방송통신위원회가 ‘인터넷 자기게시물 접근배제 요청권 가이드라인’ 초안을 공개했다. 이에 따라 이르면 다음달부터 인터넷에 올린 글을 타인이 검색할 수 없도록 권리 행사가 가능해진다. 회원 탈퇴 등의 사유로 불가피하게 본인이 직접 삭제하지 못하는 게시물 등이 대상이다. 이번 초안은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이 원하지 않는 정보가 인터넷에서 유통되는 것을 차단하는 ‘잊혀질 권리’가 제도화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잊혀질 권리는 개인의 사생활 보호, 행복추구권과 직결되는 소중한 가치다. 별 생각 없이 무심코 올린 글이나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면서 고통을 당하거나 옛 애인과 찍은 사진으로 결혼생활이 파탄 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은 분명 문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합의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성급하게 추진하면 부작용만 양산할 수 있다.

방통위 초안은 공익과 관련성이 있는 게시물에 대해서는 게시판 사업자와 검색서비스 사업자가 잊혀질 권리의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법관도 아닌 이들 사업자가 공익과의 관련성을 따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다. 정신적·사회적 피해를 유발하는 인터넷 게시물은 제3자가 올린 경우가 많지만 초안에는 제3자가 올린 게시물에 대한 삭제요구권은 포함되지 않았다. 논란을 피해간 반쪽짜리 초안으로 방통위가 생색내기식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정하려는 것 아닌지 의구심이 드는 이유다.

자기게시물 접근배제요청권 절차 개요, 잊혀질 권리 행사 대상 예시_경향DB

전 세계적으로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뜨거운 상황에서 무작정 도입을 외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관건은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다.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 및 국민의 알 권리와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권력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서구보다 약하고 언론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아 섣불리 도입하면 삭제청구권이 남발되면서 국민의 알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될 수 있다. 예컨대 언론중재위원회가 추진 중인 언론중재법 개정안만 해도 그렇다. 개정안에는 언론중재절차를 통해 기사를 삭제하는 일이 가능해지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는데, 피해자의 기사 삭제 청구가 넘쳐나 언론 보도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방통위는 가이드라인 확정에 앞서 예상되는 기술적 문제점들을 세밀하게 보완하고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픽미(Pick Me) 픽미 픽미 업.”

요즘 화제라는 케이블채널의 아이돌 경연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의 노래 ‘픽미’의 가사다. “나를 뽑아줘. 오늘을 놓치지마. 내 마음을 알아줘….” 반복되는 가사와 멜로디가 중독성이 있다. 새누리당이 이 노래를 선거 로고송으로 채택한 것도 유권자에게 각인 효과가 뛰어나다는 점 때문이라고 한다.

오는 31일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면 전국이 이 노래로 흘러넘칠지도 모르겠다. ‘픽미 픽미 픽미 업.’ 새누리당 후보들은 아이돌 지망생들처럼 노래할 것이다. 나를 뽑아줘, ‘픽미 업’.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픽미 픽미 픽미 업’. 그런데 ‘픽미’는 새누리당이 만든 ‘판타지’일 뿐이다. 지금 새누리당에선 ‘프로듀스 101’이 아닌 ‘막장’의 무대가 펼쳐지고 있다. ‘유승민 솎아내기’로 공천 막장극의 끝을 보는가 했더니, 당 대표가 공천안 의결을 거부하는 사상 초유의 ‘옥새 투쟁’까지 발생했다. 4·13 총선 후보자 등록 마지막 날까지 막장의 연속이다.

과연 막장의 끝은 어디일까. 이미 여당의 공천과정은 오로지 청와대에 밉보인 인사들을 찍어내기 위한 패권과 전횡, 비상식으로 점철됐다. 친박 핵심 윤상현 의원은 당 대표를 겨냥해 “죽여버려”라는 막말까지 해댔다. 압권은 ‘유승민 솎아내기’다. 당 공관위는 유 의원 낙천 결정을 후보 등록일까지 미루는 ‘꼼수’로 자진 탈당을 압박했다. 지난 50일간의 공천과정에서 집권여당이 민생과 여론에는 눈·귀를 막은 채 특정인 솎아내기에 총력을 쏟아붓는 비정상을 보여준 것이다. 오죽하면 김무성 대표가 “독재정권에서 하던 일”이라고 했을까.

적어도 <프로듀스 101>은 연습생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시청자는 이를 근거로 선택을 한다. 하지만 여당의 공천과정은 오직 청와대 눈 밖에 난 사람들은 쳐내고, ‘지당대신’(전하, 지당하옵니다)들을 내려꽂는 모습만을 보여줬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파동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실이 있다. 새누리당이라는 공당이 누구의,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한 당인지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16일 오후 부산 사하사랑채 노인복지관을 방문하고 나가면서 마중 나온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하고 있다._청와대사진기자단

이번 파동의 출발점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있다는 게 중론이다. 2008년 4월 총선 당시 친이계 주도의 공천 학살에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비판했던 박 대통령이 이번에는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달라”고 말해 거꾸로 ‘비박 공천 학살극’의 정점에 선 것이다. ‘박적박.’ 박 대통령의 적은 박 대통령이라는 항간의 우스갯소리다. 지금 여권 내홍은 이를 입증하는 모양새다.

박 대통령은 8년 전 “사당화, 즉 공천에 사심이 개입돼서는 안된다”고 하지 않았나. ‘유승민 솎아내기’에선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항명파동을 일으킨 공화당 ‘4인방’을 중앙정보부를 시켜 콧수염을 뽑는 등 초주검을 만들어 퇴출한 사건이 겹친다. 지역구와 비례대표를 가리지 않는 무차별적인 ‘진박’ 내려꽂기를 두곤 ‘제2의 유정회’도 회자된다. 무엇보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이 공공연하게 말해지고 있다.

‘픽미 업’, 나를 뽑아달라고?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그 마음은 뭘까. 거꾸로 뒤집어 보면 이런 뜻 아닐까.

‘픽미 업, 선택권은 너에게 있는 게 아니야. 어차피 넌 날 찍을 거잖아. 실망한 사람은 기권할 것이고, 투표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날 찍을 거니까.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된다고 하지 않니.’

정말 그렇다면 오만도 이런 오만이 없다. 이런 오만을 그대로 둔 탓에 선거 후엔 항상 ‘국민만 속았다’로 귀결되는 것 아닐까. 이번 여당의 공천파동을 통해 유권자들은 정말 값진 정보를 얻었다. 지금은 ‘픽미’에 빠져들 때가 아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중독성으로는 뒤지지 않는 ‘백세인생’의 ‘사절(辭絶)’의 정신이다. “픽미 업, 나를 뽑아달라고 하거든 일없다고 전해라~”.


김진우 | 정치부 jwkim@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반노동자 정당 심판.’ 노사정 합의가 파기되고 한 달 만에 열린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된 한국노총의 4월 총선 방침이다. 노동5법과 저성과자 해고 등 양대지침을 밀어붙인 정부·여당에 대한 심판이 상반기 투쟁계획의 핵심이 된 것이다.

그러나 대의원대회가 열린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난 14일 ‘심판투쟁 대오’에서 이탈한 이들의 윤곽이 나오면서 한국노총은 충격에 빠졌다. 새누리당 비례대표 신청자 중에 현직 임원 3명(이병균 한국노총 사무총장·김주익 수석부위원장·임이자 여성 담당 부위원장)이 포함돼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한국노총 지도부 일부가 총선을 앞두고 ‘여의도행 묻지마 티켓’을 끊는 고질병이 또 도진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노동계의 숙원사업 중 하나다. 이를 위해 노동운동 출신 인사의 여의도행은 되레 장려돼야 할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모든 여의도행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몸담은 조직이 심판 대상으로 삼은 정당의 품에 안기려는 것은 더욱 그렇다.

19일 서울 여의도 한국노총 대회의실에서 김동만 위원장이 노사정합의를 파기하는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_경향DB


한국노총 내부에서도 정부·여당에 대한 협조와 공천을 교환하는 옛 관행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14년 위원장 선거 당시 김동만 후보(현 위원장)가 임기 중 총선 불출마를 공약으로 내건 것도 이를 바꿔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 공약은 지난해 대의원대회 때 ‘위원장·상임임원은 국회의원 등 정당 소속의 선출직 공직을 담당할 수 없다’는 규약 제정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현직 임원들이 비례대표 신청을 강행하면서 제도적 견제 장치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이 확인됐다.

