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재생이란 말이 있다. 도시의 폐허들, 낙후해 외면당한 공간들을 문화적 관점에서 보존하고 재생하려는 노력이다. 인구, 교통, 교육, 복지 등의 현황을 최대한 분석하되 그 이상의 무엇, 즉 왜 사람들은 그곳을 회피하거나 사랑하는가를 문화적으로 분석한다. 기존의 도시개발 관점에서는 쉽게 보이지 않는, 그러나 틀림없이 존재하는 그 장소의 역사성과 문화성 그리고 미묘한 삶의 질서가 문화적 안목으로 해명되고 그 해법도 모색된다.

건축가 승효상과 미술가 임옥상이 주도하는 서울 창신동의 소통공작소가 대표적이다. 뉴타운 지구 해제 이후 이 일대를 어떻게 삶의 장소로 재생할 것인가, 그 관점과 실천이 집약된 곳이다. 그 밖에 성북문화재단과 스페이스 오뉴월이 공동 추진한 ‘미아리고개 재생 프로젝트’, 예술가들이 허름한 철공소 일대에 스며들어가 신생을 도모한 문래동, 강원 철원군의 ‘철원-전환’, 안산 선감도의 ‘황금산 프로젝트’ 등이 있거니와 이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즉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도시재생 특별법’을 바탕으로 뒷받침할 정도다.

기존의 시선으로 보면 쇠락한 도시의 낙후한 시설이라 해도 예술가의 눈에는 틀림없이 신생의 씨앗이 있고 애틋한 삶의 의미가 있다. 충남 장항의 ‘선셋 장항페스티벌’이 그랬다. 1936년 이래 그곳의 제련소와 굴뚝은 장항과 군산의 역사적, 지리적 상징이었다. 제련소가 폐쇄되고 굴뚝마저 철거될 위기였으나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이 공장을, 이 시설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면서 획기적인 문화예술의 공장이 됐다. 도시의 공장과 시설이 한편 무대가 되고 한편 오브제가 되는 실험적인 예술의 장이 되었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간의 이벤트가 아니라, 교육기관까지 들어서 그야말로 교육·기획·생산·전시·공연이 선순환하는 문화도시를 만들어내는, 이를테면 독일 에센의 졸페라인 같은 구상도 왜 불가능하겠는가. 이런 얘기를 왜 하는가. 고척동의 스카이돔 때문이다. 알다시피 차선의 산물이다. 한국 현대사를 상징하는 유서 깊은 동대문운동장이 반문화적인 강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후 그 대체 구장으로 현재의 장소가 결정됐고 오랜 논란과 공사 끝에 돔 형태로 완공됐다.



기본적으로 야구를 위한 신생의 공간이기 때문에 시설 수준은 한국 최고다. KBO·구단·프로야구선수협회 등이 세부적인 사항을 자문하거나 주문했고 이를 서울시와 현대산업개발이 최대한 반영했다. 문제는 운영과 활용이다. 서울시는 고척돔의 원만한 운영의 결과로 상대적으로 낙후한 고척동 일대에 새로운 활력소가 펼쳐지길 기대한다. 히어로즈 구단 또한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팀의 명맥을 잇는 차원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렇다면 밤낮으로 도시재생의 활로를 찾아다니는 문화전문가들을 만날 일이다. 지하철 1호선 구일역에서 고척돔까지, 걷기에는 조금 멀고 교통편은 부족하다. 이를 문화전문가에게 의뢰해 보라. 하나뿐인 출구로 나와 600m 남짓 걸어야만 하는 그 길을 전문가들은 놀라운 파격의 놀이와 문화의 길로 만들 것이다. 아니, 벌써 늦었다. 흔히 문화적 접목이라고 하면 문화행사 유치로 생각한다. 개장식 때 어떤 공연을 할 것인가 정도 말이다. 그도 아니면, 여기에 어떤 업체를 입점시킬 것인가 생각한다. 쇼핑몰, 예식장, 극장, 식당가 등 말이다. 이렇게 행사용이나 사후 입점 방식으로 문화를 생각한 결과, 숱한 흉물이 만들어졌다. 전국 각지의 월드컵경기장과 인천의 아시아드 주경기장, 어쩌면 엄청난 재앙이 될 수도 있는 평창 일대의 올림픽 시설들 말이다. 문화적 상상력의 빈곤으로 인해 사람들이 접근하기를 꺼리니 어떤 업체가 입점하겠는가.

사전에, 아니 적어도 공사 과정에라도 문화전문가들이 참여해야 한다. 해당 지역의 역사성 해석과 해당 장소의 문화적 의미 재해석, 해당 시설의 고유기능과 결합기능의 창조적인 가능성, 시설 이용자들의 문화적 욕망과 공간의 구획 및 배치 그리고 무엇보다 해당 지역 주민들의 일상 현황과 그 시설의 융합이 빚어낼 미래적 삶의 가치 등을 문화 기획자들과 함께, 또는 문화 기획자들이 주도해 만들었어야 한다. 이 점에서 고척돔도 늦었다. 움직일 수 없는 시설물을 고착시켜 놓고 여기에 어떤 행사를 치르고 무엇을 입점시킬까 하는 것은, 사후적이며 기능적이다. 사전에 그 공간의 역사적 가치와 문화적 의미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작업이 있어야 했다.

지금이라도 추상적인 팬이나 시민이 아니라, 고척동 주민들을 위한 문화복지 시설이 반드시 들어가야 하고, 인근 대학의 스포츠 관련학과 학생들을 위해 개방해야 하며 심지어는 스포츠 전문대학 유치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1000인의 예술가’ 같은 프로젝트도 구상해 예술가들이 다양한 작업을 해서, 경기가 없는 날에도 사람들이 몰려들어야 한다. 대규모 영업시설 입점식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몇 해 버티지 못한다. 장사는 3년이고 문화는 30년, 곧 한 세대를 창출한다.

더욱이 지역 연고성이 취약해 입에 익을 만하면 팀 이름이 바뀌는 히어로즈 구단 아닌가. 이럴수록 문화전문가를 구해 강렬하고도 싱싱한 한국 최초 돔구장 문화를 창조해야 한다. 폐허에서도 꽃을 피웠는데, 고척돔에서는 뭘 못하랴.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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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축구영웅 요한 크루이프(68)는 스포츠의 상식을 초월한 인물이다. 하루 80개비의 담배를 피우는 체인스모커였다. 경기 중 전반전이 끝날 때를 기다려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훈련도 빼먹기 일쑤였다. 시건방도 무진장 떨었다. 줄담배를 피워대고 훈련에 관심도 없으면서 “축구는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게으른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월드컵 축구를 시청하느냐는 질문에 “없다. 날 TV 앞에 앉혀놓을 유능한 선수가 없으니까…”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슈퍼스타의 상징인 9번이나 10번 대신 14번을 단 이유를 두고도 “9번은 디 스테파노, 10번은 펠레가 이미 달았으니 헷갈릴까봐”라며 으쓱댔다.

그의 자부심대로 그의 이름은 디 스테파노-펠레-크루이프-마라도나로 이어지는 레전드 계보에 빠짐없이 올라간다. 네덜란드에서는 <지저스 크루이프 슈퍼스타>라는 뮤지컬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할 만큼 숭배의 대상이다. 아약스 및 네덜란드 대표 선수와 바르셀로나 감독으로서 이룬 성공스토리 때문만은 아니다. 크루이프는 1970년대 초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구상한 ‘토털풋볼’을 그라운드에서 완성한 축구혁명가였다. 그가 언급한 ‘몸이 아니라 머리로 하는 축구’는 시건방이 아니라 토털풋볼을 일컫는 개념이었다.

전 네더란드 축구선수 요한 크루이프_경향DB


“머리를 써야 토털풋볼을 구사할 수 있다. 공수전환 때 조직적으로 움직여 공간을 메워주려면 체력보다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두뇌플레이가 중요하다.”

이전까지는 ‘공격 따로, 수비 따로’인 개인기와 드리블 위주의 축구였다. 하지만 토털풋볼은 공격수와 수비수가 유기적으로 역할을 분담해서 공간을 메워주고 최전방부터 철저한 압박으로 상대공격을 원천봉쇄하는 전술이다. 20~30m의 좁은 지역에서 ‘없는 공간’을 장악하려니 선수들 간의 두뇌플레이가 필요했다. 토털풋볼 덕분에 ‘압박’ ‘오버래핑’ ‘오프사이드 트립’ 같은 현대축구의 전술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

그렇게 펠레·마라도나와는 또 다른 차원의 축구영웅이 된 크루이프가 폐암 투병 중이다. 아무래도 젊을 적 피웠던 담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축구철학처럼 병마와 싸워 ‘아름답게 이겨주기’ 바란다.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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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미국 월드컵 자료를 찾다가 ‘경우의 수’를 따진 기사를 검색했다. 스페인(2무)·볼리비아(1무1패)와 비겼던 한국(2무)이 독일(1승1무)과의 예선 최종전을 앞둔 시점이었다. 기사는 독일과의 전력차는 아랑곳없이 갖가지 경우의 수를 제시하다 ‘일장춘몽’으로 끝을 맺는다. “독일이 혹 16강전에서 쉬운 상대를 고르려고 일부러 한국과 비겨서 조 2위를 차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즉 독일이 조 2위가 되면 비교적 쉬운 나라들로 구성된 A조 2위(루마니아·미국·스위스 등)와 16강에서 만날 수 있기에 상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독일은 헛된 기대와 달리 한국을 3-2로 제치고 조 1위를 차지했다. 기자의 이름을 보니 ‘이기환 기자’였다. 얼굴이 화끈거리지만 ‘단언컨대’ 21년 전에는 그렇게 부끄럽지 않은 ‘당대의 기사였다’고 변명해본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때는 어떤가. 김정남 감독의 인터뷰가 구닥다리다. “최강 팀에 지더라도 골차를 줄이고, 또 한 팀은 물고 늘어져 비기고, 다른 한 팀은 죽자 살자 덤벼 이기는 방안을 구상한다”는 것이다. 언론들은 ‘아르헨티나와 정면대결, 마라도나는 찰거머리에 걸리면 신경질을 부린다’는 등 잔뜩 희망을 불어넣었다. 그러나 1-3으로 완패하자 ‘너무 긴장해서 제실력을 못 냈다’고 꼬리를 내렸다. 다음 상대인 ‘불가리아는 수비 허점이 많아 해볼 만하다’고 하더니 결국 1-1. 이탈리아와의 최종전을 앞두고 잔뜩 ‘경우의 수’를 늘어놓으며 ‘한 가닥 희망이 있다’고 했지만 결과는 2-3패.


