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친구와 오후 3시에 시청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모바일 앱을 켜고 버스 위치와 소요시간을 확인하니 집에서 떠나야 할 시간이 예상된다. 늦지 않고 약속장소에 잘 도착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겐 일상화된 일이지만 신호등도 없는 남아시아의 작은 나라 부탄에서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부탄 수도 팀푸시에는 56대의 버스가 다니고 있으나 배차시간이 길고 배차간격이 일정하지 않아 시민들은 버스 이용을 포기하고 걸어다니거나 좁은 도로에 너도나도 자가용을 끌고 나오기 일쑤이며, 이로 인한 교통체증과 배기가스 배출 증가는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고 있다.

부탄은 산림에 의한 이산화탄소 흡수량이 배출량보다 높은 전 세계 몇 안 되는 탄소중립국 중 하나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로 인한 빙하호 붕괴 홍수에 노출되어 있으며, 최근 산업공정과 교통부문의 온실가스 배출량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어 국제사회의 도움을 받아 이를 해결하고 전 지구적 문제인 기후변화에 대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지능형 교통시스템은 기후변화 대응을 위해 부탄이 최우선적으로 필요로 하고 있는 기술 중 하나이다.

비단 부탄만이 아니다. 2020년 이후 도래할 신기후체제에서는 선진국뿐만 아니라 개도국에도 온실가스 감축의무가 부여됨에 따라, 많은 개도국들이 자국의 온실가스 감축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국제사회에 기술과 재정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도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특히 과기정통부는 2015년 12월 유엔의 기후기술협력 국가창구(NDE)로 지정된 이래로 개도국들의 기술지원 요청에 부응하고 우리나라의 우수한 기후기술과 기업들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오고 있다.

먼저, 유엔의 개도국 기술지원 사업을 선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특히 유엔의 개도국 기술지원 사업은 회원기관으로 가입해야 참여가 가능한데, 우리나라의 경우 48개 산학연 기관이 회원기관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이다.

또한 개도국 기술지원에 더욱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올해부터 ‘기후기술현지화 지원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여기에 참여 중인 정부출연연구소와 기업들은 기후기술 협력 프로젝트를 개도국 현지에서 직접 발굴하고 국내 기후기술이 개도국 현지에 적용될 수 있도록 기술실증 등을 추진한다.

그뿐만 아니라 과기정통부는 이렇게 추진된 기술협력 사업들이 국내외 다양한 기후재원들과 연계되어 확장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올해 ‘기후기술현지화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부탄 팀푸시의 2개 버스노선에 버스정보시스템 실증시설을 구축했다. 향후 국내외 기후재원과 연계해 부탄 팀푸시 전역에 버스정보시스템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지능형 교통시스템을 도입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이 시스템이 부탄에 정착했을 때 인도 등 인접 국가에 미치는 파급효과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 중소기업 등 민간이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될 것이며, 우리나라의 위상도 높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정병선 과기정통부 연구개발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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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 일간지가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랍에미리트연합(UAE) 방문을 두고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UAE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꼼수 조치였다는 추측성 보도를 한 뒤, 이를 정치권 일각에서 정부 비판으로 확대재생산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정작 UAE 원전사업의 향방은 대통령비서실장이 짧은 며칠간의 일정 동안 UAE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아니라 UAE의 원자력안전규제기관(FANR)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사실은 빠진 채 엉뚱한 문제로 핵심적인 이슈가 묻히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애초 한전과 UAE 당국의 계획에 따르면 바라카 원전 1호기는 지난해 말 운전허가를 받았어야 했다. 그러나 바라카 원전 예비 운전원들의 실습훈련 대상인 참조 원전 신고리 3호기의 준공이 당초 예정됐던 2013년에서 케이블 시험성적서 조작 스캔들로 3년 후인 2016년 말로 지연되면서 운전원들의 숙련도 미비가 심각한 문제로 불거졌다.

이에 UAE 원자력안전규제기관은 지난 5월 바라카 1·2호기의 운전허가를 한 차례 불허한 바 있다. 국내 원자력계는 언론을 통해 올해 12월이면 운전허가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지만, 국제원자력계 전문지들에 따르면 이미 내년으로 미뤄진 상황이다. 지난 10월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18일간 바라카 현장을 방문해 예비 운전원들의 숙련도를 점검했다.

IAEA는 자체 평가결과를 연말까지 UAE 안전규제기관에 통보할 예정이다. 하지만 IAEA가 이미 2015년에 바라카 원전 예비 운전원들의 사고 대응능력이 부족하다고 지적한 바 있어, 불과 2년 만에 바라카 원전 운전허가에 긍정적인 방향으로 의견을 바꿀지 의문이다.

이처럼 신고리 3·4호기의 비리 스캔들과 그에 따른 바라카 원전 운전원들의 훈련 부족 문제가 국제사회와 UAE 안전규제기관에서 심각한 안전문제로 부각된 상황이다.

UAE 당국으로서는 일사천리로 운전허가를 내주었다가 훈련이 부족한 운전원들이 혹여라도 인적 실수로 사건·사고를 일으킬 경우 규제기관으로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어서 운전허가를 쉽게 내주기 어려운 상황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미 수개월 전 국내 언론에 알려진 것처럼 바라카 원전 준공 지연으로 하루 60만달러씩 지체보상금을 지불해야 하고, 2만명이 넘는 건설인력 중 상당수가 철수하지 못하고 현지에서 1년을 더 체류하게 되면 당연히 인건비, 관리비 등 막대한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 한전과 한수원은 민간이 아닌 공기업이라는 점에서 향후 발생하게 될 비용은 결국 국민의 몫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트집잡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의 태도는 생뚱맞을 뿐만 아니라 국민들을 오도하는 행위이다.

이 시점에서 정작 언론이 해야 할 역할은 왜 이런 사태까지 왔는지 차분히 돌아보며 향후 국내 원전 안전규제체계의 근본적 개선방안 등에 눈을 돌리는 것이 아닐까? 사실 신고리 3·4호기 제어케이블의 시험성적서 조작 스캔들은 과거 국내 관행을 돌아볼 때 후쿠시마 원전 사고 여파만 없었다면 외부에 공개되지도 않은 채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조작행위가 은폐되지 않고 밝혀진 것은 천만다행이지만, 국내 원자력계가 이 사건 이후 충분히 개선되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원전 수출 드라이브’와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부각시키는 언론의 보도행태는 그만큼 국내 원자력계 안전 개선에 대한 경각심을 감쇄시키는 치명적인 독이 된다.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진행된다 하더라도 국내에는 여전히 24기의 원전이 남아있고 향후 4기가 더 추가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석광훈 녹색연합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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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10월 멕시코 올림픽 남자육상 200m 경기 시상식. 미국의 토미 스미스(1위)와 존 카를로스(3위)가 검은색 스카프를 두른 채 시상대에 올랐다. 미국 국가가 흘러나오자 두 선수는 성조기를 외면한 채 검은 장갑을 낀 손을 들어올렸다.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 표시였다. ‘검은 장갑 시위’ 말고도 스포츠가 정치적 의사표현의 도구가 된 사건은 많다. 1908년 런던 올림픽에서 에드워드 7세에 대한 미국 팀의 경례 거부, 1948년 런던 올림픽 경기에서 독일·일본팀 축출, 미국의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참가거부와 소련의 1984년 LA 올림픽 보복 보이콧….

‘핑퐁외교’는 스포츠가 국가 간 관계개선을 위해 나서서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대장정 등 고난의 세월을 보낸 홍군은 탁구로 지친 심신을 단련했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 등 혁명 주체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오는 펜홀더 그립을 쓰다가 셰이크핸드 그립으로 바꿀 정도로 탁구 솜씨가 능숙했다. 저우는 탁구에 빠져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다. 미국이 중국과 관계개선을 위한 수단으로 탁구를 선택한 것은 적중했다. 그 결과 중국은 ‘죽의 장막’을 걷고 국제사회로 나왔다.

흔히 스포츠는 정치를 배제하고 중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스포츠는 늘 정치의 연장이었다. 국가 지도자들은 흔히 스포츠라는 비정치적 방식을 통해 정치적 해결을 추구하려 한다. 국가 간 스포츠가 국가의 정치적 의지가 작용한 결과물인 경우가 많은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동·서독과 남북한도 체육교류를 통해 민족의 화합과 갈등 완화를 모색해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 NBC 인터뷰에서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한·미연합군사훈련 중단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러면서 “북한도 도발을 멈춘다면 올림픽 안전 개최뿐 아니라 북·미와 남북 사이 대화 분위기 조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핵 해결에 평창 올림픽을 적극 활용할 뜻을 밝힌 것이다. 스포츠의 탈정치를 주장하는 이들은 거부감이 들지 모르겠다. 문 대통령의 의도가 성공할지도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조성을 위해 무슨 대책이든 시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평화와 올림픽은 궁합도 맞는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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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에너지 전환시대로 접어든 걸까? 에너지 전환은 이제 문재인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 중 하나다. 에너지 전환이 무슨 의미고 왜 필요한지 알고 싶다면 정부가 만든 에너지전환정보센터(www.etrans.go.kr)를 방문해보라. 이런 자료를 정부가 제공하다니 참으로 큰 변화다.

