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이었던 지난 10월27일, 서울 혜화역에 남성들이 집결했다. ‘당신의 가족과 당신의 삶을 지키기 위하여’(이하 당당위)가 주최한 이 모임은 소위 곰탕집 성추행 판결을 규탄하기 위해 기획됐다. 곰탕집에서 일어난 성추행 가해자에게 징역 6월의 실형을 선고된 것에 항의하는 차원으로, 여성의 말만 듣고 유죄판결을 내린 이 판결이 남성들의 삶에 위협이 된다는 게 당당위의 주장이었다. 실제로 곰탕집 가해자의 부인이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을 때, 인터넷은 이에 동조하는 남성들의 글로 도배됐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러다간 무서워서 밖에도 못 나가겠다’며 울분을 터뜨렸는데, 이는 청와대 청원으로 이어져 31만명의 동의를 받기까지 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당당위의 집회는 전국에서 몰려든 남성들로 미어터져야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막상 집회에 나온 남성들의 수는 60여명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이 숫자에 놀랐다. 청원에 동의한 사람들의 1%만 나왔어도 이렇게 민망한 수준은 아닐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남자들이 경제활동을 많이 하니까” “원래 처음엔 사람이 없다” 등등의 변명을 하는 이도 있었지만, 이전에 혜화역을 점거했던 불법촬영 규탄 시위와 비교하면 설득력이 없다. 참고로 불법촬영 규탄 시위는 5월에 열린 첫 집회에서도 1만명을 동원했고, 더위가 한창이던 8월4일에는 무려 7만명이 모이기까지 했다. 당당위는 12월8일에 2차 집회를 열겠다고 했다가 11월24일로 일정을 앞당겼는데, 이는 연말에 참여율이 떨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란다. 그렇다고 해서 2차 집회에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 같지 않은 이유는 그들에게 ‘절실함’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당하는 일이 자칫하면 내 일이 될 수도 있다고 여길 때, 그리고 국가와 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할 거라고 생각할 때 사람들은 거리로 나선다. 삼복더위에도 여성들이 불법촬영 규탄 시위에 참여한 이유다. 하지만 남성들 중 성추행 가해자가 될까봐 불안해하며 사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조만간 성추행을 저지를 야심이 있는 이를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착실하게 일상을 영위하리라. 그렇게 본다면 인터넷에 표출됐던 뭇 남성들의 분노는 방구석에서 여혐을 시전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행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남성들의 이런 행태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건 5년 전 있었던, 남성연대 대표 성재기의 죽음에서도 드러난다. 여혐이 이슈화되기 시작했던 2008년, 성재기는 온라인에 남성연대를 만든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차별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성가족부라는 게 존재해 더 큰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여가부가 폐지되면 우리는 막걸리 한잔 하고 흩어질 겁니다. 여가부가 사라지면 우리나라 남녀는 모두 사랑하며 함께 살아가게 될 겁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남성들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남성들의 많은 수가 경제활동을 하고, 여성에 비해 임금도 많이 받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남성연대가 돈 걱정할 일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남성연대는 쭉 가난했다. 월 2000원 이상의 회비를 내는 이가 170명에 불과할 정도였는데, 이는 사무실 운영비조차 충당하지 못하는 액수였다. 설립한 지 5년이 지났을 무렵 그의 부채는 2억원으로 불어났다. 자금난에 시달리던 성재기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그건 바로 한강에 투신하는 퍼포먼스였다. “이제 저는 한강으로 투신하려 합니다. 남성연대에 마지막 기회를 주십사 희망합니다. … 시민 여러분들의 십시일반으로 저희에게 1억원을 빌려주십시오.” 한마디로 남성연대의 진정성을 알아달라는 뜻. 그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인명구조 자격증 소지자를 한강에 대기시킨 걸 보면 진짜로 죽을 마음은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깝게도 퍼포먼스는 성재기의 생각처럼 진행되지 않았다. 성재기는 불어난 물살에 떠내려갔고, 필사적인 수색 끝에 사흘 뒤에야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다.

성재기를 죽게 만든 원인은 뭘까? 무모한 퍼포먼스가 가장 큰 이유지만, 그가 그런 행동을 벌이도록 만든 건 바로 남성들이었다. 인터넷에서만 소리 높여 남성 역차별을 외치는 대신 단돈 얼마라도 남성연대에 후원했다면 그가 한강에 뛰어드는 일은 없었으리라. 수많은 여성단체들이 여성들, 그리고 그 이념에 동조하는 일부 남성들의 후원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남성이 정말로 역차별당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았던 모양이다. 더 어이없었던 건 성재기의 죽음 후 남성들이 보인 행태였다. 최소한의 양식이 있다면 남성연대에 후원금이 폭주해야 마땅하건만, 그들은 여가부 홈페이지로 몰려가 무차별 공격을 퍼부은 끝에 결국 홈페이지를 다운시켰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화풀이의 예로 이보다 더 적합한 게 있을까? 이후 남성연대는 양성평등연대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이 글을 쓰는 김에 링크를 타고 가보려 했지만 ‘이 페이지에 연결할 수 없음’이란 안내문만 뜬다. 이쯤 되면 인정해야 한다. 남성 역차별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여성들의 입을 막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걸. 우리 정부가 여성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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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쇄회로(CC) TV 속의 남성이 여성 쪽으로 걸어간다. 남성이 지나가자마자 여성은 남성을 불러 세우고 격하게 항의한다. 그 남성이 자기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이다. 소위 ‘곰탕집 성추행 사건’이다. 이 사건이 화제가 된 것은 해당 남성-A씨-의 아내가 인터넷에 글을 올린 뒤였다. 그 글에 따르면 A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며, 높은 분을 모시는 자리여서 성추행을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해당 여성, 즉 피해자가 사건 직후 합의금 1000만원을 요구했다는 것도 수상쩍다. 그럼에도 판사가 피해자의 말만 믿고 징역 6개월을 선고했으니 억울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남성들이 이런 판결을 내린 판사를, 그리고 피해자를 욕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의 말처럼 해당 CCTV로는 성추행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웠지만, 그게 곧 피해자를 안 만졌다는 얘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남성들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흥분했고, A씨에게 공감했다. 심지어 A씨를 위해 모금운동을 하자는 의견도 제법 있었다. 요즘 놀이터로 전락한 청와대 청원은 물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당연한 수순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두 번째로 공개된 CCTV는 성추행 여부에 대한 판단을 보다 잘 내릴 수 있게 돕는다. A씨가 현관 쪽에 서 있는데, 피해자 여성이 걸어와 복도 쪽 방문을 열려고 한다. A씨가 그 여성을 돌아보더니 그쪽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손을 바깥쪽으로 뻗는다. 곧바로 A씨가 항의하고, 그 뒤 양쪽 진영 간에 대치가 이어진다. 이 와중에 A씨는 도망친다. A씨 아내가 쓴 글에도 문제점이 발견됐다. 피해자는 합의금을 요구한 적이 없었고, 먼저 합의금 얘기를 꺼낸 쪽은 오히려 A씨였다. 어려운 자리였다는 아내의 글과 달리 A씨는 폭탄주 15잔을 마셨다고 했다. 게다가 A씨는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고, 거짓말탐지기 결과도 ‘거짓’이었다. 남성들의 분노를 촉발한 첫 글에 A씨에게 불리한 대목은 들어 있지 않았다는 얘기다. 이쯤 되면 판단을 달리할 법도 하지만, 남성들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만졌다는 증거는 있어요?” “증거 없이 징역을 때린 게 문제다.” “판사는 각성하라!”

사실 성추행은 증거가 남지 않는 범죄다. ‘슴만튀’ ‘엉만튀’라는 말처럼 슬쩍 만지고 도망치는데 진술 말고 무슨 증거가 남겠는가? 대부분의 성추행과 달리 곰탕집 사건은 오히려 증거가 많은 사건이다. 그럼에도 ‘증거’ 운운하는 이들은 성공한 성추행은 처벌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음주운전, 살인, 사기 등등 범죄와 관련된 기사가 인터넷에 올라올 때마다 남성이 주를 이루는 네티즌들은 일단 가해자를 욕하고, 다음으로 ‘처벌이 약하다’며 판사를 비난한다. 하지만 성범죄의 경우 남성들이 가해자에게 동조하며 그편을 드는 일이 꽤 자주 일어난다. ‘그랩’으로 유명한 윤창중이 박근혜 정부의 대변인이 아니었다면, 그의 편에 서서 피해자를 국제꽃뱀으로 몰았을 남성이 한둘이 아니었으리라.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실수로 여자의 신체부위를 만져서 성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유가 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여성은 고의와 실수를 구분할 능력이 있다. 그렇다면 왜? 어쩌면 성범죄의 90% 이상이 남성에 의해 저질러진다는 통계가 이유일 수 있겠다. 같은 남성으로서 만지고픈 네 마음을 이해한다, 네 마음이 곧 내 마음인데 어찌 너를 욕할 수 있겠느냐, 이걸 문제 삼는 여성이 나쁜 거야, 라는 게 그들이 가해자에 빙의하는 이유가 아닐까?

‘성전카페’라는 곳이 있다. 성범죄 전문 상담 카페의 준말로, 4000명이 넘는 회원들이 활동 중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가관이었다. 한 남성이 성범죄를 저질렀는데 어떻게 하면 형을 덜 받을 수 있는지 묻는 글을 올리면 경험자와 법률가들이 댓글로 방법을 알려준다. “미성년자인지 몰랐다고 잡아떼세요.” “합의하에 즐겼다고 하세요.” “쪽지 보내주시면 자세히 알려드릴게요.” 성범죄자가 결국 무혐의 판결을 받았다는 글을 올리면 축하세례가 이어진다.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오늘부터 발 뻗고 주무세요.” “부럽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 카페 덕분에 무혐의를 받았다고 고마워한다. 성범죄의 재범률이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카페는 더 많은 성범죄가 저질러지는 세상을 위해 애쓰는 중이다. 이런 카페가 한둘이 아니라는 것도 문제지만, 이런 카페에 가입을 안 한 이들도 인터넷 댓글로 성범죄자를 응원함으로써 피해여성의 싸우고자 하는 의욕을 짓밟는다. 이렇게 남성들이 가해자를 위해 연대하는 반면, 여성들은 대부분 피해자를 위해 연대한다. 강남역에서 한 여성이 묻지마 살인의 피해자가 됐을 때, 수많은 여성들이 강남역에 모였다. 피해자의 일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자신이 살아남은 게 단지 운이 좋아서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혜화역에서 열리는 규탄시위 역시 몰카범이 남성인 경우도 엄하게 처벌해 달라는 것일 뿐, 가해 여성을 편들려는 의도가 아니었다. 정부가 혜화역에 모인 여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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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마십시오. 저희 의사들이 당신을 돕고 당신의 아이를 지킬 것입니다.”

2009년 12월, 프로라이트 의사회가 출범했다.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낙태 시술 근절을 목표로 만들어진 이 단체는 이듬해 2월, 불법 낙태 수술을 하는 병원 3곳과 의사 8명을 검찰에 고발한다. 산부인과 의사가 동료의사를 고발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지만, 그로 인한 파장은 컸다. 그간 암암리에 낙태를 해오던 산부인과들이 시술을 중단한 것이다. 낙태를 하러 온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을 듣고 쓸쓸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낙태를 포기할 리는 만무했다. 미혼모가 되는 게 두려워서, 원하지 않는 성관계로 인해 임신이 됐을 때, 한 명을 더 낳아 키우는 게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는 기혼자 등등 다들 낙태를 해야 할 절실한 이유가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들은 단속이 상대적으로 덜한 지방병원으로 가기도 했고, 아예 중국으로 원정을 가서 낙태를 하기도 했다. 낙태기피에 따른 비용 상승은 저소득층이나 저연령층 등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타격을 줬는데, 이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무허가 시설에 몸을 맡겼다가 마취사고나 세균감염 등으로 목숨을 잃어야 했다. 출산한 산모 10만명당 사망하는 여성의 수를 나타내는 모성사망률이 2009년 13.5에서 2010년 15.7, 2011년 17.2로 증가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런 현상이 비단 우리나라만의 일은 아니었다. 루마니아는 낙태가 전면 금지됐던 20여년 동안 모성사망률이 21에서 128로 증가했지만, 1989년 낙태금지법이 철폐되자 한 해 만에 이 수치가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지금도 낙태가 금지된 나라에서는 여성들이 뜨개바늘이나 막대기 또는 옷걸이로 자가 낙태를 하다가 큰 상처를 입고, 또 목숨을 잃는다. 옷을 거는 도구인 옷걸이가 엉뚱하게도 낙태합법화 운동의 상징적인 도구가 된 것은 이 때문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우리나라도 이제 낙태금지법에 대해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생명을 죽이지 않기 위해 만든 이 법이 오히려 산모의 목숨을 앗아간다니, 이거 문제가 있지 않은가?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낙태하는 것을 허용하고, 덕분에 그 나라 여성들은 안전한 곳에서 낙태 수술을 받는 게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먹는 낙태약 ‘미프진’도 의사 처방만 있으면 얼마든지 복용할 수 있다. 임신 초기에 효과가 좋은 미프진은 선진국은 물론 잠비아, 에티오피아, 우간다, 콜롬비아, 심지어 북한 등등 웬만한 나라에선 죄다 허가를 받은 상태지만, 낙태가 허용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원칙적으로 불법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브로커가 추천하는, 성분이 뭔지도 모르는 가짜 약을 비싼 돈을 주고 사먹고 있으니, 낙태금지법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 법인지 의문이 든다.

