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나는 직접 만든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체포되었습니다.”

교육부가 만든 국정교과서 홍보 광고는 유관순 열사의 관점에서 3·1운동을 소개하며 시작된다. 부모님이 일본 헌병에게 피살된 이야기와 서대문형무소에서 매질과 고문을 당한 이야기가 이어지더니, 갑자기 배경음악이 꺼지고 한 여학생이 뚱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당신을 모릅니다.” 검정제인 지금의 역사교과서에 유관순의 이름과 사진이 나오지 않는다는 뜻. 이 광고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다짐으로 끝난다.

광고를 보면 볼수록 정말 잘 만들었다 싶다. 독립운동의 상징이라 할 유관순을 동원한 것도 훌륭한 전략이지만, 자신들의 약점을 국정교과서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데는 그저 감탄만 나온다.

대통령이 갑자기 교과서를 국정화하는 이유는 추측하건대 당신 아버지의 과오를 미화하기 위함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자원해 일본을 위해 싸운 분을 위대한 대통령으로 밀기는 좀 부담스럽다. 비단 박정희 대통령 말고도 우리나라 보수세력이 추종하는 분들은 대개 친일의 경력이 있는지라, 뉴라이트를 중심으로 하는 보수세력은 우리나라의 건국시점을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대신 1948년 정부수립으로 하려고 한다. 그래야 친일파들에게 면죄부가 주어지고, 이승만은 건국의 아버지가 되니 말이다. <친일인명사전>을 각 학교에 배포하는 것에 불편한 심기를 내비칠 정도로 친일에 관대한 보수세력이 ‘독립운동을 위해 애쓴 이를 잊지 않겠다’며 유관순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기가 막히지 않는가? ‘유관순에 대해 초등학교에서 다 배워서 넣지 않았다’는 진보 측의 말이 치졸한 변명으로 느껴질 수밖에. ‘김일성 주체사상을 아이들이 배우고 있다’는 식의 선동도 기가 막힌다. 실제 교과서에서 북한 관련 내용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주체사상도 비판적으로 기술돼 있지만, 저런 선동을 하는 이유는 실제로 교과서를 훑어보며 그 말이 맞는지 확인해 볼 사람이 거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진보세력이 뒤늦게 “사실과 다르다”고 우겨보지만, 이미 기선을 제압당한 뒤라 뒷북에 그친다. 비단 요즘만의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정부 시절 종부세가 부과됐을 때 보수언론은 ‘세금폭탄’이란 용어를 쓰며 반대를 표시했다.



종부세가 상당액 이상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부과될 뿐 서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지만, 그 표현은 종부세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심어주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의 구미를 끌어당기는 선동에 능하다는 것, 앞으로도 보수의 시대가 계속될 것 같은 이유다.

영악한 전략도 전략이지만, 보수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 건 콘크리트 같은 지지층의 힘이 크다. 더 무서운 건 이 지지층 중 상당수가 아무 생각이 없다는 점. 예를 들어보자. 며칠 전 발표된 국정교과서 여론조사 결과 반대가 52.6%, 찬성이 42.8%였다. 반대가 더 많긴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국정화에 40%가 넘는 이들이 찬성한 게 더 불가사의다. 아마도 이들은 교과서 국정화를 문재인이 주도했다면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와 반대시위를 했으리라.

노무현 대통령 시절을 생각해 보자. 보수는 당연히 노무현을 물어뜯었지만, 노 대통령에 대한 진보세력의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2006년 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5%대까지 떨어진 것도 진보세력이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대통령직을 잘 수행하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반면 보수층은 그런 생각 자체가 없다. 국정수행 지지도를 무슨 대선투표 정도로 아는지라 대통령이 아무리 삽질로 일관해도 무조건 ‘잘한다’를 선택한다.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늘 50%에 육박하는 것은 바로 그 이유다. 정치라는 게 원래 지지층을 빼앗아 오는 게임일진대, 생각 자체가 없으니 이들을 설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진중권 교수가 다음과 같이 한탄한 것도 이해가 된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니 이길 수가 없다.”

세상에 많은 대통령이 있겠지만, 박 대통령만큼 행복한 대통령은 드물 것 같다. 하고 싶은 걸 지시만 하면 참모들이 신출귀몰한 전략을 짜주고, 콘크리트 지지층은 그게 자신들의 이익과 상충될지언정 열정적으로 옹호해 준다. 아무리 삽질을 해도 선거는 다 이기기까지 하니, 얼마나 좋은가? 이건 비단 박 대통령뿐 아니라 앞으로 대통령이 될 보수인사들에게도 해당되는 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대한민국, 보수 대통령의 천국.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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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일 (金克一)은 조선시대 김해 사람으로 부모님을 극진히 모셨다.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할 때 극일은 입으로 상처를 빨아 낫게 했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는 대변까지 맛보며 간호를 했다.”

효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다. 인터넷이 없던 조선시대에도 효자에 관한 미담은 도의 경계를 넘어 전국에 회자됐고, 나라에서는 이들을 불러 표창하기도 했다. 이렇듯 효자는 해당 지역의 자랑이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효자의 인기가 그전만 못한 느낌이다. 여성들 사이에서 효자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트 도중 별일 아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버리는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여성들은 이런 남자들을 ‘마마보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더 큰 문제는 결혼 뒤에 발생한다. 효자남편과 결혼하면 시부모를 모셔야 하거나 그에 준할 만큼 시댁에 잘해야 하니, 아내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과거와 달리 요즘엔 효자가 직접 몸으로 뛰기보단 아내를 시켜서 효도를 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것도 부담을 가중시킨다. 인터넷에서 ‘효자남편’을 검색하면 숱한 미담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결론이 “효자남편은 싫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김극일이 직접 아버지 대변을 맛보는 대신 아내에게 시켰다면 그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하지만 지금 효자들은 하나같이 바빠, 온갖 수발을 아내에게 시킨다. 그러다 보니 다음과 같은 일도 생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모시는데, 대소변을 받아내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다. 효자남편은 밤늦게 집에 와서 “이렇게밖에 못 모셔?”라며 아내를 타박하는 것으로 효성을 과시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낳아주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까지 정성스러운 제사상을 차리게 하니, 명절까지 합치면 아내 허리가 휠 지경이다. 아내들이 효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높은 사람, 예를 들어 대통령이 효자면 어떨까? 아랫사람은 당연히 피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들까지 피곤할 수 있다. 하필이면 지금 대통령께선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가장 효성이 지극한 분이다.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대통령의 효성은 갈수록 더 커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아버지에 관해서는 기억력이 출중해서, 아버지 욕을 했던 사람은 잊지 않고 뒤끝을 작렬시킨다.


문제는 대통령의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대통령을 하신 박정희라는 점이다.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다음과 같은 전력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일본 육사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썼고, 졸업 후 관동군 중위로 활동했다. 해방 후엔 북한을 추종하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인 신분을 박탈당한 적이 있고, 쿠데타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했으며,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해 욕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하도록 했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공과를 따져서 객관적으로 해야지, 무조건 숭배만을 강요해선 안 된다.

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대통령께서는 나이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아버지를 숭배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산적한 이슈도 많을 텐데 갑자기 교과서를 국정화하자고 들고나온 것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해야 했고, 또 아버지 탄생 100주년인 2017년에 맞추려면 지금부터 서둘러도 늦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벌써부터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얘기를 흘리는 걸 보면 앞으로 만들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새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이들이 사회로 나갈 때쯤엔 곳곳에 박정희 동상이 만들어지고, 박정희를 신처럼 추종하는 종교가 생기지 않을까? 난 국정화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기존 검정제에 문제가 있다면 국정화를 하는 것도 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국정화 방침을 먼저 정한 뒤 거기에 맞는 논리를 억지로 만들려다 보니 모두가 피곤해진다. 그 결과 역사학자들이 국정화 반대 서명을 하고, 국정화에 관심이 없던 국민들마저 찬반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대통령 뜻이라면 무조건 받드는 새누리당이 “현 교과서는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며 예의 색깔론을 펴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사태를 초래한 건 다 대통령의 효심, 앞으로 대통령을 뽑을 때는 효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따져본 뒤 선택을 하자. 효자 대통령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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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극일 (金克一)은 조선시대 김해 사람으로 부모님을 극진히 모시었다. 어머니가 종기로 고생할 때 극일은 입으로 상처를 빨아 낫게 하였으며, 아버지가 병이 들었을 때는 대변까지 맛보며 간호를 했다.”

효자. 듣기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단어다. 인터넷이 없던 조선시대에도 효자에 관한 미담은 도의 경계를 넘어 전국에 회자됐고, 나라에서는 이들을 불러 표창하기도 했다. 이렇듯 효자는 해당 지역의 자랑이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서는 효자의 인기가 그전만 못한 느낌이다. 여성들 사이에서 효자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이트 도중 별 일 아닌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집에 가버리는 남자를 좋아할 여자는 그리 많지 않다. 여성들은 이런 남자들을 ‘마마보이’라 부르며 경계했다.

서민 교수
더 큰 문제는 결혼 뒤에 발생한다. 효자남편과 결혼하면 시부모를 모셔야 하거나 그에 준할 만큼 시댁에 잘 해야 하니, 아내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과거와 달리 요즘엔 효자가 직접 몸으로 뛰기보단 아내를 시켜서 효도를 하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 것도 부담을 가중시킨다. 인터넷에서 ‘효자남편’을 검색하면 숱한 미담이 나오는데, 대부분의 결론이 “효자남편은 싫다”고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김극일이 직접 아버지 대변을 맛보는 대신 아내에게 시켰다면 그 아내가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하지만 지금 효자들은 하나같이 바빠, 온갖 수발을 아내에게 시킨다. 그러다보니 다음과 같은 일도 생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보내는 대신 집에서 모시는데, 대소변을 받아내고 옷을 갈아입히는 일은 모두 아내의 몫이다. 효자남편은 밤늦게 집에 와서 “이렇게밖에 못 모셔?”라며 아내를 타박하는 것으로 효성을 과시한다.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일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님을 낳아주신 할아버지, 할머니한테까지 정성스러운 제사상을 차리게 하니, 명절까지 합치면 아내 허리가 휠 지경이다. 아내들이 효자에게 거부감을 갖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높은 사람, 예를 들어 대통령이 효자면 어떨까? 아랫사람은 당연히 피곤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국민들까지 피곤할 수 있다. 하필이면 지금 대통령께선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가장 효성이 지극한 분이다. 대통령의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지만, 대통령의 효성은 날이 갈수록 더 커지는 느낌이다. 게다가 대통령은 다른 면에서는 그렇지 않은데 아버지에 관해서는 기억력이 출중해서, 아버지 욕을 했던 사람은 잊지 않고 뒤끝을 작렬시킨다.

문제는 대통령의 아버지가 보통 사람이 아닌, 우리나라에서 오랜 기간 대통령을 하신 박정희라는 점이다. 다들 알다시피 박정희는 경제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다음과 같은 전력도 가지고 있다. 일제시대 때 일본육사에 들어가기 위해 혈서를 썼고, 졸업 후 관동군 중위로 활동했다. 해방 후엔 북한을 추종하는 남로당에 가입해 군인 신분을 박탈당한 적이 있고, 쿠테타로 헌법과 민주주의를 유린했으며, 영구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을 만들었고, 긴급조치를 선포함으로써 대통령에 대해 욕만 해도 영장 없이 체포하도록 했다. 따라서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공과를 따져서 객관적으로 해야지, 무조건 숭배만을 강요해선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16년도 예산에 대해 시정연설하고 있다._ 김창길 기자


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대통령께서는 나이든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자라나는 세대만큼은 아버지를 숭배하게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산적한 이슈도 많을 텐데 갑자기 교과서를 국정화하자고 들고 나온 것도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해야 했고, 또 아버지 탄생 100주년인 2017년에 맞추려면 지금부터 서둘러도 늦다는 인식 때문이었으리라. 벌써부터 박정희가 비밀 광복군이었다는 얘기를 흘리는 걸 보면 앞으로 만들 교과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새 교과서로 역사를 배운 이들이 사회로 나갈 때쯤엔 곳곳에 박정희 동상이 만들어지고, 박정희를 신처럼 추종하는 종교가 생기지 않을까? 난 국정화를 반대하는 게 아니다. 기존 검정제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면 국정화를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니까.

