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비평/김종철 칼럼'에 해당되는 글 49건

  1. 2017.05.11 [김종철의 수하한화]새 정부의 성공을 위하여
  2. 2017.04.12 [사설]한반도 위기설 이대로 방치할 수 없다
  3. 2017.03.16 [김종철의 수하한화]‘시민권력’을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4. 2017.02.16 [김종철의 수하한화]미국과 한국의 다른 선택
  5. 2017.01.19 [김종철의 수하한화]새로운 정치와 ‘경제성장’
  6. 2016.12.22 [김종철의 수하한화]‘시민권력’으로 세상을 새롭게
  7. 2016.11.24 [김종철의 수하한화]‘들사람의 얼’이 필요하건만
  8. 2016.10.27 [김종철의 수하한화]그들은 뭘 하고 있었나
  9. 2016.09.29 [김종철의 수하한화]자유시민-농민 백남기
  10. 2016.09.01 [김종철의 수하한화]몬스 사케르
  11. 2016.08.04 [김종철의 수하한화]백합이 썩을 때
  12. 2016.07.07 [김종철의 수하한화]브렉시트, 민주주의의 실패라고?
  13. 2015.12.23 [김종철의 수하한화]정치의 부재, 공화주의 정신의 결여
  14. 2015.08.05 [김종철의 수하한화]김수행, 아름다운 영혼을 기리며
  15. 2015.07.08 정치와 용기
  16. 2015.06.10 [김종철의 수하한화]메르스와 민주주의
  17. 2015.05.06 [김종철의 수하한화]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뒤늦은 추도사
  18. 2015.04.08 [김종철의 수하한화]세월호 1년, 민주주의를 살려야 한다
  19. 2015.03.11 [김종철의 수하한화]후쿠시마 4년, 문제는 민주주의다
  20. 2015.02.04 [김종철의 수하한화]‘자유시민’으로의 삶

새 정권이 탄생했다. 이 정권은 그냥 주기적인 선거가 아니라 매서운 추위를 무릅쓰고 촛불로 어둠을 밝히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절규했던 시민들의 궐기로 세워졌다. 그러므로 문재인 정권은 지금 승리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니다. 그들은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의 압도적인 민주적 열망을 어떻게 국가운영에 반영할지 깊게 고뇌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자신이 만약 새 정부의 요직을 맡았다고 가정할 때, 산적한 난제를 어떻게 풀지 엄두가 날까? 군사정권이나 역대의 퇴영적 정권이라면 매우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 즉 시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폭력으로 제압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촛불’의 힘으로 출범한 ‘민주정부’가 그런 비열한 통치방식에 의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쨌든 현명한 방책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단지 문재인 정권의 성공뿐만 아니라 우리들 모두, 특히 오늘의 청년세대와 아이들이 ‘헬조선’에서 벗어날 수 있느냐 없느냐가 걸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헬조선’은 적어도 100년 이상의 해묵은 비리와 부조리가 누적된 결과라고 한다면, 단숨에 개혁 혹은 격파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최근의 정치권과 언론에서 왜 ‘협치’니 ‘통합’이니 하는 말들이 난무하는지 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용어를 쓰는 사람들의 논리는 일견 합리적이다. 현재의 국회 구성상 새 정권은 어차피 야당들의 협조 없이는 법안 하나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타협을 해야 하고, 그럴 바에는 ‘공동정부’를 구성하여 ‘국민통합’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그럴싸한 논리의 배후에는 다분히 정략적인 계산이 깔려있음을 간과해서 안된다. 돌이켜 보면, 선례도 없지 않다. 1979년 10월 독재자 박정희가 암살된 직후 당시의 기득권층 인사들이 강조하던 게 바로 ‘국민통합’과 ‘타협’이었다. 그러니까 시대를 넘어서 그들이 ‘통합’과 ‘협력’을 역설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의 비행이나 역사적 과오를 문제 삼지 말아달라는 요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문재인 정권이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렇지만 난국을 헤쳐 나가려면 어쩔 수 없다면서 이 나라를 ‘헬조선’으로 만들어온 장본인들과 끝내 손잡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필경은, 노무현 정권이 그랬듯이, 좋은 의도가 엉뚱한 결과로 이어지는 정치적 실패를 자초하게 될지 모른다.

지금 선거결과를 분석하면서 특히 주류 (사이비) 언론들은 세대 간의 갈등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온갖 사회적 비극과 부조리는 근본적으로 부의 편중,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에서 기인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된다. 실제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거의 모든 사회적, 환경적, 실존적 재난의 근원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합리적 정치의 부재, 즉 공공성을 상실하고 극소수 기득권층의 사익을 돕는 수단으로 타락해버린 국가권력의 오용 내지 남용이라는 문제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에게는 정치다운 정치의 회복, 즉 민주정치의 실천만큼 더 긴급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경제민주화를 동반하지 않는 민주정치란 어불성설이라는 사실이다.

하기는 ‘헬조선’뿐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인간사회의 핵심 문제는 소득과 재산을 둘러싼 갈등과 대립이었다. 완전한 경제적 평등이라는 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몽상이다. 하지만 경제적 불평등이 극심할 때,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자유로운 삶’이 허용될 리는 없다. 나아가 그 사회는 국가폭력 없이는 하루도 유지될 수 없는 야만적인 사회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결과는 부자든 빈자든 공멸을 면할 수 없는 파국임을 역사는 명확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럼에도 부유층이나 기득권세력은 결코 양보를 하려 하지 않는다. 이 점을 가장 예리하게 지적한 사상가가 <로마사 논고>의 저자 마키아벨리이다. 공화주의자 마키아벨리는 공화정이야말로 다수 인민의 자유로운 삶을 보장하는 유일한 체제라고 말한다. 그런데 공화정의 최대 걸림돌은 부의 균점을 완강히 거부하는 부유층의 탐욕이다. 마키아벨리는 부의 과도한 격차는 필연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의 격차를 가져오고, 그리 되면 귀족과 평민의 평등한 참정권을 전제로 하는 공화정은 존속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부의 완전한 균등화나 사유재산제의 폐지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지나친 경제적 격차, 그로 인한 권력의 독점과 공권력의 오용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교적 안정된 공화주의체제 속에서 평민들이 자유롭게 살았던 역사적 선례의 하나로 게르만족의 공동체를 언급하며, 그 공동체에서는 만약 부자들이 위세를 부리면 “그냥 죽여버렸다”고 말한다.

정의를 위해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오늘의 상황에서 용인될 수 없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이야기는 ‘평민들의 자유로운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매우 단호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런 단호함을 문재인 정권에 기대할 수 있을까?

결국 중요한 것은 지혜와 용기이다. 자신들이 어떻게 집권하게 되었는지, 가장 귀를 열고 응답해야 할 상대가 직업정치인도 기득권층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평범한 시민들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는다면, 길은 뜻밖에 쉽게 열릴지 모른다. 당장 새 정부가 대응해야 할 사드 배치 문제도 예외가 아니다. 국민과 의논도, 국민의 동의도 없이 날치기로 진행되고 있는 게 이 문제의 본질임을 명확히 인식한다면 해결책은 찾을 수 있다. 즉 사드 문제를 대통령의 ‘고독한 결단’으로 해결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국민들의 뜻을 직접 물으면 되는 것이다. 예컨대 무작위로 선출된 시민들로 구성된 회의체를 만들어 거기서 치열한 논쟁과 숙의를 거쳐 내린 결정을 가지고 미국이든 중국이든 상대방에 떳떳하게 설명하면 될 게 아닌가? 한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에 대통령 맘대로 국가중대사를 결정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친절한’ 부연설명을 곁들여서 말이다.

※ 이 글로써 당분간 작별합니다. 그간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과 지면을 허락해주신 경향신문에 감사드립니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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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정한 한반도 정세에 한반도 위기설까지 나돌면서 불안감이 커지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중심으로 ‘4월전쟁설’이나 ‘4월27일 북한 선제타격설’이 확산되고 온라인 사이트에서는 ‘김정은 망명설’이 떠돌고 있다. 그제 금융가에서는 ‘외국계 글로벌 기업들이 대피 계획을 가동했다’는 루머가 돌아 확인소동이 벌어졌다. 외신들도 위기설에 가담했다. 미국 NBC방송 <나이틀리 뉴스>의 간판 앵커인 레스터 홀트가 이달 초 비무장지대(DMZ) 등에서 생방송한 것이 위기감을 부추겼고, 중국과 영국 언론들은 북한 정권교체설을 흘리고 있다.

위기설 여파는 심상치 않다. 무엇보다 주식시장이 민감하게 반응해 코스피와 코스닥 모두 주가가 떨어졌다. 이대로 방치하다가는 나라 전체가 심각한 상황으로 몰려갈 수 있다. 하루라도 빨리 잠재울 필요가 있다.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대선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한다. 시중에 나도는 위기설은 대부분 근거 없는 가짜뉴스들이다. 오는 27일 미국이 스텔스기를 보내 북한을 폭격한다는 4월전쟁설만 해도 일본의 한 블로거가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을 짜깁기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사전에 구체적인 폭격 일정을 공개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김정은 망명설 역시 황당무계하다. 선제타격설의 진원지인 미국 칼빈슨함의 한반도 배치는 수리 중인 로널드레이건 항공모함의 빈자리를 대신하기 위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4월 11일 (출처: 경향신문DB)

그럼에도 가짜뉴스들이 활개를 치는 것은 한반도 정세의 불확실성 탓이다. 북핵 문제를 담판 짓겠다던 미·중 정상회담이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난 데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 고위 관계자들이 대북 선제타격 가능성을 시사한 것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가짜뉴스들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진원인 북·미 갈등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손 놓고 있는 듯한 정부의 태도다. 폭주하는 위기설 속에서 국민 불안을 진정시킬 수 있는 그 흔한 대국민담화 하나 내놓지 않고 있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 루머들이 불거질 때 그저 부인하는 데 그치지 말고 가짜뉴스들을 확실히 잠재우는 노력을 해야 한다.

정치권도 가만있을 때가 아니다. 국정공백 상태에서 황 대행 체제가 힘 있게 국정을 추진하기 어려운 점을 감안해 책임 있는 대책을 내놔야 한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제안한 ‘5+5긴급안보비상회의’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제의한 ‘초당적 평화외교’를 주목한다. 또한 정치권은 위기설을 내세워 안보 불안 심리를 부추겨 대선에 악용하려는 움직임도 단호히 경계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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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탄핵이 될 것임을 별로 의심하지 않았지만, 막상 이정미 재판관이 “그러나 (세월호 사태가) 참혹한 것이긴 하나 탄핵 사유까지는 안 된다”고 말하는 대목에 이르러 갑자기 불안해졌다. 하지만 잠시 후, 이 역사적인 판결의 결론은 ‘피청구인(대통령)의 파면’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몰상식이 활개치는 사회에서 살아온 탓일까. 생각하면 매우 당연한 결론인데도 이 결론을 듣자 나는 눈물이 날 만큼 크나큰 해방감을 느꼈다.

지난 몇 달동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열심히 광장으로 나갔던 사람들, 그리고 몸은 못 나갔어도 마음만은 촛불을 든 사람들과 함께 있었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느낀 감정도 기본적으로는 같았을 것이다. 우리는 무책임하고 개념 없는 대통령 하나를 끌어내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오랫동안 옥죄어온 거짓과 위선, 불의와 부패의 사슬들을 걷어내고 이제는 인간답게, 정말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는 것 때문에 이토록 기쁨을 느끼는 게 아닌가?

더욱이 헌법재판소의 결론은 기대 이상으로 명쾌했다. 즉, 피청구인을 파면하는 핵심적인 사유는 그가 헌법을 위배했을 뿐만 아니라 (이 나라 최고위 공직자로서) 헌법을 수호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3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이 퇴임식에 참석해 소감을 밝히고 있다.있다. 김창길 기자

학자들에 의하면, 나라의 정체(政體)를 ‘민주공화국’으로 천명하고 헌법 제1조에 명기하고 있는 우리의 헌법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헌법이다. 1948년의 제헌헌법 이후 여러 차례 개정되었지만, 대한민국 헌법 제1조1항인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만은 지금까지 변함없이 보존돼왔다. 그런 점에서 제1조야말로 우리 헌법의 핵심인 셈이다.

그런데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이 헌법은 (무지한 젊은 시절의 내가 생각했듯이) 해방 후 몇몇 전문가들이 외국의 헌법을 베껴서 급조한 게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현행 헌법에 명시된 대로 상해 임시정부가 작성한 헌법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임시정부의 헌법 정신은 또한 1919년의 독립만세운동,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민족운동 지도자들이 품었던 이상과 비전을 계승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동학농민항쟁을 이끈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재판받을 때 관헌과 주고받은 문답 속에 이런 말이 있었다. “그대가 경성으로 쳐들어온 뒤 누구를 추대할 작정이었나?” “일본군을 물리치고 간악한 관리들을 몰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뒤 주춧돌처럼 믿음직한 선비들을 내세워 정치를 맡게 하고 나는 시골로 돌아가 농사를 계속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사를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에 여러 사람들이 협의하고 화합하는 합의법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도쿄아사히신문’ 1895·3·6) 요컨대 전봉준 장군이 구상한 것은 공화주의 정치원리였다(기본적으로 유생이었음에도 전봉준 장군이 공화주의 원리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를 구상했던 배경에는 만민평등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동학사상이 있었다).

