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의원이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면서 논쟁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를 지켜보면서 그에 대해 썼던 나의 글들을 돌아보게 된다.

나는 ‘문재인 바람’이 불기 전인 2011년 여름 그가 차기 야권주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글을 썼다. 그 이유로 지역주의의 현실 속에서 호남을 넘어 비호남 표를 가져올 수 있으면서도, ‘짝퉁 한나라당’인 손학규 전 의원과 달리 정통성에 하자가 없으며, 친노 중 드물게 품격을 갖추고 있는 점을 들었다.

예측대로 그는 민주당의 대권주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며 나는 지난해 초 이 지면에서 문 의원이 대선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비전과 정책적 콘텐츠를 갖추고, 노무현을 넘어서야 하며, 권력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충고했다(‘문재인의 운명?’, 2012년 2월27일자). 그가 대선후보가 된 뒤에는 그가 해야 할 제일 중요한 일은 공약을 가다듬는 것도, 안철수와 후보단일화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이해찬-박지원 담합체제’로 상징되는 낡은 민주당을 혁신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문재인의 첫 번째 할 일’, 2012년 9월17일자).

 

(경향DB)

그러나 그는 전혀 그러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당의 색깔을 보수세력이 그토록 싫어하는 빨간색으로 바꾸고 경제민주화를 주장하고 나서는 등 혁신하고 있을 때 문재인 의원은 민주당을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 결과는 당연히 패배였다. 국정원의 대선공작과는 별개로, 누가 제 당 하나 바로잡지 못하는 정치인에게 나라를 맡기겠는가.

이로부터 1년 뒤 그는 다시 대권 재도전을 시사하며 정치의 중심으로 재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별로 바뀐 것이 없는 것 같다. 지난 1년간 새로운 비전이나 콘텐츠를 보충한 것 같지 않다. 그렇다고 노무현을 넘어선 것도 아니다. 오히려 NLL 파동을 통해 ‘노무현 지킴이’라는 이미지가 강화되고 말았다. 칼을 갈며 민주당의 혁신의지나 구상으로 무장한 것 같지도 않다. 변한 것이 있다면 딱 하나, 강한 권력의지가 생긴 것 같다. 여당과 야당,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가 국정원 문제 등으로 두 편으로 나뉘어 파국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국면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식으로 대선 재도전 의사를 표명하고 나선 것이 이 같은 권력의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지금이 대선 재도전 의사를 밝히고 나설 때인가? 본인이 주도적으로 밝힌 것이 아니라 기자의 질문에 답한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그런 것을 논할 때가 아니라고 잘랐어야 했다. 또 왜 하필 지금 국면에서 민감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문 의원의 정치적 감각이다. 정치는 언제 무슨 이야기를 하느냐는 타이밍이 중요한 ‘타이밍의 예술’이다. 엉뚱한 타이밍은 이번만이 아니다. 문 의원의 행보를 보면 저렇게 타이밍을 잘 못 맞추기도 어렵다는 탄식이 나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지난 10월에도 당에 맡겨놓아야 할 권력기관들의 불법 대선개입 의혹에 대해 자신이 직접 공격을 하고 나서 대선에 불복하려는 것이냐는 반격의 빌미를 새누리당에 준 바 있다.

민주당을 수렁으로 몰고 간 NLL 발언을 비롯해 문 의원의 행보를 보면 엉뚱한 타이밍의 엉뚱한 발언으로 새누리당을 위기에서 구해주는 ‘구원투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어 화가 난 적이 여러 번이다. 아니다. 문 의원이 정확히 정치의 타이밍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즉 야권을 대표하는 ‘국민의 지도자’가 아니라 “민주당과 야권이야 망하건 말건, 친노와 나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정파지도자’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자신이 뉴스의 중심에 서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노이즈 마케팅’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설사 민주당이 국민들의 신뢰를 회복하지 못해 정권교체에 실패하더라도 적절한 타이밍에 노이즈 마케팅을 해 반새누리당의 대표주자로 자신을 각인시켜 야권의 주도권을 쥐는 것이 목표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품격을 볼 때 그렇지 않으리라고 믿는다. 대선에서 47%의 지지를 얻은 그는 야권의 중요한 자원이고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이다. 그런 만큼 정치적 감각을 갖춰야 한다. 또 현안은 당 지도부에 맡기고 민주당 혁신, 노무현 넘어서기, 비전과 콘텐츠 갖추기 등 밀린 숙제들을 해야 한다. 그것만이 2017년에 ‘2012년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길이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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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의 진보적인 교수들을 만나면 그들이 한국에 대해 공통적으로 부러워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회운동의 역동성이다. 꺼질 것 같으면서도 꺼지지 않고 타오르는 한국의 사회운동에 이들은 박수와 존경심을 표하곤 한다. 특히 운동이 거의 죽어있는 일본의 진보진영은 한국의 운동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곤 했다. 사실 이명박 정부 초기에 터져 나왔던 촛불시위에 대해서도 세계의 진보진영이 찬사를 보낸 바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찬사를 들을 때면 나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처럼 촛불시위와 같은 ‘거리의 정치’가 활성화되어 있는 것이 한국의 자랑인 것은 사실이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한국정치의 낙후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 툭하면 촛불 시위, 골리앗 투쟁, 이를 돕기 위한 희망버스가 터져 나오는 것은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징표에 다름 아니다. 정치의 기능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적 갈등의 조정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나 계급, 지역, 인종, 세대, 이념, 종교 등 갈등은 있게 마련이다. 이 같은 갈등을 제도적 틀 안에서 조정함으로써 갈등이 폭발하지 않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정치가 할 일이다. 그런데 정치가 그 같은 갈등조정의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사회적 약자들은 골리앗 꼭대기로 올라가고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극단적인 경우는 무장투쟁이라는 선택을 하게 된다.


몇 년 전 정부가 성매수 처벌을 법제화하려 하자 일부에서 풍선효과론을 동원해 반대한 바 있다. 풍선의 한 곳을 누르면 그곳은 들어가는 반면 다른 곳이 팽창되는 것처럼 성매매 단속을 하면 다른 변형된 성매매가 늘어난다는 논리였다. 그 논리를 빌리자면, 사회적 갈등도 풍선효과가 있다. 갈등의 총량은 일정한데 갈등을 제도정치가 해결하지 못하면 그것은 다른 곳에서 팽창해 거리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역설적으로 표현한다면, 나는 우리의 정치권이 사회적 갈등들을 잘 조정하고 정치가 제 기능을 함으로써 외국에서 부러워하는 촛불시위와 골리앗 투쟁, 거리의 정치가 우리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다.


이석기 사태에 대해 나는 이 지면에 쓴 ‘이석기를 넘어서’에서 주체사상과 종북주의는 시대착오적이지만 허용해야 하고 사법처벌이 아니라 국민의 선택에 의해 고사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만일 우리가 어떤 사상을 틀렸다는 이유로 금지한다면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나의 생각을 틀렸다고 금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옳은 주장만이 아니라 틀린 사상도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법원들어서는 이석기의원 (출처 :경향DB)


그러나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은 한술 더 떠 이석기 사건을 기화로 아예 통합진보당을 해산하려 하고 있다. 이를 보며 우려되는 것이 바로 풍선효과이다. 만일 통합진보당을 해산한다면 그 지지자들은 어디로 가겠는가? 통합진보당 지지자 중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체사상 신봉자와 종북주의자들인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극소수일 것이다. 그러나 종북주의라고 의심받고 있는 통합진보당의 지지자라는 이유로 통합진보당 당원들과 지지자들을 북한식으로 강제 집단수용소로 보내 사상교화작업을 할 것인가? 지금 정부와 새누리당이 하는 짓을 봐서는 그러지 못할 것도 없다는 걱정이 들기는 하지만,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박근혜 정부에 묻고 싶다. 통합진보당을 해산한다고 그 지지자들의 생각이 바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박근혜 정부가 통합진보당은 해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지지자들의 생각과 사상을 해산하지는 못한다는 사실이다. 결국 통합진보당을 해산하겠다는 것은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군사독재시절의 급진세력처럼 지하로 들어가 지하당을 하라고 사주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합법정당이 지하로 내려가는 풍선효과만 생길 뿐이다. 사실 우리는 박정희 시절 대표적인 지하당 조직이었던 통일혁명당으로부터 이석기 의원이 관련해 사법적 처벌을 받았던 민족민주혁명당에 이르는 오랜 지하당의 어두운 역사를 갖고 있다. 수만명에 달하는 통합진보당 당원수, 나아가 지지자 수를 고려할 때, 과거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초대형 지하당이 될 것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에 묻고 싶다. 정말 다시 낡은 지하당시대로 돌아가고 싶은가?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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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인기를 끌었던 영화 중 <몬도가네>라는 영화가 있다. 세계의 충격적인 풍습들을 다큐멘터리로 소개한 이탈리아 영화로 직역하면 ‘개 같은 세상’이라는 뜻이지만 세상의 기이한 것들을 모아놓은 것이기에 ‘기이한 세상’ 정도로 의역해 이해했다. 요즈음 자꾸 떠오르는 것이 이 영화제목이다.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고 있자면 몬도가네의 한국판인 ‘꼬레아 가네’, 즉 ‘기이한 대한민국’이라는 단어가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우리가 오랜 투쟁 끝에 민주화를 이룬 지 벌써 26년이 지났다.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만도 6번으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거쳐 박근혜 정부에 이르렀다. 게다가 이제 시대는 1950~1960년대가 아니라 지구화와 정보화가 본격화된 21세기가 아닌가? 그런데 이승만, 박정희 정권 때가 생각나는 국가권력에 의한 관권선거라니 말이 되는가?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댓글작업의혹으로 시작된 이번 사태는 그 규모가 원래의 의혹보다 훨씬 크고 국정원만이 아니라 군까지 개입된 것으로 밝혀지면서 일파만파 커지고 있다. 한마디로, 반세기 이상을 거슬러 올라가 관권선거가 판을 치던 1950~1960년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게다가 경찰수뇌부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애를 썼고 이를 조사하는 검찰을 찍어내기 위해 별별 수작을 다 벌이고 있으니 정말 몬도가네가 따로 없는 ‘꼬레아 가네’이다. 미국의 CIA와 미군정보기관이 예를 들어 2008년 대선에서 오바마 민주당 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해 “오바마는 빨갱이”라는 댓글작업을 했다면 어찌 됐을 것인가?

