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방지법 제정안이 결국 국회를 통과했다. 새누리당이 선거구 획정을 볼모 삼아 버티기로 일관하자, 야당도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192시간 만에 중단했다. 테러에 철저히 대비해야 한다는 점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정부가 그동안 테러에 대응할 제도와 기구를 갖추고 있었던 것도 그런 당위성 때문이다. 그러나 국회를 통과한 법으로는 테러 대응이란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특히 국가정보원에 국민을 상시 감시할 수 있는 무제한 권한을 부여한 게 잘못이다. 국정원이 어떤 곳인가. 2012년 대선 당시 댓글 공작을 벌인 게 확인됐다. 중국 지방정부의 공문서까지 위조하면서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으로 조작하기도 했다. 인권의식도 희박한 개혁 대상이 바로 국정원이다. 그런 곳에 광범위한 국민 사찰·감시 권한까지 주겠다니 오·남용을 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법 내용도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할 위헌적 요소가 다분하다. 테러 위험 인물을 ‘테러 예비·음모·선전·선동을 하였거나 하였다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는 자’로 포괄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국정원이 영장도 없이 이들의 금융 정보나 개인 정보를 수집할 수 있게 했다. e메일·문자메시지도 언제든 들여다볼 수 있다. 통제 장치라곤 대통령령으로 임명하는 인권보호관 한 명을 두는 데 그쳤다. 결국 국정원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개인이나, 집권 세력에 저항하는 정치 세력을 사찰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정원의 국민 감시 일상화를 초래한 1차적 책임은 청와대와 새누리당에 있다. 야당은 9일간 38명이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며 법 통과를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그 어떤 대화와 타협도 거부했다. 새누리당은 독소조항 수정 요구에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버텼다. 제1야당으로서 법안 통과를 저지하지 못한 더불어민주당도 능력 부족이란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합법적, 민주적 절차인 필리버스터를 “이념전”으로 깎아내린 발언은 지지자들을 실망시켰다. 당 지도부와 의원들이 ‘질서있는 퇴각’을 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국민들은 이제 두 눈 크게 뜨고 국정원과 여권의 행태를 똑똑히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정치적 일탈이나 기본권 침해가 발생한다면 관련자들의 분명한 정치적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지지하던 시민들에게는 투표권이란 무기가 있다. 그런 점에서 집권 세력이 테러방지법 통과를 마냥 반길 일은 아니다. 언제든 부메랑이 되어 되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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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야권통합을 전격 제안했다. 김 대표는 어제 “야권이 4·13 총선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단합된 모습을 보여야 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국민의당에선 안철수 상임공동대표가 일단 거부했지만 내부 온도차도 감지된다. 소선거구 단순다수제인 총선에서 야권이 사분오열할 경우 필패(必敗)인 까닭이다. 김 대표 제안은 테러방지법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 중단에 따른 국면전환 카드라는 인상이 짙다. 그럼에도 통합이든, 연대든, 개별 선거구 차원의 후보단일화든 야권 협력에 대한 논의는 불가피해졌다고 본다.

대통령 임기 후반에 치러지는 총선은 일반적으로 ‘정권 심판론’이 핵심 이슈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야권이 분열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집요하게 ‘야당 심판론’을 제기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역사의 시계를 30~40년 전으로 되돌린 집권세력에 대한 심판론이 뒷전으로 밀릴 판이다. 게다가 안보 문제가 이슈로 부상하면서 선거는 보수진영에 더욱 유리해졌다.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고 정권의 실정을 심판하려는 민의를 결집하는 길은 야권 전체의 협력뿐이다. 야권 지지층 다수도 새누리당의 어부지리를 우려하며 야권 통합이나 연대를 강력히 희망하고 있다. 만약 이들의 바람을 저버린 채 각개약진한다면 정치혐오가 커져 젊은층을 중심으로 투표율이 급락할 가능성이 크다.

김종인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달리는 정책의자’ 발대식에 참석하고 있다 _경향DB

물론 야권의 통합이나 연대는 선거전략일 뿐 최종적 목표일 수 없다. 야권의 협력은 ‘반(反)박근혜’ 세력의 제휴 차원을 넘어 보다 큰 그림을 지향해야 한다. 야권이 의회권력을 잡는다면 어떠한 나라를 건설할 것이며, 주권자 개개인의 삶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 것인지 선명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즉 야권이 힘을 합칠 경우 강력하고 유능한 수권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는지 입증해야 한다. 단순한 후보단일화 수준에 그친다면 선거철마다 돌아오는 이합집산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야권의 제 세력은 그동안 서로를 공격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소비해왔다. 이제는 이성을 되찾을 때다. 불필요한 자존심 싸움으로 공멸할지, 제휴와 협력으로 함께 이기는 길을 찾을지 선택해야 한다. 40여일 후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과반을 지나 180석 이상의 압승을 거둔다면 국회선진화법은 무력화되고 정권의 독주는 제어하기 어렵게 된다. 선거가 끝나고 후회해봐야 이미 늦다. 야권은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을 갖고 결단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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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인슈타인이 100년 전 예견한 중력파가 마침내 검출됐다. 세계과학계는 우주를 보는 새로운 창이 열렸다고 흥분하며 중력파 검출의 의미를 열심히 설명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역불급이다. 절망에 빠진 필자는 어떤 책에서 위안이 되는 구절을 찾았다. 아인슈타인도 중력이론을 체계화하는 데 8년 넘게 걸렸으며, 그 이론을 이해한 과학자가 전 세계를 통틀어 12명도 안된다는 대목이었다. 무릎을 쳤다. 그래, 그렇게 고차원의 이론을 고작 원고지 몇 장으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필자 같은 문외한의 눈높이에서 설명해보면 어떨까. 도전해보기로 했다. 팔자에 없는 관련 책들을 눈이 빠져라 읽고, 마침 <중력파> 책을 낸 오정근 박사의 도움도 받았다.

아인슈타인 중력이론의 요체는 질량을 가진 물체 때문에 시공간이 휘어지며, 그 시공간을 따라가는 빛도 휘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아이들이 콩콩 뛰며 노는 트램펄린을 연상해 보자(그림). 트램펄린(우주공간) 위에 쇠공(태양)을 놓는다 치자. 그러면 쇠공이 닿는 면은 움푹 들어갈 것이고, 닿는 면을 따라 곡선이 그려질 것이다. 이 곡면이 바로 아인슈타인이 설명하는 시간과 공간의 휘어짐이다. 이 시공간을 따라가는 빛도 휘어질 것이다. 만약 개미가 이 곡선면을 따라간다면 직선면보다 거리는 길어지고, 시간은 느려질 것이다. 또한 쇠공 가까이 어린아이가 서 있다고 치면 그 아이는 경사면을 따라 기울어질 것이다. 중력이란 뉴턴의 법칙대로 ‘힘과 힘의 작용’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쇠공이 만들어낸 ‘시공간의 휘어짐’ 때문에 생긴다는 것이다. 쇠공의 질량이 커지면 커질수록 시간과 공간의 휘어짐 정도도 커질 것이다.

다시 트램펄린 위에 쇠공을 던진다고 치자. 그러면 주변으로 파문이 생길 것이다. 이것이 아인슈타인이 예견한 중력파다. 만약 우주의 탄생(빅뱅)과, 별의 사멸 과정(블랙홀 충돌 및 합병·초신성 폭발·중성자별의 맥동) 등 격변이 일어나면 어찌 되는가. 엄청난 중력파 물결이 우주로 퍼질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지구에 도달하는 중력파 크기가 극미했기 때문에 관찰하기 어려웠다. 이번에 감지된 중력파도 13억 광년 떨어진 블랙홀 충돌 때 발생한 것인데, 그 크기는 10의 21거듭제곱분의 1(10의 -21제곱)에 불과했다.



그러면 중력파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인류는 지금까지 빛, 전파, X선을 탐지하는 전자기파 천문학으로 우주를 관측했다. 하지만 전자기파는 물질을 통과하기 어려운 속성을 갖고 있다. 예컨대 빅뱅 때 발생한 엄청난 에너지층은 빛과 같은 전자기파를 가둬버린다. 인류가 빅뱅으로 방출된 빛을 관측하는 데는 성공했다지만, 그것은 빅뱅 후 에너지가 식어버린 뒤인 38만년 후의 빛이었다. 인류는 빅뱅이 분출한 두꺼운 에너지층이 걷힌 뒤의 전자기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우주탄생 후 38만년 뒤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뿐인가. 빛까지도 빨려 들어가는 엄청난 중력이 작용하는 블랙홀의 전자기파도 물론 관측할 수 없다.

그러나 중력파는 우주나 별의 생성과 사멸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 우주로 퍼진다. 중력파는 전자기파와 달리 어떤 물질의 간섭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인류는 이 중력파의 파형으로 다양한 우주현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소리로도 변환시킬 수 있다. 예컨대 중력파 망원경으로 빅뱅의 원시중력파를 찾아낸다면 어찌 되는가. 빅뱅~38만년 사이의 과정, 즉 우주탄생의 순간을 읽을 수 있다. 빅뱅뿐이 아니다. 중력파 망원경을 통하면 블랙홀 내부까지 관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력파가 밥 먹여주는가. 오정근 박사는 “먹여줄 수 있다”고 한다. 전자기파는 지금의 통신혁명을 일으켰다. 중력파의 힘을 이해하고 조절할 수 있다면 인류의 삶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전파통신이 도달하지 못하는 그 어떤 곳도 중력파 통신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또 하나, 수많은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이 내준 중력파 수수께끼에 100년을 매달렸다는 것과, 미국이 지난 1992년 정식으로 출범한 중력파 검출 프로젝트에 지금까지 1조원 넘게 투자했다는 것도 경이로운 일이다. 이 대목에서 빛이 휘어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아서 에딩턴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중력파는 생각의 속도로 퍼진다.” 그러고보니 아인슈타인도 늘 문제 해결을 위해 방안을 서성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잠시 생각해보자.”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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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전국시대 말기 한나라에서 살았던 한비(韓非)입니다. 흔히 ‘동양의 마키아벨리’ 또는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정치이론가로 알려져 있지요. 순자(荀子)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이사(李斯)의 모함으로 진시황의 사약을 받고 자결한 게 기원전 233년이니 장구한 세월이 흘렀네요. 한나라 왕의 서자(庶子)로 태어난 저는 심한 말더듬이였지만 논리적인 사고와 탁월한 문재(文才)를 갖췄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제가 살던 한나라는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최약소국에 속했습니다. 칠웅이 할거하던 시대라고는 하지만 ‘1강(진나라) 6약(조·한·위·연·제·초나라)’의 구도 속에 합종연횡(合從連衡)이 잇따랐지요.

