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김상곤 부총리가 ‘경질’되었다. 안타깝고 씁쓸하다. 지지율이 하락하든가 하면 국면 전환을 위해 개각을 해왔던 그동안의 우리 정치 관행을 문재인 정부도 비껴가지 않았다. 교육같이 중요한 문제를 다루는 장관이 이런 식으로 단명해서야 최소한의 개혁이라도 가능할지 걱정이다. 그렇지 않아도 해결해야 할 문제는 산적해 있고, 새 장관이 당장 관료들을 장악하는 일조차 만만치 않을 텐데 말이다.

이번 경질의 빌미가 되었던 대학입시문제에 대해서는 사실 교육부가 어떤 결정을 내놓았더라도 사회적인 논란과 일부 집단의 반발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그 문제는 우리 사회의 심층적이고 구조적인 폐단과 관련이 있으며, 다양한 세력들이 다투고 충돌할 수밖에 없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28일 청와대 본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기에 앞서 송영무 국방부 장관(왼쪽에서 두번째)·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왼쪽) 등 국무위원들과 인사하며 환담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조금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대학입시는 결국 상위 10% 정도의 학생들이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하기 위한 규칙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의 문제일 뿐이다. 학령인구가 큰 폭으로 감소하고 대학 정원은 실제로는 남아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지금과 같은 입시지옥에 살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대학에 갈 수 있다. 문제는 모두가 ‘서울’의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하지만 극히 일부만 그럴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좋은 학벌에 대한 많은 시민들의 욕망 그 자체를 어떻게든 다스리지 않는 한 어떤 규칙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없다.

그 욕망은 사실은 계층의 상승 또는 유지에 대한 욕망이다. 현실적으로 한국에서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부모가 부자일 확률이 높다. 막대한 사교육의 효과다. 그러나 가난한 부모도 자식들은 성공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나중에 사회적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해줄 명문대 입시의 규칙이 어떻게든 부모의 경제적 여유와는 연관성이 적었으면 하고 바란다. ‘공정한’ 대입제도가 의미하는 핵심이다.

그러나 이 은폐된 계층갈등의 승자는 처음부터 명백하다. 부자 부모들은 규칙이 어떻게 정해지더라도 가난한 부모들보다 자식들을 더 잘 적응하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규칙 자체를 어떻게든 자기편에 유리하게 만들려고 온갖 영향력을 발휘한다. 수능 절대평가 같은 제도를 쉽사리 도입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한 개혁은 무엇보다도 대통령과 집권세력의 뚜렷한 개혁 철학과 비전, 그리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정치적 ‘뚝심’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 그래서 입시문제에 대한 표피적 접근으로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든 우리 사회의 불평등 구조를 확대재생산하는 결과를 피하기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우리는 좀 더 근본적이고 장기적인 전망 속에서 그 문제에 접근할 필요가 있다.

결국 대학서열을 해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방대를 획기적으로 육성해야 하고, 또 그러자면 우리 사회 전체에서 사적이거나 공적인 좋은 ‘자리’를 두고 벌어지는 경쟁을 완화해야 하며, 궁극적으로는 그 경쟁의 승자와 패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의 너무도 큰 격차를 줄여야 한다.

쉽게 말해 지방대를 나와도 대기업이나 공기업 같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게 하고, 중소기업에 다니거나 육체노동을 하더라도 충분히 인간답고 품위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교육문제는 결국 사회문제이고 노동문제이며 복지문제다. 그래서 관련된 모든 영역에서 유기적으로 작동하고 서로 긍정적인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정책들의 체계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문제의 뿌리에 다가갈 수 있다. 역시 관건은 정치다.

문 대통령은 ‘정치인’에게 장관직을 맡기면서 교육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을 원만하게 조율해 줄 것을 우선적으로 주문했다. 그러나 좀 더 담대한 비전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새 부총리는 교육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부터 다시 던져보길 바란다. 민주공화국에서 교육은 어떻게 시민들의 평등한 존엄성과 인간다운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는가?

입시문제만이 교육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교육의 영역을 다른 경제적이거나 사회적인 힘들이 작동하기 어려운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교육자들이 건강하고 역량 있는 민주시민의 양성이라는 본래의 목적을 실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학비리 근절, 교육 공공성 강화, 학교민주주의의 확립, 민주시민교육의 강화 같은 문제들이 진짜 중요한 교육문제들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입시문제도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새 부총리가 교육개혁의 참된 초석을 놓기를 기대해 본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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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한국 진보정치의 발전을 위해 온 인생을 바쳤던 노회찬 의원을 죽음으로 내몬 조선일보식 질문이다. 참으로 비수 같은 프레임이었다. 진보라면서 어떻게 부인이 전용 운전기사를 부릴 수 있냐는 시비야 사실 너무 억지스러워 실소하며 넘어갈 일이었다. 그러나 현행법상으로는 불법이 명백한 정치자금 수수 문제 앞에서 그런 식의 프레임은 고인같이 고결한 영혼을 가진 사람에겐 빠져나올 수 없는 덫이었을 테다. 진짜로 잘못이 커서가 아니라, 평생을 정의와 진보를 위해 싸워 온 정치인으로서 삶 전체가 조롱당하는 걸 피할 수 없으리라고 여겼으리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사소한 실수 때문에 정의당과 진보정치 전체가 온갖 비열한 비난과 공격에 노출될 게 분명했다. 고인으로선 어떻게든 그런 귀결을 피하고 싶었으리라.

고인은 살아남은 이들에게 많은 숙제를 남겼다. 많이들 지적한 대로 고인 같은 정의로운 정치인조차도 불법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었던 정치자금법을 고치고 소수 진보정당의 정치적 입지를 옥죄는 단순다수결 선거제도를 바꾸는 일은 정말 절실하다.

[시사 2판4판]인기를 얻고 싶어요 (출처:경향신문DB)

나는 여기에 덧붙여 고인이 빠졌던 저런 종류의 덫을 우리 진보정치가 어떻게 깨트릴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함께 성찰해 볼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도덕정치’ 전통과 관련이 있다.

언젠가 어느 독일 학자로부터 왜 한국인들은 매사를 도덕화된 시각에서 접근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해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 우리는 많은 정치적 문제를 곧잘 도덕주의적으로 접근하는데, 이는 우리 사회에 특유한 일로 유교, 특히 성리학적 전통의 영향이다. 여기서 정치는 기본적으로 어떤 도덕적 진리의 실현을 지향해야 하고, 정파들은 누가 또는 어떤 세력이 도덕적 올바름을 주장할 가장 확실한 명분을 가지고 있는지를 두고 권력투쟁을 전개했다. 개인적으로도 ‘수신’과 ‘제가’를 완수한 사람만이 정치를 할 자격을 가졌다. 바로 이런 식의 도덕정치 전통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다른 나라들이라고 해서 정치에서 도덕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몇 년 전 독일에서도 크리스티안 불프 대통령이 사소한 잘못 때문에 여론의 압력에 밀려 사퇴한 적이 있었다. 그가 친구의 도움으로 시중보다 싼 이자로 은행 대출을 받았다는 따위가 문제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성 그 자체보다는 그가, 사실은 실질적 권력도 별로 없지만, 대통령이라는 공적 지위를 부당하게 사용했을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한국에서는 다르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떠올려 보라. 대부분 청문 대상자의 공적 업무 능력이나 공동선에 대한 태도 같은 게 아니라 위장전입에서부터 논문 자기표절이라는 시시콜콜한 혐의까지 개인적인 도덕적 흠결을 따진다. 진보든 보수든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도덕정치의 전통을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일은 아니다. 멀리는 독립운동에서부터 민주화운동을 거쳐 최근의 촛불혁명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의 정의에 대한 강렬한 지향은 우리 민주주의의 비옥한 문화적 자양분이었다. 특히 늘 권력과 사회적 기득권에 맞서서 싸워 왔던 진보정치는 이 도덕정치 전통의 정수를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전통의 그림자 또한 너무 짙다. 특히 진보정치에 대해서는 치명적이기까지 하다.

