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혁 경남매니페스토실천본부 공동대표


 

19대 국회 구성을 앞두고 지난 4·11 총선에서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 투표를 통해 당선된 국회의원들의 자질, 정체성에 관한 문제다. 경남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총선을 앞두고 17개 경남지역구 18대 국회의원에 대한 의정활동을 검증·평가했다. 그 결과 평균공약이행률은 50%에도 미치지 못했고, 각 의원의 대표발의 법안의 제정·개정률도 매우 낮게 나타났다.


18대 국회 의원발의 법률안 가결건수는 대안반영 폐기를 포함하여 40.0%에 불과하다. 반면 18대가 끝남과 동시에 폐기될 운명으로 계류 중인 법률안은 48.5%에 이르고 있다. 사정이 이런 데에는 정책적 전문성을 검증해 능력 있는 대표를 뽑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탓이다. 더 이상 ‘무능국회’를 양산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책선거가 그 답이다.



(경향신문DB)



 이번 19대 총선에서 경남매니페스토실천본부는 16개 경남지역구 입후보자 56명으로부터 ①3개 희망 상임위별 입법활동계획 ②16개 쟁점현안에 대한 찬반 표명 ③3대 국정공약 ④10대 핵심지역공약의 의정활동계획을 제출받아 분석·평가했다. 4가지 영역을 모두 제출한 후보는 17명에 불과했다. 23명의 후보는 1가지 이상을 누락시켰으며, 나머지 16명은 아예 그 어떤 의정활동계획도 준비하지 못했다. 이러한 결과는 출마자들이 국정과제와 지역현안에 대한 정책 아젠다마저 갖추지 못한 채 유권자의 지지를 호소하고 있는 선거과정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같은 19대 국회의원 선거행태는 전국적으로 비슷한 현상이라고 판단된다. 결국 선거공보상의 공약은 선전문구에 불과했고, 정치적 구호로 변질됐다. 의원 당선자 중 상당수가 여전히 과대선전과 미화된 공약 구호로 유권자를 현혹한 죄가 크다.


정치개혁의 첫걸음은 대표선출의 게임규칙부터 바로잡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 이를 위해 선거과정 시스템을 개혁할 것을 제안한다. 첫째, 당 공천 일정의 법정화(法定化)다. 후보등록 개시일 이전 일정 기간을 역산(逆算)한 법정기간 직전 마감일까지 반드시 정당공천이 확정돼야 후보등록이 가능하도록 관련법 규정을 고칠 것을 제안한다. 후보등록일 전날까지도 공천싸움 하는 판에 현안분석과 정책개발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는가. 둘째, 공약작성의 내용요건을 더 세밀하게 법정화하여 후보등록요건의 법적 구속력을 강화해야 한다. 이 같은 조건이 선행되면 선거는 자연히 정책 중심의 후보자 간 경쟁으로 이어질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길을 가다가 길을 잃어버려 지나는 사람에게 길을 묻는다. 알아야 면장을 하는데, 그 일대의 길을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길을 묻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경상도식으로 “저쪽으로 잊어버리고 가이소”라고 말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무뚝뚝하게 “저 쪽으로 가면 됩니다” 하고 고개를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다. 아니면 매우 친절해서 자세히 얘기하는 바람에 시간을 너무 허비하는 경우도 많다. 그 사람의 말을 자를 수도 없고, 길을 내가 먼저 물었기 때문에 그냥 돌아서 갈 수도 없다. 일행들은 저만치 갔는데, 그 일행들을 따라서 나도 가야 하는데, 헐레벌떡 따라갈 생각에 시간이 여삼추 같은 때가 그런 경우다. 



(경향신문DB)



어느 순간 내 앞에 길이 펼쳐져 길 위에 나섰고, 끝인가 싶으면 다시 새로운 길이 내 앞에 기적처럼 펼쳐졌다. 길에서 길을 물으며 보낸 나날, 그런데도 여전히 길은 오리무중일 때가 많다. 길을 묻고 대답하는 그 일상적인 상황이 <장자>의 ‘지북유(知北遊)’ 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도(길)에 대한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도를 모르는 사람이요, 도를 묻는 사람 또한 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도는 물을 수도 없고, 물어도 대답할 수 없다. 물을 수 없는 것을 물으면 헛된 질문이 되며, 대답할 수 없는 것을 대답하면 내용 없는 답이 되는 것이다.”


노자 역시 “말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나는 늘 길에서 길을 잃어버려, 지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묻고 도착하자마자 또 길을 나서 길을 묻고 있다. 이 길이 맞는 길인가? 아니면 이 길이 아닌가, 하고 되돌아 나오는 그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그 길을….


알고 보면 인생의 길이란 스스로를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도, 세상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막을 내리는 하나의 연극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도 않고, 스스로에게 주어진 길을 걸으며, 최선을 다해 스스로에 대해 묻고 또 묻는 그 반복만이 미덕 아닐까. 그래서 괴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는지도 모른다. “자기 스스로를 알려고 하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평가받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쯤에 서 있고,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나의 물음은 끝이 없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길은 아직도 알 수 없는 저 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언제쯤 길에 도통하여 길을 묻지 않고도 길을 걸어가, 그리운 그 나라에 도착할 수 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중근 기획에디터


그제 최전방인 강원도 인제군 원통리에서 필자에게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주말에 원통초등학교에서 봄 운동회가 열리는데, 그 자리에서 경향신문의 ‘아이를 살리는 7가지 약속(www.7promise.com)’ 캠페인에 동참해 서명운동을 하려고 하니 기사가 실린 신문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그곳에서 지역아동복지센터 ‘설악산 배움터’를 꾸려나가고 있는 이주상씨(30)였다.

고향도 아닌 곳에서 2년째 지역사회를 위해 배움터 활동을 하고 있는 이씨의 말은 이랬다. “(군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이자 면소재지인) 원통의 교육열이 꽤 높아 거의 모든 아이들이 학원에 다닌다”며 “(방과후 활동을 주로 하는) 우리 배움터도 예체능 위주 특별활동 프로그램을 많이 하다 보니 공부를 많이 시키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는 또 “배움터에 나오고 싶은데 아빠가 학원에 가라고 해서 못 온다는 학생이 있다”며 “이번 기회에 학부모들을 상대로 이번 캠페인에 동참하라고 권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안보에 전후방이 따로 없듯, 사교육에도 지역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했다.

 

서울 교동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즐겁게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경향신문이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와 함께 이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필자는 여러 번 놀라고 있다. 우선 예상 밖으로 뜨거운 호응이다. 지금까지 캠페인에 동참한 인원이 3500명이다. 그제 하루에는 500명 가까이 서명했다. 같은 날 회원수가 12만명인 귀농인 인터넷 카페 ‘귀농사모’도 카페 차원에서 동참을 선언했다. 날마다 집에서 아이들과 부딪치고 있는 주부에서부터 손주를 두고 있는 어르신들, 심지어 미혼자들까지 동참하고 있다. 그리고 이씨처럼 최전방에서부터 제주도, 멀리는 미국과 영국 등 해외에서도 동참의 뜻을 밝혀왔다. 그야말로 계층과 지역을 떠난 참여 열기다.

하지만 필자가 놀란 진짜 이유는 캠페인에 참여하겠다는 목소리의 크기가 아니다. 7가지 약속에 동참한 사람들의 절절한 마음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중2, 초2 두 딸을 둔 엄마입니다. 서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히 지켜줘야 할 것 같은 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용기를 내보겠습니다. 그게 아이들이 살길이며 내가 살길인 것 같습니다. 함께하게 되어 기쁩니다.” “한번에 모두 바꿀 순 없지만 가늘고 길게 포기하지 않고 노력할 것을 서명합니다.” “동의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현실 속에서 실현 불가능한 약속이라고 하는 마음 또한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서명으로 인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실현해보고자 하는 노력이 하나씩 나타나주길 간절히 바랍니다.” 고통받는 아이들을 지켜보는 부모의 절절함이 배어있지 않은 문장이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절박함과 결연함이 약속을 지키겠다는 짧디짧은 글에서도 묻어났다. 정년퇴직한 교사, 교장들의 “우리는 못했지만 이제라도 바꿔야 한다”는 회한 섞인 다짐 역시 가슴 뭉클했다.

사실 이번 캠페인은 처음부터 조용히 진행한다는 게 기본 방침이었다. 2003년부터 이 문제를 고민해온 ‘고래가그랬어 교육연구소’의 뜻이었다. 경쟁을 부추기는 정부의 교육 정책을 비판하고, 교육 개혁과 제도 개선을 강조하는 여느 캠페인과 달리하자는 것이었다. 지금과 같은 교육 환경을 만드는 데 일조한 교육당국이나 전문가들과도 거리를 뒀다.

