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간한 OECD 교육통계(Education at a Glance 2018)를 살펴보다 깜짝 놀랄 만한 수치를 접하였다. 우리나라 대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가 초등학생 1인당 공교육비에도 크게 뒤처졌기 때문이다. 학생 1인당 공교육비는 학교교육에 투입되는 모든 재원을 재학생의 총수로 나누어 산출한다. 우리의 경우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는 정부 교부금이, 대학교는 학생 등록금이 재원의 주요한 원천이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초등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는 약 1만1000달러인 데 반해 대학생은 단 8000달러(R&D 재원 제외)에 그쳤다. 중·고등학생은 이보다 훨씬 큰 1만2000달러였다. 대학생 1명에게 투입되는 연간 재원이 초등학생에 비해 3000달러(약 330만원), 중·고등학생에 비해 무려 4000달러(약 440만원)나 부족한 것이다.

이에 매우 당혹하여 곧장 OECD 주요국들의 수치를 비교해 보았다. 역시 우리와는 완전히 달랐다. OECD 평균치로는, 초등학생의 1인당 공교육비는 약 9000달러, 중·고등학생은 1만달러, 대학생은 1만1000달러(R&D 재원 제외)로 집계되었다. 교육단계별로 대략 1000달러씩 순증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내 상식에도 부합한다.  

대학교육의 1인당 교육투자가 초·중등교육에도 크게 뒤처지는 이런 ‘황당’한 상황을 이해해 보고자 지난 15년간의 통계 추이를 살펴보았다. 2003년을 기준으로 각각 4098달러(초등학교), 6410달러(중·고등학교), 6213달러(대학교, R&D 재원 제외)로 집계되었다. 과거에는 대학생 1인당 공교육비가 분명 초등학생 1인당 공교육비보다 월등히 높았던 것이다. 중·고등학교의 학생 1인당 공교육비에도 크게 뒤지지 않았다. 

이후의 추이를 따라가 보니, 이상한 조짐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로 등록금 동결 및 인하 정책이 도입된 때이다. 2003년 약 6200달러부터 2009년 8000달러까지 꾸준히 상승하던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그 이후 근 10년간 동일한 수준에 멈추어버렸다. 한편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의 학생 1인당 교육비는 거침없이 상승하여 2013년에 대학생의 교육비를 추월했고, 이후로는 그 격차를 더욱 벌려왔다. 2015년에 이미 초등학생과 대학생 간, 중·고등학생과 대학생 간 각각 1.4배와 1.5배의 공교육비 격차가 형성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학생 1인당 교육비는 여타 OECD 국가들과도 그 격차를 벌려왔다. 2009년을 전후로 1000달러가량 뒤지던 것이 이제는 무려 3000달러나 뒤처지고 있다. 경제성장 및 물가상승에 따라 여타 국가들의 1인당 교육비 투자가 꾸준히 증가한 데 반해 우리의 대학생 교육비 투자는 10년째 동결상태이기 때문이다.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요즘 대학가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졸업학점의 축소부터 개설강의 일부 폐지, 동일과목 분반 통합 등의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일각에서는 교육의 본질을 등한시하는 대학본부들의 부도덕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사실 이런 형태의 재정부담 경감 대책은 이미 수년째 대학가에서는 일상화된 풍경이었다. 연봉 3000만~4000만원에 그치는 비정년트랙 교원이 박사급 신규임용의 과반을 차지한 지 오래다. 무분별한 외국인 유학생 유치로 6만~7만명에 불과하던 유학생 규모는 10년 새 약 2배로 늘어났다. 행정 직원들은 대개 단기 계약직들로 채워지고 있으며, 수업용 기자재나 도서관 장서 등의 구매도 눈에 띄게 줄었다. 현대적 교육공간의 확충은 고사하고 시설 개·보수조차 어려운 대학이 수두룩하다. 가히 초등학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태로 대학교육을 ‘방치’하는 게 옳으냐는 것이다. 대학교육의 학생 1인당 교육비가 OECD 평균의 단 73%에 그치는 것과 달리 초·중등교육의 1인당 교육비는 OECD 평균의 무려 1.25배에 달한다. 국가적 교육재원의 배분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과연 이와 같은 인적자본 전략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성공적으로 안착할 수 있을까? 대학교육은 창의적, 창조적, 전문적 인재를 배출하는 종말 단계의 교육이다. 아무리 혁신적인 교육과정을 초·중등교육에서 구현하더라도 대학교육이 정체되거나 후퇴한다면, 사회에 배출될 인재들의 우수성은 결코 담보되지 못한다. 국가가 4차 산업혁명의 가장 치열한 전장에서 그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2009년 (사립대 평균) 741만원이던 등록금은 올해 약 742만원으로 집계된다. 이러한 동결은 사실 정치권의 ‘반값 등록금’ 공약과 맞닿아 있다. ‘반값 등록금’을 빠르게 성취하자면 우선 등록금부터 묶어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정치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국가장학금은 무려 4조원대로 불어났다. 기타장학금을 합하여 대학생 1인당 장학금도 약 360만원에 달한다. ‘사실상’의 반값이 실현된 것이다. 결국 대학재정을 희생양 삼아 국민과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대학교육의 재정적 위기는 현실이다. 우리의 초·중등교육처럼 OECD 수준의 교육비 투자(1인당 1만1000달러)를 회복해야 치열한 국제경쟁의 각축장에서 경쟁력 있는 인재들을 배출할 수 있다. 그러자면 1인당 약 3000달러의 교육비 재원이 추가로 확보되어야 한다. 원화로는 약 330만원에 달하는 큰 액수이다. 여기에 연간 대학생 수 약 280만명을 곱하면, 대략 9조2000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정확보가 요청된다. 10년째 묶인 대학 등록금의 대가라 하겠다.

문제는 이러한 재정적 요구에 어떻게 답하냐는 것이다.

혹자는 등록금을 묶었으니 당장 330만원 인상하면 된다고 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현실적 대안이 못된다. 대학교육의 보편화로 대학등록금이 어느새 준조세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등록금 330만원 인상에 따른 ‘조세저항’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다음으로 2010년 법제화된 ‘등록금 인상 상한제’로 인해 물가상승률의 1.5배 이상의 상승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지난 3년간의 연평균 물가상승률 1.2%를 감안하면, 연간 20만원 이상의 등록금 인상은 금지된 것이다. 결국 국가의 적극적 재정투자 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다. 이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진정 초등학교보다 못한 대학교육으로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

<김영철 서강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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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늘 시끄럽다. 지난해부터 올해 중반까지는 대입제도 개편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더니 요즈음은 사립유치원 문제로 분주하다. 그 외에도 늘 자잘한 문제들이 벌어져서 교육현실이 참 절망스럽다는 비판의 말도 많이 듣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초·중등교육 부문은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으니 회복 가능성이 큰 환자라고 할 수도 있다. 울퉁불퉁 불만을 제기하는 주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치유력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문제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내가 보기엔 고등교육이야말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환자이다.

얼마 전 한편으론 흥미롭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론 끔찍하기도 한 통계를 보았다. 교육개발원에서 2016년 기준으로 대학원, 전문대, 4년제 대학의 학과명이 몇 개나 되는지 조사했다. 그 결과는 대학원 9664개, 전문대학 6884개, 4년제 대학 1만2359개였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은 200개 정도 된다. 4년제 대학 200개 중 서로 이름이 다른 학과가 1만2359개나 된다니 참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 4년제 대학이 과연 그렇게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학과를 개설할 만큼 발전한 것일까? 물론 아니다. 교육개발원 조사에 의하면 1만2359개 학과를 가르치는 내용으로 분류해보면 약 121개로 압축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한 학과에 100개 이상의 다른 이름을 붙여놓은 셈이다. 예컨대 어느 대학에선 국문과가 다른 대학들에선 문화콘텐츠학과, 디지털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등으로 불리는 식이다. 대학들은 왜 똑같은 내용의 학과에 이렇게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것일까? 사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 속에는 고등교육 문제의 아픔과 비밀이 숨어 있다.

 우리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학령인구의 감소로 학생 모집이 어려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상위권 대학이야 학과 이름을 어떻게 붙이든 학생들이 오니까 국문과라고 붙여도 상관이 없다. 하지만 학생 모집에 곤란을 겪는 대학은 국문과보다는 문화콘텐츠학과, 스토리텔링학과 같은 이름이 트렌드에도 맞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는 것도 같아 학생을 끌어들이기가 쉽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그런 작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만으로는 1만2359개의 학과명은 다 설명이 되지 않는다. 다른 중요한 이유는 재정지원을 받기 위해서다. 예컨대 문화콘텐츠를 강조하는 예산지원이 있으면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국문과의 이름을 곧장 문화콘텐츠학과로 바꾸고 학과의 목적을 프로젝트에 맞게 만들어 서류를 낸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들은 대부분 단기적이다. 예산 지원 담당자가 바뀌어 이번엔 디지털 시대를 강조하는 프로젝트 예산지원을 내면 또 문화콘텐츠학과를 디지털콘텐츠학과로 바꾸어 서류를 낸다. 이러한 대학의 모습은 상아탑, 학문의 전당, 자율과 자치의 원리 등과는 거리가 너무 멀어 참으로 비참해 보인다. 도대체 왜 대학은 이런 수모를 감수하면서 예산지원에 목을 매는 것일까?

반값 등록금 정책은 교육 불평등을 완화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적 성격을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반값 등록금으로 발생한 재정결손을 메워주는 지난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에 있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종합적인 자기계획을 수립하여 통으로 심사를 받고 적절한 수준에서 통으로 지원하는 방식이 합당할 것이다. 그래야만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산다. 그런데 지난 정부는 그러지 않고 수많은 목적사업으로 잘게 쪼개어 예산지원을 하고 사업 하나하나마다 심사기준을 엄격하게 제시해 대학을 평가하는 방식을 취했다. 대학은 이 예산지원을 받지 않으면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그 평가기준에 맞추기 위해 학과 명칭을 바꾸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예산지원을 위한 평가기준의 기본적 원칙은 아마도 기획재정부가 세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평가기준을 구체화하는 건 교육부에서 했을 것이다. 기재부가 세우는 기본 원칙은 아무래도 경제적 효율성에 치우칠 수밖에 없고 대학사회의 특성에 잘 안 맞을 가능성이 크다. 대학사회의 특성을 충분히 변론·옹호하지 못한 교육 관료의 책임 또한 없지 않을 것이다. 취업률을 기본원칙으로 강조하면 예체능계나 인문사회계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고, 그런 식으로 대학사회는 조금씩 무너져 왔다. 이제는 전 정부의 예산지원 방식, 그와 연동된 대학평가 관행이 새 정부에서도 지속되고 있는데 그런 관행에 너무 익숙해져 이제는 비명을 지를 줄도 모른다.           

