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속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자문특위)가 지난 13일, 개헌안 초안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안은 2017년부터 2018년 1월까지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산하 자문위원회(이하 개헌특위 자문위)가 작성한 ‘개헌특위 자문위원회 보고서’를 상당 부분 토대로 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지난 1월, 개헌특위 자문위가 ‘개헌특위 자문위원회 보고서’를 발표하자 전국청소년관련학과교수협의회, 한국청소년활동학회, 한국청소년지도자연합회 등 청소년계가 반대하고 나섰다. 논란의 요지는 이 보고서에서 아동, 어린이, 청소년을 아동으로 통일한다는 것. 개헌특위 자문위는 아동, 어린이, 청소년 등의 용어는 혼용하지 않는다며 이를 ‘아동’으로 통일하는 이유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아동 관련법은 보호와 복지적 시각으로 편성된 법 체계이고 청소년 관련법은 창의육성과 역량 증진적 관점에서 만들어진 법 체계로 근본적 접근방향이 다르다. 아동은 수동적 입장에서의 대상이라는 성격이 강하고 청소년은 자치적이고 주체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일반적 상식이기 때문이다.

개헌특위 자문위는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들어 명칭 통일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듯하나, 이는 국제법상 모델이 되는 포괄적 정의를 기계적으로 해석한 처사다. 실제 유엔은 보통 15~24세를 ‘청소년’으로 정의하고 있는데 이는 유엔 총회 및 유엔 세계실천프로그램(UN’s World program of Action for Youth)에서 청소년을 15~24세의 연령대로 규정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유엔 아동권리협약을 들어 청소년이라는 명칭을 작위적으로 ‘아동’으로 통일한다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정부 또한 올해부터 2022년까지 국가 청소년 정책의 근간이 될 ‘제6차 청소년정책 기본계획’에서 청소년 정책의 확대와 청소년 권리 증진 등을 위해 부처명을 현행 여성가족부에서 여성청소년가족부로 변경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현재 아동 정책은 보건복지부에서, 청소년 정책은 여성가족부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청소년 업무는 이제 복지부에서 다 맡으란 말인지, 공인 청소년지도사는 아동지도사라고 부르란 말인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몇 년 전까지 방송에서는 ‘짜장면’을 ‘자장면’으로 부르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었다. 대다수 국민들이 짜장면을 짜장면으로 부르는데 방송에서만 자장면으로 불렀던 것이다.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청소년 활동, 보호, 복지 등 전문성을 갖추고 체계적 발전을 이룬 청소년 현장의 대중성을 문서상의 용어 변경으로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된다. 청소년 정책의 확산과 전문화된 청소년 권리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에 이게 왠 소리인가.

<이영일 | 한국청소년정책연대 공동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나는 의학의 발전을 믿고 의사의 전문성을 존중한다. 병원의 세련되고 복잡한 기계들에 경탄하며, 매년 받아보는 건강진단 결과표는 늘 경건한 마음으로 정독한다. 외래 진찰실에라도 가는 날에는, 의사 선생님의 말 한마디라도 놓칠까 긴장하고 집중한다.

하지만 잘 알고 있다. 항상 오진의 가능성은 있으며, 첨단 의술도 시간이 지나서 보면 엉뚱한 시도로 판명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을. 맹독성 수은을 만병통치약처럼 사용했던 때가 있었고, 관상이나 머리 모양으로 사람의 성격과 병을 판단하려 했던 관상학과 두개학이 있었다.

조금 더 최근 사례로는, 동성애를 정신질환의 일종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1974년에야 미국정신의학협회는 동성애를 정신질환 목록에서 제외했고, 세계보건기구(WHO)가 성적 지향과 정신적 장애가 무관하다고 규정한 것은 1993년이었다.

WHO는 오는 5월 국제질병분류 11차 개정판을 내놓을 예정인데, ‘인터넷게임장애(IGD)’를 정신건강질환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게임장애 증상은 ‘적절한 게임 플레이 시간 조절 불가’ ‘게임과 여타 행동의 우선순위 지정 장애’ ‘게임으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 무시’ 등을 지칭한다. 이 같은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이들을 정신질환자로 분류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의학적 성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의사 개개인이 출중한 전문적 능력과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있더라도, 집합적 개념으로의 의학계나 의학 관련 단체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리곤 한다.

WHO의 잠정적 결정에 대해 이미 수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게임장애’라는 개념이 비학술적이라는 지적부터, 과다한 게임 플레이를 정신질환으로 볼 수 없다는 실증적 연구 결과들도 축적되었다.

예를 들어 정신건강의학 전공의 한덕현 교수는 게임으로 문제가 되는 사람의 75%는 우울증, 57%는 불안장애, 60%는 강박증을 보이는 등 공존질환이 워낙 많기 때문에 순수한 게임장애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심리학자인 빈(Bean) 교수 등은 게임 중독이 “병리학적 정신 장애로서 안정적인 구조와 높은 수준의 임상적 손상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물질 남용 연구’에 근거를 두고 있는 WHO의 제안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WHO의 실무팀이 의사 결정 과정에 ‘정치적’ 압력이 작용했음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특히 ‘아시아 국가의 관련 이해관계자들’로부터 압력을 받았다고 보고했다. 누가 왜 압력을 가하면서까지 게임을 질병으로 만들려 하는가?

“누가 왜?”라는 질문의 대답은 일단 유보하기로 하자. 대신 WHO의 ‘국제질병분류’라는 작업 자체가 전문적이고 윤리적인 의사 선생님들의 환자를 위한 순수한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만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리고 그 결과는 환자의 양산이다. 15만명의 환자가 새로 생길 것이라는 추산도 있고, 자발적 게임 관련 정신질환자가 되어 군대를 면제받는 경우도 생길 것이라는 농반진반의 예상도 있다. 게임 행동의 병리화가 오히려 치유적 환경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는 타당하다.

빈 교수와 동료들의 연구 논문은 IGD 증상들의 행동 기원에 대한 문화적이고 현상학적인 이해가 부재한다는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의 선의를 믿는다하더라도, 진단-치료라는 의학적 사고가 결국 현상의 역사적, 거시적 이해를 방해한다는 것이다. 게임 장르나 플랫폼의 차이에도 무관심하고 게임 문화나 가상세계 내의 상호작용 등을 고민하지 않은 채 내리는 진단은 200년 전의 두개학과 골상학을 반복하는 짓일 뿐이다. 의학보다는 인류학, 문화연구, 미디어연구 등이 더 적실성을 갖는다.

인간은 재미를 추구하기 마련이다. 과거에 만화나 텔레비전이 그랬듯 게임은 사람들에게 재미를 제공한다. 재미있다고 과도하게 즐기면 건강에도 미래에도 좋지 않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운동도, 독서도, 여행도 너무 많이 하면 부작용이 생긴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놀이나 행위나 대상에 정신없이 빠졌다가 자발적 회복이 이루어지는 경우들을 모두 정신질환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소위 ‘덕후’들을 ‘치료가 필요한 환자’라 명명하고 규정짓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게임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굳이 거론할 필요는 없다. 게임을 잘만 사용하면 교육적 효과를 낼 수도 있다는 주장 또한 부차적이다. 이런 이유로 게임을 상찬하는 것은 옹색하다. 그냥, 작은 즐거움을 찾거나 자투리 시간을 때우는 행위를 질병의 전조나 사회적 병폐로 보지 말자는 제안으로 족하다. 게임을 하면서까지 의사 선생님의 눈치를 봐야 한다면 너무 슬프지 않겠는가.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북한 리용호 외무상과 스웨덴 마르고트 발스트룀 외교장관 간의 회담이 지난 15일부터 사흘 동안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렸다. 양측 간 어떤 합의가 있었는지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북한에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인 3명의 석방 문제가 협의됐을 것으로 관측된다. 스웨덴 외교부가 “스웨덴이 (북한에서) 미국과 캐나다, 호주 국민의 보호권한을 가진 국가로서 회담에선 스웨덴의 영사책임에도 관심을 뒀다”고 한 것이 이런 관측을 뒷받침한다. 스웨덴은 북한에 억류됐다가 의식불명 상태로 풀려난 뒤 사망한 미국 대학생 오토 웜비어 석방 때도 미국 정부를 대신해 북한 측과 협상을 벌인 전례가 있다.

