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전과는 완전하게 다른 후반전이었다. 울리 슈틸리케 대표팀 감독은 우즈베키스탄전을 대비해 선발 라인업과 전술적 포메이션에 변화를 줬다. 하지만 전반전은 실패였다. 얼핏 보기에는 점유율이 높고 경기를 지배한 것 같지만, 상대를 괴롭게 하는 지배력이 아니었다. 전반전은 우즈베키스탄이 원하는 대로 경기가 흘러갔다.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은 너무 평범했고, 패스의 질도 매우 떨어졌다.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을 우즈벡전을 하루 앞둔 14일 오후 파주NFC에서 축구 국가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이 각오를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반대로 후반전의 공격 패턴은 전반전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움이 있었다. 전반전과 같은 평범함을 벗어나 우즈베키스탄을 흔들었다. 그 중심에는 교체 투입된 김신욱이 있었다. 김신욱의 투입이 많은 효과를 봤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축구대표팀 미드필더 구자철이 1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5차전 우즈베키스탄전에서 후반 40분 2-1 역전 결승골을 넣은 뒤 기뻐하고 있다. 김기남 기자

우즈베키스탄은 전반전에 수비들이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절했는데, 후반전에 김신욱이 투입되자 김신욱에게 시선을 많이 빼앗겼다. 우즈베키스탄 수비수들이 김신욱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 2선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우리 공격수들이 편하게 플레이를 할 수 있다.

전체적인 경기 맥락을 본다면 슈틸리케 감독이 위기를 넘겼다고 평가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오늘 경기에서도 전반전과 후반전의 경기력 차이가 심했던 것은 다음 경기에 반드시 보완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 지적하자면 처음 대표팀 운영 원칙이었던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못 뛰면 대표팀 발탁이 어렵다’는 말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으면 한다.

김대길 | 스포츠경향 해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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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려고 스포츠를 그토록 사랑했나 자괴감 들고 괴로운 나날이었다. 세간의 풍자에 운율을 맞춰 말의 유희를 즐기는 게 아니다. 스포츠를 사랑하였고 그래서 그것에 담긴 쾌락의 비밀과 욕망의 정체를 알고자 하였고, 그래서 이 비틀리고 일그러진 한국 사회에서 운동을 해온 사람들을 존경하고 사랑해왔는데, 지금처럼 무참하게 상심한 적은 없다.

최순실 때문이냐고? 일단은 그러하다. 들려오는 추문들은 승마와 빙상과 올림픽이 최순실과 정유라를 중점으로 하여 팽팽하게 돌아가는 총체적 비리인 듯 보인다.

차은택 때문이냐고? 그 점도 물론이다. 갑자기 스포츠 현장에 등장하여 뭐든 엮을 수 있을 것 같은 ‘융합’이라는 갈고리로 문화와 스포츠의 미래적 가치를 어두컴컴한 비리의 구덩이로 처넣어 버린 행각에 깊은 자괴감을 느낀다. 도대체 늘품체조라니. 저 19세기 프로이센 시절 근대식 맨손체조를 개발한 프리드리히 얀으로부터 시작한 현대 체조의 역사를 한순간에 밀어내고 느닷없이 등장한 늘품체조가 청와대를 흔드는 기괴한 리듬을 탔을 때, 그 분야 전공자들은 얼마나 깊은 자괴감에 사로잡혔겠는가.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김종 때문이냐고? 진실로 그러하다. 교수 시절부터 스포츠 권력에 대한 강한 욕망을 드러냈던 그가 문화체육관광부 제2차관이라는, 어떤 점에서 보면 장관도 아닌 자리에서, 청와대와 청담동을 잇는 파이프라인의 핵심이 되어 학자 시절 주장했던 스포츠 콘텐츠 활성화 정책을 추문의 밀실에서 거래되는 추악한 목록으로 전락시켰다.

한편, 더욱 자괴감이 드는 것은 엘리트 스포츠의 한길로 매진해 온 사람들일 것이다. 오직 땀방울의 순수함을 믿으면서, 무서운 의지로 자기 극복을 해내고 숱한 경쟁자들을 물리치면서 금메달도 따고 국민적 스타가 되었던 사람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과연 어떤 자괴감인가 하고 말이다. 거의 국가 이념 수준인 ‘국위선양’의 아이콘이었던 그 많은 메달리스트와 스타들은 스포츠 현장과 그 산업이 권력에 줄을 댄 사람들의 먹잇감이 되는 것을 전혀 몰랐거나 못 본 체하지 않았는가, 나는 진실로 의심한다. 몰랐어도 문제고 모른 체했어도 문제다.

아니 오히려 더 야박하게 말한다면 차은택이며 김종이며 하는 사람들이 2014년 아시안게임에서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까지, 또한 그밖의 숱한 스포츠 이권사업에 끼어들어 무슨 신장개업한 음식점이 전단 돌리듯이 명함을 뿌리며 내 뒤에는 청와대도 있고 청담동도 있다는 식으로 위세를 부릴 때, 혹시라도 저 명함을 손에 넣어 아쉬운 대로 전화라도 한번 넣으면 뭐라도 일이 되지 않을까 하고 욕망의 구렁텅이에 몸을 던지고자 한 사람들은 없었느냐, 이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평생 운동만 해왔다는 게 훈장이 되거나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무슨 공적 비리 사건이나 하다못해 개인 간의 사기 사건에 연루되기만 하면 ‘순수하게 운동만 해와서 세상 물정을 몰랐다’고들 말한다. 그렇게 읍소를 하고 면죄부를 구한다. 어떤 점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상황이다.

인지상정으로 보건대, 진실로 어린 시절부터 운동만 해왔고, 그 성과로 메달을 따거나 스타가 되었을 때, 갑자기 등장한 사람들이 빳빳한 명함을 내밀면서 무슨 사업을 하자, 어디에 투자를 하자 하면 가벼이 셈을 하여 따라나섰다가 돈도 잃고 명예도 잃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안타까운 일이고 진실로 운동만 해온 탓에 세상 물정에 어두워 큰 실수를 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순수’하기만 할까. 시야를 확대하여, 스포츠와 정치 권력을 연결하고 스포츠와 기업 이권을 이어보면, 오히려 순수라는 가면을 쓰고 권력이나 금력과 이인삼각 플레이를 해온 사례가 드물지 않다. 지금의 최순실 사태와 연관하여 이름이 거론되는 몇몇 메달리스트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수십년 동안 정치 권력이나 기업 권력과 호형호제 하면서 스포츠 권력을 누려온 자들, 올림픽이니 아시안게임이니 거대한 스포츠 행사장 뒤에서 계산기를 두들겨온 자들, 복마전의 대한체육회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각지에서 유무형의 실질 이권이나 상징 자본을 갈취해온 자들, 이에 대해 합리적인 비판이라도 하면 ‘국위선양’ 운운하면서 무자비한 개발주의에 빨대를 꽂은 자들, 그러다가 무슨 사건이라도 터지면 ‘평생 운동만 해온 순수한 마음’이라고 하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운동 선수 출신’이라는 낡고 닳은 이미지를 수많은 동료 후배들에게까지 덮어씌워 버리는 자들, 그런 자들의 손아귀에 체육 정책이 놀아나고 올림픽의 적자가 만성으로 불어나는 것을, 어찌 순수라는 말로 이해하겠는가.

‘세상 물정’ 모르기는커녕 아주 오랜 세월 절묘한 처세로 정치 권력에 빌붙고 간교한 셈법으로 기업 금력에 묻어간 사람들이 무슨 염치로 세상 물정 몰랐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가. 진실로 그 점 때문에 자괴감이 들고 괴롭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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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원도 평창의 가리왕산으로 전공 답사를 갔다. 도착한 곳은 알파인 스키 공사 현장이었다. 우리 일행을 환경운동연합의 김경준 국장이 맞이해 주었다. 그는 500년 이상 된 원시림이 2주간의 올림픽을 위해 파괴되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산 중앙을 마치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듯이 밀어버린 휑한 가리왕산을 직접 보니, 마음이 먹먹했다.

올림픽은 도시 개발의 효과적인 수단이다. 마라톤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땄던, 1992년 올림픽 개최지인 바르셀로나를 여행한 적 있다. 많은 볼거리와 공공 인프라 시설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 그런데 현지 가이드는 올림픽을 치르기 전 바르셀로나는 불결하고 위험하며 낙후된 도시였다며, 올림픽 개최가 바르셀로나 발전의 마중물이 됐다고 했다. 우리나라도 88 서울올림픽과 2002 월드컵 덕을 톡톡히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평창은 상황이 다르다.

올림픽 관련 기사 가운데 향후 지구온난화로 동계올림픽 자체가 위협받을 것이라는 보도가 들려왔다. 현재 기후변화가 겨울 스포츠의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스키장은 한철 장사다. 올림픽 열기가 식은  후 스포츠 활성화 및 경기장 사후관리에 있어 강원도의 기후·환경조건은 절대적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소요되는 13조8671억원+α라는 막대한 비용에 대한 혜택이 적어도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야 수지타산이 맞다. 그런데 현 기후 추세라면 강원도에서 반철 장사가 될 공산이 크다. 겨울 스포츠 자체가 위축될 가능성이 큰 만큼 동계올림픽 유치 희망 도시 수도 줄고 있다. 강설량이 많고, 눈질이 우수한 알래스카나 스칸디나비아 정도의 고위도 도시가 아니고서는 동계올림픽 유치는 독이 든 성배일 수 있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은 1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인천 시민에게 안겼다. 경비절감 노력에 사후 활용방안까지 꼼꼼히 검토했다던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조차 적자를 면치 못했다. 평창에는 대한민국 1년 정부 예산인 386조원의 3% 이상의 막대한 재원이 투입되고 있다.

하지만 평창조직위는 사후 경기장 활용방안이 미흡해 최근 이례적으로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지적까지 받았다. 정부가 약속했던 가리왕산 알파인 스키지역의 복원 및 활용 계획 등 대다수 시설에 대한 대응 방안이 허술하다는 것이다. 엄청난 양의 국민 세금을 쏟아붓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 수준이면 심각한 직무유기다. 올림픽 정신이 아닌 부채와 환경 파괴만 남길 것 같다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커지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탈리아 로마 시장은 최근 1960년 로마올림픽의 빚이 아직도 남아 있다며, 선거공약이던 2024년 하계올림픽 유치를 포기했다. 64년이 흘러도 메우기 힘든 적자 행보에 이탈리아인들의 자존심은 상했을지언정 현실을 반영한 옳은 선택이었다.

총사업비 1095억여원이 소요되는 가리왕산 알파인 스키장은 올림픽 후 일반인들은 사용조차 할 수 없는 난코스라 한다. 스키장 활용도가 매우 낮은, 3일 천하의 활강 개발 공사라는 비판에 귀 닫아서는 안된다. 그 대안으로 특정 종목을 분산 개최하자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연간 100억여원이 소모될 경기장 사후관리 비용을 생각해서라도 원점에서 검토해봐야 한다. 평창과 유치 각축전을 벌였던 전북 무주와의 분산 개최 의견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민관산학이 머리를 맞대야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가리왕산의 500년 된 원시림처럼 지속가능한 가치를 후대까지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

김주영 서울대 환경대학원 환경관리전공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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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세계 최장 철도 터널인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이 완공되었다. 해발 2300m의 알프스 산맥을 관통하는 총 길이 57㎞의 터널이다. 한니발도 나폴레옹도 그밖의 수많은 사람들도 힘겹게 넘어다녔던 알프스. 기존의 복잡한 기차와 차량의 터널들을 대체하는 이 장대한 터널의 개통식 날, 문화행사가 터널의 안과 밖에서 열렸다.