칠레 라 세레나의 라 포르타다스타디움에서 열린 2015 국제축구연맹 U-17 월드컵 조별리그 2차전 기니와 한국과의 경기에서 이승우가 돌파하고 있다_연합뉴스



이런 기사가 등장한다. “덴마크는 500만 인구에 등록 선수 18만명인데 한국은 2000명뿐…. 축구전용구장 하나 없는 현실이….” 이 기사를 쓴 기자도 지금 보면 필시 낯 뜨거워질 것이다.

이후에도 ‘죽음의 조를 만났다’ ‘패했지만 희망은 있다’ ‘역시 세계의 벽은 높았다’ ‘축구 저변이 문제다’라는 등의 희망고문이 반복됐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으로 대부분 사라졌는데 끝까지 남아있던 것이 ‘경우의 수’였다. 17세 이하 축구대표팀이 칠레 월드컵 조별예선에서 ‘경우의 수’를 따질 필요 없이 16강에 올랐다. 가뜩이나 골치 아픈 세상인데 복잡한 계산을 ‘실력’으로 해결해준 어린 친구들이 참 대견하다.


이기환 논설위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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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연 김성근이었다. 올해 프로야구의 흥행과 집요한 관심의 주인공은 김성근 감독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프로야구, 특히 ‘마리한화’의 경기를 흡사 집안일처럼 지켜보았는데, 그 결정적인 증인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다. 오랫동안 축구 순혈주의자를 자처하며 축구 선수들의 추락과 상승에 감정을 이입하며 살아왔는데, 올해는 그 마음의 상당 부분을 덜어서 프로야구에, 특히 한화이글스에, 무엇보다 김성근 감독에게 몰입하고야 말았다. 올해 나의 밤은 한화의 야구와 함께 뜨거웠다.

작년까지만 해도 한화는, 경기 중반에 그 흐름과 승패가 일찌감치 결정나버리곤 했다. 대여섯 점 차이로 끌려갈 경우 선수들이 지레 포기하고는 서둘러 더그아웃을 떠나려 했다. 하룻저녁의 승패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목청껏 응원하는 팬들이 오히려 더 열성적이었다. 적어도 작년까지 한화의 야구는 7회까지밖에 없었다. 그랬는데, 올해는 9회까지 질주했고 그런 후에도 운명의 주사위를 한사코 더 굴려서 연장으로까지 치달았다.

스포츠에 투사된 강렬한 감정을 사회 분석의 소재로 삼는 것은 기계적이고 위험하지만, 그래도 담장 밖으로까지 흘러넘친 ‘마리한화’ 열정은 일정하게 사회적이다.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는 것, 아니 충분한 자격을 갖췄음에도 좀처럼 타석에 설 수조차 없다는 것, 그런 절박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한화의 ‘일구이무’는 9회말까지 응시할 만한 스펙터클이었다. 물론 지나치게 쥐어짜는 작전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고 선수들 혹사 논란도 있었다. 나는 이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고자 한다. 문제는 프레임이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예컨대 ‘친노’, ‘친박’ 같은 용어를 보자. 이 말들에는 정치적 가치 지향성이 한 줌도 묻어 있지 않다. 오직 세력 프레임일 뿐이다. ‘비노’, ‘반박’ 같은 말들도, 바로 그런 프레임에 속해 있는 정치인들을 한낱 세력 다툼의 골목대장으로 여기게 한다. 일단 그렇게 고정된 프레임은 눈덩이처럼 구르고 굴러서 세력 다툼 이상의 그 무엇도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한다.

김성근 감독에게도 오래되고 고정된 프레임이 있다. ‘일구이무의 리더십’이 그것이다.

이 프레임은 김성근 감독과 미디어가 함께 십수 년 동안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쌍방울을 지도했던 1999년의 TV 다큐멘터리 <9회말 투아웃>을 보자. 패배에 익숙한 꼴찌들을 ‘일구이무의 리더십’으로 혹독하게 조련하여 승리에 목마른 팀으로 바꿔놓는다는 프레임 안에서 쌍방울 선수들과 김성근 감독이 재현된다. 아주 감상적인 배경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프로의 세계에서 2등은 없다. 오직 승자만 있을 뿐이다”라는 익숙한 대사가 흘러넘친다. 바로 이 프레임 안에 김성근 감독은 늘 있었다.



SK 와이번스를 맡아서 3년 연속 우승을 일구며 ‘야신’이라는 칭호를 얻었을 때, 그 무렵의 대다수 미디어는 김성근 감독의 ‘일구이무 리더십’을 찬양했다. 또한 방송 등 각종 매체에 출연한 김성근 감독 역시 특유의 ‘일구이무 리더십’을 피력했고, 미디어는 바로 그 프레임을 올해까지도 복제했다.

이러한 프레임은 복잡하고도 미묘한 야구를 일정한 틀에 끼워 맞추게 된다. 그 당사자 또한 자신의 현란한 작전과 예측불허의 승부수를 단 하나의 프레임에 의한 행위로 설명하게 된다. 스포츠의 다양성, 야구의 변화무쌍함, 인간 내면의 복잡성을 ‘일구이무의 리더십’ 안에 욱여넣게 된다.

이 프레임은, 김성근 감독이 자주 강조해온 대로 ‘인간 개조’라는 프레임과 직결된다. 리더란 하나의 목표를 위해 조직과 인간을 개조해야만 하며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신념 말이다. 여러 기업과 대학들 그리고 청와대까지 가서 특강을 했던 김성근 감독은 늘 ‘인간 개조’를 향한 리더의 자격과 책무를 강조했다.

이는 스포츠 내적인 맥락에서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명제이지만 사회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양상으로 번지기 쉽다. 20세기 발전국가형 리더십의 전형이랄 수 있는 이 같은 ‘인간 개조’ 리더십은, 복잡하고도 다양한 사회적 양상을 일도양단하여 ‘요즘 아이들’이라는 식으로 재단하는 프레임이 된다.

히딩크로부터 시작하여 아드보카트와 홍명보를 거쳐 김성근으로 이어지는 ‘스포츠 리더십 따라 하기’는 제한된 영역에서, 즉 스포츠라는 고유한 영역 안에서 검토되어야만 한다. “야구를 하면서 나름대로 터득한 것이지만 기업이나 조직에는 그대로 적용하지 마시고 다만 참고는 해보라”는 정도가 적절한 지점이다.

김성근 감독의 야구, 특유의 치밀하고 섬세한 예측불허의 세계 또한 그 자신의 심오한 복기를 통해 새롭게 해석될 필요가 있다.

그는 한국 야구와 스포츠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뛰어난 작전과 바늘 끝만큼의 기회도 놓치지 않으려는 집념을 보여줬다. 많은 사람들이 그 치밀한 세계에 경탄했던 것이지 결코 ‘일구이무의 인간 개조’에 승복한 것은 아니다. 김성근의 야구가 다양한 해석의 지평으로 펼쳐질 때 그는 더욱 깊어질 것이며 이로써 한국 스포츠 또한 더욱 넓어질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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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이후 다시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김성근 감독 때문이지만, 연고도 관련도 없는 한화 이글스의 팬이 된 것은 불꽃 남자 권혁 때문이다.

리더십 관련 서적을 찾아 읽다 김성근 감독이 쓴 세 권의 책을 읽고, 그의 리더로서의 실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하여 한화 이글스 경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주한 권혁의 뒷모습.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하여 마지막 책임을 져야 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을 떠올린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었을 것이다.

어느새 권혁의, 이글스의 팬이 된다. 일터에서 힘들 때 그의 마지막 투구를 생각한다. 어느 날은 승리의 공이었고 어느 날은 패배의 공이었던 그의 마지막 투구와 그 공을 던진 그의 어깨와 부황 자국이 남아 있는 그의 등을 생각한다. 야구는 야구일 뿐이겠지만, 올 한 해 이글스 팀의 직업 야구를 보면서 나의 일을, 나의 위치를, 나의 맡은 바를 돌아보게 되었다. 일과 삶에 대해서 생각했고, 그리고 많이 배웠다.

한 타석의 승리가 한 게임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고, 한 게임의 승리가 한 시즌의 승리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듯 모든 노력이 당장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한화 김성근 감독이 팬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_경향DB


일구이무(一球二無), 두 번째 공은 없다는 그 말에서 오히려 두 번째 공, 내일에 대한 강한 긍정과 열망을 생각한다. 내일이 없는 것처럼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것이 더 나은 내일로 성장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까. 이른 듯하지만, 김성근 감독과 권혁, 한화 이글스 야구 선수들과 트레이닝 담당 등 모든 스태프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이글스 팀 경기를 보며 한계와 극복, 헌신과 기여를 보았고, 단순한 재미를 넘어서 벅찬 감동을 느꼈다. 혹자는 혹사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함께 멋진 승부를 만들어 준 KBO 구단 모두에도 돌아온 야구팬으로서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글스에 딱 한 경기씩만 더 져 주었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덧붙이면, 직업인으로서 닮을까봐 두려운 사람과 배우고 싶은 사람이 같이 비교된 칼럼을 경향신문 지면에서 보게 된 것은 무척이나 당혹스럽다.

김성근 감독의 방법론에는 동의하지 않는 이들도 많고, 다른 방법으로 탁월한 결과를 내고 있는 감독들도 많지만, 그와 이글스의 야구는 이제 3분의 1도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일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 무엇보다 팀의 리더로서의 헌신은 많은 훌륭한 선수들과 코치들을 키워냈다. 끊임없이 배우고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타협하지 않고 하루하루 실천하는, 앎과 삶을 일치시켜 가는 그의 모습은 흔들리는 중년 남자에게 삶이라는 직업에 대하여 준엄하게 가르친다.

