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관한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보면, 늘 떠오르는 곳이 있다. 도둑을 막기 위한 쇠꼬챙이 창살 너머 있었던 초등학교 도서관이다. 작기는 했지만, 창살 건너로 보이는 서가에는 꼬맹이의 눈에는 평생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정도의 책이 꽂혀 있었다. 짙푸른 색의 커튼 틈새로 들여다보면, 도서관 아니 도서실 안은 차분하다 못해 무거운 침묵만이 있었다. 나는 거기 한구석에 앉아 마냥 책을 읽고 싶었다. 문자의 배열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이야기와 이미지의 세계에 빠져드는 그 순간 결코 행복하지 않던 나날의 삶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의 기억에 그곳은 졸업할 때까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 어떻게 열린 적이 없었겠는가마는, 그것은 책을 읽는 학생들을 위해서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해는 된다. 한 학년이 14개 반이었고, 한 반마다 80명 가까운 학생이 있었다. 6학년 전체를 계산하면, 모두 7000명이 넘었다. 1·2학년은 2부제 수업을 하였으니, 실제로는 7000명을 훨씬 넘었을 것이다. 점심시간 직후 운동장은 아이들로 가득 차서 10미터를 곧장 뛸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그 작은 도서실을 개방했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 도서실은 열리지 않았기에 지금도 아쉽고 그리운 공간으로 남아 있다(졸업한 뒤 한참 지나 지나는 길에 학교를 들렀더니 그 넓던 운동장이 손바닥만 하게 보였다. 어릴 적이라 운동장도 엄청나게 크게 느껴졌던 것이다).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중학교 때부터였다. 학교는 신축 교사를 짓고는 일본식 기와를 얹은 옛날 교사(校舍)를 도서관으로 꾸며 놓았다. 서고라고 해 봐야 큰 교실 두 칸 정도였지만 그곳은 나에게 책의 바다였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소소한 일을 돕는 학생 몇을 구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서를 도와 책 정리도 하고, 청소도 하는 그런 일이었다. 내 오른팔은 나의 생각을 기다리지도 않고 올라갔다. 다음날 나는 도서부원으로서 서고에 드나들 수 있는 특권을 얻었다.

도서관 입구에는 서고와 별도로 옛날 잡지며 오래된 책을 넣어두는 창고가 있었는데 거기도 들어갈 수 있었다. 책장으로 출입구를 막아놓았지만, 어떻게 몸을 옴츠려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고, 일단 들어가기만 하면, 온전한 나의 낙원이 펼쳐졌다. ‘학원’ 잡지의 과월호도 거기서 원 없이 볼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도 작은 도서관은 있었다. 하지만 대학입시의 중압감으로 인해 도서관에 접근하기 쉽지 않았다. 학교나 교사들도 도서관의 책을 읽으라고 적극 권유하지 않았다. 학교 한쪽의 후미진 곳에 있던 도서관 책을 빌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곳은 다시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잃어버린 낙원이 되고 말았다.

대학에 들어가서 본 도서관이 참으로 거창했던 것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지금 생각해 보면 좀 우스운 수준이지만 말이다). 더더욱 특별한 경험도 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은 어떤 과정을 통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몇몇 문중으로부터 고서를 기증받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 고서는 오랫동안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도서관에서 고서를 정리할 학생을 구한다는 소리를 듣고 즉시 자원하였다. 물론 무보수였다. 도서관 서고의 꼭대기 층에 갔더니, 바닥에 고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난방이 되지 않는 곳이라 겨울이면 손이 곱아 글을 쓰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고서를 정리하고 카드를 만들면서 나는 옛 전적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이 경험은 내가 한문학 연구자가 되는 데 말할 수 없이 귀중한 밑천이 되었다. 도서관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박사과정을 다닐 때다. 어렵게 시간을 쪼개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고서를 보러 다녔다. 아침에 내가 국립중앙도서관으로 가면 아내는 내가 써준 고서 목록을 가지고 서울대 규장각으로 갔다. 하루에 두 곳을 내가 다 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고서의 영인본도 흔하고 인터넷으로도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고서 보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도서관을 직접 찾아다니며 어렵게 복사해내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구한 자료로 논문을 발표하고 책을 썼다. 도서관의 그 책들로 나는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다. 부족한 삶이지만, 이 삶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돌아보면 도서관은 언제나 선망의 공간이었다. 평생 도서관처럼 책을 많이 쌓아놓고 필요할 때면 언제나 꺼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하지만 서생의 살림에 책값이 넉넉할 리가 없었다. 연구에 필요한 책만 주로 조금씩 구입하는 정도고, 전공을 벗어난 책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았다. 대학에 자리를 잡고부터는 당장 연구에 필요하지 않은 책도, 워낙 유명한 책이라서, 이름은 알았는데 막 번역이 되어서, 내가 사지 않으면 저자와 역자, 출판사에 미안할 것 같아서, 혹은 장정이 워낙 예쁘고 특이해서, 사들이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했다. 물론 그 본질은 그냥 책 욕심일 뿐이다. 아마도 어릴 적 책에 대한 결핍감, 도서관에 대한 환상이 그 욕심의 뿌리일 것이다.

집 가까이에 작은 구립도서관이 생겼다. 건물이 무척 예뻐 호감이 간다. 옆에는 맑은 개울이 흐르고, 개울을 따라 산책로가 나 있다. 약수터에 갈 때 그곳을 지난다. 그 도서관을 보며 정년 이후를 꿈꾼다. 그래, 정년을 하면 저기서 시간을 보내야지. 약수터에 갔다 온 뒤 아침을 먹고 저곳으로 출근해야지. 부러워하기만 하고 읽지 못했던 책들, 이름만 듣고 들추어보지도 못했던 책들, 술렁술렁 읽어 미안했던 책들을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보리라. <논어>와 <좌전>을, 두보의 시를, 플라톤의 <국가>와 마르크스의 <자본>을, <성서>와 <코란>을 읽어보리라. 다시 읽기도 하고, 새로 읽기도 하고, 천천히 읽기도 하고, 입으로 외며 읽기도 할 것이다. 읽다가 존다고 나무랄 사람도 없고, 당장 갚아야 할 글빚도 없으니, 시간은 온전히 나의 편일 것이다. 초등학교 때 그토록 앉아 보고 싶었던 그 작은 도서관의 한구석에 앉아서 나는 비로소 연구를 위한, 원고를 쓰기 위한 독서가 아닌, ‘무책임한 독서의 자유’를 한없이 누려 볼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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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헌책을 사면 그 안에 별것이 다 나온다. 책장과 책장 사이는 무언가 얇은 것을 숨기기 좋은 장소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오래된 엽서를 본 적도 있고, 우표를 본 적도 있다. 꽃잎이나 나무 잎사귀도 흔하다. 여학생들이 그런 것들을 책갈피 사이에 넣어 두었다가 편지를 보낼 때 붙여 보내곤 했는데,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뒷날 헌책을 산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해운대와 가까운 일광 쪽으로 갔다가 고물가게에서 책을 몇 권 샀는데, 그 책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우편저금통장’이란 것이 나왔다. ‘東萊郡機張面’ ‘大日本婦人會 機張面支部 貯金組合’이란 푸른 도장이 찍혀 있고, 안에는 언제 돈을 얼마를 저축했는지 적혀 있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한편 재미있는 것이라 싶어 서가에 얹어 두었다.

옛날 책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어느 대학에 계시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안에서 희한한 것을 보았노라고 하는 것이었다. 무슨 고서냐고? 흔하디흔한 <논어> <맹자> <중용> <대학> 이런 것이다. 집에 책을 가지고 와서 들추다 보니, 책갈피 안에 무언가가 있다. 고서는 인쇄한 종이를 접어서 책으로 맨다. 그러니 접힌 종이 안에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 그 무언가 끄집어내었더니, 좀 이상한 그림이다. 그림이라고? 무슨 그림?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아서는 곤란한 그런 그림이다. 이쯤 말해도 모르시겠는가? 춘화, 다른 말로 포르노그래피다. 물론 빼어난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볼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은 거룩한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다가 좀 지겨워지면 춘화를 꺼내서 감상했던 것인데, 그것을 넣어둔 것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젊은 아들은 과거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공부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지겨운가. 하지만 엄한 아버지의 눈초리에 목이 늘 당긴다. 공자왈맹자왈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책갈피에 넣어놓은 춘화를 꺼내보며 야릇한 상상에 빠진다. 아마도 이런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그런데 일은 늘 공교롭게 일어나기 마련이다. 실로 오랜만에 춘화를 꺼냈는데, 그때 마침 어험, 어험, 아무개 있느냐 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문밖에 들린다. 후다닥 춘화를 책 속으로 집어넣고 ‘예’ 하고 답한다. 어디로 심부름을 갔다 오라는 하명이시다.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 그 책 속 어디에 춘화를 넣어두었는지 까마득히 잊고 만다. 그게 백수십 년을 뛰어넘어 어느 고서점에 출현했던 것이다.


