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주 | 철학자



마치 콩가루처럼 서로 반목하는 가족이 있었다. 어느 새 성장한 자식들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권위적인 부모 사이에 있을 법한 갈등이다. 성장한 자식들은 어머니가 가진 억척스러운 이기주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다. 특히 얼마 전 아파트 단지에서 일어났던 사건은 자식들의 불만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고조시켰다. 어머니가 쓰레기를 이웃집 근처에 투기하다가 이웃에게 발각된 것이다. 이웃집의 정당한 문책에 어머니는 증거가 있느냐며 뻔뻔스럽게 맞서기까지 했다. 이 일이 있은 뒤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식들은 어머니에게 해묵은 이기주의를 버리라고 질책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자신의 이기주의가 아니었으면 이만큼 살 수도 없었다고 항변한다. 자신의 억척스러움으로 자식들이 이만큼이나 성장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어머니로서는 배신감마저 들었다.


 당연히 어머니와 자식들 사이의 관계는 서먹하고 불편해져만 갔다. 가족 이기주의를 버리기보다 어머니는 자신의 권위를 어떻게든 되찾으려고 고뇌하게 되었다. 그녀의 머리에 특단의 조치가 떠올랐다. 자식들이 들어올 때 쯤, 그녀는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던 어느 아주머니에게 시비를 걸었다. 평소 소원한 관계였으니, 그녀의 정치적 책략을 관철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상대였다. 고성이 오가는 다툼 끝에 머리채를 부여잡는 몸싸움까지 벌어졌다. 상대방 가족들까지 총출동해서 그녀를 핍박하려는 위기의 순간에, 마침 귀가하던 그녀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궁지에 빠진 것을 목격했다. 바로 이 순간이다. 아무리 어머니와 갈등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식들은 선택해야만 한다. 이웃 아주머니인가, 아니면 자신의 어머니인가? 어머니와의 반목도 잊고 그들은 어머니 편을 들고 상대방 가족들과 맞섰다. 


한밤중의 전쟁 아닌 전쟁이 끝난 뒤, 어머니와 자식들은 개선 부대처럼 집으로 돌아왔다. 순간적이나마 가족 내부의 갈등은 미봉되며,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동지 의식이 복원된 셈이다. 싸움의 와중에 생긴 자신의 상처에 반창고를 붙여주면서 아직도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자식들에게 어머니는 희미한 미소를 던질 것이다. 마침내 그녀는 억척스러운 이기주의를 버리지 않은 채 어머니로서의 권위도 회복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놀랍지 않은가? 어머니는 20세기의 가장 문제적인 정치철학자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의 통찰을 본능적으로 체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작은 책 <정치적인 것의 개념>(Der Begriff des Politischen)에서 슈미트는 우리에게 섬뜩한 가르침을 전해준다. 정치적인 것, 다시 말해 정치적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에는 항상 적과 동지라는 범주가 따라다닌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김상민 ( 출처 :경향DB)


그렇다. 어떤 공동체를 적과 싸우도록 한다면, 그 공동체 성원들은 동지라는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아니 공유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으로도 권력의 정당성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내부에 발생할 때마다, 국가권력은 외부의 적을 설정하면서 내부의 갈등을 미봉하는 정치적 기법을 마다하지 않는다. 전쟁 중에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은 결국 이적행위를 하는 꼴이 된다. 바로 이것이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당한 비판마저도 국가권력은 전쟁과 갈등과 같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언제든지 무력화시킬 수 있다. 슈미트가 국가기구란 본질적으로 갈등과 반목에 의지해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한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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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시간을 훔치는 도둑과, 그 도둑이 훔쳐간 시간을 찾아주는 한 소녀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모모>라는 소설을 아는가? 독일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가 1973년 집필한 흥미진진한 동화로 우리에게도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은 소설이다. 독일 어느 마을 원형극장 유적지에 말라깽이 소녀 모모가 살게 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타인의 말을 경청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외롭거나 우울할 때, 혹은 삶에 지쳐 피곤할 때, 그녀에게 달려와 자신의 속내를 털어 놓는다. 모모에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그들은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앞으로 삶을 살아낼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곤 했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과 모모 앞에 아주 강력한 적들이 등장한다. 바로 시간도둑들이다. 그들은 효율적인 시간 관리의 중요성을 설교하러 다니는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의 전도사들이다.


 잠시 모모가 마을을 비운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시간도둑들에게 설득되어 버린 것이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모모를 찾아오지 않는다. 더 이상 그들에게는 모모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시간관념을 주입시키면서 시간도둑들이 그들에게서 모모와 대화할 수 있는 시간마저 훔쳐간 것이다. 시간을 합리적으로 지배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살아가면서 향유하는 시간이 아니라 이윤을 위해 소비되는 시간 관념이 그들 마음에 똬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비록 동화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모모>라는 소설이 우리 가슴 한 부분을 서늘하게 만드는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을 넘기며 우리는 자신이야말로 시간도둑에게서 시간을 빼앗긴 마을 사람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니까 말이다.


이렇게 <모모>라는 소설은 도둑맞은 시간, 혹은 강탈당한 시간을 성찰해볼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안내한다. 사실 시간의 비밀을 알려면 원시시대로 돌아가 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원시인들에게는 동물을 사냥하거나 과실을 채집하는 시간과 사냥한 것을 가족이나 부족과 나누며 향유하는 시간이 있다. 전자가 ‘노동하는 시간’이라면 다른 하나는 ‘사랑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사랑하는 시간이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동굴에 벽화를 그리고 축제를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원시인 누구나 노동하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비록 원시적이고 고단한 삶을 영위했지만 그들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이다. 행복이란 가급적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 인생 전체 시간에서 사랑하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완전히 노동하는 시간을 제거할 수는 없다. 어떻게 배가 고픈 사람이 어떻게 타인과 사랑을 나누며, 예술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출처 : 경향DB


▲ 자본주의적 삶의 가치 ‘시간의 지배’ 종속 불러

노동 줄여 사랑할 시간 늘려야 진정한 경제 성장·진보


행복에 대한 원시인의 ‘오래된 미래’에서 우리는 진보의 잣대 한 가지를 얻게 된다. 노동하는 시간이 줄어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면, 그 사회는 과거보다 진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자랑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과거 사회보다 더 진보한 사회인가?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서 사회 성원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더 많이 허용하는 좋은 사회인가라는 물음에 다름 아니다. 과거 농경사회를 떠올려보자. 남루해 보이는 이 시절에도 사람들은 노동하는 시간만큼 사랑하는 시간도 충분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하는 시간, 즉 농번기만큼이나 노동에서 면제되는 사랑하는 시간이 넘치도록 충만했다. 바로 농한기이다. 겨울 동안 아이들이나 친구들과 토끼 사냥이나 꿩 사냥을 떠나는 농부의 행복한 얼굴을 떠올려보라.


