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시 정책은 속된 말로 본전을 찾기 어려울 만큼 늘 논란이 많은 영역이다. 이것은 대입정책이 상대적으로 사회적 강자들의 이해다툼이 벌어지고 있는 영역이란 뜻이기도 하다. 사회적 강자는 그만큼 발언력도 세니 그 다툼에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이 시끄러운 영역에서 최근 대입의 공정성을 살리기 위해 수능 성적 중심의 정시 비중을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사실 학교교육이라는 마당은 대학입시까지 오기 전에 이미 기울 대로 기울어져 있어 반이 훨씬 넘는 고등학생들은 대학입시에 아무 관심 없이 엎드려 잔다. 이 아이들의 상당수는 가정환경 때문에 영·유아기에 방치되어 문화적 결손을 입고, 입시 위주 학교 체제에서 이 문화적 결손이 회복될 길이 없어 일찍부터 사실상 학업을 포기한 아이들이다. 교육의 공정성은 이미 뇌의 90% 이상이 결정된다는 영·유아기부터 근원적으로 깨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미 기울 대로 기운 대입이라는 마당에서 벌어지는 공정성 시비가 어떤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은 과연 그들의 주장대로 공정하기는 한 걸까?

공정성에는 여러 차원이 있다. 그중 가장 높은 차원은 국가 차원의 공정성일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 대학입시의 공정성은 될 수 있으면 대학사회가 우리 사회의 다양성을 경험할 수 있도록 다양하게 구성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일 게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국가가 잠재력을 갖는 인재의 유실을 막고 인재 육성의 사회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좋은 가정환경에서 공부하여 80점을 맞은 아이와 열악한 가정환경에서 70점을 맞은 아이를 동등하게 평가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지 않으면 대학사회가 특정 계층의 아이들로만 구성되어 매우 편향적인 사회적 지도력을 배출함으로써 장기적으로 국가의 공정성을 크게 훼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물학에서 동종교배의 반복은 멸종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이것은 국가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공정성에서 볼 때 수능은 상대적으로 공정하지 못하다. 대입이 수능 중심으로 갈수록 특목고나 특정 지역의 고등학교가 상위권 대학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중심의 수시 비중이 늘어날수록 상위권 대학에 다양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이미 사실로 드러나 있는 바이다.

그런데 왜 수능 중심의 정시 비중이 높아지면 특목고나 특정 지역의 고등학교가 상위권 대학을 독점하다시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시험의 내용이나 형식에 불공정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수능은 학교 교육과정 밖에서 출제가 되기 때문에 교과서를 따라가는 수업과는 다른 별도의 준비가 필요하다. 그리고 5지선다의 제한된 방법으로 누군가를 떨어트려야 하는 시험은 문제 자체에 많은 트릭을 감추고 있기 마련이다. 말하자면 고등학교 교육과정은 100미터 달리기인데 수능은 100미터 장애물 경주인 셈이다. 당연히 별도로 많은 사교육비를 들여 장애물 넘는 요령을 숙달한 학생이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다. 충실하게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따라 100미터 달리기만 연습하고 별도의 준비를 하지 않은 학생이 수능이라는 100미터 장애물 경주에서 이길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공정성의 마지막 차원은 그 시험이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는가 여부이다? 만약에 미래에 필요한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있지 못하다면 그 시험은 모든 아이들에게 불공정한 것일 게다. 수능은 어떨까? 그 대답은 최근 일본이 선다형의 시험으로는 미래사회가 요구하는 고도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할 수 없다고 보아 대학 학생 선발을 위한 국가고사를 서술형으로 바꾸는 교육개혁에 착수했다는 사실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능을 비판적으로 본다고 해서 내가 현재의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전형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보는 걸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현재의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전형은 대학사회를 좀 더 다양한 학생들로 구성토록 하는 장점도 있지만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학생에게 유리하도록 기록이 부풀려 있을 소지도 없지 않고, 학교 간의 편차를 볼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어 변별력이 없다는 지적이 나올 만도 하다. 수능이든 학생종합생활기록부 전형이든 비슷하게 상한 사과인 셈이다. 비슷하게 상한 사과를 놓고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옳으니 하는 것은 시간이 갈수록 논란만 부풀릴 뿐 해결책이 나올 수가 없다. 현재의 대입제도는 말하자면 진퇴양난에 빠져 있는 셈이다.

진퇴양난에 빠졌을 땐 발상의 전환을 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예컨대 고2 말에 고등학교 교육과정이 요구하는 기본적인 표현력, 응용능력을 평가하는 국가고사를 보고, 고3 말에 자신이 선택한 분야에 대한 논술형 국가고사를 보아 그 결과를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기록하는 것이다. 이렇게 밖에 있는 국가고사를 고등학교 교육과정 안으로 끌어들이면 학생종합생활기록부에 대한 변별력이나 신뢰성 시비가 사라져 공정성 문제가 해결되고, 대학입시를 수시와 정시로 나누는 번거로움도 사라져 단순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2 말에 치르는 국가고사에서 최소 수준에 미달한 학생에게 1년간의 보충수업을 실시하여 고3 말에 다시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공교육에 대한 국가의 책무성을 높여 교육 불평등을 다소나마 완화하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대학별 고사의 폐해를 피하기 위해 국가가 그것을 대행하는 국가고사를 고등학교 교육과정 밖에서 실시하는 것은 하나의 편법이다. 이러한 편법과 그것이 야기하는 사교육으로 본체인 학교교육을 흔드는 일은 이제 그만 둘 때도 되었다.

<김진경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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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9일자 지면기사-

지난 1년은 우리 사회에 끝이 없을 적폐의 큰 줄기를 수면 위로 드러내기조차 버거운 시간이었지만, 썩고 곪은 부위를 드러낸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걸음 나아갔다고 본다.

2018년은 적폐의 잔가지를 모두 끌어올려 환부를 깨끗이 도려내는 작업을 지속해야 할 것이며, 우리는 촛불정신을 각자의 생활 속으로 옮겨와 보다 건강하고 안전한 사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실천의 해로 만들었으면 한다.

작년 한 해 민주주의의 진일보에도, 환경과 관련한 우리 사회의 문제는 크게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매년 악화되는 환경문제를 직접 체험하고 있는 우리는 불안에 떠는 ‘선량한 피해자’이길 원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음을 인지해야만 한다.

많은 산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최고 수준의 온난화와 중국의 영향 없이도 도심 내부에 짙게 드리운 미세먼지, 근본 문제를 도외시한 반복되는 가금류 대량 살처분과 오염, 경주와 울산의 지진에서 겪었듯이 언제 재앙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원전, 최악의 하천오염, 좀 더 생활과 밀접하게는 수돗물과 음료수·해산물·소금에까지 들어 있는 미세플라스틱, 아무런 정보 없이 가공식품에 혼입되는 유전자변형농산물,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안전한’ 각종 농약과 화학물질들에 둘러싸인 우리는 모두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진실은 그리 많지 않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혁신적 약품이라 선전하면서 살포하던 DDT 살충제가 이제는 조금만 발견되어도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는 상황이 되었으며, 과학이 당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다는 지금은 더 심해져서 가습기 살균제, 물수건, 생리대, 기저귀 문제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을 환경보다 돈벌이가 우선인 기업과 성장을 명목으로 기업을 우선하는 국가에 의해 해결될 것이라고 믿고 안주할 수 있는 사회는 분명 아니다.

정의롭고 안전한 사회로의 기대와 함께 올 한 해 무엇인가 열심히 하고자 다짐한 것들이 벌써 흐지부지될 시간이다. 이 시점에서 올 한 해 나와 내 주변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그동안 해왔던 무언가를 하지 않거나 줄이는 다짐을 실천해보면 어떨까 한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여러 실천운동은 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먼저 화학제품이 우리를 깨끗하게 만든다는, 기업 광고의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문제 유발 화학제품은 약간의 관심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의 사용을 줄인다고 해서 문제 될 것은 없다. 오히려 더 건강해질 뿐이다. 조금의 불편함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이 불편함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아울러 정부는 안전한 사회를 위해 시민의 협력을 요청해야 할 것이다.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이미 많은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비닐봉투 사용금지’나 독일 함부르크시의 ‘정부 건물 내에서의 1회용품 구매 및 사용금지’와 모든 커피숍의 ‘재사용 컵 사용’ 등과 같은 전환적 정책은 환경평가 최악의 국가 중 하나인 우리나라에서 더 이상 흐지부지할 규제가 아니다. 정부는 환경부나 국회, 시의회에서만이라도 스스로 1회용품 사용금지를 우선적으로 실천해보면 어떨까 한다.

촛불혁명은 누가 가져다준 것이 아닌, 스스로의 노력으로 만들어 낸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깨끗하고 건강한 환경 또한 누가 대신 만들어주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기업을, 다른 나라를 비난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없다.

