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다. 혁명으로까지 불린 ‘촛불’이 언제 타올랐던가 싶다. 가을과 겨울과 봄을 거치면서 수많은 시민으로 꽉 찼던 광장과 거리가 텅 비어 외로워 보이기까지 한다. 권력을 사유화한 대통령을 탄핵하고 새로운 대통령과 정부를 출범시킨 후의 풍경이라 하기에는 너무나 허전하다. 모처럼 열린 시민의 정치적 기회 공간인 촛불광장과 거리가 순식간에 ‘역사 유적’이 되어버린 듯하다.

소란스럽다. 광장과 거리의 한 귀퉁이에서 촛불에 손과 몸을 녹이며 연명했던 정치권이 또다시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국민의 대표’를 자임하며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주로 야권이 외교안보와 인사 문제를 갖고 그런다.

태극기를 뒤집어쓰고 사멸의 위기를 넘기고자 했던 자유한국당이야 그렇다 치자. 국민의당과 바른정당은 왜 그럴까? 그들 모두 적폐청산과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에 동의하지 않았던가? 진심으로 동의한 것이었다면 다수 국민의 호응을 얻을 대안 제시의 행보를 해야지, 왜 대통령과 정부 흠집 찾기에만 열심일까?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8월20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국민은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이 의미하는 바를 둘러싸고 (친)야권 일각에서 우려를 제기했다. 야권과 의회를 우회해 여론몰이를 통해 국정을 운영하려는 의도, 즉 포퓰리즘을 구사하려는 포석 아니냐는 것이었다.

필자가 보기에 그런 생각은 기우거나 또 다른 흠집 찾기를 위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기대는 낮고, 불신은 높은 객관적 현실을 지적함과 동시에, 시민들이 촛불로 철옹성 같았던 정권을 퇴출시킴으로써 자신의 역능을 확인했기에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주권-정책결정권-행사를 원하고 있다는 말을 한 것이다.

대통령과 정부의 흠집 찾기로 소란만 떨고 있는 야권을 보면 충분히 그리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 정말 직접적인 정책결정권 행사를 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고요함이 깃든 텅 빈 광장과 거리를 볼 때 그러하다. 즉, 대부분의 촛불시민이 자신의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가 믿든, 안 믿든 간에 다시금 기성 정치권에 나라 살림을 맡긴 것을 볼 때 그러하다.

마지노선 민주주의! ‘대통령의 권력 사유화→촛불→대통령 탄핵→새로운 대통령 선출→일상으로의 복귀’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살피다 떠올린 개념이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나쁜 대통령을 유권자의 투표로 심판하기 위해서 촛불을 드는 ‘방어적 성격의 민주주의’라는 생각이다. 주로 대통령 심판의 권리를 양보할 수 없는 민주주의의 쟁취 및 수호의 경계로 삼고, 고용과 소득의 불안정과 약자에 대한 차별과 불평등은 삶의 현장에서 각자 맞서 싸우거나 적응해야 할 사적인 문제라 여기는 민주주의다. 이런 민주주의에서 사적인 문제는 공적 공간인 촛불의 광장과 거리에서 다루어서는 안되며, 다룰 수도 없다. 옳음과 그름을 판정하기엔, 또 촛불의 대의로 삼아 내기엔 너무나 내밀하고 복잡하기에 그러하다.

마지노선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 목적은 촛불에도 불구하고 한국 민주주의가 제한적이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데 있지 않다.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원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실현하기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도 아니다. 보다 나은 민주주의를 모색하기 위해 꼭 살펴야 할 것, 즉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적 특성’을 드러내는 데 목적이 있다.

국민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문 대통령의 언사는 한국 민주주의 특성의 일면만 본 것이다. 왜 새로운 직접적 결정의 공간 형성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는지, 또 어떤 종류의 사안에 대한 직접적 결정이 우선 필요한지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는 직접민주주의를 제약하는 혹은 필요로 하는 다수 보통사람들의 삶의 현실을 먼저 헤아려야 함을 의미한다.

직접민주주의를 포퓰리즘과 등치시켜 대통령 비판의 소재로 삼는 행태는 염치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를 정상화하고 강화하는 논리와 실천을 먼저 선보이는 게 순리이다. 즉, 국민의 진정한 대표자로서 책임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히려 문 대통령과 정부보다도 한발 앞서서 마지노선 저편의 문제, 즉 불안정하고 불평등한 사회경제적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광장과 거리의 고요함과 정치권의 소란스러움이 교차하는 지금, 각자 모두 다른 방식으로나마 마지노선 민주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사유와 실천을 벌여야 할 때이다.

<김윤철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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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奎章閣)에 가 본 적이 있는가. 규장각은 현재 서울대학교 캠퍼스 내, 관악산을 바라보는 둔덕에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거의 매주 학교를 견학하는 중고생들이 집결하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이를 제외하면 비교적 찾는 발길이 뜸한 곳이다.

규장각이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직도 창경궁 후원에 규장각 건물이 남아있고, 병인양요에 소실되기 전까지 장서를 나누었던 강화도 외규장각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규장각은 단순히 특정 건물이나 장소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이라는 국가를 관통하는 어떤 정신이자 원칙이었다.

조선이 통치과정의 기록에 관한 한 편집증적일 정도로 철두철미한 구석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조선 왕실은 472년간의 통치를 5000만자(字)에 이르는 <조선왕조실록>으로 남겼다. 사관들은 왕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사초(史草)로 적었으며 이 사초는 이후 왕이 죽고 세대가 바뀌면 실록으로 편찬되었다. 사관 없이는 그 누구도 왕을 독대할 수 없도록 경국대전은 규정하고 있었으며, 사관이 쓴 사초를 왕이 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었다.

한편 왕을 보필하는 비서실에 해당하는 승정원은 국정에 관한 매일의 기록을 <승정원일기>로 남겼다. 임진왜란과 화재 등으로 절반 이상이 소실된 것을 제외하고서도 2억5000만자 분량의 포괄적인 통치 기록이다. 매일 1만자를 읽어도 거의 70년이 걸리는 방대한 분량이다. 그 이외에도 <일성록>은 왕이 스스로를 ‘나(余)’로 칭하는 일기로서, 후세 왕들이 일목요연하게 참고할 수 있는 반성의 기록이기도 하다. 이들은 모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다.

남겨진 역사적 기록의 물리적 분량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그 뒤에 숨어있는 정신이다. 조선의 정치는 왜 기록을 남기는 데 그토록 집착했으며 누구를 ‘독자층’으로 생각했던가? 그리고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의 이점, 역사를 남기는 이점은 무엇이었나?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대답은 통치 기록과 행정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왜냐하면 성공과 실패에 이르는 자세한 시행착오의 기록 없이 국정운영은 일관적이지도, 향상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일성록>이나 <승정원일기>는 실제로 이렇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록’을 왕이 열람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하니, ‘데이터의 축적’이라는 것이 만족스러운 설명이 되지는 못한다.

아마 기록을 남기는 데 조선왕조가 그토록 집착한 더 중요한 이유는 역사에 대한 경외감과 그 경외감을 통해 더 나은 정치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통치의 세부적 과정이 기록되고 있고 이것이 언젠가는 역사 앞에서 결국 까발려지고 평가될 시간이 오고 있다는 사실, 그 앞에서 겸허하지 않을 전제군주는 없었을 것이다. 현세의 어떤 권력도 역사의 긴 호흡 앞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며,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이름으로 남는가 하는 것이 아니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조선의 국왕들은 겉으로는 ‘종묘사직’을 부르짖었지만 실지로는 미래의 ‘실록’ 독자들을 끊임없이 생각했던 셈이다. 나는 이런 정신이 규장각에 응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백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규장각은 어디에 있는가. 근대과학기술문명이 중세의 암흑을 대체했다고 하지만, 통치의 과정은 조선시대가 훨씬 더 투명하였고, 민주정이 왕정을 대체했지만 정치의 기록은 오히려 청와대 소수 권력자들에 의해 독점되는 역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정보의 과잉이 가장 큰 문제가 된 시대에 왜 통치의 공적 기록 대신 개인의 자서전들이 과거를 독점하는가. 이렇게 본다면 우리 정치는 조선의 왕정보다도 후진적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는 ‘퇴각’하면서 26대의 문서 파쇄기를 사들였고 국정운영의 거의 어떤 정보도 인계하지 않았다. 대통령기록물법이 제정되기 이전 전임대통령들은 청와대를 나올 때 문서를 소각하거나 트럭에 싣고 나왔다는 보도들도 있었다. 어쩌면 북방한계선(NLL) 발언 정국 등을 통해 재임 중 기록물을 최대한 없애는 게 가장 현명한 처신인 것을 우리 정치가 새삼 확인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앞에 놓인 우선적인 작업은 대통령기록물법 등의 정비를 통해 정부가 실질적인 통치의 기록을 축적하고 체계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것이겠지만, 더 근본적인 것은 정치가 기록과 증거를 통해 스스로의 의사결정을 정당화하고 그것으로 평가받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곳에 우리의 규장각이 있지 않을까.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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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향후 5년간 국정운영 방향을 가늠할 첫 청사진이 어제 발표됐다. 2018년 예산안과 2017~2021년 국가재정운용계획을 요약하면 고용 없는 성장에서 벗어나도록 일자리와 복지 분야에 재정을 집중 투입해 사람중심의 소득주도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정부는 내년도 총지출을 전년보다 7.1% 늘린 429조원의 슈퍼예산을 집행하겠다고 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가장 높다. 이는 경제성장률 전망치보다 2.6%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한국 경제가 수년간 2~3%의 성장에 그치는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확장재정을 펴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정부는 증액되는 지출을 복지(12.9%)와 일자리부문(12%) 등 사람과 관련된 분야에 집중적으로 확대 편성하기로 했다. 경제성장의 효과가 대기업과 수출기업에서 중소·자영업 및 내수로 확산되는 ‘낙수효과’가 실종되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국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 빠지고, 사회의 양극화와 극심한 취업난에 직면해 있는 게 사실이다. 정부가 기존의 패러다임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재정을 풀어 복지를 확대하겠다고 하는 정책은 오히려 늦은감마저 있다. 저소득 가구의 가처분 소득 감소에 대한 타개책으로 복지 지출을 동력으로 소비를 진작해 경기를 살리겠다는 취지는 기대할 만하다. 이를 위해 일자리와 분배, 성장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려면 재정의 선도적인 역할도 필요하다.