고무적인 점은 남성들이 댓글을 다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네이버에서도 낙태합법화에 대한 지지가 더 많다는 사실이다. 낙태에 관한 기사마다 추천수가 가장 많은 베스트댓글은 대개 이런 식이다. “낙태합법화 적극 지지함.” “나도 남자인데 낙태는 여자 인권 문제인 것 같다. 낙태금지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보다 지금 있는 산모의 인권을 무시한다.” “싸튀충 (사정하고 도망가는 남성을 지칭함) 처벌법부터 만들던가. 애는 뭐 혼자 만들었냐?” “낙태 반대하는 놈들 실명을 밝혀라. 그놈들에게 강제 입양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건복지부는 지난 8월17일 낙태 수술을 한 의사의 자격을 1개월 정지하는 행정규칙을 공포해 논란을 일으켰다. 산부인과 의사들은 더 이상 낙태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8년 전 그랬던 것처럼 낙태를 하러 간 여성들은 “안 한다”는 말에 쓸쓸히 발길을 돌린다. 그들이 이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다들 알고 있다. 혹시 낙태금지를 강화하는 게 출산율을 높이려는 계략이라면, 이건 번지수가 틀렸다. 프랑스 등 낙태를 합법화한 나라의 출산율이 우리보다 훨씬 높으니 말이다.

1879년 여섯 번째 아이로 태어난 마거릿 생어는 열한 명의 자녀를 낳고, 그것도 부족해 여러 차례 유산을 거듭하던 어머니가 한창 나이에 죽는 걸 보고 피임에 관해 생각한다. 생어는 “어머니가 될지 아닐지를 여성이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1916년 미국 최초로 산아제한 클리닉을 연다. 그를 불편해한 권력자들 때문에 한 달 동안 옥살이를 해야 했지만, 생어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세상과 싸웠다. 그 결과 지금은 피임을 안 한다고 뭐라고 할지언정, 피임을 부도덕한 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낙태가 여성의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 같다. 2018년 5월, 아일랜드에서는 낙태 허용을 위한 헌법 개정을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했는데, 68%가 낙태금지법 폐지에 투표했다. 놀라운 점은 아일랜드가 보수적인 가톨릭이 지배하는 나라라는 사실이다. 갑자기 걱정이 된다. 우리가 1등은 못할지라도 꼴찌는 하지 말아야 할 텐데, 우리 정부는 왜 자꾸 뒤로 가는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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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1. “이건 기생충이 맞습니다.” 내 말에 A는 당황해했다. “선생님, 다시 한번만 봐주시면 안될까요? 아무리 봐도 이건…” 난 A의 말을 잘랐다. “이것 봐요. 기생충은 제가 님보다 더 잘 알잖아요? 제가 맞다면 맞는 겁니다.” A는 알았다고 하며 내 연구실을 나갔다. 그로부터 5년 뒤, 난 학술지에서 ‘기생충과 구별해야 할 음식물들’이란 기고문을 봤다. 소화가 잘 안 되는 식물의 줄기가 대변으로 나올 경우 기생충과 헷갈릴 수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내가 놀란 건 사진에 나온 콩나물이 A가 내게 가져온 물체와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렵사리 알아본 결과 내 진단이 A에게 미친 영향은 상상 이상이었다. 기생충에 감염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 회사는 A를 해고했다. 재취업을 하려고 해도 기생충 감염 전력은 그의 발목을 잡았다. 그러는 사이 A의 가정은 무너졌고, 그의 자녀들도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가정 2. “며칠 정도 걸리겠습니까?”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가 무서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최대한 빨리 준비하겠습니다.” 자신을 국정원 직원이라고 밝힌 그 사내는 내게 싱싱한 회충알 1만개를 구해달라고 했다. 말은 안했지만 그리 좋은 목적에 쓰일 것 같진 않았다. 싫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협조하지 않으면 승진에 지장이 있다는 말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매스컴은 B를 비롯한 몇몇 반정부인사들이 다량의 회충에 감염됐다고 보도했다. 이와 더불어 진보인사들의 위생관이 도마에 올랐다. 차기 대선후보로 거론됐던 B였지만, 그는 몇 달간 격리된 채 치료를 받는다는 후속기사를 마지막으로 사람들로부터 잊혀졌다.

물론 이건 가상의 시나리오다. 회충은 이제 우리 사회에 없다시피 하며, 있다 해도 약 한 알로 치료되니 그리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지만 저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많은 이들이 나를 비난할 것이다. 나의 실수에서 비롯된 첫 번째 사례라도 욕을 먹어야 마땅하지만, 두 번째 사례라면 욕을 먹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교수 자리에서 잘리고, 법적으로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전문가에게 기득권의 삶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나라를 더 좋게 만드는 데 자신의 지식을 써달라는 당부의 일환이다. 거기엔 전문가들이 최소한 사적인 이익을 위해 지식을 남용하진 않을 거라는 믿음도 담겨 있다. 전문가들의 범죄가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더 엄중하게 처벌받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법부의 만행을 다룬 팟캐스트 <이이제이>는 충격 그 자체였다. <이이제이>에 출연한 진실탐사그룹 ‘셜록’의 박상규 기자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해 그 밑에 있는 판사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어떤 짓을 벌였는지를 고발한다. 한 사건만 보자. 좌우익 대립이 치열했던 1949년, 대구 10월 사건이 일어나자 당시 경찰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였는데,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정재식씨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남편이 걱정된 아내 이외식씨는 첫돌이 막 지난 ‘도곤이’를 등에 업고 20리 길을 걸어 경찰서에 찾아간다. 제발 남편을 보게 해달라고 조르자 경찰은 수감된 사람들이 골짜기로 끌려갔다고 말해준다. 시쳇더미들 사이에서 아내는 죽어있는 남편을 찾고 망연자실한다. 억울한 죽음이지만, 국가에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이외식은 빨갱이의 아내라며 가족은 물론 마을에서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이외식이 자식을 버리고 도망간 것은 그런 측면에서 이해가 된다. 그녀 등에 업혀있던 정도곤씨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여기저기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2009년, 과거사위원회는 절차도 없이 민간인을 살해한 그 사건이 국가의 잘못임을 인정했다. 1심 판결은 아내 이외식에게 3억3000만원, 아들 정도곤에게 2억6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 돈이 잃어버린 50년을 되돌려주기엔 턱없이 적지만, 어이없게도 국가는 항소했다. 2심을 진행할 당시 사법부의 수장은 양승태였다. 손해배상금은 대폭 삭감돼, 이외식 8800만원, 정도곤 약 5000만원이 됐다. 국가는 이마저도 주지 않겠다고 상고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정도곤씨의 배상금을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주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는 나중에 밝혀졌다. 법원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었다. “(대법원은)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해왔다. 부당하거나 지나친 국가배상을 제한하고 그 요건을 정립했다.” 소위 재판거래 의혹, 즉 양승태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내가 이렇게 국가 돈을 절약해 주고 있으니 내 요구도 좀 들어달라’며 꼬리를 흔든 것이다. 이 파렴치한 행각이 드러난 뒤에도 대법관들은 사죄하기는커녕 의혹 자체를 부인했다. 양승태는 “법과 양심에 어긋난 재판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래도 이들에게 기득권의 대우를 해줘야 할까? 이들에게 보내는 존경심을 이제 거두자. 그리고 최저임금인 시간당 8350원을 주자. 신뢰를 저버린 전문가에겐 그것도 아깝지만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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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른 것이 아니라 오로지. 2, 그 이상은 아니지만 그 정도는.’

‘다만’이라는 부사에 대한 설명이다.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자주 쓰는 단어도 아니고, 뜻을 보니까 무슨 말인지 더 헷갈리는데, 그럼에도 우리가 이 단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만’이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문장을 이어주는 데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강씨(32·남)는 올해 1월7일 오전 2시20분께 제주 시내 한 마트 맞은편 도로에서 택시를 기다리던 피해자 A씨(58·여)에게 다가가 갑자기 욕설을 하며 주먹을 휘두른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피해자의 옷과 머리채를 잡아 길바닥에 넘어뜨린 후에도 얼굴과 몸을 수차례 주먹으로 치고 발로 걷어차 코뼈를 부러뜨린 것으로 조사됐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강씨는 피해자인 A씨와 전혀 알지 못하는 관계였다. 그런 강씨가 환갑에 가까운 여성에게 막무가내로 폭력을 저질러 코뼈를 부러뜨린 것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강씨에게는 비슷한 범죄 전력까지 있다. 이런 사람이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건 그 자체로 사회에 대한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엄격한 처벌이 필요할 터였다. 송 판사 역시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엄중한 처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쯤 되면 ‘징역 3년에 처한다’ 정도는 돼야 문장 흐름이 자연스러울 텐데, 송 판사가 내린 판결은 놀랍게도 집행유예였다. 송 판사의 설명을 들어보자. “다만 피고인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며,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이같이 형을 정했다.” 그러니까 ‘다만’은 롤러코스터를 방불케 하는 아찔한 반전을 가능케 하는 단어였다. 제주도에 가면 마트 맞은편에서 택시를 기다리지 말자.

또 다른 사례. 대구의 시내버스에 탄 A군(18·남)은 옆에 선 B씨(62·여)가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는 이유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B씨는 해당 사건으로 얼굴, 머리, 어깨 등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합병증으로 끝내 숨졌다. 당시 폭행을 만류하던 C씨(22)도 A군의 구타로 전치 2주 진단을 받았는데, 재판부의 판결은 이번에도 집행유예였다. “죄질이 나쁜 데다 유족이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받은 것으로 보여 피고인의 죄책이 절대 가볍지 않다. 다만 아직 10대에 불과한 피고인이 전과가 없고 초범인 점, 비기질성 정신병적 장애상태에서 범행한 점, 유족이나 피해자와 합의한 점 등을 고려했다.” 대구에서 시내버스를 타는 분들은 가급적이면 숨을 부드럽게 쉬자. A군이 옆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사법부를 ‘다만’에만 의존하는 집단으로 보는 건 그들을 무시하는 행위다. 이씨(39·남)의 경우를 보자. 그는 지난해 7월, 집에서 여자친구 ㄱ씨(47)를 마구 때려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ㄱ씨는 이씨에게 주먹으로 얼굴 등을 수차례 맞아 의식을 잃고 쓰러진 뒤 병원으로 옮겨졌고, 결국 숨졌다. 재판부는 고심했을 것이다. 사람을 죽인 범죄에 집행유예를 선고하면 누가 납득하겠는가? 그래서 재판부는 우리에게 친숙한 ‘그러나’를 등장시킨다. ‘앞의 내용과 뒤의 내용이 상반될 때 쓰는 접속 부사’인 ‘그러나’는 전혀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문장을 부드럽게 연결시켜 준다. “피해자의 고통, 유족들의 처참한 심정, 여자친구를 가격해 사망에 이르게 한 점 등을 고려하면 죄질이 매우 좋지 않다. 그러나 피고인이 피해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 사실을 확인하고자 다그치는 과정에서 벌어진 우발적인 범행으로 보인다. … 고심 끝에 피고인이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돌아갈 기회를 주기로 했다.” 여기서 ‘그러나’를 쓰니까 집행유예란 판결이 좀 더 이해가 가지 않는가? 그전처럼 ‘다만’을 썼다면 여론의 역풍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다음 사례에도 ‘그러나’가 등장한다. 최씨(66·남)는 잠든 아내의 머리를 둔기로 수차례 내리쳐 살해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유인즉슨 자신의 외도 사실을 안 아내가 밥을 차려주지 않았기 때문인데, 물론 이 판결에도 집행유예가 나왔다. “피고인이 자신을 피해 도망치는 아내를 쫓아가 머리를 계속 때리는 등 범행 방법이 무자비하고, 이 때문에 다친 피해자가 피를 많이 흘려 사망할 위험도 컸다. 그러나 범행이 다행히 미수에 그쳤고, 피해자가 입은 상처도 치료돼 현재 일상생활에 지장이 없다.”

여기서 ‘그러나’는 피해자의 빠른 회복력과 더불어 이 판결을 이해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다.

지금도 사법부는 많은 범죄자들을 사회로 돌려보내고 있는 중이다. 여기엔 ‘다만’과 ‘그러나’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글쓰기 책을 냈던 사람으로서 그들에게 ‘다만’과 ‘그러나’의 올바른 용법을 가르쳐 드린다. “사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 다만 그 국민이 선량하게 살아가는 보통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그러나 사법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국민들을 위한다고 믿는다. 국민 여론과 배치된 판결이 계속 나오는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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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사법부

-A씨는 한동안 연락이 안됐다. 나중에 A씨는 ‘갑자기 어머니가 쓰러지셨다’며 양해를 구했다.

-B씨도 한동안 연락이 안됐다. 나중에 B씨는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병원에 있었다’며 양해를 구했다.

