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말주변이 별로 없는 편이다. 그래서 아주 절박할 때가 아니면 입을 열지 않게 됐다. 학교에서 하는 회의 때 자발적으로 말을 한 적은 거의 없고 혹시 누가 내 의견을 물을까봐 전전긍긍하곤 했다. 그렇다고 내가 말 잘하는 것에 대한 욕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잘생긴 사람보다 말 잘하는 사람이 훨씬 더 부러웠고, 특히 1~2분이면 충분한 얘기를 10분씩 하는 분들을 보면 아예 넋을 잃었다. 달변가의 꿈을 품고 혼자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말주변은 잘 늘지 않았다. 이 말재주로 방송에 나갔을 때 남들은 이렇게 날 격려했다. “너에겐 어눌한 데서 오는 매력이 있어.”

처음 박근혜 대통령을 봤을 때 난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꼈다. 더구나 대통령은 정치인이었으니, 말을 못한다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도 컸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눌변이 이해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다들 알다시피 대통령은 터놓고 대화할 사람이 거의 없는 청와대에서 10대와 20대를 보냈고, 유신이 몰락한 이후에는 20년 가까이 칩거를 했다. 그 기간 중 책이라도 열심히 읽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말을 잘한다면 그게 더 이상할 터였다. 정치판 입문의 기회로 삼았던 1998년 대구 보궐선거에서 당시 박근혜 후보가 했던 연설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가… 아버지는… 아버지를… 아버지!” 여기서 떨어졌다면 스피치 학원이라도 다니면서 화술을 키웠을 텐데, 박 후보는 경쟁자로 나왔던 엄삼탁 후보를 엄청난 표차로 이기면서 국회의원이 됐다. 그 후에도 대통령은 굳이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없었다. 유세 도중 아버지를 몇 번만 부르면 표가 쏟아졌으니까. 설마 이러다 대통령까지 될까 했는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렸다!

대통령은 일반 정치인과 달랐다. 대선후보 시절 TV 토론회도 이리저리 피해 다닌 대통령이었지만, 대통령이란 자리가 끊임없이 국민과 소통해야 하는 만큼 마이크 앞에 설 기회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은 다음 두 가지 전략을 취했다. 첫째, 가급적이면 말을 하지 않기. 다들 대통령의 입만 쳐다볼 때조차 말하기를 회피했고, 아랫사람을 시켰으니까. 메르스 파동때 황교안 총리가 대국민사과를 하게 만든 게 대표적인 예다.

둘째, 돌발 상황 피하기. 어쩌다 말을 해야 할 때는 미리 원고를 준비해 프롬프터에 띄운 뒤 그냥 읽었고, 신년 기자회견처럼 피할 수 없는 행사에선 어떤 질문을 할 것인지를 사전에 받음으로써 말주변이 드러나는 것을 막았다. 심지어 할 말만 하고 질문은 받지 않는 황당한 회견도 있었으니, 대통령이 얼마나 말하기에 공포감을 갖고 있는지 짐작이 간다. 이러면서도 대통령은 자신이 눌변가라는 세간의 인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국무회의 때처럼 자신이 일방적으로 말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은 말을 길게 늘여 함으로써 달변가의 이미지를 심으려 했다. ‘밥을 먹었다’는 것보단 ‘입을 통해 밥을 몸 안에 집어넣었다’가 훨씬 더 지적으로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게 무슨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고, 그런 가운데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이 이것이다 하고 정신을 차리고 나아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것을 해낼 수 있다는 그런 마음을 가지셔야 된다.” 박근혜 어록으로 남은 이 말은 달변가에 대한 대통령의 욕망을 너무도 잘 드러냈지만, 너무 말을 길게 하려다보니 주어가 뭔지 스스로 헷갈렸고, 그 결과 정체불명의 문장이 탄생해 버렸다. 그런데 이 말이 나온 뒤 국무위원 중 “그게 무슨 뜻이죠?”라고 묻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걸 보면 그들도 대통령으로부터 의미 있는 말을 듣고자 하는 마음은 없었던 모양이다. 이 밖에도 대통령은 많은 어록을 남겼는데, 그 대부분이 문장을 길게 늘이다 발생한 참사였다.

총선이 새누리당의 참패로 끝났다. 선거 참패의 원인이 유승민 등 소위 배신자를 쫓아낸 뒤 자신과 친한 인사들을 국회에 보내려고 무리수를 둔 대통령에게 있건만, 대통령의 반응은 좀 어이없었다.

선거 다음날 청와대 대변인의 말이다.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불리할 때 침묵하고, 정 말해야 할 때는 아랫사람을 시킨다는 첫 번째 원칙이 잘 구현되긴 했지만, 너무한 것 아닌가? 스스로도 그렇게 느꼈는지 며칠 뒤 비서관회의에서 대통령은 총선에 대해 추가로 언급한다. “앞으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겠다.” 문장을 억지로 늘이지 않고 짧게 말한 건 잘했다고 칭찬할 만하지만, 그토록 열을 올리신 이벤트의 결과에 대한 반응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대통령이 말을 잘하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달변인 사람만이 대통령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 어눌해도 자신이 해야 할 말을 해주는 대통령이라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하지만 대통령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하니, 그가 해야 할 말을 역시 눌변가인 내가 대신 해준다. “제가 국민을 우습게 보고… 어 그러니까… 너무 오만하게 굴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겸허한 정치를 하겠습니다.”


서민의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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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총선 결과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필자는 4월5일자 정치시평에서 야권 분열이 여당의 압승을 보장하지 않으며 야권이 분열된 채 치러진 선거에서도 여소야대 결과가 출현한 바 있다고 지적했다. 당시 여소야대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떠올렸던 것은 여당 성향의 무소속 당선자들을 포함하면 여권이 과반수를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여당이 제2당으로 몰락하고 어떻게 해도 과반수를 확보할 수 없는 결과는 상상하기 힘들었다.

이번 총선이 박근혜 정부의 실정에 대한 유권자들의 단호한 심판이었다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반면 총선 결과가 야권에 주는 의미는 복잡하다. 호남에서는 국민의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았고, 다른 지역에서는 더불어민주당이 선전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 대해 국민의당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심판으로 규정하나 더민주가 자신이 승리한 선거라고 주장할 근거도 있다.

호남유권자들의 전략적 선택이 이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호남유권자들의 선택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기 위한 작업은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상황에서 총선 결과를 특정 지역의 민심과 연결시켜 해석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되기 쉽다는 점에서 이해할 만하다.

문제는 제대로 된 평가가 진행되지 않는 동안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호남유권자들의 선택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들이 등장해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호남과 특별한 연고가 없는 필자로서 이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재 두 가지 흐름이 우려스럽다.

먼저 선거과정에서 출현한 호남홀대론이다. 국민의당 내에서 호남홀대론으로 더민주를 비판한 경우가 있고, 더민주는 호남을 홀대한 바 없다는 식으로 대응했다. 호남에서 홀대받았다는 정서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국민의당을 지지한 핵심 원인은 아니다. 호남유권자들이 지난 대선에서는 우대를 받아 문재인 후보에게 압도적 지지를 보냈는가? 이들이 2년도 되지 않아 갑자기 홀대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민주에 채찍을 들게 되었겠는가?

호남유권자가 더민주에 채찍을 든 주요 원인은 지난 대선에서의 패배를 극복할 전망을 더민주가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판단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있다. 더민주에 대한 비판이 과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국민의당을 지지한 유권자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명확하게 하고 대응해야 한다. 즉 호남유권자들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호남우대론이 아니라 호남유권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수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더 심각한 문제는 호남유권자들의 선택을 지역주의로 모는 경향이다. 야권은 오랫동안 지역주의 극복을 중요한 정치과제로 삼아왔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사회의 지역주의는 특정 지역의 패권주의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지역주의에 기대었던 경향도 없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둘이 같은 것은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야권 내에서도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게다가 이번 선거에서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호남출신의 유권자들을 포함한 넓은 의미에서의 호남유권자들은 지역주의에 따라 선택하지 않았다. 수도권에서는 이들 중 상당수가 여권을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지지했다. 더민주가 정당투표에서 얻은 득표율과 지역구에서 얻은 득표율의 차이가 이를 잘 보여준다. 자신과 다른 정치적 선택을 했다고 이를 지역주의로 모는 주장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정신은 물론이고 객관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유권자들의 민심을 해석하는 데 있어 위의 혼란들이 정리되지 않으면 “호남이 대접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과 “호남지역주의를 극복하자”는 잘못된 주장이 대립하는 구도가 출현할 수도 있다. 눈앞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이러한 잘못된 담론들에 기댄다면 야권은 모처럼 얻은 기회를 다시 상실할 것이다.

