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학입시는 문재인 정부 및 이전 박근혜 정부의 대학입시 단순화 정책의 흐름으로 내신전형, 수능, 학생부종합전형으로 정리되어가고 있다. 사교육을 유발한다고 비판받는 논술전형 등이 금지되면서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학생부종합전형, 즉 학종에 대한 논란이 거세다. 다른 입시전형방법과 달리 교사의 80% 이상은 학종이 상대적으로 다른 전형방법에 비해 고교 교육의 정상화에 기여하며 일반고 학생들에게도 큰 여지를 준다고 판단하고 있다. 반면에 학부모의 70~80% 이상은 학종의 불투명성, 사교육 유발효과 등에 대한 불만으로 학종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있다.

나는 서울의 초·중등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딜레마적 상황에 대해 개선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느껴왔다. 학부모의 불신이 임계점을 넘어선 상황에서, 교사의 다수가 고교 정상화에 기여한다고 보는 학종의 장점을 살려내기 위해서라도 대대적인 수술이 불가피하다.

현재 대학입시에서 수시모집 선발비율은 2010년 57.9%에서 2018학년도 73.7%로 크게 늘었다. 수시모집 중 학생부종합전형의 비중도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전체 모집인원의 23.6%에 달한다. 전체적으로 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수치이지만, 서울 주요 15개 대학만 보면 학생부종합전형의 평균 비중은 43.3%로 전국 평균에 비해 월등히 높다. 특히 서울대는 수시 정원의 72.5%를 학생부종합전형으로만 선발하고 있다. 서울의 15개 주요 대학 중 몇몇 대학들은 학종 선발비율을 대폭 확대하고 학생부교과전형 비율은 최소로 하는 동시에 선발절차도 불투명하여 상대적으로 특목고, 자사고 등 특정학교 출신 학생들에 유리하도록 입시를 운영하여 비판을 받고 있다.

바로 여기에 학종을 둘러싼 ‘딜레마적 상황’을 해결할 열쇠가 있다. 학부모들의 80% 이상이 학종을 불신하는 가장 중요한 까닭은 주요 대학의 학종 운영 방식과 그 규모에 있다. 학종 전형의 기준은 불투명한데 그 비중은 점점 늘어가고, 그로 인해 사교육이 더욱 유발되는 상황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신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 학부모들의 불신과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서울대를 비롯한 주요 대학들이 학종, 학생부교과전형, 수능 등 선발 방식의 균형 비율을 다시 설정할 필요가 있다. 나는 1:1:1 정도로 적절한 균형을 유지하는 방향에서, 학종이 전체 선발비율의 3분의 1을 넘지 않도록 상한선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종에 대한 불신과 불투명성에 대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서는 학종의 3가지 측면 모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학종 준비물과 학종 준비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대학에서 학종 운영의 투명성과 공공성을 높이는 것이다. 세 번째는 내신, 학종, 수능의 비율을 적절하게 설정하는 것이다. 주요대학의 학종 비율을 제한하는 것은 이 학종 운영의 세 번째 측면에 대한 수술이라고 할 수 있다. 생활기록부 기재항목을 제한하거나, 자기소개서 집필방식을 개선하거나, 교사 추천제를 폐지하는 것 등은 이미 교육부에서도 추진하고 있다. 학종의 운영방식 개선을 위해서도 다양한 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그중 하나로 나는 ‘공공 입학사정관제’ 같은 것을 제안하고 싶다. 이는 현재 특목고나 자사고에서 입시 면접을 할 때 면접관 3인 가운데 1명을 교육청의 공공면접관 풀에서 파견하는 방식을 참고할 수 있다. 그러면 학종의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학에서도 정보공개, 사후적인 결과의 재검증 등 다양한 방법을 자발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

나도 내 의견만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학종과 관련해 다른 많은 개혁안과 보완책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학종 공론화위원회’ 같은 것을 구성하여, 학종 전형의 공정성 확보를 위한 공론의 장을 만들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국민들의 성숙한 인식에서 우러나오는 집단지성에 귀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학종을 포함한 많은 난제들을 공정하게 해결해갈 수 있을 것이다.

<조희연 | 서울특별시 교육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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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아니면 돼.’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나왔던 유행어다. 한 선배교사는 이 유행어를 학생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생활에 쓰는 것이 걱정스럽다고 했다. 이 말에 ‘혼자 잘살면 된다’ ‘나만 피해보지 않으면 된다’는 마음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최근 미투운동에 동참하는 글 중에 저명한 남성이 여성에게 부적절한 행위를 시도하려 했으나 당시 동석한 사람 중 누구도 제지하지 않았고, 나중에도 모르쇠했다는 사례가 있었다. 검찰, 문단, 극단, 기업 등 우리 사회 여러 조직에서 일어난 권력관계에 기반한 폭력과 집단의 대응에서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피해자는 철저히 혼자다. 주변 사람들은 방관자나 동조자가 된다. 왜 이런 일이 계속될까. 여러 원인 중 하나는 선한 사람들이 침묵하는 방관자적 문화다.

현 사회의 모습은 학교의 다양한 학교폭력 고리와 유사하다. 공동체 형성의 가장 중요한 때인 새 학기를 앞두고 걱정과 설렘 속에 학교 안을 본다. 어떤 학급에서 학생 간 따돌림 같은 괴롭힘이 일어나거나 학생들이 혐오표현을 거리낌 없이 내뱉는다면 학급 공동체가 깨져 있거나 학교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공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것이 주된 원인이다. 영화 <우리들>에서처럼 학급에서 소위 잘나가는 학생이 여러 이유를 붙여서 상대적으로 약한 학생을 괴롭힐 때 다른 학생들의 반응이 어떠한가를 보면 괴롭힘의 고리가 보인다. 가해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피해자를 방어해주는가.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다. 다음은 자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가 동조자나 방관자가 된다. 나만 아니면 되는 분위기로 흐른다. 피해자는 가해자만큼 동조자나 방관자 때문에 외롭고 힘들다.

영화 <우리들> 스틸 이미지

학급 공동체가 서로를 존중하고 누구나 자신을 표현하는 데 안전함을 느끼는 곳이라면 어떨까. 한 학생이 부당하게 다른 학생에게 상처를 주려 해도 다수가 그만하라고 한다면 괴롭힘을 계속할 수 있을까. 아니다. 피해자가 멈추라는 표현을 하고 다른 학생 한 명이 멈추라고 한다면 가해자는 움찔한다. 그리고 다른 한 명, 또 한 명이 나서면 힘을 발휘한다.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은 쉽지 않으면서 쉽다. 우리의 문제로 함께해야 하므로 많은 공을 들여야 하고, 함께하기에 힘을 발휘한다. 교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3월부터 평화롭고 안전한 학급 공동체를 학생들과 만들어가야 한다. 강함과 약함의 관계권력이 학급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다름과 자신다움이 비난이나 조롱의 대상이 되지 않도록, 부당한 일을 당할 때 믿고 말할 수 있도록. 뻔한 말이지만 강력한 힘을 가진 말이 학급의 유행어가 된다면 가능하다. 가령, 우리 모두는 있는 그대로 존귀하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용기를 내자. 그 친구의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나만 아니면 되는 일은 세상에 없다. 학생들이 자꾸 말하게 하고 보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학생들과 학급 공동체 생활규칙을 만들고 일관성 있게 지키는 경험을 모두 가져야 한다. 교사가 공동체 생활교육을 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을 존중하고 교육적 권위를 인정하는 학교문화와 학부모의 지지도 밑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악한 행동이 계속되는 데 필요한 것은 선한 사람들의 침묵이다. 내가 아니라서 침묵하면 앞으로 더 이상 나를 위해 말해줄 이가 아무도 남지 않는다. 다행히 학교에는 아직 희망이 있다. 학교가 사회의 축소판이라고 하지만 학생들은 못된 어른들처럼 염치가 없지는 않기에.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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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나무가 도끼에 심하게 찍혀 있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아이고 저 나무 무지 아프겠다,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들에겐 참 너무 평범하고 진부한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생각들이 현생인류의 조상인 크로마뇽인에게서 일어난 두뇌혁명의 산물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두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크로마뇽인 이전의 인류인 네안데르탈인 두뇌는 서로 연결이 안된 채 놓여 있는 수많은 컴퓨터들처럼 두뇌의 방들이 서로 연결이 안된 채 병렬되어 있는 구조였다고 한다. 그런데 크로마뇽인으로 오면서 이 두뇌의 방들이 뉴런이라는 신경세포에 의해 자유롭게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두뇌구조의 변화가 네안데르탈인에게는 불가능했던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했다. 나를 다루는 두뇌의 방과 나무를 다루는 두뇌의 방이 자유롭게 연결되기 때문에 크로마뇽인의 후손인 우리는 나무를 나처럼 상상하고 나무의 상처와 아픔에 공감할 수 있다. 이 공감은 연대와 관계를 만들어낸다. 상대방을 나처럼 상상하고 공감하여 연대하고 관계 맺는 능력, 그것이 크로마뇽인의 두뇌혁명이 가져온 새로운 사고이자 새로운 힘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두뇌구조상 이러한 공감과 연대의 능력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본능이 허용하는 범위 이상의 집단을 형성할 수 없었고, 그러한 한계 때문에 인류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에 반해 크로마뇽인은 두뇌혁명이 가져온 공감과 연대의 능력으로 수천 수만 수백만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고, 마침내 오늘날에는 60억이 넘는 사람을 자신과 같은 존재로 상상하여 인류라는 개념을 만들어내고, 인류문명을 이룩해냈다.