조직 내부에선 “임원 3명이 조합원을 팔아 금배지를 달려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비난만으로 바뀌는 건 없다. 원칙 없는 정치권 진출의 토양이 된 조직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21대 총선 때도 비슷한 일이 재연될 수밖에 없다.


김지환 | 정책사회부 baldkim@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얼마 전 아인슈타인이 100년 전 예견한 중력파가 마침내 검출됐다. 세계과학계는 우주를 보는 새로운 창이 열렸다고 흥분하며 중력파 검출의 의미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역불급이다. 절망에 빠진 필자는 어떤 책에서 위안이 되는 구절을 찾았다. 아인슈타인도 중력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8년 넘게 걸렸으며, 그 이론을 이해한 과학자가 전 세계를 통틀어 12명도 안된다는 대목이었다. 무릎을 쳤다. 그래, 그렇게 고차원의 이론을 고작 원고지 몇 장으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필자 같은 문외한의 눈높이에서 설명해보면 어떨까. 도전해보기로 했다. 팔자에 없는 관련 책들을 눈이 빠져라 읽고, 마침 <중력파> 책을 낸 오정근 박사의 도움도 받았다.

아인슈타인 중력이론의 요체는 질량을 가진 물체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지며, 그 시공간을 따라가는 빛도 휘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아이들이 콩콩 뛰며 노는 트램펄린을 연상해 보자(그림). 트램펄린(우주공간) 위에 쇠공(태양)을 놓는다 치자. 그러면 쇠공이 닿는 면은 움푹 들어갈 것이고, 닿는 면을 따라 곡선이 그려질 것이다. 이 곡면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설명하는 시간과 공간의 휘어짐이다. 이 시공간을 따라가는 빛도 휘어질 것이다. 만약 개미가 이 곡선면을 따라간다면 직선면보다 거리는 길어지고, 시간은 느려질 것이다. 또한 쇠공 가까이 어린아이가 서 있다고 치면 그 아이는 경사면을 따라 기울어질 것이다. 중력이란 뉴턴의 법칙대로 ‘힘과 힘의 작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쇠공이 만들어낸 ‘시공간의 휘어짐’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쇠공의 질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시간과 공간의 휘어짐 정도도 커질 것이다.

다시 트램펄린 위에 쇠공을 던진다고 치자. 그러면 주변으로 파문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예견한 중력파다. 만약 우주의 탄생(빅뱅)과, 별의 사멸 과정(블랙홀 충돌 및 합병·초신성 폭발·중성자별의 맥동) 등 격변이 일어나면 어찌 되는가. 엄청난 중력파 물결이 우주로 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구에 도달하는 중력파 크기가 극미했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웠다. 이번에 감지된 중력파도 13억 광년 떨어진 블랙홀 충돌 때 발생한 것인데, 그 크기는 10의 21거듭제곱분의 1(10의 -21제곱)에 불과했다.



그러면 중력파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인류는 지금까지 빛, 전파, X선을 탐지하는 전자기파 천문학으로 우주를 관측했다. 하지만 전자기파는 물질을 통과하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빅뱅 때 발생한 엄청난 에너지층은 빛과 같은 전자기파를 가둬버린다. 인류가 빅뱅으로 방출된 빛을 관측하는 데는 성공했다지만, 그것은 빅뱅 후 에너지가 식어버린 뒤인 38만년 후의 빛이었다. 인류는 빅뱅이 분출한 두꺼운 에너지층이 걷힌 뒤의 전자기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우주탄생 후 38만년 뒤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빛까지도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는 블랙홀의 전자기파도 물론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중력파는 우주나 별의 생성과 사멸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 우주로 퍼진다. 중력파는 전자기파와 달리 어떤 물질의 간섭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류는 이 중력파의 파형으로 다양한 우주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소리로도 변환시킬 수 있다. 예컨대 중력파 망원경으로 빅뱅의 원시중력파를 찾아낸다면 어찌 되는가. 빅뱅~38만년 사이의 과정, 즉 우주탄생의 순간을 읽을 수 있다. 빅뱅뿐이 아니다. 중력파 망원경을 통하면 블랙홀 내부까지 관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력파가 밥 먹여주는가. 오정근 박사는 “먹여줄 수 있다”고 한다. 전자기파는 지금의 통신혁명을 일으켰다. 중력파의 힘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전파통신이 도달하지 못하는 그 어떤 곳도 중력파 통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하나, 수많은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이 내준 중력파 수수께끼에 100년을 매달렸다는 것과, 미국이 지난 1992년 정식으로 출범한 중력파 검출 프로젝트에 지금까지 1조원 넘게 투자했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이 대목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아서 에딩턴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중력파는 생각의 속도로 퍼진다.” 그러고보니 아인슈타인도 늘 문제 해결을 위해 방안을 서성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늘 한국 정치의 문제가 ‘약한 야당’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야당이 지리멸렬하지 않았다면 경제 위기로 서민의 삶이 무너져내리는데도 여당이 ‘진박타령’이나 하면서 총선을 맞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이 노동 4법과 선거구 획정을 패키지로 묶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야당이 허약하지 않았다면 정부가 10억엔을 받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종결하기로 일본 정부와 합의하는 일은 엄두도 못 냈을 것이다. 난데없이 한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고, 역사학자 90%를 좌파로 몰고, 거짓말과 식언을 밥 먹듯 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공영방송의 보도기능이 ‘폐허’가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만약 야당이 튼튼해 비판과 견제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정부·여당이 ‘선거에서 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면 정부가 국회와 아무런 협의 없이 군사작전하듯 개성공단을 끝장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개성공단 입주 기업 124곳, 협력업체 5000곳, 업체 종사자 12만4000명의 생존을 하루아침에 낭떠러지로 내모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이 타락한다는 건 불변의 진리다. 정부·여당이 나라를 이렇게 운영하고도 총선에서 170~180석, 많게는 개헌선인 200석까지 내다보는 것 자체가 국가적 불행이다. 여당이 비굴할 정도로 청와대에 고분고분한 것은 그렇게 해도, 혹은 그렇게 해야만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지금처럼 청와대 거수기 역할을 할 수가 없다. ‘약한 야당’이 ‘약한 여당’을 만들고 그것이 국회의 행정부 견제기능 무력화로 이어진 것이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그런 점에서 ‘강한 야당’, ‘대안 야당’은 야권 지지층의 요구에만 머물지 않는다. 정치의 기능부전을 치유하기 위한 최소한의 필요조건에 가깝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철수 의원이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4주기 추도미사에서 대화하고 있다._연합뉴스

야권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올해 초까지 극심한 혼돈을 겪었다. 문재인과 안철수라는 대권 주자의 주도권 다툼, 친노와 비노의 권력투쟁, 호남과 비호남의 갈등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지만 바탕에는 ‘강한 야당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위기감이 깔려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저마다 들고나온 것이 혁신이요, ‘새정치’다.

그러나 진통 끝에 도달한 야권재편 결과가 궁극적으로 ‘강한 야당’을 만드는 쪽으로 수렴될지는 불분명하다. 무엇보다 혁신이니 ‘새정치’니 하는 말의 성찬이 권력투쟁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김종인 체제’가 들어선 뒤 더불어민주당은 빠르게 안정을 찾았지만 김종인이라는 한시적인 ‘슈퍼 관리자’의 존재, 문재인의 사퇴, 비주류 탈당이라는 상황 요인과 더 이상의 자중지란은 공멸이라는 위기의식이 맞물린 결과일 뿐 당의 체질이 바뀌고 시스템이 안정됐다고 보기 어렵다.

국민의당은 혼란스럽기 짝이 없다. 안철수가 내건 ‘새정치’는 여전히 실체가 모호하다. 메시지도, 행태도, 정책도, 인물도 새롭지 않다. 권력다툼, 계파안배와 같은 구태에 가까운 모습을 더 많이 보였다. 국민의당이 ‘새정치’라고 실천한 것은 국민의당을 만든 것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야당은 새누리당에 판판이 깨지면서도 아무런 절박감도 없이 만년 2등의 지위와 기득권에 안주해왔다. 경쟁은 관성과 무사안일에 젖은 야권 풍토를 깨는 강력한 자극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제 살 깎아먹는 이전투구식 야권 분열이 아니라 야권 전체의 파이를 키우는 생산적 경쟁을 주도할 생각이라면 국민의당은 이제라도 ‘새정치’가 무엇인지 몸으로 보여줘야 한다. 뼈저리게 느꼈겠지만 ‘이승만 국부론’, 영혼 없는 정치공학적 중도주의, 기회주의적 양비론 따위는 사람들이 바라는 ‘새정치’와 거리가 멀다.