그리고 이런 방침은 학부모들의 마음과 맞아떨어졌다. 거창한 개혁 방안이 아니라 일상에서 고민해온 바를 담담하게 펼쳐놓는 게 오히려 더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참여자들은 이 조용한 캠페인에서 더 큰 현실감과 울림을 느꼈다고 밝혔다. 또 하나의 특징은 참여자들의 고민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스스로 확인했다는 것이다.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하루하루 사교육 때문에 갈등하는 맘(엄마)입니다. 같은 뜻을 가진 분들이 생각보다 많이 계신 것 같아서 소심하게나마 용기 내어 동참해 보렵니다”라거나 “자포자기하던 심정이면서도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하던 차에 신문에서 우연히 보고 이렇게 서명합니다. 우리 아이들, 이제 함께 키웁시다”라는 다짐이다.

이번 캠페인에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왜 이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해법도 수백, 수천 가지 제시돼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것도 거창한 실천이 아니라 일상에서의 작은 실천이다.

이번 캠페인으로 교육 현실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 캠페인을 통해 절망적일 정도로 살인적인 우리 교육의 견고한 장벽에 조그만 균열을 하나 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운동에 어깨를 겯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벽은 더 일찍 무너질 것이다. 그 조짐을 이번 캠페인에 참여한 학부모, 미래의 학부모에게서 확인했다. 1t의 이론보다 1g의 실천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허인영 |‘함께걷는아이들’ 사무국장


은평 아이드림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부는 영주는 게임을 하자는 친구의 유혹을 물리치고 연습장소로 향한다. 일주일 뒤로 다가온 연주회를 위해 연습에 참여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럼펫을 배우기 전, 영주는 트럼펫이 어떻게 생긴 악기인지 몰랐다. 음표를 몰라도 악기를 배울 수 있다는 단원 모집공고와 선생님의 권유로 2년 전 시작한 트럼펫 레슨은 그만두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이제는 재미가 붙었다.

친구들의 폭력과 따돌림, 성적비관으로 작년 한 해 자살한 청소년은 150여명에 이른다. 입시지상주의 교육이 아이들을 경쟁으로 내몰고, 우정과 협력의 장인 학교가 양육강식의 장이 되었다. 아이들은 친구의 폭력에 무관심하며 약자를 배려하지 못한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가 가해자가 된다. 폭력이 일상화되고, 연령 또한 낮아지고 있지만 아이들의 인성과 정서를 위한 교육은 입시교육에 밀린 지 오래다.

 

경기 성남시 도촌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어울리오 오케스트라’ 단원들 ㅣ 출처:경향DB

영주는 꾸준히 레슨과 연습에 집중하고 있다. 실력이 늘지 않으면 다른 단원들의 연주도 망치게 된다. 한 곡을 위하여 다른 단원들의 소리를 들으며 기다려야 한다. 오케스트라라는 틀 안에서 같이 성장하지 않으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도와야 한다. 단원들 간 정서적 공감대와 유대감 없이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협력하지 않으면 하모니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나라 음악교육은 전공을 전제로 하는 소수의 엘리트 양성, 개인레슨에 집중하고 있다. 이마저 부모의 사회경제적 이유로 기회를 갖지 못하는 아동·청소년도 많다. 최근 민관 차원에서 다양한 오케스트라 사업이 실시되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도 그중 하나로 정부의 지원 없이 2009년부터 은평 아이드림오케스트라, 안양·군포 위풍당당오케스트라, 김포 아인스오케스트라를 창단·운영하고 있다. 200여명의 단원들에게 악기를 무상지원하고 레슨과 음악캠프, 다양한 공연기회를 제공하며, 우수한 아이들로 모인 ‘With us 윈드오케스트라’도 운영하고 있다. 이들 중 몇 명은 예고와 대학에 진학하기도 하였다. 대학에 진학한 단원이 후배들을 가르치는 선순환 구조도 생겼으며, 오빠·언니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고 동생들은 단원 모집을 기다리기도 한다.

청소년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한다. 나와 우리가 함께하는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다.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이 절실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인병선 | 짚풀생활사박물관 관장


전국의 사립박물관이 교육기관으로 바뀌고 있다. 올해 정부가 사립박물관 59곳에 교육사 한 명씩을 배치했다. 즉 에듀케이터라고 하는 새로운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현재 한국의 사립박물관 수는 총 250여개다. 문화관광체육부가 이들 사립박물관을 본격적으로 교육기관으로 바꾸려 하는 데는 그만한 동기가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창의적 체험활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교육정책을 전환한 데다 올해부터 주5일 수업이 실시되면서 사교육기관 아닌 다른 대안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사립박물관은 특수전문박물관으로 종합박물관과 달리 어느 한 분야를 집중적으로 수집·연구해 전문성을 갖추고 있다. 이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교육 콘텐츠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엄청나다. 그 중에는 한 분야에서 세계 최고 또는 유일이라는 평가를 받는 곳도 적지 않다.

 

박물관 문화체험 활성화에 앞장서는 ‘별별박물관’ 운영자들 ㅣ 출처:경향DB

이들 사립박물관이 지금까지 본격적으로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은 정책에도 이유가 있었지만, 박물관 자체의 인식과 역량 부족에도 원인이 있었다. 사립박물관 관장들은 아직은 거의 설립자가 맡고 있다. 이들은 열심히 수집하고 공간을 확보해 박물관 간판은 걸었지만 소장품을 교육 콘텐츠화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부분을 이번에 문화부가 혁신적인 발상으로 보완해 준 것이다.

올봄에 에듀케이터 인력이 확정되면서 사립박물관운영위원회 측에서는 걱정이 적지 않았다. 교육사 모집에 몇 명이나 지원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에서였다. 그러나 실제 부딪쳐 보니 인력은 넉넉했다. 대학에는 거의 모든 학교에 교육과가 있다. 이들 교육과 출신에게는 졸업과 동시에 교사 자격증이 주어진다. 그러나 바로 교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임용고시라는 높은 문턱이 있어서 수많은 전문 인력들이 임시교사, 강사 등 비정규직에 매달려 있는 형편이다. 이들을 흡수할 수 있는 영역이 하나 생긴 것이다.

박물관을 운영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제 불과 두 달밖에 안됐지만 에듀케이터의 존재는 큐레이터 못지않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던 커다란 한 분야가 생명을 얻어 활기를 띠는 것을 체감한다. 박물관 소장품의 교육 프로그램화, 콘텐츠 확장, 학생들의 체험영역 확대, 전문 인력의 고용창출 등 이보다 더 크고 뜻깊은 일이 또 있을까.

그러나 이 사업은 시작단계에 불과하다. 전국 사립박물관이 모두 참여할 수 있게 되어 한국 교육의 변화와 발전에 큰 동력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유인화 논설위원


개그맨의 원조인 전유성은 20여년 전 스승의 날 기념 라디오 방송에서 “예부터 ‘스승은 임금·어버이와 같으므로 감히 스승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스승을 너무 존경하던 나는 선생님의 그림자는 물론 선생님이 계시는 학교 근처도 갈 수 없었다”며 청취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그러나 요즘 전유성의 ‘주옥같은 멘트’처럼 스승을 존경과 사랑으로 따르는 제자가 얼마나 될까. 교사들의 손에서 회초리가 사라진 후 스승을 폭행하는 제자들까지 있다.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을 깨우면 교사가 욕을 먹는다. 아이를 벌하고 싶지만 뒤통수라도 한대 쳤다간 학생인권을 무시한 체벌교사로 몰린다. 학생들이 체벌현장을 인터넷 동영상에 올리면 해당 교사는 그날로 표적이 된다. 별 탈 없이 교사직을 유지하려면 ‘봐도 못 본 체’ 정신으로 견뎌야 한다는 결론이다. 반대로 학생이 교사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사례도 빈번하다. 가혹한 체벌과 성희롱을 견뎌야 하는 학생에겐 스승의 날이 가당치도 않을 터이다.

 

한성대에서 학생들이 스승의날을 앞두고 교수들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고 있다. l 출처:경향DB

엊그제 발표된 스승의 날 선물 설문결과를 보면 가장 선물하고 싶은 스승으로 응답자의 40%가 학원강사를 꼽았다. 그 다음은 학교 담임교사가 23%, 인생선배 16%, 어린이집 교사 12%, ‘선물하고 싶은 대상자가 없다’는 응답도 6%였다. ‘교직 만족도가 떨어진다’는 답은 2009년 55.3%에서 올해 79.3%로 늘었다. 사교육에 비중을 두는 현실, 촌지 근절을 위해 스승의 날에 휴교하는 학교 풍경 등 우리나라 교육의 현주소가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다.

