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공부하는 친구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야기가 사라진 책에 미쳤다. 이름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책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런 책은 존재했으되 존재하지 않았던 책이다. 정작 사람을 더 애달프게 하는 것은,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이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사라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수도원에만 비장되어 있는 그 책, 아리스토텔레스의 <희극>을 둘러싸고 얼마나 흥미진진한 사건이 벌어졌던가. 이야기는 우리나라 역사에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책으로 번졌다. 만약 그런 책이 다시 나타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그 책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런 책으로 어떤 책이 있는가? 그중 누구나 동의하는 책은 신라시대 때 향가를 모은 <삼대목(三代目)>이었다. 알다시피 신라시대의 문학은 남은 것이 별로 많지 않다. 신라 말기 인물인 최치원을 제외하면 문집을 남긴 사람도 없다. 신라라는 이름에 비해 문학작품은 그야말로 쓸쓸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향가만 해도 그렇다. 진성여왕 때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엮었다는 향가집 <삼대목>이 전해졌다면 신라시대의 문학과 언어, 사회 등에 대해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진성여왕보다 약 1세기 전인 나라시대(710~794)에 엮은 노래집 <만엽집(萬葉集)>이 남아 있다. 실린 노래는 4500수가량이다. 이러니 <삼대목>이 실전된 것이 어찌 아쉽지 않으랴? 한 친구는 <삼대목>이 나오면, 그리고 그것이 자기 것이 된다면, 어디 사람 없는 데로 가서 연구에 전념하여 일대 저작을 내겠노라고 하였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갸륵한 자료 독점욕, 연구욕이라서 이내 다들 나도 나도 하면서 찬동해 마지않았다.

그런데 이름만 남기고 사라진 것으로 알았던 책이 다시 불쑥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한다. 판소리 12마당은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수궁가> <적벽가>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강릉매화타령> <옹고집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숙영낭자타령> 등이다. 이 중에서 <춘향가> <심청가> <흥부가> <적벽가> <수궁가>는 지금도 불리고 있다. 이따금 TV를 통해 공연하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 외 <배비장타령> <변강쇠타령> <옹고집타령> <장끼타령>은 노래로 불리지는 않지만, 소설로는 남아 있어서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있다. 하지만 <강릉매화타령> <무숙이타령> <숙영낭자타령>은 노래도 내용도 아주 사라져 버렸다. 사라진 것이기에 판소리 연구자, 혹은 소설 연구자들은 더욱 관심이 높다.

세상 살다 보면 가끔은 희한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지금 서울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김종철 교수에게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김 교수는 판소리와 판소리계소설 전문가이다. 어느 날 김 교수는 사라졌던 <무숙이타령>을 발견했다고 하였다. 사라진 것이 어디서 나타났다는 것인가? 원광대 박순호 교수가 평생 모은 필사본 한글소설을 수십 책의 영인본으로 발간했는데, 그 책 1권의 첫머리에 <무숙이타령>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이 소설전집은 어지간한 대학도서관에 다 있었고, 나 역시 그 전집의 첫 권을 도서관 서가에서 빼어서 본 적이 있었다. 왜 나는 <무숙이타령>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인가.




그 전집에 실린 <무숙이타령>의 제목이 ‘무숙이타령’이 아니라, <게우사>였기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것이다. ‘게우사’는 ‘誡愚詞’로 어리석은 사람을 경계하는 말이란 뜻이다. 이 소설의 내용은 돈 많은 사내 무숙이가 평양 출신으로 서울의 기적(妓籍)에 매이게 된 의양이에게 반해 살림을 차리고, 의양이에게 자신의 호기로움을 자랑하느라 재산을 유흥에 탕진하자, 의양이가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 본처와 무숙이의 친구와 짜고 재산을 다 털어먹고는 알거지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물론 무숙이를 회개하게 하려는 계획이었으니, 일종의 탕자 길들이기인 셈이다. 이 소설은 18, 19세기 서울 시정의 유흥풍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어 조선후기 사회풍속사에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한다. 만약 김종철 교수처럼 판소리소설에 전문가가 아니고 부지런한 연구자가 아니었더라면 지금까지도 이 소설은 공간된 채로 실전판소리로 불리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비슷한 사례로 <설공찬전>의 출현도 있다. 성종 때 문인인 채수(蔡壽)는 <설공찬전>이란 소설을 지었다. 이게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서 당시 대간들이 채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성종에게 요구하기도 했으니, 문제작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소설 역시 어디로 갔는지 행방이 묘연하다. 이름만 문학사에 남았을 뿐이다. 조선전기 소설사를 구성하는 연구자들은 이름만 남은 이 소설에 대해 이런저런 추리를 그치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서경대 이복규 교수가 이 소설을 찾아냈다. 이 교수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의뢰로 조선전기의 문인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의 <묵재일기>를 탈초하고 있었다. 초서로 쓰인 일기를 해서로 옮기는 작업이다. 그런데 옛날 책은 종이를 접어서 한 장으로 쓴다. 접힌 부분은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사실 종이의 반을 못 쓰는 것이 아까운 일이다. 그래서 어떤 책은 한 면을 다 쓴 책을 뒤집어서 그 이면을 밖으로 노출시켜 거기에 무언가를 쓰기도 한다. <묵재일기> 역시 그런 재활용 책이었던 모양이다. 이 교수는 작업을 하다가 그 이면에 무언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궁금해 뒤집어 보았다. 읽어보니 뭔가 자신이 아는 지식과 접하는 곳이 있다. 더 읽어보니 사라진 <설공찬전>이 아닌가. 공부하는 사람에게 이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그 다음은 다 아는 이야기다. 논문을 써서 발표하고 번역해서 책을 내었다.

나 역시 그 뒤 옛책을 보면 혹시나 하고 이면을 뒤집어 보는 버릇이 생겼다.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행운이 오지는 않는 법이다. 하하!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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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희룡의 문집 <우봉집>이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앞서 했다. 문집이 있으면 작가 개인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조희룡 문집의 소재처가 늘 궁금했다. 그런데 이상한 인연이 이어졌다.

나수연 후손 집에서 책과 서화를 보고 있는데, 희한한 책 한 권이 눈에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불과 10페이지의 작은 시집이다. 제목은 <일석산방소고(一石山房小稿)>다. 열어보니, 첫 페이지에 ‘철적도인(鐵笛道人)’이란 저자명이 보인다. 철적도인은 ‘조희룡’의 호다.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우봉집>의 저자가 아닌가. 또 글씨를 보니 조희룡이 직접 쓴 것이 분명하다. <우봉집>이 사라졌기에 이제까지 조희룡의 한시를 묶은 시집은 발견된 적이 없다. 흥분을 누르고 <벽오당유고>와 함께 빌려 달라 하니, 선선히 그렇게 하라며 큰 서류 봉투에 넣어 줬다. 가져와 당장 복사를 하고 읽어보니 조희룡이 노년(?)에 쓴 한시다. 시는 모두 고담(枯淡)하고 아취가 있었다.

<벽오당유고>를 박박식씨에게 돌려주려는 날이었다. <벽오당유고>는 큰 책이기에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분명 복사한 뒤 봉투 안에 넣어두었던 <일석산방소고>가 보이지를 않는다. 야단이 아닐 수 없었다. 후손에게 무어라 변명을 한단 말인가. 남의 귀중한 책을 빌렸는데 없어졌다고 한다면 말이나 되겠는가? 봉투를 쥐고 거꾸로 쏟아보았지만 역시 없다. 한참 정신을 놓고 있다가 혹시 하는 생각에 봉투를 열어 손을 넣었더니, 무언가 잡힌다. <일석산방소고>다. 책이 워낙 얇아 봉투 안에 착 들어붙어 봉투를 뒤집어 쏟아도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원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일석산방소고>는 <여항문학총서>에 실어 학계에 공개했다. 이 시집이 학위논문의 한 부분을 차지했음은 물론이다.

조희룡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1970~1972년 사이에 낸 <선본해제(善本解題)>란 책이 있다. 이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서들 중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에 대해 쓴 해제를 모은 것이다. 요컨대 귀중한 책들이니 특별히 그 내용에 대해 소상히 알려주겠다는 책이다. 나는 평소 공부를 하다가 지겨울 때면 <선본해제>를 읽곤 했다. 책을 직접 접하기는 어렵지만 귀중한 옛 전적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고, 또 옛 전적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 왜 ‘선본’인지, 곧 왜 훌륭한 책인지 납득할 수 없는 해제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 <선본해제>를 읽다가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이란 책의 해제에 눈길이 갔다. ‘수경재’란 사람이 해외에서 보낸 짧은 편지집이란 뜻이다. 적독(赤牘)은 ‘척독(尺牘)’과 같은 말로 짧은 편지를 말한다.




해제를 읽어보니,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어떤 사람이 귀양을 가서, 자기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책이라고 한다. 누군지 모르는 사람이 귀양을 가서 자기 친지들에게 보낸 사신이 무슨 중요한 책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선본해제>에는 이런 경우가 종종 있어 이상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였다.

해설 뒤에 편지의 목록을 실어놓았다. 누구누구에게 보낸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름을 쓰지 않고 주로 자(字)를 써 놓았다. 자를 자세히 보니 모두 알 만한 사람들이다. 중인들이었던 것이다. 나는 그 당시 중인들을 연구하고 있었기에 자만 보고도 쉽게 편지의 수신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수신자를 확인한 뒤 조사를 더 해보니, 이 편지의 발신인, 곧 편지를 쓴 사람은 다름 아닌 조희룡이었다. 조희룡은 1851년 김정희(金正喜)의 수족과 복심(腹心)으로 임자도로 귀양을 간 적이 있다. 그때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를 모은 것이 바로 <수경재해외적독>인 것이다. 이 편지집 역시 <여항문학총서>에 영인해 넣었다.

조희룡 글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 날 책을 보다가 머리가 아파 고서목록을 들추어 보았다. 고서목록은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도서관에서는 으레 내는 것이다. 대학 도서관도 고서가 있으면 따로 고서목록을 낸다. 그런데 그때 내가 즐겨 읽던(?) 고서목록은 규장각과 장서각,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의 고서목록을 복사해 오려서 편집한 목록이다. 불법 복제물로 당연히 저작권법에 저촉되는 책이지만, 연구자로서는 편리하기 짝이 없다. 또 머리가 아프거나 심심할 때 보면 좋은 책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느 날 <제재진상(諸宰珍賞)>이란 책이 눈에 뜨인다. 여러 재상들의 진귀한 감상품이란 뜻이다. 그런데 거기에 조희룡의 편지가 실려 있다고 밝혀 놓았다. 당시 조희룡의 작품이 모두 번역되고 있었기에 그쪽에 알려 번역되게 했다.

조희룡의 저작은 5권의 <조희룡전집>으로 간행되어 있다. 이미 알려져 있는 <호산외기> <일석산방소고> <수경재해외적독> 외에 <화구암난묵> <우해악암고(又海岳庵稿)>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 <한와헌제화잡존(漢瓦軒題畵雜存)> 등도 있다. <화구암난묵>은 ‘독서신문’에 진작 소개된 적이 있고, <석우망년록>은 임창순 선생이, <우해악암고>와 <한와헌제화잡존>은 정경주 교수가 발굴해 소개한 것이다. 실시학사에서 이 모든 작품들을 모아 번역하고 5권의 <조희룡전집>으로 간행했다. <우봉집>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지금도 소소한 자료는 계속 발견되고 있지만, 어지간한 큰 덩어리는 망라된 셈이다.

작년에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한영규 교수의 연구실에 갔다가 바깥 표지를 벗긴 <조희룡전집>을 보았다(한 교수는 조희룡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취득한 조희룡 전문가다). 한 교수는 자기에게 한 질이 더 있으니 가져가란다. 고맙기는 하지만 그것을 부산까지 끌고 갈 생각을 하니 아득해진다. 부쳐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러겠단다. 일주일쯤 뒤에 책이 왔다. 책을 훑어보면서 오랜만에 옛날 학위논문을 쓰던 시절을 떠올렸다. 너무 힘들어서 조희룡 쪽은 바라보지도 않았는데, 한 교수 덕분에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고맙소! 한 교수!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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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논문을 쓸 무렵이다. 앞서 말했듯 논문 주제는 조선후기 기술직중인과 경아전의 한문학이었다. 기술직중인은 의원이나 역관, 계사, 화원 등 주로 조선의 관료체계에서 특정한 전문분야의 관료직을 수행하는 신분층이고, 경아전은 서울의 관청에서 하급 행정실무를 맡는 축들이다. 양반 사족 아래고, 보통 백성보다는 위에 위치한다. 어떤 경우 이들을 싸잡아 중인이라 하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대개 서울사람이고 또 사족이 아닌 ‘시정(市井)’의 사람이란 뜻에서 여항인(閭巷人)이라 부른다. 시정의 뜻으로 옛날에는 ‘여항’이란 문자를 썼던 것이다. 서울의 양반관료가 아닌 ‘시정의 사람’이란 뜻이 되겠다.


서울에는 중앙관청이 밀집해 있었던 만큼 양반 벼슬아치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그 아래 양반이 하지 않은 벼슬들이 수도 없이 있다. 곧 그중 가장 중요한 부류가 서리, 곧 경아전이다. 양반관료들은 일단 관리직이다. 구체적인 행정실무는 잘 모른다. 또 벼슬을 하고자 하는 양반 대기자가 워낙 많아서 한 자리에 오래 둘 수가 없다. 아침에 와서 저녁에 옮기는 것이 양반들이 벼슬하는 행태였다. 그래야 많은 사람에게 벼슬을 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는 행정이 안 돌아간다. 이런 이유로 관청의 행정 실무에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서리가 중요해진다. 양반 관료들은 흘러가는 물이라면, 서리는 바위다.

서리는 조선전기에는 취재(取才)란 간단한 시험을 쳐서 뽑았지만, 조선후기가 되면 이 제도는 시행되지 않는다. 그 대신 서울의 큰 양반집, 다른 말로 경화세족(京華世族) 가문의 겸인(청지기)이 서리가 된다. 서리는 비록 말단직이지만 그들이 취급하는 중앙관서의 업무는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귀족가의 겸인을 서리로 삼았으니 조선은 그만큼 내부적으로 썩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들은 행정 실무를 보려면 당연히 한문을 알아야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한시나 한문산문도 지을 수 있다. 이들이 한문학 창작에 뛰어든 것은 대개 17세기 중후반 이후고, 이들이 창작한 한문학을 특별히 여항문학이라 한다.