현생인류에게서 일어난 두뇌혁명, 그것이 가져온 공감과 연대의 능력이 오늘날의 사회와 문명을 이루어낸 기본 동력이었다는 말은 뒤집으면, 한 사회의 가장 심각한 위기는 그 구성원들이 공감과 연대의 정신을 버리고 본능적 욕망의 집단으로 한없이 분열되어 나갈 때, 그렇게 현생인류의 본질을 망각하고 네안데르탈인을 향해 무한히 퇴화해 가는 증후군이 만연했을 때 온다는 걸 뜻하기도 할 것이다. 지난 세월호 사태 때 우리는 세월호 가족들을 시체팔이로, 국민을 개돼지로 매도 비하하는 지도층 인사들을 보며 한국사회에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이 얼마나 심각하게 만연되어 있는가를 뼈저리게 느꼈었다. 그리고 “적어도 네안데르탈인 증후군 중증인 자들을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국민적 자각이 촛불집회로 분출되어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하지만 정권교체가 곧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의 말끔한 치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치유의 시작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왜 이렇게 한국사회에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이 만연하게 되었는가를 곰곰이 따져보는 일일 것이다.

우리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1970년대에는 대학에 다니는 친구들의 상당수가 농촌 출신이었다. 산업화가 급속히 진전되는 과정에서 농촌 대가족의 아버지는 장남이나 아들 중 공부 잘하는 아이 하나를 선발하여 도시의 대학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리고 딸들은 공장으로, 다른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지어 대학에 간 아들을 뒷받침하도록 하였다. 그렇게 해서 대학에 온 아들은 누이와 형제들에 대해 부채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아들에게 구로공단 여공들의 파업이나 농민들의 자살이 남의 일로 보일 수가 없다. 대학생과 노동자들의 연대, 대학생과 농민의 연대로 확산되어 간 1970,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정서적 기반은 바로 이 대가족의 유대감에 있었다.

그런데 대학을 나온 아들은 그와 비슷한 여성과 결혼하고, 공장에 다니던 딸 또한 비슷한 배우자와 만나 살다 보면 서로 생활문화가 달라져 소통이 뜸하게 되고, 대가족의 유대감은 사라져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마련이다. 그 시작이 바로 1990년대 초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1970, 80년대에 사회적 구심력으로 작용했던 대가족의 유대감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강남’으로 상징되는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가 사회의 전면에 등장하여 맹위를 떨치기 시작한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아이들의 왕따와 학교폭력이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며, 사회구성원들이 학교교육을 계급 계층적 구별짓기의 수단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였다는 점일 것이다.

왕따와 학교폭력 문제가 심각할 때 나는 학부모 대상 강연을 가면 “우리 어머님들 왜 비싼 돈 들여서 명품 가방 사세요? 구별짓기 하려는 거 아닌가요? 왜 악착같이 돈 모아서 강남 아파트로 가려고 하시나요? 구별짓기 하려는 거 아닌가요? 아이들의 왕따도 일종의 구별짓기입니다. 어디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어머님들의 그림자예요. 그런데 왜 자기 그림자를 보고 그렇게 깜짝깜짝 놀라며 경찰 동원하라고 소리소리 지르세요?”라고 어머니들을 질타하곤 했었다. 이제 나는 수능 문제든 특목고 자사고 문제든 학교교육을 구별짓기의 수단으로 보고 집착하는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인공지능자동화가 전면화되면 인간에게 남는 역할은 공감을 바탕으로 한 관계 형성, 협업과 통합 같은 겁니다. 그래서 OECD도 이미 학력 개념에 그러한 정의적 능력을 중요하게 포함시켰고, 각 나라도 그런 방향으로 학력 개념을 바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당신의 아이를 구별짓기를 위한 무한경쟁으로 내몰아 네안데르탈인 증후군에 빠트리려 하세요? 그렇게 하면 인공지능자동화가 전면화된 사회에서 아이가 잘살 수 있을까요?”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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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6일이 설날입니다. 그리고 한 해의 마지막 달이 섣달이고 달의 마지막 날이 그믐이니 15일은 섣달그믐입니다. 지금이야 양력으로 살아서 의미 없지만, 음력으로 살던 사람들은 섣달그믐밤이 되면 참 싱숭생숭했을 겁니다. 한 해가 또 가거든요.

만혼이 흔한 요즘에야 실감이 안 나겠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여자 나이 서른 되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고 20대 후반이면 몰아쳐 결혼하느라 그 나이 대끼리는 그 무렵 무척 분주했습니다.

더 옛날에도 그랬습니다. ‘혼기가 꽉 찼다’거나 ‘과년한…’이란 말들을 흔히 썼으니까요. 시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옛 여성의 혼인 적령기는 아마 스무 살 안팎이었을 겁니다. 혼기 지난 여성이 혼처가 나오지 않거나 집안이 혼사를 치를 여력이 없다면 애써 참아도 무진 애가 탔겠지요. 남들 다 할 때 하는 걸 못해서 어쩐지 뒤처지고 못난 것 같은 초조함과 자괴감으로 말입니다.

섣달그믐 저녁, 개밥 주러 나온 나이 찬 처녀는 개밥그릇에 잔반 퍼주며 어떤 심정이었을까요. 나이나 먹는 심란함에 울컥하겠지요. “그래 나 한 살 더 먹는다. 너도 밥 처먹어라!” 이렇게 대충 마구 콱콱 퍼주던 모습에서 만들어진 속담이 ‘섣달그믐날 개밥 퍼주듯’입니다. 늘 그렇듯 격렬한 행동은 격심한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아주 오래된 노래들이 있습니다.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히스테리가 이만저만~’ ‘개구리 노총각이 살았는데, 아하! 사십이 다 되도록 장가를 못 가~’ 요새 노총각, 노처녀라는 말은 잘 쓰지 않습니다. 무례한 표현이기도 하고 예전 기준으로 치면 지금 미혼자들 상당수가 거기에 해당되니까요.

오랜만의 인사치레마냥 무심히 던지던 ‘왜’ ‘아직’이란 말. 이번 설, 아랫사람들이 정말 듣고 싶던 말은 시쳇말 같은 빈 관심이 아니라 어쩌면, 윗사람다운 말없이 든든한 나잇값, 그 모습 아닐까요?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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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4등급을 받은 학생이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예외적인 경우겠으나 절대평가인 영어에서 4등급을 받은 학생이 서울대에 들어간다는 사실은 국민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한국 사회 구성원 대부분은 노력에 상응한 결과라는 가치관으로 치열한 한국 입시를 수용한다. 이런 점에서 세계화 시대 필수 조건인 영어구사력이 입시 기여도에서 배제되는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교육부 장관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두고 ‘오히려 영어를 못해도 서울대를 갈 수 있으니 건설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럼에도 ‘영어 4등급도 서울대 가능’이라는 독특한 사례는 몇 가지 이유로 현행 입시 제도를 더욱 불신하는 분위기를 확산시킬 것이다.

첫째, 절대평가 대상으로 영어의 적절성 문제이다. 지난 세기말 불어닥친 세계화는 이미 일상용어가 되었다. 특히 과거 수동적 교류에서 ‘한류’의 활성화로 세계화를 주도하는 국가로 나아가는 지금 영어 절대평가는 시행 효과에서 회의적 반응을 얻을 수밖에 없다. 충분한 영어실력 없이 대학에 입학한다면 원서강독이나 영어강의 수강, 영어토론에 문제가 생길 것이다. 한국 고교생의 입시 위주 학습을 전제하면 양질의 수업으로 절대평가의 부작용을 최소화하기는 어렵다. 이미 고교생 다수가 내신 성적 외에는 영어를 신경 쓰지 않는다.

가뜩이나 제2외국어 역시 소외와 파행을 통해 ‘아랍어’로 통일되는 기현상을 빚는 현실에서 영어마저 탐구 과목 하나보다 못한 대접을 받는다면 인재육성의 사회적 취지와는 동떨어진 결과를 낳을 것이다.

둘째, 계층 간 영어 실력 격차라는 불공정성의 문제이다. 대학 입시에서 영어가 소외되면 영어구사력 차이는 개인의 환경이라는 외적 변수로 결정된다. 어린 시절 영어 사용국가에 거주했거나, 양질의 영어 사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상위 계층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충분한 영어 사용능력을 갖춰 공교육 과정을 실용적으로 이수한 평범한 다수와 현격한 차이를 낼 것이다. 평등이 약자에게 불리한 역설이 현실인 셈이다.

셋째, 영어 절대평가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이다. 2018년도 입시에서 수험생들은 국어와 탐구 과목 난도 상승으로 인해 낭패를 겪었다. 영어 절대평가의 보상이 다른 과목 난도 상승으로 철저히 상쇄된 셈이다. 그 결과 이번 겨울방학 대치동에는 ‘국어 1타 강사 수업 2번 듣기’가 유행이며 문과 학생들은 사회 탐구에, 이과 학생들은 과학 탐구에 공을 들인다. 당연히 수학을 위해 영어가 빠진 시간 일부를 몰아넣어 공부한다. 안타깝지만 영어 변별력 약화와 고교 수업 정상화, 혹은 학생의 학습량 감소, 대학 서열화 완화는 아무 관련이 없다. 짓누른 풍선처럼 다른 과목으로 부풀어 오를 뿐이다.

