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의대 설립을 위한 법률안이 국회에 상정되면서 의사협회와 일부 의학계가 반대에 나서고 있다. 공공의대의 경우 없던 의대 정원을 만들어 설립한 것이 아니라 대학 비리와 질 낮은 교육 문제로 폐교된 서남의대의 정원만을 이어받아서 만드는 것이라 의료계의 반대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어느 계층, 어느 지역에 살더라도 생명과 건강에 관한 필수보건의료를 평등하게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응급, 외상, 심뇌혈관질환 등으로 인한 예방 가능한 사망에 있어서 지역 간 편차가 너무 크다. 저출산 시대에 아이를 낳는 것이 축복이어야 하는데 많은 지역은 분만할 병원이 없고, 장애가 있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어린이 재활병원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다.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 발생 등 국가 위기 상황을 최일선에서 진두지휘할 훈련된 역학조사관이나 공중보건 전문가는 매우 부족하다. 수도권은 병원도 의사도 넘쳐나는데, 정작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많은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

대다수 의대 졸업생이 수도권과 대도시에 집중되는 상황에서 지역의 필수보건의료를 책임지고 헌신할 공공보건의료 전문가 양성을 위해 공공의대는 꼭 추진되어야 한다. 학생 선발부터 지역에서 헌신할 인재를 뽑아야 한다. 기존 의과대학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는 공공보건의료 교과과정을 공공의대에서 교육해야 한다. 졸업 후 의무복무를 거쳐 지역에서 필수의료를 책임지는 전문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

일부 학계에서는 공중보건의사 제도나 공중보건 장학의 제도를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실상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기존의 의과대학 교육이 공공보건의료 전문가의 양성에 관한 교육목표와 교육과정이 부실할 뿐 아니라 실제 기존의 의과대학 졸업자를 대상으로 한 정책의 실효성이 매우 미미하다는 증거가 이미 드러난 상태다. 그런데 또다시 그러한 정책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은 반대를 위한 논리에 불과하다. 지역의 필수보건의료를 책임질 수 있는 공공보건의료 전문가를 직접 교육하고 육성하는 정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문제를 풀어나갈 동력이 생길 수 있다.

의료의 질이 떨어질 거라는 우려와 의대 설치에 막대한 국고가 들어갈 거라는 우려도 있지만, 기우에 불과하다. 국립중앙의료원을 필두로 충분히 교육실습이 이루어질 수 있는 공공병원이 있다. 특히 국립중앙의료원은 공공의대가 설립되는 시점에 많은 국가 재정을 투입하여 현대화된 병원으로 이전할 계획인데, 이보다 더 좋은 교육실습 공간은 없을 것이다. 공공의대의 비용 대부분도 임상교수 확보에 들어가기 때문에 국립중앙의료원이 교육병원이 될 경우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의료계가 배제되었다는 주장 역시 일방적이다. 이미 공공의대 설립 필요성은 전 정부에서 추진되어왔던 사안이고 수차례 학술 연구와 공개 토론회 등을 통해 여러 의견이 반영되어왔으며, 현 야당 역시 유사 법률안을 국회에 발의한 바 있다. 가장 핵심적인 이해당사자인 전북 지역의 여론도 공공의대 설립에 찬성하고 있다.

공공의대가 지역의 필수보건의료에 헌신할 전문가를 양성하는 명실상부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의료계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임준 |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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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에게 학종은 비판의 대상을 넘어 분노의 대상이다. 금수저 전형, 깜깜이 전형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최악의 입시부담을 주는 전형이라 그런 것도 아닌 듯하다. 사람들의 학종에 대한 분노는 다분히 윤리적인 감정이다. 그들은 학종이 초래한 교육윤리의 타락에 분노하는 것이다.

방금 말한 교육윤리의 타락은 시험문제 유출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다. 시험지를 훔치는 일은 명백한 범죄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예외적 현상이다. 사람들이 학종에 분노하는 것은 그보다 더 폭넓게 존재하는 비윤리적 행위들 때문이다. 학원이나 부모가 학생부에 기록될 스펙을 만들어주다시피 하는 일, 학원에서 작성한 것을 그대로 학생부에 기록해 주는 일, 학원에서 써준 자기소개서를 학생이 쓴 것처럼 위장하는 일, 학교가 성적우수자에게 스펙을 몰아주는 일…. 이런 것들 때문이다. 이것들은 결코 일부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는 일이다. 얼마 전 만난 내 친구는 학종 컨설팅학원(그 친구의 말로는 스펙 학원)을 운영하는 후배로부터 들은 내용을 말해주며 이렇게 탄식했었다. “와, 그거 완전 사기더라.”

2015년 서울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종로학원 주최로 열린 입시설명회를 찾은 수험생과 학부모들이 강사의 설명을 듣고 있다. 서성일 기자

그런데 학종으로 인한 교육윤리의 타락이 앞서 말한 것에 국한된다면 학종에 분노하는 사람이 지금처럼 많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됐든 그것 또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행하는 일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다수 사람들이 행하는 더 광범위한 비교육적 행위가 존재하는 걸까. 어느 학부모가 공개적으로 털어놓았던 이런 수준의 일이라면 그렇게 봐야 한다.

“원서 마감은 보름 앞이었다. 방법이 없었다. 우리 부자는 매일 다큐멘터리 한 편씩을 봐야 했다. 그것도 사회성 짙은 문제작 위주였다. 아들이 어려서부터 다큐멘터리를 즐겨 봤고 그를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이 상당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처럼 자기소개서를 꾸미기 위해서였다. 15일 동안 본 다큐멘터리를 15년에 걸쳐 본 것처럼 위장해…”

이런 정도의 것이라면 우리 주위의 평범한 학부모, 교사, 사교육 종사자, 그리고 학생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들은 자그마한 일탈행위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윤리적 죄책감과 불쾌감을 느끼기에 충분한 일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이 학종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사람들이 분노한다는 것은 우리사회의 윤리의식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지극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을 용감하게 밝힌 학부모는 누구일까?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다. 앞서 인용한 글은 김의겸 대변인이 한겨레신문 기자일 때 학부모로서의 경험을 담아 쓴 칼럼 “난 이렇게 아들의 ‘스펙 조작’에 가담했다”의 일부다.

스펙을 쌓으려고 억지로 한 일을 고결한 동기에서 한 것처럼 꾸미고, 형식적으로 하고선 충실하게 한 것처럼 위장하고, 남의 힘을 빌려 놓고는 혼자 힘으로 한 것처럼 속이는 행위들은 이제 더 이상 이상한 행위가 아니다. 교육(공교육·사교육·가정교육)의 일상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낯익은 행위들이다. 학종의 시대를 맞아 우리나라에는 성인군자, 대학자, 슈퍼맨이라 할 만한 훌륭한 학생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학생부와 자소서의 세계에서만 그러할 뿐이다.

학종은 위선의 입시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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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후배의 군에 간 아들이 탈영을 했다고 해서 난리가 난 적이 있었다. 그 소동은 하루 뒤 부대에서 좀 떨어진 PC방에서 인터넷에 골몰하고 있는 친구 아들을 발견함으로써 다행히 그리 심각한 일은 아닌 걸로 끝이 났다. 참 그 녀석 특이하군 하는데 후배의 말이 요즈음 군대에선 그렇게 부대를 이탈한 병사가 PC방 같은 데서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골몰하다가 붙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했다. 참 시대가 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세대가 군부대 안에서 생활하며 주로 느낀 것은 그것이 육체적인 원인에서 오든 정신적인 원인에서 오든 몸으로 느끼는 배고픔이었다. 그래서 외박이나 휴가 나갈 땐 늘 빵과 과자, 짜장면, 불고기 등을 배가 터지도록 먹어봐야지 단단히 벼르며 부대 정문을 나서곤 했다. 지금 젊은 세대에겐 문화적 결핍이 우리 세대의 배고픔과 같은 모양이다. 하기는 먹고사는 문제가 기초적으로는 해결이 되고 지적 네트워크가 삶의 핵심적 필수요소가 된 인지자본주의 시대가 아닌가?

젊은 세대에게 문화적 결핍이 우리 세대의 굶주림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면 학교교육은 우리 세대보다 젊은 세대에게 더 근본적 의미를 가질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 일정 수준의 학교교육과 그를 통해 습득한 기초학습능력이란 못 갖춰도 살아가는 데 결정적 지장은 없는 것이었지만, 젊은 세대에겐 굶주림이 우리 세대에게 그러했듯이 정상적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장애가 된다. 그런데 우리의 학교교육은 과연 이러한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걸맞게 변화해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일까? 양적으로만 본다면 대학 진학률이 70%를 넘고 대다수 학생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있고, 매년 엄청난 숫자의 박사가 쏟아져 나오고 있으니 우리의 학교교육은 인지자본주의 시대에 맞는 외양을 갖추고 있는 듯싶다. 하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무분별하게 양적 팽창에만 몰두하던 산업화 시대의 교육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 있지 않다.

