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구용 | 전남대 교수·철학


 

런던올림픽이 끝나가고 있다. 용감한 녀석들의 말처럼 한숨 대신 함성으로, 걱정 대신 열정으로, 포기 대신 죽기 살기로 힘을 겨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올림픽 이념(Olympism)이 말하듯 운동은 사람이면 누구나 차별 없이 누려야 하는 인권이다. 그러니 세계인의 운동(Sport) 축제인 올림픽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증진하며 평화로운 사회를 지향하는 문화 및 교육 운동(Movement)이어야 한다. 따라서 운동(M)을 포기한 운동(S)은 사람이 아닌 돈의 파티일 따름이다. 


 올림픽에 대한 찬사와 비판은 다양하다. 한쪽이 세계인의 축제라며 환성을 지를 때 다른 쪽은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확대하는 환영이라고 조롱한다. 세계시민은 국가나 민족, 혹은 그것이 자랑하는 역사나 특정 상품과 자신의 정체성을 배타적으로 일치시키는 대신 다양한 이질적 문화를 횡단하며 그 가치를 동등하게 인정하고 존중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금메달 수에 따라 일렬로 순위를 매기는 우리에게 올림픽은 세계인의 축제가 아니라 국가 간 무한경쟁, 곧 전쟁일 뿐이다. 올림픽 헌장에 따르면 “올림픽 경기는 개인이나 팀 종목에서의 선수 간 경쟁이지 국가 간 경쟁이 아니다”. 그러니 대한체육회가 제시한 목표인 10-10은 올림픽 헌장을 부정하는 블랙 코미디다. 


(경향신문DB)


전사, 출전, 군단, 전술, 적진, 승전과 같은 전쟁 용어들로 중계되는 올림픽은 만국에 의한 만국의 전쟁인 세계대전의 다른 이름이다. 그렇다고 올림픽을 가상적 국가항전을 통한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체계로 치부하며 냉소적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은 현실의 변화를 읽지 못한 처사다. 오늘날 시장의 요구에 부역하지 않는 국가, 자본의 논리에 복종 않는 민족은 올림픽에서 단 한 칸의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①국가대표라는 상징적 이름으로 선수들을 호명하여 힘겨루기를 시켜놓고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걷거나 각국의 방송사로부터 중계권료를 걷는 올림픽 조직들, 

②지불한 중계료를 훨씬 능가하는 광고료를 챙기는 방송사들,

 ③국가대표와 자사의 상품을 동일시하는 광고를 통해 국민적 소비를 이끌어내는 기업들이 협연하는 올림픽에서 국가는 제법 잘 팔리는 상품일 뿐이다. 


올림픽에서 국가가 상품이라면 국가대표는 살아 있는 원자재인 노동자고 국민은 국기로 포장된 문화산업의 소비자다. 그러니 더 큰 임금을 주는 나라로 국적을 바꿔 올림픽에 출전하는 선수는 고급 이주노동자며, 밤잠을 설치며 애국심을 자각하는 국민은 소비중독자이다. 그 때문에 국가라는 상품 생산자인 거대자본이 ‘만약 내가 이겨서 일본의 국가가 울릴 것을 알았다면 올림픽에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손기정님의 탄식을 상상하도록 부추기는 것은 고도의 광고 전략이다. 


그런데도 이주노동자가 몇몇 생산 라인을 접수한 올림픽이 다문화사회로의 지구적 전환의 증거인 양 떠드는 학자들이 있다. 서로 다른 종족이 하나의 국기를 단 선수단은 그만큼 다양한 이주노동자를 끌어 모을 수 있는 제국의 역사와 초국적 자본을 가진 국가의 이야기다. 미국, 영국, 프랑스 대표선수에 흑인이 많은 것은 그들의 어두운 역사를 반영하면서 그들의 문화산업이 제3세계 선수들을 흡수할 만큼 막강하다는 증표다. 어떤 철학자의 말처럼 이런 방식의 문화적 다양성이란 상품의 다양화일 뿐이며, 결국 더 큰 자본을 가진 강자만이 살아남는 문화적 토양을 은폐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올림픽이야말로 약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질 수 있는 가장 평화로운 축제라고 주장한다. 사례는 풍부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올림픽 개막식은 사회적 소외집단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를 전달하는 퍼포먼스로 넘쳐난다. 더구나 가난과 무시를 극복하고 인류를 대표하는 선수로 등극한 영웅들의 감동적 성공일기에서 올림픽은 꿈을 실현하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의 반복적 서사는 지금의 돈 중심 체제에서도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으며, 그 때문에 현 체제는 정당하다는 신화를 은밀하게 유포한다. 이런 방식으로 올림픽은 부정적 현실을 긍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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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환 선수가 런던올림픽 대회 첫날 수영 자유형 400m에서 값진 은메달을 땄다. 박 선수는 국제수영연맹 사상 25년 만에 첫 실격 판정 번복이라는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소중한 성과를 얻었다. 그의 투혼은 메달 색깔에 연연할 게 아니라 최선을 다한다는 게 얼마나 감동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올림픽에서 동메달만 얻어도 기쁨에 겨워하는 다른 나라 선수들과는 달리 우리 선수들은 은메달을 따고도 원통하다며 통곡을 터뜨리는 게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제는 금메달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때도 됐다. 국민들이 은메달을 딴 박태환에게 뜨거운 박수와 격려를 보내는 것은 실격을 당한 아픔을 딛고 결선에 나가서는 자신의 기량을 유감없이 선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금메달을 따서 올림픽 2연패를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진 것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괜찮다. 아니, 장하다. 값진 은메달을 따줘서.

 

박태환 ㅣ 출처:경향DB

대한체육회와 대한수영연맹의 오심에 대한 발빠른 대응도 돋보인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에서 체조의 양태영이 오심으로 금메달을 뺏긴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한 덕분이다. 수영 선수단은 경기가 끝난 뒤 30분 안에 이의신청을 해야 한다는 규정에 맞게 22분 만에 관련 서류를 내는 기민함을 보였다. 결국 국제수영연맹이 실격 판정을 번복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박태환에게 중국 심판이 실격 판정을 내렸다고 잘못 알려져 한때나마 국민들이 흥분했던 점도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진실이 아닌 사안을 놓고 국민들을 오도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른 경기에서도 오심으로 눈물을 흘리는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국민에게 첫 금메달의 기쁨을 안겨준 사격 10m 공기권총의 진종오 선수에게도 축하를 보낸다. 비인기 종목의 설움 속에서도 묵묵히 노력한 끝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낸 진종오는 충분히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아울러 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단신으로 열심히 노력했던 펜싱의 남현희, 동메달을 딴 남자 양궁 선수들도 눈물을 거두고, 남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기 바란다. 이왕이면 올림픽에 나갔으니 이겼으면, 그리고 금메달을 땄으면 하고 바라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못 땄다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일은 더 이상 사라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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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논설위원

 

런던올림픽 공식 슬로건은 ‘하나의 삶(Live As One)’, 공식 모토는 ‘세대에게 영감을(Inspire a Generation)’이다.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전 종목과 국가에서 여성 선수가 참여하는 ‘양성평등 대회’라는 의미와 메달 경쟁보다 창의와 감동의 향연이 되기를 지향하는 주최 측의 희망이 담겨 있다. “올림픽의 의의는 승리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참여하는 데 있으며,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하는 것이다”라는 피에르 쿠베르탱의 올림픽 정신과도 잘 부합하는 개념이다.

그렇다고 참여가 결코 간단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런던에서 런던으로(From London To London), 1948~2012’라는 한국 선수단의 캐치프레이즈에 숨은 사연만 봐도 그렇다. 64년 전 대한민국은 런던올림픽 참가가 독립운동에 이은 또 하나의 건국운동이었다. 완전한 독립국가의 지위를 인정받지 못한 나라의 올림픽 참가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승인을 받으러 스톡홀름 총회장으로 가던 전경무 올림픽대책위 부위원장이 비행기 추락 사고로 숨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국내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올림픽이 열리기 한 달 전까지는 국호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조선이라는 국호를 사용했고, 국기도 4괘의 배열이 지금과 다른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선수단 기수로서 태극기를 들고 입장했던 손기정 선생이 그 감격을 평생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런던에 내린 한국선수단 l 출처:경향DB

오늘 개막식을 가진 런던올림픽에서 64년 전 정부 수립을 앞둔 대한민국의 애환을 떠올리게 하는 선수가 특별히 눈에 띈다. 고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를 담은 <울지 마 톤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프리카 남수단의 마라토너 구오르 마리알이다. 지난해 7월 수단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남수단은 IOC 규정상 이번 올림픽 출전이 불가능하다. 새 회원국이 올림픽에 참가하려면 최소 2년이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마리알은 수단 대표로 출전하라는 IOC의 권고를 “내 가족을 죽인 국가를 대표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그는 ‘올림픽 독립 선수’ 자격으로 오륜기를 가슴에 달고 뛰게 된다. 국력 과시와 상업성의 경연장으로 흐르기 쉬운 올림픽에서 그의 참여는 색다른 감동을 준다. 우리 선수단의 당당한 모습과 함께 그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울지 마, 마리알! 그리고 울지 마, 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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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면서 우리들의 이야기도 대선을 소실점 삼아 숨 가쁘게 달아오르고 있다. 장삼이사의 하나로서 나 역시 이런저런 자리에서 반드시 해야 할 이야기가 고갈되고 나면 자연스레 대선 주자들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 자리에서 누군가 내게 물었다. 오직 스포츠라는 관점에서 보았을 때 반드시 당선되어야 할 사람은 누구냐고. 미안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직 없다고 나는 짐짓 아랫입술을 물면서 대답했다. 그는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역시 같은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선되어서는 안될 사람은 누구냐고. 그러자 순식간에 다음과 같은 생각이 났다. 

우선 경기장을 유세장으로 여기는 사람은 곤란하다. 정치인들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잘 찾아간다. 큰 경기가 열리면 어김없이 유력 정치인들을 볼 수 있다. 감독을 만나 악수하고 선수들의 어깨를 두드리고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든다. 그들이 진실로 대단한 담력의 소유자임을 다음 순간 확인하게 된다. 어서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정치 쇼 하지 말라는 관중들의 야유를 향해서도 그들은 손을 흔든다. 2년 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똑똑히 보았던 모습이다.  