하지만 국정화 방침을 먼저 정한 뒤 거기에 맞는 논리를 억지로 만들려다보니 모두가 피곤해진다. 그 결과 역사학자들이 국정화 반대 서명을 하고, 국정화에 관심이 없던 국민들마저 찬반으로 갈라져 싸우고 있다. 대통령 뜻이라면 무조건 받드는 새누리당이 “현 교과서는 주체사상을 가르친다”며 예의 색깔론을 펴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 사태를 초래한 건 다 대통령의 효심, 앞으로 대통령을 뽑을 때는 효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먼저 따져본 뒤 선택을 하자. 효자 대통령 때문에 힘들어 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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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과학자는 어떤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할까? 다른 데 일절 눈을 돌리지 않고 실험만 잘하면 훌륭한 과학자라고 생각하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첫째, 자신이 뭘 하려는지 확실한 목표를 정하고, 둘째, 거기 맞는 인재를 모아 연구팀을 꾸리며, 셋째, 그들이 열심히 일할 수 있게 잘 관리하는 것, 그게 훌륭한 과학자가 할 일이다.

최근 출간된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는 네안데르탈인의 DNA 서열을 분석함으로써 스타 과학자가 된 스반테 페보 박사가 자신의 30년 연구인생을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페보가 성공적인 연구생활을 한 이유였다. 위에서 언급한 첫째, 둘째야 남들도 웬만큼 할 수 있지만, 페보에겐 남들이 어려워하는 세 번째를 잘하는 비결이 있었다. 팀장인 페보가 일방적으로 팀을 좌지우지하는 대신 납득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면 팀원들이 언제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든 것.

이렇게 민주적인 분위기를 유지하면 장점이 많다. 첫째, 좋은 아이디어는 팀원들이 자유롭게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 와중에 나올 수 있다. 페보가 숱한 난관을 뚫을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둘째, 연구원이 주인의식을 갖는다. 교수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의욕이 생기지 않고 일도 수동적으로 하게 되지만, 자기 의지가 반영된 연구라면 사정이 다르다.

실제로 페보의 연구원들은 며칠씩 집에 안 들어가도 좋다는 태도로 연구에 임했다. 하지만 페보가 보기엔 이 시스템이 답답할 때도 여러 번 있었다. 이 분야 최고 전문가인 자신이 하자는데 남들이 반대를 하면 짜증이 나지 않겠는가? 그래서 페보는 “교수의 말이 곧 법이던 독재 시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도 가끔씩 했”지만, 민주적 분위기의 장점이 사라질까봐 “다수의 의견에 잠자코 따랐다. 우리 팀의 값진 자산인 생각을 자유롭게 교환하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획기적인 업적을 만들 수 있었다.



그 중요성과 업무량에서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대통령이 하는 일도 과학자와 다를 바 없다. 달성 가능한 국정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에 맞는 사람들을 불러다 일을 나누어 주고, 그들이 일을 잘할 수 있도록 독려하는 게 대통령의 일이니까.

안타깝게도 현 대통령은 그 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다. 국정목표부터 그랬다. 최우선 과제로 꼽은 ‘창조경제’라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는 측근은 드물었다. 해당 분야 장관으로 오는 이들은 “창조경제가 뭐냐?”는 질문공세에 진땀을 흘렸다. 목표가 뭔지도 모르는 판에 사람들이 열심히 일할 수는 없는 노릇, ‘안전과 통합의 사회’를 비롯해서 5대 국정목표가 대부분 달성되지 못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목표에 맞는 사람들을 모으려 노력한 것도 아니었다. 현 정부의 인사기준은 오직 ‘대통령과 친하냐?’였고, 친한 사람들을 주로 등용하다보니 역대 어느 정부보다 더 심한 영남 편중 인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은 “인재 위주로 인사를 하다 보니 어떤 때는 이쪽이 많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저쪽이 많기도 하다”며 겸손해했지만, 차라리 “내가 영남에 오래 살아서 그렇다”고 하는 게 훨씬 더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가장 못하는 것은 세 번째였다. 페보 박사처럼 민주적 분위기를 만들어줘야 신이 나서 일을 더 잘할 텐데, 대통령은 자신의 말에 토를 달지 못하는 분위기를 조성했고, 혹시라도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있다면 철저히 응징했다. 물론 뜻이 안 맞는 사람을 내쳐야 할 경우도 없지는 않다. 페보 박사 역시 낡은 기법만 고집하는 과학자와 결별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몇몇 측근들에 대한 대통령의 응징은 그저 어이를 상실한다. 검찰총장은 국정원 댓글 수사를 열심히 하다 쫓겨났고,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려다 굴욕을 당했다. 최근 김무성 대표와 대립각을 세우는 건 그가 내년 총선에서 안심번호 국민공천제를 하겠다고 야당과 합의해서다. 안심번호 공천제가 나쁜가? 아니다. 청와대는 민심이 왜곡되느니 국민세금이 들어간다느니 하는 걸 반대이유로 내걸지만, 속내는 이 제도로 인해 대통령 자신이 국회의원 공천권을 마음껏 휘두르지 못하는 게 싫어서다. 이런 분위기에서 국민을 위하려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들 숨을 죽이는 세상에서 대통령의 친위대인 ‘친박’들의 목소리만 날로 높아진다.

“자기 형제를 죽이기 위해 오랑캐와 야합했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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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우리 민족의 최대 명절이다. 새해를 시작하는 설도 큰 명절이긴 하지만, 풍성한 수확과 함께하는 추석이야말로 몸과 마음이 좀 더 풍요로운 때다. 그래서일까. 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며 살아보고자 연휴 동안 대통령님의 장점을 찾아 헤맸다. 주변 좌파들은 “설마 장점이 있겠어?”라며 냉소했지만, 막상 찾아보니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 시간을 잘 활용하게 해준다.

나이가 들면 시간이 참 빨리 간다는 걸 느낀다. 10대는 시간이 시속 10㎞로 가고, 50대는 시속 50㎞로 간다는 말이 있듯이,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연말이곤 했다. 서유석이 “가는 세월 그 누구가 잡을 수가 있나요”라며 탄식했듯이 시간이 간다는 건 안타까운 측면이 더 많은데, 현 대통령이 집권한 뒤 놀랍게도 세월이 가는 속도가 늦춰졌다. 이제 2년 남았나 싶으면 3년도 더 남았고, 그로부터 한참을 더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2년 반이나 남았다.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군대 있을 때보다 시간이 더 느리게 가는 것 같은데, 이 느낌을 잘 이용한다면 의외로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6개월은 걸릴 일을 석 달에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둘째, 늘 긴장할 수 있게 해준다.

먼바다에서 잡히는 청어는 운송 도중 거의 죽어버려 수산시장에서는 냉동청어밖에 접할 수 없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청어를 살린 채 운반하는 게 가능해졌다. 비결은 수조에 청어의 천적인 메기를 함께 넣는 것으로, 청어가 메기한테 잡아먹히지 않으려고 긴장하다보니 배가 부두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의 ‘메기효과’ 이론이다. 사람도 살아가는 데 적당한 긴장이 필요해서, 너무 나태해지면 일도 안되고 건강도 해칠 수 있다. 세월호에 이어 메르스까지, 현 정부 들어 해마다 큰 사건이 터지고 있다. 할 수 없이 사람들은 ‘내 안전은 스스로 지킨다’며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는데, 이는 우리의 생존력을 더 높여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셋째, 투자 대비 효과가 뛰어나다.

지난 8월14일,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면서 고속도로 통행료 면제라는, 어느 정부도 하지 못한 선물을 국민들에게 안긴다. 뜻밖의 조치에 놀란 국민들이 우르르 차를 갖고 고속도로로 나간 덕분에 메르스로 인해 침체됐던 우리나라 경제는 극적으로 회생한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대통령은 추석을 맞아 장교를 제외한 56만명의 사병 전원에게 1박2일의 특별휴가증을 주고, 멸치와 김가루, 약과 등으로 구성된 특별간식을 하사했다. 덕분에 지뢰사건 등으로 침체됐던 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는데, 간식을 사는 데 든 돈이 청와대 예산이 아니라 ‘군 소음피해 보상금’을 가져다가 쓴 것이라니, 이쯤 되면 박 대통령의 ‘한턱 정치’가 신의 경지에 이른 게 아닌가 싶다. 미국이 국산 전투기 개발에 필요한 기술이전을 하지 않으려는 것도 군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박 대통령의 능력을 무서워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넷째, 지역인재를 육성시킨다.

현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대탕평 인사”를 약속했다. ‘골고루 인재를 등용해 100%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는데, 며칠 전 경향신문이 파워 엘리트 218명을 분석한 결과 영남 출신이 38.1%로 가장 많았다. 일전에 대통령은 영남 편중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인재 위주로 하다 보니까 어떤 때는 이쪽이 많기도 하고 저쪽이 많기도 하다”고 답했다. 하기야,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 중 영남 출신이 무려 7명에 달하니, 영남 사람들에겐 뭔가 특별한 것이 있긴 하다. 고무적인 건 다른 지역 분들이 “우리 마을에서도 대통령이 나와야 해!”라며 자기 지역의 인재를 키우려 한다는 것. 이렇게 경쟁적으로 인재를 키우다 보면 결국엔 ‘대탕평 인사’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으니, 단기적인 영남 편중을 시비할 일은 아니다.

다섯째, 국정원을 세계적 정보기관으로 키우고 있다.

<파리의 생활 좌파들>이란 책에는 한 프랑스 고위공무원의 인터뷰가 나온다. “이명박이 권력을 잡으면서 국정원 활동이 활발해졌고 우리를 압박해 오기 시작했다. … 박근혜 정권이 들어선 뒤로는 더 심해졌다. 일단 파리에 주재하는 국정원 직원의 숫자가 더 늘어났다.”(183쪽)

우리는 국정원이 모사드나 CIA에 비해 능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후자의 기관들은 세계와 싸우는데 국정원은 댓글을 단다든지 간첩을 조작하는 등 찌질한 일만 했던 게 그 이유. 하지만 박 대통령 집권 이후 우리 국정원도 전 세계를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 듯하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우리도 모사드 같은 훌륭한 정보기관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대통령이 단임인 게 아쉬워진다.

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50%대라는 것에 놀라는 좌파들이 많다. 하지만 대통령의 장점을 생각하면 이 지지율은 오히려 낮은 것이다. 대통령의 장점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져서 청와대 하늘에 늘 슈퍼문이 빛나기를 빌어본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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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서른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늦게 시작한 독서는 내 삶을 180도 바꿔 놨다. 나밖에 모르고, 사회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던 내가 이제는 사람들 앞에 서서 사회 정의에 대해 떠들고 있으니, 뽕나무밭이 바다가 된 격이다. 책은 어떻게 사람을 변화시킬까?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독서가인 CBS 정혜윤 PD는 이렇게 말한다.

“책에는 좋은 말이 많잖아요. 요즘 세상에서 책이 아니면 그런 말들을 어디서 듣겠어요? 그 말들을 듣다 보면 스스로 변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지난달, 미국 오바마 대통령이 여름휴가를 가면서 6권의 책을 가져갔다는 게 보도됐다. 휴가지에서 책을 읽는 대통령이라니, 멋져 보인다. 그가 가져간 책들은 다 나름의 의미를 지닌 것들이다. <저지대>에 대한 해설을 보자.

