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별/가르치기, 키우기'에 해당되는 글 406건

  1. 2018.08.21 [학교의 안과 밖]학교 급식과 ‘어린이식당’
  2. 2018.08.16 [공감]밀알만 한 쓰임새
  3. 2018.08.13 [시선]대입 개편안, 교육에 대해 품은 뜻
  4. 2018.08.08 [사설]결국 정시 확대, 거꾸로 가는 교육정책
  5. 2018.07.31 [학교의 안과 밖]학생에 짐 지우는 외고·자사고 정책
  6. 2018.07.30 [산책자]‘과학 시대’의 교육
  7. 2018.07.24 [학교의 안과 밖]입시정보 비대칭
  8. 2018.07.17 [학교의 안과 밖]학교에 가면 사회성이 길러지나
  9. 2018.07.13 [한창완의 문화로 내일만들기]실험적 교육모델 ‘만화지옥캠프’가 주는 희망
  10. 2018.07.13 [사설]‘학생부 개선’ 숙의 결과, 대입 공정성 제고 밑거름으로
  11. 2018.07.09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무엇이 유능한 것인가
  12. 2018.07.06 [정동칼럼]달라지지 않는 대학 구조조정 정책
  13. 2018.06.26 [학교의 안과 밖]학교에서 벌어지는 두 가지 인권침해
  14. 2018.06.12 [학교의 안과 밖]학교 너머의 삶
  15. 2018.06.05 [학교의 안과 밖]‘문제 학생’ 어떻게 지도할까
  16. 2018.05.23 [학교의 안과 밖]대입제도개편, 숙의자료가 중요하다
  17. 2018.05.15 [학교의 안과 밖]단순 통계와 왜곡된 해석
  18. 2018.05.14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교육정책 지형 변화와 시민의 참여
  19. 2018.05.04 [편집국에서]아버지
  20. 2018.04.16 [김진경의 교육으로 세상읽기]미래교육 생태계지도

여름방학이 끝나간다. 이번 방학에도 초등 저학년 자녀를 둔 맞벌이 부모들은 아이들의 ‘밥’ 때문에 속을 끓였다. 학교에서 방과후교실을 운영하지만 방학 중엔 급식이 제공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점심밥 챙겨주는 학원에 보내거나, 아파트 상가 식당에 월식을 끊는 등 아이들의 끼니를 해결할 방법을 각자 찾아야 했다.

저소득층 아이들도 학교급식이 끊긴 방학에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쉽지 않다. 한 끼당 4000~5000원가량 지원되는 급식비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편의점 도시락 정도다. 식당에 가더라도 급식카드 사용이 가능한지부터 물어야 하는 상황은 아이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아이들의 ‘밥’은 이 사회의 부실한 돌봄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다. 식사란 끼니를 때우는 것,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는 행위다.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는 사회는 기본적인 생존을 안심할 수 없는 사회, 서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회를 뜻한다.

2013년부터 일본에는 ‘어린이식당’이 생겨났다. 처음 어린이식당이 생긴 곳은 도쿄의 한 채소가게였다. 동네에 제때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주인이 가게 한쪽을 활용해 저녁식사를 제공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정 해체 등으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아동이 늘고 빈곤아동대책법이 제정되면서 어린이식당은 일본 전역에 자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빵집, 카페, 마을주민센터, 생협, 개인주택 등 현재 2200여곳에서 열고 있는 어린이식당의 연간 이용자 수는 1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기존의 유휴공간을 활용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확산성이 높다. 엄마들과 지역 상인 등 주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며 민과 관의 협력으로 사회적 돌봄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눈여겨볼 만하다.

‘한 끼 식사’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일본의 어린이식당은 단순한 식사 제공을 넘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하교 후 안심하고 찾아갈 곳이 생겼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숙제도 봐주고 함께 놀아주면서 건강한 식사와 함께 안전한 돌봄도 가능해졌다. 홀로 사는 노인들, 늦게 퇴근한 직장인, 육아에 지쳐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힘든 엄마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등 이곳을 이용하는 층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2년 전, 잡지 ‘민들레’에 일본의 어린이식당 기사를 싣고 나서 제주시 독자들이 아파트 단지에 있는 육아 공간을 활용해 어린이식당을 시작했다. 최근엔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도 어린이식당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 달에 한 번 마을특화사업으로 추진하는 이 어린이식당은 구의 예산과 지역사회 시민들의 자원봉사와 후원으로 꾸려지고 있다. 올해 3월 문을 열었는데 매번 50~6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 주민들이 이용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금세 겨울방학이 돌아오고, 부모들은 다시 아이들의 돌봄을 고민할 것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돌봄 공백을 막기 위해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업시간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지만, 당사자인 아이들 입장에서 정말 필요한 돌봄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본처럼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어린이식당이 생기면 어떨까. 서로의 끼니를 걱정해주고,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보면 어른들의 삶도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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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상경한 금요일, 늦은 오후였다. 을지로 빌딩가의 한 카페에서 우유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논문을 수정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앉았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얼핏 보아도 사회초년생 티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어려 보인다’ 혹은 ‘실제 어리다’와는 결이 조금 다른, 풋것의 느낌. 창밖을 보며 나란히 앉도록 설계된 자리인데 굳이 옆사람을 의식했던 이유는 그녀가 커피를 받아오자마자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공장소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만큼 마음을 다친 것일까 했다. 아무리 생면부지라지만 울고 있는 사람 곁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핥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내려뜨린 채 교정지 페이지만 타닥타닥 넘겼다.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그녀는 이윽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부장님 혹시… 죄송하지만요. 죄송한데 바꿔주시면… 그러면 팀장님은 퇴근… 예? 아니,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듣게 되었다. 애써 귀를 닫으려 해도 안되었다. 얕은 호기심인 줄 알지만 궁금함이 일었다. 무슨 일일까. &lt;미생&gt;과 같은 비정규직의 아픔일까, 아니면 직장상사에게 모진 말을 들은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사무실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거나 모종의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까.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이런저런 추정을 해보았다. 어느덧 옆자리에서는 어깨의 들먹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내더니 메이크업 도구들을 집었다.

먼저 눈가에 섀도를 덧바른 후 연필처럼 생긴 것으로 세심하게 선을 그려 넣었다. 퍼프로 두 뺨을 팡팡 두드리고 입술에 다시 색을 입혔다. 방금 울었던 사람이 맞나 싶도록 집중해서 말이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나는 우연히 보았다. 수정작업을 하다 말고 그녀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주 잠깐, 표정을 연습하듯 생긋 웃어보는 것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까 흐느끼던 얼굴을 볼 때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종래의 호기심이 연민으로, 연민은 이내 동질감으로 옮겨갔다. 눈화장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고 손거울도 갖고 다니지 않으면서 왜였을까. 그녀에게 불가해한 동병상련을 느꼈던 것이다. 

어느 소설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눈물진 눈가를 정리하러 간 여자친구가 거울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약간 벌린 채 마스카라를 칠하”는 장면을 주인공이 문틈으로 보게 된다. 숙련된 장인처럼 그 일에 몰두하는 표정이 마치 “조금 전까지의 눈물과 애교, 토라짐이 하나의 연기였음을 조용히 웅변하는” 듯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언제 울었냐는 듯 단장에 열중하는 모습에 조용히 소름이 돋았다는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쓴웃음을 짓게 했다. 웃음의 뒤끝은 씁쓸하기보다 슬펐다. 작중 인물을 대신해서 항변하고 싶었다. “화장 고치는 데에 몰입했다고 그전의 감정들이 연기였다 할 수 있나요?”라고. 마음이 깨진 상태로도 불특정 다수에게 예쁘게 보이고픈 강박이 그녀 역시 싫었을 거라고. 부서진 마음을 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글을 쓰고, 어떤 일이든 부탁받으면 기꺼이 응하는 스스로의 강박이 그악스럽게 여겨졌던, 그래서 한밤에 깨어나 토했던 나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작가와 같은 시선으로 사람에 대해 냉소할 수 없었다.

화장을 안 하더라도 사회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직업을 가진 내가 말쑥한 차림새의 직장인들이 바삐 움직이는 일터를 가진 이에게 함부로 공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안될 것 같다. 그저 나는 꾸역꾸역 단장하던 그녀에게서 꾸역꾸역 성실하고 상냥했던 스스로가 겹쳐보였을 뿐이니까. 손거울을 보며 웃어놓고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다시 울 사람에게, 그래서 일순간 동류의식을 느꼈을 따름이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고인 눈물이 마르고 나면 이내 휘발될 피상적인 감상이었다.

그럼에도 종종 그날이 떠오른다. 당시 그녀를 괴롭혔던 대상이 직장업무였든 부장님이었든 사회구조 자체였든, 지금은 그녀가 덜 힘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스럽던 순간들, 스스로의 강박 어린 생존본능을 미워한 그 시간들마저 타인의 아픔에 밀알만 한 크기의 쓰임새를 갖는 셈이다. 이 또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무엇이면 좋겠다.

<이소영 |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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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부터 교육정책 모니터링단을 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학교마다 학부모 한 명씩 뽑으라 해서 하게 된 것. 사람을 뽑는 과정도 의아한 것이었지만, 첫 번째 설문을 받았을 때부터 내가 이 모니터링을 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는 초등학생인데, 학교생활기록부에 관한 설문의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생활을 알아야만 적을 수 있었다. 설문에 참여할 것인지를 한참 재어 보다가, 믿고 물어볼 만한 친구가 있어 전화를 걸었다. “그게, 설문 돌리고 다수결 하듯이 해서 결정할 게 아니야.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분명한 교육 철학이 있으면, 결정하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실행해야지.”