정제혁 | 정치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영국의 노화연구자 톰 커크우드는 늙음이 숙명적인 것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는 인간 수명은 앞으로도 10년마다 2년씩 늘어나고, 언젠가는 인류가 노화를 멈추는 데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는 죽음이 극복된 사회에 대해서도 상상한다. 이 사회의 주요 특징은 아이를 마음대로 낳지 못하고,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죽음이 극복된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아이를 잘 낳으려 하지 않고,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게 제한이 가해진다. 자기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생명을 이어줄 후손이 필요없고, 사망 없이 출생만 늘어나면 인구증가가 폭발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나이나 세대에 대한 관념이 거의 없기 때문에, 연애와 결혼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결혼이나 연애에서 수십, 수백년의 나이 차이는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다.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의미없는 것이 되고, 파트너와의 관계가 수백년 동안 유지되는 경우도 없다.

현재의 인류사회는 죽음을 서서히 극복해가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 사회의 평균수명은 80이 넘는다. 20년 후에는 거의 90에 달할 것이다. 수명이 늘어나는 것에 거의 반비례적으로 출산은 줄어들고 있다. 1970년경부터 2000년대 초까지 수명이 10년 증가할 때마다 출산율은 절반 정도씩 감소했다. 결혼 연령이 크게 늦추어졌고, 독신이 늘어났고, 이혼율도 크게 증가했다. 커크우드의 죽음이 극복된 사회의 특징이 서서히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인 남성.여성의 평균수명 추이_경향DB



죽음이 극복된 사회에서 볼 수 있듯이, 평균수명이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사회에서 이 추세를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우리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사람들은 추세를 바꾸어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저런 출산 장려책을 내놓고, 중국동포를 대거 받아들이자고 한다. 이에 대해 아이를 낳고 기르기가 너무 힘든 사회적 조건을 개선해야지 무슨 소리냐고 하는 비판도 핵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지난 10여년간 정부에서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꽤 많은 정책을 내놓고 시행했다. 그러나 출산율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우리 사회가 죽음이 서서히 극복되어가는 사회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 출산율을 높여서 고령화사회의 노동가능인구 감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틀린 방안이다. 죽음이 극복된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청년이기 때문에 청년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유행하는 100세 시대, 50이 인생의 절반이라는 말은 50세가 청년이라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 중 40대 말에서 50대 말까지의 인구는 20%에 달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스스로 청년이라고 생각한다면, 20대 청년들의 문제에 대한 진지한 염려가 나오기 어렵다. 만일 출산율이 높아져서 청년이 늘어난다면, ‘나이 든 청년’과 ‘어린 청년’ 사이의 갈등만 커질 것이다.

출산율을 늘리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수십년 후 노동가능인구는 얼마 안되는데 노인은 크게 늘어나 있는 사회에서 발생할 혼란을 걱정한다. 여기서 전제하는 것은 노인은 일하지 않는 존재, 부양을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한편에서는 100세 시대, 50대 청년 이야기를 하는데, 이율배반적이다. 게다가 출산율이 높아지면 인구도 증가할 수밖에 없는데, 한 치 앞도 못 보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만일 출산율이 높아져서 수십년 후 5000만의 인구가 6000만이 되면, 그때야말로 큰 혼란이 벌어질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고령화 문제는 출산율을 높이거나 중국동포를 대거 받아들여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먼저 지금 인류사회에서 죽음이 서서히 극복되어가는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만 해결의 실마리가 조금이라도 보이게 될 것이다.


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루이스 캐럴의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세계는 ‘말도 안되는 일들’ 투성이다. 회중시계를 꺼내 보는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들어간 앨리스는 몸이 커졌다 작아졌다 한다. 안고 있던 아기는 돼지로 변한다. 트럼프 나라에선 홍학 채로 고슴도치 공을 치는 크로케 경기를 한다. 이 나라의 하트 여왕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조건 목을 치라고 명령한다. 앨리스는 이런 여왕에게 반발하다가 카드 병정들의 공격을 받고 잠에서 깬다.

소설은 캐럴이 하숙하던 집 아이들에게 들려주던 이야기가 바탕이다. 아마 아이들은 캐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하는 흥분과 기대를 느꼈을 것이다. 터무니없는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소설 속 앨리스도 비슷한 심정 아니었을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얘기를 한 건 우리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들’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말도 안되는 일들’의 끝판은 무엇일까라는 황당함과 아득함을 느끼고 있는 게 다르지만.

‘혼용무도(昏庸無道·암흑에 뒤덮인 것처럼 온통 어지럽다).’ 지난해 말 교수신문이 선정한 ‘올해의 사자성어’다. 해가 바뀌었어도 별반 사정이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청년세대의 절망적인 현실을 빗댄 ‘헬조선(지옥+조선)’은 일반어로 자리 잡았다. ‘금수저’ ‘흙수저’ 등 수저로 출신 환경을 구분하는 ‘수저계급론’도 널리 쓰인다. 직업 지위와 계층의 고착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보건사회연구원의 최근 조사는 이 ‘수저계급론’이 현실임을 확인시켰다.

전국언론노동조합원들이 아리랑tv 방석호 사장 퇴진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_경향DB


문제는 이런 현실에 대한 좌절과 분노를 오히려 확산시키는 일들이 잇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집권여당 실세와 의원들은 채용 비리 의혹과 ‘갑질’ 인사 청탁 논란에 휩싸였다. 아리랑TV 사장은 미국 출장길에 아내와 딸을 데리고 고급호텔에 투숙해 한끼 113만원짜리 식사를 하는 등 공금을 흥청망청 써댔다. 권력 주변에서 호가호위하는 사람들의 ‘민낯’이 이 정도인가. 한숨이 절로 나온다.

‘말도 안되는 일들’이 어디 그뿐이랴. ‘국가비상사태급’ 경제위기라던 청와대는 경제부처 장관들의 ‘총선 출마용 개각’을 했다. 대구에선 장관 시절 ‘총선 필승’ 건배사를 했던 전직 헌법학자를 필두로 ‘진박(진실한 친박) 연대’가 만들어졌다. 경제부총리를 역임한 친박 실세는 ‘진박 후보’ 밀어주기 투어에 나섰다. 후보자의 비전은 없고 “내가 대통령과 가까워”라는 비정상적 정치행태만 가득하다. “헌법보다 대통령과의 관계”라는 얘기까지 버젓이 한다.

이런 수준이다보니 “진박이 아니라 짐박”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고, “웬갖 잡박이 날아든다”는 ‘박(朴) 타령’ 등 ‘진박’들을 풍자한 패러디물들이 유행한다.

그러자 “비아냥거리고 조롱해서야 되겠냐”고 발끈한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희화화한 게 누구인가. 오만과 독선과 구태로 스스로를 ‘조롱박(朴)’에 가둔 게 누구인가.

잠에서 깨어난 앨리스는 “정말 이상한 꿈이었어”라며 쏜살같이 방을 나선다. 하지만 지금 이곳의 ‘앨리스들’ 앞에 펼쳐진 세계는 꿈이 아니다. 그렇다면 ‘헬조선론’에 나오듯 ‘탈조선’ 하거나 ‘죽창’을 들어야 하나.

비극은 희극으로. 동요, 탈춤, 꼭두각시 놀음, 판소리…. 예로부터 해학 속에 녹아든 풍자는 민초들의 분출구였다. 풍자와 해학이야말로 ‘이상한 나라’를 가로지르는 방법이다. 현실의 부조리와 기득권 체제의 위선을 뒤집고 드러낸다.

‘사이다(속 시원함)’에 불과한 행위라고? ‘균열’이 생기다 보면 박은 깨진다.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농담은 정치적 이상을 표현하고, 더 공정하고 더 멀쩡한 세상을 창조하는 방법”(<불안>)이라고 했다. 비극은 희극으로. 그것이 ‘혼용무도’의, ‘헬조선’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들의 무기다.