국민의당이나 더민주 모두 호남유권자들의 선택의 의미를 지역에 가두어서는 안 된다. 누구를 지지했든 호남유권자들의 선택은 헬조선이라는 표현이 등장할 정도의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하는 큰 흐름 속에 있었으며, 다른 지역의 유권자들도 그 흐름에 합류했기 때문에 이번 선거의 놀라운 결과가 만들어졌다. 누구든 이 흐름을 확대하고 우리 사회의 큰 전환을 이루어내기 위한 설득력이 있는 비전을 제시할 때 야권을 새롭게 구성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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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수석비서관회의에서 20대 총선 결과를 처음 언급했다. 박 대통령은 “이번 선거의 결과는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앞으로 국민의 민의를 겸허히 받들어서 국정의 최우선 순위를 민생에 두고 사명감으로 대한민국의 경제발전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마무리하도록 하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또 “20대 국회가 민생과 경제에 매진하는 일하는 국회가 되길 기대하면서 정부도 새롭게 출범하는 국회와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총선 이후 닷새 만인 이날 박 대통령 언급은 형식이나 내용, 모든 면에서 시민들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총선은 대통령이 임기 내 치르는 몇 안되는 큰 행사이다. 여기서 여권의 최고 책임자로서 심판을 받았다면 기자회견이든 성명이든 마땅히 시민 앞에 나서 직접 소회를 밝히고, 이해를 구했어야 했다. 정작 박 대통령은 구중심처라는 청와대에 앉아 발언을 받아 적고 있는 비서들 앞에서 소감을 밝히는 것으로 갈음했다. 그러잖아도 박 대통령을 향해 ‘불통’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던 터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거 전날인 12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의사봉을 두드리고 있다._경향DB

이날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박 대통령은 6분간 모두(冒頭) 발언을 했으나, 총선 결과와 관련된 언급은 43초에 불과했다. 고작 3문장이다. 그간 박 대통령이 틈만 나면 “국회 심판”을 거론하며 사실상 ‘야당 심판’을 촉구해왔던 것에 비하면 언급 회피와 다름 아니다. 선거 직전 12일 국무회의만 해도 박 대통령은 13분간 모두 발언을 하면서 멕시코와의 자유무역협정(FTA) 협의 문제를 제외하고 대부분 시간을 야당 공격에 할애한 바 있다. 또 박 대통령은 남의 말 하듯 간접화법을 썼다. 박 대통령은 “국민의 민의가 무엇이었는가를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인지, 남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자신이 생각한다는 것인지 애매하다. 하기 싫은 말을 억지로 돌려 하는 태가 역력하다.

지도자의 의견 표명은 명확해야 한다. 두세 가지로 해석될 여지를 줘서는 안된다. 잘못 해석되면 국정에 혼란을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이날 ‘알아서 해석하라’는 식으로 화두를 던졌을 뿐이다.

내용은 더욱 실망스럽다. 진실된 사과나 반성은 없었고, 청와대 책임론도 비켜갔다. “겸허히”라는 단어로 당의(糖衣)처럼 포장했을 뿐 ‘마이 웨이’를 선언한 것이나 진배없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는 박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권세력의 국정 실패에 매섭게 매질을 했다. 또 소위 “진실한 사람들”을 국회에 내리꽂으려고 ‘진박 패권’을 부리려다 벌어진 여당 막장 공천에 철퇴를 내렸다. 이런 정부와 여당의 정점에 선 이가 박 대통령이다. 자신을 포함한 집권세력의 잘못을 밝히고 사과해야 했다. 그런데 “국민의 민의”라는 한마디로 어물쩍 넘어갔다. 민의가 무엇인지도 밝히지 않았다.

인식이 이러니 앞으로 시민이 피부로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국정 기조 변화를 기대하기는 난망하다. 실제 박 대통령은 국정 쇄신을 약속하기보다는 기존 정책을 고수할 것임을 명확히 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경제활성화와 구조개혁을 일관성 있게 추진해야 한다”며 “일자리 대책과 노동개혁의 현장 실천에 최선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결국 쉬운 해고, 복지 축소, 서민 증세, 대기업 중심의 경제운용, 표현의 자유 억압과 남북 긴장 등 지난 3년간의 적폐는 지속될 판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 총선에서도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오죽하면 새누리당에서도 “사과조차 하지 않느냐”는 비판이 고개를 들겠나. 정권 말기, 그것도 여소야대에서 여당이 대통령의 방패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 결국 이대로라면 여야 모두 등을 돌리는 ‘조기 레임덕’ 상황만 기다리고 있음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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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끝나자마자 이른바 ‘정피아(정치인+마피아)’가 대거 낙하산 공공기관장으로 내려올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 알리오를 보면 총선 출마 등으로 현재 기관장 자리가 비어 있는 공공기관은 7곳이다. 올해 말 임기가 끝나는 공공기관장은 80명이 넘는다. 연말까지 전체 공공기관 323곳 중 3분의 1가량의 기관장이 바뀐다. 공천에서 탈락하거나 총선에서 패한 여권 정치인이 크게 늘면서 이들이 전문성 및 능력과 무관하게 다음 행선지로 공공기관을 노린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공공기관장 평균 연봉은 1억3000만여원으로 국회의원 부럽지 않다. 대통령(2억1201만8000원)보다 연봉이 많은 기관장도 수두룩하다. 임기 3년이 보장되고, 연임할 수 있다. 그동안 박근혜 정권은 충성도에 따라 자리를 나눠주는 보은을 베풀었다. 그러나 낙하산 기관장은 임기 중 지방선거나 총선에 나가겠다며 사표를 내는 경우가 많아 잠시 머무는 자리로 전락했다. 전문성과 경험이 부족한 기관장이 임기를 채우더라도 ‘지금 이대로’ 안주하고는 했다. 그 때문에 상당수 공공기관은 부실·방만 경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공공기관 부채는 520조원을 웃돈다.

세월호 이후 '정피아'_경향DB

그동안 공공기관 개혁은 말뿐이었다. 19대 국회에서 낙하산을 막기 위해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 개정 논의가 있었지만 진척되지 못했다. 정치인들이 공공기관장을 자신이 갈 자리, 보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의당의 20대 국회 제1호 패키지 법안 중 하나인 ‘낙하산 방지법’은 주목할 만하다. 국회의원, 정당지역위원장, 공직선거 공천 신청자, 공직선거 낙선자 등이 그 직을 사임한 지 3년이 지나지 않으면 공공기관 임원 후보로 추천할 수 없도록 법을 개정하겠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이 전문성 없는 낙선자의 임시 거처가 되는 것을 막는 일은 총선에서 드러난 시민의 국정쇄신 요구에 국회가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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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는 4·13 총선에서 마지막으로 해외 북한식당 종업원 집단 탈북 카드를 꺼냈다. 총선 닷새 전 일이다. 통일·외교·국방부가 동원됐다. 음습한 공작의 냄새도 풍긴다. 탈북자들은 남한 도착 첫날부터 정치적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집단 탈북이 이례적인 일이고 대북 제재 효과의 산증거이기 때문에 공개한다는 정부의 설명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탈북자와 북 가족의 신변안전, 탈북루트 차단을 막기 위해 공개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깨야 할 사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정부는 선거 승리를 위해 탈북자 인권 착취와 북풍의 악습을 재연했을 뿐이다.

남북은 탈북자 처리와 관련한 암묵적 관행을 갖고 있다. 남한이 탈북 사실을 공개하지 않으면 북한도 공식 대응하지 않는다. 정부의 탈북 사실 공개는 북한더러 공식 대응하라는 의미가 된다. 탈북자들의 북 가족을 사지로 몬 것이다. 목숨을 건진다 해도 즉각적인 직장 해직과 평양으로부터의 추방, 벌목장 이전과 평생 강제 노역을 피하기 어렵다. 가슴 졸이는 것은 기존 탈북자들도 마찬가지다. 북한 당국의 단속 강화로 엉뚱하게 북 가족이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외를 떠돌며 오매불망 남한 입국의 기회를 엿보는 탈북자들에게도 악영향을 미친다. 그들이 위태로워진다면 그것은 정부 탓이다. 탈북자 문제가 북한 체제의 모순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 정책과는 별개로 접근해야 할 문제이다.

탈북자에게 북한 가족은 형벌이다. 가족을 위태롭게 만들면서 혼자만 살겠다고 나왔다는 죄책감은 낙인이 된다. ‘공화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남한행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전혀 위안이 되지 않는다. 탈북자들의 절반가량이 북 가족에게 돈을 보낸다고 한다. 죄책감을 덜어보려는 일종의 속죄 행위일 것이다. 돈이 손에 들어오면 북한 가족의 얼굴부터 떠오른다고 한다. 탈북자는 북한판 중동근로자나 광부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렇게 해서 남한에서 살아가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이다.

탈북자들이 보내는 돈은 북한의 장마당을 작동시킨다. 민생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는 것이다. 강조하건대 이것은 인도주의 차원의 문제이다. 남북의 정치적 문제, 이를테면 북핵과 연계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같은 복잡한 상황들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면 탈북자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

통일부 정준희 대변인이 북한이 해외에서 운영하는 식당 종업원들의 집단 탈출에 대해 브리핑하고 있다_연합뉴스

집단탈북 공개 사건은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정부는 탈북자를 어떻게 보고 있나. 체제경쟁의 산물, 대북 제재 효과의 증거, 선거 홍보 수단…. 다른 답은 기억나지 않는다. 북한 주민을 대한민국 국민으로 규정한 헌법 3조, 인도주의에 입각해 탈북자를 특별히 보호한다는 ‘북한이탈주민 보호 및 정착지원에 관한 법률’과 거리가 멀다. 탈북자 3만명 시대가 됐는데도 정부는 여전히 탈북자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다.

