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대학가에도 운동권이 있었다. 학생회는 때가 되면 4·19를 기념하고 6월 항쟁을 기념했다. 과거 민주화를 위해 피땀을 바친 선배들, 시민과 노동자를 기리는 집회에서 외쳐진 구호 중에는 “김대중 정권 퇴진” “노무현 정권 퇴진”도 있었다. 이와 함께 짝을 맞춰 외쳐진 구호는 “비정규직 철폐” “신자유주의 철폐” 같은 것들이었다. 김대중 정권에서 추진하던 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을 벌이던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경찰을 피해 학교로 숨어들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노동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통과된 기간제법은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할 것이란 우려를 현실화시켰다. 학생들은 시설노동자(청소노동자)들의 파업에 연대해 집회를 벌였다. 200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외쳐지던 구호들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1987 > 연희역 김태리

10년도 더 된 기억을 꺼내든 것은 6월 항쟁을 그린 영화 <1987> 때문이다. <1987>이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인기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 등 내각 인사들이 영화를 관람했고, 문재인 대통령도 지난 7일 이한열 열사의 영정을 들고 노제에 참여했던 우상호 의원(당시 연세대 총학생회장)과 나란히 영화관을 찾았다. 이한열 역의 강동원씨와 나란히 무대에 선 문재인 대통령은 “6월 항쟁을 완성시켜준 게 촛불 항쟁”이라고 말했다. ‘87년 6월 항쟁=2017년 촛불 항쟁=문재인 정권’의 등식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마음이 불편한 것은 그 때문이다. 1987년부터 2017년까지 30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은 꾸준히 나빠져왔다. 전 정권이 물려준 외환위기의 유산 속에서 김대중-노무현 정권은 신자유주의적 재편에 충실했다. 비정규직은 양산되고, 일자리는 사라졌다. 젊은이들의 삶은 88만원세대에서 77만원세대로 추락했다. 

‘꾸준한 나빠짐’의 결과 1987년 투쟁이 그토록 열망했던 직선제에 의해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들어섰다. 이명박은 우리가 상상 못한 스케일로 국토를 망쳐놨고, 박근혜는 우리가 상상 못할 수준으로 권력을 사적으로 유용했다. 더 이상 나빠지는 삶을 용인할 수 없었던 시민의 힘에 의해서 촛불항쟁이 이뤄지고 그 결과 정권교체가 이뤄졌다. 우리가 청산해야 할 ‘적폐’ 속에는 30년간 해결하지 못한 과제들도 포함돼 있다. 30년 전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쳤고, 지금은 우리 사회 기득권이 된 386들이 해결 못한 ‘미완의 과제’들인 것이다. 

영화 <1987>은 두 가지 지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1987년 항쟁을 특정 사건과 인물들의 영웅적 스토리로 요약해버리는 데 있다. ‘연희’로 여성의 역할이 제한적으로 표현되지만, 노동자의 존재는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87년 항쟁이 현재 완성된 듯한 착시현상이다. 영화는 이한열 열사의 노제에 모인 사람들이 ‘그날이 오면’을 열창하는 가운데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내리비치며 막을 내린다. 6월 항쟁의 결과로 ‘그날’이 기어이 오고야 만 것 같다. 이 착시현상은 영화 자체의 태도이자 <1987>을 소비하고 추억하는 386세대의 태도이기도 하다. 

우리는 박종철·이한열 열사, 그리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숱한 죽음들을 기억하고 추모해야 한다. 열사를 추모한다는 것은 그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가치를 현재적으로 해석하고 싸움을 이어가는 것이다. <1987>은 아쉽게도 우리에게 현실의 어떤 문제도 환기시키지 못한다.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은 아직도 차가운 감옥에 있고,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은 아직도 차별에 시달리며 기본권 보장을 위해 싸우고 있다. 불안정 노동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청년들은 여전히 미래를 꿈꾸기 힘들다. 성소수자는 아직 ‘반대’되는 지위에 머물러 있다. 그러니 <1987>을 보고 추억에 빠지기엔 이르다. 이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한 개혁과 싸움들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1987년을 기리기 위한 올바른 방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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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12일 대구·경북지역 일간지인 매일신문은 사설을 통해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매일신문은 “홍 대표는 대구에서 정치를 하고 싶다는 뜻을 누차 피력한 바 있는데, 지방분권 개헌 열망에 찬물을 계속 끼얹는다면 그 꿈 일찌감치 접기를 권고한다”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이 사설은 개헌을 둘러싼 현재의 논의지형을 잘 보여준다. 지금 자유한국당 소속 권영진 대구시장은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국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지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홍준표 대표가 원색적인 비난을 하며 제동을 걸고 있고, 그것이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최근 자유한국당이 국회 개헌특위의 자문위원회 보고서 중 일부 내용을 문제 삼고 있는 것도 이런 비판 여론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개헌을 색깔논쟁으로 끌고 가서라도 비판적인 여론을 잠재워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홍준표 대표가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국민투표를 하겠다’는 자신의 대선공약을 뒤집은 것은 누가 봐도 명분이 없는 일이다. 대한민국 주권자들은 보수-진보를 떠나서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매일신문은 1월2일에도 사설을 통해 ‘국가의 미래가 달린 지방분권개헌 이슈를 당리당략과 선거 유불리로 접근하고, 정치적 소신이 다르다는 이유로 특정 정치인에 대해 혐오를 드러내는 태도는 온당치 않다”고 홍준표 대표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하라’는 것은 보수-진보를 떠난 요구인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들을 보더라도, 개헌의 필요성에 대한 동의가 70%를 훨씬 넘는다.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는 것에 대해서도 지역에 관계없이 찬성여론이 높다.

부산일보 신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지방선거 동시 개헌 국민투표’에 대한 찬성 여론이 부산·경남지역에서 77%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신문이 작년 12월 말에 대구·경북지역 여론을 조사한 바에 따르더라도, 이 지역의 찬성률이 61.5%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자료들을 줄줄이 언급하는 이유는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를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더 이상 국회논의를 기다리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국회가 작년 말에 ‘헌법개정 및 정치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해서 올해 6월까지 활동하기로 했지만, 이 특위에서 개헌안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작년 1년 동안 국회 개헌특위는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개헌과 선거제도 개혁에 소극적인 자유한국당 측이 새로운 특위 위원장을 맡기로 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런 특위에 무슨 기대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국민들 다수가 바라는 개헌과 정치개혁을 위해서는 대통령이 나서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헌법이 대통령에게도 개헌안 발의권을 준 이유는, 이처럼 국회가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금 개헌안 발의권을 행사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대통령의 직무를 소홀히 하는 셈이 된다.

물론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하는 것은 많은 정치적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벌써부터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개헌 반대’와 같은 수준 낮은 정치공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정치공세가 쉽게 먹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앞서 언급한 근거들을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개헌논의가 본격화되면, 스스로의 대선공약을 어기고 개헌을 사실상 방해하고 있는 자유한국당은 더욱 궁색한 처지가 될 것이다. 그들이 ‘색깔 덧씌우기’ 등 여러 시도를 하겠지만, 현명한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은 쉽게 말려들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문재인 대통령이 개헌안 발의를 본격 추진해야 한다.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1월부터 본격 추진을 할 필요가 있다. 다만 시작부터 대통령이 개헌의 내용에 대해 언급할 필요는 없다. 대통령이 발의할 개헌안의 내용은 여·야당의 의견도 충분히 수렴하고, 국민들의 의견도 수렴하여 최종 확정하겠다고 하면 된다. 그러면 반대할 명분이 없다.