말이 옆으로 빠지지만 불쑥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학생 때 친구들 중 좀 올된 녀석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이상한 사진을 가지고 왔고 쉬는 시간 교실 한구석에서 뭉쳐 그것을 보느라 선생님이 오신 줄도 모르고 있다가 결국 사진을 빼앗기고 사진을 가져온 녀석은 교무실로 불려가 출석부로 머리를 통타(痛打)당하기도 하였다. 아마 요즘 이런 책을 보는 학생은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 그런 희한한 것들이 지천이니 말이다.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란 책을 보면 책갈피 속의 물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이 책은 규장각 서리를 지낸 유재건(劉在建)이란 인물이 편집한 책인데, 양반이 아닌 부류들(주로 중인 서리)의 전기를 모은 것이다. 조선후기에 역관·의관 등 기술직중인과 서울 각 관청의 서리들이 자의식을 가지고 문예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는데, 대개 그런 인물을 중심으로 비양반층의 전기, 일화를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유재건은 이 책에 자신이 쓴 <겸산필기(兼山筆記)>를 잔뜩 인용해 두었다. 그중 홍윤수(洪胤琇)란 인물에 대해 짤막하게 쓰고 있다. 홍윤수는 가난한 독서가다. 양반이 아니니 과거에 응시할 일이 없다. 하지만 독서인이다. 그가 할 일은 필사(筆肆)·책시(冊市)를 오가는 것으로 생계를 꾸리는 것이었다. 무슨 붓가게나 서점을 냈다는 것은 아니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 주고 구문을 받는 거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속활자의 나라 조선에는 희한하게도 책을 만들어 파는 출판사란 것이 아예 없었고, 책을 파는 서점이란 것이 19세기나 되어서야 출현하였다. 아마 위의 책시란 것 역시 19세기의 것일 터이다. 사정이 이랬으니 책을 사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이고 팔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자 사이에서 중개를 하는 사람을 책쾌라고 한다. 책거간이란 뜻이다.

홍윤수가 하루는 자기 친구가 팔아달라고 내놓은 경서 몇 함을 구매해 주는 단골 책가게에 가져다주기 전에 훑어보는데 그 안에서 금·은과 대모갑(玳瑁甲), 곧 바다거북의 등딱지로 장식한 칼 한 자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제법 돈이 될 만한 것이었다. 처자식들이 늘 굶주리는 판이었다. 자신이 그 칼을 가진다 해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갈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즉시 친구를 찾아 칼을 돌려주었다. 이게 제법 의리 있는 일로 평가를 받아 기록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 비싼 칼까지 책 속에 넣고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존경했던 어느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서재의 책을 정리했는데, 그 책 중 하나가 희한한 것이었다. 책 안에 편지봉투가 하나 나왔는데, 현금 약간과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를 꼼꼼하게 적은 종이쪽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인터넷뱅킹이란 것도 없었고 현금카드도 없었다. 월급을 종이봉투에 현금으로 넣어줄 때였다.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었지만 어쩌다 생기는 현금을 한곳에 따로 두고 사모님 몰래 비자금을 관리했던 것이다. 그 점잖으신 분이 서재에서 사모님 보지 않게 봉투에 현금을 넣고 빼는 광경을 생각해 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하하!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십 년 전쯤 어떤 논문집에 현금을 약간 넣어두고 뒤에 찾으니 씻은 듯이 없다. 착각을 했나 싶어 가지고 있는 논문집을 죄다 꺼내놓고 샅샅이 뒤졌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논문집들이 자꾸 불어나 일괄하여 버렸는데, 아마도 그 논문집에서 현금을 약간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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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판되거나 서점서 팔지 않는 책
빌려 보고서도 꼭 갖고 싶은 책
어렵사리 발견해 주문 넣고 나면
흡사 초등시절 소풍 기다리는 설렘


앞서 보수동 헌책방 골목 이야기를 했는데 이곳을 드나든 것은, 대학 다닐 때부터다. 나이가 꽤나 든 분이 하는 골목 초입의 작은 가게에는 약간의 한장본(韓裝本) 고서, 일제강점기 세창서관 등에서 나온 연활자본 책, 한의서 등을 팔고 있었다. 이 가게에서 지금 연구실 한 귀퉁이에 있는(거의 한 번도 보지 않은), <통감절요> 언해본, 사서(四書) 언해본을 구입했다. 서울로 가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지금 있는 대학에 부임한 뒤 다시 책방 골목을 찾았을 때 그 영감님은 가게에 없었다. 아마도 돌아가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 가게도 지금은 예전에 팔던 책을 팔지 않는다. 보수동 책방 골목에서 고서라고 할 만한 책을 파는 곳은 단 한 곳만 남았을 뿐이다.

헌책방에 자주 들르고 거기에선 무언지는 모르지만 어떤 편안함도 느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새 책을 파는 보통의 서점이 싫은 것은 아니다. 서울 살 때 광화문의 교보문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찾는 곳이었다. 책도 사고, 아내와 두 아이와 함께 아이스크림도 사먹고 하면서 주말을 보내기도 했던 것이다. 부산에도 세계 제일이라고 선전하는 백화점 안에 교보문고가 있어 종종 들러 책을 고른다. 다만 헌책방에 들렀을 때처럼 편안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책과 서점이라면 거의 무조건적인 호감을 느끼지만, 이상하게도 인터넷 서점에 대해서는 별로다.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구매한 경우는 세 번 정도다. 이태준이 책이란 글자만은 ‘책’이 아니라, ‘冊’으로 쓰고 싶다고 했던가? 인터넷 서점에서는 책을 많이 구입하면 할인폭도 크다고 선전하고 있지만, 그것에 마음이 당기지는 않는다. 아마 나도 그런 심정이어서 책은 내가 직접 보고 골라야 한다는 낡은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서(新書)의 경우, 책을 펼쳐 목차를 보고 전체를 거칠게 훑어본 뒤 내가 원하는 내용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가, 문장이 얼마나 치밀한가 등을 살펴본다. 고전급에 해당하는, 너무나 잘 알려진 책의 번역본이라면, 뒤에 충실한 해제와 주해가 있는가 등을 본다. 본문은 얼마나 잘 짜였는가, 읽기 편한가, 도판은 정교한가, 적절한 위치에 있는가, 종이는 어떤가 등을 살핀다. 잉크 냄새도 맡아본다. 그렇게 해서 마음에 드는 책이면 정말 좋은 책이다.

인터넷 서점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내 손에 떨어지기 전에는 그것이 과연 내가 바라는 책인지 아닌지 알아낼 도리가 없다. 한국에는 믿을 만한 서평 잡지가 없기 때문에 신문의 신간 소개 외에는 달리 책에 관한 충실한 정보를 얻을 곳도 마땅치 않다. 또 그 신문 서평에는 부실한 것이 허다하다. 인터넷 서점은 책 표지의 사진을 싣고 있고, 목차, 본문의 몇 쪽을 맛보기 삼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것이 현장에서 직접 책을 보고 뒤적이면서 판단하는 것과 같을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인터넷 서점이 생긴 이후로도 나는 학교 앞의 서점에서 책을 사고, 또 주문한다. 주문한 책이 오면 오가는 길에 들러서 확인한다. 책이 만약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하는 동안 서점 주인과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또 서가에 꽂힌 책을 찬찬히 훑어볼 수도 있다. 오랫동안 얼굴이 익은 주인에게는 책과 관련해 이런저런 부탁을 할 수도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나는 그 친절한 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대형 인터넷 서점이 아니라 인터넷 헌책방이다. 요즘은 헌책방도 발전을 거듭해 충실한 목록을 갖추고 있고 인터넷에 그 목록을 제공한다. 또 여러 인터넷 헌책방을 동시에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도 있어 개별 사이트를 방문할 필요도 없다. 여간 편리한 게 아니다. 물론 오프라인 서점을 들르는 것처럼 인터넷 헌책방을 들르는 것은 아니다. 신간이지만 절판된 책이나 이미 나온 지 오래라 오프라인 서점에서 아예 팔지 않는 경우다. 이건 이미 아는 책이라는 말이다.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 있지만, 빌려 보고서도 꼭 가지고 싶은 책이 있다.

예컨대 E H 카의 <바쿠닌 평전>(박순식 옮김, 종로서적)이 그런 경우다. 도서관에서 빌려서 읽은 뒤 한 권을 구입하려 했지만, 절판된 지 오래다. 더욱이 이 책을 낸 종로서적 역시 없어진 지 한참이다. 인터넷 헌책방을 뒤졌으나 없다. 약 1년 동안 이따금 확인해 보니, 어느 날 한 권이 나왔다. 즉시 주문해 손에 넣은 것은 물론이다. 한데 이 책은 활자가 너무 작아서 불만이었는데, 연전에 <미하일 바쿠닌>이란 제목으로 새 번역이 나왔다(이태규 옮김, 이매진, 2012). 활자도 크고 편집도 좋아 읽기가 훨씬 편하다.

