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말 중에 “정말?”이라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상대의 말을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말에 감탄하거나 동의할 때 사용하는 것이 관례이다. 적어도 나의 용법은 그랬다. 어느날 빵집에서, 빵집 여주인이 자기네는 국산 유기농 밀가루만을 사용한다는 말을 듣고 “정말요?” 하고 대응한 적이 있다. 그때 내 마음은 반가움이었다. 밀가루 음식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신체 탓에 국산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빵이라면 신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나온 감탄사였다. 그런데 빵집 주인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럼 사실이지, 내가 거짓말하겠어요?” 문득 톤이 높아진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명백히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느닷없이 받아 안게 된 분노에 많이 당황했고, 내가 사용한 “정말?”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부터 우리가 “정말?”이라는 단어를 어떤 경우에 사용하는지 유심히 보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용법으로 그 말을 사용하고 있었고 심지어 영어 단어 “리얼리?”조차 용례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정말?”이라는 단어를 감탄사로 사용할 때조차 마음 깊은 곳에는 무의식적 불신감이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때조차 우리가 타인의 말에 대해 첫 번째로 보이는 보편적 반응이 의심인 경우가 많았다. 내 말에 반사적으로 의심 반응을 하는 이에게 “어머, 자기는 내 말을 의심부터 하는 거야?”라고 말해서 상대를 당황하게 한 적도 있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은 생애 초기 구강기와 관련이 있다. 엄마의 수유와 양육방식이 안정적이면 아기가 타고난 불안감이 잘 다스려져서 외부 환경이 자신에게 우호적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엄마의 양육이 아기가 소망하고 예측하는 대로 진행된다면 안정감 위에 양육자와 외부 환경에 대한 신뢰감이 생겨난다. 불신감은 아기 내면의 불안감이 적절히 소화되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이고, 엄마의 수유나 양육 방식이 아기에게 안심할 만하지 않거나 예측할 수 없을 때 만들어진다. 미국 정신분석가 에릭 에릭슨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성취해야 하는 정신 기능을 발달 단계별로 제시한 바 있다. 그는 자율성, 근면성, 친밀감, 창의성 등을 형성하기 위해서, 그 전에 가장 먼저 성취해야 하는 기능으로 신뢰감을 꼽았다.

생애 초기 양육 환경이 훌륭해서 기본적 신뢰감이 잘 형성되어 있다고 해도 성장기 내내 우리의 신뢰감은 도전 받는다. 많은 부모들이 자식을 자기 뜻대로 조종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주겠다는 조건을 내건다.

부모 말을 잘 들으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성적이 오르면 여행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다. 약속을 믿고 열심히 노력했으나 약속 어음이 부도난 경험을 우리는 모두 가지고 있다. 심지어 자녀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부모도 있다. 도서관에 있다고 해도, 친구 집에서 공부한다고 해도 나쁜 상상부터 하며 자녀를 의심한다. 그런 부모의 자녀는 부모에게 맞추어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쟁이가 되고, 동시에 의심하는 부모의 습관까지 물려받는다.


▲ “세상을 의심하며 갇혀 지낼 때와 세상을 믿다가 뒤통수 맞을 때,
어느 쪽이 손해인지 따져 보자
인간 본성은 불신에 가깝다지만 신뢰란 기제는 노력하면 얻을 수 있다”


남의 말을 의심하는 성향 외에 성인인 우리가 가진 또 한 가지 특징은 약속을 어기거나 거짓말하는 사람에 대해 결코 용서하는 마음이 없다는 점이다. 연인이 사소한 약속을 어길 때에도 머리끝까지 분노하고, 공공기관에 근무하는 이들이 저지르는 비리나 거짓에 대해 가차 없이 공격한다. 그 치열한 분노와 공격은 상대방이 권위를 가졌다는 전제 조건 때문이다. 전능한 힘을 가진 듯 보였던 양육자가 거짓과 속임수로 자신을 조종했던 시절의 무의식 속 분노가 투사되는 것이다.

유아기 양육 환경이 양호하고, 성장기 부모가 아이를 믿어주며 신뢰할 만한 행동만을 보였다고 해도 우리는 다시 믿을 수 없는 세상과 마주해야 한다. 식재료를 판매하는 이들은 식품에 위험 물질을 섞고, 미디어는 늘 폭력적인 사건을 보도하며, 자연 재해는 예측 불허이다. 무의식에 아무런 의심의 씨앗이 없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다. 낯선 지역에서 만나는 사람, 밤길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우리의 유전자에는 만인이 만인에 대해 적이었던 원시시대부터의 기억이 새겨져 있다. 폭력의 경험과 위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회 공동체를 만들었고 인간은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신용 사회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알 수 없지만 그 단어의 뒷면에는 기본적으로 불신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자연 환경을 관리함으로써 이전의 물리적 위험은 줄었지만 문명화된 자연은 원시 자연보다 더욱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세상과 외부 환경을 믿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다.