영어 절대평가라는 제도 하나만 봐도 시행 취지의 정당성은 약하고 기대효과는 낮다. 실망은 대한민국 교육 제도가 마주한 벽이다. 한국의 교육 제도는 이전 제도가 지닌 부작용만 본 뒤 이를 해결하는 데 급급했으며, 국민들은 소멸한 제도가 남긴 불만이 여전한 상황에서 새로운 불만까지 맞이해 불만족의 총량은 증가했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 제도 변화의 취지를 면밀히 검토하고 예상 가능한 부정적인 결과를 철저히 감안한 뒤 단계적으로 시도하는 교육부의 주도면밀함이 절실하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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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형 교장공모제의 확대 방침이 발표된 이후로 곳곳에서 찬반 의견이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동안 내부형 교장공모제가 극히 제한적으로 시행되어서인지, 그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막연한 주장을 펼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논란에 작은 도움이 되고자 내부형 공모교장과 실제로 근무했던 경험을 나누어보려고 한다.

우리 학교는 2014년 내부형 교장공모제 학교로 지정되었다. 내부형 교장공모제는 교장자격증이 없는 평교사가 곧바로 교장이 되는 제도이다.

얼핏 생각하면 능력도 없고 경험도 없는 교사가 교장이 되어 학교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사실 교장공모의 절차가 그렇게 허술하게 진행되지는 않는다.

먼저 교장공모제 학교로 지정되려면 교사와 학부모가 모두 높은 비율로 찬성해야 한다. 교육경력 15년이 넘으면 교장자격증 소지자와 미소지자 모두 후보자가 될 수 있고, 선정 과정에서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교육철학과 가치관, 학교 운영 계획 등을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후보자별 점수가 교육청에 보고되면 최종 검증을 거쳐 비로소 교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교사와 학부모가 학교 운영에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준다. 우리 학교에 적합한 교장의 역할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교장이 학교를 알아서 잘 운영하기를 바라면서 따르기만 했다면, 교장공모제에서는 학교구성원이 심리적으로 소외되지 않기 때문에 학교 운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인의식이 자연스럽게 생긴다.

반면에 기존 승진제도에서는 힘든 행정업무에 대한 보상이나 단순한 변별력을 위한 가산점 등 교육의 본질과 상관없는 부분에서 많은 점수를 따야 교장이 될 수 있다. 그렇게 교장이 된 후에는 모르는 학교에 무작위로 발령받게 되고, 학교구성원들은 생각과 능력을 전혀 알 수 없는 교장과 덜컥 만나게 된다. 그에 비하면, 교장공모제는 학교구성원들이 교장의 능력을 훨씬 철저하게 직접 검증할 수 있는 제도이다.

또한 교장공모제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평교사가 교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에서는 이전까지 함께 근무하던 동료 교사가 갑자기 교장이 되는 일을 겪었다. 물론 처음엔 약간의 혼란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학교구성원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고 학교 운영의 동반자로 존중하는 민주적인 교장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학교의 책임자로서 교장이 가지는 법적 권한은 당연히 보장받아야 한다. 하지만 학교 현장에서는 그것을 넘어서 학교구성원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독선적인 모습도 종종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불필요한 권위의식을 걷어내면, 교장의 진정한 권위는 교장자격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성품과 능력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내부형 공모교장과 함께한 지난 4년 동안 우리 학교의 문화는 민주성과 공동체성이 확대되는 방향으로 꾸준히 나아갔다. 물론 교장공모제에도 보완할 점이 있을 것이다. 공모교장은 모두 훌륭하고 기존의 교장은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여러 학교에 교장공모제가 시행되면, 학교 현장에 민주주의가 확대되어 교육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환경이 정착될 것으로 확신한다.

<천지용 남양주 월문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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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가 소설처럼 쓴 글을 보면서 가슴에 와 박혔던 구절은 ‘아버지가 나빴다’ ‘어머니가 나빴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검찰 통신망에 올린 글에서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여자를 착하고 예쁜 딸로 키워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살아가라고 가르쳐줬어야 했다. 이 모든 게 엄마 때문이다. 이 땅에서 여자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 어떤 불합리도 참아내지 말라고, 여성이라고 무시하거나 업수이 여기는 것은 더더욱 참아내서는 안된다고, 멱살을 휘어잡고 주먹을 휘둘러줘야 한다고 가르쳐줬어야 했다”고 썼다.

그의 글을 읽고 비슷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내가 그동안 살면서 가족과 윗 세대와 학교에서 듣고 배운 것들과 못 배운 것들을 되짚는다. 누구든 다 비슷했겠지만 차별은 늘 있었고, 노골적인 무시와 구조적인 억압 사이를 왔다갔다 했다. “여자애가 고기를 잘 먹는다”고 타박하던 외할머니, 초등학교 5학년 성교육 시간에 “여자들은 통닭과 같다. 누가 먹고 싶어 먹었다면 그 사람을 욕할 수는 없다”던 선생님. 최근 ‘황태자’가 풀려난 대기업의 ‘여비서’ 공개채용 시험을 본 기억도 떠올렸다. 토론 면접에서 나름 선방했다며 안심하고 있던 내게 “말은 조리있게 하는데, 어디 회사 오래 다니겠느냐”고 한 사장님. 어쨌든 시험에 붙었고, 3박4일 직원 연수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왔다. 연수 프로그램이 ‘녹차 끓여내는 법’이라는 걸 보고 어쩐지 허망해졌다.

결국 그 회사에 가지 않았고 기자가 됐다. 업종이 다르고 회사가 달라도 차별은 늘 있었다. 그럭저럭 대응하며 살아온 것 같다. 하지만 과연 잘 살았을까? 때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마이너리티임을 자각했고, 때로는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그냥 넘어갔다. “블루스 추자”는 취재원들, ‘이쁜 여자’ 타령하는 남자에게 똑같이 성차별적인 언사를 섞어 능글맞게 대처했던 것은 고육책이었을 뿐이다. 싫어요! 미쳤어요? 왜 성희롱이야! 하면서 맞서지 못한 나같은 이들이 지금까지 계속되는 성적 괴롭힘의 바탕이 됐다는 죄책감이 크다.

서 검사의 글을 보면서 눈물이 났던 것은 성적 괴롭힘들이 줄줄이 적혀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와중에 아이를 키워야 하고, 무신경한 남편의 대꾸에 혼자 실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을 부여잡고 있는 자신을 보며 자괴감을 느끼는 그 모든 과정은 여성들에겐 너무나도 보편적인 것이었다. 학교에선 가르쳐주지 않았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은밀하게 때론 노골적으로 닥쳐오는 공격을 어떻게 맞받아쳐야 하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

다양성도, 기후변화도, 인권도, 노동자의 권리도, 모두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그 시절엔 그런 화두가 없었다는 이유를 붙이자니 좀 우습다. 성차별도, 인권 침해도, 노동자 착취와 탄압도, 환경 파괴도, 모두 그 시절에 더 심했으면 심했지 지금보다 나았을 리 없으니까. 이제라도 사회 전체가 이런 고민에 맞부딪쳤다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이 좀 나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뜻일까. 5일자와 6일자 신문에 노동 문제를 가르치지 않는 교육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여전히 우리가 배우는 것들엔 살면서 꼭 필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 평등과 정의가 비어 있다. 내가 어릴 적에 배우지 못했던 것은 옳지 않은 것을 옳지 않다 말하는 용기, 안되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는 자신감이었다. 이제라도 서 검사와 용기 있는 이들을 보며 배운다.

초·중·고교 페미니즘 교육을 의무화하자는 청와대 청원에 20만명 넘는 이들이 서명을 했다. 이 소식을 전한 포털 기사에는 이례적으로 여성들이 댓글을 많이 달았다. 온라인 전체가 ‘남초’이다시피 한 상황에서 응원글이 많이 보이니 반갑다. 그런데도 답답한 마음이 든다. 학교야말로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이며, 대다수 여성들이 성차별과 성희롱을 경험하는 ‘첫번째 사회’가 아니던가. 그러나 배우는 사람뿐 아니라 가르치는 사람도 함께 바뀌고 커 나가는 것이 교육의 본질이다.

좀 더 근본적인 의문도 있다. 학교에서의 제도교육을 통해 개개인과 사회를 얼마나 바꿀 수 있을까. 한참 앞서 나갔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저성장과 취업난 속에 인권과 평등과 평화와 환경과 다양성의 가치에 반하는 일들이 고개를 드는 시대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최소한 몇 명이라도 옳게 말하고 용기있게 행동할 수 있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 ‘몇 명’의 목소리가 역사를 바꾼 사례는 얼마나 많았던가. 성평등,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 인간에 대한 예의, 범죄와 폭력에 맞선 저항,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열린 자세 모두 배워야 한다. 페미니즘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 모든 정책에 ‘젠더 평등 의식’이 녹아들게 해야 한다.

<구정은 정책사회부장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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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은혜를 입고도 도리어 그 사람을 나무라거나 원망한다는 속담으로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 망건값 내라 한다’가 있습니다. 물살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누군가 목숨 걸고 뛰어듭니다. 구조된 사람이 가쁜 숨을 쉬면서 죽을 뻔했다고 안도하며 여기저기 더듬어보니 이마에 두른 비싼 망건이 찢어져 있습니다. 물에서 끌어내다 망가진 것 같습니다. 머리나 목 말고 팔이나 허리 잡고 나왔으면 안 망가졌을 거 아니냐고, 이 망건 어쩔 거냐고 물어내랍니다.