탈북자들은 남한 입국 첫날부터 모순과 대면한다. 왜 탈북했나요? 탈북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댄다. 하지만 일반에 공개되는 탈북 사유는 정해져 있다. 남한 사회에 대한 동경, 북한 체제에 대한 염증과 증오. 당국은 이 말을 듣고 싶어한다. 왜곡의 시작이다. 눈치 빠른 탈북자는 정보를 과장하고 지어내면 더 큰 대가를 얻는다는 것을 금방 터득한다. 중국에서 무역일 하는 사람이 정찰총국의 거물로 둔갑하고 평양에서 탈북한 사람이 가본 적 없는 지방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폭로한다. 자본주의 원리는 여기서도 작동한다. 더 비극적이고 더 끔찍한 이야기들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다. 거짓말하는 탈북자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북한에 대한 허상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진실이 묻히고 현실은 편집된다. 탈북자들은 남북 대결체제와 특정집단의 정치적 이해를 재생산하는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 전락한다. 탈북자들은 평생 이 괴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러시아어만 배운 탈북자들에게 이것은 영어보다 더 큰 난관이다. 미국 식민지로 착각할 만큼 영어가 범람하는 것보다 북한의 허상을 기초로 대북정책을 생산하는 사회가 더 적응하기 힘들다.

탈북자 정책은 탈북자를 위한 정책으로 돌아와야 한다. 정권이나 특정 집단이 필요로 하는 정책으로 변질돼서는 안된다. 정치적 용도로 탈북자를 동원하는 악습은 폐지돼야 한다. 정부 부서의 정체성과 원칙에 반하는 상부의 지시에 단호히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환경 조성이 필요하다. 탈북자는 엄연한 국민이며 소중한 통일 자산이다. 북한 체제 실패의 산증거로가 아니라 남북 연결고리로서의 측면으로 이해하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정책 방향에 대한 근본 논의를 시작할 기회이다. 여소야대라는 선거 결과로 논의 공간도 확보된 터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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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에서 제1당에 오른 더불어민주당과 3당이 된 국민의당이 세월호특별법 개정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조사 기간은 20대 국회 개원 직후인 6월 말까지로 돼 있다. 그동안 여당이 특조위 활동을 무력화하려 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두 야당이 20대 국회에서 조사 기간을 연장하고 권능도 확대하면 참사의 실체적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이처럼 두 야당의 총선 공약 중에는 공통분모가 많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테러방지법 독소조항 개정 등 훼손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려는 조치들이 대표적이다. 누리과정 예산 전액 국가부담 등 복지 공약, 대기업·중소기업 간 이익공유제 등 경제민주화 공약, 청년구직수당 지급 등 젊은 층을 위한 공약도 있다. 20대 국회에서 의회권력이 야당으로 넘어간 만큼, 이제 두 야당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공약을 실천할 수 있게 됐다. 야당의 역할과 책무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커졌다는 뜻이다.

그동안 야당의 역할을 놓고 정권 견제를 중시하는 ‘강한 야당론’과 정책·대안을 중시하는 ‘대안 야당론’이 맞서왔다. 야당은 주로 전자에 기대온 게 사실이다. 박근혜 정권의 오만과 폭주가 워낙 두드러진 탓에 대여 투쟁만으로도 존재감을 부각하는 일이 가능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대위 대표가 대국민 성명을 발표한 뒤 지역 후보자들의 발언을 들으며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_경향DB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여소야대 정국으로 인해 야당은 새로운 위상을 찾아야 한다. 국정을 주도하고, 때로는 책임도 나눠 져야 한다. 더민주와 국민의당 모두 이 같은 점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김종인 더민주 비대위 대표는 지난 15일 “뭘 해야 내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할지 냉철하게 되짚어봐야 한다”며 “이번 선거에서 내세운 공약과 다른 당의 공약을 철저히 검토해 무엇이 나라를 위해 올바른 길인가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공동대표도 어제 “국민 눈높이에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일하는 국회를 만드는 데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두 야당은 이제 시험대에 올라섰다. 이번 총선에서 시민들이 특정 정당의 독주를 허락하지 않고 의석을 배분한 점을 깊이 새길 필요가 있다. 양당 사이에선 경쟁과 공조, 새누리당과의 관계에선 견제와 협상을 병행하며 공약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가야 한다. 더민주는 원내 2당일 때와는 달라진 정치력과 전략적 사고를 갖춰야 한다. 국민의당도 모호한 줄타기나 다른 정당의 ‘2중대’ 행보 대신 분명한 정체성을 보여줘야 한다. 정의당·녹색당 등 원내외 소수정당 의견을 수렴해 필요한 부분은 입법에 반영하는 일도 두 야당 몫이다.

그렇다고 민주주의와 민생을 후퇴시키는 법과 제도에 눈감으라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이념논쟁’에 휩쓸릴까 섣불리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민주주의를 흔드는 사안에는 원칙에 따라 단호하게 대처하되, 합리적 대안까지 제시하면 된다.

현 정권의 집권 기간은 1년10개월가량 남았다. 그러나 대선 캠페인이 본격화하는 시점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1년6개월 남짓이다. 각 야당은 그 시한 내에 어떠한 집권 비전을 갖고 있는지 보여주고, 그 비전을 현실화할 구체적 역량도 입증해야 한다. 두 야당은 총선에서의 약진이 스스로 잘해서가 아님을 알고 있을 터이다. 여소야대 구도는 박근혜 정권에 분노한 민심이 던진 ‘숙제’일 뿐이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강력하고 유능한 대안야당·수권야당으로 거듭남으로써 시민에게 보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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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당의 총선 참패 직후 나온 박근혜 대통령의 첫 공식발언은 흔들림 없는 ‘노동개혁’ 추진이었다. 박 대통령은 15일 한·노르웨이 정상회담에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지만 노동개혁은 반드시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총선 결과와 상관없이 노동개혁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4·13 총선 결과 여소야대가 만들어졌음에도 야당이 반대하는 노동개혁을 그대로 밀어붙이겠다고 한 것은 노동계와 야당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물론 대통령으로서는 총선 참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규직 노조 이기주의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높다고 판단하고 여소야대 정국을 정면돌파할 승부수를 노동개혁에서 찾으려 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박 대통령 발언이 나오자 전국경영자총연합회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성과자 해고와 취업규칙 불이익변경을 위한 ‘경영계 가이드북’을 발표했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오른쪽)이 29일 국회에서 열린 새누리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_연합뉴스


하지만 쉬운 해고와 파견확대를 위한 정부의 노동개혁은 정규직은 물론 비정규직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이 같은 인식은 재벌기업 등 일부 사용자집단을 제외하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공감대가 형성돼 있는 상태다. 오죽하면 노동개혁의 전도사를 자처해 온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마저 선거 이틀 전 울산 지원유세에서 ‘우리 당이 더 이상 쉬운 해고를 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다짐했을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울산 지역 새누리당 후보는 ‘고용불안을 심화시키는 노동 4법에 반대한다’는 공약을 내놓기도 했다. 한마디로 박근혜표 노동개혁은 유권자들은 물론 여당 내에서조차 ‘노동개악’으로 심판받고 있다.

박 대통령이 민의를 배반하고 나 홀로 노동개악에 나선다면 스스로 ‘조기 레임덕’을 가속화할 뿐이다. 대통령은 재벌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위한 제대로 된 ‘노동개혁’을 고민해야 한다. 재벌개혁 없이 정규직 노동자들을 ‘공공의 적’으로 내모는 노동개혁으로는 결코 경기침체와 청년실업을 해결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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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에 의해 이번 4·13총선 결과에 대한 각종 분석들이 잇따르고 있다. 그중 하나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지역구 후보 투표와 지지정당 투표를 각각 다른 정당에 하는 소위 ‘교차투표’가 많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실제로 전체 253개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구 가운데 득표율 1위를 차지한 정당과 당선자의 소속당이 다른 경우가 절반이 넘는 138곳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교차투표가 가능해진 토대가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인 2001년 7월19일의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점에 주목하는 이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별도의 정당투표 없이 지역구 선거투표만 하게 하고, 정당이 지역구 선거에서 얻은 득표비율에 따라 비례대표 국회의원 의석을 배분하도록 하고 있던 당시 공직선거법상의 1인 1표제에 대해 9명의 제3기 헌법재판관 전원이 만장일치로 사실상의 위헌결정인 한정위헌결정을 내린 대사건이 발생했다.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유권자가 지역구 후보와 지지정당에 각각 한 표씩을 투표할 수 있는 오늘날의 1인 2표제가 탄생했다. 즉, 2001년에 헌법재판소가 1인 1표제를 폐지하는 전격적인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는,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에서 표출된 유권자의 의사를 그대로 정당에 대한 지지의사로 자동적으로 의제해 비례대표 의석을 배분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1인 1표제 한정위헌결정은 주권자이자 투표권자인 국민에게 더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국민의 투표를 통한 정치적 의사 표현의 방법을 다양화하고 정교화함으로써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헌법학자나 정치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최근에 그때의 헌법재판소 결정문을 다시 한번 찬찬히 읽어 보았다. 그리고 15년 전의 결정문에 국민의 참정권을 확대하고 헌법 정신을 살리는 공직선거법의 바람직한 개정 방향에 대한 제시가 이미 드러나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헌법재판소가 당시 1인 1표제에 대해 위헌의 근거로 든 것은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이런 비례대표 선출방식은 국민의 자유로운 선택권 보장을 요구하는 헌법상의 민주주의 원리에 위배된다고 보았다. 유권자가 지역구 후보자나 그 후보가 속한 정당 중 어느 일방만을 지지할 경우에 지역구 후보자 개인을 기준으로 투표하든 정당을 기준으로 투표하든 어느 경우에나 자신의 진정한 의사를 정확히 반영시킬 수 없으며, 따라서 후보자든 정당이든 절반의 선택권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불합리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정치불신의 풍조와 맞물려 유권자가 아예 투표권 행사 자체를 포기하게 하는 부작용도 초래된다고 지적했다.