무엇보다도 진보가 스스로에게 도덕적 완전성이라는 올가미를 씌우는 바람에 반대 세력이 너무 손쉽게 이를 역공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하여 자기 눈 안의 들보를 숨긴 자들이 진보 인사들의 눈에 있는 티를 가지고 시비를 걸어도 꼼짝없이 말려들고 만다.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존중과 예의조차 없이 비열한 정치적 술수로만 사용되는 ‘비도덕적 도덕주의’가 난무해도 속수무책이다. 이번의 드루킹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일이 이렇게까지 흘러온 건 그냥 약간의 소란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을 일을 끝까지 파헤치자고 나섰던 민주당의 어떤 도덕정치적 강박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진보부터 나서 정치에 너무 과민한 도덕주의적 촉수를 갖다 대는 습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물론 정의를 지향하는 도덕적인 정치가 그 자체로 잘못은 아니다. 요점은 도덕의 초점을 개인이 아니라 공공성과 공동선에 대한 지향에 맞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의 인간적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포용적이되, 공적 질서의 원칙에 대해서는 엄정한 새로운 정치도덕을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정치에서 도덕적 우월성보다 더 중요한 다른 가치가 참 많다. 성리학의 시대는 진작 끝났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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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토록 노심초사하며 기다려왔던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한반도의 비핵화와 종전 및 평화체제 수립의 과정은 불가역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제대로 운전대를 잡지 못했다면 일어나지 못했을 일이다. 국민들의 성원이 뜨겁다. 덕분에 이번 지방선거와 재·보궐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이 예상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번 선거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이번 선거는 그동안 우리 사회와 정치를 모든 면에서 비틀어 왔던 비정상적 분단체제가 항구적 평화체제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처음으로 치러진다. 여기서 냉전 극우주의 세력인 자유한국당이나 보수를 혁신한다면서도 안보보수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바른미래당은 정치적으로 설 자리가 없음이 확인될 것이다.

보수 진영이 기왕의 부패에 더해 평화라는 이 압도적인 시대정신을 외면한 대가다. 이제 지역 차원에서도 주류 교체가 이루어져 민주당이 우리 사회의 중심 정당이 된다. 그만큼 민주당이 져야 할 역사적 책무도 크다. 가야 할 길도 분명하다.

아무래도 제일 중요한 과제는 늘 분단을 핑계로 정당화되어 왔던 우리의 일그러진 ‘결손 민주주의’를 온전한 민주주의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민주당은 무엇보다도 좌초된 개헌부터 다시 추진해서 새 민주주의 체제를 앞장서 준비해야 한다. 기왕의 대통령 발의 개헌안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국회 차원에서 지난 30년 동안의 우리 민주주의 한계를 더 살피고 국민의 기본권을 더 잘 보호하며 곧 도래할 한반도 평화체제의 지상명령을 더 올곧이 담아낼 헌법안을 통과시켜야 한다. 개헌은 촛불혁명의 완수라는 의미와 함께 분단체제가 우리 사회와 정치에 가한 질곡을 완전하게 떨쳐내는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선언하는 함의도 가질 것이다. 물론 선거법 개정도 미룰 일이 아니다.

그런데 시민들의 물질적 안정이 확보되지 않고는 민주주의가 온전할 리 없다. 민주당은 촛불혁명의 정치적 집행자로서 또 한반도 평화체제의 수립자로서 한동안 다수당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지위는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광범위한 세력들로부터 심층적이고 장기적인 지지를 얻어내지 않고는 안정적일 수 없다. 민주당은 유럽의 사회민주당이나 뉴딜 때의 미국 민주당과 같은 진보적 기축 정당이 되어 복지국가를 위한 확고한 정치적 동맹을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포용적 복지국가는 평화체제의 가장 직접적인 함축이다.

물론 우리는 유럽이나 미국과는 다른 방식으로 그런 복지동맹을 만들어 갈 수밖에 없다. 복지국가의 발전 과정을 이해하는 데서도 ‘유럽의 지방화’가 필요하다. 유럽의 경험을 참조하되 절대화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제 19세기 이래 유럽 자본주의의 발전 경험에만 기댄 진보 정치 모델과 결별해야 한다. 민주당이 노동운동에 기반을 둔 서구적 진보 정당이 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촛불혁명을 비롯해 우리의 현대사가 명확하게 보여준 건 ‘시민적 진보’의 길이다. 우리의 복지국가 기획은 광범위한 계층의 시민적 연대라는 토대 위에 서야 한다.

그러나 민주당이 과연 이런 과제를 감당할 만한 충분한 역량과 비전과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가령 이번 선거에서 민주당의 많은 후보들이 과거 보수 진영에 있었다는 사실은, 이 당이 이제 우리 정치의 새 주류로 등극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이 당의 인적, 이념적 한계와 그 모호한 정체성도 웅변한다. 승리감에 도취되어 이런 한계와 모호성을 계속 방치한다면, 민주당도 결국 특정한 종류의 기득권 정당으로 전락하여 스스로 몰락의 문을 열게 될지 모른다. 그 결과 다른 진보 정당이 성장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어쩌면 다른 나라들에서처럼 새로운 종류의 극우 포퓰리즘이 득세할 수도 있다.

토마 피케티는 최근 서로 다른 선거 제도와 정치적 전통을 가진 프랑스, 영국, 미국 모두에서 왜 민주주의가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극우 포퓰리즘에 포획되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그 주된 이유는 중도 좌파 정당들의 정체성 변질이다. 간단히 말해 세 나라 모두에서 본디 하층 노동계급과 중산층의 이익을 대변하던 중도 좌파 정당들이 교육과 소득 수준이 높은 소수의 ‘브라만 좌파’(강남좌파)를 위한 정당으로 바뀌면서 절대 다수 하층 시민들의 처지와 이해관계를 무시한 결과라는 것이다. 민주당이 바로 이런 길로 빠지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이번의 최저임금법 개정이 그 징후가 아니길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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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역사적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분열과 적대의 70년을 뒤로하고 항구적 평화와 화해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전망된다. 정말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는 분단체제에 기생하여 색깔론 따위로 이득을 얻어 왔던 세력들이 여전히 강고하게 똬리를 틀고 앉아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있다. 우리 사회가 과연 이 새로운 시대를 제대로 맞이할 수 있는 내적인 문화적 역량을 가지고 있기는 한지 참으로 걱정이다.

한반도 전체에는 평화체제가 도래하고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 내부적으로는 적대 관계로 발전할 수도 있는 이질적인 것들의 상생적 공존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의 문제를 아직 충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오랜 분단체제 때문에 그동안 ‘타자’를 포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며 혐오하고 적대하기까지 하는 ‘전쟁문화’가 아주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단지 이념뿐만 아니라 지역, 계층, 젠더 등을 둘러싸고서도 폭력적이고 극단적인 냉전적 유형의 갈등이 일상이 되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제대로 된 정착을 위해서라도 이런 ‘우리 안의 냉전’부터 극복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사회의 다양한 세력들이 서로 갈등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민주주의와 정치의 영원한 본성에 속한다고 해야 하고, 지역, 계층, 젠더 등의 차이를 둘러싼 불협화음도 어떤 사회에서든 있을 수밖에 없다. 존재하는 갈등을 억누르기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은 명백하다.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그런 갈등의 불가피성을 수용하고 인정하면서 그것이 모두의 공멸이 아니라 상생과 번영으로 이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이다.