공화주의 원리란, 간단히 말하면, 국가가 특정 개인이나 그룹의 사유물이 아니라 구성원 전체가 평등한 자격으로 고르게 지분을 나눠 갖는 공유재산(commonwealth)이라는 전제 위에 서있는 정치원리이다. 우리들 중에는 이러한 정치사상이 해방 후 이 땅을 점령 통치하기 시작했던 미국에 의해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있다. 하지만 그 오해는 역사에 대한 완전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좀 더 깊이 역사를 들여다보면, 공화주의(혹은 민주주의)의 원리는 가시적이든 불가시적이든 늘 (세계의 어떤 지역, 어떤 민족에 못지않게) 한반도 주민들의 의식과 욕망을 근원적으로 지배해온 토착적인 생활윤리였다. 그러므로 공화주의의 첫째 원칙, 즉 평등주의 사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언제나 매우 민감했고, 그리하여 사람들이 가장 큰 불행을 느끼는 것은 평등한 세상에 대한 꿈과 욕망이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좌절될 때였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헬조선’에서의 삶이 절망적이라고 느끼는 가장 큰 요인이 무엇일까? 아마도 절대적인 빈곤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갈수록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가 심화되는 상황에, 또한 이것을 개선하는 데 필요한 국가의 공공성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 아득한 절망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헌재의 이번 결정은 누구보다 이 나라의 젊은이들을 위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정으로 인해 그동안 사실상 사문화되었던 헌법 제1조, 즉 민주적 공화주의의 원칙이 다시 국가운영과 정치의 중심원리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확고히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으로 나와 촛불을 들고 가장 큰 목소리로 끊임없이 외친 구호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였다. 실제로 우리 헌법 제1조는 이번 시민혁명에서 사람들이 사용한 유일하고 강력한 무기였다. 시민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이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에게 헌법을 지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헌재는 이 지극히 온당한 요구를 헌법적 판단이라는 형식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헌재가 헌법을 지키기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뜻에 맞는 결론을 내린 것은 매우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토록 흥분하고 세계도 놀라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따져보면 헌재까지 포함하는) 이 나라의 기득권세력의 철옹성 같은 지배구조에 큰 균열이 생겼고, 그럼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사람들이 구호만 외친다고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무엇보다 우리들 다수가 ‘공적 개인’이 되어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능동적으로 행동함으로써 그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시민권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제 문제는 모처럼 발휘된 이 시민권력을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일차적 목적은 달성했으니까, 기존의 실패한 대의제 정당정치를 그대로 방치한 채 우리는 물러나야 할 것인가? 파면당한 대통령과 공범임이 틀림없는 국회에, 그리고 이 역사적 순간에 대연정이니 화해니 타협을 운위하는 나약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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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했던 대로 트럼프의 난폭한 통치가 시작되었다. 트럼프는 백악관으로 들어가자마자 뜸도 들이지 않고 곧장 이슬람 7개국 국민의 미국 입국을 거부하는 행정명령을 발동시켰다. 하지만 이 반문명적인 (혹은 심지어 반인륜적이라고 해야 할) 조치는 곧 미국의 한 연방법원이 위헌적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써 당분간 집행이 보류되었다.

그럼에도 트럼프의 공격적인 행동은 거침이 없다. 그는 자신의 행정명령을 비판하는 목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는 선거운동 중 공약한 것을 실천할 뿐이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그리하여 멕시코와의 국경에 견고한 장벽을 설치하고, 오바마 정부에 의해서 중단되었던 대규모 송유관 건설의 재개 등등, 기습적인 조치들을 주저없이 감행하고 있다.

의회의 동의도 받지 않고, 모든 민주주의적 상식을 무시하면서 밀어붙이는 트럼프의 이 난폭한 행보 때문에 미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의 양식 있는 사람들이 지금 기막혀 하고, 분노하고 있다.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전체 유권자 중 겨우 25%의 지지를 받았을 뿐인데도 트럼프는 자신의 취약한 정치적 기반을 돌아보지도 않고 폭군적 통치방식을 수정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취임한 지 한 달 만에 벌써 ‘탄핵’ 이야기가 나오고, 실제로 미국인들의 거의 절반이 탄핵에 찬성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는 등, 실로 지금 미국은 아수라장이다.

그러나 냉정히 말하면, 당분간 트럼프가 탄핵당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트럼프는 자신이 끊임없이 내세워온 ‘미국 제일주의’를 실행하기 위한 현실적 조치로, 미국에 불리하다고 생각되는 자유무역협정들을 수정하거나 폐기할 태세이고, 해외로 이전했던 미국의 공장들의 본토 회귀를 강력히 종용하고, 외국 기업들이 미국에 중점적으로 투자할 것을 거의 협박조로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세계적 기업들은 트럼프의 요구를 따르기로 약속했다고 보도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지난 수십년간 ‘세계화 경제’의 흐름 속에서 생산기지들이 값싼 노동력을 찾아 해외로 빠져나감으로써 일자리를 잃었던 수많은 중하층 미국 시민들에게 당연히 많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날 수 있다. 게다가 트럼프는 지구사회의 가장 긴급한 현안, 즉 기후변화는 중국이 미국과 같은 ‘선진국’의 발목을 잡기 위해서 꾸며낸 음모적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화석연료의 대규모 개발과 사용에 거리낌이 있을 수 없다. 노스다코타주의 오래된 인디언 부족의 땅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은 대규모 송유관 설치 공사의 재개를 백악관에 들어가자마자 승인한 것은 그 때문이다.

정책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리고 다른 나라들이야 어떻게 되든, 미국인들에게, 특히 그동안 정치권력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층민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결국은 지속 불가능하다 해도) 그들의 생활수준을 높여준다면, 그리고 그게 트럼프의 공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다수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럼프는 탄핵을 당하기는커녕 그의 위세가 어쩌면 하늘을 찌를지도 모른다.

그런데 따져 보면, 유례없이 언행이 거칠기는 하지만, 트럼프가 추진하려는 것은 본질적으로 역대 미국의 주류 정치가들이 해왔던 것과 본질적으로 다른 게 아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쌓는 문제도 그렇다. 이미 1992년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체결 당시 클린턴 정부는 국경을 막기 위한 철조망을 설치했다. 클린턴은 ‘협정’이 발효되면 큰 타격을 입는 멕시코 농민들과 하층민들이 미국 땅으로 몰려올 것을 예견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트럼프가 하려는 것은 그러한 차단조치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기후변화 문제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역대 미국 정부는 어느 정권이든 국제사회에 책임감을 느끼기는커녕 기후변화를 막으려는 세계인들의 노력에 늘 찬물을 끼얹어 왔다. 그러다가 오바마 정부가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 동참을 했으나, 미국이 약속대로 협정을 이행할지는 의문이었다. 그 상황에서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하는 트럼프가 등장한 것이다. 요컨대, 트럼프는 전혀 새로운 것을 하려는 게 아니라 종래에 미국 정부가 하던 것을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침없이 행하여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려는 것이다.

지금 세계의 언론들은 트럼프의 등장으로 미국이 파쇼국가로 되면서 세계를 나락으로 빠트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퍼뜨리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트럼프의 언행은 차마 볼 수 없을 만큼 문명사회의 기본 규칙을 무시하고, 반지성주의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트럼프와 함께 ‘탈진실(post-truth) 시대의 정치’라는 말이 갑자기 유행하기 시작했다. ‘탈진실의 정치’란 거짓말이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정치가 거짓말로 오염되지 않은 때가 있었는가? 어쩌면 트럼프는 오랫동안 정치의 세계를 가리고 있던 위선적인 가면을 벗어던지고 있을 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위선을 필요로 하는 정치와 위선을 벗어버린 정치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거짓말’과 ‘탈진실’이 다른 것만큼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거짓말’의 경우는 말하는 사람이 내심으로는 가책을 느끼지만, ‘탈진실’의 경우는 거짓말을 하면서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차이가 있다. 그러니까 니체식으로 말한다면, 사물은 해석하기 나름이고, 진실은 오직 ‘힘’이 만들어낸다는 생각이 ‘탈진실’ 시대의 정치 원리인 셈이다. 이것을 달리 말하면, 오늘날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의 정치는 ‘니힐리즘’에 지배되어 있다는 얘기가 된다.

지금까지 나는 미국 얘기를 했지만, 물론 한국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참으로 지겹도록 오랫동안 거짓말이 난무하는 언어공간 속에서 살아왔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근원적으로 일그러지고, 흉물스러워졌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꺾이지 않는 정신이 살아 있었다는 것을 지금 우리는 경이롭게 확인하고 있다. 미국인들이 (선거제도의 결함 탓도 있지만) 시대착오적인 파쇼적 정치지배를 선택한 것과 반대로, 우리는 주말마다 대규모로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만이 활로라는 ‘진리’를 세계를 향해 발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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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월요일 저녁 JTBC 신년토론을 유심히 보았다. 헌법재판소에서는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이 진행되고, 전국의 광장에서는 사상 최대의 촛불데모가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가장 신뢰받는 언론으로 떠오른 방송사의 특별 프로그램이기도 했고, 또 예고된 출연자들에 대한 기대감도 컸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하면, 나는 지금 한국의 제도권 정치에서 이른바 양심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 측을 가장 적극적으로 대변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사람, 즉 이재명과 유승민이 공개토론에서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매우 궁금했다.

알려진 대로 둘은 곧 닥칠 차기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나올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번 선거에서 그들이 과연 소속정당의 공식후보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지금 미지수이다. 그리고 그것은, 적어도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실제로 대통령이 되는 것과 관계없이 이미 꽤 시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이 지금 행하는 발언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신념과 생각은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여타 후보자들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기본적으로 ‘지도자’와 민중의 관계는 평등하다는 것을 늘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민주주의가 정착하기까지는, 아니 민주주의의 전성기에도, 지도자의 리더십이 관건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것을 고대 그리스 이래 민주주의의 역사가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각하면 이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가령 대통령에 관해 말한다면, 제왕적 혹은 폭군적 대통령은 논외로 하고, 기본적으로 대통령(president)이란 원래 말뜻 그대로 ‘사회자’로서 역할을 하는(혹은 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떤 회의에서든 회의의 성공과 실패는 거의 사회자가 좌우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마찬가지로 국가운영에서 사회자로서의 대통령의 능력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소소한 모임에서도 훌륭한 사회자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하물며 복잡하고 방대한 국가적 차원의 정책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데 사회자 노릇을 제대로 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정치지도자, 그중에서도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의 자질을 철저히 따져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날 방송토론은 결론적으로 낙제였다. 그렇게 된 것은 토론에 참석한 어떤 패널의 무례하고 난폭한 행동 탓도 있었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진지한 토론이 막 시작된 순간, 즉 별 쓸모없는 지엽적인 말들이 어지럽게 교환된 끝에 비로소 쟁점다운 쟁점이 부각되었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이미 토론을 끝내야 할 시간이 돼버렸던 것이다.

내 생각에 그날 토론의 유일한 쟁점다운 쟁점은 유승민 의원이 이재명 시장에게 했던 질문에서 제기되었다. 즉, 유승민은 이재명이 강조하는 ‘경제적 정의’에 대해서는 자신도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경제적 정의’는 ‘경제성장’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고 말하면서 새로운 경제성장의 방책에 대한 이재명의 복안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 질문에 대한 이재명의 대답은, 그가 다른 장소에서도 자주 말해왔듯이, 고른 분배를 해야 성장도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재명뿐만 아니라 이른바 진보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나는, 이재명이 그렇게 대답하기 전에 질문자에게 반문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유승민 당신의 경제성장에 대한 복안은 무엇인지 먼저 말해달라고 말이다. 만약 그렇게 물었다면 유승민의 대답은 무엇이었을까. 방송이 끝난 뒤 나는 계속 그게 궁금했다.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요컨대, 오늘날 한국의 합리적 보수파가 생각하는 경제성장 방안이 구체적으로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항용 보수파 정치가와 논객들은 경제성장이 중요하다는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면서도 그동안 그들이 집권하는 동안 실제 경제운용에서 합리적인(즉, 지속가능한) 성공을 거둔 바도 없고, 새로운 경제정책에 대한 구상에서도 설득력 있는 대안을 내놓은 적이, 내 기억으로는,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지금 한국을 포함하여 세계경제 전체가 왜 저성장 혹은 성장정지 상태로 되었는지에 대한 명쾌한 진단과 분석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 그 당연한 결과로, 이 상황에서 경제성장률을 어떤 식으로 더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인지 합리적인 방책이 나올 리 없다. 어쩌면 그들이 경제성장을 계속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그들의 경제성장 방안이 실제로는 매우 공허한 것이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하기는 전혀 방책을 내놓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늘 기술혁신의 필요와 그것을 위한 집중적 투자와 지원, 기업하기 좋은 환경조성, 노사협조(실제로는 노동운동에 대한 억압), 무역확대 및 다변화, 공기업 민영화 등등을 운위하고 있지만, 이런 것들은 다른 나라들도 다 해왔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으로 판명난 방식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런 방식 때문에 세계 전역에 걸쳐 경제적 불평등이 엄청나게 심화되고 절대다수 민중의 삶과 자연생태계가 철저히 망가져왔다는 사실을 완전히 간과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하기는 보수파뿐만 아니다. 이른바 진보진영도 ‘성장’이라는 개념 자체는 여전히 당연시하고 있다. 그러나 자원이 한정된 지구에서, 그것도 기후변화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쳐있는 상황에서 더 많은 생산과 소비를 전제로 하는 경제성장을 한없이 계속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그리고 지금 대부분의 생산품은, 농산물을 제외하고는, 따져보면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한 쓰레기들 때문에 인간과 온갖 생물들이 서식하는 생존의 자연적 토대를 쉴 새 없이 무너뜨리고 있는 이 부조리한 현실을 언제까지 방치할 것인가? 생태주의적 사고를 아직도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럴수록 적어도 나라를 새롭게 이끌고자 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근본적인 문제를 직시할 용기와 지혜는 갖추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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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시인 김해자는 미발표 근작시 ‘여기가 광화문이다’에서 “대통령 하나 갈아치우자고 우리는 여기에 모이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이것은 지금 주말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오는 수많은 시민들의 공통적인 심경일 것이다. 우리가 하던 일을 멈추고 “빛이 사방을 덮어 세상 곳곳으로 퍼진다는 광화문”으로 모이는 까닭은 명백하다. 세습권력들과 그들에게 빌붙어 충성해온 직업정치인, 관료, 언론, 각종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배체제를 탄핵하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연민과 분배와 정의가 얼어붙은 사이/ 농촌은 해체되고 청년들은 미래를 빼앗기고 노동자들의 삶은 망가져버린” 나라를 다시 일으켜 “만인이 만인에게 적이 되고 분노가 되는 세상이 아니라/ 만인이 만인에게 친구가 되고 위안이 되는 세상을” 열자고 한목소리로 외치고 있다.

경이롭게도, 토요일의 광화문 풍경은 우리가 평소에 안다고 생각했던 그 한국 사회가 아니다. 거기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배려해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들로 충만한 공간이다. 같은 목적을 갖고 나왔기 때문에 그곳이 환대의 장소가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예를 들어, 엄청난 인파로 발 디딜 틈도 없는 공간 속에서 사람들이 서로의 안전을 배려하여 몹시 조심스럽게 움직이며 뭐든지 기꺼이 남에게 양보하려는 모습들을 보고 있으면, 여기가 바로 어제까지 모래알처럼 흩어져 각자도생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 맞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뿐만 아니다. 시위가 열리는 광장에는 개인 돈을 들여 마련한 촛불이나 핫팩을 참가자들에게 열심히 나눠주는 이들이 있고, 자기 장사는 접고 차와 음식과 떡볶이를 무료로 나눠주는 소상인들도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젊은 자원봉사자들은 여기저기서 임시 화장실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려주는 팻말을 들고 추위 속에서 몇 시간이고 서 있다.

