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철 MBC 사장이 결국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가 어제 임시이사회를 열어 김 사장에 대한 해임안을 의결했다. 9명 이사 중 5명이 찬성했다. 방문진이 MBC 사장을 해임한 것은 1988년 설립 이후 처음이다. 내년 2월 임기가 끝나는 김 사장은 뒤늦게 해외출장을 포기한 채 구명로비에 나섰지만 4번째 해임안은 막지 못했다. 김 사장 해임은 늦었지만 다행스러운 결정이다. 이번 계기를 보복인사 탓에 쫓겨난 MBC 노조원들의 현장 복귀와 함께 MBC 정상화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MBC 사태는 정치권력에 의한 낙하산 인사의 부작용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2010년 2월 김 사장 취임 후 MBC는 편파방송 시비가 끊이질 않으면서 국민 신뢰도는 바닥을 맴돌았다. 김 사장은 노조의 시정 요구를 무자비한 인사보복으로 틀어막았다. MBC는 170일간의 장기파업과 김 사장 개인 비리 의혹이 더해지면서 수렁에 빠졌다. 김 사장은 물러났지만 그가 남긴 생채기는 너무 크다.


떠나는 김재철


김 사장 해임은 정상화의 시작일 뿐이다. 인사보복으로 해고되거나 업무와 무관한 직종으로 쫓겨난 100명 이상의 MBC 노조원들은 현장으로 돌아와야 한다. 법원도 김 사장의 보복인사를 철회하도록 결정한 바 있다. 공정성 시비에 말린 MBC가 국민 신뢰를 회복할 방안을 찾는 것도 다급한 과제다.


방문진은 “조만간 후임 사장 공모절차를 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이 정치권 입맛대로 낙하산 사장을 앉힌 결과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후임은 MBC 구성원들의 신뢰를 바탕으로 방송을 이해하고 정치권 입김에서 자유로운 인사가 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김재철 파동이 재연될 수 있다.


구시대적인 방송사 지배구조를 다시 논의할 시점이 됐다. 방문진의 여야 추천 이사 구성비가 6 대 3으로 돼 있는 한 사장 인사를 둘러싼 정치적 논란은 불가피하다. 이를 해소하려면 방문진 이사 구성에 MBC 내부나 언론계 인사의 참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사장 인선이 정부 여당의 독주로 흐르지 않도록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사장추천위를 구성해야 한다. 사장 선임 때 방문진 이사 과반수 찬성이 아닌 3분의 2 이상으로 제한하는 방안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여야는 정부조직 개편안을 마무리하면서 방송 공정성 특위를 구성키로 합의한 바 있다. 여야가 머리를 맞대고 MBC는 물론 KBS의 방송 공정성을 함께 담보할 수 있는 개선안을 내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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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터졌다.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가 어제 자진 사퇴했다. 한 후보자는 위원장직 수행의 적합성을 둘러싼 논란의 장기화 때문이라고 사유를 밝혔으나 수십억원대의 해외 비자금 계좌를 운용해온 의혹이 불거진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된 듯하다. 이로써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총리와 장·차관급 인사 7명이 검증 과정에서 물러났다. 역대 정부의 출범 초기와 비교할 때 최다 낙마 기록이다. 급기야 청와대 책임론을 제기하고 나선 여당의 절박한 심경이 이해된다. ‘인사 사고’를 넘어 ‘인사 참사’라 할 만하다.


(경향신문DB)


한 후보자를 사퇴로 내몬 의혹은 놀랍고도 충격적이다. 그는 해외에서 수십억원대의 비자금을 굴리고, 이 과정에서 세금을 탈루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적잖은 각료들의 ‘4대 필수과목’으로 일컬어졌던 병역 문제와 표절, 탈루, 위장전입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복지국가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세원 확보책의 일환으로 강조해온 지하경제 양성화는 물론이고 조세정의에도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렇지 않아도 박근혜 정부의 장·차관 인사 검증에서 무기 브로커나 성 접대, CIA 연루설 등을 포함해 생소한 전력들이 쏟아지고 있던 터다. 현재 제기된 의혹만으로도 수사가 불가피해 보인다. 일각에서 한 후보자가 공직자로서의 의식을 결여하는 바람에 사달이 났다고 하는 모양인데 인사·검증팀의 무능을 자인하는 것이나 진배없다.


파문이 커지자 새누리당에서 ‘친박’으로 통하는 인사들이 자괴감과 반성을 토로하면서 청와대의 책임론과 검증 라인에 대한 문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사 참사를 시인하는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해법은 아니라고 본다.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의 과오를 감싸기 위해 사태의 본질을 감추려는 꼬리자르기라는 인상을 줄 뿐이다. 청와대 인사 중에 박 대통령의 뜻을 거스르며 ‘아니다’라고 말할 인사들이 누가 있는가. 인사위원장을 겸한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검증의 실질적 책임자인 민정수석에게만 책임을 돌린다면 납득할 국민이 얼마나 되겠는가. 작금의 사태는 박 대통령이 각급의 인사 내내 보여주고 있는 ‘나홀로 인사’ ‘수첩 인사’의 귀결이라고 보는 게 옳다.


박 대통령은 잇단 인사 실패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며칠 전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물러나자 후임자로 김관진 현 장관을 유임시키면서 간접 화법이지만 오히려 정치 논쟁이나 인사청문회를 탓한 바 있다. 고위 공직자가 국정수행 능력이나 전문성은 물론이고 높은 도덕성을 갖춰야 한다는 대통령의 인식이 확고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진짜 이유다. 박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과오에 대해 사과하고, 검증 책임자를 문책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것만이 유사 사태의 재연을 막을 수 있는 첩경이다. 그 어떤 훌륭한 인사·검증 시스템도 인사권자의 철학이나 소신을 능가할 수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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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대학의 등록금 인하나 자체 장학금 확충 노력에 따라 지원하는 ‘국가장학금 2유형’ 지급액이 지난해보다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민주통합당 유기홍, 진보정의당 정진후 의원이 한국장학재단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올해 배정된 국가장학금 2유형 예산 6000억원 가운데 대학이 자구 노력을 인정받아 지급받게 된 금액은 55.8%인 3349억원에 불과하다. 배정된 예산마저 거의 반토막이 날 정도로 국가장학금 2유형이 대학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실효성도 떨어지는 등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지난해 93.4%에 이르던 국가장학금 2유형 집행률이 올 들어 급감한 것은 대학이 자체 재정 확보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 제도를 외면한 탓이 크다고 본다. 15개교는 아예 신청조차 하지 않았고, 91개교는 자체 장학금을 한 푼도 늘리지 않았으며, 등록금 인하율도 전체적으로 0.55%로 시늉만 하는 데 그쳤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배정된 예산도 쓰지 못하는 일이 벌어져 그 피해가 고스란히 학생들에게만 돌아가게 됐다. 정부가 직접 학생들에게 지급하는 ‘국가장학금 1유형’도 성적 등의 조건 때문에 정작 지원이 절실한 저소득층은 소외되는 것과 같은 맥락의 제도적 실패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장학금 개선하라 (경향신문DB)


‘반값 등록금’의 대안으로 등장한 국가장학금이 시행 1년 만에 학생·학부모의 원성을 낳고 대학의 외면을 받는 현실은 제도 자체의 근본적인 한계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는 상황에서 등록금 부담을 줄이고 대학 교육의 질을 높이는 일은 국가적 차원에서 풀어나가야 할 보편적 정책 사안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박근혜 정부는 고등교육재정교부금 제도 등을 통한 보편적 반값 등록금 정책을 도입하자는 제안을 비롯해 등록금 정책 전반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주장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기를 바란다.


