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김우창 칼럼'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2.04.09 [김우창칼럼]자유의 조건, 정의의 조건
  2. 2012.02.13 [김우창칼럼]모든 것이 정치다 - 심보르스카의 시

김우창 | 이화여대 석좌교수

대중매체에 보도되는 사건들을 쫓다 보면, 저절로 종말론자가 될 수 있다. 세상이 곧 끝장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큰 사건은 시간이 지나면서 큰 사건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상관없이 신문 매체의 보도는 신속해야 하고 또 현실에 직접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어야 한다. 좋든 나쁘든, 이것은 매체의 생존 조건의 하나이다. 그러니 이번 칼럼도 조금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야기하려는 것은 시간이 조금 지난 독일 정치 이야기이다.


지난 3월18일에는 독일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여야 여러 당의 합의로 후보가 된 요하힘 가우크 목사가 대통령 선출대회에서 절대다수의 표를 얻어 당선됐다. 그는 당선 직후에 당선 수락 연설을 하고 다시 3월23일에는 국회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취임 연설을 했다. 정치 연설이란 대체로 당대의 상투구를 짜깁기한 공허한 수사이기 쉽다. 가우크 대통령의 연설들이 그러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눈에 띄는 내용이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 체제의 기본을 확인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에 권력 투쟁이 있게 마련이라는 것은 인간 현실의 하나로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거기에 비방과 폭로와 욕설-우리의 경우에는 공공 공간의 엄숙성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막말들이 오고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정치의 존재 정당성은 그것이 보여주는 사회 윤리 그리고 정치 원리에 있다. 가우크 대통령의 연설의 핵심은 이것을 확인하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사실 독일에서 상기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나라들이 공유하는 원리들이다.

독일이 당면한 여러 과제들을 철학적인 또는 일반적 관점에서 두루 언급하고 있는 가우크 대통령의 연설에서 되풀이되는 주제는 자유이다. 민주주의가 자유의 이념에 기초한다는 것은 새로울 것이 없다. 독일의 언론에서도 이것을 진부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논평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확인될 필요가 있는 민주주의의 기초인 것은 틀림이 없다. 동독에서 살면서 교회활동을 하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를 가져온 정치 운동에 참여한 바 있는 가우크 대통령에게 자유의 주제는 특별한 개인적인 의미를 갖는다. 수락 연설의 첫 마디는 “참으로 아름다운 일요일”이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기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날인 3월18일을 두고 하는 말 같지만, 사실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처음 민주 선거가 있었던 1990년의 3월18일을 가리킨 것이었다. 그 때의 선거는 동독인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자유로운 시민이 되게 하고, 자신들이 주권자로서의 국민이며 독일이 자기 나라라는 것을 깨닫게 했던 감격적인 사건이었다. 현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환멸감이 커져 가는 마당에 가우크 대통령은 개인적인 체험을 회고하여 민주정치의 이념을 다시 다짐하고자 한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자유만으로 국가가 바로 설 수는 없다. 자유는 정의의 짝이 돼야 한다. 취임사에서 그는, “자유는 정의의 조건, 정의는 자유의 조건-자유와 자기발전을 누리는 조건으로” 하나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정의가 전체주의적인 명령으로 확립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의가 무엇을 의미하며 정의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는 진지한 민주적 토의와 토론으로만 결정될 수 있다. 그러면서 정의는 자유의 수호를 위한 조건이 된다. 많은 사람들이 국가가 정의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다는 느낌을 갖게 되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는 쇠퇴할 수밖에 없다.

토의가 어떻게 되든, 그가 생각하는 바 정의에 대체적인 테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정의란 우선적으로 사회정의를 말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소외나 빈부 격차를 방치하지 않고, 국외자(局外者)가 사회 변두리에 버림받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 노인, 장애자를 돌보고, 사회 참여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이다. 또한 정의롭다는 것은 평등만이 아니라 성장하는 아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한껏 발휘할 수 있으며,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과실을 기대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향상할 수 있게 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후자, 사회적 유동성에 조건이 되는 것은 정의에 못지않게 자유이다. 가우크 대통령이 이 후자를 새삼스럽게 강조하는 것은 동독 출신으로서의 정치적 체험에서 나오는 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의를 “자유와 자기발전의 조건”이라고 두 가지로 규정하는 데에도 그러한 뜻은 들어 있다. 그는 공산주의 체제가 설정하는 정의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지 아니한다. 그는 다른 곳에서 집단을 강조하는 계획들이 “자유” “삶의 즐거움” “법치의 안정성” “복지”를 줄어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지적한 일이 있다.(소책자, <자유를 위한 호소>) 그에게 “대의민주주의는 집단 이익과 공동의 복지를 고르게 하는 일에 적정한 유일한 정치 체제”이다. 그것이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좋은 점은 그것이 “새로운 배움의 능력을 가진 체제”라는 것이다. 자유는 새로운 배움을 위한 조건이다.

