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훈 | 건축가

 


창덕궁·창경궁과 종묘는 원래 자연지형 위에 연결되어 조영(造營)되었는데 일제 식민통치시절에 민족혼 말살정책으로 그 둘이 갈라졌다. 왕궁과 왕가의 사당을 잇는 지형적 맥락을 끊어 역사성을 결딴내고 조선의 자존심을 훼절하려는 흉계였다. 창경궁에 동물원·식물원을 설치하고 궁을 원으로 격하시켜 유원지를 만들고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벚꽃나무 수천그루를 심고는 밤 벚꽃놀이를 즐겼다. 그것도 모자라 뚫은 길이 지금의 율곡로다. 그러자 돈화문 앞에서 에둘러가지 않고 질러가게 되었다. 지금은 서울 도심 동서방향의 주요 도로 중 하나인데 상습정체가 일어난다.

서울시에서는 교통난을 던다고 차선을 더 늘린 지하도 위를 덮어 문화재를 복원한다며 ‘율곡로 도로구조 개선공사’를 하고 있다. 도로구조를 개선하는 ‘공사’를 마쳐도 본래 자연지형의 역사적 의미 회복과는 별 관계가 없다. 역사·문화적 의미와 자존심을 되찾으려면 궁궐 영역을 절단·관통·통과하는 도로 기능을 근본적으로 없애야 한다. 도시계획이란 당장 필요한 길을 내고 넓히는 것만 아니라 나쁜 길은 없애는 거창한 역사기획이어야 한다. 600년 역사도시답게 불순한 길을 없애는 논의를 시작하자. 그렇게 거창한 뜻이라면 10년, 100년이 걸려도 좋다. 그래야 지금 사는 오늘이 내일의 역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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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률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

 

2010년 5월4일 고려대생 김연아가 뉴욕 한복판의 레드카펫에 섰다. 당시 김연아는 타임지의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부문 2위에 선정돼 맨해튼에서 열린 기념행사에 초대받아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그야말로 파워풀한 사람들’과 함께했다. 김연아는 이에 앞서 4월 고려대를 찾았다. ‘등교’가 아닌 ‘방문길’에 총장을 만나, 면담이 아닌 환담을 나누고, 학장의 직접 안내로 강의실에 들어갔다가 딱 10분 만에 떠났다.

학생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김연아가 그날 학교에 언제쯤 나타날지 같은 과 학생도, 교수도 대부분 몰랐다고 한다. 그럼에도 졸업에는 당연히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김연아는 그 당시 한 TV 토크쇼에 나와 전년도에 F학점이 있었다는 일부 언론 보도에 대해 “어이가 없다. 작년에는 과제물 같은 걸(?)로 학점을 땄다”고 말했다. 학점을 위해 제출한 과제물 같은 것(?)이 무엇인지 순간적으로 대학에 있는 나는 당혹스러웠다.

악화일로에 있던 ‘국민 피겨 스타’ 김연아와 연세대 황상민 교수의 다툼이 한 고비를 넘겼다. 지난 1일 황 교수의 “교생실습은 쇼”라는 발언으로 촉발된 갈등은 김연아 쪽의 명예훼손 소송으로 비화했지만 김연아 측이 최근 소송을 취하할 뜻을 밝히며 이번 사태는 일단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느낌이다. 하지만 표현의 자유와 명예 훼손, 공인의 사생활 충돌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논쟁은 냉정한 눈으로 눈여겨볼 만하다.

법은 ‘공연히 사실이나 허위사실을 적시해 사람의 명예를 훼손함으로써 성립하는 범죄’라 규정하고 있다. 단순히 틀린 사실을 얘기했다고 해서 명예훼손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서울 역삼동 진선여자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김연아가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판례를 보더라도 중요한 내용이 사실이면 세부적인 데서 틀려도 허위는 아닌 경우가 많다. 명예훼손은 보는 관점에 따라 해석이 다른, 그래서 딱 부러지게 정의하기 어려운, 다소 애매모호한 개념이다. 더군다나 만에 하나 황상민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 더더욱 명예훼손에 해당되지 않게 된다. “true statement are not libelous라는 판결문에 보듯이 사실 적시는 명예 훼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인류 보편의 진리다.

그러나 법 논리에 앞서 스타 김연아는 깨달아야 할 것이 있다. 지금의 눈부신 성공 뒤에는 밤잠을 설쳐 가며 성원과 지지를 보낸 황상민 교수를 포함한 전체 한국민들의 공도 얼마간 있다는 것을. 덧붙여 유명한 공인 김연아가 가지는 책임과 의무에 대해 알아야 한다. 공인이라는 유명세 때문에 열 손가락이 모자라는 광고 모델로, 가난한 한국인들이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뭉칫돈을 벌고 있지 않은가.

스타덤에 올라 부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을 팬으로 거느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자칫 한순간에 날아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지식인이란 자기에게 도움이 전혀 되지 않는 사안에도 간섭하는, 아니 간섭해야 하는 사람이다.’ 장 폴 샤르트르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황상민 교수의 김연아 관련 발언은 나무랄 일이 못된다. 표현에 있어 다소 매끄럽지 못한 점이 있지만 그는 해야 할 말을 했다고 봐야 한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김연아가 좀 더 신중했으면 좋겠다. 스스로 자세를 낮추고 이른바 셀러브리티 오블리주(유명 인사의 도덕적 책무)에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그를 사랑하는 모든 순진한 한국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

덧붙여 이번 사건은 황상민 교수의 발언 그 자체보다는 그동안 강의를 얼마나 충실하게 들었는지, 시험은 제대로 치렀는지 등등 해당 대학이 솔직하게 답하는 것이 논쟁의 본말이다. 실체적 진실 규명은 어디 가고 객들이 공허한 힘겨루기에 매달리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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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현 | 에너지경제硏 부연구위원

 


지난해 9월 늦더위 폭염 때 전력수요 급증으로 초유의 정전사태를 겪은 악몽이 다시 떠오르고 있다. 지난주 한때 예비전력이 316만㎾로 내려가 전력예비율이 4.9%까지 떨어졌다. 문제는 하절기다. 대부분 기간 동안 예비전력이 400만㎾를 밑돌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특히 8월 3~4주간은 150만㎾ 수준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정부는 최근 시민단체와 함께 전력 수급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절전캠페인 추진협의회를 발족했다. 정부는 또 6월14~21일을 국민발전소 건설주간으로 선포하고 4대 실천요령과 핵심정책을 발표했다. 국민발전소란 국민들의 절전이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갖는다는 의미다. 4대 실천요령은 전력 피크시간대인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전기절약, 냉방온도 26도 이상 유지, 휘들옷(간편 복장) 착용, 대기전력 차단 등이다.

하지만 당국이 아무리 절전 캠페인을 열심히 해도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절전하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에너지절약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블랙아웃의 유일한 해결사이다.

 

정부청사,에너지절약 캠페인 ㅣ 출처:경향DB

순간전력 수요가 피크에 오를 때 전력 예비율을 충분히 유지하려면 발전소를 지어 공급을 늘리면 된다. 하지만 발전소를 건설하는 데는 너무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 단기간에 에너지 낭비를 막고 효율을 높이는 방법은 절약밖에 없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에너지 공급확대가 아니라 ‘에너지 절약’이다. 에너지의 97%를 수입하는 우리나라는 에너지 절약 성패가 경제성장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몇 년간 유가 급등으로 국내 물가인상 압력이 위험수위를 넘었고, 에너지수입이 늘어나면서 경상수지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에너지절약을 위해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봐야 한다. 먼저 주변에 전기가 낭비되는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실내온도를 적정하게 맞추기, 컴퓨터 전원끄기, 빈방 불끄기 등을 통해 새는 전기를 줄이는 것이 에너지절약의 첫걸음이다.

전기를 마음껏 쓰기 위해 대규모 화력발전소나 원전을 짓겠는다는 생각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제는 에너지절약 및 효율 향상이 생존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정부의 확고한 에너지절약 정책 의지와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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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재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slownslow@naver.com

 

자전거 보관소와 낮은 시멘트 담 사이 좁은 공간. 내다버린 화분 20여개가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 제법 큰 화분이었다. 벤자민이나 남천 같은 키 큰 나무를 감당할 만한 크기였다. 겨우내 버려졌던 화분들이 날이 풀리자 ‘텃밭’으로 바뀌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고추를 정성들여 키우고 있었다. 하얀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고추꽃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고 하얗다. 저렇게 소극적인 꽃이 그렇게 매운 열매를 맺다니, 볼 때마다 신기했다.