앞에서 나는 유·초·중등교육이 늘 시끄럽지만 그래도 내부 동력이 살아있어 회복 가능성이 높은 환자와도 같다고 했다. 아마도 유·초·중등교육이 갖는 이러한 힘은 부족하나마 그간에 진전된 교육자치 분권에 힘입은 것이다. 진정 창조적인 동력은 자율과 자치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창조적 동력을 얻고 싶다면 반값 등록금으로 인한 재정결손을 보전하기 위한 정부 예산지원과 평가 방식을 대학의 자율과 자치가 가능한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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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을 앞두고, 학생들에게 “국어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어려웠다. 수능이 끝난 후 학생 하나가 물었다. “선생님, 왜 그런 문제를 낸 겁니까?” 내 답은 무거웠다. “솔직히 문과 학생들을 위한 문제는 아니야. 의대 정시를 위한 거지. 서울대, 연세대, 성균관대 등등 의대 사이에 줄 세우기를 위한 문제가 필요했던 거야. 문과에서도 서울대 선발에 필요한 문제는 있어야 했을 테고.”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된 후 국어는 풍선효과를 맞았다. 우리말을 잘 이해하는 능력이 존중받는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이슈가 된 ‘31’번 문제는 국어교육의 이상과는 거리가 있다. 독해와 화법 등 언어 능력과 한국어 문법의 이해, 문학 작품 감상 능력 등이 국어과에서 기대하는 영역이다. 이번 수능에서 다른 문제들은 쉽게 출제되었다. 40대 이상 기성세대들이 접했던 문제들과 비교하면 지금 국어문제는 여러 면에서 실용적이고 과학적이다. 우선 읽기·말하기·듣기·쓰기 전 영역을 고르게 평가하고 드라마 등 생활에서 쉽게 접하는 제시문들의 비중도 높고, 작문 역시 학생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다. 16페이지나 되긴 하지만 주어진 시간 내 읽으며 풀어나가는 데 큰 부담은 없다. 채무 이행에 관한 문제가 나온 16번에서 20번 역시 쉬운 문제는 아니었겠지만 상대평가에서 필수적인 문제였다. 다만 수능 전체 변별력, 특히 정시 지원에서 표준점수 차이를 내야 하는 의무를 껴안은 국어에는 난도 최상의 문제가 있어야 했다. 난이도 부담이 덜했다면 ‘31’번 문제는 출제되지 않았을 것이다.

15일 오전 정부세종청사 교육부에서 성기선 교육과정평가원장(왼쪽)과 이강래 출제위원장이 201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경향을 발표하는 도중 기자들의 국어영역 오기 질문이 이어지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연합뉴스

영어만 절대평가가 되고 수학이 사교육비 부담 우려로 난도를 높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변별력 부담은 국어에 쏠리고, 그 부작용은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최근 교육부가 요구한 정시 확대는 직접적으로 난도를 높이는 외압으로 작용해 국어 재앙은 당분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로 인해 최근 대치동 학원가에서 제일 두드러진 현상이 ‘국어 일타 쏠림’이었다. 절대평가 실시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은 거의 없고, 부작용만 다른 과목으로 옮겨간 셈이다. 만약 정시 확대가 현실화된다면 국어로 인한 난이도 차별 압박은 심화되어 ‘31’번 같은 문제가 2~3개 추가될 가능성도 우려된다.

이런 점에서 현 수능에서 시급히 논의할 문제가 영어 절대평가이다. 정시가 확대되면 국어의 표준점수는 더욱 세분화할 수밖에 없는데, 이는 국어의 난도 상승으로 이어진다. 국어 난이도 딜레마는 현행 수능 제도의 모순을 그대로 안고 있다. 영어 절대평가나 난도 낮은 수능 출제라는 상위 원칙은 수시 확대, 교과 중심 선발 확대라는 학생 선발 제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정시 확대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수능 구조 역시 위기를 맞은 것이다. 지난 상반기 교육부는 나름 진통 끝에 대입 제도에 관한 결론을 냈다. 그런데 그 결론이란 게 불분명한 데다, 추론의 책임자마저 바뀐 상태에서 대입 제도의 방향은 혼란스럽고, 출제진 역시 당장 올해 정시 지원에 어려움이 없어야 한다는 미봉적인 압력에 이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만큼 지난 수능 국어 ‘31’번은 혼란스러운 대입 제도의 문제를 함축하고 있다.

문제는 학생들의 정신적 피해다. 수능 당일 국어 ‘31’번으로 인해 받은 쇼크를 악착같이 견딘 학생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국어로 인해 ‘멘붕’이 와 다른 과목까지 지장을 받은 학생들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년에는 결코 겪고 싶지 않은 장면이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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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종’이라고 불리는 학생부종합전형을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크다. 내신 조작, 시험문제지 유출 등 부정행위가 연이어 벌어지는 상황인지라 당연히 나올 법한 주장이다.

학종을 비판하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부자 부모를 둔 아이에게 유리하고 가난한 부모를 둔 아이에게 불리하다는 점이다.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하는 입시제도가 바로 학종이라는 것이다. 학종을 ‘사교육종합전형’이라고 규정한 칼럼도 보인다. 그러니 수능 중심으로 대학에 가는 정시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지나치게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판단의 기준이 이른바 SKY 대학으로 한정된 느낌도 없지 않다. SKY 대학 몇 명 보냈는가를 가지고 명문고 운운하는 것은 문명의 탈을 쓴 야만이라고 생각한다.

지방 학생들, 특히 농어촌 지역에 사는 학생들 처지에서는 학종의 긍정적인 측면을 더 보게 된다. 시골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을 기회가 별로 없다. 대개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지만, 학교 주변에 변변한 학원도 없다. 그러다 보니 학교와 교사를 믿고 의지하게 된다. 교사들은 ‘어쩔 수 없이’ 책임감이 더 강해진다. 그래서 교사이자 학원 선생님이자 입시컨설턴트의 역할을 모두 수행한다. 밤낮이 없다.

시골 고등학교 교사들은 영양가 있는 생활기록부를 고민하며, 지역 실정에 맞는 다양한 교육 체험의 기회를 마련하고, 응시 대학 선정을 위해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씨름한다. 성적 좋은 아이하고만 그러는 것이 아니다. 밤을 새워가며 아이들의 자기소개서를 검토하고 또 추천서를 쓴다. 사실, 교사가 편하고자 하면 수능만으로 뽑는 정시가 제일이다. 학종이 가장 힘들다. 그런데도 여기에 매달리는 것은 내 아이들이 정시보다 좋은 결과를 얻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시골 아이들은 대개 늦공부다. 도시 아이들처럼 어릴 때부터 사교육을 받지 않는다. 꼭 그래서만은 아니지만, 영어나 수학 등에서 다소 부족한 편이다. 대신, 학교생활을 알차게 한다.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다. 이 아이들의 진솔한 열정이 학종을 통해 대학의 문을 열어젖힌다. 영어, 수학이 다가 아니다.

성적만으로는 하위권 대학에 갈 학생이 학종으로 중위권 대학에 가고, 중위권 대학에 갈 학생이 상위권 대학에 갈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이 바로 학종이다. 사교육 없이 그게 가능하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이렇게 원하는 대학에 간다.

소위 고교등급제를 따르는 대학 입학사정관도 있겠지만, 대개의 사정관은 그렇지 않으리라 여긴다. 맑고 밝은 눈으로 아이들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제대로 된 인재를 뽑으려 애쓰고 있으리라 믿는다. 여러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학종이 공교육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순기능도 갖고 있음을 말하고 싶다.

사교육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입시 제도가 어떻게 바뀐들 사교육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사교육을 절대악으로 간주할 필요는 없다. 공교육은 사교육에 모든 걸 떠맡기지 말고 사교육과 경쟁한다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 교육을 먹는 것에 비유한다면, 학교 교육은 밥과 김치이고 학원 교육은 비타민이다. 밥 먹는 게 부실한 것 같아 비타민으로 몸을 보강할 수 있지만, 밥과 김치를 무시하고 비타민만 먹어대면 몸이 망가진다.

<이경수 | ‘나는 오늘도 선생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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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잡지 ‘에피’ 겨울호의 한 부분을 수능 수학과 수능 과학의 리뷰를 싣기로 정한 것은 여러 달 전이었다. 벡터와 기하를 수능 범위에서 제외하는 문제를 두고 수학과 과학계가 반발하면서 수능에서 어떤 범위를 다루는 것이 좋은지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설전을 정리하고 싶었다. 당시에 수능 수학의 범위를 축소하는 것과 관련해서 인공지능이 수학의 어떤 범위를 대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전공자도 아닌데, 어려운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나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셈을 할 줄 알고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과 셈을 못하면서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 사이에는 깨닫고 얻을 수 있는 것의 차이가 확연하다. 셈을 모르면 응용은 꿈도 꿀 수 없다. 계산기, 혹은 인공지능의 아바타로 살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가올 미래에 수학이나 과학에 인간이 시간을 덜 쏟아도 된다는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 수능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통해서 이런 논란을 돌아보고 싶었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수능 문제에 대한 리뷰를 청탁하는 것은 순조로웠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진중한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물리학자부터 해외 대학에서 오래도록 연구와 교육을 하고 있는 생물학자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전공자들에게 부탁을 했다. 언어영역에 나온 과학 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서 급하게 이것에 대한 리뷰도 싣기로 했다. 모두 바쁜 와중에 재미있는 기획이라며 기꺼이 청탁에 응해 주었다. 직접 수능 문제를 풀어보고 그 문제들을 전공자의 입장에서 수준을 가늠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앞으로 전공할 학생들, 혹은 앞으로 전공하지 않을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 평가를 해 주기를 원했다. 그런데 정작 이 기획을 시작하게 만들었던 수학 분야에서는 아무도 청탁을 받아주지 않았다. 20여 분의 수학 전공자들에게 퇴짜를 맞았다. 서울, 대전, 광주, 부산, 창원, 포항 등 전국 각지에 수소문했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낭패였다. 수능 수학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시작했지만 주변의 몇몇 에피소드 덕분에 호기심은 더 커진 터였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저명한 물리학자가 수능 수학문제를 다 풀지 못하고 100점 만점으로 치면 75점쯤을 받았다고 했다. 그분의 실력을 익히 알기에 깜짝 놀랐다. 또 다른 자리에서 내 또래의 유명한 물리학자가 수능 수학의 마지막 문제를 몇 시간 동안 끙끙대다 결국 풀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분들은 고등학교에서 모두 수학 영재, 혹은 천재 소리를 들었던 분들일 것이고 아직도 수학을 많이 사용하는 물리학을 밥벌이로 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떤 문제들이 이분들을 좌절하게 만들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수학 전공자의 육성으로 수능 수학문제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었다. 헉생들이 이렇게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이유는? 교육적 효과는? 사회적인 의미는?