우선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학교교육이 문맹에 가까운 학생도 등록금을 내고 출석만 잘 하면 무난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참 신기한 시스템이라는 점이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에 대해 국가 수준에서 한 번도 평가하는 일이 없고, 9년간의 의무교육을 시행하고 있는 국가가 학생들의 기초학습능력에 대해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다. 최소한 10년간의 국민 공통교육과정이 끝나는 고1 말에 국민 공통교육과정에 대한 국가 수준의 졸업자격 고사라도 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통과를 못하는 아이들에게 고2, 3에서 별도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졸업자격 고사 응시 기회를 1~2회 더 주어 최대한 기초학습능력을 갖추도록 책임을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국가가 자기 할 일을 확실히 하면 대입제도를 둘러싼 혼란과 갈등도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고1 말의 졸업자격 고사를 대학입학자격 고사를 겸하도록 하여 ‘수능 1’로 하고, 고3 말에 고2, 3의 진로선택 교육과정에 대해 ‘수능 2’를 보도록 하고, ‘수능 2’는 미래 역량을 물을 수 있는 서술형, 논술형 문항을 도입하되 학생이 응시할 수도 있고 응시하지 않을 수도 있는 선택형으로 하면, 대학 학생 선발을 대학 본고사를 금지하는 선에서 대학 자율에 맡겨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5~6년 전 혼자서 심리학을 공부하다가 신문에 심리상담사 자격증 시험 광고가 나왔기에 흥미가 생겨 시험을 보았다. 시험 교재를 사서 한 달간 공부해 보았는데 2급 심리상담사와 아동심리상담사 자격시험에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다. 나는 이건 1차 시험이고 이제 교육도 받고 장기간 실습도 한 후 테스트를 해서 자격증을 주겠거니 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느 날 우편으로 자격증 두 장이 배달되어 왔다. 허망하게도 그것이 끝이었다. 사기당한 것 같은 느낌과 함께 국가가 이렇게 자격증에 대한 질 관리를 안 하면 심리상담을 받는 사람들이 당연히 상담자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 학벌을 따질 수밖에 없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심리상담사 자격증보다는 유수한 대학의 졸업장에 대한 신뢰도가 훨씬 높을 테니까. 국가의 각종 자격증에 대한 질 관리의 허술함이 우리 사회가 실력 위주의 사회로 나가지 못하고 학벌사회에 머물게 되는 한 이유가 아닌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이것은 직업계고와 관련된 자격증도 마찬가지다. 정말 고졸자 취업을 늘리고 싶다면 그 자격증들이 현장에서의 실력 발휘를 담보할 수 있도록 질을 관리하고 직업계고 교육의 질을 높여야 한다.

그렇다고 이른바 일류 대학이라고 교육의 질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른바 우리나라 일류 대학의 국학 전공 대학원에서 교수가 되려면 미국 유학을 해서 박사학위를 받아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히 떠돌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박사학위에 대한 신뢰도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대학교육의 질 관리가 얼마나 허술한지를 웅변한다.

흔히 미래사회에 대비한 융합적이고 창조적인 교육을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어떤 새롭고 기발한 정책이나 제도에 의해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생겨날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개혁이란 것은 그렇게 단절적인 게 아니라 바이올리니스트가 오랜 반복적 훈련을 통한 숙련의 바탕 위에서 비로소 자기만의 창조적 연주를 해내듯이 우선은 기왕의 것에서 질적으로 최선의 것을 만들어내는 매우 지루하고 고된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개혁을 원한다면 가장 먼저 현재 있는 자격증들의 자격부터 물어야 한다.

<김진경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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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화 교육을 근간으로 한 근대학교의 시효 만료를 알리는 신호가 뜬 지는 한참 되었다. 서구에서는 50년 전, 한국 사회에서는 30여년 전부터 빨간불이 깜박이기 시작했다. 문제가 일찍 대두된 서구에서는 개혁의 청신호도 일찍 나타나고 있지만, 그 신호체계를 한국 사회에 이식하는 일은 간단치 않다. 교육 문제는 정치, 경제, 사회 문제와 맞물려 있어 사회 구조가 함께 바뀌지 않는 한 해결할 수 없다. 

학교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개인과 공동체가 다르다. 개인은 문제가 생겼을 때 학교를 떠나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있지만, 공동체로서는 학교를 버리는 것이 해결책이 될 수 없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릴 수 없는 것과 같다. 타고 가면서 차를 수리하는 수밖에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칼 포퍼의 피스밀(piecemeal) 전략이 현실적인 접근이다. 한걸음 한걸음 개선해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달리는 차를 수리하는 제도개혁은 고도의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개혁이 번번이 실패하는 이유는 개혁 대상이 맞대응을 하기 때문이다. 사교육업체들, 부모들, 대학들, 교장들, 교사들…. 저마다 자신의 이해관계에 근거하여 맞대응을 한다. 부동산 정책이 실패하는 것도 업자들과 투기 수요자들이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가면서 맞대응을 하기 때문이다. 피스밀 전략이 실패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처음에는 반짝 효과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곧 도루묵이 되고 만다.

맞대응으로 빠져나갈 수 없게 외통수로 몰아야 한다.

부동산의 경우 공급 물량을 늘려 통제력을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는 정부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일이다. 저소득층을 위한 임대아파트만이 아니라 중산층을 위한 임대아파트도 공급해야 한다. 통제력을 확보한 다음 보유세나 분양가 공개 같은 정책을 보조수단으로 쓰면 아파트 값은 어렵지 않게 잡을 수 있다. 손자병법식의 묘수보다 오자병법식의 압도적인 힘의 우위로 밀어붙여야 한다. 통제력 확보가 우선이다.

교육 분야도 비슷하다. 강남 3구의 아파트 값이 뛰는 것과 강남 8학군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다. 교육 문제와 부동산 문제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단기 대책으로는 강북에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학군을 만들고, 동시에 그곳에 아파트를 충분히 공급해야 한다. 수시입학제를 확대하면서 사교육 수요가 생겨나지 않는 대입 평가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대학과 사교육업자들, 학부모들이 담합하여 그들만의 리그를 펼치지 않도록 정부가 통제력을 발휘해야 한다. 

장기 대책은 교육의 패러다임,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다. 학력으로 임금을 차별하는 사회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목수가 되고 싶은 아이는 그에 맞는 교육과정을 밟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일자리가 점점 줄고 평균수명은 늘어나는 만큼 20대 초반에는 누구나 대학에서 교양을 습득할 수 있게 국가가 학비를 지원하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이를 청년에게 주는 기본소득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학력 차별을 없애거나 아예 학력의 차이를 없애는 것이다. 전문 연구를 할 사람만 석박사 과정을 밟게 하면 된다.

초·중·고와 대학은 교양교육에 주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교양교육의 핵심은 맥락을 파악하는 힘과 커뮤니케이션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부분을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볼 줄 아는 것, 다양한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할 줄 아는 것이 교양이다. 교양 있는 사람은 가짜뉴스에 속지 않는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이유는 우리 사회 전반의 교양 수준이 낮기 때문이다. 교양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시민교육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곧 공교육의 역할이다.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을 기르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고 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일본의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생각하는 힘, 살아가는 힘의 본질 또한 맥락을 읽고 소통할 줄 아는 데 있다. 일본과 한국의 교육이 그 방향으로 제대로 바뀐다면 내부의 갈등도, 한·일 간의 갈등도 줄어들 것이다. 공교육은 공동체의 시민을 기르는 교육이어야 한다. 자신이 속한 작은 집단의 이해관계를 넘어서 전체의 관점에서 생각하고 의사결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을 기르는 것이 공교육의 방향이어야 한다.

<현병호 교육잡지 격월간‘민들레’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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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학교를 그만둔 초등 저학년 연령대 어린이들을 취재하며 알게 된 그들의 상황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학교를 그만두면 왜 모든 배움과 돌봄은 오롯이 부모의 몫으로 돌아가는가. 아이는 왜 고립되어 친구를 그리워하고,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가. 학교를 그만두는 일이 낙오와 도태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기죽지 않고 당당하기란 부모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학교 말고도 어린이들이 갈 수 있는 장소나 프로그램을 연결하려고 백방으로 수소문했으나 쉽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장소를 제공하고 싶다는 곳은 몇 군데 있었지만 그보다 필요한 일은 일단, 각자 흩어져 힘들어하고 있는 학교 밖 어린이 가정을 한데 모으는 일이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구나 싶어 급작스레 만남을 제안했다. 숲속공원에서 한적한 평일에 만나자고. 서울, 경기, 강원에서까지, 온라인에 공지한 지 일주일 만에 아홉 가정이 모였다.

아이들이 어울려 노는 사이 부모들은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이 학교 밖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척 다양했다. 몸이 아파서 학교에 가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공교육에 문제의식이 있어 입학을 하지 않은 가정도 있었다. 교사와의 관계, 혹은 또래와의 관계 때문에 학교를 잠시 쉬고 있는 가정, 학교에 다니고 있는 상태로 모임에 참석한 가정도 있었다. 대안이 없어 당장 그만두지는 못하지만 아이의 개성과 자유로움을 보장해주고 싶어 차츰 학교 밖의 길을 준비해보고자 했다.

세상은 이들을 주류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치부하지만, 사실 이들은 ‘적응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가 있지만 ‘남들도 다 그러니까’ 눈감고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익숙하고 당연한 것에 질문을 던지고, 그 물음에 답을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들이 아니라, 사회화라는 이름으로 질문을 거세하고 한 인간의 고유함을 획일화하는 학교 시스템일 것이다.

그날, ‘친구와 뛰어노는’ 평범한 일에 목이 말랐던 아이들은 거침이 없었다. 처음 만나 친해지려면 놀이 프로그램이라도 마련해야 하나, 남자아이들이 훨씬 많은데 여자아이들이 못 어울리면 어쩌나, 지레 했던 걱정들이 무색했다. 숲속을 뛰어다니고, 모래밭을 뒹굴며 서로의 몸을 파묻는 일에는 이름도, 나이도, 성별도 필요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들과 얘기 좀 나눠보았냐는 엄마의 말에 한 아이가 이렇게 답했다 한다. “우린 노는 게 대화야.”