-C씨 역시 한동안 연락이 안됐다. 나중에 C씨는 ‘휴대폰을 떨어뜨려 액정이 깨졌다’며 양해를 구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위 셋은 중고품 직거래 사이트인 ‘중고나라’에서 자기 물건을 판다고 내놓은 사람들이었다. 신기하게도 이들에게 연락이 두절될 사건이 생긴 건 다른 분이 그 물건을 사겠다며 물건값을 지불한 뒤였다. 그리고 이들이 양해를 구하고 다시 연락을 취한 시기는 이들이 물건을 보내지 않자 화가 난 구매자들이 경찰서에 가서 고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다음이었다. 궁금해진다. A, B, C는 정말 연락 못할 사건을 겪은 것일까. 구매자들이 고소 운운하지 않았더라도 이들이 먼저 연락을 취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으리라. 중고나라에서는 판매자가 믿을 만한 사람인지 알 수 있게 ‘더치트’라는, 사기피해 정보공유 사이트를 운영하는데, 거기서 조회해 본 결과 위 세 명은 최소 3번 이상의 사기를 저지른 이들이었고, 한 명은 그런 경우가 6번이나 됐다. 사기를 치는 이는 비단 이분들만이 아니어서, 중고나라 사이트에는 ‘사기를 당했어요 흑흑’이란 사연이 매일 몇 건씩 올라온다. 희한한 일이다. 왜 중고나라는 이들을 영구적으로 퇴출시키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경찰은 왜 이 사기꾼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일까?

피해를 입은 이가 사기꾼을 고소하려면 매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피해를 입증할 자료도 챙겨야 하고, 고소장을 접수하려면 경찰서에서 최소한 하루의 절반을 보내야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인생의 수업료로 생각하겠다’며 신고를 안해 버린다. 그래도 끝까지 신고하는 이들이 있긴 하다. 얼핏 생각하기엔 경찰이 사기꾼을 잡으면 다시는 사기를 칠 생각이 없게 강력한 처벌을 할 것 같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그냥 벌금만 조금 내면 끝이다. 사기꾼 자신도 놀랄 정도로 경미한 처벌을 받는다는 얘기, 사기를 쳐봤자 신고될 확률이 극히 낮고, 설령 경찰에 잡혀도 벌금만 내면 된다면, 앞으로도 계속 사기를 치고 싶어지지 않겠는가?

이건 다른 사기에도 적용된다. 우리나라 중고차 시장이 왜 복마전인지 아는가? 시중 가격보다 훨씬 낮은 가격으로 구매자를 유혹해 폐차 직전의 차를 사게 만드는 사기가 판을 치고 있어서다. 중고나라 사기가 그렇듯 중고차 사기범도 그냥 벌금만 좀 내면 바로 풀려난다. 관대한 처벌이 사기공화국을 만든다는 얘기, 현직 검사인 김웅이 쓴 &lt;검사내전&gt;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사기꾼은 어지간해서 죗값을 받지 않는다. 사기꾼이 구속될 확률은 재벌들이 실형을 사는 것만큼 희박하다. 설사 구속되더라도 피해자와 합의를 하면…쉽게 풀려난다…. 이런 천혜의 환경 조성으로 우리나라 사기범의 재범률은 77%에 이른다. 처벌을 받은 사기꾼 10명 중 8명은 다시 범죄를 저지르고, 사기범의 55%는 5개 이상의 전과를 가지고 있다.(19~20쪽)”

뜻있는 사람들은 말한다. 사기죄의 형량을 더 높이는 방향으로 법개정을 해야 한다고 말이다. 나 역시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이게 과연 입법부나 국회의원만의 문제인 것일까. 이 나라에선 중고나라와 비교가 안되는, 스케일 큰 사기가 자주 벌어진다. 자신을 높은 자리로 보내주면 경제를 살리겠다고 해놓고선 자신의 재산만 불린 사람이 있다면, 혹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들겠다면서 자기 측근의 꿈만 이루려고 한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단죄돼야 마땅하다. 국민이 할 수 있는 단죄는 선거를 통해 그를 응징하는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그게 제대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뒤늦게나마 그들에 대한 단죄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그건 저 중의 한 분이 나라를 완전히 거덜 낸 뒤였지, 그 이전까지 선거에서 제대로 된 심판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왜 그럴까? 우리가 남이 아니라서, 존경하는 분의 딸이어서, 저쪽은 왠지 북한하고 친한 것 같아서 등등의 시답잖은 이유 때문이었는데, 이것만 보면 사기꾼에 대한 처벌이 약하다고 징징댈 일은 아니다.

오늘은 지방선거 날이다. 지방선거의 취지는 지역의 일꾼을 뽑자는 것, 누가 우리 지역을 더 발전시킬지에 대한 판단이 표를 던지는 가장 중요한 선택지여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지방선거 후보자를 정당에서 공천하는 제도 탓에 지방선거는 각 정당에 대한 심판의 기능을 수행하게 됐다. 무조건 투표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느 정당이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지를 꼼꼼히 따져 투표해야 하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더 이상 사기공화국이 되지 않도록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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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가족 중 한 명이 큰 병에 걸리면, 아주 부잣집이 아닌 이상 집안이 거덜난다. 건강보험이 있음에도 이런 일이 생기는 건 건강보험에서 부담하는 비율(이를 보장성이라 한다)이 높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대부분에서 보장성이 80%를 넘지만, 우리나라의 보장성은 60% 남짓이다. 치료비가 총 5000만원이 든다면 2000만원을 본인이 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높여서 환자의 부담을 줄여준다면 적극 환영할 일, 문재인 대통령의 야심작 문재인 케어(문케어)는 이런 취지에서 탄생했다. 문제는 돈이 든다는 것. 국민들이 문케어로 혜택을 보는 것이니만큼 이는 건보료를 인상함으로써 해결하는 게 맞다. 도대체 얼마나 올려야 할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국회 예산처에 따르면 보장성을 70%로 올리는 데만도 3.2%의 인상이 필요하단다. 게다가 문케어에 포함된 비급여 보장,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지원 확대 같은 정책들, 그리고 고령인구 증가 같은 환경적 요인을 감안한다면 이보다 더 큰 인상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 건보료는 2017년에 비해 2.04%, 직장인 기준 월평균 2000원이 올랐을 뿐이다. 더 황당한 것은 앞으로도 인상률을 예년 수준을 넘지 않게 관리하겠다는 복지부의 공언이다. 이 정도 인상률로 문케어가 가능할까? 정부는 그간 모아둔 건강보험 적립금 21조원을 사용하면 된다는데, 이건 당장 보험료를 올리지 않으려는 꼼수에 불과하다. 문케어가 시작되면 적립금은 곧 바닥이 날 테고, 그때가 되면 보험료를 올리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말이다. 정부가 당장의 인상을 꺼리는 까닭은 지지율이 떨어질까 걱정해서다. 실제로 우리 국민들 10명 중 8명은 문케어로 인해 혜택을 보는 건 좋지만, 추가적으로 보험료를 부담하는 것은 반대한다고 답했다. 이런 식이면 박근혜 정부의 ‘증세 없는 복지’ 공약을 왜 비판했는지 이해가 안 가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정부는 건보료 인상의 불가피함을 국민들에게 설명하고 협조를 구했어야 했다. 한국의 의료시스템을 훨씬 더 좋게 바꾸는 일인데, 지지율이 좀 떨어진들 어떠랴.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하는 대신 당장의 지지율을 선택함으로써 보험료 인상의 부담을 다음 정권으로 넘기기로 한 모양이다. 재정불안에 허덕이는 문케어가 제대로 작동할지 의사들이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미용·성형을 제외한 비급여를 건강보험에서 지원하는 것 역시 우려스럽다. 비급여는 당장 생명에 지장이 없어서 국민건강에 포함되지 않은 항목이다. 환자 개인이 좀 더 편하고자 돈을 더 내고 선택하는 게 비급여란 얘기인데, 6인실 대신 2인실에 입원한다든지, 회복기간을 약간 단축시켜주는 추가적인 약을 부담하는 게 그 예다. 개인의 편의를 위한 선택에 국민이 내는 보험료를 쓰는 게 과연 온당할까? 더 우려스러운 일은 비급여 여부의 판단을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이 한다는 사실이다. 심평원은 의사의 정당한 진료행위에 과도한 개입을 하곤 했다. 환자에게 꼭 필요한 약을 써도 “왜 이 약을 썼느냐?”며 따지고, 경우에 따라서는 줄 돈을 안 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비급여마저 심평원이 관장한다면, 환자들이 돈을 더 내고 좋은 치료를 받는 건 불가능해진다. 또한 의사들이 그동안 원가 이하의 진료수가를 비급여로 메꿔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문케어에 대한 의사들의 반발은 충분히 이해된다.

하지만 의사들의 반발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의사들, 이기심의 극치네요”라는 댓글에서 보듯, 국민들은 의사를 적폐세력처럼 취급한다. 이건 문케어에 대해 국민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반대투쟁을 이끄는 최대집 의협회장이 ‘박사모’라는 게 더 큰 이유다. 박근혜가 무죄이며 억울하게 탄핵당했다고 주장하고, 최순실의 태블릿 PC가 조작됐다고 하는 등 그가 했다는 일련의 말들엔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가 회장이 되고 나서 첫 번째로 추진한 ‘문케어 반대 의사파업’을 하필이면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4월27일로 잡았던 것도 의협의 앞날이 어둡다는 걸 말해준다.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의협회장이 된 것일까? “내가 선거에 무관심했다.” “설마 박사모가 되겠냐고 방심했다.” 얼마 전 만난 동료 의사들은 이런 반성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정부 측에 의사들의 우려를 전달하고, 이를 문케어에 반영하려면 정부와의 줄다리기가 필요한데, 여론에서 외면받는 의협회장의 말에 정부가 얼마나 귀를 기울여줄지 의문이다. 

이건 꼭 의협만의 일일까?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단지 경제전문가라는 이유로 돈밖에 모르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가 큰 낭패를 봤다. 거기서 교훈을 얻기는커녕 다음 선거에선 무능하기 짝이 없는 분을 대통령으로 만듦으로써 ‘이게 나라냐?’는 탄식을 하게 만들었다. 문 대통령이 다시금 나라를 일으키고 있지만, 잃어버린 9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화가 치솟는다. 6·13 지방선거가 얼마 안 남았다. 신중하게 투표해 의사들처럼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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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드라마는 스토리보다는 보다 자극적인 장면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끌려고 합니다. 여러분 중 상대방 얼굴에 물 뿌리는 거, 혹시 한 번이라도 보신 분 있나요? 전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 일은 오직 드라마 안에만 있을 뿐이죠.”

글쓰기 강의를 나갈 때면 한국 드라마에 대해 비판하곤 했다. 다른 분야에 경험이 없는 드라마 작가가 상상만으로 극본을 쓰니 신선한 스토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일반 사람도 드라마를 써야 한다는 게 내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얘기를 하면 안 되겠다 싶다. 내가 몰랐을 뿐, 드라마 속의 일들은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었으니까. 대한항공 전무 조현민은 ‘을’인 광고대행사 직원에게 물을 뿌리고 폭언을 했단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물론 조씨는 그런 일 자체를 부인했다. 그녀는 “얼굴에는 (물을) 안 뿌렸고 밀치기만 했다”고 주장한다. 밀치는 게 얼굴에 물을 뿌리는 것보다 덜 나쁘다고 믿는 그녀가 대견해 보이지만, 아쉽게도 조씨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런 일이 없었다면 당시 현장에 있던 광고대행사 직원이 해당 사실을 부인하는 인터뷰를 했을 것이고, 베트남에 있던 조씨가 갑자기 귀국해 취재진 앞에서 “내가 어리석었다”는, 마음에 없는 말도 안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조씨가 그 사실을 부인하는 건 해당 장면을 찍은 영상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만일 누군가 그 장면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면, 조씨는 ‘더워 보여서 그랬다’는 식의 변명을 하지 않았을까?

내친김에 대한항공 직원 중 한 명이 조씨의 폭언이 담긴 음성파일을 공개했다. 파일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말투의 천박함도 놀라웠지만, 어떻게 그리 높은 데시벨로 계속 고함을 칠 수 있는지가 더 경이로웠다. 그간 드라마에 조씨 같은 악역이 등장하지 않았던 건 이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비현실적이기도 했지만, 조씨 역을 맡을 만큼 성량이 풍부한 사람이 없어서였으리라. 그런데 제보자에 따르면 조씨의 이런 폭언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란다. 제3자인 내가 잠깐 듣는 것도 괴롭던데, 이런 폭언을 수시로 들어야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끔찍할까 싶었다. 땅콩 서비스를 빌미로 비행기를 돌린 조씨의 언니 조현아까지 있으니, 대한항공에서 일하는 것이야말로 ‘극한직업’으로 분류하는 게 맞다. 물론 대한항공 측은 문제의 음성파일 주인공이 조현민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말하지만, 난 그 사람이 조현민이길 바란다. 조현민 말고 이런 일을 할 사람이 또 있다면, 세상이 몇 배쯤 더 무서워질 거다.