행사는 가히 충격의 실험 예술이요 거침없는 퍼포먼스였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표현하려는 주제! 그것은 한마디로 이 터널 공사에 온몸을 바친 노동자들을 추모하고 기억하는 것이었다. 숙연하고도 장중한 연출이었다. 유튜브로 검색하면 다 볼 수 있는데, 보는 동안 당신의 입술은 굳게 다물어질 것이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우리의 경우라면 어떨까. 몸으로 노동한 사람, 그렇게 하다가 아차 잘못되어 죽어간 사람, 그들의 가족. 과연 추모를 하고 기억을 할까. 높은 사람들이 줄줄이 연설이나 하고 나서 풍악을 울리고 댄스를 하고 만국기나 펄럭이는 정도가 아닐까. 왜? 우리에게는 연출가가 없어서? 기술이 없어서? 아니다. 노동에 대한, 그 위엄 있는 삶에 대한 존경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혁명, 대영제국,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자본주의 종주국, 바로 영국이다. 그들의 2012년 런던 올림픽 개막식의 주제는 ‘팬더모니엄’, 즉 악마가 날뛰는 생지옥이었다. 존 밀턴과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가 장면화되면서 경기장에서는 그야말로 가혹한 어린이 노동을 포함한 생지옥이 묘사되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나 일자리를 달라며 행진한 재로 시민들의 투쟁이 전개되었다.

반면, 인천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구한말의 작은 포구가 인천공항과 국제도시를 창건할 만큼 발전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가까운 안산이나 부천을 포함하여 인천의 주안, 부평, 남동 등지에 몰려든 사람들의 100여년 역사는 지옥까지는 아닐지라도 힘겨운 삶의 나날을 위엄 있게 이겨낸 노동의 역사였다.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이러한 역사는, 지극히 평면적인 사실의 나열에 그쳤고 대부분은 억지스럽게 연출한 만들어진 신화, 구겨진 전통, 과도한 국가주의였다. 런던의 밀턴과 블레이크의 시에 비하여 인천 개막식의 고은의 시는 진부한 행사시에 불과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스포츠와 노동에 대한 두 나라의 인식 차이가 현격하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근대의 스포츠는 ‘위로부터’ 강제되는 애국주의의 도구였다. 학교의 체육 수업이나 전문 선수들의 훈련 과정은 철저한 규율 통치였다. 이 점,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구한말의 애국계몽 운동이나 일제 치하의 학교 체육은 ‘지덕체를 겸비한 엘리트 양성’이 목표였다.

다른 점은, 영국의 경우 산업 도시의 하위 노동자 계급이 이 스포츠를 자신들의 일상적 문화로 전복시켰다는 점이다. 반면 우리의 경우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를 거쳐 오랜 독재 통치를 거치는 기나긴 ‘비정상 국가 상태’에서 스포츠는 군국주의에 포섭되었고 개인의 몸은 규율과 통제와 동원의 대상이 되었다.

이 차이로 인하여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스포츠 행사가 있을 때, 우리의 경우 그 스포츠 행사는 ‘국가 행사’가 되었다. 시민들은 그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적 열망을 실천할 만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럼에도, 어떤 시기적 국면에서 새로운 해석이나 연출이 가능하지 않을까. 이를테면 박찬욱·박찬경 두 감독이 만든 서울 다큐멘터리 <고진감래>를 들 수 있다. 시민들이 찍은 수많은 영상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에서, 가난했는데 발전했다는 식의 ‘서울찬가’는 찾아볼 수 없다. 오늘을 살아가는 서울 사람들의 다양한 일상, 즉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벅찬 일이나 버거운 일들이 외로우면 외로운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그 영상에 묻어 있다. 유튜브로 ‘고진감래’를 치면 금세 볼 수 있다.

다시, 인천 아시안게임을 얘기하자면, 장진 감독이 개막식을 연출하였고 영상 분야는 요즘 최고의 뉴스메이커인 차은택 감독이 맡았다. 런던 올림픽의 대니 보일 감독이 풍자와 조소와 비판의 칼을 지녔다면 장진 감독은 유머와 재기가 있을 뿐이었다.

차은택 감독은 그 무렵 이후 현 정부의 ‘한류 문화 총감독’ 같은 일을 해왔다. 이 두 감독이 인천의 역사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연출했을까는 자명하다. 무거운 침묵과 역사적인 분노가 장중하게 펼쳐진 런던 올림픽에 비하여 인천의 개막식은 공허한 화려함의 극치였다. 영상, 의상, 조명 등이 ‘세계로 뻗어가는 한류 문화’뿐이었다. 급기야 싸이가 나와서, 인천 한복판에서 ‘강남 스타일’을 부르며 끝이 났다.

이 지면을 통하여 거듭 평창을 걱정해 왔는데, 역시 같은 맥락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식의 총감독은 ‘난타’의 송승환씨다. 그는 ‘한류 문화를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까지 소개’하고 싶다고 했다. 이 빈곤함이 문제다. 스포츠와 역사에 대한 이 빈곤함은 억지스러운 가짜 역사 만들기로 이어질 우려가 있다. 역사를 편의적으로 쪼갠 후 검증도 안되는 주술적 요소를 덧대고는 기이하고도 무속적인 흰 옷을 전통 의상인 양 입고 ‘한류 상품’을 요란하게 펼쳐냈던 인천 개막식이 반복될까 걱정이다.

박근혜 정부는 스포츠 관점에서 보면 2014 아시안게임으로 시작해서 2018 평창 올림픽으로 끝난다. 21세기 한국의 중대한 스포츠 행사가, 국가주의 말고는 아무런 철학도 상상력도 없는 이 정부의 국책 문화사업에 깊이 관여한 사람들에 의해 공허한 ‘국뽕’ 행사로 전락할까, 우려스럽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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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몇몇 신문의 1면에는 500일 앞으로 다가온 2018평창동계올림픽을 축하하는 문화 공연이 펼쳐진다는 광고가 실렸다. 더불어 문화체육관광부의 보도자료에 기반한 관련 뉴스들도 실렸다. 그 광고와 기사들을 보면서, 아 정말로 평창올림픽은 큰일 나겠구나, 하는 깊은 우려에 사로잡혔다. 그 많은 행사에 참여하는 연예인, 엔지니어, 자원봉사자들의 노고야말로 귀한 것이지만 지난 8일 고척돔구장에서 열린 ‘2018 평창올림픽 G-500 페스티벌, K-pop 콘서트’ 행사를 비롯해 이달 말에 서울과 평창 일대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문화 행사가 일종의 ‘한류 관광’과 같아서, 얼핏 보기에 화려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공허한, 속 빈 군무로 그칠 공산이 커보인다.

왜 그런가? 새롭고 가치 있는 의미의 발견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스포츠가 됐든, 공연이 됐든 문화행위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의미의 생산과 재현이다. 그 의미는 클리퍼드 기어츠가 발리의 닭싸움을 통해 밝혔듯이, 개인에게는 심층적이며 사회로서는 집합적이다. 88올림픽이나 2002월드컵은, 위로부터(88올림픽) 강제된 것이든, 아래로부터(2002월드컵) 생산된 것이든 당대의 집합적 열망이 터져나온 사건들이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그런데 그 후, 여러 지자체들의 수많은 국제 행사들은 발전국가 시대의 의미나 상징의 시효가 소멸된 것을 모르고 과잉 중복의 이른바 ‘국뽕 행사’로 일관함으로써 오히려 대규모 국가 행사의 역효과만을 확인해왔다.

그 결정타가 2014인천아시안게임 개막식이다. 진행상의 어수선함은 별개로 하더라도 진부한 국가주의적 상상력, 퓨전도 아니고 전통도 아닌 기이한 의상과 춤들, 아시아는 인천에서 하나가 된다는 식의 무모한 국수주의, 한류 스타들이 시종일관 무대를 장악해 버리는 요란한 관광 무대로 졸렬함의 극치를 달린 바 있다. 어떤 의미도 생산하지 못했고 기존의 어떤 의미도 창조적으로 재해석하지 못했다. ‘하나 되는 아시아’니, ‘세계로 뻗어가는 인천’이니 하는 구호의 남발인데, 이런 구호에 그나마 의미가 발생했던 20세기는 벌써 한 세대 이상 지나버렸다.

500일을 남겨두고 문체부가 기획하고 여러 단체들이 총망라돼 펼치는 각종 공연과 행사가 이와 다를 바 없으니, 2014년의 졸렬한 파탄을 보고 나서도, 2년여가 지나도록, 대규모 스포츠이벤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개념과 상상력이 이 정도로 빈곤하다는 점에서, 나는 깊은 우려를 갖는다.

얼마 전에 끝난 2016 리우 올림픽도 되새겨보자. 시청률조사기관 닐슨코리아는 리우 올림픽 개막 직전에 “주요 경기시간대가 새벽에 몰리면서 본방송 시청률로는 역대 최저를 기록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실제로 지상파 3사의 역대 올림픽 중계방송 평균 시청률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2%, 2004년 아테네 올림픽 31.5%, 2008년 베이징 올림픽 32%, 2012년 런던 올림픽 23.1%를 기록했으나 리우 올림픽의 경우 KBS1 10.5%, MBC 5.3%, SBS 4.3%를 기록했다.

이를 낮밤이 뒤바뀌는 ‘시차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것은 게으른 판단이다. 베이징을 빼고는 다들 심야나 새벽의 개막식이었다. 2012년 런던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5시에 개막식을 치렀고 2004년 아테네는 아예 깊은 잠을 자는 시간대였다. 그럼에도 31.5%였다.

리우 올림픽의 저조한 시청률은, 시차 때문이 아니라, 올림픽이 더 이상 매력적인 구경거리가 아니며 그 문화 행사들을 통해 더 이상의 집합적 의미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 한국갤럽의 조사를 보면 “국민들은 밤잠을 설치며 응원을 하느라 생활리듬이 깨지는 경우도 많았다”고 적고 있다. 그랬던 것이 런던, 소치 그리고 리우에 이르면서 이렇게 ‘생활리듬’이 깨질 정도로 올림픽을 ‘국가지대사’로 보는 감정은 크게 줄었다. 한국갤럽에 따르면, 올림픽을 통해 ‘생활이 즐거워졌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2004년 아테네 78%, 2010년 밴쿠버 89%, 2012년 런던 84%였으나, 2014년 소치 때는 67%로 하락했고 이번 리우에서는 55%로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올림픽이 더 이상 ‘국가지대사’가 아니며 황금알을 낳는 ‘특수’가 아니며 시청률의 고점을 찍는 ‘대박 상품’이 아닌 것이다.

요컨대 올림픽을 통해 ‘국민’이 되고 ‘애국’을 실천하고 ‘국가’를 드높인다는 식의 발상 자체가 효력을 잃었다. 20세기의 ‘국민’이 21세기의 ‘시민’이 되었으며 대규모 스포츠 대회는 따라서 다른 의미, 새로운 가치, 전혀 다른 상상력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500일을 앞둔 여러 행사들을 통해 “전통과 첨단이 흥겹게 어우러지고, 인류 평화와 공영을 위한 소중한 가치들을 빛냄으로써 대한민국이 문화리더십을 발휘하겠다”고 한다. 이 낱말들은 사전적으로 뜻이 깊다. 그러나 그것이 조합되어 하나의 문장으로 의미를 생산해야 할 텐데, 아뿔싸, 이 수사들은 이미 1988년과 2002년에 다 써먹었고 2014년에는 더 이상 당대적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적자 투성이로 함께 겪었다.

그랬음에도 획기적인 발상, 당대적인 상상력, 모험적인 의미 창출은 어디에도 없다. 한류 스타 총출동일 뿐인데, 이런 빈곤한 상상력으로 평창을 준비한다고 하니, 어찌 우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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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묵직한, 모든 이의 가슴 밑바닥에 침전된 차마 잊고 싶은 기억들까지 긁어내는 영화를 보았다. 다큐멘터리 영화이고, 축구 영화이고, 오는 22일부터 파주와 고양 일원에서 열리는 제8회 DMZ 국제다큐영화제 출품작이다. 어느덧 8회에 이른 이 영화제는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오늘의 세계가 겪고 있는 고통과 슬픔의 상흔들을 깊이 있게 다룬 작품들로 풍성하다. 그중에서 축구와 관련된 영화 3편을 관객에게 도움말을 주기 위해 미리 보았는데, 게으르게 만든 스포츠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잉된 감정’이나 ‘진부한 감동’과는 무관한, 애써 찾아가 볼 만한 수작들이었다.