매달 만남을 이어가기로 결정하고 나자, 모임의 방향에 대해 부모들은 보태고 싶은 말이 많았다. 혼자 하던 고민을 함께 헤쳐 나갈 것에 대해 기대도 크고,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생각하는 배움의 종류와 형태에 대해서도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선뜻 이 모임에 어른들의 말을 얹지는 않기로 했다. 오직 아이들 중심으로 만남을 이어가자고 뜻을 모은 가운데, 아이들은 벌써 언제 다시 만나느냐고 엉덩이를 들썩이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부모들이 일일이 함께 다니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아이들의 성장에는 어른들은 개입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가 있게 마련이며, 학교를 그만둔 모든 어린이들의 부모가 아이와 함께 다닐 수 있는 형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풀어가야 할 숙제는 많지만, 일단 같은 고민을 하는 친구들을 만난 것에 기뻐하며 호기롭게 학교 밖 어린이들의 네트워크는 첫걸음을 뗐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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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여러분들의 혈세와 등록금으로 운영되는 대학의 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가져주십사 하는 마음에서 씁니다. 고교 교육을 망치고 불평등을 생산하는 기지처럼 됐다는 한국 대학도 스스로 개혁할 의지나 힘이 부족합니다. 송구스럽습니다. 

한국 대학들이 말기 질환을 앓고 있다는 진단을 받은 지는 벌써 10년이 넘은 듯합니다. 오래전부터 진작 필요했던 것은 실천이고 조직이요, 또 실제로 적지 않은 분들이 양심과 밥벌이를 걸고 재단과 또 ‘이명박근혜’ 정권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구체적인 진단도 처방도 거의 나와 있는데, 교수들 자신의 보수성과 안일함, 또 사학재단과 기득권의 여전한 강고함 때문에 어둡습니다. 또 자칭 ‘촛불혁명정부’ 아래에서 나아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많은 이들이 김상곤 교육부총리와 문재인 정부 자체에 실망한다 하는 거겠지요. 사학법·고등교육법의 개정, 공영형 사립대, 국립대 네트워크, 대학 비정규직 철폐, 총장 직선제 도입 등 대학 민주주의와 공공성뿐 아니라 국제적 경쟁력(또는 탁월성)을 위해서도 실로 많은 과제가 있지만, 오늘은 대학평가 문제에 대해서만 말씀드릴까 합니다.

지난주에 또 중앙일보가 대학평가 결과라는 것을 발표했던데요, 기사를 보니 ‘대학 적폐’의 핵심 중 하나가 바로 이 대학평가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한국의 대학평가는 하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주도합니다. 평가를 통해 대학을 ‘호갱’으로 만들어 잇속을 차리고, 대학서열화로 사회 전체의 줄세우기를 획책합니다. 진정한 학문과 교육의 관점은 단 1도 관련이 없는 그들 식의 학벌 계급투쟁처럼 보입니다. 그럼에도 대학들은 그 권세와 언어폭력이 두려워 거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런 대학평가의 속내는 허당이고 실로 표피적입니다. 이번에도 보니 대학평가 관련 기사들에는 ‘가짜뉴스’에 가깝다 해도 될 게 적지 않습디다. 기본 사실관계조차 틀린 것도 여러가진데, 근본적으로 신문사 대학평가에 사용되는 지표가 의심스럽고 부실합니다. 예컨대 가장 중요한 지표의 하나인 교수의 1인당 발표 논문 수 같은 것이 결코 신뢰할 만한 게 아닙니다. (재)임용·승진 등을 미끼로 삼아 대학당국들이 휘둘러댄 거센 채찍과 당근 때문에, 지난 10여년 사이 ‘쪼개기’ 등 교수들의 논문 양산술은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만약 1명의 인문사회과학 쪽 교수가 1년에 (분야별 차이는 있죠) 4편 이상의 단독 저술 논문을 생산했다면, 그건 비정상적인 압력과 불안·초조 상태에서 쓰인 것일 겁니다. 물론 그 논문들의 질도 별로 믿을 것이 못 되겠죠. 국제화 지표 따위도 눈 가리고 아웅하는, 이제는 외려 해로운 것들입니다. 교육부·과기정통부 합동 조사 결과에 따르면 와셋 같은 해외 ‘가짜’ 학회에 참가했던 교수·연구자는 1317명(5년간)입니다. 그들은 왜 멀리 비행기를 타고 그런 데 논문을 발표하러 갔을까요?

한편 중앙일보 평가에는 학과를 등급 매긴 것도 포함돼 있습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는 소위 주요 대학들에서도 학부에서 폐과·폐강 현상이 이어지고 대학원이 ‘정원 미달’ 상태인지 오래됐습니다. 그런데 등급 평가라니 도토리 키재기 같은 일입니다만, 이번에 평가를 받은 학과들 중에는 일부 교수들의 학생 인권 침해, 표절, 성폭력 문제 등으로 풍비박산·아비규환이 된 곳들이 있습니다. 그 학과들과 일부 문제 교수들에 대한 대학당국의 처리를 보면 ‘아, 정말 대학은 갈 데까지 갔구나’ 하는 탄식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대학평가에는 그런 소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럴싸하게 만든 정량지표와 허장성세 ‘몇 등’은 이제 대학의 참담한 현실을 은폐하고 더 확대합니다. 대학이 제정신을 차려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는 데 기여하기를 바라는 분들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 대학평가에 눈을 주시지 말기 부탁합니다. 내가 나온, 또 자식이 다니는 대학이 그런 평가에서 몇 등이더라는 ‘부심’을 갖는 분들은 설마 여기는 없겠지요?

사실 이미 교수협의체나 고려대 총학을 위시한 학생들이 신문사 대학평가를 거부한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은 중앙일보 평가를 거부한 대신 해당 분야 외국 학자들로 패널을 만들어 제대로 된 자체 정성평가를 받은 적이 있답니다. 진짜 교육과 학문의 발전이 목적이라면 그런 전문적이면서도 공공적인 평가가 필요한 것입니다.

대학들이 마지못해 신문사 대학평가에 응하거나 ‘우리가 몇 등’이라며 나대더라도 한편 갑질에 못 이긴 탓이고 다른 한편 용렬한 학벌주의자들과 사학재단이, ‘타자의 인정’에 주린 배를 채우고 또 학내권력의 도구로 삼기 위해 하는 일이라는 점을 아시고 꾸짖어주시기 바랍니다. 그 때문에 비정규직 교수들도 희생당하고 우리 많은 젊은 학생들까지 병들고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1960년을 묻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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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하게 적겠다. 2945만4432원. 필자의 대학 생활 영수증의 총액이다. 세부 내용을 공개하면 이렇다. 8학기 중 학자금 대출을 받은 6학기의 등록금과 생활비 대출 총액은 2953만9000원으로, 국가장학금으로 받은 150만9071원을 제하고 나면 2802만9929원의 원금이 남는다. 여기에 142만4503원의 이자를 더하면 3000만원에서 54만5568원 모자란 2945만4432원이다. 또 하나, 든든학자금은 상환기준소득(2018년 기준 2013만원)을 넘지 않는다면 원금 상환 의무는 없어도 이자가 계속 쌓인다. 그러니 내게도 3000만원이라는 고지가 머지않았다.

등록금 자체가 워낙 많기 때문에 한 번 대출을 받으면 원금을 채 갚기 전에 다음 학기에 대출을 받는 악순환이다. 300만원을 웃도는 단위로 쌓이는 원금에 아무리 낮은 금리가 붙는다 해도 20살에 첫 대출을 받아 첫 직장을 가질 때까지의 긴 시간이 지나면 액수는 모른 체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 시간은 금이라고 했던가. 시간이 지날수록 돈이 돈을 불리는 꼴을 보고나니 그 의미를 알게 됐다.

많은 등록금은 ‘결국 네가 선택한 일이잖아’란 수익자 부담 논리로 유지된다. ‘그렇게 등록금이 부담되면 왜 무리해서 대학에 갔냐’는 후렴은 ‘요즘 시대에 대학 졸업장이 뭐가 중요하냐’는 2절로 이어진다. 다시 보자. 지난 6월17일 검찰 발표에 따르면, 하나은행은 이른바 ‘S·K·Y 대학’ 출신을 채용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점수를 조작했다. 대학 졸업장과 서열에 따라 채용 여부를 결정한 셈이다. 더불어 비진학 청년에 대한 편협한 인식, 부실한 사회안전망으로 대학 진학 여부가 자유 선택이 아닌 사회적 억압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대학의 재정 역시 오랜 기간 수익자 부담 원칙으로 운용돼 왔다. 한 학기 수입을 정부 재원이 아닌 민간 재원에 의지하고 있다보니 고등교육비 부담은 공공보다 개인의 몫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부실 대학 명단에 오르면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학재단이 아니라 학생이 학자금 대출을 이용하지 못함으로써 책임을 진다. 대학 공공성에 대한 고민 없이 민간에게 책임을 떠넘기다보면 교육격차에 의해 사회 양극화가 심해질 뿐이다. 이제는 콩 심은 데 콩 나지 개천에서 용이 나지는 않는다.

올해 교육부는 고등교육 예산을 지난해 9조4987억원에서 4550억원 증가한 9조9537억원으로 편성했다. 실효성에는 의문이 들지만 등록금에 대한 부담을 호소할 때마다 정부도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곤 했다. 처음엔 학자금대출제도의 도입이었고, 다음은 든든학자금제도의 신설이었다. 취업난과 저임금에 맞물려 연체율이 늘자 최근에는 국가장학금 확대와 지자체의 학자금 대출 이자 지원사업으로까지 확대되었다. 그렇지만 이는 등록금을 낮추는 근본적 대안이 아니라 당장에 필요한 보조 수단일 뿐이다.

대학 공공 기숙사 확충도, 학교 앞 임차인으로서의 주거권 보장도, 단시간 일자리 질의 향상도 해결하지 못하는 정부가 고등교육비마저 개혁할 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은 ‘폭탄 돌리기’에서조차 만지기 싫다며 나 몰라라 하는 꼴이지 않나. 내일을 버리고 오늘만 살게 하는 대출형 정책은 버릴 때가 되었다. 이제는 진짜 반값등록금을 향한 전반적 기조 수정을 바탕으로 대학 공공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와 대학 재정 확보에 대한 논의가 절실히 필요한 때다.