개헌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포괄적이고 제한 없는 논의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기본권 강화와 지방분권 외에도, 직접민주주의 확대,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로의 선거제도 개혁 같은 내용이 논의의 주된 대상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또한 가장 논란이 되는 권력구조(정부형태)와 관련해서도 공개적인 토론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나갈 필요가 있다. 어차피 개헌과정은 다양한 의견들이 합의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아마도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할 것인지와 관련해서 가장 고민되는 것은 국회 통과 가능성일 것이다. 국회의원 3분의 2가 동의해야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국민투표에 부쳐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헌안의 국회 통과 가능성을 처음부터 비관할 필요는 없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개헌은 이미 보수-진보의 프레임을 넘어서고 있다. 보수든 진보든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국가운영시스템을 만드는 것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도 대통령이 진정성 있게 개헌을 추진하겠다면,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이 지지하고 개헌논의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개헌안을 논의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에 관한 거대한 집단학습과 토론의 과정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들에게는 그런 역량이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그 논의의 물꼬를 틔워주기를 기대한다.

<하승수 |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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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대한민국에서 근래 보기 드문 매우 독특한 현상이 하나 나타나고 있다. 그건 바로 반미 데모나 반미 여론이 매우 약화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진보계열의 움직임이 그러하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11월 방한 기간 중 반미 시위가 있었고 아직도 반미 여론이 존재하나 그의 자국중심적 발언이나 정책, 그리고 우익적인 가치관과 철학을 보건대 우리 진보세력이 이 정도로 조용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반면 미국 내부나 서유럽에서는 반트럼프 여론이 심각하고, 선진국 중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찰떡궁합을 자랑하는 나라는 일본 정도밖에 없다.

왜 이런 현상이 대한민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이 주로 국내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또 미국이 한국에 노골적이고 강압적으로 뭘 요구하기 이전에 우리 정부가 선제적으로 대미 외교를 잘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오른쪽에 위치한 정치인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다른 어떤 대통령에 비해 아직까지 진보세력의 비난을 가장 덜 받는 미국 대통령으로 기록될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쳐서는 안되는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상당수 진보세력이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비핵화 정책을 역시 지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을 압박하고 제재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북정책과 비핵화 정책은 기존의 한국 보수세력이 주장해 온 정책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있고, 오히려 과거 어떤 미국 정부보다도 더 한국 보수세력의 주장에 가까운 정책임에도 불구하고 왜 상당수 진보세력이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고, 반미 데모나 시위를 벌이지 않는 것일까? 미국의 대북 압박이 정권 생존에 위협을 가해 북한이 핵을 가지려 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진보세력이 왜 이제는 대북 압박만이 비핵화의 길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일까? 정말 급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한 필자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들은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을 지지하기 때문이다. 즉 대북정책이 무엇이냐보다도 누가 대북정책을 추진하느냐가 더욱 중요하다. 전형적인 정체성 정치이다. 현재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은 한·미 공조에 방점을 찍고 있고, 기조에 있어서 미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권교체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이전 보수 정부와도 큰 차이가 없다. 물론 그 배경에는 한국이 한·미 공조노선에서 이탈하면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고, 그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다. 정부 지지세력은 이렇게 애를 쓰는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으며 전쟁방지를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즉 비판적 미국 지지다.

둘째, 가설은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혐오와 죄와 벌을 기준으로 하는 징벌적 사고이다. 사실 보수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진보세력의 입장에서 볼 때도 북한의 왕조정치, 인권유린, 그리고 반인륜적인 핵개발, 갓 30대의 독재자 등이 좋게 받아들여질 리 만무하다. 진보의 가치관에 다 역행하는 일이다. 그리고 국제사회의 규범을 어기고 일방적으로 독주하는 북한에 대해 징벌을 가해야 하는 것도 진보적인 가치관에 부합한다. 이 점에서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은 지지할 만한 정책이다.

아마도 해답은 위 두 개 가설의 교집합쯤에 있을 것으로 생각되나 이러한 대북정책과 세계관은 ‘안보 진보세력’이라는 묘한 정치세력의 탄생을 예고하게 된다. 즉 안보정책은 기존 ‘안보 보수세력’과 크게 다르지 않고 경제정책은 진보적으로 가는 정치세력이다.

그들의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히 조사해 보아야겠지만 주로 젊은층에 포진한 이 정치세력은 그 세계관으로 인하여 북한과의 협상이나 대화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북한에 유화적인 중국에 대해서도 매우 부정적이다. 잘못하면 총체적으로 반북, 반중, 반러라는 매우 냉전적인 세계관으로 흐를 위험도 있다. 더구나 압박만으로는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는 기존 진보의 사고와는 달리 최대 압박과 항복으로 비핵화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견지하여 냉전적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가능성도 있다.

문제는 현실이다. 압박으로 인하여 전운이 감돌고 동북아에 한·미·중·일·북의 군비경쟁이 시작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은 그대로 존재할 때 이들은 더욱더 강한 압박을 요구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타개책을 지지할 것인가?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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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8명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했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청와대에 초청되는 건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국제사회 현안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1991년 이후 27년 만이다. 문 대통령은 오찬에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할머니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할머니들의 뜻에 어긋나는 합의를 한 것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사과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오찬에 앞서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는 김복동 할머니를 문병했다. 노환으로 오찬 참석이 어렵게 되자 직접 병원을 찾아가 인사를 하고 의견을 들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함께 오찬을 한 뒤 이용수·안점순(앞줄 왼쪽부터) 할머니를 배웅하고 있다. 청와대 제공

문 대통령과 할머니들의 만남은 한·일 정부 간 위안부 합의로는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천명한 지난달 28일 입장발표 이후 꼭 일주일 만이다. 하루 전 발표된 ‘위안부 합의 검토 태스크포스(TF) 보고서’는 한·일 합의 과정에서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지적했고, 문 대통령 역시 “피해 당사자와 국민이 배제된 정치적 합의였다는 점에서 매우 뼈아프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문 대통령의 위안부 피해자 초청은 피해자 의사가 반영되지 않을 경우 사안의 근본해결이 어렵다는 ‘피해자 중심주의’ 철학에 서서 문제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뗀 것으로 볼 수 있다. 지난해 8월 세월호 피해자 유족을 청와대 영빈관에 초청했을 때와 같이 대통령이 피해 당사자를 직접 만나 국가가 시민의 생명과 권익을 지키지 못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것이다. 국가의 지도자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이다.

위안부 문제는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매듭을 풀어야 했던 과제였다. 일본 시민단체인 ‘일·한협정문서 전면공개를 요구하는 모임’이 공개한 자료를 보면 1953년 수교협상 과정에서 한국 측 대표가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전시하 여성인권에 대한 인식 부족 등 시대적 한계로 인해 묻혀 버렸다. 민주화 이후인 1991년에야 김학순 할머니가 자신이 위안부였다는 역사적 증언을 하면서 진상규명 움직임이 본격화됐지만 2018년을 맞아서도 미완으로 남아 있다. 문제가 불거졌을 때부터 한국 정부가 ‘피해자 중심주의’에서 적극적인 외교노력을 했더라면 이처럼 역사적 정의가 미뤄지는 일은 없었을지 모른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청와대 방문이 진정한 문제해결의 출발점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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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정농단 사건으로 재판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가정보원으로부터 특수활동비 36억여원을 받은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뇌물수수 등)로 추가 기소됐다. 박 전 대통령이 상납을 지시하면 국정원이 갖다바치고 ‘비선 실세’ 최순실씨가 돈 관리에 개입했다는 게 검찰이 파악한 사건의 얼개다. 박 전 대통령은 이 돈을 의상비와 ‘비선 치료’ 비용, ‘문고리 3인방’ 격려금 등으로 쓴 것으로 조사됐다. 국가안보에 사용하라고 지출증빙 제출의무까지 면해준 예산을 착복한 것만으로도 중범죄인데, 그 돈을 업무와 무관한 사적 용도에 썼다니 기막힐 따름이다.