물론 개인적 자유를 그가 절대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의 기본법이 규정한 “사회국가”이다. 그것은 자유와 정의를 하나로 묶어 놓고자 하는 체제이다. 강제적 정치 질서를 거부하고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정의의 질서를 확보하려 할 때, 중요한 것은 책임의 개념이다. 책임은 자유와 정의를 하나로 이어줄 수 있다. 그것은 정치에서 논의되고 법률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주로 도덕적 윤리적 개념이다. 독일사회가 이주민을 포용할 수 있는 다원적 사회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면서, 가우크 대통령은 국가는 이제 민족의 운명공동체가 아니라 정치적 윤리적 가치공동체라고 주장한다. 국가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라면, 그것은 가치를 옹호하고 창조하는 수단이라야 하고 윤리에 의해 뒷받침돼야 한다.

거꾸로 여기의 가치란 정치적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개인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사회정의와 참여와 사회적 유동성”을 보장하려는 일을 가리킨다. 흔히 정치의 숨은 동기로 작용하는, “불안과 원한과 부정적인 계획”들로 하여금 정치를 이끌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가 소망하는 것은 “자유와 평화와 유대”가 하나가 되는 사회이고, “우리의 자손들에게 이것이 우리나라라고 물려줄 수 있는” 나라이다.

가우크 대통령은 그의 취임사의 마지막에서 이러한 이상을 위해 민주주의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대통령으로서의 그 자신에 대한 신뢰, 정치적 윤리적 책임을 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뢰, 그리고 국민에 대한 신뢰를 당부한다. 가우크 대통령은 그가 말하는 정치 이상이 유럽의 전통--고대 희랍, 법에 의한 정치, 그리고 유대로부터 내려오는 기독교의 전통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전통을 새삼스럽게 말하는 것은 독일이 서구의 민주주의 전통에서 오랫동안 이탈했던 사실과 오늘날 유럽 공동체의 위기적 상황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과제와 전통을 달리 하는 나라에서 반드시 민주주의의 이상과 현실이 같은 것일 수는 없다.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가 말하는 민주주의 이상은 민주주의 국가에 두루 해당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유와 정의 그리고 윤리적 책임을 버리고서는 민주주의가, 가우크 대통령의 표현을 빌려, “인간 생존의 가장 아름답고 위대한 가능성의 하나”로 남아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의 우리 정치 현실은 어떠한가? 거기에서 자유와 정의의 이상과 책임과 윤리 그리고 삶의 위대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상이기도 하면서 현실 정치의 현장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 오늘의 우리 정치 공간에서 이러한 높은 가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을까? 가장 천박한 싸움터가 된 듯한 정치 공간에 절망하면서도, 총선일 투표소로 가는 사람들의 고민은 이러한 민주주의의 이상의 관점에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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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예부터 한국인의 큰 관심사는 -개인적인 인생 문제 다음으로- 정치이다.
이제 큰 선거들이 다가오니, 정치가 더욱 중요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인의 경우가 아니라도, 폴란드의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가 ‘시대의 자식들’이라는 시에서 “하루 내내, 밤중 내내, 모든 일은-당신의 일, 우리 일, 그들의 일은/ 모두 정치이다”라고 한 것은 오늘의 세계에 두루 해당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세태를 말한 것이고, 심보르스카 자신이 정치를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말은 아니다. 이 시는 “정치가 번창하는 가운데에도, 사람들은 죽고/ 동물은 죽고, 집들은 불타고,/ 들녘은 황폐해져/ 상황은 정치적이지 않던 태곳적과 다름이 없다”는 말로 끝난다.

