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조|한성대 교수·경제개혁연대 소장 sjkim4059@hansung.ac.kr


이명박 대통령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레임덕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대통령의 임기가 1년 반이나 남은 현 시점에 벌써 그 절름발이 오리가 도처에서 목격되고 있는 듯하다.
정치학에 문외한인 필자가 무슨 이론적 근거를 가지고 하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과거 정권 때도 봤던 현상, 특히 정책결정자들의 행동 유인이 극단적으로 엇갈리는 현상이 이미 시작됐다는 느낌이다.


한편으로, 다음 정권에서 새로운 기회를 노리는 사람들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따라서 책임 문제가 따르는 정책 결정을 요리조리 잘도 피해가는 복지부동의 묘기를 선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다음 정권에서는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현 정권에서 성과를 만들려는, 그래서 단기적 보상을 받아내려는 과잉충성의 자세를 취한다. 해야 할 일을 외면하는 복지부동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밀어붙이는 과잉충성의 최악 조합, 이것이 레임덕 현상의 대표적 징후가 아닐까 한다.


먼저, 복지부동의 사례. 론스타의 외환은행 대주주 적격성 심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론스타는 산업자본으로 판정되거나 주가조작 사건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외환은행의 대주주 자격을 상실한다. 이 때 감독당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6개월 내에 초과지분을 매각하라고 명령하는 것뿐이다.
그런데 하나금융이 외환은행을 인수하겠다고 손들고 나선 상황에서 매각명령은 곧 론스타의 ‘먹튀 행각’을 승인하는 꼴이 될 것이고, 그 뒤에 이어질 온갖 정치적 비난을 예상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래서 감독당국은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로 인해 외환은행과 국민경제가 부담할 비용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축은행 문제도 마찬가지다. 10년 만에 저축은행 수가 절반으로 줄었다는 것은 그만큼 저축은행 업종 전체의 부실이 심각하고 그 수익모델이 취약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런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공적자금 투입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정권과 관료들에게 자살행위라는 것 역시 너무나 명백한 경험적 사실이다. 그래서 공적자금의 ‘공’자도 꺼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선, 저축은행 부실의 처리비용을 모두 은행에 떠넘기는 편법과 관치만 난무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저축은행과 건설회사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더욱 증폭되고, 부동산시장의 거래는 실종되고, 가계부채의 시한폭탄은 똑딱똑딱 초침이 돌아가고 있다.


다른 한편, 과잉충성의 대표적 사례는 4대강 사업과 감세정책일 것이나, 이는 필자가 아는 게 없으니, 다른 문제를 보자.
다음 대선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든 팽당할 것이 확실한 사람은 누구인가. 경제 쪽에서는 뭐니뭐니 해도
강만수 산은지주 회장과 최중경 지식경제부 장관일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최근 행보는 과잉충성을 넘어 자아실현 단계로 넘어갔다.
낙하산 인사 문제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 현 상황에서 은인자중해도 지나치지 않을 강만수 회장이 오히려 우리금융을 인수해 메가뱅크의 꿈을 실현하겠다고 나섰다. 이를 위해 금융지주회사법 시행령상의 규제를 완화하는 특혜도 요구하고 있다. 1년 반 후에 물러날 분이 대형 인수·합병(M&A)의 화학적 결합을 이끌 리더십을 어떻게 발휘하겠다는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최중경 지경부 장관에게 주어진 최대 과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이다. 그런데 정운찬 동반성장위원장이 꺼낸 이익공유제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연일 비난을 쏟아붓고 있다.
모르긴 해도, 얼마 남지 않은 기간에 확실한 성과를 만들어내야 하는데, 엉뚱한 제안으로 인해 자신의 구상(?)이 엉클어졌다는 조급증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최고 의사결정자 간의 협력도 제대로 안 되는데, 대·중소기업 동반성장이 가능하겠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 날까지 업무를 놓지 않겠다고 했다. 필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지 않았듯이, 이명박 대통령의 업무 추진력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대통령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확히 구분해 줌으로써 정책의 구체적 내용을 결정·집행할 관료들의 유인 구조를 정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레임덕 현상을 최소화하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반대되는 현상이 속출하고 있다. 다음 정권을 저울질하는 복지부동과 현 정권에 목을 매는 과잉충성의 최악 조합 속에서 정부 정책은 급속히 신뢰성을 잃어가고 있다. 안타깝다. 결국 대통령이 선택하고 책임져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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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 | 영남대 교수·법학 hkpark@ynu.ac.kr


누가 누구를 만났다는 것이 톱뉴스가 되고 있지만 나에게는 달나라 얘기 같다. 내 민족이거나 내 나라 사람들 같지도, 내 친구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아니 내 나라 사람 대부분이 내 친구 같지도 않다. 톱뉴스에 나오는 그런 이상한 사람들의 인기가 그렇게도 높다는 것을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사이에 파당이 없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파당이다. 민생을 위한다고 하지만 그 민이 누구인지도 의심스럽다.

특히 나로서는 그들이 말하는 공정이란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가령 노사분쟁에 정부가 공정 중립이어야 한다는 원칙은 꼭 법을 들먹이지 않아도 당연한 것이다. 노사 모두 같은 국민이니 정부가 그 어느 편이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언제나 사측이다. 유성기업 파업에서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앞장서 ‘연봉 7000만원을 받는 배부른 노동자’들의 투쟁이라고 비난하고 공권력을 투입했다.

그 말이 사실인지도 의문이고 공권력 투입의 공정성에도 의문이 있지만, 이는 우리나라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지도 의문이다. 옛날부터 대표적인 노동악법으로 비난받았으나 지금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 그것을 처음부터 완전 폐지해야 했으나, 대통령을 비롯해 정부 측의 제3자 개입이 워낙 성행하니 두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제3자’조차 애초부터 정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공정·중립 의무가 있으니 어떤 개입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개인 간 분쟁에 대해 국가는 중립이고 공정해야 나라의 질서가 선다. 그 분쟁에 국가가 개입해 한쪽 편을 들면 정의가 있을 수 없다. 이것이 원칙이고 법이고 진실이다.
그러나 현실의 정치는 그 반대다. 법과 정치, 진실과 현실, 공정과 불공정 사이의 갈등은 언제 어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만큼 극심한 곳이 또 있을까?

1세기 전쯤 영국이 지배한 인도에서도 노사분쟁이 있었지만 식민지 정부도 개입하지 않았다. 간디가 노동자들을 지지하고 친구인 사용자에게 노사를 조정하라고 요구하자 사용자는 부자관계에 제3자 조정은 있을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런 가부장주의적인 인간관계는 지금도 한국에 지배적이다.
그러나 간디는 그런 가부장주의에 저항하여 노동자에게 파업을 권유했다. 돈이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지금 한국의 대통령은 돈이 모든 사람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존재가 아닌지 의문이다.

지금 간디가 한국에 있다면 대통령이 되기는커녕 제3자 개입 금지로 당장 구속되고 그 파업은 불법파업으로 규정되어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으리라. 게다가 간디는 사용자가 굴복할 때까지 파업을 풀지 않겠다는 서약도 노동자들에게 받았고, 그럼에도 노동자들이 파업의 장기화로 흔들리자 무기한 단식에 돌입했다. 이것이 간디 최초의 단식이었다. 그것이 간디 사상과 행동의 출발이고 전부였다. 그의 진실 추구도, 비폭력도, 애국도 그 속에 다 포함되었다. 그러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제3자가 단식을 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당장 잡아갈지 모른다. 

우리 대통령과 간디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노사에 대한 태도만이 아니라 영어나 미국, 서양 문명에 대한 태도 등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어린지’에서 출발한 ‘고소영’ 파당과 달리 간디는 영어 교육을 철저히 거부했고 돈에 지배되는 서양 문명을 거부했다. 어떤 파당도 만들지 않았으며 모든 파당을 거부했다. 간디를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고자 해도 한국에서는 감옥을 가지 않는 한 간디를 말할 수 없다.

이런 현실에서 1세기 전 인도의 간디를 말하기조차 괴롭다. 그런 현실의 대통령 등이 간디를 비롯한 진실의 사람들을 들먹이는 것이 참으로 우습다. 특히 예수님을 들먹이는 것에는 창피스럽다. 

최고경영자(CEO) 예수니 부처니 간디니, 그들의 리더십이니 하는 소리도 어처구니없다. 간디도 시계를 찼으니 CEO는 그로부터 시계차기와 시간엄수를 배워야 한다고 하는 그런 책들이, 고장 난 자동차가 어떻게 사람을 죽여야 정의인가 운운하는 책보다는 실용적일지 모르겠다.
물론 그런 책들에는 파업이나 파당에 대한 이야기가 없고 오로지 돈 버는 이야기뿐이다. 정말 달나라 이야기 같다. 반면 학생들에게 간디를 이야기하면 비현실적이라고 한다. 진실을 모르고 현실에만 급급하는 학생들이 안타깝다. 그 원인이 톱뉴스라면 이를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답답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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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새사연 이사장

간단하다. 평생을 진보운동에 바친 진보연대 정광훈 대표가 즐겨 쓴 말이다. 권력이 전교조를 ‘빨갱이’로 살천스레 몰아세울 때다. 전교조가 빨간 수박을 먹고 씨를 뱉으면 ‘참교육’이 열린다고 응수했다. 민중의 삶이 어려운 까닭도 간단했다. 전기가 양에서 음으로 흐르듯이, 권력이 민중에서 나와 정치로 흘러야 하는 데 그게 고장이 났다고 풀이했다.  

아스팔트 농사에 열정을 쏟은 ‘우리 시대의 농민’ 정광훈은 진보정당 선거운동 자리에서 삶을 마쳤다. 투사다운 최후다. 정광훈은 해남 동향인 ‘전사 시인’ 김남주와 오월의 투사들이 묻힌 빛고을 땅에 몸을 섞었다. 여느 윤똑똑이 먹물보다 간명하게 현실을 꿰뚫었던 ‘늙은 투사’의 희망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감히 진보대통합이라고 판단한다. 미더운 농민들 앞에서 진보대통합에 방점을 찍고 연단에서 내려오던 내게 건넨 당신의 다사로운 눈길을 잊을 수 없다.

그래서다. 다시 향을 피우고 애잔하게 타오르는 향연 아래 이 글을 쓴다. 마침 진보대통합이 익어가고 있어서다. 다만 마지막 고비가 강파르다. 왜 지금 진보대통합인가부터 새삼 짚고 싶은 까닭이다.

진보대통합에 합의한 민노당 이정희 대표,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를 비롯한 협상단 (출처:경향신문 DB)

고통 커가고 희망 보이질 않아

진보대통합은 특정 정파의 이념을 위해서가 아니다. 특정 정파의 패권을 위해서도 아니다. 진보세력 개개인의 ‘자리’를 위해서는 더욱 아니다. 진보대통합이 절실하고 절박한 이유는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고통이 무장 커져가는 데도 도통 희망이 없어서다. 시장 만능의 신자유주의가 15년째 민중의 삶을 꼭뒤 누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서 부자 감세에 더해 남북 갈등의 증폭으로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의 폐해는 더 전면화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법은 간단하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데 동의하는 모든 사람이 그 최소강령으로 뭉쳐야 옳다. 문제는 그것을 넘어 특정 정파의 논리를 고집하는 데 있다. 더러는 자본주의 폐절을 선언하지 않는다고 진보대통합 논의를 폄훼하지만, 통합의 참뜻을 놓친 무책임한 선동이다. 더러는 신자유주의를 엘리트적 개념이라며 부르대지만, 대학 진학률이 80%가 넘은 나라에서 국민이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예단이야말로 엘리트적 발상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에 또렷하게 선을 긋지 못할 때, 김대중-노무현 정부처럼 비정규직 확산이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정당화한다.

더 큰 갈등은 대북문제에서 불거지고 있다.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른바 ‘종북논쟁’으로 당이 쪼개진 경험을 진보세력은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통합의 자리에선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자신이 ‘종북’으로 시험받고 있다거나, 딴 살림 차릴 명분만 찾는 ‘종파’로 경멸받고 있다는 판단이 든다면 통합은 어렵다. 남과 북의 신자유주의와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넘어 선 새로운 사회를 당면목표로 삼고 두 체제의 잘잘못을 따져가자는 데까지 합의한 상황에서 대북문제로 진보대통합이 파국을 맞는다면, 우스개가 될 수 있다.

최소 강령으로 대통합 이뤄내야

더구나 남쪽 진보세력에게 선결과제는 민중의 고통이다. 신자유주의를 넘어서자는 데 합의한 ‘동지’들이 대북문제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자체가 분단체제의 굴레다. 신자유주의와 분단체제를 넘어서자는 최소강령, 아니 최적강령으로 진보대통합을 이룬 뒤 어떤 경제정책, 어떤 통일정책을 펼 것인가를 실사구시의 자세로 섬세하게 만들고 국민 앞에 내놓는 게 집권을 꿈꾸는 대안 정당이 걸어갈 길이다.