‘알바’를 전전해야 하는 저소득층 학생에게 높은 성적 기준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실익 없는 제도를 내놓고 대학의 노력 부족이라든가 도덕적 해이만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수도권과 지방, 이른바 ‘주요 사립대’와 중소 규모의 사립대를 같은 잣대로 지원하는 것은 불공평하다. 단기적으로는 이런 문제점을 보완해 국가장학금 제도를 정교하게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당장은 이번에 배정되지 못한 절반가량의 국가장학금 2유형 예산을 성적 제한 때문에 받지 못한 1유형 학생 및 저소득층에게 확대 지원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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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세계인의 가슴에 트라우마를 남겼다. 강진에 따른 거대한 해일파가 모든 도시 시설물을 집어삼킬 듯 덤벼드는 모습은 아직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방사능 누출사고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일본 정부의 무능과 자연재해의 공포에 지구인들은 치를 떨었다. 이후 원전 안전성이 초미의 관심사로 부각되면서 세계 각국은 앞다퉈 내진설계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만 예외다. 정부가 구조물의 내진설계 기준을 완화하는 방안을 추진 중인 것으로 드러났다. 소방방재청이 최근 공청회에 내놓은 국가지진위험지도를 보면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의 내진설계 기준을 현재 진도 6에서 5.5 수준으로 낮추는 것으로 돼 있다. 지진위험지도는 내진설계 기준을 정하는 기초자료다. 소방방재청은 “정부 최종안이 확정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발상만 갖고도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경향신문DB)


정부의 내진설계 기준 재검토는 후쿠시마 사고가 단초가 됐다. 1997년 작성된 지진위험지도를 현실에 맞게 바로잡자는 게 기본 취지다. 전문가들조차 “한반도에서 규모 7 이상의 지진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던 터다. 하지만 결과물은 정반대로 나왔다.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 “기준을 낮추는 데는 토목학회의 이해가 반영된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기준이 이대로 낮아지면 건축물을 짓는 데 필요한 철근과 콘크리트 양이 10%가량 줄어든다고 한다. 건축비를 아낄 요량으로 설계기준을 완화했다면 사익 추구를 위해 국민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범죄행위와 다를 바 없다.


한반도가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입증됐다. 최근 30년간 ‘규모 3’ 이상의 지진만 300여 차례다. 매년 50차례 이상 지진이 빈발하고 있다. 하지만 대비책은 허술하기 그지없다. 1960년대 원전 건설 이후 내진설계 개념이 도입됐지만 서울시내 건축물 중 내진설계 기준에 맞는 것은 7%에 불과하다. 국내 원전은 진도 6.5에 견디도록 설계돼 있지만 후쿠시마 원전이 7.3의 지진과 해일에 당한 것을 감안하면 안전을 장담할 수 없다.


국가 재난방재의 최우선 고려 대상은 뭐니 뭐니 해도 국민안전이다. 당장은 경제성 논리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대형 재난의 참사를 생각하면 한낱 수사일 뿐이다. 최근 잇따르고 있는 화학물질 누출 및 산업재해도 안전불감증이 빚은 결과다. 경제성을 앞세운 내진설계 기준 완화 방침을 당장 폐기하고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언제까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노릇을 되풀이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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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원영 | 환경운동연합 처장


 

우리 땅을 두고 핵위협, 전쟁위협이 만연하고 있다. 전쟁은 최악의 선택이다. 전쟁은 모든 생명과 자연을 가리지 않고 파괴한다.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으며 우리의 현재는 물론 미래를 철저히 파괴할 뿐이다.


북한은 핵실험을 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원칙을 저버리더니 한·미 합동군사훈련인 ‘키 리졸브’ 훈련을 문제 삼아 ‘정전협정을 폐기하겠다’며 전쟁위협의 수위를 더해 갔다. 핵폭격기 B-52와 핵잠수함 ‘샤이엔(Cheyenne)’의 등장에 대해서 “핵으로 위협하면 그보다 더 강한 핵공격으로 맞설 것”이라고 위협 공세를 이어갔다. 전쟁과 핵 위협은 북한 스스로도 자멸하는 길인데 이런 소아병적인 태도로 국제사회에서 얻을 것이 없다.


북한의 이성을 잃은 핵위협, 전쟁위협에 대응하는 한국 정부와 미국 역시 유아적이긴 마찬가지다. 한국의 국방부는 기자들을 모아놓고 북한 전역을 공격할 수 있는 미사일을 실전 배치했다고 자랑했다. 한·미 양국은 지난 7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추가 제재 결의를 이끌어냈다. 기존 제재 내용이 권고조항에 그쳤던 것을 상당 부분 의무화하고 제재 범위도 넓혔다. 북한을 더욱 고립시키고 궁지로 몰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결코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북한은 기다렸다는 듯이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핵선제 공격권’을 행사할 것이라며 ‘제2의 조선전쟁’을 위협했다.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규모는 줄였다고 했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에 맞서겠다며 핵폭격기를 8일과 19일 한반도 상공에 출격시키고, 핵잠수함을 13일부터 부산항에 정박해 23일까지 한·미 합동훈련에 참가시키고 있다. 남북이 서로 공멸하는 어리석은 핵전쟁의 위협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핵을 머리에 이고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이는 이중적이고 자기모순적인 태도다. 박 대통령은 핵무기 개발 기술인 우라늄 농축과 재처리 기술을 허용하는 한·미 원자력협정의 개정을 미국에 지속적으로 요구해왔다. 이것부터 중단해야 한다. 우라늄 농축은 미국의 우라늄 농축 공장에 지분투자로, 재처리 문제는 파이로프로세싱 한·미 공동연구 10년으로 이미 잠정 합의를 보고 실무작업만 남은 상태인데도 개정시한 1년을 남겨놓고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갑자기 핵무기 기술을 요구하는 것은 북한을 자극하고 미국을 압박하는 행위다. 북한 핵실험 도발에 박 대통령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한·미 양국과 북한의 정치인들이 벌이는 핵과 전쟁 위협은 달리 해답이 없다. 서로 무기를 내려놓는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미 전쟁을 겪었고 올해가 정전 60년이 되는 해다. 전쟁이 얼마나 무참히 삶과 정신을 송두리째 파괴하는지 잘 알고 있는, 전쟁을 겪은 기성세대들이 더 강경한 발언을 하면서 전쟁위기를 높이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진다면 60년 전의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모든 것이 파괴될 것이다. 남북한 모두가 사라져버리고 한반도는 향후 수백년간 살 수 없는 땅이 될 것이다. 우리는 공멸을 막지 못한 세대로 기록되어서는 안된다. 


(경향신문DB)


서로를 향해 위협하면서 달리다보면 브레이크를 걸 수 없는 상태가 올 수도 있다. 지금은 우선 이성을 되찾고 진정해야 한다. 즉자적인 반응과 공격적인 언행은 피하고 한번 쉬고 차분하게 대응해야 한다. 무기를 드는 이에게 오히려 무기를 버린 빈손을 보이고 대화를 요청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고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이 땅을 두고 벌이는 죽음의 도박을 중단하라. 무기를 버리고 대화를 시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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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민주통합당 의원이 어제 5·4 전당대회에서 당권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앞서 같은 뜻을 밝힌 이용섭, 강기정 의원을 포함해 당권 도전자는 3명으로 늘어났다. 고 김근태 전 상임고문계의 민주평화연대(민평련)도 조만간 단일 후보를 내는 등 도전자는 1~2명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비주류의 좌장 격으로 대세론의 중심에 서 있는 김 의원이 출마를 결정함에 따라 민주당 전대의 막이 올랐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경향신문DB)


이번 전대는 흔한 말로 ‘죽느냐, 사느냐’를 넘어서는 그 이상의 무엇이 돼야 한다고 본다. 누가 대표를 맡느냐도 중요하지만 죽기를 각오해야 겨우 살아날 구멍이라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민주당만 그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다. 총선, 대선을 내리 패하고도 절박한 위기의식이나 비상한 결기가 느껴지지 않아서다. 패배를 책임져야 할 지도부가 제대로 된 반성의 말 한마디 내놓지 않는 게 민주당의 현주소다. 주류로서는 비주류가 대안이냐고 따지기 전에 먼저 책임지는 모습을 보이는 게 최소한의 도리다. 이마저 없으니 지지자들도 마음을 접거나 지쳐가는 중이다. 전대가 당의 환골탈태를 위한 모색의 과정이라기보다 여전히 당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또 하나의 계파 싸움으로 비쳐지는 이유다.


