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강신주 칼럼'에 해당되는 글 50건

  1. 2013.07.08 대중매체의 역설 - 대화의 제스처만 있을 뿐 대화가 사라지고 있는 위험한 시대 (1)
  2. 2013.06.24 국정원 선거개입, 국회와 언론은 어디있나 (1)
  3. 2013.06.10 원자력 발전에 발목 잡힌 우리
  4. 2013.05.27 자본에 모독당한 책의 운명 (1)
  5. 2013.05.13 당신은 지금 생각을 하고 사는가? - 독재시대의 지긋지긋한 업보
  6. 2013.04.29 조용필의 허리 위로 부르고 듣는 음악, 싸이의 하체 음악에 대한 저항 아닐까?
  7. 2013.04.15 의료민영화 외치는 자, 복지 말할 자격 없다
  8. 2013.03.31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논문 표절이 반복되는 까닭 - 놀이를 노동으로 바꾸는 자본의 힘
  9. 2013.03.17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
  10. 2013.02.17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누가 겁도 없이 ‘안티고네’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가?
  11. 2013.01.27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무엇이 우리 선생님들을 부끄럽게 만드는가?
  12. 2013.01.13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지금 우리에게 광장과 밀실은 존재하는가?
  13. 2012.12.30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14. 2012.12.16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왜 당신은 투표장에 가야만 하는가
  15. 2012.12.02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누가 민주주의를 모독하려고 하는가
  16. 2012.11.18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대선 후보들, 고통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은 있나요?
  17. 2012.11.04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노동의 가치
  18. 2012.10.07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19. 2012.09.16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누가 ‘과거를 퉁치자’고 하는가
  20. 2012.09.02 [철학자 강신주의 비상경보기]빚 권하는 사회

지난주 목요일 땅끝마을 해남의 아름다운 사찰 미황사에 다녀왔다. 조계종에서 기획한 출가학교가 열렸기 때문이다. 41명의 20대 남녀가 8박9일 동안 출가학교에 모여들었고, 나도 강사로 초청된 것이다. 도대체 무슨 번뇌와 상처가 그리 심해서 이 아름다운 사람들은 여기에 모여 있을까.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 공양을 마친 뒤, 추적추적 떨어지는 비를 피한 처마 밑에서는 웅장하고 아름다운 달마산이 보였다. 아까 강의를 들었던 몇몇 임시 행자 아가씨들이 반갑게 내게 말을 붙여왔다. 어쩐 일로 출가학교에 들어왔는지 물어보지는 않았다. 상처를 보여줄 때까지 절대로 보여 달라고 해서는 안되는 법이다. 처마 밑에서 그녀들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출가학교에 들어오자마자 스님들이 스마트폰과 돈을 거둬갔다는 것이다.


얼마 전 조사에 따르면 어른들이 하루 평균 4시간 스마트폰을 한다면, 청소년들은 7.3시간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스마트폰에 중독돼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스마트폰을 매몰차게 스님들은 거둬 가버린 것이다. 돈이라면 상관은 없다. 어차피 달마산 기슭 깊은 산골에서 무슨 돈 쓸 일이 있겠는가. 하루이틀 무엇인가 빼앗겨버린 것과 같은 엄청난 금단현상이 있었다고 그녀들은 재잘거렸다. 그렇지만 내가 도착한 목요일에 그녀들은 이미 스마트폰이 없다는 것에 적응된 상태였다. 하긴 그러니 스마트폰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 내게 들려주었는지 모를 일이다. 스마트폰에 시선과 정신을 빼앗긴 7.3시간을 회복한 뒤 그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엇인가를 보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보기 마련이다.



그녀들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달마산을 보았고, 하늘의 구름을 보았으며, 산사를 둘러싼 아름다운 나무들의 움직임에 바람을 보았으며, 아름다운 미황사 경내의 당간지주를 보았을 것이다. 또한 그녀들은 사람들을 보았을 것이다. 출가학교 교장선생님이신 법인 스님, 미황사의 주지이신 금강 스님, 그리고 맛난 사찰 음식을 마련하시는 공양간 사람들. 그 모든 사찰 식구들의 자애로운 얼굴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 자신처럼 출가학교에 들어온 동료들의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순간 그녀들은 대화를 시작하리라는 점이다. 그렇다. 잠수함에 홀로 타서 계기판을 응시하는 것처럼 스마트폰에 빠져 그녀들이 잊고 있었던 것은 바로 대화였던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출가학교에 모여든 20대 남녀

스님에게 스마트폰을 앗긴 다음에야

산·바람·구름을 보기 시작했다

더 중요한 건 대화가 시작됐다는 거다”


스마트폰은 과거 TV가 했던 역할을 고스란히 하고 있다. 화목한 가정의 이미지를 떠올려보자. 식사를 끝낸 가족은 응접실에 모여서 TV 모니터를 보며 웃음을 터트린다. 아마 재미있는 연예프로그램이라도 보고 있나보다. 그렇지만 이 순간 불의의 사고로 TV가 고장나면, 모든 상황은 극적으로 변해버린다. 서로가 너무나 낯설게 다가오고, 고장난 TV 앞에 있는 것이 너무나 어색하게 느껴질 것이다. 아버지는 베란다로 담배를 피우러 가고, 어머니는 빨래하는 것을 잊었다고 화장실에 들어가고, 동생은 갑자기 책을 본다며 자기 방으로 종종걸음을 치고, 누나는 전화할 데가 있다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TV는 가족을 모여 있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금까지 가족을 분열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순간 현명한 사람이라면 TV가 지금까지 가족이 서로 대면하는 시간을 얼마나 빼앗았는지 깨닫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가족을 다시 거실에 모이게 하려고 TV를 고칠 것이다.


대중매체란 항상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서 대화의 가능성을 빼앗는다. 이것은 사실 매체, 즉 미디어(media)의 본질 아닌가. 매개(mediation)란 말이 있다. 그것은 벽돌과 벽돌을 붙이는 시멘트와 같다. 얼핏 보면 벽돌과 벽돌을 연결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벽돌과 벽돌이 직접 만나는 것을 막는 역할도 한다.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매개라는 말이 그렇듯이 모든 매체는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교묘하게 사람들을 분리시키고 고립시키고 있다. 영민한 현대 프랑스 사회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도 자신의 저서 <리듬분석>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미디어화는 대화를 지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영화라는 매체를 생각해보아도 분명하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극장에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희로애락을 표현한다고 해도, 극장 안에서 누구나 고독한 개인으로 머물러 있지 않은가.


(경향DB)


함께 있지만 고독하도록 만드는 것, 공감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하지만 대화는 사라지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대중매체의 본질이다. 이런 대중매체가 드디어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TV는 걸어 다닐 수도 없고, 영화관이 우리에게 올 수도 없었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은 마치 그림자처럼 우리의 손에 잡힌 채 영원히 우리가 살아 움직이는 한 함께할 각오를 다지고 있는 것 같다. 친구와 만나 그 사람에게 집중하기보다 어느 사이엔가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다양한 볼거리와 시시각각 알려주는 정보들에 우리는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그나마 TV나 영화는 외형적으로나마 사람들을 모이게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제 친구와 직접 만나 대화하는 것보다 카카오톡 등 다양한 애플리케이션으로 화면상으로 대화하는 것이 더 편하게만 느껴지니까.


대화하던 친구는 어느 사이엔가 다른 일로 떠날 수 있지만, 스마트폰은 항상 내 손안에 있다. 친구보다 더 친구 같은 존재가 된 것이다. 이제 혼자서도 우리는 외롭지 않다. 스마트폰이 나와 함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타인을 그리워하는 고독의 시간마저도 스마트폰은 고맙게도 허락하지 않는 셈이다. 이제 어느 사이엔가 스마트폰은 우리의 제2의 심장이 된 것 같다. 스마트폰의 충전 게이지가 줄어들면, 우리의 심장도 그만큼 쪼그라든다. 밥을 잠시 굶더라도 우선 스마트폰부터 살려야만 한다. 스마트폰마저 나와 함께 숨쉬지 않는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는 고독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가 알까. 바로 그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대화를 빼앗으면서 고독을 선사했는데도, 고독을 완화시키고 있다는 착시효과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대화를, 그러니까 친구를 빼앗고 그 자리에 파렴치하게 들어앉았음에도, 자신만이 유일한 친구라고 우리를 속이는 것이 바로 스마트폰이다. 이렇게 우리 아이들을 자그마치 하루 7.3시간이나 병들게 만드는 스마트폰을 방치하는 것은 정당한 일일까. 미황사의 임시 행자들에게서 발견한 서로를 바라보는 해맑은 미소와 재잘거리는 대화 소리에서 우리는 작지만 커다란 지혜를 배워야 한다. 출가학교가 고독한 수행의 장소가 아니라 되찾은 대화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 너무나 아이러니한 일이다. 출가가 인간을 만나 대화하는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스마트폰을 없애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자연과 만나고 인간과 대화하는 제2의 미황사가 되는 것 아닐까. 출가학교를 운영하는 법인 스님이나 금강 스님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합장!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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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불쌍하다. 알량한 도로교통법으로 헌법에 보장된 집회결사의 자유를 막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위 법률이 헌법에서 보장된 민주주의 정신을 부정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 우리는 남루하기까지 하다. 자신의 통행을 가로막는다고 혹은 약속 시간에 늦었다고, 시위대 앞에서 욕설을 퍼붓거나 경적을 울리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소연할 곳이 없어서 공동체의 다른 성원들에게 힘을 모아달라는 시위를 부정하는 순간,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토로할 공간 자체를 없애고 있다는 사실을 알까. 모든 사람에게 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이 시위를 할 수 있는 자유를 쟁취하는 지름길인데 말이다. 우리 공동체의 존망과 관련된 너무나도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민주주의의 이념 자체를 부정하는 사건이니, 독재자 전두환의 재산을 환수하는 일이나 축구 국가대표 감독을 선임하는 문제보다 수백, 수천 배나 중요한 사건이다. 


국가정보원이 선거에 개입한 사건,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이건 헌법 정신을 교묘하게 제약하는 하위 법률을 만들어 아쉬우면 헌법재판소에 하소연을 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입법 폭력보다 더 질이 나쁜 사건이다. 어쨌든 입법 폭력은 형식적이나마 최소한의 합법성을 갖춘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은 그냥 민주주의를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야만일 뿐이다. 최종적으로 국민의 통제를 받아야 할 공권력이 국민을 통제하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독재이고 권위주의가 아닌가. 워터게이트 사건이 뇌리에 떠오르는 것은 단지 필자만일까.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에서 벌어졌던 공권력의 선거 개입 사건으로, 민주주의의 보루를 자처하던 미국의 모든 시민들은 당혹감을 넘어 분노의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대통령 닉슨의 사임으로 민주주의가 받았던 모욕과 상처는 조금이나마 치유될 수 있었다. 하긴 행정부의 최고 수장이 책임지지 않으면 누가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1974년 대통령 사임 의사를 표명하고 있다. (경향DB)


뭐 복잡하게 먼 나라 미국의 사례를 생각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경우에도 이승만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든 3·15 부정선거 사건이란 아픈 기억이 있지 않은가. 이승만과 닉슨의 차이는 이승만이 권좌에 쫀쫀하게 연연하다가 4·19혁명이란 국민적 저항에 직면해 하와이로 도망갔다는 것뿐이다. 어느 경우든 공권력의 선거 개입은 민주주의와 헌법을 수호한다고 취임 선서를 했던 최고 통치권자가 책임을 져야만 나름대로 미봉될 수 있는 중차대한 사건이다. 지금 국정 최고 통치권자가 책임져야 할 시급한 사건, 아이러니하게도 국가보안법에 걸릴 만한 사건이 다시 벌어진 것이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짓밟은 사건만큼 국가를 위기에 빠뜨리는 사건이 또 있을 수 있을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기 때문이다. 국가정보원 선거 개입 사건은 이렇게 비유해도 좋을 것 같다. 집을 지켜야 하는 개가 주인을 지키기는커녕 자신에게 먹을 것과 잘 곳을 제공한 주인을 물어버린 꼴이다. 민주주의를 지키는 성곽이 갑자기 사라진 꼴이다. 이제 국회의원들이 나설 차례이고, 언론이 나설 차례가 된 것이다.


개가 왜 주인을 물었는지 정확하게 원인을 진단하고 다시는 이런 미친 짓을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민주주의 정신을 추스를 때다. 당연한 일 아닌가. 국회의원들은 행정부의 공권력을 감시하라고 선출된 대표자들이고, 언론은 행정부·입법부·사법부 등 권력기관이 국민을 제대로 대표하고 있는지 알려주어야 하는 신성한 임무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민주주의와 양립 불가능한 야만

워터게이트 사건 땐 닉슨 사임

국회의원·신문·방송·포털들

시민이 나서기 전에 움직여야”


그렇지만 상황은 이상한 식으로 돌아가고 있다. 몇몇 국회의원들은 다시 양비론을 조성하고, 부창부수격으로 유력 포털사이트나 주류 언론들도 민생 등의 경제적 사건이나 전두환 재산 환수 등 사회적 사건으로 쟁점을 희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국가정보원과 긴밀히 연결된 수권 정당 국회의원들의 모습은 실망스럽지만,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그러려니 무시하도록 하자. 당·정·청 회의라는 명목으로 항상 수권 정당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대변하기보다 최고 통치자의 통치 행위에 대한 암묵적인 지지나 동조를 당연한 자신의 임무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국민과 민주주의를 위해 행정부를 감시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마저 방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문제는 유력 포털사이트나 주류 언론들이 보이는 행태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은 민주주의 이념과 정신으로 사건과 사실의 우선순위를 정해야만 한다. 지금 유력 언론들은 보수 사학계의 학자들과 비슷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일부 사학자들은 일제시대와 독재 시절의 사건과 사실들 중 경제 발전으로 삶의 질이 상승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들만 선정하여 당시의 정치적이고 정신적인 억압상을 희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특정 사건이나 사실들에 주목할 때, 이미 특정한 선이해가 전제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포털사이트의 검색 우선순위를 보라. 혹은 유력 신문들의 헤드라인을 보라. 최고 통수권자의 사임까지도 가능한 중차대한 사건을 다른 쟁점으로 희석시키거나, 혹은 논점을 다른 식으로 변질시키고 있지 않은가.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되었을 때, 가장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들이라는 사실을 언론은 알고나 있는 것일까. 