 

(경향DB)

아직도 정보기관들이 문재인 민주당 의원과 같이 급진세력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자유주의적 정치인을 결코 대통령이 돼서는 안되는 종북세력, 반국가세력으로 인식하여 그의 당선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의 당선방해 작업을 벌였다는 사실, 또 그 같은 공작이 결국 세상에 밝혀지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하다. 특히 국정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 시민사회대표들이 참여한 과거 청산활동을 통해 과거의 정치적 개입에 대한 자기반성을 했었음에도 그 같은 자기반성 보고서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또다시 대선에 개입했다는 것은 참담하기만 하다. 결국 여러 외신들의 대대적인 보도가 잘 보여주듯이, 이번 공작 덕분에 어렵게 이루어 놓은 우리의 민주주의는 국제적인 웃음거리가 되고 있고 박근혜 대통령의 국제적인 이미지에도 손상이 가고 있다.

그러나 정말 충격적인 것, 정말 기이한 것은 국가기관의 대선개입 그 자체가 아니다. 정말 기이한 것은 여권과 보수진영의 반응이다. 여권이 제대로 된 보수세력이라면, 아니 보수-진보를 떠나 상식을 가진 정치세력이라면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철저한 진상규명에 적극 나서는 한편 책임질 것은 책임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검찰 수사 관계자들을 야권과 가까운 친노세력으로 몰아가고 야권의 문제제기 역시 대선불복종으로 몰고 감으로써 위기에서 벗어나려 하고 있으니 한숨밖에 안 나온다.

물론 정몽준 의원과 이재오 의원과 같은 중진들은 이번 사태에 대한 여권의 대응에 대해 자기반성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예외적 상황일 뿐 여권의 분위기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번 댓글공작에 대해 “국가기관에도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중략)…박근혜 지지자들만 트위터를 쓰고 댓글을 쓰는가”라는 이정현 홍보수석의 발언에는 할 말을 잃게 된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박 대통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박 대통령은 본인이 이 같은 공작을 인지하고 있었는가와는 별개로 대승적 입장에서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고 재발방지와 책임자 처벌을 약속하여 문제해결에 적극 나서야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인 김현철씨가 정확히 지적했듯이, 그것이 아니라 유신독재의 상징적 구호였던 새마을운동을 제2의 새마을운동으로 발전시켜 국민의식혁명을 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나서니 답답하기만 하다. 세계화의 21세기에 우리는 관권선거와 관제 국민의식 개조운동이 판을 치던 1950년대와 유신시대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긴 공식행사에서 유신시대가 그립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오는 판에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정말 기이한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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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니 여권의 ‘배신자’가 된 진영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마지막 말은 “복지는 내부의 적을 만들지 않는 일”이었다. 대통령의 세 번 반려도 뿌리치고 끝내 사퇴를 관철했으니, 그게 ‘사랑의 배신’이냐 아니냐를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출당이니, 탈당이니 기초연금을 둘러싼 배신자 논쟁에서 그나마 가슴 언저리를 맴도는 건 그의 이 마지막 소회뿐인 것 같다. 이런 난장판을 예상 못하지는 않았을 터이기에, 그럼에도 가롯 유다의 선택을 하게 된 ‘양심’의 본질과 이면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복지를 가능하게 하고, 지탱하는 근본은 두 가지다. 돈과 약속이다.

“가장 빈곤한 계층의 후생을 증대하지 않고는 어떤 사회 개선도 기대하지 말라”(<정의론> 중)는 존 롤스의 일갈처럼 한 사회가 공동체로 존재하고 기능하기 위한 수단인 복지는 수혜자와 부담자가 확연하게 나뉘기에 공동체의 동의가 본질이다. 공동체의 동의는 “타인의 곤궁에 대한 공감만이 보편적 인권 개념을 가치있게 한다”(<유러피안 드림>)는 제레미 리프킨의 호소처럼 ‘가진 사람’들의 절제와 타인에 대한 이해의 표현이다. 따라서 돈, 즉 재정은 그 동의의 결과물이자 원인이다.

 

(경향DB)

 

어떤 면에서 여권은 참 일관성이 있다. 적어도 노인층에겐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TV토론에서 “기초노령연금을 보편적 기초연금으로 확대해 모든 어르신한테 내년부터 20만원 기초연금을 지급할 것”이라고 했다. 야당의 ‘보편적 복지’론에 “포퓰리즘식 퍼주기 복지”라며 경기(驚氣)를 일으키던 그들이지만, 유독 노인층에겐 ‘보편 복지’를 언급하며 내놓은 약속이었다. 당시 박 후보 공약은 소득 하위 80% 계층에게만 2017년까지 18만원으로 인상하는 민주당 공약보다 훨씬 급진적이었다. 의심스러웠지만, ‘원칙과 신뢰’의 박 후보 약속이니 딱히 사기라고 주장할 근거도 없었다.

이보다 앞서 이명박 전 대통령도 대선을 일주일여 앞둔 2007년 12월10일 대한노인회 주최 토론회에서 “임기 안에 기초연금을 20만원까지 올려주겠다”고 약속했다. 2008년 4월 총선을 앞두고는 아예 기초노령연금을 월 36만원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물론 이명박 정부 내내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표’ 되는 노인층과만 이처럼 되풀이해 온 약속과 파기의 역사는 선거용 ‘표’퓰리즘 외엔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실상 기초연금은 국민연금 재정 문제와 깊은 인연이 있다. 2006년 파산에 직면한 국민연금 재정개혁이 기초노령연금 도입의 계기인 때문이다. 당시 노무현 정부는 ‘더 내고, 덜 받는’ 연금 개혁안을 면구스럽게 국민 앞에 내밀었다.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정부 연금 개혁안을 맹비난하면서 부결시키고 대신 ‘더 내지는 않고, 덜 받기만 하는’ 불완전 개편안을 관철시켰다.

박근혜 정부는 지난 8일 국무회의를 열고 다시 국민연금 보험료를 현행 9%로 동결했다. 당초 14% 인상까지 검토하던 걸 백지화하고 차기 정부로 넘긴 것이다. 2060년 연금 고갈이 예상되지만 적어도 이 정부 내에 욕을 먹지는 않게 됐다. 재정 때문에 기초연금 공약을 “불가피하게 조정한다”던 그들이, 이 정부 내 벌어질 일이 아닌 국민연금 재정 위험엔 눈감은 셈이다. 결국 폭탄을 돌리다가 어느 정부는 다시 면구스럽게 훨씬 심각한 개편안을 국민들에게 내밀어야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여권은 복지의 ‘기반 원칙’ 두 가지 모두를 어겼다. 아니 기만했다. 단순히 공약 파기니 하는 논란의 수준을 넘는다. ‘집권 실격’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래서 진 전 장관의 그 말, ‘내부의 적’은 울림이 있다. 부담층이든 수혜층이든 불만과 불신이 자라면 그 복지는 존재하기 어렵다. 복지의 종말은 공동체 신뢰의 붕괴를 의미한다. 진 전 장관이 여권 내부의 적인지, 여권이 우리 사회 내부의 적이 되고 있는 것인지.

권력이 아주 조그만 얼룩을 보여도 배반은 싹을 틔우기에, 그것은 ‘권력의 예보계’와도 같다. 결과적으로 이 정부는 첫해부터 이미 얼룩이 들고 있음을 자인하고 있는 꼴이다. 더욱이 지금 여권 핵심부가 질 낮은 배신 논쟁을 통해 느끼는 통증은 다른 뭇사람들의 배반감과 상실감에 비하면 작은 것일 수도 있다.

내부의 적을 만들어 공동체를 만인 대 만인의 검투장으로 만들면 ‘힘’ 외엔 통제할 방법이 없다. 점점 권력과 통치의 수단이 과거로 가는 듯한 지금 분위기는 그래서인가.

김광호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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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4년간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민교협) 공동대표 일을 한 적이 있다. 특히 이들의 반민중적 신자유주의정책에 저항해 많은 시간을 거리에서 보내며 열심히 투쟁했다. 그러나 두 가지 후회가 남는다.

하나는 비정규직을 위해 투쟁하면서도 정작 대학의 비정규직인 시간강사 문제를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못한 것이다. 특히 정치권이 강사들의 처우개선이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시간강사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하는 ‘시간강사 학살 법’을 여야 합의하에 만들어 내년부터 시행하겠다니 더욱 그러하다. 이 법은 워낙 욕을 먹은 원래의 법안 중 일부 독소조항을 뺐지만 기본적인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는 대표적인 악법으로, 교육전문가라는 국회의 관련의원들이 국가의 녹을 먹으며 이같이 한심한 법안이나 만들고 있으니 나라의 미래가 걱정이다.

다른 하나는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한다며 김대중 정부가 도입한 ‘브레인 코리아(BK) 21’정책을 막지 못한 것이다. 이 정책은 많은 자원을 학문후속세대인 대학원생들에게 지원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학원생들의 연구계획을 받아 이 중 우수한 학생들에게 연구비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교수들이 연구하고 싶은 연구계획을 제출하고 대학원생들은 단지 조교나 연구보조원으로 참여해 지원을 받도록 만들었다. 민교협은 이 같은 정책이 가뜩이나 ‘교수의 노예’라는 말을 듣는 대학원생들을 더욱 교수들에게 종속되게 만들고 우수한 대학원생들이 자신이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자율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이유 때문에 교수의 연구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자신의 전공이나 관심과 거리가 먼 엉뚱한 주제를 연구하게 만듦으로써 의도와 달리 학문후속세대 양성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비판했다.

 

(경향DB)

특히 이 같은 폐해는 인문사회 등 문과분야에 극심하다. 이는 대학원생들이 교수의 연구조교로 참여하는 이공계식의 연구방식을 문과에도 그대로 적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이 같은 비판에 귀를 막고 방학임에도 각 대학은 비상연락망을 동원해 응모하라고 지시하는 등 군사작전식의 졸속적인 방식으로 이 같은 정책을 강행했다. 그 결과, 이제 대학원생들은 자신이 공부하고 싶은 것을 연구하며 배고픈 고난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영혼을 팔아 교수 밑에 들어가 연구보조원으로 혜택을 누릴 것인가 하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다.