그중 가장 짧은 8분짜리 미니 다큐 <스페셜 원>은 미얀마 양곤의 얀빠 수산시장 노동자들을 깊은 유머로 다루고 있다. 스페셜 원? 그렇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맡아 시즌 개막 후 4연승을 달리고 있는 조제 무리뉴 감독의 닉네임이다. 그는 스스로를 ‘스페셜 원’이라고 불렀다. 얀빠 수산시장의 사내도 스스로를 그렇게 부른다. 사내는 첼시 유니폼을 입고 있다. 유니폼 뒤에는 ‘스페셜 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이 짧은 다큐멘터리는 복잡한 수산시장을 마치 축구 중계방송처럼 보여준다. 젊은 노동자들이 스페셜 원의 지시에 따라 분주하게 일한다. 모두들 첼시의 푸른 유니폼을 입고 있다. 어떤 친구는, 실은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라고 말하면서 마지못해 첼시 유니폼을 입고 있다며 씁쓸하게 웃는다. 이렇게 축구는 지구 끝까지 퍼져 있고 그 많은 일상들 속에서 축구는 작은 웃음과 약간의 소동과 소박한 관계들을 형성한다. 다행히 축구가 그들 곁에 있다. 축구와 일상! 그 단면이 8분 안에 녹아 있다.

폴란드 작품인 <풋볼 브라더스>는 가난한 마을의 형제 이야기다. 장차 축구선수를 꿈꾸는 소년들이다. 26분이라는 짧은 화면에 어머니는 나오지 않는다. 러닝타임이 짧아서 어머니가 등장 안 하는 게 아니다. 홀로 두 아들의 배후인물이 되어 묵묵히 살아가는 아버지의 인생이 겹쳐진다. 한때 프로선수가 되려 했으나 그 점에서는 실패했다. 그렇다고 아버지로서의 삶이 실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을 정성껏 키운다.

이 다큐의 미덕은 씁쓸한 유머다. 가난한 삶을 견디게 하는 씁쓸하지만 의연한 유머 말이다. 앞부분에서 아버지는 두 아들에게 축구 기술을 가르치다가 제풀에 넘어진다. 이미 두 아들은 아버지를 넘어섰다. 하지만 소년들의 미래는 밝지 않다. 부상도 있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형이 있고 동생이 있지 않은가. 둘은 함께 달린다. 형에게 동생이 없었더라면 아침의 스트레칭은 고독한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동생에게 형이 없었더라면 저녁의 달리기는 외로운 질주였을 것이다. 둘은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공을 찬다.

그리고 반드시 시간을 내서 꼭 봐야 할 영화가 있다. 스페인의 세르지오 옥스만 감독이 만든 <축구장 가는 길>이다. 이것은 정녕 다큐일까. 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엄선한 필름이니 틀림없이 다큐이겠지만, 순전히 낱말 뜻으로 접근하건대, 이 필름이 ‘사실 그 자체’를 찍은 ‘다큐’라고 한다면, 잔인할 정도로 슬프고 무서울 정도로 아름답다. 폭우 속에 치른 경기에서 무참하게 패배를 당한 날 밤처럼, 삶의 무거운 엄숙함, 곧 죽음이 이 다큐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스포츠 영화’라는 특정 장르가 아니라 영화의 보편적 가치에 도달한 작품이다.

아들은 지난 20년 동안 아버지를 만난 일이 없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생의 찰과상이 20년을 찰나처럼 흐르게 만들었다. 아들은 축구광 아버지와 함께 2014 브라질 월드컵 기간에 함께 있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모든 어긋난 가족사가 그렇듯이, 두 사람의 대화는 어색하고 불편하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주 어렸을 적에 축구장에 데려갔던 일들을 떠올려 말하지만 아들은 전혀 기억에 없다고 대답한다. 그렇게 20년이 흘러버린 것이다.

이 다큐는, 한 생애를 힘겹게, 고독하게, 그러나 축구가 있기에 그나마 즐거울 수 있었던 한 노인의 마지막 한 달을 일관된 침묵으로 다루고 있다. 화면은 정지된 듯, 미세하게 흘러간다. 마치 죽음에 이르는 삶처럼. 무서운 침묵이 70분 동안 흐른다. 대도시의 이야기건만 혼잡한 도시의 소음조차 희미하게 들린다. 병원으로 급히 들어서는 앰뷸런스 소리도, 브라질에서 들려오는 월드컵의 함성도 아득하게만 들린다.

이윽고 월드컵도 끝나고 노인의 삶도 끝난다. 아! 실제로 죽음에 이르고 말다니. 극영화였다면 진부했을 텐데 축구가 없었더라면 극단의 고독사였을 노인이 사실로서의 죽음에 이르고 만다.

그 텅 빈 시공간 속으로 아들은 아버지가 운전하던 차를 운전하다 흡사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처럼 ‘아, 그렇지? 월드컵이지, 누가 우승한 걸까?’ 하며 창문을 열고 누군가에게 경기 결과를 물어본다. 이 영화를 보고나면 오랫동안 인연이 끊어졌던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야만 할까? 그래야만 한다! 축구는 그렇게 한 줌의 위로가 된다. 9월 말의 고양과 파주로 가서, 수소문해 꼭 찾아볼 만한 영화 <축구장 가는 길>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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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귀국길은 쓸쓸했습니다. 환영 인파는 고사하고 몇몇 사람들이 격려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기자들의 질문은 날카로웠고 당신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말끝을 흐리기도 했습니다. 낯선 모습,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 처음 겪어보는 풍경일 것입니다.

2008년에는 어떠했던가요? 당신은 베이징 올림픽 해단식의 기수로 장미란 선수와 함께 서울광장까지 퍼레이드를 했지요. 광저우 아시안게임 때는 배드민턴의 이용대 선수와 함께 기수를 맡기도 했지요.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출국할 때나 현지에서 경기를 마쳤을 때나, 마지막 1500m를 포기하고 귀국했을 때도, 세상의 관심은 줄었고 또한 냉랭했습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그럼에도 당신은 새로운 각오를 다졌습니다. 리우 현지에서는 4년 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겠다고 했지요. 그러나 귀국길에 깊은 생각을 한 듯 공항에서는 “출전 여부를 지금 결정하는 것은 이른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어진 답변에서 당신은 “만약 도쿄 올림픽에 나갈 경우 리우 올림픽처럼 준비하지 않겠다. 정말 준비를 잘하고 싶다”고 했지요.

도쿄 올림픽 출전이 전혀 가망 없지는 않습니다. 꽤 많은 후배 선수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지만 실력 격차가 크지요. 아직은 당신 앞으로 나서서 역영을 하는 선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국제수영연맹(FINA)의 A기준 기록을 통과한다면 5회 연속 올림픽 출전이 가능합니다.

아직 시간이 많습니다. 그러나 훈련할 시간보다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리고 당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은 듯합니다. 당신은 지난 4월 기자회견에서 무릎을 꿇은 적 있습니다.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게 기회를 달라”고 호소하면서 말이지요. 그 자리에서 유정복 인천시장은 “박태환의 명예회복과 국위선양을 위해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당신을 오랫동안 지도해온 노민상 전 감독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했지요.

어쩌면 당신은 금지약물인 ‘네비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 ‘국위선양’이라는, 과잉된 신념에 의해 비틀거리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당신이 4년 후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이 같은 과잉된 신념들, 그리고 그것을 주장하고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들을 위해 당신을 재촉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당신과, 당신의 가족과 감독과 관계자들은 진심으로 ‘국가에 이바지’하기를 원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 개인적으로 명예를 회복하는 길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이 위선이나 거짓이라는 게 아니라 바로 그런 생각 자체가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금지약물의 기억, 일부 팬들의 비난, 대한수영연맹의 노골적인 견제 등 도쿄로 가기 위해서 당신은 이런 일들을 잊거나 이겨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국가를 위해서 이바지’하겠다는 낡은 관념의 탈피입니다.

당신은 충용스러운 국민이 아니라 자유로운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신생 독립국으로 모든 사회적 에너지를 ‘국가’로 집중하던 20세기 중엽이 아닙니다. 당신을 우러르며 막 수영을 배운 후배들은 어쩌면 22세기를 볼 수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은 2016년입니다.

이번 대회 유도에서 금메달을 딴 아르헨티나의 파울라 파레토 선수는 대회가 끝나면 원래 직업인 의사의 길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반면 우리 축구팀을 8강으로 이끈 권창훈 선수는 미팅 한번 안 할 정도로 오직 ‘축구밖에 모르는’ 선수라고 합니다. 두 선수의 인생이 다 가치 있고, 두 선수의 선택이 다 아름다운 것이지만, 글쎄요, 오직 축구밖에 모르면 이제는 조금 걱정스럽습니다.

당신도, 수영밖에 모른다고, 오직 수영에 인생을 걸었다고, 4년 후에도 출전하겠다고 말했는데 그것이 단지 강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수영밖에 모른다’고 하면,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노릇입니다. 당신은 벌써 27살이고, 그 나이 또래의 많은 청년들은 다양한 경험과 사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수영밖에 모른다’면, 당신과 당신 가족과 당신을 오래 지도해온 감독은 한 사람의 인생 전체를 꽉 쥐고 비틀고 있는 셈입니다. 진심이 반드시 정답은 아닙니다.

20대 중반이면 노장 소리를 듣는다는 수영 종목에서 사실 리우를 빛낸 ‘원로’들이 있습니다. 이번 대회 개인혼영 200m 금메달을 포함해 무려 22개의 금메달을 딴 펠프스는 어느덧 31살입니다. 개인 자유형 50m 금메달을 딴 앤서니 어빈은 무려 35살이지요. 19살 때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을 딴 어빈은 한때 방황을 하면서 금메달을 이베이(eBay)에 내다팔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지요. 담배와 술은 물론 마약에도 손을 댔었고 문신시술소에서 일하거나 록밴드로 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결국 절치부심 끝에 2011년 전격 복귀해 이번 대회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이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려면 어빈 선수 못지않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할지 모릅니다.

4년 후, 당신이 다시 도쿄의 수영장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저는 박수칠 겁니다. 다만 ‘국가에 이바지하겠다’는 식의 일그러진 신념이라면 박수 소리는 조금 작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비록 진심은 담겨 있으되 깊이가 없고 오직 행동만 있는 그런 신념을 멀리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을 물리치고, 오랜 사색과 번민을 통해 ‘나 자신을 다시 찾기 위해 도쿄에 왔다’고 하면 저는 아낌없이 박수칠 겁니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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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올림픽 직전에 나는 입대를 했는데, 그 뜨거웠던 여름에 수행했던 ‘중요 임무’는 올림픽 성화의 안전을 도모하는 일이었다.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기 북부의 어느 국도로 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데 혹시라도 모를 ‘불순분자나 간첩’의 소행을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막중한 임무’를 띠고 사병들은 보름이 넘도록 야산에 매복해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찬 광활한 산야를 경계했다.

ⓒ 경향신문DB

마침내 올림픽 성화 차량이 국도에 나타난 날, 그래도 임무라고 모두들 바짝 긴장했다. 그런데, 그 차량 행렬은 빠른 속도로 나타나서는 국도 저 너머로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이런 일쯤이야 기나긴 생애의 짤막한 에피소드로 그칠 노릇이지만, 부천시 고강동이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비극의 기원은 상계동이다. 1980년대 상계동은 삶이 아니라 생존조차 어려운 곳이었다. 친척이 살고 있어서 자주 놀러가곤 했는데, 사촌들과 씨름이며 레슬링을 하다가 벽을 밀치기라도 하면 옆집 안방으로 넘어지는 곳이었다.