스승의 날은 교권 존중과 스승 공경을 위해 지정됐다. 우리나라는 1963년 5월24일 ‘은사의 날’을 시작으로 1965년 세종대왕의 탄신일이 ‘스승의 날’로 정해졌다. 대만은 공자 탄신일인 9월28일, 인도는 라다크리슈난 대통령 생일인 9월5일, 아르헨티나는 정치가 도밍고 파우스티노 사르미엔토의 기일인 9월11일을 스승의 날로 정했다. 각 나라마다 본받을 만한 위인을 스승으로 기리며 국가 정신을 바로잡는 길잡이로 삼고 있다.

오늘 스승의 날 이 땅에선 존경받는 스승들이 얼마나 되는지 자문해본다. ‘가르쳐 이끌어주는’ 스승과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인격이 동시에 존중될 때 균형의 사회가 이뤄진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 제자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동섭 |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사회문제의 주된 원인을 찾는 방법을 단순화시켜 말하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람에서 찾는 것이다. 문제가 지엽적이거나 소수의 사람들에게 국한되어 있을 경우 많이 적용하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교화하거나 교체하면 해결될 것이라는 자유주의적 방법론에 맞닿아 있다. 다른 하나는 문제의 근원을 사회구조에서 찾는 방식인데 주로 사회전반에 걸쳐 보편적으로 발생하는 문제에 적용된다. 어떤 문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일반적이며 반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사회구조가 배태한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아이들을 살리는 7가지 약속’에 시민들의 동참이 이어지고 있다 한다. 우리의 교육환경은 누가 보아도 비정상적임이 틀림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캠페인이 서명을 넘어 범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다. 교육문제의 근원을 찾아 해결하려는 노력이다.

캠페인은 부모들을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람들을 변화시키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문제는 부모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일만으로 해결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다수의 부모들은 교육환경이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도 않는다. 실천이 어려운 것은 이 문제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보편적이며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울산 남창중학교 학생들이 학교 담장에 벽화를 그리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학부모들만큼 현재의 교육문제를 생생히 체험하고 있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그들은 일상에서 아이들의 고통과 좌절을 목도 한다. 그럼에도 그 같은 현실을 다수의 부모들이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캠페인은 “서로 이 정도는 지키자는 취지”라고 한다. 기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부모들이 왜 그렇게 많은 것인가?

부모들이 자기 자식들을 사교육시장으로 내모는 이유는 그들의 경험이,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가 그길 이외에 다른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청소년들,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도 “직업을 선택할 때 거의 패닉(공황상태) 수준으로 안정성에 집착”한다고 한다. 이것을 부모들이나 아이들의 ‘창의성 부족’이나 ‘욕심’ 때문이라 할 수 있을까? 다수의 경우는 떵떵거리며 호의호식하는 직업을 찾자는 것이 아니다. 단지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위해, 바꾸어 말해 경제적인 생존을 안정적으로 보장받기 위해 성적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 사회에는 안정적 직업이 부족하다.

어느 대학을 나와도, 혹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차별받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다면, 어느 순간 실패하더라도 다시 노력하면 언제든 재기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떤 직업을 갖더라도 일정한 수준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판단이 선다면, 어떤 직장에서도 불안정한 고용상태로 인해 불안에 떨 필요가 없다고 생각된다면, 그래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도 경제사회적 안정성이 확보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어느 부모가 어린 자식들을 입시지옥으로 내몰겠는가?

우리 사회의 학벌구조는 그 자체로 권력구조이다. 봉건적 학연주의가 자본주의 발전과정으로 융합되면서 학연체계를 내포한 독특한 사회경제적 권력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이것은 제도로, 문화로, 심지어 규범으로 우리 사회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대졸자로 입사를 제한하고, 그것도 서울소재대학과 지방대, 명문대 비명문대로 가르고, 학벌이 평생 자신의 간판과 연줄이 되는 사회에서 대학입시를 단판승부로 여기고 몰입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7가지 약속’과 더불어 구조로부터 배태된 제도와 문화를 가능한 것부터 하나둘 바꾸어 가는 실천을 병행하자. 예를 들어 모든 입사시험에서 학적, 출신지역, 연령 등을 고려하지 않는 블라인드 리뷰를 제도화시키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이다. 이것은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고 패자들의 부활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만 되어도 입시위주의 공부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역차별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저 공정하게 실력과 인격으로 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며 실패했더라도 새로운 기회가 지속적으로 주어지는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사람들 간 출신학교, 고향, 나이 등을 캐묻고 그에 따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 자체가 사회발전을 저해한다는 캠페인도 동시에 진행하면 좋을 것이다. 직업안정성을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다. 무엇보다 이 같은 일이 우리 모두의 아이들을 살리고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실천을 유도해야 한다.

구조적 문제는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는다. 수십년 이상 걸릴 수도 있는 문제이다. 단기간의 캠페인으로는 성과를 얻기 쉽지 않을 것이다. 긴 안목으로 지침 없이 실천하고 노력해야 할 일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영수 중국전문가


 


<열자-설부>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산서성에 위치한 진(晉)나라에 한때 도둑이 들끓었다. 백성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도둑을 잡는 절묘한 기술을 지닌 극옹이란 자가 나타났다. 이 자는 얼굴의 미간만 보고도 도적을 식별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진나라의 통치자인 경공이 그로 하여금 도둑을 잡게 했는데,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도둑을 족집게처럼 잡아냈다. 국군은 너무 기쁜 나머지 조문자에게 “극옹 하나만 있으면 나라 전체 도적이란 도적은 다 잡을 수 있으니 많은 사람이 필요 없겠소 그려!”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에 조문자는 “말과 얼굴색만 가지고 도적을 다 잡으려 했다가는 도적을 다 잡기는커녕 극옹도 곧 죽을 겁니다”라고 했다.



오색 주전골에서 발견된 엽전 (경향신문DB)



얼마 뒤 도적들이 한데 모여 “우리가 이렇게 궁지에 몰린 것은 다 극옹이란 놈 때문이다”라고 극옹을 성토한 뒤 힘을 합쳐 극옹을 살해했다. 이 소식을 들은 경공은 급히 조문자를 불러들여 도적을 금하는 대책을 물었다. 이에 조문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 왕실에 이런 속담이 전해옵니다. ‘연못 속의 물고기를 볼 수 있는 자는 불길하며, 감춘 것을 헤아릴 수 있는 자는 재앙을 만난다.’ 도적을 근절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능한 인재를 추천하고 기용하여 교화를 베풀어 백성들이 염치가 무엇인지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도적은 없어질 것입니다.”


경공은 사회라는 현자를 임용했고, 진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심리학에 보면 잠재의식에서 비롯되는 ‘표정언어’나 ‘신체언어’라는 것이 있다. 이런 표정언어는 본인 의식의 통제를 받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의 비밀을 왜곡해서 반영한다. 극옹은 바로 도적의 표정언어로 드러나는 모종의 규칙 같은 것을 파악하여 미묘한 특징을 관찰함으로써 도적을 가려냈던 것이다. 하지만 극옹의 이런 신출귀몰한 도둑 잡는 능력에 대해 조문자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극옹이 도적을 다 잡지도 못할뿐더러 되레 목숨을 잃을 것으로 보았다.


사회적 도덕규범을 위반한 행위를 누군가 알아채면 비밀을 들킨 자들은 비밀을 알아챈 사람과 대립되는 자리에 자신들을 위치시킨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압박이 가해지면 바로 그 사람을 목표로 삼아 공격을 퍼붓는다. 위정자가 국정과 관련한 일을 감추고 이를 알아챈 백성을 억누르는 경우가 바로 그런 것인데, 그 결과는 늘 백성과 위정자 둘 다 다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예나 지금이나 정책의 시행은 소통과 교화가 가장 효과적이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배수찬 울산대 교수·국어교육


 

최근 케이블 텔레비전 방송인 슈퍼액션에서 인기그룹 유키스의 멤버를 주연으로 한 <홀리랜드>라는 드라마를 방영했다. 연약한 소년이 싸움 기술을 익혀 이른바 ‘짱’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으로 된 짧은 4부작 드라마였다. 원작은 일본 만화책이라고 한다. 이쯤 되면 고개를 돌릴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내용 또한 주먹을 쓰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많아, 싸움을 조장하는 터무니없는 드라마로 치부하고 말 수도 있겠다. 나 주인공의 한마디 대사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기필코 강해지고 싶다.” 