마키아벨리의 구분을 빌리자면, 사회적 갈등은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만 끝까지 관철시키려 드는 ‘투쟁’이 아니라 모두의 이익과 관점이 반영된 공동의 삶의 질서를 낳을 수 있는 ‘논쟁’이 될 때 공동체의 번영을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다. 이런 논쟁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은 공정성과 상호존중이다. 누구에게든 틀리더라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고 상대를 타도해야 할 적이 아니라 단지 생각과 처지가 다른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공동의 삶의 틀 자체를 깨지 않는 한 그 어떤 이견이나 차이도 존중하고 상대를 폭력적 절멸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포용의 원칙’으로 이어진다. 그런 바탕 위에서만 갈등은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지금 제1야당 대표라는 인사가 바로 이런 규범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빨갱이’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배제의 정치를 선동하고 있다. 그런 관용의 규범은 사실 이 당이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적 관용의 체제는 그런 불관용을 선동하는 행위를 단호하게 불관용할 때에만 유지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해서라도 이런 당이 더 이상 설 곳이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조선일보는 검인정 역사교과서 서술 지침을 놓고 또 케케묵은 이념시비를 걸고 있다. 이렇게 특정 진영이 ‘유일하게 올바르다’고 여기는 역사관만 미래 세대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발상 역시 그 규범을 부정한다. 이 때문에 진보 쪽에서 또 다른 올바른 역사관을 내세우며 맞서는 것은 옳지 않다. 가령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로 할지 아니면 건국일로 할지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합리적인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분명하다.

“학문과 정치에서 논쟁적인 것은 수업에서도 역시 논쟁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독일의 좌우 정치진영이 소모적인 이념 논쟁 너머에서 미래 세대가 올바른 민주시민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정치교육’을 하자면서 이끌어 낸 ‘보이텔스바흐 합의’의 핵심 원칙이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이런 의견도 있고 저런 의견도 있다, 근거는 각기 이러저러하다, 옳고 그름은 학생들이 스스로 따져서 판단하라, 바로 이런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자는 것이다. 이런 ‘논쟁성의 원칙’으로 이제 무의미한 ‘역사전쟁’을 끝내야 한다.

민주주의를 단순히 다수결주의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승자독식의 원리를 따르는 다수결은 정치적 의사결정에서 시간적 제약 등에 따른 실용적 필요 때문에 불가피한 것이지 그 자체로 민주주의는 아니다.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다수결주의 너머에서 사회를 통합시킬 수 있는 심층 합의가 필요하다. 그동안의 반공안보체제는 우리 사회가 민주화 이후 30년이 넘도록 포용의 원칙 같은 가장 기본적인 다원적 민주주의 원칙에 대한 합의조차 제대로 이루어내지 못하게 했다. 이제 바로 그런 합의를 이룰 때가 되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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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운동이 진행되면서 그에 대한 해석 투쟁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금까지 늘 크고 작은 성 관련 추문으로 시끄러웠던 자유한국당 쪽에서는 신이 나서 좌파의 성문화가 원래 문란하다고 조롱하고, 가끔 여성혐오적 발언으로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던 김어준은 거봐란 듯이 ‘공작’ 운운하며 맞불을 놓는다. 모두 헛소리다. 그런 언설들 자체가 지금 미투 운동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배경을 보여줄 뿐이다. 고은 시인이나 연극연출가 이윤택, 특히 안희정 전 지사의 범죄적 행각에 대한 고발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도덕적 이중성이 진보진영 전반에 대한 신뢰 상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우려도 나온다. 당연하다. 그러나 어딘가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문제가 훨씬 더 심각하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이번 사태는 진보진영 전반의 어떤 은폐된 흉상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많은 피해자의 폭로와 고발을 들으면서 문제가 단지 진보를 자처하는 몇몇 예술가나 정치인 개개인의 왜곡된 성의식이나 그에 따른 범죄적 행각이 아님을 생생하게 확인했다. 문제는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던 남녀 사이의 권력 불균형과 어떤 사회문화적 무의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여성혐오가 낳은 구조적 불의다. 이번에 확인된 것은 사회적 불의에 맞선다는 많은 진보인사들이, 단순히 그러한 불의에 둔감했다는 정도를 넘어, 심지어 그 중요한 일부를 함께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보이기를 자처해 온 모든 이들, 특히 남성들이 부끄러워하면서 그동안의 진보정치와 문화에 대한 뼈아픈 성찰의 계기로 삼을 일이다.

지금의 미투 운동은 1987년 6월항쟁 이후에 일어났던 이른바 ‘노동자대투쟁’에 비견될 수 있다. 이 투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주변에만 머물러 있던 노동자들은 미흡하나마 얼마간의 분배정의를 실현할 수 있었고, 또 우리 민주주의의 한 축으로 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었다. 이제 지금까지 사회적 약소자로 머물러 있던 여성들이 억압을 떨치고 일어나 견디기 힘들었던 슬픔과 아픔을 고발하며 정의를 세우겠다고 외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사회가 이제 더 ‘깊은 민주주의’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데 대한 엄숙한 지상명령이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정치적 지배의 형식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평등한 존엄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양식이다. 그런 사람들이 공동의 틀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협력하며 함께 문제를 처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과 방식 그 자체다.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런 인간적 삶의 양식 속에서만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껏 좁은 의미의 정치적·제도적 차원에만 신경을 썼을 뿐, 이 일상적 삶의 양식의 인간적 질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미투 운동은 우리의 일상적 생활세계가 여성 같은 사회적 약소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을 무시하는 문화적 악습에 여전히 심각하게 침윤되어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주었다.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은 이제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의 인성은 물론이고 일상적 수준의 다양한 사회적 관계와 교류 방식, 나아가 문화적, 도덕적 가치의 문제로도 향해야 한다. 우리의 생활세계를 인간화하고 일상적 삶의 문화를 민주화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갈 길이 멀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결코 무슨 진화적 필연성의 결과가 아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성차별 문화를 만들어냈던 조선의 유교화 과정을 생각해 보라. 그 과정은 단숨에 이뤄지지도 않았고 자연스럽게 성공을 거두지도 않았다. 여성 지위의 급격한 하락을 가져왔던 그 유교화 과정은 100년 이상의 오랜 시간에 걸쳐 그리고 향약을 비롯한 다차원적인 교화 장치를 통해 사람들의 일상적 삶 전체를 포섭했다. 삼강오륜의 도덕과 음양론이라는 형이상학적 지지대도 동원했다. 지금 우리는 그 과정의 힘이 얼마나 심대하고 강고한지 처절하게 깨닫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도 그만큼 끈질기고 전방위적이어야 한다.

단순히 법적,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하는 데에만 초점을 두어서는 안된다. 그런 게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그런 개혁은 언제나 문화적 혁신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개혁은 문화개혁이 표현되는 구체적 방식이자 결과가 되어야만 튼실하고 온전할 수 있다. 미투 운동 덕분에 우리는 촛불혁명이 적폐청산이나 개헌을 넘어 여성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약소자들의 인간적 존엄성이 존중되는 민주적 생활세계를 확립해야 한다는 더 깊은 수준의 과제도 갖고 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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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헌안을 마련하기 위한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한창이다. 국회 개헌특위의 활동이 지지부진하자 문재인 대통령은 정부 차원의 개헌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으며, 시민사회에서도 이런저런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 촛불혁명은 우리 사회의 근본 틀을 새롭게 규정할 개헌을 통해서만 완성될 수 있을 터, 가능한한 여러 의견들이 검토되고 반영된 최선의 헌법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이런 논의 과정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래 우리나라에는 하나가 아닌 두 개의 헌법, 곧 공식 헌법과 함께 ‘이면헌법’(백낙청)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 말이다. 이 이면헌법은 분단이라는 비정상적 상황이 국민의 기본권에 대한 심각한 제약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여기는 등의 내용을 담은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심지어 민주화 이후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공식 헌법을 무력화시키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심지어 통합진보당을 해산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에서 극명하게 확인되었듯이, 하위법인 ‘국가보안법’이 헌법의 해석마저 지배한다. 이 이면헌법의 작동을 중지시키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헌법을 만들어도 우리 민주주의는 결코 온전한 모습을 갖기 힘들 것이다.