검찰 수사 결과를 보면, 박 전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13년 5월부터 국회의 탄핵소추 석 달 전인 2016년 9월까지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에게서 총 35억원을 상납받았다고 한다. 이원종 전 대통령비서실장을 통해 받은 1억5000만원까지 합치면 뇌물액수는 총 36억5000만원에 이른다. 이 중 3억6500만원은 최순실씨 등과의 연락을 위해 사용한 차명 휴대전화 51대 구입 및 통신요금, 기치료·운동치료·주사 비용, 서울 삼성동 자택 관리 비용 등으로 쓰였다. 9억7600만원은 이재만·안봉근·정호성 전 비서관 등 최측근들에게 휴가비·명절비 명목으로 흘러갔다. 이들에게 돈을 건네는 과정에 최순실씨가 개입한 정황을 보여주는 최씨의 자필 메모도 발견됐다. 나머지 돈 가운데 일부는 최씨가 운영하던 ‘박근혜 전용’ 의상실 운영비로 전달됐다고 한다.

국정원 특활비 사건이 터졌을 때부터 이런 사태를 예상 못한 것은 아니었다. 국정농단 수사·재판 과정에서 이미 박 전 대통령이 권력을 사유화한 흔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갖가지 주사 비용에서 삼성동 집의 보일러 기름값까지 아우르는 ‘깨알 같은’ 사용내역을 접하고 보니 다시 한번 충격을 금할 수 없다. 국가와 개인을 구분하지 못한 지도자의 후과가 추하고 참담하다.

박 전 대통령이 추가 기소된 날, 친박계 핵심인사인 자유한국당 최경환 의원도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 1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최 의원은 “돈 받은 게 사실이라면 동대구역에서 할복하겠다”며 의혹을 부인해왔지만 법원은 “혐의가 소명되고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며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검찰은 국정원 특활비가 박 전 대통령과 최 의원 외에 다른 친박계 실세 의원·장관들에게 전달됐는지도 철저히 수사해야 한다. 특활비를 사적으로 착복한 경우 모두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마땅하다. 관행으로 치부하고 어물쩍 넘어간다면 ‘예산 농단’은 뿌리 뽑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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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몇 번을 망설였다. 끝까지 볼 배짱도, 울지 않을 자신도 도무지 없었다.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이었던 유시춘 선생 손을 잡고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까진. 유 선생은 시사회를 봤지만 후배를 위해 기꺼이 동행했다. 숨소리까지 고문당하던 그때와 두 번이나 마주하게 해 미안했다. “괜찮아, 뜨거웠던 한 계절이 내 인생의 정수였어. 살아서 이런 시절 봤으면 된 거지.”

몇 겹의 장면이 숨가쁘게 이어졌다. 박종철의 죽음과 49재, “종철아 아비는 할 말 없대이”, 이한열의 죽음,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김승훈 신부의 폭로, 열사 26인을 호명했던 문익환 목사의 절규, 전국적 추모 투쟁을 관통하던 ‘그날이 오면’. ‘타이거 운동화 한 짝’은 군사정권에 맞선 청춘들의 사랑과 투쟁이었다.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유 선생은 화장실을 찾았고 난 돌아서서 포스터만 쳐다봤다.

세밑 주말 저녁, 눈송이가 흩날렸다. 한참을 걷다 발길 머문 커피숍에 앉았다. “<1987>은 보통사람들의 서사네요. 선과 악의 순간순간이 일궈낸 변혁 그 자체가 역사겠지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린 고개를 끄덕였다. 유 선생은 6·10항쟁 당일 아침 연행됐다. 구로경찰서에서 장안동 대공분실을 거쳐 강동경찰서로 끌려갔다. 부채꼴 모양 유치장 앞에 붙은 유 선생 죄목은 ‘집시법 위반’. 반대쪽 유치장에 갇힌 여성들이 유 선생 죄명을 보더니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그 여성들의 박수를 들으니 ‘매운 계절의 채찍을 딛고 북방에 선’ 것처럼 울컥했다고 한다. 신민당사 점거 농성으로 일찌감치 서대문구치소에 있던 YH노조 사무장 박태연도 그립다고 했다. 유 선생은 여사 21사동 통풍구 위에 올라서서 6월항쟁을 들려줬다. 서울구치소 여사 ‘소지’(일본어로 ‘청소’)는 지금 살아 있을까. 구치소 목욕은 일주일에 한 번뿐이었다. 그나마 정치범은 마지막 순서였다. 목욕물이 남았을 리 없었다. 한 ‘소지’가 유 선생에게 물 양동이를 건네며 몸을 돌려세우더니 “마, 세상 안 디비지겠나. 함 바까 보자”며 등을 밀어주는 게 아닌가.

눈발이 잦아들 무렵에야 우린 눈 얘기를 꺼냈다. “민주주의가 어느 날 갑자기 눈송이처럼 떨어진 게 아니란 걸 젊은 친구들이 알았으면 좋겠어.” “그럼요, 알 거예요. 알아차렸을 거예요.” 그새 커피잔은 세 번 정도 비워지고 채워졌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유 선생이 눈치채길 바랐다. ‘그로부터’ 1년 후를 묻고 싶었다. <1987>의 1년 후 말이다.

혁명은 유토피아를 만들지만 혁명 스스로의 유토피아도 있다. 반동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항쟁의 반동은 너무도 잔인했다. 정치의 책임이 크다. 시민들이 열어준 민주주의를 오로지 권력게임의 도구로 활용한 탓이다. 1987년 대선의 노태우 후보 당선, 1988년 13대 총선의 지역주의 부활은 혹독한 대가다. 반면 노동자들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1987년 박종철, 이한열의 죽음은 직선제 쟁취로 수렴됐지만 그해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생존권조차 보장받지 못한 노동의 현실을 드러냈다. 노태우 정권에서 분신한 노동자 규모만 전체 정권의 84%를 차지한다(임미리 <열사, 분노와 슬픔의 정치학> 중).

87년 함성에서 2017년 촛불항쟁을 떠올리게 된다. 시민들에게 총구를 겨눴던 군사정권, 총구는 겨누지 않았지만 시민을 버렸던 이명박·박근혜 정권. 30년 전 촛불을 끄고 집으로 돌아갔던 우리는 30년 후 지금은 촛불을 끄지 않고 그대로 광장에 서 있다. 적폐청산, 비정규직 문제 등 시민들이 직접 제기한 사회 문제는 정치 의제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의 70%대 지지율은 다신 맘 편히 집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우리의 다짐일 테다. “그래,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아직 감옥에 있는 촛불항쟁 1년은 참 안타깝지.” “맞아요. 성장하지 않는 민주주의는 달빛에 바랜 신화일 뿐이죠.”

<정치부ㅣ 구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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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는 3일 ‘건국 100년을 준비하겠다’고 밝힌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외눈박이 역사 인식으로 쓸데없는 역사 논쟁만 부추기고 있다”고 비난했다. 평창 올림픽을 한반도 평화의 전기로 만들자고 한 신년인사회 연설을 놓고서는 “심각한 문제를 후손에 떠넘기려는 친북좌파의 얄팍한 위선”이라며 현 정부를 친북좌파로 규정하기도 했다. 케케묵은 안보관과 저급한 색깔론 공세는 한때 그가 몸담았던 자유한국당 인사들과 오십보백보다. 홍준표 한국당 대표는 엊그제 초등학생이 평화 통일을 주제로 그린 그림으로 만든 달력을 놓고 “인공기가 은행 달력에 등장하는 세상이 됐다”고 해 장안의 웃음거리가 된 바 있다. 안보정당을 자임하는 보수정당의 대표가 초등학생보다 못한 대북관과 통일 비전을 갖고 있다는 게 부끄러울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15일을 건국 시점으로 정하자는 보수 일각의 주장은 독립운동의 역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얄팍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무시하는 해괴한 발상이기도 하다. 유 대표는 지난해 11월 당 대표로 취임하며 “낡고 부패한 기득권 보수, 철학도 정책도 없는 무능한 보수의 과거를 반성하고 진정한 보수의 길을 열겠다”고 했다. 그가 말한 새로운 보수의 길이 헌법 부정을 뜻한 건 아닐 것이다.

