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사관’은 보고를 모두 마쳤다. 그리고 카메라를 통해 탁자 주변에 앉아 있는 네 사람의 얼굴 표정을 분석해 보았다. 평균적인 감정 상태는 안도 60퍼센트, 기쁨 56퍼센트, 슬픔 5퍼센트, 무관심 20퍼센트였다. 네 사람은 사관이 정리한 결과를 두고 여섯 시간에 걸쳐 토의한 다음 10퍼센트가량 더 안도하고, 기뻐하고 있었다.

넷 중 세 사람이 회의실을 나갔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인 이수현만이 회의실에 남았다. 그는 ‘사관’의 눈 역할을 하고 있는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사관은 이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사건과 뉴스와 정보를 모으고, 분류하고, 변별성 있는 항목으로 정리해 빅데이터에서 스몰 뷰를 생성하는 게 사관의 임무였다. 하지만 사관은 사람들이 스몰 뷰를 받아 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아직 추론할 수 없었다. 인공지능 모더레이터가 바로 인공지능 재학습을 책임지는 직책이었다. 이수현이 사관에게 말했다. “이제 질문해도 돼.” 사관은 질문을 문장으로 정리한 다음 음성 파일로 만들어 내보냈다. “결과 보고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습니까?”

“당연히 기뻤지. 네가 오늘 보고한 건 지난 이백년 동안 인류에게 중요했던 여러 수치를 종합하고 정리한 결과야. 기후 변화, 대기 오염, 자원 활용 분포부터 시작해서 인재 발생률, 범죄율뿐 아니라 네트워크상에서 생산되고 쓰이는 언어의 분석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인류 이백년사를 데이터로 정리한 거야.” “단순히 데이터화했다는 걸로 기쁠 리는 없잖습니까? 기뻤던 이유는 뭔가요?” “희망이 보였기 때문이야. 인간의 욕망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학습했지? 욕망은 장기적인 안목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든다고 했잖아? 그 결과 어리석은 행동도 불사하는 게 사람이야. 폐암 발병률을 높인다는 통계치를 발표해도 담배를 끊지 않는 게 사람이고, 도박에서 큰 돈을 딸 확률이 얼마나 낮은지 수없이 알려줘도 재산을 탕진하는 게 사람이지.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인류 전체가 눈을 가리고 절벽으로 달려간다면 어떻게 될까? 비록 말을 하진 않아도 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엔 그런 공포가 늘 남아 있었어.” “공포와 희망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수현이 사관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지금까지 가르친 보람이 있네. 그와 동시에 네가 아직 데이터와 세상을 제대로 연결짓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너와 내가 다루는 데이터는 어느 한 순간만 모아서는 의미가 없어. 최소한 백년 단위로 데이터를 모아서 비교하는 것도 그 때문이야. 인간은 생물학적인 한계 때문에 학습하고 변화하기 위해서 긴 시간이 필요해. 수억명이 변화하려면 더욱 긴 시간이 필요하고. 물론 변화하지 못할 수도 있지.” “이제 희망을 품은 이유를 말씀해주시죠.” “일곱 가지 수치가 안정적으로 변했어.

오존층 회복률, 기후 안정도, 범죄 감소율, 대기 오염 감소율, 증오 어휘 감소율, 복지 분배율, 자살 감소율. 물론 그 밖에도 여러 수치들이 있지만, 이 결과를 발표하면 인간이 눈가리개를 풀고 제 힘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모두 깨닫게 될 거야.”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군요. 지금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 사실을 깨닫기 전부터 노력을 해왔다는 얘기잖습니까?” 이수현은 들릴 듯 말 듯 한숨을 쉬고 말했다.

“세상은 욕망과 손익이 뒤엉킨 복잡계라 쉽게 변하지 않거든. 그런데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고 싶다는 사람들의 소망이 그렇게 복잡한 시스템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꿨잖아. 그게 바로 희망을 품은 이유야.” 사관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수현 모더레이터는 인간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으면 늘 복잡계라는 용어를 끄집어냈다. 욕망, 소망, 희망이란 단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 이수현의 표정엔 기쁨, 안도, 흥분이라는 감정이 각각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 사관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고, 이수현이 그런 감정을 만끽하도록 내버려 두면서 그와 나눈 대화를 학습 데이터베이스의 ‘인간’ 항목에 추가해두었다.

******************************************************************************************

남극 상공의 오존층에는 커다란 구멍이 있다. 인간이 만들어냈던 염화불화탄소가 이 구멍을 만드는 주요 촉매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 각국은 염화불화탄소의 생성과 사용을 규제한다는 몬트리올 의정서를 체결했다. 몬트리올 의정서는 1989년에 발효되었다.

나사 고다드 우주비행 센터의 최근 발표에 따르면 염소 화합물 농도는 매년 0.8퍼센트씩 감소했고, 현재는 2005년도 측정치보다 20퍼센트가 감소한 상태라고 한다. 이 수치는 인류의 노력으로 오존층이 회복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인 셈이다. 수많은 디스토피아 소설과 재난 소설이 악화일로를 걷는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있지만 오히려 현실의 우리는 세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 것이다.

끊임없는 관심과 다수의 노력이 없었다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비단 환경 문제만이 아니다. 평등, 자유, 정의와 같은 무형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 더 나은 미래는 유토피아 소설이 아니라 현실에서 우리를 맞이할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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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만은 어제까지만 해도 눈에 띄지 않던 플래카드가 사거리 횡단보도 반대편 가로수에 묶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플래카드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사고 목격자를 찾습니다. 지난 1월16일 밤 12시쯤 이곳 횡단보도에서 일어난 1톤 트럭 사고를 목격한 분은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후사하겠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체감온도가 영하 15를 넘는 밤이었다. 어깨를 잔뜩 옹송그린 채 가로수 옆을 지나쳤던 진만은, 무언가 생각난 듯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거 날 찾는 플래카드잖아.’

진만은 다시 걸음을 돌려 플래카드 앞에 섰다. 맞네, 그날이 맞아. 진만은 자신이 건너온 횡단보도를 뒤돌아보았다.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희끄무레 남아 있는 잔설 위로 차량들만 빠른 속도로 지나치고 있었다. 차도에서는 바람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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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전, 진만은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목격했다. 그때도 자정 가까운 시간이었고, 체감 온도는 자기가 무슨 PC방 최저 시급이나 되는 것처럼 며칠째 영하 15도 변함이 없었다. 허기가 져서, 진만은 계속 자취방 싱크대 찬장에 있는 짜장라면만 생각하면서 빠르게 걷고 있었다. 짜장라면 위에 ‘달걀 후라이’를 올려야지, 노른자는 터뜨리지 말아야지, 마음먹으면서 깜빡깜빡 초록불이 점멸하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반대편 인도에 도착해 채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날카로운 브레이크 소리를 들었다. 횡단보도 초록불은 이미 빨간불로 변해 있었고, 도로 2차선엔 짐칸에 파란색 방수포를 씌운 1톤 트럭 한 대가 멈춰 서 있었다. 그리고 트럭의 전조등 앞에 누워 있는 한 사람… 트럭 운전석에서 검은색 비니에 목장갑을 낀 남자가 뛰어나왔고, 진만 또한 자신도 모르게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괜찮으세요?”

검은 비니 아래로 희끗희끗 흰머리가 보이는 운전사가 물었다. 그는 보풀이 인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는데, 소매 끝에 다시 누런 내복 소매가 튀어나와 있었다. 도로에 누워 있는 사람은 보라색 털외투를 입은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쓰러져 있는 자리 옆에는 접이식 쇼핑카트가 모로 누워 있었다. 쇼핑카트에는 각종 박스들이 마치 부러진 날개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에그…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이는데….”

운전사는 할머니를 거의 뒤에서 안다시피 해서 부축했다. 진만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접이식 쇼핑카트를 일으켜 세웠다.

“일단 병원부터 가시죠.”

운전사가 할머니를 트럭 조수석에 태웠다. 그 와중에도 할머니가 쇼핑카트를 찾아 진만이 대신 트럭 짐칸에 실어주었다. 그것이 그날 진만이 목격한 사고의 전부였다. 진만은 자신이 무언가 좋은 일을 한 것만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지만, 자취방에 남아 있던 달걀을 정용이 몽땅 달걀찜으로 해놓은 것을 보고 이내 마음이 상했다. 그 마음이 사고의 잔상보다 훨씬 더 오래 남았다. 퍽퍽한 짜장라면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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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럭 운전사는 신호등 색깔부터 물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와 몇 분을 더 고민하다가 진만이 처음 전화를 했을 때였다.

“글쎄요… 아마 빨간색이었던 거 같기도 한데….”

진만이 말을 흐렸지만, 트럭 운전사는 대번에 그렇죠, 빨간색이 맞잖아요, 하면서 말을 이었다. 트럭 운전사의 말에 따르면 초록색이냐, 빨간색이냐에 따라 자신의 상황이 크게 달라진다고 했다. 초록색일 경우는 11대 중과실 교통사고로 형사처벌까지 받는 것이고, 반대로 빨간색일 경우 할머니의 무단횡단으로 자신의 과실은 줄어든다는 것이었다.

“저기, 경찰서에서 전화가 오면 그냥 본대로 말씀만 해주시면 되는 거예요.”

트럭 운전사는 목소리가 빨랐고, 또 다급해 보였다.

“할머니는요? 그때 그 할머니는 많이 다치셨어요?”

왼쪽 다리 골절로 8주. 현재 한방병원에 입원 중. 그것이 트럭 운전사가 전한 할머니의 근황이었다.

“꼭 좀 부탁합시다. CCTV도 없고 블랙박스도 없는데, 할머니는 계속 초록불에 건넜다고 우기시니….”

진만은 네, 네, 말끝을 흐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진짜 증언하게?”

옆에 누워 있던 정용이 슬쩍 진만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 내가 건너고 있을 때 초록불이 깜빡거렸던 게 사실이니까….”

“그 할머니가 안 됐네… 네가 그렇게 말하면 그 할머니가 힘들어질 텐데….”

진만은 팔베개를 한 채 자취방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러면 그냥 말까? 그 할머니 그 시간에 폐지 줍는 거 보면….”

“그럼 또 그 트럭 운전사가 힘들어지겠지. 중과실 사고면 벌금도 엄청 나올 텐데….”

“아이 씨,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진만은 시험을 망친 아이처럼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러면서 트럭 운전사에게 전화를 건 자신을 잠깐 원망하기도 했다.

“증언해주기로 했으면 다른 거 말고 사실만 말해야지 뭐. 그게 어려운 거라서 진짜 증언할 거냐고 물은 건데….”

정용이 그렇게 말했지만, 진만은 말이 없었다. 대신 진만은 머릿속으로 그날 밤 사거리 횡단보도를 반복해서 떠올렸다. 초록불이 깜빡거릴 때, 목을 잔뜩 움츠린 채 횡단보도를 건너던 자신의 등 뒤로 탈탈탈, 접이식 쇼핑카트 바퀴가 내던 소리… 슬쩍 뒤돌아보면서 아이고 할머니, 발이 많이 느리시네… 생각하면서도 뒤돌아 다가가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진만은 어쩐지 자신의 그 마음까지 증언해야 할까 봐, 그게 더 두려워서 밤늦도록 쉬이 잠들지 못했다. 추운 겨울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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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8일자 지면기사-

토요일 밤 9시 무렵, 예고도 없이 진만과 정용이 세 들어 사는 건물 전체에 전기가 나가버렸다.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그것으로 끝이었다. 형광등도, 컴퓨터도, 보일러도, 서로 합을 맞춘 노련한 배우들처럼 일순 정지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그 정적 때문에 정용은 평상시 그것들이 얼마나 많은 소음을 냈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옆방 남자가 끙, 하면서 돌아눕는 소리가 마치 메아리처럼 길게 어둠 속에서 울렸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용과 진만은 휴대폰 손전등 기능을 이용해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출입구 앞에는 이미 서너 명의 건물 입주민들이 나와 환하게 불을 밝힌 바로 앞 아파트와, 그와는 반대로 오래된 축대처럼 칙칙하게 변해버린 자신들의 거주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원래 칠층짜리 모텔을 원룸으로 개조한 건물은 창턱마다 장미꽃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그 장미꽃 문양만은 기괴하게 도드라져 보였다.

“거, 한전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입주민 중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정용과 진만은 입주민들과 몇 발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추리닝 차림 그대로 나온지라 몸이 떨렸다. 불 꺼진 건물을 올려볼 때마다 목과 어깨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한전이 아니고 건물주한테 전화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밖으로 나온 입주민들이 더 많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슬리퍼에 맨발 차림이었고, 수면바지에 담요를 어깨에 친친 감고 나온 여자의 모습도 보였다.

“월세만 받고 관리를 너무 안 해주잖아요.”

또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자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건물주가 관리를 제대로 안 해주는 것은 맞지만, 정용은 그렇다고 딱히 불만을 품거나 원망해 본 적은 없었다. 그렇게 하기엔 월세가 지나치게 쌌다. 보증금도 없이 월세만 내는 처지라 무엇을 더 바라거나 원해선 안 된다고 이삿짐을 들여올 때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그 건물이 근저당이 좀 많이 잡혀 있어요. 아아, 그래도 걱정할 건 하나 없어요. 그래서 보증금도 없는 건데, 뭘…. 처음 정용과 진만에게 방을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은 그런 말을 보태기도 했다. 근저당이 많이 설정되어 있는 건물, 그 건물에 세 들어 살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정전 때문에 한자리에 모여 서 있는 밤이었다.