이른바 ‘학교폭력’이 심각하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긴 하나, 대학에서 아이들을 길러 교사로 키워 나가야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요즘 보도되는 상황은 정말 접하기 괴롭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얻어맞고, 대낮에 운동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교사가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차라리 양념이다. 동급생에게 맞고 자살하는 아이가 줄줄이 나오는 상황에서, 교권은 어쩌면 사치스러운 개념일지 모른다. 집에 돌아와 하루의 피로를 잊고자 무심결에 텔레비전을 켜면, <홀리랜드> 같은 드라마들이 아이들더러 ‘강해져야 한다’며 윽박지른다. 


 너무 부조화스럽지 않은가. 세상은 학교가 폭력으로 물들었다며 호들갑을 떠는데, 텔레비전에서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타가 주인공인 싸움 드라마를 방송하고 있다. 더욱 답답한 것은 어른들의 태도다. 학생들은 폭력을 몰라야 하는 것처럼 야단이다. 정말 그럴까? 



18일 서울의 한 고등학교 잔디밭에서 고3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씨름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DB)



플라톤이 <국가>에서 제시한 ‘훌륭한 교육’에 따르면, 20세 이전의 아이들은 반드시 체력훈련과 군사훈련을 받아야 한다. 플라톤은 용인되고 통제된 상태에서 폭력이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했던 것이다. 군사훈련은 시대가 달라졌으니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의 체력훈련은 분명 학교의 책임이다. 학교는 과연 아이들의 체력훈련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싸움과 폭력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굴레이다. 누구나 학창시절을 떠올리면 싸움은 있었고, 때리는 아이와 맞는 아이가 있었다. 인간 세상이 이런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공부시킨답시고 백년 전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교실에 몰아넣어 하루종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그러나 기대수준이 높아진 학부모와, 쾌적한 생활에 길들여진 아이들은 학교를 향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교권의 추락은 현행 시스템을 유지하는 한 피할 수 없는 흐름이다. 일부에서 주장하듯 학생인권조례 탓만 할 일은 아닌 것이다.


어쨌거나 학교가 없어지지 않는 이상, 그리고 학교가 아이를 떠맡은 이상, 학교는 제대로 아이들을 키워낼 책임이 있다. 지식교육도 인성교육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된 체육교육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현 상태에서 체육은 폭력에 대응하고 그것을 절제하는 힘을 실제로 길러줄 수 있는 유일한 교과이다. 잘만 하면 몸을 쓰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며, 절도와 인내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준다. 우리는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아이들에게 머릿공부만 시켰다. 하지만 맞으면서 학교를 다니는 치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홀리랜드>에서 말하듯, ‘기필코 강해지고 싶은’ 아이들은 많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홀리랜드>나 보면서 위안을 얻도록 해서야 되겠는가. 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데, 우리가 <홀리랜드>보다는 아이들을 더 잘 가르쳐야 학교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에 나오는 플라톤의 말을 그대로 옮겨 우리가 할 일의 방향으로 삼자. “시가와 체육으로 혼의 격정적인 면과 지혜를 사랑하는 면이 적절하게 조화되도록 하는 것이 교육의 목표이다. 그리고 식생활은 단순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종회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소묘 900점, 목판화 350점 등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대표작은 뉘른베르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이다. 이 그림에는 눈물겨운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어 있다.


그림 공부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뒤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 친구와 약속을 했다. 한쪽이 그림을 배우는 동안 다른 한쪽은 노동을 해서 학비를 부담하기로 한 것이다. 뒤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했고,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자 이제는 친구를 공부시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는 하루 일을 마치고 기도 중이었다.


 그의 기도는 이러했다.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굳어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하오니 하나님, 내 친구 뒤러만은 화가로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다. 이것이 불후의 명작 ‘기도하는 손’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건 이처럼 인간적 유대로 묶여 있을 때다.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한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안타까운 사건이 속출하는 세상이다. 만약 그중 한 아이에게 뒤러와 같은 우정의 체험이 있다면, 극단적 선택을 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러므로 폭력에 대한 예방교육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은, 우리 아이들에게 감동적인 인간관계의 체험을 열어주는 일이다.



자살한 경북 안동의 여중생이 다니던 학교에서 학생이 묵념하고 있다. (경향신문DB)



그렇게 고급한 정신적 영역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타락이나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매일같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는 철면피한 인물들의 가슴속에는, 작지만 단단하고 소박하지만 값있는 가치관이 숨어 있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본령이 있는 선거에서 나쁜 방식으로 사람들을 속인 당선자, 어려운 사람들의 정성어린 저축을 맡아 잘 관리하기는커녕 이를 횡령하고 도주하려 한 은행가에게는, 볼품 있는 감동의 체험이 그의 인생 역정에 있기 어렵다.


현대사회의 가장 무서운 질병은 암이 아니라 우울증이라는 얘기를 어느 의사에게 들었다. 암은 치유의 과정이 비교적 객관화되어 있으나, 우울증은 그것이 환자에 따라 천태만상이므로 종잡기가 어렵다는 말이다. 한 시대의 아이콘으로 불리던 대중문화 스타들이 자기 생명을 버린 비극의 장막 뒤에는, 미상불 애써 추구하고 지켜야 할 목표와 가치의 상실이 주된 원인으로 잠복해 있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은, 단순히 상류사회에 진입한 신분으로 국제기구의 중책을 맡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인류사회의 질병을 퇴치하고 경제적 불균형을 개선하려는 이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그것을 키워준 어머니의 훈도가 있었다. “어머니는 늘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나의 꿈은 마틴 루터 킹처럼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머니의 가르침은 곧 가장 큰 사랑과 감동의 다른 이름이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일도 그것이 진심일 때에만 가치가 있다. 진심이 없는 곳에서는 감동의 싹이 자라지 않는다. 고귀하고 운명적인 사랑은 평탄한 곳에 피어나는 꽃이기보다는 역경의 가시밭길을 넘어선 곳에 선물처럼 주어지는 열매이기 마련이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생과 감사와 신뢰를 한마디로 축약하면 아마 ‘사랑’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시 ‘가을의 나뭇잎’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다.


감동이 있는 삶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일생의 과제이다. 바야흐로 녹음방초가 꽃을 이기는 좋은 계절이다. 이때에 정녕 우리에게 감동적인 세상살이의 체험이 있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가꾸어 나가야 할지를 깊은 사색으로 탐구해 보았으면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유인화 논설위원


지난 4일 저녁 서울 안국동 갤러리 아트링크에 배우 박정자(70)의 연극 50년 기념 ‘박정자 전’을 축하하려고 130여명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였습니다. 한옥을 개조해 만든 갤러리의 아담한 마당에서 최백호의 노래 ‘보고 싶은 얼굴’로 시작된 봄밤의 잔치는 아름답고 따뜻했지요. 1962년 <페드라>의 시녀 역으로 시작한 ‘박정자의 연극 50년’은 한국예술사를 말해주는 시간여행입니다.

늘 푸근한 웃음을 짓던 여배우가 그날처럼 긴장한 표정을 보여준 건 드문 일입니다. 기자가 박정자 선생을 처음 취재한 1988년 이후 그토록 굳은 채 감격하는 모습은 처음 봤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미친 도깨비 같다”는 말로 ‘50년 잔치’의 뜻깊은 첫날을 말합니다. “연극배우로 사는 동안 행복했다. 좋은 작품, 감격적인 무대, 훌륭한 선후배, 그리고 큰 박수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당신, 그 시간들에 대한 감사를 전시라는 이름으로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갤러리 벽에는 진명여고 시절 파란 꿈을 담은 박정자 학생의 똘똘한 눈동자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명동을 거닐던 이화여대생의 다부진 입술까지, 1970년대 추송웅과 출연한 <부부연습>에서 에너지 넘치는 손짓부터 <19 그리고 80>에서 귀여운(?) 80세 할머니로 분장한 순간의 윙크까지 140여편의 연극 출연을 기념하는 생생한 사진들과 동영상, 대본과 의상 등 온통 배우 박정자가 걸어온 ‘길’로 가득했습니다. 오는 13일까지 매일 저녁마다 가수 은희, 배우 강부자, 노래꾼 장사익 등 그의 친구들이 다양한 레퍼토리로 무대를 만들고 한태숙 연출의 ‘맥베스’ 낭독회가 이어집니다.

‘박정자 전’의 전시품 중에는 박정자의 다정한 ‘라이벌’ 손숙 전 환경부 장관(68)의 편지도 눈에 띕니다. “사랑하는 형님! 눈물겹고 힘들고 외로운 이 길을 가면서 늘 제 앞에 형님이 등불이 되어주셔서 길을 잃지 않았습니다. 이제 연극은 우리에게 운명이고 종교가 되어버렸네요….” 끝없는 구도의 길을 공감한 글입니다.