이렇게 해서 구한 책이 더러 있다. 약간 오래된 아나키즘에 관한 <탈환> 같은 책도 모두 인터넷 헌책방에서 구입한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 전공과 관련된 책이다. 내가 갖고 있는 장지연의 문집 <위암문고>(국사편찬위원회, 1956)의 복사본은 연보 부분의 몇 페이지가 빠져 있다. 부산대학교 도서관에 있는 원본 자체가 파본인 것이다. 역시 인터넷 헌책방에서 깨끗한 책 한 권을 구할 수 있었다. 이야기가 약간 옆으로 새지만 <위암문고>는 엄청난 문제를 안고 있는 책이다.

원래 <위암문고>의 대본이 된 원본 <위암문고>의 연보에는 장지연의 친일 사실이 명백히 실려 있건만, 그 연보를 싣지 않고 다른 엉뚱한 연보를 실었던 것이다. 이렇게 문헌을 변개한 사람이 누구인지, 그 의도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위암장지연선생기념사업회에서 2004년 출간한 <위암 장지연 서간집>(3책)은 장지연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자료인데, 일반 판매를 하지 않아 구할 수 없었다. 인터넷 헌책방에는 혹시 있을까 하여 검색해 보았더니, 파는 곳이 있다. 아마도 인터넷 헌책방을 검색할 수 없었다면, 이 책들을 구하는 데 아주 애를 먹었을 것이다.

인터넷 헌책방에서 언제나 원하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원하는 책을 손에 넣을 확률은 대단히 낮다. 그러니 자주 들러 책이 나왔는지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 책이 있을 경우 주문을 넣고 흡사 옛날 초등학교 시절 소풍날을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그런 어린아이 같은 나 자신을 보고 하도 우스꽝스러워 혼자 슬며시 웃곤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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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사전> 이야기를 하다보니, <한양가> 생각이 절로 난다. <한양가> 이야기를 좀 해 보자.

집이 해운대에 있으니, 집에서 승용차로 3분이면 바닷가다. 기장을 거쳐 일광으로 올라가면 차가 드물다. 고리원자력발전소도 지난다. 서생에 접어들면 길가에 배를 파는 가게가 많이 보인다. 배 과수원이 많기 때문이다. 한동안은 휴일이면 아내와 함께 집을 떠나 동해안으로 올라갔다. 물론 저 멀리 강원도 동해안까지는 아니고, 구룡포까지 가면 가장 멀리 가는 것이다. 다른 목적은 없다. 간절곶에 가서 바닷가 바람을 쐬고 칼국수 한 그릇을 먹은 뒤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오다가 가끔 고물을 파는 가게에 들른다. 땅값이 싸서 그런지 군데군데 고물을 파는 곳이 있다. 고물이라 하는 것은, 이 가게의 물건들이 골동품이라 말하기는 어려운, 좀 그런 물건들이기 때문이다. 오래된 낡은 집에서 주워온 물건들이라고 하면 꼭 맞을 것이다. 깨진 옹기며 문틀, 다듬잇돌, 작은 단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좀 값이 나가는 물건도 있다. 가께수리, 소반 같은 것은 쓸 만하다. 좀 번듯한 가게라면 중국산 물건이 태반이다. 이런 가게들은 바다를 끼고 있어 아마도 서로 연통을 하는 듯, 요일을 정해 놓고 경매를 하는 큰 가게도 있다. 그래 봐야 몇 천원, 몇 만원짜리다.

이따금 들러서 구경을 한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직업이라 이런 곳에서도 직업병이 도진다. 가게 한쪽 구석에 헌책이며 종이뭉치를 잔뜩 쌓아 놓은 곳이 있으면 우선 가서 들추어본다. 건질 게 있을 리 만무다. 또 가다오다 종종 들르는 곳이기에 새로 들어온 무엇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에 다시 갔더니, 못 보던 것들이 있다. 뒤적여보니, 20세기 초반에 나온 구활자본 <사씨남정기>와 <유학자휘(幼學字彙)>, 그리고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한 <한양가> 한 권이 있었다. 주인에게 이건 얼마냐고 물었더니, 내 얼굴을 한참 보더니 무척 고민 끝에 모두 1만원에 가져가란다. 지폐를 꺼내 건네니, 책을 종이봉투에 담아준다.

<사씨남정기>는 소설을 전공하는 같은 과 정출헌 선생에게 주고 나머지는 집에 두었다. 사실 <한양가>가 중요한 책이다. 송신용(宋申用)이란 분이 주해를 했는데, 아주 재미있는 양반이다. 조선시대 때는 서점이 없었기에 서적 유통은 서쾌라고 하는 서적 중간상인이 맡았는데, 송신용은 조선시대에 태어나 1962년까지 활동한 서쾌였던 것이다.

서쾌라고 해서 우습게 알아서는 안된다. 송신용은 한문 전적을 취급한 사람인 만큼 한문을 읽을 줄 알고 식견이 높은 지식인이었다. 학계에 여러 가지 새로운 자료를 소개하는 등 책을 보고 중요한 자료를 가려내는 안목도 있었다. 또 그가 주해한 <한양가>는 오랫동안 <한양가>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책이었다.


<한양가>는 조선후기 서울 풍속의 보고다. 예컨대 서울 시전(市廛)에서 어떤 물건을 팔았는지를 꼼꼼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상업사를 이해하는 데 불가결한 자료인 셈이다. 예컨대 시전 풍경 중, 광통교 일대의 그림 시자의 존재와 거기서 팔리는 그림의 종류를 소개한 부분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회화사의 귀중한 자료다.

또 하나 <한양가>의 자료적 가치는 능행(陵幸), 부정으로 얼룩진 조선후기 과거장 풍경, 서울의 유흥 풍속에 관한 자료를 풍부하게 싣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의 각계각층, 특히 중하층인들이 무엇을 즐거움으로 삼고, 어떻게 놀았는지를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조선후기 서울의 유흥계 주역이었던 별감(別監)들의 ‘승전(承傳)놀음’에 대한 서술은, 서울의 멋쟁이 남성의 패션이라든가, 별감과 연예인의 관계 등을 알 수 있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귀중한 것이다.

나는 <한양가>를 처음 읽고 이렇게 중요한 자료도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논문을 쓸 때, 풍속사를 주제로 책을 쓸 때 종종 인용했다. 그런데 이 책은 주해 없이 읽을 수가 없다. 송신용이 인명이며 지명, 풍속 등에 대해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놓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근래에 이 책을 다시 살필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의 주석은 이제 별반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송신용이 주해본을 낸 1948년으로부터 60여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역사학과 국문학 쪽이 발전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목할 만한 주석은 남아 있다.

예컨대 승정원 사령(司令)에 대해 “사령은 관아에서 심부름을 하는 하례(下隷)지만 승정원 사령만은 임금과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신수가 빼어나고 문식(文識)이 있는 사람을 골라 사령의 옷도 입히지 않고 출입시켰으며, 심지어 <승정원일기>도 거지반 그들의 손으로 기록하였다고 한다”는 주석을 달고 있는데, 이것은 구한말을 살았던 장홍식(張鴻植) 선생으로부터 들은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석은 문헌에 나오지 않는다. 흔히 국고(國故)라 불리는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제도나 습속 같은 것은, 당대 사람들에게는 워낙 익숙한 것이라 기록으로 남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일단 그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면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다. 특히 파란 많은 근대사로 인해 조선의 문물, 제도를 제대로 정리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이런 지식들은 영원히 상실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 역시 <한양가>를 주해한 적이 있는데 어느 날 조선시대 복식사를 공부하는 딸이 좀 보잔다. 주었더니 한참 보다가 웃는다. 왜냐 물었더니, 틀린 데가 많단다. 그럼 그렇지. 언젠가 다시 꼼꼼히 공부해서 풍부한 도판을 덧붙여 <한양가>의 주해본을 다시 내고 싶다.

사족. <한양가>만큼 서울의 지리와 풍속 등을 알 수 있는 책은 없을 듯하다. 다만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은 있다. 19세기 끝에서 20세기 초에 간행된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등 이른바 계몽기 신문은 서울에 관한 정보가 풍부하다. 이것을 잘 요리한다면 조선시대의 상황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젊을 적에 한 번 해보고 싶은 작업이었는데, 이제는 물리적으로 그럴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아쉽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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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하게 덩치 키우는 서울
조선의 흔적 빠르게 씻겨 나가
‘서울사전’ 하나 만들고 싶다


박사과정에 들어가서 번역을 하는데, ‘자각(紫閣)’이란 말이 나왔다.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었다. 경인 선생님(필자의 박사논문 지도교수인 임형택 선생님)께 여쭈어보았더니 “응, 서울을 자각이라 그랬어” 하신다.

그 뒤로 서울이란 오래된 도시에 관심이 쏠렸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하자면 서울의 장소성에 흥미가 생겼던 것이다.