우수한 대학원생들을 단순히 교수의 연구보조인력으로 만들어 사실상 학문후속세대의 창의성과 독립성을 말살하는 이 같은 경향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이 같은 학문후속세대의 창의성 말살정책으로는 박근혜 대통령이 추구하는 창조경제조차도 요원할 것이다. 특히 우려스러운 것은 이 같은 연구프로젝트들이 대형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일부 이공계연구의 경우 대형화가 불가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인문사회계에도 이 같은 경향이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특히 21세기는 ‘다양성’이 핵심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소수 주제 중심의 대형화는 학문의 자살행위에 다름 아니다.

문제는 이 같은 자살적 추세가 오랜 군사문화인 전시주의, 그리고 한국연구재단과 같은 담당기관의 권력욕과 행정편의주의가 만든 결과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1000억원을 가지고 선발된 1000명의 박사들에게 연 3000만원씩, 그리고 7000명의 박사과정생에게 연 1000만원씩을 지원해 연구하고 싶은 주제를 연구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 길이지만, 이는 전시주의적인 기준에서 보면 가시적인 성과가 눈에 띄지 않고 관리도 어렵다.

그보다는 50억원짜리 프로젝트 20개로 나누어주면 가시적 결과가 눈에 띄고 관리도 쉽다. 게다가 각 대학들은 그 돈을 받기 위해 굽실거릴 것이고 집행기관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다. BK21의 후속사업인 BK플러스라는 최근의 정책은 이 같은 경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대형화 추세를 반영해 연구단을 구성하려면 상당한 교수 수를 채워야 하는 것을 의무조항으로 제시하고 있어 교수 수가 적은 서강대학교 같은 ‘강소대학’은 애당초 연구단을 구성할 수 없는 과가 태반이다.

처우개선이라는 이름하에 사실상 강사들을 학살하고 있고 학문후속세대 양성이라는 이름하에 학문후속세대의 창의성을 말살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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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담하다. 지난해 총선과정에서 불거진 부정선거 파동도 부끄럽기 짝이 없었는데 이번에 터진 이석기 파동은 더욱 그러하다. 진보를 자처해온 사람으로서 참담하기가 이를 데 없다. 사실 통합진보당을 중심으로 우리사회에 친북 내지 ‘종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주체사상파가 존재해 왔다는 것은 진보진영의 물을 조금이라도 먹은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번에 밝혀진 녹취록 등은 사법적 판결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와 상관없이 테러계획 등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석기 사태를 넘어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명확히 해두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이석기 파동에도 불구하고 주체사상과 종북주의는 사상적으로, 정치적으로 허용돼야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은 틀린 주장도 할 수 있는 자유의 보장에 있기 때문이다. 분단시절 서독은 동독을 추종하는 ‘종동독주의’ 노선을 추구한 공산당을 허용했다. 다시 말해, 주체사상과 종북주의는 국민의 선택에 의해 정치적으로 도태시켜야 하는 것이지 사법적으로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사실 종북주의와 주체사상에 호응하는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다만 문제는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이 국가보안법의 존재 등으로 인해 종북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민주당의 묻지마식 반MB야권연대와 비례대표제가 더해져 이들의 정체성에 대한 엄밀한 대중의 검증이 없이 문제의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한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 종북주의자들이 떳떳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도록 만들어서 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고사시켜야 한다. 또 민주당도 낡은 묻지마식 야권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둘째, 이와는 별개로 이번 녹취록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테러는 사법적으로 규제해야 한다. 이는 사상의 자유와는 별개의 문제이며 좌우이념을 넘어서 처벌해야 한다. 예를 들어, 노무현 정부 시절 한 극우논객이 좌파정부인 노무현 정부에 대한 사실상의 무장봉기를 선동한 바 있다. 이것이 추상적인 글에 그쳤으니 망정이지 이 같은 계획이 이번 이석기 사태처럼 조직적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논의되었다면 이는 사법적으로 처리했어야 한다.

셋째, 정작 걱정은 새누리당과 보수세력이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계기로 쾌재를 부르며 강공을 계속하고 있다. 심정은 이해되지만 유죄확정이 되지 않았는데도 이석기 의원을 국회에서 제명하고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려고 하는 등 공안드라이브를 가속화하고 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두 가지다. 하나는 현재의 이석기를 만들어낸 것은 야권연대를 한 민주당이 아니라 새누리당이 뿌리를 둔 유신과 전두환 정권이라는 군사독재라는 사실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1982년에 대학에 들어간 82학번이라는 점이다. 그는 80년 광주의 비극 속에서 계엄군의 진입작전을 승인해 양민학살을 방조한 미국에 대한 증오를 생생하게 체험하며 자라난 세대이다. 물론 이후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낡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은 그의 잘못이다. 그러나 이들 반미 주체사상파를 만들어 낸 원죄는 군사독재에 있다. 따라서 새누리당과 보수세력은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한다.

 

나아가 이번 사태를 기화로 국정원 개혁을 포함한 개혁과제들을 물 건너가게 하고 공안드라이브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가려 한다면 그것은 제2, 제3의 이석기를 만드는 길이다. 이석기 사태의 재발을 막는 길은 종북매카시즘이 아니다. 그 길은 철저한 개혁으로 우리 사회를 노동자들이 툭하면 분신하고 철탑에 올라가는 사회가 아니라 ‘살맛 나는 멋진 사회’로 만드는 것이다.

통합진보당도 테러 논의가 농담이었다는 식의 헛소리를 할 게 아니라 합리적인 자주파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혁신을 해야 한다. 정의당 그리고 노동당으로 이름이 바뀐 진보신당 등 주사파에 비판적인 진보세력들은 진보의 존망이 걸린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의 올바른 선택이다.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는 신랄하게 비판하되 그것이 ‘종북매카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올바른 진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대중의 몫이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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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6개월이 됐다. 이에 따라 여러 평가가 줄을 잇고 있다. 개인적으로 새 정부가 가장 잘한 것은 전두환 미납추징금 징수라고 생각한다. 민주 정부를 자임한 김대중, 노무현 정부조차 엄두도 내지 못한 일을 과감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에 박수를 보낸다. 다음으로 잘한 것은 4대강 사업 등 이명박 정부의 실정에 대해 심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관계에서 일정한 성과를 얻어내고 있는 것도 평가해주고 싶다. 구체적으로, 시진핑체제 출범에 따른 중국의 대북정책 변화라는 운에 기인한 바가 크지만, 북핵문제에 대한 중국의 지원을 얻어내 북한을 고립시킴으로써 원칙을 지키면서 개성공단, 이산가족 상봉 등 대북관계에서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


그러나 비상식적인 일방 인사, 정치권과 여론을 무시하는 불통의 정치, 국정원 사태에 대한 방관, 경제민주화의 후퇴 등 우려되는 것이 훨씬 많다. 특히 오기에 가까운 인사와 불통의 정치를 바라보면서 떠오른 것은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은 너무도 다른 양 극단의 정치인이다. 노 전 대통령은 엄밀한 의미의 진보는 아니더라도 자유주의 개혁세력을 대변한다면 박 대통령은 냉전보수세력을 대변한다. 어려운 성장과정을 거친 노 전 대통령이 서민과 비주류를 대표한다면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로 성장한 최고엘리트 출신이다. 노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어울리지 않는 언행으로 구설수를 달고 다녔다면 박 대통령은 일찍이 퍼스트레이디 훈련을 받은 덕택에 최고의 품위와 격을 갖춘 정치인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과 박 대통령, 그리고 지지자들이 모두 펄쩍 뛰며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두 정치인은 너무도 닮은 점이 있다. 그것은 위험한 순교자주의이다. 나는 2007년 초 다음과 같이 쓴 바 있다.



“현재 한국정치에는 두 명의 ‘순교자주의자’가 있다. 순교자주의란 여론 등과 상관없이 자신이 옳은 일을 위해 순교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서 종교인에게는 중요한 덕목일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인의 경우 민주화투쟁 등에 있어서 필요할 때도 있지만 민심에 반하고 틀린 것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해 무대뽀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위험할 수 있는 성향이다. 두 명은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의원이다. 노 대통령은 평생을 주류에 도전하며 살아온 반주류 순교자주의자이다. 특히 지역주의에 저항해 돈키호테처럼 싸워 ‘바보 노무현’이라는 아름다운 별명도 얻었다. 그러나 순교자주의가 잘못돼 이제 올바른 여론에 대해서도 ‘여론은 무시하기로 했고 역사가 내가 옳았음을 평가할 것’이라고 위험하게 나가고 있다. 박 의원 역시 순교자주의자이다. 다만 차이는 주류 중에서도 최상류 주류로 살아온 기득권수호적 순교자주의자, 반공주의 순교자주의자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내용만 반대일 뿐 위험한 순교자주의자라는 점에서는 똑같다. 박 의원은 대한민국이 노무현 정부라는 친북좌파에 의해 존폐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자신은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순교하겠다고 믿고 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 대선에 뛰어들었다’는 미국 방문 중 한 발언이 그 예다.”


2005년 한 정치인이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라는 글을 썼다는 뉴스가 올라왔다. “김근태 의원과 같은 사람이 썼나보다” 생각하고 읽어보니 박 대통령이 쓴 것이어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모를 모두 비극적으로 잃고 자신까지 테러를 당한 상황에서 충분히 ‘고난을 벗 삼아’ 운운할 수 있겠다고 이해가 됐다. 그러나 바로 그 같은 개인사와 생각이 정당한 비판에도 귀를 닫고 잘못된 길을 고집하는 순교자주의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는 걱정을 했다. 특히 그 글에서 “소신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욕을 안 먹을 수 없으며 그 비난은 가슴에 다는 훈장 이상으로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갈 것”이라는 구절이 그러하다. 박 대통령이 역사에 남는 훌륭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와 대화하기에 앞서 민심과 대화해야 하며 순교자주의를 버리고 땅으로 내려와야 한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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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은 오랜 감옥생활에서 나온 깊은 사색을 통해 얻은 지혜로 우리를 감동시켜왔다. 그중 하나가 그의 ‘머리, 가슴, 발 이론’이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이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행’이고 이에 못지않게 먼 것이 ‘가슴으로부터 발로의 여행’이라는 주장이다. 머리로 알기는 쉬워도 이를 진정으로 가슴으로 느끼기는 쉽지 않고 이를 발로 실천하기는 더더욱 어렵다는 성찰이다. 최근의 정국, 특히 새누리당의 국가정보원 국정감사 보이콧에 저항해 가두투쟁에 나선 민주당을 보면서 문득 떠오른 것이 바로 신영복 선생의 ‘머리, 가슴, 발 이론’이다.