북한에 억류돼 있는 한국계 미국인은 김동철 목사와 평양과학기술대 김상덕(토니 김) 교수, 평양과학기술대에서 농장관리 일을 하던 김학송씨 등 3명이다. 김 목사는 간첩혐의가 적용돼 노동교화형 10년이 선고됐고, 나머지 두 사람은 반공화국 적대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은 영사 접견이 제한되는 등 수감자의 권리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 정부는 그동안 이들의 석방을 요구해왔다. 지난 15일 조지프 윤 전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회담 제의를 받아들인 직후 주유엔 북한 측 관료들과 접촉해 억류 중인 미국인 3명의 석방을 촉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북한이 어떤 결론을 내릴 것인지는 아직 예상하기 어렵다. 회담의 구체적인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발표할 만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북한이 적극 풀어야 할 사안이다. 가급적 빠른 시일 내 억류된 미국인들을 석방,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이들을 석방할 경우 신뢰구축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청와대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6일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이 대화 상대로서 진지한 대우를 받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전한 바 있다. 북한을 제재대상이 아닌 국제사회의 동등한 일원으로 대우해 달라는 뜻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 시대의 북한이 정상국가로 나아가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고 관측한다. 정상국가는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그렇게 본다면 억류된 미국인의 석방은 북한의 이런 의지를 국제사회에 발신하는 기회다.

김 위원장은 대북특사단을 통해 비핵화 의지를 천명했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이를 구체화하려 하고 있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핵·미사일뿐 아니라 인권 분야에서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의당은 17일 전국위원회 회의를 열고 민주평화당과의 공동교섭단체 추진 방침을 의결했다. 평화당과의 협상 결과에 대해 다음 전국위 회의에서 승인하는 절차가 남기는 했지만, 양당의 교섭단체 구성은 사실상 확정적이다. 양당의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평화당(14석)과 정의당(6석)에 더해 공동교섭단체 구성 시 참여하기로 한 무소속 이용호 의원까지 합쳐 21석을 가진 새로운 교섭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현 3개 교섭단체 체제는 4개 교섭단체 체제로 재편 된다. 2008년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선진과 창조 모임’ 이후 10년 만에 공동교섭단체 구성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20대 국회 지형은 또 한번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이정미 대표는 전국위 회의에서 “정의당이 4월과 5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에 기여하고, 우리 당과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논의에 개입하려면 지금이 공동교섭단체를 만들 적기”라고 했다. 맞는 얘기다. 교섭단체가 아닌 소수 정당은 국회 운영 및 의사일정 협상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한반도 평화, 개헌, 적폐청산, 권력기관 개혁 등 굵직한 현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현안 처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때로는 전략적 선택도 필요하다.

정의당 내부에선 당의 정체성, 지방선거에서의 혼란 등을 이유로 반대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충분히 제기될 만한 우려다. 하지만 새 정부 10개월을 돌아보면 과거사 진상규명 등 행정부 재량으로 가능한 것은 그나마 진전이 있는 편이지만, 국회 차원의 입법이 필요한 제도적 개혁은 대부분 답보 상태다. 선거제도, 검찰개혁 등 각종 개혁입법과제는 보수야당의 발목잡기에 가로막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촛불정신의 핵심인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이 진행되지 않는 병목은 바로 국회다. 국회로 촛불이 옮겨붙어야 한다”(박석운 퇴진행동기록기념위 공동대표)는 말이 나오겠는가.

지금은 촛불민심을 받든 수많은 개혁과제를 현실화하기 위해 국회의 실질적 입법활동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러한 때 양당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은 진보진영의 확실한 결집을 통해 공동목적을 함께 이룰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두 당이 손잡아 소수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적한 현안에서 더 강한 목소리로 소외된 민의를 대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의당은 17일 전국위원회 회의를 열고 민주평화당과의 공동교섭단체 추진 방침을 의결했다. 평화당과의 협상 결과에 대해 다음 전국위 회의에서 승인하는 절차가 남기는 했지만, 양당의 교섭단체 구성은 사실상 확정적이다. 양당의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면 평화당(14석)과 정의당(6석)에 더해 공동교섭단체 구성 시 참여하기로 한 무소속 이용호 의원까지 합쳐 21석을 가진 새로운 교섭단체가 등장하게 된다. 현 3개 교섭단체 체제는 4개 교섭단체 체제로 재편 된다. 2008년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선진과 창조 모임’ 이후 10년 만에 공동교섭단체 구성이 눈앞으로 다가오면서 20대 국회 지형은 또 한번 변화를 맞게 된 것이다.

이정미 대표는 전국위 회의에서 “정의당이 4월과 5월 한반도 평화를 위한 대화에 기여하고, 우리 당과 대한민국의 운명이 걸린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논의에 개입하려면 지금이 공동교섭단체를 만들 적기”라고 했다. 맞는 얘기다. 교섭단체가 아닌 소수 정당은 국회 운영 및 의사일정 협상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힘든 게 현실이다. 한반도 평화, 개헌, 적폐청산, 권력기관 개혁 등 굵직한 현안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현안 처리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때로는 전략적 선택도 필요하다.

정의당 내부에선 당의 정체성, 지방선거에서의 혼란 등을 이유로 반대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충분히 제기될 만한 우려다. 하지만 새 정부 10개월을 돌아보면 과거사 진상규명 등 행정부 재량으로 가능한 것은 그나마 진전이 있는 편이지만, 국회 차원의 입법이 필요한 제도적 개혁은 대부분 답보 상태다. 선거제도, 검찰개혁 등 각종 개혁입법과제는 보수야당의 발목잡기에 가로막혀 한 치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오죽하면 “촛불정신의 핵심인 적폐청산과 사회대개혁이 진행되지 않는 병목은 바로 국회다. 국회로 촛불이 옮겨붙어야 한다”(박석운 퇴진행동기록기념위 공동대표)는 말이 나오겠는가.

지금은 촛불민심을 받든 수많은 개혁과제를 현실화하기 위해 국회의 실질적 입법활동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러한 때 양당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은 진보진영의 확실한 결집을 통해 공동목적을 함께 이룰 수 있게 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두 당이 손잡아 소수당의 한계를 극복하고 산적한 현안에서 더 강한 목소리로 소외된 민의를 대변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방분권과 지방자치를 강화하기 위한 기초의원 4인 선거구 신설안이 광역시·도의회 문턱에서 좌초하고 있다. 지난 13일 대전시의회는 본회의를 열어 대전시 선거구획정위원회가 마련한 기초의회 4인 선거구 2곳 신설안을 종전과 같이 다시 2인 선거구로 만들어 통과시켰다. 14일에는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의원으로만 구성된 경기도의회 행정안전위원회가 4인 선거구 2곳 신설안을 전면 폐지해 모두 2인 선거구로 되돌려놓았다. 부산·대구시의회와 경남도의회 등도 같은 일을 벌이고 있다. 두 거대 양당의 시·도 의원들이 소수 정당의 진출을 원천봉쇄하고 있는 것이다. 사사건건 싸우는 두 당이 기득권을 지키는 데는 똘똘 뭉치고 있다.

민주당과 한국당의 지방의회 독점은 심각하다. 2014년 지방선거 때 대전의 기초의원 당선자 54명 중 민주당(당시 새정치민주연합)은 28석, 한국당(새누리당)은 26석이었다. 다른 당은 단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전국적으로 기초의원 당선자의 47.9%와 39.3%를 두 당이 나눠 가졌다. 이래 가지고는 시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지역사정에 맞게 반영하는 지방자치가 실현될 수 없다. 대동맥은 대동맥대로, 실핏줄은 실핏줄대로 기능해야 건강한 몸을 유지하는 것과 같다. 이런 의석 독점이 가능한 이유는 한 지역구에 의원을 두 사람씩 뽑는 제도 탓이 크다. 선거구를 잘게 쪼개 소수의 인원을 뽑다보니 인지도 높은 정당 후보들만 당선되고 소수 정당 후보들은 밀려나는 것이다. 이런 폐해를 보다 못한 시민사회가 추진한 것이 4인 선거구 확대다. 지역구를 넓혀 4명을 뽑으면 좁은 지역에서 두 명을 선출할 때 사장되던 표들도 당선자를 낼 수 있지 않으냐는 것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은 시·도의회가 지방의회 선거구 및 의원정수를 조례로 정할 때 선관위가 중심이 되어 만든 선거구획정안을 존중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번의 경우 선거구획정위안대로 해도 4인 선거구는 65곳으로 전체의 6.6% 밖에 안된다. 2인 선거구가 49.1%로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도 이마저 용납하지 못하겠다면 민주당과 한국당은 풀뿌리민주주의를 입에 올릴 자격이 없다. 특히 정치개혁 운운하며 지방분권을 위해 개헌까지 하겠다는 민주당이 이런 일을 거드는 것은 몰염치하다. 민주당과 한국당은 지방의회가 하는 일이라며 방치하지 말고 즉시 나서서 선거구 획정을 바로잡아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봄은 ‘잔인한 계절’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봄은 그랬다. 4월 남도부터 5월 광주까지 한국의 봄은 슬픔으로 열렸고, 동족 간 전쟁 이후 늘 ‘긴장의 시절’이었다.

