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이 가시화되고 있다. 아직 향후 추이가 불투명하긴 하지만,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어떤 식이든 안철수발 정계개편이 이루어질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차기 대통령을 목표로 한 정치인 안철수의 집요함이 이 모든 사단의 출발점일 터다. 그는 지금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한 보수의 땅을 개간해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정치공학적 시선을 거두고 ‘촛불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형성이라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볼 때 그의 이번 행보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어쩌면 이를 통해 정치인 안철수는 자신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촛불혁명은 단순히 정권교체로 끝나서는 안된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낳은 지금의 ‘결손 민주주의’를 좀 더 온전하고 건강한 민주적 정치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이 체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합리적인 진보와 보수가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서 생산적 경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분열과 갈등은 모든 민주주의 사회의 영원한 구성 원리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율이 아무리 높아도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은 다른 여느 민주 사회에서처럼 언제나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보수적 유권자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정치적 보금자리가 없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유한국당은 유사-파시스트 수구 정당일 뿐이다. 내년 지방 선거와 다음 총선을 통해 이 당을 완전히 퇴출시키거나 최소한 주변화시키지 않고는 이 땅의 건강한 민주주의 발전과 촛불혁명의 완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약 현정부의 개혁이 지지부진해진다든가 하면 보수적 유권자들의 표가 갈 곳을 찾지 못해 결국 다시 한국당으로 몰릴 개연성이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사태를 피하자면 합리적 보수 정당이 저 수구 정당을 결정적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바른정당의 이른바 ‘개혁 보수’ 실험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지금 김무성을 비롯한 저열한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의 배신 때문에 파산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 보수 정치의 관성적 힘은 너무 강했던 데 비해 새로운 이념적 좌표 설정은 설득력이 너무 약했다. 단순히 보수가 진보에 대해 더 이상 ‘종북몰이’만 하지 않는다고 합리적 보수가 될 수는 없다. 복지 같은 진보적 의제를 얼마간 수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은 박근혜도 했다.

내가 볼 때 바른정당 정치인들은 보수개혁의 핵심적 지렛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안보 보수’의 관점을 버려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유승민 대표는 지금도 ‘햇볕정책’에 대한 대립각 세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강철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 남한의 수구 보수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한국당은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든 분단 상황을 악용해서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보수가 합리적이고 개혁적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분단 체제의 망령을 떨쳐내야 한다. 기대컨대, 정치인 안철수에게 주어진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분단체제를 평화적 대화로 극복하려 했던 DJ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약속했었다.

한국 보수의 개혁적 재정립은 헌법보다 국가보안법을 앞세우는 정치적 도착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차이를 선명히 하되, 북한을 단순히 적대시하지만 말고 보수가 앞장서 그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공존을 지향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설픈 흡수통일에 대한 환상은 물론 적화통일에 대한 비현실적 공포도 버리고, 이미 현실인 한반도 양국체제를 공식화하고 안정화할 정책적 대안들을 찾아야 한다.

지금 두 당의 통합 시도를 두고 ‘보수 통합’이 아니라 ‘중도 개혁 통합’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적 딱지가 아니라 민주당의 오른쪽에 분단체제에 매몰된 안보 보수의 시각을 버린 건강한 민주 정치 세력의 영토를 확보하는 일이다.

안철수 대표의 정치적 승부수가 이런 방향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장은주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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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최우선적인 국정과제 중 하나인 ‘적폐청산’을 두고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자유한국당 쪽이 그것은 결국 정치보복일 뿐이라며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까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마다 이전 정권 담당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일이 반복되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소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맞선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과거 집권세력의 잘못을 징치하는 일이 비열한 정치보복과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는 것은 우리 헌법상의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적폐청산을 넓은 의미에서 ‘전투적(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독일에서 배워 우리 헌법도 채택하고 있는 이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민주주의라도 바로 그 토대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의 적에 대해서만은 관용적일 필요가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그런 적을 용인할 경우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 과거 저질렀던 일들은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비리가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를 그 근간에서부터 흔든 중대 범죄들이었다. 이런 범죄들을 정치보복이라는 비난이 두려워 단죄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우리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는 언제든 또다시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전투적 민주주의의 논리는 쉽게 악용될 수 있다. 김기춘 같은 유신체제 정초자들도 북한과 내부의 추종자들이라는 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전투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예외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인 방식으로 실천되어야만 정당화될 수 있다. 적폐청산도 마찬가지다.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뜬금없이 공론장에 끌어들인 적폐청산이라는 표현이 지금 우리 사회와 정부가 당면한 과제를 적절하게 드러내줄지 의문을 품을 만하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나 부정의를 일거에 해소하겠다는 뜻을 담은 그 표현은 점진적이고 절차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에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적폐청산의 논리가 자칫 ‘종북척결’과 같은 정치 문법을 가진 것으로 오해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래서 적폐청산의 정치는 민주적 헌정 질서의 회복과 재발 방지라는 명확한 목표 설정을 잊어서는 안된다. 스스로 가장 중요한 적폐청산의 대상인 검찰이 중심에 서는 역설도 넘어서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참된 민주주의의 수호자는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른 위헌 정당 해산 제도 같은 헌법적 장치들이 아니라 사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우리 시민들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말하자면 ‘민주적 우환의식’을 갖고 광장에 모여 절제의 미덕을 함께 갖춘 놀라운 열정으로 무너져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냈다. 4·19, 5·18, 6·10을 거치고 촛불혁명으로 부활한 한국 민주주의의 경험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시민들의 참여와 감시와 견제야말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심화시킬 수 있는 핵심 동력임을 보여주었다.