놀라운 이야기는 이 밖에도 많다. 시위가 있는 날은, 가령 청와대 근처의 도로는 경찰차들이 철벽처럼 길을 막아놓고 있는 탓에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 동네, 특히 세검정 일대의 주민들은 시위에 참가하려면 걸어서 갈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그 중간에 자하문터널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몇몇 인근 주민들이 자신들의 승용차를 가지고 나와서 터널 구간을 무료로 태워주는 일종의 셔틀을 운행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간과 돈을 아낌없이 내놓고 시위에 참가하고, 참가를 독려하는 이런 시민들의 이야기들을 들을수록 우리가 결코 ‘이상한’ 대통령 하나 때문에 광화문에 모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난다. 사람들의 열망은, 말할 것도 없이, 이제는 썩어문드러진 구체제를 제대로 청산하고 정말로 인간다운 삶이 가능한 세상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 세상은 어렵고 복잡한 말로 묘사할 필요가 없다. 주말의 광장에는 새로운 세상,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과 지혜가 놀랄 만큼 선명하게, 풍부하게, 강력하게 분출되고 있다. 예를 들어 무대 위에 오른 어떤 밴드 가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마을운동이 아니라 옛마을운동”이라고 노래 불렀다. 그 노래의 뜻은 일찍이 박정희 정권이 앞장서서 유포시킨 ‘새마을정신’이란 실은 황금물신주의를 조장하고 (농촌)공동체를 와해시킨 원흉이었고, 따라서 지금은 사람들이 정을 나누며 서로 돕고 살았던 ‘옛마을’의 정신을 되살리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 나라 정치인들이 ‘밥값을 못하고’ ‘서비스 정신’이 몹시 부족하다고 신랄하게 꼬집고,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업체는 갈아치우는 게 당연하다”고 읊조렸다.

주말 광화문광장에서 듣는 발언은 실로 감동적인 게 한둘이 아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나라를 또박또박 설명하는 어린 학생들과 시골에서 온 할머니, 늙은 농민과 노동자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언급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등등. 너무나 수준 높고 품위 있는 언어가 표출되고 있는 이런 장면 앞에서 새삼 느끼는 것은 지금과 같은 형태의 대의 민주주의 정치는 이제 더는 다수 민중의 민주적 열망과 지혜를 담는 그릇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지금 광화문을 비롯해서 전국의 광장과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주장하는 게 있다. 즉, 나라의 주권은 ‘우리’에게 있지, 일시적으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1987년 6월이나 2008년 광우병 파동 때의 시위 장면에 비해서 한결 더 구체화된 민주주의적 요구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국가의 중대사를 의논하고 결정하는 과정에서 그 결정의 주체는 민중 자신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식하게 된 것이다.

지금 광장에서 울려나오는 구호 가운데는 쌀값문제, 노동탄압, 인권 및 환경문제 등등 개별적 이슈에 관련된 것들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대통령의 탄핵문제에 집중돼 있으며 그와 동시에 재벌문제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가 크게 공감을 얻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제 대다수 시민들 사이에서는 오늘의 한국 사회가 ‘헬조선’으로 돼버린 것은 무엇보다 소위 정경유착, 즉 정치가 금권에 의해서 유린·농락되어왔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 되었음을 뜻하는 게 아닌가? 정치뿐만이 아니다.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윤리적 기초를 수호해야 할 언론, 학계, 사법부, 그리고 검찰이 얼마나 부패하고 타락했는지 이제 대다수 시민들은, 아이들까지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2016년 겨울, 우리의 최대 과제는 민주주의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시위나 봉기는 결국 일시적이다.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제도나 법을 만들어 민중의 민주적 열망이 지속적인 생명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 제도와 법을 만들거나 개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시민들 자신이어야 하며, 따라서 ‘시민의회’든 ‘시민주권회의’를 통해서든 ‘시민권력’의 힘으로 나라의 틀을 새로 짜는 것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게 지금 광장을 밝히는 촛불의 의미를 옳게 이해하는 방식일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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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일각(一刻)이라도 빨리 대통령직 수행을 정지시켜야 한다. 이대로 두면 너무 위험하다. 보수·진보를 가릴 것 없이 온 국민이 거의 일치된 목소리로 더 이상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물러가라고, 주권자의 이름으로 준엄하게 명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는 이 상황에서 고위공직자들을 새로이 임명하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조약까지 맺었다.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국가·국민의 운명을 파탄으로 몰아넣을지 모르는 이와 같은 짓들을 계속해서 저지를 게 아닌가?

이 나라가 지난 수년간, 선출된 공적 권력이 아니라 사실상 최아무개라는 사인(私人)에 의해 지배돼왔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었을 때, 대한민국 국회는 즉각 대통령의 직무 정지에 착수해야 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화국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정치가라면 100만명의 시민들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기 전에 마땅히 탄핵 절차를 서둘러야 했던 것이다. 현재의 대한민국 국회가 아무리 ‘공공심을 결여한 인간들(idiotes)’의 집합체라고 할지라도, 그 정도의 일은 명색 국민의 대표로서 이행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였다. 그런데도 야당 의원들조차 한없이 꾸물거리더니 이제야 비로소 탄핵절차에 들어가기로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온다. 대체 무슨 궁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야당이 우려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라고 한다. “현재의 국회 의석으로 볼 때 여당 의원들의 상당수가 동의해야 탄핵안이 가결된다. 또,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해도 헌법재판소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회에서 탄핵안이 가결되면 대통령은 직무가 정지되지만, 그 대통령의 충직한 머슴으로 지내온 현 국무총리가 당분간 국가를 운영하는 책임자의 지위를 맡게 된다.” 이러한 우려는 일면 합리적인 근거를 갖고 있다. 일단 발의된 탄핵안은 성사돼야 하고, 임시적으로나마 행정부를 관리할 인물이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것도 합당한 생각이다. 그러나 정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지금 상황에서 가장 긴급한 것인가를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그리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지금 우리에게는 박근혜의 대통령직 수행을 즉시 정지시키는 것보다 더 시급한 과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우려사항은 그다음의 문제이고, 그때 가서 대응하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국회가, 좀 더 좁혀 말하면, 야당 정치인들이 과연 자기들에게 맡겨진 이 중대한 역사적 책무를 감당할 능력과 용기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니, 이 문제가 자신들이 떠맡아야 할 역사적 책무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이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박근혜라는 인물이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 자체가 그 자신에게나 우리 모두에게 재앙의 시작이었다. 실제로 박근혜는 박정희의 딸이라는 것 말고는 책임 있는 정치가로서 아무런 자질도, 능력도 보여준 바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공과 사를 전혀 구별하지 못하는 위인이라는 것은 오래전부터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정수장학회나 영남대학교를 자신이 상속받은 개인 재산으로 간주해온 것은 그가 공민의식을 완전히 결여한 사람임을 입증하는 단적인 증거였다. 개인적인 얘기지만, 나는 박정희가 사망한 직후 1980년 봄에 영남대 교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그 이전에 재직하던 학교를 떠나 영남대로 옮긴 이유 중에는 매우 순진한 기대가 있었다. 즉 1960년대 중반에 박정희 정권이 대구대학과 청구대학이라는 (대구·경북지역의 유지들이 해방 직후 설립한) 두 명문 사학을 거의 강제적으로 통합하여 설립한 이 대학이 이제 독재정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원래의 민립대학의 지위를 회복할지 모른다, 그러면 영남대는 ‘주인’ 없는 대학이 되어 한국 사회에서는 드물게 대학자치의 모범을 보여줄지 모른다, 라는 기대 말이다. 그러나 이런 기대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곧 깨지고 말았지만, 그 와중에 동료들과 내가 가장 의아스럽게 생각한 것은 박근혜가 대학의 새 주인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원래 영남대는 박정희가 독재권력을 가지고 남의 재산을 강취(强取)하여 만든 학교였으나,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특정 개인이 아니라 5·16재단이라는 공익재단에 귀속돼 있었다. 그런데 독재자 박정희가 사망하자 그 딸이 이 학교를 마치 자기 부친이 물려준 정당한 사유재산인 양 상속을 해버린 것이다. 공과 사의 구별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는 이 너무도 뻔뻔스러운 처사에 우리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지만, 무도한 군사정권의 지배하에서 우리는 침묵하고, 굴종의 세월을 견딜 수밖에 없었다. 꼽아보니 그로부터 35년이 지났다.

그런데 지금 새삼 우리가 놀라는 것은, 실은 이 나라의 정치판과 언론계에서는 박근혜라는 개인이 정치가로 등장할 때부터 그가 공직자로서는 매우 부적격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선거제도가 갖는 허점을 타서 승승장구한 끝에 드디어 대통령이라는 지위까지 상속을 하였고, 그 결과 나라는 철저히 망가져버렸다. 그러니까 박근혜 개인의 책임도 책임이지만, 사태를 이 지경까지 방치하거나 방조해온 자들이 더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임져야 할 자들에는 어용언론과 여당 정치가들뿐만 아니라 소위 야당 정치가들도 포함돼 있다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벌써 한 달 가까이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과 거리로 나와, 너나없이 새로운 나라,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엄청난 운동이 정당한 결실을 거두자면, 지혜롭고 용기 있는 정치지도자들의 역할이 불가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찍이 함석헌 선생이 말씀하신 ‘들사람의 얼’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이 나라 정치판에서는 왜 좀처럼 보이지 않을까? 계산에만 열중할 뿐 자기희생을 모르는 좀비들 이외에 왜 ‘큰 인간’이 없을까?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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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하나? 황당하다고 해야 하나? 국회에 나와서 임기 내에 개헌을 주도하겠다고 ‘폭탄’ 선언을 할 때만 하더라도 독선적인 표정이 역력했는데, 바로 이튿날 “국민들께 사과한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사과한다면서도 빤한 거짓말을 몇 마디 하고는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하는 것을 보고 그걸 진솔한 사과라고 받아들일 ‘국민’은 아무도 없겠지만, 그래도 늘 자기만 옳다는 독선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권력자가 저렇게 힘이 빠진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낯선, 결코 유쾌하다고 할 수 없는 경험이다.

생각할수록 기괴스럽다. 국정원의 개입 덕분이든 뭐든 박근혜 정부는 합법적 절차에 따라 국민에 의해 선출된 정권이었다. 그런데 알고보니 이 정권의 막후에서 국가운영을 사실상 조종하고 좌우해온 실질적인 권력은 최아무개라는 개인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난 몇 년간 박근혜 정권이라고 생각했던 정부는 실제로는 허깨비에 불과했고, 실상은 최아무개 정권이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누구도 모르고, 아무도 그 권력행사를 위임해준 바 없는 일개 사인(私人)에 의해 대한민국 국민들이 지배를 받고, 통치를 당해왔다는 게 아닌가?

박근혜 대통령이 25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비선 실세’ 최순실씨에게 각종 연설문과 발언자료 등을 유출한 것을 인정하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뒤 고개를 숙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어떤 학자들은 그동안 한국의 대통령제를 규정하여, 삼무(三無) 대통령제라고 말해왔다. 즉 무책임, 무반응, 무소불위로,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일에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의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지 않고, 제 마음대로 국가를 운영하는 습성에 길들여진 최고 권력자의 제왕적 통치방식을 그렇게 불러온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여기에 한 가지 더, 즉 ‘무개념’을 추가하여 ‘사무(四無) 대통령제’라고 불러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오로지 권력을 장악하는 데만 급급할 뿐, 국가란 무엇인지, 공과 사는 어떻게 구별되는 것인지, 대통령직이란 무엇을 하는 자리인지에 대한 기초적인 개념도 없는 인물이 대통령직을 수행할 때에 나라가 어떻게 망가지는지 지금 통절하게 경험하고 있다.

되돌아보면,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에는 참으로 말도 안되는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가장 가깝게는 농민 백남기의 죽음을 둘러싼 국가권력의 불가사의한 패륜행위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백남기 그분이 경찰의 무자비한 물대포를 맞고 뇌가 망가져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 나라 공권력은 굳이 부검을 하여 정확한 사인을 알아내겠다면서 이미 무너질 대로 무너진 유족의 마음을 갈가리 찢고, 수많은 시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검찰과 경찰이 부검을 하겠다는 것은 무슨 수로든 사망의 원인을 조작하여 자신들의 책임을 얼버무리겠다는 속임수라는 것은 누가 봐도 빤하다.

그런데도, 공권력의 정당한 행사라는 형식논리를 들이대며, 이 무도하고 파렴치한 작태를 멈추지 않는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리 썩을 대로 썩었다는 대한민국 공권력이라고 하지만 자기들도 인간인데 이렇게까지 반인륜적인 폭거를 행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세월호 문제도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 사회에 만연한 돈밖에 모르는 풍조, 부실하기 짝이 없는 관리·감독체계, 꼭대기에서 밑바닥까지 공적 책임의식의 철저한 붕괴 등등으로, 어차피 사고는 났고, 수많은 아까운 생명이 희생되었다. 그렇다면 국가는 마땅히 사고의 원인을 규명·조사하는 데 적극 나서거나 협력해야 했다. 그래서 국가 자신의 책임이 막중한 만큼 공정한 조사가 되기 어렵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겸허히 받아들여 민간 특별조사기구에 의한 진상조사를 적극 돕고 성실히 뒷받침해야 마땅했다. 법률적 형식논리를 따지기 전에, 그것이야말로 국가라는 공동체가 계속 존립하려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최소한의 윤리적인 행위라는 인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보아온 대로, 이 정권은 진상조사를 돕기는커녕 끊임없이 방해하고, 특별조사위원회의 활동 시한마저 자의적으로 정한 뒤, 결국 조사활동 자체를 강제로 종료시켜 버렸다. 사고 이후 2년이 더 넘었는데도, 그리고 지금도 광화문에서는 유족들이 진상규명을 피눈물로 호소하며 농성 중인데도, 국가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세월호’는 아직도 미스터리 속에 싸여 있다. 그리고 이 상황은 언제 해소될지 기약이 없다. 현대국가 가운데 이런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나라가 또 있을까? 국가권력이라는 게 대체 뭐길래 이토록 반인륜적인 작태를 계속 보여주고 있는가?

나열하자면 끝이 없다. 개성공단 폐쇄도, 사드 배치 문제도 마찬가지다. 특히 우리에게 남북 문제는 힘들고 고달프지만 어쨌든 조심스럽게 관리하여 평화를 유지하면서 궁극적으로 통일을 도모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업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자면 우리 사회의 최량의 지혜를 발굴·결집하여 최대한의 합리성으로 대응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지만 오랫동안의 인내와 용기와 지혜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개성공단을 이 정권은 하루아침에 폐쇄해 버렸다. 그 결과 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가까스로 남아 있던 남북 간 교류의 마지막 통로가 닫혀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무모한 결정이 납득은 안되지만, 어쨌든 국가 최고 권부에서 내린 결정인 만큼 거기에는 나름대로 합리적인 논의와 숙의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아무개라는 이가 국가 중대사를 좌지우지했다는 정황이 드러난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개성공단 폐쇄 결정에도 그의 개입이 있지 않았을까, 모골이 송연하지만, 의심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여기서 정말 짚어야 할 게 있다. 국가운영이 이토록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대통령을 보좌한다는 사람들, 그리고 집권당 고위 인사들이라는 자들은 대체 뭘 하고 있었나 하는 것이다.