하지만 몇 가지 점검해봐야 할 대목이 있다. 우선 향후 5년간 확대재정을 펼칠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럴 여력이 있는지 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정부는 내년도 총수입을 전년보다 7.9% 증가한 447조1000억원으로 계획하고 있다. 향후 5년간의 재정지출은 연평균 5.8% 늘리겠다고 한다. 이 기간 경제성장률은 기껏해야 3% 정도 수준이다. 그만큼 적자가 날 공산이 크다. 정부는 확장적 재정정책을 쓰면서도 재정건전성을 지속가능한 수준에서 유지하겠다고 하지만 균형을 잘 유지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정부는 또 향후 5년간 17만4000명의 공무원을 채용하겠다고 한다. 정부는 내년에 국민 생활·안전 분야 중앙직 공무원 1만5000명, 지방직 1만5000명 등 총 3만명을 충원할 계획이다. 지금 연간 공무원의 인건비는 35조8000억원에 달한다. 공무원 채용은 비탄력적인 세금의 증가를 의미하므로 장기적으로 운영 가능한지 숙고해야 한다. 또 중소기업 청년 3명 채용 시 1명의 급여를 지원하는 중소기업 청년 고용장려금의 경우 악용되지 않도록 보완할 필요가 있다. 불필요한 사회간접자본(SOC) 예산도 20% 줄이겠다고 한다. 하지만 앞으로 대형 국책사업이 예정돼 있어 자칫 계획이 어긋날 수도 있다. 일시적인 감축에 그치지 않도록 지속적인 감독을 해야 한다.

특히 국방예산은 이번 기회에 방향전환을 검토해야 한다. 정부는 국방예산을 2조8000억원(6.9%) 늘려 편성했다. 자주국방과 북한 핵미사일 위협 대응을 이유로 들었다. 하지만 불요불급한 무기체계 사업에 대한 예산배정의 타당성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도 최근 막대한 국방비 투입에도 불구하고 전력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첫 예산안의 큰 그림은 무난하지만 향후 5년간 지속가능성을 보장하기에는 미흡한 게 사실이다. 정부는 경제 패러다임 변화를 위해 쓸 곳에는 쓰겠다는 입장이 강하다. 그런데 복지예산은 인간다운 삶의 최소한을 보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정부의 예산안과 국가재정운용계획으로 내년은 가능할지 모르지만 지속가능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혹여나 일단 재정을 쓰고 문제가 발생하면 대안을 강구하겠다는 생각이 아니기를 바란다. 증세 없는 복지가 환상임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다. 요행과 막연한 기대감으로 예산을 짤 것이 아니라 솔직하게 증세의 필요성을 알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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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어제 새벽 또 탄도미사일을 발사했다. 이 미사일은 일본 상공을 지나 발사지점에서 2700㎞ 떨어진 북태평양에 떨어졌다. 비행거리로 볼 때 미국의 괌을 사정거리에 둔 중장거리탄도미사일(IRBM)로 추정된다. 이는 한·미 양국군의 을지프리덤가디언(UFG) 연습에 대한 대응 차원을 훨씬 넘어선 도발이다. 특히 이번 도발이 한국과 미국이 대북 대화 분위기 조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와중에 이뤄진 것이어서 심각성을 더한다. 한반도 정세가 또다시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으로 우려된다.

한국과 미국 정부는 강력 반발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강력한 대북 응징 능력을 과시하라”고 지시했다. 북한의 도발이 용인할 수 없는 선을 넘어섰다고 본 것이다. 군은 맞대응 차원에서 MK84 폭탄 8발 투하훈련을 실시하고, 한국형 탄도미사일 ‘현무2’의 발사 영상을 공개했다. B-1B 전략폭격기 등 미국 전략자산의 한반도 전개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일본 도쿄 시민들이 29일 북한이 발사한 탄도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통과했다는 뉴스를 전하는 대형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다. 도쿄 _ AFP연합뉴스

정부는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를 연 뒤 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그간 외교적 해결을 시사해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통화하면서 “지금은 대화할 때가 아니다”라며 강력한 대북 압박을 강조했다. 북한 미사일 발사 전까지만 해도 긴장완화 조짐을 보이던 한반도 정세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로 일시에 긴장 국면으로 급변한 것이다.

북한의 탄도미사일 도발은 핵보유국 외길을 향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다. 누가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고 핵미사일 완성을 향해 걸어가겠다는 것이다. 이달 초 북한 스스로 공언한 ‘괌 포위사격 방안’이 언제든 실현 가능한 실제적 위협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의도도 엿보인다. 어제 발사한 탄도미사일은 비행거리로 볼 때 북한에서 3000㎞ 떨어진 괌까지 도달 가능하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최근 괌 포위사격을 유보하겠다면서 미국의 행보를 지켜보겠다고 말한 이후에도 여전히 강력한 대북 제재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미국의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의미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북한은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핵개발로 체제안전을 보장받고 경제적 번영을 얻으려는 시도는 전혀 승산이 없는 무모한 싸움일 뿐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지만 이에 굴복하는 나라가 한 곳도 없다는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북한은 과연 자신들의 핵보유 명분에 국제사회가 동의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끝 간 데 없는 도발에 중국과 러시아마저 인내심을 잃고 등을 돌려 유엔 안보리 제재에 동참하고 있다. 한반도는 물론 세계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는 북한의 미사일 도발을 강력히 규탄한다. 

북한과의 대화를 모색해온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난관에 부닥쳤다. 북핵 문제의 대화해결과 ‘한반도 운전자론’을 주창하고 “전쟁은 안된다”며 강력한 대미 메시지를 보낸 정부로서는 당혹스러울 것이다. 물론 시민들의 불편하고 불안한 심정을 감안할 때 북한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이 비상식적이고 국제관행을 따르지 않는 국가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국제사회에서 그런 북한을 설득해 대화 무대로 끌고 가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다름 아닌 정부였다. 북핵 문제에서 감정적 대응은 금물이다.

북한이 도발하지 않으면 대화를 거론하고 미사일을 쏘면 금세 태도를 바꿔 응징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한 적절한 전략이라고 볼 수 없다. 정세에 따른 대응도 중요하지만 일관성을 잃고 일희일비하는 것은 김정은의 핵 위협에 놀아나는 격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와 제재 병행의 기조를 굳건히 하고,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전략을 세운 뒤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흔들리지 않고 일관성 있게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북한의 도발과 한·미가 맞대응하는 악순환은 이제 끝내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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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대법원은 이건희 전 삼성 회장 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발행을 통해 회사에 970억원 손해를 끼친 혐의였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은 변호사 시절 이 사건을 수임해 변호한 경력이 있었다. 그와 함께 삼성을 방어한 김종훈 변호사는 이번 이재용 부회장 사건의 변호인이기도 하다.

이용훈 대법원의 핵심은 삼성사건 공동변호인 김종훈 비서실장, 광주일고 후배 이광범 사법정책실장, 전임 최종영 대법원장을 상대로 연판장을 돌린 이용구 송무심의관 등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법연구회 멤버다. 이용훈 대법원장 시절에 법원행정처는 비대해지고 권력기구화했다고 평가받는다. 

“우리법연구회 출신을 포함한 개혁·소장 법관들이 행정처 요직에 기용되거나 기타 권력의 주류에 편입되면서 (중략) 제왕적 대법원장 권한과 행정처 중심의 관료적 승진구조를 통한 법관 사회 관료화는, 이용훈 전 대법원장 시절에 더 심화되었다. (중략)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에 이루어진 것이라, 비판이 더 어려워졌다”고 법원 내부통신망에서 판사들은 말한다.

#2. 2011년 대법원은 시국사건 피해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사건을 줄줄이 깼다. 피해자들은 2005년 노무현 정부가 만든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도움으로 재심 무죄를 받았다. 이들의 손해배상금을 대폭으로 깎은 대법원은 새로운 논리를 만들었다.

