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9일 문재인 대통령은 평양 5·1경기장에 운집한 15만 북한 주민 앞에서 남한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대중연설을 했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는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3차 남북정상회담은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장 한 달 이상 내리막길을 걷던 지지율은 10% 이상 급반등해서 60%대를 회복했다. 비판자들은 지지율 하락을 가져왔던 경제정책의 실패를 평화 프레임으로 덮으려 한다고 하고, 지지자들은 역시 문 대통령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어느 쪽이 맞을까.

여기서 퀴즈 하나. 세대별로 보면, 남북정상회담은 어느 세대의 지지율을 가장 크게 견인했을까? 고령층은 반공보수가 주된 이념이고 평화 프레임은 젊은층에 잘 먹힐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정답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답은 60대 이상이다. 지지율 최저점인 9월 2주에 32% 지지율로 가장 박한 점수를 줬던 60대 이상은 3차 정상회담 직후인 9월 3주에는 58% 지지율로 급반등해서 50대보다도 훨씬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이하 한국갤럽 자료). 지지율 절대값으로만 보면 20~40대가 더 높지만, 정상회담 직전과 직후의 반등률로는 60대 이상이 압도적으로 높다. 숫자가 속내를 말해주지는 않지만, 미루어 짐작한다면 분단의 고통을 몸으로 느끼는 유일한 세대라는 점, 그리고 문 대통령 연설 직전에 있었던 소위 ‘대집단체조’와 같은 국가주의적 스펙터클에 익숙한 세대라는 점 등이 작용했으리라.

문재인 대통령이 19일 밤 평양 5.1 경기장에서 열린 ‘빛나는 조국’을 관람한 뒤 평양 시민들앞에서 연설을 하고 있다. 서성일 기자

이 사례에서 보듯이 문재인 정부의 지지 기반은 상당히 복잡하다. 박근혜 정부 때는 몹시 단순했다. 고령, 영남, 보수, 새누리당 지지자, 주부 및 무직자면 대통령이 무슨 짓을 해도 무조건 지지, 그 반대로 갈수록 지지율 급락이었다. 문재인 정부 지지율도 앞선 모든 정부처럼 장기적으로는 하락추세이지만, 중간중간 반등하면서 완만하게 하락한다. 올해만 해도 평창올림픽 직전 남북단일팀 논란과 ‘평양올림픽 선동’으로 하락했던 지지율은 올림픽 개막 후 급반등했다. 최저임금 및 부동산 정책 논란으로 하락하던 지지율은 3차 정상회담 이후 또 급반등했다.

두 차례의 반등을 비교해보자. 평창올림픽 때는 2030세대가 급격하게 지지를 철회했다가 빠른 속도로 복귀했다. 이번에는 2030은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다. 경제정책 논란으로 40대 이상이 지지를 철회하는 동안 그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이번에 세대별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오히려 50대이다. 지난 14주 동안의 변화를 보면 50대는 최고점인 6월 2주 74% 지지에서 최저점인 9월 1주에는 38% 지지로 반토막이 났다. 회복국면에서도 50% 지지로 회복세가 가장 더디다. 앞서 말했듯이 오히려 60세 이상의 회복세가 가장 빠른 형국이다. 직업별로 보면 주목해야 할 것은 자영업자다. 평창올림픽 때도 이미 최저임금은 논란이 되고 있었지만, 자영업자층은 지지를 그리 많이 철회하지도 않았고 회복세도 비교적 빨랐다. 이번에는 6월 2주 76%에서 9월 1주 32%로 지지율이 가장 많이 빠졌고, 9월 3주 52%로 회복되긴 했지만 여전히 주부와 더불어 가장 지지가 낮은 집단이다. 두 번의 반등이 있었지만, 첫 번째 반등을 이끈 집단과 두 번째 반등을 이끈 집단은 상당히 다르다.

정치권에서는 지지층을 ‘집토끼’라 부르고 상대 당 지지층을 ‘산토끼’라 부른다고 들었다. 부동층은 ‘들토끼’라고도 한단다. 그런데 장기 추세를 보면 문재인 정부의 경우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영원한 집토끼도 산토끼도 없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최근 몇 달만 보면 지지를 철회하지 않았던 2030세대는 집토끼인 셈인데, 그들은 평창올림픽 직전 갑자기 가출해서 산토끼가 되었던 적이 있다. 반면 영원한 산토끼인 줄 알았던 60세 이상은 3차 정상회담 이후 갑자기 집에 들어왔다. 물론 언제 또 나갈지 알 수 없다. 그나마 안정적인 집토끼라면 직업별로는 화이트칼라와 학생, 계층별로는 중상층이다(일부의 착각과는 달리 계층별 지지율은 하층에서 꾸준히 가장 낮고 중산층과 상층에서 꾸준히 높다). 그 외의 거의 모든 집단은 집과 산을 번갈아 왔다갔다 한다. 모두가 들토끼인 셈인가.

경제정책 실패를 평화 프레임으로 덮었다는 비판은 틀렸다. 50대와 자영업자는 정상회담 이후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60대 이상이 돌아왔다. 이제야 안심이라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지지자도 틀렸다. 집토끼가 별로 없다. 이런 현상의 정치적 의미는 무엇인가. 수시로 번갈아가며 집 나가는 토끼를 매번 잡으러 다닐 수 없다는 뜻이다. 다수의 국민들이 동의할 합리적이고 포용적인 지점에서 정치 균열을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정책과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야 한다. 상대가 산에서 들로 내려오기 전에.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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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임금 논란을 지켜보는 심정은 착잡했다. 노·사·언론 할 것 없이 입 달린 사람은 누구나 정부의 최저임금 정책에 대해 맹비난을 퍼부었다. 특히 편의점 업주 등 소상공인들의 최저임금 불복종 운동은 평소 편의점을 드나들며 24시간 영업하는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삶을 영위하는지 궁금해하던 일반 소비자들에게도 공감을 얻는 분위기다. ‘을들의 전쟁’이라는, 씁쓸하지만 부인하기도 어려운 이름이 붙었고 결국 대통령 지지율은 12%포인트가 빠졌다.

이대로라면 최저임금 문제는 해법이 없을 것이다. 편의점 업주들이 나를 잡아가라고 나선다면 어찌할 것인가. 그들을 처벌하면 정치사회는 절단날 것이고 처벌하지 않으면 최저임금은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문제는 해법이 없는 일들이 최저임금뿐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동산, 교육, 증세, 통일비용, 난민 문제 등등 그 목록은 끝이 없다. 어떻게 해야 하나.

세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주요 정책들은 최소 10년 이상의 연도별 시뮬레이션이 함께 나와야 한다. 우리 사회 갈등 사안의 상당수는 시간축을 길게 잡고 보면 전혀 다르게 보이는 문제들이다. 지금은 엄청난 비용을 치르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되었다고 후회할 사안들, 혹은 지금은 집단 간 이익다툼의 문제로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상생의 문제인 경우들이다. 더구나 세계 최고의 고령화 속도를 감안할 때, 같은 정책이라도 지금의 의미와 10년 후의 의미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지금 어떤 정책을 하면 향후 10년간 해마다 무슨 변화를 겪을 것이고 하지 않으면 10년 후 어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점을 정교하게 시뮬레이션하고 국민과 소통해야 한다. 이런 증거기반 정책을 가지고 대통령이나 책임있는 당국자가 진정성 있게 소통한다면 이해해줄 국민은 훨씬 많아질 것이다.

전국편의점가맹점협회에 소속된 편의점주들이 16일 오후 서울 성북구 보문동 영광빌딩에서 전체 회의를 열고 최저임금 차등적용과 가맹수수료 인하 등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구호를 외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둘째, 급하더라도 정책의 순서를 지켜야 한다. 최저임금이 왜 이렇게 뜨거운 감자가 되었나. OECD 최고의 자영업 비중 때문이다. 우리의 자영업 비중은 OECD에서 두 번째로 높고 적정 규모의 3.5배에 달한다. 자영업자 세 명 중 두 명은 어차피 시장에서 버텨낼 재간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들은 시장에서의 불리한 지위를 본인과 가족의 무지막지한 장시간 무급 노동으로 때우며 버텨왔다. 이런 상황이 현 정부 들어서 빚어진 것인가.

박근혜 정부 때도, 이명박 정부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나간 어느 정부도 구조조정 대책을 내놓지 않았다. 자영업이 적정 규모로 구조조정되는 순간 실업률은 치솟을 것이고, 그것은 정치적 타격으로 돌아올 것이 뻔하므로. 정치적 이유로 한계에 선 자영업자들을 방치해온 것이다. 이번에 최저임금이 이슈가 되자 다수의 언론은 그렇지 않아도 알바 정도의 수입이나 간신히 올리던 편의점주들이 이제는 알바만도 못하게 되었다는 논지로 비판에 나섰다. 무책임한 비판이다. 편의점주가 알바 정도 수입이나 간신히 올려왔다면 그것 자체가 비정상 아닌가. 지금까지 이 비정상에 대해 침묵하다가 알바보다 못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면 진의를 의심받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자영업 문제에 정공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셋째,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는 방식, 즉 거버넌스를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최근에는 정부부서와 일을 하다보면 그들이 보유한 높은 능력과 지식 수준에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정책 자문을 해달라고 요청을 받지만 이미 실무자들이 전문가를 능가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거의 항상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 빈칸으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국정을 운영하다보면 불가피하게 정무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무적 판단의 영역이 많아질수록 정책의 합리성은 그만큼 증발한다. 정무적 판단에 참여하는 사람은 소수일 수밖에 없고, 그들은 해당 정책에 대해 실무자 수준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분리해서 다루는 기존의 관행도 재고해야 한다. 재정에 대한 세밀한 고려 없이 사회정책이 제시되고, 기재부가 재정을 이유로 사회정책을 난도질하고, 그로 인한 소모적 논쟁이 정책의 동력을 잃게 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서는 안된다. 정부 내에서 부문별 사회정책의 필요성과 재정에 대한 토론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합의된 상태에서 정책을 발표하고 추진해야 한다.

우리처럼 정치적·사회적 합의의 메커니즘이 전무한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결과를 좌우하는 경우가 많다. 모처럼 5일간의 휴가를 시작한 문재인 대통령이 현명한 결론을 가지고 업무에 복귀하길 기대한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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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여성들은 왜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죠?” 한 30대 여성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가 웃으며 답했다. “잘생겼잖아요. 신사적이고요.” 대통령에 대한 지지 여부를 외모나 매너로 결정하다니,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헛짚었다. 이 여성은 10년 이상 시민들의 다양한 정치 참여를 이끌어온 현직 활동가이다. 정치의식이라면 평균적인 한국인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그는 꾸미지 않은 대답을 들려주었을 뿐이다.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가 바뀌고 있다. 일시적인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간 지속될 각인인지 아직은 분명치 않으나, 외국 여러 나라의  사례들을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로널드 잉글하트가 1977년에 이미 ‘조용한 혁명(silent revolution)’이라고 불렀던, 근본적인 가치관 변화의 한 부분이다. 경제성장은 사회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다. 일자리의 구조가 달라지고, 문화가 바뀌고, 여성의 경제활동이 늘어나고, 가족의 구조가 변하고, 성역할의 고정관념이 사라진다. 이 변화는 크게 보아서는 물질주의 가치관에서 탈물질주의 가치관으로의 변화이다. 안보, 성장, 국가를 가장 중시하는 가치관에서 인권, 자유, 개인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앞의 것이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라면 뒤의 것은 충분조건이다. 앞의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 도입을 위한 환경요건이라면 뒤의 것은 민주주의 공고화의 미시적 기반이다. 자기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자라나는 세대를 배불리 먹이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시작되기조차 어렵다. 그러니 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필요조건이자 환경요건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은 모든 사람이 인권과 자유를 누리고 행복하게 살고자 함이다. 그러니 탈물질주의는 민주주의의 충분조건이자 미시적 기반이다.