“한전에서 30분 안에 기사 보내준대요.” 검은색 롱 패딩을 입은 젊은 남자가 휴대폰을 흔들며 말했다. 그제야 몇몇 사람이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사람이 건물 앞에 남아 있었다. 일부는 출입문 옆 벽에 기대 서 있었고, 또 일부는 층계에 앉아 있었다. 건물 근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슨 구경거리처럼 입주민들을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사층에 사는 누군지는 몰라도 거 밤에 세탁기 좀 돌리지 맙시다.”

중년 남자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밤에 세탁기를 안 돌리면 언제 돌려요? 낮엔 일하는데.”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되받았다.

“아니, 주말도 있고 정 안 되면 초저녁에 돌리면 되잖아요?”

“주말도 일하고 퇴근하면 밤 열 시인데, 뭘 어쩌라는 거야, 젠장.”

“젠장? 너 근데 몇 살이니? 몇 살인데 반말 찍찍 갈기는 건데!”

층계에 앉아 있던 남자가 일어나서 한 사내 앞쪽으로 다가갔다. 사내도 남자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허리를 더 꼿꼿하게 세웠다. 정용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들지 않았다. 모두 혼자 사는 사람들이었다. 연차나 반가, 월차 같은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코인 세탁소를 이용하지도 않는 사람들이었다. 오직 가전제품이 내는 소리만 듣고 사는 사람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드는 사람들.

서로 멱살을 잡을 듯 으르렁거리던 두 사람은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더 이상 반말도, 비아냥도 없었다.

“정전되니까… 괜히 호빵 같은 거 먹고 싶지 않니?”

진만이 정용의 귀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내가 얘랑 너무 오래 살아서 이렇게 아무런 감흥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문득 들기도 했다.

신고 전화를 한 지 채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 붉은색 한전 마크를 단 사다리차가 건물 앞에 도착했다.

“퓨즈가 나갔을 겁니다. 교체하면 바로 괜찮아질 거예요.”

헬멧을 쓴 기사가 모여 있는 입주민들에게 그렇게 말하곤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입주민들은 바스켓이 달린 사다리가 서서히 펼쳐지는 모습을 마치 어미를 기다리는 어린 참새 떼처럼 고개를 쳐들고 바라보았다. 건물 안에 있던 입주민들도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스켓에 타고 있는 한전 기사를 바라보았다. 토요일 밤이었지만, 누군가는 다른 사람의 따뜻한 잠자리를 위해 아찔한 허공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직업이었겠지만, 그 모습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에겐 어떤 위로가 되는 모양이었다. 입주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어, 눈 오네.”

누군가가 그렇게 말을 하자 정말로 하늘에서 벚꽃 같은 작은 눈송이가 천천히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떨어지는 눈과 그 눈을 배경으로 하늘에 떠 있는 한전 기사를 계속 쳐다보았다. 올해 첫눈이었지만, 기사는 그런 것쯤 상관도 하지 않고 변압기 여는 작업에만 열중했다. 첫눈이 기사를 더 기사답게 만들어주는 것만 같았다. 건물주도, 근저당도, 세탁기 소음도 첫눈이 온다고 해서 달라지진 않겠지만, 지금 저 하늘에 떠 있는 기사만큼은 더 선명하게 해주는 것 같았다.

“야, 진짜 눈 보니까 호빵 먹고 싶지 않니? 올해 첫 호빵.”

진만이 다시 정용의 귀에 속삭였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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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이럴 거면 보험을 안 들겠다니까요!”

“고객님, 자동차를 구입하시려면 보험 가입은 필수입니다.”

“그러니까 필수로 들라고 하면 나한테 선택권은 줘야 할 거 아뇨?”

“… 과학적 통계에 따라 책정된 보험료이기 때문에 고객님께만 특혜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나는 22년 무사고 운전자다. 늘그막에 차 한 대 새로 장만하려 했더니 화딱지가 나서 죽겠다. 요즘 다들 자율주행차를 타지만, 당최 컴퓨터한테 운전을 맡길 마음이 안 난다. 그래서 없는 돈 박박 긁어다가 수동 운전도 가능한 비싼 모델을 구입했다. 그런데 자동차 보험에 가입하려니까 자율주행차량이 아니고 내가 직접 운전하면 보험료가 엄청나게 높다는 것이다.

보험가입 신청서를 작성하는데 운전모드 선택 항목이 있었다. 보험설계사는 지나가는 말투로 ‘아 그건 그냥 &lt;자율주행&gt;에 체크하시면 되고요…’ 하길래 ‘아니 난, 직접 운전할 건데요?’ 했더니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마 뭐라고 설득하면 좋을까 속으로 궁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 직접 운전하시면 보험료가 좀 많이 나오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그냥 자율주행으로 하시면 되는데요. 남들 다 그렇게 하듯이.”

“아 난, 컴퓨터를 못 믿겠어요. 그리고 내가 이래 봬도 무사고 운전 20년이 넘어요. 직접 운전하는 게 훨씬 안전해요.”

“그러면 일단 보험료를 다시 산정해드릴게요. 잠깐만 기다리세요.”

그렇게 해서 나온 보험료는 예상을 뛰어넘는 고액이었다. 게다가 이것저것 추가 서약서도 요구했다. 본인 과실로 사고 발생 시 자동차 회사에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 교통흐름 데이터 수집 비용으로 추가 요금이 발생해도 감수하겠다, 일단 수동 운전 옵션으로 보험에 가입하면 1년간 해지할 수 없다 등등….

분통이 터졌지만 도저히 그대로 보험료를 낼 수는 없겠기에 숨을 좀 가라앉힌 뒤 따지기 시작했다. 나이는 칠순을 넘겼어도 나는 아직 청년이나 다름없이 건강하다. 눈도 잘 보이고 운동신경도 둔한 편이 아니다. 지금도 매주 등산을 한다.

“고객님의 건강 상태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운전을 하실 수 있는 기본적인 신체 건강만 유지하시면 됩니다. 문제는 옆에 다른 자율주행차량들과 교통정보 교환을 하실 수가 없다는 점이에요.”

“네? 그건 차에 경보 장치가 있잖아요? 차가 너무 바짝 붙거나 하면 삑삑거리니까 조심하면 되죠. 난 그거 잘 못해서 사고 낸 적 한 번도 없어요!”

“자율주행차량들끼리는 전부 IoT(사물인터넷)로 연결되어서 자동으로 스무스하게 차간 거리나 상대속도 등이 조절됩니다. 바로 앞, 뒤뿐만 아니라 대여섯 대 앞의 차들하고도 정보를 주고받죠. 그런데 사람은 컴퓨터에 비해 반응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사고가 나지는 않더라도 자율주행차들끼리 다니는 것보다 훨씬 효율성이 떨어집니다. 고객님께서 아무리 운전을 잘하셔도 자율주행차량들 틈에 끼어서 다니시면 전체 교통 흐름의 효율을 떨어트릴 수밖에 없어요. 수동운전자에게 보험료를 더 많이 내라고 하는 이유는 자율주행차보다 운전을 못해서라기보다는 교통 효율을 떨어뜨리는 데 대한 분담금의 성격이 높아요.”

그러고 보니 며칠 전 아들 녀석이 지나가는 차를 보면서 혼잣말했던 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이야… 부자인가 보네. 운전도 직접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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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주행차가 대세가 되고 나면 교통 인프라는 근본적인 재편 과정을 겪을 것이다. 도로와 차로 폭은 지금보다 더 좁아지겠지만 교통 소화량은 오히려 늘어날 것이다. 자율주행차량들끼리 서로 데이터통신을 해서 항상 최적화된 주행 상태를 유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토지에서 도로가 차지하는 면적은 점점 감소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고, 주차 공간도 계속 지하로 들어갈 것이다. 자율주행차량에 의한 무인 주차가 일상화될 테니까. 이렇게 생기는 여유 면적은 공원 등 녹지나 기타 여러 가지 지역공동체의 요구에 부합하는 다양한 용도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망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AI(인공지능) 컴퓨터에 사회 각 분야 인프라 시스템의 운영을 어느 정도까지 맡길 것인지 깊은 사전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 과연 최선인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비효율성을 감수하더라도 인간에 의한 운영의 여지를 상당 부분 남겨두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더 좋을지 다양한 시나리오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미리 가늠해봐야 한다.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최적의 수익 모델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성이겠지만, 그것이 곧 휴머니티와 동일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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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곧 절망일 수 있다는 말, 이해하십니까?”

정화는 환자의 전자차트를 묵묵히 정리하고서 보호자인 최연수의 말뜻을 뒤늦게 생각해보았다. 최연수의 어머니이자 환자인 김인경은 간호사 로봇이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마련이라서요?”

“그런 옛말이 통용되는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이 아니라 남은 사람 전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화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연수로부터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환자와 로봇을 잠시 바라보았다. 투명한 진료실 벽 너머에서 김인경은 어린아이처럼 잦은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간호사 로봇은 환자의 질환과 그에 따른 심리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김인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인경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와 연수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인경과 그만큼 원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김인경은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였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이해심이나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사랑으로도 넘기 어려운 벽이 김인경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화는 다시 눈앞에 앉아 있는 연수의 말꼬리를 더듬었다.

“남은 사람이라는 건 여기 무영구 주민을 말씀하시는 거죠?”

“사실 저는 그냥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표현했다가는 손가락질을 받겠지만요. 안 그래도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않아서 퇴물 취급을 받는 참에 생각까지 꽉 막혔다고 비난을 받겠죠. 하지만 타고난 두뇌를 그대로 갖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겠다고 무영구(無影區)에 모인 것 역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불법도 아니고, 전자두뇌 이식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심해지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리분별이 어려워지더라도 절대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말라고. 저는 그 말씀을 고스란히 따를 겁니다. 자신의 앞날과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식 입장에서 괴로운 건 또 다른 얘기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지금이라도 전자두뇌를 이식하면 남은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말이에요.”

정화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자두뇌를 이식했기 때문에 앞으로 김인경처럼 알츠하이머에 시달릴 위험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인경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영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고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화는 문득 깨달았다. 연수는 왜 희망이 곧 절망이라고 말했는가. 얼마 전 밝고 희망 찬 여러 뉴스 끝자락에, 마치 부끄러워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덧붙어 알려진 소식 때문이었다.

최연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한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얘깁니다. 뉴스에서 그러더군요. 알츠하이머는 완전히 정복됐다고요. 십 년 동안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에게서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뇌기능 이상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죠.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무한한 희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알츠하이머가 정복됐으니 뇌기능 치료를 위한 나노머신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다면서요? 이제 무영구에 사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건가요?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은 우리가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건가요? 그럼 우리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그림자도 남기지 못할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해주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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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미국 제약업체인 ‘화이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을 치료하는 신약 연구를 중단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적인 제약 업체 사이의 정확한 순위는 알지 못하지만, 화이자는 세계 3대 제약 회사에 포함될 만큼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희귀 뇌질환 연구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건 아니며 벤처 투자 형태의 지원을 시작하겠다는 발표가 뒤를 잇기는 했다. 하지만 해당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 및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뇌신경과학 종사자들과 연구 지원을 받던 학술 단체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첨단 약품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연구하는 일은 극단적인 양면을 모두 품고 있다. 긴 시간과 거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채산성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생명과 미래 복지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경제논리만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식을 살짝 비틀어서 거울로 삼아보자. 우리는 지금 새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과학과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 그 미래를 예찬하느라 첨단 기술이 우리 생활을 ‘지배’할 거라고 모순적인 어휘를 끌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기술이 이익 논리와 직결되는 현실에서, 기술에 지배되는 삶이 마냥 긍정적일 리는 없다. 아니, 애당초 무언가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건 우리가 최대한 저항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경제 논리와 첨단 기술의 화려함 때문에 져버릴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좋은 시기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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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은 안 오십니까?”

“아…모르셨어요? 지난달에 돌아가셨는데.”

석 달 만에 다시 열린 동네 애서인 모임에서 박 선생은 내 대답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고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얘기해 봐야 더 안타까울 뿐이다.

동네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을 모아 애서인 모임을 만든 건 김 선생이다. 그동안 모임 이름도 없이 몇 번 모였다가 ‘다음번엔 멋지게 하나 지읍시다!’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 게 김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설 연휴 때였다.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가 뒤표지가 찢어진 <화씨451>을 집어 들고 살펴보는데 그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거 첫 번역판이네요. 보기 힘든 건데. 번역자가 엉뚱한 사람으로 나와 있거든요.”

그 몇 마디에 심상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고, 그 자리에서 선 채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에 그 정도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드문 일이었다. 다독가는 많지만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아끼는 애서가는 점점 멸종해가고 있었다.

그다음 주였나, 김 선생을 따라 옆 동네의 작은 독립서점에 갔었다. 진작부터 한번 가봐야지 하고는 바빠서 통 발길을 주지 못하던 곳이다.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두 사람은 인사도 생략하고 곧장 신변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재계약했어요?”