그렇지만 벌써부터, 또 갈수록, 에너지를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뜨겁다. 다양한 목소리들이 분출하고 있다. 산업화 과정을 지원해왔고 이미 적지 않은 일자리나 지역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는 기존 에너지 체계를 바꾸려 하기에 당연한 일이다. 정부의 에너지 전환 의지를 담은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둘러싸고도 지지와 반대, 보다 적극적인 대응 요구 등 다양한 의견이 개진될 것이다. 에너지 체계를 둘러싸고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존재하고 그들이 자신들의 이해나 가치를 중심으로 목소리를 활발하게 내는 건 우리 사회가 그만큼 건강하다는 증거다.

그런데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고 존중받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제시된 모든 의견이 다 옳은 건 아니다. 각자의 위치와 상황에 따라 달리 보일 수는 있겠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전력공사가 영국 무어사이드 원전 사업권 인수를 위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었다. 이를 두고 벌써 원전 수출에 성공했다는 식의 보도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탈원전·원전 수출 구도의 모순으로 국내 탈원전정책이 해외 수출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날 선 비판이 드세다.

하지만 정작 영국과 협상했던 조환익 전 한전 사장은 탈원전정책이 원전 수출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국내 원전정책은 경제성, 환경성, 안전성 등의 가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데 비해 해외 원전 수출은 “시장과 산업” 문제로 해당 수입국이 결정한 원전 건설 요구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한국은 원전 밀집도와 소수 지역의 다수호기 집중도, 원전 밀집지 주변 지역 인구 규모에서 세계 최고인 데다 최근엔 지진 위험까지 더해져, 국내 원전의 단계적 축소는 정당성을 가지기에 산업으로서의 원전 수출이 별개로 진행될 수 있다. 물론 위험기술의 해외 수출을 윤리적으로 문제 삼을 수는 있지만 말이다.

더군다나 환경운동연합이 성명서에서 지적하듯 영국 무어사이드 신규 원전 건설 건은 ‘투자사업’이다. 일본 도시바가 포기한 원전 사업권을 인수, 한전이 비용을 조달해서 APR 1400 두 기를 건설한 후 향후 60여년간 전기 판매 이익을 남겨 투자금을 회수해 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도시바가 기술이 부족해서 포기했을까? 문제는 건설 금융 조달과 투자금 회수 가능성이다. 영국에서는 최근 승인된 해상풍력 발전사업의 전기 판매가격이 ㎿h(메가와트시)당 58파운드 아래로, 힝클리포인트 C 원전 2기의 향후 35년간 고정 판매가격인 92.50파운드보다 낮았다. 이런 상황에서 판매가격을 충분히 보장하는 계약을 맺지 못하면 한전이 수익은커녕 투자금을 온전히 회수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다. 투자 실패 시 공기업인 한전 손실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 된다. 그야말로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의견과 사실이 이렇게 다르다.

게다가 최근 한수원 노조에서는 탈원전 목소리를 내온 교수와 시민단체 활동가, 변호사, 산업통상자원부 공무원 등에 대해 대대적인 고소·고발에 들어갈 계획으로 알려져 있다. 의견이 다를 경우 법적 다툼이 아니라 각자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며 토론하고 소통하는 게 필요하다. 의견 차이와 갈등은 회피할 게 아니고 직시하고 대면해서 상생을 지향하며 풀어가야 한다. 엇갈리고 대립되는 목소리를 누르기보다 드러내고 다퉈야 한다. 그렇기에 에너지 전환은 에너지원만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 사회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길이기도 하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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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정책들이 ‘공정하지 않다’는 일부(라고 믿고 싶다) 여론의 기세에 밀려 좌초 중이다.

시위현장에서, 공청회장에서 ‘기회와 과정의 평등 YES! 결과의 평등 NO!’라는 팻말을 든 이들의 표정은 비장하고 목소리는 단호하다. 열의를 보면 작금의 정책이 모든 노동자의 급여를 동일하게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결과의 평등은 대졸자, 고졸자에게 똑같은 보상을 한다는 게 아니라, 인간다운 삶에서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평등한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존엄성이 서로 사랑만 하면 보장되나? 돈 없으면 이웃이 아무리 인자한들, 삶은 비루해진다. 가장이 주 40시간 노동하여 받는 급여로 가족을 시대에 걸맞게 부양할 수 있었다면 비정규직 문제는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산들 노동지위가 계약직이면 고작 1년 앞도 예측할 수 없다. 게다가 의료, 주거, 교육, 정보의 공공성이 아직은 요원한 나라다. 받는 돈이 200만원도 되지 않는다면(월급쟁이 43%에 해당), 월세와 휴대폰 할부금 내기 바빠서 저축은 언감생심이다. 가족이 수술이라도 하면 살림은 거덜 난다. 200만원이면 가족이 존엄할까? 치킨 한 마리 먹을 때마다 심사숙고하고 몇 년에 한 번쯤 제주도 여행 가는 걸 두려워한다면 그게 어디 ‘2017년’의 삶이라 할 수 있는가? 밥만 안 굶어도 행복할 수 있는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무심코 틀어놓은 홈쇼핑 채널을 보다가 오래된 텔레비전을 36개월 할부로 바꾸는 과감한 결심을 21세기에도 ‘사치’라고 한다면 이 빌어먹을 자본주의는 완전 사기다. 크루즈 세계여행을 가겠다는 것도, 한우갈비를 먹겠다는 것도 아니다. 단지 평범하겠다는 사람을 앞에 두고 ‘더’ 고생한 사람 있으니 사람 가려 보편적 권리 따지자는 게 과연 ‘공정’한 것일까?

‘누구나’ 평범하게 살 수 있는 정책을 논하자는데, 자꾸만 ‘그들의’ 실체를 알려주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인류가 취해왔던 가장 나쁘면서도 효과 좋은 대화법이다. 들어보니,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자들은 ‘무임승차’하겠다는 염치없는 작자들이다. 남들 공부할 때 ‘놀았고’, 누군가가 미래를 준비할 때 ‘편하게’ 아무 일이나 기웃거린 나태한 사람들이다. 놀다가 그리 되었다는 논리는 무지하고 ‘당해도 싸다’는 식의 인식은 비열하다.

악의적인 편견을 가진 자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도 우습다. ‘억울한 마음 모를 바 아니지만 이해 바란다’면서 이들을 달래면 안된다. 그러면 ‘어떤 가치 있는 행위를 했는지도 모르겠는 사람들이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동정 받는 게 정상이냐’(S대학 인터넷 커뮤니티)는 말이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성인군자가 베풀어주는 은혜가 아니다. 당연한 권리가 누군가의 배려로 이루어진다면 ‘혜택 받은 자’들은 늘 눈치 보며 살아야 한다. 그러다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머리가 저리 나쁜데 운 좋아서 정규직이 되었다’는 조롱을 듣게 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정규직 전환 정책은 누굴 동정해서가 아니라, 권리가 필요한 사람들을 ‘이제야’ 직시한 다른 모두의 책무가 실천되는 것일 뿐이다.

‘차별의 설움’과 ‘노력의 허무’는 다른 층위에서 논해야 하지만,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한 줄 아느냐!”는 사람들의 절규가 거세다. 왜 이들은 고작 정규직 일자리 하나 얻고자 많은 걸 포기해야만 했을까? 그 일 아니면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현실을 목도했기 때문일 게다. 아니었다면 진로를 바꾸지 않았을 수도, 연애를 포기하지 않았을 수도, 아니면 여유롭게 책도 읽으면서 결과의 평등을 오해하지 않고 살았을지 모른다.

이 울분을 ‘재발방지’하려고 사회가 노력해야 함은 마땅하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이 객관적으로 좋아지는 것은 누군가가 꿈을 포기하는 것을 예방하고 청년들이 제한된 일자리를 얻고자 살인적인 경쟁을 하는 파국을 조금이나마 진정시킨다. 눈물을 외면한 게 아니란 말이다.

하지만 ‘고생에 걸맞게’ 권리의 우선순위를 따지는 사람들의 심보 덕택에 앞으로 취업스펙은 더 화려해질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때는 요람에서부터 ‘요즘 세상 장난 아니야’를 들으며 지금보다 더 많이 포기하고 노력해야지만 정규직이 될 것이다.

관문을 통과한 이들이 지금의 정규직을 보고 생각할 거다. ‘솔직히 우리보다 고생한 것도 아닌데, 챙길 건 다 챙겨먹네.’ 누군가의 ‘심정’을 고려한다고, 차별받는 노동자의 ‘물정’을 바꾸자는 정책을 공정하지 않다고 하는 사회의 미래가 어디까지 괴기스러워질지 나도 궁금하다.