2009년 프로야구 개막전 때는 당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시구에 나섰다. 그는 시구를 마친 다음에도 양 팀 더그아웃을 ‘격려 방문’하는 바람에 경기가 지연되었다. 국회에서 이같은 ‘관료주의’를 추궁하자 그 장관은 “뒷말이 있고 그래서 쓸데없는 짓은 안 하는 게 낫다”고 발언하여 정말 그가 선수들을 격려하고 시즌 개막을 축하하러 간 것인가 하는 본질적인 의문을 갖게 했다. 동네 경기를 가봐도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이 ‘밥은 쌀로 짓는다’는 식의 하나 마나 한 얘기를 땡볕에 아이들 세워놓고 떠든다. 이런 관료주의자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음으로 선수들을 병풍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있다. 이들은 올림픽이라도 열리면 금쪽같은 시간을 내서 반드시 공항으로 나간다. 선수들과 더불어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면 그 순간 수십명의 취재진이 일제히 셔터를 누른다. 그 ‘포토타임’의 순서나 위치를 놓고 보좌관들은 막후에서 신경전을 벌인다. 얼마 전에도 인천공항에서 그런 진부한 풍경이 벌어졌다. 더 끔찍한 것은 자신의 선거에 스타 선수들을 반강제로 동원하는 사례다. 선수들도 자존심이 있어서 웬만한 호출에는 끄떡하지 않지만 축구를 비롯한 여러 종목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사들의 선거에서는 어김없이 스타 선수의 어색한 표정을 볼 수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대통령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박태환이 아시안게임 자유형 1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딴 뒤 포효하고 있다. l 출처:경향DB

 마지막으로 선수들의 성장이나 생활환경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은 대통령은커녕 선거에도 나오면 안된다. 그런 사람은 사실상 일반 국민의 성장 환경이나 어려운 일상에도 큰 관심이 없는 수가 많다.

 잠깐 범위를 좁혀 보자. 전국소년체전이 갖가지 부작용이 있어 아예 폐지하거나 개혁해야 한다는 것은 체육계의 오랜 열망이다. 그런데 지지부진하다. 체전 성적이 교감이나 교장의 승진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기 때문이다. 소속 학교 학생들이 큰 대회에서 입상하면 ‘유공 교원’에게 평점이 부여되거나 승진 등의 인사에 반영이 된다. 학생 선수들이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이것이다.

 이 작은 그림을 확대하면 이 나라 체육 정책과 고스란히 겹쳐진다. ‘대한건아’가 ‘국위선양’을 하면 그 순간 지배적인 위치에 있는 정치인은 그 열기를 온전히 자신의 정치력 확장의 도구로 삼는다. 아이들은 교실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합숙소와 경기장을 전전하며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고 그들 중에 일부가 국가대표가 되어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고 ‘국위선양’을 한다. 그 성취는 그 자체로 귀하다. 대다수 학교 구성원이나 국민들은 그런 귀한 가치를 추상적인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유독 학교장이나 단체장이나 유력 대선 후보나 대통령은 그것을 현찰로 바꿔버린다.

 어느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그 후보의 됨됨이나 정책에 대해 나는 잘 모른다. 그럼에도, 지지 여부를 떠나서 지금까지 제시된 각 진영의 구호는 물론이려니와 수십년 동안 질리게 봐온 웅변형 구호들에 비하여 ‘저녁이 있는 삶’은 여운이 깊다. 그 여운은 시적인 언어 구사라는 점도 있지만,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던 ‘저녁’이라는 가족 일상이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우리의 삶을 뼈저리게 담고 있다는 점에서 슬프다. 선수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볼 줄 아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선수들에게도 ‘저녁’이 필요하다. 아, 물론 이것은 비유다. 선수들은 대부분 저녁에 경기한다. 낮에 경기하면 관중석은 텅 빌 것이다. 내 말의 요점은 선수들에게도 휴식과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린 학생 선수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휴식이 필요하고 문화가 필요하고 공부가 필요하다. 오늘 이 주장은 순전히 스포츠라는 관점에 한정한 것이다. 한계가 없지 않다. 그러나 한줌의 의미는 있다.

 선수들을 인기 관리에 필요한 도구로 삼는 정치인이라면, 사람들 많은 곳에서 사진을 찍거나 악수를 하는데 필요한 병풍으로만 여기는 유력 후보라면, 그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 비록 스포츠에 국한한 얘기지만 선수들을 병풍으로 여기는 후보는 국민들마저 슬쩍 먹잇감을 던져주면 한 표 찍어주는 예속된 존재로 여기기 쉽다. 그래서 나는 이번 올림픽에서 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예의주시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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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 | 동화작가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여름방학인데도 보충수업을 하느라 학교에 나와서도 마음은 온통 올림픽에 가 있었다. 바야흐로 1988년. 탁구의 현정화 선수를 비롯해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의 전적을 거둔 한국 선수들을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이국 선수들에게 매료되기도 했는데, 그중에서도 수영의 비욘디는 단연 스타였다. 요즘이야 한 몸매 하는 남자 연예인들이 흔하고 흔하지만, 그때는 비욘디 같은 몸매를 텔레비전에서 보기 어려웠다.

서울 사람들이 부러웠다. 서울올림픽이니, 서울 사람들은 모두 올림픽의 주인공쯤 되는 줄 알았다. 서울은 아니지만 나도 엄연한 한국 사람이니, 주연은 아니어도 조연쯤은 되는 줄 알았다. 아, 대한민국! 정수라의 그 노래마저도 좋았다.

그때,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은 하나인 줄 알았다. 올림픽 때문에 생계 수단인 노점을 빼앗긴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올림픽을 유치한 대통령이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살육을 저질렀다는 것도 몰랐다. 훗날, 많은 것을 알게 된 뒤 올림픽이 싫어졌다. 태극 마크를 달고 겨루는 모든 일이 고까웠다.

그런데 런던올림픽에 출전하는 마라톤 선수 구오르 마리알. 그는 수단 난민 출신으로 미국 영주권자인데 시민권자가 아니라서 미국 선수로 뛸 수는 없단다. 남은 방법은 원래 국적이던 수단 대표로 출전하는 것. 하지만 마리알은 IOC의 그 제안을 거절했다. “내 가족을 죽인 국가를 대표할 수는 없다.” 결국 마리알은 올림픽기를 들고 출전하게 되었다.

 

2012 런던올림픽 D-30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이 파이팅을 외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순수한 스포츠 정신이라고들 한다. ‘순수’라, 참으로 교묘한 말이다. 사전적으로만 따지자면 좋은 의미이지만, 얼마나 수많은 의도로 악용되어 왔는가. 현실을 비판하는 예술을 탄압하기 위해 예술의 순수성을 부르짖고, 현실을 바라보는 눈과 귀를 가리기 위해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내세웠다. 1980년 광주의 대학살을 자행한 바로 그 다음해에 제10회 전국소년체전이 광주에서 개최되었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에 따라.

그런데 간혹 순수하지 않은 선수들이 있다. 축구 선수 지네딘 지단은 2002년 프랑스 대선 당시 극우 성향의 국민전선 후보 르펜이 당선되면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르펜은 인종차별 행보를 보여 온 사람이었고, 알제리 이민자 출신인 지단은 그에 반대한다는 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한 것이다. 그보다 더 앞선 권투 영웅 무하마드 알리는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어느 베트콩도 나를 검둥이라 부르지 않았다.” 또 체코 출신으로 미국 국적을 가지게 된 테니스 선수 나브라틸로바는 대회에 앞서 기자들에게 미국은 동성애 후진국이라며 부시 행정부를 강력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어디 그뿐인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당시, 스페인 축구 FC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전쟁 반대’ 현수막을 경기장에 걸어두고 ‘평화를 위한 바르셀로나’라고 쓰인 유니폼 차림으로 경기를 치렀다.

아! 그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떠올리다보니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이번 런던올림픽에 한국의 무하마드 알리가, 나브라틸로바가 나타나 준다면? 한국 축구 대표팀이 ‘해고는 살인이다’라고 유니폼에 써붙이고 뛰어준다면. 박태환 선수가 물살을 헤치고 나와 두 주먹 불끈 쥐며 강정마을을 파괴하지 말라고 포효해준다면! 쌍용차 해고노동자 23명을 비롯한 사회적 타살로 인한 죽음들을 위해 애도의 인사를 건네준다면. 이것이 나의 올림픽에 대한 꿈이다.

무슨 망상이냐고?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혹시 아는가? 언젠가 우리의 무하마드 알리가 정말로 순수한 스포츠의 정신으로 강펀치를 날려줄려는지!

그러지 않는다고 선수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누군가에게는 ‘최선의 선택’으로 기억된 군부 독재 이래로 스포츠는 순수를 강요받아 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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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올림픽이 10여일 앞으로 다가온 지금 ‘올림픽 돈벌이’가 관심을 끌고 있다. 먼저 가전업계가 신발끈을 동여맸다. LCD TV 수요가 10% 이상 늘 거란다. 그러고보니 요즘 한 TV광고는 ‘3D’로 보라고 하고 경쟁사는 ‘스마트’하게 보라고 우리를 꼬드긴다. 방송, 인터넷업체, 광고업계도 올림픽 수혜주가 될 거라 한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업종이 있다. 우선 맥주업계. 여름철 성수기인 데다 올림픽이 열려 매출이 40% 이상 증가할 것이란다. 그렇다면 맥주의 천생연분 배필은 누구인가. 바로 치킨 아니겠는가. 요즘 ‘치(킨)맥(주)’이 대세란다.

우리나라의 하루 닭 소비량 150만마리 중 프라이드치킨으로 100만마리가 나간다. 그런데 2010 월드컵 때 한국전이 있는 날이면 매출이 다섯 배나 늘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 모자라게’ 경기 1시간 전에 치킨집에 전화했다가 10군데 몽땅 통화 중이어서 치킨을 먹지 못했던 손석희 교수가 2차전을 앞두고 아침부터 일갈하지 않았던가. “아침 먹고 바로 치킨을 예약하라”고.

월드컵의 경우 한국팀 경기 때 국민들이 집중적으로 닭을 먹어치우지만 올림픽은 245명의 선수가 22개 종목에서 30개 이상의 메달을 다툴 것이기 때문에 추가로 1000만마리의 닭이 생을 일찍 마감해야 할 것이다. 성적이 좋으면 2000만마리의 닭이 스포츠 코리아의 제물이 될 수도 있겠다.

