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대선이 코앞에 닥쳤는데도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사람들의 포부와 이상, 그리고 그 실현 방안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발언을 아직 들을 수 없다. 참으로 답답하다. 물론 그들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신기하게도 여야 가릴 것 없이 경제민주화를 말하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들먹이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에서 이러한 원론 수준의 이야기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또 누구든 듣기 좋아할 만한 언설일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공허한 이야기이다.


하기는 찰나적인 대중적 인기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극장정치’의 시대에 시대상황을 정확히 읽고 그것을 설득력 있는 정치적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식견과 능력을 갖춘 정치지도자를 기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지 모른다. 지금 우리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것은 매스미디어의 주의를 끌기 위한 갖가지 수준 낮은 쇼와 이벤트, 저열한 정치적 책략일 뿐이다. 엄청난 비용과 사회적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왜 선거를 해야 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나라 안팎은 전대미문의 심각한 복합적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지만, 이 위기는 결국 정치의 열화(劣化) 현상에 연결돼 있음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폐부를 찌르는 뛰어난 정치연설을 들어본 지도 까마득하다. 물론 정치가 늘 진지하고 엄숙한 것일 필요는 없다. 엄숙주의는 권위주의의 소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가 대중에게 보다 친근한 것이 된다는 것과 정치의 천박화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대중과의 친밀한 ‘소통’을 위한답시고 실제로 행해지는 정치적 행태는 대부분 대중을 즉자적인 욕망 충족에만 매달린 근시안적인 존재, 즉 유아나 백치처럼 취급하기 일쑤이다. 이런 식으로는 나라의 장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대중의 정치적 교양이 질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간단히 답할 수 없는 문제지만, 나는 지금과 같은 정치의 열화 현상이 초래된 원인은 일차적으로 이 나라 ‘엘리트들’--좌우를 불문하고--의 상상력의 빈곤, 혹은 정신적 왜소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지금 한창 얘기되고 있는 ‘경제민주화’라는 것만 해도 그렇다. 경제민주화란 시대상황으로 볼 때 결코 더는 미룰 수 없는 절박한 명제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지금 그 어떤 진영으로부터도 경제민주화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실현될 수 있는지 명쾌한 설명과 실현 방안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간단히 말하면, 경제민주화란 극단적인 부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생긴 개념이다. 지금과 같은 극심한 부의 편중이 더 계속된다면 사회적 안정성이 파괴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은 특권 계층 자신의 존립기반도 허물어질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그러므로 경제민주화란 무엇보다 경제적 평등화를 뜻하는 개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경제적 평등화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부분적인 땜질이나 미온적인 대책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사실이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적어도 해방 공간에서 행해진 토지개혁과 유사한 수준의 과감한 개혁이 아니면 안될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토지개혁보다도 더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은 그동안 우리의 삶을 지탱해온 온갖 시스템의 근본적 전제였던 ‘경제성장’이 더 이상--항구적으로--계속될 수 없는 시대가 바야흐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성장시대의 종언’이 뜻하는 궁극적인 의미를 조금이라도 깊이 생각한다면, 중앙집중적 거대 금융 및 산업시스템의 끊임없는 확대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생활방식, 그리고 그 방식에 의존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부추기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육 등 온갖 제도와 관행이 근본적으로 탈바꿈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에 극히 자연스럽게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사회가 문명의 존립방식 자체의 전환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중대한 과제에 대응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결국은 이 전환이라는 과제도 정치적 합의와 결정을 거쳐야 할 것인데, 지금처럼 질 낮은 정치로써 어떻게 이 사활적인 문제에 대처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사회에 지금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말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적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들 가운데 ‘성장 없는 시대’를 고려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들 중 진보적이라는 이들도 결국은 성장 논리에 고착되어, 새로운 성장정책으로 가령 우주항공, 신소재, 첨단 제약의료 분야 등 혁신기술 개발에 투자해야 할 필요성을 논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혁신기술 개발에 드는 막대한 비용 때문에라도 재벌을 ‘활용’해야 한다는 논리도 나오고 있다. 


이 시대착오적인 성장 논리로부터의 탈각을 위해서도 지금 절실한 것은 과감한 상상력이다. 오늘날 우리의 상상력이나 정신력의 빈약함은 멀리 갈 것도 없이 제헌헌법의 ‘이익균점권’ 조항을 돌아보면 금방 느낄 수 있다. 제헌헌법이 외국의 헌법을 졸속으로 베낀 것일지 모른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만, 적어도 자본과 노동간의 공평한 관계를 규정한 ‘이익균점권’이라는 조항은 국회에서 장시간에 걸친 격론을 통해서 성립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제헌헌법 제18조 제2항의 이 조항은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낸 전진한(錢鎭漢) 등에 의해 발의되었다. 전진한에 의하면, 노동자는 ‘노력’을 출자한 자본가이기도 하기 때문에 ‘돈’을 출자한 자본가와 이윤을 균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권리였다. 전진한은 “노동을 상품시하여 자본에 예속시키는 것은 고루한 사상”임을 역설했다. 그러니까 이익균점권의 논리는 오늘날 재벌과의 협력을 운위하면서 결국은 재벌의 눈치를 보는 왜소한 자세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정신적 강인함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거수경례하는 박정희 대통령 (경향신문DB)