조현아와 조현민, 두 자매는 이제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유명인이 됐다. 정말 신기한 건 이들의 태산 같은 분노다. 재벌가에서 태어나 원하는 걸 다 갖다시피 한 이들이 왜 늘 그렇게 분노에 차 있는지 이상하지 않은가? 음성파일의 막말은 광고대행사 팀장이 제대로 답변을 못하자 벌어진 일이란다. 분노할 기회만 기다리는 사자 앞에서 말이 안 나오는 것도 당연하지만, 설사 준비가 미흡해 답을 못했다 해도 저런 대규모의 분노를 터뜨리는 건 이상한 일이다. 언니가 저지른 소위 땅콩회항도 일반인이 보기엔 별일 아닌 사건으로 촉발됐지 않은가? 일반적으로 분노는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됐을 때 표출된다. 자신이 받아야 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게 첫 번째 조건이다. 주변인들이 아무리 극진히 모셔도 두 자매는 그 정도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느낀다. 주위의 깍듯함이 진심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어서인데, 이건 그들의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측면도 있다. 정식으로 입사시험을 봤으면 모형비행기 회사도 들어가지 못할 실력으로 진짜 비행기 회사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으니, 남들이 비웃을까 걱정될 수밖에. 조현민이 트위터에 썼다는 ‘명의회손’은 그 단서를 제공한다.

둘째, 분노를 마음껏 표출해도 되기 때문이다. 땅콩회항 때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던 조현아가 다시금 사장으로 일선에 복귀한 데서 보듯, 조현민 역시 자신이 무슨 짓을 해도 대한항공이 자기들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게다가 항공사가 그리 많지 않은 현실에서 사람들이 대한항공을 안 타고 못 배길 거라는 것도 너무 잘 안다. 여론 때문에 당장은 사과하는 척하지만, 아마도 조현민은 물 뿌린 사실을 폭로한 업체 사람과 음성파일을 언론사에 제공한 제보자를 찾아내 복수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으리라.

첫 번째 조건은 우리가 바꿀 수 없다. 자기가 더 대접받아야 한다고 우기는데, 어쩌겠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두 번째, 즉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고위직은 비록 사기업이라 해도 회사에 다시 돌아갈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순간적인 실수라면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처럼 오랜 내공에서 비롯된 만행을 그냥 방치해서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이 조치는 대한항공은 물론, 조씨 개인을 위해서도 도움이 된다.

그래도 의대를 나온 내가 보기에 조씨에게 가장 필요한 건 회사일이 아니라 입원이니까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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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하 MB)이 드디어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그는 현 상황을 자신에 대한 정치보복으로 몰아가고 싶은 모양이던데, 아쉽게도 그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은 이재오씨 한명뿐인 것 같다. 그가 여기까지 온 것은 다들 알다시피 돈에 대한 사랑이 유별났기 때문인데, 그 사랑을 철저하게 숨긴 덕분에 MB가 부정한 방법으로 만든 재산이 도대체 얼마나 되는지 추측조차 안되는 모양이다. 일각에서는 30조원을 얘기하기도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금액만 가지고도 MB는 감옥에서 오랜 기간 복역해야 한단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곧 먼 곳으로 떠나는 MB가 벌써부터 그리워지는데, 여기서는 돈, 큰 집, 빠른 차, 명품 좋아하는 부인, 능력 있는 아들 등 모든 걸 다 갖춘 그에게 정작 없는 건 무엇인지 짚어 봄으로써 그에 대한 내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첫째, MB에겐 친·인척이 없다.

혹자는 혈연을 징글징글하게 묘사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가친척은 보는 것만으로 좋고, 어려울 때 내 편이 돼주는 존재다. 내가 좋아하는 사촌 형은 늘 술을 사줄 때마다 “우리는 같은 핏줄 아니냐?”며 친하게 지내자고 강조하는데, 내 사촌 형과 달리 MB에게 친·인척은 그냥 이용할 대상일 뿐이었다. 시골에서 농사를 짓던 형을 도곡동 땅의 주인이라고 우기게 했고, 그것도 부족해 다스라는 기업의 바지사장으로 만들어 이용해 먹었다. 사위에겐 뇌물을 받아 자신에게 가져오라고 시켰다. MB의 처남은 투병 중에 휠체어를 타고 검찰에 출두하는 등 이용만 당하다 저세상으로 갔다. 처남이 죽자 MB는 처남의 부인 권씨를 자기 재산을 관리하는 데 이용하기까지 하는데, 일가친척을 돕지는 못할망정 이용만 하는 MB에게 진정한 의미의 친·인척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둘째, MB에겐 측근이 없다.

“사건의 전모가 국민들에게 알려질 수 있도록 최대한 성실히 임하겠다.” MB 집사로 불린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이 검찰에 출두하면서 한 말이다. 실제로 그는 검찰에서 ‘이게 다 MB가 시킨 일’이라고 자백했단다. 이건 김희중 전 청와대 제1부속실장도 마찬가지였다. 끝까지 자신의 책임을 강조한,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 안기부장을 지낸 장세동의 경우가 좀 극단적이라 해도, 측근들이 이렇게 쉽게 자백하는 건 기이한 일이다. 측근들이 끝끝내 증언을 거부한다면 MB를 포토라인에 세우는 게 가능했을까?

하지만 더 신기한 분은 “자신들의 처벌을 경감받기 위한 허위진술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여전히 자신은 죄가 없다고 우기는 MB다. 정말 자신이 관여한 바가 없다 해도 ‘다 내 탓이니 아랫것들은 놔두고 나를 처벌하라’고 하는 게 우두머리의 자존심 아닌가. 그런 면에서 본다면 MB에게 측근은 없었고, 측근들 역시 주군을 잘못 정했다.

셋째, MB에겐 지지자가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검찰에 출석하던 날, 삼성동 자택엔 극성 지지자들이 몰려 화제가 됐다. 박사모로 대표되는 그들은 박근혜가 돌아오는 시각은 물론이고 구속되는 날, 공판이 있는 날 등등 이슈가 있을 때마다 자리를 지켰다. 언론매체와 다수 국민들은 그들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봤지만, 박사모들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반면 MB가 검찰에 출두하는 날엔 지지자라고 볼 만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대통령을 지낸 지 오래돼서든지, 박근혜와 달리 임기를 다 마쳐서 그랬다고 볼 수도 있지만,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큰 범죄로 감옥에 다녀온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도 따라다니는 지지자들이 있었다는 점에서 MB의 쓸쓸한 검찰 출두는 이례적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MB님, 당신은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겁니까?

넷째, 융통성이 없다.

검찰에 따르면 MB는 BBK로 인해 다스가 입은 손실액 140억원을 되돌려 받는 과정에서 국가기관을 동원했는데, 이는 다스가 MB 것이라는 의혹을 갖게 만들었다. 돈에 대한 사랑이 지나쳐서 벌어진 치정극이지만, 더 큰 문제는 그다음이다. 그 과정에서 MB는 미국 변호사를 선임했는데, 삼성에 이 소송비 60억원을 대신 내게 했단다. 이 돈은 고스란히 MB의 뇌물로 변해 그의 뇌물액수가 100억원을 넘기도록 만들었다. 이렇게 위험한 일을 굳이 할 필요가 있었을까? BBK 돈을 찾는 대신 차라리 기업들한테 140억원을 달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이런 융통성이 있었다면 MB가 지금 이런 처지에 놓이지 않았으리라.

그밖에도 없는 게 몇 개 더 있다. 국가를 자신의 돈을 불릴 수단으로 삼는 행위는 ‘개념이 없다’라고 말할 수 있고, 대북공작을 위해 써야 할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빼돌리는 행위는 ‘안보의식이 없다’에 해당될 것이다. 임기 중에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던 것으로 보아 ‘안 해본 일이 없다’는 말도 가능하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지금 MB는 ‘변호사비가 없다’라고 주장하는 중이다. 그간 해먹은 재산을 생각하면 그냥 웃기려고 한 말 같은데, 그래서 이 말도 덧붙이련다.

“MB에겐 유머감각도 없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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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 당구를 좋아하던, A라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우리들을 모아놓고 당구에 대해 일장 강연을 했다. 그가 했던 말 중 지금도 기억나는 대목은 다음이다.

“당구에 한번 빠지니까 모든 게 당구공으로 보이는 거 있지. 밥을 먹을 때도 밥그릇과 반찬그릇이 당구공으로 보여서, 저걸 어떻게 치면 될지 생각하고 있더라고. 잠자리에 누우면 천장에 있는 벽지무늬가 또 당구공으로 보여. 그럼 또 저걸 어떻게 칠까 고민하지.”

그 친구 덕분에 당구가 얼마나 중독성이 있는지 깨달은 나는 당구를 절대 치지 말자고 결심했다. 대학에 간 뒤 만난 친구들이 가끔씩 2차로 당구장을 갔지만, 난 그때 멍하니 앉아 있을지언정 절대로 당구 큐대를 잡지 않았다. 내 당구 실력이 30에 불과한 건 전적으로 그 때문인데, A와 달리 내 다른 친구들은 현실을 당구대로 착각하지 않았다. 이걸 보면 당구를 친다고 다 중독이 되는 건 아닌 모양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다 보니 좋든 싫든 북한에 관한 소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다들 알다시피 북한은 원래 우리와 한 나라였지만, 이념에 따라 분단된 상태다. 이 때문에 소모적인 갈등을 계속하는 대신 하나로 합쳐 강력한 국가를 만들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들은 지속적인 남북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와는 반대로 북한은 6·25라는 비극을 일으킨 국가인 데다 천안함 사건 등 지속적인 도발을 계속하고 있으니, 그냥 남처럼 지내는 게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북한의 경제사정이 안 좋아지면서 ‘그런 나라와 통일하면 우리만 손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천문학적인 통일비용을 생각하면 그들이 꼭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주장들은 다 나름의 근거가 있기에, 자기 생각이 다를지언정 어느 정도 수긍하는 건 충분히 가능하다. 우리 국민 대다수는 여기에 속한다.

문제는 북한을 너무 숭상하다 그만 이성을 잃어버린 분들이다. 우리 사회의 극히 일부에 불과한 이들을 난 ‘숭북주의자’, 줄여서 ‘숭북’이라 부르련다. 당구에 빠져 밥그릇이 당구공처럼 보인 내 동창 A처럼, 숭북들은 삶의 모든 순간에서 북한을 떠올린다.

-민주당 의원들이 헌법에 나와 있는 자유민주주의를 민주주의로 바꾸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다. 검토해볼 수 있는 얘기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곧 나라의 주인인 정치체제이며, 현존하는 가장 이상적인 체제로 추앙받지 않는가? 지난 9년을 포함한 이 나라의 정치사에서 부족했던 것은 민주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아서였지, 민주주의에 ‘자유’가 없어서는 아니었다. 물론 자유의 가치를 들며 여기에 반대할 수는 있다. 문제가 되는 건 숭북들로, 이들은 자유가 떨어진 ‘민주주의’란 말에서 북한이 주창하는 인민민주주의를 본다. 심지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떠올리기까지 하니, 북한을 숭상해도 너무 숭상하는 게 아니겠는가?

-현 정부의 기조 중 하나는 지방분권이다. 지방마다 환경이 다르니 정치도 그에 따라 달라지는 게 타당해 보인다. 물론 여기에 반대할 수는 있다. 때에 따라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할 때도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숭북들은 놀랍게도 지방분권에서 북한의 연방제를 본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자. “북한이 낮은 수준의 연방제를 한다며 적화통일 전략을 내세우고 있는데 문재인 대통령이 말하는 지방분권은 연방제와 맥이 통한다.”

전 국민이 관심을 갖는 동계올림픽 기간에도 이들은 쉬지 않았다.

-보통 사람은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평창이란 말을 들으면 강원도에 있는 산 좋고 공기 좋은 곳을 떠올린다. 하지만 숭북들은 평창이란 단어만 들어도 흥분해서 어쩔 줄을 모르며, 급기야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다. “평창 올림픽이 아니라 평양올림픽이다.”

-북한 응원단이 쓰고 있는 가면이 화제가 됐다. 응원단에 따르면 그 가면은 북한에서 미남으로 통용되는 얼굴이란다. 보통 사람들은 ‘아, 북한의 미남상은 저런 얼굴이구나’ 하고 만다. 하지만 숭북들은 그 얼굴에서 젊은 시절의 김일성을 떠올린다. “북한 최고의 미남은 김일성이다. 따라서 저 가면은 김일성 가면이다.”