“1960, 1970년대 인도와 미국을 배경으로 시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차분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는 이런 멋진 말도 나온단다. “죽음 앞에서 우린 평등해. 그 점에선 죽음이 삶보다 나은 것 같아.”(93쪽) <올 댓 이즈>도 한 남자의 삶을 통해 미국 사회에서 사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 주는데, 이런 책들을 읽으면 삶이 무엇인지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섯 번째 대멸종>은 지구에서 사라져 가는 생명체들의 이야기로, 개발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겠다. 비단 오바마만이 아니다.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나 3대 대통령인 제퍼슨은 장서가 수천권인 애서가였고, 후임 대통령들 중에도 알아주는 독서가가 꽤 많았단다. 나름의 한계는 있을지언정 미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중요한 가치가 된 것도 이런 전통 덕분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책 하면 떠오르는 분은 1만7000권의 책을 소장했다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그는 비서실장이 골프를 권하자 이렇게 말했단다. “좋은 운동이지요. 그런데 골프 한 번 치려면 서너 시간은 걸리죠? 그렇다면 책을 한 권 읽을 시간인데, 독서가 낫지 않을까요.” 노무현 전 대통령도 책을 좋아해, 휴가 때는 물론이고 탄핵 소추를 당했을 때도 책을 읽으며 보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어떨까? 고백하자면 난 박 대통령에게 편견을 갖고 있었다. 책과 그다지 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대통령이 된 뒤 첫 번째로 간 2013년 여름휴가 때 박 대통령이 공개한 사진을 보면 모래밭에 글씨를 쓰며 놀고 계시던데, 그 사진은 기존의 편견을 더 강화시켜 줬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경남신문 기사의 한 구절을 보자.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 바로 ‘독서’다. 박 대통령의 삼성동 자택을 방문한 기자나 보좌관들은 누구나 놀란다고 한다. 원인은 2층 서재의 박근혜가 읽은 수많은 책 때문이다.”

이번 여름휴가 때도 박 대통령은 책만 읽으며 보냈다고 한다. 오바마와 달리 박 대통령이 휴가 때 무슨 책을 읽었는지 자랑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좌파들은 ‘읽는 책의 수준이 낮아서’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이유는 “다른 출판사가 소외받을까봐”란다. 실제로 대통령이 읽었다고 공개한 책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은 바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독서가의 한 명으로서 대통령이 책을 좋아한다니 다행이긴 하다. 좀 의아하다 싶은 건 그렇게 책을 좋아하는 분이 왜 서른 이전의 나와 비슷한 행동을 하시는 것이냐다. 말씀에 두서가 없는 것도 그렇고,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는 문제가 생기면 아랫사람에게 뒤집어씌우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책과 담을 쌓은 분 같다. 세월호 유족들을 대하는 태도는 더욱 미스터리다. 책을 많이 읽었다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의 슬픔을 능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하는데, 그분들을 무슨 기생충 보듯이 하셨으니까. 비슷한 사례가 있긴 하다. 2000년 미국 대통령이 된 부시도 독서 애호가였단다. 바쁜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2006년부터 3년간만 따져도 200권 가까운 책을 읽었으니, 대단하긴 하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는 별 시답지 않은 이유로 이라크전을 일으켰고, 평상시 모습에서도 독서를 통해 길러지는 지성이나 배려 같은 덕목을 찾아보긴 힘들다. 이분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까?

문제는 앎과 실천의 괴리일 것이다. 책을 읽고 아무리 좋은 교훈을 얻는다 해도 그게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지 않겠는가? 다시금 정혜윤 PD의 말을 인용한다.

“책을 읽고 나서 나와야 할 진짜 좋은 질문은 ‘이 책을 읽었으니까 다음엔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것이에요. 이런 질문을 자기 자신한테 던질 때 책이 나를 변화시키는 조언이 될 수 있어요.”

이제 가을이다. 책을 읽고 그걸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자. 그렇지 않는다면 몇 트럭의 책을 읽는다 해도 변하는 건 없다.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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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서울에 일이 있어 여의도에 갔다가 나이 드신 분들(이하 어르신)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봤다. 종북세력을 규탄하는 내용이었는데, 그때 든 생각은 ‘날도 더운데 고생이 많으시구나’였다. 갑자기 3년 전 대선 투표 때의 일이 떠올랐다. 투표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 놀러 갈 생각에 아침 일찍 투표장에 갔는데, 길게 줄이 늘어서 있었다. 내가 사는 천안이 유난히 어르신들이 많은 탓인지, 아니면 나이가 들수록 부지런해서 그런지, 그 대부분은 어르신들이었다. 흰옷을 입은 채 차례를 기다리는 그분들의 얼굴은 무료해 보였다.

선거 때마다 어르신들은 연령대별 투표율에서 늘 1, 2위를 다툰다. 2012년 대선 때 60대 이상의 투표율은 80.9%로 전체 투표율을 가뿐히 넘겼고,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70대 이상의 투표율은 67.3%로, 한창 팔팔한 20대의 48.4%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어르신들은 왜 이렇게 투표를 열심히 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이분들이 국가가 부여한 의무에 헌신적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투표를 하는 것은 권리이기도 하지만 의무이기도 한데, 처벌이 뒤따라야 마지못해 의무를 다하는 젊은층과 달리 어르신들은 ‘의무’라고 하면 웬만해서는 지키려 하신다. 우리나라가 빠른 시간 안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것도 다 어르신들이 의무를 지키며 헌신한 결과였다.

그분들께 감사한 마음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짠하다. 그렇게 나라에 공헌하신 분들인데, 70세를 넘긴 뒤에도 계속적으로 선거를 통해 국가에 기여하라고 강요하는 게 과연 옳은 것인지 의문이 들어서다. 나이가 들면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릎연골이 다 닳아서 걸을 때마다 아프고, 계단을 오르내릴 때는 특히 통증이 심하다. 계단이 있는 투표소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투표 몇 번 했다가 골병이 들 수도 있다. 또한 나이가 들면 눈이 침침해진다. 투표용지의 글씨가 안 보일 수 있고, 손이 떨려 투표용지의 테두리 안에 붓두껍을 찍는 데 실패하기도 한다(테두리에 닿으면 실격이다). 간혹 판단력이 흐려지는 분도 계셔서, 지지하는 당의 기호가 몇 번인지 헷갈리시는 분도 계시다. 얼마 전 친구 문병을 갔다가 만난 83세 할아버지는 대통령 담화를 TV로 보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박근혜 대통령이 말씀은 정말 잘하셔.”

현 대통령의 유일한 약점이 언변이 약하다는 것인데, 나이가 들다 보니 판단기준이 뒤죽박죽된 것 같아 안타까웠다. 정년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놓은 것도 이제 그만 일하고 쉬시라는 취지라는 점에서, 생기는 것 하나 없는 선거의 의무를 계속 감당하게 놔두는 게 옳은지 중지를 모을 필요가 있다.




19세 미만인 학생들을 생각해 보자. 건국 이래 최고의 영어 실력을 갖춘 그 아이들이 성인에 비해 판단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없고, 체력도 뛰어나 투표장이 5층에 있어도 하등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선거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은 정치바람에 휩쓸리지 말고 공부에 전념하라는 취지다. 각 고등학교에 후보자들이 찾아가 자신을 찍어달라고 전단지를 돌리고, 학생들이 야당과 여당으로 편을 나눠 패싸움이라도 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라. 절로 고개를 젓게 된다.

그런데 왜 휴식이 필요한 어르신들을 정치싸움의 현장에 그대로 방치하는 걸까? 어르신들로 하여금 젊은이에게도 버거운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가도록 떠미는 것은 효를 최고의 가치로 숭상했던 우리나라의 전통과도 맞지 않는다.

이런 우려가 나올 수는 있다. 어르신들이 투표권을 갖지 못하면 어르신들의 권리가 침해될 수 있다고. 하지만 그런 걱정은 쓸데없는 것이다. 선거 때마다 그분들이 선거권을 어느 쪽으로 행사했는지를 생각해 보라. 어르신들은 노인복지를 우선시하는 후보보다는 22조원을 들여 강바닥을 파거나, 법인세를 깎아주는 후보를 훨씬 더 선호했다. 자기 계층의 이익보다 국가발전을 우선시하는 분들이라니, 가슴이 뭉클해지지 않는가? 우리 어르신들은 그렇게 사심이 없는 분들이고, 그랬기 때문에 우리 후손들이 이만큼이나마 살게 된 것이다.

한 가닥 불안은 있을 수 있겠다. 어르신들의 ‘올바른’ 선택이 종북세력으로부터 이 나라를 구해준 원동력인데, 70대 이상이 선거에서 빠진다면 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불안. 단언컨대 그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일베’의 뛰어난 활약에서 보듯 우리 사회가 20대들을 워낙 잘 키운 덕분에 종북세력이 과거만큼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중이니 말이다. 설사 종북세력이 집권한다 한들, 메르스에 속수무책이고 지뢰 도발에도 불구하고 북한에 대화를 구걸하는 현 정부보다 못할 것 같지는 않다. 게다가 북한이 망하기라도 하면 종북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쓰러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어르신들, 나라 걱정은 접고 투표날 마음 편히 쉬십시오. 물 좋은 온천도 많으니까요.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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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에서 해킹장비를 샀다. 장비를 판 회사 직원의 말에 따르면 국정원은 자신들에게 “카카오톡 감청 기능을 추가해달라”고 부탁했다. 게다가 국정원은 지난 대선 때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다는 등 정치공작을 벌였던 전력이 있다. 사정이 이러니 여론조사 결과 “내국인 사찰도 했을 것”이라고 믿는 이가 52.9% 나온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국정원 주장대로 “대테러나 대북공작 활동을 위해서만 해킹했을 것”이라고 응답한 분들도 26.9%나 됐다. 이분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 중 일부는 세상은 추호의 거짓도 없는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일 것이다.

그래서 이분들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밀문서를 줄줄 외우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일 뿐, 26.9%의 대부분은 자신의 소신보단 “내가 어떻게 답하면 박근혜 대통령에게 유리할까”를 생각하는 분들이다. 세상에선 이런 분들을 ‘박빠’라고 부른다. 메르스 사태 등 갖은 악재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30% 이하로 내려가지 않는 것도 다 이분들 때문인데, 박빠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박 대통령을 가련하게 여긴다.

“가련한 대통령 좀 그만 흔들어라, 멍청한 남정네들아.” 박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문자의 첫 구절이다. 처음 이 구절을 봤을 때 난 여기서 지칭하는 대통령이 박 대통령은 아닌 줄 알았다. 행정부의 수반이며, 입법과 사법을 우습게 여기는 절대자를 ‘가련’하다고 표현할 사람은 최소한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다음을 보라. “박 대통령, 잘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라도 응원을 보냅시다.” 아이돌 그룹의 빠들이 자신들이 추종하는 연예인을 위대하다며 치켜세우는 것을 떠올려보면, 절대자를 가련한 존재로 승화시키는 박빠들은 확실히 특이한 존재다.

둘째, 노무현 전 대통령을 무소불위의 존재로 치켜세운다.

“참 나쁜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시절 박 대통령이 한 말인데, 여기서 보듯 박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을 싫어했다. 사정이 이렇다면 박빠들은 노 전 대통령을 깎아내려야 마땅하다. A가수의 팬이라면 라이벌인 B가수가 A가수보다 노래를 못한다고 하는 게 일반적인 경향이니까. 그런데 박빠들은 그 반대여서, 노 전 대통령의 능력을 과대평가한다. 뭔가가 잘 안되면 죄다 노무현 탓으로 몰아붙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살아 계시다면 얘기가 다르지만,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러고 있으니 정말 신기한 일이다. 일례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유력 정치인들에게 돈을 준, 소위 성완종 리스트가 문제가 됐을 때 박빠들의 논리는 “노무현이 대통령 재임 시절 성완종을 사면해서 박 대통령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다”였다. 정치적 라이벌을 과대평가하는 빠라니, 정말 특이하지 않은가.


셋째, 계산에 약하다.