<민선영 | 청년참여연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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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로서 그리고 현직 영어교육자로서 현재 중학교 3학년이 치를 2022년도 대입제도개편안과 관련한 교육부 발표에 우려를 감출 수 없다.

2014년부터 학교 교육 정상화를 위해 수능 절대평가제도가 추진되었지만, 일부 과목만 도입된 절대평가는 본래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18학년도 수능에서 기초과목 중 영어만 절대평가 방식으로 시행됨으로써, 기초과목 간 학력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가 현실로 드러났다. 국어와 수학은 이전과 같이 상대평가로 시행되었고 1등급과 2등급이 4%와 7%로 유지됨으로써 변별력을 갖춘 반면, 영어는 절대평가 실시로 1등급 10.03%, 2등급 19.65%로 평가의 변별력을 상실했다.

지난달17일 충남 공주시 한일고등학교에서 고3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이날 교육부는 '2022학년도 대학입학제도 개편방안 및 고교교육 혁신방향'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국어와 수학에 비해 1등급과 2등급 누진 비율의 차이는 3배 가까이 된다. 앞으로 이와 같이 과목별로 다른 방식의 평가방법을 지속하면,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 동일 기초과목군으로 분류된 국어, 영어, 수학의 과목 간 기초학력의 불균형이 심각해질 것이다. 이미 올해 많은 주요 대학에서 수능 영어 절대평가의 결과에 대비하여 수능 영어 반영 비율을 낮추고, 상대적으로 국어, 수학, 탐구 영역의 비중을 높였다. 이는 평가방식이 기초 교과과목 간 다르면 학교 교육에서 언어, 수리, 외국어 역량의 균형이 깨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올해부터 적용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의 특징은 문·이과 구분 없는 융합형으로 선택과목의 확대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학생들이 기초과목의 균형 잡힌 능력의 토대 위에서, 개인적 선택의 기회를 확대하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동일 기초과목군에 다른 평가방식을 적용한다면, 학생들은 자신의 관심과 진로에 의해서라기보다는 평가방식에 따라 과목별 공부의 가중을 결정할 것이고, 이는 곧 기초학력의 불균형을 낳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순발력, 지구력, 근력과 관련한 기초체력을 각각 평가할 세 개의 체력평가 종목이 있는데, 두 종목은 경쟁에 의한 순위로 10등까지 1등급으로 정하여 상대평가로 측정하고, 다른 한 종목은 타당한 기준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1등급이 30명 정도 나올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한다고 치자. 학생들은 절대평가 종목보다는 상대평가 종목에만 관심을 두고, 자신들의 기초체력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보다는 평가방식에 신경을 더 쓰게 될 것이다.

이런 평가방식의 차이는 결국 순발력, 지구력, 근력 등 기초체력 능력의 균형이 깨지는 원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초과목과 관련한 평가에서 가장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동일한 평가방식을 적용하는 것이다.

수능은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전체 교육과정을 통해서 배운 전체 교과의 역량을 균형 있게 평가하면서도 사탐과 과탐 과목을 통해 학생의 개별 역량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초과목군의 교과를 다른 방식으로 평가하는 것은 학생들의 기초 역량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놓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이미 2018학년도 수능에서 이런 문제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초과목군의 다른 평가방식이 장기간 지속된다면, 학생들의 기초학력 불균형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영어교육의 위축과 부실로 인하여 일반 학생과 특권층 학생 간 영어 실력 격차가 더욱 커지고 사회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미래의 국가경쟁력이 떨어지는 주요 요인이 될 것이다.

이런 식의 대입 시험방식의 개편과 결정은 우리가 바라는 인재 양성의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 취지에 맞게 기초과목 간 교과의 핵심역량을 균형 있게 키우려면, 본래의 취지대로 관련 교과에 동일 평가방법을 적용하는 것이 절대적이다. 이러한 문제점을 알고도 동일 평가방식 적용을 미루는 것은, 그 피해를 지속적으로 미래세대에 전가하는 것이다. 아울러 현시점에서 영어를 포함한 모든 절대평가의 경우, 학생의 본질적 역량을 측정할 수 없는 모호한 기준의 쉬운 수능이 아니라, 기준이 명확한 절대평가제도의 도입이 절실하다. 이것만이 공교육이 무너지지 않고, 균형 잡힌 기초학력 인재를 양성할 수 있는 대안이다.

<홍선호 서울교대 교수 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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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이 지난 4일 강서 특수학교설립비상대책위원회, 김성태 국회의원과 함께 강서 특수학교(서진학교) 설립에 협력하기로 합의했다. 합의는 장애인 학부모들이 특수학교 설립을 위해 지역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는 ‘무릎호소’ 사건이 발생한 지 1년 만에 이루어졌다. 이로써 주민들의 반대로 난항을 겪어온 서진학교 신축이 본격화하게 됐다. 특수학교 설립을 둘러싼 갈등이 주민과의 소통으로 해결된 것은 환영할 만하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가운데), 손동호 강서특수학교설립반대 비대위원장,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가 4일 국회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실에서 강서 특수학교 설립에 대한 합의문을 들어보이고 있다. 권호욱 기자

그러나 합의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무턱대고 박수만 칠 수는 없다. 서울시교육청이 발표한 ‘강서 특수학교 설립에 대한 합의문’에는 향후 통폐합되는 학교부지에 한방병원을 우선 건립하고, 옛 학교부지에 주민복합문화시설을 건립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에 적극 기여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서진학교가 들어서는 학교부지는 서울시교육청 소유여서 특수학교가 들어서는 데 법적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교육청이 주민의 반발을 우려해 지역구 국회의원의 공약사업을 지지하고 행정적으로 불필요한 ‘합의’까지 도출한 것이다. 전국장애인부모연대 등 장애학생 부모들이 “의무교육기관인 특수학교는 결코 기피시설이 아님에도 ‘대가성 합의’를 맺어 기피시설처럼 인식되게 했다”고 비판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서울시에는 2018년 8월 현재 국립 3곳, 공립 8곳, 사립 19곳 등 30곳의 특수학교에 장애학생 3789명이 재학 중이다. 장애학생들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설이다. 과밀학급, 장애학생의 원거리 통학 등으로 특수교육의 여건은 열악하기만 하다. 이런 상태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이 장애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특수학교 건립을 추진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다. 그 첫 사업인 서진학교 설립은 2002년 경운학교 개교 이후 16년 만의 일이다. 현재 서초구에는 나래학교를 신축 중이고, 중랑구에 동진학교(가칭) 신설이 예정돼 있다. 이 와중에 서진학교의 ‘합의’는 이들 학교 설립에 ‘나쁜 선례’가 될 수 있다. 주민들이 반발하면 또다시 합의를 위해 대가를 제시할 것인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도울 책임이 있다. 그 책임에는 특수학교 건립뿐 아니라 장애인에 대한 인식 개선도 포함된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있다지만, 서진학교 설립에서 보듯 님비 현상은 여전하다. 그러나 장애와 비장애는 둘이 아니다. 장애와 비장애를 차별하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특수학교는 지역사회와 함께 가는 상생 모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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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종합전형(학종)에 부정적인 학부모가 현저하게 많은 듯하다. 몰라서가 아니라 알 만큼 알기에 그런 것 같다. 왜 그럴까?

우선 학종 주창자들의 얘기와는 달리 학종이 주는 시험 부담이 엄청나게 크다. 어쩌면 악명 높았던 죽음의 트라이앵글을 넘어선다. 죽음의 트라이앵글 당시 학생들이 준비해야 하는 시험은 최대 세 종류였다. 그러나 학종은 네 종류나 된다. ①내신 ②수능(수능최저학력) ③구술면접고사 ④교과 경시대회 시험이다. 그런데 ④도 시험인가? 그렇다. 경시대회 중 영어, 수학, 국어, 사회, 과학 등의 경시대회는 명백한 시험이다. 물론 네 종류의 시험 중 2~3개만 반영하는 대학도 많다. 하지만 그것은 별다른 위로가 되지 못한다. 입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은 저학년일수록 다수의 대학을 염두에 두고 공부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학종은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입시경쟁의 영역으로 전부 편입시켰다. 그래서 학생의 모든 학교활동(봉사활동, 동아리활동, 독서활동, 진로활동, 학생회활동, 학급활동, 경시대회 등)은 사실상 입시경쟁이 되었다. 심지어는 장애우를 돕는 선한 활동조차도 이젠 입시경쟁이다. 이 많은 것들을 어떻게 잘할 수 있나? 조금 하고는 많이 한 것처럼, 부실하게 하고는 충실하게 한 것처럼 꾸미는 위선과 거짓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다. 이것만으로도 걱정이 태산인데 학부모의 근심은 학생부 기록으로도 이어진다. 학생이 아무리 활동을 많이 해도 그것이 학생부에 빼어나게 기록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일 수 있다. 그래서 이제 학부모는 아이를 담당한 교사가 학생부 작성을 뛰어나게 잘해주는 사람이기를 기도해야 한다. 어떤 교사여야 할까? 글을 잘 쓰는, 기록에 정성을 다하는 교사면 좋겠는데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아이를 위해 과장된 기록을 서슴없이 하고,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해주는 교사여야 만족할 것 같다.

