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서초·강남·송파 등 이른바 ‘강남 3구’의 주택 투기지역 지정을 해제할 모양이다. 4·11 총선이 새누리당 승리로 끝나자마자 경제 부처 일각에서 주택거래 활성화 대책의 필요성을 거론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강남 3구 투기지역 지정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면서 발표가 임박한 듯한 인상까지 주고 있다. 이런 분위기에 영향받아 재건축 아파트를 중심으로 강남 집값이 들썩거리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 들어 주택·토지 등 부동산 경기가 뚜렷한 하강곡선을 그리면서 정부는 해마다 두세 차례씩 부동산 시장을 띄우기 위한 대책을 내놨다. 집을 팔려고 해도 못 파는 서민층의 고충을 덜어준다는 명분 아래 ‘주택거래 활성화 대책’으로 포장된 여러 대책을 쏟아냈지만 효과는 별로 없었고 과거에 힘들게 도입했던 투기억제 장치들만 차례로 무장해제시켰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단지 (경향신문DB)



강남 3구는 마지막 남은 투기지역이다. 이곳의 투기지역 지정이 해제되면 전국에 투기지역은 한 곳도 남지 않는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투기심리 자극 효과다. 투기지역 해제가 당장 시장에 큰 파장을 몰고 올 것으로는 예상되지 않지만, 과거 ‘부동산 투기 진원지’로서 강남이 갖는 상징성 때문에 투기심리를 자극하게 될 것이란 우려가 적지 않다. 투기지역에서 풀리면 3주택 이상 보유자에 대한 양도세율 10%포인트 가산이 적용되지 않는 등 이명박 정부가 내건 부자감세 기조의 연장선이라는 점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투기지역 해제와 함께 담보대출인정비율(LTV)과 대출을 연소득의 일정 비율로 제한한 총부채상환비율(DTI) 상한도 현행 40%에서 50%로 각각 높아지게 된다. 이는 가뜩이나 가계부채가 한국 경제의 ‘시한폭탄’이 돼 있는 상황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빚을 더 내서 집을 사라’고 부추기는 꼴이나 다름없다.


지금은 부동산 시장이 가라앉아 투기에 대한 걱정이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투기는 일단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들불처럼 번져 백약이 무효다. 정책의 유연성도 필요하지만 강력한 투기억제 장치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투기조짐이 나타나면 그때 가서 다시 투기지역으로 묶으면 된다’는 새누리당 일각의 주장은 현실을 몰라도 한참 모르는 아마추어나 할 소리다. 시장에는 정부·여당이 4·11 총선을 통해 여당에 압도적 지지를 보낸 강남 3구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투기지역 해제를 서두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투기심리를 자극해서라도 부동산 경기를 띄우겠다는 발상은 안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홍욱 정치부 기자 ahn@kyunghyang.com

18대 국회가 2일 사실상 막을 내렸다. 이번 국회 임기는 5월29일까지이지만 이날 국회 본회의를 마지막으로 실제 활동은 끝난 셈이다.

18대 국회는 쏠림이 심했다. 4년 전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53석으로 제1당이 됐고, 친박연대(14석)까지 합하면 167석이었다. 반면 통합민주당(83석), 민주노동당(5석), 창조한국당(3석) 등 진보·개혁 정당은 합해봐야 91석에 그쳤다. 힘의 우열이 여실한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회 운영은 진즉 기대하기 어려웠다.

거대 여당은 야당의 반대에 직면하면 우회로를 찾지 않았다. 야당을 힘으로 밀어붙이고 밟고 넘어갔다. 그 결과 ‘역대 최악의 국회’라는 오명이 갖가지 기록으로 남겨졌다. 18대 직권상정 의안 수는 16대 6건, 17대 29건을 훨씬 뛰어넘는 99건이었다. 여야 입장차가 컸던 법안은 여지없이 직권상정이 됐다. 부자감세 법안을 시작으로 신문법·방송법 등 미디어법, 4대강 사업 관련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등이 대표적이다. 합의처리가 관행이었던 예산안마저 4년 내내 강행처리한 것도 거대 여당이 횡포를 부렸음을 보여주는 단면이다.

 

이윤성 국회 부의장이 야당의 저지 속에 미디어법을 직권상정하고 있다. l 출처:경향DB

대화와 타협 대신 극한 대립에 빠져드는 것은 일상이 됐다. 국회에서 극심한 몸싸움이 벌어져 의원들이 병원으로 실려가고, 해머에 소화기, 최루탄까지 등장했다. 압도적 표차로 등장한 이명박 정부가 여당을 흔들어대면서 통법부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다. 논쟁을 비효율적인 일로 여기는 최고경영자 출신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관이 한몫했다. 국회의 입법권이 제왕적 대통령에게 휘둘린 것이다. 그러다 보니 18대 국회는 소통보다는 불통으로 점철됐다. 조용환 변호사처럼 정당이 추천한 헌법재판관 후보자가 국회 표결에서 부결돼 여야 간 불신의 깊이를 드러냈다.

국회는 마지막까지 씁쓸함을 안겨줬다. 의안처리제도개선법 얘기다. 더 이상 몸싸움을 하지 말자고 여야가 의견을 모았지만 19대 총선 이후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을 얻더니 이 법이 도입되면 ‘식물국회’가 된다며 입장을 바꿨다. 여기저기 뜯어고쳐가며 우여곡절을 거쳤다.

19대 국회는 과연 얼마나 달라질까. 일단 여야의 국회 의석수는 엇비슷해졌다. 총선 결과 152석이던 새누리당은 문대성·김형태 당선자가 탈당하면서 150석이 됐다. 야당도 민주통합당(127석)과 통합진보당(13석)이 합치면 140석이다. 제1당이라도 힘으로만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문제는 정치를 해나가는 과정이다. 여야가 물밑에서 깜짝 합의를 이루기보다 비효율적으로 보여도 치열한 논리 대결을 거쳐 접점을 찾아갈 수 있을까. 유권자인 국민은 무엇을 원하는지 소통하고 공감하며 입법 활동에 반영할 수 있을까. 결국 매번 기대하면서도 4년 뒤에 속절없이 배반당하는 일을 또다시 맞이할까.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양권모 | 정치·국제에디터 sulsu@kyunghyang.com

민주통합당에서 이해찬 전 총리와 박지원 의원이 만나 당 대표와 원내대표를 나눠 맡기로 정리했다고 한다. 권력을 맡을 당사자들끼리 밀실에서 짬짜미를 해놓고, 이것을 소속 국회의원과 국민들이 아름다운 단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친노와 호남의 결합, 대선 승리를 위한 역할 분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착각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결합과 대선 승리는 이런 식의 끼리끼리 담합으로 담보되지 않는다. 왜? 이들의 역할 분담은 가치도, 명분도, 감동도 없기 때문이다. 대선 승리를 위한 선택이라고 내세웠지만, 외려 대선을 포기한 것으로 간다는 점에서 전략적이지도 않다.

 

이해찬 전 총리와 박지원 최고위원 l 출처:경향DB

첫째, 가치도 없고 명분도 없다. 친노 대 비노, 호남 대 비호남의 구도를 언제까지 지속할 것인가라는 반성 아래서 이런 역할 분담을 도모했다지만, 가치가 반영되지 않는 단합은 권력나누기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친노는 이해찬 전 총리가, 호남은 박지원 의원이 대표하기 때문에 당권을 분담해서 맡겠다는 것은 오만이 아니면 내세우기 힘들다. 바른 연대는 가치를 갖고 이뤄지는 것이지 자기들이 구획한 지역과 세력의 인위적 결합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경선을 하기도 전에 자기들끼리 원내대표와 당 대표로 결론을 내고, 국회의원과 당원들에게 이를 수용하라고 내놓는 것에서는 오만을 넘어 독재적 발상까지 묻어난다. 그래 놓고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의 독재, 사당화 문제를 비판할 터인가.

이러한 단합 논리는 총선 패배의 원인을 호도하는 것이기도 하다. 총선에서 패배한 것은 이들의 인물, 세력 결합이 이뤄지지 않아서가 아니다. 쇄신에서도, 공천에서도, 정책에서도 새누리당을 능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는 것은 담합을 포장하는 허울의 명분이고, 내심에 흐르는 것은 최대 계파 수장들의 권력 지키기일 뿐이다.

둘째, 설령 단합을 위해서라는 선의를 인정한다손 치더라도 두 사람의 역할 분담은 감동이 없다. 지난 시대의 인물, 노회한 정객이 등장하는 흘러간 드라마에 감동이 있을 리 없다. 자칭 정치9단끼리의 결합은 18단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해묵은 정치를 환기시키고, 민주당을 18년 전쯤으로 되돌리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새누리당 박근혜 비대위원장은 감히 미래를 얘기하는데, 대안 야당의 얼굴은 구태의연함을 보여주려 한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미래를 돋보이게 하는 거울효과로 이만한 인물 조합도 없다. 총선에서 무감동 공천을 보여주더니 이번에는 작정하고 감동 없는 경선, 무감동의 지도부를 만들어 보일 판이다.

셋째, 전략적이지도 않다. 대선 승리를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하지만, 대선 승리를 위해 가장 전략적이지 않은 결합이다. 박근혜 비대위원장을 상대로 대선 승리를 꿈꾼다면 야당이 맨 먼저 갖춰야 할 것이 경쟁의 과정, 역동성이다. ‘친노’의 노무현 전 대통령이 2002년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민주당 경선에서 보여준 경쟁, 역동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 결합은 그러한 건강한 경쟁의 싹 자체를 스스로 자르고, 당의 역동성을 없애 버리려는 것이다. 대권 7부 능선쯤 가 있는 박근혜 대세론에 맞서려면 그 경쟁을 부추겨 쇼라도 꾸며야 할 판에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친노 사람으로 자기들끼리 결정했다고 공고하고 나선 꼴이기 때문이다.

그랬으니 이 결합이 염두에 둔 대통령 후보일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담합이 아닌 단합으로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옹호하고 나섰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인위적 권력나누기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재야 원로들의 원탁회의까지 이용함으로써, 대선 국면에서 역할이 필요한 원탁회의의 권위와 정당성조차 훼손했다. 그래서 새누리당과 무슨 일을 도모했다면 담합이지만 정권교체를 위해 뭉친 것이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는, 박지원 의원의 주장은 허술할 수밖에 없다. 외려 이번 담합은 정권교체 자체를 포기하는 길일 수 있다.