<오찬호 | 작가·<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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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으로 수능이 연기되면서 수험생들이 혼란을 겪었다. 혼란은 시험 내부에도 있었다. 국어와 수학이 어렵게 출제되면서 평소보다 성적이 떨어진 학생들도 늘어났다. 여기에 일부 수험생들을 당황하게 한 악재는 영어와 한국사였다.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쉽게 등급을 맞출 것으로 봤음에도 3등급 이하의 성적이 나온 학생들이 많았다. 이러한 변수는 한국사에서 두드러져 자격고사 정도의 시험에서 4등급 이하를 받아 수시전형 시험 기회를 상실하거나 정시에서 불이익까지 겪을 학생들도 늘었다. 천재지변으로 입시일까지 변경된 수험생들은 시험 자체에서도 여러 가지 지각변동을 체험한 셈이다. 시험 하나에 내재한 많은 내적 변수는 적절히 통제해 단순화시켜야 한다.

우선 영어의 등급 비율이다. 영어가 절대평가로 전환되면서 교육현장에서는 상위 등급 비율이 관심사가 되었다. 올해 6월 모의고사에서 8% 정도 1등급을 받으면서 절대평가로 인한 등급 문제는 줄어드는 듯했다. 그런데 9월 모의고사로 가면 1등급 비율이 5%대로 폭락한다. 그 결과 원서접수 기간부터 학생들은 자신의 예상 수능 성적을 계획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본 시험을 코앞에 두고 영어까지 추가로 공부할지 고민했다. 절대평가로 전환해 학습 부담을 줄인다는 정부의 의도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낮은 난이도를 유지해야 했음에도 수능 2개월 전 치른 시험이 어려웠던 것이다. 가뜩이나 국어와 수학 난이도가 지속적으로 올라가는 상황에서 학생들이 느낀 부담은 매우 컸다.

영어 난이도를 균등하게 확보할 구체적인 방안이 필요하다.

한국사 역시 문제이다. 수능 시험에서 상당수 학생들이 한국사 난이도가 올라 낮은 등급을 받았다. 일단 수능 시험에서 한국사를 의무적으로 치르는 것부터 문제이다. 이는 수능 시험에 대한 부담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 역행하는 퇴행적인 제도이다. 또한 지난 정권에서 시도한 국사교과서 국정화, 즉 정권이 강요한 공동체의 과거에 대한 단일 담론이라는 획일적 결과가 수능 내 한국사 시험이다. 개인적으로 조속한 시일 내에 폐지해야 하는 비합리적 제도라고 보는데, 난이도에 대한 합리적 조정이 우선이다. 모의고사와 본 시험 간 난이도 차이가 크면 학생들은 높은 난이도에 맞게 대응하게 되고, 이는 추가적인 부담이 된다.

장기적으로 수능은 언어와 추리라는 두 영역으로 재편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런 단순화가 어렵다 해도 가능한 영역에서 수험생들의 부담을 줄여야 한다. 그런데 절대평가나 자격고사를 기치로 내건 영어와 한국사에서 많은 학생들이 준비의 어려움을 겪었다.

올해 3학년 학생들은 공부시간 대부분을 국어와 수학에 투자했다. 풍선효과는 실제로도 이어졌으며, 이를 근거로 내년에도 학생 대부분은 국어와 수학을 공부할 것이다. 전술한 두 과목을 집중 학습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긍정적인지 여부를 떠나 이러한 현실은 영어나 한국사 등이 안정적인 예측치를 가질 때 정당화된다.

쉽고 간편한 시험으로 영어를 인식하도록 난이도 안정화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시급한 폐지가 요구되는 한국사 시험은 최소한의 준비로 끝낼 수 있도록 쉬운 출제를 일관성 있게 고수할 필요가 있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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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사람을 채용할 때는 제대로 대우하면서 하여야 한다는 ‘노동존중사회’의 정신을 구현”한다는 표현을 정부 문서에서 발견할 줄은 몰랐다. 불과 몇달 전까지, 정부가 노동자를 사람 취급하는지도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부가 7월 ‘공공부문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에 담은 정책 취지다.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 대표적인 비정규직 남용 사업장인 인천국제공항을 방문하여 선언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는 이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놀라움과 기대로 시작한 정책이지만, 실제 현장에서 추진되는 과정에 곳곳에서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정권교체 이후에도, 공공부문 곳곳에서 비정규직을 남용하고 차별하던 관행은 쉬이 사라지지 않는다.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도 왜곡되거나 무시되기 일쑤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5월 12일 ‘찾아가는 대통령’ 첫 방문지로 찾은 인천국제공항공사에서 한 노동자가 이야기 도중 눈물을 훔치고 있다. 문 대통령은 ‘공공기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대책을 밝혔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런 사정 때문에, 대통령이 다녀간 사업장이고, 그나마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단결하여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인천공항에서 정규직 전환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국민의 관심이 많다. 그러나 인천공항에서조차 정규직 전환은 큰 벽에 부딪혀 있다.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을 “무임승차”라고 비난하는 일부 정규직 직원들의 집단 반발도 문제이지만, 이를 핑계로 십수년간 전체의 90% 가까이를 비정규직으로 채워온 인천공항공사 측의 본능이 다시 깨어났기 때문이다. 회사는 비정규직을 인천공항공사로 직접고용할 경우 공개경쟁시험을 치러야 한다는 입장이다. 십수년간 공항을 안전하게 운영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졸지에 무자격자 취급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탈락자가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공개경쟁시험은 ‘고용안정’을 제공하겠다는 정책 취지와도 어긋난다.

또 직접고용을 하게 된다면 정부가 ‘고령자친화직종’으로 65세까지 근무를 인정한 청소·경비 노동자의 정년연장도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정책의 목적과는 정반대로 많은 비정규직들이 당장 해고될 위험에 처한다. 정부의 가이드라인은 상시지속업무는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특히 ‘생명·안전’과 관련된 업무는 반드시 직접고용하라는 것이다. 자회사는 오히려 예외적인 방안이다. 하지만 회사는 직접고용 전환 “0명”, “10분의 1만 적용”이라는 방안을 내놓고 노·사·전문가협의에 제시했다.

정부가 이런 억지를 인정하는 정책을 제시했던 것은 아니다. 필자도 노동계 대표로 정책협의 과정에 참여한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의 원래 취지는 그렇지 않다. 최소 기준을 제시한 후 정책 취지에 따라 노사가 협의해 구체적인 방안을 정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자율적인 협의라는 좋은 말에는 함정이 있다. 정규직 전환을 책임져야 할 사용자가 끝까지 억지를 부리면 합의가 불가능하다. 정부가 제시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가이드라인은 이런 과정을 거쳐 인천공항에서는 “직접고용 정규직화 제로”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런 뒤집힌 공공기관 운영이 이루어져서는 안된다.

그나마 여론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친 인천공항마저 이럴 정도면 다른 곳은 더 심한 것이 당연하다. 여러 공공기관에서 비정규직 현황을 누락하거나, 오히려 전환 전에 해고하려는 행태가 발생하고 있다. 노사 간의 힘이 근본적으로 사용자에게 쏠려 있는 사회다.  정부가 인천공항은 물론 여러 공공기관을 꼼꼼히 살피고, 가이드라인이 취지에 맞게 제대로 적용되고 있는지 챙기지 않는다면, 좋은 취지로 시작한 정책이 비정규직 당사자들에게 큰 상처를 남길 우려가 크다.

가이드라인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민간부문을 선도할 모범적 사용자로써 공공부문은 더욱 솔선수범하여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공공부문에서부터 비정규직들의 정규직 전환을 시작한 취지일 것이다. 민간까지 “사람을 채용할 때는 제대로 대우”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공기관 사용자들의 일탈을 정부가 더 방치해서는 안된다.

<박준형 |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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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화성-15형’ 시험발사로 내년 2~3월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의 평화적 개최가 위태로워졌다. 만에 하나 29일의 미사일 발사가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과 북한의 추가 도발의 방아쇠가 된다면 세계인의 축제이자 평화제전이라는 올림픽의 취지가 빛을 잃게 된다. 이대로 가다간 ‘평화올림픽 이전에 전쟁올림픽이 먼저 펼쳐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을 해야 할 판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유엔이 지난 14일 평창 올림픽 휴전결의안을 채택한 데 이어 정부는 올림픽 기간에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한다는 구상을 검토하고 있다. 이런 한국과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북한이 화답할지 현재로선 불투명하다. 다만 북한이 미사일 발사 이후 낸 성명에서 스스로를 ‘평화애호국가’로 칭하며 “세계 평화와 안정을 수호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한 점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공연한 수사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국면전환을 시사한 것일 수도 있다. 그간 북한이 핵무력 완성 후에 미국과 담판짓는다는 이야기를 해왔던 점을 상기해본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점도 음미해봐야 할 대목이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최대의 압박과 관여’를 하겠다며 대북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지만, 성과는 신통치 않다. 미국과 국제사회가 대북 압박 수위를 최고로 끌어올려 ‘풀을 뜯어 먹는’ 처지가 된다 한들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군사 해결 방식은 한국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다. 결국 북한과 미국, 남북 간의 대화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점은 자명하고, 이 대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평창 올림픽은 기회가 될 수 있다.