우직하게 순간순간 전력투구하듯 열심히 사는 그를, 결과를 조작하는 쉬운 방법으로 전 세계를 속인 사람과 같이 비교하는 것은 어떠한 맥락이든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종석 | 서울 강남구 역삼동 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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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가 세계 7위라고? 미스터리이자 웃음거리다.”(가디언) “이건 조크다. 무시해야 한다.”(USA투데이) 국제축구연맹(FIFA)이 이번 달 국가별 세계랭킹을 발표하자 온갖 비아냥이 쏟아졌다. 오죽했으면 루마니아의 앙헬 이오르다네스쿠 감독마저 “우리 팀은 세계 7위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솔직하게 인정했을까. 사실 최근 11년 동안 루마니아의 축구 수준은 형편없었다.

랭킹 산정기준은 이렇다. 최근 4년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승무패×경기중요도×상대팀전력×대륙 간 전력’에다 최근 경기에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승(3점) 무(1점) 패(0점)’, ‘월드컵(4점) 대륙컵(3점) 월드컵 예선 등(2.5점) 친선(1점)’ 등이 부여되는 식이다. 상대팀 전력에 따른 점수도 차이가 있다. 200점(최대점수)을 기준으로 하되 가령 어떤 팀이 세계 5위를 이겼다면 200-5, 즉 195점을 획득한다. 이렇게 계산이 복잡하다보니 루마니아가 어째서 세계 7위에 올랐는지 쉽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대륙 간 차별이다. 유럽과 남미연맹에 1.00을 부여하는 반면, 북중미 0.88과 아시아·아프리카 0.86, 오세아니아 0.85로 낮은 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어느 대륙에 속해 있냐에 따라 ‘랭킹의 세습’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인 것이다. 아시아의 3강인 한국(57위)·일본(58위)·호주(60위)가 만만한 상대인 오스트리아(13위), 알바니아(25위), 러시아(32위), 헝가리(37위), 그리스(44위)보다 랭킹이 낮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게 공평하지 않다고 무시할 수도 없다. 랭킹이 낮으면 월드컵이나 아시안컵 본·예선에서 시드를 받지 못한다. 자칫하면 조별리그부터 강팀을 만날 수밖에 없다.


FIFA 랭킹포인트 계산법_경향DB


영국 프리미어리그는 FIFA 랭킹 50위권 밖의 국가 선수들에게 취업비자를 발급하지 않는다. 이것이 블랙번 입단을 노렸던 김보경이 깊은 설움을 맛보며 좌절했던 이유다. 손흥민은 이적료가 1000만유로가 넘으면 이적을 허용한다는 예외조항에 따라 토트넘에 입단했다. 손흥민의 이적료는 3000만유로로 추정된다. 꿈과 희망을 줘야 할 축구는 이렇게 카스트 제도를 방불케 하는 뿌리 깊은 차별의 멍에를 지우고 있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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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에 동아대학교가 있다. 여러 학과에 걸쳐 두루 실력을 인정받아 온 대학이지만 특히 체육과 관련해 전국적 차원의 실력과 지명도를 가진 대학이다. 그런데 바로 그 대학의 운동장이 주차장으로 급변했다. 학교 측은 서구 구덕캠퍼스에 있던 예술대가 승학캠퍼스로 옮기면서 주차난이 심각해져 운동장을 주차장으로 바꿀 수밖에 없었고 다른 곳에 같은 규모의 인조잔디 운동장을 새로 조성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아니라고 답했다. 별일 아닌 듯 말하고 있지만, 실로 중요한, 단지 대학 체육의 위기만이 아니라 대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게 만드는 중차대한 문제다.

이런 일이 여러 대학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연세대 신촌캠퍼스의 실외 농구장은 신축되는 아트홀 때문에 철거됐다. 농구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때문에 악기 조율이나 연습에 방해가 된다는 게 이유다. 고려대는 공학관 신축을 위해 테니스장을 현장사무실로 전용했고 서강대는 실외 농구장 자리에 새 건물을 짓고 있다. 중앙대나 서울대에서도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드넓은 캠퍼스는 오간 데 없고 오밀조밀한 유리 건물들만 들어서고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문제들을 파생하게 된다.

우선 체육이라는 신체 활동에 대한 편견의 확산이다. 체육 활동은 기껏해야 공부하다가 스트레스를 푸는 사소한 행위로 축소된다. 체육은, 그러나 그 자체로 오랜 역사와 미학이 내재된 학문이자 활동이다. 공부나 연구보다 하위에 있는 게 아니라 동렬에 있다. 스트레스를 푸는 게 운동의 전부가 아니다. 기본적으로 운동은 그 자체 내에 심미적 세계가 따로 존재한다. 그것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어김없이 그 장소로 가게 되어 있다. 땀 흘리며 지쳐서 누운 채 하늘을 바라볼 때 ‘나는 살아 있다’는 충일감을 느끼기 위해서 말이다.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농구하는 데 방해되니 공부는 저 외딴 곳에 가서 하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공공성의 훼손이다. 대학과 그 공간은 국공립이나 사립을 막론하고 사회적 공공성의 장소다. 특정 분야나 인물의 소유가 아니라 대학 구성원, 나아가 인근 주민들까지 함께 활용해야 하며 그렇게 하라고 일정하게 지원도 나오는 장소다. 학생이나 주민들에게 선심 쓰는 곳이 아니라 원래 학생과 주민들의 공유 공간으로 기능하는 곳이 대학이다. 학생들이 공부도 하고 운동도 하며 주민들이 산책하고 학자들이 사색할 때, 캠퍼스는 진실로 아름답다.

그런데 건물 신축이나 그에 따른 주차난을 이유로 그나마 한 줌 여유가 되었던 공공의 장소를 특정한 이익에 부합하도록 축소시키면 대학의 장소적 공공성은 사라진다. 그 자리를 수익성이 치고 들어온다. 옛날에는 자판기 커피 한 잔 들고 잔디나 벤치에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눴다. 저 멀리 운동장에서 공을 차는 학생들을 보면서 말이다. 그런데 모두들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대학은 공공의 장소가 아니라 주머니가 얇은 학생들은 주눅이 드는 신분 차별과 문화 차별의 냉혹한 정글이 되고 있다. 운동장은 돈 안되는 학생들 대신 적지 않은 주차비를 지불하는 차들로 채워진다. 수익성이 캠퍼스를 장악한다.


마지막으로 인간적 접촉의 상실이다. 야외 체육 공간을 없앤 대학들은 대체 공간을 마련해준다고 한다. 대개는 실현되지 않는데 더러 그 약속이 지켜졌다 해도 큰 건물의 지하나 캠퍼스의 후미진 곳이다. 운동을 하려면 후미진 곳으로 가야만 하는데 그 순간 그것은 고독한 트레이닝이 되고 만다.

굳이 5억달러 가치의 체육시설을 갖춘 조지아대학교를 언급하지 않겠다. 재학생 중 95%가 수영, 농구, 배구, 복싱을 하는 버지니아주립대학교의 엄청난 시설도 언급하지 않겠다. 앤아버 인구 11만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미시간대학교의 스타디움도 언급하지 않겠다.

그저 한 줌이라도 좋다. 손바닥만 해도 좋다. 그러나 반드시 캠퍼스의 중심에,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야외 운동 공간이 있어야 한다. 캠퍼스 중심에서 공을 찬다는 것은 그 일대의 모든 사람이 함께 공을 찬다는 뜻이다. 연구실이나 도서관에서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람에게도 생의 자극이 된다.

학생들이 왜 운동을 하는가? 누군가 지켜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선이 교차하고 몸이 섞이면서 인간적 접촉이 증가하면 사랑도 싹트고 심지어 학문의 융합도 이뤄진다. 같이 뛰어도 돼요? 물으면 금세 숫자 맞춰서 뒤섞여 뛰는 게 캠퍼스의 운동이다.

철저히 관리되는 첨단 건물의 폐쇄된 연구실에서는 학문의 융합이 이뤄지지 않는다. 후미진 곳의 고립된 운동도 비인간적이다. 동경의 시선도 없고 사랑의 눈길도 없이 냉혹하게 승부만 겨룰 뿐이다. 엄격하게 시간 제한을 두고 일정하게 사용료를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는 대학의 연구를 방해하고 학생들의 사랑을 파괴한다. 이런 비극이 따로 없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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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사인 볼트(자메이카·29)는 이름 그대로 ‘번개’라 할 수 있다.

번쩍하는 사이에 100m(9초58)와 200m(19초19)를 한달음에 달려버린다. 196㎝, 95㎏의 탄탄한 몸으로 무장, 다른 선수들이 44걸음에 내달리는 100m를 41걸음으로 끝내 버린다. 최대 보폭은 243㎝나 되며 평균시속은 37.6㎞에 이른다. 60m부터 시작되는 가속구간의 순간최고속도는 시속 45㎞에 달한다. 영국 브루넬대의 크레이그 샤프 교수는 “볼트가 아킬레스건을 활용해 짧은 접지시간에 더 강하게 지면을 차버림으로써 가속을 얻는 능력이 탁월하다”고 분석했다. 그제 베이징 세계육상선수권대회 100m 결승에서는 ‘바람보다 빠르다’는 저스틴 게이틀린(미국·33)을 제치고 9초79로 우승을 차지했다. 어찌 바람이 번개를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런 볼트 역시 ‘인간계의 최고’일 뿐이다. ‘동물계’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아무리 빠르다 한들 치타의 속도(시속 104㎞)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지뿔영양(시속 89㎞)과 검은꼬리누(시속 80㎞)는 물론, 타조(시속 64㎞)에도 미치지 못한다. 볼트가 9초58에 뛴 100m를 치타는 5초80 만에 가볍게 달린다. 물론 치타의 경우 그렇게 달려 잡은 동물 고기를 먹으려면 약 30분은 호흡을 가다듬어야 하는 게 단점이긴 하지만…. 코요테(시속 40~48㎞)는 인간이 추격할 수 있는 동물이라지만 그 역시 따라잡을 수는 없다. 추격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우면 코요테의 순간속도가 시속 69㎞로 올라간다. 그나마 우사인 볼트의 경쟁자로 꼽을 수 있는 동물이 있다. 단봉낙타이다. 단봉낙타는 우사인 볼트의 평균시속(37.6㎞)보다 느린 시속 35.3㎞로 달리니까 승패를 겨뤄볼 만하다. 하지만 경주에 훈련된 낙타와의 ‘벼랑 끝 승부’라면 과연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미국 서던 메소디스트대 연구팀은 100m 달리기 인간의 한계속도가 ‘이론상’ 시속 64.37㎞(40마일)에 이를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인간의 팔다리 움직임과 근섬유의 움직임이 이상적으로, 그것도 빨리 움직여야 가능한 속도다. 100m 기록으로 환산하면 5초대 중반으로 치타와 견줄 수 있다는 것이다. 과연 도달할 수 있는 목표인가. 그저 이론상의 기록이겠지.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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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70주년을 맞아 여러 분야의 70년 역사를 정리하는 일들이 많았다. 나는 지난주 KBS에 가서 광복 70주년 특집의 하나로 한국 스포츠 70년사를 기억하는 데 동참했는데, 방송이라는 특성 때문에 다 못한 얘기가 있어 여기에 몇 자 적는다.