국가정보원이 교묘한 선거 개입으로 국민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과 지금 주류 언론들이 논점 이탈이나 쟁점 희석화의 전략으로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으려는 것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민주주의의 가치가 훼손되는 순간, 언론출판과 집회결사의 자유는 근본적으로 위험에 빠질 수밖에 없다. 결국 유력 포털사이트나 주류 언론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목을 조르고 있는 중이다. 아니다. 어쩌면 이미 죽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에 맞서 싸우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다면, 이미 언론들은 정부기관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 지금 국회의원도 언론도 민주주의 정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아니 우롱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행정부의 공권력이 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했는데도, 국회나 언론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 시민들이 직접 나설 수밖에. 아주 오랜만에 우리 대학생들이 시국선언을 시도하고 있고, 다양한 시민단체와 양심 있는 시민들도 자발적으로 민주주의를 위기에서 구하려는 청년들의 움직임에 동참하려고 한다. 결국 민주주의의 최종 보루는 우리 시민들의 단결된 힘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민마저 위기에 빠진 민주주의를 구하지 않는다면, 다시 권위주의의 시대가 도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시민들이 직접 나서는 순간, 국회의원들은 그리고 언론인들은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물러나야만 할 것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앞에서 자신의 소임을 제대로 방기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그 죄를 씻으려는지.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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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력 발전이 휘청거리고 있다. 그렇지만 제대로 휘청거린다기보다는 묘하게 휘청거리고 있다. 한편에서는 거듭되는 크고 작은 원전 사고로 전력 수급이 당장 위태롭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원자력 발전의 핵심 부품이 부실 검사로 채택되었다는 더 위험천만한 이야기도 오가고 있다. 어느 경우이든 원전이 잘 돌아야 전력 수급이 차질이 없을 것이고 나아가 핵심 부품을 제대로 검사했다면 원전은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로 하는 논의일 뿐이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우리는 너무 쉽게 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니까 원전과 관련된 최근 쟁점들은 원전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휘청거리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다는 것이다. 제대로 휘청거린다면 이번 여러 일련의 사고로 원자력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되물어보는 계기도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일본 후쿠시마시 대피소에서 아이가 방사성물질 측정을 받는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다. (AP연합)


사실 원자력과 인간 사이의 문제는 자본과 인간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고효율의 원전을 욕망한 것이 아니라, 자본이 그것을 욕망했기 때문이다. 이윤 추구란 자본을 작동시키는 결코 종식시킬 수 없는 강박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윤 추구 과정에서 생기는 절망적인 부수 효과도 자본은 거침없이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 산업자본의 메카인 공장은 인간에게 환경오염이라는 심각한 불이익을 가져다주었다. 그렇지만 산업자본은 자신의 무분별한 팽창을 반성하기는커녕 환경오염을 새로운 이윤의 창구로 활용할 정도로 기민하다. 깨끗한 물과 깨끗한 공기도 이제 훌륭한 상품으로 변했으니까 말이다. 깨끗한 물과 공기를 제조하느라 물과 공기가 더 오염되는 것도 자본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이윤 추구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순간의 효율을 강조하는 자본주의의 생리상 원자력 발전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풍력 발전, 지력 발전, 태양 에너지 등등 대체 에너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효율이 문제인 셈이다. 자본주의는 이윤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내는 본능적인 후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은 결코 대체 에너지에 얼굴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원자력 발전의 경제성이 현저하게 떨어지지 않는 한, 자본은 집요하게 원전의 효율성에 자신의 몸을 맡기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체르노빌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그렇게도 쉽게 은폐되어 망각에 이르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당장 원전 사고 현장을 방문해보라. 원자력 발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인간의 삶에 위험한 것인지 명백히 체험하게 될 것이다. 원전 사고는 과거에 일어났던 사고가 아니라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직감할 테니까 말이다.


그렇다. 원자력 발전은 단순한 효율의 문제를 넘어서는 인간의 삶, 혹은 생존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니 잘못된 문제 설정에 속아서는 안 될 일이다. 원전이 낙후되어 자꾸 멈추어 전력 수급에 차질이 발생하는 것이 핵심 문제가 아니다. 나아가 원전에 부실한 핵심 부품이 사용되었다는 것도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아니 누구나 이런 표면적인 문제 이면에 더 큰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원자력 발전은 항상 인간의 통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은 수력 발전이나 풍력 발전, 혹은 조력 발전과는 달리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질 때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한다. 한마디로 발전소라는 외관을 갖춘 원자 폭탄인 셈이다. 그러니 자꾸 원전이 작동을 멈추었다는 소식을 들을 때, 혹은 원전에 불량 부품이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의 전신에는 한줄기 서늘함이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방치해오다

줄잇는 사고에 휘청거리는 원전

‘후쿠시마의 비극’ 망각한 건 아닌지

이제 후손들을 위해 답을 내려야 할 때”


이런 서늘한 한기는 원자력 발전이라는 근본적인 불안 요소를 우리의 삶에서 제거하지 않는다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선택할 때가 아닌가. 효율이라는 미명 아래 원전을 계속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뿐만 아니라 후손의 삶을 위해 원전을 점진적으로 폐기할 것인가? 그런데 우리는 아직도 정부가 주장하는 효율의 논리에 휘둘리고 있다. 어쩌면 전기 수급의 불안정 상황이 원자력 발전의 위험성보다는 원자력 발전이 가져다주는 이득에 우리의 시선을 묶는 역할을 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불볕더위에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는 불편함, 혹은 결정적인 순간 단전이 되어 발생하는 생활의 불편함이 초래될 테니까 말이다. 바로 이 부분이다. 원자력 발전의 이득이 우리 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원자력 발전이 표방하는 효율의 논리만큼 인간적인 가치에 적대적인 자본의 가치가 가장 노골적으로 관철되는 곳도 있을까. 순간의 이득에 연연할 때, 우리는 자본주의에 완전히 길들여져 원자력 발전을 긍정하게 될 것이다. 반면 우리와 후손들의 안정적인 삶을 걱정한다면, 그래도 우리에게는 아직도 희망은 남아 있다. 인간의 가치가 그래도 자본의 가치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은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를 가늠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시험석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삶의 편리함만을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을 넘어서 전체 공동체 나아가 인류의 삶을 생각할 것인가. 혹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물어도 좋다. 체르노빌이나 후쿠시마의 비극을 방치할 것인가, 아니면 효율이 떨어지더라도 비극의 씨앗 자체를 제거할 것인가.


앞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안정된 삶의 조건을 물려줄 의무가 있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자식들에게 고통을 선사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분명 원전이 줄어들고 장기적으로 원자력 발전이 폐기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많은 불편함이 찾아들 것이다. 이런 불편함을 감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이윤을 확보해주겠다는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제 불편함 정도는 기꺼이 감내하도록 하자. 순간의 불편함은 심할지라도 그 열매는 무척 달 테니까 말이다. 지상에서 우리가 사라진다고 해도 이 지상에 사라지지 않을 희망과 행복을 심었다는 것만큼 보람찬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방진 마스크 쓰고 원전반대 기자회견(경향DB)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원자력 발전을 막을 수 있는가 막연하기만 할 것이다. 그렇지만 적을 알면 적을 이길 수 있는 법이다. 원자력 발전을 추진하는 정부나 자본의 논리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저항을 통해 원전 발전 비용을 급격하게 올리는 것밖에 없다. 정부나 자본의 최종 잣대는 효율일 테니까 말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자신이 가진 편리함과 기득권을 일정 정도 내려놓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원자력 발전이란 치명적 위험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인류애적 용기와 실천적 의지로 무장해야만 한다. 이런 용기와 실천을 갖출 때에만 우리는 다음 세대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어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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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일이다. 매출액 기준으로 5위 안에 들어가는 거대 출판사에 강의를 하러 간 적이 있다. 출판사 직원들에게 인문학 특강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은 것이다. 저자로서 어떻게 출판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강연하기에 앞서 이미 나와 책을 함께 만들었던 편집자가 출판사의 최근 동향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충격이었다. 마케팅을 담당하는 직원이 출판 기획회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 때문이었다. 당장 5000부 이상 나갈 책이 아니면 기획회의에서 말도 꺼내기 힘들다는 푸념을 들었다. 


이런 식이라면 니체와 같은 위대한 철학자가 나타나도 출간 제안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경우 3년이 되어도 판매량이 200권을 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당시 니체가 자신의 주저를 출간하지 않았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담겨 있는 니체의 자유정신을 어떻게 지금 우리가 맛볼 수 있었겠는가. 


순간적으로 잘 나가는 책이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도 아니고, 순간적으로 별로 반응이 없는 책이 영원히 잊히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모든 베스트셀러들이 스테디셀러, 즉 고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바꾸어 말해도 좋다. 마케터가 출판 기획회의에 참여하는 순간, 아니라면 출판사 사장이 마케팅 마인드로 출판을 결정하는 순간, 베스트셀러들은 나올 수는 있지만 고전들이 나오기는 어려운 법이다. 독자들이 원하는 책을 만들면 베스트셀러가 탄생하기 쉽다. 그러니 소비자의 취향과 요구를 읽어서 그에 영합하는 상품을 내놓으려는 마케터의 논리, 그러니까 자본주의 논리가 힘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책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출판사라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출판사도 경쟁적으로 자본주의 논리를 채택하고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우연히 만난 인문 출판사 사장이 지금까지 미망에 살다가 갑작스럽게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처럼, 혹은 자신이 모던한 경영 기법이라도 배운 세련된 오너로 거듭나기라도 한 것처럼, 마케팅의 논리를 설파하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구역질이 나는 것을 애써 참는다. 


몇 년 전 어떤 편집자가 내게 제안했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이 쓰고 싶은 책을 쓰세요. 대신 제목만 제가 달도록 해주세요. 인문 서적으로 분류되지 않고 경영과 처세 서적으로 분류되어야 하니까요. 최소 10만 권 이상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독자들의 사유를 깨우고, 자신의 삶 나아가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고민하도록 만들어야 하는 인문 저자에게 돈을 위해 글을 쓰라는 제안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뿐이었다. 저자도 이렇게 모독하는 데 그 편집자가 독자들을 세치 혀로 어떻게 모독할지는 명약관화한 일 아닌가. 



일러스트 _ 김상민

▲ “돈의 논리에 잠식당해 가는 출판계

사재기는 ‘저자와 독자의 관계’ 왜곡

인간의 사유를 깨우는 것이 좋은 책

인문 출판사들, 책의 본령 되새기길”


책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수많은 책들이 오늘도 쏟아져 나오지만, 책이라는 외양만 갖고 있는 상품도 있고 동시에 책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책도 있다. 상품으로서의 책은 독자들에게 원하는 정보를 주거나 아니면 재미를 주는 것이다. 반면 책으로서의 책은 독자들을 불편하도록 만들어 사유를 자극한다. 위대한 작가가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유는 새디스트적인 취향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들, 그러니까 이웃들과 후손들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좋은 말은 귀에 거슬린다는 말이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지만 입에 쓰지만 몸에 좋은 약을 기꺼이 먹거나 혹은 귀에 거슬리는 말을 기꺼이 듣는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이것이 바로 진정한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기 어려운 이유, 혹은 잘해야 고전의 반열에 올라 스테디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긴 누가 자신에게 아첨하는 책,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똥구멍을 핥는” 책이 아니라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책을 좋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다행인지 불행인지 상품으로서의 책은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모든 종이 매체가 그렇듯이 통신과 영상 기술의 발달은 정보와 재미를 제공하는 책의 기능을 현저히 축소시키고 있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열면 필요한 정보나 재미를 충분히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책으로서의 책은 결코 수명이 다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다하지 않아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을 깨우려는 노력이 멈추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어떤 소망스러운 미래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e북의 형태를 취하든 무엇이든 간에 자본보다는 인간적 가치에 무게를 두는 책은 계속 나와야 한다. 우리 공동체가 탁류처럼 되더라도, 작으나마 맑은 샘물 한 줄기라도 흘러들어야 그나마 완전히 썩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바로 여기에 문학, 철학, 역사 등 인문 저자와 출판사들의 존재 이유가 있다.


어느 대형 작가와 관련된 사재기 사건은 아직 충격의 여파가 가시지 않고 있다. 물론 여러 사건들에 묻혀 그 충격을 어느새 잊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그 충격의 상처를 아프게 아로새겨야만 한다. 저자와 독자, 그러니까 책을 매개로 만나야 하는 인간관계를 왜곡한 사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출판사에 의해 일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베스트셀러만 만들면 된다는 장사치에 가까운 출판사가 아니라, 인문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문학을 표방했던 출판사가 저지른 사건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탁류를 정화시키는 작은 샘물마저 오염된 꼴이니까 말이다. 저자와 독자를 이보다 심하게 모독하는 경우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돌아보면 출판사 탓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저자나 독자가 책의 정신을 올바르게 세우고 있었다면, 과연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자본에 모독당한 출판사가 내건 베스트셀러라는 유혹에 저자나 독자들도 모두 매혹되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문 저자나 출판사들에 이익을 버리고 자선 사업을 하라는 것은 아니다. 애써 집필한 책이나 출간한 책이 많이 팔려서 수익이 증가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얻어진 수입은 일차적으로 책의 정신에 독자들이 많은 공감을 표시했다는 증거, 다시 말해 아이를 돌보듯이 정성들여 집필했고 출판했던 책을 독자들도 사랑했다는 증거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가장 보수적인 사상가라고 비판되기도 하는 공자(孔子)마저도 말했던 적이 있지 않은가. “녹재기중(祿在其中)!”, 그러니까 “봉록은 그 사이에 있다”는 말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학문을 언제까지 배워야 출세해 돈을 잘 벌 수 있는지를 묻자, 실망감을 간신히 이기고서 공자가 제자들에게 한 말이다. 공자도 돈, 그러니까 봉록을 부정한 적은 결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때 발생하는 부차적인 효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인문 저자들도 그렇지만 인문주의를 표방하는 출판사 사장도 반드시 아로새겨야 할 가르침 아닌가.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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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은 의무다. 한나 아렌트의 말이다. 생각은 또한 의지다.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다. 생각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능력이 아니라 하나의 의무이자 의지라니. 당혹스럽겠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인 권력과 경제적인 기득권 앞에서 우리는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기조차 힘들기 때문이다. “저건 아니지”라는 생각을 표현했다가는 엄청난 불이익이 생길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우리는 생각을 쉽게 포기하는 쪽을 선택한다.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권력자의 생각을 그대로 답습하는 편이 일신의 안전에 훨씬 유리하다는 무의식적인 판단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짐승이 된다. 자신의 안전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만 하는 인간일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 안타까움에 탄식이 멈추지 않는다. 20세기 대부분을 우리는 생각의 권리를 허용하지 않았던 야만적인 권위주의의 지배에서 허덕였기 때문이다. 20세기 전반기를 어둡게 만들었던 일본 식민지 시기로도 모자랐던지, 20세기 후반기는 군사독재의 군홧발에 의해 더럽혀졌다. 힘이 모든 인간적 가치를 억압했던 시대를 산다는 것은 남루하고 서글픈 일이다. 그렇지만 모진 것이 삶인지, 암울했던 시대에도 삶은 지속되어야 했다. 20세기 전반기에 굴욕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은 하나둘 이 세상을 허무하게 떠났지만, 1970년대 유신독재 시절에 유년기나 청년기를 보냈던 사람들은 이제 어느 사이엔가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했다. 개발독재의 추억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배를 곯지 않게 해준 아련한 전설로 남아있지만, 우리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당시 대학을 다니면서 유신체제의 중심부에 들어가려 했으며, 마침내 그 뜻을 이룬 사람들이다.


지금 사회 지도층으로 성장한 그들이 권력의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한 가지 치러야 할 치명적인 대가가 있었다. 그것은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과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독재체제의 정점에 있는 독재자는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혼자서 판단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자신의 생각을 ‘근면하고 성실하게’ 이행하라고 요구했기 때문이다. 최고권력자의 생각일지라도 그것이 전체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단호히 거부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생각의 의무와 의지를 관철하려는 민주시민의 태도이다. 그렇지만 독재체제의 권위주의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결국 대다수 국민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보다는 독재자 일인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이 출세의 관건이 된 것이다. 이렇게 유신시절 대학을 다니며 관계나 법조계에 들어갔던 젊은이들이 어느 새 자신의 분야에서 정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현 정부가 내각을 구성할 때 우리가 장관 후보자들의 비윤리성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공동체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청장년기를 보낸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 노골적으로 말해 유신시절 사법시험을 보려 했던 사람들에게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어떤 윤리성을 바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떤 관료’라는 시에서 시인 김남주도 말하지 않았던가. “관료에게는 주인이 따로 없다!/ 봉급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다!/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이 그 주인이듯. (…) 아프리칸가 어딘가에서 식인종이 쳐들어와서/ 우리나라를 지배한다 하더라도/ 한결같이 그는 관리생활을 계속할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서글픈 굴곡을 이처럼 갈파한 시가 또 있었던가. 