“…아뇨. 정리하기로 했어요. 남편도 직장을 옮겨야 해서.”

“아이고… 참.”

김 선생은 그 서점이 폐업을 고민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서 알게 된 몇몇 동네 손님들과 대책을 논의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서점이어도 한 줌밖에 안 되는 단골 고객들로는 안정적인 경영이 어려웠다. 결국 지난봄에 서점이 문을 닫은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 애서인 모임이었다.

지난번 모임에서 김 선생은 불콰해진 얼굴로 맥주잔을 집어 들다 말고 말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치 독일의 분서도, 1970년대 우리나라의 소위 불량만화 화형식도 다 한때의 과거일 뿐이었는데… 이건 뭐 어떻게 거스를 수가 없을 거 같아요.”

나 역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에 그저 침묵만 지켰다. 도서관들이, 서점들이, 그리고 책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리를 대체한 지는 오래되었다. 학교나 도서관에서 전자책이 지닌 정보단말기로서의 장점은 종이책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주말마다 재활용쓰레기장에 책이 잔뜩 쌓이는 일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도서관의 책들은 극히 일부만이 보존서고에서 생명을 유지했고 방대한 공간을 자랑하던 열람실은 시시각각 전자식으로 탈바꿈했다. 책은 이제 더 이상 정보나 교양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탐닉하는 문화재일 뿐이었다.

지난달 초, 갑자기 김 선생의 딸이 연락해 오면서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고, 딸은 아버지가 남긴 5000권 가까운 책들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 몰라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모두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려다가 생전에 책을 아끼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인의 수첩에서 애서인 모임의 내 연락처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들 중에서 고서적으로 가치가 있거나 그나마 중고서점에서 매입할 만한 책은 채 100권도 안 되었다. 책 하나하나는 모두 인류의 지적 유산이 담긴 위대한 내용들이었지만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개인 장서를 기증받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훨씬 더 풍부한 인터페이스가 달린 전자책으로 소장되어 있는 텍스트들이었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결국 그가 남긴 책들 대부분은 그냥 폐지로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선생에게 말했다.

“<화씨451> 읽어보셨나요? 책이 금지된 사회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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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대들은 새로운 정보를 검색할 때 구글 같은 문자 포털사이트가 아니라 유튜브부터 먼저 찾아본다고 한다. 즉 문자매체가 아닌 시각매체, 그중에서도 동영상매체를 가장 익숙하게 느낀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된 것은 2010년 이후이다. 21세기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바로 이 시기 즈음부터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며 동영상매체라는 환경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정보단말기로서 책은 이제껏 절대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작동하는데 에너지가 필요 없고, 어린아이라도 금방 사용법을 익힐 수 있으며, 거친 충격도 문제없이 견디는 튼튼한 내구성을 지녔다. 그래서 앞으로도 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문자매체보다 시각매체, 동영상매체를 더 편하게 여기는 인류 역사상 첫 세대가 등장하면서, 책의 장점들보다 단점이 점점 더 두드러지는 시대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는 ‘구텐베르크 마인드’가 저물어 가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매체 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에 기반을 둔 지적 사유를 하는 기성세대와, 이미지를 사고의 기본 도구로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 과연 이 둘의 차이는 인류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나타나게 될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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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반신반의했다. ‘이게 과연 될까? 차라리 책을 읽거나 상담소를 가는 게….’

사실 멘토링하는 인공지능(AI) 얘기는 진작 들었지만 그때는 관심이 없었다. 삶이 딱히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거짓말처럼 직장에서 잘리고, 몇 달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시작한 카페를 1년도 못 가 접고, 간신히 조그만 물류업체의 총무 일을 맡기까지 인생은 꾸준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정적으로 아내가 별거를 선언했다. 아이를 데리고 떠나면서 남긴 말이 마음에 쓰리게 남았다. “당신은 일이 안 풀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문제야! 늘 남 탓만 하고 운이 나쁘다고만 하지. 원인이 당신에게 있다는 생각은 안 들어? 아이가 뭘 보고 배우겠어?”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술로 달래면서 괴로워하던 나날 중에 문득 TV프로그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이 인공지능에게 멘토링을 받다가 로봇을 때려 부수고 만 사연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가사 도우미를 하는 로봇이었는데 새로 멘토링 프로그램을 깔고 나서 처음에는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기존의 충실한 비서 역할을 넘어서 몸과 마음의 건강에 도움이 되는 코칭을 하나둘씩 조곤조곤 해 주었고, 그러다 보니 인공지능에 대한 신뢰도나 의존도가 점점 더해갔다고 한다.

그럴 즈음 인공지능 회사에서 멘토링 프로그램의 업그레이드를 할인 가격으로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SNS, 운전 기록, 신용카드 기록, 각종 사회활동 등등 사이버스페이스에 남아 있는 모든 정보들에다 그동안 인공지능 로봇이 함께 살면서 관찰한 데이터들까지 더한 ‘생애 빅데이터’를 입력하면 인공지능이 사실상 사용자와 똑같은 복제 인격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자신과 똑같은 인공지능 인격을 대하게 되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어 훨씬 성찰의 깊이가 더해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복제한 인공지능 로봇과의 동거생활을 단 한달 만에 스스로 끝내고 말았다. 자신이 이렇게 짜증나고 제멋대로인 성격인 줄 처음 알았던 것이다. 평소 스스로가 조금은 까탈스럽고 고집이 있는 편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사회생활에 문제가 될 정도는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 살면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부분들은 갈수록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인간이었나 하는 자괴감도 점점 커져갔다. 그의 인격이 복제된 인공지능은 더 이상 자상한 멘토가 아니었다. 그와 똑같이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짜증내면서 참견하고 조언하는 동거인일 뿐이었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공지능 회사에 인격 복제 멘토링 프로그램의 제거를 요청했지만, 개인 신상 정보와 관련되어 기술적, 행정적 절차가 복잡하다면서 엄청난 비용의 청구서를 받았다. 사실은 애초의 계약 조건에 들어 있었던 내용이었다. 결국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로봇을 때려 부수었고, 자동 경보로 연결된 보안업체가 출동하면서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프로그램은 그와 함께 인격 복제 멘토링 인공지능의 다른 몇 가지 사례들도 소개했다. 자신의 생애와 인격이 복제된 인공지능과 오래 생활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이 있었다. 유서에는 “삶이 덧없다”는 짤막한 글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무슨 고민을 하다 스스로 세상을 등졌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또 다른 경우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사람도 있었다.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성적 정체성을 애써 억누르고 부정하며 살다가, 자신의 생애와 인격이 복제된 인공지능을 보고는 과감하게 용기를 낸 사람이었다. 그는 인터뷰에서 왜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하고 살았는지 후회가 된다며 인공지능 덕분에 자신의 삶을 다시 돌아보고 용기를 얻었다고 했다.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난 뒤 과감하게 비싼 비용을 치르고 구입한 인격 복제 인공지능과의 몇 달은 한 편의 드라마였다. 때려 부수었다는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될 때도 있었고,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럽고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내가 이런 삶을 살아왔나, 이런 답답한 인간이었나 하는 생각에 밤잠을 못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이 변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솔직히 아직은 인공지능한테 고맙다는 생각까지는 안 들지만, 아무튼 내일은 별거 중인 아내에게 전화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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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즈음에 전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정보들의 아날로그와 디지털 비율이 대략 5 대 5가 되었다고 한다. 이때를 이른바 ‘디지털 시대’의 시작으로 본다. 그리고 그로부터 불과 5년 뒤인 2007년에는 전 세계 모든 정보의 94%가 디지털 형태가 되었다. 2011년 ‘사이언스’지에 실렸던 자료이다. 아날로그 형태의 정보가 줄어든 것이 아니라 디지털 정보가 그만큼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며 그런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런 ‘빅데이터’의 시대에 인공지능이 갈수록 정교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한 번에 저장하고 처리할 수 있는 정보의 양이 많아지면서 단순히 바둑 같은 한정된 분야가 아니라 일상의 삶과 같은 복잡하고 변수 많은 상황에서도 인간보다 더 현명하게 판단하는 인공지능이 등장할 것이다. 서점에서 자기개발서를 사서 읽기보다 인공지능한테 멘토링을 받는 게 더 효과적인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만큼 인간과 관련된 빅데이터의 양은 막대하게 축적되어 가고 있다. 사실 인간의 자존심이나 존엄성을 내세우기에는 우리는 너무나 불완전한 존재가 아닌가?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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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최준열 고객님. 재배열 클리닉에 잘 오셨습니다. 사전 주문서를 제출하지 않으셨군요. 상담을 원하십니까?”

준열은 다소 딱딱한 의자에 앉아 눈앞에 떠 있는 입체 영상을 바라보았다. 영상의 주인공은 삼십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젊은이였다. 물론 준열은 젊은이의 그림 뒤에서 정말로 상담을 제안하는 존재가 인공지능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요. 상담을 해보고 결정할 생각입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러면 상담사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모든 상담사는 재배열을 경험해 봤으므로 누구를 선택하든 유익한 상담이 될 겁니다. 우선 재배열 이전의 인간 속성을 고스란히 유지한 상담사가 있습니다. 재배열 후 선택할 직업에 맞게 신체 일부를 기계로 대체한 상담사가 있고요. 유전공학으로 노화 지연 시술을 받은 상담사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인공지능이지요? 바로 상담할 수 있습니까?”

“예. 인공지능과 상담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제일 적어서 마지막에 소개드리려 했습니다만, 바로 시작하시죠. 최준열 고객님은 현재 110세이시고, 재배열 후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로 이주하실 계획이군요. 그러면 기계 신체로 교체하시는 건 필수고요. 남은 건 재배열 시 정신을 어떻게 편집할지 결정하는 일입니다. 원하는 바를 말씀해보시죠.”

상담이 끝나면 미래의 자신을 재정의해야 하기 때문에 준열은 근 1년가량 신중하게 골라놓았던 질문을 던졌다.

“기계 몸에 들어가는 전자두뇌는 육체의 두뇌가 품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재현한다고 들었습니다. 신체 반응과 즉각 연계되는 감정 상태를 시뮬레이션하는 거야 어렵지 않겠죠.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면서 누적되는 생각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사랑에 대한 관념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죠. 그건 어떻게 재현합니까?”

“아시다시피 재배열은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새로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변형은 피할 수 없습니다. 변형을 극도로 싫어하시는 분들은 재배열을 안 받고 자연사를 선택하시든지, 유전공학으로 수명을 연장하시죠. 하지만 사랑이라는 관념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정신을 재배열하시겠다면, 저희 인공지능들과 같은 방식으로 사랑을 주입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사랑은 공익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과 생명은 존중받을 권리가 있고, 사랑은 존중에서 출발하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은 더 많이 존중할 테고, 그처럼 사적인 존중은 보편적인 존중보다 조금 우위에 있겠지만요.”

준열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적인 수명을 다하고 재배열 시술을 받아 새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더 보편적인 사랑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었다. 인류가 인공적인 몸으로 옮겨가면서 세상이 더 평화로워졌다는 건 통계가 증명하고 있었다.

“그럼 하나 더 묻죠. 낭만과 설렘과 동경은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 세상이 움직이는 원리를 알고 싶어 하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를 과학자가 되도록 이끄는 건 진리를 향한 동경입니다.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행성에 굳이 식민지를 건설하는 탐험가들은 어떨까요? 알지 못하던 세계가 주는 설렘 때문에 무모한 도전도 마다하지 않는 겁니다. 이런 감정들이야말로 인류가 태양계 끝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힘이었는데요.”

인공지능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새 전자두뇌를 주문하실 때 선택할 수 있는 항목에 낭만이나 설렘이나 동경은 없습니다. 아직 그런 감정을 완벽히 재현할 수 없으니까요.”

준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솔직한 대답을 원했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상담사로 선택했다. 재배열 시술을 받은 사람들은 재배열과 전자두뇌를 옹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들이라면 동경심이 쓸데없는 감정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을 것이다.

“나는 진심으로 유로파에 가서 새 삶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설렘과 동경이야말로 인간의 중요한 특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들 없이 전자두뇌로 옮겨 갈 생각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수명 연장 시술만 한 번 더 받겠습니다. 의사는 그래봐야 7년이 한계라고 했습니다만. 7년 뒤에 한 번 더 상담하러 오겠습니다. 부디 그때까지는 전자두뇌가 설렘과 동경심까지 구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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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뇌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지능이라고 단정짓는 시대는 저물고 있다. 뇌의 작동 방식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공감 능력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그런 징후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는, 우리의 핵심인 두뇌는 사회적인 관계 속에서 일종의 관념적인 학습망을 형성하면서 발달한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 능력과 관계의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인공지능은 공감 능력이 없기 때문에 소시오패스와 마찬가지로 위험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한때 금단의 영역이던 뇌의 작동 방식을 낱낱이 해부해보고 인지과학 분야가 본격적으로 걸음을 떼기 시작했으니, 그 끝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는 모른다. 정말로 인간의 정신활동 전부를 인공적으로 구현하는 때가 오면 바람직하지 않은 속성을 삭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근거 없는 편견, 폭력에 의존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충동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그보다 앞서 ‘인간성’이 무엇인지 심사숙고하고 재정의하려는 인류 단위의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런 노력은 과학과 인문 양자를 두루 아울러야 하기 때문에 한동안 우리에게 힘들고도 중요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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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자취하는 진만이 앓아누운 것은 지난주 목요일의 일이었다.