 

연극배우 박정자씨 ㅣ 출처:경향DB

올해 88세인 백성희 선생은 현역배우로 가장 오래 무대를 지켜온 배우입니다. 1943년부터 69년 동안 400여편의 연극에 출연한 그는 자전극 <길>에서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이 길을 죽을 때까지 가는 거야”라며 가도가도 부족한 예술의 여정을 탐했습니다.

이들은 한 해도 무대를 거른 적이 없습니다. 고단한 수행길을 묵묵히 이어온 이들의 온몸에는 수십년 동안 흘린 땀과 눈물이 배어있지요. 비단 배우만은 아닐 겁니다. 예술은 갑자기 이뤄지는 게 아닙니다. 운전면허를 따기 위해 문제집을 풀고 몇 시간의 학원 수업 후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는 것처럼 몇 시간, 몇 달 만에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이제 학교현장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지난해부터 초·중·고교에서 행하는 수업집중이수제로 인해 예술과 체육이 단시간 내에 마스터할 수 있는 과목이 돼 버렸습니다. 이 제도는 학교 재량으로 국·영·수 등 입시와 직결되는 과목의 수업시간을 늘리고, 주당 한두 시간의 수업에 그치는 음악·미술·체육·도덕·사회·과학·가정·기술 등은 3년 동안 배울 내용을 학년별 또는 학기별로 몰아서 교육하는 방식입니다. 특정 학기에 집중적으로 수업하다 보니 국사나 한문 등 자세한 내용을 습득하거나 외워야 하는 과목은 주마간산식의 진도 맞추기에 급급한 게 사실입니다. 학생들의 감성과 인성 발달을 위한 예체능 교육도 체험 위주보다 암기 위주입니다.

얼마 전에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전국 중학교 전학년에 주당 4시간씩 체육을 가르치라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졸속 지시가 떨어지자 일부 중학교는 토론·문화·예술·봉사 등 다양한 경험을 해야 할 창의적 체험활동 시간을 줄였습니다. 수업의 효율성을 위한 집중이수제가 전인교육 부재를 낳는 괴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중1·고1 학생들의 경우 기초가 쌓이지 않은 상태에서 중2와 중3 과정, 고2와 고3 과정을 미리 배우다 보니 부작용이 속출합니다. 특히 연간 40여만명에 달하는 전학생의 사정이 딱합니다. 학교마다 학기마다 배우는 과목이 달라 특정 교과목을 배우지 못하는 사례가 발생해도 속수무책입니다. 또한 입시와 연관되지 않은 교과를 축소하다 보니 수업시간이 줄어든 교사는 다른 학교로 파견수업을 가거나 부전공 과목 연수를 받아 전근하는 사례가 늘었습니다. 늘어나는 영어와 수학 시간을 위한 기간제 교사나 단기연수 교사의 양산도 우려됩니다.

오죽하면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교원단체들이 이 제도를 비판하겠습니까. 정부는 교육현장의 목소리에 귀기울여야 합니다. 학생들의 지식 발달단계를 정밀하게 고려하지 않고 졸속으로 도입한 수업집중이수제의 문제점 보완과 개선 없이는 교육의 미래도 없습니다. 특히 예체능 교육은 시간의 축적에 따라 숙성되는 자연의 순리와 같습니다. 열 달을 채워 사람이 태어나듯 생각 속의 창고도 한번에 채워질 수 없습니다. 3년 동안 배워야 하는 예술과목을 한두 학기에 끝내면서 어떻게 제2, 제3의 ‘박정자’가 탄생하기를 기대하겠습니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재헌 한국청소년활동진흥원 이사장

 

최근 발표된 자료를 보면 청소년 5명 중 1명은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한다. 학교폭력과 왕따, 학업에 대한 불안 등으로 청소년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자살이라는 극단의 선택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다. 또 매년 6만∼7만명의 초·중·고교생들이 학업을 중단한다고 한다. 2009년 이후 누적된 자퇴생의 수는 무려 20만명.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밖 시설’은 턱없이 부족해 이들 청소년들은 갈 곳을 잃고 헤매다 결국 범죄의 피해자로 혹은 가해자로 내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청소년 활동을 총괄·지원하는 기관의 일원인 필자는 현장에서 청소년들과 직접 소통할 기회가 많다. 이들을 접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청소년들의 고통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는 것이다.

청소년 문제는 어느 한 주체의 노력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가정과 학교뿐만 아니라 청소년시설·단체·기관, 지역사회, 정부가 긴밀히 협력해 현실적이고 중·장기적인 해법을 찾는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특히 제도교육이 한계에 달해 있는 만큼 청소년 수련관, 청소년 문화의 집 등 청소년 활동시설을 포함한 지역사회의 역할이 크게 증대돼야 한다.

 

경기도 일산동구의 한 번화가에서 청소년들이 배회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지역사회는 청소년들의 멘토와 의지처가 되어주고, 활동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은 다양한 체험활동을 통해 저마다 자신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꿈을 키울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지역사회가 더 많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해야 한다.

주 5일제 수업 전면실시를 맞아 각급 학교에서도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체험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청소년수련관과 수련원 등 청소년 활동시설에서도 다양한 청소년 체험활동 서비스를 개발·지원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이달 말 예정된 ‘대한민국 청소년 박람회’는 청소년이 기획 단계부터 직접 참여하며, 자신의 꿈과 진로를 탐색하고 창의적인 체험활동이 가능하도록 꾸며져 눈길을 모은다.

또 사회 각 주체가 참여한 만큼 청소년 친화적 환경 조성을 통해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해법을 제시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 아프리카 속담에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동네가 나서야 한다’라는 말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청소년들의 건강한 성장과 꿈을 키우기 위해 가정과 학교,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서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영수 | 중국전문가


 

춘추시대 초나라의 장왕은 집권 초기 개혁에 반발하는 세력의 거센 저항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재상 벼슬까지 지낸 권신 두월초(斗越椒)는 무력으로 저항했다. 장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북채를 잡고 북을 두드리며 군사들을 격려했다. 이를 본 두월초가 활을 쏘았다. 화살은 장왕이 타고 있는 전차를 향해 날아들어 북을 뚫었다. 장왕이 급히 화살을 피하기가 무섭게 두월초의 두 번째 화살이 날아들어 이번에는 전차의 지붕을 뚫었다. 병사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허둥지둥 퇴각했다.



경향신문DB



퇴각한 초나라 군사들은 두월초가 쏜 두 발의 화살을 뽑아서는 서로 돌려가며 구경했다. 화살은 별스럽게 크고 날카롭기 짝이 없었다. 모두들 이 화살이야말로 ‘신전(神箭)’이라며 놀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두월초의 ‘신전’에 잔뜩 겁을 먹은 병사들을 본 장왕은 야간에 군영을 순시하는 책임자를 불러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했다.


“우리 선군이신 문왕께서 당시 식(息)이란 나라를 공격하다가 세 발의 날카로운 ‘신전’을 얻었다. 그런데 두월초란 놈이 그중 두 발을 훔쳐갔다. 오늘 그 두 발을 다 써버렸다.”


두월초의 신전이 초나라 군대에 공포를 가져다줌으로써 군심이 전반적으로 동요하는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이 벌어졌다. 따라서 장왕은 ‘신전’이 몰고 온 불안과 공포를 바로 없애야만 했다.


먼저, 장왕은 ‘신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았다. 병사들 눈으로 똑똑히 본 사실을 부인했다간 오히려 거짓말한다는 혐의만 사게 되고, 이것으로는 병사들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장왕은 ‘신전’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기지 넘치게 활을 쏜 ‘사수’와 ‘화살’을 분리했다. 그는 활을 쏜 사수 두월초는 입에 담지 않고 그저 ‘화살’의 대단함을 담담하게 언급했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 활을 쏜 두월초의 실력을 자연스럽게 깎아내렸고 이로써 반란군에 대한 병사들의 미신과 두려움은 사라졌다. 또 장왕은 두월초가 두 발의 ‘신전’을 훔쳐갔다고 흘림으로써 두월초를 나쁜 자로 모는 동시에, 오늘 전투에서 그 두 발의 화살을 다 사용했기 때문에 더는 두려워할 게 없다는 것을 암시했다.