이러함에도 정치9단이라는 이들이 무리수를 두면서 권력 짬짜미를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궁금하다. 헌법기관인 소속 국회의원들은 버튼만 누르면 작동하는 로봇쯤으로 간주하고, 국민들은 안중에도 두지 않기 때문일까. 도저히 질 수 없는 총선에서 127석의 제2당이 된 결과를 두고 괜찮은 성적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데서 이미 예고된 권력의 오만이 발동된 것일까. 아니면 대선에서 패할 것을 예상하고 제1야당의 당권이라도 잡겠다는 생각일까.

이제 ‘원내대표 박지원-당 대표 이해찬’의 담합대로 원내대표와 대표 경선의 결과가 나오면 민주당은 식물정당을 자초하는 것이 된다. 밀실 야합의 각본대로 되면 민주당은 죽은 정당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선 경쟁도 일찌감치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진정 정권교체, 대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우선 민주당의 경선에서 이 담합의 각본을 깨는 수밖에 없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bbbenji@naver.com

1998년 일본 총리가 된 오부치 게이조는 지지율이 60%를 넘을 만큼 인기를 끌었고, “10~2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명재상의 실적을 남겼다”는 평가까지 받았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던 데는 나름의 비결이 있었다. 대학원에 다닐 때부터 정계 진출을 준비해온 그는 연설을 잘하기 위해 웅변부에, 정치인이 되면 휘호를 부탁받을 것이라며 서예부에, 난투국회에 대비해 합기도부에 들었다. 자기 지역구인 ‘군마’가 관광명소라며 관광학회에도 가입했다. 심지어 “정치인은 세계를 알아야 한다”며 25세 때 9개월간 4대륙 38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26세 때 최연소 중의원이 되면서 총리를 향한 힘찬 발걸음을 내디뎠다. 한마디로 오부치는 준비된 정치인이었다.

총선이나 지방선거가 있을 때마다 우리나라의 정당들은 지명도가 있는 사람을 영입해 자기 당의 후보로 내보낸다. 그 후보의 이념이 자기 당의 지향점과 맞느냐보단 그저 인지도가 있느냐, 없느냐가 입당원서를 받는 기준이다.

 

기자회견 취소하고 돌아가고 있는 문대성 새누리당 부산 사하갑 당선자 l 출처:경향DB

정치인 중 방송에서 뉴스를 진행하던 분들이 유난히 많은 것도 그들이 정치를 잘해서라기보단 남들보다 얼굴이 팔려 표를 얻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MBC 앵커 출신의 엄기영은 2011년 3월 한나라당에 입당하자마자 한 달 후에 벌어질 강원지사 보궐선거의 후보가 됐다. SBS 앵커였던 정성근은 지난해 말 박원순 서울시장의 온라인 취임식을 비판한 클로징 멘트로 화제를 모았는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새누리당에 입당해 공천을 따냈다. 낙선하는 바람에 맹형규, 전용학, 유정현으로 이어지는 SBS 선배들의 뒤를 잇진 못했지만, 무려 42%의 득표율을 기록하며 선전했다. 앵커를 그만둔 게 불과 총선 두 달여 전인 걸 감안하면, 왜 정당들이 앵커 영입에 열을 올리는지 이해할 수 있다.

민주통합당도 별반 다를 건 없었다. <나는 꼼수다>를 통해 인기를 얻었다는 이유로 김용민을 공천하는 바람에 국회의원 1석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당의 지지율도 떨어뜨렸으니 말이다. 지역구는 아니지만 통합진보당은 서기호 전 판사를 비례대표 14번에 공천했는데, 여기엔 그가 총선 직전 ‘각하의 빅엿’이란 말로 현 정부를 비판해 화제가 됐던 게 크게 작용했으리라. 이런 식의 공천이 문제가 되는 건 정치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국회에 들어가 뭘 얼마나 잘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전에 하던 일이 정치와 전혀 연관이 없진 않겠지만, 앵커나 판사, 태권도 선수 등이 정치를 배우는 직업은 아니잖은가? 국회의원이라는 자리가 우리 국민에게 끼치는 중대한 영향을 고려한다면 한두 달 전에 입당시켜 금배지를 달게 하는 작금의 풍토에 대해 한번쯤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논문 표절이 들통나 패가망신 직전에 이른 문대성은 지명도 위주의 공천이 주는 폐해를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회충알이 사람에게 감염력을 가지려면 최소한 2주 정도는 흙속에서 발육해야 하는 것처럼, 좋은 국회의원이 되고 싶다면 선거 2년 전에는 당에 들어가 정치를 배우는 게 순리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에는 수많은 정치 지망생이 있으며, 그들도 나름대로 금배지의 꿈을 안고 지역구 관리를 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대신 돌려차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당원도 아닌 사람을 불러들여 공천을 준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이런 식이면 굳이 정당에서 궂은일을 하기보단 외부로 나가 어떻게든 지명도를 쌓는 게 훨씬 더 나을 것이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안철수 교수가 유력한 대권후보로 분류되는 건 그 대표적인 예다.

유권자들도 반성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보단 당장의 지명도에 이끌려 투표를 한 게 그간의 행태였으니까. 직함에 현혹되지 말고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보자.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오부치처럼 준비된 정치인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윤여준 |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

지난 총선에서처럼 말의 위력과 폐해가 단적으로 드러난 적도 흔치 않을 것이다. 팟캐스트 <나꼼수>의 멤버인 김용민 민주통합당 후보의 과거 막말파동이 판세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말로 인해 역사의 향방이 바뀐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해 적지 않지만, 우리 정치사에서는 4·19 당시 민심에 불을 지른 “총은 쏘라고 준 것”이라는 이기붕의 망언 이래 또 하나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정치란 단순한 폭력에 의한 일시적 지배가 아니라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공동체를 유지·발전시키기 위한 명분으로서 특히 말을 중요시한다. 그래서 왕과 조정에서는 용어 사용에 극도의 신중을 기했고, 군주는 특정 용어를 독점하기도 했다. 서양에서는 일찍이 수사학과 논리학을 중시하는가 하면, 동양에서는 왕의 이름을 입에 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글자의 사용 자체를 금지하기도 했다. 방법은 반대지만 언어를 중시, 이를 관리했다는 점에서는 같았던 것이다.

 

‘막말’ 파문에 휩싸인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 l 출처:경향 DB

민주주의란 권력의 확립과 정당화를 폭력이 아닌 말을 통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의회(parliament)라는 단어 자체가 말하다(parler)를 어원으로 하고 있듯이, 서로에 대한 잠재적 폭력, 다시 말해 내전과 같은 복수혈전을 방지하기 위해 권력투쟁을 말로 하도록 고안된 제도인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의 모체라고 할 공론장(public sphere) 자체가 카페, 신문 등 문예서클에서 출발하였다는 해석도 있다.

요즘 논의되는 ‘의사소통 민주주의’도 바로 언어를 통해 권력이 구성된다는 관점을 강조한 것이다. 절박한 사정에 처한 사람들이 요구를 제기하면 현자들이 경쟁적으로 이를 발전시켜 의제화하고, 이렇게 제시된 의견과 주장에 대해 운명 공동체의 국민 대중이 그 우열과 가부를 직접 판단, 소정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대응책을 집합적으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의 핵심은 정치적 발언, 청취, 판단에 따르는 자원과 기회를 공정하게 관리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 하겠다.

문제는 언어란 복합적 기능과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은 의사소통의 수단이며,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명제가 말하는 바와 같이 인간 정신을 구성하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 인식능력의 한계, 모호하고 혼돈스러우며 가변적인 감정과 의지로 인해 언어는 사실관계나 말하는 사람의 의사를 왜곡할 수 있다는 결함도 안고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기 위해서는 말의 사용에 특별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먼저 언어 사용에서는 사실성이 최대한 확보돼야 한다. 특히 선거 국면에서는 사실을 날조, 과장, 훼손하는 흑색선전과 루머가 민주정치에 치명상을 줄 수 있다.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는 ‘북풍’, 그리고 ‘양심선언’과 ‘의인’까지 날조하는 행위는 과거 우리 모두 똑똑히 목도한 바 있다. SNS를 통해 투표 당일 미확인 혹은 거짓 정보를 확산시키는 최근의 사례도 주목을 요하는 현상이라 하겠다.

다음으로 언어를 이성적이고 품위있게 사용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절박한 요구를 제기하거나 이에 대한 공감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국민적 판단과정에서는 격정적인 언사가 동원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를 정치 의제화하는 과정에서는 냉철한 이성과 종합적인 판단력이 중요하다는 점에서 원색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분노와 보복의 언어가 아니라 최대한 차분하고 품위있는 이성적 언어가 요청된다는 점이다.

<나꼼수>가 일부 용인되면서도 지난 총선 때 김용민의 막말파동이 논란을 빚은 소이도 여기에 있다. 우리 정치의 병리현상을 고발해 국민적 불만과 스트레스를 푸는 한편 현실정치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풍자나 격정적인 언사가 동원되는 것도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상찬되고 규범화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특히 시중의 여론을 공론으로 바꾸는 즉 정치 의제화의 핵심 담당자라 할 수 있는 국회의원에게는 매우 엄격한 기준과 높은 덕목이 요청되는 것이다. 결국 민주주의는 말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 민주주의를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올바르고 품위있는 언어 사용의 중요성에 관해서 정치인들은 물론 국민 모두의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이건 포기다. 그렇다. 민주통합당이 대선을 포기한 것이 확실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19대 총선에서 예상 밖의 참패를 하고도 뼈를 깎는 반성과 쇄신은커녕 더욱 오만과 나락 속으로 빠져들 수는 없는 일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민주통합당이 충격적인 패배 후에도 국민에게 반성하고 혁신하는 척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쇼’조차 왜 하지 못하느냐는 것이다. 2004년 총선, 대통령 탄핵으로 역풍이 불어 한나라당은 개헌저지선도 차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나 박근혜 의원이 구원투수로 등장해 ‘천막당사’라는 배수진을 통해 예상 밖으로 121석을 건져냈다. 이번 총선에서도 “탄핵 때보다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일부의 우려 속에서 한나라당은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해 박 의원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또 박 위원장은 김종인·이상돈 같은 개혁적 인사들을 영입했고 이들은 혁신을 주도했다. 하다못해 당의 색깔까지 그들이 그토록 싫어하던 빨간색으로 바꾸는 쇼를 감행했다.


