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이 난에서 나는 ‘깊은 민주주의가 세상을 살린다’라는 제목 밑에서 ‘깊은 민주주의’의 실천적 모범사례로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를 소개했다. 내가 ‘깊은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당연지사로 여기는 ‘선거에 의한 대표자 선출’이라는 제도가 기실은 선거를 통해서 기득권 세력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메커니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우리가 정말로 좋은 삶을 누리려면 일반시민이 명실상부한 정치의 주체가 되는 대안적인(혹은 새로운) 시스템을 긴급히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말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깊은 민주주의’는 지금 세계 도처에서 갈수록 위축돼 가는 민주주의를 어떻게 소생시킬지 고민하고 모색하는 많은 사람들이 즐겨 쓰는 용어이다. 이 용어가 널리 쓰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대명사가 돼있는 대의제민주주의가 엄밀히 따지자면 ‘얕은 민주주의’ 즉, 허울뿐인 민주주의라는 비판적 성찰 때문이다.

대의제민주주의를 뒷받침하는 정당성의 근거는 ‘공정하고 자유로운 보통선거제도’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오늘날 선거란 기득권 세력의 이해관계에 의해 원천적으로 조작·왜곡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전혀 공정하지도, 자유롭지도 못한 게 선거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선거에서는 누구를 무엇 때문에 뽑아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투표를 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또한, 자신의 한 표가 선거결과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아예 투표를 하지 않는 시민들도 다수 존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투표를 해봤자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정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점도 선거제도의 근본적인 허구성을 알려주는 분명한 징표이다.

이런 정치시스템 속에서 국가나 지역사회의 주요 현안들에 대해 시민(혹은 주민)들의 의사가 옳게 반영되리라고 기대하는 게 잘못일 것이다. 정치라면 모두들 환멸과 절망을 느끼고, 특히 젊은이들 사이에 냉소주의가 확산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냥 속수무책으로 지낼 것인가? 우리는 지금과 같은 허울뿐인 민주주의의 근본문제가 무엇인지 끊임없이 묻고, 민주주의의 재생 가능성을 치열하게 탐색해야 할 게 아닌가? 우리가 언제까지나 노예로서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민주주의의 재생 가능성을 오랫동안 천착해온 사람들이 도달한 결론의 하나가 ‘숙의민주주의’라는 개념이다.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는 바로 이 숙의민주주의의 모범적인 실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숙의민주주의에는 시민합의회의 말고도 여러 형태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숙의여론조사(deliberative polls)’나 ‘시민배심제’ 등은 실제로 이미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실험적으로 운용되어왔다. 그리고 이 실험들은 ‘숙의민주주의’라는 유용한 정치적 기술을 통해서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의 정신과 원칙이 오늘의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소생될 수 있다는 것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다.

국정감사 이틀째인 8일 오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류길재 통일부장관이 기조실장과 답변을 숙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덴마크의 시민합의회의는 원리상으로는 정치적·사회적 문제에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지만 어쨌든 아직까지는 과학기술 문제에 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숙의여론조사’라는 것은 거의 모든 정책사항에 적용되면서 이미 오스트레일리아, 유럽연합, 태국, 미국, 영국 등 다수 국가에서 실험적으로 실천돼 왔다. 그 중에서 특기할 만한 사례가 있는데, 그것은 중국의 웬링시(溫嶺市) 제구오진(澤國鎭)에서 2004년 이후 계속 시행되고 있는 ‘숙의여론조사’이다.

상하이 남쪽 300㎞에 있는 제구오진은 97개의 마을과 20여만의 인구로 구성된 향촌지역이다. 이 지역의 행정책임자들은 중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계획된 공공사업은 많은데 예산은 부족한 재정상황 때문에 심히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계획된 공공사업들은 예외 없이 시급한 현안들이지만, 재정 형편상 상당수의 계획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사업의 우선순위 책정을 행정책임자들이 직접 하거나 전문가들에게 맡기지 않고, 주민들의 의사에 따르기로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2004년에 그들은 ‘숙의여론조사’의 창안자라고 알려진 미국의 스탠퍼드대학 교수 제임스 피시킨과 그의 중국인 동료 학자들을 초청하여 주민들의 ‘숙고된’ 의견을 듣는 절차를 진행하도록 의뢰했고, 이 숙의여론조사 결과를 지역인민위원회에 회부하여 통과시켰다.

제구오진에서의 숙의여론조사는 먼저 250명 정도의 주민을 무작위 제비뽑기로 선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렇게 뽑힌 주민들은 며칠 동안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관련 사항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얻고, 여러 개의 분과로 나뉘어 활발한 토론을 거친 다음에, 한정된 예산을 다리와 도로 건설에 쓸 것인지, 혹은 노인복지나 학교를 짓는 데 쓸 것인지 등등 나름대로 결론을 모아 주민들의 의견을 제시했다.

흥미로운 것은, 전혀 글자를 모르는 주민도 이 숙의여론조사 패널에 뽑혀 당당히 참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주민명부에 의한 무작위 추첨제 방식으로 참가자들을 선정했기 때문이다. 하기는 글자를 모른다고 해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모르는 것은 아니고, 현안에 대하여 전문가들의 조언을 충분히 듣는다면 어떤 유식자 못지않게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 까닭이 없다. 그뿐만 아니라, 분과 토의에서 사회를 맡은 그 지역 교사들은 소수에 의한 토론의 독점을 막고, 모든 참여자에게 공평한 발언과 질문의 기회를 보장했기 때문에 글자를 모른다는 것이 별로 장애가 될 수 없었다.

그 이후 제구오진은 공공사업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일뿐만 아니라 지역예산을 편성하고 심의하는 과정에서도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도록 이 숙의민주주의적인 방식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여 이제는 그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공산당 일당독재 체제라고 폄훼하고 있는 중국에서의 이야기다. 선거로 선출되었다는 단 하나의 근거로 국민(혹은 주민)들의 의사는 묻지 않고 마치 제왕처럼 군림하는 정치지도자, 행정책임자들에게 너무나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그저 부러워만 하고 있어야 할까? 잘 생각해봐야 할 일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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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세월호 사태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생명보다 돈을 중히 여기는 풍조는 조금도 변화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온갖 불의와 부조리, 비이성과 몰상식이 활개를 치는 사회는 갈수록 자정기능을 잃고, 병들어 썩어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무엇보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이 모든 사회적 부패와 병리현상에 대하여 최종적인 책임이 있는 ‘정치’가 지금 완전히 기능 부전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전체 근로소득자의 절반 이상이 기아임금을 받고, 자살률은 산업국가 중 최고인데다 젊은이들은 결혼도, 가정을 꾸리는 일도, 아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이 나라 ‘국민’의 생활실태이다. 그런데도 이런 문제는 이 나라 통치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점점 심해지는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이랍시고 정규직을 보다 쉽게 해고할 수 있는 터무니없는 방안을 내놓고 있는 게 아닐까.

소위 야당 정치가들도 별로 다르지 않다. 그들은 지금 ‘경제민주주의’의 절박성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제대로 싸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 뿌리 깊은 무능 탓인지, 의지가 없는 탓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따져보면, 근본적인 이유는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의 부족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여야를 막론하고, 지금 정치가들은 ‘정치가계급’이라는 새로운 계급을 형성하여 거기에 안주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특권적인 지위의 영속화 이외에는 별로 관심이 있는 것 같지 않다.

이런 ‘국민’ 없는 국가라는 기묘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어떻게 될까? 일찍이 소비에트사회주의권이 붕괴했을 때 <역사의 종언>이라는 논문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최종적인 승리를 논했던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몇 해 전 내놓은 <정치적 질서의 기원>에 이어 최근에는 <정치적 질서와 정치적 쇠퇴>라는 저서를 출판했다. 이 저술들에서 그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도 계속적인 자기갱신을 하지 못한다면 결국은 쇠퇴·자멸한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그동안 민주체제를 대변해온 미국의 정치질서도 지금 심각한 쇠퇴국면에 놓여 있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민주정치’가 쇠퇴하고 있는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대의제 정치가 공공선이 아니라 자본과 기업의 이익을 무엇보다 앞세우는 하수인으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금 민주주의란 허울뿐, 어디서나 압도적인 것은 금권과두정치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선거를 하고 투표를 한다 하더라도 상황이 개선될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 자본의 이익에 반하는 의지나 계획을 가진 개인이나 정당이 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은 제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선거를 통해 민의를 묻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지금은 작동불능 상태라는 사실이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는 국민을 향해서 (집권 후 쉽게 뒤집어버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된 정치풍토에서 ‘책임 있는 민주정치’란 언어도단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최근 저서들에서 제시하는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체제가 있다. 그는 그것을 ‘덴마크’라고 부른다. 이 경우, 덴마크는 현실의 특정 국가라기보다 “번영을 누리고, 민주적이고, 안전하며, 잘 통치되고, 부패 정도가 낮은” 상상의 나라이다. 그러나 비록 상상의 장소라지만, 굳이 ‘덴마크’라는 이름으로 성숙한 민주주의를 묘사한 데에는 그만한 근거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후쿠야마의 의도가 무엇이든, 덴마크를 하나의 모범국가로 제시한 것은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지난 몇 해 동안 나는 덴마크에 관한 자료와 문헌을 읽을 때마다 늘 감탄이 절로 나왔다. 덴마크가 단순히 세계 첫째의 복지국가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덴마크는 한때 전쟁으로 완전히 폐허가 된 나라였지만, 자립적 정신과 협동적 능력을 기르는 광범한 민중교육과 협동조합 시스템을 구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복지민주국가가 된 나라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덴마크인들에게 민주주의란 대의제가 아니라, 정치를 자주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말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비단 국가 차원뿐만 아니라 생활의 온갖 영역에서도 대화와 토의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를 습관화하고 있다.

둘러앉아 수업을 하고 있는 덴마크 어린이들 (출처 : 경향DB)


그 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이다. 이 제도는 원래 1980년대 초에 핵발전소 건설 문제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벌어진 논쟁의 산물이다. 그 논쟁 중에서 덴마크 국민 다수는 원전 도입을 반대했고, 의회는 국민의 뜻을 따랐다. 그런데 덴마크가 좋은 나라인 것은, 찬반 두 의견 사이에 치열했던 논쟁으로부터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는 점이다.

즉 국가적 중대사를 결정해야 할 문제가 대두될 때 그것을 절도 있게, 가장 합리적으로 논의·결정할 제도적 틀을 만든 것이다. 그것이 ‘시민합의회의’이다. 예를 들어, 유전자변형농산물을 도입할 것이냐를 결정할 때 국민들의 숙고된 의사를 얻어내기 위해서 이 시민합의회의가 열린다. 대개 20명 정도로 구성되는 이 회의의 멤버들은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시민들 중에서 제비뽑기로 무작위로 뽑혀, 몇 달 동안 주말마다 모여 해당 전문가들의 설명과 관련 자료들을 철저히 숙지한 다음, 국회의사당에서 공개리에 최종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 회의는, 목사, 교수, 변호사, 택시운전사, 간호사, 환경미화원 등 다양한 신분의 시민들로 구성되는 게 상례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들의 결정이 대개 다수결이 아니라 전원 합의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투표가 아니라, 제비뽑기로 뽑혔기 때문에 그들이 특정 이해관계를 가진 자들의 영향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특별한 이권,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는 이상, 사람은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게 마련이다.

아직까지 덴마크에서도 이 시민합의회의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문제에 국한해서 실시되고 있지만, 그 원리는 국가의 중대사 전반에 걸친 의사결정 방식으로 활용해도 조금도 모자랄 게 없다. 아니, 제비뽑기에 의한 시민회의라는 ‘깊은 민주주의’의 실천이야말로 민중의 집단지성이 왜곡 없이 반영되는 가장 합리적인 국가운영을 약속한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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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사태 이후, 많은 일본 시민들은 ‘핵 없는 세상’을 절규하며, 정부에 원자력 정책의 변경을 요구하는 크고 작은 시위를 계속해왔다. 그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의 발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의 하나는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말이었다. 그는 엄청난 원자력 재해를 겪고도 기존 원자력 정책을 완고하게 밀고 가려는 정부와 지배층의 태도에 절망하고, 그것을 “우리는 모욕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로 표현했다.

나는 오에 겐자부로를 별로 중요한 작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반핵 시위에 적극 참여할 뿐만 아니라 시위대 앞에서 이런 발언을 했다는 사실 하나로 그를 다시 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 발언은 오늘날 일본을 비롯해서 한국, 나아가 세계의 지식인, 작가, 예술가들이 느끼는 심적 고통을 가장 핵심적으로, 가장 간명하게 드러낸 말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들로서는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나날의 연속이다. 특히 ‘말’을 가지고 먹고사는 지식인들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것은, 합리적인 언어와 생각이 끊임없이 경멸을 당하고,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들이 압도적으로 난무하는 현실이다.