리더가 위기상황에서 적절하게 임기응변할 수 있다는 것은 달리 말해 백성들을 불안에 떨지 않게 하는 리더십을 갖췄다는 뜻이기도 하다.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떨거나 상황을 과장하는 리더를 바라보는 백성의 마음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장왕의 임기응변 리더십은 리더의 안정감이란 면에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현우 | 서평가


 

과학자들에 따르면 중년이나 노년에 걸리는 질병이 출생 이전 사건들에서 비롯될 수도 있다. 영국의 한 지역에서 제1차 세계대전 직전과 도중, 그리고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방대한 출생기록을 조사한 결과인데, 궁핍한 환경 때문에 평균보다 훨씬 작게 태어난 아기들은 다른 아기들보다 나중에 건강하지 못할 확률이 매우 높았다. 성인이 된 이들의 상당 비율이 65세 이전에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 열악한 환경에서 비롯된 영향 결핍을 보상하기 위한 시도가 체질에 흔적을 남기고 그것이 몇 십 년 후에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온 것으로 본다. 


 환경과의 이러한 부조화가 심지어는 후대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친할아버지가 사춘기 때 대풍작으로 음식을 풍부하게 섭취할 경우 손자들의 당뇨병 발병 확률이 높아졌다. 중요한 신체발달단계에서 포식을 한 것이 정자 내 유전자에 어떤 화학적 변화를 일으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터 글루크먼과 마크 핸슨의 <문명이 낯선 인간>이란 책에 소개된 내용이다. ‘어긋남’을 뜻하는 책의 원제 ‘미스매치’는 개체가 자기 생애 초기 환경과 ‘잘 맞물리느냐 어긋나느냐’가 그 개체의 건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유전자와 환경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준다고 할까. 


개체적 차원에서 초기 환경의 중요성은 계통적 차원, 곧 인류사에도 적용된다. 진화심리학에서는 아예 우리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오랜 세월에 걸쳐 우리 마음이 디자인되었던 석기시대의 환경과 현재의 문명 환경 사이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입증하기 위해 진화심리학에서 즐겨 드는 사례가 성선택(섹스)과 공격성(살인) 같은 주제다. 미국의 심리학자 더글러스 켄릭이 쓴 <인간은 야하다>의 원제가 ‘섹스, 살인, 그리고 삶의 의미’인 것도 그래서 특이하진 않다. 진화심리학이 말해주는 인간의 본성을 잘 정리해놓은 책인데, 가령 살인 환상에 대한 내용도 참고할 만하다.


미국의 한 대학 학생들을 상대로 한 조사에 따르면, 누군가를 죽이고픈 살인 환상을 품은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남학생의 76%, 여학생의 62%가 그렇다고 답했다. 우리라고 해서 더 적은 수치가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럼 누구를 죽이고 싶어할까? 남녀 모두 대상은 주로 남성이다. 하지만 남성의 59%(여성의 33%)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죽이는 환상을 갖고 있음에 반해서 여성의 27%(남성의 7%)는 애인을 살해하는 환상을 품었다. 


살인 환상을 품을 가능성에 있어서는 남녀 간의 차이가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살인사건의 거의 90%는 남성에 의해 저질러진다. 그건 여성이 자신의 살인 환상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드물다는 걸 말해준다. 어떤 이유에서인가. 저자는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여성의 환상은 남성에 비해 일시적이다. 둘째, 여성은 폭력적 충동에 대한 억제력이 더 강하다. 셋째, 남성은 다른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주기 위해 공격적으로 행동하려는 성향이 더 강하다. 마지막 성향은 짝짓기에서 여성에게 선택받기 위해 더 심한 경쟁을 감수해야 하는 남성이 자연스레 발달시킨 본성이다. 수컷 공작새가 화려한 꼬리로 암컷의 마음을 끌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하여 남성이 늘 공격적인 것은 아니다. 주로 10대 후반과 20대에 남성호르몬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가장 높을 때 자신의 지배성을 과시하려고 폭력적일 때가 많다.


10대 청소년들이 20대 남자 대학생을 잔인하게 살해한 ‘신촌 살인사건’이 발생해 사회에 충격을 주고 있다. 오컬트 카페가 원인이라고도 하고 스마트폰 채팅 갈등이 원인이라고도 한다. 혹은 더 오래된 기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기원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우리의 공격성을 조금은 제어할 수 있을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방훈 | 양산대 교수·경영학


 

필자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집안사정으로 어머니와 강제적으로 떨어져서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산 적이 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인자하시어 나를 아껴 주셨다. 그래도 나는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동내 어른들을 볼 때마다 저의 어머니 만나게 해달라고 계속 부탁을 드렸더니, 오는 보름날 밤 8시까지 두 마을 중간에 있는 큰 밭의 중간에 큰 소나무 밑으로 나오라고 했다. 



(경향신문DB)



설레는 마음으로 8시에 소나무 밑으로 같더니 어머니는 벌서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품에 안겨 눈물을 흐렸다. 어머니가 만들어 오신 개떡과 보리떡, 삶은 계란 등을 맛있게 먹으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는 “너는 커서 무엇이 되고 싶나?” “나는 과수원 할래요. 과수원해서 돈 많이 벌어 어머니께 빨리 효도하고 싶어요” 그래 내 아들 훌륭한 꿈을 가졌구나“하고 어깨를 툭툭 쳐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앞으로 이 곳으로 나를 만나러 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만약 나를 만나는 것이 발각되면 집안에 큰 일이 난다고 하시면서 당신이 연락하기 전까지는 찾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소나무 밑에서 어머니와의 즐거운 만남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고이 간직할 수 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나는 대학교수가 되었고 슬하에 2녀를 잘 키워 행복하게 살고 있다. 최근에 위암말기라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를 받고 있으나, 어머니께서 소나무 밑에서 주었던 사랑과 용기는 나의 삶에 힘을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더욱이 어머니가 암으로 고통스럽게 돌아가실 적에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내 자신이 부끄럽고 죄스럽다.


우리시대 대개의 어머니들은 어머니는 고통과 아픔을 가슴에 앉고 살았다. 그래서 한국의 어머니들만이 겪는 ‘화병’이 의학적 용어로까지 정착된 것이 아니겠는가?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고난과 통한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인내하신 어머니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그 눈물은 통회의 눈물이자 희망의 눈물이다. 우리 모두는 부모로부터 무한사랑을 받을 수 있는 자식이자, 또한 어떤 역경 속에서도 무한사랑을 베풀수 있는 부모이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너무 가까워서 잊고 있었던 부모나 형제의 손을 잡아보는 것이 어떨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류점석 | 비교문학자

‘발호’한다는 것은 ‘날뛴다’는 말이다. ‘발(跋)’은 밟거나 뛴다는 의미고, ‘호(扈)’는 고기 잡는 어구인 통발을 뜻한다. 통발에 갇힌 잔챙이들이 옴짝달싹 못하고 어부의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과는 달리, 힘을 가진 거친 물고기들은 길길이 날뛰며 통발을 비웃고 달아난다는 데서 유래한 말이다. 고기들의 행태를 빗댄 이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쓰일 때는 아랫사람 또는 신하가 윗사람 또는 임금을 우습게 여기고 권력을 남용하며 잇속을 챙기는 경우에 해당된다.

<후한서> ‘양기전’에 따르면, ‘어깨는 성난 듯이 들썩거리고 눈은 날카롭기 짝이 없고 눈동자에서는 섬광이 넘쳤지만 말투는 어눌하고 더듬거리기까지 한 양기’는 조정의 실권을 쥐고 국정을 농단한 대장군이었다. 그가 어린 나이에 황제위에 등극시킨 질제(質帝) 유찬은 영민하여 양기를 제거하는 것이 보위를 지키는 길이라 생각하고 조회 석상에서 양기를 평하여 말하길, “그는 발호장군이다. 숫제 제멋대로란 말이다”라고 했다. 이 말에 앙심을 품은 양기는 유찬을 독살하고 꼭두각시 황제 환제를 세워 부와 권력을 신물나게 누리다 결국엔 그도 환제의 계략에 말려 척살되었다. 발호장군 양기의 탐욕과 망발은 한 시대만의 전유물이 아닌 듯하다.

지금 우리는 재벌 총수가 유산상속 문제로 감정이 뒤틀려 육친의 형에게 맞서 ‘발호’하는 패륜을 목격하고 있다. ‘가족들로부터 퇴출을 당하여 장손의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이맹희씨가 “건희는 늘 자기탐욕만 챙겼고 형제간 불화를 가중시켜 왔다”고 한 말에 발끈한 이건희씨는 “맹희씨는 감히 나에게 건희, 건희 할 상대가 안된다”고 맞받았다. 이건희씨가 분기탱천하여 깔아뭉갠 것은 보통사람들의 상식과 도덕개념이다. 형이 직함을 생략하고 맨 이름으로 불렀대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돈벌이와 “아내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바꾸라”는 말에 넋이 나가 그를 교주 모시듯 하는 세태에서 이건희씨가 발호할 만도 하지 않은가?