김진우 | 정치부 jwkim@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달 미국 로스앤젤레스(LA)를 다녀왔다.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미국 국내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인천까지 국제선으로 오는 항공편이었다. 샌프란시스코공항 국내선 터미널에서 국제선 터미널로 이동하는데 공항 밖으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지쳐 있던 터라 잠시 바깥공기를 쐬고 싶어 출구로 향했다. 시계를 보니 출발 시각까지 1시간 남아 있었다. ‘주말이니 다시 검색을 받고 들어오려면 빠듯할 수 있겠다’ 싶어 가던 발길을 돌렸다. 생각이 바뀌어 몸을 돌리는 순간 벽쪽에 있던 공항 직원이 “아웃(Out)”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원래 방향대로 나가라는 뜻이었다. 출구에 닿기 5m 앞 바닥의 빨간선에 한 발이 걸쳐 있었기 때문이다.

문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고, 다시 들어올 때 수십m 늘어선 검색대 인파 때문에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미국 공항의 엄격한 보안 관리와는 정반대로 한국에서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중국인 부부와 베트남인이 각각 지난달 21일, 29일 인천공항의 허술한 보안을 틈타 밀입국한 것이다. 단지 밤 늦은 시각, 아침 이른 시각이란 것이 보안이 뚫린 이유였다. 인천공항의 보안·테러 방지 업무를 주도하는 곳은 국가정보원이다.

인천공항 수하물처리시스템(BHS) 고속벨트_경향DB


국정원은 중국인 부부가 밀입국한 지난달 21일 ‘인천공항 테러·보안대책 실무협의회’를 열기도 했지만, 43시간이 지나서야 밀입국 사실을 확인했다. 국정원은 지난달 29일 또다시 회의를 열었지만, “상호 협조를 강화하자”는 원론적인 결론만 냈다.

이런 가운데 황교안 국무총리는 지난달 30일 인천공항을 찾아 관계자들을 질타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다. 황 총리는 다음날 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당초 장관급인 국무조정실장 주재로 열릴 차관회의를 당일 아침 총리 주재 장관회의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이날 황 총리는 인천공항이 잇따라 뚫린 사건을 정부와 여당이 추진 중인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테러방지법)과 연관시켰다. “밀입국한 사람들이 테러범이었다면 큰 불행이 생길 수도 있었다”며 밀입국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테러방지법을 내세운 것이다. 여당이 발의한 테러방지법의 골자는 국정원 아래 테러통합대응센터를 두고, 각종 테러 위험에 대비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아전인수였다. 인천공항이 구멍 난 것은 법의 미비 때문이 아니라 보안과 출입국을 담당하는 각 기관들의 협업이 원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협업을 주도하는 국정원의 책임이 크다고 볼 수 있는데, 엉뚱하게 테러방지법을 들먹인 것이다.

밀입국 사태 재발 방지책을 마련하고, 미국처럼 직원들이 엄격히 따를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외양간이 부서져 소를 잃은 뒤, 그 소가 미친 소일 수 있었으니 미친 소로 의심되는 모든 소에게 위치추적장치를 다는 법을 통과시켜 달라고 할 때는 아닌 것 같다.


김경학 | 사회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요즘 불교계 안팎에선 두 스님의 맞대결을 잔뜩 기대하는 눈치다.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과 ‘선 수행법의 기수’로 불리는 안국선원장 수불 스님을 두고서다. 지난해 가을 촉발된 ‘깨달음 논쟁’ 때문이다. 논쟁은 지난해 9월 현응 스님이 ‘깨달음의 역사’ 세미나에서 “깨달음이란 잘 이해하는 것”이라며 “깨달음은 설법과 토론,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지, 선정(禪定) 수행을 통해 이루는 몸과 마음의 높은 경지, 즉 신비로운 경지가 아니다”라고 주장한 것이 발단이 됐다.

이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구하는 선승들의 단체인 전국선원수좌회가 성명을 내고 반박했다. 수좌회는 “현응 스님이 말한 ‘이해하는 것’은 부처님과 조사들이 경계한 ‘알음알이(이해)’로, 이것을 깨달음으로 삼게 되면 도둑을 자식으로 삼는 것과 같게 된다”고 일침을 가했다.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이루는 것’이란 얘기다.

수불 스님도 합세해 전국 선원과 불교계에 배포한 <종지(宗旨)의 현대적 구현>이란 책자에서 “진리란 ‘그저 잘 이해하는’ 대상이 아니라 ‘보고 얻고 알고 깨우쳐 들어가야 하는’ 것”이라며 “ ‘깨달음이란 이해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책상물림의 말일 뿐이고, 정작 진실된 수행자라면 ‘깨달음이란 사유의 영역을 초월한다’는 부처님 말씀에 동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현응 스님은 최근 열린 한 세미나에서 “불교를 논하는 자리라면 수불 스님과 대화할 수 있다”고 했고, 이튿날 수불 스님도 “종단이 자리를 마련한다면 나갈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조계종 관계자는 “깨달음 논쟁이 계속 굴러갈 사안이기 때문에 설 연휴가 지난 후 두 스님의 자리가 마련되지 않겠느냐”고 말해 은근히 두 스님 간 ‘빅매치’가 기대되기도 한다. 이 와중에 “양측의 논쟁 수준이 너무 낮다”며 새로운 깨달음을 들고 나온 종단도 있다.


과연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종교담당 기자의 책상에는 1주일만 지나면 깨달음에 관한 책들이 수북이 쌓인다. 국내외 저명한 스님부터 종교 학자, 철학자, 명상가까지 저자가 다양하다. 개중에는 너무 전문적이고 현란해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것부터 뻔한 내용까지 천차만별이다. 간혹 두고두고 읽고 싶은 책들도 있긴 하다. 그러나 ‘깨달음’이 상품화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종교의 유무를 떠나 깨달음을 얻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깨달음은 보통 사람들이 넘볼 수 없는 고매한 것인지도 모른다. 선승처럼 일평생을 바치며 벽면수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전문가들의 논쟁에서 벗어나 각자 삶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깨달음’에 대해 생각하고 방법을 찾아보면 어떨까. 이를테면 ‘생활형 깨달음’이다. 주변을 둘러보면 깨달음을 주는 것들이 의외로 많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 매일 아침 출근 전 먹이를 주는 열대어 ‘구피’로부터 성찰의 기회를 얻은 적이 있다. 4개월 전 키우기 시작했는데 한번은 어미 구피가 막 낳은 새끼를 주변 구피들이나, 심지어 어미가 잡아먹는 광경을 목격했다. 예쁘게만 여긴 구피들의 잔인한 생태에 큰 충격을 받았다. 화장실 변기에 확 내다버릴까 고민하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수초에 꽁꽁 숨어있던, 조금 자란 새끼들이 나와 자유롭게 헤엄치는 것을 보며 신기해 했다. 알고 보니 구피는 비정할지언정 자신의 한입 크기를 넘어선 것은 먹지 않았고, 또 타고난 순리상 먹지 못했다. 알갱이 사료도 물었다가 적당한 크기를 넘어선 것이면 바로 뱉어냈다. 어항 속 여리고 무지한 생명들의 질서는 그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구피들을 보면서 ‘사람의 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자신을 비롯해 한입 크기에 만족하기는커녕 탐욕을 버리지 못할 때가 부지기수다. 알맞은 한입은 어떠해야 할까. 깨달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김희연 문화부 부장 대우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 연말 만난 한 고위 공직자는 근래 들어 입이 거칠어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흠칫 놀랄 때가 있다는 말을 했다. 정치나 사회 얘기만 나오면 부아가 치밀고 의식도 못하는 사이에 입에서 욕설이 튀어나오곤 한다는 것이다. 그 주변 친구들도 비슷한 증상을 보인다고 했다. 그는 “한국 사회가 집단 우울증에 빠진 것 같다”며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돌아보면 맨정신으로 버텨내기 힘든 1년이었다. 사는 것은 신산하고 팍팍해도 이제 어디 내놔도 과히 부끄럽지 않은 민주국가, 정상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긍심 하나는 있었는데 그마저 산산조각 나버렸다. 시간은 역류해 1970년대로 되돌아갔다. 표현의 자유, 생각의 자유, 말할 자유, 대통령을 욕할 자유, 인간에 대한 예의, 타인에 대한 배려…. 최소한의 상식이자 사회적 합의로 여겨졌던 것들이 차례차례 뒤집어졌다. 사람들은 수치심과 분노, 모멸감, 어떤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진박’이니 뭐니 하는 허접한 말들이 그 위를 덮었다. 소통과 시대정신은 ‘배신’ ‘의리’ 따위 조폭식 용어로 대체됐다. 국회에서 보수의 시대정신을 토해냈던 유승민은 배신자로 찍혀 정치생명이 위태롭다. 더욱 절망적인 점은 역사의 궤도를 역주행하는 폭주기관차를 제어할 장치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독재정권 시절에는 ‘양김’이 이끌던 강한 야당이 있었다. 재야단체 등 민주화운동 세력의 도덕적 우위도 확고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참여연대, 경실련 등 시민단체의 영향력이 커졌다. 민주노총이 생기면서 노조의 발언권도 강해졌다. 그 근저에는 민주화·합리화라는, 사회구성원 다수가 공유하는 가치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박근혜 대통령이 무슨 일을 하건 지지할 준비가 되어 있는 약 40%의 콘크리트 지지층이 있다. 여당은 대통령보다 한 술 더 뜬다. 대통령이 돌을 던지면 받아서 다연발 미사일을 쏜다. 야당은 지리멸렬하다. 언론지형은 보수가 절대 우위를 점하는, 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노조의 정치적 발언권은 거의 무시할 만한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시민단체의 말발도 예전 같지 않다. 갖은 명목의 보수적 시민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면서 실제 역할의 크기나 대표성의 정도와 관계없이 여론시장에서 절반의 지분만 인정받고 있다. 민주화 이후 사회구성원 다수가 추구하는 절대적 가치도 사라졌다.