5·4 전대가 출발과 함께 ‘김한길 대 반김한길’ 구도로 짜여지는 모양새부터 이상하다. 김 의원의 우세가 점쳐지자 범주류 후보들이 만나 그들끼리의 연대를 타진했다고 한다. 당의 혁신을 위한 토론의 장이었다는 설명이나 주도권 상실을 우려한 집단적 대응으로밖에 읽히지 않는다. 물론 세력이 약한 후보들이 연대한다는 것 자체를 탓할 수는 없다. 활로 모색을 위한 진지한 고민이 있다면 권장이라도 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연대라면 특정인을 넘어뜨리기 위한 세규합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민주당은 지금 비상한 각오와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민주당은 안철수 전 서울대 교수의 서울 노원병 출마 선언으로 정치적 의미가 커진 4·24 재·보선에서 자칫 구경꾼으로 전락할 처지다. 이를 극복하려면 민주당이 총선과 대선 패배를 통해 무슨 교훈을 얻었으며, 앞으로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 등에 대해 선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재·보선과 전대를 통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간판을 내리는 지경으로 내몰릴 수도 있다. 민주당은 사실상 마지막 기회를 맞고 있다는 현실부터 직시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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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정치가 국민들을 위해 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유머와 웃음의 선사이다. 경제와 안보의 어려움으로 민생 개선이 뜻한 바와 달리 쉽사리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영국 자유당의 유명 정치인 하코트는 “유머는 인생의 소금이며 의회의 방부제다. 그 진묘한 처방으로 상처받은 사람은 물론 원망하는 사람도 없다”고 했다. 유머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정치이기도 한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정치인 멘지스는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싸움은 웃을 줄 모르는 사람들과 웃을 줄 아는 사람들과의 싸움이다”라고까지 했다. 


윈스턴 처칠이 세기의 정치인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유머 때문이기도 하다. 허버트는 처칠을 당대의 최고 유머리스트로 꼽았다. 처칠의 유머 중 잘 알려져 있는 것 중 하나가, 2차대전 직후 노동당 총리로서 철도와 은행 등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던 애틀리와 의회 화장실에서 만나 나눈 ‘대화’이다. 애틀리와 주요 산업 국유화 문제로 다투고 있던 처칠을 화장실에서 만났다. 화장실에 들어간 처칠은 애틀리의 옆자리밖에 빈 자리가 없음을 보고선 멀찌감치 떨어진 다른 자리로 가 기다렸다 일을 보았다. 이를 본 애틀리가 왜 그러느냐는 뜻으로 농을 담아 말을 건냈다. “물건이 작아 보여주기 싫어 그런가보군요”라고. 그러자 처칠이 답했다. “아니요. 당신은 뭐든 큰 것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주장하니까요”라고. 


브이자를 그려보이고 있는 윈스턴 처칠 (경향신문DB)


처칠의 유머 중 잘 알려져 있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처칠과 동료 의원들 간에 노동당의 창시자가 누구냐를 두고 논란이 일었을 때였다. 처칠은 엉뚱하게도 콜럼버스가 노동당의 창시자라고 주장했다. 동료 의원들이 어찌 그러냐고 물었다. 처칠이 답했다. “콜럼버스는 땡전 한 푼 없이 남의 돈으로 항해를 시작했고, 자기의 목적지가 정확히 어디인지도 몰랐으며, 도착한 다음에도 그곳이 어디인지조차 알지 못했다네. 딱 노동당이 그렇지 않은가”라고.


정치가 ‘어찌 저리도 엉망일까’ 싶은 요즘이다. 새 대통령과 정부가 들어섰는데도 새롭다고 느껴지는 것이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국회를 존중하고 국민통합의 시대를 열겠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조직법 개정이 여야협상의 난항으로 지연되자 바로 대국민담화를 통해 반대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닌 압박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야당도 마찬가지다. 대선 패배 후 뼈를 깎는 성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했다. 하지만 체감할 수 있는 게 없다. 회초리 투어라는 이름으로 벌건 대낮의 대로에 나와 무릎 꿇고선 때려달라고 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민망하게 하더니, 대선 패배 책임을 놓고 내부 논란만 벌이다가, 민생 해법의 제시와 실천도 없이 새 대통령과 정부의 실책에 대해 시비만 가리고 있을 따름이다. 


새 정치를 주창하는 이들도 썩 다르지 않다. 안철수 전 교수는 새 정치의 내용이 무엇인지 여전히 모호한 가운데, 정치학 개론서에나 나올 듯한 소리를 출마의 변이라 내놓고, 진보정의당과 왜 하필 노원병인지에 대해 아옹다옹하는 모양새를 보였다. 모두가 처칠이 비판했던 ‘콜럼버스를 창시자로 한 노동당’ 같은 꼴새인 것이다.


정책에 대해 입장이 다를 수 있다. 또 경쟁자와 반대자가 미울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가 그 다툼의 와중에도 국민을 위한 정치가 되려면 다름과 미움을 기품있는 유머로 표현해 내며 유쾌한 웃음을 자아낼 수 있어야 한다. 유머를 ‘자기를 사랑하는 실천 방식’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노와 증오를 넘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넉넉함과 힘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유머이고, 그 넉넉함과 힘의 증명을 통해 국민의 사랑과 선택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새 정치의 힘은 이미 누군가가 다 말한 바 있는 레토릭과 정책들의 나열에 있지 않고 유머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잔인한 달 4월을 앞둔 지금, 정치하는 이들의 유머에 대한 사색이 필요하다. 정치가 국민들의 삶을 황무지에 방치해두는 잔인함을 그치기 위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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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숙 | 한국여성의전화 상임대표



 

참으로 기가 막혀 할 말이 없다.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 탄식이 절로 나온다. 최근 전 법무부 차관 김학의씨의 사퇴와 함께 사회지도층 인사의 성 접대 파문를 접하면서 드는 생각이다. 잊을 만하면 터져 나오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성 접대 파문은 일반 국민들로서는 생각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검찰을 비롯해 국회의원, 국정원, 사업가 등 이 사건과 관련돼 있다고 추측되는 인사들이 점점 늘어가면서, 국민들은 분노를 넘어 허탈과 좌절을 느끼고 있다. 사회지도층들은 국민들이 위임한 권한을 가지고, 국민들이 피 땀 흘려 낸 세금으로 많은 권한과 높은 급여를 받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기대되는 것은 청백리까지는 아니어도 법과 상식에 준하는 업무 처리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국민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는 일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이 국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이용해, 돈을 벌려는 자들과 결탁하고 그들의 ‘접대’를 받으며, 이권에 개입하고, 그 이권을 나눠가졌다는 것이다. 통탄할 일이다.


 

성접대의혹 김학의 차관 사퇴 (경향신문DB)



공정한 경쟁과 거래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첫걸음이다.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과 투명하게 집행되는 원칙은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를 움직이는 질서를 존중하게 하며, ‘법을 지키는 사람만 손해 본다’라는 피해의식을 막을 수 있다. ‘접대’를 받은 사람들은 공정한 경쟁을 위한 원칙을 만들고 집행하지 못하며, ‘접대’를 한 사람은 당연히 특별 대우를 요구할 것이며 이는 부정부패의 온상이 된다.


2012년 부패인식지수 순위에서 우리나라는 지난해 43위에서 45위로 하락한 것으로 나타났다. 부끄러운 현실이며, 우리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이러한 ‘접대’ 관행은 청산돼야만 한다. ‘접대’와 ‘권력’을 통해 이권을 나눈 것 자체도 심각한 문제이나, 더욱 경악할 일은 이 ‘접대’에 제공된 것이 언제나 그랬듯이 돈뿐 아니라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성 접대’는 여성의 ‘성’을 매개로 청탁과 이권을 주고받는 불법 행위이며 ‘성 접대’는 ‘접대’가 아니라 ‘성매매’라 불러야 한다. 성매매는 분명히 현행법상 범죄행위이다.


성매매는 여성의 성(性)을 상품화하는 대표적인 방법으로 여성에 대한 폭력이자 성적착취 행위이다. 성매매는 여성을 인격을 갖춘 ‘인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물건이나 노리개 정도로 여기는 것이다. 여성에 대해 이런 저열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여성폭력 문제를 다루는 관련자들이라는 것에 분노와 함께 자괴감을 느낀다.