이 경험이야말로 우리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 민주주의는 결코 한꺼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새로운 상황과 도전에 직면하여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천하고 그 적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새로운 방안들을 끊임없이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제 적폐청산을 넘어 좀 더 확고하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파수꾼 민주주의’(존 킨) 체제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과 조직을 공적인 감시와 통제 아래 놓이게 함으로써 권력 집중과 부패를 막아내는 다양한 실천과 기구들로 이루어진다.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서 시민들이 좀 더 성숙한 민주적 시민성을 갖추도록 하는 데서 시작해서, 더 많은 시민사회적 조직들이 활성화되도록 하고,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시민의회’ 같은 제도들을 도입해야 한다. 언론이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모든 국가적 권력 행사 과정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더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가령 검찰을 감시하고 견제할 독립적인 ‘공수처’ 같은 기관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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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1주년을 맞은 요즈음 민주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그 혁명에 참여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외쳤던 시민들의 열망을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처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지가 쟁점이다. 최장집 교수와 박상훈 박사의 비판은 아주 신랄하다. 그런 식의 이해는 대의제를 본성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서 비롯되었단다. 심지어 의회를 우회하려는 문 대통령 식의 정치는 군주정의 행태일 뿐이라고 극언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야말로 오히려 촛불혁명이 열어 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임채원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촛불혁명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포칵의 개념으로, 시민들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이 속한 공화국의 불안정성을 확인하고 충만한 시민의식을 갖고 해법을 찾아 나서는 계기를 가리킨다. 우리 시민들이 딱 그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지난해 10월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서울 광화문광장 등 전국에서 이를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고는 하지만 주권자 시민들이 언제나 이 나라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정농단 사태에 직면해서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심각하게 고장 나 있음을 깨닫고 “이게 나라냐?”고 물으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시민적 덕성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외쳤다.

우리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일부 특권 세력의 사익 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데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그 세력의 충실한 하인들이었던 일부 ‘정치계급’에 대해서도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본디 민주공화국은 ‘데모스’, 곧 인민들이 전적으로 지배를 행사하는 좁은 의미의 민주정의 요소와 함께 엘리트들의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인정하는 귀족정의 계기도 가진 ‘혼합정체’이기는 하다. 실제로 대의민주주의는 그런 엘리트들의 정당한 통치를 보장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허울뿐인 민주공화국에서는 지금까지 과두 특권 세력과 그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계급이 전체 정치를 자신들의 부패를 은폐하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 왔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선거제도를 악용하고 공론장의 민주적 정당화 과정을 악랄하게 왜곡한 덕분이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가 나서 그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했던 것이다.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시민들이 새삼 주권자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정치 과정의 중심에 서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그것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은 당연히 대의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민들이 의회와 정당들을 불신하는 것은 그것들이 정작 가장 본질적인 책무, 곧 시민들을 대의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국민들이 모든 사안을 직접 결정하는 무슨 ‘국민투표정치’ 같은 걸로 의회정치를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요구의 핵심은 정치가 시민들의 요구에 더 잘 반응하게끔 정치의 행태와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시민들이 더 많이 참여하고 감시하며 견제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요점은 현재의 사실상의 과두정을 혁파하고 참된 ‘민주적’ 공화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추구하는 과두 특권 세력의 ‘귀족정치’에 대한 거부와 경계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나 정치혐오라 해서는 안된다.