물론 우리 시대 시간도둑들은 당시 농경시대의 낮은 GDP를 내걸며 그때가 불행한 사회였다고 주장할 것이다. 심지어 지금은 농경시대 경제난을 상징하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고, 그래서 지금 자본주의 사회가 더 진보한 사회라고 설레발을 칠 것이다. 항상 시간도둑들은 이런 식이다. 인간의 행복이 질적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고, 우리의 행복은 자본의 양에 의존한다는 궤변을 펼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묻고 싶다. 지금 그렇게 GDP가 높은데도 우리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를 달리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이웃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고 있다는 반증 아닌가? 그리고 덤으로 알아두자. 과거 농경사회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보릿고개라는 현상의 이면에는 정부나 지주의 창고에서 곡식이 썩어가는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쨌든 최소한의 공동체가 이루어진 다음에 정의로운 삶의 규칙이 존재한다면,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법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우리들에게 사랑하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시간도둑들로 가득하다. 안정적 직장을 허용하지 않는 자본가들, 저임금을 유지하면서 맞벌이를 강요하는 자본가들, 농한기에 비해 너무나 작은 휴가 기간을 생색이라도 내듯이 허락하는 자본가들, 살인적인 경쟁 교육으로 아이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시간마저 빼앗고 있는 교육 당국자들, 근본적으로 사랑하는 시간을 늘려주는 것이 아니라 분배를 더 늘리겠다는 미사여구만을 읊조리는 정치가들. 자본주의 체제가 과거보다 진보적이라고 역설하는 지식인들. 농가성진(弄假成眞)이라고 했던가. 거짓말도 반복되면 진실이 되어버린다는 말이다. 시간도둑들의 거짓말은 반복되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의 삶이 처한 불행에 눈을 감고 있다. 그렇지만 언제까지 우리는 시간도둑들의 말에 순진하게 속고만 있을 것인가. 이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삶은 원시인들보다 더 불행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사랑하는 시간을 위해 우리는 노동하고 있는가? 어쩌면 우리는 소와 같은 삶을 영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침 일찍 나가 저녁 늦게까지 밭을 갈다가, 소는 축사에 들어오면 잠에 곯아떨어진다. 옆에 있는 소와 하루 있었던 일을 도란도란 이야기하거나 몸을 비빌 시간도 없다. 소의 일과와 우리의 그것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일주일 내내 노동하다가 주말이 되면 쉬기에 바쁜 우리가 어떻게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예술을 만끽하는 사랑의 시간을 향유할 수 있다는 말인가. GDP가 그만큼 올랐으면, 사회체제는 주5일 근무가 아니라 주4일, 혹은 주3일로 노동하는 시간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닌가. 불행히도 시간도둑들의 집요한 설교 탓인지 우리는 사랑하는 시간의 증가야말로 사회의 진보를 나타낸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가수 김만준도 ‘모모’를 부르며 절규했던 것 아닐까.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는 것을 모모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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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정신분석학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요약된다. “억압된 것의 회귀!” 자세히 풀어보자. 억압된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우리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용수철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용수철을 누르면 그것은 반드시 다시 튕겨 나오기 마련이다. 어느 때 튕겨 나오는지가 관건이 된다. 바로 튕겨 나오면 상관이 없다.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 안정을 취할 테니까. 문제는 눌러졌을 때 바로 튕겨 나오지 않는 경우다. 그것은 무엇인가가 튕겨 나오는 힘을 통제하기 때문이다. 생존의 이익과 불이익을 계산하는 알량한 자아가 그 역할을 한다. 엄청난 압력을 가진 채 일촉즉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은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부당한 대우를 받았지만 권력자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무모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분노를 꾹 눌러 놓는다. 참지 않고 상급자에게 분노를 표출한다면, 우리가 당할 불이익이 만만치 않으니까.

표출되지 않고 억압된 분노는 엄청난 압력을 가지고 있다. 마치 물을 가득 채우면 언젠가 터질 수밖에 없는 물 풍선과 같다. 아마 물 풍선의 부위 중 가장 약한 부위가 물이 터져 나올 장소가 될 것이다. 그러니 직장 상사에게 표현하지 못한 분노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애완견이나 자신의 아이에게 터질 수가 있다. 애꿎은 아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우리의 분노는 나름대로 해소된 것이다. 이번에는 우리 대신 아이가 자신의 분노를 억압할 테지만 말이다. 아마 아이는 자기보다 약한 학급 친구에게 그 분노를 표출할 것이고, 그 친구는 다시 또 다른 약한 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이 정도면 분노의 윤회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만약 충분히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아이에게 자신의 분노를 표출하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사랑하는 아이를 기꺼이 파괴시키는 일을 하려고 하겠는가.

그렇지만 탈출구를 찾지 못한 억압된 분노는 우리 자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여성의 경우 안면 근육 마비 등의 히스테리 증상을 보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어쩌면 히스테리 증상과도 같은 것은 그나마 긍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억압된 감정을 자신의 육체에나마 표출했으니까 말이다. 대부분 우리 이웃들이 선택한 전략은 더 비극적이다. 다름 아니라 분노와 같은 어떤 감정이 발생할 때, 그들은 감정 자체를 완전히 억압하여 교살하는 전략을 선택하니까 말이다. 권력자가 커피 잔에 가래를 뱉고 마시라고 할 때, 일체의 감정을 죽인 사람이라면 분노라는 감정이 발생할 리 없다. 당연히 권력자와의 마찰도 그리고 뒤따르는 불이익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권위적인 사회, 혹은 전체주의 사회를 가름하는 척도를 하나 얻게 된다. 개인들은 자신의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기 힘든 만큼, 그 사회는 권위적이라는 것이다.

권위적인 사회일수록 그 성원들이 좀비와 같다는, 혹은 기계와 같다는 느낌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너무나 권위적인 시부모를 두고 있는 며느리의 창백한 얼굴, 갓 군대에 입대한 이등병의 경직된 몸, 군경의 총칼 앞에서 굴비처럼 끌려가는 시위대의 잿빛 행렬 등등. 그렇다. 감정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하긴 자신에게 침을 뱉었다고 해서 시체가 분노하거나 기계가 화를 내는 경우는 없다. 그렇다. 살아있다는 것은 감정이 발생하고 그것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권력자가 웃기는 짓을 하면 웃고, 그가 부당한 짓을 하면 분노해야만 한다. 그래서 어쩌면 구성원들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고 당당해질 때, 다시 말해 자신의 삶을 긍정하는 힘이 있을 때에만, 민주주의는 간신히 가능한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일러스트 ㅣ 김상민


▲ 감정 자유롭게 표현 못한다면
개인 억압하는 권위적 사회다
인문학과 예술의 존재를 통해
삶을 옥죄는 게 뭔가 돌아보라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억압 체제는 항상 성원들에게 감정을 죽이라고 노골적으로 강제하거나, 아니면 은근하게 훈육한다. 자신의 삶을 살아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교살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억압해서도 안된다. 이럴 때 우리는 마침내 당당한 삶의 주인이 되며, 동시에 자유라는 오래된 이상이 현실에 그 당당한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자신만의 감정과 꿈을 자유롭게 노래했던 인문정신과 예술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그들을 통해 그리고 그들이 만든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억압되었던 우리만의 감정과 꿈을 되살릴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다. 그 때문일까. 자신의 삶이 무기력해지거나 무가치하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문학을, 음악을, 그리고 영화를 보러 가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 감정이 메마르고 있다고 느낄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인문학과 예술이란 오아시스를 찾는다. 카프카를 읽으면서 우리는 체제의 압박을 감내할 수밖에 없는 답답함을 느낄 수 있다. 베냐민을 읽으면서 우리는 억압체제에 대한 분노의 불을 다시 지필 수도 있다. 혹은 베토벤의 소나타를 들으며 우리는 삶의 깊은 비애를 회복할 수도 있다. 아니면 혼자 영화관에 들러서 기쁨, 절망, 슬픔, 혹은 환희의 감정을 수혈할 수도 있다. 이미 우리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감정이 아니라면, 더 자세히 말해 감정의 자유로운 표현이 아니라면, 삶은 죽음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돌아보자. 즐거움, 분노, 슬픔, 환희 등등 너무나 소중한 감정을 오늘 얼마나 표출했는지.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출할 수 있었던 만큼, 우리는 살아있었던 것이고 자유로웠던 것이다.