옆집 아저씨는, 나가 놀아라, 하면서 무덤덤하게 못질을 서너 번 해서 다시 벽을 세워 엄연히 분리되어야 할 양쪽 가족의 사생활을 간신히 보호했다. 수십가구당 공용 화장실 하나가 달랑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아침이면 사람들이 신문지를 손에 말아쥐고 줄을 서던 곳이었다. 그 풍경에 질린 아이들은 집 밖으로 떠돌기 일쑤였고 성년이 되기 전에 대부분 가출했다. 그래도 그곳 또한 생존의 엄숙함이 지배하는 곳이었다. 다들 지옥에서 벗어나고자 열심히 살았다.

그러나 아다시피,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지옥에서 벗어나려는 상계동 사람들을 무저갱으로 밀어 넣었다. 과연 그것이 ‘세계인의 잔치’를 위한 것일까. 이제는 고전이 된 다큐멘터리 <상계동 올림픽>의 김동원 감독은 “중동 건설 경기가 끝나자 건설자본들이 올림픽을 명분으로 정부에 로비를 하여 재개발사업을 정책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재개발, 지하철 개통, 분양 딱지, 투기 광풍이 상계동을 뒤덮었고, 곧 헐거운 삶들을 나락으로 밀어버리는 강제 철거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일부는 경기도 포천으로 밀려났다. 90여가구가 끝까지 남았지만 이듬해 4월, 1000여명의 용역, 구청 직원, 진압경찰이 상계동을 초토화시킨다. 주민들은 명동성당에서 300여일을 버티며 지하철을 타고 상계동에 있는 일터나 학교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 많이들 흩어질 수밖에 없었고 39가구가량이 부천의 고강동 국도변으로 떠밀리게 된다. 그래도 라면이라도 끓여 먹으며 가건물을 지으면서 활로를 모색하는데, 또다시 공권력과 용역의 진압이 시작된다.

이유는? 88올림픽 성화가 지나가는 길목이라는 것이다. 주민들은 움막을 짓거나 땅굴을 파서 그 안에 들어가 간신히 최소한의 안전을 도모했지만 이마저도 올림픽 광풍은 참을 수가 없는 듯 당국은 거대한 가림막을 쳐버렸다. ‘외국인’이 보면 안된다는 이유였다.

리우올림픽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현지에 도착한 언론은 여러 정황들을 타전하고 있다. 지카 바이러스도 걱정이고 테러도 걱정이다. 다양한 질병을 전염시키는 모기를 피해 미국 농구대표팀은 항구에 1만6700t급 크루즈 선을 띄웠고, 영국 대표팀은 모기가 올라오기 어려운 고층에 선수단을 배치하기로 했다. 한국 선수단도 모기향, 모기장, 모기채 등을 준비했다는데, ‘만전’을 기하는 모습이다.

한편 지난 21일 브라질 연방경찰은 테러 모의 혐의로 브라질인 10명을 체포했다. 아울러 브라질 정부는 8만5000명의 경찰과 군인을 올림픽 기간 중 도심 곳곳에 배치할 예정이다. 리우의 치안은 극도로 불안해 지난 5년간 발생한 살인 사건 희생자 수가 무려 1519명에 달한다. 브라질 축구 스타 히바우두는 자신의 SNS를 통해 가급적 리우 방문을 자제해 달라고까지 했다.

이런 풍경은 이제 올림픽이 ‘지구촌의 축제’가 아니라 ‘치안 올림픽’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를, 세상은 평온한데, 스포츠가 문제라는 식으로 봐서는 안된다. 21세기의 대규모 스포츠 대회는 ‘인류의 화합’이라는 식의 부도난 어음을 내걸고 팽창하는 민족주의(정치)와 정교한 상업주의(자본)의 저글링으로 전락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동시에 경기장 바깥의 불안, 브라질의 심각한 불안정성과 지구 곳곳의 위기가 스포츠 대회를 계기로 강력하게 투영된 결과다. 그 무슨 축제를 치르기 위해 관중의 셀카봉까지 반입 금지시키는 상황인데, 이는 21세기가 최소한의 일상을 위해 최대한의 치안 통치를 승인해야만 하는 시대임을 역설한다.

리우올림픽에 소요되는 400억헤알(약 12조6200억원)의 예산은 최악의 경제 상황에 빠진 브라질을 더욱 더 수렁으로 몰아넣고 있다. 큰 대회 이후 재정 파탄을 겪는다는 ‘올림픽의 저주’가 이미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브라질 정치 상황 또한 극도의 혼란 상태이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체육부 장관이 지난 두 달 사이에 무려 3명이나 교체됐다.

이런 파국 속에서 가장 먼저 고통받고 최후까지 나락으로 내던져지는 사람들은 물론 브라질의 가난한 이들이다. 이미 리우의 빈민가는 올림픽을 명분으로 초토화됐고 거리는 쫓겨난 사람들의 행렬로 어수선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축제’는 ‘당신들의 올림픽’일 뿐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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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가 합의하고 또 우리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어떤 요소’가 한국 스포츠의 ‘어떤 상황’에 불일치하는지, 그것을 살필 필요가 있다.”

인권학자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의 말이다. 이 말을 지난달 말, 어느 포럼에서 들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포럼의 주최 측은, 한국 스포츠의 전근대적이며 비인권적인 상황이 비단 스포츠 내부의 상황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의 퇴행적 현상과 맞물려 있다는 전제 아래, 이런 문제라면 응당 경청할 만한 탁견을 지닌 조효제 교수를 초청하였던 것이다. 조효제 교수의 발표와 그에 따른 여러 토론자와 참가자들이 주고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경향신문DB

스포츠 내부의 인권적 상황은 끊임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해결해나가야 한다. 감독이나 선배들의 지속적인 폭행이나 괴롭힘도 그와 같은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당장의 긴급 구제 차원에서 적발하고 징계하는 것이 급선무이지만, 왜 그와 같은 폭행이 끊이지 않고 있는가 하고 질문을 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 일반의 위계서열 문화와 스포츠 내부의 서열 작동 방식의 같거나 다른 맥락을 헤아려 판별해내야 한다.

예리한 질문은, 분명한 답은 주지 못할지라도, 다양한 질문을 낳는다. 문제적 상황은 모습을 달리하여 다른 시공간에 불현듯 출현하기 때문에 언제나 질문은 새롭게 던져져야 하며 그럴 때에 질문은 애초의 질문부터 더 예리하게 본질을 파고들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 스포츠계에 만연해 있는 국가주의, 승리지상주의, 위계서열의 구조와 그에 따라 파생하는 폭력이나 비리는 물론 수업권, 문화권, 사회권의 침해 등에 대해 판별할 때에 ‘사회적 상식과 헌법에 보장된’ 바에 근거해 호소하는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상식이 건강한 것인지,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여러 권리들이 사회 일반에 적용되고 있는지를 살피고 그중 무엇이 스포츠계 내부의 전근대성을 더욱 악화시키는 힘으로 작동하는지를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예컨대 정치학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00년 3월10일 어느 칼럼에서 이탈리아의 경제 도약과 사회적 활기의 원인을 분석하면서 이 나라 특유의 가족, 지역, 조합의 역할에 주목한 바 있다. 그러나 2006년에는 바로 그 이유, 즉 이탈리아만의 독특한 가족주의적 사회 연결 관습이 프로축구의 승부 조작은 물론 사회 전반의 부정부패의 원인이 되었다는 칼럼을 썼다. 동일한 공간, 동일한 조건이지만 역사적 시간과 상황의 압력이 이 동일성을 정반대의 사회적 양상으로 낳게 하였음을 간파한 것이다.

최근 발생한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16)의 훌리건 사태 역시 마찬가지다. 축구가 좋아서, TV로 시청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아서 직접 경기장에 찾아가는 사람들을 훌리건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욕설이나 폭력이 수반돼야 한다.

훌리건은 그 다음 단계의 행동을 말한다. 경기 전부터 위압적인 분위기를 형성하고 경기 중에는 경기의 세부 진행 사항과 무관하게 쉼없이 구호를 외치거나 욕설을 하며 경기 후에는 승패에 상관없이 주먹을 쓰려고 우르르 몰려다닌다.

물론 에릭 홉스봄이 1960년대를 분석하면서 썼듯이, 훌리건은 사회복지 축소, 빈부격차 심화, 권리 박탈 등에 따라 비등해진 하위 계층의 불만이 어느 정도 열려 있으되 사실상은 규제와 관습 때문에 차단되어 있는 축구장에서 다소 거칠게 표현되는 정도로 이해되는 때가 있었다.

1980년대 악명 높은 마거릿 대처 정부의 노동자 탄압 때도 축구장에서 터져나오는 불만의 함성과 억하심정의 행동에 대해 존중하고 양해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양상이 달라졌다. 훌리건들의 좀 더 조직적인 행동 결사체인 울트라스는 축구장에 떼를 지어 나타나되 축구와는 하등 상관없이 행동한다.

지난 6월12일 유럽축구선수권대회가 열리는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에서 잉글랜드와 러시아의 울트라스들이 맞싸워 44명 이상이 다치는 일이 터졌다. 프랑스 정부는 러시아 울트라스 20명을 추방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추방된 자 중에는 극우파 울트라스 리더인 알렉산드르 슈프리긴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극단적인 인종 혐오와 러시아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전(全)러시아축구팬연합(VOB) 회장이자 러시아 하원 의원 이고리 레베데프의 보좌관이다. ‘개인적 일탈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구조화된 힘이 느껴진다. 프랑스 경찰은 “잘 훈련된 러시아 훌리건 150여명이 아주 빠르게 아주 폭력적으로 행동했다”고 발표했다.

축구팬이 서포터스가 되었다가 훌리건이 되고 울트라스가 되는 것은, 적어도 유럽에서는 어렵지 않은 행로다. 모든 축구팬이 울트라스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울트라스는 처음 축구장에 들어설 때는 축구팬이었다.

그렇다면 공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정녕 승패의 결과 때문에 그가 폭력배가 되었는가. 아니다. 그 사이에 스며든 사회적 공기를 맡아봐야 한다. 그가 숨쉬고 있는 곳의 사회적 공기, 그것의 성격과 방향에 의해 그는 축구장으로 들어가 열렬히 응원하기도 하고 축구장 밖에서 상대편 팬들에게 악행을 하려고 서성대기도 하는 것이다.

이는 급속한 사회적 퇴행과 경제 불안에 따라 언제든지 우리 사회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다. 처음에 그것은 일부 팬의 극성맞은 행동이요, 일부 ‘축빠’나 ‘야빠’들의 치기어린 팬심으로 불린다. 그러다가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넘쳐 흐름’이 발생하고 나면, 그 이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사회적 불만을 스포츠 현장이나 문화적 장소에서 거침없이 내뱉는 흉포한 행동이 될 것이다.

이미 그러한 일들이 다양한 문화적 장소에서 전국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제 실질적 의미의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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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가을, 부산아시안게임이 열리던 때 일이다. 일주일 넘게 아시안게임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다가, 가을 햇살을 올려다볼 만한 틈이 생겨 통도사로 바람을 쐬러 갔다. 마침 통도사의 개산대제가 열렸다. 당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도 있었다. 그해는 대통령 선거도 있던 때라서 2002 월드컵의 인기에 파도타기를 한 정 후보는 여러 사람들을 이끌고 큰절로 들어섰다. 몇몇은 축구협회 임원들이었다. 그중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운동장에서 한평생을 보낸 자신이 정치인의 유세 행차에 따라나선 모양을 꽤나 난처해했다.