우선, 누가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하는 점이다. 역사는 복잡다단한 수많은 요소와 사건들이 당대의 상황이나 구조적인 힘과 맞물리면서 격렬하게 흘러간다. 그중 어느 것을 특별히 선정하고 기억한다는 것은 중립적일 수가 없다. 물론 사건의 측면에서, 손기정의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이나 88 서울올림픽 등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렇게 선택하다 보면 생략되거나 삭제되는 사건도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사건과 인물들에 대한 해석이다. 모든 사건과 인물을 다 기억할 수 없다면, 특정한 사건과 인물에 대한 해석을 통해 그 당대를 회복하는 것이다. 해석이 결핍된 사건 나열은 주관적인 스토리텔링을 낳는다. 그것은 대체로 왜곡의 위험성을 내포한다. 개인과 당대 사회가 서로 밀고 당기는 힘의 관계를 검토하지 않고 한 인간이 자의적이며 선구적으로 결연히 마음먹자마자 곧장 실행했다는 식의 의지의 기억으로 역사를 심각하게 왜곡하는 스토리텔링 말이다.

과거 공안검사들이 개인사의 조각들을 억지로 짜맞춘 후 아예 태어나면서부터 ‘가진 자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살아온 것처럼 단죄한 것이 대표적이다. 지금 당장 국회의원들의 홈페이지를 가보라.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들은 성장기나 청년기의 파편들을 나열하면서 “그리하여 국민에게 봉사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노라는 식의 스토리텔링을 자랑하고 있다.

스포츠 70년사도 마찬가지다. 흔히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에 이르는, 굵직한 사건들과 그 주인공들은 오직 ‘조국 광복’이나 ‘경제 도약’이나 ‘세계 속의 한국인’이 되기 위해 운동을 시작한 것처럼 묘사된다. 대한축구협회가 2005년 발간한 ‘한국 축구 7인의 영웅들’이 꼭 그랬다.

물론 이 거창한 말들에 전혀 진실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당대의 집합적 감수성은 개인의 내면에 강렬한 화인을 찍게 마련이고 따라서 그는 자신의 선택과 행위에 대해 시대적인 당위성을 부여받고자 한다. 한·일전에 임하는 선수들, 해외 무대에 진출한 선수들, 올림픽에 나선 선수들. 그들의 내면에 흔히 ‘애국심’으로 요약되는 당대의 집합적 감수성이 묻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 감정이 뛰어난 성취를 추동케 한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힘의 사회적 의미, 그 의미가 개인에게 끼친 육체적·심리적 작용들은 더욱더 많은 해석을 요구한다.

가령 1960~1970년대에 많은 사람들이 김일의 프로레슬링에 열광했던 기억을 단지 ‘반칙 많이 하는 일본 선수를 응징하는 자랑스러운 한국인’으로만 요약할 수는 없다. 김일은 물론이고 권투의 김기수·홍수환 등에 대한 열광이란 정든 시골을 등지고 도시로 몰려든 뿌리 뽑힌 사람들의 처절한 생존 감정과 결착된 것이다.

역사의 전면에서 단 한 번도 주역으로 호명된 적이 없는 무명소졸들이었기에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터져나오는 강렬한 감정을 달리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없어 다만 ‘애국심’이라는 용광로에 집어넣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강렬한 감정이란, 냉혹한 대도시에서 육체적 시련과 정신적 수모에도 불구하고 날마다 처절한 생존 게임을 벌여야만 했던, 다름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열광이었다.

따라서, 역사 일반이 그렇듯이, 한국의 스포츠 역사를 일별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당대의 집합적 감수성이 무엇이며 그것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축구에 대해 대한체육회나 대한축구협회의 기록들은 대체로 “나라 잃은 설움을 운동장에서 거침없이 표출했다”는 애국주의의 수사들뿐이다. 반면 1920~1930년대의 신문 기사들은, 잉글랜드의 리버풀이나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그렇듯이, 이미 인천이나 원산 같은 항만 공단 지역에서 축구가 산업도시의 노동자 문화로 자리 잡았음을 잘 보여준다. 그 일상 문화로서의 스포츠에 대한 확인과 그 감정들의 해석이 필요한 것이다. 2002년의 월드컵 4강도 ‘애국심의 표출’만이 아니라 정치 민주화, 경제 성장, 문화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감각이 동원된 광장의 열병식이 아니라 문화적 광장의 축제로 드러났음을 읽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역사의 사건들, 그 함성들, 그 상흔들마저 해명될 수 있다. 영문학자 테리 이글튼이 “역사는 기승전결의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런 의미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가 그렇듯이, 당대의 어떤 문제가 해결되었고 또 어떤 문제는 왜 미완인 채로 다음 시대의 충격적인 과제로 던져졌는가 하는 질문이다. 질문을 동반하지 않는 역사 돌아보기는 관계자들끼리 모여 추억의 후일담을 나누는 일밖에 되지 못한다.

예컨대 1970년대 스포츠 정책을 살펴보자. 강압적인 국민 동원 체제 아래에서 스포츠는, 선수에게나 일반인에게나, 국가가 신체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구조의 결정판이었다. 태릉선수촌이나 새마을운동은, 그 일정한 의미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권력이 일상을 비정상적인 동원 체제로 구축한 사례다. 88올림픽의 ‘공적인 성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민·관·군이 ‘혼연일체’된 국가의 스펙터클 문화 통치였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 이후, 한국 사회는 그 상태를 극복했는가. 이에 대해 우리는 마땅한 답을 찾기 어렵다. 스포츠의 즐거움, 그 미학, 그 공동체적 열망 대신 강력한 ‘애국주의’가 여전히 압도한다.

그리하여 어떤 상황인가. 몇몇 대표 선수나 프로 선수들을 제외하고 보면, 우리의 스포츠는 여전히 상명하복의 강압적 질서와 여타의 산업에 비교할 수도 없는 위태로운 비정규직 저임금 상태에 놓여 있다. 운동을 하다 중도 포기하면 도저히 제2의 인생을 계획할 수 없는 형편이다. 강력한 위계질서에 의한 신체 통제도 여전히 작동한다. 선수들에 대한 오해와 편견도 극심하다. 운동 경력이 리더십이나 인격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오히려 운동을 했다는 것이 뭔가 거칠고 결핍된 과정을 거쳐온 것처럼 오해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스포츠 역사 70년은 찬란하게 묘사되는 몇몇 사건과 인물의 위업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격다짐의 전근대성과 유무형의 폭력성을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운동을 열심히 하면, 비록 대표나 프로가 못되더라도, 이 사회에서 정상적인 직업으로 평가받고 적절하게 생계를 유지할 수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오늘날의 스포츠 권력과 그 단체 지도자들은 이 최소한의 조건도 마련하지 못한 채 ‘70년 영광의 드라마’를 내내 우려먹는다. 이 현실 인식 위에서, 한국 스포츠 70년사를 문제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문제 해결의 열쇠는 문제 안에 숨어 있다’는 경구를 깊이 새기면서 말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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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이라는 단어를 검색하니 누군가 ‘빨갱이가 (지리)산에 숨어들었다고 빨치산이라 하는 건가요’라고 묻고 있다. 실소를 자아내지만 우스갯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1946년 대구 폭동 이후 10년 이상 지리산에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친 공산 빨치산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원·동지·당파 등을 뜻하는 프랑스 발음 ‘빠르티장’(partisan)에서 유래됐으니 공산게릴라만 콕 집어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후방에서 무장인민투쟁으로 침략자들을 무력화시키려고 조직된 부대와 구성원이다. 엄밀히 말해 미국독립전쟁 당시의 민병대와 러시아 내전 때의 적군 및 민중봉기 세력도 빨치산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2차대전 후 유고연방을 세운 요시프 브로즈 티토는 전설적인 빨치산이었다. 티토는 80만명의 빨치산을 이끌고 유고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신출귀몰하며 나치 독일의 기계화 사단을 무력화시켰다. 티토가 빨치산 운동을 기념해 창단한 축구팀(FK 파르티잔 베오그라드)은 동유럽의 명문클럽이다. 유고연방은 깨졌지만 티토 빨치산의 흔적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빨치산 전법의 핵심은 ‘기동력’이다.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상대의 뒤통수를 쉼없이 잽싸게 치고 빠져야 한다. 1921년 고작 50여명의 당원으로 출발한 중국공산당이 28년 만에 중국대륙을 석권한 것도 기동력을 핵심으로 한 ‘치고 빠지기’ 전법 덕분이었다. 막강한 전력의 일제 침략군과 국민당 정권 틈바구니에서 어떻게 정면으로 맞설 수 있었겠는가.