생각해보라. 후쿠시마 사태는 얼마나 가공할 핵 재해인가.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앞으로 망가질 사람들이 속출할 게 아닌가. 뿐만 아니라 사고 원전의 수습은 속수무책인 채, 땅과 바다는 방사능으로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고 있다. 이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될지 기약도 없다. 그런데도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기득권층과 정부와 주류 미디어는 아무 반성의 기미도 없이 원자력 이외에 대안은 없다는 입장만 고집하고 있다. 대안에너지와 생태적 생활방식으로 전환함으로써 ‘핵 없는 세상’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을 많은 지식인, 과학자, 탈핵운동가들이 구체적인 시나리오를 가지고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해도, 힘 있는 자들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탈핵의 논리가 불합리하거나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도 탈핵의 논리가 옳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럼에도 경청하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기왕의 원자력 체제 덕분에 누리고 있는 그들 자신의 권세와 지위와 부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합리적인 언어와 생각이 아니라 기득권세력의 억지 논리가 나라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이 터무니없는 ‘모욕적인’ 상황을 언제까지 두고 봐야 할 것인가. 원자력 문제는 한가지 예에 불과하다. 세월호 사태에 대한 반응을 통해 우리는 책임질 줄 모르는 권력의 모습과 기득권 세력의 뿌리 깊은 부도덕성, 비인간성을 너무도 똑똑히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는 또 광범한 시민적 합의를 통해 어렵게 도입된 ‘무상급식’을 자신들의 공약사항이 아니라며 허물어뜨리려 하고 있다(‘경제민주화’라는 핵심공약을 내팽개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이). 아무리 몰상식한 정치라 하더라도 기왕에 시행하던 프로그램, 그것도 나이 어린 학생들의 밥에 관한 것을 중단시키고 싶다면, 합당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엄청난 무기를 사들일 돈은 있고, 아이들 밥 먹일 돈은 없다는 게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이런 상황에 대해 우리가 한탄만 하고, 권력자들을 비난하고, 질 낮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만 표출하고 있을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래봤자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난을 하고, 비판을 한다고 해서 정치판의 꼼수가 사라지고, 권력자들의 자질과 생각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선거구 조정이 필요하다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오자마자 농촌 지역구 국회의원들의 허둥대는 모습은 이른바 ‘정치인’들의 관심은 첫째도 둘째도 그냥 권력의 자리를 지키고자 하는 것임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지금 우리 농촌과 농민은 정부가 광적으로 밀어붙이는 ‘자유무역협정’들로 인해 완전히 파국에 직면해 있다. 그런데 그 농촌 지역구 의원들은 농민을 보호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본 적이 있는가? 그런 ‘정치인’들이 선거구 변경으로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지지 않을까, 안절부절 노심초사하고 있는 정경은 가증스럽기보다 희극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결국 문제는, 정치인 혹은 권력자들의 개인적 자질이 아니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현재의 선거제도와 그것에 기반을 둔 대의제 정치시스템 속에서는 양심적이고 정의로운 정치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새누리당 김문수 보수혁신특별위원장이 26일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간담회를 통해 개헌 문제와 관련, "저보고 헌법을 바꿔달라고 하는 사람(국민)은 아직 못봤다"고 발언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대부분의 사람은 정말 ‘좋은 나라’에서 잠시라도 살다가 죽고 싶어 한다. ‘좋은 나라’란 별 게 아니다. 합리적인 말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다. 그런데 그런 나라를 위해 시급한 것은, 지금과 같이 돈과 조직과 혈연, 지연, 학연 따위의 음성적인 연줄, 그리고 무엇보다 부패한 기득권 세력의 도움 없이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선거제도의 근본적인 혁파이다. 오늘날의 선거제도는 지배층의 영구적 권력 유지를 돕는 메커니즘일 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지배층에는 야당 정치인들도 당연히 포함된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의 최우선적인 관심사는 자신의 특권적인 신분 보지(保持)라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니까 결국 의지할 곳은 우리 자신뿐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지금 정치판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개헌문제에 예민해질 필요가 있다. 이대로 가면, 개헌은 또다시 여야 정치인들 사이의 주고받기 놀음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개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개헌은, 지금과 같이 꽉 막혀있는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최적의 방책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 안된다. 예를 들어, 2008년 세계적 금융위기로 사실상 국가적 파산에 직면했던 나라들, 예컨대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절대로 양보해서는 안될 것은, 개헌 작업의 주체가 기성의 정치가들이 아니라 시민들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아이슬란드와 아일랜드에서는 제비뽑기로 선출된 시민대표들이 장기간 주말마다 모여 전문가들의 도움 속에서 선거제도와 헌법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토론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진행했고, 그럼으로써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민주주의의 강화만이 세상을 살리는 길임을 다시금 깨우쳐주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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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개헌

“인민은 자신이 자유롭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심각한 착각이다. 그들은 선거기간 동안만 자유로울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그들은 다시 노예가 된다.” 이것은 250년 전에 루소가 했던 유명한 말이다. 지금 우리들에게 이 오래된 루소의 명언보다 더 실감나는 말이 있을까?

선거기간 중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겠다, ‘100% 국민대통합’을 지향하겠다,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 등등, 매우 듣기 좋은 말들을 되뇌며 몸을 낮춰 다가올 때, 많은 유권자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이 모든 약속들이 죄다 헛소리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것들은 ‘원칙과 신뢰’의 인간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후보가 제시하는 약속이 아닌가? 선거용일 것이라는 의심이 없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완전히 거짓말로 끝날 것이라고 믿기는 실제로 어려웠다.

세월호 문제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이 유가족들에게 연민과 동정을 표하며 눈물로 사과하고, 철저한 진상규명을 공언했을 때, 이것은 엄청난 재난에 대해 근본적인 책임이 있는 최고위직 공직자로서의 당연한 자세로 우리 모두는 이해했다. 그러나 놀랍게도, 잠깐 사이에 대통령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졌다. 유가족에게는 냉담해졌고, 진상규명에 관해서는 그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지침’을 내려버렸다. 그러고는 자신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면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현과 비판적인 여론을 억누르는 광범한 감시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왜 이렇게 태도가 표변해버렸을까? 두말할 것도 없이,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서 집권세력이 이겼고, 이제 당분간 선거가 없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의 눈치를 보고 환심을 사야 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하기는 선거 때의 약속이 선거 후에 헌신짝처럼 버려지는 정치판의 악습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정세 변화 혹은 객관적 현실의 제약 때문인 경우도 없지는 않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현대 대의제 정치가 거짓과 속임수를 기반으로 하는 그 본질을 갈수록 감추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전에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공약 실천 문제에 관해 했다는 이명박의 말, 즉 “선거 때는 무슨 말인들 못하랴”라는 발언은 이런 현실을 가장 ‘정직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사실 이명박 정권은 극단적인 거짓과 기만, 술수로 일관했던 정권이기는 하지만, 예외적인 경우는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명박 정권은 지금과 같은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 시스템의 필연적인 결과인 타락과 부패 혹은 무능과 무책임의 정치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오늘날 우리가 겪는 거의 모든 고통과 억울함, 불행과 갈등, ‘희망 없음의 느낌’은 본질적으로 정치가 올바르게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정치란 기본적으로 사회적 정의의 실현에 이바지하는 정치일 것이다. 정의가 실현되거나 혹은 적어도 정의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살아있는 사회라야 건강한 사회, 희망이 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의의 실현 없이는 안정되고 평화로운 사회 자체가 성립 불가능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정의는 평화의 근본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날 이 나라의 정치(나아가 세계의 주류 정치)가 평화는 정의가 아니라 군대와 경찰, 정보기관과 검찰, 그리고 전자감시망으로 보장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의해 압도적으로 장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치가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 정치다운 정치의 실종은 불가피하고, 따라서 정말 평화로운 세상은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주류 정치가들은 평균적 시민의 상식에도 못 미치는 이런 어리석은 생각으로 문제 해결은커녕 분쟁과 갈등을 조장하고, 갈수록 세상을 위험에 빠트리는가?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오늘의 선거제도, 그리고 그것을 기초로 한 정당정치의 기본구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단순다수표로 당선을 결정하는 선거제도 밑에서는 ‘극장정치’에 능란한 인간, 명망가, ‘귀족’, 혹은 재력가(혹은 재력가의 후원을 받는 자)가 아닌 이상, 건전한 상식과 판단력을 지닌 보통시민이 민중의 대표로 선출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희박하고, 설령 정치판으로 들어간다 하더라도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기본적인 모순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들 대부분은 이런 선거제도, 이런 정당정치를 혁파하지도 못하고, 혁파해야 한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않은 채 그저 비통한 심정으로 불의(不義)가 횡행하는 세상에서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참고 지내고 있다.

새 정치를 향한 결단의 촉구 (출처 : 경향DB)


그러나 결국 정치가 올바르게 기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이나 다음 세대를 위해 희망적인 전망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매일매일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개별적인 이슈들에 치열하게 대응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상으로 지금과 같은 엉터리 정치의 구조적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을 광정(匡正)하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부질없는 파당적 분쟁에 골몰해 있을 때가 아니다. 사실 좌우, 보혁 다툼은 이미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북 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기후변화와 에너지, 자원 문제, 경제사회적 불평등 등등, 지금 우리가 직면한 엄중한 상황은 그러한 낡은 대결의 논리로는 전혀 대응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 상황은 오직 사회 속에 숨어 있는 최량의 지혜를 결집함으로써만 극복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선결돼야 할 것은, 지금과 같은 엉터리 정치, 독선적 정치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구조를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즉 헌법과 선거제도를 진정으로 ‘민주공화국’의 정신에 부합하도록 고쳐야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 작업을 다음 선거에서의 유불리에 부심하는 국회의원들과 직업 정치꾼들에게 맡겨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헌법과 선거법은 능동적인 시민들로 구성된 ‘시민의회’가 주체가 되어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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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그대가 경성에 쳐들어간 뒤 누구를 추대할 생각이었는가?

답: 일본군사를 물리치고 간악한 관리들을 몰아내어 임금 곁을 깨끗이 한 뒤 주춧돌처럼 믿음직한 몇 사람의 선비를 내세워 정치를 하게 하고, (나는) 시골로 돌아가 평상의 직업인 농사에 종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국사를 한 사람의 세력가에게 맡기는 것은 큰 폐해가 있었음을 알기에 몇 사람의 명사들이 협의하고 화합하는 합의법에 따라 정치를 담당하게 할 생각이었다.

이것은 동학농민전쟁을 이끌었던 ‘녹두장군’ 전봉준 선생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진행된 심문 과정에서 일본영사와 나눈 문답내용이다. 이 내용은 1895년 3월6일자 ‘도쿄아사히신문’에 ‘동학수령과 합의정치’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전봉준 장군의 이 ‘합의정치’ 개념은 놀랍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학자 김정기 교수의 말대로 “이 하잘것없어 보이는 몇 줄의 기사에는 조선의 정치를 뒤집을 폭발력이 내장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런 새로운 통치체제 구상이 어떤 외래 사상에서 빌려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이 그 충실한 일원이었던 유교사회의 민본주의 이념과 부패한 정치현실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통해서, 또 무엇보다 그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처절한 투쟁을 통해서 획득한 예지의 산물이었다.

부패하고 무능한 지배층과 외세의 침략에 맞서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궐기했던 갑오동학농민전쟁은 세계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뛰어난 사상적 운동·투쟁이었다. 물론 이 싸움의 결과 수십만의 민초들이 살육을 당했고, 나라는 망국의 길로 빠져 들어갔다. 그런 점에서 동학농민전쟁은 실패한 운동이지만, 그러나 결코 헛된 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민초들의 참혹한 희생과 피눈물을 통해서, 민중이 주인으로 사는 세상, 즉 정말로 ‘됴흔’ 나라란 어떤 나라인지, 그 정치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전봉준 장군 심문기록에 드러난 국가체제 구상의 핵심은, 지방은 (실제 동학혁명 당시 전라도에서 광범하게 시행된 것과 같은) ‘집강소’ 체제에 의한 철저한 자치, 그리고 중앙은 ‘합의정치’에 의한 독재의 배제였다.

1894년 수만명의 농민군이 집결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린 장소인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에는 1989년 ‘동학혁명백산창의비’가 세워졌다. (출처 : 경향DB)


동학혁명 이후 120년 동안 우리는 엄청난 역사적 격변을 겪으며 우여곡절 끝에 소위 근대국가의 외양을 갖추고 근대적 산업을 일으키면서 제도상의 민주주의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슬프게도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는 아직 미실현 상태이다. 동학농민들이 피눈물로 염원했던 ‘됴흔’ 나라로부터 우리는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만약 동학의 지도자와 농민군들이 살아서 되돌아와 지금 이 나라를 본다면 어떤 기분일까?

다른 것은 그만두고, 세월호 문제에 대응하는 오늘의 한국정치는 절망적이라는 말로써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존재 그 자체를 의심케 하는 일대 역사적 재난이었다. 그러나 사고 이후 다섯 달이 지난 지금 우리는 세월호 사고 그 자체보다도 더 끔찍한 상황에 처해 있다. 세월호 진상규명 방식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실로 허망하고 무익한 정치적 소동 때문이다.

지금 집권세력은 국가의 계속적인 존립을 진정으로 원한다면 자신의 과오를 뼈아프게 인정하고 성역 없는 조사에 적극 협력해야 할 절대적인 도덕적 의무가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온갖 억지 논리로써 적당히 이 상황을 넘어가기 위한 술책을 부리기만 하고, 이에 대항해야 할 야당은 무능과 어리석음만을 보여준 끝에 드디어 자멸적인 분열과 혼돈상태로 추락하고 말았다. 어느 쪽도 정치란 무엇인지 최소한의 안목도 책임 있는 자세도 보여주지 못하면서 말이다. 그리하여 사실상 이 나라의 정치는 지금 작동 불능 혹은 부재 상태이다.

이 상황에서 정치가들이 끝없이 비난을 당하고, 정치 자체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이러한 정치다운 정치의 실종은 반드시 정치가들 자신의 잘못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물론 정치가들의 자질도 중요하지만, 기본적인 것은 역시 정치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시스템이 근본적인 결함을 내포한 이상, 설령 유능하고 정의로운 정치가일지라도 실제로 효과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는 범위는 크게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오늘날 한국정치의 근본문제는 모든 권력을 대통령이 독점하는 구조로 설계돼 있다는 데에 있다. 지금 이 나라는 민주공화체제라면 반드시 작동해야 할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거의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다. 국회의원은 국민에 의해 직접 선출된 ‘헌법기관’임에도 여당의원들은 오로지 대통령의 뜻을 받드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하고 있고, 검찰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사법부조차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느라고 조심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이것이 바로, 군사독재정권과 싸워서 민주화를 쟁취한 지 25년 이상이 된 지금 현재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이다. 왕조 말기 동학농민군이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정치현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세계는 상투적인 국익논리나 성장, 개발 따위 시대착오적인 가치관으로는 더 이상 미래를 열어갈 수 없는 엄중한 역사적 전환기에 처해 있다. 이 상황에 슬기롭게 대처하려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합리적인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합리적인 정치란 한마디로 공공의 정신에 충실한 정치이다. 그리고 그것은 국민과 정치가들의 활발한 토의와 대화를 통한 의사결정 과정으로만 성립할 수 있다.

결국, 전봉준 장군이 구상했던 자치와 합의의 정치만이 합리적이고 건강한 정치를 보증할 수 있는 것이다. 오로지 최고 권력자 개인의 인간적 자질과 품성과 능력에 정치적 의사결정이 거의 전적으로 의존해 있는 시스템이 얼마나 무책임한 정치, 어리석은 국가운영을 초래할 수 있는지 지금 우리는 매일매일 끔찍하게 실감하고 있다. 우리는 정치가들 개개인을 비난하기 이전에 먼저, 이 의롭지 못한 허망한 정치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기 위한 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우리는 120년 전으로 되돌아가 전봉준 장군의 국가체제 구상을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합의정치’와 집강소 중심 지방자치 체제를 구상하고, 그 일부는 실행도 했던 녹두장군의 정치사상은, ‘됴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 모두의 영감을 자극하는 사상적 원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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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가톨릭교회의 최고 지도자라는 극히 존귀한 신분이면서도 교황은 한결같이 겸허한 자세를 취했고, 약하고 소외받고 버림받은 존재에 대한 끝없는 동정과 관심을 나타냈다. 무엇보다도 그는 단순·소박한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가, 사람다운 사람, 혹은 지도자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무언중에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떠났다. 이런 모습은 지도자다운 지도자의 부재로 늘 시련과 고통을 받고 있는 이 나라 민초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그러한 자세와 언행은 그가 세속적 이해관계를 초월한 종교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게 아닐까라고 우리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온갖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히고설킨 정치현실 속에서도 그러한 모습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례가 있다. 예를 들면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그렇다. 그는 대통령의 관저는 노숙인들에게 내어주고, 자신과 아내는 교외의 작은 오두막에서 지내고 있다. 매일 대통령 집무실로 오가는 소형 중고 자동차는 자신이 직접 운전을 한다. 또한 일흔 살이 넘은 이 노인은 늘 손수 요리를 하고 청소를 하며, 손님에게도 손수 차를 끓여 내놓는다. 그리고 봉급의 9할은 시민운동단체와 자선기관에 기부금으로 보낸다. 그는 귀빈용 레드카펫을 밟는 것도, 넥타이를 매는 것도 싫어한다. 심지어 작년 가을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그는 노타이 차림이었다.