그간 문재인 정부는 북핵 문제에 소극적인 태도로 임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강경태도, 국내 보수여론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았다는 점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변명이 될 수 없다. 한국은 각국에서 오는 손님을 맞이해 잔치를 치러야 할 올림픽 주최국이다. 문재인 정부가 평화올림픽의 개최를 위해 능동적으로 나서는 것은 선택이 아닌 의무사항이다. 분단국가 한국에서 치러지는 올림픽이 명실상부한 평화의 제전이 되도록 문재인 정부가 북핵 해결에 용기와 상상력을 발휘할 것을 기대한다. 우리에겐 시간이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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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겨울의 연례행사처럼 전북 고창과 전남 순천만에서 고병원성 AI(조류인플루엔자)가 검출됐다. 비상상태에 들어간 방역당국은 순천만 전면 폐쇄와 심각 수준의 방역 실시라는 선제적 조치를 취했다. 가장 극단적인 선제적 조치는 물론 AI의 숙주 자체를 제거하는 ‘살처분’이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강원도는 소규모 농가의 닭과 오리를 수매해 도태시키기로 했다. 소규모지만, 살처분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살처분의 끔찍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겨울 AI로 3000만마리의 닭과 오리가, 2010년엔 구제역으로 300만마리의 소와 돼지가 살처분당했다. 상당수는 생매장되었다. 그런데도 AI나 구제역의 창궐과 대규모 살처분의 근원으로 꼽히는 공장식 축산은 요지부동이다.

지난 11월, 제주시의 한 공장에서 현장실습 중이던 고교생이 프레스에 눌리는 사고를 당해 사망했다, 18번째 생일을 나흘 남긴 채. 지난 1월 전주의 유플러스 고객센터에서 현장실습 나온 여고생이 목숨을 끊었다, ‘콜수’를 못 채웠다는 문자를 남긴 채. 지난해 서울 구의역에선 스크린도어 수리를 하던 현장실습생이 전동차에 치여 사망했다, 뜯지 못한 컵라면과 숟가락을 가방에 남긴 채. 매년 6만여명의 고교생들이 ‘산업체 현장실습’이라는 이름으로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현장에 배치된다. “꿈을 키울 수 있는 현장실습 환경을 만들어 달라”는 학생들의 호소와 요구의 정당성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도 학생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노동현장의 환경은 변할 줄 모른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해 가격을 매기고 매매가 이뤄지는 곳이 시장이라면,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이 시장으로 변한 지 이미 오래다. 생명도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신격화된 시장의 이익 앞에서”(프란치스코 교종 <복음의 기쁨>) 약자의 절규와 호소는 들리지 않는다. 공장식 축산이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하는 한, 엄청난 규모의 살처분을 하더라도 변화는 없다. 열악하고 위험한 노동현장이 더 많은 이윤을 보장하는 한, 인명피해가 반복되어도 변화는 없다.

돈과 시장의 압도적 우위는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감지된다.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에서 시민참여단은 원전 2기의 증가를 뜻하는 ‘공사 재개’와 ‘원전 축소’를 선택했다. 일부 언론은 절묘한 선택이라며 치켜세웠지만, 분명히 모순된 선택이다. 여기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매몰비용’이라는 시장 논리가 안전, 환경, 지역주민의 피해 같은 의제들을 압도했을 가능성이 크다. 지난달 24일,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가 두 번이나 부결시킨 설악산 오색케이블카사업을 조건부 승인했다. 연간 365만명, 하루 평균 1만명의 탐방객으로 몸살을 앓는 설악산이지만, 아직도 활용이 부족하다고 한다. 자연공원 내 케이블카 금지를 위한 법률 개정이 진행 중인데 정부는 설악산에 케이블카를 놓겠다고 한다. 시장 논리 외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시장이 사회를 지배하면서, 돈이 ‘신’으로 등극했다.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맘몬(물신)을 섬기는 시대다. 맘몬의 시대에는 언제나 수많은 약자들이 희생 제물로 내몰린다. 그러나 약자를 배제하고 강자만을 위하는 것은 실패한 사회다. “소수는 다수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웬델 베리 <생활의 조건>) 약자의 권리가 인정되도록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어야 한다.

지난 정부에서 일어났던 불행한 일들이 새 정부에서도 계속되고, 지난 정권이 시작한 불의한 일을 새 정권이 이어받는 걸 보는 건 허탈한 일이다. 정권은 바뀌었지만 아직 세상은 바뀌지 않았음을 받아들이는 건 힘든 일이다. 세상을 변화시킬 만큼 사람들이 변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는 건 아픈 일이다. 강자만이 아니라 약자들도 존중받는 사회로 가는 길은 아직도 멀고 험하다. 여전히 촛불을 들고 거리에 서야 하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아직, 추운 겨울이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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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시간 단축을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막판 고비를 넘지 못하고 있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여야 3당 간사가 휴일근로 수당을 지금처럼 통상임금의 150%만 지급하는 방안에 합의하자 노동계뿐 아니라 여당 내부에서도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국회 환노위는 28일 소위를 열어 ‘휴일근로 중복할증’ 방안을 논의했으나 이견을 좁히지 못해 올 정기국회에서 근로기준법 개정안 처리가 불투명해졌다. 중복할증이란 노동자가 휴일에 근무하면 휴일수당과 연장수당 둘 다 지급하는 것을 말한다. 중복할증이 근로기준법 개정안의 쟁점으로 떠오른 것은 법원이 휴일근로는 연장근로에 포함되는 만큼 하루 통상임금의 150%가 아닌 200%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비롯됐다. 지금까지 고용노동부는 행정해석을 통해 ‘휴일근로는 연장근로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왔다. 이런 행정해석은 주당 노동시간을 최대 68시간(주 5일  40시간+연장근로 12시간+토·일 근로 16시간)으로 늘리는 결과를 낳았다.

한국 노동자 연간 노동시간 2113시간, OECD 회원국 연간 평균 노동시간 1766시간. 출처: 경향신문DB

여야는 올해 초부터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논의해왔다. 국회 환노위 여야 3당 간사는 지난 23일 휴일근로도 연장근로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고 주당 최대 노동시간을 52시간으로 못 박는 내용에 합의했다. 그러나 휴일근로에 대해서는 하루 8시간까지는 현행처럼 50%만 가산해 통상임금의 150%만 지급하도록 했다. 150% 지급에 찬성한 의원들은 휴일근로 중복할증에 따른 기업의 부담이 가중되고, 중복할증이 되레 노동자들의 휴일근로를 유인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휴일근로 중복할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노동부의 잘못된 행정해석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자 장시간 노동을 막기 위한 근로기준법을 개악하는 일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정당한 임금을 받고 주 40시간을 일하며 휴일에 쉬는 것을 원한다. 초과근무 수당을 받기 위해 휴일에 일하는 노동자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애초 초과근무에 할증을 붙인 것도 휴일이나 연장근로에 ‘비싼 값’을 매겨 장시간 노동을 억제하자는 취지가 담겨 있다. 그렇잖아도 한국 노동자들의 연평균 노동시간은 세계 최장 수준이다. 지난해 기준 2069시간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평균(1764시간)보다 305시간이나 길다. 장시간 노동에 내몰리는 것도 억울한데 법정수당마저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여야는 주당 노동시간 52시간 법제화와 휴일근로 중복할증 적용을 통해 장시간 노동이 일상화된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전기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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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적 방법에 의한, 평화를 위한, 평창 올림픽, 그 험난한 도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지난 13일 오전 10시(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기간 휴전을 결의하는 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이로써, 숱한 무리수와 거의 파괴적인 개발 홍역에도 불구하고, 내년 2월의 동계올림픽이 평창에서 열려야만 하는 상황적 명분을 일단 사후적으로라도 확보했다.

다행이다. 이마저도 없었더라면 평창 올림픽의 역사적 명분이나 문화적 가치는 훨씬 가벼워졌을 것이다. 김연아 홍보대사가 특별연설에서 밝힌 대로 평창 올림픽은 “남북의 얼어붙은 경계를 넘어서 평화적 분위기 조성”을 모색할 수 있는 일차적인 출발점이다.

그러나, 누구나 아다시피, 결의안 채택이나 특별연설로 평화적 분위기가 금세 조성되지는 않는다. 그럴 수만 있다면 인류는 이미 기원전부터 평화적인 황금시대를 살아왔을 것이다.

근래의 올림픽 역사에는 피의 흔적이 배어 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때는 선수촌에 테러집단이 침입해 이스라엘 선수들을 살해했고 1984년 동계올림픽을 치른 사라예보는 1990년대 이후 끔찍한 내전에 시달렸다. 올림픽 기간 중에라도 휴전을 하자는 결의를 1993년부터 채택해 왔지만 러시아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당일에 조지아를 침공했다.