북한 김남희(오른쪽)와 한국 박희영이 21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동아시안컵 축구대회 여자부 대결 도중 쓰러진 지소연의 다리를 함께 붙잡고 경련을 풀어주고 있다. 북한이 허은별의 2골을 앞세워 2-1로 역전승했다.-경향DB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 출전한 북한의 남녀 축구대표팀도 ‘빨치산 전법’으로 무장했단다. 북한 감독은 동산서격(東散西擊·동쪽에서 흩어놓고 서쪽을 친다)이니 일행천리(一行千里·한 번에 천리를 간다)니 하는 제법 어려운 말로 설명했지만 실은 간단하다. ‘빠른 측면전환 후 크로스’(동산서격)와 ‘긴 패스 한 번으로 최전방에 건네주기(일행천리)’가 아닌가. 1983년 청소년 월드컵에서 4강에 오른 한국대표팀에 외신들은 ‘벌떼작전(swarm tactics)을 폈다’고 했다. 빨치산축구나 벌떼축구나 기본은 ‘한 발자국 더’라 할 수 있다. 가뜩이나 부족한 실력에 그나마 뛰지도 않는다면 어찌되겠는가. ‘똥볼축구’ 소리나 들을 것이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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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글몽글, 함께하실 거죠?”

서강대에서 스포츠심리학을 가르치는 정용철 교수의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숨쉬는 것만큼이나 영어를 자연스럽게 한다는 그가 모국어의 낱말을 잘못 쓴 줄 알았다. ‘몽글몽글’이라는 부사가 있다. 작은 덩어리로 된 사물의 말랑말랑하고 매끄러운 느낌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몸글몽글’이라니, 의아해 다시 물었더니, 또 몸글몽글이란다. 덧붙여 말하기를 언론인이자 시인인, 아니 그보다는, 1970년 문교부 주최의 스포츠꿈나무선발대회에서 무려 3600여명의 경쟁자를 물리치고 최종 12명의 합격자에 포함되면서 한때 촉망받던 농구 선수의 기억을 갖고 있는 한림대 고광헌 교수가 ‘몸글몽글’이라고 작명했다고 한다.

다시, 그 낱말을 입안에 넣고는 혀끝으로 살살 쓰다듬어 보니, 과연 농구 선수 출신의 시인다운 작명이라는 느낌이었다. 몸글, 즉 몸으로 쓴 글이 몽글, 즉 말랑말랑하게 살이 올라 눈을 씻고 다시 읽어볼 만하다는 뜻이다. 요컨대 스포츠를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에게 제대로 된 글쓰기 교육을 해보자는 취지이니, 평소 그런 관점을 여러 번 피력한 자로서 당연히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당부였다. 그래서 두 달 동안 스무명 가까운 젊은 학생들과 ‘스포츠와 나’를 주제로 여덟 차례의 변주를 했다.

스포츠 선수나 그 전공 학생들에게 왜 글쓰기가 필요한가.

사실 이 질문은, 스포츠 분야뿐만 아니라 사회 전 영역에 걸쳐 어린 시절부터 체계적이면서도 즐겁게 함께해야 할 중요한 일이다. 글을 쓰려면, 자기 생각부터 더듬어봐야 하고, 그렇게 생각을 여물게 하다 보면 자기와 주변 사람들을 두루 살피게 된다.

이런 과정을 어려서부터 익혀서, 마치 밥을 먹거나 걷는 일처럼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면 함부로 자기 말을 앞세우기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고언을 기꺼이 듣게 되고 제멋대로 자기 얘기를 강요하기보다는 다른 이의 필설에 담긴 날카로운 비판을 자기의 것으로 새기게 된다.


가령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이라도 글쓰기 수업을 몇 주 정도 제대로 받는다면, 그동안 주술 관계도 없고 앞뒤 문맥도 없는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에 스스로 놀라며 자신을 주어로 한 책임 있는 말들을 제대로 할 것이다. 정치란 ‘정언(正言)’이요 이는 곧 “이치를 정확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 공자의 경지 말이다.



돌이켜보면, 이 나라 교육에서, 가장 크게 결핍된 것이 학생들 스스로 말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지금껏 받아쓰고 외우는 일방통행이었다. 성장 과정에서, 감성적이든 논리적이든, 스스로 말을 하거나 생각의 무릎을 오무려 글을 쓰게 하는 교육이 결핍되어 왔다.

스포츠 분야는 말할 것도 없다. 유소년 때부터 지도자의 강박과 명령을 몸으로 수행해야만 했고 대학이나 프로 입단 후에도 철저한 위계 서열의 부품으로 주어진 명령어를 반복하는 것에 길들여져 있을 따름이다. 미디어에 수시로 노출되는 프로야구 같은 인기 종목 선수들은 그나마 방송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기질이 드러나는 대답을 하는 편이지만, 대다수 선수들은 말을 하거나 글을 써본 경험 자체가 전무하기 때문에 단문에 단답이거나 그마저도 거칠게 자기 감정을 내뱉는 정도다. 그래서 고광헌, 정용철 두 분이 ‘몸글몽글’을 통해, 글을 쓰거나 읽는 것 자체가 어려서부터 통제되고 금지된 스포츠 선수와 그 분야 전공 학생들을 돕고자 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은, 짧은 인터뷰 시간에 재치 있는 대답을 해보자는 식의 기술을 익히는 게 아니다. 어떤 선수들은 과묵하고도 신중하게 답변함으로써 스포츠가 지닌 엄숙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행위에 대해 깊이 있는 생각과 주체적인 의견을 자기 내면에 견실하게 쌓아나가는 것이다. 왜 나는 운동을 하는가, 이 행위의 의미는 무엇인가, 내 몸은 어떻게 반응을 하고 그 순간 내 감정은 왜 증폭되는가, 나의 행위가 지닌 사회적 의미는 무엇인가, 그야말로 온몸을 헌신하는 이 스포츠가 이 사회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등에 대한 생각 말이다.

박찬호 선수가 미국에 진출했을 때, 미국인 코치들이 끊임없이 “왜 그렇게 던졌느냐”고 묻길래 처음에는 그게 책임을 추궁하는 줄 알고 덮어놓고 “잘못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차츰 현지의 격조 있는 인간관계를 파악한 후에, 그는 투구 하나하나에 대해 스스로 말하고 코치들과 높은 수준의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이영표, 기성용, 손흥민 등이 해외에 진출해 처음 겪은 ‘문화 충격’도 이런 일이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말을 한다는 것, 그로부터 스포츠라는 고결한 행위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된다.

‘몸글몽글’은 바로 그런 이유로 시작된 프로젝트다. 함께해보니, 다만 기회가 없었을 뿐, 학생들이 쓴 글은 다채롭고 기발했으며 무엇보다 진솔했다. 스포츠를 전공하는 학생들답게 이 거친 세상을 몸으로 부딪친 흔적이 뚜렷했다. “혼란스러웠고 힘들었던 시간과 함께 튀어오른 손등의 혈관, 까맣게 그을린 손등, 딱딱하게 자리 잡은 손바닥의 굳은살”(서강대 이승은)에 대한 기록, “나를 무겁게 짓누르고 가두었던 눈빛과 강요들”(경희대 윤영조)에 대한 회상, “나를 갈기갈기 찢고 싶을 때 내 옆에서 나를 위로했던”(인천대 이병현) 인연에 대한 애달픔,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막연하게 잡히지 않는 그 무언가를 쫓았던”(서울대 박지영) 옛 시절에 대한 감정 등을 읽으면서, 나는 이 학생들이 어려서부터 쓰거나 읽는 과정을 겪었더라면, 한국 스포츠가 더욱 따스한 풍경이 되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금 수많은 선수와 학생들이 잔인한 위계질서와 폭력적인 승리주의 아래에 놓여 있다. 그들의 여린 마음속에는 날카롭게 베인 상흔들이 남아 있다. 글을 쓰면서 스스로를 생각하고, 또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몸글몽글’ 정도가 아니라, 동시다발적으로 스포츠 현장 곳곳에서 진행되어야만 한다. 운동기계가 아니라 존엄한 인간적 행위의 실천자로 거듭나기 위해서 말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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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종의 둘째 계비인 문정왕후는 아들(명종) 대신 8년이나 수렴청정하며 권세를 휘둘렀다. ‘여주(女主·여왕)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이라는 대자보까지 시중에 나붙었다. 왕후의 소원은 남편(중종) 곁에 묻히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첫째 계비(장경왕후)와 합장한 남편(서삼릉 소재)을 정릉(강남구 삼성동)으로 옮기는 무리수를 뒀다. 하지만 1565년 승하한 왕후는 끝내 남편 곁에 가지 못한 채 태릉(노원구 공릉동)에 안장됐다. 중종 능의 지대가 너무 낮아 물이 스몄기 때문이다. 문정왕후로서는 아들(명종)과 며느리(인순왕후)가 태릉과 이웃한 강릉에 나란히 묻힌 것을 그나마 위안으로 삼았을까.

그 후 400년이 지난 1965년 어느 날 화장실에서 민관식 대한체육회장의 뇌리를 스치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태·강릉’ 지역이었다. 체육관을 이리저리 전전해야 했던 대표선수들에게 불암산 아래 공기 좋은 그곳은 훈련장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결국 “나무 한 그루도 상하지 않게 건설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건부 허락 아래 태릉선수촌이 건설됐다. 태릉선수촌은 한국엘리트 스포츠의 요람이 됐다. 개촌 이후 대표선수들이 따낸 하계올림픽 메달만도 234개다. 메달뿐이랴. 어려웠던 때, 별로 내세울 게 없었던 시대에 축 처진 국민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한 이들이 바로 선수촌에서 피와 땀, 혼을 쏟아낸 그 시대 젊은이들이었다. 지옥훈련의 대명사인 로프클라이밍 훈련과 단내 풀풀 풍기며 불암산 눈물고개를 오르내린 10㎞ 산악훈련 등은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됐다. 선수촌의 건물 하나, 나무 한 그루, 흙 한 줌도 태릉의 새 역사가 됐다.