무상급식 얘기가 나올 때마다 박빠들은 ‘나라가 거덜난다’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그 충정은 십분 이해하지만, 그토록 나라의 재정을 걱정한다면 박빠들이 먼저 대통령에게 기업의 법인세를 올리자고 얘기해야 맞다. 이명박 정부 때 시작된 감세정책은 5년간 100조원에 가까운 재정적자를 냈고, 그 기조를 그대로 유지한 현 정부에서는 135조원의 적자가 날 것으로 예상된다. 무상급식 비용은 여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은 법인세의 원상회복에 반대한다. 신기하게도 박빠들은 여기에 침묵으로 일관한다. 왜 그럴까? 나라를 걱정하는 그들의 충정이 거짓일 리는 없으니, 아마도 숫자 감각이 없는 게 그 이유이리라. 학생들에게 경고한다. 수학을 못하면 박빠가 될 확률이 높다.

박빠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또 다른 문자는 박 대통령의 업적을 나열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꼽는 첫 번째 업적은 “노무현의 한·미연합사 전작권 환수 무기 연기”였다. 모든 나라는 평화 시는 물론이고 전시에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할 권리를 갖는다. 어쩔 수 없이 미국에 양도하긴 했지만, 전작권은 우리가 주권국가로서 반드시 돌려받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전작권 환수를 무기 연기한 게 박 대통령의 첫 번째 업적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혹시 그들은 전작권의 개념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 참고로 두 번째 업적은 전교조의 법외노조 통보인데, 아무리 내세울 업적이 없어도 그렇지, 이런 것들을 업적이라고 문자로 돌리고 있다는 게 참 안돼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했던 노사모는 대통령의 이라크 파병을 반대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도 반대하는 등 비판할 점은 비판하곤 했다. 하지만 박빠는 대통령의 뜻이라면 무조건 추종한다. 지금 박 대통령이 나라를 산으로 끌고 가시는 건 물론 본인의 능력 탓이지만, 박빠의 무조건적인 지지도 여기에 한몫을 한다. 박빠가 위험한 이유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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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대선을 앞둔 2007년 12월13일, 당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 홍준표는 편지 한 통을 공개했다.

“나의 동지 경준에게…. 자네가 큰 집하고 어떤 약속을 했건 우리만 이용당하는 것이니 신중하게 판단하길 바라네.”

홍준표에 따르면 이 편지는 김경준과 같이 수감생활을 한 신경화가 김경준에게 보낸 것으로, 김경준이 우리나라에 온 이유가 노무현 대통령의 요청에 의한 것임을 암시하고 있었다. BBK 대표였던 김경준은 주가조작으로 미국으로 도망간 상태였는데, 대선을 앞두고 그가 귀국한 것은 BBK를 자신이 설립한 것처럼 얘기하고 다녔던 이명박 후보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신경화의 편지가 공개되면서 상황이 달라졌고, 결국 이명박 후보는 대통령에 당선된다.

그로부터 4년 뒤, 신경화의 동생이 “그 편지는 이명박씨 가족과 측근의 부탁으로 내가 날조한 것”이라고 폭로하고, 옥중에 있던 김경준은 가짜편지 작성자들을 고소하기에 이른다. 2015년 7월, 재판부는 “가짜편지로 인해 김경준이 정신적 고통을 입었다”면서 가담자들에게 1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이쯤 되면 가짜편지를 쓰게 한 배후가 누구인지 궁금해지는데, 검찰의 결론은 “배후는 없다”였다. 홍준표를 비롯해 편지의 유통에 관여된 사람들은 편지가 조작된 사실을 전혀 몰랐기 때문에 배후가 될 수 없다는 게 검찰의 말. 그 말대로라면 홍준표는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편지를 대선의 판세를 뒤흔드는 결정적 증거인 양 기자들 앞에서 흔들었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가담자들은 왜 그런 위험한 일을 벌였을까. 대선에서 공을 세워 좋은 자리를 얻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게 검찰의 친절한 설명이다.


김경준씨가 옥중에서 경향신문 기자에게 보낸 편지_경향DB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 보장을 받고 난 뒤에야 위험한 일에 뛰어든다. “이번 일만 잘되면 자넨 신차장이야” 정도의 약속은 있어야 불법적인 일을 한다는 얘기다. 그런데 가짜편지 작성의 가담자들은 위로부터 아무런 언질도 없이 위험천만한 일을 했다니,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쉽게 수긍하는 분들이 있는데, 그게 바로 검찰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으며, 그 어렵다는 사법시험도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엘리트다. 별다른 고비 없이 승승장구하다 보면 세상이 따뜻한 곳이라고 생각하기 마련. 검찰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너무 잘 믿는 집단이 됐다. 다른 면에서는 뛰어날지언정 배후를 밝히는 일은 검찰에게 거의 불가능한 미션이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나는 몰랐다”고만 하면 더 이상 그를 의심하지 않고 수사를 종결해버리고, “배후는 없다”는 식의, 자신들 이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을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일이 검찰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우리나라의 굵직한 사건들은 대부분 배후가 없다. 2012년 선거 직전 대인배 김무성 의원이 비공개가 원칙인 남북 정상 간의 회의록을 피 토하듯 읽었지만, 회의록 유출 여부를 수사한 검찰의 결론은 ‘무혐의’였다. 검찰에 출석한 김 의원이 “대화록을 본 일이 없다”고 했으니, 순진무구한 검찰로서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국정원 댓글사건을 소신껏 수사하던 채동욱 검찰총장은 느닷없이 혼외아들 의혹이 불거지면서 총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교육문화수석실, 고용복지수석실 등에서 채 총장의 아들과 그의 어머니 임씨에 대한 정보를 열람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지시했는지 의혹이 집중됐지만, 검찰의 조사결과 이것들은 모두 개인적 일탈일 뿐 배후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검찰은 청와대 관계자들이 업무에 바쁠 것을 고려해 서면조사를 하는 세심함을 보였다니, 이 세상이 살 만한 곳인 이유는 이런 분들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최근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의 해킹업체로부터 해킹 프로그램을 주문한 것이 밝혀져 파장이 일고 있다. 국정원은 북한 공작원을 해킹하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이 해킹하려던 것은 카카오톡이었다. 물론 북한 공작원도 카카오톡을 쓸 수 있지만, 그 경우 법원의 압수수색 영장을 받으면 카카오톡 대화 내용을 통째로 들여다볼 수 있으니 굳이 해킹 프로그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게다가 국정원이 대선 직전 등 매우 민감한 시기에 프로그램을 구입했고, 국정원의 핵심 파트인 대북심리전단 팀이 주로 했던 일도 야당 후보를 욕하는 것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정원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힘들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모두가 아니라고 해도 검찰만은 국정원의 주장을 믿을 것임을. 만일 이 사건을 검찰이 수사하게 된다면 이번 사건 역시 국정원 말단직원 몇 명의 개인적 일탈로 마무리될 확률이 높다.

남의 말을 잘 믿지 않고 매사를 음모론적 시각으로만 바라보다 보면 사회가 혼탁해진다. 그러니 순진무구하기 짝이 없는 우리 검찰은 사회를 맑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일 수 있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이라도 검찰이 속시원하게 배후를 밝혀줬으면 좋겠다. 매번 반복되는 개인적 일탈이란 결론이, 이젠 좀 지겹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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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보면 싸움의 승패를 따지는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잘못을 누가 더 많이 했는지와 무관하게 먼저 사과하는 쪽이 패자였다. 어른들은 “지는 게 이기는 거다”라는 철학적인 얘기를 하곤 했지만, 또래들이 보는 앞에서 “미안해”라고 하는 건 정말 모양 빠지는 일이었고, 그 어른들도 막상 자신들이 싸울 땐 일절 양보가 없었다. 둘째, 울면 지는 거였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겁을 먹었거나 싸운 것 자체를 굉장히 후회한다, 이런 의미로 해석이 됐으니까.

이런 얘기를 한 이유는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대통령께서 ‘연승 신화’를 써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일어난 사건을 보자.

세월호 사고의 진상규명을 위해 우여곡절 끝에 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여기에 대해 대통령은 특별위원회의 독립적 조사를 무력화하는 내용을 담은 시행령을 만들어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이건 애써서 특별법을 만든 국회에 대한 정부의 폭력이었기에, 안 되겠다 싶었던 국회는 소위 ‘국회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통과시킨다. 개정안의 내용은 국회가 정부를 견제할 수 있도록 보다 강한 권한을 갖자는 것이니, 대통령 입장에서는 이 개정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자신의 권한인 거부권을 행사했고, 개정안은 무효가 됐다.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이해가 가지만, 말도 안 되는 일은 그 직후에 벌어졌다. 대통령이 불같이 화를 냈고, 여기에 대해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가 “대통령에게 송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면서 사과한 것. 허리를 무려 90도로 구부리면서 말이다.

생각해 보자. 민주주의는 삼권분립이 원칙이고,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입법부인 국회와 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대통령이 먼저 시행령을 만들어 국회를 공격했고, 국회가 개정안으로 반격을 가했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자 새누리당은 개정안을 폐기시킴으로써 이 사태는 종결됐는데, 마지막 공격을 한 쪽이 대통령이니 국회가 좀 더 화가 나야 정상이지만, 오히려 대통령이 펄펄 뛰며 화를 내고 있다. 유 원내대표는 90도 사과에도 불구하고 현재 쫓겨나게 생겼으니, 이건 누가 봐도 대통령의 압승이다.




대통령은 국민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6월 한 달간 우리나라를 공포로 몰아넣은 메르스로 인해 자영업자들은 장사가 안돼 울상이었고, 외국 관광객은 발길을 끊었으며, 환자들은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10조원의 손실을 냈다는 이 사태의 책임은 초기 대응을 잘하지 못한 정부에 있으니, 여기에 대해서 정부 수반인 대통령이 사과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사과한 분은 황교안 총리였는데, 총리가 된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은 분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사과했는지 의아하다. 반면 대통령은 아직도 사과를 안 하고 버티고 있는데, 이대로 간다면 국민에게 값진 승리를 거두게 된다.

메르스 이전 우리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것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 여권 실세들이 돈을 받았다는 소위 성완종 리스트였다. 당사자들은 돈을 받지 않았다고 부인했지만, 그들의 변명은 하나둘씩 거짓말로 드러났다. 사정이 이렇다면 검찰이 리스트에 연루된 이들을 조사하는 게 당연할 텐데, 대통령의 인식은 국민들의 허를 찔렀다. 성 전 회장에게 돈을 받은 정치인들이 나쁜 게 아니라, 감옥에 있는 성 전 회장을 사면해준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나쁘다는 것. 이런 식이면 성 전 회장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정말 신기하게도 검찰은 성 전 회장이 어떻게 사면이 됐는지를 조사하기 시작한다.

결국 검찰은 노 전 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가 뇌물을 받고 사면을 해줬음을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고, 대통령과 친하지 않은 ‘비박’ 정치인 두 명에 대해서만 기소하고 나머지는 무혐의로 처리함으로써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법부도 엄연히 삼권분립의 주체건만, 사법부는 대통령을 견제할 생각은 오래전에 포기한 듯하니 여기서도 대통령이 가볍게 1승을 챙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월호가 침몰한 뒤 진도체육관을 찾은 대통령은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난 천안에 마련된 분향소에만 가도 눈물이 나던데, 유족들이 오열하는 현장에 가서도 울지 않은 것은 정말 대단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 이후에도 대통령은 국회 앞에서 기다리는 유족들과 눈도 마주치지 않는 등 기싸움에서 전혀 밀리지 않았으니, 유족들에게도 1승을 거둔 셈이다.

이쯤 되면 대통령을 ‘승리의 보증수표’ ‘천부적인 싸움꾼’으로 불러도 무방할 듯싶은데, 그러고 보니 박 대통령이 왜 노무현 전 대통령을 한심하게 봤는지 이해할 법하다. 노 전 대통령은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고, 평검사들과 대화를 시도한 데다 국민들한테 미안하다고 뻔질나게 사과하는 그런 대통령이었으니까. 승률 100%인 박 대통령이 앞으로도 계속 연승 신화를 써내려갈지 지켜볼 일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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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신수 때문에 졌다.”

미국 야구팀 텍사스의 배니스터 감독은 경기가 역전패로 끝나자 기자들을 불러 추신수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떠들었다. 4-2로 리드하던 8회, 추신수가 자기 앞으로 날아온 타구를 쓸데없이 3루로 송구하는 바람에 동점의 빌미를 만들어줬다는 것. 추신수의 플레이가 그리 현명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 때문에 졌다는 말엔 수긍하기 어려웠다.