정당정치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요구도 그 자체로는 옳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우리 정당정치가 왜 아직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성찰과 함께할 때라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우리 정당들, 특히 민주당과 같은 개혁적 진보를 자임하는 정당의 발전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것은 곧 민주당이 ‘힘 없는 사람들의 힘’, 곧 ‘시민적 권력’을 위한 정치적 기구로서 자기 정립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겨울 시민정치와 의회정치가 서로 호응했을 때 어떤 정치적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민주당은 바로 그 역사적 교훈을 그 정체성의 중핵에 새겨둘 수 있어야 한다.

이념과 핵심 가치는 물론이고, 조직 형태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주권자 시민의 합리적 이해관계와 요구라는 기반 위에 세워야 한다. 지금 민주당이 이런 일을 아직 제대로 못하고 있어서 걱정이지 너무 많이 해서 문제는 아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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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은 최근 유엔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제적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국의 핵실험을 정당화했다. 미국의 횡포 때문에 유엔이 추구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자위를 위해 핵개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철저하게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국제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반항한다고 하여 피해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만고의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항변했다.

유엔이 상임이사회에 속한 강대국들의 입김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거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부당하다는 따위에 대한 지적이야 옳다. 그러나 북한이 수차례 핵실험을 강행하며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은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 포장될 수 없다. 북한은 지금 김정은 3대 세습정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강박 때문에 한반도 전체 인민들의 생명과 안녕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참으로 가증스럽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북한의 저 결기만은 높이 사야 한다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특별히 ‘종북적’이어서라기보다는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 때문일 터다.

적잖은 시민들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순응적인 행태밖에 보이지 못한다며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우발적 전쟁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민족적 자존감의 손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민족주의적 정서 이면에는 강한 서구중심주의가 숨어있다. 늘 민족 자주성을 강조하는 북한이 내세우는 저 국제적 정의에 대한 관념은 개별 국가의 배타적 주권성의 이념을 인정하고 고취했던 17세기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른 서구 중심의 근대적 국제 질서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성원들이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을 때 당연시하고 있는 전제, 곧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상도 사실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와 서구의 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런 인식틀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오늘날 새롭게 확립되어야 할 지구적 정의에 대한 이상은 더 이상 개별 국가의 절대적 주권성의 원칙 위에 서서는 안된다. 주권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전 세계 만민의 자유와 인권을 상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국제 질서의 확립과 작동을 위해 일정하게 제약되고 순치되어야 한다. 북한같이 자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국가의 주권 행사를 무턱대고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정의의 관점에 서야 미국 같은 강대국들의 패권 추구도 유엔 같은 국제기구와 국제법의 틀 안에 더 잘 묶어둘 수 있다.

이때 평화는 정의의 절대적 전제다. 아니, 평화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정의다. 그 어느 국가나 민족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목적과 명분이 그럴 듯하다 해도, 한반도에 사는 수천만의 생명과 안녕을 담보로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 미국은 그에 맞서 군사적 응징을 위협하는 지금의 상황은 그 자체로 심각한 인권 침해요, 거대한 불의가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에 대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거나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런 주장도 결국 남한만을 대상으로 한 변형된 민족주의의 발로로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틀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이상부터 의심하자. 평화가 민족이나 통일 같은 가치보다 우선해야 함도 분명히 하자. 민족통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통일도 평화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그 평화체제의 출발점은, 사실은 이미 현실이지만 부정되고 있는, 한반도 양국체제를 공식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북한을 하나의 완전한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우리가 앞장서 북·미가 평화협정을 맺고 수교를 하게 도와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헌법의 비현실적인 한반도 영토 조항부터 삭제하면서 북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주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평화로운 외교 관계를 맺는 체제는, 조금 낯설지는 모르지만 무슨 역사적 모순은 아니며, 오히려 지금의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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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국회가 개원했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출범하기는 했지만,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들어섰다. 그 어지럽기로 소문난 ‘여의도 정치’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야당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새 대표는 ‘강한 야당’에 대한 결기를 분명히 했고, 자유한국당은 엉뚱한 트집을 잡아 아예 국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정의당을 제외한 야 3당은 이른바 ‘반문연대’를 형성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자칫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많은 개혁과제 해결이 때를 놓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벌써부터 몇몇 논객들은 문 대통령이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국정운영에 대한 높은 지지율에만 기대려 한다며 우려하던 터였다.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만 내세우고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문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문 대통령이 대의제를 채택한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거나 ‘지지율 독재’를 한다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면서 협치를 주문하고 타협과 양보를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아직도 진행 중인 ‘시민혁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핵심 과제의 하나가 바로 정치적 체제 전환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87년 체제의 통상적인 정부들과는 달리 이 체제를 끝장내고 더 좋은 질을 가진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 촛불시민들은 무엇보다도 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반민주 적폐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시키라고 명령했다. 툭하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념적 편협함으로 보나, 그동안의 정치행태를 보나 도무지 다원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건강한 보수 정당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번의 국회 보이콧 작태만 보더라도 이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 당은 사법부의 판단을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와 연결시키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집권기에 사법부도 조종하고 언론도 장악해 왔음을 사실상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들이 그랬으니 현정부도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우리가 자유한국당의 현실적 위상을 무턱대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저 당이 자유민주주의를 팔면서 우리 정치의 중심축이 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아서는 안된다. 만약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여소야대 현실을 빌미 삼아 이런 반자유민주주의적 수구 정당과 섣부른 타협을 해서 촛불정신을 배반한다면, 그런 선택이야말로 오히려 커다란 민심이반을 낳을 것이다.