공부를 하다보니 한문학사(史)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거개 서울 사람이었다. 특히 조선후기가 되면 서울에서 벼슬하는 사람은 서울 사람이었다.

박지원과 박제가·이덕무·유득공 등이 어울려 살던 곳도 종로 백탑 부근이었고, 김창협과 김창흡(金昌翕) 등도 모두 서울 자하문 근처에 살았던 것이다. 또 대개의 서울 양반들은, 충청도와 경기도에 따로 향제(鄕第)를 두고 살았다. 홍대용은 충청도 청주(지금은 천안이 되었다)에 향제가 있고, 서울 남산 아래 서울집이 있었다. 추사 김정희는 충청도 예산에 향제, 가회동에 서울집이 있었다.

서울은 1980년대에 급속도로 덩치를 키워가고 있었다. 1981년 제3한강교를 건너 세곡동 쪽으로 가는데, 양재동 시민의 숲 어름을 흐르는 수로에 낚시꾼들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빼곡히 앉아 있었다. 이제 그런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조선시대의 흔적, 전근대의 자투리는 급속도로 씻겨나가고 있다.

나는 부산 태생이고 집안은 원래 경상북도다. 서울은 공부를 하기 위해 머물렀던 곳이다. 서울의 지역성에 대해서는 아주 젬병이었다. 이곳저곳 지역의 내력에 대해 귀동냥이라도 하려고 주변의 ‘서울’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도 잘 모른다는 이야기뿐이었다.

서울과 관련되는 유일한 끈이라면 서울 여자와 만나 결혼을 했다는 것이다. 서울토박이인 처가 식구들에게 물어도 얼마 전의 서울만 알 뿐, 조선시대의 서울, 해방 전의 서울은 잘 모른다.


이래저래 책을 찾아보니 여러 책이 있었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誌)>, 유만공이 쓴 <한경지략(漢京識略)> <세시풍요(歲時風謠)> 등이 조선후기 서울에 관한,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한양가>도 빼놓을 수 없는 자료였다.

<한양가>는 서울 시전의 구체적인 모습과 그 활기찬 분위기, 서울 중하층 사람들의 유흥 등에 대해 다른 데서 찾아볼 수 없는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 외 강이천(姜彛天)의 <한양사(漢陽詞)>와 같은 연작 한시들도 꽤나 남아 있었다. 이런 책은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야말로 창해일속(滄海一粟)이었다.

예컨대 ‘우대’란 말은 학위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꼭 알아야 할 지명이었다. 경인 선생님께 여쭈어보니, 이희승 선생님을 찾아가 뵈란다. 일석(一石) 선생의 수필을 보면, 마치 서울을 자기 동네 그리듯 그려놓았다.

하지만 무슨 용기로 그 극노인을 만날 수 있단 말인가. 이러구러 시간은 흘렀고 우대도 다른 문헌에서 찾아 해결할 수 있었다.

이런 공부의 과정을 거치면서 세상에 나처럼 서울의 장소성에 궁금증을 갖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아예 내가 ‘서울사전’을 하나 만들면 어떨까 한 적도 있다.

한글학회에서 만든 <서울 지명사전>이 있지만 그것은 단지 지명일 뿐이지 않은가. 또 그 서술 방식으로는 과거 서울의 구체적인 모습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지금 지도와 옛지도, 그 외의 시각 자료를 풍부하게 넣고 관련되는 역사, 문화, 인물 등의 이야기를 곁들인 그런 사전은 어떨까. 이런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이란 도시는 불안하게도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었다. 아니 빠르다는 말로도 충분치 않다. 그것은 날마다 변신하고 있었고 전근대의 흔적을 씻어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울 역시 거의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서울에 관한 것을 모아서 ‘서울사전’이란 것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1993년 서울을 떠났고 이런저런 연구에 쫓겨 ‘서울사전’은 불발이 되고 말았다. 그 뒤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다 그 첫머리의 파리 시장의 치밀하기 짝이 없는 묘사를 보고, 과연 오늘날 우리가 조선시대 서울을 그토록 정밀하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다시 ‘서울사전’을 떠올렸지만, 그것을 구체화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대신 이래저래 모은 자료에 주해를 붙여 2010년 <사라진 서울>이란 책을 냈다. 아마 앞으로도 내 평생에 다시 서울사전은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사전이 풍부한 사회는 문화가 풍요로운 사회다. 사전은 그 사전을 만들 당시까지 모든 문화적 업적을 압축한 것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별별 사전이 있을 수 있다. 도서관의 참고열람실에 가보면 별별 사전이 다 있다. 내 서가에도 <갑골문자전> <금병매사전> <홍루몽사전> <시경사전> <이조어사전> <세계사대사전> <철학사전> <음식용어사전> <정치경제학사전> 등 이런저런 사전이 꽂혀 있다.

하지만 사전을 만드는 일은 고역 중의 고역이다. 요즘 대학에서는 사전을 편찬해도 업적으로 쳐주지 않는다. 10년, 20년이 걸려 사전을 만들어도 그 역시 논문 1편과 같이 평가할 뿐이다.

만약 대학에서 사전 만드는 것을 자기 학문적 과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도 연구업적 0%가 되어 쫓겨나고 말 것이다. 또 사전은 제작이 어렵고 제작한다 해도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누가 그 고생을 감당하려 할까?

사인먼 윈체스트의 소설 <교수와 광인>은 정신병으로 사람을 죽이고 감옥에 갇혀 있던 윌리엄 마이너가 제임스 머레이경(Sir James A H Murray)이 요구하는 어휘의 용례를 찾아 저 유명한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제작에 열정적으로 협력했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 역시 사전을 만들려면 감옥에 갇히거나 갇힌 것처럼 살아야만 했던 것인가? 하하!

끝으로 한마디만 더 하자. 과거 모르는 것이 있으면 사전을 펼쳤다. 하지만 이제는 이런저런 사전 역시 펼치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인터넷 때문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제공하는 사전 역시 어떤 사람의 노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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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때까지 베스트셀러, 시대별로 종류도 많았는데
이젠 스마트폰이 방대한 ‘한어대사전’을 삼켰으니…


친구가 스마트폰에서 기묘한 사전을 보여준다. 스마트폰 화면에 한자를 쓰면 곧 현재 가장 큰 한자 사전으로 알려진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의 해당 한자 항목이 뜨는 것이다. 엄청나게 편리하다. 10책이 넘는 사전이 스마트폰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말이 난 김에 사전 이야기를 해보자. 앞서 일제강점기의 베스트셀러 중 하나가 자전이었다고 했는데, 이건 상당히 놀라운 사실이다. 요즘은 어떤 사전도 베스트셀러에 들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일제강점기만 해도 여전히 한문을 읽었고 국문이라 해도 한자말투성이의 국한문 혼용을 했으니, 당연히 한자 자전의 수요가 많았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사전에 대한 수요가 이처럼 높았다면, 순전히 한문을 사용했던 조선시대에는 그 수요가 더 컸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조선시대에는 더 많은 다양한 사전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또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지금 우리가 아는 그런 한자 사전은 없었다.

원래 모르는 한자를 찾는 사전은 중국에서 세 가지 종류로 발전했다. 첫째 의미상 같이 엮일 수 있는 한자를 모은 사전이다. 예컨대 ‘집’이란 의미를 갖는 한자를 모으는 방식이다. 가(家)·실(室)·당(堂)·재(齋)·누(樓)·헌(軒)·관(館)·관(觀) 등은 모두 ‘집’을 나타낸다. 이런 식으로 종류별로 한자를 모은다. 한(漢)나라 이전에 만들어진 <이아(爾雅)>가 그 최초의 것이다.

두 번째로는 운서(韻書)가 있다. 한시를 지을 때 한자의 운(韻)과 그 글자의 평·측을 알아야 한다. 모든 한자를 106운으로 나누고(206운으로 나눈 것도 있으나 잘 쓰이지 않았고, 우리나라에서 쓴 것은 106운이었다), 각 운마다 글자를 소속시킨 것이다. 중국 남북조시대에 만들어진 <광운(廣韻)>을 시작으로 다양한 운서가 만들어졌으며 고려와 조선은 그것들을 수입해 사용했다. 한편 조선에서도 운서를 제작해 사용했는데, <규장전운(奎章全韻)>(1800)이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세 번째 사전은 <자서(字書)>다. 즉 전혀 모르는 글자가 나왔을 때 그 글자의 음과 뜻, 운 등을 알기 위한 사전이다. 후한의 허신(許愼, 30~124)이 만든 <설문해자(說文解字)>를 엮고 처음으로 540개의 부수를 제시해, 부수로 한자를 검색하는 법을 고안했다.

이 방법을 따라 양(梁)나라 고야왕(顧野王)의 <옥편(玉篇)>, 명나라 매응조(梅膺祚)의 <자휘(字彙)>, 청나라의 <강희자전(康熙字典)> 등이 만들어졌다. <옥편>부터는 부수의 수도 214개로 줄었다. 20세기 이후 근대식 자전이 만들어졌으나 온갖 한자 자전에 ‘옥편’이란 이름이 붙었으니, 고야왕의 <옥편>의 영향력은 정말 장구하다 하겠다.