지난주 일요일 오전, 자전거를 가지러 가다가 보았다. 한 할머니가 화분 근처에서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붓을 들고 있었다. 자루가 가늘고 긴 수채화 붓으로 고추꽃을 하나하나 건드리고 있었다. 인공수분을 하는 것이었다.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또 제때에 가루받이를 하지 않으면 수확에 큰 차질이 생기는 과수원도 아니었다. 나무가 제법 많은 신도시 아파트인데다, 단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논과 밭이 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에 야트막한 산도 있었다. 그런데 인공수분이라. 벌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벌이 보이지 않았다. 흰나비는 아침마다 두서너 마리씩 눈에 띄곤 했는데, 윙윙대는 벌소리는 들어보지 못했다. 산수유, 벚꽃, 목련, 모란이 피고지는 동안 아파트 화단에서 벌을 보지 못했다. 서둘러 기사를 검색해보니, 토종벌이 멸종 직전이었다. 농민신문에 따르면, 농민들은 토종벌의 99%가 이미 죽었다고 추정한다는 것이었다. 꿀벌의 애벌레가 탈바꿈하기 전에 말라죽는 ‘낭충봉아부패병’이 주범이었다. 하지만 치료법은커녕 발병 원인조차 규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서양벌도 문제였다. 서양벌도 곰팡이성 세균에 감염돼 몸이 굳는 ‘석고병’에 노출되어 양봉농가들이 아연 긴장하고 있다고 한다.

 

꽃에 앉은 꿀벌 ㅣ 출처:경향DB

꿀벌의 집단폐사(CCD)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한반도에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한나 노드하우스의 <꿀벌을 지키는 사람들>(더숲)에 의하면, 미국에서도 19세기 후반 이후 21세기 초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유로 벌들이 집단폐사했다. 봉군 붕괴의 원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해졌다. 살충제 남용에 이어 유전자 교란, 신종 병원균 출현, 최근에는 휴대전화에서 나오는 전자파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노만 마이어가 편집한 <가이아 아틀라스>(지영사)에 의하면, 식물 한 종당 적어도 스무 종의 동물이 의존해 살아간다. 식물이 한 종 사라질 때마다 더 많은 종의 동물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다. 현재 지구상의 생물은 700만~1300만 종. 이 중 대부분이 무척추동물인데, 무척추동물 중 80~90%가 곤충이다. 대량 멸종은 곤충들에게서 일어나고 있다. 하루 약 20종의 곤충이 지구에서 사라진다. 꿀벌과 같은 곤충의 멸종은 지구 생태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꿀벌이 사라지면 우선 농작물의 수확량이 급감한다.

아인슈타인은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이내에 인류가 멸종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보도에 의하면, 지구상의 충매화 중 80%가 꿀벌에 의존한다. 세계 100대 농작물도 꿀벌이 없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꿀벌이 주요 농작물의 가루받이 중 71%를 담당하고, 다른 곤충과 새가 나머지 29%를 차지한다. 인간의 입으로 들어가는 먹을거리 중 3분의 1 이상이 꿀벌을 매개로 한다는 보고도 나와 있다.

“내년에는 봄이 안 와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가 무엇으로 사는지 다시 생각하게 했으면 좋겠다.” 건축가 고 정기용이 전 국토의 공사장화를 비판하며 덧붙인 말이다. 벌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지 성찰하지 않는다. 대신 붓을 든다. 우리에게는 몇 자루의 붓이 필요한 것인가. 아니 이것이 붓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인간이 벌과 나비를 대신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인가. 우리는 대체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가. 오지 않은 봄이 가고 있다. 벌이 찾아오지 않아서 오지 않은 봄이 이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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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재원 산업부 기자 jwhong@kyunghyang.com

 

지난주 만난 석훈이(가명·14)는 참 착한 아이였다. 몇 달 전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자 “저 이제 학원 안 다녀도 돼요”라고 했던 속깊은 아이다. 한창 식욕이 왕성할 나이에 교내 매점도 못가게 됐지만 그는 불평하지 않는다.

그런 석훈이가 일주일에 나흘씩 교실에서 대학생으로부터 과외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됐다. 과목은 영어와 수학, 한 번에 두 시간씩 듣는다. 다른 친구들이 학원으로 사라져버린 지난 금요일 오후, 석훈이는 여대생 선생님의 수학 수업을 받고 있었다.

석훈이는 나중에 교사가 돼 어려운 학생들을 돕고 싶어 한다. 그래서인지 선생님의 칠판 필기와 설명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열심히 수업을 듣는다. 이 학교엔 이날 석훈이와 처지가 비슷한 20여명이 모여 더위도 잊고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마다 꿈을 지닌 아이들이다. 서울지역 각 명문대에서 선발된 정예 대학생 교사들도 이 아이들이 대견해 모처럼 팔을 걷어붙였다.

석훈이가 과외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된 건 삼성 덕분이다. 삼성은 형편이 어려운 중학생 1만5000명이 방과후 과외수업을 받을 수 있도록 연간 300억원을 지원한다. 석훈이는 여기에 선발됐다.

삼성은 ‘드림클래스’란 이 프로그램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어려운 학생들에게 돈 몇푼, 물고기 몇마리를 던져주는 대신 ‘낚시하는 법’을 전해주기 위한 프로그램으로, 기획에만 1년 이상이 걸렸다고 한다.

 

서울 은평구 은빛초등학교 학생들이 점심을 먹으며 웃고 있다. l 출처:경향DB

이번 여름방학 땐 교사들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지방의 학생들을 뽑아 서울대에서 합숙을 시키며 재학생들로부터 과외를 받도록 해준다. 대학생 교사들은 이 아이들의 멘토 역할까지 맡아주기로 했다.

삼성이 돈을 쓰면 의심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룹에 불리한 여론을 돌리기 위한 것이란 지적을 받곤 한다. 삼성전자만 해도 석 달 만에 5조원의 이익을 남기는데 고작 그 정도 내놓고 생색을 내느냐고 말하는 이도 있다. 삼성이 누구 덕에 컸느냐는 지식인들의 토론도 벌어진다. 삼성만큼 국가의 덕을 본 기업이 또 어디 있느냐며, 이를 갚기 위해서라도 사회공헌은 당연하다고 말한다. 치사한 돈으로 잘난 척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말들은 석훈이를 돕지 못한다. 곤궁한 그에게 돈은 똑같은 돈이어서, 어떤 다른 돈이 더 훌륭한 돈일 수 없다. 누구도 말 대신 돈을 내주지 않는데, 현장에서 만난 석훈이에겐 그 돈이 꼭 필요해 보였다.

기업들이 그놈의 ‘치사한 돈’ 좀 많이 썼으면 한다. 더 많은 ‘석훈이’를 찾아내 온갖 방법으로 그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어라. 석훈이가 교사가 되는 날, 그 돈은 더할 수 없이 고귀해진다는 걸 우리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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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소설가

 

오래된 유머 중에 이런 게 있다. 바늘로 코끼리 죽이는 법 세 가지. 하나, 죽을 때까지 찌른다. 둘, 한 번 찌르고 나서 죽기를 기다린다. 셋, 기다렸다가 죽기 직전에 찌른다.

섬에서 하는 풍어제는 첫 번째 방법을 쓴다. 고기 많이 잡게 해달라고 용왕님한테 제(祭)를 올리는 거라서 용왕제라고도 하는데 해마다 5월이면 빠뜨리지 않고 해오고 있다. 많이 잡히면 많이 잡혀서, 어장이 신통찮으면 발복축원을 비는 심정으로, 어중간하면 또 그런 대로 착실하게 도장을 찍어왔다. 잘되면 내 탓, 못 되면 귀신 탓이 이곳에서도 유용하기 때문이다. 생선이 많이 잡히면 내가 기술이 좋아서, 안 잡히면 용왕이 심술을 부렸거나 아니면 직무유기의 게으름에 빠졌기 때문에 그렇다고, 우선 나부터 떠들고 다닌다.

올해도 어김없이 풍어제가 열렸다. 지난 몇 년간 어장이 시원찮았으므로 삼가 심각한 기분으로 치러졌다. 어떤 기분으로 하든 이거 한번 볼 만하다. 우선 마을의 웬만한 배는 모두 화려한 만선기로 단장을 한다. 만국기를 다는 배도 있다. 제사를 지낼 배가 제관 일행을 싣고 출발하면 매귀굿을 할 매구꾼(요즘 말로 풍물패)이 탄 배가 그 다음, 그리고 치장을 한 마을 배들이 우당탕탕 뒤를 따라간다. 숫제 전투라도 치르러 나가는 기세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제를 올린 다음 제물과 돈을 실은 자그마한 떼배를 띄워놓는 게 하이라이트이다. 모든 배들이 떼배를 중심으로 시합하듯 빙글빙글 돈다. 도는 횟수만큼 만선(滿船)이 보장되는 것 같다. 그러는 동안 매구꾼들은 왁자하니 풍물을 친다. 거문도 뱃노래도 부른다. 이 정도로 한바탕 바다를 뒤흔들어 놓으면 용왕도 부담스러워 뭘 안 하지는 못할 것이다. 왜? 이미 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차마 모른 척할 수 없는 법 아닌가.