아무리 둘러봐도 현실이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아무리 얘기해도 권력이 눈도 꿈쩍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절망의 언어적 증상이 욕설과 침묵이다. 그러나 욕설과 침묵은 소통의 언어가 아니다. 감정을 배설하고, 내부로 가라앉는 것이다. 그것은 소통의 가능성이 차단되고 현실의 개선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나타나는 증상이지만, 그 증상의 발현으로 소통 가능성, 개선 가능성은 더욱 닫힌다.

한국에서 민주세력이 자력으로 정권을 쥔 적은 단 한번도 없다. 김영삼 정부는 3당 합당으로 탄생했고, 김대중 정부는 DJP 연합으로 가능했다. 노무현 대통령도 정몽준과 연합해야 했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민주세력의 집권이 당연시되고 실권이 예외시되는 착시가 나타났다. 그러나 한국처럼 보수의 정치적 기반이 강한 곳에서 민주세력의 집권은 오히려 대단히 예외적인 현상이었다고 보는 게 냉정한 현실인식이다.
올 해에는 총선이 있다. 당장의 선거,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진보개혁세력에 필요한 것은 정치적 토대를 바꾸는 일이다. 이는 30년, 50년을 내다보고 하는 장기 프로젝트다. 끈질긴 소통과 접근으로 지지기반을 한 뼘 한 뼘 넓히는 일이다. 역사에는 지름길도, 로또도 없다. 새해에는 욕설과 침묵 대신 조곤조곤한 대화를 많이들 했으면 좋겠다. 긴 안목으로 일상의 정치적 실천에서 보람을 찾는 것이야말로 ‘집단 우울증’ 시대를 건너는 최상의 처방이 아닐까 싶다.


정제혁 | 정치부 jhjung@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아이 보육은 나라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라.”

박근혜 대통령은 2012년 대선 때 만 3~5세 어린이의 무상보육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당선인 시절에도 “보육과 같은 전국단위 사업은 중앙정부가 (재원을) 책임지는 게 맞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년 1월 어린이집·유치원 보육비는 벼랑 위에 섰다. 정부와 교육청 간 누리과정 예산 갈등이 서로 먼저 비키라는 ‘치킨게임’으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3년간 땜질해오던 ‘시한폭탄’이 해 넘기 전에 터진 격이다. 기획재정부는 2014년 누리과정 예산 편성을 거부하기 시작했고, 교육부는 지난 5월 지방재정법 시행령을 고쳐 어린이집 보육비도 ‘교육감 의무’라고 떠넘겼다. 반환점도 돌기 전 대통령 약속은 공중에 떠버렸다.

이영 교육부 차관이 취임사를 하고 있다._연합뉴스


시·도 교육감들은 지난 23일 박 대통령에게 공개 면담을 요청했다. 이 문제의 매듭을 풀 수 있는 사람은 결국 처음 단추를 끼운 대통령뿐이라는 것이다. “어린이집 보육비를 정부가 책임지지 않으면 더 이상 졸라맬 허리띠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바로 다음날인 24일 날선 대답과 반격을 내놓은 것은 이영 교육부 차관과 추경호 국무조정실장이다. 이 차관은 “대법원 제소를 검토하겠다”고 밝혔고, 추 실장은 “관계법령상 누리과정 예산은 의무적으로 편성하도록 돼 있다”며 정부가 바꾼 시행령 앞에 배수진을 쳤다. 정부의 ‘강성’ 마이크를 두 사람이 잡은 것이다.

정작 교육감들의 면담 요청을 받은 대통령은 말이 없다. 지자체 복지 정책을 총선용·선심성이라고 공격하고, 정부 일을 우선하라고 압박해도 달라지지 않는 게 있다. 대통령이 대선 공약을 지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누리과정 예산 기사엔 대통령이 약속을 지키라는 댓글이 쇄도한다. “약속한 사람이 지키는 것 아닙니까?”, “대통령 되면 증세 없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믿은 국민은 뭐가 됩니까”, “국정교과서 만들 돈은 있지만 누리과정 지원할 돈은 없다는 거죠. 기가 찹니다.” 대통령이 답할 차례다.


임아영 | 정책사회부 layknt@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교육부 출입기자들이 매주 정례 행사처럼 하는 일이 있다. 국정 역사교과서 편찬준거가 언제 발표되는지 물어보는 일이다.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는 지난달 3일 국정화를 확정고시하면서 편찬준거 발표일을 ‘11월30일’로 예고했다. 그러고는 발표 예정일을 “12월7일쯤”으로 했다가 “확정된 건 아니지만 14~16일쯤”으로 다시 늦췄다. 교육부 관계자는 18일에도 “다음주에 나올지 안 나올지 확정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는 ‘올해 안에는 나오느냐’는 질문에 “나와야겠지”라고 말했다.

교육부의 공식 해명은 “편찬심의위원회 심의가 끝나지 않아 발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검정교과서 집필기준보다 분량이 늘어나는 점을 고려해도, 일반적인 편찬심의라면 진작에 편찬준거가 나왔어야 한다는 게 역사학계의 중론이다. 배경식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은 “정치적 고려 때문”이라고 말했다. 정부가 국정화를 결정하면서 의도했던 내용들을 청와대 입맛에 맞추면서도 최대한 논란을 적게 일으키는 방식으로 집어넣느라 지연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부와 여당이 지난 10일 통상 최종적인 입장 조율 절차로 해석되는 당정협의도 마친 뒤라서 의혹은 더 커지고 있다. 당정은 그날 ‘5·16은 군사정변’이라는 표현을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독재 미화’ 시비에 하나의 방어막을 친 것이다. 그러면서 1948년 8월15일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아닌 ‘대한민국 수립’의 건국절 개념을 원용했다.

김정배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 역사교과서 집필진과 기준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_경향DB


어느새 편찬준거 발표와 동시에 시작하겠다던 집필 기간은 한 달 가까이 줄어들게 됐다. 교육부는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지 않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역사를 가르친 지 9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업교사가 ‘응모자 중 괜찮았던 집필자’로 분류한 ‘복면’ 집필진에게도 충분한 시간일지는 의문이다. 졸속 집필의 경고가 적색으로 바뀌고 있다.


정원식 | 정책사회부 bachwsik@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철수 의원(53)은 20대에 기초의학을 연구하는 의사의 길을 걸었다. 대학원 시절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한 그는 서른 초반엔 사이버 보안 전문가로 이른바 ‘전업’을 했다. 10년 뒤, 홀연히 미국 유학을 떠나 경영학을 공부하고 온 안 의원은 경영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금은 무소속 국회의원이다.

안 의원은 이러한 자신의 이력에 대해 “제가 지금까지 몇 번 직업을 바꿨다. 그런데 도중에 그만뒀던 적은 한 번도 없다”(2012년 9월19일)고 설명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한 다음날인 지난 15일, 부산에 내려간 안 의원은 전날까지도 자신이 소속돼 있던 당을 ‘교체돼야 할 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는 “새정치연합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은 배척한다. 그러면 집권할 수도 없지만 집권해서도 안된다”고, “평생 야당만 하기로 작정한 정당이다. 조그만 기득권도 내려놓지 않으려 한다”고 말했다.