청나라 강희제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강희자전>은 4만7053자를 수록한 가장 정보량이 많은 사전이었고, 이후 자전은 모두 <강희자전>을 모본으로 삼았다. 비록 ‘옥편’이란 이름을 달고 있어도 내용은 <강희자전>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고려와 조선은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중국의 운서와 자전을 수입해 사용하거나, 그것을 복각(覆刻)해 사용했다. 만든 것도 몇 종 있지만, 널리 사용된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조선에서 제작한 운서와 자전으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것을 꼽으라면 <규장전운>과 <전운옥편(全韻玉篇)>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등이 중국의 다양한 운서를 참고해 만든 것이고, 후자는 <강희자전>을 바탕으로 만든 자전이다. 이 두 책은 정조 이후 민간에 가장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 20세기 초반까지 관판본(官板本)은 물론이고 민간의 방각본(坊刻本)으로도 여러 차례 간행되었던 것이다.

한자 사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해 그것만으로도 거창한 학문의 분야가 된다. 또 이 방면의 연구 업적이 상당히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사전들이 과연 얼마나 발간되고 유통, 이용되었는가는 아직 선명하게 밝혀진 바 없다.

조선시대에는 책값이 엄청나게 높았다. 과연 조선시대의 과거를 준비하는 사족 양반들은 모두 다양한 사전을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 과감히 그렇다고 답할 자신은 없다. 잠정적인 추정으로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체로 어릴 적 한문을 배울 때는 선생님이 뜻과 음을 알려준다. <천자문>이나 <유합(類合)> 같은 글자를 모아 놓은 책을 배운다. <천자문>은 다 아는 책이니 설명이 필요없을 것이다. <유합>은 한자를 의미별로 분류한 것이다. 서거정(徐居正)이 만들었다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이런 글자를 가르치는 텍스트부터 읽고 외우고 쓰는 과정을 거친다. 뒷날 이게 적절한 텍스트가 아니라는 비판이 있어 중종 때 최세진(崔世珍)이 일상생활과 밀접한 글자 3360자를 모아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선조 때 유희춘(柳希春)이 <유합>을 개정해 수록 한자 수를 2배 정도로 불린 <신증유합(新增類合)>(3000자)을 엮기도 했다. 이런 책들이 주로 어린이를 교육할 때 사용한 한자책이었다.

약간 복잡한 텍스트는 스승에게 뜻과 음을 배우고 다시 또 읽고 외우고 쓰는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기본적인 한자를 익힌다.

하지만 조금 더 수준이 올라가면 그때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예컨대 <논어>나 <맹자>를 읽다가 모르는 글자가 있으면 어떻게 하는가? 대개 어려운 글자는 주석이 달려 있다. 이 글자의 음은 무엇이고 뜻은 무엇이라고 나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주석이 없는 책들은 어떻게 하는가? 스승을 찾아 물어볼 수밖에 없다.

이덕무(李德懋)의 <청장관전서>에는 어떤 글자를 써 놓고 무슨 뜻이냐고 묻는 편지와 이덕무의 답장이 여러 통 실려 있다. 워낙 박학한 이덕무이기에 그런 문의가 많았던 것이다. 물론 이것은 이덕무만이 아니라 다른 문집에서도 더러더러 보인다. 지면이 짧아 상론하지는 못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만든 한자 자전은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에서 30년에 걸쳐 만든 <한한대사전(漢韓大辭典)>(2008년 완간, 모두 16권)이 아닌가 한다. 이 사전으로 일본식 자전으로부터 비로소 자유롭게 되었던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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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리’(제7권 제9호 1935년 10월1일) 잡지를 보니, 책에 관한 이야기가 더 있다. ‘서적시장조사기(書籍市場調査記), 한도(漢圖)·이문(以文)·박문(博文)·영창(永昌) 등 서시(書市)에 나타난’이란 기사가 그것이다. 이 기사를 통해 1935년 당시 경성, 곧 서울에서는 서적시장도 ‘꽤 활기를 띠고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나날이 번창하여져 가는 서울장안에는 안국동을 중심으로 삼고 관훈동을 뚫고 종로 거리로 나가는 좁은 거리와 창덕궁 돈화문 앞으로 내려오는 좁은 거리 등으로는 무수한 서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날로 늘어가고 번창하여 감을 보게 된다. 약 5, 6년 전보다도 훨씬 서점들이 많아진 것을 바라볼 수 있는 현상이다.”

지금 지명과 꼭 같다. 종로 일대에 서점이 날로 불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최근에는 종로 ‘야시(夜市)’에 고본서적상(古本賣商輩)도 족출(簇出)한다고 하니, 밤이면 야시장에 헌책을 파는 상인이 대거 출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들 불어난 서점에서 팔리는 책의 절대다수는 ‘현해탄을 건너오는’ 책, 곧 일본책이다. 하지만 ‘조선 안에서 조선 사람의 손으로 되어서 나오는 서적도 전보다 훨씬 많아져 가는 현상’이란다. 조선의 인쇄, 출판 역시 발전 추세에 있었던 것이다.

학자와 전문가의 증가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한편 “조선의 고전(古典)을 찾아보려는 학구적 양심을 갖고 있는 학도, 한글 문헌에서 ‘우리의 넋과 얼, 모든 특색, 자랑, 모든 문화적 유산을 알아보자’는 학생 내지 일반 민중의 심리현상의 발현”이라고 추측한다.

이 기사는 한성도서주식회사(漢城圖書株式會社), 이문당(以文堂), 박문서관(博文書館), 영창서관(永昌書館) 등 큰 서점의 판매부수를 조사하고 있다.

이것을 검토해 보면 당시 스테디셀러 책들을 짐작할 수 있다. 한성도서주식회사에 의하면, 심의린(沈宜麟)의 <조선동화대집(朝鮮童話大集)>은 출판 이래 5000부를 돌파해 3판을 준비 중이고, 이윤재(李允宰)의 <문예독본(文藝讀本)> 상·하 2권은 각각 4000부를 판매하여 재판을 준비 중이고, 이은상(李殷相)의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도 출간 이래 3000부를 돌파하였다고 한다.

그 외 문학서적으로는 사화(史話)와 역사소설이 가장 많이 팔렸다. 이광수의 <마의태자> <이순신> 등이 수위를 점하여 각각 4000부를 넘었고, 그 다음 이은상의 <노산시조집(鷺山詩調集)>이 2500부를 돌파하여 재판이 절판되고 3판을 인쇄하고 있으며, 그 다음은 이광수의 ‘순문예작품’인 <무정> <개척자> <재생> 등이 출판된 지 오래된 이유도 있겠지만 4000부 가까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근자에 출판된 <흙> 역시 호평을 받아 3판 인쇄 중이고 4000부는 돌파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한다. 김동인의 <여인>, 이태준의 <달밤> 등 문예작품도 2000~3000부가 매진되어 재판 인쇄에 들어갔고, 심훈의 <영원의 미소> 등 4, 5종도 인쇄 중이라 한다. 역시 소설의 시대다!


한성도서주식회사의 경우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주문이 몇 년 전보다 훨씬 증가하고 있고, 특히 조선 사화와 문예작품에 대한 일반 대중의 인식이 확연히 높아져서 아무리 안 팔린다 해도 4000~5000부는 쉽게 팔린다는 것이다. 이것은 몇 해 전 잘 팔리는 책도 4000부를 넘기 어려웠던 것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현상이다. 기자는 “조선의 독서열이 늘어져 가고 있는 사실”에 감탄한다.

이문당은 한성도서와 함께 오래전부터 지방에까지 널리 알려진 대서점이다. 이문당의 판매를 조사해 보면, 1922년에는 노자영의 작품이 ‘조선의 젊은 남녀들에게 많이 읽혀져’ 그의 수많은 작품 중 <사랑의 불꽃> 같은 소설은 하루 평균 30~40부씩 팔려 서적시장에서 최고의 판매실적을 자랑하였다고 한다.