삼십대 후반의 한 여성은 자기가 누구인지, 생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고 싶어 뒤늦게 인문학 강좌나 유명인사의 강연을 들으러 다녔다. 여러 패러다임으로 인간과 삶을 설명하는 강연을 두루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마음이 답답하기만 했다. 어떤 강연도 미흡한 느낌이었고 일상에 조그마한 변화도 찾아오지 않았다. 이해력 부족 때문인지, 강사가 지식을 아끼면서 다 말해주지 않는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았다. 그렇게 1년 이상 시간을 보낸 후 알아차렸다. 자신이 강의실에 앉아서 줄곧 강의 내용을 의심하고 강사의 말을 비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사에게 시기심을 품은 채 그의 지식을 폄훼하고자 했고, 강사가 권위적이라고 느끼면서 그를 비난하곤 했다. 1년간 고스란히 시간과 열정을 낭비한 셈이었다.

의심하는 마음과 신뢰하는 마음 중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은 의심, 불신 쪽이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는 능력은 자율성, 친밀감, 창의성 등의 정신 기능과 함께 성장 과정에서 만들어 가져야 하는 역량이다. 성장기에 그 기능이 형성되지 못했더라도 성인이 된 후 알아차리고 노력하면 얼마든지 새롭게 성취할 수 있다. 그런 다음 한번 계산해보아야 한다. 외부 세계를 의심하면서 자기 신념 속에 갇혀 있을 때 보는 손해와, 세상을 신뢰하다가 뒤통수 맞을 때 보는 손해 중 어느 쪽이 심각한가를. 일정한 공식이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풀이 결과는 사람마다 다를지도 모르겠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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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기는 특별하다”는 한때 텔레비전 광고에서 자주 들었던 카피이다. 그것은 또한 세상의 모든 아기 엄마들이 입 밖에 내지 않아도 확실하게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감정이다. 엄마들은 누구나 “내 아기가 천재가 아닐까” 뜨겁게 고민하는 시기를 보낸다. 엄마의 눈에는 아기의 모든 것이 특별해 보인다. 아기의 특별함이 아니라 엄마가 자신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즘이 아기에게 투사된 감정이라는 사실은 잘 인식되지 않는다.

아기가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된 후에도 아기에게 투사된 엄마의 나르시시즘은 포기되지 않는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자녀를 특별한 사람으로 키우기 위한 노력을 경주한다. 다양한 조기 교육을 하고, 수많은 학원을 돌게 하고, 조기 유학을 보내기도 한다. 특별한 재능이 보인다 싶으면 그 분야의 대가에게 데리고 가서 검증을 받는다. 그 과정에서 자녀의 욕구는 고려되지 않는다. 자식이 특별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특별한 사람의 부모가 되고 싶어 하는 엄마의 욕구만이 빛날 뿐이다. 자녀의 모든 것을 자기 기준으로 통제하는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자녀의 친구, 대학, 학과 등을 자신이 결정한다. 물론 자녀의 배우자도 직접 검증한다. 평생을 같이 살 사람이 자기 배우자를 선택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상식조차 이해하지 않는다.