그런데 모두에게 거절당했다. 물론, 고작 20명에게 부탁을 해 본 것이니 단지 운이 나빴던 것일 수도 있다. 수학도 분야가 넓고 전공은 세분화되어 있어서, 전공자들이라도 수능 문제를 풀어보는 것이 부담이 되었을 수도 있다. 전공자들조차 푸는 것에 거북함을 느끼는 문제들을 학생들은 왜 풀어야 할까? 또 다른 가능성은 정치적인 공방에 휩쓸리기 싫어하는 수학자들의 생리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올해처럼 불 수능, 마그마 수능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기대와 다른 점수를 맞은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재수생을 양산할 가능성이 높으면 수능 문제를 두고 구설이 심할 터이니 거기에 휩쓸리고 싶지 않았으리라. 상황이 이러면 말 한마디 한마디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커진다. 그래도 이런 문제가 수학 분야만의 문제가 아닐 텐데 용기 있는 필자를 만나지 못해서 아쉽다. 개별적인 사정들이 없지 않았겠으나 모두가 입을 다문 상황은 수능 수학문제를 둘러싸고 해야 할 말이 많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수능 수학이 아이들을 점수로 줄세우는 것이 목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교육을 방지하겠다고 학교 범위 안에서 어렵게 내는 모양인데 수학적 직관이나 자질보다는 반복훈련으로 비비 꼰 함정을 피하는 것만 연습하는 데 학원만 한 곳이 없다. 청탁에 실패해서 섣불리 판단하기 어려우나 수능 문제가 학생들의 실력을 향상시키거나 수학 교육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다. 고등학교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한 것만으로는 풀기 어렵고 사교육의 단련을 열심히 받아야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수능 수학문제의 정체를 누군가 나서 속시원히 밝혀주시길 간절히 바란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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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토로 이민을 와서 큰아이는 한국에서와 같은 4학년으로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청각장애아 특수반이 있는 학교였다. 그 반에는 토론토 여러 지역에서 모인 아이들이 6~7명 있었고, 교사로는 담임과 부담임 두 분이 계셨다. 선생님들은 청각장애 아이들의 특성에 맞춰 수업을 진행했다. 특정 과목에서 학습 능력이 향상되었다 싶으면 아이들을 비장애아 교실로 보냈다. 우리 아이는 수학을 시작으로 메인 스트림에서 공부하는 과목을 차츰 늘려나갔다. 고교에 가서는 모든 과목을 비장애인 아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장애를 가진 아이들의 공부도 공부지만, 이 시스템은 더 큰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장애아와 비장애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생활하고 또 서로에게 익숙해지도록 하는 데 더없이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특수학교를 따로 만들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학생 사이에 담을 쌓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부터 ‘다름’을 있는 그대로 접하게 하다 보니 비장애인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장애와 같은 ‘다름’을 유별나게 여기지 않는다. 새로 이민을 온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장애인과 이민자는 때로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몸이나 언어가 불편한 사람일 따름이다. 어릴 적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이런 교육을 줄기차게 받다 보니, 장애인이나 이민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 따위의 감정이 스며들 여지가 거의 없다.

인천 한 아파트 옥상에서 추락해 숨진 10대 중학생을 추락 직전 집단으로 폭행한 혐의를 받는 중학생 A군 등 4명이 16일 오후 인천지방법원에서 열리는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고자 인천시 남동구 남동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아이가 학교에 간 지 3개월쯤 지났을 무렵 담임 선생님이 아이 편에 편지를 보내왔다. 급히 상의할 일이 있으니 우리더러 학교에 나오라는 내용이었다. 무슨 큰일이라도 생겼나 싶어 다음날 바로 학교에 갔다. 선생님은 아이의 나쁜 버릇에 대해 이야기했다. 귓속말하기와 소리 지르기. 여러 사람이 있는 곳에서 옆사람에게 귓속말을 하는 것은 대단히 무례한 행동이며,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버릇도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이에게 여러 번 주의를 주어도 고쳐지지 않으니 급기야 부모를 부른 것 같았다.

선생님이 그 이야기를 얼마나 엄하게 하는지, 우리는 크게 야단을 맞는 학생처럼 눈물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우리는 아이에게 입이 닳도록 이야기를 했다. 아이는 “알았어요, 알았어요. 이제는 안 그래요”를 되뇌었다. 그런 ‘가정교육’을 1년쯤 지속했을 것이다. 아이는 버릇을 고쳤다.

두 아이를 토론토의 학교에 보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학교는 공동체(사회) 생활이 요구하는 매너와 예의 교육을 어릴 적부터 정교하고 철저하게 시킨다. 마치 ‘서방예의지국’을 만들기라도 하려는 듯,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데 필요한 예의 교육을 공부보다 더 중요시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해마다 이방인 20만~30만명이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의 나라이다 보니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매너는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필수 요소이다. 귓속말하기 같은 작은 버릇 하나를 두고도 부모를 호출할 정도이니, 소수자에 대한 차별이나 혐오 같은 것은 당연히 범죄 수준으로 다스린다.

얼마 전 한국에서 이른바 ‘다문화 가정’의 중학생 아이가 집단 괴롭힘과 폭행을 당한 끝에 결국 죽음에 이르렀다는 참담한 뉴스를 보았다. 인구절벽에 맞닥뜨린 한국은 싫든 좋든 이민자의 나라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올해로 200만명을 넘어섰다니 하는 말이다. 중학생 아이를 죽음으로 내몬 어린 당사자들만 탓할 문제가 아니다. 학교고 언론이고 부모고 어른들 모두가 이 문제에 대해 무지하고 무관심해서 벌어진 일이다. 생김새가 다른 사람도 ‘우리’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민한 바 없으니, 이런 문제는 필연적으로 터져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 한국 사회는 ‘다름’을 존중하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야기해야 한다. 어려운 일도 아니다. 생각만 조금 바꾸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야 사람 사는 세상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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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대학입학시험은 학력고사였다. 선 지원이었고, 전기, 후기, 전문대 각각 따로 원서를 쓰고, 따로 시험을 봐야 했다. 전기대 입시는 지원한 대학교에서 있었다. 택시 운전을 하는 아버지가 택시로 교문까지 데려다주었다. 나는 도시락을 가져가지 않았다. 긴장을 하면 소화가 안되니 먹을 것 같지도 않았다. 점심시간에 나를 받아줄지 거절할지 알 수 없는 교정에 앉아 같이 시험을 보는 친구가 나눠주는 초콜릿 한 조각을 점심 대신 먹었다. 예외 없이 입시한파가 몰아친 날이었을 텐데, 거짓말처럼 환하던 햇빛만 기억난다. 시험이 끝나고 터벅터벅 교문을 걸어 나가는데, 익숙한 얼굴이 웃으면서 나를 불렀다. 아버지였다. 만나자는 약속도, 기다리겠다는 약속도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그곳에서 우연처럼 만났다. 그 많은 수험생과 그 많은 학부모들과 그 넓은 대학 캠퍼스의 교문 앞에서 어긋나지도 않고 엇갈리지도 않고 나중에 생각하니 신기했다. 휴대폰은커녕 호출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그 앞에 언제부터 서 있던 것일까. 시험은 어려웠고, 고사장을 빠져나오는 내 미래는 비관으로 가득했지만 교문 앞에 서 있던 아버지를 보는 순간 그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날마다 보는 아버지가 그때보다 더 반가웠던 적이 있을까.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고등학교 앞에서 15일 오전 한 어머니가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치르는 아들을 시험장에 들여보낸 뒤 기도를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지난주에는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었다. 올해도 변함없이 적잖은 학부모들이 교문 앞에서 떠나지 못하고 기도도 하고, 응원도 보냈다. 그리고 그 모습으로 예외 없이 비판을 받았다. 소위 극성 맘들이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보이는 과잉 사랑이라는 것. 비판을 하는 사람들은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이 교문에 서서 기도하면 애들이 시험을 잘 볼 거라고 믿는 미신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런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건 전쟁, 이라고 누구나 공감하는 입시현장에 아이 혼자 들여보내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머뭇거리다 보니 시험이 끝날 때까지 서성이게 된 마음 약한 부모도 있을 것이고. 신기한 건 그 하루 교문을 떠나지 못하고 발을 동동 구른 부모는 극성으로 비판받았는데, 수능 100일 전부터 보낸 응원의 편지가 담긴 한 수험생의 통장은 감동적인 부모의 사랑으로 내내 회자되었다. 그 두 종류의 사랑은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시간의 차이일까, 방법의 차이일까.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은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고 바람직할까. 아이를 기르면서 나는 그 균형점이 늘 헷갈린다. 품에 안으면 과잉이라 비판받고, 내버려두면 방치 혹은 학대로 비난받는다. 제일 어려운 건 아이가 실패했을 때, 그 실패를 껴안아주는 방법인 것 같다.

시험이 끝나고 나를 마중 나온 아버지에게 매운 냉면을 사달라고 했는데, 냉면을 파는 집은 족발집뿐이었다. 그마저도 차가운 물냉면만 팔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집에서 족발도 먹고, 차가운 물냉면도 먹었다. TV에서는 그날 치른 시험 정답이 발표되는 중이었는데, 우리는 그 내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기억나지 않는 다른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나는 그 시험에서 실패했다. 후기대 입시는 혼자서 갔다. 내가 그러겠다고 했다. 실기시험을 보는 날은 폭설까지 내려서 찾아가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로 갈아타야 했는데, 버스가 다니지 않았다. 겨우 잡은 택시는 언덕을 넘지 못해서 나는 중간에서 내려 30분을 넘게 걸어 종이 울리기 직전에야 겨우 입실할 수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거기서부터는 내 몫이고 내가 혼자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눈길을 걱정했지만 아버지도 내 결정을 말리지 않았다.