과도한 편리는 필연적으로 부작용이 나타남을 인식하고 ‘조금 불편할 준비’를 하는 데에서 ‘생태민주주의’는 시작되며, 나와 내 주변을 위해 이 불편함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는 생활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홍석환 부산대 조경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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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미세먼지 농도 때문에 대중교통 무료운행과 공공기관 차량 2부제를 시행한 것을 두고 비판여론이 만만치 않다. 예보의 정확도가 떨어지는데 섣부른 정책으로 하루 평균 50억원의 공짜요금을 날리고 있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박원순표 포퓰리즘이라는 비판도 나온다. 물론 비상저감조치 발령요건이 지나치게 까다롭고, 경기도와 인천 등과의 충분한 협의 없이 시행함에 따라 다소간 혼란을 빚은 것도 사실이다. 이 조치들이 실제 유의미한 미세먼지 저감수치로 연결될지도 역시 미지수다.

미세먼지와 초미세먼지 농도가 나쁨 수준을 보인 17일 서울 송파구 잠실 일대가 뿌옇게 보이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하지만 미세먼지 문제는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위험’으로 다가왔다. 최근 발표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야외 초미세먼지 노출도는 41개국 중 가장 나빴다. 또 한국의 대기오염 조기사망률이 2060년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100만명당 1000명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미세먼지는 세계보건기구가 지정한 1급 발암물질이다. 부지불식간에 체내에 쌓여 호흡기 질환을 악화시키고, 각종 암과 조산, 치매 등을 유발하므로 ‘침묵의 암살자’로 통한다. 그러나 공기가 나쁘다고 숨을 멈출 수는 없다. 미세먼지 문제를 ‘국가재난’으로 여겨야 하는 이유다. 정부와 지자체의 최우선 가치가 시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것이라면 다소간 비용이 들고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선제조치를 취하는 게 맞다.

시민도 방관자의 입장에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약간의 불편과 희생은 쾌적한 환경을 위해 아낌없이 지불해야 하는 대가로 여기는 시민의식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자신의 호흡권을 지키는 일이다. 하루이틀쯤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미세먼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된 지금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민간차량 2부제의 시행을 논의하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다. 미세먼지 대책을 ‘공짜소동’으로 치부하지 말고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건강보험쯤으로 여기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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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는 지구촌의 문제다. 그래서 각국이 미세먼지와의 싸움에 나서고 있다. 대기오염 도시라는 오명을 쓰고 있는 베이징이 가장 적극적이다. 미세먼지 적색경보가 발령되면 각종 규제에 나선다. 적색경보가 발령된 2015년 10월에는 전기자동차를 제외한 모든 차량에 홀짝제를 적용했다. 건축물폐기물 운반차량 운행도 금지했다. 도로청소 횟수를 늘렸고 폭죽이나 길거리 구이가 금지되기도 했다. 파리는 2015년 3월 미세먼지 오염이 심각해지자 차량2부제를 실시해 차량의 통행을 규제했다. 대신 대중교통을 무료로 했다. 런던은 2016년 시내 전역의 대기오염 상태를 알려주는 경보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암스테르담은 대기오염 현황을 시각화한 ‘나무 와이파이’를 세워 오염수준을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서울시 초미세먼지 농도가 이틀 연속 ‘나쁨’을 보이면서 ‘미세먼지 비상저감’ 조치로 출퇴근 시간 버스·지하철 요금이 면제된 15일 시민들이 서울 광화문역 개찰구를 통과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미세먼지는 황산염, 암모니아 등의 이온 성분과 금속화합물, 탄소화합물 등 유해물질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초미세먼지는 미세먼지의 4분의 1크기밖에 되지 않는다. 기도에서 걸러지지 않고 대부분 폐포까지 침투해 심장질환과 호흡기 질병은 물론 사망에도 이르게 할 수 있다.

서울시는 15일 처음으로 미세먼지 비상저감조치를 발령했다. 시민참여형 차량2부제, 출퇴근시간 대중교통 무료운행, 공공주차장 폐쇄 등의 조치를 취했다. 지난해 5월 광화문광장에서 시민들이 논의한 내용을 정책으로 반영해 이날 시행한 것이다. 그러나 첫 시행은 매끄럽지 못했다. 서울시는 대중교통 이용객이 20%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지하철과 버스 승객은 미미하게 느는 데 그쳤다. 차량2부제도 미흡했다. 무료 지하철·무료 버스에 따른 서울시 비용부담은 50억~60억원 정도다. 이를 두고 ‘돈낭비’가 아니냐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도 있다. 시민건강은 금전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번 조치로 시민들에게 미세먼지의 심각성에 대해 새롭게 인식할 기회를 제공했다면 정책적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미세먼지를 줄이는 데 소요되는 엄청난 예산에 비하면 이 정도의 학습비용은 지불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문제는 학습비용을 줄이면서 정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느냐이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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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는 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학생을 교육하는 일을 한다. 이 명제가 지켜지면 학교교육은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학교가 수업을 가장 중요시하는 교육활동 중심으로 운영되기 때문이다. 나머지 교육개혁 방안은 겉치레다. 교육부와 교육청은 어떤 정책을 먼저 선택해서 집중해야 할까. 교원업무 정상화다. 교원업무 정상화는 교사들의 업무를 줄여 편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사가 본연의 임무인 학생 교육에 충실하게 하자는 것이다. 왜 교사들은 수업을 연구하고 학생과 상담하는 일에 전념하지 못하는가?

첫째, 교사는 수업과 학생상담 외에도 할 일이 많다. 행정업무 담당교사는 업무포털에서 공문 확인 처리, 각종 사업 관련 업무 처리를 하고, 담임교사는 학부모와 출결 관련 전화상담, 출결서류 정리, 설문조사 및 통계 처리도 하고 교과수업과 관련해 물품 주문, 생활기록부 작성 및 점검 등을 한다. 열거한 예시 중 학생 교육활동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그래서 교원업무 정상화의 첫 단계는 학교 업무를 분류해서 직무에 맞게 분장하는 것이다. 교사가 공문 처리 같은 행정업무보다 교육활동을 주로 하게 하는 것이 업무 정상화다. 학교업무는 세 가지로 분류한다. 수업과 학급운영과 생활지도 같은 학생 교육활동과 학교폭력, NEIS 업무, 수업물품 품의 주문, 정보 공시, 각종 행사 준비 등과 같은 교무행정과 학교재정, 시설관리, 방재 등과 같은 일반행정업무가 있다. 학교에는 교사 외에 교장, 교감, 일반행정직, 교무행정실무사 등 다양한 직무를 담당하는 구성원이 있다. 각 직무대로 법령과 지침에 따라 업무를 분장하고 부여받은 임무를 충실히 하면 된다.

둘째, 교사 1인당 수업시수가 많다. 주당 교사 1인이 담당하는 표준수업시수가 있었지만 공무원총량제(직종별로 채용되는 공무원 인원 상한선을 정해두는 것)가 시행되면서 시수 제한 명시가 없어졌다. 교사가 학생 수행활동지를 살펴보고 첨삭해주고 다음 시간 수업활동지를 준비할 짬은 일과 후에 난다.

셋째, 학교 기본운영비를 늘리고 각종 공모사업을 줄이는 것이다. 학교 기본운영비에 수업에 필요한 자료를 구입할 수 있는 교수학습예산을 충분히 확보해주면 사업에 응모해서 교수학습비를 확보할 필요가 없다. 공모사업은 신청서 작성, 신청, 선정 후 예산서 제출, 사업 집행, 정산서 및 보고서 작성·제출 등 일거리가 줄줄이 이어진다.

넷째, 교육부와 교육청은 학교에 요구가 아닌 지원을 해야 한다. 학교가 교육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필요한 행정과 자원을 지원하는 역할로 탈바꿈하는 혁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교사가 하는 교육에 대해 믿고 존중하면 된다. 수업 단원마다, 수업하는 학급마다, 개인 학생마다 잘 맞는 교육방법은 다르다. 생활지도도 학생에게 같은 교육방법과 상담법을 적용해도 효과가 다르다. 한 가지 정답은 없다. 교사는 다양한 교육방법을 체득해 효과적인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리고 교사에게 적절한 교육방법을 적용하는 교육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다. 오래된 미래다. 이미 2010년경부터 경기나 서울에서는 학교 혁신을 위해 교원업무 경감(나중에 ‘정상화’로 정책 명칭 수정) 정책에 먼저 힘을 쏟았다. 이제 거의 10년이 되었다. 아직도 학교에서 교사는 수업이 아니라 다른 일로 바쁘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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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가 놀고 있을 때 그녀에게 반한 제우스가 황소로 변장하여 나타났다. 이 황소에 관심이 끌려 에우로페가 그의 등에 오르자 제우스는 바다 건너 크레타섬으로 날아가 황소를 좋아한 그녀를 위해 하늘에 황소상을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황소별자리다. 이 공주의 이름 에우로페(Europe)는 영어의 유럽(Europe), 프랑스어의 외로프(Europe), 독일어의 오이로파(Europa), 러시아어 예브로파(Европа) 등 구라파의 다양한 명칭이 되었다. 이렇게 흩어진 자신의 이름을 빌린 국가들을 에우로페는 하나로 모으고 싶었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에우로페 국가들은 정체성은 달라도 유럽공동체로 통합되어 거대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단군의 단일자손이면서도 70년을 넘게 적대시하며 갈라져 있는 한반도는 날이 갈수록 초라해 보인다. 통일의 열기도 갈수록 식어져 독일이 지불한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에서 남북의 통일에 부정적인 층도 있다고 한다. 이는 통일비용만 생각했지 분단비용은 염두에 두지 않은 근시안적인 사고로 분단에는 돈뿐 아니라 심리적인 피해까지 따르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통일에 제일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층으로 정치인들을 꼽을 수 있다. 일부 지도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정치꾼들은 남북의 분단이라는 민족의 수치도 모자라 영호남 등 남한까지 갈라 이중분단을 저질러 왔다.