이해찬 전 총리와 박지원 최고위원 (경향신문DB)


그러나 민주통합당은 참패 후에도 ‘쇄신의 쇼’조차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한명숙 대표가 물러나기는 했지만 문성근 대표대행이 자신의 패배를 비우호적인 언론환경 탓으로 돌리며 부산 젊은이들이 <나꼼수>를 안 들어서 졌다는 식으로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 기껏 한다는 것은 패배의 원인에 대한 심도 있고 냉철한 분석이 아니라 “좌클릭해서 졌으니 중도로 가야 한다”는 황당한 중도논쟁이었다. 


물론 선거에서 중도를 잡아야 이기는 것은 맞다. 그러나 중도층, 즉 새누리당과 민주통합당의 지지자가 아닌 무당파층이 민주통합당에 등을 돌린 것은 민주통합당이 비리 전과자를 공천하고 김용민 파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등, 노회찬 당선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누리당이 뼈를 깎고 있을 때 민주개혁진영은 때나 밀고 있는” 오만한 모습을 국민들에게 보여줬기 때문이지 좌클릭했기 때문이 아니다. 즉 이념이 아니라 상식의 싸움에서 졌다. 사실 총선 과정에서 민주통합당이 좌클릭한 정책들을 국민들에게 선전하고 설득하려 노력한 적이 얼마나 되는가?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나 신문을 보다가 “당이 또 구태 보이면 자멸할 수밖에 없다”는 큰 제목 아래 “민생 얘기는 어디로 가고 온통 정쟁이냐”는 쓴소리를 했다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당연히 민주통합당 이야기라고 생각해 반가워 읽어 봤더니, 박 위원장이 새누리당에 쇄신을 촉구한 내용이었다. 대신 민주통합당은 대표적인 구시대 정치인들인 이해찬 상임고문과 박지원 의원이 각각 당대표와 원내대표를 하기로 밀실담합을 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쇄신을 해도 모자랄 판에 밀실담합이라니 제정신인가? 절망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이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민주통합당의 가장 유력한 대권주자로 깨끗한 원칙주의자라는 이미지의 정치 초년생인 문재인 당선자까지 이에 대해 “담합이 아닌 단합으로 오히려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말했다는 데에서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된다. 나는 이 지면에 쓴 2월27일자의 ‘문재인의 운명’에서 문 당선자가 “대권까지 흙탕물에서의 이전투구를 이겨내기에는 너무 깨끗하고 권력의지가 약한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기우였던 것 같다. 문제의 논평을 읽고, 문 당선자가 너무 빠르게 원칙을 버리고 이전투구에 적응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미스터리는 민주통합당의 두 지도자가 밀실담합을 하면서, 나아가 문 당선자가 이 담합에 대해 논평을 하면서,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 것인지를 생각해 봤을까 하는 점이다. 생각하지 않았다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고, 생각하고도 그런 짓을 했다면 착각도 보통 착각을 한 것이 아니다. 이들 때문에 민주통합당은 국민들에게 민주세력이 통합한 민주통합당이 아니라 호남과 친노의 맹주들이 담합한 ‘맹주담합당’으로 보이게 됐다. 맹주 담합이니 그래도 ‘박근혜 일당체제’보다는 민주적이라고 박수라도 쳐줘야 하나? 맹주담합당, 만만세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철웅 논설실장



언제부터인지 국민정서란 말이 부정적인 맥락으로 사용되곤 한다. 가령 이명박 대통령은 당선자 때인 2008년 신년사에서 “선진화를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에서 시작하자. …‘떼법’이니 ‘정서법’이니 하는 말도 지워버리자”며 법치를 강조했다. 그 후 그는 수도 없이 법치를 강조했고, ‘떼법’을 개탄했다. 그가 말한 정서법은 국민정서법을 줄인 말이다. 국민정서를 빙자한, 감성적 규범을 들먹이지 말고 진짜 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말인즉슨 옳다. 국민정서란 말은 다분히 추상적이다. 이 말을 쓰는 사람에 따라 뜻이 달라질 여지가 크다. 정치인들이 “국민정서를 감안하면…”이라거나 “국민정서상 맞지 않는 행위…” 운운하면 그건 십중팔구 아전인수 격 주장을 펴기 위한 포석이라고 보면 된다. 국민, 나아가 국민정서를 들먹이면 일단 그럴듯한 명분을 선점할 수 있다는 생각이리라. 이래저래 국민정서란 말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용법으로 앞으로도 생명력을 유지하지 않을까 한다. 


이렇게 국민정서법이 법치를 무력화하는, ‘떼법’과 동일시되는 현상은 마땅히 경계해야 한다. 다만 떼법이란 말이 “법을 무시하고 생떼를 쓰는 억지주장, 또는 떼거리로 불법시위를 하는 행위”라는 뜻인 경우에 한해서다. 왜냐하면 현실에선 법치만능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정당한 주장을 떼법으로 몰아붙이는 경우를 왕왕 보기 때문이다. 2009년 용산참사를 공권력과 법치를 유린한 떼법으로 간주하는 시각 같은 것이다. 게다가 스스로 수도 없이 불법을 저질러온 이명박 정권에서 국민정서법이니, 떼법 얘기를 듣는 국민은 몹시 불편하다. 



서울의 한 대형마트 직원이 미국산 쇠고기 판매를 중단한다는 안내판을 부착하고 있다. (경향신문DB)



미국에서 광우병 소가 발생하자 롯데마트는 여러 경쟁사들과 달리 미국산 쇠고기 판매를 중단하고 있다. 마트 관계자는 그 이유를 “소비자의 먹거리 불안의식이 높은 데다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해도 광우병에 대한 국민정서를 무시할 수 없다”고 밝혔다고 한다. 누군지 몰라도 이 관계자가 매우 핵심을 찌르는 말을 했다고 본다. 아무 데나 국민, 국민정서를 갖다 붙이는 것은 삼가는 게 좋다. 그러나 국민건강을 말하는 데 있어 국민정서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 이 점을 직시하지 않으니까 자꾸 미국 편에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게 되고 그것이 또다시 국민정서를 해치는 거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철웅 논설실장



미국에서 6년 만에 광우병 소가 발견됐다. 심각한 사태이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광우병 통제체제가 허술한 미국에서는 언제라도 터질 일이 터진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다. 정부는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면 즉각 (쇠고기) 수입을 중단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가 범국민적 촛불시위로 번지던 2008년 5월8일 일간지에 광고를 그렇게 냈다. 국민들은 당연히 정부가 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었다. 



정부가 2008년 5월8일자 주요 일간지 1면에 게재한 광고 (경향신문DB)



그런데 4년 만에 ‘실제상황’이 발생하자 정부는 말을 바꿨다. 즉각 수입 중단은커녕 검역 중단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대신 검역 강화를 하겠다고 한다. 수입위생조건이 어떻다느니 핑계만 잔뜩 늘어놓을 뿐이다. 수입조건을 보면 수입 중단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는 것이다. 캐나다와의 협약에는 명시적 조항이 있는데, 한·미 간에는 그게 없어서 곧바로 수입 금지가 안된다고 했다. 이상하다. 그럴 거면 국민을 향해 철석같은 약속은 왜 했을까. 구체적 내용이 없다는 건 도리어 우리가 수입 중단 사유를 포괄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생긴 것 아닌가. 


그게 아니라고 한다.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우리에게 수입을 중지할 권리가 전혀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국민을 속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수입하는 측에서 위험성을 입증해야 하는데 한국은 광우병 발생 시 현지조사 등 그럴 권리를 다 포기했다. 이쯤 되면 말바꾸기 정도가 아니라 먹는 것 가지고 벌인 대국민 사기라고 봐야 한다. 


이 정권은 촛불시위 때 겉으론 후회니 반성이니 했어도 속마음은 그게 절대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이태 후 “촛불을 반성하는 이가 없다”고 돌변한 것이 증거다. 촛불이 무서우니까 일단 둘러대놓고 나중에 민간인 사찰이나 하고 약속을 어기고 한 것이 다 들통나고 있다. 안일한 자세로 광우병의 심각성을 축소하거나, 미국 입장을 두둔하는 듯한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처음 본 걸 이미 본 것처럼 느끼게 되는 데자뷰를 경험하나 보다. 지금 우리가 겪는 것은 정권의 국민 무시란 데자뷰가 아닌가 한다. 마르크스는 역사가 ‘처음에는 비극적으로, 다음에는 희극적으로’ 반복된다고 했건만 이런 데자뷰는 그저 서글프기만 하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우규 정치부 차장


 

<세설신어(世說新語)>. 중국 송나라 때 문학가인 유의경이 지은 책이다. 후한 말에서 동진 말까지 제왕·귀족·문인·승려 등의 언행이 수록돼 있다.


당시 문사들은 현학과 청담(淸談·명리를 떠난 맑고 고상한 이야기)을 잘해야 인정받았다. 인물 품평은 청담의 주요 과제였다. 책에 나오는 36종류의 품평 중 용지(容止·준수한 용모와 훌륭한 행동거지)편에는 “하후현의 맑은 인품은 해와 달이 가슴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고, 이풍의 흔들거리는 모습은 옥산(玉山)이 장차 무너지려는 것과 같다”고 했다. 상예(償譽·감상과 칭송)편에는 “유담이 강관을 ‘말을 잘하지 못하지만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잘한다’고 평했다”고 적혀 있다.


정치권에서도 이런 다양한 품평이 나온다. 최근 주목받는 품평은 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을 향한 게 아닐까.


그에게는 ‘원칙주의자, 신뢰의 정치, 수첩공주, 얼음공주’ 등의 평가가 따라붙는다. 그런데 그를 전담해 취재하는 기자와 당직자 등 바로 옆에서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도는 품평이 하나 있다. 바로 ‘레이저빔’이다.


지난 24일 박 위원장이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비대위 회의를 마쳤을 때다. 전날 김문수 경기지사가 대권 출마선언을 하면서 당내 경선 방식을 완전국민경선제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게 화제였다. 한 기자가 “김 지사가 2002년 박 위원장이 경선룰에 불만을 갖고 탈당했는데 이제 말바꾸기 하느냐고 했다”고 물었다.