부모가 되고 보니 모든 부모의 사랑을 굳이 재단해서 구분하고 싶지 않다. 어떤 사랑이 옳고 어떤 사랑이 그르든, 어떤 사랑 아래 있든, 결국은 저 홀로 살아간다. 혼자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둔다고 강해지는 것도 아니고, 이것저것 다 챙겨준다고 응석받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어떤 사랑이든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은 홀로 나선 길을 바라보는 용기가 아닐까 싶다. 지금 그 길 앞에 서 있는 아이들과 부모 모두에게 그 용기가 함께했으면 좋겠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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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입시가 가장 많은 종류의 사교육을 유발할까? 학종이다. 어떤 입시에 가장 많은 사교육비가 들어갈까? 특기자전형 등을 예외로 한다면 역시 학종이다. 그것은 현존하는 입시전형의 구성요소만 살펴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 수능전형, 논술전형을 위주로 살펴보자. 이들 전형의 구성요소는 다음과 같다.

ⓛ내신 ②수능 ③경시대회시험 ④구술고사 ⑤논술고사 ⑥학생부비교과 ⑦자기소개서 ⑧면접 ⑨추천서 ⑩고교등급제

③은 일반적으로 학생부비교과로 분류된다. 하지만 과목별로 존재하는 경시대회시험은 명백히 또 하나의 학교시험이다. 따로 떼어내야 이해가 쉽다. ④또한 시험이다. 면접형식으로 진행되어 면접과 혼동하기 쉽지만 보통의 면접과는 다르다. 그것은 일종의 대학별 고사다. ⑩은 정부가 금지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은밀히 존재하고 있다. 만약 고교등급제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고 학종 입시지도를 하는 교사나 입시전문가가 있다면 그는 철저히 무능한 자다.

각각의 입시전형은 위의 요소 중 한 개 또는 몇 개를 활용한다. 가장 많은 요소를 활용하는 입시는 학종이다. 최상위권 대학일수록 대체로 반영하는 요소가 많다. 연·고대 학종은 ⓛ+②+③+④+⑥+⑦+⑧+⑨+⑩으로 구성된다. ②수능은 최저학력(등급)을 적용한다. ⑩고교등급제는 대학이 강하게 부인하겠지만 입시의 현실에서 교사와 학부모가 피부로 느끼는 존재다.

이렇게 많은 요소로 구성된 학종이 사교육을 적게 유발한다면 이상한 일이다. 학종 구성요소 중 사교육을 직접 유발하는 건 ⓛ ② ③ ④ ⑥ ⑦ ⑧이다. 물론 구성요소가 많다고 해서 그에 비례해 사교육이 증가하는 건 아니다. 각각의 사교육 간에는 공통부분이 존재한다. 예컨대 내신 사교육과 수능 사교육은 일정부분 중첩된다. 하지만 각각의 사교육에는 독자적인 영역도 상당히 많다. 따라서 구성요소가 많은 입시가 더 많은 사교육을 유발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부 학종 주창자들이 학종이 수능전형 등에 비해 사교육을 적게 유발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한 억지다. 논거 자체가 말이 안 될 때가 많다. 예컨대 그들은 상위권 대학일수록 학종 안에 수능이 포함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그러고는 수능 사교육을 오로지 수능전형의 책임으로 돌려버린다. 내신 사교육조차 학종이 아닌 다른 전형의 책임으로 돌리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시험 대비 사교육이 학종과 아예 무관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학종 사교육 안에는 수능 사교육, 내신 사교육, 경시대회시험 사교육, 구술고사 사교육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학종 구성요소 중 시험요소가 유발하는 사교육만 해도 다른 입시 대비 사교육을 훌쩍 넘어서지만 학종 사교육은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학생부비교과 사교육(학생부 컨설팅 사교육)과 자기소개서 사교육은 사실상 학종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학종이 만들어낸 신종 사교육이다. 이들 사교육은 값이 비쌀 뿐만 아니라 다른 사교육에 비해 매우 비교육적이다. 나는 사교육을 가치중립적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학생부 컨설팅 사교육만은 예외다. 그중 상당수는 사교육이라 하기보다는 사기(詐欺) 교육이라 해야 마땅하다.

학종은 사교육 조장에 그치지 않고 그 영역을 사기 행위로까지 넓혔다. 학생부종합전형은 사교육종합전형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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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12일 서울 숙명여고 시험문제·정답 유출 사건에서 실제 유출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수사를 마무리했다. 경찰은 구속된 이 학교 전 교무부장 ㄱ씨는 물론 그의 쌍둥이 딸들에 대해서도 기소 의견으로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ㄱ씨는 지난 5차례의 중간·기말고사에서 문제와 정답을 유출해 딸들에게 전달한 혐의를 받고 있다. ㄱ씨와 쌍둥이가 혐의를 부인하고 있어 사건의 최종 진실은 향후 법정에서 판가름나게 된다. 하지만 정답이 메모돼 있는 쌍둥이의 ‘암기장’이나 ‘포스트잇’ 등 경찰이 확보한 각종 직간접적 증거와 정황들로 볼 때 유출의 개연성이 매우 높다. 경찰의 발표대로라면 잘못된 ‘부정(父情)’이 자신과 딸들의 인생을 망치고 많은 학부모에게 허탈감과 분노를 안겨준 사건이다.

시험지 유출 의혹을 받고 있는 서울 강남 숙명여고 학부모와 졸업생들이 학교 정문 앞에서 학교의 해명을 촉구하는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우철훈 기자

이번 사건으로 고교 내신에 대한 신뢰도 논란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올해 고2 학생들이 치를 2020학년도 대입에서 전국 4년제 대학이 모집인원의 77.3%를 수시모집으로 선발할 정도로 수시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수시에서는 교과 성적 등이 포함된 내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내신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 대입제도의 근간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숙명여고 사건 외에도 최근 모 고교 기간제 교사가 학생과 성관계를 맺고 성작을 조작해줬다가 적발되는 등 내신 관리의 문제점을 보여주는 사건이 여러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이에 일각에서는 대입에서 수시 비중을 줄이고 대학수학능력시험 위주의 정시모집을 늘려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정시 확대 요구는 학생들의 운명을 사교육이 가름하는 과거의 잘못된 교육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또한 정시 확대는 안 그래도 시험 성적에 매달리는 우리 교육의 병폐를 더욱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학교 교육은 수능에 맞춰진 주입식 학습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21세기가 원하는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적인 인재를 길러내는 길은 더욱 요원해질 뿐이다.

교육부는 교사와 자녀들을 한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하는 ‘상피제’를 도입하고 시험지 보관실에 폐쇄회로(CC)TV를 설치하는 등의 대책을 내놓았다. 이 같은 조치 등을 통해 내신의 공정성과 신뢰성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왜 답안을 훔쳐서라도 시험만 잘 보면 된다는 ‘시험만능주의’, 친구들을 이겨야만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무한경쟁주의’에 빠져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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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유치원은 공공성이 강조되는 교육기관인가? 유치원 원장의 사유재산인가? 비리 사립유치원의 명단 공개 이후 연일 계속되고 있는 쟁점이다.

사립학교의 경우는 어떨까? 사립학교 비리의 대명사로 불리며 그 판결 결과가 사립학교제도의 시금석으로 작용해온 상지대에 대하여 최근 주목할 만한 법원 결정이 있었다.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은 1993년 사학비리를 저지르고 쫓겨난 뒤 여러 차례 복귀와 학교 재장악을 시도했다. 그는 교육부 사학분쟁조정위원회가 지난 9월 김종철 연세대 교수 등 9명을 상지학원 정이사로 선임했던 것에 대해 “종전 이사들이 상지대의 정이사 추천권을 행사해야 한다”며 교육부를 상대로 이사선임처분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얼마 전 제기했다. 아울러 이사 선임의 효력을 취소소송 판결 전까지 정지해달라는 집행정지 신청도 같이 냈다. 이에 대해 서울행정법원이 지난달 18일 기각 결정을 내린 것이다.

6일 오전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시민단체 '정치하는 엄마들' 활동가들이 '교육부의 비리유치원 비호·방조에 대한 감사청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서울행정법원은 “학교법인 설립 목적의 수호라는 보충적 지위에서 더 나아가 종전 이사 등의 경영권 내지 재산권을 회복시켜 주거나 이들의 지분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학교 내지 학교경영권을 재산권의 대상으로 보는 사고의 산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종전 이사들에게 과반수의 정이사 선임 추천권을 부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이들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손해가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다”고 기각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결정은 2018년 6월 사립학교법 시행령에서 종전 비리 이사가 포함된 이사 협의체가 새로운 정이사를 추천할 경우에 전체 후보자의 과반수 미만만 추천할 수 있도록 제한하기로 하고 상지대에 이를 적용하였던 것에 대하여 법원이 정당성을 인정한 최초의 결정으로 그 의의가 자못 크다.

2007년 대법원은 임시이사체제로 운영되던 상지대에서 임시이사들이 변형윤을 이사장으로 하는 9명을 정이사로 선임한 것에 대하여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하였던 것에 대하여 사학의 설립 및 운영의 자유, 재산권 등을 근거로 ‘설립자로부터 이어진 이사들의 인적 승계’를 박탈할 수는 없다고 판시하여 김문기 측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하지만 이 같은 논리는 사립학교법 시행령 개정과 학교법인의 정체성은 종전 이사 등과의 인적·재산적 연관성의 확보가 아니라 설립목적 등이 구체화된 정관을 통하여 유지·계승된다는 2013년 헌법재판소 결정, 그리고 이번 행정법원의 결정 등으로 상당 부분 극복됐다.

그런데 사립학교에 대하여 사학의 설립 및 운영의 자유, 재산권을 주장하면서 사립학교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건 퍽 익숙한 논리가 아닌가. 바로 최근 비리 사립유치원 명단 공개로 촉발된 교육부의 사립유치원 공공성 강화안에 대하여 한유총이 ‘사립유치원은 설립자의 사유재산이므로 수익권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과 다르지 않은 논리이다.

