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고 있음인가. 현 정권 들어 아주 간혹, 정부나 산하 연구소 관계자의 전화를 받는다. 시민 인문학 진흥을 위해 무슨 아이디어가 없느냐는 것이다. 대통령이 문화 융성의 일환으로 인문학을 언급하자 유관 부서들이 정책 개발에 나선 모양이다. 내 대답은 회의적이다. 인문학이 4대강처럼 될까 봐서다. 인문학의 본령은 비판과 성찰이다. 녹색 마인드 없는 정부의 4대강 사업이 4대강 생태계에 치명타를 가했듯이 인문 정신과 거리가 먼 정부의 인문학 사업 또한 인문학 생태계를 파괴할 수 있다.


정부의 인문학 지원 사업이 없는 것도 아니다. 대표적인 것이 인문한국(HK)사업이다. 2000년대 중반, 대학 교수들이 인문학 위기라며 난리를 치는 통에 만들어진 프로젝트, 인문학 연구 인프라를 구축하고 세계 수준의 연구 역량을 확보하겠다며 진행되고 있는 이 사업을 위해 연간 평균 400여억 원이 대학에 투입된다. 그러나 보라. 연구 성과의 학문적, 사회적 확산을 도모하고 세계적 담론의 생산과 소통을 주도하겠다며 천문학적인 돈을 들이는 이 사업이 인문학 진흥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한국연구재단이나 지자체의 시민 인문학 강좌 지원도 그렇다. 물론 이 프로그램으로 시민들은 대학이나 지자체, 도서관 등지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인문학 강의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인문학의 저변을 확대하거나 인문학 연구 풍토를 개선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수없이 개설되는 시민 강좌에도 불구하고 인문 출판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효과라면 적잖은 학자들이 대학의 비정규직 강사에서 시민 강좌를 찾아다니는 지식 소매상으로 변신하고 있는 정도라고 할까.


2. “하이데거의 철학과 불교 사상에 대해 비교 철학적 강의를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1995년 가을학기였다. 그 해 강의를 모험적으로 실시한 이후 필자는 필자 나름의 내면에서 하나의 학문적 확신을 얻었다.”


김형효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그의 책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 쓴 머리말 첫 부분이다. 김 교수는 전공의 경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색채의 철학 세계를 섭렵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철학에서 마르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베르그송, 메를로-퐁티, 레비-스트로스, 라캉, 푸코, 데리다 등 서양 철학자와 맹자와 순자, 노자와 장자, 주자와 퇴계, 율곡, 다산, 불교의 유식학과 화엄학, 원효와 지눌, 제자백가 등의 동양사상을 종횡무진하며 수많은 연구서와 논문을 냈다. 그리 많은 책을 냈으면서도 대부분이 묵직한 노작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했을까.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는 내게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의 저술 이면에 ‘모험적인’ 강의가 있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의 난해한 ‘존재와 시간’을 불교의 유식사상으로 풀어낸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만 하더라도 두 학기에 걸친 강의가 바탕이 됐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문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라는 안정된 직장을 가졌던 김 교수와 달리 대다수 소장 인문학자들은 비정규직 강사라는 것이다. 이들이 김 교수처럼 자신의 지적인 여정을 따라가며 강의를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칸트를 전공한 학자가 교양 글쓰기를 강의하고, 니체를 전공한 학자가 철학 입문을 강의하는 식이다. 이건 대학뿐 아니라 대학 밖 시민 강좌에서도 비슷하다.


일러스트 : 김상민기자


▲ 연간 400억 ‘인문한국’ 사업비를

인문학자의 강의·저술에 지원 땐

인문학의 위기 절로 해소될 것


3. 지난주 시작한 우리 공동체의 프랑스 철학 입문 강의에 세 사람이 새롭게 참여했다. 크지 않은 방이 꽉 찼다. 방이 비좁아 애를 먹는 강의는 몇 개 더 있다. 2주 전 시작한 지젝 강독이 그렇고 니체, 푸코, 칸트 강의도 마찬가지다. 들뢰즈 강독과 라캉 강독은 연 몇 주씩 출석률 100% 기록을 이어갔고 ‘에티카’ 강독은 32강을 진행했는데도 강의를 거듭할수록 참여자가 늘어난다. 불교경전과 동양고전, 인문 프랑스어, 희랍어 성서 강독에도 열기가 넘친다. 해당 분야 최고의 학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열정적으로 시민들과 만나는 덕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이들이 여기서 강의하는 것이 썩 바람직한 현상만은 아니다. 역량과 열정을 갖춘 학자가 자원봉사하다시피하며 대학 바깥에서 강의해야 하는 현실부터가 그렇다. 그 좋은 강의가 이렇게 작은 방에서 겨우 열 명이나 스무 명 앞에서 말하는 것으로 허공에 흩어져 버리는 것은 더욱 안타깝다. 강의 내용을 책으로 쓰고자 하나 이들에게는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부족하다. 이들이 연구하고 강의하며 집필할, 보다 나은 여건을 만들 수 없을까.


이제,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이렇듯 좋은 시민 강좌를 여는 학자에게 정부(기업도 좋다)의 강의 및 출판 지원비를 얻어 주어서라도 강의 내용을 책으로 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이게 가능하다면 시민들에게 질 높은 강의를 제공하면서 인문 출판을 살리고 인문 학자를 지원하며 제대로 된 연구 풍토도 조성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사조다. HK사업으로 매년 대학에 주는 돈의 4분의 1만 있어도 해마다 1000명의 학자를 지원하며 1000개의 고급 강좌를 개설하고 1000권의 인문학 책을 출간할 수 있다. 하기에 따라 최고의 인문학 진흥 사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아,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전제 조건이 있다. 지원 대상 선정 심사를 철저하게 독립시키고, 대학 교수는 아예 지원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문학 진흥에 관한 한, 대학과 대학 교수들은 문책 대상이지 지원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정부에서 인문강좌와 인문출판과 인문학자와 인문학계 모두에게 좋은, 꿈 같은 일이 가당키나 한가. 꿈…깨자!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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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벌이가 시원찮게 되면서 하고 싶었던 일조차 희미해져 버린 당신과 나, 이런 우리도 해마다 2~3주 정도 유럽이나 미주, 인도나 아프리카를 여행할 수 있을까? 이대로 가면 우리는 은퇴한 뒤에도 경제적인 풍요와는 거리가 멀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우리가 은퇴해 시간이 많아지면 해마다 프로방스나 알프스 인근의 고풍스럽고 한가한 마을, 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의 농장 등지를 돌아가며 2~3개월쯤 살아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조심스러운 우리의 거주 공간, 음악 소리를 제대로 내기도 어려우니 목공 같은 취미 생활은 엄두도 못 낸다. 전기톱이나 콤프레셔 같은 공구의 소음이 시작되는 순간 이웃이나 아파트 관리인이 달려와 문을 두들겨댈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시간이 날 때마다 목공삼매에 빠지며 뭔가를 창조하는 재미가 가능하기나 할까?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대안연구 공동체의 강좌 모습(출처 :경향DB)


얼마 전 아내와 함께 보름 동안, 때아닌 여행을 다녀왔다. 물론 돈이나 시간이 풍족해서가 아니다. 지난해 우리 집에 달포간 머물렀던, 은퇴한 해외 교민 부부와 메일을 주고받다 갑자기 마음을 내서 어렵게 돈을 마련하고 시간을 낸 것이다. 이들이 좋아했던 것들로 선물 꾸러미를 만들어 그 집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지만 약간의 불안함도 없진 않았다. 그 집에 머물다 불편해지면 상업 숙소로 옮길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버선발로 뛰어나오다시피 우리를 반기는 이들을 보며, 매일 밤마다 잔치를 벌이듯 준비한 식사와 담소를 즐기며, 숙소를 옮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돈 한 푼 내지 않고 머문 집이 내 집 못지않게 편안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우리를 아는 사람만이 준비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내의 취향에 맞춰 음악회 티켓들이 마련돼 있었고 내 관심사에 따라 녹색, 또는 대안운동 현장답사가 이루어졌다. 남녀노소가 어울려 춤추는 이색 클럽을 찾고 이국적인 맛집을 찾는 것도 그곳 사람만이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다 자동차를 빌려 우리 부부가 며칠 다른 지방을 여행하다 귀환했을 땐 몇 년 헤어진 사람을 만난 듯 반가워했다.


지난해 시작된 이들과의 인연은 이들이 우리 집에 얼마간 머문 것이 전부다. 그럼에도 부모나 형제의 집에 머무는 것보다 편안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돈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 그렇다면 돈 아닌 그 어떤 것, 정성이나 신뢰, 또는 함께하기나 나눔 같은 걸 우리도 배운 것이 아닐까.


은퇴 후 최소한의 비용으로 자신이 꿈꾸는 이국에서 몇 달 살 수 있다는 건 이들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두세 달 정도 집을 교환하면 된다는 것이다. 구미에서는 이미 퍼져 있다는 이른바 하우스 스위치, 집의 소유 못지않게 사용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유럽과 미주 일대에 집을 가진 사람과 서울 사람이 서로 일정을 맞춰 2~3개월 집을 교환하면 서울 사람은 유럽이나 미주에, 유럽이나 미주 사람은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살 수 있다. 생활비는 큰 차이가 없으니 비행기 삯만 있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지역과 일정 선택의 폭이 넓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유럽의 교민 사회에서 오랜 세월, 사회운동을 하며 인적 네트워크를 다져온 이 분들은 말했다. 이런 것들이야말로 돈이 전부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쉽게 실천 가능한 대안들 아닌가. 나는 유럽 참여자를 모을 테니 대안연구공동체에서도 그런 교환이 가능한 사람을 모아 보시라.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하우스 스위치, 어울림 공방…

더불어 사용하고 나누면

고단한 삶도 아름답게 빛난다


소유보다는 사용, 혼자보다는 함께하기를 즐기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이뿐 아니다.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 어울려 공방을 만드는 것도 그 중 하나다. 직업이 아닌 이상, 보통 사람이 서울에서 개인 공방을 만들기는 어렵다. 값비싼 공구도 그렇지만, 공방의 보증금과 월세는 더욱 부담스럽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누면 간단해진다. 특히 솜씨와 능력이 빼어난 사람이 있다면 공동체 구성원이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목공예교실 운영도 가능해진다. 나눔을 사회화할 수 있는 것이다. 상품화가 가능한 작품을 만든다면 사람들에게 판매할 수도 있다.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들도 함께하면 가능할 뿐 아니라 경우에 따라 일자리 창출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송년회 시즌이 시작됐다. 웬만한 이들의 수첩에는 이미 연말까지 송년회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다. 올해도 송년회에서 만난 이들은 온갖 건배사를 하며 술잔을 부딪칠 것이다. 어떤 곳에서는 “우리가 남이가”라고 외치며 그들만의 눈빛을 교환하기도 할 것이다. 좋다. 하지만 기왕 모이는 것, 우리의 삶과 삶터를 보다 건강하고 풍성하게 하는 뭔가를 함께 꿈꾸고 계획할 수는 없을까.


더불어 힘을 모으거나, 나누면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많다. 마포 일원에서 활발한 여러 공동체들도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는 것이 낫다는 믿음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계속되는 힘은 함께하는 이를 소중하게 여기며 소유보다는 사용과 나눔에 주목하는 것에 있다. 재능을 나누고, 아이 교육을 함께하며, 집도 나눈다. 이는 우리 인문학 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수단일 뿐 중요한 것은 인간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것도 갈수록 척박하고 고단해지는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인문학 공동체를 꾸리며 긴 여행이나 공방처럼 엉뚱한 것을 꿈꾸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니 누구든 오시라, 더불어 공부하며 꿈꿀 수 있는 온갖 재미난 것들을 지금, 여기서 이루어보지 않겠는가.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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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지럽다…. 얼마 전 공동체를 찾았던 한 대학 교수가 했던 말이다. 마침 에릭 홉스봄을 읽던 이들이 노각으로 오이 냉채를 만들어 나누고 있었다. 참기름 냄새가 진동했다. 한 방에서는 이반 일리치 읽기가 진행되고 있었고, 다른 방에서는 글쓰기 스터디가 합평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나는 나대로 목공 삼매에 빠져 있었던가. 세미나실 하나를 좌식으로 바꾸고 낮은 책상을 만들던 참이었다.