눈 돌려 브라질 노동당을 보라. 3기째 집권하며 빈부차를 줄여가고 있다. 그 간단한 사실만으로도 한국 진보세력은 고통 받는 민중 앞에 석고대죄해야 옳지 않을까. 진보대통합이 최우선으로 섬길 대상은 민중이다. 민중의 거울로 자신을 비춰보면 통합은 어렵지 않다. 반신자유주의, 분단체제 극복, 국정대안 제시, 3항18자다. 진보대통합의 실사구시 철학, 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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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신문사에 입사했다. 몇 달 후 동기들과 월급 이야기를 하다 내 급여가 조금 적다는 걸 알게 됐다. 불쾌했다. 담당부서에 물어봤더니, 병역을 필한 사람에 대해 호봉을 가산해 준다고 했다. 마음이 바뀌었다. 2년 먼저 회사에 들어왔으니 ‘합리적 차별’이라 생각했다.

경향신문 DB



1999년 헌법재판소 취재를 담당할 때다. 군 가산점을 규정한
‘제대군인 지원에 관한 법률’ 8조 1항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 헌재는 “가산점 제도는 제대군인의 취업기회를 특혜적으로 보장하고, 그만큼 제대군인이 아닌 사람의 취업기회를 잠식하는 제도”라고 판단했다. “공직수행능력과 아무런 관련성을 인정할 수 없는 성별 등을 기준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의 사회진출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므로 정책수단으로서의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라고도 했다. 요컨대 ‘합리적 차별’이 아니란 얘기였다.

2011년, 군 가산점이 다시 논란이다. 남성들은 세상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여성 총리에 대법관, 장군, 전투기 조종사가 나올 만큼 여성들이 ‘드세져’ 남성들이 역차별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법시험과 행정·외무고시에서 여성의 합격률이 높은 것은 뉴스 축에 끼지도 못한다. 남성들은 불만일 것이다. 푸른 청춘에 머리 깎고 병영에 묶인 것만도 서러운데, 또래 여성들은 2~3년 먼저 사회 나가 돈 벌고 때로는 윗자리에 앉아 ‘보스’가 되니까. 그러나 가슴으로 느끼는 것과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달라야 한다. 그런 게 이성이고 상식이다.

국회 법사위에 계류 중인 ‘병역법 일부 개정법률안’은 국가·지자체 공무원과 교원 등의 임용시험에서 본인이 얻은 점수의 2.5% 한도 내에서 가산점을 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위헌으로 결정된 제대군인지원법과 다른 점은 채용 횟수에 제한을 두고, 합격자가 전체의 20%를 넘지 않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제대군인 가운데 공직임용 시험을 치르는 비율은 얼마나 될까. 이 중에서 가산점 혜택을 받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김선택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팀이 여성가족부의 의뢰로 작성한 ‘군복무자에 대한 합리적 보상제도’ 보고서를 보자. 김 교수팀의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해마다 25만명가량이 군에서 제대한다고 가정할 때, 이 중 새로운 가산점제 덕에 합격하는 비율은 7급 공채 0.08%, 9급 공채 0.2%일 것으로 추산됐다. 군 가산점제가 상징적 조치일 수는 있으나 실질적 조치는 아니란 얘기다.

의무복무자들의 박탈감을 달래주고 싶다면, 제대군인 모두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 같은 방안은 이미 여러 곳에서 내놓았다. 제대 후 취업지원, 사회적응기간 생계보조를 위한 ‘전역수당’ 지급, 대학에 복학하는 사람들에 대한 학자금 저리 융자 등이 그것이다. 의무복무하는 사병들에 대해선 급여 현실화, 건강보험금의 국가 부담, 국민연금 혜택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군에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이들이다. 군 가산점제가 위헌으로 결정되기 전인 1991년, 왼팔에 장애가 있던 정모씨는 총무처(현 행정안전부) 주관 7급 행정직 공채에서 82.22점을 받았다. 당당한 차석이었다. 군 가산점을 적용한 결과는 달랐다. 78.33점을 받은 군필자가 가산점을 더해 83.33점으로 정씨를 제쳤다. 정씨는 탈락했다.

새로운 가산점제 아래선 이런 사태가 없을까. 김선택 교수팀은 2009년 7급 공채(일반행정직) 결과에 가산점제를 적용해봤다. 필기시험 합격자 363명 중 47명(12.9%)의 당락이 바뀌었다. 남성 합격자는 47명 늘고, 여성 합격자는 그만큼 줄었다. 9급 공채는 더했다. 필기 합격자 339명 중 67명(19.8%)의 운명이 달라졌다. 진입장벽을 쌓아 취업기회 자체를 봉쇄하는 것은 합리적 차별이 아니다.

여전히 정체 모를 박탈감이나 분노가 가시지 않는 남성들이 있다면, 묻고 싶다. 당신의 분노는 어디를 향하는 게 옳은가. 절에서 고시 공부하느라 입영통지서 못 받고 면제된 사람이나 무대에서 멀쩡하게 춤추다 공익근무요원 가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여성이나 장애인인가.

<시크릿 가든>의 재벌 2세 대신 진짜 재벌의 아들, 장관의 아들, 장군의 아들이 백령도를 지킬 때 시민의 삶은 더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애꿎은 이들에게서 직업선택의 자유를 빼앗으려 하지 말고 ‘신의 아들들’부터 군에 보내라. 그리고 제대군인을 돕고 싶다면, 공짜로는 안된다. 돈 쓸 생각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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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성|작가

공자는 틀렸다. 제자의 물음에 탈상은 삼년이면 족하다고 했거늘, 오늘 대중들은 비 퍼붓는 광장에서 그를 부르고 있다. 아직 그를 다 보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경향신문 DB> 

동학농민군은 탈상하는데 1백 년이 넘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공식적인 사과를 통해 이들의 신원을 회복시켜준 건 노무현 정권 때다. 제주 4·3사건은 탈상할 뻔했다가 현 정권 들어 재를 뿌리는 바람에 제상이 넘어지기 직전이다. 앞으로도 한동안 귀신들은 화약연기를 뒤집어쓴 채 한라산 중허리를 감돌아야 할 판이다.

광주항쟁은 숫제 재장례 분위기로 돌아서고 있다. 지속적 항쟁과정을 통해 민주사회의 ‘애국가’가 된 ‘산 자여, 따르라’는 노래마저 빼앗는 ‘관제화’ 강요와 3년 내리 대통령이 불참하는 등 국경일답지 않은 대우, 유네스코 문화유산등록과정에 모욕까지 더해진 까닭이다. 

새로 정부가 들어서면 광화문 네 거리에서 기념행사를 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런 점에서 더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탈상에는 조건이 있다. 가해자가 있는 죽음은 더욱 그러하다. 상복을 벗자면 그만한 내력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상장을 떼어내 땅에 묻거나 불에 태우고, 여인네들이 오늘도 머리를 빗질하고 나서게끔 하기 위해서는 안팎으로 매무새를 분명히 해야 할 일들이 있다.

노무현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그를 생각하면 어제가 오늘이다. 한국 민주사회는 처음으로 복고를 갖게 되었다. 민주정권 10년이 그러하지만, 낙서 한 줄을 옥에 가두는 늙은 야만이 그와 함께 살던 시대가 ‘태평성대’였음을 새삼 반추케 한다. 한낱 초짜 검사들마저 대통령과 대거리를 맘 놓고 하질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촛불이 꺼지자 곧 권력의 채찍은 노무현을 향했다. 우선 그 채찍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내야만 한다. 이것이 첫 번째 조건이다. 조현오 경찰청장의 차명계좌 운운은 그 연장선에 있다. 가해자들은 지금도 모욕과 망각을 교차해서 써먹고 있질 않은가.

노무현은 삶과 죽음을 통해 네 번 버림받았다. 먼저 스스로를 버려서 이룰 수 없는 꿈을 향해 그는 달려갔다. 실패를 알면서 도전해간 정치인의 길이다. 

탄핵은 평민 출신 대통령이 권력을 유지해내기가 얼마나 버거운지를 웅변해주었다. 집권 말기 집요하게 당한 굴욕은, 그를 마침내 부엉이 바위로 밀어 올렸다. 무엇보다 캄캄하게 버림 받은 건 그가 추진해온 정책들이 현 정부 들어 철저히 능멸당한 대목이다. 

과거사정리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이뤄내고자 한 화해와 평화는 매순간 계승해야 마땅한 것들이다.

민주정권을 이어가지 못한 결과 한국사회는 전직 대통령의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그의 죽음은 ‘민주 10년’에 대한 깊은 성찰과 치열한 토론, 그리고 정권 회복이야말로 탈상의 조건임을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다. 덧붙여 도전과 책임, 희생과 서민적 풍모를 내뿜어온 노짱, 노간지의 독점은 탈상의 길을 더디게 할 뿐이라는 점도 명념해 두어야 한다.

한적한 시골마을 봉화의 부엉이바위는 이태째 설화적 힘으로 꿈틀대고 있다. 그 바위는 어둠을 찢는 소리로 외치고 있다. 그는 거기서 내려오지 않아도 좋다. 탈상이 끝나는 그날까지는.

소싯적 무덤으로 가는 장례행렬 악사 노릇을 했던 공자는 죽음이 지녀야 할 거룩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오늘 그를 노래로 보내면서 다시 부른다. 산 자여, 따르라! 공자는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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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구 | 성공회대 교수·사회학

1961년 5·16 군사쿠데타 50주년을 맞아 다수의 보수 매체들은 박정희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대체로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박정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데에는 별반 새로운 근거가 제시되고 있지 않다. 과거와 같이 경제성장과 자주국방의 공 정도가 제시될 뿐이다.

새로운 것이 있다면―물론 그것조차 별반 새로운 것이 아니지만―여론조사 정도가 있을 뿐이다. 여론조사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역대 대통령 중 박정희를 최고의 대통령으로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번 여론조사에서 좀 더 유심히 보았던 것은 박정희에 이어 노무현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박정희 대통령을 바로 뒤따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이번 여론조사 결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압도적인 긍정이 약화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 각종 여론조사에서 박정희는 항상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제 압도적인 1위는 상대적인 1위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변화는 박정희 시대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들의 박정희 평가가 그리 높지 않다는 데에 기인하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흉상 철거를 촉구하는 시위 (출처: 경향신문 웹DB)

아마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역대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많은 변화를 보일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기억이 흐려지고 때로는 역사의 현장에서 멀어짐에 따라 객관적인 평가가 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의 딜레마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항상 내세워왔던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일반 시민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질 때 그들의 기득권과 정당성 역시 약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세력의 불안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이 잊혀질 수도 있다는 바로 이 사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기억을 수시로 불러낼 필요가 있다. 기억을 불러내지 않으면 시민들로부터 잊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기억 불러내기에서 긍정적인 기억들만이 불러내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불러내지지 않는 부정적인 기억들은 시민들로부터 점차 잊혀진다는 점이다. 박정희 통치의 당시보다 지금의 시점에서 박정희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더 많이 나오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기억이, 특히 선별되어 불러내진 기억은 신화가 되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사에서 분단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졌던 분단·반공·개발의 독재체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그야말로 역사적 난제이다. 현재 우리가 서 있는 기반이 1948년으로부터 1987년에 이르도록 40여년에 걸쳐 전개되었던 이 같은 독재체제에 의해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 체제에서 구축된 기득권 세력들이 현재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과거의 긍정적인 기억들만을 불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와 미래사에는 또 하나의 흐름이 있다. 이제까지의 민주화와 민주개혁 그리고 앞으로 복지와 남북 평화통일로 이어질 거대한 흐름이 그것이다. 이 후자의 흐름이 분단·반공·개발이란 전자의 흐름을 넘어설 수 있을 때, 그리고 이 후자가 전자의 긍정적인 측면까지도 흡수해냈을 때 박정희에 대한 평가도 비로소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 우리는 과거의 신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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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택 전 일간지 기자

31년 전, 계엄군으로 투입된 공수부대가 아무 죄도 없는 광주시민들을 살육했던 일을 두고 ‘북괴(북한)의 특수부대와 그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이 저지른 폭동’이라는 주장이 지금도 제기되어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2011년 5월 12일자).

광주에서 그 때의 항쟁기록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기록으로 등재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어느 조직에서 ‘광주사태는 북괴(북한)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침투하여 자행한 소요’일 뿐 공수부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펼치며 그들의 만행이라는 기록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은 온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광주사태’를 현장에서 직접 취재했던 필자는 당시의 몇 가지 상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18일 오후 4시 정각, 금남로 횡단보도에 도열해 있던 1개 중대가량의 얼룩무늬 공수부대복장 군인들이 갑자기 시위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시민들에게 쏜살같이 내달려 진압봉으로 두들겨 패고 소총개머리판으로 내리치고 군화발질을 해댔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로 이때 택시를 타고 신혼여행을 떠나는 신혼부부로 보이는 감색정장의 신랑과 예쁜 한복차림의 신부를 붙잡아 마구잡이로 두들겨 팼던 공수부대복장의 군인들, 길을 가다 붙잡혀 난도질당한 20대 여자를 군용트럭위에 올려놓고 ‘보기좋다’며 희롱했던 공수부대복장의 군인들, 북동 276번지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에 착검한 M16 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들어와 업무를 보고 있던 총무와 배달학생을 실신되도록 두들겨 팬 후 끌고 갔던 공수부대복장의 군인들이 북한의 특수부대요원들이라는 말입니까? 또한 이 길에서 두들겨 맞고 짓밟히고 찔린 채 피투성이 상태로 붙잡혀 2대의 트럭에 실려 있던 시민들을 어디론가 끌고 간 공수부대 복장군인들이 북한의 특수부대요원들이란 말입니까?