199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 심보르스카가 지난 2월 초하루에 88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침공, 유태인과 폴란드인 학살, 강제 이송과 노동, 소련군 진주, 숙청과 학살, 공산정권 수립과 붕괴, 자본주의 이행 등의 사건으로 인한 정치적 격동기가 심보르스카가 살았던 시대이다. 무력과 폭력의 대사건이 모든 것을 정치화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에 들어선 정치체제가 전체주의를 지향하는 나치즘이나 공산주의 체제였다는 사실도 삶의 정치화를 심화했다.

 
모든 것이 정치라면 심보르스카의 시도 당연히 정치적 내용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시는 정치에서 멀리 있는 삶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그러면서도 정치의 시대에서 정치에 대한 직접·간접의 언급은 피할 수 없다. ‘제목이 필요 없다’라는 시는 작은 것들이 삶의 내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내용이지만, 이것을 정치 또는 역사의 거창한 사건에 대비한다. 중요한 것은 “햇빛 밝은 아침/ 강가의 나무 밑에/ 내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중대한 사건이 아니어서/ 역사에 기록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동기를 따지고 연구 대상이 될/ 전투도 비밀조약도 아니고/ 전제군주를 주살한 사건도 아니다”. 그렇다고 작은 사실에 역사가 없는 것이 아니다. “덧없이 지나가는 순간에도 많은 과거가 있다.” 토요일 전에는 금요일이 있고, 유월 전에는 오월이 있고, 포플러는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린 것이고, 강물은 상류로부터 내려오고, 구름은 바람에 불려 왔다가 다시 불려 간다. 정치 음모나 대관식에만 사연이 있는 것이 아니다. 혁명기념일이 돌아오듯이, 강기슭의 자갈도 돌아든다. 개미와 풀밭과 물결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그 나름의 모양과 인과가 있다. “중요한 일은/ 중요하지 않은 일보다도 더 중요하다”-이렇게 말할 수는 없다.

처음 시를 쓰기 시작했을 때, 심보르스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이상에 따라 레닌에 관한 시 또는 새로운 공장을 짓는 노동자를 예찬하는 시를 썼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저항작가들과 합류했다. 그러나 발표된 시로 보건대, 그때 이미 정치보다는 개인적인 생활의 여러 뉘앙스에 인생의 현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중에도 정상적인 일상생활, 어떻게 보면 부르주아적인 삶의 일상성을 그리워한 것으로 보인다. 한 고전적인 풍경화를 말하는 시에서 그는 나무와 풀 그리고 오월의 오후가 그대로 있는 광경을 묘사하고 자신을 그림 속의 흰 보넷을 쓰고 노란 치마를 입은, 바구니를 들고 가는 여인이라고 생각한다. 이 여인의 세계는 모두 해야 10㎞ 정도의 자기 주변이다. 그러나 그 범위 안에서 병에 쓸 수 있는 약초는 잘 알고 있다. 그에게는 집이 있고 고양이가 앉아 있는 의자가 있고 물주전자가 있고 남편이 있다. 세상의 선악에 대한 고민이나 심리적 갈등에 시달리지 않는 그 여인에게 모든 일은 세상이 가르치는 상투적인 문구들로 설명된다. 물론 이러한 단순한 삶은 아이러니를 가지고 그린 것이지만, 어려운 시대의 심보르스카에게 동화적인 매력을 가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가족사진’은 이것을 조금 더 현실적인 관점에서 확인한다. 사진 속에 들어 있는 조상들은 비극적인 사랑이나 정신의 고민을 알지 못하던 보통사람들이다. 이러한 조용한 삶에 대조하여 “열광적이고 거대한 죽음”이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다른 사람들에 해당되는 일일 뿐이다.
 