용왕제가 끝나고 며칠이 흘렀다. 한끼 잘 차려 먹인 게 효과가 있는가를 보러 어제는 친구들과 볼락낚시를 갔다. 배를 타고 방파제, 갯바위 이곳저곳을 싸돌아다녔는데도 전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용왕이 단단히 틀어졌거나 이제는 눈치가 트여 젯밥 정도로는 양이 안 차는 모양이라고 밤 깊어 돌아오면서 우리는 수군거렸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안 물어도 계속 낚시채비를 던지는 것처럼 또 풍어제를 올리는 것이다. 돌아오는 5월에 또 한다. 될 때까지 한다.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다.

 

 

출처:경향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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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리원전 1호기의 안전 점검을 실시한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어제 “지난 2월 발생한 정전 사고의 원인이던 비상디젤발전기를 포함한 설비 상태가 양호함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안전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얘기다. IAEA의 발표는 고리 1호기의 재가동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역주민과 시민단체들은 “IAEA의 안전 점검은 원천 무효”라고 주장하며 폐쇄할 것을 촉구했다. IAEA의 안전 점검 결과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고리 1호기의 안전을 둘러싼 논란과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증폭될 것이 뻔하다. 정부와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섣불리 재가동을 결정한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7개국 8명의 전문가로 구성된 IAEA 점검단은 한수원의 요청으로 지난 4일부터 고리원전 1호기에 대한 안전 점검을 실시했다. 주민들이 IAEA의 점검을 불신하는 것은 IAEA가 핵발전의 안전보다 핵발전의 필요성을 우선하는 기구로 보기 때문이다. 과거 굴업도와 경주방폐장 부지 등 국내 핵시설에 대한 안전 점검에서 신뢰할 수 없는 결과를 내놓은 적이 있다는 점도 이유로 든다. 이번 점검단의 전문성과 짧은 현장점검 기간에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IAEA의 안전 점검은 고리 1호기 재가동을 위한 요식적이고 형식적인 점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고리원전 앞 바다에서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신규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해상시위를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고리원전 1호기는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해 2007년 30년 설계수명을 다했으나, 수명을 10년 연장하면서 안전성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그동안 고리 1호기에서 발생한 사고는 국내 전체 원전 사고의 20%를 차지한다. 지난 2월에는 외부전원 공급장치인 비상디젤발전기가 가동되지 않는 심각한 사고까지 발생했다. 최근 고리 1호기에서 체르노빌 원전 사고 때와 같은 방사성 물질이 방출되는 사고가 발생하면 사망자는 최대 90만명, 경제적 피해는 628조원에 이른다는 모의 실험 결과도 나왔다. 한수원은 “발생할 가능성이 없는 무리한 상황을 가정한 것”이라고 반박했지만, 고리 1호기에는 경각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IAEA 안전 점검단은 고리원전 1호기의 운전 연수 경과에 따른 설비 관리가 IAEA가 제시한 국제기준에 만족하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후의 폭넓은 안전조치는 우수 사례로 추천한다고도 했다. 한수원은 “IAEA가 점검 착수 전 두 달간 방대한 자료를 검토해 8일간의 현장점검 기간은 부족하지 않다” “IAEA는 모든 나라가 공인하는 원자력 안전 부문의 최고, 최후의 기관”이라고 해명했다. IAEA는 믿을 만한 전문기관이란 이야기다. 그러나 지역주민과 시민단체들의 생각은 다르다. 이들이 고리 1호기의 안전을 신뢰하지 못하는 한 재가동해선 안된다고 본다. 당장 폐쇄가 어렵다면 적어도 이들이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안전 점검을 다시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고리 1호기의 재가동이 아니라 국민 안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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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훈|건축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지방 버스에 푸드덕거리는 닭을 들고 타는 사람들이 흔했다. 서울 버스에서도 주인에게 들려 상경한 닭이 가끔 똥도 싸고 울기도 했다. 지푸라기로 엮은 달걀 한 꾸러미가 큰 선물이던 순박한 시절의 모습이다. 1980년대 초, 중동 어느 나라에선가 비행기를 탔더니 전통의상에 휜 칼을 찬 사내의 어깨 위에 머리씌우개를 한 사냥매가 태연히 앉아 있더라. 이집트 룩소르에서 카이로로 가는 기차를 탔더니 닭은 양반이고 오리에 강아지 그것도 모자라 염소에 양까지 다 있어 동물농장이 따로 없더라. 지저분한 냄새에 시끄러워도 같이 가는 내내 푸근하더라.

요즘은 소비자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장삿속이 발전해 농장-공장-시장이 다 붙어 있다. 집 앞의 마트에서 모든 걸 살 수 있다. 그것도 귀찮아 택배를 이용하고 무얼 들고 다니질 않는다. 바빠서 멀리 갈 수 없다는 사정과 게을러서 못가는 핑계가 엉켜 있다. 게으름에 바쁘고, 뭔지도 모르며 할 일만 많은 것에 익숙한 일상이다.

달걀 한 판을 들고 지하철을 탄 아주머니 멀리 가시는데, 늘 보던 달걀에서 수십년 전 풍경이 떠오르더라. 장소와 상황이 바뀌면 같은 사물도 낯설게 보인다. 그 풍경 속에서 나는 내가 낯설게 느껴지더라. 가끔은 낯선 모습과 같이 사는 것이 일상이어라.

 

출처:경향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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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규 | SR코리아 대표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일어난 지 1년여 만에 도쿄를 거쳐 후쿠시마를 다녀오게 되었다. 사고 이후 방사능 오염이 어느 정도인지 측정도 하고, 후쿠시마에서 300㎞ 떨어진 도쿄 시민들의 삶의 모습도 궁금해서다.

방사능은 다른 오염원과는 달리 아주 객관적으로 오염도를 잴 수 있다. 측정 결과 당초 도쿄가 조금 높을 것으로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서울과 도쿄 시내 거리의 방사능은 0.10~0.15μ㏜(마이크로시버트) 정도로 환경 방사능 수치는 비슷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가지고 간 방사능 계측기가 가리키는 수치는 후쿠시마로 다가갈수록 점점 높아졌다. 후쿠시마역을 100㎞ 정도 남겨둔 상태에서 0.25μ㏜ 수준으로 올라가더니 역에 도착했을 때는 0.40~0.45μ㏜ 수준으로 높아졌다. 후쿠시마역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지역에서 북서쪽으로 80㎞ 떨어진 곳이니 사고 지역으로 갈수록 방사능 수준이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예상은 쉽게 할 수 있다. 역 주변은 여느 때와 같이 시민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역 주변을 돌면서 방사능이 높은 지역(Hot Spot)을 몇 곳 조사해 보았는데, 가로수 밑과 화단 구석 등에서 6.5μ㏜에 달하는 위험 지역을 다수 확인할 수 있었다.

전문가들은 환경방사능에 의한 외부피폭보다 입과 코로 들어오는 내부피폭이 훨씬 위험하다고 말한다. 방사능의 세기는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기 때문에 방사능 물질을 흡입했을 때 호흡기나 소화기 계통에 닿게 되면 100만배 이상의 피폭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보다 마스크를 착용한 사람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원전사고 피해 모의실험 결과발표 ㅣ 출처:경향DB

오랜 기간 그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 원전사고와 방사능 오염은 불가항력이었을까?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곳이 이곳인데 여기를 두고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 매일 먹고 마셔온 물과 야채와 쌀이 여기서 난 것인데 오염이 되었다 한들 어떻게 무엇을 피할 수 있단 말인가? 불안과 공포와 걱정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지난 1년여 동안 후쿠시마 사람들의 눈물이 흐르고 흐르다 이제 눈물샘마저 말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태계 순환으로 보면 방사성물질은 이제 넓은 지역에 대기를 통해 확산되어, 토양에 스며들고 식물을 통해 먹이사슬로 옮아가고 있을 것이다. 일부는 하천을 통해 바다로 흘러가면서 어류, 조류 등으로 생체 농축과정을 거치고 있을 것이다. 멀리 미국 샌프란시스코 해안에서 잡힌 참다랑어에서 세슘이 검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것이 며칠 전 일이다.