여항문학을 담당했던 여항문인들의 이름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지만, 그들이 어떤 관청의 서리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래도 여러 자료를 보고 추적하면 확인이 되는 사례들이 모인다. 하지만 그들이 어느 집 겸인이었는지 밝힐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벼슬도 양반벼슬이 제일이라 어느 관청 서리인 것도 밝히기 꺼리는 판인데, 무슨 자랑거리라고 어느 대갓집 청지기라고 밝힐 것인가? 연구자인 나로서는 그 사례가 나와 주었으면 좋겠지만, 찾을 수가 없어 고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느 날 이만수(李晩秀)의 문집인 <극옹집>을 훑어보고 있는데, ‘음정축서(陰庭軸序)’란 글이 있었다. 읽어보니 1809년 이만수 집안의 겸인들이 모여서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신 것을 기념하여 만든 시축(詩軸), 곧 ‘음정축’에 붙인 이만수의 서문이었다. 축은 두루마리를 뜻한다. 모여서 시를 지으면 그 종이를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든 것이 축이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황소에 싣고 다닐 정도로 큰 시축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직경 30㎝쯤 되는 축을 본 적이 있다. 펼치니 그 속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시와 그림과 글이 한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음정축서’가 흥미로운 것은 한 사람의 양반이 겸인을 얼마나 거느리는지, 또 그 겸인이 어떤 중앙관서의 서리인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만수 집안은 소론 명문가였다. 연안이씨(延安李氏) 월사파(月沙派)로 알려진 이 집안은 월사 이정귀(李廷龜) 이래 사환이 끊이지 않은 명문이었다. 집은 서울 낙산(洛山) 아래 동촌에 있었다. 이 자료를 통해 이 가문에서 거느리고 있는 겸인의 규모를 보자. 이철보(2명), 이길보(2명), 이복원(7명), 이성원(8명), 이시수(5명), 이만수(7명)등 이 집안이 이다. 이철보 이하는 이정신(李正臣)의 후손이다. 즉 이정신―이철보―이복원―이시수·이만수, 이정신―이길보―이성원이 된다. 즉 이정신의 후손 3대가 거느린 겸인의 수가 31명이란 것은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이들이 이 집안의 대소사를 처리했던 것이다.

이들은 어느 관청의 서리였던가. 이만수의 예를 들어보자. 이만수는 김진악·전취인·김재묵·김기영·김재만·최정우 등 6명의 겸인을 거느렸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호조의 서리였다. 호조는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관청이다. 호조의 서리는 엄청난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물론 그 수입은 관례화된 부정이었다. 19세기 호조 서리가 남긴 일기에 의하면 당시 호조 서리 자리는 약 2000냥에 거래되었다. 서리 자리가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자리가 아니었으면 고가에 거래될 리 만무다.

이들이 어떻게 호조 서리가 되었던가? ‘음정축’이 만들어지기 한 해 전인 1808년 9월 이만수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호조판서가 된 이만수가 자신의 겸인을 호조 서리로 박아 넣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또 이만수의 영향력으로 호조 서리가 된 자들이 자신의 수입을 독차지했을 것인가? 당연히 자신을 호조에 넣어준 이만수와 나누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음정축서’야말로 조선후기 겸인과 경화세족가문의 관계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더할 수 없이 중요한 자료인 것이다.

어느 날 지도교수님이신 경인 선생님께서 희한한 자료를 하나 구하셨다고 했다. 선생님의 자료를 보고 싶을 때는 그 자리에서 금방 말씀드리면 좀 곤란한 것 같아서 언제나 한참 뜸을 들이다가 다시 말씀드리면, ‘그래, 그러지 뭐’라고 하신다. 역시 그렇게 해서 그 귀중한 자료를 볼 기회를 얻었다. 카메라로 찍어도 좋다는 허락을 얻고 댁으로 찾아갔더니, 조심스럽게 자료를 내놓으신다. 낯선 자료를 볼 때는 나도 모르게 약간 흥분하게 된다. 들뜬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자료를 보니, 어디서 많이 본 글이 아닌가. “어, 이거 음정축이네.”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다. 이어 나는 사진을 찍었다. 아무튼 결론은 이렇다. 원본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으면 또 어떠랴. 연구자인 나는 내용만 있으면 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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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여러 문헌을 통해 서울의 큰 양반집의 겸인, 곧 청지기가 중앙관서의 서리가 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구체적인 경우만을 접했을 뿐, 그것이 관례화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지 못해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교의 <대한계년사>에서 정말 내가 원하는, 더할 수 없이 정확한 자료가 나왔다. 말하자면 꼭 맞는 열쇠를 찾은 셈이었다.

<대한계년사>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7년 한국사사료총서의 하나로 간행한 책이다. 구한말의 정계와 사회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다. 하지만 그 시대를 연구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굳이 볼 필요가 없는 책이고 나 역시 관심을 두지 않을 책이었다(지금은 번역본도 나와 있다). 그 책의 한 모퉁이, 그것도 주석 부분에 내가 필요한 자료가 있는 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어느 날 교보문고의 서가에서 우연히 뽑은 책에서 내가 그렇게 찾던 자료 둘을 동시에 찾았으니, 정말 희한한 인연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멍한 상태로 있다가 정신을 수습했다. 무엇보다 <벽오당유고>를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또 이 조악한 책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책의 편자를 보니 ‘박박식’이란 분이었다. 뒤에 안 것이지만 ‘박식’이란 이름은 자신이 박식하기에(?) 붙인 이름이고 본명이 아니었다. 책의 출판사도 없었다. 박박식 개인이 그냥 인쇄소에서 찍어 교보문고에 납품한 것이었다. 궁금하여 책 뒤에 실린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엄청나게 반가워하면서 ‘선생과 같은 분을 기다렸소’ 하는 것이 아닌가. <벽오당유고> 운운했더니, 어쨌든 당장 만나자고 했다. 술을 한 병 사들고 그 집으로 찾아갔더니, 일반 주택이었다. 마당에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는 종이박스 더미부터 범상치 않았다. 그 종이박스는 집의 거실에까지 쌓여 있었다. 인사를 하고 어떤 이유로 그 책자를 냈는지 물었더니, 먼저 병풍 하나를 내보였다. 아주 잘 쓴 병풍이었다. 낙관은 없었고 ‘소봉(小蓬)’이란 호만 적혀 있었다.



이것이 문제의 씨앗이었다. 박박식씨는 병풍의 글씨에 반한 나머지 ‘소봉’이 누구인지 너무나 알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볼 곳이 없었다. 그는 시장에서 점포를 열고 있는 상인이었다. 학계와 끈이 닿을 수가 없었다. 학계와 끈이 닿지 않아도 <한국인명대사전>의 부록을 찾아보면 된다. 부록에는 사전에 실린 인물들의 호가 실려 있으니 소봉이 나수연인 것은 금방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이 길도 몰라 ‘소봉’을 찾아 헤맸고 10년이 훨씬 지난 뒤에야 나수연이란 사람이 소봉이란 호를 쓴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병풍을 쓴 사람이 나수연이라고 믿게 되었다. 물론 그 병풍의 소봉과 나수연이 일치한다는 것은 그분만의 믿음일 뿐이다.

희한한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박박식씨는 나수연의 후손을 찾았다. 오랜 시간 뒤 드디어 그는 나수연의 증손자가 경기도 어디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집을 찾아갔다. 오랫동안 드나든 끝에 후손과 제법 친한 사이가 되었다. <난정서> 법첩 역시 그 집안에서 얻은 것이었고, 그 법첩이 대단히 귀중한 것임을 입증하기 위해 대만의 고궁박물관에까지 보내 감정을 받기도 했다. 그 감정서는 교보문고에서 본 책 속에도 들어 있었다. 어쨌거나 지금 나의 기억으로 그는 나수연의 후손을 찾기까지 20년 이상이 걸렸다고 했다. 엉뚱하지만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벽오당유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분은 당장 후손을 찾아가 보잔다. 그래서 쇠고기 몇 근을 끊어 들고 경기도에 사는 후손을 찾아갔더니, 반갑게 맞아주고 점심까지 거룩하게 차려주어 내가 도리어 황송할 지경이었다. 그분은 농사를 짓는 농민으로 정말 순박한 분이었다. 인사 끝에 <벽오당유고>를 보자고 했더니, 그 책은 물론 다른 책과 서화까지 잔뜩 내놓았다. 대원군의 글씨, 최북의 그림,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문인 지식인들의 유묵(遺墨)도 잔뜩 있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이름을 들면 알 만한 명사들이 어울려 놀며 지은 시와 그린 그림으로 만든, 직경 30~4㎝ 되는 두루마리다. 편지도 꽤 많이 있었다. 구한말의 것으로 박은식, 장지연 등의 이름도 보였다.

<벽오당유고>는 조선총독부의 출판 허가를 받기 위해 깨끗하게 정사(精寫)한 것이었다. 나수연이 아마도 아버지 나기의 시문을 모아서 출판하기 위해 정리한 것을 오세창이 어떤 인연으로 빌려 본 것이었다. 후손으로부터 나수연과 나기에 관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삼청동에 서울집이 있었다는 것, 경기도 일대에 몇 만석에 해당하는 거대한 전장(田莊)을 갖고 있는 부유한 집안이었다는 이야기는 문헌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이었다.

<벽오당유고>는 박박식씨가 중간에서 말을 잘해 그 책을 빌려올 수 있었다. 한 권 분량이었으니 그리 내용이 풍부한 문집은 아니었다. 또 중요한 것은 이미 <근역서화징>에 발췌되어 있었다. 그렇다 해서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내 눈으로 보고 싶은 자료를 확인했으니까 말이다. 자료는 뒤에 <여항문학총서>를 만들 때 같이 영인해 넣었다. 박박식씨는 따로 <벽오당유고>를 영인해 주고, 그 책을 발견한 공을 생각해 해제에 자신의 이름을 꼭 넣어 달라고 했다. 영인본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렸는데 기다리기 지루했던지 박박식씨는 자주 전화를 걸어 채근하곤 했다. 어느 날 전화 속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뇌경색에 걸려 몸을 잘 움직이지 못한다면서 그 책의 영인본을 보는 것이 자신의 소망이라 했다. 이내 영인본을 만들어 그에게 보냈다.

학문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사람이 자신이 구입한 병풍 글씨의 필자를 찾기 위해 오래 노력한 결과가 나의 연구와 접속하게 됐으니 세상 인연이란 참으로 희한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 집에서 나는 조희룡이 남긴 자료와 또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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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다. 구한말에 관심이 많아서 ‘대한자강회보’ 등의 잡지며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만세보’ 등 신문을 읽었다. 이쪽은 지금은 연구자가 꽤 있지만 당시에는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었다. 학위 논문을 쓴다 해도 별반 읽어주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조선 후기 역관이나 의관 등 기술직 중인과 서울 관청의 하급관리인 서리가 주축이 된 한문학에도 관심이 있어 자료를 읽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여항문학 쪽이 나을 것 같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여항문학 방면의 최초이자 대표적 저술로 구자균의 <조선평민문학사>가 있다. 이 책은 원래 구자균의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과 졸업논문이다. 요즘 대학에도 졸업논문 쓰는 관행은 남아 있다. 하지만 대부분 베끼기로 일관하기에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그 시대에는 학부 졸업논문은 엄청난 무게를 갖는 것이었다. 한국 한문학의 역사를 최초로 엮은 김태준의 <조선한문학사> 역시 경성제국대학의 졸업논문이었다.

어쨌거나 구자균의 <조선평민문학사>는 당시로서는 사뭇 새로운 시각의 논문이었다. ‘평민’이란 말에서 보듯, 이 논문은 양반이 아닌 사람들의 한문학을 다룬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양반과는 구분되는 어떤 문학적 성격을 찾으려 했지만 그런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조선평민문학사>는 ‘평민적’ 성격보다는 대개 중인과 서리들의 문학활동 자료를 사적(史的)으로 거칠게 엮어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구자균이 멈춘 그 지점에서 출발해 무언가 중인·서리 문학의 성격을 찾아보자는 것이 나의 속내였다. 다만 여기서는 그것에 대해 상론할 것까지야 없겠다.




먼저 자료를 모으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런데 알려진 어지간한 자료는 수집할 수 있었고, 또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자료도 상당수 수집했지만, 꼭 보고 싶은 어떤 자료들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예컨대 <조선평민문학사>의 참고문헌에 <우봉집>이란 문집이 있었지만 어디서도 볼 수가 없었다. <우봉집>은 조희룡의 문집이다. 조희룡은 <호산외기(壺山外記)>란 중인·서리들의 전기집을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아울러 그는 김정희의 고제(高弟)로서 추사의 글씨, 곧 추사체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돌아다니는 추사의 글씨 중 많은 부분이 조희룡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조희룡은 어쨌거나 19세기 여항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데, 그의 문집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지금까지도 <우봉집>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또 하나 보고 싶은 책은 <벽오당유고(碧梧堂遺稿)>였다. 이야기가 약간 우회하지만, 먼저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부터 시작해 보자. <근역서화징>은 근대 이전 한국의 서화가에 대한 정보를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은 한국 서화사를 연구하는 데 있어 둘도 없는 중요한 자료다. 오세창은 <근역서화징>의 첫머리에 자신이 인용한 서적들의 목록을 제시해 두었다. 이 중 <근역서화징>을 제외하고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책이 있었다. 그의 부친 오경석은 김정희의 제자였고 유명한 서화 수장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하였다. 오경석은 집에 천죽재라는 서화 수장고를 두고 있었다. 천죽, 곧 ‘하늘 대나무’는 불에도 타지 않는다 하니, 서화 수장고로는 안성맞춤인 이름이다. <근역서화징>에는 <천죽재차록(天竹齋箚錄)>, 곧 오경석의 서화비평집에서 인용한 글이 상당수 실려 있다. 하지만 이 책 <천죽재차록>도 현재 어디로 갔는지 오리무중이다.


이외에 유최진이란 사람의 <초산잡저(楚山雜著)>란 책도 자주 인용되었고, 거기에는 중인들의 시회에 관한 활동이 실려 있었다. 이 책과 유최진의 다른 책들은 국립중앙도서관의 오세창문고에서 찾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벽오당유고>라는 책은 찾을 수 없었다. 나기란 사람의 문집이었는데, 이 책에서 인용된 자료가 중인·서리의 문학활동을 꽤나 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도서관에도 이 책은 실려 있지 않았고, <근역서화징>을 제외한 어떤 문헌에도 이 책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어느 날 교보문고에 갔다. 보통은 인문서 코너 서가를 훑고 필요한 책을 구입해 나오는데, 그날은 아무 이유도 없이 예술 방면 쪽 서가로 그냥 가보았다. 서예 쪽 책을 모아둔 곳이었다. 어떤 서가에 서가의 사이즈보다 큰 책이 꽂혀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판형이 보통 책의 두 배나 됨 직한 그 책을 뽑아 보니, 왕희지의 글씨, 곧 법첩(法帖)을 영인한 책이었다. 그저 그렇고 그런 책이었다. 후루룩 넘겨보니, 몇 페이지 안되는 책이라 금방 끝이다. 그런데 눈에 확 들어오는 페이지가 있다. 다시 그 페이지를 열었더니, 내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벽오당유고>의 첫 면이 아닌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찬찬히 넘겨보니, 책의 대부분은 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 법첩이고, 끝부분은 다른 자료를 영인해 실어놓은 것이다. 정교의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도 한 페이지 실어놓았다. 나수연에 관련된 자료였다. 나수연은 구한말 황성신문의 사장을 지낸 인물이다. 이 책의 편자는 나기가 나수연의 아들이라면서 특별히 나수연에 관한 자료를 실어놓은 것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나수연 아래에 딸린 정교의 주석이었다. 그는 나수연이 대원군의 겸인(겸人)이라는 것, 또 겸인은 서울 경화세족가의 청지기라는 것, 그들이 중앙관서의 서리가 된다는 것을 밝혀놓았다.