대통령에게 직언은커녕 그저 어린애들처럼 고분고분 순종만 하면서 국록(國祿)만 축내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는 이는 이번 사태의 진상이 드러나기 전에 국회에서 ‘봉건시대라면 모를까 운운’하며 최아무개라는 숨은 권력자의 권력행사를 부정했다. 하지만 지금 드러난 진상은 오늘의 대한민국 최고 권부는 옛 왕조시대보다 훨씬 더 질 낮고 무책임하고 비겁한 자들의 소굴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지 않은가?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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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이 저세상으로 그이는 갔다. 뇌가 심하게 손상되어 317일이나 의식불명 상태로 누워 있다가 국가로부터 아무런 사과를 받아내지 못한 채 영영 불귀의 객이 되었다. 

사과는커녕 소위 공권력은 이제 와서 부검을 하겠단다. 천하가 다 아는데도 오직 대한민국 경찰만은 그가 왜 죽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겹겹이 차벽을 쌓아놓고 거기로 접근한다고 무지막지하게 물대포를 쏘아댄 당사자 자신이 말이다.

어쩌다가 대한민국이 이렇게 형편없는 저질국가로 전락해버렸을까? 이런 나라에 정말 희망이라는 게 있을까? 문득 120년 전 나라를 구하려고 궐기했다가 반동적인 지배층과 외국군대에 의해서 무참한 학살을 당했던 동학농민군을 생각해본다. 그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면서 염원했던 ‘좋은 세상’이 지금과 같은 대한민국이었을까?

그리고 망국의 한(恨)을 품고 낯선 땅, 낯선 거리에서 풍찬노숙의 쓰라린 세월을 감내하며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쳤던 독립투사들이 생각했던 새 나라는 어떤 것이었는가? 우리가 다 아는 대로 그분들이 임시정부를 세우고 집단지혜를 모아서 설계한 것이 ‘대한민국’이었고, 그 정체(政體)는 ‘민주공화국’이었다. 그러니까 독립투사들의 주권회복 운동은 왕조를 부활하자는 게 아니라, 민중이 나라의 주인으로, 자유인으로 사는 나라를 세우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삼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되는 것과 동시에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지는 운명을 강요당했고, 곧이어 동족끼리의 참혹한 전쟁, 그리고 오래 지속된 독재체제와 분별없는 산업화, 난폭한 ‘개발’ 때문에 이 나라 백성들의 삶은 한순간도 편할 날 없이 끊임없이 멍들고 파괴되어왔다. 그럼에도 동학농민군과 항일독립투사들의 정신은 이 나라 백성의 혈맥 속에 잠복된 형태로나마 어떻든 죽지 않고 살아있었음에 틀림없다. 

그 결과,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불충분한 대로 ‘민주화’를 성취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이제는 고개를 들고 떳떳한 자유인으로, 인간답게, 위엄 있게 살 수 있게 됐다는 자부심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에서 남북 간의 대화·화해·협력의 길도 어느 정도 열렸고,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천신만고 끝에 이룩한 이 모든 가능성이 언젠가부터 무너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다시 캄캄해져버렸다.

경악할 것은, 반동적인 군사쿠데타 따위가 아니라 민주화의 산물인 직선제 ‘선거’의 결과로 이 모든 역사적 퇴행이 진행돼왔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역사의 시곗바늘이 거꾸로 돌아가는 것은 소수 지배층의 시대착오적인 무지와 탐욕 때문만이 아니라 상당수 민중이 그들을 무조건 지지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오늘의 한국 정치가 다수 민중의 뜻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분노하고 개탄하지만, 정치를 좌우하는 지배층 자신은 그런 비판에 괘념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늘 고정 지지층이 존재하고, 전파력이 큰 대중매체가 항상 자기들 편에 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에게는 돈과 권력이 있기 때문이다.

서글픈 현상이지만,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강자들을 옹호하고 지지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강자숭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현상의 궁극적인 원인은 인간존재의 나약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힘없는 자들이 어지러운 세상을 살다가 보면 결국은 강자 편에 서는 게 안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자기보호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드 배치 반대 집회가 열리고 있는 성주의 참외 생산 농민에게 서울에 살고 있는 어느 노인이 전화를 걸어왔다. 노인은 참외 박스에 적힌 전화번호를 보고 연락한다면서 “사드 배치를 반대하면 서울 지역 노인단체들과 참외 불매운동을 벌이겠다. 수도권에는 1000만 인구가 산다. 성주 인구는 몇만명도 안된다.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시사IN>2016·7·30). 그러니까 서울의 노인도 사드를 배치하면 누군가가 ‘희생’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돼야 한다는 파쇼적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다. 그는 성주의 농민들이 단순히 참외를 재배하여 생계를 도모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시민들이라는 점은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

지금 성주 사람들이 분개하는 것은 국가의 중대사를 국민과도 국회와도 상의 없이, 그리고 현지 주민들에게 한마디도 물어보지 않고 최고 권력자 맘대로 결정하는 위헌적·독재적인 처사 때문이다. 그러니까 성주의 농민들은 자신들이 ‘자유시민’임을 천명하고, 정부에 헌법을 지키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그들은 ‘불매운동’ 운운하는 저 서울의 노인(그리고 그와 유사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참된 자유시민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게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경우에 누군가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들은 피해자의 아픔을 나누려 하고, 혹은 최소한 미안해하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고 윽박지르지 않는다. 그것은 국가주의와 파시즘을 뒷받침하는 논리, 즉 노예들의 논리이다.

나는 백남기 그이를 개인적으로 만나본 적은 없다. 그러나 그의 오랜 지인과 동지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는 이 나라의 그 어떤 ‘애국자’나 지사보다도 지독히 향토를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며 평생을 보낸 분이었다. 반독재 투쟁에 용기 있게 참여하여 감옥살이까지 한 청년기의 경력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서울에서 어엿한 대학을 나왔으면서 몰락일로에 있는 농촌으로 들어가 한평생 동지들과 함께 ‘좋은 농사’를 통해서 ‘좋은 나라’를 만들고자 불철주야 헌신했던 삶이 그것을 말해준다. 그는 농사야말로 천하지대본이라는 진리에 충실했던 농민이자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사는 세상을 위해 싸운 진정한 ‘자유시민’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농사를 우습게 여기는 자들의 무지몽매함을 깨우쳐주기 위해 때때로 거리에 나섰지만, 국가는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끝내 무자비한 폭력으로 그를 쓰러뜨렸다. 누군가의 말처럼 티끌만큼의 “이성도, 상식도, 양심도 없는” 나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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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고 딱 점칠 수는 없지만, 이대로 가면 머잖아 이 나라가 망할 것 같다. 설령 완전히 망하지는 않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더 절망적인 상황이 닥치는 게 아닐까, 그런 불길한 예감이 날이 갈수록 짙어진다. 지금 이 나라 지배층과 그들을 에워싼 이른바 ‘엘리트’들의 정신상태는 120년 전 조선왕조 말기의 지배층의 그것과 조금도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나라를 살리겠다고 일어선 백성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그 진정한 요구가 무엇인지 귀 기울여 들을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외국 군대를 불러들여 제 나라 백성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방식을 선택했던 그 조선의 지배층 말이다.

지금은 120년 전과는 다른 세상이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든든한 ‘동맹국’ 미국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그리하여 그저 미국에 순종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 이 나라 주류 기득권층은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엊그제 청와대와의 갈등 때문에 사표를 낸 모 신문사의 주필이라는 사람이 그동안 어떤 글을 썼는지 궁금해서 찾아봤더니 가장 최근에 쓴 칼럼의 제목이 ‘미국이 화내는 건 무섭지 않나’였다. 즉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쟁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우려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그러니까 미국을 섬기고 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동류들이 지금 우리가 잘 모르는 이유로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진짜 걱정해야 할 사태는 무슨 전쟁이 아니라 내부적인 붕괴와 몰락이다. 국가나 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는 경제력과 군사력이 아니라 도덕적·윤리적 기반과 최소한도의 합리적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기반이 무너지는 것을 날마다 보고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태의 진상규명을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이 정부의 파렴치한 행동, 맹독성 녹조가 창궐하고 있는 4대강 물의 수질이 문제없다고 천연스레 거짓말을 하는 환경부의 뻔뻔스러움 등등,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정부 사람들뿐만 아니다. 입만 열면 ‘애국’을 말하고, 미국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대한민국 기득권층 사람들의 실제 행동을 보라. 그들의 한결같은 공통점은,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공익 내지 국익으로 끊임없이 위장, 은폐하면서 상습적인 거짓말을 한다는 점이다.

국가기관 고위직에 내정되어 인사청문회에 오른 인물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심히 부도덕한 방법으로 돈을 벌고 출세를 해온 자들로 드러나는 것을 우리는 지겹게 보아왔다. 하지만 가장 경악할 것은 부끄러움을 느끼는 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썩을 대로 썩은 상류층 사회에서 길들여지다 보면 진실과 허위, 선악, 미추를 분간하는 감각 자체가 마멸돼버리는지 모른다. 자신의 손으로 정직하게 먹고사는 가난한 백성들이 ‘개·돼지’로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이 상황을 어떻게 깰 수 있을까? 역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지배층의 자발적인 선의나 양보에 의해서 민주적인 사회, 보다 평등하고 인간적인 사회가 열리는 일은 없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으로 매우 오래된 흥미로운 선례가 있다. 그것은 옛날 로마공화국 초기에 발생한 ‘총파업’ 사태이다. 원래 고대 로마는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면서 ‘원로원과 로마 인민’의 나라로 정의했다. 원로원은 로마라는 도시국가를 건설한 귀족들의 후예로 구성되었지만, 여기서 ‘인민’이라는 것은 로마 전체 주민이 아니라 건국 이후 여러 형태로 공적을 쌓거나 큰 재산을 축적한 부르주아계층을 뜻했다. 대다수 민중, 즉 농민, 장인, 소상인, 사무원, 해방노예 등은 ‘인민’에서 제외됐고, 따라서 참정권도 없었다.

이 무렵의 로마 평민들은 계속되는 전쟁에 끌려 나가는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이 끝난 상태에서도 삶은 절망적이었다. 그들은 항용 빚으로 살았고, 빚을 갚지 못하면 자동적으로 채무노예가 되어 가혹한 처우를 당하거나 노예시장에서 팔려도, 죽임을 당해도 불평을 할 수 없었다.

이 상태를 개선하고자 그들은 떼를 지어 광장에 나가 부채의 탕감, 토지의 재분배, 참정권을 요구하며 소동을 벌였다. 그러나 로마 지배층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이에 기원전 494년 어느 날 평민들은 일제히 자신들이 하던 일을 중지하고 로마로부터 5㎞ 떨어져 있는 산(‘몬스 사케르’ =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 자기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내려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다급해진 원로원이 여러 차례 사자(使者)를 보내 로마가 외적의 침입 때문에 위험한 상태라고 설명하고, 제발 내려오라고 요청했다. 어떤 귀족은 평민들을 설득할 목적으로 우화를 지었다. 즉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손발이 위장에 원한을 품고 먹을거리를 입으로 운반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 때문에 영양실조로 위장이 죽어버렸지만, 결국 손발도 힘을 잃고 죽어버렸다,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평민들은 완강히 하산을 거부했다. 그래서 결국 원로원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채무노예의 해방, 부채 탕감 이외에 평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2명의 호민관을 두는 제도를 신설할 것을 결정하였다. 로마의 유명한 호민관제도는 이렇게 해서 탄생했다.

로마의 평민들이 ‘몬스 사케르’로 올라가는 일은 그 뒤에도 여러 번 있었지만, 어쨌든 이 비폭력적인 투쟁을 통해서 평민들은 그때마다 민주적 권리를 쟁취해냈고, 이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로마는 보다 안정되고 질서 있는 사회로 존속하는 게 가능했다.

주목할 것은 로마의 평민들이 죽창이나 쇠스랑을 들고 귀족들에게 대항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비폭력적인 비협력·불복종을 통해서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이다. 따져보면 민중이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는 데에 이것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온갖 합법적·불법적 장치와 탄압 밑에서 노동자와 시민들의 단결된 행동이 조직적으로 차단된 사회에 살고 있다. 이 상황이 계속되면 민중은 물론 궁극적으로 지배층도 공멸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현대식 ‘몬스 사케르’ 투쟁 방법을 찾아내는 일이야말로 가장 시급하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계급투쟁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살리는 길이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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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집에서는 밥을 공양이라고 말한다. 오래전 일이지만, 왜 그렇게 부르는지 꽤 궁금했다. 어떤 사람은 “자연과 뭇 중생들의 노고를 생각하며 보살로서 살겠다는 의지와 깨달음을 얻겠다는 의식”이 공양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는 게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즉 ‘발우공양’을 줄인 말이 공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밥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이유를 내가 확실히 납득한 것은 그게 공희(供犧)와 같은 말이라는 것, 그리고 공희란 산스크리트어 야즈나(yajna)의 번역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였다.

‘야즈나’는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기타> 전체를 통해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이다. 고대 이래 인도의 성자들은 생명·삶의 원리는 무엇인가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야즈나’라는 말로 설명해왔다. 잘 생각해보면, 우리의 생명·삶은 누군가가 내게 바치는 희생 없이는, 그리고 동시에 내가 누군가에게 바치는 희생 없이는 한순간도 영위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하다.

간단히 밥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밥을 못 먹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고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런데 밥은 쌀로 짓지만, 쌀은 땅과 하늘, 바람과 구름과 비의 ‘자기희생’, 농부와 그 가족의 헌신적인 땀, 그리고 그들의 이웃과 공동체의 노고와 협력이 없으면 단 한 톨도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들어 있고, 밥 한 그릇을 알면 만사(萬事)를 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한국말을 쓰는 우리는 때때로 밥이라는 말을 ‘희생물’이라는 뜻으로 노골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다. “넌 내 밥이야” 혹은 “내가 당신의 밥이란 말이냐”라고 우리는 종종 말할 때가 있는데, 그때 밥이란 제물(희생물)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문제는 “내가 당신의 밥이 되어줄게”라고 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지만, 여하튼 한국어 어법 자체에 벌써 밥=희생물이라는 생명사상이 명확히 내포돼 있다는 것은 흥미롭다.

우리는 대개 우리 자신이 남의 밥=제물이 되는 것은 별로 내켜하지 않지만, 무의식중에나마 ‘희생’이 얼마나 고귀한 가치인가는 잘 알고 있다.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수많은 민담·전설 속에서 끝없이 되풀이돼온 전형적인 미담일 것이다. 그리고 비근하게는 가령 야구시합에서도 늘 큰 박수를 받는 선수는 ‘희생번트’로 자기는 죽고 그 대신 앞선 주자를 살리는 선수이다.