그가 보기에 어지러운 건 공동체의 겉모습뿐만이 아니었다. 강좌와 세미나, 스터디는 더 어수선했다. 그에 따르면 논어, 맹자 강독과 그 성격이 상반되는 노장 및 불교 경전 강독의 병행은 잡화점식 시간표의 전형이었다. 불교 경전 읽기 모임과 희랍어 성서 읽기 모임이 동시에 개설돼 있는 것도 그랬다. 그는 몰아세우듯 물었다. 니체에서 라캉, 푸코, 들뢰즈, 지젝, 벤야민, 부르디외처럼 인기 있는 강좌나 세미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사람조차 모으기 어려운 칸트 강좌는 왜 개설하는가. 그리스 고전 철학을 읽는 강좌며 세미나가 3개나 동시에 진행 중인 것도 비효율적이다. 영화 감상, 책 읽고 글쓰기, 시 창작, 영문 단편 읽기, 미술사, 건축, 사진 강좌와 누드 크로키가 포함된 드로잉 등은 하나로 묶기조차 어려운 이질적인 장르 아닌가. 여기에다 좌식 방이 완성돼 참선, 명상, 요가 모임까지 생기면 공동체의 시간표는 더 어지러워질 것이다. 작심한 듯 충고를 쏟아놓던 그 학자는 결론을 맺었다. 시간표에 이곳만의 정향이랄까, 특성이 드러나야 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다. 인문학 공동체는 명품점을 지향해야 살아남는다. 이것저것 다양하게 나열하는 백화점이나 지자체의 문화센터와는 달라야 한다.


2. 그의 지적은 맞다. 인문학 공동체가 백화점 문화센터와 다른 명품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현실적이다. 실제로 잘 알려진 제도권 밖 인문학 공동체의 대다수는 강의나 세미나 제목만 일별해도 그 지향이 드러난다. 대학 밖에서 철학적인 사유의 저변 확대를 꾀해 온 ‘철학아카데미’, 학문간 가로지르기를 하며 코뮨주의적 삶을 모색해 온 ‘수유 너머’ 계열의 여러 모임들, 진보주의와 자본주의 비판을 내세운 ‘네트워크 새움’과 ‘연구모임 아래’, 이름에서 공동체의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는 ‘다중지성의 정원’, 책과 차(茶), 그리고 우정이 있는 문화공간을 지향하는 ‘길담서원’, 역사나 문학 출판사가 출판 활동의 연장으로 설립한 ‘푸른역사 아카데미’, ‘문지 사이’, ‘인문까페 창비’ 등.


우리 공동체도 뜻한 바가 없진 않았다. 주부, 직장인, 학생을 포함한 시민들의 인문학 공부 욕구를 수렴하면서 제도권에서 외면하거나 못하는 것들의 대안 만들기.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 자본 앞에 무릎을 꿇고 대학이 돈벌이 기업화한 현실을 직시하는 것만으로 공동체의 지향은 어렵지 않게 도출됐다. 여기에 대학 안팎을 막론하고 수입 이론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외국 이론을 우리식으로 소화해 새로운 걸 창조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터였다.


일러스트 _ 김상민(출처 :경향DB)

문제는 칡넝쿨처럼 뻗어가는 공부 모임의 속성이었다. 니체, 들뢰즈, 지젝 등을 제대로 공부하려니 그리스 철학이 필요했다. 그리스 철학자들의 저작을 읽다 보니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처럼 전통과 현대를 잇는 연결점을 찾아야 했다. 서양 철학만 공부하는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해 동양 철학이 필요했고, 논어와 맹자를 공부하니 노장과 불교 사상에도 눈길이 갔다. 불교 경전을 읽으면서 종교 간의 대화를 생각하니 기독교 성서를 희랍어로 읽는 모임도 생겨났다. 문학, 영화, 건축, 사진, 드로잉 강좌, 세미나를 만든 건 인문학을 공부하며 연습한 사유들을 문화예술에 접목시켜 보려는 시도였다. 머리와 가슴이 함께하는 몸을 만들려니 명상이나 요가가 가능한 좌식 방도 필요했다.


3. 사실 공동체의 강좌와 세미나를 지향성이라는 실에 하나로 꿰려는 시도는 근대의 기획에 속한다. 인문학에서 서로 차이나는 것들을 한 지평 위에 개념적으로 종속시키려는 것이야말로 근대 기획의 전형 아닌가. 그것이 무엇이든 하나의 지향성은 제국주의를 배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 가지다. 유례없는 과학 기술의 발전을 앞세워 우주 만물을 인간 앞에 대상으로 나란히 세우며 이를 인간의 식민지로 만든 것도 그 결과다. 그리고 이 인간 중심, 강자 중심 기획이 지구화한 참상은 작금 우리가 목도하는 바와 같다.


부끄러운 아버지…. 이른바 명문대를 졸업하고 번듯하게 살면서 공동체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40대 중반 남성의 공부 이유는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다. 모르긴 해도 그가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 강자 중심 사회에서 자신이 차지한 힘 있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학연이나 혈연, 지연, 계급, 통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한사코 소유를 확대하며 여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가치의 전승은 더욱 아닐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열살, 스무살 어린 동료들과 어울려 오이 냉채를 먹어가며 희희낙락 공부에 열심이다. 공동체가 어지럽듯 그도 어수선해 보인다. 평생 안정된 밥벌이를 움켜쥔 대학 교수의 눈으로 보면 더욱 그럴 것이다.


그러나 명심하자. 인류사에서 가치 있는 것이 창조된 곳은 등 따습고 배부른 아랫목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새 가치, 법칙이 생성된 곳은 언제나 바람 차고 거친 산야였다. 앞날을 기약할 수 없이 떠난 모험의 길, 낯선 것들이 어지럽게 마주치며 공명하는 카오스에서였다. 그러니 당연하다. 다른 세상을 꿈꾸는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의 공부가 어지러운 것도.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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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융성이 국정 지표 중 하나로 된 덕인가. 인문학이 시대의 유행어가 된 느낌이다. 인문학을 벼랑 끝에 내몬 이들이 입만 열면 인문학이다. 여기에는 대통령이나 교육이나 문화 관련 부처, 대학뿐 아니라 경제 관련 부처도 포함된다. 인문학이야말로 창조경제의 바탕이라는 것이다. ‘CEO 인문학’ ‘아이폰 인문학’이 등장한 지는 이미 오래다. 슬라보예 지젝의 무겁고도 난해한 저작 초판이 출간 열흘 만에 소진되고 대학 밖에서 인문학 간판을 내건 단체만도 100개나 되는 시대, 바야흐로 인문학의 전성시대다.


스티브 잡스는 생전 신제품 아이패드 발표회 자리에서 “애플의 기술은 인문학(Humanities), 교양과정(liberal arts)과 결합되어 있다”고 밝혔다. 잡스의 기술과 인문 융합은 기업의 인문학 바람을 일으켰다. _ 경향신문 자료사진


때 맞춰 나도 인문학을 내걸고 숟가락 하나 얹었으니 제대로 흐름을 탄 셈이다. 문제는 공동체에서 나의 주 임무가 고상한 강의나 세미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쑥스럽게도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청소와 설거지다. 누군가 커피를 엎지르면 닦아내야 하고 어디선가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고 비명을 지르면 달려가 잡아줘야 한다. 복사와 프린트도 내 일이고 프린터에 종이가 걸리면 빼 내는 일도 내 차지다. 빔 프로젝터에 연결한 낡은 노트북이나 스피커에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고쳐야 하는 것도 내가 할 일이다. 그 기술이라는 게 기껏 코드를 다시 꽂거나 손으로 탁탁 치는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말이다. 처음 오는 이에게 찾아오는 길을 안내하는 것도, 이들을 맞이하는 것도 내가 하는 일이다. 돈이 없는 탓이다.


돈이 없는 게 당연하다. 우리가 하는 인문학이 창조경제의 바탕인 돈 되는 인문학과는 거리가 먼 까닭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외려 그 반대다. 사유다. 사유의 연습, 사유의 노동으로 자본과 과학기술, 대중문화가 맹목으로 팽창하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사상 유례 없이 풍족한 시대를 살면서도 이토록 피폐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파헤치는 것이다.


돈이 없다고 해서 가난한 것은 아니다. 한때 나만의 일이던 것들이 갈수록 공동의 일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만 해도 그렇다. 커피가 떨어질 만하면 누군가가 가져오고 누가 말하지 않아도 사무실 테이블에는 먹을 것들이 준비돼 있다. 청소와 설거지에 나서는 이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나의 주업이 위태로워지기도 했다.


인터넷 카페 별명이 ‘아로리’인 청년이 있다. 참여하던 공부 모임이 흩어지면서 한동안 공동체에 나오지 않던 그를 만난 건 뜻밖에도 어느 날 아침이었다. 일이 있어 일찌감치 공동체로 나왔다가 열심히 물걸레질을 하는 그를 발견한 것이다. 몰래 청소하다 들킨 그는 “일찍 출근하며 이곳을 지나다…”라며 어색하게 말을 얼버무렸던가. 충북 보은에서 번역 일을 하며 농사를 짓던 그가 공동체를 처음 찾은 것은 재작년 이때 즈음이었다. 그 먼 곳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 등을 읽는 서양고전철학 세미나에 참여한 것이다. 영어로 읽는 인문학, 프랑스어로 읽는 인문학 같은 세미나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던 그가 아예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이 지난해 봄. 공동체 인근의 한 공방에서 목공을 배우기 시작한 그는 즐기면서도 수행하듯 공부에 임했다. 몇몇 어려움도 있었다. 그가 희망하는 여러 공부 모임에 참여하기에는 공방 일이 지나치게 바빴던 것이다. 그나마 참여하던 세미나도 이를 이끌던 학자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서 해산되자 당분간 그가 공동체에 올 일도 사라졌다. 모든 만남에는 헤어짐이 잉태되어 있지만 사람의 드나듦이 이곳처럼 잦은 데도 드물다. 새로운 강좌나 세미나를 개설하며 마음이 설레는 건 아로리 같은 이들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러스트 _ 김상민


처서가 지나면서 무더위도 한풀 꺾였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대학 바깥의 여러 인문학 공동체에서는 수많은 강좌나 세미나가 시작된다. 이는 논어, 맹자, 장자 강독에서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토텔레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칸트, 니체, 들뢰즈, 푸코, 지젝에 이르는 강좌와 세미나를 준비하고 있는 대안연구공동체도 마찬가지다. 기왕의 발터 베냐민에 더해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 이론 읽기와 이반 일리치 저작 읽기도 우리가 새롭게 시작하는 세미나 중 하나다.


책 읽기, 글 쓰기, 토론처럼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지는 공동체의 인문학은 돈벌이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장식품이나 한담도 아니다. 피폐한 시대, 인간적 삶을 위한 성찰과 연대에 필수적이면서도 절절한 화두다. 새롭게 시작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만 해도 자본과 욕망을 포괄하며 우리 시대를 통찰하는 멋진 이론이었음에도 제대로 착근되지도 못한 채 우리에게서 멀어져가지 않았는가. 푸코가 “젊은 날 이들을 만났다면 학자로서의 평생을 비판 이론의 주석가로 살았을 것”이라고 고백한 이론이다. 한물간 느낌이 없지 않은 비판 이론을 지금 여기서 공부하는 건 세계화, 정보화의 벌판에서 편익과 효율과 욕망을 좇다 막다른 곳에 내몰린 우리를 제대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현대 기술 문명을 뿌리에서 비판하며 온몸으로 대안을 찾고 실천한 이반 일리치 저작 읽기 세미나도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2400년 전,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광장에서 사람들에게 물었다. 정의란 무엇인가, 지혜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 이제 이들의 저작을 공부하며 우리도 질문하고 사유할 것이다. 욕망이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무엇인가, 다시 정의란, 지혜란, 용기란 무엇인가…. 이런 질문에 동참하기 위해 잠시 이곳을 떠났던 사람과 새로운 사람들이 어우러져 공동체를 찾을 것이다. 새로운 인연의 시작도 좋고 잠시 끊어졌던 인연의 재개도 훌륭하다. 아는가, 아로리처럼 멋진 이들이 우르르 공동체를 찾을지.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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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를 결심한 그날 밤에 아내가 아들을 출산했다는 전갈이 왔다. (…) 태자는 아내의 침실로 들어갔다. 아내는 아기를 품에 안고 잠들어 있었다. 아기와 산모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 저 팔을 치우면 아내가 깨어나겠지. 성불한 뒤 돌아와 내 자식을 안아보리라.’ 태자는 왕궁을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렸다. 성문이 저절로 열리고 말은 발굽을 땅에 딛지 않고 달렸다. 강을 건넌 뒤, 수행하던 시종에게 옷을 벗어주며 작별했다. 싯다르타는 칼을 집어 머리칼을 잘라 허공으로 던졌다.”