보통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판결에서 법원은 피해시점부터 판결일까지의 이자를 주도록 한다. 판결 전까지는 5%, 판결 후로는 20%이며 지연손해금이라 부른다. 그런데 대법원이 과거사 사건들은 시간이 많이 흘러 이자가 많으니 깎으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준시점을 손배소송 항소심 변론이 끝난 날로 미루라고 했다.

더구나 사건을 고등법원으로 보내지 않고 대법원 스스로 이자를 계산해 재판을 끝냈다. 이 판결은 이후 인혁당 피해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한 전직 대법관은 “이해하기 어려운 판결이다. 재판에 대한 헌법소원이 있다면 해야 할 사안”이라고 했다. 판결은 한날 4건이 동시에 나왔고 주심은 모두 우리법연구회 창립 멤버 박시환 대법관이다.

#3. 몇 해 전 서초동 서울고법에서 판사들이 인사를 돌았다. 이 법원에 새로 발령난 판사들은 관례대로 부장판사들 사무실에 들어가 줄줄이 인사를 했다. 하지만 한 부장판사가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자신이 직접 밖으로 나와서 판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눴다. 인사의 대상도 부장판사가 아니라 재판부라며 자신의 배석판사를 데려나와 인사시켰다.

부장판사는 이후 법정에서 난동꾼을 막다가 다친 법정경위 소식을 듣고 배석판사와 재판연구원을 데리고 문병에 나섰다. 쓸쓸히 병실을 지키던 경위는 고위법관의 등장에 감동했다. 부장판사는 책임을 다하다 부상한 법정경위를 표창해야 한다고 법원에 주장해, 표창장을 받아주었다. 이 사람이 김명수 새 대법원장 후보자이고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이다.

그가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에 단독 출마했을 때 만장일치 추대 대신 투표를 하자고 했다. 투표함을 여니 반대표가 있었다. 하지만 김명수 후보자는 반대표가 나온 사실을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국제인권법학회는 소수자도 견해를 밝히는 건강하고 자유로운 조직이라는 것이다.

지금 법조계에 김명수 후보자에 관해 물으면 세 가지를 듣는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다는 것과 출세하려 살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번 사법개혁 저지 의혹 사건에 관여한 세력들이 그를 붙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 의혹의 핵심에는 과거 우리법연구회 멤버들도 있다. 누군가가 우리법연구회 소속이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다. 결국 기대도 우려도 모두 김명수 후보자 자신의 몫이다.

<사회부 | 이범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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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참으로 난감한 인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는 정치적으로 넘어서는 안될 금기의 단어들을 거침없이 내뱉고, 트위터를 통해 정제되지 않은 감정과 비난을 쏟아내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바꾼다. 워싱턴 포스트는 “말 바꾸기의 제왕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기사를 썼고, 뉴욕 타임스는 트럼프가 트위터에서 모욕한 사람들의 명단을 꾸준히 업데이트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거의 400명에 육박한다. 우리 입장에서 난처한 것은 바로 그 예측불허의 트럼프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열쇠를 쥔 핵심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알려면 그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알아야 한다.

지난달 6일 오후(현지시간) G20 정상회의 참석차 독일을 공식 방문 중인 문재인 대통령이 주함부르크 미국총영사관 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한·미·일 3국 정상만찬에 앞서 기념촬영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그는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어떤 정치적인 분석도 잘 적용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이 이해하기 어렵다면 컴퓨터에 그를 이해하라고 주문해보자. 이미 알파고는 이세돌과 커제를 이기지 않았던가. 컴퓨터라면 그를 이해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그는 날마다 트위터에 수많은 말들을 남기고 있다. 하루 평균 다섯 개의 트윗인데, 이것은 충분한 데이터를 제공해준다. 분석방법은 토픽 모델링이라는 기계학습의 일종이다. 컴퓨터가 글을 읽고, 이런 단어들이 이 정도로 분포되어 있다면 이 글의 주제는 무엇이라고 추정하는 방식이다. 예상치 못한 글을 읽었을 때 사람은 경악하지만 컴퓨터는 냉정을 유지한다. 상식을 벗어나거나 일관성을 잃은 글을 읽었을 때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지만 컴퓨터는 사람이 보지 못한 숨은 일관성을 찾아낸다.

자, 이제 분석을 시작해보자. 컴퓨터가 트럼프 대통령의 트윗들을 읽었더니 거기에는 13개의 소주제들이 있었고, 이것들은 세 개의 대주제로 깔끔하게 묶여 있었다. 대주제1에는 미국 내 고용창출이 중심에 있는데, 이것을 둘러싸고 이슬람 테러리즘 비난, 국경 문제를 둘러싼 멕시코 비난, 북핵 문제를 둘러싼 중국과 북한 비난이 함께 놓여있다. 고용이 왜 외교 이슈들과 같이 묶여 있을까?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고용은 미국뿐 아니라 어느 나라도 풀기 어려운 문제이다. 기술 변동으로 가장 많이 일자리를 잃고 고립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우파로 돌아선 사람들이 바로 트럼프를 당선시켜 준 중하층 백인들이기도 하다. 그들의 일자리를 되돌려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은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운 일이다. 이때 이슬람, 멕시코, 중국, 북한은 일자리를 뺏어가거나 혹은 고용창출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좋은 핑계가 되어준다. 적어도 컴퓨터는 트럼프의 속마음에서 주요 외교 이슈들이 사실은 국내용이라고 읽어낸 셈이다.

대주제2는 민주당과 언론에 대한 비난이다. 특히 언론에 대한 비난이 압도적인데, 원래도 많았지만 러시아 스캔들 이후 폭증하고 있다. 대주제1에는 고용과 외국이라는, 별로 개연성 없는 연결고리가 있었다. 고용이 안 늘어나는게 정말 외국 때문인지, 언론은 이 부분에서 사실관계를 검증하려고 하기 때문에 접근을 허락해서는 안될 집단이다. 그가 언론을 비난할 때 주로 ‘가짜뉴스’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팩트 체크’를 허용하고 싶지 않지만, 이미 팩트 체크 당했다면 그 뉴스가 가짜라는 주장이다.

대주제3은 선거 승리 이후 대국민 감사, “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 같은 뻔한 지지자용 메시지들인데, 의외인 것은 아베 일본 총리가 여기에 함께 묶여있다는 점이다. 언제 바뀔지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트럼프는 확실히 아베를 좋아한다. 걸핏하면 모욕을 주는 다른 나라 정상들과는 달리, 아베와 골프 친 이야기 같은 것들을 자랑삼아 늘어놓는다. 트럼프에게 아베는 자신을 알아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유일한 외국 정상인 것처럼 보인다.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와 일본의 통화정책에 대한 트럼프의 비난이 얼마나 거센 것이었는지를 기억한다면, 아베에 대한 이러한 특별대우는 놀랍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아베는 트럼프 당선 직후 제일 먼저 트럼프 타워에 달려갔고, 수시로 통화를 하며 그와 친분을 쌓고 그를 존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실제로 일본은 정상 간 친목과 실무자 간 협상이라는 투 트랙 전략을 써왔고 상당 부분 성공했다는 것이 국제사회의 평가이다. 세계의 비난을 받는 미국 대통령을 존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우에 따라 굴욕외교로 비칠 수 있음에도 아베는 그것을 했다. 한반도에 전쟁이 운위되고 FTA 재협상이 시동을 거는 시점이다. 적어도 컴퓨터는 트럼프의 외교정책이 상당부분 국내용일 수 있다고 읽어냈다. 아베처럼 정상 간 친목이 될지 아니면 트럼프의 “생큐, 삼성” 트윗처럼 미국 내 일자리 창출 압박을 결국은 들어주는 것이 될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는 국내용 선물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의 외교정책에도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장덕진 |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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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핵폭탄·미사일 개발과 이를 저지하려는 국제사회의 대응이 수위가 높아져 이제 북·미전쟁으로 갈 수 있다고 서로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문제해결이 안되어 사태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갔을 때의 결과를 당사자들이 그려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확실성이 있으나 큰 윤곽은 분명하다. 남한에 큰 인명 피해가 있을 것이고 북한에는 대량파괴와 체제붕괴가 일어날 것이다. 협상이론에 입각해 설명하자면 파국점(breakdown point)이 현상유지(status quo)에서 파괴적 전쟁으로 이동하였다. 당사국들이 합리적이라면 여기서부터 합의점을 찾아나가야 한다. 다시 말하여 새로운 파국점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해결책들을 살펴봐야 한다.

1994년의 제네바 합의 틀(Agreed Framework)을 기준점으로 들여다보기 시작하되 무엇보다도 왜 실패했는지 봐야 한다. 실패의 첫째 원인은 합의 틀이 미국에서 정치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이행에 차질이 생긴 것이고, 둘째는 북한이 체제유지를 위한 담보로서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합의 틀은 깨졌고, 대안적 논의의 틀이었던 6자회담도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당사국들에서 정치적으로 뒷받침되지 않아 실효성이 없었다.