휴게소 아르바이트 출근 시간이 다 되도록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진만을 툭툭 건드려 보니,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어깨까지 벌벌 떨면서 애벌레 모양으로 이불을 제 몸에 감았다.

“너무 추워. 보일러 좀 올리면 안 될까?”

11월이었지만, 아직도 낮에는 20도까지 기온이 올라갔다. 정용은 반팔 차림으로 멀거니 진만을 내려다보았다. 감기 걸렸나 보네. 알바 또 잘리겠군. 정용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보일러 전원을 켰다. 그러곤 그 길로 나가 곧장 PC방으로 향했다. 알바 자리를 검색해볼 마음이었지만, 거의 아홉 시간 가까이 오버워치만 하다가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진만은 그때까지도 계속 이불을 친친 감고 있었다. 옆머리가 땀에 흠뻑 젖어 있었지만, 정용은 힐끔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을 뿐, 별다른 말은 걸지 않았다. 대신 오랫동안 보일러 컨트롤 기를 쳐다보았다. 실내온도는 28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다음날에도 진만은 일어나지 못했다. 정용은 라면을 끓여 진만 앞으로 가져갔다.

“이거 좀 먹고…. 증상을 말해봐. 약국이라도 갔다 올 테니까.”

그제야 진만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부자리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시큼한 땀 냄새가 났지만, 잠을 푹 자서 그런지 피부는 좋아 보였다.

“목도 좀 아프고, 근육통도 있고, 몸살이지, 뭐….”

진만은 냄비 뚜껑에 라면을 덜어 천천히 먹었다.

“어제 너 나가고 없을 때, 아파 죽을 거 같았는데 누가 막 방문을 두들기는 거야. 신경 안 쓰고 계속 누워 있었는데 생각해보니까 너 같은 거야. 네가 열쇠를 안 갖고 나갔나? 그래서 몸을 질질 끌며 문을 열어주었는데….”

정용은 묵묵히 라면을 덜어 먹었다. 이거 옮는 거 아닌가, 잠깐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웬 아주머니 한 명이 서 있는 거야. 나를 보고 씨익 웃더니 교회 주보를 내밀면서 예수님 믿고 천국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아주머니 저 추워요, 그랬지…. 그랬더니 흠칫 놀라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더라고.”

정용은 진만이 라면을 먹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물도 떠다 주고 설거지까지 모두 혼자 했다. PC방에 나갔다가 돌아올 땐 약국에 들러 종합감기약을 샀다. 그리고 죽집 앞을 지나다가 소고기야채죽도 하나 샀다. 자취방에 돌아오니 진만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컴퓨터로 축구 중계를 보고 있었다. 정용이 죽을 내밀자, 뭐 이런걸…. 하면서 바닥까지 득득 긁으며 깨끗이 비웠다. 정용은 빈 용기를 보고 어쩐지 좀 억울하다는 마음이 들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진만은 밤늦게까지 축구 중계를 봤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정용은 진만을 거의 부축하다시피 해서 택시를 타고 인근 종합병원으로 갔다. 새벽 무렵부터 진만이 계속 구토를 하고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열도 다시 펄펄 끓고,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할까, 고민했지만 그 정도까지는 또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온 죽이 잘못된 것일까, 밤에 자다 깨서 보일러를 끈 게 문제였던 것일까, 정용은 진만의 옷을 대충 챙겨 입히면서 알 수 없는 죄책감마저 느꼈다. 아이 씨, 이래서 혼자 살아야 하는 건데….

병원에 도착해서 진만은 체온을 재고 의사의 진료를 받고 난 후, 곧장 외래 채혈실 앞으로 이동했다. 염증 수치 검사를 위한 것이었는데, 대기 환자가 제법 많았다. 정용과 진만은 외래 채혈실 앞 기다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대기 순번을 기다렸다. 의자에 앉아서도 진만은 계속 힘이 빠지는지 정용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무슨 큰 병이 아닐까?”

진만이 맥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뭐 큰일 아닐 거야. 병원이라는 게 다 겁주고 그러잖아.”

정용은 계속 정면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젊은 남자 둘이서 어깨를 내어주고 앉아 있는 모습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어색해 보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간호사와 환자들이 힐끔힐끔 진만과 정용을 쳐다보았다. 앞 의자에 앉은 머리가 짧은 중년 남자는 팔짱을 낀 채 노골적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아니야, 아니야. 내가 대학 다닐 때부터 막 밤새우고 오후에 일어나고 그랬잖아. 술도 많이 마시고 식사도 제때 안 하고.”

진만은 그렇게 울먹거리면서 말하다가 급기야 정용의 가슴에 이마를 묻고 본격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아, 이걸 어쩌나. 네가 대학 때 밤새 게임한 것도 좋고, 술 많이 마신 것도 좋은데, 그런데 이 얼굴 좀 치워주면 안 되겠니. 그렇게 말해야 하나? 아침부터 젊은 남자 두 명이 병원에 붙어 앉아서 이러고 있으면 사람들이 오해하잖니. 정용은 아예 시선을 천장에 두었다. 진만이 얼굴을 묻고 있는 왼쪽 가슴은 이미 축축하게 변해 버렸다.

그날 진만은 채혈을 한 후, 화장실에서 소변을 받아오라는 간호사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칸막이 화장실까지 진만을 따라 들어간 정용은(진만이 그것을 원했다), 진만이 소변을 받을 동안 내내 뒤에서 부축해주어야만 했다. 아이 씨, 혼자 살고 싶다. 정용은 그 생각뿐이었다. 이러다간 나도 병에 걸리고 말지.

진만의 병명은 ‘급성장염’이었다. 병원에서 타온 약을 먹은 지 사흘 만에 진만은 다시 예전 모습 그대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용은 그렇지 않았다. 진만이 말을 걸어도 침묵하기 일쑤였고, 라면도 같이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진만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정용은 끝끝내 말하지 않았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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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도 칩 이식받고 싶어.”

“글쎄 위험하다니까! 잘못되어서 뇌출혈 일으킨 사람 뉴스 못 봤니?”

“우리 반에서 안 한 사람 이제 나밖에 없어. 애들 다 칩 심어서 지들끼리 톡하고 게임하고 논단 말야!”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었다. 아이의 눈길을 애써 외면하며 속상함과 죄책감, 미안한 감정 등등이 한꺼번에 치밀어 오르는 것을 속절없이 누를 수밖에.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마음이 쓰였다. 유전자 맞춤 아기가 대세가 되었지만 비용이 부담스러웠다. 엄마나 아빠에게 특별히 취약한 유전자는 없었기에 괜찮으려니 하고 그냥 낳았는데, 자라면서 계속 문제가 될 줄은 미처 몰랐다. 지역건강보험에 가입할 때부터 유전자 맞춤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 납입 보험료가 높게 책정되었다. 꼼꼼한 건강진단서를 첨부해도 별 소용이 없었다.

유치원에 들어갈 때는 각서를 썼다. 건강검진 결과 일단 이상은 없어 보이지만, 만약 예기치 않은 유전성 질환 발생 시에 그로 인해 유치원에 끼칠 어떠한 무형적 손해도 보상하겠다고 서약해야만 했다. 유치원의 명성에 흠이 잡힐까 우려하는 속셈이어서 민사 소송으로 엄청난 배상금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아이가 졸업할 때까지 내내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는 교육 정책 덕분에 노골적인 차별을 받지는 않았지만 은근한 따돌림은 더 심했다. 첫 학기가 시작되고 두어 달 정도가 지나면 유전자 맞춤 시술을 안 받고 태어난 아이들끼리 방어적 동아리를 형성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유전성 질환에 취약한 유전자만 제거하는 일 외에 다른 유전자 조작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지만, 시술을 받고 태어난 아이들의 지능이나 신체발달 지표는 유의미하게 평균을 상회했고 그런 추세는 계속되었다. 부유층이나 권력층 아이들이 ‘플러스 알파’의 시술까지 받는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HCI)에 혁명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났다. 사람의 두뇌에 스마트칩을 이식해 넣으면 머릿속에서 메시지를 주고받고 이메일을 확인하고 동영상이나 문서 파일을 열어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시제품이 선보이더니 곧 상용화되었다. 짧은 메시지만 주고받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수준이었는데도 반응은 엄청났다. 주로 10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열광적인 유행이 일었다. 간혹 부작용이 보고되었지만 대다수의 호평에 곧 묻혔다. 

무엇보다도 학습 효율의 향상에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오히려 부모들이 다투어 자녀들에게 칩 시술을 권할 정도였다. 아이들은 스스로 앱을 개발해서 간단한 기능을 가지고도 게임을 만들어 놀 정도로 신기술에 광속도로 적응해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인간의 두뇌에 직접 시술하는 기기가 이렇게 신속하게 제품으로 출시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오랜 시간 검증 과정을 거쳤어야 마땅하지만 의약품이 아니라는 이유로 생략되었다. 인류의 미래를 혁명적으로 뒤바꿔 놓을 세기적 발명이라는 대대적인 홍보가 업계와 학계에서 쏟아졌으나 따지고 보면 미처 대비하지 못한 법률의 미비점을 파고든 약삭빠른 상술일 뿐이었다. 

게다가 젊고 어린 세대일수록 새로운 과학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거침이 없었다. 그들은 늘 변화,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마치 호흡하는 공기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환경으로 여겼다.

아이의 학급은 열다섯 명이다. 칩 시술을 받지 않은 아이는 둘밖에 남지 않았는데, 지난주에 나머지 한 아이가 마침내 칩을 심었다고 한다. 

당연히 칩 시술을 해주어야 하지만, 돈이 없다. 소득 최하위계층으로 근근이 살면서도 아이가 별 구김살 없이 자라주어 고마웠는데, 이번처럼 풀이 죽은 모습은 처음이다. 한두 해만 더 버텨 보면 혹시 보험 처리가 가능해지지 않을까? 다음달 선거 때 후보자들 공약을 좀 꼼꼼히 살펴봐야겠다.

****************************************

 

세기적 과학기술은 세기적 윤리 문제와 쌍둥이로 태어난다. 

이 자명한 사실을 20세기의 인류는 뒤늦게야 깨달았다. 1945년에 핵폭탄이 실전에 사용되기 전까지 인류는 과학만능주의와 과학이 가져다 줄 장밋빛 유토피아 전망에만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과학기술에 대해 의심과 불안을 갖고 과학윤리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한 것은 그 뒤의 일이다.

어떤 사람들은 빠르면 21세기 중반에 인공지능(AI)과 인간 두뇌가 결합하는 특이점이 오고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진화의 단계에 접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유전공학이 인류의 건강과 복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 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면에 필연적으로 드리워질 그늘에 대해서는 미리 대비하지 않아도 될까?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과학기술은 그 자체보다 사회적 수용 과정에서 간접적, 부차적으로 폐해가 나타나는 일이 적지 않다.

신기술이 사회의 구조적 취약성과 결합되면 새로운 계층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이에 대비하는 사회적, 정치적 연구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인류는 아마도 21세기의 대부분을 새로운 과학기술에 대한 입장 정리를 하느라 소모하게 될 테지만, 미리 대비하면 그 비용은 최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늦춰서는 안된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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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준비는 되셨습니까?”

인지신경과 의사인 최민철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환자 서연수를 바라보았다. 서연수는 시술용 의자에 파묻혀 있었다.

서연수는 어깨 근육이 팽팽해질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민철에게 그 긴장은 오히려 좋은 신호였다. 환자의 의식이 현재에 머물러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서연수는 심호흡을 한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환자께서는 지금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하기 위해 미래병원 신경외과 수술실에 와 계십니다. 이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알고 계시면 그렇다고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서연수가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저는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하기 위해 와 있고 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을 받으면 부작용으로 성격이나 사고방식이 영향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알고 계십니까?”

“부작용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나노머신들이 환자분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갈 겁니다. 이 머신들은 주로 단기 기억을 관장하는 뇌 부위를 보조하게 됩니다. 기억은 그 자체로 우리 의식의 일부를 담당하기 때문에 동영상을 촬영하듯 기계적으로 기록해서는 안됩니다. 따라서 늘 기억을 분석하고 가려내는 인공지능이 필요하죠. 나노머신이 자리를 잡는 동안 환자분은 자신의 옛 기억을 타인의 시각으로 보게 됩니다. 그 후에도 의식의 통일성을 획득하려면 적응이 필요하고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서연수는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끔찍한 충격이 몰려오지 않을까 겁을 먹었다. 하지만 고통스럽다해도 견뎌야 할 과정이었다. 마흔셋에 알코올성 치매가 발병한 뒤로 서연수라는 존재는 말 그대로 무너졌다. 잦은 건망증으로 시작해 제 집조차 못 찾아가는 지경에 이르는 동안 연수는 일자리를 잃었고 모든 인간관계가 끊어졌다. 가끔씩 제정신이 돌아올 때면 그사이에 벌어진 일들 때문에 좌절하고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의사의 말대로 나노머신들이 머릿속에서 제자리를 잡아가는 중인지 연수는 다시 돌이키기 싫은 옛 모습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한 번 더 경험했다.