올봄은 참 흔치 않은 날들로 기록될 것 같다. 긴장과 슬픔 대신 미약하지만 ‘희망’의 기운을 품은 바람이 마음을 어루만진다. 북·미 정상 간 만남 가능성에 전문가들은 4·5월 한반도의 운명사적 전환을 입에 올린다. 지난 몇 개월, 그 어느 때보다 사나운 겨울과 깊은 위기를 건너왔기에 이 봄은 더 반갑고 소중하다. 깰까 조바심치는 꿈처럼 느껴진다.

140여년 전 일본 주재 청 외교관 황쭌셴의 <조선책략>(1876년)의 핵심은 ‘일본’이었다.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에 집약된 책략의 본질은 ‘러시아 견제’였고, 일본을 활용하라는 조언이었다. 황쭌셴으로선 18년 뒤 한반도를 놓고 청과 일본이 피를 흘리는 상황은 전혀 짐작도 못한 셈이다. 그는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던 그해(1905년) 사망했다.

구한말처럼 열강의 이해가 복잡하게 부딪치는 격변의 공간에선 불변의 외교안보 원칙이란 없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이리가 될 수 있기에 현실은 그런 사치를 허용하지 않는다. 변덕스러운 인간 마음만큼이나, 시시각각 달라지는 게 국가의 욕망이다. 안보에서 국익은 유연해야 하며 예민해야 한다.

무능한 인조는 항서를 찢은 김상헌과 항서를 쓴 최명길 모두를 향해 “그대도, 그대도 충신이요”라며 울부짖었다. 한참 늦은 후회였다. 일찌감치 모두 맞고 모두 틀릴 수 있다는 실용으로 접근했다면 역설적으로 남한산성에서 항서를 짓는 굴욕은 없었을 게다.

이 드문 봄날에 과거의 실패를 다시 불러낸 것은 우리 현실 때문이다. 일각에 불과하지만 삼일절에 ‘일장기’가 등장하고, 성조기를 흔들며 “전쟁불사”를 외치는 정치가 존재하는 현실이다. 제1야당은 북·미 정상의 대화 합의에 “안보 쇼”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이처럼 정치가 외교안보를 대하는 태도는 여전히 사려 깊지도, 교훈적이지도 않다. 그들은 시시각각 변하는 외교안보의 이해관계를 ‘정치적 신념’ 대하듯 한다.

외교안보의 기준은 ‘국익’이다. 이를 부인할 정치세력은 없다. 그럼 국익의 본질은 무엇인가. ‘평화’다. 적어도 근대 이후 국가의 존립 목적이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라면 국익의 궁극적 모습은 ‘평화’일 수밖에 없다. ‘평화보다 더한 국익은 없다’는 경구는 그래서 나온다. 전쟁조차 평화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일 뿐이다. ‘안보’는 곧 평화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안보 문제에 정파가 없다는 것은 시각과 견해의 차이가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차이가 없는 가장 명료한 명제에 기초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게 안보를 대하는 정치의 자세다. 그 나머지는 안보를 이용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국익은 ‘비전(非戰)·비핵(非核)’이다. 전쟁과 핵 없는 한반도는 어느 하나 양보할 수 없는 지금 국가의 존립적 가치다.

물론 비전과 비핵이 맞서는, 어느 한쪽은 선택해야 하는 ‘진실의 순간’이 올 수 있다. 그 ‘신의 시간’에 민심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그것이 궁극적 평화라는 국익을 향하기 위해서도 비전과 비핵은 모두 존중받아야 한다. 최선을 다해 할 것을 다해 봤을 때 민심은 다시 한마음으로 달려갈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안보에 겸손하지 못한 정치, 즉 안보의 적들을 허용해선 안되는 이유다.

이 드문 봄날에 오직 한 곳 예외적인 그들의 모습은 결국 선거(6·13 지방선거) 때문이리라. 비전·비핵에 기초하기보단, 얕은 정치적 이해의 동굴에 숨어 외쳐대는 소음들이다. 지지층 모으기에 함몰된 탓이다.

실상 그런 정치 때문에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은 북핵의 시간표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통일은 도둑처럼 올 수 있다”(이명박 전 대통령), “통일은 대박”(박근혜 전 대통령) 등 허망한 ‘붕괴론’에 사로잡혀 손을 놓은 동안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고도화하며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는 지경으로 내달렸다. 중국을 설득해 단단한 압박 대오를 만든 것도 아니었고, 미국·북한을 움직여 핵시간표를 늘린 것도 없었다. 그들이 보수 지지층 환호 속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한반도는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지금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 드문 봄이 결코 실패해선 안될 절실한 기회임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속에 그들의 역할도 있다. 분단 이후 ‘시시포스의 형극(荊棘)’이 된 한반도 평화는 어떤 순간, 어떤 상황에서도 굴려가야 할 ‘운명의 바위’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는 역사에서처럼 ‘안보의 적’들이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시간 동안 잔뜩 ‘심지가 짧아진 폭탄’을 떠넘긴 역사적 책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세상을 살다보면 상상보다 더 빠르게 현실이 변하거나 상상을 뛰어넘어 현실이 펼쳐지는 경우를 가끔씩 목격하게 된다. 바로 지금의 남북관계, 북·미관계가 그렇다. 불과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북한의 핵전쟁 도발 가능성까지 점쳐지면서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 것 같았는데, 극적으로 북한이 평창 올림픽에 참가하고 남북대화가 급물살을 탔다. 급기야 다음달 우리는 분단 이후 최초로 북한 최고지도자가 남한 땅을 밟는 장면을 마주할 것으로 전망된다. 나아가 서로 질세라 독기 가득하게 살벌한 말을 주고받던 미국과 북한 최고지도자들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것이다. 이런 변화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놀라울 따름이다. 이런 상황 변화를 이끌어낸 우리 정부의 노력이 빛난다.

이런 화해 분위기 속에서 남북 에너지협력을 꿈꿔본다. 에너지는 우리 삶을 떠받치는 기초다. 에너지 없이는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의식주가 해결될 수 없으니 생존 자체가 어렵다. 북한의 에너지 형편을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북한 스스로 정확한 통계를 가지고 있지 않은 데다 외부에 제대로 공표하지도 않고 공표되는 통계들조차 서로 달라 신뢰하기 어렵다. 하지만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북한의 에너지 사정은 동구권이 붕괴된 1990년 초 이래 날로 악화되는 추세를 보인다. 1990년에 2396만TOE(석유환산톤)였던 총공급량이 2016년에는 991만TOE로 절반 이상(58.6%) 감소했다. 1인당 공급량은 같은 기간 1.19TOE에서 0.40TOE로 무려 3분의 1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는 세계 평균의 21.5%에 불과하다.