뜻대로 자녀를 훌륭하게 키워 놓은 나르시시스트 부모는 이제 보상을 요구한다. 직장생활을 시작했으니 부모에게 용돈도 주고, 매일 안부 전화도 하고, 부모가 원할 때면 언제나 시간을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사람에게 직장과 가정의 모든 과정이 장애물 경주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을 공감할 줄 모른다. 왜 안부 전화를 빠뜨렸느냐고, 왜 생일을 잊었느냐고 자녀를 채근하고, 자녀들은 어린 시절 습관처럼 부모를 기쁘게 해주려 애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나르시시즘으로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은 1970년대 미국에서부터 이야기되어 왔다. 20년쯤 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같은 현상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나르시시즘은 한 개인이 자신이 옳고 선하고 정당하고 특별하다고 믿는 감정이다. 나르시시즘에도 건강한 수준과 병리적 수준이 있다. 건강한 나르시시스트들은 자기를 존중하는 만큼 타인을 존중하며, 자기의 의견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의견에도 귀 기울일 줄 안다. 자신의 욕구와 타인의 욕구를 조절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상적인 결론을 찾아낼 줄 안다.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들은 오직 자신만이 옳다고 주장한다. 세상에서 무수히 목격되는 논쟁 장면들은 자기만 옳다고 믿는 사람들의 대결이다. 저마다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목숨처럼 사수하면서 타인의 그름을 증명하는 데 온 힘을 쏟기 때문에 모든 논쟁은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믿는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타인을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 타인의 성취를 깎아내리며 폄하할 때도 옳다는 신념에 가득 차 있다. 자기가 특별하다고 여기는 병리적 나르시시스트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사랑하고 숭배하며 특별하게 대해 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상한 점은 병리적 나르시시스트의 미숙한 인격에서 나오는 행동들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매혹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들의 행동이 간혹 터무니없고 비상식적인 경우에도 대중들은 그것을 성공한 사람의 특권으로 여기며 관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들을 선망하고 숭배하면서 그들을 모방한다. 대중들의 마음을 읽은 자본주의는 나르시시즘을 훌륭한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다. 시장에 범람하는 나르시시즘의 코드는 다시 대중들을 휩쓸어 가는 기호가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특별함을 주장하면서 사랑해주기를 바라는 가족, 친구, 동료, 이웃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 자신만이 옳고 특별하다는 ‘병적 나르시시스트’가 힘을 가질 때
부모는 자녀에게,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나쁜 영향을 끼쳐
일방적 헌신과 희생 요구하는 ‘그’에게 단호한 거절이 필요


문제는 정서적·도덕적으로 완성되지 못한 나르시시스트들이 힘을 가졌을 때이다. 부모는 자녀에게, 리더는 공동체 구성원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들은 자기 가치만이 옳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아랫사람들을 키워줄 줄 모르는 사람이 된다. 오직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 이익을 위해 주변 사람을 사용한다. 타인을 착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성공이나 특별함의 증거라 믿는다. 자신의 잘못이나 약점이 드러났을 때는 겸허하게 인정하기보다는 끝까지 부정하는 쪽을 택한다. 그들에게 겸손함이란 약자가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생존법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의 심리적 뿌리는 유아적 전능감이다. 유아기에 아무 근거 없이 자신이 옳고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느끼는 아기의 감정이 현실 검증을 거치지 않은 채 유지되면서 성인 나르시시스트를 만들어낸다. 또한 나르시시스트 부모에게 양육되면서 동일한 감정을 물려받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들이 스스로 인정하지 못한 채 내면에 숨겨두고 있는 감정은 수치심과 시기심이다. 타인을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는 마음 밑에 있는 감정은 시기심이다. 타인을 폄하하면서까지 유지하고 싶어 하는 우월감은 수치심이거나 열등감이다. 그들은 불편한 자기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현실을 왜곡하는 쪽을 택한다. 세상이 자신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고.

나르시시스트와 얽혀 감정적 불편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가장 먼저 본인도 나르시시스트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인정해야 한다. 내면에 동일한 무의식이 있기 때문에 고통당하면서도 특별한 사람 곁에서 서성이는 것이다.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우월하다는 자기 이미지와 특별한 대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해야 한다. 그토록 우월하고 선하고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으며, 그런 점을 고집하지 않을수록 삶이 오히려 편안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 더욱 좋을 것이다.

다음으로 자신을 조종하려는 나르시시스트와 경계를 그어야 한다. 모든 개인은 저마다 다른 욕구, 감정, 생각을 갖는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인식한 상태에서 나르시시스트의 요구에 단호하게 거절하는 훈련을 해야 한다. 경계를 잘 유지할수록 관계를 잘 맺을 수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면 좋을 것이다. 거절당한 상대방이 격렬한 분노를 표출할 때 그것을 묵묵히 감수할 준비도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윈윈하는 관계 맺기를 배워야 한다. 일방적인 헌신이나 희생을 요구하는 상대에게 그 대가가 무엇이냐고 물을 줄 알아야 한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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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천년이 시작되는 첫해에 나는 뉴질랜드를 여행 중이었다. 오클랜드의 큰 서점에 들어가 베스트셀러 1위 코너에서 집어든 책은 세라 도너티의 <황야 속으로(Into the Wilderness)>라는 소설이었다. 1998년 캐나다에서 처음 출간된 이후 두 해 이상 영어권에서 두루 읽히는 중인 듯했다. 소설은 한 가족의 일상을 묘사하는 밝은 분위기로 시작된다. 대학에 진학하여 큰 도시로 유학을 떠나는 딸의 짐 싸기를 돕는 부부 모습이 한동안 묘사된다. 부부는 딸이 대학 생활에서 누릴 즐거운 활동들에 대해 조언한다. 딸을 배웅한 후 자동차가 막 공항 주차장을 빠져나오자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편이 운전 중인 아내에게 차를 잠깐 세우라고 청한다.