실제로 ‘이익균점권’ 조항이 현실에서 실천되었는지 여부는 일단 별개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60년 전 선인들의 당당한 정신과 자세에 비해서 우리들이 지금 한없이 초라한 몰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사문화된 것이었음에도, ‘이익균점권’ 조항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헌법에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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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옛 중국의 사회적 위계질서는 엄격했다. 수많은 백성 위에 관료가 있었고, 관료조직의 정점에 대신(大臣), 그리고 그 위에는 말할 것도 없이 황제가 존재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황제 위에 또 누군가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한 존재를 후세인들은 일민(逸民)이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는 황제의 권력 바깥에 있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원래 군주의 권력행사는 신하를 자처하는 자들의 협력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다. ‘일민’이란 말하자면 그 신하됨을 거부한 인간이었다. 그럼으로써 그는 자신의 인간적 존엄을 지키는 것이 가능했으나 동시에 온갖 시련과 불이익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중국 역사상 대표적인 ‘일민’은 아마 시인 도연명(陶淵明)일지도 모른다. 그는 동진(東晋) 사람으로 지방 여러 곳에서 관직생활을 하다가 41세에 사임하고 향리로 돌아가 평생 농사를 짓고 살기로 결심했다. 그때 그가 쓴 것이 “돌아가리라, 전원이 황폐해지고 있는 지금 내 어찌 아니 돌아갈 것인가”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왜 그런 결심을 했는지 묻는 사람에게 그는 “쌀 다섯 말 때문에 (상사에게) 허리 굽히기 싫어서”라고 답했다. 말하자면, 쌀 다섯 말이 봉급으로 주어지는 직장을 그만두고, 쌀을 직접 지어서 먹는 자유로운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향리라고는 하지만, 대대로 벼슬살이를 한 가문의 후손인 도연명에게 농사는 낯선 경험이었다. 따라서 그의 농사일은 서툴 수밖에 없었고, 항시 곤궁을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농사를 짓고 살다가 62세에 시 130편을 남기고 죽었다. 다작(多作)이 아니었던 것은 그가 단지 자연을 즐긴 음유시인이 아니라 무엇보다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몸소 노동해야 하는 농사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도연명이 택한 ‘일민’의 길은 한가로운 은둔자의 생활이 아니라 끝없는 고투의 삶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정작 임금 곁을 떠나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면서도 입으로는 늘 ‘귀향’을 말했던 수많은 시인묵객들의 관념적인 ‘탈속’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도연명이 속세를 초월한 인간이 아니라 정치적 현실에 예민했던 인간이었음을 명확히 지적한 것은 노신(魯迅)이었다. 노신은 완전히 초탈한 인간이라면 시를 쓸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노신의 생각으로는, “사귐도 어울림도 이제 모두 끊으리라/ 세상과 나는 어긋나기만 하니 다시 수레에 오른들 얻을 게 무엇이냐”라는 ‘귀거래사’의 구절에 이미 세상에 대한 도연명 자신의 ‘분노’와 ‘저항’이 내포되어 있었다. 동시에 거기에는 “고귀한 정신을 육신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지금까지의 생활을 청산하고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회복하겠다는 준엄한 윤리의식이 작용하고 있었다.


노신이 1500년 전의 시인 도연명에 각별히 주목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마 그 자신 불의(不義)한 세상 속에서 한 자루의 붓에 의지해 분투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지식인으로서의 강한 자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식인이란, 따져 보면, 자신의 역할이나 재능을 인정해주는 권력자·후견인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매우 불안한 존재이다. 현대사회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성공을 바란다면, 변덕스러운 대중의 취향을 무시할 수 없는 게 또한 모든 현대의 작가, 예술가, 철학자, 지식인들의 기본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아첨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권력자나 대중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살아남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게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지식인의 생존상황이다. 노신이 도연명에 관해 언급한 것은 그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심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의 작가·지식인으로서 좋은 삶, 혹은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을지에 대한 노신 자신의 고뇌가 담긴 언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 <이상호 기자 X파일>이라는 책을 읽었다. 2005년 7월에 MBC 방송을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삼성녹취록사건’이 보도되기까지의 전말이 세세히 기록된 일기책이다. 이 책에 의하면, 담당기자가 처음에 제보를 받고, 관련된 취재를 하고, 그것이 실제로 보도되기까지 10개월이 걸렸다. 왜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그리고 그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것을 해명하는 게 이 책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다.


‘삼성녹취록사건’이란, 간단히 말해, 이 나라 최대의 자본권력이 국가권력을 좌우해왔거나 하려고 해온 내막이 명확한 증거와 함께 폭로된 사건이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 근본적으로 금권정치라는 사실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삼성녹취록사건’이 보여준 것은 그 금권정치의 방식이 너무나 비열하고 음습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공공질서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민주주의를 뿌리로부터 훼손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상호 기자 X파일>을 보며 새삼 전율하는 것은 이보다 조금 다른 문제 때문이다. 즉, 지금 자본이 행사하는 영향력은 국가의 공권력뿐만 아니라 지식인 사회 전체에도 걸쳐 있다는 가공할 사실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언론자유가 보장되고, 노조위원장이 방송사 사장이 되어 있던 시절임에도, 이 중대한 사건이 보도되기까지 10개월이나 걸린 이유는 외부압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요인은 권력의 눈치를 보며 미리 자기검열을 하는 방송사 내부 분위기였다. 이 책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고군분투하는 기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장 괴로운 게 뭐냐면 본의 아니게 선후배, 동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상처를 준다는 것이었다. 


책을 읽는 동안 생각해봤다. 그 상황에서 나라면 어떠했을까. 나 역시 내 일상의 평온을 깨뜨리는 이상호 기자를 십중팔구 미워했을 것이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생애 말년에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용기’에 대해서 강의했다. 그는 진리를 말하는 데는 목숨을 걸 정도의 용기 혹은 적어도 남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손상시킬 각오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뒤집어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은 ‘진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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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일본이 달라지고 있다. 평소에 자기의사를 명확히 잘 표현하지 않는 일본인들이 데모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1960년 안보투쟁 이후 50년 동안 자취를 감췄던 대규모 항의집회가 지금 일본의 주요 도시들에서 가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물론 후쿠시마 원전사고 때문이다. 그러나 ‘사요나라 원전’이라는 슬로건 밑에서 진행되는 이 데모는 후쿠시마 사고 직후보다도 사고 1년이 넘은 지금 훨씬 더 강도 높게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다.


데모에 익숙한 한국인들의 감각으로는 일본의 데모가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또, 그동안 일본이라고 해서 가두에서 전혀 시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흔히 극우단체들에 의한 시대착오적인 일탈행동의 표출에 지나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양심적인 일본 지식인들 중에는 민주화 투쟁을 통해서 군사정권을 종식시킨 한국의 경우를 내심 부러워하며 콤플렉스를 느낀 사람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데모를 할 줄 아는 한국사회야말로 어떤 점에서 일본인들이 본받아야 할 선진사회였다.