같은 속담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으니 내 봇짐 내라 한다’도 이와 같습니다. 나는 건졌으면서 내 보따리는 왜 못 건졌냐고, 그게 어떤 보따린데 당장 찾아내라고, 아까는 그저 살려만 달라던 사람이 두 발 동동거리며 구조자를 원망으로 윽박지릅니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 오늘날에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소방관은 열쇠공도 아니면서 전문가를 불러 문 따는 기술을 배웁니다. 미국 등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긴박한 상황으로 문 부수고 들어가도 소방관이 수리비를 물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집 다 타겠다고 빨리 꺼달라 난리쳐서 문 부수고 들어가 번지는 불 잡아주면 고작 이만한 불로 문 망가뜨렸다고 변상하라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불가피한 경우라면 법적으로 면책되지만 그 불가피를 입증하기란 또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소방관이 사비로 보상하는 어처구니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목숨 걸고 화마와 싸우고 나서도 압수수색에 수사까지 받는 요즘입니다. 어쩌면 그 화재의 발단이 된 힘 있는 자들이 시선을 돌리고자 책임 전가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목숨에 이익까지 구하려는 배은망덕 물귀신들에게 사람 살리고 동네북으로 두드려 맞는, 땀보다 눈물로 더 젖는 우리 영웅들의 넓고 씁쓸한 등입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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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위주 교육을 저차원적 교육, 입시를 넘어선 교육을 고차원적 교육이라 거칠게 단순화해보자. 주입식·암기식 교육을 저차원 교육, 창의력·사고력을 기르는 교육을 고차원 교육이라 해보자. 저차원적 교육을 넘어 고차원적 교육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나에겐 이 당연한 과제가 사치스러운 일로만 여겨질 때가 많다. 학교의 현실 때문이다. 좀 심하게 단순화해 학교의 문제점을 드러내자면 학교는 교육기관이 아니다. 저차원적 교육에서 보든 고차원적 교육에서 보든 학교는 교육기관이라기보단 사무행정기관에 가깝다.

학교는 교육 그 자체보다 교육에서 파생하는 사무·행정적 업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무엇보다 교육청과 교육부에서 내려 보내는 사업과 행정업무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단순히 중요하게 여기는 선에 그치는 게 아니다.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만들어서 하고, 간단하게 해도 될 일을 복잡하게 한다. 조금 복잡한 것은 매우 복잡하게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만들어서 한다. 그래서 교육 그 자체로 향해야 할 교사의 관심과 에너지를 끝없이 소모하게 만든다. 교육부와 교육청의 관료주의적 행정이 이러한 폐단을 강요하고 있으며, 사무·행정업무 위주의 학교제도와 조직체계가 그 폐단을 일상화한다. 교육은 몸통이고 사무·행정업무는 꼬리에 불과한데 학교에는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주객전도 현상이 뿌리 깊이 고착돼 있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려면 교장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교장은 그 폐단에 눈을 감고 있다. 단순히 눈을 감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장서 그 폐단을 강화하고 심화시키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왜 그럴까? 교장자격증제도와 그에 연계된 교장승진제도의 필연적 귀결이다. 교장 자격증을 따기 위한 승진점수는 어떻게 쌓을 수 있나? 나에겐 복잡하고 어렵기만 한데, 분명한 것은 교육 그 자체에 대한 애정과 열정은 아무런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교육에 바쳐야 할 관심과 에너지를 빼내어 다른 곳에 돌릴수록 승진점수를 쌓고 교장 자격증을 받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이다. 자신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다른 교사들까지 그렇게 만들어야 그 유리한 정도가 더 커진다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눈곱만큼에 불과하지만 교육부가 비중을 확대하려는 ‘내부형 교장공모제’는 교장 자격증이 없는 교사도 교장이 될 수 있는 제도다. 극히 작은 변화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승진제도를 옹호하는 세력의 반발이 거세다. 그들은 교장 자격증이 교장 자격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표인 것처럼 말한다. 허황한 소리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진실에 더 가깝다. “교장 자격증은 교육자인 교사가 교육자로서의 영혼을 상실해간 증표에 불과하다.”

지금의 교장자격증제는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의 소중함을 모욕하고 훼손하는 제도다. 다른 전문직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기괴한 제도다. 병원장이 되기 위해 의사에게 또 다른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고, 대학 총장이 되기 위해 교수에게 또 다른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다. 경찰, 검찰, 법원 다 마찬가지다.

아주 조금에 불과하지만 내부형 교장공모제의 비중을 확대하려는 교육부는 칭찬받을 만한가? 방침 하나만 보면 분명히 그러하다. 그러나 교장자격증제도와 교장승진제도 전반을 사실상 지금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에 주목하면? 칭찬은커녕 혹독한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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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우체국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선물소포를 포장하여 부칠 때만 해도 있었는데 포장봉투를 버린 다음 한참 걷다 보니 아뿔싸, 수중에 지갑이 없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선반에 두었던 지갑을 누가 훔쳐갔거나 봉투를 버리며 딸려 들어갔거나. 사실 후자의 가능성은 낮았다. 아무려면 쓰레기통에 지갑을 넣을 만큼 정신을 놓고 살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나마 되찾을 희망이 있는 경우 또한 후자였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커다란 쓰레기통으로 머리를 넣어보니 텅 비어 있었다. 쓰레기통 뚜껑 열고 고개를 들이미는 고객을 본 우체국 직원분이 달려오셨다. 자초지종을 들으신 그분은 십여분 전에 비워진 쓰레기가 이미 지하처리장으로 내려갔다 하셨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하며 돌아서는데 “뭐가 어쩔 수 없어요? 가보면 되지”라며 나더러 따라오라셨다. 지하층으로 내려가니 아까 버린 종이봉투가 저편에 얼핏 보이는 듯했다. 저쪽 같다고 하자 그분은 쓰레기더미 안으로 그야말로 불도저처럼 돌진하셨다. “지갑 무슨 색이에요?” 하시면서.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며 팔을 잡아끌어 나왔다. 지갑 같은 것은 아무렇지 않아졌다. 비닐 재질로 된 저렴한 물건이었고, 안에 든 돈은 일만 몇 천원이었을 것이다. 요즘처럼 현금을 안 들고 다니는 세태에 남의 지갑 훔칠 만큼 어려운 이라면 내가 작은 도움을 드렸다 치자. 그런 호기로운 마음마저 솟았다.

세상에서 제일 친절한 사람들이 일하는 공간 가운데 하나가 내겐 우체국 같다. 여러 해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서점에 들렀다 충동적으로 카드를 한 세트 산 나는 선배선생님들께 보낼 연하장을 작성하여 부치러 갔다. 연말이라 우체국에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직원분 말씀이, 물량이 밀려 일반엽서는 4~5일가량 소요될 거라 하셨다. 그러면 새해일 텐데, “메리 크리스마스”라 쓰인 카드를 연초에 받으면 얼마나 김이 새겠는가? 더 빠른 방법은 없는지 물었더니 특급등기인가 있기는 하다셨다. 무심코 “그걸로 해주시겠어요?” 하자 그분은 손에 쥔 봉투들과 내 얼굴을 번갈아 살피더니 “이거 연하장 아닌가요?” 물으셨다.

특급은 직접전달이 원칙이라 수령인에게 전화가 간단다. 수령지로 기재된 대학들은 현재 방학일 테고 수령인들은 손윗사람일 듯한데, 오히려 받는 분을 번거롭게 해드리는 결례를 범하지 않겠냐 하셨다. 연하장은 본디 늦게 받아도 기분 좋은 법이라며 일반우편으로 보낼 것을 권하셨다. “네? 네…” 하며 엉겁결에 그렇게 했다. 그리고 두고두고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분이야 안에 든 것이 연하장이든 업무서류든 알 바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밀려들어 정신없던 와중에 수령지와 고객의 표정에서 그것이 ‘긴급하지 않음’을 유추하셨던 따스한 관심과, 우편매너에 무지한 사회초년생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조언해준 배려에 감사했다.

왜 우체국에서는 항상 좋은 분들을 만날까. 문득 궁금해졌다. 한국우정사업본부는 구글처럼 꿈의 기업이란 말인가. 그런데 떠올려보면 해외에 있을 때도 그랬다. 지구 건너편에서 공부할 무렵, 지인에게 부칠 소포꾸러미를 품에 안고 있었더니 할아버지 직원분께서 “왜, 너도 그 소포와 함께 바다 건너 날아가려고?” 농담을 던지셨다. 그리고 이어서 “너의 그 웃음이 참 좋다. 넌 앞으로도 항상 그렇게 웃으며 살아라, 알았지?” 하셨다. 웃음이 예쁘다는 칭찬은 그때 처음 들었다.

내가 우체국에서 ‘먹어주는’ 얼굴인 건가 하며 친구들과 농담을 주고받다 생각하니, 그곳에 갈 때면 나는 언제나 웃고 있었던 듯하다. 내 엽서나 선물꾸러미를 받게 될 상대방의 놀라움과 즐거움을 상상하며 표정이 아이스크림을 갓 꺼내든 아이처럼 환했을 것이다. 우체국에서 상냥한 이들만 만났던 것은 그분들이 실제로 친절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으로는 선물 보내는 순간의 설렘이 그분들께 전해져서일지도 모르겠다.

새해 우리 앞에 놓일 하루하루를 우체국 찾아갈 때의 얼굴로 맞이하면, 연말 즈음 우리는 저마다 ‘웃음이 예쁜 얼굴’에 조금 더 가까워져 있지 않을까.

<이소영 |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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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2400만명이 넘는다. 2017년 한 해에 해외여행을 떠난 한국인의 숫자이다. 해외여행을 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없는 사람도 적지 않고, 비행기를 탈 수 없는 영·유아나 노인 인구도 감안하면 2400만명은 인구 대비 엄청난 규모이다. 해외여행을 하는 사람 숫자로만 따진다면, 한때 국가의 요란한 구호였던 ‘세계화’라는 목표는 이미 초과 달성한 셈이다.