대입제도 개선안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바뀌는 제도는 지금 중학교 3학년부터 해당된다고 한다. 초등 4학년 학부모인 나는 이번 개편안이 우리 아이와는 상관이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또 바뀌겠지. 그래도 다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한참 인터넷을 들락거렸다. 이번 안을 마련하는 데에도 시민참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사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지. 대입제도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교육을 가장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인데, 이것도 설문 돌리듯 하는 과정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대입제도 개편 권고안과 관련해 열린 교육부 긴급 간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 입학 전까지, 얼마나 더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을까만 따지는 게 학교 현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입제도를 두고 다수결 싸움이나 다름없는 설문조사를 하겠다고 들이대면, 사람들은 자기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방법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아이의 삶을 마치 자신의 삶인 양 여기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대입에 닥쳐서 좀 더 간명하고 단순한 시스템, 그러니까 아이들을 줄 세우는 것이 잘 보이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마치 학교생활종합기록부가 몇몇 돈 많은 사람들이 농간을 부리기 좋은 제도인 것처럼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반대쪽에는 수능 점수야말로 부모의 재산과 비례한다는 통계가 있다. 수능 첫해에 대학 입시를 치렀던 나는 수능 시험에 대해 좋게 기억한다. 학력고사보다 점수가 잘 나왔으니까. 하지만 통계가 말하는 것은 부모가 충분히 돈이 많아서 수능시험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 할수록 아이의 성적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수·삼수를 하고, 재수·삼수생이 점수가 더 높고. 유명 학원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수능 점수는 낮아진다.

소위 일류대학을 간다고 해서,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열일곱 살, 스무 살 아이들이 불행하도록 강요하는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교육 정책 결정자들은 그저 전단 나누어 주듯, 골고루 설문을 돌리는 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껏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나와 아내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래서 무엇을 하겠다는 교육인 거지? 하는 질문에 맞닥뜨렸다.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최대한 골고루 반영하겠다는 학교의 자세는 맨 꼭대기 교육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의 자세를 닮았다. 어디에서도 교육이 이것을 하겠다 하는 ‘뜻’을 찾기 어렵다.

며칠 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연수에 다녀왔다. 초·중등 선생님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1983년 시작된 이 모임은 이오덕, 권정생, 윤구병 선생과 같은 분들의 뜻을 새기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육에 대한 뜻을 나누고, 학교에서 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어떻게 이 뜻을 펼칠 수 있을지 직접 실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저마다 학교에서 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되, 그것이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하는 뜻을 지켜나가는 데에 어떠한가를 두고 늘 치열하다. 교육 정책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것을 두고, 바로잡을 힘이 없는 것은 교육에 대해 품은 뜻이 없어서일 것이다. 어떻게 줄 세우는 것이 모두에게 공평한가 하는 식의 질문으로는 어떤 답을 꺼내도 누군가에 대한 유불리만 가릴 수 있을 뿐이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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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교육회의가 7일 2022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전형 비율을 현재보다 늘리고 수능 절대평가 과목에 제2외국어·한문을 포함시키라고 교육부에 권고했다. 다만 수능 비율은 명시하지 않고 대학 자율에 맡기도록 했다. 또 국어·수학·탐구는 상대평가를 유지토록 했다. 1년 동안 공들인 대입 개편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가교육회의의 대입 개편 권고안은 개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대입에서 수능 반영 비율을 높이고 상대평가를 유지토록 하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를 개편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적 안배도 엿보이지 않는다. 확고한 교육 철학과 비전에 따라 대입제도를 개편한 게 아니라 그저 여론을 반영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대입 개편 권고안이 정부의 교육공약과 배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철학은 계층 간 불평등 해소, 학교교육 정상화, 입시경쟁 완화 등으로 모아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수능 절대평가 과목 확대, 자사고·외고 폐지 등 고교체제 개편, 내신 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 고교학점제 등을 내걸었다. 어느 것 하나 수능 전형 확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고교체제 개편만 해도 수능 확대에 유리한 자사고를 폐지하기 쉽지 않을 터이다. 수능 절대평가 과목 확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입 개편 권고안에 대해 진보와 보수진영 모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보수교육단체는 수능 정시 반영 비율이 공론화위원회에서 제시한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반면 진보교육단체는 입시경쟁교육을 강화하고 혁신교육을 무력화하는 안이라고 주장한다. 워낙 반발이 거세 대입 권고안이 이대로 확정된다고 해도 제대로 교육현장에 정착할 수 있을지 우려스러울 정도다.

공은 다시 교육부로 넘어갔다. 교육부는 교육회의 권고안을 토대로 이달 말 최종 개편안을 내놓아야 한다. 최종안을 확정짓기까지에는 수능 과목 구조, 고교체제 개편, 성취평가제 등 몇 가지 고려 사항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학이 자율적으로 수능 전형을 확대하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로서는 책임 회피, 철학 부재 논란으로부터 벗어날 마지막 기회다. 결자해지의 자세로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고 혁신교육을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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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지난 6월28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81조 5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적어도 올해에는 외고·자사고·국제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학생들이 예전처럼 희망하는 일반고에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자사고에 국한된 결정이지만 실제로는 외고·국제고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제81조 5항은 지난해 12월 개정된 것으로 외고·자사고·국제고 지원자의 일반고 지원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헌재의 결정은 당연하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은 대선공약(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와 교육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전부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을 난처하게 만들어 목적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은 외고·자사고·국제고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너희들 외고·자사고·국제고에는 갈 생각을 하지 마. 지원했다 떨어지면 너희가 원하는 다른 학교에는 절대 못 가게 될 거야. 떨어지면 정원 미달인 학교에 보낼 거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외고·자사고·국제고에는 갈 생각을 하지 마.” 

실제로 시행되면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인기가 꽤 낮아지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공약을 이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내 머릿속엔 그보다 바람직한 2개, 아니 3개의 방법이 떠오른다. 하나는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존립 근거를 제시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다. 시행령 제90조 1항, 제91조의3 등이다. 시행령 개정이니까 전적으로 정부(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존재는 인정하되 일반고처럼 오로지 추첨으로만 학생을 선발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없애지 않은 채 이들 학교로 인한 초·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82조 1항을 개정하면 된다. 역시 전적으로 정부(대통령)의 권한이다.

다른 정치세력들이 반대를 하지 않을까? 첫 번째 방법은 대선 당시 바른정당(유승민 후보)과 정의당(심상정 후보)이 내걸었던 공약과 동일하다. 두 번째 방법은 국민의당(안철수 후보)이 내걸었던 공약과 일치한다. 이들 정치세력은 찬성할 것이다.