어쩌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오늘 하루도 지나간 것은 아닌지. 만약 불행히도 그렇다면, 다시 숙고해보자. 도대체 무엇이 감정의 자유로운 표출을 가로막고 있는지. 오직 이런 철저한 숙고와 반성을 거칠 때에만 우리는 자신의 삶과 자유를 옥죄는 권위주의적 구조에 직면할 수 있다. 마침내 우리는 가장 원초적인 지점, 어쩌면 번지 점프대에 서게 된 것이다. 뒤로 물러날 것인가? 아니면 앞으로 뛰어내릴 것인가? 바로 이 아찔한 순간이 찬란한 순간이기도 하다. 한번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리면 우리는 지금까지의 공포가 사실 과장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반면 다시 뒤로 물러서면 우리는 용기와 비겁, 그러니까 자유와 굴종의 번지 점프대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에서 시인 김수영이 말했던 ‘절정’에 서 있다. 그리고 절정에서 뒤로 조금 물러나는 순간 시인처럼 누구나 가슴을 치며 읊조리게 될 것이다.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 자신이 비겁하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비겁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 가능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더 많이 물러나 아예 번지 점프대를 떠나게 되면, 우리는 비겁했던 자신의 모습마저도 깨끗이 잊을지도 모른다. 비겁함을 비겁함으로 아프게 자각하지 못하는 순간, 우리는 정말로 비겁해질 것이다. 이제 번지 점프대에서 뛰어내리자. 이것이 바로 사자와 같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의 정신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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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TV를 틀면 유명 원로 연예인의 익숙한 목소리가 자주 들린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에서 보험을 들기가 만만치 않은 노년층을 상대로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는 광고의 한 대목이다. 장례비 등 자신이 갑자기 떠날 때 자식들이 떠안아야 할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자식에 대한 마지막 사랑이 아니냐는 은근한 훈계도 뒤따른다. 미래에 대한 염려를 조장하고 그 염려를 보험으로 완화시키라는 자본의 유혹이 무섭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돌아보자. 과연 노인들만 미래를 염려하고 있는가? 초등학생에서부터 중학생에 이르기까지 아이들은 특목고나 자사고에 갈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고등학생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을지 염려하고 있으며, 대학생들은 취업을 할 수 있을지를 염려하고 있다. 심지어 직장인들은 실직이나 당하지 않을지, 혹은 너무 이른 은퇴 뒤의 삶이 어떨지 염려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온통 미래에 대한 염려로 가득한 사회, 즉 염려사회에 살고 있다.

염려가 과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내일 중요한 일정이 있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내일 일정에 대한 염려가 지나치면 그는 오늘 하루를 제대로 보낼 수가 없다. 애인을 만나 행복을 느낄 수도, 고뇌에 빠진 후배의 하소연을 들을 수도, 길거리에 누워있는 노숙자의 삶에 비통할 수도, 심지어 지금 자신이 먹고 있는 음식의 맛을 음미할 여력조차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통째로 오늘 하루를 내일 일정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 일정이 끝나면 그는 미래에 대한 염려를 그치게 될까. 그렇지 않다. 내일이 되면 그는 모레를 염려하게 될 것이다. 오늘이 수단이 되고 내일이 목적이 되면, 우리의 현재는 항상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불행한 사람은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모든 행복은 내일로 연기된다. 물론 그는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다. 오늘 고생하는 것은 모두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좌우명, 그러니까 오늘은 힘이 들지만 내일은 행복할 것이라는 신념에는 심각한 아이러니가 잠복해있다. 내일이 오늘이 되는 순간, 모레가 또 내일이 되기 때문이다. 결국 미래를 지나치게 염려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은 잡을 수 없는 파랑새와 같은 것일 수밖에 없다. 행복을 약속해준다던 내일이 계속 고통스러운 오늘로 변할 테니까. 결국 “우리에게 내일은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은 죽을 때까지 불행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온통 내일에 대한 염려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잔인한 사람이다.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그리고 생계에 위협을 느끼는 이웃의 불안도 그에게는 별다른 느낌도 매력적인 이성과의 데이트도, 근사한 지역으로의 여행도 그에게는 별다른 기쁨을 줄 수 없으니까. 또한 이 사람은  줄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처럼 염려는 우리를 불행하고 잔인한 분위기를 풍기는 고독한 자아로 만드는 심리적 메커니즘으로서, 우리의 사랑과 유대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내일을 지나치게 염려하면 할수록, 그만큼 우리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애인, 친구, 후배, 그리고 가난한 이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없는 법이다. 당연히 이 상태에서 우리는 그들의 말에 화답할 수도, 그래서 사랑과 우정이란 관계를 형성할 수도 없다. 이처럼 염려는 누군가 함께 있으면서도 그와 공감하고 유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항상 억압 체제는 다수의 사람들을 깨알처럼 분리시키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법이다. 그러니 체제가 이런 좋은 계기를 간과할 리 만무하다. 체제는 우리보다 더 똑똑하다. 소수가 다수와 전면전을 벌여서는 승리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 체제 입장에서 미래를 염려하는 인간의 심리는 너무나 유용한 것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미래만을 신경 쓰면 쓸수록 우리에게는 사랑과 연대의 가능성은 그만큼 사라질 테니까 말이다. 잊지 말자. 외부의 타자와 만나고 공감할 때, 우리는 자신이 바로 현재에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는 것을. 결국 현재는 타자와의 공감과 연대가 가능해지는 시제라는 점이 중요하다.