대통령 지지율이 꾸준히 높지만, 그중에서도 성별·세대별로 높은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20대 여성과 40대 남성이다. 정부의 각종 개혁·평화 정책에 대한 지지도 똑같은 패턴을 보인다. 지난 칼럼(‘젠더 정치의 등장’ 3월13일자)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20대 내부에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현상)은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근접한다. 여성과 남성의 정치적 견해차가 대구·경북과 광주·전라만큼 커졌다는 말이다.

앞에 소개한 대화를 보고 너무 정치의식이 없는 것 아니냐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남성 위주의 정치의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가능성이 크다. 40대 남성은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이 한 몸 기꺼이 던진다는 생각도 한때는 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문 대통령은 도도하게 흘러온 민주화의 역사를 마침내 완성시키는 남성적 거시담론의 영웅일 수 있다. 반면 20대 여성은 ‘신사적’이라는 말 속에 드러나듯이 여성을 포함한 모든 소수자의 권리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있는 듯한 문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열광할 수 있다.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외모나 매너 때문에 지지하는 ‘생각 없는’ 지지가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정치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민주주의이다. 20대 여성들이 앞장서서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반’이 중요하다고 외치고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대통령 지지율은 ‘몇 퍼센트’라는 하나의 숫자로 나타나지만, 여성의 문재인과 남성의 문재인은 다르다.

한국보다 20~30년 앞서서 정치적 젠더 갭을 경험했던 외국의 사례들을 보자. 전통적으로는 여성의 정치활동 참여가 남성보다 낮고 더 보수적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일정 단계에 이르면 젠더 간 정치적 견해차가 없어지는 ‘해체(dealignment)’ 현상이 나타나고, 그 단계를 지나면 여성이 남성보다 진보적으로 변하는 ‘재정렬(realignment)’이 이루어진다. 적어도 선진산업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나라들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나타나는 것이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 임신과 출산에 대한 자기결정권, 유리천장의 완전한 해체 요구이다. 한국만이 세계사의 유일한 예외가 되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는 한국 정치의 균열구조를 영원히 바꾸어놓을 것이다.

안보와 성장에만 의존해 살아온 보수야당이 이런 변화에 맞춰 혁신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가치가 젊은 여성들이 요구하는 가치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상태를 바꾸지 못하면 끝장이다. 외국의 경험을 보면, 미시적 차원에서 한번 진보화한 여성들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여당에는 운동권의 거대담론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를 미시적인 일상의 ‘습관’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과제가 있다. 한국 정치에서 ‘남자의 문재인’뿐 아니라 ‘여자의 문재인’이 정당한 대접을 받게 해주지 못한다면 지금의 ‘여당(與黨) 지지’는 ‘여당(女黨) 창당’으로 바뀔 수도 있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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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정상회담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필자는 두 개의 원칙, 즉 게임전략과 협상 네트워크에 입각해서 지난 몇 달간의 진전을 지켜봐왔다. 주어진 입장에서 최선의 결과를 얻어내려는 전략을 게임전략, 주어진 입지 자체를 바꾸려는 전략을 네트워크전략이라고 한다. 먼저 게임전략을 보자. 트럼프는 게임이론의 교과서와 같이 행동해왔고, 따라서 대단히 예측 가능한 사람이다. 물론 그는 스스로 했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뒤집어왔다는 점에서 예측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그가 한 말의 ‘내용’에 집중했을 때의 이야기이고, 그가 왜 말을 뒤집는지 ‘의사결정의 원칙’에 집중해보면 그는 매우 예측 가능하다. 그는 이미 20년 전에 언론 인터뷰를 통해 지금 구사하고 있는 대북 전략을 설명한 바 있다. 첫째, 북핵 대응은 빠를수록 좋다. 둘째, 처음에는 대화로 시작한다. 셋째, 선제타격의 가능성을 닫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북한이 두려워하는 것은 선제타격뿐이므로. 넷째, 미국이 단호하게 나가면 북한은 대화에 응할 것이다. 그는 20년째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이 1일(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에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대남담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왼쪽)이 가져온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보이며 웃고 있다. 친서를 담은 봉투가 트럼프 대통령의 아랫배를 거의 가릴 정도로 크다. 워싱턴 _ 연합뉴스

대화 시작과 동시에 존 볼턴과 같은 초강경 네오콘을 국가안보보좌관에 앉힌 것은 ‘협박을 믿게 만드는 전략(credible threat)’이다. 대표적 선제타격론자이자 ‘전쟁에 반대한 적이 한번도 없는 인물’이라는 이야기까지 듣는 볼턴이 트럼프의 곁에 있다면 그의 협박을 북한이 흘려듣기는 어렵게 된다. 김정은도 북핵의 위기감을 최고조로 높이고 핵보유국임을 세계에 천명함으로써 몸값을 최대치로 끌어올린 직후 협상에 나서는 것은 담대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그의 한계는 만약 협상이 어그러져 미국을 상대로 서로가 목숨을 건 폭주에 나설 경우 결국 막판에 방향을 틀어야 할 것은 북한이라는 데에 있다. 동원할 수 있는 위협의 한계 때문에 김정은은 한 수 접을 수밖에 없었다. 게임전략에서는 트럼프의 판정승이다.

존 볼턴 임명이 발표된 지 나흘 후 김정은은 전격적으로 시진핑을 방문했다. 게임전략에서 네트워크전략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기존의 남·북·미 협상 네트워크는 트럼프에게 유리했다. 한·미가 한쪽에 있고 북한은 남한에 의존해야 하는 구도이다. 김정은은 중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이 틀을 본인에게 유리하게 바꾸어버렸다. 북·중이 오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관계를 회복하고 협상 네트워크가 아시아를 중심으로 재편된다면 미국은 졸지에 태평양 건너편의 관찰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게임전략에서의 불리함을 네트워크전략으로 만회한 김정은은 남북정상회담에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일 수 있었고, 회담 직후 다시 시진핑을 찾아가 협상 네트워크에서의 북·중 고리를 더욱 다졌다. 

일이 여기까지 진행되자 트럼프는 회담 취소를 선언하고 판을 깨버린다. 결국 김정은은 굴욕적이지만 대화를 원한다는 메시지를 낼 수밖에 없었고, 트럼프는 즉시 이 메시지를 받아들인다. 상대가 배신하면 즉시 처벌하고, 상대가 협동으로 복귀하면 즉시 용서하라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Tit for Tat)’ 전략의 가르침 그대로이다. 

중국이 아직 배후에 버티고 있으니 트럼프의 게임전략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김정은이 잠시 점유했던 네트워크전략의 우위를 상당부분 무력화시켰다.

이렇듯 지금까지 트럼프와 김정은의 선택은 게임전략과 네트워크전략 두 가지로 대부분 설명된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싱가포르 회담은 열릴까. 김정은은 크게 모욕당하지 않는 한 판을 깰 인센티브가 없다. 트럼프는 최대한의 압박이란 단어까지 거둬들이면서 김정은을 관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중국이나 러시아가 갑자기 협상 네트워크의 지형을 바꾸지만 않는다면 판을 깨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가능성이 높다. 

일본은 상당한 정도의 경제적 보상과 같은 입장료를 내지 않는 한 판에 끼어들기 어려울 것이다. 김정은은 애써 조금이나마 바꿔놓은 협상 네트워크에 미국의 또 다른 우방 일본이 끼어들어 판세를 바꾸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트럼프도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 문재인 대통령은 싱가포르로 날아갈까. 아마도 갈 것이다. 

하지만 일각의 예상처럼 비핵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종전선언으로 체면을 살리는 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트럼프의 게임전략에 크게 어긋난다. 비핵화의 확실한 약속을 받되 한 번의 회담으로 완성될 수 없기 때문에 종전선언이 의미 있는 중간매듭의 역할을 하는 것이 더 그의 전략에 잘 부합한다. 협상결과를 크게 ‘타결’과 ‘결렬’로 나눈다면 김정은은 완전한 타결에서 일부 벗어날 수는 있겠지만 결렬 쪽에 가까이 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미국 중간선거와 노벨상 가능성 등을 생각하면 11월 이후 트럼프의 협상의지는 크게 낮아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김정은이 치러야 할 대가는 훨씬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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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는 부쩍부쩍 다가오는데 변변한 후보조차 내지 못하고 있는 자유한국당 수뇌부는 그러거나 말거나 연일 보수결집에 여념이 없다. 후보라도 제대로 내놓고 보수 유권자를 결집한다면 이해라도 되지만, 변변한 후보도 없는데 결집만 열심히 하니 진짜 목적은 지방선거가 아니라 딴  데 있는 것 아니냐는 추측도 무성하다.

이러한 결집의 방법은 애처롭게도 하나같이 철 지난 레퍼토리들뿐이다. 문재인 정부가 보수세력이나 특정 지역을 말려 죽이려고 한다는 유언비어성 협박,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종북좌파 소굴이라는 색깔론. 그중에서도 백미는 지난 3월 말에 발족한 ‘사회주의 개헌저지 투쟁위원회’이다. 사회주의 개헌이라니, 안될 일 아니겠는가. 반드시 저지하기 위해 투쟁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이 위원회는 아직까지 특별한 활동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그리 급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사회주의 개헌을 저지하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시사 2판4판]마이너스의 손 (출처:경향신문DB)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 추억. 요즘도 어른들이 그런 짓궂은 장난을 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예전에 걸핏하면 어린아이들 울음보를 터뜨리던 난감한 질문은 이것이었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코웃음치고 넘어가면 될 어리석은 질문에 순진한 아이들은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결국은 울음보를 터뜨렸고, 어른들은 손뼉을 치며 박장대소했다. 어차피 그 질문에 답을 듣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으므로. 재미만 있으면 되니까.

다시 개헌 이야기로 돌아오자. 필자도 가급적 대통령이 개헌 발의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국회가 발의해야 하는데, 국회는 개헌특위만 만들어놓고 1년이 넘는 기간 동안 실질적으로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더구나 개헌은 오랫동안 대다수 국민과 시민사회, 전문가들이 그 필요성을 지적해왔고, 지난 대선에서 모든 주요 후보들이 공통적으로 약속한 사항이기도 했다. 그런데 국회는 아무것도 안 했다. 그러면 대통령이라도 최소한 시도라도 할 수밖에 없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문 대통령은 새 헌법이 ‘국민헌법’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국민헌법자문특위를 설치했고, 특위는 국민들의 의견을 방대하게 청취했다. 홈페이지 방문 및 의견 제시 52만, 안건 제시 1127건, 16개 시·도 지역순회 간담회, 유관 학계와 시민사회 의견 수렴, 2000명 규모의 전 국민 여론조사, 전국 4대 권역에서 800명이 참여한 숙의형 시민토론회, 160명이 참여한 청소년·청년 토론회가 그것이다.

특히 주목할 것은 숙의형 시민토론회이다. 길 가는 시민을 붙잡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자. 대통령중심제, 내각제, 이원집정부제 중 무엇을 선호하십니까? 세 가지 대표적 정부 형태의 특징과 장단점이 무엇이고 그것이 한국에 적용되었을 때 어떤 결과를 낳을지 어느 정도 예상하면서 답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묻는 꼴이다. 숙의형 시민토론회에서는 개헌의 주요 쟁점별로 상반된 의견을 가진 전문가들이 나서서 자신이 지지하는 개헌의 방향을 말하고 그 근거를 설명했다. 시민들은 그 설명을 듣고 스스로 토론했으며, 토론이 모두 끝난 후에 의제별로 자신들의 의견을 결정했다. 생각의 근거를 가지게 된 시민들은 정치인들과는 달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옳다면 기꺼이 바꿨다. 대표적인 것이 대통령 개헌안 발의 후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총리의 국회 선출 여부이다. 토론 이전에는 국회 선출 반대가 48.3%(찬성은 40.2%)였는데, 토론 이후에는 반대가 68.3%(찬성은 24.1%)로 달라졌다. 개헌안 마련에 적극 참여한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토론회에 만족했다는 응답은 권역별로 97~99%였고, 이런 기회가 마련된다면 또 참여하고 싶다는 응답도 권역별로 모두 95%를 넘었다.