현 정국의 핵심에는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와 헌정질서의 근본을 흔드는 아주 심각한 사안이다. 그 결과 사상 처음으로 정보기관에 대한 국정조사가 이루어지게 됐다. 또 주요 대학의 교수들이 줄줄이 성명서를 냈고 중·고등학생들까지 거리로 나섰다. 284개 시민사회단체로 시국회의가 구성돼 철저한 진상조사와 국정원장 해임을 주장하고 있다. 사안의 엄중함을 생각할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국정조사는 아무것도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새누리당에 있다. 새누리당은 국정조사를 세 번이나 파행시켰고 20여일간 국정조사를 중단시켰다. 주요 증인 채택을 거부하는가 하면 주요 당직자들이 외유 등으로 여의도를 떠났다. 이 같은 행태는 결국 국민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새누리당에 분노하며 민주당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잘해야 무능의 극치로 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민주당의 잘못된 대응으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이라는 민주주의의 사활이 걸린 중요한 문제를 단순한 여야 간의 정쟁으로 보고 있을 따름이다. 민주당은 국정조사를 물타기 위한 보수세력의 북방한계선(NLL) 논쟁에 쓸데없이 뛰어들어 문제의 초점을 흐렸을 뿐 아니라 논쟁에서도 백전백패하고 말았다. 국정조사 과정에서도 무능과 무기력을 그대로 보여줬다. 특히 여름휴가를 핑계로 국정조사를 일주일 쉬기로 합의를 해주는가 하면 이에 대한 여론의 비판이 일자 “솔로몬의 선택에 나오는 어머니의 심정” 운운하며 이를 합리화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장외투쟁을 선언하고 나서니 별 감동이 없다.


(경향DB)


민주당의 장외투쟁 돌입에 대한 권성동 새누리당 의원의 논평은 불행하게도 정곡을 찌르는 정확한 것이다. “NLL 대화록 국면에서 민주당이 큰 실수를 했고, 또 이번 국조특위 과정에서도 막말 논란 등으로 자기들이 얻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을 취득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민주당 지도부가 강경파에 흔들리게” 돼서 결국 거리로 나선 것으로 “하려면 진작 했어야 하는데 파행의 원인을 우리 새누리당에 돌리고 그걸 빌미로 장외투쟁하려는 의도가 아주 명명백백하게” 보인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뒤늦게나마 전면적인 투쟁에 나선 것은 어쨌든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야 머리를 넘어 발로 실천하고 나선 셈이다. 그러나 진정성과 가슴이 느껴지지 않는다. 머리에서 가슴은 건너뛰고 발로 내려간 기분이다. 나아가 국민들의 가슴을 움직이기에도 너무 부족하다. 문제는 국민의 가슴을 움직이는 것이지 단순히 거리로 뛰어나가는 것이 아니다. 장외투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국민의 가슴과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면서 거리에 백번 뛰어나와 봐야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땀 닦는 김한길 대표 (경향DB)


이와 관련, 투쟁 상황을 둘러보려고 서울시청 앞 투쟁본부를 가보았는데 민주당이 정신을 차려도 한참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타고 시청 앞 천막당사 옆을 지나가는데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광장 옆으로 한 차선을 차지하고 늘어선 민주당 국회의원과 당직자들의 호화스러운 고급 승용차의 행렬이었다. 그 이유야 알 수 없지만, 비상시국의 가두투쟁에 나서며 구태여 고급 승용차들을 타고 나올 필요가 있는가? 그리고 투쟁본부 옆에 구태여 금배지 스티커를 부착한 승용차들을 줄줄이 세워놓아야 하는 것인가? 해답은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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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몇 년 전 필자가 쓴 한 칼럼의 제목이다. 그렇다. 우리 사회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대한민국이란 국가와 정치공동체는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원래 이 같은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정권만 바뀌면 정부구조까지 바꾸는 기이한 정치권의 졸속주의, 한탕성과주의 때문이었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클린턴 정부에서 부시 정부, 부시 정부에서 오바마 정부로 정권이 바뀐다고 정부 부처가 생기고 없어지고 이름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정권만 바뀌면 정부 부처가 생기고 없어지고 난리를 친다. 대한민국이란 국가는 존재하지 않고 김대중 정권, 노무현 정권, 이명박 정권, 박근혜 정권과 같은 정권들만 존재하는 셈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의 정치적, 이념적 균열이 너무도 심각해 “하나의 정치적 공동체로서의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교과서와 역사박물관 문제가 그 예이다. 우리는 군사독재를 미화한 군사독재시대의 교과서를 민주화 이후 개정한 바 있다. 그러나 보수정권들이 집권하자 이를 좌파적 역사관이라고 시비를 걸며 다시 뜯어고치고 있다. 이념적 성격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교과서가 바뀌고 학생들이 다른 내용의 역사를 배워야 하는 기이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건국 60주년을 맞아 건립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역시 야당과 민주세력으로부터 편향적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어 이념이 다른 정권이 집권하면 이를 뜯어고치겠다고 나설 가능성이 크다.


(경향 DB)


국정원의 불법 선거개입과 NLL사태도 마찬가지다.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국정원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한 대한민국의 정보기관이 아니라 특정 정권과 정파의 도구로 전락되고만 충격적인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는 최고 정보기관의 총수가 지난 10년간 대한민국을 통치했고 지난 대선에서도 자유주의적 색깔의 야당을 다시는 권력을 잡아서는 안되는 ‘종북세력’으로 보고 불법적인 선거개입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집권을 막는 것이 애국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념적 골이 깊다는 사실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민주 정부들도 다르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는 수구세력의 반발로부터 개혁과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잘못된 소명의식에서 광범위한 도청을 했다. NLL사태 역시 기밀을 지켜야 하는 정보기관이 국가비밀을 공개한 것도 문제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들을 보여주고 있다. 똑같은 정상회담 회의록을 놓고도 어떻게 그처럼 판이하게 다른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다. 즉 최소한의 상식과 언어를 공유할 수 있는 대한민국이란 정치공동체는 사라지고 이념적 균열이 얼마나 심각하기에 같은 문장을 놓고도 다른 해석에 기초해 사생결단의 논쟁을 하느냐는 것이다.


현대민주주의의 핵심인 다원주의와 관용사상은 유럽의 심각한 종교분쟁 속에서 생겨났다. 다른 종교를 탄압할 경우 자신들도 남과 다른 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을 수 있다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인식을 통해 다원주의와 관용사상이 생겨났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는 ‘역지사지의 정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최근의 정권교체를 통해 배웠듯이 아무리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교과서를 만들고 역사를 강요해봐야, 또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하는 정책을 만들어봐야, 이념이 다른 정권이 들어서면 이를 뜯어고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같은 역지사지의 인식에 기초해 초정파적으로 개방적인 논쟁을 거쳐 정권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을 합의에 기초한 정책들을 만들어 나가는 ‘역지사지의 정치’를 실천해야 한다. 물론 이들 문제는 무엇이 옳은 것인가 하는 ‘진리의 정치’가 개입돼 있는 만큼 합의와 타협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의견이 다른 세력들을 말살하거나 모두 수용소에 감금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렵더라도 역지사지를 통한 합의의 정치로 나아가야 한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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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신당’이 구체화되고 있다. 한국에서 장기적인 생명력을 가진 의미있는 제3당이 가능한지, 진보정당도 아니고 민주당과 비슷한 자유주의정당이 제3당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는 논쟁적인 주제이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현재의 거대양당제의 문제점, 구제가능성이 별로 없어 보이는 민주당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안철수 신당은 그 논의만으로도 기존 정당질서에 충격을 줄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어떤 내용의 신당이냐는 구체적인 내용이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안철수의 싱크탱크인 정책네트워트 내일의 창립심포지엄에서 이사장을 맡은 최장집 교수가 제시한 청사진이다. 언론에 보도됐듯이 최 교수는 한국정치의 가장 큰 문제점 중의 하나는 “낮은 수준의 정당제도화”라고 전제한 뒤 지금과 같은 거대양당의 ‘내용 없는 진영대립’을 극복할 수 있도록 ‘진보적 자유주의’에 기초한 대안정당이 출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최 교수의 분석에서 주목할 것은 ‘내용 없는 진영대립’이다. 즉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사생결단으로 싸우지만 사실상 정책면에서 차이도 없어 내용 없는 대립일 뿐이라는 통렬한 비판이다. 물론 김대중, 노무현 정부 지지자들의 경우 “그래도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고 반론을 펼지 모르지만 큰 틀에서는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다. 사실 지금도 쟁점이 되고 있는 쌍용차 문제도 원죄는 이명박 정부가 아니라 진보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해외매각을 강행한 노무현 정부에 있다. 따라서 문제는 중산층과 서민의 정부를 자청하고 나섰고 보수진영으로부터 ‘빨갱이’ 정권이라는 비판을 받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왜 사회적 양극화의 주범이 되고 보수정권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경제정책을 펴고 말았느냐는 그 원인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다. 안철수 신당이 이에 대한 엄밀한 분석에 기초해 대안을 제시할 때만이 민주당과 같은 비극을 피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안철수 정책네트워크 내일 창립기념 심포지엄 (연합)


진보적 자유주의는 공감할 수 있는 이념이다. 그러나 민주당이 실패한 것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아닌 ‘그냥 자유주의’ 내지 ‘보수적 자유주의’를 추구했기 때문인가? 진보적 자유주의는 민주당의 그동안의 이념과 정강보다 더 진보적인 이념인가, 아니면 민주당보다 보수적이어서 민주당과 새누리당의 중간쯤 되는 이념인가? 내가 보기에 민주당 노선보다 더 진보적인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 않고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중간쯤 되는 이념이라면 민주당의 이념도 새누리당과 의미있는 차이를 만들어내지 못했는데 진보적 자유주의가 의미 있는 차이를 만들어내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 판단은 진보적 자유주의가 내용면에서 민주당의 정치이념과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는 쪽이다. 즉 진보적 자유주의라는 것이 민주당과 다른 정당을 만들 만큼 차별성을 갖는 정치이념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콩나물 국밥집에서 만난 여 야 대표 (경향DB)


민주당이 실패한 것은 정치이념 때문이 아니라 사욕에 의해 정치를 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안철수의 공익적 리더십이 해답일 수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무능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면 또 다른 얘기다. 이 경우 안철수의 신당이 민주당과 달리 경제민주화 등 시대적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도 아니고 구조적 제약 때문에 실패한 것이라면 안철수신당은 구조적 제약을 어떻게 넘을 것인지 보여줘야 한다.