강명관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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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정치적 격변은 책을 재로 만들고, 흩고, 옮기고, 다시 모이게 한다. 조선시대 역모 사건이 나면 책은 흩어지고 옮겨지고 다시 모였다.

실학자로 유명한 유수원(柳壽垣)이 1755년 나주괘서 사건으로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책은 홍봉한(洪鳳漢)의 차지가 되었다. 이렇듯 거대한 정치적 사건은 책을 흩고 옮긴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책을 소멸시키고 흩고 옮기고 다시 모으는 것은 전쟁이다.


조선의 책은 임진왜란 때 한 번 소멸되었다. 이후 책에 크나큰 액운이 된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6·25전쟁이다. 유명한 장서가들의 회고담을 보면 반드시 6·25전쟁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원본을 소장했던 최남선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최남선은 6·25전쟁 당시 서울 우이동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장서 역시 6·25전쟁 때 모두 소실되었다. 지금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육당문고(六堂文庫)는 6·25전쟁 이후 수집한 것이라고 한다.

조지훈 선생도 6·25전쟁 때 장서를 상실한 것 같다(‘나의 서재’). 화재로 인한 것은 아니고, 피란 간다고 비워둔 집을 도둑이 털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도둑이 범상한 도둑이 아니라 상당한 식자층이었던 것 같다. 선생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책 도둑도 공부하는 방면이 나하고 같은 사람이던 모양으로 내가 애써 모으고 아끼던 고전, 국학 연구 관계 서적은 깡그리 가져가고 여남은 권 남은 건 다 낙질(落帙)로 병신이 돼 버린 것이다. 값으로 따지면 비싼 것도 안 가져간 것이 있고, 초판본이나 보잘것없는 체제의 진귀본(珍貴本)을 다 가져간 걸 보면 견식이 있는 내 학문의 동지를 얻은 것 같은 느낌을 맛볼 때도 있다.”




이 자료를 보면 책 도둑은 국문학 쪽으로 상당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다. 초판본이나 진귀본을 모두 가져간 ‘견식이 있는 자’였으니 말이다. 아마도 선생의 집에 희귀하고 귀중한 책들이 있는 것을 알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한편 그 도둑을 ‘학문의 동지’로 일컫는 선생도 대단한 도량이다.

이희승 선생도 6·25전쟁 때 장서를 잃어버렸는데, 피란하고 난 뒤가 아니라, 9·28수복 직전이다. 선생은 ‘서재’란 글에서 ‘책 권’이나 쌓여 있었던 서재가 9·28이 아니라 9·28 새벽 채 밝기도 전에 원인 모를 화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앞서 서재를 이야기할 때 들었던 일석서실의 1만권 장서는 뒷날 다시 모은 것이다.

쟁은 책만 없애는 것이 아니다. 책 외에도 문서, 서화 등 수많은 문화재를 소멸시켰다.

서예가 정해창(鄭海昌)은 ‘구책(舊冊)의 정취’란 글에서 전쟁으로 책을 잃어버린 사람이 자신만 아니라는 생각에 억지로 스스로 위로하고 지내기는 하지만 섭섭하고 답답하고 생각나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고 하면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 중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것은, 책이 아니라 비첩(碑帖)이요 무장사 단비첩(斷碑帖) 중에서도 이석첩(二石帖)이라고 했다. 무장사비는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비석이다. 그 비석의 세 조각이 남았는데, 그중 두 번째 것을 탁본한 비첩을 전쟁통에 망실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이렇게 애써 모은 책과 문화재를 소멸시켰다.

전쟁은 책을 소멸시키지만 한편으로는 책을 다시 모으기도 한다. 국문학계의 원로인 아무개 선생님은 희귀한 자료를 많이 소장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분의 자료는 6·25전쟁 이후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모은 것이라 했다. 국학 계통으로 연구하신 분들의 추억담을 들으면 다양한 문화재가 그때 쏟아져 나왔고 헐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내가 가장 흥미 있어 하는 쪽은 책이다.

소설가이자 문학평론가인 홍효민(洪曉民)은 ‘탐서벽(探書癖)’에서 30년 동안 서점 주인과 안면을 트고 외상으로 사들인 책이 6·25전쟁 때 다수 분실되었지만, 1·3후퇴(1·4후퇴를 말하는 듯) 때에 다행히 대전에 와서 몇 군데 대학에 관계(아마도 시간강의를 한 것을 말하는 듯)하게 되어 다시 책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워낙 책값이 비싸서 책이 모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지는 말이 재미있다. 남들은 1·3후퇴 때에 곧잘 헌책을 ‘근으로’ 산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런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전쟁으로 책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을 그냥 무게로 달아 팔았다는 것이다. 괜찮은 책들을 무게로 사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니 그야말로 횡재가 아니었을까?

홍효민 역시 대전에서 근으로 달아 파는 책을 만나기는 하지만, 그런 책이란 ‘태평양전쟁 때 일본정신을 고취하는 책’이 아니면 펭귄북스라고 한다. 별 가치가 없는 책이란 것이다(홍효민의 생각과는 별도로 ‘태평양전쟁 때 일본정신을 고취하는 책’도 지금은 사료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물론 그 뭉치 중에서도 좋은 책이 있어 덤비지만, 그럴 경우 주인은 ‘그건 달아 파는 책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홍효민은 좋다 말았다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한다.

전쟁과 같은 격변은 책을 소멸시키는 한편 책의 장소를 옮겨 다시 집합시킨다. 앞서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들었는데, 그곳 역시 책이 쏟아져 나온 것은 6·25전쟁 이후다. 부산의 보수동 헌책방 골목 역시 6·25전쟁을 계기로 생긴 것이다. 보수동은 남포동, 광복동, 대신동을 옆에 두고 있고, 이 일대에 서울에서 피란 온 학교가 많았다. 따라서 책의 수요가 당연히 있었다.

한두 서점이 지금의 골목 어귀에 생기기 시작해서 긴 골목 전체가 책방으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인을 잃은 집에서 훔친 책이 흘러나오기도 하고 기한(飢寒)에 몰린 책 주인이 자신의 책을 헐값에 처분하기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책은 다시 모이기도 한다. 하나 첨언하자면, 보수동의 위쪽 대신동 일대는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거주지였다. 보수동 책방골목에 한때 많았던 일본책들은 아마도 그들의 소유였을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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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59년 10월15일부터 11월11일까지 이병기 등 13인의 장서가를 찾아 그들의 서재를 소개하는 글이 실렸다. 1. 이병기 매화옥서실(梅花屋書室) 2. 박종화 파초장서실(芭蕉莊書室) 3. 이희승 일석서실(一石書室) 4. 김상기 독사연경지실(讀史硏經之室) 5. 최현배 노고산방(老姑山房) 6. 김원룡 삼불암서실(三佛菴書室) 7. 이병도 두계서실(斗溪書室) 8. 황의돈(黃義敦) 해원루서실(海圓樓書室) 9. 윤일선 동호서실(東湖書室) 10. 안인식 미산서실(嵋山書室) 11. 김두종 양당서실(兩堂書室) 12. 양주동 무애서실(無涯書室) 13. 김용진 향석서실(香石書室).

국문학자(이병기), 국어학자(이희승·최현배·양주동), 사학자(김상기·이병도·김원룡·황의돈·김두종), 의사(윤일선), 유학자(안인식), 서화가(김용진), 소설가(박종화) 등이 그 시기 대표적인 장서가로 꼽혔던 것이다.

13편의 글을 쓴 분은 송재오(宋在五)인데(내력을 전혀 모르겠다), 글이 워낙 심한 국한문혼용이어서 지금 세대는 거의 읽을 수가 없을 것이다. 대체로 각 장서가의 서재와 장서 중 가치가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워낙 내용이 많아서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고 흥미로운 것을 몇 가지 골라본다. 가장 멋있는 서재는 아마도 김상기의 ‘독사연경지실’로 보인다. ‘역사를 읽고 경전을 연구하는 서재’란 뜻이다. 국한문으로 된 것을 약간 풀어본다.

밝고 정리가 잘돼 서실과 집필실인 작은 방이 옆에 있었고, 그 속에 1만3000권 장서가 서가에 즐비하다. 책상에 놓인 다소의 문방과 기완(器玩), 대소 현판은 조화된 위치에 속(俗)을 넘었고, 여러 개의 도자기를 비롯한 고물, 골동은 서재에서 역시 품 높은 벗이 되고 있었다.

시·서·화 삼절(三絶)로 이름 높은 신자하(申紫霞) 친필로 된 ‘독사연경지실’은 그대로 ‘東濱讀史硏經之室’로 대현판이 걸려 있었고, 음각, 양각의 장서인 대소 10여개 아취가 풍겨 있었다.

책과 문방, 골동품, 도자기, 현판, 장서인 등이 제자리에 있는 아취 넘치는 서재다. 글 쓰는 사람의 서재란 본래 이런 것이다. 앞서 자신의 서재가 책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대개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고 했다.

하지만 송재오의 ‘일석서실’에 대한 묘사는 사뭇 다르다. 일석서실은 ‘약 만권의 장서로 꽉 차 있는 밝고 깨끗한 서재’로 한쪽에 목록함까지 비치한 ‘새삼 서장(書藏)의 의(義)와 충(充)’을 얻은 그런 깔끔하고 정돈된 서재였던 것이다.

손꼽을 만한 책으로는 1485년 간행된 <관음경(觀音經)>, 만력 2년 이전에 간행된 것으로 짐작되는 <여씨향약> 언해본을 꼽았다.



장서는 역시 전공별로 구별되는데, 최현배의 ‘노고산방’은 엄밀한 성격답게 ‘만권 서적이 정연히 분류된 목록’이 있었고, 장서에는 역시 국어학의 희귀 자료가 많았다. 곧 귀중서의 대부분이 운서(韻書), 언해본이었다. <두시언해> <주역전의구결(周易傳義口訣)> <훈몽자회> <이문집랍> <화동정운통석운고(華東正韻通釋韻考)> <십구사략언해> <마경초집언해> <노걸대언해> <병학지남언해> <예기언해> <연화경언해> 등이 그것이다.

사물로서의 책에 몰두한 흔적이 보이는 장서가는 이병기다. 그는 필체, 교판(校板), 소위 서향(書香)을 좇는 애착과 더불어 책의 초각, 초의 위(僞)·정(正)·각(刻)의 정(精)·조(粗), 종이의 미·악, 장정의 교·졸, 인(印)의 초종(初終) 등을 따져서 책을 수집했던 것이다. 이병기의 <가람일기>를 보면, 그가 책을 수집하는 과정을 아주 세밀하게 엿볼 수 있다.

약간 특이한 취향의 장서가도 있다. 고고미술사학자인 김원룡의 장서에 <고활자취요(古活字聚要)>란 책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임진왜란 전후의 20여종 활자의 견본을 모은 것이라고 한다. 아울러 김원룡은 애국계몽기의 잡지를 다수 소장하고 있으며, 아울러 광복 이후 쏟아져나온 잡지와 벽보까지 수집했다고 한다.

좀 각별한 분은 김두종 선생인데, 원래 서양 의학을 공부해 내과의사가 되었다가 다시 한의학을 공부했다. 의사학(醫史學)을 연구하는 한편 전혀 다른 분야인 한국의 활자와 인쇄술을 연구하기도 하여, <한국의학사>와 <한국고인쇄기술사>란 대저를 남기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그의 장서에는 활자·인쇄와 관련한 귀중서가 많았다. <일산당 고활자본 서목(一山堂古活字本書目>이란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김두종 선생이 700여종의 고활자본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법천송증도가(法泉頌證道歌)>가 비록 조선에 와서 복각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저본은 1239년 이전에 제작된 고려 때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거개 모든 장서가가 국문학자나 사학자이지만, 윤일선만은 성격이 다르다. 의학을 전공해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서울대 총장을 지낸 윤일선의 서재는 동서 양본(洋本), 신간 고판(古版)이 조화되어 있었고, ‘거개가 의서(醫書)라 또한 과학스러운 운치도 나부끼는’ 그런 곳이었던 것이다.

장서가들의 책은 대개 대학과 공공도서관으로 갔다. 이병기·이희승의 장서는 서울대로, 김두종의 장서는 국립중앙도서관과 한독약품으로, 최현배의 장서는 연세대로, 김상기의 장서는 일부 서울대로, 일부 영남대로 갔다. 좋은 책을 모아 연구도 하고 후학들에게도 도움이 되니 얼마나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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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교수의 연구실에 들렀더니 참으로 멋이 있었다. 책이 꽉 차 있지는 않았지만, 텅 빈 곳은 아무 곳도 없다. 한쪽에는 중국인 친구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산수화가 걸려 있고, 또 작지만 좋은 글씨 족자도 드리워놓았다. 베이징 유리창(琉璃廠)에서 구입했다는 낙관도 여러 개 서가에 얹어놓았다. 책도 그저 그런 책이 아니라, 중국에서 수입한, 책갑(冊匣)에 넣은 책, 우리나라 고서 등이 이곳저곳에 있어 무언가 고색창연한 분위기가 감돈다. 더 둘러보면 붓글씨를 쓰는지 벼루와 연적, 필가(筆架)도 있고 먹으로 얼룩진 천도 있다. 향로도 있고 다관(茶罐)을 놓은 다포(茶布) 근처에는 찻물 자국이 진하다. 선비다운 서재의 모습이다. 주인의 인격도 아마 고아(古雅)하리라 짐작이 된다.

옛날 선비들의 서재는 어떠했을까? 남아 있는 그림을 보면 역시 책으로 꽉 차 있지는 않다. 필요한 책만 서가에 놓여 있고, 서안(書案)에는 지금 읽고 있는 책만 단정하게 펼쳐져 있다. 서안 옆에는 연상(硯床)이 있다. 조촐하구나! 사실 많은 책을 보고 저술을 하는 것은, 18세기 후반 이후에 생긴 현상이다. 그전에는 광람(廣覽)과 박학(博學)을 통해 엄청나게 많은 저술을 하는 풍조는 없었다. 아니 가장 많은 저서를 남긴 다산조차도 서재에 책을 꽉 채웠을 것 같지는 않다. 그가 가장 많은 저술을 했던 강진의 초당(草堂)은 좁은 곳이다. 거기에 책이 있었으면 얼마나 있었겠는가?

책을 모아두고 책을 읽는 공간인 괜찮은 서재를 갖고자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희승 선생은 <한 개의 돌이로다>의 ‘서재’란 글에서, 학자에게는 예지(叡智)와 끈기와 건강이 있어야 하고, 아무리 작더라도 서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한 뒤, 자신은 아무것도 타고나지 못했으며 서재다운 서재 역시 가져보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이어 “공부하는 사람에게 서재가 없다는 것은 농부에게 전답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하며 서재는 학자들에게 ‘육탄전·백병전의 싸움터’로서 ‘책과 대결’을 하여 그 싸움에서 이기면 살고 지면 죽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서재 안에서의 전쟁이 우리에게는 성패의 계기요, 사활 문제’라고 말한다. 아, 서재를 두고 이런 비장한 말을 할 수 있다니, 부럽기 짝이 없다.