동시에 주목할 것은 그의 정책결정이 흔히 매우 용기 있고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는 금년 초 마약 마피아들의 협박과 온갖 정치적 압력에 굴하지 않고, 마리화나의 생산, 판매, 소비를 합법화하는 법률을 통과시켰다. 그의 논리는 명쾌하다. 즉, 마리화나는 담배보다 훨씬 독성이 약하다. 그럼에도 이것을 계속 불법화하고 있는 한, 출처불명의 비위생적인 마리화나를 사 피울 수밖에 없는 중독자들을 국가가 도와줄 길이 없다. 그러나 마리화나가 합법화되면 국가에 의한 관리가 가능해지고, 중독자는 국가가 공적으로 치료해줄 수 있다. 또한 마리화나로 인한 막대한 판매 수익은 더 이상 지하에서 돌아다니지 않고 국가의 정당한 수입이 되어 복지예산으로 쓸 수 있다 등등.

호세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 _ AP연합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종교가든 정치가든, 결국은 지도자의 사람됨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떠난 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지도자들도 진정으로 민중의 마음을 읽고, 공감할 줄 아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 줄 것을 갈망하는 이런저런 기대와 바람을 표명하고 있다. 그러나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기대와 바람은 부질없는 짓이다. 오늘날 이 나라의 권력 엘리트들의 품성과 자질이 달라질 가능성은 제로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혹시 어느 날 문득 속물적 삶의 무의미함을 통절히 깨닫고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변모했던 가령 톨스토이의 경우처럼 내면적 회심을 경험한 사람이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실제로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데도 우리들은 날이면 날마다 권력자들의 태도가 바뀌기를 기대하고 바라면서 끊임없이 간청하거나 항의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런 나라에서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은 너무나 피곤한 노릇이지만, 생각해보면 이것보다 더 어리석은 ‘국민생활’도 없다. 왜 이 나라의 민중은 자기들에 의해 선출된 대표자(들)에 의해 이처럼 끊임없이 무시와 외면을 당하고, 업신여김을 받고 살아야 하는가. 이제 정말 우리는 근본적인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민중과 권력 사이의 이 불편·불합리한 관계는 반드시 권력자들의 인간적 자질 탓만이 아니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이나 호세 무히카 대통령 정도의 수준과는 비견할 수 없을지라도 비교적 양식 있는 정치가, 엘리트들은 우리 사회에도 드물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자질과 관계없이 그들이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그룹으로서 행동할 때 거의 예외 없이 ‘괴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실제 오늘날 대의제민주주의는 공공선을 실현하고, 민중의 진실한 욕구를 반영하는 정치시스템이 아니라 특권층과 지배세력의 배타적인 이익추구를 돕는 음험한 장치로 변질되어버렸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한국 사회만 그런 게 아니지만, 지금은 근대적 정당정치, 대의제민주주의가 실패했다는 것, 이 정치시스템을 갖고는 희망이 있는 미래를 열 수 없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져 가고 있다. 예를 들어 최근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21세기의 자본>을 통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 현상은 지난 수백년간 일관되게 지속돼온 자본주의체제의 내재적 특성 때문이라는 것을 방대한 통계자료로 입증하고 있다. 피케티에 의하면, 1, 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반까지가 비교적 불평등이 완화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본주의 역사에서 매우 예외적인 시기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케티의 관찰은, 다시 말하면, 그동안의 근대적 정당정치와 대의제민주주의가 실질적인 민주주의를 위한 기본조건, 즉 경제적 민주주의를 실현시키는 데 전혀 무력했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하고 있다.

소문과는 달리 왜 대의제민주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하는 정당제도가 이토록 무력하고 쓸모없는 것인가? 여러 설명이 가능하겠지만,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은 선거라는 제도의 근본적 약점 혹은 속임수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선거란 기본적으로, 돈과 권력기구와 미디어 등 온갖 메커니즘을 장악·통제하고 있는 기존 지배층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결코 민중의 진실한 의사와 욕구를 반영하지 못한다. 오늘날 극심한 투표율 저조 현상은 투표를 해봤자 권력 엘리트들 사이의 자리이동 외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너무도 익히 보아온 유권자들의 정당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조한 투표율 위에서 단순 다수표로 선출되는 한, 현재의 정치가들에게는 사실상 정치적 ‘정당성’이 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금 국회에서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어떻게 할지 그 방법을 놓고 끝없이 소모적인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상황은 결국 이제 정당도, 의회정치도 사실상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말해준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운명을 ‘정치가’라는 특권계급에 맡겨놓아서는 안되는 것 아닐까? 민중사회에 잠재된 지혜를 왜곡 없이 대변하는 공감의 정치, 양심의 정치가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새로 찾아내야 하지 않을까?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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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끗한 에메랄드빛 물이 장미와 인동덩굴들로 둘러싸인 바위들에 부드럽게 부딪히며 찰싹거리거나 자갈들이 깔린 강변과 흰 모래톱 위로 굽이치며 흘러가고 있다.”

이것은 영국왕립지리학회 회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898년에 쓴 <조선과 그 이웃들> 속에서 묘사한 남한강 상류의 모습이다. 이 아름다운 세계는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남한강뿐만 아니라 한국의 거의 모든 큰 강들은 곳곳에서 댐과 콘크리트 시설물들에 의해 끊임없이 가로막히면서 강다운 모습을 계속 상실해왔다. 여기에 결정타를 입힌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명박 정부가 강행한 소위 ‘4대강 사업’이다.

강을 정비한다며 모래톱과 강바닥을 분별없이 파헤치고, 옥답 중의 옥답인 강변 둔치들을 가차없이 제거하고, 대규모 댐들로 곳곳에서 강의 흐름을 막아버리면, 강이 완전히 파괴된다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만한 너무도 명백한 상식이었다. 그런데도 온갖 말도 안되는 논리를 들이대며 정부는 어용언론과 어용학자들로부터 적극적 혹은 소극적 지지를 받아내면서 공사를 강행했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4대강 사업으로 훼손된 경남 창녕군 부곡면 노리마을 앞 낙동강 습지 (출처 : 경향DB)

낙동강을 비롯하여 우리의 강들은 더 이상 강이라 할 수도 없는,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거대한 호소와 수로로 변하고 만 것이다. 수량은 풍부해졌는지 모르지만, 썩은 물로 무얼 하겠다는 것인가. 생각하면 정말 피눈물이 난다.

그러나 나는 ‘4대강 사업’의 결과를 단지 환경파괴나 국가재정상의 ‘비용 문제’로 보는 -현재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시각은 매우 미흡하다는 느낌을 갖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의 수질이 악화되었다거나 내륙 수변 생태계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되었다거나, 혹은 국가재정에 심각한 타격이 가해졌다거나 하는 그런 공리적이고 가시적인 손실이 아니다. 핵심적인 사태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자연스러운’ 강이 없는 나라에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의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아이들은 지금부터 강이라고 하면 거대한 수로와 댐과 콘크리트 시설물 외에 아무것도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이 없는, 삭막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평생을 지내게 될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19세기 말에 조선을 찾았을 때 그의 눈에 먼저 뜨인 것은 사람들의 ‘빈곤한’ 생활이었지만, 동시에 그는 조선의 평민들이 매우 맑고 소박한 심성의 소유자들임을 주목하였다. (버드 비숍 역시 당시 조선을 방문하고 기록을 남긴 다른 서양인들처럼 조선 사람들의 ‘게으름’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그것은 아직 자본주의적 노동규율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던 민중의 생활태도에 대한 서구인의 미숙한 편견을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그리고 버드 비숍의 생각에, 조선 사람들의 이러한 심성은 궁극적으로 그들이 누리고 있는 금수강산의 아름다움에 연유하는 것이었다.

그런 조선 사람들의 후손이건만 우리들은 지금 경황없이 우리의 모든 정력을 천박하고 야비한 물질적 욕망의 경쟁적 추구에 쏟아부으면서 분주한 나날을 지내고 있다. 가끔이나마 유유히 흘러가는 강과 먼 산을 바라보며 인생과 우주의 의미와 그 신비에 대해 명상하는 습관은 우리의 생활로부터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 예전엔 고기를 낚는 것보다 낚시터의 ‘적막’에 마음을 뺏긴 낚시꾼이 많았다. 이제는 그러한 것도 아득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하이데거식으로 말하면, 우리는 이제 거의 예외 없이 ‘고향을 잃은 자’들이 되었다. 실제로 고향땅에서 멀어졌기 때문이라기보다, 경제성장과 개발과 텔레비전과 스마트폰에 의해 그렇게 돼 버린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 고향 상실을 ‘계산적 사고’의 압도적인 득세로 말미암아 사색의 습관과 능력이 쇠퇴한 탓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사색이란 사물의 본질과 존재의 의미에 대하여 근원적으로 들여다보는 능력이다. 그리하여 철학자는 묻는다. “오늘날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거주지에 고요히 사색할 수 있는 장소가 남아 있는가?” 하이데거는 제3차 세계대전보다 더 무섭고 우려해야 할 것은 “생명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기술적 침략이 확대되고” 있음에도 이 ‘침략’의 의미에 대한 근원적인 사색이 결여된 세상이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간이란 그저 ‘안락’과 ‘안전’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라도 최소한 배부른 돼지가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서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 인간다운 인간의 존립을 위해서는 인간에게 “고요히 사색할 수 있는” 능력과 장소를 허용하는 문화가 살아있어야 하고, 정치도 마땅히 그 방향으로 겨냥되어 있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이명박 정부를 비롯하여 역대 정권의 실정은 단지 국가재정을 거덜내고 환경을 파괴해왔다는 점에 그치는 게 아니라고 할 수 있다. ‘4대강 사업’의 엄청난 죄악에 대해서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지만, 새만금 개발을 내세워 천혜의 갯벌을 대대적으로 망가뜨리고, 우리들 모두의 영속적 삶을 위한 가장 소중한 기반인 농사를 끊임없이 홀대해온 역대 정권과 권력엘리트들의 과오도 결코 작은 게 아니다. 우리가 그러한 과오들을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그 정책방향이 결국 ‘배부른 돼지들’의 세상을 지향한 것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고통스러운 것은 우리의 생활수준이 낮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동안 ‘가난’을 저주하고 증오하면서 우리 사회 전체가 일념으로 추구해온 것이 결국은 공허한 물질적 안락이었다는 데 핵심적 비극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다가 우리는 뜻밖에도 우리의 삶이 전혀 안락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인간다운 삶의 근본기반이 망실돼 버렸음도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이 극적으로 표면화된 것이 ‘4대강 사업’의 재앙과 ‘세월호 참사’이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두 개의 사태 사이에는 내면적인 연속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두 사태는 무엇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그것을 위해 공적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근원적으로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사태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가 희망이 있으려면 ‘사색’의 소중함을 깊이 느끼고, 사색할 줄 아는 인간들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안된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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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직후 나는, 이 나라의 집권세력에 대하여 어느 지면을 빌려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이) 자신들의 책임을 통절히 자각하고, 개과천선할 가능성은 있는가? 단 1퍼센트도 없다. 많은 아이들이 물에 잠겨 있는 동안은 잠시 엎드려 있겠지만, 곧 그들은 다시 그들의 오래된 습성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뿌리 깊은 무지와 교만, 무교양과 무례함이 빚어내는 거짓과 위선의 정치에 치를 떨며 한없는 무력감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한겨레> 2014·5·7)

불행하게도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지방선거 기간 동안 “반성합니다, 사과합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라며 90도로 허리를 꺾어 간절히 빌던 사람들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표변해버렸다. 내 예상은 맞았지만, 완전히 맞지는 않았다. 솔직히 나는 이렇게 빨리 그들이 가면을 벗고, 또다시 말도 안되는 행태를 노골적으로 드러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아직도 진도에서는 바닷물 속에서 건져내지 못한 시신들을 찾는 힘든 작업이 진행 중이고 그것을 절망적으로 지켜보며 기다리고 있는 이들이 있는데도, 세월호 참사로 환기된 국가의 책임이라는 문제는 그들에게서 벌써 멀어져 가고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지금 허다히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밀양에서는 경찰병력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어 오로지 자신의 삶터에서 그냥 살도록 내버려달라고 호소하는 주민들을 무도하게 짓밟는 ‘국가폭력’을 거리낌 없이 휘둘렀다. 이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는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에 대한 위헌적인 통제와 탄압이 또다시 시작되고, 정부와 여당은 국회차원의 국정조사에 대해서도 계속 어설픈 핑계를 들먹이며 적당히 넘어가려는 잔꾀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 집권세력의 뿌리 깊은 후안무치한 작태 중에서 가장 비열한 것은 교육감 직선제를 폐지하자는 그들의 노골적인 주장이다. 이른바 진보 성향의 후보들이 대거 교육감에 당선되자 이에 대하여 불안과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물론 이해할 수 있다. 진보 교육감 시대의 개막으로 차별적 특권교육의 틀이 크게 흔들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인간다운 양심과 염치가 있다면, 어떻게 이토록 노골적으로 민주주의 원칙을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언행을 드러낼 수 있을까. 불가사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전국학교비정규직연대회의 회원들이 24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서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규탄 기자회견을 열어 전교조를 지키기 위한 공동행동에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_ 연합뉴스


불가사의한 것 중에서도 단연코 백미는, 국정을 쇄신한답시고 대통령이 뽑은 새로운 참모들의 면면이다. 그 가운데 결국 총리 후보는 사퇴했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나머지 인물들의 경우만 본다 하더라도 단지 한심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해도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대통령이 말하는 ‘국가개조’라는 게 대체 무엇인지 심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교육과 윤리와 도덕에 관계하는 정부기관, 즉 교육부 장관에 가장 비교육적이고, 가장 비윤리적인 행위를 한 것으로 드러난 인물을 지명한 것은 과연 무슨 의도일까.