앞의 두 방법이 전부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공약을 포기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는 뒤로 미루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구성될 국가교육위원회의 과제로 돌린다면 명분이 그리 옹색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 정부의 대선공약에 의하면 국가교육회의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위한 과도기적 존재다. 공약 취지대로라면 큼직한 교육정책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게 맞다.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은 타당한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와 교육부가 꾀한 방식은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정부·교육부의 공약 이행 방식은 학생들을 수단으로 삼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정부와 교육부는 정치적 술수라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을 실행했다 할 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마키아벨리즘이라고만 하는 것보단 소인배 마키아벨리즘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듯하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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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관련된 사회, 문화적인 활동이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이 학회나 학술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내놓는, 전문 집단 안에서의 활동이 선진국 수준으로 늘어났다. 곧 없어질 분류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의 비율이 이과가 훨씬 많은 쪽으로 역전된 지도 오래다. 고등학교에서부터 과학, 수학을 제법 깊게 배우는 숫자가 젊은 세대의 절반을 넘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이어져 과학, 수학을 밥벌이로 삼는 숫자도 제법 된다는 의미다. 개개인의 결정의 총합으로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시대에 과학, 기술과 관련된 내용을 스스로 알아야 하는 필요성은 점점 커져간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과학과 기술의 내용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활동들도 많아지고 있다.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놓았던 잡지만 있었는데 ‘스켑틱’이나 ‘과학잡지 에피’처럼 성인들을 위한 과학 잡지들이 창간되었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강연도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 열리고 있다. 카오스재단은 단순한 대중 강연을 넘어서 전문가 수준의 과학 강좌를 ‘마스터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열고 있는데 관객을 모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러 온다. 유전자 조작, 핵발전, 미세먼지, 기후변화 등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많은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과학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학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과학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과 관련된 결정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외국어를 익히면 그 언어를 쓰는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갖게 되는 것처럼, 일정한 수준의 과학과 수학을 익혀야 삶과 운명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수능에서 과학과 수학의 시험 범위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2년부터 수능에서 수학에서는 기하와 벡터가 빠지고, 과학2 과목이 모두 시험 범위에서 제외된다. 물론 교육과정에서 이런 내용들을 모두 들어내겠다고 보도된 것은 아니라서 시험만 안 본다는 이야기이지 싶다. 하지만, 수능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들은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학생들은 잠만 자는 상황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고 학생들은 제외된 부분들을 익히지 못하고 고등학교 과정을 끝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 대해 축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조치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배우지 않은 것들은 대학 가서 배우면 된다고 한다. 반면에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교육의 수준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양쪽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과학과 수학의 시험 범위를 줄이면 학생들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쪽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는 것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교육과정 안에 있는 내용들을 충실히 전달하고 가능하면 많은 학생들의 성취도를 끌어올리는 것을 걱정해야 할 교육당국이 시험 범위만 놓고 교육 정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교육적이라고 할 수 없다. 공부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에 대해선 과학과 수학이 중요한 시대에 세상을 이해하는 기초는 제공하도록 오랜 시간을 두고 교육과정을 재편해야지 수능 시험 범위 축소 같은 것은 정책이 될 수 없다. 물론 수능 범위 축소를 반대하는 쪽에도 같은 질문을 한다. 전공할 소수의 학생들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과학과 수학에 대한 어떤 수준의 이해가 세상 사는 데 필요한지 고민하고 토론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껏 교육과정을 제공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중교육을 통해 양성된 인력이 해야 할 일은 인공지능과 자동 로봇이 점점 대체할 것이고 산업적 요구가 영재 교육에만 집중될 것이므로 영재 교육의 대상이 아닌 학생들에게 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금의 교육정책 결정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의 글을 읽었다. 실제로 교육청에 시민교육을 담당하는 민주시민교육과가 생겼다. 나는 이런 생각이 과학과 수학 교육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아니길 바란다. 인공지능과 자동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학과 수학을 모르고 그것들이 제공하는 편의를 누리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과 수학을 더 능숙히 다룰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눈앞에 닥칠 결정을 함께할 민주 시민들이 과학이나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배워야 한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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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이 깨져서 한쪽이 우월한 것을 의미하는 비대칭은 여러모로 활용되는 개념이다. 남북관계에서도 비대칭적인 군사력이 항상 문제였다.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군사력이 우세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남한의 군사 대응에 비해서 북한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부분이 있는데 그런 것을 비대칭 전력이라고 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만에 달한다는 북한의 특수부대가 비대칭 전력이었고, 수년 전부터는 핵과 생화학무기 등이 중요한 비대칭 전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전력은 유사시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가장 첨예한 주제가 되고 있고 북·미 협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대칭은 군사력과 같은 거대 담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비대칭은 우리 삶의 작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대표적인 것이 교육 정보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갖고자 하지만 의미 있는 정보는 상대적으로 희소하기 때문에 정보를 일반 재화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자원이라고 한다. 비대칭인 정보를 확보하려면 비용을 많이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입시와 같은 교육 정보는 비용을 들여 구입해야 하는 고급 재화이고, 그것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대칭적으로 유리한 것이 입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다. 이렇게 입시 정보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소위 교육특구라는 몇몇 지역들과 특목고·자사고가 득세할 수 있었다. 이들 지역이나 고등학교는 입시에 대한 여러 유형의 정보를 확보하고 활용하기 좋은 여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진입하면 비대칭 정보환경의 수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정보를 구입할 수 있는 교육특구에서도 또 다른 정보의 비대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런 지역이나 학교들에서 입시 정보의 또 다른 비대칭을 만든 것은 학생부종합전형이다. 수능에 대한 정보와 활용은 제한적으로라도 공유될 수 있지만 학종에 특화된 정보들은 전적으로 학생 개개인에 맞춘 개별화된 것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유가 어렵다. 이 때문에 아주 소수만이 확보한 고급의 비싼 정보들로 인해서 비대칭의 수혜를 받는 지역과 학교 안에서 또 다른 비대칭의 차별이라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깜깜이 전형이라는 학종에 대한 비판이, 평범한 일반고 학부모들이나 대도시 변두리 또는 지방학교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특구지역이나 특목고, 자사고와 같은 곳에서 주로 주장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능 입시에 대한 고급 정보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여 어렵게 들여보낸 학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액의 컨설팅을 받거나 논문에 편승하는 등 입시경쟁에서 앞서가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부모들이 느꼈을 비대칭의 차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이에 비해서 학종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것을 위해서 투자할 여건도 되지 못하는 대다수 학부모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학교생활’을 열심히 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성취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비대칭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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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고 습한 날이었지만, 쌍둥이 남매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에어컨도 없는 반지하 집에 선풍기를 세게 틀어놓은 채, 남자아이는 블록놀이를 하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김치 부침개를 해 먹겠다며 분주했다. 학교에 안 간 지 3주쯤 되었다는 아홉 살 쌍둥이의 일과는 단순했다. 집에 있고 싶을 땐 엄마와 요리를 하거나 책을 읽고, 밖에서 놀고 싶은 날이면 공원이나 박물관, 야외수영장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아이들 엄마는 ‘독을 빼는 중’이라고 표현했다. 자꾸 눈치를 보고 행동을 주저하는 학교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어 일단은 마음껏 놀게 하며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남매가 학교를 가지 않게 된 발단은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복종놀이’ 때문이었다. 한 아이를 지정해 자기들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놀이인데, 그 명령은 주로 다른 친구를 대신 괴롭히는 일이었다. 복종놀이에 지속적으로 지명된 쌍둥이 남자아이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얻었고 어느 날 발작에 가까운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제지하는 교사를 할퀴고 물어 교권 침해로 신고당하면서 이 사건은 교사와 아이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아이도 피해자 아니냐고 하소연하자, 그건 학교폭력위원회에 따로 신고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교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처벌로 해결하려는 기계적인 접근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겼다. 교사는 병가를 냈고, 엄마는 아이를 더 이상 억지로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같은 반에서 이 과정을 다 지켜본 여자아이도 등교 거부를 했다. 왜 자기만 학교에 가야 하냐고, “엄만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딸의 말에 결국 엄마는 두 아이와 의도치 않은 홈스쿨링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초등 저학년 연령대 어린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지원은 확대되고 있지만, 기본법상 청소년에 속하지 않는 만 9세 이하 학교 밖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미비하다. ADHD, 학교폭력, 교사와의 갈등,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학교생활이 어려운 초등학생들은 늘고 있는데 책임회피성 제재만 강화될 뿐 아무 대책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밀려나면 교육에서 돌봄까지 모든 것이 부모의 몫이다.

학교를 그만둘 때, 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아이의 사회성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사회성이 저절로 길러지진 않으며, 오히려 미숙한 공동체 안에서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부조리를 몸소 익힐 뿐이다. 교육사회학을 연구한 가도와키 아쓰시는 사회성과 사회력을 구분해 설명한다. 사회성이 사회에 적응하는 능력이라면, 사회력은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가는 능력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사회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안전한 학교’라는 것은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 아니라 ‘위험한 사회를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성숙한 곳’을 뜻한다. 법과 규제로 그 배움의 기회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아이는 카메라를 향해 익살스럽게 브이자를 그렸다. 얼마 전까지 우울증 고위험군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밝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 많은 게 좋아지고 있어서, 엄마는 일단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단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엄마 품을 벗어나게 될 땐 어찌 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말이다. 엄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매는 사이좋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학교의 상처를 달래가고 있었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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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같은 학과에서 강의하시던 <머털도사> <임꺽정> 등의 명작을 그려내신 이두호 교수님께서 특별한 제안을 하셨다. 본인이 만화를 배울 때는 대개 도제식 과정을 거쳐서 7~8년 이상 만화수업을 하고 작가로 연재를 시작할 수 있었다고 말씀하시며, 그러한 도제식 과정은 하루 20시간 이상 작화테이블에 앉아 작업을 할 수 있는 집중력 훈련이었다고 회상하셨다. 하지만 이제 만화를 배우기 위해 대학교 만화관련학과에 입학한 학생들은 그러한 도제식 과정이 아닌 대학의 커리큘럼을 따라 공부하다보니 교양과목, 아르바이트, 동아리, 학생회, 축제, 소개팅 등 도대체 언제 만화에 전념하며 작업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걱정이셨다. 그러면서 본인이 여름방학이 되면 만화전공 학생들 30여명을 데리고 산속 폐교에 들어가 9박10일 정도 도제식 만화교육의 진수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제안을 하셨다.

당시 동료교수로서 필자는 그러한 교육방식이 지금 학생들에게 가능하겠냐는 기우와 그러한 과정의 운영, 예산, 안전문제 등을 걱정했다. 하지만 당시 이두호 교수님은 학생들에게 취지를 설명하고 참가비를 본인부터 각출하며 참여를 독려하셨다. 6월 말 충청도 산골에 있는 폐교를 기도원으로 사용하던 목사님에게 허락을 얻어내고 학부학생 30여명을 데리고 시작했던 캠프가 일명 ‘만화지옥캠프’로 명명된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의 하계만화창작캠프다.

방충망도 없던 교실에는 모기떼가 득실대고 제대로 된 화장실과 샤워실도 없던 공간에서 학생들은 난생처음 하루 20시간 이상 고강도 작업을 경험하게 된다. 자신들과 똑같이 작화를 하시는 이두호 교수님의 솔선수범에 딴청을 피울 수도 없었고, 9박10일 내에 30페이지 이상의 단편작품을 완성해야 하는 미션이 학생들에게 오기를 발동시켰다. 이렇게 작품을 완성시킨 학생들을 마지막 9일째 위로방문했던 필자는 어딘가 다른 기운에 놀라게 된다. 학교담벽에 붙여진 학생들의 완성작품을 평가받는 시간, 학생들은 자신들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성취감에 이미 어떠한 교육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성숙한 눈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렇게 10여년 지옥캠프전통이 무르익을 무렵, 이두호 교수님에 이어 <공포의 외인구단>의 이현세 교수님이 캠프촌장을 맡았고, 이때부터 네이버웹툰의 편집장이 위로방문을 시작한다. 국내 유력 웹툰앱이었던 네이버웹툰에서는 학생들 작품에서 새로운 시도를 확인하기 시작했고, 우수 단편들을 선정하여 연재하기 시작한다. 작품의 수준이 확인되면서 여타 다른 포털사이트의 웹툰앱 편집장도 방문하게 되었고, 결국 2013년에는 20여개의 웹툰앱과 만화잡지사 편집장들이 우수작가를 선점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게 된다. 이런 성과를 지켜보던 네이버웹툰은 새로운 기획을 제안한다.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학생 이외에도 이런 캠프에 참가할 수 있도록 문호를 개방하고 전국 모든 웹툰앱 편집장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공론화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캠프경비는 네이버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여유 있게 충당되었다.

2014년부터 5개년 계획으로 시도된 이러한 만화지옥캠프는 2018년인 올해, 장래 웹툰작가를 꿈꾸는 총 100명의 전국 대학생들과 이미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웹툰작가가 된 15명의 멘토들이 함께 참가하여 명실상부한 작가양성 만화캠프가 되었다. 이제는 쾌적한 대형연수원 시설에서 에어컨과 수세식 화장실, 샤워실, 개인침실 및 작업실 공간을 배정받으며 무료로 캠프에 참가할 수 있고, 전국 40여개의 웹툰앱 편집장들이 마지막 평가 당일 참석해 바로 연재계약까지 가능한 협의를 진행한다. 캠프촌장인 이현세 교수는 좋은 시설의 안정된 작업환경을 보장하면서도 이렇게 강조한다. “이제 이처럼 천당 같은 시설에서 작업을 하니, 실제 더 어려울 수 있다.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도 멋진 작품의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게 지옥이지!”