 

일본 도쿄 시내 총리관저 앞에서 열린 탈원전 시위 (경향신문DB)



사실, 일본이 경제적으로는 대국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인권의식과 민주주의가 깊게 뿌리를 박은 성숙한 선진사회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나라로 존재해왔음이 분명하다. 말할 것도 없지만,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패전의 결과로 외부에서 주어진 선물이라는 측면이 강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근원적으로 한계가 명백한 민주주의였다. 일본이 식민지 침략과 전쟁 책임에 대해서 언제나 머뭇거리고, 아시아 이웃나라들과 선린관계를 유지하는 문제에서 늘 애매한 태도를 취해온 것은 무엇보다 그러한 한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손으로 민주주의를 만들지 못한 사회가 어른스럽게, 책임있게 행동한다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민주주의의 미성숙 혹은 취약성을 생각할 때, 결코 빠트릴 수 없는 것은 한때 ‘재팬 넘버원’이라고 자타가 공인한 경제적 번영일 것이다. 전후 일본사회에서 드물게 ‘불량정신’의 고귀함을 늘 역설했던 정치사상가 후지타 쇼조의 용어를 빌리면 일본 민주주의의 성장을 가로막아온 결정적 저해요인은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였다. 다시 말해서, 한국전쟁으로 인한 특수(特需)와 미국의 동아시아 냉전전략 덕분에 빠른 속도로 경제적 번영을 달성한 일본사회는 ‘안락’에 취했고, 그 ‘안락’의 유지를 위해서 국내외적 모순과 불의,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에 대해서 대체로 침묵하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습성이 굳어졌던 것이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나무젓가락 때문에 필리핀의 산들이 민둥산이 되고 있다는 극히 기초적인 사실도 생각하지 않았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후쿠시마 원전사고라는 대참사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다수 일본인은 자신들이 누려왔던--그러나 근년에 이르러 점점 멀어져가는--번영과 안락이 근본적으로 허구적 토대 위에 구축된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물론 일차적으로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데모는 원전 재가동을 허용하려는 정부 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강한 이의제기이다. 그래서 작년에 방사능이 대량 방출된 사고 이후 원전 54기가 전면적으로 가동 중단된 상황에서도 우려했던 것처럼 전력대란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정부가 국민의 이익보다 산업계와 보수언론의 의사를 더 중시한다는 비판적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이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원자력처럼 위험한 전력생산 시스템은 이제 그만두고 장기적으로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재생가능에너지 시스템을 구축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단순한 전력생산 시스템의 변경에 지금 일본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원전반대 데모 참가자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드러내는 의견이나 최근 일본에서 쏟아져 나오는 관련 자료와 문헌을 보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문제의 근원은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지금까지의 생활방식 그 자체임을 의식·무의식적으로 인지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일본에서 높은 판매부수를 기록하고 있는 <하산(下山)의 사상>이라는 책이 있다. 요컨대 일본사회가 끝없는 진보와 성장이라는 환상을 좇는 것을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성숙’ 사회를 지향할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이다. 근대국가 형성 초기부터 줄곧 계속된 부국강병 혹은 대국 지향 논리를 이제는 단념하고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공생의 삶이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는, 이 메시지는 따져보면 별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때는 근대일본의 ‘웅비’ 과정을 묘사한 유명한 소설 <언덕 위의 구름>에 열광했던 일본사회가 이제는 그 ‘웅비’가 결국 ‘후쿠시마’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다.


<언덕 위의 구름>에서 <하산의 사상>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는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일본의 변화를 가리켜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지난 7월17일 총리관저 앞에서 17만명의 데모 참가자들을 향해 세계적인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는 “알고 보면 시시한 것. 시시한 전기 때문에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아름다운 나라와 아이들의 미래를 망쳐야 하는가”라고 절규했다. 여기서 ‘시시한 전기’라는 말은 결코 간단한 표현이 아니다. 따져보면 그동안 일본을 포함한 이른바 선진 산업사회를 뒷받침해온 것은 한마디로 전기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전기를 ‘시시한’ 것이라고 통매(痛罵)한다는 것은 그 산업체제의 근원적인 허구와 비윤리성을 꿰뚫어보는 강인한 정신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비슷한 강인성을 드러내는 인상적인 예는 또 있다. 그것은 일찍이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생환한 후 근대국가의 야만적인 본성을 통절히 깨닫고 자주적 정신으로 자급 농사에 평생 전념해온 90세의 현역 농부 나카시마 다다시의 발언이다. 그는 최근 출판된 대담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대체에너지 따위를 말할 때가 아니다. 전력부족으로 산업이 후퇴하면 수출경쟁이 안되겠지만, 인력은 더 필요해지고, 그러면 실업자도, 취직난도 해소될 것이다. 그리고 에너지 부족으로 생활이 불편해지면 인류의 존속에 유리한 라이프스타일이 부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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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여당 대선 후보가 출마를 공식화하면서 ‘국민이 행복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선거용임을 감안하면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는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헛소리로 끝나게 될 말이라 할지라도 정치가가 선택하고 사용하는 언어에는 그 자신의 세계관이나 현실인식이 얼마간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기 집권의 가능성이 높은 유력 후보가 ‘국민의 행복’을 언급한 것은 어쨌든 다행스럽다. 자살률이 세계 최고 수준을 기록하고, 국민의 80%가 불행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절망적 현실을 적어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발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행복’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단지 미래의 일로 약속만 할 게 아니라 집권을 하기 전이라도 지금 당장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자신을 지지하는 확고부동한 유권자를 30% 이상 확보하고 있는 여당 정치지도자는 그 자체로 이미 강력한 권력자이다. 그런데도 이 지도자는 ‘국민의 행복’에 관계된 중대한 현안들에 대해서 늘 침묵하거나 기껏해야 ‘안타깝다’는 모호한 말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특이한 정치적 행동을 줄곧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러다가 뜬금없이 ‘국민의 행복’을 운위한다는 것은 보기에 따라 극히 희극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철학과 신념이다. 이것은 ‘독재자의 딸’에게만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나라 정치엘리트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얘기하고 있지만, 그들이 민주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지는 매우 의심스럽다. 갈수록 심화되는 양극화를 극복하고 대중적 빈곤화와 실업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대책으로 성장보다 분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일자리 창출, 복지를 주요정책으로 내세우는 것은 물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문제의 본질이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그 자체에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경제민주화라는 과제는 실제로 경제문제라기보다 정치·사회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실질적인 민주주의가 실천되느냐에 달린 문제이다. 오늘날 뒤틀린 경제의 핵심문제는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 현상으로 요약될 수 있지만, 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금권정치가 종식되고, 사회정의가 실현되어 ‘작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해서 발언할 권리를 회복하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답시고 선정을 베풀고자 하는 게 아니다. 올바른 정치는, 요컨대,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넓히는 데 기여하는 노력일 뿐이다. 