이에 답하지 않던 박 위원장은 또다시 질문이 나오자 “어제 대답하지 않았습니까”를 두 번이나 하고는 그 기자를 빤히 쳐다봤다. 눈에서 레이저빔이 발사되는 듯했다고 한다.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그 뒤 더 이상 질문은 나오지 않았다.


지난달 7일 이상일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관훈토론회에서 박 위원장에게 “육영수 여사와 박정희 대통령 후광을 이용하려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박 위원장은 레이저빔을 쏘며 “진심이냐”고 물었다. 이 위원은 “썰렁 유머를 잘하신다고 들었는데 하나 해달라”고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얼마 뒤 이 논설위원은 새누리당의 국회의원 비례대표 당선자가 됐다.


지난해 9월 국정감사를 앞두고 박 위원장이 인천고용센터를 방문했다. 한 기자가 ‘안철수 바람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레이저빔이 발사됐다. 박 위원장은 이어 “병 걸리셨어요”라고 쏘아붙였다. 


레이저빔은 곤혹스럽고 불편한 장면에서 쏟아진다. 그 빔을 맞고 ‘멘붕’(멘털리티 붕괴, 정신혼미)되지 않을 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그런 박 위원장이 옹호하는 의원이 한 명 있다. 최근 ‘최재오’로 품평되는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이다. 2008년 친박계 공천학살을 주도한 친이계 이재오 의원에 빗댄 별칭이다. 19대 총선 공천을 최 의원이 주도했으며, 대표부터 최고위원, 당직자까지 명단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같은 친박계인 유승민·이혜훈 의원마저 그가 인의 장막을 치고 있다는 취지로 비판할 정도다. 그런데 박 위원장은 공개 석상에서 “사실이 아닌 왜곡된 이야기”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박 위원장이 어떻게 정보와 의견을 모아 그런 평가를 내렸는지는 모르겠다. 혹여 비판적인 소리가 나오자 레이저빔을 뿜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최경환 의원은 여전히 ‘최재오’로 품평되고 있다.


세종대왕은 정책 토론을 할 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 문제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허조를 불렀다. 세종은 그런 허조를 ‘고집불통’이라고 평하면서도 늘 경청했다.



박근혜 정치 논전 구도 (경향신문DB)



박근혜 위원장에게 필요한 것은 레이저빔이나 인의 장막이 아니라, 허조 같은 ‘악마의 대변자’(Devil’s Advocate·반대의견을 내놓아 열띤 논의가 이뤄지도록 하는 사람)가 아닐까. ‘불도저’라는 이명박 대통령 측근인 ‘영포대군’ 이상득 의원, ‘방통대군’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왕차관’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의 수사 상황을 보며 부쩍 드는 생각이다. 혹시 대통령이 되려 한다면 말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신형철 | 문학평론가


 

지금껏 살아온 삼십 수년의 시간을 한 번 더 살고 나면 나는 70대 중반의 노인이 될 것이다. 아직은 멀었다고 해야 하겠지만,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확실히, 예전보다는 꽤 빈번히, 노인이 된 나를 상상해 보게 된다. 집요한 인간적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워져 지혜로운 평온함에 이르겠거니 하는 기대를 해보기도 하지만, 반대로, 육체는 늙어가는데 욕망이 더 강렬해진다면 그 아이러니를 어찌할 것인가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현대사회는 노년의 초연과 지혜를 칭송하지만 그들의 욕망과 육체는 불편해한다. 1935년생인 오에 겐자부로 선생이 일흔이 되던 해에 출간한 대담집에는 이런 문답이 있다. “건강 유지를 위해 하고 계시는 것이 있습니까?” “줄곧 클럽의 풀장에서 수영을 했습니다만, 노인의 벌거벗은 몸이 사람들 눈에 어떨까 싶어 일흔을 넘겨서는 그만두었습니다.” 세계적인 대작가인 오에 선생이건만 그의 육체는 타인에게 폐가 될 뿐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자 나는 쓸쓸해지고 말았다.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郞) 일본 소설가 평상복 차림으로 실내에 앉아있는 모습 (경향신문DB)



그런 쓸쓸함을 두 시간 동안 느낄 수도 있겠구나 하고 각오한 채로 영화 <은교>를 보러갔다. 영화는 70대 노시인 이적요의 노쇠한 육체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얼마 후 17세 소녀 은교의 건강한 육체가 화면을 채운다. 이 두 육체가 영화의 주인공이다. 70대의 육체가 10대의 육체를 욕망하기 시작하면서 서사의 기차는 출발한다. 욕망을 연구한 뛰어난 이론가들의 통찰을 내식대로 정리해 보자면 ‘욕망의 서사’는 대체로 다음 서너 개의 역을 경유한다. 


첫째, 욕망은 ‘결핍’에서 출발한다. 이적요의 은교에 대한 욕망은 우선은 자신에게 ‘없는’ 여자(그에게는 아내도 딸도 없다)에 대한 욕망이겠지만 동시에 자신에게 ‘없는’ 젊음에 대한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은교를 안는 환상 장면에서 이적요는 젊은 날의 그로 되돌아가 있다. 둘째, 욕망은 ‘금지’를 통해 가중된다. 70대 노인이 17세 소녀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노욕이고 추문이다. 그런 시선은 슬픔과 울분을 키우고 욕망은 그것을 먹고 자란다. 


셋째, 욕망은 ‘경쟁’을 통해 심화된다. 이적요의 제자인 서지우에게는 젊음이 결핍돼 있지 않으며 이적요에게만큼 강한 금지가 부과돼 있지도 않다. 그는 은교를 안을 수 있고 또 안는다. 서지우의 존재는 질투와 분노를 키우고 욕망은 그것을 먹고 사슬을 끊는다. 넷째, 욕망은 ‘자멸’로 완성된다. 욕망은 어느 한계를 넘으면 충동이 된다. 충동이 무서운 것은 그것이 제 주인을 파괴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스승은 제자를 죽이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죽였다. 


물론 이것은 극적인 상황이다. 세상의 모든 욕망이 이 네 단계를 모두 통과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노년의 욕망은 그 주인에 의해 일찌감치 처단되고 매장되고 부인될 것이다. 그래도 그것은, 없지 않고, 있다. 예술은 ‘있어야 할 것’을 그리기 이전에 먼저 ‘있는 것’을 그린다. 이 영화가 70대와 10대의 성기를 얼핏이나마 보여주는 것은, 성기가 불가피하게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고, 우리의 욕망이 그와 같기 때문이며, 노년의 욕망 또한 그렇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나는 이와는 좀 다른 어떤 노년의 욕망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적요의 욕망은 결핍된 것에 대한 불가능한 동경이어서 아프다. 그런데 같은 70대 노인들인 현 대통령과 그의 멘토인 어떤 분에게는 죽어도 다 못 쓸 돈과 안하무인의 권력이 있을 것인데 왜 그들은 이미 있는 것을 그토록 열정적으로 추구하나. 그것은 인간적 욕망이 아니라 기계적 충동의 산물일까. 제 주인을 파괴하기 전에는 절대 멈추지 않는, 괴물 같은 그 충동 말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제혁 사회부 기자

지난해 9월30일 열린 청와대 확대비서관회의.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 정권은 돈 안 받는 선거를 통해 탄생한 특성을 생각해야 한다”며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므로 조그마한 허점도 남기면 안된다”고 말했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부산저축은행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고, 이국철 SLS그룹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해 신재민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르는 등 대통령 측근의 비리가 본격적으로 터져나오던 시점이다.

이 대통령은 유난히 희화나 풍자의 소재가 되는 경우가 잦은데,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이라는 말도 그렇다. ‘청와대 직원들은 엄격한 도덕적 기준을 지녀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겠지만, 세간의 평판과는 확연히 동떨어진 이 대통령의 ‘낯선’ 인식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했다. 이 정부 들어 대통령 주변 사람들이 기소된 목록만 대충 훑어봐도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 운운하기 어렵다. 말과 실질의 거리가 하염없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당황하고 냉소하고 조롱한다.

 

이명박 정부 권력실세들의 비리 연루 의혹 l 출처:경향DB

이 정권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정적을 제거하고 제 사람을 심으려 민간인을 불법사찰하고 재산을 강탈했다. 그 사실을 숨기려고 불법사찰의 증거가 담긴 총리실 컴퓨터를 망가뜨렸다. 이 사실마저 덮으려고 사건 관련자를 돈으로 매수하려 했다. 이 일련의 과정을 청와대가 주도했다. 국무총리실은 행동대 역할을 했다. 여당 의원들은 불법사찰의 피해자를 빨갱이로 분칠했다. 검찰은 깃털만 뽑고 수사를 덮었다. 이 거대한 부조리극에 입법·사법·행정이 총동원됐다. 현 정권의 창업공신 중 한 명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여당 대표에 당선되려고 돈봉투를 돌렸다. 이 대통령 측근인 은진수 전 감사원 감사위원과 김두우 전 홍보수석은 영업정지된 부산저축은행에서 뇌물을 받았다. 신재민 전 차관은 기업인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 이 대통령 부인 김윤옥 여사의 사촌오빠는 제일저축은행에서 4억원의 뇌물을 받았다. 김 여사의 사촌언니 김옥희씨는 비례대표 공천을 대가로 30억원을 받았다.

이 대통령의 ‘멘토’라는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은 건설업자로부터 수억원을 받아 썼다. 실세 중 한 명인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은 건설업자로부터 10억원대 뇌물을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새누리당 의원도 뇌물수수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이 대통령의 측근과 친인척 중 비리로 기소됐거나 의혹이 제기된 사람만 20명을 넘는다. 현재까지 드러난 것만 이 정도다. 앞으로 뭐가 얼마나 더 터져나올지 알 수가 없다.

며칠 전 사석에서 만난 검찰 관계자는 “검찰이 권력의 눈치를 본다고 욕을 먹고 있지만, 임기말 수사만 제대로 해도 평가는 바뀐다. 검찰도 임기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어제까지 정권과 한배를 탔던 검찰도 등을 돌리는 낌새가 보인다. ‘도덕적으로 완벽한 정권’의 말로가 초라하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강상중 | 도쿄대 대학원 교수

한국의 총선거가 끝났다. 서울에서도 지방에서도 거리에는 후보자들의 얼굴사진이 붙은 깃발이 나부끼고, 기업광고로 착각하기 쉬운 선거차량이 거리를 누비는 광경이 펼쳐졌다. 후보자와 응원단은 손을 흔들어 환심을 사려 하고 확성기가 시끄럽게 울어대는, 일본과 흡사한 선거풍경이다.