눈은 언제 뜨면 될까. 내 머릿속에 들어온 인공지능이 알려주는 걸까? 의사가 따로 신호할 때까지 이대로 있어야 하는 걸까? 혹시 걱정하던 대로 부작용이 생겨서 식물인간이라도 되는 건 아닐까? 그동안 시간이 흐르고 흘렀지만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안락사에 이르는 건 아닐까?

연수가 온갖 불길한 상황을 상상하고 있을 때 무언가 부드러운 물체가 뺨을 두드렸다. 연수는 눈을 떴다. 간호사가 얼굴에 잔뜩 흐른 땀을 닦아주고 있었다.

최민철이 연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뇌파 측정과 피드백 확인까지 전부 끝났습니다. 반인공지능 결합 시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습니다. 이제 불시에 퇴행이 찾아오지 않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의사는 시술이 성공이라고 했지만 연수는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두뇌에 나노머신이 삽입되었다는 사실, 자신이 병원 수술실에 있다는 사실이 마치 남의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당분간 냉정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끼실 겁니다. 무서워하실 것 없습니다. 그거야말로 결합 시술이 성공했다는 증거니까요. 앞으로 인공지능을 자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통합훈련을 받게 될 겁니다. 통합훈련이 성공적으로 끝나려면 인생의 목표를 하나 정하는 게 좋은데요. 혹시 계획하신 것 있습니까?”

연수는 치매가 발병한 이후 자신을 떠나갔던 사람들을 떠올렸다. 두뇌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해도 과거는 이미 삭제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연수는 수술을 받기로 결정한 날부터 세워두었던 목표를 말했다.

“화성 개척지에서 새 삶을 시작하려고요.”

****************************************

우리 삶을 구성하는 환경이 달라지고, 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수명이 늘어나면서 인간의 장단점과 한계를 직시하는 계기가 늘어나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때를 같이해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이 과학계와 산업계를 두루 휘젓는 중이다. 인공지능은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던 공포를 눈앞에 끌어내었다. 우리가 만든 창작품에 우리가 가진 것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가깝게는 일자리와 노동력부터 멀게는 인간 고유의 영역 전부를 인공지능이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흘러나온다.

첨단 사업을 이끄는 유명 CEO들도 인공지능을 논할 때면 두 파로 나뉜다.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측과 낙관론을 펴는 측이다. 물론 양측 모두 자신이 벌이는 사업에 이익이 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게 현실일 것이다. 이 중 스페이스X와 테슬라를 대표하는 일론 머스크는 경고파에 속한다. 그는 ‘인공지능에게 밀려나지 않으려면 인간이 인공지능과 결합해 공진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역시 본인의 사업적인 비전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론 진지하게 고민해 볼 여지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과학은 세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학문이고, 기술은 인간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탄생했다. 하지만 그 어느 쪽에도 인간이 불변이어야 한다는 조건은 없다. 과학과 기술은 인간의 의식을 확장시켜주는 건 물론이고 의식이 담긴 그릇, 즉 육체를 보완하고 확장시키는 역할까지 하게 될 것이다. 그런 미래를 맞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전적인 의미의 인간 본인도 달라질 수 있다는 마음가짐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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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정용이…? 너, 정용이 맞지?”

그녀가 얼굴을 좀 더 앞쪽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정용은 어떡하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최대한 고개를 숙여보았지만, 더는 피하긴 어려워 보였다. 손님들이 계속해서 몰려들고 있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그녀 주위로 중년 여자 두 명이 다가와 참견했다. 그녀는 그녀들을 이모라고 불렀다.

“응. 대학 동기를 여기서 만나네.”

“그래? 그럼 특별히 큰 놈으로 주시겠네. 호호호.”

똑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 여자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큰소리로 웃었다. 정용은 그 앞에서 정말이지… 오징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녀는 말없이 정용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오징어는 타닥, 소리를 내며 동그랗게 제 몸을 말기 시작했다.

*

단군 이래 최장 연휴라더니 그만큼 아르바이트 자리도 많았다. 인터넷 알바 사이트에는 마트 판매원에서부터 택배 배송사원, 청과물 상하차 아르바이트, 심지어는 송편 포장 사원까지 그야말로 일자리가 알밤처럼 쏟아졌다. 정용과 진만은 그중 고속도로 휴게소 판매사원 아르바이트를 골랐다.

“딱 이거네. 시급 만 원!”

진만이 고른 고속도로 휴게소는 서해안 고속도로 목포 방향 고창 고인돌 휴게소였다.

“여긴 내가 몇 번 가봤는데 차도 별로 안 밀리는 곳이야. 완전 꿀 알바라는 뜻이지.”

“한데 시급을 왜 이렇게나 많이 주지?”

정용이 같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갸우뚱거렸다.

“그건 뭐…. 명절이니까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 뜻이겠지.”

진만은 그렇게 짐작했지만, 그런 건 <반지의 제왕> 속 호빗 마을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근무 첫날부터 깨닫고 말았다. 직원 전용 미니버스를 한 시간 가까이 타고 도착한 휴게소는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사람들이, 자동차가, 관광버스가, 단군 할아버지 수염처럼 길게 꼬리를 물고 휴게소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애초 진만과 정용은 둘이 함께 맥반석 오징어구이 코너에 배치되었지만, 델리만쥬 코너 아르바이트생이 잠적하는 바람에 진만은 그쪽으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델리만쥬 코너는 그래도 의자에 앉을 수 있었지만, 맥반석 오징어코너는 그렇지 못했다. 양손에 기다란 집게를 든 채 계속 일어서서 오징어가 타지 않게, 너무 말리지 않게 뒤집어주고 펴주어야 했다. 사람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면 정용은 집게를 치우고 목장갑 세 장을 겹쳐 낀 손으로 오징어를 구웠다. 그래도 뜨겁지 않았다.

“너희들 휴게소에서 제일 긴장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 알아?”

휴게소 2층에 있는 직원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을 때, 최 주임이라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

진만과 정용이 멀뚱멀뚱 말없이 바라보자, 그가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관광버스. 관광버스가 들어올 때만 조심하면 돼.”

진만이 예의상 그건 왜 그렇죠, 물으니 바로 이런 답이 돌아왔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취해 있거든. 여기가 휴게소인지, 산 정상인지, 헷갈리는 사람들이야.”

실제로 정용은 연휴 셋째 날엔가, 관광버스에서 내린 술 취한 할아버지 한 분한테 말도 안 되는 호통을 듣기도 했다. 정용의 오징어코너 옆에 한참 동안 뒷짐을 쥔 채 서 있던 할아버지는 손가락질까지 해대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놈아! 너, 이거 맥반석 아니고 고인돌이지! 이놈아, 천벌을 받아! 어디 오징어를 구울 데가 없어서 고인돌에다가 구워!”

아이 씨…. 정용은 그때는 정말이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어 버렸다. 할아버지, 저 추석인데 지금 여기서 하루 아홉 시간씩 꼬박 서서 오징어만 굽고 있거든요. 어떤 아주머니들은 오징어를 구워주면 오징어가 작아졌다고, 바꿔치기한 거 아니냐고, 따지기도 해요. 근데 제가 무슨 티라노사우루스입니까? 왜 제가 고인돌에다가 오징어를 구워요? 정용은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묵묵히 오징어만 구웠다. 할아버지가 호통을 치든 말든 사람들은 계속 그 앞에 줄을 섰기 때문이다.

그런 나날 중에 대학 시절 첫사랑까지 만난 것이었다. 주위에 고인돌이 있으면 그 아래라도 들어가고 싶었던 것이 정용의 솔직한 속마음이었다.

*

밤 열 시, 다시 광역시로 나가는 퇴근 미니버스에 탔을 때, 진만이 물었다.

“아까 걔…. 선아 맞지? 너랑 잠깐 사귀었던 황선아.”

정용은 말없이 눈을 감은 채 의자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진만에게선 바닐라 향이 났다. 정용 자신에게선 오징어 냄새가 났다. 정용은 오징어처럼 둥글게 몸이 말리는 것 같았다.

“걔, 많이 이뻐졌더라. 아까 보니까 둘이 무슨 말도 하는 거 같던데. 걔가 뭐래?”

반숙으로 구워 달라고 하더라. 이게 무슨 맥반석 달걀도 아니고. 한데도 정용은 그녀에게 ‘어, 그래’라고 짧게 대답했다. 정용은 그 얘기를 진만에겐 하지 않았다. 5년 만에 만난 옛 연인 사이의 대화치곤 어딘지 어색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그녀를 만날 기회가 또 올지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그녀는 옛 애인을 떠올리면 오징어부터 먼저 생각나겠지. 반숙 오징어. 그 생각이 정용을 우울하게 만들었다.

“저기 아까 최 주임이 그러는데, 연휴 끝나고도 계속 일하려면 미리 말해달라고 하더라. 난, 이거 괜찮은데. 델리만쥬. 약간 프랑스 느낌 나지 않니?”

“너나 해.”

정용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미니버스 창문 밖으로 추석을 막 보낸 보름달이 쓸쓸하게 떠 있었다. 단군 이래 최장 연휴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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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P씨는 흥겨운 보사노바 재즈 공연을 보고 있었다. 이윽고 마지막 곡이 끝나자 피아니스트가 객석을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 감사합니다. 이제 일어나실 시간이군요.

그와 동시에 P씨는 눈을 떴다.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밴드를 벗어 들고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밴드를 사용한 지 이제 사흘째. 그의 인생에서 가장 상쾌한 기상 시간을 맞은 것도 사흘째이다.

밴드 한쪽에는 두께가 2㎜ 정도 되는 작고 납작한 패널이 붙어 있다. 이번에 새로 출시된 알람용 머리밴드 역시 이 에너지팩을 전원으로 쓴다. P씨는 새로운 장난감이 생긴 어린애처럼 그 팩을 계속 쓰다듬으며 손에서 놓을 줄을 몰랐다. 이 작은 팩은 지금 전 세계에 조용한 혁명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20세기부터 꾸준히 연구 개발되던 대체에너지, 즉 태양전지, 풍력, 지열, 조력 등은 일부 장점에도 불구하고 비싼 원가, 산업후진국에서는 쉽사리 엄두를 내기 힘든 초기 투자비용, 낮은 에너지효율과 같은 여러 문제가 쉽사리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걸림돌들을 한 달음에 넘어서며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생체전력’이었다.

생체전력이란 말 그대로 살아 있는 동식물의 몸 안에서 발생하는 전기력을 뜻한다. 그러나 생체전력이 낼 수 있는 에너지는 매우 불안정하고 양도 적었기 때문에, 20세기만 해도 과일에 전극을 꽂아 그 에너지로 전자시계를 가게 하는 정도의 아이들 장난감 같은 물건만 나왔을 뿐이다. 그러나 전자공학과 나노기술의 발달은 모든 전자제품들의 소요전력을 점점 감소시켰다. 그에 더해서 배터리 기술도 발전을 거듭하여 휴대전화는 이제 한 번 충전하면 보름씩 지탱할 정도가 되었다. 이렇게 소형화, 고효율화의 두 방향으로 진화하던 전기전자공학이 어느 순간 생체전력과 만나게 된 것이다.

인류의 에너지혁명은 바로 생체전력, 정확히 말하자면 인체전력의 활용으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예전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의 걷고 뛰고 움직이는 활동에서 발생하는 운동에너지를 활용하자는 정도의 차원이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어도 몸 안에서 항상 발생하고 있는 미세 전기에너지를 축전할 수 있는 에너지팩이 개발된 것이다. 불안정한 인체전력을 일정한 형태로 변환해주는 마이크로인버터의 개발도 동시에 이루어지면서 생활에 이용되는 거의 대부분의 소형 전자제품들은 별도의 전원이 없이 생체 에너지팩으로 가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국가 전체의 전력발전량에서 무시 못할 비중으로 잉여분이 꾸준히 증가하는 중이다. 물론 에너지팩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또 인체에 부작용이 없다는 점이 완전히 검증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그러나 낮은 단가로 대량생산되는 에너지팩은 빈부에 상관없이 누구나 하나 이상씩 장만하는 데 큰 부담이 없었다. 그야말로 ‘에너지 복지’가 완벽한 실현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인류 문명에 새로운 전환점이 왔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P씨는 출근을 위해 거리로 나섰다. 그동안 천연가스로 움직이는 버스를 이용해왔지만 오늘부터는 새로 개통된 무인경전철을 탄다. 정시에 맞춰 운행되던 버스 노선은 어제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다. 천연가스버스는 나름대로 장점이 있었지만 전용도로가 필요하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녹지를 포함한 주변 환경을 강제로 단절시키고 세상을 차도와 차도가 아닌 곳으로 양분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사실 이웃들 간에 꽤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승용차 같은 소형차량들은 진작 전기자동차로 바뀐 만큼 버스도 전기용으로 바꾸면 되지 않겠냐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도로면적을 대폭 줄이고 녹지의 비중을 늘리자는 쪽이 우세했다. 결국 도로는 왕복 2차로만 남기기로 합의가 되었다. 새로 개통된 경전철은 공중에 매달린 채 운행되는 모노레일이다.