바른정당은 이제껏 정책이나 정강에서 한국당과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했던 게 사실이다. 안보 현안에 대한 바른정당의 정부 비판은 색깔 공세였다. 사안별 정책공조로 존재감을 나타내려 했지만 오히려 대안 없이 정부·여당의 발목 잡는 데 한국당 2중대 역할만 했을 뿐이다. 그 결과 20석이었던 당은 현재 11석으로 교섭단체 지위를 잃었다. 창당 전 17%에 달했던 지지율은 5%대까지 떨어졌다.

바른정당이 국민의당과의 통합에 나선 것은 이런 현실에서 지방선거를 준비해야 하는 고민의 산물일 것이다. 양당의 통합을 논의하기 위한 통합추진협의체는 2월 내에 신설 합당 방식으로 통합하는 데 노력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들은 정치변화와 개혁을 열망하는 ‘제3세력의 대통합’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두 당의 정체성 차이는 여전히 크다. 유 대표는 정치공학적 결합을 넘어 공통의 가치로 뭉치려면 좀 더 현실적인 안보정책을 정립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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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평창 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과 남북회담 개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3일 오후 판문점 연락채널을 다시 개통했다. 연락채널은 북측 연락관이 먼저 남북직통 전화를 걸어오면서 복구됐다.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이 한껏 고조되고 있는데도 비상 연락망마저 2년 가까이 끊긴 ‘비정상’이 해소된 것이다.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리선권 위원장은 이날 조선중앙TV에 나와 판문점 연락채널 개통방침을 전하면서 “진지한 입장과 성실한 자세”로 동계올림픽 대표단 파견과 관련한 실무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은 리 위원장을 통해 발표한 입장문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두 차례 거명했고, 문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북한의 신년사에 대해 직접 지지의사를 표명한 것에 환영의사를 나타냈다. 또 대화에 나설 북측 기관으로 노동당 통일전선부, 조평통, 국가체육지도위원회를 지정했다.

이는 문 대통령이 전날 국무회의에서 통일부와 문화체육관광부에 남북대화 복원과 북한의 올림픽 참가방침에 대한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것에 조응한 것으로 보인다. 양측 최고지도자들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는 모습은 이번 남북대화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고 있다. 한국 정부의 회담제의에 대한 응답을 기관명의의 성명 발표와 같은 예전 방식과 달리 조평통 위원장이 직접 방송을 통해 발표한 점도 주목된다. 북한이 입장문에서 “북남관계 개선 문제가 온 민족의 기대와 염원에 맞게 해결되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북남당국이 어떻게 다뤄나가는가에 달려 있다”고 한 것도 ‘남측 정부가 하기에 달렸다’며 책임을 떠넘기곤 하던 종전과 다르다.

북한이 1일 신년사에 이어 3일 입장문 발표, 판문점 연락채널 개통 및 통화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남북관계 복원에 이례적으로 적극성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대화를 앞두고 기싸움을 하려 들거나 불투명한 태도로 일관하던 과거 행태가 사라진 것도 긍정적이다. 새해 들어 노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 매체들이 대남비난을 중단한 것도 좋은 신호다.

물론 며칠간의 태도만으로 대화의 성패를 예단하기는 어렵지만, 관계개선의 첫 단추가 순조롭게 끼워지는 흐름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모처럼 마련된 대화 모멘텀을 살려 남북이 성의 있는 자세로 관계복원에 적극 나서줄 것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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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는 2일 “청와대와 정부가 김정은의 신년사에 반색하면서 대북 대화의 길을 열었다는 식으로 환영하는 것은 북한의 책략에 놀아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역사의 죄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북한의 평창 올림픽 참가는 인류 평화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의 정신을 살리고 나아가 ‘평창 성공’의 핵심이 될 수 있다. 보수세력도 평화올림픽이 되어야 한다는 데 아무런 이견이 없다. 그런데 정작 그런 전기가 마련되니까 남남갈등을 부추기는 정쟁의 도구로 삼는 격이다.

신보수를 자처하는 유승민 바른정당 대표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신년사에 대해 “국제사회의 제재와 압박을 무력화하고 핵무기를 완성하기 위한 시간끌기용 제스처”라고 비판했다. 바른정당은 현재 국민의당과 설 전에 통합을 마무리한다는 목표 아래 한창 실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통합 파트너인 국민의당은 “경색되었던 남북관계의 터닝포인트가 되길 바란다”고 환영했다. 유 대표는 햇볕정책에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쟁점에 대해 정반대 입장을 보이는 두 당이 한솥밥을 먹겠다고 하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남북 문제는 대결이 아닌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밖에 없다. 평소엔 남북관계의 안정적 관리가 되지 않아 한반도가 위기 상황으로 치닫는다고 주장해온 보수 야당이 대화가 시작되려고 하니 이를 비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 246명을 초청해 신년인사회를 열었다. 그러나 홍·유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등 제1, 2, 3 야당 대표가 약속이나 한 듯 모두 불참했다. 저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댔지만 공감하기 어렵다. 야당은 그동안 불통과 편가르기가 나라를 망친다며 청와대의 소통 부족을 비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더더욱 대통령과 야당 대표가 얼굴을 자주 대해야 한다. 야당 대표들이 그런 자리를 스스로 차버린 것은 협량의 정치라고밖에 할 수 없다.

신년인사회에서 한 시민은 “모두가 행복하고 싸우지 않는 나라가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2018년 새해는 여야가 불통을 버리고 소통과 타협의 정치로 나아가는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시민들은 바라고 있다. 야당이 새해 벽두부터 이런 시민의 여망과는 달리 구태를 반복하고 있는 것은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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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국민의 삶의 질 개선을 최우선 국정목표로 삼겠다”고 말했다. 무역 1조달러 시대 재진입, 3%대 성장률 등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경기 회복의 온기를 실물경제 전반으로 확산시켜 체감할 수 있는 성과를 만들어 내겠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표 개선에도 불구하고 삶이 나아졌다고 느끼는 시민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여전히 소득은 제자리이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는 것은 지난한 일이다. 올해부터 시작된 최저임금 1만원 로드맵을 두고 기업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는다. 민간 일자리 창출에 대해 정부는 혁신산업을 선정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했지만 재계는 규제완화가 먼저라고 맞서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올해는 사람중심 경제의 착근 여부를 가늠하는 시금석의 해가 될 것이다.