 

지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여자 핸드볼 예선 일본과의 경기를 관전하는 한국응원단의 응원모습 ㅣ 출처:경향DB

그런데 나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스포츠 이벤트 때문에 온 나라가 일사불란하게 들썩이는 경우도 못 봤지만 TV 판매가 갑자기 10% 이상 늘고 폭음과 폭식을 하는 나라도 본 적이 없다. 스포츠에 가장 광적인 미국에서도 어느 도시의 프로팀이 우승할 경우 맥주 소비량이 늘긴 하지만 한국처럼 큰 차이도 아니고 그나마 지역적 현상일 뿐이지 전 사회적 현상은 아니다. 이는 우리 여가문화의 척박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고, ‘국가주의 여가’의 등장이기도 하고, ‘애국주의 식성’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왜 올림픽이나 월드컵 때만 되면 평소엔 안 하던 행동을 하게 되는 걸까. 물론 그 출발은 10년 전의 월드컵일 것이고, 그 이유는 미디어 스포츠의 발달이니 애국주의의 상품화니 하며 뭉뚱그려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정확하게 겨누고 싶다. 그 배후의 원흉은 바로 언론이다. 올림픽과 월드컵 때면 이성이 집을 나가버리는 현실은 바로 언론의 작품이다.

2002년부터 중복편성, 동시중계가 고착화되더니 2006 월드컵 때 지상파 방송사들은 하루 최고 21시간의 축구 싹쓸이 편성을 감행했고 2008 올림픽 때도 (청와대의 ‘분위기 띄우라’는 명령 때문인지) 메인뉴스의 반 이상을 올림픽으로 채워버렸다.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 때는 주최국인 미국도 관심이 없는 대회를 가지고 연일 ‘세계가 경악했다’는 기사를 ‘써 대더니’ 2010년 지상파 3사는 아예 김연아 헌정방송이 돼버렸고, 몇 달 후엔 아시안게임 소식까지 연일 메인뉴스 헤드라인에 편성했다. 그래도 신문은 조금 낫다고? 천만에. 올림픽 때면 각 신문사 홈페이지는 ‘올림픽 특별판’으로 바뀌고 우리는 그 수많은 올림픽 기사와 그 밑에 굴비처럼 엮여 내려가는 딸림기사들을 피해갈 수 없다.

외국의 언론은 어떨까. 자국 선수가 금메달을 따면 톱기사로 올리기도 하지만 그 외엔 스포츠 섹션에 가지런히 모여 있다. 미국의 NBC는 현지에서 메인뉴스를 전하기도 하지만 올림픽 소식을 너댓 꼭지 이상 내보내지 않는다. 자고로 언론은 세상을 보는 창이고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다. 그런데 언론은 창문, 방문까지 몽땅 올림픽과 월드컵으로 도배를 해버린다. (그게 언론이냐.) 보통 ‘언론은 여론을 반영한다’고 하는데 한국에서는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이번에도 ‘멘(털)붕(괴)’ 언론을 볼 것인가.

이번엔 언론이 언론다웠으면 한다. 그렇게 못하겠다고? 수백만의 닭머리들이 당신 꿈에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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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 논설위원


인간의 남성과 여성은 각기 다른 이유로 직립보행을 하게 됐다. 남자는 음경을 드러내기 위해서 뒷다리로 일어섰다. 여성은 정반대의 이유로 두 발로 섰다. 네 다리로 땅을 짚었을 때 뚜렷이 드러나는 음부를 감추기 위해서다. 야한 우스개 같지만 미국 오리건대학교의 맥신 시츠-존스턴의 성선택 이론에 나오는 도발적인 주장이다. 영장류의 한 종이 인간으로 진화하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라는 직립보행의 이유조차 이렇게 다르다면 남자와 여자는 똑같은 존재로 취급될 수 없다. ‘연애의 바이블’로 애독되는 존 그레이의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에서처럼 인간 남녀는 화성인과 금성인에 비유될 정도로 이질적이다.

자연계에서 성선택은 대부분 암컷의 주도로 이뤄진다. 공작 수컷의 화려한 깃털과 엘크 수컷의 거대한 뿔이 전형적인 예다. 암컷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라면 생존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특성을 발달시키기도 해야 하는 게 수컷의 불쌍한 운명이다. 그렇게 암컷의 선택을 받은 수컷의 후손이 살아남는 것이다. 인간 진화의 여정과 그 과정에서 일어난 성선택도 자연계의 진화 원리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오랜 수렵·채집 시기를 거치면서 수렵에 능한 남성이 성선택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을 것이라는 짐작을 쉽게 할 수 있다. 스포츠의 기원을 사냥이나 전투행위와 같은 데서 찾는다면 그것은 남자 세계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성선택적 행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런던 올림픽에 출전할 국가대표 선수들 ㅣ 출처:경향DB

남성의 전유물로 출발했던 올림픽이 남녀 모두의 제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1900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회 대회부터 시작된 여성 참여가 이번 런던올림픽에서 모든 종목으로 확대됐다. 유일하게 금녀의 원칙을 유지하던 복싱이 정식 여자 종목으로 채택되면서다. 카타르·브루나이와 함께 또 다른 금녀의 원칙을 고수하던 사우디아라비아가 여자선수를 출전시키면 런던올림픽은 그야말로 ‘완전한 양성평등’ 대회라는 새 역사를 쓰게 된다. 카타르·브루나이는 이미 여자선수의 참가를 결정했고, 파견 불가를 천명했던 사우디아라비아도 최근 조건부로 보낼 수 있음을 시사했다고 한다. 스포츠 양성평등은 자연계의 성선택 역사도 새로 쓰는 셈이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먹고 그만 무화과 잎으로 똑같이 치부를 가려버렸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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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스페인이 우승했다. 골문을 굳게 지킨 카시야스, 중원을 누빈 이니에스타, 이탈리아의 성채를 무너뜨린 득점왕 토레스가 주목을 끌고 있지만 실은 그라운드를 한 번도 밟지 않으면서도 경기 전체를 통솔한 자, 곧 델 보스케 감독이 진정한 우승의 주역이다. 스페인이 이길 수는 있지만 4-0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우승한 것은 역시 감독의 몫이다.

델 보스케 감독은 피를로를 초반부터 극단적으로 밀어붙임으로써 예리한 패스 역습이 발생하지 않도록 했다. 전반전이 시작되자마자 스페인 선수들 예닐곱 명이 중앙선을 넘어 갔다. 그런데 그것은 공격이 아니라 수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피를로는 자기 문전 앞에서 지치고 더딘 공격을 시작해야 했다. 피를로가 중앙선 너머로 침범해 오면 델 보스케 감독은 적진의 후방으로 두세 명을 침투시켜 병참기지에서 피를로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차단시켰다.

경기 내내 이탈리아가 범했던 실수들은 상대의 혈맥을 끊고자 한 델 보스케 감독의 교전수칙 때문이었고 스페인 선수들은 척탄병까지 그 역할을 해냈다. 압도적인 점유율과 ‘제로톱’이라는 희대의 전술, 곧 오직 그들만이 해낼 수 있는 축구를 구사한 스페인은, 비단 결승전만이 아니라 전체 6경기를 복기하건대, 우승할 만한 자격이 충분한 팀이었다.

 

이탈리아 마리오 발로텔리가 유로 2012 준결승에서 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아쉬운 것은 발로텔리다. 그는 이탈리아 팔레르모의 아프리카 가나 출신 이민자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극심한 가난 때문에 세 살 때 이탈리아 가정으로 입양됐고 다섯 살 때 축구를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몸싸움이 뛰어났는지 일곱 살 때는 학교 축구팀 부모들이 그의 출장정지를 요구하는 탄원서를 냈다고도 한다. 17세에 이탈리아 명문 클럽인 인터밀란에 입단했고 곧 대표팀에도 이름을 올리게 된다.

그는 종종 그라운드 바깥의 일로 언론에 이름을 올린다. 빈민가의 교회에 참석해 200파운드를 기부했다거나 카지노에서 딴 돈을 노숙인에게 기부했다는 소문은 점잖은 편이다. 아, 물론 발로텔리는 세계적인 록밴드 오아시스의 멤버인 노엘 갤러거와의 인터뷰에서 이 모든 ‘자선 행위’는 사실이 아니거나 부풀려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기는 해도 인터밀란 소속이면서 지역 라이벌 AC밀란 유니폼을 입고 다니면서 ‘이 팀이 좋다’고 말하거나 집안에서 폭죽놀이를 하다가 불을 낸 일, 여자교도소가 보고 싶다고 난입한 일 등은 모두 사실이다.

그는 경기 중에 발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 후에는 입으로 파문을 낳기도 한다. 경쟁 상대 선수에 대해 한마디 해달라고 하면 “누…구?”라고 되묻고, 명감독으로 불리던 당시 인터밀란의 조제 무리뉴 감독에 대해서는 “나를 이해 못한 것은 무리뉴 혼자뿐. 그게 그의 문제”라고 공격한 적도 있다. 인종차별 사태가 예고된 이번 유로 2012를 앞두고는 “누군가 나에게 바나나를 던지면 그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가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의 스포츠 저널리즘은 종종 선수들로부터 도덕과 계몽의 즙을 짜내려고 한다. 만약 오늘 유명 선수가 책을 냈다고 해보자. 아마 그 책은 도전, 실패, 극복, 승리 같은 진부한 어휘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청소년들의 꿈과 희망을 위해’라는 싱거운 말도 달라붙어 있을 것이다. 그만의 잘못은 아니다. 우리의 스포츠 문화는 이 진부한 도덕의 수사를 수십년 동안 써왔다.

그 정신적 배경은 1970년대부터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규모 국제대회가 있을 때마다 되풀이된 ‘국위선양’이라는 선전 때문이다. 이런 대회가 열릴 때마다 온갖 미디어에서 ‘국위선양’의 훈담이나 ‘도전과 극복’의 미담을 만들어 무한대로 살포한다. 그러다가 무슨 ‘사고’라도 터지면 그 선수는 한순간에 ‘악동’이 되어 생매장당한다. 국위선양과 성공신화의 아이콘은 무결점과 무오류의 신화가 되어야만 하고 조금이라도 흠결이 보이면 한순간에 천사에서 악마로 추락한다.