여성의 성 상품화 문제는 성 평등한 사회를 위해 반드시 극복돼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그럼에도 법을 집행해야 할 사람들이 범법행위를 조장하고 묵인하는 현실에서 과연 우리사회에 ‘정의’가 존재하는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 대가 없는 ‘접대’가 없음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을 모르거나, 알아도 무시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의 집중 때문이다. 우리사회 최대의 권력기관인 검찰과 관련된 수많은 사건사고들은, 검찰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을 분산시켜야만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사건이 나면 그때뿐 검찰개혁은 여전히 변죽만 울리고 있고, 검찰관련 수사를 검찰이 하는 현실에서 달라질 것은 별로 없다. 여야 정치권과 대통령은 약속한 대로 검찰개혁을 단행해야 할 것이며,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신설해 고위공직자들의 비리를 제대로 수사하고 사법처리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또한 국회는 국회의원 윤리강령과 공직자윤리법을 강화해, 국민이 위임한 권한으로 사리사욕을 채우는 부패한 자들을 엄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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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김재철 사장의 진퇴 여부가 26일 결판난다.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는 엊그제 긴급 이사회를 열어 김 사장 해임안을 상정한 뒤 26일 처리키로 했다. 최근 20여명의 계열·자회사 임원인사를 하면서 방문진과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처리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김 사장의 해임안은 이번이 4번째다. 이번에는 야당 추천이사 3명 외에 여당 몫 방문진 이사 3명도 동참했다는 점에서 해임안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해임안 통과는 9명 이사 중 5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김 사장 해임의 당위성은 새삼 얘기할 필요도 없다. 이를 계기로 쫓겨난 MBC 노동자들의 복직과 함께 추락한 MBC의 위상을 되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김재철 MBC사장 (경향신문DB)


김 사장의 죄과는 일일이 열거하기조차 힘들 정도다. 그가 2010년 3월 이명박 정부의 낙하산 사장으로 온 뒤 MBC는 조용한 날이 없었다. 군사정권 시절에나 볼 수 있었던 ‘땡전 뉴스’가 부활되면서 MBC는 망신창이가 됐다. 오죽했으면 ‘MB씨 방송’이라는 오명을 들었을까. 재임기간 중 MBC 신뢰도가 3분의 1로 추락했다는 조사도 있다. 노조는 편파방송 시정을 요구하며 170일간 장기파업을 벌였지만 무자비한 보복인사가 돌아왔다. 이 와중에 100명 이상의 노조원들이 쫓겨났다. 그는 무용가 출신의 한 여성 사업가에게 일감을 몰아주거나 업무와 무관한 특급호텔·명품가게에서 신용카드 사용을 남발해 경찰조사를 받았다. 또 감사원의 카드 사용내역 제출과 국회 출석요구를 거부해 고발당했다. 지금껏 버티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은 분위기다. 야당 추천 이사들은 물론 여당 추천 이사들도 “방문진을 무시하는 태도가 도를 넘었다”고 성토한 걸 보면 때가 온 것 같다.


김 사장 퇴진은 시작일 뿐이다. 김 사장의 전횡에 맞서다 해고된 노조 간부들의 복직은 물론 인사보복을 당해 밀려난 MBC 구성원들은 제자리로 돌아와야 한다. 노조원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법원도 김 사장의 보복인사를 철회하라고 판시한 바 있다. 서울남부지법은 최근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업무와 무관한 부서로 발령난 기자·아나운서·PD 65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법원은 “방송제작을 맡은 기자와 아나운서, PD를 이와 관계 없는 부서에 발령낸 것은 정당한 이유가 없는 권리남용”이라고 밝혔다. 또 MBC 구성원들은 나락으로 떨어진 국민신뢰를 회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방문진도 달라져야 한다. 김 사장 해임안을 처리한다고 과거 잘못이 묻히는 것은 아니다. MBC 경영을 감시 감독해야 할 방문진이 그의 비리를 싸고돌며 사태를 키운 주역 아닌가. 청와대의 눈치나 보면서 거수기 노릇을 해온 게 어제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이번에는 도를 넘었다. 이 같은 구태가 되풀이되는 한 새 정부에서도 유사한 MBC 사태가 재연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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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정치부 차장


 

당신이 수영선수라고 가정하자. 지금 볕 좋은 해변에서 가족들과 느른한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다. 바람은 기분좋게 귀밑을 간질인다. 돌연 바늘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바람을 가르고 공기를 찌른다. 당신이 턱을 괴고 누운 모래 위 2시 방향(오른쪽 앞)에서 한 어린아이가 물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구원을 요청하는 목소리엔 이미 물이 차고, 어지러운 손놀림 주변에선 포말들이 일렁인다. 거리는 100m쯤. 당신과 그 아이 사이엔 쨍쨍한 모래사장과 파도 치는 바다가 가로놓였다.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당신은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설 것이다. 그리고 맹렬한 기세로 달려갈 것이다. 당신은 이상과 정의감에 불타는 평범한 시민이니까. 물에 대한 자신감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달려갈 것인가. 그 아이를 향해 곧바로 빛처럼 달려갈 것인가. 머릿속에서 머뭇거릴 시간은 없다.


당신이 직선으로 달려간다면 오히려 늦을 수 있다. 아무리 빼어난 수영 솜씨로도 모래 위를 달리는 속도보다 빠를 순 없다. 당신은 직선이 아니라 우회하듯 달려야 한다. 헤엄치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뛰어가는 거리를 길게 하는 것이 불과 몇 초 차이라도 빨리 그 아이에게 닿는 길이다.


이 이야기는 ‘페르마(Pierre de Fermat)의 광속도 문제’라는 과학적 원리를 설명할 때 종종 드는 예화다. ‘굴절률이 다른 두 매질에서 빛이 선택하는 길은 굴절률을 최소화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는 것이다. 우주 가스층과 암흑공간, 대기, 구름 등 서로 다른 성질의 공간을 거쳐 얼굴에 도착하는 태양은 당신을 향해 똑바로 날아온 직선의 빛은 아닌 셈이다.


이런 과학 원리를 인문계적 감수성에 ‘통섭’적으로 대입한다면 효율이라 생각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깨달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모든 진실은 곡선”이라 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을 얻어야 하는 정치 관점에서 보면 ‘동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긍정·부정 양갈래 여론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긍정의 공간을 최대한 늘리고, 부정적 매질을 최대한 줄이는 게 페르마 원리에 따르면 효율일 것이다. 그냥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게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부터 연일 ‘신뢰’를 말했다. 그냥 말하는 게 아니라 “사회적 자산”이라며 가장 앞줄에 놓고 강조한다. 지금 이런저런 ‘약속 위반’ 논란이 있지만, 통치 ‘권위’의 출발점을 ‘신뢰’로 삼은 것이다. 이전 대통령들이 ‘경제 성장’ ‘국가 변혁’ 등 큰 가치와 구호로 국민동원에 나서던 것에 비하면 신뢰는 너무 당연하고 추상적이며 소박하다. 박 대통령이 페르마식 ‘관계와 정치의 미학’ 비밀을 조금은 엿본 게 아닐까.


하지만 새 정부 첫 내각 인사청문회가 마무리된 지금 여론의 표정은 착잡하다. 인선 상당부분을 국회에서 ‘땡처리’하듯 넘겼지만, ‘문제적 인물’들인 김병관 국방부 장관, 현오석 경제부총리 후보자는 여전히 어정쩡한 채 남았다. 연일 언론사엔 전화가 걸려 온다. 21일에도 공무원 출신이라고 밝힌 60대 노신사는 “국가관을 거론할 자격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도저히 땡처리도 못할 하자품들이 아닌가하는 찝찝함이 뒷머리를 당긴다. 청문회가 한참 지났지만 박 대통령도 선뜻 ‘임명 강행’을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경향신문DB)


그렇다고 ‘훅’ 털어버리자니 한 달 넘도록 정상 궤도에 오르지 못하는 정부 모습이 안쓰럽다. 실상 주식판 말로 ‘손절매’ 타이밍도 놓쳤다. 인사권자 입장에선 계륵이 돼 버렸다. 버리자니 손해가 크고, 삼키자니 가시뼈에 목이 찔릴 것 같다.