인쇄업체에서 20대 총선 비례대표 투표용지를 정리하고 있다._연합뉴스

더 나아가 이것은 신생 정당에 대한 국민의 지지도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게 해 기존의 세력정당에 대한 국민의 실제 지지도를 초과해 그 세력정당에 의석을 배분해 주게 되는 결과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원리의 왜곡을 극히 심화시킨다고 본 것이다.

둘째, 선거의 원칙 중 하나인 ‘직접선거의 원칙’에 위배된다고 판시했다. 비례대표 의원의 선거는 지역구 의원 선거와는 별도의 선거이므로 이에 대한 유권자의 별도의 의사표시인 별도의 직접투표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셋째, 무소속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유권자들의 평등권이 침해된다고 보았다. 무소속 후보자에 대한 투표는 그 무소속 후보자의 선출에만 기여할 뿐 비례대표 의원의 선출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해 투표가치의 불평등이 발생하고 이것은 무소속 후보자에게 투표하는 유권자를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것이 됨을 근거로 들었다.

이번 선거에서 적지 않은 국민들은 국회의 법 개정이 아닌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탄생한 1인 2표제를 적극 활용해 국민의 정치적 의사를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표시했다. 이번에 국민에 의해 선택된 선량들은 선거에서 드러난 국민의 민의가 무엇인지 잘 분석해 이를 제도 개선에 반영하는 데에서부터 의정활동을 시작해야 한다. 선거법과 관련해서는 이번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이 사표(死票)를 대거 발생시키는 소선거구제를 끝내라는 것은 아닌지 차분히 검토하고 사표 발생을 줄이는 중선거구제로의 법 개정을 모색해 볼 필요가 있다.

‘밀실공천’과 당내 실세들에 의한 ‘사천’(私薦)에 분노한 민심을 보았다면 민주적인 공천제도를 구체화하는 정당법 개정에도 시급히 나서야 한다. 국회의원이 되었다고 벌써 기득권화해 선거제도나 공천제도에 대한 법 개정에 소극적으로 대처한다면, 4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번 선거를 치르면서 절감했겠지만, 국민은 무섭다.


임지봉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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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이 우리 사회에 준 가장 큰 은총은 ‘믿음의 회복’일 것이다. 수년간 몇 차례 선거를 거치면서 잃어가던 ‘민심의 현명함’에 대한 믿음이다.

많은 유권자들은 투표 당일 ‘총알’이 될 투표용지를 앞에 두고 의심했을 것이다. ‘나의 이 한 표가 과연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저 콘트리트처럼 단단한 절대(?) 정부의 절대 오만이 깨어질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허공을 향해 난사하는 공포탄 같은 쓰라린 마음으로 기표 도장을 꾹 눌렀을 터다.

“10년 전 같이 일을 시작했다가 이젠 반도 안 남았다. 다 이혼했다. 집에 가져가는 돈이 자꾸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가난한 사람들이 반 이상 박근혜를 찍는다.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공포 때문에 굽신거리는 거다. 너무 억울하다. 민주세력이 하나가 돼도 부족할 판인데 나뉘어 싸우니 희망도 꺼져간다. 그래서 희망도 가난해졌다.”

한 지인이 총선 직전 페이스북에 올린 어느 택시기사의 이야기다. 그것은 꽤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짓눌러온 ‘주술’과도 같은 편견이었다. 노년층은 박근혜 대통령의 ‘팬덤’이 돼 또 묻지마 지지를 하겠지란 답답함이고, 젊은 세대와 가난한 서민들은 방관하거나 계급배반 투표를 하고 있다는 원망이었다. ‘보수 아니면 진보’ ‘여 아니면 야’라는 딱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는,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반복된 정치적 기억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편견은 좌절이 차곡차곡 쌓인 고립감의 다른 얼굴이었다.

하지만 총선 날 밤 TV화면을 통해 본 결과는 그런 상처 입은 마음들 하나하나가 어떻게 길을 만들고, 산과 강이 되며, 그리고 도도한 바다로 흘러 세상을 덮어가는지를 절감케 했다. 희망이 가난해진 줄로만 알았는데, 희망은 그렇게 ‘치유할 수 없는 질병’인 것처럼 절대 가난해지지 않았더라.

수년간 빈말과 약속 파기로 세상을 황폐하게 하고도, 선거라고 다시 ‘미래’라는 신기루를 꺼내던 정치 언어는 저격당했다. 택시기사의 독백처럼 삶은 난장판인데 경제팀은 ‘괜찮다’고만 했다. 대통령은 “국민”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 언어는 여의도 눈엣가시들을 제거하는 데서만 진정성이 보였다. 국민들 고통을 알고 위로하는 게 아니라 지시하고, 야단치고, ‘심판해달라’고 보챘다.

야 3당의 20대 총선 공통 공약_경향DB

총선 표심은 대통령이 비명처럼 내지른 ‘배반의 통증’이 실상 지난 몇 년간 뭇사람이 차곡차곡 쌓아온 배신감과 상실감에 대한 부끄러움이어야 했음을 웅변한다. 실상 배반은 권력이 아주 조그마한 얼룩만 보여도 싹을 틔우는 ‘권력의 예보계’와도 같다. 대통령의 ‘배반의 아우성’은 그 점에서 오히려 모호하던 배반의 행렬을 불러들인 꼴이다.

하지만 저격당한 것이 대통령만은 아니다. 정치도, 언론도, 유권자들도 모두 저격당했다. 이분법적 정치만을 현실로 알던 ‘흑백 동굴’ 속 우상들은 스스로를 저격했다. 그들의 익숙한 현실을 편견으로 만들었다. 가난해지던 희망은 절로 부유해진 게 아니라 신천지를 찾고서야 부유해질 수 있었다.

새누리당 지지자이면서 야권에도 표를 준 그들, 박근혜 정부에 ‘투표 포기’로 의지를 표시한 그들은 우리 사회 프리즘에서 ‘성찰적 표심’ 정도로 위치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이처럼 ‘성찰적 유권자’는 오만하지 않은 권력에 대한 희구를 상징한다.

권력은 움직이고 있다. 대선을 20개월 앞둔 이 시점의 변화를 일반적 총선 표심과 똑같이 볼 수는 없다. 희망을 접은 권력은 밀쳐두고, 누가 희망을 품을 만한 권력인지를 따져보는 장정에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야당들은 좋아할 게 아니라 잔뜩 긴장해야 할 상황이다. 기회와 함께 온 미증유의 위기에 안달복달해도 모자란다. 그것이야말로 진짜 ‘권력에 대한 의지’다. 권력을 쥐기 위한 다툼이 권력 의지일 수는 없다.

국민의당은 묻고 또 되물어야 한다. 불길처럼 타오른 제3당에 대한 성찰적 표심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인가. 그만큼의 내부 구성과 내용물은 갖춰져 있는가. 면면만 보면 머리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다. “위대한 국민의 승리”라는 안철수 대표의 평가가 박 대통령의 “국민”처럼 ‘영혼 없는 빈말’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쉽게 지울 수 없는 이유다.

더불어민주당은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총선 제1당’이란 성가에도 불구하고, 사죄하고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옹색함이 현실을 증명한다. 힘과 논리의 우위로 여당과 야심만만한 3당을 끌고 갈 실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인가. 더 이상 기댈 언덕(호남)도 없다.

더민주도, 국민의당도 이런 과제 풀이에 실패한다면 다음 민심의 총알은 그들을 향할 것이다. 살아나려던 희망이 다시 가난해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희망이 가난해질까 더 이상 안절부절못하고 싶진 않다.