이렇게 마련된 개헌안을 자유한국당은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부르고 있다. 며칠 전 홍준표 대표가 박근혜 피고인을 ‘공주’라고 부른 것을 보니 그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왕’으로 대접하는 모양이다. 막상 그 왕께서는 순전히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해 총칼로 개헌을 단행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은 아무것도 안 해놓고, 헌정사상 최초로 방대한 국민이 참여하고, 그렇게 참여한 국민의 97% 이상이 만족한 토론을 거쳐 만들어진 헌법안을 ‘사회주의 개헌’이라고 부른다. 대한민국 국민을, 특히 보수성향 국민의 수준을 뭘로 보기에 이런 말장난을 할 용기가 나는 걸까. 어쨌든 자유한국당이 정색하고 대한민국 국민에게 준엄한 질문을 던진다.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물론 예전 어른들처럼, 대답이 중요한 건 아닐 거다. 나라야 어찌 되건, 그들은 살길만 찾으면 되니까.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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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은 용기 있는 소수의 고발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 넓은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소수의 고발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규칙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근거는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 현상)이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는 지역과 이념이었고, 불과 10여년 전부터 세대가 또 하나의 변수로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뚜렷한 젠더 갭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자. 올림픽 직전에 대통령 지지율이 유의미하게 낮아졌고, 세간에서는 가상통화 규제와 남북 단일팀 구성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특사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여론은 또다시 요동쳤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1월17일에 있었던 리얼미터 조사에서 남북 모두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해야 한다는 응답은 20대에서 38.9%로, 60대(27.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그러나 한 달 후인 2월20~22일 실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한반도기 공동 입장이 잘된 일이라는 응답은 20대에서 73%로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같은 응답자에 대한 반복조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20대 여론에 일대 반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있다. 20대 평균은 73%이지만, 남성 20대는 62%로 여전히 60대(5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지지를 보이는 반면 여성 20대는 85%로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20대 내부에서 성별 차이는 무려 23%포인트에 달한다. 20대 여론의 반전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20대 여성 여론의 반전이었던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광주·전라의 지지율은 85%였고 대구·경북의 지지율은 57%였으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간주되곤 하는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가 28%포인트였다. 적어도 20대 내부에서 젠더 갭은 이제 지역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같은 조사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도 20대 남성은 43%만 잘된 일이라고 평가해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낮은 반면 20대 여성은 59%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냈다. 이 사안에 대해 광주·전라와 대구·경북의 차이가 21%포인트였는데, 20대 내부의 젠더 갭은 16%포인트로 역시 만만치 않은 파급력을 보여줬다.

20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서 성별 차이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갤럽조사 중 한반도기 공동입장에 대해서는 세대별로 성별 분리 효과가 적게는 3%포인트에서 많게는 7%포인트의 차이를 보이는데, 20대의 23%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적다. 그나마 50대 이상에서는 성별 견해의 순위가 역전되어 여성보다 남성의 찬성률이 더 높게 나타난다.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는 젠더 갭 효과가 적게는 1%포인트에서 많게는 5%포인트의 차이를 보여서 역시 20대의 16%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이번에도 역시 성별 견해의 순위가 50대 이상에서는 역전되어 젊은층에서는 단일팀 구성에 대한 지지가 여성이 더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남성이 더 높다.

다소 길게 수치를 인용했지만, 일관된 발견들을 요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 기성세대 여성들은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남성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20대 여성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둘째, 정치적 견해차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에 주목하면, 기성세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보수적이고 20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다. 셋째, 20대에서의 젠더 갭 효과는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불려왔던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크다. 20대 유권자의 수는 약 676만명인데,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한반도기 공동입장의 경우처럼 23%포인트의 차이를 보인다면 얼추 계산해도 100만표 정도는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미국 정치에서 유권자의 젠더 갭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90년대부터다. 빌 클린턴은 1996년 대선에서 여성 표의 54%를, 그리고 남성 표의 43%를 가져갔다. 그는 공화당 후보였던 밥 돌에 비해 800만표를 앞섰는데, 여성 표에서 앞선 것이 1100만표였다. 그 이후 대부분의 주요 정책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은 20%포인트 내외의 견해차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 젠더 정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정치세력들은 미투 고발을 지방선거용으로 소비하려 하기보다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 시급하고도 진지하게 장기 대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할 정치적 이유도 충분하다. 100만표가 걸려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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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이 올해 들어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였다. 여론조사 기관에 따라 최저점 기준 60% 미만으로 떨어진 곳도 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지만, 대체로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긍정평가는 약 10%포인트 줄었고 부정평가는 약 10%포인트 늘었다는 것은 공통적이다. 아직도 역대 정부에 비하면 높은 편이지만, 워낙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온 까닭에 그 배경에 대한 관심이 높다.

언론의 진단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비트코인 등 가상통화 규제를 둘러싼 정책 혼선으로 인해 2030세대가 지지를 철회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불거진 북한 관련 이슈들이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데이터를 보면 가상통화와 관련한 해석은 어느 정도 과장되었거나 착시현상이라 보인다. 가장 큰 반발을 불러왔던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강경 대응 발표가 1월11일이었는데, 그 직후인 1월 셋째주 조사에서 비교적 큰 폭으로 지지율이 빠지기는 했지만(갤럽 기준 6%포인트. 이하 같은 기관 자료) 2030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많이 빠진 것은 아니었고,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모든 세대에서 골고루 지지율이 하락했다. 2030세대는 이 기간에 6~7%포인트 하락했다가 2월 들어서는 약간의 보합세를 보이고 있다.

이 기간에 오히려 주목할 것은 13%포인트 하락 후(58%→45%) 보합세도 거의 없는 대구·경북, 26%포인트 하락 후(67%→41%) 미세하게나마 추가 하락하고 있는 바른정당 지지층, 10%포인트 하락 후(52%→42%) 추가 하락을 이어가고 있는 보수층 등이다.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해 부정평가를 내린 응답자들이 제시한 이유를 보아도 가상통화 규제 때문이라는 응답은 고작 1%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다른 해석은 역시 북한 관련 이슈이다. 가장 큰 논란이었던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것이 1월17일, 북한 측 사전 점검단이 방남한 것이 1월21일, 마식령 스키장 남북 공동훈련이 1월31일이었다. 따라서 북한 관련 이슈는 1월 둘째 주에서 넷째 주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그 후 2월 첫 주 정도까지 여파가 미쳤을 것이다.

1월 셋째 주에서 넷째 주로 가면서 전체 지지율은 67%에서 64%로 3%포인트 하락했는데, 같은 기간 60대 이상 지지율은 6%포인트(50%→44%), 대전·세종·충청 지지율은 10%포인트(66%→56%), 자유한국당 지지층 9%포인트(25%→16%), 경제적 중하층 15%포인트(76%→61%), 바른정당 지지층 전주 21%포인트에 이어 5%포인트 추가 하락(41%→36%), 보수층 전주 10%포인트에 이어 5%포인트 추가 하락(42%→37%), 중도층은 7%포인트(75%→68%) 하락했다.

실제로 1월 넷째 주에 국정수행 부정평가를 한 응답자들이 제시한 이유를 보면 단일팀 등 북한 관련 이유가 압도적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보면 심상치 않은 지지율 변동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역시 북한이다.

70%대의 지지율은 이념적으로는 중도보수, 지지정당별로는 자유한국당을 제외한 다른 야당 지지층, 지역적으로는 대구·경북을 제외한 다른 지역의 고른 지지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지지율이 크게 빠진 집단을 보면 거의 정확하게 이 세 집단에 해당한다. 문재인 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촛불이 만든 정부임을 강조해왔고, 촛불민심을 떠안고 간다고 설명해왔다. 그런데 70%대 지지율을 가능하게 한 촛불민심에는 이 세 집단이 중요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랬던 세 집단이 떠나기 시작했고, 그들은 촛불광장의 ‘계약’이 깨졌다고 느끼는 것 같다.

데이터를 보면 그렇게 느끼는 공통된 이유는 ‘북한’, 다른 말로 ‘안보’이다. 그들은 ‘안보는 보수’라는 암묵적 계약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계약이 있었는지는 애매하다. 문 대통령의 대선공약집에는 한반도 평화가 가장 중요한 기조로 되어 있지만 동시에 북한의 ‘완전한 핵 폐기’도 약속하고 있고, 대선 기간 중 문 대통령은 안보와 관련해서 보수층을 안심시키는 발언도 여러 차례 했다. 그러니 그들이 암묵적 계약이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존재하는 것이다.

평창 이후 이 질문은 더 첨예해질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이라는 특수 상황이 끝나고 나면 미국과 국제사회의 강경 제재 기조는 더욱 첨예해질 것이고, 이미 방북 초청장을 보낸 북한은 최대한 남한을 전면에 내세우려 할 것이다. 참으로 어려운 선택이 될 텐데, 선택이 늦어질수록 중도보수는 이탈할 것이다. 적어도 중도보수를 포용하지 않고는 국정동력을 유지하기 어렵다. 안보와 성장은 보수의 어젠다이다. 두 영역에서 무엇을 합의할 수 있고 무엇은 양보할 수 없는지, 무엇은 가능하고 무엇은 불가능한지, 합의를 한다면 누구와 어떻게 합의할지 결정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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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유학 시절의 일이다. 바로 인접 학과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유명한 교수가 가르치고 있었다. 그분의 강의가 어떤지 궁금해져서 그 학과 학생에게 물었다. “그 과목은 제도(institution)지.” 간결한 대답이 돌아왔다. 거기에는 많은 뜻이 응축되어 있었다. 그 학과 학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들어야 하는 과목, 그 과목이 필수라면 다른 과목은 선택, 그 과목에서 가르치는 이론이 토대라면 다른 이론은 응용, 이런 것들 말이다. 제도란 그런 것이다.

지난 2주간 경향신문 지면에는 흥미로운 토론이 이어졌다. 시작은 1월4일자에 실린 정치 컨설턴트 박성민 대표의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라는 글이었다. 역사적으로 항상 주류였던 한국의 보수우위 시대가 지나가고 정당으로 치면 ‘민주당 대 반민주당’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이다.

그는 한국의 유권자 지형을 진보부터 보수까지 30 대 20 대 30 대 20의 네 집단으로 구분하는데, 보수정당은 선거 때마다 왼쪽에서부터 시작해 조금씩 유권자 지지를 빼앗기다가 마침내 탄핵과 2017년 대선에서는 중도보수라고 할 세 번째 30%마저 등을 돌렸다는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유리한 정치적 입지,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통합할 경우 세 번째 30%의 대안이 될 가능성, 그리고 자유한국당 내부의 폐쇄성을 보면 가까운 시일 안에 보수의 시대를 다시 보게 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며칠 후 정용인 기자는 “386세대의 주류 등극으로 한국 민주화는 완성됐을까”라는 기사를 내놓았다. 그도 역시 위에 언급한 박 대표의 글을 언급하면서 시작하는데, 그의 문제제기는 단순하고 그래서 힘이 있다. 국정농단 사태가 드러나기 이전까지 우리는 오랫동안 보수세력에만 유리하게 만들어진 ‘기울어진 운동장’을 걱정해왔고, 보수의 장기집권을 우려해왔다.