선생은 서재를 몇 종류로 분류한다. 첫째, 응접실보다 화려한 기구를 차려놓고, 가난한 학자보다 훨씬 더 많은 책을 간수해둔 경우다. 그 책들은 장정도 훌륭하고 금박으로 책등에 제목을 새긴 외국서적으로서, 전문적인 학술에 가까운 전집들이다. 그 장서를 보면 주인공의 학식만이 아니라 외국어 실력도 매우 높은 것 같지만 대화를 잠깐 나누어보면 무식이 확 드러난다고 말한다. 장서는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부류의 서재는 책이 ‘저장’되어 있을 뿐 전혀 읽히거나 이용되지 않는 경우다. 첫 번째 서재와는 달리 서재 주인은 책도 잘 알고 책 탐도 있어 책을 부지런히 주워 모은다. 하지만 읽지 않는다. 선생은 이런 사람을 돈만 모으는 수전노와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첫 번째 부류보다는 격이 높다고 평가한다.

셋째 부류의 서재는 책이 정리되어 있지 않고 대개 어지러이 흩어져 있다. 서재 주인의 시선도 책갈피나 글줄 사이로 기어들어가 오직 먹칠한 종이에서 금강석이나 노다지 이상의 보물을 파내려는 듯 눈을 부릅뜨고 덤비는 모습을 이 서재에서 볼 수 있다. 선생은 이 서재야말로 이른바 서적과 대결하려는 학자의 전쟁터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렇게 표현한다.

“머리를 싸 동이고 몇 날 몇 달을 부비대기를 치다가, 바늘 끝만큼이라도 무슨 새로운 사실이나, 남이 지금까지 생각해 내지 못한 것을 발견한 때에는, 그야말로 희희작약(喜喜雀躍)하여, 가슴속에서 용솟음쳐 흘러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여, 어쩔 줄을 모른다. 이러한 기쁨을 실지로 체험하여 보지 못하고서는 그 진미를 알 도리가 없다. 수천 명의 경쟁자와 함께 시험을 치르고, 입학의 관문을 돌파한 사람이 맛보는 승리의 술잔도 방향(芳香)하지 않은 바 아니요, 등산가가 험준한 암벽을 기어오르고 기어올라서, 무쌍한 고난을 극복한 나머지, 절정에 도달하여 하계를 눈 아래 내려딛고, 길게 휘파람을 불 때에 그 쾌감도 여간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서재에서 얻은 적은 진리와 작은 발견으로부터 오는 환희야말로, 전자와 같은 척도로 헤아리고 견줄 수 없는 커다란 무엇이 있다.”

아마도 선생은 서재가 책과 씨름하여 학문적 깨달음을 얻는 곳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선생이 서재에서 학문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루었기에 하신 말씀일 것이다.

정작 선생의 서재는 어떤 등급에 속했던가? 선생은 반평생 서재다운 서재를 가져보지 못했고, 서재 겸 침실 겸 응접실 겸용의 공간을 이용해 왔다고 말한다. 그마저 선생의 전용 공간이 아니라 아내와 자식들이 같이 사용하는 혼용의 공간이고, 항상 정돈되어 있지 않고 조용할 때가 드물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의 서재야말로 진정한 서재가 아닌가 한다.

나는 어떤가. 나 역시 직업이 직업인지라 읽고 쓸 곳이 필요하다. 집에 책을 쟁여둔 방이 있어 거기서 읽고 쓴다. 좋은 말로 서재다. 하지만 어떤 교수의 서재에서 풍기는 그런 예스러운 멋은 전혀 없다. 그냥 사방에 아무 장식 없는 나무 서가를 두르고 창가에 넓은 앉은뱅이 책상을 두었을 뿐이다. 학교 연구실도 마찬가지다. 그냥 서가와 책뿐이다. 책상 위에도 컴퓨터 모니터만 있을 뿐이다. 그날 하루 보아야 할 책이 있으면 뽑아다가 보고 용도가 없어지면 다시 서가로 원위치시키거나 도서관에 반납할 뿐이다. 그러니 연구실도 휑뎅그렁하다. 아니, 삭막하다! 언제나 서두에서 말한 분의 서재와 같은 멋있는 곳을 한 번 가져보나.

일석 선생이 말씀하신 첫 번째, 두 번째 서재가 아닌 데 만족하고 말 것이다. 무슨 내 주제에 멋있는 선비의 서재란 말인가.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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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이 방종현 등에게서 빌려본 책은 요즘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영인본으로 제작되어 어지간한 학자들의 연구실, 서재에는 구비되어 있는 것이다. 소장하고 있지 않아도 도서관에 신청하면 금방 빌려볼 수 있다. 하지만 양주동이 향가를 연구할 무렵에는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책이 아니었다.

양주동은 최남선이 책을 빌려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지만, 사실 최남선이 책 인심이 후한 편은 아니었다. 아니 도리어 인색했다고 말할 수 있다. 김춘동 선생은 <오주연문장전산>에 ‘취 하여’란 글에서 ‘육당(최남선)은 진본을 찾으면 널리 알리거나 동학과 더불어 함께 보기를 꺼려 하는 성벽이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점잖은 분의 조심스러운 표현이 이럴 정도면, 희귀한 책이 있으면 자랑만 잔뜩 하고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최남선이 그렇게 아끼던 장서는 6·25전쟁 때 몽땅 재가 되고 말았으니, 최남선이 책을 빌려주거나 아니면 여벌을 만들어놓았더라면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책이 흘러넘치는 시대니 마음만 먹으면 쉽게 책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특히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책은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최근 어떤 책의 영인본이 나온 것을 보고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이 책의 이름을 말하면, 한문학 혹은 국문학 연구에 종사하는 분들은 모두 알 것이다. 이 책은 18, 19세기를 살았던 문인이 자신과 가까이 지냈던 문인들의 작품을 모은 것이다. 다른 곳에는 실려 있지 않은 중요 작가의 작품이 대량으로 실려 있어 일찍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작가의 작품 중 일부는 필사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었고, 그것을 읽어본 연구자들은 성리학의 도덕주의가 편만한 조선에서 그와 사뭇 이질적인 파격적 주장과 작품이 있다는 것에 경악하였다.

어떤 분은 이 작가를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어 이 작가에 대한 연구가 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공개된 작품이 너무 적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앞서 말한 그 총서에 실려 있었던 것이다. 아예 몰랐다면 모를까 소재처를 알면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자료를 보고 싶어 거의 미칠 지경이 된다. 한데 책은 개인의 소장본이었다. 어지간한 연구자라면 혹은 독서가라면 다 아는 그 분은 고서점을 운영하였다.

앞의 박사학위 논문 역시 연구자가 직접 소장자를 찾아가서 자료를 보여줄 것을 요청했지만, 역시 일부만을 겨우 보고 쓴 것일 뿐이었다. 이 작가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나의 친구 역시 학부시절에 용감하게 그 소장자를 찾아가 자료의 열람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이미 공개된, 보나마나 한 자료의 복사본을 얻어왔을 뿐이었다. 연구자들은 모두 이 책 전체의 내용에 대해 사뭇 궁금해하였다.



그 자료를 보기 위해서 나 역시 이런저런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코 볼 수가 없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난 뒤다. 우연한 인연이 닿아 고서감정으로 이름난 분과 선이 닿았다. 그 책을 이야기했더니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냐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분 역시 그 책의 복사본을 구할 수 없었다. 뒤에 내가 어떤 책을 쓰는 과정에서 그 책을 꼭 보아야만 할 필요가 있었다. 박사학위 논문을 쓴 그 사람에게 부탁해 내게 필요한 부분 몇 쪽을 얻어 볼 수 있었다. 고맙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내용 전체를 보고 싶은 것은 여전하였다. 아니 갈증이 더하였다.

어느 날 정말 그 자료에 접근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은 선생님(평소에 가까이 지내는 사이다)을 만나 부탁했더니, 그 선생님은 “그게 무슨 어려운 일이야!” 하고 단박에 허락하는 것이었다. 아, 이제는 되었구나 하고 며칠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이윽고 전화가 왔다. “강 교수, 그 책 말이야…” 그 서두만 듣고 나는 그 책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몇 달 전 같은 과의 교수님으로부터 그 책이 영인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연구실로 찾아가 책을 펼쳐보니, 글씨가 선명하지 못하고 희미하다. 보기가 좋지 않았다. 원본에서 직접 사진을 떠서 영인본을 만든 것이 아니고, 복사본을 다시 복사한 것 같았다. 하기야 연구자에게는 글자만 보이면 된다. 내용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런데 그렇게 연구자들을 감질나게 하더니, 누가 이제 와서 어떻게 ‘봉인’을 풀고 영인본을 낼 수 있었단 말이야? 이런 마음으로 첫 권을 열고 첫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거기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보통 이렇게 귀중한 자료를 영인본으로 내게 되면 그 자료의 가치와 소장처, 자료를 구한 방법, 자료를 제공한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 등을 하기 마련이지만, 이 책에는 해제라고는 단 한 줄도 없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어디서 이 자료를 구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책을 돌려주니 동료 교수님이 구입할 것이냐고 물었다. “아니, 필요하면 김 교수에게 빌려보고 말지 뭐” 하고 말았다. 이 책에 볼 만한 자료가 아주 없느냐면 그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미 이래저래 다 알려졌고, 그에 대한 연구도 어지간히 이루어져 있다. 별로 당기지가 않았다. 또 약간 언짢기도 하였다. 온갖 이유로 몇몇이 그렇게 끌어안고 곶감 빼먹듯이 하더니,렇게 어설픈 영인본이 나온 것은 어떻게 그냥 두는지 모르겠다. 고소나 고발은 하지 않는가 말이다. 이 책을 소장했던 원소장자 분은 세상을 뜬 지 거의 10년이 되었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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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양주동의 <문주반생기>는 수주 변영로의 <명정사십년>과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음주기로 꼽힌다. 두 책을 읽으면 ‘낭만적 음주’의 절정을 보는 것 같다. 게다가 <문주반생기>의 자존자대, 곧 허풍은 도리어 얼마나 진솔한가.

두 사람은 영문학을 전공했지만 뒷날 행로는 아주 달랐다. 변영로는 시인으로 언론인으로 살았지만, 양주동은 국어학자가 되었던 것이다. 국어학자 양주동은 여러 저작을 남겼지만 향가를 연구한 <고가연구>를 제외하면 모두 자장귀 같은 것이다.

“어려서부터 야망이 오로지 ‘불후의 문장’에 있었고, 시인·비평가·사상인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던” 양주동이 국어학자가 된 것은 일본인 학자 오쿠라 신페이 때문이다. 향가는 알다시피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이 귀중한 신라의 노래는 향찰로 쓰여 무슨 말인지 알아먹지 못한다. 최초로 향가를 연구한 사람은 일본의 학자 오쿠라 신페이였다. 어느 날 우연히 본 오쿠라 신페이의 <향가 및 이두의 연구>는 양주동의 민족의식을 격발시켰다.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첫째 우리 문학의 가장 오랜 유산, 더구나 우리 문화 내지 사상의 현존 최고 원류가 되는 이 귀중한 향가의 석독을 근천년래 아무도 우리의 손으로 시험치 못하고 외인의 손을 빌렸다는 그 민족적 부끄러움, 둘째 나는 이 사실을 통하여 한 민족이 ‘다만 총·칼에 의해서만 망하는 것이 아님’을 문득 느끼는 동시에 우리의 문화가 언어와 학문에 있어서까지 완전히 저들에게 빼앗겨 있다는 사실을 통절히 깨달아, 내가 혁명가가 못되어 총·칼을 들고 저들에게 대들지는 못하나마 어려서부터 학문과 문자에는 약간의 ‘천분’이 있고 맘속 깊이 ‘원’도 ‘열’도 있는 터이니, 그것을 무기로 하여 그 빼앗긴 문화유산을 학문적으로나마 결사적으로 전취·탈환해야 하겠다는, 내 딴에 사뭇 비장한 발원과 결의를 했다.”

무리한 공부로 폐렴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완성한 <고가연구>는 민족적 자존심을 살려준 것은 물론이고, 향가에 대한 학문적 관심을 폭발시킨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은 무엇보다 어마어마한 고문헌을 독파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책의 서두에는 방대한 문헌이 열거되어 있다. 이 책들은 당시로서는 희귀한 고서들이었다. 곧 원본밖에 없는 책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으면 보지 못하는 것이다. 또 누가 갖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양주동은 결심이 서자 ‘한글 고문헌 장서가’인 방종현·최남선·이희승·이병기 등을 방문하여 문헌을 빌렸다. 또 그들은 ‘국보급 장서들’을 아낌없이 내주었다. 아마 방종현 등의 ‘한글 고문헌 장서가’가 없었다면, <고가연구>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방종현과 최남선·이희승·이병기 등은 당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었다. 책이 흔하지 않고 연구에 필요한 책은 더더욱 귀하였으니, 학자들은 책을 모으는 데 힘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이름난 학자는 거개 장서가이기도 하였다. 지금 모모한 대학 도서관에 ‘동빈문고’ ‘가람문고’처럼 ‘문고’가 들어간 장서들은 모두 학자 개인들이 처절한 노력을 통해 모은 것이다. 하지만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책을 모으는 분위기는 거의 찾기 어렵다. 어지간한 자료는 온라인으로 찾아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바대로 테크놀로지가 연구 환경을 바꾸고, 연구 풍토까지 바꾼 것이다.

예전에는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도 고서가 꽤나 있었다. 1978년도의 기억이다. 한 고서점의 시렁 위를 보니, 고서가 잔뜩 있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책은 <좌전>이다. 손때가 거의 묻지 않은 책 한 질이 단정하게 묶여 있었다. 읽을 수 없는 책이지만, 살 수 없는 책이지만, 값은 물어볼 수 있었다. 한 권당 1000원이란다. 대학생이 가정교사로 나서면 한 달에 4만원 정도 받는 시절이었으니, 책값은 그리 비싸다고 할 수 없었다. 아마도 집안이 넉넉한 처지였으면 그 책을 샀을지도 모르겠다.

연구자가 되고 나서도 나는 고서점은 출입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고서점에 가보면 한 권당 20만~30만원이 훅 넘는다. 연구에 꼭 필요한 거라면, 어떻게든 마련하겠지만, 그런 자료들은 이미 영인본으로 나와 있다. 그러니 굳이 고서를 사 모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고서를 사 모을 만한 나이, 즉 30~40대에 너무 주머니가 얇아서 엄두를 내기 어려웠던 것이다. 가까운 친구 중에 고서를 사들이는 친구가 있다. 어느 날 그 친구를 만났더니 아무개의 문집이 낙질본과 17세기 유명한 문인의 간찰이 있는데, 자네 가지고 가려는가? 한다.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친구의 마음도 고마워서 받아들고 왔다. 그 간찰의 주인공의 문집은 이미 영인본이 나와 있어 내용은 굳이 탐낼 것도 없지만 말이다.