강대국에 둘러싸인 약소국의 비애와 굴욕을 절감한 저는 왕의 실정(失政)과 무능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이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왕에게 인재를 중용하고, 법률과 제도를 정비해 나라의 기틀을 다져야 한다고 직언했습니다. 하지만 왕은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되레 감언이설이 몸에 밴 소인배나 나라의 법도를 어지럽히고 명리만을 좇는 이들을 중용했지요. 나라에 망조가 들면서 저는 절망했습니다. 그때 세상에 대한 울분을 삭이며 쓴 글이 <한비자>에 나오는 ‘망징(亡徵)’입니다. ‘망징’은 “나라가 반드시 망한다는 것은 아니며 단지 망할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도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시절 암울한 현실을 한탄하며 ‘망국론’을 펼쳤다지요? 제가 쓴 ‘나라가 망할 징조 47가지’ 중 몇 가지만 추려 소개하겠습니다. 2200여년 전에 쓴 낡은 글이긴 하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았으면 합니다.

“군주가 법률을 쉽게 바꾸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갈피를 못 잡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무릇 군주는 법률을 가볍게 여기거나 정치를 황폐화시켜서는 안됩니다. 대한민국 국회에선 지난 8일간 경이로운 일이 벌어졌다지요? 테러방지법안 처리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가 세계 최장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야당 의원 30여명의 눈물과 분노, 절규와 호소는 ‘망징’에서 벗어나려는 사자후(獅子吼)처럼 들렸습니다. 하지만 여당 의원들은 이를 ‘자폭정치’ ‘총선용 공작’ 등으로 폄훼하며 테러방지법 독소조항을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고 했지요.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이라고 격노했다지요? 테러방지법안은 국가정보원의 대국민 감시를 사실상 무제한 허용하는 ‘악법’이란 평가가 많습니다. 시민들이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에 뜨거운 호응을 보인 것도 그 때문이지요. 야당 의원들의 필리버스터 발언록을 묶으면 ‘한국판 망징’이 되지 않을까요? 군주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쓴소리에 귀를 닫으면 그 나라가 어디로 갈지는 뻔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_경향DB

“군주가 고집이 세서 화합할 줄 모르고, 간언(諫言)을 물리치며 백성을 이기는 일을 즐기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무릇 군주는 국민을 설득하되 이기려 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지난 3년간 승부사 기질을 발휘하며 국정 현안들을 밀어붙이기로 해결해왔습니다.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강행했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채 ‘최종적·불가역적’이라며 위안부 문제를 일본 정부와 졸속 합의했습니다. 개성공단 가동 전면 중단은 남북을 화합보다는 대결 국면으로 몰고 가려는 조치였지요. 군주가 고집을 꺾지 않고 독단적으로 국정현안을 처리하면 그 나라가 어디로 갈지는 뻔합니다.

“군주가 뉘우침이 없고, 자신은 재능이 많다고 여기면 그 나라는 망할 것이다.” 무릇 군주는 뉘우침이 많아야 하고,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사과에 인색합니다. 세월호 참사 때도, 성완종 리스트 파문 때도, 메르스 사태 때도 대국민 사과는 없었습니다. 정작 책임져야 할 때는 ‘유체이탈 화법’을 쓰며 “국민이 나서달라”는 말만 되풀이했습니다.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는 박근혜 정부를 ‘겨울공화국’에 비유했다지요? 인 목사는 “박 대통령께서 너무 자주 역정을 내시고, 꾸중도 하시고, 국회의원들을 나무라시는 걸 보면서…. 지난 3년이 무서웠다”고 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울 수 없는 겨울공화국 같은 나라가 어디로 갈지는 뻔합니다.

제가 쓴 <한비자>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무가 부러지는 것은 벌레가 파먹었기 때문이고, 담장이 무너지는 것은 틈이 생긴 탓이다.” 청년세대들에게 ‘헬조선’으로 불리는 대한민국의 나무와 담장은 온전한지요? 원인 없는 결과가 없는 게 세상 이치인 것처럼 ‘망징’도 그러합니다.


박구재 | 기획·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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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3·1절 경축사에서 지난해 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한 한·일 합의 배경을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피해자 할머니가 한 분이라도 더 살아 계실 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집중적이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라고 설명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정부가 노력했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합의 무효화를 주장하는 현실과는 동떨어진 인식이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유족회는 지난달 27일 ‘나눔의 집’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위안부 합의는 피해자들을 무시한 정치적 야합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한국갤럽의 지난 1월5~7일 여론조사에 따르면 위안부 합의가 ‘잘못됐다’는 답변은 54%로 ‘잘됐다’는 응답 26%의 2배가 넘었다. 피해 당사자와 다수의 국민들이 ‘한국의 완패’라며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데도 박 대통령만 위안부 피해자를 위한 노력의 성과라며 자화자찬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일본 정부의 불성실한 태도를 원론적으로만 언급한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일본은 위안부 합의문에서는 ‘군의 관여’와 ‘정부의 책임’을 명시했다. 하지만 전향적이던 태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완전히 달라졌고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공개적으로 위안부 강제동원 사실까지 부인한 상태다. 합의를 무효화하지 못하더라도 합의 정신을 전면 부정하는 일본의 행태에 대해 따끔한 지적이라도 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런 식의 미래지향은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이란 합의 문구에 발목이 잡힌 정부의 대일 저자세 외교의 결과라는 점에서 전혀 미래지향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박근혜 대통령이 1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97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여야 대표 앞을 지나가고 있다._청와대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이 “북한이 핵으로 정권을 유지시킬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도록 해야 한다”고 밝힌 부분은 북한 붕괴론을 연상시킨다. “현 상황을 끝내기 위해서도 한반도의 평화통일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고 한 부분도 마찬가지다. 남북 교류협력을 완전히 단절한 채 대북 제재를 강화하는 상황에서 통일은 결국 북한 김정은 체제의 붕괴와 이에 따른 흡수통일뿐이다. 하지만 북한 붕괴론은 남북 긴장을 고조시키고 군사적 충돌까지 가져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중국이 존재하는 한 붕괴론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이미 증명된 상황이다. 중국은 전례 없이 강한 대북 제재에 동의하면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 논의를 병행하자고 제안했다. 정부는 대북 제재 국면 이후 닥쳐올 외교 환경의 변화에도 대비해야 한다.

박 대통령은 야당의 테러방지법 저지를 위한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이어지고 있는 국회를 향해 “직무유기”라고 지적했다. 이는 국가정보원의 대국민 사찰권을 강화하는 법안의 해악적 요소에 눈감고, 다수당의 일방적 법안 밀어붙이기를 막기 위한 합법적 의회 민주주의 절차를 무시하는 발언이다.

박 대통령은 또 “이럴 때일수록 국민 여러분의 진실의 소리가 필요하다” “국민들께서 직접 나서주시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4·13 총선을 앞둔 상황에서 중립을 지켜야 할 대통령의 정치개입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부적절한 발언이다. 3·1절 경축사를 통해 드러난 박 대통령의 국정 인식이 실망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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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대사관 앞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노숙하고 있는 지킴이 대학생들에게 방한 텐트를 지급해달라는 서울변협의 긴급구제 신청을 국가인권위원회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권의 중대한 침해가 없으며 농성자들의 생명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긴급한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겨울에 60여일째 노숙하면서 농성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의 건강을 염려하는 목소리가 높지만, 여기에서 인권위의 결정이 정당한지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인권위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으면 하는 생각에 아쉬움을 감추기는 어렵다.

인권위는 인권의 보호와 향상을 위한 업무를 수행하는 국가기관이다. 인권위는 이런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입법, 사법, 행정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독립기구의 지위를 부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인권위도 국가 기관이므로 정부의 정책과 무관할 수 없다. 더구나 11명의 인권위원 중 4명을 대통령이 지명하며, 여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국회에서 4명을 선출한다. 인권위가 정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조처를 취하기가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구성이다. 그렇지만 인권위의 역할은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이다. 약자들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닌 이상, 서로 달리 해석할 수 있는 문제에서는 이들의 편에서 생각하고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인권위의 역할일 것이다.

우리는 정부 기관들이 자신의 업무나 역할과는 어울리지 않는 활동을 하는 것을 너무도 흔히 본다. 고용노동부는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하고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행정부서이다. 그러기에 고용노동부는 노동자들의 편에서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그런데도 고용노동부가 그런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는 듯하다. 그보다는 정부의 노동정책을 뒷받침하는 데 업무의 우선순위를 두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 홈페이지는 이른바 ‘노동개혁입법’의 처리를 촉구하는 팝업창을 메인에 띄우고 있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이 한목소리로 반대하는 그 법안이다. 입법의 명목으로 청년에게 일자리 희망을 주기 위한 것임을 내세우지만, 정작 그 ‘청년’들에게서도 지지의 목소리를 찾기는 어렵다. 노동자들이 반대한다면, 다른 정부기관이나 행정부서들이 입법을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고용노동부는 적어도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 자신의 역할일 것이다. 정부 안의 다른 행정 기구들을 상대로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그러지 않고 기업의 입장을 뒷받침하는 정책을 펼친다면 구태여 고용노동부가 별도로 존재할 이유는 없다.