미국에서 북한정책은 그동안 고질적으로 다른 대외정책 현안에 후순위로 밀리는 문제로 인해 진전되지 않았다. 최근의 사태는 미국이 더 이상 미봉책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문제 해결의 시발점이 될 수 있다. 북한으로서도 국제사회의 경제적 제재가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에 가까이 왔고, 전쟁으로 가도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출구를 찾을 필요가 있다.

현재는 샅바싸움이 진행 중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으로선 북한의 궁극적 핵 포기를 전제로 협상을 시작하려 할 것이고, 북한은 핵 동결과 안전보장 플러스 경제적 지원을 교환하는 협상을 시작하자고 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간과해선 안될 것은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은 미국이 해줄 수 있을지 몰라도 경제적 지원의 큰 몫은 한국의 부담이 될 거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한국이 지금부터 어떤 형태로든 협상에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의 입장이 반영되지 않고 부담만 지는 일이 있어선 안된다.

비핵화 약속을 깨고 국제사회의 문제국가가 된 북한도, 핵확산 방지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미국도 한반도의 미래를 그리는 주역은 될 수 없다. 한국이 신중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방향을 잡아나가야 한다.        

한국은 제네바 합의 틀이 논의되던 1990년대 전반의 한국이 아니다. 경제적 지위와 민주주의의 성숙도에서 그때와는 다르다. 이제는 세계 무대에서 책임 있는 플레이어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 문제에서 당연히 주역이 되어야 한다.

협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진부한 보수·진보 진영의 논리를 넘어 미래지향적인 국민적 합의 도출 노력이 있어야 한다. 북한과 미국에 당당히 합의의 이행을 요구하고 단계마다 이행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한국도 끌려다니지 않을 거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한다. 중국과 일본으로부터도 한반도 문제에 관한한 한국의 입장이 존중 받을 수 있도록 실용적 외교를 펴나갈 필요가 있다.

한반도에 평화를 유지하고, 궁극적으로 통합된 민족공동체를 지향하는 한반도 정책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진행되도록 한국이 책임의식을 가지고 사태 해결에 임해야 한다.

<채수찬 | 카이스트 교수·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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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중학교 학생증에서 사진만 오려갖고 지갑 속에 넣어놨다이. 낮이나 밤이나 텅 빈 집이지마는 아무도 찾아올 일 없는 새벽에, 하얀 습자지로 여러 번 접어 싸놓은 네 얼굴을 펼쳐본다이. 아무도 엿들을 사람이 없지마는 가만가만 부른다이. … 동호야.’

동호는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열다섯 살 난 소년이다. 동호는 자신의 집에서 자취를 하던 또래 친구와 친구의 누나를 찾아 헤매다 도청에 있던 동네 형들과 누나들을 도와 수많은 주검을 수습한다. 이 소설을 다시 꺼낸 든 것은 5·18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고 온 날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하늘색 체육복 위에 교련 점퍼를 걸친 동호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책은 2014년 5월 나왔는데, 당시에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차마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밀쳐놓았다가 지난해 읽은 것 같다.

동호는 <택시운전사>에서 대학가요제에 나가고 싶어 대학생이 됐다는 스무 살의 구재식(류준열)과 겹쳐졌다. 택시기사 김만섭(송강호)이 독일 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와 동행해 광주를 찾은 날, 지역 택시기사 황태술(유해진)의 집에서는 늦은 저녁밥상이 차려졌다. 독일 기자의 통역을 도운 재식도 함께했다. 대학가요제 얘기에 모두 ‘한 곡조 뽑아보라’고 난리였고 재식은 순진하고 해맑은 모습으로 어설픈 노래와 춤을 선보인다. 이 평화롭고 행복한 한때는 곧 불어닥칠 비극의 전조여서 더욱 아프게 다가왔다. 영화 속 재식과 소설 속 동호는 그날의 광주에서 계엄군에 맞서다 푸른 주검이 된다.

<택시운전사>의 열기가 쉽게 가라앉지 않고 있다. 배급사 쇼박스의 자료를 보면 26일 오전 기준 누적 관객 1100만명을 넘어섰다. 영화가 일으킨 바람 덕분인지 한강의 소설을 다시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출판사 창비에 따르면 <소년이 온다>는 최근 33쇄를 찍고 20만부를 돌파했다. 작가의 철저한 고증과 취재를 바탕으로 한 소설은 당시 광주 상황을 담담하면서도 가슴 시리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137분짜리 영화와 216쪽의 소설을 보고 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답답함을 느낀다. 37년 전의 일이지만 지나온 세월이 죄스러울 만큼 그날의 진실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군 전투기 출격 대기와 헬기 사격 여부를 진상 조사하게 됐다. 국방부는 국군 기무사령부 보존 자료를 공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동안 국방부 차원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상 조사’가 세 차례 시행됐지만 당시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국군 기무사령부 보존 자료는 기밀로 분류돼 열람이 제한됐다.

다음달 ‘5·18 광주 민주화운동 헬기 사격 및 전투기 대기 관련 특별조사 위원회’가 운용에 들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번 조사에서 ‘군사기밀보호심의위원회’가 기밀 자료 해제를 결정하면,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기무사 자료가 처음 세상에 공개된다. 그러나 국방부 조사 위원회에는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다. 5·18 진상 규명의 최대 난제인 ‘발포 명령자’가 누구인지 규명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국회에서 ‘5·18 진상 규명 특별법’을 제정해 조사권·기소권 등 법적 강제력을 가진 진상 규명 위원회를 설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화는 광주의 그날 이후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택시운전사 만섭은 여전히 손님을 싣고 달리고, 독일 기자는 기자상을 수상한다.

영화를 보고, 소설을 읽는 우리들도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책에서는 막내아들을 잊지 못하는 동호의 노모뿐 아니라 도청에서 함께했던 동네 형과 누나들, 살아남은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

작가는 취재를 마치고 찾은 소년들의 무덤가에서 동호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책 끄트머리 에필로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그날의 동호와 재식이 다 보지 못한 5월의 눈부신 햇빛을, 우리는 꼭 되찾아주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의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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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국회에 계류 중인 방송관계법 개정안의 재검토를 지시하고, 더불어민주당은 수정안 마련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보수야당은 “문 대통령과 여권이 방송장악이라는  민낯을 드러냈다”며   강력 반발하고 나섰다. 문 대통령은 지난 22일 방송관계법 개정안에 대해 “(이대로 시행되면) 최선은 물론 차선의 사람도 (공영방송) 사장이 안될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자칫 공영방송 사장이 여야의 눈치만 살피는 소신 없는 인사가 선임될 수도 있다는 우려를 나타낸 것이다. 지난해 7월 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의원 162명이 발의한 방송법·방송문화진흥회법 등 4개의 방송관계법 개정안은 공영방송 이사 추천권을 여야 7 대 6의 구성으로 바꾸고, 사장을 뽑을 때 재적이사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하는 ‘특별 다수제’ 도입을 골자로 하고 있다. 어떤 정권도 공영방송을 장악할 수  없도록 제어장치를 둔 것이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발언이 “지시가 아닌 제안”이라고 강조했지만 민주당은 지난 22일 열린 ‘정기국회 대비 연찬회’에서 방송관계법 수정안을 마련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민주당과 언론단체 등에선 국민배심원단을 모집해 공영방송 사장을 임명하는 ‘국민 추천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방송관계법 개정안조차 자유한국당의 반발로 국회 통과가 무산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재검토 발언은 시의적절하지 않다. 숱한 논란 끝에 그나마 차선책으로 마련한 방송관계법 개정안이 아닌 제3의 수정안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채 이상론에 치우쳐 있다고 비판받을 소지가 크다.

현행 방송관계법은 사실상 대통령과 여당의 뜻대로 공영방송 사장을 선임할 수 있도록 규정돼 있다. 이는 야당에 불리한 것이다. 오히려 개정안이 야당에 유리하다. 그런데도 자유한국당은 개정안의 국회 통과를 저지해왔다. 그렇다고 야당에 불리한 현행 방송관계법을 고수하겠다는 것인지도 불분명하다. 결국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느라 자가당착에 빠진 상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공영방송을 장악하며 국정을 파탄 낸 보수야당은 지금이라도 공영방송 정상화에 힘을 보태야 한다. 민주당도 수정안 마련보다 방송관계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에 주력하는 게 옳다. 그게 과거정부에서 참담하게 무너진 공영방송을 되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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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당 전당대회에서 안철수 대표가 선출됐다. 득표율 51.1%로 가까스로 결선투표는 치르지 않게 됐다. 안 대표는 대표 출마 당시 대선 패배와 제보조작 사태에 대해 더 많은 반성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우려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다시 당대표로 선출된 것은 위기에 빠진 당을 살리려면 당 창업주인 안철수 중심의 리더십이 필요하다는 데 더 많은 당원들이 공감했다고 볼 수 있다. 안 대표는 수락연설에서 “광야에서 쓰러져 죽을 수 있다는 결연한 심정으로 제2 창당의 길, 단단한 대안 야당의 길에 나서겠다”고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새 대표가 27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임시전국당원대표자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된 뒤 연설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연합뉴스

구원투수로 돌아온 안 대표 앞에는 만만찮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다. 당장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창당 이후 최저치를 기록하고 있는 당 지지율을 끌어올려야 한다. 지금 국민의당은 원내 5개 정당 가운데 지지율 꼴찌일 정도로 시민의 신뢰를 잃은 상태다. 문재인 정부 인사 대응에서부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등 주요 현안마다 일관된 노선이나 명분없이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제보조작 사건에 대해 당내 누구도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았다는 점도 실망을 안겨줬다.