본격 휴가철이 시작된 주말, <보르헤스의 불교 강의>를 읽으며 더위를 식힌다. ‘20세기의 창조자’라고도 불리는 저 남미의 환상적 리얼리스트가 정통한 이해를 바탕으로 풀어내는 불교 강의는 여러 차례 읽어도 질리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자주 눈길이 머무는 곳은 보르헤스가 붓다의 출가를 묘사한 부분이다. 번뇌의 불꽃을 끄고 생사의 매듭을 풀기 위해 갓 출산한 아내와 아들을 버려두고 떠나는 것이다. 고금의 영웅들이 모두 그랬듯이. 영웅과는 십만 팔천 리나 떨어져 있는 내가 이 구절에 자꾸 끌리는 것은 번뇌와 생사의 고통이 아무리 커도 나는 결코 떠날 수 없는 그릇임을 잘 아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불교의 가르침, 혹은 수행이나 깨달음은 출가 수행자들의 전유물인가. 사랑하고 아이를 기르며 먹고 살기 위해 일상의 온갖 비루함을 견뎌야 하는 나와 당신은, 그저 떠나는 이들을 부러워해야만 하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정진해도 캄캄한 밤중을 헤매는 이들이 허다한 터에 사랑과 돈과 명예 따위를 좇는 이들에게 깨달음이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언젠가 이후 경제는 늘 쉽지 않고, 한발 삐끗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대다. 이럴수록 우리의 화두는 오직 ‘살아남기’ 하나가 돼야 한다. 떠나지 못한 채 오롯이 견디어야 하는 당신과 나, 깨달음에 관한 한 이번 생은 이미 망했다.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함인가. 인문학을 기치로 내걸고 출범한 공동체에서 불교 강좌를 다시 꾸린다. 재작년 시작했던 공동체의 불교시민강원이 흩어진 지 일 년여 만이다. 이 강좌를 위해 불교 교학뿐 아니라 인문학에도 두루 밝은 스님을 삼고초려했다. 지난해의 실패 탓에 강좌를 다시 여는 것도, 훌륭한 스님을 모시는 것도 쉽지 않았다. 부실하나마 명분은 있었다. 공부하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 출가자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면, 저잣거리 사람들과 나누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하다보면 재가자 중에서도 스님의 공부에 도움이 될 사람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다수를 모아 일회성 강좌, 혹은 가벼운 법문을 하는 식의 강의를 일방적·단편적으로 할 게 아니라 소수가 오더라도 깊이 있는 본격 강좌와 세미나를 오래 지속하며 학문과 수행을 함께할 도반을 찾자는 것이었다.


과문해서 거칠기 짝이 없지만 우리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건 아니다. 출가 수행자들이 산사에서 은산철벽을 꿰뚫고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내디디며 구한다는 깨달음이란 것이 높디높은 어떤 경지가 아니라는 것을. 선사들의 뼈를 깎는 수행담은 그 어떤 모험담 못지않게 흥미진진하지만 깨달은 사람이라고 해서 남다른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물 위를 걸을 수도 없고 허공을 날거나 가려진 벽을 꿰뚫어 보거나 남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능력도 없다. 


새 불교운동을 펼쳐온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에 따르면 깨달음이란 변화와 관계성의 법칙을 깨닫는 것, 즉 삼라만상이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이다. 여기서 연기적인 존재를 깨닫는 것은 삶과 존재의 모든 영역이 변화와 관계의 세계임을, 비실재, 무아(無我)임을, 환상임을 깨닫는 것을 이른다. 대승불교의 이상향인 보리살타(보디사트바, 보살)는 이런 초기 불교의 이상향인 아라한의 깨달음에서 더 나아간다. 보살은 깨달음이란 뜻을 지닌 보디와 중생, 즉 모든 삶과 역사로 치환될 수도 있는 사트바를 합성한 말이다. 보살이라는 대승불교의 이상 속에는 깨달음과 사람을 포함한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역사와 함께하는 뜻이 함축돼 있는 것이다.


다음 주 개강하는 공동체 불교 강좌의 첫 텍스트가 <유마경>이라는 건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유마경>은 초기 불교의 주요 테제를 광범위하게 다루면서 이를 대승불교의 관점에서 해명하는 대승 초기 경전이다. 특이하게도 이 경전의 주인공 유마거사는 출가자가 아닌 재가자다. 그는 재가자이면서도 붓다의 10대 제자를 압도하는 깨달음과 지혜로 출가 교단의 권위주의와 독선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이 경전의 핵심은 ‘번뇌가 곧 보리(菩提)’라는 것이다. 하기야 <유마경>의 통찰이 아니어도 진리와 해탈이 있는 곳이 어찌 고요한 산사의 선방뿐이겠는가. 진리는 외려 사랑하고 아이 기르며 먹고 살기 위해 지지고 볶는 우리의 일상 속에 있을 것이다.


“일체 중생이 병들었으므로 나도 병들었거니와 만약 일체 중생의 병이 나으면 나의 병도 나을 것이다.”


세간에 회자되는 유마거사의 저 유명한 선언은 공동체를 꾸리는 뜻과 정확하게 겹친다. 우리가 얻으려는 자유는 나 홀로 번뇌와 욕망에서 벗어나려는 자유가 아니다. 번뇌와 욕망 속에서의 자유다. 어지러운 시대, 이웃과 더불어 아파하고 낫기를 꿈꾸는 도심 공동체에서의 공부도 수행이라는 점에서 출가자의 공부와 한 가지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는 대안 수행 공동체이기도 하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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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가 그걸 모르나?”


정부의 한 핵심 실세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서울의 한 사립대 총장이 보였다는 반응이다. 이 핵심 실세는 김광두 국가미래연구원장.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를 이끌며 현 정부의 국정 밑그림을 그린 이로 알려져 있다. 김 원장이 6월27일 경주에서 열린 대학교육협의회 대학총장 세미나에서 했다는 기조 강연의 요지는 공자 말씀에 가깝다.


“창조산업에선 문화 콘텐츠가 중요하다. 현재 시장 수요가 적다고 전통 인문학인 문사철(문학·역사·철학)을 가볍게 생각하는 흐름에 대해서는 고민해봐야 한다. 문사철에 바탕을 둬야 깊이 있고 차별성 있는 내용을 만들 수 있다.”


그는 강연 뒤 기자들과 만나 일부 대학들이 인문학과 통폐합을 하면서 너무 상업적으로 간다고 비판한 것으로 전해진다. “누가 그걸 모르나”란 냉소적인 반응은 여기서 나왔다고 한다. 대학 구조조정과 재정지원에서 취업률이 절대 지표가 되고 있는 상황에서 취업이 안되는 인문학과의 통폐합은 어쩔 수 없는 일 아니냐는 것이다.


대학 인문학 위기의 큰 책임은 대학에 있지만 총장들의 항변도 잘못된 건 아니다. 정부가 칼자루를 쥔 ‘갑’이고 대학이 ‘을’인 이상 먼저 바뀌어야 하는 쪽은 정부다. 


대학이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하고 교수가 기업에 취업을 구걸하며 동분서주하게 된 책임은 취업률로 대학을 줄 세워온 정부 쪽이 더 무겁다. 따라서 정부가 진정으로 대학 인문학이 살아나기를 바란다면 제도부터 맞게 정비하는 것이 순서다. 인문한국(HK) 사업으로 인문학의 목줄까지 거머쥔 정부가 한국연구재단을 통해 벌이는 선심성 사업으로 살아날 인문학이 아니다. 


인문학의 요체는 심사를 해가며 벌이는 사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들이 마음껏 연구하고 교수할 수 있게 하는 자유에 있다. 정부 실세의 대책 없는 질타와 대학 총장의 항변 사이에서 말라가는 것은 대학 인문학, 인문학자다.





2. 대안연구공동체에서 30강에 걸쳐 한 사상가의 저작 강독을 이끌어온 학자가 곧 강독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어려워도 몇 년은 함께하기로 했는데 도저히 시간과 몸이 받쳐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한 지방 대학의 HK 연구교수다. 그 대학이 HK 연구 과제에 지원하면서 약속한 논문을 쓰는 것이 일이다. 지난 5월에는 공저이긴 하지만 네 권이나 되는 책을 급조했다고 했다. HK 사업을 3년 더 연장하려 실적 겸 보고서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학자적인 자존감이나 소신을 생각할 여지는 없었다. 중요한 것은 심사하는 이들의 마음에 들게 보고서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일을 하려고 독일에서 10년이나 그 고생하며 공부했나 싶다”며 “나는 논문을 긁어대는 기계”라고 자조했다.


그런 그가 공동체에서의 강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이 학자로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동체는 멍석만 펼치고 있겠다. 이 멍석 위에서 맘껏 춤을 추며 노시라”는 공동체의 원칙과 자신의 바람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학위를 받고 귀국한 뒤 대학에서 가르치라는 것만 가르치다, 공동체에 와서야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가르친다고도 했다. 그는 지방에서 서울로 오가는 교통비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공동체 강의를 성심껏 준비하며 진행했다. 머잖아 강의 성과를 모아 학문의 최첨단과 일반 독자를 잇는 책부터 하나 쓰는 것이 그와 공동체의 일차 목표였다. 그런데 현실이 쉽지 않았다. 그에게도 건사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철학자에게도 밥은 하늘이었다.


그는 자신의 강의를 이어갈 후임을 찾기 위해 독일에서 함께 공부하던 동료 학자 몇몇에게 전화를 걸었다. 학위를 받은 지 10년이 가까워 오는데 번듯한 직장을 가진 이는 별로 없었다. 논문에 쫓기며 여기저기 강의하고 다니느라 하나같이 분투하고 있었다. 옆에서 통화를 지켜보다 그가 전화를 끊으며 상대에게 하는 말에 울컥했다.


“그래, 안 아프고 살아 있어 줘서 참, 고맙다.”


3. 지난 주말, 공동체 참여자들이 작은 잔치를 열었다. 건물 뒤 주차장을 비워 널찍하게 천막을 치고 참여자들이 준비한 음식과 막걸리, 맥주를 먹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홍대 입구에서 활동하는 인디밴드와 국악 연주자 등이 출연하는 조촐한 공연과 월드뮤직 상영도 준비했다. 작은 전시회와 벼룩시장도 열어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다.


잔치는 지난해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다. 이번 잔치도 기금 마련 성격이 없지 않았지만 첫 잔치는 더 그랬다. 목적이 에어컨을 마련하기 위한 바자회였다. 세미나실을 몇 개 더 만들며 에어컨을 못 들여놓아 쩔쩔매는 것을 본 참여자들이 이 행사를 기획한 것이다. 소문을 들은 이들이 하나 둘 에어컨을 보내와 바자회를 하기도 전에 에어컨은 마련됐다.


첫 잔치를 연 지 1년, 그 사이 공부 모임은 배로 늘고 참여자 또한 그만큼 증가했지만 잔치를 주도한 사람들은 절반 이상 바뀌었다. 바뀐 얼굴은 잔치를 여는 사람뿐이 아니었다. 배우는 이, 가르치는 이의 얼굴도 달라졌다. 규모가 커지면서 새로 온 학자도 많지만 떠난 학자도 생겨난 것이다. 이들이 떠난 이유는 대부분 경제적인 것이다. 여기서의 수입으로 생활이 되지 않는 것이다.


잔치 중 이들 생각에 수시로 울적함이 스쳐갔다. 아, 사람들이 지치는구나. 아무리 공부의 요체가 호학, 즉 학문을 즐기는 데 있다고 하더라도 즐거움과 보람으로만 견디는 게 쉽진 않구나. 잔치가 끝난 뒤 뒤풀이 시간, 잔치를 준비한 이들과 늦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공동체의 지금은 밤, 어쩌면 우린 어두운 밤길을 걷는 중인지도 모르지. 지금 걷고 있는 길이 맞기나 한 것인지, 얼마나 가야 새벽이 올지 몰라 불안해 하며…. 


그렇다면 이 잔치는 즐기는 것 못지않게 내가, 길동무인 너와 함께 걷고 있다는 걸 알리는 행사가 아닐까. 어두운 밤, 힘들어도 나 여기 함께 걷고 있다며 뚜벅, 뚜벅, 사랑과 우정의 발소리를 내주는 것. 누군가 말했지. 밤길 걷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라고.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jrkkk@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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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학력은 대학 졸업이다. 무리해서 최종 학력을 끌어 올려봐야 대학원 중퇴가 전부다. 신문기자 시절, 대학에 몸담고 있던 선배의 호의와 강권으로 자의반 타의반 언론홍보대학원에 다닌 적이 있다. 야간 대학원이었지만 주경야독하는 이들 특유의 열정은 없었다. 강의는 형식적이었고 학생들은 학위 때문에 마지못해 출석했다. 그런데 나에게는 굳이 학위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 학비도 안 내니 그냥 다니기만 하면 되는데도 머잖아 그만두었다. 그곳에서 강의를 듣고 학위를 받는 게 내 삶에도, 일에도, 공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런 학력, 이력을 지닌 내가 지난해 대안연구공동체 학자들과 힘을 모아 대안 대학원을 개설했다. 철학과정과 저술과정을 둔 ‘파이데이아 대학원’이다. 학기마다 신입생을 받아 벌써 3기생을 모집 중이다. 하는 일이라야 청소와 설거지, 복사 따위의 허드렛일이지만 그래도 내가 대학원 과정 개설에 나서다니 소가 웃을 일이다.


제도권 대학원을 어설프게 흉내 낸 건 아니다. 대안 대학원이니 학위는 줄 수 없지만 대학과 여타 인문학 공동체에서 못하거나 하지 않는 것들을 한번 해보자는 것이다. 나이와 직업, 계층을 넘어 공부에 뜻이 있는 이들과 더불어,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대학의 핵심 기능은 연구와 교수다. 연구는 여러 가설들이나 과제를 탐구하고 토론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것이다. 독자적인 연구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은 교수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연구 활동을 경험하며 탐구방법을 배우고 창조력, 비판력을 기른다. 이것이 교수다. 따라서 대학에서의 교수는 연구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강의도 마찬가지다. 강의를 위해서는 상응하는 연구가 이루어져야 하고, 강의를 마치면 저술이나 기타 생산물로 그 결과를 남기는 게 진짜다.