교육부 장관 후보자는 제자의 논문을 그대로 베끼거나 요약한 것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고, 연구비까지 챙겼다-그것도 반복적으로-라는 게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 본인은 당시에는 관행이었다는 식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모양이지만, 아무리 우리나라 대학들이 썩어빠졌다 하더라도 그런 파렴치한 행위가 대학의 관행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국가의 최고 권력자가 그런 인물을 굳이 교육부 책임자로 앉히려고 하는 숨겨진 이유가 있는지 나로서는 짐작도 안되지만, 만약에 이대로 그가 교육부 장관이 된다면, 한 가지 효과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즉, 한국에서 교육부라는 것은 적어도 교육문제에 관한 한, 어떠한 설득력 있는 발언을 할 하등의 권위도 자격도 없는 기관으로, 우리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눈에도, 확실히 각인될 것이다. 대통령이 노리는 게 설마 이것일까?

하기는 한국의 주류 지배층이 과연 교육이 무엇인지, 교육부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상식적인 이해를 갖춘 집단임을 입증해 보인 적은, 적어도 내 기억에는, 전혀 없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민주사회라면 교육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불가결한 전제조건, 즉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신념이 거의 전적으로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전제(專制) 체제를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신민 혹은 노예들을 길러내는 훈련 이외에 어떤 다른 교육이 있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교육의 생명은 어디까지나 ‘자유’라는 사실, 그리하여 교육의 자유라는 게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것이며, 교육의 자유를 무시하는 게 얼마나 중대한 (인간성에 대한) 범죄인지를 그들은 모른다. 이것은 그들 자신이, 돈과 권력과 헛된 명예에 대한 탐욕을 벗어나서, 스스로 ‘자유인’으로서 인간다운 삶을 누려본 체험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즉, 그들의 근원적인 정신적 빈곤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나라 지배층은 몇 명의 해직교사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국제적 상식을 무시하고 ‘전교조’의 법적 지위를 박탈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전교조가 ‘공공의 적’이기라도 한 것처럼 온갖 음해와 중상모략으로 악선전을 퍼트려온 연장선상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토록 전교조를 혐오하고, 무력화시키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전교조가 ‘교육의 자유’를 염원하고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가장 유력한 시민적 저항조직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민주주의가 후퇴를 강요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교조를 비롯한 주요 노동운동, 시민운동 세력이 무너진다면, 안 그래도 독선적인 권력은 아무런 저항에 부딪힘 없이 반민중적, 반민주적 정책을 거침없이 밀어붙일 것임이 명확하다. 이 폭주에 제동을 걸고 민주주의를 되살리려면, 우선 우리들 모두가 (특히 젊은이들이) 축구에 쏟아붓는 정열을 조금만이라도 아껴서 전교조의 운명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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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날, 경향신문 신년기획 ‘문명, 그 길을 묻다’의 첫회 대담을 흥미롭게 읽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문명의 붕괴> 등 몇 권의 중요한 책으로 한국 사회에서도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왜 하필 이 시리즈의 선두에 내세워졌는지 궁금하다. 아마 신문 편집자도 지금 이 문제를 가장 절박한 문제로 느끼고 있는지 모른다. 이 문제라는 것은 물론 문명의 지속가능성 여부다. 아니, 이 지상에서 인간 생존의 지속가능성 자체의 문제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야기 중 가장 심란한 대목은,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된다고 할 때 현재의 어린 세대나 장차 태어날 아이들이 2050년쯤 맞이할 세상이 어떤 세상일지 생각해보자는 말이다. 자기가 생물학자에서 생태주의자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도 자신의 쌍둥이 자식들의 나이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다이아몬드 교수 자신은, 지구환경이 생태적으로 황무지가 되어 있을 2050년쯤에는 이미 저세상 사람일 것이지만, 마실 물을 비롯하여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기초적 인프라가 거의 모두 소멸된 상황에서 아들딸, 손자손녀들이 과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을지 심히 염려하고 있다.


2050년쯤이라면 30여년밖에 남지 않았다. 다이아몬드 교수의 이야기에서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해보았다. 나 자신도 그 무렵에는 세상에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그러나 내게도 자식들이 있고, 어쩌면 그들에게도 그들 자신의 자식들이 생겨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모두에게 앞으로 수십년 후에 닥칠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


제래드 다이아몬드 (출처 :경향DB)


되돌아보면, 나는 소년 시절부터 줄곧 이 비슷한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려왔다. 중학생 때 우연히 <제7 지하호>라는 소설을 읽은 이후 더 그랬던 것 같다. 이 소설은 한 인간집단이 사전에 건설된 거대한 지하도시로 대피함으로써 핵전쟁에서 살아남았으나 결국은 온갖 첨단 기술에도 불구하고 쓰레기 처리라는 난문제에 봉착하여 실패하고 마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 소설을 읽은 후 나는 한동안 가위눌려 지냈다. 


그러나 나중에 어른이 된 다음 나는 내 어렸을 때의 경험이 결코 철없는 소년이 황당한 픽션을 읽고 느낀 비현실적인 공포감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핵무기는 말할 것도 없지만, 원자력이든 화석연료든 재생 불가능한 에너지와 지하자원을 기반으로 하여 유지되는 문명이 근본적으로 자멸적이며 지속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인데도, 세상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었다. 내게는 이런 현실이 늘 신기하고,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졌다.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어쨌든, 마음속 깊은 곳의 불안과 공포심에도 불구하고 나와 우리 세대가 삶을 영위해온 이 세상 자연은, 거두절미하고, 한없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품이었다. 문제는, 이 아름다움과 풍요로움의 체험이 우리 다음 세대와 그들의 자식들에게도 이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경제성장이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 세계의 지도자들이 하루빨리 각성하는 데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그 점에 대해 어느 정도 낙관적인 것 같다. 그 근거는 자기가 아는 많은 기업 경영자들이 자손들의 미래 생존에 대해 진심으로 걱정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과연 그럴까? 다이아몬드 교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게 아니다. 내가 보기에 그의 생각은 지나치게 나이브하다. 


개인적으로 인류의 장기적인 생존기반에 관심을 갖는 정치 지도자, 경영자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문제는 그들의 관심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실제로 국가운영과 기업경영의 기본원리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핵심적인 걸림돌은, 말할 것도 없이, 이윤 추구에 혈안이 돼 있는 자본주의 경제 논리, 그리고 그것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뿌리 깊은 ‘국익’ 관념이다. 더욱이 지금은 신자유주의와 자유무역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약육강식 논리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신제국주의’ 시대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우리의 현실을 보더라도 그렇다. 지금 우리는 철도, 의료, 가스 등 국민 생활의 필수불가결한 기초적 인프라인 공공 서비스 시스템이 기업의 사적인 이익창출 수단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정부는 민영화(사유화)가 아니라고 강변하지만, 말이 아니라 실제로 취하는 행동은 민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 근본적으로 모순적인 정책을 거센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결국 대기업 혹은 다국적기업의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 생산과잉과 자본과잉으로 기능부전에 빠진 세계경제 상황에서 자본가들에게 남은 마지막 ‘프런티어’는 공공 인프라의 사유화밖에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의 농민들과 빈민, 그리고 중국이나 인도 등 신흥개발국의 노동자들을 착취·약탈해온 구조도 이미 수명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권력과 공모하여 자본가들이 공공 인프라를 사유화하여 돈을 더 벌어봤자 그게 과연 언제까지 지속 가능할까? 다수 국민이 걷잡을 수 없이 빈궁화의 수렁으로 빠져 들어가는 상황에서 어떤 경제가 안정성과 지속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가면 확실한 것은, 시간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모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비참한 공멸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권력자, 자본가라고 해서 예외일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공생의 원리가 지금처럼 절실한 때가 없지만, 지금 국가와 자본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힘, 즉 타성에 깊이 젖어 있다. 따지고보면, 더 많은 성장과 축적을 향한 자본의 운동이건 부국강병을 겨냥하는 국익 논리건 그것은 모두 시대착오적인 논리다. 이 완고한 벽을 파쇼적 강권통치로 넘어설 수 있을까? 암울한 세상을 회피하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모든 지혜를 모아서 가장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이성적으로 합의하기 위한 틀의 확보다. 구원의 가능성은 우리가 얼마나 질 높은 민주주의를 향유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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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가톨릭 사제들이 공개적으로 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고, 그 자리에서 박창신 신부의 강론이 있었던 것은 지난 11월22일이었다. 그 강론에서 이 원로 신부는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를 갈수록 유린하고 있는 정권에 대해 매서운 비판을 했다. 그러자 수구세력과 정부는 거두절미하고 이 발언 중에 나온 한마디 말을 꼬투리 잡아 과장되게 왜곡해 이적성 발언이라고 규탄하기 시작했다. 또다시 ‘종북 척결’이라는 상투적인 공격 논리를 꺼내들면서 말이다. 이 와중에 대통령까지 나서 “묵과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자 검찰이 수사에 들어간다는 뉴스도 나왔다.


그중에서도 특기할 것은 ‘대한민국수호천주교모임’이라는 단체가 보여준 반응이다. 그들은 성직자가 정치에 개입했다고 하여 박창신 신부를 파문해 줄 것을 요청하는 탄원서를 서울 주재 교황청 대사관에 제출했다. 제출 날짜는 11월28일이었다. 교회와 국가 혹은 종교와 정치의 관계라는, 역사가 오래된, 그러나 결코 칼로 무를 자르듯이 명쾌하게 정리할 수 없는 이 복잡한 문제를 탄원서 한 장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 탄원서 제출은 어설픈 코미디로 끝날 공산이 매우 커졌다. 왜냐하면 그 바로 이틀 전 11월26일에 로마에서 신임 프란치스코 교황의 새로운 회칙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이 <복음의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간행되었고, 그 핵심적인 내용이 교회가 복음화라는 소명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로 돼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는 아직 <복음의 기쁨>을 보지 못했다. 곧 영문판이 나온다고 하니 그때 전문을 읽어볼 생각이지만, 아쉬운 대로 인터넷에서 찾은 몇몇 발췌본과 해설, 논평들을 읽어보았다. 어떤 해외의 논평자는 ‘전율’이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책의 획기적 의의를 논하고 있었다. 가톨릭교회의 내부 역사를 잘 모르는 나 같은 문외한이 이 문서가 갖는 역사적 의의를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발췌본만으로도,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신선한 충격과 기쁨, 크나큰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11월29일 (출처 :경향DB)


<복음의 기쁨>은 현재 가톨릭교회와 세계가 직면한 숱한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지만, 요지는 간명하다. 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각자 말할 수 없이 신성한 존재임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황의 이 ‘권유’의 두드러진 면은 ‘가난’을 특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예수가 가난하고, 늘 가난한 이들과 어울렸듯이, 교회도 스스로 가난해지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프란치스코 교황 자신은 “안온한 성전 안에서 머무는 고립된 교회가 아니라, 거리로 나가서 멍들고, 아프게 하며, 더러워진 교회를 더 원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아프게 하는’ 교회라는 표현이다. (일부 국내 자료에는 ‘상처받는’ 교회로 번역돼 있는데, 영어 발췌본에는 hurting이라고 돼 있다. 영어 발췌본이 원문을 정확히 번역했다고 가정하면 ‘아프게 하는’ 교회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 즉 세계를 비윤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특권층에 대하여 교회가 늘 고분고분한 자세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거기에 들어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가톨릭 최고 지도자들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경제적 불평등을 가장 큰 문제라고 보고 있다. 교회의 소명은 가난한 이들을 해방하여 사회의 완전한 일원이 되게 하는 것이라는 그의 생각은 확고하다. 그러나 그는 가난한 이들과의 일상적인 작은 연대 행위들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빈곤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가 강력히 문제 삼는 것은, “소수의 부가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에 다수의 빈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불균형 상태를 만들어내는 논리, 즉 ‘시장의 절대적 자율성’과 금융투기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이다.


예전 군사독재 시절 브라질의 반체제 성직자 돔 헬더 카마라 신부가 했던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카마라 신부는 언젠가 “내가 가난한 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내가 빈곤의 원인을 물어보면 그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고 부른다”고 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제는 교황이 ‘가난의 구조적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물론 이번 교황이 라틴아메리카 출신이라는 점도 중요할 것이다. 또 세계 전체 상황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적어도 라틴아메리카는 군사독재 시대가 끝나고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지금 국민들의 생활도 예전과는 비할 바 없이 호전되고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 상황변화는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에 공감했던 많은 가톨릭 성직자들의 희생과 헌신에 힘입은 바가 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발췌본을 읽었을 뿐이지만, <복음의 기쁨>에는 기억해 둘 만한 표현이 풍부하다. 예를 들어 “진정한 평화는 정의를 통해서만 실현된다” 혹은 “부의 분배나 빈자들의 인권이 사회통합이나 평화라는 이름으로 억압되어서는 안된다” 혹은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선은 특권의 포기를 거부하는 자들의 안락보다 높은 가치를 지닌다” 등등의 표현이 그렇다. 내 생각에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오늘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상업주의와 ‘무관심의 세계화’가 압도하고 있는 세계에서 낙담하고 비관주의에 빠지는 ‘패배주의’를 경계하는 메시지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확신 없이 출발한다면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우리는 패배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생각해보면, 패배주의 혹은 비관주의는 결국 자기중심적 사고, 즉 ‘교만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복음의 기쁨>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옳고 진실한 어떤 것일 뿐만 아니라, 견디기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우리의 생을 새로운 빛과 더 없는 기쁨으로 채울 수 있게 하는 아름다운 어떤 것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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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의 가톨릭 신부이자 학자인 앨버트 놀란이 쓴 <기독교 이전의 예수>라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 있다. 이 책의 주안점은 기독교 성립 이전의 상황, 즉 로마제국의 변방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에 살던 한 인간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그리고 동시대인의 눈을 통해서” 묘사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책에서 독자들이 보는 것은 메시아, 구원자, 삼위일체의 신(神) 등등 기독교 신앙이 전제된 예수상이 아니라 가난한 식민지 땅에서 이웃들과 나날의 슬픔과 기쁨을 함께하면서 살았던 ‘목수의 아들’의 실존적 삶과 그 내면이다.