그 시절 당구를 치던 내 친구들은 다 나름대로 건실한 가장이 된 반면, A의 인생은 그다지 잘 풀리지 않았다. 가끔 생각한다. 그때 누군가 A에게 관심을 가져줬다면 그의 삶이 좀 더 낫지 않았을까? 우리는 숭북주의자들이 대책 없는 돌아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하지만, 어쩌면 그들도 간절히 외부의 도움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제부터라도 북한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치료할지 연구해 봐야겠다. 혹시 아는가? 숭북을 유도하는 기생충이 그들의 뇌속에 들어가기라도 한 것인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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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시작되며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반사작용의 일종. 호흡기에 있는 이물질이나 병원체를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는, 우리 몸의 방어기전이다.” 인터넷에 나온 ‘기침’의 정의다. 누군가 기침을 하면 주위에선 “감기 걸렸느냐?”고 묻곤 한다. 감기바이러스가 호흡기에 침투한 경우 기침이 나는데, 이때는 열이 있다든지 청진상 이상소견이 동반되기 마련이라 쉽게 진단이 가능하다. 기침은 다른 질환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감기로 인한 기침은 2주를 넘기는 법이 드물어, 그 이상 기침이 계속된다면 다른 질환을 의심해야 한다. 특히 8주 이상 기침이 지속되는 경우를 만성기침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사람의 5%가 만성기침에 시달리고 있다니 그 빈도가 결코 낮지 않다. 작년 11월 말부터 석 달째 계속되는 기침으로 고생한다는 지인은 결국 병원을 찾았고, 의사로부터 ‘후비루’라는 진단을 받았다. 비염 때문에 만들어진 콧물이 목 뒤쪽으로 흐르다 보니 목이 답답해지고, 이걸 제거하기 위해 기침을 한다는 얘기다. 이밖에도 만성 기관지염이랄지, 천식, 위식도역류 등도 만성기침을 일으키는 중요한 원인이니, 기침이 멎지 않으면 일단 병원에 가는 게 좋겠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하지만 기침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병이 있는 건 아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기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내가 겪은 일이다. 7살 때, 난 기침을 심하게 했다. 걱정이 된 어머니는 날 병원에 데리고 가셨지만, 특별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나아지겠지 했지만 기침은 그 뒤로도 계속됐다. 어머니는 날 데리고 몇 군데의 병원을 더 찾았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용하다는 병원에 찾아간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의사가 날 맞았다. 수시로 기침을 하던 시절이었지만, 이상하게 그 의사 앞에서는 기침이 나오지 않았다. 의사는 나더러 입을 벌려보라고 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뒤 의사는 어머니한테 이렇게 말했다. “이건 그냥 습관입니다. 진짜 원인이 있다면 지금도 기침을 할 텐데, 제 앞에선 안 하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몇 달간 계속되던 내 기침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렇듯 기침을 해야 할 신체적 병변이 없는데도 기침을 계속하는 경우를 습관성 기침이라고 하는데, 이건 어린이에서 더 많다.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아이가 습관성 기침을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고, 당시의 난 주위 사람들의 관심이 고팠던 모양이다. 몸이 아프면 야단도 덜 맞고, 관심을 끌 수 있으니 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지난 17일 오후 강남구 삼성동 사무실에서 검찰의 특수활동비수사와 관련한 입장을 밝히며 기침하고 있다. 권도현기자

지난 1월17일, 이명박 전 대통령(이하 MB)이 기자들 앞에 섰다. 민감한 질문마다 답변을 회피하거나 “그걸 왜 나한테 묻느냐?”며 눈을 부라리던 그가 기자들을 부른 것은 사정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측근들이 국정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를 수수한 혐의로 구속된 마당이니, 자신에게도 곧 검찰의 칼날이 미칠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부름을 받은 기자들이 우르르 MB의 삼성동 사무실로 몰려갔다. MB의 말도 듣고, 그간 못했던 질문도 마음껏 하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MB는 알맹이라곤 하나도 없는, 3분간의 짧은 성명을 마친 뒤 질문도 받지 않고 퇴장해 버린다. 기자들은 ‘이러려면 왜 우리를 불렀냐’고 항의했지만, MB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그의 표정은 자기 할 말을 다한 자의 것이었는데, 설마 그가 “지금의 검찰수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다”라는 말을 하려고 그 쇼를 벌인 것 같진 않았다. 추측건대 그 성명서의 핵심은 기침이었다. 관심을 얻고자 기침을 했던 어린 시절의 나와는 달리, MB는 ‘내가 많이 아프니까 제발 나한테 관심 좀 갖지 말라’고 검찰에, 기자들에게, 그리고 국민들에게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그렇게 본다면 성명서가 부실한 것도, 질의응답을 안 받은 것도 다 이해가 된다.

지난 10여 년간, MB는 늘 건강한 모습을 보여 국민들을 기쁘게 했다. 젊은 시절 기관지확장증으로 병역면제를 받긴 했지만, 대통령 재임 시절 그의 건강이 문제된 적은 없었다. 2017년만 해도 민간인 출입이 금지되는 기무사 내 테니스장에서 20여 차례나 테니스를 쳤다니, 그의 건강은 믿어도 될 것이다. 그런 그의 건강이 가끔씩 도마에 오르는 건 가끔씩 나오는 기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기침은 너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가 대선후보로 나섰던 2007년, 그는 검증위원들이 자신의 병역의혹을 걸고넘어질 때 7차례나 마른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검증위원이 대통령직이 격무인데 건강이 버틸 수 있겠느냐고 하자 그 뒤 한 번도 기침을 안했단다. 자신의 의지로 통제가 가능하단 얘기다. 최근의 기침도 마찬가지다. 그 짧은 시간 말을 하는데 기침을 그리 많이 한다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텐데, 그때 말고는 그가 그렇듯 격렬히 기침을 한 적은 없지 않은가? 그래서 말씀드린다. 그의 기침은 위기탈출용 기침일 뿐 건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 검찰이나 국민들이 마음 약해지지 마시라고 말이다. 그리고 수사에 속도를 좀 내자. MB의 바람대로 평창 올림픽 때 전 국민이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까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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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MB, 이명박

개 다섯 마리를 키운다. 미모가 출중한 데다 애교도 많은 애들이라, 집에 갈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밖에 개들을 데리고 나가면 다들 개가 예쁘다고 찬사가 이어진다. 아내와 난 이 개들의 행복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개들을 혼자 놔두는 게 싫어서 해외여행은 물론이고 국내여행도 가지 않는다. 내가 먹고픈 게 있어도 개들이 먹겠다면 기꺼이 양보할 정도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우리가 없다면, 이 개들의 운명은 하루아침에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개를 기르는 데는 돈과 노력이 필요하다. 먹는 것을 주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한두 번씩 놀아줘야 하며, 가끔 미용도 시켜줘야 미모가 유지된다. 정말 돈이 드는 항목은 진료비다. 개는 의료보험이 없는지라 진료비가 사람보다 훨씬 비싸다. 지금은 저세상으로 갔지만 전에 기르던 개는 심장이 좋지 않아 인공심박기를 달아야 했는데, 결혼 후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때가 바로 그 시기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개를 기르는 사람은 많다. 애견인 천만시대라고 하니, 다섯명 중 한명은 개와 더불어 사는 셈이다. 그런데 이들 중 개를 위해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개가 아파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아 병을 키우고, 행여 데려가도 치료비가 비싸다며 그냥 나오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급기야 이들은 개를 버린다. 나이가 들었다고, 아프다고, 이사를 간다고, 출산 때문에 등등 나름의 이유는 있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버려지는 개들의 운명은 똑같이 비극적이다. 먹을 것을 구하려고 쓰레기통을 뒤져야 하고, 길을 건너다 차에 치이거나 보호소로 끌려갔다 안락사를 당하는 게 유기견의 말로다. 누군가에게 입양돼 제대로 된 관리를 받는다면 애교 많은 개로 돌아갈 수 있지만, 버려진 개가 다시 입양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이렇게 버려지는 개는 한 해에 10만마리에 달하고, 이들을 위한 보호소 운영과 안락사에 들어가는 돈은 천문학적이다. 버려지는 개는 자신에게도 불행이지만, 국민건강 차원에서도 해를 끼친다. 집에서 사료를 먹는 개와 달리 유기견은 이것저것 주워 먹다가 개회충에 걸리고, 개회충의 알을 곳곳에 뿌린다. 그 알이 사람에게 들어와 눈이나 간, 뇌 등에 염증을 일으킬 수 있는데, 우리나라가 세계적인 개회충 강국인 이유도 거리 곳곳에 유기견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토리’라는 유기견을 입양했다. 토리는 유기견으로, 식용으로 도살되기 전 극적으로 구조된, 기구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 뒤 2년간 토리는 새 주인을 찾지 못했지만, 문 대통령 덕분에 퍼스트 도그가 되는 견생역전을 이룬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미지 관리 차원에서 개를 입양했다 내팽개친 반면, 문 대통령은 원래 반려동물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놓인 유기견을 입양한 것만 봐도 대통령의 품성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문 대통령은 대통령이 될 때 반려동물에 대한 공약을 발표하며 유기견에 대한 항목을 포함시켰다. ‘유기동물 재입양 활성화’가 바로 그것인데, 안타깝게도 문 대통령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기견 문화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2017년만 봐도 유기견에 대한 기사가 차고 넘친다. 개가 아프다는 이유로 쓰레기봉투에 버린 사람도 있었고, 휴가철은 대놓고 개를 버리는 시기다. 유기동물을 입양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관리를 안해 더러워진 외모도 입양을 꺼리는 이유지만, 한번 버려져 상처받은 개를 다독이려면 새끼 때 입양하는 것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전 정부의 정책이 실패한 것도 유기견의 급증에 한몫했다. 2015년부터 반려동물 등록제가 시행돼 이를 위반하면 40만원의 과태료를 내게 했고, 버려진 동물의 주인을 알 수 있게 내장용 칩을 심는 것을 의무화했지만, 단속 건수가 0에 수렴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정책들은 전혀 효과를 내지 못했다. 개를 버리겠다는 의지가 투철한데 칩이 무슨 대수겠는가? 유기견 입양을 권하는 것보다 유기견이 발생하지 않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는 얘기다. 병에 걸린 후 치료하는 것보다 걸리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훨씬 노력이 덜 드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말씀드린다. 지금처럼 누구나 개를 기르는 대신, 개 기를 자격을 보다 엄격히 하자. 개와 남은 평생을 같이하고, 개가 아플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도 돌봄을 계속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개를 기르게 하자. 그러자면 제대로 된 애완동물 등록제가 필요하다. 예컨대 개를 기르려는 사람에게 50만원 정도의 등록비를 국가에서 받고, 그 개를 국가가 관리하게 한다면 어떨까? 개를 기르기 어려워야 개의 소중함을 알고, 그 정도 돈을 지불할 수 있어야 개에 대한 제대로 된 돌봄을 하지 않겠는가? 유기동물의 경우엔 등록비를 싸게 한다면 유기동물 재입양 활성화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위 강아지 공장에서 개를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것도 규제할 필요가 있다.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펫숍 분양을 금지시켜 달라’는 청원도 이런 맥락이다. 찾아보면 방법이 없진 않을 터, 2018년은 반려동물들이 눈물을 덜 흘리는 해로 만들어 주시길 빈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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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열흘간, 우리 사회는 귀순병사의 몸에서 기생충이 나왔다는 소식으로 들끓었다. 사람들은 병사의 몸에서 나온 기생충의 길이가 27㎝이고, 그런 게 무려 50마리나 들어 있다는 사실에 까무러쳤다. 기자들 중 일부는 내게 전화를 해서 이 사태에 대한 분석을 의뢰했다.

“아마 회충일 거예요. 자세히 조사해보면 편충도 꽤 있을걸요?”

“북한의 상하수도 시설이 미비한 데다 사람 똥을 비료로 쓴 탓이겠지요.”

“그런 곳에선 구충제를 먹어봤자 별 소용이 없어요. 어제 구충제 먹어봤자 오늘 또 회충알이 입에 들어오거든요.”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기생충이 화제가 된 건 2005년 김치 기생충 파동 이후 무려 12년 만의 일, 간만에 예능이 아닌 전공분야 인터뷰를 하게 돼서인지 나도 신이 나 있었다.

“이국종 교수님께, 저는 아덴만 여명작전 당시에 사경을 헤매던 석해균 선장을 치료한 이 교수님의 명성과 권위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몇 군데의 인터뷰를 하고 난 뒤, 위와 같이 시작되는 정의당 김종대 의원의 글을 읽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통해 모든 인간은, 설령 그가 북에서 왔을지라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국민과 언론은 그 병사의 상태에 크게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하고…. 그렇다면 수술 상황이나 그 이후 감염 여부 등 생명의 위독 상태에 대한 설명이면 충분합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15일 기자회견 당시에 총격으로 인한 외상과 전혀 무관한 이전의 질병 내용, 예컨대 내장에 가득 찬 기생충을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셨습니다.”

그의 글은 내게 충격 그 자체였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상처 회복이 좀 지연될 수는 있을지라도, 기생충의 존재는 북한군의 생사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길이 27㎝의 기생충이 브리핑의 중심이 된 것은 빈곤, 더러움, 징그러움 같은, 기생충이 갖고 있는 나름의 함의 때문이었다. 아마도 국방부는 우리 체제의 우월성을 위해 기생충을 적극 부각시켰고, 이국종 교수는 물론이고 나 역시 그들의 전략에 이용당한 셈이었다.       