원칙과 현실이 부딪히면서 현실론이 우세해질 경우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수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여전히 많은 수의 경제전문가들은 문재인노믹스에 회의적이다. 경향신문 조사에 따르면 경제전문가들의 58.1%가 소득주도 성장은 성공하기 힘들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저임금 1만원 인상, 공무원 증원에도 부정적이었다. 소득주도 성장과 사람중심 경제는 대기업·수출의 낙수효과에 의존해온 기존 한국 경제의 틀을 바꾸는 작업이다. 문재인 정부 내내 노력해도 주춧돌을 올려놓는 수준에 그칠지도 모를 장기적인 과제다. 그렇다면 단기 성과에 조급해하기보다 새로운 경제 정책 방향의 중요성을 시민들에게 설득하면서 더 많은 공감을 이끌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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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 개헌을 거론하는 목소리가 높다. 여론조사 결과에서도 개헌을 지지하는 응답이 70% 넘게 나왔다. 여야 정치권은 지난 연말 개헌특위와 정개특위를 통합, 6월까지 운용하기로 했다. 2월까지 개헌안을 내는 문제는 더 협의하기로 했다. 그러나 개헌을 둘러싼 정당 간, 시민 간 간극은 크다. 여론조사 결과 정부 형태는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 시기는 올 6월이 30~40%로 다소 우세했지만 압도적으로 지지받지는 못했다. 개헌에 대한 찬성 의견은 높지만 각론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개헌에 대한 높은 지지는 당장 개헌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정치의 수준을 높여달라는 주문으로 해석하는 게 합리적이다. 지금 개헌은 정치개혁의 동의어에 가깝다. 그렇다면 정치권이 할 일은 자명해진다. 개헌 취지를 벗어난 채 개헌 시기와 방법을 둘러싸고 정쟁을 할 게 아니라 실현 가능한 정치개혁에 집중하는 것이다. 중장기적으로 개헌을 추진하면서 단기적으로 선거구제 개편에 합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선거제도를 바꿔야 개헌의 핵심인 정부 형태에 대한 논의도 제대로 이뤄진다.

선거제도 개편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어야 함은 물론이다. 정당의 득표수와 국회 의석수 간 비례성을 최대한 확보하자는 방향에 관해 공감대도 형성돼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이미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제안해놓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도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에 찬성하는 의견이 절반을 넘었다. 연말 여야 의원 26명이 선거구제 개편을 위해 ‘민심그대로 정치개혁연대’라는 초당적 모임을 결성했다. 그들의 활약을 기대한다. 각당은 서둘러 선거제도에 관한 당론을 모아야 한다. 자유한국당은 ‘문재인 정부 심판론’을 흐린다며 6월 개헌을 반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선거구제 개편에라도 나서야 한다. 이마저 거부한다면 그것은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말밖에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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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1일 신년사를 통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의사를 밝히고, 남북관계 개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민족의 위상을 과시하는 좋은 계기”라면서 “대표단 파견을 포함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용의가 있으며 이를 위해 북남(남북) 당국이 시급히 만날 수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또 “우리는 민족적 대사들을 성대히 치르고 민족의 존엄과 기상을 내외에 떨치기 위해서라도 동결상태에 있는 북남관계를 개선하여 뜻깊은 올해를 민족사의 특기할 사변적인 해로 빛내어야 한다”며 남북관계 개선을 강조했다. 김 위원장은 남북 간 군사적 긴장상태의 완화를 위해 남북이 노력해야 한다며 지난해 7월 남측이 제안한 군사당국 간 회담에 응할 가능성도 비쳤다. 각계각층 단체들과 개별적 인사의 대화와 접촉, 왕래의 길을 열어놓겠다며 남북교류 재개 방침도 내놨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1일 평양 중앙위원회 청사에서 신년사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신년사의 남북관계 개선론이 원론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올해 신년사는 구체적이다. 북한이 지난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인 ‘화성-15형’을 발사하고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뒤 올해부터 대화에 나설 것으로 예상됐지만 이처럼 남북대화 의지를 전면적으로 드러낸 것은 주목할 만하다. 김정은의 대화 의사는 핵·미사일 실험에 따른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 제재로 어려움을 겪는 현 상황을 타개하려는 구상일 수 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압박기조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고 남북대화를 북·미대화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는 것일 수도 있다.

일각에서는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미국 본토 전역이 우리의 핵 타격 사정권 안에 있다”면서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있다”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한·미 간 북핵공조를 흐트러뜨리려는 책략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자유한국당은 ‘화전양면식 신년사’라고 평가절하했다.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든 남북관계는 우리의 필요와 관점에서 판단해야 한다. 한 달여 앞으로 다가온 평창 동계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북·미 간 긴장이 전쟁으로 치닫지 못하게 막는 것이 우리의 당면 과제이다. 남북대화가 이 과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해 6월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문제에서 운전대를 잡겠다고 했지만, 그간의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핵·미사일 도발을 하는 북한에 대북 군사공격을 거론하는 트럼프 행정부 때문에 한국 정부의 운신 폭이 좁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1월 유엔총회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중 일체의 적대적 행위를 중단하자는 휴전결의를 이끌어냈고, 북한에 올림픽 참가를 제안하면서 분위기를 다져왔다. 그런 노력에 북한이 화답한 셈이고, 이제야 문재인 정부가 운전석에 올라 실력을 보일 시기가 온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을 설득해 북·미대화로 이끌어낸다면 동북아에서 한국의 외교적 공간은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

지난 10년간 동결된 남북관계를 복원하는 데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국제사회의 북핵 공조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지 않도록 주변국과의 충분한 협의도 필요하다. ‘동맹’이냐, ‘민족’이냐는 식의 흑백논리가 부각되면서 남남갈등이 격화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정부 당국은 보수정부 10년을 거치며 생긴 관성을 탈피해 남북관계 개선이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의 디딤돌이 되도록 상상력과 지혜, 용기를 발휘해야 한다.

북한도 모처럼의 남북대화가 성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핵·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는 성의를 보일 필요가 있다. 한 달여 남은 평창 동계올림픽이 명실상부한 ‘평화의 제전’이 되도록 준비하려면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가급적 이른 시일 내에 남북 체육회담이 열려 남북이 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지혜를 모으는 모습을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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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카나리아는 산소가 줄어들면 노래를 멈춘다. 이 때문에 광부들은 산소가 충분한지 확인하기 위해 카나리아를 새장에 넣어 갱도에 데리고 들어갔다. 표현의 자유라는 산소를 감지하는 예술가들은 우리 사회의 카나리아라 할 수 있다. 촛불이 켜지기 이전부터 예민한 카나리아들은 위험신호를 여러 차례 보냈다. 그들의 경계경보는 헌법을 유린한 정권을 심판하는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드러났다.

블랙리스트 사태는 단순히 지원금을 둘러싼 이념적 다툼이 아니며 예술계에만 한정된 사건은 더더욱 아니다. 블랙리스트 사건의 근원적 문제는 현 정부가 청산하고자 하는 적폐가 자기의 몸통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데 있다. 블랙리스트의 실행은 참여와 협치를 무시한 행정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참여정부 시기 도입된 공개성과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시스템은 정부가 바뀔 때마다 관료 중심의 권위주의적 행정으로 되돌아갔다. 상명하복에 충실한 관료 시스템은 결국 원하는 목소리를 내는 카나리아에게만 숨쉴 공기를 부여했다. 적폐청산은 바로 이런 행정의 민낯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문화정책을 수행한 공무원들은 문화권력들이 자신들을 흔든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문화예술계에는 일사불란하게 조직화된 권력이 존재하기 어렵다. 이 카나리아들은 저마다 다른 소리로 노래하는 것으로 먹고사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권력을 체계적으로 생성하고 유지하기 쉬운 쪽은 관료집단이다. 폐쇄적 고시제도를 통해 공급되는 관료는 희소하며, 닫힌 조직은 동질성을 유지하기에 용이하기까지 하다. 공익의 수호자이자 공정한 세금의 관리인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공익 수호와 감시의 권리를 가진 국민들의 참여를 배제함으로써 문화권력을 독단적으로 장악해왔다.