물론 촛불혁명을 거치면서 이 이면헌법의 위세가 상당히 위축되기는 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그 이면헌법의 논리에 따라 문화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실행했던 김기춘 등이 사법적 징치를 받았고, 그 이면헌법의 은밀한 집행자였던 국가정보원에 대해서도 ‘적폐청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최근에도 우리 극우반공주의 세력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양올림픽’이라 조롱하고 모처럼 조성된 남북대화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이면헌법을 부활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우리 사회 일각의 삐뚤어진 반공, 반북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와 사회를 여러 차원에서 일그러뜨리고 있는 비정상적인 분단체제 그 자체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 분단체제를 정상화하는 길은 단지 민족적 동질성에 기초한 ‘통일’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현행 헌법도 우리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통일 지향을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동안 이런 패러다임으로는 분단체제의 비정상성을 완화시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병리성을 극대화하기만 한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민주정부 10년 동안의 대북포용정책 역시 한반도에 정상 상태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극우반공주의자들은 그런 정책이 북한에 유화적이라면서 이면헌법을 더 활발하게 작동시키기 위한 빌미로 삼았다. 그 결과가 바로 지난 두 정부 시기의 남북관계 경색과 작금의 북핵 위기다.

모처럼 열린 지금의 남북대화 국면도 비슷한 운명을 되풀이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이제 이 통일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통일과는 다른 방식으로 분단체제를 정상화할 수 있는 길이 있다. 통일의 가능성은 미래의 일로 열어 두면서 이미 국제법적 현실인 ‘1민족 2국가 체제’를 그 자체로 수용하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국가의 ‘평화공존’이라는 새로운 정상상태를 만들어내는 길이다. 나중에 독일 통일의 초석이 되었다고 평가받는 빌리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이 이끌어 낸 동서독 사이의 ‘기본조약’이 모델이 될 수 있다. 이 조약은 두 독일 사이를 “서로 평등한 보통의 좋은 이웃 관계”라고 규정하고, 양국의 주권과 독립성 및 영토적 통합성을 인정한 위에서, ‘상설대표부’를 상대의 수도에 설치하도록 했다.

이런 방식은 하나의 민족이 만든 두 국가의 화해 불가능한 이념과 체제의 차이를 그 자체로 존중하고 인정함으로써 분단이라는 비정상성을 정상화하려 한다.

어떤 신실한 기독교도와 냉철한 무신론자의 신념체계는 서로 화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배타적 신념체계를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삶의 질서를 만드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신념의 차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수용하면서 공동의 삶을 규제하는 원칙들에 합의할 수 있으면 된다. 이게 바로 우리 극우반공주의 세력이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면서도 사실은 부정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의 방식이다. 마찬가지 원리에 따라 한반도에 국제적으로 보증된 ‘관용의 레짐’을 구축할 수 있다.

우리 헌법의 영토조항(3조)과 통일조항(4조)은 평화공존 패러다임에 잘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조항들은 공식 헌법을 무력화시켜 온 이면헌법의 은밀한 작동을 정당화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개헌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런 문제도 함께 검토되고 적절한 대안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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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셜미디어와 공론장에 새삼스레 이른바 ‘86세대’에 관한 담론이 넘쳐나고 있다. 영화 <1987>의 흥행과도 관련이 있지만, 우리나라 정치지형의 변화에 대한 진단의 맥락도 크다. 단순한 가십 거리가 아니다. 경향신문이 ‘장기 386시대’라는 역사기술적 명명까지 하고 나설 정도로 이 세대의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은 시대진단의 핵심에 있다. 나 자신도 이 세대에 속하는데, 우리 민주주의의 미래와 이 세대, 아니 ‘우리’ 세대의 본격적인 주류 등극을 연결 짓는 논의들을 보면서 솔직히 조금 착잡하다.

‘1987’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가 잘 묘사하고 있듯이, 1987년 우리나라는 특히 우리 세대에 속하는 숱한 이들의 희생과 헌신 덕분에 ‘민주화’라는 역사적 성취를 이루어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민주세력과 군부 세력의 어정쩡한 타협에 기초했던 그 성취는 매우 제한적인 의미밖에는 가지지 못한다고 해야 한다. 그때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른바 ‘87년체제’는 기본적으로 ‘결손 민주주의’ 체제로서, 그동안 숱한 한계들을 노정해 왔다. 우리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체제가 권위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해야 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우리 사회는 이후 양극화와 불평등의 심화 때문에 큰 고통을 겪어 왔다. 최장집 교수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자신의 책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가 질적으로 나빠졌다”는 진단으로 시작해야 했을 정도로 문제는 너무도 현저하다.

틀림없이 우리 세대는 스스로에 대해 충분히 자랑스러워해도 된다. 지독한 입신양명주의를 문화적 유산으로 갖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야만적 억압에 맞서며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사회적 연대와 공동선을 위한 삶을 살았던 나의 많은 친구와 선후배들은 적절한 사회적 존경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촛불혁명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몫을 해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우리는 우리 사회가 지난 30년 동안 반쪽짜리 민주주의밖에는 가질 수 없었던 데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식 세대이기도 한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부르는 암담한 현실을 만들어낸 데 대해 깊은 책임감도 가져야 한다.

물론 우리가 무슨 악의를 가지고 우리 사회를 이렇게 만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선의가 넘쳐서 문제일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 우리 사회의 병든 현실을 만드는 데 일정하게 기여했다고 해야 한다. 어쨌거나 지금 우리는 대부분 이 사회의 기득권층에 속하고,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우리에게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완성하고 불의를 바로잡는 데 앞장서야 할 모종의 역사적 책임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의 한계에 대한 깊은 성찰부터 해야 한다. 사실 ‘박정희의 자식들’이기도 했던 우리들은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새 시대의 주인공인 양 자처해 왔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두 도그마에 사로잡혀 있었던 우리의 이데올로기적 환상과 거기서 비롯된 시대착오적인 정치적 세계관은 자주 우리 민주주의와 실천을 일그러뜨리곤 했다. 진보를 자처하는 우리의 가정과 직장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영원히 이 시대적 한계를 벗어던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우리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자식들이기도 한 청년세대의 성장을 지원함으로써만 우리의 책임을 가볍게 할 수 있다. 우리 세대의 탐욕이 ‘헬조선’을 만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지나치다. 하지만 우리들의 번듯함이 청년들의 절망이라는 기반 위에 서 있음은 분명하다. 청년들이 무기력하기만 하고 비트코인 투기나 한다고 비아냥거려서는 안된다.

그런 모습은 우리들이 앞장서 만들어내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막지도 않았던 우리 사회의 무한 경쟁과 승자독식의 삶의 문법이 만들어낸 결과다. 그들의 아픔을 어루만져 주고 그들이 희망을 가지게끔 도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일방적으로 답을 제시하며 이끌겠다고 나서지는 말자. 공감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면서 그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키우도록 배려하자. 바로 청년세대의 주체화와 역량강화를 돕는 게 우리가 책임을 다하는 가장 적절한 방식이다.