오직 권력만이 관심거리인 이들은 힘든 현실에 대처하기보다 자신의 지역만을 챙기고 상대 지역에 반감을 일으켜 쉽게 당선되면서 한결같이 애향, 애교, 애국 등을 내세운다. 이들이 전략적인 애교를 부르짖을 때 동창회조차 없는 독일 대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상승하여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무려 4000종류의 맥주에 전 세계 맥주공장의 3분의 1을 지닌 독일의 애향은 자기 지역의 맥주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아름다운 지역감정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역감정은 대결의 구도를 넘어 적대감으로 악화되어 미국의 인종 문제나 중동의 종교분쟁같이 국가의 재난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이념이 같은 남한을 분단시키면서 이념이 다른 민족과 남북통일하자는 외침은 훈장을 주렁주렁 차고 있는 이완용을 연상케 한다.

서양이 근대 300여년에 걸쳐 판단과 감정을 분리하는 훈련을 받을 때 당파싸움에 익숙해진 탓인지 우리는 진보나 보수, 좌우익, 영호남 등으로 갈라지고, 독재정권에 저항만 해도 좌익이나 빨갱이로 낙인찍는 반공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과거 강력한 반공국가로 우리의 최대 우방이었던 대만과 단절하고 한국전쟁의 주적이었던 공산중국과 수교할 때 극단반공주의자들은 왜 그리도 침묵했는지. 국익을 위해 공산권 중국은 받아들이면서 같은 민족인 북한에 약간의 편향만 보여도 좌익이나 빨갱이로 규탄하는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하지만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 동질성이 많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지역만을 챙겨 민족의 정서를 오염시킨 정치에는 공통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를 벗어나 학계, 문학, 예술, 체육 등의 공동체가 양국의 변천에 내포된 공통점을 찾아 통일을 추구해야 하겠다. 유럽통합의 동기도 원래 정치가 아니었다. 1916년 당대 최고의 문학가 로맹 롤랑은 머지않아 민족의 갈등이 끝나고 유럽의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예언했는데 후에 유럽은 정말로 통합되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철옹성과 같은 반목의 벽을 쌓던 미국과 북한을 가장 가깝게 했던 사건도 정치가 아니고 2008년 2월27일 평양에서 연주된 로린 마젤이 지휘한 뉴욕필하모니였다. 이때 북한의 청중들은 성조기를 앞세운 그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맺게 된 동기도 나고야세계탁구경기(1971)였고, 우리도 시드니 올림픽(2000) 등에서 남북단일팀으로 통일의 정서에 접근하기도 했다. 북한의 스포츠팀과 여러 단체가 참가하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안진태 | 강릉원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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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전환의 원년이 밝았다. 이제 우리는 안전과 생명이 중시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전환의 출발점에 섰다. 포항 지진 이후 한 여론조사기관이 탈핵·에너지전환국회의원모임 의뢰로 지난해 1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탈원전 신재생에너지 확대정책에 대해 58.2%의 응답자가 계속 추진을 지지했고 27.0%만 추진 중단을 원했다. 국민 모두가 에너지전환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적 추세인 에너지전환을 국민 다수도 이제 가야만 하는 길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전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원자력과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이용에 생계를 걸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나 에너지전환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에너지갈등이다. 심각성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원자력발전소와 석탄화력발전소,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송전탑 등을 둘러싼 에너지갈등이 태양광발전 시설 설치에서도 재연되는 느낌이다. 과거 몇몇 지역에 국한되었던 갈등이 전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어떤 에너지 이용도 환경이나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간주된다. 원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화석연료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 환경이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적고 그런 영향조차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나마 풍력발전은 소음이나 전자파, 철새 이동경로 방해, 빛 반사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설치에 주의를 요하지만, 태양광발전은 숲을 대대적으로 훼손한다거나 미관이나 경관에 대한 고려 없이 설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별다른 환경이나 건강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풍력발전에는 일정한 이격거리 규정을 두지만 태양광발전에는 두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태양광발전에 이격거리를 두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태양광발전소 건설을 ‘결사반대’하며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총 태양광 설비용량(약 4.6GW)의 63%가량이 입지한 농촌에서 반대 민원이 늘고 있다. 주민들은 미관이나 경관 침해 문제만이 아니라 패널의 빛 반사, 주변 온도 상승, 전자파 발생 등을 문제로 제기한다. 하지만 기술 검증 결과 이런 우려는 사실이 아닌 걸로 나타났다. 태양광발전 시설에 대한 이격거리 기준을 설정·운영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가이드라인과 다르게 지난해 말까지 85개 지자체가 도로나 주거지역으로부터 최소 100m에서 심지어 1000m까지 이격거리를 두도록 하는 개발행위허가 지침을 마련했고 그 결과 무산되는 사업들이 생겨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현재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들을 살펴보면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업자들이 농촌을 단지 대규모 설치 대상지로 대상화할 뿐 지역주민의 보금자리에 변화를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지역주민에게 아무런 수익이나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은 채 소외시키거나 배제한 탓이 크다.

주민이 함께하지 않는 태양광발전 확대는 또 다른 토목공사이자 외지인에 의한 지역수탈로 느껴진다. 지역주민이 태양광발전소 건설 과정에 참여해서 의견을 나누고 에너지 생산 주체로 탈바꿈하여 이익과 일자리를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고령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농가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농촌 태양광발전은 협동조합 방식의 출자나 임대를 통해 농가소득원이자 농촌재생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주민참여와 이익공유 없는 에너지전환, 그것은 네모난 동그라미와 같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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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 곧 절망일 수 있다는 말, 이해하십니까?”

정화는 환자의 전자차트를 묵묵히 정리하고서 보호자인 최연수의 말뜻을 뒤늦게 생각해보았다. 최연수의 어머니이자 환자인 김인경은 간호사 로봇이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마련이라서요?”

“그런 옛말이 통용되는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이 아니라 남은 사람 전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화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연수로부터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환자와 로봇을 잠시 바라보았다. 투명한 진료실 벽 너머에서 김인경은 어린아이처럼 잦은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간호사 로봇은 환자의 질환과 그에 따른 심리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김인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인경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와 연수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인경과 그만큼 원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김인경은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였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이해심이나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사랑으로도 넘기 어려운 벽이 김인경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화는 다시 눈앞에 앉아 있는 연수의 말꼬리를 더듬었다.

“남은 사람이라는 건 여기 무영구 주민을 말씀하시는 거죠?”

“사실 저는 그냥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표현했다가는 손가락질을 받겠지만요. 안 그래도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않아서 퇴물 취급을 받는 참에 생각까지 꽉 막혔다고 비난을 받겠죠. 하지만 타고난 두뇌를 그대로 갖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겠다고 무영구(無影區)에 모인 것 역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불법도 아니고, 전자두뇌 이식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심해지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리분별이 어려워지더라도 절대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말라고. 저는 그 말씀을 고스란히 따를 겁니다. 자신의 앞날과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식 입장에서 괴로운 건 또 다른 얘기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지금이라도 전자두뇌를 이식하면 남은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말이에요.”

정화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자두뇌를 이식했기 때문에 앞으로 김인경처럼 알츠하이머에 시달릴 위험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인경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영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고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화는 문득 깨달았다. 연수는 왜 희망이 곧 절망이라고 말했는가. 얼마 전 밝고 희망 찬 여러 뉴스 끝자락에, 마치 부끄러워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덧붙어 알려진 소식 때문이었다.

최연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한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얘깁니다. 뉴스에서 그러더군요. 알츠하이머는 완전히 정복됐다고요. 십 년 동안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에게서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뇌기능 이상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죠.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무한한 희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알츠하이머가 정복됐으니 뇌기능 치료를 위한 나노머신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다면서요? 이제 무영구에 사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건가요?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은 우리가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건가요? 그럼 우리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그림자도 남기지 못할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해주실 건가요?”