19일 오후 2시경 금남로 2가와 3가 사이에서 메가폰을 들고 길 양편 건물을 향해 “커튼을 쳐라, 밖을 내다보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쏴버리겠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검정베레모에 별 하나를 단 장군이 북한 특수부대소속 장성이었다는 말입니까? 20일 오전 10시20분쯤 가톨릭센터 앞 금남로3가 길 위에서 남녀 30여명의 젊은이들을 팬티와 브래지어 차림의 알몸 상태로 만들어 놓고 혹심한 기합을 줬던 공수부대복장의 군인들이 북한의 특수부대 요원들이라는 말입니까? 21일 오후 7시쯤 장갑차를 선두로 시내에서 철수하면서 학동 길 양쪽 주택가에 무차별 총격을 가한 공수부대 복장 군인들이 북한의 특수부대요원들이라는 말입니까?

광주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공수부대와 대치한 가운데 전두환 퇴진’을 외치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웹DB)


근래 들어<수사기록상으로 보는 12·12와 5·18>,<공수부대의 광주사태>,<전두환과 광주혁명>,<전두환 재심 프로젝트>,<화려한 5·18사기극>이라는 책들을 통해 5·18살육은 공수부대소행이 아니라 ‘간첩의 지령을 받은 불순세력의 소요’, ‘여순반란사건에 뿌리를 둔 공산혁명, 북괴의 특수부대요원과 이들의 사주를 받은 불순세력의 반란’이라는 주장들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제기된 것인지 묻고 싶습니다.

<화려한 5·18사기극>에 실린 사례를 들어봅시다. 이 책에 실려있는 증언들을 보면 모두가 북한의 특수부대요원들이 마음대로 휴전선을 넘나들고, 해안선으로 상륙하고, 땅굴을 타고 제집처럼 대한민국에 들락거리며 5·18폭동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사령관 명령만 있으면 인민군은 언제든지 휴전선을 넘어올 수 있었다’는 이 책 내용대로라면 대한민국은 이미 북한군의 무력으로 흡수되어 존재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당시 계엄사령관으로 대한민국의 국방 및 치안을 총체적으로 담당하셨던 이희성장군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무서운 음모요 황당한 일입니다. 심지어 필자가 5·18관련 저서를 통해 5월22일부터 나타난 ‘복면부대’에 대해 당시 ‘계엄사나 정보기관에서 투입시킨 프락치일 가능성이 높다’고 언급한 대목에 대해 ‘시민군에 가까운 김영택 기자도 복면부대가 북괴의 특수요원임을 시사하고 있다’고 인터넷에 올리고 <화려한 5·18사기극>에 실어놓고 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이에 필자는 당시 상황을 두고 공개 토론을 제의합니다. 이제 가해자들께서는 억울하게 당한 광주시민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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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사회부장 

어제 서울중앙지검이 농협 전산망 마비 사건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담당 부장검사인 첨단범죄수사2부장이 6층 브리핑실에서 파워포인트 자료를 곁들여 설명했다. 사진·방송카메라 촬영도 허용했다. 배포한 보도참고자료는 ‘용어 설명’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완벽한 ‘미장센’(무대장치·조명 등에 관한 총체적 계획)에 비해 결론은 시원치 않았다. 검찰은 “북한에 의한 새로운 사이버 테러”라고 하면서도, 구체적 근거에 대해선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항이라 밝히기 곤란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저께는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부산저축은행그룹 비리와 관련, 대주주 등 21명을 기소했다. 중수부는 세 가지 자료를 언론에 배포했다. 다양한 그래픽을 담은 21쪽짜리 설명자료에 3쪽짜리 ‘피고인별 공소사실 요지’, 5쪽짜리 ‘SPC(특수목적법인) 운영현황’까지 내놨다. 내용은 몰라도 형식은 ‘프레스 프렌들리’였다.

지난달 15일 서울중앙지검이 한상률 전 국세청장 관련 의혹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할 때는 조금 달랐다. 브리핑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오후 2시30분, 3차장검사 사무실에서 티타임 형식으로 이뤄졌다. 보도자료 한 장 주지 않고, 사진·방송 촬영도 사절했다. 브리핑 말미엔 이런 문답이 오갔다. 앞의 질문은 기자, 뒤의 답변은 3차장검사가 한 말이다.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건도 카메라 돌아가고(촬영하고) 하는데, 이렇게 티타임 형식으로 하는 이유는 뭔가.” “나도 제대로 된 사건으로 (브리핑)하고 싶다.”

“전직 국세청장이 기업에서 돈 받았다면 중요한 사안인데.” “글쎄.”

“금요일 오후에 발표한 이유는 뭔가.” “굳이 금요일을 선택한 이유는 없다.”
 

유리하면 ‘확대’ 불리하면 ‘축소’
 



검찰의 의도는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발표는 하지만 관심은 갖지 말아달라…. 일부 개인비리만 인정해 불구속 기소하고, 권력형 비리엔 모두 면죄부를 준 채 어물쩍 수사를 종결하려니 계면쩍었을 터다. 

딱딱한 뉴스가 잘 먹히지 않는 주말, 경향신문과 한겨레 등 일부 언론을 제외하고는 한상률 사건에 주목하지 않았다.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면서 ‘한상률’은 조용히 잊혀졌다.

한상률 사건 수사결과가 발표된 날, 조현오 경찰청장의 서면진술서가 검찰에 도착했다. 조 청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 차명계좌’ 발언을 했다가 지난해 8월 사자(死者)에 대한 명예훼손 등의 혐의로 고소·고발됐다. 

검찰은 조 청장에 대한 조사를 8개월간 미뤘다. 주임검사는 사건을 그대로 쥐고 있다가 지난 2월 정기인사 때 다른 곳으로 옮겼다. 노무현재단이 해당 검사를 직무유기죄로 고발한 뒤에야 검찰은 “조 청장으로부터 서면진술서를 받았다”고 공개했다.

1995년 6년차 기자 때 처음 접한 검찰이나 16년 후 데스크가 되어 바라본 검찰이나 다른 것이 없다. 조직의 안전을 최우선에 두고 정권의 뜻에 민감한 속성은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검찰은 변하지 않는다고, 시민이 검찰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포기해야 할까. 그럴 수는 없다. 검찰의 기소권은 시민이 편의상 위임한 것이지, 검사들에게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국회 사법제도개혁특별위원회(사개특위)는 최근 대검 중수부의 수사권 폐지와 특별수사청 설치 등 검찰 개혁안 처리를 6월 임시국회로 넘겼다. 수뇌부 집단사퇴 가능성까지 거론하며 반발하던 검찰은 안도했다. 참다못한 시민사회는 “더 이상 검찰 개혁을 국회에만 맡길 수 없다”며 들고 일어났다. 참여연대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등 115개 시민사회단체가 ‘사법개혁 촉구 인권시민사회단체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이다.

이제,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

한국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후퇴하지 않으려면, 검찰 개혁은 필수 과제다. 단순히 중수부 수사권 폐지나 특별수사청 설치 등 한정된 의제를 놓고 갑론을박할 것이 아니라 더 깊고 넓게 검찰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 검찰 권한을 지역·기능에 따라 분산시키는 방안, 일부 간부를 선거로 뽑아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 법무장관 등 법무부 주요 간부에 비검찰 출신 법률전문가를 기용하는 방안 등도 검토할 수 있다.

요즘 TV 프로그램 <나는 가수다>가 인기다. ‘가수는 가창력으로 말한다’는, 당연하지만 현실에서 외면당해온 명제가 명제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검사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자, 서초동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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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사회부장

1. 올해 1월 갑자기 일자리를 잃은 홍익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홍대 문헌관 일부 공간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였다. 총학생회는 성명을 냈다. “학생의 환경을 지켜주셨던 노동자분들이 아닌 외부세력의 학내 점거나 농성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이며, 학생들의 편의나 학습에 지장을 주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 없음을 밝히는 바입니다.”

#2. 이달 초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청소·경비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3개 대학 학생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을 지지하는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명운동을 진행했다. 모두 4만3000여명의 학생이 지지 서명에 참여했다.

#3. 지난 25일 경희대는 올해 등록금 인상분 3% 중 2%를 학생들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나머지 1%의 절반은 차상위계층 학생 장학금으로, 절반은 학내 비정규직(청소·경비 노동자)과 시간강사 지원금으로 쓰기로 했다. 앞서 경희대 학생들은 6년 만에 연 전체 학생총회에서 이 같은 사항을 의결했다.
 



“왜 요즘 대학생들은 싸울 줄을 모르는 거야?” 지난해 사회부장이 된 이후 부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곤 했다. 등록금을 올려도 묵묵, 대자보를 떼어내도 묵묵, 학내에서 불의가 벌어져도 묵묵. “참고 참고 또 참는” 만화 속 캔디인지, 무던히 참기만 하는 청춘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홍대·경희대… 빛나는 집단지성

그러나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은 없다. 변화의 단서는 늘 작은 데서 생겨나고, 때로는 역설에서 비롯한다.

‘#1’을 ‘#2’ ‘#3’으로 바꿔놓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건 홍대 총학생회다. 사실 그들은 잘못한 게 없다. 청소노동자들과 적극 연대하려 한 학생들이 직간접적으로 징계 압박을 받는 현실이 문제다.

아니, 징계도 작은 족쇄에 불과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족쇄들이 있다. 대학생들이 졸업 후 일하고 싶은 기업은 대부분 ‘노동(노조) 친화적’ 신입사원을 싫어한다. 이들은 그들을 ‘불온’하다고 본다. 용기 내어 짱돌을 들었다가도 슬그머니 내려놓게 되는 이유다.

홍대 총학생회는 청년들 마음속 깊은 곳의 부끄러움을 자극했다. 부끄러움은 힘이 되었다. 홍대 재학생들은 ‘청소노동자와 함께하는 홍익대 서포터즈’를 만들었다. “추우시죠? 얼마나 힘드세요”라며 노동자들에게 따뜻한 우유를 건네는 학생들도 생겨났다. 이웃 대학 학생들은 지지와 응원을 위해 하루가 멀다 하고 농성장을 찾았다. 그리고 이들은 몸으로 느꼈다. 참아서는 안된다, 침묵해서는 안된다, 말해야 한다, 행동해야 한다.


이들은 승리의 쾌감도 맛보았다. 홍대 청소노동자들은 농성 49일 만에 고용승계와 임금 인상 등에 합의하고 전원 일터로 돌아갔다. 이대 노동자들도 임금 인상 합의를 이뤄냈다. 이들의 시급은 당초의 4320원에서 4600원으로 280원 올랐다.

비록 인상액은 높지 않지만, 앞서 협상을 타결한 홍대 노동자들의 시급(4450원)보다 150원 많은 금액이다. 노동계에선 홍대 쟁의가 이대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승리의 쾌감은 중독적이다. 이겨본 사람은 또 다른 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인문학자 엄기호는 덕성여대, 연세대 원주캠퍼스 학생들과의 대화를 바탕으로 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이야기했다. “학생들과 수업을 계속하면서 나는 ‘집단지성’을 신뢰하게 되었다. 리포트를 읽다 보면 그 안에서 부처도 발견하고 예수도 발견하고 또 칸트나 하이데거, 혹은 푸코도 발견하게 된다. 선생의 역할은 그들에게 그러한 능력이 이미 있음을 일깨워주고 북돋워주며 개념적 사유가 가진 짜릿함을 만끽하게 하는 것이지 그들의 무지를 질타하는 것이 아니다.”

옳다고 믿거든 소리 높여 외쳐라

젊은이들의 빛나는 집단지성은 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의 서명 현장에서, 6년 만에 열린 경희대 전체 학생총회에서 발현되었을 것이다. 서명대 앞에서, 노천극장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선생이 되었을 터. 청춘은 이렇게 배우고, 자란다. 일단 성장이 시작되면? 그땐 아무도 못 말린다. 빛의 속도로 앞만 보고 나아갈 테니까.

청춘이 싫어할 훈수 한마디. 화가 나거든 참지 말라. 옳다고 믿거든 소리 높여 외쳐라. 꼭 짱돌을 들 필요는 없으나, 벗의 손을 잡아라. 당신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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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사회부장

엄기영 전 MBC 사장이 오늘 강원지사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할 것이라고 한다. 한나라당 원희룡 사무총장은 1일 “엄 전 사장이 2일 한나라당 강원도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경선 참여를 공식 선언할 것”이라고 말했다.

엄 전 사장은 지난해 2월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의 일방적 임원 선임에 반발하며 사표를 냈다. 당시 그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문진이 방송의 독립성, 자율성을 부정하고 특정인을 (제작·보도본부장에) 앉히겠다고 고집한 것은 방송 섭정을 넘어 방송에 대한 직접 경영이나 다름없다. 방문진 이사장이 관행을 무시하고 MBC 이사진 선임에 개입해 누구를 앉혀야겠다고 고집하면 당연히 정치적 의혹이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사장직에서 물러나던 날엔 MBC 노조원들을 향해 머리 위로 하트를 그려보이고, 주먹을 불끈 치켜들며 “파이팅”을 외쳤다. 권력의 박해와 탄압을 받는 언론인의 행보였다.