이 시끌벅적한 선거기간이 지나고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여당의 선전, 야당은 기대 이하의 결과로 마무리됐다. 여당은 정당의 간판을 바꾸고, 당의 얼굴(비상대책위원장)을 여성으로 바꾸는 것으로 의석의 격감을 막고, 그럭저럭 과반수를 확보하게 됐다. 여당인 새누리당과 현 정권으로부터 거리를 두면서 성장에서 복지로 중점을 옮기는 것에 의해 거둔 신승(辛勝)이지만 현 정부에 대한 국민여론의 강한 반발을 감안한다면 새로운 여당은 선전을 한 셈이다. 박근혜 위원장은 앞으로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후보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야당은 어떠한가. 의석수를 대폭 늘리며 약진했자만 패배감 같은 분위기에 휩싸여 있음에 틀림없다. 선거를 치르기 전까지는 국회의석 과반수 확보가 현실감을 띠었고, 여야 역전도 필연일 것으로 예상돼 온 만큼 ‘기대이하’의 결과라는 이미지는 불식하기 어렵다.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불안의 씨를 안게 된 것도 확실하다.

이런 총선 결과를 어떻게 분석해야 할 것인가. 전문가나 언론, 정치인 등 각계의 식자들이 이러저러한 각도에서 파고들고 있을 것이다. 다만 눈앞에서 전개되는 상황에서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면 투표율이 예상한 만큼 높아지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던 것 아닐까.

 

19대 총선과 정당정치, 그리고 한국의 민주주의’ 공동 학술대회 l 출처:경향DB

수출에 의존하는 한국경제는 세계적으로 성장한 기업들의 해외진출과 브랜드 파워도 있고, 일본에서도 이런 한국경제의 파워에 대한 인상이 깊어지고 있다. 하지만 국민의 생활과 복리면에서 보자면 최근 수년간 가처분소득의 정체와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고용의 확대, 실업률 상승과 부동산 가격 급등 등으로 한국사회의 저변을 지탱해온 중간층의 피폐가 심화됐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 간 격차와 계층 간 격차, 치열한 경쟁에 따른 심리적 스트레스와 박탈감 등 다양한 사회적 병리가 드러나고 있다. 요컨대 성장지상주의의 정치·경제구조가 사회적인 복리와 연대를 빠르게 해체하면서 만성적인 패배자 집단과 계층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여파는 심각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 가장 높은 자살률이 말해주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한국은 대외적으로는 글로벌 경제의 우등생처럼 보이지만 대내적으로는 빈곤과 격차, 병리가 끊임없는 사회가 돼가고 있는 것이다. 본래 민주화가 어느 정도 정착된 한국에서 선거는 성장보다는 복지로 방향을 튼 정치를 택할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일본에 비해 정보기술(IT)이 앞서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다양한 미디어와 네트워크가 확산되고 있는 한국에서 청년층의 정치참여가 좀 더 확산돼 이번 선거에서도 영향을 발휘하면 좋았으련만, 투표율이 지난 총선보다 오르긴 했어도 대단한 증가율은 아니었다.

확실히 국민의 정치참여 퇴조와 ‘무당파’층의 확대, 투표율 저하는 선진국 민주주의에 공통된 현상이다. 국민주권에 기초한 민주주의라지만 정부는 글로벌 시장이라는 익명의 힘에 좌지우지되고 국민의 뜻이 국정에 반영되지 않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런 점도 선진국의 민주주의 위기로 일컬어진다.

한국은 글로벌 경제에 급속히 편입돼 그 영향을 정면에서 받아온 만큼 민주주의의 위기도 심각해지고 있다. 어떤 정부나 대표를 선택한다고 해도 국가가 글로벌 시장경제와 그 혜택을 향유하는 대기업의 동향에 주목하는 만큼 유권자와 국민의 생활 및 복리에는 자원을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체념 비슷한 감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조합도 야당도, 다양한 운동단체도 체제와 반체제의 격렬한 대립을 되풀이하고 있지만, 실제로 대안은 점점 좁아지고 있다, 이런 의식이 청년층을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기성 정당정치에서 새로운 비전이나 신선한 발상을 체감할 수 없는 젊은이들이 ‘그렇다면 경력쌓기를 위해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민주화시대와 ‘포스트 민주화시대’의 청년층과 학생 간의 의식에는 꽤 큰 단절이 있다. 야당이 그 단절을 메우지 못했고, 젊은이들이 투표소로 발길을 옮기도록 할 새로운 정치 스타일과 비전을 보여주지 않았던 것에 야당 패배의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새 시대의 정치에는 새로운 정치학이 필요하듯, 새로운 정치가도 필요하다. 그것이 확실하게 드러날 때까지 민주화 이후의 한국 정치는 여러 곡절을 거칠 것이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류근일 | 언론인

한국의 진보라 할까 좌파라 할까 하는 진영은 이제 상대방에 대한 싸움에만 파묻힐 게 아니라 자신들이 누구이고, 누구여야 하는가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한국의 진보는 과연 잘하고 있나? 이런 질문은 바깥에서보다 내부에서 먼저 제기되어야 상식적이다.

진보의 지평에는 최근 두 개의 논점이 떠올랐다. <나꼼수>의 막말 파동이 그 하나였다. 또 하나는 1990년대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잔재들의 등판을 둘러싼 의혹이었다. 이 두 가지는 한국 진보의 품격과 정당성이 걸린 중요한 논점이었다. 진보의 끝자락이 저질, 쌍욕 판으로까지 가 닿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 그리고 한국 진보가 ‘너무 먼 좌(far left)’하고 짝짜꿍이 되는 게 과연 좋은 것인지가 논란이 되어야 했다.

막말과 관련해 문성근 민주통합당 대표권한대행은 선거판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한계를 설명하는 가운데 이렇게 덧붙였다. “부산 젊은이들은 <나꼼수>를 안 듣는다. 듣는 사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동원을 하는데…”(뉴스1) 거북한 얘기다. 부산 젊은이들이 “콘돌리자 라이스를 ××해서 죽이자”(라디오21) 따위를 듣지 않아 동원이 안됐다니, 이건 부산 젊은이들에 대한 결례일 수 있다. 자신과 진보에 대한 ‘누워 침 뱉기’도 될 수 있다. 한명숙 전 대표도 막말꾼을 강력하게 응징하지는 않는 채 그 팔로어들 눈치를 살폈다. 자해(自害)였다. 윤리적 판단을 못해서였나, 득실 계산에 어두워서였나, 미추(美醜) 분간이 둔해서였나?

 

민주통합당 김용민 후보가 경로당을 찾아 할머니들에게 사죄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쌍욕, 저주, 외설이 반항의 무기로 쓰이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하문화, 비주류, 소수파로서 한 귀퉁이에 웅크리고 있는 게 제대로 된 곳의 풍경이다. 한국에서처럼 어엿한 주류 제도야당이 그것에 영합하고 겁먹는 건 한심한 사례다. 윤리적 목마름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다는 사람들이 오늘날에 와 진보운동을 그렇게, 윤리와는 멀어도 한참 먼 동네로까지 접속시킨대서야 그게 결국은 자신들 말고 누구 손해인가? 진보가 자문해야 한다.

민혁당 잔재가 왕년의 종북 노선을 씻었다는 양심고백도 없이 은근슬쩍 민노당, 통합진보당을 잠식해 왔다는 근래의 증언들이 사실이라면, 그것 역시 한국 진보의 올바른 노선정립을 위해 무섭게 달라붙어야 할 이슈였다. 진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좌쪽 극단도 진보인가… 하는 등등의 근본적인 쟁점들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유럽 좌파의 역사는 좌파 내부의 노선투쟁 역사였다. 특히 극좌 전체주의에 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의 투쟁 역사였다. 공산당과 통일전선을 하자는 좌파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우파 사회주의자들의 논쟁도 뜨거웠다.

동유럽 우파 사회주의자들은 공산당 쿠데타 후 멸종을 당할 운명이었지만 그들은 원칙대로 갔다.

러시아의 멘셰비키도 1923년에 명맥이 끊길 때까지 볼셰비키와는 다른 배를 탔다. 이게 지적(知的) 정직성이란 것이다. 한국 진보 내부에는 과연 그런 정직한 노선투쟁이랄 게 있나?

민혁당 비전향 부대가 그 후의 숙주 안에서 심지어 ‘당권파’로까지 올라가 있었다면, 보수 우파보다도 그쪽의 ‘그래도 좀 생각 있는’ 선수들이 가장 앞장서 논쟁의 포문을 열었어야 ‘진보적’이다. 이게 어째 보수 우파의 아젠다로만 놔둘 일인가? 문제는 보수가 아닌 진보의 총 노선이 걸린 사안이다.

그렇다면 진보 안에서 먼저 “전체주의, 3대 세습, 인권압살, 핵-미사일 도발에 눈감는 쪽을 진보로 품을 수 있는가?” 하는 말이 당연히 나왔어야 ‘기본’이다. 정치적 타산에서, 진영에 묶여, 보수가 더 미워 그렇게 안 했다면 그것은 지식인으로서는 실존적 파산, 지성의 포기, 따라서 진보의 스캔들이다.

‘×× 전문가 +너무 먼 좌’라는 뻐꾸기가 진보 둥지에 날아 들어왔다. 둥지는 뻐꾸기를 안고 품고 손잡고 팔을 들어 보였다. 뻐꾸기에 코라도 꿰였나, 뻐꾸기와 아예 사랑에 빠졌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동규 | 동명대 교수·언론광고학

27세의 홍안(紅顔), 이준석 새누리당 비대위원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20일자)에서 “예상치 못한 시나리오인 과반의석 점유로 당이 혼란스러운 것 같다”고 말했다. 여당 스스로도 놀랄 만큼의 총선 결과였던 게다. 후폭풍이 당연하다. 진보적 유권자 상당수가 4월11일 늦은 밤, 패닉상태에 빠져들었다. 정치허무주의라는 유령이 대한민국 하늘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즉각적으로 KTX 민영화가 들먹거리고, 민간인 불법사찰 문제는 언론의 의제설정에서 완연 사그라드는 추세다.