고서를 열심히 모으는 분을 만나면, 은근히 책 자랑을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떤 희귀본을 어떻게 구입했다는 것, 뜻밖에도 염가에 구입했다는 것 등등이다. 하지만 부러워해 본 적은 없다. 그런 책들은 대개 이미 영인본이 있다. 굳이 원본으로 구입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부러운 경우도 있다. 고서점 출입을 자주 하다 보면, 희귀한 자료를 손에 넣을 확률이 높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모모한 분들은 그렇게 해서 구입한 자료를 학회에 가서 소개하고 논문도 쓰고 번역도 하여 책을 내었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 고서점을 출입할 마음은 없다. 또 그럴 만한 경제적 여유도 여전히 없다. 이미 나와 있는 책만으로도 내 공부는 충분한 셈이다. 이러니 나는 앞으로 대학 도서관에 내 이름을 딴 문고를 설치할 자격은 아예 없는 셈이다. 하하!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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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점점 불어나면 저 방으로 옮겨다 쌓는다. 아이들이 자라서 서울로 떠났으니 빈방이다. 책장을 사서 벽면에 가득 채우고 거기에 넘쳐나는 책을 꽂는다. 한참 지나면 그것도 모자란다. 다시 방 하나를 비우고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버리는 책이 나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거기 딸려서 오만 가지 종이뭉텅이, 문서 따위가 나온다.

책을 옮기다가 오래된 상자 하나를 열었더니, 정말 가관이다. 옛날 노트, 자료를 옮겨 적은 카드, 발표문 요지, 그리고 논문 복사한 것이 쏟아져 나온다. 가장 양이 많은 것은 역시 논문이다. 스테이플러로 세로로 세 번 찍고 맨 앞면에 논문이 실린 잡지 이름을 붉은 글씨로 적어둔 것이었다. 20대 중·후반 석·박사 과정 때 복사해서 정성껏 제본한 것과 30대 중반 책을 쓰기 위해 읽으려고 모아둔 것들이다. 그동안 몇 번 버릴 기회가 있었지만, 혹시 하고 버리지 못한 것들이다. 하지만 역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어 상자 속에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미련 없이 깡그리 뭉쳐 노끈으로 묶어버렸다.

그 논문들은 쉽게 구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것은 내가 있는 학교가 아니라, 친구들을 통해 다른 대학의 도서관에서 복사해낸 것도 있었다. 논문을 찾는 것도 일이었다. 도서관 로비에 도열해 있는 카드박스를 뒤적이면서 참고논문을 찾는 것이 공부의 첫걸음이었다. 카드박스를 뒤적이는 것도 어려웠다. 그 많은 박스 어디에 내가 찾는 연구논문이 있는 줄 안단 말인가. 또 대학 도서관 참고열람실에 모든 논문집이 다 있는 것도 아니었다. 희한하게도 내가 찾는 논문집만 빠져 있는 경우가 많았다. 논문이 실려 있는 논문집을 찾았다 해도 그것을 손에 넣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복사기가 도입된 것이 1970년대 후반이었으니 그래도 나는 그 혜택을 보았다 하겠지만, 그전에는 어떻게 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사정 때문에 영인본 출판사에서는 그런 논문집에서 필요한 논문만을 모아서 따로 책을 찍어 팔기도 하였다.

대학에 자리를 잡고는 각 학회에서 보내오는 논문집을 모아두었다. 연구실 한쪽 서가에 논문집별로 나란히 꽂아두고 필요하면 꺼내 보곤 했다. 하지만 4년 전 이 논문들 역시 모두 버렸다. 워낙 빨리 불어나므로 감당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왜 논문집들이 이렇게 늘어났는가? 약 10년 전부터 대학에 ‘경쟁력 강화’ ‘무한경쟁’ 등등 ‘경쟁’이란 말이 화두가 되면서부터였다. 교수들에게 논문을 증산하라고 강요했고 논문의 편수로 교수를 평가했다. 논문 생산량이 많으면 높은 등급을 받고 인센티브를 더 받을 수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성립한다. 학술지가 갑자기 두꺼워졌다. 1년에 한 번 내던 학술지를 두 번 내기 시작했고, 이제는 서너 번씩 낸다. ‘놀멍쉬멍’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연구열을 불태우는 것은 물론 아니다. 어쨌거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열심히들 논문을 쓴다. 그게 논문집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이유다.




논문집이 늘어나는 것만큼 논문집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하면 결코 아니다.

공부하는 사람은 적고 학회는 늘어나고 또 논문집도 늘어나니, 거기에 실리는 논문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논문의 편수로 모든 것을 평가하니 견실하게 공부하는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설픈 논문을 삼류 논문집에 여러 편 싣고 높은 평가를 받아 자리를 꿰차는 경우도 허다하다. 도무지 옥석을 가릴 수가 없다. 논문의 편수로 연구 업적을 평가할 수 없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문제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책임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도 나서서 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나가면 학문은 자연스레 멸종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자연히 논문집도 예전처럼 소중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요즘은 인터넷으로도 논문을 볼 수 있다. 글을 쓰다가 참고해야 할 논문이 있으면 학교 도서관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해당 논문을 검색하고 불러와 작업하던 창에 띄울 수 있다. 최근의 논문이어서 전자파일 형태로 있는 것이라면, 유관한 부분을 복사해올 수도 있다. 물론 오래된 논문은 PDF 파일로 보아야 하겠지만. 그러니까 이제 논문을 굳이 종이로 출력해서 볼 필요도 없는 것이다. 종이책이 사라질지 사라지지 않을지 미지수지만, 종이 논문집의 용도는 확연히 줄어들었다.

같은 대학의 경제학을 전공하는 친구가 연구실을 옮겼다. 이전 연구실은 원래 강의실을 막아서 만든 것이라 천장이 높고 컸다. 하지만 새로 지은 건물의 연구실은 좁다. 깨끗하고 전망도 좋지만 좁은 연구실은 문제를 일으킨다. 책을 놓을 공간이 부족한 것이다. 그 친구가 내게 어느 날 희한한 작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책을 쪼개어 스캔하는 것이다. 수백 권 스캔해봐야 얼마 안 된다. 외장 하드디스크에 담으면 그만이다. 그동안 모은 자료집이며 논문도 모두 집어넣는다. 또 어느 날 e메일로 광고가 날아들었는데 내 친구가 했던 그런 작업을 대신해주는 회사란다. 말하자면 얼마의 비용으로 책을 스캔해서 하드디스크에 담아주니 이용해달라는 것이었다. 약간은 우스웠다. 옛날 노교수님들의 연구실에 가면 사방이 오래된 책들이었고 군데군데 각종 문서며 자료들이 끼워져 있었다. 그것을 보고 무언가 거룩한 학문의 분위기를 느끼며 주눅이 들곤 했다.

앞으로 10년 뒤면 책이라고는 한 권도 없고, 그냥 컴퓨터만 달랑 한 대 있는 교수 연구실을 보지 않을까? 하지만 학문의 수준이 정말 높아져 있을까? 그게 더 의문스럽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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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이후 조선 지식인들의 저술을 보면 갑자기 그 양이 많아졌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산의 엄청난 양의 저술이 대표적이며, 다른 학자들도 다산만큼은 아니지만 결코 그 지적 노동의 양이 적지 않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같은 책도 오랜 시간이 소요된 엄청난 분량의 저작이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 역시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저술의 양이 불어난 이유를 궁리하다가 안경이 도입된 것도 중요한 이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조선 지식인들이 즐겨 보던 중국책들은 글씨가 작은 것이 많았는데, 이것은 노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안경은 임진왜란 이후 북경에서 수입되기 시작해 18세기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사용되었으니, 아마도 안경의 보급이 보다 많은 책을 볼 수 있게 하고, 많은 저술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처럼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학문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지식의 확산에 기여했듯, 우리가 범상히 여기는 안경, 복사기 역시 학문 발달에 기여했을 것이다. 물론 컴퓨터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전공하는 한국학 쪽에서는 영인본의 제작이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영인본은 극소수의 사람이 독점하고 있던 희귀한 자료를 관심 있는 학자들에게 개방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20대 중반부터 어느 분을 통해 책을 사들였다. 그분은 주로 한국학 관계 영인본을 팔러 다녔다. 그분은 평생을 책 팔러 다녔기에 알 만한 학자들은 다 알았다. 하도 오래 거래하다 보니 조금은 무람없는 사이가 되었다. 어느 날 내 연구실로 와서 다리품을 쉬며 이제 이 노릇도 그만둘 작정이란다. 30년을 훌쩍 넘었을 것이다. 이 양반이 우연하게 처음 <훈민정음> <월인천강지곡> 등 국학 관계의 중요 문헌을 팔았던 그날을 이야기한다. 요약하면 이 책을 본 사람들의 반응이 희한했다고 한다. 원본과 꼭 같은 영인본, 그것도 고서처럼 선장한 책이 눈앞에 있어 눈이 휘둥그레지던 국어 교사와 역사 교사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고 했다. 하기야 누가 <훈민정음>을 보았으며, <용비어천가>와 <월인천강지곡>을 보았더란 말인가?




1970년대 국학 붐이 불면서 영인본 시장은 활황을 맞았다. 문집이며 사료들이 영인본으로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영인본은 사실 제작하기 수월한 편이다. 마스터 인쇄로 찍으면 값싼 영인본이 만들어졌다. 좀 더 신경을 쓰는 곳에서는 기획을 해서 일정한 주제 아래 책을 모아서 내고 사진원판을 제작해 영인본의 수준을 높였다. 하지만 그것은 일부였고, 돈만 되면 어느 책이나 손쉽게 영인본을 찍었다.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도서관의 서고에 갇혀 있던 책들이 깔끔한 양장본의 형태로 눈앞에 나타났으니 말이다. 연구자들은 영인본을 사들였고 그것에 의지해 논문을 썼고 책을 썼다. 확실히 영인본 제작이 학문 발달에 적지 않게 기여한 것이다. 하지만 영인본을 찍는 출판사는 거개 영세했고 한 번 영인본으로 찍은 책은 다시 찍는 법이 없었다. 그 영세한 영인본 제작의 시대도 오래가지는 않았다. 민족문화추진회에서 영인본의 대종을 이루는 문집에 표점을 하고 정교한 영인본을 만들어 보급하면서 영인본 시장이 타격을 입은 것이다.


하지만 가장 큰 변화는 컴퓨터와 인터넷의 출현에 있다. 한국고전번역원, 규장각,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학중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등에서는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도록 원전 자료를 디지털화해 놓았다. 이런 판이니 굳이 돈 들여 영인본을 구입할 필요가 없다. 이제 영인본 자료는 거의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 남이 사니까 나도 산다는 식으로 경쟁하듯 책을 사들이던 대학원생들도 책을 사지 않는다. 연구동에 다니던 책장수들이 사라진 지 오래다. ‘공부해봐야 무슨 소용인가’라는 자조적인 분위기도 한몫할 것이다.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학문하는 행태도 바꾼다. ‘대한매일신보’나 ‘황성신문’ 등 구한말 신문도 모두 인터넷으로 검색할 수 있다. 편리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조금 걱정은 된다. 옛날 ‘대한매일신보’를 볼 때는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가면서 읽고 자료를 찾았다. 그러는 중에 내가 찾는 자료뿐만이 아니라 다른 자료도 읽을 수 있었고 그 시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연구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하지만 검색어를 찾아서 원하는 것만을 얻는 방법은 그런 과정을 없애버린다. 편리하지만 연구자로서의 자세는 아니다. 또 검색된 자료는 많지만, 그 자료가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즉 빙산의 윗부분만 보고 그 아래의 거대한 부분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편리한 것이지만, 그 편리가 도리어 학문을 망치는 경우도 허다한 것이다.

<열녀의 탄생>을 쓸 때 경험을 들어본다. 하고 많은 문집 속에 열녀에 관한 자료가 어떻게 있는 줄 아는가? 지금은 고전번역원(옛날의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그동안 영인한 <한국문집총간> 300책을 디지털화 해서 인터넷에 올려놓았다. 검색 기능도 괜찮아 찾고 싶은 자료를 적당한 검색어로 찾아볼 수 있다.

만약 ‘열녀’라는 말이 나오는 문헌을 찾고 싶다면, ‘열녀’라는 검색어로 검색하면 된다. 그 검색 결과는 많지만 읽고 필요한 것을 취하면 된다. 그런데 <열녀의 탄생>을 처음 쓸 시기에는 디지털화는 꿈도 꾸지 못할 때였다. 하는 수 없이 책을 모두 가져다 놓고 목차부터 읽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어떠했냐고? 귀찮고 힘들기는 했지만 아주 좋았다. 내가 필요한 자료를 챙길 수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그 기회를 통해 다른 자료들도 폭넓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의 검색 기능만으로 이런 것은 불가능하다.

정리하자. 컴퓨터와 인터넷의 발달은 앞으로 학문 연구에 어떤 변화를 일으킬 것인가? 긍정적인가, 부정적인가. 실로 궁금한 문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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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은 <철종실록>으로 끝난다. 부록으로 끝에 <고종실록> <순종실록>이 붙어 있지만, 이것은 정식 실록으로 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두 실록은 일제강점기인 1927년부터 1935년까지 이왕직(李王職)에서 편찬한 것이기 때문이다. 편찬 책임자는 경성제국대학 교수 오다 쇼고(小田省吾)였다.

이왕직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李王家)와 관련된 사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든 관청이고, 그 장관이 일본인이었으니, 이 두 실록이 일제의 입장에서 쓰인 것은 물론이다.

실록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신문과 잡지다. 그 중에서도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 독립신문은 필독서로 꼽힌다. 하지만 이 신문의 영인본은 한 번 발간된 이래 다시 발간되지 않았다. 나는 지도교수님인 경인 선생님 댁에서 대한매일신보를 가져와 한동안 끼고 살았다. 매우 흥미로운 자료였다. 황성신문은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중요한 자료는 복사했는데 복사한 것도 한 짐이었다. 대한매일신보는 오랫동안 보았기에 책이 좀 망가졌다. 돌려드릴 때 선생님 뵙기 사뭇 무안했다.대한매일신보를 돌려드린 뒤 나는 늘 이 신문을 한 질 구했으면 했다. 하지만 절판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얼마 뒤 이 책이 다시 영인되었다는 말을 듣고 당시 형편으로는 거금을 들여 어렵게 한 질을 샀다. 그날 밤 얼마나 기뻤던지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황성신문도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다가 뒤에 영인본이 나왔다는 소문을 듣고 역시 무리해서 한 질을 구했다. 독립신문도 간행한 지 오래되어 구할 수 없었는데 뒤에 모 교수님의 연구실에 갔다가 새로 찍은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출판사에 연락해서 구했다. 위의 세 신문은 모두 한일병합 이전에 발간된 것이다. 그 이후 신문은 어떠했던가? 1910년 일제는 한반도를 집어삼키자 항일적 논조의 신문을 모조리 폐간했다. 그리고 가장 항일적 논조를 유지했던 대한매일신보는 자신들이 인수해, ‘대한’ 두 글자를 떼어버리고, 매일신보로 만들어 총독부의 기관지로 삼았다. 매일신보는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생기기 전 유일한 신문이 되었다. 그 논조가 일제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이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동시에 다분히 계몽성을 띠고 있었다. 이수일과 심순애의 신파로 유명한 조중환의 <장한몽>, 이광수의 소설 <무정>도 이 신문에 실린 것이다. 총독부 기관지이지만 이 신문만큼 조선의 사정을 소상히 다룬 신문도 없고, 또 당시 어지간한 문인들이 모두 이 신문에 글을 썼기에 일제강점기 초기를 연구하려면 이 신문을 읽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나 역시 20세기 초 서울에 관한 자료를 모아 <사라진 서울>이란 책으로 엮었는데, 그 중 서울 성곽, 시전에 관한 자료를 이 신문에서 뽑아 넣었다.