그런데 인도의 고대사상에서 ‘야즈나’를 만물의 존재 원리로 파악한 것은 ‘희생’이 반드시 생명·삶의 손실을 뜻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희생하는 존재 자신에게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는 깨달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의 밥이 된다는 것은 돌고 돌아서 결국 누군가가 내 밥이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 만물이 이런 생명·삶의 사슬로 엮어져 있음을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는 매우 시적인 언어로 갈파한 분이 바로 동학의 두 번째 지도자 해월 선생이었다. 동학의 세계관에 따르면, 이 세상 만물은 전부 ‘한울님’이다. 그러므로 모든 ‘한울님’은 다른 ‘한울님’들을 먹여살리는 밥이자, 동시에 다른 ‘한울님’을 밥으로 삼아 살아간다. 그래서 이천식천인 것이다.

해월 선생의 이 간명한 은유는 뛰어나게 심오한 생명사상의 표현이다. 피상적인 눈으로 본다면, 이 세상 속 생명붙이들의 관계는 서로서로를 잡아먹는 극히 살벌한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해월 선생은 그것을 오히려 생명체 상호간의 상호부양과 공여(供與)의 관계로 파악한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평소에 새들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감옥에서 쓴 어떤 편지 속에는 철새들의 이동에 관한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온다. 북유럽에서 추운 계절이 다가오면 철새들은 아프리카의 나일강 쪽으로 대거 이동을 하는데, 그 먼 하늘을 날아가는 것은 독수리 등 맹금류들에게도 심히 힘든 여정이다. 그래서 새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완전히 탈진하여 모래밭에 며칠이나 쓰러져 누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토록 맹금류들에게도 험한 고행길인데 노래하는 작은 새들은 어떻게 그 먼 길을 가는가? 과학자들의 발견에 따르면, 철새가 이동하는 계절에는 하늘에서 잠시 ‘휴전’이 성립한다. 즉 작은 새들은 큰 맹금류의 등에 업힌 채 머나먼 길을 간다는 것이다. 오래전, 로자의 서간집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내가 얼마나 놀랐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하기는 이 모든 것은 불가(佛家)에서는 원래 극히 낯익은 상식이었다. “천지는 한 뿌리요, 만물은 한 몸(天地同根萬物一體)”이라든지 “세상은 순환하며 뭇 중생을 살린다(空界循環濟有情)” 등의 표현은 모두 그러한 근원적인 생명사상·세계관에서 나온 것이다. 그 사상적 뿌리에서 밥을 공양이라고 부르는 언어습관이 생겨났을 테지만, 어쨌든 공양이라는 말로써 한국불교는 우리가 매일 습관적으로 먹는 밥이지만 그때마다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희생의 산물인지를 우리가 기억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런 전통을 세우고 계승해온 것만으로도 나는 한국불교의 공로가 크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적어도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일개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생명·삶의 근본이치를 가르치고, 그 근본이치에 따라 사람이 겸허한 마음으로 단순·소박하게 사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치는 실천적 지식·사상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절집이 이상하게 변해버렸다. 나는 산중 사찰들에 즐비한 자동차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척 편치 않다. 게다가 한국불교의 기둥이랄 수 있는 조계종에서는 선거 때마다 금품이 난무한다는 소문이고, 동국대에서는 비리 혐의를 받는 총장(스님)이 외려 문제를 제기한 학생들과 교수를 탄압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졌다. 며칠 전에는 미국인 출가자 현각 스님이 한국과 인연을 끊기로 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돈을 너무 밝히고 권력자에게 굴종적인” 한국 사람들에게 질린 모양이다. 범부들이라 할지라도 재물에 집착하는 것은 정신적 빈곤을 드러내는 증상이다. 하물며 출가 수행자들이 돈과 권력의 굴레에 얽매여 있다는 것은 너무나 서글픈,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다. “백합이 썩을 때 그 냄새는 잡초보다 훨씬 더 고약하다.”(셰익스피어)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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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 영국의 국민투표 결과가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쪽으로 결론이 나자 온 세계가 화들짝 놀라고, 온갖 미디어가 폭포처럼 분석·논평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흥분상태가 가라앉는 듯하지만, 여전히 세계의 언론들은 ‘브렉시트’ 사태의 추이와 전망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문제의 중요성을 생각하면 극히 당연하다. 브렉시트란 유럽의 중핵 국가가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라고 할 수 있는 ‘국제주의적’ 연대체로부터의 이탈을 결정한 엄청난 사건이니 말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운데)가 6월 27일(현지시간) 런던의 하원에 출석해 브렉시트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런던 _ AP연합뉴스

실제로 브렉시트는 다양한 각도에서 해석이 가능한, 복합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가령 세계 현실을 ‘아래에서 위로’ 보는 데 익숙한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무엇보다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지난 수십년간 세계 전역의 민초들과 자연세계를 난폭하게 짓밟고 유린해온 신자유주의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약자들의 분노와 항변의 표출로 읽을 수 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의 발상지인 영국에서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게 매우 흥미롭다. 그러나 세계의 주류언론은 이 점에 주목하기보다는 국민투표에서 ‘탈퇴’ 쪽에 몰표를 던진 것으로 알려진 주요 계층, 즉 (자신들의 경제적 곤경이 이민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하층민들의 ‘무지’와 시대착오적인 ‘국수주의’ 정서를 비웃고, 또한 그러한 ‘어리석은’ 대중적 정서를 이용하려는 정치적 야심가들을 규탄·비판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 비판의 연장선에서 상당수 언론인·지식인들은 -좌우파를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의 실패’를 거론하고 있다. 영국이라는 국가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에 영향을 미칠 중차대한 문제를 결정하는 데 국민투표라는 ‘직접민주주의적’ 방식을 채택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가를 이번 사태가 명확히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주장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전제가 성립돼야 있다. 즉 유럽연합 탈퇴 결정이 과연 ‘잘못된’ 선택인지가 확실할 때, 그리고 현행의 국민투표가 진정으로 민주주의적인 제도라고 인정할 수 있을 때이다. 이 두 가지 전제조건이 결여된 상태에서 브렉시트를 비난하고,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비판하는 사람(들) 자신의 선입관과 편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영국의 이번 국민투표는 결함이 없는 게 아니었다. 투표가 시행되기 전 영국 사회는 이 문제에 대한 찬반 의견이 첨예하게 갈라져 들끓었고, 그 과정에서 이성적인 토론보다 격정적인 주장들이 난무했다. 따라서 일반시민들이 현안을 충분히 숙지하고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온갖 형태의 미디어를 통해 사실상 발언권을 독점했던 것은 하층민이 아니라 지배층 엘리트들이었다. 물론 ‘탈퇴’를 외치는 보수 혹은 극우파 정치가들의 목소리도 컸지만, 보수·진보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엘리트 정치가, 지식인, 언론인들은 유럽연합 탈퇴의 부당성과 무모함을 줄기차게 말했다. 그런 점에서 극우파 정치꾼들의 선동에 ‘무지한’ 대중들이 휘둘렸다고 말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도 않고, 또 대중(하층민)을 깔보는 발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실 이번 국민투표의 정작 중요한 문제점은 따로 있다. 그것은 투표율 72.2%에 51.9%의 지지로 탈퇴가 결정됐다는 사실이다. 단순 다수결 원칙으로는 탈퇴파의 승리임이 분명하지만, 투표권자 전체를 고려하면 탈퇴 쪽 득표는 그 비율이 36%도 안된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국 국민의 ‘압도적인’ 선택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국가 중대사를 이런 식으로 결정하는 게 과연 옳으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고, 그 물음은 완전히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지금 ‘예상 밖의’ 국민투표 결과에 대해 언론들이 호들갑을 떠는 분위기 속에서 주로 런던 등 대도시 주민들 사이에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여론이 끓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지금과 같은 국민투표는 문제가 많은 게 사실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현안에 대한 충분한 토의와 숙의 과정을 결여하고 진행되기가 쉽고, 그 결과로 국가 구성원들의 ‘일반의지’가 정당하게 표현될 수 있는 제도로 인정되기는 어려운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국가의 중대사는 ‘대표자들’에게 위임해서 그들이 의회나 정부에서 결정하도록 하고, 국민투표와 같은 위험한 ‘직접민주주의’ 제도는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과연 사리에 맞는 일일까?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물어봐야 할 게 있다. 즉 그동안 소위 대의제민주주의가 제대로 기능을 했더라면, 지금과 같이 세계의 부를 1%가 독점을 하고 그들의 지배 밑에서 99%의 인간이 노예로 살아가야 하는 이처럼 암울한 상황이 만들어졌겠는가 하는 것이다. 오늘날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세계 전역에서 대의제 정당정치는 작동불능 상태에 빠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가 직면한 온갖 엄중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사실상 최대의 걸림돌이 되어 있다.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대의제민주주의가 다수 민중의 요구를 대변하기는커녕, 극소수 기득권층의 이해관계를 대변·관철하는 수단으로 기능해왔기 때문이다. 정당정치, 대의제민주주의라는 것은 말일 뿐이지 실질적으로 오늘날 정치는 금권정치로 변질된 지 오래다. 이 금권정치의 주역이 자본가들과 정치가계급, 그리고 이들을 뒷받침하는 지식인, 학자, 언론인 등 소위 엘리트들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00년 전, 스페인 철학자 오르테가는 <대중의 반역>이라는 책에서 문화와 전통을 모르는 어리석은 대중이 민주사회를 파괴하고 있다고 개탄했지만, 미국의 사회사상가 크리스토퍼 래시는 1990년대 중반에 쓴 글 <엘리트의 반역>에서 오늘날 ‘세계화’ 시대의 민주주의의 적은 엘리트들이라고 진단했다. 래시에 의하면, 옛날의 귀족들이 (전부는 아니라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공동체를 걱정하며 귀족으로서의 책임감을 자각하고 있었음에 반해 오늘의 엘리트들이 충성을 바치는 것은 지구적 차원의 (자본이 주도하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을 길러준 향토, 지역, 풀뿌리 이웃들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겉돌고 있다. 지금 민주주의의 적은 민초들이 아니라 엘리트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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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안되면 보좌관이라도 만나기 위해 의원실을 누볐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대받지 못했습니다. ‘정치의 부재’로 고통받고 있는 주권자들이 주권을 위임받은 자들에게 아주 작은 책임이라도 질 것을 부탁하는 자리에서 보험외판원처럼, 옹송그리며, 고개를 조아리며, 굽신거려야 했습니다. 어르신들과 일정을 마치고 국회를 떠나올 때마다 저는 진한 비애를, 외로움을 느껴야 했습니다. 수십 번 국회를 다녔지만, 단 한번도 이런 감정 속에 빠지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밀양 초고압송전탑 반대 대책위 사무국장 이계삼씨가 최근에 녹색당의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며 쓴 ‘출마의 변’ 가운데 한 대목이다. 이계삼은 몇 해 전까지는 고등학교 교사였으나 뜻한 바 있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새 삶을 준비하던 중, 송전탑 건설공사 때문에 삶터를 잃게 된 한 연로한 농민이 분신자결을 하는 충격적인 사태에 마주쳤다.

이후 그는 자신의 일은 접어두고 피해주민들과 함께 송전탑 공사의 부당함을 세상에 알리고 공사를 중단시키기 위한 외롭고, 고통스러운 싸움을 계속해왔다. 그 과정에서, 들여다보면 볼수록 부조리, 불합리, 부도덕성으로 점철되어 있는 송전탑 문제의 진실을 국회의원들에게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려고 ‘수십 번’이나 국회를 찾았다.

그러나 의원나리들은 흔히 시골의 ‘무지렁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운명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였다. 그들은 의원실로 찾아온 시골사람들을 친절하게 맞아주기는커녕 굴욕감을 안겨주기 일쑤였다. 이계삼은 국회의원이나 보좌관들 앞에서 이 나라의 ‘주권자’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굽신거려야” 했다고 쓰고 있다. 이계삼의 글에는 명시돼 있지 않지만, 짐작하건대 이것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의 공통적인 태도일 것이다(기억하기도 싫지만, 과거 노무현 정부 시절에 어떤 법안 때문에 의원회관을 며칠 방문해야 했던 나 자신도 이와 유사한 불쾌한 경험을 했다).

오늘날 이 나라 정치의 근본문제는 정치가들이 ‘주권자’들의 절실한 인간적 혹은 생활상의 요구에 대하여 ‘반응’을 보여주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공화국임을 천명하고 있는 나라에서 선거를 통해 뽑힌 통치자, 정치가들이 국민 혹은 유권자들의 절실한 요구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기이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서도 그들이 임기 내내 하는 일이란 오로지 다음 선거에서의 재선을 위한 궁리와 술책이다. 유권자들의 절실한 요구를 무시하고 반응을 하지도 않으면서, 또다시 선거에서 이길 궁리를 한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게 지금 이 나라의 정치판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심히 불합리한 선거제도 때문이다. 소선거구 지역구 중심으로 국회의원을 뽑는 제도하에서는 양당체제를 벗어날 수 없고, 양당 소속 정치인들에게는 그들이 ‘정치가계급’으로서 누리는 특권의 영속화가 늘 최우선적인 관심사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날 대한민국의 선거는 이른바 망국적인 지역주의와 강력히 결합되어 있다. 지역주의에 깊이 침윤된 선거풍토 속에서는 입후보자의 자질이나 공적에 관계없이 ‘묻지 마’ 투표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선거에서 당선 혹은 재선을 꿈꾸는 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천권자’ 혹은 ‘실력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이다. (자신의 지역구 사람들도 아닌) 하찮은 무지렁이들한테 관심을 기울여봤자 별 소득이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선거를 좌우하는 것은 결국 돈이다. 선거에서 이기자면 우선 지명도가 높아야 하지만, 지명도를 보증하는 사회적 성공, 출세, 업적 등등은 불의가 만연한 세상에서 돈(혹은 부패한 정신) 없이 성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지금 지식인 사회에서 흔히 운위되는 대의제민주주의의 위기란 별 게 아니다. 오늘날 돈을 가진 자들에 의해 지배·통제되는 선거는 기득권자들의 영구집권을 돕는 메커니즘 이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정치가 공익이 아니라 (재벌과 부유층, 기득권층의) 사익에 봉사하는 도구로 변질·타락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공화주의 정신의 완벽한 결여이다. 공화주의 정신이란 국가가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사유물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전체의 공유물이라는 인식에 투철한 정신이다. 비단 물질적인 재산뿐만 아니다. 공화체제는 그 구성원들 사이에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기본적으로 평등한 존재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옹호하는 정치체제이다.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_AP연합뉴스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하려면 금년 3월1일에 퇴임한 전 우루과이 대통령 호세 무히카의 예를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재임 중 극히 소박하고 파격적인 생활방식과 지혜로운 국가운영 때문에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인물이다(퇴임 직전에는 한국의 수구언론까지 그에 관한 기사를 썼다).