개는 개밥을 주는 사람이 도둑인지 살인자인지 신경 쓰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맛난 개밥을 주느냐의 여부다. 그래서 “개에게 개밥을 주는 사람은 바로 그 주인이라고” 김남주 시인도 조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사람이 개일 수 있다는 말인가. 불행히도 독재시절의 입신양명은 스스로 개로서 살기로 작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스로만 개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해도, 개로 자처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 너무나 큰 해악을 끼치게 된다. 개가 아니라 인간으로 살려고 버티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기 때문이다. 주인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의 열등감 때문에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동료와 후배들을 보면 불쾌감, 아니 모욕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주인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면서 개밥을 챙겨왔던 사람들

주인 명령이 없을 때 그들에게 남는 것은

동물적인 쾌락과 향락, 그리고 권력욕뿐”


인간으로 혹은 민주시민으로 당당히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사람들은 개가 되어버린 사람으로서는 불쾌하기 그지없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들의 당당함은 개가 되어버린 사람에게 자신이 지금 개로서 살고 있다는 냉정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니까 말이다. 더군다나 권력 앞에서도 당당한 타인이 자신의 처자식이거나 후배들이라면, 한마디로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라면 그의 불쾌감은 하늘을 찌르게 될 것이다. 이런 불쾌감을 지우기 위해서일까. 개로 자처한 사람은 당당한 인간들을 모두 개로 만들려고 한다. 권력자에게 비굴한 사람들이 항상 자신의 후배들에게도 비굴함을 강요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자신만이 개로 전락할 수 없으니, 모든 사람들도 개로 전락해야만 한다는 식이다. 권력자에게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이 있을까. 자신의 개가 모든 사람들을 개로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하니 말이다.


최근 사회 지도층들의 후안무치와 안하무인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이다. 그들은 주인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면서 개밥을 챙겨왔던 사람들, 타인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생각의 의무와 의지를 저버린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을 이렇게 만든 가장 큰 원인은 과거 유신시절로 상징되는 권위주의적 사회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유신시절을 거쳤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그들처럼 개가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렇다. 우리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자신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정당한지, 그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반성해야만 했을 것을 반성하지 않아서, 생각해야만 했을 것을 생각하지 않아서, 그들은 지금 그 자리에 와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의 명령이 없을 때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동물적인 쾌락과 향락, 그리고 누군가에게 군림하려는 권력욕뿐이다. 이미 머리는 권력자에게 넘겨주었으니 남은 것은 알량한 몸뚱이와 동물적 욕망일 수밖에. 여기서나마 힘을 행사하지 못한다면, 개로서 살아가는 삶은 너무나 남루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떤 사람은 부동산 투기를 하고, 어떤 사람은 위장전입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접대에 몸을 맡기고, 어떤 사람은 성추행도 서슴지 않는 것이다. 어쨌든 개는 주인을 제외하고 누구도 무서워하지 않는 법이다. 온 시민에게 수치심을 심어준 사건에도 주인에게만 꼬리를 내리는 개들의 모습을 보라. 언제나 우리는 유신시절의 악업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민주주의를 모욕하는 이런 개판이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강신주 |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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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을 것이다. 잠시 혼절해서라도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잊으려고 할 정도로 고통은 참혹하기만 하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따뜻한 위로가 쇄도할 것이다. “그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예요” “인생이란 어차피 이별 아닌가요. 이별이 조금 일찍 왔을 뿐이에요” 등등. 그렇지만 고통이 완화되기는커녕 그들의 위로가 위선적으로 들리기까지 한다. 그러니 겉으로 고맙다는 말은 하지만 속으로는 “당신처럼 행복한 사람이 나의 고통을 헤아릴 수나 있을 것 같나요”라고 절규하기 십상이다. 이럴 때 자신보다 더 큰 상처와 고통을 가진 친지가 찾아오면 상황은 전혀 달라진다. 그는 다른 사람과는 달리 그저 묵묵히 눈물을 비치며 우리의 손을 꼭 잡을 뿐이다. 이런 고통에 무슨 말로 위로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저 손을 잡아주거나 묵묵히 옆에 함께 있어주는 것밖에.


바로 여기에서 인간의 놀라운 진실이 발견된다. 더 큰 고통을 경험했던 사람만이 그보다 적은 고통을 겪는 사람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진실 말이다. 자신보다 앞서 모든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을 겪은 친구의 속삭임처럼 우리 곁에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그래서 음악은 삶이 피폐했을 때 우리에게 더 없이 소중한 벗이 되어왔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음악을 만드는 예술가들을 사랑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나 환희에 보편적 의미를 부여하여 그것을 매혹적인 선율로 우리에게 들려주기 때문이다. 천둥벌거숭이 친구들보다는 때때로 음악이 백배나 더 힘이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랬었다. 유재하와 김광석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우리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의 친근한 친구였던 적이 있었다.


모든 예술가들처럼 한때 우리 음유시인들에게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당연한 일이 아닌가. 자신의 진솔한 감정을 토대로 노랫말과 선율을 만들면, 스타일이 발생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그래서였을까. 1990년대까지 매해 압도적인 인기가수나 인기곡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대중은 자기만의 음유시인을 가질 수 있고, 그에 따라 궁핍하나마 우리 음유시인들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의 열풍이 거세지면서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이제 음악도 산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음악이 수단으로 전락하고 돈이 목적으로 등극한 것이다. 물론 과거 우리 음유시인들도 돈을 벌었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돈보다 소중했던 것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자기의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것이었다. 당연히 그들에게 돈은 자신의 노래를 얼마나 대중이 사랑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을 뿐이다.


2000년대 들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이제 가수들은 자기만의 스타일이 아니라 대중의 취향이나 욕망에 영합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제 노래는 수단이고 돈은 지상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이런 음악 산업화의 중심부에는 재계의 재벌 흉내를 내는 거대한 기획사가 똬리를 틀고 있다. 이제 가수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스타일을 헌신짝처럼 버려야만 한다. 기획사는 음악소비자들의 욕망을 정확히 읽고 있고, 거기에 맞춘 노래를 가수들에게 공급할 테니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만의 고유한 스타일은 장애만 될 뿐이다. 너무나 강한 스타일과 개성은 대중음악이 대량 소비되는 데 장애물로 기능할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스타일과 개성의 실종이란 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우리나라를 넘어 세계를 휩쓰는 싸이의 리드미컬한 ‘하체 음악’

그러나 조용필의 낭만적 감성을 대중은 여전히 갈구하고 있었다”


개성 있는 예술가들이 많을수록 대중은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라 나름대로 개성을 가진 존재로 분화할 수 있는 법이다. 이것은 음악 하나를 만들어 대량 소비시키려는 기획사로서는 여간 못마땅한 일이 아닐 것이다.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한다면 기획사는 대중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부할 수 없는 공통적인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여기서 마침내 허리 아래로 부르고 듣는 음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가장 원초적 욕망, 그것은 바로 섹스다. 아직도 금기시되고 있기에 섹스에 대한 욕망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일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모든 사람의 정신과 영혼은 나름대로의 역사와 고유성을 가진다는 자명한 사실은 무시될 수밖에 없다.


마침내 허리 위로 부르고 듣는 음악, 그래서 각 개인만의 고유성에 호소하는 음악은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최근 10여년간 얼마나 많은 아이돌 그룹이 허리 아래를 흔들며 우리의 아랫도리를 자극했는가. 이제 하체와 하체가 교감하는 음악이 주도적인 대중음악이 된 것이다. 하체와 하체 사이에서 공명하는 음악은 세대, 언어, 그리고 역사를 가로지르는 놀라운 힘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청소년 팬뿐만 아니라 삼촌 팬마저도 생길 수 있었고, 우리나라를 넘어서 미국이나 영국, 호주, 중국, 일본 등등 세계인들의 하체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싸이의 리드미컬한 하체가 상징하는 것이다. 그것이 말춤이든 혹은 시건방춤이든지 간에 말이다.


(경향DB)


“있잖아 말이야/ 너의 머리 허리 다리 종아리 말이야/ Good! feeling feeling? Good!/ 부드럽게 말이야/ 아주 그냥 헉소리나게 악소리 나게 말이야.” 최근 다시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젠틀맨’에 실려 있는 가사 중 일부분이다. 지금 직면하고 있는 이성의 고유한 개성이나 역사를 읽는다는 것은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그러니 육체에만 주목하라. 그렇다면 남녀관계의 모든 곤란은 사라지고 ‘쿨’한 혹은 ‘굿’한 전망만이 남게 될 테니까. 그렇지만 자신뿐만 아니라 타자도 육체로 모두 환원되지 않는 어떤 고유성이 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이런 자각 때문일까.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60이 넘은 어느 노가수의 노래가 갑자기 주목을 받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단순한 주목 정도가 아니라 실질적인 앨범이나 음원 구매로까지 이어지는 열기다.


“이런 날이 있지 물 흐르듯 살다가/ 행복이 살에 닿은 듯이 선명한 밤/ 내 곁에 있구나 네가 나의 빛이구나/ 멀리도 와주었다 나의 사랑아.” 가수 조용필의 19집 앨범에 실려 있는 ‘걷고 싶다’라는 노래 가사 중 일부분이다. 인생의 동반자가 생겼다는 행복, 나에게 삶의 빛을 비추어준 사랑하는 사람을 기리는 노래다. 탁월한 발라드 가수의 노래답게 서정적인 가사와 선율이 돋보인다. 오래된 연륜에서 나온 세련됨을 가지고 있지만 분명 우리 노가수의 노래에는 소년을 연상시키는 목가적인 낡은 감성, 현실에서는 여지없이 좌절될 수밖에 없는 낭만적 감성이 깔려 있다. 그럼에도 왜 지금 다시 조용필인가? 하체로 부르고 듣는 노래가 지배적인 지금에 대한 대중의 무의식적인 저항이나 거부 반응은 아닐까. 그래서 아이돌로 시작되어 싸이로 정점을 찍고 있는 하체로 부르는 수많은 노래의 범람 속에서,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는 조용필의 노래는 새롭다는 기묘한 시차(parallax)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지.


(경향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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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生老病死)! 불교에서 인생은 이 네 글자로 간단히 요약된다. 그렇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그리고 마침내 이 세상을 떠난다. 물론 우리의 삶이 이 네 가지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 불행하고 궁핍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우리 삶이 살아낼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는 생로병사 사이에 벌어지는 다채로운 일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도 하고, 여행도 떠나며, 맛있는 음식도 먹고, 음악도 듣고, 스포츠도 즐기고, 직장에서 일을 하고, 책도 본다. 그럼에도 불교에서는 왜 생로병사로 삶을 요약한 것일까. 그것은 생로병사가 우리 삶의 행복을 위태롭게 만드는 하나의 한계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생로병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생로병사에 맞닿아 있는 순간, 우리에게 삶 자체를 향유한다는 것은 하나의 사치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누구나 겪는 생로병사의 경험이 최근에는 동일한 장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 병원이다. 그렇다. 우리는 병원에서 태어나고, 늙거나 병들면 병원을 찾는다. 그리고 마침내 병원에서 우리는 기구한 운명을 마무리한다. 한쪽에서는 새로운 생명체가 태어났다고 환호하고, 다른쪽에서는 수술실 앞에서 가족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그리고 또 다른쪽에서는 고인의 영정을 모시고 유족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있다. 이곳이 바로 병원이다.


생로병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무엇보다도 먼저 개구리나 벚꽃 아니면 병아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가진 생명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다. 이런 한계에 직면할 때, 그러니까 태어나거나 늙거나 병들거나 아니면 죽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만의 힘으로 한계와 맞서야만 한다. 그 누구도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생로병사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의 고독한 싸움은 덜 외로울 수도 있다. 병원은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거대한 극장인 셈이고, 그곳의 의료진들은 우리의 생로병사를 지키는 동반자였던 셈이다. 고마운 일이다. 생로병사의 고통에 직면하여 두렵고 외롭기만 할 때, 우리는 병원에서 그나마 작은 평화와 안정을 찾게 되니 말이다.


생명체라면 누구나 겪게 될 고통과 불안도 병원 의료진이 떠안는다는 것은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환자가족에게는 친구보다 더 위로가 되는 곳, 가장 약해질 때 우리에게 힘을 주는 곳, 그래서 가장 인간적이고 따뜻한 곳일 수밖에 없는 곳, 그곳이 병원이어야만 한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어느 누구도 병원을 그런 소망스러운 곳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생로병사의 고통에 동반자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친절하고 더 편안한 동반자를 찾으려면, 우리는 그에 상당한 돈을 의료비로 지불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 자본은 이익이 남는 곳이라면 동물적인 감각으로 찾아내는 법이다. 병원에서도 자본은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배가 너무나 고파 굶어죽을 지경에 이른 사람에게 사과 하나는 천금의 가치가 있다. 당연히 생로병사에 고통받고 불안한 사람에게 천금인들 무엇이 아깝겠는가. 그래서일까. 지금 자본은 우리의 생로병사에서 이윤을 얻으려고 한다. 제약회사, 병원 경영자 등 의료자본가들이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위해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제약회사의 해묵은 리베이트 관행, 의료진에게 직간접적으로 강제되는 과잉진료 관행이 생긴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물론 그 피해는 모두 생로병사에 신음하는 우리 이웃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될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병원은 생로병사가 펼쳐지는 극장…

의료진은 고마운 동반자이지만 의료자본가는 돈만 좇아서 움직여

‘공공의료기관 폐업’ 맞서 싸워야”


다행히도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에게 새로운 의약품, 새로운 진단 기술, 그리고 새로운 수술 장비 등이 여간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거대한 부가가치를 위해 움직이는 의료자본을 반기지 않을 리 없다. 그 정도쯤 구매할 자본은 충분히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런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몇 %나 될까. 대다수의 우리 이웃들에게 그런 고가의 의료서비스는 말 그대로 언감생심의 일일 뿐이다. 물론 의료자본가들은 자신들이 더 큰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새로운 의료 생산물들을 만든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의료 서비스는 언젠가 일부 부유층을 넘어서 가난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갈 것이라고 역설한다. 이른바 ‘트리클다운(trickle-down)’ 효과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사회 부유층이 더 부유해지면,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어 그 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혜택으로 주어진다는 것, 바로 이것이 트리클다운 효과다. 그렇지만 과연 그럴까. 이해를 돕기 위해 바우만(Zygmunt Bauman)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하지만 그와 같은 ‘트리클다운’ 효과는 설령 그것이 과거 어느 곳에서는 실제로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최근에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엘리트 집단이 더 부유해지는 것과 공동체 전체의 삶이 더 안전하고 건강해지는 것 사이의 연관관계는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의 판단력을 흐리는 이런 정치적 선전을 묵과해서는 안된다.” 최근에 번역된 그의 새로운 책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중 ‘건강 불평등(health and inequality)’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트리클다운’ 효과를 신뢰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의료민영화다. 그러니까 이윤이란 자본주의 논리를 의료 영역에도 관철시키자는 것이다. 그를 통해 새로운 의료산업이 발전한다면, 그 결과 새로운 고용 창출과 질 좋은 의료 서비스 제공 등 장기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히 혜택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다시 정치가들의 정치적 레토릭이 전가의 보도처럼 빛을 발하고 있다. 마치 의료민영화는 사람들이 의료에 참여하는 따뜻한 정책인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사실 의료자본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참여정부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부 시절, 그러니까 2003년부터 의료민영화가 본격 논의되었다는 점이다. 보수도 아니고 진보를 자처했던 당시 정부가 트리클다운 효과를 맹신하고 있었다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다.