나는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에 북한의 에너지 소비 실태와 남북 에너지협력, 특히 재생가능에너지협력에 대해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북한의 에너지 이용에 대한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새터민(북한 이탈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와 심층면접을 실시했다. 조사를 통해 북한에서는 에너지 부족으로 경제활동이 전반적으로 위축되었고 주민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새터민들은 남한보다 훨씬 추운 날이 많은 북한에서 난방연료가 부족해 겨울철에조차 난방을 하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고, 1990년대 중반 이후로는 온수를 사용한 적이 거의 없다고 말했다. 주택 단열은 물론이고 내복조차 입을 형편이 못되었으며, 병원과 학교에 갈 때는 직접 땔감을 가져가야 한다고 말했다. 식량이 없어서도 문제지만 식량이 있는 경우에도 밥 지을 연료가 없어 여러 끼 식사를 한 번에 준비했던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벌써 10년 전 조사였다. 지금은 어떨까? 통계자료에 따르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남북왕래가 동결되고 민간 차원에서의 교류도 현저하게 줄었으며 통일기반 구축 연구과제에 대한 지원도 줄었다. 에너지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에너지 위기 상황에서 북한이 악순환의 고리를 스스로 끊고 이 위기를 극복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어떻게든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것만이, 어떤 에너지인지를 불문하고 공급을 확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기후변화시대, 에너지전환의 시대라 불리는 현시점에서 남한은 물론 대부분의 산업국가들에서 확대재생산 되어 온, 화석연료와 원자력 중심의 중앙집중적 에너지체제의 구축과 강화라는 전철이 반복되어서는 곤란하다. 그런 체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재생가능에너지에 기반한 분산적인 에너지체계로 진행하면서 주민의 에너지 기본권을 보장해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관심과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남북대화와 북·미대화가 열어줄 화해 분위기가 남북에너지협력의 창을 열어주기를 기대해본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일본 드라마 <우리 집엔 아무것도 없어>의 주인공 마이는 매일같이 무언가를 버리지 못해 손이 근질거리는 ‘버리기 마녀’다. 학창 시절 졸업앨범부터 남편과 연애할 때 주고받은 커플링까지 필요 없는 것은 일단 버리고 본다. 일본에서 정리 노하우를 소개한 블로그로 인기를 끈 일러스트레이터 유루리 마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그렇다고 극단적으로 모든 것을 버리자는 것은 아니다. 마이는 최소한의 물품만 갖춘 집에서 살고 있다. 결론은 필요 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나니 집도 넓어지고, 청소하기도 편해 오히려 머물고 싶은 집이 됐다는 해피엔딩이다.

무엇을 채울지보다 어떻게 비울지는 비단 사적 공간인 집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공적 공간도 마찬가지다. 도시의 대표적인 공적 공간으로는 광장을 꼽을 수 있다. 광장 역시 깨끗이 비워질수록 매력적이다. 비어 있지만 사람들의 일상으로 다시 채워지는 공간, 그곳이 사람들이 내 집처럼 머물고 싶은 광장이다. 서울 도심에도 서울광장과 광화문광장이 있다. 안타깝지만 두 곳 다 머물고 싶은 광장과는 거리가 있다. 서울광장은 사방이 도로로 둘러싸여 접근성이 떨어지고, 광화문광장은 차량소음으로 시끄럽다. 무엇보다 꽃밭, 전시관, 동상 같은 화려한 시설물만 있을 뿐 한여름 뙤약볕을 피하기도 어렵고, 편히 앉을 수 있는 공간도 마땅하지 않다.

버리기 마녀에게 광장 정리를 맡겨보자. 아마도 광장에 있는 시설물을 다 없애자고 하지 않을까. 그중에서도 서울광장의 잔디를 가장 먼저 치우자고 할 것이다. 애초 광장에 잔디를 심은 것은 아이러니다. 그나마 잔디보호 때문에 들어가지 못하는 때도 많다. 광화문 도로 한가운데에 중앙분리대로 만들어 놓은 광화문광장 또한 그렇다. 이순신 장군 동상 뒤로 세종대왕 동상이 광화문을 가로막고 있어 시야를 가린다.

언젠가 유럽을 여행하다 가본 광장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들은 노천카페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계단에 앉아 책을 읽거나 잡담을 나누었다. 때론 떠들썩한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유럽 광장이 좋아 보이니 무조건 베끼자고 조르는 건 아니다. 광장이 일상의 연속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두 광장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긴 하다. 이명박 시장과 오세훈 시장 시절 광장을 조성하면서 사실상 폐쇄형 광장으로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자. 그래도 광장이 여전히 전시행정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할 텐가. 일년의 대부분 전국 특산물을 파는 시장이나 이벤트성 홍보 행사가 열린다. 정작 시민이 광장을 이용하려면 서울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서울, 도시의 품격>의 저자 전상현은 ‘공간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 인식이 형성되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시민들은 공공 공간을 통제하는 권력의 부당한 태도에 그다지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 같아요. … 민주 시민사회의 공공 공간은 분명 시민이 요구하고 전용할 수 있는 공간인데도 말이죠.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여전히 공공 공간을 정부가 계획·통제·관리하는 공간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이탈리아 건축학자 프랑코만 쿠조는 <광장>에서 “광장 없는 도시는 죽은 도시”라고 했다. 다행히 지난해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계획을 밝혔던 서울시가 ‘녹색교통진흥지역’으로 지정된 한양도성 내부 주요 도로를 올해 4∼6차로로 줄이고 보행 공간으로 바꾼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광화문광장은 그동안의 고립된 ‘교통섬’에서 벗어나 찻길 없는 ‘진짜’ 광장이 된다. 자동차 방해를 받지 않고 잠시 쉴 수 있는, 허가받지 않아도 이용할 수 있는 그런 광장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 그러다 촛불을 들어야 한다면 광장에 모여 다시 촛불을 들면 된다.

<이명희 전국사회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명박 전 대통령이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에 출석한 다섯 번째 전직 대통령이 됐다. 14일 서울중앙지검 포토라인에 선 이 전 대통령은 “참담한 심정”이라며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는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지만 말을 아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다. 바라건대 역사에서 이번 일로 (전직 대통령 수사가) 마지막이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뒤늦게 대국민 사과를 하기는 했으나, 검찰 수사가 정치보복이라는 생각은 접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도 알 길이 없다. ‘뇌물 혐의를 인정하는가’ ‘다스는 누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등의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정성 있는 반성과 사죄를 기대했던 주권자들은 또 한 번 배신당했다.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해 만 하루에 가까운 21시간만에 조사를 마친 이명박(77) 전 대통령이 15일 오전 6시25분에 검찰청사를 나서며 차에 오르고 있다. 김기남 기자

이 전 대통령의 일성(一聲)에 비춰 볼 때 그가 어떤 태도로 조사에 임했을지는 짐작할 만하다. 이 전 대통령은 진술을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범죄 혐의 대부분을 부인했다고 한다. 검찰이 ‘이 전 대통령이 실소유주’라고 판단한 다스·도곡동 땅 등 차명 의심 재산에 대해 “나와는 무관하다”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17억여원 수수, 삼성전자의 다스 소송비 60억원 대납 등과 관련해서도 ‘지시·관여한 바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MB의 집사’로 불리는 김백준 전 청와대 총무기획관 등의 자백을 비롯해 상당한 정황이 확보된 상황임에도 부인으로 일관한 것이다. 애당초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밝힐 뜻이 없었음을 말해준다. 출석 전날 측근인 김효재 전 정무수석을 통해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변호인단 구성에 어려움이 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 정도이니 딱히 놀랄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이 전 대통령의 혐의를 입증할 만한 증거는 차고도 넘친다. 청와대를 개인적 치부의 발판으로 삼고, 국고를 ‘사금고’처럼 여기며, 공직 임명을 돈과 맞바꾼 흔적은 부끄러우리만치 노골적이다. 이 전 대통령은 국가 최고지도자를 지낸 사람으로서 모든 진실을 털어놓고 용서를 구할 마지막 기회를 저버렸다. 검찰은 더 이상 좌고우면할 필요가 없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는 불가피하다. 뇌물수수 혐의를 받는 액수만 100억원을 넘어서고 공범들도 이미 구속된 터에 ‘반성하지 않는 주범’에게 불구속 기소의 은전을 베푸는 것은 명분에 맞지 않다.

적폐는 뿌리째 뽑아내지 않으면 언젠가 반드시 재발한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검찰은 이 전 대통령의 불법행위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물음으로써 법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바란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문재인 대통령이 13일 직속기구인 국민헌법자문특별위원회로부터 정부 개헌안의 토대가 될 헌법 자문안을 보고받았다. 문 대통령은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늦지 않게 대통령 개헌안을 확정해 국민께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청와대 관계자는 오는 21일 개헌안을 발의할 것이라고 말했다. 개헌안이 공고된 날로부터 60일 이내에 국회가 의결해야 한다는 절차를 감안해 6·13 지방선거 때 개헌하려면 늦어도 이날에는 발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헌의 중심이 되어야 할 국회는 논의조차 하지 않는데 대통령은 착착 개헌을 준비하고 있다. 참 이상한 개헌이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헌법이 규정한 권한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6·13 지방선거 때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함께 실시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그러니 문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 그 자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문제는 시민의 뜻을 물어 개헌을 주도해야 할 국회가 개헌 논의를 진척시키지 않고 있는 점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을 제외한 자유한국당 등은 개헌안조차 제출하지 않았다. 특히 한국당은 지방선거 때 개헌안 국민투표 실시를 홀로 반대하고 있다. 대통령 권한을 줄이는 개헌이 되어야 한다면서 당내 의견조차 제대로 수렴하지 않고 있다. 4년 연임 대통령제 개선안을 두고도 문 대통령 퇴임 후 민주당이 최대 8년까지 정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몰아붙이고 있다. 과거 자신들이 4년 연임제를 주장하고 지방선거 때 투표하자고 공약한 사실을 잊은 듯하다.