앨버트 놀란의 문제의식은, 태생으로 보나 교육으로 보나 중류계급 출신이며 삶의 조건이 별로 불리하지 않았던 예수가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 사람들과 어울려 사귀고 또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즉, 예수는 왜 스스로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있기를 ‘선택’했던가? 이에 대한 간명한 답변은, 예수가 엄청난 연민의 인간이었다는 점이다. 연민이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심정적 반응이다. 예수가 목자 없는 양들처럼 풀이 죽어있는 자들을 딱하게 여기고, 과부를 위로하고, 나병환자와 소경을 낫게 하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겼다는 이야기들은 실제로 복음서에서도 가장 살아있는 구체적 증언들이다. 그러나 앨버트 놀란은 연민, 자비심, 동정심 같은 말로 예수의 진실한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영어판(혹은 한글판) 성서의 ‘측은히 여긴다’라는 표현은 그리스어 ‘스플랑크니소마이’를 번역한 말인데, 이 말은 원래 ‘애간장이 탄다, 창자가 끊어진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즉, 고통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대하는 예수의 마음은 단순한 동정심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렘브란트 반 레인,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출처 :경향DB)

타인의 운명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라는 점에서 예수의 이야기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대표적인 사례는 아마도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경우일 것이다. 알다시피 트루먼은 루스벨트의 급작스러운 병사(病死)로 졸지에 부통령에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태평양전쟁 말기 미국 군대의 최종 지휘권자가 되었던 인물이다. 되돌아보면, 트루먼의 역할은 현대사와 인류문명의 전개 방향에 결정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맨해튼계획의 ‘성과’인 원자폭탄의 실제 사용 여부가 그의 판단에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명령했고, 그 결과 미증유의 대참사를 일으키고, 또한 이른바 ‘핵시대’를 열어놓음으로써 지금까지도 인류사회가 핵의 공포와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퇴임 후 75회째 생일날 그는 어떤 하객으로부터 “생애 중 후회스러운 일이 없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후회되는 게 있다면 결혼을 더 일찍 못한 것”이라고 답변했다. 요컨대, 원폭 투하 결정이라는 것은 그의 생애에서 매우 사소한 사건이었고, 자신의 결정으로 참혹하게 희생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무고한 사람들에 대한 생각은 그의 머릿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인간인데 어째 저럴 수 있을까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트루먼식의 반응은 실제로 인간사회에서 드문 것이 아니다. 이른바 잘난 사람,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 권력자들일수록 타인의 고통과 불운에 대한 무관심 내지 둔감성은 유별나다고 할 수 있다. 오죽하면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했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로 인해 집과 삶터를 잃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황을 하고 심지어 자살자까지 늘어나는 상황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원전 사고 수습이 전혀 진척이 안 되고 있는 상황에서 원자력을 단념하기는커녕 계속적인 원전 가동, 원전 수출 정책을 말하고 있는 일본정부와 권력자들의 행태는 가증스럽다기보다 불가사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물론 일본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밀양에서 초고압 송전탑 건설문제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시골 사람들을 대하는 이 나라 기득권자, 잘난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거의 구역질이 난다. 그들은 “이대로만 살게 내버려 둬 달라”는 시골 사람들의 간절한 호소에 한번이라도 귀를 기울일 마음은 없이, 시골 사람들의 무지와 이기심을 비난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심지어 최근에는 ‘외부세력’ 운운하더니 드디어 ‘종북세력’을 들먹이는 데까지 왔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3년 10월9일 (출처 :경향DB)


이 지겹도록 반복되는 약자멸시와 강자우선의 논리, 즉 자신들의 특권적 이익을 ‘국익’으로 포장하여 끊임없이 약자를 희생시킴으로써 기득권을 유지·강화하려는 이 뿌리 깊은 부도덕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까? 나는 저명한 반핵운동가 히로세 다카시의 오래된 제안, 즉 원전을 세우려면 도쿄 중심부에 세워야 한다는 제안을 그냥 반어법이 아니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결국 대개의 인간은 당사자가 아니면 당사자의 고통과 불행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울이나 대도시의 전력 사용 때문에 시골 사람들이 고통과 멸시를 당하는 상황을 종식시키자면, 대도시 사람들도 같은 고통을 느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원전과 전쟁은 약자의 희생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므로 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책도 전쟁이 나면 사회적 약자만이 아니라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 자신이 먼저 희생되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미 20세기 초에 이런 제안을 한 사람이 있었다. 덴마크의 육군대장 프리츠 홀름은 ‘전쟁근절법안’을 만들어 각국 지도자들에게 돌렸는데, 그 법안의 개요는 이러했다. 즉 “전쟁 개시 후 10시간 내에 다음 각항에 해당하는 자들은 최하급 병졸로 소집되어 최전선에 배치되어야 한다. 1. 국가원수 및 그 친족 2. 총리 및 장차관 3. 국회의원(단, 전쟁에 반대한 국회의원은 제외) 4. 전쟁에 반대하지 않은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위에 열거한 자들의 아내, 딸, 자매 등은 간호사 혹은 잡역부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야전병원에 근무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1920년대 일본의 반전평화사상가이자 언론인이었던 하세가와 뇨제칸의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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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미래가 있을까? 우리에게 정말 희망이 있는가? 연일 ‘내란음모’니 뭐니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뉴스쇼’들을 보고 있자니 괴롭다기보다 한심하다는 생각만 든다. 하기는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음모’에 연루되었다니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든 혐의 사실만으로도 충격적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혐의를 뒷받침하고, 인신 구속의 근거로 제시된 증거물, 즉 소위 ‘녹취록’을 읽어보면 이게 코미디도 아니고 대체 뭔가 하는 허망한 생각이 절로 든다. 장난감 총을 개조해서 뭘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통신시설과 유류탱크를 어떻게 공격해서 뭘 하자는 것인지, 혹시 이 방면의 전문가들은 짐작하는 게 있는지 모르지만, 우리처럼 어리석은 백성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잡히는 게 없다. 당사자들한테는 실례 되는 말이겠지만, 이른바 ‘주사파’에 속한 활동가나 정치인들의 지적·정신적 능력이 이 정도인 줄은 정말 몰랐다.


국가권력도 한심하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벌써 수년 전부터 사찰을 시작해 획득한 증거라는 게 겨우 이 코미디보다 못한 ‘녹취록’인가? 막대한 세금을 써서 움직이는 국가정보기관이 이 정도밖에 실력이 없다면, 그것도 물론 작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둘러싼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소동 속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붙잡고 씨름해야 할 보다 긴급하고, 절실한 과제들에 대한 정치적·사회적 의식이 위축되고, 심지어 증발해 버린다는 점이다. ‘내란음모’가 있고, ‘간첩죄’에 해당하는 범죄행위가 있다면, 그때그때 법적 절차에 따라 적발하고, 심판하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시민들의 신뢰를 받는 국가기관이 되고 싶다면, 정치적 목적을 위해 공안사건을 조작하거나 활용했던 군사독재 시대를 연상시키는 행동은 하지 않는 게 마땅하고, 그게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도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애국행위’는 오히려 망국에 이르는 길이 될 수 있음을 냉정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정 들어서는 이석기 의원 (출처: 경향DB)

그러나 누구보다 냉정히 자신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언론기관들이다. 요 며칠 주류 미디어가 보여주는 모습은, 보도매체라기보다 오랜만에 먹이를 발견한 굶주린 승냥이를 방불케 한다. 누군가 이미 지적했지만,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다. ‘내란음모’라는 무시무시한 사건을 다루는데, 왜 그토록 신이 날까(이 과잉 흥분 상태의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이 ‘정열’의 1만분의 1만이라도 때늦지 않게 4대강 공사나 원자력 문제의 진실을 캐는 데에 바쳐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언론들이 냉정을 잃으면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없이 천박해진다는 것도 이번에 나는 새삼 깨달았다. 그런 점에서 엊그제 언론인 손석희씨가 뉴스앵커로 재등장하게 된 것을 계기로 행한 어느 인터뷰에서, 뉴스의 객관성·공정성 못지않게 ‘품위’의 중요성을 거론한 것은 퍽 인상적이었다).


항용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주류 언론의 공격 대상은 사건 당사자들만이 아니다. 지금 가장 황당한 것은 이 사건을 빌미로 우리 사회에서 이른바 좌파 혹은 진보 진영 전체가 존명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물론 좌파 혹은 진보 진영 자신의 잘못도 크지만, 기본적으로는 주류 언론에 의한 끊임없는 비방과 공격의 결과라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출처: 경향DB)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좌우 이데올로기의 구분을 갈수록 무의미하게 만들고 있는 세계이다. 이런 현실이기 때문에 더욱, 당면한 인류사적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해서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사회 속에 축적되어온 다양한 사상과 경험과 기술을 포괄적으로 지혜롭게 계승하면서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힘을 얻어야 한다. 이것은 극히 초보적인 상식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좌우의 이념·사상은 대립을 통한 상호 승인과 대화가 계속돼야 할 관계이지, 한쪽이 다른 쪽을 섬멸해야 할 불구대천의 관계는 결코 아니다.


‘내란음모’ 사태 속에서 또다시 좌파들에 대한 적대감을 퍼뜨리는 데 분주한 주류 언론들의 기세등등한 태도를 보면서 문득 물어보고 싶어졌다. “그래 다 좋다. 그런데 그대들은 무슨 대책이 있는가? 정말로 이 체제가 그대로 계속돼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자본주의 시장지상주의 논리가 정말 정답이라고 믿는가? 노동자들의 인권이나 사회적 불평등, 환경파괴, 자원고갈 따위는 어찌 되든 끝없이 투기를 장려하고, 값싼 제품의 더 많은 생산, 유통, 소비, 폐기를 일념으로 추구해가면, 언젠가는 골치 아픈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빠른 속도로 닥치고 있는 기후변화의 위협에 대해서는? 무엇보다도 ‘죽어버린 행성(dead planet)’ 위에서는 모든 게 끝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지난 6월 뉴욕의 페이스대학교에서 ‘개혁과 혁명을 위한 2013년 좌파 포럼’이 열렸다.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세계 전역의 ‘좌파 지식인·활동가’들이 참석하여 사흘 동안 열린 이 모임에서는 300편이 넘는 논문이 발표되고, 촘스키를 비롯한 석학들의 강연이 있었다. 포럼의 총괄적 테마는 ‘생태적·경제적 전환을 위해서’였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그동안 생태위기는 일반적으로 ‘좌파’에 의해 기피되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온 문제이다. 그런데 이 대규모 좌파 지식인들의 포럼은 이제 그런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 명확히 선언했다. 인터넷에서 지금 확인할 수 있는 발표 논문들의 제목과 요약문을 일별해 보더라도, 이제는 세계의 지식인들이 생태적 위기상황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이번 포럼에서 ‘세계체제론’의 이론가 월러스틴은 앞으로 수십년 사이에 세상이 연옥이 되느냐 아니면 지금보다 조금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느냐가 결정될 것이며, 그 확률은 50 대 50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제 가짜 싸움은 시급히 그만두고 진짜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 싸움에 좌파, 우파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제라도 늦게나마, 사심을 버리고, 허심탄회한 마음으로 정말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눈을 뜰 필요가 있다.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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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시마 관련 ‘괴담’이 떠돈다며 단속·처벌하겠다는 총리의 의지가 표명됐다. 대체 ‘국민행복을 저해하는 괴담’이 뭔지 들여다보니, 일본 국토는 절반 이상 방사능으로 오염됐다, 혹은 위험한 일본산 수산물은 먹지 말아야 함에도 현재 한국으로 대량 반입되고 있다 등등, 실은 내 자신이 여러 곳에서 공개적으로 해왔던 이야기들이다. 앞으로는 정부나 원자력 마피아, 사이비 언론의 말만 듣고 조용히 입 닫고 살아야 할까? 군사독재 시대로 되돌아가는 것인가? 어쩐지 으스스하고 기분이 좋지 않다.


정홍원 총리 (경향DB)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2년 반, 충격과 슬픔, 분노 속에서 지냈다. 사고 직후 멍하게 있다가 닥치는 대로 자료를 찾아보던 중 어쩐지 이 사태가 체르노빌을 능가하는 세계적 대재앙이 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어쨌든 이전까지 하던 일을 잠시 중지하고, 내가 해독할 수 있는 종류의 원자력 관련 문헌을 찾아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읽은 것을 토대로, 가급적 많은 동료 시민들과 기본 인식을 공유하기 위해 글과 강연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꽤 해왔다. 그리고 이 모든 게 결국은 국가의 정치적 선택으로 귀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통절히 깨달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이제는 녹색당 출현이 절박하다는 적지 않은 젊은이들의 열정적인 뜻에 공감하며, 녹색당 창설에 동참했다.


시민환경단체들의 활동만으로 충분하다면 우리가 굳이 녹색당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정치를 바꾸지 않는 한, 원자력에 기반을 둔 사회경제체제의 변경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했다. 그리하여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정치적 결단을 촉구하는 일이 매우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탈핵 희망버스’에 참가한 녹색당 당원들이 거리 집회를 열고 있다. (경향DB)


한국에서 녹색당은 아직 미약하지만, 그 존재의의는 갈수록 중요해질 것이라고 믿는다. 그 근거는 무엇보다 일본의 현 상황이다. 후쿠시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혜로운 정치가 작동해야 할 것임에도, 일본은 지금 이성과 합리성이 완전히 실종된 매우 질 낮은 정치의 전형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이미 단순한 우경화의 수준을 훨씬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국가운영의 주역들이 시대착오적인 군국주의적 정서에 집착하고 있는 자세와 발언을 계속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나는 일본 정치의 이 열화 현상은 후쿠시마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증유의 재해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현실에 맞설 수 있는 지혜와 용기가 없기 때문에 정치가 저토록 저열해지는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평화헌법의 폐기와 군사국가로의 회귀는 일본 우익세력의 오래된 염원이다. 하지만 지금 그들이 동아시아는 물론 국제사회 전체의 비웃음을 사면서도 계속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은 후쿠시마라는 요인을 배제하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지만, 후쿠시마 사고 대책은 아직 가닥도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언제 수습될 지, 수습이 가능하기는 할지 매우 불투명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지난 4월 워싱턴에서 일본 원자력위원회의 스즈키 다쓰지로 위원장 대리가 한 말은 비교적 솔직했다. 그는 후쿠시마 사고 현장은 지금 “조그만 쥐 한 마리가 전력 공급선을 절단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인정했다. 즉, 당장이라도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고 현장에 투입된 어떤 노동자는 7월11일자 트위터에 글을 올려 현재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오늘은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지 28달이 되는 날이다. 2년4개월이 지난 지금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대책은, 세 가지 대응 원칙, 즉 ‘멈춰라’(핵분열 중지) ‘식혀라’(냉각) ‘닫아라’(방사성물질 유출 봉쇄) 중에서 ‘멈춰라’밖에 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냉각 시스템도, 봉쇄 대책도, 오염수(汚染水) 문제도, 대기 중 방사능 오염 확산도 수습되지 않고 있는 현실.”(@Happy11311)


일본정부와 도쿄전력이 지난 7월말 마침내 오염된 냉각수가 바다로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더 이상 은폐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는 일본산 수산물 반입에 대해서 걱정하고 있지만, 그보다 더 치명적인 상황이 곧 닥칠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작년 7월 독일 킬(Kiel) 해양연구소가 발표한 시뮬레이션 연구에 의하면, 후쿠시마 사고 직후 대기와 해양으로 방출된 방사능을 근거로 측정한 실험에서 4~5년 후에는 미국 서부해안까지, 10년 후에는 태평양 전체가 완전히 오염된다는 결론이 나왔다. 물론 방사능은 바닷물에 희석될 것이지만, 전체적인 해양 방사능 농도는 지금보다 2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 원자력 당국이 그동안 방사능 유출을 은폐해왔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이 유출 상황이 기약 없이 진행될 것을 감안한다면, 태평양은 머잖아 고농도 방사능 오염으로 죽음의 바다로 변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방사능 누출 사고가 발생했던 후쿠시마 제1원자력발전소 원자로 4호기의 건물 내부 (로이터 연합)


그러나 당장 가장 두려운 것은, 후쿠시마 제1원전 4호기의 운명이다. 지난번 대지진 때 일부 손상되고 현재 기울어진 채 버티고 있는 이 건물 수조(水槽)에는 사용후 핵연료봉 1500여개가 담겨있다. 전문가들은 만약 어떤 이유로든지 이 수조의 냉각 시스템이 작동 불능 상태로 빠지면, 북반구는 즉시 아마겟돈이 될 것임을 우려하고 있다. 지진학자들의 예측대로, 다시 대규모 지진이 후쿠시마 부근에서 발생한다면 우리에게 남은 것은 기도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불길한 얘기를 하자면 끝이 없다. 작년 5월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가 발표한 연구도 그렇다. 그 연구에 의하면, 향후 지구상에서 원자력 대사고 발생 확률은 10~20년에 1회라는 것이다. 이 예측이 맞고, 세계의 원자력 시스템이 이대로 간다면, 100년 안에 적어도 북반구는 거주 불가능한 불모의 공간으로 변할 것이 틀림없다.