당의 정체성 확립은 무엇보다 시급하다. 안 대표는 당선 직후 “실천적 중도개혁 정당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겠다. 배타적 좌측 진영이나 수구적 우측 진영에 매몰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문재인 정부의 독선과 오만을 견제하겠다고도 했다. 옳은 얘기다. 하지만 제3당으로서의 캐스팅보트는 분별력있게 행사해야 한다. 국민의당이 그간 보인 모습은 그런 기대에 한참 못 미쳤다. 되레 야당의 존재감을 보여주겠다며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가 하면 호남여론에 밀려서야 정부와 협력하는 등 중심을 잃은 행태를 드러냈던 게 사실이다.

안 대표가 목표로 삼은 다당체제를 위해서는 인물과 정책, 정치 행태 등 모든 면에서 차별성과 참신성을 보여줘야 한다. 그런 면에서 안 대표는 ‘극중(極中)주의’에 대한 개념과 지향점을 명확히 정리할 필요가 있다. 말이 쉽지 중도를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안 대표가 말한 것처럼 좌측과 우측의 중간을 찾아다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전당대회 전후 불거진 당내 갈등을 추스르고 비안(非安·비안철수)계 인사들과 화합하는 건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정당·정치개혁을 위해 당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일도 미룰 수 없다. 새 정치를 내세우면서 낡은 정치를 답습해선 시민에게 감동을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새 활로를 찾지 못하면 국민의당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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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출범 100일이 지났다. 몇 차례 스텝이 꼬이는 일들이 있었지만 적극적인 대국민 소통과 높은 지지를 통해 착실한 걸음을 해왔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일부 야당은 이미지 위주의 ‘쇼통’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 못하는 자가당착이다. 6개월의 국정공백과 인수위 기간 없이 출범했음에도 안정적이면서도 나라다운 나라를 향한 변화의 역동성이 있다. 같은 기간 80%의 지지율이 반토막 났던 노무현 정부에 비하면 ‘연착륙’이라는 평가를 훨씬 뛰어넘는 성공적 출발임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취임 100일의 연착륙이 성공의 보증수표일 수는 없다. 재벌개혁, 검찰개혁, 일자리, 탈원전 등 난제들이 첩첩산중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외교일 것이다. 지난 9년의 실패를 복구해 한반도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도전은 출발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 한·미 공조와 ‘베를린구상’으로 한반도 문제의 운전대를 잡으려던 계획이 흔들린다.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오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2017년 외교부와 통일부 업무보고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북·미는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언술로 긴장을 고조시키고, 미·중의 힘겨루기로 한국은 설자리 찾기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이 미·중 양쪽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지난 정부 외교부 장관의 엉터리 상황인식은 없어서 다행이지만 대외정책의 컨트롤타워는 현안관리에만 매몰되면서 전략적 사고의 부재를 노정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한·미 공조를 다진다고 말하지만 미국의 입장에 지나치게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이슈를 처리하는 과정도 일관성과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라는 질문이 지지층에서 나오기 시작한다. 외교안보라인의 인사를 보며 과연 정권이 교체된 것이 맞는가라는 문제제기도 있다. 이에 대해 정부는 최악의 상황을 최선을 다해 수습하고 있는데 반대편도 아닌 지지층의 비판이 억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외교란 관리한다고 관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았으면 좋겠다. 현상유지를 목표로 한다고 해서 그것이 가능한 경우보다 아닌 때가 훨씬 더 많다. 현안은 처리해야 하겠지만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순위와 과감한 결정을 통해 단순화시켜야 한다.

현 난국을 돌파하는 방법은 상황관리보다 담대한 제안과 주도권 행사라는 인식의 전환이 먼저다. 노무현 2.0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라는 식의 미국 내 강경파의 압박과 국내 보수세력의 안보프레임 공세를 비껴가기 위해 혹시라도 일보후퇴 일보진전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면 재고해야 한다. 사드 조기 배치 여부를 통해 한국 대통령을 검증하겠다는 미국 내 강경파들의 도를 넘은 압박에 말려들어서는 결코 안된다.

참여정부 초기 국내 보수기득권의 거센 저항에 비하면 훨씬 나은 환경이고 이를 잘 관리하면서 대북 문제에 관한 통합적 지지를 획득한다는 논리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자기모순을 내포한 희망적 사고다. 그들이 현재 입을 다문 것은 두 가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신정부에 대한 높은 지지 때문에 벙어리냉가슴 앓는 것이거나, 아니면 자신들이 내심 원하는 외교를 하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느 쪽도 여차하면 돌변할 변덕스러운 침묵일 뿐이다. 그렇다면 선택은 분명하다. 높은 지지율을 유지하기 위한 소심한 외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높은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을 때 담대한 평화구상을 제시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정책에 대한 지지를 이미 표한 것이며, 80%를 넘나드는 지지율은 이를 재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좌충우돌로 대중정책은 변덕스럽고, 대북정책도 불분명하다. 미국이 헤매고 있을 때 우리가 나서야 한다. 사드 조기 배치, 예방공격, 한국의 독자제재 강구 등 트럼프 행정부의 강경노선과 압박에 더 이상 밀리지 말고 우리의 담대한 구상으로 미국을 설득해내야 한다.

1994년 제네바합의의 주역 로버트 갈루치는 현 위기에서 희망은 문재인 대통령뿐이라고 했다. 이는 개인의견이 아니라 미국 대화파들의 공통된 주문이다. 북핵동결론은 원래 전제조건으로 제시된 것이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 조건이 되어버렸다. 대화를 하고 조건을 다루면 되는데, 대화에 조건을 두는 것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박근혜의 신뢰 프로세스의 실패를 되풀이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문재인 정부는 단순한 신정부가 아니라 촛불이 탄생시킨 정부다. 따라서 빚진 대상은 국민들뿐이다. 국민들만 생각하고 국민들만 믿고 담대한 타개책을 제안할 때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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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전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이 질의에 적절치 못한 답변을 이어가며 눈을 감고 있다. 김기남 기자 kknphoto@kyunghyang.com

정부의 살충제 계란 대응은 실패했다. 지금 시민의 불안은 메르스 사태 때와 다르지 않다. 이젠 정부가 무슨 말로 식품안전을 얘기해도 믿을 수 없다는 게 민심이다. 류영진 식품의약품안전처장의 무능과 무책임이 시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류 처장은 계란 생산량, 국내 소비량, 살충제 계란 유통량 등 기본적인 업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취임 한 달밖에 안됐다고 해도 식품안전을 책임지는 조직의 수장으로서 컨트롤타워 기능을 수행하기는커녕 미숙한 대처와 엉뚱한 발언으로 혼란을 부추기고 불안만 키웠다. 국무총리의 질책을 ‘짜증’으로 받아들이고, 오락가락 대응에 대해선 “언론이 만들어낸 말”이라며 언론을 탓했다. 고위공직자의 기본자세가 갖춰져 있지 않다. 그에게선 능력도 책임감도 찾아볼 수 없다.

더 이상 두고 보기 어렵다. 약사 출신으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도왔던 그는 임명 때부터 식품안전 책임자로서 제대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야당의 류 처장 해임 요구를 무리한 정치공세로 받아들이는 시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낙연 총리는 엊그제 국회에서 류 처장의 거취 문제를 “고민하겠다”고 말했다. 총리는 언필칭 책임총리란 말이 무색하지 않으려면 류 처장 해임을 대통령에게 건의해야 한다. 하루라도 빠를수록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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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중국이 오늘 수교 25주년을 맞는다. 한·중관계는 기로에 서 있다. 불신은 확대되고 경제협력 및 안보협력은 격감하고 있다. 양국이 수교 25주년 기념행사를 따로 여는 지경이다. 5년 전 수교 20주년 기념행사를 양국이 공동주최하고 시진핑 당시 국가부주석 등 중국 고위층이 대거 참석해 성대히 치른 것과 비교된다. 밝은 미래를 기대하기는커녕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조차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간 한·중관계는 도약을 거듭했다. ‘우호협력관계’에서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로 발전했고, 인적 교류는 연 1000만명을 넘었다. 교역규모도 급성장해 수교 당시보다 33배나 증가했다. 한국은 세계 10대 교역국가의 토대를 닦았고, 중국은 G2 국가로 성장했다. 양국이 정치·경제적 보완관계인 데다 동북아의 전략 환경도 양국관계에 우호적이었던 덕이다. 하지만 지금 양국을 둘러싼 전략적·경제적 환경은 악화됐다. 중국의 급성장과 그에 따른 미국과의 패권경쟁, 여기에 북핵까지 엉켜 한반도 문제는 한층 복잡해졌다. 중국은 G2에 걸맞은 국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기를 원한다. 미국의 역외균형자 역할을 인정해오던 태도가 바뀌고, 한·중관계도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갈등은 이 같은 전략적 환경의 산물이다.