하지만 대학은 물론 요즘 번성하는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도 이 일이 쉽진 않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신으로 군림하는 시장의 위세 탓이다. 이미 자본주의 기업의 하청 업체, 또는 스스로가 돈벌이 기업을 자처한 대학은 그렇다 치자. 학문할 여건을 마련하지 않는 대학 경영자, 열정도 능력도 없는 교수, 대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니는 학생이 어우러져 상아탑을 벼랑으로 몰아간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대학의 대안을 자처한 인문학 공동체에서조차 시장 때문에 좋은 강의가 불가능하다니 말이 되는가.


현실이 그렇다. 어느 면에서는 인문학 공동체만큼 시장 논리가 극명하게 적용되는 곳도 흔치 않다. 사람들이 찾지 않으면 강의를 아예 열지 못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강의의 질이야 어떻든 세간의 ‘평’이 좋지 않으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의 강의가 대학 강의보다 낫다는 평을 듣는 것에도 슬픈 진실이 담겨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대중이 좋아하는 말랑말랑한 강좌, 유행이나 트렌드에 영합하는 학자만 살아남을 가능성이다. 물론 인기 있는 강좌에서 돈을 만들어, 인기는 없지만 꼭 필요한 강좌를 개설하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가난한 인문학 공동체로서 이마저 쉽지 않다. 학기제 대학원이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건 강좌별 참여비가 아닌, 학기별 등록금을 내기 때문이다. 등록금으로 작으나마 여력을 만들어 인기에 관계없이 반드시 필요한 강좌를 개설할 수 있는 것이다. 역량과 열정이 있는 학자라면 수강생이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마음껏 연구와 교수를 하게 하는 것, 이는 제대로 된 학문을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다석 유영모 선생이 YMCA 연경반에서 평균 다섯 명 안팎, 때로는 단 한 명의 청중을 두고 오랜 세월 강의를 계속하며 동서고금의 종교와 철학을 하나로 꿰는 사상을 창출했듯이. 소쉬르가 5~10명의 학생을 두고 강의하며 20세기 인문학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저작 중의 하나인 저 <일반언어학강의>를 낳았듯이.



이 못지않게 중요한 대학원 개설 목적은 참여자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하자는 것이다. 근래 인문학 열풍을 타고 대학과 지자체, 도서관, 백화점, 인문학 공동체 등에 수많은 강좌가 개설되고 있다. 전통 인문학에서 문화 예술 제 분야에 이르기까지 종류와 수준도 다양하다. 하지만 대부분 강연 수준의 단편적인 강의로, 체계를 갖춘 것은 드물다. 참여자로서는 이 나무, 저 나무 여러 나무를 보면서도 숲의 전모는 파악하기 힘든 실정이다. 유행 따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대충 듣는 강의로 제대로 된 공부가 가능할 리 없다. 중요한 건 기본이다. 특히 철학에서 오랜 세월을 거치며 다듬어진 개념과 사유를 익히고 철학사의 전체 구도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공부가 불가피하다.


이제 겨우 1년에 지나지 않지만 ‘파이데이아 대학원’에서는 몇 가지 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교수 한 사람, 한 사람이 작은 학교가 되어 강의며 학기를 자율 운영하는 것도 그중 하나다. 약 50강에 걸쳐 진행하는 <에티카> 강독이 그렇고, 이보다 긴 시간이 소요될 니체 저작 강독이 그렇다. 동양고전 강독은 사서삼경만으로도 2년가량의 공부가 필요하고 노장철학도 장기 강좌가 불가피하다. 한 교수가 철학 입문에서 전문 분야에 이르는 강의를 차차 수준을 높여 진행하며 이를 통해 철학사의 구도 파악에서 고급 사유를 가능케 하는 실험도 시작했다. 이러니 3월에 시작해 14~16주면 끝나는 현 제도권의 학기제를 따라서는 강의를 할 수 없다. 6개월, 24주 강의를 진행하며 쉬는 건 각 강좌별 교수와 학생이 알아서 하는 식이다. 아직 걸음마 단계니 풀어야 할 과제도 많다. 연륜이 짧은 탓에 상당수 강좌가 입문이나 유명 철학자의 저작 강독, 수입 이론의 소개에 머물러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주경야독하는 대다수 참여자의 여건도 만만치 않다. 언뜻 보아도 가야 할 길은 첩첩산이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첩첩산을 넘어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 실험하고 만들어가는 지금, 이 자리다. 대안적인 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며 지금, 여기서 우리의 공부와 삶과 세상을 횡단하고 접속하고 융합하는 것이다. 같은 길 걷는 도반과 더불어 우정을 나누며 새처럼 자유롭게, 즐겁게….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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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 밤은 소란스럽다. 하루 종일 골짜기를 맴돌던 검은등뻐꾸기 소리가 잦아들고 소쩍새 소리가 들리더니 이제 호랑지빠귀 소리가 밤하늘을 가른다. 밤이 깊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강원도 제법 깊은 산골에 있는 오두막. 마포 아닌 곳에서 쓰는 ‘마포 스캔들’이다. 부처님오신날로 시작된 연휴를 맞이해 모처럼 서울을 벗어난 참이다.


오늘 낮에는 얼마간 밭을 일구고 다소 철이 지난 고추며 오이, 가지, 호박, 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언젠가 귀농을 하겠다며 산골에 제법 너른 밭을 마련하고 농사를 지은 지 벌써 10년이 더 지났다. 귀농은 못한 채 주말 농사, 휴가 농사만 부지런히 지은 셈이다. 그러다 지쳐 올 한해 농사는 쉬리라 마음먹었다. 요 몇 년, 멧돼지와 고라니 가족들이 출몰해 농사를 망치면서 농사 재미가 덜해진 데다 주말이 바빠진 탓도 있다. 뒤늦게나마 얼마간의 모종을 심은 것은 오랫동안 주말 농사를 지어온 타성 때문인가. 오늘 심은 것은 모두 산짐승들이 잘 건드리지 않는 것들이다. 고구마, 감자, 서리태, 옥수수, 열무, 배추, 아욱, 상추, 시금치, 홍당무, 들깨처럼 나도 좋아하고 멧돼지나 고라니도 좋아하는 것들은 심을 엄두를 못 낸다. 다행히 모종을 심자마자 비가 내리니 올 농사도 출발은 좋은 셈이다.


다음주 이 산골에는 특별한 손님 둘이 찾아온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공부하는 20~30대 여성들이다. 이들은 이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홀로 수행하듯 살아가는 아주머니 댁에서 보름 정도 머물 예정이다. 세계를 여행하며 뉴욕에서도 살아보았으나 산골에서는 살아보지 못한 이들, 토익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지구 반대편에 거주하는 작가에 대해서는 세세히 알아도 요즘 산길에 흔하게 피어나는 애기똥풀, 양지꽃, 뱀딸기, 꽃다지, 봄맞이꽃, 매발톱꽃, 산괴불주머니, 각시붓꽃, 덩굴딸기, 조팝나무들은 잘 모르던 이들이다.

이들은 공동체에서 ‘깨어나기’란 이름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에서 처음 만났다. 지난 4월, ‘녹색평론선집’을 필두로 한 생태 환경 책을 읽던 이 모임 구성원들은 식물도감을 들고 밖으로 나가 풀과 나무 이름도 외웠다. 새소리를 녹음한 MP3파일을 들으며 새도 공부했다. 이에 앞서 소로의 <월든>과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을 읽은 이들이 산골에서 머물기로 한 것은 소로와 니어링 부부의 삶을 일부나마 경험해 보기 위해서다. 소로가 그랬듯이 세상사에서 벗어난 곳에서 단순한 삶을 실천하며 마음과 몸, 지성과 감성, 사람과 자연, 문명과 비문명을 돌아보며 삶을 성찰해 보기로 한 것이다.


이들이 계획하는 산골 생활은 특별할 것이 없다. 농사일 거들기, 산나물 하기, 새벽 산길 걷기, 밤하늘 별보기, 새소리 듣기, 명상 등으로 산골로 가는 이들이 누구나 생각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어쩌면 이들의 길지 않은 산골 생활이 이들의 삶을 크게 흔들 수도 있다는 것을. 대다수의 인문학 공부 공동체에서 강조하는 것은 앎과 삶의 조화다. 이들의 책읽기는 책읽기에 그치지 않고, 글쓰기는 컴퓨터 자판으로 글자를 치는 행위를 넘어선다. 이들이 산골에서 보내기로 한 글들이 벌써부터 궁금해지는 이유다.


글쓰기 이야기가 나온 김에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40대 주부 ㄱ씨, ㄴ씨, 그리고 ㄷ씨가 공저자로 체결한 출판 계약 이야기도 전하자. 계약한 출판사는 규모가 작지만 최근 주목받는 책을 잇따라 낸 인문학 출판사다. 이 출판사 사람에게 이들의 이야기를 전했더니 바로 출판 계약서를 작성하자며 계약금을 보냈다. 필자 감식안이 빼어난 출판 전문가가 전문학자도 아닌 주부를 놓칠세라 책을 출간하자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들은 평범하지만 우리 사회의 이른바 주류 주부와는 다르다. 초등학생, 중학생 아이를 기르며 매주 세 차례씩 인문학 공동체에 출근하다시피하며 공부에 빠져 있는 것부터가 그렇다. 학창 시절 할 수 없이 공부했다는 ㄱ씨는 까다롭고 골치 아픈 철학 공부가 재미있고 기쁘다고 말한다. 결과로서의 공부, 점의 공부가 아닌, 행위로서의 공부, 선의 공부…. 공부가 좋으니 공부 분량이 만만찮은 건 당연하다.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일상을 단순화한 그의 책읽기, 글쓰기의 분량은 전문 학자 못지않다.


이는 오랫동안 수많은 자기계발서를 읽으며 재테크 시테크에 몰두하다 얼마 전 인문학 공부로 돌아선 ㄴ씨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르면 자기계발서는 두 부류다. 하나는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며 진통제를 주는 부류고, 또 하나는 ‘아프냐? 그건 네가 못난 탓이다’라며 대증요법적 치료제를 주는 경우다. 어쨌거나 못난 나의 변화를 촉구하는 대부분의 자기계발서는 모든 문제의 책임을 개인에게 돌린다. 개인마다 성공의 의미가 다르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무시되고 진정한 자아실현은 금기어에 가깝다. ㄴ씨가 인문학 공부로 돌아선 것은 분초를 다투어 계발한 자신이 자신과 세상을 망칠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다.


이렇듯 공부하는 여성들에게 사람들은 흔히 묻는다. 엄마가 그렇게 공부에 빠져 있으면 아이 학원 정보는 어떻게 수집하며 시험공부는 누가 돌봐 주느냐? 중학생 아이 둘을 기르는 ㄷ씨는 말한다. 최선의 교육은 아이에게 어떤 삶을 살라고 말하며 정보를 수집해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살기를 원하는 삶을 내가 살아내는 것이다. 아이는 말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뒷모습으로 교육하는 것이다!


사실 이들의 공부 목표는 거창하지 않다. 할 수 있으면 사교육이나 투기 같은 것을 하지 않고 이웃과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며 좋은 시민이 되는 것 정도로 소박하다. 하지만 좋은 시민이 된다는 게, 나쁜 시민이 되지 않는다는 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 이는 출세하고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노력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진정한 공부와 성찰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진정한 공부는 고민을 없애주는 것이 아니라 고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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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코끼리와 호랑이의 싸움이 될 것입니다. 만일 호랑이가 가만히 서 있는다면 코끼리가 그 막강한 엄니로 호랑이를 짓누르겠지요. 그러나 호랑이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낮에는 밀림에 숨어 있고 밤에 다시 나타납니다. 호랑이는 코끼리 등에 뛰어올라 코끼리의 가죽을 찢어놓고 다시 어두운 밀림으로 뛰어들어갑니다. 그러면 코끼리는 천천히 피를 흘리며 죽어갑니다. 이것이 인도차이나의 전쟁이 될 것입니다.”


베트남 혁명가 호찌민이 1946년 9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주말, 윌리엄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읽으며 게릴라전을 생각했다. 장 코르미에의 <체 게바라 평전>에 이어 일주일 동안 두 권째 읽은 혁명가 평전이다. 바쁜 가운데 이들 전기를 읽으며 게릴라전을 떠올린 계기가 있다. 최근 발표된 서울시의 인문학 중심 평생교육 계획을 접하면서다. 