‘새정치연합 창업주’에서 하루 만에 당을 견제해야 하는 입장으로 바뀐 것이다. 직업을 바꿔온 것처럼 정치적 입장도 선택에 따라 ‘리셋’하려는 모습이었다.

2013년에도 안 의원은 “양당 기득권 구조를 깨야 한다”며 10개월 동안 독자 신당을 추진하다 이듬해 3월 민주당 김한길 대표와 돌연 합당했다.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안 의원의 선택에 대해 “자신이 청산대상으로 규정한 세력으로 가버렸기 때문인데 결국 일종의 자기부정이 아닌가라고 느꼈다”고 말했다. 경영학을 공부했던 그는 정치적 고비마다 항상 ‘합리적’ 선택을 해왔다.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때로는 자신의 낡은 말들을 부인하기도 하고 정치적 성향을 조정하기도 했다. 누적된 그의 선택 속에서 지금의 안 의원에게 국민들을 설레게 했던 ‘안철수’라는 브랜드가 여전한지는 의문이다.

안 의원의 지난 13일 탈당 기자회견문 제목에도, 이보다 1주일 전 이뤄진 최후통첩 기자회견문 제목에도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하나 있다. ‘다시.’

그러나 정치권에서의 ‘리셋’은 자신의 앞선 선택을 성공시켜내지 못한 알리바이처럼 보인다.


심혜리 | 정치부 grace@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다.”

한번쯤 이런 결심을 하지 않은 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씁쓸했던 경험도 한번쯤 있었을 터.

그런 결심을 하는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아버지의 억압적인 태도에 대한 분노 때문일 수도, 아버지의 신산한 삶에 대한 반발 때문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많은 아들딸들에게 아버지는 애증(愛憎)이 엇갈리는 존재이자, 극복하고 싶은 대상이라는 점이다.

이런 상념에 빠진 건 지난달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YS)의 영정 앞에 선 ‘대통령의 자녀들’ 때문이다. 특히 눈길을 잡아끈 것은 영결식에 나타난 YS의 장남 김은철씨였다. 중절모에 검은색 선글라스 차림. 병색이 언뜻언뜻 비쳤고 부축을 받기도 했다.

사실 은철씨는 YS의 화려한 정치경력에 가려진 인물이었다. 혹자는 은철씨가 YS가 정치적으로 탄압받던 시절 고통스러운 경험을 많이 당해 피해의식이 크다고 했다. YS 집권 후에는 술에 취해 대통령 경호실에 이끌려 귀가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했다. 과연 은철씨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 민주화 투사에서 보수여당의 대표, 그리고 대통령까지 굴곡이 컸던 아버지의 삶은 아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대통령의 자녀들’이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아버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고 결심했을지, 아버지의 길을 따라 권력의지를 키웠을지. 적어도 영광과 오욕이 교차했던 아버지의 삶이 자녀들에게 벗기 힘든 굴레였을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이런 상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이자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이 영결식 다음날 YS 묘역을 찾았다는 소식으로 더욱 커졌다.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김영삼 전 대통령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다._경향DB


또 다른 ‘대통령의 자녀’인 박근혜 대통령도 YS 빈소를 찾았다.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건강 상태 등을 이유로 들었지만, 아버지 대부터 이어져온 구원(舊怨) 때문이라는 뒷말을 낳았다. 게다가 YS 서거를 계기로 민주화 투쟁과 역사 바로 세우기 등이 재평가되는 상황이 불편했을 것이다.

YS는 2001년 당시 박 대통령을 평가하면서 “아버지와 딸은 다르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박 대통령은 아버지를 빼고 설명하기가 어렵다. 박근혜 정부가 1970년대 유신시절로 돌아가고 있다는 지적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강행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라는 비판까지 제기된다.

대선 후보 시절 박 대통령을 ‘스트롱맨(Strongman)의 딸’이라고 불렀던 해외 언론은 이제 대놓고 ‘독재자(Dictator)’의 딸’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주간지 네이션은 “박 대통령이 독재자였던 부친의 발자국을 따라가면서 권위적인 정책에 반대하는 노동자와 시민들을 탄압하고 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아버지의 공(功)은 계승하되, 과(過)는 넘어서겠다는 의지를 보이곤 했다. 1999년 YS의 박 전 대통령 비판에 기자회견을 자처해 “자신이 한 일은 옳고 남이 한 일은 모두 잘못됐다는 식의 자세는 반사회적이다. 이런 성격을 가진 사람은 정치인이나 정치지도자가 돼선 안된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심리 에세이스트인 김형경씨는 아버지를 극복하기 위해선 내면에 있는 아버지를 떠나 보내야 한다고 했다. ‘좋은 아버지 환상’을 투사하는 행위도 중단해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사회적 질서’나 ‘권력’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극복은 억압적 체제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기도 한다.

유신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 대통령에게 ‘아버지=억압적 권력’ 공식은 애초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권력’ 그 자체가 된 박 대통령에게 ‘아버지의 극복’은 이미 과거형이 된 것일까.



김진우 | 정치부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부·여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막장드라마도 이런 막장드라마가 없다. 최소한의 상식도, 논리도, 절차도, 염치도 다 내팽개쳐버렸다. 거짓말을 밥 먹듯 하고 눈 하나 꿈쩍 않고 말을 바꾼다. 앞뒤 안 맞는 얘기를 태연히 하고, 여론수렴은 여론전으로 대체한다. 국정화에 반대하는 50% 이상의 시민을 비국민으로 만들고, 사학과 교수의 90%를 좌파로 빨갛게 덧칠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 힘든 판에 느닷없는 국정화 타령으로 나라를 두 동강 내놓고는 ‘국민통합’을 해야 한다고 염장을 지른다. 노태우 정권 이래 이렇게 뻔뻔하고 막무가내인 정권은 처음 본다.

“역사는 역사학자들과 국민의 몫이다”, “정치인들이 역사를 재단하려고 한다면 다 정략적인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하기 때문에 제대로 될 리도 없고 나중에 항상 문제가 된다”, “역사에 관한 일은 국민과 역사학자의 판단이다. 어떤 경우든 역사를 정권이 재단해선 안된다. 정권의 입맛에 맞게 한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대표이던 2004~2005년 한 말이다. 그때와 지금이 달라진 건 박 대통령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사실밖에 없다. 정치인이 신념과 태도를 바꿀 때는 합당한 설명이 뒤따라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도리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국정화의 방아쇠를 당기면서 자신의 태도가 왜 180도 바뀌었는지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이런 게 박 대통령이 말하는 원칙과 신뢰인지 궁금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반대하는 청소년들이 7일 서울 세종로 정부청사 앞에서 국정화 반대를 요구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_김창길 기자


하긴 이 판국에 원칙이니 신뢰니 하는 고상한 말을 입에 담기도 민망하다. 보름 전만 해도 국정교과서 집필진을 다 공개하겠다더니 대표 필진만 공개한다고 말을 바꾸었다. 국정화 반대 여론이 날로 커지자 행정예고 기간을 단축했다. 행정예고 기간에 수렴된 시민들의 의견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던 당초 방침과 달리 검토 결과를 의견을 제출한 사람에게만 개별 통보하는 것으로 뒤집었다. 국정화 TF의 존재가 드러나자 처음에는 “TF인 건 맞다”더니 행정 절차상 위법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자 “TF가 아니다”라고 말을 뒤집었다. 국정화에 44억원의 예산을 예비비로 몰래 지급해놓고는 국회에 와서 “예비비로 할지, 본예산으로 할지 결정된 게 없다”고 거짓말했다. 검정 기준에도 없는 천안함 사건이 검정 교과서에 실리지 않았다고 생트집을 잡고, 이 정부의 심의·수정을 거쳐 발간된 검정 교과서가 종북·좌편향에 대한민국을 부정한다고 제 목을 찌른다.