민주주의란 까다롭고 복잡한 게 아니라 글자 그대로 민중의 자기통치를 뜻한다. 그런 점에서 대의제 민주주의는 어떤 경우에도 근본적인 결함을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오늘날 선거에 의해 돌아가는 의회제 정당정치는 심각한 불의 혹은 부조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선거란 어차피 돈과 권력이 판을 좌우하는 게임인 이상, 정당한 대표자를 선출한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민중이 자신의 의사를 국가정책에 반영시킬 수 있는 여지는 지극히 좁을 수밖에 없다. 지금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온갖 위기의 궁극적인 원인은 결국 이러한 대의제 민주주의가 가진 결함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흥미로운 것은 나라에 따라 민주주의의 질적 수준이 다양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근본적인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보완장치에 따라 민주주의가 얼마든지 질적으로 높거나 낮은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왜 민주주의가 중요한가? 한마디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으로 살고 싶어 하는 근원적인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기관들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각국의 ‘행복지수’를 보면, 최상위는 항상 덴마크나 스위스다. 안정된 복지국가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우리는 쉽게 추측하지만, 덴마크나 스위스인들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원인이 높은 국민소득이나 빼어난 경관이 아니라 자신들이 향유하는 ‘민주주의’에 있다고 생각한다. 거의 직접민주주의에 근접한 정치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는 스위스는 더 말할 것도 없지만, 덴마크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덴마크는 원래 민중의 자치적 협동운동으로 부흥을 이룬 나라이다. 그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지만, 오늘날 특히 흥미로운 것은 ‘시민합의회의’라는 제도이다. 1985년에 세계 최초로 창설된 이 제도는 새로운 과학기술을 도입하는 문제를 시민들의 주체적인 참여에 의해 결정하도록 고안된 것이다.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첨단과학기술에 관련된 최종 결정권이 전문가들이나 업계, 정부 당국이 아니라 일반시민들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회의는 먼저 국회의 ‘기술위원회’가 주관하여 전국적 언론을 통해 자원자를 모집한 뒤에 무작위로 15명을 선정한다. 선정된 이들은 대개 주부, 공장노동자, 환경미화원, 샐러리맨 등 평범한 시민들이다. 그들은 주말을 이용하여 몇 차례 준비모임을 거친 다음에 며칠간 전문가들을 불러서 경청, 질의응답의 결과를 근거로 의견을 모아서 보고서를 만든다. 그리고 마지막 날 국회의사당에서 일반 방청객과 의원들, 그리고 TV를 통해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보고서 작성 경위를 설명하고 답변한다. 그동안 이 회의에서 취급된 주제는 유전자조작식품, 방사선식품조사, 인간게놈계획, 전자신분증명서, 유전자치료 등 다양했다. 시민합의회의의 결론은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게 아니어서 반드시 따를 필요는 없지만, 대체로 국가정책은 그 결론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간다. 


원래 시민합의회의는 원자력발전 건설 여부를 두고 1980년대 전반기에 치열하게 벌어진 논쟁의 산물이다. 덴마크는 핵분열을 최초로 실험적으로 확인했던 핵물리학자 닐스 보어의 고국이다. 그런데도 1970년대의 석유위기 이후 격렬한 논쟁 끝에 덴마크 시민들은 원전 불가라는 결론을 내렸고, 의회는 그 결정을 따랐다. 그 대신 덴마크는 자연에너지 개발에 전력을 기울여 현재 세계 최대의 풍력발전 수출국가가 되었다. 밥을 제대로 먹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은 밀도 높은 민주주의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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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국제원자력기구(IAEA) 소속 전문가들에 의한 고리원전 1호기 안전점검 결과가 발표되었다. 이들은 발전소의 ‘안전문화’에는 문제가 없지 않지만, 설비상태는 양호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후쿠시마 이후 안전성 강화 대책이 착실히 이행되고 있다는 점도 덧붙였다. 이런 발표에 반발할 지역주민이나 탈핵활동가들을 의식해서인지 이들은 또한 자신들이 한국 원전당국의 ‘들러리’가 아니라 ‘독립적인 전문가’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환영해야 할 뉴스이다. 고리원전 상태에 대한 심각한 불안으로 불면의 밤을 보내는 사람들에게는 이보다 더 반가운 소식이 없을 테니까. 그러나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이다.

한국의 원전당국은 평판이 매우 나쁜 고리원전 문제를 ‘국제기구’의 도움으로 척결하려는 의도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기관도 아니고, IAEA 점검단을 초빙해서 조사를 맡겼다는 것은 처음부터 이 문제를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처리할 의사가 없었음을 스스로 폭로했다고 할 수 있다.

원전당국의 설명에 의하면, IAEA는 “국제연합 산하의 중립적 비영리 독립기구로서 모든 나라가 공인하는 원자력 안전 관련 최고, 최후의 기관”이다.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의 이 말은 사정을 잘 모르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원자력 문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지식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수준 낮은 농담에 불과하다. 보통 IAEA는 핵확산 방지를 위해 존재하는 국제기구라는 인식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이 원자력 일반에 대해서 다소 비판적인 입장에 서 있는 기관으로 오인할 수 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조사팀이 후쿠시마 원전 3호기를 살펴보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하기는 핵무기를 반대하면, 핵무기와 쌍둥이인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계의 핵심적인 비극의 하나는 핵 주도세력이 핵을 군사용과 민수용으로 구분한 다음에, 한편으로는 핵무기 확산을 막는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핵의 평화적 이용’이라는 이름으로 원자력 시설을 세계 전역으로 확대하는 모순적인 행동을 위선과 거짓 언어로 치장하여 되풀이해왔다는 데에 있다.

바로 그 위선과 거짓을 집약하고 있는 대표적인 조직이 IAEA라고 할 수 있다. 1957년에 미국 정부의 주도로 국제연합 산하 기구로 창설된 IAEA는 그 헌장에서 이미 “세계 전역에 걸쳐 평화와 건강과 번영을 위해서 원자력의 공헌을 가속화·확대한다”는 자신의 목적을 천명했다. 이 창설 목적을 보더라도, IAEA는 자신이 군부와 원자력 산업계를 위한 명백한 ‘로비단체’, 그것도 미국 정부의 비호를 받는 유엔 산하 조직 중에서도 가장 막강한 로비단체임을 인정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IAEA가 원자력이나 방사능에 관련된 치명적인 문제에 대해서 늘 눈을 돌리고, 무관심한 자세를 취해온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무관심한 정도가 아니라, IAEA가 방사능 문제에 대해 취해온 행동의 역사는 완전히 범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에 세계보건기구(WHO)와 맺은 협정이다. 이 협정은 상대편 기관이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반드시 “상호합의에 따라” 계획하거나 행동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국 이것은 원자력에 관한 WHO의 권한, 즉 방사능의 위험에 대해 조사하거나 경고해야 할 WHO의 고유한 역할을 저지하기 위한 ‘협정’이었다. 원래 1956년까지 WHO는 “원자력 산업과 방사능의 증대에 의해서 미래 세대의 생명이 위협받고 있다”는 공식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59년의 협정 이후 WHO는 방사능의 영향 문제에 관해서 사실상 침묵을 지키거나 극히 소극적인 관심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이 비겁한 행동은 후쿠시마 원전사고에서도 반복되고 있다.