체제가 염려를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실 체제는 고민하고 다시 고민한다. 염려를 어떻게 하면 더 증폭시킬 수 있을까,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깨알처럼 고독한 자아로 파편화할 수 있을까? 위대한 현대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나치라는 파시즘 체제와 연루된 것도 어쩌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인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나중에 불가피했던 일이라고 부인하기는 했지만 하이데거는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일련번호 312589를 받을 정도로 열성적이었던 진성 나치 당원이었다. 흥미롭게도 그의 철학을 관통하는 개념이 바로 ‘염려’, 즉 조르게(Sorge)였다. 결국 하이데거는 당시 독일인이 서로 유대하고 연대하여 독일의 산적한 정치경제적 난제들을 해결하는 데 뛰어들지 못하도록 만드는 데 일조했던 것이다. 삶을 옥죄는 난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만을 염려하고 있는 독일인들이 모든 난제들을 한방에 해결해 준다는 히틀러의 약속에 환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염려가 깊을수록 파시즘적 체제가 도래할 가능성은 높아진다. 아니 정확히 말해 파시즘적 체제는 미래에 대한 우리들의 염려를 증폭시키지 않는다면 탄생할 수도 없다. 그래서 어느 사회가 얼마나 파시즘에 노출되어 있는지의 척도는 항상 사회 성원들이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염려의 정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파시즘적 체제만 인간의 염려를 증폭시키는가? 그렇지 않다. 파시즘보다 더 노골적으로 염려를 증폭시키는 체제가 있다. 바로 우리 시대의 자본이다. 주변을 돌아보라. 불확실한 미래상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금융상품들을 팔아 이윤을 남기는 거대자본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이웃들의 고용 조건을 불안하게 만든 당사자가 누구인가? 그런 그들이 다시 미래를 염려하는 우리 이웃들의 불안 심리를 이용하여 다양한 연금과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우리의 염려를 증폭시키는 정치 체제나 경제 체제를 바꾸는 것은 시급한 일이다. 물론 체제의 구조를 바꾸는 일은 고독한 개인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 이웃들 사이의 공감과 유대가 없다면, 어떻게 압도적인 구조를 넘어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지금 우리는 체제가 증폭시킨 염려라는 심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완전 딜레마다. 억압 체제가 극복된다면 우리의 염려 상태는 완화될 것이다. 우리의 염려 상태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억압 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공감과 연대를 불가능하다. 여기가 바로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야 한다. 억압 체제가 없어지기를 기다리지는 말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증폭된 염려 상태를 완화시키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염려가 전제하는 시제인 미래를 부정하는 것이 그 출발점일 것이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라는 슬로건을 가지고 말이다. 사랑과 우정을 진정으로 나누고 싶은가? 이웃들과 공감과 연대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의 삶에 집중할 수 있는 시제, 즉 현재,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을 꽉 잡을 일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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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신자유주의로 표방되는 현대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남긴 상처는 너무나 깊고 광범위하다. 신자유주의란 자본가의 자유, 그러니까 결국은 자본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이념이다. 당연히 신자유주의가 발호하면 할수록 인간의 삶은 더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자본 성장의 제단에 바쳐진 제물, 혹은 목적을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렇다. 신자유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자본의 성장이지 결코 인간의 행복은 아니다. 정확히 말해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렇지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자본의 성장이 우리 인간의 행복을 약속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해 “빵이 커지면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나누어줄 수 있다”는 감언이설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진지한 얼굴로 빵이 커지도록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원리로 경쟁을 제안했다.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었다. 빵이 커져야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는 것은 지금 빵을 나눌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작은 빵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다고,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했으니까. 어리석음의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신자유주의가 내건 경쟁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생존경쟁이란 콜로세움에 뛰어들어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용케 승리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일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가 없으니 불안한 일이다. 이제는 빵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틈도, 그리고 빵을 나누자고 주장할 여력도 없다. 그저 검투 경기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존의 명령에 충실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구성 원리를 고민하는 것도 일종의 사치일지 모를 일이다. 


신자유주의의 기만 때문일 수도, 아니면 우리의 무지 때문일 수도 있다. 이제 결국 생존도 버거운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생존의 위기에 처한 사람이 자신 이외의 타인의 삶을 생각하거나, 아니면 바람직한 공동체의 모습을 꿈꿀 리 만무하다. 바로 이럴 때 파시즘의 유혹이 시작된다. 스스로 공동체의 미래를 꿈꿀 여력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이 대신 꿈을 꾸어주겠다고 나타난 형국이다. 이것이 파시즘이다. 위로부터의 구원의 약속, 다시 말해 “나만 따르면 모든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위로부터의 복음이 전해지는 것이다. 생존이 위태로운 사람들 중 그 누가 이런 복음을 거부할 수 있다는 말인가?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니 타인의 힘으로라도 구원받으려는 것은 당연한 반응 아닌가.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불안한 삶을 살았던 독일인들이 히틀러의 복음에 열광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생존이 불안정할수록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하려는 의지를 잃지 말아야 한다. 외부로부터 달콤한 구원의 목소리가 자꾸 들려올 테니까 말이다. 몸이 약해지면 정신도 혼미질 수밖에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꿈을 꾸지 못하고 타인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허영 때문일까. 스스로 주인이라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숨기려고 한다. 마침내 마르크스도 말했던 기묘한 전도 현상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에 대해 신하로서의 태도를 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꾸로 그가 왕이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하가 되는 것이라고 믿는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위대한 인문정신들이 이구동성으로 스스로 당당한 주인으로 살아야만 한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인지 모를 일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스스로 꿈을 꾸지 못하고

타인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싯다르타는 태어날 때 말했다고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이 세상 오직 자신만이 홀로 존귀하다고 기염을 토한 것이다. 편협한 사람이라면 싯다르타가 자기만 귀하고 다른 사람들은 비천하다는 오만불손한 선언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싯다르타가 원했던 것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절대적인 존귀함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임종을 앞둔 싯다르타의 유언을 제대로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스승이 세상을 떠났을 때 방향타를 상실할까 두려워했던 제자들에게 남긴 사자후였다. 싯다르타의 입장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웠겠는가! 자기 자신만의 당당한 삶, 그러니까 독존과 자유의 삶을 영위하라고 평생 가르쳤지만, 제자라는 것들이 자신의 삶을 살아내기는커녕 스승을 모방하며 살려고 했으니까 말이다.


싯다르타만인가. 서양의 가장 강력했던 인문정신의 소유자 니체도 말했다. “신은 죽었다”고 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는 신이 죽었다는 선언은 사실 이제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하며 살아야만 한다는 선언에 다름 아니다. 신의 역사가 이제 인간의 역사로 바뀐 것이라고나 할까. 신이 세계에 부여한 의미를 찾아서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제 스스로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야만 한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말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나를 잃고서 너희 자신을 찾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너희가 나를 모두 부인했을 때에만 비로소 나는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를 신봉하지 말고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때, 모든 사람은 차라투스트라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놀랍기만 하다. 모든 사람이 독존의 자유를 얻으라고 강조했던 싯다르타의 가르침은 자신의 삶을 긍정할 때 모든 사람이 차라투스트라가 될 수 있다는 니체의 가르침에서 다시 반복되고 있으니까. 동서양을 가로지르는 이 두 가지 가르침이 하나의 죽비 소리로 우리의 구부러진 등을 내려치고 있지 않은가! 외부로부터 삶의 지침을 찾으려는 우리의 나약함을 가차 없이 질타하여 구부러진 몸을 당당히 펴라고 말이다. 외부는 군주나 부모, 선생 등과 같은 인격일 수도 있고, 아니면 권력, 자본, 혹은 신과 같은 무형의 존재일 수도 있다. 외적인 권위를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의 삶을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살아낼 수밖에 없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그렇지만 이런 불행은 더 큰 비극의 서막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지 못할 때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불가능한 꿈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현대 프랑스 철학자 푸코의 가르침을 상기하자. 전쟁은 우리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억압적인 체제가 지배를 관철하려는 장소는 우리의 내면이다. 당연히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할 장소도 우리의 내면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 그렇지만 지금 상황은 어떤지 보라.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기보다는 종교적이거나 정치적인 멘토들의 판단과 생각에 열광하고 있다. 더 이상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보다 멘토들의 생각과 판단이 더 탁월하다는 군색한 변명은 하지 말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위한 멘토가 되지 못하고 멘토를 찾아헤맬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파시즘이란 괴물을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이제 스스로 판단하고 생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만큼 우리에게 그나마 간신히 자유와 민주주의의 꿈이 허락될 수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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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철학자


 

생계가 심각한 위협에 빠졌을 때, 우리는 이기적으로 변한다. 아니 변해야만 한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가 아니라 반드시 살아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니까. 이럴 때 우리는 생존 경쟁에 뛰어든 짐승으로 변하고 만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과 가져야 할 것에 연연하는 순간, 우리는 보수적으로 변하고 만다. 왜냐고. 보수주의란 기본적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강력한 소유의 의지가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주의가 기승하고 있는 상황에서 마치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불행히도 사랑이 사라질 때, 우리는 인간에서 짐승으로 변신한다. 모든 것을 절망적으로 소유하려고 할 때, 어떻게 타인에게 무엇인가를 건네주는 일이 가능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타인에게 건네줄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사랑 아닌가. 사랑이 없다면, 과연 인간에게 사회는 가능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일이다.