대정 14년(일본 다이쇼시대, 1925년)부터는 ‘세계대전 이후 세계사조(世界思潮)의 격변과 외래사상의 격랑으로 반도 사상계에도 일대 센세이션과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던 관계’로 노자영의 소설은 급격히 몰락하고 이광수의 <단종애사> <이순신> <마의태자> 등 역사소설이 잘 팔리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아 <카프작가 7인집> <카프시인집> 등 새로운 문예서적류가 이광수의 역사소설 다음 가는 호성적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박문서관은 종로에서 가장 많은 독서가가 찾는 서점이다. 사전류가 가장 많이 팔리고, 그중 <선화사전(鮮和辭典)>이 4000~5000부를 돌파해 고대소설, 신소설을 제하고는 판매의 수위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일선신옥편(日鮮新玉篇)> <한일선신옥편(漢日鮮新玉篇)> 등은 퍽 많이 나가고, 이제까지 팔린 것을 계산하면 고대소설보다 훨씬 더 나간 것이다. 일제강점기였으니 일본어, 한국어, 한자를 동시에 찾아볼 수 있는 사전에 대한 수요가 워낙 컸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소설이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은 지방의 농사꾼, 부녀자, 일반 가정의 여전한 수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충렬전(忠烈傳)> <춘향전> <심청전> 등이 3만~4만부를 돌파하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 잘 팔리는 책은 <추월색(秋月色)> <송죽(松竹)> <미인의 도(道)> <능라도(陵羅島)> <춘몽(春夢)>과 같은 소위 ‘신소설’류도 많이 나가는데, 이런 책들은 대개 2만부를 넘기고 있다고 한다.

옛 소설이 여전히 가장 많이 팔린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일이다. 책으로만 보면 1930년대 농촌은 여전히 조선시대였던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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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 책방골목 이야기를 하다가 일기 쪽으로 이야기가 흘렀다. 서점 이야기를 좀 더 해 보자. 어릴 적에 집에 책이 없다 보니, 가장 부러운 집은 책이 많은 집이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의 집은 대본소였다. 학교 정문을 벗어나 조금만 가면 문방구를 파는 가게가 있었고, 가게의 한쪽 벽면은 책으로 가득하였다. 대본소를 겸했던 것이다. 책을 한없이 볼 수 있는 그 친구가 부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런 행운을 외면하는지 나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친구의 대본소에 갔더니 어떤 사람이 와서 책을 찾는데, 친구는 그 책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모르고 허둥대었다. 내가 즉시 책의 위치를 손으로 가리키자 친구는 깜짝 놀라며 어떻게 아느냐고 되물었다. 그 책의 위치만 아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 벽면 가득한 책의 위치를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우습다. 중학교 동창의 이름은 거의 다 잊었지만, 그 친구의 이름은 지금도 똑똑히 기억이 난다.

서점은 동네 어디에도 있었다. 출판업의 규모가 크지 않아 진열할 책도 적었기에 서점의 규모도 따라서 크지 않았지만, 그래도 거리마다 동네마다 서점은 있을 만한 곳에는 다 있었다. 또 서점은 좀 점잖은 직업에 속하였다. 대학 다닐 때 학교 앞에는 서점이 열 곳 정도 있었다. 지금 학생의 수는 그때의 다섯 배이고, 경제 규모는 10배도 넘을 것이다. 하지만 서점은 단 두 곳이다. 이 두 곳의 서점조차 평소에는 파리만 날린다. 단행본을 사가는 사람이 없단다. 그런데 왜 새 책은 자꾸 받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서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란다. 요컨대 신학기에 교재를 파는 것을 제외하고는 대학 앞 서점은 본래의 기능을 잃은 것이다.

서점은 과거 꽤나 괜찮은 직종이었다. 일제강점기의 서점을 보자. ‘삼천리’(제9권 제4호 1937년 5월1일 발행)에 ‘미모의 서점 마담, 문사(文士) 노춘성(盧春城) 부인 이준숙(李俊淑)씨’란 대담이 실려 있다. 노춘성은 유명한 문인이었던 노자영(盧子泳)이다. 그의 아내인 이준숙이 서점을 경영했던 것이다.

기사는 “여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직업선상에 나선 인텔리 여점주와 인텔리 여류의 할 만한 직업”이라고 했으니, 서점은 당시의 신여성이 할 만한 직업으로 꼽혔던 것이다. 책은 아무래도 여느 상품과는 다르고, 고객 역시 이른바 배운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준숙은 “다른 장사와 달리 손님들이 모두 점잖은 분들”이라고 하였다.


이준숙은 이화여자전문(梨花女子專門) 음악과를 졸업한 뒤 교사로 몇 년 근무하다가 5년 전 서점 경영에 뛰어든 ‘인텔리 여성’이었다. 서점을 하게 된 동기는 생활 곤란으로 생계를 돕자는 것이었고, 그중 서점은 이미지가 괜찮은 것, 또 자신의 성격과 취미에 맞는 것 같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남편 노자영이 문학을 본업으로 하는 까닭에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자신이 음악을 전공하였으나 문학에 애착을 가졌던 것, 이런 것이 서점 경영을 결심한 이유였는데, 모 대학교수가 모 사건으로 투옥된 뒤 그 부인이 남편의 장서를 가지고 본정(本町·지금의 충무로)에서 서점을 시작하여 상상 이상 잘되었다는 체험담을 듣고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서점의 명칭은 ‘미모사 서점’이고 동소문 근처 동성상업학교 옆에 있었다. 시내 중심가는 아니었지만 인텔리층이 많이 사는 성북정(城北町)과 명륜정으로 드나드는 초입이고, 또 경성제국대학을 위시한 여러 고등학교가 주위에 있어 인텔리층과 학생층을 고객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었다.

미모사 서점은 지방통신 판매도 하고 있었다. 신문과 잡지에 광고도 하고 목록도 그해 봄 300원이나 들여 만들었다. 출판도 했다.

그해 처음 서간집 <홍장미 필 때>를 출판했는데, 주인의 말에 의하면 “그 성적이 퍽 좋은 편”이었다. 책은 주로 도쿄나 오사카 등에서 구입했고, 나우카(ナウカ)社 같은 출판사에서 재고 정리를 위해 할인할 때 좋은 책을 싸게 사들이기도 한다. 이익은 조선 책은 2할 내지 3할, 일본 책은 4, 5할 정도였다고 한다. 가장 많이 팔리는 책은 문예서적이고, 일본 잡지로는 ‘영화지우(映畵之友)’ ‘キング(킹)’ ‘日の出(해돋이)’ ‘主婦之友(주부의 벗)’ 등이, 조선 잡지로는 ‘삼천리’ ‘조광(朝光)’ ‘여성(女性)’이 가장 많이 팔린다고 하였다. 학생들 중 경성제국대학생들은 의학서적을 많이 찾지만 없는 것이 많고, 고상(高商)은 경제와 역사 분야를, 중학생들은 시집과 탐정소설을 주로 사간다고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독자의 성별이다. 고객이 어느 쪽이 많으냐는 질문에 이준숙은 여자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이하는 직접 읽어보자.

“여성들이 독서를 하지 않는가 봐요. 학생시대에는 무엇을 열심히 공부하든 여성들도 한번 가정에 들어가면 그만 가정의 노예가 되어 바깥세상과는 인연을 끊는 모양이지요. 첫째 여자들은 경제권을 갖지 못하니, 아마 책도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으니 남자에게 부탁하게 되겠지요, 말이 좀 딴 길로 갑니다만, 조선 여성들은 가정에만 들어가면 자기 개성은 영영 죽이고, 그저 충실한 가정부인이 되려고만 하는 듯하여요. 그러나 서양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가정을 가진 후도 충실한 가정부인이 되는 동시에 어디까지든지 자기의 개성을 살려가며 키워가는 것이외다.

저의 이전(梨專) 동창생들 가운데에는 그때 몇 분은 졸업 후 꼭 큰 인물 되리라고 자타가 믿었던 것인데, 한번 가정에 들어간 후 그 존재조차 찾아볼 수 없어요. 그것이 무엇보다 쓸쓸하여요. 저도 졸업 당시에는 위대한 음악가가 되겠다는 양양한 야심을 가지었던 것인데 가정을 가지니 그리 마음대로 안되더구만요. 그러나 아직 그 야심만은 버릴 수 없어요. 저는 음악 외에 문학을 즐기는데, 서점을 경영한 후부터는 독서만은 더 하게 되니 그것만은 행으로 생각합니다.”

서점 주인이 여성이다 보니, 자연히 여성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요즘은 어떤가? 서점 이야기를 하다가 딴 길로 빠졌다. 용서하시기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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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동에서 산 일기책 이야기를 하다 보니, 생각이 옛날의 일기로 번진다. 다만 현재 남아 전하는 것은 조선시대의 일기뿐이다. 그것도 조선전기의 것은 불과 3종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후기의 것이다. 그중 몇 가지 실례를 들어보자. 먼저 조선전기의 일기다.

이문건(李文楗·1495~1567)이 1535년부터 1567년까지 쓴 <묵재일기(默齋日記)>는 달아난 노비를 잡아다 매를 친 이야기, 전답 문제로 소송한 이야기, 맹인을 불러 점을 친 이야기 등 16세기 사족의 일상을 세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묵재일기>에는 노비에 관한 이야기가 퍽 많은데 이것을 모두 뽑아 정리하면 조선전기 노비에 대해 구체적이고 풍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유희춘(柳希春·1513~1577)이 1568년에서 1577년까지 쓴 <미암일기(眉巖日記)>는 개인사는 물론이고, 그가 선조의 신임을 받았던 고급관료였던 만큼 당시 조정에서 일어난 사건도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될 때 기본 사료들이 모두 불타고 말았기에 <미암일기>는 <선조실록>의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하였다.