후쿠시마 사태는 일본만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직면한 대재앙임이 분명하다. 원자력은 본래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망각하고 덤벼든 주제넘은 짓의 결과가 지금과 같은 속수무책의 상황이다. 아무리 몰라도 ‘괴담’ 운운할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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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이 아닌 중국인 두 명이 사망자로 파악됐다는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시아나 여객기 샌프란시스코 공항 착륙사고를 보도하면서 어느 종편 텔레비전 앵커가 했다는 ‘멘트’이다. 항공기 사고란 대개 대참사로 이어지기 쉽고, 항공여행은 현대인에게는 불가결한 이동수단이다. 따라서 항공기 사고는 폭발적인 뉴스가 되기 쉽다. 더욱이 이번에는 대규모 인명 피해는 면했지만 비행기가 불타고 대파되는 큰 사고였다. 그 와중에서 정신없이 보도 작업에 몰두하다 보면 멀쩡한 사람도 이성을 잃는 경우가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저 ‘멘트’는 너무도 난폭한 발언이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건 인간으로서 할 만한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는 10대의 꽃다운 소녀들이었다.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방송을 접한 많은 사람이 경악하고, 분개한 것은 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이 사건은 일회성의 단순한 방송 사고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당 방송사가 여론 무마용으로 내놓은 다음과 같은 해명을 보면 그 점이 더욱 확실해진다. “사망자 가운데 한국인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 입장에서는 다행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멘트였다. 하지만 생방송 중 매끄럽지 않게 진행한 점 사과드린다.”(채널A 7월7일자 보도자료) 이 설명에는 문제의 ‘멘트’가 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한 흔적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놀라운 것은, 사과할 것이 있다면 방송을 “매끄럽지 않게 진행한 점”에 있다는 사고방식이다. 즉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술적인 문제이지 도덕적·윤리적 문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해명 아닌 해명 속에는 왜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강력하게 암시돼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생각은 무엇보다 ‘우리 입장’이라는 말을 아무런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이 쓰고 있는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우리 입장’이라고 할 때, ‘우리’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가? 희생자의 죽음을 진실로 마음 아파하고 슬퍼하는데 꼭 희생자와 국적이 같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되어 있다. 물론 한국인이라면 한국인의 생사문제가, 중국인이라면 중국인의 생사문제가 우선적인 관심사가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이런 논법을 밀고 나가면, 같은 나라 사람 중에서도 동향인이나 동창생의 일은 내게 더욱 친근한 관심사가 될 수 있다. 내 친척, 내 친구, 내 가족에 이르면, 그냥 무조건 봐주고, 충성을 바치고, 호의를 베푸는 대상이 된다. 하기는 공자님도 아버지가 법을 어겼다고 아들이 고발하는 것은 문제라고 생각했고, <맹자>에는 짐승을 제물로 쓸 때도 늘 봐서 낯이 익은 놈보다는 낯선 놈을 쓰도록 배려하는 임금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혈연, 지연, 학연 등 개인적 인연에 따른 이러한 충성·호감의 이면에는 낯선 타자들에 대해서는 무관심 혹은 심지어 적대감이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좋은 사회, 좋은 삶을 진실로 바란다면, 이 점을 늘 잊지 말고 상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체로 거의 누구나 당연하게 여기는 이 현상은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실존적 한계일지라도, 자칫하면 사람 사이의 차별을 정당화하고, 나아가서는 야만적인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발전할 수 있는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사 이래 인간사회를 짓눌러온 온갖 종류의 차별은 기본적으로 여기에 연유한다고 할 수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끼리의 격심한 경쟁을 구조적으로 강제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이 차별을 극단적으로 심화·확대시켜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본주의와 ‘국익’ 논리가 결합되고, 그 결과로 식민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이 형성되어, 세계가 끝없이 파괴·유린되어 왔다는 것은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대로이다.


국익 논리에 의거한 극단적인 인간차별을 둘러싼 가장 치열했던 논쟁이 바로 16세기 스페인을 중심으로 전개된 이른바 ‘인디오 논쟁’이다. 일찍이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당도하여 발견한 것은 한마디로 지상낙원이었다. 뜻밖에도 거기에는 풍요로운 자연환경에서 지극히 평화롭게 살아가는 낯선 인간사회가 있었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황금과 노예와 토지를 대량 획득하기 위해서 그 지상낙원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전환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로부터 역사상 가장 야만적인 타자(他者) 박멸작전이 시작됐던 것이다. 그러나 백인들도 사람인지라 그들은 처참한 살육과 노예화의 희생자들이 자신들과 같은 인간이라는 사실이 꺼림칙했다. 그리하여 원주민은 ‘인간’이 아니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가톨릭 사제 라스-카사스를 비롯한 소수의 목소리가 이에 저항하여, 대논쟁이 전개됐던 것이다. 압도적인 대세는 인디오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쪽이었다. 그것이 스페인 사람들의 ‘국익’ 논리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500년이 지난 지금도 스페인에서는, 물론 일부이겠지만, 여전히 라스-카사스라는 이름은 국익을 해친 매국노 혹은 공적(公敵)으로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국익이라는 관념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벼랑 끝에 서있다. 이 위기상황은 예전처럼 국가적·민족적 단위에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여전히 자민족, 자국 중심의 배타적 이익 논리이다. 그러나 이 배타적인 논리의 장기적인 결과는 비참한 공멸일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국익 논리는 ‘악마의 논리’라고 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국익 관념에 붙들려 있는 한, 활로가 열리지 않을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폐색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지금 라틴아메리카가 가리키는 방향이다. 위키리크스 개설자 어산지에게 피신처를 제공한 데 이어서 남미국가는 지금 국제적인 미아가 된 에드워드 스노든에게 망명을 허가하겠다고 나섰다. 제국과의 갈등이 초래할 ‘국익’ 손상을 각오한 이 용기있는 행동은 모든 양심적인 인간의 존경을 받아 마땅하다고 할 수 있다.



김종철|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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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30년 전 미국이라는 나라에 난생처음 가서 대학원에 등록을 하고, 록펠러가 지어줬다는 건물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야간수업을 듣고 제일 늦게 방을 나서던 나는 전등을 끄고 나오기 위해서 스위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둘러봐도 스위치 비슷한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 강의 시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궁금해서 옆방에 가보았다. 거기도 스위치 같은 것은 없었다. 웬일일까? 나중에 들으니, 건물 전체가 그렇다는 것이다. 전기는 중앙변전소에서 통제하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밤낮없이 강의실이건 연구실이건 전기를 켜놓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황당하고도 충격적인 뉴스였다.


그러니까 미국에서는 전기란 공기 같은 것, 즉 건물 속에 들어가면 그냥 늘 있는 것이어서 의식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전기라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약자의 삶과 자연이 망가지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는 생활구조가 아니었다. 그동안 내가 한국에서 듣던 “협상 불가능한 미국식 생활방식”이란 결국 이런 것이었구나!


일찍이 국제문제 전문가 조지 캐넌은 “세계인구의 6.3%를 점하는 미국은 미국식 생활을 위해서 세계의 부 50%를 필요로 한다…미국이 윤리적인 외교를 추구한다는 것은 매우 순진한 생각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외국을 침략할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고 공언했다. 이 유명한 발언이 나온 것은 1948년이었다. 그 이후 역사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로이다.


‘미국식 생활방식’의 구체적인 진상을 목도하고, 나는 복잡한 상념에 빠져들었다. 오늘날 대학이나 학문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 터무니없는 미국식 생활을 합리화하고, 그것을 전 세계로 확산하려는 목적에 봉사하는 문화적 제도에 불과한 것이며, 대학 내 소수의 비판적인 학자·지식인들도 근본적으로는 ‘충성스러운 야당’과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들자 내가 미국에 무슨 공부를 왜 하러 왔는지 심히 모호해졌다.


마침 그때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형 핵무기를 서유럽 나토가맹국에 배치하려는 레이건 정부의 계획에 대항하여 격렬한 반핵운동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운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관련서 몇 권을 읽고, 상당한 계몽을 받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개안(開眼)을 경험한 것은 루돌프 바로라는 철학자의 발언 덕분이었다. 바로는 원래 동독의 공산주의자였지만, 반체제 혐의로 구금됐다가 서독으로 추방된 이후 녹색당 창설기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이 무렵 ‘절멸주의’라는 용어로써 현대문명이 이미 집단자살체제가 되었음을 명료하게 지적하고 있었다. 1983년 가을, 미국 시민단체의 초청으로 뉴욕을 방문한 그는 반핵시위대 앞에서 “우리가 핵무기를 반대하려면 먼저 뉴욕 시내를 질주하고 있는 저 수많은 자동차를 반대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좌파 진영 사이에서 이 발언은 즉각 격렬한 성토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바로가 제3세계 민중이 빈곤의 늪에서 벗어나와 현대적 문명생활을 누릴 권리를 부정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이 논쟁을 보면서 좌파의 앞날이 걱정되었다. 그들은 루돌프 바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보다 생명과 자연의 입장에서 보자면, 핵무기나 자동차나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았다. 실제로 좌파 진영 속에서 핵무기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큰 것에 비해 핵에너지 시스템(혹은 대규모 화력발전 시스템)을 반대하는 목소리는 늘 모기소리였다.


환경운동단체 회원들이 핵무기와 핵발전소 폐기를 요구하는 퍼포먼스 (경향DB)


‘미국식 생활방식’ 앞에서 절망을 느끼고 있던 내게 바로의 발언은 큰 위안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바로의 책들에 몰두했다. 그의 목소리는 통렬했다. “우리는 안전을 추구하되 무기를 버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화학물질을 쓰지 않는 보건위생을 추구해야 하고, 산업적 시스템 바깥에서 생계를 강구해야 하며, 땅과 숲의 보존을 위해서 짐승고기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생명의 적이며 사탄이다.” 요컨대 우리 개개인이 특별히 악한 동기가 없더라도, 오늘날의 거대 산업체제에 별 생각 없이 순응하는 생활 자체가 가공할 악행이라는 것이다.


최근 오랫동안 은폐됐던 엄청난 비리들이 드러나면서 원전 가동이 일부 중지되자 전력대란이 운위되고 있다. 이 기회에 일차적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나라 전력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밝혀내는 일일 것이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값싼 산업용 전기요금 체계, 그로 인한 극도로 몰상식한 에너지 낭비구조, 대기업과 깊게 유착된 국가권력에 의한 무책임한 에너지 정책 등을 철저히 캐묻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왜 두려워하는지 근본적으로 따져보는 일이다.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이 과연 전기 부족 상황인가? 우리는 지금과 같이 생명과 자연을 끊임없이 파괴하지 않고서는 한순간도 지탱할 수 없는 대규모 산업·소비 시스템이 과연 지속 가능하다고 믿는가?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기를 풍부히 쓰는 산업과 생활이 정말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마지막 철학적 물음은 1980년대 초 원전 도입 여부를 둘러싼 논쟁 중에서 덴마크 시민들이 던진 질문의 하나였다. 그런 근본적인 질문과 사회적 토론의 결과, 덴마크는 원전을 짓지 않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원래 인간생활에서 물자와 에너지를 흥청망청 소비하는 생활은 정상이 아니라 일탈이라고 해야 옳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장구한 인류사에서 ‘경제성장’ 시대는 찰나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문명비평가 루이스 멈포드는 고대 그리스가 자유와 자치에 입각하여 위대한 문명을 창조했던 기반에는 간소한 생활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에 의하면, “그리스 문화와 가난은 쌍둥이”였다.


일본 하코다테 야경 (경향DB)


생명에는 빛과 밝음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어둠과 그늘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늘과 어둠이 없으면 수면도 휴식도 취할 수 없다. 전기를 꺼야 밤하늘의 별들도, 북극성도 나타나게 마련이다. ‘미국식 생활방식’의 지배 밑에서 별을 잃고, 침로(針路)를 잃은 채 방황하는 이 정신적 빈곤 상황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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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고전적인 교양소설 <빌헬름마이스터의 수업시대>에서 괴테는, 인간다운 삶을 원한다면 날마다 몇 가지 일을 습관적으로 실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매일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시 한 편을 읽고, 훌륭한 그림을 적어도 하나는 보아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하루 중에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이치에 맞는 말 몇 마디’라는 말에 못지않게 흥미로운 것은 ‘가능하다면’이라는 유보적 표현이다. 즉, 괴테는 사람이 일상생활 속에서 ‘이치에 맞는 말’을 듣거나 말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다. 