정치평론가들의 4·11 총평을 요약해보면 대략 세가지다. 첫째는 ‘차려준 밥상도 못 먹는’ 민주통합당의 무능이다. 밥상을 통째 걷어차고 바닥에 흘린 밥 알갱이나 주워 먹은 꼴이다. 갈라먹기 공천의 절정은 민주당 경제민주화특위 위원장 유종일 교수의 공천 탈락이었다. 둘째는 “선거의 여왕의 저력”이다. 오른손에 휘감은 붕대로 상징되는 정교한 이미지정치가 부동층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셋째는 선거 중반 이정희 의원 사퇴와 종반 김용민 후보 막말 파문이다. 일리있는 해석들이다. 하지만 이것만이 새누리당 압승 원인의 전부일까?

투표는 특정한 정치·경제·사회 정책을 주장, 실천하는 정당과 후보자에 대한 공감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앞선 분석들은 혹시, 유권자들 표심을 일시적 화장빨에 현혹되는 즉자적 선택 결과로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19대 총선 투표일인 11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 주민센터의 투표소를 찾은 유권자들이 줄을 서있다. I 출처:경향DB

정치 문외한인 필자 생각에 막강한 의회권력을 선출하는 역사적 선택에서 초(超)보수 정당이 대대적으로 승리한 것에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바로 유권자들 스스로가 초보수적이기 때문이다. 4대강 사업, 민간인 불법사찰, 재벌경제 고착화로 대표되는 정치세력이 다수당 등극의 축포를 터트리는 현상에는 우리나라 유권자들 인식이 꼭 그만큼이라는 구조가 깔려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뚜렷한 인과관계에 애써 눈을 감는 건, 우리 사회가 일종의 최면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유권자는 무조건 옳다’라는 집단최면 말이다.

총선 다음날 새벽, 잠자리에 든 필자의 비몽사몽 위에 겹쳐진 것은 1932년의 독일이었다. 그해 7월31일 ‘민족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나치당)’은 37.3%의 압도적 지지율로 제국의회 선거를 장악한다. 그들에게 권력을 몰아준 것은 유령이 아니었다. 사민당의 지지부진한 절차민주주의에 짜증을 내고 히틀러의 경제성장 마술에 현혹된 보통의 독일 사람들이었다. 이른바 ‘유권자의 위대한 선택’을 통해 탄생한 나치 정권이 이후 어떤 길을 걸어갔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

국회의원 선거보다 몇 배 중요한 또 다른 선거를 앞둔 지금, 우리 정치의 키워드는 민주당의 무능도 새누리당의 꽃단장 제스처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눈앞에 꿈틀대고 있음에도 모두가 외면하는 그 괴물의 정체는, 바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넘어선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우중화(愚衆化)인 것이다.

후손에게 물려줄 강산을 뿌리부터 파헤치는 4대강 사업도, 헌법민주주의의 기초를 부수는 민간인 불법사찰도 모두 남의 일이라 여기는 극단적 개인주의. 민혁당 관련자 사법살인으로 상징되는 유신독재의 공포를 못 사는 이들도 살 만했던 호시절로 대체하는 기억상실증. 이 ‘숨은 손’들이 모여 허황무비한 7·4·7공약에 박수를 쳤고, 돈 놓고 돈 먹기식의 뉴타운공약에 몰표를 던졌던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손들이 8개월 뒤에 다시 붓뚜껑을 들 것 아닌가.

가혹한 경제불황의 고통을 원인제공자인 기득권력에 대한 분노로 표출하기보다는, ‘무능해보이는’ 개혁세력에게 되돌리는 착종적 인식과 유권자들의 집단무의식 저변의 이 같은 퇴행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그들을 번쩍 깨울 수 있는 혁명적 정책 대전환이 시도되지 않는 한, 남은 대선 또한 민주개혁 진영에는 전도무망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80년 전의 독일을 2012년 12월 이 땅에서 다시 만나는 데자뷰, 상상만 해도 등에 소름이 돋는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봉선 논설위원

아마 ‘한 번 주유로 서울과 부산을 왕복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다. 강한 인상을 남긴 광고 중 하나인 하이브리드 자동차 카피의 한 구절이다. 살인적인 고유가 시대를 살아가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 때문에 더 와닿았던 모양이다. 전기와 휘발유로 가는 차라는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새길수록 새롭다. 고가라는 한계가 있으나 돈과 에너지를 절약할 수 있고, 친환경론자라는 평판까지 덤으로 얻는다. 유행하는 말로 ‘개념 있는’ 측에 들 만하다. 필요성이 제기됐고, 그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기업 경영자와 과학기술자들이 상상력을 발휘한 산물일 것이다. 사익을 추구하는 기업이 이 정도라면 국리민복을 외치는 정치, 정치인이라면 이를 능가하는 상상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정치적 상상력의 사례라면 2002년 대선의 행정수도를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노무현 민주당 후보가 행정수도를 입에 올렸을 때만 해도 많은 이들이 황당해했다. 옆에서 그의 한마디 한마디에 귀기울여온 기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노 후보에게 설명을 듣고서야 뜻을 헤아렸던 기억이 있다. 노 후보는 충청 민심을 얻었고, 대선에서 이겼다. 수도권 표의 이탈을 감안하면 그게 그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플러스 효과가 컸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포퓰리즘이라는 일각의 비판에도 지방자치를 깊이 연구해온 덕에 유권자의 이해를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행정수도는 ‘관습헌법상 수도는 서울’이라는 해괴한 헌재의 결정 때문에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반쪽 났으나 현실이 됐다. 행복도시는 노무현의 업적으로 남을 것이다.

 

고 노무현대통령 묘역찾은 민주통합당 당선자들 I 출처:경향DB

절대적 좌우 개념의 붕괴, 복잡다단한 국민들의 욕구, 정치적 상상력이 정치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하이브리드 정치’ 시대의 도래라 해도 무방할 듯하다. 국민들이 원하면 상대 진영의 정책이라도 빌려다 쓰는 정책 차용이 유럽에서는 오래된 일이지만, 이제 국내로 밀려들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복지국가론이 그 중 하나다. 이전까지만 해도 국가의 개입이 불가피한 복지국가론은 자본주의의 기반인 시장을 훼손한다며 우파 진영의 냉대를 받아왔다. 총선 공약에 반영되지는 못했지만 새누리당이 당의 정강·정책에 ‘경제 민주화’를 삽입한 것도 그 범주에 속한다. 상상력과 하이브리드는 한뿌리다. 상상력이 문제 의식이라면 하이브리드는 대안이다.

사실 ‘안철수 현상’은 하이브리드 정치적 요소가 적지 않다.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은 자신을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규정한 바 있다. 보고 듣기에 따라선 양립할 수 없는 단어의 집합인 ‘좌파 신자유주의’처럼 불편하다. 하지만 안 원장은 MBC 파업 현장을 찾는가 하면, 탈북자 북송 반대 집회에도 참여한다. MBC 파업은 정당하고, 탈북자 북송은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존 프레임에 익숙한 정치인이라면 칭송 아닌 비판이 쏟아질 그런 ‘파격’을 꿈꾸지 못한다. 이념이 아니라 상식과 원칙에 입각한 유연한 사고, 즉 하이브리드 정치적 판단으로 가능한 일이다. 그가 서울시장 출마를 선언할 때 한나라당의 확장성을 경계하면서도 민주당 지지를 천명하지 않은 것도 마찬가지다. ‘반한나라’ 하면 ‘친민주’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그에게는 제3의 지대가 있었다. 이분법적 사고의 틀을 벗어날수록 그가 잘 보인다.

지금 민주통합당에서는 노선 투쟁이 벌어지고 있다. 4·11 총선에서 과도하게 좌클릭하는 바람에 패했으니 중도를 보강하자는 주장과 제대로 좌클릭을 해봤느냐는 반론의 충돌이다. 철이 한참 지난 논쟁이다. 좌클릭이니 우클릭이니 하는 양단의 두 개념은 경계가 모호해지고, ‘민생’을 공통분모로 하이브리드적 변신을 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저마다의 고민이 결국 삶의 문제라는 ‘민생’에서 만나는 시대다. 민생이야말로 이종과 혼합이라는 본래 뜻처럼 2개 이상의 상이한 특성을 결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하이브리드 정치의 정수다. 새누리당이 보수적 정책에, 민주당이나 진보당이 개혁·진보적 정책에 비교우위를 가질 수밖에 없겠지만 그 어떤 민생의 가치를 독점하는 시대는 끝났다.

문제는 하이브리드 정치가 머리 좋거나 창의력이 풍부한 몇 사람의 머리를 쥐어짠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대선을 얘기하자면 왜 집권해야 하는가와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자문에 대한 분명한 답을 구하고, 이를 위해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겠다는 절실함이 있어야 상상력이 생겨난다. 다시 말하자면 열망과 각오, 투지로 상상력을 빚어낼 때 하이브리드 정치도 가능하다. 총선 결과에 참담해해야 할 곳은 민주당이다. 진정 참담해하는 이들은 그들을 지지한 시민들이고, 민주당은 내심 127석에 만족하는 것 같으니 역설도 이런 역설이 없다. 다시 묻는다. 민주당은 진정 정권을 잡고 싶은가. 무엇을 위해서인가. 국민을 위해 꼭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인가, 아니면 집권하면 얻을 수 있는 전리품 때문인가. 민주당이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현 야권 주자들의 장점만 모은 후보가 출현한다 해도 희망을 말하기 어렵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광기 | 경북대 교수·사회학

지금 전국의 국립대학은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하다. 총장 직선제 폐지를 둘러싼 교육과학기술부와의 갈등이 빚어낸 후유증 때문이다. 교과부는 지난해 초 ‘교육공무원임용령 일부 개정령안’을 국무회의에서 통과시킴으로써 단과대학장 직선제를 폐지시키고 총장이 직접 임명토록 해 파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지금의 후유증은 그때 이미 충분히 예견된 일 중 하나였다.

교과부가 총장 직선제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는 명분은 간단하다. 직선제의 폐해가 심하다는 이유에서다. 현실성 없는 공약의 남발과 학내 구성원의 파벌 형성 등으로 선거가 과열되고, 보직을 공에 따라 나누어 먹어 학내 분위기를 크게 해친다는 역기능이 직선제 폐지의 명분으로 등장했다. 이에는 확실히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대학에서 총장에 뽑힌 이들과 보직에 눈먼 아부쟁이들이 이런 소리를 들을 짓을 해온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해서 필자도 그런 것에 염증을 느껴 솔직히 직선제 폐지를 염두에 둔 적도 있다. 하지만 직선제가 절대로 폐지돼서는 안되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 때문에 그런 생각을 떨칠 수밖에 없다.