김광호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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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은 14일 밤 총선 후 처음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공천 배제됐다가 무소속 출마해 당선된 인사들의 복당을 원칙적으로 허용키로 했다. 이에 유승민, 윤상현 등 당선자 7명은 원하면 모두 복당이 될 참이다. 새누리당이 이런 결정을 한 이유는 자명하다. 원내 제1당 지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새누리당은 122석을 얻어, 123석의 더불어민주당에 밀려 제1당 지위를 빼앗겼다. 탈당 무소속 7명이 복당하면 129석으로 원내 제1당이 된다. 탄핵에 가까울 만큼 총선에서 참패한 새누리당의 첫 행보가 무소속 복당 수용이라는 점은 실망스럽다. 과연 지금 새누리당이 국회 기득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일 때인지 안타깝다.

4.13 총선 대패한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중앙선대위 해단식에서 고개를 숙여 생각에 잠겨 있다._권호욱 선임기자

원내 제1당 위세는 자못 크다. 그간 국회의장은 관례에 따라 원내 제1당에서 배출됐다. 국회의장은 국회법에 따라 각 교섭단체 대표의원(원내대표)과 협의해 국회 일정을 정한다. ‘합의’가 아니라 ‘협의’로 규정돼 있어, 합의가 안되면 국회의장 판단에 따라 운영되는 것이다. 대통령이라도 국회의장 동의가 없으면 법령을 사실상 시행할 수 없다. 이 때문에 새누리당은 선거 참패에도 의장직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유권자 심판에 따라 원내 제2당으로 전락한 새누리당이 인위적으로 제1당 지위를 회복하려는 것은 민심 왜곡에 다름 아니다. 지금 새누리당이 할 일은 억지로 국회의장직을 따내 대통령 의중을 관철하는 게 아니라, 민심의 향배를 읽고 반성하며 개혁에 매진하는 것이다. 정신 차리고 다시 일어서겠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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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6일로 꼭 2년이 된다.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가던 안산 단원고 학생과 교사, 탑승객 등 모두 304명이 생명을 잃었지만 비극의 진실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세월호는 진도 앞바다 맹골수도에 잠겨 있고 실종자 9명은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시 비장하게 국가개조를 외쳤으나 집권세력은 사건 해결의 첫 단추인 진실규명을 외면했고 세월호 지우기에만 골몰했다. 시민들은 정부와 새누리당이 세월호 참사를 선사인 청해진해운의 탐욕과 선장의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으로 몰고가면서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마저 정치투쟁으로 왜곡한 사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이는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대한 민의의 준엄한 심판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세월호 유가족 법률 대리인으로서 활동했던 박주민 변호사가 서울 은평갑 선거구에서 자신을 세월호 점령군이라고 비난한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국회에 입성한 사실이 보여주는 바다.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이 과연 세월호 민심을 얼마나 겸허하게 수용할지는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활동시한을 연장하는 특별법 개정안과 특검 수용 여부를 통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정부는 세월호특별법이 시행된 2015년 1월1일을 특조위 활동 시작일이라고 하면서 올해 6월까지만 활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별법 시행령이 지난해 5월 발효됐고 특조위 사무처를 구성한 것이 7월, 첫 예산이 배정된 것이 8월이란 점을 감안하면 특조위 활동을 가장 빨리 종결시킬 수 있는 시점으로 법적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봐도 세월호 진상규명에 소극적인 태도를 드러낸 것임을 알 수 있다.

세월호 특조위 주요 활동_경향DB


정부가 6월 말 특조위에 파견된 인력을 복귀시키고 예산 배정을 추가로 하지 않으면 특조위 활동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세월호 유족들은 1년6개월인 특조위의 활동기간을 최소 6개월 이상 더 보장하고 조사 방해에 대한 수사권을 갖도록 하는 세월호특별법 개정안을 국회에 청원했다. 새누리당이 총선 민의를 진정으로 존중한다면 한 달 반 남은 19대 국회의 마지막 임시국회를 열어 세월호특별법 개정안을 처리해야 한다. 세월호 선체 인양작업은 현재 오는 7월까지 육상으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으며 선체 조사는 진상규명의 핵심이다. 특조위가 선체 인양 후 정밀 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도 특별법 개정안에 포함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특조위의 청문회에서 제기된 청해진해운의 선내 대기방송 지시, 해경의 녹취록 조작 등 각종 의혹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집권세력은 세월호특별법이 650만명의 서명으로 제정됐다는 점을 상기해야 한다. 시민들의 요구는 국가 조사기구를 통한 성역 없는 진상조사였다. 새누리당은 특조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주지 않는 대신 특검을 요청하면 즉시 수용하겠다고 야당과 합의했지만 지난 2월 특조위가 국회에 보낸 참사 당시 해경 지휘부에 대한 특검 요청안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유족들에게 “특검도 해야 한다”고 했던 박 대통령의 약속도 속임수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300명이 넘는 생명을 앗아간 대형 참사 후에도 부실구조의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정의로운 정부라 할 수 없다.

새누리당은 이제라도 세월호 참사는 억지로 지울 수 없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을 직시해야 한다. 그것이 총선 민의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다. 진상규명과 안전시스템 구축이 없는 한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진정한 탈상은 어렵다. 그런 점에서 세월호 피로감을 주장하면서 이제 잊자는 분위기가 갈수록 고개를 들고 있다는 점은 우려스럽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미래세대인 학생들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다. 참사의 교훈을 학생들과 나누려는 전교조의 세월호 관련 공동수업을 정치투쟁으로 매도해서는 안된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가 시민을 보호해줄 것이란 믿음을 무너뜨렸다. 이는 수십년간 누적된 적폐의 결과이기도 하다.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날까지 세월호 사건이 현재 진행형이란 점을 야당도 외면해선 안된다. 세월호특별법 개정안 국회 통과에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의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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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에서 젊은층 투표율이 크게 올랐다고 한다. 지상파 방송 3사의 출구조사 결과, 20대와 30대 투표율은 19대 총선에 비해 각각 13%포인트, 6%포인트가량 상승한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50대와 60대 이상 투표율은 큰 변동이 없었다. 세대별 최종 투표율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인명부와 투표자 간 대조작업을 마치는 2~3개월 후에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선관위가 총선 직전 공개한 투표참여 의향 조사 역시 출구조사 결과를 뒷받침하고 있다. ‘반드시 투표하겠다’는 20대가 4년 전 같은 조사보다 19%포인트, 30대가 9%포인트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연령별 적극 투표 의향_경향DB

2030세대의 투표율 상승은 ‘헬조선’ ‘흙수저’로 상징되는 경제·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절망의 분출로 해석할 수 있다. ‘5포(연애·결혼·출산·인간관계·내집 마련 포기) 세대’라고 자조하던 청년층이 대거 투표소로 향한 것으로 봐야 한다. 실제 각 대학 총학생회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캠페인이나 플래시몹 동영상을 통해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압승하며 제1당이 된 데 이들의 ‘분노 투표’가 작용했을 개연성이 짙다.

젊은이들은 이번에 스스로의 힘을 자각했다. 공은 정치권으로 넘어갔다. 각 정당은 청년들의 정치적 의사를 상시적으로 반영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선거에 임박해 ‘청년 비례대표’ 뽑는 식으로는 안된다. 젊은층의 투표 참여 열기에 담긴 뜻을 외면한다면, 이들은 선거를 불신하게 될 것이다. 청년들이 거리로 나선 다음에는 후회해도 이미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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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 결과는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은 여권의 오만과 실정에 대한 심판이 마침내 내려졌다는 것이다. 과거 고비마다 불길같이 일어나 한국정치를 바로잡았던 국민들이, 최근의 주요 선거들에서는 실정을 거듭하는 기득권 세력들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치 및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과 실천은 일차적으로 정치가들의 몫이지만, 국민의 전략적 선택이 변화의 시동을 걸었다.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 벌 중의 하나는 자신보다 저급한 사람들의 지배를 받는 일”이라는 플라톤의 경구는 2400년 전의 철학자의 위대한 혜안이라는 점보다, 아직도 오늘날 우리 현실에 적확하게 들어맞는다는 한국정치의 후진성이 더 크게 다가왔었다. 다행히도 국민들의 준엄한 심판으로 우리가 다시 그런 벌을 받게 되지 않을 기회를 얻었다.

희망을 봤지만, 염려는 사라지지 않는다. 스멀스멀 더 큰 걱정이 밀려온다. 우려의 근거는 수두룩하지만, 그중에서도 두 가지에 주목한다. 먼저, 일정부분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청중 민주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프랑스 정치학자 베르나르 마냉은 주권을 가진 시민이 정치가들을 선택하지만, 이후에는 정치가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심해지면 선거귀족정 또는 선거독재가 가능해진다. 한국정치가 온몸으로 이를 증명해왔다.