****************************************

2018년 1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미국 제약업체인 ‘화이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을 치료하는 신약 연구를 중단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적인 제약 업체 사이의 정확한 순위는 알지 못하지만, 화이자는 세계 3대 제약 회사에 포함될 만큼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희귀 뇌질환 연구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건 아니며 벤처 투자 형태의 지원을 시작하겠다는 발표가 뒤를 잇기는 했다. 하지만 해당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 및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뇌신경과학 종사자들과 연구 지원을 받던 학술 단체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첨단 약품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연구하는 일은 극단적인 양면을 모두 품고 있다. 긴 시간과 거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채산성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생명과 미래 복지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경제논리만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식을 살짝 비틀어서 거울로 삼아보자. 우리는 지금 새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과학과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 그 미래를 예찬하느라 첨단 기술이 우리 생활을 ‘지배’할 거라고 모순적인 어휘를 끌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기술이 이익 논리와 직결되는 현실에서, 기술에 지배되는 삶이 마냥 긍정적일 리는 없다. 아니, 애당초 무언가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건 우리가 최대한 저항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경제 논리와 첨단 기술의 화려함 때문에 져버릴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좋은 시기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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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육에 몇 년 전, ‘배움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교육철학이 등장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배공’이라는 줄임말로 잘 알려진 이 교육방법론은, 주입식 교육에 몰입했던 학교 현장이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더 이상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SNS의 급속한 발달과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속에서 학생들은 형해화된 교과서와 5지선다형 수능 문제에 함몰되기를 거부한다. 복잡한 이론을 이야기할 것도 없다. 학교에서 직감하는 변화들이다.

‘배공’ 이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단지 교사가 교과목 잘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의 전부인 시대는 지났다. 학부모 역시 더 이상 방관자적 관찰자일 수 없다. 학생, 학부모, 교사는 이미 학교 구성원의 당당한 3주체가 아닌가. 그리고 이 3주체가 물리적 공간으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지역사회,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1년 전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는 “이게 나라냐”는 구호로 상징된다. 부정부패, 비리 등 적폐청산에 대한 소망, 차별과 불평등의 해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시민 참여의 확대가 그 목소리에 녹아 있었다. 그러한 염원이 1700만명의 조용한 혁명을 가능케 했다.

교육계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안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의 바람을 학교 교육에 제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입시경쟁교육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체념하는 동안,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졸업 후 비정규직으로, 알바 노동자로 살아가는 고충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해 왔는지, 또 그들의 삶의 고향이자 터전인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고민을 제대로 나눈 적이 있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마공)는 한 학교에 네트워킹된 지역사회의 수많은 집단지성 구현의 장이 될 수 있다. 학부모들은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의 달인이요, 저명한 인사요, 지역의 어르신이다. 또 여러 마을활동가들의 노하우는 단위 학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의 노력과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교과 지식을 아무리 달변으로 포장해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해도 그렇게 구성된 배움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배공’의 핵심 교육철학은 ‘잘 가르침’이 아닌 ‘잘 배움’이다. ‘마공’ 역시 단위 학교 교육과정의 하향식 전달이 아닌 상향식 협력이 필요하다. 아니 상하의 위계 의식 자체로부터 탈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주민 등이 서로의 관계맺음 속에서 교육 공동체가 그 자체로 완성되는 진정한 삶과 배움의 공간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배움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벌사회라는 교육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할지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을 마련할 수 있다. 교사들은 교실과 학교, 나아가 대한민국 교사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실천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올해는 다양한 교육정책의 입안을 앞두고 있다. 특히 하반기에는 작년에 1년 유예되었던 수능 개편안 발표 등 전 사회의 관심이 집중된 사안도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꿈꾸는 교육개혁이 무궁무진한 상상 속에서 술술 풀리는 실천과 더불어 무술년 새해를 교육혁명의 원년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도성훈 인천 동암중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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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평창 동계올림픽 개막이 한 달 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관련 업계 및 정부부처의 관심과 인력이 집중되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는 관광과 교통 혜택이 결합된 한정판 카드 및 패스를 선보이고, 평창 동계올림픽 개·폐막식장을 축소 구현한 ‘상상 스타디움’을 공개하는 등 새로운 한국 방문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업계는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외국인 관광 시장이 한층 더 성장할 것이라 기대하는 모습이다. 지난해 기준 방한 외국인 수는 사상 처음으로 1700만명을 돌파했다. 이를 통해 19조4000억원의 관광수입과 34조5000억원의 생산유발효과를 얻고, 취업유발인원이 37만4000명에 달하는 등 내수 활성화 및 일자리 창출에 긍정적인 효과를 보았다. 이처럼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는 외국인 관광 시장의 확대는 국력 신장으로 직결되는 만큼, 이번 동계올림픽 준비에 더욱 큰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간 숫자에만 치중했던 관광정책이 이번에 제대로 방향성을 잡을 수 있을지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한 해에 외국인 관광객들이 얼마나 방문했고, 각 국가별 관광객은 몇 명이고,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소비하고 갔는지 등 숫자에 주로 치중해 왔기 때문이다.

31일 강원도 강릉 경포대에서 시민들이 2017년 마지막 일출을 보고 있다. 해가 나면서 해변에 설치된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오륜기 조형물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강윤중 기자

필자는 평창 동계올림픽이 단순히 스포츠 올림픽에 그치지 않고 ‘관광 올림픽’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필히 관광 콘텐츠의 경쟁력이 뒤따라야 한다고 본다. 성공적인 관광 올림픽이란 일회성 방문으로 숫자 늘리기에 포커스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의 관광 콘텐츠 개발을 바탕으로 관광객들의 호기심을 자극, 이번 방문이 재방문으로 연결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이미 정부는 올림픽 개최지인 강원도의 주요 관광자원, 인문자연 자산을 활용하여 ‘대관령 눈꽃축제’ ‘평창 겨울 음악제’ ‘한옥 숙박 체험’ ‘강원 템플스테이’ 등 각양각색의 관광 아이템들을 운영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렇듯 외국인 관광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관광 코스와 더불어 비즈니스, 의료, 레저, 엔터테인먼트 등 문화와 관광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콘텐츠들을 구축한다면 특별하고, 경쟁력 있는 관광산업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관광객들이 더욱 가까이에서 한류를 느낄 수 있는 한류 체험 상품, 장인의 기술이 돋보이는 무형문화재, 성수동 수제화 거리 등 직접 보고 느낄 수 있는 콘텐츠들은 물론, 11대째 내려오는 한옥 가옥, 3대가 함께 사는 가족의 가풍 및 예절 체험, 한국에서는 흔하디 흔한 된장·고추장 등 한국만의 음식문화까지 스토리텔링을 통해 다채롭게 엮어 낸다면 한국을 ‘다시 가고 싶은 나라’로 기억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앞으로 국내 관광산업은 외형적인 관광 인프라 못지않게, 콘텐츠가 지닌 스토리 자체가 하나의 경쟁력이 되어 많은 것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 확신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이 성공적인 관광 가치를 지닌 행사로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질적 성장을 위한 관광 콘텐츠들의 개발과 관광업계의 노력이 필요하다.

<정명진 | 코스모진여행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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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서울지역 유치원에서 진행되는 방과후 영어 프로그램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정규 유치원 프로그램을 마친 아이들이 오후에 사교육업체에서 제공하는 영어교육을 받고 있었다. 강사는 전문적인 훈련 없이 업체에서 간단한 교육을 받고 파견된 사람이었다. 아이 10여명이 TV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거나 강사의 지시에 집단적으로 영어를 따라 했다. 그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집단으로 영어 떼창을 하는 듯했고, 마치 앵무새가 인간의 말을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이 노래를 부를 때 과연 노랫말의 뜻이나 알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 시간에 아이들이 우리말로 뭔가를 했다면 어땠을까. 이 또래의 아이들은 자신의 모국어로 다양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주변 사람들과 풍부한 대화가 가능한 나이다. 누가 하는 말을 일방적으로 따라 하거나 앵무새처럼 반복할 나이는 아니다. 언어 발달이 폭발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여서 혼자 내버려 둬도 우리말이 쏟아져 나오는 시기다.

이 시기에 부모나 또래와의 소통은 아이들의 어휘 발달이나 언어 능력 향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어떤 어휘를 사용해서 얼마나 질적으로 풍부한 소통의 기회를 갖느냐 하는 것이 초등학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도 있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그저 시키는 대로 따라 하거나 매우 제한적인 표현만을 활용해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영어교육은 어떤 면에서 시간 낭비다.