예를 들어, 그는 대통령관저가 너무 크다고 노숙자들에게 내주고 자신과 아내는 교외의 작은 농가에서 기거하며, 봉급의 대부분을 시민단체에 기부하고, 출퇴근 시에는 관용차가 아니라 오래된 폭스바겐 비틀스를 직접 운전하며, 찾아온 손님들에게는 손수 차를 끓여 내놓곤 했다. ‘정치적 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이런 행동은 실은 그의 공화주의적 신념에 완전히 부합하는 행동이었다. 그는 정치가는 자기가 대표하는 국민들의 다수와 같은 수준과 방식으로 생활을 하는 게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오늘날 세계가 직면한 최대의 위기는 기후변화도, 환경파괴도, 전쟁위협도 아니고, 정치의 위기라고 말했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 대부분의 정치가는 지위가 높아지면 갑자기 왕이 되려 하고, “붉은 카펫과 자신을 받들어 모시는 자들에게 둘러싸여” 공화주의 정신을 망각해버린다. 즉 선출된 임시적 공복일 뿐이라는 자각을 결여한 정치가들 때문에 오늘의 정치가 위기에 처했고, 세계가 커다란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

넥타이라는 헝겊조각을 매는 것을 싫어하고, 빈민가의 소년소녀들이 각자의 매트리스에서 잠을 자는지 아닌지에 관심이 많았던 무히카 대통령은 취임 때보다도 퇴임 시에 국민들로부터 훨씬 더 높은 지지를 받았다. 퇴임 후 그는 지금껏 살던 집에서 화훼농사를 지으며 농업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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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음을 들었을 때 아, 아까운 사람을 또 잃었구나 하는 몹시 허전한 느낌이었다. 특별히 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할 만한 개인적 인연이나 기억은 없다. 오래전 돌아가신 정치학자 (잠깐 국회의원으로 활동도 했던) 이수인 교수댁에서 딱 한 번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지만, 그와 우정을 나눈 적이 없다. 게다가 그가 심혈을 기울여 완역한 <자본론>이나 그의 저서를 꼼꼼히 읽어본 적도 없다. 단지 그때그때의 필요 때문에 그 저술의 일부를 뒤적이거나 그가 쓴 신문의 칼럼을 흥미롭게 읽어봤을 뿐이다.

우리 세대는 <자본론>을 통독하거나 충실히 읽은 경험자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보다 10년 정도 위 세대는 예전 일본 학자들이 번역한 <자본론>을 읽는 게 가능했겠지만, 해방 후 오로지 한글로 글을 읽기 시작한 세대들에게는 (예외는 있겠지만) 일본어 해독력이 없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광적인 반공체제 속에서 무슨 판본이건 <자본론>을 구해서 읽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더욱이 나와 같은 문학전공자에게는 설령 <자본론>을 어렵사리 구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설책 읽듯이 술술 읽어낼 재간이 없었다. 실제로 내 경우, 30대 후반에 미국에 가서 두 학기를 보내며 도서관에서 <자본론>을 빌려 틈틈이 읽어보려고 했으나 그게 문학이나 역사책을 보듯이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학생 시절에 서양경제사상사를 겉핥기로 읽은 밑천으로 낯선 용어가 끊임없이 출현하는 <자본론>을 혼자 독파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 책에서 그나마 내가 쉽게 이해하거나 흥미를 느낀 대목들은, 예컨대 밀가루가 아니라 석회가루가 잔뜩 섞인 빵으로 근근 목숨을 부지할 수밖에 없었던 초기 산업시대 노동자나 빈민들의 참상에 관한 생생한 묘사들이었는데, 사실 그런 기록은 블레이크나 디킨스를 읽으면서 내가 이미 충분히 숙지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런 기록에 접하기 위해 굳이 <자본론>이라는 난해하고 두꺼운 텍스트를 읽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 이후 <자본론>에 대한 내 관심은 시들해져버렸고, 그 결과 나는 오히려 원전 자체보다 그것에 직간접으로 연관된 2차 텍스트들을 더 많이 보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이유가 무엇이든 명색 지식인이라면서 한 번도 <자본론>을 통독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자본론>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훌륭한 안내자의 도움을 받으며 이 고전을 충실히 읽은 지식인이 많은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에 비해 ‘분위기’가 다를 것이고, 그 차이는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성격과 수준을 좌우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일본의 경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도 적잖은 독자가 있는 일본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은 언젠가 자신의 지적 생애가 마르크스를 축으로 영위돼왔음을 말하고, 그 까닭의 하나로 학부생활의 경험을 들었다. 즉, 그가 경제학부에 다니던 학생 시절에는 <자본론>을 거의 암기하다시피 하지 않으면 학점을 딸 수 없는 학풍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몇십년이 지난 뒤에도 그는 <자본론>의 상당 부분을 대충 페이지까지 기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_경향DB




하기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지적·학문적 분위기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자유로웠다. 일본은 냉전체제 속에서 군사적·외교적으로 사실상 미국의 종속국이라는 처지를 면할 수 없었지만, 사상과 학문의 자유에서는 제약이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전쟁 이전에 잠복된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던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가 아마도 세계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게 대략 1970년대 말까지의 일본 지식사회의 풍경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컨대 일본의 ‘엘리트’들을 양성·배출하는 도쿄대학을 위시한 주요 고등교육기관에서는 학부 때부터 <자본론>과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고 배우는 것은 거의 필수적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지만, 전후 일본은 장기간의 자민당 일당 지배체제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정책에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가 꽤 내포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적어도 몇십년 동안 일본 사회는 빈부격차가 작은 안정되고 평화스러운 사회로 존립할 수 있었고, 세계인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이렇게 된 데는 복합적인 원인이 있겠지만, 주요 정치가, 고위 공무원, 대기업 간부들 중에 대학에서 받은 교육의 영향으로 ‘좌파적’ 현실인식과 세계이해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유력한 설이 있다(실제로 자민당에는 오랫동안 우익 이외에 좌익 성향의 정치가들도 존재했다).

일본의 경우는 비근한 예에 불과하다. 어떤 사회든 사상, 학문, 언론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고, 다양한 각도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관점들이 풍부히 존재할 때, 그 사회는 인간적으로 살 만한 사회가 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오늘날 일본의 정치와 사회는 퇴영적인 기류가 지배적이지만, 적어도 일본 사회가 전반적인 안정과 평화를 누리며, 세계적으로도 존경받는 지식인, 작가, 학자들을 출현시킨 시기는 마르크스(주의) 사상 혹은 경제학 연구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풍요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정신은 이단적 사상이나 ‘불량정신’이 폭넓게 허용되는 상황에서만 왕성히 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김수행 교수의 업적은 실로 대단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자기희생을 각오하고 마르크스 연구에 일생을 걸었고, 그 성과를 (우여곡절 끝에, 운 좋게도) 종래에 ‘사상과 학문의 자유’라는 게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던 한국의 제도권 대학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그 덕분에 이제 마르크스 사상 연구는 이 땅에서도 어쨌든 시민권이 확보되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완역한 <자본론>을 시민적 교양을 위한 자양분으로 쓰기 위해 끊임없이 쉬운 말로 해설서를 쓰고 시민강좌를 열었다.

게다가 제자들이 쓴 추도문을 보면, 그는 또 학생들을 지독히 아낀 스승이자 참으로 소박한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가 진짜라는 (지금 한국 사회가 완전히 잊고 있는) ‘진리’를 몸으로 가르친 드문 교육사상가이기도 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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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뒤덮고 있는 먹구름이 걷힐 것인가? 국가 파산 위기에 빠진 그리스의 민중이 국민투표를 통해 그동안 세계를 지옥으로 만들어온 핵심적 요인, 즉 글로벌 자본주의의 약탈적 금융시스템에 대해 명확한 거부의사를 밝혔다.

반년 전, 그리스에 ‘시리자’라는 좌파연합 정부가 들어설 때만 하더라도, 이들이 어떻게 막대한 국가부채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필시 모처럼 들어선 민주정부이지만 결국은 사태 수습에 실패하고,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견한 사람도 많았다.

새로운 금융지원을 받아봤자 그것이 도로 채권자들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악순환의 구조 속에서 독자적인 통화 발행권도, 통화 관리수단도 없는 국가가 어떻게 국민들의 생존·생활을 보장하고, 나아가 경제를 다시 일으켜 빚을 갚을 수 있을지 막막해 보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트로이카’인 유럽연합(EU)·유럽중앙은행(ECB)·국제통화기금(IMF)은 그리스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정책, 즉 부유층에 대한 중과세나 군사비 삭감 정책을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서민들의 고통만 가중시키는 임금 삭감, 사회복지의 축소 등 소위 긴축정책만을 강요해왔다. 그리스의 부채는 일부 탕감하고 나머지는 상환기간을 대폭 연장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IMF 내부의 이성적인 판단에도 불구하고, 최근에 트로이카는 더욱더 철저한 긴축정책을 요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이상의 금융지원은 없다는 협박을 가해왔다. 결국 민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제거하겠다는 의도를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에 대한 ‘시리자’ 정권의 응답이 7월5일의 국민투표였다. 이것은 실은 그리스 국민이 채권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깊은 의미를 내포한 투표였다. 세계의 주류 언론은 이것을 단순히 가혹한 긴축정책에 대한 찬반 여부를 그리스 국민에게 묻는 투표행위로 그 의미를 축소해서 접근했지만, 실제로 이번 국민투표는 1% 특권층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세계를 사회적, 생태적, 도덕적 황무지로 만들고 있는 글로벌 금융자본주의 질서에 대해 한 나라 국민 전체의 의견을 묻는 세계 최초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 그리스 국민은 압도적인 거부반응을 표시했다. 그런 점에서 2015년 7월5일은 세계의 정치 및 경제 질서가 근본적인 변화의 국면을 맞는 계기, 역사적인 분기점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커졌다. 왜냐하면 이날의 그리스 국민투표는 소비에트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 지금까지 수십년간 세계를 압도해온 “대안은 없다”는 소위 네오리버럴리즘의 논리에 결정적인 균열 혹은 타격을 가한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15년 시리자 집권 이후 주요협상 일지_경향DB


생각하면, 국면 타개의 방법으로 국민투표를 택한 것은 매우 현명하면서도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 왜냐하면 그리스 민중도, 세계의 수많은 다른 지역 민중처럼, 오늘날의 주류 미디어가 끊임없이 쏟아내는 반민중적 프로파간다의 강한 영향력 밑에서 자기망각에 빠져 특권층·부유층의 편에 서는 엉뚱한 선택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처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리자’ 정부는 민중을 믿고, 국민투표를 선택한 결과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정부가 아니면 불가능한 발상, 믿음, 결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국민투표의 결과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트로이카’가 양보를 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없이 앞으로의 상황은 이전과는 매우 달라질 게 분명하다.

그리고 만일 ‘트로이카’의 양보를 얻어내지 못하고 그리스가 유로존에서 탈퇴한다면 그리스 민중은 한동안 몹시 고통스러운 삶을 견뎌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와 같은 출구 없는 암담한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사회적 실험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런 그리스 민중의 경험이 세계의 다른 수많은 지역 민중에게도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암시를 주고, 희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지금 그리스가 직면한 것은 그리스만이 아니라 세계의 민중 전체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문제이다. 언론들은 흔히 이 문제를 그리스와 유럽연합 혹은 그리스와 독일이라는 각도에서 국가 간 문제로 몰고 가는 경향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이것은 ‘국익’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특권적 부유층과 일반 민중 간의 대립과 갈등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지금 그리스 내부에서도 부유층과 서민들의 입장은 같을 수 없고, 독일 내에도 ‘트로이카’의 입장에 열렬히 반대하는 그룹(예컨대 ‘좌파당’이나 녹색당)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이 문제를 두고 전혀 상이한 시각이 대립하고 있다(그리스 사태가 ‘과잉복지’의 결과라는, 한국의 주류 언론의 해석은 몰상식한 억지논리이기는 하지만 결국은 그들의 뿌리 깊은 반민중적 자세, 강자숭배 체질의 표출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엄밀히 보면 대립과 갈등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실은 아직도 압도적인 것은 반민중적 세력이다. 그들은 비단 경제력, 군사력뿐만 아니라 언론, 교육, 대학, 문화, 예술을 좌우하고, 무엇보다 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종식시키고 보다 민주적이고 인간적이며 정의로운, 그리고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그리스 국민투표 못지않게 또 하나 희망적인 신호는 아직은 드물지만 진실로 용기 있는 인물들이 세계의 중심적 정치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대표적인 인물은 미국의 차기 대통령 선거전에 뛰어든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이다. 그는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임을 명확히 공언하고, 미국이 군사대국, 세계의 지배자가 되려는 욕망을 그만두고 차별 없는 민주적 복지국가, 즉 적어도 덴마크나 스웨덴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 변화해야 할 필요성을 정열적으로 설파하고 있다.

그동안 어떤 정치가로부터도 듣지 못했던 이 과감한 발언들로 지금 미국의 시민사회, 특히 젊은이들의 반응은 열광적이다. 과연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신의 말대로, 설사 지더라도 선거과정에서 그가 행한 발언 때문에 많은 시민들이 미국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숙고’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미국과 세계의 변화는 시간문제가 될지도 모른다. 용기 있는 정치적 행동은 ‘좋은 세상’을 위한 불가결한 덕목임에 틀림없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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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붐비던 시내가 한산하다. 좀 과장하면 유령도시 같다. 하기는 도시의 이 조용한 풍경은 그 자체로 나쁘지는 않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런 속 편한 소리를 할 상황이 아니라는 게 문제이다. 거리 풍경이 이렇게 된 것은, 감염력이 강하고, 치료약이 없고, 치사율이 높다는 메르스라는 유행병의 갑작스러운 확산과 더불어 시민들이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타인들과의 교류·접촉을 극도로 꺼리며, 스스로 ‘자가격리’의 생활로 들어가고 말았다. 소문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은 출입을 일절 그만두고, 필요한 생활물자도 배달에 의존해서 지낸다고 한다. 혹시 타인의 손이 닿았을지도 모르는 현관문 손잡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알코올로 닦으면서.