대학의 실험적인 교육모델이 대기업의 사회적 후원을 이끌어내고, 그러한 후원의 발판으로 전국의 대학생들이 산업계와 직결된 맞춤형 교육과 취업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 아직도 우리에겐 도전할 때 희망이 있음을 보여준다. 여전히 은퇴하셨음에도 18년째 이두호 교수님은 캠프에 동참해서 손자 같은 학생들 작품을 묵묵히 지켜보시며 어린 작가들과 눈을 맞추고 격려하신다. 가슴에 남겨지는 원로의 모습이다.

<한창완 세종대 교수 만화애니메이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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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공론에 부친 ‘학교생활기록부(학생부) 신뢰도 제고 방안’에 대한 시민정책참여단 숙의 결과가 공개됐다. 교육부가 12일 발표한 내용을 보면, 큰 틀에서 기존 학생부 시스템을 유지하되 사교육 부담을 키우는 원인으로 지목돼온 일부 항목은 손질하는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앞서 교육부는 학생부 신뢰도 제고방안을 ‘국민참여 정책숙려제’ 1호 안건으로 정하고 시민참여단 100명의 숙의 절차를 거치기로 했다. 사교육이 개입할 여지가 많은 데다 합격기준이 모호해 ‘금수저 전형’ ‘깜깜이 전형’이란 비판을 받아온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의 공정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시민참여단은 논란이 돼온 ‘수상경력’은 현행대로 기재하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이드라인을 마련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부모의 계층에 좌우된다는 지적을 받아온 자율동아리도 기재는 하되 참여 동아리 개수에 제한을 두기로 했다. 가장 논란이 돼온 ‘소논문’은 아예 학생부에서 빼고, 인적사항 중 학부모 성명·생년월일·가족변동사항도 삭제키로 했다. 그러나 학생과 학부모의 부담을 줄이기에는 여전히 미흡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참여단 측에서도 시간에 쫓겨 충분한 논의가 이뤄지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전문가 자문위원회에 참여했던 전교조 등 4개 단체가 “교육부가 자신들의 시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이뤄지도록 압력을 행사했다”고 주장하는 등 외압 논란이 빚어지기도 했다.

시민참여단 숙의 결과에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일단 학종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한 첫 단추는 끼웠다고 본다. 학종은 당초 공교육을 정상화한다는 취지로 도입된 후 대입에서 비중이 계속 높아져왔다. 상당수 학생과 학부모가 지나친 학업부담이나 경제적 배경에 따른 교육격차 등을 이유로 비판하지만, 현장에서는 고교 교육을 정상궤도로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긍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이번 숙의절차를 시작으로, 교육당국은 학종이 당초 취지에 부합하는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또한 대학입시 정책은 학종뿐 아니라 고교 체제·수능·내신 등이 하나의 고리로 맞물려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대입정책을 포함한 교육정책을 공론화하는 작업은 유의미하지만, 그렇다고 교육부가 모든 책임을 공론화에 미뤄선 곤란하다. 교육당국은 공동체의 미래를 염두에 두고 교육정책의 거시적 비전을 그려내 시민에게 제시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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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우리나라 남성들의 삶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통용되는 유능하다는 말의 뜻이 잘못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학교 다닐 때는 물론 대기업의 임원, 고위공무원 등으로 줄곧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아오다 은퇴한 친구들을 만나보면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갑자기 아무것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살 줄도 모르고, 배울 줄도 모르기 때문에 그 많은 시간을 어떻게 처리할 수가 없어 당혹스러워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직장생활을 한 기간보다 그렇지 않은 기간이 긴 나는 그때마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것 봐라. 이제야 백수의 제왕인 내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가를 알겠지?” 하고 놀린다. 그러면 친구들은 주둥이를 댓 발씩 내밀며 “너는 글쟁이니까 그렇지!” 하고 항의한다. 그런데 글쟁이가 아니면 주위의 구체적 사물이나 사람,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가?

산업사회 시대 이래 우리 학교에서는 주로 개념적 앎을 가르치고 중요하게 평가해왔다. 할 줄 앎, 배울 줄 앎, 살 줄 앎은 기껏해야 특별한 성향을 갖는 개별 교사가 틈틈이 가르치거나 몇몇 대안학교에서 가르치는 주변적인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개념적 앎이란 주로 세분화된 분과학문의 지식을 요약한 것이고, 세분된 분과학문의 지식이란 세밀하게 분업화된 산업사회의 노동구조와 연관되어 있다. 결국 산업사회의 학교는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작업벨트에서 세밀하게 분업화된 작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고, 그런 기준으로 평가하여 학생들을 성공한 유능한 사람과 실패한 무능한 사람으로 나누었던 셈이다.

이러한 교육이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키는가는 농촌 소도시의 학교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농촌 소도시의 학교는 꼭 외계에서 날아와 앉아있는 UFO 같다. 교원들은 그 지역에 거주하지 않기 때문에 아침 8시가 되면 소비행정을 타고 나타났다가 오후 4시 반이 되면 소비행정을 타고 외계로 사라진다. 이 외계인들은 낮 동안 아이들의 두뇌를 만져 그 지역을 떠나 테일러-포드 시스템의 벨트가 있는 외계로 가는 것이 유능하며 성공한 것이고 그 지역에 남는 것은 무능하고 낙오한 것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주입한다. 아이들이 그 지역에 남더라도 자기 삶을 잘 꾸려갈 수 있도록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쳐주는 법은 없다. 그래서 그 지역에 남는 아이들은 자신을 낙오자로 인식하고 그 지역의 삶을 낙오한 삶으로 인식하여 스스로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 삶이 황폐화되는 것은 학교교육에서 성공한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런 학교교육을 받고 분업화된 노동구조에 익숙해진 사람은 그 작업벨트상에 있을 때는 매우 유능한 사람이지만 그 작업벨트를 벗어나면 아무것도 모르는 무능한 사람이 된다. 그나마 이와 같은 산업사회 교육시스템, 사회시스템은 자본이 국가의 통제 범위 안에 있어 국가가 대다수 사람들에게 안정적 노동기회를 제공하고, 더 나아가 삶의 황폐화를 최소한의 선에서라도 보완할 수 있는 사회보장을 제공할 수 있을 때 지속가능하다.

얼마 전 모 재벌 디스플레이 회사 사장이 새로 짓는 공장과 관련해서 한 발언이 교육 전문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논란이 된 적이 있다. 그 사장은 이 공장은 전면적으로 인공지능 자동화가 이루어져 인력을 고용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우리 회사는 한국과 무관하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한마디로 우리 회사는 한국 사람을 고용하지도 않고 한국에 물건을 팔지도 않으니 한국 국민의 삶에 관심 없다는 말이다. 자본이 국가의 통제 범위 안에 있을 때는 자본이 어쩔 수 없이 국민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디지털 기술의 발전에 따라 세계화가 진전되면서 자본은 국가의 통제 범위를 벗어났고, 국민의 삶에 무관심해졌다. 그에 따라 국가는 더 이상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안정적 노동의 기회를 제공할 수도 없고, 사회보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 나가기도 어렵게 되었다.

이미 은퇴한 우리 산업화 세대는 학교에서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치지 않고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그러한 앎에 무관심했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대부분 안정적 직장을 보장받아 은퇴 이후의 삶이 그렇게 길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면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젊은 세대에겐 학교가 개념적 앎만을 가르치고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인공지능 자동화가 급속히 진전되어 직업의 안정성이 사라지고, 조기퇴직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이 없다면 개인의 삶이 황폐해지고 이런 현상이 심화되면 사회가 와해될 수도 있다. 개념적 앎만이 아니라 할 줄 앎, 살 줄 앎, 배울 줄 앎을 가르치는 학교교육 패러다임의 근본적 전환이 필요하다.

위와 같은 교육 패러다임 전환에서 핵심 중 하나는 중앙정부가 부여한 권한에 근거한 학교장의 지도력을 점진적으로 지역사회에 근거한 학교장의 지도력으로 바꾸어 학교가 더 이상 외계에서 날아와 앉은 UFO가 아니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관련된 정책이 요즈음 활발하게 거론되는 지방분권, 교육자치 분권 정책일 텐데 아직까지는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자치단체 사이의 권한 배분 논란 수준에 머물러 갈 길이 멀어 보인다. 근래 교육정책들을 보면 대입정책이든, 직업교육정책이든 꼭 소년·소녀 실종사건을 보는 느낌이다. 어떤 정책이든 개념적 앎을 기준으로 상위 10%의 아이들만 있고 나머지 90%의 아이들은 없다. 90%의 아이들은 어디로 갔지? 누가 돌보지? 지방분권, 교육자치 분권 논의가 지역사회에 근거한 새로운 학교장의 지도력 논의로까지 깊어져 이 물음에 답할 수 있기를 바란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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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박근혜 정권의 교육부가 대학 구조조정을 위해 실시한 대학평가의 부작용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작년 5월 새 정부가 출범한 후 더 나은 구조조정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대학평가를 1년 유예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이유이다. 그러나 새 정부의 교육부는 ‘대학 기본역량진단’(이하 역량진단)이라는 새 이름의 대학평가를 강행하며 한층 공정하게 개선되었다고 자부했지만, 6월20일 발표된 1단계 평가는 예상대로 대학들의 반발을 사고 있다.