한때 발호하며 ‘권불십년’을 망각했던 권력 주변 거간꾼들의 추한 말로를 보노라면, 차라리 불길에 휘말려 단박에 제 몸을 태워 한줌의 재가 되고 마는 부나방의 삶이 더 경건하게 느껴진다. 2008년 3월 ‘형님 공천’에 대한 당 안팎의 불만을 언급하며 기자들이 이상득씨에게 “시중에는 상왕 정치라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그는 “이명박이가 내 말을 들을 것 같냐? 당신들이 이명박이를 잘 몰라서 그렇다”고 했다. 아무리 육친의 형이라지만 국가원수를 공개 석상에서 “명박이가…”라고 칭하며 하대한 것은, 그가 공적 체제를 무시하며 발호했던 지난 4년간의 전횡을 암시한 전주곡이었다.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신변의 안전을 도모해야 할 이상득씨가 가상의 미래권력 앞에서 “대선 필승”을 주창하며 잔을 드는 모습이 애처롭다.

 

쉬는시간 족구를 하고 있는 중학생들 l 출처:경향DB

이렇듯 자신의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말은 비정하지만, 인간사의 실상을 폭로하는 반면교사의 역할은 한다. 진정으로 우리를 슬프게 하는 말은 자기의 허물은 덮어둔 채 상대를 질책하듯 책임을 전가하는 말이다. 지난달 여주의 한 중학교를 찾은 이명박 대통령은 “공부에만 찌들어 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세상에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는가? 대통령이 북 치고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장구 치면서 일제고사로 학생들의 코를 꿰어 그들을 벼랑으로 내몰면서 어떻게 말로만 “친구와의 관계도 좋고, 남을 존경할 줄 알고, 사회적 활동으로 학교생활을 잘해나가는 사람이 우리 사회의 인재”라고 할 수 있는가?

토요 휴무가 정착되자 친구와 더불어 ‘한류산악회’(친구 한두현에서 ‘한’, 제 이름 류가헌에서 ‘류’를 따서)를 조직하여 격주로 인근의 소요산, 감악산, 도봉산, 수락산, 고대산, 멀리는 태백산 등을 오르며 호연지기를 키우다 중간고사 기간이라 잠깐 중단한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을 보아 잘 안다. 제발 아이들이 공부에만 찌들어 살지 않게 그들을 쥐어짜며 변죽만 울리는 짓, 그만하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경희 | 청소년작가

우연한 기회에 북에서 온 아이들을 만나게 됐다. 나는 아이들을 처음 보는 순간, 찔레 넝쿨 속에 숨어 있던 ‘붉은 삐라’를 떠올렸다. 꽃제비로 전전하다 이 땅에 정착한 아이들일 것이란 편견과 함께. 하지만 아이들은 나의 고정 관념을 여지없이 깨트렸다.

하나원을 통해 학교에 온 설화는 청보리처럼 풋풋했다. 단발머리에 수줍은 미소를 짓는 모습이 참 예쁜 아이다. 하지만 설화는 넋을 놓고 허공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 설화와의 소통을 꿈꿨다. 만날 때마다 자신 안에 감추어진 분노, 아픔 등을 표현하길 권했다. 다행히 아이는 아픔을 토해 낼 줄 알았고, 열정적이었다.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는 부모님과 도강하다 잡혀 간 언니에게 피를 토하듯 쓴 편지를 읽으며 설화도 울고 나도 울었다. 설화는 글을 통해 트라우마를 치유해 나갔다.

설화는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한 후 대학 입시 준비를 하고 있다. 나는 목표를 향해 차근차근 올라가는 설화가 대견스러웠다. 그런 설화에 대해 좀 더 많은 것을 알고 싶었다. 비단 설화만이 아닌 내가 만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을 향한 갈망이기도 했다.

온 천지에 꽃비가 흩날리던 날,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이번에는 교실이 아닌 아이들이 머물고 있는 기숙사를 찾기로 했다. 학교에서 운영하는 무연고 탈북 아이를 위한 그룹 홈에는 여덟 명의 아이들이 머물고 있었다.

그룹 홈에 들어서니 아이들이 환한 미소로 나를 맞았다. 대문 입구에 널린 신발이며 빨랫줄에 즐비하게 널린 옷가지들. 일반 가정과 다를 게 없었다. 특별하다면 작은 탁자 위의 사진첩이었다. 여덟 명의 아이들이 각기 다른 사진첩을 진열해 놓았다. 아이들은 그렇게 ‘가족’을 이루며 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을 품어주는 선생님이 있긴 하지만. 아이들은 기숙사 선생님을 ‘엄마’라고 불렀다.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 엄마’는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귀청을 파 주기도 하고, 아이들의 고민을 들어 주기도 하는 등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그래도 지쳐 보이거나 힘겨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행복한 얼굴이었다.

“아이들과 하룻밤만 지내보면, 제가 왜 저 아이들의 엄마가 되었는지 알 거예요.” 기숙사 맘이 말을 마친 뒤,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지라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나는 아이들과 교실에서는 나눌 수 없는 이야기를 허심탄회하게 나누고 싶었다. 잠시 후, 미리 시켜 놓은 음식이 배달되었다. “너희들 피자 좋아한다며? 실컷 먹어. 통닭도 먹고.” 나는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에게 권했다. 나는 피자를 먹는 아이들에게 물었다. 북에서도 피자를 먹어 봤느냐고.

“북한에서는 피자를 먹어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여기 와서 많이 먹어봤는데 별로예요.” 어쩐지 피자를 먹는 아이들의 손놀림이 활발하지 않았다.

“그럼 피자 싫어한다고 하지 왜 가만히 있었어?” “여기 음식이 아무리 맛있어도 북에서 먹던 옥수수 국수나 꼬장떡 맛 같지는 않아요.” 아이들은 옥수수 국수, 꼬장떡이라는 말이 나오자 와글와글,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시 먹어 보고 싶어요. 가끔 꿈까지 꿔요. 고향 집 가마솥에서 막 쪄 낸 꼬장떡 먹는 꿈요. 옥수수 국수…. 그 때는 정말 먹기 싫었는데 지금은 엄청 그리워요.” 아이들의 마음은 이미 고향에 가 있었다. 공감이 갔다. 나 역시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피자보다는 쑥개떡이 더 맛있으므로.

“북한은 정말 과일이 맛있어요. 사과도 껍질째 씹어 먹어도 아삭아삭, 맛있고 오야주나 자두도 여기보다 훨씬 크고 꿀맛이에요.” 수입 포도를 보자 아이들은 또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이들의 생얼굴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놀랍게도 쌍꺼풀을 한 아이들이 많았다. 설화도 그 중의 하나였다.

“쌍꺼풀 했니?” “네. 북한에서 했는데 돈 벌면 여기서 다시 할 거예요. 촌스러워서요.” 설화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놀란 건 오히려 나였다. 내친김에 나는 ‘북한에서도 자유연애를 하니?’에서부터 그간 묻고 싶었던 질문을 쏟아놓았다. 그런데 내 말을 듣던 설화가 다소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남한 사람들은 우리를 이방인으로 볼 때가 많아요. 그렇지 않으면 꽃제비 정도로 불쌍하게만 보고요. 어딜 가나 사는 모습이 다 다르듯이 북한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목숨 걸고 여기까지 왔을 뿐, 다르지 않아요.” 역시 설화다웠다. 순간, 나는 지난 3년간 아이들을 만나오며, 그들에 대해 꽤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소에 설화에게 묻고 싶던 질문을 했다. “대학에 가면 무슨 공부를 하고 싶니?” “전, 법을 공부할 거예요. 북한도 마찬가지지만 남한에 와 보니 법이 강자 편인 게 많은 것 같아 씁쓸해요. 우리 탈북자를 위한 정책도 마찬가지구요. 나 혼자 세상을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자꾸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의가 이기게 되지 않을까요. 힘들어도 꼭 해 보고 싶어요.”