뜻밖의 질책에 추신수는 화가 났고, “그렇게 잘하면 감독이 직접 글러브를 끼고 하라”고 반박하기도 했다. 감독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추측을 하자면 이렇다. 배니스터는 올해 텍사스 감독으로 부임한 초짜 감독이다. 팀을 잘 이끌어 좋은 성적을 거두려는 마음이 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중심에 서야 할 추신수가 너무 못한다. 4월 한 달간 타율은 1할이 채 안됐고, 시즌의 절반을 향해 가는 지금도 2할3푼대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고 수비가 좋은 것도 아니고, 도루는 한 개도 없다. 도대체 이런 선수를 왜 연평균 200억원가량을 주며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감독의 질책은 그동안 쌓인 불만이 엉뚱한 곳에서 터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다행히 감독과는 화해를 했지만, 추신수는 요즘 위기다. 작년의 부진은 부상 핑계를 댈 수 있지만, 올해마저 못한다면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서른 중반에 접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7년 계약 중 첫 2년을 이렇게 망친다면 내년, 내후년의 성적은 더 암담하지 않겠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텍사스 팬들도 추신수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다. 발 빠르고 선구안도 좋은 데다 홈런도 많이 치는 선수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것. 현지 언론에서는 심심치 않게 ‘먹튀’ 얘기가 나온다.

‘먹고 튀었다’의 줄임말인 먹튀는 많은 돈을 받고 입단한 선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그렇다고 먹튀가 꼭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개념은 아니다.

대통령을 예로 들어보자. 대통령의 연봉은 2억원가량 된다. 수많은 비서를 거느리고, 안전을 위해 경호원을 둔다. 차는 방탄이 되는 에쿠스리무진으로, 가격은 20억원이다. 필요할 때 언제든 이용할 수 있는 전용기도 있다.

퇴임 후에도 현직 때 월급의 95%를 받으니 평생 돈 걱정할 일은 없다. 이 모든 것은 물론 국민이 낸 세금으로 지급된다. 다시 말해서 국민은 십시일반으로 세금을 모아 대통령을 5년간 부리며, 이 기간 동안 대통령이 나라를 잘 이끌어주기를 기대한다. 이 기대에 부응하면 좋은 대통령이고, 그렇지 못하면 먹튀라고 불러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최근 초등학교를 방문해 아이들과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던 박근혜 대통령은 어떤 대통령일까?

“나는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며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국민의 자유와 복리의 증진 및 민족문화의 창달에 노력하여 대통령으로서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것을 국민 앞에 엄숙히 선서합니다.”

보다 객관적인 판단을 위해 취임식 때 대통령이 했던 선서를 가져와 봤다. 이 선서만 잘 지켜도 훌륭한 대통령일 테니까.

우선, 대통령은 헌법을 준수하고 있는가? 대통령은 대선에 개입해 헌법을 유린한 국정원에 셀프개혁을 지시함으로써 사실상 면죄부를 줬다. 대통령이 헌법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일 때는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국회와 싸울 때뿐이다.

둘째, 대통령은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현 정부는 출범 이후 북한과 대화 자체를 안 하고 있다. 신년기자회견에서 “통일은 대박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통령이 한 노력의 전부.

국민의 자유와 복리증진은 어떤가? 카카오톡을 검열해 기존 사용자들로 하여금 텔레그램으로 옮겨갈 자유를 선사한 건 긍정적이지만,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의무는 빵점에 가깝다. 세월호 침몰 사고 시 컨트롤타워 역할을 제대로 못함으로써 인명피해를 키웠으며, 메르스 사태도 초기 대응을 잘못해 아플 때 병원도 못 가게 만들어 놨다.

마스크 쓴 사람들이 거리를 뒤덮게 한 게 민족문화 창달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취임식 선서의 대부분을 지키지 않고 있는 건 확실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금 위기다. 집권 1년차 때야 초반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작년과 올해의 거듭된 실정은 변명의 여지가 없으니 말이다.

더 큰 문제는 이제 대통령의 임기가 반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서슬 퍼런 집권 초기에도 나라를 잘 이끌지 못했는데, 레임덕이 오는 내년, 내후년의 모습은 더 암담하지 않겠는가?

당연한 얘기지만 박 대통령을 찍은 분들도 지지를 철회해, 철옹성 같던 지지율은 30%대로 떨어졌다. 원칙과 신뢰를 강조해 믿고 찍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다. 그래서 말씀드린다.

“대통령님, 계속 이런 식으로 하시면 먹튀, 그것도 역대급 먹튀가 되십니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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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에 대한 현 정부의 대응은, 언제나 그랬듯이 미덥지 않았다. 정부의 대응이 완벽해서 첫 번째 감염자 이외에 메르스 환자가 더 나오지 않았다면 다들 메르스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살았겠지만, 국민들의 평온한 일상을 용납하지 않는 정부 덕분에 초등학생들조차 메르스를 입에 달고 사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국회에 나와 “초동 대응이 잘못됐다”며 사과한 걸 보면 국민들의 알 권리 차원에서 일부러 메르스 사태를 확산시킨 건 아닌 모양이다. 현재 문 장관이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질타를 받고 있는데, 이게 꼭 그만의 잘못인지는 모르겠다.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석·박사도 모두 경제학으로 받은, 그 후 보건과는 전혀 동떨어진 분야에서만 일해온 문 장관이 메르스에 대해 대응을 잘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차관 또한 법학과를 나와 사회복지학으로 박사를 받은 분이라 이번 사태에 큰 도움은 안됐으리라.

복지부의 수장이 전문성을 갖추지 못했다면 총리가 그 역할을 수행하면 된다.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 전 세계를 강타할 때, 우리나라가 사망자 한 명 없이 그 위기를 극복해낸 데는 간호사 출신의 복지부 장관도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수시로 상황을 보고받고 회의를 주재한 고건 총리의 공도 컸다. 하지만 지금 이 나라에는 총리가 없다. 이완구 전 총리가 사퇴한 뒤 최경환 기획재정부 장관이 총리를 대행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임시반장을 해봐서 아는데, ‘임시’가 붙으면 “어떻게든 이 시기만 넘기자”는 소극적인 마음을 갖게 된다. 아마도 최 장관은 난데없는 메르스 사태에 망연자실한 채 아무것도 안 하고 있을 것 같다. 사정이 그렇다면 대통령이라도 나서야 했지만, 아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는 수많은 장점이 있다. 첫째, 자기관리가 뛰어나다.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올림머리 스타일’을 고수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10여개의 실핀을 이용해 본인이 직접 스타일링을 한단다. 둘째, 자신이 사과해야 할 일을 아랫사람에게 미루는 미덕을 가지고 있다. 셋째, 보기 드문 효녀로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누가 뭐라고 하기만 하면 불같이 화를 내신다. 넷째, 사람을 뽑을 때 능력보다는 자신에 대한 충성심을 더 높이 사서, 공직기강을 잡는 데 누구도 따라갈 사람이 없다. 다섯째, 가끔씩 유체를 이탈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대통령만 아니면 <놀라운 대회 스타킹>에 두세 번은 나가셨을 것 같다. 여섯째, 노트 필기의 달인이다. 이건 수능을 볼 초·중·고생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일곱째, 뚜렷한 국가관을 가지고 있어 북한으로부터 우리나라를 막는 데 적격이다.

실제로 새누리당에서 일하는 이광우라는 분은 박 대통령이 당 대표 시절 국가보안법 폐지를 막음으로써 “이 땅의 공산화를 막았다”고 한 바 있는데, 어쨌거나 현 대통령 임기 동안에는 공산화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다.


이런 여러 가지 장점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한 가지 있는데, 그건 바로 위기관리 능력이 약하다는 것이다. 지난해 발생한 세월호 사고 때, 대통령은 배가 침몰했단 소식을 듣자마자 7시간 동안 잠적했다가 오후 5시쯤 갑자기 나타나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그 시각엔 배가 거의 가라앉은 뒤였기에 이 발언은 매우 뜬금없게 들렸는데,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 대통령의 행적도 그때와 비슷했다. 메르스 감염자가 나온 뒤 “메르스와 관련해 유언비어를 퍼뜨리면 처벌하겠다”는 지시 이외에는 아무것도 안 하던 박 대통령은 정확히 14일 만인 6월3일 민관합동 긴급점검회의를 연다. 그 자리에서 대통령은 “태스크포스팀을 만들겠다” “더 이상 확산이 안되도록 만전을 기하겠다”고 말했는데, 그때는 이미 2명의 사망자와 3차 감염자까지 발생한 뒤였고, 많은 국민들이 마스크를 쓰거나 외출을 삼가고 있는 중이었다. 세월호 사고 때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희생된 것처럼, 2015년 대한민국은 메르스 환자 수에서 사우디아라비아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메르스 강국이 됐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세간의 농담처럼 메르스(MERS) 대신 코르스(KORS)로 이름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혹시 정부가 이런 식의 국위선양을 원했던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3년 전 대선에서 우리 국민들은 위기관리보다 자기관리를 더 중시하는 대통령을 뽑았다. 자기관리가 뛰어난 대통령을 보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이것 한 가지는 명심하자. 현 정부는 우리 국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작년엔 세월호 사고가 났고, 올해는 메르스가 왔다. 남은 임기 동안 몇 번의 위기가 더 올지 모르지만, 다행히 정권의 수명은 유한하다. 자신의 안전은 스스로 지킨다는 각오로 2년 반을 버티자.

살아남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으니 말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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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달간 우리나라에는 총리가 없었다. 이완구 전 총리가 고 성완종 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소위 ‘성완종 리스트’에 연루돼 옷을 벗었기 때문이다. 후임을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다. 총리 후보자가 되면 인사청문회라는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쳐야 하니 말이다. 실제로 박근혜 정부 들어서 총리 후보가 된 이들 중 세 명이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한 채 낙마했다. 그 바람에 세월호 사건 이후 사표를 낸 정홍원 총리는 바통을 넘길 사람이 없어 열 달이나 더 현직에 머물러 있어야 했는데, 이번에 새 총리로 지명된 황교안씨도 청문회 통과가 쉽지 않아 보인다.

야당에서 황씨가 공안검사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현 정부가 공안통치에 나서겠다고 노골적으로 선언한 것”이라며 반대하는 데다,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고, 아들한테 3억원을 편법으로 줬다는 의혹까지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황 지명자가 꼭 총리가 됐으면 좋겠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황씨는 박근혜 대통령이 내세울 수 있는 몇 안 남은 카드다.

이번 정부 들어서 총리 후보로 지명된 분들이 인사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거나, 어렵사리 통과해도 비리로 물러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현 정부의 인사 풀에 있는 분들이 죄다 그런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국민들은 돈 욕심이 없는 데다 흠잡을 데 없는 과거를 가졌고 그러면서도 일을 잘하는 분이 총리로 오길 바라지만, 아쉽게도 대통령이 아는 분들 중 그런 분은 없다. 만일 한 명이라도 있다면 정홍원 총리 후임으로 진즉 그분을 지명하지 않았겠는가? 냉정히 생각하자. 이런저런 비리가 있다고 황씨를 거부해버리면, 그보다 더한 사람이 온다.

둘째, 사실 황씨는 상대적으로 청렴한 분이다.

이전에 총리로 지명됐던 안대희씨는 현직에서 물러난 뒤 5개월간 16억원의 수임료를 받은 게 낙마의 결정적 이유였다. 그런데 황씨는 1년6개월간 16억원을 받았으니, 3.6배 정도 더 청렴하다고 할 수 있다. 편법증여 의혹이 있는 돈도 16억원 중 3억원에 불과해 20%가 채 못 된다. 이 정도면 현 정부에서는 성인의 반열에 들 만하다.

셋째, 도대체 왜 총리만 그렇게 물고 늘어지나?