위 2007년 대법원 판례에는 이른바 ‘독수리 5형제’로 지칭된 이홍훈, 박시환, 김지형, 김영란, 전수안 대법관의 반대의견이 있었다. 이들은 ‘학교법인은 기본적으로 민법상 재단법인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만 그 조직·운영에 관하여 법적 규제와 행정감독을 강화함으로써 사학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하여 사립학교법이라는 특별법에 의하여 설립·운영되는 특수법인’이라고 하여 학교법인의 공공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이 2013년 헌법재판소 결정과 이번 행정법원 결정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사립학교법 제1조는 사립학교의 자주성뿐 아니라 공공성도 규정하고 있다. 교육기본법 제5조 제2항이 교육의 자주성을 규정하면서 ‘학교운영의 자율성은 존중되며, 교직원·학생·학부모 및 지역주민 등은 법령으로 정하는 바에 따라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는 점에 비춰볼 때 사립학교의 자주성은 학교의 자치, 즉 교육공동체 구성원의 자치를 의미하는 거지 설립자나 학교법인의 축재 수단이나 족벌 지배 및 경영권 세습으로 이해돼선 안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립유치원도 유아교육법에서 교육감의 인가를 받아 설치되고, 누리과정에 따라 국가에서 상당액의 지원금을 받는 이상 공공성을 지닌 교육기관의 정체성이 우선한다고 할 수밖에 없다. 유치원이 사유재산임을 근거로 유치원 원장들이 각종 편법을 용납해 달라는 것이야말로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

최근의 유아교육법 등 관련 법 개정과 국가회계시스템의 사립유치원 적용, 국공립유치원 확충 등 일련의 공공성 강화 정책은 교육계 묵은 적폐를 도려내고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사립유치원과 함께 사립학교에 있어서도 공공성 강화 논의가 다시 시작되고 성공적으로 진행되길 희망한다.

<김영준 | 민변 교육·청소년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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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쟁이들은 대체로 돈 계산이나 그런 걸 위한 서류 작성과는 참 거리가 먼 족속이다. 수년 전 어린이 문학 작가들이 내는 월간지 ‘어린이와 문학’이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무려 2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첫해는 존경과 찬탄을 한 몸에 받는 능력자가 있어서 이게 ‘어린이와 문학’에 내린 하늘의 은총에 가까웠다. 그런데 그 다음 해 무슨 이유인가 우리 사회 평균 수준의 돈 계산 능력을 갖춘 능력자가 빠져나가자 졸지에 하늘의 은총이 재앙으로 돌변했다. 요구하는 은행거래와 서류와 영수증이 그렇게 많은지 그런 일에는 무지몽매하기 그지없는 글쟁이들이 1년 내내 우왕좌왕 정신이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글쟁이들은 절대 정부 지원은 받지 말고 차라리 주머니를 털어서 적자를 메꾸자는 결정을 거의 만장일치로 내리고 정부 복식부기 회계의 압제에서 해방된 기념으로 거하게 한잔 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있다.

나 역시 무지몽매한 글쟁이 중 하나라 처음 세무서에서 사업자이고 복식부기로 장부를 만들어 종합소득세 신고를 해야 한다고 연락이 왔을 때 확인 전화를 여러번 했었다. 저 가게 같은 거 하는 사업자 아닌데 잘못 연락하신 거죠? 회사도 아니고 받는 건 책 인세밖에 없어서 무슨 대차대조표, 손익계산서 같은 거 만들 거리가 애초에 없는데요? 골치 썩이기 싫어서 신고를 안 했더니 추징 세금 300만~400만원에 벌금 100만원이 나왔다. 이렇게 정부 지원금을 타먹는 일이 어렵고, 우리나라 세무서가 이렇게 무섭다.

그런데 며칠 전 유아교육 전문가가 나한테 와서 살짝 귀띔을 해주었다. 사립유치원들은 복식부기로 회계처리를 하지 않고 단식부기로 회계처리를 할 수 있도록 법률에서 예외를 인정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률개정을 해서 이 조항을 바꾸지 않으면 에듀파인 같은 국가 회계시스템을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식부기는 말하자면 현금출납부만 작성하는 것이어서 그걸 가지고는 재무상태도 파악하기 어렵고, 회계부정을 찾아내기도 어렵다.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거지나 다름없는 글쟁이들에게서도 고문에 가까운 복식부기 회계 규정을 들이대 주머니 동전까지 꺼내가는 실력자들이 어떻게 적어도 매출 10억원은 되고 정부 지원도 1억원 내외는 받을 사립유치원에 현금출납부만 기록하면 되도록 너그러워질 수 있었던 거지? 이건 거의 부정을 저지를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해준 꼴인데? 이걸 가능하게 하려면 거의 무소불위의 신적 능력이 필요했을 텐데?     

사립유치원들이 회계감사와 국가 회계시스템 에듀파인 적용 방침에 반발하여 학부모들에게 폐원을 통보하는 일이 산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진짜 폐원을 하는 것은 법령상 문제가 되지만 폐원을 학부모에게 통보하는 것은 법령상 문제가 안된다고 연합회 간부가 총회에서 권장을 한 모양이다. 이렇게 유아와 학부모에게 겁주는 행위를 당당하게 하는 배후에는 유치원교육을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모델로 보는 관점이 완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교육수요자가 있어서 교육공급자가 생긴 거고, 교육공급자는 원하는 수익이 생기지 않으면 수요자가 있어도 공급을 중단할 수 있는 건데 웬 간섭이냐는 투다. 이런 점에선 근래 20여년간 형성된 사회 교육적 흐름이 사립유치원 사태를 부추긴 측면이 없지 않다.

언제부턴가 학교교육을 이야기할 때 교육수요자와 교육공급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쓰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김영삼 정부 5·31 교육개혁 이후부터일 것이다. 물론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가와 교육기관이 절대적 갑이었던 군사정권 시절에 비하면 학생·학부모의 학교 교육에서의 지위를 높이려 한다는 점에서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개념은 진일보한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육의 주권자인 국민을 졸지에 공교육의 수요자로 전락시킨다는 점에서, 또 교육 주권자인 국민과 공적 봉사자인 국가기구 위에 이 모두를 규정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시장이 존재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불편한 느낌을 주는 개념이기도 하다.

공교육을 교육수요자-교육공급자 모델로 보는 나라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원산지인 미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어느 토론회에서 한 교육 전문가가 미국의 수월성 교육은 하버드, 스탠퍼드 같은 사립학교가 담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나는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이사회가 있다고 해서 하버드, 스탠퍼드를 사립학교로 보면 안돼. 그 대학들은 그 출발에서 보면 카운티 주민들로 구성된 이사회가 건립한 국공립학교야. 미국의 학교 대부분이 그래. 그래서 카운티의 경제 사정에 따라 교육환경의 차이가 크다는 문제점이 있어. 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그런 문제점을 알면서도 감수해. 왜냐하면 카운티의 주민들이 학교를 건립한 주권행위가 공교육의 중심을 지키는 가장 신성한 가치이기 때문이지. 이런 신성한 가치가 없다면 그건 공교육도 아니고 국가도 아니지.”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한다는 것은 단순히 회계를 투명하게 하는 등 기능적인 개선을 하는 게 아니라 지역주민을, 국민을 공교육을 건립한 주권자로서, 그 주권행위를 신성한 가치로서 교육의 중심에 세우는 것이다. 지역주민이, 국민이 을인 수요자로 인질이 되는 곳에는 어떠한 상상적 공동체도, 국가도, 공교육도 없는 것이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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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이 25일 사립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유치원 공공성 강화 대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국공립유치원을 늘리고, 사립유치원의 회계 투명성을 강화하는 것이다. 또한 사립유치원 이익집단의 일방적 휴·폐원 등 반교육적 행태를 제재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현시점에서 교육당국이 내놓을 만한 대책은 대부분 망라했다고 본다. 중요한 것은 실행이다.

국공립유치원 확충 시점을 앞당긴 게 가장 눈에 띈다. 당초 정부는 전국 평균 25% 수준인 국공립유치원 취원율을 2022년까지 40%로 높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이 같은 목표를 수정해 내년 중 신·증설할 국공립유치원 학급 수를 기존 500개에서 1000개로 늘리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국공립 취원율 40% 달성 시기를 1년가량 앞당길 수 있다. 정부는 비리의 발단이 된 회계 문제와 관련해선 국가 회계관리 시스템 ‘에듀파인’을 사립유치원에도 단계적으로 적용키로 했다. 원생 200명 이상 대규모 유치원은 내년 3월부터 에듀파인을 써야 하고, 2020년에는 모든 유치원이 대상이 된다.

25일 오후 세종시의 한 공립유치원에서 수업을 마친 어린이가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날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은 국공립유치원 취원율을 40%까지 늘린다는 공약을 조기에 달성하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난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유아교육법·사립학교법·학교급식법 등 관련 3법의 개정이 뒤따라야 한다. 국공립유치원을 신·증설하려면 부지와 예산 확보가 필수다. 특히 국공립 취원율의 지역별 편차가 큰 만큼, 젊은 부모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국공립을 더 늘려 정책 체감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경기도처럼 아파트 건설이 활발한 지역에선 사립유치원의 반발로 공립유치원 신설 계획이 무산된 사례가 적지 않다고 한다. 정부와 국회는 관련 법 개정 및 국공립유치원 신·증설 과정에서 이익집단의 조직적 저항이나 로비에 흔들려선 안된다.

유치원은 미래 세대의 교육이 시작되는 ‘학교’다. 정부는 사립유치원의 비리 근절 차원을 넘어 근본적 유아교육 개혁에 나서야 한다. 모든 아이들에게 ‘출발선에서의 평등’을 보장할 수 있도록 공공성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 한다. 국공립유치원 취원이 ‘로또’가 되어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돈 내고 사립에 보내야 하는 구조는 바꿀 때다. 유아교육의 내용에서도 과잉학습을 유발하는 요소는 제거할 필요가 있다.

최대 사립유치원 단체인 한국유치원총연합회(한유총)는 “경악과 충격을 금할 수 없다”며 “교육부 방안은 사립유치원의 땅과 건물을 사유재산으로 일구고, 수십년간 유아교육에 헌신해온 설립자와 원장들의 생존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반발했다. 내부 의견을 수렴해 대응 방향을 정할 것이라고도 했다. 과거처럼 집단휴업을 선포해 학부모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정부 양보를 얻어내면 휴업을 철회하는 식으로 대응할 텐가. 이런 단골 수법이 더 이상은 통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비리 유치원 명단을 공개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쏟아지는 격려와 후원 행렬을 보라. 한유총은 깊이 자성하고 체질 개선에 나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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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2조원의 정부 지원을 받는 사립유치원 비리에 온 나라가 분개하고 있다.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의 오만한 막가파식 대응도 기가 막힌데, 일부 유치원이 내년도 신입생 모집 중단이나 폐원을 입에 올리는 것은 말 그대로 협박이다.