12일 오전 국방부와 환경부 관계자 등이 경북 성주에 있는 주한미군 사드 기지에서 전자파·소음 측정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드 갈등은 일시적인 문제가 아니다. 설령 사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한·중관계가 전면적 협력관계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양국관계의 기존 틀은 이미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한·중 모두 인정해야 한다. 새로운 모멘텀이 필요하다.

한국은 이미 중국과 단절하고 살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 한국은 대중국 교역규모가 전체의 30% 정도이나 전체 대외무역이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다. 반면 북한 대외무역의 90%를 중국이 차지하지만 대외무역이 GDP의 2%에 불과한 점을 고려하면 한국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사드 갈등은 여러 현안 중 하나가 아니라 사활적 이해가 걸린 문제다. 빨리 해소해야 하지만 더 이상 악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정부 들어 심화되는 사드 갈등은 우려스러운 일이다. 사드 부지 환경영향평가와 요격미사일 4기의 임시배치 등 한국의 오락가락하는 행보로는 악화된 사드 갈등 해소도, 한·중관계 회복도 가능하지 않다. 특히 미·중 갈등 국면에서 사드 문제를 앞세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한국의 안보이익도 추구하면서 동시에 미·중이 전략적 타협국면으로 전환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중국 역시 사드 갈등에 매달리는 것이 북핵 해결은 물론 중국의 국익에도 결코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중국의 외교안보를 위해서도 한국을 배제하는 것은 가능하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한·중관계 악화는 중국의 정치·경제적 성장을 저해할 뿐 아니라 G2국가로서의 위상을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한·미동맹과 한·중관계는 배타적인 부분이 있지만 얼마든지 조화로운 운영이 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한·중 양국은 사드 갈등 등 현안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미래의 향방이 결정되는 관건적인 국면을 맞고 있다. 사드 갈등이 바람직한 미래로 가는 성장통이 되도록 머리를 맞대고 더 많은 전략대화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동북아 평화와 안정, 한·중 공동 번영으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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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정치자금 9억원 수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3일 만기 출소했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은 한 전 총리가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며 그에 대한 검찰 수사와 재판 결과를 ‘사법 적폐’로 규정했다. 김현 대변인은 “억울한 옥살이에서도 오로지 정권교체만을 염원한 한 전 총리님, 정말 고생 많으셨다”며 “향후 사법 정의가 바로 설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나가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약속드린다”고 밝혔다. 추미애 대표는 “기소도 잘못됐고, 재판도 잘못됐다”고 말했다.

검찰 수사가 한 전 총리를 타깃으로 이뤄진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전 총리 사건은 그가 건설업자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증거가 나와 유죄가 확정된 사안이다. 사법개혁이 필요한 이유로 여당이 한 전 총리 재판 결과를 거론하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한 전 총리가 민주화운동을 하다 투옥된 것도 아닌데 출소 현장에 여당 지도부가 우르르 몰려가 영웅 맞이하는 듯한 행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23일 새벽 경기도 의정부시 고산동 의정부교도소에서 만기 출소하며 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이명박 정부 검찰은 당시 야당의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였던 한 전 총리를 표적 수사했다.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달러를 받았다는 1차 뇌물 사건이 무죄가 날 것이 확실시되자 2010년 4월 검찰은 또 다른 혐의로 한 전 총리를 옭아맸다. 대법원이 2년 가까이 시간을 끌고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올려 표결하는 등 불필요한 억측과 오해를 산 측면은 있다. 그런데 한 전 총리가 돈을 받은 정황 증거가 드러났다. 건설업자가 발행한 1억원짜리 수표가 한 전 총리의 동생의 전세자금으로 사용된 것이다. 한 전 총리 비서도 건설업자로부터 2억원을 받았다. 2015년 8월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건설업자가 건넨 수표를 한 전 총리가 받아 동생에게 줬다고 판단하고 대법관 8(유죄) 대 5(일부 무죄)로 유죄를 확정했다.

당사자인 한 전 총리로서는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재판을 다시 해도 사법적 진실이 달라지기는 어렵다. 게다가 일부 무죄 의견을 낸 대법관 5명도 한 전 총리가 건설업자로부터 최소 3억원을 받았다는 점은 인정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무기력하게 정치적 동지를 감옥에 보낼 수밖에 없었던 여권 인사들의 안타까운 심정은 이해한다. 그러나 부패에 눈감고 권력에 굴종하는 사법부를 개혁한다면서 사법개혁의 깃발을 내걸고 있는 민주당이다. 그럼에도 한 전 총리 감옥행을 사법 적폐라고 하는 것은 이 사법개혁의 정당성을 의심케 하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민주당은 한 전 총리에 대한 온정주의 때문에 시대적 과제인 사법개혁의 순수성을 훼손해도 되는지 성찰해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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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 이후 한반도가 지니는 지정학적 의미는 강대국들 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특정 국가에 의한 한반도의 독점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과 북으로 분단된 한반도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펼치는 힘겨루기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14일 중국의 지식재산권 침해와 강제적인 기술이전 요구 등 부당한 무역관행을 조사토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사실상 무역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중국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중국 상무부는 15일 대변인 성명을 통해 “다자간 무역 규칙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좌시하지 않겠다”며 세계무역기구(WTO)에 미국을 제소할 수 있음을 내비쳤다. 그러자 극우 성향의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나서서 “중국과의 경제 전쟁은 모든 것이고, 우리는 모두 그에 미친 듯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한반도에서 그들이 (북핵 문제 등으로) 우리를 툭툭 치고 있지만 그건 단지 곁가지(sideshow)에 불과하다”고 했다.

7월 28일 오후 경북 성주 주한미군 사드 기지에 미군 장비가 놓여 있다. 이날 국방부는 사드 기지에서 진행해온 소규모 환경영향평가 이외 일반 환경영향평가도 실시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연합뉴스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은 ‘말폭탄’이 결국 ‘쇼’였던 것이다. 난공불락인 북한의 핵무기 위협 속에 살아남으려면 자수자강(自守自强)하는 수밖에 없다는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 ‘어떻게’라는 물음에는 핵무기가 없는 한국의 전략적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풀기가 어려운 고난도 방정식과도 같다.

역대 어느 지도자도 자신에게 주어진 북핵 숙제를 풀지 못했다. 그 사이 북핵 문제는 점차 난도만 높아갔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레드라인’을 넘는 것도 시간문제라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그렇다면 문 대통령도 임기 내 북핵 문제를 불가역적으로 해결할 묘안이 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임기 5년 단임제의 대통령이 세습으로까지 이어지는 왕조체제를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방법은 없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다시 말한다. 김정은 정권이 10~20년 이내 붕괴될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도 말자. 희망적 사고가 정책이, 국가전략이 될 수는 없다. 머지않아 김정은 정권이 붕괴될 것을 가정하고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면 당장 중단하기를 권한다.

그렇다면 현명한 지도자가 해야 할 일은 주어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경로를 택하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비핵화 벽돌을 한 장만 쌓는 일이다. 

‘가난한 국가’가 국가안보 수준을 단기간에 높이는 방법은 타국과 군사동맹을 맺는 것이 정설이다. 문재인 정부 역시 굳건한 한·미동맹을 기반으로 북핵 문제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인식을 지니고 있다.

다만 우려되는 점은 사드 배치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듯이, 한·미동맹 강화 과정에서 중국의 크고 작은 반발에 문재인 정부가 얼마나 명민하게 대응할 수 있느냐이다. 이를테면 동북아 지역에서라도 미국에서 중국으로 급격하게 세력 전이가 이루어질 경우 우리의 내부적 균열을 어떻게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적 고민도 함께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유럽의 동아시아 전문가였던 카를 필니가 19세기 말 미국 국무장관을 지낸 존 헤이의 “지중해는 과거의 바다이고, 대서양은 현재의 바다이며, 태평양은 미래의 바다”를 인용하면서 21세기는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 역할을 맡는 다극화된 세기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병철 | 평화협력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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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처럼 일했다는 공관병 때문에 다시 한국군의 존재 이유와 기능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모 기관과의 공동연구로, 군 복무 중인 청년부터 월남전 참전 용사까지, 6개월 공익근무요원 출신부터 전방 특수부대 출신까지 열댓명의 남자들과 ‘군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경험의 개인차가 무척 크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은 ‘그래도’ 대한민국 군대의 존재 가치에 대해 인정했다. 군대 경험이 자기 생애에서 긍정적 기능을 했고, 후배나 아들도 군대 가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작전권 문제는 물론 한국군의 온갖 적폐와 말도 안되는 가혹행위·인권침해를 앎에도 말이다. 그래서 ‘그래도’를 좀 더 파고드니 그런 답은 역설이나 일종의 결과론이었다. 무척 괴롭고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군대는 가족과 학교밖에 모르던 청년에게 팔도의 온갖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사회성’을 기르게 하고, 짧은(?) 2~3년 동안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게 했다는 것이다. 과연 이 시간이 해외여행이나 사회봉사를 그만큼 하는 것보다 유의미했을까?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세상의 허다한 ‘군대 이야기’를 종합해볼 때 한국군의 3대 폐단은 ‘삽질’, 부패 그리고 폭력이다. 셋 중에서 뭣이 더 중한지, 도대체 무엇부터 ‘시정’하자 할지 모르겠다. 다 너무나 심각하고 시급하기 때문이다.