최 교수가 정확히 지적한 ‘낮은 수준의 정당제도화’도 문제이다. 이는 정권 초기 노무현 대통령이 부딪쳤던 고민과 동일하다. 기존의 정당은 분명 문제가 많다. 그렇다고 새 정당을 만드는 것은 인물을 중심으로 노무현당, 안철수당이라는 인물정당이 생기고 인물과 함께 그 정당도 사라짐으로써 낮은 수준의 정당제도화를 더 심화시킬 것이라는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나는 당시 “노 대통령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정당 개혁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는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그리고 나의 예언대로 그 정당은 노무현 정부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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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의 한국 사회를 규정하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나는 단연코 ‘반지성의 사회’ ‘증오의 사회’라고 부르고 싶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지성적 논의, 합리적 논쟁이 사라져 버렸다. 합리적 논쟁을 대신한 것은 누구 편, 어느 진영이냐는 편가르기와 진영논리다.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접하면 더 이상 그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그 주장이 타당한가를 따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올바른 이야기를 들어도 자신과 생각이 다르면 그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지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려고도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그 주장이 옳으냐, 그르냐가 아니라 그가 우리 편이냐, 아니냐일 뿐이다.


관계, 언론계, 학계에 종사하는 소위 잘나가는 대학 동기들의 친목모임이 있다. 당연히 이념적으로 생각이 다르니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곤 한다. 그러던 중 주요 언론의 중책을 맡고 있는 한 친구가 내뱉은 말은 머리를 망치로 치는 것같이 충격을 줬다. “요즘은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면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는다. 대신 왜 저 친구가 저 이야기를 하는지 따져본다. 고향이 어디지? 누구 편이지? 그것을 따지면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 사회는 지성적 논의가 사라지고 진영논리만이 지배하는 ‘반지성 사회’가 돼 버렸다. 합리적 논쟁에 기초한 ‘지성의 정치’가 사라지고 진영논리에서 생겨난 ‘증오의 정치’가 지배하는 ‘증오 사회’가 돼 버린 것이다.


사실 최근 쟁점이 되고 있는 윤창중 사태, 그리고 5·18 광주민중항쟁의 왜곡을 보면서 절망감에 빠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윤창중 사태의 비극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한심한 일탈이나, 구멍난 청와대의 위기관리체계나, 언론계에서는 다 알고 있었던 윤 전 대변인의 문제를 본인만 몰라놓고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을 배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어이없는 해명이 아니다. 진짜 비극은 이 같은 사태도 진영논리에 근거해 박근혜 정부를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좌파의 음모’로 보는 일부 보수세력의 소름끼치는 사고방식이다. 


임명장 받던 윤창중 전 대변인 (경향DB)


‘5·18 사태’도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호남 출신으로 김대중 정부의 청와대 국정상황실장까지 지낸 사람이 종편의 시사 프로그램의 진행자로 나서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 “5·18이 북한 특수부대가 침투해 일으킨 것”이라는 상식 이하의 주장을 여과없이 소개하는 ‘반지성의 반공 선정상업주의’ ‘정치 포르노주의’에 할 말을 잃게 된다. 게다가 ‘일베’는 5·18을 전면적으로 폄훼하고 조롱하는 글들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같은 보수진영의 반지성적 진영논리와 증오의 정치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실정과 타락, 그리고 ‘운동권의 탐욕’과 또 다른 증오의 정치도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과거 군사독재 시절에 보수세력의 증오 정치가 별로 없었던 것은 민주화운동 진영이 절대적으로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 막아선 친노 (경향DB)


반지성주의와 진영논리는 보수나 극우세력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진보적 시각에서 비판하면 그 타당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한나라당의 주구’라는 식의 반지성적 대응만이 날아왔다. 얼마 전 노무현 대통령의 4주기 행사가 있었다. 그러나 추모행사에 참가하려던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과거 노 대통령을 비판하고 최근 친노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수모를 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노 대통령의 생가나 추모 행사장에서는 ‘완장부대’들이 문을 지키고 앉아 제 편이 아닌 사람은 내쫓는 ‘완장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진보진영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거의 종교가 되어 버린 자신들의 신념에 기초해 타인의 비판적 충고에는 귀를 닫고 있다.


비극적이지만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은 더 이상 지성이 아니라 진영논리에 의한 증오다. 특히 인터넷을 보면 절망적이다. 합리적 논쟁과 이를 통한 자기성찰과 자기정정이 없는 사회는 자멸할 수밖에 없다. 불행히도 우리가 그러한 길로 가는 것 같다. 답답한 일이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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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드디어 여의도에 입성했다. 구제가 어려운 민주당의 현실을 고려할 때 야권의 재생을 위해 그의 새 정치가 절실하다. 그러나 그의 국회 입성이 손뼉 쳐서 반겨지지가 않는다. 그가 여의도에 입성하는 날, 진보정의당 노회찬 전 의원이 꿈에 나타나 놀라서 잠을 깼다. 그는 가슴과 등에 칼을 꽂고 피를 흘리며 나에게 기어오고 있었다.


상계동 돌며 인사하는 안철수 의원 (경향DB)


진보신당 탈당 등으로 비판을 받고 있지만 노 전 의원은 진보의 불모지에서 진보 정당을 뿌리 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왔고 진보 정당이 배출한 몇 안되는 대중정치인이다. 특히 모범적인 지역구 활동으로 진보정당 후보로는 드물게 지역구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삼성과 국가권력의 유착을 폭로한 죄로 금배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안 의원이 평소 공익적 리더십을 실천해왔고 재벌을 비판해왔으며 새로운 정치를 주장하고 있는 만큼 노 전 의원에 대한 부당한 판결에 항의하는 뜻으로 후보를 내지 말고 선거를 보이콧하자고 민주당을 비롯한 야권을 설득하고 나설 줄 알았다. 그러나 “기회는 이때”라는 듯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재벌과 국가권력에 의해 가슴에 비수를 맞은 노 전 의원의 등에 다시 한번 칼을 꽂은 것이다. 꿈속에 노 전 의원이 두 곳에 칼이 꼽혀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였으리라. 물론 안 의원은 새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원내 진출이 절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새 정치가 수단과 과정은 어찌되었든 목적이 정의로우면 된다는 낡은 결과지상주의라면 그건 낡은 정치일 뿐이다. 재벌과 국가권력에 의해 치명상을 입은 진보 정당을 부축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 한번 비수로 찔러 그 시체를 밟고 일어서는 것이 새 정치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새로운 정치가 아니다. 영세상인들의 영역까지 침입해 밥줄을 끊는 재벌과 무엇이 다른가?


안철수는 안철수고 문제는 노회찬이다. 노 전 의원은 사면이 되기 전엔 공직 출마가 불가능하다. 설사 사면을 받더라도 지역구를 옮기거나 안 의원이 대통령이라도 돼서 지금의 지역구를 떠나지 않는 한, 아니면 국회의원을 포기하고 구청장 등 다른 공직을 겨냥하지 않는 한, 안 의원과 싸워 이겨야 한다. 이는 쉽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당분간은 진보정의당, 그리고 진보 정당의 미래를 위해 전념해야 한다. 노 전 의원이 취할 수 있는 하나의 선택은 안철수를 따라가든지, 아니면 민주당을 따라가든지, 자유주의 정당에 들어가 그 내부에서 진보 블록을 구성하는 것이다. 현재 진보정의당의 다수파는 진보 정당과는 거리가 멀고 유시민을 따르던 국민참여당 계열이고 이에 노 전 의원과 심상정 의원 등이 얹혀 있는 형국이라는 점에서 이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게다가 민주당행을 강하게 거부했던 유시민 전 장관이 당을 떠난 만큼 큰 장애가 없어진 셈이다. 사실 이미 국민참여당 계열의 강동원 의원은 진보정의당을 탈당했고 안철수 쪽으로 갈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노 전 의원은 최근 건전한 진보 정당의 2단계 창당을 이야기하는 등 이 같은 선택과는 일단 거리를 두고 있다.


(경향DB)