이것이 4월13일의 선거결과가 권력판도는 바꿨지만, 한국정치 및 국민의 삶을 바꿀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의 근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내 권리나 의무를 행사하는 시점에서는 민감하지만, 내 손을 떠난 후부터는 관심을 거둬버리는 경향이 있다. 가장 전형적인 예가 세금이다. 탈세가 만연될 만큼 납세에 민감하지만, 내 손을 떠난 세금이 어디에 사용되는지에 대해선 둔감하다. 내 손을 떠난 세금처럼 내 손을 떠난 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현상이 반복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번 선거가 정책부재의 선거였기에 문제는 더욱 커질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행사한 표가 어떻게 정치가를 바꾸고, 정치가는 그 표가 어떤 결과로 다시 국민의 삶을 바꾸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강봉균, 원유철, 이군현, 황진하 새누리당 관계자들이 20대 총선 출구조사 결과를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다 _경향DB

기득권이 보수적이 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왜 보수적이 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경제학자 베블런은 당면한 일상에서의 생존만으로도 힘겨운 빈곤층은 변화를 위한 정치적 행동을 해볼 여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현실이 힘겹지만 변화가 품고 있는 ‘알 수 없는 고통’보다, ‘아는 지금의 고통’을 차라리 견디고 말겠다는 가슴 아픈 체념인 것이다. 이것이 소득불평등이 심화되고 중산층이 몰락함에도 뻔뻔하게도 야당 탓만 하면서 부자감세를 유지해온 정권을 지난 8년간 참아온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바뀌면 나아질 수 있다는 신뢰를 주지 못한 야권의 책임도 물론 더해진다.

이제 분명한 심판이 내려졌다. 그런데 유권자의 현명함을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두 번째 우려를 떨치기 어렵다. 그것은 한목소리로 선거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인다는 정부·여당의 고백에 대한 진정성 때문이다. 독선과 불통이 특기인 정권이 하루아침에 환골탈태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정치적 생존을 위한 표피적 적응에 그치며, 정치적 위기국면을 이미지와 언론, 그리고 정치공작으로 뒤집어버릴 수 있는 정권이다. 더 나아가 야권에 기회를 주었음에도 실패한 것처럼 몰아가, 내년 대선에서는 되치기를 시도할 가능성도 크다. 이번 선거 기간 보여준 대통령과 여당의 오만함은 이전에는 은폐와 포장이라도 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민낯이었다는 점에서 개선의 의지가 하루아침에 생길 것 같지 않다.

심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한 노파심의 차원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발생할 문제에 대한 우려이자 경고다. 바통을 넘겨받은 야권은 국민들의 주권행사가 정치를 통해 어떻게 다시 국민들에게 되돌아가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신뢰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국민들은 ‘민심은 무섭지만 청중은 무력하다’는 한국 민주주의의 약점을 믿고 준동하는 정치꾼들이 생기지 않도록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것이다


김준형 | 한동대 교수·국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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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수결 원칙의 투표에서 한 표는 위력이 막강하다. 때로는 사람의 목숨도 결정한다. 영국의 왕 찰스 1세는 1649년 의회에서 폭정 혐의로 67 대 68표로 참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 세상의 어지러움이여, 안녕히”라는 말을 남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미국의 텍사스·알래스카·워싱턴·아이다호 주가 미국 영토가 된 것도 1표 차 결정이었다. 자칫하면 미국은 전체 면적의 3분의 1가량을 얻지 못할 뻔했다.

한국에서는 더 희한한 일도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대통령종신제 개헌안이 재적의원 3분의 2에 1표 모자라 부결되자 ‘사사오입’을 적용해 가결시킨 사건이다. 203명이 참가해 135표가 나오자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인데 인간을 소수점 이하로 표기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하면 135명이 된다”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미게재] 19대총선 경기 하남시 민주통합당 문학진(국회의원)_경향DB

박빙의 차로 선거의 희비가 갈린 사례는 흔하다.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전국 8개 선거구에서 1표 차로 당락이 갈렸다. 16대 총선에서 경기 광주군에 출마한 문학진 후보는 3표 차로 낙선해 ‘문세표’란 별명을 얻었다. 그 후 법원의 재검표 결과 2표 차로 확인되자 별명은 ‘문두표’로 바뀌었다. 초박빙 승부를 보는 사람은 흥미진진하지만 당사자는 피를 말릴 수밖에 없다. 근소한 차로 진 사람들은 쉽게 승복하지 못한다. 패배의 고통과 상실감을 견디다 못해 정신과병원을 찾는 이도 적지 않다고 한다. 승자독식의 선거 특성을 감안하면 그 심정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16대 총선 서울 동대문을 선거구에서 11표 차로 낙선한 한 후보도 참지 못하고 선거무효소송을 걸었다. 그 결과 표차는 3표로 줄었지만 승패는 바뀌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두 후보 모두 지지자 위장전입이라는 신종 ‘득표공작’을 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20대 총선에서도 진땀 승부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1000표 차 이내 초접전지가 13곳이나 된다. 가장 치열했던 곳은 인천 부평갑. 새누리당 정유섭 후보와 국민의당 문병호 후보의 표 차는 26표였다. 전주 을에서도 111표로 당락이 갈렸다. 두 곳 모두 재검표하느라 밤을 꼬박 새웠다. 롤러코스터를 탄 후보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조호연 논설위원 ch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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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에 참패를 안김으로써 박근혜 정권의 오만과 퇴행을 심판했다. 민심을 거스른 정권에 분노한 유권자들이 정부·여당에 큰 회초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박 대통령은 이번 총선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다시 확인하고, 어떻게 고칠 것인지 점검해보는 좋은 계기로 삼아야 한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대기업 중심 경제정책으로 최악의 취업난, 성장률 하락, 비정규직 확대, 양극화 심화 등을 초래해 서민의 삶을 팍팍하게 만들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테러방지법 제정, 누리과정 예산 회피, 위안부 문제 졸속 협상 등으로 국가와 사회의 퇴행을 초래했다.

성장 과실이 시민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야 한다는 명제는 거꾸로 갔다. 반칙과 편법, 차별 관행 철폐와 공정한 시장경제 질서 확립도 멀어지고 있다. 돈을 풀고 규제를 완화해도 대기업 배만 불릴 뿐 낙수효과는 없었다. 고용 없는 성장, 중소기업·자영업자 몰락, 노동시장 양극화, 중산층 붕괴라는 부작용만 낳았다. 정부는 경제가 선전하고 있다고 하지만, 곧이곧대로 믿는 시민은 거의 없다.

[20대 총선 당선자 지도 ]영남에 꽂힌 ‘파란 깃발’…호남에 몰아친 ‘녹색 바람’ _경향DB

지난 3년간 경제정책의 효과를 점검하는 게 우선이다. 정부의 성장 위주 정책기조에 대해 국제기구에서 이미 한계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전 세계 부자들의 모임인 세계경제포럼조차 소득 주도 성장을 얘기하고 있다. 총선 의제로 떠올랐던 최저임금 인상과 같이 시민 소득을 향상시키는 정책을 고민해야 한다. 부동산 정책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높은 전셋값을 감당하지 못한 서민들이 급속하게 월세로 쫓겨가고 있다. 시대적 추세라며 전세 소멸을 부채질하는 듯한 정부는 무책임하다. 월세시대가 연착륙하도록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 중산층 월셋집인 뉴스테이보다 서민 임대주택을 늘리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총선 때문에 잠시 미뤄뒀던 부실기업 구조조정 또한 본격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금기어가 된 증세에 대한 논의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정부가 내년 3월 배포하겠다며 현재 저술 중인 중·고교 국정 역사교과서는 박 대통령이 시민 목소리에 귀 닫은 대표적 사례이다. 획일적 교육 및 역사 왜곡 우려 등 온갖 반발을 무시했지만 이제 상황이 달라졌다. 박 대통령이 바로잡는 쪽으로 결단해야 한다. “중앙정부가 책임진다”는 대선 공약을 깨고 지방교육청에 떠넘긴 누리과정 예산은 지금이라도 정부가 책임있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예산을 전액 또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3분의 2가량 부담하는 게 마땅하다. 사고 후 2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세월호 문제는 특별법을 개정해 독립적인 조사활동을 보장해야 한다. 정부·여당은 개혁, 야권은 개악이라고 맞섰던 기간제법과 파견법 등 노동개혁 법안은 원점 재검토가 불가피하다. 고용노동부 지침인 일반해고와 취업규칙 변경 요건 완화 등 양대지침도 손질 필요성이 커졌다.

박 대통령은 중간평가인 총선에서 낙제 수준의 성적표를 받았다. 시민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여 국정 실패에 대해 공개 사과하고 정책 대전환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제 일방통행은 불가능해졌다. 여소야대 3당 체제에서 필요한 것은 대화와 타협이다. 남은 임기는 22개월뿐이다.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되도록 바로잡기에는 시일이 촉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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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6.04.14 21:46:01 수정 : 2016.04.14 21:47:54

4·13 총선은 뜻밖에도 여당 참패, 야당 압승으로 끝났다. 선거 전날까지만 해도 1여다야 구도로 치르는 선거에서 보나마나 여당은 낙승할 거라고 모두들 예상하고 있었다. 심지어 개헌 저지선이 뚫리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조차 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이것은 민심의 승리다. 박근혜 정권의 실정과 오만에 대한 심판이다. 박근혜 정권은 3년이 지나도록 경제, 민생, 외교에서 아무런 업적도 내놓지 못한 채 남 탓, 야당 탓, 국회 탓만 하고 있었다. 보수적 국민들조차 이 말에는 동의하지 않음이 이번 선거에서 드러났다. 이명박 정부부터 새누리당 집권이 8년이 지났는데, 경제가 나쁘고 민생이 도탄에 빠진 것이 아직도 집권 여당의 책임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게 말이 되는가. 박근혜 정권 3년 동안 해놓은 것이라고는 퇴행적 국사교과서 국정화, 망국적 위안부 문제 합의, 상습적 부동산투기 조장 등 실정뿐이며, 좋은 일을 한 기억이 별로 없다.