결의안이 한낱 종이 쪼가리에 지나지 않을 수 있음을, 올림픽의 흑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안만큼은 아니더라도, 우리로서는 193개 회원국 중 157개국이 만장일치로 통과시킨 휴전결의안을 더욱 무겁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크게 세 가지로 천명된 사안 중 핵심은 올림픽 기간 전후(개최 7일 전부터 종료 7일 후까지) 적대행위 중단이다. 이 기간만이라도 북은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고 남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하는 것이다. ‘일시적인 쌍중단’인데, 이를 미국이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므로, 우리로서는 유엔의 휴전결의안을 효과적인 우회로로 삼아 일시적이나마 실질적인 상호 적대행위 중단을 추진할 수 있다.

아직 청와대와 군 당국은 ‘한·미동맹’이라는 강력한 제어장치를 고려하여 훈련 연기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중단이 취소가 아니라 연기를 뜻하는 것이라면 충분히 추진할 만한 사항이다. 현재 북한은 도발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식으로든 밝힌 상태는 아니지만, 가을 이후 겨울에 이르는 동안 일단 충격적인 도발 요법은 쓰지 않고 있다.

미국의 ‘테러지원국 재지정’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지 의문이지만, 최소한 북한 병사의 판문점을 통한 탈북 사건 등의 국지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국면에서, 우리 정부가 평화를 위한 평창 올림픽의 의지를 다각도로 밝히면서 북한 선수단의 참가, 안전 보장 및 스포츠 교류를 위한 특사 교환 등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면, 적어도 내년 2월의 한반도가 조금은 더 따스해질 것이다.

결의안 중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스포츠를 통한 평화, 개발, 인권 증진’이다. 이 결의안이 북한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상정하고 채택된 것이지만 ‘스포츠를 통한 평화, 개발, 인권 증진’이라는 목표는 특정 국가의 개별적인 사안이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공동으로 추진해야 할 인류사적 목표다. 비단 올림픽 기간만이 아니라, 남북 상호간에나 우리 사회 내부에서나, 반드시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숙제다. 평화는, 단순한 캠페인 몇 번으로는 도저히 획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단순히 말로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정부와 조직위원회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상호 군사행동 중단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는 ‘스포츠를 통한 평화, 개발, 인권 증진’이라는 유엔결의안을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좋은 말 대잔치’로 그쳐서는 안될 중요한 사안이다.

‘스포츠를 통한’이라는 표현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그 하나는 도구적 측면이다. 이른바 ‘핑퐁 외교’처럼,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를 상호 적대하는 나라끼리 친선의 가교로 만들거나 한 사회 내에 첨예한 갈등을 해결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스포츠는 충분히 그럴 만한 도구적 기능이 있고 국내외적으로 그러한 기능이 긍정적으로 기여한 바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도구적으로 스포츠가 작동하는 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더욱이 이렇게 도구적으로 잠깐 쓰이고 말 경우 그나마 그 기계적이고 도구적인 기능조차 ‘이벤트’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스포츠를 통한’이라는 표현의 진정한 해석은 ‘스포츠에 내재된 가치와 미학으로’라는 방향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따라서 스포츠나 올림픽에 대한 패러다임 자체를 전면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강한 신체적 능력의 비적대적 경쟁이라는 기본 골격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현재의 스포츠나 올림픽을 둘러싼 담론은 20세기 중엽 이후 강대국이 형성한 언어들로 채워져 있다. 국가주의와 남성주의가 압도적인 가운데 약간의 휴머니즘과 헐거운 이벤트성 멘트들뿐이다.

이를 평창을 계기로, 두터운 휴머니즘과 다양한 가치들로 대체해 나가야 한다. 내전, 빈부격차, 인종 갈등, 교육, 성, 환경 파괴 등 21세기 들어 제기된 숱한 문제들이 스포츠와 연관되어 있다. 그것들은 심지어 스포츠를 통해 더욱 심해지거나 스포츠를 통해 파괴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를 제어하고 해결하는 것, 그것을 다름 아닌 ‘스포츠를 통해’ 해결해 나가자는 것이 유엔결의안의 가치적 해석이다. 앞으로 두 달 남짓, 짧은 기간이지만, 정부와 조직위원회는 이 가치적 해석이 평창에서부터 가능할 수 있으며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입증하고 천명할 필요가 있다. 스포츠를 통한 다양한 가치의 새로운 실천 로드맵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때에, 올림픽 기간 중 상호 군사행동 중단도, 북한을 명분으로 고립시키려는 이벤트가 아니라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숭고한 결단임을 재천명하는 것이다.

<정윤수 | 스포츠 평론가·성공회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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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부(학교생활기록부)는 교과 더하기 비(非)교과다. 내신 더하기 비(非)내신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할 수 있겠다. 교과 우수상, 교과 세부능력특기사항 등이 교과로 분류되지 않고 비교과, 즉 비(非)내신으로 분류되니 말이다. 학생부 비교과는 교사가 쓴 기록물이다. 아닌 것도 있지만 대체로 그렇다. 다른 입시전형과 구별되는 학생부종합전형의 특징은 무엇일까? 비교과가 입시에 반영된다는 것이다.

학생부 비교과를 쓰는 데서 비롯되는 어려움은 그 성격이 다른 것과 현저히 다르다. 학생부를 쓸 때 교사는 아주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운동경기에 비유해서 말하자면, 심판과 선수라는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역할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다.

학생부를 쓸 때 교사는 심판이어야 한다. 학생부 기록이 학생부종합전형의 중요한 입시자료로 사용되므로 당연히 공정하게 기록하는 것이 맞다. 거짓말하거나 과장하거나 윤색하면 안된다. 교사는 냉혹한 심판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교사는 학생과 함께 뛰는 선수여야 한다. 다른 학교의 ‘학생+교사’팀과 경쟁하는 우리 학교 ‘학생+교사’팀의 선수여야 한다. 학생부를 쓸 때 교사는 자기 학교 학생의 장점과 재능을 돋보이게 해야 한다. 교사가 선수 역할을 하지 않고 심판 역할에 치중하는 것은 자기 팀 선수인 학생을 배반하는 것과 같다.

어떻게 해야 하나? 참으로 벗어나기 어려운 딜레마다. 물론 대부분의 교사들은 어느 한쪽 역할에 더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긴 한다. 교사마다 그 정도가 제각각 다르겠지만 대부분 심판 역할이 아닌 선수 역할에 더 충실하기로 마음먹는다. 완전한 거짓말까지는 못하더라도 과장이나 윤색 정도는 눈 딱 감고 해주는 쪽으로 입장을 정한다. 나 또한 그런 교사들 중 하나다. 그러나 그렇게 마음먹었다고 해서 마음의 고뇌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심판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어려운 일이다. 심판 역할에 충실하란 것은 교사가 제자에게 갖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러운 감정을 외면하란 얘기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게 실제의 현실 속에선 애초 불가능에 가깝다. “실험도구를 잘 다루고…”라고 쓸 때 실험도구를 잘 다루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어떻게 명확히 구별하겠는가? “감정을 살려 시를 잘 낭송하고…”라고 쓸 때 도대체 한 반의 몇 명까지를 잘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나?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키우고…”라고 쓸 때 경각심을 키운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을 가리는 기준이 있을 수 있는가? 무엇보다 아무리 교사라 해도 학생의 내면세계와 심리상태를 어떻게 자세히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교사들은 학생부를 쓰는 내내 괴로울 수밖에 없다. 한편으론 학생부를 너무 좋게 좋게만 써주는 것 같아 괴롭다. 다른 한편으론 모자라고 부족하게 써준 것만 같아 괴롭다. 혹자는 학종으로 인해 교사의 힘이 세졌다고 말한다. 학생부 때문에 학생과 학부모가 교사 앞에서 고양이 앞의 쥐처럼 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런 측면도 있기야 하겠지만 교사야말로 학생부 때문에 한없이 초라하기만 하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초라하다.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너무 자주 속이는 것 같아 초라하고, 그렇게 쓴 학생부가 학생·학부모의 높은 기대에 못 미치는 것 같아 초라하고…, 이래저래 초라하기만 하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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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오후 2시29분에 규모 5.4의 강한 지진이 경북 포항시 흥해읍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번 지진은 지표로부터 깊이 5㎞ 부근에 위치한, 북서쪽으로 약 30도 기운 가로 6㎞·세로 3㎞가량의 단층면이 비스듬히 어긋나며 발생했다. 지난해 9월 발생한 규모 5.8의 경주 지진 때와 마찬가지로 지표에서는 확인된 바 없는 지하에 숨겨진 단층에서 발생한 이번 지진은 주향이동단층 운동 성분과 역단층 운동 성분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현재까지 발생한 여진들을 분석해 보면 본진보다 깊은 곳에서 발생한 지진은 역단층 지진이고, 본진보다 얕은 곳에서 발생하는 여진은 주향이동단층 지진이다.

이번 포항 지진은 한반도에서 언제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위협하는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을 깨우치는 국민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고 있다. 과거의 한반도는 지진 발생빈도가 낮고, 발생하는 지진 규모 역시 작은 지역에 속했다.