다른 선택은 노회찬, 심상정과 같은 진보 세력과 개혁적 자유주의 세력인 국민참여당 계열이 동거하는 상황을 끝내고 당을 해체하는 것이다. 국민참여당 계열은 이념이 비슷한 안철수당이나 민주당으로 가고, 노 전 의원 등은 진보신당과 진보 정당의 혁신을 위해 구성된 노동현장의 노동자정당추진회의 등과 함께 (반미와 통일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종북주의 등의 비판을 받아온 통합진보당과 달리) 노동과 복지 문제 등에 역점을 둔 21세기형 진보 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물론 탈당을 둘러싼 감정적 앙금 때문에 진보신당과의 논의가 쉽지 않을 것이다. 또 통합진보당 사태가 보여주듯 무리한 통합은 득보다 실이 많다. 그러나 각개약진은 공멸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그리스 좌파연합 등 다양한 실험을 참고해 이들 진보정치 세력의 연합조직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노 전 의원이 할 역할이 있을 것이며, 그 첫걸음은 진보신당 탈당에 대해 사과 등으로 앙금을 푸는 것이다.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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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볼리바르혁명의 주역인 차베스가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선 21세기형 사회주의 모델로 주목을 받아온 볼리바르혁명의 미래이다. 다행히 그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르 임시대통령이 차베스 유고로 실시한 대통령 재선거에서 승리해 혁명을 이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로 승리해 재검표 요구에 시달리고 있는 등 그 미래가 불투명하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이를 넘어서 정치와 혁명에서 인물의 역할에 대해, 나아가 혁명의 제도화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개인적 경험과 관련해 그러하다. 2004년 12월 나는 베네수엘라정부의 초청으로 신자유주의로부터 ‘인류를 지키기 위한 세계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이후 국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베네수엘라를 방문했지만 당시만해도 한국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볼리바르혁명을 직접 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베네수엘라로 향했다. 거기서 볼리바르혁명의 여러 면을 생생하게 보고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충격적인 것은 차베스와의 만남이었다. 52개국에서 온 400명의 진보인사들 앞에 나타나 털어놓는 그의 내공의 깊이와 폭은 내가 만난 그 어느 학자들보다도 뛰어난 것이어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충격은 감탄을 넘어 우려로 변해갔다. 일정을 무시하고 오후 3시부터 11시까지 8시간 동안 마이크를 놓지 않아 저녁 9시에 열릴 예정이었던 대통령 초청만찬이 자정에야 열리게 된 것을 보면서 볼리바르혁명의 미래가 걱정됐다. 한번 마이크를 잡으면 놓지 않는 그가 권력을 놓지 않으려 할 것이 너무 자명했다. 즉 그는 권력양도를 통해 자신을 넘어서 혁명이 제도화되는 ‘혁명의 제도화’ 길을 택하는 대신 2006년 임기가 끝나기 전에 개헌을 해 계속 권력을 잡으려고 할 것이 뻔해 보였다. 그리고 나의 우려대로 그는 개헌의 길을 택해 죽을 때까지 권력을 유지했다. 물론 국내외의 위협 앞에서 혁명의 지속이 중요하지, 3선 개헌이라는 절차적 측면이 뭐가 그리 중요한 문제냐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 걸려 있는 것은 단순한 절차적 민주주의의 문제가 아니라 ‘혁명의 개인화’인가, ‘제도화’인가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인물이 없는 정치란 불가능할 정도로 정치에서 인물은 중요하다. 차베스와 같은 지도자가 아니었다면 볼리바르혁명의 지금과 같은 성과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물에 의존하는 경우 스탈린주의와 같은 개인숭배를 낳게 된다. 그 극단적인 형태가 봉건왕조와 다름없는 3대 세습이라는 낯 뜨거운 희극을 연출하고 있는 북한이다. 그리고 우리도 경험한 3김정치가 그 약한 형태일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지나치게 특정한 인물에 의존할 경우 그 인물이 사라질 때 특정인물에 의존하던 정치는 위기를 맞게 된다. 정치가 인물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지나치게 특정인물에 의존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지지와 변혁적 힘을 제도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같은 문제점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볼리바르혁명이지만 반드시 멀리 갈 필요는 없다. 가까이 있는 진보신당을 보면 알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주류세력에 대해 종북주의와 패권주의를 비판하며 탄생해 주목을 끌었던 진보신당은 자신들의 지도자였던 노회찬·심상정 의원과 조승수 전 의원이 2012년 통합진보정당 창당을 위해 당을 떠난 뒤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특히 민주노동당이 주축이 돼 새롭게 출범한 통합진보당이 지난해 부정경선 소동으로 위기에 처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기회를 맞았음에도 사실상 몇몇 활동가들의 ‘자폐적인 정치서클’로 전락한 채 대중적인 진보정당으로 재기할 기미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진보신당이 대중적 지지를 제도화하지 못하고 몇 명의 스타 정치인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결과이다. 진보정치가 단순히 특정인물에 의존하는 ‘인물정치’를 넘어서 대중적 지지와 변혁적 힘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 그것이 차베스가 남긴 중요한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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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디오게네스라는 그리스 철학자가 있다. 옷 한 벌, 지팡이, 빵 자루 이 외에 가진 것 없이 길 가의 통 속에서 사는 그는 어느 날, 늘 그러하듯이 햇볕을 쬐고 있었다. 그때 그의 명성을 듣고 알렉산더 대제가 찾아 왔다. 


알렉산더가 “당신에게 무엇인가 해주고 싶은데, 무엇을 원하느냐”고 묻자 그는 “내 앞에 비치는 햇볕이나 가리지 말아주십시오”라고 답했다고 한다. 요즈음 자주 떠오르는 것이 이 디오게네스다. 그의 또 다른 일화 때문이다. 그가 훤한 대낮에 등불을 손에 들고 다니기에 사람들이 의아해서 물어보자 “사람을 찾습니다. 어디 사람 없습니까?”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렇다. 사람 같은 사람이 없는 현실이 그로 하여금 대낮에 등불을 들고 다니게 만든 것과 비슷한 상황이 우리에게도 벌어지고 있다. 정말 박근혜 대통령이 쓰고 싶은 인재 중에 국민의 지탄을 받지 않을 만큼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는 사람이 그렇게 없는 것인가? 새 정부 공직 후보자들의 과거를 보고 있노라면, 디오게네스를 흉내 내서 대낮에 등불을 들고 “어디 깨끗한 인재 없소”라고 외치며 전국을 누비고 싶은 심정이다.


물론 위장전입 등 주요 공직 후보자들의 범법 행위와 부도덕성이 문제가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새 정부 공직 후보자들의 부도덕성은 정도를 넘어섰다.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국민들은 “우리의 지도자들이 부도덕한 범법자 집단에 불과하며 법을 지키며 착실하게 살아온 나만 바보”라는 생각에 허탈하기만 하다. 



청와대 임명장 수여식후 환담장소 이동 (경향DB)



나 역시 마찬가지다. 허탈감 정도가 아니라 지난 삼사십년의 우리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현재 한국 사회의 최고 엘리트들인 이들 공직 후보자가 성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해온 지난 삼사십년이 사실은 이들 엘리트의 각종 범법 행위가 일반화되어 판을 쳐온 비정상의 역사였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장전입 등 그 ‘흔한 관행적 비리’마저 하지 못한 나 자신이 무언가 모자라는 바보처럼 느껴진다. 더욱 우려되는 것은 이들 엘리트, 나아가 사회 전체의 도덕적 불감증이다. 치매가 아니라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잘 알 터인데 부끄러운 오점들이 다 노출될 것을 알면서도 공직을 수락하고, 오점들이 사회적 쟁점이 되어도 사퇴하지 않고 버티는 도덕적 불감증 말이다. 하도 공직자들의 비도덕성이 일반화되면서 웬만한 허물은 허물이 아닌 것으로 공직 후보자들이,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의 생각이 마비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궁금한 것은 왜 유독 새 정부 들어 비도덕적인 고위 공직 후보자가 많아졌느냐는 것이다. 애당초 박 대통령과 측근들이 문제가 많은 인재들만을 알고 있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인사검증 시스템이 그전 정권들에 비해 엉망이라 이 같은 사태가 벌어진 것인가? 어느 경우든 문제가 심각하긴 매 한가지다. 


사실 한심한 북한의 핵무장이 심각한 안보 위협이 되고 있지만 이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심각한 위협은 주요 공직자들의 부도덕성에 의한 국민들의 허탈감이다. 또 공안당국은 “북한보다 무서운 내부의 적”을 이야기하지만, 진짜 무서운 내부의 적은 극소수의 종북주의자들이 아니라 국민들의 허탈감이다.


박 대통령은 국정 목표를 희망의 ‘국민행복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밝혔다. 뜨거운 박수로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새 정부의 인사를 보고 있노라면 국민들은 행복하기는커녕 허탈하기만하다. 국민행복시대가 아니라 ‘국민허탈시대’이다. 국민허탈시대 개막, 만만세다! 새 정부에 부탁하고 싶다. 제발 행복하게 만들어주지 않아도 좋으니, 문제 인사들의 공직 후보 지명으로 국민을 허탈하게 만들지만 말아달라고. 


새 정부는 뒤늦게 인사 문제에 대해 사과를 하고 인사개혁을 약속했다. 새 정부가 국민허탈시대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미봉책에 그치지 말고 인사시스템을 혁명적으로 개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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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유시민 전 의원이 정계를 은퇴했다. 이로써 3김 정치에 의해 사당정치와 지역주의로 왜곡된 한국의 자유주의를 아래로부터 당원이 움직이는, 제대로 된 근대적 정당과 탈지역주의로 바로잡으려던 ‘유시민 실험’도 실패로 끝났다. 사당정치와 지역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적 문제의식의 정당성,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여러 재주들을 생각할 때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유시민 실험의 실패는 자초한 면이 많다. 구체적으로, 진정성보다는 단순히 재주에 의존하고, 긴 호흡을 가지고 옳은 길을 뚜벅뚜벅 걸어감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했던 ‘소탐대실 정치’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어, 그는 아래로부터 당원이 결정하는 정당을 주장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정치에 입문할 때는 지역구 결정을 무시한 민주당 지도부의 낙하산 공천에 의해 국회의원이 됐다. 또 지역주의와 싸우기 위해 적지인 대구에 내려가 국회의원 출마를 했다가 떨어지자 얼마 뒤 짐을 싸가지고 올라와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특히 국회의원 야권후보 단일화 과정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가가 있는 지역구를 놓고 자기 이익만 고집하다가 민심의 결정타를 맞고 말았다. 이 점에서 그는 비슷한 목표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멘토이자 동지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갔다. 그리고 그 결과 노 전 대통령과 같은 정치적 업적을 이루지 못했다. 다시 말해, ‘유시민의 길’은 긴 호흡에서 진정성을 가지고 지역주의 등 한국정치의 기성질서에 저항함으로써 ‘바보 노무현’이라는 말을 들으며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통령 자리에까지 오른 ‘노무현의 길’과 달랐다. 즉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더 큰 것을 얻는 ‘소실대탐의 정치’와는 정반대인 ‘소탐대실의 정치’였던 것이 문제였다.


정계은퇴 선언한 유시민 (경향신문DB)


우려되는 것은 돌아온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가 유시민 전 의원과 비슷한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안 전 교수는 전성기의 유 전 의원과 비교하더라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등 유 전 의원과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안 전 교수 역시 한국의 전근대적 거대정당체제, 특히 전근대적 자유주의정당에 대한 비판에 기초한 개혁적 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유시민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진성당원에 의한 인터넷 정당과 탈지역주의 등 핵심 개혁 내용에서 자신과 중첩되는 안 전 교수의 등장이 유시민의 정치은퇴 결정을 촉진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안 전 교수가 작은 것을 버림으로써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고 이를 통해 더 큰 것을 얻는 ‘노무현의 길’과 ‘소실대탐의 정치’가 아니라 눈앞의 작은 이익에 연연해 더 큰 것을 잃어버리는 ‘유시민의 길’과 ‘소탐대실의 정치’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예가 안 전 의원이 적지인 부산을 피해 노회찬 진보정의당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공석이 된 노원병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그의 논리이다. 그는 부산 영도를 택하지 않고 노원을 선택한 것에 대해 “지역주의에서 벗어나 민심의 바로미터인 수도권에서 새로운 정치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그렇다면 지역주의와 싸우기 위해 안 전 교수가 민심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에 출마한다는 수도권, 즉 종로의 의원직을 헌신짝처럼 던져 버리고 적지인 부산으로 내려가 낙선의 길을 걸은 바보 노무현의 길이 자기 출신지역에서 출마했다는 이유로 지역주의란 말인가? 노 전 대통령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모욕적 궤변이다. 솔직하게 “노원이 부산보다 당선 확률이 높아서”라고 이야기한다면 솔직성이라도 인정해 줄 텐데 이 같은 궤변을 늘어놓으니 할 말이 없다.