아시아선수권대회를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훈련 중인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 _경향DB


태릉선수촌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의 복원 계획에 따라 완전 철거될 운명이었다. 그런데 최근 서울시가 문화재청에 태릉선수촌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신청했다. 조선왕릉처럼 태릉선수촌도 문화재이니 철거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리있는 말이다. 기억과 기록은 있는데 정작 해당 시설이 사라져버린다면 어찌 되는가. 반쪽의 역사만 남을 뿐이다. 최근 유네스코 역시 문화유산의 무조건적인 철거와 복원보다는 현대도시가 겪는 변화를 인정하는 추세다. 다름 아닌 공존의 방법을 찾으라는 뜻이다.


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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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계에서 틈만 나면 참새들의 입방아거리로 오르는 주제가 하나 있다. 다른 종목에서는 두각을 나타내는 흑인들이 왜 유독 수영에서만은 약할까 하는 궁금증이다.

다른 인종에 비해 물갈퀴가 짧다느니, 땀구멍이 너무 커서 물을 많이 품기 때문이라느니 하는 별의별 근거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 가운데서도 메이저리그 LA다저스 단장을 지낸 알 캄파니스의 해석이 즐겨 인용된다. 그는 1987년 “흑인들은 부력이 약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인종차별적인 발언으로 단장직에서 쫓겨난 바 있다. 흑인들은 근육이 많은 대신 체지방이 적어 물에 잠기는 부분이 많다는 말이다. 물론 모두 과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이야기이다. 이는 1988년 9월21일 서울올림픽 수영 접영 100m에서 입증됐다. 수리남의 앤서니 네스티가 7관왕을 노리던 매트 비욘디(미국)와 미하엘 그로스(독일)를 제치고 금메달을 딴 것이다. 이후 앤서니 어빈과 컬렌 존스(이상 미국) 등 흑인계가 올림픽에서 금메달 행진을 이어갔다. 흑인이 수영과는 맞지 않는 인종이라는 편견이 깨진 것이다. 그렇다면 흑인스타가 수영에 유독 적은 이유는 뭘까. 환경의 차이일 가능성이 높다. 수영은 축구나 야구, 육상 등 다른 스포츠와 달리 첨단 시설과 장비, 그리고 체계적인 개인교습이 필요한 종목이다. 흑인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네스티도 미국에서 엘리트 수영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아프리카 저개발국가나 서구의 저소득층에 속한 흑인들이 출세를 겨냥해서 승부를 걸 수 있는 종목이 아니다.


광주 하계유니버시아드 대회에 감비아 선수로 유일하게 출전한 수영 대표 팝 종가(오른쪽)와 아르팡 조브 코치가 8일 광주 유대회 선수촌에서 감비아 국기를 펼치고 활짝 웃고 있다. -경향DB


그런 면에서 2015 광주 유니버시아드에 출전한 감비아의 수영청년 파프 종가(17)의 도전은 박수받을 만하다. 50m 규격 풀은 구경도 못한 채 위험한 감비아 강에서 훈련을 받아온 청년이다. 접영 세계기록(26.67초)보다 13초 이상 늦은 기록(40초04)으로 조예선 꼴찌에 머물렀다. 그러면 어떠랴. 유니버시아드 시상식에서 국가 대신 부르는 공식노래가 있다. ‘그러므로 즐깁시다!(Gaudeamus igitur)’이다. 그 다음의 가사가 더 멋지다. ‘아직 젊을 때에(juvenes dum sumus)…’이다. 17살 종가 청년이 부를 만한 안성맞춤의 ‘청춘송가’이다.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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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한화의 최진행 선수가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실시한 도핑테스트에서 금지약물(스타노졸롤) 양성반응을 보여 30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스타노졸롤은 세계반도핑기구(WADA)가 지정한 제1종 상시 금지약물이다.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하고 간이 손상되는 등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난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 출전한 육상스타 벤 존슨(캐나다)이 이 성분 때문에 금메달이 박탈된 바 있다. 이번에 최 선수는 “체력이 떨어져 지인이 권유한 영양보충제였다”며 “금지약물인지 몰랐다”고 해명했다. “고의성이 없었다”는 말을 100% 믿더라도 구단 트레이너에게조차 한마디 묻지도 않고 이 같은 위험한 성분을 복용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이는 최 선수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난해 두산 투수 이용찬 선수에 이어 올해 수영스타 박태환, 프로축구 제주 강수일, 프로배구 흥국생명 곽유화 선수 등이 줄줄이 도핑테스트에서 약물성분이 검출돼 출전정지 처분을 받았다. 프로야구·축구·배구 등 프로 스포츠에까지 약물 복용이 폭넓게 퍼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도 올림픽·아시안게임과 같은 종합스포츠 대회에 참가하는 아마추어 스포츠의 경우엔 검사도, 처벌기준도 엄격하다. 박태환 선수의 경우 세계반도핑기구의 불시 도핑테스트에서 적발돼 징계를 받았다. 배드민턴 이용대 선수도 불시 도핑테스트를 위한 일정관리 시스템을 잘못 이해했다는 이유만으로 징계 처리됐다가 겨우 취소되기도 했다. 반면 프로 스포츠계의 경우 세계반도핑기구의 규정이 아닌 자체 도핑 규정에 따라 처벌한다. 따라서 처벌의 수위가 낮을 수밖에 없다. 이는 약물에 대한 무지와 불감증을 더 부추기는 요소가 될 수 있다. 최근 적발된 선수들이 ‘콧수염용 연고를 발랐을 뿐’이라든가, ‘다이어트 약을 먹었을 뿐’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약물에 특히 민감해야 할 선수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수영선수 박태환이 27일 서울 송파 잠실관광호텔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금지약물 양성반응에 관해 설명하고 국민들에게 사과하고 있다._경향DB



각 구단, 감독, KBO와 같은 스포츠 기구도 선수의 부주의 탓으로 책임을 돌려서는 안된다. 하루하루 승패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복용하는 모든 약물을 수시로 체크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선수 개개인의 마음가짐이다. 떨어지는 체력을 일거에 끌어올리는 약은 금지약물밖에 없다. 그리고 그 약물은 선수 개인은 물론 스포츠를 파멸로 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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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명이 자동차를 탔다. 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과 사무총장 그리고 대변인. 누가 운전할 것인가. 정답은 ‘경찰’이란다. 이 농담을 확대해 보자. 택시가 아니라 대형 버스라고 해보자. 국제 축구계를 쥐락펴락해온 사람들이 대거 탑승하면 과연 누가 운전대를 잡을까. 이번에도 정답은 ‘경찰’이 되지 않을까.

지난 7일(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일간지 ‘선데이타임스’는 타보 음베키 전 대통령이 블라터로부터 100억원대의 뇌물을 받았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미국 검찰은 남아공 정부쪽에서 나온 거액이 잭 워너 전 FIFA 부회장과 2010 월드컵 개최지 투표권을 행사하는 집행위원 2명에게 건네졌다고, 공소장에 적시했다. 현재 미 검찰은 워너를 포함한 14명의 관계자들을 부패 혐의로 체포한 상태다. 남아공 월드컵과 관련해 벌써 버스 한 대가 꽉 찼다.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전 세계의 축구장을 ‘검게’ 물들였던 주앙 아벨란제 밑에서 사무총장을 하며 축구를 돈으로 바꾸는 계략을 보고 배운 블라터는 개최지 결정권, 중계권, 공공 전시권이라는 3종 세트를 활용해 축구장을 자기들만의 환전소로 바꿔왔다. 남아공 대회의 경우, 본선 대회 전까지 4년간 지역예선 중계권, 광고 수익 등으로 무려 4조2763억원을 번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당시 12억원의 중계권료를 지불했으나 2010년에는 700억원이 넘었다. ‘FIFA 파트너, 월드컵 스폰서, 내셔널 서포터’ 등으로 구분된 수십개의 글로벌 기업들이 FIFA를 위해 월드컵 기간 돈의 축포를 쏘아댔다.

그리고 공공 전시권! 블라터와 그 수하들이 스필버그나 잡스 같은 사람은 흉내도 못 낼 정도로 21세기 인류 최고의 상상가임을 입증한 수입원이다. 2002 한·일월드컵 때 온 나라의 거리와 광장을 가득 메운 열정을 보고 이들은 곧장 공공 전시권을 고안해낸다.

2인 이상이, FIFA의 허락 없이, 공공장소에서 월드컵을 시청하면 과태료를 물리겠다는 것이다. 극장, 역, 광장, 병원, 터미널 같은 장소에서 어떻게 과태료를 물리나, 농담이겠지, 난 안 봤소 걸어가던 중이오 하는 사람을 어떻게 적발하나. 이렇게 방심하는 사이 그들은 ‘팬페스트 광장’을 고안해냈다. 수백년 동안 개별 독립국가의 사람들이 모이고 떠들고 저항하고 웃고 즐기고 사랑을 나누던 광장을 그들은 순식간에 장악해 자신들에게 막대한 후원금을 낸 기업과 방송사만이 그 광장을 독점적으로 사용케 했다.

권력 장악의 타당성과 장기적인 안정을 노리는 부패한 정치인들, 축구의 열정에 배어 있는 땀방울을 마케팅이라는 용광로에 우겨넣는 기업들, 이들이 떠받치는 권좌에 앉아 개별 주권 국가의 고유한 법칙과 재정 원리를 일거에 무시해온 FIFA의 권력자들이 축구장을 검게 물들여 왔다.


이에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 겸 FIFA 명예부회장이 나섰다.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천명한 상태는 아니지만 서서히 군불을 지피는 초기 양상은 두루 확인된다. 그는 지난 5일(한국시간), CNN의 유명한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포와의 인터뷰에서 “블라터 회장은 당장 물러나고 일반 업무도 중단해야 한다”고 강조한 후 “축구 관계자들과 만나 의견을 들어본 뒤 신중하게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부 의견은 회의적이다. 세력 관계상 아시아계 후보가 당선되기 어렵다는 중론이다. 최근 3년간 FIFA 인사들과 교류가 적었다는 의견도 있다. 국내 선거에서 연거푸 좌절되면서 과거의 영향력을 많이 잃었다는 분석도 있다.