문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은 야당을 압박해서라도 개헌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헌안을 통과시키려면 국회의원 3분의 2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지금처럼 야당이 모두 반대하는 한 개헌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개헌을 밀어붙이다 개헌안이 부의조차 되지 못하면 모처럼 마련한 개헌의 기회마저 날릴 수 있다. 개헌을 무산시킨 책임을 야당에 지우면 당장 지방선거에서 유리할지 몰라도 문 대통령에게 돌아갈 비난도 적지 않다. 지금이라도 한국당이 개헌안을 내놓고 여야가 밀도있게 논의하면 개헌할 수 있다. 지난 1년간 여야는 개헌에 대해 의견을 모아왔다. 당장 개헌 시기를 결정하기 어렵다면 개헌안의 내용을 합의하는 차선책이라도 마련해야 한다. 30년 만에 시민의 권리장전을 새로 쓰는 개헌의 주객을 바꿀 수는 없다. 대통령의 개헌안 발의는 최후의 수단이다. 개헌은 국회가 주도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997년 7월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박노해 시인의 에세이 <새벽에 길어올린 한 생각>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천주교 인권위원회가 마련한 출판기념회에선 황지우 시인이 축시를 낭송하고, 가수 장사익·정태춘·박은옥이 축하공연을 했다. 출판기념회는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할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만 정작 책의 저자는 없었다. 당시 박 시인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감옥에 갇혀 있었지만 책은 출판기념회를 통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1998년 12월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서간문집 <이희호의 내일을 위한 기도>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현직 대통령 부인의 출판기념회여서 정·관계 인사와 문인, 여성계 인사 등 1000여명이 모였다. 이 여사의 출판기념회는 책의 출간을 알리려는 목적보다는 당시 외환위기 여파로 어려움을 겪던 서민들을 돕기 위한 일종의 ‘모금 행사’ 성격이 짙었다. 실제로 이 여사의 인세 수입과 출판기념회 수익금 전액은 불우이웃돕기에 쓰였다.

출판기념회는 저자와 지인들이 집필의 고통과 출간의 기쁨을 함께 나누는 행사다. 하지만 선거철에 정치인들이 여는 출판기념회는 선거자금 모금수단이 된 지 오래다. 올해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치인들의 출판기념회가 기승을 부렸다.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에게 출판기념회는 ‘선거 밑천’을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후보에게 눈도장을 찍어야 하거나 이른바 ‘보험’을 들어야 하는 이들에겐 출판기념회 초대장이 ‘현금 납부 고지서’나 다름없다. 정치인 출판기념회에서 책값으로 수천만원을 내도 공직선거법이나 정치자금법, 부정청탁금지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더구나 회계장부를 남기거나 신고해야 할 의무조차 없다.

400쪽짜리 책 100권이 만들어질 때마다 30년 된 나무 한 그루씩 사라진다고 한다. 정치인 출판기념회에서 정가보다 수십~수백배 많은 돈을 내고 구입한 함량미달의 책들은 쓰레기통에 버려지기 일쑤다. 정치인들에게 ‘책에 대한 예의’를 갖추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렇지 않으면 ‘책 모독 금지법’ 제정을 위한 입법 청원운동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박구재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4차례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김지은씨가 2차 가해를 멈춰줄 것을 호소했다. 김씨는 12일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에 “더 이상 악의적인 거짓 이야기가 유포되지 않게 도와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김씨는 편지에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하고 숨죽여 지내고 있다. 신변에 대한 보복도 두렵고, 온라인을 통해 가해지는 무분별한 공격에 노출돼 있다”고 했다. 김씨가 지난 5일 방송에 출연해 “국민들이 저를 조금이라도 지켜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은 성폭행 피해 사실 폭로 이후 감당하기 어려운 2차 피해를 예견했기 때문이다. 김씨의 이런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가 어떤 식으로 가공되고 유포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비서 성폭행 의혹을 받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9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검에 자진출석하고 있다. _우철훈 선임기자

 

 

김씨는 성폭행 피해 사실을 폭로한 이후 인격살해와 다름없는 2차 피해를 당했다. 온라인 커뮤니티와 블로그 등에서는 김씨의 학력·나이·결혼 여부 등 신상정보는 물론 ‘성폭력을 가장한 정치공작’ ‘아버지가 과거 정치활동을 했다’ 등과 같은 터무니없는 루머가 급속도로 번졌다. 법무부 고위 간부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서지현 검사도 근거 없는 소문으로 개인의 인격이 무참하게 짓밟히는 2차 피해를 당했다. 오죽하면 서 검사가 검찰진상조사단에 출석해 허위 소문에 대한 수사까지 요청했는가.

서권천 변호사는 지난 7일 정봉주 전 의원에게 성추행당했다는 피해자의 주장을 비꼬면서 “(피해자가) 7년 전 일을 막 나눴던 대화처럼 기억하고 있다. 피해자의 천재성에 감탄한다”는 글을 트위터에 올렸다. 부산지역 정치인은 성폭행 피해자를 모욕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시당으로부터 제명조치됐다. 성폭력 피해 여성들의 외침을 가로막고, 그들을 불순한 존재로 만들어 고립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2차 가해가 아닐 수 없다. 성폭력 가해자 가족에 대한 과도한 비난과 악성 댓글도 근절돼야 한다. 일부 누리꾼들은 배우 고 조민기씨 등 성폭력 가해자 가족의 신상정보와 사진을 찾아 인터넷에 올리거나 저주 섞인 악담을 퍼붓고 있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는 들불처럼 번져가는 미투 운동을 가로막는 또 다른 폭력이다. 2차 가해는 직접적인 성폭력에 버금가는 범죄 행위와 다를 바 없다. 미투 운동의 성패도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를 막는 데 달려 있다. 성폭력 피해자를 2차 가해로부터 보호하는 집단지성의 촘촘한 그물망을 만들어야 미투 운동을 더욱 확산시킬 수 있다.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2차 가해자를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해 대법원이 선고한 재판 중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들이 수임한 사건이 440건으로 전년보다 67%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경향신문이 대법관 출신 변호사들이 참여한 사건들을 전수조사한 결과 2016년 대한변호사협회가 조사했던 263건보다 177건 더 늘어났다. 대법원은 2016년 대형 법조비리사건인 ‘정운호 게이트’가 터지자 전관예우 관행을 근절시키겠다며 여러 가지 대책을 내놓은 바 있다. 하지만 대법관 출신 상고심 수임은 줄기는커녕 오히려 늘어났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와 하루라도 같이 근무한 대법관은 주심에서 배제하겠다고 했지만 역시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신영철 전 대법관이 지난해 수임한 대법원 사건 중 5건은 근무시기가 겹치는 대법관들에게 배당된 것으로 밝혀졌다. 얼마 전 차한성 전 대법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공여 사건 상고심에 변호인을 맡았다가 여론의 호된 비판을 받고 사퇴한 바 있다. 전관예우 근절 대책이란 게 헛구호에 그치고 있는 셈이다.

대법관 출신 변호사가 사건을 수임할 경우 동료 대법관이나 후배 법관들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고 때로는 부당한 압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전직 대법관이 변호인 명단에 이름만 올려도 판사들이 움찔하고, 도장만 찍어주고 건당 수천만원 이상을 받는다는 건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비싼 돈을 주고라도 대법관 출신 전관 변호사를 상고심에 내세우는 이유는 그의 대법원 내 연고를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뻔하다. 1, 2심 때는 빠져 있다가 뒤늦게 변호인단에 들어간 것도 이름값에 기대 재판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최고법관 출신이 변호사 개업을 해서 돈을 버는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 미국은 대법관이 종신직이고, 70세가 정년인 일본은 퇴임 후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 것이 불문율로 통한다.