괴테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18세기 독일사회의 ‘후진성’에 대해서 그가 치를 떨었다는 얘기가 된다. 원래 ‘교양’이라는 개념 자체가 어떤 점에서 독일사회의 후진성의 증표였다.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는 시민혁명을 통해서 근대적 문물제도를 확립해가며 세계사적 변혁의 선두에 서 있었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여전히 중세적 질서가 압도적이었고, 신흥 부르주아계급의 관심은 재산증식에 집중되어 보다 넓은 정치적·사회적 각성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자칫 대혼란을 초래할 혁명이 아닌 온건한 방식으로 ‘후진성’을 탈피해야 한다는 요구가 생겼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르주아계급의 지적·정신적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게 괴테를 비롯한 선각자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강조한 게 인간의 내면적 성장을 위한 자기교육, 즉 ‘교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배경이 무엇이든, ‘교양’의 중요한 척도로서 괴테가 ‘이치에 맞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꼽았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젊었을 적에 괴테의 이 구절을 처음 대했을 때 내 시선이 거기에 한참이나 머물러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괴테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것 같았다. 이것은 결코 옛날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우리 자신이 너무나 오랫동안 거짓말과 위선적 언어를 당연지사로 여기며 살아온 게 아닌가. 그리하여 늘 이치에 맞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거나 들어야 하는 상황에 익숙해졌고, 그 결과 마침내 거짓과 진실에 대한 감각조차 사라져버린 게 아닌가. 이러고서야 우리가 어떻게 존엄한 인격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을까. 괴테의 책을 읽으며 나는 그런 우울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그 이후 수십 년이 흘러 청년은 속절없이 늙은이로 변했다. 그러나 한스러운 것은, 적어도 우리 사회의 공적 언술공간에서 거짓언어와 부조리한 언어를 이제는 그만 들었으면 하는 평생의 소원이 내 생애 동안에 성취될 전망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진사회란 무엇보다 이치에 맞는 말이 통용되는 사회라는 괴테식의 생각이 옳다면, 한국사회가 후진성을 벗어날 날은 지금으로서는 아득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행을 저지른 자신의 측근들이 죗값을 치르기도 전에 특별사면을 단행한 임기말의 대통령이 자신의 재임 중에 ‘국격’이 높아졌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 천박한 자랑을 일삼고,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공약함으로써 대통령에 당선된 이가 자신의 공약이 가진 의미를 완전히 몰각하고 민주주의와 복지를 우습게 여기는 대표적인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를 태연히 중용하는 나라가 오늘의 한국사회이다.


그러나 가장 절망적인 것은 사법부가 조금도 이치에 맞지 않는 문장을 판결문이랍시고 내놓는 현실이다. 노회찬 의원에게 통신비밀보호법을 어겼다고 실형을 선고함으로써 국회의원직을 박탈한 대법원의 결정에 대하여 지금 많은 시민들이 분노하는 것은 직업적 법률가들이 걸핏하면 내세우는 소위 ‘법리’를 몰라서가 아니다. 법리라는 것도 결국은 ‘법의 이성’을 뜻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성적인 생각에 부합하는, 즉 이치에 맞는 논리여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뇌물을 주고받은 자의 죄는 묻지 않고, 뇌물을 받은 자들의 이름을 공개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까지 박탈하는 게 과연 정상적인 사법권력 행사라고 할 수 있는가.

(경향신문DB)


더욱이 그 뇌물 수수는 사사로운 개인 사이가 아니라 재벌과 검찰공무원 사이에 진행되어 국가의 법질서 자체를 근원적으로 무너뜨릴 수 있는 중대한 범죄행위에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도 대법원은 “(뇌물 수수행위가 발생한 것은) 8년 전의 일로서, 공개하지 않으면 공익에 중대한 침해가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해 비상한 공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오늘날 삼성이라는 거대재벌이 음으로 양으로 이 나라의 권력기관, 언론, 학계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며, 공무원의 정당한 직무수행과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마비시키고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사법적 정의에 대한 최종적 판단을 내리는 기관만은 그게 “8년 전의 일이기 때문에 별로 문제될 게 없다”라는 식의 경악할 만큼 나이브한 엉터리 논리를 펴고 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사법부의 국회 경시 태도이다. 현행 통신비밀보호법은 도청 금지라는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유죄일 경우 벌금형은 없고 징역형만 있다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여야의원 152명은, 이 법률의 개정을 준비하며, 노회찬 의원에 대한 판결을 늦춰 줄 것을 대법원에 요청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것은 삼권분립의 본의가 무엇인지 착각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삼권분립은 국가권력의 집중에 의한 독재를 방지하기 위한 제도이지 합리적인 설명 없이 민중이 선출한 국회의원을 추방해도 좋다는 제도가 아닌 것이다.


굳이 선후를 따진다면, 민의와 보다 직결된 국회야말로 국권의 최고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역사가 제일 오래된 영국에서 대법원이 설치된 것은 2009년이었다. 그때까지 최고재판소 기능은 국회(상원)가 대행해왔던 것이다. 민주정치란 철저히 의회중심이어야 한다는 철학이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부터 영국 대법원은 모든 판결을 유튜브로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공화주의의 원리란 사익보다 공익을 중시하는 시민적 덕(德), 즉 자유인의 정신임을 갈파했다. 자유인의 언어에는 원래 무리가 없다. 거짓언어는 결국 노예(혹은 노예근성에 젖은 자)들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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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지금 세계는 전대미문의 복합적 위기상황에 처해 있다. 기후변화와 환경위기, 석유 및 각종 자원이 값싸고 풍부하게 공급되던 시대의 종식, 광범위한 농경지 축소 혹은 사막화, 근대적 금융통화제도의 파탄과 세계 동시 채무위기, 사회적 격차의 심화, 걷잡을 수 없는 실업률과 범죄의 증가 등등, 인간다운 삶의 지속을 근원적으로 위협하는 사태 앞에서 인류사회는 현재 속수무책이다. 정치지도자들은 자신도 믿지 않는 헛된 공약을 남발하며 임시미봉책에 골몰할 뿐, 미래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장기적인 비전을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이 무능력의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답한다면, 아직도 그들이 성장 패러다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져보면, 오늘의 이 위기상황은 유한한 지구상에서 무한한 진보의 추구라는 맹목적인 성장 논리가 초래한 필연적인 결과이다. 제아무리 뛰어난 기술적 재간이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이 근본적으로 지구가 제공하는 한정된 자원과 생태적 조건을 벗어나서 영위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 근본적 제약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성장이라는 주문(呪文)을 무작정 외며 위기를 돌파하려 해봤자 헛일이라는 것을 아직도 세계의 다수 권력 엘리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2010년 시정연설에서 “지금부터 세계에서 창출되는 고용은 전부 미국 내에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혹은 “미국경제의 성장에 공헌하지 않는 외국인 젊은이들을 미국 대학에서 교육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따위 난폭한 발언을 주저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경제성장에의 뿌리 깊은 신앙 때문이다. 그러나 오바마식의 접근방식이 일시적으로는 몰라도 장기적인 성공을 거둘 확률은 제로라고 우리는 단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위기의 원인을 가지고 위기를 해결하려는 어리석고 무모한 방식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경향신문DB


여전히 낡은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 정치세력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이 개탄스럽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주목할 것은 세계 곳곳에서 대안적 방식을 찾는 진지한 움직임이 근래에 한층 활발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유럽에서는 유로권 경제(나아가 글로벌 경제)의 사실상 파산을 진작부터 예견하면서 상당수의 지식인·활동가들이 탈성장 사회와 새로운 경제논리를 탐색하고 논의하는 장을 계속적으로 확대해왔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일본에서도 눈에 띄게 이런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정치는 여전히 미망 속을 헤매고 있지만, 사회 저변에서는 이제부터는 성장 확대가 아니라 축소균형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이겠지만, 지난 1년간 일본 아마존 서점에서 가장 많이 팔린 서적의 제목도 ‘작은 상업의 권유’였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 중에서도 가장 괄목할 곳은 아마도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일 듯싶다. 예를 들어, 에콰도르와 볼리비아가 특히 그렇다. 이 두 나라는 룰라의 브라질이나 차베스의 베네수엘라가 국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아온 것에 가려져 왔지만, 자본주의 이후의 삶의 대안적인 모델 제시라는 면에서 매우 모범적인 개혁을 착실히 수행해왔다. 그 가운데서 특기할 것은 각기 2005년과 2006년에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된 이후 ‘좋은 삶’을 강조하고, 근대국가로서는 최초로 ‘자연의 권리’를 명확히 규정한 새로운 헌법 제정이다. 여기서 ‘좋은 삶’이란 종래의 상투적 행복관, 즉 풍부한 재화의 소유나 소비를 기반으로 한 개인주의적 삶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공동체 속의 조화로운 관계를 중시하는 검소한 삶을 뜻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두 나라의 신헌법에서 말하는 공동체란 인간공동체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자연만물이 어울려 사는 생명공동체 전체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좋은 삶’이란 인간끼리의 관계를 넘어서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근본 인식이 이 헌법에 내포돼 있는 것이다. 신헌법에서 ‘자연의 권리’를 명시해 국민들이 자연의 혜택을 누리는 대신에 자연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신헌법에 명시된 ‘자연의 권리’라는 사상은 기본적으로 안데스 전통문화의 세계관·자연관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안데스 토착문화는 원래 파차마마(어머니 대지)에의 끝없는 공경심에 기초한 문화였다. 안데스의 농민은 대지를 단순히 땅이나 흙덩어리로 생각하지 않았다. 대지는 만물의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돌도, 흙도, 온갖 식물도, 물도, 안개도, 바람도, 해와 달과 별도 모두 자신들과 함께 사는 식구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자연만물을 인격화해 ‘그이’ 혹은 ‘그이들’이라고 불러왔다. 이러한 근원적인 생명 옹호 사상과 지혜로운 삶의 태도를 바탕으로 그들은 생태적 악조건 속에서도 놀랄 만큼 다양한 작물을 만년 이상 길러왔다. 세계 전역에서 생물종이 급속히 소멸되고 있는 지금도 안데스 농가에서는 평균 50종 이상의 감자를 수확하고 있다.


결국 에콰도르와 볼리비아의 신헌법이 언급하고 있는 ‘좋은 삶’이란 서구인들에게 침략을 당하고 식민화되기 이전의 토착문화에 내포돼 있던 근원적인 생명가치의 복구를 통해 지금 자본주의 이후의 삶에 대한 창조적인 비전을 제시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세계는 자유, 평등, 우애를 늘 말해왔지만, 본시 그것은 자연과 사회적 약자를 원천적으로 배척·차별하는 구조 위에서만 작동 가능한 자본주의 논리로는 절대로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일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안데스의 이 두 나라 신헌법은 세계사의 오래된 숙제를 푸는 해법을 담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지구의 다른쪽에서는 이처럼 중대한 정신적 각성에 따라 진지한 정치적 실험과 사회적 개혁이 시도되고 있는 동안에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공동체의 가장 값진 보물 중 보물인 4대강과 그 주변 농경지를 철저히 파괴하고 유린하는 광태가 벌어졌다. 게다가 그 광란은 ‘녹색성장’이라는 거짓이름 밑에서 정권의 최대 업적으로 국내외에 널리 선전되었다. 부끄러운 것은 둘째 치고, 이 광란의 후유증으로 ‘좋은 삶’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반이 영구히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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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예상 못한 것은 아니지만, 서글픈 선거 결과이다. 어차피 합법적인 경쟁이니만큼 비록 내가 원했던 결과가 아닐지라도 평정심을 잃지 말고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게 아니다. 하기는 또 누가 아는가.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게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났건만 여전히 울적하고, 허망한 기분을 떨쳐버리기가 쉽지 않다. 일도 제대로 손에 잡히지 않는다. 왜 이럴까. 5년 전에는 보나마나 뻔한 결말이었기 때문인지 이런 기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는 실패한 정권은 심판받는 게 대의민주주의의 기본원리에 부합한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은 성격이 전혀 다른 선거였다. 이번 선거의 독특한 성격은,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한, 박정희 시대에 대한 국민적 평가가 암묵리에 핵심적인 이슈가 된 선거라는 점이었다. 그리하여 군사독재체제에서 벗어난 지 25년이 경과한 지금 과연 다수 한국인이 어떤 가치를 보다 중하게 여기는지 명확히 판별할 기회가 이번에 주어졌던 셈이다.


(경향신문DB)


박근혜를 박정희와 연결시키는 것에 대하여 ‘연좌제’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오늘날 박근혜라는 정치지도자가 존재하는 것은 순전히 그의 혈통 때문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알고, 본인 자신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이다. 실제로 그가 15년 동안 국회의원을 지냈다고 하지만, 큰 정치가다운 행동을 보여준 바도 없고, 국가 중대사에 관련하여 민중으로부터 찬양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적극적인 관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대부분 그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데 근거한 것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선거에서는 공약 자체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공약의 신뢰성과 진정성이다. 그것을 판단하자면, 후보자의 과거 경력과 언행을 되돌아보는 수밖에 없다. 요컨대 그가 내세우는 공약과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삶이 얼마나 조화되는 것이냐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선거의 결과는 다수 유권자들이 공약도, 공약의 신뢰성도, 고려하지 않고 표를 찍었음이 뚜렷한 정황이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선거 후 나온 여러 분석·논평을 종합해보면, 여야 공히 주요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민주화’는 사실상 선거에 별 영향을 주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결국 ‘민주주의’가 아니라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지금 한국인 대다수는 생각하고 있음이 드러난 셈이다. 선거 막판에 “다시 한번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가 먹혀들 것이라고 판단한 여당 측의 계산은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 세계경제는 작동불능 상태에 빠진 자본주의시스템이 언제 회복될지, 혹은 회복이 되기나 할 것인지 심히 불확실한 상황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경제가 박정희 시대의 경제논리로 대응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은 길게 말할 필요가 없다. 현재의 경제위기는 생산력 부족이 아니라 오히려 과잉생산으로 인한 위기이다. 그리고 부의 집중, 사회적 격차, 구매력 부족이 이 위기를 초래한 주요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경제가 아니라 더 많은 민주주의라고 생각해야 옳다.


그러나 여당 측은 말할 것이 없지만, 민주개혁 세력을 대변한다는 야당 후보 측이 선거 기간 중 이 점을 유권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서 과연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니, 야당을 포함하여 현재의 소위 민주개혁 진영이 얼마나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는지도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민주화 운동을 했고, 민주화에 성공했다는 이야기를 자꾸 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이다. 국민들 태반이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현실에서 “왜 민주주의가 아니면 안되는가”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견고한 논리와 사상과 실천이 없다면 민주주의의 퇴행은 불가피하다고 할 수밖에 있다. 