협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교과서적인 의회정치의 문법이 아니라 진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 동맹이다.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문연대의 시도에 맞서 촛불시민들의 명령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던 정치세력들의 연대, 말하자면 ‘촛불연대’를 새로운 차원에서 복원해 내야 한다. 그 연대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지켜내기 위한 연대였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가 자유한국당과 민주당 사이를 기계적으로 저울질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바른정당이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자유한국당을 기웃거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야당들이라고 그저 들러리만 서려 하지는 않을 터이다. 민주당이 앞장서서 자유한국당이 없거나 소수화된 미래의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다른 야당들에 분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이익을 줄 수 있는 연대의 끈을 제시해야 한다. 소수 정당의 생존과 위상을 확실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이 그런 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혁을 통해 진보 정당이 더 커지고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자유한국당의 자리를 대체하는 다당제가 성립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양당중심제보다는 민주당을 위해서나, 사회개혁을 위해서나 훨씬 낫다. 그런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은 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지 않는가.

직접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언제나 민주주의의 질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가 단적인 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기본적으로 우리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했다. 우리 대의제는 다름 아니라 시민들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해서 위기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승자독식을 원칙으로 하는 현행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에서는 패배한 후보를 지지한 시민들의 의사는 전혀 대변되지 못한다. 정치권은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그 열망에 고장 난 대의제를 수리함으로써 응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바람직한 선거제도에 대한 숙의의 과정을 ‘시민배심원단’에 맡겨도 좋겠다.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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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민주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도 쉽게 결정해서는 안되는 국가적 의제들이 있다. 특히 국가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거나 그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사안들이 그렇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계속할 것인지의 문제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결정의 정당성은 통상적인 사안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확보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전문가들의 결정에 맡길 수는 없다.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이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되는 사안은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전혀 그 전문성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환경적 차원의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들로서는 기껏해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근거로 도덕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식의 억지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사안과 관련된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시민배심원제’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는 과두정에 어울리고 민주주의의 수단으로는 추첨이 맞다고 했다. 성별, 연령별, 지역별 균형 등을 고려한 제비뽑기에 의해 선출될 시민배심원단들은 기본적으로 원자력 산업과 무관하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사적 이익이 아니라 그야말로 국가공동체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최선의 판단을 내릴 가능성을 더 크게 갖고 있다. 게다가 이 시민배심원단에서는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계층과 집단의 표준적인 대표자들, 곧 농부, 노동자, 자영업자, 사무직원, 전업주부, 실업자 청년 등과 같은 보통의 시민들이 왜곡 없이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방식은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합리적 민의를 최소한 아주 근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혹시 너무도 평범한 시민들이라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을까? 시민배심원단은 단순히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심층적인 학습을 하고 다른 배심원들이나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폭넓게 듣고 토론을 한 뒤 숙고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최초의 의견을 바꿀 수도 있고, 아무튼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안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판단의 합리성에도 큰 신뢰를 보낼 수 있다. 더구나 다양한 연령과 계층과 집단의 성원들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은 폐쇄적 전문가 집단보다 사안을 훨씬 더 다각도로 보면서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민주주의의 이 인식론적 우월성은 다양한 사례와 경험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데도 이번의 정부 결정을 두고 도전이 만만찮다. 시민배심원제를 도입하기로 한 데 대해 사회적 논의 과정이 충분치 않았다고 문제제기하는 정도를 넘어 위법적이라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운영주체인 공론화위원회와 정부 사이에서도 시민배심원단이 심의만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정의 책임도 함께 져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간 혼선을 보였다. 마침내 공론화위원회 스스로 결정에 따른 부담을 피하려는 듯 시민배심원단 대신에 ‘시민참여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단다. 그러나 시민배심원제 자체를 포기하면 안된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이런 민주적 심의 과정을 더 확고하게 제도화하고 뿌리내리게 할 필요가 있다.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편 같은 사안들도 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우리 정치권이 권력구조 문제에 대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은 개헌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서도, 정치권은 얼마 전 기득권 정당들을 중심으로 선관위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권고를 무시하고 현행 소선거구제를 약간 손보는 데서 멈추고 만 선택을 한 바 있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는 단지 시민배심원단의 공정한 숙의 같은 것을 거침으로써만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할 수 있고 민주적 정당성도 갖는 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원의 문제들에까지 시민배심원단을 확대하고 상설화할 필요가 있다. 그걸 ‘시민의회’라고 부르자. 이 시민의회는 시민적 주권성을 좀 더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결정적 통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민의회를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촛불혁명을 비로소 ‘혁명’이게 할 참된 성취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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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했다. 그 혁명은 80%에 가까운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했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집권 초반 지지율도 그쯤 된다. 당연하게도 그 지지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할 수 없고, 다양한 방향에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벌써 ‘범진보’ 진영 안에서부터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참여정부 때부터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은 바로 그래서 사소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이 먼저 총파업을 감행하며 도전했다. 촛불혁명에 조직적으로 가장 앞장섰던 세력으로서 이 정부의 출범에 대해 가진 나름의 지분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겠단다. 그러면서 각종 노동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획기적 실마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는 언제든지 격한 투쟁의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여성운동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양성평등의 실현 없는 민주주의는 사이비 민주주의라며 터무니없이 마초적인 여성관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해임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까지 했던 문 대통령으로서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정치적 압력이다.