이 신문은 무척이나 보기 까다로웠다. 이 신문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었다. 신문 원본은 볼 수 없고 마이크로필름만 볼 수 있었다. 마이크로필름을 보는 일은 무척 피곤하다. 특히 신문처럼 판면이 크고 내용이 많은 자료는 한 면 한 면 화면에 띄워놓고 기사를 읽어야 하는데, 이게 정말 고역이다. 워낙 글자가 작아 보이지도 않는다. 해당 자료를 찾으면 프린트를 하면 되는데, 프린트는 값비싼 사진 인화지에 하게 되어 있어 가난한 대학원생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으로 적지 않은 부담이었다. 어쨌거나 한동안 남산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매일신보를 보면서 자료를 찾던 일이 어제 같다.

연구자들의 고통을 누군가가 헤아렸던지 1985년 이 신문이 영인되었다. 보고 싶었지만 개인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는 선배를 통해 서울 모 사립대학에 소장된 영인본을 빌려 보기 시작했다. 1910년부터 1919년 3·1운동 직전까지 훑었는데 20세기 초반 한국 사회의 급격한 변동을 이 신문을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충격적인 것도 있었다. 그동안 항일 언론인으로 알고 있었던 장지연(張志淵)이 이 신문에 700편이 넘는 글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황성신문사 사장으로 을사조약에 거세게 항의해 ‘시일야방성대곡’이란 논설을 쓰고 급기야 그 일로 투옥까지 된 장지연이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에 글을 싣다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학원에서 계몽기 신문을 자료로 삼는 강의를 개설했더니 학생들이 대한매일신보 등을 복사해 온다. 영인본에서 복사한 것이 아니다. 물었더니 인터넷에서 원문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세월 많이 좋아졌구나! 하지만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 넣어야 짜다고 그것을 읽어 의미를 찾는 일은 역시 연구자의 일이다. 들으니 요즘 대학원생들은 옛날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의 한문에 가까운 국한문혼용체는 물론 한자가 많이 섞인 신문을 읽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마이크로필름은 자료를 볼 수 있는 방법으로 상당히 괜찮은, 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당히 불편한 방법이었다. 뒤에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도 상당히 많은 마이크로필름을 제작해 거기서 필요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었다. 연구원의 마이크로필름은 사진 인화지가 아니라 보통의 종이에 프린트할 수 있는 것이었기에 값이 아주 쌌다. 부산대에 부임한 뒤 경제학과에 계시는 선생님(아주 친한 친구의 숙부이기도 하다)이 도서관장으로 계시면서 주선해 규장각의 마이크로필름을 복제해 도서관에 들였다. 그때 어떤 사람들은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고 했지만 어쨌든 가져오고 나니 많은 사람들이 이용한다. 일단 연구에 필요한 자료는 많이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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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책을 다 가질 수는 없다. 또 가지고 싶은 책이라 해서 다 가질 수도 없다. 도서관은 그래서 생긴 것이다. 도서관이 없는 시대 혹은 도서관이 없는 사회라면, 또 있어도 이용할 자격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빌려 보는 수밖에 없다. 다른 것은 몰라도 책과 ‘빌린다’는 말은, 인접관계에 있는 말이다. 다른 물건을 상상해보라. 책처럼 쉽게 빌려달라고 할 수 있는 물건이 있는가? 이러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일에 근거를 둔 이야기도 숱하게 많다.

조선 초기의 문인 김수온(金守溫)의 이야기다. 어느 날 서거정(徐居正)에게 희귀한 책 한 권을 빌려달라고 한다. 당연히 빌려주었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책을 돌려주지 않는다. 집으로 찾아가 돌려달라고 채근했더니 돌려줄 수 없다고 한다. 왜냐고 물으니, 자기 머릿속에 다 있다며 좔좔 외운다. 빌려간 책을 뜯어 도배를 해놓고 외운 것이었다. 이쯤 되면 돌려받는 것을 자발적으로 포기해야 할 것이다.

사실 책은 빌리고 빌려주고 하는 것이고, 또 그런 과정에서 온갖 이야기를 다 만들어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모아보면 아마도 책 한 권 분량은 나올 것이다. 최석정(崔錫鼎)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자였던 최명길(崔鳴吉)의 손자이고 또 벼슬이 영의정까지 오른 인물이다(무려 8차례나 영의정에 올랐다). 이 분은 <구수략(九數略)>이란 수학책을 저술한 수학자로 유명하기도 한데, 한편으로는 책을 엄청나게 많이 소장한 장서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최석정은 자신의 책에 장서인을 찍지 않았다. 책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었으니 책을 잘 빌려준 것은 불문가지다. 또 책을 돌려달라고 채근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돌려받을 때 책을 읽은 흔적이 없으면 몹시 언짢아 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진정한 독서가, 애서가로 봐야 하지 않을까?

어떤 선배 교수에게 책을 잔뜩 빌렸다. 10년을 실컷 보고 난 뒤 돌려주려고 했더니, 그냥 가지고 있으란다. 자신은 당장 볼 일도 없고, 연구실도 좁아 그 책까지 돌려받으면 둘 데도 없단다. 가지고 있다가 자신의 정년 때 돌려달라고 한다. 뭔가 이상하다. 그 선배 교수는 정년이 되면 책을 모두 없애버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연구실로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니, 책을 맡아달라는 건지, 가지라는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그분의 정년 때까지 그 책들은 내 연구실에 있게 됐다. 아마도 이 분은 최석정 같은 분인가 보다.

이따금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책이 갑자기 필요해 서가를 뒤져보면 없다. 다시 훑어보아도 없다. 연구실에도 없고 집에도 없다. 누가 빌려간 것일 터이다. 이럴 경우 예전에는 무지하게 아쉬웠지만, 요즘은 깨끗이 잊고 만다. 왜냐고? 내 서가에도 빌려 보고 돌려주지 않은 책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고의적으로 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 사람은 아니다. 어쨌든 이래서인지 요즘은 빌려주고 까마득히 잊어도 별로 충격을 받지 않는다.




책을 빌리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빌려주고 돌려받지 못한 못내 아쉬운 책, 아니 문서가 있다. 1979년 나는 대학 3학년이었다. 알다시피 10월16일 그 사건이 일어났다. 부마민주화항쟁이었다. 아침에 상대 건물에 강의를 들으러 갔더니(상과대학생은 아니지만 상과대학 건물의 강의실에서 수업을 했다), 학생들이 줄지어 미라보다리(부산대 안 계곡에 놓인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강의를 팽개치고 따라갔다. 구 도서관 자리에 이르렀더니, 선언문을 낭독하는 사람이 있었고 이어 구호를 외쳤다. 스크럼을 짜고 곧 대운동장으로 내려갔다. 학교 옆 사범대 부속고등학교 담장이 무너졌고 학생들은 거기를 통해 밖으로 나갔다. 그 다음부터는 다 아는 이야기다. 남포동, 광복동에서 박정희 정권 타도를 외치는 시위를 벌였다. 나는 부산대 학생이었다. 그 다음날도 같은 시위가 있었다. 나는 역시 부산대 학생이었다.

버스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고 파출소가 불타는 것을 보았다. 이건 역사적 사건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본 시위의 처음과 시작을 꼼꼼히 적었다. 내가 본 것을 기록해야만 해! 오랫동안 나는 그 종이뭉치를 소중히 간직했다. 1980년대 대학에서 조교로 근무할 때다. 워낙 엄혹한 시절이라 학교 안에도 사복경찰이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저항했다. 등사판으로 찍어낸 성명서, 선언서 같은 것들이 교정에 뿌려졌다. 손에 닿는 대로 그것들을 모았다. 나와 가까이 지내는 학생들은 그런 것들을 보면 일부러 챙겨다주었다. 이것도 언젠가는 역사의 자료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는 따로 갈무리해 두었다.

그 뒤 서울로 올라와 다시 학업을 계속했다. 어느 날 친구와 술을 먹다가 부마항쟁으로 화제가 번져 그때 일을 기록한 자료가 있다고 했더니 빌려달란다. 하지만 그 뒤로 그 자료는 나의 손으로 다시는 넘어오지 않았다. 거의 30년이 지난 뒤 친하게 지내는 동료 교수가 전에 들었다면서 그 자료를 좀 보자고 했다. 지금 내 손에 없다고 했다. 그런데 3년 전인가 부산의 부마항쟁기념사업회에서 그 자료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서 들었는지 빌려달라고 했다. 그 친구는 같은 과 동료 교수와 이래저래 인척관계다. 그래서 동료 교수를 통해 연락했더니 이미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고 어쩌고 하는 동안 사라진 것이다. 이런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기념사업회 쪽은 너무나 섭섭해했다. 광주민주화항쟁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물이 정리되어 있지만, 부마항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연구실로 찾아온 그 분은 녹음이라도 남기는 것이 옳다면서 내 희미한 기억을 정돈하려 했다.

생각해보면 특별한 사람이 역사의 자료를 남기는 것이 아니다. 내가 좀 더 마음을 썼더라면 그 자료를 곱게 정서해서 복사해 두었을 것이다. 신중하지 못했던 젊은 날이 마냥 후회스럽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빌려줄 자료가 있고, 아닌 자료도 있는 것 같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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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이야기는 20세기에도 상당수 남아 있다. 책은 ‘冊’으로 써야 한다고 말했던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은 ‘책과 冊’이란 수필에서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빌리러 오는 친구를 이렇게 평한다.

“가끔 冊을 빌리러 오는 친구가 있다. 나는 뜨거운 질투를 느낀다. 흔히는 내가 첫 한두 페이지밖에는 읽지 못하고 둔 冊이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속삭여주려던 아름다운 긴 이야기를 다른 사나이에게 먼저 해버리려 나가기 때문이다. 가면 여러 날 뒤에 나는 아조 까맣게 잊어버렸을 때 그는 아조 피곤해져서 초라해져서 돌아오는 것이다. 친구는 고맙다는 말만으로 물러가지 않고 그를 평가까지 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경우에 그 冊에 대하여 전혀 흥미를 잃어버리는 수가 많다.”

자신이 읽지 않은 책을 빌리려 하는 사람을 질투한다는 것, 그 책을 다 읽은 친구가 책에 대한 평을 하면서 돌려주면 그 책에 대해 아주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흡사 그 사람은 마치 내가 사랑하되 아직 고백을 하지 못한 여인에게 먼저 접근해 그 여인의 마음을 훔쳐간 연적(戀敵)과 같다. 이렇게 빌려준 책은 아주 집을 나간 ‘노라’가 되는 경우도 있다.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도 남의 冊을 빌린다.

“이러는 나도 가끔 남의 冊을 빌려 온다. 약속한 기간을 넘긴 것도 몇 권 있다. 그러기에 冊은 빌리는 사람도 도적이요, 빌려주는 사람도 도적이란 서적 윤리가 있는 것이다. 일생에 천권을 빌려 보고 9백 9십 9권을 돌려보내고 죽는다면 그는 최우등의 성적이다. 冊을 남에게 빌려만 주고 저는 남의 것을 한 권도 빌리지 않기란 천권에서 9백 9십 9권을 돌려보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빌리는 자나 빌려주는 자나 冊에 있어선 다 도적이 됨을 면치 못한다.”

이태준 역시 책을 빌리고 기한을 넘겨 돌려주지 않은 책도 있다. 그러기에 책은 빌리는 사람이나 빌려주는 사람이나 모두 도둑을 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태준의 결론은 이렇다. “그러나 冊은 역시 빌려야 한다. 진리와 예술을 감금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冊은 물질 이상이다.” 이태준은 진정 책을 사랑한 사람일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책을 빌리는 데 대한 언급을 많이 남기고 있다. 이희승(李熙昇) 선생의 ‘애서(愛書), 뺨 치고 싶어’를 보자. 선생은 자신의 책에 대한 사랑을 ‘본능적인 것’이라 하고 작위적이거나 시켜서 되는 노릇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어 매입했거나 증여를 받았거나 책의 가치가 높거나 낮거나 일단 들어온 책을 되판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한다. 책을 파는 것은 손가락을 잘라버리는 것과 같으며, 조선 전래의 미풍으로도 책을 파는 것은 ‘사군자(士君子)의 패가망신의 단말마적 최후의 행동’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석 선생은 수천권 장서가 6·25전쟁 때 소실된 이후 책을 아끼는 마음이 더욱 심해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현재의 장서는 과거의 장서만 못하다고 말한다.

“과거의 장서는 주로 국내판 고서(古書)로 언해류(諺解類)·어학서류(語學書類)였는데, 고서점에서 이런 책을 하나 발견할라치면,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그것을 입수하여야 되었고, 한번 입수한 다음에는 구기박살이 된 책장을 일일이 펴서 인두질을 치고 의(表紙)를 갈아 붙이거나 풀칠을 하여 개장(改裝)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에 문자를 기입하는 등의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책을 저장함으로써 마음의 가멸(富)을 느끼었고, 그 책을 읽어 갈 적에, 이해에 앞서 우선 법열(法悅)을 만끽하게 되었던 것이다. 남에게 빌려주었다가 돌려 올 적에 책에 낙서를 하였거나, 책장을 구겼을 때에는, 그처럼 불쾌하고 분한 일이 다시 없었다. 그 사람이 만일 옆에 있다면, 뺨이라도 갈기지 않을 수 없는 충동을 느끼곤 하였다.”(동아일보 1962년 7월16일)

아! 책을 사랑하면서 법열(法悅)을 느끼다니! 그리고 빌려준 책에서 낙서나 구겨진 책장을 볼 때 분한 나머지 뺨이라도 갈기고 싶다니, 점잖으신 선생께서 이런 폭력을! 책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알 만하다.