그런데 불과 1~2년 만에 보수가 궤멸하고 한국의 주인이 바뀌고 있다는 분석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설명이 필요하다. 그는 구체적으로 ‘그 시절’을 경험한 독특한 세대적 연대를 가진 386세대가 주류로 등극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이는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며, 정 기자가 이전부터 주장해오던 ‘장기 386시대’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과연 한국의 주인은 바뀌고 장기 386시대는 현실이 될까? 핵심은 문재인이라는 개인을 빼놓고 생각했을 때 앞선 모든 전망들이 그대로 성립하느냐에 달렸다. 임기가 끝나고 문 대통령이 퇴장했을 때, 45%를 넘나드는 지금의 민주당 지지율은 유지될까? 정권의 핵심 포스트를 채운 386은 문재인이라는 개인이 없이도 시대정신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 질문들에 쉽게 ‘그렇다’고 답하려 한다면, 불과 얼마 전까지 세상이 바뀌기 이전에는 왜 그리도 ‘기울어진 운동장’과 ‘보수의 장기 집권’을 걱정했었는지 함께 답해야 한다.

보수의 자멸이나 386의 대안이 될 세대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아니다. 세상의 변화가 제도로 남아야 한다. 영원할 것 같던 보수집권도 9년 만에 끝났다. 민주당 정부가 5년을 갈지, 10년을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제도를 어떻게 만들어놓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다. 문재인 없이도 더 좋은 세상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으려면 좋은 변화들을 제도로 만드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인적 청산도 중요하겠지만, 케인스의 말처럼 장기적으로는 우리 모두는 죽고 없을 것이다. 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그 사회의 움직일 수 없는 ‘상수’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에 성공한다면 한국의 주인은 바뀔 것이고 386은 역사를 바꾼 사람들로 기록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한때의 출세주의자로 끝나버릴 수도 있다.

대표적인 예가 개헌, 선거법 개정, 국정원·검찰 개혁 같은 것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장 딱한 것은 자유한국당이다. 의석 116석에 지지율 20% 미만. 유일하게 가진 것이라곤 비토권밖에 없다. 그 비토권이 유지되는 기간은 아무리 길게 잡아도 다음 총선까지 2년 남짓이다. 6월 지방선거에서 대패하기라도 한다면 더 일찍 비토권을 잃어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과 비슷한 121석을 가지고 비토권에 의지해 버텨냈던 17대 국회의 추억은 빨리 잊을수록 좋다. 지금의 자유한국당에는 박근혜가 없고, 지금의 자유한국당은 그 당시 한나라당보다 훨씬 폐쇄적이다. 건강한 보수정당의 등장을 바라는 입장에서, 새로운 제도를 써내려가는 데에 적극 참여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 훨씬 나은 전략이라고 충고하고 싶다. 제도를 만드는 것은 첨예한 전쟁이다. 비토만 하다가 새로운 제도가 정해지고 나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주류로 복귀하지 못할 수도 있다. 386에나 보수정치세력에나, 제도화는 전쟁이다.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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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보면 개헌의 역사는 적나라한 권력욕의 역사였다. 이 과정에서 민주공화국의 시민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제헌헌법부터가 권력투쟁의 산물로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가 뒤섞인 불안정한 헌법으로 탄생했다. 1952년의 이른바 ‘발췌개헌’은 정부안과 야당안에서 이곳저곳 발췌하고, 군인들이 의사당을 포위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은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길을 열어주기 위해 국회의원을 소수점으로 잘라 사사오입 해버리는 기발한 창의력을 선보였다. 4·19혁명 직후에 이루어진 3차 개헌은 그나마 최초의 합법적 절차에 따른 개헌이었으나, 과도정부 수립 후 한 달 만에 개헌안이 제출되었으니 별다른 숙고와 합의가 이루어지긴 어려웠을 것이다. 3·15 부정선거와 4·19를 둘러싼 ‘민주반역자’ 처벌 요구에 따라 이루어진 4차 개헌은 1~2주 만에 개헌안 제출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5·16 군사정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주도한 5차 개헌은 그나마 3개월 정도의 준비기간을 거쳤는데, 쿠데타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모두 장악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박정희의 3선 길을 열어준 3선 개헌은 야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점거한 상태에서 여당인 공화당 의원들이 몰래 장소를 옮겨 통과시켰고, 야당은 개헌안 가결 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신헌법으로의 개정은 박정희 종신 집권을 위한 것이었고, 제5공화국 헌법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의 총칼 아래 만들어졌다. 절차적 민주주의의 복원을 가능케 한 1987년 헌법도 사실은 6·10 민주항쟁의 거대한 파도 속에서 필사적으로 정권을 잡기 위한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의 6·29 선언으로 그 물꼬가 트였다.

그로부터 30년. 이제 또 한 번의 개헌이 논의되고 있다. 헌법은 이 나라를 민주공화국이라고 선언하고 있지만, 매번 개헌은 그 민주공화국의 시민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만들어지고 고쳐지다 보니 시민들은 헌법에 무지하고 무관심하다. 시민들이 헌법을 잘 알고, 헌법에 애정을 가지고, 대통령을 포함해 누구라도 반헌법적 행위를 하는 자들을 우리 공동체의 토대를 갉아먹는 공공의 적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면 87년 헌법하에서도 훨씬 더 좋은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박근혜 같은 대통령을 탄생시킨 것도 87년 헌법의 한계이지만,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며 국가의 근본 토대를 질문하기 시작하자 바로 그 박근혜 탄핵을 가능하게 한 것도 87년 헌법이었음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번 개헌은 다를까. 지금대로라면 무력 동원이 없을 뿐, 권력 나누기를 위한 또 한 번의 정치공학으로 끝날 공산이 높아 보인다. 국회 개헌특위는 정치적 유불리와 다음 정권 창출을 위한 눈치보기만 하느라 1년 세월을 허송했지만 아직 아무것도 합의된 것이 없다. 선호하는 권력구조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가 이따금씩 발표되는데, 각각의 정부형태가 우리에게 적용되었을 때 어떤 장단점을 가질지 정확하게 알고 응답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여론’조사가 아니라 ‘느낌’조사라고 보는 것이 맞다.

시민 없이 정파의 이익을 위해 개헌하고, 그래서 시민은 헌법에 관심도 애정도 없고, 그래서 헌법은 구석에 처박힌 채 최소한의 기능밖에 하지 못하는 개헌 잔혹사를 또 반복할 것인가. 핵심은 학습, 숙의, 그리고 수용이다. 개헌을 계기로 권력구조뿐 아니라 지방분권과 기본권 등 주요 쟁점을 시민들이 광범위하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학습을 통해 각각의 장단점을 알고 나면 무엇을 우리 사회의 근간으로 삼을 것인지 숙의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렇게 학습하고 숙의해야만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헌법이 설사 내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을 수용하고 헌법에 애정을 가지게 된다. 시민들이 헌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헌법은 우리의 일상 속에 살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국민투표를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국회의결과 국민투표에 필요한 날짜를 감안할 때 대체로 내년 2월 말까지는 개헌안이 만들어져야 한다. 학습, 숙의, 수용을 하기에는 턱없이 촉박한 시간이다. 그렇더라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최소한의 사회적 합의조차 없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멈춰진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개헌이야말로 그러한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낼 절호의 기회이다. 일각에서는 개헌이 국회의 고유권한이라는 주장도 들리는데, 개헌안을 만드는 과정에 시민을 배제하라는 조항은 헌법 어디에도 없다. 필요하다면 지방선거 이후로 넘기는 안도 배제할 수는 없다.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는 ‘랜덤 개헌’보다는 어렵더라도 ‘뒤늦은 개헌’이 나을 것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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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1주년을 맞이했다. 돌이켜보면 촛불은 퇴행적 수구보수에 볼모로 잡힌 대한민국을 역사의 진공상태에서 구해낸 일대 사건이었다. 이명박 정부 5년이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정체의 시간이었다면 박근혜 정부 4년은 역사를 뒤로 돌리는 퇴행의 시간이었다. 그러는 사이 골든타임은 속절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촛불은 이 기나긴 정체와 퇴행을 끝내고 이 나라가 적어도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되찾았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를 가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현 정부는 촛불이 탄생시킨 정부임을 강조해왔고, 요즘은 ‘촛불혁명’이라는 단어도 많이 쓰이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지난해 10월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서울 광화문광장 등 전국에서 이를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정치적인 수식어를 걷어내고 본다면 촛불은 과연 객관적으로 무엇이었을까. 1주년을 맞은 요즘 학계에서도 다양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있고, 필자도 그 한 귀퉁이를 얻어 분석을 해보았다. 주요한 결과는 이런 것들이다. 첫째, 작년 10월24일 태블릿 PC 보도와 충격적인 국정농단 사태의 전모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했을 때 시민들이 보인 즉각적인 반응은 ‘대의제 불신’이었다. 태블릿 PC 보도 40일 후에 이루어진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가장 두드러진 현상은 정당 이탈이었다. 국정농단의 책임을 져야 할 당시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가장 많이 이탈했지만, 야당 지지자들도 만만치 않은 수가 ‘지지정당 없음’으로 돌아섰다. 전체적으로 60%에 육박하는 유권자가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고 응답했다. 새누리당 불신이 가장 컸지만 다른 정당 불신도 만만치 않았고, 결국은 대의제 민주주의 불신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시민들이 직접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섰다.

둘째, 약 24주에 걸쳐 진행된 촛불집회를 일주일 단위로 쪼개서 매주 무엇이 핵심 이슈였는지 담론분석을 해보았다. 24주를 관통한 핵심단어는 딱 두 개. ‘분노’와 ‘탄핵’이었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촛불광장에서 환영받지 못했는데, 새누리당과 그 후신인 자유한국당은 말할 것도 없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민주당이나 심지어 문재인 대통령조차 초기에는 환영보다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문재인 당시 후보가 촛불광장에서 환영받게 된 것은 대선이 가까워지고 촛불정신을 대선 승리로 결론지어야 할 필요성이 가시화되면서였다. 이 또한 대의제 민주주의 불신의 또 다른 얼굴일 것이다.

셋째, 촛불집회에 참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해서 비교해보니 참여한 사람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유의미하게 높아졌고, 내 손으로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정치효능감도 유의미하게 높아졌다. 이것은 촛불이 가져온 긍정적인 학습효과라 할 것이다. 그런데 촛불의 경험에도 불구하고 달라지지 않은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정치 불신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중심 투표이다. 촛불에 참여한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불신은 여전했고, 촛불을 경험한 사람들도 정책, 정당, 국정운영 능력 등과 별 상관없는 투표를 했다는 점에서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과 차이가 없었다. 유일한 차이는 참여자들이 비참여자들보다 후보의 도덕성을 더 중요하게 고려했다는 점이다.

종합해보자. 촛불은 대한민국을 역사의 퇴행에서 구해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시에 정치에 대한 관심과 정치효능감을 높이는 긍정적 학습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촛불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개선하지 못했고 오히려 일정 부분 강화시킨 면도 있으며, 그 결과 투표는 후보자의 도덕성이라는 인물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국정농단을 계기로 그 극단적인 한계를 보여줬으니 촛불이라는 시민민주주의 혹은 직접민주주의가 그 자리를 대체하려는 사회적 힘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 말이다. 다른 한편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의 성공은 숙의민주주의가 한국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촛불 1주년을 맞는 교훈이 단순히 촛불의 정신을 계승하고 촛불의 명령을 떠안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다. 촛불은 위대했지만 완전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촛불의 힘으로 구시대의 적폐를 조금이나마 빨리 끝내고 등장한 문재인 정부는 대의제 민주주의, 직접민주주의, 숙의민주주의라는 세 개의 민주주의가 서로 조화롭게 소통하고 공생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시대를 만들어야 할 사명이 있다. 내년의 지방선거, 공약사항인 임기 내 개헌, 2020년의 총선이 모두 그 계기가 되어야 하고, 특히 시민들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다시 신뢰할 수 있고 인물이 아닌 정당과 정책을 보고 투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촛불을 혁명이라고 당당히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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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6·10민주항쟁 기념식과 지난달 미국 애틀랜틱 카운슬에서 주는 세계시민상 수상연설이 대표적이다. 기존의 ‘경제민주화’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이 두 가지가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지, 다르다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어리둥절할 수도 있다. 우선 경제민주화부터 정리해보자. 일반 국민들에게 경제민주화는 ‘을지로위원회’를 연상시키는 ‘갑의 횡포로부터 을을 지키는’ 것이거나 비정규직을 줄이는 양극화 해소쯤으로 받아들여진다. 학계의 논의는 소위 ‘경제민주화 조항’으로 알려진 헌법 119조 2항을 둘러싼 법학계의 일부 연구를 제외하면 매우 드문 편이다.