전관예우 관행은 범죄와 다를 바 없다. 전직 판사나 검사가 맡은 소송이라고 해서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건 재판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짓밟는 처사다. 시민들의 법감정과 상식에도 어긋난다. 그러나 대법원의 대책은 아직 허술하고 엉성해 보인다. 직업 윤리와 정의를 스스로 지키지 못한다면 법으로 규제할 수밖에 없다. 전직 대법관들의 돈벌이 변호를 막는 입법이 반드시 필요하다. 전관 변호사의 수임료를 모두 공개하고, 재판부와 변호인의 연고관계를 밝히는 등의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정의당 소속 의원들이 지난 11일 긴급 의원총회를 열고 민주평화당과 공동교섭단체 구성을 적극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노회찬 원내대표는 12일 당무위원회에서 각종 민생 입법과 선거법 개정 등 촛불시민이 요구한 개혁이 지지부진하고 있다며 “국회 내에서 더 강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평화당과의 공동교섭단체 추진을 결의했다”고 설명했다. 오는 17일 정의당 전국위원회 추인이 남아 있지만 평화당(14석)과 정의당(6석)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은 성사될 가능성이 높다. 2008년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의 ‘선진과 창조 모임’ 이후 10년 만에 두 정당의 공동교섭단체 실험을 다시 보게 될 것 같다.

두 당의 공동교섭단체 추진은 한국 정치에서 소수당의 입지가 얼마나 약한지를 보여준다. 교섭단체가 아닌 정당은 국회의 법안과 예산 처리에서 의사를 반영하기 매우 어렵다. 교섭단체만이 국회 운영 및 의사일정 협상에 대표를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고보조금 배분에서도 크게 손해를 본다. 이처럼 과도한 차별이 벌어지는 이유는 국회법이 교섭단체 의석수를 20명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교섭단체 구성 문턱을 높여 소수당을 배제한 결과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벌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은 선거제도에 있다. 현행 선거제도는 소선거구제로 지역구별로 1명만을 뽑는데 당선자를 만들어내지 못한 표는 모두 사장된다. 정당의 득표수에 따라 배분하는 비례대표가 있지만 그 숫자가 압도적으로 적어 소수 의견을 반영하는 데 한계가 있다. 게다가 양당 체제는 두 당이 극한 대립을 할 경우 국정을 마비시킨다. 다원화 사회에서 소수파·약자 등 다양한 의견과 이해를 반영하는 것이 필수인데, 현행 선거제도와 문턱 높은 교섭단체 규정이 그 흐름을 거스르고 있다.

보수당들은 평화당과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 추진을 비판하고 있다. 당의 정체성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정치권의 최우선 과제는 유권자의 뜻을 정확히 의석에 반영할 수 있게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다. 시민의 대표를 뽑는 것부터 제대로 해야 개헌도 가능하다. 비례성의 원칙을 대폭 강화한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는 선거제도 개혁안이 이미 제출돼 있다. 양당제의 폐해를 줄이며 시민의 의사를 왜곡 없이 반영하는 비례대표 확대는 세계적인 흐름이다. 평화당과 정의당의 공동교섭단체 구성의 제1 목표도 당연히 선거제도 개혁이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미투 운동은 용기 있는 소수의 고발자들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폭 넓은 사회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소수의 고발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젊은 여성들은 이제 더 이상 남성들이 만들어놓은 문화와 규칙에 동의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 근거는 최근의 여론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한 정치적 견해의 젠더 갭(성별 분리 현상)이다. 오랫동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는 지역과 이념이었고, 불과 10여년 전부터 세대가 또 하나의 변수로 등장했다. 그런데 최근의 조사에서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뚜렷한 젠더 갭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자. 올림픽 직전에 대통령 지지율이 유의미하게 낮아졌고, 세간에서는 가상통화 규제와 남북 단일팀 구성이 그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동계올림픽이 진행되고 특사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여론은 또다시 요동쳤다. 어떻게 달라졌을까.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이 결정된 1월17일에 있었던 리얼미터 조사에서 남북 모두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해야 한다는 응답은 20대에서 38.9%로, 60대(27.0%)에 이어 두 번째로 낮았다. 그러나 한 달 후인 2월20~22일 실시된 한국갤럽의 조사에서 한반도기 공동 입장이 잘된 일이라는 응답은 20대에서 73%로 모든 세대를 통틀어 가장 높았다. 같은 응답자에 대한 반복조사가 아니기 때문에 직접 비교는 무리가 있지만,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20대 여론에 일대 반전이 있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또 한 번의 반전이 있다. 20대 평균은 73%이지만, 남성 20대는 62%로 여전히 60대(54%)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지지를 보이는 반면 여성 20대는 85%로 압도적으로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 20대 내부에서 성별 차이는 무려 23%포인트에 달한다. 20대 여론의 반전으로 보였던 것은 사실은 20대 여성 여론의 반전이었던 것이다. 같은 조사에서 광주·전라의 지지율은 85%였고 대구·경북의 지지율은 57%였으니,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간주되곤 하는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가 28%포인트였다. 적어도 20대 내부에서 젠더 갭은 이제 지역 못지않게 중요한 변수로 등장한 것이다.

이걸로 끝이 아니다. 같은 조사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도 20대 남성은 43%만 잘된 일이라고 평가해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낮은 반면 20대 여성은 59%로 모든 세대에서 가장 높은 지지를 보냈다. 이 사안에 대해 광주·전라와 대구·경북의 차이가 21%포인트였는데, 20대 내부의 젠더 갭은 16%포인트로 역시 만만치 않은 파급력을 보여줬다.

20대가 아닌 다른 세대에서 성별 차이는 어떨까. 앞서 언급한 갤럽조사 중 한반도기 공동입장에 대해서는 세대별로 성별 분리 효과가 적게는 3%포인트에서 많게는 7%포인트의 차이를 보이는데, 20대의 23%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적다. 그나마 50대 이상에서는 성별 견해의 순위가 역전되어 여성보다 남성의 찬성률이 더 높게 나타난다.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대해서는 젠더 갭 효과가 적게는 1%포인트에서 많게는 5%포인트의 차이를 보여서 역시 20대의 16%포인트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다. 이번에도 역시 성별 견해의 순위가 50대 이상에서는 역전되어 젊은층에서는 단일팀 구성에 대한 지지가 여성이 더 높고 50대 이상에서는 남성이 더 높다.

다소 길게 수치를 인용했지만, 일관된 발견들을 요약하면 세 가지다. 첫째, 기성세대 여성들은 정치적 견해에 있어서 남성과 별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20대 여성은 뚜렷한 차이를 나타낸다. 둘째, 정치적 견해차의 크기가 아니라 방향에 주목하면, 기성세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보수적이고 20대 여성은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다. 셋째, 20대에서의 젠더 갭 효과는 한국 정치의 최대 변수로 불려왔던 지역 간 차이의 최대치에 견줄 수 있을 만큼 크다. 20대 유권자의 수는 약 676만명인데, 특정 정치 사안에 대해 한반도기 공동입장의 경우처럼 23%포인트의 차이를 보인다면 얼추 계산해도 100만표 정도는 쉽게 왔다갔다 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미국 정치에서 유권자의 젠더 갭이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이미 1990년대부터다. 빌 클린턴은 1996년 대선에서 여성 표의 54%를, 그리고 남성 표의 43%를 가져갔다. 그는 공화당 후보였던 밥 돌에 비해 800만표를 앞섰는데, 여성 표에서 앞선 것이 1100만표였다. 그 이후 대부분의 주요 정책 영역에서 여성과 남성은 20%포인트 내외의 견해차를 기록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이제 젠더 정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각 정치세력들은 미투 고발을 지방선거용으로 소비하려 하기보다 미투가 필요 없는 세상을 위해 시급하고도 진지하게 장기 대책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그래야 할 정치적 이유도 충분하다. 100만표가 걸려있지 않은가.

<장덕진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중국 공산당은 이념의 중요도에 따라 ‘주의’ ‘사상’ ‘이론’ ‘관’ ‘론’을 뒤에 붙인다. 마르크스-레닌 ‘주의’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마오쩌둥 ‘사상’이고 덩샤오핑 ‘이론’이 뒤를 잇는다. 지난 11일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99.8%의 찬성으로 통과된 개헌안에서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이 헌법 서문에 포함됐다. ‘시진핑 사상’이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었던 덩샤오핑을 제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한 마오쩌둥의 사상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이다. 

‘중국특색 사회주의’는 먼저 자본주의에 성공한 다음에 공산주의를 실현하자는 사상으로 1970년대 말 덩샤오핑이 개혁·개방을 위해 제창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되긴 했지만 생산력이 낙후돼 진정한 사회주의에 진입하지 못한 ‘사회주의 초급단계’인 만큼 경제건설과 개혁·개방이 필요하다는 논리다. ‘능력 있는 사람부터 먼저 부자가 되라’는 선부론(先富論)도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후 중국특색 사회주의는 중국 공산당의 슬로건이 돼왔다. 그런데 이번에 ‘시진핑 신시대’라는 접두어가 붙게 된 것이다.