방사능 문제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국제적 권위기관이라고 하는 WHO가 IAEA와 다름없는 원자력 홍보기구로 전락한 것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체르노빌 원전사고에 대한 우스꽝스러운 평가이다. 2005년 WHO와 IAEA 합동회의에서 발표된 체르노빌 피해상황에 대한 최종 결론에 의하면 사망자 56명, 갑상샘암 사망 아동 9명, 그리고 사망에 이어질 암에 걸린 사람 4000명뿐이었다. 적잖은 독립적 과학자와 의료인들이 지적해왔듯이, 이것은 많은 독립적 자료와 조사를 철저히 외면하고, 계속해서 고농도 방사능 지역에 거주하면서 치명적인 피해를 가져올 오염 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900만명 이상의 인간을 완전히 무시한 결론이었다(르몽드디플로마틱 2009년 5월).

생각해보면, 후쿠시마는 물론이고 체르노빌로 인한 재앙도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오랜 잠복기간이 있고, 오염된 토양에서 자란 농산물로 인한 방사능 섭취에 따라 앞으로 몇 세대에 걸쳐 발생할 유전자 손상을 고려하면 IAEA와 WHO의 합동 결론은 과학이라기보다 저열한 수준의 은폐 공작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방사능의 위험을 이처럼 비상식적으로 은폐하고, 과소평가하는 행위가 버젓이 과학과 국제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게 오늘의 현실이다.

이런 공식적인 자료나 문헌에 의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일인지는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장 피에르 뒤퓌의 증언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체르노빌 사고 20주년인 2006년에 우크라이나를 직접 방문해본 결과, 그동안 접했던 자료와 현지 사정 사이에 엄청난 괴리가 존재함을 발견했다. 돌아와서 그는 <체르노빌로부터의 귀환-분노한 한 남자의 수기>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관련 과학자와 기술관료들이 원자력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이유를 찾아보려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일찍이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막스 베버가 지적한 문제, 즉 현대적 학문의 운명인 과잉 전문화로 인한 과학의 왜소화, 그리고 시야가 협소해진 과학자의 ‘근본적인 무교양’에 연유하는 도덕적 감수성의 결여를 무엇보다 주목하고 있다.

참고로 덧붙이면, 장 피에르 뒤퓌는 현재 ‘프랑스 방사선 방호 및 원자력안전연구소’라는 준(準)국가기관의 윤리위원회 위원장이기도 하다. 원자력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지식인이 원자력 관련 중책을 맡게 하는 것. 이게 진정으로 원자력의 안전관리를 생각하는 사회의 상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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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성장의 한계>라는 책이 출판된 것은 1972년이었다. 이 책은 현재의 추세가 그대로 계속된다면 2020∼2050년 사이에 인구, 산업 및 식량생산, 자원공급과 환경오염이 한계에 도달하여 더 이상 근대적 산업문명 체제가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한 데이터를 근거로 예측했다. 이러한 예견(혹은 경고)은 당시의 상황에서 매우 충격적인 것이어서 세계적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그 후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지금까지 1000만부 이상이나 팔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근 다시 이 책이 화제가 된 것은 출판 40주년을 기념하여 ‘스미소니언 협회’가 주최한 심포지엄 때문이다. 지난 3월 워싱턴에서 열린 이 모임에는 저자들 중 아직 생존해 있는 두 사람이 참석했고, 그들은 자신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장’을 추구하는 데 여념이 없는 오늘날의 세계 현실을 개탄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제는 은퇴 교수인 데니스 메도즈는 어느 인터뷰에서 “그 책을 쓸 때 우리는 너무 낙관적이었다. 우리가 작업의 결과를 내놓으면 정책결정자들이 그것을 참조하여 행동을 바꿀 것이라고 믿었다”고 40년 전의 자신들의 ‘순진함’을 돌아보며 자책하는 심정을 토로했다. 그러면서 그는 1970년대라면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다”는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했다. 그의 추산으로는 현재 인류의 산업 및 소비생활의 규모는 이미 지구가 용납할 수 있는 수용능력의 150% 이상을 초과했다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성장의 한계>의 저자들이 지금 드러내는 비관주의의 근거가 점점 더 확실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스미소니언 심포지엄’에서 밝혀진 중요한 사실은 지금부터 40년 전의 예견이 단순한 예측이 아니라 갈수록 현실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물리학자 그레엄 터너가 2008년에 발표한 논문이다. 이것은 1970년에서 2000년까지의 인구, 공업제품, 자원, 오염, 식량생산 등에 관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그 추세가 <성장의 한계>에서 예견된 시나리오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한 연구결과이다. 1970∼2000년이라는 30년간의 동향이 <성장의 한계>가 예측한 추세와 일치한다면, 이른 시기 안에 급진적인 방향전환이 없다면 이 책이 경고한 ‘산업문명의 붕괴’는 결국 현실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이 성장논리에 기반을 둔 우리들의 생활방식은 앞으로 수십년 내에 어떤 식으로든 끝날 것임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

 