게릴라전. 가벼운 장비로 무장한 소규모 비정규군이 정규군을 상대로 벌이는 전투다. 그러나 게릴라는 토착 주민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한 존재다. 주민과 게릴라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에 비유된다. 거대 지자체인 서울시가 인문학 교육에 나서겠다는 보도를 보며 엉뚱하게 게릴라전을 생각하는 건 무슨 까닭인가.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꾸려가는 입장에서 서울시의 인문학 교육 계획은 눈을 번쩍 뜨게 하기에 충분하다. 인문학 공동체를 대상으로 공공시설 등의 공간을 제공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는 것이다. 매월 건물 월세 내기에 급급한 공동체에 공간을 지원해 주겠다는 것은 공동체 운영을 사실상 책임져 주겠다는 말과 같다.


물론 올해 57억원, 내년 81억원의 예산을 투입한다는 서울시 계획의 무게중심은 인문학 공동체에 있지 않다. 시민청 시민대학과 부설 평생교육장을 운영하고 서울시립대 시민대학과 권역별 시민대학을 개설하는 것이 핵심이다. 추진력이 강한 박원순 시장답게 내용의 상당 부분은 이미 실행에 옮겨졌다.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시민청 시민대학은 72개 과정을 시작했고 서울시립대 시민대학도 곧 72개 과정을 시작한다. 아울러 성공회대, 이화여대, 경희대 등 3개 대학이 서울시와 제휴해 권역별 시민대학을 개설하는 등 내년까지 5개 권역별 시민대학이 문을 여는 것으로 돼 있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 지원은 말미에 몇 줄 삽입된 정도다. 어쨌든 좋다. 이것으로 “시민에게 삶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하고 더불어 사는 공동체로서 시민력을 높이는” 서울시의 바람대로 된다면 더할 나위없다.


하지만 직시하자. 이른바 인문학 열풍의 진원인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의 활성화가 대학 인문학의 실패에서 유래한다는 건 상식이다. 대학이 기업의 하청기관화하거나 그 자체가 돈벌이를 하는 기업체로 전환하면서 돈 안 되는 인문학은 벼랑에 몰렸고, 이것이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의 설립으로 이어진 것이다. 대학 밖 인문학 열풍으로 일부 연구자가 대학에 흡수되고 몇몇 대학 또한 인문학 수요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다. 지자체와 지역도서관들이 다투어 인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백화점 문화센터까지 이에 가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문제는 정부와 지자체가 기업화한 대학, 백화점들과 더불어 주도하는 인문학이 그 본령과 맞닿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지난해 서울시는 노숙인,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희망의 인문학’ 교육을 실시해 수료자의 3분의 1이 자산형성 저축을 하게 됐다고 자랑했지만 인문학이 저축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인문학의 본령은 경쟁력 향상이나 돈 모으기가 아니라 돈과 경쟁력 운운하는 인간과 사회의 본질을 꿰뚫는 것이다.


결국 서울시의 지원은 인문학과 관계없이 번듯한 외관을 갖추었거나 제안서를 잘 만들어 내는 약삭빠른 단체의 차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공교롭게도 이번에 서울시와 제휴한 대학들은 모두 오세훈 시장 시절 ‘희망의 인문학’ 프로그램에 참여한 대학들이다. 같은 대학들이 시행하는 박원순표 인문학과 오세훈표 인문학은 어떻게 달라질까. 현재 활동 중인 몇몇 공동체도 수혜자가 되겠지만 이들도 종내는 서울시의 눈치나 보는 단체로 전락할 수 있다. 공무원의 눈치를 살피며 지원을 받느니 풍찬노숙하며 자유롭게 공부하는 게릴라가 낫지 않을까. 


사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활동은 이미 게릴라에 가깝다. 온갖 역경에도 사그라지지 않는 열정이 그렇고 운영자와 참여자의 강한 연대가 그렇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부양하는 건 정부나 지자체의 지원이 아니다. 인문학 공부에 목말라하며 참여하는 시민들이다. 게릴라의 전술이 무궁무진하듯 인문학 공동체의 공부 내용이나 방식도 자유자재하다. 이곳에서는 가르치는 이와 배우는 이의 자율이 생명이다. 한쪽에서는 초보들이 어울려 철학 입문을 공부하고, 다른 쪽에서는 전문 학자와 더불어 플라톤, 니체 전집을 강독하거나 <에티카>를 1년에 걸쳐 꼼꼼하게 읽어나간다. <도덕경>에 이어 <장자>를 통째로 암송하려는 팀이 있는가하면 ‘사서(四書)’의 21세기형 변용을 사유하며 글쓰기를 하는 반도 있다. 건축, 영화, 미술, 사진 등의 예술과 인문학의 접속을 꾀하는 동아리도 있다. 스스로의 공부를 책으로 쓰는 팀도 조직됐고 이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태 모임도 만들어지고 있다.


대개 게릴라전의 요체는 ‘히트 앤드 런’에 있으며 적군의 포위 공격이나 격멸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해방구로 지정한 지역에서는 역량을 총동원해 적을 격퇴한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중국과 쿠바, 인도차이나, 알제리의 운명을 바꾼 건 게릴라전이다. 그렇다면 게릴라를 자처하는 대안 인문학 공동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체 게바라는 말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김종락 | 대안연구 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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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1. 겨울이 그리 길고 춥더니 다시 봄이다. 봄은 북한산 등산 인구가 늘어난 것만 봐도 확연하다. 지난 주말엔 꽤 쌀쌀했는데도 산에는 등산복을 입은 인파로 넘쳐났다. 근교의 산을 오르더라도 제대로 갖춰 입는 것, 예전과 다른 풍경이다. 언젠가부터 북한산은 가히 등산복 패션의 경연장이라 할 만하다. 산에서 달라진 풍경이 하나 더 있다. 평일에 산을 오르는 이들이 늘어난 것이다. 직장인이건, 은퇴나 실직한 이건 심신을 달래며 오를 산이 있다는 건 우리의 복이다. 문제는 앞으로 30년은 더 살아야 하는 이들이 긴 세월 산만 오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은퇴한 이들이 옛 친구들과 어울리며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는 것도 그렇다.


박근혜 정부 출범을 전후해 기초노령연금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파생된 논란들도 많다. 복지공약 후퇴, 구멍난 사회안전망, 국민연금 부실, 조세부담, 세대갈등 등등. 여기서 우리가 외면하고 있는 보다 근원적이고 엄중한 문제가 있다. 고령화다. 고령화를 둘러싼 예측들은 상상보다 훨씬 암울하다. 우리나라가 노인국으로 공식 등극하는 해는 2020년 즈음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65세 이상 노인들이 15세 미만의 어린이보다 많아진다. 인구도 하향세로 접어든다. 젊은이 4명이 노인 1명 이상을 부양해야 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부양해야 할 노인은 급속하게 늘어나는 대신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젊은이들은 허리가 휠 것이다. 


50세 이상이 유권자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도 이즈음이다. 정치가 기득권화, 보수화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거다. 진보하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건 절망적인 일이다. 예상치도 못한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고 파국을 불러올 수도 있다. 은퇴자들이 몇 년만 더 산을 오르면 닥칠 현실이다. 이에 대비해 자기 계발을 해도 모자랄 판에 공동체에 어울려 인문학 공부라니 말이 되는가.


2. 지난주 대안연구공동체의 책읽기, 글쓰기 모임에서 재야 불교학자인 김윤수 변호사의 <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와 <육조단경 읽기>를 읽었다. 앞서 그리스도교 책을 읽은 이 모임에서 불교 책으로 이 책을 선택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근본불교의 원리로 불교를 요연하게 설명한 것으로 이만한 책이 흔치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을 선정한 보다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다. 저자가 재야 불교학자라는 사실이다. 


김 변호사가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50세를 앞두고서였다. 불교를 처음 공부하는 이들이 흔히 그렇듯이 그도 <반야심경> <금강경> <육조단경> 등을 읽었으나 줄기조차 잡지 못했다. 몇 년이나 헤매던 그는 마침 번역되기 시작한 5부 니까야(초기불교 경전)를 읽으면서 비로소 불교의 윤곽을 잡는다. 알고보니 <반야심경>과 같은 대승경전이 초기불교 경전을 전제로 쓴 경전이었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알게 된 불교는 코끼리 다리 만지듯 알던 불교와 달랐다. 방대하면서도 정교했다. 그 뒤 그는 자신의 공부 결과를 책으로 써낸다. 52세가 되던 2003년 처음으로 <육조단경 읽기>를 썼던 그는 <반야심경·금강경 읽기> <주석 성유식론> <불교는 무엇을 말하는가> <여래장 경전 모음> <설무구칭경, 유마경> <묘법연화경> <대방광불화엄경> 등을 해마다 쏟아냈다. 이 중 <대방광불화엄경>은 총 7권, 6000쪽이 넘는 대작이다. 특급 학자도 쉽지 않은 엄청난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법조인인 그가 불교 책을 쓴 것을 두고 다른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자신의 원(願)과 삶을 조화시킨, 흔치 않은 사례임에 분명하다. 얼핏 보기에도 그의 공부는 단순한 공부가 아니다. 세상 변화를 향한 열정적인 노력이자 굳센 자기 수행이다. 공동체에서 그의 책을 읽은 보다 깊은 뜻은 삶과 공부의 조화를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주인이 되는 공부를 우리도 본받기 위해서였다.


인문학 공부하는 주부의 노트 (경향신문DB)


3.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의 묘비명이다. 묘비명은 그의 철학 원칙과 삶의 자세를 드러내는 선언으로 읽히지만 작금의 철학자를 비판하는 경구로도 훌륭하다. 이들은 대체로 현실에 참여하는 대신 눈을 감은 채 세상을 해석하는 것에 머물렀던 것이다. 그러나 긴 인류사를 목도한 우리는 안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가져가는 꿈 또한 가능하지 않은 유토피아라는 것을. 


그럼에도 공부로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무엇보다 이들의 세계 해석이 해석에 그친 것만도 아니다. 철학을 포함한 광의의 인문학이 세상을 바꾼 사례는 고금에 흔하다. 이를 위해 피를 흘린 이도 부지기수다. 하지만 피 흘리며 언젠가 도달해야 할 목표보다 소중한 것이 있다. 기만과 억압과 폭력과 착취를 깨고 세대와 문화를 넘어, 협력하며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 애쓰는 순간순간들의 모음이다. ‘지금, 여기서’의 일상이다. 경쟁 못지않게 협력과 나눔과 조화는 인간과 공동체의 본성 속에 스며 있다. 우리가 어울려 공부하는 것도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현대에 적응하는 대신 우리가 지닌 본성을 구현하려 함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어려운 시기, 자기 계발서 아닌 인문학을 공부하는 뜻은 눈 감은 채 노예의 순응을 택하지 않고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구성하려 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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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우리 사회에서 ‘아줌마’는 여성이 아니다. 다른 성이다. 아줌마는 기혼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미혼여성뿐 아니라 기혼여성조차도 동의하는 모욕적인 호칭이다. 지하철에서 다이빙하듯 몸을 던지며 자리다툼을 벌이는 뻔뻔스러운 여성, 세련되지 못한 파마와 화장에 뚱뚱하고 탐욕스러운 여성, 음식점이고 버스고 가릴 것 없이 큰 소리로 떠들면서도 창피함을 모르는 여성.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사교육 열풍을 불러온 것도 아줌마고 부동산 투기의 주범인 복부인도 아줌마다. 오죽하면 청문회에서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이 들통 난 고위공직 후보자가 가장 많이 둘러대는 말이 “아내가 한 일로, 나는 모르는 일”일까. 아줌마를 보는 시선은 대안 인문학 공동체라고 해서 그리 다르지 않다. 재작년 인문학 공동체를 시작하며 잘 알고 지내던 한 대학교수에게 강의를 부탁하자 첫마디가 “무식한 아줌마 앞에서 강의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나는 “우리 공동체는 백화점 문화센터와 달리 대학생, 대학원생과 전문 직업인 참여자가 대부분일 것”이라는 변명을 늘어놓았던가.


부끄럽지만 이 변명은 사실이 아니다. 주부는 학생, 직장인과 더불어 대안 인문학 공동체 참여자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축이다. 여기서 직장인 참여자는 보다 구체적으로 세분될 수 있다. 회사원, 공무원, 출판 에디터, 연구원, 교사, 교수, 의사, 한의사, 약사, 은행원, 변호사, 군인, 건축가, 시인, 소설가, 화가, 연출가, 연주가, 디자이너, 건축가 등등. 학생도 그렇다. 우선 학부생, 석사과정, 박사과정으로 분류가 가능하고 전공까지 따지게 되면 더 다양한 참여자가 있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 참여하는 세 축 가운데 유일하게 더 이상 나눠지지 않은 부류가 있다. 주부, 다시 말해 아줌마다. 그러니까 아줌마는 단일 직종으로 치면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수가 많은 셈이다. 그나마 밤 강좌나 세미나엔 직장인이나 학생이 많다. 하지만 직장인과 학생이 오기 어려운 낮 강좌나 세미나의 구성원은 아줌마가 압도적이다.