최초로 대서양과 태평양을 횡단했다는 마젤란은 길을 떠나기 전 비장한 유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럴 법도 하다. 항로를 개척하러 떠났던 배 5척 중 1척이 돌아오지 못하던 시절이다. 배 1척에 수백명의 선원이 올랐다면, 육지에 남아 있는 선원의 가족은 수천명에 이를 수도 있다. 떠나는 배의 숫자가 많아질수록 돌아오지 못한 사람과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그 어느 도시보다 많았을 리스본에서 애조 깃든 창법이 특징인 파두가 등장한 건 우연은 아니다.

인천공항의 분위기는 대부분 밝다. 인천공항은 파두가 울려 퍼지기에 적당하지 않은 곳이다. 여행 가는 사람 특유의 명랑함이 있다. 여행객이 명랑하면 여행객으로 가득 찬 공항도 덩달아 명랑해진다.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는 운명이 지배하는 마젤란 시대의 항구는 다르다. 대체 돌아올 보장이 없음에도 마젤란 시대 때 사람들은 왜 배를 타고 떠났던 것일까? 비록 5척 중 1척이 돌아오지 못하는 위험한 여행이었지만, 만약 돌아오기만 한다면 배를 타고 떠난 사람들은 카지노의 잭팟에 버금갈 일확천금을 노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항해를 후원했던 스페인 왕궁과 마젤란이 맺은 계약서를 살펴보면 그가 유서까지 쓰고 항해를 떠난 이유를 알 수 있다. 마젤란은 귀환한다면 발견한 나라에서 얻어질 수입의 20분의 1을 자기 몫으로 챙길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6개 이상의 섬을 발견하면 그 섬의 3분의 1인 2개의 섬에 대해 마젤란은 특별권을 갖게 된다. 발견한 모든 육지와 섬에서 마젤란은 귀족 신분과 총독의 지위를 얻을 수 있고, 그 지위를 자녀에게도 상속할 수 있다. 그래서 마젤란은 유서까지 쓰고 항해를 떠났던 것이다. 마젤란은 그런 셈을 하며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 저 멀리로 떠났다지만, 대체 한 해 240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 그 이유는 여행객들이 들고온 가방의 크기와 색만큼이나 제각각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 해외여행이란 한국에 대한 불만이 우회되어 ‘헬조선’으로부터의 일시적 탈출로 표현되는 중산층 징후일 수 있고, 어떤 이에겐 자식이 보내주는 생애 첫 호강 효도여행일 수도 있다. 가사노동에 지친 어떤 전업주부에게 해외여행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남이 해준 밥”을 삼시 세끼 먹을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퇴근 이후에도 심지어 주말에도 각종 업무 독촉과 지시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해외여행은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합당한 구실을 제공해 주는 소중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해외시찰을 구실 삼아 남의 돈으로 편안하게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 해외여행은 자기 지위를 확인하고 헛기침할 수 있는 순간일 것이며, 1년을 꼬박 아르바이트하며 모은 청춘에게 해외여행은 남들 블로그를 보며 키워왔던 꿈이 실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어떤 이에게 해외여행은 텔레비전에서만 구경했던 리얼리티 쇼와 드라마의 현장을 내 눈으로 확인하는 기회일 것이며, 인생사진을 남겨 인스타그램의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은 파워 여행 블로거의 글에서 읽은 맛집을 반드시 순례하겠다는 투지로 떠날 수도 있고, 어떤 이는 너도나도 다 가는 여행지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덜 알려진 장소를 혼자 보며 좋아하고 싶은 비밀스러운 묘미를 만끽하는 게 목적일 수 있다. 어떤 이에겐 해외여행의 참맛은 다름 아닌 면세품 쇼핑일 수 있고, 어떤 이는 이런 사람들을 경멸할 수도 있다.

지리적으로는 반도이지만, 대륙으로 가는 육로가 막혀 있는 한국은 사실상 섬이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그 섬에서 해외로 나갈 수 있는 자유는 1989년 이전까지는 없었으니, 우리는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좋다. 어쨌든 한 해에 24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의 이유로 한국이라는 섬에서 잠시 벗어나 해외여행을 떠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시인 김기림은 “세계는/나의 학교/여행이라는 과정에서/나는 수없는 신기로운 일을 배우는/유쾌한 소학생”이라고 했다. 김기림 시를 빌려 표현하자면 한 해 2400만명의 사람들이 지불하는 여행비용은 ‘세계라는 학교’에서 ‘신기로운 일’을 배우기 위해 치르는 수업료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오히려 해외여행을 통해 자국중심주의를 강화시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를 벗어나는 혜안을 얻기도 한다.

때로 수업료는 돈가치를 하기도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떤 수업료는 괜한 비용일 수도 있다. 한 해 2400만명이 넘는 사람이 치르는 수업료는 어떤 종류일까? 그리고 나의 수업료는?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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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시작 이틀째였다. 몇년 전, 미국 미주리 대학으로 언론 연수를 갔던 나는 오랜만의 캠퍼스 생활에 들떠 있었다. 점심을 먹고 강의실로 돌아가는 길에 어디에선가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콘서트라도 열리고 있는 건가 싶어 신이 나 뛰어갔는데, 학내 집회 현장이었다.

본관 앞 광장에 모인 대학원생 수백 명이 학교 당국을 향해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피켓에는 “학교 당국은 부끄러운 줄 알라” “대학원생을 위한 교수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쓰여 있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집회 참석자 중 교직원 혹은 교수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진지하게 학생들의 발언을 경청했고, 구호에 맞춰 함께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지역 일간지 홈페이지에 톱으로 걸린 뉴스는 낮에 내가 목격했던 그 집회에 관한 소식이었다. 자세히 읽어보니 대학 당국이 대학원생들의 의료비 지원을 새 학기부터 갑작스럽게, 일방적으로 삭감한 것이 사태의 발단이었다. 기사에는 월세 등에 비해 학교의 지원금이 턱없이 부족해서 배우자가 투잡, 스리잡을 뛰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석·박사생들의 사연이 소개됐다.

그러나 그 기사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날 집회에 동참했던 한 교수의 멘트였다. “내 연구실은 이들 덕에 굴러가고 있고, 내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것도 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이들 덕분에 정부로부터 (충분한) 의료비 혜택을 받고 있다. 그런데 정작 이들에 대한 학교 당국의 지원은 부족하다 못해 너무 모욕적이다.”

대학원생에 대한 착취는 한국에서나 미국에서나 똑같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역시 한국보다는 미국의 상황이 낫다고 생각했다. 과연 한국에서 학생들의 집회에 동참해 실명으로 신랄한 인터뷰를 해줄 교수가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면 말이다. 대학이 언제부턴가 이윤을 내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하고, 학내 구성원 누구도 제대로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는 한국의 대학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나를 더욱 놀라게 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저널리즘 스쿨에서 청강을 하고 있던 취재 실습 시간이었다. 그날 수업의 주제는 ‘당국자가 대답을 회피할 때 어떻게 진실에 접근해야 하는가’였다. 수업을 듣는 학생 중에는 의료비 삭감 사태를 취재하기 위해 며칠 전 대학 총장을 직접 인터뷰한 대학 신문 기자가 있었다. 교수는 그와 총장의 인터뷰 녹취 파일을 강의실에 앉아있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틀었다. “의료비 지원 삭감 방침을 누가 주도적으로 결정한 것이냐”는 학생 기자의 질문에, 총장은 계속해서 애매모호한 대답을 하며 어물쩍 대화 주제를 바꾸려 했다.

그러니까 그 교수는 ‘책임을 회피하는 능구렁이 같은 당국자’의 실례를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재직 중인 대학 총장을 살아있는 교재로 삼은 것이다. 그는 수업을 마치기 전, “총장의 이메일을 정보공개 청구해 그가 의료비 지원 삭감 정책을 누구와 사전에 상의했는지 알아내는 것도 좋은 접근 방법”이라며 “혹시 다른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언제라도 나에게 메일을 보내달라”고 당부했다. (미국에서는 공립대 총장 이메일도 정보공개 대상이 된다.)

집단행동이 계속 확대될 조짐을 보이자 결국 미주리대 총장은 의료비 삭감 정책을 전면 백지화하고, 자신의 소통 노력이 부족했던 데 대해 공식 사과했다. 교수가 학생들의 편에서 함께 행동하고, 자신의 전문성과 지식을 보태 학생들의 권리 보장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 어찌 보면 그 당연한 일이 놀라움을 넘어 신선한 문화적 충격으로까지 다가왔던 것은 내가 ‘갑질 논란’으로 얼룩진 한국의 대학사회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 듯했다.

최근 한국에 대학원생 노동조합이 처음으로 결성됐다. “정해진 근무시간 없이 수시로 호출당하고, 각종 폭언과 성희롱 등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그러면서도 ‘학생’이라는 이유로 정당한 노동대가를 받지 못하는 착취의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다. 다음달 24일 공식 출범하는 대학원생 노조는 앞으로 대학원생들의 연구·노동환경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한편,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각 대학 대학원총학생회와 공동대응에 나설 방침이라고 한다.

용기있게 첫발을 뗀 이들의 싸움이 외롭지 않길 바라고, 이들의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로 끝나지 않길 바란다. 다행히 노조 설립 소식이 알려진 뒤 이메일, 페이스북 등에서 가입 문의가 잇따르고, 졸업생·교수의 응원 메시지도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구슬아 대학원생 노조위원장이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문제는 “‘대학원생 대 교수’라는 단순한 프레임으로 설명할 수 없는 구조적 문제”이다. 대학원생 노조 출범이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교 당국이 평등한 주체로서 서로를 존중하는 대학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작이 됐으면 한다.