대통령 ‘복심’이란 사람은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는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여당 대표는 “세계 모든 나라가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부러워하는데 정작 나라 안에서는 헬조선이란 단어가 유행이다. 이는 부정적인 역사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라고 견강부회를 한다. 헬조선이 극우 누리꾼이 몰려 있는 ‘일베’에서도 사용되는 말이고 그 용어의 쓰임새도 청년실업 문제와 맞물려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딴전을 피우는 것인지, 정말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의 명령을 받고 급하게 국정화를 밀어붙이다 보니 하는 말마다 앞뒤가 안 맞고 편법이 판을 친다. 광범위한 국정화 반대 여론에 화들짝 놀라 내뱉는 격한 언사들은 성난 민심에 기름을 끼얹는다. 국정화가 바람직하지 않다는 과거의 소신을 접고 국정화 총대를 멨다가 ‘팽’당한 김재춘 전 교육부 차관의 경우는 차라리 서글프다. 이 모든 소란과 난리법석의 중심에 박 대통령이 있다. 비밀주의와 속도전, 정치적 반대파를 빨갱이로 몰고 군사작전하듯 시민과 야당을 상대했던 유신독재의 음습한 기운이 풍긴다. ‘그래도 시대가 바뀌었는데 역사의 시계를 되돌릴까’ 하는 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박 대통령은 눈 하나 꿈쩍 않고,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이 일을 순식간에 해냈다. 어쩌면 이번 일은 시작에 불과할지 모른다.


정제혁 | 사회부 jhjung@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국개발연구원(KDI)과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 국회경제정책포럼은 2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서비스산업과 청년일자리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국회에 계류 중인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을 조속히 통과시키자는 취지다. 토론회에서 새누리당 정희수 의원은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건·교육·관광 등의 서비스산업을 집중 육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KDI는 청년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88.4%가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 도입에 찬성했다고 보고했다. 압도적인 찬성률이다. 하지만 조사 내용을 살펴보니 석연치 않은 대목이 눈에 띄었다. 청년 90.7%가 “서비스발전기본법을 잘 모른다”고 답한 것이다.

꼼수는 디테일에 있었다. KDI 관계자는 “법안 취지 및 내용을 순수한 사실만 담아 객관적으로 설명했다”고 했다. 그러나 ‘순수한 사실’이란 “서비스산업의 생산성 향상 및 경쟁력 강화를 뒷받침하는 지원체계가 미흡한 상황”이며 법은 “서비스 분야의 법·제도적 인프라를 강화해 산업 발전을 촉진하고 양질의 일자리와 국민경제의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는 개요 설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질 낮은 일자리를 양산하고 공공부문의 민영화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등 법을 둘러싼 논란이나 문제점은 설문 참가자에게 제시되지 않았다. 다국적기업에 의해 국내시장이 잠식될 수 있다거나 의료민영화, 사행산업 확대 가능성 등에 대한 우려도 생략됐다. 제갈현숙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은 “법안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설문조사 결과는 무의미하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청년 팔이’는 이번만이 아니다. 정부는 시간제 일자리 도입이나 임금피크제 등 정책을 추진할 때마다 ‘청년실업 해소’를 내세워왔다. 하지만 이런 제도들이 과연 청년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가져다줄 것인지 의문은 여전하다. 재계가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이번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도 명분은 ‘청년을 위해서’이지만 청년들이 뭘 얻게 될지는 모호하다.


조형국 | 경제부 situation@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사건’에는 전조(前兆)가 있는 법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1년 ‘10·2 항명’을 주도한 공화당 4인방을 초주검 상태로 쫓아낸 일은 1년 뒤 유신의 전주곡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7월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를 찍어낸 일은 여당 장악의 신호탄이었다.

일전에 40여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진 두 사건에서 데자뷰(기시감)를 느낀다고 했는데, 괜한 노파심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아버지를 극복하기보다는 그 길로 회귀하는 모습이 뚜렷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박 전 대통령이 1973년 국정 전환을 발표한 지 42년 만에 이뤄진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그 결정판이다.

유신 시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 대통령이 그 시절에 대한 향수와 확신을 갖고 있다는 정황은 여러 차례 드러났다. 정치를 하는 이유가 “아버지의 명예회복”이라지 않는가. 지난 대선 과정에서 “5·16, 유신, 인혁당 사건 등은 헌법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사과한 게 오히려 예외적 사건이다. 되레 “(5·16은) 구국의 혁명”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 일”(1989년 MBC 인터뷰)이 솔직한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역사전쟁’의 소용돌이다. 우리 사회를 반쪽으로 갈라놓는 이념전쟁이 웬 말이냐고? ‘국민통합 100%’ ‘민생 우선’을 외치더니 뜬금없다고? 이것이야말로 박 대통령의 ‘전공 분야’라는 분석이 많다. 박 대통령의 별칭은 ‘선거의 여왕’이다. 갈등과 대립, 승부수 정치에 탁월한 것이다.



사실 “박근혜 정권이 뭘 남기겠느냐”는 수군거림이 여권 일각에서까지 들린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등 국가위기에서 정부의 무능이 여실히 드러났다. 경제 살리기, 남북관계 개선 등도 난망인 상황이다. 역사전쟁은 이 모든 현안을 덮어버릴 수 있다. 당장 보수층을 똘똘 뭉치게 할 수 있다. 정치공학적으로 나쁘지 않은 수다.

하지만 역사와 싸우겠다는 박 대통령의 선택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는 따져봐야 한다. 무엇보다 ‘이해당사자’가 자신의 집념이나 분노를 관철시키기 위해 역사전쟁에 나서는 게 옳은 것일까. 대한민국의 성장동력이 한계에 봉착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이 시점에 대통령의 의지라는 이유로 역사전쟁을 최우선 국정과제로 올려놓는 일이 과연 옳은 것일까.

지금 국정화 강행은 우리 사회를 편 가르기와 대립으로 내몰고 있다. 모든 국정 현안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면서 오직 ‘내 편, 네 편’만을 강요하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마치 구름 위에 있듯 “지금 나라와 국민 경제가 어렵다. 올바른 역사교육 정상화를 이뤄 국민통합의 계기가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하고는 방미길에 올랐다.

2012년 12월7일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 아시아판은 박 대통령을 모델로 한 표지를 공개하면서 ‘The Strongman’s daughter’라고 소개했다. ‘스트롱맨(Strongman)’이라는 표현을 두고 ‘실력자냐, 독재자냐’라는 해석 논란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이 논란이야말로 사건의 ‘전조’였다.

박 대통령은 지금 아버지의 길을 가려 하고 있다. ‘스트롱맨의 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유승민 찍어내기’ 당시 박 대통령은 ‘배신의 정치’를 말했다. 배신이란 무엇인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위임된 권력이 주권자의 여망을 저버리는 것이야말로 ‘배신’ 아닐까.

박 대통령은 아버지 시절의 과오를 사과하고, ‘국민통합’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웠다. 지금 박 대통령은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다. ‘국민행복’이야 그렇다치고 ‘국민통합’도 물 건너가고 있다. ‘스트롱맨의 딸’은 틀렸다. 이제라도 되돌려야 한다.


김진우 | 정치부 jwkim@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학부모들께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먹는 식사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아이들 머릿속에 어떤 것이 들어가서 자리 잡을지에는 관심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한 말이다. 평소 비판적이었던 무상급식에 대해 빈정거리면서, 여야 전선이 명확해진 ‘역사 전쟁’에 학부모 동요를 일으켜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려는 의도였다.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한국사 교과서를 한 번이라도 보셨다면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도 했다.

이런 말을 하는 김 대표는 그동안 아이들 ‘머릿속’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나. 백번 양보해 그가 말하는 ‘반대한민국’ 교과서들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를 거쳐 정식 발행될 때까지 여당 요직을 독차지했던 그는 뭘 하고 있었나. 급식 요구는 ‘공짜 복지, 복지병’이라고 비난했고, 대선 유세 때는 남북정상회의록 내용을 줄줄 읊으며 ‘편 가르기’에 바빴다.



역사교과서를 제대로 봤는지도 의문이다. 김 대표는 지난 7일 회의에서 “(현 교과서는) 스탈린 지령을 받아 북한에서 먼저 정부를 구성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뒤집어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분단 책임이 있다고 가르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은 1948년 8월15일, 북한의 ‘공화국 창건일’은 이보다 늦은 9월9일인데 순서를 거꾸로 안 것이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의도적인 부분 발췌를 통해 ‘검정교과서=친북·종북’이라고 외치는 그에게 유신정권 때 발행된 교과서라도 읽어 보길 당부한다.

김 대표는 차라리 “내가 유신정권 이전에 중·고교를 다녀서 ‘올바른 국정교과서’로 교육을 못 받았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잘못 알고 있으니 ‘국정교과서’가 필요하지 않겠나”라고 호소하는 편이 더 나은 여론 설득 전략이 아닐까.