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24일 일본대사관앞 소녀상 지킴이들을 방문하고 격려하고 있다._경향DB

얼마 전 정부가 개성공단 폐쇄를 결정하자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에 유입된 돈의 70%가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에 사용된 정황이 있다는 주장을 했다. 개성공단 폐쇄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리를 찾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이 사실이라면 유엔 안보리 결의안 위반이라는 비판이 나오자, 통일부 장관은 서둘러 자신의 발언을 철회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통일부는 남북대화와 교류·협력, 한반도 평화 정착을 업무로 하는 행정부서이다. 정부 안의 다른 부서들이 개성공단의 폐쇄와 북한과의 단절을 주장하더라도, 통일부는 개성공단의 유지와 남북 대화의 지속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통일부가 존재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통일부는 그런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저 개성공단 폐쇄라는 정부의 정책만을 충실하게 따를 뿐이다.


이런 문제점은 여성가족부나 교육부도 마찬가지이다. 여성가족부는 한때 일본군 ‘위안부’ 교육자료까지 만든 적이 있지만, 우리 정부와 일본 정부 사이의 합의에 반발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목소리에는 애써 침묵하고 있다. 교육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육의 자율성과 창의 인성을 강조한다. 암기 위주의 지식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의 사고력을 높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면서도 역사교과서를 국정화하겠다는 정부 방침에는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채 실행에 옮기는 데만 전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정부 정책이 일관성이 있어야 하는데 부서들 사이에 다른 의견을 내면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정책이 추진력을 잃게 된다고. 그러나 국가 기관은 각자 맡은 업무가 있으며, 그 업무에 커다란 영향을 받는 국민들이 존재한다. 국민들 편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해당 기관의 본연의 책임이다. 그것이 국가 행정의 민주적 의사결정이며, 나아가 정부 정책이 국민의 신뢰를 얻는 길이다.


김한종 | 한국교원대 역사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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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의 공천 갈등이 진흙탕 싸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른바 ‘공천 살생부’ 논란까지 보태지면서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수준이다. 사태의 발단은 비박근혜(비박)계 정두언 의원의 폭로다. 정 의원은 김무성 대표에게서 ‘현역 의원 40여명이 포함된 살생부가 있다’는 취지의 발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 살생부의 진원지는 친박근혜(친박)계 실세라고도 했다. 공천을 둘러싼 계파 갈등이야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정 의원 주장이 사실이라면, 청와대가 여당의 공천에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증좌가 된다. 반드시 진상을 규명해야 할 이유다.

새누리당은 어제 온종일 살생부 논란으로 시끄러웠다. 김 대표는 최고위원회의에서 “제 입으로 그 누구에게도 공천 관련 문건이나 살생부 이야기를 한 바가 없다. 최근 정가에 이런 말이 떠돈다고 했을 따름”이라고 해명했다. 정 의원은 그러나 김 대표가 자신을 직접 불러 “(살생부에) 정 의원이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고 맞받았다. 친박계에선 서청원 최고위원과 최경환 의원 등이 나서 “김 대표의 자작극”이라고 비판했다. 일부에선 “자해 공갈”이라는 비난까지 나왔다고 한다. 앞서 이한구 공직후보자추천관리위원장은 당 공식기구의 조사를 요청했다.

살생부 논란의 배경에는 두 가지가 자리하고 있다고 본다. 우선, 청와대의 공천개입 시도이다. 대통령의 노골적인 ‘친박 편들기’는 살생부가 실재할 것이라는 관측을 낳기에 충분하다. 다음으로, 총선 승리를 눈앞에 뒀다는 새누리당의 오만이다. 야당이 분열하고, 보수진영에 유리한 안보 이슈가 선거판을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는 아직 40여일 남았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따 놓은 당상이라는 식의 발상은 국민을 우습게 보는 일이다.

진위가 불분명한 살생부 논란으로 여당 전체가 벌집 쑤신 듯한 풍경은 퇴영적이다. 더욱이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말을 빌리면,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 아닌가. 공직선거법까지 볼모 삼아 테러방지법을 밀어붙이면서, 뒤에선 공천 타령만 하고 있었다니 부정직하다. 김 대표가 뒤늦게 “당 대표로서 국민과 당원에게 심려를 끼친 점에 대해 사과드린다”고 밝혔지만, 뒷맛은 개운치 않다. 당 대표가 중대 발언을 했다가 논란이 되면 와전이라며 물러서는 행태를 너무도 많이 봐왔기 때문이다. 이토록 무책임한 집권당을 언제까지 지켜봐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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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천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공천과정이 시끄러운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시간은 많이 지체됐다. 3월 초면 선거 대진표가 나와야 하는데 공천 규칙을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20여일 안에 모든 공천이 마무리돼야 하는 상황이다. 유권자들은 후보검증을 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투표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공천과정에서의 혼란은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인데 이번에는 정도가 더 심하다. 물론 선거과정에서 혼란과 소란은 정치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충분히 반영하는 공천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 현상이기도 하다. 권위정부 시기 여당의 공천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됐고, 야당의 경우는 분란이 없지 않았지만 ‘제왕적 총재’의 권위와 영향력에 의존해 공천이 진행됐다. ‘위로부터의 공천’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았다. 정당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면서 상황이 바뀌었고, 공천권을 당원 및 유권자들에게 돌려준다는 원칙이 점차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이 원칙의 실현이 간단치 않다. 백가쟁명식 방안들이 제출됐지만 만족할 만한 방안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 내의 컷오프와 전략공천을 둘러싼 논란은 정무적 혹은 전략적 판단이 공천에 얼마만큼 영향을 행사해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질문을 던진다. 지금까지 공천 논란은 대부분 이 두 쟁점을 둘러싼 것이었다.

문제의 근원은 아래로부터의 공천이 제대로 작동하기에는 당원과 유권자들의 참여가 너무 저조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조건에서 진행되는 경선은 소수의 적극적 지지층을 동원하는 세력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어 다른 세력들의 불만을 사고, 유권자 다수의 요구를 충분히 반영하기 어렵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고 원칙을 포기할 수는 없다. 다소의 문제와 불만이 있더라도 당원과 유권자들의 목소리가 공천과정에 반영되는 원칙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정당의 민주화와 정치발전의 장기적 방향이다. 이를 위해 최소한 경선규칙은 미리 확정돼야 한다. 미국 민주당의 샌더스 열풍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프라이머리나 당원투표라는 과정이 없었으면 출현하기 어려운 현상이었다. 특히 그가 승리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에서 저녁 늦게까지 줄을 서가며 투표했던 유권자들이 미국의 풀뿌리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주었다. 우리 경우에는 참여경선은 아예 포기하고 여론조사로 경선이 진행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려 있다. 제도적이고 절차적인 면에서 각 정당은 이미 낙제점을 받았다. 선거결과에 관계없이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이다.

더민주전략공천1호양향자출마회견_연합뉴스

전략적 판단이 공천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발생한다. 아래로부터의 공천이 가지고 있는 결함을 정치적 행위로 보완할 수밖에 없다. 정치신인의 발탁, 전략적 지역에서의 승리, 당의 정체성 강화 등이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주요 내용들이다. 이 점에서 시스템 공천만을 강조한 더민주의 혁신안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일리가 있다. 계파 갈등에 대한 우려를 피하기 위한 고충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정치의 자율성을 지나치게 축소시킨다. 시스템 공천도 공정성 논란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선거를 앞두고 만들어진 절차 자체가 특정 계파에 유리하다는 논란이 제기된다. 합의된 수준 내에서 전략적 판단이 작용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제왕적 총재나 살생부와 같은 괴담이 판치는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제도의 부족한 점을 리더십으로 보완해야 하고, 논란과 갈등이 불가피하지만 이를 통해 리더십을 평가받으면 된다. 이도 선거의 중요한 기능이다. 주요 정당들의 공천에 전략적 판단의 영향이 커지고 있는 것은 객관적 원인이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리더십이 사적이거나 계파 이익을 추구하는가, 아니면 지지층의 열망을 반영하며 대국을 위해 결단하는가이다.

본격적으로 선거국면으로 들어가면서 공천이 유권자들의 이목을 모으고 있고, 주요 정당들이 다른 영역의 경쟁에서 큰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공천의 적절성에 대한 유권자들의 판단이 선거결과에 큰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더 높아졌다. 몇몇 지역의 공천이 지금까지의 유리한 흐름을 불리하게 또는 불리한 흐름을 유리하게 뒤바꿀 수도 있다. 이 점에서 각 정당들은 비슷한 출발선에 서 있다. 유권자들도 공천과정에서의 논란을 무조건 백안시할 것이 아니라 이를 즐기고 그 속에서 드러나거나 감추어져 있는 정치성을 투표의 주요 기준으로 삼을 일이다.


이남주 |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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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여의도 정치는 시민들의 관심 밖이었다. 정치권 행태에 대한 실망과 외면이 일차적 원인이었다. 하지만 국회의사당 안에서 이뤄지는 법안, 정책, 예산 결정에 있어 유권자 참여가 구조적으로 봉쇄된 ‘그들만의 리그’ 책임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잠들었던 여의도가 깨어나고 있다. 국회법 106조 2항에 깊이 숨어 있다가 40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필리버스터(다수당 독주를 막기 위한 합법적 무제한 토론) 때문이다. 24시간 생중계되는 국회TV를 엄청난 숫자의 시청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거대한 의사당 돔 안에 빙산처럼 잠겨있던 대의정치가 활발한 시민 참여 속에 물 위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고 김대중 대통령의 국회의원 시절 필리버스터 기록을 깬 김광진 의원에서부터 국정원의 어두운 역사에 대한 한바탕 명강의를 펼친 박원석 의원. 실질적 공천배제 결정에도 불구하고 눈물의 연설을 한 강기정 의원과 휠체어 투혼을 보인 김용익 의원. “유신 질주 본능을 멈추라”는 사자후를 통해 11시간39분의 국회 최장 연설기록을 세운 정청래 의원에 이르기까지 후속 주자가 바통을 이어받을 때마다 화제가 쏟아지고 있다.