<정유진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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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의 우리말 중 하나가 비망록(備忘錄)입니다. 말 그대로 잊어버렸을 때를 대비한 기록이죠. 기억이란 한계가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뭉텅뭉텅 잊어버리며, 심지어 다른 정보들과 섞여 전혀 엉뚱한 기억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기억은 믿을 바 못 되고 왜곡되기 십상입니다. 더불어 누구나 가끔 기발한 착상을 하지만 떠오른 것을 바로 적어두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나중에 ‘아, 뭐였더라’ 머리 움켜쥐고 이마 찧어도 기억에서 퇴색된 아이디어는 오리무중 어딘가에서 끝내 찾지 못합니다.

하지만 잊어버렸다고 완전히 잊은 건 또 아닙니다. 끄적여 놓은 메모를 들여다보면 ‘아! 그랬지!’ 바로 당시처럼 기억나니까요. 이렇듯 메모는 기억의 타래를 풀어주는 소중한 실마리입니다. 기억은 과거를 배신해도 기록은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메모를 참 안합니다. 온갖 자기계발서에서 메모의 힘이 성공의 열쇠라고 강조해도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지 못합니다. 게다가 뭔가 또박또박 순서대로 논리정연하게 적어 놓으려는 강박이 있어서, 단정히 메모하려는 사이 당시의 생생한 느낌은 어느덧 두루뭉술하게 현장에서 멀어집니다.

메모는 데생이 아니라 크로키입니다. 휘갈겨야 메모입니다. 괴발개발이라도 나만 알아보면 충분합니다. 굳이 다이어리가 아니더라도 주머니에 꾸겨 둔 전단지도 좋고 손바닥도 좋고 스마트폰 녹음도 좋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메모가 됩니다.

이렇게까지 말씀드려도 끄적임의 가치를 또 잊어버리시겠지요. 그래서 옛날에도 이를 강조했던 속담을 일러드립니다. -기억하지 말고 메모하세요. “똑똑한 머리보다 얼떨떨한 문서가 낫다.”

역사의 승자는 기록을 남긴 쪽이고 삶의 승기는 꾸준히 메모하는 사람이 움켜쥡니다. 적자생존. 적는 자가 살아남습니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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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진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자신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에서 “관용과 이타심은 가르쳐야 습득할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기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생물학적 본성에 대한 큰 논쟁이 벌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도킨스의 주장에 대한 반론 중 하나로, 수학 생물학자인 마틴 노왁은 “진화의 가장 놀라운 면모는 경쟁이 치열한 사회에서 협동하도록 만드는 능력에 있다”고 주장하며 협력하는 이타적 인간이 생물학적 본성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인간이 이기적인가 아니면 이타적인가라는 물음은 이미 동서양의 철학자들이 줄기차게 고민해 온 문제다. 성선설과 성악설을 주장했던 고대 철학자들에 이어 중세의 철학자 토마스 홉스는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에 정부 통제가 없으면 이기심으로 서로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했고, 근대의 경제학자 가렛 하딘은 누구나 방목할 수 있는 공유지는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풀 한 포기 남지 않게 된다는 ‘공유지의 비극’ 이론을 제시했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에서도 인간 본성과 관련된 이런 토론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다만, 이 논쟁이 ‘이기적 주체’인 학부모와 학생들 모두의 욕망을 만족시켜 주면서도 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대단한 대학입시 정책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다른 나라들에서 벌어지고 있는 논쟁들과 다른 부분이다.

우리나라 대학입시는 공식적으로 대학에서 공부할 능력이 되는 학생을 가려내는 선발 기능, 학생들의 자기계발 기능, 바람직한 학교 교육의 방향을 유도하는 교육 기능, 사회 통합에 기여하는 공동체 기능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능들이 한데 뒤엉켜 있는 것은 물론이고 학부모들과 학생들의 ‘사회적 계층 확보’를 위한 이기적 욕망의 충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기능이 사실상 다른 기능들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렇다보니 여러 기능의 문제들이 모두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어떤 계층이나 이해집단의 사회적 계층 선점 또는 계층 보존의 이기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전체가 문제 있는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다.

연초부터 대입정책포럼이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오는 8월에 발표될 수능시험의 개편 방향은 물론, 요즘 대입의 핵심인 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대한 개선안과 고교학점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하여 많은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과정 중심의 정성적 평가인 학종 전형에 대한 정량적 평가척도를 제시해야 한다는 주장들마저 제시되고 있다고 한다. 과정 중심의 평가와 기록,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정성적 평가는 고등학교 교사들이나 대학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제공할 수 있는 교육서비스는 성적과 같이 정량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학부모들의 요구가 제안되고 있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가치의 교육이 제공되는 공교육과는 달리 학교 밖 사교육의 효과는 금전적 크기에 비례하기 때문에 교육을 통한 계층의 이익 확보라는 이기적 욕망의 달성은 돈의 힘을 통해서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난다. 정량적 평가요소가 학종에 깊이 개입되면 사교육과 같은 외부의 영향력이 평가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게 된다. 학종이 이기적 욕망의 통로가 되면 이번 교육개혁도 기득권의 먹이로 전락하게 될 수 있다. 대입정책포럼과 같은 자리에서 모두의 지혜를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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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노 과르디니(1885~1968, 신학자이자 교육학자)는 <삶과 나이>라는 책에서 삶을 나이에 따라 시기별로 나눠 고찰한다. 유년, 청년, 성년, 중년, 노년, 말년으로 구별된 각 시기는 다음 단계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독자적인 삶의 형상이라고 한다. 각 시기를 통과할 때는 나름의 전형적 위기를 겪는다. 모든 삶의 시기는 반복될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모든 하루하루, 모든 한 해 한 해는 우리의 구체적인 삶의 생생한 시기들이다. 이들은 단 한번밖에 오지 않기에 우리의 삶 전체에서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위를 갖는다. 따라서 특정하게 정의된 삶의 시기만을 강조하는 모든 시도는 자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과르디니가 설명하는 삶의 시기들 중에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노년의 가치이다. 삶은 단선적이고 획일적 흐름이 아니라 자체적으로 완결된 여러 시기들로 구성된다. 노년도 고유한 형상이며 그 시기의 가치는 ‘지혜’로 압축된다.

노년에는 미래가 얼마 남아있지 않기에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과거를 돌아보며 삶의 맥락을 이해하게 된다. 삶의 맥락 속에는 다양한 소질과 성과, 성취와 상실, 기쁨과 고난 등이 서로를 규정하며 얽혀있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가 ‘인간의 삶’이라고 부르는 놀라운 구조물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노년에 이르러 삶 전체를 볼 수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인식을 통해 후대에게 배울 만한 지혜를 전달하게 된다. 노년에게 핵심적인 문제는 노년의 과정이 지닌 의미를 이해하고 실현하는 데 있다. 복잡하게 얽혀 형성된 전체 구조물로서의 ‘인간의 삶’을 통찰하는 인격을 지닌 사람은 사는 데 급급해 격류에 쓸려다니는 이들에게 삶의 전모와 본질적 의미를 깨우쳐주고 올바른 방향으로 조절하게끔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노년의 가치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롤 모델로서 나는 종종 프란치스코 교황을 떠올린다. 그는 남미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청년기에 예수회 사제가 됐다. 노년기에 교황이 됐을 때, 역대 어떤 교황도 사용한 적 없는 ‘프란치스코’를 이름으로 선택했는데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부터 따온 것이다. 교황으로 취임한 지 만 2년이 되는 해인 2015년 6월에는 로만 가톨릭 역사상 최초의 생태회칙인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발표했는데 이 회칙의 제목은 성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에서 따온 것이다. 회칙은 교서, 담화 등 다양한 교황문헌 중 가장 비중이 높은 형식이다. 이 생태회칙은 그해 11월에 열린 파리 기후변화회의에서 기후협약이 성사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성 프란치스코의 ‘태앙의 찬가’는 “저의 주님, 찬미받으소서. 누이이며 어머니인 대지로 찬미받으소서. 저희를 돌보며 지켜주는 대지는 온갖 과일과 색색의 꽃과 풀들을 자라나게 하나이다”라고 노래한다. 교황은 이 노래를 인용하는 걸로 회칙을 시작하고 이 누이인 대지가 지금 울부짖고 있다고 한다. 우리의 무책임한 이용과 남용으로 지구의 재화들이 손상을 입었기 때문이다(회칙 1,2항). 회칙은 우리의 ‘공동의 집’인 지구를 돌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찬미받으소서’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스도교인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대화를 건네는 방식이라는 것과 환경, 경제, 사회의 통합생태론(Integral Ecology)을 제시한 데 있다. 모든 것이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오늘날의 문제들이 세계적 위기의 모든 측면을 고려하는 시각을 요구하기 때문이다(회칙 137항). 통합생태론은 빈곤 문제와 환경 문제를 통합하는 접근법이다. 여기엔 교황이 겪은 생생한 삶의 경험들이 녹아있다. 교황은 아르헨티나에서 빈민사목을 담당했었다. “소외된 이들은 수십억명에 이르러 인류의 대다수를 차지”하고(회칙 49항),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이 세상의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일상생활의 체험과 과학연구는 가장 가난한 이들이 모든 환경 훼손의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준다(회칙 48항).