2007년, 우리는 BBK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분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 후 5년간 국토는 파헤쳐지고, 나랏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북한이 우리 땅에 대포를 쏴도 항의 한번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5년 뒤, 현 대통령이 당선됐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총리와 대통령을 비교하면 후자가 훨씬 중요할 텐데, 대통령을 대충 뽑는 나라에서 총리한테만 유독 까다롭게 구는 건 도대체 왜일까?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넷째, 황씨는 역사상 가장 오래 심사숙고해 지명한 총리다.

새 총리 후보를 발표하기 전 청와대는 출입기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바 있다. “10시 정각에 발표하겠다.” 그런데 10시가 되기 4분 전, 청와대는 아무런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채 돌연 발표를 연기한다고 했다. 황씨가 지명된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었기에 발표를 미룬 것은 ‘후보자가 달라진 게 아니냐’는 추측을 낳았지만, 그로부터 20분 뒤 청와대가 발표한 총리 후보는 알려진 대로 황씨였다. 즉 황씨는 약속된 발표시간을 어겨가며 심사숙고한 최초의 총리다.

다섯째, 황씨는 보기 드문 천재다.

청와대는 황 후보자가 “현 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수행하면서 대통령의 국정철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 총리에 적임자라고 했다. 본 사람이 거의 없는, 그래서 존재 여부에 대해 논란이 있는 대통령의 국정철학을 이해한다는 것만으로도 황씨는 석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분은 진작 총리로 모셨어야지, 대통령 임기가 2년9개월밖에 남지 않은 지금에야 모시는 건 아쉽기 짝이 없는 일이다.

여섯째, 황씨가 낙마하면 총리 없는 세상을 살아야 할 수도 있다.

위에서 말한 대로 지난 한 달간 우리나라에는 총리가 없었다. 그 이전 10개월간은 총리직에서 마음이 떠난 사람이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들은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다. 만일 황씨가 이번에 낙마라도 한다면 총리가 없는 기간은 더 길어질 테고, 그 경우 국민들이 정부가 숨기고 싶은 비밀을 알아챌 수 있다. 총리가 하는 일이 없다는 것 말이다. 그 경우 총리라는 자리가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총리를 목표로 정치판에 뛰어든 이도 한둘이 아닐 텐데, 그들의 꿈을 꺾을 수야 없지 않은가?

이상과 같은 이유로 난 황교안 후보자가 정식 총리가 되기를 바란다.

야당에 당부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보다는 황씨의 인사청문회를 하루빨리 통과시켜주시라. 이보다 더 적합한 총리 후보는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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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황교안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전 국민 기생충 감염률이 80%를 넘나들었다. 거리에서 약을 팔던 약장수들이 구경하던 아이 한 명을 무작위로 불러내 회충약을 먹이면, 그 아이의 항문에서 회충이 떼거지로 배출되곤 했다. 같은 반 아이들 중 상당수가 기생충에 걸려 약을 먹어야 했지만, 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단 한 번도 양성으로 나온 적이 없었다. 그때는 다행이라고만 생각했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겐 장차 기생충학자가 될 자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고양이 앞에 선 쥐가 도망칠 생각을 못한 채 몸을 떨고 있는 것처럼, 전 국민의 80% 이상을 삼켰던 기생충도 감히 내게는 들어올 생각을 못했으니까.

나뿐 아니라 다른 기생충학자들도 기생충에 걸리는 경우가 일반인에 비해 현저히 적은 듯하다. 어쩌다 감염사례가 나오긴 하지만, 그건 연구 중에 우연히, 혹은 일부러 기생충에 감염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톡소포자충 연구의 대가인 남모 선생님은 톡소포자충이 담긴 주사기에 손을 찔려 감염됐고, 장흡충 연구의 대가인 채모 선생님은 증상을 알아보기 위해 다른 연구원과 함께 기생충을 일부러 삼켰다. 나 역시 기생충에 걸려보려고 별의별 수를 다 썼지만, 아직까지 감염된 적은 없다. 만우절이던 4월1일, 무슨 거짓말을 할까 머리를 짜내다 ‘기생충에 걸렸다고 하면 어떨까?’를 떠올린 건 그런 이유였다. 기생충학자가 기생충에 걸렸다니 이 얼마나 웃긴가? 기생충으로 인해 입원했다는 글을 올렸더니 과연 호응이 엄청났다. 문병을 오겠다는 분들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부분은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재미있어했다.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만일 진짜로 내가 기생충에 걸렸다면, 스타일 구겼을 거라고.

이런 식으로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는 뭐가 있을까? 몇 가지 경우가 떠오른다.

1) 가수 아이유가 노래방 대결에서 음치인 나보다 점수가 덜 나온다. 가수라고 해서 기계가 100점을 주지 않지만, 내게 점수를 더 주는 기계라면 노래방에 있어선 안된다.

2) 비행기도 돌리는 조현아씨가 택시기사에게 “차 좀 돌리자”고 했다가 거절당하는 것. 택시기사가 조씨를 알아본다면 충분히 가능한 스토리다.

3) 스컹크가 남이 뀐 방귀에 질식한다. 방귀 냄새가 독하다고 해서 남의 방귀 냄새를 잘 참는다는 보장은 없으니, 이것 역시 가능하다.

4) 이명박 전 대통령이 ‘누가 더 돈을 낭비하는가’를 겨루는 시합에 나가서 예선 탈락한다. 아무리 가정이지만, 이런 일이 있을 성싶지는 않다.


5) 박근혜 대통령이 ‘모래 속의 진주’라 극찬했던 윤진숙 해수부 장관이 ‘실없이 웃기’ 시합에서 1회전 탈락한다. 이것 역시 가능할 것 같진 않다.

6) 이완구 전 총리가 목숨을 담보로 한 치킨게임에서 닭한테 패한다. 물론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7) 국정원이 악플달기 시합에서 일개 누리꾼에게 진다. 댓글에 있어서는 최고수인 국정원이 그럴 리는 없다.

8) 박 대통령이 묵언수행에서 스님한테 패한다. 우리나라 스님의 총수가 얼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의 고수는 찾기 힘들 것 같다.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검사로 재직 중이던 1993년 ‘슬롯머신 사건’을 수사하면서 업계 대부인 정모씨 형제로부터 돈을 받은 정·관계 유력자들을 구속시켰다. 그중에는 6공 황태자로 불리던 박철언 전 장관도 있었다. 검찰 측에 물증이 없다는 것을 안 박 전 장관은 자신이 돈을 받지 않았다며 배달사고를 주장했지만, 홍 지사는 단호했다. 뇌물 사건은 대부분 물증이 없다고 박 전 장관의 변명을 일축했다. 목격자였던 홍모 여인의 증언은 결정적이었다. 결국 박 전 장관은 유죄판결을 받고 수감됐다. 이 사건은 스타 방송작가인 송지나씨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는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모래시계>는 바로 이 슬롯머신 사건을 각색한 것이었다.

그 홍 지사가 지금 매우 곤궁한 처지에 놓였다. 한나라당 대표 경선 때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에게서 1억원을 받았다는 혐의로 검찰에 출두해야 했으니까. 슬롯머신 사건 때 박 전 장관이 그랬던 것처럼, 홍 지사는 배달사고를 주장한다. 성 전 회장의 자살로 검찰 측에 물증이 없다는 걸 믿는 탓이지만, 검찰은 단호했다. 1억원을 직접 전달했다고 알려진 경남기업 윤 전 부사장의 증언도 확보한 터였다. 사태가 점점 불리해지자 홍 지사는 급기야 “경선 기탁금 1억2000만원이 집사람의 비자금”이며, 그 돈은 국회대책비를 가로챈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뇌물보다는 횡령이 낫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겠지만, <모래시계>의 스타 검사가 22년 만에 피의자가 돼 검찰에 출두한 건 흡사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진 격이다. 이 사건이 또 다른 방송작가에게 영감을 줘서 ‘모래시계 속편’이 만들어지길 기대해본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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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열심히 보는 드라마 <압구정 백야>는 <인어아가씨> 등을 집필했던 스타 작가 임성한이 ‘방송국을 소재로 한 가족이야기를 그리자’는 것이 기획의도였단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주인공 백야가 자신을 버리고 재가한 어머니에게 복수를 맹세할 때만 해도 기획의도대로 가나 싶었지만, 임성한의 작품들이 다 그렇듯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백야의 친구인 ‘육선지’의 존재감이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이 남자한테 배신을 당했을 때 “어쩜 그럴 수 있니?”라며 같이 흥분해 주고, 가끔 되지도 않는 우스갯소리로 억지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이 고작이었지만, 이 드라마는 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즉 육선지는 회가 거듭될수록 극중 비중이 높아지는데, 지루할 만치 길게 편성된 결혼식 장면도 그랬지만, 신혼여행지에서 신랑과 닭살 돋는 장면이랄지, 육선지가 결혼 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중전마마를 연상케 하는 한복을 입고 가 화제가 된다든지 하는 장면들을 보면 도대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누군지 헷갈릴 정도다. 최근에는 그녀가 아들 네 쌍둥이를 출산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시청자게시판은 “이게 압구정 백야가 아니라 압구정 선지다”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도배됐다. 뭐로 보나 주인공급은 아니었던 육선지의 빛나는 활약에 대한 의문은 아내의 다음 말로 풀렸다.

“육선지 역을 맡은 배우, 임성한 작가의 조카잖아!”

실제로 육선지 역할을 맡은 배우 백옥담은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만 출연했다. 놀라운 연기로 극에 활력을 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 배우가 혈연을 제외하면 뭐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만하다. <압구정 백야>에 육선지가 캐스팅된 것도 임 작가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게 많은 시청자들의 추측이다. 그래서 아쉽다. 임 작가가 조카의 앞날보다 드라마가 잘되는 것에 더 신경 썼다면 <압구정 백야>가 막장으로 치닫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 비단 임 작가만 욕할 일은 아니다. 인사권을 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과 친한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일이 제법 많으니 말이다. 그 정도가 심한 대표적인 분은 바로 대통령인데, 이분의 원칙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자신과 친하냐 아니냐인 듯하다.

얼마 전까지 국무위원 18명에는 대선 때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친박 출신 국회의원이 3분의 1인 6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분들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하다 물러난 이완구 총리의 예에서 보듯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는다. 친박인사의 중용은 비단 국무위원에만 국한된 건 아니어서,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2014년 3월부터 9월까지 공기업, 준정부기관 등에 임명된 친박인사는 무려 94명이었단다. 나도 서민이 아닌 박민이었다면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청자에게 욕만 좀 먹으면 되는 드라마와 달리 국무위원과 공기업에 자격 없는 사람이 임명되는 건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1948년 탄생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면서 국민들은 얼떨결에 선거권을 갖게 됐다. 1971년 선포된 유신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박탈했지만, 줄기찬 투쟁 끝에 국민들은 그로부터 16년 후 대통령 선거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1995년에는 자기 지역을 위해 일할 사람도 스스로 뽑게 됐으니, 이쯤 되면 국민이 여러 요직의 인사권자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그 인사권을 잘 행사하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누가 진정으로 지역과 국가를 위해 일을 잘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대신, 특정 후보가 자기 지역 출신이라서, 아니면 상대 후보가 종북이라는 공작에 놀아나서 표를 던지는 사례가 제법 많으니 말이다. 그 결과 한 도지사는 우리나라에 몇 없는 공공병원을 없애버렸고, 아이들 밥 주는 걸 가지고 이전투구를 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한 기업인으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 그를 뽑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압구정 백야>가 시청자에게 몰매를 맞으며 막장으로 치닫자 MBC는 “약속된 주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당혹스럽다”면서 “다시는 임성한 작가와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는 어찌됐건 욕을 먹고 있고,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간 숱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국민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이가 없다. 이렇게 물어보자. 국민의 뜻은 늘 위대하며, 국민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 인사권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마침 오늘은, 일부 지역에 국한되긴 했지만, 재·보선이 실시되는 날이다. 후보자의 고향과 종북논란에 구애받지 않는, 해당 지역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기대해 본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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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런 배넛이 쓴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는 뒤늦게 책읽기에 재미를 붙인 70세 영국 여왕이 점점 변하는 내용이다. 흔히 변한다고 하면 나빠지는 것을 생각하지만, 여왕의 변신은 그 반대다. 책을 읽으면서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주인공이 느끼는 감정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다보니 현실에서도 다른 사람들의 입장에 서서 생각하는 게 가능해졌고, 그들이 현재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알 수 있게 됐다. 즉 여왕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타인에 대한 배려는 책을 많이 읽으면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선물이었다.