후쿠시마 원전사고를 계기로 일본은 현재 안전 점검을 명목으로 54기 원전을 모두 중지시켰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국가적 토론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원전 전력 공급 제로인 상태에서도 일본이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은 에너지 정책은 국민들의 동의 아래 잘 설계하고 디자인하면 여러 가지 방안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원전 20기가 가동 중인 우리나라 현실로 돌아와 보니, 아직도 핵드라이브 정책에 목을 매고 있어 걱정스럽다. 이제 더 이상 우리의 미래세대에 후쿠시마의 눈물을 다시 흘리게 해서는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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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 | 스포츠칼럼니스트 prague@naver.com

 

틀림없이 김연아는 불쾌했을 것이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교생 실습에 나섰을 텐데 저명한 심리학자가 보여주기 위한 쇼라고 비판했으니, 상처 입었을 것이다. 사실 ‘쇼’를 하려고 해도 지켜보는 눈이 너무나 많은 게 학교 현장이다. 교사들도 수십 명이고 학생들은 수백 명이다. 몇 번 얼굴만 비치고 만다면 금세 실망스럽다는 글이 봄날의 벚꽃처럼 인터넷에 흩날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얼굴만 잠깐 비치고 광고 찍으러 가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논란이 된 황상민 교수의 발언을 보니, 이 사실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황 교수가 단정적으로 말한 측면이 있다. 김연아로서는 상당히 불쾌했을 것이다. 그러나 심각한 명예훼손인가 하면 생각해볼 여지가 없지 않고 고소까지 할 일인가 하면 글쎄, 그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는 게 내 판단이다. 그 이유를 적어본다.

 

서울 역삼동 진선여자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간 김연아가 '피겨 이론' 수업을 하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우선 법정에서 이긴다 해도 실익이 크지 않다. 여론은 전체적으로 황 교수의 사실 판단 착오와 표현의 과잉을 비판하고 있다. 황 교수도 비록 자기 방어적 측면이 강하지만, 사과의 뜻을 밝혔다.

만일 법정으로 갈 경우, 황 교수는 자신의 주장을 반증하기 위해 김연아가 교생 실습에 나설 만큼 대학 생활을 정상적으로 이수했는지를 되물을 것이다. 상당히 많은 시간을 전지훈련이나 대회 참가로 해외에 머물러야 했던 김연아로서는 학교 측의 ‘여유 있는’ 규정 해석이나 배려에 따른 ‘비출석 과제물 대체 이수’ 등을 밝혀야 하는데, 이 경우 잃는 것이 더 크다. 사실에서 이긴다 해도 특혜 논란에 또 휘말릴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볼 것은 스포츠교육의 불균형성이다. 황 교수의 발언 취지도 사실 이 대목이다. 이번 기회에 김연아와 주변 관계자는 물론 교과부, 문화부, 대한체육회 등은 제도적으로 ‘공부하기 어려운 학생 선수’ 상황을 심각하게 성찰해야 한다.

체육 특기자 제도는, 공부할 마음이 전혀 없는 학생은 물론이려니와 공부를 하고 싶은 학생도 전혀 그것을 실현하기 어렵게 만든다. 바늘구멍보다 좁은 특기자 문을 통과하기 위해 중·고교 학생 선수들은 대체로 교실 구경도 못한 채 경기장에서 귀한 10대 시절을 보낸다. 그중 열에 아홉은 낙오하고 한두 명이 통과하게 되는데, 그들은 학생이라기보다는 대학의 홍보대사처럼 생활한다. 이래저래 관문을 통과한 쪽이나 그렇지 못한 쪽이나 공부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인생의 절반을 보내게 된다. 이게 정상인가, 김연아와 더불어 우리는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의 당사자였고 입학하자마자 세계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그 대학 총장이 ‘고대 정신을 팍팍 주입한 결과’라는 어처구니없는 실언까지 했던, 김연아라면 이 같은 불균형성을 들어서 잘 알고 겪어서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황 교수의 비판이 매우 불쾌한 것이었을지라도, 그 맥락이 학생 선수들에게 공부할 기회, 친교할 기회, 인성을 쌓을 기회를 제도적으로 박탈해버리는 현 스포츠교육을 비판하려는 것이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지금 당장 김연아라는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는 없지만, 이번 논란이 미래의 김연아를 꿈꾸는 수많은 중·고교 유망주가 공부도 하면서 실력을 쌓는 방법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국위선양 신드롬’에서 다 함께 벗어나자고 말하고 싶다. 김연아는 천부적인 재능과 고결한 노력으로 값진 성취를 이룬 인물이다. 앞으로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정점으로 하여 스타 중의 스타로 활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아직 22살의 청년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룰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도 있는 나이다. 실수와 오판과 격정이 허락되는 나이다. 22살은 무엇인가를 베풀고 이끌어가는 나이라기보다는 이 사회의 다양한 모습과 욕망, 의견을 두루 접하며 더 성장해야 할 때이다.

김연아는 일반인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위치에서 굵직한 결정과 선택을 할 수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이 사회의 평균적인 젊은이가 겪고 배운 소중한 것을 결핍한 경우이기도 하다. 이러한 때에 혹시 이 사회가 김연아를 ‘국위선양의 젊은 리더’ 같은 일종의 허위의식으로만 대할 경우 그 끝은 자칫 일그러진 영웅이 추락하는 벼랑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자신을 ‘무오류 무결점’으로 이미지화하려는 주변의 유혹에 대해 김연아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갖고자 했던 문대성의 경우가 반면교사다.

나는 김연아가 이렇게 말하기를 기대한다. ‘황 교수의 발언은 사실과 명백히 달라서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스포츠교육의 기형성을 비판하려는 취지를 이해하여 고소를 취하한다.’ 이것으로 김연아는 법정까지 가지 않고서도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한마디만 덧붙이기를 바란다.

‘우리나라 스포츠교육은 비정상적인 부분이 있다. 여러 교수님이나 지도자들과 함께 학생 선수들이 공부와 운동을 병행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가능한지 찾아보도록 하겠다.’ 이럴 때 김연아는 그 무슨 낯간지러운 ‘한국을 빛낸 스타’ 정도의 저렴한 이미지가 아니라 진실로 스포츠를 사랑하고 진정으로 후배들을 보듬어주는, 진짜 스타가 될 것이다. 그런 스타로서, 그러니까 서푼어치 판타지 스타가 아니라 진정한 역할 모델의 구현자로서 2018평창의 리더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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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 | 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서울 동대문에서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까지 관동대로를 걸어갈 때의 일이다. 양수리에서 양평에 이르는 6번 국도를 따라 함께 걷고 있던 한 도반이 내게 말을 건넸다. “선생님, 저 걸어가기가 너무 힘들어요?” “왜요?” “매연과 소음 때문에요.” 차량들이 다니는 대부분의 길은 온통 매연과 소음의 종합백화점이다. 


집도 마찬가지다. 현대인들이 살고 있는 대부분의 아파트들은 특별한 방음장치를 하지 않는 이상 소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러 소리들이 끊이지 않는다. 이른 아침부터 어둠이 내리는 저녁까지 “싱싱한 딸기가 왔어요” “달고 맛있는 꿀 사과 왔어요” 하고 소리치는 행상들 소리에 계절이 오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정도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으면 “무슨 일로 이렇게 조용하지?” 오히려 의구심이 생긴다. 소음이 사라진 순간에도 이렇게 마음이 편하지 않고 궁금해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도 모르게 소음을 사랑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경향신문DB)



어린 시절을 회상해보면 청소년기를 보낸 두 곳의 집 역시 길갓집이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사람들의 발소리와 두런대는 소리들이 방문을 통해 내게 곧바로 들렸다. 


“도시인은 침묵이 지배하는 공간에서는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그는 침묵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얼른 큰소리로 말을 하거나 자동차의 라디오나 CD음악을 켜서 안도감을 주는 소리를 추가한다. 소음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고요한 침묵의 세계는 결국 표적이 사라진 불안의 세계가 되고 만다. 갑자기 떠들썩한 소리가 딱 그쳐버리면 기분이 으스스해지기 쉽다. 그것은 곧 엄청난 재난이 발생하기 직전의 정지 순간처럼 느껴져서 길갓집에 사는 사람들은 공연히 겁을 내며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에 실린 글이다. 



 작금의 시대에 길을 걷기 위해서는 참고 견디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다. 나는 그 도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차피 나그네는 길에서 하루 종일을 보내야 하므로 매연도 보약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매연도 몸에 좋은 보약이라고 여기며 달게 받아들이세요.” 그러면서 니체의 운명애를 들려주었다. “인간의 위대성을 나타내는 나의 공식은 운명애이다. 필연적인 것은 감내하고 사랑해야 한다.”



길을 걷는 사람은 소음도 아름다운 음악이나 풀벌레의 노래 소리처럼 들으며 가는 그런 지혜를 터득해야 한다.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길을 걷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이자 화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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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문학평론가 poetica7@hanmail.net


 

엄청나게 크거나 믿을 수 없이 작은 것들에 관해 말해보기로 하자. 