이 일이 세상이 타락하여 망해가는 징조는 분명히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바로잡고 더 낫게 만들기 위해 불가피한 과정이다. 단순히 정치권력 교체에 머물지 않고 정의롭고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촛불의 또 한 걸음 전진인 것이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처음 들어보는 단체인 ‘정치하는엄마들’은 사립유치원 비리가 뿌리 깊은 구조적 문제임을 일깨웠다. 언론은 간간이 유치원의 문제를 보도했지만, 주로 폐쇄회로 카메라에 잡힌 충격적인 아동 학대 장면을 부각시키는 쪽이었다. 왜 그런 일이 자꾸 터지는지 근본 원인을 파고들지 않고 선정적 보도에 치우쳐 진짜 문제의 은폐를 돕고 말았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김용민의그림마당]2018년10월26일 (출처:경향신문DB)

‘정치하는엄마들’은 1년 이상 갖가지 고생을 무릅쓰며 비리 유치원 원장들의 방해와 협박, 감독 당국의 냉대와 비협조를 물리치고 마침내 사립유치원의 운영 문제를 공론화하는 데 성공했다. 엄마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발휘하는 힘은 새 세상을 열려는 여성들의 거스를 길 없는 도도한 흐름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사립유치원 논란의 와중에 보육교사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고, 언론도 그들에게 관심이 부족하다. 삼성 백혈병 피해라는 긴 싸움을 감당한 이들의 하나인 의사 공유정옥씨는 얼마 전 페이스북에 “짧은 건강 상담 중에 유난히 눈물을 많이 보이는 직종, 보육교사”라는 글귀를 올렸다. 아동학대로 잘못 몰린 끝에 그만 스스로 세상을 등진 윤모 교사를 추모하는 글을 퍼온 게시글에 나온다. 우리는 보육교사의 어려운 처지를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할 길을 찾아야 한다. 민주시민의 당연한 의무이다.

유치원 비리에 분노하는 엄마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가 유치원의 볼모임을 뼈저리게 실감한다. 유치원을 쉽게 옮길 수도 없을뿐더러, 잘못된 관행에 깊숙이 물든 유치원장들이 하루아침에 개과천선하기를 기대할 수 없다. 변화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거의 두 세기 전에 나온 찰스 디킨스의 소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구빈원의 멀건 죽일망정 더 달라고 사정하는 어린 주인공의 운명을 자기 아이가 겪지 않도록 막을 방법은 있다. 바로 유치원 보육교사나 조리사의 목소리가 유치원 운영에 반영되도록 하는 것이다. 다수는 아니더라도 양심적이고 훌륭한 유치원장들은 틀림없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엊그제 어느 라디오 아침 방송에 한 요양사가 출연하여 정부 지원을 받는 사설 노인 요양원의 비리는 사립유치원을 뺨칠 정도임을 폭로했다. 용기를 낸 이 요양사에게 노동조합의 울타리가 있듯이, 일하는 여성들의 인권과 노동권을 존중할 방도를 찾아야 한다.

불법과 비리에 대한 거센 분노에 맞서서 사립유치원장들은 자신의 유치원이 정부 지원을 받지만 ‘사유재산’임을 내세운다. 어쩌면 이토록 부실비리 사립대의 행태와 판박이인지. 노인 요양원은 전체의 1.1%를 빼면 모두 사설이며, 사립유치원은 국공립보다 3배 규모의 원아들을 맡고 있다. 사립대학은 전체 대학의 80%가 넘고, 전문대학은 거의 대부분이 사립이다. 주요국가 중 우리처럼 고등교육의 사학 비율이 높은 나라는 없다. 이처럼 교육기관의 국공립 비중이 낮은 상황에서 교육의 공공성을 강화하기 어려우며, 덮어놓고 사유재산 운운하는 억지 논리가 횡행하게 마련이다. ‘공영형 유치원’이 대안으로 떠오르는 이때, 국회는 내년도 정부 예산안에서 시범사업 예산이 전액 삭감된 ‘공영형 사립대’도 진지하게 재론해야 한다.

큰아이가 두 살 때 외국에서 유치원을 보낼 기회가 있었다. 선생님 두 분은 다 아이를 둔 엄마였다. 여러 해가 지나 교수가 되어 얻은 첫 연구년에 기회가 닿아 가족과 함께 그 유치원을 다시 찾았다. 두 분은 변함없이 그곳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우리 유치원 현실에서 엄마 보육교사들은 과연 얼마나 안정되고 행복한지, 자신의 출산과 육아 휴가는 제대로 받고 있는지, 동일 직장의 평균 근무 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궁금하다.

큰아이와 6년 반 터울인 막내는 서울에서 종교기관이 운영하는 좋은 어린이집을 여러 해 다니는 행운을 누렸다. 고마운 선생님이 많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두 분이 있다. 이경○ 선생님과 나○경 선생님. 당시 두 분은 미혼의 젊은 여선생님이었다. 혹시 몰라 이름 한 글자를 가린다. 마땅한 보답을 한 적 없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다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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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유치원 원장님들 덕분에 새삼 우리 교육의 ‘암흑의 핵심’이 선뜻 그 모습을 드러낸 듯합니다. 비리와 부정 그리고 교육부의 무책임은 ‘사립’의 두꺼운 장막 뒤에 있습니다. 좌파 운운하거나 폐원까지 거론하는 원장님들의 저 당당한 태도는 무엇을 ‘빽’으로 한 것인지요? 유치원이란 딱 그들의 사기업이자 사유재산입니다. 

초등학생부터 어른까지 ‘사립’ 건물주가 꿈이며, 궁중족발 사장이 더 동정받는 이 나라에서(그러니까 이 나라 자체가 일종의 ‘사립’입니다), 신성불가침 사립의 신화를 뚫고, 국공립유치원을 늘려야 한다는 여론이 인다는 건 예외적인 상황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오늘의 이 관심이 교육 전체에까지 연결되기를 바라봅니다. 

이제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가와 사립학교의 관계는 새로 정립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민의 혈세가 없으면 하루도 유지되지 못하지만, ‘사유재산’으로 간주되고 자영업처럼 운영되는 이 이상한 사립 중심 교육체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불어민주당 박용진 의원이 15일 오전 국회 교육위원회의 서울시교육청 등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사립유치원 회계비리 감사결과와 관련해 질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의 경우도 사립대학과 정부(교육부)의 관계는 기묘합니다. 정부의 개입·간섭과 사립대학의 자율권은 이상하게 결합하여 교육 모순을 증폭시켜 왔습니다. 정부가 사립대학 운영에 많이 개입하는 듯하지만, 정작 재단의 전횡을 적절히 견제하거나 사립대학이 공공적인 교육기관으로서 역할을 하도록 하지는 못했습니다. 정부는 표면적으로 모든 사립대학의 ‘갑’이고 교육부의 과장·국장에게조차 대학의 권력자들이 굽신거리는 것 같지만, 그 근본 실상은 유착에 가까울 듯합니다.

그리고 사립대학마다 사정이 크게 다릅니다. 어떤 대학들은 정말 부실하지만, 또 어떤 대학들은 기실 재산과 권세가 많고 셉니다. 사립대학의 이사장·총장 자리는 임기란 것도 없이 세습되는 경우도 많으니, 그들은 적어도 5년짜리 정권보다는 위에 있습니다. 이같이 사적소유의 신성함이 세습과 전횡을 정당화하는 이 나라에서 대학 자율권은 위험성이 더 큽니다. 크고 힘 있는 일부 사립대학은 학생 선발권이나 등록금에 대한 자율권을 보장하라 하지만, 과연 그럴 자격이나 사회적 책임감이 그들에게 있을지요? 그들이 자율권을 진정한 교육이나 사회를 위해 쓸까요? 지금도 사립대학은 그야말로 ‘사립적’이라 할 기득권과 이윤의 논리, 그리고 차별을 가르치고 재생산합니다. 예컨대 서울의 주요 사립대학들은 입시에서 공공연히 지방이나 일반고 출신 학생을 차별합니다.

중학교 때 이미 인생이 결정되는 교육 파행의 상당 부분 책임은 그런 사립대학에 있습니다. 노중기 교수의 말대로 일부 사립대학은 재벌이나 특정 종교 집단의 사회지배의 전초 기지 구실도 하고 있습니다. 사학은 그들의 투자처이자 비자금 운용 장치이며, 재벌체제는 핵심적 노동력 공급기구로서의 대학에 이해관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대학 구조조정의 정치사회학> <학단협 심포지엄 자료집>)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간 비리와 재단의 전횡 외에도 영업 논리와 사회적 무책임이 대학을 지배하게 됐습니다. 교육부는 이를 내버려두거나 조장했습니다.

교육부 개혁이나 사학법 개정 없이 우리 교육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노무현 정부 때 사학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과 분탕질이 아직 생생합니다. 영남학원 이사장이었던 박근혜를 필두로 이명박, 이재오, 나경원 등이 촛불을 들고 전국을 돌았었지요. 이사 중 일부를 ‘개방형’으로 한다는 조항이 그토록 그들의 족벌체제와 재산권에 위협이 됐나 봅니다. 이른바 보수세력이 사유재산권 침해며 ‘사회주의’라 방방 뜨면서 위헌소송도 제기하고, 한기총 같은 단체는 물론 점잖은 줄 알았던 다른 종파들도 함께 ‘총궐기’하던 모습과 결국 당시 여당이 꼬리를 내리던 모습도 기억합니다.

이 나라에서 사학법은 국가보안법만큼 신성하여 국민이나 헌법 위에 있나 봅니다. 지금도 자유한국당 주변의 정치권, 언론계, 종교계 등에는 사학 족벌과 인맥·혼맥으로 뒤엉킨 이해관계 동맹이 건재하겠지요. ‘사립’ 교회와 학교들이 세습하는 지위와 재산에 비교하면, 아마 어떤 소시민들이 기도했다는 고용세습은 조족지혈 정도겠지요.