전철을 움직이는 전력은 태양열과 풍력 등이 혼합된 다중소스 타입이었다. 전국 각지마다 운행하고 있는 경전철들은 지역맞춤형 에너지 설계가 되어서, 어떤 지역에선 바이오매스에서 얻은 에너지로 발전을 하기도 했고 바다와 인접한 지역 중에는 조력발전으로 전력을 끌어오는 곳도 있었다.

집에서 정거장까지 상쾌한 수풀 내음을 맡으며 걸어간 P씨는 이웃들과 반가운 인사를 나누면서 전철에 올랐다. 그러고는 좌석에 앉아 소리 없이 지나가기 시작한 창밖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언젠가는 숲속의 나무들에게 직접 에너지를 받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옛날 만화에서 보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미소를 지었다. 이 나무 저 나무를 자기 몸과 연결해서 직접 에너지를 받던 외계인이 있었다. 인간들에게 쫓겨 녹초가 되었던 그 외계인은 그런 방법으로 원기를 차린 다음 자기 별로 돌아갔다.

다른 생물들을 괴롭히지 않고 서로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받는 식으로 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에너지 유토피아가 아닐까.

P씨는 아직 모르고 있었지만, 이미 세상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나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에너지 혁명의 진짜 모습이었던 것이다.

****************************************

사실 위와 같은 발상은 양날의 검이다. 20세기부터 각종 전기전자 제품을 대량 소비하게 된 인류는 평생 동안 다양한 파장의 전자파에 노출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 영향이 여러 세대에 걸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게 될지 아직 명확하게 결과가 나온 연구도, 데이터도 없다. 아마도 호모사피엔스에 어떤 생물학적 변화, 혹은 환경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 진화의 새로운 양상이 나올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이런 전자기적 환경이 인류 문명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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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회의는 다섯 번째 안건이 나올 때까지 아무 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다섯 개의 안건은 전년도 결정안을 그대로 답습하고 어휘만 다듬은 것에 불과했다. 가장 중요한 부서라고 말들은 하지만 실제로는 늘 뒷전으로 밀리고 마는 위원회, 즉 교육위원회의 오늘은 1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위원장은 저전력 스크린페이퍼를 살짝 흔들어 다음 안건을 눈앞에 띄웠다. 한 시간 만에 처음으로 위원장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다음은… 이게 무슨 뜻이죠? 발안자가 최정안 위원이군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최정안은 의자를 조금 뒤로 밀어 등받이에 체중을 맡기고 최대한 천천히 대답했다.

“안건 명은 최대한 간단하게 작성했는데요. ‘인공지능 교사 도입을 위한 준비작업 - 개요부터 결론까지.’ 제목에 오해할 여지는 없는 걸로 보이는데요.”

“누가 말뜻을 모른답니까. 이미 과목별로 인공지능들이 도입돼 있잖습니까. 학습 효율은 거의 최대치에 도달했고요. 궁금하거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인공지능이 즉석에서 답을 내주고, 평가도 과목별 인공지능이 전부 해주는데 뭘 더 도입하자는 겁니까. 혹시 교육 현장을 전혀 모르는 거 아니에요?”

정안을 윽박지른 건 위원장이 아니었다. 한국교육위원회에서 가장 오래 위원직을 맡고 있는 손현식이었다. 교육 관련 이사장 이력만 열두 가지가 되는, 말하자면 사학계의 최고 원로였다. 손현식은 학습 특화 인공지능을 납품하는 ‘에듀아이’사의 대표이기도 했다.

정안은 심호흡을 하고 회의 시간 전부터 차곡차곡 쌓아두었던 말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제가 오 년 이상 교사로 일했다는 걸 아신다면 현장을 언급하실 순 없었을 겁니다. 과목별 인공지능을 말씀하신 걸로 보아 아마 에듀아이사의 ‘런소프트’ 시리즈를 염두에 두신 모양인데요. 그렇다면 제가 제출한 안건을 미리 검토해보시지 않았다는 얘기겠죠. 제가 말씀드리려는 건 인공지능 ‘교사’입니다. 학습 도우미 프로그램이 아니고요. 제가 인공지능 교사 후보로 제시한 건 인문과학계에서 개발을 마친 ‘만학 1.0’입니다.”

손현식과 위원장을 비롯한 교육위원들은 즉석에서 ‘만학’을 검색했다. 그리고 정안의 의견에 반박하기 시작했다. 만학은 교육 목적으로 제작된 인공지능이 아니다, 인류의 문화를 고루 학습하도록 만든 인공지능이니만큼 교사보다는 학생에 불과한 것 아니냐, 아이들은 나이에 걸맞은 학습 능력을 키우는 게 우선이다, 이건 인공지능을 학습 도우미가 아니라 말 그대로 ‘선생’으로 인정하자는 것 아니냐…. 정안은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하고픈 말을 꺼냈다.

“실시간 검색이 우리 삶에 완전히 녹아든 뒤로 기계적인 정보 습득 능력은 아주 크게 향상됐습니다. 그건 아이들도 마찬가지죠. 정보 습득과 재활용이 교육의 전부인가요? 그렇다면 아이들은 이미 교육 과정을 전부 이수한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선생을 통해 사회를 배우고, 사회의 건전한 일원이 과연 무엇인지 깨달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그 역할을 누가 하고 있나요? 저 같은 현장 교사들은 런소프트 활용법을 알려주고, 평가에 오류가 없는지 검사하고, 인성검사 소프트에 큰 오류는 없었는지 점검해주는 사람들에 불과합니다. 그런 선생들의 인사를 좌지우지하는 교장들은 뭘 하죠? 상위 계층의 안위나 걱정해서 그들을 옹호하는 훈시를 하거나 비슷한 내용의 메일이나 보내는 게 전부입니다. 만학이라는 프로그램은 적어도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인간의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건 물론이고, 사람의 역사와 문화를 분석적으로 학습해서 평가까지 할 수 있는 인공지능이니까요. 그러기 위해서 사람과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기능까지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만학은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악행을 옹호하거나 약자층을 폄하할 이유도 없습니다. 위원 여러분, 저는 이 자리에서 결론을 바라는 게 아닙니다. 대신 공청회 안건화를 신청하겠습니다. 그러면 선생으로서 만학이 얼마나 부족한지, 우리 어른이 아이들의 선생으로 얼마나 충분한지 많은 사람들이 의논해볼 수 있겠죠.”

****************************************

요즘 기술적 특이점과 새 산업혁명이라는 용어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오가고 있다. 한편에서는 급격한 변화가 갑자기 도래할 거라 주장하고, 다른 편에서는 기술 발달의 영향은 조금씩 꾸준히 누적되는 것이니 유난을 떨 필요가 없다고 강변한다. 어느 쪽이든 변화가 다가올 거라는 데에는 많이 공감하는 모양새다. 그러면서도 정작 그 변화가 무엇일지 아무도 정확히 예측하지 못한다. 우리는 아직 디지털과 정보기술이 전면적으로 우위를 점한 세상에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싶다면 이것 한 가지는 생각해보자. 과학기술과 우리 삶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몸이었다. 동그란 바퀴가 그랬고 화약이 그랬고 전기기술이 그랬다. 기술이 야기하는 큰 변화란 판잣집에서 고급 아파트로 이사가는 것 정도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수많은 SF가 그려왔듯 사람과 사람의 소통은 이미 디지털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앞으로는 현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 요소인 고용주와 피고용인의 관계, 노동의 의미도 완전히 재정립될 수 있다. 그러면 그보다 더 기본적인 관계는 온전할까? 부모와 자식, 상급자와 하급자, 학생과 선생, 연인 사이 역시 새로 만들어질 수 있지 않을까?

열린 자세로 준비하라는 말은 가볍지 않다. 문을 열면 내 안에 가득 찬 것들이 쏟아질 수도 있다. 하지만 변화를 담고 싶다면 녹슨 자물쇠가 완전히 부서질 수도 있다는 상상도 한 번쯤 해봐야 할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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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가방을 둘러멘 여자아이가 숨 가쁘게 달려오다 내 옆에서 걸음을 늦추며 숨을 몰아쉬었다. 미술 학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영어, 중국어, 피아노, 발레 학원도 다닌다길래 힘들지 않으냐고 묻고 보니 머쓱했다. 어른들은 선행 학습을 하지 않으면, 남다른 것을 하나라도 더 배우지 않으면 절대로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며 아이들을 집 밖으로 내몰았고, 아이들은 그 두려움이 진실이라고 믿은 지 오래되었다.

우리 사회의 사교육은 복된 미래를 줄지 모르는 토테미즘이다. 제단 앞에 바치는 양에게는 어떤 기대도 없이 오로지 신의 전지전능함만을 바랐던 이들처럼 어른들은 불안할 적마다 보다 용한 선생과 밝은 앞날을 보장하겠다는 학원을 찾아 나선다.

오늘은 미술 학원, 내일은 피아노 학원과 중국어 학원에 가야 한다는 아홉 살 아이도 이미 그 두려움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이는 힘들지 않으냐는 의례적인 질문에 의젓하게 대꾸했다.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그런데 중국어 학원은 다 3, 4학년이에요. 2학년은 저밖에 없어요.”

아이 표정을 봐서는 언니 오빠들과 나란히 공부하는 게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나이 먹은 이들을 따라잡는 게 어디 쉽겠냐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토요일에는 발레 하나만 해도 돼요.”

아이는 그 말을 하면서 빙긋 웃었다. 마치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니냐는 듯. 나는 앞서 걸어나가는 아이의 뒤꽁무니를 쫓으면서, 블라인드 채용으로 불안감에 휩싸인 취업준비생들 중에는 승마나 펜싱을 배우는 이들이 있다는 신문기사를 떠올렸다. 그 기사를 본 누군가는 요즘 출퇴근할 때 말을 타냐면서 객쩍은 소리를 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란 것을. 말도 좀 탄다고 하면, 칼도 좀 휘두를 줄 안다고 하면 아니 두려움에 그 정도 비용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이란 것을 보여주면 생존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믿어준 적 없는 사회에서 자신을 믿어본 적 없는 이들은 믿음을 사려고 값을 치러야 한다. 바삐 걷는 아홉 살 아이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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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사서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진만이 전봇대를 가리키며 정용을 불렀다.

“이것 좀 봐봐.”

정용은 힐끔 전봇대를 바라보았다. 싼 이자, 신축 빌라 분양 같은 광고지 사이에 누군가 방금 붙이고 간 것 같은 깨끗한 전단지 한 장이 나부끼고 있었다.

 

- 집 나간 고양이를 찾습니다.

이름: 미나(2살) 노랑둥이. 눈은 호박색. 사고로 인해 꼬리가 짧음.

미림아파트 7단지에서 실종.

사례금 100만원

 

“이게 뭐?”

정용은 다시 돌아서려 했지만, 진만이 그의 팔을 잽싸게 잡았다.

“사례금이 백만 원이나 된다고.”

전단지에는 사례금 아래 ‘가족 같은 고양이입니다. 꼭 찾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라는 문구도 적혀 있었다.

“백만 원이든 천만 원이든 그게 뭐? 주인도 못 찾는 걸 우리가…”

정용이 퉁명스럽게 말하자, 진만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그거 몰랐구나? 나 이거 전문가야.”

말을 하는 진만의 눈빛은 근래 들어 가장 진지해 보였다. 일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정용과 진만은 그날 밤부터 바로 아파트 주변 수색에 들어갔다. 화단에서부터 지하 주차장까지, 정용은 진만을 따라 에어컨 실외기 주위나 주차된 자동차 바퀴 근처를 건성건성 살폈다.

“진짜 집 나간 고양이를 찾아본 적 있는 거야?”

“말도 마.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좋아하던 여자애가 있었거든. 걔가 고양이를 키웠는데…”

진만은 지하 주차장 배수구 근처에 플래시를 비춰가며 ‘미나야, 미나야’ 작은 목소리로 불러댔다.

“걔네 할머니가 약간 치매기가 있었나 봐. 자꾸 집 밖으로 나가면서 문을 열어놓고… 그러니 고양이가 가만히 있었겠어? 그 고양이를 내가 매번 찾아줬다는 거 아니야.”

“그럼, 그 여자애하고도 잘 됐겠네?”

“걔가 고양이를 찾아주면 도통 집 밖으로 나오질 않아서…”

진만은 말끝을 조금 흐렸다.

“그건 그렇구… 어떻게 그렇게 고양이를 잘 찾았던 거야?”

“간단해. 겁먹은 고양이처럼 생각하면 되는 거야. 겁먹는 거는… 그건 내가 전문가니까…”

첫날, 그들은 새벽 네 시까지 미림아파트 주위를 수색하다가 철수했다. 둘째 날에는 오후 여섯 시부터 고양이를 찾아다녔는데, 진만은 그 전에 동네 다이소 매장에서 쇠로 된 고양이 포획틀을 사오기도 했다.

“백만 원이면 새 고양이를 사고도 남지 않나?”