국어학자였던 이숭녕(李崇寧) 선생 역시 책에 대해 극도의 애정을 표시한다. ‘미신 같은 망상 속에, 책 사랑 때문에 항상 인색해지고’란 글을 보면, 책을 보여 달라는 사람이 적지 않아 서가에서 책을 뽑아다주는데, 그 사람이 침을 바르고 책장을 넘기는 것까지는 그래도 용납할 수 있지만, 엄지와 검지로 책장을 집어 넘길 때면 형언할 수 없는 ‘안타까운 초조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책을 일주일만 빌려주셔야…’ 하는 말을 이어 듣게 되면 ‘어디 먼 나라로 자식을 인질로 납치하는 심정’을 느끼며 ‘거절의 이유’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사치(四痴)’라는 옛말을 들며 책은 빌려주는 것이 없어지는 것의 시초라고 말한다. 빌리는 것이 일치(一痴), 빌려주는 것이 이치, 빌리고 돌려주지 않는 것이 삼치, 빌렸다가 돌려주는 것이 사치다. 선생은 그래서 고급학생(아마도 높은 학년을 말하는 듯)이나 후배에 한해 책을 빌려주되 대출부에 기입하고 반환날짜를 다짐받은 뒤 빌려준다고 한다.

언젠가 최남선이 <재물보(才物譜)>를 베끼겠다면서 빌려달라는 것도 책 주인과 상의한 뒤 결정하겠다면서 거절한 적이 있다고 한다(물론 그 책은 선생의 것이 아니었다).

선생은 결론으로 ‘책을 위하면 책은 모여든다’ ‘책은 공부하는 주인을 찾아 모여든다’라는 미신적인 망상을 믿으며 ‘공부와 인연을 끊으면 책도 주인과 인연을 끊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책을 사랑하는 자는 책에 대해 무척 인색한 법이나 결코 오해할 것이 아니다.”(동아일보 1962년 4월30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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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의 최고의 다독가, 애서가였던 이덕무의 책 빌리기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자. <세정석담(歲精惜譚)>에서 이덕무는 이렇게 말한다.
 
“만권(萬卷)의 책을 쌓아두고도 빌려주지도 읽지도 햇볕에 쪼여 말리지도 않는 사람이 있다 하자. 빌려주지 않는 것은 어질지 못한 것이고, 읽지 않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이고, 햇볕에 쪼여 말리지 않는 것은 부지런하지 못한 것이다. 군자가 반드시 독서를 해야만 하는 법이니, 빌려서라도 읽는 것이다. 책을 묶어두고 읽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어떤가. 선비는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이고, 책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읽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에는 수많은 책을 쌓아두고도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남에게 빌려주지도 않는 법이다. 책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 빌려주는 것도 아는 법이다.
 
이렇듯 책 빌리기에 일가견(?)이 있는 이덕무였으니, 자연 자신에게 책을 빌려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숱하게 남기고 있다. 그는 이서구(李書九)에게 보내는 편지를 여러 통 남기고 있는데, 모두 책에 관련된 이야기다. 이덕무가 1741년생이고, 이서구가 1754년생이니 나이는 열세 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둘은 친구처럼 지냈다.
 
첫 번째 편지에서 이덕무는 이서구가 자신의 장서를 자필로 교정하고 평점해 달라고 부탁한 데 대해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기뻤다고 말한다. 이덕무는 18, 19세에 자신이 살던 집을 ‘구서재(九書齋)’라고 했는데, 구서란 독서·간서(看書)·장서(藏書)·초서(초書)·교서(校書)·평서(評書)·저서(著書)·차서(借書)·폭서(曝書) 등 아홉 가지를 가리키는 것이라 한다. 독서는 물론 책 읽기, 간서는 책 보기다. 책 보기는 내용을 읽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보는 것이다. 장서는 책을 소장하는 것, 초서는 책을 읽으면 내용을 뽑아 적는 것, 교서는 책을 교정하는 것, 평서는 책을 평하는 것, 저서는 책의 저술, 차서는 책 빌리기, 폭서는 책을 햇볕에 쬐는 것이다. 그런데 ‘구서(九書)’는 이서구의 이름 ‘서구(書九)’를 뒤집은 것이 아닌가. 이덕무는 10년 뒤 구서재가 이서구와 연결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한다. 이때 이덕무의 나이 28, 29세, 이서구는 15, 16세다. 참으로 조숙한 독서가들이다.
 
이서구의 부탁 편지를 받았을 때는 아마도 새해였던 모양이다. “또 새해가 되었으니 족하는 많은 기서(奇書)를 얻어 지혜와 식견이 날로 진보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한가롭고 병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창에 비치는 햇살이 늘 선명하고 밤에는 등불이 환하지요.” 좋은 책을 얻어 지혜와 지식이 날로 진보하기를 바란단다. 요즘은 찾아볼 수 없는 덕담이다! 훌륭하구나.
 

 


이어지는 두 번째 편지는 저 유명한 책을 팔아먹은 이야기다.

자신의 집에 돈이 나갈 만한 가장 괜찮은 물건은 <맹자> 7책인데,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돈 2백 푼에 팔아 밥을 해먹고 ‘희희낙락’ 유득공을 찾아가 자랑을 했더니, 유득공 역시 오랫동안 굶주린 끝에 <좌씨전>을 팔아 술을 사다가 둘이 마신 이야기를 한다. 맹자와 좌구명이 밥과 술을 사준 것이라면서 둘은 맹씨와 좌씨를 한없이 칭송했다. 유쾌한데, 어찌 좀 서글프게 유쾌하다.
 
이덕무는 다독하는 자신을 나무라기도 한다. “예전에 책을 빌려 내쳐 읽는 사람을 보고 나는 그가 너무 애를 쓴다고 비웃었는데, 이제 어느 결에 나도 그 사람을 닮아 눈은 어둡고 손은 굳은살이 박이게 되었습니다. 사람이란 정말 제 주제를 모르는 법이지요.” 남에게 책을 빌려 바지런히 읽는 사람을 비웃었는데, 자신 역시 어느 결에 책을 빌려 읽느라 눈은 어두워지고 책을 베끼느라 손에 굳은살이 박이게 되었단다. 이런 말을 하면서도 책을 빌리고 또 빌려준다.
 
“내 학자는 아니지만 늘 <근사록(近思錄)>을 애중하여 항상 몸 가까이 밤낮으로 서너 조목씩 보면서 몰래 자신을 반성하는 터라 잠시라도 손에서 떼어놓고 싶지 않소이다. 하지만 족하의 청을 어떻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9책을 삼가 보냅니다. 다만 이 책을 보내고 나면 내가 눈을 댈 책이 없으니, <원문류(元文類)> 아니면 <송시초(宋詩抄)> 둘 중에서 하나를 빌려주심이 어떨지요?
 


“<일지록(日知錄)>을 3년 동안 고심참담 애써 구하다가 이제야 비로소 어떤 이의 비장한 것을 읽어보았더니, 육예(六藝)의 글과 백왕(百王)의 제도와 당세의 일에 고증해 밝힌 것이 명확했습니다. 아, 고영인(顧寧人, 寧人은 顧炎武의 자)은 진정 옛날의 큰 선비라 할 만합니다. 돌아보건대, 지금 세상에 족하가 아니면 누가 이 책을 읽을 수 있겠습니까? 또 내가 아니면 누가 이 책을 초하겠습니까? 4책을 우선 보내니 보물처럼 보심이 어떨지요. 전에 보내준 작은 공책은 이미 다 썼습니다. 족하는 계속 공책을 보내어주셔서 나의 책을 초하는 일을 끝을 맺게 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이서구지만 이덕무는 이렇게 정중하다. 이것 외에도 빌려달라고 하는 책이 잔뜩 있다. 이서구의 집안은 워낙 명문이니 가난한 서파 이덕무와는 달리 책이 많았던 것이다. 이덕무는 이서구에게 책 빌리는 데 좀 넉넉해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옛날 송준길(宋浚吉)이 남에게 읽으라며 책을 빌려주고 돌려받았을 때 책에 보풀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곧 책을 읽은 흔적이 없으면, 다시 주면서 읽으라 했는데, 어떤 못된 젊은이가 책을 빌렸다가 돌려줄 때 혼이 날까 하여 책을 밟고 문질러 읽은 것처럼 꾸며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면서 자신은 그런 못된 젊은이가 아니니, 송준길을 본받아 자신에게 책 인심을 넉넉하게 쓸 것을 부탁하고 있다. 과연 이덕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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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이 책을 빌렸던 것을 말하다 보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대한 예절을 절로 생각한다.

책을 사랑하기로 조선 제일이었던 박학한 독서가 이덕무는 나름 책 빌리기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었다. 가난했기에 큰 장서가가 못 되었던 그는 책을 빌려보는 입장이었나 보다.

이덕무로부터 책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책이 많아도 애서인으로 치지 않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이덕무는 책을 어지간히 빌렸던 모양이다. 그가 쓴 <사소절(士小節)>은 18세기 후반 서울 사족들의 생활상 에티켓에 대한 저술인데, 당연히 책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대한 예절도 있다.

먼저 책을 빌리는 사람 쪽을 보자.

완성되지 않은 남의 책 원고를 건드려 그 차례를 바뀌게 해서는 안된다. 장정하지 않은 서화를 빌려달라고 해서도 안된다. 남의 완성되지 않은 원고를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장정이 되지 않은 상태의 서화를 함부로 빌려 달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남의 서적·시문(詩文)·서화는 일단 보고난 뒤에 빌려달라고 청해야 한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는데도 억지로 빼앗아 소매 속에 넣고 일어나서는 안된다.

남의 책이나 시문, 서화는 한 번 본 뒤 빌려줄 것을 청해야 한다. 곧 보지도 않고 빌려달라고 해서는 안된다. 주인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빌리고 싶더라도 억지로 빼앗아 가지고 오면 안될 일이다. 가까운 벗 사이에는 이런 무례가 일어나기 쉽다.

다음은 책을 빌리는 기한이다.

남의 장서를 빌리면 꼼꼼하게 읽고 베낀 뒤에 약속한 날짜 안에 돌려주어야 하고, 오래 지체하여 기한을 넘기거나 돌려달라고 채근하는 데도 돌려주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에게 재차 빌려주어 훼손하거나 잃어버린다면 결국 나의 행실에 오점을 남기는 것이 될 터이다.

그래, 책을 빌렸으면 약속한 날까지 돌려주어야 한다. 가슴에 찔리는 말이다. 도서관의 책도 빌렸다가 늦게 반납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결국 벌금까지 물고 만다.


돌려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땅히 다시 먼지를 떨고 차례대로 정리해서 보자기에 싸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옛날 책은 여러 권이다. 10권이 한 세트라면 1권부터 10권까지 정리해서 먼지를 떨고 보자기에 얌전히 써서 돌려보내야 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겠는가?

빌려온 책은 당연히 더럽혀서는 안될 것이다. 남의 글씨 병풍이나 그림이 있는 가리개 병풍을 빌리면 마땅히 보물처럼 여기며 완상해야 할 것이다. 창이나 벽을 가려 바람과 추위를 막아서는 안될 것이다. 또 보풀이 일고 주름이 지고, 침과 콧물 자국이 나도록 해를 넘겨 돌려주지 않아서는 안될 것이다.

빌려온 책에 오류가 있다고 하자. 책을 읽는 사람은 견딜 수가 없다. 고치고 싶다. 그럴 경우 책에다 교정을 해서는 안된다. 책 주인이 옛것을 사랑하여 내용을 중시하는 사람, 곧 학문이 있고 책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라면 교정을 해 주어야 한다. 어떻게 종이쪽에 별도로 써서 그 곁에 조심스럽게 붙인다. 함부로 책에다 써서 고쳐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 주인이 물건을 아끼기만 하고 학문이 없는 사람이라면 곤란해지지 않겠는가?

귀중한 책은 그냥 빌려 읽고 마는 것은 아니다. 책을 베낄 때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아야 한다. 해서(楷書)와 초서를 섞어 써서는 안될 것이다. 또는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다가 끝에 가서는 게을러져서 마음의 거친 것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마땅히 한 부의 책을 완성해야만 할 것이다. 책을 빌리는 중요한 이유는 베끼는 것이다. 베낄 때는 해서로 단정하게 베껴야 하고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베껴서 완성해야 할 것이다.

빌려주는 사람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덕무는 “남에게 책을 빌려주어 뜻하는 사업을 성장케 하는 것은 남에게 재물을 주어 그 곤궁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이덕무는 책을 많이 빌려본 사람이라 그런지 책을 빌려주어 한 사람의 지적 성장을 돕는 것은 재물을 주어 곤궁을 구제하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그래서 빌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빌려주는 것이 책 가진 자의 도리가 된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이나 책을 빌리려는 사람이 있으면 인색하게 굴지 말고 즉시 빌려줄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빌릴 때, 그 사람이 혹 빌려주지 않으면 화를 낼 필요가 없다. 뒷날 그 사람이 또 빌리려고 올 경우 전에 나에게 빌려주지 않았다며 앙갚음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만약 부형이 빌려주지 않으려 한다면, 처음에는 부형에게 잘 말씀 드리고, 그래도 끝내 들어주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부형이 빌려주지 않으려 하신다’고 말할 필요는 없다.

자신의 책을 빌리려 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낌없이 빌려주라는 말이다. 한편 내가 빌려준 어떤 사람에게서 책을 빌릴 때 그 사람이 빌려주지 않는다 해서 화를 내어서는 안된다. 그 사람이 뒷날 나에게 책을 빌리러 왔을 때 복수심에 꽁하여 빌려주지 않아서는 또 안된다.

책이 흔해진 요즘, 어지간한 책은 구할 수 있고, 또 도서관에서도 빌려볼 수 있다. 하지만 이덕무의 에티켓은 지금도 유효하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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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야기를 하고 보니 책 빌리는 이야기(거꾸로 책 빌려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 혹은 연구하는 사람이 어떤 책을 필요로 하는데, 또 그 책이 누구에게 있는지 번연히 아는데, 책을 빌려 볼 수 없다고 하자. 역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이 어떤 공부를 하는 어느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빌려주어야 한다. 그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도리다.

다산 정약용 이야기를 해보자. 다산은 알다시피 조선 최고의 학자다. 그의 학문은 실로 광범위해 경학, 문학, 사학, 경제학, 행정학, 음악학, 지리학, 언어학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힘을 쏟았던 분야는 경학(經學)이었다. 경학이란 경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하려는 학문이다. 주자학의 본령도 경학이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대한 기존의 모든 주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주해를 통해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고, 그 위에 자신의 장대한 철학을 축조했다. 주자 이후 사서의 해석은 그의 <사서집주>를 따랐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은 주자와 그 학파의 주해를 선택한 국정 표준 주해서였다. 여기서 과거 문제가 출제되었기에 이 두 주해서의 중요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명은 물론 조선도 대전본(大全本)을 표준 주해서로 삼았다. 그런데 대전본은 워낙 졸속으로 만들어졌기에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드디어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가 <일지록(日知錄)>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이란 논문에서 대전본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조선이 그동안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텍스트의 문제가 노출된 것이다.