'한톨나눔축제'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물부족 체험을 위해 물통나르기를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아직도 ‘지속가능한 성장’ 혹은 ‘지속가능한 발전’을 운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환상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효율적인 자원이용이라는 방법으로, 혹은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성장’을 지속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도 심히 어리석은 생각임이 분명하다. 낭비와 파괴와 오염을 구조적으로 강요하는 근본적인 틀 자체가 혁파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혁신적인 과학기술이란 결국 파멸을 앞당기는 데에 기여할 수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녹색혁명’이라는 ‘과학적 영농방법’의 도입이 바로 그렇다. 1950년대 이래 ‘녹색혁명’으로 세계의 식량생산은 비약적으로 증대되었으나 그것이 기계와 화학물질에 대한 과도한 의존을 불가피하게 함으로써 반세기가 흐른 지금 세계 전역의 농토는 대부분 사막화 현상을 드러내고, 농산물 증산도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국면에 직면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기계화·화학화가 대대적으로 적용된 농법의 영향으로 세계적인 물 부족 현상이 심각한 현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오랫동안 세계 식량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어온 ‘월드워치연구소’의 창설자, 레스터 브라운이 현재 가장 우려하고 있는 게 바로 이 문제이다. 그는 물 부족 문제는 석유 고갈 문제보다도 곧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석유 없이는 불가능한 게 현대적 농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피크오일’ 이후의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식량생산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석유에 못지않게 물 부족 문제 또한 식량생산에 큰 위협이 될 것이고, 그 결과 우리는 조만간 전대미문의 대량 기아(飢餓) 사태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어쩌다 이렇게 바로 코앞에 닥칠 일도 보지 못하고, 오로지 성장논리에 갇힌 채 아무 대비 없이 이 지경까지 왔을까? 1973년에 나온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성장의 한계>가 예견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해답을 제시한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의 저자, 프리츠 슈마허는 동남아시아 전통사회에서의 체류 1년간의 체험을 통해서 “유한한 지구상에서 무한한 성장”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서구식 근대문명과 그것을 정당화하는 현대경제학의 근원적인 어리석음을 통절히 깨닫고, ‘성장’과 ‘진보’가 아니라 인간조건의 한계에 대한 성숙한 인식 위에서 자족(自足)할 줄 아는 ‘불교경제학’을 제창했다.

슈마허의 메시지는 중요한 것이었지만, 성장논리에 중독돼 있는 허다한 정책결정자와 경제학자들로부터 <성장의 한계> 못지않게 냉대를 당했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를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 책을 주목했다. 카터는 슈마허를 백악관으로 초청하여 한 시간 동안 경청했다. 그리고 곧 백악관 지붕에 태양광 발전 패널을 설치하고, 참모들에게 지구환경에 관한 종합적인 보고서를 작성할 것을 지시했다. 그런데 1982년, 카터가 물러나고 새로이 대통령이 된 레이건이 백악관에 들어온 첫날, 최초의 지시사항이 지붕 위의 태양광 패널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매우 상징적이다. 레이건 이후 이른바 신자유주의 경제논리에 의해 전 세계가 걷잡을 수 없이 황폐화된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 퇴영적 정치의 출발점이 바로 <성장의 한계>나 <작은 것이 아름답다>처럼 인류의 장래를 위해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메시지를 난폭하게 짓밟는 행위였던 것이다.

<성장의 한계> 이후 40년의 세월이 완전히 허비되어버린 것은 생각할수록 통탄스럽다. 더욱 통탄스러운 것은 이제 완전히 벼랑 끝에 이른 상황에서도 아직도 성장논리가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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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총선 결과는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다. 선거란 무엇보다 집권세력의 공죄를 준엄하게 심판하는 행위여야 하고, 그 심판은 민주주의의 존속에 불가결하다. 이것은 초보적인 진실이다.

그런데 딴 것은 젖혀두고, 현 정권은 민간인 사찰 문제 하나만으로도 엄중한 정치적 단죄를 받아야 마땅했다. 사찰이란 민주주의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가장 비열한 통치 방식이다. 개인적 약점을 캐내 정치적 저항이나 반대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게 ‘사찰’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끊임없이 자행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상황에서의 선거였음에도, 집권세력이 또다시 국회 제일권력을 차지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침체를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번 선거 결과는 집권당의 승리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정당별 득표결과를 보면 범여권에 비해 범야권 쪽의 지지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야당세력은 이번에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패배한 셈이다. 이 모순은 말할 것도 없이 현행 선거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최다 득표자 1인만 선출되는 제도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대표성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패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뜻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 명백한 모순에 대한 보완책의 하나가 비례대표제지만, 현재 여의도의 비례대표 의석은 보완책이라고 하기에는 그 비중이 너무나 미미하다.

 

녹색당 이유진 비례대표 1번 후보가 당원들과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I 출처:경향 DB


원래 대의제 민주주의는 결함 많은 제도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현실적 대안이 없는 이상, 다양한 보강 장치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의를 최대한 바르게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의 확보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긴급한 것은 개헌이 아니라 선거제도의 개혁일 것이다. 대표성의 왜곡이 불가피한 현 선거제로는 최소한의 합리적 정치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의 선거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요식행위일 뿐, 기득권층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장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쉽다.