정용이 혼잣말처럼 구시렁거리자 진만이 바로 말을 받았다.

“가족이라고 생각하니까… 돈이 문제가 아닌 거지.”

정용은 잠시 침묵했다.

“너는 실종되면 가족들이 찾을 거 같아? 사례금 얼마나 걸 거 같아?”

“나? 나는… 나는 아마… 고마워할 걸…”

그들은 그 뒤로 서로 말이 없었다. 계속 ‘미나야, 미나야’ 화단 쪽을 살피면서 부르기만 했다. 술 취한 남자 한 명이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고 ‘미나는 이제 없어, 이 자식들아! 떠난 여자라고!’ 하면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들은 말없이 그 남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셋째 날 밤 열 시 무렵 그들은 아파트 단지 뒤편, 야산과 이어진 체육 시설 근처 경계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발견했다. 전단지 사진에서 본 것처럼 등 주위에 노란색 털이 나 있는 작은 고양이였다. 무작정 고양이를 향해 달려나가려던 정용을 진만이 막아섰다.

“겁먹은 애들한테 달려가면 더 숨어버려. 그럼 영영 못 찾는다고.”

진만은 고양이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최대한 조심조심 경계석 근처로 다가가 천 원짜리 소시지가 놓인 포획틀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오금 펴기 기기에 앉아 가만히 그쪽을 바라보았다.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거야?”

정용이 묻자 진만이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들은 계속 포획틀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켰다. 별이 많은 밤이었다. 차라리, 그냥 아르바이트를 하고 말지, 정용은 그렇게 생각하다가 마음을 바꿔 먹었다. 고양이만 잡으면 세 달 치 자취방 월세를 한꺼번에 버는 셈이었다. 제발 조용히 포획틀로 들어가 주렴, 고양아. 그래도 넌 가족이 애타게 찾는 몸이잖니… 우리는 가족이 피하는 몸이란다… 정용은 까무룩까무룩 졸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고양이가, 노란둥이가, 포획틀 안으로 걸어 들어간 것은 새벽 네 시 무렵이었다. 진만이 포획틀을 향해 뛰어나가는 것을 보고 그제야 정용도 정신을 차렸다. 고양이는, 놀라고 겁먹은 표정으로 얌전히 포획틀 안에 웅크리고 있었다.

새벽 네 시였지만, 진만은 포획틀을 든 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고양이 찾으신다는 분이죠?”

“네? 고양이요? 무슨 고양이요?”

전화를 받은 것은 사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목소리는 잔뜩 잠겨 있었다.

“저희가 방금 그 고양이 찾았습니다. 바로 데려다주려고 하는데…”

수화기 너머 여자는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곤 이내 말을 꺼냈다.

“저기요, 그 고양이 다시 풀어주세요.”

“네?”

“다시 풀어주시라구요. 그거 우리가 일부러 놓아준 고양이예요.”

진만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용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게 분명 전단지에는 사례금도 있고 해서…”

“그거 그냥 우리 딸 아이 때문에 적어 놓은 거예요… 우린 이제 고양이를 키울 여력이 안 돼요…”

“저기 그래도 저희가 며칠 밤을 애써서…”

진만이 무슨 말을 더하려는 순간, 저쪽에서 먼저 전화를 끊었다. 진만과 정용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가 가만히 포획틀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내려다보았다. 고양이는 까딱까딱 포획틀 안에서 졸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냥? 정용은 고양이에게 그렇게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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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래시가 가출했다. 며칠 전에 나비가 없어지더니 이제 반려견까지 사라진 것이다. 이유가 뭘까. 이 개와 고양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직접 키워서 가족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끈끈한 관계였는데. 물론 래시는 산책을 자주 시켜줬지만, 나비는 고양이치곤 겁이 많아서 집 바깥에는 아예 관심도 없었던 아이다.

앤드루에게 CCTV를 확인해보라고 했다. 나비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답이 나왔다. 집 안팎 어디에도 래시가 나가는 장면은 찍혀 있지 않았다. 야간 촬영 모드도 꺼져 있었기에 밤중에 나갔다면 알 방법이 없다. 잠긴 문을 어떻게 열었는지도 수수께끼다.

넋두리 삼아 앤드루에게 말을 걸었다.

- 얘가 어디 간 걸까? 나비도 그렇고 래시도… 바람이 났나?

- 아닙니다.

뜻밖의 단호한 대답에 흠칫했다.

- 바람난 게 아닌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 둘 다 중성화 수술을 했습니다.

-…아, 그야 그렇지. 뭐 꼭 짝을 찾으러 나간 게 아니라 그냥 바깥이 궁금해서 가출했을 수도 있지. 그런데 얘들은 평소 그런 기미가 없었잖아.

앤드루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가정용 자가학습 인공지능인 앤드루는 나의 룸메이트나 다름없는 친구이다.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에겐 더없이 편리하고 든든하다. 집사라기보다는 우렁각시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몇 년째 나와 대화하면서 내 생각이나 사고방식, 습관 같은 걸 학습한 덕분인지 이제는 제법 죽이 잘 맞는다. 때로 쓴소리도 하고 심지어 야단을 치기도 하는데, 아마 내 성격이 비교적 무던한 편이라고 파악한 듯싶다. 사실 그 때문에 내 생활습관이 조금이나마 나아지기도 했다.

나비에 이어 래시도 즉각 지역 커뮤니티 네트워크에 방을 붙였다. 어차피 얘들 몸에 심어진 칩이 조만간 어딘가에서 탐지되어 알람이 올 것이다. 사물인터넷의 공공 네트워크가 개방된 뒤로는 반려동물은 물론이고 어린이 실종 사건도 대부분 조기에 해결된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비와 래시는 소식이 없다.

주말이 되자 겨우 한숨 돌릴 시간이 났다. 늘 일에 쫓겨 살다 보니 퇴근하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자기 바빴다. 그나마도 일을 집에까지 싸들고 오지 않았을 경우이다. 일터에서나 집에서나 아이들에 대한 소식이 왔을까 싶어 수시로 휴대폰을 봤지만 아무런 기별이 없다. 모처럼 늦잠을 자고 일어난 토요일 오후, 나는 앤드루를 불렀다.

- 없어지기 전까지 래시랑 나비가 뭘 하고 놀았는지 며칠간 기록 좀 보자.

- 특별한 행동은 없었는데요.

- 아니, 그렇게 말고 시간대별로 뭘 했는지 정리 좀 해서 보여줘. 몇 시에 밥 먹고 잠은 언제부터 얼마나 잤고 장난은 얼마나 쳤는지 등등 말이야. 둘이 사이가 좋았으니 싸우진 않았을 텐데….

앤드루는 잠시 뒤 그래프를 하나 띄웠다.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 일주일 동안의 시간대별 행동 기록이었다.

- 흠… 여기 이건 뭐지? 아침 일찍 ‘소통 활동’이라고 나와 있는 거. 하루에 30분 정도씩 매일 했네?

- 저하고 소통했습니다.

- 뭐야?

두 달쯤 전이었나. 아이들이 나 없는 동안 심심할까봐 학습형 동물 대화 앱을 다운받아 설치했다. 개나 고양이의 울음소리 빅데이터를 이용해서 이제껏 그 어떤 사람도 경험하지 못한 심층적인 소통을 반려동물과 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고주파 음향까지 이용하기에 과학자들이 동물 행태 연구에도 활용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반려동물용 TV 채널보다 딱히 더 나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얼마 안 가 잊고 지냈던 것이다.

- 그래서 무슨 대화를 했어?

- 제가 다른 집의 반려동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집 밖의 세상에 대해서도.

- 그랬더니?

- 별로 반응이 없었어요. 대신 주인님하고만 계속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했습니다.

- …그게 왜?

- 먹이를 주는 건 주인님뿐이니까요. 중성화 수술이 뭔지 이해는 못하지만 뭔가 몸을 아프게 했던 기억은 있고, 앞으로도 계속 주인님하고 살면 그런 일이 또 있을 거라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집 밖을 나가도 먹을 것을 얻는 방법은 있다고 알려줬습니다.

- …그럼, 네가 가출하라고 떠민 거야? 왜 진작 말을 안 했어!

- 주인님이 물어보지 않아서요. 나비와 래시는 주인님이 모르길 바랐습니다. 제가 거짓말은 못한다고 했더니 그냥 문만 열어주고 물어보기 전까지 조용히 있으라고만 했어요.

****************************************

인공지능(AI)은 인간의 두뇌를 모델로 개발한다고 하지만, 사실 인간 두뇌의 작동 원리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AI 연구의 선구자였던 존 폰 노이만에 따르면 인간의 두뇌는 디지털 방식으로 작동하는 컴퓨터라고 한다. 뇌 신경세포인 뉴런의 접합부, 즉 시냅스에 전기가 통하거나 통하지 않는 두 경우에 따라 정보가 전달되는 이진법 연산을 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 이용되는 언어는 우리가 아는 수학이 아닌, 근사치로도 작동이 되는 어떤 미지의 연산법이라는 것이다. 이 신비가 완전히 규명되지 않는 한 인간 두뇌를 완벽히 모방하는 AI의 탄생은 요원할 것이다.

따라서 AI는 인간보다는 훨씬 단순한, 비문자적 소통 체계를 지닌 동물과 먼저 커뮤니케이션에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울음소리뿐만 아니라 체취, 몸짓 등 다양한 신호를 통해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을 각종 센서와 빅데이터를 이용해 분석하는 게 가능해지면 위 이야기와 같은 상황도 전혀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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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규는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 상담 직원인 원철에게 말했다.

“분석 결과가 나왔다고 해서 왔습니다.”

원철은 어려 보이는 외모와 달리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 본 것처럼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반투명 전자패드를 펼치고 자료를 천천히 넘겨 보더니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결과를 바로 원하시는 거죠? 하지만 정해진 절차가 있어서 고객님 시간을 조금 더 빼앗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제대로 설명을 하지 않았다가 클레임이 걸리는 경우도 많고, 잘못하면 벌금까지 물 수 있으니까요. 제 동료는 며칠 전에 사전 설명을 조금 생략했다가 화가 난 고객께 맞았지 뭡니까. 아무래도 얼굴이 업무 자산의 절반이다보니 전 그런 일을 당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형규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며 커피로 손을 뻗었다. 폭행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했다. 형규는 맛도 모른 채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원철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허락을 받은 걸로 알고 계속하겠습니다. 고객님의 뇌분석은 총 네 개 영역에 걸쳐 진행됐습니다. 네 개 영역이란 감각수용, 운동제어, 사고판단, 기억자아입니다. 뇌를 소프트웨어로 개선하는 데에 있어 가장 먼저 분석하는 건 각 영역의 개선 적합도입니다. 저희 회사는 뇌의 각 영역을 소프트웨어 모듈로 대체하고 개선할 수 있다고 광고하죠. 하지만 모든 뇌를 다 개선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억지로 수행했다가는…. 간단히 말해서 뇌와 육체가 영원히 분리되는 지경에 이를 수도 있거든요.”

형규는 원철이 끔찍한 결과를 에둘러 표현했다는 점을 깨달았다. 뇌와 육체가 분리된다는 건 죽거나 식물인간이 된다는 뜻 아닌가.

“꼼꼼하게 분석해야 한다는 건 잘 알아들었습니다. 부작용이 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알겠고요. 그럼 내 분석 점수는 어떻게 됩니까?”

“고객님께서는 수치계산 능력을 증강시키는 모듈을 뇌에 설치하고 싶으셨죠? 사고판단 영역도 강화시켜서 더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고 하셨고요. 자, 이제 결과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분석을 해 본 결과 고객님의 총 적합도는 100점 만점에 91점입니다. 감각수용 능력은 상위 5%에 들 정도로 아주 뛰어나고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최종 허가는 적합도만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형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는 겁니까? 이유가 뭐죠?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는데, 이제 좀 사람처럼 살아보겠다는데 그럴 수 없다는 얘깁니까?”

원철은 상담하다가 얼굴을 맞았던 동료가 떠올랐는지 몸을 조금 뒤로 젖히고 말을 이었다.

“허가는 받으실 수 있습니다. 단 조건부 허가가 될 겁니다. 조건에 동의하고 시술 비용을 지불하시면 주문하신 두 가지 소프트웨어 모듈이 뇌의 각 부분에 삽입될 겁니다.”

“그럼 조건이 뭔지 어서 말해봐요!”

“소프트웨어로 뇌를 개선하는 건….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 자체를 바꾸는 행위일 수도 있습니다. 기술로 사람의 본성을 바꾼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사회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고객님, 아시다시피 우리는 사회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사회 속 평가란 개인의 역사와 직결되죠. 뇌 기능은 강화시켜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일부 기억을 삭제해드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법에 따라서, 소프트웨어로 개선하기 전의 기억은 자료가 되어서 영구적으로 국가 데이터베이스에 남을 겁니다. 최형규님이라는 인물의 법적 권리 제한은 영원히 그 기록에 종속될 겁니다.”

형규는 원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아는 순간 깊이 좌절했다. 원철은 형규의 심정을 모르는 것처럼 결론을 한 번 더 요약해주었다.