최대 네 종류의 시험과 수많은 학교활동…, 이것만으로도 입시 부담이 사상 최고인데 학종은 여기에 면접과 자기소개서까지 더한다. 그리고 이것들 모두에 대한 평가가 정성평가로 이뤄진다. 학종 주창자들은 정성평가를 최선의 평가라 예찬하지만 학부모에게는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평가일 뿐이다. 결국은 입시 부담만 증가한다. 물고기의 위치가 불확실할수록 그물을 더 넓게 쳐야 하는 어부처럼 학부모도 입시의 그물을 더 넓게 펼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입시를 돈과 시간이 부족한 학부모가 감당할 수 있을까? 순박한 학부모가 위선적 학부모를 이길 수 있을까? 대답은 자명하다. 대다수 학부모에게 학종은 부자에게 유리한 금수저 전형이고, 얼굴 두껍고 속 시커먼 사람에게 유리한 후흑학 전형일 뿐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학종 주창자들은 학종이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불러왔다고 내세운다. 좋은 일이긴 하다. 하지만 학부모는 이제 그런 활동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제 예전의 낭만적 순수성을 잃어버린 입시경쟁으로서의 힘겨운 활동들이다. 또 학종 주창자들은 학종으로 인해 학교 수업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체적으론 아주 작은 변화일 뿐이다. 또 학종의 근본적 한계로 인해 앞으로도 그 변화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작은 변화나마 이루어낸 교사의 고군분투는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 지나친 과장과 일반화는 현실을 왜곡한다. 

학부모에게 학종은 괴물일 뿐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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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한국 교육에서 가장 심각하게 무너져 있고, 그 때문에 한국 교육이 실패할 수밖에 없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심 밖에 놓인 교육영역을 들라면 나는 서슴없이 대학원 교육과 영·유아 교육 분야를 들겠다. 지난 산업화 시대에는 새로운 지식은 서구에서 수입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산업계가 요구하는 고급인력의 최종 학력 수준이 대체로 대졸을 넘지 않아 대학원 교육은 과외의 것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영·유아 교육 분야 역시 산업계의 인력 양성 요구와 직접적 연관성이 약하고 전반적으로 생활수준이 높지 않았기에 과외 영역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다매체와 사이버 세계가 일상생활에 깊이 들어오고 인공지능 자동화가 급진전되는 이른바 인지자본주의 시대에는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인지자본주의 시대에는 일상생활에서 이른 시기부터 다매체와 사이버 세계에 노출되므로 영·유아 교육 분야가 교육의 입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경제·사회적 격차가 심해지고 더 나아가 양극화되고 있어 가정환경에 따라 아이들이 향유하는 돌봄과 문화 수준의 차이가 크다. 이는 출발점에서의 인지능력과 학습 의욕의 차이로 나타나고 결국 출발점에서의 근원적 교육 불평등을 만들어낸다. 뇌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 뇌의 90% 이상은 영·유아기에 형성된다고 하니 이 출발점에서의 근원적 불평등은 이후 극복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렇기에 사회적 격차를 줄이고 최소한의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여 한국 사회가 지속가능하도록 구심력을 형성한다는 공교육의 근본 취지를 포기하지 않는 한 영·유아 교육 분야는 가장 우선적으로 국가재정이 투여되어야 할 영역 중 하나다.

하지만 한국은 영·유아 교육에 대한 요구가 확대되어 국가재정을 집중 투여해야 할 시기에 투자를 회피하고 영세한 민간자본을 끌어들여 문제를 해결했다. 그 결과 영·유아 교육의 균질성과 공공성이 담보되지 못하고 교육의 출발점에서의 불평등이 심각해졌다. 게다가 영세한 민간 교육기관 참여자의 이해관계가 너무 복잡다기하게 얽혀 있어 이제는 국가가 재정을 투여하여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도 해결하기가 어려운 상태다. 사회적 합의를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영·유아 교육 영역은 공공성을 높이기 위한 획기적 개선이 어렵다.  

그래도 영·유아 교육은 대학원 교육에 비하면 형편이 낫다. 우리나라의 지방 대학원은 이미 전반적으로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서울 유수 대학의 대학원도 직접적 효용성이 약한 기초학문이나 기본 콘텐츠 영역은 무너져가고 있다. 국가가 대학원 교육과 학문 연구에 지나치게 시장원리를 적용한 결과일 것이다.

친구 조카가 아인슈타인이 나온 스위스 대학에 유학하여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스위스에 남아 은행에서 일하다가 지금은 로펌에서 일하고 있다. 국내에 들어오면 교수가 되는 것 이외엔 길이 없는데 그게 쉽지 않기 때문이었다. 언뜻 물리학 전공자가 은행이나 로펌에서 일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수 있는데 세계를 상대로 하는 규모의 은행이나  로펌에서는 물리학 전공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기초학문이나 기본 콘텐츠 영역은 중국같이 자체 인구가 많거나 세계시장을 상대로 하는 나라에서는 시장에서 성립이 가능하다. 하지만 한국과 같이 시장 규모가 작은 나라에서 기초학문이나 기본 콘텐츠 분야는 국가가 재생산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성립 자체가 어렵다. 그런데 김영삼 정부 5·31 교육개혁의 특징 중 하나는 고등교육에 시장경쟁 개념을 끌어들이는 것이었고, 지난 이명박 정부 이래 이러한 경향은 극단화되었다. 당연히 기초학문 영역, 기본 콘텐츠 영역이 급격히 쇠락하고 대학원 교육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근래에는 한국문학 연구 등 한국학 분야마저 대학에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미국에 가서 학위를 받아 와야 한다는 소리가 들리니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기초학문 영역, 기본 콘텐츠 영역이 무너지면 한국은 영원히 원천기술이나 원천 콘텐츠를 생산하지 못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이 크다. 한국의 대학에 투여되는 연구·개발(R&amp;D) 예산은 연간 5조6000억원 규모로 적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시장 방식으로 개별 교수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직접적 효용성이 큰 분야에 집중되는 문제도 있고 학문 연구의 재생산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효과도 별로 없다. 우선은 한국의 개별 대학이 대학원을 제대로 발전시키기에는 규모가 너무 작은 만큼 적어도 광역권 단위로 거점 국립대 중심의 통합 대학원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게 시급해 보인다. 그리고 학문 연구 인프라가 잘 갖추어져 있는 일본 등을 밴치마킹하여 필요한 학문 연구 인프라를 갖추어 나갈 필요가 있다.

인지자본주의 시대의 기준에서 본다면 한국 교육은 입구와 출구가 무너진 집이다. 입구인 영·유아 교육이 무너져 불평등하게 기울어지고, 출구가 무너져 빠져나갈 곳이라고는 대기업, 공무원 등 좁은 구멍 몇 개뿐인 집안에서 참 절망적인 경쟁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노작교육이라는 입구와 장인적 기술교육의 출구는 아예 제대로 만들어진 적도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절망적인 경쟁만을 교육문제라고 붙들고 있을 게 아니라 입구와 출구를 제대로 세우고 창문도 시원시원하게 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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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2022학년도 대학입학제도 개편방안이 발표됐다. 핵심은 수능 전형 비율을 30% 이상으로 확대하도록 대학에 권고하고, 학생부종합전형의 공정성을 제고하는 것이다. 교육정책의 결정 과정에서 국민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에서 새로운 정책 실험이 긍정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특히 대학입시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공정성과 신뢰성에 맞추어져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내용 중에서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중장기 고교교육 혁신 방안이다. 우리의 관심을 아이들의 미래, 교육의 미래로 돌릴 필요가 있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도래, 급격한 학령인구의 감소 등 교육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는 교육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함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이제 입시 위주의 경쟁적 교육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교육, 개별 학생의 특성에 맞는 맞춤형 교육, 보다 유연한 교육체제의 구축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런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고교학점제 도입의 구체적 로드맵이다.

고교학점제는 현 정부의 대표적인 교육공약이다. 지난해 11월에 교육부가 ‘고교학점제 추진방향 및 연구학교 운영계획’을 발표한 후 연구·선도학교를 지정해 운영하고,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진로 희망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고 개별화된 교육과정을 제공함으로써 학생의 잠재력을 구현하고, 수업·프로젝트 수업 등 학생 참여형 수업을 활성화하는 제도다. 하지만 학교 현장의 반응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취지는 좋지만 고교 내신 평가 개선, 대입제도와의 연계가 전제되지 않는 한 고교학점제가 제대로 시행되기 어렵다는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발표된 고교학점제 로드맵은 여러 측면에서 기대감을 높여준다. 학생의 선택권을 고려한 수능 과목 구조 개편, 진로선택과목에 대한 절대평가 등의 계획을 담아, 고교학점제를 실행할 기반이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 학생의 과목 선택권 확대 등을 지원하는 2015 개정 교육과정이 현장에 안착하도록 하는 한편, 단계적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교육 현장이 변화하고 대응할 시간을 거쳐 2025년에 본격 시행됨을 예고한 것이다.

고교학점제를 중심으로 미래에 대비하는 유연한 교육제도를 마련하려면 좀 더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교육 혁신의 빅 픽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우선 학교제도를 더욱 유연화하는 것과 함께 교사의 역할 변화가 필요하다. 지식의 전달자에서 학습의 멘토나 코디네이터로서 교사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교원 양성, 임용·연수 제도 개선이 뒤따라야 한다. 교사의 업무 경감과 학교 문화 개선도 이루어져야 한다. 궁극적으로 학생의 고교 교육과정 이수 경로와 학습 경험이 대학 입학 과정에서 고려될 수 있도록 하는 대입제도의 개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고교학점제가 현장에 정착하려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암기위주 교육, 치열한 경쟁을 유발하는 상대평가에 매몰된 학교 현장을 정상화할 기폭제가 될 정책임에는 분명하다. 고교 서열화를 해소하기 위한 고교체제 개편 정책과 맞물려, 학교 유형이나 지역에 관계없이 학생의 적성과 소질을 살리는 교육 여건이 조성될 것으로 기대된다.