지금 진주에서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진주의료원 폐업 사태다. 이번 사태는 의료민영화라는 보수적 정책을 그 문맥에 놓고 보아야 그 본질이 드러나는 법이다. 디테일에 속아서 구조적 본질을 놓쳐서는 안될 일이다. 당신은 자본의 가치가 아니라 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공공의료기관을 폐업하려는 시도 자체에 맞서 싸워야만 한다. 돈이 없다고 병원에 가지 못하는 환자와 가난한 환자를 거부하도록 강요받는 의료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병원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고통이 펼쳐지는 곳이고, 그만큼 가장 많은 사랑과 관심이 필요한 곳이다. 이곳을 무시하고 어떻게 복지를 논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인간이 아니라 자본의 편을 들고서도 어떻게 우리 사회가 복지라는 공동체적 이념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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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아이가 게임을 하지 않도록 만드는 방법은 있을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기 위해 우리가 먼저 숙고해야 할 것이 있다. 왜 아이는 그렇게도 게임에 몰두하는가? 글자 그대로 게임은 놀이이기 때문이다. 호이징하(Huizinga)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인간이 얼마나 놀이에 매료되는지 어렵지 않게 납득할 수 있다. 그렇다면 놀이의 어떤 특성이 인간을 그렇게 사로잡는 것일까. 노동과 대조했을 때 놀이는 자신의 특성을 분명히 드러낸다. 철학적으로 노동은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불일치한 것으로, 놀이는 반대로 행위의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의 음주는 놀이일 수 있지만, 직장 상사와의 회식자리나 아니면 거래처 사람과의 회식자리에서 음주는 노동일 수밖에 없다. 친구 사이에서 음주 행위는 그 자체로 수단이면서 동시에 목적이지만, 업무상 이루어지는 음주 행위는 술이 수단이고 친밀한 관계 확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놀이를 좋아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법이다. 어느 누가 거래처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이 경우 음주는 고통스러운 노동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호이징하가 인간을 ‘호모 루덴스’, 그러니까 놀이하는 인간으로 정의내린 것도 다 이유가 있는 셈이다. 인간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동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제 게임에 몰두하는 아이를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분명해지지 않았는가. 게임을 놀이가 아니라 노동으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예를 들어 10만점의 점수를 얻어야 밥을 준다고 어머니가 제안하는 것이다. 이 순간 게임을 하는 행위는 밥을 먹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고, 당연히 게임은 이제 곤혹스러운 노동이 된다. 아니면 지금부터 하루에 5시간씩 반드시 게임을 해서 프로게이머가 되어야 한다고 아이에게 주문해도 좋다. 이전에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에 몰입했던 아이도 5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연신 시계를 쳐다보게 될 테니까.


지금은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가 공동체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까지 지배하고 있는 불행한 시대다. 이제 돈이 모든 행위의 지고한 목적, 거의 유일하기까지 한 목적으로 신격화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를 몰입시켰던 놀이의 영역은 점점 더 줄어들어가고 있다. 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책이 아니라 교재를 읽기 시작한 지도 상당히 오래되었다. 마치 게임처럼 뜬눈으로 밤을 새우게 했던 독서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행위인 반면, 학교나 학원에서 교재를 읽고 암기하는 행위는 더 좋은 상급학교 진학이라는 목적에 종속되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고등학교 공부가 입시라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고등학생들은 젊은 창조성을 잃어버리고 고달픈 지적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하루빨리 그리고 가장 효과적으로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지 않으면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날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놀이는 좋아하지만 노동은 싫은 법

자본의 논리에 대학이 죽자

논문은 지적놀이가 아닌 노동이 되고 스펙·상품이 돼버렸다”


대학 입학이 목적이기에 대학 측에서 학생을 선발할 때 요구하는 것들을 미리미리 준비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학업 성적 증명서, 기타 과외 활동 증명서, 그리고 수학능력 시험 성적 증명서만 갖추면 된다. 이런 증명서들이 입시를 결정하기에 가능한 한 모든 방법이 동원될 여지가 생긴다. 해당 과목에 흥미가 없거나 들키지 않고 부정행위를 하더라도 성적만 좋으면 된다. 과외 활동에 별다른 열의가 없거나 심지어 실제로 하지 않았더라도 과외 활동을 했다는 증명서만 있으면 된다. 흥미로운 일 아닌가. 수단과 목적이 분리되어 그 틈이 더 크게 벌어질수록, 그만큼 비리와 편법이 침입할 수 있는 개연성은 더 커지니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정당한 목적이라도 수단이 정당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주장일 뿐이다. 공부를 지적 놀이가 아니라 지적 노동으로 변질시키지 않았다면, ‘정당한 수단’이란 말 자체가 나올 수도 없었을 테니까 말이다.


지적 놀이의 공간을 제공했던 대학이나 대학원마저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취업이란 절박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이제 우리 대학생들은 자신이 선택한 학과를 평생 즐거움을 줄 수 있는 지적 놀이의 장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전공 영역은 고소득 직업을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대학에서 전공과정은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학문 영역, 그러니까 지적 놀이여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대학에서 독창적이고 비판적인 지성인이 탄생할 수 있는 법이다. 마치 게임을 하는 것처럼 밤을 새워가며 공부에 몰두했을 때 어떻게 창조적인 지성인이 나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마 지적 놀이에 몰입했던 대학생은 어느 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대학원이란 상급학교에 진학하게 될 것이다. 너무나 재미있었던 공부와 연구를 학부 과정 동안에만 국한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까.


지적 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논문과 학위는 하나의 결과물, 그러니까 놀이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에게 논문과 학위는 기쁨의 대상이기는커녕 심지어 슬픔의 대상이기까지 하다. 논문을 쓰고 학위 과정을 마치는 순간, 그래서 마침내 대학이나 대학원을 떠나는 날, 그들은 자신을 매혹시켰던 놀이 영역과 작별해야 하기 때문이다. 힘들었지만 즐거웠던 시간을 추억으로 넘기는 것보다 슬픈 일이 또 있겠는가. 그렇지만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작으나마 존재했던 지적 놀이의 장으로서 대학은 사실상 거의 죽어버리게 된다. 지적 놀이의 결과물에 불과했던 학위가 숭고한 목적으로 승격해버린 것이다. 물론 논문이나 학위가 이렇게 신격화된 이유로는 학위가 일종의 스펙으로 기능한 풍조도 한몫 차지한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자본주의 논리에 편입된 대학 측이 학위를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구매할 수 있는 매력적인 상품이라고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명문대부터 별로 알려지지 않은 대학에 이르기까지 모든 대학의 대학원 과정을 들여다보라. 얼마나 기묘한 대학과 대학원 과정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는지를, 그리고 얼마나 용이하게 학위가 매매되는지를. 학위를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불문율을 믿고 입학은 했지만, 지적 놀이가 아니라 지적 노동으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금까지 수업료 등으로 지출한 비용을 생각하면 논문 작성을 포기할 수도 없는 일이다. 마침내 논문 표절과 대필이 성행할 수밖에 없는 조건은 모두 갖추어진 셈이다. 그래서일까. 이제 아예 논문 표절과 대필 문제는 연례행사처럼 반복되고 있다. 이 와중에 정당한 수단만이 가치 있다는 원론적인 논의나 엄격한 논문 검증 방식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도처에서 들린다. 그렇지만 논문 표절과 대필 사건을 방지하는 유일한 방식은 자본에 맞서서 놀이가 가져다주는 창조적 즐거움을 회복하는 것이다. 수단과 목적이 일치되는 자발적인 행동 앞에서 대필이나 표절과 같은 불미스러운 일은 발을 붙일 수조차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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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그리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 개인으로서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봉건사회의 구조적 압력에 거의 압사 직전에 이른 홍길동의 절규다. 이런 절규를 통해 홍길동은 간접적이나마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생각하고 있고, 형을 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토로한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우리는 허균이 살았던 조선시대보다 더 나은 사회에 살고 있는가. 자주 이런 의구심이 드는 것은 입각을 꿈꾸는 수많은 지식인들이 5·16 군사쿠데타를 쿠데타라고 말하지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 슬픈 것은 5·16에 대해 “답변 드리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달라”는 장관 후보자들의 솔직한 주문이다. 그들은 모두 5·16이 쿠데타라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진실을 공개적으로 토로하지 못하도록 만들었을까.


현대 독일 철학자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 1947년 출생)라면 측은하기까지 한 우리 각료들을 냉소주의의 포로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상황 논리나 자기 보존의 욕망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렇게 행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하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어쩌면 더 못난 사람들이 어차피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새롭게 통합된 냉소주의는 자신이 희생자이고 희생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에게 이해심을 보인다.” 1983년에 출간된 그의 히트작 <냉소적 이성비판(Kritik der zynischen Vernunft)>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볼썽사나운 풍경을 이보다 더 정확히 독해할 수도 있을까. 그렇다. 그들은 자기 보존의 욕망,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더 많이 자신의 이익을 보존하려는 욕망 때문에 진실을 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향신문DB)


그래서 “답변 드리기 어려운 점을 양해해달라”는 부탁의 이면에는 당신도 나의 자리에 있다면 나처럼 할 것 아니냐는 반문이 깔려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당신도 나만큼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냉소주의자 아니냐는 절규인 셈이다. 너무나 슬픈 일 아닌가. 지금 우리는 진실을 토로하면 자신을 보존할 수 없고, 반대로 진실을 억누르면 자신을 보존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내면 속에 어떤 진실을 가지고 있어도 좋지만 그것을 결코 공개적으로 발화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시대의 불문율이었던 셈이다. 하긴 돌아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면접관 앞에서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하는가. 혹은 회사 최고경영자(CEO) 앞에서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하는가. 문중 어른이나 시댁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하는가. 혹은 부모나 선생님 앞에서 우리는 진실을 이야기하는가.


도대체 무엇이 진실을 토로하는 것을 하나의 저주처럼 만들어 놓았을까. 무엇이 진실 은폐를 하나의 삶의 태도로 내면화시켰던 것일까. 어쩌면 그 실마리는 진실이 아니라 허구를 강요했던 100여년에 걸친 반민주적인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제가 우리를 강제로 병합했던 일본 강점기 시절, 우리는 지속적으로 허구를 강요당했다. 이승만 독재시절, 그리고 박정희 독재시절, 나아가 전두환 독재시절까지, 우리는 진실을 말하는 순간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었다. 거의 한 세기에 가깝게 허위를 강요당하면서, 우리에게 냉소주의는 제2의 천성으로 자리를 잡아버린 것이다. 마침내 진실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이제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반드시 검열해야만 하는 저주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생존의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 우리는 진실을 포기하고 허위를 말하도록 강요되기 쉽다. 그래서 IMF 구제금융 사태는 허위를 강요하려는 권력이나 자본에는 더 할 수 없는 기회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권력에 대해 기꺼이 진실을 말하던 대학생들과 파업을 통해 자본에 대해 진실을 관철시키려고 했던 화이트칼라에게 생존이란 중대한 문제가 화두로 던져졌기 때문이다. 이제 이승만 독재에 맞서 싸우던 1960년의 4·19 혁명, 박정희 유신 독재에 저항했던 1979년의 부마항쟁, 그리고 전두환 독재를 무너뜨렸던 1987년의 6월항쟁은 에덴동산의 일처럼 멀기만 하고, 빛바랜 안줏거리나 취기어린 무용담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이제 진실인 줄 알면서도 말하지 못하는 냉소주의가 거대한 정치 영역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미시적 영역에까지 그 촉수를 뻗치게 된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5·16은 쿠데타” “불법 노동행위”

말할 수 있는 작은 용기들이 쌓일 때에만

우리에게는 자기 보존 욕망보다

더 고귀한 공동체의 꿈 깃들 수 있지 않나“


아렌트(Hanna Arendt, 1906~1975)가 그렇게 비판했던 나치 전범 아이히만(Karl Adolf Eichmann, 1906~1962)도 어느 면에서 우리보다 사정이 더 나아 보인다. 히틀러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지만, 관료로서 아이히만은 자신의 행동을 결코 후회해본 적이 없다. 예루살렘 전범재판에서 당당하기만 했던 아이히만에게 아렌트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구체적으로 말해 유태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다는 무사유의 책임을 물었다. 그렇지만 생각이 없었을지라도, 최소한 아이히만은 진실을 알면서도 그것을 토로하지 않는 냉소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최소한의 순박성과 순진무구함은 갖추고 있었던 셈이다. 지금 우리는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도 벌거벗었다고 말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이히만보다 더 교활해졌고, 더 야비해졌고, 더 타락한 것이다. 


자신의 생각을 정직하게 토로하지 않는 것이 지혜롭다고 인정되는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냉소주의는 정치적 진실과 사회적 진실에 눈을 감고 허위와 불의를 방관하도록 만든다. 냉소주의가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란 잿빛 아우라를 사회 도처에 독가스처럼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구조적인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아. 너만 다칠 뿐이야. 진짜로 네가 걱정된다. 이제 아마추어처럼 살지 말고 프로로 사는 것이 어떠니.” 정말 친절한 냉소주의자다. 그렇지만 이제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이런 친절이 결국 자기 정당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고위 공직의 세계에서부터 대기업의 직장세계까지, 혹은 작은 편의점 아르바이트에서부터 가정생활에까지 질식할 정도로 팽배해 있는 냉소주의라는 유령을 쫓아내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과연 미래에 대한 희망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마지막 가르침을 기억하려 한다. “파르헤지아(parrhesia)!” 진실을 말하려는 용기를 말한다. 그렇지만 파르헤지아는 단순히 솔직하게 말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위험 앞에서도”라는 단서 조항이다. 그래서 파르헤지아는 자기 보존의 욕망을 어느 정도 내려놓아야만 가능한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를 쿠데타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CEO가 불법 노동행위를 했을 때 불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비정규직법을 교묘히 이용하는 고용주에게 부당함을 말할 수 있는 용기. 이런 작은 용기들이 쌓일 때에만, 우리에게는 자기 보존의 욕망보다 더 고귀한 공동체의 꿈이 깃들 수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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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마침내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안티고네(Antigone)가 실정법을 의도적으로 위반한 것이다. 반란을 도모하다가 처형된 그녀의 오빠 폴리니케스(Polynices)의 시신을 매장했던 것이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테베의 왕이자 그녀의 숙부였던 크레온(Creon)이 정한 법, 그러니까 폴리니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방치하고 그 누구도 장례를 지내서는 안 된다는 법령을 보란 듯이 어긴 것이다. 법령을 어겼지만 안티고네는 자신이 소임을 다했다고 느낀다. 심지어 분노한 크레온 앞에서 안티고네는 당당하기까지 했다. “제우스가 내리신 명령은 아니잖아요. 땅의 모든 신들을 다스리는 최고로 정의로운 분이 인간에게 그런 잔인한 명령을 내리신 적은 없으니까요. 저는 사람에게 신성한 법을 어기도록 할 만큼 숙부의 명령이 그렇게 강력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아요.” 지금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극작가 소포클레스(Sophocles, BC496-406)는 자신의 희곡 <안티고네>에서 신성한 법과 왕의 법을 대립시키고 있다. 


‘신성한 법’과 ‘왕의 법’을 통해 소포클레스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히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과 그 사이에 벌어지는 비극은 아니다. 오히려 소포클레스의 생각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이 자신의 양심을 따를 권리와 권력이 부여한 실정법 사이에는 항상 본질적인 긴장이 내재하고 있다는 통찰이다. 나아가 그는 ‘왕의 법’보다 ‘신성한 법’이 더 우위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떻게 오빠의 시신이 들개들의 먹이가 되는 것을 묵과할 수 있다는 말인가. 