지금 우리 세대가 가진 권력과 영광은 어떤 역사적 행운의 결과이지 도덕적으로 마땅히 누려도 좋은 응분의 대가는 아니다. 오만이라는 악덕이 그 행운을 파멸의 시발점으로 삼지 않도록 철저히 경계할 일이다. 우리들이 그토록 우리의 성취라며 자랑스러워하고 싶은 민주주의는 무릇 단지 겸손한 자들만이 누리고 꾸릴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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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의 합당이 가시화되고 있다. 아직 향후 추이가 불투명하긴 하지만, 활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어떤 식이든 안철수발 정계개편이 이루어질 것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차기 대통령을 목표로 한 정치인 안철수의 집요함이 이 모든 사단의 출발점일 터다. 그는 지금 제대로 된 주인을 찾지 못한 보수의 땅을 개간해 자신의 영토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정치공학적 시선을 거두고 ‘촛불 이후’의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의 형성이라는 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볼 필요가 있다. 내가 볼 때 그의 이번 행보는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정치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어쩌면 이를 통해 정치인 안철수는 자신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가장 큰 역할을 수행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촛불혁명은 단순히 정권교체로 끝나서는 안된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낳은 지금의 ‘결손 민주주의’를 좀 더 온전하고 건강한 민주적 정치체제로 대체해야 한다. 이 체제에서는 무엇보다도 지금까지와는 달리 합리적인 진보와 보수가 다원적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지반 위에서 생산적 경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의 분열과 갈등은 모든 민주주의 사회의 영원한 구성 원리다. 우리 사회에서 지금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율이 아무리 높아도 보수적 성향을 가진 유권자들은 다른 여느 민주 사회에서처럼 언제나 상당한 비율로 존재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지금 우리나라에 이런 보수적 유권자들이 안심하고 머물 수 있는 정치적 보금자리가 없다는 데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자유한국당은 유사-파시스트 수구 정당일 뿐이다. 내년 지방 선거와 다음 총선을 통해 이 당을 완전히 퇴출시키거나 최소한 주변화시키지 않고는 이 땅의 건강한 민주주의 발전과 촛불혁명의 완수는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만약 현정부의 개혁이 지지부진해진다든가 하면 보수적 유권자들의 표가 갈 곳을 찾지 못해 결국 다시 한국당으로 몰릴 개연성이 결코 적지 않다. 이런 사태를 피하자면 합리적 보수 정당이 저 수구 정당을 결정적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바른정당의 이른바 ‘개혁 보수’ 실험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지금 김무성을 비롯한 저열한 정치적 기회주의자들의 배신 때문에 파산 위기에 처해 있다. 우리 보수 정치의 관성적 힘은 너무 강했던 데 비해 새로운 이념적 좌표 설정은 설득력이 너무 약했다. 단순히 보수가 진보에 대해 더 이상 ‘종북몰이’만 하지 않는다고 합리적 보수가 될 수는 없다. 복지 같은 진보적 의제를 얼마간 수용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일은 박근혜도 했다.

내가 볼 때 바른정당 정치인들은 보수개혁의 핵심적 지렛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시대착오적인 냉전적 ‘안보 보수’의 관점을 버려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유승민 대표는 지금도 ‘햇볕정책’에 대한 대립각 세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 중인 영화 <강철비>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받는다.” 남한의 수구 보수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한국당은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든 분단 상황을 악용해서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려 하고 있다. 우리의 보수가 합리적이고 개혁적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바로 이런 분단 체제의 망령을 떨쳐내야 한다. 기대컨대, 정치인 안철수에게 주어진 사명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분단체제를 평화적 대화로 극복하려 했던 DJ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약속했었다.

한국 보수의 개혁적 재정립은 헌법보다 국가보안법을 앞세우는 정치적 도착에서 벗어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과 북한과의 차이를 선명히 하되, 북한을 단순히 적대시하지만 말고 보수가 앞장서 그 차이를 인정하고 상호 공존을 지향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설픈 흡수통일에 대한 환상은 물론 적화통일에 대한 비현실적 공포도 버리고, 이미 현실인 한반도 양국체제를 공식화하고 안정화할 정책적 대안들을 찾아야 한다.

지금 두 당의 통합 시도를 두고 ‘보수 통합’이 아니라 ‘중도 개혁 통합’이 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치적 딱지가 아니라 민주당의 오른쪽에 분단체제에 매몰된 안보 보수의 시각을 버린 건강한 민주 정치 세력의 영토를 확보하는 일이다.

안철수 대표의 정치적 승부수가 이런 방향에서 결실을 맺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장은주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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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최우선적인 국정과제 중 하나인 ‘적폐청산’을 두고 시비가 끊이질 않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나 자유한국당 쪽이 그것은 결국 정치보복일 뿐이라며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까지 맞장구를 쳤다. 하긴 정권교체가 이루어질 때마다 이전 정권 담당자들의 비리를 파헤치는 일이 반복되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될 소지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전임 대통령의 국정농단에 맞선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가 헌법과 민주주의를 파괴했던 과거 집권세력의 잘못을 징치하는 일이 비열한 정치보복과 같을 수는 없다.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는 것은 우리 헌법상의 국가적 과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적폐청산을 넓은 의미에서 ‘전투적(방어적)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독일에서 배워 우리 헌법도 채택하고 있는 이 민주주의 개념에 따르면, 다양성과 차이를 존중하고 포용하는 민주주의라도 바로 그 토대를 부정하는 민주주의의 적에 대해서만은 관용적일 필요가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 그런 적을 용인할 경우 민주주의 자체가 파괴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자유한국당을 중심으로 한 수구세력이 과거 저질렀던 일들은 그냥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비리가 아니라 우리 민주주의를 그 근간에서부터 흔든 중대 범죄들이었다. 이런 범죄들을 정치보복이라는 비난이 두려워 단죄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우리 헌정 질서와 민주주의는 언제든 또다시 무너질 수 있다.

그러나 전투적 민주주의의 논리는 쉽게 악용될 수 있다. 김기춘 같은 유신체제 정초자들도 북한과 내부의 추종자들이라는 적으로부터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는 명분을 앞세웠다. 전투적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심각하게 위기에 처한 예외적인 상황에서 제한적인 방식으로 실천되어야만 정당화될 수 있다. 적폐청산도 마찬가지다. 사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세월호 참사의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뜬금없이 공론장에 끌어들인 적폐청산이라는 표현이 지금 우리 사회와 정부가 당면한 과제를 적절하게 드러내줄지 의문을 품을 만하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문제나 부정의를 일거에 해소하겠다는 뜻을 담은 그 표현은 점진적이고 절차적인 문제해결을 지향하는 민주주의에 어딘가 어울리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적폐청산의 논리가 자칫 ‘종북척결’과 같은 정치 문법을 가진 것으로 오해될 여지도 없지 않다. 그래서 적폐청산의 정치는 민주적 헌정 질서의 회복과 재발 방지라는 명확한 목표 설정을 잊어서는 안된다. 스스로 가장 중요한 적폐청산의 대상인 검찰이 중심에 서는 역설도 넘어서야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참된 민주주의의 수호자는 전투적 민주주의 개념에 따른 위헌 정당 해산 제도 같은 헌법적 장치들이 아니라 사실은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우리 시민들은 심각한 민주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말하자면 ‘민주적 우환의식’을 갖고 광장에 모여 절제의 미덕을 함께 갖춘 놀라운 열정으로 무너져가는 민주주의를 되살려냈다. 4·19, 5·18, 6·10을 거치고 촛불혁명으로 부활한 한국 민주주의의 경험은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시민들의 참여와 감시와 견제야말로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심화시킬 수 있는 핵심 동력임을 보여주었다.