현재의 민주통합당은 희망이 없다. 따라서 그 형태가 어찌 되었건, 안 전 교수를 중심으로 한 야권의 개편이 시급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 전 교수가 노무현의 길이 아니라 유시민의 길을 가는 한 그 한계는 뻔하다. 노무현의 길이냐, 유시민의 길이냐, 그것이 안 전 교수와 야권의 미래, 나아가 한국정치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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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박근혜와 링컨. 언뜻 보기에 잘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이다. 물론 박근혜 대통령이 링컨처럼 역사에 남는 위대한 대통령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링컨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노예를 해방시킨 진보적인 정치인이었다면 박 대통령은 대통령의 딸 출신의 대표적인 보수적 정치인이라는 등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의 취임식을 보면서 떠오른 것이 엉뚱하게도 링컨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박 대통령이 취임하는 바로 그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링컨>에서 링컨 대통령 역을 열연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대통령 취임 (경향신문DB)


박 대통령의 취임식을 바라보면서 왜 하필 링컨 대통령이 떠올랐을까? 그 이유는 링컨 대통령의 유명한 게티스버그 연설 때문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 연설에서 링컨은 민주주의를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부”라고 정의한 바 있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국민에 의한 정부’ ‘국민에 의한 정치’다. 물론 민주주의는 ‘국민을 위한 정치’, 즉 위민(爲民)주의와 위민정치여야 한다. 그러나 국민을 위한 정치 자체가 민주주의는 아니다. 예를 들어,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 세종대왕은 백성을 위한 위민정치를 활짝 꽃피운 위대한 위민정치인인지 모르지만 민주정치인은 결코 아니었다. 즉 그는 왕으로서 저 높은 곳에서 불쌍한 국민들을 내려다보며 이들을 위해 밤잠을 설치며 위대한 위민정치를 폈지만, 백성들은 여전히 정치과정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박 전 대통령은 가난한 국민들을 기아에서 해방시켜주고 잘살게 만들어주는,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이를 실현시킨 위민주의 대통령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를 위해 독재는 불가피하고 민주주의는 장애이자 사치라고 생각한,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정치인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국민’을 무려 58번이나 언급했고 국민의 행복과 관련해 ‘행복’을 20회나 언급했다. 이 같은 면을 주목하면 박 대통령은 어느 대통령보다도 국민을 생각하는 민주적 대통령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목할 것은 취임사에서 정작 민주주의, 그리고 민주주의의 핵심인 정치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국 박 대통령이 언급한 국민이 ‘국민에 의한 정치’가 아니라 ‘국민을 위한 통치’라는 위민주의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게 한다. 다시 말해, 경제를 살리고 국민들의 삶의 수준을 높여주면 되는 것이지 그 과정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결과지상주의, 결과로서의 국민행복주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다.


취임사만이 아니다. 그동안 여러 언론이 지적했지만 주요 공직자들의 인선도 민주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결과 지지율이 급락했다. 그럼에도 본격적인 정부 출범에 있어서도 인수위 시절 불통 인사라며 많은 비판 대상이 된 사람을 다시 중용하는 ‘오기 인사’를 하고 있다. 여기에서 반드시 짚고 넘어갈 것은 민주주의란 단순히 선거와 같은 집권과정의 민주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민주주의란 투표를 할 때만 주인이 되고 선거가 끝나면 노예로 돌아가는 제도가 결코 아니다. 


정치학 용어에 위임민주주의라는 말이 있다. 즉 선거과정은 민주적이지만 선거만 끝나면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위임되고 집중되는 비민주적 체제를 의미한다. 박 대통령이 “내가 민주적 선거로 뽑힌 대통령이니 5년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 생각을 갖는다면 그것은 심각한 문제다. 그럴 경우 박 대통령이 아무리 경제를 살리고 국민의 삶을 개선시킨다 하더라도 그것이 위민정치일 수는 있지만 민주정치와는 거리가 멀다. 아니 21세기의 정부는 단순한 위민정치로는 경제를 살리고 국민의 삶을 개선할 수 없다. 박 대통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란 단순히 국민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국민에 의한 정부이기도 하다는 링컨의 가르침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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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소련·동구 멸망과 사회민주주의의 위기 이후 유행한 것이 ‘제3의 길’이다. 영국의 전 총리 토니 블레어로 대변되는 이 제3의 길은 신자유주의도, 사회민주주의도 아닌 그 중간노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실상 사회민주주의의 포기와 신자유주의로의 투항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제3의 길은 그 같은 우경적 노선이 아니라 자본주의도, 그렇다고 문제가 많은 현실사회주의도 아닌, 제3의 대안을 의미하는 급진적 노선이라 할 수 있다.


그 같은 노선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1955년에 열린, 흔히 반둥회의라고 부르는 ‘아시아 아프리카(AA)회의’였다. 아시아와 아프리카 신생국들이 모인 이 회의는 서구 자본주의와 이의 다른 얼굴인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리고 소련의 관료적 사회주의와 새로운 사회주의적 제국주의에 대항해 ‘제3세계’의 ‘제3의 길’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 회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본주의진영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진영과는 구별되는 ‘비동맹’이라는 대외정책노선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고 국내 정치경제체제의 제3의 대안에 대해서는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지만 말이다.

아시아·아프리카회의 참석 뒤 칭다오에서 달라이 라마(사진 가운데) 등과 기념촬영한 푼왕(오른쪽). (경향신문DB)


지난주 내가 근무하는 서강대학교와 인도네시아국립대학과의 한국학 관련 협력문제로 인도네시아를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이 기회를 살려 1950년대의 제3의 길의 흔적을 살펴보기 위해 시간을 내서 반둥을 찾았다. 수도 자카르타로부터 3시간 거리인 이 고산도시는 역사적인 회의장소를 아시아 아프리카 박물관으로 개조해 잘 보존하고 있었다. 박물관에 들어서 회의를 이끈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인도의 네루, 중국의 저우언라이, 이집트의 나세르, 아프리카의 엥크루마, 유고의 티토 사진과 자료들, 그리고 역사 깊은 회의장을 둘러보자 많은 생각들이 스쳐갔다. 


반둥회의 이후 중국·인도의 국경분쟁 등 회원국가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제2차 회의는 무산됐다. 그러나 신생국이 계속 늘어나면서 반둥회의를 계기로 등장한 ‘비동맹그룹’은 점차 세를 가해 국제정치의 한 축을 이루어왔다. 물론 친미노선을 추구한 우리는 이 같은 운동과 거리를 둔 반면, 북한은 뒤늦게 이 운동에 참여해 발언권을 행사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운동은 제3의 대안을 보여주지 못하고 대부분 김일성과 같은 독재체제로 변질되어 버렸다. 나아가 소련·동구의 몰락과 함께 ‘제2세계’가 사라지면서 사실상 세계는 자본주의라는 ‘제1의 길’로 평천하됐다. 그것도 가장 악랄한 형태인 신자유주의로 말이다. 회의를 주도했던 나라들을 보더라도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중국은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라는 이름으로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지만 사실상 신흥 자본주의국가로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며 새로운 패권국가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인도 역시 신흥 자본주의 강국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싼 노동력에 기초한 한국의 봉제공장으로 변화했고 유고는 인종문제로 갈가리 찢겼다. 엥크루마의 가나는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잦은 정변과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반둥에서 이 같은 생각에 잠겨 있는데 들려온 것이 북한의 핵실험소식과 이에 대한 인도네시아정부의 비판성명이었다. 반둥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이 회의가 상징하는 비동맹운동에 깊이 관여한 북한은 사실상 ‘군사세습왕조’로 전락하여 체제생존이라는 이름 아래 핵무기 개발에나 열을 올리고 있으니 답답하기만 하다. 이와 관련, 비동맹운동의 오랜 동지였던 인도네시아가 이를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결국 비동맹운동과 제3의 길은 실패했다. 그러나 그 문제의식만은 아직도 유효하다. 국제적으로는 우리의 미래가 팍스아메리카가 계속되든, 아니면 중국 주도하의 팍스차이나가 되든, 반둥회의가 내걸었던 평화공존과 평등호혜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정치경제적으로도 이미 멸망한 현실사회주의나, 한계에 이른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길이 절실하다. 그 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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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대선이 끝난 지 한 달 남짓이 지났다. 박근혜 정부는 아직 출범하지 않았고,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는 거의 한 달이나 남아 있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가 출범해서 상당기간이 지나간 기분이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도 하지 않았건만 벌써 걱정이 태산 같다. 요즘 내가 갖고 있는 걱정은 민주통합당 지지자 등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바랐던 48% 중 많은 사람들이 하는 ‘앞으로 박근혜 정부 5년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걱정이 아니다. 가장 큰 걱정은 앞으로 박근혜 정부 5년이 아니라 오히려 그 5년 뒤인 2017년 대선이다. 아니 2017년 대선 패배 후 또 한 차례의 5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가의 걱정이다. 5년 뒤에 희망이 있다면 5년을 참고 견딜 만하다. 그러나 ‘희망 없는 기다림’이야말로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렇다. 민주통합당을 보고 있자니 5년 뒤인 2017년 대선에서도 별 희망이 없어 보인다. 물론 2017년 대선은 박근혜 정부가 어떻게 5년간 국정을 운영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 따라서 벌써 2017년 대선을, 특히 2017년 대선 패배를 이야기하는 것은 황당하게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가 그처럼 죽을 쑤고 민심이 그들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총선과 대선에서 패배한 민주통합당이 설사 박근혜 정부가 5년간 죽을 쑨다고 2017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겠는가? 별로 그럴 것 같지 않다. 특히 2017년 대선에서도 희망을 가질 수 없는 것은 대선 패배 후 민주통합당이 보여주고 있는 한심한 태도 때문이다. 민주통합당에 지난 총선에 이은 대선 패배는 ‘비상한 상황’이다. ‘비상한 상황’은 ‘비상한 해법’을 요구한다.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현 상황을 전혀 비상한 상황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물론 민주통합당은 대선 패배 후 비상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는 민주통합당이 현 사태를 비상사태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름만 비대위이지 비대위 위원장 선출부터 그 내용은 비상한 해법과는 거리가 멀다. 무난하고 덕이 있는 원내 중견의원을 위원장으로 내세워 무슨 비상한 해법이 나올지 답답하기만 하다.