그랬는데, 스포츠 스타들을 정치의 병풍으로 삼는 일은 끝나지 않았다. 2008년 3월 말, 18대 총선의 동작을 선거구에 출마한 정몽준 후보는 축구협회의 김정남 울산 현대 감독을 비롯, 부산 아이파크 황선홍 감독, 프로농구 전주 KCC 허재 감독 그리고 2002년의 스타 안정환 선수까지 유세 연단으로 끌어올렸다. 이들을 포함해 이회택 협회 부회장이나 김주성 국제부장 등도 비슷한 자리에 함께했는데, 아마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거부할 수 없는 거래에 응하다 보면 점점 그 거래의 달콤한 맛, 굳이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없더라도 엄청난 권력이 나를 필요로 한다는 치명적인 착시에 흔들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 대신에 내가 선택됐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덧 협조 연락이 없게 되면, 아 나는 폐기 처분된 것인가 하고 자괴감까지 들게 된다. 바로 그 순간, 전화벨이 울리면 두 번째 소리가 나기도 전에 통화 버튼을 누르게 된다. 나는 지금 권력의 작동 방식보다는 이러한 메커니즘에 의해 선수들의 몸과 영혼이 교란되는 상황을 얘기하는 중이다.

2009년 3월21일을 생각해보자. 당시 전남 소속의 이천수는 굴욕적인 징계를 받고 홈구장에 들어섰다. K리그 홈 개막전에서 심판을 향해 ‘주먹 감자’를 날리는 바람에 이천수는 3중의 처벌을 받았다. 6경기 출장정지, 제재금 600만원 그리고 페어플레이 기수라는 사회봉사활동 처분 말이다. 특수부, 강력부, 마약부 등을 거친 전직 검사 출신의 K리그 상벌위원장은 두 개의 징계로도 부족한지 이천수로 하여금 페어플레이 깃발을 들고 서 있도록 했다. 전남 팬들은 ‘선수인격 무시하는 X 같은 연맹’이라는 깃발을 내걸었다. 선수가 겪는 치욕적 상황이 팬들에게도 모욕의 순간이 됐다. 구단 직원들이 달려와 항의 깃발을 철거했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이천수는 심각한 표정으로 페이플레이 깃발을 들고 서 있었다.

그리하여 이천수는 ‘개과천선’을 했던 것일까, 모를 일이다. 그러나 협회가 선수에게 필요 이상의 과잉 징계, 그것도 의자 들고 복도에 나가 서 있으라고 하는 식의 인신 모욕적 징벌을 내린 것은 K리그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박태환 선수가 무릎을 꿇었다. 지난 5월2일, 인천시청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박태환은 “수영선수는 수영장에서 성적·결과를 가지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하더니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었다. 앞서 4월28일에 박태환을 지도하고 있는 노민상 전 국가대표 감독이 제자의 올림픽 출전을 소망한다며 무릎을 꿇은 바 있다. 스승이 무릎을 꿇은 지 4일 만에 박태환 선수도 무릎을 꿇었다.

상황은 이해할 수 있다. 2014년 9월 도핑 규정 위반으로 징계를 받은 후 박태환은 악전고투 끝에 주요 네 종목에 걸쳐 국제수영연맹(FINA)이 정한 A기준 통과 기록을 작성해 리우올림픽 출전 자격을 갖춘 상태다. 그러나 ‘징계를 받은 후 3년이 지나지 않은 자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는 대한체육회 규정 때문에 올림픽 출전 가능성이 희미해진 상태, 결국 무릎을 꿇는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왜 무릎을 꿇는단 말인가? 박태환의 소속팀 인천시청 구단주인 유정복 인천시장은 “박태환의 명예회복과 국위선양을 위해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했다. 노민상 전 감독도 “국가를 위해 이바지할 수 있게 해달라”고 말해왔으며 박태환도 이날 “국가에 봉사할 수 있게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했다. 그렇다면 국가를 향해 무릎을 꿇었단 말인가?

박태환에게 다른 말을 하는 사람, 다른 길을 제시하는 사람, 다른 삶을 권유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단 말인가? 이번 올림픽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다음 선수권 대회도 있다고, 입상만이 모든 게 아니라고, 출전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고, 선수 생활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지도자의 길도 있고 방송의 길도 있고, 대학원으로 진학해 자신이 세운 위엄 있는 기록의 학문적 의의를 탐구할 수도 있다고, 이렇게 다른 권유를 하는 사람은 없단 말인가.

대한수영연맹과 대한체육회는 좀 더 일찍, 좀 더 확실하게,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든가 아니면 모든 가능성을 확보하든가 하여 선수가 전전긍긍하지 않도록 했어야 한다. 감독을 비롯해 박태환과 가까운 사람들도 박태환의 어깨 위에 올려놓은 자신들의 욕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박태환 자신도, 극심한 모순적 상황이 부여하는 심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국위선양’의 허망함에 기대지 말고 다른 차원의 삶까지 이제는 생각해봐야 한다.

박태환의 아름다운 유영을 보면서 기뻐했던 팬들도, 언제까지나 기다릴 것이며 그가 ‘다른 선택’을 하더라도 기꺼이 성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이미 수차례나 ‘국위선양’을 한 선수가 바로 그 맹목에 볼모가 되어 국가를 향해, 국가의 체육 정책을 주무르는 사람들을 향해 굴욕적으로 무릎을 꿇는, 부끄럽고 가슴 아픈 상황이 재연되지 않을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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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일삼는 관중을 ‘훌리건’이라 한 연유는 확실치 않다. 1890년대 뮤직홀 노래에 등장하는 가상의 무례한 아일랜드 가족 이름을 땄다는 설, 아일랜드의 깡패 술집 경비원인 패트릭 훌리한에서 비롯됐다는 설 등…. 이 밖에 1745년 재커바이트 봉기 때 영국의 조지 와이드 장군이 영국군을 무던히 괴롭혔던 ‘깔따구’(파리의 일종인 벌레)의 게일어인 ‘meanbh-chuileag’를 ‘훌리건(hooligan)’으로 발음한 게 시초라는 설도 있다. 와이드가 영국군을 지긋지긋 물어뜯은 깔따구떼를 ‘훌리건’이라며 증오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훌리건’이 폭력행동을 이르는 말이 된 것은 한 신문 보도가 계기였다. 1898년 8월 런던 남부에서 ‘훌리건 보이스’라는 젊은 폭력조직이 살인사건을 일으켰다. 8월22일자 런던의 ‘데일리그래픽’ 신문은 이 사건이 ‘훌리거니즘(Hooliganism)의 이름 아래 자행된 만행’이라는 내용의 기사를 썼다.

인간의 훌리건 성향은 지극히 원초적인 데다 내셔널리즘이 유독 발현되는 축구에서 극성을 떨쳐왔다. 축구는 인류가 대리전쟁을 펼치는 좋은 수단이었다. 축구를 핑계삼아 폭력을 휘두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인 구스타브 르봉은 “한 사람일 때는 교양인일 수 있지만 군중 속에서는 야만인이 된다”고 했다. 1985년 관중 간 패싸움으로 39명이 사망한 벨기에 헤이젤 참사가 괜히 일어났겠는가.


러시아와 잉글랜드의 유로2016 경기 후 벌어진 팬들의 충돌로 경찰이 최루탄을 발사해 잉글랜드 팬들이 얼굴을 가리고 있다 _AP연합뉴스


지금 유로 2016 축구대회가 유럽의 밤을 뜨겁게 달구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잉글랜드-러시아 팬끼리 치고받다 수십명이 다쳤다. 스포츠 종목의 팬이자 특정 팀의 서포터스인 사람도 군중심리에 휘말린다면 한낱 훌리건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런 사람들에게 ‘롤리건(Roligan)’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조용하다’는 덴마크어(rolig)에 gan을 붙인 말이다. 열정적이지만 한없이 질서정연한 1980년대 덴마크 축구팬들을 가리킨다. 롤리건뿐인가.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 한국 응원단은 해외 언론들로부터 ‘콜리건(korligan)’의 명성을 얻었다. 열정적인 응원은 물론 깨끗한 뒤처리까지 책임지는 응원문화를 평가한 것이다. 축구가 아무리 원초적이라 해도 축구장은 짐승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란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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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올림픽의 꽃, 피겨스케이팅에서 자랑스러운 우리 선수가 아름다운 연기를 마치고 심사위원의 점수가 나오길 기다리는 긴장된 순간.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TV 화면은 그 선수를 주목한다. 그런데 그 순간, 선수가 특정 생수 회사의 로고가 선명하게 보이는 생수병의 물을 마신다면? 그 생수 회사에게는 최고의 마케팅일 수 있지만 동계올림픽 공식 생수로 지정된 다른 생수 회사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올해 8월 개최되는 브라질 리우 하계 올림픽이 끝나고 나면 그 다음은 바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다. 3번의 도전 끝에 2011년 대한민국 평창이 동계올림픽 개최도시로 선정된 날의 감격이 올림픽 개막을 앞둔 설레임으로 바뀌어야 할 시점이기도 하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동계올림픽 개최 국가로서 올림픽의 가치를 고양하기 위해 지켜야 할 룰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2018 평창동계올림픽대회 및 장애인동계올림픽대회 조직위원회의 공식 법률자문사로서 조직위원회의 동계올림픽 준비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다 보니 대회 시설의 준비 부족, 부족한 재원 등 흔히 언론에서 언급되는 문제보다도 더 광범위하고 파급력이 크며 심각할 수 있는 것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의 브랜드 가치 보호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장에 내정된 이희범 전 장관_연합뉴스



평창동계올림픽에 소요될 막대한 재원은 국가·지방자치단체의 공공재원과 후원기업, 단체들의 후원금, 공식 상품·서비스 판매대금과 경기장 입장권 수입, 중계방송료 수익 배분금으로 조성된다. 이 중 상당 부분은 후원금이 차지하는데 이러한 후원금의 규모는 평창동계올림픽의 브랜드 가치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평창동계올림픽의 후원사가 돼 해당 분야에서 독점적, 공식 후원사의 자격과 권리를 누릴 수 있다면 그 가치는 매우 높아질 것이고 그러한 후원사의 권리가 매복 마케팅이나 무임 승차 혹은 ‘나 하나쯤이야’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일반인들에 의해 침해·훼손되면 어떤 기업이나 단체도 후원에 나서고자 하지 않을 것이다.

기업 차원에서 마케팅의 한 방편으로 공식 후원을 하지 않으면서 우회적으로 올림픽을 활용한 마케팅을 하는 매복 마케팅은 이러한 브랜드 권리에 대한 직접적이고 의도적인 침해로 위법하며 부당한 일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상업적 의도가 매우 적은 경우라 하더라도, 공식적으로 인정되지 않은 행사나 단체나 개인이 올림픽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하거나 표현하는 활동을 하는 것도 올림픽이라는 브랜드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올림픽은, 올림픽을 연상시킬 수 있는 그 어떠한 다른 표현을 포함하여, 식당 간판 한 구석, 주민 행사 현수막, 동네 어귀 어느 곳에 아무렇지도 않게 마음대로 표시하고 이용해서는 안 되는, 최고 수준으로 ‘보호 받아야’ 하는 최상의 ‘가치 있는’ 브랜드라는 점을 우리 모두 유념해야 할 것이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전 국민이 하나된 열정으로 깨끗하고 공정하고 평화롭게 치러야 할 세계적 축제다. 1988 서울올림픽을 뛰어넘어 2018 평창동계올림픽이 더 빛나는 가치를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손으로 올림픽의 가치를 지켜나가자



이윤남 |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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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테니스 세계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29)는 2010년 여름 조국 세르비아의 한 의사로부터 “빵을 먹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선뜻 동의하기 힘든 말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빵과 파스타, 피자에 유제품과 고기를 즐긴다. 의사는 심지어 파스타, 피자마저 끊으라고 했다. 부모가 피자 가게를 운영하는 그에게 유고슬라비아 내전 때 가족의 생명을 지켜준 빵을 포기하라니….