폴란드 바르샤바의 크리스마스 장식 l 출처 : 경향DB


극장에서 연극을 보고난 다음의 생각을 적은 ‘연극 인상기’에서 그는 연극에서 자기에게 제일 좋은 부분은 연극이 끝난 다음, 죽었던 사람들이 가슴에 꽂혔던 칼, 목에 걸렸던 밧줄을 풀면서 일어나 청중을 향하여 인사할 때이다. 그렇다고 영웅들의 비극이 없는 보통의 삶이 고독과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비극이 끝난 다음에 무대에 흩어진 꽃이나 칼을 거두어들이는 일이 끝나면, 관중의 삶도 그렇게 불원간 거두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연극의 다른 효과이다. 사람의 일로 지속되는 것은 없다. 그리고 슬픔과 고통을 피할 수는 없다. ‘풍경을 뒤로하고’에서 심보르스카는, 다시 봄이 오고, 초목에 새싹이 움트고 젊은이들이 사랑을 하고 하는 것을 기피할 이유가 없고 세상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지만, “그 가운데 다시 사는 것”은 사절하겠다고 말한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고통과 슬픔에 대한 위안이었다.

높은 관점에서 내려다보는 눈에 인생을 테두리하는 것은 죽음이다. 정치와 역사와 이데올로기의 틀도 사람의 삶을 아는 데에는 너무 크고 먼 관점을 제공할 뿐이다. 공산치하에서 쓰여졌을 여러 편의 시에는, 이데올로기적 질서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삶은 우연의 연속 또는 행운과 불운의 연속이라는 것을 말하는 생각들이 표현되어 있다. ‘그럴 수도 있었을 일’이라는 제목의 시는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순전히 재수라고 말한다. 맨 먼저 와서 잘되는 수가 있고 맨 먼저 와서 잘못되는 수가 있고, “숲이 있어서, 다행이었을 수 있고/ 나무가 없어서 다행이었을 수가 있고”…. ‘테러리스트는 보고 있다’라는 시는 “13시20분”에 터지게 되어 있는 폭탄이 장치된 장소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을 묘사한다. 마지막 사람은 10초를 남겨 두고 일단 나왔다가 장갑을 찾으러 들어간다. 그리고 폭탄이 터진다. 다른 한편으로, 시 ‘유토피아’는 모든 것이 정연하게 정비되어 있는 세상이 사람 살 만한 곳은 아니라고 말한다. 정치계획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에서는 “왼편에 있는 깊은 확신의 호수에서는/ 바닥으로부터 진리가 방울져 올라온다./ 흔들리지 않는 소신이 골짜기 위로 치솟아/ 그 꼭대기에 가면 사물의 본질을 환히 내다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삶에서 발견하는 작고 아름다운 것 이외에 가치 있다는 것이 있다면, 심보르스카에게 그것은 개인의 심성 깊이에서 나오는 본능적 반응들-윤리적 의미를 가진 반응들이다. 진정한 사랑은 무상(無償)의 것이기에 값진 것이다. 자책감, 후회, 양심, 인간애, 연민 또는 동물에 대한 사랑 등은 삶의 귀중한 체험이다. ‘방주(方舟)에 실어야 할 것’이라는 시는 구출해야 할 가치로 “차이가 있다는 기쁨/ 보다 나은 사람에 대한 찬양/ 둘 중 하나만을 택하도록 줄여 놓은 것이 아닌 여러 선택/ 묵은 망설임/ 생각할 시간/ 언젠가는 이런 것들이 쓸모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러한 것들을 말한다.

사람의 감정이 만들어내는 것에는 나쁜 것이면서도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 있다. ‘증오’라는 제목의 시가 말하는 것이 그것이다. 증오는 정치를 움직이는 동력이 되기 쉽다. “인간애” “연민” “고민하는 사람의 회의”-이러한 것들은 군중을 열광하게 하지 않는다. 증오는 사람을 열광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장애물을 타고 넘을 수 있게 한다. 증오는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그것은 한밤중 찬란한 불꽃을 만들어내고 “장밋빛 새벽에 폭발하는 거대한 폭탄”을 만들어낸다. “증오는 폐허에서 비극적 감동/ 그 가운데 솟아오른 기둥에서 잡스러운 유머”를 발견한다. 종교와 국가 그리고 정의도 그것으로 힘을 얻는다.

작은 것들이 삶의 내용이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도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러니는 그것들을 지탱하는 정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작은 것들의 옹호가 바로 정치를 위한 교훈이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심보르스카 자신이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정치가 된 우리의 시대를 생각함에도 이런 아이러니는 교훈을 가지고 있다. 심보르스카의 죽음을 기하여, 그의 시를 돌아보는 소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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