대통령은 ‘선거의 여왕’이란 칭찬에 도취되어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공천 학살을 자행하여 스스로 지지층 이반을 일으켜놓고도 태연하게 선거 직전에 빨간 옷을 입고 선거 접전지를 다녔고, 투표 당일에도 빨간 옷을 입고 투표장에 나타났다. 그래도 이길 거라는 오만한 ‘선거의 여왕’을 국민이 가차없이 심판한 것이다. 내가 사는 대구에서조차 주위에서 ‘이번에는 1번 안 찍을 거다’ ‘이번에는 본때를 보여야 한다’고 말하는 보수 시민을 많이 봤다.

야당은 압승을 거두었다. 더불어민주당은 서울 강남에서도 당선자를 내는 등 서울과 수도권을 석권했고 대구, 부산, 경남에서도 예상 밖의 당선자를 다수 내어 대승을 거두었다. 이제 명실상부한 전국 정당에 가까운 정당은 더민주이다(다만 광주, 경북에서 전패한 것이 흠이다). 야당의 불모지였던 대구에서 김부겸이라는 희망의 불꽃을 피워올렸고, 부산에서는 당선자를 5명이나 냄으로써 ‘야당 도시’ 부산의 명예를 크게 회복했다.

4.13 총선 대구 수성갑에 출마한 김부겸 후보가 출구조사 결과를 보고 환호하고 있다_강윤중 기자

하기야 대구도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에는 ‘야당 도시’라는 자랑스러운 별명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타가 공인하는 보수의 아성이다. 이번 총선에서 김부겸, 홍의락 당선이 대구의 명예회복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서슬 푸르던 유신독재 시절 국회에서 우리나라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고, 통일이어야 한다는 지극히 옳은 연설을 용감하게 했다는 이유로 유성환 의원이 구속당한 이후 31년 만에 대구에서 야당 의원이 출현했으니 글을 쓰는 지금 벅찬 감회를 누를 수 없다. 나도 대구 출신으로서 이제 어깨를 펴고 다닐 수 있게 됐으니 대구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느낀다.

국민의당은 38명의 당선자를 배출하여 예상보다 큰 성과를 올렸다. 이것은 호남 석권과 비례대표에서의 선전 덕분이다. 호남이 국민의당을 선택한 것은 앞으로 어떤 평가를 받을지 두고 볼 일이다. 비례대표에서 국민의당의 약진은 기존 정치권에 대한 국민의 불신, 그리고 더민주의 비례대표 공천 실패에 대한 반사이익이라고 본다. 국민의당은 절반의 성공일 뿐이다. 왜냐하면 국민의당은 지역에서 25석을 얻었는데, 야당 분열로 인해 전국적으로 새누리당에 내어준 의석 수가 그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총선을 코앞에 두고 탈당, 분당한 행위는 납득할 명분이 없고, 그들이 내세운 친노 패권주의는 근거가 없다. 보라! 이번에도 친노는 대거 당선됐고, 더구나 새 얼굴이 여럿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사실 친노는 새누리당이 가장 두려워하는 개혁세력이다.

이제 여소야대 20대 국회는 무엇을 해야 하나? 박근혜 정권이 헌신짝처럼 버린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실현이 물론 중요하다.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선거제도 개혁이다. 첫째, 소선거구제에서 중대선거구로 개편. 이것만 해도 지역 싹쓸이는 크게 줄어들고 김부겸, 이정현은 쉽게 당선될 것이다. 둘째, 비례대표 의석 증가. 복지국가,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 민의에 비례하여 의석을 나누려면 비례대표 의석을 대폭 늘려야 한다. 그런데도 19대 국회는 겨우 54석이던 비례대표 의석을 47석으로 줄이고 말았다. 이를 독일처럼 의석의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100석을 목표로 늘려나가야 한다. 셋째, 투표 연령 인하. 18세부터 투표하는 나라가 세계 232개국 중 215개국이니 세계의 대세다. 우리도 18세로 낮추어야 할 때다.

세 가지 선거제도 개혁에 대해 줄기차게 반대해온 정당이 새누리당인데, 이제 여소야대가 되었으니 개혁의 기회가 왔다. 당리당략을 뒤로하고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 선거제도를 개혁하는 것이야말로 이번 총선에서 나타난 정치혁명을 완성하는 길이다. 민심은 위대하다. 이제 정치권이 뒷받침해야 한다.


이정우 | 경북대 명예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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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6시40분. 몇 번 이름을 불러 깨웠지만 대답이 없다. 이번엔 한번 버럭 소리를 지를 차례다. “너, 정말 안 일어날래? 이제 혼자 좀 못 일어나냐!” 그제야 방 안에서 짜증 섞인 소리로 대답한다. “일어났어, 옷 입고 있다고.” 옷은 무슨, 어젯밤에 빤 교복 셔츠며 스타킹이 거실 빨래걸이에 그대로 걸려있는데 모를 줄 아냐, 누워서 대답하면서.

식탁에 반숙 계란 프라이와 멸치볶음, 현미잡곡밥, 소고기 미역국, 김치를 차려놨다. 며칠 전 사소한 말다툼 끝에 아이가 미역국 타령을 했다. “친구 엄마는 시험 보는 날, 일부러 미역국 끓여준대. 시험 못 보면 엄마 탓 하라고.” 그 말을 들은 다음부터는 보란듯이 미역국을 단골로 끓여댄다. 그 엄마 속도 좋다고 해라. 걸핏하면 친구 엄마를 갖다붙여. “그 집 가서 그 엄마랑 살던가, 지지배야!”

오후 2시 아이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4월8일 ○○○학생은 벌점 1점을 받았습니다.’ 새 학기가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벌점을 받아. 등굣길에 짧은 치마가 걸렸나, 준비물을 빠트렸나. 상점 받아도 모자랄 판에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는 거야, 설마 생기부(생활기록부)에 적히는 건 아니겠지.

저녁 무렵에 아이가 보내온 카톡. “용돈 떨어져서 학원 갈 차비가 없어 ㅠㅠ. 김밥도 사먹어야 돼. 1만원만 통장으로 빨리 넣어주세요♡.” 돈 달라고 할 때만 하트야, 평소에 좀 고분고분하지. 퇴근 후 늦은 장을 본다. 우유, 짜장라면, 딸기, 삼겹살, 아이스크림…. 다이어트 한다고 잘 안 먹던데, 고기라도 구워 먹여야지. 근데 고등학교 2학년이 다이어트 할 때냐구, 웬수.

그리고 밤 10시 “다 녀 왔 습 니 다”. 아이가 현관 문을 열고 들어서 운동화를 벗고, 책가방을 던져두고 냉장고 문부터 열며 조잘조잘 오늘 하루를 얘기한다. 내일 아침이면 어서 일어나라고, 티격태격하며 얼굴을 맞대고 따뜻한 체온을 느끼며 또 하루를 시작하겠지. 내세울 것 없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시작할 것이다.

그러나 이 보잘것없는 일상이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꿈에서라도 단 한번만…’이라며 그리워하는 엄마들이 있기 때문이다. 별이 된 아이들을 품고서 광화문광장에서, 안산에서, 팽목항에서 지금도 울고 있는 엄마들이 있다.

"세월호 기억하자" 추모관에 전시되는 세월호 모형_경향DB

내일 4월16일은 세월호 참사 2주기다. 언제 이토록 시간이 지났을까.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된 것이 없는데 시간만 지난 것은 아닌지. 2주기를 맞아 관련 책이 다수 출간되고 추모행사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지만 세월호를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게 현실이다. 고통을 기억하려고 하지 않는다. 지난 2년간 유가족들 곁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시민단체 활동가들과 종교인들은 “유가족과 미수습자 가족들이 울고 웃는 것은 시민들의 관심, 기억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지난달 28일 서울시청에서 열린 세월호 2차 청문회 방청석에도 유가족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대부분 자리했을 뿐 빈자리가 많았다. 총선 분위기에 밀려 청문회에서 새로 나온 내용들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고 관심 밖의 일로 취급됐다. 이제 세월호광장에서는 가이드 깃발을 따라 영문을 모르는 중국, 일본 관광객들이 노란 천막 안에 마련된 전시회 등을 둘러볼 뿐이다. 지금 예정대로라면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은 6월 말로 끝난다.