또한 김종대 의원은 뒤이어 쓴 글에서 의료 행위 도중 알게 된 환자의 정보를 공개하는 것이 의료법 19조 위반이라는 사실도 지적했는데, 이것 역시 ‘의사’에 속하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북한사람은 언제든 이용당해도 된다고 믿어온 내 과거가 의료법 위반에 무심했던 이유였으리라. 좋은 글은 이렇게 읽는 이에게 깨우침을 준다. 게다가 글에서 지목한 대상이 국민의 신망을 한몸에 받고 있는 이국종 교수였으니, 글쓴이의 용기도 가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사람은 다 다르고,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는 없다. “이국종 교수가 노력하는데 거기다 대고 인격테러라고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정보공개를 금지한 의료법이 북한 주민에게도 적용돼야 하느냐?” 같은 반박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여기에 대해서는 논의해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은 대부분 김종대 의원에 대한 저주였다. 어느 나라 국회의원이냐, 자신이 모시는 북한의 국격이 손상되니 불편한 것이다, 말 많으면 공산당, 진짜 기생충은 바로 너다, 관심종자냐 등등. 궁금하다. 이런 말을 하는 분들은 김종대가 쓴 글을 읽어보기라도 했을까? 해당 글에서 김종대가 귀순하는 병사에게 총격을 가한 북한의 행위가 반인도주의적이며, 우리 주권을 부정했다고 지적한 사실을 안다면, 위와 같은 비판은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 시대를 사는 많은 이들은 글의 전문을 찾아 읽기보다는 “김종대, ‘이국종 교수가 인격테러했다’” 같은 자극적인 문구만 보고 김종대를 욕한다. 가짜뉴스가 유통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구조하에서다. 마음에 드는 구절을 적당히 짜깁기해 인터넷에 유통하면 다들 속아 넘어가지 않겠는가? 결국 김종대는 여론에 못 이기고 사과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의원직을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종대는 군사전문가로, 방산비리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사병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꾸준히 문제를 제기하며 신망을 받고 있었다. 아무리 국민영웅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지만, 할 말을 했다는 이유로 이런 훌륭한 정치인을 보내버리려는 기도는 광기에 가깝다.

인간의 뇌엔 모두 150억개의 세포가 있다. 그렇게 세포가 많은 이유는 여러 개의 세포들이 협력해서 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라는 설계자의 주문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세포 하나만 사용해 판단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제대로 상황파악도 안한 채 무작정 공격하고 보는 일이 늘어나는 것도 다 이 때문인데, 가끔이라도 우리가 다세포생물이라는 생각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꼭 김종대 의원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제도를 택한 우리나라의 앞날을 위해서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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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사면발니에 걸렸어요. 도와주세요.”

포털 사이트에 가보면 이런 식의 질문이 이따금씩 올라온다. 사면발니는 음모에 기생하는 ‘이’의 일종인데, 사는 곳의 특성상 성적 접촉으로 전파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사면발니에 감염된 남편들은 펄쩍 뛴다. 자신은 외부인과 성적 접촉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그들은 ‘찜질방에서 걸렸다’거나 모텔, 사우나 탈의실 등에서 옮았다고 말한다. 물론 수건이나 팬티 등을 공유함으로써 사면발니에 감염되는 것도 가능하지만, 이런 일은 ‘지극히 드물다’고 문헌에 나와 있다. 게다가 찜질방에서는 새로 소독한 수건을 쓰지, 남이 음모를 닦던 수건을 사용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사면발니 환자들의 거의 전부가 찜질방을 통해 전파된다는 건 의학적으로 말이 안되는 얘기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처럼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는 방법 중 가장 흔히 쓰이는 게 바로 거짓말이다. 사면발니에 걸리는 게 검찰이 관여할 일은 아니지만, 만일 검찰이 불러서 추궁한다면 끝까지 버틸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 거짓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어느 정도의 내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6년 말을 뜨겁게 달궜던 국정농단 청문회의 최고 스타는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었다. 그는 시종일관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인해 질문하는 이를 미치게 했는데, 국민의당 이용주 의원은 그로부터 블랙리스트가 실재한다는 사실을 실토받기 위해 같은 질문을 18번이나 던져야 했다. 결국 조윤선은 “그런 명단은 있었던 것으로 판단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답변함으로써 이용주 의원이 쓰러지는 사태를 막았다. 문체부 서기관에 따르면 작년 9월과 10월,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조윤선에게 보고했다는데, 논리와 집요함을 모두 갖춘 국회의원들 앞에서도 꿋꿋이 거짓말하는 그를 보면서 감동한 이는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위증 혐의로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을 받고 만다. 사람들은 조윤선이 구속을 피했다고 아쉬워했지만, 그는 한술 더 떠서 항소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항소심에서 조윤선 측이 내세운 논리가 절묘하다. “9473명에 대한 리스트를 부인한 것이지 블랙리스트의 존재 자체를 부인한 허위증언은 아니다”라는 것도 그렇지만, “해당 증언을 할 당시 선서하지 않았으니 법리적으로 무죄”라는 주장은 국회 출석을 앞둔 이들이라면 외워둘 가치가 충분하다. 물론 조윤선에게도 약점은 있다.

무조건 부인하는 그 뚝심은 대단하지만, 거짓말은 뚝심만 가지고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상대가 결정적인 증거를 들이밀었을 때 의외로 쉽게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단한 점은 여기에 있다. 국정농단을 수습하기 위해 마련한 대국민담화에서 세 번 모두 거짓말을 한 것도 놀라 자빠질 일이지만, 자신을 위해 일하던 변호인을 모두 자르면서 발표한 ‘자신의 입장’은 그의 거짓말 내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해를 돕기 위해 그의 말과 실제 하려던 말을 적어본다.

“무엇보다 저를 믿고 국가를 위해 헌신하시던 공직자들이 피고인으로 전락해 재판받는 걸 지켜보는 것은 참기 힘든 고통이었습니다”(“제 보복이 두려워 제게 헌신하시던 공직자들이 재판받을 때 모든 책임을 제게 떠넘기는 걸 지켜보는 건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사사로운 인연을 위해서 대통령 권한을 남용한 사실이 없다는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믿음”(“대통령 권한을 오직 사사로운 인연에만 사용했다는 진실은 절대로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믿음”)

“저는 롯데나 SK뿐 아니라 재임 기간 그 누구로부터도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사실이 없습니다”(“재임 기간 중 부정한 청탁을 받거나 들어준 곳이 롯데나 SK뿐이겠습니까? 왜 얘네들만 가지고 그러는지?”)

“재판 과정에서도 해당 의혹은 사실이 아님이 충분히 밝혀졌다고 생각합니다”(“저와 변호인의 노력으로 인해 해당 의혹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못했습니다”)

“법원이 6개월 동안 재판을 했는데 다시 구속 수사가 필요하다는 결정을 저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6개월이 아니라 6년을 해도 저는 재판을 훼방 놓겠습니다”)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보복은 저에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합니다”(“정치보복은 제 특기였는데, 그걸 제가 당하니 기분이 참 더럽습니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습니다”(“다 제가 저지른 사건이지만, 책임은 티끌만큼도 질 수 없습니다”)

이런 명문이 왜 화제가 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다. 박근혜의 뛰어난 점은 거짓말이 일상이 된 탓에 스스로를 속이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런 분한테는 거짓말탐지기도 무용지물이고,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별 소용이 없다. 그에게 있어서 불리한 증거는 다 조작이고, 사실을 털어놓는 증인은 정부가 회유한 이에 불과하니까. 희대의 거짓말쟁이가 청와대에 있어서 모든 비극이 초래됐다면, 지금 그가 있는 구치소는 자신에게 딱 맞는 자리일 터다. 그가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물기를 빈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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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얼마 전, 출판사 분과 새 책을 쓰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출판사가 내게 부탁하는 자리였으니 자신이 내겠다고 우겼지만, 그냥 내가 계산하고 말았다. 그곳은 중국집이었고 코스요리를 먹었으니, 누군가가 신고한다면 부정청탁금지법(이하 김영란법)에 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다.

돈을 내기 싫다면 해결책은 간단하다. 아예 안 만나거나 저렴한 곳에서 만나면 되지만, 아무리 싸다 해도 얻어먹는 건 오해의 소지가 있는지라 주로 전자를 택하고 있다. 이해관계가 없는 친구들과 만난다 해도 김영란법을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해진다. 더치페이 대신 한 명이 “오늘은 내가 쏜다”고 하면, 그것 역시 문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전문가에게 확인해보니 두 경우 모두 교수로서의 직무관련성이 없어 김영란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보니 모임 자체를 잘 안 갖게 되는데, 이 선택은 내게 놀라운 경험을 선사했다.

자기 시간이 많아진 것이다. 가족과 보내는 시간도 늘어났지만, 연구에 쏟는 시간도 더 많아졌다. 외부강사료 제한을 둔 것도 바람직하다. 강사료가 지나치게 많을 경우 외부강의에만 관심을 둘 수 있지만, 그걸 제한해 놓으니 억지로라도 교수 본연의 업무에 충실할 수 있다. 내가 올해 4편의 논문과 4편의 책을 쓴 것도 다 김영란법 덕분이다.

9월28일이면 이 법이 시행된 지 1년이 된다. 옛 버릇을 버리지 못한 111명이 법을 어겨 조사를 받았고, 그중 3명이 구속되기도 했지만, 이 법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국민의 85%가 이 법안을 지지하고 있으며, 서울시교육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학부모의 95%와 교직원의 92%가 ‘교육현장에 긍정적인 영향을 줬다’고 답했단다.

외식업과 꽃집은 이전보다 매출이 크게 줄었지만, 인터넷에 올라온 누리꾼 의견은 이에 대한 우려를 깔끔하게 정리해준다. “부정부패에 편승해 돈을 벌던 이들을 왜 우리가 걱정해야 하는가?” 정치권 일부에서는 식사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 10만원의 3·5·10의 상한선을 올리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누리꾼들은 “한 글자도 고치면 안된다”며 맞서고 있다. 정부가 만든 법에 대해 이렇게 높은 지지를 보인 적이 과연 있었나 싶을 만큼 정의사회 구현에 대한 국민들의 의지는 굳건하다.

아쉬운 점은 이 법의 적용을 받는 이가 공직자, 언론인, 교육자에 국한된다는 점이다. 이들과 배우자를 모두 합쳐도 400만명에 불과하며, 이는 우리 국민의 10%가 채 안되는 수치다. 사람이란 다 비슷하기 마련이라, 나머지 90%의 국민들이라고 부정청탁을 저지르지 말란 법은 없다. 몇 년 전 유행했던 광고를 보자. 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오달수는 승강기 안에서 직장 상사의 딸이 K팝 콘서트에 가야 하는데, 티켓이 없다는 말을 듣는다. 같은 승강기에 있던 동료가 복잡한 결제로 어려움을 겪는 동안 오달수는 광고에 나오는 간편결제 서비스로 순식간에 결제를 끝내고 티켓을 건넨다. 상사는 말한다. “딸한테 점수 좀 땄어, 오 과장. 이제 오 차장인가?” 업무와 무관한 상사의 편의를 봐줌으로써 승진을 하는 건 김영란법이 청산하고자 하는 적폐다. 이 광고에 대해 규탄하는 목소리가 드물었던 건 회사마다 이런 유의 부정청탁이 수도 없이 많아서였으리라.

김영란법이 시행된 이후 첫 명절인 설에 즈음해선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신세계백화점이 내놓은 최고급 한우세트인 ‘명품 목장한우 특호’(120만원)는 이달 12일 판매를 시작한 지 4일 만에 준비한 120개가 매진됐다. ‘프리미엄 참굴비’도 10마리에 200만원이라는 비싼 가격에도 4일 만에 30개가 모두 팔렸다.” 공무원들이 혹시 문제가 될까 싶어 작은 선물도 마다하는 동안, 김영란법의 사각지대에선 이런 고가의 선물들이 오가고 있었다. 공무원이 받는 선물이 그런 것처럼 이 선물들 역시 공정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범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일까?

꼭 고가의 선물이 오가야만 부정청탁인 것은 아니다. 예컨대 철도청 직원이 추석날 내려갈 열차표를 지인에게 구해줬다면, 그로 인해 아무런 대가를 받지 않는다 해도 부정청탁일 수 있다. 그 행위로 인해 정당하게 표를 살 수 있었던 이가 표를 사지 못하게 됐으니 말이다. 이 원칙은 학생들에게도 적용된다. 내가 맡은 학생들에게서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모 교수에 의하면 1학기 기말고사가 끝난 뒤 성적을 발표했을 때, 많은 학생들이 자신에게 연락해 성적을 올려달라고 했단다. 채점이 잘못돼서가 아니라 장학금을 타야 돼서거나, 취업을 하려면 학점이 좋아야 하니까 유급을 면하기 위해서 등등이 그들이 대는 이유였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부정청탁 금지의 대상에서 자신들이 제외돼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비단 학생들뿐 아니라 이런저런 인연을 빌미로 부정한 청탁을 하는 이들은 도처에 있으리라. 김영란법을 전 국민을 대상으로 확대할 필요성은 여기에 있다. 김영란법 시행 1년 만에 공직자와 교육계, 그리고 언론계가 깨끗하게 바뀐 것처럼, 김영란법의 전면 확대는 우리나라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나라로 바꿔줄 것이다. 부정부패에 편승해 이득을 취하던 이들아, 김영란법의 철퇴를 받거라.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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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제1심 판결은 법리판단과 사실인증 그 모두에 대해서 법률가로서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5년형을 선고받은 뒤 삼성 측 변호인이 한 말이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판사들도 나름의 법리에 근거해 판결을 내렸을 텐데, 의견 차이가 약간 있는 것도 아니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다니 그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유죄판결 모두에 대해 인정 못 하냐’는 질문에 “전부 다 인정 못 한다. 유죄 선고된 부분에 대해서 전부 다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법은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해 만들어진 최소한의 규범이다. 당연히 법은 사회구성원의 보편적인 상식에 부합해야 한다. 이 부회장의 5년형에 대해 시민사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한 기사에 따르면 시민들 대부분이 구형량에 비해 형량이 너무 적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재판부 결정에 반대하는 여론도 있긴 하지만, 그건 이 부회장의 구속이 경제를 악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지, 이 부회장이 무죄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판결을 진심으로 슬퍼한 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선고 직후 “대한민국이 무너졌다”며 울부짖은 바로 그분들인데, 사람들은 이들을 ‘박사모’라 부르며 정상적인 사람 취급을 안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삼성 측 변호인들은 유죄임을 인정 못 한다고 하고, 항소심에서는 죄다 무죄가 선고될 것을 확신한다고 말한다. 둘 중 하나다. 변호인들이 죄다 박사모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난 후자라고 생각한다. 만일 그들이 박사모라면 정상적인 판단력이 없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람이 사법고시를 합격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는 건 말이 안된다. 