 

대학 총장 직선제 유지 기자 회견(1996년) I 출처:경향DB

첫째, 민주주의 국가라면 어떤 선거도 나쁜 선거란 없다. 선거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폐단 때문에 선거를 없앤다면 그것은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국회의원 선거 과정이 혼탁하다고 해서 선거를 없앨 수 없듯이 대학 현장의 직선제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의 교육과 실천을 위해 하물며 초등학생도 반장 선거를 하는데 교수들이 선거를 못하게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둘째, 직선제를 없앨 때의 폐단이 시행했을 때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선출되지 않은 학장이 총장의 거수기 노릇만을 톡톡히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선출되지 않은 총장은 지성인의 수장 노릇보다는 정부 시책의 주구 노릇을 할 공산이 더 커진다. 총장이 되기 위해 학내 구성원보다는 정치권이나 정부에 줄을 대 낙점 받고 싶어 안달하는 이들이 총장이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셋째, 총장 직선제 폐지의 불순한 목적 때문이다. 정부 시책에 입도 뻥긋 못 하고 국으로 입을 다문 채 교과부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할 총장을 배출하려는 목적에는 곧 그를 수장으로 삼고 있는 평교수들조차 그렇게 만들고 싶어 하는 간교한 꼼수가 숨어 있다. 결국 사회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위정자들의 잘잘못을 따져야 할 교수들의 사회적 책무를 못하게끔 교수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자물쇠를 채우는 잠재적 기능을 직선제 폐지가 지니고 있기에 결코 직선제가 폐지되어서는 안된다. 사회의 건전한 비판은 언제나 작동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과부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불도저처럼 총장 직선제 폐지를 밀어붙이고 있다. 그런데 그 방법이 치사하기 그지없다. 알량한 돈 몇 푼(교육역량 강화사업)을 갖고 대학들을 위협해 직선제 폐지를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받아들이게 한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뜩이나 재정이 열악한 국립대학으로선 그 정도의 지원도 절실해 백기를 들 것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교과부가 치밀하게 기획한 일이다. 그러나 몇몇 국립대학이 이에 끝까지 저항했고, 그 결과는 올해 사업 선정에서 해당 대학의 탈락이었다. 도대체 총장 직선제와 교육역량 강화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어 이런 보복성 결정을 교과부가 내리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그 사업비의 대부분은 장학금 등 학생들을 위해 쓰인다. 장학금을 볼모로 삼아 교과부가 이런 일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을 국민들은 알까?

지난달 말 전국 국공립대 교수들은 이주호 교과부 장관의 불신임안을 90% 이상의 찬성으로 가결했다. 이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 따져보고 반성하는 장관이었으면 한다. 어쨌든 개인적으로 백기투항을 하지 않은 대학에 몸담고 있다는 것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아, 국립대학의 봄날은 언제 오려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총선 결과는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다. 선거란 무엇보다 집권세력의 공죄를 준엄하게 심판하는 행위여야 하고, 그 심판은 민주주의의 존속에 불가결하다. 이것은 초보적인 진실이다.

그런데 딴 것은 젖혀두고, 현 정권은 민간인 사찰 문제 하나만으로도 엄중한 정치적 단죄를 받아야 마땅했다. 사찰이란 민주주의를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가장 비열한 통치 방식이다. 개인적 약점을 캐내 정치적 저항이나 반대 목소리를 침묵시키려는 게 ‘사찰’의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런 짓을 끊임없이 자행했다는 증거가 속속 드러나는 상황에서의 선거였음에도, 집권세력이 또다시 국회 제일권력을 차지하는 기이한 사태가 발생했다. 이 나라 민주주의의 침체를 보여주는 서글픈 증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이번 선거 결과는 집권당의 승리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했듯이, 정당별 득표결과를 보면 범여권에 비해 범야권 쪽의 지지율이 더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야당세력은 이번에 실질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패배한 셈이다. 이 모순은 말할 것도 없이 현행 선거제도의 불합리성 때문이다. 한 지역에서 최다 득표자 1인만 선출되는 제도는 필연적으로 민주적 대표성을 심각하게 왜곡한다. 패한 후보를 지지한 유권자들의 뜻은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구조인 것이다. 이 명백한 모순에 대한 보완책의 하나가 비례대표제지만, 현재 여의도의 비례대표 의석은 보완책이라고 하기에는 그 비중이 너무나 미미하다.

 

녹색당 이유진 비례대표 1번 후보가 당원들과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I 출처:경향 DB


원래 대의제 민주주의는 결함 많은 제도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다른 현실적 대안이 없는 이상, 다양한 보강 장치를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민의를 최대한 바르게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의 확보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긴급한 것은 개헌이 아니라 선거제도의 개혁일 것이다. 대표성의 왜곡이 불가피한 현 선거제로는 최소한의 합리적 정치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의 선거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요식행위일 뿐, 기득권층의 영구집권을 보장하는 장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쉽다.

미국에서 그렇듯이 한국의 정치도 이대로 가면 결국 기본적 정책 방향이 별로 다를 게 없는 양당독재체제로 굳어질 게 틀림없다. 현 선거제는 새로운 사상과 철학을 가진 신생 정치세력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직면한 현실이 이제는 기성의 사상, 관념, 가치에 의해서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벽에 부딪혀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갈수록 심화되는 세계적인 환경·자원·에너지·금융위기는 지금까지 화석연료에 기반을 둬 왔던 성장경제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성장의 시대를 뒷받침해온 낡은 사고와 제도의 효력이 더는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엄중한 문제를 계속 외면할 때, 그 궁극적인 결과는 집단적 자멸 사태일 것이다.

그렇게 보면 설령 이번 선거 결과가 야당세력의 승리였다 해도 그게 꼭 의미 있는 승리였을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현재 야당세력이라고 해서 시대현실의 심각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 과연 믿을 만한 것인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비근하게는 한·미 FTA나 4대강 문제, 원자력에 관한 문제의식만 해도 그렇다. 이 현안들에 대해 그들은 지금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려 있다. 그것뿐만 아니다. 예를 들어, 지속 가능한 삶을 생각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농업문제에 대해서 이번 선거에서 민주통합당은 놀랍게도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이 나라에서 산업화가 시작된 이래 역대정권에 의해 한국의 농사는 끝없이 홀대를 당해왔고, 노무현 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 동안 농촌인구는 500만에서 350만으로 줄어들었다. 이것은 150만의 인구가 일자리를 잃거나 도시 빈민으로 전락했다는 것을 뜻하지만, 실은 더 중요한 것은 한국의 농업이 이제 사멸 직전에 이르렀다는 기막힌 사실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권력 엘리트들은 언제나 농업규모의 확대, 농사의 기업화, 경쟁력 강화라는 공허한 말만을 되풀이해왔지만, 그들은 그 경쟁력 논리의 궁극적인 결과가 무엇인지 한번도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해본 적이 없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경제성장이 멈춘 시대의 삶은 어떻게 될까. 확실한 것은 원래 그래왔듯이 소농 중심의 순환적 농사야말로 인간다운 삶의 최후 보루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화석연료 혹은 원자력에 의존하는 성장경제 시대는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자원과 에너지 확보를 둘러싼 경쟁이 격화되고, 전쟁까지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석유를 확보한들, 장기 지속될 수 없음은 뻔한 일이다.

따라서 경제규모를 확대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고식적인 방식이 아니라 공생과 상부상조의 원리에 따른 삶을 재창조하는 게 새로운 시대의 핵심과제일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현명한 방식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차피 앞으로는 새로운 농경 중심 사회일 게 틀림없고, 따라서 성장 없는 시대를 대비한다는 의미에서도 지금은 건강한 농사기반의 확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다고 할 수 있다.

현재의 선거제도로는 이러한 장기적인 대책,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위한 치열한 논의를 위한 정치적 틀의 형성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이다. 시대착오적인 성장논리로부터의 탈각을 말하는 진실로 생산적인 목소리가 이런 선거판에서 주목을 받는다는 것은 애초에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녹색당이 처한 처지가 바로 그러했다. 세계 70여개 국가에 존재하는 게 녹색당이지만, 한국에서는 이번에 최초로 등장하여 선거에 참여했다. 녹색당은 탈핵·탈성장·농업회생을 최대 긴급 현안으로 인식하고,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효과적인 대책들을 제시했다. 하지만 거대 정당들의 그늘에 가려져 녹색당의 목소리와 문제의식은 완전히 변두리로 밀려나고 말았다. 녹색당 자신의 역량부족 탓도 크지만, 거대 정당의 고식적인 목소리 이외에 이단적인 목소리의 시민권을 허용하지 않는 선거제도 하에서 이것은 신생정당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독일의회만큼이라도 비례대표제가 확대되지 않는 한, 우리 사회에서 녹색정치가 열릴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중근 기획에디터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지난 총선 막바지에 광주에 출마한 이정현 새누리당 후보와 대구에 출마한 김부겸 민주통합당 후보를 불러내 모종의 정치 행사를 가지려 한 것으로 보도됐다. 이런 이벤트는 안 원장이 그동안 비판해온 한국 정치의 낡은 행태의 단면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으로, 현 시점에서 안 원장의 정치의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정치란 무엇인가. 아무도 그것을 모른다는 데 안 원장 문제의 핵심이 있다.

정치와 사회 현안에 대해 발언할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더구나 안 원장처럼 여론조사 지지율이 50% 안팎에 이르는 명망 있는 인물이라면 더욱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할 의무도 있다. 여기에 국민이 현역 정치인이나 정당에서 대안을 찾지 못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정치 행보에 대한 1차적 책임은 그가 아니라 정치인과 정당에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럼에도 안 원장의 지금 행보를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 한둘 아니다. 원래 선거는 후보가 어떤 세력을 대표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면 약속을 실천하는 일련의 정치 과정이다.