조코비치는 21살이던 2008년 호주오픈에서 우승하며 상승세를 탔다. 하지만 그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체력이 약해 중요한 경기에서 후반에 와르르 무너지는 경우가 많았다. 2010년 호주오픈 8강전에서는 조 윌프레드 송가(프랑스)와 접전을 펼치다 막판에 호흡곤란을 일으켜 승리를 헌납했다. 그러나 그는 1년 뒤인 2011년 7월 윔블던에서 당시 최고선수인 라파엘 나달(스페인)을 꺾고 우승했다. 그해 조코비치는 43연승을 거두며 메이저 타이틀 3개를 따냈고 세계 1위에 올랐다. 이후에도 승승장구했고 6일 마침내 프랑스오픈마저 석권하면서 커리어 그랜드 슬램을 달성했다.


남자 프로테니스 세계랭킹 1위 노바크 조코비치_AP연합뉴스


조코비치를 변하게 만든 건 식이요법이다. 호흡곤란 증세는 밀가루에 포함된 단백질 성분 글루텐에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그의 체질 때문이었다. 조코비치는 유제품과 설탕이 많이 든 음식까지 피하며 몸을 개조했다. 1m88㎝의 큰 키에 체중 78㎏인 그는 쉽게 지치지 않고, 더 빨라졌다. 최근 한국에선 탄수화물 제한식 바람이 불고 있다. 일본의 니시와키 슌지 박사는 <당을 끊는 식사법>에서 “탄수화물은 독소”라며 밥, 빵, 국수 등 탄수화물을 아예 끊으라고 권한다. 그럼 무엇을 먹으라는 말인가. 과거 조코비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효과는 엄청나다. 조코비치는 최근 펴낸 책 <이기는 식단>에서 “딱 2주만 투자하라. 14일간 글루텐을 피하면 당신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권한다. 슌지 박사는 “3일만 탄수화물을 끊으면 몸에서 체지방이 분해되기 시작한다”고 말한다. 밀가루 음식을 먹고 더부룩하고 불편한 느낌을 받는 이들, 당뇨·고혈압·중성지방·두둑한 뱃살 등으로 고민하는 이들이라면 ‘빵 끊기, 밥 끊기’를 한 번쯤 시도해 봐도 좋을 것 같다.



김경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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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선생님께.

윤수입니다. 평소에 자주 연락을 드렸어야 했는데, 엊그제 스승의날을 속절없이 보내는 바람에 마음이 무거웠고 또 곧 정년퇴임을 하신다고 하여 이렇게 귀한 지면을 빌려 인사드립니다.

세상사 바쁘다는 핑계로 5인 이상 모이는 자리에는 가급적 나가지 않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는 저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그래도 잊을 만하면 나가는 자리가 선생님을 뵙는 반창회입니다. 숱한 동창회나 모임을 꺼리되 유독 반창회만큼은 나가려 하고, 어쩌다 빠지기라도 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저를 보고 식구들은 도대체 초등학교 5학년 반창회를 저토록 숭상하는 것이 신기하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그리고 1978년에 서울화계초등학교 5학년 5반을 다녔던 친구들이라면 제 마음의 그늘을 금세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그해의 5학년 5반은 기나긴 학창 생활 중에서도 매일매일이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가득 찼던, 모두가 싱그럽게 열매 맺던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 첫 추억이 생각납니다. 화계초등학교에서는 매주였던가 매달이었던가, 아무튼 토요일에 ‘하이킹’이라는 걸 가곤 했었습니다. 신학기 들어 첫 하이킹을 맞아 저희는 선생님을 따라 학교 뒷동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동산에 풀어놓고 마음껏 놀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친해지지도 않은 터라 저희는 눈치를 보며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습니다. 이윽고 선생님께서는 저희를 학교로 인솔해 내려가셨습니다. 교실로 들어가셔서, 선생님께서는 참으로 놀라운 이유로 손바닥을 한 대씩 때리셨습니다. 요즘이야 어떤 이유에서든 체벌해서는 안되지만 그때는 따끔하게 매를 대는 것이 어쩔 수 없는 교육과정의 하나로 받아들여지던 때였습니다. 아무튼 선생님께서는 저희들 손바닥을 한 대씩 따끔하게 때리셨는데, 그 이유란 놀랍게도 ‘잘 놀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용걸이는 기나긴 학창 생활을 돌이켜 봤을 때 ‘도대체 잘 놀지 못해서 맞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라고 회상합니다.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 하면, 저희는 잘 놀았습니다. 실컷 놀았습니다. 쉬는 시간은 물론이고 수업 중에도 놀았고 점심 시간에도 놀았고 학교가 파한 후에도 운동장에 남아서 놀았습니다. 동네마다 몰려다니면서 놀았습니다. 아, 물론 맞지 않으려고 논 것은 아닙니다. 놀아도 괜찮다는, 잘 놀아야 한다는, 기를 쓰고 놀아야 한다는 선생님의 방목으로 저희는 해가 저물도록 놀았습니다. 국어 시간에도, 산수 시간에도 놀았습니다. 옆 반 선생님이 저희 교실 문을 벌컥 열고는 “아니, 이 선생. 애들 공부는 언제 가르칠 거요?” 했던 기억까지 납니다. 요즘의 학교 풍토에서는 상상도 못할 진짜 공부였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무작정 놀게만 하지 않으시고, 자상하게 가르쳐주기도 하셨습니다. 물론 그게 피구에서 이기는 전략을 연마하거나 11월의 어느 날, 아침부터 첫눈이 내렸을 때, 수업하다 말고 뛰쳐나가서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점심 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눈싸움을 하거나 피리를 불거나 발야구를 하거나 또 하이킹을 가서 노래를 실컷 부르는 방법들이었지만 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교과 공부가 최고라는 옆 반을 성적으로도 한번 이겨보자 해서 모처럼 선생님과 저희가 열심히 공부해서 최고 반을 따돌리고 평균 점수 1등을 한 일도 기억납니다.

선생님은, 어린 저희들이 보기에 만능 스포츠 선수였지요. 선생님의 스파이크는 매처럼 날카로웠고 야구를 하실 때는 그리 넓지도 않은 운동장에서 2루 도루까지 하셨지요. 상필이는 ‘아니 애들 앞에 두고 도루가 다 뭐냐?’고 추억을 되새깁니다. 6학년 선배들을 이기기 위해 수업 시간 내내 피구의 전략과 전술을 짜던 선생님의 열정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서 성적이나 성별을 전혀 고려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를 앞세우거나 여학생이라고 열외를 시키는 일이 없으셨지요. 그래서 손미은이나 변기영 같은 친구들이 피구의 주전이었고 발야구의 투수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이제 그런 추억들은 20세기의 유산으로 사라진 듯 보입니다. 파행에 파행을 거듭한 우리의 교육 현실은 이제 몸으로 부대끼고 웃고 떠들면서 성장하는 진짜 교육의 가치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선생님 역시 저희들과 함께하던 시절보다는 그 이후로 아이들과 함께 스포츠를 즐기고 노래를 하고, 꽃 피면 꽃구경 가고 눈 내리면 눈싸움하던 방식을 어쩌면 포기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스포츠 활동 또한 빈부의 격차에 따라 완전히 구별되어 예전 같으면 조금 형편이 어려웠던 저 같은 학생도 일단 교실에만 오면 온종일 뛰어놀 수 있었는데, 요즘에는 문화적 차별과 시선의 지배가 역력하여 어린 친구들이 완벽하게 통제되어 이미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 주눅 들어 버리는 듯해 보입니다.

선생님. 이제 정년퇴임을 하신다 하니, 두 번 다시 그런 교실이 있을 수 없고 몸으로 서로 사랑하며 배우는 교실이 영영 사라지는 듯해 송구합니다. 선생님으로부터, 아이들은 기를 쓰고 해가 저물도록 놀아야 한다는 것을, 공을 차고 배트를 휘두르고 수영을 하면서 커야 한다는 것을 배웠지만 우리 세대에 이르러 이 귀한 스포츠 교육의 가치가 완전히 실종되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마음은 참담합니다만, 그래도 그 시절의 꼬마 아이가 선생님으로부터 몸의 교육을 배워 이렇게 가갸거겨를 겨우 떼고 먹고살 수 있게 됐으니, 이에 뒤늦은 ‘스승의날’ 인사를 올립니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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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선수 박태환이 큰절을 했다. 5월2일 기자회견 자리에 나온 그는 “국가에 봉사할 수 있도록 한 번만 기회를 달라”며 바닥에 엎드렸다. 올해 8월 브라질 리우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나가고 싶다는 게 그 이유다. 한국 수영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금메달을 안겨줬고, 아시안게임에서도 많은 금메달을 딴 박태환이니만큼 이제 개인의 삶을 살겠다고 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을 텐데, 그의 봉사심은 나 같은 범인이 그 크기를 측량하기 어려울 만큼 큰 모양이다.

다들 알다시피 박태환은 2014년 아시안게임이 열리기 두 달 전, 남성호르몬 주사를 전문으로 하는 병원에서 국제수영연맹이 금지하는 약물 중 1순위에 해당되는 남성호르몬제 ‘네비도’를 투여받았다. 박태환은 억울하다고 말한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2개월이면 약물이 체내에서 완전히 배출될 텐데, 세계반도핑기구가 그 기간을 기다려주지 않고 불시에 검사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박 선수에 따르면 그는 그게 금지약물이란 사실을 전혀 몰랐고, 주사를 맞기 전 의사에게 몇 번이나 투여해도 괜찮은지 확인받았단다. 희한한 점은 금지약물을 투여받은 선수들이 하나같이 똑같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라면 약물을 한 선수들은 대부분 사악한 마음을 가진 의사에게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인 셈, 이런 사람이 하도 많은지라 세계반도핑기구는 ‘고의성 여부에 관계없이 약을 하면 무조건 선수 책임이다’라는 조항을 집어넣고 그에 따른 징계를 하고 있다. 결국 박 선수는 아시안게임에서 딴 메달을 모조리 박탈당하고 1년6개월간 선수자격을 정지당하는 징계를 받고 만다.

그 징계는 2016년 3월로 끝났으니 리우 올림픽에 참가가 가능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문제가 남아 있었다. 대한체육회 국가대표 선발규정에 따르면 약물로 인해 징계처분을 받을 경우 “징계 만료일로부터 3년이 경과하지 아니한 자는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고 돼 있기 때문이다. 이 규정대로라면 박태환 선수가 리우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지라, 박 선수와 그의 지지자들은 이 규정의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안 그래도 국제수영연맹으로부터 1년6개월의 징계를 받은 마당에 우리나라에서 추가로 징계하는 것은 이중처벌이라는 게 그들의 논리다.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현실에서 이중처벌은 생각보다 흔하다. 예컨대 모 대학에서 기생충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보이스피싱에 가담했다가 붙잡혀 징역형을 살았다고 해보자. 형기를 마치면 그가 계속 대학교수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아마 그가 감옥에 가는 순간 해당 대학에서는 그를 해임할 것이다. 그가 출소한 뒤 “이미 법의 심판을 받았는데 해임까지 하는 것은 이중처벌이다”라며 억울함을 호소해봤자 그에게 동조할 사람은 없을 것 같다.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보이스피싱과 금지약물이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하실 분들이 계시겠지만, 근육양이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수영에서 남성호르몬제 투약은 보이스피싱을 능가하는 범죄일 수 있다.

국민들 앞에서 넙죽 엎드리는 것과는 별개로, 박 선수는 국제스포츠중재재판소(CAS)에 이미 제소를 했단다. ‘대한민국이 나를 올림픽에 못 가게 하니 너희들이 좀 압력을 넣어 달라’는 취지인데, 외국의 힘을 빌려서라도 올림픽에 가겠다고 하는 걸 보면 그가 이러는 게 진짜 봉사심의 발로인지 의심이 간다. 진정한 봉사란 해당 기관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가능한 법인데, 나라에서는 제발 쉬라고 하는데 편법을 동원해서라도 올림픽에 가겠다고 우긴다면 봉사의 취지가 퇴색되지 않겠는가? 게다가 CAS가 박 선수의 출전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어떤 사람을 국가대표로 뽑을지 결정하는 것은 그 국가의 고유한 권리지, 국제재판소의 판단을 구할 일은 아니다. 뻔히 이중처벌임을 알면서도 대한체육회가 저런 규정을 만든 이유는 국가대표가 갖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모 나라의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왔는데, 알고 보니 그가 부정선거로 대통령에 당선된 사람이었다. 그 경우 우리는 “쯧쯧, 저 나라는 어떻게 저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인정할까?”라며 나라 전체를 우습게 볼 것이다. 수영선수라고 해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약물로 징계를 받은 선수를 징계가 풀리자마자 올림픽에 참가시키면 ‘저 나라는 포용력이 넘치는구나!’라고 감탄하는 대신 ‘메달 따려고 혈안이 됐구나’라며 혀를 차지 않겠는가?