최근 출범한 대선평가위만 해도 그렇다. 민주통합당은 대선평가위원장에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 측 캠프에서 활동했던 한상진 교수를 임명했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대선평가의 핵심쟁점인 문재인, 안철수 단일화 과정의 문제점을 다룰 위원회에 안철수캠프 핵심 관계자를 임명한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경기에서 한 팀 선수로 뛴 사람이 문제의 시합에 대해 심판을 보는 코미디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내용과 형식이 있다. 그런데 민주통합당의 일 처리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형식도 문제다. 아무리 민주통합당이 혁신을 한다고 해도 국민이 알아주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현재 국민 중에 민주당이 대선 패배를 반성하고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한나라당은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 패배 후 천막당사로 옮겨 뼈를 깎는 ‘쇼’를 연출했다. 민주통합당도 이를 본받아 천막이 아니라 토굴당사에라도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충고했지만 전혀 그 같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고 있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과 정해구 정치혁신위원장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경향DB)


현재의 민주통합당을 보고 있자니, 2017년 대선과 그 이후를 위해 민주통합당을 변화시켜 제대로 만드느니 새누리당의 차기주자를 개혁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정권교체를 바라는 사람들의 유일한 희망은 ‘메시아 안철수의 귀환’을 목매어 기다리는 것인가? 사실 이제 남은 선택은 두 가지뿐이다. 안철수, 나아가 진보정의당의 심상정, 노회찬 등이 민주통합당으로 들어가 이를 점령하여 안에서 파괴하고 완전히 새로운 정당으로 만드는 ‘내파’인가, 아니면 외부에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 민주통합당을 파괴하고 이를 대체하는 ‘외파’인가. 그것뿐, 다른 대안은 없어 보인다. 나는 벌써부터 2017년이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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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현대 사회과학의 중요한 쟁점 중의 하나는 의도와 전혀 다른 결과가 역사를 움직이는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다.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선후보의 TV토론이 좋은 예이다. 이 후보는 대선토론이 지지자들을 위한 카타르시스의 장이 아니라 부동층을 설득해 유인하는 장이라는 것을 망각한 채,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나왔다고 공언하는 등 지나치게 공격적인 자세를 보였다. 그 결과 의도와는 정반대로 박 후보 당선의 일등공신이 되고 말았다. 이는 한 여론조사 결과 그의 공격적인 TV토론 태도가 보수표심 집결의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된 것이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 대선 결과에는 이 후보의 공격적 태도를 넘어서 한국진보정당의 문제점, 나아가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추구해온 연합정치라는 보다 뿌리깊은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대선 직전 이 지면에 쓴 ‘김소연을 아시나요’라는 칼럼에서 나는 1997년과 2002년 대선에서 진보정당은 권영길 후보를 내세워 독자노선을 걸었지만 민주당은 승리했고 이 같은 독자노선이 진보정당 발전에 기여했을 뿐 아니라 정치공학적으로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의 승리에 오히려 도움을 줬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권 후보가 반한나라당 지지층 중 3% 정도의 지지를 갉아먹었지만 그의 존재가 김 대통령과 노 대통령에 대한 색깔론을 중화시켜 이들이 3%보다 많은 중도적 표를 얻도록 도와줬다.


 

MBC 스튜디오에서 경제분야 TV합동토론을 시작 전 포즈를 취하는 세후보 (출처: 경향DB)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이 있다. 권 후보는 민주당과 선거연합이 아니라 독자노선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TV토론에서도 보수적인 이회창 후보만 공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김대중, 노무현 후보도 공격함으로써 이들이 보수세력이 공격하듯이 진보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 중도층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이정희 후보는 전혀 다른 전략을 썼다. 문재인 후보는 공격하지 않고 모든 화력을 박근혜 후보에게 집중함으로써 보수층과 중도층에게 “문재인과 이정희는 한패”라는 인식을 주고 말았다.


이 같은 등식이 더욱 문제가 된 것은 이정희 후보와 현재 통합진보당에 남아있는 구민주노동당 주류세력이 북한의 세습 비판거부, 북한 핵개발 옹호 등으로 ‘종북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왔고 특히 이 같은 문제들과 부정선거 등 도덕적 문제들이 지난해 통합진보당 사태로 국민들의 집중적인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다. 이들을 비판하며 분당을 한 진보신당이 2010년 지방선거, 2012년 총선에서 독자노선을 걸었던 것과 달리 이 후보와 민주노동당은 이 두 선거에서 민주당과 손을 잡고 선거연합을 한 전력이 있다. 물론 민주당은 통합진보당 사태가 터져 나오고 통합진보당이 분당을 하자 이번 대선에서 종북이미지가 없는 심상정 진보정의당 후보와는 손을 잡으면서도 종북이미지가 강한 통합진보당의 이정희 후보와는 끝까지 정책연합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동안 이정희 후보와 가졌던 선거연합의 전력, 그리고 TV토론에서 보여준 이정희 후보의 토론전략 등으로 중도적 유권자들에게 민주통합당이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설득시키고 이들을 견인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북한이 같은 ‘세습권력’인 박근혜 후보를 도와주고 싶은 듯 선거 직전에 로켓까지 쏘아 올렸으니 중도층은 더욱 박근혜 쪽으로 쏠리고 말았다. 다시 말해, 이번 대선결과에 북한의 모험주의, 한국 ‘다수파’ 진보정당의 종북주의, 이들과 민주당의 연합정치노선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민주당은 민주노동당과의 선거연합을 통해 2010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연합정치의 축복’이었다. 그러나 종북적 이미지의 진보정당과의 연합정치 전력은 대선에선 오히려 ‘연합정치의 저주’가 되고 말았다. 이번 선거를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배워야 한다. 우선 진보정당은 종북적 노선을 벗어나고 새로운 21세기적 진보정당으로 변신해야 한다. 또 민주당과 같은 자유주의정당과 진보정당은 낡은 민주대연합론에 기초한 연합정치 만능론을 벗어나 어떤 정당과 언제, 어떤 연합을 할 것인가 엄밀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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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기이하다. 민주당을 보고 있노라면 과연 이 당이 바로 얼마 전 대선에서 패배한 정당인가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물론 말로는 “정권교체를 바라는 국민의 뜻을 저버린 역사의 죄인” 운운하며 혁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성도, 절박감도 느낄 수 없다. 당권 등을 놓고 벌어지는 친노-비노의 대립을 보고 있자면 오히려 경기에서 이긴 승자들이 전리품을 놓고 벌이는 싸움으로 착각이 들 정도이다.


대선 이후 민주통합당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패배의 원인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진단이 가능하기 때문에 다양한 입장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여야 한다. 그러나 그런 것 같지 않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안철수와 관련한 공방이다. 안 후보 측이 안철수로 단일화됐으면 승리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하면서 벌어지고 있는 안철수 진영과 민주통합당 간의 공방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유치한 수준에 화가 치민다. 단일화 과정의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단일화 과정 자체가 정치이고 권력투쟁이다. 따라서 후보사퇴가 자폭이었든, 아니면 패배였든, 이것에서조차 이기지 못한 안 후보가 본선에 나갔으면 이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망상이다. 사실 최근의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문재인 후보가 패배한 이유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야권후보 단일화가 기대에 미흡해서”라고 답하고 있는 바, 이 같은 아름다운 단일화 실패에는 어느 날 갑자기 후보사퇴를 선언하고 나오고 이후에도 선문답 같은 문 후보 지지운동으로 일관했던 안철수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결국 필요한 것은 양 진영 간의 유치한 논쟁이 아니라 1997년, 2002년 대선과 달리 이번 단일화가 제대로 되지 않은 이유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다. 이를 위한 기초자료로 양 진영은 단일화 과정을 합동으로 백서로 정리해 공개해야 한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이번 대선에서 안철수 변수가 어떤 작용을 했는가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다. 안 후보는 여론조사 등에서 박근혜 후보를 누르면서 박근혜 대세론을 흔들어준 중요한 공이 있다. 또 정치적으로 소극적인 20~30대를 선거로 끌고 나온 공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안철수의 ‘빛’이라면 ‘그림자’도 만만치 않다. 우선 민주통합당을 자기혁신하고 대선을 위해 전력투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세주 안철수’만 바라보고 있는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지난번 칼럼에서 지적했듯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과 이명박 대통령의 실정이 민주통합당의 지지율을 상승시켜 혁신 기회를 가로막는 ‘노무현의 저주’ ‘MB의 저주’로 작동했듯이 ‘안철수의 저주’가 작동한 것이다. 그러나 안철수는 또 다른 측면에서 이에 못지않게 민주통합당에 부정적으로, 박근혜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동하고 말았다. 아니 누구에게로의 유불리를 떠나 이번 대선을 엉뚱한 방향으로 끌고 가고 말았다.


(경향신문DB)


이번 대선에서 우리는 비정규직, 청년실업, 영세자영업자 등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15년의 시장만능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탄난 민생에 대한 대안, 특히 2008년 세계금융위기로 파탄난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대안체제를 놓고 국민적 논쟁을 벌였어야 했다. 그러나 안철수로 인해 그렇게 되지 못한 측면이 강하다. 구체적으로 안철수라는 후보의 존재이유 그 자체, 나아가 안철수의 선거공약이 이를 상당히 가로막았다. 그의 정치적 근거는 정치불신에 기초한 정치개혁이었고 당연히 그는 이를 핵심공약으로 들고 나왔다. 물론 정치개혁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회의원 수를 줄이느냐가 아니라 민생문제들이다. 민생문제를 제대로 해결한다면 국회의원 수가 좀 많은들 무슨 상관인가? 따라서 이를 중심으로 여야가 경쟁을 벌였어야 했는데 안 후보의 등장과 함께 지방선거, 서울시장 주민투표 등 지난 몇 년의 선거에서 중심 쟁점으로 부상했던 복지와 민생 문제가 국회의원 수 축소 등 정치개혁에 밀려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이는 민생문제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손해보지 않은 장사였다. 한마디로 또 다른 ‘안철수의 저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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