크리스토퍼 포터의 아름다운 책 <당신과 지구와 우주>에서 읽었다. 엄청나게 큰 것들은 얼마나 클까. 크기의 등급을 26단계로 나눌 수 있다. 1m에서 10m까지의 크기를 1등급이라고 하면, 10억광년에서 100억광년까지의 크기가 26등급이다. 이것은 10을 25~26번 제곱한 m다. 지금까지 우주에서 발견된 가장 큰 구조물인 ‘슬로언 장성’(Sloan Great Wall)의 크기가 이 등급에 속하는데, 은하단들이 이룬 띠인 이것은 만리장성보다 250,000,000,000,000,000배 길다.


은하단의 중심부에서 흔히 발견되는 거대타원은하의 모습 (경향신문DB)



 믿을 수 없이 작은 것들은 얼마나 작을까.


이번엔 위와는 반대 방향으로 10단계의 등급을 매기는 일이 가능할 것이다. 1m에서 10㎝까지를 1등급이라고 한다면, 1nm(나노미터)에서 0.1nm까지의 크기가 10등급이다. 10을 마이너스 9~10번 제곱한 미터다. 원자들이 이 등급에 속한다. 


이보다 더 작은 것들도 있기는 있다. 쿼크(quark)라는 이름의 신비로운 입자가 그것. 물리학자 머리 겔만이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피네건의 경야(經夜)>의 한 구절, “Three quarks for Muster Mark”에서 그 이름을 가져왔다고 한다.


엄청나게 큰 것이건 믿을 수 없이 작은 것이건,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 보면 ‘재다’라는 행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동시에 밀려오는 것이다. 제 아무리 크거나 작은 것들도 결국 인간은 다 재는 데 성공했구나 하는 경이로움이 그 하나이고, 그럼에도 잴 수 없는 것들은 끝내 잴 수 없는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반발심이 다른 하나이다. “심장 활동의 전기적 패턴은 추적할 수 있지만, 변덕스럽게 솟구치는 애증은 추적할 수 없다.”(<당신과 지구와 우주> 73쪽) 과연 그렇다. 또 그래야만 한다.


문학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싶어서다. 시인들은 오랫동안 그 ‘잴 수 없는 것들의 잴 수 없음’에 대해 말해 왔다. 김수영의 시 중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품은 아니지만 내가 가끔 외워보곤 하는, 이런 시가 있다. 




가벼운 무게가 하늘을

 생각하게 하는

 자[針尺]의 우아(優雅)는 무엇인가 


무엇이든지

 재어볼 수 있는 마음은

 아무것도 재지 못할 마음

 삶에 지친 자(者)여

 자를 보라

 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


(‘자’ 전문) 




 무엇이든 잴 수 있는 마음은 정작 아무것도 잴 수 없다는 말.


안도현의 새 시집 <북항(北港)>에는 이런 시가 수록돼 있다. 



   

바다의 폭이 얼마나 되나 재보려고 수평선은 귓등에 등대 같은 연필을 꽂고 수십억년 전부터 팽팽하다


사랑이여

너하고 나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폭’ 전문)

 


어쩌면 이런 말일까. 수평선은 바다의 폭을 재기 위해 저토록 오랜 세월 팽팽한데, 나와 너는 우리 사이의 거리를 재기 위해 무엇을 했나. 수평선의 그것과 같은 그런 수십억년의 노력이 있든가 아니면 자와 같은 세상의 흔한 도구와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잴 수 없는 것들은 끝내 잴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대상이 인간일 경우라면, 그의 무언가를 재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위협이거나 모욕일 수 있다. 어떤 이가 공동체의 안위를 파괴하는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법의 자에 판단을 맡기면 될 것이다. (그 법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것인지도 늘 함께 따져야 하리라.) 그러나 누군가의 머릿속에, 그것도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자를 들이대서, 그의 ‘사상’이 왼쪽으로 혹은 오른쪽으로 얼마나 기울어 있는가를 재는 일은 결국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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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렬 | 방송대 문화교양학부 교수


1년 전쯤 우리나라의 이름있는 건축가들이 어느 신문사의 부탁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물을 선정한 적이 있다. 그 중 네번째로 뽑힌 것이 파주출판단지다. 선정 이유는 “지형을 최대한 살린 친환경적 도시의 가능성”이었다. 출판단지에 들어가보면 정말 그런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지 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는 자연상태의 습지 양편으로 다양한 디자인의 현대 건축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고, 거기에다 아담하면서 고풍스러운 한옥 한 채가 멋을 더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환경이라는 말을 기준삼아 건축물들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곳은 점점 미심쩍은 장소로 변한다. 그곳 건축물은 대부분 쇠와 콘크리트, 유리와 돌로 이루어졌다. 모두 제조할 때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고, 따라서 그 자체로는 친환경의 기준을 통과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그렇더라도 앞으로 수십년간 건축물을 사용할 때 들어가는 에너지의 양이 많지 않다면 초기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다. 하지만 건물들은 처음부터 그에 대한 고려를 아예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반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폐쇄해버린 것처럼 보인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공간 사옥 ㅣ 출처:경향DB

어떤 건물은 철골로 얼개를 짜고 그 사이는 유리로 채웠다. 철골을 받치고 서 있는 굵은 원통형 철기둥은 절반이 건물 안쪽에 들어 있고, 나머지 절반이 바깥쪽에 나와 있다. 보고 있으면 건축가가 현대적 디자인 실험을 앞세워 기후파괴 실험을 마음껏 즐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저녁 무렵 마침 건물을 나서는 이용자들에게 지난겨울에 어떠했는지 물었다. 바닥에서 난방을 하고 온풍기를 돌리는데도 추워서 힘들었다는 대답이 금세 돌아왔다. 예상했던 답이다. 철골과 철기둥을 통해서 에너지가 조금도 방해받지 않고 쉼없이 빠져나오는 형국이니 불을 아무리 때주어도 따뜻해질 리 만무다. 이런 건축물은 교정이 불가능하다. 앞으로 건물이 수십년간 자행할 기후파괴를 막을 방도가 없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멀쩡한 건물이지만 사용하지 않고 그냥 방치하든지, 부수고 새 건물을 짓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

친환경을 강조하기 위해 외벽을 치장한 나무 마감 부분도 찬찬히 뜯어보면 어설프기 짝이 없다. 표면은 고정핀에서 흘러내린 녹물로 얼룩져 있고, 군데군데 썩어가는 곳도 있다. 나무와 콘크리트 외벽면 사이에 바람길을 내준 곳은 어떤 건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건물은 콘크리트벽에 얇은 유리솜을 붙이고 그 위에 바로 나무를 댔다. 공기가 통하고 물이 닿지 않게 해주어야 하는데, 그런 배려가 조금도 없다. 스며든 물이 빠져나갈 수 없으니 아래쪽에서 썩거나 곰팡이가 피는 것은 당연하다.

홑겹 유리도 여기저기 눈에 띈다. 홑겹은 두겹짜리보다 두 배 이상, 세겹짜리보다는 10배나 빠르게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건축가들이 디자인만 생각했지 친환경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는 건축가들이 한국의 두번째 대표건축물로 ‘공간’ 사옥을 뽑았다는 데서도 드러난다. 그들은 선정 이유로 신구 사옥의 대비가 주는 세련미를 들었다. 그런 멋을 느낄 수 있다는 데는 동의한다. 그러나 유리옷을 입은 신사옥이 겨울과 여름에 얼마나 춥고 더운지, 이를 다스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지 조금이라도 따져보았다면 공간 사옥을 이 시대 한국 최고의 건축물 반열에 올리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파주출판단지나 공간 사옥을 한국의 유명 건축가들이 최고로 꼽았다는 사실은 그들이 여전히 근대에 머물러 있음을 보여준다. 근대인은 자연은 무한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후변화, 체르노빌·후쿠시마의 원전사고는 모두 그런 생각의 결과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 시대의 과제는 근대적 자연관을 극복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바라보면 유리로 덮인 공간 사옥이나 파주출판단지의 건물들은 근대가 낳은 위기를 부추기는 것으로, 최고가 아니라 최악으로 선정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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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 | 귀농본부 텃밭보급소장

 

가뭄이 심각하다. 도시농부들은 농장에만 오면 물을 주기 바쁘다. 참 희한한 것은 물을 주면 줄수록 땅이 더 딱딱하게 굳는다는 점이다. 물을 주었는데 작물이 더 가뭄을 타기도 한다. 왜 그럴까?