최근 교육부의 유치원 방과후 영어교육 금지는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밑그림을 그리겠다는 의도에서 나온 정책이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한마디로 영·유아를 둔 학부모들이 갖고 있는 자녀의 영어에 대한 생각은 기대와 불안감으로 응축된다. 어차피 영어는 학교나 사회에 나가서 중요한 능력의 하나인데, 이왕이면 잘할 수 있도록 키워주고 싶은 것이 많은 학부모들의 욕심이며 기대다. 더구나 영어를 조기에 배우면 좋다는 믿음으로 똘똘 뭉쳐 있는 현실에서, 다른 아이들이 수십만원에서 수백만원 하는 소위 ‘전일제 영어학원’을 다니는데, 자신의 아이를 보면 왠지 불안하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친다고 하는데, 그렇게 믿고 따라가도 되는지, 그런 불안과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자꾸 주변을 살피고, 남들이 하는 것의 최소한이라도 따라가려고 한다. 이런 학부모들의 불안이나 기대 또는 경쟁의식을 제대로 해소해주지 못하면, 정부의 유아 관련 영어교육 정책은 착근하기 어려울 것이다.

차제에 유아기 영어교육과 관련하여 몇 가지를 체계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첫째, 유치원 단계부터 초등학교 2학년까지 영어교육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현재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이는 유치원 단계의 누리과정이나 초등학교 1~2학년에서 진행되는 영어교육과 일관성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조정이 필요하다. 더불어, 유치원 시기의 아이들 학부모들이 갖는 영어교육에 대한 기대나 요구 또는 불안을 적극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방안도 필요하다. 정부는 조기 영어교육의 효과나 부작용 또는 그 양면성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자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 그와 함께 전국에 난립해 있는 전일제 어린이 영어학원을 어떻게 할 것인지 분명한 대안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국민들의 기대나 불안을 해소할 수 있는 종합적인 영어교육 정책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3학년에서 실시되는 영어교육이 고등학교 3학년까지 이어지면서, 어떤 방식으로 어떤 능력을 길러줄 것인지 명확한 지표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 지표를 제대로 따라간 학생들은 사교육을 받지 않아도 더 이상 학교나 사회에서 손해를 보거나 차별을 받거나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 그럴 때 학부모들은 정부나 학교를 믿고 따를 수 있으며, 조기 영어교육의 허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병민 | 서울대 교수·영어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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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에서 교육은 개인 입장에서 보면 자아실현의 과정이며, 공동체를 기준으로 보면 탁월한 인재 육성을 위한 훈련의 장이다. 이를 위해 기대소득이 높은 직장이나 사회적으로 선망되는 직업을 얻기 위한 경쟁이 인정되고, 사회는 최선의 인재를 얻음으로써 공익이 실현된다. 이런 낙관적인 가설은 현실에서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우선 경쟁의 제반 요건인 공정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부모의 경제력이나 교육 환경 등 여러 격차로 인해 출발부터 도착까지 많은 학생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뛰는데 이 과정에서 부모와 학생 등 공동체 구성원은 수많은 불평등을 체험한다. 크게 보면 사회 역시 목적 달성에 실패한다. 교육으로 공동체 운영을 위한 이상적 덕목을 갖춘 인재를 얻어야 함에도 환경 차이로 인해 귀중한 인적 자원이 일부 사장된 데 반해 도덕적 훈련이 부족한 자원 일부가 손쉽게 승리를 얻는다. 그뿐만 아니라 구성원들의 불만과 갈등이 가중되는 보다 심각한 부작용도 나타난다.

이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교육제도, 특히 대학입시제도는 개인과 사회의 이질적 목적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국민들 다수는 대입 전형에 대한 불만 수준이 높다. 수시 전형은 부모의 경제력에 좌우되는 등 불공정하다는 것이 입시제도를 경험한 다수 국민의 생각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는 도덕적, 지적 훈련이 체계화된 인재를 얻기 어렵다. 물론 사회 역시 이상적 시스템 마련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신 성적을 근간으로 구성되는 현행 수시 전형이 문제가 있어도 객관식 문제를 고집하기는 어렵다. 사회는 미래를 짊어질 인재가 필요한 만큼 교육 투자 이후 나타나는 다수의 바람직한 변화에 주목할 수밖에 없는데, 이를 위해 학교 수업 정상화와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을 갖춘 교육과정 운영은 양보하기 어렵다. 문제는 철저히 파편화된 입시생이나 학부모들이 사회가 지향하는 방향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제도는 발표하면서도 제도가 함의하는 교육적 당위성이나 교육 철학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 고민하는 존재도 지극히 적다. 도덕적 기반이 약한 데다 수용자들에 대한 감성적 배려도 부족한 상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듯 즉각 반응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다보니 예상치 못한 변수에 제도가 신뢰를 상실하는 악순환만 반복되었다. 물론 공동체 교육의 이상을 수용한다고 해도 경쟁에 매몰된 개인이 장기적인 안목을 지니기도 어렵다.

교육제도는 경쟁 주체의 핵심 불만을 제거하면서 장기적인 교육 목표에 대한 사회적 공감을 확산하는 두 가지 과업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불공정성을 호소하는 개인의 불만부터 읽어야 한다. 공동체에 대한 도덕적 불신을 방치한 상태에서 어떤 시스템도 신뢰를 얻지 못한다. 이와 병행해 미래 인재 육성의 이상적 방향에 대한 공감대 형성 과정 역시 물적 시스템으로 마련해 구성원의 평가를 받도록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lt;니코마코스 윤리학&gt;에서 탁월성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지속적인 훈육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교육제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성취욕구와 사회적 목표를 동시에 충족하는 교육제도는 개인과 사회 양자 간 지속적인 검증을 통해 단련되어야 한다. 개인과 사회가 서로 등을 돌린, 우애(philia)가 사라진 현 상황에서 제도라는 저울은 최선의 정밀성을 기초로 구성된다.

<정주현 | 논술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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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에서 객실 청소업무를 하는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선 이후 원청의 무분별한 ‘대체인력 투입’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대한항공은 한진그룹 계열사 직원은 물론 본사 사무직 직원까지 동원해 청소업무에 나섰고, 하청업체인 ‘이케이맨파워’는 불법 대체인력 투입으로 고발당하자 현재 투입 중인 인력을 원청 소속으로 전환하는 방법을 검토하는 등 웃지 못할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다.

헌법은 자주적인 단결권·단체교섭권 및 단체행동권을 보장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단체행동권은 그야말로 노동3권 중에 가장 중심인 권리이다. 단체행동을 전제하지 않은 단체 결성이나 단체교섭은 무력한 것이어서, 이들만으로는 노사관계의 실질적 평등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43조에서 쟁의권을 보장하고, 일부 필수공익사업장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쟁의행위 기간 중 사용자의 대체인력 투입을 금지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이 권리가 가장 필요한데도 오히려 가장 열악한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 간접고용 노동자들이다. 간접고용 노동자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노동3권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하게 침해되는 권리가 바로 단체행동권이다. 원청이 손쉽게 원청 노동자를 투입하거나 다른 협력업체로 돌려막기를 하거나 신규채용을 하는 등으로 파업을 무력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서비스, LG유플러스, SK브로드밴드, C&amp;M 등 대기업은 물론 공공기관인 정부세종청사, 코레일 역시 간접고용 노동자 파업에 대체인력을 투입하여 물의를 빚은 바 있다.

하청업체 파업에 이처럼 원청이 적극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의 잘못된 행정해석 때문이다.

고용노동부는 과거 간접고용 시 대체인력 투입을 제한하는 기존의 해석(1988. 노사32281-19968)을 뒤집고 원청은 사용자가 아니므로 대체인력 투입금지 조항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행정해석(1998. 협력68140-226)을 유지해오고 있다.

그러나 노조법상 ‘사용자’의 개념은 반드시 근로계약관계의 당사자로 한정되지 않는다. 대법원도 “원청회사가 하청 근로자들의 근로조건에 대하여 실질적인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면 노조법상 사용자에 해당한다(2007두8881)”고 판결한 바 있다.

대부분의 용역업체에서 투입인원의 결정, 업무내용과 근무시간, 인건비 등이 원청에 의해 결정되는 데다가 독자적인 노력에 의한 이윤창출과 위험부담도 없는 점을 고려해보면, 원청 역시 노조법을 준수해야 할 사용자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원청이 하청업체 파업으로 인해 업무가 실질적으로 중단되고 대체인력을 투입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이미 자신의 사용자성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비단 실질적인 지배력까지 나가지 않더라도, 어떤 ‘노동’으로부터 이익을 향유하는 자가 그 ‘노동’의 온전한 실현을 위한 헌법상 의무를 부담하는 것이 당연하다.

단지 고용형태가 다르다는 이유로 헌법상 권리가 박탈되는 현실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법률로 원청의 대체인력 투입 금지를 제도화해야 한다. 다행히도 꾸준한 문제제기로 인해 20대 국회에는 ‘원청의 대체인력 투입 금지 법안’이 발의되어 있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을 추진하면서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선언했다.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동3권을 원상회복하는 것, 사용자가 실질적 이익은 누리면서 의무는 부담하지 않으려는 유인을 제거하는 것이야말로 비정규직 제로시대를 여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우지연 |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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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4개를 비준하겠다는 입장을 유엔에 표명키로 했다. 법무부는 7일 ‘제3차 유엔 국가별 정례인권검토(UPR)’ 실무그룹 보고서 초안을 통해, 결사의 자유·단결권·단체교섭권 관련 협약 87·98호, 강제노동 폐지 관련 협약 29·105호를 비준하라는 UPR 권고를 ‘검토 후 수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87호와 98호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전국공무원노동조합(전공노) 합법화와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비준 방침을 환영하며, 후속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지길 기대한다.