다섯 달 뒤인 7월, 엄 전 사장은 민주당의 재·보선 출마 요청을 거절한 뒤 재·보선에 나선 강원지역 한나라당 후보들을 찾았다. “개인적 친분 때문에 격려차 방문한 것뿐”이라고 했지만 믿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8월엔 강원 춘천으로 주소지를 옮겼다. 12월부터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강원도를 누비기 시작했다. 마침내 한나라당의 상징색인 파란색 점퍼를 입고 TV에 출연함으로써 확실하게 ‘커밍아웃’했다.

출처: 경향신문 웹DB

‘탄압 받는 언론인 행보’는 착각

이 기간 든든하게 뒷배를 봐준 것은 MBC였다. 엄 전 사장은 사퇴 후 11개월간 MBC에서 매달 1150만원의 자문료와 에쿠스 차량, 운전기사 등을 지원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MBC는 최근 이 문제로 논란이 일자 “사규에 ‘사장은 업무상 필요에 따라 고문, 자문위원 등을 둘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며 “이 규정에 근거해 지난해 3월 엄 전 사장을 자문으로 위촉, 회사 경영과 향후 발전 방향 등에 대해 수시로 자문을 구해왔다”고 밝혔다.

MBC의 설명대로라면, 엄 전 사장은 정권이 자신을 몰아내고 선임한 후임 사장(김재철)의 경영을 돕기 위해 수시로 자문하며 거액의 돈과 차량을 제공받은 셈이 된다. 본인 생각에는 아름다운 ‘친정 사랑’일지 모르겠으나,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민망한 풍경일 뿐이다.

정치는 나쁜 일이 아니며, 정치인도 나쁜 직업이 아니다. 나쁜 것은 정치혐오증이다. 유능하고 깨끗한 사람일수록 적극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어 정치혐오증을 없애고 정치를 더 낫게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엄 전 사장이 이런 사람들의 범주에 들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지난 1년간의 행보를 돌아보면 그로 인해 한국 정치가 더 나아질 것이란 전망이 서지 않는다.

엄 전 사장이 그럼에도 강원지사 선거에 나서겠다면, 그의 자유의지에 맡길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피선거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공직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

다만 언론계 후배로서 한 가지만은 간곡히 부탁한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언론의 사명이나 언론인의 역할 같은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를 바란다. 엄 전 사장은 이제 ‘명 앵커 엄기영’이나 ‘권력과 불화하는 언론경영인 엄기영’이 아니라 수많은 ‘폴리널리스트(politics+journalist·언론정치꾼)’ 중 한 사람일 뿐이다. 물론 ‘폴리널리스트 엄기영’도 나름의 교훈을 남길 수는 있을 것이다. 한 인간(특히 공인)의 이미지와 실체는 잘 부합하지 않거나, 때로는 반대일 수 있다는 교훈 말이다.

폴리널리스트 중 한 사람일 뿐

2년여 전 이명박 정권의 「PD수첩」 등 언론 탄압을 소재로 칼럼(2008년 8월18일 경향포럼)을 쓴 적이 있다. 그때 엄 전 사장을 언급했다. ‘정권에 겁먹은 엄기영 사장은 떳떳지 못한 타협을 했다. 「PD수첩」 광우병 보도와 관련, 재심 청구 기회를 포기하고 사과 방송을 하더니 간부급 PD들을 사실상 강등시켰다. ‘인간적 존엄’에 대한 감수성이 있는 이라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당시 언론계 대선배를 ‘재단’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내 판단이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엄 전 사장은 그때나 지금이나 떳떳지 못한 타협을 하고 있다.

엄기영은 늘 엄기영이었다. 엄기영은 변신한 것이 아니다. 배신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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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아 사회부장

 
지난 21일 밤, 모처럼 마음이 가벼웠다. 누군가 물었다. 삼호주얼리호 구출작전 때문에 바빴을 텐데, 표정이 밝은 이유가 뭐냐고. “며칠 동안 엠바고(보도시점 유예)가 걸려 있던 작전이 무사히 끝나서”라고 답했다.

홀가분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TV에 나와 “제가 어제 오후 5시12분 국방부 장관에게 구출작전을 명령했다”고 한 게 조금 걸리긴 했지만, 아주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나 역시 ‘면제’인 처지라 마음속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을 콤플렉스가 짐작이 돼서다. ‘막타워(11m 높이 모형탑)’ 한 번 안 타본 주제에 남자들 앞에서 ‘대포병 레이더’나 ‘K-9 자주포’를 읊을 때면 사실 얼마나 오금이 저렸던가.
 
주말인 22일 밤, TV를 켰다. 예상치 못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복부에 총상을 입은 석해균 선장의 상태가 당초 알려진 것보다 위중하다.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오만 의료진은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위험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삼호주얼리호 석해균 선장이 수술을 받은 뒤 인공호흡기를 단 채 안정을 취하고 있다. (연합뉴스)



작전 직후 합동참모본부는 브리핑에서 ‘완벽한 성공’을 자랑하며 석 선장의 부상 정도에 대해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로 간단히 넘어간 터다. 분노와 동시에 자괴감이 들었다. 20년 넘게 신문사 밥을 먹고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한마디에 안심한 나는, 기자인가.

정작 의료진은 닷새 만에 출발

23일, 회사에 나와서 관련 기사들을 챙겨봤다. 석 선장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하고(정부 신속대응팀의 표현에 따르면 ‘수면상태’) 있었다. 뿐만 아니라 추가 수술도 받아야 한다고 했다.

24일부터 25일 아침까지, 석 선장 가족에 대한 보도가 잇따랐다. ‘부인 최진희씨는 처음엔 남편의 생명에 지장이 없다고 해 안심했는데, 건강이 악화됐다는 보도를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최씨는 남편이 치료받고 있는 오만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수차례 선사인 삼호해운 측에 전했다. 하지만 별다른 반응이 없다.’

25일 낮, 외교통상부와 삼호해운은 “최씨 등 석 선장의 가족 2명과 한국 전문 의료진이 오늘 밤 오만 살랄라를 향해 출발한다”고 발표했다. 전문 의료진은 석 선장이 장시간 비행을 견딜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될 경우 환자 이송 전문 비행기(에어 앰뷸런스)를 동원해 이르면 이번주 안에 한국으로 이송할 것이라고 했다.

석 선장이 총상을 입은 지 닷새 만의 결정이었다. 외교부와 국토해양부 공무원, 언론사 기자들은 이미 오만 현지에 도착했는데, 가장 먼저 배려했어야 할 가족과 최우선적으로 보냈어야 할 전문 의료진은 닷새 만에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그 사이 석 선장은 먼 이국 땅에서 고독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군 당국은 “석 선장이 ‘아덴만 여명 작전’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찬사를 되풀이했다. 합참에 따르면 그는 삼호주얼리호가 해적들에게 납치된 직후부터 청해부대 최영함의 추적과 구출작전에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배를 ‘지그재그’로 몰거나 소말리아 쪽으로 가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운항하고, 해적들의 눈을 피해 우리말로 최영함과 교신했다. 엔진오일에 물을 섞어 기관을 고장내는 방식으로 몇 차례나 배를 공해상에 정지시키기도 했다. 그 때문에 구출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해적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해 무릎과 어깨 등에 골절상을 입고, 작전이 시작된 뒤엔 해적에게 ‘조준사격’을 당했다고 한다.


석 선장을 한 번 만나본 적도 없는 수많은 이들이 그의 쾌유를 비는 사이, 정부는 무엇을 했던가. 석 선장을 ‘아덴만의 영웅’으로 만들고, 작전 장면이 생생히 담긴 동영상이나 청해부대원들의 수기까지 공개해가며 ‘마케팅’을 하는 데 바빴다. 그들이 승리의 기쁨에 들떠 혁혁한 전과를 과시할 때, 석 선장의 부인 최진희씨는 울고 있었다.

정부는 그 부인에게 사과해야

25일 오만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기자들과 만난 최씨는 “제발 남편과 함께 무사히 몸 건강하게 돌아올 수 있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이야기했다.

정부가 승리를 완성하고 싶다면, 그녀에게 “처음에 부군의 건강상태를 정확히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사과하고 위로해야 한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그녀의 눈물을 닦아줘야 한다. 그게 국가다. ‘아덴만 여명 작전’은 국가란 무엇인지, 정부의 존재 의미는 어떤 것인지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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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이 글은 2008년 4월 30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주최 토론회(“노동자 정치세력화, 버릴 것과 살릴 것”)에서 발표한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음을 밝혀둡니다.


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를 말하나

민주주의가 가져온 사회적 성취는 왜 나라마다 다른가.

누군가 필자에게 묻는다면, 크게 보아 그러한 차이는 조직노동에 바탕을 둔 진보정당의 존재 내지 그 영향력과 매우 깊은 상관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대체로 조직노동과 진보정당의 영향력이 클수록 투표율이 높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정도는 작다. 빈곤율도 낮으며, 소비사회로 경도되는 정도도 덜하다.
사회가 성장과 경쟁의 논리에 의해 일방적으로 내몰리는 정도가 작고, 폭력의 정도나 범죄율이 낮다. 경험적 근거로 뒷받침하기는 어려운 일이긴 하나, 문화적으로도 풍요롭다는 게 내 생각이다.

반대로, 노동의 이익을 조직하려는 노력이 이념적으로 공격받고 그들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가 정치적으로도 과소대표될 때 그 나라의 민주주의 질은 낮고, 공동체적 관념은 취약하며, 인간적이고 윤리적인 토양 역시 척박해진다. 사회의 중요한 집단이익이 배제됨 없이 폭넓게 대표되는 조건 위에서만 민주주의는 사회를 보다 넓은 공동체적 기반 위에서 통합하는 결정메커니즘으로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노동은 가장 크고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따라서 그들을 배제하려면 정상적인 방법과 합리적 범위를 넘어서게 되고 그 경우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한마디로 말해 노동의 참여와 그에 기반을 둔 강력한 진보정당을 만드는 문제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 프로젝트를 만드는 데 있어서 중심 문제 중의 중심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한국은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가질 수 있을까. 이른바 ‘미국 예외주의’(American Exceptionalism)로 일컬어지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경로를 피할 수 있을 것인가. 남북한이 지리적으로뿐 아니라 이념적으로 분단되어 있는 조건에서, 진보적 이념정당의 대중적 발전은 과연 허용될 수 있을까. 일본의 경우 40년 이상 0.5당의 위치를 굳건히 지켰던 사회당도 붕괴, 소멸되었는데 과연 한국이 ’미국적 범위‘를 벗어나 유럽적 경로를 가질 수 있을까.
오랫동안 강력한 사회주의 이념정당을 가진 이탈리아에서마저 진보정당 있는 정당체제가 붕괴되었는데, 과연 한국의 진보정당이 때 늦게 등장해 때이른 소멸의 위기를 극복하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부과하는 시련을 넘어 유력한 정당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
미국을 대표하는 정치학자이자 사회학자인 립셋이 유럽 역시 미국화되고 있다며 더 이상 미국은 예외가 아니라고 하는 마당에,
과연 한국은 그런 경향을 거슬러 올라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 모델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나라가 될 수 있을까.

정치를 이해하는 방법의 중요성

이상의 질문에 대해 긍정적으로 답하기는 매우 어려운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강력한 국가의 존재, 재벌과 주류언론이 중심이 된 강력한 거대사익들의 기득체제, 분단과 전쟁의 경험이 불러들이는 강력한 이념적 제약 등 한국에서 진보정당 있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제약하는 요인은 대개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토대를 갖는다.

하지만 제약 요인이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현실이라고 비약할 수는 없다. 각자가 지향하는 정치학의 계보나 퍼스펙티브에 따라 다르겠지만, 필자의 관점에서 정치학의 근본적 강점은 그 어떤 결정론적 사고에도 식민화되지 않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때문에 어쩔 수 없다거나, 남북한의 분단을 먼저 극복해야만 진보정치가 열릴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외재적 환원론은 근본적으로 미국 예외주의적 접근(즉, 다른 나라와 다른 미국적 예외에서 그 원인을 찾는 접근)의 한국판일 뿐이다.

문제는 여러 제약 조건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개척해갈 수 있을 정도로 진보세력이 정치적으로 유능한가 하는 데 있다. 사회학자 중의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는 막스 베버는 정치에 대한 소명이 있는 사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진보정치의 영역에서 우리가 목격한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필자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은 근본적으로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방법에 있어서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바 크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진보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지지할 사회적 기반과 유권자가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들로부터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고 본다.

대다수 진보파들은 민주주의와 대중정치를 이해하고 적응하기보다는 기존의 자신들이 견지했던 이념의 언어로 현실을 재단하고 대중을 계도하려는 태도가 강했다. 권력과 권위, 갈등과 대립, 리더십과 통치의 기능을 부정하면서 일종의 정치의 현실을 초월한 도덕적, 급진적 운동론으로 정치조직의 통합력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요컨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대중정치에 적응하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진보정당의 대중적 발전에서 매우 중대하고도 핵심적인 문제라 생각한다.