‘삽질’은 무능과 무의미의 비유어다. 군대 가면 ‘나라를 지킨다’고? 추상적으로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병사들은 분명 들판을 뛰고 바다를 헤엄치며 전쟁연습을 하기도 하고, 무기 다루는 법과 ‘적’을 살상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한다. 그러나 왠지 공허하다. 그리고 그런 시간보다 훨씬 많은 무의미한 시간이 있다. 군생활의 상당 부분은 그냥 병사들이 거기 있기 때문에 행해진다. 60만명의 젊은이들이 모여서 잡초 제거, 평토, 제식, 점호, 관물대 정리, 다림질 따위를 열심히 하면 ‘나라가 지켜’지나? 물론 현실에 맞지 않는 이념·안보교육도 ‘삽질’에 해당한다. ‘삽질’의 본질은 군의 낡거나 잘못된 시스템과 무능·부패한 일부 장교·장성 집단일 것이다. 이를 보통 국민의 아들들이 무임금과 가혹행위로 벌충하는 것이 ‘국방의 의무’로 돼 있다. 그런 국방의 개념 자체에 문제 있는 거 아닌가?

부패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방산비리 같은 일들이다. 나라가 가난했을 때는 군수나 인사비리가 다반사였다 하나, 지금은 미국의 글로벌 대기업 무기상들과 거래하는 장성들이 부패의 주역인 모양이다. 많은 남성들이 지적하듯 왜 북한보다 수십배의 국방예산을 수십년간 쓰고도 왜 ‘안보위기’에 시달려야 하나? 이 또한 ‘큰 개념’이 잘못된 탓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폭력이다. 물론 모든 군대는 존재 자체가 폭력이다. 그런데 어떤 군대의 폭력은 적을 향해 있지 않고, 자기 병사들이나 여군 그리고 민간인들을 향해 있으니 문제다. 대한민국 군대는 어떤가? 근래 들은 군폭력 이야기 중 모 특수부대 출신에게 들은 것이 가장 끔찍했다. 고참이 공개적으로 후임의 성기를 만지거나 때리고 몸의 다른 부위를 핥거나 하는 ‘장난’은 물론 일대일 상황에서의 성폭력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상관·선임에 의해서 수시로 저질러지는 성희롱·성폭력이, 폭로도 시정도 될 수 없이 은폐되고 마치 ‘전통’처럼 대물림되는 강력한 구조가 2000년대까지 있었다는 것이다(지금은 나아졌으리라 믿는다).

많은 희생과 노력이 있었는데도 왜 군 인권은 근본적으로 나아지지 못했을까? 여전히 군내 자살 장병과 성폭력 피해자들이 줄어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전방에서 일병으로 근무하는 한 젊은 친구를 만나니 군대 간 지 1년 만에 놀랍게 성숙해졌다. 한눈에 봐도 몸에 근육이 붙었고, 마음에도 근육이 붙은 듯 공부와 자신의 미래에 관한 성숙한 걱정도 한다. 요즘은 시간 날 때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으려 한다고도 했다. 이전에는 모두 없었던 일이라니 대견스럽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는 20대의 어느 시기를 병영에서 보내는 보통의 청년들에게 (거의 저절로) 일어나는 변화이기도 하다. 이러할진대 한국군은 이 시대에 무엇이어야 하며, 수십만의 병사들은 어떤 존재여야 하나? 근본적 성찰과 개혁이 필요하다.

민간 전문가들과 시민단체, 그리고 여성들도 참여하는 개혁 프로그램을 통해 예산구조, 병영문화와 인권, 교육과 생활의 체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군대가 나라에 진정 필요하고 젊은이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조직으로 변해야 한다. 될 때까지, ‘개혁’으로 정말 ‘빡세게’ 군을 굴려야 하겠지만, 군개혁은 단지 군의 문제만이 아니다.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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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나랏돈 빼먹는 꼴이지요.” 초로의 목사님은 목이 메는 것 같았다. 마른침을 몇번 삼키더니 “부끄럽고 참담하다”고 했다. 그 목사님의 이야기는 이랬다. 얼마 전부터 자신의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한 교인이 상당한 액수의 헌금을 하겠다며 그 액수의 몇배나 되는 기부금 증명서 발급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기부금 증명서가 있으면 세금이 공제된다며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니냐”는 설명까지 곁들였다고 한다. 평소 “하나님 앞에서 정직해야 한다”고 설교해 왔지만 새 신자의 면전에 대고 단칼에 거절하기도 민망해 잠시 머뭇거리는 틈을 그는 놓치지 않았다. “목사님. 다들 그러고 살아요. 예전에 납품했던 한 교회 목사님이 물건값 깎아주면 기부금 증명서 발급해주겠다고 해서 그렇게 ‘윈윈’해 왔는걸요. 죄송한 얘기지만 이 교회에서 1년에 이만큼 헌금할 수 있는 사람도 없잖아요.”

시쳇말로 이런 교인 몇명만 있으면 교회 살림은 펴진다. 소도시에서 수십년째 목회를 한 그 목사님은 세속적 기준으로 성공과 거리가 멀었다. 교인 수는 200명이 채 안됐고 형편 좋은 사람도 없었다. 예배당도 임대한 공간이었다. 사실 이 목사님도 속으로는 잠시 흔들렸다고 했다. “그게 세상살이의 요령인지는 몰라도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살면 안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게 마음이 아픕니다.”

그는 이전에도 다양한 경로를 통해 기부금 액수를 부풀려달라거나 증명서를 허위 발급해달라는 요구를 받아왔고 그때마다 가차 없이 거절했다고 했다. 듣기 좋은 말로 ‘융통성’이고 ‘세상 사는 이치’일 뿐, 교회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조직적 범죄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순간이지만 유혹에 흔들렸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고 여전히 많은 교회가 그런 탈법을 일삼고 있는 것이 참담하다”고 털어놨다. 이 목사님의 교회에는 소위 잘나가고 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확률이 높지 않다. 그 때문에 몇년 전 만난 목사님의 형편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종교인 소득에 대한 과세를 두고 압도적인 여론은 종교인도 예외가 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일부 종교인, 엄밀히 말해 개신교의 대형 교회는 열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만큼의 이유를 대며 반발한다. 소통 부재, 준비 부실부터 종교탄압 우려까지 나온다. 제각기 감춰놓은 속뜻이야 뭐가 됐든 표면적으론 “성직자가 담당하는 영적인 일을 세속적인 노동과 같이 취급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동의한다. 성직은 영적인 일이다. 시간에 따른 노동의 투입을 통해 효율을 따지는 일반적인 노동과 동일하게 취급하기엔 무리가 있다. ‘일방적’ 과세에 반대하는 주장에도 공감한다. 그러니 이건 어떤가. 연말정산을 할 때 종교단체에 낸 기부금은 소득공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국가가 알량한 세금 몇푼으로 영적인 영역에 해당하는 헌금의 고귀한 정신을 훼손해서야 되겠는가. 어차피 헌금은 신과 나의 영적 관계에서 우러나야 하는 것이고 믿음의 표현이다. 목사를 보고,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신앙적 양심으로 내는 헌금이라면 세금 몇푼에 좌우될 리 없다. 그게 교회에서 가르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이다. 교회 입장에선 탈세를 부추기는 온상이라는 사회적 비난에 시달리지 않아도 된다.  

성경 마태복음 6장에 이런 말씀이 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고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는 것이다. 십일조를 강조한 말라기 3장과 함께 교회에서 헌금을 독려할 때 자주 인용되는 내용이다. ‘아낌없이 바치면 다 하나님이 책임져주신다’는 목회자들의 설교에 많은 신자들은 순종했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한국 교회는 성장했다. 이젠 그 과실을 딴 교회들 차례다. 걱정과 근심 모두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의 영광 가리지 말고.

<문화부 | 박경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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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수줍은 성격이다. 경남고 재학 시절 친구가 선생님에게 심하게 얻어맞아 입술이 터지고 피가 흘렀다. 부당한 폭력이었다. 문재인은 항의하고 싶었지만 나서지 못했다. 대신 문재인은 그 교사가 가르치는 과목을 공부하지 않았다. 전교 톱 수준의 성적이었지만 그 과목만 꼴찌였다. 이 때문에 그는 첫해 입시에서 서울대 상대에 낙방했다. 그게 문재인 스타일이다.