이 경험이야말로 우리 민주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다. 민주주의는 결코 한꺼번에 완성되지 않는다. 새로운 상황과 도전에 직면하여 민주주의의 이상을 실천하고 그 적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새로운 방안들을 끊임없이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이제 적폐청산을 넘어 좀 더 확고하게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있는 ‘파수꾼 민주주의’(존 킨) 체제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민주주의는 권력을 가진 모든 사람과 조직을 공적인 감시와 통제 아래 놓이게 함으로써 권력 집중과 부패를 막아내는 다양한 실천과 기구들로 이루어진다. ‘민주시민교육’을 강화해서 시민들이 좀 더 성숙한 민주적 시민성을 갖추도록 하는 데서 시작해서, 더 많은 시민사회적 조직들이 활성화되도록 하고,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에 시민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시민의회’ 같은 제도들을 도입해야 한다. 언론이 권력 감시와 비판이라는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모든 국가적 권력 행사 과정에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더 잘 작동할 수 있도록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해야 한다. 가령 검찰을 감시하고 견제할 독립적인 ‘공수처’ 같은 기관을 서둘러 도입해야 한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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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혁명 1주년을 맞은 요즈음 민주주의 논쟁이 한창이다. 그 혁명에 참여해서 새로운 대한민국을 외쳤던 시민들의 열망을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처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이해하는 것이 옳은지가 쟁점이다. 최장집 교수와 박상훈 박사의 비판은 아주 신랄하다. 그런 식의 이해는 대의제를 본성으로 하는 현대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 오해에서 비롯되었단다. 심지어 의회를 우회하려는 문 대통령 식의 정치는 군주정의 행태일 뿐이라고 극언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야말로 오히려 촛불혁명이 열어 놓은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가 아닌가 한다.

임채원 교수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촛불혁명은 전형적인 ‘마키아벨리언 모멘트’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포칵의 개념으로, 시민들이 위기 상황에서 자신들이 속한 공화국의 불안정성을 확인하고 충만한 시민의식을 갖고 해법을 찾아 나서는 계기를 가리킨다. 우리 시민들이 딱 그랬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요구하며 지난해 10월29일부터 시작된 촛불집회 1주년을 맞아 지난 28일 서울 광화문광장 등 전국에서 이를 기념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나란히 놓아둔 종이컵들에서 촛불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시민이 ‘촛불은 계속된다’고 적힌 종이컵을 놓고 있다. 이준헌 기자

우리나라가 민주공화국이라고는 하지만 주권자 시민들이 언제나 이 나라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정농단 사태에 직면해서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심각하게 고장 나 있음을 깨닫고 “이게 나라냐?”고 물으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놀라운 시민적 덕성을 발휘하면서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외쳤다.

우리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민주공화국이 일부 특권 세력의 사익 추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 데 대해 분노했다. 그리고 그 세력의 충실한 하인들이었던 일부 ‘정치계급’에 대해서도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본디 민주공화국은 ‘데모스’, 곧 인민들이 전적으로 지배를 행사하는 좁은 의미의 민주정의 요소와 함께 엘리트들의 일정한 지위와 역할을 인정하는 귀족정의 계기도 가진 ‘혼합정체’이기는 하다. 실제로 대의민주주의는 그런 엘리트들의 정당한 통치를 보장하는 기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허울뿐인 민주공화국에서는 지금까지 과두 특권 세력과 그 세력을 대변하는 정치계급이 전체 정치를 자신들의 부패를 은폐하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해 왔다.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현행 선거제도를 악용하고 공론장의 민주적 정당화 과정을 악랄하게 왜곡한 덕분이다. 지난 촛불혁명에서 시민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깨닫고 스스로가 나서 그런 상황을 바로잡고자 했던 것이다.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시민들이 새삼 주권자임을 확인하고 스스로 정치 과정의 중심에 서겠다는 선언을 했을 때, 그것은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부정하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은 당연히 대의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시민들이 의회와 정당들을 불신하는 것은 그것들이 정작 가장 본질적인 책무, 곧 시민들을 대의하는 데서 근본적으로 실패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는 국민들이 모든 사안을 직접 결정하는 무슨 ‘국민투표정치’ 같은 걸로 의회정치를 대체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 요구의 핵심은 정치가 시민들의 요구에 더 잘 반응하게끔 정치의 행태와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라는 것이다. 또 그렇게 하기 위해 시민들이 더 많이 참여하고 감시하며 견제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을 갖겠다는 것이다. 요점은 현재의 사실상의 과두정을 혁파하고 참된 ‘민주적’ 공화정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이 추구하는 과두 특권 세력의 ‘귀족정치’에 대한 거부와 경계를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부정이나 정치혐오라 해서는 안된다.

정당정치가 제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요구도 그 자체로는 옳다. 그러나 그런 요구는 우리 정당정치가 왜 아직도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성찰과 함께할 때라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아직도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가장 중요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우리 정당들, 특히 민주당과 같은 개혁적 진보를 자임하는 정당의 발전 동력이 어디에 있는지를 확인시켜준 것이다. 그것은 곧 민주당이 ‘힘 없는 사람들의 힘’, 곧 ‘시민적 권력’을 위한 정치적 기구로서 자기 정립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난겨울 시민정치와 의회정치가 서로 호응했을 때 어떤 정치적 성취를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했다. 민주당은 바로 그 역사적 교훈을 그 정체성의 중핵에 새겨둘 수 있어야 한다.

이념과 핵심 가치는 물론이고, 조직 형태와 정치적 의사결정 과정을 주권자 시민의 합리적 이해관계와 요구라는 기반 위에 세워야 한다. 지금 민주당이 이런 일을 아직 제대로 못하고 있어서 걱정이지 너무 많이 해서 문제는 아니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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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3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북한의 리용호 외무상은 최근 유엔에서 행한 연설에서 ‘국제적 정의’라는 개념을 통해 자국의 핵실험을 정당화했다. 미국의 횡포 때문에 유엔이 추구하는 정의가 실현되지 않고 있어서 자위를 위해 핵개발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은 철저하게 정의의 원칙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금 국제사회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반항한다고 하여 피해자에게 제재를 가하는 만고의 부정의”를 저지르고 있다고 항변했다.

유엔이 상임이사회에 속한 강대국들의 입김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있어 개혁이 필요하다거나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부당하다는 따위에 대한 지적이야 옳다. 그러나 북한이 수차례 핵실험을 강행하며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는 현 상황은 어떤 경우에도 정의로 포장될 수 없다. 북한은 지금 김정은 3대 세습정권을 유지해야 한다는 편집증적인 강박 때문에 한반도 전체 인민들의 생명과 안녕을 걸고 위험한 도박을 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피해자 코스프레가 참으로 가증스럽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사회에서도 미국에 당당하게 맞서는 북한의 저 결기만은 높이 사야 한다는 이들이 의외로 많은 듯하다. 특별히 ‘종북적’이어서라기보다는 강한 민족주의적 정서 때문일 터다.

적잖은 시민들이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순응적인 행태밖에 보이지 못한다며 실망감을 토로하고 있는데, 여기에도 우발적 전쟁에 대한 걱정만큼이나 민족적 자존감의 손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하고 있지 않을까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민족주의적 정서 이면에는 강한 서구중심주의가 숨어있다. 늘 민족 자주성을 강조하는 북한이 내세우는 저 국제적 정의에 대한 관념은 개별 국가의 배타적 주권성의 이념을 인정하고 고취했던 17세기의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른 서구 중심의 근대적 국제 질서의 산물이다. 우리 사회의 많은 성원들이 통일을 지상과제로 삼을 때 당연시하고 있는 전제, 곧 하나의 민족은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상도 사실은 애초 같은 뿌리에서 나와 서구의 근대 역사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이런 인식틀은 이제 버릴 때가 되었다.