바로 여기에 왕의 권력 앞에서 주눅 들지 않는 연약한 안티고네의 비범한 당당함의 비밀이 숨어 있다. 소포클레스는 ‘왕의 법’이 아니라 ‘신성한 법’에 손을 들어준다. 아니 들어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신성한 법을 지키려고 결정한 순간, 왕의 법 자체는 아무런 위협도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하긴 죽음을 선택한 인간을 어떻게 죽음의 벌로 굴종시킬 수 있겠는가. 


<안티고네>는 비극적으로 마무리된다. 죽음의 선고 앞에서 도망쳤던 안티고네가 마침내 자살한 뒤 크레온은 아들과 아내가 자살하는 등 온갖 불행을 겪기 때문이다. 소포클레스는 ‘신성한 법’을 어긴 대가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에게는 결코 강제해서는 안 되는 법을 강제로 시행하는 순간, 권력은 엄청난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였던 셈이다. 비록 소포클레스는 권력의 오만을 불행한 가족사에 국한시켰지만, 사실 개인의 양심에 반하는 법령을 시행했던 군주들의 말로가 어땠는지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지 않은가. 폭동과 혁명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군주의 권력과 명예가 얼마나 허망하게 사라져 갔었는가. 그러니 사회 성원들에게 그들의 양심과 이성에 반하는 법령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군주제도 하에서도 반드시 지켜야할 철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불의를 고발한 이가 죄인이 되는 악법은 법이 아니다.

우리는 악법을 고치고 저항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정의를 존중하는 민주주의다.”


정치철학적으로 ‘신성한 법’과 ‘왕의 법’ 사이의 긴장이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 바로 ‘자연법’과 ‘실정법’ 사이의 갈등 속에 구조적으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실정법이 냉혹하게 적용되는 법조문을 우선시한다면, 자연법은 인간의 자유로운 양심과 이성을 우선시한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가 다른 사회보다 탁월한 이유는 자연법의 힘에 의해 법조문을 계속 자연법에 맞게 고칠 수 있다는 데 있다. 반면 아무리 민주주의를 표방할지라도 어떤 사회가 자연법을 무시하면서 인간의 양심을 굴복시키려고 한다면, 그 사회는 억압적인 사회일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말해 모든 권위적인 사회는 자연법의 정신을 법조문에 아직 없다는 이유로 가볍게 짓뭉개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럴 때 소로(Thoreau, 1817-1862)의 말처럼 사회 구성원들의 저항은 의무이자 동시에 권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악법도 법이다”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는 완전히 틀렸던 것이다. “악법은 법이 아니다.” 악법은 개인의 양심과 이성을 부정하는 사악한 법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악법을 고쳐야 하고, 악법을 묵수하려는 세력에 저항해야만 한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자연법을 가슴에 아로새기고 있는 사람들이 없다면 존속할 수 없는 정치 이념이니까 말이다. 만일 실정법이 자연법 위에 선다면, 모든 인간은 법의 지배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가 되고 만다. 바로 이 순간 민주주의가 사라지고 법만능주의가 탄생하게 된다. 사람이 법을 만들지 결코 법이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신념이 없다면, 그리고 그 신념에 입각한 저항과 행동이 없다면, 민주주의는 단순한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주저 <시민 불복종>(Civil Disobedience)에서 소로도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하며, 그래서 우리는 법을 존중하기보다는 먼저 정의를 존중해야만 한다”고 말이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소로의 말을 되씹어야만 하는 날이다. 음미하고 음미해서 민주주의의 이념과 자연법의 정신을 다시 되새겨야 하는 날이다. 불의를 고발했던 국회의원 한 사람이 실정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에서 물러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혐의자의 실명을 거론해서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였다. 대재벌과 검사 사이의 검은 커넥션을 국민에게 알리려고 자신의 홈페이지에 관련 검사들의 이름을 올린 것이 사단이 된 것이다. ‘통신비밀보호법’을 사무적으로 적용한 결과인지, 혹은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편을 들기 위해 이 법을 이용한 것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권력의 불의를 감시하라고 선출된 국회의원의 의무마저도 혐의자의 실정법적 권리 앞에서는 무력화되어버린 것이다. 실정법에 의해 죄인이 되어버린 국회의원은 “그 순간 다시 와도 비리와 맞서겠다”고 말한다. 크레온 앞에서 당당하기만 했던 안티고네가 떠오르는 것은 오직 나 하나만일까.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헌법 전문 1조 2항의 내용이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는 법이 실정법이란 미명하에 국민의 양심과 이성 위에 군림하려는 위기 국면에 서 있다. 제1의 안티고네가 가능하다면 제2의 안티고네도 가능한 것 아닌가.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정과 비리를 감시하지 못한다면, 심지어 부정과 비리를 폭로하는 국회의원마저도 실정법의 무리한 적용으로 그 자격을 박탈해버린다면, 국회의원이라는 권력마저도 없는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권력의 불의와 싸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오늘은 너무나 참담한 날이다. ‘양심과 이성에 따른 행동이 실정법에 의해 억압되고 통제될 수 있다.’ ‘자연법은 실정법에 비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이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후손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리 시대의 안티고네를 보면서 우리가 직시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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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깜짝 놀랐다. 학생인권조례 이후 교권이 위축되었다니. 선생님을 대상으로 했던 어느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선생님 한 분이 내게 볼멘소리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에게 웃으며 말해주었다. “선생님! 학생이든 여성이든 아니면 인간이든 인권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사회적 약자라서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학생인권 때문에 교권이 침해되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보다 약자는 아니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교권이라고 말하시려면, 교장 선생님이나 장학사, 혹은 교육 관료와 같은 상급 교육 기관의 관료주의나 권위주의에 대해 선생님들의 권리를 지키시려고 할 때에만 사용해야 합니다. 노동자에 대해 재벌의 권리를 말할 수 없고, 이등병에 대해 사단장의 권리를 말할 수 없는 것도 같은 이치 아닐까요. 지금 선생님께서는 교권에 대해 볼멘소리를 하시지만, 그 불만은 아이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아이들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교육 관료주의에 대한 분노에서 기원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그래서 아이들의 행복을 소망하는 직업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선생님은 유괴범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을 볼모로 돈을 벌겠다는 것, 이것이 유괴범이 하는 행동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누군가를 알려고 한다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어느 때 그 사람이 행복한지 알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 때문에 행복해 하는 것을 보는 것보다 뿌듯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래서 아이들을 사랑하지 못하고 월급만 받고 있을 때, 선생님들은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스스로 직감하는 것이다. 유괴범으로 살고 있다는 씁쓸한 현실을 말이다. 그렇지만 어느 선생님이 유괴범으로서의 삶을 살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교육 관료주의, 그리고 자본주의적 교육 이념이 선생님들을 자꾸 유괴범으로 만들어가고 있다. 아이들과 애정을 나눌 수 있는 기본적인 시간마저 뺏는 상명하복식의 행정 관료주의가 지배적일 때, 그리고 아이들을 자본의 구미에 맞는 상품으로 만들라는 교육 이념이 팽배할 때, 선생님들의 자괴감은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심각해질 수밖에 없으니까.


선생님과 포옹 (출처 : 경향DB)


아이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부부가 모두 맞벌이를 할 정도로 삶이 팍팍하다고 해보자. 이 부부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랑을 제대로 줄 수 있겠는가. 같이 산책하며 꽃에 대해, 구름에 대해, 개울에 대해, 그리고 노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다. 여기서 어떻게 아이의 내면을 읽을 여력이 있겠는가. 선생님들에게 과중한 행정 업무를 부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교육 관료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주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과연 사제 간의 사랑에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지금 그들은 선생님과 아이들을 생각하기는커녕 관료로서의 자신의 역할만 기계적으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방과후 학교예산이 지방 일선 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아이들과 사랑할 수 있는 절대 시간을 뺏는 과도한 행정 업무가 된 것을 그들은 알기나 할까. 그 사이에 외롭게 방치될 아이들의 외로움,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선생님들의 자괴감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나마 아이들과 만날 때도 선생님들은 괴롭기만 하다. 전체 사회에 팽배해 있는 자본주의적인 이념과 맞서서 미래 우리 사회에 희망의 씨앗을 심어야 하는 것이 바로 학교와 선생님의 역할 아닌가. 학교는 사랑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곳이지, 약육강식의 검투사를 키우는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저마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을 찾아주는 것, 그래서 미래에 다양한 가치들과 행복이 공존하는 공동체를 꿈꾸는 것, 이것이 바로 학교의 역할 아닌가. 그래서 내가 만났던 어느 선생님은 그렇게 괴로워했던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제자보다는 생계를 위해 자동차를 배워야 한다는 부모의 말에 동감했던 적이 있던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괴로워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사회나 자본이 원하는 스펙을 쌓으면서 살아가는 것이 불행한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일 아닌가. 남이 원하는 것을 행하는 삶이 노예의 삶이라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힘들더라도 관철시키는 것이 바로 주인의 삶이니까 말이다. 제자를 사랑했던 선생님은 제자에게 노예의 삶을 살라고 권한 것이 영 못마땅했던 것이다. 어쨌든 사랑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지 그것을 좌절시키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출처:경향DB)



▲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도 묵묵히 교단에 오르는 우리 선생님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간을

충분히 그분들에게 주는 것뿐이다”


누가 행정 관료주의의 힘을 발휘하여 우리 선생님들을 관료로 만들고 있는가. 누가 자본주의적 경쟁 이념을 강제하여 우리 선생님들을 학원 선생으로 만들고 있는가. 도대체 누가 제자들을 사랑하려는 선생님의 작지만 큰 소망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가. 무기력하고 자괴감에 빠진 선생님들로부터 어떻게 우리 아이들이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서 어떻게 우리가 소망스러운 미래를 꿈꿀 수 있다는 말인가? 학생인권조례가 탄생한 지 1년이 된 지금, 이제 우리가 꿈꾸어야 할 것은 선생님들에게 가해지는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주는 선생인권조례, 혹은 교권조례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학생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권리가 아니다. 그런 발상만큼 선생님에게 무시하는 것도, 심지어 무례한 것도 없을 것이다. 교권조례는 정치권과 교육부를 포함한 행정 관료들에 대한 우리 선생님들의 권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음 놓고 제자와 사랑을 주고받으며 미래를 꿈꿀 수 있는 사랑의 권리이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말미에 항상 나는 묻곤 한다. 다음 학기에는 몇 명에 대해 선생님일 수 있겠느냐고. 당혹스럽게 고민하다가 선생님들은 얼굴을 붉히며 말하곤 한다. “두 명입니다.” “세 명입니다.”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다. “예. 그렇게 약속한 것처럼 꼭 하세요. 그러면 선생님들은 최소한 그 두 명에 대해 그 세 명에 대해 선생님이신 겁니다. 그리고 명심하세요. 나머지 학생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미안하다고, 선생님의 힘이 부족해서 너희들까지는 다 업고 갈 수는 없어서 미안하다고.’ 이런 미안함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면 됩니다. 언젠가 은퇴하시는 그 날까지 한 번은 자기 반 학생 모두를 업는 날이 올 테니까 말입니다.” 바로 이 분들이 우리 선생님들이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일념으로 오늘도 묵묵히 교단에 오르는 우리 선생님들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이들을 사랑하는 시간을 충분히 그 분들에게 주는 것뿐이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치지 않도록, 그래서 마음껏 아이들을 업고 갈 수 있는 힘을 남겨드리는 일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의 미래는 결정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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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이 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 이만큼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을 반성하도록 만드는 예리한 글을 본 적이 있는가. 들뢰즈도 촘스키도, 그렇다고 해서 아감벤이 쓴 것도 아니다. 방금 읽은 글은 1961년 2월5일 우리 소설가 최인훈이 소설 <광장>을 집필하면서 쓴 서문의 일부분이다.


인간에게는 광장과 밀실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성찰은 아직도 유효하다.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이라고 해도 좋고, 노동의 공간과 향유의 공간, 혹은 주장의 공간과 침잠의 공간이라고 해도 좋다. 광장과 밀실, 어느 것 하나 인간의 삶에서 빠져서는 안 된다. 최인훈의 말처럼 밀실이 없을 때, 광장에는 폭동의 피가 흐르게 될 것이다. 밀실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달라는 외침이자 개인만의 고유한 내면을 확보하려는 몸부림이다. 반대로 광장이 사라질 때, 광란의 울부짖음이 새어나오게 될 것이다. 연대의 권리와 정치적 발언을 빼앗긴 사람은 자폐증의 울분과 분열증의 절규를 토해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 충분한 거리를 두고 광장과 밀실, 두 공간이 우리에게 가능해야만 하고, 동시에 우리는 자유롭게 두 공간을 오고갈 수 있어야만 한다.


 

1961년 베스트셀러 최인훈著 '광장/구운몽' 책표지 (출처: 경향DB)



중요한 것은 광장과 밀실 사이의 충분한 거리라고 할 수 있다.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하는 순간, 광장도 밀실도 그 고유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스마트폰이 생활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지금, 광장과 밀실 사이의 거리가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아들었다. 최인훈도 예측하지 못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연예인과 운동선수 등 스타들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사생활도 아무런 여과 없이 광장에 진열되곤 한다. 이제 안전하게 사생활을 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누군가 나의 말을 녹음하고 행동을 녹화해서 SNS를 통해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알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스러운 침실을 안전하게 감싸고 있던 두툼한 외벽이 이제 투명한 유리창으로 바뀐 형국이다. 반대로 업무는 이미 끝났지만 직장 상사나 거래처 사람이 보내는 긴급 메시지와 메일, 혹은 세상 돌아가는 정보가 도착했다는 알림 메일이 부단히 우리의 스마트폰에 찾아온다.