(출처:경향신문DB)

그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학자 시절인 2012년에 발표한 ‘경제민주화의 의미와 과제’라는 논문이다. 그가 새 정부의 첫 공정거래위원장으로 발탁되었을 뿐 아니라 비교적 안정적으로 직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김상조 위원장은 경제민주화의 실체적 내용을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울 뿐 아니라 설사 정의한다 하더라도 국내외 정치·경제 상황이 그 집행에 제동을 걸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경제민주화의 의미는 ‘방법론상의 최소 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최소 원칙이란 “거래관계의 현실에 기초하여 부담과 편익의 조화, 권한과 책임의 일치”를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진보성향의 학자로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본다면 놀랄 정도로 실용적이고 주류 경제학의 핵심 원칙에 부합한다.

그렇다면 경제민주주의는 무엇인가. 연설을 통해 드러나는 문 대통령의 인식은 경제민주주의를 기존의 경제민주화의 상위개념이자 하나의 사회모델로 보고 있는 듯하다. 6·10항쟁 기념식에서는 양극화가 경제적 불안요인을 넘어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런 의미의 경제민주주의는 미국의 다원주의 정치학자 로버트 달이 1985년 출간한 <경제민주주의 서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보수성향이 강한 다원주의 정치학의 태두임에도 불구하고 지나친 불평등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고 가장 우려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실제로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과 주요 국제기구들은 지나친 양극화가 ‘대의의 불평등’을 낳음으로써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반대파에 의해 지나치게 진보적이라는 비판을 받아온 문 대통령이 다원주의 정치학자의 이론을 꺼내든 것은 절묘한 카드이다. 같은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 일자리 창출,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제시했다. 경제민주주의를 사회적 대타협까지 포괄하는 하나의 사회모델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세계시민상 수상 연설에서도 “새로운 대한민국은 경제민주주의와 평화를 향해 나아갈 것”임을 분명히 하면서 1987년 민주화의 경험을 들어 “세계가 고민하는 저성장·양극화 문제에 대해서도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를 새롭게 쓴 대한민국이 해법을 제시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고 했다. 이것 역시 87년체제를 대체하는 새로운 체제의 밑그림으로 경제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독일의 번영을 가능케 한 사회적 시장경제는 각 정당은 물론 전 국민적 합의에 기초하고 있다. 한마디로 “시장의 효율을 최대한 활용하되 사회적으로 합의한 틀 안에서 활용한다”는 원칙이다. 효율은 최대한 살리되 그것을 위해 인간을 생존권과 사회권의 최저선 밑으로 내몰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때 극심한 노사갈등으로 몸살을 앓던 스웨덴의 반전 계기는 살트셰바덴 협약이었고, 그 후 노총이 제시한 성장모델인 렌-마이드너 모델은 수십년의 번영을 가져온 상생의 모델이었다.

우리도 사회적 합의의 틀 안에서 최대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데 합의할 수 있다면 다시 성장할 수 있다.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이 상충하지 않고 선순환할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해보면, 경제민주주의는 새로운 사회모델의 밑그림이고 경제민주화는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방법론적 원칙이며, 이 두 가지가 결합된 것이 새로운 대한민국의 시대정신이라고 읽힌다. 그렇다면 자연스레 내년 지방선거 때로 예상되는 개헌 국민투표가 떠오른다. 이 밑그림이 실현되려면 경제민주주의의 정신은 새 헌법 곳곳에 녹아들어가야 한다. 개헌이라면 늘 권력구조 이야기만 나오던 상황에서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선거제도 개편이나 경제민주주의가 함께 논의될 수 있다면 반길 일이다. 향후 수십년간 시민들의 삶을 규정할 개헌은 국회 개헌특위가 독점할 일은 아니다. 국회의 권한과 책임을 다하되 기존 체제의 한계에 속박되지 않는 시민적 숙의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공론화는 시민들이 충분한 정보를 학습하면서 숙의하고 합리적 결론에 도달하며 그 결론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음을 증명하지 않았던가.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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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연휴를 앞둔 시점에 정치보복 논란이 뜨겁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발언을 빌미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이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고, 김경수 의원을 필두로 더불어민주당이 강력 반발하자 정 의원은 “국가정보원이나 국가정보기관이 정치보복을 하지 말자는 것”이 적폐청산이라고 재반박했다. 김 의원은 노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관이고, 정 의원은 이명박 청와대의 정무수석이었다. 그러자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정치보복 프레임에 속지 않을 것”이라고 일갈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아들 건호씨가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을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하기 위해 25일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들어서고 있다.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다른 한편으로 리얼미터가 발표한 문재인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사상 최저치인 65.6%로 나타났는데, 이는 같은 기관의 조사에서 최고치였던 82.3%와 비교하면 16.7%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넉달 전 지지층의 5분의 1 정도가 빠져나간 셈인데, 주로 빠져나간 사람들은 5060세대, TK와 PK 일부, 주부·자영업자·무직자 등으로 박근혜와 자유한국당의 핵심 지지층이었던 사람들이다. 문재인 정부의 행보가 실제로 정치보복인지 아닌지를 떠나, 길고 긴 추석 연휴 동안 다섯 가구 중 한 가구의 명절 밥상머리에서는 적폐청산한다는 새 정부의 행태가 지난 정부와 다를 게 뭐가 있냐는 얘기들이 오갈 것이다.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이야기가 오가는 것 자체가 빈사상태의 자유한국당에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자유한국당은 도대체 무엇을 놓고 정치보복이라 주장하는 것일까. 대뜸 국정원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현재 수사가 진행 중인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을 말하는 것일 게다. 수사의 칼날이 박근혜 정부를 넘어 이명박 정부에까지 겨눠지자 지난 정부도 아니고 지지난 정부까지 ‘터는’ 것은 ‘치사’하다는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다. 필자 또한 정치보복에 적극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치보복일까? 과거에 당한 것을 되갚아주고 싶은 보복의 감정이 있느냐 없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수사하고 처벌해야 할 실제의 범죄행위가 있었느냐 없었느냐, 만약 있었다면 전직 대통령이라는 점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정치적 관용의 한계를 넘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가 핵심이다.

정치적 현안과 관련해서 온라인 빅데이터를 분석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박근혜가 당선된 2012년 18대 대선에서 얼마나 어마어마한 수의 ‘알바’가 활동했고 그들이 정치적 공론장을 얼마나 심각하게 망쳐놓았는지를. 그들의 활동이 선거결과를 뒤바꾸어 놓았는지 여부를 확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들이 부정적인 의미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이 나라의 정치적 공론장을 파괴했다는 점이다. 당시 분석가들은 온라인 빅데이터를 분석하며 계속해서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의 규모로 이렇게 체계적으로 활동하려면 잘 갖추어진 조직과 엄청난 예산이 필요할 텐데, 그걸 제공하는 자들은 누구일까? 짐작은 가지만 증거는 없었다. 이제야 조금씩 드러나는 진실을 보면 역시나 그 짐작이 맞았었다.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을 비롯한 국가기관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에 세금과 조직을 제공했고, 그들의 활동은 그 당시 청와대와 연결되어 있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국가를 수호해야 할 제1의 책임을 가진 대통령이, 청와대가, 국가기관이 국민의 세금을 가지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데 썼다면 헌법 위반이고, 선거법 위반이고, 국정원법 위반이다. 보복의 감정이 있건 없건 수사하고 처벌할 수밖에 없는 중대한 범죄행위이고, 정치적 관용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사안이다. 그러니 정치보복 운운은 도무지 어불성설이다.

그러면 이것은 정치보복이 아니라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정치보복 프레임에 말려들지 않으면’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아무리 정치보복이 아니라고 설명해도 여전히 빠져나간 5분의 1은 정치보복이라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 못하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이 제시한 이유들 중에 정치보복은 3~4위를 오가는 중요한 이유이다. 정치보복이 아닌데, 그 프레임에 빠지면 안된다는 것도 알고 있는데, 그래도 자꾸만 그 프레임에 발목을 잡힌다.

그 이유가 뭘까. 나는 문재인 정부가 ‘적폐청산’과 ‘촛불정신’ 이외의 다른 정치동력을 찾아내지 못한 데에 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두 가지가 지나간 시대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라면 비어있는 것은 다가오는 시대의 비전에 접근해가는 정치이다. 적폐청산이 새 시대의 비전에 접근해가는 불편부당한 과정임을 설명할 수 있을 때, 누구도 감히 정치보복을 입에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밀월의 시간은 끝나가고 성적표를 받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비전을 세우는 것도 아직 지지율이 높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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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참으로 난감한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는 정치적으로 넘어서는 안될 금기의 단어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트위터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감정과 비난을 쏟아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꾼다. 워싱턴 포스트는 “말 바꾸기의 제왕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기사를 썼고,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모욕한 사람들의 명단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거의 400명에 육박한다. 우리 입장에서 난처한 것은 바로 그 예측불허의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열쇠를 쥔 핵심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알려면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지난달 6일 오후(현지시간)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주함부르크 미국총영사관 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미·일 3국 정상만찬에 앞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그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어떤 정치적인 분석도 잘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컴퓨터에 그를 이해하라고 주문해보자. 이미 알파고는 이세돌과 커제를 이기지 않았던가. 컴퓨터라면 그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날마다 트위터에 수많은 말들을 남기고 있다. 하루 평균 다섯 개의 트윗인데, 이것은 충분한 데이터를 제공해준다. 분석방법은 토픽 모델링이라는 기계학습의 일종이다. 컴퓨터가 글을 읽고, 이런 단어들이 이 정도로 분포되어 있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추정하는 방식이다. 예상치 못한 글을 읽었을 때 사람은 경악하지만 컴퓨터는 냉정을 유지한다. 상식을 벗어나거나 일관성을 잃은 글을 읽었을 때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컴퓨터는 사람이 보지 못한 숨은 일관성을 찾아낸다.

자, 이제 분석을 시작해보자. 컴퓨터가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들을 읽었더니 거기에는 13개의 소주제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세 개의 대주제로 깔끔하게 묶여 있었다. 대주제1에는 미국 내 고용창출이 중심에 있는데, 이것을 둘러싸고 이슬람 테러리즘 비난, 국경 문제를 둘러싼 멕시코 비난, 북핵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북한 비난이 함께 놓여있다. 고용이 왜 외교 이슈들과 같이 묶여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고용은 미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기술 변동으로 가장 많이 일자리를 잃고 고립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우파로 돌아선 사람들이 바로 트럼프를 당선시켜 준 중하층 백인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자리를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때 이슬람, 멕시코, 중국, 북한은 일자리를 뺏어가거나 혹은 고용창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적어도 컴퓨터는 트럼프의 속마음에서 주요 외교 이슈들이 사실은 국내용이라고 읽어낸 셈이다.

대주제2는 민주당과 언론에 대한 비난이다. 특히 언론에 대한 비난이 압도적인데, 원래도 많았지만 러시아 스캔들 이후 폭증하고 있다. 대주제1에는 고용과 외국이라는, 별로 개연성 없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고용이 안 늘어나는게 정말 외국 때문인지, 언론은 이 부분에서 사실관계를 검증하려고 하기 때문에 접근을 허락해서는 안될 집단이다. 그가 언론을 비난할 때 주로 ‘가짜뉴스’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팩트 체크’를 허용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팩트 체크 당했다면 그 뉴스가 가짜라는 주장이다.