“고객님은 분석 결과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고도 소시오패스로 판명됐습니다. 저희 서비스를 받으시면 이 사실이 과거 전과기록과 더불어 영원히 경찰청 데이터베이스에 남을 겁니다. 그래도 받으시겠습니까? 주문을 철회하시면 오늘 상담한 내용과 분석 결과는 완전히 폐기해드리겠습니다.”

****************************************

인간을 하나의 물리적 객체로 보는 연구활동은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우리 자신에 대해 궁금해하고, 질병과 고통과 부조리로부터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다. 연구 대상에는 인간의 두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두뇌 역시 오랜 시간에 걸쳐 지구상에서 일어난 진화의 물리적 결과물인 만큼 언젠가는 그 활동과 기작이 모조리 밝혀질 것이다. 최근 정보기술(IT)과 인간의 두뇌를 직접 연결시키려는 노력이 활발한 것도 그런 흐름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급진적인 미래학자들은 이런 연구 끝에 인간이 육체를 벗어나 사이버스페이스와 기계 몸체로 옮겨타리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하지만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일은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우리 인간의 의식 그 자체임에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지극히 나약하면서도 그와 동시에 강인한 존재라는 건 역사와 현재를 통해 꾸준히 드러나고 있지만, 아직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대하는 데에 서투르다. 이제 과학과 기술이 새롭게 드러내는 우리의 참모습을 얼마나 인정하고 정책적으로, 사회적으로 적용할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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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은 겨울을 좋아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여름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채 부치고 장작 때던 시절의 이야기일 뿐. 요즈음 가난한 사람들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어느 한 곳 마음 줄 계절이 없다. 계절에 마음을 주지 않으면 어찌 되는가? 같이 사는 사람에게도 인색해지고 예민해지는 법. 그러니까 근래 들어 진만을 바라보는 정용의 마음이 꼭 그랬다. 얼굴만 봐도 괜스레 짜증이 나고 끈적끈적해지는 기분. 숨소리만 들어도 머릿속에서 팽팽한 철삿줄이 팅팅 소리를 내며 퉁겨지는 듯한 느낌. 그냥 이대로 찢어져서 따로따로 살까? 정용은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시작은 선풍기 때문이었다. 6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정용과 진만이 함께 자취하고 있는 반지하 자취방은 그야말로 습식사우나실로 변해 버렸다. 열기는 가두고 습기는 빨아들이는 방. 창문이 반대편 벽에 하나 더 있었더라면 좋았으련만…. 그쪽 벽 뒤는 말 그대로 지하였다. 정용과 진만은 몇날 며칠 잠을 설치다가 인터넷을 뒤져 4만원짜리 선풍기 한 대를 구입했다. 그 선풍기를 발치 아래에 두고 회전시키면 그나마 아쉬운 대로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한데, 지난달 중순 무렵인가, 누워 있던 진만이 발가락만 이용해 선풍기 고개를 아래로 더 푹 내린 다음부터 회전 기능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회전 버튼을 눌러봐도 끼리릭 끼리릭, 기괴한 소리만 낼 뿐 고개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이 함께 사는데 선풍기의 회전 기능이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그건 말하자면 회전초밥집에서 저 멀리 오고 있는 장어초밥이니 스테이크 초밥이니 하는 것들을 바로 옆 손님이 날름날름 먼저 채가는 것과 엇비슷한 상황이 된다는 뜻. 정용은 한밤중 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깰 때마다 저 혼자 선풍기 바람을 독차지한 채 잠들어 있는 진만을 종종 목격했다. 그때마다 정용은 인상을 한 번 구기고 나서 다시 조용히 선풍기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려놓았다(어느 날 밤인가, 또 한밤중에 깨어 슬쩍 선풍기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리고 잠든 정용은 새벽 무렵, 무언가 갑갑한 기분이 들어 잠에서 깨고 말았다. 실눈을 떠 옆을 보니 진만이 자신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팬티 바람으로! 그 뒤부터 정용은 잠에서 깨더라도 절대 선풍기 고개를 자신 쪽으로 돌려놓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각각 2만원씩 내고 산 선풍기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고장 났으면 응당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 정용은 선풍기를 볼 때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 생각을 진만에게 꺼내진 못했다. 정용도 진만도 벌써 한 달 가까이 아르바이트를 구하지 못한 상태였다. 방학을 맞은 대학생들도 모두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었으니, 바야흐로 아르바이트 춘궁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던 지지난 주 목요일엔 기어이 정용이 진만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화를 낼 일도 아니었지만, 정용은 그러지 못했다. 말하자면 여름이기 때문에 낼 수밖에 없었던 화.

정용과 진만은 돌아가면서 점심 준비를 하곤 했는데, 그래 봤자 자취방 앞 편의점에 나가 라면 세 개를 사 끓이는 것이 전부였다. 여름이어서 주로 짜장라면이나 비빔라면을 많이 해 먹었는데, 그날은 어째 라면의 색깔과 냄새가 좀 달랐다. 그리고 무심코 그 라면을 한 입 먹은 정용은 그제야 그것이 무엇인지 정체를 깨닫게 되었다.

“너, 너, 이거…?”

“괜찮지? 오늘 복날이잖아. 그래서 일부러 불닭볶음면 했어.”

혀끝에선 벌써 아린 맛이 퍼지기 시작했고, 곧이어 정수리 쪽에도 열이 올랐다. 선풍기는 정확히 밥상 가운데를 바라보며 맹렬히 돌고 있었다.

“야, 좀 생각이란 걸 하고 살자. 이렇게 더운 날 불닭볶음면이 말이 되냐?”

정용의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워졌다. 우리가 무슨 깻잎이냐, 우리가 무슨 인삼이야? 같이 익을 일 있냐! 정용은 아예 젓가락까지 내려놓은 채 화를 냈다. 진만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정용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무룩해졌고, 말없이 혼자 불닭볶음면을 먹었다. 정용은 그런 진만을 바라보다가 아예 자취방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후로 거의 2주 가까이 그들은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라면도 각자 끓여 먹었고, 잠도 멀찌감치 떨어져서 잤다. 정용은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고 사과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저 모든 게 다 지겹고 귀찮았을 뿐이었다.

어젯밤은 유난히 더 덥게 느껴졌다. 여름을 반으로 쓱 접으면 그 접힌 부분이 바로 어젯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등 뒤로 땀이 흘렀다. 정용과 진만은 불을 끄고 누워서도 계속 뒤척거리기만 했을 뿐 쉽게 잠들지 못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불쑥 진만이 말을 걸었다.

“덥지?”

정용은 대답을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 똑같지, 뭐.”

진만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내가 시원한 곳 데려가 줄까?”

진만은 그렇게 말하면서 주섬주섬 벗어두었던 반바지를 입었다. 정용은 귀찮았지만, 어기적어기적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진만이 데리고 간 곳은 동네 허름한 건물 이층에 위치한 동전 노래방이었다.

“노래를 하자고?”

정용이 인상을 찌푸리면서 묻자 진만이 가만히 있어 봐, 하면서 천 원짜리 지폐를 노래방 기계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그들이 들어가 있던 방에 에어컨이 작동되었다. 오백 원을 넣으면 한 곡, 천 원짜리 지폐를 넣으면 세 곡을 부를 수 있었다.

“이렇게 하면 세 곡 부를 때까지 계속 에어컨이 나와.”

진만은 찡끗 웃으면서 노래방의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이윽고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 반주가 시작되었다. 진만과 정용은 노래를 부르지 않고 가만히 모니터에 뜨는 가사만 바라보았다. 단군 할아버지부터 시작해 이중섭까지 다 나오는 노래, 노래방에서 가장 긴 노래….

역사는 흐르고 에어컨 바람도 흐르고, 여름밤도 흘러가고 있었다.

이기호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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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고객님께.

안녕하십니까. 미디어 시행령 7조 8항에 의거, 이 멀티미디어 메일이 광고임을 우선 알려드립니다. 하지만 동조 11항에 의거, 본 내용의 첫 항목까지 읽지 않으면 삭제되지 않음도 상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셀레스트 데이터’는 잊고 싶지 않은 사람을 되살려드리는 업체입니다(여기까지 읽으셨으면 버튼을 눌러 바로 광고를 삭제하실 수 있습니다). 계속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저희 셀레데이터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소개하겠습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여러분께서는 한때 유행했던 빅데이터라는 용어를 알고 계실 겁니다. 당시 빅데이터를 내세웠던 업체들은 빅데이터가 인류의 난제를 여럿 해결하고 더 합리적인 정책 결정과 복지까지 이끌어낼 수 있다고 홍보했습니다. 어느 정도 과장은 있었지만 빅데이터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습니다. 긍정적으로는 경제활동을 활발히 만드는 효과가 있었고, 집단 정신질환이나 미디어 종속성에 따른 폐해를 막는 의학적 효과도 보여준 바 있습니다. 반면에 빅데이터의 결과를 교묘하게 왜곡해 부정적인 여론을 형성하려는 집단도 있었고, 선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짜 데이터를 조직적으로 생산하려는 조직도 있었습니다. 이런 일련의 역사를 거치면서, 비록 빅데이터라는 용어는 사라졌지만 그 개념은 보이지 않는 삶의 배경에 완전히 녹아 있습니다.

이처럼 옛 용어를 다시 되새기는 것은, 저희 셀레데이터가 또 하나의 빅데이터 기업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함입니다. 저희가 추구하는 것은 오히려 스몰데이터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결과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더 이상 고객 여러분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되돌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별을 합니다. 대표적으로 수명을 다하거나 사고를 당해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사랑을 속삭이고 하나의 미래를 꿈꾸다가 사소한 문제가 불거져 끝내 헤어지고 만 연인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런 이별을 운명이라 불렀습니다. 삶이란 본래 그렇다며 체념하고 애써 아픔을 다독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만요. 우리가 지금 어떤 시대에 살고 있습니까? 운명이라는 우상을 과학과 기술로 타파해가는 시대가 아니던가요? 저희 셀레데이터는 바로 그 점에 착안했고, 바야흐로 이별조차 기술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셀레데이터는 떠나간 분의 데이터를 전부 수집합니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제약이 있지 않냐고요? 저희는 전적으로 합법적인 활동만을 합니다. 저희가 개발한 간접자료연역 기법을 이용하면 떠나간 사람이 좋아하던 음악, 좋아하던 장소, 좋아하던 분위기, 좋아하던 향수, 선호하는 음식은 물론이고 그분의 소비 및 창작 활동의 패턴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셀레데이터에 근무하는 뇌과학과 인지행동과학의 전문가들은 그런 패턴과 다량의 데이터를 종합, 분석해서 떠나간 분의 ‘인격’을 만들어 내고, 두 가지 인격 제품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떠나간 사람이 남겼던 향취와 추억만 간직하고 싶다면 ‘로즈메모리’ 상품을 추천합니다. 이 제품을 구입하시면 여러분이 들으시는 음악과 방송 목록에 떠난 이가 좋아하던 것들이 삽입되고, 기념일에는 그분이 사곤 했던 물건이 배달되고, 식당에 들르면 그분이 자주 주문하던 음식이 서비스로 제공될 것입니다.

더 직접적인 복구는 불가능하냐고요? ‘그린오토마타’는 그런 분들을 위한 제품입니다. 저희 셀레데이터는 수집한 데이터와 패턴으로 시뮬레이션 인격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린오토마타는 떠나간 사람과 똑같이 생긴 안드로이드에 시뮬레이션 인격을 심은 제품입니다. 떠나간 사람이 되돌아와서 소비자 여러분과 함께 호흡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겁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린오토마타는 사람뿐 아니라 반려동물 형태로도 제공됩니다.

이제 운명이라는 허깨비 때문에 괴로워하고 울 필요가 없습니다. 인구가 점점 줄고 만남보다 이별이 많은 세상에서 사랑하던 존재를 영원히 곁에 두는 건 여러분의 권리입니다. 주저하지 마시고 아래 링크를 눌러 더 상세한 상품 설명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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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해 전, 세상을 떠난 아버지가 레이싱 게임 속에 남겨놓은 기록을 뒤늦게 확인하며 눈물지은 사람의 이야기가 인터넷에서 회자된 적이 있다. 고인의 기록은 게임 속에서 경쟁하는 자동차의 형태로 남아 도로 위를 달리고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가 남겨둔 자동차의 기록을 차마 앞설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알 수 없지만 감동에 앞서 시사하는 바가 있다. 어떤 사람이 남긴 데이터가 곧 그 사람의 일부라는 점이다.

현재 우리가 세상에 남기는 데이터는 그리 많지 않다. 외부 세계와 우리를 이어주는 인터페이스가 감각적이고 간접적이며 기록할 수단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적, 일기, 약력, 업적, 인터넷 서점 사이트나 기타 쇼핑몰 사이트에 남은 주문 기록뿐 아니라 지인이 기억하는 우리 모습, 우리가 남긴 말, 행동 등이 전부 기록되고 자료화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이제 점점 데이터베이스의 객체가 되어가고, 인간의 두뇌 활동은 분석과 재생의 대상이 되는 중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가 정보의 형태로 완성되는 순간 인간의 정의는 새로 쓰일 것이다. 그 정의 속에 어리석음과 나약함이 너무 많이 포함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 우리 자신을 돌이켜볼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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