국민들의 감시의 시선을 피해 이들이 한 일은 성찰 없는 상명하복과 복지부동 그리고 부정부패였다. 국가나 조직의 수장이 바뀔 때마다 쏟아지는 소나기는 꽃보직과 한직을 순회하며 잠깐 피하면 그뿐이었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정치권 인사나 특수한 이익집단의 민원을 들어주면서 소나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면 됐다. 이 모든 일을 행했던 의사결정 책임자들 중에 눈에 띈 극소수에게만 책임을 묻는다고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 바뀌지 않은 시스템과 사람이 자신의 썩은 뿌리를 어떻게 스스로 뽑아낼 것이며,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문화행정이 권력이 아닌 민주주의에 충실한 자리로 돌아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지금과 같이 정치적 민원이나 특수 이익집단의 요구에 취약한 조직 구조와 인사제도를 개편해야 한다. 정책의 효율성과 공공성을 달성할 수 있는 조직으로 바꾸고 인력 충원의 개방성을 높이는 것이다. 둘째, 정책과정의 공개성과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국민의 참여와 민간 협치를 확대하는 것이다. 특히 평가와 같이 국정과제나 정책 성과를 확인하는 과정에는 더욱 그렇다. 투명성이 담보된 협치제도와 국민참여제도만이 ‘협치 코스프레’를 견제할 수 있다. 셋째, 문화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의지를 실천해야 한다. 문화예술위원회 스스로가 표현의 자유를 짓밟도록 제도적 원인을 제공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의 개정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여타 산하기관 및 단체에 대한 자율성과 독립성도 실질적으로 보장해 이들을 블랙리스트의 집행도구로 전락시켰던 과오도 바로잡아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표현의 자유를 가벼이 여긴 사람들이 책임있는 자리에서 새 술을 만드는 데 손을 담그고, 블랙리스트 실행의 수족이 되었던 술부대를 관리하던 사람들이 여전하다면 이것을 새 술이라 믿을 수 있을까. 문화관료라는 장막을 걷어내고 투명한 절차의 협치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지 못한다면 새 문화예술정책에 대한 신뢰는 생기기 어렵다. 정책운영의 모든 절차를 투명하게 하고 국민 참여와 민간 거버넌스를 실천할 때만 적폐청산 그 이후의 미래를 그려볼 수 있다.

<홍기원 | 숙명여대 정책대학원 문화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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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지난 27일에 외교부 장관 직속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검토 태스크포스’가 보고서를 발표했다. 2015년의 한·일 간 위안부 피해자 합의는 일본 측 요구가 과도하게 반영된 불균형 합의이며, 우리 측에 일방적으로 부담이 되는 이면합의도 비공개로 존재한다는 내용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 합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고, 이에 대해 일본의 아베 총리는 “합의는 1㎜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반발하고 나섰다. 이런 가운데 여러 시민단체들은 “위안부 합의를 지금 당장 파기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해서, 2015년 12월28일에 양국 외교부 장관들이 기자회견의 형식을 통해 발표한 한·일 간 위안부 피해자 합의는 법적으로 무효이다. 법적 효력이 인정되는 정식 조약이 아니기 때문이다.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의 공식적 약속’이기는 하지만, 법적으로는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 양국 정부 간의 정치적 선언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위안부 피해자 합의는 엄밀히 말해서 법적으로는 ‘파기’하고 말고 할 대상도 아니다. 그 이유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첫째, 2015년의 위안부 피해자 합의는 문서화가 되었는지, 양국 정상의 서명과 비준을 받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우리 헌법 제6조 제1항은 ‘헌법에 의하여 체결·공포된 조약’만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때 조약이란 ‘국가 간의 문서화된 합의’를 말한다. 구두합의나 정식으로 문서화되지 않은 기자회견문이 ‘조약’이 될 수는 없는 이유다.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같은 중차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 양국의 전권대사가 됐건, 외교부 장관이 됐건 외교적 협상을 통해 일정한 합의에 도달했다면, 이를 정식으로 문서화해야 하고 양국 정상의 서명 등을 통한 정식 비준을 얻어야 조약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양국 정부는 이 한·일 간 합의가 공식적인 절차를 거쳐 이루어진 서면 합의임을 명확하게 확인해 준 바가 없다.

둘째, 백번 양보해서 문서화되었다고 가정하자. 그래도 한·일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법적 피해를 배상받아야 할 피해자 할머니들이 존재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조약으로 체결·비준하기 전에 피해자 할머니들의 충분한 이해와 동의를 구했어야 함은 물론이고,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었어야 할 문제이다.

우리 헌법은 제60조 제1항에서 8가지 중요한 조약에 대해서는 국민 대표기관인 국회의 동의를 얻게 함으로써 대통령의 조약체결권에 국회를 통한 민주적 통제를 가하고 있다.

그 8가지 조약 중 하나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이다.

헌법 제37조 제2항은 국민의 기본권은 국회가 만든 법률로써만 제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국민의 기본권 제한을 내용으로 하는 조약은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에 해당한다. 일본군에 의해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법적 권리를 제한하는 내용이 될 수밖에 없는 이 한·일 위안부 피해자 합의는 따라서 국회의 사전 동의를 얻어 체결해야만 하는 ‘입법사항에 관한 조약’이 될 수밖에 없다. 국회에는 동의는커녕 정식 보고도 하지 않고 정부 당국자 간의 밀실합의 끝에 양국 외교부 장관들이 기자회견 형식으로 깜짝쇼를 할 대상이 결코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절차적 하자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지난 위안부 피해자 합의는 문제가 많은 불공정 합의였다.

특히 이번에 밝혀진 이면합의의 내용을 보면 가히 충격적이다. 당초 우리가 주장했던 ‘사죄의 불가역성’이 아니라 ‘해결의 불가역성’으로 합의를 했다든지, 한국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 이전 문제 등에 관여하겠다고 약속했다든지, 성 노예 표현을 자제하겠다는 등의 합의를 비공개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 굴욕적 합의가 도대체 내용적으로 유효성을 인정할 수 있는 ‘공정한 합의’라고 볼 수 있는가.

한·일 양국 간의 위안부 피해자 협상은 이제 시작이라고 보면 된다. 이어질 한·일 정부 간의 투명한 협상을 통해 그 내용을 발전적으로 고쳐가고 추후에 한·일 양국의 헌법이나 법률이 정한 절차에 따라 국회의 동의 등을 거쳐 조약으로 체결한 뒤, 양국 정상의 정식 서명과 비준을 거쳐 정식 조약으로 완성해야 한다. 그러한 위안부 피해자 합의만이 진정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있는 합의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는 우리인데, 왜 정부가 합의합니까?” 피해자 중의 한 분이었던 김군자 할머니의 토로다. 지난여름에 세상을 떠나셨다. 남은 이들의 책임이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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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가 이전 합의보다 진전된 것이며 현실적으로 최상의 결과였다는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의 항변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를 협상 테이블에서 결론짓도록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 입장에서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문제의 본질과 한·일 합의의 근본적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정치적 합의로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이 이 문제를 정치적 협상으로 결말지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는 것이 비극의 시작이며 위안부 합의의 근본 문제였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이 1월 1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부산 일본영사관 앞 소녀상 등 현안보고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위안부 해결 없이는 일본과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턱없이 강경한 자세를 보였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여자로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단심(丹心)의 표현이었을 수도 있고, 친일 논란을 빚은 선친의 전력을 의식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국민 정서에 편승해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정치 행위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대일 기조는 지속가능하지 않은 외교적 자충수라는 게 문제였다. 미국의 아시아재균형 정책에 첨병 역할을 하는 일본과 각을 세우는 것이 한·미 관계를 어색하게 만들고 미국의 압박을 초래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박 전 대통령은 탈출구를 찾아야 했다. 그리고 그가 택한 방법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다’는 명분을 만들기 위해 협상을 서두르는 것이었다. 이 협상은 구조적으로 한국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박근혜 정부가 대일 외교의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바람에 생긴 일이다.

초기 단계에 박 대통령에게 ‘일본과 외교를 이렇게 하면 나중에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고 경고하고 이를 막았어야 했다. 그리고 그 일을 했어야 하는 사람은 박근혜 정부의 외교수장이던 윤 전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고, 국민 모두가 수용할 수 없는 합의가 이뤄졌을 때는 장관직을 걸고 저항하지도 않았다. 윤 전 장관은 협상 결과 평가가 박하다고 항변할 것이 아니라, 외교장관으로서 한국 외교가 이길 수 없는 전쟁터로 끌려나가는 것을 막지 못한 책임을 생각해봐야 한다.