역량진단을 통하여 ‘자율개선대학’에 선정된 대학은 정원 감축 권고 없이 정부의 일반재정지원을 받게 되지만, 탈락한 대학은 2단계 평가를 거쳐 탈락이 확정되면 정원 감축 권고와 함께 정부 재정지원 제한 등 각종 불이익을 받게 된다. 교육부는 이처럼 개별 대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1단계 평가에 대해 자율개선대학 선정 명단을 담은 보도자료 하나 내놓지 않고 각 대학에 해당 대학의 평가 결과만 알렸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예비 결과라는 명분을 내세운 모양이지만, 각 대학을 일일이 접촉하여 전체 명단을 알아내느라 기자들만 고생했고 일부 언론은 오보를 냈다. 1단계 결과를 놓고 역량진단의 심각한 허점을 세 가지만 살펴보자.

첫째, 자율개선대학 선정에 비리사학 여부는 반영되지 않았다. 두드러진 예는 상지대학교의 자율개선대학 탈락이다. 상지대는 장기간의 대학 민주화 투쟁 끝에 승리하여 학교가 알차게 발전하던 중에 이명박 정부에서 사립학교법의 독소조항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의 부당한 결정에 따라 김문기 전 이사장 세력이 복귀하여 학교를 망가뜨렸다. 작년에 겨우 비리집단을 다시 몰아내고 정상화의 길을 가려는 참에 자율개선대학에서 탈락한 것이다. 사학비리세력이 저지른 잘못을 엉뚱하게 죄 없는 대학 구성원과 지역사회에 고스란히 전가하는 꼴이다. 도무지 촛불정부가 내릴 수 없는 결정 밑에 깔린 둔감함에 분한 생각마저 치솟는다. 2단계 평가에서 예외로 판단하여 구제해야 마땅하다.

또 자율개선대학 명단에는 비리세력 때문에 자율적으로 개선될 길이 없는 대학들도 있다. 얼마 전 교육부 공무원이 비리제보자 신원과 제보 내용을 해당 대학에 유출하여 말썽이 난 수원대가 좋은 본보기다. 작년부터 무려 100건 넘게 제보된 사학비리에 대한 엄정한 감사를 통해 그 결과를 역량진단에 반영하는 것은 현행의 평가체제로는 불가능하지만, 사학비리를 척결해야 올바른 대학 구조조정과 개혁이 가능함은 수원대 사례 하나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둘째, 권역별 평가를 도입해서 지역 균형발전을 고려하겠다고 했지만, 결과는 역시 수도권 편중이었다. 수도권 대학의 자율개선대학 선정 비율은 90%가 넘는 반면, 지방대학은 65%대에 머물렀다. 정원 감축 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은 41개 대학 중 36개가 지방대학이니, 지역 균형발전은 공염불이다.

대학교육연구소는 역량진단에 대한 논평에서 중요한 문제를 하나 더 지적하고 있다. 입학정원이 3000명 이상인 28개 대학은 1개 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선정되었지만, 1000명 미만의 소규모 대학은 절반도 채 선정되지 못했다. 대마불사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학령인구가 급감하니 입학정원의 대폭 감축은 불가피하지만, 폐교를 택하는 경우를 줄여 대학 숫자를 가급적 유지해야 대학 생태계와 지역 경제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지방의 소규모 대학들은 내실이 있든 없든 다 망한다.

셋째, 전문대학에 대한 차별이 도를 넘었다. 지난 6월25일 한국전문대학교육협의회가 역량진단 1단계 결과가 형평성을 잃었다고 비판했듯이, 4년제 일반대학의 자율개선대학 선정 비율은 75%이지만 전문대학은 역량진단 참가대학 133개교 중 65%에 해당되는 87개교만이 선정되었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과제에도 담긴 고등직업교육의 내실 있는 발전이 가능할까.

교육부는 그동안에도 일반대학에 전문대학 고유의 실용적인 학과를 마구잡이로 허용하는 등 전문대학 교육을 곤경에 빠뜨리고 대학 생태계를 망가뜨려왔다. 국공립이 거의 없이 대부분의 학교가 사립인 전문대학 학생들은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안 출신이 대다수인 터에 비싼 등록금과 열악한 교육환경에 시달려왔고, 교수들도 어려운 여건에서 능력껏 교육을 해내기가 힘들었다. 교육부는 자신이 망가뜨린 전문대학을 아예 고사시킬 작정인가.

정책 당국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올바른 해법이 나온다. 대학평가와 대학 구조조정에 대한 발상의 획기적인 전환이 절실하고 또 절실하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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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쯤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지금의 학부모들이 중·고등학교 학생이던 시절로 돌아가 보는 것도 좋겠다. 현재의 윤리의식과 인권감각으로 당시의 학교를 살펴보자. 교사·교장이 학생에게 가하는 수많은 인권침해 사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제정된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이 교사·교장에게 당하는 인권침해를 방지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지금도 그때처럼 많을까? 그렇지 않다. 현저히 감소했다. 지역과 학교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학생의 인권상황은 놀랄 만큼 개선됐다.

또다시 시계를 10년 전쯤으로 돌려보자. 학생이 다른 학생에게 가하는 인권침해, 즉 학교폭력 사례를 자주 볼 수 있을 것이다. 학교폭력이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어 국가 차원에서 해결 방안이 모색된 것은 2012년 즈음이다. 그 이후로 학교폭력은 급속하게 감소했다. 통계수치로만 보면 증가했을 수 있지만 통계상의 증가는 학교폭력이 감소했어도 나타날 수 있다. 과거에는 학교폭력으로 인식되지 않던 학생들 사이의 작은 갈등까지도 학교폭력 사안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학교폭력예방법의 개정이 필요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수 학생이 소수 학생을, 힘센 학생이 약한 학생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학교폭력은 현저히 감소했다.

앞에서 언급한 두 종류의 인권침해는 앞으로도 상황이 더 개선될 것이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그런데 학교에는 예전에 상상하기 어려웠던 완전히 새로운 성격의 인권침해 사례가 등장하여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학생이 교사에게 가하는 인권침해 행위가 그것이다. 얼마나 많을까? 노골적 욕설이나 위협적 행위마저도 이젠 놀랍지 않은 상황이다. 교사에게 그에 못지않게 큰 상처를 주는 극도의 무례한 행위까지 포함하면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생각된다.

독자들께서는 학생이 교사에게 가하는 인권침해라는 말이 상당히 어색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대개 그것을 인권침해라 부르지 않고 교권침해라 부른다. 하지만 교권침해라는 말은 자칫 문제의 실상을 은폐할 수 있다. 지금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권위에 대한 침해라는 말이 연상시키는 것보다 훨씬 더 참담하고 부끄러운 내용이다. 그것은 교사의 권위를 침해하는 행위라고 말하기보단 교사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하는 것이 실상에 더 부합한다.

물론 교권침해란 말을 교사의 교육활동에 대한 침해란 말로 이해하면 그것도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긴 하다. 실제로 학생이 교사에게 가하는 인권침해 행위의 대부분은 교사가 수업이나 생활지도 등의 통상적 교육활동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심지어는 수업 분위기를 심하게 망치는 행위를 제지하거나 꾸짖는 과정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학교인권의 사각지대가 급속히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학교인권의 사각지대는 사라져야 할 것이지 다른 쪽으로 이동해야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교사에 대한 인권침해 또는 교권침해는 교사에게 심각한 정신적 상처를 준다. 나아가서는 원활한 교육활동을 위해 필요한 기초적 질서와 안정된 분위기를 파괴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소수의 일탈행위만으로도 영화 관람 분위기가 크게 망가질 수 있다. 물론 학교는 영화관과 다르고, 수업과 교육은 영화 감상과 다르다. 그런데 그게 과연 완전히 다르기만 한 것일까?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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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감 중에 메일을 한 통 받았다. 작년에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열여섯 살 청소년이 보낸 메일이었다. 덧붙여 보낸, A4 다섯 장에 달하는 기고문에는 자신이 학교를 그만둔 이유와 그 과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성적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학교의 일상이 답답했고, 모르는 것 투성이인 세상이 궁금해 다른 경험들을 해보고 싶었을 뿐인데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 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엄청난 문제아가 되어 있었다고.

예전에 비해서는 좀 덜해진 듯도 하지만, 여전히 이 사회에서 학교가 갖는 권위는 견고하다. 그 권위는 학교가 제 기능을 잘 수행해서라기보다는, 그 외엔 선택지가 별로 없는 독점성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학교의 높고 단단한 지위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일반적인 태도에도 고스란히 묻어난다. 처음 만난 십대에게 “어느 학교 다니니?” “몇 학년이니?”부터 묻는 것은 흔한 일이다. 종종 걸려오는 상담 전화에서 걱정으로 가득 찬 부모들의 첫마디 또한 “아이가 학교를 안 가려고 해요”이다. 본디 아이들이란 ‘학교에 있어 마땅한 존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학교를 그만두는 건 이 사회에서 도태 혹은 낙오되는 일이라는 부정적 시각이나, 당장 학교를 나오더라도 그 다음의 선택지가 별로 없는 빈약한 현실도 두려움 생성에 일조한다.

다양한 이유로 학교를 그만둔 청소년들은 실제로 ‘학생’이라는 자격을 상실함과 동시에 발생하는 모든 리스크를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하는 현실에 맞닥뜨린다. 한 홈스쿨러는 배우가 되고 싶어 찾아간 극단에서 3년 넘게 착취와 폭행을 당하다 겨우 그곳을 빠져나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십대 때 찾아갔다가 이미 청년이 된 그 홈스쿨러는 “다 널 위한 거야”라는 연출가의 교묘한 모럴 해러스먼트에 빠져들어 그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힘들어하고 있다. 아이의 자유로운 배움을 존중해주고 싶어서 선택한 길인데 일이 이렇게 되도록 몰랐다고, 부모의 자책도 이루 말할 수 없다.