제도 차원에서 사학법 개정이 대학개혁의 핵심이라면 대학 내적으로는 교수 사회의 개혁이겠지요. 1970~1990년대 한국 대학지성이 민주화와 근대화에 함께 영향받고 또 혜택을 누려 성장한 것이라면, 2000년대 이후의 대학은 그것과 스스로 결별하기 위해 온 힘을 써온 것처럼 보입니다. 물론 ‘이명박근혜’ 교육부와 일부 사학재단이 의식적으로 (전 시대의) ‘대학’과 투쟁했지만, 교수들 자신도 그러했다 생각합니다. ‘자유로부터의 도피’라는 명제에 가장 어울리는 집단이 교수 외에 또 있을지? 여기까지 쓰니 벌써 교수님들의 자조·한탄·비아냥거림이 들려오는 듯합니다. 한국 교수 사회의 의식과 문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써보겠습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1960년을 묻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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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의대 설립을 위한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되면서 의사협회와 일부 의학계가 반대에 나서고 있다. 공공의대의 경우 없던 의대 정원을 만들어 설립한 것이 아니라 대학 비리와 질 낮은 교육 문제로 폐교된 서남의대의 정원만을 이어받아서 만드는 것이라 의료계의 반대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계층, 어느 지역에 살더라도 생명과 건강에 관한 필수보건의료를 평등하게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응급, 외상, 심뇌혈관질환 등으로 인한 예방 가능한 사망에 있어서 지역 간 편차가 너무 크다.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이 축복이어야 하는데 많은 지역은 분만할 병원이 없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어린이 재활병원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 발생 등 국가 위기 상황을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할 훈련된 역학조사관이나 공중보건 전문가는 매우 부족하다. 수도권은 병원도 의사도 넘쳐나는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대다수 의대 졸업생이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지역의 필수보건의료를 책임지고 헌신할 공공보건의료 전문가 양성을 위해 공공의대는 꼭 추진되어야 한다. 학생 선발부터 지역에서 헌신할 인재를 뽑아야 한다. 기존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공보건의료 교과과정을 공공의대에서 교육해야 한다. 졸업 후 의무복무를 거쳐 지역에서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공중보건의사 제도나 공중보건 장학의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기존의 의과대학 교육이 공공보건의료 전문가의 양성에 관한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이 부실할 뿐 아니라 실제 기존의 의과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정책의 실효성이 매우 미미하다는 증거가 이미 드러난 상태다. 그런데 또다시 그러한 정책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대를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 지역의 필수보건의료를 책임질 수 있는 공공보건의료 전문가를 직접 교육하고 육성하는 정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문제를 풀어나갈 동력이 생길 수 있다.

의료의 질이 떨어질 거라는 우려와 의대 설치에 막대한 국고가 들어갈 거라는 우려도 있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국립중앙의료원을 필두로 충분히 교육실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공병원이 있다. 특히 국립중앙의료원은 공공의대가 설립되는 시점에 많은 국가 재정을 투입하여 현대화된 병원으로 이전할 계획인데, 이보다 더 좋은 교육실습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공공의대의 비용 대부분도 임상교수 확보에 들어가기 때문에 국립중앙의료원이 교육병원이 될 경우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의료계가 배제되었다는 주장 역시 일방적이다. 이미 공공의대 설립 필요성은 전 정부에서 추진되어왔던 사안이고 수차례 학술 연구와 공개 토론회 등을 통해 여러 의견이 반영되어왔으며, 현 야당 역시 유사 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한 바 있다. 가장 핵심적인 이해당사자인 전북 지역의 여론도 공공의대 설립에 찬성하고 있다.

공공의대가 지역의 필수보건의료에 헌신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명실상부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임준 |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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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에게 학종은 비판의 대상을 넘어 분노의 대상이다. 금수저 전형, 깜깜이 전형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최악의 입시부담을 주는 전형이라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사람들의 학종에 대한 분노는 다분히 윤리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학종이 초래한 교육윤리의 타락에 분노하는 것이다.

방금 말한 교육윤리의 타락은 시험문제 유출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시험지를 훔치는 일은 명백한 범죄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예외적 현상이다. 사람들이 학종에 분노하는 것은 그보다 더 폭넓게 존재하는 비윤리적 행위들 때문이다. 학원이나 부모가 학생부에 기록될 스펙을 만들어주다시피 하는 일, 학원에서 작성한 것을 그대로 학생부에 기록해 주는 일, 학원에서 써준 자기소개서를 학생이 쓴 것처럼 위장하는 일, 학교가 성적우수자에게 스펙을 몰아주는 일…. 이런 것들 때문이다. 이것들은 결코 일부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는 일이다. 얼마 전 만난 내 친구는 학종 컨설팅학원(그 친구의 말로는 스펙 학원)을 운영하는 후배로부터 들은 내용을 말해주며 이렇게 탄식했었다. “와, 그거 완전 사기더라.”

2015년 서울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종로학원 주최로 열린 입시설명회를 찾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서성일 기자

그런데 학종으로 인한 교육윤리의 타락이 앞서 말한 것에 국한된다면 학종에 분노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것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행하는 더 광범위한 비교육적 행위가 존재하는 걸까. 어느 학부모가 공개적으로 털어놓았던 이런 수준의 일이라면 그렇게 봐야 한다.

“원서 마감은 보름 앞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자는 매일 다큐멘터리 한 편씩을 봐야 했다. 그것도 사회성 짙은 문제작 위주였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다큐멘터리를 즐겨 봤고 그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자기소개서를 꾸미기 위해서였다. 15일 동안 본 다큐멘터리를 15년에 걸쳐 본 것처럼 위장해…”

이런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 주위의 평범한 학부모, 교사, 사교육 종사자, 그리고 학생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들은 자그마한 일탈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윤리적 죄책감과 불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학종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사람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윤리의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을 용감하게 밝힌 학부모는 누구일까?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다. 앞서 인용한 글은 김의겸 대변인이 한겨레신문 기자일 때 학부모로서의 경험을 담아 쓴 칼럼 “난 이렇게 아들의 ‘스펙 조작’에 가담했다”의 일부다.

스펙을 쌓으려고 억지로 한 일을 고결한 동기에서 한 것처럼 꾸미고, 형식적으로 하고선 충실하게 한 것처럼 위장하고, 남의 힘을 빌려 놓고는 혼자 힘으로 한 것처럼 속이는 행위들은 이제 더 이상 이상한 행위가 아니다. 교육(공교육·사교육·가정교육)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낯익은 행위들이다. 학종의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에는 성인군자, 대학자, 슈퍼맨이라 할 만한 훌륭한 학생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부와 자소서의 세계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학종은 위선의 입시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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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후배의 군에 간 아들이 탈영을 했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소동은 하루 뒤 부대에서 좀 떨어진 PC방에서 인터넷에 골몰하고 있는 친구 아들을 발견함으로써 다행히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걸로 끝이 났다. 참 그 녀석 특이하군 하는데 후배의 말이 요즈음 군대에선 그렇게 부대를 이탈한 병사가 PC방 같은 데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골몰하다가 붙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참 시대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가 군부대 안에서 생활하며 주로 느낀 것은 그것이 육체적인 원인에서 오든 정신적인 원인에서 오든 몸으로 느끼는 배고픔이었다. 그래서 외박이나 휴가 나갈 땐 늘 빵과 과자, 짜장면, 불고기 등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봐야지 단단히 벼르며 부대 정문을 나서곤 했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문화적 결핍이 우리 세대의 배고픔과 같은 모양이다. 하기는 먹고사는 문제가 기초적으로는 해결이 되고 지적 네트워크가 삶의 핵심적 필수요소가 된 인지자본주의 시대가 아닌가?

젊은 세대에게 문화적 결핍이 우리 세대의 굶주림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학교교육은 우리 세대보다 젊은 세대에게 더 근본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일정 수준의 학교교육과 그를 통해 습득한 기초학습능력이란 못 갖춰도 살아가는 데 결정적 지장은 없는 것이었지만, 젊은 세대에겐 굶주림이 우리 세대에게 그러했듯이 정상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장애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교육은 과연 이러한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변화해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양적으로만 본다면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고 대다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있고, 매년 엄청난 숫자의 박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우리의 학교교육은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외양을 갖추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분별하게 양적 팽창에만 몰두하던 산업화 시대의 교육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다.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학교교육이 문맹에 가까운 학생도 등록금을 내고 출석만 잘 하면 무난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참 신기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에 대해 국가 수준에서 한 번도 평가하는 일이 없고,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국가가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최소한 10년간의 국민 공통교육과정이 끝나는 고1 말에 국민 공통교육과정에 대한 국가 수준의 졸업자격 고사라도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통과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고2, 3에서 별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졸업자격 고사 응시 기회를 1~2회 더 주어 최대한 기초학습능력을 갖추도록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국가가 자기 할 일을 확실히 하면 대입제도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고1 말의 졸업자격 고사를 대학입학자격 고사를 겸하도록 하여 ‘수능 1’로 하고, 고3 말에 고2, 3의 진로선택 교육과정에 대해 ‘수능 2’를 보도록 하고, ‘수능 2’는 미래 역량을 물을 수 있는 서술형, 논술형 문항을 도입하되 학생이 응시할 수도 있고 응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형으로 하면, 대학 학생 선발을 대학 본고사를 금지하는 선에서 대학 자율에 맡겨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5~6년 전 혼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신문에 심리상담사 자격증 시험 광고가 나왔기에 흥미가 생겨 시험을 보았다. 시험 교재를 사서 한 달간 공부해 보았는데 2급 심리상담사와 아동심리상담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다. 나는 이건 1차 시험이고 이제 교육도 받고 장기간 실습도 한 후 테스트를 해서 자격증을 주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우편으로 자격증 두 장이 배달되어 왔다. 허망하게도 그것이 끝이었다. 사기당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국가가 이렇게 자격증에 대한 질 관리를 안 하면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당연히 상담자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학벌을 따질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심리상담사 자격증보다는 유수한 대학의 졸업장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높을 테니까. 국가의 각종 자격증에 대한 질 관리의 허술함이 우리 사회가 실력 위주의 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학벌사회에 머물게 되는 한 이유가 아닌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이것은 직업계고와 관련된 자격증도 마찬가지다. 정말 고졸자 취업을 늘리고 싶다면 그 자격증들이 현장에서의 실력 발휘를 담보할 수 있도록 질을 관리하고 직업계고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고 이른바 일류 대학이라고 교육의 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일류 대학의 국학 전공 대학원에서 교수가 되려면 미국 유학을 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박사학위에 대한 신뢰도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대학교육의 질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웅변한다.

흔히 미래사회에 대비한 융합적이고 창조적인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어떤 새롭고 기발한 정책이나 제도에 의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생겨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개혁이란 것은 그렇게 단절적인 게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가 오랜 반복적 훈련을 통한 숙련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기만의 창조적 연주를 해내듯이 우선은 기왕의 것에서 질적으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내는 매우 지루하고 고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현재 있는 자격증들의 자격부터 물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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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화 교육을 근간으로 한 근대학교의 시효 만료를 알리는 신호가 뜬 지는 한참 되었다. 서구에서는 50년 전, 한국 사회에서는 30여년 전부터 빨간불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문제가 일찍 대두된 서구에서는 개혁의 청신호도 일찍 나타나고 있지만, 그 신호체계를 한국 사회에 이식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교육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맞물려 있어 사회 구조가 함께 바뀌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다. 