이제 당신 앞에는 ‘신뢰’라는 소망하는 과실이 놓여 있다. 그것은 서두르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버려 사라질 만큼 연약하다. 거기까지는 가시덤불과 들판을 모두 지나야 한다. 그냥 직진로를 택할 것인가. 아니면 조심스럽게 가시덤불을 돌아가는 길을 택할 것인가. 어쩌면 멀고 힘들어 보이는 길이 가장 빠른 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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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어제 자진 사퇴했다. 김 후보자가 지명된 지 38일 만이고, 김학의 법무차관이 ‘고위층 성 접대’ 연루 의혹과 관련해서 물러난 지 하루 만이다. 이로써 인사청문회 대상인 총리·장관 후보자 중 4명이 중도 낙마했다. 김 차관과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를 포함하면 6명에 이른다. 잇단 인사 실패는 비단 숫자만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박근혜 대통령과 청와대의 인사 시스템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김 후보자의 퇴진은 말 그대로 만시지탄이다. 그러나 사퇴라는 결론보다 여기에 이르는 과정을 더 주목하고자 한다. 김 후보자는 지명 직후부터 자질 시비와 도덕성 논란을 부르면서 온갖 구설에 휩싸였다. 급기야 해외자원개발 특혜 및 우회상장 등으로 논란이 된 자원개발업체 KMDC의 양해각서 체결 행사 참석차 버마로 출국한 사실까지 밝혀졌다. 정작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은 한·미연합사 방문 때 그를 배석시키는 등 감싸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를 ‘박심’이라고 확신한 김 후보자는 나라를 위해 일할 기회를 달라며 기자회견을 자청하는 볼썽사나운 모습까지 연출했다. 국민을 피곤하게 만든 ‘김병관 논란’은 청와대 인사 시스템의 난맥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박 대통령도 혼란을 키웠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보인다.


(경향신문DB)


김 차관의 사퇴는 지금까지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전대미문의 인사 사고로 기록될 만하다. 의혹이 불거지던 초반 “다 조사했다”던 청와대가 그의 퇴진이 임박하면서 “본인이 알아서 대응해야 할 일”이라고 180도 입장을 바꾼 사실은 많은 것을 말해준다. 김 차관은 인수위 시절부터 ‘친박’이 선호하는 검찰총장감으로 거론됐으나 3명의 최종 후보군에서 제외됐다. 응당 옷을 벗을 것으로 관측됐으나 총장보다 낮은 기수를 임명하던 관행마저 깬 채 총장과 동기인 그가 차관 자리에 올랐다. 때맞춰 권력의 핵심이 그의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인사청문회라는 검증 절차도 없는 차관직인 데다 권력 핵심의 지원설이 나돈 그에게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졌을 리 만무하다.


박 대통령은 김 후보자 후임으로 김관진 장관을 유임시키면서 ‘또다시 정치적 논쟁과 청문회로 시간을 지체하기에는 위급한 상황’이라는 취지로 설명한 모양이다. 박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인사 실패를 정치적 논쟁과 청문회 탓으로 돌리는 것 같아 말문이 막힌다. 박 대통령이 그런 상황인식을 바꾸지 않는 한 유사사태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불길한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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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신임 헌법재판소장에 박한철 헌법재판관, 재판관에 조용호 서울고법원장과 서기석 서울중앙지법원장을 각각 지명했다. 이강국 전 헌재소장이 퇴임한 지 60일, 이동흡 전 헌재소장 후보자가 사퇴한 지 37일 만의 일이다. 이번 인사는 소장 권한대행을 맡아온 송두환 재판관의 퇴임을 하루 앞두고 이뤄졌다. 늦게나마 헌재 공백 사태를 해소하려 한 뜻은 이해하나, 인사 내용은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경향신문DB)


1988년 출범한 헌재는 민주화운동의 빛나는 성과물이다. 권위주의 시대 독재자의 통치수단으로 전락했던 헌법에 제자리를 찾아줌으로써 국민 기본권을 수호하려는 취지로 창설됐다. 헌재 수장에게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자질도 기본권 수호에 대한 신념이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에서 박한철 지명자가 헌재소장으로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다. 박 지명자는 대검 공안부장 시절 촛불집회 참여 시민들에 대한 무차별적 기소와 ‘미네르바’ 박대성씨 수사를 지휘했다. 헌법재판관이 된 뒤에도 기본권 보장에 대한 투철한 인식을 보여주지 못했다. 헌재가 경찰의 서울광장 차벽 봉쇄를 위헌 결정할 때 합헌 의견을 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선거운동을 금지한 공직선거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건 심판에서 합헌 쪽에 선 재판관은 박 지명자와 이동흡 전 후보자 2명뿐이다. 


박 대통령이 현직 헌법재판관을 헌재소장에 지명한 배경에도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재판관 임기 6년 중 2년을 마친 박 지명자는 소장에 오를 경우 4년 후 퇴임해야 한다. 이렇게 되면 박 대통령은 임기 말에 헌재소장을 또 한번 임명할 수 있다. 헌법이 대통령 임기를 5년, 헌법재판관 임기를 6년으로 정한 것은 헌재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 같은 장치가 실효성을 잃게 된다면 유감스러운 일이다.


남성 고위법관 일색의 신임 재판관 내정 역시 환영하기 어렵다. 개인의 자질이나 도덕성을 문제삼는 게 아니다. 헌재 구성의 다양성 실종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헌재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마지막 기대를 걸고 찾아오는 곳이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면 ‘소수자 감수성’이 절실하다.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만이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 진보, 학자, 재야법조인이 드문 헌재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지난해 6월 대법관 제청 때도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헌재 구성에서 똑같은 사태가 되풀이되니 답답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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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연루된 ‘성 접대’ 의혹 사건의 파장이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다. 한 건설업자가 강원도 원주의 별장에 로비 대상자를 불러 향응과 함께 성 접대를 했다는 게 사건의 골자다. 김학의 법무부 차관이 이번 사건에 연루돼 언론에 실명이 공개되자 사표를 냈다. 김 차관은 “모든 게 사실이 아니다”라면서도 “새 정부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사퇴한다”고 밝혔다. 성 접대 리스트에는 김 차관 외에도 수십명의 각계 유명인사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어 불똥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경찰은 관련자 3명을 출국금지하고 공개수사로 전환했다. 경찰 내사 과정에서 일찌감치 문제가 된 김 차관이 청와대의 인사검증을 무사통과한 것으로 드러나 청와대의 안이한 대응도 도마에 올랐다. 민주당 박용진 대변인이 “B급 에로물 수준의 고위공직자 도덕관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라며 “인사검증에 실패한 박근혜 정부의 무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라고 논평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건설업자로부터 성 접대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김학의 법무차관이 21일 사표를 제출한 뒤 정부과천청사에서 차에 타고 있다. _ 한국일보 제공


경찰 수사를 통해 이 사건의 실체가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건설업자 윤모씨가 여성사업가에게 돈과 외제차를 받아 사용한 뒤 돌려주지 않은 게 사건의 발단이다. 여성사업가는 지인을 시켜 차를 돌려받는 과정에 트렁크에서 별장의 ‘성 파티’ 장면이 담긴 7개의 CD를 발견해 경찰에 윤씨를 고발했다. 윤씨의 접대 리스트엔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망라돼 있다. 김 차관에 이어 감사원·국가정보원 고위간부와 종합병원 원장, 전직 경찰 수뇌부, 전 국회의원도 있다. 소문이 사실이라면 참으로 충격적이며 개탄스러운 일이다.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골프 접대에 이어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별장에서 몰래카메라가 돌아가는 줄도 모른 채 난잡한 유희를 벌였다니 아연실색할 따름이다.


경찰은 성역 없는 수사를 통해 한 점 의혹 없이 사건의 실체를 밝혀야 한다. 정치적 파장을 생각해 어물쩍 마무리할 사안이 아니다. 이 사건은 권력형 비리로 확산될 개연성도 있다. 윤씨는 리스트에 이름에 올라 있는 경찰청 산하기관과 병원의 보수공사를 수주했다고 한다. 한 사정기관 간부는 연립주택을 받았다는 의혹도 제기된 터다. 성 접대에 그치지 않고 뇌물이 오갔는지 살펴봐야 한다. 윤씨 고발 사건이 무혐의 처리되는 과정에 외압이 있었는지 여부도 밝혀야 한다. 김 차관은 사표를 낸 만큼 경찰수사에 적극 협력하는 게 옳은 자세다.