포항 지진 발생 사흘째인 17일 교육부 민관합동점검단원들이 포항시 북구 흥해초등학교의 내부 균열 등 지진 피해 상황을 살펴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이러한 한반도에 심상치 않은 조짐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나타나고 있다. 동일본 대지진은 한반도 동해안 연안 지역을 일본 열도 방향으로 5㎝가량 이동시키고, 한반도 서쪽 해안 지역은 2㎝가량 이동시켰다. 결과적으로 3㎝가량 동서 방향으로 확장된 한반도 지각은 동일본 대지진 이전보다 약한 강도를 보이게 된다. 실제 한반도 지각 내 지진파의 속도가 동일본 대지진 직후 약 3% 감소한 것으로 측정되기도 했다. 약화된 한반도 지각은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한 지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서서히 회복 중이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약화된 지각에서는 지진 발생빈도와 지진 규모가 크게 증가했다. 한반도에서 지진 관측이 시작된 1978년 이후 동일본 대지진 이전까지 33년 동안 총 5회에 불과하던 규모 5.0 이상의 지진이, 동일본 대지진 후 6년5개월 동안 5차례나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지난해 9월12일에 발생한 규모 5.8의 경주 지진이 포항 지역에 많은 힘을 가해 이번 포항 지진을 유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하 11㎞에서 발생한 경주 지진은 단층에 누적하고 있던 많은 에너지를 포항 지역을 포함한 북동 지역과 남서 지역에 추가했다. 이렇게 지진에너지가 추가된 지역에서는 많은 여진들이 이어졌다.

결국 경주 지진이 난 지 14개월 만에 포항 지진이 발생했다. 이번 포항 지진이 발생한 흥해읍 일대는 경주 지진 이전까지는 규모 2.0 이상의 눈에 띄는 지진 발생이 없었던 곳이다.

이번 포항 지진은 경주 지진과 몇 가지 다른 점을 보이고 있다. 경주 지진은 포항 지진에 비해 1~10㎐ 사이 고주파수 대역의 지진파 에너지가 높은 데 반해, 포항 지진은 0.6㎐ 이하의 주파수 대역에서 경주 지진보다 높은 에너지를 보였다. 포항 지진에 의해 건축물이 많은 피해를 본 이유는 낮은 진원 깊이, 분지형 퇴적층으로 이뤄진 표층에서의 지진파 증폭, 건물에 영향을 주는 저주파수 대역에서의 많은 에너지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포항 일대의 표층을 구성하는 퇴적층 내에 포함되어 있던 많은 물들이 강한 지진동 때문에 지표로 배출되는 액상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규모 6 이상의 강한 지진에서 주로 관측되는 이런 액상화 현상이 이번 포항 지진 이후 관측된 점은 분지형 지질구조에서 보이는 지진파 증폭 현상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이렇듯 우리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위협적인 자연재해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포항 지진 촉발 원인으로 지열발전소를 새롭게 지목하고 있다. 지열발전소는 포항 지진 진앙과 1㎞ 남짓 가깝게 위치해 있고, 물 주입 시기에 미소 지진이 발생해 이번 포항 지진의 원인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 2016년 1월부터 주입된 물의 총 누적량은 약 1만2000㎥에 이르고, 다시 배출된 물의 양을 고려하면, 순수하게 지중에 남아 있는 물의 양은 약 5000㎥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주입된 물의 양과 주입 기간, 지열발전소 가동 방식이 규모 5.4라는 큰 지진을 유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특히 중대형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흔히 보이는 수천회에 달하는 미소 지진과 수많은 중소형 지진들이 거의 관측되지 않았던 점도 지적되고 있다. 신속하게 정부 차원의 조사가 이뤄지는 점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하루빨리 조사가 완료되어 국민 불안이 해소되길 기대한다.

지진 원인 규명과 함께 포항 지진 영향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이번 포항 지진 발생으로 주변 지역에는 포항 지진으로부터 전이된 지진에너지가 새롭게 축적되었다. 포항 지진 진앙지로부터 북동쪽과 남서쪽 방향으로 응력이 증가되어, 한반도 남동부 지역에는 매우 복잡한 응력 환경이 형성되었다. 특히 경주와 포항 사이 지역과 포항과 영덕 사이 앞바다 지역의 지진에너지 증가가 눈에 띈다.

이번 포항 지진의 여진은 빈발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나 6개월 이상 지속될 가능성이 있다. 특히 추가된 지진에너지가 해소되기까지 수년이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세심한 지진 대비가 필요하다. 한반도가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란 점은 이제 재론의 여지가 없다. 지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많은 기초 정보 구축이 필요하다. 이런 면에서 지하에 숨겨진 활성단층에 대한 조사가 절실하다. 2007년 규모 4.8 오대산 지진, 지난해 경주 지진, 올해 포항 지진 등 내륙에서 발생한 주요 지진들이 모두 지하의 숨은 단층에서 발생했다. 한반도에서 지진을 유발하는 단층은 지표에서 관측되지 않는 단층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해역 지역 단층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원자력발전소 등 사회 기간 시설들이 위치해 있는 해안 지역은 강한 지진파와 지진해일을 동반하는 해역지진에 취약할 수 있다. 하나씩 차근차근 준비해 나가면 안전한 대한민국이 보다 가까워질 것으로 확신한다.

<홍태경 |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지진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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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체에 현장실습을 나갔던 18세 특성화고 학생이 사고로 숨지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생수 제조업체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제주지역 특성화고 3학년 이민호군이 지난 9일 제품 압착기에 눌리는 사고를 당한 지 열흘 만에 사망한 것이다. 당시 사고 현장에는 안전관리를 책임지는 업체 직원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이군 사망을 계기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추모 촛불집회를 열고 있는 특성화고 학생들은 ‘왜 실습하다 죽어야 합니까’ ‘이군의 죽음은 우리의 현실’이란 손팻말을 들고 현장실습 안전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이 생애 첫 노동현장에서 숨진 것은 올 들어서만 두번째다. 지난 1월에는 전주에 있는 통신사 콜센터에서 현장실습을 하던 홍모양이 “아빠, 나 콜 수 못 채웠어”라는 문자메시지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대학에 가지 않아도 기능인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꿈을 갖고 특성화고에 진학한 학생들이 현장실습을 나가 죽음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장은 곳곳이 세월호이고, 구의역이다. 현장실습생들은 일하다 손가락이 잘리거나 건물에서 추락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기 일쑤다. 주당 70시간이 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쓰러지는 일이 다반사다. 전공과 상관없는 부서에 배치돼 저임금을 받으며 일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특성화고 학생들의 현장실습은 ‘노동착취 실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육당국은 현장실습 전 학생들의 안전과 노동조건을 명시한 표준협약서를 작성토록 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특성화고와 산업체는 극소수다. 그런데도 교육당국은 현장실습의 노동인권 침해에는 눈을 감고 특성화고 취업률 높이기에만 골몰하고 있다. 교육부는 그제 직업계 고교의 올해 취업률이 17년 만에 50%를 넘어섰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특성화고는 학생들을 취업에 유리한 현장실습으로 내몰고, 산업체들은 현장실습생을 노동착취 대상으로 삼는 행태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정부는 특성화고 현장실습장의 법 준수 여부와 노동인권 침해 실태를 철저하게 점검해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현장실습제도를 아예 폐지하는 방안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군 추모 촛불집회에 나온 특성화고 학생들의 외침대로 현장실습생이 ‘일하는 기계, 노예, 부속품’이 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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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경주 지진에 이어 포항 지진까지 발생하면서 국내 일반 건축물은 물론 원전 안전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과거에는 지진의 단순 규모만 논란이 됐으나 이번에는 건축물 진동 효과를 보여주는 지표인 최대지반가속도 문제가 제기되면서 논란의 수준도 진전했다.

최대지반가속도 기준으로 월성원전은 0.18g, 기타 가동 중인 원전은 0.2g, 신고리 3호기부터는 0.3g까지 버티도록 설계됐으나, 포항 지진 당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의 관측소에서 0.58g까지 측정된 만큼 특단의 안전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물론 원자력계는 포항의 지반 조건으로 지반가속도의 증폭효과가 컸지만, 암반에 입지한 원전의 경우 증폭효과가 낮으니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반박한다. 원자력계의 주장 중 지반 조건에 따라 증폭효과가 달라진다는 것 자체는 지질학계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포항 지진 발생 이후 포항시 북구 장량동 한 빌라에서 한국건축구조기술사회 직원들이 지진 충격으로 철근이 드러난 필로티건물 기둥을 살펴보고 있다. 이석우 기자

그러나 문제는 국내 지진 관련 학계나 연구기관들도 국내 원전 부지의 심지층, 부지 주변, 해양단층까지 세부조건이 어떤 상황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는 그간 국내 원자력산업과 지진 연구조사에 대한 투자가 비대칭적으로 이뤄진 결과로, 더 많은 조사·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다. 원자력업계는 원자로 노심과 증기배관의 안전을 전공한 것이지, 지진을 전공한 것이 아니다.