시진핑 주석의 영구집권을 보장한 이번 개헌에 국제사회의 비판이 쏟아지고 있지만 중국 언론들은 ‘내재적 관점’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덩샤오핑 이론은 절대빈곤 시대에는 유효했지만 세계 2위의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한 지금에 와서는 한계가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관료들의 부정부패, 환경오염, 부동산 과열, 국영기업의 막대한 부채 등 숱한 문제가 중국 사회의 장기적 안정을 위협했다. 보시라이, 저우융캉 등이 벌인 권력스캔들 앞에서 집단지도체제도 무력했다. 결국 위기돌파를 위해 권력집중을 선택했다는 게 ‘내재론적’ 해석이다. 환구시보는 12일 “중국은 건국 초기 소련식 사회주의를 수용해 경제기반이 취약했지만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됐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중국 공산당은 언론 감시 등에 의한 외부적 견제가 없는 대신 당내 민주주의로 체제를 유지해왔다. 이번 헌법 개정은 당내 민주주의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절대권력은 폭주하게 마련이다. ‘시진핑 사회주의’를 세계가 우려하고 있다.

<서의동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역사적 사변의 연속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육성 비핵화 선언,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이 금지의 영역을 벗어났다. 상상불허다. 나는 지난 칼럼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을 위험한 인물이라고 쓴 적이 있다. 지금은 두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또 트럼프에게 노벨 평화상에 도전하라고 쓴 칼럼도 수정한다. 문재인 대통령, 김 위원장과 공동수상에 도전하라고 말이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준비 접촉 때 판문점에서 만난 북한 인사에게 인터뷰를 주선해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뉘기와 하고 싶다고?”라고 물어 “김정일 위원장”이라고 대답했다. 한참 만에 벌어진 입을 다문 그가 말했다. “동무 간이 크구먼.” 궁금한 게 너무 많다. 특히 김 위원장에게 그렇다. 전쟁 위기에서 평화를 꿈꾸게 한 역사적 결단이 어떻게 이뤄졌을까. 그가 생각하는 북한의 미래, 한반도의 미래는 무엇인가. 직접 묻고 답을 듣고 싶어 가상 인터뷰를 했다.

- 제재를 견디다 못해 비핵화 선언한 건가. 평양도 낮에는 전기가 끊긴다던데.

“누가 그런 유언비어 퍼뜨리고 다닙네. 평양에 직접 와서 보라우…. 내가 결단한 거는 평화로운 조선반도, 인민들을 배불리 먹이기 위해서디. 물론 제재가 영향이 없다면 거짓말이디. 고난의 행군 때처럼 죽기 살기로 버틸 수도 있디만 핵·경제 병진을 약속했는데, 또다시 인민 희생을 요구할 수는 없디.”

- 애초 핵개발하지 않았으면 될 일 아닌가.

“기자 선생, 도대체 국제정치를 알기는 하나? 핵 없었으면 미국이 조선을 쳐다보기라도 했을까? 속절없이 제재만 당했을거야?”

- 남한과 미국을 믿는가. 두렵지 않나.

“국가관계는 필요의 산물 아니갔나? 남쪽엔 평화 원하는 정권이 들어섰고, 저성장 경제 타개책도 필요하지 않나? 트럼프는 중간선거 돌파구가 필요하지. 본토 공격 가능한 조선 핵에 불안감이 크고 자존심도 상하고. 그리고 선생한테만 하는 말인데, 핵은 폐기해도 기술은 남지 않갔어? 수틀리면 몇 개월 안에 다시 핵무력 갖출 수 있디. 독일과 일본이 전쟁에서 패하고도 기술력이 남아 있어서 그렇게 빨리 재도약할 수 있었디 않아? 하지만 중요한 건 믿음이디. 서로 신뢰하면 핵이든 재래식무기든 왜 위협이 되갔어?”    

- 북·미 정상회담에서 합의 못하면 양측 지도자 모두 최악의 상황으로 갈 수도 있다.  

“나 개인과 공화국 운명이 걸린 담판인 걸 잘 알고 있디. 트럼프도 모르지 않을 거고. 실패하면 죽는다는 각오로 임할 생각이디.” 

- 재래식무기 불사용 선언도 했는데, ‘미제를 몰아내고 남조선을 혁명한다’는 조선노동당 규약 및 혁명노선과 배치되지 않나.

“당 규약에 있다고 반드시 실천하란 법 있나? 그럼 남쪽은 왜 헌법 3조(대한민국 영토를 한반도 전체로 규정)를 실천하디 않디?”      

- 문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나.

“내래 문 대통령을 믿디. 죽 지켜봤지만 북남관계 발전과 평화의 의지를 갖고 안팎의 비판에도 흔들림 없이 걸어왔디. 언행이 일치되는 액면가 지도자이고, 뿔난 망아지 트럼프를 다룰 줄 아는 영리함도 갖췄디. 틈만 나면 트럼프를 칭찬하지 않아? 그러니 트럼프도 문 대통령을 욕할 수 없지비. 자존심 안 굽히고 주장 관철시키는 재주도, 함부로 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디. 트럼프가 아베는 막 대해도 문 대통령에게는 정중하디 않아?”

- 남쪽 보수세력은 핵무기 대량생산을 위한 북한의 시간벌기쇼라고 비판하는데.

“이미 핵무력 완성했는데 무슨 시간벌기? 내래 이 말은 꼭 하야갔어. 남쪽 보수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기집단이디. 보수정권 땐 누가 내려가도 환영 일색이더니 지금은 절대 안된다고 난리쳐대지 않디 않아? 이명박은 천안호 사건 발생 두 달 만에 정보원(국정원) 고위급을 평양에 보내 북남 수뇌회담 하자고 졸라댔지. 연평도 사건 발생 12일 만에 우리 사람이 서울에 갔지. 박근혜는 돌아가신 장군님을 존경한다는 편지를 보내지 않았어? 천안호·연평도 유족은 왜 이명박·박근혜에게 항의하지 않는지 료해가 되지 않는다.”

- 보수세력의 말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걱정 말라우. 트럼프만 설득하면 다 따라오게 돼 있어. 이번에도 트럼프가 수뇌회담 응하자 홍준표 빼고 다 환영했디 않아?” 

- 말 나온 김에 천안함·연평도 사건과 김정남 암살사건에 대해 말해달라.

“고저 북남관계 해치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갔어. 언젠가는 말할 날이 오갔지.”

김 위원장이 정말 이렇게 말할지 궁금하다. 이 자리를 빌려 인터뷰를 요청한다. 한국 기자라면 누구나 김 위원장과의 인터뷰를 소망할 것이다. 김 위원장이 인터뷰를 한다면 한국 언론과 먼저 했으면 하고 가급적 그것이 나였으면 한다. 긍정 답변을 기대한다.

<조호연 논설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사랑하는 가족이나 가깝게 지냈던 친지와 영원히 이별하는 장례식은 한 번 열리는 것이 정상인데 상황에 따라서는 안장처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도 한다. 주로 타지에서 숨을 거둔 망자의 유해를 수습해 고향으로 이장하는 경우가 있다. 지난 2월23일에 베를린 가토 묘지에서 윤이상 선생의 이장식이 있었다. 날씨는 추웠지만 때마침 따뜻하게 비낀 햇살은 고인의 고향 길을 평안하게 인도하는 것 같았다. 고인의 유지에 따라 가족과 친지 20여명 정도가 모여 간소한 불교의식으로 거행된 23년 전 장례식 때는 날씨가 꽤나 쌀쌀하고 을씨년스러웠다. 평화와 평정을 찾은 현자(賢者)의 삶을 떠올리게 하는 선생의 플루트 독주곡 ‘살로모’가 조용히 흐르는 가운데 우리는 윤 선생과 이별했다.