이런 사태는 위험하다. 선수들이 경기장 바깥에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선행으로 청소년들에게 진정한 인간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을 하지 않는다 해서 비난할 일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선수들은 경기장 안에서, 규칙을 지키되 규칙을 초월하는, 인간이 하는 행위이되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포박당했으면서도 한순간에 그것을 헤치고 유유히 자유의 지평으로 헤엄쳐가는, 그런 비범한 경기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교사이다. ‘아, 나도 저렇게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탄성과 환호란 바로 그 규칙이 은폐하고 있는 보석 같은 인간 유희의 본질을 찾아내는 데서 발생한다. 발로텔리는 그것을 성취했다.

발로텔리 하면 누구나 ‘악동’이란 말을 떠올린다. 그런 표현은 발로텔리는 물론이고 다양하고 오묘한 내면을 가진 인간 그 자체를 설명하는 데 너무나 부족하다. 게다가 진부하다. 언젠가 발로텔리가 ‘사고’라도 치면, 우리의 미디어는 ‘악동, 제 버릇 못 고쳐’라는 식으로 보도할 것이다. 게으른 취재도 문제지만 진부한 사유는 더 문제다. 발로텔리 역시 셰프첸코, 포돌스키, 호날두, 리베리, 멜베리 등 이번 유로 2012를 누빈, 끝없이 바위를 굴리고 또 굴려야 했던 시지포스 중의 한 명이다. 보라, 그 역시 팀이 준우승에 머물자 눈물을 흘리지 않았던가. 틀림없이 그 액체도 짭짜름하고 조금은 뜨거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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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논설위원

 

살 떨리는 상황이다. 9회말 투 아웃 만루. 스코어는 4-3. 타자는 요즘 한창 방망이에 물이 오른 수위타자. 볼 카운트는 2-3. 공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에 투수가 교체된다. 투수는 ‘끝판 대장’이란 별명을 가진 오승환 선수이다. 이런 상황을 가정해보자. 누가 가장 떨릴까. 투수? 타자? 포수? 양팀 감독? 수비하는 야수? 확률상으로는 가장 불리한 사람이 타자일 것 같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야구는 기록의 경기다. 기록이 유난히 많고 중요하다는 뜻이다. 경기 전략에서부터 선수 연봉 책정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준이 되는 것이 기록이다. 그러니까 기록에 정통한 선수·감독보다 상대적으로 무지한 관중의 속이 더 탈 수밖에 없지 않을까.

삼성 마무리 전문 투수인 오승환 선수가 지난 1일 프로야구 통산 최다 세이브 기록(228세이브)을 달성했다. 최연소·최소경기 200세이브, 아시아 한 시즌 최다 세이브 등 세이브 관련 기록을 모조리 갈아치우는 중에 이룩한 또 하나의 신기록이다. 기록을 생명으로 하는 스포츠 종목에서 대기록을 달성한 뒤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다. “단순히 세이브 숫자를 채우는 것보다 블론세이브를 적게 하는 마무리 투수로 팬들의 기억에 남고 싶다”는 것이다.

 

끝판대장 오승환 l 출처:경향DB

블론세이브란 세이브(save)를 날려버린(blown) 것을 말한다.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중간 계투나 마무리로 나온 투수가 실점으로 동점 또는 역전을 허용한 경우다. 그 실점이 자책점이 아니더라도 블론세이브로 기록되며, 나중에 재역전해서 패전을 면하거나 승리투수가 되어도 그 기록은 유지된다. 블론세이브 기록은 미국 메이저리그에서는 1980년대부터, 한국 프로야구에서는 2006년부터 공식적으로 집계하고 있다.

마무리 투수에게 세이브는 명예지만 블론세이브는 불명예다. 그가 명예로운 기록을 세우고 불명예 기록을 강조한 것에서 마무리 투수의 고뇌를 엿볼 수 있다. 세이브에 대한 그의 철학은 야구장 밖의 세상사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명예를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불명예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특히 정치인이 유념할 만한 경구가 아닐까. 이렇게 블론세이브 기록을 중시한다면 ‘돌부처’라는 그도 공 하나로 승부가 갈리는 순간에는 가장 떨 것 같다. 참고로 2006년부터 집계한 그의 블론세이브 기록은 16번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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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균 체육부 기자

 

10여년 전 삼성그룹에 입사했을 때다. 그룹에서는 삼성 관련 서적 여러 권을 신입사원들에게 나눠줬다. 그중에는 ‘삼성 용어사전’이라는 책도 있었다.

가장 강조했던 용어는 이건희 회장이 특별히 신경 쓴다는 ‘뒷다리 잡기’라는 단어였다.

누군가의 혁신적 행동에 대해 쓸데없이 트집을 잡아서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뒷다리 잡기’는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계명’에 가까웠다. 삼성이 신경영 선언을 통해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뒷다리를 잡지 않는’, 혁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영 문화 덕분인지도 모른다.

조지프 슘페터는 ‘기업가 정신’을 주장한 대표적 학자였다. 슘페터가 기업가 정신에서 말한 기업가란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실패의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 미래에 도전하는 창조적 파괴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혁신가’다. ‘뒷다리 잡기’ 금지와 ‘기업가 정신’이 맞닿는 대목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는 19일 임시 이사회를 열고 10구단 창단을 사실상 무산시켰다. 롯데 장병수 사장이 줄곧 주장한 ‘시기상조론’이 받아들여졌다. 선수 수급의 문제점과 프로야구의 질적 가치 하락 우려가 이유로 제기됐다.

 

류대환 홍보지원부장, 10구단 창단은 유보입니다. l 출처:경향DB

고교야구팀 수는 53개지만 1학년 신입부원의 수는 해마다 늘고 있다. 리틀 야구의 규모는 팽창일로다. 동아대 전용배 교수는 “NC의 창단으로 경남지역 학교 야구부의 수가 빠르게 늘고 있다. 창단이 우선”이라고 말했다.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만으로 변화를 거부하는 것은 삼성이 그토록 경계했던 ‘뒷다리 잡기’를 닮았다. 삼성과 한화는 지난 이사회까지 10구단 창단에 반대 뜻을 롯데와 함께했다. 이날 임시 이사회를 앞두고 반대 구단들의 설득에 몇몇 구단이 돌아선 것으로 알려졌다. KBO가 과감하게 10구단 창단 승인 여부를 표결에 부치지 못한 것은 ‘달라진 기류’ 때문이었다.

프로야구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고 있다. 관중수가 급증했고, 지자체 2곳이 기업을 선정한 채 프로야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구단 대표들은 변화를 거부했다.

재벌들은 한국 경제를 이끈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기업가 정신이 실종’된 채 ‘뒷다리를 잡는’ 재벌 계열사 사장들의 선택은 한국 경제의 암울한 미래를 미리 보여주는 징후일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원래 재벌들은 ‘독점 구조’를 무엇보다 좋아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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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2010년 5월4일 고려대생 김연아가 뉴욕 한복판의 레드카펫에 섰다. 당시 김연아는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부문 2위에 선정돼 맨해튼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그야말로 파워풀한 사람들’과 함께했다. 김연아는 이에 앞서 4월 고려대를 찾았다. ‘등교’가 아닌 ‘방문길’에 총장을 만나, 면담이 아닌 환담을 나누고, 학장의 직접 안내로 강의실에 들어갔다가 딱 10분 만에 떠났다.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김연아가 그날 학교에 언제쯤 나타날지 같은 과 학생도, 교수도 대부분 몰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졸업에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연아는 그 당시 한 TV 토크쇼에 나와 전년도에 F학점이 있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어이가 없다. 작년에는 과제물 같은 걸(?)로 학점을 땄다”고 말했다. 학점을 위해 제출한 과제물 같은 것(?)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대학에 있는 나는 당혹스러웠다.

악화일로에 있던 ‘국민 피겨 스타’ 김연아와 연세대 황상민 교수의 다툼이 한 고비를 넘겼다. 지난 1일 황 교수의 “교생실습은 쇼”라는 발언으로 촉발된 갈등은 김연아 쪽의 명예훼손 소송으로 비화했지만 김연아 측이 최근 소송을 취하할 뜻을 밝히며 이번 사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명예 훼손, 공인의 사생활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논쟁은 냉정한 눈으로 눈여겨볼 만하다.

법은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라 규정하고 있다. 단순히 틀린 사실을 얘기했다고 해서 명예훼손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서울 역삼동 진선여자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김연아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판례를 보더라도 중요한 내용이 사실이면 세부적인 데서 틀려도 허위는 아닌 경우가 많다. 명예훼손은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른, 그래서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려운, 다소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더군다나 만에 하나 황상민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 더더욱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게 된다. “true statement are not libelous라는 판결문에 보듯이 사실 적시는 명예 훼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 보편의 진리다.

그러나 법 논리에 앞서 스타 김연아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의 눈부신 성공 뒤에는 밤잠을 설쳐 가며 성원과 지지를 보낸 황상민 교수를 포함한 전체 한국민들의 공도 얼마간 있다는 것을. 덧붙여 유명한 공인 김연아가 가지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공인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광고 모델로, 가난한 한국인들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뭉칫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스타덤에 올라 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을 팬으로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자칫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식인이란 자기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사안에도 간섭하는, 아니 간섭해야 하는 사람이다.’ 장 폴 샤르트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황상민 교수의 김연아 관련 발언은 나무랄 일이 못된다. 표현에 있어 다소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지만 그는 해야 할 말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김연아가 좀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이른바 셀러브리티 오블리주(유명 인사의 도덕적 책무)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순진한 한국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여 이번 사건은 황상민 교수의 발언 그 자체보다는 그동안 강의를 얼마나 충실하게 들었는지, 시험은 제대로 치렀는지 등등 해당 대학이 솔직하게 답하는 것이 논쟁의 본말이다. 실체적 진실 규명은 어디 가고 객들이 공허한 힘겨루기에 매달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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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틀림없이 김연아는 불쾌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교생 실습에 나섰을 텐데 저명한 심리학자가 보여주기 위한 쇼라고 비판했으니, 상처 입었을 것이다. 사실 ‘쇼’를 하려고 해도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 많은 게 학교 현장이다. 교사들도 수십 명이고 학생들은 수백 명이다. 몇 번 얼굴만 비치고 만다면 금세 실망스럽다는 글이 봄날의 벚꽃처럼 인터넷에 흩날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얼굴만 잠깐 비치고 광고 찍으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란이 된 황상민 교수의 발언을 보니, 이 사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황 교수가 단정적으로 말한 측면이 있다. 김연아로서는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명예훼손인가 하면 생각해볼 여지가 없지 않고 고소까지 할 일인가 하면 글쎄,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 이유를 적어본다.