도대체 광장의 생활과 밀실의 생활은 언제 끝나고 언제 다시 시작되는가. 광장과 밀실의 식별 불가능성! 이것이 바로 스마트폰이 우리에게 열어준 현기증 나는 세계다. 여기서 공적인 생활과 사적인 생활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다. SNS를 상징하는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광장과 밀실의 구분을 희석시키는 물질적 토대라고 할 수 있다. 사적인 입장에서 트위터에 올린 글이 공적으로 독해될 수도 있고, 반대로 공적인 입장에서 올린 글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사적인 글로 폄하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일기처럼 내면적 고백을 담은 사적인 글이나 사적인 생활이 공적인 담론으로 확산되어 이슈가 되는 순간, 우리에게 밀실은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 정치적 입장을 표명하는 글이 사적인 글로 폄하되는 순간, 광장은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지금 폭동의 피와 광란의 울부짖음이 스마트폰의 화면에 불쾌한 앙상블을 내며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출처: 경향DB)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일주일에 며칠, 혹은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꺼놓도록 하자

처음엔 낯설겠지만 우리에게 광장과 밀실,

두 공간은 점점 커질 테니까 말이다”


스마트폰은 밀실과 광장을 식별 불가능할 정도로 흡수하는 블랙홀과도 같다. 바로 여기서 가상공간, 그러니까 가상 밀실과 가상 광장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타자에 직면해야만 하는 광장에 불편하게 서 있기보다는 우리는 스마트폰이 열어놓은 가상 밀실로 쉽게 도망치곤 한다. 친구 관계가 분명한 젊은이들이 서로를 앞에 두고도 스마트폰에 열중하는 모습은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풍경 아닌가. 반대로 성찰과 사색이 이루어져야 하는 밀실에 홀로 있는 순간 우리는 고독을 견디지 못하고 스마트폰이 펼쳐내는 가상 광장에 발을 디디기도 한다. 이렇게 점점 가상 광장과 가상 밀실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는 실제 광장과 실제 밀실을 점점 망각하게 된다. 그 결과 능숙한 트위터리안이나 블로거가 되면 될수록, 우리는 직접 대면한 타자와의 공적인 관계나 침묵과 휴식의 시간에 심한 무력감을 느끼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스마트폰을 꺼내는 악순환에 쉽게 빠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스마트폰은 점점 우리에게서 광장도, 그리고 밀실도 빼앗아 가고 있는 것 아닌가. 단지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광장으로 가고 있다는 착시 효과만, 그리고 밀실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착시 효과만을 주고 있을 뿐 아닌가. 스마트폰이 가능하도록 만든 가상세계는 광장에 당당히 진입하지도 못하고, 동시에 밀실에 편안히 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를 증식시키고 있으니까 말이다. 매매를 용이하게 만드는 좋은 수단이었던 화폐가 어느 사이엔가 숭고한 목적으로 변질되었던 것처럼, 소통을 용이하게 만드는 매체일 수도 있는 스마트폰 자체가 하나의 숭고의 목적이 되어가고 있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 아닐까. 그리고 그만큼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힘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일주일에 며칠, 혹은 하루에 한두 시간이라도 좋다. 이제 스마트폰을 잠시라도 꺼놓도록 하자. 처음에는 낯설겠지만 최인훈이 말한 광장과 밀실, 두 공간은 점점 커질 테니까 말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우리에게는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게 바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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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1970년 11월 전태일은 자신을 횃불 삼아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감추고 있던 치부를 백일하에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1972년 10월 박정희는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전태일의 외침에 유신헌법으로 응답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이번 겨울은 유독 춥게만 느껴진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독재자의 딸이 보내는 득의만면의 미소가 매서운 겨울바람과 함께 더욱 우리의 옷깃을 세우게 만든다. 이제 박정희의 묘지에 누가 당당하게 침을 뱉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누가 얼굴을 들고 전태일의 묘소에 참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권자의 과반수가 전태일이 아니라 박정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가 아니라 2012년 올해 벌어진 사건이자 남기고 뺄 것도 없는 바로 우리 의식의 현주소다. 상생과 통합의 미사여구가 캐럴 속에서 울려 퍼지지만, 어디 이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상생과 통합의 주체는 자본가나 보수 여당, 혹은 대통령이니까 말이다.


 독재자의 딸을 지지했던 보수적 성향의 유권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나 있을까. 아마 그들은 선거 결과에 득의양양해 있을지도, 혹은 이제 경제가 회복되어서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의 영화가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들의 백일몽은 박정희 시대에 비인간적인 피와 땀을 흘려야만 했던 수많은 전태일을 망각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돌아보면 그들은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에서부터 1997년 IMF 구제 금융 사태 때까지 물질적 풍요를 만끽했거나, 아니면 그 시대에 물질적 기반을 얻는 데 성공했던 사람들을 부모로 두었을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공식 하나를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풍요를 구가하던 자본이 위기에 빠져 불황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문을 달기보다는 오히려 거의 미친 듯이 돈, 그러니까 현금을 수중에 넣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과거보다 재산이 줄어드는 순간, 재산이 더 줄어들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여기에 보수적 성향 유권자들의 유례없는 단결력이 발생한 원인이 있다.


전태일 유족 "박근혜 후보 재단 방문은 무의미하다" (출처 ;경향DB)


아무리 과거보다 재산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줄어들 재산이나마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 아닌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행운을 행운이라고 느낄 여유는 우리들에게는 증발한 지 오래이다. 더군다나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가진 재산에 노심초사할수록, 우리들의 시야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헤어진 임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데, 어떻게 가족이나 친구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잃어버린 돈에 안타까워하는데, 어떻게 이웃의 하소연이 귀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보수적 감수성이 탄생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자, 동시에 보수적인 사람들이 왜 공동체의 삶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기득권에만 연연하게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핵심적인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보수적인 사람들의 눈에 1997년 IMF 구제 금융 시대 이후 대학을 다녔던 88만원 세대의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과 쓰디쓴 분노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대학과 청춘의 낭만은 어느 사인엔가 사치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과거 사법시험처럼 정규직 직장을 구하기가 힘이 드는 시대에 그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한 근무 조건과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 던져져 있다. 젊은이들에게 더 가혹한 삶의 환경을 제공했던 MB 정권에서 그들의 절망은 깊어만 갔지만, 그래도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온 사회 성원들을 비인간적인 경쟁으로 내몰고 민영화라는 미명하에 공적 안전망을 차근차근 자본에 양도했던 MB 정권도 언젠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 젊은이들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을 품어주는 정권, 그러니까 보편적 복지의 방향으로 공동체가 재편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젊은이들이 보편적 복지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출처: 경향DB)



▲ “‘박정희’라는 형식을 그의 딸이 채우자마자,

‘전태일’이란 형식을 전도유망한 우리 젊은이가 채워버렸다”


선거가 끝난 뒤 우리 젊은이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박정희를 선택한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삼촌, 이모, 고모였으니까 말이다. 아들과 딸, 혹은 손자와 손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당한 배신이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전태일의 편을 들어주리라 믿었는데, 우리 어른들은 박정희를 선택한 것이다. 소수의 기득권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어떻게 제2의 ‘전태일’이 되도록 내몰리고 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와 손녀의 간절한 소망을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만큼 보수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며, 우리의 선량한 이웃들에게 자본이 성장하고 발전해야 아들과 딸이, 그리고 손자와 손녀가 잘살 것이라는 믿음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과반수의 우리 이웃들 대부분이 선의를 갖고 독재자의 딸을 권좌에 올렸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선의를 조롱하는 사건이 하루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새 권력자에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언론들의 외면을 받아 더욱 쓸쓸하기만 했던 한 젊은이의 죽음이다. 2012년 12월20일 오후 7시,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절망 속에 35살의 어느 젊은이가 자살이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원.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태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박정희’라는 형식은 ‘전태일’이란 형식으로 완성된다. 아니면 전태일이란 형식에 수많은 이웃들을 가두어야만 박정희란 형식이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구조는 바로 이것이다. ‘박정희’라는 형식을 그의 딸이 채우자마자, ‘전태일’이란 형식을 전도유망한 우리 젊은이가 채워버린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경기결과를 복기하듯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승인과 패인을 쿨하게 분석하고 넘어갈 문제는 더욱이 아니었다. 왜냐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생사의 문제이자 희망과 절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이란 형식을 다시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이 업보를 어떻게 우리가 다 갚을 수 있을까. 이제 절망하는 젊은이들과 함께하면서 우리의 업보를 씻어나가자.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도록 하자.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과거 어느 선비처럼 젊은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본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수단이 되는 그날까지 “가야 할 길이 머니, 부디 자중자애하기를 바란다(政遠, 切祈珍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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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선택의 순간이 다가왔다. 김수영의 ‘풀’이란 시에서 ‘풀’이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문제다. 그렇지만 선택지에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김수영’이 없었다. 평소에 풀은 김수영 본인의 삶을 상징한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학교 선생님들이나 참고서에서는 ‘풀’은 민중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나름 설득력이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래도 풀이 김수영 본인을 상징한다는 생각을 접을 수가 없었다. 


실제로 수업시간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을 때, 국어 선생님도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라고 나름 인정하시기도 했다. 그렇지만 지금 시험 문제 선택지에는 ‘김수영’이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당혹감을 느끼고 있을 때, 또 다른 선택지로 ‘민중’이 보인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이 없다는 생각에 이 문제에 답을 기재하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민중’이란 가능한 다른 선택지를 정답으로 선택할 것인가?


 방금 사례는 내가 강연 때 만났던 어느 여고생의 고민을 재구성해본 것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조언을 그녀에게 해줄 생각인가. 답이 없으니 어떤 선택지도 답으로 표기하지 말라고 권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민중’이란 다른 가능한 선택지를 답으로 표기하라고 권해줄 것인가? 


당시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일반 사람들이 동의하는 그리고 본인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는 ‘민중’을 정답으로 표기해서, 대학에 들어가라고. 그리고 훌륭한 국문학자가 되어 김수영의 풀이 상징하는 의미로 ‘민중’이 왜 부족한지를, 이어서 김수영이 자신의 삶을 풀로 상징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논문이나 책으로 발표하라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에게 나는 오십보백보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는 <맹자(孟子)>의 ‘양혜왕상(梁惠王上)’에 등장하는 고사와 관련된다. 비겁하게 후퇴했다는 점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같다는 취지이다. 그러나 과연 맹자의 말처럼 오십보와 백보는 같은 것일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이론에서만 혹은 관념에서만 오십보와 백보는 같지만, 실천에서 혹은 삶의 차원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힌 것과 누군가를 죽인 것은 타인에게 위해를 가했다는 이론적인 측면에서 같은 것이지만, 삶의 차원에서 두 가지는 확연히 다른 것이다. 예를 들어 “이미 상해죄를 범했으니, 살인죄도 저질러버리자”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잘해야 본질주의자, 혹은 아이와 같은 순수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고매한 이상세계에 매몰되어 있는 유아론자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사태와 상황을 정확히 읽어낼 수 있는 안목을 결여한 채 자포자기하고 있는 불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십보와 백보는 다르다는 것을 알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상해죄에서 자신의 범죄행위를 멈출 것이다. 그는 다친 사람은 회복할 수 있지만, 죽은 사람은 회생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 김상민



▲ “선거는 신념이 아닌 삶의 문제

‘오십보 백보’라지만

민주주의의 이념에서 한발이라도 가까운 이를 선택하자”


대통령 선거가 바로 코앞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마 입맛을 다시게 될 수도 있는 선거일지도 모른다. 어느 후보도 경쟁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옳은 지적이다. 모든 후보가 민주주의와 인문주의의 잣대로 생각해본다면 오십보백보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을 선택해야 한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나이브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다. 머릿속에 최선이 있으면 안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최선을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후보들이 다 마음에 들지 않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상 한번이라도 완전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었던 적이 있었는가? 모두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도정에 있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 이념에 백보 물러서 있는 후보와 오십보 물러서 있는 후보는 동일한 후보라고 보아서는 안된다.


대통령 선거는 신념과 이상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과 삶의 문제이다. 이미 우리는 과거 정부들에서 아프게 경험하지 않았는가. 대통령이 누구냐에 따라 앞으로 5년간의 우리 삶은 상당한 부침을 겪을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우리에게서 받은 혈세를 자신의 신념과 이념에 따라 어디에 쓸지 선택하고 집중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진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민주주의 이념에서 오십보 물러나 있는 후보를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 이 오십보에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면 49보가 될 수 있는 법이다. 그렇지만 백보 물러서 있는 후보를 뽑는 순간, 우리가 똥줄 빠지게 한 걸음을 내딛는다고 해도 99보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삶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상해죄와 살인죄의 차이처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 시대 가장 탁월한 인문정신 발터 벤야민도 말하지 않았던가. “항상 그때그때의 1보만이 진보이며 2보도 3보도 n+1보도 결코 진보가 아니다.”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우리에게 너무나 절절한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벤야민 앞에서 당신은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후보들이 모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래서 투표할 생각도 별로 없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도대체 어느 때 투표를 할 생각인가. 민주주의 이념에서 1보도 후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그대로 실현할 수 있는 후보가 나올 때까지 모든 정치적 현실에 비관하고 낙담할 생각인가. 그러고도 당신은 민주적인 삶을 살아내려고 한다고, 그래서 자신을 진보적인 사람이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어떻게 민주주의를 향한 1보를 떼지 않고, 2보를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인가. 1보, 1보, 그리고 1보가 쌓여야, 마침내 우리가, 그리고 인류가 그렇게 절절하게 꿈꾸었던 민주주의 이념에 도달할 수 있는 것 아닌가. 1보도 내딛지 않으면서 2보에 대해 3보를 이야기하는 사람, 다시 말해 당장 개선할 수 있고 선택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이상만을 읊조리는 사람은 보수적인 사람보다 더 해로운 사람일 수 있다. 그는 주변에 무기력만을 유포시키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는 어느 후보자가 차선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최선이란 단지 우리의 관념 속에, 그러니까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최선을 전제로 하는 차선도 다분히 우리의 관념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차선이란 관념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제거하자.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눈에는 자신이 직면해 있는 현실이 보일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는 자포자기의 심정, 그 유아론적 심정을 떨쳐내야만 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가. 오십보 정도 민주주의 이념에서 후퇴한 후보, 그리고 백보 정도 민주주의 이념에서 후퇴한 후보가. 자, 이제 선택하라. 우리 공동체의 이상을 향해 오십보 뒤에서 출발할 것인가, 아니면 백보 뒤에서 출발할 것인가. 민주주의를 향해 뚜벅뚜벅 우직하게 걸어가야만 하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한다. 오십보와 백보는 이론에서는 마찬가지로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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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1894년 11월8일 우금치에는 겨울을 재촉하는 싸늘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날 우금치는 이전만큼 춥지 않았다. 농민들의 거친 호흡과 피범벅이 되는 뜨거운 땀방울을 예견하고 있었으니까. 우금치 전투! 어쩌면 그것은 전투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독일에서 현대전을 배운 일본군, 그리고 그들과 함께했던 조선 관군 앞에서 동학군은 솔개 앞의 병아리떼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신식 서양 무기와 전술로 무장한 일본 주력군 앞에서 죽창이나 농기구가 무기의 전부였던 농민들은 사격장의 표적지와 같은 신세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만 조선 관군의 어느 지휘자의 보고에 따르면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피가 강을 이루었어도 농민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전진했다고 한다. 얼마나 그 모습이 장엄했고 무서웠는지 그 지휘자는 그들이 악귀와 같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동료의 시체를 밟고 피의 강을 건너며 전진하는 농민들은 더 이상 아무래도 좋을 무지렁이들이 아니었다. 아마 더 이상 살육을 원하지 않았던 농민 지도부가 후퇴를 결심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날 우금치에서 살아서 돌아갈 농민들은 한 명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순하디 순한 농민들을 이런 전사로 만들었던 것일까. 물론 그것은 동학(東學)의 가르침이 그들을 자유인으로 각성시켰기 때문이다. “인내천(人乃天)!” 그렇다. 사람 한명 한명이 모두 하늘처럼 존귀하고, 그러니 자유롭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니 그 누가 그들의 존엄성과 자유를 꺾을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를 주인으로 자각한 사람들을 그 누가 다시 노예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인가? 주인으로 죽을지언정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 바로 그들이 차가운 우금치를 한여름처럼 뜨겁게 만들었던 우리 조상들이었다.


우금치의 열정으로 우리는 직접민주주의라는 뜨거운 이상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다. 민주주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인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고 표현할 수 있을 때에만 간신히 가능한 제도다. 지금 나는 ‘간신히’라고 말했다. 그렇다.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선물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인으로 당당히 서 있으려고 했을 때에만 오직 그럴 때에만 존재할 수 있는 법이다. 우리가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치를 떠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유신헌법은 국민을 일종의 거수기로, 다시 말해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 수동적인 객체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유신헌법 전문 1조 2항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우리 헌법 1조 2항은 다음과 같이 바뀌어 있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유신헌법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핵심은 “대표자나 국민투표”라는 구절에 있다. 박정희는 우리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정치적인 의견을 직접 표현하지 말라고 명령한 것이다. 오직 대표자를 통해서만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 대통령을 뽑았다면, 그 대통령의 재임기간 중 입 닥치고 있으라는 것이다. 시위와 같은 직접민주주의적 행동은 언감생심의 일일 뿐이다. 그렇지만 주권은 반드시 대표자를 통해서만 행사해야 한다는 것, 이것만큼 민주주의 이념을 그 뿌리에서부터 흔드는 만행이 또 있을 수 있을까.