학교 바깥에서의 리스크가 온전히 개인의 몫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더 촘촘한 사회적 안전망이 필요하다.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센터 개설 등 제도적 지원은 늘고 있는 추세지만, 학교 밖을 선택한 이들에게 절실한 것은 복지 차원의 교육 프로그램 제공이 아니라 그 낯설고 불안한 길을 함께 의논하고 의지하며 걸어갈 ‘사람들’이다. 앞서 메일을 보낸 청소년은 학교를 그만두기까지 여러 단계의 상담을 거쳐야 했는데, 상담 과정에서 “그러다 인생 망친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학교 밖 공간에서 자신의 선택을 격려해주는 사람들을 만나 원하던 배움의 길을 찾아가고 있는 그 친구는 악담인지 조언인지 모를 어른들의 말을 보란 듯이 되받아쳤다. “학교를 나왔지만, 내 인생은 망하지 않았어요.”

‘이생망(이번 생은 망했어)’이라는 말이 유행이지만, 책임지고 있는 그 자신이 포기하기 전에는 쉽사리 망하지 않는 게 인생이다. 학교의 권위가 작용하지 않는 변방에서도 제 인생을 열심히 책임져보려는 청소년들에게 필요한 도움닫기는 무엇일지 고민해볼 일이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는, 남들과 같지 않더라도 그 선택을 존중받고 지지받는 반복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는 사실을 배울 기회가, 비단 그들에게만 필요한 것은 아닐 테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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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명이 같이 공부하는 교실의 수업시간이다.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철수는 수업교재와 필기구가 없다. 좀 지나 철수는 큰소리로 떠든다. 교사는 철수에게 경청하라며 주의를 준다. 수업이 잠시 끊긴다. 철수는 교실을 돌아다닌다. 교사가 지적하니 펜을 빌린다고 한다. 수업이 다시 끊긴다. 진수는 짝에게 말을 걸고 짝의 필통을 건드린다. 다시 교사가 집중하라고 말한다. 대다수 교과시간에서 비슷하다.

이 교실에서 교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두 학생의 행동을 못 본 척하고 다른 학생들만 가르쳐야 할까. 그럼 방해 행동으로 수업이 되지 않는다. 28명의 학습권과 2명의 학습권과 교사의 교육권 중 무엇을 존중해야 할까. 교사의 제지에도 학생이 수업 방해 행동을 계속해도 교실 밖으로 격리하기는 힘들다. 학생의 수업권 침해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매일 일어나는 교실은 많다. 두 학생의 행동습성은 여러 해에 걸쳐 지속되고 심해진 것이다. 해당 학급의 수업의 질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교사는 다른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두 학생에 대해서도 답답하고 안타깝다. 다수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경청하고 참여하자고 함께 정한 학급 약속을 지키고 공적인 시공간에 대해 존중하기를 원하지만 해당 학생은 미안해하지 않는다. 교과 교사는 이유를 물어보고,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한다. 담임교사는 학부모와 상담한다.

수업 방해가 지속적이고 심한 학급에 대해 학년에서 같이 고민하고, 학생선도위원회를 열어 선도절차를 밟는다. 그래도 그때뿐인 경우가 많다.

교사들이 지치는 것은 문제행동을 반복하는 5~10%의 학생들에게 에너지가 소진될 때다. 전체를 보면 소수다. 이 소수의 학생들에게 에너지를 쏟는 것이 공평한 것일까. 학교는 교육목표에 따라 학생에게 적절한 교육적 방법을 적용하는 곳이다. 공평하다는 판단은 교육적으로 효과가 있는 것인가로 해야 한다. 소수 학생이지만 문제행동은 공동체 문화에 시나브로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또한 문제행동을 하는 학생도 자존감 있고 타인을 배려하는 시민으로 성장할 기회가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교사들이 보통 이 학생들에게 지도와 상담을 하며 몇 배의 품을 들이지만 학생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행동의 원인이 여러 가지이고 10여년간 몸에 밴 습관이 고착되었기 때문이다. 성장과정에서 여러 요인으로 인해 심리적·인지적·도덕적으로 적정한 발달이 이뤄지지 않았거나 존중받는 관계를 맺는 사회적 기술이 없거나 무기력하거나 부정적 습관이 생활화된 경우 등등.

한 명의 보통 교사가 해도 교육이 가능한 학생이 있다. 반면 한 명의 보통 교사가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도 있다. 후자의 경우, 지금 교실에서는 교사 혼자 오롯이 버텨내고 있다. 학생의 어려움의 원인에 따라 다양한 교육적 지원을 하는 시스템이 있어야 한다. 원인에 따라 전문적인 치료가 필요하거나 학습, 심리, 문화, 복지 지원 등 다양한 해결책이 필요하다. 교과수업 지도에 훈육과 돌봄까지 개별 교사에게 오롯이 맡겨져 있다. 모든 학교에 일반교사 외에 상담전문, 복지전문, 진로전문인 교사가 배치되어 있지는 않다.

전문성이 있는 다양한 교직원을 확보한 학교라면 학년부와 관련부서가 학생 성장을 위해 협업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여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의 성장과 수업의 질을 보장하기 위해서 말이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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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중3 학생부터 적용되는 2022학년도 대입제도는 사실상 국가교육회의가 결정한다. 정확히는 국가교육회의 산하의 대입제도개편특별위원회 산하의 공론화위원회 산하의 시민참여단이 결정한다. 하청에 재하청을 주는 방식에 대한 시시비비는 뒤로 미루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지금은 시민참여단이 최선의 결정을 할 수 있도록(또는 최악의 결정만은 피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 때다.

지금으로선 시민참여단에 제공하는 ‘숙의자료’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실제로 공론화위원회는 지난 16일 “시민참여단이 대입제도에 대해 잘 모를 수 있어 숙의자료를 충분히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공론화위원회는 정말 중요한 숙의자료를 확보했을까. 확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어떤 자료를 말하는 건가?

첫째, 한국사와 영어에 대한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조사자료다. 그동안 이들 과목에서는 학교의 수업·시험과 학생의 공부내용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한국사·영어에서는 이미 수능 절대평가제가 시행됐다. 한국사는 수능필수로 지정될 때부터 절대평가제였다. 영어는 작년부터 시행됐지만 학교의 수업·시험을 기준으로 보면 3년 예고제로 인해 이미 2015년부터 절대평가제가 시행됐다. 한국사·영어 수능 9등급 절대평가제는 수업·시험·공부내용에 어느 정도의 변화를 일으켰는가?

둘째,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에 대한 광범위하고 객관적인 조사자료다. 이들 과목에서는 학교의 수업·시험, 학생의 공부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가. 현 고1 학생들에게는 개정 교육과정이 적용되고 있다. 이전과 크게 다른 점은 통합사회와 통합과학 두 신설과목을 모든 학생이 배운다는 것이다. 그런데 수능 개편안이 1년 연기되면서 생긴 우연한 결과로 인해 고1 학생들은 입시제도 개편안이 어떻게 결정되든 수능에서 통합사회와 통합과학을 치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상 처음으로 수능의 영향이 완전히 배제되고 내신의 영향만을 받게 된 주요과목의 수업·시험과 학생의 공부내용에 나타난 변화를 알아볼 수 있게 됐다. 시행기간이 짧은 한계가 있지만 하늘이 준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이 정도의 숙의자료가 제공돼야 시민참여단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있다. 수능제도 개혁을 우선해야 하는지, 내신제도 개혁을 우선해야 하는지, 아니면 둘 다를 동시에 해야 하는 것인지, 그 어떤 판단이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목소리 큰 소수가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를 토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시간이 부족한데 이런 조사가 가능할까?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 교육청-학교에는 잘 구축된 조사 시스템이 존재한다. 수천·수만 교사의 의견을 1주일이면 알아볼 수 있다. 학교폭력실태조사 시스템 등을 활용하면 수십만 학생과 학부모의 의견도 한 달 이내에 알아볼 수 있다.

이러한 조사자료는 단순히 시민참여단을 위해서만 필요한 게 아니다.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해진 대입제도를 둘러싼 사회갈등을 완화하는 데에도 꼭 필요하다. 예컨대 수능에 전 과목 절대평가제를 도입하면 그에 반대한 사람들이, 지금처럼 상대평가제를 유지하면 그에 반대한 사람들이 반발할 것이다. 내신제도에 절대평가제를 도입하거나 도입하지 않거나 해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반대 입장의 사람들을 승복시킬 수 있을까. 최선의 조사자료를 제공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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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교통공단의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5년 우리나라 교통사고 발생 건수는 23만2035건이다. 그런데 교통안전이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다고 평가받는 일본에서는 우리의 두 배가 넘는 53만6899건의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하지만 상대적 수치를 비교하면 내용은 정반대가 된다. 자동차 1만대당 사망자는 일본이 0.5명이지만 우리나라는 1.9명, 인구 10만명당 사망자는 일본이 3.8명인데 우리나라는 9.1명으로 거꾸로 격차가 확 벌어지게 된다. 이런 착시 현상 때문에 교통사고 관련 통계는 반드시 상대적 수치를 활용하기 마련이다.