운동과 정치

운동으로서 진보세력이 정치 영역에 참여한다는 것의 가장 이상적인 내용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하여 가난한 서민대중의 삶의 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개선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여기서 핵심은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 내지 이른바 ‘정치의 방법’에 대한 문제이다.

정치의 방법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 정치학의 기본 전제는, 정치란 개인의 차원 나아가 운동성 내지 도덕성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세계를 갖는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심’, ‘도덕성’, ‘운동성’과 같은 도덕률이 진보의 영역에서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언어로 기능하고 있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이러한 접근은 무엇보다도 정치를 현실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정치의 현실이 포착되지 않는 조건에서 정치의 방법으로 힘을 조직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도덕성은 개인의 자율적인 판단의 영역에 있는 것이지 강제될 수 없는 것이다. 도덕성이 정치적 행위를 규제하는 기준이 될수록 정치가 도덕적일 수 있는 기반은 파괴된다. 우리사회처럼 도덕성이 강조되는 정치도 없지만 한국정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한국의 정치가가 부도덕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실제 개선해야 할 정치의 현실을 놓쳐버리고 결과적으로 부도덕한 정치 현실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정치에서 자주 사용되는 ‘의식개혁’ 내지 ‘의식화’라는 접근도 마찬가지이다. 기실 사람의 의식과 내면세계를 뜯어고치자고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태도이지만, 개개인의 의식을 문제 삼는 동안 정작 문제가 되는 의식을 만들어내는 정치적 조건은 건재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가는 교체되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유사한 의식과 관행이 반복되는 정치구조는 변함이 없게 된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한국정치가 도덕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은, 도덕성을 따지는 동안   
                            
실제 개선해야 할 정치의 현실을 놓쳐버리기 때문이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했듯이,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든다. 정치의 체계와 구조를 좋게 만드는 것만이 시민사회 내지 생활세계의 도덕적 기반을 널리 확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이 들어오지 않는 한 운동이 민주정치의 발전에 기여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근대 정치학은 도덕주의와 단절하면서 출발했다. 달리 말하면, 가난한 대중의 운명이 정치가의 선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반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접근이라 하겠다.
아무리 선한 정치엘리트나 그 어떤 민중적 교리를 갖는 정당도 대중의 요구에 의해 제약되는 정치의 체계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도덕적 헌신은 무뎌지고 편협한 조직의 관점은 커질 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이상적 민주주의라 해도, 민주주의 역시 지배의 한 형태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가 운동권 내지 진보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갖는 가장 큰 불만은, 분명 그들 역시 정치를 하고 권력을 이용하고 개인과 집단의 이해관계를 위해 다투고 있는데도 늘 언어의 구사에 있어서는 그런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를 권력과 이해관계에 초연한 역사적 역할자로 정의하거나, 자신은 안 그런데 상대가 권력과 이해관계를 다툰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또 자신은 원치 않지만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권력과 이해를 다투게 되었다는 식의 자기 위선과 변명의 문법이 일상화되었다.

진보정치도 정치인 한 권력과 이해관계의 문제를 합리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언어를 가져야 할 것이다. 진보파의 언어가 정치 행위의 실제를 반영하지 못할 때, 대개 언어로 이루어지는 민주정치의 현실에서 다수의 신뢰를 조직해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민주노동당의 분열과 진보세력의 매우 초라한 정치적 성과 내지 주변화 현상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정치의 현실을 다룰 언어가 없다면, 갈등을 합리적으로 다룰 수 없고, 기껏 누가 더 도덕적으로 규탄 받아야 하는가를 따질 수밖에 없다. 그것도 공론의 장에서 이루어질 때는 상호 자기파멸적 효과를 가져 올 것이기에 은밀한 방법과 보이지 않는 배타성 내지 내부자라면 누구나 이를 감지할 수 있는 집단적 분위기의 형태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결과는 컸다. 진보정치의 영역 내부에서 갈등과 균열이 생길 때마다 도덕주의적인 집단 선택이 강요되고 결과적으로는 스스로의 사회적 기반을 끊임없이 축소시키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악순환을 끊지 않는 한 진보정치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시도들이 앞으로도 다른 결과를 가져오긴 어려워 보인다.

정치와 정당

대규모 정치공동체를 움직여야 하는 이상, 체계와 조직이 필요하고, 그만큼 기능과 역할에 따른 위계구조를 갖지 않을 수 없다. 국가 역시 마찬가지이다. 국가 없는 민주주의는 없으며, 본래 민주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국가의 한 형태로 정의되고 개념화된 것이다. 물론 국가 없는 사회를 구상할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말해 그것은 민주주의를 넘어선 차원의 이슈이다.

불평등의 원리로 조직된 시장메커니즘이 생산적 자원의 분배와 할당을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평등화의 가장 강력한 기제는 민주주의이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은 정치적 평등의 원리에 따라 조직된 민주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따라서 정치와 국가에 대한 부정적 태도는 현실의 불평등체제를 안정화시키는 데 기여하기 쉽다.

정당 혹은 당파성의 문제도 그렇다.

현대 민주주의는 선거를 제도적 채널로 하는 정치적 대표의 체제를 그 핵심으로 한다. 로베르토 미헬스가 강조했듯이, 이는 불가피하게 정치를 직업으로 하는 엘리트들의 과두체제 혹은 이들로 이루어진 정당들 간의 과두체제를 발전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민주주의의 현대적 유형이라 부르고, 나아가서는 고대 민주주의보다 더 민주적이고 더 실천 가능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 갈등의 정치적 대표와 경쟁의 원리가 보통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 엘리트와 정부를 보다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당으로 조직된 복수의 정치적 대안들이 존재해야 하고 이들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가 일종의 물리학적 효과를 가져야 한다. 사회의 균열기반 위에 위치한 여러 집단들의 이익과 열정을 복수의 정당들이 경쟁적으로 동원하여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대하고자 하는 파당적 경쟁의 효과가 작용하지 않는 한, 자본주의 시장의 분배구조에서 소외되어 있는 약자들의 요구가 국가의 정책결정에 반영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념과 리더십 그리고 규율

사회경제적으로 지배적 위치에 있는 집단은 ‘지금 있는 현실’의 힘의 관계를 정당화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하지만, 다수의 형성이라는 민주적 방법을 통해 불평등 구조를 개선해가고자 하는 진보세력의 경우 대안적 이념은 ‘지금의 현실이 개혁된 내일의 현실’을 추상적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는 문제가 있다.

현상유지를 바라는 집단이야 현재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족하지만 현실의 변화를 지향하는 진보세력의 눈은 불가피하게 미래에 두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대규모 집합행동을 이끌고자 하는 진보세력에게 ‘확신의 딜레마’는 피할 수 없는 도전이다.

합리적 선택이론에 기초한 정당론을 개척한 앤소니 다운즈가 정당의 세계에서 이념의 역할을 강조하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정당들이 발전시키고자 하는 이념을 ‘확신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합리적 기제 내지 지름길(shortcut)이라고 정의했다. 불행하게도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제대로 된 강령 하나 작성하지 못하고 추상적 공론으로 시간을 보냈다.

물론 제 아무리 현실적인 내용과 체계를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념만으로 정당조직이 직면하는 딜레마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정당론에 대한 ‘최후의 패러다임’을 개척한 안젤로 파네비안코가 강조하듯, 리더십의 발전 없이 정당조직을 통합할 방법은 없다.
거대한 규모의 정치조직을 제도나 추상적인 규칙으로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현실이 아니다.

정치란 폭군이나 독재자의 출현가능성을 감수하고도 인간이 사회를 조직하고 통합하는 불가피한 방식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정치 없이 시민적 삶을 발전시키기는 불가능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의 핵심은 좋은 통치자를 만드는 문제에 대한 것이다.
정당을 ‘현대판 군주’(modern prince)라고 지칭했던 안토니오 그람시가 강조했듯이, 정당이 중심이 되는 현대정치에서 정당은 곧 국가의 통치권을 두고 경합하는 정치적 리더십의 조직적 표현과 같은 것이다.

응당 조직으로서의 정당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집합행동의 딜레마를 완화시키는 현실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념이 필요하고, 자연스럽게 리더십의 발전 및 조직적 권위의 확립, 규율의 체계화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대중정당의 모델을 말하면서 막연히 ‘대중적’인 어떤 정당조직을 연상하곤 한다.

그러나 19세기 이래 서구민주주의를 이끈 대중정당은 매우 응집적인 이념정당이었으며, ‘민주집중제’라고 불리는 강한 리더십과 조직적 규율, 다양한 대중단체를 특정 방향으로 이끄는 당 활동가들의 당파적 역할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러한 정당모델을 그대로 실현할 수야 없겠지만, 그러나 그 기본 원리는 오늘날은 물론 미래에도 부정될 수 없다.

결국 핵심은 권위, 권력, 국가, 정당, 당파성, 리더십의 좋은 모델을 발전시키는 데 있는 것이지 그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정치 자체를 없애버리는 접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우리사회의 진보파와 개혁파들이 반정치, 반국가, 반권위 등을 특징으로 하는 극단적 자유주의의 공세로부터 민주 정치를 얼마나 지켜냈는지 회의적이다.

모두가 나서서 민주화이후의 정치를 부패하고 부도덕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사이, 반정치와 투명성, 효율성을 핵심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정치관과의 접합은 훨씬 강화되었다.
정치는 쉽게 회계학의 원리에 따라 교정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전락했고, 대중 속에서의 정치활동 역시 부패 가능성을 이유로 부정시되고 구태라고 비판되었으며, 방송매체를 활용한 정책토론회 등 대중과 유리된 정치가 무비판적으로 강조되었다.

사회적 갈등구조를 초월하여 주류언론-재벌-검찰-시민운동-주류학계를 묶는 광범한 ‘정치개혁 담론동맹’이 맹위를 떨치는 사이 민주정치와 정당정치는 점점 사회적 기반을 상실해 갔다. 급기야 세계에서 가장 투표하기 쉬운 나라라 할 수 있는 한국에서 총선투표율이 46%까지 떨어지고 말았다.

당내 민주주의의 문제

모든 정당이 당내 민주화를 말해왔고 지금도 계속 그 패러다임 안에 있다. 문제는 당내 민주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서, 좋은 정당이 되기 위해 당연히 발전시켜야 할 리더십과 이념, 적절한 조직규율 등을 심각하게 약화시키는 데 기여해왔다는 사실이다.

정당은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가?

답은 ‘아니다’이다. 반드시 민주적이어야 하는 것은 정당체제이지 정당이 아니다. 민주정치의 핵심은 개별 단위(unit)로서 하나의 정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당들 즉 단위들 사이의 관계양식을 말하는 정당들의 체계(system)에 있기 때문이다.

단위로서의 정당은 기본적으로 자율적 결사체의 성격을 갖는다. 어떤 정당은 자신들이 대표하고자 하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위계적인 조직구조를 가질 수도 있고, 이념을 중시하며 상층 엘리트 사이의 집단지도체제를 발전시킬 수도 있다. 가능한 민주적 가치와 원리가 당내에서 발전해야겠지만 그것이 조직으로서의 정당 내지 리더십의 발전을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물신화하는 일이 된다.

민주주의든 진보든 민중을 위한 것이며, 거꾸로 민중이 그러한 이념적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정치와 정당 역시 추상화된 원리나 가치에 맹목적으로 종속되는 영역이 아니라 인간들이 살아 움직이는 현실의 공간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당내 정파는 한국 사회 진보파를 괴롭혀 왔던 대표적인 문제였다.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정파의 존재 때문에 문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파의 존재와 이들 사이의 경쟁이 당내 활력과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정파의 문제를 그렇게 다루지 못한 데 있었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가 있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지도자가 없는 민주주의’에서는 대중권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정파와 붕당이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필자는 오늘날 한국 진보정치의 현실이 정확히 베버의 말과 같게 되었다고 본다. 2004년 원내 진입과 함께 어렵게 만들어진 진보의 정치적 자원이 탕진된 것은, 정파 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지도부의 부재로 인해 정파의 폐해가 무제한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직화와 리더십에 부정적인 정향은 대개의 경우, 개인적으로 발언권을 더 크게 가질 수 있어서 자신이 원하지 않는 지도부 등장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중산층 엘리트들의 욕구를 반영한다.
강력한 리더십의 체계가 작동할 때 이들의 욕구는 조직 내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지만, 반대로 리더십의 체계가 작동하지 않을 때는 언제든 정치조직의 파편화 내지 정파의 과도한 족출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된다.
진보적 관점을 담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학 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한 정당의 부재는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시민들의 정치 참여를 축소하고 선거를 중간계급 위주의 것으로 만든다.”