<정제영 | 이화여대 교수 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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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방학이 끝나간다. 이번 방학에도 초등 저학년 자녀를 둔 맞벌이 부모들은 아이들의 ‘밥’ 때문에 속을 끓였다. 학교에서 방과후교실을 운영하지만 방학 중엔 급식이 제공되지 않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아이를 점심밥 챙겨주는 학원에 보내거나, 아파트 상가 식당에 월식을 끊는 등 아이들의 끼니를 해결할 방법을 각자 찾아야 했다.

저소득층 아이들도 학교급식이 끊긴 방학에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쉽지 않다. 한 끼당 4000~5000원가량 지원되는 급식비로 선택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편의점 도시락 정도다. 식당에 가더라도 급식카드 사용이 가능한지부터 물어야 하는 상황은 아이들을 주눅들게 만든다.

아이들의 ‘밥’은 이 사회의 부실한 돌봄 시스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예다. 식사란 끼니를 때우는 것, 배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는 행위다. 아이들이 ‘눈칫밥’을 먹는 사회는 기본적인 생존을 안심할 수 없는 사회, 서로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사회를 뜻한다.

2013년부터 일본에는 ‘어린이식당’이 생겨났다. 처음 어린이식당이 생긴 곳은 도쿄의 한 채소가게였다. 동네에 제때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주인이 가게 한쪽을 활용해 저녁식사를 제공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가정 해체 등으로 밥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아동이 늘고 빈곤아동대책법이 제정되면서 어린이식당은 일본 전역에 자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빵집, 카페, 마을주민센터, 생협, 개인주택 등 현재 2200여곳에서 열고 있는 어린이식당의 연간 이용자 수는 100만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기존의 유휴공간을 활용해 사회에 필요한 가치를 재생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확산성이 높다. 엄마들과 지역 상인 등 주민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참여하며 민과 관의 협력으로 사회적 돌봄을 회복하고 있다는 점은 더욱 눈여겨볼 만하다.

‘한 끼 식사’를 목표로 시작했지만 일본의 어린이식당은 단순한 식사 제공을 넘어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아이들은 하교 후 안심하고 찾아갈 곳이 생겼다. 대학생 자원봉사자들이 찾아와 숙제도 봐주고 함께 놀아주면서 건강한 식사와 함께 안전한 돌봄도 가능해졌다. 홀로 사는 노인들, 늦게 퇴근한 직장인, 육아에 지쳐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힘든 엄마들이 찾아오기도 하는 등 이곳을 이용하는 층은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

2년 전, 잡지 ‘민들레’에 일본의 어린이식당 기사를 싣고 나서 제주시 독자들이 아파트 단지에 있는 육아 공간을 활용해 어린이식당을 시작했다. 최근엔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도 어린이식당을 열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한 달에 한 번 마을특화사업으로 추진하는 이 어린이식당은 구의 예산과 지역사회 시민들의 자원봉사와 후원으로 꾸려지고 있다. 올해 3월 문을 열었는데 매번 50~60명의 어린이와 청소년, 주민들이 이용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금세 겨울방학이 돌아오고, 부모들은 다시 아이들의 돌봄을 고민할 것이다. 대통령 직속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돌봄 공백을 막기 위해 초등학교 저학년의 수업시간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지만, 당사자인 아이들 입장에서 정말 필요한 돌봄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일본처럼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어린이식당이 생기면 어떨까. 서로의 끼니를 걱정해주고, 바쁜 부모를 대신해 동네 아이들을 함께 돌보면 어른들의 삶도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싶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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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상경한 금요일, 늦은 오후였다. 을지로 빌딩가의 한 카페에서 우유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논문을 수정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자리에 앉았다. 단정한 정장 차림에, 얼핏 보아도 사회초년생 티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어려 보인다’ 혹은 ‘실제 어리다’와는 결이 조금 다른, 풋것의 느낌. 창밖을 보며 나란히 앉도록 설계된 자리인데 굳이 옆사람을 의식했던 이유는 그녀가 커피를 받아오자마자 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공공장소에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만큼 마음을 다친 것일까 했다. 아무리 생면부지라지만 울고 있는 사람 곁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핥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 시선을 내려뜨린 채 교정지 페이지만 타닥타닥 넘겼다. 휴대폰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그녀는 이윽고 통화버튼을 눌렀다. “저… 부장님 혹시… 죄송하지만요. 죄송한데 바꿔주시면… 그러면 팀장님은 퇴근… 예? 아니,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엿들으려던 것은 아니었으나 듣게 되었다. 애써 귀를 닫으려 해도 안되었다. 얕은 호기심인 줄 알지만 궁금함이 일었다. 무슨 일일까. &lt;미생&gt;과 같은 비정규직의 아픔일까, 아니면 직장상사에게 모진 말을 들은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사무실에서 집단따돌림을 당하거나 모종의 부당한 처우를 받았을까.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이런저런 추정을 해보았다. 어느덧 옆자리에서는 어깨의 들먹거림이 잦아들었다. 그녀는 가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내더니 메이크업 도구들을 집었다.

먼저 눈가에 섀도를 덧바른 후 연필처럼 생긴 것으로 세심하게 선을 그려 넣었다. 퍼프로 두 뺨을 팡팡 두드리고 입술에 다시 색을 입혔다. 방금 울었던 사람이 맞나 싶도록 집중해서 말이다. 그 모습을 곁눈질하던 나는 우연히 보았다. 수정작업을 하다 말고 그녀가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아주 잠깐, 표정을 연습하듯 생긋 웃어보는 것을. 이번에는 내 쪽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까 흐느끼던 얼굴을 볼 때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종래의 호기심이 연민으로, 연민은 이내 동질감으로 옮겨갔다. 눈화장이라고는 해본 일이 없고 손거울도 갖고 다니지 않으면서 왜였을까. 그녀에게 불가해한 동병상련을 느꼈던 것이다. 

어느 소설 초반부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눈물진 눈가를 정리하러 간 여자친구가 거울 앞에서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약간 벌린 채 마스카라를 칠하”는 장면을 주인공이 문틈으로 보게 된다. 숙련된 장인처럼 그 일에 몰두하는 표정이 마치 “조금 전까지의 눈물과 애교, 토라짐이 하나의 연기였음을 조용히 웅변하는” 듯했다고 화자는 진술한다. 언제 울었냐는 듯 단장에 열중하는 모습에 조용히 소름이 돋았다는 주인공의 심리묘사는 쓴웃음을 짓게 했다. 웃음의 뒤끝은 씁쓸하기보다 슬펐다. 작중 인물을 대신해서 항변하고 싶었다. “화장 고치는 데에 몰입했다고 그전의 감정들이 연기였다 할 수 있나요?”라고. 마음이 깨진 상태로도 불특정 다수에게 예쁘게 보이고픈 강박이 그녀 역시 싫었을 거라고. 부서진 마음을 하고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글을 쓰고, 어떤 일이든 부탁받으면 기꺼이 응하는 스스로의 강박이 그악스럽게 여겨졌던, 그래서 한밤에 깨어나 토했던 나처럼 말이다. 나는 그 작가와 같은 시선으로 사람에 대해 냉소할 수 없었다.

화장을 안 하더라도 사회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직업을 가진 내가 말쑥한 차림새의 직장인들이 바삐 움직이는 일터를 가진 이에게 함부로 공감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면 안될 것 같다. 그저 나는 꾸역꾸역 단장하던 그녀에게서 꾸역꾸역 성실하고 상냥했던 스스로가 겹쳐보였을 뿐이니까. 손거울을 보며 웃어놓고 아마도 다음 장면에서 다시 울 사람에게, 그래서 일순간 동류의식을 느꼈을 따름이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고인 눈물이 마르고 나면 이내 휘발될 피상적인 감상이었다.

그럼에도 종종 그날이 떠오른다. 당시 그녀를 괴롭혔던 대상이 직장업무였든 부장님이었든 사회구조 자체였든, 지금은 그녀가 덜 힘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스럽던 순간들, 스스로의 강박 어린 생존본능을 미워한 그 시간들마저 타인의 아픔에 밀알만 한 크기의 쓰임새를 갖는 셈이다. 이 또한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무엇이면 좋겠다.

<이소영 |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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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부터 교육정책 모니터링단을 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학교마다 학부모 한 명씩 뽑으라 해서 하게 된 것. 사람을 뽑는 과정도 의아한 것이었지만, 첫 번째 설문을 받았을 때부터 내가 이 모니터링을 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는 초등학생인데, 학교생활기록부에 관한 설문의 대부분은 중·고등학교 생활을 알아야만 적을 수 있었다. 설문에 참여할 것인지를 한참 재어 보다가, 믿고 물어볼 만한 친구가 있어 전화를 걸었다. “그게, 설문 돌리고 다수결 하듯이 해서 결정할 게 아니야.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이 분명한 교육 철학이 있으면, 결정하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실행해야지.”

대입제도 개선안이라는 것이 발표되었다. 이렇게 바뀌는 제도는 지금 중학교 3학년부터 해당된다고 한다. 초등 4학년 학부모인 나는 이번 개편안이 우리 아이와는 상관이 없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또 바뀌겠지. 그래도 다시 친구에게 이야기를 듣고, 한참 인터넷을 들락거렸다. 이번 안을 마련하는 데에도 시민참여단이라는 이름으로 조사해서 정책을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지. 대입제도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우리나라 교육을 가장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인데, 이것도 설문 돌리듯 하는 과정으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김상곤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에서 대입제도 개편 권고안과 관련해 열린 교육부 긴급 간부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 입학 전까지, 얼마나 더 상위권 대학에 갈 수 있을까만 따지는 게 학교 현장이다. 그런 상황에서 대입제도를 두고 다수결 싸움이나 다름없는 설문조사를 하겠다고 들이대면, 사람들은 자기 처지에서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방법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게다가 아이의 삶을 마치 자신의 삶인 양 여기는 학부모 입장에서는 대입에 닥쳐서 좀 더 간명하고 단순한 시스템, 그러니까 아이들을 줄 세우는 것이 잘 보이는 것이 편리할 수도 있다. 최근에는 마치 학교생활종합기록부가 몇몇 돈 많은 사람들이 농간을 부리기 좋은 제도인 것처럼 소문이 나기도 했지만, 반대쪽에는 수능 점수야말로 부모의 재산과 비례한다는 통계가 있다. 수능 첫해에 대학 입시를 치렀던 나는 수능 시험에 대해 좋게 기억한다. 학력고사보다 점수가 잘 나왔으니까. 하지만 통계가 말하는 것은 부모가 충분히 돈이 많아서 수능시험에 돈과 시간을 투자하면 할수록 아이의 성적은 올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니 재수·삼수를 하고, 재수·삼수생이 점수가 더 높고. 유명 학원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수능 점수는 낮아진다.