이런 착시는 교육 분야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독일 연방통계청에서도 근무했던 통계학자 게르트 보스바흐 박사가 한 토론회에서 겪은 사례다. 독일에서 사회적 위기로 논의되고 있는 인구문제 및 교육정책에 대한 토론회였는데 당시 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주 가족부 장관은 주정부에서 신규 교사 1000명을 채용했다고 자랑스레 발표했다. 그러자 보스바흐 박사는 베스트팔렌주에는 학교가 몇 개나 되느냐는 질문했고 당황한 장관이 우물쭈물하자 다른 교수가 공립학교만 7000개쯤 된다고 말해주는 순간 장내 분위기는 싸늘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무려 1000명이나 되는 교사를 채용’한 것이 아니라 ‘7곳의 학교 중 1곳만 신규 교사를 채용했다’는 의미였으니 장관은 통계 숫자로 공공연히 사람들을 속이려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우리나라의 한 교육전문가는 “서울대 정시는 100% 수능으로 선발해요. 근데 정시에서는 일반고 출신 합격자가 59.3%예요. 반면에 특목고와 자사고 출신 합격자는 39.2%입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수능이 일반고에 더 불리하다는 주장을 하는 걸까요?”라고 인터뷰했다. 실제 2018학년도 서울대 정시 입시에서 일반고 출신은 510명이 합격했고 특목고와 자사고에서는 불과 337명이 합격했으니 이 숫자만 보면 일반고가 수능전형에서도 월등한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 맞다. 그런데 이 주장을 알게 된 몇몇 고등학생들이 자료를 찾아보더니 이런 반박 논리를 이야기해 주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일반고 학생은 119만3562명이고 특목고는 6만7960명, 자율고는 13만3896명이다. 일반고 학생 수가 특목고와 자율고 학생 수의 여섯 배에 가깝다는 것을 고려하면 일반고의 수능 경쟁력이 특목고와 자사고에 비해서 크게 떨어진다고 보아야 하고,  최근 보도에 따르면 서울대 정시전형 합격자들 중에서 강남·서초·송파 3구 출신이 무려 169명이나 된다고 하니 그나마 교육특구 지역을 제외한 일반고 출신 학생들이 수능으로 최상위 대학에 진학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는 것이다.

평범한 고등학생들도 쉽게 찾아내는 수능시험의 문제점에 대한 여러 통계자료들이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왜곡된 통계자료와 감성적 논리를 통해서 구성된 주장들이 정부나 국회에서 입시정책을 세우고 법안을 심의하는데 영향을 줄 때 생기게 될 문제를 생각해보면 정말 심각하다. 물론 정부와 교육청, 정치권이 일반고 교육동아리 학생들보다 나은 판단을 해 줄 것을 기대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고 했다. 그래서 걱정이다.

※참고 자료 독일사례: 게르트 보스바흐 <통계 속 숫자의 거짓말>, 교육전문가 인터뷰: 이기정 <입시의 몰락>, 통계청 e-나라지표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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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공지능 자동화니 4차 산업혁명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으레 인공지능 자동로봇이 움직이고 있는 산업현장의 변화를 떠올린다. 최대한 생각의 폭을 넓힌다고 해도 대개의 경우 그로 인한 일자리의 소멸과 실업의 증가 정도에 멈추기 마련이다. 그러니 인공지능 자동화의 진전이 교육정책의 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꾸었고 최근의 교육정책을 둘러싼 갈등의 원인도 일정 정도는 거기 있다고 하면 모두 “웬 아닌 밤중에 홍두깨야?” 할 것이다.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국의 인공지능 자동화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는 것부터 이야기해야겠다. 로봇 밀도라는 통계가 있다. 로봇 밀도란 제조업 분야 노동자 1만명 대비 산업로봇 설치 대수를 말한다. 이 로봇 밀도에서 한국은 2016년 현재 631대로 압도적 세계 1위이다. 싱가포르가 2위로 488대, 독일이 3위로 309대, 일본이 4위로 303대, 미국이 7위로 189대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공지능 자동화의 급격한 진전이 교육정책 지형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1960년대 이래 김영삼 정부 때까지의 산업사회에서 대중교육의 개혁에 대한 요구는 주로 경제 산업계에서 왔다. 산업구조가 중공업 단계로 바뀌었으니 실업계 고등학교를 늘려 숙련 노동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둥, 고도 산업단계로 접어들었으니 대학을 늘려 고급 인력을 많이 공급해줘야 한다는 둥 하는 식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이렇게 산업단계에 맞는 인력 양성에 대한 요구가 국가 교육개혁정책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개혁정책에 범정부 차원의 힘이 실리는 좋은 측면도 있었지만 국민의 뜻을 수렴하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국민과의 소통이라야 내리먹이기식으로 교육개혁정책을 계몽하는 수준 이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인공지능 자동화 기술이 진전되기 시작하면서 경제 산업계의 대중교육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대중교육을 통해 양성된 인력이 해야 할 일들을 인공지능 자동 로봇이 점점 대체해가니 산업계에서는 대중교육에 대해 아쉬울 게 없어졌다.

그나마 경제 산업계에서 관심을 갖는 것이 글로벌 차원에서 노는 영재교육인데 그건 이미 카이스트는 과기정통부, 한국예술종합대학은 문체부, 폴리텍대학은 노동부, 국제학교는 기재부 하는 식으로 대부분 교육부 소관이 아니게 되었고, 앞으로 더 그렇게 되어갈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산업구조가 이렇게 바뀌었으니 거기에 맞는 인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대중교육을 이렇게 개혁해야 한다는 요구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다. 이것은 대중교육의 입장에서는 기회이기도 하고 위기이기도 하다.

대중교육을 경제적 가치로만 바라보는 경제 산업계의 요구가 약화되면 대중교육이 경제적 종속을 벗어나 본래의 사회적 가치 실현으로 방향을 틀 수 있으니 기회라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가 벌였던 교육개혁운동인 ‘새 교육 공동체’ 운동은 이러한 지향을 잘 보여준다. ‘새 교육 공동체’는 그 명칭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대중교육의 사회적 가치에 중심을 두고 지역 단위의 교육생태계, 생활생태계 구축을 지향하고 있었다. 디지털 지식정보화 사회, 인공지능 자동화 사회의 기술적, 경제적 발전 역시 그에 걸맞은 사회적 토대의 구축, 사회적 가치의 실현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이러한 교육적 지향은 정당한 것이었고, 다소 이른 감이 있어 당시엔 실효를 거두진 못했지만, 노무현 정부 말기에 혁신학교 운동으로 부활하게 된다.

인공지능 자동화 시대에 경제적 편향을 가지고 대중교육을 보면 대중교육은 그 존재이유가 불분명한데 재원만 많이 들고 늘 소소한 이해관계 충돌로 시끄러워 부담스럽기만 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한다. 이렇게 되면 대중교육은 계륵이 되어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대중교육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한 건 이명박 정부에서이다.

이명박 정부는 대중교육을 경제적 효율성의 관점에서만 보아 첨단 산업 시대에 유용한 영재를 선별하기 위한 장치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국제학교 특목고 자사고 등으로 학교를 서열화하고 본토 발음 영어 바람을 일으킴으로써 유치원까지 이 선별 경쟁에 휩쓸리게 하였다. 대중교육의 사회적 가치는 철저히 짓밟히고 대중교육의 주인이어야 할 70, 80%의 아이들은 버려졌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정책은 대중교육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했다는 점에서 거의 적폐에 가깝다. 지금 수능 정시 확대를 호소하며 다니는 학부모들은 사실 이 적폐적 정책의 피해자들이다. 자녀가 특목고 등의 선발에서 탈락하고 일반고에 왔는데 상위권 대학은 압도적 비중의 학종을 통해 주로 특목고생만 뽑아 다시 한번 경쟁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 극히 좁은 문이지만 학종을 시도해 보려 하는데 일반고에서도 상위권이 아니라고 학생부를 제대로 기록조차 해주지 않는다. 이제 역전의 기회는 수능 정시뿐인데 비율이 낮아 역시 너무 좁은 문이 되어있다.

이 학부모에게 정말 문제 되는 것이 수능 비율일까? 아니다. 정말 문제 되는 것은 반복된 좌절이고, 반복된 좌절을 겪게 한 조기 선별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적 적폐이다. 지금은 좌절의 반복으로 생긴 한이 당장 눈앞에 보이는 수능 비율을 향해 있는 것일 뿐이다.

대중교육의 위기 속에서 너무도 많은 학생 학부모들이 조기 선별에서 탈락하여 없는 존재 취급을 받으며 깊은 상처를 입었다. 이 상처를 치유하고 대중교육을 바로잡는 길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은 경제 편향에서 벗어나 대중교육의 사회적 가치에 방점을 찍는 관점의 전환이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관점에 맞게 정책의 입안 단계부터 시민사회가 참여할 수 있는 교육 거버넌스의 일대전환이 필요하다. 사회적 가치에 입각한 교육정책은 그렇게 만들어져야 하고, 위에서 내리먹이는 정책의 골격이 없으니 앞으로의 교육정책은 그렇게 만들어져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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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한 달여 전 암수술을 했다. 3년 전에 이어 두 번째다. 다행히 수술은 잘됐다. 아버지는 지난해 갑자기 눈이 안 보인다며 안과를 찾아갔다. 시력을 잃을 수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눈에 여러 번 주사를 맞았는데, 앞으로도 더 맞아야 한다고 했다. 아버지는 1934년생이다. 한국 나이로 여든다섯. 젊을 때 앓아누운 적이 없다 했으나 세월엔 장사 없는 법이다. 차에 탈 때 아버지는 느릿느릿 몸을 말아 넣는다. 

아버지가 몇 해 전부터 주민자치센터에서 운영하는 컴퓨터 교실에 다닌다. 요즘은 엑셀 프로그램을 배운다. “느그 아버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아침부터 컴퓨터 배우러 간단다.” 어머니가 말했다. “저도 엑셀 잘 모르는데, 아버지가….” 팔순 노인이 엑셀을 배워 어디에 쓸까. 가계부를 정리할 것도, 사업계획서를 쓸 것도 아닐 터이다. 그저 세월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그런 생각이 아닐까?