교황이 롤 모델로 삼은 성 프란치스코는 새들과 대화를 나누고 늑대도 설득시켰으며, 십자군전쟁 당시에는 홀로 전장에 뛰어들어 적장인 술탄을 면담한 일화가 남아있다. 800년 전 중세 속의 이 성인은 프란치스코 교황을 통해서 생태적 삶의 징표로 다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름과 생태회칙을 통해 노년의 지혜를 드러냈다고 생각된다. 그의 지혜가 지금 시기 전 인류가 처한 위기를 깊이 짚어내는 것이라는 사실은 그의 삶이 각 시기의 독자적 형상과 위기를 녹록지 않게 겪어내며 무르익혀온 것이라는 확인을 하게 한다. 노년의 가치는 지혜로 드러나는데, 지혜는 인격이라는 그릇에 자신의 삶의 궤적과 경험을 생생히 담아 우려낼 때 형성될 수 있는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찬미받으소서’에는 여러 철학자와 신학자들이 언급되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로마노 과르디니의 <근대의 종말>은 가장 많이 8번이나 언급된다. 특히 생태위기의 근원으로서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의 세계화(The globalization of the technocratic paradigm)’를 지적하는 대목에서다. 과르디니는 <근대의 종말>에서 자연, 인간의 주체성, 문화에 대한 근대적 세계관이 몰락했다고 본다. 인간의 주변세계로서 자연은 다가갈 수 있고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지금은 직접적인 관계가 불가능한 존재로 ‘자연스럽지 못한 자연’이 됐다. 주체성은 구체적으로 살아있는 개인의 고유한 삶에 대한 느낌과 삶의 영역을 바탕으로 하는 것인데 이러한 것은 점점 더 많이 사라지고, 사람들은 정상적인 사회업무 수행과정에서도 영혼이 없는 사물처럼 취급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어 ‘인간답지 못한 인간’이 되어간다. 인간의 작업은 전체적 삶을 체험할 수 없게 됐다. 과르디니는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 인간의 손을 벗어났고, 그래서 거침없이 마구 부려질 것이며, 힘의 정도도 정확히 측정해낼 수 없는 이런 과정을 이끌어가는 주체는 국가이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본다.

생태위기는 근본적으로 삶의 실감이 사라져가는 위기이다. 그걸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이 마력 같은 기술관료적 패러다임에 실려간다는 점에서 존재의 위기이다. 이 시대를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지 다시 교황의 지혜, ‘찬미받으소서’로 돌아가 답을 찾고자 한다.

<강금실 | 법무법인 원 변호사·포럼 지구와사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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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친권지상주의 국가다. 친권 앞에서는 그 어떤 권리도 맥을 못 춘다. 교권도 인권도 딱 거기까지다. 장애가 명백하여 특수교육이 필요한 학생도 학부모가 거부하면 특수반에 편성할 수 없고, 심신의 문제가 있어 즉각 조치가 필요한 학생도 학부모가 “아니, 내 아이가 비정상이란 말이냐? 인정할 수 없다” 하고 나서면 할 수 있는 조치가 없다. 심지어 부모에 의한 신체적 정신적 학대가 의심되는 학생이 있어도 일시적인 친권 정지 요청은커녕, 학부모 소환조차 강제할 수 없다. 

보다 못해 교사가 가정방문을 갔다가는 폭언이나 폭행은 기본이고 주거침입으로 고소당할 각오를 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친권이 이렇게 드높은 까닭은 부모야말로 누구보다 자식을 가장 잘 알고, 가장 사랑하고, 가장 좋은 조치를 해 줄 사람이라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의 자식 사랑은 인륜이 아니라 천륜이라 불린다. 천륜은 당연히 타고나는 것이지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천륜이라는 것이 과연 있는지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하고 있다. 인터넷 게임에 빠져 자녀를 방치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부모, 자녀를 감금시켜놓고 신체적으로 학대하여 맨발로 탈출하게 만든 부모, 딸을 장기간 성폭행하고 임신과 낙태를 반복한 아버지, 자녀를 살해하고 그 사체를 유기하고서도 태연하게 일상생활을 영위한 아버지 등의 사건들은 과연 자녀의 안전한 양육과 교육을 부모의 자연스러운 사랑에 그저 맡겨둘 수 있는 문제인지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대부분의 부모가 자녀에 대한 보호와 양육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복잡해지는 현대사회에서 점점 더 복잡하고 까다로워지는 자녀의 양육, 그리고 더 나아가 훨씬 더 합목적적이고 체계적이라야 할 교육을 그저 “자기 자식이니까 오죽 알아서 잘 챙길까?” 하며 부모의 본성만 믿고 맡겨둘 일일까? 이미 현대사회는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의 범위를 훨씬 넘어서는 범위의 지식, 기능, 가치, 태도를 요구한다.여기에 필요한 내용과 방법은 특별한 지식과 기술을 요구하며, 따로 교육을 받아야만 갖출 수 있다.

이걸 하기 위해 공교육 체제가 존재한다. 공교육은 부모가 원하는 자녀를 키워주기 위한 공공 서비스가 아니라 부모에게 자녀를 사회에 필요한 구성원으로 길러내는 일에 동참하라는 공적인 의무에 더 가깝다. 만약 이 공적인 의무가 친권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사적 욕구 앞에 번번이 흔들리고 가로막히고 있다면, 이는 사회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뜻이다. 제대로 꼴을 갖춘 선진국 중에 공적인 교육의 의무와 학생의 인권을 친권 앞에 방치시켜 놓은 나라는 없다.

친권은 매우 소중한 권리다. 하지만 이 권리는 무한히 보장되는 권리가 아니다. 이 권리는 자녀의 인권 앞에서 멈추어야 하며, 다른 부모, 다른 자녀의 권리 앞에서 멈추어야 하며, 사회가 요구하는 공공의 가치와 의무 앞에서도 멈추어야 한다. 이러한 ‘멈춤’은 자연적인 본성이 아니라 교육받아야 하는 것들이다. 즉, 이제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됨’을 배워야 한다. 부모됨에 대한 교육 없이 그저 자연적인 본성이니 자식 낳으면 알아서 어떻게든 하겠지 하며 방치한다면, 이는 부모에게나 자녀에게나 또 사회에나 불행이다.

<권재원 | 실천교육교사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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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정책은 속된 말로 본전을 찾기 어려울 만큼 늘 논란이 많은 영역이다. 이것은 대입정책이 상대적으로 사회적 강자들의 이해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영역이란 뜻이기도 하다. 사회적 강자는 그만큼 발언력도 세니 그 다툼에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시끄러운 영역에서 최근 대입의 공정성을 살리기 위해 수능 성적 중심의 정시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사실 학교교육이라는 마당은 대학입시까지 오기 전에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져 있어 반이 훨씬 넘는 고등학생들은 대학입시에 아무 관심 없이 엎드려 잔다. 이 아이들의 상당수는 가정환경 때문에 영·유아기에 방치되어 문화적 결손을 입고, 입시 위주 학교 체제에서 이 문화적 결손이 회복될 길이 없어 일찍부터 사실상 학업을 포기한 아이들이다. 교육의 공정성은 이미 뇌의 90% 이상이 결정된다는 영·유아기부터 근원적으로 깨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기울 대로 기운 대입이라는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정성 시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공정하기는 한 걸까?

공정성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차원은 국가 차원의 공정성일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대학입시의 공정성은 될 수 있으면 대학사회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성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국가가 잠재력을 갖는 인재의 유실을 막고 인재 육성의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가정환경에서 공부하여 80점을 맞은 아이와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70점을 맞은 아이를 동등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학사회가 특정 계층의 아이들로만 구성되어 매우 편향적인 사회적 지도력을 배출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국가의 공정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 동종교배의 반복은 멸종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국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공정성에서 볼 때 수능은 상대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 대입이 수능 중심으로 갈수록 특목고나 특정 지역의 고등학교가 상위권 대학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중심의 수시 비중이 늘어날수록 상위권 대학에 다양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이미 사실로 드러나 있는 바이다.

그런데 왜 수능 중심의 정시 비중이 높아지면 특목고나 특정 지역의 고등학교가 상위권 대학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험의 내용이나 형식에 불공정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수능은 학교 교육과정 밖에서 출제가 되기 때문에 교과서를 따라가는 수업과는 다른 별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5지선다의 제한된 방법으로 누군가를 떨어트려야 하는 시험은 문제 자체에 많은 트릭을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100미터 달리기인데 수능은 100미터 장애물 경주인 셈이다. 당연히 별도로 많은 사교육비를 들여 장애물 넘는 요령을 숙달한 학생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충실하게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따라 100미터 달리기만 연습하고 별도의 준비를 하지 않은 학생이 수능이라는 100미터 장애물 경주에서 이길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공정성의 마지막 차원은 그 시험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가 여부이다? 만약에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시험은 모든 아이들에게 불공정한 것일 게다. 수능은 어떨까? 그 대답은 최근 일본이 선다형의 시험으로는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고도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보아 대학 학생 선발을 위한 국가고사를 서술형으로 바꾸는 교육개혁에 착수했다는 사실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능을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서 내가 현재의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전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는 걸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현재의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전형은 대학사회를 좀 더 다양한 학생들로 구성토록 하는 장점도 있지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생에게 유리하도록 기록이 부풀려 있을 소지도 없지 않고, 학교 간의 편차를 볼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어 변별력이 없다는 지적이 나올 만도 하다. 수능이든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전형이든 비슷하게 상한 사과인 셈이다. 비슷하게 상한 사과를 놓고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논란만 부풀릴 뿐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다. 현재의 대입제도는 말하자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진퇴양난에 빠졌을 땐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컨대 고2 말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표현력, 응용능력을 평가하는 국가고사를 보고, 고3 말에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대한 논술형 국가고사를 보아 그 결과를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기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밖에 있는 국가고사를 고등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끌어들이면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대한 변별력이나 신뢰성 시비가 사라져 공정성 문제가 해결되고, 대학입시를 수시와 정시로 나누는 번거로움도 사라져 단순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2 말에 치르는 국가고사에서 최소 수준에 미달한 학생에게 1년간의 보충수업을 실시하여 고3 말에 다시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공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을 높여 교육 불평등을 다소나마 완화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대학별 고사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국가가 그것을 대행하는 국가고사를 고등학교 교육과정 밖에서 실시하는 것은 하나의 편법이다. 이러한 편법과 그것이 야기하는 사교육으로 본체인 학교교육을 흔드는 일은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었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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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하는 일을 한다. 이 명제가 지켜지면 학교교육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가 수업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육활동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교육개혁 방안은 겉치레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어떤 정책을 먼저 선택해서 집중해야 할까. 교원업무 정상화다. 교원업무 정상화는 교사들의 업무를 줄여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본연의 임무인 학생 교육에 충실하게 하자는 것이다. 왜 교사들은 수업을 연구하고 학생과 상담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는가?