작물에게 물은 밥이 아니다. 작물에게 밥은 공기 중 질소다. 흙의 통기성이 좋아야 질소가 흙 속에 잘 들어간다. 그래야 미생물이 질소를 작물에게 먹기 좋게 고정시켜 준다. 그런데 물을 자꾸 주면 구멍이 막힌다. 비 온 뒤 땅이 굳는 원리와 같다. 구멍이 막히면 질소가 흙 속에 들어갈 수 없어 작물이 굶는다. 질소 거름을 주어도 흙 속에 구멍이 막히면 미생물이 활동할 수 없고 그러니 또한 작물이 굶는다. 거름을 많이 주었는데도 거름 결핍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다.

 

물을 주는 것보다 더 필요한 게 있다. 호미질이다. 풀이 없어도 호미질을 해주어야 좋다. 가뭄이 심하면 땅이 굳고 금이 간다. 이 금으로 땅 속 습기가 빠져나간다. 호미질을 해 주면 이 금을 막아주어 흙의 건조를 막아준다. 게다가 호미로 작물 주변을 긁어주면 통기성이 좋아진다. 흙에는 토양 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습기 통로가 있다. 맨땅에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축축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표토를 호미로 긁어주면 이 통로를 메워주거나 끊어주는 것이다. 물을 주는 데도 요령이 있다. 차가운 물을 바로 주지 말고 통에 받아두어 상온 상태가 된 물을 주어야 타격이 덜하다. 봄엔 곧 따뜻해지는 아침에 주고, 뜨거운 여름엔 시원해지는 해질녘에 주어야 온도차에 의한 타격이 작다.

뿌려준 물이 마르면 흙이 굳는다. 그때 또 반복적으로 물을 주지 말고 딱딱해진 흙을 호미로 긁어준다. 그러고 나서 물을 주면 좀 낫다. 아니면 물을 주고 나서 마르기 전에 호미로 흙을 덮어준다. 물 마르는 것을 막기도 하고 딱딱해지는 것을 막을 수도 있다. 더 좋은 방법은 분무기 노즐을 작물 뿌리 옆 흙에 푹 찔러 물을 흙 속에 직접 공급해주는 것이다. 초보 농부님들은 물을 너무 잘 주어 농사를 망친다. 꼭 명심하길 바란다. 물보다 호미질이 더 좋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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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찬 | 한국외대 교수·문화연구 yckim@hufs.ac.kr


경주 양동마을에 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그 유명한 한옥마을이다. 그곳에 가자 어린 시절에 경험한 한옥과 서당에 대한 기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오른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경기도 마석에 있는 한 서당에 간 적이 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알게 되었는데 그 서당은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이신 청명 임창순 선생이 세운 태동고전연구소란 곳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그곳은 젊은이들이 3년 정도를 기약하고 들어와 한학을 수학하는, 그러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보기 드문 한학 교육기관이었다. 나는 어린아이치곤 고전이나 한문, 서예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다. 중학교에 올라가 서예를 배우면서 안진경체와 구양순체를 구별할 줄 알게 되자 동글동글한 안진경체보다 날카롭고 직선적인 구양순체에 푹 빠져 열심히 먹을 갈며 붓글씨를 연습하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대체 이 사람들은 이런 곳에 와서 뭘 하는 걸까 의아해했다. 무더운 여름날이었는데 한학 공부에 지친 젊은이들이 어슬렁거리다 시원한 한옥 마룻바닥에 앉아 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부채를 천천히 부치며 바둑을 두던 그 나른한 오후의 분위기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양동 이씨와 경주 손씨의 집성촌인 경북 경주 안강의 양동마을 (경향신문DB)


 대학 시절 안동 하회마을에 갔던 기억도 난다. 그때는 그곳을 순우리말 반, 한자 반 명칭인 ‘물도리동’이란 이름으로 불렀는데(지금도 그렇게 부르는지 모르겠다) 마을 앞을 굽이굽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과 그 앞에 깎아지른 듯 병풍처럼 턱 버티고 서 있는 절벽이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집들 사이로 난 조그만 길들을 따라 나지막한 담장을 끼고 요리조리 마을을 돌아다니던 기억도 잊을 수 없는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이런 기억을 반추하며 잔뜩 기대에 부풀어 간 양동마을.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라는데 관광객인 우리를 맞이한 것은 초여름을 방불케 하는 땡볕더위와 마을 곳곳에서 요란한 기계음을 내며 풀 베는 소리, 확성기를 타고 나오는 동네 주민의 목소리, 주차장을 가득 메운 차량들, 그리고 정말로 많은 수의 관광객들이었다. 외국인들이 많은 것이 이채로웠다. 양동마을은 문자 그대로 ‘문화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하회마을과는 달리 한옥들이 대부분 언덕에 자리 잡은 독특함도 있는데, 그럼에도 그윽하고 고아한 한옥의 정취를 제대로 느낄 수가 없었다. 대표 한옥마을로서 양동마을의 보존 가치를 높이려면 무엇보다 지금처럼 너무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다니지 않도록 하루 방문객 수를 대폭 줄여 쾌적하게 마을을 둘러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기대와는 딴판이었던 양동마을의 번잡함을 접하고, 지난해에 갔던 강원도 고성 왕곡마을에서의 하룻밤이 떠올랐다. 함씨 집성촌인 그곳의 한옥은 이북식이라 소 키우는 축사가 추위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와 부엌 옆에 붙어있는 독특한 구조다. 무엇보다 마을 전체가 정겹고 고즈넉했다. 한옥 뒷마당에 담장을 끼고 장독대가 있었고 코스모스가 핀 길을 따라 동네 한 바퀴 산책하기도 그만이었다. 그 중 몇 채에는 재미있는 이름이 붙어있고 민박도 할 수 있었는데, 그날 같이 간 일행 모두 방 하나씩 차지하고 뜨뜻한 방구들에 깨끗한 홑청의 이불을 덮고 푹 잘 수 있었다. 창호지 바른 문으로 솔솔 들어오는 가을바람을 코끝에 느끼며. 왕곡마을은 내게 전주 한옥체험관 못지않게 한옥을 잘 체험할 수 있게 해준, 한옥에 사는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해 준 곳이다. 


양동마을 역시 방문객들에게 체험의 공간을 충분히 제공하는 한옥마을 모델을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기에 여러 가지 제한은 있겠지만, 앞으로의 지향점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우르르 몰려다니는 관광객들로 인해 장바닥처럼 번잡한 곳이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북촌 한옥마을처럼 사람 사는 모습을 제대로 접할 수 없는 한옥마을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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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점석 | 비교문학자


손님으로 초대받은 경우 나름의 식사습관 때문에 나는 가끔 난감한 상황에 빠지곤 한다. 밥알 한 톨을 남기지 않고 밥그릇을 깨끗이 비우는 까닭에, 수저를 놓으려는 순간에 더 먹으라는 권유를 받고 끝까지 사양할 수 없어 몇 숟갈을 더 뜨고 어쩔 수 없이 포만감에 시달리며 자책하곤 한다. 탁발승이 아닌 속인이 밥알을 하나도 남기지 않는데 더 권하지 않는 주인이 오히려 이상하겠다는 판단에, 습관을 바꿔 조금 남기며 난처한 상황을 막아볼까도 생각했지만, 학창시절에 경험한 너무도 강렬한 인상은 그런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였다. 나는 비구니들만이 수행 정진하는 고향의 도량을 찾아가 대뜸 한 달 동안만 생활할 수 있게 받아주라는 철딱서니없는 부탁을 했고, 용케도 그 억지가 통해 산사에서 행자승의 흉내를 내본 적이 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차가운 마루에 오체투지하며 108배를 올리는 동안 바닥의 냉기는 내 삶을 반추하게 했다. 그렇게 얼핏 닷새쯤 지났을 무렵 볕이 좋아 경내를 거닐며 우물가를 지나다 나는 못 볼 것을 보고만 사람처럼 뜻밖의 광경에 놀란 적이 있다. 설거지를 마친 스님은 한 손에 그러모은 밥알들을 물에 헹궈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넣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내가 바닥에 흘리고 그릇에 남긴 음식물 찌꺼기들이었다. 며칠 동안 묵묵히 나를 지켜보았을 그 마음의 깊이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을 비롯한 전국 25개 교구본사 주지들이 25일 견지동 조계사에서 도박추문을 참회하는 108배를 하고 있다. /박민규기자 ㅣ 출처:경향DB

이렇듯 청빈하지만 자족한 삶을 꾸려가려는 초발심을 되새기며 고여 썩지 않으리라는 서원에 자신을 가두고 용맹 정진하는 일상이 출가 수행승의 삶이다. 불편하지만 견디고 옹색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는 투명한 삶이, 몸과 마음을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그곳에서 확인했다. 마음 안에서 불길처럼 솟아나는 욕망과 밖에서 불어오는 탐욕을 잠재우고, 자기 아닌 것에서 벗어나라는 계율은 번잡의 늪에 빠지지 말라는 말일 게다. 사문의 길에 들어서기 위한 출가란 물질과 본능에 예속된 존재에서 떨치고 일어나 초월적 존재를 향한 삶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한 고독한 결단이다. 타성에 젖어 안락만을 탐하다 낯선 길에 들어서는 출가란 불교적 선회만도 아니고 일회성에 그치는 반짝 행사는 더더욱 아니다.