대박을 터뜨린 것은 신경민 의원이었다. 새누리당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를 “국회 마비 행태”라고 격렬히 비난하는 가운데, 필리버스터가 새누리당의 19대 총선 공약임을 폭로한 것이다. 그 내용이 새누리당 홈페이지에 게재됐다는 지적이 나오자 몰려드는 누리꾼에 의해 홈페이지가 다운됐다. 국민적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에 대한 증거다.


2월23일 오후 7시7분부터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이후 대한민국 정치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국회의원들의 생생한 육성을 유권자들이 직접 듣고 반응하는 쌍방향 민주주의의 장이 열리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각종 SNS는 물론 사무실과 퇴근 후 술자리 심지어 안방에서까지 정치 토론이 살아나고 있다. 격정과 호소로 터져 나오는 야당의원들 발언에 대한 지지 물결이 쓰나미처럼 커지고 있는 중이다.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는 이 같은 현상은 어디에서 비롯됐는가. 2001년부터 지금까지 모두 4차례나 발의, 부결됐던 테러방지법이 “국가비상사태”라는 희한한 명분 아래 정의화 국회의장 손으로 직권상정됐기 때문이다. 국정원의 임의적 판단에 따라 영장 발부도 없이 e메일, 카톡, 금융거래 등 온갖 개인정보가 샅샅이 노출되는 이 악법의 실체에 대해 필자가 붓을 더할 필요는 없으리라.

지난 대선 시점 국정원이 자행한 불법 정치개입과 이후 스마트폰 감청 의혹 전모조차 채 드러나지 않은 상황 아닌가. 이런 지경인데 만약 “국민감시와 공공사찰을 위한” “국정원 무제한 감청 및 금융정보취득법”이 현실화될 경우 어떻게 될 것인가. 시민들을 겨냥한 내밀한 프라이버시 정보 수집과 악용을 막아낼 방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필자는 은수미 의원의 연설을 시청하다가 새벽 4시가 넘어 잠자리에 들었다. 9시쯤 설핏 깨어난 순간 부리나케 TV 생중계를 열었다. 오전 2시20분에 시작한 필리버스터가 아직도 진행 중이었다. 파리하게 지친 얼굴로 발언을 이어가는 자그마한 체구의 여성 의원. 물끄러미 화면을 지켜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세상이 타락했고 정치도 타락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그 순간 내 마음속에 떠오른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싸우는 저런 정치인을 가졌다는 그 어떤 자부심이었다.

12세 이상 국민은 누구나 국회 본회의를 방청할 권한이 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야당의원들은 섬처럼 고립된 국회의사당에서 사투를 벌이고 있다. 여의도로 가자. 국회 방청을 신청하자. 방청석이 넘치면 줄을 서자. 그 긴 줄이 국회를 삥 둘러싼 다음 한강을 건너 광화문까지 이어지게 하자. 목숨을 걸고 연설하는 의원들에게 “당신은 외롭지 않다. 국민들이 뒤에 함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자.


김동규 | 동명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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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는 참신했다. 그 자체가 어떤 이들에게는 시빗거리였지만 많은 이들에게 ‘축제’처럼 다가왔다. 서방이 ‘민주주의가 미흡한 나라’라고 몰아붙이는 이란의 언론들조차 한국의 필리버스터 사실을 전했을 정도로 외국 언론에서도 뉴스거리가 됐다. 사실 필리버스터는 의회 정치의 오래된 수단 중 하나이며, 연설뿐 아니라 여러 방식이 동원돼 왔다. 프랑스에서는 야당이 13만건에 이르는 개정안을 내 법안 심사를 늦춘 적도 있다.

하지만 늘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간을 끈다 해서 법안을 마냥 무산시킬 수는 없다. 미국 민주당 대선주자로 나서 붐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2010년 미 의회에서는 근 20년 만에 8시간 반 필리버스터를 하면서 감세 연장법안에 맞섰으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듬해 초 결국 법안을 승인했다. 캐나다에서 2011년 의원 103명이 돌아가며 58시간 동안 연설을 해 우편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는 법안을 막으려 했지만 보수당은 끝내 법안을 통과시켰다.

필리버스터를 ‘다수당의 횡포를 막기 위한 약자의 저항’으로 일반화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미국에서 최장 시간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운 사람은 1957년 24시간18분 동안 연설한 스트롬 서몬드 의원이다. 그가 만 하루가 넘도록 연단에 서서 막아내려 한 법은 흑인들에게도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권리를 보장해 주기 위한 민권법이었다.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인 서몬드는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고 백인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교육시키는 것에 극렬히 반대했다. 서몬드 같은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민권법은 상원에서 찬성 72표 대 반대 18표로 압도적으로 통과됐다. 필리버스터라는 이례적인 방식으로 시대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음을 보여줬고, 48년간 상원의원을 지낸 서몬드에게는 2003년 사망할 때까지 ‘민권법에 반대한 인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다.


테러방지법을 다수당이 통과시키겠다고 우기면, 인권에 대한 염려 따위는 무시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대의제하에서 어떤 방법이 있겠는가. 그러니 이 법을 막겠다는 야당들의 필리버스터는, 은수미 의원의 연설은 감동적이지만 서글프다.

하지만 냉소하고 포기할 일은 아니다. 진짜 감동적인 것은 한국 의회에서 수십년 만에 필리버스터가 벌어졌다거나, 간만에 야당다운 야당의 모습을 보게 된 사실이 아니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필리버스터에 나선 의원들에게 목소리를 전하는 ‘시민참여 아카이브’다. “국민이 정부를 두려워해선 안됩니다. 국민들은 헌법에 나와있듯 기본권을 침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신념 님, 2016년 2월25일 최민희 의원을 통해서.” 시민들이 웹사이트에 올린 글이 의원의 입을 통해 의회에서 울려퍼진다.

이 아카이브의 모토는 “당신이 쓴 연설문, 국회 본회의장에서 읽히고 있습니다”이다. 시민들이 국회의원을 ‘대변인’으로 쓰고 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대의제 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가 합쳐지는 순간이다. 미국과 유럽에서 벌어진 ‘점령하라’와 ‘분노하라’는 저리가라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에서 새롭게 탄생한, 구시대 독재자의 진부한 2탄 박근혜가 만들어낸 21세기형 민주주의다.

기존의 대형 미디어들은 한심하다. 올드미디어들이 일련의 사건을 나몰라라 하는 것을 보니 화가 나기보다는 가련하다. 신문들이 쓰지 않는다 해서, 기사 비중을 줄인다 해서 몇 날 며칠 계속되는 필리버스터를 시민들이 모를까. 미디어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과 그것의 의미를 제대로 전하지 않거나 감췄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소통수단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아랍의 봄’을 불러온 이들도, ‘점령하라’와 ‘분노하라’에 응답한 청년들도 신문과 방송에서 정보를 얻어 거리로 나가지는 않았다. 올드미디어들이 감추기에 급급해 하는 사이에 사람들은 ‘의원 사용법’을 찾아내 하고픈 이야기를 하고 있고, 정치수업과 역사공부를 톡톡히 하고 있다.

의원들과 시민들이 필리버스터로 막고자 하는 테러방지법과 비슷한 대테러법을 채택한 나라들이 세계에 몇 곳 있다. 지난해 폐기된 미국의 애국자법, 프랑스 의회가 통과시킨 비상사태 연장 헌법 개정안 같은 것들이 유사한 사례다. 여러 나라 대테러법의 정보수집 강도와 인권 침해 소지, 시민자유 억압 등을 비교해보면 한국의 테러방지법은 아마도 이집트의 것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집트에서는 병원에 누워 죽은 척하는 옛 독재자의 정치적 아들이 안정을 명분으로 반대파를 내리누르고 반정부 주장을 테러로 몰아붙인다. 그런들 가려질까? 대테러법으로 시민들의 눈과 귀와 입을 얼마나 막을 수 있을까. 참여의 새로운 방식이 날마다 개발되는 시대다.


구정은 국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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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방지법안 처리에 반대하는 야당의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이 100시간을 돌파하며 세계 최장 필리버스터로 기록됐다. 엿새째 계속된 토론에 참여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정의당 의원만 20여명에 이른다. 주말과 휴일에도 필리버스터를 직접 보려는 시민이 국회에 줄을 이었다. 특히 10대와 20대 등 젊은층과 가족 단위 방청객이 많았다고 한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에선 갖가지 신조어가 양산되는 등 필리버스터가 뜨거운 이슈로 부상했다. 해외 언론도 한국의 필리버스터를 주목하고 있다. 필리버스터는 이제 하나의 ‘현상’이 되었다.