대주제3은 선거 승리 이후 대국민 감사, “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 같은 뻔한 지지자용 메시지들인데, 의외인 것은 아베 일본 총리가 여기에 함께 묶여있다는 점이다.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트럼프는 확실히 아베를 좋아한다. 걸핏하면 모욕을 주는 다른 나라 정상들과는 달리, 아베와 골프 친 이야기 같은 것들을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트럼프에게 아베는 자신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유일한 외국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와 일본의 통화정책에 대한 트럼프의 비난이 얼마나 거센 것이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아베에 대한 이러한 특별대우는 놀랍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베는 트럼프 당선 직후 제일 먼저 트럼프 타워에 달려갔고, 수시로 통화를 하며 그와 친분을 쌓고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실제로 일본은 정상 간 친목과 실무자 간 협상이라는 투 트랙 전략을 써왔고 상당 부분 성공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이다. 세계의 비난을 받는 미국 대통령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우에 따라 굴욕외교로 비칠 수 있음에도 아베는 그것을 했다. 한반도에 전쟁이 운위되고 FTA 재협상이 시동을 거는 시점이다. 적어도 컴퓨터는 트럼프의 외교정책이 상당부분 국내용일 수 있다고 읽어냈다. 아베처럼 정상 간 친목이 될지 아니면 트럼프의 “생큐, 삼성” 트윗처럼 미국 내 일자리 창출 압박을 결국은 들어주는 것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국내용 선물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외교정책에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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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 없는 전쟁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중단을 놓고 벌어지고 있는 공론화에 대한 여론전 말이다. 당사자인 한국수력원자력이나 관련 분야 전문가, 정치권,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언론도 매일같이 총력을 기울인 지원사격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이슈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글에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한, 그러나 대단히 중요한 두 가지 이슈를 짚어보려고 한다.

첫째, 애초에 공론화가 왜 필요해졌는지의 문제이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공론화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독일의 사례를 든다. 독일에서 공론화를 거쳐 탈핵 결정에 도달하기까지 25년이 걸렸는데, 한국에서는 3개월 만에 하겠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는 비판이다. 맞다. 우리도 차분하게 긴 시간을 가지고 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왜 그렇게 하지 못할까? 독일은 연정과 합의제 민주주의의 긴 전통을 가지고 있어서 ‘에너지 미래’라고 하는 하나의 의제를 25년간 논의하고 합의할 수 있었지만, 한국은 무조건적인 발목잡기와 승자독식의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장 하지 않으면 못한다. 한국 상황에서 긴 시간을 가지고 공론화하자는 것은 하지 말자는 이야기를 돌려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 제1야당 대표가 청와대 영수회담 참석조차 거부하는 상황에서 독일 사례를 들어 공론화를 비판하는 것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뜻일 뿐이다.

공론화는 그 기본 정신에 있어서 숙의 민주주의와 맞닿아 있다. 민주주의는 단순한 표 계산이 아니다. 시민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고, 독립적이고 불편부당한 숙의를 통해 제대로 된 합의에 도달하는 종류의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잘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공론화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한계를 보완하고, 한국과 같은 극한대결의 정치에 합의제 민주주의의 요소를 도입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촛불광장의 함성 속에서 제도권 정치와 시민 정치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공론화라는 장치를 통해 일정 부분 시민의 합의된 뜻을 제도권에 반영하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정치적 실험이기도 하다. 여야가 대립할 땐 대립하더라도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에서 힘을 합치고 있다면 공론화를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 무조건적인 비판은 민주주의가 나아질 기회를 박탈할 뿐이다. 독일의 탈핵결정을 주도한 원자력 윤리위원회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원자력 말고는) 대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열린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해치는 것이다. (중략) (대안을 찾는 것은) 시민들로 하여금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며, 이것은 시민사회를 강화시킨다.”

둘째, 투명성의 문제이다. 한수원을 비롯한 관련 기관들이 그동안 얼마나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투명하고 공정하게 활동해왔느냐는 질문이다. 원자력에 대한 외국의 공론조사 사례를 보면, 공론화 과정을 거친다고 해서 반드시 원전 선호도가 낮아지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투명성에 대한 요구가 크게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도 공론화 과정을 거쳐 어쩌면 신고리 5·6호기 건설을 계속하는 것으로 결론이 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이 경우에도 원자력을 둘러싼 불투명한 먹이사슬의 고리만 제거되더라도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고 혈세를 절약하는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한수원은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납품비리, 정치권 커넥션, 수뢰 의혹만 하더라도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려면 갈 길이 멀고도 멀다. 그럼에도 공론화 국면에서 친원전 보도를 하는 매체에 집중적인 광고비 지원을 했다는 사실이 녹색당의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드러났다. 후쿠시마 사태를 악화시킨 도쿄전력이 정확하게 같은 짓을 했었다.

한국의 에너지 미래와 관련된 활동을 조금이라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 있다. 탈핵을 하자는 것도 아니고, 에너지 미래와 관련한 토론회 정도만 한번 하자고 해도 그동안 한수원이나 주변 기관, 산업부 등 관련 부처는 아예 말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원전 증설로 갈 텐데 뭐하러 토론이니 뭐니 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드냐는 태도로 일관해 온 것이다. 에너지 미래에 대한 논의는 우리의 미래 먹거리를 준비하는 혁신산업이기도 한데, 아예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권이 바뀌고 탈핵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시작되니 자신들의 폐쇄적 태도에 대해서는 입을 닫고 있다. 공론화 과정이 급한 것이 그렇게 문제라면 시간이 자신들 편이었던 보수정권 9년 동안에는 왜 아무런 토론도, 협의도 하지 않았는가. 공론화를 통해 공사 계속이라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투명성만은 획기적으로 높이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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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을 두고 정부는 공론화위원회를 설치하고 공론조사를 실시하겠다고 한다. 지난 한 주 내내 상당수의 언론은 이 결정을 강력히 비판했다. 비판의 주요 논거 중 하나는 원자력과 같은 고도의 기술적 문제를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에게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여론조사 하나를 소개한다. 후쿠시마 원전사고 직후인 2011년 5월 일본 아사히신문은 7개국에서 원전 관련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일본, 한국, 독일, 미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이다. 그런데 뜻밖에 사고의 당사국인 일본보다 독일과 한국의 조사결과가 훨씬 눈길을 끌었다. 독일은 원전 안전성에 대해 큰 걱정은 안 하지만 압도적으로 줄이자는 의견이고, 한국은 많이 걱정되지만 그냥 두자는 의견이었다. 알려졌다시피 독일은 그 이후 탈핵결정에 이르렀고, 한국은 일단 신규원전 건설을 중단하는 것을 논의해보자는 단계이다.

2일 장맛비와 안개가 덮인 울산 울주군 서생면 신고리 원전 주변이 을씨년스럽다. 왼쪽 위는 내년에 준공될 원전 4호기, 오른쪽 골리앗 크레인이 있는 곳은 원전 5·6호기 건설현장, 아래는 5·6호기 부대시설 부지로 철거 중인 서생면 신리 부락이다. 연합뉴스

왜 한국인들은 몹시 걱정스럽지만 그냥 두자고 했을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비용 걱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전기요금 오를까 걱정부터 국가적으로는 원전산업의 경쟁력에 이르기까지. 다른 하나는 낮은 정치효능감이다. 걱정은 되지만 줄이자고 한들 그게 되겠어? 이런 생각 말이다. 비용의 문제는 생각보다 매우 복잡하다. 원자력의 비용을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어떤 종류의 신재생에너지냐에 따라, 지역별 특성에 따라, 신재생에너지에 축적된 투자 및 기술 수준에 따라 다르다. 신재생에너지라고 해서 무조건 청정에너지인 것만도 아니고, 안정성에 대한 질문도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처럼 이슈가 많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한쪽이 좋다고 무조건 믿기보다는 국가 백년대계를 위해 분석하고 합의해야 할 여지가 많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원자력이 무조건 싼 것도 아니고 무조건 위험한 것도 아니다. 분석과 합의가 필요하다.

걱정되지만 해봐야 안될 것 같으니 그냥 두자는 것은 우리의 운명을 소수의 정치인과 전문가, 관료와 이익집단의 손에 맡기자는 뜻이 된다. 에너지 공론화에 대한 비판은 이러한 태도를 부추긴다는 면에서 민주주의에 반하는 면이 있다. 기술적 전문성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기술은 사람과 조직이 운용한다. 1984년에 출판된 찰스 페로의 명저 <정상 사고(Normal Accidents)>는 바로 이 부분을 명쾌하게 지적한 책이다. 연구에 따르면 설사 기술은 입증됐다 하더라도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과 조직은 입증되지 않았다. 고도로 복잡한, 그리고 경우에 따라 파국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기술이 입증되지 않은 사람과 조직에 맡겨졌을 때 사고의 가능성은 상존하며 그런 종류의 사고들은 언젠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에서 ‘정상 사고’라고 부른다. 원전을 재검토하자는 주장이 자칫 수많은 노력의 산물인 원자력 기술을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원자력 전문가들이 느낄 수 있는 좌절감은 이해한다. 하지만 기술적 전문성이 인간과 조직의 한계까지 극복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기술이 안전하니 원전을 계속 늘려나가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일종의 월권행위에 해당한다. 기술적 전문성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요조건에 불과한 전문가주의에만 입각해서 에너지 정책을 결정할 수는 없다. 탄탄한 기술의 토대 위에 민주적 합의가 필요하다.

스탠퍼드대 제임스 피시킨 교수로부터 시작된 공론조사는 일반 여론조사와 달리 배심원단을 대상으로 찬반 양측이 서로의 근거를 제시하고 설득하며 그 과정을 대중과 공유한 끝에 충분한 정보를 가진 상태에서 합의에 도달한다. 기술적 전문성은 이 과정에서 충분히 제시할 수 있다. 잘만 이루어지면 숙의과정을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단점을 보완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덴마크, 미국, 호주, 그리스 등 여러 나라에서 이미 수십차례 활용해본 경험도 있다. 원자력을 찬성하는 쪽에서도 너무 겁먹을 필요가 없다. 에너지 정책을 둘러싼 공론조사의 외국 사례들을 보면 원자력에 대한 선호도는 별로 줄어들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투명성에 대한 요구와 최종 결정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이 크게 늘어난다. 한국적 상황에서는 꽉 막혀있는 정치체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단기적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최종적으로 원전을 늘리든, 줄이든 에너지 합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경험처럼 장기적이고 원활한 협치가 필요한데 여의도의 경색은 적어도 내년 지방선거까지는 그대로 갈 것이다. 사석에서는 야당 의원들도 현재의 정치체제하에서 악역을 할 수밖에 없는 입장을 안타까워하기도 한다. 협치의 바탕이 되는 개헌과 선거제도 개편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공론화의 경험은 민주주의를 고양시키고 국가가 작동하게 해주는 대안이 될 수도 있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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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추경이 발등의 불이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제일 앞자리에 일자리 정책이 있고, 그걸 뒷받침하려는 게 이번 추경이다. 그러나 야당이 호락호락 추경안을 통과시켜 줄 리는 만무하다. 특히 자유한국당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대선에서 변변히 힘도 써보지 못한 채 패배했지만, 청문회를 계기로 해서 추경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전투를 치르려 할 것이다.

청와대도 급할 수밖에 없다. 오죽했으면 문재인 대통령은 “단 1원의 국가예산이라도 반드시 일자리 만드는 것으로 이어지도록” 하겠다고 약속했고,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현재의 일자리와 소득 양극화 문제를 “재난에 가깝다”고 표현했다. 추경의 법정요건에 맞추기 위함이다.