1998년 외환위기 사태와 그로부터 강력하게 대두한 신자유주의라는 이념만큼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까지 우리 인간을 아프게 할 수 있는지 명확히 보여주었던 것도 없다. 자본의 자유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인간이 자신의 자긍심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이 인간이 아니라 자본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제 인간마저도 그가 가지고 있거나 가질 수 있는 자본의 양으로 평가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니 달려야만 한다.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자본을 가지려는 경쟁이 시작된 셈이다.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해묵은 당근과 채찍의 전략을 다시 꺼내들었던 것이다. 경쟁에서 이긴 극소수의 사람이나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어선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당근을 제공했고, 불행히도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는 실직과 실업이라는 매서운 채찍을 휘둘렀다.



경쟁에서 이겨야만 한다. 그래야만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경쟁 논리는 인간을 동물로 만들어서 자신을 사랑하거나 타인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했다. 이런 참혹한 삶의 조건에서 한때 사랑의 결실로 칭송되던 아이들도 더 이상 환영받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행복도 생존에 불리하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지속될수록 출산율이 저하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인간의 반응인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생존에 더 이상 도움이 되는 존재라기보다는 생존율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귀찮은 존재로 여겨진 것이다. 당연히 우리 사회에서는 아이들이 점점 줄어들었고, 그만큼 상대적으로 장년과 노년층이 늘어나게 되었다. ‘고령화 사회’가 마침내 등장한 것이다.


고령화 사회가 결코 바람직한 사회일 수는 없다. 생존만을 걱정하면서 삶을 영위했던 결과이기도 하지만, 고령화가 가중될수록 전체 사회 성원들은 더 치열하게 생존을 위해 경쟁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노인들도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고령화 사회는 표면적인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아야 한다. 고령화 사회는 우리의 자유로운 결단에서 출현한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가 우리 삶에 강제한 서글픈 파국이니까. 10년 동안 이루어진 상처는 최소 10년 이상은 어루만져야 치유되는 법이다. 그러니 고령화 문제를 일순간에 해결하려는 정부의 여러 정책들은 일순간적인 마취제라면 모를까, 근본적인 해법일 리 없다. 더 가혹하게 말한다면, 정부의 정책은 기만적이기까지 하다. 하긴 자본의 이익을 위해 경쟁 사회를 조장하고 강화하는 데 일조한 정부가 과연 출산율과 고령화의 문제를 걱정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진짜 개도 웃을 일 아닌가.


명심하자. 신자유주의로 무장한 자본주의와 그것을 옹호하는 정부가 고령화 사회의 주범이라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나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고령화 사회를 교묘하게 다시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본가와 정치가들은 하나같이 모두 고령화 사회를 우려하고 있다는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양두구육(羊頭狗肉)도 이 정도면 예술의 경지에 이른 것 아닌가. 도처에 전개되는 상업 광고와 정치 선전을 보라. 외롭게 죽어갈 수도 있다고 두려워하고 동시에 남은 가족들을 걱정하는 노인들을 유혹하는 수많은 보험 광고가 우리 눈에 들어올 것이다. 또한 노인쉼터나 노인복지센터 등 노인들의 복지를 약속하며 그들로부터 표를 구걸하는 정당의 화려한 제스처도 눈에 쉽게 띈다. 너무나 멋지지 않은가? 자본가와 정치가들의 동물적 감각이 말이다. 고기와 내장도 다 빼내먹고, 이제 뼈까지도 우려먹겠다는 형국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어떻게 하면 고령화 사회를 극복할 수 있을까. 사실 이 의문을 제대로 풀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개인을 생존 경쟁이 아니라 사랑의 가치에 눈뜨도록 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공동체의 작동 원리는 성원들 사이의 경쟁이 아니라 사랑에 있다는 원초적인 사실을 깊게 자각해야만 한다. 남태평양의 어느 부족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GDP와 GNP에서는 우리와 전혀 경쟁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들은 남루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우리보다 더 해맑은 미소를 띠고 있다. 거센 바람과 파도에 맞서 싸운 어부 한 명이 그 결실을 가지고 해변에 이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부족 사람들은 그에게 달려온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물고기를 잡을 수 없는 노인도, 그리고 바다에 나가기에 너무나 어린 소년도 그 속에 섞여 있다. 그렇지만 아무런 미안한 마음도 없이 그들은 어부에게서 물고기를 받아간다. 놀라운 것은 어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고기를 웃으면서 나누어준다는 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렇지만 의문은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어부로부터 물고기를 나누어받은 노인들도 한때는 젊었었다. 당시 그들도 지금은 건장한 어부로 자란 어린 소년에게 물고기를 나누어주었던 것이다. 그렇다. 지금 물고기를 받은 소년들도 나이가 들면 노인이 되어 있을 어부에게 물고기를 나누어줄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사랑의 원리가 노인과 소년의 삶을 궁핍하지 않도록 했으며, 그들의 얼굴에 신뢰와 애정의 미소를 깃들게 만든 것이다. 이 부족 성원들 중 그 누가 아이 낳기를 두려워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아이는 나만의 아이가 아니라 공동체 성원 전체의 아이니까 말이다. 물론 지금 자신에게 물고기를 받은 소년이 장성하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누구도 자신이 괜히 물고기를 나누어주었다고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는다. 이렇게 사랑의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어떻게 경쟁에 지쳐 자살하는 젊은이나, 혹은 노숙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떻게 이런 곳에서 고령화 사회가 발생할 수 있다는 말인가. 오래된 미래가 있다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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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철학자


얼마 전 김수영에 대한 10주 강의가 끝났다. 모든 강의가 그렇듯 어쩔 수 없이 내 강의도 일방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말하고 제자는 듣는 식으로 강의가 진행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강의 도중 나는 종종 티타임을 제자들과 갖는다. 이런 때 나는 스님들의 묵언수행의 교훈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중생에 대한 사랑을 서약한 스님은 중생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듣기 위해 우리는 침묵하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내 쪽에서 소음을 내지 않아야 상대방의 소리가 들릴 수 있는 법이니까. 소통은 바로 침묵에의 의지 속에서만 시작될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선생은 제자에 대해, 부모는 자식에 대해, 정치가는 국민에 대해, 선배는 후배에 대해, 먼저 묵언수행의 교훈, 침묵의 지혜를 배울 일이다.

지금 우리는 소통하자는 외침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우리가 불통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증거 아닌가. 고대중국의 철학자 노자가 말했듯이 충효의 가치가 부각되는 시대는 사실 불효와 불충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소통의 외침이 주로 힘 있는 자들, 그러니까 정치가나 최고경영자들의 입에서 울려퍼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소통은 힘 있는 자들의 입에서 발화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에게 소통하자는 이야기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대통령이 하급관료를 불러 소통하자고 할 때, 혹은 아버지가 자식을 불러 소통하자고 할 때, 관료나 자식이 느낄 압박감은 명약관화하다.