이 간단하면서도 단호한 주장이야말로 현대 정치의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대중과 대표를 연결하는 수직적 책임성(vertical accountability)이고, 이는 이념과 집단, 조직 등의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겠지만 구체적 인물과 지도자를 초점으로 한 직접적 대표성(direct representation)의 원리에 의해서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진보정당은 정치적으로 더 강해져야 하고, 그러려면 사회적 요구를 구체적으로 표출할 수 있는 리더십 형성이 시급하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사례로 볼 수 있듯, 한국의 진보정당은 개인으로 상징되는 리더십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정당조직 모델을 고집했다.
아마도 이 점은 다른 나라에서도 유사 사례를 찾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진보정당이 갖는 자원과 잠재력을 조직하는 데 있어서 빈약한 성과로 나타났다. 정당이 하나의 조직인 한, 그것도 사회의 개혁자가 되고자 하는 진보정당인 한, 리더십의 문제를 경시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현실의 민주주의가 먼저 정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한 뒤 그것에 책임성을 묻듯이, 정당조직에서도 중요한 건 먼저 리더십이 기능하게 하고, 그리고 나서 그것이 만들어낼 수 있는 권위주의적 요소들과 대면해가야 할 것이다. 인치(人治)가 갖는 독단성과 임의성을 제어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인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정치를 없애는 것과 같다.

그간 한국의 진보정당은 보수정당과는 달리 ‘인치의 과잉’ 때문에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대와 대중적 열망을 응집시킬 수 있는 ‘인치의 부족’ 즉 리더의 부재 때문에 더 많은 문제를 낳았다. 아데나워 시대의 독일기민당, 브란트 시대의 독일사민당, 맥도날드 시대의 영국노동당, 미테랑 시대의 프랑스 사회당, 베를링게르 시대의 이태리 공산당을 말하듯, 진보정당도 리더십의 특징과 결합된 직접적 책임성의 구조를 발전시키는 데 소극적이지 않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헌법을 만드는 데 참여했던 제임스 매디슨이 강조했듯이, 인간이 천사라면 통치는 필요 없을 것이다. 천사가 통치한다면 책임성을 부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은 인간의 현실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정치가 필요하고 통치도 필요하며, 권력과 권위의 부여도 불가피하다. 먼저 리더가 조직을 통치할 수 있게 한 뒤에 그 결과에 사후적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 없이 어느 조직도 성과를 내기는 어렵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야말로 리더가 조직을 통치하기도 전에 과도한 견제부터 하면서 조직을 통치 불능으로 만들어 온 우리사회의 진보파들에게 가장 부족한 일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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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진(배두나)과 하동아(이천희)는 요새 유행어로 ‘잉여’(취업난을 겪는 젊은 세대가 자조적으로 자신을 일컫는 말)다. 돈 없고, 배경 없고, 가방끈도 짧다. 더 큰 문제는 이들이 너무 젊다는 거다. 사는 게 버거운 이들에겐 젊음도 짐일 뿐이다. 그래서 둘은 만나기만 하면 으르렁댄다. 자신과 꼭 닮은 상대방을 물어뜯음으로써 하루하루를 견뎌낸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3류 나이트클럽 무대에서 노래하게 된 진진이 동아에게 묻는다. “넌 꿈이 뭐냐?”(진진) “너, 헛바람 들었구나. 송충이는 솔잎 먹고 살아야 돼.”(동아) “송충이도 태어난 이유는 있을 거 아니야.”(진진) “우리에겐 그런 거 없어. 그냥 사는 거야….”(동아)

MBC 드라마 <글로리아>는 서글프다. 변두리 나이트클럽과 그 앞 포장마차를 무대로 살아가는 비주류 인생들이 주인공이다. 미끈한 재벌2세가 등장하긴 하지만 그도 ‘세컨드’의 아들. 서글픈 인생이긴 마찬가지다.

사교육비 늘리는 경쟁위주 교육
 

<경향신문 DB>

이명박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공정한 사회’를 이야기했다. 공정한 사회란, 출발과 과정에서 공평한 기회를 주되, 결과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을 지는 사회라고 했다. 넘어진 사람은 다시 일어설 수 있고 일어선 사람은 다시 올라설 수 있는 사회, 서민과 약자가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사회라고도 했다. 좋은 얘기다. 이런 사회가 실현된다면 진진과 동아도 ‘잉여’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 수 있으리라.
그러나 문제는 ‘공정성’을 구체적으로 정의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 있다. 최근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 지역균형선발 전형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연합뉴스 8월16일 보도). 지역균형선발 전형 폐지론자들은 이 제도가 수학능력이 충분치 않은 지원자를 합격시켜 대학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지방 학생을 배려하기 위해 우수 학생의 기회를 빼앗는 ‘불공정한’ 제도라고 주장한다. 반면 이 전형을 옹호하는 이들은 지역격차로 누적된 불평등을 해소하는 일종의 어퍼머티브 액션(affirmative action·소수자 우대정책)이란 점에서 ‘공정한’ 제도라고 반박한다. 양쪽 모두 공정성을 이야기하지만, 각각이 주장하는 공정성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이 대통령이 생각하는 ‘공정한 사회’의 구체적 그림이 궁금하다. 그는 공정한 사회를 위한 실천의 예로 ‘활기찬 시장경제를 위한 규제 개혁’과 ‘사교육비 절감을 포함한 교육 개혁’을 들었다. 규제 개혁이란 뭔가.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에서 규제 개혁은 규제 완화와 사실상 동의어다. 이명박 정부는 기업 성장이 서민경제 활성화로 연결된다는 논리에 따라 집권 초부터 (부자)감세와 (기업)규제 완화에 나섰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많은 나라들이 규제 강화에 나설 때도 꿋꿋이 제 갈 길을 갔다. 결과는? 경기지표는 회복되었으나 일자리는 생기지 않고 양극화는 깊어졌다. 교육 개혁도 다르지 않다. 자율형 사립고와 일제고사로 대표되는 경쟁 위주 교육은 사교육비를 절감하기는커녕 많은 학생과 학부모들을 절망으로 내몰았다. 이 사회는 공정한 사회인가?

8·8 개각 이후 이명박 정부는 ‘영남 색’이 더욱 짙어졌다. 대통령·국회의장·국무총리·여당 대표가 모두 영남 출신이다. 4대 권력기관장도 검찰총장만 비영남(서울) 출신일 뿐, 국정원장과 국세청장(후보자)·경찰청장(후보자) 등 3인은 영남 출신이다. 이 사회는 공정한 사회인가?

숱한 불법행위 저지른 장관후보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있는 신재민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는 8년 동안 5차례 위장전입을 했다고 시인했다. 더불어 양도소득세 회피 의혹, 땅 투기 의혹, 부인의 위장취업 의혹도 받고 있다. 다른 총리·장관·청장 후보자들의 의혹까지 일일이 거론하기엔 지면이 모자라지만, 한 가지는 묻고 싶다. 명백한 불법행위로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낸 사람이 고위공직에 오른다면…이 사회는 공정한 사회인가?

이달 초 휴가를 떠난 이 대통령이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를 탐독 중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청와대는 “해당 도서는 참모들이 올린 추천도서 목록에 있었을 뿐이며 대통령이 휴가지에 가져갔는지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대통령이 아직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일독을 권한다. 만약 읽고도 공정한 사회에 대해 앞뒤 맞지 않는 논리를 폈다면, 찬찬히 재독하길 권한다. ‘공정한 사회’, 결코 어려운 개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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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여자 아이돌 스타들에게 최대의 적은 ‘생얼(맨얼굴)’ 공개일 것이다. 생얼이 화장한 얼굴 못지않게 예쁘면 인기에 도움이 되지만, 그러기란 쉽지 않다. 어쩌다 화장한 모습과 상당히 다른 사진이 인터넷에 뜨면 ‘OOO의 굴욕’이 된다. 다른 이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그녀들의 맨얼굴이 궁금하지 않다. 노래 잘하고 연기 잘하면 그만이지, 꿀피부인지 여드름투성이인지 알아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런데 심각한 건 생얼 공개 열풍이 TV 밖으로 번지고 있다는 점이다. 20세 이하 여자월드컵에서 맹활약 중인 지소연·이현영 선수를 ‘익사이팅 듀오(활기찬 2인조)’라 부른다는데, 이명박 정권에도 익사이팅 듀오가 나타나 권력의 생얼을 거침없이 내보이고 있다.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과 강용석 한나라당 의원이다(지소연·이현영 선수여, ‘몹쓸 비유’를 용서하라!).

강 의원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친여 보수언론까지 앞다퉈 보도했으니 생략하고, 상당수 언론이 피해간 유 장관의 발언만 정리한다. “(6·2 지방선거 때) 젊은애들이 전쟁과 평화냐 해서, 한나라당 찍으면 전쟁이고 민주당 찍으면 평화고 해서 다 (민주당으로) 넘어갔다. 이런 정신상태로는 나라 유지하지 못한다. 그렇게 (북한이) 좋으면 김정일 밑에 가서 어버이 수령하고 살아야지. 나라로서의 체신이 있고 위신이 있고 격이 있어야지.” 
 

<연합뉴스 | 경향신문 DB>


‘젊은애들’ 탓하는 외교장관 

유 장관이 ‘어록’을 남긴 것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해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위해 열린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때다. 외통위 소속이 아닌 천정배 의원이 비준안 저지를 위해 들어온 걸 본 유 장관은 “여기 왜 들어왔어. 미친×”라고 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비준안 상정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의 몸싸움이 계속되자 “이거 기본적으로 없애버려야 해”라고 일갈했다.

국제무대에서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장관의 말은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고위공직자에 걸맞은 세계관과 가치관, 뚜렷한 논리, 고상한 품격과 세련된 언어 구사가 필수다. 우선, “김정일 밑에 가서 살아라” 발언은 유 장관이 민주국가의 고위공직자다운 가치관과 세계관을 갖추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한국에서 선거 참여가 시민의 권리라면, 선거 결과에 대한 승복은 시민의 의무다. 고위공직자는 더욱이 시민의 정치적 선택을 존중하고 받들어야 마땅하다.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있을 때마다 지난 대통령선거의 득표차 531만표를 내세운 게 어느 정권인가. 대선에선 자신들이 이겼으니 반대세력도 결과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방선거에선 자신들이 졌으니 반대세력이 ‘잘못된 선택’을 책임지라는 것인가.

다음으로, “김정일 밑에 가서 살아라” 발언은 철저하게 비논리적이다. 유 장관 말대로라면 지방선거 때 전쟁이 싫다며 민주당 찍은 젊은이들은 친북·종북주의자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국가안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 셈이다. 국가정보원과 공안검사들, 아니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엇을 했단 말인가.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이 땅에서. 정부 외교안보팀의 핵심인 유 장관 역시 책임을 면키 어려운 중대 사태다. 그런데도 반성하기는커녕 ‘젊은애들’ 탓을 하다니.

마지막으로, “김정일 밑에 가서 살아라” 발언은 고상하지도 세련되지도 못했다. 국민의 녹을 먹는 공복으로서 국민의 ‘정신상태’를 들먹이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미국 민주당 출신인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이 공화당 지지자들을 향해 정신상태를 들먹인다면 자리를 지킬 수 있겠는가.

“나라로서의 체신·격이 있어야”

세간에는 유 장관이 7·28 재·보선을 앞두고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의 천안함 외교 실패를 가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발언한 것 아니냐는 시각도 있다. ARF의 천안함 관련 의장성명에는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명시한 ‘규탄’이라는 표현이 빠졌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외교부 장관을 지낸 송민순 의원의 말처럼 “스트레스가 많다보니, 본인이 어떤 지위에 있다는 걸 잊어버리고 나온” 발언이길 바란다. 그렇다면 깨끗이 사과하고 조용히 물러나면 된다. 이명박 대통령과 유 장관에게 잠시 유 장관의 어법을 빌려 말한다. “이런 정신상태로는 정권 유지하지 못합니다. 나라로서의 체신이 있고 위신이 있고 격이 있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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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다. 미국에서 히스패닉계 최초이자 여성으로선 세번째인 연방대법관이 탄생했다. 소니아 소토마요르다. 1년이 지난 지금, 미국에선 네번째 여성 연방대법관이 탄생하려 하고 있다. 하버드대 로스쿨의 첫 여성 학장을 지낸 엘리나 케이건이다. 그가 인준되면 대법관 9명 중 여성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를 포함해 3명으로 늘어난다.

한국 대법원에도 여성 대법관이 있다.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가운데 김영란·전수안 대법관 등 2명이다. 이 중 김 대법관이 8월24일 퇴임한다. 대법원은 지난달 말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를 구성해 어제까지 후임 대법관 후보자 추천을 받았다. 제청자문위는 오는 19일쯤 회의를 열어 후보군을 3~4명으로 압축해 대법원장에게 추천할 예정이다. 이후 대법원장은 이들 중 1명을 대통령에게 임명 제청한다.
 



김영란 대법관 | 2010-07-25 | 경향신문 DB
 
 
대법관 임용 자격은 의외로 까다롭지 않다. 법원조직법에 따르면 40세 이상, 법조경력 15년 이상이면 된다. 반드시 판·검사 출신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변호사 자격증만 있다면, 국가기관이나 지자체 등에서 법률 관련 업무를 하거나 대학의 법학 교수(조교수 이상)로 재직한 기간이 15년 이상이면 대법관이 될 수 있다. 이 같은 규정에도 불구하고 후보군으로 거론되는 이는 거의 모두 고위법관들이다. 자연히 성별은 절대 다수가 남성이다. 법원 내부에서는 법원의 안정성을 고려하면 이런 선택이 불가피하다고 말한다.