학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과 공동체가 다르다. 개인은 문제가 생겼을 때 학교를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공동체로서는 학교를 버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타고 가면서 차를 수리하는 수밖에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 포퍼의 피스밀(piecemeal) 전략이 현실적인 접근이다. 한걸음 한걸음 개선해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달리는 차를 수리하는 제도개혁은 고도의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개혁 대상이 맞대응을 하기 때문이다. 사교육업체들, 부모들, 대학들, 교장들, 교사들…. 저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맞대응을 한다.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는 것도 업자들과 투기 수요자들이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가면서 맞대응을 하기 때문이다. 피스밀 전략이 실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반짝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도루묵이 되고 만다.

맞대응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외통수로 몰아야 한다.

부동산의 경우 공급 물량을 늘려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는 정부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아파트만이 아니라 중산층을 위한 임대아파트도 공급해야 한다. 통제력을 확보한 다음 보유세나 분양가 공개 같은 정책을 보조수단으로 쓰면 아파트 값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손자병법식의 묘수보다 오자병법식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밀어붙여야 한다. 통제력 확보가 우선이다.

교육 분야도 비슷하다. 강남 3구의 아파트 값이 뛰는 것과 강남 8학군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교육 문제와 부동산 문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기 대책으로는 강북에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학군을 만들고, 동시에 그곳에 아파트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수시입학제를 확대하면서 사교육 수요가 생겨나지 않는 대입 평가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대학과 사교육업자들, 학부모들이 담합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지 않도록 정부가 통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장기 대책은 교육의 패러다임,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학력으로 임금을 차별하는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목수가 되고 싶은 아이는 그에 맞는 교육과정을 밟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점점 줄고 평균수명은 늘어나는 만큼 20대 초반에는 누구나 대학에서 교양을 습득할 수 있게 국가가 학비를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이를 청년에게 주는 기본소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학력 차별을 없애거나 아예 학력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전문 연구를 할 사람만 석박사 과정을 밟게 하면 된다.

초·중·고와 대학은 교양교육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양교육의 핵심은 맥락을 파악하는 힘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부분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볼 줄 아는 것,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것이 교양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가짜뉴스에 속지 않는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이유는 우리 사회 전반의 교양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교양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시민교육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곧 공교육의 역할이다.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고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의 본질 또한 맥락을 읽고 소통할 줄 아는 데 있다. 일본과 한국의 교육이 그 방향으로 제대로 바뀐다면 내부의 갈등도, 한·일 간의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공교육은 공동체의 시민을 기르는 교육이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의사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공교육의 방향이어야 한다.

<현병호 교육잡지 격월간‘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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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학교를 그만둔 초등 저학년 연령대 어린이들을 취재하며 알게 된 그들의 상황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를 그만두면 왜 모든 배움과 돌봄은 오롯이 부모의 몫으로 돌아가는가. 아이는 왜 고립되어 친구를 그리워하고,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낙오와 도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기란 부모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 말고도 어린이들이 갈 수 있는 장소나 프로그램을 연결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장소를 제공하고 싶다는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그보다 필요한 일은 일단, 각자 흩어져 힘들어하고 있는 학교 밖 어린이 가정을 한데 모으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구나 싶어 급작스레 만남을 제안했다. 숲속공원에서 한적한 평일에 만나자고. 서울, 경기, 강원에서까지, 온라인에 공지한 지 일주일 만에 아홉 가정이 모였다.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사이 부모들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학교 밖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척 다양했다.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공교육에 문제의식이 있어 입학을 하지 않은 가정도 있었다. 교사와의 관계, 혹은 또래와의 관계 때문에 학교를 잠시 쉬고 있는 가정, 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태로 모임에 참석한 가정도 있었다. 대안이 없어 당장 그만두지는 못하지만 아이의 개성과 자유로움을 보장해주고 싶어 차츰 학교 밖의 길을 준비해보고자 했다.

세상은 이들을 주류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사실 이들은 ‘적응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있지만 ‘남들도 다 그러니까’ 눈감고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물음에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이 아니라,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질문을 거세하고 한 인간의 고유함을 획일화하는 학교 시스템일 것이다.

그날, ‘친구와 뛰어노는’ 평범한 일에 목이 말랐던 아이들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 만나 친해지려면 놀이 프로그램이라도 마련해야 하나, 남자아이들이 훨씬 많은데 여자아이들이 못 어울리면 어쩌나, 지레 했던 걱정들이 무색했다. 숲속을 뛰어다니고, 모래밭을 뒹굴며 서로의 몸을 파묻는 일에는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필요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들과 얘기 좀 나눠보았냐는 엄마의 말에 한 아이가 이렇게 답했다 한다. “우린 노는 게 대화야.”

매달 만남을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나자, 모임의 방향에 대해 부모들은 보태고 싶은 말이 많았다. 혼자 하던 고민을 함께 헤쳐 나갈 것에 대해 기대도 크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생각하는 배움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선뜻 이 모임에 어른들의 말을 얹지는 않기로 했다. 오직 아이들 중심으로 만남을 이어가자고 뜻을 모은 가운데, 아이들은 벌써 언제 다시 만나느냐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부모들이 일일이 함께 다니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아이들의 성장에는 어른들은 개입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게 마련이며, 학교를 그만둔 모든 어린이들의 부모가 아이와 함께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풀어가야 할 숙제는 많지만, 일단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난 것에 기뻐하며 호기롭게 학교 밖 어린이들의 네트워크는 첫걸음을 뗐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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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여러분들의 혈세와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의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는 마음에서 씁니다. 고교 교육을 망치고 불평등을 생산하는 기지처럼 됐다는 한국 대학도 스스로 개혁할 의지나 힘이 부족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한국 대학들이 말기 질환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은 지는 벌써 10년이 넘은 듯합니다. 오래전부터 진작 필요했던 것은 실천이고 조직이요, 또 실제로 적지 않은 분들이 양심과 밥벌이를 걸고 재단과 또 ‘이명박근혜’ 정권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인 진단도 처방도 거의 나와 있는데, 교수들 자신의 보수성과 안일함, 또 사학재단과 기득권의 여전한 강고함 때문에 어둡습니다. 또 자칭 ‘촛불혁명정부’ 아래에서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많은 이들이 김상곤 교육부총리와 문재인 정부 자체에 실망한다 하는 거겠지요. 사학법·고등교육법의 개정, 공영형 사립대, 국립대 네트워크, 대학 비정규직 철폐, 총장 직선제 도입 등 대학 민주주의와 공공성뿐 아니라 국제적 경쟁력(또는 탁월성)을 위해서도 실로 많은 과제가 있지만, 오늘은 대학평가 문제에 대해서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지난주에 또 중앙일보가 대학평가 결과라는 것을 발표했던데요, 기사를 보니 ‘대학 적폐’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 대학평가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한국의 대학평가는 하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주도합니다. 평가를 통해 대학을 ‘호갱’으로 만들어 잇속을 차리고, 대학서열화로 사회 전체의 줄세우기를 획책합니다. 진정한 학문과 교육의 관점은 단 1도 관련이 없는 그들 식의 학벌 계급투쟁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대학들은 그 권세와 언어폭력이 두려워 거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대학평가의 속내는 허당이고 실로 표피적입니다. 이번에도 보니 대학평가 관련 기사들에는 ‘가짜뉴스’에 가깝다 해도 될 게 적지 않습디다. 기본 사실관계조차 틀린 것도 여러가진데, 근본적으로 신문사 대학평가에 사용되는 지표가 의심스럽고 부실합니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인 교수의 1인당 발표 논문 수 같은 것이 결코 신뢰할 만한 게 아닙니다. (재)임용·승진 등을 미끼로 삼아 대학당국들이 휘둘러댄 거센 채찍과 당근 때문에, 지난 10여년 사이 ‘쪼개기’ 등 교수들의 논문 양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만약 1명의 인문사회과학 쪽 교수가 1년에 (분야별 차이는 있죠) 4편 이상의 단독 저술 논문을 생산했다면, 그건 비정상적인 압력과 불안·초조 상태에서 쓰인 것일 겁니다. 물론 그 논문들의 질도 별로 믿을 것이 못 되겠죠. 국제화 지표 따위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제는 외려 해로운 것들입니다. 교육부·과기정통부 합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와셋 같은 해외 ‘가짜’ 학회에 참가했던 교수·연구자는 1317명(5년간)입니다. 그들은 왜 멀리 비행기를 타고 그런 데 논문을 발표하러 갔을까요?

한편 중앙일보 평가에는 학과를 등급 매긴 것도 포함돼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소위 주요 대학들에서도 학부에서 폐과·폐강 현상이 이어지고 대학원이 ‘정원 미달’ 상태인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등급 평가라니 도토리 키재기 같은 일입니다만, 이번에 평가를 받은 학과들 중에는 일부 교수들의 학생 인권 침해, 표절, 성폭력 문제 등으로 풍비박산·아비규환이 된 곳들이 있습니다. 그 학과들과 일부 문제 교수들에 대한 대학당국의 처리를 보면 ‘아, 정말 대학은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탄식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학평가에는 그런 소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럴싸하게 만든 정량지표와 허장성세 ‘몇 등’은 이제 대학의 참담한 현실을 은폐하고 더 확대합니다. 대학이 제정신을 차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대학평가에 눈을 주시지 말기 부탁합니다. 내가 나온, 또 자식이 다니는 대학이 그런 평가에서 몇 등이더라는 ‘부심’을 갖는 분들은 설마 여기는 없겠지요?

사실 이미 교수협의체나 고려대 총학을 위시한 학생들이 신문사 대학평가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은 중앙일보 평가를 거부한 대신 해당 분야 외국 학자들로 패널을 만들어 제대로 된 자체 정성평가를 받은 적이 있답니다. 진짜 교육과 학문의 발전이 목적이라면 그런 전문적이면서도 공공적인 평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학들이 마지못해 신문사 대학평가에 응하거나 ‘우리가 몇 등’이라며 나대더라도 한편 갑질에 못 이긴 탓이고 다른 한편 용렬한 학벌주의자들과 사학재단이, ‘타자의 인정’에 주린 배를 채우고 또 학내권력의 도구로 삼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아시고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문에 비정규직 교수들도 희생당하고 우리 많은 젊은 학생들까지 병들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1960년을 묻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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