이쯤에서 질문 하나. 학생, 직장인, 주부 중에서 니체나 프로이트, 라캉, 푸코, 지젝 등의 이론을 가장 쉽게 이해하고 환호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이 분야를 전공하거나 직업상의 필요로 전문적으로 공부한 이들은 예외로 치자. 답은 전문 직업인을 포함한 직장인이나 학생이 아니다. 주부, 즉 아줌마다. 주로 고학력 여성이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찾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이들의 인식 능력은 생각 이상이다. 전문 직업인도 머리에서 쥐가 나는 것 같다며 어려워하고 대학원생조차 힘들어하는 공부를 이들은 어렵잖게 받아들인다. 이들의 지적 적응력은 강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문화예술이든, 글쓰기든 가리지 않고 이들은 공부의 열정이 가장 뜨겁고 성취도 또한 가장 빼어나다. 얼마 전 대안연구공동체에서 비슷한 시기에 시작한 세 개의 책읽기, 글쓰기 세미나만 봐도 그렇다. 직장인이 주축인 세미나, 학생들로만 구성된 세미나, 주부가 주축인 세미나에서 책읽기를 가장 즐기며 글쓰기를 가장 치열하게 하는 팀은 단연 주부가 주축인 세미나였다. 시작 당시만 해도 대학생, 대학원생들에 비해 눈에 띄게 어수선하던 주부들의 글쓰기는 머잖아 이들을 추월하고 전문 글쟁이 수준에 근접했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를 찾는 주부들의 공부를 향한 열정과 성취가 이토록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치맛바람·복부인·지하철 자리다툼·뻔뻔함…

온갖 왜곡된 시선을 겪어 이겨낸 아줌마들

그들에게 공부는 새 언어로 새 삶을 발언하는 행위

그래서 ‘아줌마 인문학’은 혁명보다 더 힘이 세다”


우리 사회에서 주부들의 성공은 남편이나 자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한 인간으로서 주부의 꿈이나 소망은 철저히 무시된다. 주부의 힘으로 자녀를 성공시키는 가장 확실한 길은 교육이다. 이들이 자녀의 성공을 위해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사교육 열풍을 일으키는 것도 당연하다. 자녀 교육에 목숨 걸고 과외비를 마련하기 위해 파출부나 노래방 도우미, 심지어 성매매까지 불사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컨대 아줌마는 여성성조차 부인된 뻔뻔스러움과 탐욕의 대명사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꿈조차 차압당한 사회적 소외계층이자 약자다. 우리 사회의 수백만 구성원을 향한 저 고요하면서도 조직적인 폭력!


이들이 치열하게 공부하는 이면에는 억압받고 소외된 삶에 대한 회한과 분노도 없지 않을 것이다. 온갖 신산을 몸에 새긴 아줌마들의 삶이 그대로 인문학 이론이 되는 건 아니지만, 인간의 성찰을 본령으로 하는 전복적인 인문학 이론이 낯선 것이 아닐 수 있다. <일본변경론>이란 책으로 알려진 우치다 타쓰루도 “학창시절 그리 난해하던 구조주의 책들이 세상에 시달리며 수십년 세월을 돌아 다시 읽어보니 술술 이해되더라”며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라는 프랑스 구조주의 소개 책까지 쓰지 않았던가. 아이 낳아 기르고 부모나 친지가 세상을 떠나고 믿었던 남편의 사랑도 세월 앞에서는 별것 아닌 것을 깨달으며 산전수전을 모두 경험한 이들이 곧 아줌마다. 오랜 소외와 차별 끝에 마침내 지성의 영토에 진입한 이들은 공부의 소중함을 안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 아줌마들의 공부는 학점, 고시, 취업, 유학 등의 목적이나 경제적 가치를 위한 것이 아니다. 취업학원 정도로 전락한 제도권 대학에서의 공부와는 목적부터가 다르다. 그럼 이들에게 공부란, 앎이란 무엇인가. 이들에게 공부는 자유에의 도정이다. 기존의 지배규범이나 상식, 습속에 질문하는 것이고,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며 도전하는 것이다. 존재의 아픔에 공감하며 함께 상처받는 일이고, 이를 새로운 언어로 발언하는 일이다. 그리하여 무지와 무사유는 그 자체로 폭력이자 유죄라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기도 하다.


앎은 곧 참여다. 지배 규범에 도전하며 공감하고 상처받는 일이 마냥 행복할 리 없다. 그러나 그 상처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자란다.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고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그러면서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이 잉태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줌마가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전복적인 행위다. 


아줌마가 인문학을 공부하면 혁명을 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상이 흔들리고 변화될 수 있다. 대안 인문학 공동체에서 아줌마들의 공부는 다른 세상을 꿈꾸는 일이다. 다른 삶을 현실화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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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jrkkk@nate.com


새해 들어서도 여전히 뉴스를 외면하고 산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서다. 50대의 일원으로, 지난 대선 때 이런 선택에 내몰렸던 불안한 세대가 안쓰럽다. 춥고 우울하다.


얼마 전 개설된 공동체의 논어집주(論語集注) 강독반에 참여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오래전부터 한문의 문리를 트고 싶었으나 차일피일 미루던 터다. 처음부터 강독에 참여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시작하기 전 10명이 채 못 되던 강독 참여 희망자는 30~40대가 주축에 50대가 둘. 그런데 강독이 시작되자 일단의 대학생들이 무리지어 왔다. 정확하게 서른 살이나 어린 친구들이었다. 나이와 직급의 위계가 엄격한 집단에서 잔뼈가 굵었음인가. 아들의 동갑내기와 클래스메이트가 된 것이 어색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슬그머니 강독을 그만둔 이유다.


중국을 찾은 미국 대학생들이 문묘 대성전에서 공자의 논어를 읽고 있다. (출처; 경향DB)



30~40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이들이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 이런 일은 대학 밖 인문학 공동체에서 이야깃거리도 되지 않는다. 일상적이다. 이를테면 재작년 여름 시작한 이래 1년 반이나 지속되고 있는 공동체의 고대 그리스 철학 읽기 모임을 보자. 


이 모임 참가자의 연령대는 20대 초반에서 50대 후반에 걸쳐있다. 직업도 각양각색이다. 대학 신입생에서 대학원 석사과정, 박사과정, 전업주부, TV방송 그래픽 디자이너, 회사원, 대학 강사, 회계사, 공무원, 피아니스트, 한의사, 신문사 논설위원, 입시학원 원장….


이들이 모인 계기는 물론 공부다. 토론이 뜨거워지면 목소리가 높아지고 중간에 씩씩거리며 나와 찬물을 들이키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이들이 공부하고 토론만 하는 건 아니다. 뒤풀이 또한 공부 못지않게 중요하다. 첫 모임 이래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뒤풀이를 하지 않은 날이 없었을 정도다. 어쩌다 세미나를 쉬기라도 하는 날이면 자기네끼리 어울려 영화관에 가네, 공연장이며 전시회장에 가네 하며 더 바쁘다. 오죽하면 한 40대 참가자가 “학교나 직장에서 만나지 못한 지음(知音)을 만난 듯하다”고 고백했을까.


흔히 “공부에는 때가 있다”고 말한다. 특히 외국어 공부는 나이 들면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체력도 저하되거니와 무엇보다 암기력이 부치는 탓이다. 그런데 공동체에서 공부하는 이들을 보노라면 나이 듦이 공부에 더 유리한 것 같다. 암기력이 부족한 건 사실이지만 이해하고 종합하는 힘은 더 뛰어난 것이다. 여기에다 청년들이 잡념이 많고 엉덩이가 가벼운데 비해 이들은 집중력과 끈기까지 갖추었다. 실제로 1년여 전 시작한 일본어 신문읽기반의 경우 평균적으로 나이 든 사람들이 더 낫다.


“공부에는 때가 있다”는 말이 생기고 이것이 내면화한 것이 오래된 일도 아니다. 근대 이후 학교 제도를 체계화하고 같은 나이에 같은 내용의 공부를 획일적으로 주입한 이후다. 같은 나이에 같은 내용을 가르쳐 같은 생각을 가진 국민을 길러내는 건 근대국가의 핵심 통치전략이다. 


산업사회에 필요한 노동자와 군대의 양성에 획일적인 교육이 유리했던 탓이다. 전 국민을 같은 틀에 집어넣고 붕어빵을 찍어내는 식의 교육이 빚은 부작용은 크다. 천차만별인 개성이 말살되고 획일적인 사고가 지배한 것부터가 그렇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하는 것으로, 학교를 마치면 공부 끝이라는 생각도 여기서 나왔다. 지식정보화 물결이 세상을 휩쓸면서 평생교육이 강조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학교 교육의 들러리일 뿐이다.





▲ “탐구하는 노년은 젊고 싱싱하다

나이·학번만으로 선후배 따지는 세태

직위·경륜·지역의 벽을 뛰어넘은

퇴계와 기대승의 교분을 배우자”


이 땅에서 특히 심각한 학교 교육의 부작용이 하나 더 있다. 나이와 학번으로 선후배를 따지면서 세대를 구별하는 것이다. 이런 구별 의식은 가정으로, 직장으로, 사회로 고스란히 이어진다. 조금만 나이 차가 나도 세대차 운운하며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나이 든 세대는 젊은 세대를 무시하고 젊은 세대는 나이 든 세대를 경멸한다. 동영상으로 유포되는 지하철 패륜남, 지하철 막말녀나 추태를 부리는 노인의 모습도 이와 거리가 멀지 않다. 나이 들면 신체나 두뇌 조건에 상관없이 뒷방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일반화한 것도 그렇다. 지난 선거에서 보여준 50대들의 선택도 내몰릴지 모른다는 불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황은 머리 숙여 두 번 절합니다. 그대의 편지를 기다린 지 오래…. 이제 천리 먼 길에서 사람을 보내 제 글에 대한 가르침과 아울러 틀린 곳을 바로잡은 책 한 권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에 관한 논변이 넉넉하고 자세하여 길 잃은 이를 이끄는 그대의 염려가 남김없이 베풀어졌습니다.”


퇴계 이황이 고봉 기대승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알다시피 퇴계와 고봉은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이어감으로써 이 땅의 논쟁사를 빛낸 학자다. 첫 편지를 나눌 당시 58세의 성균관 대사성이었던 석학 퇴계는 이제 갓 과거에 급제한 32세의 새파란 청년 고봉에게 깍듯이 예의를 다한 편지를 보낸다. 퇴계가 고봉에게 첫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 뒤 두 사람의 애정과 존경을 담은 편지 교환은 13년 뒤 퇴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공부, 즉 자기완성이라는 절절한 화두를 꿰뚫기 위해 나이와 세대, 직위와 경륜, 지역의 한계를 뛰어 넘어 두 영혼이 만난 것이다. 이런 만남을 통해 공부하고 우정을 나누는 게 조선조 선비에게만 가능할까.


“공연을 통해 관객들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 “건축 이전에 그 건축에 머무는 인간을 깊이 있게 이해하기 위해” “아이들이 명문대에 진학해 삼성에 입사하는 꿈을 넘어선, 보다 자유롭고 폭넓은 꿈을 이야기하게 하기 위해” 엊그제 진행된 공동체의 대안 대학원 등록 예정자들과의 대화에서 지원자들이 밝힌 포부들이다. 이 중에는 안경알을 갈며 평생 공부를 이어간 스피노자처럼 컴퓨터를 고치며 평생 공부하고 싶다는 컴퓨터 수리업자도 있다. 강의와 연구에 쫓기느라 미루기만 했던 근원적인 질문을 좇으며 삶을 제대로 정리하고 싶다는 은퇴 물리학자도 있다. 


직업, 연령, 성별은 다르지만 이들의 꿈은 20대 청년 못지않게 젊고 싱싱하다. 돌아보면 모든 것이 불확실하기만 한 시대, 그럼에도 이들의 노후 대책은 재산 축적이 아니다. 공부다. 이렇게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지면 실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도 잦아들 텐데, 그것이 가능하기나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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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대통령 선거판에서는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평생교육만큼 중요한 것도 드물다. 지식의 주기가 극한으로 짧아진 시대, 교육은 젊은 시기 일정한 기간에 삶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의 삶 모두가 교육의 과정이다. 


수유너머, 철학아카데미, 다중지성의정원, 길담서원, 연구모임 아래, 푸른역사 아카데미…. 마포를 중심으로 산재한 대안 학문 공동체들의 공통 화두도 평생공부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평생교육과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평생공부에는 미묘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평생교육이 실용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부라면 공동체에서의 공부는 즐거움이자 수행으로서의 공부, 공부 자체가 목적인 공부다.


여기 늦깎이 공부에 빠진 한 70대가 있다. 경복궁 인근에 길담서원이란 이름의 서점 겸 인문예술 카페를 운영하는 박성준 선생. 늘 책으로 가득한 배낭을 메고 다니는 그의 향학열은 뜨겁다. 학생으로, 신학자로, 목사로, 시민운동가로, 교수로 평생을 공부와 더불어 살아온 그가 철학 공부를 처음 시작한 건 4년 전인 69세 때였다. 그 뒤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으며 젊은 시절엔 결코 알 수 없었던 니체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고 했던가. 그가 지난해 7월 마포의 대안연구공동체를 처음 찾은 것도 <자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 독일어 원서 강독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수강한 과목은 몇 개 더 있다.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 프랑스어 원서 강독을 함께했고 목공 수업에도 참여했다. 