‘대법원 구성 다양성’ 중요 의미

‘기수 파괴’ 인사에 대한 사법부 일부의 우려는 이해한다. 그러나 최소한 김영란 대법관의 후임을 서열 위주로 인선해서는 안 된다. 김 대법관을 기용한 것은 노무현 정부이지만, 그의 발탁이 갖는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라는 의미는 어떤 정부에서도 폄훼될 수 없다. 여성 대법관의 임용은 단순히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여성 대법관은 어린이, 노인, 노동자, 장애인, 외국인, 성적소수자 등 한국 사회의 다양한 소수자를 대변할 수 있다. 여성은 소수자의 인식에 공감하는 촉수, 즉 일종의 ‘소수자 감수성’을 갖고 있는 까닭이다. 비슷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남녀 법조인이 있다 치자. 남성이 직선주로를 질주해왔다면, 여성은 끊임없이 허들을 넘으며 힘겹게 현재에 이르렀을 가능성이 높다. 그 허들은 가정·사회에서의 성차별일 수도 있고 출산, 육아, 가사노동의 부담일 수도 있다. 허들을 넘는 과정에서 ‘엘리트인 그녀’는 ‘약자인 그들, 그녀들’과 만났을 것이다.

김영란 대법관은 2006년 6월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수에 선 사람들은 소수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소수의 권익이 침해당하지 않도록 고려해야 합니다. 판결하기 전에 한번 더 소수의 입장에서 생각해봅니다.” 

2006년 3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새만금 관련 소송에서 11 대 2로 공사 재개를 명령했다. 김영란 대법관은 박시환 대법관과 함께 “자연환경 보전의 가치가 개발에 따른 가치보다 우선적으로 보호돼야 한다”는 반대의견(소수의견)을 냈다. 2007년 3월 ‘대학 시간강사도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돼 대학이 산재보험료를 부담해야 한다’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김 대법관은 이 사건의 주심을 맡았다. 지난 5월 대법원은 “어린아이를 둔 부부가 이혼할 때 누가 양육에 적합한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면 자녀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아버지가 성실하게 딸을 보살펴왔고, 딸은 부모가 헤어질 경우 아버지와 같이 살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며 아이 의사에 반해 친권행사·양육자를 어머니로 지정한 원심을 파기, 환송했다. 이 사건의 주심도 김 대법관이었다.

어린이·노인 등 소수자 대변

1981년 무명의 애리조나주 판사이던 샌드라 데이 오코너를 미 연방대법관에 지명한 이는 공화당 소속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었다. 레이건은 법무부와 공화당 상원의원들의 반대에 굴하지 않고 오코너의 인준을 밀어붙였다. 오코너는 미 연방대법원의 ‘균형추’ 역할을 하며 여성의 낙태 권리와 어퍼머티브 액션(소수자 우대정책)을 지켜냈다. 그가 알츠하이머를 앓는 남편을 간호하기 위해 사임하자,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치에 지진이 일어났다”고 표현했다. 

‘보수 대통령’ 레이건은 훗날 ‘레이거노믹스’로 명명된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으로 기억되지만,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을 임명한 대통령으로도 역사에 남았다. 한국의 보수 대통령도 여성과 소수자의 권익을 위해 행동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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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뛰었다. 박지성이 수비수 2명을 제치고 골문을 향해 질주할 때. 위스키나 면도기 광고에 나올 때의 어색한 박지성이 아니었다. 당당하고 위엄이 넘쳤다. 매혹적인 그의 질주는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았다. 인터넷의 관련기사마다 마우스를 옮겨대며 클릭하기 바빴다. 월드컵의 신은 내게도 이렇게 강림하셨다.

나를 비롯한 많은 이들이 박지성의 왼발에 경배하던 시간, 서울 조계사에선 200여명의 사람들이 두 손 모아 기도하고 머리 숙여 절하고 있었다. 지난달 31일 소신공양(燒身供養)한 문수 스님을 추모하는 ‘1080배 참회 정진 기도회’였다.


조계사 일주문 앞에 25일 개원한 서울 한강선원에서 4대강 생명살림을 위한 24시간 참회정진 기도를 하던 수경스님이 기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 2010-05-25 | 경향신문 DB
 

문수 스님이 “이명박 정권은 4대강 사업을 즉각 중지 폐기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입적한 뒤 10여일이 흘렀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가. 6·2 지방선거가 치러졌고, 20·30대 젊은이들이 투표소에 줄을 섰으며, 야당이 압승하고, 참패한 여당에선 쇄신 바람이 불었다. 4대강 사업 기조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불교계 환경운동의 상징인 수경 스님은 지난 5일 ‘문수 스님 소신공양 추모제’에서 호소했다. “이명박 대통령님,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눈도 깜짝하지 않으십니까? 강의 숨통을 자르면서, 온갖 생명을 짓밟은 것으로도 모자라 사람의 목숨까지 가져가고도 이토록 냉담하십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최소한의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래서는 안 됩니다.”

월드컵 틈탄 4대강 강행 선언

이 대통령의 침묵은 계속됐다. 남아공월드컵이 막을 올리고 한국 대표팀이 첫 경기인 그리스전에서 2 대 0으로 쾌승을 거둘 때까지. 남녀노소 불문하고 승리의 달콤함에 빠져 있을 때, 그제서야 대통령은 입을 열었다. “4대강 살리기는 ‘생명’ 살리기 사업입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인천국제공항과 고속철도에 이르기까지 국책사업은 그때마다 많은 반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바로 그 사업들이 대한민국 발전의 견인차가 되었습니다. 4대강 사업도 그렇게 될 것입니다.” 수행자가 몸을 불살라도, 민심이 투표를 통해 중단을 요구해도 4대강 사업을 강행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대~한민국’의 분위기를 틈타 얼렁뚱땅 말이다.

‘대~한민국’의 뒤편에서 사람들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월드컵의 막이 오른 11일, 낙동강 유역에서 20여년째 골재 채취업을 해오던 70대 사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사망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유서에는 “정부가 많은 국민이 반대하는 사업을 추진해서 원망스럽다. 생업을 못하게 돼 힘들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는 4대강 사업으로 골재 채취를 더 이상 할 수 없게 된 데 대해 고민해왔다고 한다.

육체적으로 숨이 끊기는 것만이 죽음이랴. MBC는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인사위원회에 회부된 이근행 노조위원장의 해고를 확정했다. 역시 지난 11일, 월드컵 개막일이었다. MBC에서 노조 활동과 관련해 해고자가 나온 것은 1996년 총파업 당시 최문순 노조위원장(현 민주당 의원) 이후 14년 만이다. 민주노동당에 가입하거나 당비를 낸 혐의로 기소된 수백명의 전교조 교사와 전공노 공무원들도 파면·해임 등 ‘사회적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교육과학기술부와 행정안전부는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전국 시·도 교육청과 지방자치단체에 이들을 징계조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아마도 월드컵이 끝나기 전 ‘대청소’를 완료하는 게 목표일 것이다. 

‘대~한민국’ 함성에 묻힌 죽음들

이어지는 죽음들, 대답 없는 권력에 질식했을까. 4대강 사업 반대에 앞장서던 수경 스님은 화계사 주지와 불교환경연대 대표직 등 모든 직함을 내놓고 조계종 승적까지 반납한 채 자취를 감췄다. 그는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에 큰 충격을 받고 자괴감을 느껴왔다고 한다.

서민 단국대 의대 교수는 경향신문 6월9일자 칼럼에서 “월드컵이 무섭다. 현 정부가 그간 미뤄둔 구린 일들을 싹 해치울까봐”라고 했다. 나는 월드컵이 아니라 내가 두렵다. 한국 대표팀이 고지대인 요하네스버그에 잘 적응할지, 세계 최고의 공격수 리오넬 메시를 막아낼 수 있을지, 부부젤라 소리에 경기력이 떨어지지는 않을지 궁금해하는 내가 두렵다. 그 사이 또 누군가 죽어갈까봐, 그것도 모른 채 TV 앞에서 넋을 잃고 있을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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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초 영국 왕실은 왕위계승서열 3위인 해리 왕자가 공격용 헬리콥터 아파치의 조종사 훈련과정을 밟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육군 장교인 해리 왕자는 2007년 말부터 2008년 초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적이 있다. 소속 부대가 탈레반의 타깃이 될 것이라는 우려로 10주 만에 귀국했지만, 그는 지금도 아프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다.


<경향신문 DB
>


영국 왕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높은 사회적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 전통은 널리 알려져 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차 세계대전 당시 공주의 몸으로 군용 트럭을 몰았고, 여왕의 아들 앤드루 왕자는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아르헨티나명 말비나스) 전쟁에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미국 지도층도 영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의 아들, 존 매케인·세라 페일린 전 공화당 정·부통령 후보의 아들이 모두 이라크에서 복무했거나 복무 중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 이후 군 통수권자로서의 결연한 의지를 보여주려 애쓰고 있다. 지난 24일 대국민 담화를 발표한 장소는 청와대가 아닌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이었다. 앞서 4일 열린 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선 평상복 차림으로 거수경례를 했다. 천안함 사건 조사결과 발표 다음날인 21일에는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했다. 그러나 국가안보 책임자들의 단호함을 보여주기에는 면면이 미덥지 않았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8명 중 절반인 4명이 군 면제였다. 이 대통령은 기관지 확장증, 정운찬 총리는 고령, 원세훈 국정원장은 하악 관절염, 정정길 대통령 비서실장은 근시고도양안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군에 다녀와야만 안보를 말할 자격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스핀 닥터(정치홍보 전문가)’들의 면밀한 ‘연출’로도 이들의 전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NSC 참석 8명중 절반이 군면제

요즘 북한에 대한 군사적 응징을 주장하며 ‘전쟁 불사론’을 외치는 극우파들이 있다. 정부도 이를 틈타 국민의 위기의식을 자극하며 6·2 지방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려 하고 있다. 나는 전쟁 불사론자들의 가족 가운데 군 복무 중인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 혹여 동생이나 아들, 사위를 군대에 보냈다면 응징이니 보복이니 전쟁이니 하는 말을 그리 쉽게 꺼내지 못할 테다. 최소한 안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군인 가족들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봐야 하지 않을까. ‘예비군 긴급 징집’이라는 허위 문자메시지에 놀란 사람들의 문의전화가 국방부에 쇄도했다는 ‘소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이는 전쟁을 각오할 때만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궤변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전쟁은 패자는 물론 승자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다. 내가 죽거나 내 가족이 죽은 다음에 국가가 승전고를 울린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1·2차 세계대전이 남긴 유일한 긍정적 효과가 있다면 ‘전쟁은 무서운 것’이며 ‘패자는 물론 승자도 상처를 입는다’는 인식을 세계에 심어준 점일 것이다. 지구촌 곳곳에서 크고 작은 국지적 분쟁이 계속되고, 많은 나라가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아직까지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남북한 군사력의 불균형 등을 이유로 전쟁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하는 이들도 있다. 이 또한 위험한 생각이다. 역사상 많은 전쟁이 의도하지 않은 우연에 의해 일어났다. 전쟁에 대한 ‘합리적인 두려움’을 갖는 것만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지키는 길이다.

전쟁 원하면 아들부터 전장에

이성을 잃은 호전적 세력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싶다. 전쟁을 원한다면 당신의 동생, 아들, 사위부터 전장에 내보내라. 아니, 당신도 방아쇠 당길 기운만 남아있다면 전장에 뛰어들어라. 그럴 자신이 없다면 전쟁의 ‘ㅈ’도 입에 담지 말라. 실제 전쟁을 할 능력도, 의지도, 배짱도 없지 않은가.

전쟁이라는 이슈에서 주변부로 밀리기 쉬운 여성들에게도 말하고 싶다. 현대전은 전방과 후방, 전투원과 비전투원의 구분이 모호한 총력전이다. 민간인, 특히 여성과 어린이의 피해가 크다. 그러니 이웃의 목숨을 담보로 사익을 취하려는 무리들을 ‘응징’하라. 그들이 조성하는 비합리적 공포 분위기에 휘둘리는 대신 “나는 전쟁이 싫다”고 당당하게 선언하라. “아는 건 쥐뿔도 없는 여자”(한나라당 지방선거 홍보 동영상)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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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기자’라고 불리기 시작하던 순간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권력을 감시하고, 약자의 편에 서고, 어떤 유혹과 압력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진실만을 말하는 자들에게만 허락된 이름, 그게 기자라고 배웠습니다.”(MBC 보도부문 사원 252명 ‘김재철, 황희만 선배께 드리는 글’)

가슴이 먹먹하다. 기자를 업으로 삼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러할 테다. 모든 기자는 처음 ‘기자’라고 불리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기쁨과 자부심, 부담과 두려움이 교차하던 순간을. 세월이 흘러 그저 그런 생활인으로 살아가는 내게, MBC 기자들은 ‘그 순간’의 무게를 일깨워주었다. 부끄러웠으되 가슴은 뛰었다.
 