중세의 세계관과 과학의 결정적 차이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데에 있다. 행성들의 운동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던 중세시대 종교학자들이 성경의 권위를 빌려 천동설을 믿도록 강요했지만, 천문학자들이 체계적 관측과 합리적 추론을 통해 거짓이라는 것을 밝혔다. 혹시 국내 원자력계도 박정희 시대 형성된 ‘원자력 신화’의 권위를 빌려 모르는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닌지 자성이 필요하다.

자신이 모르는 사항이라면 전공학계에 문의해야 하고, 전공자들도 조사를 못해 모른다면 그들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게 원칙일 것이다. 만약 이미 공기업의 투자가 진행돼 기다릴 수 없다면 최소한 사전예방의 원칙이라도 지켜야 할 것이다.

우리와 가장 유사한 해외 사례로 미국의 노스 안나(North Anna) 원전을 보자. 지진으로부터 안전하다고 여겨져온 미국 중동부 지역의 암반 부지에 입지한 버지니아주 노스 안나 1·2호기의 경우 최대 규모 6.2, 최대지반가속도 0.12g의 내진설계를 구축해 운영해왔다. 그러나 2011년 원전으로부터 18㎞ 떨어진 진앙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 미국 지질조사국 지역측정소에서 최대지반가속도 0.26g(원전 건물 측정치 0.12g)가 측정된 바 있다. 이 지진 이후 미국 지질조사국과 전력연구소는 해당 지역의 예상 최대 지진규모를 평균 기준 7.2로 상향조정했다. 이에 따라 전기사업자인 도미니언사도 노스 안나 3호기 신규 원전 건설계획의 허가심사를 받기 위해 내진설계를 기존 원전의 4배가 넘는 0.54g로 상향조정해 신청한 바 있다. 신규 원전이 건설될지 여부는 별개의 이야기다.

미국 지질조사국처럼 체계적 지진 연구기반이 부실한 국내에서 노스 안나 사례를 그대로 따라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국민적 관심을 받으며 공론화까지 진행한 마당에 신규 원전 건설이 불가피하다면, 조사가 부족한 만큼 원자력계와 규제기관은 신규 원전과 밀집해 가동 중인 원전들에 대해 대폭 강화된 내진설계를 반영할 필요가 있다.

<석광훈 | 녹색연합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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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인플루엔자(AI)가 또다시 기승을 부릴 조짐이다. 전북 고창의 오리농가에서 고병원성 AI 바이러스 H5N6형이 검출된 데 이어 20일에는 전남 순천만의 철새 분변에서 검출된 AI 바이러스가 H5N6형으로 확진됐다. 전남도는 올겨울 들어 처음으로 철새 분변에서 고병원성 AI 바이러스가 검출된 순천만을 21일부터 전면 폐쇄하고 습지 관광도 금지하기로 했다. 고병원성 AI 확진으로 지난달 13일 어렵게 회복했던 ‘AI 청정국 지위’를 잃게 돼 가금류 수출에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더 큰 걱정은 평창 동계올림픽을 80여일 앞두고 고병원성 AI가 발생했다는 점이다. AI가 발생하면 가금류 농가에 이동중지명령이 내려지고, 전국 주요 고속도로에는 통제초소가 설치된다. 올림픽 기간에는 80여개국의 선수와 취재진을 포함해 40여만명이 한국을 찾을 예정이다. AI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면 농가 피해는 물론이고 올림픽에 심각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고병원성 AI는 2014년부터 연례행사처럼 발생하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4월까지 AI가 전국 50개 시·군으로 번져 사상 최대의 피해가 발생했다. 농가 900여곳에서 닭·오리 등 가금류 3787만마리가 살처분됐다. 피해농가에 지급한 살처분 보상금만 3084억원에 달했고, 계란값 폭등과 관련 산업 위축 등 간접 피해도 컸다. 우려스러운 것은 올해도 지난해 겨울과 유사한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에는 11월11일 야생조류 분변에서 AI 확진 판정이 났고, 닷새 뒤인 16일 전남과 충북의 가금류 농가에서 AI가 발생하면서 전국으로 확산됐다. 올해도 야생조류 분변에서 AI 항원이 잇달아 검출된 데 이어 지난해와 비슷한 시점에 가금류 농장에서 AI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AI 바이러스 유형도 전염성이 강하고 폐사율이 높은 H5N6형으로 똑같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방역당국의 대응이 지난해보다 신속해졌다는 점이다. 올해는 전북 고창의 농가에서 키우던 오리 1만2300마리를 살처분하면서 AI 위기경보를 ‘주의’에서 최고단계인 ‘심각’으로 올렸다. 지난해에는 1783만여마리를 살처분한 뒤에야 ‘심각’으로 격상했다. 지난해 AI 재앙이 초래된 것은 방역당국이 초동대처에 실패하고 뒷북 대응으로 일관한 탓이 크다. 그런 측면에서 이낙연 국무총리가 “초동방역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감하고 신속해야 한다”고 지시하고, ‘범정부 AI 수습본부’를 설치한 것은 적절하고도 바람직한 조치다. 정부와 지자체는 지난해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AI 조기 차단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 허술한 방역체계와 어설픈 대응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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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지진으로 흔들리는 나라가 되었다. 건물 외벽이 쏟아져내렸고 아파트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포항의 많은 사람들이 기울어진 아파트의 각도만큼이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조금만 더 흔들렸다면, 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집도 학교도 다시 지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르게 지어야 한다. 한 번 일어난 것은 두 번 일어나고, 작게 일어난 것은 크게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금이 간 마음을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이제 마음도 집을 잃어버렸다. 마음을 다시 지을 수 있을까. 건물은 지진을 반영해서 달리 설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골조를 달리 세울 수 있을까.

육군2작전사령부 예하 50사단 장병들이 17일 오후 포항 청하면 지진 피해지역에서 굴삭기ㆍ덤프 등을 투입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대한 재앙은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리스본 대지진이다. 1755년 11월에 큰 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고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죽었고 85%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당대 사상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세상일을 신의 뜻으로 설명했던 신정론을 강하게 비난했다. “모든 게 ‘신이 만든’ 최선이라 외쳤던 철학자여, 와서 이 폐허를 보라.” “신이 벌을 내렸다고 말하는 자여, 어미의 가슴에 안겨 피흘리고 있는 저 어린것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말해보라.” 그는 신의 섭리에 자신을 내던지느니 약한 인간들과 더불어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겠다고 했다.

근대 계몽주의는 이렇게 태어났다. 자연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은 맹목이며 믿을 것은 인간의 이성뿐이다. 재난을 신의 의지에서 떼어내어 인간 이성의 관리 아래 두는 것. 불확실한 자연을 인간의 과학기술로 지배해 나가는 것. 수잔 니먼의 표현을 빌리면 리스본에서의 깨달음은 “근대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하지만 인간을 믿어도 좋은가. 과연 자연은 맹목이고 인간의 눈은 밝은가. 다시 포항 지진을 보자. 지진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진앙지 근처의 핵발전소들을 보았다. 더 큰 재난을 의식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장 끔찍한 재난이 인간 한테서 올 것임을 알고 있다. 리스본 지진은 근대를 낳은 재앙이지만 지금 우리는 근대가 낳은 재앙과 대면하고 있다.

리스본 지진에서 볼테르는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비난했다. 하지만 10년 전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촨성 대지진은 천재와 인재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댐에 담긴 물이 지반을 뚫고 들어가 단층을 끊어 지진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재해에 인간의 죄가 없는지도 확실치 않다. 볼테르 이후 계몽의 역사는 재난을 막을 수호자가 재난의 유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핵무기와 핵발전소는 이런 역설의 정점에 있다. 최고의 안보수단이 최악의 자기절멸수단이며, 최고의 발전설비가 최악의 황폐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과 주류 언론은 포항 지진이 탈핵 논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필사적이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비합리적 주장을 펴는 것이 광우병 사태와 같다”고 했다. 핵발전소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비합리적 선동과 괴담에 놀아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과 괴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우려는 더 깊은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탈핵론자들이 아니라 “이번 지진으로 원전의 안전성이 입증되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다. 거기서 나는 안전성이 아니라 불감증을 본다. 핵무기가 최고의 방어수단이라고 하지만 핵무기를 끼고 사는 삶이 불안을 유발하듯, 핵발전소가 최고의 안전장치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고 해도 핵발전소를 늘려감으로써만 영위할 수 있는 삶은 불안하다.

원자로를 다섯 겹으로 둘러쌌으니 안전하다는 말은 다섯 겹을 둘러싸야만 안전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장에는 그 다섯 겹이 충분한 것인지, 다섯 겹을 제대로 둘러싸기는 한 것인지 때문에 불안하다(경험상 한국사회에서 이런 불안은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최소 다섯 겹은 둘러싸야 하는 것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놓고, 더 늘리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 그런 맹목성 때문에 불안하다.