‘스(님)들’이 호텔방에서 한껏 풀어 헤치고 술을 홀짝이며 때론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도박판을 벌였다는 보도나 그 현장을 몰래 찍어 폭로하는 다른 ‘스’들의 원한이 전혀 놀랍지가 않다. 또한 종단을 대표하는 ‘스’가 룸살롱에 가 성접대를 받았네, 아니네 하는 설왕설래에도 별 관심이 없다. 몸집은 비대하고 얼굴에서는 번지르르한 기름기가 마를 날이 없는데 그런 추문을 꼭 들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그들도 사람인지라 관능이 팔딱이고 외물에 아찔 하는 순간이 왜 없겠는가? 일말의 연민이 일면서도 한편으론 괘씸하기 짝이 없다. 이중 삼중의 가면을 쓰고 사기행각을 벌이며 해탈을 향한 몸부림은커녕 탐욕을 키우는 데 안간힘을 쓴 그들은, 출가 사문이 아니라 비행을 좇아 집을 뛰쳐나온 가출 건달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괘씸하기는 통합진보당의 본말이 전도된 내홍도 마찬가지다. 스님들이 생산 활동에 참가해 중생을 구제하기보다는 삶의 애환으로 찌든 중생들의 마음을 위무해야 하듯, 정치란 삶의 틀을 바꿔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어야 한다. 더하여 진보정치를 표방하는 자들은 도덕성의 토대 위에서 자신은 한줌 밀알이 되겠다는 초발심으로 선명해야 한다. 더욱이 비민주적 전횡에 당한 인권 유린의 역사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조작된 다수결로 민주적 절차를 무시하고 파당적 이익을 구차하게 지켜보려는 그들도 가출 정치꾼들일 뿐이다.

사뭇 비장한 출가가 한순간에 조롱거리인 가출이 되고 마는 까닭은, 탐욕에 빠져 초발심의 결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남을 향해 소리치기 전에 나를 돌아보고 냉정해져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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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숲학교 오래된미래’ 교장 happyforest@empas.com


산중 숲에 사는 나는 세상 소식을 대할 채널이 많지 않다. 하루하루의 소식 정도야 라디오의 뉴스를 통해 주로 얻어 듣지만, 세상의 큰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채널은 마땅한 것이 없다.

하긴 도시에 살 때와 달리 세상의 흐름에 큰 관심도 없는 편이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흐름이 궁금할 때면 나는 서점가의 신간 소식을 찾아보곤 한다. 신간의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분야별로 대략의 세상 흐름을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나의 눈길을 끈 신간 도서의 흐름은 ‘아픔’에 대한 강조다. 이 시대의 세상 전체를 피로사회로 규정하는 책도 있고, 청춘은 본래 아픈 시절이라고 좌절감이 큰 청년층을 위로하려는 책도 있다. 중년의 마음을 끌기 위한 어떤 책은 ‘마흔은 아플 수도 없는 아픔’이 있는 큰 버거움을 안고 산다고 자극한다.

 


청춘이건 중년이건 세상이건, 그만큼 피로하고 그만큼 내상(內傷)을 안고 사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일까? 청년실업과 저임금, 비정규직 취업구조 속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청춘, 뜻하지 않게 조직을 떠날 수도 있는 상시 위험의 구조 속에서 삶과 가족을 걱정해야 하는 중년을 생각하면 아픔이 부각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흐름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숲과 자연을 통해 삶의 지혜를 배우고, 그 지혜를 세상과 나누며 살고 있는 나는 사람들이 지나치게 스스로를 아픈 시대에 살고 있다고 느끼는 것을 염려하게 된다. 몸이 겪는 병도 너무 아픔을 크게 받아들일 경우 몸을 추슬러 다시 생기를 되찾는 것을 오히려 늦추거나 방해하듯, 시대적 정신적 통증 역시 지나치게 강조되고 확산되는 것은 우리를 더욱 무기력하게 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된다.

나는 오히려 아픔이 삶의 일부임을 강조하고 싶다. 삶 전체에 희로애락이 순서를 두지 않고 찾아들고 섞이고 또 반복하듯, 아픔 역시 전체 삶의 어느 국면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인정하자 말하고 싶다. 역사 역시 그 흐름이 섞이고 다시 반복되는 것이니 찾아든 아픔을 전부로 여겨 그 앞에 굴복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권하고 싶다. 나의 역설은 숲에서 살아가는 나무와 풀의 삶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단호하게 표현하면 그것이 곧 자연의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내가 사는 여우숲은 아주 오래 전에 산사태가 있었던 곳이다. 산의 한쪽 면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때, 크고 작은 바위와 돌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흔적이 분명하게 남아 있다. 지금은 무너진 산의 사면이 모두 천이(遷移)의 과정을 통해 다양한 나무와 풀로 복원되었고 마침내 숲을 이루었지만 표면에는 정상에서 흘러내린 바위와 돌이 가파름을 지탱하고 있는 형상을 보이는 숲이다.

상상해 보라! 여우숲처럼 바위와 돌이 많은 산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는 개별 식물의 삶은 어떨까? 태어날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생명은 하나도 없다. 삶은 오직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도 짐승도 식물도 모두 마찬가지다. 더욱이 식물은 태어난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스스로 움직일 수조차 없다. 광합성이라는 획기적인 능력을 가져 스스로 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재주를 선물로 받은 대신, 오직 태어난 자리에서 제 하늘을 열고 꽃피워야 한다는 형벌도 함께 받은 생명이 식물이다.

바위와 돌이 많은 지형인 이곳에서 삶을 시작한 여우숲의 나무들, 특히 바위 위에서 발아한 나무들은 모두 바위를 끌어안거나 바위를 뚫는 방법밖에는 삶을 지탱할 방법이 없었다.

참으로 큰 아픔이요, 재앙이었다. 바위에서 싹이 튼 여우숲의 그 나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왜 하필 이 자리에서 삶을 시작해야 하느냐고 원망하는 삶을 살았을까? 나는 왜 산사태가 나기 전의 이 산에 태어나지 못했느냐고 바꿀 수 없는 과거를 부여잡고 아파했을까?

내 삶이 동구 밖의 느티나무보다 너무 척박하다고 여기가 아닌 저기의 삶을 부러워했을까? 이런 곳에서 내가 꽃이나 제대로 피워낼 수 있겠느냐고 아직 주어지지 않은 미래를 걱정했을까?

아니다. 여우숲의 소나무는 바위 틈을 헤집어 뿌리를 박았다. 키는 조금 작더라도 그렇게 제 하늘을 열었고 가을이면 오래된 솔잎을 떨구며 토양의 비옥도를 조금씩 높여나갔다. 여우숲을 이루고 있는 또 다른 나무인 느티나무나 신갈나무들은 바위를 끌어안았다. 자신을 핍박하던 바위를 끌어안음으로써 마침내 어떠한 태풍이나 강우에도 버텨낼 버팀돌로 바꿔놓았다. 참으로 많이 힘겹고 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모두 숲의 주인이 되었다. 지금 이 숲의 신록은 모두 그들이 아픔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 결과다. 노루와 살쾡이, 멧돼지가 이 숲으로 되돌아온 것은 모두 아픔의 국면을 담담하게 건너 낸 나무들의 공이다. 지금 여우숲은 소쩍새 소쩍- 소쩍- 노래하고 부엉이 푸호- 푸호- 울어대며 검은등뻐꾸기 뽀-뽀-뽀-뽀 유혹의 소리가 한창이다. 잔치가 따로 없는 날들이다. 이 숲의 잔치는 모두 아픔을 껴안고 제 하늘 열어 꽃피워낸 바위 위의 나무들의 분투가 차려낸 밥상이다.

그렇다. 나만 아프고 인간만 아픈 것이 아니다. 내게만 결핍이 있는 것도 아니다. 아픔과 결핍은 생명 모두에게 주어지는 신의 형벌인지도 모른다. 가없이 나약한 생명이 바로 우리 인간이니 어쩌겠는가? 아파하자, 그러나 주저앉지는 않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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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 소설가


루이스 터커(Louise Tucker)라는 영국 가수가 있다. 영국 길드홀 음악원 출신으로 팝페라 1세대에 속한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비창’ 제2악장의 멜로디에 가사를 얹은 곡 ‘Midnight Blue’를 웬만한 사람들은 들어봤을 것이다. 이 노래가 한창 유행하던 1980년대 초 어떤 외국 잡지에서 그녀의 인터뷰를 읽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인터뷰어가 빤한 마지막 질문을 했다.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이가 들면 고향 브리스톨의 작은 마을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서 길 모퉁이의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을 하루 종일 구경하면서 살 것이다.”