오늘날 새롭게 확립되어야 할 지구적 정의에 대한 이상은 더 이상 개별 국가의 절대적 주권성의 원칙 위에 서서는 안된다. 주권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전 세계 만민의 자유와 인권을 상호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국제 질서의 확립과 작동을 위해 일정하게 제약되고 순치되어야 한다. 북한같이 자국민의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국가의 주권 행사를 무턱대고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 정의의 관점에 서야 미국 같은 강대국들의 패권 추구도 유엔 같은 국제기구와 국제법의 틀 안에 더 잘 묶어둘 수 있다.

이때 평화는 정의의 절대적 전제다. 아니, 평화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정의다. 그 어느 국가나 민족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아무리 목적과 명분이 그럴 듯하다 해도, 한반도에 사는 수천만의 생명과 안녕을 담보로 북한은 핵실험을 하고 미국은 그에 맞서 군사적 응징을 위협하는 지금의 상황은 그 자체로 심각한 인권 침해요, 거대한 불의가 아닐 수 없다.

하루빨리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야 한다. 북한에 대해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거나 우리도 핵무장을 해야 한다는 따위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런 주장도 결국 남한만을 대상으로 한 변형된 민족주의의 발로로서, 정의롭지도 못하고 현실적이지도 않다. 이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한반도 문제에 대한 그동안의 인식틀을 근본적으로 성찰하면서 항구적인 한반도 평화체제를 만들어내기 위한 새로운 접근법을 발전시켜야 한다.

하나의 민족은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형성해야 한다는 이상부터 의심하자. 평화가 민족이나 통일 같은 가치보다 우선해야 함도 분명히 하자. 민족통일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통일도 평화도 불가능하게 만들지는 않았는지 의심해 봐야 한다.

그 평화체제의 출발점은, 사실은 이미 현실이지만 부정되고 있는, 한반도 양국체제를 공식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북한을 하나의 완전한 독립 국가로 인정하고, 우리가 앞장서 북·미가 평화협정을 맺고 수교를 하게 도와야 한다. 내부적으로는 우리 헌법의 비현실적인 한반도 영토 조항부터 삭제하면서 북한도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주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민족이 두 개의 국가로 나뉘어 평화로운 외교 관계를 맺는 체제는, 조금 낯설지는 모르지만 무슨 역사적 모순은 아니며, 오히려 지금의 교착 상태를 풀 수 있는 아마도 유일한 해결책일 것이다.

<장은주 | 와이즈유(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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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국회가 개원했다. 문재인 정부는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매우 성공적으로 출범하기는 했지만, 이제 본격적인 시험대에 들어섰다. 그 어지럽기로 소문난 ‘여의도 정치’의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야당들은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새 대표는 ‘강한 야당’에 대한 결기를 분명히 했고, 자유한국당은 엉뚱한 트집을 잡아 아예 국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정의당을 제외한 야 3당은 이른바 ‘반문연대’를 형성할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다. 자칫 정국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많은 개혁과제 해결이 때를 놓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벌써부터 몇몇 논객들은 문 대통령이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강한 열망이나 국정운영에 대한 높은 지지율에만 기대려 한다며 우려하던 터였다. 문 대통령이 국민과의 소통만 내세우고 의회정치와 정당정치의 문법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문 대통령이 대의제를 채택한 헌법 정신을 부정하고 있다거나 ‘지지율 독재’를 한다며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면서 협치를 주문하고 타협과 양보를 요구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아직도 진행 중인 ‘시민혁명’의 시간을 보내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핵심 과제의 하나가 바로 정치적 체제 전환이다. 촛불시민혁명으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87년 체제의 통상적인 정부들과는 달리 이 체제를 끝장내고 더 좋은 질을 가진 새로운 민주주의 체제를 탄생시켜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을 갖고 있다. 촛불시민들은 무엇보다도 자유한국당으로 대변되는 반민주 적폐세력을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시키라고 명령했다. 툭하면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지만, 자유한국당은 이념적 편협함으로 보나, 그동안의 정치행태를 보나 도무지 다원적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건강한 보수 정당이라고 보기 힘들다. 이번의 국회 보이콧 작태만 보더라도 이는 너무도 분명하다. 이 당은 사법부의 판단을 정부의 언론장악 시도와 연결시키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집권기에 사법부도 조종하고 언론도 장악해 왔음을 사실상 고백하는 것일 뿐이다. 자신들이 그랬으니 현정부도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 비록 우리가 자유한국당의 현실적 위상을 무턱대고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저 당이 자유민주주의를 팔면서 우리 정치의 중심축이 되는 것을 더 이상 두고 보아서는 안된다. 만약 문 대통령과 민주당이 여소야대 현실을 빌미 삼아 이런 반자유민주주의적 수구 정당과 섣부른 타협을 해서 촛불정신을 배반한다면, 그런 선택이야말로 오히려 커다란 민심이반을 낳을 것이다.

협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교과서적인 의회정치의 문법이 아니라 진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정치적 동맹이다. 과거로 회귀하려는 반문연대의 시도에 맞서 촛불시민들의 명령에 따라 박근혜 대통령 탄핵에 동참했던 정치세력들의 연대, 말하자면 ‘촛불연대’를 새로운 차원에서 복원해 내야 한다. 그 연대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자유롭고 민주적인 기본질서를 지켜내기 위한 연대였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극중주의가 자유한국당과 민주당 사이를 기계적으로 저울질하지 못하게 막아야 하고, 바른정당이 보수대연합을 명분으로 자유한국당을 기웃거리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야당들이라고 그저 들러리만 서려 하지는 않을 터이다. 민주당이 앞장서서 자유한국당이 없거나 소수화된 미래의 새로운 정치 체제에 대한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면서 다른 야당들에 분명하고 실질적인 정치적 이익을 줄 수 있는 연대의 끈을 제시해야 한다. 소수 정당의 생존과 위상을 확실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확대하는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이 그런 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개혁을 통해 진보 정당이 더 커지고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이 자유한국당의 자리를 대체하는 다당제가 성립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양당중심제보다는 민주당을 위해서나, 사회개혁을 위해서나 훨씬 낫다. 그런 방향의 선거제도 개혁은 문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지 않는가.

직접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언제나 민주주의의 질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영국의 브렉시트 투표가 단적인 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기본적으로 우리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했다. 우리 대의제는 다름 아니라 시민들을 제대로 대의하지 못해서 위기에 빠졌다. 무엇보다도 승자독식을 원칙으로 하는 현행 단순다수결 소선거구제에서는 패배한 후보를 지지한 시민들의 의사는 전혀 대변되지 못한다. 정치권은 시민들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그 열망에 고장 난 대의제를 수리함으로써 응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바람직한 선거제도에 대한 숙의의 과정을 ‘시민배심원단’에 맡겨도 좋겠다.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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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민주적인 정당성을 가진 정부라도 쉽게 결정해서는 안되는 국가적 의제들이 있다. 특히 국가 전체의 운명과 관련되거나 그 결정이 미래 세대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사안들이 그렇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을 계속할 것인지의 문제 같은 것이 전형적인 예다. 이런 문제에 대한 결정의 정당성은 통상적인 사안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확보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를 단순히 전문가들의 결정에 맡길 수는 없다.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자신들의 밥그릇 챙기기가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사안을 판단하리라는 보장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설사 그들이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일이 가능하다고 해도, 문제되는 사안은 원전 관련 전문가들이 전혀 그 전문성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적·환경적 차원의 문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들로서는 기껏해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근거로 도덕의 상대성을 주장하는 식의 억지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사안과 관련된 전문가가 누구인지는 전혀 분명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정부가 ‘시민배심원제’를 통해 결정을 내리기로 한 것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거는 과두정에 어울리고 민주주의의 수단으로는 추첨이 맞다고 했다. 성별, 연령별, 지역별 균형 등을 고려한 제비뽑기에 의해 선출될 시민배심원단들은 기본적으로 원자력 산업과 무관하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사적 이익이 아니라 그야말로 국가공동체 전체의 공동선을 위해 가장 좋은 선택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최선의 판단을 내릴 가능성을 더 크게 갖고 있다. 게다가 이 시민배심원단에서는 인구를 구성하고 있는 다양한 계층과 집단의 표준적인 대표자들, 곧 농부, 노동자, 자영업자, 사무직원, 전업주부, 실업자 청년 등과 같은 보통의 시민들이 왜곡 없이 자신들을 대변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방식은 가장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우리 사회 전체의 합리적 민의를 최소한 아주 근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한다.