미국에서 그렇듯이 한국의 정치도 이대로 가면 결국 기본적 정책 방향이 별로 다를 게 없는 양당독재체제로 굳어질 게 틀림없다. 현 선거제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진 신생 정치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이 이제는 기성의 사상, 관념, 가치에 의해서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갈수록 심화되는 세계적인 환경·자원·에너지·금융위기는 지금까지 화석연료에 기반을 둬 왔던 성장경제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장의 시대를 뒷받침해온 낡은 사고와 제도의 효력이 더는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엄중한 문제를 계속 외면할 때, 그 궁극적인 결과는 집단적 자멸 사태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설령 이번 선거 결과가 야당세력의 승리였다 해도 그게 꼭 의미 있는 승리였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현재 야당세력이라고 해서 시대현실의 심각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비근하게는 한·미 FTA나 4대강 문제, 원자력에 관한 문제의식만 해도 그렇다. 이 현안들에 대해 그들은 지금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려 있다. 그것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지속 가능한 삶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농업문제에 대해서 이번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은 놀랍게도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역대정권에 의해 한국의 농사는 끝없이 홀대를 당해왔고, 노무현 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동안 농촌인구는 500만에서 350만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150만의 인구가 일자리를 잃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하지만, 실은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농업이 이제 사멸 직전에 이르렀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권력 엘리트들은 언제나 농업규모의 확대, 농사의 기업화, 경쟁력 강화라는 공허한 말만을 되풀이해왔지만, 그들은 그 경쟁력 논리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한번도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해본 적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 멈춘 시대의 삶은 어떻게 될까. 확실한 것은 원래 그래왔듯이 소농 중심의 순환적 농사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최후 보루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화석연료 혹은 원자력에 의존하는 성장경제 시대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원과 에너지 확보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전쟁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석유를 확보한들, 장기 지속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경제규모를 확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공생과 상부상조의 원리에 따른 삶을 재창조하는 게 새로운 시대의 핵심과제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현명한 방식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는 새로운 농경 중심 사회일 게 틀림없고, 따라서 성장 없는 시대를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지금은 건강한 농사기반의 확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선거제도로는 이러한 장기적인 대책,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위한 치열한 논의를 위한 정치적 틀의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이다. 시대착오적인 성장논리로부터의 탈각을 말하는 진실로 생산적인 목소리가 이런 선거판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이 처한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세계 70여개 국가에 존재하는 게 녹색당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번에 최초로 등장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녹색당은 탈핵·탈성장·농업회생을 최대 긴급 현안으로 인식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대책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거대 정당들의 그늘에 가려져 녹색당의 목소리와 문제의식은 완전히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녹색당 자신의 역량부족 탓도 크지만, 거대 정당의 고식적인 목소리 이외에 이단적인 목소리의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는 선거제도 하에서 이것은 신생정당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독일의회만큼이라도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녹색정치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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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틱해운지수’라는 게 있다. 석탄, 철광석, 곡물을 비롯하여 설탕, 철강제품, 비료, 목재, 시멘트 등 산적(散積) 화물을 운반하는 부정기 외항선의 운임 동향에 관해 런던의 해운관계기관에서 매일 발표하는 수치이다. 이 수치는 세계경제가 몇 달 혹은 몇 년 뒤 어떻게 될지 미리 알려주는 경기 선행 지수가 될 수 있다. 화물선 운임 결정 요인은 기본적으로 세계 전체의 산업활동 상황에 달려있다. 석탄, 철광석, 곡물 등은 오늘날 거의 모든 산업을 뒷받침하는 기본 원료이다. 당연히 산업이 활발하면 원료를 운반하는 선박의 운임이 높아지고, 저조하면 선박의 운임이 낮아진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갖는 ‘발틱해운지수’가 지금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1985년에 지수 1000으로 시작하여 2008년 5월에 12000이라는 최고치를 기록한 이래, 몇 달 뒤 월스트리트 금융파산 상황에서 660으로 뚝 떨어졌다가 얼마 후 약간의 회복세를 보여주는 듯했지만, 다시 하락하여 마침내 최근에는 2008년 말 수준으로 추락하고 있다. 이 추세는 본질적으로 현재 세계 전체가 직면하고 있는 금융위기, 나아가 전반적 경제위기에 직결된 사태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지금 자본주의 종말 운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떻든 세계경제의 전망이 어두운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현재 그리스가 겪는 비참한 상황은 예외적인 게 아니라 곧 세계 전역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의 세계 자본주의 위기는 그동안 경제성장을 뒷받침해온 핵심요인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데에 주된 원인이 있음이 확실하다. 즉, 석유를 비롯한 값싼 자원과 값싼 식량, 값싼 노동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특히 석유라는 ‘마법의 물질’은 결정적이다. 지난 반세기 이상 세계의 경제성장은 기본적으로 값싼 석유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석유는 에너지 이외에 산업사회의 존속에 불가결한 온갖 재료와 원료의 원천이다. 그 때문에 고갈돼 가는 석유 확보를 둘러싸고 산업국가간에 갈수록 피나는 경쟁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러나 석유가 재생불가능한 자원인 이상, 석유의 대량소비에 의존하는 산업구조를 탈각하지 않고 석유확보 경쟁에만 매달린다면 설령 일시적인 성공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공멸할 것임은 자명한 일이다. 

식량위기도 심히 위협적인 문제이다. 금융투기꾼에 의한 국제식량가격 조작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계의 농토가 급격히 축소되거나 사막화되고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이다. 지난 몇십년간 화학비료와 농약의 대량 투입으로 엄청난 곡물증산이 가능해졌으나 동시에 토양침식과 토질악화라는 심각한 후유증이 나타났다. 게다가 식량생산에 이용되어야 할 양질의 광대한 땅이 공장식 축산 사료와 생물연료를 위해서 허비되고 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산업사회의 종말이 시작됐음을 알려주는 뚜렷한 징후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에게는 대량생산·대량소비·대량폐기를 확대·반복해 온 산업경제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른 방식, 즉 지역 중심의 자립적·자급적 생활방식을 조금이라도 많이 확보하려는 시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것은 농사의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다. 인류사회에 미래가 있다면, 싫든 좋든 그것은 새로운 농경시대일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이 사회에는 지금 온갖 공약과 계획, 제안이 난무하고 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러한 숱한 계획 속에 경제성장이 멈춘 상황을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가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무슨 근거인지 모르지만, 계속적인 성장을 암묵적인 전제로 하는 한, 그 모든 제안은 공허한 것으로 끝날 공산이 매우 높다. 

지금은 재벌이 동네의 골목시장에까지 들어와서 서민들의 생계수단을 위협하는 시대이다. 재벌의 탐욕을 비난하기 전에 이게 무엇을 뜻하는 현상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재벌도 이제는 벼랑 끝에 몰려있다는 명백한 증좌인 것이다. 그러나 노골적인 약육강식의 길로 가서는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다. 유일한 활로는 공생의 원리를 익히고, 공생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삶의 양식인 ‘순환경제’를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늘날 사멸 직전에 있는 농업, 농촌, 농민을 살리는 일이다. 

최근 일본정부는 농사를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 연간 150만엔을 7년간 지급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주로 노인들밖에 남아있지 않은 농촌 상황이 이대로 간다면 농사를 계승할 세대가 단절될 것이라는 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듯 중대한 결단이 정부 차원에서 나오는 것을 보면 일본은 그래도 합리적인 사고력이 아직 남아있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판에서는 여야를 막론하고 최소한의 위기의식조차 없다. 국내의 농사를 보호하는 것보다 ‘해외농지’를 확보하거나 “농지가 아니라 곡물딜러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이 나라 권력 엘리트들의 뿌리깊은 사고방식이다. 
 

경향신문DB


농사를 살리는 것은 당면 위기에 대한 지혜로운 대응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의 난제 중의 난제, 즉 수도권 과밀현상과 지역균형발전 문제의 해결에도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중앙의 주요기관 지방이전이라는 방식으로 이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지역균형발전을 위해서는 지역경제가 우선 살아나야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역경제의 핵심이 농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다. 농사를 살리면 지역의 토착 소상공업이 살아나고, 지역사회와 마을문화가 활기를 찾고, 거기에 뿌리를 박고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연히 늘어나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복잡한 방법이 필요 없다. 일본처럼 농사를 지으려는 젊은이들에게 월급을 주는 것도 좋지만, 나는 농사일을 하는 사람 모두에게 기본소득으로 매월 정액을 일률적으로 평생 지급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른바 농촌대책용 국가예산을 진정으로 농민을 위해서 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재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치적 의지이다. 물론 시대착오적인 ‘자유무역협정’ 따위를 밀어붙이는 정치상황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합리적인 사고, 양질의 정치가 통하는 사회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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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김종철 | 녹색평론 발행인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보를 전부 폭파하고 강을 원상태로 돌리면 됩니다.”