청와대의 부실한 인사검증도 문제다. 김 차관의 연루 의혹은 내사 과정에서 일찌감치 문제가 됐다. 청와대는 그를 임명하기 전에는 몰랐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김 차관이 부인하자 사실무근으로 결론냈다는 얘기도 들린다. 성 추문 연루 의혹을 알고도 인사를 강행했다는 얘기다. 청와대는 고위공직자 인선 과정에 수없이 되풀이돼온 부실검증과 밀실인사 관행을 언제까지 반복할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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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중앙지검이 그제 외환은행 본점을 전격 압수수색해 전산자료와 대출 관련자료를 가져갔다. 외환은행은 2006년부터 지난해 9월까지 6년 동안 중소기업 3089개사의 대출 6308건에서 대출금리를 마음대로 올려 181억원을 부당하게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고 한다. 대형 시중은행이 금리조작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앞서 금융감독원은 지난달 말 외환은행에 기관경고, 임직원 11명에게 문책경고·주의적 경고·감봉 등 제재를 내리면서 검찰에 고발한 바 있다. 


금융기관은 신용등급 변경 등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대출금리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 금리를 올리려면 대출 기업에 통보를 하고 재계약을 맺어야 하지만, 외환은행은 대출 기업 몰래 전산자료를 조작해 0.1%포인트씩 금리를 올려 문제가 된 것이다. 기업으로서는 자동이체로 이자를 빠져나가게 한 만큼 피해를 입더라도 제대로 알기 어렵다. 은행은 신용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만큼 고객에게 금리를 속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욱이 이번 대출금리 조작에는 국부 유출 논란을 일으킨 미국 사모펀드 론스타가 막후에 자리 잡고 있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대주주이던 2007년 2월부터 2011년 7월까지 배당금 1조7099억원을 챙긴 바 있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영문도 모르고 낸 이자가 론스타 배당금으로 들어간 것이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검찰은 수사를 시작한 만큼 진실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 고위 경영자 지시에 따른 조직적인 범죄인지 분명히 가려야 한다. 외환은행은 유사 사례가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마련했고 부당하게 받은 대출이자도 대부분 피해 기업에 돌려주었다고 해명하고 있다. 검찰과 금융감독원은 이런 잘못이 외환은행에만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은행에도 있었는지 제대로 파헤쳐야 한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과천농협이 대출금리를 조작해 44억원을 부당하게 챙겼다가 일부 직원이 실형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곳 말고도 상당수 은행 지점에서 지점장들이 권한을 남용해 가산금리를 멋대로 올리는 수법으로 실적을 거둔 사실이 금감원 조사 결과 드러나기도 했다. 


이번 수사가 다른 시중은행으로 확대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돌면서 금융기관 사정의 신호탄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차제에 중소기업의 고혈을 짜내 사욕을 채우는 은행의 횡포를 뿌리 뽑아야 한다. ‘비올 때 우산 뺏는’ 나쁜 관행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것인가. 


가정해보자. 정권이 바뀐 후 신임 대통령이 ‘국정철학 공유’를 이유로 헌법상 임기(6년)가 보장된 대법원장을 바꾸려 한다면. 말도 안되는 상상을 한다고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지금 박근혜 정부가 유사한 일을 벌이려 하고 있다. 청와대를 진원지로 하는 양건 감사원장 교체설이 그것이다. 헌법상 임기(4년)의 절반이 남아있는 양 감사원장을 경질하겠다는 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온다. 청와대는 그러면서도 국민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의 거취 문제는 외면하고 있다. 법치와 원칙을 강조해온 박 대통령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보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양 감사원장이 박근혜 정부의 국정철학을 공유한다고 생각하나” “(유임이 예상되던) 경찰청장도 바뀌었으니 그 방향대로 가지 않겠느냐” 같은 발언을 서슴없이 하고 있다. 헌법 경시를 넘어서는 위헌적 발상이다. 감사원은 대통령 소속 기관이지만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와 마찬가지로 독립적인 헌법기관이다. 감사원장 임명 시 국회 동의를 얻도록 하고 임기도 헌법에 명시한 이유다. 경찰청장과 검찰총장은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지만 인준 투표 대상은 아니다. 임기 역시 경찰법이나 검찰청법 등 개별 법률로 정하고 있다. 더욱이 감사원은 행정기관·공무원의 직무 감찰 등을 주업무로 하는 조직이다. 업무 성격상 감사원장이 반드시 대통령과 국정철학을 공유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조금 다른 생각을 갖는 것이 국리민복에 도움될 수 있다. 경찰청장을 갈아치웠으니 감사원장도 교체할 수 있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경향신문DB)


박 대통령이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인물은 양 감사원장이 아니라 김병관 후보자다. ‘의혹 백화점’으로 불리는 김 후보자에게 또 다른 결격사유가 추가됐다고 한다. 해외 자원개발업체 주식 보유를 신고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더니, 이 업체 관계자들과 버마를 방문하고도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문제의 기업은 버마 자원개발권을 얻는 과정에서 특혜를 받았다는 의혹에 휩싸였던 곳이다. 위증 논란으로까지 번지면서 새누리당 내에서도 김 후보자의 사퇴나 청와대의 결단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그동안 박 대통령의 인사에서 드러난 불통과 독선, 부실검증과 약속파기 사례를 일일이 나열할 생각은 없다. 지금이라도 ‘정치인 박근혜’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원칙과 신뢰로 돌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박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양 감사원장의 임기를 보장하고, 민심에 따라 김 후보자 지명을 철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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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교수



1993년 3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드 클레르크는 자국이 보유한 7개의 원자폭탄을 모두 파괴했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남아공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핵무기를 폐기한 국가가 되었다. 


1980년대 말까지 남아공은 국제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엔 제재 결의의 단골 대상이었고, 이웃 나라 앙골라와 분쟁 중이었으며, 국민들은 아파르트헤이트라는 강력한 억압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었다. 핵무기는 이러한 상황에서 백인들의 정권유지 수단으로 비밀리에 개발되었다. 1989년 가을 드 클레르크가 취임했을 때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냉전이 끝남에 따라 앙골라와의 분쟁은 해소되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항하는 흑인들의 싸움은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강력한 경제제재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北 김정은, 핵실험후첫현지시찰…군부대방문 (경향신문DB)


이때 드 클레르크가 선택한 길은 넬슨 만델라를 풀어주고, 아프리카민족회의나 공산당 같은 금지된 단체들의 정치활동을 허용하고, 핵무기를 폐기하는 것이었다. 안으로는 아파르트헤이트를 포기하고 민주화를 시작함과 동시에 밖을 향해서는 평화국가로 나아간다는 결정을 한 것이다. 


1980년대 말의 남아공 상황은 지금의 북한 상황과 유사한 점이 있다. 북한도 당시의 남아공과 마찬가지로 체제유지를 위해 핵무기를 개발했고, 강한 경제제재를 당하고 있고, 다른 나라와 분쟁 중이고, 민중은 강력한 억압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다. 그런데도 남아공은 핵을 폐기했다. 북한의 경우와 다른 무엇이 있었던 것이다.


남아공과 북한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권력을 잡은 집단이 권력을 내준 후에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느냐에 대한 판단의 차이일 것이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만델라를 풀어주기 전에 협상과정에서 흑인들이 정권을 잡더라도 자신들이 그 전과 마찬가지로 부를 누릴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94년 흑인들이 참여한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드 클레르크는 부통령으로 수년간 권력을 누렸다. 만일 만델라를 비롯한 아프리카민족회의 간부들이 피의 보복을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아무리 국제적 제재가 심하고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고 그 대가가 막대하다고 해도 백인 권력층은 최후까지 아파르트헤이트 유지를 위해 싸웠을 것이다.


북한 권력층의 가장 큰 관심은 권력의 유지와 자손들의 안전일 것이다. 그들은 핵무기를 개발하고 보유하는 것만이 이를 위한 유일한 수단이라고 판단하는 것 같다.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미국과 남한에서 강하게 압박을 가하고, 굶주리는 민중의 동요와 탈출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들은 다른 선택이 없다고 보는 것 같다.