맞다. 고용과 불평등의 문제는 안보 및 성장과 더불어 정책의 제일 앞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절박하고도 시급한 사안이다. 막무가내식 발목 잡기에서 벗어나려면 몇 가지 보완해야 할 점들이 눈에 띈다.

첫째, 추경과 공공부문 일자리는 시급한 단기처방이고, 장기처방을 가시화해야 한다. 물론 이것들이 단기처방이라는 점은 이미 몇 차례에 걸쳐 밝힌 바가 있으나, 종종 이것이 문재인 정부 일자리 정책의 근간인 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의 공공부문 규모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으로 쪼그라들어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 어느 정도 이를 늘려나갈 여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공공부문 일자리는 대체로 혁신과는 무관한 것들이어서 청년보다는 노인에, 성장보다는 분배에, 장기처방보다는 단기처방에 어울린다. 워낙 상황이 시급하니 단기처방을 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청년, 성장, 장기처방에 어울리는 정책들을 내놓고 야당과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둘째, 장기처방과 관련하여, 청년뿐 아니라 우리 모두는 머지않은 장래에 비정규직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일자리 문제의 핵심에 기술변동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 시안에 삼성전자가 지은 세계 최대의 반도체 공장은 달랑 2800명을 고용했을 뿐이다. 로봇이 모든 일을 하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스스로 “세계 최초의 파트타임 경제”라고 선언했다. 기술의 발전속도를 보면 우리 모두가 파트타임으로 일해야 할 날은 그리 머지않았다. 무능한 보수정권 9년 동안 한국의 혁신 생태계는 망가질 대로 망가졌다. 혁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모두가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경제에서 어떻게 국민의 인간다운 삶과 행복을 보장하겠는가.

셋째, 혁신과 관련하여, 문제의 근원은 최상위 재벌에만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으면 한다. 물론 지배구조 문제, 너무 높은 사내 유보금, 일감 몰아주기와 그로 인한 혁신적 중소기업의 도태 등 많은 문제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 한국 재벌의 문제가 최상위 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면 최근에는 소위 ‘세컨드 티어(second tier)’ 재벌 문제가 그 못지않게 심각하다. 굳이 번역하자면 ‘2류 재벌’이라고 할까. 한때 30대 재벌로 함께 분류되며 나름의 위상을 자랑하던 많은 중견 재벌들이 혁신하지 못한 끝에 2류 재벌이 되어버렸다.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어찌 됐든 지난 10여년간 한국에서 나온 혁신은 대부분 최상위 기업에서 나온 반면, 2류 재벌들은 거의 아무런 혁신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혁신은 없는데 가족경영은 유지해야겠고, 그러면 남는 것은 골목상권 장악과 갑질밖에 없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문제가 됐던 대부분의 골목상권 침해와 갑질 사건은 2류 재벌에서 나왔다. 이들은 은행빚까지 잔뜩 껴안고 있어서 혈세 투입을 각오하지 않고는 퇴출시키기도 어렵다. 최상위 재벌의 문제를 해결하되, 혁신을 살리고 문제가 되는 2류 재벌을 최소의 비용으로 퇴출시키는 묘책이 필요하다.

넷째, 불평등 완화는 단순히 내가 낸 세금을 남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의 4분의 1에 달한다고 추정되는 사회갈등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최근 나오고 있는 연구결과들을 보면 하위계층에 속한 사람들은 연애도, 출산도, 결혼도 모두 훨씬 적게 한다. 낮은 출산율은 납세자의 수를 줄이고, 우리 모두의 세금을 올린다. 지금 청년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고령화가 절정에 도달할 20~30년 후 기성세대의 노후를 돌봐줄 중년층이 사라진다. 노인빈곤은 OECD에서 압도적 1위인데,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적절한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한 노인이 혼자 거동할 수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비율은 2배 이상 늘어난다. 이들은 건강한 노인에 비해 훨씬 많은 세금을 필요로 한다. 그러니 불평등 완화는 우리 모두를 돕는 일이 되었다.

시급한 현안은 산적해 있고 여소야대 지형은 험난하다. 탄탄한 정책구상을 통해 새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단기처방과 장기처방, 혁신과 지속가능성을 모두 잡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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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9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예언이 실패할 때>라는 책이 있다. 레온 페스팅거와 두 명의 동료들이 함께 쓴 사회심리학의 고전이다.

미국의 주부였던 마리안 키치는 어느날 자신이 클라리온 행성에서 온 외계인의 명을 받아 그들의 말을 글로 써낸다고 주장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유행했던 ‘분신사바’ 같은 행위이다. 그는 1954년 12월21일에 지구가 멸망할 것이며, 진정으로 믿는 자만이 외계인의 안내를 받아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동조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일종의 공동체를 이루었고,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직장과 학교를 그만두고 재산을 헌납했다. 지구 멸망 직전인 12월20일 밤, 그들은 외계의 방문자를 기다리기 위해 한곳에 모였다. 하지만 자정이 지나고 밤 12시5분이 되었는데도 외계의 방문자는 오지 않았다. 그때 누군가가 집 안에 걸려있던 시계 중 하나가 아직 11시55분을 가리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다는 데에 합의했다. 10분 후. 모든 시계가 다 자정을 넘겼고 그들은 침묵했다. 새벽 4시45분. 마리안 키치는 또 한 번의 ‘분신사바’를 했고, 그들의 진정한 믿음 덕분에 외계인들이 지구를 멸망시키지 않기로 했다고 알렸다. 키치의 거짓 주장 때문에 직장과 학교와 재산을 잃은 ‘믿는 자들’은 키치에게 분노하기는커녕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선교’하려는 시도를 이어갔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한국에도 이런 일들이 일어났다. 시작은 박근혜의 열혈지지층이었다. 하루가 다르게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의 대통령이 그런 행위를 했을 리가 없다고 믿었다. 초저녁이었다. 탄핵안이 발의되자 가결될 리가 없다고 믿었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탄핵안이 가결되자 헌법재판소가 인용할 리 없다고 믿었다.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 생계를 뒤로 미룬 채 헌재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정미 재판관이 주문을 읽었다.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자정을 넘긴 밤 12시5분이었다. 어떤 이는 탄핵을 무효화할 수 있다고, 또 어떤 이는 태블릿PC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 아직 11시55분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곧 모든 시계가 자정을 넘겼다. 그들은 침묵했다. 본격적인 대선 국면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여전히 침묵했다. 새벽 4시45분. 한국판 마리안 키치가 나타났다. 그는 또 한 번의 ‘분신사바’를 통해 자정 이전의 세상을 이어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침묵하던 ‘믿는 자들’은 ‘선교’를 시작했다.

오늘 밤 우리는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짧게는 박근혜 정권 ‘혼용무도’의 4년을, 길게는 수십년 동안 천천히 진행되어온 국가의 마비 상태를 끝내고 이제야말로 전혀 다른 대한민국을 시작해야 하는 역사적인 날이다. 필자가 여러 기회를 빌려 주장해왔듯이, 인구구조의 급격한 변화, 성장률의 지속적 하락, 금방이라도 터질 듯 팽팽한 동북아의 긴장상태를 보면 새 정부 5년이야말로 대한민국에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다. 이번에 못하면 영원히 못한다. 주요 후보만 해도 다섯 명으로 치러진 이번 대선을 통해 국민들은 여러 편의 ‘믿는 자들’로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광신도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가벼운 동조자가 되었지만, 정치란 원래 유권자들을 가름으로써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니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선거국면과 선거 이후는 달라야 한다. 박근혜 정부가 했었던 가장 나쁜 일은 계속해서 국민들을 편가르기 하고 자신들의 광신도를 만들어냄으로써 정권을 유지하려 했다는 점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새 정부는 같은 일을 반복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상대편의 ‘믿는 자들’에게 또 다른 ‘분신사바’를 기다리게 하면 다 같이 망한다.

<예언이 실패할 때>의 저자 페스팅거는 두 가지 조언을 한다. 첫째, 법과 원칙의 적용이다. 선교를 이어가던 마리안 키치의 종교집단은 결국 사법당국의 개입이 있은 후에야 그 활동을 중단했다. 새 정부의 과제로는 개혁의 영역이 될 것이다. 그러나 법과 원칙의 적용은 공정하고 완만하며 일관된 것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시스템을 통한 차분하면서도 끈질긴 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믿는 자들’로 하여금 현실을 인정하는 고통을 줄여주어야 한다. 하나의 정치세력을 오랫동안 지지해온 사람들일수록, 설사 그들이 자신을 배신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는 것은 커다란 고통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패배라는 현실을 눈앞에 들이대면 그들은 현실을 인정하기보다는 더 열성적으로 선교하며 또 다른 ‘분신사바’를 기다린다. 새 정부의 과제는 ‘통합’의 영역이자 ‘정치’의 영역이 될 것이다. 오늘 밤 만나게 될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이 새 정부의 사회심리학을 깊이 숙고하기를 기원한다. 그래야만 그토록 기다려왔던 새로운 대한민국을 열어갈 수 있을 것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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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23일자 경향신문 ‘시대의 창’ 지면을 통해 나는 ‘19대 대선이 18대 대선과 다른 이유’라는 칼럼을 게재한 바 있다. 핵심은 촛불정국을 겪으면서 각 정당 지지층이 모두 대거 이탈해 부동층이 전체 유권자의 절반을 넘게 되었으며, 이번 대선은 누가 그들을 설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었다. 지난 대선과는 달리 진영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 화두라는 주장도 덧붙였다. 오늘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그 이야기를 이어가보려 한다.

흔히 ‘이명박근혜’라고들 말하지만, 박근혜 정부 4년은 이명박 정부 5년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주변의 지식인과 정책전문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심각한 종말론적 위기감을 토로했다. 정권의 단물을 나눠 먹고 있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이념도 세대도 상관없는 위기감이었다. 이명박 정부 때는 그렇지 않았다. 진보와 젊은 세대가 동의하든 안 하든 보수와 기성세대는 나름의 자기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이념이나 세대 따위가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 가면 정말로 몇 년 안에 나라가 망한다는 위기감이 널리 공유되었다. 이제는 정말로 대결적인 정치가 아니라 합의적인 정치가 필요하고, 5년마다 뒤집히는 정책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일관된 정책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하지 않으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다는 절박한 깨달음이었다. 학계와 시민사회에서도 차기 대선에서 이 깨달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여러 조직과 실험이 진행되기 시작했다. 진보단체와 합리적 보수단체들이 함께 활동하려는 움직임도 감지되었다. 아직까지 대중적 공감이란 과제가 남아있었지만, 적어도 지식인·전문가 사회 내부에서만이라도 보기 드문 합의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시대정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모든 것은 탄핵과 조기대선 국면으로 빨려들어갔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왼쪽에서 세번째)가 지난 8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 호프집에서 안희정 충남지사(오른쪽), 이재명 성남시장(왼쪽에서 두번째), 최성 고양시장(왼쪽) 등 경선 경쟁자들과 건배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당의 경선 라인업은 꽤 괜찮은 그림이었다.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지지율 1위로 우뚝 나서고, 합의의 정치를 앞세워 중도보수까지 확장성을 보여준 안희정이 2위, 문재인의 왼쪽에서 강력한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준 이재명이 3위를 차지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문재인의 ‘정권교체, 적폐청산’ 프레임은 앞서 말한 ‘시대정신’에 비추어보면 아쉬움이 많았지만 경선국면이었으므로 이해할 수도 있었다. 경선 경쟁력과 본선 경쟁력이 늘 거꾸로 가는 민주당의 딜레마가 있고, 안희정이라는 위협적인 경쟁자가 존재하는 상황이었으므로. 그러나 경선이 끝나고 본선이 시작된 지금도 그 프레임이 변함없이 유지되는 것은 곤란하다. 선거공학적으로 불리할 뿐 아니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근혜 탄핵과 구속에 대한 변함없이 높은 찬성률이 보여주듯이, 상당수의 보수층 유권자들은 지난 대선에서 자신들이 잘못된 선택을 했음을 이미 인정했다. 동시에 그들은 박근혜 같은 후보가 아닌, ‘괜찮은 보수’ 후보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해왔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정 없다면 문재인에게 표를 주거나 기권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탐색이 반기문에서 황교안과 안희정을 거쳐 안철수에게까지 이어졌다.