“얼마 전에 완공했는데 폭파하려 하겠습니까? 22조원이나 들인걸요.”

 
“이제 시작입니다. 4대강에 만들어놓은 보들을 그냥 놔두면 그 후유증 때문에 돈이 계속 들어갈 겁니다. 수질악화, 퇴적, 역행침식, 홍수 증가가 나타날 것이고, 앞으로 한국 국민의 출혈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일 겁니다. 4대강사업의 후속비용을 지속적으로 부담할 경제력을 가진 나라는 지금 지구상에 없습니다. 독일의 경제력으로도 어림없습니다. 보를 폭파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가장 값싸고 효과적입니다. 22조원이 소모된 지금 없애는 것이 앞으로 후속비용을 더 많이 들이고 없애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지요.”

이것은 지금 독일에 거주하고 있는 어떤 한국인과 독일의 저명한 하천관리 전문가 사이에 최근 있었던 대화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이 대화의 질문자를 포함한 몇몇 재독한인들은 2010년 6월부터 현지에서 ‘번역연대’라는 모임을 결성하여 외국어로 된 자료와 정보들을 우리말로 옮겨 인터넷을 통해 열성적으로 소개해왔다.
 

녹색당 창당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GED(Green Entertainment Design) 강연. l 출처 : 경향DB


정부의 완강한 부인에도 불구하고, ‘4대강사업’이 ‘대운하’를 상정하지 않고는 전혀 설명할 수 없는 공사였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다. 독일 거주 한국인들이 이 문제에 특히 민감했던 것은 까닭이 있다. 원래 ‘대운하’ 계획은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시절에 독일의 마인-다뉴브 운하를 둘러본 끝에 얻은 착상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번역연대’의 출발점은, 독일의 예로써 ‘대운하’ 혹은 그 위장된 형태인 ‘4대강사업’을 정당화하고자 한 정부와 어용학자, 어용언론의 논리에 내포된 속임수와 거짓을 묵과할 수 없었다는 데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유럽의 하천상황에 관련된 귀중한 과학지식에 근거하여, 국내의 어떤 비판세력보다도 더 안타깝고, 더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우리나라의 보물 중의 보물인 4대강과 그 유역이 전면적인 파괴에 노출된 현실에 맞서왔던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공사 완료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4대강사업’의 온갖 후유증을 열심히 은폐하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계속 덮고 간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간 이 국책사업이 결국 나라의 존망을 위태롭게 하는 재앙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4대강사업’은 정부의 실책이라기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인재(人災)로 규정될 날이 곧 올 것이다.

따져보면 ‘4대강사업’은 극단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꼭 이명박 정부만 그런 게 아니지만, 특히 이 정부는 4대강 이외에도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 용산참사, 미디어법, 한·미 FTA 등등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 대부분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의 의견을 진지하게 들어보려는 자세를 한번도 취하지 않았다. 명백히 주권재민을 천명하고 있는 헌법을 정부 자신이 끊임없이 무시·폄하해온 것이다.

국제사회가 알아주는 훌륭한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자유선거로 집권한 정부에 의해 이처럼 허망하게 민주주의가 퇴행을 강요당해온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현행의 한국정치를 규정하는 제도적 틀 그 자체의 결함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정치인 개개인의 자질도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많은 한국인들이 양심적인 정치가들을 고대하는 심정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더 깊이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물이 아니라 결국 제도와 시스템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기본적으로 오늘날 한국에서는 대통령이 유일한 현자임을 자처하며 전횡과 폭주를 계속하더라도, 그가 국회 다수당을 지배하고 있는 이상, 권력남용을 제어할 방법이 없다. 그 필연적인 결과는 나라 전체에 미치는 재앙일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권력자 자신도 불행을 면치 못한다. 이것은 숱한 선례에서 보아온 역사적 철칙이다. 그런데도 권력자의 권력남용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은 무릇 절제된 권력행사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단적으로 알려준다. 권력자 개인의 사람됨만 괜찮으면 권력과 겸손이 양립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것은 환상임이 분명하다. 

양심과 상식에 어긋나는 정치에 오래 익숙해져온 결과, 사람들은 대개 정치라면 무조건 더럽다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 한다. 나 자신도 오랫동안 그런 정서 속에서 살아왔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미련은 접고, 지역 중심의 소규모 공동체 속에서의 협동적 자치생활이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새만금, 4대강, 한·미 FTA, 남북관계의 악화, 그리고 후쿠시마 사태는 국가 차원의 건전한 정치적 이성이 작동하지 않는 한, 모든 게 허사라는 것을 명확히 상기시켜주었다. 그래서 나는 어둠을 저주하기보다는 촛불 하나라도 켜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최근에 녹색당 창설에 용기있게 나선 젊은이들을 돕기 시작했다. 녹색당은 아직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이미 세계 70여 국가에 걸쳐 인류사회가 부닥친 공통 현안을 ‘녹색적 비전’에 입각하여 정치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결집한 21세기 유일한 국제주의적 정당이다.

그런데 새 정당을 꿈꾸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새삼 시야에 들어왔다. 즉, 지역구 중심 소선거구제에 의한 지금과 같은 의회 구성 방법으로 한국의 국회가 앞으로 끊임없이 닥칠 온갖 엄중한 위기에 대처하는 것은 차치하고, 우리 사회가 최소한의 합리적인 사회로 나아가는 게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현재처럼 국회의원 대다수가 지역구라는 국지적 이해관계에 얽매여 협소하고 단기적인 시야밖에 가질 수 없는 구조 속에서 국가와 세계적 차원의 문제에 집중하는 국회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선거법을 고쳐 적어도 독일 정도의 비례대표제를 확보하는 것보다 더 나은 현실적 해법이 없는 듯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국회가 편협한 국소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운 대표자들에 의한 진실로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정책 결정의 장이 되기를 기다려봤자 백년하청일 것이다. 후쿠시마 사고 이후 독일이 핵발전소의 단계적 폐기라는 실로 모범적인 결정을 내린 데에는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녹색당 이외에 비례대표제라는 요인이 큰 작용을 했음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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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