그 안타까움에 광화문광장 노란 천막 한 귀퉁이에서 세월호 엄마들은 노란 리본을 쇠줄에 달아 오가는 사람들에게 조심스럽게 말 붙인다. “리본 달아드릴까요?”

세월호 생존학생과 형제자매들의 이야기를 엮은 <다시 봄이 올 거예요>에 한 생존학생이 말한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기억할 거예요”는 우리에게 필요한 말이다. 고통의 치유와 새로운 출발도 모두 ‘기억’에서 시작된다.


김희연 | 문화부 부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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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2당으로 전락했다. 보수 여당이 제1당에서 밀려난 것은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0년 2대 총선 이후 처음이다.

야권 분열이라는 더없이 유리한 조건에서 새누리당이 1당 지위를 내주는 역사적 패배를 한 것은 지지층마저 등을 돌렸기에 가능한 일이다. 새누리당의 참패는 자초한 것이다.

여권의 정점인 박근혜 대통령은 여당을 거수기로만 부려왔다. 야당도 국정 협의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심판 대상으로 대했다. 시민의 반대와 저항에도 세월호 참사의 진실은 여전히 물 밑에 묻혀 있고, ‘필리버스터’라는 야당의 반발을 부른 테러방지법도 막무가내로 도입했다.

새누리당은 독단을 막기는커녕 지시를 앞장서 시행하는 여의도 출장소를 자임했다. 이번 총선에서는 ‘진박’을 지역구에 내리꽂기 위해 민의를 거스르는 공천도 서슴지 않았다. 무슨 일을 해도 지지자들이 찍어줄 것이라는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시민은 새누리당으로부터 제1당 자격증을 박탈했다.

정연국 청와대 신임 대변인_경향DB

청와대는 교훈을 얻었을까. 정연국 대변인은 기자들이 총선 소감을 묻자 “20대 국회가 민생을 챙기고 국민을 위해 일하는 새로운 국회가 되기를 바란다. 국민의 이러한 요구가 나타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의 총선 전날 “민생 안정과 경제활성화에 매진하는 새로운 국회가 탄생해야만 한다”는 야당 심판론의 판박이다. 여야 모두 총선 결과를 여당 심판으로 받아들이지만, 청와대만 야당 심판이라고 강변하는 꼴이다. 심각한 인지 부조화다. 이 정도 성적이라면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이 총사퇴하고 중립내각을 구성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다.

청와대가 민심을 무섭게 여기지 않는다면 새누리당이 나서야 한다. 시민의 뜻을 청와대에 전달하는 여당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했다가 시민으로부터 외면당해 천막당사로 가야 했던 2004년보다 더한 궤멸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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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그중에서도 부산·경남(PK)에서 26년간 지속돼온 새누리당 독점 체제가 무너진 것은 놀라운 대목이다. 부산은 1979년 박정희 정권의 몰락을 부른 부마민주항쟁의 진원지였다. 전통적 야도(野都)였던 부산의 정치적 색채는 1990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과 ‘3당 합당’을 하며 달라지게 된다. 이후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으로 이어지는 일당 독주체제가 유지돼왔다. 총선에서 여당의 공천장은 당선확인증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나 이번 총선은 달랐다. 더불어민주당이 부산에서 5석, 경남에서 3석을 차지했다.

야당 당선자가 대거 나온 배경은 새누리당의 자충수에 있다고 본다. 새누리당은 부산에서 사상 처음으로 현역 의원들을 100% 공천했다. 이런 여당의 오만과 독선에 민심이 등을 돌렸다. 반면 더민주의 김영춘(부산진갑), 박재호(남을), 전재수(북·강서갑), 최인호(사하갑) 후보 등은 낙선의 고통을 딛고 지역밀착형 공약과 선거운동으로 표심을 잡았다. 경남에서도 민홍철(김해갑), 김경수(김해을), 서형수(양산을) 후보가 야당 소속으로 승리했다. PK의 일당 독점체제 붕괴는 고질적 지역주의 완화의 청신호이자, 3당 합당으로 일그러진 한국 현대정치사를 새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다.

20대 총선 부산 진구갑에 출마한 김영춘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 되자 축하케이크를 자르고 있다_연합뉴스

‘보수 패권’의 강고한 벽이 무너진 곳은 PK 지역뿐이 아니다. 서울에서는 여당의 오랜 아성이던 ‘강남’과 ‘목동’이 야당을 향해 문을 열었다. 강남을에서 더민주 전현희 후보가 현역 의원인 새누리당 김종훈 후보를 꺾었다. 목동이 위치한 양천갑에서도 더민주 황희 후보가 승리했다. 이들 지역에서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은 각각 24년(강남을), 28년(양천갑) 만의 일이라고 한다. 20대 총선 결과는 지역주의가 균열을 넘어 붕괴의 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막대기만 꽂아도 당선’이라던 시대는 이제 저물었다. 한국의 ‘비정상 정치’가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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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이 막을 내렸다. 새누리당이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한 반면 더불어민주당은 수도권, 국민의당은 호남에서 승리했다. 16년 만에 여소야대 국회가 재연되며 박근혜 대통령은 조기 레임덕(권력누수)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민심이 박근혜 정권의 민생·민주주의 후퇴에 냉엄한 심판을 내린 것이다.

박 대통령은 선거 결과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박 대통령이 집권한 3년간 시민의 삶은 계속 악화됐다. 소득 불평등이 깊어지고 청년실업률이 치솟았다. 전셋값이 폭등하고 가계부채가 급증했다. 민주주의와 역사 인식은 30~40년 전으로 후퇴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 위안부 합의, 테러방지법 강행에 시민은 분노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선거중립 의무를 아랑곳하지 않고 노골적으로 총선에 개입했다. 어제도 새누리당의 상징색인 빨간색 옷을 입고 투표소에 나타났다. 그 결과가 총선 패배다. 이제라도 박 대통령은 국정운영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총선 결과에서 나타난 민의를 외면하고 불통·독선·폭주를 이어간다면 더 큰 심판에 직면할 것임을 알아야 한다. 새누리당도 집권당으로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천 과정에서 오직 박 대통령의 뜻을 무작정 따랐던 결과가 대구·부산 등의 표심 이반으로 나타난 것 아닌가. 대통령 사진을 사진이라 부르지 못하고 ‘존영’이라 칭하는 정당은 공당이 아니라 호위무사 패거리가 뭉친 사당일 뿐이다.

야권도 선거 결과에 자족할 때가 아니다. 야권 분열로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는 선거를 만들지 못했다는 점을 반성해야 마땅하다. 수도권 상당수 지역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단일화’가 이뤄졌으나, 일부 지역에선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표가 분산되며 적잖은 사표(死票)가 발생했다. 더민주와 국민의당은 민의 왜곡을 막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야권 분열이 내년 대선에서도 최대 쟁점이 될 가능성이 큰 까닭이다. 더민주는 서울에서 압도적 1위를 달리고 영남 등 기타 지역에서도 예상보다 선전했지만 ‘야당의 심장’인 호남에서는 국민의당에 참패했다. 왜 이러한 일이 벌어졌는지 돌아볼 일이다. 국민의당도 이른바 ‘녹색 바람’을 일으키며 약진했으나 ‘지역당’ 처지는 면하기 어렵게 됐다. 더욱이 개별 후보 차원의 야권 연대조차 가로막은 부분은 두고두고 족쇄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1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기상고 체육관에 마련된 개표소에서 개표원들이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개표 작업을 하고 있다._정지윤기자


다행스러운 것은 투표율의 상승이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집계 결과 유권자 4210만398명 가운데 2443만2533명이 투표에 참여해 58%의 투표율(잠정)을 보였다. 19대 총선 투표율(54.2%)보다 높았고, 2014년 지방선거 투표율(56.8%)도 넘어섰다. 비록 60%의 벽은 돌파하지 못했지만 고무적인 결과로 받아들인다. 투표율 제고는 특정 정당에 미칠 유불리를 떠나 시민의 정치참여 열기를 방증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이번 총선 투표율이 비교적 높았던 데는 복합적 원인이 있다고 본다. 우선, 박근혜 정권의 집권 3년을 평가하는 선거였다. 야권 지지층은 총선을 정권의 오만과 독주에 제동을 걸 기회로 여기며 투표를 독려했다. 반면 여당의 핵심 지지층은 최악의 공천 파동에 실망해 상당수가 투표장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야당의 핵심 지지기반인 호남 투표율은 영남보다 높게 나타났다. 다음으로, 총선 사상 최초로 이틀간의 사전투표가 실시됐다. 지난 8~9일 실시된 사전투표율은 12.2%로 2013년 사전투표 도입 이래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선거일에 출근해야 하는 유권자들이 대거 사전투표를 함으로써 투표율 상승을 견인한 측면이 있다.

이번 총선 결과는 민심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생생히 보여줬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분노와 실망을 명확히 표출하면서 야권에 대해서도 각성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20대 총선 결과는 정치권 전체에 성찰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패자는 물론 승자도 민의 앞에 겸허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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