지금 세상은 청장년 시절 아버지가 부대껴온 세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알파고로 대표되는 AI는 물론이고, 사물인터넷, 드론과 가상현실 체험까지 등장했다. 전상진 교수는 &lt;세대 게임&gt;에서 ‘시간의 실향민’이란 표현을 썼다. 변화의 속도에 맞출 수 없는 사람들이 과거 시대에 머물며 실패자로 낙인찍히는데, 이에 맞서 저항하는 노인 등이 ‘시간의 실향민’이라고 했다. 개발독재시대 때만 생각하며 박정희·박근혜를 연호하는 태극기 시위대를 두고 한 말이다. 한데, 이념 성향을 떠나 생각해보면 나도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는 데 가랑이가 찢어지는 ‘시간의 지각생’이다. 1991년 입사했을 때는 원고지에 기사를 썼다. 수화기에 대고 기사를 부르거나 팩시밀리로 보냈다. 지금 기자들은 사건 발생 즉시 온라인으로 기사를 송고하고, 페이스북·트위터 같은 SNS를 통해 뉴스를 뿌린다. 앞으로는 동영상 시대란다. 뉴스 제작환경은 천지개벽했다. 나도 눈이 핑핑 도는데 하물며 아버지는?

노인들이 체감하는 세상의 변화속도는 젊은이보다 더 빠르다. 과학적으로 그렇다. 나이가 들면 신진대사가 느려진다. 시간은 같은 속도로 흐르는데 몸이 못 따라가니 시간의 흐름이 상대적으로 빠른 것같이 느낀다.

아버지는 역사를 핏물로 기록하던 시대를 살아왔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다. 한국전쟁으로 큰형(내게는 큰아버지)을 잃었다. 장자를 잃은 상심으로 드러누운 아버지(할아버지)도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박정희와 전두환 등 두 번의 군사쿠데타를 지켜봤다. 네 번의 민주주의 혁명을 체험했다. 4·19와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민주화운동 그리고 촛불혁명까지. 소년·청년·장년·중년·노년까지 그의 몸을 관통한 것이 다 역사였다. 때로는 총으로 쓰이고, 때로는 핏물로 기록되고, 나중에는 촛불로 밝힌 바로 그 역사의 목격자이자 주인공이다. 어느 순간이 가장 강렬했을까. 자신의 목숨줄만 아니라 가족의 생명까지 위태로웠던 그런 순간들일 것이다. 내가 조금 힘들 때, 희한하게도 어려운 시절 아버지의 초조한 표정이 불쑥 떠오른다. 

아버지는 사업도, 장사도 했다. 한 10년 장사가 잘되다가도 갑자기 어려워지곤 했다. 정치·경제·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림살이만 변하지 않고 편안할 리 없다. 농경제, 경공업, 중화학공업, IT, AI까지 산업구조도 혁명적으로 변해왔는데 이런 구조적 변화를 끝까지 버텨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박수를 받을 만하다. 예전엔 사업에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친지들이 쌈짓돈을 추렴해 재기 자금을 보탰으니까. 지금은? 말 꺼내기도 어렵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끔 묻는다. “대통령은 어떠냐, 지방선거는?” 그러고는 내 의견에 자신의 생각을 포갰다. “네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니 네 뜻대로….” 내 형제들이 “대학 졸업해도 취직하기는 저희 어릴 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하면 아버지는 “내 손주들은 잘될 터이니 걱정 마라” 했다.

어릴 때는 누구나 아버지의 등에 업혀 세월의 징검다리를 건넌다. 문득 내 아이들이 나를 앞질러 가고 있을 때 비로소 아버지를 돌아본다. 팔순 넘어서도 컴퓨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아버지. 

‘모든 역사는 현대사’란 말이 있다. 역사는 현재 건재한 사람들에 의해 다시 해석되고 의미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비틀어 생각하면 자신의 몸으로 역사를 썼던 주인공들인 노인들은 이제 기록자가 아니라 역사 속의 인물, 객체가 됐다. 그래도 노인들은 현재의 끈이라도 잡으려 한다. 영어도, 컴퓨터도 배운다. 한데 청장년들은 그들이 걸어왔던 시절을 얼마나 이해하려고 노력할까. 눈부시게 찬란한 5월. 연초록 새싹도 늙은 가지에서 비어져 나오는구나!

<최병준 문화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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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질 수도 있으니 좀 가볍게 수수께끼 형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그간 우리 사회에 수많은 파업이 있었지만 이 파업처럼 장기간 진행되고 있는 파업은 일찍이 없었다. 또 이 파업처럼 정부와 사회가 무대책으로 일관한 적도 일찍이 없었다. 이 파업은 단기간에는 그 심각한 결과가 눈에 잘 띄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파괴적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해법을 마련하는 게 쉽지 않고, 일단 그 파괴적 결과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해법을 찾더라도 복구하는 데 장구한 시간이 걸린다. 이 파업의 이름은 무엇일까?

답은 출산파업이다. 페미니즘의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은 출산파업이란 말 자체를 불쾌하게 여기겠지만, 풍자적 의미로 쓰는 말이니 잠시만 양해해주시기 바란다. 그간 한국사회나 정부가 저출산 문제를 다루는 관점은 한국이라는 거대한 공장에서 일어난 만성적 출산파업에 대한 대응,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성적으로 지지부진 진행되는 파업이니 그 대응이 급할 것도 없었다. 이미 2010년 삼성경제연구소는 저출산과 고령화에 따른 노동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050년까지 1159만명의 이민자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참 선견지명으로 가득한 미래적 보고서를 낸 바 있고, 정부의 실세인 경제관료들은 지금도 이 해법을 금과옥조로 신봉하고 있는 중이다. 말은 중립적(?)이고 과학적인 언어로 점잖게 하지만 결국 한국이라는 공장에 출산파업이 일어났으니 대체노동력을 투입해서 단호히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관점이 이러니 당근으로 주어지는 출산장려책이란 것도 무슨 수당을 찔끔찔끔 주느니 마느니 하는 유의 것이어서 애초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 참담한 결과는 현재 50만이 넘는 대학신입생 수가 20년 뒤엔 20만 남짓으로 떨어진다는 사실, 매년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 등이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저출산의 근본 원인은 위와 같이 한국을 거대한 공장으로 보는 관점 자체,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을 노동력으로 보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관리하는 근대 산업국가 패러다임 자체에 있다.

피그미족과 함께 수년간 생활을 하며 연구한 인류학자의 보고에 의하면 피그미족의 주당 노동시간은 15시간이다. 피그미족은 그 이상으로 많은 노동을 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무척 게을러 보이기도 하고 이상해 보이기도 하는 이 피그미족의 노동시간은 그러나 자연생태계와의 관계에서 보면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15시간 이상의 노동을 하면 피그미족이 생활하는 범위 내의 자연생태계가 점차 고갈되어 종족의 지속적 생존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인류학자들의 연구보고에 의하면 피그미족만이 아니라 역사시대 이전이건 이후건 수렵채취생활을 하는 종족들의 노동시간은 15시간 남짓이었다. 맹목적인 축적이 노동을 규정한 것이 아니라 자연생태계와 생활생태계의 조화가 노동을 규정하였다. 이러한 점은 전통 농경사회까지 대체로 마찬가지였다. 우리 고대소설 &lt;흥부전&gt;에서 흥부는 제비 다리도 고쳐주고, 부모와 자식, 형제 이웃과의 관계를 중요시한다는 점에서 자연생태계, 생활생태계와의 조화를 추구하는 전통사회의 인물형이다. 이에 반해 놀부는 부의 축적을 위해 생활생태계와 자연생태계를 서슴없이 파괴하는 근대적 인물형이다. &lt;흥부전&gt;은 흥부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근대 산업사회는 인류 역사에서 보면 매우 짧은 기간 존속해온 예외적인 사회이다. 축적 자체를 위해 노동을 하고 맹목적 축적을 위해 자연생태계와 생활생태계의 파괴를 서슴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 결과가 온난화, 미세먼지 같은 심각한 환경 문제이고, 가족과 지역사회의 해체라는 생활생태계의 붕괴이다.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고 생활생태계가 붕괴되면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유적 존재로서의 생존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느낀다. 이것이 산업화가 덜 진전된 못사는 나라가 산업화가 고도로 진전된 사회보다 행복도가 높고 유독 산업화가 고도로 진전된 사회에서 저출산 문제가 심각하게 나타나는 이유일 것이다.

근대 산업사회는 물질적 풍요라는 측면에서는 성공한 사회지만 삶의 질이나 행복도에서는 실패한 사회이다. 생산성 중심의 산업사회 패러다임에서 삶의 질 중심의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러한 전환은 인공지능자동화가 전면화하는 미래사회와도 맞는 방향이다. 그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한국을 더 이상 거대한 공장으로 보지 않고 사람들이 깃들어 살아가야 할 생활생태계로 보는 것, 한국인을 더 이상 거대한 공장의 생산성을 높여야 하는 일꾼으로 보지 않고 생태계를 조화롭게 꾸려나가야 할 주체로 보는 것일 게다.

얼마 전 교육 관련 국책연구원들을 순방할 기회가 있었다. 모두들 열심히 잘하고 있었는데 묘하게 남은 것은 답답함과 두려움이었다. 연구원이니 좀 여유를 갖고 앞에서 말한 미래 패러다임에 대한 고민 같은 것도 하고 있겠지 기대했는데, 보이는 것은 교육부처와 마찬가지로 생산성 중심 산업사회 시스템의 레일 위를 달려가는 기관차의 맹렬한 속도였다. 저렇게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는 기관차가 이미 시야에 들어와 있는 인구절벽 아래로 떨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려웠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인구 절벽에 대비하여 지역의 생활생태계가 지속 가능하도록 교육시스템을 어떻게 조정하고 어떤 시스템을 어디에 어떻게 남겨야 하는지 ‘미래교육생태계지도’를 그려야 한다. 그리고 그 지도에 따라 기관차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할 방안을 찾아야 한다. 미래생활생태계지도를 그리면 좋겠지만 너무 많은 변수가 있어 어려우니 고정된 시스템을 다루는 미래교육생태계지도부터 그리자는 것이다. 교육기관은 지역 생활생태계의 구심점 역할을 하니 미래교육생태계지도는 현재 상태에서 가능한 미래생활생태계지도이기도 할 것이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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