한편 주자의 주해도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모기령(毛奇齡, 1623~1718)이 경전과 역사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주자의 경전 주해가 오류임을 주장했다. 모기령은 주자에게 심사가 꼬였던지 주자의 학설이라면 괜찮은 것도 증거를 찾아 억지로 부정하는 짓을 서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모기령의 경학이 18세기 후반 조선 학계에 수입되자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모기령과 아울러 경학에 일대 충격을 던진 사람은 염약거(1636~1704)였다. 유교 정치학의 오리지널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서경(書經)>(다른 이름은 <尙書>)은 원래 진시황의 분서(焚書) 때 사라졌다가 뒤에 다시 출현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텍스트가 등장했는데, 그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어쨌거나 동진(東晉) 이후 <고문상서> 25편과 <금문상서> 33편을 합친 것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서경>이다. 이후 사람들은 이 텍스트를 교과서 삼아 읽었다. 그런데 ‘고문’이라고 한 것이 문장이 읽기 쉽고, 금문이라 한 것이 읽기 어려운 등의 문제가 있었다. 학자들은 ‘고문’ 쪽이 수상했지만, 가짜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염약거의 업적은 엄밀한 문헌적 증거를 들어 ‘고문’ 쪽이 가짜라고 밝힌 데 있다. 너무나 완벽한 증거 앞에 더 이상의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고문’ 쪽의 <대우모(大禹謨)> 역시 가짜였고 <대우모>에 근거해 성립한 주자학 역시 치명상을 입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사사건건 주자의 학설이라면 반대하던 모기령이 이번에는 염약거에 반대해 <고문상서원사>를 써서 <고문상서>가 진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 학계에서는 <고문상서>의 진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염약거와 모기령이 나와 <서경>의 절반이 가짜니 아니니, 주자가 옳니 그르니 하고 논란이 뜨거웠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이 전해진 것은 대체로 1760년대 말부터다. 18세기 후반 경학 쪽에 전에 없던 논의들이 풍성해진 것은 대륙의 이런 학문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776년 즉위한 정조가 경사강의(經史講義)를 열고 경전과 역사에 대해 토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모기령과 고염무의 학설이 검토되었다. <고문상서>의 진위도 다루어졌다. 다산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신유사옥 때 걸려든 다산은 강진 귀양지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의 거창한 경학 방면의 업적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 중 <매씨서평(梅氏書評)>이란 책이 있었다. <서경>의 절반인 <고문상서>가 동진(東晉)의 매색이 날조한 가짜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문제는 100년도 전에 염약거가 <상서고문소증>에서 이미 밝힌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산은 <상서고문소증>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다산만이 아니라 대체로 18세기 말까지 조선 학계는 모기령은 알아도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모기령의 <고문상서원사>가 <상서고문소증>을 의식해 저술되었는지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실 18세기 조선 학계에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고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1818년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매씨서평>의 원고를 홍현주(洪顯周)에게 보냈다. 홍현주는 정조의 사위고, 그의 형 홍석주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집안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고,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매씨서평>의 원고를 본 홍석주는 홍현주에게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을 다산에게 보내라고 한다. <매씨서평>의 부족처를 보완하라는 의미였다. 책을 받아든 다산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이내 <매씨서평>을 고쳐나갔다. 홍석주는 노론이고 다산은 남인이었다. 평소 서로 오가는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홍석주는 다산이 필요한 책을 보냈다. 다산은 책의 말미에 홍석주 형제가 책을 빌려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들 형제의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매씨서평>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쪼록 책을 빌려줍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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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야기를 좀 더 하자. 개인이 아무리 책을 많이 가졌다 해도 국가나 공공기관만큼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조선 전기의 어지간한 문인들도 상당량의 책을 가지고 있었겠지만, 장서가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홍귀달(洪貴達, 1438~1504)의 경우도 자신은 원래 책이 없었는데, 외직을 돌다 오면 왕이 하사한 서적이 많아서 꽤나 책을 모으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경우 아무리 모은다 해도 수백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앞서 소개했던 이문건의 <묵재일기>와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읽어보면 그들이 갖고 있었던 장서량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유희춘의 경우는 의식적으로 책을 모아 수천권을 소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서가라고 부를 만하다. 하지만 이문건의 경우는 장서가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하다. 18세기 이후에는 상당한 규모의 장서를 갖춘 장서가가 나오지만, 그 역시 국가가 소장한 서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어쨌거나 가장 큰 규모는 역시 국가의 도서관이다. 내가 흥미 있어 하는 고서로 말하자면 국립중앙도서관,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학교 규장각 등이 그런 곳이다. 서울의 모모 사립대학은 구입 혹은 기증을 통해 방대한 규모의 고서를 소장하고 있다. 이런 도서관에서는 두꺼운 고서목록을 간행하고 서문에서 이 자료를 널리 이용해 좋은 연구업적이 나오기를 기대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자료를 열심히 모으고 목록집을 내고 열심히 이용하라고 선전하니, 정말 훌륭한 일이라 하겠다. 하지만 연구자들이 그 자료에 손쉽게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모든 도서관은 고서를 별도로 관리한다. 앞에서 모 대학의 <열하일기>에 대해 말했지만, 좀 귀중한 고서는 보기가 상당히 어렵다. 흔한 책은 당연히 열람이 쉽다. 또 그런 책은 대개 영인본이 있어서 굳이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영인본이 없는 책은 어떻게 할 것인가. 과거 서울대학교 규장각에서는 문집 복사를 요청하는 사람에게 그 문집을 두 벌 복사할 비용을 내게 했다. 한 벌은 복사해서 주고, 다른 한 벌은 가지고 있다가 혹 다른 사람이 요청하면 그 복사본을 복사해 주기 위해서였다. 이용자로서는 꽤나 부담이 되는 것이었지만, 원래 도서관의 예산이 적고, 또 고서를 보호하기 위한 조처이니, 좀 비싼 값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따랐다. 게다가 다른 사람이 이미 복사 비용을 댄 복사본은 내가 다른 비용을 들이지 않고 복사할 수 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이런 규칙을 둔 규장각은 정말이지 양반이었다. 다른 도서관에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 연구자가 보고자 하는 책 중에서 특정 도서관만 소장한 유일본이거나 귀중본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고서목록의 서문에 우리 도서관이 많은 귀중본을 가지고 있다고 하거나 목록에 ‘귀’자가 많이 찍혀 있다면 문제가 사뭇 심각해진다. 그 귀중한 책은 자료적 가치가 아주 높다는 의미고, 그 귀중본을 연구자들은 선용해서 좋은 연구결과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귀중본을 선정하는 진짜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사실 귀중본의 선정은 연구자와 격리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진다. 보여주기 싫어서 귀중본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말 귀중본이라면 그것을 열람할 절차가 따로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열람자의 신원을 보다 확실하게 밝힌다든지, 약간의 비용을 지불하게 한다든지, 원본은 보여줄 수 없으니 마이크로필름을 보라든지 아니면 디지털화된 이미지 자료를 보라든지, 그것도 아니면 복사본을 보라든지 말이다. 이렇게 무슨 납득할 만한 절차가 있어야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런 절차는 아예 마련되어 있지 않다. 무조건 안된단다. 정말이지 귀중본을 한 번 보려면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과정을 겪는다. 아예 보여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귀중본이라면 문제는 다르다. 그것은 개인의 사적 소유물이니까 본인이 보여주지 않겠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굉장히 섭섭하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귀중본은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공공을 위한 것이다. 내가 겪은 일을 말하자면 20년 전에 어느 대학 도서관에 귀중본(아니 한 페이지짜리 귀중문서)이 있어 한 번 보고자 했더니 당연히 안된단다. 나는 그 한 장짜리 문서가 왜 귀중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문서에 대한 가치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을 꼽자면 나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워낙 귀중한 자료라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다. 어떻게 그것이 귀중본이 되었는지도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요컨대 도서관 사정이 이렇다. 도서목록에 실린 책이나 문서 옆에 귀중본이란 명사가 붙어 있다면, 그건 대체로 학계의 연구자와 영원히 하직한다는 표시라고 이해하는 편이 심신 수양에 좋다.

더욱 한심한 것은 그림 쪽이다. 미술사 방면의 학회에 참석했더니 발표자가 화면에 그림을 비추고 설명을 한다. 흥미진진하다. 한데, 어떤 그림은 참으로 보기 민망할 정도로 화면 상태가 안 좋다. 이게 원그림을 제대로 찍은 것이 아니고 어느 책(혹은 논문)에 실린 것을 찍은 것이다. 미술사, 특히 회화사 연구는 그림이 생명이다. 그림은 세부까지, 미세한 색채까지 엄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원화를 보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어떤가? 그림을 소장하고 있는 어디서도 원화가 아닐지라도 원화에 가까운 믿을 만한 도판조차 제공하지 않는다. 어느 미술관은 원화를 찍자면 엄청난 돈을 요구하기도 한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디지털이란 새로운 기술이 있으니, 각 도서관의 귀중본을 모두 디지털화해 사이버공간에 한국귀중본디지털도서관이란 것을 하나 만들어 누구나 공짜로 아니면 염가로 이용할 수 있게 하면 어떨까 싶다. 특정한 건물도 필요 없고, 돈도 많이 들지 않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도 디지털화해서 사이버공간에 내놓으니 좀 좋은가 말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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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경험에 입각해 보다 정확하게 말하라면, 이른바 한국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라면, 도서관과 얽힌 ‘불유쾌한’ 추억 한둘은 갖고 있을 것이다. 연구자들 사이에는 종종 입에 올리는 추억들이다. 먼저 저 유명한 <열하일기>로 물꼬를 터보자.

몇 해 전 <열하일기>를 깔끔하게 번역한 모 대학 교수님의 이야기다. 이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 역시 <열하일기>다. 논문에는 <열하일기>의 여러 이본을 조사한 부분이 있었다. <열하일기>는 18세기 말부터 엄청나게 읽힌 책이지만, 인쇄된 적이 없다. 모두 필사본으로만 전한다. 필사 과정에는 필사자의 실수로 인해 수많은 변개(變改)가 일어난다. 또 원작의 특정한 부분이 필사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여 의도적으로 개작하는 경우도 있다. 이때는 전혀 다른 책이 되어 버리는 것인데 <열하일기>의 한 이본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문제는 박지원이 쓴 원본이 남아 있지 않다는 데 있다. 그래서 남아 있는 여러 이본을 대조해 가며 원본을 짐작하는 작업이 퍽 중요한 일이 된다.

국내의 어떤 대학은 <열하일기>의 중요한 이본을 많이 가지고 있다. 이 교수님은 당연히 그 도서관에 가서 복사를 신청했다. 하지만 복사는 불허였다. 앉아서 베껴 가란다. <열하일기>가 그 도서관에만 있는 책이고, 또 세상에 알려진 적이 없는 책이라면 베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본 연구가 아닌가? 아무리 사정을 이야기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앉아서 베끼는 수밖에. 보다 못한 사무원이 그 담당자가 없을 때 조금씩 복사를 하게 해주었다. 그렇게 해서 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어떤 유수한 대학 도서관에 중요한 필사본이 있다. 이 도서관 역시 귀중한 책이 많다고 자랑하는 곳이다. 그 책의 전편은 이미 영인본이 나와 있어 나 역시 충분히 검토한 바 있다. 하지만 후편에 해당하는 부분은 출간된다는 광고만 있을 뿐 출간은 되지 않고 있었다. 그 대학 도서관에서 어떻게 복사를 해볼까 하고 친구를 통해 가능성을 타진해 보았더니 안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 경우 늘 그렇듯 즉각 체념하는 것이 인격을 수양하는 지름길이다. 그런데 얼마 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인격 수양을 포기했다. 그 친구가 우연히 도서관에 갔더니, 부전지(附箋紙)가 많이 붙어 있어 복사가 안된다던 그 책이 복사기 위에서 한참 열을 올리고 있더라는 것이다. 누구에게 복사해 주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어떤 서양인 학자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하랴!


이런 일은 거의 모든 도서관에서 반복된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할 때다. 서울에서 가장 큰 도서관에 학계에는 알려지지 않은 자료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러 차례 찾아가 그 책을 빌려 검토하고 복사를 했다. 하루는 책을 신청했더니 사서가 책을 내어주며 작은 소리로 “읽을 줄이나 아나?”라고 하는 것이었다. 중얼거리는 듯한 작은 소리였지만 내 귀에 똑똑히 들렸다. 아마도 새파랗게 젊은 친구가 찾아와 자꾸 고서를 빌려 달라고 하니, 귀찮기 짝이 없었던 모양이다. 서고는 쇠그물 건너편에 있었기에 나는 그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모른다. 어쨌거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고 한편으로는 증오감이 불쑥 치솟았다. 하지만 나는 갑이 아니라 을이 아닌가. 다시 인격을 수양하는 수밖에.

그로부터 얼마 뒤 다시 도서관을 찾아 그 책을 빌리려 했다. 지난번 복사할 때 채 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 얼굴 모르는 사서는 그런 책은 없다고 했다. 목록에는 있는데요, 그리고 지난번에 빌렸는데요? 아, 없다는데 왜 그래요! 그 책은 끝내 빌릴 수 없었다. 그 뒤 (지금) 서울의 큰 대학 교수가 된 친구 아무개 역시 도서관에 가서 그 책을 빌리려 했지만 책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나는 왜 책이 갑자기 없어졌는지 지금도 알지 못한다.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나면 사정이 좀 나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라는 것이 있다. 경술국치 이후 모든 신문이 폐간되고 거의 유일하게 ‘매일신보’만 남았기에 총독부 기관지지만 일제강점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신문은 아무나 볼 수 없는 것이다. 워낙 오래된 것이기에 만지면 부스러진다.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마이크로필름으로 볼 수 있었다. 한데 1980년대에 마이크로필름은 사진 인화지로만 출력할 수 있었고, 그 값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는데, 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면 감히 출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 신문이 영인본이 되어 나온 것이다. 하지만 너무나 비싸 개인이 소장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부산대학교에 부임한 이후 학교 도서관에 가서 즉시 ‘매일신보’ 영인본이 있는지 확인하고 대출을 신청했더니 안됐다. 담당사서에게 물었더니 이게 정기간행물이라서 대출이 안된단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신문은 1세기 전의 것이고 이미 영인본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사료가 되었다는 것인데, 무슨 정기간행물이냐? 사리를 들어 따졌지만, 그 어린 사서는 그런 말씀일랑 도서관장님한테 가서 하세요! 그것으로 끝이다. 도서관장이라니! 도서관장에게 말을 하면 물론 빌려줄 것이다. 하지만 이게 무슨 꼴인가? 나는 지인을 통해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서 ‘매일신보’를 빌려 연구에 참고했다.

도서관은 책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어서 존재하는 곳이다. 이용하는 사람이 없다면, 도서관은 필요 없는 곳이 될 것이다. 귀중한 책의 복사를 허락하지 않는 원칙은 이해가 간다. 그럴 수 있다. 귀중한 도서를 마구 복사하다가는 원본이 손상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 번 복사한다고 해서 원본이 아주 못 쓰게 되지는 않는다. 스캔을 한 디지털 자료든, 사진이든, 아니면 종이로 복사한 것이든, 복제본을 만들어두면 된다. 모든 자료가 디지털화되는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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