혹시 너무도 평범한 시민들이라 사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그릇된 판단을 하지 않을까? 시민배심원단은 단순히 사안에 대해 의견을 제출하는 역할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심층적인 학습을 하고 다른 배심원들이나 일반 시민들의 의견을 폭넓게 듣고 토론을 한 뒤 숙고된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최초의 의견을 바꿀 수도 있고, 아무튼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안을 선택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판단의 합리성에도 큰 신뢰를 보낼 수 있다. 더구나 다양한 연령과 계층과 집단의 성원들로 구성된 시민배심원단은 폐쇄적 전문가 집단보다 사안을 훨씬 더 다각도로 보면서 창의적인 해법을 제시할 수도 있다. 진리 발견의 가능성을 높여주는 민주주의의 이 인식론적 우월성은 다양한 사례와 경험에서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데도 이번의 정부 결정을 두고 도전이 만만찮다. 시민배심원제를 도입하기로 한 데 대해 사회적 논의 과정이 충분치 않았다고 문제제기하는 정도를 넘어 위법적이라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운영주체인 공론화위원회와 정부 사이에서도 시민배심원단이 심의만 해야 하는지 아니면 결정의 책임도 함께 져야 하는지의 문제에 대해서 얼마간 혼선을 보였다. 마침내 공론화위원회 스스로 결정에 따른 부담을 피하려는 듯 시민배심원단 대신에 ‘시민참여단’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했단다. 그러나 시민배심원제 자체를 포기하면 안된다. 오히려 이번 기회에 이런 민주적 심의 과정을 더 확고하게 제도화하고 뿌리내리게 할 필요가 있다.

개헌이나 선거제도 개편 같은 사안들도 보자. 문재인 대통령은 내년 지방선거 때 개헌을 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를 가진 우리 정치권이 권력구조 문제에 대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은 개헌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선거제도 개편과 관련해서도, 정치권은 얼마 전 기득권 정당들을 중심으로 선관위의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 권고를 무시하고 현행 소선거구제를 약간 손보는 데서 멈추고 만 선택을 한 바 있다. 이런 사안들에 대해서는 단지 시민배심원단의 공정한 숙의 같은 것을 거침으로써만 모든 정치세력이 합의할 수 있고 민주적 정당성도 갖는 안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원의 문제들에까지 시민배심원단을 확대하고 상설화할 필요가 있다. 그걸 ‘시민의회’라고 부르자. 이 시민의회는 시민적 주권성을 좀 더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는 결정적 통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시민의회를 도입하는 것이야말로 촛불혁명을 비로소 ‘혁명’이게 할 참된 성취 중 하나가 아니겠는가.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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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 11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문재인 정부는 ‘촛불혁명’을 통해 탄생했다. 그 혁명은 80%에 가까운 압도적 다수의 국민들이 지지했고, 지금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집권 초반 지지율도 그쯤 된다. 당연하게도 그 지지는 콘크리트처럼 단단할 수 없고, 다양한 방향에서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다. 벌써 ‘범진보’ 진영 안에서부터 균열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참여정부 때부터 보아왔던 익숙한 풍경이라 새삼스럽지는 않지만, 사실은 바로 그래서 사소하게 여길 문제는 아니다.

노동운동이 먼저 총파업을 감행하며 도전했다. 촛불혁명에 조직적으로 가장 앞장섰던 세력으로서 이 정부의 출범에 대해 가진 나름의 지분을 정치적으로 실현하겠단다. 그러면서 각종 노동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획기적 실마리가 마련되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는 언제든지 격한 투쟁의 상대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경고장을 날렸다.

여성운동의 견제도 만만치 않다. 양성평등의 실현 없는 민주주의는 사이비 민주주의라며 터무니없이 마초적인 여성관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적이 있는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해임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까지 했던 문 대통령으로서는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정치적 압력이다.

문 대통령의 열성 지지자들은 그런 도전과 견제를 마뜩잖아 한다. 그렇지 않아도 사방팔방에서 적들의 공격에 시달리고 있는데, 힘이 되어야 마땅할 것 같은 세력들이 그 적들과 함께하거나 최소한 그 적들을 돕고 있단다. 그들 중 일부는 스스로를 ‘신좌파’니 어쩌니 하며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과 날카롭게 구분 짓고는 그 운동들에 대한 서운함을 날선 적대의 언어로 표출하기도 한다.

이런 종류의 균열을 무턱대고 비난하면서 억지 연대를 강요하는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것을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서로 다른 ‘정의’의 관점들이 충돌한 결과라고 이해할 수 있다. 모두가 정당한 정의의 요구들을 제기하고 있지만, 그 초점과 차원이 얼마간 어긋나서 불가피하게 생길 수밖에 없는, 감내해야 할 불협화음 정도로 말이다.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현실을 생각할 때, 비정규직 철폐 같은 좀 더 평등한 ‘분배 정의’에 대한 요구만큼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민주정부가 민감하게 다루어야 할 문제는 없어 보인다. 오랜 여성 억압의 역사를 생각할 때, 양성평등의 이상이 단순히 형식적인 기회균등의 차원을 넘어 실질적으로, 곧 제도적으로 또 문화적으로 관철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젠더 정의’의 요구도 최소한 그만큼은 절박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정의의 요구들은 단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지반 위에서만 실현가능할 것이기에, 우선 그 지반을 공고히 하고 심화시키는 ‘민주주의적 정의’부터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물리치기도 쉽지 않다.

긴장과 갈등 자체를 회피할 방법은 없다. 유일하게 올바른 해법도 없다. 차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키고 고무하기까지 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공동의 지반을 강화시킬 수 있는, 말하자면 ‘함께 또 따로’의 변증법이 필요할 따름이다. 여기서 변증법이라는 표현은 ‘대화를 통한 진리 발견술’이라는 말의 본래적 의미를 염두에 두고서 붙인 것이다. 그러니까 진정성 있는 소통만이 유일한 해법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가 충족되어야 한다.

우선 ‘공동선’에 대한 지향이다. 그 어떤 정의의 요구도 ‘모두에게 좋은 것’의 우선성을 넘어서려 해서는 안된다. 우리의 민주공화국은 바로 그 공동선의 구현체로 이해되어야 하며, 모든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그 공동선의 요구로 번역되고 또 그를 통해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상호성과 보편성이라는 기준에 따른 검증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오류 가능주의’의 수용이다. 사람들이 지닌 신념과 열정은 삶과 사회 진보의 동력이다. 그래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한답시고 스스로가 지닌 과학적, 정치적, 도덕적 인식들을 무턱대고 상대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들이 절대적 진리는 아니며 언제든지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는 점만은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과 참된 소통을 할 수 있다.

민주주의적 정의 없이는 분배 정의도, 젠더 정의도 실현 불가능하겠지만, 그런 요구들을 무시하는 민주주의 또한 성립할 수 없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큰 틀에서 같은 편이어야 할 사람들과도 이견과 차이를 조율하며 소통하는 데 아직 전혀 익숙하지 못하다.

지금 다들 자기만의 정의를 내세우며 서로 시퍼렇게 날만 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되돌아볼 일이다.

장은주 | 영산대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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