문 대통령은 한국 정치의 관행을 싫어한다. 중진 의원들도 그닥 신뢰하지 않는다. 기존 정치의 관행은 보스·계파정치요, 그 작동 방식은 밀실야합이었다. 2015년 문재인은 당 대표 시절 당이 계파가 아닌 시스템에 의해 운영되게 했다. 자기 사람이 잘려 나갈지라도 타협하지 않았다. 친노의 상징인 이해찬·문희상·유인태·정청래·김현이 공천에서 탈락했지만 손을 내밀지 않았다. 과거 여의도 정치의 문법으로는 서로의 지분을 보장하며 나눠먹는 것이었지만 문재인은 거래에 나서지 않았다. 다선 의원들은 지분이 사라지고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자 “친노가 다 해먹는다” “근본도 없는 놈들이 당을 말아먹고 있다”고 했다. 친문 패권주의란 말이 나왔다. 문재인에겐 ‘정치력 부재’ ‘리더십 부족’이란 꼬리표를 붙였다. 원칙에 반하는 타협을 거부한 결과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경남고등학교 재학 시절 소풍 때(뒷줄 가운데) 찍은 사진. 문재인 캠프 제공

결국 그들은 탈당했다. 당을 떼로 뛰쳐나간 의원들은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한 호남 중진들이었다. 문재인 캠프의 핵심 인사는 “문 대통령이 제일 싫어하는 게 여의도 중진정치다. 갑자기 중진들이 한소리하며 ‘옛날엔 어쨌는데…’라고 충고하는 거를 싫어한다. 기존 여의도 정치에 대한 혐오감이 있다”고 했다. 참여정부 민정수석 시절 2004년 총선 출마 요청을 거부하자 당에서 “왕수석 노릇을 계속하고 싶은 모양”이란 말이 나왔다. 뒤도 안 돌아보고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청와대를 떠났던 그다.

출범 100일이 갓 지난 문재인 정부의 본격적인 국정운영은 지금부터다. 100대 국정과제를 이행하기 위해서는 465건에 이르는 법률 제·개정이 필요하다. 120석 여당만으로는 실현할 수 없는 구도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야당의 협조, 즉 협치 구도를 만드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문한다. 언즉시야(言則是也), 맞는 말이지만 문 대통령의 생각과는 좀 다르다. 

민주당은 지난 7월 임시국회에서 뿌리가 같은 국민의당의 협조를 먼저 견인하고 여기에 바른정당을 합류시켜 비(非)자유한국당 전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실은 호남의 사나워진 민심과 문재인 정부 지지 여론이 크게 작용한 덕분이다. 9월 정기국회도 신(新)3당공조가 이뤄질지는 의문이다. 국민의당은 8·27 전당대회에서 안철수 전 대표가 새로운 당 대표로 선출될 것이다. 안 전 대표는 출마선언에서 “북핵 위기, 부동산 폭등, 불안정한 에너지 정책 같은 문제를 두고는 분명한 역할을 하는 야당이 되겠다”고 했다. 몇 가지를 예로 들었지만 문재인 정부 정책 전부를 놓고 하는 말과 다를 바 없다. 안철수가 주창한 ‘극중주의’란 문재인 정부 개혁과제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다.

유인태 전 정무수석은 “문 대통령은 지난 100일간 야당을 설득하는 데 온 정성을 쏟은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관찰은 정확하지만, 왜 그랬을까에 대한 답은 빠져 있다. 답은 문 대통령이 여의도 정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협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협치인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문 대통령은 비겁한 협치, 야합식 협치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찾은 게 시민을 향한 직접 소통이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대국민 소통 행보에 주력하고 있다. 양김(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권위주의적 카리스마 정치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계몽군주처럼 담론을 선도하는 정치를 펼치다 고립됐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불통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문 대통령의 감성적 소통정치는 한국 정치사에 이제껏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새로운 시도다. 문 대통령은 그제 대국민보고에서 “간접민주주의로 우리 정치가 이렇게 낙후됐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의 집단지성과 함께 나가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의 의중은 명확하다. 여의도가 구체제, 낡은 정치에 찌들어 있는 한 협치를 구걸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위험한 생각일 수도 있고, 파천황(破天荒)적 정치실험일 수도 있다. 고교 시절엔 마음에 안 드는 교사의 책을 덮는 식으로 맞설 수 있다. 그러나 대통령은 국정을 덮을 수 없다. 문 대통령의 새로운 실험은 성공할 수 있을까. 9월 정기국회에서 성적표가 나올 것이다.

박래용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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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문재인 대통령이 21일 차기 대법원장에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을 지명했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은 “김 지명자는 법관 독립에 소신을 갖고 사법행정의 민주화를 선도해 실행했고, 공평하고 정의로운 사법부를 구현해 국민에 봉사와 신뢰를 증진할 적임자”라고 인선 배경을 설명했다. 대법원장은 국가권력의 한 축인 사법부 수장으로 국가 의전 서열 3위이다. 대법관 제청 및 헌법재판소 재판관 3인 지명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헌법과 법률에 의해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는 법관들의 수장으로, 대법관 13명과 함께 최고·최종심 법원인 대법원의 재판도 맡는다.

신임 대법원장 후보자로 지명된 김명수 춘천지방법원장이 21일 오후 강원 춘천지방법원 법정에서 취재진과 만나 소감을 밝히고 있다. 연합뉴스

헌법은 다수결이나 힘의 논리에 구애받지 말고 약자의 권리를 보호하라는 임무를 사법부에 맡겼다.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이나 입법부를 구성하는 국회의원과 달리 대법원장이나 법관을 투표로 뽑지 않는 이유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므로 사법부는 시민에 더 겸허해야 한다. 그러나 현 양승태 사법부는 모든 면에서 미흡했다. 재벌에는 관용을 베풀고, 정권 실력자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판결을 내렸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등 약자에게는 가차 없이 유죄를 선고하고, 지체된 판결 등으로 과거사 피해자들에게는 고통을 안겼다. 사법부의 생명인 재판의 독립성도 훼손했다.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판사를 통제하고, 판사 학술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와해시키려는 음모를 꾸미다 들통났다.

김 지명자가 국회 인사청문회와 임명동의 절차를 거쳐 임기 6년의 대법원장에 정식 취임하면 문재인 정부 임기 종료 이후에도 1년 이상 대법원장직을 수행하게 된다. 무엇보다 김 지명자는 세계 최하위 수준인 사법 신뢰도를 끌어올릴 준비와 각오가 돼 있어야 한다. 사법부의 신뢰 하락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 위기이다. 대법원장에게 집중된 권한을 분산하고,  법원행정처의 축소·폐지가 필요하다. 판사들 회의가 잇따르고 현직 판사가 단식 농성을 벌이는 등 사법부 내부에서도 자성과 개혁 요구가 분출하고 있다.

김 지명자는 양승태 현 대법원장보다 사법연수원 기수가 13년 아래이고, 대법관 경험 없이 곧바로 대법원장으로 지명된 점에서 파격적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법원 내 대표적인 ‘진보 법관’으로 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김 지명자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법이 만인에게 평등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구현할 수 있는 사법개혁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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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정부가 그제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에 즈음해 그동안 국정운영을 시민들에게 직접 설명하는 ‘대국민 보고대회’를 열었다. 국민인수위원들이 직접 시민들로부터 받은 의견을 토대로 국정 방향에 대해 질문했고, 각 부처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이 대답했다. 토크쇼 형식으로 1시간 동안 진행된 행사 후반부에 문 대통령이 나와 국정에 대해 설명했다. 문 대통령과 수석비서관, 주요 부처 장관들이 국민인수위원들과 허심탄회하게 얘기하는 것은 나름 새롭고 신선한 소통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날 행사는 내용과 형식에서 결코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우선 시민들의 최대 관심사인 안보 위기와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배치, 원전, 살충제 계란 대책 등이 거론되지 않았다. 대신 일방적 국정 홍보에 초점이 맞춰졌다. 지켜보기 불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문 대통령, 장관, 수석들의 답변도 충실하지 않았고 알맹이가 없었다. 방송사들이 휴일 황금시간대에 일제히 생중계한 것이 무색했다. 도리어 시민들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지나치게 대통령에게 의존하는 국정운영 실태를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대통령 한 사람의 인기에 의존하는 국정이 되다 보니 국정 보고대회의 중심이 자연스럽게 대통령 홍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닌가 싶다. 

문재인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새 정부 출범 100일을 기념해 열린 ‘국민인수위원회 대국민 보고대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시민이면 누구나 감동을 주는 국정을 원한다. 하지만 그 감동은 일방적 홍보가 아니라, 국정 수행의 성과를 통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통령 홀로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듯한 현재의 비정상적인 상황을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 행정명령이 아닌 입법을 통한 제도화된 국정운영이 필요하다. 특히 여소야대 정국에서는 야당과의 협치가 불가피하다.

문 대통령의 말대로 정치가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으니 직접 민주주의 요소를 국정에 가미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는 대의제를 보완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합당하다. 내각을 중심으로 국정을 집행하고, 여당을 통해 시민들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도록 국정운영 시스템을 재정비하는 것이 시급하다. 문 대통령 취임 100일이 지났지만 내각과 더불어민주당은 존재감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돈다. 문 대통령은, 내각이 유능하고 집권당이 정치역량을 갖췄다고 믿는다면 그에 합당한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 특히 국정의 한 축인 민주당은 야당과 협상하고 국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무가 있다. 이는 단순히 청와대의 지침을 전달받아 집행하는 방식으로는 완수할 수 없는, 정치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도 하다. 민주당에 더 많은 권한을 위임하고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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