 

서울 역삼동 진선여자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김연아가 '피겨 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우선 법정에서 이긴다 해도 실익이 크지 않다. 여론은 전체적으로 황 교수의 사실 판단 착오와 표현의 과잉을 비판하고 있다. 황 교수도 비록 자기 방어적 측면이 강하지만, 사과의 뜻을 밝혔다.

만일 법정으로 갈 경우, 황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김연아가 교생 실습에 나설 만큼 대학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수했는지를 되물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전지훈련이나 대회 참가로 해외에 머물러야 했던 김연아로서는 학교 측의 ‘여유 있는’ 규정 해석이나 배려에 따른 ‘비출석 과제물 대체 이수’ 등을 밝혀야 하는데, 이 경우 잃는 것이 더 크다. 사실에서 이긴다 해도 특혜 논란에 또 휘말릴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스포츠교육의 불균형성이다. 황 교수의 발언 취지도 사실 이 대목이다. 이번 기회에 김연아와 주변 관계자는 물론 교과부, 문화부, 대한체육회 등은 제도적으로 ‘공부하기 어려운 학생 선수’ 상황을 심각하게 성찰해야 한다.

체육 특기자 제도는, 공부할 마음이 전혀 없는 학생은 물론이려니와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도 전혀 그것을 실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특기자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중·고교 학생 선수들은 대체로 교실 구경도 못한 채 경기장에서 귀한 10대 시절을 보낸다. 그중 열에 아홉은 낙오하고 한두 명이 통과하게 되는데, 그들은 학생이라기보다는 대학의 홍보대사처럼 생활한다. 이래저래 관문을 통과한 쪽이나 그렇지 못한 쪽이나 공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생의 절반을 보내게 된다. 이게 정상인가, 김연아와 더불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의 당사자였고 입학하자마자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그 대학 총장이 ‘고대 정신을 팍팍 주입한 결과’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언까지 했던, 김연아라면 이 같은 불균형성을 들어서 잘 알고 겪어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황 교수의 비판이 매우 불쾌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맥락이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할 기회, 친교할 기회, 인성을 쌓을 기회를 제도적으로 박탈해버리는 현 스포츠교육을 비판하려는 것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김연아라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는 없지만, 이번 논란이 미래의 김연아를 꿈꾸는 수많은 중·고교 유망주가 공부도 하면서 실력을 쌓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위선양 신드롬’에서 다 함께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김연아는 천부적인 재능과 고결한 노력으로 값진 성취를 이룬 인물이다. 앞으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정점으로 하여 스타 중의 스타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22살의 청년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나이다. 실수와 오판과 격정이 허락되는 나이다. 22살은 무엇인가를 베풀고 이끌어가는 나이라기보다는 이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욕망, 의견을 두루 접하며 더 성장해야 할 때이다.

김연아는 일반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굵직한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사회의 평균적인 젊은이가 겪고 배운 소중한 것을 결핍한 경우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혹시 이 사회가 김연아를 ‘국위선양의 젊은 리더’ 같은 일종의 허위의식으로만 대할 경우 그 끝은 자칫 일그러진 영웅이 추락하는 벼랑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무오류 무결점’으로 이미지화하려는 주변의 유혹에 대해 김연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갖고자 했던 문대성의 경우가 반면교사다.

나는 김연아가 이렇게 말하기를 기대한다. ‘황 교수의 발언은 사실과 명백히 달라서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스포츠교육의 기형성을 비판하려는 취지를 이해하여 고소를 취하한다.’ 이것으로 김연아는 법정까지 가지 않고서도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만 덧붙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스포츠교육은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 여러 교수님이나 지도자들과 함께 학생 선수들이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한지 찾아보도록 하겠다.’ 이럴 때 김연아는 그 무슨 낯간지러운 ‘한국을 빛낸 스타’ 정도의 저렴한 이미지가 아니라 진실로 스포츠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후배들을 보듬어주는, 진짜 스타가 될 것이다. 그런 스타로서, 그러니까 서푼어치 판타지 스타가 아니라 진정한 역할 모델의 구현자로서 2018평창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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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그냥 뚫고 지나가는 것 그게 제일 현실적인 해결책입니다. 지나간 뒤에야 저는 애당초 그런 벽이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그러니 멈추지 마세요. 계속 달리세요.”

소설가 김연수의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쯤, EBS 교육방송 <지식채널>의 객원작가로 참여한 김연수는 이렇게 마라톤을 예찬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매우 함축적으로 자기 생각을 말해야 했던 까닭에 예찬의 도입부는 싱거운 편이었다. “1000m를 달려보세요. 이제 그렇게 41번만 더 달리면 됩니다.” 이렇게 시작한 그의 예찬은 “한 번에 하나씩, 작은 목표를 이뤄가다 보면 언젠가 큰 꿈도 이룰 수 있습니다”로 이어지는데 이런 정도의 권유가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의 목소리라면, 조금 한가로운 것 아닌가 그런 느낌이었다.

 

‘핑크리본 사랑마라톤’ 참가자들 l 출처:경향DB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김연수는 방향을 튼다. “앗, 그런데 뭔가 빠뜨렸군요” 하면서 그는 “현실 앞에서 우리 꿈은 보잘 것” 없다는 비극적 인식 아래 다시 마라톤을 이야기한다. 싱거운 권유가 조금은 애틋한 아포리즘으로 바뀐다. 1000m를 한 35번쯤 달렸을 때, 그러니까 35㎞ 지점에 이르면 누구나 견디기 어려운 장벽을 만나게 되는데 그것은 “온 우주가 저 하나 완주하는 걸 막기 위해서 밀어대는 느낌”이다. 그리하여 포기, 몇 달 동안의 준비, 다시 달리기. 그래서 김연수는 다시 그 벽을 만나게 되고 “벽을 만나면 뚫고 지나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 벽을 지나가고 나면 애당초 그런 벽이란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조지 쉬언의 마라톤 예찬론인 <달리기와 존재하기>를 번역하기도 한 김연수다.

내 경우로 말하자면, 어쩌면 평발일지도 몰라 그래서 나는 오래 걷기도 어렵고 뛰기는 더 괴롭지 하면서 오랫동안 뛰는 일 대신에 맹렬히 공을 차고 열심히 자전거를 탄다. 그 바람에 김연수가 말한 35㎞의 벽을 직접 실감해 본 일이 없다. 다만 축구 후반전 30분쯤, 혹은 한계령이나 죽령의 정상을 자전거로 마침내 기어오르던 기억을 되살리며 아마도 다리가 저 스스로 비틀거리고 심장이 잔뜩 부풀어오른 풍선처럼 터질 것만 같은, 그런 일이 아닐까 짐작은 한다.

일본의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가 곧잘 언급된다. 한때 그는 마라톤을 20회 이상 완주한 작가로 통했다. 그러다가 2009년도쯤에는 25회 완주 작가로 소개되었고 요즘은 30회 이상 완주했다고 나온다. 미리 써놓은 묘비명처럼 진짜로 그는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마라톤은 황영조, 이봉주 같은 선수들을 포함하여 소수의 마니아가 즐기던 스포츠였다. 그러던 것이 한국마라톤협회에 따르면 2010년 한 해에만 약 513개 대회가 개최되고 대략 330만명의 동호인이 활동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특히 1997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그 수가 중장년층 중심으로 크게 늘었다.

이에 대해 스포츠사회학자 김영갑은 “극기와 자기 통제의 수단으로써 마라톤은 상처 입은 중산층의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구”라고 분석한 바 있다. 소설가 김연수도 2003년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인내하며 결승점까지 들어가고 말겠다는 다짐에서 비롯”된 현상이라고 쓴 적이 있다. 사회학자 정준영은 적어도 미국에서 마라톤은 중산층 남성의 “세련된 자기과시 수단”이라고 분석했다. 고급 자동차는 물질적인 과시에 지나지 않지만 마라톤은 시간의 여유와 정신적 여유, 그리고 균형 잡힌 몸매로 성공한 중산층 정서를 과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우리 사회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확실히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과 허약한 기반을 일거에 드러내고 또한 그것마저 무너뜨린 공포였다. 그 이후 우리 사회는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대로 “일생 전체가 끝내 물리치지 못할 공포와의 길고도 헛된 싸움”이 되었고 그리하여 우리의 인생이란 “끝없는 수색정찰”이 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사회의 집단주의 신화는 깨졌다. 조직은 더 이상 개인을 보호하지 않는다. 개인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가족까지 위험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두드러지는 사회 현상은 억압이나 배제가 없는 문화에 몰입하는 것이다. 갑자기 와인 열풍이 부는가 하면 걸그룹을 좋아하는 삼촌팬도 양지로 나왔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일도 아니고 심드렁해지면 그만두면 그뿐이다.

자전거, 요가, 마라톤 등 자기 통제에 따른 강렬한 몰입이 가능한 레저 문화가 급증하는 것은 그 자체로 애틋한 현상이면서 동시에 우리 사회의 긴박한 생존 상황을 역설한다. 이 과도한 문화적 몰입은 얼핏 폐쇄적인 자기애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는 사회적 억압에 저항하는 정서적 힘이 되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달린다. 스스로 내켜서 하는 일이다. 달리다가 힘들면 멈추면 된다. 멈췄다고 해서 사회적 낙오나 실패는 결코 아니다. 하루키는 서른세 살 때 갑자기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단박에 출세작을 쓴 후 그것을 평생 동안 하기 위해 담배를 끊고 마라톤에 나섰다. 김연수도 잘 준비된 글감이 빛나는 소설로 빚어지듯이 잘 준비된 과정이 아름다운 완주로 이어진다고 썼다. 아무튼 달리는 것에 대해 이렇게 훈수를 두는 것보다 직접 달리는 것이 훨씬 아름다운 일이다. 달리기에 더없이 좋다는 5월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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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성 | 미국변호사

지난 13일 수원 살인사건 당시 112신고센터 녹취록이 공개돼 큰 파장이 일었다. 거듭된 사건 축소와 은폐 의혹이 불거지면서 경찰의 위치추적권에 대한 논란이 커졌다. ‘위치정보의 보호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위치정보법)’은 112신고센터가 휴대폰 사용자의 동의를 받아야만 위치추적을 허용한다. 이에 사전동의 없이 긴급구조 시 경찰의 위치추적을 허용하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

유럽연합(EU)은 범연합적인 112 긴급번호제도를 채택한다. 27개 회원국 어디서나 동일번호로 긴급구조 요청이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회원국별 고유 긴급번호제도는 112와 병행된다. 유럽연합의 관련지침은 회원국이 발신자번호 및 위치정보에 대한 프라이버시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한다. 별도의 사전동의는 필요하지 않다. 동의한 후라도 언제든지 전화연결 및 전송단위별로 손쉽게 취소할 수 있다. 112 긴급전화의 경우, 통신사업자는 이용자가 임시적으로 거절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위치추적을 할 수 있다.