 

 

작곡가로서 그리고 세계인이자 동시에 애국자였던 고인을 생각할 때면 나는 또 다른 음악가 쇼팽을 떠올린다. 물론 두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과 음악세계는 다르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영감은 모두 조국의 역사와 전통에서 비롯했다. 윤 선생에게는 우리의 전통적인 창의 시김새나 가야금의 농현(弄絃)이었다면 ‘피아노의 시인’ 쇼팽에게는 ‘폴로네즈’나 ‘마주르카’가 바로 그러한 뿌리였다. 두 사람 모두 이국 땅에서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고난과 압제에 신음했던 조국의 운명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친지들이 한 줌의 조국 흙을 담아 선사한 은잔을 지닌 채 20세에 바르샤바를 떠나 39세에 파리에서 병사한 쇼팽은 러시아의 압제에 저항했던 폴란드 인민에게 바친 유명한 에튀드(연습)곡 ‘혁명’을 남겼다. 음악으로 표현된 민족적 기념비라고 할 수 있는 이 짧은 곡은 비통 속에서도 해방을 향한 그의 불타는 열정을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타민족이 아니라 바로 동족에 의해서 자행된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으로부터 받았던 엄청난 충격과 분노를 딛고 고인이 작곡했던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를 들을 때마다 나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투쟁하는 한국 민중의 뜨거운 힘을 느낀다.

선생의 묘비에 새겨진 ‘處染常淨(처염상정)’은 혼탁한 곳에 있으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는 연꽃을 그리고 있다. 비록 절망스럽고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도 아름다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부단의 노력을 기울였던 고인의 삶을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쇼팽은 자기의 심장을 조국 땅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큰누이가 그의 심장을 몰래 코냑 병에 보관해서 고향으로 가져와 동생이 바르샤바를 떠나기 직전까지 살던 집 근처에 있는 ‘성십자가 성당’의 돌벽 안에 안치했다. 그리고 “네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마태복음의 6장 21절을 그 밑에 새겼다. 유한한 지상세계에 쌓아놓은 재물이 아니라 성령의 구원만이 영원한 보배라는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대하여 윤 선생은 더러움이 있으면 당연히 깨끗함도 있게 마련이라는, 즉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다는 연기(緣起)의 세계를 믿었다. 전자는 성(聖)과 속(俗)의 단절을 통해서, 후자는 오히려 이의 연속에서 진리의 존재양식을 발견했다.

어떤 음과 그 다음에 오는 음 사이에 항상 단절이 있는 피아노에 의거해서 쇼팽은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남겼다. 첼로주자였던 윤 선생은 음의 흐름과 연결을 보다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현악기나 관악기를 선호했다. 또 서양의 음세계가 마치 잣대를 사용해서 그린 직선의 세계라면 동양의 그것은 붓글씨처럼 명암, 강약과 장단을 늘 지닌 세계라고 음악미학에 있어서 서양과 동양의 차이도 강조했다. 언젠가 고인은 나에게 자신의 음악세계를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에 비교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보였던 구름이 어느 새 사라지고 사라졌던 것처럼 보였던 구름이 이내 다시 나타나지만 결코 같은 모양을 반복하지 않는 것처럼, 우주 속에 여러 모습을 띠며 끝없이 흐르는 음을 자신은 다만 악보에 옮겨 놓았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조국과 민족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깊이 흐르는 선생의 음악세계를 생각하면 나는 먼저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를 떠올리게 된다. 나는 이 곡에 등장하는 시를 선택하는 고인의 작업을 도우며 작품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우리 민족의 기나긴 역사에서 느꼈던 절망과 한을 뒤로하고 평화와 통일이 오는 감격스러운 그날의 환희를 느낀다. 러시아의 핍박에 시달렸던 조국의 푸른 호수와 울창한 숲, 그 땅에서 평화스럽게 살고자 했던 핀란드인의 꿈을 표현했던 시벨리우스의 교향시곡 ‘핀란디아’가 있다. 핀란드의 제2의 국가로서 사랑을 받고 있는 이 곡처럼 선생의 교성곡도 우리 땅에서 더 자주 울려 퍼져 더 많이 기억되기를 나는 항상 바란다. 프라하의 지하철역에는 전차의 도착과 출발을 알리는 짧은 신호음악이 울린다. 스메타나의 교향시곡 ‘나의 조국’ 속에 나오는 ‘몰다우강’의 첫 소절이다. 고인의 곡도 짧은 소절이라도 평양과 서울의 지하철역에서도 들을 수 있는 그날을 가끔 상상해 본다.

이제 선생의 유해는 잔잔한 파도소리를 가까이서 들을 수 있는 양지바른 고향 땅에 영원한 안식처를 갖게 되었다. 고인의 뜻대로 자주와 평화가 뿌리내린 조국이 아니라, 여전히 주위 강대국의 헤게모니 쟁탈전 속에서 남북과 남남 갈등으로 뒤틀린 현실은 이별을 고하는 내 마음도 무겁게 만든다. 그러나 흙탕물 속에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고 향기를 발하는 연꽃처럼 윤 선생의 맑은 영혼과 아름다운 선율은 우리 민족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지며 보다 더 인간적이고 평화스러운 세상을 향한 우리의 노력을 계속 독려하리라고 믿는다.

동백꽃이 활짝 필 통영묘소를 그리며 나는 이장식에 앞서 묘역의 주위를 혼자 돌아보면서 고인과 함께 보냈던 지난 날들을 회상했다. 지난여름에 가득했던 해당화와 산딸기는 이제 앙상한 가지만 남겼다. “우리의 운명은 종종 겨울의 과실나무처럼 보인다. 바싹 마른 큰 가지며 뾰쭉한 작은 가지를 보는 슬픔 속에서 이들이 오는 봄에 다시 푸르러지며 꽃을 피우고 그래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누가 감히 생각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또 이를 알고 있다”는 괴테의 &lt;빌헬름 마이스터의 방랑시대&gt;의 한 구절을 떠올리며 앞으로도 계속 흐를 공간 속에서 베를린과 통영은 반드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송두율 |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이 2008년 자신에게 성추행당했다는 한 여성의 주장이 제기되자 의원직 사퇴 의사를 밝혔다. 민 의원이 당내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퇴할 경우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 본격화 이후 현역 의원의 첫 낙마 사례가 된다. 문화예술계의 고은 시인·이윤택 연극 연출가 등에 이어 정치권에서도 안희정 전 충남지사·정봉주 전 의원 등 진보진영 인사들을 향해 미투가 집중되는 형국이다. 자유한국당 등 보수진영에선 이를 틈타 ‘도덕적 우월성을 과시하더니 부메랑을 맞았다’는 식의 공세를 퍼붓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민병두 의원은 10일 자신을 겨냥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폭로가 나오자 의원직에서 전격 사퇴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 의원은 이날 오후 문자 메시지를 통해 "제가 모르는 자그마한 잘못이라도 있다면 항상 의원직을 내려놓을 생각을 갖고 있었다"며 "이에 의원직을 내려놓겠다. 그리고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지난 7일 국회 정론관에서 '건강한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 발표하는 민병두 의원. 2018.3.10 연합뉴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투는 보수·진보의 문제가 아니다. 젠더폭력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서지현 검사의 사례에서 보듯 사회적 지위나 계급과도 무관하다. 그렇다면 현재까지 진보 쪽에서 미투가 더 많이 나오는 배경은 무엇인가. 이미 여성계에서는 이 문제를 두고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박진 다산인권센터 상임활동가는 지난 8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이야기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존재할 때 등장한다”며 “말하는 여성당사자들과 동의하는 남성들이 이 진영(진보진영)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현재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교수도 방송에 출연해 “좌파 진영에 있던 여성들이 꾸준히 문제제기를 했고 더 주체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해야 한다”며 “좌우를 막론하고 적폐는 있다. 조용한 지역이 위험한 지역”이라고 지적했다. 보수·우파라고 안심할 때가 아니다.

‘공작’ 가능성을 염려하는 시각도 근거 없기는 마찬가지다. 미투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현상이 아니다. 미투 운동의 배경에는 여성에 대한 구조적 차별·배제·억압이라는 거대한 모순이 놓여 있다. 이러한 모순을 견디다 못한 당사자들이 한꺼번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지금, 특정 세력이 개입해 ‘없던 일’을 만들어내거나 ‘일어난 일’에 제동을 걸 수 있다고 보는 건 판타지에 가깝다. 사실관계를 다툴 부분이 있다면 차분히 시시비비를 가리면 된다. 미투가 오염되었다느니, 사회적 살인을 한다느니 등의 관점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도, 현실적으로 타당하지도 않다.

“한국 여자 90% 이상이 성추행, 성희롱 경험이 있다”는 배우 김여진씨의 트윗처럼 성폭력은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다. 주권자를 대리하는 정당과 정치인들은 이 사실부터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