야자타임이란 것이 있다. 나이나 지위가 같다고 상정하고 후배들이 편하게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자리다. 직장 상사나 학교 선배가 후배들과 소통하려고 벌이는 일종의 의식인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야자타임은 후배들을 더 경직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후배들은 야자타임을 자신들의 속내를 캐려는 선배들의 책략이라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하긴 어느 후배가 “야, 인마 너는 왜 이렇게 머리가 나쁘니. 그러고도 네가 사장이냐!”라고 이야기하겠는가. 똑똑한 후배라면 아마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네가 사장이었다면 나는 기꺼이 네 회사에 취업할 거야!” 야자타임만이 아니다. 소통을 위한 각종 모임도 별다른 결실 없이 변죽만 울리기 쉬우니까. 대체 소통하려는 의도가 번번이 좌절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통령을 포함한 사회지도층 인사 대부분은 소통 자체가 목적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다시 말해 그들은 한 번도 소통의 숨겨진 목적을 고민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소통은 사랑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의미도 없는 개념이다. 그러니까 사랑이 목적이고 소통은 단지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의 의지가 없을 때, 소통을 꿈꾸는 일체의 제스처가 상대방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후배가 이혼으로 힘들어 할 때, 선배는 소통의 모임으로 마련된 회식 자리를 취소하는 것이 낫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소통 아닌가. 반면 남편이 피곤해할 때, 그를 깨워 대화를 시도하는 부인은 지금 소통이 아니라 폭력을 행사하는 중이다.

학교에서 제자들이 죽어 가는데, 귀를 막고 있는 총장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비록 극단적인 형식일지라도 자살이 제자들이 건네는 절박한 하소연이라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고 있다. 하긴 경쟁이야말로 과학기술 발전의 동력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념의 대변자이니, 그에게 사랑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애초부터 어불성설인지도 모를 일이다. 놀랍게도 그도 소통에 대한 강조를 게을리한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지나친 경쟁으로 인간과 과학에 대한 애정을 잃어가는 제자들의 탄식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그는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그러니 그가 외친 소통은 자신의 뜻을 관철하려는 레토릭에 불과한 것이다. 그가 제자를 사랑하는 선생님이 아니라 체제 발전의 프로파간다로 전락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일러스트ㅣ 김상민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는 것, 혹은 자신이 듣고 싶은 것만을 말하라고 강제하는 것. 이것은 소통하려는 애정도 없으면서 소통의 제스처만을 취하는 것이다. 이보다 소통에 대한 더 큰 배신행위가 있을까. 자신이 내려는 소리를 타인으로부터 들으려는 것은 소통이 아니라 교묘한 고문 행위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신념이나 기득권마저도 내려놓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은 감히 소통을 입에 올려서도 안된다. 상대방이 자리를 내려놓으라고 말한다면 기꺼이 내려놓을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소통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다. 이것은 어쩌면 소통이란 한자에도 예견돼 있었던 것 아닐까. 소통(疏通)은 무엇인가 막힌 것을 터버린다는 ‘소(疏)’라는 글자와, 타자와 연결된다는 의미를 가진 ‘통(通)’이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 소통의 정신은 연결된다는 의미의 ‘통’이라는 글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는 ‘소’라는 글자에 응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통령도 신자유주의적 신념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카이스트 총장도 자신의 교육 정책이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정치인들도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판단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부모도 아이의 행복을 미리 알고 있다는 확신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는 법이다. 단지 자신을 내려놓지 않은 소통은 자신의 신념, 생각, 판단, 확신만을 상대방에게 관철시키려는 폭력으로 바로 변질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너무나 무서운 일 아닌가. 타자와 연결하려는 의지가 오히려 타자를 파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제자들과의 티타임 자리에서 나는 가급적 입을 다물고 침묵으로 일관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말하는 순간 제자들은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물론 내 강의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위험도 충분히 감내할 각오를 다지고 있어야만 한다. 선생으로서의 나의 기득권을 버릴 각오가 없었다면, 티타임 자리는 만들 필요도 없을 테니까. 티타임 자리는 사랑과 소통의 공간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 테니까. 티타임을 마무리하면서 나의 뇌리에는 다시 한번 묵언수행의 교훈이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침묵하라! 오직 그럴 때에만 당신의 귀에는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할 것이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자신을 버려라! 오직 그럴 때에만 당신보다 지위나 학식이 열등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릴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바로 소통의 첫걸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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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장례식장에서 가장 슬픈 표정을 짓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상조회사 직원이나 아니면 부의금을 대신 전달하려고 온 사람일 것이다. 왜냐고? 고인과 일면식도 없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다. 돌아보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고인이나 유족과 그저 아는 정도의 관계라면, 우리는 그 사실을 애써 숨기기 위해 더 공손하게 향을 지피고 더 애절하게 국화를 고르곤 한다. 이래서 예절이나 법도가 요긴한 법이다. 자신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도 상황에 맞는 연기를 가능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에 대해 형식이나 방법에 얽매일수록, 우리는 스스로 그를 사랑할 수 없음을 토로하고 있는 셈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좋아하던 음식이 자장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당신은 제사상에 어떤 음식을 올려놓을 것인가. 자장면일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제사 법도에 어긋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쨌든 제 아버님이 좋아하시던 음식은 자장면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아버지가 생전에 어떤 음식을 좋아했는지 알지 못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홍동백서(紅東白西)라는 규칙에 따라 지금까지 지내온 방식대로 제사상을 차리게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직감하게 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하는 것이고, 그것을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고? 그에게 행복을 선사하기 위해서고,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제사상에 아버지가 좋아하던 자장면을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아버지의 제사상에 홍동백서의 규칙에 따른 음식을 올려놓을 것인가? 여기서 진보와 보수가 갈라진다. 진보적인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통용되는 규칙이 아니라, 타인이 원하는 것을 해주려는 사랑이다. 그러니 과거의 규칙은 부정되고, 새로운 규칙이 등장할 수 있다. 홍동백서로 장식되어야 할 제사상에 자장면이 올라갈 수 있다는 파격! 그렇지만 이것은 과거의 규칙에 싫증이 났거나 혹은 단순한 변덕으로 생긴 것은 아니다. 누가 뭐라고 흉을 보더라도, 아버지의 제사상에 자장면을 올려놓는 혁명을 감행한 것은 아버지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 기원을 따지고 보면, 홍동백서라는 규칙도 아버지에 대한 누군가의 절절한 사랑이 없었다면 생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를 사랑했던 그는 제삿날 아버지가 좋아했던 음식을 올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 보수적인 사람은 아버지를 사랑해본 적이 없다. 당연히 그는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그것을 해주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단지 자식으로서의 기본적인 도리만을 아버지와 무관하게 실천할 뿐이다. 그러니 제사상마저도 과거의 방식이나 형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생전에 자장면을 좋아했다는 것을 모르니, 홍동백서로 차려진 제사상을 선택할 수밖에. 결국 타인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꼴이다. 이것은 결국 자기 사랑 아닌가.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칭찬을 듣기 위해, 혹은 불효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기 위해, 그는 열심히 아버지가 원하지도 않던 음식을 차려 놓고 생색을 내고 있으니까 말이다. 귀신이 정말로 있다면 아버지의 혼령은 자식의 집에 제사 음식을 먹으러 오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혼령은 집 근처 중화루라는 중국음식점으로 가지 않을까. 