시민은 왜 야당의 필리버스터에 호응하는가. 다양한 이유가 있겠으나 우리는 ‘정치적 효능감’에 주목하고자 한다. 정치적 효능감이란, 나의 정치적 참여가 효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말한다.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는 이러한 믿음이 무너진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국회의원은 선거철 한 표를 호소할 때 외엔 ‘나’에게 관심이 없고, 국회는 ‘나’와 무관한 ‘그들만의 리그’라는 인식이 만연한 터다. 이는 심각한 정치혐오를 낳고, 정치혐오는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강화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테러방지법은 국가정보원의 대국민 감시를 사실상 무제한 허용한다는 내용 측면에서 악법일 뿐 아니라, 법안을 추진하는 정권의 행태 역시 최악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한다면서 국민 의사는 안중에도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필리버스터에 참여한 야당 의원들은 토론에 앞서 국민 의견을 공모했고, 수집된 의견을 연설에 반영했다. 시민은 국회방송과 유튜브를 보며 실시간, 쌍방향으로 소통했다. 필리버스터 의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기 위해 개설된 웹사이트에는 3만여명이 글을 남겼다. 결국 필리버스터가 일깨운 가치는 매우 평범한 것들이다. 국회는 주권자를 대표하는 입법기관이고, 국회의원은 입법자이며, 입법 과정에는 주권자가 참여해야 한다는 상식적 명제다.

이석현 국회부의장(오른쪽 위)과 새누리당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왼쪽 아래)가 26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에서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오른쪽 아래)의 테러방지법 표결 저지를 위한 필리버스터 발언을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_연합뉴스


새누리당은 필리버스터에 대한 대중의 호응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테러방지법안을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으며, 필리버스터가 계속되면 민생 파탄과 선거 연기 등의 책임을 모두 야당이 져야 한다고 압박한다. 의석 과반을 차지한 거대 여당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며 야당의 백기 투항을 요구하다니 오만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새누리당이 민생이나 총선을 진정으로 염려한다면 즉각 테러방지법 재협상에 나서는 게 순리다. 필리버스터를 통해 기존 테러방지법안의 문제점이 온 나라에 알려진 상황이다. 독소조항조차 수정하지 않은 채 처리를 강행한다면 시민의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민주를 비롯한 야권은 ‘필리버스터 현상’의 의미를 깊이 새길 때다. 시민은 정치가 자신들과 유리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자신의 의사가 정치에 반영되고, 그 정치가 다시 자신의 삶을 나아지게 하는 선순환 구조를 소망하고 있다. 이번 필리버스터가 한국 사회의 뿌리깊은 정치혐오를 극복하고 민주주의 위기를 타개하는 새로운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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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5일로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3주년을 맞았다. 청와대가 지난 3년간 박 대통령의 공개발언 1342건을 빅데이터로 분석해 본 모양이다. 대통령이 가장 많이 사용한 용어가 ‘국민’, ‘대한민국’, ‘경제’ 순이라고 한다. 또 청와대는 취임 3주년을 맞아서 대통령의 비유모음집이란 것을 냈다고 한다. “정책을 만드는 대통령의 비유”라는 부제가 달렸다. 박 대통령이 평소에 정책을 설명하면서 비유적 표현을 많이 쓴 데 착안해서 11개 분야, 40개의 세부정책과 관련된 비유적 표현을 묶었다고 한다. 예컨대 융통성 있는 법적용을 강조하며 언급했던, 그래서 이 책의 제목으로도 채택된 “사람 나고 법 났지, 법 나고 사람 났나요?”, 경제활성화 법안 처리와 관련해서 언급한 “불어터진 국수, 누가 먹겠어요?” 같은 내용들을 모은 책이다.

청와대는 ‘비유집’의 발간취지를 국민들과 보다 가깝게 소통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라고 했다. 특히 청와대는 “박 대통령이 비유나 신조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대중적인 언어로 정책의 본질을 쉽게 전달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듣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와 하고 싶은 말을 정확히 전달하는 ‘진심’의 결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청와대의 이런 설명이나 빅데이터 분석 결과를 보면 박 대통령의 ‘국민’을 생각하는 마음이 마치 세종 임금의 백성들을 ‘어여삐’ 여기는 수준이다. 그런데 나에게 박근혜 정부 3년의 기억은 차가운 정부, 싸늘한 대통령이라는 것 외에 잘 떠오르는 것이 없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듯하다. 새누리당의 전신이었던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도 방송인터뷰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털어놓았다. “제가 대통령들을 많이 겪어봤지만 박근혜 정부만큼 찬바람이 쌩쌩 나는 한겨울 같은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라고 했다.

박근혜대통령이 세월호참사 1주기를 맞는 16일 오후 전남 진도군 팽목항 방파제에서 대국민담화를 발표하고 있다._정지윤 기자

유난히 찬바람이 쌩쌩 나는 3년이었다. 세월호 사태를 겪으며 희생자에 대한 대통령의 태도는 차가웠다. 이른바 ‘유체이탈식’ 화법으로 말하는 대통령은 이 땅에서 함께 어울려 사는 존재가 아니었다. 메르스 사태의 초기에도 대통령은 보이지 않았다.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고, 배신의 정치를 거론하며 여당의 원내총무를 사퇴시키는 대통령, 쟁점 법안처리의 지연에 대해 국회를 호통치는 대통령, 진실한 사람만 선택받게 해달라고 선거법을 무시하고 거침없이 말하는 대통령,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인 대통령의 무모함은 서슬 퍼런 무법의 권력자였다. 차가운 권력의 무소불위는 국내에 머물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협상을 졸속으로 타결해버리는 것도, 개성공단을 폐쇄해버리고 남북 간 전쟁위기의 빌미를 준 것도 대통령의 차가운 무모함이었다. 납득하기 어려운 논리로 순식간에 진행했던 미국과의 사드 협의도 국민들에게 차갑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한·미 간에 사드 배치 문제가 결론 난 것 같았는데 다시 중국과 미국 간에 비핵화와 평화협정, 사드 비배치 문제가 동시에 진전되는 듯한 복잡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 정부의 무모함만 노출된 것도 차가운 대통령이 보여준 과격한 정치였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이 같은 정치행태에는 대의정치의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임의 윤리’가 없다. 대의민주주의는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운영하는 제도다. 그래서 대통령과 집권여당은 국민들을 책임져야 한다. 책임을 모르는 정치는 국민 없는 정치나 마찬가지다. 세월호의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대통령의 국민이고, 메르스로 불안에 빠진 국민이 대통령의 국민이다. 개성공단의 입주업체와 그 하청업체의 사람들이 대통령의 국민이고, 평생을 가슴 속에 피멍을 안고 살아온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대통령의 국민이다. 그리고 개성공단 폐쇄와 사드 배치로 북한의 위협에 더해 중국과의 새로운 긴장 속에서 전쟁의 공포에 떨어야 하는 이 땅의 사람들이 바로 대통령이 책임져야 할 대통령의 국민이다. 대통령의 국민인 이 사람들 말고 누구를 위해 대통령은 존재하는가?

지난 3년간 대한민국은 국민이 없는 나라였다. 대통령이 책임지는 국민이 없는 나라였고, 대통령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국민도 없는 나라였다. 대한민국은 오직 대통령만 있는 이상한 나라였다. 옛 어른들은 혹독한 시집살이하는 며느리의 삶을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이라고 했다. 남보다 못한, 사랑 없는 시어머니 밑에서 국민들은 혹독한 시집살이 3년 한 기분이다. 총선을 앞두고 남북의 긴장을 몰아가는 것을 보면 국민들의 시집살이가 길어야 5년이라는 체념이 오히려 순진한 게 아닌가라는 불길한 생각도 든다.


조대엽 | 고려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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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가 2009년 미국의 44대 대통령이 되어 백악관에 입성했을 때 그의 머리는 까만색이었다. 취임 초 흰머리(정확하게는 회색이다)는 듬성듬성 있었지만 지금은 반백이 됐다. 40대에서 50대로, 세월이 그만큼 지나버렸다. 미국의 한 유력일간지는 2014년 11월 오바마의 희어진 머리카락을 거론하며 대권을 꿈꾸는 이들에게 “왜 대통령이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대통령이 권력과 명예를 누리는 자리만은 아닌 만큼,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감당할 자신이 있냐는 의미였다. 초강대국 미국의 국내 정치만 신경써도 고달플 지경인데 전 세계의 온갖 문제에 관여하지 않는가.

오바마도 흰머리에 대한 질문을 종종 받는 모양이다. 그는 “(다른 나라의) 몇몇 지도자들은 염색했지만 나는 염색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부인 미셸은 한 방송 인터뷰에서 “사람들은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남편의) 흰머리가 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 딸들 때문”이라고 받아넘겼다. 사춘기인 두 딸이 방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그랬다는 것이다. 농담이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힘든 자리다. 테러 대응을 위한 테러방지법의 국회 통과에 총력전을 펴고 있지만,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국무총리도 자신이 국가테러대책회의 의장인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신경쓸 게 많다. 25일 취임 3년을 맞은 박근혜 대통령은 오죽하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모두 발언을 하고 있다. 취임 3주년을 하루 앞둔 이날 20분간 청년 일자리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였다._청와대사진기자단

박 대통령의 외모는 취임 전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국정운영은 초장부터 국민 기대와는 다르게 흘렀다. 박 대통령은 19대 총선, 18대 대선 과정에서 경제민주화, 복지 확대 등 핵심 정책을 좌클릭했다. ‘개혁적 보수’의 모양새를 취했지만 대통령직인수위 때부터 성장과 안보라는 ‘정통 보수’의 본색을 드러냈다. ‘2012년 박근혜’는 ‘2007년 박근혜’로 돌아간 것이다. 국정 비전을 ‘희망의 새시대’로 정했지만 통치 방식은 21세기에 맞지 않았다. 대한민국을 ‘1인 직할’ 체계로 만들고 ‘만기친람(萬機親覽)’식으로 삼라만상을 관장했다. 이른바 ‘정윤회 문건’ 파동으로 청와대 비선실세 논란이 불거졌을 때, 이를 지켜보던 한 공직자는 “수십년 시행착오를 겪으며 쌓아온 시스템이란 게 있는데 다 소용없는 일”이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여의도 정치’에는 짐짓 모른 척했다.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사건 등 정치 현안에는 침묵하거나 “나는 모르는 일”이라며 거리를 뒀다. 아무리 대통령 입장을 요구해도 “국회에서 논의할 일”이라고 잘랐다. 야당이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것만 빼고.