<유신모 | 정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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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는 지난 22일 올해 마지막 본회의에 32개 법안을 올렸다. 이들 법안은 개헌 특위 연장을 둘러싼 여야 갈등으로 본회의가 무산되면서 처리되지 못했다. 이 중엔 전기용품 및 생활용품 안전관리법(전안법)과 고등교육법 개정안(시간강사법)이 포함돼 있다. 전안법은 가습기 살균제 사태 이후 의류와 잡화 같은 생활용품도 전기용품처럼 ‘KC 인증서’를 받도록 의무화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인증 비용만 20만~30만원이 들어가 영세소상공인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운다는 지적에 따라 해마다 1년씩 유예하는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시행을 미뤄왔다. 개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당장 새해 1월1일부터 법이 적용된다. 인증을 지키지 못한 소상공인에게는 3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 또는 500만원 이하 과태료가 부과된다. 소상공인 700만명은 하루아침에 범법자로 내몰릴 판이라고 아우성이다.

시간강사법은 시간강사의 고용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주 9시간 이상 강의하는 전업 대학 강사에게 교원 지위를 주고 임용 기간을 1년 이상 보장하는 내용이다. 당초 2012년 도입될 예정이었지만 법 취지와 달리 강사의 대량 해고를 불러올 것이란 우려가 커지면서 3차례에 걸쳐 도입이 유예됐고, 내년 1월1일 시행을 앞두고 추가로 유예기간을 연장하기로 했다. 이 법에 영향을 받는 시간강사만 8만명이라고 한다. 개정안이 처리되지 않으면 대학의 강사 임용에 큰 혼란이 빚어질 것은 불문가지다. 올해 안에 법안이 통과되지 못하면 당장 새해부터 실질적인 피해가 예상되는 이런 일몰법안만 12건이다. 영주귀국 독립유공자의 유족에게 주택을 우선 공급하는 내용의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은 주택신청기간(1월2~12일)을 감안하면 연내 법안 처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29일은 연내 본회의가 열릴 수 있는 마지막 골든타임이다. 하지만 여야는 28일에도 기싸움을 벌이며 충돌했다. 이번 임시국회는 연내 해결해야 할 민생 법안이 많다는 이유로 여야 합의에 따라 열렸다. 이럴 거면 뭐하러 열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당사자들은 속이 타들어간다. 이러니 민생국회가 아니라 ‘민폐 국회’ ‘민생 패싱’이란 말을 듣는 것이다. 법안 처리를 위한 본회의 개최는 흥정의 대상이 아니라 국회의 의무다. 여당은 누구보다 집권당으로서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 야당도 도 넘은 정치 공세를 삼가야 한다. 싸움을 해도 민생 문제는 처리해야 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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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부 정책혁신위원회가 28일 보수정부에서 이뤄진 주요 대북정책의 점검결과를 담은 ‘정책혁신 의견서’를 발표했다. 핵심은 지난해 2월10일 개성공단 전면중단 결정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일방적인 구두지시에 의해 이뤄졌음을 확인한 점이다. 정부는 당시 개성공단 중단조치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에서 결정됐다고 밝혔지만 혁신위 조사결과 이틀 전인 2월8일 개성공단에서 철수하라는 박 전 대통령의 구두지시가 있었던 사실이 확인됐다.

혁신위는 또 당시 개성공단 중단의 근거로 내세운 ‘개성공단 임금의 핵개발 전용’ 문구는 충분한 근거 없이 청와대의 의견으로 삽입됐다고 밝혔다. 당시 참고한 것으로 보이는 정보기관의 문건은 주로 탈북민의 진술 및 정황에 기초한 것이다. 해당 문건에도 ‘직접적인 증거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단서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요컨대 신뢰하기 어려운 정보에 의존해 남북관계를 파탄으로 몰고갈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후 홍영표 당시 통일부 장관이 “개성공단으로 유입된 돈의 70%가 당 서기실에 상납됐다”고 했다가 국회에서 의원들의 추궁을 받자 증거자료를 갖고 이야기한 건 아니라고 번복하기도 했다.

정부는 더구나 국무회의도 열지 않은 채 대통령 자문기구에 불과한 NSC 상임위원회 결정을 기초로 11일 개성공단에서 인력을 철수시키고 단전·단수 조치까지 취했다. 북한의 4차 핵실험과 장거리 로켓 발사 등 안보적 위기상황에 따른 통치행위라고 하더라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이뤄졌어야 하지만 정부가 법절차를 깡그리 무시한 것이다. ‘정세와 상관없이 공단의 정상운영을 보장한다’는 2013년 남북 간 합의서를 철석같이 믿고 개성공단에 진출한 기업인들은 날벼락 같은 결정에 수천억원대의 손실을 입었다.

보수정부의 대북정책은 ‘통치행위’라는 명목하에 법절차를 무시하고 이뤄지는 경우가 잦았다. 이명박 정부가 2010년 천안함 사태 대응조치로 내놓은 남북 간의 모든 교류를 전면 중단시킨 ‘5·24’조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대통령이라고 해서 법률 위에서 권한을 행사할 수는 없다. 이래서는 대북정책이 집권자의 뜻에 따라 요동칠 수밖에 없고, 정치적 후유증을 키우게 된다. 혁신위가 당부한 대로 이번 점검결과를 ‘남북관계를 당파성에서 벗어나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법률에 근거해 추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 대북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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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합의검토 태스크포스(TF)’의 보고서에 적반하장식 반응을 내놓았다. 위안부 문제 합의 당시 외교장관이던 윤 전 장관은 이면합의를 했으며 이를 은폐했다는 지적에 “비공개 부분을 대외발표하지 않았지만 다양한 계기에 국회, 언론 등에 설명했다”고 주장했다. 어처구니가 없다. 그는 이면합의 의혹이 쏟아질 때 자신을 포함한 정부 전체가 “절대 없다”고 부인하지 않았나. 그는 “특히 소녀상 문제에 대한 이면합의는 없다”고 다짐했다.

위안부 합의에 ‘최종적·불가역적’이란 표현이 들어간 데 대한 해석도 가관이다. 그는 “외교적 합의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기본적으로 불가역적”이라고 말했다. 외교적 합의와 불가역이 동일시된다면 왜 불필요하게 그런 표현을 합의문에 명기했는지 궁금하다. 특히 일본이 사죄할 경우 돌이킬 수 없도록 하기 위해 한국 측이 먼저 불가역적이란 표현을 제안한 사실을 고려하면 그의 주장은 더욱 공허해진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7년 12월 29일 (출처:경향신문DB)

위안부 합의의 일본 쪽 당사자인 아베 총리는 TF 보고서가 발표되자 “위안부 합의는 1㎜도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국이 추가 조치를 요구하더라도 일절 응하지 않을 것임을 강조한 것이지만 무례한 발언이다. 지난해 일본 총리 명의의 사죄 편지를 쓰는 문제에 대해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는다”고 대응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일본 입장에서는 일단 합의한 내용을 재협상하려는 움직임을 못마땅하게 여길 수 있다는 점은 십분 이해한다. 그러나 합의 이후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의 태도를 보면, 합의가 잘못되었음이 역설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아베 총리는 합의 하루 뒤 “어제로써 모두 끝이다. 더 이상 사죄하지 않는다”고 한 바 있다. 위안부 합의를 돈 주고 산 면죄부로 여기지 않았다면 할 수 없는 말이다. 20여일 뒤엔 “일본군의 위안부 강제연행은 증거가 없다”며 합의 사항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합의는 ‘(일본)군의 관여하에 다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남긴 문제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한다’고 되어 있다. 지난 1월에는 소녀상 문제와 관련해 “10억엔을 줬으니 한국 측이 성의를 보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진정성이 없는 거짓 사죄로 책임만 모면하면 그만이라는 속내가 드러난다.