문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들은 그런 도전과 견제를 마뜩잖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방팔방에서 적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데, 힘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 세력들이 그 적들과 함께하거나 최소한 그 적들을 돕고 있단다.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신좌파’니 어쩌니 하며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날카롭게 구분 짓고는 그 운동들에 대한 서운함을 날선 적대의 언어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균열을 무턱대고 비난하면서 억지 연대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정의’의 관점들이 충돌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정당한 정의의 요구들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초점과 차원이 얼마간 어긋나서 불가피하게 생길 수밖에 없는, 감내해야 할 불협화음 정도로 말이다.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현실을 생각할 때, 비정규직 철폐 같은 좀 더 평등한 ‘분배 정의’에 대한 요구만큼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가 민감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오랜 여성 억압의 역사를 생각할 때, 양성평등의 이상이 단순히 형식적인 기회균등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곧 제도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관철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젠더 정의’의 요구도 최소한 그만큼은 절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정의의 요구들은 단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지반 위에서만 실현가능할 것이기에, 우선 그 지반을 공고히 하고 심화시키는 ‘민주주의적 정의’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기도 쉽지 않다.

긴장과 갈등 자체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 유일하게 올바른 해법도 없다. 차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키고 고무하기까지 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공동의 지반을 강화시킬 수 있는, 말하자면 ‘함께 또 따로’의 변증법이 필요할 따름이다.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표현은 ‘대화를 통한 진리 발견술’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서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성 있는 소통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공동선’에 대한 지향이다. 그 어떤 정의의 요구도 ‘모두에게 좋은 것’의 우선성을 넘어서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바로 그 공동선의 구현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모든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그 공동선의 요구로 번역되고 또 그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상호성과 보편성이라는 기준에 따른 검증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오류 가능주의’의 수용이다. 사람들이 지닌 신념과 열정은 삶과 사회 진보의 동력이다. 그래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답시고 스스로가 지닌 과학적, 정치적, 도덕적 인식들을 무턱대고 상대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들이 절대적 진리는 아니며 언제든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과 참된 소통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정의 없이는 분배 정의도, 젠더 정의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요구들을 무시하는 민주주의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큰 틀에서 같은 편이어야 할 사람들과도 이견과 차이를 조율하며 소통하는 데 아직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

지금 다들 자기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서로 시퍼렇게 날만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이다.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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