여기서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국회는 힘이 넘치는데 (박근혜 전 대통령은) 여자 하나다. 법관은 약자를 생각하는 게 정도”라며 탄핵법정을 유린했던 김평우 변호사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김평우는 1945년생, 우리 나이로 73세니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해도 이해할 수 있지만, 송우철을 비롯한 삼성 변호인단의 연령은 거기에 훨씬 못 미친다. 그래서 난 삼성 측 변호인들이 이재용의 유죄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는 그의 발언은 그러니까 국민들이 아닌, 자신의 주군인 이 부회장을 향해서 한 말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습니다. 2심에서는 꼭 집행유예로 빼내 드리겠습니다!”

잠시 변호인의 존재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자. 서울에 사는 딸을 만나러 저 멀리 산골짜기에서 달려온 할머니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런데 그 할머니가 하필 최순실과 비슷하게 생겨 경찰서에 끌려갔다. 경찰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할머니에게 훔쳐간 말을 내놓으라고 추궁한다. 경찰과 마주 앉은 게 난생처음인 할머니로선 당황한 나머지 말을 잘 못 했고, 결국 저지르지도 않은 범행을 인정해 버린다. 이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게 해주는 이가 바로 변호인이다. 변호인은 할머니로 하여금 경찰의 부당한 협박에 시달리지 않게 해주며, 불리한 진술을 못하게 막아준다. 덕분에 할머니는 원래 목적인, 서울 사는 딸을 만나러 갈 수 있게 된다. 이런 게 변호인이 만들어진 취지, 그런데 지금 변호인들이 과연 이런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을까? 이재용 부회장은 거대 그룹인 삼성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검사라 해도 그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하며, 법정에서 그의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으니, 변호인이 없다 해도 그가 불리한 판결을 받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법률 지식이 없으니 그 부분에 대해 조언해줄 변호인이 필요하겠지만, 지금 그의 곁에 있는 변호인들은 그 역할을 훨씬 넘어선다. 이렇게 답변하면 유죄가 나오니까 기억이 안 난다고 말해라, 이 대목은 묵비권을 행사하라, 이런 식의 코치를 해주면서 삼성 측 변호인들이 노리는 것은 바로 이 부회장의 무죄방면이리라. 하지만 그들이 공부한 법 정신은 유죄가 확실한 의뢰인을 자백하게 함으로써 적정량의 형을 받게 하는 것이어야지, 범죄를 저지른 게 명백한 이를 사회로 내보내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액의 수임료에 법 정신을 내팽개치는 변호사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다.

1000만명이 본 영화 <변호인>에서 돈 잘 버는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던 송우석(송강호 분)은 단골 국밥집 아들 진우가 시국사건에 휘말려 재판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구치소에 있는 그를 면회하는 것만 도와주려 했던 송우석은 눈앞에 펼쳐진 진우의 처참한 모습에 격분해 모두가 마다했던 그의 변호인이 된다. 재판정에서 송우석은 정권의 편에 서서 진우를 빨갱이로 모는 차동영(곽도원 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니는 애국자가 아니고 죄 없고 선량한 국가를 병들게 하는 버러지고 군사정권의 하수인일 뿐이야. 진실을 얘기해라. 그게 진짜 애국이야.” 

여기서 ‘군사정권’을 ‘삼성공화국’으로 바꾸면 현 상황에 딱 들어맞을 것 같은데, 이 부회장의 판결을 본 송우석이 다음과 같이 외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 정도 뇌물이면 최소 10년은 받아야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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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골목길에서 서행하는 차량의 사이드미러에 일부러 손을 부딪친 뒤 운전자에게 치료비를 뜯어낸 일당이 검거됐다. 2013년 9월부터 올해 2월까지 26차례에 걸쳐 이 짓을 했고, 갈취한 액수가 무려 1290만원이란다. 이들이 했던 수법 중엔 다음과 같은 것도 있었다. 운전면허가 없는 초등학교 동창에게 운전연습을 시켜준다며 자기 차를 운전시킨 뒤,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일당으로 하여금 자기 차를 들이받게 한 것이다. 무면허로 사고를 낸 게 두려운 초등학교 동창은 350만원을 뜯기고 만다. 당시 유행하던 창조경제에 걸맞은 보험사기다.

전통적인 보험사기도 꾸준히 저질러지고 있다. 통증을 과장해 입원하거나 장해 진단을 받은 뒤 보험금을 청구하는 사례가 대표적인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분이 교통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는 50대 남자분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차량에 치인 이분은 휠체어가 없이는 움직이지 못했고, 침대에 걸터앉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하지만 보는 사람이 없자 휠체어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실을 갔고, 10㎏가 넘는 휠체어를 번쩍 들어 차량에 싣더니 운전을 해서 집으로 가기까지 했다. 정체가 탄로난 뒤 그는 “아픈 것처럼 속인 게 아니라 실제로 아프다. 정도의 차이다”라고 말했는데, 이미 그는 자신이 가입한 보험사에서 8500만원을 받아냈고, 가해차량의 보험사에 합의금으로 4억8000만원을 달라고 하는 중이었다. 그 돈을 받기 위해 1년 반 동안 장애인 연기를 했다니, 정성이 정말 대단하다. 요즘에는 보험설계사들까지 가담함으로써 수법이 더 교묘해지고, 규모도 커졌단다.

보험사기가 악질적인 범죄인 이유는 피해자가 금전적 손실을 보는 것 이외에도 보험금이 부당하게 새어 나감으로써 선량한 보험계약자의 손해가 더 커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험사기는 빈번히 일어나고, 심지어 증가하고 있다. 서울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 배상훈은 <누가 진짜 범인인가>라는 책에서 처벌의 경미함이 한 이유라고 말한다. “2013년 재판을 받은 보험 사기범의 양형을 분석한 결과 벌금형 68.7%, 집행유예 17.6%, 징역형 13.7%로 벌금과 집행유예 비중이 거의 90%에 이르렀다.”(185쪽) 일반 사기범의 징역형 비중이 46.6%인 걸 감안하면 3분의 1 수준에 불과한데, 이러다보니 보험사기를 저지르고픈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외국에서 보험사기가 극히 드문 것도 “벌금형이나 집행유예를 남발하지 않으며, 처벌 수위도 액수에 비례하여 결정”(187쪽)되기 때문이란다.

여기에 더해 판사들이 법을 지나치게 엄격히 적용하는 것도 보험사기가 증가하는 이유다. 7월29일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는 95억원 보험금이 얽혀있는 사건을 방영했다. 사건개요는 이렇다. 43세 남성인 김씨는 임신 7개월인 캄보디아인 아내를 옆에 태우고 가다가 갓길에 세워진 트럭을 들이받는다. 부딪힌 곳이 조수석 쪽인데다 아내가 안전벨트도 안한 상태여서 아내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하지만 미심쩍은 대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아내의 혈액에서 수면유도제가 검출됐다. 임신한 상태에서 감기약조차 먹지 않는 것은 한국이나 캄보디아나 똑같다. 둘째, 김씨는 아내 이름으로 총 32개의 보험을 들어놓은 상태였는데, 그 중 26개는 교통재해와 관련된 것이었다. 덕분에 김씨는 95억원의 보험금을 받게 됐지만, 운전면허도 없는 아내에게 그런 보험을 들게 한다는 것 자체가 의심을 살만하다. 셋째, 지방에서 생활용품점을 운영하는 김씨는 수입이 월 500만원 정도에 불과한데, 400만원이 넘는 보험료를 매달 지불했다. 정상적이지 않다. 넷째, 김씨는 사고를 낸 이유를 졸음운전 탓으로 돌렸다. 하지만 사고 현장의 CCTV에선 김씨가 사고 20초 전 상향등을 켜고, 핸들을 갓길 쪽으로 트는 게 목격됐다. 갓길에 세워진 트럭을 발견하고 고의로 추돌하려 했다는 의심을 살만하다. 다섯째, 김씨가 별로 다친 곳이 없다는 건 그럴 수 있지만, 환자복을 입은 김씨가 두 손을 든 채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은 건 아내와 자식을 한꺼번에 잃은 사람이 할 행동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김씨는 아내의 시신을 서둘러 화장했다. 뭔가를 숨기려는 사람이 곧잘 하는 짓이다.

물론 위에서 말한 사실들이 김씨가 고의로 사고를 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이가 김씨뿐인 현실에서, 의심할 만한 정황이 다섯 개 이상 겹쳐진다면 그걸 우연으로만 봐선 안 되지 않을까? 2심에서 김씨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한 건 이런 이유지만, 대법원은 “남편 김씨가 고의 사고를 냈다는 정황증거, 반박의 여지가 없는 꼼꼼한 증거”를 더 찾아내라면서 무죄 취지로 파기환송해 버린다. 대법원이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원칙에 입각해 내린 결정이겠지만, 이 판결이 캄보디아인 아내와 가족, 그리고 보험금과 이자를 내줘야 할 보험사 등 여러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대형 로펌에서 전직 대법관을 비롯한 화려한 변호인단을 꾸린 김씨는 현재 돈을 지급하지 않는 보험사를 상대로 민사 및 형사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 나라에서 보험사기가 갈수록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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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중 가장 말을 못한 분은 누구일까? 대부분 503호에 계시는 그분(이하 GH)을 떠올리겠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이하 YS)도 결코 만만한 분은 아니다. 말 못하는 걸 남들이 알아챌까봐 대선 전 토론회에 한사코 불참했을 정도인데, 특유의 사투리까지 결합돼 정체불명의 문장이 탄생하곤 했다. 정말인지 확실한 건 아니지만 “제주도를 국제적으로 유명한 강간도시로 만들겠습니다”라든지 ‘결식’이라 해야 할 것을 ‘걸식아동’이라 하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래도 내가 GH의 손을 들어주는 이유는 YS는 그래도 문장의 기본은 갖춘 반면, GH는 한 문장에 주어, 동사, 목적어가 여러 개씩 뒤섞여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GH는 수첩이나 프롬프터가 없으면 말을 하지 않으려 했고, 인터뷰도 예정된 질문이 아니면 받지 않았다. 지금 GH가 재판 도중 어지러움을 호소하는 것도 예상을 벗어난 질문이 많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일러서트_ 김상민 기자

정치인이 말을 잘해야 하는 이유는 정치가 설득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 설득은 동료 정치인을 대상으로 하기도 하지만, 기자나 국민을 상대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YS나 GH가 실패로 끝난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말만 잘한다고 정치를 잘하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건 그 말에 어떤 콘텐츠가 담기느냐이지, 화려한 언변이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을 보자. 그가 말을 잘한다고 생각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012년 대선 토론회 때는 그 말 못하는 GH를 압도하지 못했고, 이번 대선 때도 그의 말이 답답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가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가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국민의당 안철수는 말을 못하는 게 자신의 약점이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부산 출신답게 사투리가 섞여 손해를 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는 말을 매끄럽게 잘하진 못한다. 그래서일까. 지난 대선 때 안철수는 달라진 목소리로 대중 앞에 섰다. 웅변학원을 다녔다는 설이 돌기도 했는데, 본인은 자신의 목소리가 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독학으로 복식호흡을 익히며 굵은 목소리를 익혔다.” 그 결과 안철수가 더 행복해졌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대선에서 홍준표에게도 뒤진 3위에 그쳤다. 그건 목소리 문제가 아니었다. 해야 할 말을 하는 대신 오직 선거에서 이기기 위한 정치인의 얼굴만 보였으니까. 객관적으로는 바뀐 목소리가 더 좋을 수 있었지만, 거부감을 느꼈다는 반응이 더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가 정치인으로 인기를 끌었던 과거를 돌이켜 보자. ‘무릎팍도사’에서 그는 어눌한 말투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말하는 내용이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50%의 지지율에도 불구하고 5%에 불과하던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하던 장면도 감동이었다. 기존 정치에 염증을 느끼던 사람들이 그에게 열광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던 그가 몰락하기 시작한 건 국민들이 그의 입을 바라볼 때 늘 침묵으로 일관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늘 새 정치를 입에 올렸지만, 그가 말하는 새 정치가 무엇이냐에 대해 속시원하게 설명한 적은 없다. 일부에선 그에게 ‘간철수’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행동은 안하고 간만 본다는 뜻인데,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사드 배치에 대해서 왜 제 입장을 발표하지 않느냐는 말이 많습니다만, 지금 저는 여러 의견을 듣고 있습니다. 한쪽의 의견만 듣고 판단하는 것은 성급한 것이니 모든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까지 제가 입장표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유력 대선 후보다 보니 입장표명을 하지 않을 수도 없기 때문에 신중하게 여러 의견을 듣고 있는 중입니다. 제 입장은 추후에 발표하겠습니다.’ 매사 이렇게 한다면 지지자들도 답답해하지 않겠는가?