 

휘경동 위치추적 중앙관제센터에서 성범죄 위치추적시스템에 관해 설명하고 있다. I 출처:경향DB

미국의 긴급번호제도는 긴급상황(911)과 비긴급상황(311)으로 구분된다. 업무량을 분산시킴으로써, 911콜센터(PSAP)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미국 통신법은 통신사업자의 개인정보에 대한 보호의무를 강조한다. 911 긴급전화서비스를 모든 이용자가 언제 어디서나 제공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보편적 역무로 간주한다. 긴급상황 시 통신사업자가 위치정보의 이용, 공개, 또는 접근을 허용한다. 관련 위치정보는 911콜센터, 긴급 디스패처(dispatcher:배치담당자) 서비스사업자, 소방서, 수사당국, 병원 응급실 등에 제공된다.

경찰 112신고센터의 자동위치추적권을 허용하려면 법률개정이 필요하다. 첫째, 위치정보법 제15조 ‘긴급구조지원기관’의 긴급구조도 사전동의 없이 위치추적을 허용하도록 명시해야 한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 시행령은 경찰청, 방송통신위원회 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둘째, 적용범위를 112, 119 긴급전화 응답으로 한정해서 위치정보의 유출, 오용 및 남용을 막아야 한다. 셋째, 제29조의 긴급전화 발신자 자격조건을 없애고, 긴급전화 응답즉시, 위치정보사업자가 위치정보를 신속하게 제공하도록 명시해야 한다. 112신고센터의 자동위치추적과 더불어 민간전문가인 디스패처의 콜센터 배치 및 출동지휘권 부여를 고려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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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영 교통안전공단 이사장

얼마 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지하철 내 흡연 여성 논란’을 보며 마음이 무거웠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문화가 우리 사회 전반에 퍼져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교통문화 역시 양보와 배려에 인색하기는 마찬가지다. 주행 신호로 바뀐 후 조금만 지체해도 어김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경적소리에 놀란 경험은 운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방향지시등을 켜는 순간부터 차선을 변경하려는 자와 자신의 차선에서 먼저 앞으로 진행하려는 자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시작된다. 교통안전공단이 ‘교통약자 배려 문화운동’을 범시민 생활실천 운동으로 추진하는 이유다.

 

서울 장안사거리에서 한 엄마가 아이를 데리고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I 출처:경향DB

교통약자란 운전자 중에서도 어르신, 임산부, 장애인, 초보운전자를 비롯해 유아를 동반한 운전자를 말한다. 교통약자를 배려하는 운전은 어려울 게 없다. 첫째, 차선 변경에 어려움을 겪는 차량이나 저속운행으로 뒤 차량의 통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차량에 양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둘째, 장애인 탑승 차량이나 영·유아 탑승 차량 등 승·하차 시 시간이 좀 더 필요한 차량에 대해 여유롭게 기다려주는 것이다. 특히 스쿨버스 및 어린이 탑승 차량 주변에서 과속 및 앞지르기를 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 모든 도로에서 보행자를 우선시하고, 고령자나 임산부 등 보행에 어려움을 겪는 교통약자에게는 신호가 바뀌더라도 안전하게 횡단보도를 건널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제공해주면 된다.


이러한 교통약자 배려 문화운동은 교통사고 감소 효과로 나타날 것이다. 모든 운전자가 약자 배려 문화운동을 실천하면 연간 최대 128명의 교통사고 사망자 감소가 기대된다. 또한 국민의 교통안전 의식 및 교통문화 수준을 나타내는 국가 교통문화지수도 10% 이상 향상될 것으로 예측된다.

한국의 교통사고 피해는 2010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의 약 1.1%인 13조원에 달하고 있으며 교통안전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2개국 중 30위에 머물고 있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를 자랑하고 있지만 교통안전 수준은 꼴찌나 다름없다. 교통안전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국가정책이나 교통 환경, 그리고 기술 개발 등 여러 요인들에 대한 종합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통안전 의식의 변화 없이는 어떠한 정책이나 기술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도로 위에서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할 줄 아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것이 교통안전 수준을 높이기 위한 우선 과제인 것이다.

상대방을 배려한다는 것은 내가 배려받아야 하는 소중한 인격체임을 드러내는 일이다. 나로부터 시작된 배려는 상대방의 배려를 낳고 나아가 사회 전체의 문화로 확산될 수 있다. 상대방을 존중해 결국 내가 존중받는 양보와 배려의 문화가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로 자리 잡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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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스포츠칼럼니스트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선뜻 지지하기 어려운 정당 소속이지만, 낯빛 번지르르한 그 당의 지역 유지들보다는 한국 스포츠의 상징이 되는 늠름한 청년이 국회로 진출한다면 조금이라도 젊고 싱싱한 의정 풍경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 탓이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에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이며 현 동아대 태권도학과 교수라는 ‘스펙’이라면 한국 스포츠 위상에 걸맞은 인물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그런데 표절 시비가 일었다. 살펴보니,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시비나 논란이 아니라 거의 ‘사실 확인’만 남은 처절한 논문이었다. 일각에서는 직접 베껴 쓰는 ‘노력’도 하지 않은 대필이라고도 주장한다. 그 ‘사실 확인’의 책임이 있는 국민대학교는 ‘복사 학위 논문’일 가능성이 짙어 연구윤리위원회를 열어 엄격하게 논문을 점검한다고 하는데, 족히 두세 달은 걸린다고 한다.

문대성 후보의 당락 여부와 무관하게 이번 사태를 계기로 살펴볼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문대성 후보의 ‘복사 학위 논문’은 ‘체육 분야 인사들의 학문적 능력’에 대한 일반인의 편견을 더욱 증폭시키는 꼴이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식사회 일각에서는 엘리트 선수 출신의 학위 논문에 대해 의심스러워 하는 눈치가 없지 않았다. 굳이 대학원 과정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중·고교 과정이나 대학 과정을 정상적으로 이수했느냐는 시선에 대해 자신있게 항변할 수 있는 체육계 인사는 없을 것이다.

 

문대성 새누리당 후보의 선거사무소 입구에 누군가 붙여 놓은 패러디물 ㅣ 출처:경향DB

2010년 가을, 당시 고려대 재학 중인 피겨의 김연아 선수가 출석은 물론 리포트 제출도 불성실하게 하여 담당 교수의 지적을 받았을 때 체육계의 일반적인 여론이 ‘월드클래스 선수가 국제 대회 출전이나 연습 대신 강의실에 들어가야 하느냐’는 쪽으로 흘렀던 일이 있다. 국제대회 준비라는 현실을 감안하여 리포트 제출 같은 별도의 프로그램을 활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쨌거나 ‘정상적인 수업’에 참여했다고는 볼 수 없다. 게다가 스타 선수들은 ‘학교 홍보’ 차원에서 스카우트 작전까지 벌여가며 입학시키게 되는데, 그런 후에 수업을 제대로 이수하라고 재촉할 대학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 까닭에 스타 출신 선수들이 언제 공부를 하며 또 체계적인 공부를 해나갈 소양이라도 닦을 수 있었겠느냐 하는 편견 아닌 편견이 발생하게 된다.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악물고 학문의 길을 걷는 적지 않은 선수들이 존재한다. 선수 출신 학자들은 강의실의 교재로는 도저히 체득하기 어려운 오랜 선수 경험을 살려 체육이라는 학문의 심화에 기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이제 문대성 후보의 표절 논란으로 인하여 묵묵히, 힘겹게, 익숙지 않은 학문 언어에 매진하고 있는 적지 않은 선수 출신 학자들이 오해와 편견에 시달리게 되었다.

달리 생각해보면, 문대성처럼 세계 최고 수준의 성취를 이룬 선수가 강단에 서기 위하여 박사 학위를 제출해야 하는 것도 문제로 남는다. 물론 현장 경험만 있다고 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을 너끈히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인 학과 연구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오랜 훈련 과정과 세계 최고 자리에 도달하는 과정의 자기 치유 과정 그리고 그 성과를 통해 획득한 국내외 안팎의 네트워크 등은 어떤 점에서 틀에 박힌 학위 논문보다 더 값진 것이다. 이러한 현장 가치를 존중하지 못하는 진부한 아카데미즘 구조에 의하여 표절이나 대필의 유혹이 발생한다.

물론 모든 선수 출신이 이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표절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문대성은 자신에 의하여 비난 받을 수도 있는, 힘겹게 공부하고 있는 선수 출신 학자들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해야 한다. 이것은 당락과 무관한, 양심과 윤리의 문제다.

문대성은 부산의 한 지역구에 출마한 후보이지만 동시에 체육계를 대표하는 정치인이기도 하다. 만약 그가 당선될 경우 거의 유일한 선수 출신 국회의원이 되는데, 표절 논란 이후 그가 보여준 태도로 보건대, 과연 권위적인 엘리트 체육 중심의 현행 구조를 개혁할 만한 소신과 역량을 갖춘 것인지 의심스럽다.

‘국위선양’ 일변도의 국가주의 체육 정책이 얼마나 파행적인지, 소수정예의 엘리트 스포츠가 어떻게 선수와 지도자와 학부모를 괴롭히는 구조인지, 전국체전이나 특기생 제도나 각급 대표 선발제도가 어떻게 한국 스포츠의 풍성한 발전을 저해하는지 등 수많은 난제가 얽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작은 방법으로 ‘공부하는 학생 선수’를 위한 체육진흥법 개정의 시도가 있었으나 국가주의와 엘리트 위주로 일관해온 체육계의 저항 때문에 좌초된 적이 있다.