일러스트 _ 김상민


▲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상대방이 원하는 걸 주는 것

형식논리 얽매인 진보, 소외된 이웃의 절망 헤아려야”


타인이 원하는 것을 읽어내 그에게 그것을 해줄 것인가? 아니면 자신이 옳다고 믿는 기존의 형식과 방법을 타인에게 관철할 것인가?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분명 전자의 길, 즉 사랑의 길을 따를 것이다. 사랑 때문이다. 홍동백서를 포기하고 자장면을 제사상에 올리는 혁명의 정당성은 오직 사랑 때문이다. 최소한의 인문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시라도 보수의 편에 설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 인간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맹목적으로 통용되는 형식과 방법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대목에서 우리는 이성복 시인의 예리한 통찰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산문집에서 시인은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의 방법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가.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그를 가장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된다. 아니 정확히 찾지는 못할지라도 찾으려는 노력을 쉬지 않을 것이다. 반면 이렇게 해야만 사랑일 수 있다는 방법을 미리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타인의 속내를 읽으려는 노력 자체를 불필요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이어지는 순서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방법을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방법을 가진 사랑”은 사랑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큰 폭력인 셈이다. 내 앞에 있는 타인보다는 자기가 옳다고 맹신하는 방법만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방법을 가진 사랑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으로 귀결하게 된다. 아니 오직 자신만을 사랑한다는 추악한 모습을 가리려고 사랑의 방법을 맹신하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과 무관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자식처럼 말이다. 


정치가든 학자든 아니면 일반 시민이든 진보를 표방하는 사람이라면 타인에 대한 사랑만이 새로운 방법을 발명해낼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니 진보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을 사랑하면 할수록, 타인을 사랑하기는 더 힘들 테니까. 현재 진행형인 진보정치의 위기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지금 진보정당은 억압받는 이웃들보다 자신의 이념을, 자신의 방법을, 그리고 자신의 동지를 더 사랑하고 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고나 할까. 진보정당이 보수정당보다 더 보수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어떻게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진보정당은 자신의 신념, 방법, 그리고 동지마저도 모두 내려놓고 사랑이란 잣대로 자신의 삶을 처절하게 반성할 때 아닌가? 이 대목에서 시인 황지우의 통찰은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뼈아픈 후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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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끔 철학적인 고민에 빠지곤 한다. 한숨을 쉬면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볼 때가 있다. “살아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자도 당혹감을 느낄 만한 질문이다. 그렇지만 대답하기 힘들 것만 같은 이런 난문도 형식만 조금 바꾸면 어렵지 않게 해답을 찾을 수 있다.왜 자살하지 않고 살아가는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사랑 때문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도 좋고, 아니면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도 좋다. 어느 경우든 우리는 쉽게 자살을 결정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생을 마감하려고 옥상 난간에 서 있는 어떤 사람을 떠올려보자. 순간 뇌리에 자신이 사랑하거나 혹은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떠오른다면, 그는 결코 난간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사람이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지만 아니어도 상관은 없다. 한두 마리 금붕어도 좋고, 아니면 작은 화초라도 좋다. 금붕어나 화초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두고 이 세상을 떠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한다면 그들에게 먹이를 주거나 혹은 물을 주어야 하니까. 불행히도 평생의 반려자를 잃어버린 사람이거나 아니면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애완견이나 화초를 가까이 하게 된다. 비록 인간이 아닐지라도 그것들을 사랑으로 돌보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처절한 몸부림인 셈이다. 밀란 쿤데라도 말하지 않았던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 그렇다. 자살에 이를 정도로 삶이 가벼워졌다면, 우리는 자신의 삶을 무겁게 만들 수 있는 사랑하는 대상을 찾아야만 한다. 


예수도, 마르크스도, 그리고 우리 시인 김수영도 한결같이 사랑이 충만한 사회를 꿈꾸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인간을 행복으로 이끌려는 그들이 어떻게 사랑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있었겠는가. 인간은 사랑하고 사랑받아야만 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자,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여리디여린 우리 아이들도 여기서 예외는 아니다. 아니 상처받기 쉬운 만큼 더 넓고 더 따뜻한 사랑이 필요한 법이다. 그렇지만 과연 지금 우리 아이들은 행복을 느낄 만큼 충분히 사랑하고 사랑받고 있는가? 아니다. 행복은커녕 우리 아이들은 폭력과 자살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 여기서 자살이나 폭력을 구분할 필요는 전혀 없다. 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으니까. 



일러스트 _ 김상민





자살이나 폭력은 모두 사랑이 부재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동일한 원인의 상이한 결과물일 뿐이다. 어떻게 타인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자신을 사랑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앗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폭력이나 자살은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미움일 수밖에 없다. 우리 소중한 아이들, 언젠가 앞으로 태어날 인간들을 돌보아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가진 그들이 점점 인간이라는 사실을 혐오하고, 자신이나 타인에 대한 미움을 쌓아가고 있는 이유는 자명하다. 사랑의 부재 때문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을 상실하면서 우리 아이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존재가 가벼워진 것이다. 


언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해답의 실마리는 아직도 나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는 선착순과 관련된 참담한 기억으로 충분할 것 같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 고등학교 교련이나 체육 수업에서 내가 온몸으로 배운 것은 선착순이 가진 냉엄한 경쟁 논리였다. 50명이 넘는 우리 반 학생들은 너무 우정이 깊었던 것일까. 교련이나 체육 선생님은 선착순을 통해 우리의 우정을 와해시켜서 일사불란한 교정 질서를 세우려고 했다. 경험해보았던 사람이라면 모두 알 것이다. 가장 먼저 골대를 돌고 돌아온 학생은 선착순에서 열외가 된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골대 사이를 다시 뛰어야만 한다. 또다시 한 명이 선착순에서 열외가 된다. 서로 친했던 우리의 내면에 조금씩 악마가 들어오는 것도 바로 이 순간이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친구들을 이겨 선착순에서 열외가 되어야 한다는 달콤한 속삭임이 들리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사랑과 신뢰의 관계가 경쟁과 불신의 관계로 변모하는 아찔한 순간이었다. 바로 이것이다. 교련이나 체육 선생님이 우리에게 각인시켜주려고 했던 것은 바로 경쟁과 불신이었던 것이다. 1등을 한 친구는 선착순에서 열외가 되고 나머지 우리들은 다시 운동장을 뛰어야만 했다. 1등을 한 친구는 우리들이 뛰는 것을 애써 보지 않으려고 했고, 우리도 그를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온몸이 땀에 범벅이 되어 교실로 향하는 길은 서로 너무 서먹서먹하기만 했다. 그렇게 우리의 틈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외로워지는 길을 강요당한 불쌍한 영혼들이었다. 선착순의 추억을 암울했던 독재의 잔재라고 가볍게 치부하지 말자. 1등에게 모든 혜택을 제공하는 경쟁 교육도 기본적으로 선착순의 논리를 전제하고 있으니까. 1등한 아이만 학교에서, 혹은 가정에서 사랑과 관심의 대상이 된다. 


뛰어야 한다. 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존할 수도 없다. 이런 사회가 지속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사랑의 가치를 점점 더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등수가 떨어지기라도 해보라. 1등을 하던 아이는 1등을 놓친 자신뿐만 아니라 자기 대신 1등을 차지한 아이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1등을 염두에 둘 수도 없는 아이들은 또 어떤가? 그들도 결코 사랑과 관심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삶의 이유이자 동시에 자신의 존재가 무거워지는 방법이니까 말이다. 연예인이 되어서 한방에 모든 사랑과 관심을 받으려는 야망을 품는 학생도 생긴다. 사랑이 아니라면 관심이라도 받아야만 한다. 폭주족 등 불량한 학생이 되거나, 아니면 폭력을 행사하는 학생이 되어도 좋다. 