한국은 1991년 ILO에 가입했지만 8개 핵심협약 중 4개는 비준하지 않았다. 187개 회원국 가운데 4개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과 중국, 마셜제도, 팔라우, 통가, 투발루 등 6개국뿐이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노동인권 후진국의 오명을 면치 못했고, 국내에서도 불필요한 갈등과 분열이 야기됐다. 가장 심대한 피해를 입은 것은 전교조와 전공노다. 2013년 박근혜 정부는 14년간 합법노조의 지위를 유지해오던 전교조에 대해 ‘노조 아님’ 통보를 했다. 해직교사 9명을 조합원으로 인정한 전교조 규약이 교원노조법을 위반했다는 게 이유였다. 전공노 역시 해직자의 조합원 자격 문제를 이유로 설립신고를 번번이 거부당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ILO 핵심협약 비준을 후보 시절 공약으로 제시했고 집권 후 100대 국정과제에 포함시켰다. 협약 비준을 서두르는 것은 당연하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우선 전교조의 재합법화는 비준 이전에도 가능하다. 박근혜 정부의 법외노조화가 행정처분에 불과한 만큼 이를 철회하면 일단 법외노조 이전 상황으로 복귀할 수 있다. 또한 정부는 협약 비준을 위한 구체적 로드맵을 노동계와 협의하고, 국회는 협약 내용과 상치되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교원노조법, 공무원노조법 등의 개정 작업에 즉각 착수해야 한다. 특수고용·간접고용 노동자 등 노동3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의 노동기본권을 보장하는 방안도 강구돼야 함은 물론이다.

노동자들은 누구나 노동조합을 자유롭게 설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헌법과 노동관계법이 보장하는 ‘노동조합 자유설립주의’다. 노조라면 무조건 백안시하던 낡은 인식은 이제 버릴 때가 됐다. 보수진영도 구태의연한 색깔론 따위로 노동기본권 확대를 막아설 생각은 접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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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 교육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발표가 있었다. 미국의 100대 명문 사립고등학교가 성적증명서에 기존의 과목명과 성적을 빼고 핵심 역량 성취도를 중심으로 표기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 내 아이비리그를 포함한 명문 대학 신입생의 대부분이 이들 100대 명문 사립고등학교 출신이기 때문에 미국 고등학교에서 새로운 역량 중심 성적증명서가 도입되면 곧 대학의 입학 사정 방식에도 변화가 생길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교육 전문지 ‘인사이드 하이어 에드(Inside Higher Ed)’가 지난해 5월 보도한 바에 따르면, 새로운 역량 중심 성적증명서에는 분석적·창의적 사고능력, 복합적 의사소통, 리더십과 팀워크, 디지털·양적 리터러시, 세계적 시각, 적응력·진취성·모험정신, 진실성과 윤리적 의사 결정, 마음의 습관 등 8대 핵심 역량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평가한 내용이 기록된다. 영어·수학·과학 등 수업에서 받은 성적을 표기하는 정량적 평가 방식은 지양하고 각 핵심 역량별로 개별 학생들의 성취도와 숙련도를 표기하는 정성적 평가 방식을 적용한다는 것으로,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변화다.

미국의 공립고등학교들도 학생 개개인의 핵심 역량을 강화해 21세기형 인재로 양성하기 위한 계획을 앞다퉈 발표하고 있다. 미국 내에서도 전통적으로 교육 수준이 높은 버지니아주의 고등학교 3곳은 지난해 2월, 2018년도 신입생부터 ‘하이스쿨 2022’ 프로그램을 신설해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의 주목적은 고등학교에서 개인 맞춤형 학습을 실현하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학습 목표에 맞춰 수강할 과목과 과외활동을 정하고 개별 일정에 맞춰 등교와 하교를 하게 된다. 또한 영어와 과학, 수학과 사회 등 몇 개 과목을 연계해 융합한 학제 간 수업들도 들을 수 있게 된다.

미국 서부 캘리포니아주의 한 고등학교는 이미 2년 전부터 150여명의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개인 맞춤형 학습 프로그램을 시범 운영해 왔으며 지난해 9월부터는 전체 신입생을 대상으로 개인 맞춤형 학습 프로그램을 확대 실시하고 있다. 신입생을 맡은 교사들은 학생 개개인의 장점과 선호에 따라 개인 맞춤형 학습을 진행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고 커리큘럼도 학생들이 개인의 관심과 흥미를 찾고 추구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새롭게 구성됐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미국 고등학교의 다양한 변화의 중심은 바로 학생이라는 점이다. 이들의 변화는 대학입시 정책의 변화에 맞추기 위한 것도 아니고 더 좋은 대학에 보다 많은 학생들을 입학시키기 위한 것도 아니다. 학생 개개인이 새로운 시대에 잘 적응하고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개인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한국에서도 얼마 전 교육계에 큰 파장을 일으킨 발표가 있었다. 2021학년도 수능 절대평가 도입안과 학생부종합전형 평가요소 가운데 자기소개서와 교사추천서를 축소·폐지할 계획이란 교육부의 발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두 가지 계획 어디에도 학생이 중심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교육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계해 한 국가와 그 구성원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복합적이고 중대한 사안이기 때문에 어떤 정책이나 제안도 완벽할 수는 없다. 앞에 소개한 미국 고등학교의 변화도 현실적으로 실행되고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성적평가 제도나 학사운영 방식 변화에 앞서 여러 과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교육의 중심에 학생이 있고 아이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논의하고 고민하는 과정 속에 나온 이런 변화와 시도는 분명 의미있는 움직임이 될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를 처음 세상에 알린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발표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 보고서에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재들에게 요구되는 10대 핵심 역량이 나와 있다. 

순위로 보면, 복합문제 해결능력, 비판적 사고능력, 창의력, 인적자원 관리능력, 협업능력, 감성능력, 판단 및 의사결정 능력, 서비스 지향성, 협상능력, 인지적 유연력 등이다. 

우리나라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교육계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4차 산업혁명이란 새로운 시대는 점점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지금 우리가 무엇에 중점을 두고 어떤 변화와 시도를 할 것인지 정하는 바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류태호 미국 버지니아주립대 평생교육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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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발전은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렵고, 원자력을 평화를 위해서만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대통령의 최측근이 먼 나라에 ‘몰래’ 특사로 다녀오고 그 이유를 비밀에 부치는 것은 민주주의가 단단히 뿌리내린 국가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그 나라와 큰 돈벌이가 되는 계약을 맺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헌법에 명시된 절차도 무시하면서 군대를 파견하고 각종 군사지원을 해주는 일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원자력발전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의 특사파견으로 불거진 아랍에미리트연합과의 각종 비밀협약(설)들은 어느 누가 잘못한 결과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하찮게 여겼던 반민주 정부가 민주주의를 모르는 왕정국가에 민주주의와 양립하기 어려운 원자력발전을 넘겨주었기 때문에 거의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지금 특사파견을 둘러싸고 극심한 논란이 벌어지는 이유는 촛불혁명으로 민주주의가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촛불혁명 없이 반민주 정부가 지속되었다면 이런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민주주의 정부도 원자력발전 앞에서는 주눅들어 있는 것 같다. 특사파견 이유도 제시 못하고, 밝히면 야권이 감당할 수 있겠냐고 우회적으로 반격하고, 원전수출이라는 국익을 위해 숨길 수밖에 없다는 변명이 모두 그런 까닭일 것이다. 그중에서 정부를 가장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이 ‘원전수출은 국익’이라는 구호인 것 같다. 특사파견 이유를 밝히면 사우디, 터키, 요르단, 영국 등지의 원전 수출길이 막힌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원전수출은 국익을 위하는 것일까? 오히려 국익을 해치는 일은 아닐까? 더 나아가서 민주주의를 억누르고 인권 침해를 돕고 지구환경을 파괴하는 일은 아닐까? 대다수 아랍에미리트연합 국민들은 원자력발전소 건설에 관심이 없다. 전기요금 거의 제로라는 국왕의 시혜를 누리며 사는 데 익숙해져 있을 뿐이다. 핵폐기물과 사고위험에 대한 우려는 극히 일부에서만 나오고, 이들도 공개적으로 목소리 내기를 꺼린다. 우리나라의 박정희 정권에서 고리 1호기가 세워질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하지만 4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원전의 위험은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고, 촛불시민들은 원전을 포기하는 방향을 선택했다.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때가 되면 그 나라에 원전을 수출한 한국은 자기가 포기한 원전을 돈벌이가 된다는 이유로 떠넘겼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중동의 다른 나라에서 비난은 이미 시작됐다. 2012년 요르단 시민들은 한국의 연구용 원자로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고, 한국대사관에 건설을 멈추라는 항의서한을 보냈다.