위안부 문제의 핵심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 회복이다. 관련 당사자들 누구라도 피해자들이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행동하는 건 당연한 의무다. 누구보다 자숙해야 할 윤 전 장관과 아베 총리의 부적절한 처신이 유감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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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눈이 많은 올해다. 밤새 소복이 쌓인 눈처럼 12월의 밤들도 소리 없이 내려앉으며 한 해의 끝에 닿고 있다. 지난 한 해 숨 가쁘게 달려온 우리들 마음속 시간들을 포근히 감싸는 하얀 위로들이다.

지난 26일자 경향신문의 1면 첫 화두는 ‘77만원세대’였다. 통계청의 ‘2017년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지난해 30세 미만 저소득 청년 가구 한 달 소득이 78만원이었다는 것이다. 2007년 여름 우석훈·박권일이 저서 <88만원세대>를 통해 비정규직으로 상징되는 청년의 불안한 삶을 공론화한 지 꼭 10년 만이다. ‘88만원세대’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면, ‘77만원세대’는 스스로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고 한다. ‘생’ 자체를 부정하는 허깨비 같은 삶들의 절망이 가슴에 박힌다.

출처:경향신문DB

20대의 상위 5%만 공무원·대기업 같은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나머지 95%는 비정규직인 ‘0.5 대 9.5’의 사회가 88만원세대의 사회상이라면, ‘77만원세대’는 더욱 악화됐을 터. 어쩌면 ‘0.1 대 9.9’의 사회가 지금 우리 눈앞에 서성이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절망의 심연은 다른 곳에 있다. 추락하는 청년의 삶과 달리 국가·기업의 부는 커지는 모순이다. 2006년 국내총생산(GDP)은 847조8760억원이었다. 지난해는 1637조4200억원으로 2배 가까이 성장했다. ‘30대 기업집단의 사내유보금 추이’ 자료를 보면 기업들 유보금은 2006년 127조4000억원에서 2015년 478조원으로 275% 폭증했다.

자본은 고삐 없이 증식하지만, 공동체는 깊은 속병이 들고 있다. 헤어날 길 없는 불평등은 절망을 낳는다. 절망은 분노를 만든다. 분노는 한 사회를 파괴한다. 이런 공동체가 지속가능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짓누르는 질문이다. 부의 편중과 민심의 균열은 모든 국가들의 말기적 증상이었다. 그래서 부의 편중의 통제는 정치의 책무다.

문재인 대통령은 26일 국무위원들과의 만찬에서 “촛불민심을 받들어 나라를 나라답게 만드는 일은 1년, 2년 이렇게 금방 끝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적폐청산의 목표가 비정상 권력의 정상화, 즉 우리 사회 권력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면 참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탄핵과 대선을 통해 정치권력의 변화를 이뤄냈을 뿐 우리 사회 각 권력들의 관계가 정상화됐는지는 의문이기 때문이다. 결국 적폐청산의 궁극적 지향점은 구성원들의 삶이어야 한다.

적폐청산의 완성은 공동체를 위협할 만큼 심화한 부의 편중과 불균형의 해체다. 이는 ‘자본의 민주적 통제’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시장권력에 휘둘리고 위협받는 정치·사회 권력을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권력(손)’의 하수인으로 전락한 정치·사회 권력의 극복은 지금 모든 국가들의 고민이고 과제이기도 하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미국 정치 시스템은 갈수록 ‘1인 1표’ 원리보다는 ‘1달러 1표’ 원리에 동화돼 가고 있다”고 탄식했다.

실제 문재인 정부 1호 정책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정책이었다. 그 첫 발자국으로 찾았던 인천공항공사는 26일 비정규직 1만명의 정규직화를 위해 3000명은 직접 고용, 나머지 7000명은 자회사 정규직으로 채용키로 했다. 그 확대판이라 할 공공부문 일자리 확대를 담은 새해 예산안도 “포퓰리즘” 비난 등 진통 끝에 간신히 국회를 통과했다. ‘중소기업 다 망한다’는 일각의 선동에도 최저임금 인상도 일단 결정됐다.

이처럼 하나하나 지향하는 것은 소득과 자본의 분배, 편중·편식의 완화에 맞춰져 있다. ‘임금 상승-소비 촉진-생산 증가’의 선순환으로 경제성장과 복지를 모두 이뤄내겠다는 ‘소득주도 성장’론은 자본의 민주적 통제의 다른, 아주 완화된 표현으로 읽힌다.

하지만 고삐 없는 자본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운위될 때마다 따라붙는 이야기는 ‘기업 죽이기·때리기’다. 90% 시민의 삶은 나빠지는데 국가·기업은 살찌는 모순 속에서 자본의 민주적 통제가 ‘기업 괴롭히기’로 둔갑하는 현실이 기막히다. 민주적 권력의 권위를 위협할 만큼 자본의 힘은 세다.

자본이 권위를 가진 권력에 의해 정상 통제될 때 개인의 삶도 나아진다는 경험을 주는 것이 현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과제다. 어쩌면 문재인 정부에게 주어진 그 시간은 길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라는 여론의 동력에도, 입법 과정에선 소수정권임을 연일 확인하는 게 현실이다. 자본의 민주적 통제와 이를 밀고 가야 할 정권의 현실적 조건의 괴리는 크다. 앞서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는 노무현 정부의 실패를 넘어서는 길은 그만큼 험난하다. 영리한 정치권력의 유능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광호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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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민경제자문회의 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내년도 경제정책방향을 27일 내놨다. 삶의 질에 가시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지향점이다. 사람중심 경제·소득주도 성장의 연장선이다. 양적 성장을 강조하던 역대 정권에 비해 질적 성장을 한가운데에 놓았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의제 설정이다. 다만 구체적인지, 실천가능한지 꼼꼼히 따져봐야 할 대목이 적지 않다. 

정부는 삶의 질을 높일 두 축으로 일자리 창출과 혁신성장을 제시했다. 혁신성장이 전면에 등장한 것은 분배에만 치중하지 않고 산업을 부양하면서 4차 산업혁명시대에 대비하고 일자리도 늘리겠다는 다목적 포석일 것이다. 하지만 관이 나서 선도산업을 발굴·지원하고 규제도 완화하겠다는 개발경제식 해법이 얼마나 성과를 낼지는 의문이다. 정작 정부의 역할이 절실한 조선 등 전통산업 대책은 아예 없다.  

취업자수 전망치는 5개월 전 새 정부 경제정책방향의 36만개보다 낮은 32만개로 제시했다. 예산을 투입했음에도 일자리가 늘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그럼에도 과거 정부 때 실패로 끝난 고용증대 세제 같은 정책을 다시 들고나왔다. 청년들로 하여금 고용정책을 직접 만들게 하고, 기업들에 청년고용 장려금을 제공하는 정책도 효과는 미지수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며칠 전 청년실업 해결책을 묻자 “2022년까지 계속 나빠질 것이다. 얼마나 완화시키느냐가 관건이다”라고 말했다. 문제 해결에 의지가 있는 것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방식으로는 저소득층 소득을 늘려 소비를 살리고 이를 기업생산으로 연결하면서 선순환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이상으로 끝날 수도 있다. 역대 정부가 출범 초기 한결같이 민생을 얘기하고도 늘 실패로 끝난 것은 조급증과 성과주의에 쫓기다 종국에는 기득권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질 제고의 초점이 저소득층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에 맞춰져야 한다는 것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들을 위한 정책이 더 촘촘하게 짜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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