<경향신문 DB> 


MBC가 파업에 들어간 지 오늘로 만 한 달이 되었다. 1992년 최창봉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벌인 52일간의 파업 이후 최장기 파업 기록이다. 이근행 노조위원장이 지난달 26일 단식 농성에 들어가자 차장급 고참부터 입사 7년차까지 60여명의 기자와 PD 등이 “부끄럽지 않은 방송인이 되기 위해” 동조 단식에 돌입했다. 이틀 전에는 취재기자들로 구성된 MBC기자회와 카메라기자·영상편집부원들로 이뤄진 보도영상협의회 회원 중 72.8%가 김재철 사장과 황희만 부사장의 퇴진을 촉구했다. 보도부문 구성원의 70% 이상이 실명으로 사장 퇴진 성명을 발표한 것은 MBC 창사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MBC 252명 실명 사장퇴진 성명

기자란 본래 자신의 이름을 앞세우는 이가 아니다. 기자는 자신이 추적한 진실을 주인공으로 만들고, 그 뒤편에 조용히 존재하는 이다. 기자가 기사 밖에서 이름을 내걸고 직접행동에 나서야 하는 세상은 기자를 위해서나, 시민을 위해서나 불행하다.

1980년대 입사한 신경민 전 뉴스데스크 앵커부터 2000년대 입사한 새내기 기자들까지 뉴스 리포트가 아닌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이 요구하는 건 월급을 올려달라는 것도, 수당을 더 달라는 것도, 근무조건을 개선해달라는 것도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저널리스트로서의 상식과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거다.

‘큰집’에 불려가 ‘조인트’ 까이고 좌파 정리하는 사장, ‘조인트’ 발언의 장본인을 고소하겠다더니 엉뚱하게 후배들을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하는 사장, 보도본부장에서 탈락한 인사를 더 높은 부사장 자리에 앉히는 사장, ‘미래’를 염두에 뒀는지 틈만 나면 고향으로 달려가는 사장 아래서 제대로 된 공영방송이 가능하겠는가. 더욱이 그는 “가을에 단풍이 떨어지고 겨울에 눈이 와도 (노조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무책임까지 겸비한 터다.

MBC 파업은 국내외에서 보낸 지지 성금이 1억1813만원(지난 3일 현재)에 이를 만큼 시민사회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인터넷의 MBC 파업 관련 기사에도 응원하는 댓글이 많이 달린다. 하지만 ‘귀족노조 회사, 차라리 문 닫아라’는 식의 글도 간간이 눈에 띄는데,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MBC 사원들의 봉급 수준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설사 그들이 많이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파업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될 수 없다. 돈만 많이 주면 직업적 자존심 따위는 무시해도 괜찮은 것 아니냐는 논리는 한국의 노동현실을 왜곡시켜온 비겁하고 저열한 논리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 수 없다는 걸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기자로서의 자존심 지키고 싶다”

많은 이들이 MBC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검사와 스폰서의 끈끈한 관계를 치밀하고 정교하게 파헤친 「PD수첩」의 사례를 들며 공영방송으로서 MBC의 존재 의미를 강조한다. 나는 더욱 구체적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대통령이 주재하고 모두발언을 한다는 이유로 전군 주요 지휘관 회의를 일제히 생중계하는 방송, 휴일 황금시간대에 올림픽 선수단 환영행사를 동시에 내보내는 방송을 바라는가. “빵꾸똥꾸”도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도 사라진 ‘대한늬우스’식 방송을 원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실명을 걸고 김재철 사장의 퇴진을 요구한 252명을 지켜내야 한다. 곡기를 끊고 “몸으로 말하는” 60여명도 지켜내야 한다. 이 용기있고 아름다운 언론인들의 밥과 일과 자존심을 지켜주지 못하면, 언젠가는 나의 밥과 일과 자존심도 잃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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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검사입니다. 요즘 공공의 적이 돼 버린 검사, 맞습니다.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1심 재판에서 무죄가 선고되자 다들 저희를 손가락질합니다. 야당이나 진보언론은 그렇다 칩시다. 보수 신문이 거들고, 여당 일부에서까지 눈을 부라리는 건 못 견디겠습니다. 쏟아지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고 있으려니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왜 무리한 기소를 했느냐고요? 지방선거를 눈앞에 둔 정치인들은 검찰만 쳐다보고, 보수 신문은 한 전 총리 사건으로 지면을 도배하는 데 버텨낼 수 있었겠습니까. 「PD수첩」사건을 생각해 보십시오. 임수빈 전 부장검사는 능력을 인정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대로 있었으면 ‘검찰의 별’이라는 검사장을 달고, 더 높은 자리도 바라보았겠지요. 그런데 그분은 PD들을 기소할 수 없다고 버텼습니다. 결과는 어찌 됐나요. ‘조인트’ 까이는 정도가 아니라, 옷을 벗었습니다. 그러면 후임 검사는 나중에 무죄가 나건 말건 피의자를 기소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판사는 정규직,검사는 비정규직

이런 말씀을 하는 분도 있을 겁니다. 판사들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정권의 심기를 거스르는 판결도 내리는데, 너희들은 왜 그러지 못하느냐고요. 구차하지만, 변명 좀 하겠습니다. 판사들은 임관 15년차까지 인사를 거의 예측할 수 있습니다. 첫 부임지는 사법시험·연수원 성적을 합산해 정해지지만, 이후에는 서울·수도권 초임자는 지방으로 가고, 지방 초임자는 수도권에 진입하기 때문에 순서만 다를 뿐 큰 차이가 없습니다. 

10~11년차까지는 지방법원 배석판사를 거쳐 단독판사 생활을 하고 12~13년차에 고등법원으로 갔다가 14~15년차에 지법 단독으로 다시 오거나 대법원 재판연구관이 됩니다. 16년차에 지법 부장판사가 될 때도 동기들이 나란히 올라가지요. 이후에도 다음 임지를 알 수 없다는 것 외에는 예측 가능합니다. 23~24년차에 고법 부장판사 자리를 놓고 다툴 때까지는 심한 경쟁이 없습니다. 고법 부장은 차관급으로, 검찰에서는 검사장에 해당합니다. 평검사가 검사장이 되려면 부부장-부장-차장 등을 거치며 간·쓸개 다 내놓고 살아야 하니, 판사들이 부럽지요. 판사들의 인사가 예측 가능하도록 이뤄지는 것은, 법관이 인사에 신경쓰게 되면 소신 있고 독립적인 재판이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심지어 판사들 가운데도 몇 해 전부터 ‘근무평정’이 인사에 반영되기 시작하면서 법원장 눈치가 보인다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영철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파문도 그래서 생긴 것 아니겠습니까.

판사가 정규직이라면, 검사는 비정규직입니다. 검찰에도 순환인사 원칙은 있지만, 서초동(대검·서울중앙지검)이나 과천(법무부)에 가려면 좁은 문을 뚫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단 엘리트 코스에 접어들면 서초동과 과천을 떠날 일이 없습니다. 한 전직 고검장은 검사 생활 29년 동안 5년만 지방근무를 했다는 ‘전설’을 자랑하지요. 윗분들의 눈에 들면 세상 여론도, 재판 결과도 상관없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하고, 정연주 전 KBS 사장이 무죄를 선고받아도 해당 사건을 담당한 검사들은 좋은 자리로 갔습니다. 검찰 인사권을 누가 갖고 있습니까. 정권입니다. 정권이 원하는 대로 수사하면 탄탄대로가 보이지만, 버티다가는 보따리를 싸야 할 수도 있습니다.

순환 원칙 지켜 예측 가능하게

시국사건의 잇단 무죄 판결에 약이 오른 한나라당은 법관인사위원회의 60% 이상을 외부 인사로 채우겠다고 합니다. 인사 개입을 통해 판사들을 쥐락펴락하겠다는 계산입니다. 한나라당 안이 실현되면 판사도 검사처럼 신분이 불안정한 비정규직 처지가 되겠지요. 그러나 이 정권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절실한 것은 법관 인사제도 개편이 아니라 검찰 인사제도 개편입니다. 검찰 인사위원회야말로 독립성을 강화하고 외부 인사와 평검사의 참여를 늘려야 합니다. 그리고 순환인사의 원칙을 확고히 해서 ‘정치검사’가 되려는 유혹을 차단해야 합니다. 무리한 기소를 해 무죄 판결이 나온 검사는 인사에서 불이익을 줘야겠지요. 검찰 인사 시스템을 바꾸지 못하면 몇 년 후 또다른 검사들이 또다른 표적을 향해 돌진할 겁니다. 지금의 표적이 한명숙 전 총리라면 그때의 표적은 누가 될까요. 권력은 유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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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웃었다. 웃음은 건강과 장수의 비결이라니, 그들에게 감사해야겠다. 김우룡 전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과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 이야기다.

우선 김우룡 전 이사장. 신동아 인터뷰에서 “김재철 MBC 사장이 ‘큰집’에 불려가 ‘조인트’ 까이고 매도 맞고 해서 MBC내 ‘좌빨’을 척결했다”고 털어놨다. 이 자폭성 발언으로 그는 실업자가 되었다. 다음은 최시중 위원장. 여기자포럼에 참석했다가 “여성들이 직업을 가지기보다 현모양처가 되기를 바란다. 딸 둘을 (모 여대) 가정대에 보냈고 대학 졸업하자마자 이듬해 시집을 보냈다”고 말했다. 여성 비하 논란이 일자 “사회에서 열심히 일하는 여성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면 정중히 사과드린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하지만 ‘현모양처’의 표본으로 든 맏딸이 한나라당에 서울시의원 공천을 신청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중잣대 논란까지 보태졌다.
 


<경향신문 DB>
 
 
며칠 사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터져나온 두 ‘소극(笑劇)’이 차라리 반갑다. 이명박 정권의 핵심부에 있다는 인사들-이 중 한 사람은 ‘대통령의 멘토(조언자)’로 불린다-의 발언이 현 정권의 적나라한 실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는 특히 이들이 사용한 어휘에 주목한다. 

여권 인사들의 ‘설화’ 릴레이

일단 ‘조인트’부터.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조인트(를) 까다’가 관용구로 올라 있다. 풀이는 ‘(속되게) 구둣발로 정강이뼈를 걷어차다’이며, 용례로는 ‘상사가 명령을 따르지 않는 신병에게 군홧발로 조인트를 깠다’는 표현이 실려 있다. 사전이 공인하듯, 조인트를 까거나 까였다는 말은 권위주의적 병영국가 시절의 잔재다. 40대 이상 남성들은 이 관용구에서 씁쓸한 정겨움마저 느낄지 모르겠다. 고교와 대학 시절 교련 시간에, 그리고 군대에서 많이 듣던 용어 아닌가. 김 전 이사장은 김재철 사장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얼마든지 다른 표현을 쓸 수도 있었다. 큰집에 불려가 ‘한 소리’ 들었다든지…. 하지만 무심코 떠올린 ‘조인트’를 통해 그는 단박에 자신과, 자신이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정권의 정체성을 고백했다. 마초적이고, 퇴행적이고, 군사문화적인.

‘현모양처’론도 다르지 않다. 우리 어머니 세대가 교복 입던 시절엔 장래 희망으로 현모양처를 꼽는 여성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젊은 여성들을 앞에 놓고 현모양처 운운하면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최 위원장이 말하는 현모양처란 신사임당이 아니라 안방마님을 뜻하는데, 지금은 자아실현을 위해서든 생계유지를 위해서든 일하지 않고서는 살기 힘든 시대다. 최 위원장은 두 딸을 모 여대 가정대에 보냈고 졸업한 이듬해 시집 보냈다고 했다. 이 대학 가정대 졸업생들은 자랑스러운 모교를 ‘결혼을 위한 간판’으로 전락시킨 최 위원장에게 명예훼손 소송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최 위원장의 딸조차 “아버지가 (발언을) 잘못한 것 같다. 여기자포럼 가서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었는데 죄송하다”(시사IN 인터뷰)고 했다. 최 위원장의 발언 역시 현 정권의 가부장적이고 과거회귀적인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낙태 단속으로 출산율을 높이겠다는 발상과 최 위원장의 현모양처론은 동전의 앞뒤에 다름 아니다.

‘설화(舌禍)’ 릴레이는 끝이 없다. 김태영 국방부 장관은 “아프리카에는 밀림과 자연만 있다. 그게 관광명소냐. 무식한 흑인들만 뛰어다니는 곳일 뿐”이라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했다. 뒤늦게 사과했지만, 정권의 시대착오적 이미지를 강화하는 데는 한 몫 했다.

여권에 설화가 잇따르자 한나라당 지방선거기획위원장인 정두언 의원은 “선거 때는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히 젊은 층을 짜증나게 하는 언행은 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현정권의 퇴행적 실체 드러내

그러나 언행이란 주의를 기울인다고 달라지는 게 아니다. 인간과 그 인간이 속한 집단의 교양과 품격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작가 공지영은 독일 체류 중 느낀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토론을 할 때 좌파는 타이도 매지 않은 차림으로, 때로는 담배까지 피워가며 자유분방하게 이야기하지만, 우파는 정장 차림으로 철학자들의 명언을 인용하며 점잖게 말한다.’ 우리도 품위 있는 우파를 가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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