그랬던 박 대통령이 정치 한복판으로 들어와 엄중한 경제·안보 위기 상황에서 야당이 도와주지 않는다며 심판해달라고 한다. 언제부터인지 화내고, 짜증내고, 분개하는 모습이 잦다. 급기야 지난 24일 20분간 얘기하면서 손으로 회의 테이블을 10여차례 내려쳤다. 정부가 출범 3주년을 맞아 내놓은 154쪽짜리 ‘성과 자료집’을 가득 채울 정도로 한 일이 많고, 나를 믿고 도와주면 될 텐데 발목만 잡냐는 인식이다. 뜻대로 되지 않아 힘들다며 노기를 드러내는 리더십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조마조마하다.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는 ‘박근혜 정부 3년’ 평가를 묻자 “솔직히 무서웠다”고 했다. 문제는 앞으론데 박 대통령의 국정운영 스타일이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미국 정치인들에게 ‘케네디스럽다(Kennedyesque)’는 극찬이다. 미국에서 “You are so Obama”라고 하면 ‘성격이 시원하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두고 ‘뚝심 있는 리더십’이란 긍정적 의미의 ‘메르켈리즘(Merkelism)’에서 지나치게 우유부단하다는 부정적 의미의 ‘메르켈른(Merkeln)’이 나왔듯, ‘~스럽다’의 이미지는 변할 수 있다. 2년 뒤 ‘박근혜스럽다’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지금은 칭찬하는 말이 아닌 것 같다.


안홍욱 |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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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화 국회의장이 테러방지법안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하자 법안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이 릴레이 무제한 토론(필리버스터)을 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 김광진 의원을 시작으로 같은 당 은수미 의원, 정의당 박원석 의원 등이 반대토론을 했다. 현재 많은 의원들이 발언신청을 한 상태여서 토론은 상당 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헌정사에서 필리버스터가 사라진 것은 유신 시절이다. 1969년 신민당 박한상 의원의 10시간15분짜리 3선 개헌안 반대토론이 마지막 필리버스터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인 73년 국회법으로 국회의원 발언 시간을 제한, 필리버스터를 금지했다. 독재정권 입장에서 야당 의원들의 끝없는 반대토론을 통한 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필리버스터가 불가능해지면서 과반 의석을 가진 정당은 어떤 법안이든 밀어붙일 수 있게 됐다. 반대로 합법적 저지 방법이 사라진 소수당은 본회의장 점거 같은 물리력을 동원했고, 여야 간 난투극이 빈발했다. 쟁점 법안 처리를 둘러싼 날치기와 몸싸움은 한국 국회의 일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를 바로잡고자 국회는 새누리당 주도로 2012년 국회선진화법을 통과시켰고, 필리버스터도 이 법에 의해 39년 만에 부활했다.

이처럼 필리버스터는 의회주의 국가에서 소수당이 합법적 방법으로 다수당을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장치다. 더민주 등의 이번 필리버스터 역시 새누리당이 야당의 반대를 무시한 채 다수당의 힘으로 국민사찰이 가능한 테러방지법안을 통과시키려는 데 대한 정당한 대응이다. 필리버스터는 의회민주주의가 발전한 미국에서 시작된 것에서 알 수 있듯 의회주의의 일부이다. 그런 점에서 필리버스터로 후진적이고 퇴행적인 몸싸움 사태를 피한 것은 주먹이 아닌 말로 싸우는 국회를 정착시키려는 노력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야당이 합리성 없이 정부와 여당의 발목을 잡기 위해 필리버스터에 나섰다면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반대 이유가 충분하다.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안기부 부활법’이란 평가가 나올 정도로 테러방지법의 해악적 요소에 대해서는 사회적 공감대가 이미 크다.

상황이 이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많은 국민이 희생하고 나서 통과를 시키겠다는 이야기인지”라며 필리버스터에 나선 야당을 협박하고 있다. 의회민주주의에 대한 무시가 아닐 수 없다. 정부와 여당은 야당 의원들이 장시간 연설에 지쳐 쓰러지기만 기다릴 것이 아니라 반대 이유에 귀 기울이고 대안을 찾아야 한다. 그게 바로 토론을 통한 해결이라는 필리버스터 도입 취지에도 부합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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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오늘로 출범 3년을 맞는다. 청와대는 그제 정책 모음집을 통해 평화통일 기반 구축, 역사교과서 국정화,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전작권 전환 연기 등을 그간의 업적으로 꼽았다. 경제 분야에서는 경제민주화 실천, 국내총생산(GDP) 및 고용률 증가, 소득 분배 수준 향상 등을 내세웠다. 박 대통령은 “욕을 먹어도 좋다는 각오로, 오로지 대한민국 정상화를 위해 비정상적인 요인을 바로잡았다”고 밝혔다. 한마디로 정치·외교·안보 분야는 물론이고 경제·사회 분야에서도 못한 게 없다는 얘기다. 물론 지난 3년의 평가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 집권자 입장에서는 지나온 길에 대해 나름 평가를 받고 싶을 것이다. 게다가 총선이 눈앞이다.

하지만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다잡아보는 시점에서 이런 자화자찬은 듣기 거북하다. 역사는 후퇴하고, 민생은 황폐화되고,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태로 악화됐다는 야당의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나아졌다는 정부 평가에는 동의할 수 없다. 최근의 남북 긴장 고조를 두고 통일은 대박이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일관되게 추진한 결과라는 말에 누가 고개를 끄덕일까. 사상 최초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명확히 표명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위안부 합의에 대한 평가는 또 어떤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의견 반영 없이 서명하고, 합의 뒤에는 상호비방 자제를 내세워 국제사회에 보편적 인권 문제조차도 제기하지 말라는 윽박지름은 뭔가. 역사교과서 국정화 등 대통령과 다른 견해는 용납조차 않는 분위기는 어떤가. 오죽하면 여당 윤리위원장을 지낸 인명진 목사가 자애로운 대통령을 기대했다가 찬바람 쌩쌩 부는 모습에 무섭다고까지 했을까.

경제는 나아졌나. 잠재성장률 4%, 고용률 70%, 국민소득 4만달러라는 ‘4·7·4공약’은 애초부터 쉽지 않은 것이어서 눈감는다 치자. 수출·내수 침체, 청년 실업, 전셋값 폭등, 가계부채 급증은 뭐로 설명할 것인가. 저유가와 글로벌 경기 침체의 악조건 속에서도 선방했다는 얘기를 스스럼없이 하는 뻔뻔함에 놀라울 뿐이다. 지난 3년간 대한민국이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가 되고, 삶의 질이 나아졌다고 여기는 시민이 얼마나 될까. 박 대통령에게 남은 시간은 2년이다. 시민들이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것은 독선이 아닌 소통이다. 지금이라도 물정을 헤아리고 함께 호흡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대통령과 시민을 위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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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이 달포 앞으로 다가왔다. 야권은 쪼개져 삿대질하며 악머구리처럼 싸운다. 여당에도 난리가 났다. 먹을 것이 많아서다. 달려드는 이가 많아지니 다툼이 커지는 건 정글의 법칙일 터.

이 야단 와중에 코미디가 벌어지고 있다. 국회의원 후보자가 병아리도 아닌데 감별사가 나타났다. ‘박근혜 대통령을 위하는 진실한 사람’인 진박(眞朴)인지, 진실한 체하는 가박(假朴)인지 가려준다는 것이다.

기중 새누리당 최경환 의원이 갑이다. 경제부총리씩이나 했던 분이 몸을 낮춰 감별사를 자처했다. 주로 강세 지역을 주유하며 진박을 낙점한다.

최 감별사가 진박 후보들을 치켜세우는 말들이 요즘 말로 아재(아저씨) 개그 뺨친다. 지난 3일 정종섭 전 행정자치부 장관의 대구 선거사무소 개소식에서는 “정 후보가 붓글씨에 일가견이 있다. 우리 또래 중에 붓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없는데, 진실한 사람”이라고 감별해줬다.

2일 윤두현 전 청와대 홍보수석의 대구 사무소 개소식에도 거둥하듯 등장해 “윤 후보가 참 감각이 탁월하다. (개소식 날짜를)오늘 박 대통령 (64세)생신날로 뽑았죠. 그 정도는 돼야 국회의원을 한다니까”라고 말했다.

1일 이헌승 의원의 부산 사무소에서는 “2007년 박근혜 대표 경선 때 내가 종합상황실장을 했고 이헌승 의원이 수행단 부단장을 했는데 뚝심 있는 사람이다. 진실한 사람과 함께해야 진실한 사람 아닌가”라고 했다. 자신이 진박이니, 자신과 함께했던 이 의원도 진박이라는 깔끔한 논리다.



2009년 용산참사 때 강경 진압을 지휘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은 경주 선량이 되겠단다. 12일 최 감별사는 그를 향해 “출중한 국가관을 갖고 있고, 한국공항공사를 성공적으로 이끈 경영능력을 가진 훌륭한 후보”라고 했다. 공항공사 산하 국내 공항에서 사건, 사고가 잇달았다는 소식은 못 들은 듯하다.

그래서, 그의 감별법은 덜 진실해 보인다. 그것보다 훨씬 나은 기준이 있다. 진박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박근혜 대통령 의지를 얼마나 실현해 내는가를 보면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23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2회 대한민국 공무원상 시상식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_연합뉴스

북한 핵실험과 로켓 발사로 한반도 긴장이 증폭되자 정부는 기다렸다는 듯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사드) 카드를 들고나왔다. 이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탐지해 격추하는 시스템이다. 중국은 사드가 자국을 겨냥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야권도 “동북아에 신냉전을 불러올 것”이라고 타박한다.