일년 전 아랍에미리트연합에서는 2050에너지계획을 발표했다. 주된 내용은 전체 에너지의 절반가량을 재생가능에너지로 충당하고, 이를 위해 170조원에 달하는 돈을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이 계획에서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6%밖에 안된다. 원자력발전은 현재 건설 중인 4기로 묶어 두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이들도 미래는 태양광과 풍력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원자력발전소를 가지려 했을까? 답은 아마 군사적 활용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원자력발전소 보유가 아니라 이를 당근 삼아 한국의 군사력을 가져오는 것이 이면의 목표였으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원자력이 핵무기가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도 군사용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고, 한국은 영리한 그들에게 이용당한 셈이다. 그런데도 한국은 원전수출에 매달리고 있다. 하지만 170조원과 22조원을 비교하면 우리가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하는지 분명해진다. 그래야 떳떳하게 돈도 벌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민주주의 국가로 우뚝 설 수 있다.

<이필렬 방송대 교수 문화교양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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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체로서 나쁜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것이 나쁜 경우 대개 그것은 그것이 너무 적거나 많은 데서 비롯된다. 그 자체로서 나쁜 게 아니라 너무 과소하거나 과대해서 나쁠 뿐이다. 입시교육만 해도 그렇다. 그것도 사실 따지고 보면 너무 과도해서 문제인 것이지 적절하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주입식·암기식 교육도 너무 지나쳐서 문제인 것이지 적절하다면 오히려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수준을 맞추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지루하고 고단한 과정을 거쳐야 겨우 그 근처에 다가갈 수 있다. 또한 적절함에 대한 탐색은 인간의 영혼을 매료시키지 않는다. 인간의 영혼을 자극하는 것은 대개 과소함이나 과대함으로의 편향이다.

최근 교사 사회에선 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법률 조항들에 대한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국민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나는 그분들께 이런 질문을 드리고 싶다. 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에 대한 제한은 과연 ‘적절한’ 정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가?

투표 행위 외에 교사의 정치적 활동은 사실상 모든 게 금지다. 정당 가입만 금지된 게 아니다. 일반 국민에게 문호가 개방된 국민경선 같은 정당 활동의 참여도 금지다. 심지어는 정치후원금을 내는 행위조차 금지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정치후원금에 대해 세상을 더 좋게 가꾸는 소금과 같은 돈이라 했다. 그러나 교사에게는 그러한 돈을 정당과 정치인에게 보낼 자유와 권리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교사는 교사직을 버리지 않고는 공직선거에 나설 수가 없는데,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이나 자치단체 의원 선거에만 그런 게 아니다. 초·중·고 학교교육을 관할하는 교육감 선거에도 나설 수 없다. 대학교육을 담당하는 교수는 교수직을 유지하며 교육감 선거에 나설 수 있지만, 초·중·고 교육을 담당하는 교사들은 교사직을 버려야만 그렇게 할 수 있다. 대학교수는 자신이 지지하는 교육감 후보를 위해 정치적 활동을 할 수 있지만, 교사는 지지하는 교육감 후보가 있어도 아무런 정치적 활동을 할 수가 없다. 다른 선거도 아닌 초·중·고 교육을 관할하는 교육감 선거인데 말이다.

이것을 적절한 수준의 제한으로 보긴 어렵다. 헌법에 보장된 권리인 종교의 자유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종교의 자유가 있다 해도 교사들은 학교에서 특정 종교에 대한 신앙을 학생들에게 설교할 자유가 없다. 엄하게 금지됐다. 교사들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금지다. 그러나 교사들도 학교 밖에선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자신의 종교를 남에게 권유할 수 있다. 교사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제한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에 비추어 생각해 보자. OECD 국가들은 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를 우리보다 폭넓게 인정하고 있다. 제한을 해도 우리에 비해 그 정도가 훨씬 약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모두 마찬가지다. 독일의 경우엔 교사의 정치적 활동을 오히려 적극 권장하는 듯한 느낌이다. 우리도 이들 나라와 같아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일반 국민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는 물론 교사의 정치적 자유와 권리 또한 온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설사 자유와 권리를 제한한다 하더라도 ‘적절한’ 정도에 그쳐야 한다. 적절함이 올바름이다.

<이기정 | 서울 미양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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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일자 지면기사-

지난 11월2일 교육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 입시를 일반고와 동시에 치르도록 하는 고입 동시 실시 방안을 발표했다. 일반계 고등학교의 교육을 정상화하고 초·중등교육의 왜곡을 바로잡는 첫 번째 조치로 평가하고 싶다.

이명박 정부에서 추진한 ‘고교 다양화 300 프로젝트’는 고교 교육을 다양화하고 학교 선택권을 확대하겠다는 명분으로 시작됐지만, 진정 다양한 교육 목표와 내용을 추구하는 학교가 만들어지진 않았다. 오히려 학교 다양화 정책은 학교 서열화 체제를 공고히 했다. 고교 체제 영향을 받는 중학교 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초등학교 교육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쳤다.

이들 학교는 독특한 목적을 추구하고자 설립됐으나, 실제 운영은 설립 목적과 한참 동떨어진 게 현실이다. 자사고의 경우 사립학교 고유의 교육 목적과 내용을 지향한다는 명분을 내걸었으나, 자사고의 63%는 국·영·수 교과를 권장 기준 이상으로 편성해 입시 중심으로 운영하고 있다. 또 20%에 가까운 외고·국제고 학생이 학교에서 배운 제2외국어가 아닌 외국어 과목으로 수능에 응시한다. 외고 졸업생 절반 이상이 어문계열이 아닌 계열로 대학에 진학하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자사고와 외고·국제고는 입시 명문고교로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이들 학교는 전체 고교 중 학교 수는 3.6%, 학생 수는 3.9%에 불과하지만, 2017년 서울대 입학생은 자사고 출신이 18.7%, 외고·국제고 출신이 15.7%를 차지했다. 현재와 같은 고교 체제를 계속 유지한다면, 조만간 고교 평준화 이전의 ‘일류 고등학교’ 체제로의 회귀가 이뤄질 것이다.

문제의 심각성은 고등학교에만 그치지 않는다. 초·중학생들이 자사고와 외고·국제고 진학을 위해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고 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발표한 자료를 보면, 자사고 진학을 희망하는 중3 학생 중 월평균 100만원 이상 사교육비를 지출하는 비율은 일반고 진학 희망 학생의 5배에 달했고, 외고·국제고 진학을 희망하는 학생의 37.1%가 초등학교 단계에서부터 고입 사교육을 시작한다.

고교 교육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의 기초 위에서 어느 정도는 전문교육을 추구한다. 따라서 고교 운영의 다양화는 필요하며 바람직하다. 여기서 다양성은 교육 목적과 내용 면에서의 다양성을 의미한다. 일반계 고교보다 앞서 입학 단계에서 우수한 자원을 선발하고, 선별 효과로 학교의 다양성을 드러내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자사고와 외고·국제고 등이 진정으로 학교교육의 다양화에 기여하고자 한다면, 일반계 고교와 동등한 조건에서 학생을 선발하고, 학교교육의 과정에서 다양한 재능을 지닌 인재를 길러낼 수 있는 교육 효과를 만들어내야 한다.

고입 동시 실시는 고교 체제 전체에 바람직한 변화를 실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일반계 고교 진학생의 구성에 변화가 생길 것이며, 일반계 고교 교육의 정상화를 기대할 수 있다. 자사고와 외고 등은 이번 기회에 학생 선발 효과가 아니라 학교 설립 목적과 특색을 살릴 수 있는 교육으로의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고입 동시 실시는 초·중등교육 변화의 출발점 조치다. 앞으로 정부가 발표한 ‘고교 체제 개편 3단계 로드맵’, 고교학점제 시행, 대학 입학 전형 제도 개편 등 초·중등교육을 근원적으로 혁신하기 위한 정책에 관한 논의를 활발히 진행하고 좋은 정책을 준비해야 한다.

<김용 | 청주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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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의 해가 저문다. 광장과 길거리를 터질 듯 가득 메운 촛불이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사회 변혁을 향한 힘찬 바람이 불고 있다. 그러나 변화의 물꼬가 막혀 있는 곳도 많다. 문재인 정부의 주요 공약인 ‘안전한 사회’와 ‘지속가능한 사회’가 그렇다. 지난 21일, 제천의 화재는 우리가 아직도 ‘대충’과 ‘설마’라는 안전 불감증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시설은 부실하고, 운영은 편의적이고, 점검은 형식적이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라는 암묵의 요구에 침묵의 동의를 하는 다수가 있는 한, 안전한 사회는 요원하다.