다들 알다시피 국민의당은 지금 존폐위기에 몰렸다. 대선 때 국민의당이 제기한 문 대통령 아들 의혹이 사실은 조작된 자료를 바탕으로 했다는 게 드러나서다. 조작의 주범인 이유미는 이미 구속된 상태고, 이준서 전 최고위원을 비롯한 당 윗선까지 수사가 확대되고 있다. 당에서 꾸린 진상조사단은 이유미의 단독범행을 주장하지만, 그걸 믿는 국민은 거의 없어 보인다. 설령 단독범행이 맞다 해도, 제대로 된 검증도 없이 덜컥 발표한 건 명백한 잘못이다. 이미 밝혀진 사실만 가지고도 석고대죄를 해야 마땅하지만, 당 중진들은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다. 당 지지율이 꼴찌로 추락한 건 당연한 귀결. 하지만 이 사태와 관련해 안철수는 또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직책이 어떻든 국민의당은 안철수의 당이다. 사람들은 이용주나 박지원의 해명보다, 그의 사과를 듣고 싶어한다. 이 사과를 하는 데 무슨 대단한 화술이 필요한 게 아니다. ‘무릎팍도사’에서 그랬던 것처럼, 진솔한 사과와 함께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인지만 말하면 된다. 그 정도도 하지 않으면서 새 정치를 입에 올리는 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침묵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정치인으로서 안철수의 생명선은 짧아지고 있다. 궁금하다. 이럴 거면 목소리는 도대체 왜 바꾼 것인지.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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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와 기생충 이외의 것들에는 도통 관심이 없던 내가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강준만 교수가 쓴 ‘인물과 사상’이란 계간지를 읽고 난 뒤부터였다. 훗날 수많은 ‘강준만 키드’를 양산해 낸 그 시리즈의 창간호는 대선이 있던 1997년 1월 출간됐는데, 부제가 ‘정권교체가 세상을 바꾼다’였다. 저자는 그 책에서 김대중(DJ)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일들이 많을 것이라면서 DJ에 대한 지지를 촉구했다. 그때만 해도 쿠데타로 집권한 세력과 그 후손들이 36년간 장기집권을 해왔기에, 그의 말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다. 그의 바람대로 그해 말 치러진 대선에서 DJ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충격적인 일들이 몇 있었지만, 세상이 바뀌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새 대통령이 대선 직전 일어난 외환위기를 수습하느라 바쁘기도 했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할 수 없이 김종필(JP)씨와 손을 잡은, 소위 ‘DJP 연합’이 개혁의 발목을 잡아서였다. 뒤를 이은 노무현 대통령이라도 세상을 바꿔줬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집권 초기 대북송금특검을 수용하는 등 야당과의 협치에 지나치게 매달리느라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했다. 정권교체의 충격은 오히려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 때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가까워진 듯했던 남북관계가 원래대로 돌아갔고, 대통령은 국민의 뜻과 반대되는 일만 골라서 해댔으니까 말이다. 애써 긍정적인 면을 찾자면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 정부로 가는 데 있어서 완충역할을 해줬다는 데 의미가 있다. 생각해 보라. 노무현 정부에서 바로 박근혜 정부로 갔다면, 국민들의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대선을 6개월 앞둔 여론조사에서 홍준표 후보가 48.5%의 지지를 얻어 24.5%에 그친 문재인 후보에게 크게 앞섰습니다. 안철수 후보는 18.3%로 3위입니다.”

지금이 2017년 6월 말이니 원래대로라면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지 위와 같은 갑론을박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대로 선거가 치러졌다면 어땠을까. 각종 재·보선에서 전패하는 등 지리멸렬이 삶의 철학이 됐던 야당이 1000만명 넘는 노인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는 여당 후보를 이기긴 어려웠으리라. 하지만 신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에 박근혜에게 최순실을 보내줬고, 덕분에 생각지도 않은 정권교체가 일어났다. 이 정권교체는 이전의 그것과는 달리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 있는 중이다.

박근혜·최순실 비리의 철저한 규명과 처벌, 세월호 사건의 재조사, 검찰개혁, 부끄럽지 않은 대한민국 만들기, 이 정도가 집권 초기 문재인 정부가 해줬으면 하는 버킷리스트였으리라. 그런데 대통령은 이런 일들은 당연히 할 것이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4대강 비리도 조사한단다. 게다가 외교부와 국토부에 여성을 장관으로 지명하는 등 성평등도 지향하고 있다. 대통령의 인기가 치솟을 수밖에 없다. 이런 대통령에 감동해서였을까? 서울대병원은 고 백남기씨의 사인을 병사에서 외인사로 바꿨다. 물대포에 맞아 머리를 다친 게 사망원인이었던 걸 감안하면, 이제야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린 셈이다.

 서울대병원 측은 “면밀한 내부 검토를 통해 신중하게 사망원인을 변경했”으며 “정치적 외압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백씨의 사망원인을 병사로 발표한 2016년 10월에도 “사망진단서 작성과 관련해 외압이 전혀 없었다”라고 했으니, 모두 자발적인 판단이 맞다. 같은 기관에서 같은 사람에 대해 사인을 달리 발표한 게 이해가 안 가겠지만, 그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박근혜 시절에는 의사들의 판단력이 마비됐었지만, 정권교체가 의사들의 판단력을 바로 세웠다고. 감동적인 장면은 또 있다. 백씨 사망 당시 경찰청장이던 이철성씨가 백씨와 그 유족에게 사과한 것이다. 기자간담회를 열어 “깊은 애도와 함께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말한 것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데, 유족을 직접 만나 재차 사과하겠단다. 이전 정권에서 이씨는 결코 이런 분이 아니었다. 사과할 의향이 없다고 거듭 밝혔고, 심지어 백씨가 사경을 헤맬 때 병문안조차 가지 않았다.

“병문안을 가는 게 결과적으로 사과의 의미가 돼 가지 않는 게 맞다”고 한 적이 있으니, 최근 그가 보이는 모습은 도저히 동일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에게 일어난 기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는 바로 정권교체다. 정권교체가 박근혜 시절 깊은 잠에 빠진 이씨의 양심을 흔들어 깨웠다는 것.

자신이 잘하는 것도 모자라 주변인들까지 모조리 감화시키다니, 이번 정권교체는 정말로 우리가 바라는 세상을 만들어줄 것만 같다. 여기에 긍정적 요소가 하나 더 있다. 흠결이 있는 장관들을 임명했다는 이유로 자유한국당이 협치를 포기한 것이다. JP와 동거했던 DJ의 예에서 보듯,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꿈꿨던 노무현의 예에서 보듯, 보수세력의 비위를 맞추다간 되는 일이 없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문 대통령의 강경화 외교부 장관 임명은, 그 자체로는 아쉬울 수 있지만, 세상을 정말로 바꾸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리라. 4년10개월 후 우리는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진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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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성이 헤어지자는 동거녀의 말에 격분해 그녀를 패 죽였다. 이것만 해도 충분히 엽기적인데, 그는 동생과 함께 인근 밭에 그녀를 묻고 시멘트를 섞어 암매장한다. 이 엽기적인 사건은 4년이 지난 2016년에야 진상이 밝혀졌고, 결국 남자는 구속된다. 이분은 징역 몇 년을 선고받았을까. 20년 이상이라고 답할 분들이 많겠지만, 판사님은 달랑 징역 5년을 선고한다. 반면 자신의 딸을 성폭행했다는 상담교사를 살해한 뒤 자수한 어머니는 10년형을 받았기에, 판결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누리꾼들의 관심이 뜨겁다. 일부에선 “암매장보다 자수가 더 나쁘냐”며 의아해하지만, 그건 그렇게 볼 일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게 다 판사님이 그리는 큰 그림이니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사람들은 흔히 범죄 없는 세상을 원한다고 말한다. 실제 그런 세상이 오면 일반인들이야 좋을지 몰라도, 법조인들은 죽을 맛이다. 판사와 검사는 세금으로 월급을 받으니 좀 낫지만, 변호사는 밤에 편의점에서 알바를 해야 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판검사가 좋은 것만은 아니다. 무위도식한다고 눈치보는 것도 미안하고, 언제 잘려서 변호사 개업을 해야 할지 모른다. 법조3륜의 중심축인 판사들이 총대를 멘 건 그런 이유다. 이분들은 범죄가 생각보다 잘 일어나지 않는 게 붙잡히기라도 하면 오랜 기간 감옥에서 지내야 하기 때문이라고 가정한다. 그래서 이분들은 그런 불안감을 없애주는 방법을 연구했고, 다음과 같은 안전장치를 만든다. 우선 ‘심신미약’이란 조항을 금과옥조로 떠받들기 시작한다. 범행 당시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하면 형을 사정없이 깎아줬다. 한 여자아이의 인생을 짓밟은 조두순이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우겨 겨우 12년형을 받은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조씨 말고도 많은 이들이 비슷한 이유로 감형을 받고 있다. 이 조항의 효과는 첫째, 술을 마시면 대담해지니 범행을 저지르기 쉬워지고, 둘째, 혹시 붙잡힌다 해도 적은 형량을 받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그러다보니 범죄자들 사이에선 ‘범행 전 한잔 어때요?’란 덕담이 유행할 지경이란다. 심신미약은 알코올뿐 아니라 정신질환을 앓은 이에게도 큰 도움이 된다. 정신병이 불치병은 아니건만, 과거에 우울증이나 조현병 등의 진단을 받은 적이 있다면 무조건 감형사유가 된다. 그러니 범행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일단 의사에게 찾아가 우울한 표정을 짓거나, 환청이 들린다고 떼를 써보시라. 운이 좋다면 바로 풀려날 수도 있다.

다음으로 판사들은 항소를 하면 형량을 낮게 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범행 당시 상황이 변한 게 없다면 1심과 2심의 형량이 같아야 하고, 항소 자체가 판결에 대한 불복을 의미하니 괘씸죄가 추가되는 게 맞을 것 같지만, 판사들은 거의 대부분 형을 깎아준다. 왜? 항소를 자꾸 해야 자신들의 일이 많아지고, 변호사도 수임료를 챙길 수 있으니 말이다. 여기까지만 해도 범죄자들에게 충분히 유리한데, 판사님들은 피해자 또는 피해자 가족과 합의하면 형량을 대폭 줄여주는 서비스도 시행하고 있다. 그 바람에 피해자 측은 가해자로부터 합의를 해달라는 협박에 시달려야 하며, 마음에서 우러나서가 아니라 더럽고 무서워서 합의를 해주게 된다. 그야말로 감형3종 세트로, 이는 범죄 많은 사회가 오길 바라는 판사들의 큰 그림이다. 위에서 예로 든 암매장 남성을 보자. 보통 사람 같으면 5년형도 감사히 받을 텐데, 그는 형이 너무 길다며 항소를 한다. ‘항소 할인 서비스’가 있는데 이 권리를 묵혀두는 건 바보짓일 테니, 그의 행동은 지극히 당연하다. 과연 항소를 맡은 판사님은 5년에서 무려 2년을 깎아주신다. 징역 3년, 근거가 뭘까. 첫째, 피고인이 반성하고, 둘째, 우발적 범행인 데다, 셋째, 피해자의 유족이 처벌을 원치 않기 때문이란다. 반성하는 사람이 자수하는 대신 시체를 암매장했을까 싶고, 사건의 우발성은 1심에서도 고려됐을 텐데 2심에서 또다시 적용되는 게 경이롭다. 유족이 합의한 것도 범인이 얼마 안돼 출소하는 게 두려워서일 텐데, 이게 형을 깎아줄 이유가 돼야 할까? 범인들이 하루빨리 사회로 나와 재범을 저지르라는 판사의 독려라는 가설을 제외한다면, 이 판결을 이해하는 건 힘들어 보인다.

미야베 미유키가 쓴 <스나크 사냥>에서 인간 말종인 남녀는 단순히 자동차를 빼앗기 위해 마침 그곳을 지나던 어머니와 딸을 죽인다. 그럼에도 그들은 시너를 마셨다는 이유로 심신미약 포인트를 획득하고, 제정신이 아니란 이유로 구치소 대신 병원에서 편하게 수감생활을 한다. 재판할 때 반성하는 척까지 하는 등 적은 형량이 나올 게 거의 확실해 보이자 피해자의 아버지는 결국 총을 구해 범인들을 죽이러 간다. “앞으로 오년 뒤, 십년 뒤에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야. 살해당한 내 아내와 딸의 이름 뒤에 앞으로 그런 인간들에게 걸려들어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기다란 명단이 생길 테니까.”(326쪽)

동거녀를 죽이고 암매장한 남성은 2019년, 조두순은 2020년 사회로 복귀한다. 이들에게 피해를 볼 여성들의 기다란 명단이 생길 것 같지만, 판사들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법률수요 증대라는 큰 그림에 있으니까.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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