유희춘은 책을 사랑한, 책에 집착한 다독가이자 애서가였다. 그는 원하는 책이 있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손에 넣었는데, 그 과정을 이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 그였기에 그는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모두 외울 수 있었다. 1543년 간행된 오자 많은 <주자대전(朱子大全)>의 교정도 그가 맡았다. <미암일기>에는 교정을 본 분량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책 정보 외에 <미암일기>에서 내가 각별히 눈여겨본 것은 일기에 나오는 물품들이다.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어느 고을의 누구에게서 어떤 물건이 왔다는 기록이 이어진다. 쌀, 포목, 꿀, 미역, 종이, 생선 등 아주 구체적인 물목과 수량이 나온다. 화폐가 유통되지 않던 시대였으니, 실물의 증여경제가 주축이었던 것이다. 이 자료를 잘 분석하면 16세기 조선사회 실물경제의 구체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암일기>에 이어 오희문(吳希文·1539~1613)이 쓴 <쇄미록(鎖尾錄)>도 대단히 중요한 일기다. <쇄미록>은 1591년 11월27일부터 1601년 2월27일까지 쓴 것인데, 이 기간은 임진왜란과 겹친다. 따라서 이 일기가 임진왜란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 중요성이야 굳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쇄미록> 이후의 일기로는 김령(1577~1641)의 <계암일록(溪巖日錄)>이 있어서 전쟁 이후 사족 사회의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지나는 길에 하나 덧붙이자면, 임진왜란을 경험한 일기류는 사족들의 문집에 상당히 많이 전한다. 이것들을 공간해 번역하면 임진왜란 연구에 상당한 도움이 될 터이다.


조선후기에는 방대한 일기가 적지 않게 전한다.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황윤석(黃胤錫·1729~1791)의 <이재난고>, 유만주(兪晩柱)의 <흠영(欽英)>이 있다. 전라도 고창의 선비였던 황윤석은 서울로 올라와서 당대 최고의 벌열이었던 안동김씨 가문의 김원행(金元行)의 제자가 된다. 황윤석은 1738년부터 1791년까지 일기를 썼다. 이 일기에서 각별히 중요한 것은 18세기 후반 베이징에서 수입된 서적들의 소유 현황과 유통 양상이다. 특히 베이징에서 들어온 한역(漢譯) 서양서가 어느 집안에 있는지, 누가 그 새 지식을 이해하고 있는지, 서울 사족들 사이에 지식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축되어 있는지 이 일기를 통해 소상히 알 수 있다.

<흠영>을 쓴 유만주는 조선후기 노론 명문가인 기계유씨(杞溪兪氏)다. 유길준(兪吉濬) 역시 이 집안의 후예다.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이 명문가의 자제는 오직 책 읽기로 평생을 보냈다. 따라서 <흠영>도 독서일기다. 유만주는 문학서를 위주로 매일 어떤 책을 얼마나 읽었는지 꼼꼼하게 쓰고, 중요하고 흥미로운 대목을 발췌해 옮겨놓는가 하면, 비평도 곁들이고 있다. 정조의 시대에 경화세족 가문에서 어떤 책을 주로 읽었는가를 알려면 <흠영>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의 일기를 읽으면 오늘날 일기와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곧 그곳에는 개인의 내면 고백이 없다. 개인의 내면 고백이란 것은 아마도 근대의 산물일 것이다.

생각건대, 그런 일기의 최초의 예는 윤치호(尹致昊·1865~1945)의 <윤치호일기>가 아닐까? 1883년부터 1906년, 1916년에서 1943년까지 쓴 방대한 이 일기가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료가 됨은 물론이다. 원래 한문과 국문으로 쓰던 일기는 1889년 12월부터는 영어로 쓰인다. 영어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윤치호는 16세에 일본에 유학하여 2년 동안 서양 학문을 배우고, 19살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직접 만나 조선의 장래에 대해 건의하는 등 조선의 정치에 깊이 개입했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떠나 중서서원(中書書院)에서 서양의 근대 학문을 공부하다가 감리교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다니며 인문학과 사회과학, 신학을 공부한다. 이쯤 되면 그의 세계관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짐작할 것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을 가진 근대적 지식인 윤치호는 조선의 현실에 절망하는 한편 기독교를 통한 문명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구 문명에 대한 열등감, 그들의 인종주의에 대한 비판 등 조화를 이룰 수 없는 생각, 개신교 신자로서의 죄의식의 표백 등 근대를 경험하기 시작한 개인의 내면을 볼 수 있는 자료로 <윤치호일기>만 한 것도 없을 것이다.

사족. 최근 일기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져 연구물이 나오고 있다.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강신항 등,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는 <이재난고>를, <일기를 통해 본 조선후기 사회사>(이성임 등, 새물결, 2014)는 <계암일록>을, <일기로 본 조선>(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엮음, 글항아리, 2013)은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일기를 다룬 저작물이다. 저작들을 통해 조선시대 개인의 생활과 속내를 들여다보는 것은 너무나 흥미롭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앞으로 보다 많은 일기가 발굴되기를, 그리고 또 깊이 연구되기를 바란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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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에 한두 번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드나든다 하니, 무어 대단한 책이라도 잔뜩 사들이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냥 산보 삼아 들르는 것이다. 쉬는 날 이따금 아내와 버스를 타고 남포동에서 내려 광복동 거리를 걷다가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국제시장 깡통골목 부평시장으로 돌아다니며 구경을 한다. 깡통시장에는 최근 야시장도 생겨서 밤에 볼 것이 더 많다.

어떤 날은 둘이 깡통골목을 거쳐 대청동까지 올라간다. 나는 길을 건너 보수동 책방골목으로 가고 아내는 깡통골목을 더 뒤지고 다닌다. 한 두어 시간 지난 뒤 다시 만난다. 나는 배낭을 지고 서점을 훑고 지나가는데 무슨 좋은 책이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책방골목은 그냥 헌책을 파는 곳일 뿐이지 일본 도쿄의 ‘간다(神田)거리’처럼 고서점이 밀집해 있는 그런 곳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 책도 사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고, 이따금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책을 두어권 사거나, 아주 드물게 앞으로 공부에 참고가 됨직한 책도 사기도 한다. 하지만 사는 책은 대부분 신간을 살 필요가 없는 소설 같은 것이다. 한번은 도스토예프스키 전집을 구하려 하니, 1974년에 나온 정음사판 전집이 있다. 시렁 높이 있는 것을 내려 달라 해서 보니, 워낙 오래되어 낯설기 짝이 없다. 포기하고 말았다. 뭐, 이런 식이다. 그냥 걷느니 책방골목으로 다닐 뿐인 것이다.

수삼년 전 봄날 역시 아내와 헤어져 책방골목을 배회하다가 골목 중간쯤에 있는 제법 규모가 있는 책방에 들렀다. 자주 들리기는 하지만 별로 책을 산 기억은 없는 곳이다. 훑어보니 한쪽에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잡이로 책이 잔뜩 꽂혀 있다. 그중 책등이 벗겨진 볼품없는 책이 있었다. 뽑아 보니 어라? 책케이스까지 갖춘 책이다. 책케이스 앞면에는 찔레꽃이 그려져 있고 ‘文藝日記 1961’(문예일기 1961)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책을 꺼내보니 하드커버다. 그 표지에는 ‘學園日記 4269 學園社’(학원일기 4269 학원사)라고 써 놓았다. 단기 4269년은 1956년이니 책케이스의 1961년과는 맞지 않다. ‘학원일기’를 ‘문예일기’ 케이스에 넣어둔 것이 틀림없었다. ‘학원일기’는 청소년을 독자층으로 삼았던 잡지 ‘학원’의 부록이었다. 당시 잡지사에서는 잡지를 더 팔 의도로 종종 부록을 끼워 팔곤 했는데, 일기장 역시 그런 것이었다. 일기장이 탐나서 잡지를 사는 사람도 아마 있었을 것이다. ‘학원’은 고등학생들이 읽기 꼭 좋은 잡지였다. 학원사에서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현상 시문 대회를 했는데, 그것을 거친 전국의 청소년 문사들이 뒤에 정식 문인이 되곤 하였다.

일기를 훑어보니 푸른 만년필로 단정하게 쓴 글씨다. 갑자기 구미가 당겼다. 주인을 불러 짐짓 아무것도 아닌 체하면서 이거 얼마요? 하고 물었더니, 주인은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책을 한 번 보고 망설망설하다가 2만원이라고 하였다. 자기로서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니, 무슨 이런 낡은 공책이 2만원이란 말이오? 하지만 얼굴에서 비상한 관심의 자취를 읽어낸 주인의 말투가 갑자기 단호해졌다. 세상에 한 권밖에 없는 책 아닙니까? 하는 수 없이 지갑을 열고, 2만원을 건넸다.