나는 이런 분석에 대체로 동의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관전 포인트가 있다. 블라터에 반대한다고 해서 곧장 개혁적인 후보인가 하는 점이다. 블라터 회장은 “나도 완벽하지 않고, 모두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그 ‘모두’에 정 명예회장이 자유로운가도 검토해봐야 한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 때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던 정몽준 후보는 “FIFA 책임자가 한국이 준결승에 오른 것은 MJ라는 놈이 축구 심판을 매수한 게 아니냐고 했다. 그 정도 되면 제가 능력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유세 과정의 실언이겠지만, 이런 인식이라면 반블라터 인사일 뿐, FIFA를 개혁할 만한 인사인가, 회의적이다.

물론 선거는 현실이다. 블라터의 말처럼 ‘모두’가 어느 정도 흠집이 있는 상황에서 평지돌출의 인물이 선거에 나서기는 어렵다. 그런 점에서 정몽준 명예회장은 유력한 후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개혁 프로그램과 의지’다. FIFA 특유의 철저한 비밀주의를 깰 수 있는가, 최고 수준의 의사결정과 그에 따른 회계 및 운영에 대해 투명하게 공개하고 집행하는 의지가 있는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수십년의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는가, ‘1국1표’의 비밀주의에 기반한 24인 집행위원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인가, 축구공을 빼닮은 열정적인 팬들의 순수한 눈망울을 모조리 돈의 단위로 치환해 버리는 상상력 자체를 근절해낼 수 있는가 등이 관건이다.

이에 대한 확실한 프로그램과 강력한 의지가 있다면 정몽준 명예회장이 출마하기 바란다. 그러나 반블라터 깃발만 앞세운 채 어떻게 우군을 확보하고 적군을 공략할까 하는 공작적 자세라면 출마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해서는 당선되기도 어렵지만, 바로 그런 전략으로 당선되었기에 블라터는 몰락했다. 개인에게는 불운이요 축구계로서는 재앙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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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트디부아르가 2006년 독일 월드컵 지역예선을 통과한 2005년 10월, 동료들과 함께 본선 진출을 자축하던 디디에 드로그바는 중계방송 카메라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단 일주일 만이라도 내전을 멈춰달라”고 외쳤다. 이 호소로 정부군과 반군 간의 내전은 1주일간 휴전했다. 정부군과 반군은 마침내 2007년 평화협정을 맺었다. 드로그바의 호소는 유엔 회원국(193개국)보다 많은 가입협회(209개)를 자랑하는 축구의 역할과 가치를 보여준 사례이다. 인류가 야만적인 전쟁 대신 축구를 통해 갈등의 마음을 풀고 경기장 밖에서는 서로 손잡고 평화와 화합의 장으로 나서야 한다는 게 축구의 메시지인 것이다.

하지만 이렇듯 전 세계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축구의 ‘심장부’(국제축구연맹·FIFA)가 실상은 온갖 비리의 온상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지난해 2018 러시아 및 2022년 카타르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의 비리의혹을 조사한 이른바 ‘가르시아 보고서’가 나왔지만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은 ‘문제없다’고 일축했다. 급기야 FIFA 총회를 이틀 앞둔 지난달 27일 월드컵 개최지 선정 과정에서 천문학적 액수의 뇌물을 챙긴 혐의로 FIFA 주요 인사들이 체포됐다. 그럼에도 FIFA 부패의 몸통으로 지목된 블라터는 5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수사망이 좁혀오자 끝내 버티지 못하고 어제 자진사퇴했다. 관련자들의 혐의는 공갈, 온라인 금융사기, 돈세탁 공모, 탈세, 국외계좌 운영 등 47개에 이른다. FIFA는 마피아와 마약 카르텔을 방불케 하는 부패의 온상이었던 것이다. FIFA는 지난해 브라질 월드컵에서 6조3000억원의 수익(현금 1조6000억원 포함)을 올렸지만 세금을 내지 않았다. 비영리단체로 등록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블라터 회장의 연봉과 활동비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블라터는 수익금의 일부를 ‘축구발전금’ 형태로 각국 협회에 나눠주는 방식으로 지지세력을 넓혔다. 게다가 지금까지 개최지를 결정하는 집행위원이 불과 24명이었다. 13표만 얻으면 되니 거액의 뇌물이 난무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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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터 FIFA 회장 사퇴 (출처 : 경향DB)


러시아 등 일부에선 미 연방수사국(FBI) 등 미국의 수사당국이 이번 수사를 벌이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모양이다. 그렇더라도 이를 계기로 부패의 온상으로 전락한 축구와 FIFA가 신뢰를 회복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뜻깊은 일이다. 블라터 자진사퇴가 FIFA 개혁의 시발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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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블라터

2013년 당시 동부 감독이던 강동희씨 사건은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스타 출신의 현역 감독이 브로커들로부터 4700만원을 받고 후보 선수들을 투입하는 수법으로 승부를 조작한 혐의가 인정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창진 KGC 감독이 수사선상에 올랐다. KT 감독 시절이던 지난 2~3월 경기에서 후보 선수들을 기용해 승부를 조작하고 불법스포츠 토토에 돈을 건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전 감독이 지인들을 동원해서 빌린 사채(3억원)로 자신의 팀 경기에 베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만약 경찰이 제기한 혐의가 모두 사실이라면 충격적이다. 현역 감독이 직접 승부조작을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셈이기 때문이다. 경찰은 2014~2015시즌에 펼쳐진 5경기를 주목하고 승부조작 여부를 면밀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물론 수사가 초기 단계여서 섣부른 예단은 하기 어렵다. 전 감독도 법무법인을 통해 “승부조작이나 불법베팅의 사실이 없다”고 전면 부인하고 나섰다. 경찰은 철저한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내기를 바란다.

이재민 한국프로농구연맹(KBL) 사무총장이 26일 서울 논현동 KBL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2년 만에 불거진 승부조작 파문과 관련해 입장을 밝히고 있다. _ 연합뉴스


경찰의 수사 소식만으로도 국내 농구계는 공멸의 위기감에 빠졌다. 사실로 밝혀질 경우 가뜩이나 떨어진 농구의 인기가 스타 현역 감독들의 잇단 탈선으로 끝없이 추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농구는 좁은 코트에서 불과 5명이 뛰는 종목이다. 선수 교체의 제한도 없다. 이 때문에 감독의 작전에 따라 경기 흐름이 바뀔 수 있고, 승패나 점수차 관리 등의 방법으로 조작할 여지가 있다고 한다.

차제에 다른 종목도 ‘강 건너 불구경’식으로 대응하면 안된다. 지금까지 농구 외에도 야구와 축구, 배구 등이 모두 연루되어 홍역을 치르지 않았던가. 도박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게 고질적인 문제이다. 불법도박 세력들은 선수나 감독, 심판 등 경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검은 손길을 내민다. 예컨대 프로배구에서는 승부조작 관련자들이 출소한 후에도 선수들에게 접근하려는 움직임이 파악되기도 했다. 사실 어떤 제도나 법으로도 도박의 유혹을 근원적으로 막기란 쉽지 않다. 개인의 마음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스포츠 도박은 다르다. 한 사람의 탈선이 종목 전체를 존폐의 위기로 빠뜨릴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을 우상으로 삼았던 팬들의 상처는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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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여섯점 차이 났다고
끝난 경기로 봐야 하나
가장 중요한 불문율은
응원하는 팬 존중하는 것


우리는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인생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길고도 복잡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정황에 처해 있는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어떤 일은 분명히 내 실수였다, 내 탓이다, 인정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분명치 않다. 왜 내 보고서가 묵살되었는지, 왜 내가 야박한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왜 나에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언제나 길고도 불투명한 고립과 고통인지 알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당시 아이들을 구하다가 죽음에 이른 선생님들. 그 중에 몇 분은, 인사혁신처의 순직심사위원회에 따르면, ‘기간제 교사’라서 순직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 왜? 도대체 왜? 이제는 다급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신분을 감안해 행동해야 하는가. 온갖 비리로 얼룩진 육·해·공의 군 수뇌부들은 이 사회가 완전히 뒤집힌, 모든 가치가 뒤집힌, 사회임을 말해준다. 반면 스포츠는 명확하다. 규칙이 엄정하고 결과가 분명하다. 승패가 분명하고 그 이유도 눈에 보인다. 선수의 실수도 보이고 감독의 결정적 오판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휘슬이 불릴 때까지, 마지막 타자가 아웃될 때까지 선수들을 응시한다. 다시, 우리는 왜 스포츠에 열광하는가. 내게 주어진 모든 조건들의 타이밍은 언제나 너무 늦거나 빠르기 때문이다. 진학, 취업, 승진 등 사회적 절차에서 우리는 번번이 타이밍을 잃거나 빼앗긴다. 세상의 패스는 늘 너무 늦거나 너무 빠르다.

타이밍! 스포츠는, 그 어떤 종목이든지, 1초 이내의 긴박한 순간에 벌어지는 절묘한 타이밍의 세계다. 정확한 패스와 터닝슛, 찰나와 같은 도루와 간발의 세이프, 공의 궤적과 속도를 감각적으로 판단하고는 전속력으로 달려 온몸을 던져 마침내 지면에 닿기 직전의 공을 잡아내는 외야수! 우리는 경탄한다. 아, 저와 같은 타이밍이야말로 내가 이 거친 세상에서 단 한번이라도 겪어보고 싶은 순간이 아니던가. 그래서 경기장에 간다. 선수들 이름을 외쳐 부른다. 지고 있어도 응원한다. 지고 있는 저 선수들의 지친 표정이 꼭 우리네 일상과 닮지 않았는가. 9회말 세 번째의 아웃이 선언되기 전까지, 열렬히 응원한다. 그게 우리의 삶이다. 마지막 남은 한 번의 기회라도 움켜쥐고 싶은 것이다.

‘불문율’이라는 얘기가 있다. 지난 23일, KT 대 한화의 경기가 도화선이 되었다. 6-1로 앞서가던 한화가 9회초에 도루를 하고 9회말에는 투수들을 연이어 교체했다는 것이다. KT 주장 신명철이 분노를 표시했다. 이용철 해설위원은 “상대를 자극하는 행동이다. 사실상 승부가 결정난 경기에서, 9회말에 이런 식으로 투수 교체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했다.