상도동에서부터 청와대까지 김 대표와 동고동락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 차남 현철씨는 최근 트위터에 그를 향해 이런 글을 남겼다. “어설프게 대권은 꿈도 꾸지 마라.”


정환보 | 정치부 botox@ 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세종청사 청소용역직 근무자 급여 수준은 전국 청사 용역직 근무자에 비해 가장 높다. 시중 노임에 비해서도 세종청사는 124% 높은 수준이다. 저희와 같이 근무하시는 분들 급여를 올리게 되면 다른 청사 분들도 30% 이상 다 올려줘야 한다.”

지난 1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기획재정부 국정감사장. 새정치민주연합 신계륜 의원이 “지금 밖에서 며칠째 농성을 벌이고 있는 세종청사 노동자의 얘기부터 좀 들어보라”고 최경환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에게 건의했다.

최 부총리는 “차관이 대신 설명하겠다”며 뒤로 빠졌고, 부총리를 대신한 방문규 기재부 제2차관은 이렇게 답변했다. 방 차관의 말대로라면 세종청사 청소용역직 노동자들은 좀 뻔뻔해 보인다. 이들은 상여금 지급을 요구하고 있다. 다른 곳보다 많이 받는데 상여금까지 요구하다니 참 나쁜 ‘귀족노조’다.

그런데 방 차관의 말이 사실일까.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날 기재부 옆 농성장을 찾았다. 노조 관계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월급명세서를 꺼냈다. 그가 내민 월급명세서에 찍힌 수령액은 153만원. 세금을 공제한 실수령액은 138만원이었다. 방 차관이 강조한 ‘전국 청사 중 가장 높은 수준’의 임금은 이랬다.

방 차관은 ‘기준점 효과’를 악용했다. 경제를 잘 아는 사람들이 종종 쓰는 꼼수다. 방 차관은 청소노동자 임금 기준점을 ‘타 청사’로 잡았다. 정부는 애초에 청사 청소용역직 노동자의 임금을 과도하게 깎았다. 전국에는 4개 청사가 있다. 공제 전 기준으로 정부서울청사는 월 132만원, 정부과천청사는 월 130만원(연차 및 시간 외 미포함)을 준다. 가장 많이 주는 곳은 정부대전청사로, 월 156만원이다.

하지만 기준점을 바꾸면 판단이 달라진다. 세종청사 옆에 있는 세종시청은 청소용역직 노동자에게 184만원을 준다. 세종국책연구단지도 181만원이다. 이 지역의 표준 임금이 이 정도라는 얘기다. 같은 지역의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청소용역직 노동자의 임금이 20%나 차이가 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시중노임의 124%라는 것도 ‘기준점 꼼수’다. 방 차관은 시중노임의 기준을 최저임금(시급 5580원)으로 잡았다. 통상 청소용역직의 시중노임은 중소기업중앙회가 정한 일용직 최저임금 단가를 쓴다. 세종청사 청소용역 업체는 입찰에 참여하면서 이 단가의 85%를 제시해 낙찰받았다. 세종청사 청소용역직 노동자들은 중소기업중앙회 일용직 단가의 85%를 받고 있다고 반박했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2016년도 예산안을 설명하고 있다._연합뉴스



최경환 부총리는 지난해 취임과 함께 ‘소득주도 경제’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공무원 임금은 올해 3.8%, 내년 3.0%를 선뜻 올려줬다. “공무원이 올라야 민간이 오른다”는 이유를 댔다. 그런 기재부가 청사의 청소용역직 노동자만 저임금을 강요하고 있다. 공무원노조는 한술 더 떴다. 중앙행정기관공무원노조는 “청소용역직 노동자의 파업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라며 청사관리소에 대체인력을 투입해 청결을 유지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공무원연금 개혁 때 연금 훼손을 막아달라며 거리로 나오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정부는 민간기업 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위해 1인당 임금상승분의 70%까지 지원하고, 간접노무비 20만원도 지원하겠다고 지난 17일 밝혔다. 청소용역직 노동자들은 정규직까지도 바라지 않는다. 비정규직이라도 할 테니 동네 수준에 맞게 임금만 맞춰 달라는 것이다. ‘청사 기준’으로 저임금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지자체 기준’으로 합리화해달라는 얘기다.

정부는 자기집 청소를 해주는 도우미의 임금도 제대로 맞춰주지 못하면서 남의 집에는 왜 임금을 올려주지 않느냐며 닦달하고 있다. 제 눈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것일까, 혹은 대통령부터 내려온 ‘유체이탈 화법’이 전염이 된 것일까. 그저 ‘어이’가 없다.


박병률 | 경제부 mypark@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근혜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다. 요즘 새누리당의 모습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다. 요즘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국정수행을 뒷받침하는 집권여당의 역할에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하고 있다.

당장 박근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인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는 선봉장을 자처하고 있다. “노조가 쇠파이프만 휘두르지 않았다면 국민소득 3만불이 됐을 것”(김무성 대표), “파업은 핵폭탄”(이인제 최고위원) 등의 독설을 내뱉으며 ‘노조 때리기’에 여념이 없다.

대통령 심기 경호에도 빈틈이 없다. 지난달 26일 박 대통령이 소속 의원들을 청와대로 초청하자 당의 공식 행사인 의원 연찬회 일정을 축소하고 달려갔다.

원내사령탑인 원유철 원내대표는 국회 상임위원회의 청문회 개최 요건을 확대하는 국회법 개정안 처리를 합의한 지 이틀 만에 번복했다. 친박계를 중심으로 제2의 ‘유승민 파동’이 올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자 화들짝 놀라 물러선 모습이다.

이 모든 게 ‘유승민 파동’의 학습효과다. 박 대통령이 지난 6월25일 ‘배신의 정치’라며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찍어낸 이후 나타난 현상들이다. 새누리당에서 뾰족한 ‘송곳’은 사라졌다. 대신 “청와대가 불편해할 일은 하지 않으려”(당 관계자)는 분위기가 생겼다.

박 대통령의 선택은 옳았다. 유 전 원내대표를 희생양으로 삼은 ‘여당 길들이기’는 성공했다. 당·청관계는 신(新)밀월 시대를 구가하고 있다. 밀월은 밀월인데 수직적이다.


새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가(왼쪽) 박근혜 대통령(오른쪽)_연합뉴스


물론 흠집이 좀 났다. 하지만 남는 장사를 했다. 권력에 도전하는 이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고 당을 다잡지 않으면 집권 후반기 국정운영은 어떻게 하겠는가. 의회정치와 정당 민주주의 훼손은 ‘새 발의 피’다.

40여년 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그랬다. ‘10·2 항명’ 파동을 일으킨 공화당 4인방을 초주검으로 만들어 축출했다. 그리고 1년 뒤 유신의 길을 걸었다.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박 대통령은 2012년 유신에 대해 “아버지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노심초사하셨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도 “내 무덤에도…”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근 불거진 ‘대구 의원 물갈이설’이 실마리다. 유 전 원내대표 편에 섰던 대구 의원들이 ‘배신의 정치인’으로 찍혔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박 대통령이 ‘배신자’를 그냥 둘 리가 없다. 더 나아가 임기 말, 그리고 임기 후까지 권력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와 욕망이 읽힌다.

8·25 남북 합의와 중국 방문 ‘성과’로 얻은 자신감까지 있다. 박근혜식 통치 스타일을 밀어붙이려는 조짐이 확연하다. 청와대와 친박계가 여당을 장악하려 한다는 ‘시나리오’도 다시 힘을 얻고 있다. 오픈프라이머리로 “권력자의 공천개입을 막겠다”고 한 김무성 대표도 점점 힘이 빠지는 모습이다.

과연 시나리오가 실현될 수 있을까. 한 가지, 시간은 박 대통령 편이 아니다. 레임덕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는 얘기다. 설혹 시나리오대로 된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남겠는가. 마치 눈가리개를 한 경주마처럼 무작정 앞으로 가고 있는 당의 모습이다. 그러다가 자칫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김 대표는 지난해 8월 당 대표 당선 직후 “당이 대통령의 밝은 눈과 큰 귀가 돼 여론을 가감 없이 전달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야당 덕’을 보는 상황은 언젠가 지나간다. 그때가 되면 여권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지난 총·대선 때처럼 경제민주화, 복지를 다시 꺼내놓을 순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때까지 여권에 혁신의 ‘생살’이 살아 있을지 의문이다.


김진우 기자 jwkim@kyunghyang.com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