남아공의 사례는 북한의 핵폐기와 변화를 끌어내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남아공에서는 냉전 종식 후의 평화협정과 만델라가 그런 상황을 만들어주었고, 드 클레르크가 이에 화답하여 핵무기와 아파르트헤이트 폐기를 결정했다. 북한의 경우에는 평화협정과 남북연합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이다. 평화협정은 북한 권력층이 외부의 공격으로 망하지 않는 여건을 만들어주고, 남북연합은 그들의 자손들도 언젠가는 자유로운 민주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권리를 최대한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상황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남아공 핵폐기 사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와 고립화가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제네바 합의 파기 후 진행된 북한의 핵개발 과정을 살펴봐도 그들의 주장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우리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 북한의 핵무기는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남아공 사례는 이를 끌어낼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가 진정으로 북한의 핵폐기와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면 북한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상황 조성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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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이 대대적인 물갈이 인사에 술렁이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임명한 금융 공기업과 산하 단체, 은행권의 낙하산 인사가 주된 표적이다. 신제윤 금융위원장 후보자는 그제 인사청문회에서 “(금융권 기관장의) 잔여 임기가 있어도 필요하면 교체 건의를 하겠다”고 말했다. 또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전문성 크게 두 가지를 보고 (교체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덧붙였다. 최근 감사원과 금융감독원이 ‘MB 금융맨’을 겨냥해 감사나 검사를 벌이는 것도 이를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라는 분석이다. 정권 교체기마다 되풀이돼온 금융권의 낙하산 인사가 이번에도 금융권을 흔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는 이유다. 대선의 논공행상에 따라 자리를 나눠 먹는 ‘그들만의 잔치’에 금융시장은 넌더리가 나 있다. 낙하산 인사의 폐해는 재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실력과 전문성보다 정치권 줄대기에 따라 금융기관의 장이 결정되는 후진적인 지배구조는 바로잡아야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금융권은 정실인사로 골병이 들었다. 이른바 ‘4대천왕’이라고 불린 강만수 KDB산은금융 회장 겸 산업은행장과 어윤대 KB금융 회장, 이팔성 우리금융 회장, 김승유 전 하나금융 회장이 그들이다. 이들은 금융지주회사라는 이름으로 은행장 위에 회장 자리를 만든 뒤 수억~수십억원의 고액 연봉을 받으며 자리보전을 해왔다. 15~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안택수 신용보증기금 이사장도 낙하산의 전형으로 꼽힌다. 또 금융 공기업과 산하 단체는 퇴직 관료들의 ‘놀이터’로 전락한 지 오래다. 금융권의 26개 자리 중 19개가 MB와 친분이 있는 인사나 MB정부 경제·금융관료로 채워졌을 정도다.


신제윤 금융위원회 위원장 후보자가 18일 국회 인사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경향신문DB)


후진적인 지배구조는 낙하산 인사의 결과물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장이 바뀌는 지배구조하에서는 글로벌 경쟁력을 논하기조차 부끄러운 일이다. ‘금융권에는 왜 삼성 같은 기업이 없느냐’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임기를 채우기도 힘든 낙하산 최고경영자에게 장기적인 경영전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낙하산 인사는 각종 청탁과 비리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든 한계도 있다. 이명박 정부는 최소한의 원칙마저 무시했다. 국책은행이나 정부가 주요 주주인 금융기관은 몰라도 민간 은행인 KB금융지주까지 낙하산으로 채우는 것은 월권이자 시장에 대한 모욕이다.


MB정권의 정실인사 관행이 되풀이돼서는 안된다. 박근혜 대통령도 평소 전문성과 실력을 인사의 원칙으로 강조해왔다. 50년 만에 공채 출신 첫 은행장을 뽑은 중소기업은행이 본보기가 될 수 있다. 정권 교체기마다 후임 사장 선임을 놓고 시끄러웠던 포스코가 내부 승진을 통해 안정적인 지배구조와 세계적인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 대선 기여도에 따라 자리가 결정되는 구태는 더 이상 안된다. 조직원들의 신망과 실력이 검증된 인사가 새 수장을 맡아 안정적인 지배구조를 바탕으로 금융권의 새 판을 짜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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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논설위원

 


이명박 전 대통령 기록물 가운데 비밀기록이 한 건도 없다고 해서 억측과 논란을 낳고 있다. 기록관리를 제대로 안 했거나 무단 폐기했을 것이라는 의심에서부터 꼭 보호해야 할 기록 외에는 과감히 공개성 높은 일반기록으로 넘긴 것이라는 반론에 이르기까지 구구하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의심은 정당하고 반론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서로 오해가 있다고 하니까 비밀기록이 뭔지부터 정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안업무 규정상 ‘비밀’이라 함은 그 내용이 누설되는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유해로운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는 국가 기밀을 말한다. 공공기록물관리법은 이를 비밀기록물이라고 부르면서 공공기관의 모든 기록물에 대해 생산 단계에서 보존 기간, 공개 여부, 비밀 여부 및 접근 권한 등을 함께 정해서 관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사후에 보호기간을 설정하는 대통령지정기록물(지정기록)과는 개념도 범주도 다른 기록임을 알 수 있다.


(경향신문DB)


MB 정부가 비밀기록을 한 건도 이관하지 않았다는 것은 국가위기 대응 매뉴얼 등 이와 유사한 안보 관련 사안을 비밀기록으로 관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렇다면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국가위기 대응 매뉴얼의 경우 철저하게 접근이 제한된 가운데 후임자가 참고할 수 있어야 하며 급박미묘한 안보상황에서 끊임없이 업그레이드해야 하는 성격의 기록이다. MB 정부 관계자는 이를 ‘지정 비밀기록’이라고 하면서 모두 인수인계해 현 정부가 잘 활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아마 지정기록으로 분류해 이관하고 사본을 인수인계한 모양이다. 그렇다면 왜 그것을 굳이 지정기록으로 ‘봉인’까지 했는지, 그리고 활용 단계에서 비밀로 분류하지도 않고 어떻게 안전하게 관리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지정기록과 비밀기록은 동의어가 아니다. 비밀기록 가운데 공개될 경우 국가안전보장에 ‘중대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기록물이 지정기록에 포함될 수는 있지만 이 제도의 도입 취지는 대통령 기록이 후임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악용되거나 그런 상황을 우려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는 일을 막기 위한 것이다.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 의사소통, 인사검증기록 등이 그런 경우다. 우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북방한계선(NLL) 포기 발언’ 논란을 통해 그 취지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것을 이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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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안철수 전 교수의 출마를 지켜보면서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본인이 알든 모르든 그의 행위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로 보인다. 하나는 지역프레임으로부터의 탈피다. 지역주의는 지역을 잣대로 정당 지지나 투표행위가 이뤄지는 것을 뜻한다. 이 지역주의를 탈지역주의로 극복하자는 게 지역프레임이다. 새누리당 후보가 호남에서, 민주통합당 후보가 영남에서 탈지역주의 투표를 호소하는 것이다.


16대 대통령을 지낸 노무현은 일관되게 탈지역주의를 외쳤다. 호남정당의 후보로서 부산의 국회의원 선거,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지역주의 타파를 외쳤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담대한 용기였다. 그런데 그가 보여준 진정성은 충분히 인정하더라도 현실에서 그런 노력이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이다. 작년 총선과 대선에서 부산·경남에서 일부 지역주의 투표가 완화된 것으로 나타나긴 했지만 지역주의가 해소되고 있다는 징후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 


지역구 둘러보는 안철수 후보 (경향신문DB)


지역주의가 해소되려면 몇몇 인물이 이른바 ‘적지’에서 당선되는 형태로는 불가능하다. 대신 특정 지역에서 경쟁적 정당체제가 작동해야 한다. 서로 다른 대안, 특히 사회경제적 분야에서 차별화된 대안을 가진 정당이 경쟁할 때 비로소 지역주의는 해소될 수 있다. 계층·이념·정책적 지지기반이 다른 정당이 경쟁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얘기다. 


지역주의는 탈지역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계층 인식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호남의 200만원 소득자(장삼)와 영남의 200만원 소득자(이사)가 지역을 잣대로 투표하면 다르지만 계층을 잣대로 투표하면 같아진다. 장삼에게 탈호남을, 이사에게 탈영남을 아무리 외쳐봐야 별 소용이 없다. 장삼과 이사를 묶어주는 건 계층이다. 안 전 교수의 출마가 익숙한 지역프레임과 결별하고 새롭게 계층프레임을 지향하는 노력이면 좋겠다.


다른 하나의 생각은 스턴트(stunt) 정치다. 황산벌에서 적진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드높인 관창의 결기를 정치인이 보여줘야 한다는 게 스턴트 정치다. 요즘 대선주자급이나 명망이 있는 정치인에게 관창의 이런 결기나 스턴트맨의 묘기를 기대하는 건 일종의 유행처럼 보인다. 리더십을 기대하기 어려우니 이런 것이라도 하기를 바라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이런 것이 정치의 본령일까. 감성적 소구로 일시적 바람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 때문에 정치구도가 근본적으로 재편되거나, 정치의 질이 달라질 수 있을지 회의적이다.