글쎄, 우선 불문율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중에 김성근 감독이 밝혔지만, 9회초 진루한 강경학은 사인을 잘못 파악하고 도루했다. 이에 한화는, 발이 느린 포수 허도환으로 교체했다. 이때, KT 벤치는, 적어도 이용철 해설위원은 이 교체의 의미를 파악했어야 한다. 발이 매우 느린 선수를 들여보낸다? 이를 파악했더라면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윤규진의 등판 또한 양팀 모두, 그리고 해설위원 역시 사전에 알고 있는 사항이었다. 큰 점수 차로 패하기 전에 악착같이 달라붙어서, 상대 팀이 테스트 삼아 투수를 교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다.

분명 지켜야 할 금도가 있고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를 법률로 규제할 수 없는 것처럼, 숱한 상황이 발생하는 경기장의 모든 행위를 규정집에 적을 수는 없다. 규정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부자유에 구속된다. 그래서 불문율이 존재한다. 그러나 말뜻 그대로 ‘문자로 적시’되지 않은 것이므로 이를 해석하고 적용하기 위해서는 문자 규정보다 훨씬 정교해야 한다. 막연히 ‘스포츠맨십’이나 ‘동업자 정신’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특히 경기 그 자체의 밀도, 그 뜨거운 몰입의 정념을 무시하는 ‘동업자 정신’은 오히려 반스포츠적이다. 이날 경기는 6회 때 이미 5-1이었고 8회에는 한화가 한 점을 더 추가했다. 그러면 경기가 끝난 것인가. 팬들은 아직 아웃카운트가 세 개나 남아 있다고 열렬히 응원하고 있는데, 선수들은 기운이 빠져 있고, 해설위원마저 6점 날 때부터 이 경기는 이미 끝이 난 거라고 해도 되는가. 언제부터 대여섯 점 차이가 나면 그 경기는 끝난 것이라는 ‘불문율’이 생겼단 말인가.

타고투저 현상에 날씨마저 더워지면서 한 경기, 한 회마다 대량 득점이 발생한다. 20일, 삼성은 두산을 25-6으로 꺾었다. 23일, 롯데는 LG를 19-11로 이겼다. 9회나 연장까지 가서 웃는 자와 우는 자가 바뀌는 일도 늘고 있다. 10일, 두산은 한화전에서 9회말에 뒤집었다. 17일, 이번에는 한화가 넥센을 연장까지 물고 늘어져서 이겼다. 아니, 당장 다음날 경기에서 KT가 입증하지 않았던가. 비정해 보이는 한화 야구를 무섭게 몰아쳐 13-4로 이기지 않았던가.

물론 불문율이 있다. 보복 투구는 절대 금지다. 투구 방해 정도가 아니라 아예 무릎을 보고 들어가는 슬라이딩은 퇴장이다. 거친 욕설 또한 그렇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불문율은 야구를 존중하는 것이다. 야구는 9회말부터라고, 그것을 귀하게 여기던 ‘스포츠 정신’은 어디로 갔는가. 이 거친 세상에서 연거푸 패퇴한 팬들은 한 베이스라도 더 가려고 치고 달리는 선수들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간다. 마지막 아웃카운트 선언 때까지 함성을 지른다. 그것을 존중하는 것, 가장 중요한 불문율이다.


정윤수 | 스포츠평론가·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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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경찰이 발표한 스포츠 비리 수사 내용을 보면 한숨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선수들에게 지급돼야 할 거액의 훈련비와 지원금을 허위로 타내는가 하면 기업 후원금의 일부를 개인 성과금 명목으로 빼돌린 스포츠인들이 적발됐다.

예컨대 어떤 종목 코치는 선수들의 식사·숙박비 등 훈련비와 대회출전비 등 총 1억5000만원을 횡령했다. 또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출신의 지도자는 이 같은 비리를 묵인해주는 대가로 공무원들에게 거액의 뇌물까지 뿌렸다. 해당 공무원은 그 대가로 지원금 요청 공문을 허위로 작성했다. 심지어 조직폭력배 행동대장이던 어떤 종목의 전무이사는 우수선수 관리지원금을 1억5000만원이나 빼돌렸다.


문제는 적발된 종목이 쇼트트랙·레슬링·스키·씨름 등 4개 종목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적발 내용에 기상천외하거나 경천동지할 수법이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다양한 종목에서 잡다한 수법이 통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정당당한 승부의 세계여야 할 체육계에서 비리의 고질화와 일상화가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만큼 체육계는 지금까지 광범위하게 통용돼온 부조리의 사슬을 스스로 풀지 않으면 비리집단의 이미지를 씻기 어렵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간과해서는 안될 대목도 있다. 이번 수사는 지난해부터 문화체육관광부와 경찰이 상시 합동으로 벌여온 이른바 ‘스포츠 4대악(惡) 수사’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입시비리·편파판정·승부조작·(성)폭력 등 이른바 4대악을 없앤다는 취지는 좋다. 그러나 전담 수사기구 상설화를 통해 스포츠계 전체를 ‘악의 축’이라 단정하고 척결 대상으로 삼는 것은 논란의 소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주무부처인 문화부는 체육계 전반을 비리의 온상으로 매도하기보다 구조적인 문제점을 찾는 노력을 보여야 할 것이다.

이번 수사에서 드러났듯 예산을 관리감독해야 할 공무원도 제대로 된 감사를 받지 않거나 협회가 외부의 통제 없이 예산을 총괄했다. 또 지원금을 요청하고 관리감독하는 이들이 장기간 같은 자리에 있었다. 이들은 검증이 허술한 보상금 항목을 노렸다. 비리 적발도 좋지만 엄격한 관리감독 체계를 만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뜻이다. 체육계가 비리집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면 그 손가락질은 곧 문화부로 향한다는 것을 알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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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이 1000일 앞으로 다가왔다. 삼수 끝에 유치한 동계올림픽이 이제 3년도 채 남지 않았는데, 지금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기존의 대형 국책사업 추진 과정에서 벌어졌던 것들과 매우 유사하다. 올림픽 주최 측은 사업의 경제성과 국격, 매몰비용을 들며 사업을 강행하고, 분산 개최 등 사업방향의 선회를 요구하는 쪽은 환경파괴와 경제효과 추정의 허구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동일한 논쟁이 벌어졌던 사업들은 현재 어떤 모습일까.

새만금사업의 경우 소실된 갯벌의 가치를 차치하고, 경제성 평가만을 봐도 ‘밑 빠진 독’이라고 할 만하다. 공동조사단이 총 사업비 약 3조원의 비용을 기준으로 비용편익분석을 한 결과, 시나리오에 따라 편익이 비용의 최대 3.81배에서 최소 1.25배로 산출됐다. 이마저도 법원 감정촉탁 보고서에 따르면 “경제성 평가에서 왜곡 평가의 예로 교과서에 실려도 좋을 만큼” 의도적으로 편익은 부풀리고 비용은 제외시켜 나온 결과이다. 심지어 수질개선 항목은 비용이 아닌 편익으로 포함됐다. 경제성 평가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까지 끊임없이 변경되고 있는 새만금 기본계획에서 총 비용은 22조2000억원까지 늘어났다. 그중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던 수질개선 비용으로만 초기의 총 사업비에 근접하는 2조9000억원이 책정됐다. 이 역시 향후 얼마든지 더 늘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편익은 어떠한가. 투자율이 매우 낮아 2018~2022년을 민간투자 확산단계로 설정한 것을 보면, 미래의 편익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4대강 사업의 경우도 22조원을 투자했지만, 물부족 지역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 이를 근거로 전국에서 댐건설 계획을 다시 추진 중이다. 사업 구간에 남은 것은 극심한 녹조와 정체된 강뿐이다. 더 큰 문제는 사업을 추진할 때와 평가하고 책임져야 할 때의 태도 차이다. “강이 동맥경화에 걸려서 준설을 해야만 한다”던 4대강 사업의 홍보 문구는 협박하듯 연일 TV에 등장해 많이 알지만, “대규모 준설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타당성이 낮”으며 “남조류 대량 발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는 보 건설에 따른 체류시간 증가”라는 국무총리실 산하 조사평가단의 사업평가 결과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업을 추진해 직접적으로 경제적인 이익을 얻는 소수는 뒷감당에 관심이 없다. 이익은 그들 소수가 가져가지만, 손해는 우리 모두가 보는 것이다.

평창 동계올림픽과 관련된 이슈들도 예의 사업들과 다르지 않다. 초기 8조8000억원이던 사업 예산은 전체 공정률이 미미했던 2014년 말 이미 13조원까지 뛰었다. ‘경제적 효과 평가’에서 추정한 직접적인 효과 21조원에는 정부 지출 3조원 등 비용까지 넣어 비난을 받기도 했다. 나가노의 사례를 보면 향후 유지 관리의 경제적인 문제는 훨씬 심각할 수 있다. 지금이라도 보다 나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환경적인 면에서 최고의 쟁점이 되고 있는 가리왕산 활강경기장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벌목률이 높다고 해도, 나무를 키우는 토양과 물의 체계는 아직 온전하다. 그러나 공사가 더 진척되어 슬로프와 리프트를 설치하기 위한 절성토 토목공사, 인공눈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댐·관로 설치를 하고 화학물질을 살포하기 시작하면 토양과 지하수, 주변 생태계는 완전히 교란될 것이다. 이러한 공사가 시작되지 않은 지금이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막을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1002일 남은 14일 오후 서울 잠실 롯데호텔에서 ‘스키인의 날’ 행사가 열리고 있다. 평창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회 1000일을 앞둔 16일에 공식 슬로건을 발표할 예정이다. _ 연합뉴스


이러한 두 가지 문제를 모두 개선할 수 있는 방안으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분산 개최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도 ‘아젠다 2020’을 통해 분산 개최의 효용성을 인정한 바 있다. 다만 조직위원회의 결정을 존중하겠다는 입장이다. 이로써 모든 책임은 온전히 조직위원회의 몫이 됐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강원도의 재정파탄과 환경파괴로 이어져 국제적인 수치로 남지 않게 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조직위원회의 결단이다.


이현정 | 국토환경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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