지금 그녀가 그렇게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나는 날마다 그것을 하고 있다. 우리 마을에는 카페 대신 거문슈퍼의 작은 평상이 있다. 마을에 가게 되면 한참 동안 그곳에 앉아 있게 된다. 거문슈퍼 주인이나 엘지호(낚싯배 이름이다) 형수님이 커피를 타주기에 커피값도 안 든다. 사람들이 한 명씩 지나간다. 이장도, 부녀회장도, 먼 친척 아주머니도, 중학생도, 어부도, 한전 직원도, 해군 수병도 지나간다. 면서기도, 초등학생도, 보건진료소 간호사도, 우편배달부도, 비슷한 등산복으로 통일한 단체관광객도 지나간다. 말을 걸기도 하고 나에게 걸어오기도 한다. 그렇게 있다 보면 마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훤히 알게 된다.

 

세상이 딱 이 정도 속도로만 돌아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모두 다 좋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왜, 살다보면 나의 즐거움이 누군가에게는 괴로움이 되는 경우가 간혹 있잖은가.

문제는 아는 얼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을 때 일어난다. 대여섯 명 나란히 앉아 있다 보면 대화에 별다른 내용이 없다 보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더 유심히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들 앉아 있으니께 지나가기가 겁나 거시기해요.”

이렇게 말하는 아낙이 있었다. 옳은 말씀이다. 내가 마을로 가려면 해수욕장을 지나가야 한다. 종종 공공근로를 하시는 분들이 쉬고 있다가 나를 빤히 바라본다. 내 움직임에 따라 고개의 각도가 일제히 변한다. 거문슈퍼 앞에서는 우리가 그렇게 한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는 것은 괴롭다. 그런데 내가 누군가를 바라보는 것은 재미있다. 그 딜레마 속에서 나는 날마다 갈등하고 있다. 참으로 쉽지 않는 남 바라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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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 | ‘야생초 편지’저자


토끼 사냥이 끝나면 토끼를 잡은 사냥개를 버린다. 한나라 유방이 천하를 평정한 뒤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 한신을 없애버린 데서 나온 말이다. 아마도 토사구팽은 정치와 관련된 뒷담화를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고사성어가 아닐까 싶다. 인간사회에서나 있는 줄 알았던 토사구팽을 최근 우리집 닭장에서 보며 사회성을 가진 동물들의 보편적 특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닭을 키울 때 한 공간에 수탉 한 마리에 암탉 열 마리 정도 넣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처음 닭을 받아올 때부터 암수 비율이 맞지도 않았을뿐더러 중간에 이런저런 사고를 당하다 보니 한 공간에 수탉 네 마리와 암탉 네 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당연히 수탉들 사이에 치열한 서열 다툼이 일어났다. 처음부터 가장 덩치가 크고 기세가 좋은 노란 장닭이 왕노릇을 하기에 그냥 그 체제로 가는가 했는데 어느 날 아침에 모이를 주러 갔더니 2인자였던 회색 닭이 왕이 되어서는 노란 장닭을 구박하고 있었다. 객관적 전력으로 보아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은데도 어쨌든 서열이 바뀌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장닭이 머리를 꼿꼿이 쳐든 채 위엄을 뽐내고 있다. l 출처:경향DB

이후 노란 장닭은 서열 1위를 되찾으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서열 3위인 검은 닭과 1위 회색 닭 사이에 무시무시한 전투가 벌어졌다. 서열 3위와 4위는 자체 부화로 태어난 새끼였는데 어느덧 자리싸움을 할 정도로 컸다. 말하자면 자신의 아비와 권력투쟁을 한 것이다.

검은 닭은 아직 완전히 크지 않았지만 스피드와 점프력이 대단했다. 그 전투에서 서열 1위 회색 닭은 처참하게 깨지고 만다. 벼슬이 찢어져 너덜거리고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었다. 꿩 잡는 게 매라고 싸움에도 상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부터 재미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보통은 최고 두목을 꺾은 놈이 서열 1위가 되어야 하지만 검은 닭은 회색 닭을 꺾었을 뿐 노란 장닭과는 애초부터 상대가 되질 못했다. 다시 노란 장닭의 세상이 되었다. 회색 닭은 새끼에게 패배한 뒤로 기가 죽어서 예전에 이겼던 노란 장닭에게 대들 엄두를 못 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무참하게 패배시킨 검은 닭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니 꼼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 노란 장닭은 적수가 없다. 마음 놓고 독재권력을 행사한다. 예전보다 훨씬 가혹하게 수탉들을 못살게 굴었다. 특히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회색 닭을 물리친 검은 새끼 닭을 얼마나 핍박하는지 아예 밥도 못 먹게 했다. 저러다 굶어 죽겠다 싶어서 검은 닭은 다른 공간에 격리시키고, 회색 닭은 아랫마을 아주머니가 수탉이 필요하다고 하여 주어버렸다. 노란 장닭이 검은 닭을 사주하여 라이벌을 제거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발생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아무튼 결과는 전형적인 토사구팽이었다.

정치권만큼 토사구팽이 횡행하는 곳도 없지만 요즘 돌아가는 형국이 꼭 우리집 닭장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 한국 사회의 기득권 세력이 노란 장닭이라면 통합진보당의 내부 갈등은 회색 닭과 검은 닭을 닮았다. 섣부른 예측을 해서는 안되겠지만 느낌상 결론은 이미 난 것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이것을 자연의 질서라고 생각하면 별 문제가 없다. 그렇게 잡고 잡히면서 한 세상 흘러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인간을 닭보다 차원이 높은 존재로 본다면 이런 식의 진행과정은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잘못하면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반공은 사상이 아니다. 21세기에 다시 부는 반공 히스테리가 그렇지 않아도 빈약한 우리 사회 사상의 지형도를 황량한 벌판으로 만들고 있다. 인간은 안전한 공간에서 사육되는 닭과 달리 숲과 계곡과 들판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자연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 저쪽 사회가 황량하다 하여 우리도 같은 방식으로 대처하다 보면 사상의 동물인 인간을 그야말로 닭장 속에 갇힌 닭으로 만들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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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 | 귀농본부 텃밭보급소장


몇 년 전부터 섬에서부터 내륙 산촌 구석구석까지 누비며 토종 종자를 찾아 다녔다. 토종 종자는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특히 소득 위주로 기계와 시설 농사가 발달한 지역을 가면 눈 씻고 찾아도 토종 종자 보기가 어렵다. 한번은 남 몰래 토종 옥수수를 심는 농가를 만날 수 있었다. 그 지역엔 상품성이 뛰어난 잡종 옥수수가 대세여서 토종 옥수수를 더욱 보기가 어려웠다. 옥수수는 다른 종자와 아주 잘 섞이는 남의꽃가루받이 식물이어서 토종은 자칫 잡종 옥수수의 상품성을 떨어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돈도 되지 않는 것을 왜 남 몰래 심습니까?” 뭔가 특별한 대답이 나오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의외였다. “조상님들이 물려주신 종자를 어떻게 내 대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토종씨앗 전시회 ㅣ 출처:경향DB

토종을 찾으러 다니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토종을 간직하고 있는 분들은 대개 할머니들인 여성 농부님이라는 거다. 토종 수집단을 이끌고 있는 안완식 박사는 토종 은행을 설립하는 데 앞장선 분인데 정년퇴임 후에도 토종을 수집하러 전국을 누비고 있다. 그런 그가 늘 하는 말이 있다. 토종은 여성이 지켜왔다고.

토종을 지켜온 할머니들은 우리를 보면 그렇게 반갑게 맞이하실 수가 없다. 안 박사는 “돈의 가치보다 생명의 가치, 전통의 가치를 아는 분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니 돈이 되지 않는다고 조상님이 물려주신 종자를 나의 대에서 끊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인 것이다.

옛날 농부들은 굶어 죽을지언정 종자를 먹지 않고 베고 죽는다고 했다(農夫餓死 枕厥種子). 조상들이 배고프다고 종자를 먹어버렸다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맛있고 크고 양이 많은 상품성 뛰어난 것만을 찾고 있는 사이에 불임 종자가 온 세상을 차지하고 말았다. 그 결과 씨를 받는 농부도 우리 곁을 떠났다. 험난한 세상에 등불이 될 씨종자 농부가 그리운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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