나는, 여야를 막론하고, 정말 이번에는 단지 육체적으로만 젊고 참신한 게 아니라 진실로 한국 스포츠의 고질과 구습을 개혁할 만한 인사의 원내 진출을 바랐고, 그 주역으로 문대성을 주목했다. 나는, 그가 화려한 이력과 위상을 앞세워 스포츠계의 거물로 성장하려는 야심가가 아니길 바랐다. 그런데 표절 논란이 일었고 그에 대응하는 태도는 실망스러웠다. 그는 ‘스포츠 정신’이라는 말로 자신을 변명함으로써 어려운 여건에서도 묵묵히 정도를 걸으며 훈련하고 공부해온 학자들의 ‘스포츠 정신’을 침해했다. 풍부한 현장 경험과 근면한 학문 성과를 바탕으로 정·재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한국 스포츠를 독립적으로 개혁하고 발전시킬 인재를 갖기가 이토록 어려운가. 안타까운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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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히딩크 효과’라고 했던가? 벌써 10년 전의 일이다. 그때 ‘2002 월드컵 4강 신화’가 있었고 그 신화를 작성한 네덜란드의 히딩크는 감독과 진부한 관성과 낡은 사회 관습에 의미있는 파열음을 낸 주인공으로 기록된 바 있다. 히딩크는 한국 사회의 오랜 서열문화를 잘 몰랐고, 단지 잘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을 중요하게 여길 이유를 찾지 못했고, 그래서 축구장 안팎에서 우선 그것을 없애는 데 노력했다. 군대식 상하관계를 유연하게 흔들었고 적재를 적소에 배치했으며 특정 개인의 재능보다는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도록 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존심 강한 리더’였다. 원래 그러한 성향이지만 때때로 그는 의도적으로 언론이나 축구계 일부 인사들이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대표팀)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는 자신의 팀이 존중받을 만한 팀이라는 것을 항상 강조했고 그 덕에 그의 팀의 일원이 된 선수들의 정신적 키는 한 뼘쯤 더 자랐다. 몇 가지 변수까지 합해져서, 그 결과가 ‘4강 신화’로 나타났다.

그 후 10년 세월이 지났다. 축구계는 물론 여러 기업이나 기관, 학교 등지에서 히딩크를 직접 초빙하거나 그와 관련한 주제로 크고 작은 강연이 숱하고 열렸는데, 10년이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아니 적어도 한국 축구계는 그 ‘효과’를 어떻게 활용해 변화했는가?

글쎄, 질문을 던지자마자 마땅한 답이 없어 가슴이 무거워진다. 물론 축구장 안에서 벌어진, 매우 특수한 조건에서, 소수의 인원이 일치된 목표를 갖고 치른 과정을 놓고, 그 결과가 찬란하다고 해서 우리 사회의 병리를 진단하고 그 처방까지 구하는, 그 무슨 ‘효과’라고 하는 것이 조금은 호들갑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사회 전체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축구계만이라도 ‘히딩크 효과’의 어떤 요소들이 건강하게 작동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나는 갖고 있다.

그 생생한 사례가 전격적인 조광래 감독 경질이다. 경질 이후 대한축구협회는 ‘한국 축구를 잘 아는 감독’이라는 기준만 제시했을 뿐, 어떤 합리적인 대안이나 장기적인 전망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조광래 감독 | 연합뉴스 | 경향신문 DB

나는 축구협회가 조광래 감독의 임기를 마지막까지 보장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에 대한 호불호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기본적으로 그가 추구하는 ‘기술 축구’가 일정한 성과를 나타냈으며 대표팀의 구성원을 20대 초반의 실력파로 재구성한 것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그의 ‘기술 축구’가 좀 더 확실하게 실현되었더라면 대표팀뿐만 아니라 유소년 축구의 체질까지 개선하는 미래지향적인 길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비로소 한국인 지도자에 의해 우격다짐의 특색 없는 축구에서 세련되고 정교한 기술 축구의 지평이 열릴 것이라고 나는 기대했다. 만약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그의 축구가 일정한 성취를 낸다면 이른바 ‘조광래 효과’가 형성되어 상명하복의 서열주의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의 오래된 동맥경화증을 개선하는 데도 일정한 기여를 하리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제 그것은 다 무망한 일이 되었다. 이제 뒤집혀진 ‘조광래 효과’만 남았다. 역시 우리 사회는 시스템이 아니라 한두 명의 ‘오너’에 의해 매우 중요한 결정이 손쉽게 이뤄진다는 비극적인 인식만이 남았다. 수많은 의견이 제출되어 건강한 논쟁 속에서 바람직한 전망이 도출되는, 그런 사회란 역시 무망한 일이라는 것을 오히려 강하게 확인시켜준 꼴이 되었다. 기술위원회라는 합법적이며 합리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부회장단’이라는 임의적인 모임이 대표팀 감독 경질을 결정하는 현황은 우리 사회의 정계나 재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낡은 관성이다. 조광래 감독 전격 경질은 오직 그와 같은 적폐가 여전히 막강한 관습으로 남아 있음을 뼈저리게 확인시켜 주었다. 

그렇기는 해도 이미 현실은 바뀌었고, 김훈의 표현대로, 축구계는 다시 ‘당면한 문제를 당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아직 새 감독은 결정되지 않았고 숱한 사람들 이름만 오르내린다. 스벤 고란 에릭손이나 압신 고트비 같은 외국인 감독부터 국내의 김호곤, 최강희, 홍명보 등이 거론된다.

이제라도 기술위원회가 제 역할을 해야 한다. 한국 축구의 기본적인 유전자는 무엇인지, 세계 축구의 흐름은 어떠한지, 현재 대표팀에 참여 가능한 선수들의 구성요소는 어떠한지 충분히 살펴야 한다. 이 큰 흐름 속에서 차기 감독의 가닥이 잡혀야 한다. 그래서 언젠가 또 바뀌게 되더라도 한국 축구의 스타일과 골격과 시스템은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히딩크 효과’의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특정 개인에 따라 팀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 말이다. 그것을 10년 넘게 유보했으므로 어쩌면 차기 감독도 연봉이나 계약기간이 맞는 사람을 데려오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운 좋게도 그 감독이 쿠웨이트전을 승리로 장식해 최종예선에 진출할 수도 있다. 나는 우선 급한 상황이므로 진실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그것이 한국 축구의 발전을 기약할지는 의문이다. 합리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한두 명의 전횡으로 조직이 굴러가면 언제나 이렇게 임기응변의 미봉책을 구하게 된다. 이 뒤집힌 ‘조광래 효과’를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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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성경 말씀에 “네 눈 속의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고 했거늘, 최근 한국 축구가 직면한 현실이 그와 같다. 아시아축구연맹(AFC)은 지난 25일 회원국별 2012년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을 발표했다. 한국 출전권은 3.5장으로 결정됐다. 이로써 정규리그 최종 순위 1, 2위팀과 FA컵 우승팀이 ACL로 직행하고 정규리그 3위팀은 플레이오프전에 나가게 된다. 포항스틸러스가 그 쓴잔을 마시게 되었다.

이를 두고 중동 축구의 마법에 걸려들었다는 비판이 먼저 나왔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현재 아시아 축구의 권력은 중동(특히 카타르)으로 쏠려 있다. 이번에 카타르는 기존 2장이었던 출전권을 4장으로 확대하는 성과를 올렸다. 확실히 2022년 월드컵 개최지 선정 이후 중동의 오일머니가 아시아 축구계를 장악해가고 있다.

중동 축구계의 영향력은 지난달의 챔피언스리그 4강 1차전에 대한 징계조치에서 확인된 바 있다. 수원 삼성과 알사드(카타르) 간 난투극이 벌어졌는데, AFC는 알사드의 골키퍼 코치 1명만 6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내린데 반해 수원의 고종수 코치와 스테보는 6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받았다. 외교력의 부재 얘기가 이때부터 나왔다.

그렇기는 해도, 이 모든 조치를 정몽준 전 회장의 일선 후퇴와 중동 오일머니의 영향력 강화만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부분적인 조치들의 주도적인 타결에 있어 이런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승부조작이라는 확연한 사실에 기반한 ACL 출전권 0.5장의 감소는, 확실히 우리 축구계의 들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중요한 것은 ACL 출전권이 0.5장 줄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 근본원인이 된 승부조작 및 그밖의 허약한 체질 구조가 재확인되었다는 점이다.

대전 황진산이 팬들에게 승부조작을 사과하는 플래카드를 펼쳐보이고 있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 먼저 승부조작 파문. 총 57명이 프로축구연맹에 의해 영구히 이 나라의 그라운드를 밟을 수 없게 됐다. 이수철 전 상주 상무 감독을 포함해 선수와 지도자 등 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프로축구 30년 역사 중 최악의 사태다.
그리하여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무슨 대책이 있었는가. 57명의 축구화를 영원히 벗겨버리는 것으로 구조적 적폐는 해결되었는가. 나는 오랫동안 이 사태에 대한 내실 있는 조치와 지극히 인간적인 해결 방식을 기다려 왔으나 아직 들은 바가 없다.

최근 이영표 선수의 “K리그가 부끄럽다”는 발언도 중요하다. 지난 17일, 이영표는 트위터에 “선수가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적 당하는 리그. 오늘은 K리그가 부끄럽습니다”라고 썼는데, 경남FC에서 성남으로 강제적으로 이적하게 된 윤빛가람 선수에 대한 글이었다.
윤빛가람은, 경남이 이적료 20억원과 조재철 선수를 받는 조건으로 자신을 성남으로 맞트레이드했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알았다. 이 점을 나는 걱정한다. 스코틀랜드의 명문 글래스고 레인저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던 윤빛가람은 경남의 선택에 따라 해외 진출의 꿈을 미루게 되었다. 경남에도 사정이 있을 것이다. 레인저스가 제시한 이적료는 경남의 현실을 보완하는 데 부족했다. 선수를 자원으로 삼는 스포츠 비즈니스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걱정하는 것은, 당사자가 언론을 통해 최종 결과를 알게 되는 방식이다. 이것은 인간적인 해결 방법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내년에 단 1회만 한시적으로 시도하는 스플릿 시스템을 보자. 정규리그 상위 8개팀과 하위 8개팀으로 나눠 2라운드를 더 실시해 상위리그에서 우승팀을, 하위리그에서 2부리그 강등팀을 정하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내년에는 우승보다는 우선 8위부터 해야 한다. 이는 AFC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2013년부터 무조건 ‘승강제’를 실시해야 되기 때문이다.
사실 ‘K리그’라는 이름에 걸맞게 실질적인 승강제를 벌써 했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스플릿 시스템도 오래전에 실험했어야 한다. 2013년 승강제 실시에 억지로 맞추다 보니 단 한 번만 실시하는 리그 운영이 발생하게 되는, 다시 말해, 늘 원칙을 유보하다 보니 차후의 일이 대체로 즉흥의 ‘임기응변’이 되는 ‘K리그 잔혹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다.
올 시즌 성적으로 보면 6강 플레이오프에 모조리 기업 구단이 진출했으니 여기서 우승팀이 나올 것이고 시민구단이나 도민구단은 강등될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올해 대전 시티즌의 팀 운영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났듯이, 축구팀을 지자체장의 홍보팀 정도로 여기는 구단이라면 예산을 삭감하거나 아예 해체하는 결과도 나올 수 있다.