소위 일류대학을 간다고 해서, 삶이 풍요롭고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건 분명하다. 열일곱 살, 스무 살 아이들이 불행하도록 강요하는 교육은 바뀌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하지만 교육 정책 결정자들은 그저 전단 나누어 주듯, 골고루 설문을 돌리는 일로써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껏 그렇게 일을 하고 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뒤로, 나와 아내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래서 무엇을 하겠다는 교육인 거지? 하는 질문에 맞닥뜨렸다. 학부모 한 사람 한 사람의 의견을 최대한 골고루 반영하겠다는 학교의 자세는 맨 꼭대기 교육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의 자세를 닮았다. 어디에서도 교육이 이것을 하겠다 하는 ‘뜻’을 찾기 어렵다.

며칠 전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 연수에 다녀왔다. 초·중등 선생님들이 모이는 자리였다. 1983년 시작된 이 모임은 이오덕, 권정생, 윤구병 선생과 같은 분들의 뜻을 새기며, 35년이 지난 지금까지 교육에 대한 뜻을 나누고, 학교에서 또 자기가 선 자리에서 어떻게 이 뜻을 펼칠 수 있을지 직접 실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저마다 학교에서 하는 방법은 조금씩 다르되, 그것이 ‘삶을 가꾸는 교육’이라고 하는 뜻을 지켜나가는 데에 어떠한가를 두고 늘 치열하다. 교육 정책이 이렇게 우왕좌왕하는 것을 두고, 바로잡을 힘이 없는 것은 교육에 대해 품은 뜻이 없어서일 것이다. 어떻게 줄 세우는 것이 모두에게 공평한가 하는 식의 질문으로는 어떤 답을 꺼내도 누군가에 대한 유불리만 가릴 수 있을 뿐이다.

<전광진 | 상추쌈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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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교육회의가 7일 2022학년도 대학입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전형 비율을 현재보다 늘리고 수능 절대평가 과목에 제2외국어·한문을 포함시키라고 교육부에 권고했다. 다만 수능 비율은 명시하지 않고 대학 자율에 맡기도록 했다. 또 국어·수학·탐구는 상대평가를 유지토록 했다. 1년 동안 공들인 대입 개편이 원점으로 돌아갔다는 얘기가 나온다.

국가교육회의의 대입 개편 권고안은 개편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다. 대입에서 수능 반영 비율을 높이고 상대평가를 유지토록 하는 것은 과거로 회귀하는 것이다. 이를 개편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교육적 안배도 엿보이지 않는다. 확고한 교육 철학과 비전에 따라 대입제도를 개편한 게 아니라 그저 여론을 반영한 탓이다.

그러다 보니 대입 개편 권고안이 정부의 교육공약과 배치되는 결과를 낳았다. 문재인 정부의 교육철학은 계층 간 불평등 해소, 학교교육 정상화, 입시경쟁 완화 등으로 모아진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공약으로 수능 절대평가 과목 확대, 자사고·외고 폐지 등 고교체제 개편, 내신 성취평가제(절대평가제), 고교학점제 등을 내걸었다. 어느 것 하나 수능 전형 확대와 어울리지 않는다. 고교체제 개편만 해도 수능 확대에 유리한 자사고를 폐지하기 쉽지 않을 터이다. 수능 절대평가 과목 확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대입 개편 권고안에 대해 진보와 보수진영 모두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보수교육단체는 수능 정시 반영 비율이 공론화위원회에서 제시한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반면 진보교육단체는 입시경쟁교육을 강화하고 혁신교육을 무력화하는 안이라고 주장한다. 워낙 반발이 거세 대입 권고안이 이대로 확정된다고 해도 제대로 교육현장에 정착할 수 있을지 우려스러울 정도다.

공은 다시 교육부로 넘어갔다. 교육부는 교육회의 권고안을 토대로 이달 말 최종 개편안을 내놓아야 한다. 최종안을 확정짓기까지에는 수능 과목 구조, 고교체제 개편, 성취평가제 등 몇 가지 고려 사항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학이 자율적으로 수능 전형을 확대하라는 큰 틀에서는 벗어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교육부로서는 책임 회피, 철학 부재 논란으로부터 벗어날 마지막 기회다. 결자해지의 자세로 학교교육을 정상화하고 혁신교육을 확대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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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재판소가 지난 6월28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81조 5항의 효력을 정지시키는 가처분 결정을 내렸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적어도 올해에는 외고·자사고·국제고에 지원했다 떨어진 학생들이 예전처럼 희망하는 일반고에 지원할 수 있게 됐다. 자사고에 국한된 결정이지만 실제로는 외고·국제고에도 적용될 예정이다. 제81조 5항은 지난해 12월 개정된 것으로 외고·자사고·국제고 지원자의 일반고 지원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헌재의 결정은 당연하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은 대선공약(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을 이행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와 교육부가 짊어져야 할 부담을 전부 학생들에게 전가하는 방식이다. 학생들을 난처하게 만들어 목적을 이루려는 방식이다. 정부의 시행령 개정은 외고·자사고·국제고에 지원하려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나 다름없다. “너희들 외고·자사고·국제고에는 갈 생각을 하지 마. 지원했다 떨어지면 너희가 원하는 다른 학교에는 절대 못 가게 될 거야. 떨어지면 정원 미달인 학교에 보낼 거야.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에 가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 외고·자사고·국제고에는 갈 생각을 하지 마.” 

실제로 시행되면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인기가 꽤 낮아지긴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방식으로 공약을 이행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내 머릿속엔 그보다 바람직한 2개, 아니 3개의 방법이 떠오른다. 하나는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일반고로 전환하는 방법이다.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존립 근거를 제시한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개정하면 되는 일이다. 시행령 제90조 1항, 제91조의3 등이다. 시행령 개정이니까 전적으로 정부(대통령)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다. 다른 하나는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존재는 인정하되 일반고처럼 오로지 추첨으로만 학생을 선발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외고·자사고·국제고를 없애지 않은 채 이들 학교로 인한 초·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을 최소화하는 방법이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제82조 1항을 개정하면 된다. 역시 전적으로 정부(대통령)의 권한이다.

다른 정치세력들이 반대를 하지 않을까? 첫 번째 방법은 대선 당시 바른정당(유승민 후보)과 정의당(심상정 후보)이 내걸었던 공약과 동일하다. 두 번째 방법은 국민의당(안철수 후보)이 내걸었던 공약과 일치한다. 이들 정치세력은 찬성할 것이다.

앞의 두 방법이 전부 부담스럽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공약을 포기하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또는 뒤로 미루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구성될 국가교육위원회의 과제로 돌린다면 명분이 그리 옹색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현 정부의 대선공약에 의하면 국가교육회의는 국가교육위원회를 위한 과도기적 존재다. 공약 취지대로라면 큼직한 교육정책은 국가교육위원회에서 결정하는 게 맞다.

외고·자사고·국제고의 일반고 전환은 타당한가?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정부와 교육부가 꾀한 방식은 그것을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정부·교육부의 공약 이행 방식은 학생들을 수단으로 삼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점에서 정부와 교육부는 정치적 술수라는 의미의 마키아벨리즘을 실행했다 할 만하다. 그런데 그것은 그냥 마키아벨리즘이라고만 하는 것보단 소인배 마키아벨리즘이라 하는 것이 더 적절한 듯하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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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관련된 사회, 문화적인 활동이 이전에 비해 크게 늘어나고 있다. 과학자들이나 공학자들이 학회나 학술지를 통해서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내놓는, 전문 집단 안에서의 활동이 선진국 수준으로 늘어났다. 곧 없어질 분류일지는 모르겠지만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의 비율이 이과가 훨씬 많은 쪽으로 역전된 지도 오래다. 고등학교에서부터 과학, 수학을 제법 깊게 배우는 숫자가 젊은 세대의 절반을 넘고 대학에서 전공으로 이어져 과학, 수학을 밥벌이로 삼는 숫자도 제법 된다는 의미다. 개개인의 결정의 총합으로 사회의 문제들을 풀어가는 시대에 과학, 기술과 관련된 내용을 스스로 알아야 하는 필요성은 점점 커져간다.