첫째, 교사는 수업과 학생상담 외에도 할 일이 많다. 행정업무 담당교사는 업무포털에서 공문 확인 처리, 각종 사업 관련 업무 처리를 하고, 담임교사는 학부모와 출결 관련 전화상담, 출결서류 정리, 설문조사 및 통계 처리도 하고 교과수업과 관련해 물품 주문, 생활기록부 작성 및 점검 등을 한다. 열거한 예시 중 학생 교육활동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그래서 교원업무 정상화의 첫 단계는 학교 업무를 분류해서 직무에 맞게 분장하는 것이다. 교사가 공문 처리 같은 행정업무보다 교육활동을 주로 하게 하는 것이 업무 정상화다. 학교업무는 세 가지로 분류한다. 수업과 학급운영과 생활지도 같은 학생 교육활동과 학교폭력, NEIS 업무, 수업물품 품의 주문, 정보 공시, 각종 행사 준비 등과 같은 교무행정과 학교재정, 시설관리, 방재 등과 같은 일반행정업무가 있다. 학교에는 교사 외에 교장, 교감, 일반행정직, 교무행정실무사 등 다양한 직무를 담당하는 구성원이 있다. 각 직무대로 법령과 지침에 따라 업무를 분장하고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하면 된다.

둘째, 교사 1인당 수업시수가 많다. 주당 교사 1인이 담당하는 표준수업시수가 있었지만 공무원총량제(직종별로 채용되는 공무원 인원 상한선을 정해두는 것)가 시행되면서 시수 제한 명시가 없어졌다. 교사가 학생 수행활동지를 살펴보고 첨삭해주고 다음 시간 수업활동지를 준비할 짬은 일과 후에 난다.

셋째, 학교 기본운영비를 늘리고 각종 공모사업을 줄이는 것이다. 학교 기본운영비에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구입할 수 있는 교수학습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주면 사업에 응모해서 교수학습비를 확보할 필요가 없다. 공모사업은 신청서 작성, 신청, 선정 후 예산서 제출, 사업 집행, 정산서 및 보고서 작성·제출 등 일거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넷째,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교에 요구가 아닌 지원을 해야 한다. 학교가 교육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행정과 자원을 지원하는 역할로 탈바꿈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교사가 하는 교육에 대해 믿고 존중하면 된다. 수업 단원마다, 수업하는 학급마다, 개인 학생마다 잘 맞는 교육방법은 다르다. 생활지도도 학생에게 같은 교육방법과 상담법을 적용해도 효과가 다르다. 한 가지 정답은 없다. 교사는 다양한 교육방법을 체득해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교사에게 적절한 교육방법을 적용하는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다. 오래된 미래다. 이미 2010년경부터 경기나 서울에서는 학교 혁신을 위해 교원업무 경감(나중에 ‘정상화’로 정책 명칭 수정) 정책에 먼저 힘을 쏟았다. 이제 거의 10년이 되었다. 아직도 학교에서 교사는 수업이 아니라 다른 일로 바쁘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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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육에 몇 년 전, ‘배움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교육철학이 등장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배공’이라는 줄임말로 잘 알려진 이 교육방법론은, 주입식 교육에 몰입했던 학교 현장이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더 이상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SNS의 급속한 발달과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속에서 학생들은 형해화된 교과서와 5지선다형 수능 문제에 함몰되기를 거부한다. 복잡한 이론을 이야기할 것도 없다. 학교에서 직감하는 변화들이다.

‘배공’ 이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단지 교사가 교과목 잘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의 전부인 시대는 지났다. 학부모 역시 더 이상 방관자적 관찰자일 수 없다. 학생, 학부모, 교사는 이미 학교 구성원의 당당한 3주체가 아닌가. 그리고 이 3주체가 물리적 공간으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지역사회,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1년 전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는 “이게 나라냐”는 구호로 상징된다. 부정부패, 비리 등 적폐청산에 대한 소망, 차별과 불평등의 해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시민 참여의 확대가 그 목소리에 녹아 있었다. 그러한 염원이 1700만명의 조용한 혁명을 가능케 했다.

교육계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안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의 바람을 학교 교육에 제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입시경쟁교육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체념하는 동안,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졸업 후 비정규직으로, 알바 노동자로 살아가는 고충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해 왔는지, 또 그들의 삶의 고향이자 터전인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고민을 제대로 나눈 적이 있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마공)는 한 학교에 네트워킹된 지역사회의 수많은 집단지성 구현의 장이 될 수 있다. 학부모들은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의 달인이요, 저명한 인사요, 지역의 어르신이다. 또 여러 마을활동가들의 노하우는 단위 학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의 노력과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교과 지식을 아무리 달변으로 포장해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해도 그렇게 구성된 배움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배공’의 핵심 교육철학은 ‘잘 가르침’이 아닌 ‘잘 배움’이다. ‘마공’ 역시 단위 학교 교육과정의 하향식 전달이 아닌 상향식 협력이 필요하다. 아니 상하의 위계 의식 자체로부터 탈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주민 등이 서로의 관계맺음 속에서 교육 공동체가 그 자체로 완성되는 진정한 삶과 배움의 공간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배움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벌사회라는 교육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할지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을 마련할 수 있다. 교사들은 교실과 학교, 나아가 대한민국 교사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실천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올해는 다양한 교육정책의 입안을 앞두고 있다. 특히 하반기에는 작년에 1년 유예되었던 수능 개편안 발표 등 전 사회의 관심이 집중된 사안도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꿈꾸는 교육개혁이 무궁무진한 상상 속에서 술술 풀리는 실천과 더불어 무술년 새해를 교육혁명의 원년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도성훈 인천 동암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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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서울지역 유치원에서 진행되는 방과후 영어 프로그램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정규 유치원 프로그램을 마친 아이들이 오후에 사교육업체에서 제공하는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다. 강사는 전문적인 훈련 없이 업체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파견된 사람이었다. 아이 10여명이 TV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강사의 지시에 집단적으로 영어를 따라 했다. 그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단으로 영어 떼창을 하는 듯했고, 마치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 과연 노랫말의 뜻이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시간에 아이들이 우리말로 뭔가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 또래의 아이들은 자신의 모국어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과 풍부한 대화가 가능한 나이다. 누가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따라 하거나 앵무새처럼 반복할 나이는 아니다. 언어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여서 혼자 내버려 둬도 우리말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다.

이 시기에 부모나 또래와의 소통은 아이들의 어휘 발달이나 언어 능력 향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어휘를 사용해서 얼마나 질적으로 풍부한 소통의 기회를 갖느냐 하는 것이 초등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거나 매우 제한적인 표현만을 활용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영어교육은 어떤 면에서 시간 낭비다.

최근 교육부의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금지는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밑그림을 그리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한마디로 영·유아를 둔 학부모들이 갖고 있는 자녀의 영어에 대한 생각은 기대와 불안감으로 응축된다. 어차피 영어는 학교나 사회에 나가서 중요한 능력의 하나인데, 이왕이면 잘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싶은 것이 많은 학부모들의 욕심이며 기대다. 더구나 영어를 조기에 배우면 좋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현실에서, 다른 아이들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 하는 소위 ‘전일제 영어학원’을 다니는데, 자신의 아이를 보면 왠지 불안하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그런 불안과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주변을 살피고, 남들이 하는 것의 최소한이라도 따라가려고 한다. 이런 학부모들의 불안이나 기대 또는 경쟁의식을 제대로 해소해주지 못하면, 정부의 유아 관련 영어교육 정책은 착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제에 유아기 영어교육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체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치원 단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영어교육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유치원 단계의 누리과정이나 초등학교 1~2학년에서 진행되는 영어교육과 일관성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조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유치원 시기의 아이들 학부모들이 갖는 영어교육에 대한 기대나 요구 또는 불안을 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 정부는 조기 영어교육의 효과나 부작용 또는 그 양면성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자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전국에 난립해 있는 전일제 어린이 영어학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분명한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의 기대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종합적인 영어교육 정책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3학년에서 실시되는 영어교육이 고등학교 3학년까지 이어지면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능력을 길러줄 것인지 명확한 지표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 지표를 제대로 따라간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더 이상 학교나 사회에서 손해를 보거나 차별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그럴 때 학부모들은 정부나 학교를 믿고 따를 수 있으며, 조기 영어교육의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병민 |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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