이럴 때 진박들이 떨쳐 일어나야 한다. 대구든, 경기 평택이든 “사드를 내 지역구에 유치하겠다”고 공약하면 된다. 아마 그분께서는 ‘국회에서 피를 토하듯 열변하는 것’보다 이를 더 좋아할 것이다.

지역구민들이 좋아할지는 미지수다. 그러니 후보자의 ‘진박 의지’가 중요하다.

지역구 사무소나 자택에서 101m쯤 떨어진 곳에 사드 레이더를 설치하겠다는 공약까지 하면 금상첨화다. 사드 레이더 관련 보고서는 ‘100m 이내에서 심각한 화상과 내상을 입힐 수 있다’고 돼 있다. 한민구 국방장관도 “사드 레이더는 최소고각이 고도로 유지되기 때문에 100m 이내만 조심해야 할 구간”이라고 했다.

그러니 레이더 100m 바깥에서 숙식을 하는 정도의 기개를 보여야 한 조각 붉은 마음을 떨쳐보일 수 있지 않겠는가.

핵 무장을 하자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좋다. 그게 진박으로서 진심이라면 아예 “내 지역구에 핵 재처리 시설, 핵 미사일 시설, 미국 전략핵 시설을 세우겠다”고 유권자들에게 약속하면 된다. 핵 ‘3종 세트’도 좋고, 사드와 핵의 ‘1 + 1 콤보 세트’ 공약도 믿음직할 것이다.

그것 말고도 꽤 많다. 지역구에 개성공단 대체 시설 건설 및 한달 평균 임금 18만600원의 노동력 제공, 북 최고위층 암살 특수부대 시설 건립, 복무 중인 진박 자제들의 이동형 대북 확성기 지원 근무 등도 눈길을 끌 만한 공약이다.

참, 박 대통령이 그토록 원해 마지않던 테러방지법이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됐다. 이참에 국가정보원으로 하여금 진박들의 통신 감청과 계좌 조회 허용을 공개 천명하면 어떨까. ‘몽매한’ 유권자들이 국정원의 권력 오·남용을 우려하니,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몸소 보이라는 것이다.

마침 국정원은 “북한이 반북 활동가, 탈북자, 정부 인사 등에게 독극물 공격을 하거나 중국 유인 후 납치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에 비판적인 정부·정치권 인사나 언론인에게 신변 위해를 가할 수 있다”고 했다.

테러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자신의 정보쯤이야 국정원에 건네주고 감시해달라고 요청하면 일거양득 아닌가.


최우규 |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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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이 노래를 즐기는 것은 옛날부터 이웃 나라인 중국에까지 잘 알려진 일이다. 이런 노래 즐기기의 최신판이 <너의 목소리가 보여>(너목보)라는 TV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색다른 묘미는 누가 누가 잘하나를 가리는 데 있지 않고, 온갖 제스처와 코스프레로 그럴듯하게 포장한 다양한 경력의 출연자 중 음치와 실력자를 가려내는 데 있다. 화려하게 치장한 출연자 중 가짜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너목보>를 보며 가짜 목소리가 허공을 찌르는 한국 정치를 떠올리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정체를 알기 힘든 출연진을 가진 한국 정치, 그 총선 무대가 다가오고 있다. ‘너목보’ 정치를 보며 가짜 목소리를 찾는 즐거움이 아니라, 짜증을 느낄 일반 시민들을 위해 진짜 실력자를 감별하는 나만의 기준을 소개하고자 한다. 여의도 명가수를 자처하는 집단은 모두 넷이다. 자칭 보수 하나, 자칭 진보 하나, 자칭 중도 둘. 이들의 목소리를 찾아낼 기준이 많으면 헷갈린다. 둘은 부족하고, 넷은 넘친다. 딱 세 가지, 잡(job)과 집과 교육을 소개한다.

첫째, 잡(job). 일자리 창출은 모든 출연자에게 필수다. 성장, 창조경제, 동반성장, 공정경제, 경제민주화 등을 통한 일자리 창출. 코스프레에 속지 말자. 말의 성찬에 속지 말자. 일자리 창출의 핵심은 중소기업의 육성이다. 한국의 대기업 집중도는 경제규모가 큰 나라 중 세계 최고다. 그런데 대기업의 투자는 고용 유발효과가 낮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이 어렵다. 이는 지난 10년간 우리가 익히 경험한 바다. 대기업의 중소기업 지배력을 약화시키는 한편, 중소기업을 살리지 않고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없다. 일자리 창출을 말하다가 경쟁력 강화, 규제완화, 동반성장 등을 곁들이는 출연자는 자신이 춤추는 발라드 가수라고 주장하는 거다. 현란한 춤사위에 속지 말자. 중소기업 살리기를 똑바로 발음할 수 없다면, 일자리 창출이란 노래는 들어볼 필요도 없다. 일차 탈락자다.



둘째, 집. 한국에서 집은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물건이다. 투자가치를 위한 집. 그래서 한국의 토지와 집의 가격은 도시국가를 제외하면, 전 세계에서 최고다. 젊은 부부가 집 사기를 포기하는 것은 당연하다. 사고 싶고, 살고 싶은 ‘살 만한’ 집을 제공하는 게 그리 어려운가? 국가가 책임지고 나서 부동산 투기에 과세하고, 주택 개발에 앞장서면 ‘살 만한’ 주택을 제공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런데 부동산을 통한 경기회복이란 가짜 목소리에 의존해 경제를 살리겠다는 출연자가 많이 있다. 당연히 탈락 대상자다. 부동산 경기에 의존하지 않고, 투기 세력에 맞서 싸우며 살 만한 주택을 제공해줄 출연자라면 그는 청중과 공감할 수 있는 실력자다. 추천 대상이다.

셋째, 교육. 친구들과 놀며 배우는 즐거운 학교는 더 이상 한국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협동이 아니라 경쟁, 소득에 따라 차별화된 교육, 평준화 체제의 와해 등으로 한국 교육체계는 망가졌다. 청년들이 말하는 헬조선의 핵심에 서열화된 교육체계가 자리 잡고 있다. 교육 문제는 전 국민의 관심사이기 때문에 수많은 어설픈 해결책들이 변주곡으로 해석되어 유통되고 있다.

역대 국회의원 총선거 지역구 확정일_ 경향DB

교육 문제 해결의 본 주제는 고등학교 무상교육, 공교육 회복이다. 본 주제가 빠진 변주곡은 감동을 줄 수 없고, 와해된 교육을 바로 세울 수 없다. 다양성, 영재교육, 특수목적 교육 등에 목소리를 높이는 출연자는 사회적 불평등을 유지하려 드는 사람이다. 공교육 회복이 빠지면 들을 필요 없다. 고음이 아니라 저음이 좋은 가수, 일부 특권층이 아니라 대다수 시민을 향해 노래하는 이가 진짜 실력자다.

이제는 자칭 여의도 명가수 중 누구를 탈락시키고,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쉽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지역구에서 후보자를 구분할 감별법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분께는 고민할 필요 없다고 말씀드린다. 그런 감별법은 필요 없다. 선거에서는 집단만 보면 된다. 아무리 잘났다고 주장하는 인물도 집단의 목소리를 이기는 것을 본 적이 없지 않은가.

총선 무대에 나선 자칭 명가수들에게 잡과 집과 교육, 세 가지 기준에 따라 O, X 표를 하다보면, 그들의 거친 목소리를 볼 수 있다. ‘너목보’의 정치지만 우리는 이제 즐길 수 있다. 다가오는 총선,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고 즐기자. 선거는 축제의 장이라 하지 않나.


이영철 | 전남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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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도 있고, 많은 사람을 잠깐 속일 수도 있지만,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속일 수는 없다.”

당연해 보이는 말이지만, 최소한 우리나라에선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 사람들, 특히 애국보수세력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판결이 자기 믿음과 다르게 나온다 해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모양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아들 주신씨의 병역비리 의혹이 대표적이다. 주신씨는 허리디스크로 4급 판정을 받았는데, 그 MRI가 가짜라는 게 그들의 주장. 논란이 확산되자 세브란스병원에서 공개검증을 받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혹을 확대재생산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애국보수의 클래스를 살펴보자.

첫째, 그들은 주신씨가 병역면제를 받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박 시장의 아버지-박 시장-주신씨 이렇게 3대가 병역면제라고 하기도 한다. 정말일까? 박 시장 아버지는 일제시대에 살았고, 박 시장은 부선망독자라고,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신 독자라 8개월 방위로 병역을 해결했다. 문제의 주신씨는 신검을 받은 후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했는데, 공익요원을 보고 면제라고 하는 사람은 애국보수세력이 유일하다. 그런데 그분들에게 남는 건 시간, 3대가 면제라고 인터넷에 도배를 어찌나 해대는지 그게 진짜인 줄 아는 분들이 생겨나고 있다. 특정인을 비판하기 위해 거짓말을 동원하는 건, 사실을 가지고 깔 게 없기 때문이 아닐까?

둘째, 주신씨의 비리 의혹을 제기한 분은 부산 동남권원자력의학원에 근무하는 의사 양승오씨다. 그는 애국보수세력으로부터 “영상의학 최고의 전문가”로 여겨지고, 이건 ‘동남권’이란 이름 때문에 빚어진 듯한데, 심지어 “아시아 최고의 명의”라고 칭하는 분들도 있다. 자료를 검색해본 결과 논문이 많은 것도 아니고, 수도권에 사는 환자가 그를 만나기 위해 부산까지 가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가 왜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일까? EBS <명의> 팀은 왜 그분을 놔둔 채 세브란스병원의 정태섭 교수를 촬영한 것일까? 아무래도 그들에게 명의란 좌파를 까는 의사인 듯하다.