박정희 시대가 아무리 심한 억압과 인권유린의 시대였다 할지라도, 자신이나 가족·친지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다면 그것을 심각하게 느끼지 않는 게 보통사람들의 심리와 정서이다. 더욱이 한국은 예나 지금이나 어렸을 때부터 토론다운 토론을 통해 정치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 자랄 수 있는 일상적 공간이 거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주류언론과 대학의 타락은 극에 이르렀고, 제도권 교육에서 사실상 교육이 사라진 지는 오래되었다. 


돌아가신 리영희 선생은 군사독재 시대를 한마디로 “숨을 쉴 수가 없었던” 시대라고 했다. 박정희 시대는 인간다운 존엄성과 상식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옥이었다. 박정희는 근대 국민국가의 기본 원리, 즉 동등한 권리와 자격을 가진 ‘우리들 중의 1명’으로서 선출되어 권력을 위임받은 지도자가 아니었다. 박정희가 선포한 ‘유신정치’의 ‘유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에서 따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유신은 영어로 Restoration, 즉 ‘왕정복고’로 번역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 박정희 자신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사실상 왕이었고, 국민을 시혜의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러기에 그는 한번도 국민 개개인의 인격과 자존심을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행복한 돼지’이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의 국민에서 배제되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은, 그 박정희 시대에 꺾이지 않는 인간정신의 숭고함을 대변했던 시인 김지하가 선거 동안 보여준 행태이다. 요약하자면 “후천개벽의 시대에는 여자가 왕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박근혜를 지지한다”는 기묘한 논리로 그는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도왔다. 실제로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를 떠나서 충격적이었다. 며칠 후에는 ‘조선일보’를 통해서 온당한 글이라고는 할 수 없는 궤변과 독설과 욕설로 옛 민주화의 동지이기도 했던 선배들을 공격함으로써 그의 논리가 변절도, 전향도 아닌 지적·정신적 파탄의 소산임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것도 엄밀히 보면 특정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박정희 시대를 극복해내지 못한, 우리들 자신의 정신적·사상적 빈곤을 상징적으로 집약한 서글픈 사건이었다.

김지하 시인 (경향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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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번개시장에는 번개가 없고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고


국화빵에는 국화가 없고


정치판에는 정치가 없네


이것은 작고한 시인 이선관이 쓴 ‘없다’라는 시의 전문이다. 절로 웃음이 나는 유머러스한 작품이지만, 그러나 생각해보면 매우 심각한 ‘진실’을 내포한 은유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선관의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는 비근한 일상적 경험이나 하찮은 사물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투박한 언어로 언급하다가 의외의 순간 시대와 사회의 근본 모순과 어둠을 비수처럼 날카롭게 폭로하는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해마다 성탄절이 다가오면 가로수에 전등을 달아 거리를 화려하게 장식하는 장면 앞에서 시인은 돌연 나무들의 편이 되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시여/ 당신 아들 탄생도 좋지만/ 제발 잠 좀 자게 해주십시오.” 구세주의 탄생을 기린다면서 정작 나무라는 피조물에 대한 배려는 털끝만큼도 없는, “말 따로, 행동 따로”의 타락한 현실에 대한 이보다 더 간결하고 힘찬 항의의 목소리가 있을까.


(경향신문DB)


이선관은 아직 세상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시인이다. 그러나 그의 시를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전혀 시적이라고 할 수 없는 투박한 언어를 통해서 뜻밖의 정신적 고양 혹은 개안을 경험하는 순간이 허다하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 좋은 시, 좋은 문학이란 치졸한 자기현시나 감상적인 말의 잔치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소박하고 단순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 시인이 평생 뇌성마비를 앓았다는 사실, 극빈 속에서 홀로 자식을 키우며 실로 고달픈 나날을 지냈다는 사실, 평생 출생지를 벗어나 본 적 없이 ‘협소한’ 생을 보냈다는 사실 등등을 알면 그의 시와 삶에 대해 경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이선관은 이미 산업화 초기인 1970년대 중반에 마산 앞바다의 생태적 죽음을 예리하게 묘사한 시 ‘독수대’를 발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환경시인’이 되었다. 비록 육신은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시야는 일찍부터 세계적인 보편성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선관의 생의 궤적을 살펴보면, 그가 지녔던 이 ‘세계적 시야’의 원점은 다름 아닌 4·19혁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때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던 그는 4·19를 촉발시키는 데 기여한 3·15 마산의거에서 데모대에 씩씩하게 합류했고, 그것은 이후 그가 민주주의와 통일, 평화, 환경 등과 관련하여 한국과 세계의 정치현실에 부단히 치열한 관심을 갖고 다가가는 사색의 원점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시대의 모순과 사회적 정의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그의 아들의 증언에 의하면, 1987년 6월 시위 도중 최루탄을 맞은 연세대 학생 이한열의 사망소식을 듣자 저녁을 먹다가 시인은 그 자리에서 마치 아이처럼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공공심은 지식인이 갖춰야 할 기본적 덕목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이 공공심이 시인에게는 철저히 육화된 것이 아닌 한 무의미한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좋은 시는 궁극적으로 타자, 특히 약자의 운명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는 거의 본능적인 공감능력에 달려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선관은 우리 시대의 탁발한 시인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는 “씨알 한 톨/ 흙 알갱이 하나/ 물 한 방울/ 공기 한 모금/ 햇빛 한 뼘”의 소중함을 설령 우리가 “치매에 걸리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에게는 “손녀가 할아버지 등을 긁어 준다든지/ 갓난애가 어머니의 젖꼭지를 빤다든지/ 할머니가 손자 엉덩이를 툭툭 친다든지/ 지어미가 지아비의 발을 씻어준다든지/ 사랑하는 연인끼리 입맞춤을 한다든지/ 이쪽 사람과 위쪽 사람이/ 악수를 오래도록” 하는 것보다 더 행복한 삶이 있을 수 없다.


행복한 삶에 대한 그리움이 강렬한 것은 이 세상에는 가난하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얘기를 할 때도 이선관은 감상에 젖거나 수다를 떨지 않는다. 그는 그냥 “가정집마다 한두 대의 전화/ 이천만 대 이상의 휴대폰/ 그러나/ 하루에 전화 한 통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무뚝뚝한 말이지만, 그 속에 오히려 측량할 수 없는 연민의 감정이 담겨 있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모든 생명 가진 것, 특히 버림받거나 소외된 약자의 존재에 대한 시인의 관심은 당연히 정의로운 정치에의 갈망으로 연결되고, 그 결과는 흔히 위선과 거짓의 정치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역겨움, 증오감을 표출하게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 곳곳에서는/ 칠 초마다 어린이가 한 명씩 굶어죽는데/ 서울 부자동네 국회의원이 단식을 하신단다/ 제발 웃기는 짓 좀 그만 하시라.”


시인 이선관이 간경화로 숨을 거둔 지 7년이 흘렀다. 그를 기리는 추모행사가 해마다 가을이면 마산의 창동에서 열리고 있다. 11월 초 나는 시인과의 개인적 인연도 있어서 거기 참석했다. 행사 전 창동시장 일대를 천천히 둘러보았다. 실은 그곳은 어린 시절 내가 어머니를 따라 많은 시간을 보낸 전통시장이기도 하다. 실로 몇십년 만에 둘러보다가 나는 비통한 심정을 억제할 수 없었다. 시장에는 그 옛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전혀 없었다. 이게 시장인가 싶을 만큼 썰렁하기만 했다. 전쟁 직후였지만, 내 어린 시절의 이 시장은 언제나 사람이 붐비고, 설명하기 어려운 자유와 풍요와 명랑성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장의 외형은 지붕이 설치돼 있는 등 예전에 비할 바 없이 현대화되었으나 전체 분위기는 누추함과 빈곤이 지배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치명적 질환은 부의 양극화임에 틀림없다. 이 현상은 방치하면 곧 사회 전체의 공멸을 초래할 것이다. 그러기에 현재 사실상 이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여당 대통령 후보도 입만 열면 ‘국민행복’과 서민생활의 안정에 헌신하겠노라고 공언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골목상권과 전통시장을 최소한이나마 보호하려는 법안의 국회 상정이 여당에 의해 좌절되고 있는 것은 왜일까. 정치지도자의 “말 따로, 행동 따로”라는 악습이 박멸되지 않는 한, “정치판에 정치가 없는” 괴기스러운 상황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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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웃기는 소리지만, 예순을 넘긴 이 나이에도 군복차림에다가 군모를 쓰고 있는 꿈을 꾸다가 놀라서 깨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젊었을 적에 특별히 험한 군대생활을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악몽’이 아직 따라다니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출생 이후 내 최초의 기억은 대개 6·25 전란과 관계되어 있다. 남해의 어떤 섬 해변에서 굴비처럼 철사에 묶여진 사람들의 시체가 떠밀려 와 있는 기괴한 모습을 본 기억, 그리고 피란에서 돌아온 뒤에도 밤만 되면 어딘가에서 터지는 포탄의 굉음에 짓눌려 지낸 기억 따위가 그렇다. 그러나 당시 네다섯 살짜리가 겪은 이 단편적인 장면의 의미를 짐작이나마 할 수 있게 된 것은 나중에 커서 어른들의 이야기를 듣고, 책을 보면서였다. 보도연맹이니 빨치산이니 하는 것을 어린아이가 알 도리는 없었다. 


아이 때는 아무리 끔찍한 장면일지라도 그 의미를 모르는 이상, 그게 내면화되기는 어려운지 모른다. 실제로 내게 훨씬 큰 상처가 된 것은 좀 더 커서 고등학교 입학 후의 경험이었다. 그해 초여름은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그래서 어느 날 1학년인 우리들이 농촌 돕기에 나섰다. 우리는 각자 양동이 따위를 들고 걸어가고 있었는데, 도중에 난데없이 출현한 지프에서 뚱뚱한 육군장교가 내렸다. 그는 우리들의 선생님을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지휘봉으로 마구 구타를 하는 게 아닌가. 나중에 듣기로는, 학생들의 어지러운 대열이 못마땅했다는 것이다.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지역 계엄사령부 지휘관이었다. 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을 중단시킨 군인들의 명분은 ‘국가재건’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스승을 구타하는 방법으로 나라를 새로이 세우고자 했다. 


군사독재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강압적 철권통치 때문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몰상식한 짓을 보고 살아야 하는 고통이 더 컸다. 예를 들면, 해마다 사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하는 대통령을 영접한답시고 길가에 늘어선 개나리들을 억지로 활짝 꽃피우기 위해서 몇 달 전부터 병사들을 동원하여 ‘개나리 조기개화(早期開花) 프로젝트’를 행하는 것을 나는 군대시절 내내 보아야 했다.


이 비슷한 일은 비일비재했다. 허위보고, 겉치레, 표리부동한 위선적 언행은 사회 전체에 구조화되어 있었다. 살아남으려면 누구든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몰상식과 독재가 결합된 대표적인 만행이 ‘장발 단속’이었다. 멀쩡한 젊은이들의 머리칼이 국가기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길거리에서 함부로 잘리는 터무니없는 짓이 오래 계속되었다. 아무 법적 근거도 없이 단지 최고권력자 개인의 취향에 거슬린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장발 단속 (경향신문DB)


1970년대 중반 내가 재직하고 있던 어느 지방대학에서 학생들의 부탁으로 저명한 작가 한 분을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한 적이 있다. 이 나라 최고급 작가로 내가 존경하고 있던 작가였다. 그분 특유의 해박하고 진지한 강연이 끝난 뒤 우리는 저녁식사를 위해 시내로 나왔다. 그런데 같이 걷고 있던 분이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살펴보니 길 건너편에서 경찰의 ‘닭장차’에 막 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분은 몇 해 동안 미국에 머물다가 막 귀국했기 때문인지 장발인데다가 뒷모습만 보면 청년 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필 그 시각 시내 중심가를 급습한 장발단속반에 걸려든 것이다.


잠시 멍해 있다가 나는 다급히 경찰관들에게 쫓아가 간곡한 어조로 설명했다. 그리하여 그분을 ‘닭장’으로부터 가까스로 구출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인근 식당으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우리는 밥을 먹지 못했다. 작가는 침묵 속에서 말할 수 없는 모욕감과 수치심으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되돌아보면, 박정희 시대는 실로 누추하고 야만적인 시대였다. 작가는 불온한 글로 탄압을 받거나 감옥에 갈 수도 있다. 그것은 작가로서 명예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나라 최고급의 작가가 장발 단속에 걸려 ‘닭장차’에 실린다는 이 기막히게 누추한 코미디는 대체 무엇인가. 작가·예술가에게 이보다 더 야만적인 형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날 일은 어쩌면 ‘사소한’ 사건일지 모르지만, 나는 그것은 박정희 시대의 본질을 집약하는 극히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박정희 시대란 영웅의 시대도, 비극의 시대도 아니었다. 비극이란 원래 위대한 정신의 위대한 몰락에 관한 드라마이다. 박정희 시대는 단지 천박하고 저열한 정신이 지배하는 시대였을 뿐이다.


박정희는 농촌을 살린다면서 ‘잘 살아보세’라는 유치한 노래를 밤낮으로 틀어놓고 농민들을 바보나 어린애처럼 취급하고, 토착문화를 가차없이 파괴함으로써 지속가능한 삶의 근본 토대를 급속히 해체시켰다. 박정희와 그 추종자들은 이 땅에 면면히 전승돼온 선인들의 지혜와 삶의 기술, 사회적 관계망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하며 그것을 ‘경제발전’이라고 불렀다. ‘경제발전’이라고 하면 모든 게 허용되는 사회, 역사도 문화도 전통도 헌신짝처럼 내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사회, 그리하여 깊이도 영혼도 없는 사회가 이 시대를 통해서 굳건히 정립된 것이다.


1979년 10월 새벽, 대통령의 ‘유고’ 소식을 들었다. 문득 옛날 우리 선생님이 군인한테 폭행당하는 것을 본 이후, 나는 한순간도 자유인으로 산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군대시절은 물론, 대학 선생이 되고 난 뒤에도 끊임없이 감시받고 있다는 느낌에 짓눌려 살았고, 글을 쓸 때도, 글이 발표되고 나서도 늘 불안했다. 그런 비겁한 나 자신이 혐오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제는 해방이다”--독재자 박정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 우리들은 종일 들떠 있었다. 


요즘 젊은이들과 얘기를 해보면, 그들이 박정희 시대가 어떤 시대였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언젠가부터 이 나라에서 사실상 역사교육은 사라졌다. 설령 역사를 배운다 할지라도 박정희 시대의 한국 사회 전체가 거대한 수용소였다는 사실을 그들이 체감할 리가 없을 것이다. 당대 최고의 작가가 어떤 치욕에 노출되던 시대였는지, 그것을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과 같다. (위에서 언급한 작가는 지금 생존 중이다. 혹시 이 글을 보더라도 용서해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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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