일러스트 | 김상민



▲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유신으로 좌절된 직접민주주의의 꿈

‘안철수 현상’으로 나타나

안철수 사퇴해도 ‘안철수 적’인 꿈은 남아”


이제 유신헌법이 철폐된 지금 현실로 돌아오자. 비록 헌법전문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인정하고 있지만, 우리 현실은 과연 유신헌법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나 있는가? 정당정치라는 미명하에 여전히 유력정당의 정치인과 입후보자들이 거의 모든 정치적 권한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여론마저도 좌지우지하고 있지 않은가. 이념으로서의 유신헌법은 사라졌지만, 현실로서의 유신헌법은 엄연히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돌아보라. 헌법전문이 보장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명령은 한갓 도로교통법이나 집회나 시위에 관한 법률, 혹은 국가보안법과 같은 하위 형식의 법률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정 아닌가. 국민을 지치도록 만들기에 충분히 복잡하고 다양한 절차와 하위법률들은 헌법전문이 보장한 민주주의 이념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혹은 도달하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최근 어느 무소속 대선 후보가 드라마틱하게 사퇴했던 일이 있었다. 바로 안철수 후보다. 기존 정당정치에 포획되지 않고서도 대통령이 될 수도 있었던 그였기에 그를 지지했던 많은 국민들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그는 대의민주주의 자체를 폐기하고 직접민주주의의 전통을 만들려고 했던 인물도 아니며, 더욱이 자본주의보다는 인문주의의 가치를 우선시하는 급진적인 휴머니스트도 아니었다. 대선 후보를 사퇴하기 전 공약을 보면 사실 그는 많은 부분 사회민주주의 이념에 동조했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국민들이 안철수를 열정적으로 지지했던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안철수 후보가 사퇴했을 때 왜 많은 사람들은 무력감을 넘어서 슬픔을 느꼈던 것일까. 상당수의 사람들은 안철수 후보를 통해 기존 정치권이 만들어 놓은 장벽과 절차를 뚫고 민주주의의 이념을 실현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던 것 아닐까. 


안철수를 통해 우리 국민 대부분은 기존 정당과 대표들에 의해 왜곡되고 좌절된 직접민주주의의 꿈을 다시 꾸어보려고 했다. 불행히도 안철수가 사퇴하자마자 정치권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국민을 볼모로 권력욕을 불태우고 있다. 그렇지만 어느 바보가 모르겠는가. ‘안철수’와 ‘안철수적인 것’은 전혀 다른 범주라는 사실을. ‘안철수’가 사퇴했다고 해서 ‘안철수적인 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안철수적인 것’은 바로 우금치에서부터 불타올랐던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집요한 꿈이자, 동시에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전문의 숭고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잊지 말자. 안철수 때문에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꿈이 생긴 것이 아니라,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때문에 안철수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사실 ‘안철수적인 것’, 그러니까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현재 대표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전혀 대표성이 없다는 방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기존 정당들이 국민들의 정치적 의사를 제대로 대표했다면, 안철수로 상징되는 ‘안철수적인 것’은 발생할 수도 없었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 거대 정당들과 그들의 대선 후보들은 안철수가 사퇴하자마자 ‘안철수적인 것’도 사라졌다고 안심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 지금 대선 후보들은 ‘안철수적인 것’을 하나의 악몽이라고 애써 자위하면서 폄하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지만 ‘안철수적인 것’을 끌어안는 후보만이 진정한 대표가 될 수 있고, 아니 되어야만 하지 않는가.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와야 하니까, 그리고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니까. 우금치에서 당당히 쓰러져갔던 선조들이 지금 우리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주시하고 있다. 우리 후손들이 민주주의를 감당할 지혜와 용기가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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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아침, 아니 정확히 말해 아직 이른 새벽, 고요한 산사에는 목어와 범종 소리가 어김없이 울려 퍼진다. 가슴 깊은 곳에 파고드는 범종 소리는 우리 마음을 아리게 한다. 누구를 깨우는 것일까?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이 오늘도 생명을 지키기를 바라는 마음 아닐까? 토끼를 먼저 깨워야 한다. 늑대가 먼저 깨어나면 토끼가 먹잇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늑대를 죽여서 토끼가 편하게 살도록 할 수도 없다. 늑대는 또 무슨 죄인가? 무엇 때문에 다른 짐승의 살을 뜯어먹고 살도록 태어난 것일까? 하지만 육식 동물들이 항상 사냥에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일까. 늑대는 항상 말라 있다. 일주일에 하루 사냥에 성공하면 기적이라고나 할까. 그러니 마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토끼를 잡아다 늑대에게 줄 수도 없다. 새벽 산중을 깨우는 목어, 범종, 법고 등의 소리는 그래서 아픈 소리다. 토끼에게는 오늘 늑대에게 잡아먹히지 말라는 기원을, 그리고 늑대에게는 오늘 굶지 말라는 소망을 담아 보내는 소리인 셈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런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이기라도 할까. 인간처럼 죄가 많은 존재도 없으니까 말이다. 풀을 뜯어먹는 토끼나 토끼를 잡아먹는 늑대처럼 우리도 식물을 먹고 동물도 잡아먹고 산다. 사실 우리는 늑대나 사자보다 더 무서운 존재이다. 어쨌든 생태계의 최정상에 군림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니까 말이다. 그래서 물짐승, 날짐승, 들짐승 등을 다 깨우고, 제일 마지막에 깨워야 할 존재가 바로 우리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스님들이 조금도 음식을 남기지 않고 공양을 마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음식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먹어야 다른 애꿎은 생명체들을 해치는 비극을 그나마 줄일 수 있을 테니까. 자비의 마음이란 바로 이것이다. 살아간다는 것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이 아니라면 자비는 아무것도 아니다. 종교적 용어가 싫다면, 인류의 수많은 지성이 목놓아 외쳤던 사랑이라고 해도 좋다.


길을 가다가 구걸을 하는 걸인을 보고 그가 느낄 삶의 고통과 비애를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를 못 본 척하고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미 그의 고통이 느껴졌다면, 그의 고통은 이제 나의 고통이기도 하니까. 지갑의 돈을 꺼내 집어주던가, 아니면 옷을 벗어 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그의 고통이 이제 나의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내 것이 되어버린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꺼리겠는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나의 돈을 주었으니 나는 가난해진 것이고, 나의 옷을 벗어주었으니 나는 추워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만큼 나의 고통은 완화될 수 있으니, 그깟 돈이나 옷이 대수이겠는가. 결국 진정한 사랑이 외적인 형식으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성을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출처: 경향DB)


사랑의 척도, 혹은 사랑의 깊이는 사랑의 행동 이후에 얼마나 자신이 궁핍했는지, 나아가 그 궁핍을 얼마나 행복하게 감당하는지에 의해 측정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가진 재산의 일부를 가난한 사람에게 기부하는 재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랑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그 대가로 세금 감면 혜택을 받거나, 아니면 귀족적 고상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칭송을 받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이 경영하는 기업의 이미지를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더 배고픈 사람에게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준 사람이나 더 추운 사람에게 옷을 벗어준 사람은 자신이 사랑을 실천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더 배고파졌으니까, 그리고 더 추워졌으니까 말이다. 삶의 아이러니, 혹은 자본주의의 슬픈 현실은 가난한 사람에게 재벌의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가난한 사람의 사랑보다 더 도움이 된다는 데 있다. 그렇다. 사랑을 하기도 힘든 일이지만, 이처럼 사랑을 받기는 더군다나 더 힘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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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란 책이 있다. 이미 우리 사회에서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마이클 샌델의 신간 서적이다. 이 책을 통해 그는 과거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돈으로 사게 된 현실, 그러니까 시장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본주의의 비도덕성을 개탄만하고 있을 뿐, 샌델은 그 이상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현실을 냉정히 진단했던 그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사태를 관조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샌델은 질문을 잘못 던졌던 것은 아닐까. 이렇게 물었으면 좋았을지도 모른다. ‘돈으로 팔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남아 있는가? 억만금을 주어도 팔 수 없는 것들이 우리에게는 남아있기라도 한 것일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과 돈으로 팔 수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가 돈을 가진 사람, 그러니까 자본가의 입장에 서있는 질문이라면, 후자는 돈을 가지지 않는 사람, 그러니까 노동자의 입장에 근거하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결국 샌델의 논의가 잘해야 ‘노블리스 오블리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무리 돈이 있어도 우리가 사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당연히 이것은 가진 자의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는 주장일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샌델의 정의론이다. 그렇지만 돈을 가진 자는 언제든지 자신의 윤리나 의무를 헌신짝처럼 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샌델의 이야기가 항상 순진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우리가 가진 수많은 소중한 것들 중 자본이 사활을 걸고 사려는 표적은 무엇일까? 우리의 사랑도 용기도 가족도, 그리고 자존감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노동이다. 하긴 노동을 살 수 없다면, 자본가는 아무리 금고에 돈이 많아도 몸소 노동을 할 수밖에 없다. 자본가와 노동자로 분할되지 않고 어떻게 자본주의가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본주의의 맹목적 의지가 피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누군가의 노동을 구매해서 자본가는 자연과 직접 씨름하는 육체노동을 회피하려는 것이다. 백장(百丈) 스님의 청규(淸規)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그러니까 하루 노동하지 않았다면 그 하루만큼 먹지 않는다는 가르침이다. 누구나 노동을 해서 먹고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은 큰스님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하긴 노동하지 않았는데도 무엇인가를 먹는다면, 그것은 다른 사람의 노동을 빼앗았다는 것 아닌가. 큰스님이 죽을 때까지 쟁기를 놓지 않았던 속내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돈으로 노동을 산다는 것, 다시 말해 자본가가 된다는 것은 일을 하지 않고 편하게 살겠다는 의지, 그러니까 백장 스님의 가르침을 부정하겠다는 의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가 기꺼이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자본가의 의지에 복종하는 굴욕을 감당하려고 하겠는가?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당당한 주체로 살려는 자유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팔지 않으면 살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혹은 자본가가 숨기려고 하는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다. 우리도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을 자본가가 모를 리 만무하다. 당연히 자본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보호하며 자신의 우월함을 지키려고 할 것이다. 방법은 단순하다. 그것은 우리가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팔지 않으면 안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애써 팔라고 유혹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소중한 것을 들고 나와 팔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돈이 가장 중요하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돈으로 팔릴 수 있는 노동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돈으로 팔릴 수 없는 노동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생계를 위협할 정도로 빈곤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정리해고를 수행하거나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것도 좋고, 아예 취업문을 좁히는 것도 좋다. 이처럼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은 우리가 내다팔 것을 고민하게 만드는 방법이었던 셈이다. 무엇을 팔아야 돈을 벌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순간, 우리는 마침내 자본주의에 완전히 포획된 것이다. 팔려고 하는 순간, 우리는 사려고 하는 구매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여기서 자본가는 회심의 미소를 던질 것이다. 이제 자신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만 하면, 우리는 알아서 그것을 준비할 테니까 말이다. 영어회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도서관에서 미친 듯이 토플과 토익을 파고들 것이다. 혹은 매력적인 외모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형수술까지 기꺼이 감내할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노동은 양분되어 버린다. 돈과 바꿀 수 있는 노동과 돈과 바꿀 수 없는 노동. 물론 이런 분할에는 전자의 노동만 가치가 있고, 후자의 노동은 무가치한 것이라는 판단이 전제되어 있다. 이제 음악을 감상하는 것, 적벽가를 완창하는 것, 친구들과 여행하는 것, 프루스트의 소설을 완독하는 것 등등은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한 것이다. 어른들이 하는 말로 음악을 듣는다고, 소설을 읽는다고, 혹은 여행을 간다고 돈과 쌀이 나올 리 만무하니까. 그렇다면 정말 자본에 의해 팔린 노동이 가치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사실 우리가 돈으로 바꾸어버린 노동보다 더 가치가 있었던 것은 바로 돈이기 때문이다. 자본가가 노동이 가치가 있다고 선전하면서, 노동의 가치는 오직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도 모를 일이다.


돈이 가장 중요하며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돈으로 팔릴 수 있는 노동이라고 믿는 순간, 우리는 돈으로 팔릴 수 없는 노동을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벌어진다. 우리는 자신이 좋아하는 노동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본이 좋아하는 노동을 수행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노동의 소외다. 가령 적벽가를 부를 때 가장 커다란 행복을 느끼는 젊은이가 있다고 해보자. 금융회사에 취업하려고 할 때, 그는 과연 적벽가를 부를 때 자신이 가장 행복하다고 당당히 면접관에게 말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비극적인 일 아닌가? 억만금을 주어도 팔 수 없는 것이 이제는 팔리지 않는 무가치한 것이어서 숨겨야만 하는 현실이 말이다. 과연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까.


옛날 어느 스님은 매일 일어나자마자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한다. “주인공! 잘 계시는가!” 스스로 삶의 주체로 살고 있는지를 점검한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도 스스로에게 매일 되물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여보게! 억만금을 준다고 하더라도 팔 수 없는 것이 자네에게 있는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이때 우리의 뇌리에는 노동 이외에 부모님, 자식들, 애인, 사랑, 자존심, 용기 등등 아마 수많은 사람과 가치들이 스치고 지나갈지도 모른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란 말이 있다. 조금씩 노력하다 보면 생각할 수도 없는 거대한 산도 옮길 수 있다는 고사다. 그렇다. 이제 우리는 억만금을 주어도 절대로 팔 수 없는 영역을 하나씩 하나씩 되찾는 어리석은 사람, 즉 우공(愚公)이 되어야만 한다. 그만큼 우리는 자본가가 어쩔 수 없는 강력한 주체로 거듭나게 될 것이고, 지금까지 잊고 지냈던 행복이 우리의 삶에 조용히 찾아오게 될 것이다. 너무나 단순해서 그만큼 너무나 어려운 행복의 길을 누가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는 우공이 되기에 너무나 약아져버린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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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모순도 오래되면 느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일까. 자본주의 체제에서 산다는 것, 그리고 민주주의 체제에서 산다는 것. 어느 사이엔가 우리는 둘 사이의 간극에 너무나 무감각해진 것 같다. 그렇지만 무감각해졌다고 해도 모순은 모순일 뿐이다. 세입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용산참사나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쌍용자동차 사태, 어느 여성을 크레인 꼭대기까지 내몰았던 한진 사태, 그리고 서울역 후미진 곳에서 잠을 청하는 노숙인의 풍경 등등. 우리 삶을 지배하는 모순은 언제든지 핏빛 얼굴로 나타나 우리의 삶을 동요시키며 결단을 요구할 수 있다. “당신은 자본주의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에서 살 것인가?” 다행스럽게도 양자택일이 아닐지라도 우리에게 다른 방식으로 물을 수도 있다. “당신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중 어느 가치를 우선시하는가?”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당신은 어떤 입장인가? 


 자본주의적 삶과 민주주의적 삶 사이의 모순을 다시 느끼려면 주주총회와 선거의 차이를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지도 모른다. 주주총회를 보자. 10명의 주주가 총회를 갖고 있다. 그 중 한 명이 전체 주식의 90%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 9명은 각각 1%의 주식만을 가지고 있다. 회사의 이익을 배당받을 때나 회사의 미래를 결정할 때도 대주주 한 사람이 전권을 행사하게 된다. 나머지 9명으로서는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주주총회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가 아니라 각자가 소유한 자본의 양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든 대통령을 뽑는 선거든, 미래 공동체의 삶을 결정하는 선거에서 이들 10명은 동일한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대표자를 선출할 때 재산이나 교육의 정도 혹은 신앙 등에 의해 선거권에 차등을 두지 않는다는 ‘보통선거’의 이념이다.