집에 돌아와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일기책 안쪽에 ‘張大成 專用’(장대성 전용)이라고 써 놓았다. 아마도 이 일기는 장대성이란 사람이 쓴 것일 터이다. 일기는 1956년 1월1일부터 10월16일까지의 것이다. 나이는 스무 살 정도다. 집은 경상남도 진주 근처의 시골이다. 일기가 시작될 때 장대성은 진주에서 하숙을 하면서 진주농림고등학교 3학년생으로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1, 2월 대입시험을 앞두고 마음을 졸이며 공부를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진주 하숙집에 있다가 시골집으로 갔다가 하더니, 결국 3월4일 낙방 통보를 받는다. 다시 동아대학교에 응시했지만, 또 낙방이다. 어쩔 수 없이 자기 집안에서 하는 제재소의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며 불안한 마음으로 입대(入隊)를 기다리다가 5월8일 동아대학교 야간부 편입시험에 합격한다. 당연히 5월19일 징집 연기를 하고 계속 제재소 사무실에 근무하면서 학교를 다닌다. 따지고 보면 별로 신기할 것도 없는 일기다. 하지만 6·25전쟁 뒤 불안한 시대의 20대 초반 평범한 대한민국 청년의 일상과 속내를 엿보기에 족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친척과 친구들에 대한 친밀한 관계, 젊은 여성에 대한 치기 어린 애정, 일과 휴식 등을 그야말로 날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장대성의 주 활동무대는 미화당백화점이고, 취미는 영화보기다. 하루치를 보자.

‘7월1일. 금일이 일요일인 동시에 7월의 첫날이어서 시민들은 오랜 장마에 시달렸던 몸을 비가 그치자 각 곳으로 산보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오전에는 남포(南浦)에서 ‘벼락감투’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책상에 앉아 NOTE 정리에 골몰. 저녁에 DS에 있는 S miss와 약속을 포기하고 본점의 y와 같이 시민관에서 <안다루샤>를 관람하고 돌아와 DS에서 S에게 변명을 하고 11시경 SY와 같이 중국요리로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DS에서 경음악으로 1시가 넘도록 감상에 잠긴다.’

하루의 일과가 복잡하기도 하다. 7월 일기가 시작하기 전 ‘이달의 메모’에서 7월에 본 영화를 정리해 두고 있는데, 모두 16편이다. 엄청난 영화광이 아닐 수 없다. 일기를 통독하고 나서 대단한 자료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치른 2만원의 값은 하는 것 같았다. 또 영화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1950년대 젊은이의 영화보기도 시각에 따라서 참고할 만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한다. 이 일기를 사들인 뒤로 혹 서점이나 고물 파는 곳을 들르면 일기가 있는가 하고 살피게 되었다. 어느 날 고리원자력발전소 인근의 고물 파는 곳에서 살까 하다가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아쉽기 짝이 없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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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다닐 때 별로 없던 책이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대학원 시절부터다. 현금을 주고 살 수 없는 영인본을 외상으로 사고 달마다 갚아나갔다. 그렇게 해서 늘어나는 책을 보면서 내 지식이 늘어나는 것처럼 착각하며 뿌듯해한 적도 있다. 한데,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나니, 책이 불어나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책을 사는 핑계도 여럿이다.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에 꼭 필요한 책이기 때문에 사들이는 경우는 나무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연구와 관계없는 책도 사들이는 데 문제가 있다. 전공과는 상관없지만 워낙 고전으로 소문이 난 책이라서, 그 책을 읽지 않으면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질 것 같아서 산다.

또 내가 이런 책을 사주지 않으면 누가 사주랴 하는 어쭙잖은 동정심(?)에서 산 책도 있고, 심지어 장정이 너무 좋아서 산 책도 있다. 이러니 연구실은 물론 집에도 책이 자꾸 쌓인다. 17년 전 이사한 집은 애초 입주할 때 가장 큰 방 사면에 책장을 둘러 넣어 아예 책방으로 만들어 책을 쌓기 시작했고, 나머지 방도 아이들이 자라서 집을 떠날 때마다 하나씩 책방으로 바꾸었다.

그러고도 책이 넘쳐 일부는 솎아서 버렸다. 소용이 닿지 않아서, 그리고 영원히 볼 것 같지 않은 책이라서 버린 것이지만, 한 권 한 권 살 때의 추억이 떠올라 적잖이 섭섭했다.

정년을 한다면 이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까이 지내는 교수님들과 이 문제를 이야깃거리로 삼아 종종 한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분들 역시 공부 욕심, 책 욕심이 많아 적지 않은 책을 가지고 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녀가 부모와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는 경우다. 그냥 물려주면 된다. 고민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아주 드물다. 가까이 지내는 어떤 교수님은 정년 뒤 어디 큼지막한 공간 하나를 빌려 거기에 책을 모두 가져다 놓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 작은 도서관에 매일 출근해 책도 보고 저녁이면 석양주도 한잔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빌리는 비용이며 책의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역시 공상에 가깝다.

대개는 정년 뒤 자신의 책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기를 원한다.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무척 좋아했지만, 요즘은 썩 반기지 않는 눈치다. 21년 전 대학에 부임한 해 어느 봄날이었다. 정년을 한 노교수님 한 분이 연구동 복도에서 혀를 차면서 ‘무슨 이런 짓을 하누’ 하신다. 여쭈어 보니 도서관에 자신의 장서를 기증한 뒤 시간이 지나 찾아갔더니 복본을 모두 골라서 어디 구석에 쌓아놓았더란다. 그래서 짠한 마음에 자신이 있었던 연구동으로 다시 가져왔다는 것이다.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평생 애지중지 끼고 살던 책들이 버림을 받아 팽개쳐진 꼴을 보면 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처지도 이해는 된다. 책은 쏟아져 나오고 서고는 부족하다.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해서 복본을 버릴 요량으로 솎아내어 둔 것이리라.

그게 기증자의 눈에 뜨이지 않았더라면 더욱 좋았을 것인데, 마침 눈에 뜨이는 바람에 기증자를 한없이 섭섭하게 한 것이리라.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책 많기로 소문난 어떤 교수님은 대만에 기증했고, 어떤 교수님은 일본에 기증할 예정이라 했다.

한동안 한 달에 두어 번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가서 남포동에서 내려 먼 길을 산보 삼아 걸어간다. 이따금 눈에 걸리는 책을 사서 배낭에 쑤셔 넣는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집에도 책이 적지 않건만 보지도 않을 책을 무얼 그리 사느냐고 나무란다.

대답할 말이 궁하다. 공부하는 딸에게 물려줄까도 하지만, 전공이 달라 필요한 책만 좀 솎아내면 나머지 대부분의 책은 갈 곳이 없을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서관에 기증할까 생각해 보지만, 거개 도서관에 있는 책일 것이고 희귀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대부분 솎아내어 버릴 것이다. 요컨대 도서관 직원만 귀찮게 할 뿐 결코 반가운 대상은 아닐 것이다.

에라, 그래, 그럼 묶어서 팔아버리자! 속이 갑자기 시원해졌다. 그런데 이따금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책을 뒤지다가 내가 아는 분의 장서인이 찍힌 책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일괄해 파는 것도 보류할 수밖에.

다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묘안을 생각해냈다. 어느 날 보수동 골목을 걷다가 아내더러 나 역시 정년 후 보수동에서 책방을 하나 내면 되지 않겠냐고 제안을 했다. 집에 쌓인 책에 넌덜머리가 난 아내는 즉각 정말 괜찮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작은 책방에 들러 이런 규모의 가게를 얻는 데 얼마면 되냐고 물어보기도 한다. 그리 많은 돈은 아니었다. 또 내가 가진 책이면 그런 책방 서너 개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황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점잖게 책방에 앉아 책을 읽다가 손님이 오면 책을 챙겨 주면 그만이다.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 책이 안 팔린다고 안달복달할 것도 없다. 친구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그 날 책 판 돈을 가지고 아래쪽 동네, 곧 깡통골목,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으로 건너간다. 구석구석 좋은 술집 천지다.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하루를 마친다. 어떤가. 황홀하지 않은가.

이 기막힌 계획을 주위 교수님들에게 털어놓았더니, 모두들 환호작약하면서 좋은 아이디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여러 교수님들이 자신의 책도 ‘강 교수의 책방’에 내놓을 터이니, 팔아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방을 아지트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대충 계산해 보니, 그 교수님들의 책만 모아도 몇 만 권을 훌쩍 넘는다. 따라서 책의 공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마 이 소문이 나면 다른 교수님들도 동참할 터이고 그러면 ‘강 교수의 책방’은 20~30년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책의 입장에서도 폐가도서에 꽂혀 있다가 소각되는 운명을 맞는 것보다 헌책방의 서가에서 자신을 읽어줄 새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아, 그러고보니 나는 정년 뒤 내 책의 처리와 두 번째 인생의 계획까지 벌써 완벽하게 세웠구나! 행복하여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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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