그런가 하면 수강생을 모으지 못해 폐강 위기에 몰린 <소피의 세계> 독일어 원서 강독을 길담서원으로 옮겨 살려내기도 했다. 길담서원에서의 공부거리는 훨씬 더 많다. 영어 고전 강독반인 ‘콩글리시’와 일본어 인문학 강독반인 ‘맨땅 일본어’를 이끄는가 하면 청소년 인문학 교실과 어른 인문학 교실 등에서 가르치고 공부한다. 프랑스어와 독일어 원전 강독 모임에 참여하는 것도 공부의 일부일 뿐이다. 서원에서의 공부 성과를 책으로 펴내고 각종 세미나와 문화예술 행사를 기획하고 개최하며 여기저기의 특강에 응하느라 시간을 쪼갠다.


그의 사례는 특별한 것이라 치자. 조금 더 연령대를 낮추면 늦깎이 공부에 빠진 사람은 훨씬 더 많아진다. 이를테면 전북 완주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40대 중반의 최모 목사. 그가 매주 두 차례씩 먼 길을 달려와 파이데이아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융과 니체를 만나고 나서였다.




“개신교 목사로 니체 읽기가 어려운 것은 우선 니체의 혹독한 기독교 비판, 성직자 비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니체가 말하는 방대한 서양철학 전반이었어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철학을 공부해야 했는데, 신학교에서는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이제라도 철학을 공부해 니체의 기독교 비판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하고 싶었다. 


“만약 니체를 창조적으로 수용하거나 극복하지 못한다면?” 하고 묻자 그는 웃으며 답했다. 


“직업을 바꿔야지요.”


대안 학문 공동체가 다양한 만큼 참여자들의 공부 목적도 다양하다. 역시 가장 많은 부류는 실용성을 추구하는 이들이리라. 외국어 원서를 읽기 위해, 문화예술을 즐기고 안목을 고양하기 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업무 능력을 높이기 위해서 인문학을 공부한다는 이들도 많다. 인문학의 실용성을 생각하는 이들이 가장 많이 드는 사례는 스티브 잡스다. 예술의 경지에 이른 잡스의 여러 제품들이야말로 그의 인문학 내공에서 유래했다는 식이다. 이들의 목적은 인문학으로 돈을 벌거나 최소한 장식으로라도 써 먹자는 것이다.


이들에 비하면 소수지만 다른 부류도 있다. 애써 실용성과 거리를 두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인문학의 실용성을 멀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모든 것이 화폐로 교환되는 자본주의에서 인문학의 실용성은 더 많은 돈을 벌게 하지만 현실과 삶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막는 탓이다. 근원적인 것에 대한 질문하기와 해답 찾기야말로 인문학의 본질 아닌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삶에 거리를 두고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기, 대다수 인문 공동체들의 특징이다. 기업보다 더 기업화한 대학의 인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에 반비례해 학벌도, 학위도 못 주는 대안 인문학 공동체가 번성하는 이유다. 인문학 공부가 수단에서 목적의 지위를 얻는 것도 실용성에서 벗어나면서부터다.


이들에게 공부는 더 이상 돈이나 더 나은 자리를 얻는 수단이 아니다.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과 해답의 추구다. 이런 질문과 해답의 반복적인 추구 과정 속에서 삶의 변화를 모색하는 것이다. 앎과 삶의 일치! 이들의 평생공부가 즐거움이자 일종의 수행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런 공부를 함께하는 이들이 혼자 앞서 가겠다며 경쟁을 할 순 없다. 같은 길을 걷는 도반이다. 성별과 세대와 계층을 넘어서는 친구다. 그러므로 이들이 대안 학문 공동체에서 함께하는 공부는 공부에 그치지 않는다. 서로를 귀하게 여기며 내가 지닌 귀한 것을 나누는 것을 포함한다. 이들의 공부는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람을 맞아들이는 것이기도 하고 함께 밥상을 나누는 것이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에서 출발한 공부가 타자와의 깊은 만남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당연히 이들의 공부는 책상머리를 벗어난다. 강의나 세미나와 글쓰기에서 현실의 이슈들을 치열하게 토론하는가 하면 직접 행동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면서 다른 삶, 다른 세상을 모색하고 도모하는 것이다. 물론 현실은 엄혹하다. 이들에게도 경제적인 압박은 상존하고 돈과 자리를 향한 유혹도 일상이다. 


“예술가는 사슬에 묶여 춤추는 사람이다.” 길담서원 박성준 선생이 자주 인용하는 니체의 말이다. 


현실에서 온갖 구속에 묶여 있으면서도 질문에 대한 풀이의 추구와 자기 변화의 몸짓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이는 온갖 어려움에도 다른 세상을 향한 꿈을 멈추지 않는 여러 대안 인문학 공동체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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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1. ‘교수들 글쓰기 형편없다.’ 신문기자 시절, 내가 쓴 기사의 제목이다. 인문학 교수였던 한 계간지 주간의 말을 옮긴 기사이니 내 주장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인터뷰하고, 이런 제목이 뽑히게 기사를 썼다는 것은 내가 그 주간의 말에 동조했다는 것을 뜻한다. 계간지로 현실과 소통하는 지식인 문화의 창출에 나섰으나 지식 사회에 좌절하고 절망감을 느낀다는 그의, 교수들에 대한 최악의 비판은 글쓰기에 대한 것이었다. 요지는 대략 이랬다.


‘교수들이 제대로 된 글을 못 쓴다. 여기서 글쓰기는 독자적인 사유체계를 세우고, 이를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풀어내는, 거창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최고학부의 교수라는 사람들이 주어, 술어가 제대로 호응하고 목적어를 제자리에 놓는 정도의 기초적인 글쓰기도 할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문학평론가를 제외한 인문 사회학자들의 대부분이 그렇다. 여기에는 이른바 내로라하는 논객도 포함돼 있다. 내용과 입장만 적당히 나열해 놓고 좋은 입장만 가지면 그것으로 좋은 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용과 입장이 난해한 것은 차치하고, 이들이 쓴 글을 도무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편집자들이 손보지 않으면 목불인견이랄 수밖에 없는 글들을 대하노라면 이들이 과연 자신의 이름으로 된 저서를 스스로 썼는지도 의심스럽다.’


이 글을 쓰면서 오래전 기사를 떠 올리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나 자신, 갈수록 글쓰기가 되지 않음을 아프게 느끼는 것이다. 글쓰기가 되지 않는 원인은 여러 가지다.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며 고인 것이 넘쳐나야 하는데 내게는 이 모두가 부족하다. 


2. 내 상황이 이러함에도 대안연구공동체에서는 또 하나, 식은땀 나는 일이 진행 중이다. ‘파이데이아(PAIDEIA·시민 교양교육을 뜻하는 고대 그리스어) 대학원’이란 이름의 대안 대학원을 꾸리고, 철학 과정과 저술 과정을 개설한 것이다. 


두 과정 모두 설립 배경이나 취지가 없을 리 없다. 철학 과정은 늦깎이 철학 공부에 맛을 들인 이들이 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게 하자고 만든 것이다. 사실 전공자가 아닌 이가 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대학에서는 ‘스펙’을 쌓느라 철학에 눈을 돌리기 어렵고 대학 바깥 대안 배움터의 철학 교육에는 체계가 부족하다. 그렇다고 대학원에 들어가는 것도 어렵다. 대학원은 매우 전문화, 직업화 되어 있는 데다 비용과 시간 등의 부담이 만만치 않은 탓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학원 철학 과정을 개설할 용기를 내게 한 것은 역설적으로, 제도권 대학이 직면한 인문학 위기였다. 실력과 자격을 갖추고도 제도권에 진입하지 못한 철학자가 적잖았던 것이다. 실제로 파이데이아 대학원 철학과정에 참여한 소장, 중견 학자들은 질과 양 모두에서 제도권 대학원에 뒤지지 않는다. 


저술과정의 목표는 보다 현실적, 구체적이었다. 참여자가 인문학 공부를 바탕으로 관심을 가진 분야에서 저서를 내게 하되 인문학 바탕이 탄탄한, 좋은 책을 내게 하자는 것이다. 여기에는 나 자신의 경험에서 우러난 문제의식도 있었다. 스스로 책 한권 쓰고 싶었으나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각 분야의 전문가나 직업인들이 좋은 글, 좋은 책을 쓰게 할 순 없을까. 방법은 철학 공부였다. 수학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은 말할 것도 없고 인문학에서조차 유용하듯 철학, 또는 철학적 사유의 훈련은 인문학은 물론, 인간이 관계된 모든 분야의 공부와 글쓰기에 유용하다고 본 것이다. 저술 과정 참여자 가운데 철학과 관계없는 분야의 저·역서를 내려는 이들도 철학을 필수과목으로 한 이유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이데이아 대학원’의 입학 조건으로 대학 졸업 정도의 수학능력을 내걸었으나 참여자의 수준부터 천차만별이었다. 강사진은 고심 끝에 강의 수준을 정했으나 어떤 이에게는 너무 어려웠고, 어떤 이에게는 그 반대였다. 인문학 이외의 분야에서 좋은 책 쓰기가 인문학 공동체의 설립 취지에 맞느냐는 비판도 나왔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우리의 글쓰기 공부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리고,

이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

그러다 생각이 고여 넘쳐나면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3. 대안연구공동체도 그렇지만, 비제도권 인문학 공부 단체들은 흔히 대놓고 인문학의 비실용성을 이야기한다. 인문학의 실용성은 최근 인문학 이상 열풍을 몰고 오기도 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인문학 위기의 원인이기도 하다고 보는 것이다. 실용성의 전제는 보상이다. 자본에 의한 보상의 추구는 학문과 예술 활동을 상품화해 화폐 가치로 바꾼다. 학문과 예술의 상품화는 진리와 가치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활동을 보상을 추구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으로 전락시킨다. 신진 인문학자들이 국책 프로젝트를 위한 비정규직 논문 생산 노동자로 만든, 한국연구재단의 BK21 사업이 그 단적인 사례다. 스티브 잡스를 인문학의 대표 주자로 등극시킨 논거 또한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인문 공동체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문학은 상품을 매끈하게 만드는 공부가 아니다. 인간학, 즉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한 본질적인 근원적인 물음을 제기하고 그 답을 찾아가는 일종의 수행이다. 


그렇다면 인문 공동체의 비실용적인 설립 취지와 각 분야의 전문인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탄탄한 저서 하나 내게 하자는 ‘파이데이아 대학원’ 저술 과정의 설립 목적은 어떻게 조화할 수 있을까. 답은 아직 모른다. 분명한 건 8월 하순에 시작해 심하게 흔들린 대학원 과정의 공부가 10월이 지나면서 빠른 속도로 안정되고 있다는 것이다. 


미하일 바흐친은 우리의 모든 글이며 말을 일종의 ‘간접화법’이라고 했다. 나의 말과 글이란 것도 알고 보면 이미 누군가 했던 것의 ‘리플레이(replay)’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좋은 글쓰기, 탄탄한 책 쓰기는 무엇인가. 


모든 글쓰기가 리플레이인 이상,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의 텍스트 아닌가. 따라서 우리의 글쓰기 공부는 세상을 향한 감각의 촉수를 벼리고, 이를 차곡차곡 쌓아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 그러다 생각이 고여 넘쳐나면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국 중요한 건 기본이다.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생각하기! 어쩌면 우여곡절을 겪으며 현재 진행 중인 ‘파이데이아 대학원’도 기본을 제대로 하자는 몸부림의 또 다른 형태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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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jrkkk@nate.com


나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험은 더 끔찍하다. 그래도 공부를 피할 수는 없었다. 삶의 마디마다 장애물처럼 버티고 선 시험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인생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에 가려진 느낌이 없지 않지만 목하 치열하게 진행 중인 2013학년도 대학 입시만 해도 그냥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시험이 아니다. 신분 결정 시험이다. 신자유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시험의 승자가 되는 극소수는 지나치게 과다한 보상을 받지만 대다수는 패자로 전락한다. 


 영문도 모른 채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수험생들로서는 두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교실이 갈수록 살벌해지는 것도, 대학 입시를 치를 때마다 온 나라가 들썩이는 것도 당연하다.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중요한 시험을 치러야 하는 꿈이, 군 입대 영장을 다시 받는 꿈과 더불어 한국 성인 남성들에게 2대 악몽으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입시 지옥의 최상위 목록에는 수학이 있다. 이 땅의 수험생들이 수학에서 생각하는 힘을 키우며 학문의 즐거움을 찾을 여유는 없다. 공식과 문제풀이의 이해와 암기와 숙달. 여기에 성공했든 실패했든, 대다수에게 수학은 엄청난 인내를 필요로 하는 괴로움, 또는 좌절이나 상처로 각인돼 있다. 이 때문에 수학은 입시는 물론, 그 뒤에도 쓰임새가 많은 중요과목이지만 입시가 끝난 뒤 가장 멀리 팽개치는 과목이기도 하다.