정치 리더에게 요구되는 건 리더십이지 묘기가 아니다. 자신이 대변하고자 하는 집단이나 계층을 충실히 대표하고, 설득력 있는 정책대안으로 그들의 삶에 대해 책임지는 게 핵심이다. 정치인이라면 힘들게 사는 서민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삶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 방법을 찾고, 관철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안 전 교수가 얼마나 정치를 잘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그가 만약 ‘적지에서 적장과 싸우는’ 스턴트 정치를 선택했다면 일시적으로 인기가 올라갈지는 몰라도 그 인기 때문에 그가 좋은 정치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


안 전 교수의 선택에 대해 찬반이 있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객관적으로 짚어보는 것이다. 우리의 관심 포인트는 그의 개인적 성패가 아니라 그가 자신에 대한 지지로 나타나는 대중적 열망을 사회의 변화로 인도하는 리더십을 보이느냐 여부다. 그의 출마가 이제부터 인기는 잊고 시대과제를 온몸으로 껴안는 정치인의 고뇌를 선택한 것이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 정치가 좀 더 나아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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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재일 | 경북대 교수·신문방송학



바닷가에서 새가 조갯살을 파먹기 위해 부리를 들이민다. 조개는 방어하기 위해 입을 굳게 다문다. 적대로 한몸이 돼 오도 가도 못한 둘은 결국 어부에게 잡힌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부지리(漁父之利)의 기원 설화다. 어부의 이익은 새와 조개의 적대에 기인한다. 물론 어부는 둘의 적대를 획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얻는 이익은 우연적 행운의 결과이다. 그런데 한번 이렇게 재미를 본 어부가 바닷가에 조개를 풀어 놓는다면, 그래서 새가 다시 조개부리에 걸려든다면?


어부가 바보가 아니라면 한번쯤 상상할 법한 가정이 아닌가? 실제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매를 훈련시켜 꿩을 사냥하고, 오리를 이용해 물고기를 잡았다. 동물의 생존의지를 사냥 도구로 이용한 거다. 이 경우 ‘어부의 이익’은 행운이 아닌 의지의 산물이다. 즉 새와 조개의 적대는 어부가 연출한 것이다. 이 상황에 적합한 사자성어는 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물리친다는 의미의 이이제이(以夷制夷)다. 어부지리의 경험은 이이제이의 전략으로 진화하기 쉽다. 우연적 행운을 반복하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물론 이용당하는 오랑캐가 아니라 이용하는 주체가 될 수 있다면 말이다.


(경향신문DB)


흔히 역사 속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피해자, 가해자, 수혜자. 누구나 수혜자가 되길 원하지만, 피해자는 절대로 수혜자가 될 수 없다. 가해자가 모두 수혜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수혜 없는 가해자’(고문기술자 이근안, 학교폭력의 가해학생, 가난한 가정의 폭력 가장 등등)는 피해자의 다른 얼굴이다. 수혜자는 가해의 부담을 지는 수혜자와 그 부담조차 없는 수혜자가 있다. 이이제이는 가해와 피해의 부담을 비켜 가면서 순수한 수혜를 욕망하는 자의 전략이다. 문제의 초점을 피해자와 수혜 없는 가해자의 구도로 연출하고, 수혜의 주체는 그 소란 뒤로 숨어 가해에 연루된 흔적을 삭제하는 것. 한병철은 <피로사회>에서 이런 방식의 통치를 ‘지배 없는 착취’로 명명하면서, 신자유주의 성과사회의 특징적 징후로 제시한다.


담뱃값 인상 법안은 흡연자라는 오랑캐의 돈으로 서민이라는 또 다른 오랑캐의 복지 재원을 충당함으로써 증세 부담이 줄어든 부자가 상대적으로 수혜자가 되는 전형적인 이이제이의 정책이다. 이 전략이 성공하려면 간접흡연의 피해자인 비흡연자 대 가해자인 흡연자, 모든 국민의 의료재정을 축내는 가해자인 흡연자 대 피해자인 비흡연자의 적대가 강조되어야 한다. 반면 자발적으로 담배를 배웠지만, 비자발적으로 흡연을 유지하고 있는 니코틴 중독 피해자로서의 흡연자 대 발암성분의 화학물질로 중독성을 높여 안정적 이윤을 유지하고 있는, 진정한 가해자인 담배회사의 적대는 가려져야 한다. 수혜자 역시 부자보다 서민이 전면에 내세워져야 한다. 그래서 새와 조개의 적대가 어부의 연출이라는 사실이 끝내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담뱃값 인상 법안을 둘러싼 논란은 지금 이렇게 진행되고 있다.


학교폭력을 둘러싼 논란도 사정은 비슷하다. 자살한 피해학생의 절박함과 억울함 대 가해학생들의 가혹함이라는 적대에 꽁꽁 묶여 있다. 가해학생들은 억울하다고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들도 인성교육의 부재와 무한경쟁 체제의 피해자들 아닌가? 대학마저 자본의 논리에 따라 직업훈련소로 몰아가는 지금의 교육 정책이 지속된다면 학교폭력은 그치기 어렵다. 진정한 가해자는 이런 교육정책으로 학교에 적의와 경쟁의 문화를 조장한 정책입안자들이다. 


여기서 질문해 보자. 그들은 왜 지속적인 학교폭력의 피해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교육정책 기조를 고수하려는 걸까? 이 질문은 이런 교육정책의 숨은 수혜자가 누구인가라는 것과 같은 질문이다. 피해자가 드러내면 가해자는 부인하고, 그 사이 수혜자는 숨는다. 하여 피해자의 언어는 직설적이고 가해자의 언어는 기만적이며 수혜자는 위선적이다. 오랑캐로 살지 않기 위해서 진정으로 적대해야 하는 것은 가해자의 기만이 아니라 수혜자의 위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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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기업인인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가 내정 사흘 만에 낙마했다. 공직자 주식신탁제도를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행 공직자윤리법은 4급 이상 공무원이 보유 주식이 3000만원을 넘을 경우는 해당 주식을 팔거나, 금융기관에 주식을 맡겨 60일 안에 처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는 회사 주식(25.45%, 695억원어치)을 금융기간에 맡겨두었다가 공직을 그만두면 찾아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청와대는 2005년부터 시행한 이 제도의 취지를 제대로 알리지도 않은 채 기업인 영입을 서두르다 황당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한마디로 인사의 난맥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황철주 중소기업청장 내정자 사퇴.


중기청장은 동반성장을 비롯한 경제민주화를 직접 추진해야 하는 핵심적인 자리라고 할 수 있다. 여야가 합의한 정부조직 개편안도 중기청장 권한을 한층 강화했다. 차관급이지만 국무회의에 배석하도록 하고, 기업들이 담합행위를 했을 경우 고발 요청권을 준 것도 중소기업의 목소리를 정책에 적극 반영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기청장은 현장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고,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추진할 역량과 의지가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고를 나와 벤처기업을 키워 자수성가한 황철주 전 내정자가 적임자라고 볼 수 있지만 제도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행정안전부가 보완책을 마련한다고 하지만 자칫 사람에 맞춰 법을 바꾸는 ‘위인설법(爲人設法)’ 논란을 부를 수 있다.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중기청장은 고위 관료 출신들이 낙하산 인사로 맡았다. 그래서는 안된다. 현장경험과 전문성을 두루 갖춘 전문경영인 출신이나 명망 있는 민간인이 중기청장을 맡아야 새로운 바람을 기대할 수 있다. 


중기청장과 더불어 일감 몰아주기를 비롯해 대기업 횡포를 뿌리뽑는 데 앞장서야 할 자리가 공정거래위원장이다. 비전문성과 대형 로펌 근무경력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내정자는 현금 90억원을 비롯해 재산이 100억원이 넘는 것으로 드러났다. 로펌 근무 당시 변호사 수임료로 받았다고 하지만, 고객인 재벌 대기업을 위한 변론의 대가로 상식적인 수준을 넘어가는 재산을 취득했다는 점에서 경제적 약자를 보호한다는 공정거래위원장을 맡기엔 부적절한 인사라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은 경제민주화를 제대로 추진할 수 있는 인사를 중기청장과 공정거래위원장에 기용하기를 바란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인사가 만사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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