이런 상황 때문인지, 과학과 기술의 내용들을 일반인들에게 알리는 활동들도 많아지고 있다. 학생들을 주요 대상으로 놓았던 잡지만 있었는데 ‘스켑틱’이나 ‘과학잡지 에피’처럼 성인들을 위한 과학 잡지들이 창간되었고 성인을 대상으로 한 과학 강연도 열띤 호응을 받으면서 열리고 있다. 카오스재단은 단순한 대중 강연을 넘어서 전문가 수준의 과학 강좌를 ‘마스터 클래스’라는 이름으로 열고 있는데 관객을 모을 수 있을까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화학과 물리학을 공부하러 온다. 유전자 조작, 핵발전, 미세먼지, 기후변화 등 현재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많은 현상들을 이해하는 데 과학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과학 연구를 업으로 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본적인 과학지식은 가지고 있어야 삶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일들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과 관련된 결정에 한 표를 행사할 수 있다. 외국어를 익히면 그 언어를 쓰는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기초를 갖게 되는 것처럼, 일정한 수준의 과학과 수학을 익혀야 삶과 운명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믿고 있었는데, 수능에서 과학과 수학의 시험 범위를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2022년부터 수능에서 수학에서는 기하와 벡터가 빠지고, 과학2 과목이 모두 시험 범위에서 제외된다. 물론 교육과정에서 이런 내용들을 모두 들어내겠다고 보도된 것은 아니라서 시험만 안 본다는 이야기이지 싶다. 하지만, 수능에 포함되지 않는 과목들은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학생들은 잠만 자는 상황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일반고 학생들은 제외된 부분들을 익히지 못하고 고등학교 과정을 끝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 대해 축소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조치가 학생들의 부담을 줄여주고, 배우지 않은 것들은 대학 가서 배우면 된다고 한다. 반면에 많은 과학자들은 과학교육의 수준 하락을 걱정하고 있다. 양쪽 모두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있다.

과학과 수학의 시험 범위를 줄이면 학생들의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는 쪽은 학생들이 시험을 보지 않는 것들은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교육과정 안에 있는 내용들을 충실히 전달하고 가능하면 많은 학생들의 성취도를 끌어올리는 것을 걱정해야 할 교육당국이 시험 범위만 놓고 교육 정책을 움직이고 있는 것은 교육적이라고 할 수 없다. 공부의 부담을 줄이는 방식에 대해선 과학과 수학이 중요한 시대에 세상을 이해하는 기초는 제공하도록 오랜 시간을 두고 교육과정을 재편해야지 수능 시험 범위 축소 같은 것은 정책이 될 수 없다. 물론 수능 범위 축소를 반대하는 쪽에도 같은 질문을 한다. 전공할 소수의 학생들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과학과 수학에 대한 어떤 수준의 이해가 세상 사는 데 필요한지 고민하고 토론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정성껏 교육과정을 제공할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얼마 전,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대중교육을 통해 양성된 인력이 해야 할 일은 인공지능과 자동 로봇이 점점 대체할 것이고 산업적 요구가 영재 교육에만 집중될 것이므로 영재 교육의 대상이 아닌 학생들에게 시민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금의 교육정책 결정과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분의 글을 읽었다. 실제로 교육청에 시민교육을 담당하는 민주시민교육과가 생겼다. 나는 이런 생각이 과학과 수학 교육을 축소하려는 움직임이 아니길 바란다. 인공지능과 자동 로봇이 할 수 있는 일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과학과 수학을 모르고 그것들이 제공하는 편의를 누리면 된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과학과 수학을 더 능숙히 다룰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다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눈앞에 닥칠 결정을 함께할 민주 시민들이 과학이나 수학을 일찌감치 포기하지 않도록 교육과정을 개편하고 다양한 교육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배워야 한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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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칭이 깨져서 한쪽이 우월한 것을 의미하는 비대칭은 여러모로 활용되는 개념이다. 남북관계에서도 비대칭적인 군사력이 항상 문제였다. 전체적으로는 우리의 군사력이 우세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남한의 군사 대응에 비해서 북한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부분이 있는데 그런 것을 비대칭 전력이라고 한다. 10여년 전까지만 해도 수십만에 달한다는 북한의 특수부대가 비대칭 전력이었고, 수년 전부터는 핵과 생화학무기 등이 중요한 비대칭 전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입장에서는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친 전력은 유사시에 큰 문제가 되기 때문에 남북관계의 가장 첨예한 주제가 되고 있고 북·미 협상의 핵심이기도 하다.

비대칭은 군사력과 같은 거대 담론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정보의 비대칭은 우리 삶의 작은 부분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대표적인 것이 교육 정보다.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필요한 정보를 갖고자 하지만 의미 있는 정보는 상대적으로 희소하기 때문에 정보를 일반 재화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자원이라고 한다. 비대칭인 정보를 확보하려면 비용을 많이 지불해야 한다는 의미다. 결국 입시와 같은 교육 정보는 비용을 들여 구입해야 하는 고급 재화이고, 그것을 구입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비대칭적으로 유리한 것이 입시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이유다. 이렇게 입시 정보가 비대칭적이기 때문에 소위 교육특구라는 몇몇 지역들과 특목고·자사고가 득세할 수 있었다. 이들 지역이나 고등학교는 입시에 대한 여러 유형의 정보를 확보하고 활용하기 좋은 여건을 갖고 있기 때문에 큰 비용을 들여서라도 진입하면 비대칭 정보환경의 수혜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다양한 정보를 구입할 수 있는 교육특구에서도 또 다른 정보의 비대칭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이런 지역이나 학교들에서 입시 정보의 또 다른 비대칭을 만든 것은 학생부종합전형이다. 수능에 대한 정보와 활용은 제한적으로라도 공유될 수 있지만 학종에 특화된 정보들은 전적으로 학생 개개인에 맞춘 개별화된 것들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공유가 어렵다. 이 때문에 아주 소수만이 확보한 고급의 비싼 정보들로 인해서 비대칭의 수혜를 받는 지역과 학교 안에서 또 다른 비대칭의 차별이라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깜깜이 전형이라는 학종에 대한 비판이, 평범한 일반고 학부모들이나 대도시 변두리 또는 지방학교들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교육특구지역이나 특목고, 자사고와 같은 곳에서 주로 주장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수능 입시에 대한 고급 정보와 환경을 마련해주기 위해서 많은 비용을 지불하여 어렵게 들여보낸 학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액의 컨설팅을 받거나 논문에 편승하는 등 입시경쟁에서 앞서가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학부모들이 느꼈을 비대칭의 차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생각도 든다. 이에 비해서 학종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그것을 위해서 투자할 여건도 되지 못하는 대다수 학부모의 자녀들은 학교에서 선생님들과 ‘학교생활’을 열심히 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성취를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비대칭의 아이러니라고 해야 할 것 같다.

<한왕근 | 교육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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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덥고 습한 날이었지만, 쌍둥이 남매의 오후는 평화로웠다. 에어컨도 없는 반지하 집에 선풍기를 세게 틀어놓은 채, 남자아이는 블록놀이를 하고 있었고 여자아이는 김치 부침개를 해 먹겠다며 분주했다. 학교에 안 간 지 3주쯤 되었다는 아홉 살 쌍둥이의 일과는 단순했다. 집에 있고 싶을 땐 엄마와 요리를 하거나 책을 읽고, 밖에서 놀고 싶은 날이면 공원이나 박물관, 야외수영장 같은 곳을 찾아다녔다. 아이들 엄마는 ‘독을 빼는 중’이라고 표현했다. 자꾸 눈치를 보고 행동을 주저하는 학교에서의 습관이 남아 있어 일단은 마음껏 놀게 하며 치유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고.

남매가 학교를 가지 않게 된 발단은 초등학생들 사이에 유행하는 ‘복종놀이’ 때문이었다. 한 아이를 지정해 자기들 명령에 복종하게 하는 놀이인데, 그 명령은 주로 다른 친구를 대신 괴롭히는 일이었다. 복종놀이에 지속적으로 지명된 쌍둥이 남자아이는 극도의 스트레스로 우울증을 얻었고 어느 날 발작에 가까운 경련을 일으켰다. 이를 제지하는 교사를 할퀴고 물어 교권 침해로 신고당하면서 이 사건은 교사와 아이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아이도 피해자 아니냐고 하소연하자, 그건 학교폭력위원회에 따로 신고하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교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처벌로 해결하려는 기계적인 접근은 모두에게 상처만 남겼다. 교사는 병가를 냈고, 엄마는 아이를 더 이상 억지로 학교에 보내지 않기로 했다. 같은 반에서 이 과정을 다 지켜본 여자아이도 등교 거부를 했다. 왜 자기만 학교에 가야 하냐고, “엄만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딸의 말에 결국 엄마는 두 아이와 의도치 않은 홈스쿨링을 시작하게 되었다.

학교에 가지 않는 초등 저학년 연령대 어린이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학교 밖 청소년들을 위한 지원은 확대되고 있지만, 기본법상 청소년에 속하지 않는 만 9세 이하 학교 밖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지원은 미비하다. ADHD, 학교폭력, 교사와의 갈등, 학업 스트레스 등으로 학교생활이 어려운 초등학생들은 늘고 있는데 책임회피성 제재만 강화될 뿐 아무 대책이 없다.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밀려나면 교육에서 돌봄까지 모든 것이 부모의 몫이다.

학교를 그만둘 때, 부모들이 가장 걱정하는 건 아이의 사회성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사회성이 저절로 길러지진 않으며, 오히려 미숙한 공동체 안에서는 약육강식과 승자독식의 부조리를 몸소 익힐 뿐이다. 교육사회학을 연구한 가도와키 아쓰시는 사회성과 사회력을 구분해 설명한다. 사회성이 사회에 적응하는 능력이라면, 사회력은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꿔나가는 능력이라는 것. 그런 면에서 학교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사회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안전한 학교’라는 것은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 곳이 아니라 ‘위험한 사회를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성숙한 곳’을 뜻한다. 법과 규제로 그 배움의 기회를 만들지는 못할 것이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아이는 카메라를 향해 익살스럽게 브이자를 그렸다. 얼마 전까지 우울증 고위험군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밝았다. 학교에 가지 않는 것만으로 많은 게 좋아지고 있어서, 엄마는 일단 걱정을 내려놓기로 했단다.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 엄마 품을 벗어나게 될 땐 어찌 해야 할지 막막하지만 말이다. 엄마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매는 사이좋게 서로에게 의지하며 학교의 상처를 달래가고 있었다.

<장희숙 |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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