주주총회가 인간의 수가 아니라 자본의 양으로 결정된다면, 선거는 자본의 양이 아니라 인간의 수로 결정된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을 규정하는 모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과 인간 사이의 모순이라고 불러도 좋고, 재산권과 인권 사이의 갈등이라고 불러도 좋다. 아니면 경제와 정치 사이의 모순이라고 이야기해도 된다. 우리 주변에 펼쳐지는 비극은 항상 자본이 인간을 압도하려 할 때 벌어진다. 삶의 수단이 우리 삶을 옥죄는 핏빛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어떻게 하면 수단이 목적을 지배하려는 역설, 혹은 자본이 인간의 숨통을 조이는 역설을 해소할 수 있을까. 이것은 자본주의가 경제체제로 정착된 이후 지금까지 모든 인문정신들이 해결하려 했던 문제다. 자본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는 항상 인간의 삶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자본 앞에 구겨진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것은 어떻게 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에 다름 아니다.


선거에서는 재벌총수 한 명과 노동자 한 명이 동등한 한 표를 행사하는 것을 알기라도 하듯이, 지금 대선 후보들은 앞을 다투어 ‘경제민주화’라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어쨌든 재벌총수 한 명의 지지를 받는 사람보다 노동자 두 명의 지지를 받는 사람이 권력을 잡기 쉬울 테니까 말이다. 그러니 여당 후보든 야당 후보든 아니면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무소속 후보든 모두 앞다투어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역설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보통선거 이념에 따라서 권력을 잡으려는 사람들로서는 불가피한 전략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대통령은 태생적으로 자본주의의 자식이기보다는 민주주의의 자식이니까. 그렇지만 아는가? 민주주의의 자식이긴 한데, 대선 후보들은 모두 사생아라는 사실을.




일러스트 _ 김상민(출처: 경향DB)




▲ “지금 대선 후보들이 모두

민주주의의 사생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경제민주화나 복지를 주장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장밋빛 향기를 풍기고 있지만, 이야기를 잘 들여다보면 대선 후보들은 예외 없이 모두 자본의 성장을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자본이 성장해야 그렇게 성장한 것을 다시 노동자들에게 분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빵이 커지면 빵을 나누어줄 수 있다”는 해묵은 논리다. 이제야 대선 후보들이 모두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를 표방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단순화를 무릅쓰고 정의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가가 얻은 이익을 환수해 노동자들에게 되돌려주겠다는 이념이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 공정하고 윤리적인 통치자가 불가피한 법이다. 그러니 지금 역사관이나 윤리성이 대선의 첨예한 쟁점이 된 것이다. 혹시 생선을 고양이에게 맡기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발생할 수밖에 없으니까.


지금 대선 후보들이 모두 민주주의의 사생아일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의 진정한 아버지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어보면 문제의 핵심에 쉽게 들어갈 수 있다. 만일 자본이 그들의 생각처럼 성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은 도대체 노동자들에게 무엇을 분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바로 이 점이다. 사회민주주의가 표방하는 공정한 분배라는 이념은 분배할 것이 충분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자본이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거나 불행히도 불황이나 공황이 엄습할 때, 사회민주주의는 위기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분배할 것이 없다면, 그들의 권력 기반 자체가 부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결정적인 순간, 그러니까 불황의 순간에는 항상 자본 편을 들 수밖에 없다. 호황일 때는 민주주의자의 가면을 쓰지만, 불황일 때 사회민주주의자는 가차없이 자본주의자로서의 맨얼굴로 드러내는 형국인 셈이다.


이미 우리는 겪지 않았는가.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노무현 정권이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시도했던 사실을 말이다. 물론 노무현 정권이 FTA를 도입한 것은 스스로 공정한 분배자라고 자임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본이란 빵을 키워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 명확하지 않는가. 빵이 커야 나누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순간, 노무현 정권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몰랐던 것이다. 빵이 작든 크든 항상 나누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과거 조선시대를 떠올려보자. 민중이 보릿고개를 겪고 있을 때, 지주나 관청의 곳간에는 쌀이 썩어가고 있었지 않았는가. 민주주의의 원칙에 따라 그리고 인간애에 따라 사회적 노동의 결과물은 언제든지 나눌 수 있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그럴 의지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전 세계적으로 자본이 불황으로 치닫고 있는 지금,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불황에 이르러 자본은 자신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정리해고든 뭐든 인간에게 가혹한 시련을 안겨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민주주의의 가치를 더 깊이 생각할 때 아닌가. 위기의 순간에 더 절실한 것은 자본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과 존엄성을 긍정하는 자세일 테니까 말이다. 지금 우리가 대선 후보에게 물어볼 것은 경제민주화나 복지, 혹은 그들의 공정성이 아니다. “빵이 커지지도 않고 오히려 작아질 때, 당신은 자본의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인간 편에 설 것인가?” “혹시 당신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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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패다. 급하게 단추를 채우다 보니, 단추를 잘못 채운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 누구나 단추를 잘 채운 옷을 입고 싶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이 순간 내게는 단지 두 가지 선택지만이 남겨진다. 첫 번째 선택지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지만 단추를 차근차근 풀어가는 방법이다. 이렇게 인내를 가지고 단추를 풀어가다 보면 언젠가 단추를 잘못 채운 결정적인 부분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부분, 잘못 채워진 부분을 제대로 채워야 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너무나 성가신 일 아닌가. 혹시 단추를 잘못 채웠다는 나의 느낌이 틀렸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두 번째 선택지를 선택할 수도 있다. 단추를 잘못 채운 것 같다는 느낌을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부정하고 계속 단추를 채워가는 것이다. 언젠가 단추 채우기가 무사히 끝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단추를 다시 풀면서 뒤로 갈 것인가, 아니면 언젠가 맞겠지 하고 계속 앞으로 나갈 것인가? 제정신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추를 다시 풀어 잘못 채운 부분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결국 과거에서 우리는 구원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다. 과거나 현재를 간단히 부정하고 미래만을 보고 간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또 없을 것이다.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첫 번째 사랑에 실패한 사람은 심각하게 어느 지점에서 사랑이 자신의 곁을 떠나게 되었는지 처절하게 복기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실패한 사랑을 응시하는 것은 가슴 아린 일이니까. 방금 딱지가 앉은 상처를 다시 후비는 일은 너무나 힘든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상처를 후비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첫 번째 사랑의 비극에서 어떤 교훈도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두 번째 사랑에서 사랑의 결실을 바랄 수 있겠는가.


과거에서 구원의 희망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 시대 인문학이 얻은 핵심적인 통찰이 아닌가. 프로이트가 환자의 내면을 뒤지며 과거에 발생한 트라우마를 집요하게 찾아들어간 것도, 그리고 베냐민이 자본주의가 안겨준 불행을 해소하기 위해 19세기 자본주의의 수도 파리를 이 잡듯이 뒤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과거에 생긴 트라우마는 환자의 현재를 지배하고, 나아가 미래도 결정하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19세기에 그 틀을 갖춘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 시대를 거쳐서 미래 세대의 삶도 지배할 것이다. 현재와 미래를 바꾸고 싶은가? 그것은 개인의 경우든 사회의 경우든 모두 잘못 채워진 단추를 찾는 것으로 시작되어야만 한다. 지금 어떤 사람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그의 정신이 언제 틀어지게 되었는지 그 과거의 시점으로 육박해가야만 한다. 현재 자본주의 체제에 문제가 있다면,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가 지금처럼 뒤틀리게 되었던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유신·인혁당 등 과거 놔두고 미래만 보자는 ‘책략’이 있다

과거가 잿빛이면 미래도 잿빛…‘과거 투쟁’서 물러서선 안돼”


생각해보라. 일본의 사학자들이 집요하게 과거사를 왜곡하는 이유를. 일본 제국주의가 결코 반인륜적인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주장에 우리는 쉽게 콧방귀를 뀐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아직도 살고 있는 우리에게 일본의 주장이 먹힐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연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돌아가시고 우리마저도 이 세상을 떠난 뒤 100여년 후에는 그럴 수 있을까? 분명 과거 왜곡을 방치한 대가는 전적으로 우리 후손들이 감당하게 될 것이다. 일본의 역사 왜곡은 지금 우리를 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미래를 미리 장악하고자 하는 무서운 시도다. 결국 일본의 미래 세대들과 우리의 미래 세대들 사이에 갈등과 불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어떤 식으로든 미래를 지배하게 된다는 사실이 말이다. 과거를 둘러싼 투쟁이 현재에 이루어진 투쟁보다 더 파급력이 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제야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을 망령처럼 떠도는 이상한 이야기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이해할 수 있다. “과거의 일은 역사의 심판에 맡겨야 한다!” 유신독재도 그리고 유신독재가 남긴 상처도 ‘퉁치자’는 주장이다. 이것은 유신독재라는 그 치욕스러운 과거를 현재 살고 있는 그 누구도 문제 삼지 말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유신독재는 ‘박정희’라는 형식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 동시에 ‘장준하’라는 형식과 ‘전태일’이라는 형식도 만들어냈다. 지금 나는 형식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이 자리에 구체적인 인물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박정희’라는 형식이 있었기에 ‘전두환’이 가능했고, ‘장준하’라는 형식이 있었기에 지성인에 대한 탄압이 가능했고, ‘전태일’이란 형식이 있었기에 ‘비정규 노동자들’의 척박한 삶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반드시 유신독재라는 잘못 채워진 단추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독재자라는 형식, 그로부터 파생되는 지식인 탄압과 노동자 억압이라는 형식을 제거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전승된 것을 제압하려 획책하는 타협주의로부터 그 전승된 것을 쟁취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메시아는 구원자로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메시아는 적그리스도를 극복하는 자로서 온다. 죽은 자들도 적이 승리한다면 그 적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는 점을 투철하게 인식하고 있는 역사가에게만 오로지 과거 속에서 희망의 불꽃을 점화할 재능이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적은 승리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베냐민의 <역사철학테제(Uber den Begriff der Geschichte)>에 등장하는 말이다. 베냐민의 서늘한 역사 감각에 인혁당 피해자 가족들의 눈물과 절규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 우리 탓이다. 그들을 다시 눈물 흘리게 한 것은 바로 우리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우리는 과거를 둘러싼 투쟁에서 물러서서는 안된다. 잘못 채워진 단추로 거슬러 올라가 그것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그들은 계속 피눈물을 흘릴 것이고, 그 피눈물은 먼 미래를 절망으로 물들일 테니까 말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의 슬로건이 프루스트의 소설 제목처럼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여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역사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과거는 우리가 어찌할 수 없이 저 멀리 지나가버린 그런 것이 아니다. 과거는 집요하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그 그림자를 드리우기 때문이다. 과거가 잿빛이면 현재나 미래도 잿빛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니 과거로 돌아가 그 잿빛을 제거해야만 한다.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그 잿빛을 ‘퉁치자’는 움직임, 다시 말해 과거 잘못 채워진 단추를 그냥 내버려두고 미래만을 보자고 유혹하는 암울한 책략에 직면해 있다.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투쟁은 단순히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에까지 이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망스러운 미래를 되찾는 결정적인 동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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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돈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성을 보장하는 체제다. 돈이 상품과는 달리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10만원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10만원에 상당하는 상품 중 어떤 것이든지 구매할 수 있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면 자장면을, 아름다운 장미를 애인에게 주고 싶다면 장미를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상품을 가진 사람은 이런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가질 수가 없다. 자장면을 만든 사람이 아무리 애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려고 해도 돈이 없다면 불가능한 법이다. 반드시 자장면을 팔아 장미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어야만 한다. 급하다고 해서 자장면을 들고 꽃가게에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자장면이 있으니, 장미 한 송이만 주세요.” 아마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취업하려고 혈안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몸을 뜯어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신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려고 지금도 애를 쓰고 있다. 상품 상세 설명서, 그러니까 스펙이란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 스마트폰은 인터넷 속도가 빨라요, 그리고 앱도 다른 기종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활용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시중에 좋다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화소를 가진 카메라도 장착되어 있구요.” “저는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입니다.” 마르크스의 시니컬한 지적처럼 정말 지금 우리는 보편적 매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돈이 없다면, 우리는 옷과 집과 같은 생필품조차도 구할 수 없는 사회에 살 수 있으니까. 


자본가의 파괴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팔아서라도 얻으려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회사 CEO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그가 존경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그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든지 나를 해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내게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는 속담이 맞긴 맞나보다. 월급날 우리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니까 말이다. 우리는 작은 자본가가 된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탈바꿈한다. 이제 상품은 자본가가 가지고 있고,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냉혹한 원리, 그러니까 돈을 가진 사람이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원리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자본가의 잉여가치 보호하는

신용카드 남발과 대출제도

노동자에게 봉급 이상 지출 조장

자본의 탐욕 통제 장치는 없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출처: 경향DB)


평상시 자본가들은 소비자로 변신한 노동자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자본이 만든 상품을 사느라 자신이 가진 돈을 다 소비할 테니 말이다. 바로 여기에 자본의 신비가 숨어 있다. 노동자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는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볼까. 사실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이유는 그것으로 상품을 구매하라는 암묵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비자가 된 노동자들이 상품을 사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봉급으로 주었던 돈이 상품 대금으로 회수되지 않을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괴물이 가진 유일한 약점, 즉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광고를 통해 소비를 유혹하는 전략, 마케팅이 중요시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가의 입장에서 노동자에게 봉급으로 주었던 돈은 반드시 회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로서의 위엄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마케팅이고 뭐고 더 이상 노동자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허영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광고도 더 이상 노동자의 지갑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쓰고 말고는 돈을 가진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로서는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침내 묘수 한 가지가 자본가의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바로 신용카드와 대출로 상징되는 신용경제 시스템이다.


신용경제는 노동자가 아무도 모르게 미래에 쓸 수 있는 돈을 미리 댕겨서 쓰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결국 신용경제는 빚경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용경제는 또한 얼마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신용카드나 대출을 통해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든 우리는 가볍게 명품가방도 구입할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과시하는 허영인 셈이다. 또한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신용카드는 치명적인 마력을 발휘한다. 친구나 동료들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은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은행의 단말기는 어떤 꾸지람도 없이 버튼만 누르면 가볍게 300만원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신용경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만나면서 더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상거래는 주로 신용카드로 이루어지고 있고, 웬만한 결제는 이제 스마트폰으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어디서나 신용경제는 우리의 허영과 자존심을 음흉한 미소로 어루만져주고 있는 셈이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나 혹은 남에게 돈 이야기를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여린 사람, 즉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일수록 신용경제는 견디기 힘든 유혹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사악한가? 마치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신용경제는 우리가 돈이 궁해질 때를 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용경제에 포획되어 빚을 지게 될 때 자본은 빚을 진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우리 탓으로 돌릴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 부주의한 당신 탓이라고 말하는 기만적인 거미처럼 말이다. 부동산이든 명품가방을 사고 싶을 때, 혹은 갑자기 급전이 필요할 때, 우리는 신용경제에 포획되어 순간적인 단맛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항구적인 채무자의 길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신용경제가 발달할수록 신용은커녕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니 말이다. 그렇지만 자본은 그런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 국민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일하고 있는 지금 자본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부동산을 통해 경제 불황을 타개하겠다고 정부가 내놓은 정책, 그러니까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하겠다는 정책을 보라. 다시 우리들에게 빚을 내 부동산을 구매하라는 요구가 아니면 무엇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나 우리는 빚을 권하는 나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벗어날 수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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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