초반 몇 달을 제외한다면, 사람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끊임없이 비난하기 바빴다. 세월호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젊은층으로 짐작되는 누리꾼들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세월호 사건은 놀러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정부한테 뭐라고 하느냐?” “돈 십억씩 받고도 모자라 더 받아내려고 이러느냐?”

사고 초기 교통사고 운운했던 새누리당 분들이 엄청난 비난에 직면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런 변화는 그저 개탄스럽다. 세월호 사고로 동생을 잃은 언니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악성 댓글보다 교통사고라고 하는 게 더 속상해요.”

심지어 세월호 인양에 반대하는 이들도 한둘이 아니다. 세금이 아까운데 그 고철덩어리를 뭐하러 인양하느냐는 것. 이들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요즘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청년들은 시시때때로 책을 읽었고, 삼삼오오 모여 우리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결과 그들은 신문에서 하는 얘기를 믿는 대신 그 행간을 읽음으로써 진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청년들은 책을 안 읽으니 자기 생각을 만들지 못하고, 정치인과 언론의 조종에 쉽게 넘어간다. 책을 읽지 않는 부작용은 이것만이 아니다. 타인의 입장에 서서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정신을 배우지 못한다는 것. 예컨대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방황하는 칼날>은 딸을 잃은 아버지가 복수를 하는 스토리인데, 읽다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죽을 때까지 지옥 같은 삶이 계속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불합리하게 빼앗긴 사람은 어디에서도 빛을 발견할 수 없다.”(106쪽)

세월호 참사의 유족들 마음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어이없이 침몰한 배, 단 한 명도 구조하지 않은 해경, 진상규명에는 담을 쌓은 정부, 얼마나 답답할까? 하지만 책과 담을 쌓은 누리꾼들은 세월호 유족들의 심경을 헤아리기는커녕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짜증을 내고, 유족들을 위해 쓰는 돈이 아깝기만 하다.


그래서일 것이다. 정부가 세월호 유족들을 마음 놓고 홀대하는 까닭이. 오로지 자신의 지지율에만 신경을 쓰는 그들이 세간의 여론을 모를 리 없다. 그래서 그들은 유족들의 양보로 만들어진 세월호 진상규명특위를 ‘세금도둑’이라고 비난하고, 특위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유족들에게 거액의 배·보상금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배·보상금이라는 것이 사고의 진상이 다 밝혀진 뒤 지급하는 돈이라는 점에서 이는 “진상이고 뭐고, 이제 그만 입을 다물라”는 협박이었다.

재난 관리의 컨트롤타워는 아닐지 몰라도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세월호 사고에 어느 정도 책임이 있는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1주기인 4월16일 당일, 남미 순방을 떠난다. 청와대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 18일에 출국할 예정이었는데 콜롬비아 대통령이 제발 좀 와달라고 읍소하는 바람에 출국일을 이틀 앞당겼단다. 꼭 그를 만나야 할 사연이 뭔지 모르겠지만, 세월호 참사에 대해 설명하고 양해를 구하면 하루쯤 늦는다고 큰일날 것도 없을 것 같다. 혹시 생일인가 싶어 자료를 찾아보니 콜롬비아 대통령의 생일은 8월10일이다. 그럼에도 꼭 4월16일 출국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가 무엇이건 이건 대통령이 그만큼 세월호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세월호 유족들을 욕하는 누리꾼들이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은 이 땅에서 유사한 사건·사고가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 말이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세월호 참사는 바로 우리 자신들의 일로 돌아올 수 있다. 인양에 드는 세금 몇 천억원이 아까울 수는 있겠지만, 그걸 아낀다고 우리네 삶이 얼마나 더 행복해지는지 생각해 보시라. 그리고 이제라도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책을 읽으시라. 남들의 생각을 자기 생각인 양 착각하는 대신, 스스로의 생각을 만들고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연습을 하자. 계속 스마트폰만 본다면 시간은 잘 가겠지만, 나중에 당신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디 한 군데 호소할 곳이 없을지도 모르니까.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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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44년 4월, 한국 국민들의 눈이 뉴스 화면으로 쏠렸다. 아나운서가 흥분한 목소리로 인양 장면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네, 드디어 선체가 인양되고 있습니다. 오랜 수색에도 찾지 못했던 실종자의 유해가 배 안에 있을지, 또 침몰 원인도 규명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2014년 304명의 희생자를 내며 침몰했던 세월호는 그 뒤 무려 30년간을 차가운 바닷속에 있다가 햇빛을 봤다.

“할아버지, 당시엔 인양 기술이 없었나 봐요? 이제야 배를 꺼내는 걸 보면.”

14살 손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해줬다. “그렇지 않아. 기술은 충분했단다. 다만 당시 정부가 인양에 적극적이지 않았어.”

손자가 놀란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니, 왜요? 배를 꺼내야 사고 원인을 규명하지 않나요?”

손자의 당연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래. 하지만 정부는 진상규명을 원하지 않았던 모양이야. 오히려 세월호 사고를 그저 교통사고쯤으로 축소하려고 했으니까.”

손자가 되물었다.

“할아버지 생각은 어떤데요? 그게 정말 교통사고인가요?”

“세월호 침몰 자체는 교통사고로 볼 수도 있지. 그런데 말이다, 달리던 버스가 사고가 났는데 운전자는 물론이고 그 뒤에 온 경찰이 승객들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해보자. 그 뒤 버스가 폭발해 모두 죽었다면, 그걸 단순한 교통사고라고 불러도 될까?

손자는 어이없어했다. 그게 도대체 말이나 되느냐고.

“세월호 사고가 바로 그랬어. 사고 당시 선장과 선원들은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방송만 반복했거든.”

손자가 바로 반박했다. “정말요. 선장이 판단을 잘못한 모양이네요. 하지만 해경이 왔을 거 아니에요. 그들은 왜 승객들을 대피시키지 않았죠?”

“믿기 어렵겠지만.” 난 차 한 잔을 마신 후 말을 이었다. 당시 사고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 구조선은 배에 들어가 승객들한테 퇴선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그 대신 조타실로 가서 팬티 차림의 선장과 선원들만 구조했다고. 날 닮아 작은 손자의 눈이 일반인 수준으로 커졌다. “선원들만 구조했다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그뿐이 아니야. 국방부 자료를 보면 해경은 해군의 최정예 잠수요원인 SSU 대원과 해군 특수부대(UDT) 요원이 도와주겠다는 걸 거절해. 또한 사고 직후 미군 소속 헬기 2대가 돕겠다고 왔지만 역시 해경의 거부로 그냥 돌아가지. 그뿐이 아니야. 구조작업을 돕는다고 전국에서 민간 잠수사들이 몰려들었지만, 그들의 도움 역시 거절해.”

손자의 얼굴이 분노로 바뀌었다.


“해경은 도대체 왜 그랬대요? 세월호 승객들을 구하지 말아야 할 이유라도 있었나요?”

“이것도 믿기 어렵겠지만.” 난 잠시 침묵하다 말을 이었다.

“그 시절의 법은 사고가 났을 때 민간업체가 구조를 담당하도록 돼 있었어. 배가 침몰하면 회사가 구난업체를 선정해 구조를 부탁하는 것이지. 구난업체는 구조를 해야 돈을 버는데, 그 당시 해경은 ‘언딘’이라는 업체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단다. 그래서 해경은 언딘이 오기 전까지는 다른 누구도 구조에 뛰어들지 못하게 했던 거야.

그 뒤 이 말을 덧붙였다. 마땅히 컨트롤타워 역할을 해야 할 대통령은 “인명구조에 최선을 다하라”는 지시를 내린 뒤 무려 7시간여 동안 행적을 감췄다고.

“그럼 국민들은요?”

말도 안 된다면서 혼자 분을 삭이던 손자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이런 걸 가지고 교통사고로 우기는 정부를 그냥 보고만 있었나요?”

국민 얘기를 하려니 갑자기 가슴이 갑갑해졌다.

슬프게도 우리 국민들은 세월호 유족들을 적대시했어. 죽은 자식을 이용해서 한몫을 챙기려 든다고. 사실 유족들이 원한 것은 진상규명이었는데 말이야. 세월호 사건 후 한 달 반 만에 지방선거가 치러졌거든? 거기서 여당이 압승을 해요. 그 후에 있었던 재·보선도 마찬가지고 말이야. 이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유족들을 대놓고 무시했지. 한 번만 만나달라고 사정해도 대통령은 듣지 않았으니까. 진상규명 특별법도 마지못해 통과시키기는 했지만, 아무 의미도 없었어.”

손자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니까 지금 세월호가 30년 만에 인양이 되는 것은 35년 만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진 탓도 있는 거네요.”

난 씁쓸히 웃었다.

“그렇지. 그나마도 인양비를 국민성금으로 모았으니 망정이지, 세금으로 한다고 했으면 쉽지 않았을 거야. 그래도 다행이지. 내 살아생전 세월호가 인양되는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저승에서 그 학생들을 만나도 조금은 덜 미안할 것 같아.”

손자는 내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는 정말 야만의 시대를 사셨군요. 우리 역사지만, 정말 부끄럽네요.

나도 말없이 손자의 손을 잡았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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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세월호

얼마 전, 검사 세 명이 사표를 내고 청와대로 갔다. 말이 사표이지, 이들은 청와대 근무가 끝나면 다시 검사로 돌아간다. 사람들은 이런 식의 근무형태를 ‘현직 검사의 청와대 파견’이라 부른다.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검사는 범인을 잡아야지, 왜 청와대에 가 있지? 혹시 청와대가 범죄자들의 소굴인가?’ 이렇게 의심하는 것도 일리는 있지만, 청와대가 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다. 예를 들어 한 검사가 선거 때 국가정보원이 여당에 유리하게 댓글을 단 증거를 포착했다고 치자. 마음먹고 수사하려는데 청와대에 있는 선배 검사가 전화를 한다.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제발 날 봐서 수사를 그만둬주게.” 선배를 유난히 따랐던 정 많은 검사는 결국 수사를 포기한다. 검사가 말을 안 듣고, 친분도 그다지 없다면 어떻게 할까? 해당 검사에 대한 비리를 수집하면 된다. “당신을 꼭 닮은 아이를 서초동에서 봤다.” 강직하지만 비리가 있는 검사는 결국 수사를 포기한다.

1997년 개정된 검찰청법이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면서까지 현직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금지한 이유는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이 침해될까 우려해서였다. 그럼에도 역대 정부는 검사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주체하지 못한 나머지 미리 사표를 받는 편법을 동원해가며 욕구를 충족시켰다. 노무현 정부 때는 9명이 청와대에 파견됐고, 기록의 산실인 이명박 정부 때는 무려 22명이 청와대에서 근무하다 전원 검찰로 복귀했다. 현 정부는 어떨까?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한 지 2년이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 10명의 검사가 청와대에 파견됐다. 남은 기간이 3년인 점을 고려하면 이전 정부의 기록도 깰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대통령이 되기 전 박 대통령이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비판하지 않았느냐는 것. 일견 보기엔 그런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이 아니다.

비판에는 두 가지 맥락이 있다. 첫 번째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비판으로, 해당 행위에 대해서 “그건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럼 두 번째는 뭘까? “내가 진짜를 보여주겠다”면서 무대 위에 있는 사람에게 빨리 내려오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능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서 출연자들이 줄넘기를 하는 코너가 있었다. 예능프로그램이다보니 누가 더 못하는지 경쟁이 벌어졌다. 그 광경을 한심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김태원씨는 “그게 뭐냐?”며 줄을 건네받았다. 그가 보여준 줄넘기는 관객들은 물론 같이 출연한 분들까지 자지러지게 만들었다. 김태원씨의 핀잔이 그렇듯이 검사 파견에 대한 박 대통령의 비판도 당연히 후자인 바, 이런 걸 가지고 대통령이 변했느니 뭐니 해서는 안된다.