인간인 이상 우리는 타인과 더불어 살지 않으면 생존·생활이 불가능함에도,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 타인들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옛 예언서가 경고해온 ‘백조일손’(백 명의 조상에 한 명의 자손)의 상황이 도래한 것일까. 말세가 되면, 괴질이 창궐하여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도 갑자기 피를 토하고 쓰러져 결국은 대부분이 죽고, 급기야는 십리에 한 사람의 인간도 만나 보기 어려운 세상이 될 것이라는 끔찍한 예언 말이다. 물론 메르스라는 게 그런 괴질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피해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이라면, 그것은 결국 세상의 종말, ‘말세’가 아닌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말세도, 괴질의 창궐도 결국은 사람이 만들어낸다는 사실이다. 메르스라는 유행병의 발생경위나 확산과정을 보더라도 그렇다. 아직 정확한 연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메르스가 중동지방에서 발생하게 된 것은 이 병원체의 숙주라는 낙타가 근년에 이 지역에서 생태적 조건과 상관없이 과도하게 밀집 사육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금까지 메르스의 감염률이나 치사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사우디아라비아로 알려졌는데, 그 주된 이유는 (‘시사IN’ 최근호에 의하면) 그곳 의료기관의 허술한 질병관리시스템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서도 사우디의 부유층은 그들 특유의 ‘폐쇄적인’ 생활방식 때문에 좀처럼 메르스에 걸리지 않고, 주로 서민층, 특히 외국인 노동자들이 쉽게 감염된다고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가난한 자 혹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한다는 관념이 희박한 독재국가 혹은 권위주의 국가일수록 질병관리시스템이 허술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메르스확산으로 서울 강남지역의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휴업을 이틀 더 연장하도록 한 11일 반포구의 한 초등학교 정문에 휴업을 알리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출처 : 경향DB)


지금 한국은 발전된 기술사회라고 자처하면서도, 사우디 다음으로 메르스 감염률이 높은 나라가 되면서 세계인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기피를 당하는 불쌍한 처지로 전락했다. 그러나 우리가 정작 절망을 느끼는 것은, 이 사태가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이 나라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최고위 공직자(들)는 우왕좌왕할 뿐 세월호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초기 대응’에 완전히 실패하고,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 것 같다. 뒤늦게 얼굴을 내민 대통령은 잘 알아들을 수도 없는 말로 미주알고주알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지만, 텔레비전 카메라 앞에서의 그런 쓸데없는 연기(演技)로 이 심각한 재앙이 극복될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

전문적인 식견과 역량을 요하는 공중보건문제에 대하여 최고 통치자가 이런저런 세부사항에 관련하여 개입한다는 것은 사실 우스운 일이다. 최고 권력자라고 해서 모든 문제에 정통한 현자인 척 행동하는 것보다 희극적인 장면이 없다. 좋은 통치자는 자신의 권한과 능력의 한계를 잘 이해하고, 화급을 다투는 재앙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 그 방법을 지혜롭게 강구하는 자이다. 그렇다면 지금 중요한 것은 이 방면의 최고 전문가를 선택하여, 그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것일 터이다. 그게 바로 고대 아테네인들이 보여준 방법이었다.

고대 아테네인들은 인류사상 최고의 민주주의를 실현시켰고, 그 민주주의의 핵심기제는 거의 모든 공직자를 제비뽑기로 선출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한 것은 직업적 정치가란 결국은 부패하게 마련이라는 철저한 인식, 모든 시민은 누구든 국가사무를 감당할 능력이 있고, 또 그래야 모두가 자율적 인간으로 살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테네인들에게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하는 주체는 ‘엘리트’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일반시민이었다. 그러나 예외가 있었다. 예컨대 전쟁을 지휘한다거나 국가의 까다로운 재정문제는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테네에서는 예외적으로 장군이나 재정관은 투표로 선출했고, 일정한 임기 동안 그들에게 절대적 복종을 했다. 그렇게 해야 공동체가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에 최고 권력자가 나선다는 것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짓이다. 때로는 적임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그가 거리낌 없이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는 것이 최고 권력자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 또 하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 즉, 지금 한국 사회가 재난 대응에 계속 실패하는 것은, 현장책임자나 실무자들이 자주적으로 신속히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재량권이 없다는 점과 큰 관계가 있다는 점이다. (‘시사IN’ 기사에 의하면) 실제로 정부는 메르스에 대한 매뉴얼을 이미 작년 말에 작성해놓았다. 그런데 그게 무용지물이 된 것은 오히려 실무자들이 그 매뉴얼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즉, 지난 5월4일 인천공항으로 메르스 감염 환자가 입국했을 때, 그의 출발지가 (메르스 발생국이 아닌) 바레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가 (메르스 발생지역인) 카타르를 경유했다는 사실은 방역실무자들이 무시해버린 것이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발생지역만 나열돼 있는 매뉴얼이었기에.

상관의 지시 없이 실무자들이 자주적으로 판단·행동한다는 것은 오늘날 이 사회에서는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다. 식민지 지배, 군사독재, 독선적인 정부를 거치는 동안 관료사회든 기업이든 한국인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노예의 삶에 길들여졌다. 그러니까 메르스 사태도 결국 민주주의의 결여로 빚어진 재앙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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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13일 세계는 두 사람의 위대한 작가를 잃었다. 한 사람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 다른 한 사람은 우루과이의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이들은 오랫동안 정열적으로 세계의 양심을 대변해온 이른바 ‘좌파 문학의 거장’으로서 세계 전역의 독자들로부터 존경을 받아왔는데, 신기하게도 같은 날 타계했다. 그런데 한국의 언론에서는 귄터 그라스의 사망소식은 꽤 자세히 보도됐으나, 갈레아노의 소식은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 깜깜이었다. 이게 의도적인 결과인지, 혹은 무지나 무관심의 소치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내 편견인지 모르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치스’의 망령과 평생 싸웠던 그라스도 물론 중요하지만, 훨씬 우리의 주목을 끌어 마땅한 작가는 갈레아노이다. 왜냐하면 그는 오늘날 글로벌 자본의 압도적 지배 밑에서 자연과 인간이 철저히 파괴되고 짓눌리고 있는 (인류 전체의 사활이 걸려 있는) 세계적 위기상황에 정면으로 맞서 싸워온 작가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선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갈레아노는 죽을 때까지 ‘현역’이었다. 그가 <수탈된 대지-라틴아메리카 500년사>라는 이제는 세계적 고전이 된 작품을 쓴 것은 28세 때였지만, 그때 못지않게 최근까지 70대 중반의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왕성하게 문학 활동을 하고 있었다.

10년 전, 일본의 평론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글로 인해 한국문단이 잠시 소란스러웠던 적이 있다. 그가 생각하는 ‘근대문학’의 핵심은 시대현실을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거기에 도전하는 저항정신이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는 이 정신의 쇠퇴현상을 느끼고 있었는데, 한국에 와서 보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한 것이다. 노골적인 상업주의는 아니라 해도 거의 자폐적 수준의 독백이나 자기현시적 욕망의 표출을 문학으로 오인하고 있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한국문단의 현실을 감안하면, 그의 발언은 경청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당시 문인들의 반응은 대개 단세포적 ‘반발’을 넘어서지 못했고, 그 결과 생산적인 토론의 기회는 사라졌다.

되돌아보면, ‘근대문학의 종언’이라는 테마가 무익한 소동으로 끝나버린 것은 당시 가라타니 고진이나 한국문인들의 시야에 라틴아메리카의 문학이 보이지 않았던 점도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다. 아마 라틴아메리카는 동아시아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그곳은 오랜 세월 서구의 침탈과 군사독재로 억압돼온 ‘후진지역’이라는 선입관 때문에 주목해 볼 생각을 못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라틴아메리카가 (전진과 후퇴를 거듭하면서) ‘좋은 삶’을 위한 세계적인 해방투쟁의 선두에 선 지도 이미 20여년이 지났다. 우리가 이 새로운 역사적인 흐름을 몰랐다면, 그것은 냉전시대의 이데올로기적 편견에 갇혀 지낸 탓도 있지만, 매사를 미국과 유럽인의 눈을 빌려 보는 데 익숙해진 탓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재작년 베네수엘라 차베스 대통령의 사망소식을 전하면서 한국의 언론들이 태연히 그를 ‘독재자’로 불렀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차베스뿐만 아니다. 신대륙 500년사에서 처음 원주민 출신이 대통령이 된 볼리비아나 진보적 경제학자 출신이 국가를 이끌고 있는 에콰도르는 다함께 세계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명시한 신헌법을 제정해 종래의 서구식 ‘인권개념’을 확장·심화함으로써 생태적 보존과 토착민의 삶을 포괄하는 보다 실질적인 인권정책을 시도하고 있다.

브라질에서도 노동자 출신 대통령의 등장을 전후로 민주주의 강화를 위한 다각적 실험들이 시도돼 왔고, 우루과이에서는 좌익 게릴라 출신의 철저한 공화주의자 대통령이 다수 국민의 절대적인 존경과 지지 속에서 최근 임기를 마치고 퇴임했다.

또, 지금 세계 제일의 ‘지속가능한 국가’로 평가받는 ‘군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도 주목에 값하는 나라이다. 물론 쿠바도 빼놓을 수 없다. 쿠바는 물론 공산당 독재 치하의 가난한 나라이다. 하지만 결코 간과하면 안될 것은 세계의 가장 어려운 지역에 가장 긴요한 도움, 즉 의료진이나 교사들을 아낌없이 파견해 지원해온 나라가 미국도 유럽 국가도 아니고 쿠바라는 점이다.

중남미 4개국을 순방중인 박근혜 대통령이 17일 오후(현지시간) 콜롬비아의 수도 보고타 볼리바르 기념관을 방문,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독립영웅인 시몬 볼리바르 장군 동상에 헌화한 뒤 걸어나오고 있다. (출처 : 경향DB)


어쨌든 지금 라틴아메리카는 (물론 예외는 있지만) 여러 모로 세계의 가장 선진적인 지역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엄청난 혁명적 변화 과정에서 막중한 역할을 해온 것이 시와 문학, 예술이라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차베스를 비롯한 오늘날 라틴아메리카의 개혁정치가들과 그들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지식대중 중에 갈레아노의 글과 책을 읽지 않고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삼엄한 군사독재하에서 갈레아노가 쓴 ‘금서’를 숨을 죽인 채 읽었고, 해외로 빠져나갈 때는 ‘갓난아기의 기저귀 속에’ 숨겨서라도 책을 가지고 나갔다.

갈레아노는 원래 저널리즘에서 출발한 작가이기도 하지만, 그에게 문학과 정치, 그리고 역사는 별개가 아니었다. 어떤 점에서 <수탈된 대지>는 파블로 네루다의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하워드 진의 민중적 역사관을 결합한 문학-역사서라고 할 수 있다. 그에게 문학이란 야만적인 지배와 수탈과 폭력 밑에서 짓눌리고 억압돼온 자들이 ‘자유인’으로서 존엄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즉 근원적인 의미의 ‘정치적’ 활동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갈레아노의 스타일은 비인간적인 체제나 기득권 세력의 탐욕과 폭력적 지배를 소리 높여 규탄하는 게 아니었다. 그의 문학은 비참한 역사와 현실을 묘사할 때도 늘 풍부한 민중적 감수성에 뿌리를 둔 ‘이야기’의 형태로 전달되고, 그 이야기들은 예리한 아포리즘, 해학과 위트, 시적 환상과 뒤섞여 있다. 그 때문에 픽션도 아니고 논픽션도 아닌 그의 작품에서 독자들은 완전히 현실을 새롭게 발견하는 신선한 충격을 경험한다.

그는 민중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은 ‘이야기’의 힘 때문이라고 믿었다. 인간의 세포조직은 분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구성돼 있다고 그는 즐겨 말했다. 갈레아노는 좌파 지식인들에게서 흔히 보는 ‘납처럼’ 무거운 언어를 싫어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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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이 다 됐는데도 이 꼴이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구성된 진상조사특위는 출범조차 하지 못하고 있고, 아직도 건져내지 못한 시신들은 기약 없이 바다 밑에 갇혀 있다. 이 판국에 정부가 입안한 ‘시행령’은 진상조사특위의 권한과 조사 범위를 제한하여 “정부조사 결과의 분석 및 조사”에 국한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시행령’대로 한다면 특위에서 행정지원이나 맡아야 마땅할 공무원들이 실제 조사업무를 관장케 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조사를 받아야 할 대상이 오히려 조사의 주체가 된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또 한번 독립적이고 엄정한 진상규명을 어떻게든 좌절시키려는 정부의 ‘의지’를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이 말도 안 되는 ‘시행령’은 당연히 철회되어야 한다. 억울하게 자식을 잃고,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말이다.

인간으로서 감내할 수 없는 비극을 겪고, 가장 따뜻한 위로와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국가로부터, ‘잘난’ (사이비) 언론들로부터, 그리고 속 좁은 이해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볼 줄 모르는 ‘동료시민들’로부터 온갖 모욕과 비난과 조롱을 받으며 지난 1년을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과 눈물 속에서 지내온 유가족들이 또다시 거리로 나와 드디어 삭발을 결행하게 만드는 현실, 정말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다.

취임 이후 오로지 ‘침묵’을 주무기로 삼아온 대통령은 그저께 모처럼 입을 열어 기술적 가능성과 여론을 살펴서 세월호 인양 여부를 ‘적극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뭐라도 모처럼 말을 해준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동안 뭘 하다가 이제 와서 인양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걸까. 더구나 몇몇 언론의 분석에 따르면, 대통령의 이 발언도 그 순수성이 의심스럽다. 요컨대 코앞에 닥친 보궐선거용 발언, 즉 책략적 발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정말로 인양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저 터무니없는 ‘시행령’부터 거둬들이는 게 마땅한 순서가 아닌가.

게다가 대통령의 말은 명확한 인양 의사를 밝힌 것도 아니다. 기술적 타당성을 검토한 다음 (변덕스러운) 여론이 허락한다면 인양을 하겠다는 것이니까 선거가 끝난 뒤 정치적 셈에 따라 인양 불가라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암시가 이미 이 말 속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세월호 참사 초기에 사죄의 눈물을 흘리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방선거가 끝난 뒤에는 태도가 일변하여 유족들의 간절한 면담 신청도 외면하고 딴전만 피우는 모습을 고통스럽게 지켜본 바 있다. 걱정되는 것은, 이런 경험이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 국가권력의 통치수법은 이다지도 더럽고 비열한 것인가--생각하면 너무도 비감스럽다.

지난 달 31일 오전 서울 청운동 푸르메재단 건물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모여 실종자들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_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 1주년을 맞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참사 그 자체가 아니라 참사의 진상을 밝혀내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는 개탄스러운 현실이다.