누가 우리 아이들을 경쟁과 불신에 물들여 끝내 자살과 폭력으로 내몰고 있는가? 국가의 경쟁력을 위해 개인의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사람들, 인간보다는 자본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는 사람들, 미래 후손들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 바로 현정권과 그 비호세력들 아닌가. 그러니 자살과 폭력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겠다는 정부의 제스처는 개도 웃을 일이다. 경쟁의 논리를 버리지 않는 정부가 어떻게 아이들에게 사랑을 되찾아줄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가해자가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껏 정부가 생색을 내며 내놓은 대책, 즉 치밀한 사전예방과 단호한 형사처벌이 남루해 보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사랑은 그 방법부터가 철저하게 사랑에 입각해야만 한다. 그렇지만 감시와 처벌은 불신과 공포라면 몰라도 결코 사랑의 방법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니 자꾸 묻게 된다. “주여! 저들은 지금 저희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겁니까? 아니면 알면서도 하고 있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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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청량리로 가는 무궁화 열차를 양평역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 젊은 아가씨가 내게 조심스레 다가오며 물었다. “혹시 강신주 선생님 아닌가요?” 순간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 기억을 일깨워주려는 생각에서인지, 그녀는 5년 전 대학 신입생 때 철학입문이란 내 강의를 들었다고 수줍게 말했다. 그제서야 그녀의 눈빛이 어딘지 낯익어 보였다. 강의 때마다 가급적 모든 학생들과 눈을 한 번은 맞추려던 노력의 결실이었을까. 서둘러 열차에 올라타 좌석을 잡은 뒤 그녀의 근황을 물어보았다. 영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는 취업 걱정 때문에 벌써 휴학도 한 차례 했다며 쓴웃음을 짓는다. 명문 사립대, 그것도 영문과를 다니는 수재가 취업을 걱정하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그녀처럼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나는 물어보았다. “얘야. 너는 꿈이 뭐니?” 잠시 당혹감을 드러내고는 그녀는 말한다. “그냥 편하게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푹 쉬었으면 좋겠어요.” 어, 이거 분명 크게 잘못되었다. 내 제자는 꿈을 잃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소망스럽게 키워나갈 수 있는 꿈일 수 있겠는가. 하루 종일 들판에서 쟁기를 끌던 소나 품을 수 있는 꿈 아닌가. 말이 꿈이지, 이것은 그냥 삶에 지쳐 쉬고 싶다는 불행의 절규일 뿐이다. “너, 꿈이 없구나. 아니 꿈이 무엇인지 모르는구나.” 무슨 소리인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녀에게 나는 꿈과 현실 사이의 관계, 그 진실을 말해주었다. 꿈을 가진 사람만이 현실을 가질 수 있다고. 아니 정확히 말해 이상을 품고 있는 사람만이 극복할 수 있는 현실, 혹은 극복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현실을 가질 수 있다고 말이다. 


어느 소년이 아이거 북벽을 오르려는 꿈을 가졌다고 하자. 반드시 이루어야 할 꿈을 가진 순간, 소년은 압도적인 아이거 북벽과 아직은 나약하기만 한 자신의 모습, 즉 엄연한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니 거벽을 오르려는 꿈을 품은 소년에게는 고뇌가 찾아오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아이거는 등반에 능숙한 사람도 오르기 만만치 않은 괴물이니까. 등반의 꿈을 품었지만 그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소년은 자신의 삶을 무의미하다고 느낄 것이다. 그렇지만 역시 등반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어서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등반의 꿈을 가지고 아이거를 올려다볼수록, 소년에게 아이거는 더 자신을 압도하는 것만 같다. 꿈을 가지면 현실은 항상 더 큰 현실성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꿈이 열어놓은 현실이 너무나 압도적일 때, 소년은 아이거에 오르겠다는 꿈을 접을 수도 있다. 바로 이 순간 소년에게 극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아이거는 위험한 그 무엇으로 보이기보다는 그저 나와는 무관한 하나의 웅장한 풍경으로 보일 테니까 말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 “인간에게 두 가지 현실이 있을 수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이상주의자만이 현실주의자일 수 있는 법이다.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 하는 순간, 이상주의자는 그것을 방해하는 현실에 직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진정한 현실주의자가 항상 위대한 이상주의자였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억압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이 없었다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라는 냉엄한 현실에 직면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꿈을 실현하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그의 명저 <자본론>이 탄생한 이유가 아닌가. 그러니 잊어서는 안된다. 냉정한 현실을 응시할 수 있는 현실주의자의 힘도 그가 품고 있는 꿈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꿈을 포기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극복해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만이 남게 된다. 실천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현실이 아니라 관조하고 순응하면 되는 풍경으로서의 현실 말이다. 


그러니까 인간에게는 두 가지 현실이 있을 수 있다. 극복해야만 하는 현실과 순응해야만 하는 현실. 불행히도 내 제자는 후자의 현실만을 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생존하기 위해 현실에 적응하느라 경황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꿈을 이루려는 인간적인 희망이 그 싹을 틔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니 그녀의 낯빛은 그렇게도 무기력했고 우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뒤, 나는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며 물어보았다. “얘야. 대학에 갓 들어왔을 때 너의 꿈은 무엇이었니?” 신입생 시절을 되돌아보아 그런지 그녀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저는 제일 행복하거든요.” “그런데 왜 그 꿈을 접었니?” “선생님도 아시잖아요. 저희 학교에는 사범대가 없고, 또 있다고 해도 경쟁이 너무 심해서 선생님이 된다는 것, 그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거든요.” 꿈을 접은 이유를 설명하다가, 그녀는 내가 방금 전 건넨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시무룩해지며 곧 말문을 닫았다. 


속절없이 기차는 청량리역에 도착했고, 그녀는 학교에 가야 한다며 총총히 떠났다. 하지만 나는 한참이나 움직일 수 없었다. 꿈을 너무나 쉽게 포기한 내 제자가 너무나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안타까움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자신의 자식에게 안정적으로 물려주기 위해, 아이거의 수십배나 될 정도로 높은 현실의 벽을 만들어 놓는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할 현실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현실로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자유주의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가 바뀔 수 없는 절대적인 현실이라는 생각을 독가스처럼 전파시키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집권 여당은 이런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고, 그것을 세상에 관철시키려고 했던 것 아닌가.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꿈을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어떻게 인간이 극복해야 할 현실을 극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기에 나는 총선을 조바심 속에 기다렸다. 총선을 통해 나는 우리가 현실의 벽이 조금이라도 낮아질 수 있는 사회에 접근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리고 나는 우울함과 무기력을 감당하면서 인간은 결코 행복하게 살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불행히도 나의 믿음과 확신은 절실한 기다림만큼이나 깊은 절망감으로 변하고 말았다. 아직도 순응해야 할 현실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보수주의가 지배적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순간적이나마 내게는 환멸이 찾아들었고, 좋은 사회에 대한 꿈을 접을 뻔했다. 아찔했다. 꿈을 포기하는 순간, 내 자신은 극복해야 할 현실을 망각한 보수적인 철학자, 아니면 잘해야 염세주의적인 철학자로 전락하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 우리가 극복해야 할 현실의 벽은 줄어들기는커녕 더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럼에도 그리고 그렇기에 우리는 꿈을 꾸어야만 하는 것 아닌가. 모든 이가 꿈을 꾸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인간적인 사회, 그 사회에 대한 아름답지만 더 강해져야만 하는 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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