2009년에도, 2017년에도 우리를 불안케 한 것은 괴담이 아니라 불감증이다. 이 불안은 괴담으로 생겨난 게 아니므로 과학기술로 해소되지 않는다. 핵발전소에 대한 불안의 해법을 더 안전한 핵발전소의 건설에서 찾는 한 우리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발전소를 양산해온 우리 사회의 길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우리 정신의 골조가 다시 짜일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지진에도 견디도록 내진설계된 정신들, 다섯 겹의 콘크리트로 밀봉된 정신들, 지진이 나면 오히려 핵발전소로 뛰어들어 가라는 저 낡은 볼테르들이 어떤 새로운 계몽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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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경주지진에 이어 1년여 만에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전국에서 지진동을 느꼈다. 집이 무너지고 길이 갈라지고 자동차가 파손되고 사람들이 다쳤다. 잘 수습되고 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이 일대 활성단층들이 활동기에 들어갔으니 학교 등 다중 이용시설과 주요 산업시설의 안전 점검이 시급하다.

한반도 동남부 양산단층대에는 국내 원전 18기가 운영 중이고 5기의 원전이 건설 중이다. 인근의 부산, 울산, 대구, 경주 등 주요 대도시에는 수백만명의 인구가 밀집해 지진과 함께 원전사고까지 이어진다면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양산단층대에는 육지에서만 230㎞에 이르는 양산단층을 중심으로 월성·신월성 원전 주변에 있는 울산단층, 고리·신고리 원전 주변의 일광단층, 동래단층, 밀양단층 등 발견된 것만 60여개가 넘는 활성단층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난 수천만년 동안 최소 4번의 활동 시기가 있었고 활동 시기에 들어서면 수백년 이상 지각활동이 이어졌다. 작년 경주지진에 이은 640회의 여진 그리고 15일 포항지진과 이후 하루 동안 30회가 넘는 여진은 양산단층대가 다시 활동 시기에 돌입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미 지질학자들은 양산단층대의 재활성을 경고해왔다. 양산단층대 일대에 지진 규모 7.0이 넘는 대규모 지진이 수백년의 주기를 두고 발생했던 기록이 역사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마지막 대규모 지진 발생 후 500여년이 지난 지금이 대규모 지진이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경고가 있었지만 정부 당국은 안일했다.

포항지진은 경주지진보다 규모가 작지만 피해는 더 컸다. 진원지 깊이가 더 낮고 도시 인근이라 피해가 더 컸다. 지진 위험을 단순히 지진 규모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포항지진은 포항분지의 퇴적층과 화강암의 북쪽 경계단층에서 발생했다. 연약지반인 퇴적층은 포항지진을 더 증폭시켰다. 규모 5.4인 포항지진 진앙에서 2.6㎞ 떨어진 가스공사 흥해관리소의 지진계는 0.58g(중력가속도)의 최대지반가속도를 기록했다. 중력가속도 g의 0.58배의 힘으로 좌우로 흔들린 것이다.

이 일대에 운영 중인 원전 17기의 내진설계는 0.2g에 불과하다. 신고리 3호기와 건설 중인 원전 5기의 내진설계 역시 0.3g밖에 되지 않는다. 포항지진으로 0.58g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원전 내진설계는 여기에 한참 낮은 수준이다. 지금은 진앙이 원전에서 떨어져 있어서 안전하지만 다음 지진이 원전 인근에서 일어난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포항분지의 남쪽 경계단층은 월성원전 인근이다.

지진으로 인해 땅이 흔들릴 때 돔 형태의 콘크리트 건물이 지진에 견딘다고 원전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원전은 배관 연결 길이만 170㎞에 달하고, 케이블 연결 길이는 1700㎞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배관이 파손될 수 있고 용접부위가 갈라질 수 있고 밸브가 틀어질 수 있으며 화재가 발생해 케이블이 녹아내릴 수 있다. 17개 원전의 케이블은 내연 케이블이 아니라서 화재가 나면 원전 전체가 먹통이 될 수 있다. 파손된 배관으로 인해 원전 냉각이 실패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지진으로 도로가 끊겨서 외부 지원도 불가능해지고 산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방사성물질이라도 방출되는 날에는 수백만명의 인구가 도대체 어디로 피난을 간다는 말인가.

지금은 전기 공급이 충분해서 봄가을에는 원전 40개, 여름·겨울에는 원전 20개 이상의 발전설비가 남는 상황이다. 앞으로도 전기 소비는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는 예측인데 신규 발전소는 늘어나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원전 가동과 건설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설계상 내진설계 강화가 될 수 없는 중수로 원전인 월성원전 1~4호기부터 폐쇄해야 한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상향된 원전안전기준으로 안전성을 재검증하기 위해 50개의 가동 중인 원전을 모두 중단했다. 내진설계를 강화하고 지진 안전성을 투명하게 확인하기 전까지 원전 가동과 건설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국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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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지진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주일 연기되면서 대입전형일정이 일제히 조정됐다. 교육부는 16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의 협의를 거쳐 수시·정시 모집 등 대입전형일정을 1주일씩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지역 수험생들은 인근 지역에서 수능을 치를 수 있도록 했다. 교육당국의 수능 연기와 대입전형일정 조정은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조치다. 수능이 자연재해로 연기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지만 대입전형일정의 혼선이 수험생의 안전보다 앞설 수는 없다. 강진 여파로 포항지역의 시험장 14곳 중 11곳에서 교실 벽에 균열이 생기고, 운동장 곳곳에 금이 가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도저히 수능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강진 이후 40여차례의 여진에 이어 16일 오전 9시2분쯤 포항시 북구 인근 지역에서 규모 3.6의 지진이 발생했다. 수능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수험생들이 1교시에 대피해야 하는 아찔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수능의 생명은 형평성이다. 지진 피해가 큰 포항지역 수험생들은 다른 지역 수험생들보다 심리적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공평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능을 치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능과 대입전형일정이 늦춰져 59만3000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크게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험생들은 대학 진학의 관문인 수능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웠을 터인데 지진 발생과 시험 연기로 심적 부담이 더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차분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지구가 준 선물, 마지막 일주일을 불사르는 직전 특강’ 등과 같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며 ‘특강 마케팅’에 나서는 일부 학원의 행태에는 눈살이 찌뿌려진다.

교육당국은 수능 연기와 대입전형일정 조정으로 수험생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85개 시험지구로 옮겨진 수능 시험지 보안이 중요하다. 관련 당국은 시험지 유출이나 도난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교육당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재난 발생 시 수능 시행 여부와 대입전형일정 조정을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비상계획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단 한 차례의 수능이 대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대입체제 개편도 서둘러야 한다. 모든 시민이 교육당국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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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지난해 9월 경주지진에 이어 1년2개월 만에 포항지진이 일어남으로써 한반도가 더는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님이 재확인됐다. 두 번의 강진은 한반도 동남부를 가로지르는 활성단층대를 진앙으로 두고 있다. 이 일대에는 월성 6기, 한울 6기, 고리 6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고, 5기가 건설 중이다. 원전지뢰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이번 지진에도 불구하고 가동 중인 전국의 원전 24기가 모두 정상운영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진 안전지대라던 동남부 지역에서 강진이 단기간에 두 번이나 이어졌다는 것은 이 일대 단층이 본격 활성화 단계에 돌입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진의 진원지(9㎞)가 지난해 경주지진(11~15㎞)에 비해 얕아져서 체감위험도가 훨씬 커졌다는 사실도 심상치 않다. 그럼에도 지하의 지질구조를 분석한 ‘단층지도’는 아직 없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 엄습한 수상한 지질현상을 파악할 수 없다. 지진이 잦았던 17세기 이후 400년 동안 지하 어디엔가 축적된 응력이 경주·포항지진으로 나타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축적 응력이 지하 몇 ㎞ 깊이에서, 혹은 어느 원전 밀집지역에서 지진으로 표출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지진이 일상의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문제는 가동 원전 24기 중 23기의 내진설계가 규모 6.5에 해당되는 최대지반가속도 0.2g에 맞춰졌다는 것이다. 한수원은 이미 규모 7.0에도 견딜 수 있도록 21기의 내진보강을 마쳤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본설계는 그대로 둔 채 주변 구조물 등을 보강해봐야 한계가 있다. 특히 얇은 압력관이 380개나 설치된 중수로 원전(월성 1~4호기)의 경우 내진보강이 사실상 어렵다. 지진으로 압력관이 터지면 백혈병과 암을 유발하는 삼중수소가 대량으로 유출될 수 있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려면 당연히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해야 한다. 공포감을 고취하려는 게 아니다. 다가올지 모를 비극에 대한 올바른 대처법이다. ‘원전사고는 1억년에 한번 나올 법하다’고 큰소리치던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원전가동을 중단해서라도 원전구조의 안전성을 점검하고 기존 원전들의 내진설계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2022년으로 예정된 월성 1호기 폐로를 비롯하여 내진보강이 어려운 노후원전들을 차례로 정리해야 한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딱 하나, 탈원전이다. 한반도를 강타한 지진이 그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16일 ‘월성 1호기 폐로’를 논의한 한수원 이사회가 탈원전의 본격적인 첫걸음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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