안희정의 경선탈락 이후 안철수 지지율이 계속 오르더니 지난 주말 사이 다자구도에서도 안철수가 1위를 차지하는 여론조사 결과가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적폐세력의 지지를 받는 후보’라는 프레임은 별 효과가 없을 것이다. 적폐 정치인은 버젓이 남아있으나, 적폐 유권자는 없기 때문이다. 문재인 지지층의 높은 충성도가 반드시 플러스 요인인지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지난 대선에서도 그랬듯이 이번 대선에서도 그들의 높은 충성도는 역으로 확장성을 방해하는 요소를 동시에 가진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최고 권력을 쥐고도 소수파일 수밖에 없는 이 나라의 정치구조 속에서 홀로 고군분투하다가 비극을 맞이했다.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개도국 대학의 실험실에서 홀로 밤을 새우며 실험에 몰두하다 폭발사고를 당한 과학자처럼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문재인이 철저한 개혁을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때의 교훈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개혁과 통합, 개혁과 미래설계를 분리해야 한다. 개혁은, 설사 저강도라 하더라도, 법과 시스템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그러나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5년 내내 지속되어야 한다. 저강도의 일관된 개혁이 고강도의 일회성 개혁과 그에 따르는 역풍에 비해 훨씬 효과적이다. 후보는 ‘청산’을 말할 것이 아니라 ‘통합’과 ‘미래’를 말해야 한다. 19대 대선의 화두는 진영 대결이 아니라 국민통합이다. 상대 진영은 이미 파산했고, 안철수 지지자는 청산 대상이 아니다. 19대 대선은 18대 대선과 다르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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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한 인터뷰에서 나는 현 정부를 ‘유랑도적단’에 빗댄 바 있다. 유랑도적단이란 경제학자 맨커 올슨이 <권력과 번영>이라는 저서에서 사용한 개념이다. 그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번영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어차피 성숙한 민주주의가 아닐 바에는 ‘유랑도적단’보다 차라리 ‘정주도적단’이 낫다고 지적하였다. 정주도적단은 이듬해에도 수탈해야 하기 때문에 씨앗이라도 남기지만, 한 번 털고 떠나는 유랑도적단은 씨앗조차 남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한국의 단임제 정부가 1987년에 가졌던 역사적 효용성을 차츰 잃어버린 끝에 이제는 유랑도적단과 같은 대통령 무책임제의 폐해만 남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해 이 표현을 빌려 쓰면서 이것은 나의 표현이 아니라 올슨의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대통령에 대한 건강한 풍자조차 금기가 되어버린 현실을 잘 알기에 공연한 말길에 오르내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지켜보며 나 스스로가 아직도 얼마나 순진하기 짝이 없는지 깨닫게 됐다. 유랑도적단은 비유가 아니라 현실이었던 것이다. 학자들이 비판이랍시고 비유나 하고 있을 때 그들은 권력을 이용해 비판자의 입을 틀어막으며 실제로 나라를 털어먹는 데 골몰하고 있었다는 점이 특검수사를 통해 그리고 헌재 판결을 통해 드러났다. 특검수사가 본궤도에 오른 이후 나는 칼럼을 통해 박근혜를 언급한 적이 한번도 없다. 그는 이제 적어도 대한민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영원히 퇴출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자연인 박근혜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보다는 우리가 새로 만들 세상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파면당한 전직 대통령이 사흘 만에 내놓은 메시지를 보며 아직도 나는 세상 물정 깨달으려면 한참 멀었음을 알았다. 그는 퇴출당할 생각도, 자연인으로 돌아갈 생각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에 대해 말해야 한다.

흔히들 ‘친박(親朴)’이라는 단어를 쓰곤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단어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해왔다. 친박이 아니라 ‘용박(用朴)’이 맞다. 박근혜와 친한 것이 아니라 박근혜를 이용하는 것이다. 한때 박근혜의 입으로 불렸던 전여옥 전 의원은 2007년 한나라당 경선 당시 그를 떠나며 자신이 겪은 여러 경험과 인물평을 남긴 바 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니 여기서 반복하지는 않겠다. 거기에는 여러 내용들이 적나라하게 밝혀져 있다. 한때 친박이었던 많은 정치인들은 ‘몰랐다’고 말한다.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통령이 된 후 변했다’고 말한다. 모두 거짓말일 것이다. 몰랐을 리가 없다. 하다못해 나 같은 백면서생도 알았다. 지난 대선이 있던 2012년 한 해 동안 지면을 통해 발표한 칼럼들을 다시 뒤져 읽어보니 정책과 철학의 빈곤, 맥락은 사라지고 원론만 반복하는 특유의 어법, 정상 상황에서는 한번도 리더십을 발휘한 적이 없고 콘크리트 지지층에 기대어 위기돌파에만 능한 그의 경력, SNS를 통해 대대적으로 펼쳐진 의심스러운 여론조작 정황 등이 마치 본 듯이 적혀있다. 그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일개 학자 눈에도 뻔히 보이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정치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알면서도 그의 상품성을 이용해 권력을 차지한 것이다. 현대사의 굴곡으로 인해 박근혜가 저절로 가지게 된 엄청난 상품성, 결함이 있지만 그것이 잘 드러나지 않게 해주는 폐쇄성, 거기에 옳고 그른 것을 가리지 못하는 철학과 정책의 부재까지. 노회한 정치인들이 앞장세우고 이용하기에는 최선의 조합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친박이 아니라 용박이다.

용박이 그를 이용했다면 그는 국민들을 이용했다. ‘용민(用民)’이다. 박근혜인들 친박이라 불리는 용박이 자신을 이용한다는 것을 왜 몰랐겠는가. 하지만 알면서도 짐짓 이용당해 주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니 기꺼이 이용당했을 것이다. 오늘까지 삼성동 자택 앞을 지키는 지지자들 중 상당수는 빈곤과 전쟁의 상처를 뚫고 솟아오른 대한민국의 도약을 함께했던 사람들이고, 그것을 무한한 자부심의 근거로 삼는 사람들이다. 뒤늦게 이용당했음을 깨닫고 등을 돌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끝까지 그를 믿어주는 사람들이다. 헌정사상 최초로 파면당함으로써 국격을 떨어뜨리고 사흘의 침묵 끝에 내놓은 메시지는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했으니 10% 남짓 남은 열성 지지자들을 볼모로 해서 나라야 망하거나 말거나 또다시 진흙탕의 정치싸움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철저한 ‘용민’이다. 그는 자연인 박근혜로 돌아온 것이 아니라 정치인 박근혜로 돌아왔다.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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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 지사의 지지율이 무서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보수 후보들의 지지율이 전혀 오르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보수층 유권자들의 표심은 갈 곳을 잃었다. 본인의 애매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의 지지율이 높은 편이지만, 막상 ‘권한대행의 권한대행’을 임명하고 출마할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은 간단치 않을 것이다. 황 대행이 그 후폭풍을 뚫고 당선될 꿈을 꿀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다고 본다면, 정치적으로 보이는 그의 행보는 대선보다는 다른 목표를 향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안 지사의 최근 지지율 상승은 갈 길 잃은 보수와 문재인 전 대표에게 불안감을 느끼는 중도층의 지지에 힘입은 바가 크다. 1987년 이후 모든 선거에서 야권을 항상 불리한 출발선에 세웠던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번에는 실질적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것은 유의미한 보수 후보가 없기 때문이지, 보수성향 유권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안정적 진보’의 이미지를 착실하게 선점한 안 지사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혜택을 누리는 최초의 야권 후보가 될 수도 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민주당 경선의 문턱을 넘을 가능성은 아직까지 매우 작다. 완전국민경선제와 결선투표제라는 변수가 누구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는 아직 예측하기 어렵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할 경우 분노한 민심은 어느 정도 풀릴 것이고, 대선 판도는 크게 출렁일 것이다. 그러나 3월13일 전후에 후보를 확정하기로 한 민주당 경선 일정을 감안할 때, 세간의 예측대로 3월 초 탄핵인용이 이루어진다면 안 지사는 달라진 대선 판도의 이득을 챙길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문 전 대표와 더불어 친노의 양대 적자인 그가 민주당을 탈당할 가능성도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선에서의 높은 외연 확장성에도 불구하고, 그가 가진 가능성이란 결국 경선 이전에 지지율이 문 전 대표와 비슷한 수준으로 오르고 그것이 경선 투표자들의 결정을 바꿔놓는 것과 같은 이변 이외에는 없을 것이다.

안희정 충남지사가 12일 광주 서구 쌍촌동 5·18민주화운동 학생기념탑에서 참배 후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여기까지는 선거공학적인 이야기들이다. 이번에는 우리 민주주의와 정치현실을 직시해보자. 최근 논란이 된 소위 ‘대연정론’ 이야기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화두를 던진 안 지사의 가능성이 매우 작기 때문에 오히려 편하게 말할 수 있다. 소위 ‘헬조선’을 운위하게 만드는 이 나라의 수많은 문제들 중 거의 대부분은 대결적 정치에서 시작됐고 합의제 민주주의의 성격을 강화함으로써 풀 수 있는 것들이다. 참여정부가 애써 마련했던 여러 개혁 ‘로드맵’들, 그리고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이 어디로 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는 이미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승자독식을 위해 필사적으로 쟁패하는 정치로는 헬조선의 문제를 아무것도 풀 수 없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합의제 민주주의를 가진 나라들이 그렇지 않은 나라들보다 양극화, 실업, 고용률 등 다양한 지표에서 더 나은 성적을 거두고 있다. 당장 개헌은 못하더라도 정치의 합의적 요소를 강화하는 것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현실을 보자. 민주당이 집권한다고 가정할 경우 121석의 여당은 178석을 차지하는 자유한국당, 국민의당, 바른정당, 정의당 그리고 무소속 의원들을 상대해야 한다. 국회선진화법하에서 법안 통과를 하려면 180석이 넘어야 하니 야당으로부터 적어도 59석의 협조가 필요하다. 국민의당이 호락호락 협조할 리도 없지만 그래봤자 38석이다. 이번 대선에서 후보다운 후보도 내지 못하고 몰락한 자유한국당이지만 여전히 의석은 94석인데, 이들은 대선을 통해 심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하나부터 열까지 발목을 잡을 것이다. 과거 열린우리당은 2004년 총선에서 탄핵역풍 덕분에 제1당으로 출발했지만 실질적으로 와해되는 데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상태로 2020년 총선까지 가야 한다. 그 중간에 2018년 지방선거가 있는데, 이때야말로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사활을 건 총력전을 펼칠 것이고 보수 유권자들도 결집할 것이다. 그러니 설사 정권교체가 된다 한들 합의제 성격을 강화하지 않은 채 출범한 다음 정부가 제대로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일본 민주당의 전례를 보면, 진보정권 시즌 2가 실패할 경우 수권능력 제로로 낙인찍혀 두 번 다시 집권이 어렵게 될 수도 있다.

자유한국당도 포함될 수 있는 대연정은 안된다는 주장은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자유한국당을 배제하기 위해 이처럼 중요한 의제를 논의조차 해보지 않는다는 것은 득보다 실이 너무 크다. 교체와 청산도 중요하지만 미래가 더 중요하다. 정권교체를 이루겠다고 말하지만 경천동지할 이변이 없는 한 정권교체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능하고 지속가능한 차기 정부를 만드는 논의를 시작부터 걷어차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선거공학과 별도로, 진지하게 연정을 논의해보자.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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