성장을 위해 더 많이 생산하고, 생산한 만큼 더 써야만 하는 경제체제에서 소비주의의 확산은 불가피하다. 소비주의는 이미 우리 사회의 거대한 흐름이 되었다. “나는 쇼핑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대로, 마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순례 장소로 등극했고, 쇼핑은 예배가 되었다. 사람들은 얼마나 더 소유하고 소비해야 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소비는 가히 경배의 수준에 올랐다. 이런 고도의 소비사회가 지속가능할 리 없지만, 변화를 택하는 사람은 소수다. “설마, 끝장이야 나겠나.” 사람들은 익숙해진 길을 좀처럼 포기하지 않는다.

많이 쓰고 쉽게 버리는 생활양식은 생태적 부담과 사회적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소비의 증가는 곧 쓰레기의 증가다. 쓰레기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 쌓이게 마련이라, 이제는 바다에도 거대한 쓰레기 더미들이 생겨났다. 글자 그대로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로 변하고 있다(프란치스코 교종, <찬미받으소서>). 상시적 업무에 대한 비정규직의 확산은 우리 사회가 이제는 사람도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으로 여기고 있다고 말해준다. ‘버려진’ 노동자들은 아직도 살을 에는 추위에 거리를 헤매고 굴뚝에 올라가 내려오지 못한다. 사람들은 “강박적 소비주의”와 “집착적 소비주의”에 빠진 채 “소비의 자유를 누리는 한” 자유롭다고 착각한다(<찬미받으소서>). 소유와 소비의 능력이 성공으로 간주된다. 경쟁은 치열해지고, 불안과 위기의식이 고조된다. 살아남기 위해 자신을 더 몰아붙인다. 기약 없는 내일에 오늘을 담보로 잡힌 채, 스스로 노예가 된다. 소비주의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안전한 사회도 지속가능한 사회도 불가능하다. 부정하기 힘든, 암울한 전망이다.

누구나 행복하길 바란다. 소유와 소비에 매달리는 것도 그렇게 되면 행복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얻는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끝없이 ‘더’를 향해 질주하는 우리의 고단한 현실이 그 증거다. 사실 우리들은 일상의 소소한 체험을 통해 어떤 때 진정으로 행복해지는지 알고 있다. 앞만 보며 질주할 때가 아니라 옆을 보며 함께 갈 때, 뒤처진 사람들에게 서로 관대히 손을 내밀 때, 우리는 행복하다. 그 행복은 오래 지속된다. 인간 실존(ex-istence)은 자기 ‘밖에 서는(standing outside)’ 존재인 것이다. 자기를 비우고 거기에 타자를 채울수록 충만해지는 역설적 존재, 사람이다. 그러니 소비주의는 인간의 완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길이다. 아무리 많이 소유하고 소비해도, 아니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를 향한 끝없는 몸부림에 사로잡힌다.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는 정부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뜻하는 우리 각자의 적극적 응답이 필수다. 우리가 자신을 비움으로 충만해진다면, 소유나 소비가 아닌 내어줌과 검약을 우리의 기본 생활방식으로 삼지 못할 까닭이 어디 있는가.

송구영신의 때. ‘더 빨리, 더 많이, 더 편하게’는 이제 그만 우리 마음에서 지우자. ‘조금 천천히, 조금 적게, 조금 불편하게’를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기자. 그럴 때,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사회는 느리지만 분명한 우리의 현실이 될 것이다.

<조현철 신부·녹색연합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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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은 안 오십니까?”

“아…모르셨어요? 지난달에 돌아가셨는데.”

석 달 만에 다시 열린 동네 애서인 모임에서 박 선생은 내 대답에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뭐라고 덧붙이려다 그냥 입을 닫고 말았다. 얘기해 봐야 더 안타까울 뿐이다.

동네에서 책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을 모아 애서인 모임을 만든 건 김 선생이다. 그동안 모임 이름도 없이 몇 번 모였다가 ‘다음번엔 멋지게 하나 지읍시다!’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든 게 김 선생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를 처음 만난 건 설 연휴 때였다. 재활용쓰레기 버리는 곳에 쌓인 책들을 뒤적이다가 뒤표지가 찢어진 <화씨451>을 집어 들고 살펴보는데 그가 문득 말을 걸어왔다.

“그거 첫 번역판이네요. 보기 힘든 건데. 번역자가 엉뚱한 사람으로 나와 있거든요.”

그 몇 마디에 심상치 않은 내공(?)이 느껴졌고, 그 자리에서 선 채로 한 시간쯤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요즘 세상에 그 정도로 책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기는 드문 일이었다. 다독가는 많지만 책이라는 물성 자체를 아끼는 애서가는 점점 멸종해가고 있었다.

그다음 주였나, 김 선생을 따라 옆 동네의 작은 독립서점에 갔었다. 진작부터 한번 가봐야지 하고는 바빠서 통 발길을 주지 못하던 곳이다. 주인과는 잘 아는 사이인 듯 두 사람은 인사도 생략하고 곧장 신변 이야기부터 나누었다.

“재계약했어요?”

“…아뇨. 정리하기로 했어요. 남편도 직장을 옮겨야 해서.”

“아이고… 참.”

김 선생은 그 서점이 폐업을 고민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곳에서 알게 된 몇몇 동네 손님들과 대책을 논의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서점이어도 한 줌밖에 안 되는 단골 고객들로는 안정적인 경영이 어려웠다. 결국 지난봄에 서점이 문을 닫은 뒤에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이 애서인 모임이었다.

지난번 모임에서 김 선생은 불콰해진 얼굴로 맥주잔을 집어 들다 말고 말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도, 나치 독일의 분서도, 1970년대 우리나라의 소위 불량만화 화형식도 다 한때의 과거일 뿐이었는데… 이건 뭐 어떻게 거스를 수가 없을 거 같아요.”

나 역시 그의 말에 깊이 공감하고 있었기에 그저 침묵만 지켰다. 도서관들이, 서점들이, 그리고 책들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전자책이 종이책의 자리를 대체한 지는 오래되었다. 학교나 도서관에서 전자책이 지닌 정보단말기로서의 장점은 종이책이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경지였다. 주말마다 재활용쓰레기장에 책이 잔뜩 쌓이는 일이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기세는 수그러들 줄을 몰랐다. 도서관의 책들은 극히 일부만이 보존서고에서 생명을 유지했고 방대한 공간을 자랑하던 열람실은 시시각각 전자식으로 탈바꿈했다. 책은 이제 더 이상 정보나 교양을 전하는 수단이 아니라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탐닉하는 문화재일 뿐이었다.

지난달 초, 갑자기 김 선생의 딸이 연락해 오면서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장례까지 치른 뒤였고, 딸은 아버지가 남긴 5000권 가까운 책들을 어찌 처분해야 할지 몰라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모두 재활용쓰레기로 버리려다가 생전에 책을 아끼던 아버지 생각이 나서 차마 그러지 못하고, 고인의 수첩에서 애서인 모임의 내 연락처를 찾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책들 중에서 고서적으로 가치가 있거나 그나마 중고서점에서 매입할 만한 책은 채 100권도 안 되었다. 책 하나하나는 모두 인류의 지적 유산이 담긴 위대한 내용들이었지만 도서관에서는 더 이상 개인 장서를 기증받지 않고 있었다. 어차피 훨씬 더 풍부한 인터페이스가 달린 전자책으로 소장되어 있는 텍스트들이었다. 정말 피하고 싶었던 일이지만, 결국 그가 남긴 책들 대부분은 그냥 폐지로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거운 표정으로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던 박 선생에게 말했다.

“<화씨451> 읽어보셨나요? 책이 금지된 사회 이야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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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10대들은 새로운 정보를 검색할 때 구글 같은 문자 포털사이트가 아니라 유튜브부터 먼저 찾아본다고 한다. 즉 문자매체가 아닌 시각매체, 그중에서도 동영상매체를 가장 익숙하게 느낀다는 말이다. 스마트폰이 대세가 된 것은 2010년 이후이다. 21세기에 태어나 자란 세대는 바로 이 시기 즈음부터 초등학생 시절을 보내며 동영상매체라는 환경을 마치 숨 쉬듯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정보단말기로서 책은 이제껏 절대적인 지위를 누려왔다. 작동하는데 에너지가 필요 없고, 어린아이라도 금방 사용법을 익힐 수 있으며, 거친 충격도 문제없이 견디는 튼튼한 내구성을 지녔다. 그래서 앞으로도 책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문자매체보다 시각매체, 동영상매체를 더 편하게 여기는 인류 역사상 첫 세대가 등장하면서, 책의 장점들보다 단점이 점점 더 두드러지는 시대로 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생긴다. 한마디로 말해서 21세기는 ‘구텐베르크 마인드’가 저물어 가는 시대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매체 환경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문자에 기반을 둔 지적 사유를 하는 기성세대와, 이미지를 사고의 기본 도구로 사용하는 새로운 세대. 과연 이 둘의 차이는 인류 문화사에서 어떤 의미를 나타나게 될까?

<박상준 서울SF아카이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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