말을 마친 설화가 다짐이라도 하듯, 입술을 앙다물었다. 설화의 말에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또 다른 아이들. 나는 저 아이들이 얼룩 같은 어제는 모두 잊고, 잘 마른 수건처럼 보송보송한 내일을 만들어 갈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밤이 깊었다. 나는 기숙사를 나와 꽃길을 걸었다. 당당하면서도 활기찬 탈북 아이들. 저들은 우리와 살아 온 환경이 다를 뿐, 결코 이방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한 시간이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유인화 논설위원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다단조 작품 67-운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석에서 부동의 자세로 30분 동안 앉아있는 단원들이 있다. 마지막 4악장에서 트롬본을 연주하는 3명의 연주자이다. 이들은 환한 조명이 켜져 있는 무대에서 1악장부터 3악장이 연주되는 동안 꼼짝않고 자신의 연주시간을 기다린다. 4악장에서도 몇 마디 연주 후 100마디 넘게 소리내지 않고 대기하는 부분이 많아 긴장의 연속이다. 40여분 동안 쉴 틈 없이 연주하는 바이올린 연주자들도 몇 마디 쉬는 부분이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가는 거대한 음표의 흐름에 자칫 흠집을 내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 때문이다.

오케스트라 연주는 화합의 결실이다. 소리를 빚어내는 연주자들끼리 호흡을 맞추기 위해 집중력과 많은 연습이 필요하다. 단원 개인의 출중한 테크닉보다 100여명의 단원이 만드는 화음이 소중하다. 육상경기처럼 빨리 뛰는 건 소용없다. 지휘자의 해석에 따라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는 순간이 중요하다. 다른 악기보다 큰 소리를 내거나 작은 소리를 내도 안된다. 단원이 함께 부드러움과 아름다움을 창조해야 한다.

 

경기 성남시 도촌초등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어울리오 오케스트라’ 단원들 l 출처:경향DB

1743년 창단된 세계 최고(最古)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비롯해 1842년 창립된 뉴욕 필하모닉, 1813년 태어난 로열 필하모닉 등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단원들의 장인정신과 협동심으로 완성된 한 권의 역사책이다. 외인음악구단을 내세운 TV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가 성공한 이유도 강마에의 지휘로 하나가 되는 단원들의 연주에 그들의 꿈과 땀, 간절함과 희망이 담겼기 때문이다.

엊그제 교육과학기술부가 초·중·고교의 학생 오케스트라를 현행 150개교에서 300개교로 늘린다고 밝혔다. 음악을 통해 청소년들의 인성과 창의성을 키워주기 위함이다. 5월부터 문화예술 소외지역 학교 우선으로 오케스트라 운영 학교가 선정되고, 창단비용으로 학교당 8000만원이 지원된다. 6월부터 학생을 지도하는 ‘마스터클래스’에는 국내 정상급 음악인 100명이 가세해 음악의 힘을 전파한다. ‘함께 만드는 음악’은 성적 스트레스와 자살, 학교폭력과 집단따돌림 등 몸과 마음이 아픈 우리 시대의 청소년들을 치유하는 처방전이 될 수 있다. 욕심과 주장만 있는 이합집산의 우리 정치판에도 반성과 화합을 위한 오케스트라 처방전이 필요한 건 아닐까.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지우 | 유학 준비생


 

“엄마, 쿠키한테 빵 주지 말라니까!” 내가 소리치자 당황한 엄마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쿠키가 하도 내가 빵 먹는 것을 쳐다보는데, 불쌍해서 그만….”


쿠키는 우리 집에서 키우는 작은 몰티즈 강아지다. 빵, 과자 같은 음식은 강아지의 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우리 가족은 쿠키에게 절대로 빵 같은 음식을 주지 않기로 했었다. 그런데 쿠키를 입양했을 때의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엄마는 동정심에 쿠키에게 빵을 준 것이다.


 물론 엄마는 ‘이번 딱 한 번만’이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쿠키의 입장이다. 쿠키는 ‘어제 주인에게 빵을 받아먹었는데, 오늘도 주인이 빵을 주겠지’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쿠키는 빵이나 과자가 자신의 건강을 해롭게 할 것이기 때문에 먹지 말아야겠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경향신문DB)



최근 자동차 트렁크에 개를 매달고 달린 ‘악마 에쿠스’ 사건을 둘러싸고 인터넷이 시끌했다. 운전자는 자신을 향한 네티즌들의 분노에 억울해 했다. 개를 유기한 것도 아니고, 개가 질식할까 봐 정성스럽게 노끈을 이용해서 숨구멍까지 만들어줬는데, 한순간의 사건으로 왜 자신이 ‘악마’라는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문제는 ‘패러다임’이다. 개의 시각과 사람의 시각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만약 그 트렁크에 개가 아닌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큰 사고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차가 달리고 있을 땐, 트렁크 밖으로 뛰어내리면 안 된다는 것을 ‘당연히’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개에겐 전혀 당연한 일이 아니다. 개의 시각에서는 뚜껑이 열려 있는 트렁크에 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당황스러운 일이고 달리고 있는 차에서 뛰어내린다는 게(그것도 목줄이 걸린 상태에서) 위험한지 어쩐지 모르는 것이다. 운전자가 ‘악마’였기 때문에 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의 패러다임, 즉 개의 시각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난 것이다.


반려견을 기르는 가정이 부쩍 늘고 있다. 하지만 반려견의 주인은 그에 못지않게 개의 패러다임을 이해하고, 개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개의 패러다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누구나 ‘악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전진한 투명사회정보공개센터 소장



메트로 지하철 9호선 요금인상 문제로 불거진 민자투자사업 문제에 대해 시민들의 원성이 높다. 특히 특정 세력과의 관계를 의심받고 있는 맥쿼리인프라가 전국의 17개 유료 도로와 터널, 항만, 지하철 등에 약 2조원을 투자했다. 이들은 시민의 호주머니를 털거나, 세금지원 형태로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이 사실이 지하철 9호선의 기습 요금인상 발표로 알려지면서 여론이 들끓고 있다.



9호선 요금인상에 관해 답변하는 박원순 서울시장 (경향신문DB)



민자투자사업은 지방자치시대를 맞으면서 자치단체장들의 무리한 보여주기 행정이 불러온 필연적 결과이다. 임기 동안 본인의 치적을 내세우기 위한 거대한 토건사업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그 결과 투자자를 찾기 위해 무리한 계약을 추진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가고 있다. 지하철 9호선에서 보듯이 그들의 탐욕적이고 안하무인의 오만한 태도는 어쩌면 서울시에서 그 빌미를 제공한 탓도 크다. 향후 이런 사태를 방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에 우선 지방자치단체는 시민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는 각종 민자투자계약 및 민간위탁계약에 대해서 계약서를 일정시간 동안 시민들에게 공개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계약서는 이해관계자들의 합의서이다. 그런데 그동안 지자체들은 시민들과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각종 계약을 맺으면서 그 계약서를 공개하지 않았다. 이는 계약관계를 규정하고 있는 민법의 원리에도 맞지 않는 원칙이다. 영국에서는 컨설테이션 제도라고 해서 시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을 시행할 때는 필수적으로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해야 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시민들의 의견 제시 방법은 주로 온라인을 통해 이뤄지지만 우편, 전화, 방문 등 다양하게 열려 있다. 이후 시민의 의견을 정리하고 걸러내는 작업을 거친 후, 정책 사안에 대한 국민 의견이 공식 기록으로 최종 정리되고 이를 집행부서에서 재차 검토하도록 하여 정책에 반영한다. 지하철 9호선 및 우면산터널이야말로 이러한 정책을 반영해야 할 표본이다.


다음으로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회의공개법도 대안으로 제시하고 싶다. 미국에서는 이미 1976년에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대국민적 공개를 법적으로 제도화한 ‘회의공개법’을 제정했다. 이 법은 일반 국민에게 정부의 의사결정과정을 직접 관찰하도록 하여, 의사결정과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와 이해를 증가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법안의 특징은 회의를 비공개하려면 참가자들의 동의를 일일이 묻고 그 이유를 공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우리도 민자투자사업에 대한 회의를 시민들에게 공개하면 지하철 9호선과 같은 비상식적인 계약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실태는 어떤가? 공공기관의 정보공개에 관한 법률은 비공개대상정보를 규정하면서 의사결정과정 중인 정책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비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필자가 일하고 있는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에서는 연간 수천 건의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있지만 이 조항으로 수많은 비공개 처분을 받고 있다. 이 얼마나 비민주적인 방식인가? 하루속히 법안을 개정해 시민들의 참여를 보장해주는 법률이 필요한 대목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 재개발·재건축 회의록을 한달 내에 공개하도록 하는 한편 향후 정보공개청구에 대해서 비공개처분을 까다롭게 하는 네거티브 방식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또한 서울정보소통광장을 설치해 향후 시민의 알권리 및 참여에 대해 전반적인 정책을 검토 중이기도 하다. 이런 움직임은 전국적으로 확산돼야 할 것이다. 시민이 계약의 이해관계 주체인데, 그 과정에 시민이 빠져 있는 것은 아무리 봐도 말이 되지 않는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