박태환은 우리나라에서 불모지라 할 수영에서 세계 정상에 섬으로써 국민들에게 큰 기쁨을 준 선수다. 고의든 아니든 약물을 함으로써 명예가 크게 실추되긴 했지만, 그를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많고, 나도 그중 하나다. 그가 올림픽에 나가 또 하나의 메달을 따는 것도 좋은 일일 수 있지만, 나라에서 만든 규정을 존중하고 그에 따르는 건 더 멋진 일이 아닐까 싶다. 박 선수가 십년 넘게 한국수영을 홀로 짊어지느라 애썼던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이제 그 부담을 내려놓고 즐기면서 수영을 하길 빈다. 국가대표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이지, 수영선수 자격이 박탈된 것은 아니니까.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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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소리인가. 신국창생의 신화인가, 영웅탄생의 전설인가. 대한축구협회장과 대한체육회장 그리고 문교부 장관까지 지낸 민관식의 자전기록 중 일부다. 그는 회고한다. 1964년 도쿄올림픽을 현지에서 관람한 후 한국에도 선진적인 체육훈련센터의 필요성을 절감했다고, 그리하여 귀국 후 이를 추진하던 중 “영겁의 어둠 속을 꿰뚫은 순백의 빛줄기” 같은 소리를 들었다는 것이다. ‘태릉, 태릉으로 가라!’

문제는 그곳이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세계문화유산! 아, 물론 그때는 그런 생각조차 희박했다. 태·강릉의 문화적 가치? 그런 인식이 없던 시절이다. 창경궁이 유원지였던 시절이고 경복궁 내에 사령부 막사가 있었고 1963년에는 권역 내에 골프장, 식당, 주점, 잡화점 등을 지으려 했다. 그러니 서울 저 바깥의 태·강릉 한가운데에 체육훈련센터를 건립하겠다고 하는 것은 신묘한 우주의 기운을 느끼면 그만이었다. 그곳이 바로 태릉선수촌이다.

지금 태릉선수촌이 논란에 휩싸여 있다. 1966년에 완공되어 이른바 ‘국위선양 엘리트 체육’의 산실이었던 이곳이 태·강릉 복원 계획에 따라 2017년 완공 예정인 충북 진천으로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다. 현 태릉선수촌은 8만평 정도이고 진천은 26만평 정도 된다. 문화재청은 세계유산 등재 당시 유네스코가 왕릉의 원형 보존을 권고한 만큼 선수촌 철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한체육회는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유산 등록 신청을 했고 이미 서울시 지정 ‘서울 미래유산’ 목록이란 점을 보존의 근거로 내세운다.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기준이지만, 그러나 현실에서 그리고 국제적 기준에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대응할 정도는 아니다.

세계문화유산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을 지정하는 것은, 일부의 오해와 달리, 관광산업 활성화나 지역경제 활성화 같은 맥락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일로 인해 ‘특정 국가의 문화유산이 아닌 인류 전체의 문화유산’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강력한 국제적 약속이다. 말하자면 이미 1960년대에 한국은 세계문화유산의 가치가 있는 곳을 체육센터로 훼손한 셈이다. 단 유네스코는 오랜 세월 동안 문화유산 권역 안팎에서 가난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원형 복원 때문에 갑자기 쫓겨나는 일을 막고, 최소한의 범위에서 공존하는 것을 권장할 뿐이다.

태릉선수촌 보존을 주장하는 체육계의 논리는 매우 허약하다. 이를테면 서울시의 ‘미래문화유산’ 지정은 대한민국 정부가 태릉선수촌 철거·이전 계획을 공식 문서로 국제기구에 제출한 사안에 비교할 때 힘이 약하다. 2013년 12월9일 국회에서 열렸던 토론회의 주장들도 빈곤한 주장들의 격렬한 성토였다.

태릉선수촌장을 지낸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과 여러 체육인들의 의견을 종합하면, 현재의 자리에 있을 때 경제효과가 있고 무엇보다 학생 선수들의 학습권을 보장할 수 있으며 진천으로 옮기면 도시와의 고립감 때문에 경기 감각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과연 그러한가. 현재 자리에서 국가대표들이 집중적으로 훈련은 했지만 학습권이 보장됐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대표 선수들이 수십년 동안 선수촌이라는 ‘고립된 섬’에 갇혀 그 사회의 평균적인 교육, 문화, 일상, 친교 등으로부터 동떨어진 채 폐쇄적으로 훈련만 해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보존의 논리가 아니라 오히려 현행 엘리트 훈련 시스템에 대한 전면적 개혁의 근거가 될 뿐이다. 그나마 인정할 수 있으며 또한 확대할 만한 근거는, 태릉선수촌이 그 자체로 한국의 20세기를 압축한 또 하나의 문화적 장소라는 점이다. 근대문화유산의 역사적, 문화적, 장소적 가치, 즉 그 집합 기억의 가치를 살릴 필요가 있다.

물론 이것도 ‘태극전사의 땀이 밴’ 같은 수사로는 안된다. ‘귓전을 강하게 때리는 목소리, 태릉, 태릉으로 가라’, 이런 미신적인 소리에 의해 선수촌이 창건된 것도 아니요, 그 속에서 50년 넘게 영웅들의 위대한 전설만 쓰인 것도 아니다. 기억은 특정인의 인상이나 경험이 아니다. 사회 속에서 격렬하게 생성되고 소멸되는 ‘기억과 망각의 적대적인 상호작용’이다. 파편화되고 불완전한 개인 기억에 의해 특정 사건이나 장소가 전면적인 의미를 차지해서는 곤란하다.

승리한 자, 메달리스트, 체육과 문화의 권력, 스타들. 이들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 해석된 태릉선수촌의 장소적 기억을 모든 체육인들에게 강요하고, 그 공간을 둘러싼 상처와 실의와 좌절을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는, 그런 왜곡의 논리로 현재의 자리를 보존하자는 주장에는 반대한다. ‘온 국민의 기억’이란 말도 어폐가 있다. 잠실이나 동대문운동장과는 경우가 다르다. 태릉선수촌은 어지간한 사람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겨우 1년에 한두 번 행사 때문에 개방했던, 그런 외딴섬이었다.

보존을 주장하려면 체육 역사를 전면적으로 새로 쓸 것, 엘리트 중심의 한국 체육사 서술을 다차원의 다중 기억 방식으로 재현할 것, 문자 사료뿐만 아니라 수많은 관련 자료의 아카이빙을 집성할 것, 폐쇄된 엘리트 훈련 방식의 개혁 프로그램을 제시할 것, 그러면서 동시에 현재의 자리를 지켜야만 하는 문화적 근거를 모색할 것 등이 요구된다.

그저 ‘88올림픽의 영광과 선수들의 땀방울’을 보존하자는 정도로는 ‘세계문화유산 원형 복원’의 국제적이며 역사적인 논리를 이길 수 없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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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제(柯潔) 1위, 알파고 2위, 박정환 3위…이세돌 5위.’ 인공지능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대국 직후 바둑전문랭킹사이트인 ‘고레이팅’이 발표한 세계랭킹이다. 화제의 주인공인 이세돌의 랭킹이 실은 커제(중국 1위)와 박정환(한국 1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커제 9단은 최근 세계 3대 타이틀(바이링배·삼성화재배·멍바이허배)을 휩쓴 기사다. 국내 기사들은 커제와의 전적에서 19승41패의 참담한 성적을 보이고 있다. 이세돌 9단도 절대 열세(2승8패)다. 커제는 도발적인 언행으로 자주 인구에 회자되었다. 지난 1월 멍바이허배 결승을 앞둔 이 9단이 “내가 이길 확률이 50%”라고 예측하자 커제는 시니컬한 반응을 보였다. “무슨 50%씩이나…. 5%겠지.” 19살 청년의 ‘시건방’을 승리로 다스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번번이 패해 물러나니 장이 뒤집힐 판이다.

박정환 9단(23)이 버티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족해 보였다. 사실 박 9단은 2011년 불과 18살에 후지쓰배 우승으로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기사다. 2013년 농심배에서는 막판 2연승으로 극적인 우승을 견인했다. 지금까지 29주 연속 국내랭킹 1위를 질주하고 있다. 그러나 뭔가 결정적인 한 방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그랬던 박정환 9단이 상하이에서 열린 ‘바둑올림픽’(응씨배)에서 커제를 꺾고 준결승전에 진출했다. 두 기사는 얼마 전 수지(박정환)와 Lurk(커제)라는 아이디로 펼친 인터넷 10번기에서 5승5패의 호각을 이룬 바 있다. 두 기사의 스타일은 꽤 다르다. 박 9단은 취미도, 특기도, 직업도 바둑일 만큼 오로지 바둑밖에 모른다. 사활 문제를 푸는 게 유일한 취미여서 ‘사활귀신’이란 별명이 붙었다.

박정환 9단과 커제 9단이 응씨배 세계바둑선수권 본선 8강전에서 승부를 겨루고 있다_경향DB

커제 9단은 거침없는 말투 때문에 ‘밉상캐릭터’로 알려졌다. 그러나 달리 보면 세인의 관심을 끄는 ‘말의 잔칫상’을 마련해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글도, 해설도, 예능감도 빼어난 팔방미인이다. 김성룡 9단은 “꼭 이창호(박정환)와 이세돌(커제)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평한다. 박정환 9단의 분발로 지긋지긋했던 ‘커제 공포증’을 털어냈으니 반가운 일이다. 인간 대 기계에서 이젠 인간 대 인간…. 앞으로 두 라이벌 이 빚어낼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질 것 같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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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비 콕스(75)는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감독이었다. 아내 팸 콕스는 “야구에 미친 남자”라고 했다. “남편의 인생에서 99.75%가 야구였다”고도 했다.

몇 번 없었던 가족 소풍 중 한 번은 동물원이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 안에 갇힌 고릴라만 줄곧 쳐다보곤 했다. 흐뭇하게 웃으며 콕스가 말했다. “여보, 저 녀석 팔뚝 좀 봐. 어떻게 저 녀석과 계약해서 우리 팀에 뛰게 할 수 없을까.”

29년 동안 메이저리그 감독을 지냈다. 애틀랜타 감독만 25년을 했다.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애틀랜타를 11년 연속 지구 우승으로 이끌었다. 통산 2504승은 메이저리그 감독 역대 4번째로 많은 승리다. 올해의 감독상을 4번이나 수상했다. 바비 콕스 감독이 따낸 2504승보다 더 주목받는 기록은 158번의 퇴장 기록이었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메이저리그 최고 기록이다. 성격이 불같고 화를 참지 못해서 툭하면 뛰쳐나갔던 게 아니었다. 콕스 감독은 일이 생기면 뚜벅뚜벅 걸어가 심판 앞에 섰다.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모자를 팽개치거나 바닥을 파헤치지 않은 채 조용조용, 또박또박 따졌다. 퇴장당하고 나면 휙 돌아서 더그아웃으로 돌아갔다. 감독 생활 초창기였다. 애틀랜타에 대럴 채니라는 백업 내야수가 있었다. 통산 타율이 2할1푼7리였으니 그리 대단한 선수는 아니었다. 뉴욕 메츠와의 경기였다. 채니는 홈 슬라이딩을 했고, 아웃 선언을 당했다. 채니가 펄쩍펄쩍 뛰기 시작하자 콕스 감독이 뛰쳐나왔다. 심판을 향해 대신 항의를 했고, 채니 대신 감독이 퇴장을 당했다. 화가 난 콕스 감독은 퇴장 뒤 감독실의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때려 부쉈다. 채니는 깨져서 물이 넘치는 변기를 지켜봤다.