비슷한 예는 한둘이 아니다. 전문성이 없는 사람을 정권과 친하다는 이유로 높은 자리에 보내는 것을 낙하산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이 되기 전 낙하산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사기를 떨어뜨린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선 때 박 대통령의 선대위원장이었던 김성주씨가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가고, 친박 핵심인 73세 할아버지가 마사회장에 임명된 것에 대해 박 대통령을 비판한다. 이것 역시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박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건 진정한 낙하산이 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라이벌 이명박 전 대통령이 출범 2년간 245명의 낙하산을 내려보낸 데 비해 박 대통령은 같은 기간 318명인 것을 보면, 향후 50년간 깨지지 않을 기록을 세울 것 같지 않은가? 군인 출신 아버지를 둔 분이 낙하산을 싫어할 거라는 가정도 애당초 말이 안됐다. 담뱃값 논란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4년, 박 대통령은 담뱃값을 500원 인상하려는 정부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주와 담배는 서민이 애용하는 것 아닌가?” 반대하는 것 같지만, 헷갈리지 말자. 박 대통령이 저런 말을 한 진의는 ‘서민들이 담배를 못 피우게 하려면 획기적인 인상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였다. 올해 들어 담뱃값이 2000원 인상된 것은 그러니까 10년 전부터 별렀던 일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박 대통령이 과거 정부의 인사를 비판했던 것도 ‘진정한 인사 참사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겠다’는 다짐이었다. 현 정부 들어 인사문제가 화두가 되는 건 그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한 사람을 비판할 때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요즘 변했다”는 말을 많이 쓴다. 물론 이 말이 그리 좋은 말은 아니다. 나 역시 “뜨더니 변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하지만 남을 기분 나쁘게 하려고 사실이 아님에도 변했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알기에 박 대통령은 과거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겐 변했다는 말보다 변한 게 없다는 말이 더 치명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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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뜨는 게 꿈이었다. 서른 살 무렵부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책을 주기적으로 냈던 것도 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는데, 문제는 유치해도 너무 유치했다는 데 있었다. 책이 안 팔린 건 당연한 일이었고, TV에 나가 인지도를 얻은 뒤엔 “네가 과거에 낸 책을 가지고 있다”는 협박 전화가 이따금 올 정도였으니 말이다. 더 한심한 것은 내 책을 베스트셀러로 만들려고 교보문고에 죽치면서 사재기를 한 일이었다. 하루에 10권씩, 계산대 여러 곳을 돌면서 어머니와 함께 책을 샀는데, 베스트셀러는커녕 1쇄도 소화하지 못한 채 절판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글쓰기 연습을 하는 것, 그 후 난 8년간의 글쓰기 지옥훈련에 돌입했고, 결국 과학 분야의 베스트셀러를 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하 명박님)도 베스트셀러를 쓰는 꿈을 가졌던 모양이다.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이번 회고록이 세간의 관심을 모으기 전에도 명박님은 꾸준히 책을 내셨다. 2005년에 출간된 <신화는 없다>를 비롯해 <청계천은 미래로 흐른다>, <이명박의 흔들리지 않는 약속> 등이 명박님이 쓴 책들인데, 초창기의 내가 그랬듯 이 책들이 판매량에서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 모양이다. 작년 말에는 세계적 작가로 거듭나기 위해 <미지의 길>이란 영문 자서전을 미국에서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서점에 많은 돈을 지불해야 가능한 ‘화제의 시간 진열대’에 책을 전시하는 등 갖은 노력을 했음에도 1000권 남짓 팔리는 데 그쳤으니, 명박님의 실망이 컸을 듯하다. 이 상황에서 베스트셀러의 꿈을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쓰기 지옥훈련을 택한 나와 달리 명박님은 스케일이 큰 모험을 선택한다.

첫째, 대통령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를 보면서 사람들이 의문을 가진 건 이런 점이었다. “그렇게 돈도 많은데, 왜 정치판에 나와서 욕을 들입다 먹을까?” 나 역시 그게 의문이었다. 그 좋아하는 돈도 사회에 헌납할 만큼 대통령이 꼭 돼야 했을까? 하지만 그분이 책으로 뜨기 위한 수단으로 대통령에 출마했다고 생각하면 모든 게 이해된다.

둘째, 4대강 사업을 했다.

인터넷을 보면 이런 질문이 많이 올라와 있다. “4대강 사업은 왜 한 거예요?” 이유를 아는 사람이 없으니 답변도 제각각이다. 명박님의 모교인 동지상고 동문들에게 돈 벌 기회를 준다거나, 큰빗이끼벌레를 번식시켜 미래 식량의 대안으로 삼으려 했다는 등등 말이다. 오죽하면 2014년 말에도 “4대강 사업 왜 했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오겠는가. 하지만 그분이 4대강 사업을 한 건 오직 베스트셀러를 쓰기 위함이었다. 많은 국민이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판이니, 회고록이 나온다면 서점에 달려가 책을 사지 않겠는가.


셋째, 자기만의 캐릭터를 구축했다.

평범한 사람은 관심을 끌기 어렵다. 사람이 너무 착해도 재미가 없다. 재임 시절 명박님만큼 독특한 캐릭터를 만든 대통령이 또 있을까? 우리 국민들은 “해봐서 아는데”를 비롯한 그의 유행어에 즐거워했고, 자기가 한 일을 남의 일처럼 말하는 ‘유체이탈화법’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또한 친·인척과 측근들의 상당수를 감옥에 보내는 등 ‘나쁜 남자’의 이미지까지 보여줬는데, 이 캐릭터들은 훗날 베스트셀러를 쓰는 밑천이 됐다. 이번 회고록에선 나르시시스트로 분한다고 하니, 정치적 반대자들마저 열광할 수밖에 없으리라.

넷째, 노이즈마케팅을 했다.

베스트셀러에서 중요한 건 마케팅, 하지만 이 책은 굳이 돈을 들여 광고할 필요가 없었다. 남북 간의 회담이나 세종시 수정안 등 민감한 소재를 다룬 게 주효해서 9시 뉴스와 중앙일간지 1면에서 명박님의 회고록이 수도 없이 언급됐으니까. 이것 역시 베스트셀러를 노린 명박님의 치밀한 계산에서 나왔다는 게 내 추측이다.

이런 이유로 명박님이 쓴 <대통령의 시간>은 각 서점에서 집계하는 종합베스트셀러의 순위권에 올라 있고, 이런 추세면 현재까지 대통령 회고록 판매 1위를 지키고 있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운명이다>를 능가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혹자는 이 책이 800쪽 분량으로 쓰인 것, 2만8000원의 상대적으로 비싼 가격이 붙은 점, 책 할인을 금지하는 도서정가제 시행 직후에 출간된 점 등의 이유로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하는 모양인데, 확실한 것은 명박님이 보통 사람과는 차원이 다른 노력을 해서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점이다. 꿈을 이루기 위해 욕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던 분, 우리가 모셨던 대통령은 바로 그런 분이었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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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주위에 잘나가는 사람(이하 잘난 사람)이 있으면 삶이 편할 것 같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상의하는 건 물론이고, 정 부탁할 게 없더라도 밥 한 끼는 얻어먹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별로 좋을 게 없단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잘난 사람은 너무 바빠서 주위 사람을 챙길 겨를이 없고, 자신에게 부탁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어서 일일이 다 들어주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뜨더니 변했다”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TV에 몇 번 나가면서 인지도가 상승하자 삶이 굉장히 바빠졌다. 할 수 없이 그간 나가던 모임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지인들로부터 온갖 청탁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송국 구경시켜 달라” “컬투 사인 받아 달라” “연예인과 소개팅시켜 달라” 등등. 들어준 경우도 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거절한 적도 있는데, 거절당한 쪽에서는 즉각 이런 소문을 냈다. “서민 말이야, 뜨더니 변했어.” 방송에서 다 잘려 한가해진 지금, 이때 남은 앙금 때문에 만날 사람이 없다.

이게 갑자기 뜬 사람의 일반적인 행보다. 그런데 잘난 사람이 의리까지 있어서 주위 사람 챙기는 일을 무엇보다 우선시한다면 어떨까?

주위 사람들은 행복에 겨워 그를 칭송하고, 그 광경을 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든 그 잘난 사람과 친해보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시나리오, 설마 이런 분이 있냐고? 있다. 놀라지 마시라. 그분은 바로 현 대통령이시다.

이분이 자신의 의리를 만천하에 드러낸 것은 취임한 지 4개월이 지났을 무렵이다.

당시 정국은 국정원 때문에 시끄러웠다. 대선 당시 국정원이 직원들을 시켜 야당 후보를 비방하는 댓글을 달게 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니까. 게다가 그 사건을 물타기하려고 국정원이 남북 정상 간의 회의록을 공개해버렸다. 남재준 국정원장을 해임하라는 여론이 비등했지만, 대통령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남 원장은 2007년 대선 경선 때부터 자신을 도운 충신이었으니까.

그로부터 1년 뒤엔 국정원이 없는 간첩을 만들려고 증거를 조작했다는 게 드러났다. 이번에야말로 국정원장이 해임되겠거니 했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이번에도 남 원장과의 의리를 선택했다.

김기춘 비서실장과의 관계도 감동적이다. 2013년 8월부터 비서실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김 실장은 현 정부 인사참사의 배후로 지목된 데다 최근 비선 논란과 관련돼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등 경질될 사유가 충분했다. 하지만 대통령은 김 실장 편이었다.


왜 이럴까? 대통령은 그 이유를 “드물게 보는 사심이 없는 분”이어서란다. 사심이 없다는 게 어떤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26억원가량의 예금을 비롯해 김 실장의 재산은 37억원에 달하니, 돈 얘기는 아닐 것이다. 혹시 내가 생각하는 그 사심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나이쯤 된 분 중 그런 사심을 갖는 분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김 실장이 대통령 당선을 도운 원로그룹인 ‘7인회’의 핵심 멤버였고, 대통령이 보기 드문 의리파라는 걸 고려하면 모든 의혹이 풀린다.

이 밖에 ‘문고리 3인방’이라고, 문건에 나온 비선 파동에 연루된 청와대 비서관들의 교체 요구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는데, “의혹을 받았다는 이유로 내치거나 그만두게 하면 누가 내 옆에서 일하겠느냐”고 말해주는 분이 주위에 있다는 건 그 자체로 축복이다.

이러다보니 다음과 같은 미담이 만들어졌다. 오래전부터 박 대통령과 친하게 지냈던 모씨의 딸이 승마선수인데, 한 대회에서 라이벌 선수에게 패했다. 그러자 그 대회의 심판들이 경찰에 불려가 조사를 받았고, 승마협회에 대한 대대적 감사가 시작됐다. 그 감사에서 모씨에 대해 부정적인 보고서를 쓴 문화체육관광부의 국장과 과장이 좌천됐다.

이 사건들의 배후에는 모씨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대통령이 있다는 것. 딸의 패배에 속상해하는 지인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대통령이라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물론 미담은 대부분 과장되기 마련이며, 모씨 역시 “2007년 비서실장을 그만두고 난 뒤 만난 적이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필경 터무니없는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신화가 만들어지고 대중들 사이에서 유포되는 걸 보면 평소 대통령의 의리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김보성씨가 현 정부 들어 뜬 것도 의리가 그만큼 이슈화됐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새삼 아쉬워진다. 내가 대통령과 아무런 친분관계가 없는 것이.

내가 대통령의 측근이라면, 수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기생충이 멸종해서 힘드네요”라고 한마디하는 것만으로 기생충 감염률을 1960년대로 되돌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구충제 판매가 금지되고, 기생충 감염의 산실이던 인분비료가 다시 부활하지 않았을까?

기생충들아, 미안하다. 다 내 잘못이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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