이 사태에 대하여 가장 무거운 책임을 느껴야 할 집권세력은 야비하게도 유족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밖에 없는 비용 문제를 계속 부각시키고, 심지어는 특위 활동이 ‘세금도둑’이 될 것이라는 등 반인륜적인 발언을 거침없이 계속 쏟아냄으로써 (내용을 잘 모르는) 나날의 생활현실에 찌들어 사는 서민들을 오도하고, 끝내는 많은 선량한 생활인들마저 세월호 문제라면 짜증스럽게 반응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이렇게 해서 집권세력은 독립적인 진상규명을 막고, 그리하여 그들의 ‘안전’을 지키고, 정치적 책임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이 나라는 무슨 꼴이 되는가. 나라든 가정이든 어떤 조직이든, 그게 존립하려면 최저한의 도덕적, 윤리적 기반이라는 게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 모양대로 간다면, 국가 혹은 한 인간공동체로서 최소한이나마 구비해 있어야 할 도덕적 판단, 정의의 기준은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일찍이 정치사상가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소비에트사회주의권의 붕괴라는 역사적 격변사태를 두고 쓴 논문 ‘역사의 종언’을 통해서 이제는 ‘자유민주주의’야말로 인류사회 최후의 유일한 보편적 정치체제라고 공언했다. 이후 후쿠야마는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왜곡 혹은 퇴행 현상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입장을 조금씩 수정했으나,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여전히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온전히 기능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그중에서 그가 특히 강조하는 것은, 정부 혹은 권력자의 국민에 대한 ‘설명책임’이다. 설명책임을 결여한 정치는 민주정치라 할 수 없고, 그런 나라를 민주주의국가라고 인정할 수도 없다. 하물며 설명책임을 다하지 않는 정치를 가지고는, ‘번영하고 자유롭고 인간적인 나라’ 즉, ‘덴마크’ 같은 나라로 가는 길은 영영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설명책임의 결여는 반드시 집권세력의 탓만 아니다. 역사적으로 어떠한 권력, 어떠한 통치세력도 순전히 자신의 선의에 의해서 국민의 뜻을 따르고, 설명책임을 다하려고 한 적은 없다. 그들은 국민의 뜻을 따르고 설명책임을 이행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망하게 된다고 느끼는 경우에만 국민의 뜻을 따를 뿐이다. 요컨대 권력이 설명책임을 방기하는 것은 그렇게 해도 권력을 상실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 정부, 여당, 권력엘리트집단의 자의적 통치, 즉 설명책임의 방기는 결국 대항세력의 부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야당은 많은 의석을 갖고도 자기들이 힘이 없다는 불쌍한 소리만 하고 있다. 싸울 의지도, 실력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 설명책임은 비단 집권세력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있음이 틀림없다.

결국 우리가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관건은 여야 불문하고 권력자에 대하여 설명책임을 강제하기 위한 민중(혹은 시민적) 권력의 강화이다. 가장 쉽고 가장 중요한 것은, 통곡하고 슬퍼하고만 있을 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양심적인 언론, 정당, 노동 및 시민운동의 일원이 되거나 적극적인 후원자가 되는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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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11일, 미증유의 지진과 쓰나미로 일본 동북부가 초토화되고,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이재민이 생겨난 게 바로 어제 같은데 벌써 4년이 지나갔다. 그러나 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재해는 불가항력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세월이 가면 어떤 식으로든 수습이 되고 아물게 마련이다.

문제는 그날 동시에 일어난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이다. 4년이 경과했지만, 사고를 온전히 수습할 수 있는 대책은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고, 앞으로도 아마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 사이 방사능은 기약 없이 방출되고, 대기와 해양은 끝없이 오염되고 있다.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는 미국과 캐나다의 전문가들에 의하면, 이미 북미지역도 후쿠시마 사고의 심각한 피해지역이 되었다. 북미지역의 유아사망률이 현저히 높아졌다는 통계는 하나의 지표이다. 이대로 가면 결국 태평양도 생명에 치명적인 생태적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후쿠시마 사고현장 인근 거주지를 떠난 20만 이상의 피난민은 언제 귀향할 수 있을까? 아니, 귀향이 가능한 날이 올까? 이미 귀향을 아예 단념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하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삶터가 복구될 수 없다는 것을 다들(마음속으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게다. 지금 후쿠시마현 곳곳에는 소위 제염작업을 통해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을 걷어내 담아둔 포대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이 포대들을 처분할 방법은 있는가? 중요한 것은, 방사능 사고에 관한 한, 제염을 통한 원상복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사고가 나기 전의 후쿠시마 땅은 가장 농사가 잘되는 비옥한 토지였고, 그 해안은 풍부한 수산자원의 보고였다. 하지만 인류의 공통자산이기도 한 이 모든 ‘보물’은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다.

원자력 재해란 본질적으로 속수무책인데다가 또 얼마나 가공할 만한 것인지, 그 경험이 없었던 게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1986년의 체르노빌 참사였다. 체르노빌 참사는 “사고였다”라고 과거형으로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근 30년이 다가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사고이다. 아마 영구적으로 계속될 것이다.

2012년에 체르노빌을 다녀온 일본 NHK 프로듀서들의 취재기록에 의하면, 체르노빌에서 140㎞나 떨어진 마을의 13∼14세 학생들 중에서 자신이 건강하다고 느끼는 아이들은 18명 중에서 4명밖에 되지 않았다. 한창 원기왕성할 때인데도 말이다. 그런 아이들이 병든 늙은이들처럼 걸핏하면 쓰러져 하루에도 몇 차례나 앰뷸런스에 실려 병원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체르노빌 사고 당시 태어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이렇게 된 것은 대를 이어 계속되는 방사능의 유전적인 영향 이외에 방사능에 의해 오염된 토지에서 기른 작물을 먹고 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상황이 종식되려면 방사능의 독성이 사라지는 수백, 수천, 수만년을 기다려야 한다.

통탄스러운 것은,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엄청난 참사를 보고도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는 자세이다. 일본정부와 권력자들은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국민의 압도적인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원전 재가동과 원자력산업의 해외수출이라는 기왕의 정책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마치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 같은 사태가 없었다는 듯이, 설계수명이 끝난 원전의 연장 가동을 ‘용감하게’ 밀어붙이고 있는 한국정부도 마찬가지다. 대체 무엇을 보고 배운다는 ‘학습개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이럴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후쿠시마 사고 4주년에 때맞춰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독일 총리의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녀는 독일이 그랬듯이 일본도 과거 역사를 솔직히 정리·반성하지 않으면 미래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원전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는 에너지시스템이라고 명쾌히 지적했다. 실제로, 일본(한국도 마찬가지지만)이라는 국가의 근본문제는 역사에서 배우지 않으려 한다는 점이다. 일본지배층은 태평양전쟁에서 참혹한 패배를 당하고서도 이것을 ‘패전’이라고 하지 않고 ‘종전’이라고 불러왔고, 그럼으로써 식민지지배와 전쟁책임을 묻는 역사적 과제를 회피해왔다.

문제를 직시하지 않고 얼버무리려는 이 정신적 도피주의는 후쿠시마 사태에 대해서도 되풀이되고 있다. 국제사회를 향해 “후쿠시마는 완전히 통제되고 있다”고 거짓말까지 하면서 올림픽 개최권을 따내 후쿠시마 사태 수습이라는 난제로부터 눈을 돌리려는 무책임성과 비겁함에서도 그것은 드러났지만(방사능에 오염된 땅 도쿄에서 과연 올림픽이 성사될지 두고 볼 일이지만), 무엇보다 온 세계에 피해를 끼치고도 원자력시스템을 그만두지 않으려는 그들의 완미(頑迷)한 태도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은 오늘날 경제력과는 관계없이, 가령 독일에 비해서, 매우 질 낮은 국가, 퇴행적 국가의 모습을 국제사회를 향해 부끄럼도 없이 드러내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 4주년인 11일 일본 미야기현 나토리시에서 두 자매가 이제는 아무런 흔적조차 남지 않은 옛 집터를 찾아가 당시 사망한 부모를 추모하고 있다. 이날 후쿠시마, 미야기, 이와테현 등 피해가 컸던 지역을 비롯해 일본 곳곳에서 대규모 추모 행사가 열렸다. _ AP연합


이러한 퇴행을 자초한 책임은 물론 권력엘리트들에게 있다. 흔히 지적하듯이, 일본은 메이지 시대 이후 줄곧 관료 주도 전제정치였고, 국가의 중대사는 항상 권력엘리트들이 독점적으로 결정해왔다. 국민의 뜻과 우연히 일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권력엘리트들이 국민의 의견을 흔쾌히 받아들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요컨대 민주주의 원칙의 거부가 일본 및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로 확대되는 비극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한국의 원자력안전위원회는 설계수명이 끝난 월성 1호기 원전 연장 가동을 우려하는 시민들의 의견들을 무시하고 연장 가동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원안위’ 위원장은 연장 가동을 반대해온 사람들을 ‘외부세력’으로 지칭하고, “기술문제에 정치가 개입하는 현실”을 비난했다. 이 주제넘은 발언은 민주주의에 대한 무지 혹은 몰이해의 소산임이 분명하다. 원전의 건설이나 운영에 관한 ‘노하우’는 전문가들의 몫이겠지만, 원전 자체의 사회적 용인 여부를 결정하는 주체는 어디까지나 주민과 시민들이어야 한다는 것은 민주사회의 대원칙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자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좌지우지하는 이 한심한 상황을 이대로 두면, 앞날이 암담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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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세대에게는 생소한 이름일지도 모르겠지만, 민병산 선생(1928~1990)은 한때 이 나라의 상당수 양심적인 지식인·예술가들의 친근한 벗이자 스승으로서 깊은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살다가 가신 분이다. 그분은 아무런 재산도, 일정한 직장도 없이, 일생을 독신으로 지낸 무욕의 현자이자 박람강기(博覽强記)의 독서인이었다. 그분은 번역이나 좋아하는 바둑의 해설을 쓰거나 수필을 써서 생계를 영위했고, 생애 말년에는 고서화와 지필묵의 거리(인사동)를 거닐며 자신이 쓴 붓글씨들을 주변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주다가 가셨다. 한마디로 자유인이었다.

‘자유인’으로서의 그분의 면모는, 생활에서든 말과 글에서든 자신의 에고를 내세우거나 공격적인 자기주장을 하는 일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그분과 가까이 지낸 이들 중에는 민병산을 ‘식물적 인간’이었다고 말하기까지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무골호인이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선생은 습관적으로 대개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는 분이었지만, 간간이 특유의 해박한 지식으로 지혜로운 말씀을 들려주신 분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이 원래 ‘식물적 인간’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분의 죽마고우인 신동문 시인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지만, 선생은 일제강점기 충청도 제일의 갑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나 ‘귀공자’로 자랐고, 보성중학교 학생이었을 때는 럭비선수로도 활약한 혈기 넘치는 청년이었다. 그런 그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전기는 10대 후반 학우들과 함께 조직한 ‘독서회’가 불온단체로 지목되어 경찰에 체포된 사건이다. 그래서 동료 학우들과 옥살이를 하다가 10개월 만에 풀려나왔는데, 막상 나와 보니 자기만 풀려나온 것이다. 갑부 집안의 권세로 총독부에 로비를 한 결과인 것을 알게 된 청년 민병산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말없이 칩거에 들어갔다. 선생의 지인들은 그 충격 때문에 그가 칩거생활에 들어가 오로지 독서에 열중한 것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몇 년간의 칩거 후 세상에 나타났을 때 민병산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그는 얼굴부터 달라져 있었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였으나 연로(年老)한 현자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민병산 선생의 죽마고우인 신동문 시인 (출처 : 경향DB)


이것도 친지들에 의해 나중에 알려진 이야기지만, 민병산은 그 후 조부가 돌아가신 뒤 응당 장손으로서 물려받아야 할 재산상속을 일체 포기하고, 문자 그대로 무소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막대한 상속을 포기한다는 것, 그리고 무소유의 삶을 산다는 것. 이것은 물론 범인(凡人)이 함부로 논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무소유의 실천이란 ‘인류의 교사’로 추앙받은 톨스토이조차도 결행하기 어려웠던 일이다. 50대 이후 톨스토이의 정신을 사로잡은 것은 복음서의 가르침이었다. 톨스토이에게 그 가르침은 단순했다. 즉 헐벗고 가난한 자가 복을 받으리라는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톨스토이는 팔순이 지나 사망 직전에 이르러서야 모든 것을 버리고 가출을 결행할 수 있었다. 수십년에 걸쳐 하루도 빠짐없이 무소유의 삶을 꿈꾸고,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는 내면적 갈등과 투쟁을 거친 다음에야 마침내 결행한 것이 그때였던 것이다. 톨스토이와 같은 예외적으로 비범한 정신력과 강골(强骨)의 소유자가 말이다! 그런데 민병산은 그것을 아무도 모르게 벌써 20대 청년시절에 결행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 후의 그의 삶이 어떻게 전개되든 이미 민병산의 생애는 ‘자유인’의 그것일 수밖에 없도록 돼 있었다.

오늘날 세상에는 무소유라는 말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쓰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종교인, 혹은 민중의 ‘멘토’라고 불리거나 자처하는 이들 가운데 그런 인물들이 꽤 있다. 그러나 진짜 무소유란 재산뿐만 아니라 사회적 명예, 그리고 온갖 권력 욕망으로부터 철저히 해방되어 있는 상태이다. 어떤 사람들이 민병산 선생을 ‘식물적 인간’이라고 부른 것은 그분이야말로 늘 그러한 욕망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무소유란 진정한 자유로움의 근본조건이다. 자유로운 인간의 특징은 그가 사심이 없고, 생각이 크다는 점이다. 돌아가신 뒤 후배들이 편찬한 민병산 문집 <철학의 즐거움>이라는 책을 보면, 비록 지금으로서는 낡은 토픽이 된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글 자체는 가식 없이 자연스럽고, 엄정하면서도 소박한 문체 속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 대한 각별한 애정과 따뜻한 시선이 곳곳에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글에는 어떠한 개인적 고뇌, 자기연민, 혹은 자기주장의 목소리는 흔적조차도 없다. 우리가 보는 것은 철저히 사심을 초월한 ‘시민적 관심’의 일관된 표출이다. 중요한 것은, 이 무욕의 현자가 지니고 있던 궁극적 관심사는 결코 은둔자로서의 삶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민병산이 지향한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그러나 자율적인 시민으로서의 열려진 삶이었다.

선생이 들려주는 재미있는 짧은 일화가 하나 있다. 언젠가 그가 동네 길을 나오다가 돌담에 널찍한 광고가 붙어 있어서 그걸 보려는데, 오전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이들도 그걸 보려고 걸음을 멈췄다. 어른이 궁금해한다고 생각했는지 한 아이가 선뜻 “아저씨, 이건 새로 생긴 버스노선을 안내하는 광고예요”라고 말했다. “버스가 하나 더 생겼단 말이니?” “예, 오늘부터 혜화동, 종로5가, 퇴계로, 서울역으로 돌아서 온대요. 여기 그림으로 표시가 돼 있어요. 보세요.” “음, 정말 그렇구나. 아저씨는 편리해져서 좋구나. 너는 어떠냐?” “전 뭐 날마다 버스를 타나요. 학교가 바로 여긴데. 그럼 아저씨 안녕히 가세요.”

몇 해가 지난 뒤에도 이 장면이 자주 생각난다고 민병산은 썼다. 그러면서 그는 그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 ‘자유시민’이 되기를 염원한다. 그는 “전제정치하의 페르시아인들의 자세는 어깨가 축 처져 있었지만, 그리스 자유시민들은 자세가 반듯했다”는 고대 역사가들의 말을 인용한다. 결국 민병산의 꿈은 아이들이 씩씩하게 자라서 존엄한 ‘시민’으로 사는 세상이었다. 그래서 그는 아이들이 무거운 책가방 때문에 어깨가 처지는 일이 없기를 바라고 바랐다. 그러나 지금 우리 아이들은 하루하루를 교육이라는 이름의 ‘지옥’과 ‘스마트폰’ 속에 갇혀 완전히 자폐적인 인간으로 자라고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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