승부조작 파문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 정규리그에 총 271만1369명이 경기장을 찾아 지난해보다 3.3% 늘어났다. 팀 전체가 승부조작 파문에 휘말렸던 대전 시티즌의 평균 관중도 66%나 늘었다. 여전히 팬들은 찬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이 사랑하는 선수들의 이름을 부르며 스탠드 위에서 뛰고 있다. 그 열기 덕에 그나마 ACL 출전권 3.5장이 지켜졌다고, 나는 생각한다. 축구계의 자생능력이나 자정능력만으로 본다면, 3.5장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이 칼럼을 마무리할 즈음에 프로축구연맹의 새 소식이 들려왔다. 평일 저녁에 치러지는 챔피언결정전의 시작시간을 방송사의 요청으로 오후 6시로 당겼고 그로 인해 무료 입장 서비스를 한다고. 챔피언결정전 시간조차 지키지 못하고 무료 입장이라는 변칙에 임기응변이니, 애석하다. 돈 내고 볼 만한 경기도 못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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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동계올림픽으로 인한 경제효과가 65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누구 표현대로 이는 ‘거의 사기’다. ‘구라가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 자료를 나에게 주면 세 시간이면 100조원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어느 경제학자가 그랬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거짓말을 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경제효과가 450조원이라는 ‘창조적 연구’도 있지 않았던가. ‘경제효과’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요, 상상력의 공간인 것이다.

올림픽을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평상시라면 절대 짓지 않을 불필요한 시설을 단 보름간의 행사를 위해 짓는다. 신나게 환경을 파괴하며 많이도 짓는다. 누가? 재벌 건설사가. 누구 돈으로? 우리 세금으로. 이게 ‘경제효과’의 실체다. 그러니까 ‘올림픽 경제효과’란 건설사엔 버는 돈이지만 우리에겐 써야 할 돈인 것이다. 그래서 한 외국 학자는 올림픽은 가난한 자의 돈을 부자들에게 옮길 뿐이라고 했다. 올림픽은 곧 양극화다.

‘흑자 올림픽’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회 개최를 위해 쏟아 붓는 지출을 계산하면 무조건 적자다. 무시무시한 적자다. 철도에 7조원, 도로에 2조2000억원, 경기장에 1조2000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9조원을 들여 KTX까지 놓는단다. 이제 평창올림픽은 20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건설프로젝트가 됐다. 개최 준비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대테러 보안·안전비용에만 2조원이 필요하다. 이런 식이면 개최비용은 30조원을 가뿐하게 넘길 것이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LA올림픽을 비롯한 올림픽 흑자사례를 연구해 완벽하게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애석하게도 평창이 참고할 만한 ‘흑자사례’는 없다. 당시 LA는 선수촌을 새로 짓는 대신 대학 기숙사를 활용했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경기장도 새로 짓지 않았다. 주경기장도 1923년에 지어진 LA콜로세움을 그냥 썼다. 알펜시아 같은 허황된 리조트도 없었고 고속철도도 놓지 않았다.

지금 올림픽은 구조적으로 흑자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특히 개최지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다. IOC는 경기장 규모, 경기장 간 거리, 선수촌과의 거리 등을 중시한다. 중복투자, 과잉투자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계올림픽의 ‘파괴력’은 엄청나다.
1998년 개최지 나가노는 지금도 경기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후회하고 있고 올림픽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반성하고 있다. 2010년 개최지 밴쿠버는 대회 폐막 후 10억달러 적자라고 했었는데 최근 50억달러에서 100억달러 적자라고 실토했다.

또 다른 문제는 대회 폐막 후의 시설 관리다. 폐막 후 그 거대하고도 많은 시설의 관리는 전적으로 지역 주민의 몫이다. 강릉시는 폐막 후 다섯개의 빙상장들을 컨벤션센터, 체육관, 수영장 등으로 전환한다고 하지만 전환 공사비만 각각 수백억원이 필요한 데다 관리비로 매년 20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인구 20만 강릉시에 과연 적절한 수준인가.

그러니까 문제는 ‘얼마나 흑자를 내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자를 줄이는가’이다. 경기장을 크게 짓고 여기저기 공사판을 벌이며 올림픽을 폼나게 치를수록 강원도는 골병든다. 추후 발생할 재정 손실의 싹을 미리 쳐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기장 규모를 줄이고 미디어센터, 선수촌은 물론 경기장도 기존 시설을 쓰거나 가건물로 지어 폐막과 함께 철거해야 한다.

IOC와 약속했기 때문에 안된다고? ‘강원도의 발전’이라는 도민과의 약속은 어디 갔나.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 끈질기게 협상해라. ‘대회 반납 불사’의 자세로 협상해라. 강원도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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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지금 나는 1년 전의 내가 아니다. 이 얼마나 다행인가?” 골프 황제 타이거 우즈의 말이다. 그는 ‘뉴스위크’ 최신호 칼럼에서 ‘1년 전’의 사고 이후 자신이 새롭게 거듭났음을, 조금은 상투적으로, 그러나 나름 절실하게 적고 있다. 그는 기이한 열정의 연쇄사슬과 그에 따른 불화와 파경을 ‘1년 전의 자동차 사고’라고 함축하여 말하는데, 아무래도 그렇게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작지만 소중한 삶의 가치들을 뒤늦게라도 깨달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타이거 우즈는 ‘자동차 사고’ 이후 “아들을 목욕시키는 것이 골프 공을 한 바구니 더 치기보다 훨씬 낫다”거나 아이들에게 “파스타를 만들어주는 일이 최고급 식당의 식사보다 보람 있다”고 말하는데, 매우 진부하지만, 최고 수준의 인위적 삶에서 추락하여 뒤늦게야 가족의 한 사람이 된 그로서는 충분히 할 만한 말이다.

하긴 타이거 우즈 역시 우리처럼, ‘60억명 중의 1인’일 것이다. 그가 경쟁을 통해 남는 기록이야 언제든 깨어질 뿐 “우리 삶에 영구히 남는 건 가족의 사랑과 다른 사람의 존중”이라고 말할 때, 숙취에서 간신히 깨어난 자를 운명처럼 기다리고 있는 한 그릇의 콩나물국 앞에서 우리 또한 숙연히 깨닫는다. 한 해의 종착지로 달려가는 이때, 올해의 인상 깊은 경기들을 통하여 그 같은 소박하면서도 비범한 가치를 다시 한번 떠올려보고 싶다.

우선 김연아의 눈물이 떠오른다. 지난 2월,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그녀는 수년 동안 혹독하게 조련된 자신의 육체를 4분 7초 동안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그녀의 몸은 중력을 비웃었고 원심력과 구심력의 자장을 맘껏 유린하였으며 고도의 절제된 힘으로 흡사 나비의 날갯짓과 같은 자유로운 비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울었다.

동작을 멈추는 순간, 그녀는 울었다. 이 점이 중요하다. 금메달이 확정되고 나서 울음을 터트린 게 아니라, 더 이상 점프하거나 회전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자신에게 주어진 4분 7초가 다 소진되었을 때, 그녀는 울었다. 그 끈끈한 액체는 메달이나 우승 같은 현실적 성취감과는 전혀 다른, 새 지평 위에 올라섰다는 경이로움과 오랜 짐을 이제야 내려놓을 수도 있다는 깊이 모를 허탈감의 표현이었다.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는, 아시아 출신 투수 가운데 최다승을 기록한 박찬호의 눈물 또한 기억할 만하다. 윤종신의 노랫말처럼, 박찬호의 눈물 역시 “수분과 염분과 그리움이, 추억과 다툼과 서러움”이 방울방울 맺혀져 있다. 그와 같은 눈물을 올해 수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저마다의 링 위에서 흩뿌렸다.

박주영의 눈물은 어떠한가.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은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0-1로 패하였다. 이로써 금메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고 박주영을 비롯한 몇몇 선수들의 병역 혜택도 이뤄지지 못했다. 그 이후 치러진 동메달 결정전. 놀랍게도 한국 대표팀은 후반 막판, 고도의 집중력으로 이란을 물리쳤다.

금메달보다 귀한 동메달?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종료 직후 터져나온 박주영의 눈물은 그 같은 표현이 결코 근사한 역설법으로 포장된 상투적인 격려가 아님을 입증했다. 박주영은 펑펑 울고 나서 “인생을 살아오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의 소중했던, 어떤 최초의 경험을 다시 한번 느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맨 처음 공을 차보았을 때, 처음 축구화를 신었을 때, 처음 승리했을 때 혹은 처음 패배했을 때. 마치 첫사랑처럼 최초의 상태로 돌아간 것. 금메달이니 동메달이니 하는 현실의 가치나 무게가 아니라, 맨 처음 그라운드에 섰을 때 느꼈던 축구장의 경이롭고도 신선한 공기를 다시 맛본 상태, 그런 일순간의 고결한 상태에서 박주영은 눈물을 흘렸다.

연말에 혹시 우리도 눈물 한 방울 흘릴지 모를 일이다. 마이크를 붙잡고 악을 쓰는 동료의 목덜미의 팽팽한 근육을 보면서, 추운데 어서들 들어가라며 훌쩍 택시에 오르는 상사의 뒷모습에서, 숙취를 못 이겨 새벽에 겨우 일어나 냉수 한 사발 마시고 불현듯 바라본 고요하여 텅 빈 듯한 거실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맨 처음의 상태로 돌아가 틀림없이 눈물 한 방울 흘리게 될 것이다. 그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의외로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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