셋째, 2월17일 서울중앙지법은 양씨의 주장이 허위라면서 15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그러자 그들은 판사를 욕한다. 판사가 좌파이며, 서울시장의 권력에 매수당했다고 한다. 또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의학 관련 문제에 대해 당대 최고 권위 전문의와 판사 중 누가 더 잘 알고 있을까요?” 야당 정치인인 박 시장의 권력이 집권당의 그것을 능가한다는 그들의 망상도 놀랍지만, 허위사실 유포에 관한 재판을 ‘의학 관련 문제’라고 단정짓는 창의성은 절로 고개가 수그러지게 만든다. 그런 논리라면 내가 “애국보수들은 뇌에 기생충을 가지고 있다”고 떠들어대도 판사는 판결을 내리지 못할 것이다. 기생충에 대해선 내가 판사들보다 훨씬 잘 아니까.

넷째, 창의성의 결정체는 주신씨의 공개검증이었다. 2012년 주신씨는 병원 관계자와 기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MRI를 다시 찍었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이들은 즉시 사과를 했지만, 애국보수세력은 물러서지 않았다. MRI가 바꿔치기됐다는 것. 그 옆방에서 다른 사람이 MRI를 찍고 그 사진이 주신씨의 것으로 둔갑했다는데, 그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3년여가 지난 지금까지도 알려진 바가 없다. 신기한 점은 그들이 여전히 주신씨의 공개신검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 의사들이 보고 있는데도 MRI 바꿔치기가 가능하다면, 열번을 찍든 백번을 찍든 아무 의미가 없다. 그렇다면 그들이 영국에 있다는 주신씨를 소환하려는 진짜 이유는 그냥 주신씨가 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좋으면 니들이 가는 방법도 있다.

다섯째, 그들은 1997년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아들이 공개신검으로 모든 의혹을 해소했다면서 박 시장을 비난한다. 이건 사실일까? 물론 아니다. 이 후보에겐 아들이 둘 있었는데, 둘 다 체중미달로 병역이 면제됐다. 특히 첫째는 179㎝에 45㎏이라는 드문 체형이어서 의혹을 한 몸에 받았는데, 대선 직전 서울대병원에 나타난 이는 첫째가 아니라 둘째 아들이었고, 그나마도 키만 측정하고 몸무게는 재지 않았다. 이 후보가 두 번이나 대선에 떨어진 건 이 의혹이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정도가 애국보수에게 ‘의혹 해소’라면, 공개검증에 응한 주신씨는 ‘의혹 완전말끔대박정리’가 돼야 마땅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애국보수세력은 그 투철한 애국심을 엉뚱한 곳에 낭비하고 있다. 물론 달리 할 일이 없어 그러는 건 알지만, 안타깝다. 애국보수라는 좋은 단어가 웃음거리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제 박 시장 아들은 놔주고 다른 곳에 관심을 쏟으시라. 국가부채라든지, 김무성 의원 본인의 병역 의혹, 물고기 떼죽음 등등 애국보수의 관심이 필요한 일들은 도처에 있다. 애국보수의 각성을 기다린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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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이 어제 20대 총선 선거구 획정 기준에 합의했다. 지역구 의석을 253석으로 현재보다 7석 늘리고, 대신 비례대표 의석을 47석으로 7석 줄이는 안이다. 합의 내용을 살펴보면 선거구 무법 사태를 54일이나 방치하며 이끌어낸 합의안치고는 너무나 실망스럽다. 선거제도 개혁을 통한 정치개혁이란 국민적 기대를 반영한 내용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구 획정 논의는 2014년 10월 헌법재판소가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편차가 ‘2 대 1’을 넘지 않아야 한다”며 기존 선거구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헌재의 결정은 모든 유권자의 한 표의 가치는 최대한 평등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인구 10만 지역과 30만 지역에서 똑같이 국회의원 1명을 선출하면, 인구 30만인 지역 1표의 가치는 10만 지역의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헌재의 결정은 현행 소선거구제 개편 논의에 불을 붙였다. 승자독식 체제로 1000만표 이상의 사표가 발생하고, 소수 정당은 득표율에 합당한 의원수를 확보하지 못하고, 영호남 지역에서는 정당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못하는 등의 문제를 개선하자는 목소리가 커졌다. 즉 선거구 획정 기준 결정 과정은 선거제도의 개편을 통한 정치개혁의 기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새누리당과 더민주가 합의한 선거구 획정 기준에는 아무런 정치개혁 방안도 포함되지 않았다. 비례대표제 확대, 지역구 선거 연령 하향 조정, 투표시간 연장 등 선거제도 개선안은 모두 무산됐다. 양당은 소선거구제에서 발생하는 사표와 낮은 비례성에 대한 보완책을 제시하기는커녕 지역구 의석을 늘리며 비례대표 의석을 축소했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비례대표 확대라는 시대적 요청에 역행한 것이다. 합의 도출 과정도 문제다. 새누리당은 선거구 획정을 테러방지법 처리와 연계하면서 선거구 무법 사태를 방치했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면서 정치 신인들은 그만큼의 자신을 알릴 시간을 잃어버렸고, 현역 의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에 유리해졌다. 후보자를 제대로 살펴볼 유권자의 권리도 침해됐다.

정치개혁과는 거리가 먼 합의안이 만들어진 데는 새누리당 탓이 크다. 새누리당은 사표를 줄이고 비례성을 개선하기 위한 어떠한 중재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례대표 의석은 한 석도 줄일 수 없다고 큰소리를 치던 더민주도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시민들의 정치개혁에 대한 기대가 기득권의 벽에 막힌 것이다. ‘기득권 짬짜미’ ‘여당의 폭력적 몽니와 야당의 무능이 빚어낸 정치적 퇴보’라는 비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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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선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국민이 정치세력들을 평가해 교체하는 것(수단)과 이를 통해 국가권력이 국민 행복의 보장과 증진에 쓰이도록 하는 것(목적)이다.

우리나라는 이 기능이 절반만 작동한다. 국민들은 노무현 정권을 이명박 정권으로, 이명박 정권을 박근혜 정권으로 교체했다. 그러나 정권만 바뀌었지, 그 어느 정치세력도 국민 행복의 보장과 증진을 이뤄주지는 않았다. 삶의 질 하락과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가 이를 증명한다. 심판의 수단은 성공했으되 심판의 목적 달성은 실패한 것이다.

특히 거대정당들의 내외부적 권력투쟁이 최대의 정치 이슈로 부각되면서 이번 총선에서는 복지와 경제민주화 이슈마저 자취를 감췄다. 선거의 목적을 아예 기대조차 못할 상황이다.

정치권이 자신들만의 리그를 만들어 국민과 스스로를 괴리시키는 ‘낡은 정치’가 이런 현상의 주범이다. 우리나라의 정치권은 진입장벽과 기득권 보호 장치들로 둘러싸인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복지와 경제민주화를 강조하는 새로운 세력이 정치권으로 들어가는 것은 매우 어렵다.

설사 진입한다 해도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한 여러 제도와 관행들이 이런 신진세력의 활동을 막아선다. 여기에 기성의 언론과 경제 권력도 기존의 정치세력과 우호적 관계를 견지함으로써 낡은 정치가 지속되도록 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낡은 정치는 국민 행복의 적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우리는 ‘낡은 정치’를 해소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국민이 제대로 된 정치를 요구하고 실제로 주체가 되어 그런 정치를 실천하는 것이다.

정치(政治)란 본디 바른 길(正)을 가도록 국민이 자신을 대신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사람들을 채찍질하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바른 길’이란 삶의 질을 적정하게 보장함으로써 불평등을 줄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 주거, 노후, 육아, 노동, 장애, 소득보장 등 기본적인 삶의 영역에서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야 한다. 또한 학교·직업·평생교육 등을 통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필요한 역량을 갖출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반 위에서 각각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투여한 정신적·육체적 노력에 비례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그래야 모든 구성원들이 발생한 불평등을 용인할 수 있고 서로간의 통합이 가능해진다. 결국 바른 길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적정 수준 이상의 행복을 구가하는 것이며, 이를 위한 조건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이다.

따라서 제대로 된 정치란 국민이 정당과 정치인들로 하여금 행복의 조건을 만들도록 채찍질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 국민들은 이미 제대로 된 정치를 암암리에 인식하고 있다. 국민의 다수는 기성의 정당과 정치인을 불신하며, 이들에게 냉소와 혐오를 보이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낡은 정치가 보여주는 것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제대로 된 정치가 아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 국민의 다수는 기성 정치의 구조적 문제도 간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은 어쩔 수 없어” “대한민국은 바뀌지 않아”라고 말한다. 낡은 정치의 관행과 제도들이 제대로 된 정치를 방해한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정치를 외면하거나 부정할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정치를 말하고, 그것의 실현을 위해 선거에서 심판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의 대선 레이스에서 나타나고 있는 버니 샌더스 열풍이 그 사례다. 지난 수십년 동안 지속되어온 삶의 질 하락과 불평등의 심화에 대해 미국인들은 기득권 정치를 심판하고 있다. 스페인에서도 같은 일이 발생했다.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스페인 국민들은 ‘포데모스(Podemos)’에 전체 350석 중 69석을 주면서 국민당과 사회노동당이라는 기존의 정치세력들을 심판했다.

이런 일들이 대한민국에서도 이뤄지길 소망한다.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 국민 행복의 보장과 증진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 그런 복지정치가 기존의 ‘낡은 정치’를 대신하는 것, 그것은 바로 국민의 적극적 참여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투표를 통해 복지정치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는 후보자를 뽑고, 정당에는 그런 방향으로 노선과 정책을 바꾸도록 하며, 공약을 반드시 지키라는 회초리를 내리쳐야 한다.

대한민국의 거대한 변화, 그것은 바로 우리 국민의 손에 달려 있다.

이권능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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