수학에 미친 사람들! 대안연구공동체에 최근 꾸려진 수학, 또는 수학사·수학철학 공부 모임의 이름이다. 


“수학에 격심한 상처를 받아 ‘수학’ 하면 식은땀부터 나는 사람. 수학을 잘하는 이를 외계인으로 보았던 사람. 수학 때문에 고통스러웠는데 자녀에게도 수학 못하는 유전자가 전해져 낙심하는 사람. 수학을 잘했으나 입시 문제풀이만 하느라 수학의 진정한 재미라고는 몰랐던 사람….”


모임을 시작하기 전, 참여자를 모집하며 내걸었던 글이다. 공부와 시험, 특히 수학으로 좌절하고 상처받은 이들로 수학 공부 모임을 꾸리다니, 말이 되는가. 수학이라면 식은땀부터 흘리는 이들과 어울려 수학에 미쳐보려 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은 수학에 시달리기만 했던 경험이 억울해서다. 사실, 수학의 즐거움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알다시피 수학사의 뒷이야기는 괴짜 천재들이, 수학을 즐기는 유쾌한 스캔들의 기록이자 기상천외한 상상력의 모음 아닌가.



▲ “수학은 질문하는 힘과 상상력 키워주는 학문

공식과 문제풀이만 집중했다면 ‘수학의 혁명’은 불가능

‘수학에 미친 사람들’은 수학에 상처 받은 이들을 모아

수학의 재미를 제대로 알려보고자 하는 것이다.”


20세기 초반 독일 괴팅겐대 수학과를 상징했던 힐베르트는 1900년 당시까지 풀리지 않던 23개의 중요한 수학 문제를 발표해 현대 수학에 큰 영향을 끼친 수학자다. 1807년 가우스가 교수로 임명된 이래 괴팅겐대 수학과는 리만, 클라인, 힐베르트, 민코프스키, 막스 보른 등 기라성 수학자들이 공부하고 가르치며 세계의 수학을 지배했다. 가우스나 리만도 그렇지만 힐베르트에게도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힐베르트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제자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의 이야기다. 그에게 몇 마디 추도사를 부탁하자 힐베르트는 유능한 제자가 아깝게 세상을 떠나 가슴 아프다는 말로 시작했다.


“재능이 매우 뛰어났고 장래가 촉망되는 학생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를 연구했습니다. 엡실론(ε)을 양수라고 합시다 ….” 


힐베르트에게 수학자 누군가가 소설가로 직업을 바꾸었다는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간단한 일입니다. 그의 상상력은 수학자가 되기에는 모자라지만 소설가가 되기에는 충분하니까요.”


몰입과 상상력! 빼어난 수학자들에게 이 두 단어는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즐기다 보니 시도 때도 없이 몰입했고, 그러다 보니 수학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상상력이 나왔다. 늦깎이긴 하지만 우리도 이런 즐거움을 느껴 보자는 것이다. 그게 잘 안되면 수학을 공부해야 하는 아이들에게라도 수학의 재미를 제대로 알려 보자는 것이다.


인문학을 기치로 내세운 공동체로서는, 수학이 철학을 비롯한 광의의 인문학 및 문화예술과 가진 밀접한 상관관계도 지나칠 수 없다. 자연과학이나 공학, 그리고 사회과학에 수학이 폭넓게 응용되는 것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 수학은 인문학, 특히 철학이나 예술과도 떼어놓을 수 없다. 수학의 비조인 탈레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물론이고 좌표축을 발명해 대수와 기하를 통합한 데카르트와 미적분학을 놓고 뉴턴과 우선권 논쟁을 벌인 라이프니츠 등 근대 이전 수학자는 거의 철학자였다. ‘러셀의 패러독스’로 유명한 철학자 버틀란트 러셀만 해도 젊은 시절, 화이트헤드와 더불어 ‘수학원리’라는 난해한 저작을 쓴 특급 수학자다.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과 예술에 큰 영향을 미친 수학을 공부하면 인문학이 풍성해진다. 


공동체가 수학 공부 모임을 꾸린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질문과 사유를 즐기자는 것이다. <수학, 철학에 미치다> <수학 멘토>란 책의 저자로, 공동체에서 수학 공부 모임을 이끄는 장우석 숙명여고 교사. 그는 무엇보다 “사유하라”고 강조한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수학과 수학사를 전공하며 동서양 철학을 폭넓고 깊이 있게 공부한 그에 따르면 수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질문하는 힘의 배양과 사유하는 즐거움으로 요약된다.


절대 진리로 통하던 유클리드 기하학에 반기를 들고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창시한 볼라이와 로바체프스키, 집합이라는 개념으로 무한을 비교한 칸토어, 모든 공리적 수학 체계에는 그 체계의 공리로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함을 증명한 괴델…. 수학사의 흐름을 바꾼 수학자들은 하나같이 질문의 대가이자 사유의 혁명아들이었다. 이들의 공부가 우리의 입시처럼 이해와 암기와 숙달에 머물러 있었다면 수학사의 혁명은 불가능했다. 


최근에 갓 출범한 수학 공부 모임 ‘수학에 미친 사람들’은 수학사를 읽으며 이제 겨우 유클리드의 증명을 즐기는 정도다. 그럼에도 참여자의 눈빛은 의욕으로 반짝인다. 이 모임에서 문제풀이나 답보다 중요한 것은 질문이다. 사유다. 공부를 싫어하는 이들이 입시 지옥의 대명사인 수학을 새롭게 공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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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락 | 대안연구공동체 대표


흔히 아마추어는 일이 서투른 사람의 다른 말이다. 비전문가로, 프로의 하위 개념이다. 그렇다고 아마추어라는 말이 서투르다는 뜻만 가진 건 아니다. 아마추어(amateur)의 라틴어 어원은 아마토르(amator), 즉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오직 그 일이 좋아서 즐기는 사람이 아마추어의 원래 뜻이다.


‘JSC 아키텍처’ 정상철 소장은 대안연구공동체에서 건축을 가르치는 일을 즐기는 아마추어다. 그는 가방 끈이 길지 않다. 건축과를 졸업한 뒤 곧바로 ‘조성룡 도시건축’에서 잔뼈가 굵은 건축인이다. 의재 미술관, 선유도 공원, 소마미술관, 파주출판단지와 헤이리 아트벨리의 몇몇 사옥과 박물관, 지앤아트스페이스, 이응노의 집, 정각사…. 그가 ‘조성룡 도시건축’에서 참여한 건축물들은 그의 자랑이다.


 정 소장이 정말 자랑스러워하는 게 하나 더 있다. 검은 얼굴에 짧은 수염을 길러 산적을 연상케 하는 그가 건축가 정기용의 휴먼 다큐멘터리 영화 <말하는 건축가>에 출연한 것이다. 요컨대 조성룡, 정기용 같은 특급 건축가와 작업하며 건축을 익힌 그는 한창 나이의 프로 건축인이다. 


프로이면서 아마추어인 것은 그에게 건축을 배우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의 건축 교실에 모여든 사람들은 사람 수만큼이나 직업이 다양하다. 모두가 해당 분야에선 프로지만, 건축에는 아마추어다. 미국의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는 한 건축학도가 방학을 틈타 함께한 것은 오히려 예외다. 이런 이들에게 학위도 없는 무자격자가 진행하는 건축 수업. 프로가 보면 웃을 일, 건축의 숨은 스캔들이다. 아니다. 건축의 스캔들은 따로 있다. 도시 농촌 할 것 없이 아파트를 빼곡이 꽂아두고 사람보다 돈이 지배하는 이 땅의 건축 현실이다. 건축가로 넘치는 땅에서 건축도 아닌 건축이 창궐하는 것이야말로 건축의 공공연한 스캔들 아닌가.


다른 분야도 그렇지만 프로 못지않게 아마추어가 중요한 분야가 건축이다. 도시나 건물을 만들고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는 전문 건축가가 아니다. 건축주, 즉 아마추어다. 이 땅을 메운 아파트, 돈 냄새밖에 안 나는 조야한 건축물은 건축 아마추어리즘의 현실을 웅변한다. 따지고 보면 전문 건축가가 생겨난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 브루넬레스키가 피렌체 두오모 성당의 돔을 만들며 이름을 알리기 전에는 건축가의 이름도 없었다. 저 위대한 고딕 성당을 설계하고 지은 중세 건축가도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건축학교에서 건축을 가르치며 건축가 면허를 주기 시작한 것도 19세기가 지나서다.



일러스트 _ 김상민(출처 ;경향DB)


▲ “한 분야에서 가르치는 이가 또 다른 분야에서는

배우는 이로의 변신, 대안연구공동체에서 흔한 풍경이다.

이들의 공부는 서툴지만 프로에게 없는 뭔가가 있다.

즐김이다. 열정이고, 사랑이다.”


프로 건축가가 건물을 짓게 되면서 건축물이 좋아진 것도 아니다. 세계적으로 위대한 건축물의 대부분은 전문 건축가가 등장하기 전에 세워진 것들이다. 건축가가 등장한 뒤에도 자격증이 없는 건축가가 지은 빼어난 건축물은 부지기수다.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 르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로에. 20세기 건축의 세 거장으로 알려진 이들도 건축학교를 나오지 않았다. 아직도 세상 건축물의 95%는 전문 건축가가 아닌 사람에 의해 지어진 것들이다. 아마추어에 의해 좋은 건축이 가능함은 건축이 단순한 기술의 집적만은 아닌 탓이다. 집이든, 거대 건축물이든 건축에는 그 시대의 예술과 문화와 사상의 핵심이 담겨 있다. 건축은 예술과 문화의 사상 결정체다. 미셸 푸코가 건축에서 사상의 핵심을 길어 올린 것도, 발터 벤야민의 주 저서가 <아케이드 프로젝트>인 것도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꿈꾸는 집! 정 소장이 대안연구공동체 건축 수업에서 내건 슬로건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꿈꾸고 상상하는 집을 구체화하는 경로와 방법을 안내하겠다는 것이다. 그의 건축 수업은 집에 대한 글쓰기로 시작한다. 나는 왜 집을 꿈꾸는가, 집에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어떤 삶을 살 것인가. 그에 따르면 집은 단순한 집에 그치지 않는다. 삶을 성찰하고 내가 꿈꾸는 삶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짓기를 공부하는 것은 삶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치유하는 일이다.


건축 현장에서 만난 여러 분야의 건축가와 조경 전문가, 풍수 전문가까지 특강 강사로 참여하는 건축 교실의 공부는 집짓기의 모든 것에 걸쳐 있다. 잘 지어진 집과 건축 현장을 찾아 지형과 장소, 공간, 재료, 색, 구조, 조명, 냉난방, 환기 등등을 관찰하기. 다이어그램을 그리고 스케치를 하고, 도면을 그리며 여러 수준의 모형을 제작하기. 집과 건축의 본질에서 건축과 개인, 공동체, 사회, 도시 등등의 요소들을 성찰하기. 


정 소장을 공동체에 끌어 들인 것은 지난해 말이었다. 우연찮게 그의 이력이며 참여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그 경험을 함께 나누며 즐기자고 제안한 것이다. 공동체에서 진행되는 철학 강좌에 꾸준히 출석한 것은 그를 끌어 들인 또 다른 이유다. 여기에 흔쾌히 응한 정 소장은 대안연구공동체가 최근 만든 대안 대학원의 늦깎이 학생이기도 하다. 툭하면 사무실에서 밤을 새우고 건축주 만나랴, 현장 찾으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만 그의 철학 수업 출석률은 개근에 가깝다. 프로 건축인이 철학에서 아마추어로 변신하는 것이다. 한 분야에서 가르치는 이가 또 다른 분야에서는 배우는 이로의 변신, 대안연구공동체에서 흔한 풍경이다. 


이들의 공부는 서툴지만 프로에게 없는 뭔가가 있다. 즐김이다. 열정이고, 사랑이다. 이들은 수업에서건, 뒤풀이에서건, 현장 견학에서건, MT에서건 잘 논다. 그렇게 즐기며 이들은 아름답고 멋진 것들을 상상하고 생산한다. 미국에서 온 건축학도가 방학을 마친 뒤 미국으로 돌아가며 “대학에서 3년 배운 것보다 이곳에서 3개월 배운 것이 많다”고 한 것도 공치사만은 아니다.


정 소장은 공동체에서 재능 기부 형태로 가르치지만 그가 일방적으로 주는 것만도 아니다. 그는 공동체에서 가르친 이래 자신의 건축이 크게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형태의 완벽성에 매달리던 엘리트 건축에서 인간과 공동체와 사회에 무게 중심을 놓은 건축으로의 이행. 동아리 형태로 시작한 건축 교실을 보다 체계화, 공부를 심화시켜 보려는 것도 주는 것 못지않게 받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건 박사급 학자들이 진행하는 대안연구공동체의 다른 분야 공부도 비슷하다.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주는 것은 받는 것이다. 가르치는 일은 곧 배우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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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