메이저리그 애틀랜타의 바비 콕스 감독_AP연합뉴스

채니는 이후 콕스 감독의 모든 결정을 따르겠다고 결심했다. 후보로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았어도 전혀 불만이 없었다. 1979년 시즌 막판이었다. 데뷔 후 11번째 시즌을 보낸 채니의 타율은 1할1푼1리밖에 되지 않았다. 콕스 감독이 채니를 불렀다. “구단이 재계약을 하지 않을 것 같다. 다른 팀이 네 플레이를 보고 데려갈 수 있도록 남은 시즌 2주 동안 최대한 모든 경기에 선발 출전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채니는 그 경기들에서 타율 3할3푼3리를 기록했다. 시즌이 끝난 뒤 피츠버그와 뉴욕 메츠에서 영입제의가 있었지만 이를 거절했다. 채니는 자신의 마지막 감독으로 바비 콕스를 택했다. 애틀랜타를 대표했던 타자 치퍼 존스가 0-3으로 뒤진 경기에서 삼진을 당하자 헬멧을 팽개쳤다. 심판이 존스를 향하는 순간 콕스 감독의 고함이 먼저 나왔다. 급하면 욕설이 섞였다. 심판은 선수 대신 감독을 향하고 감독에게 퇴장을 선언했다. 경기 후반 마크 테셰이라의 역전 홈런이 나왔다. 158번의 퇴장 대부분이 그렇게 이뤄졌다.

항의와 퇴장이 심판 길들이기를 향하지 않았다. 선수의 퇴장을 막기 위한 선수(先手)였다. 퇴장이 곧장 승리를 보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콕스 감독이 퇴장당한 경기의 승률은 38.5%. 통산 승률 55.6%에 한참 모자란다. 하지만 콕스 감독의 퇴장은 선수들의 로열티를 쌓았고, 팀워크를 만들었고, 통산 2504승의 밑거름이 됐다. 콕스 감독은 나서서 승리를 챙기는 대신, 누군가를 대신해 퇴장당함으로써 나머지의 승리를 얻었다.

20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났다. 이겼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대표들은 즉각 ‘내 몫’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는 추대론을 얘기하고 또 누구는 대권을 향한 결선 투표제를 언급했다. 졌다고 생각하는 이들의 대표는 제 잘못이 아닌 양 모른 척하는 중이다.

그깟 공놀이지만 야구에서마저 진짜 감독은 패배를 안고, 승리의 공을 선수들에게 돌린다. 이겼으니 이제 내놓아라, 졌지만 내 탓은 아니다라는 팀은, 다음 경기에서 이기기 어렵다. 승패가 아니라 그 야구가 발전하지 못하는 게 더 큰 문제다. 애틀랜타가 11년 연속 지구 우승을 한 건, ‘퇴장’ 덕분이다.


이용균 | 스포츠부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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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많은 질문으로 가득 차 있다. 정답을 제시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다. 그래서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도 있고 생각이 엇갈리는 장면도 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하고 정지우 감독이 연출한 영화 ‘4등’이다. ‘해피엔드’와 ‘은교’로 유명한, 그래서 스포츠 인권을 다룬 이 영화 ‘4등’을 연출했다는 게 조금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원래 ‘사로’(1994), ‘생강’(1996) 같은 독립단편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2005년에 류승완·장진·김동원과 함께 인권위 프로젝트 영화 ‘다섯 개의 시선’에 참여했던, 그리고 그 유명한 ‘해피엔드’나 ‘은교’도 단순한 치정에로물을 넘어 관계의 형성과 파탄의 미묘한 엇갈림을 제시했던, 정지우 감독이다.

그런 까닭에 일차적으로 나의 기대는 이 영화가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습적 재현을 넘어서길 바랐다. 가령 드라마 속의 ‘택시 기사’를 연상해 보자. 일반적인 택시 기사가 아니라 드라마에서 ‘재현’되는 택시 기사 말이다. 무뚝뚝하거나 거칠게 과속하거나 기사식당에서 큰 소리로 떠들면서 뜨거운 국밥을 퍼먹는 식으로 재현되는 모습이란, 현실의 단면이 지나치게 과장되어 굳어져버린 진부한 이미지다. 영화의 연출자가 별다른 고뇌 없이 자동반사적으로 재현하는 이미지는,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고정관념을 굳게 한다.

미디어가 판박이로 찍어내는 이미지는 일종의 낙인이 되고 생활 관습의 복제까지 수반한다. 동료에게 상냥하고 손님에게 친절하고 가족에게 부드러운 택시 기사가 현실에서는 많은데, 그러나 ‘택시 기사’라고 할 때, 그런 모습까지 떠올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게으르게 재현된 이미지가 윤리적인 문제까지 낳을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스포츠를 다룬 영화 속의 인물들도 그렇게 재현되는 수가 많다. 몇몇 영화들, 그 작품 속의 지도자들이 떠오른다. ‘국가대표’의 성동일, ‘우리생애 최고의 순간’의 엄태웅, ‘맨발의 꿈’의 박희순 등 이들은 대체로 복장 상태가 불량하다. 헝클어진 머리칼에 후줄근한 차림으로 등장한다. 수염도 까칠하게 나 있고 성격도 그만큼이나 거칠다. 그런 외모에서 차분하고 자상한 대화나 작전 지시가 나올 리 없다. 하나같이 분노조절 장애가 있는 듯 소리를 지르거나 악을 쓴다. 그런데 속정이 깊다? 인간적이다? 곡절도 많고 사연도 많고, 그래서 ‘감동’의 눈물선을 따라간다?

현실의 다양한 양상들, 수많은 감독들의 스타일들, 저마다의 독특한 개성과 날카로운 직관 등은 이들 영화에서 하나같이 사라진다. 구체적인 작전 지시도 없고 기껏해야 “포기하지 마, 쟤들도 지쳤다고. 우리에겐 내일이 있어” 같은 수준이다. 현실에서 이런 지도자는 거의 없다. 프로축구 제주 유나이티드의 박경훈 전 감독은 카메라가 즐비한 경기장은 물론 연습 중에도 단정하게, 때로는 정장으로, 특별한 날에는 특별한 차림을 한다. 왜? 그는 말한다. “운동하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서.”

다시, 영화 ‘4등’으로 돌아가자. 내일, 선거 있는 날, 이 영화도 개봉한다. 우연의 일치지만 더불어 한두 마디 할 만하다. 이번 총선에서 몇몇 스포츠 인사들이 지역이나 비례로 출마했다. 그런데 아쉽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만의 인품, 승부의 세계를 겪어본 자만 제시할 수 있는 포부, 통합 체육회 출범 이후의 국민 건강과 체육의 미래를 제시하는 정책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1등 지상주의, 엘리트 지상주의, 인기 지상주의에 매몰돼 있는 체육인들의 정계 입문이 결정되는 날에 ‘4등’은 여러 겹의 질문을 제시한다.

영화는 1등에 매몰된 지도자와 부모와 아이가 저마다의 입장에서 어떻게 폭력에 노출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가를 보여준다. 비록 후줄근한 옷차림에 우선 화부터 내는 고정된 이미지의 재현이 눈에 먼저 보이지만, 정지우 감독은 스포츠와 인권, 그러니까 이 두 용어 사이를 건널 수 없는 강처럼 가로지르는 폭력의 발생과 재생산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추적한다. 표면적으로 그것은 ‘운동하는 학생이 1등이 안되면 그 무엇도 안되는 현실’을 담는다. 그러나 이 영화는 자기부정과 자기인정 사이에서 극도로 혼란에 빠지는 지도자와 아이에게 전 생애를 투사해 아이의 경기 결과가 곧 자기 삶의 결산표가 되는 부모,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저도 모르게 동생을 ‘엎드려뻗쳐’ 시켜놓고 태연스럽게 폭력을 재생산하는 아이를, 그들 각자의 사정과 심정과 관점을, 그 해답 없는 질문들을 제시한다.

영화를 보고 나면, 스포츠 폭력의 구조적 원인을 아이 엄마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아닌가, 자기의 잘못을 부모에게 전가하는 지도자의 해명이나 변명은 왜 당당한가, 제목은 ‘4등’인데 왜 아이가 1등을 하는 것으로 영화가 끝나는가 등에 대해 거듭 생각을 하게 한다.

정지우 감독은, ‘해피엔드’나 ‘은교’에서도 정답을 제시하기보다는 그렇게 쓴 답안지를 일부러 지우면서 다른 답안은 없는가 하고 카메라를 익숙한 프레임 바깥으로 돌리곤 했는데, 이 스포츠 인권 영화 ‘4등’에서도 그렇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익숙한 정답에 멈추지 않고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과연 폭력은 어떻게 정당화되고 재생산되는가?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의 역행 현상에 대해 영화 ‘4등’은 익숙한 정답 대신 다양한 오답을 찾아보자고 권한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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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은 ‘욱’하는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는 스포츠이다. 고대 그리스의 투사들은 밧줄에 매인 채 돌 위에서 마주 앉아 어느 한 편이 녹다운 될 때까지 주먹으로 쳤다. 로마시대 전사들은 주먹보호를 위해 감싼 가죽끈에 쇠징을 박았다. 가죽끈은 훗날 ‘사지 찌르기’라는 의미의 흉기인 미르멕스로 변질됐다. 전사가 죽어나갈 때까지 진행되던 야만의 이벤트는 기원전 393년 무렵 공식폐지됐다. 권투가 다시 등장한 것은 17세기 영국이었다. 야만적이라는 비판 때문에 몇 가지 ‘문명적인 룰’을 만들기 시작했다. 다운 뒤 30초 중단, 글러브 사용 의무화, 1회 3분 후 1분 휴식 룰 등….

1889년 7월8일 미국 미시시피주 리치버그에서 벌어진 존 설리번과 제이크 킬레인의 대결은 인류 최후의 맨주먹 싸움이었다. 설리번은 킬레인의 강공에 크게 고전하다 44라운드 들어 토하기까지 했다. 킬레인의 승리가 예감됐지만 반전이 벌어졌다. 설리번이 75라운드까지 버티자 견디다 못한 킬레인 측이 수건을 던졌다. 둘 다 얼굴이 엉망이 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혈투였다. ‘맨주먹 챔피언’인 설리번은 3년 뒤 글러브를 낀 신식대결에서는 무너지고 만다. 상대인 짐 코빗의 아웃복싱에 농락당해 21회 KO패 한 것이다. ‘신사의 룰’로 무장한 복싱은 이후 100년 가까이 인간의 결투본능을 대리충족시키면서 히트 스포츠로 발전했다.

프로복싱 신인王전 최종예선_경향DB


하지만 인기에 취한 복서들은 사각의 링에 갇혀 안주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매니 파퀴아오와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의 ‘세기의 졸전’은 추락한 복싱의 현주소를 웅변한다. 그러니 식상한 팬들은 강한 자극을 찾아 종합격투기 등으로 시선을 돌린다. 국내 사정은 더 암담하다. 1980년대부터 가짜복서가 등장하고, 편파판정 시비로 해외까지 망신살이 뻗치는 등 악재만 쌓였다. 여기에 배고프고 힘든 복서생활을 기피하는 풍조까지…. 최근엔 아마 대표선수들까지 오는 8월 리우올림픽 출전권이 걸린 예선전에서 줄줄이 탈락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이후 68년 만에 올림픽 출전이 좌절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복싱의 인기를 회복할 수 있을까. 야만의 시절로 돌아가 글러브를 벗고, 죽을 때까지 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모두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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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