 

안철수의 대권 도전 예상 시나리오 I 출처:경향DB

그런데 안 원장을 보면 그가 우리 사회의 누구를 대표하고 어떤 정치를 펼치겠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다. 대통령 후보를 꼼꼼히 검증한 뒤 선택하는 것이 민주주의 절차의 필수인데, 안 원장에 대해 국민이 알고 있는 얘기는 대부분 간접 정보뿐이다. 결과적으로 그의 애매한 행보가 국민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다.

더 심하게 말하면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높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이쪽 저쪽 세력을 모아 대선에서 이기겠다는 심산인 것 같다. 여느 사람 같았으면 자신의 실력은 내보이지 않은 채 이미지로만 대통령에 당선되어 보겠다는 안이한 발상이라고 비난받기 딱 좋은 상황이다.

이당 저당의 장점을 취해 제3지대에서 세력을 구축하려는 안 원장의 태도도 썩 미덥지 않다. 지난 4·11 총선에서 투표에 불참한 절반에 가까운 중도세력의 유권자를 겨냥한 외연 확대라고 하지만, 이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대선 출마 결심을 미루는 그의 행보가 가뜩이나 취약한 우리 정치의 체질을 더욱 약화시키고 있다. 사실 안 원장의 인기는 기성 정치와 정당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거나 조롱하는 데서 시작됐다. 그것은 현대정치가 정당정치라는 점에서 안 원장이 본의 아니게 한국 정치를 후퇴시키는 역할만 하고 무대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자아낸다. 안철수 현상이 안고 있는 위험성이다.

제3지대 구축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렵다.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는지도 의심스러운 여론조사 지지율을 믿고 애매한 행보를 보이다 외면당한 사례를 국민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정몽준 의원은 진심에 없는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추진하다 선거 전날 밤 파기해 대선판도를 어지럽혔다. 민주당과의 후보 단일화를 거부하고 제3의 후보로 대선을 완주한 문국현 전 창조한국당 대표 역시 정치에 새바람을 불어넣는 데 실패했다. 정운찬 전 총리와 박세일 교수의 지난 정치행보도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안 원장의 측근이라 불리는 인물들도 그에 대한 불신을 더하고 있다. 그가 정치에 공식 입문하지 않은 탓도 있지만, 안 원장을 주위에서 돕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도통 알지 못한다. 대통령을 선택할 때 유권자들은 후보 하나만 보지 않는다. 후보를 둘러싸고 있는 보좌진의 수준과 역량도 한 표를 행사하는 데 중요한 판단의 근거가 된다. 대통령 혼자 국정을 운영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보좌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역량을 갖추고 있는지도 당연히 검증해야 한다. 안 원장의 경우, 멘토라고 하는 몇몇 인사가 거론되지만 그들 상당수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 외 다른 보좌진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이 상태에서 안 원장이 대통령이 되면 그가 어떤 정치를 펼지 국민으로선 예측할 방법이 없다.

변죽을 울리면서 이리저리 재는 모습은 우리가 안 원장에게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현실정치가 못마땅하면 정치판에 직접 뛰어들어 다른 정치인보다 더 뛰어난 성과를 내면 된다. 그것으로 좋은 평가를 받으면 대통령으로 나서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기회를 노리는 게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이제 대세론이라는 것은 없다. 말하자면 뿌린 만큼 거두는 것이다”라는 심상정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의 말은 백번 옳다. 정밀하게 관리된 인기나 반사이익만 보고 유권자들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뽑아줄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다. 이제 창당을 하든지, 기존 정당에 들어가든지는 안 원장의 몫이다. 깔끔하게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면 대학에 남는 것도 그의 선택이 될 수 있다. 안 원장은 지금도 정치참여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선 과정의 검증에 대비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도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진호 논설위원

향토에 대한 자부심도 정치인의 입에 오르다 보면 엉뚱하게 변질된다. 특히 개발독재시대에 발아된 지역주의를 벗어던지지 못한 우리 정치지형에선 모순 구조를 더욱 뒤틀리게 할 수도 있다. 19대 총선 대구 수성갑에서 김부겸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을 누르고 수성에 성공한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이 연일 쏟아내는 지역주의 발언을 들으면서 뒷맛이 씁쓸해지는 까닭이다.

이 의원은 지난 12일과 16일 CBS와 PBC 라디오방송에 잇달아 출연해 지역과 야당의 정체성을 ‘명쾌하게’ 정리했다. 그가 내놓은 발언들을 요약하면 이렇다. “대구·경북 지역은 국가의 안전을 생각하는 화랑도 정신이 내려오는 곳으로 급진 좌파이념의 민주통합당은 지역주민들에게 절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쪽(민주당)은 걸핏하면 데모하고 흔들고 하는 그런 성향이 있는데, 우리 영남지역에서는 사회안정을 굉장히 중시한다”고도 했다.

 

새누리당 이한구 후보가 유권자를 만나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대구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에서 ‘조선의 모스크바’로 불릴 만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운동의 메카였다. 주요 산업시설이 우선 배치됐던 박정희 시대를 거치면서 친여 성향으로 기울었을 뿐이다. 개발독재시대에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에서 지역주의를 부추겼던 과거를 생략한 채 대구·경북(TK)지역 정치성향의 역사적 기원을 뜬금없이 화랑의 시대로까지 올려잡은 꼴이다.

‘민주통합당=급진좌파’라는 주장 역시 이념적 색맹(色盲)을 드러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이번에 대구 수성갑에서 김부겸 후보를 선택한 40.42%의 유권자는 급진좌파 이념의 추종자들이란 말인가. 과거 이 지역에 노동·소작 쟁의가 많았던 게 급진좌파 때문만도 아니다. 그만큼 삶이 팍팍했기 때문이다.

이 의원이 그러면서도 지역주의 타파라는 김부겸 의원의 출마 명분이 걸렸는지 “지금 지역정당이 어디 있느냐. 인물이 떨어져도 무조건 다른 당을 찍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강변한 대목에서는 말문이 막힌다. 패장은 말이 없다지만, 그렇다고 이긴 장수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쏟아내도 된다는 뜻은 아닐게다. 이 의원의 경우엔 지역 유권자들은 물론 화랑도까지 모독한 셈이다. 지역주의를 일거에 깨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깨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젊음을 던졌던 화랑정신에 더 가깝지 않겠는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남들이 우리를 ‘백의민족’이라고 부른 이유는 우리가 흰옷을 입고 흰색을 숭상했기 때문이란다. 중국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부여는 흰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널리 입었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1세기부터 300년간 존속한 부여 사람들이 백의를 입었다니, 그 역사가 굉장히 오래됐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진짜로 흰옷을 좋아했는지는 의문이다. 흰옷은 때를 잘 타고 오래 입으면 누렇게 변색된다. 또한 더 살이 쪄 보이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이는 단점도 있다. 흰옷을 입었던 것은 염색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탓이라는 주장도 그래서 제기됐다. 사극을 보면 못사는 사람들은 흰옷을 입지만, 양반들은 죄다 화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민족이 좋아한 색깔은 어떤 것이었을까? 바로 붉은색이다. 임진왜란 때 임금이 의주로 피란하는 등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곽재우는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고, 함안군을 수복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려 훈장을 받는다. 그는 싸울 때 늘 붉은 옷을 입고 선봉에 섰기에 사람들은 그를 ‘홍의장군’이라고 불렀다. 붉은색 곤룡포를 입은 영조대왕의 어진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왕들이 입은 옷은 모두 붉은색이었다. 고려 말 충신 정몽주의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에서 ‘단심’이란 ‘붉은 마음’을 뜻한다. 이렇게 붉은색을 좋아했기에 우리나라의 상징인 태극기를 만들 때 빨간색이 들어간 건 당연한 일이었다.

 

붉은악마들이 다양한 복장과 분장을 한 채 응원을 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붉은색에 대한 선호는 축구대표팀의 유니폼에서도 드러난다. 1948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한 축구팀의 사진을 보면 상의와 스타킹이 붉은색이다. 제14회 런던올림픽은 정부 수립 후 국가를 대표해 외국에 가는 첫 번째 행사였는데, 우리가 정말 흰색을 좋아했다면 이런 유니폼을 입었겠는가? 심지어 1980년대부터는 상의와 하의 모두 붉은색을 입게 되는데, 우리 대표팀이 4위를 차지한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대회는 우리가 붉은색을 좋아한다는 걸 전 세계에 알린 계기였다. 그 후 유니폼의 색조는 조금씩 변하지만, 4강 신화를 쏜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도 상의든 하의든 유니폼의 붉은색은 여전히 유지됐다. 축구대표팀을 응원하는 모임인 ‘붉은 악마’도 붉은색 티셔츠를 입었기에 그때 우리나라는 국토 전체가 붉은색으로 물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12년 초, 한나라당은 자신들이 저질렀던 온갖 악행을 떠안고 총선과 대선을 치르기엔 무리가 있다는, 그들답지 않은 현명한 판단을 내린다.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문제는 원래 파란색이던 로고였다. 파란색은 친근감을 불러일으켜 삼성을 비롯한 기업들이 상징으로 채택하고 있는데, 어느덧 보수의 상징이 돼버린 파란색을 버리는 건 그들로선 아까운 일이었으리라. 결국 새누리당 로고는 그릇 모양의 빨간색으로 정해졌다. 빨간색은 상대에게 공격성을 불러일으킨다는 분석도 있지만, 우리 민족이 예부터 빨간색을 좋아한다는 걸 간파한 거였다. 자기들이 그렇게 싫어 하는 북한이 빨간색을 상징색으로 쓴다는 것도, 자기들이 정적을 탄압할 때 ‘빨갱이’란 딱지를 붙여왔던 전력도 개의치 않았다. 그 전략은 적중했다. 붉은색에 대한 우리 민족의 선호는 불법사찰 등 현 정권이 저지른 일들에 눈을 감고 맹목적 지지를 하게끔 만들었다. 4월11일, 새누리당은 수도권과 호남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승리하면서 2002년 이후 10년 만에 전국을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평소 ‘색깔론’을 당의 주요 전략으로 쓸 정도로 색채감각이 뛰어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통이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으니, 다가오는 대선에서도 새누리당의 붉은색은 나름의 위력을 떨칠 것이다. 민주통합당의 노란색이나 통합진보당의 보라색으로 여기에 맞서는 건 어려워 보인다. 정권이 바뀌려면 400여년 전 이 땅에 나타났던 홍의장군이 재림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그가 다시 온다면 어떤 색의 옷을 입고 나타나려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