“우리 이혼합시다.”

남편은 딸이 대학에 진학할 때까지 기다려왔다고 말한다. 짐을 꾸려놓으면 사람을 시켜 가져가겠다고 덧붙인 후 그 길로 차에서 내려 멀어진다. 그 대목은 우선 소설적 반전 때문에 놀라웠다. 더 놀랐던 점은 문화 차이였다. 당시 우리 사회에서도 이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이혼은 아내 쪽에서 제기되었다. 자녀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기다리는 편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이혼을 요청하는 쪽도 아내였다. 우리 사정과 정반대인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이 많아졌다. 머잖아 우리나라에서도 남편 쪽에서 먼저 이혼을 요구하는 날이 오겠구나 싶었다.

이혼이 증가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많은 연구가 나와 있다. 핵가족 사회의 양육 환경이 개인을 정서적으로 예민하게 만들어 친밀한 관계를 어렵게 한다는 견해가 있다(앤서니 기든스). 귀한 자식으로 키워져 나르시시스트가 된 개인들이 결혼 제도 안에 포함된 헌신과 배려 행위에 무능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크리스토퍼 래시). 페미니즘의 등장과 여성들의 변화가 결혼 제도를 흔드는 근간이 된다는 주장도 있다. 어떤 이들은 남녀가 본래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함께 사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게 아닐까 의문을 제기한다. 그중에서도 친밀한 관계를 어렵게 하는 요소 중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 파는 사랑이나 결혼에 대한 낭만적 환상이 아닐까 싶다.

한 여성은 남자친구와의 연애 관계에서 가장 어려운 지점이 로맨스에 대한 환상이라고 고백했다. 그녀는 연애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남자는 개 아니면 애”라는 항간의 속설을 수용하고, 남자친구가 자기에게 원하는 것을 ‘개의 영역과 애의 영역’으로 나누어 인식해 보았다고 한다. 그랬더니 남자친구의 마음과 행동을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관계의 갈등이 줄어들고 파도는 잦아들었지만 허전한 마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녀는 낭만적 환상이 제거된 연애의 정의가 너무 야박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연애란 건강한 성인 남녀가 자발적으로 만나 성적 정서적 친밀감을 나누는 일” 말고, 무엇인가 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결혼 연령이 늦춰지는 이유가 오직 경제적인 요인뿐일까
젊은이들은 계약 결혼 등 구속력과 책임이 덜한 대안을 꿈꾼다
그럼에도 연애와 결혼은 미화되고 꾸준히 팔릴 것이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웩슬러가 남자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은 왜 섹스를 하는가. 그 대답은 여러 가지였다. 자긍심을 확인하기 위해, 분노를 숨기기 위해, 우울 불안 무료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잘못한 일에 대해 보상하기 위해, 동정심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배우자가 원하는 친밀감에 부응하기 위해, 아내가 원해서 등등 수많은 이유가 있었다. 그중 한 가지가 애정을 표현하고 경험하기 위해서였다. 남자들이 섹스하는 이유 중에 “애인이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워서 섹스한다”는 답은 없다고 덧붙이면 모든 여성들은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하지만 그것은 공정한 관계 맺기이다. 남자들이 해결해야 하는 신체적 욕구가 먼저 있어서 그것을 잘 충족시켜줄 여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의존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구가 먼저 있어서 그것을 잘 충족시켜줄 남자를 사랑한다. “여러분도 애인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게 가방을 선물해달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돌직구에 화를 내는 여성도 있다.

결혼 생활에서도 딜레마는 이어진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원가족이 주는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자립할 자신은 없어 결혼을 선택한다. 그들은 결혼을 하기만 하면 행복한 가정이 절로 생기고 남편의 사랑과 헌신을 받을 거라 꿈꾼다. 남편에게 독점적으로 의존하고 싶은 여성은 이런 질문을 한다. “시어머니에게서 남편을 빼내와 내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그들에게 환상이 제거된 결혼의 정의를 말해준다.

“결혼이란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한 성인 남녀가 만나 가족 공동체를 꾸리는 일이다. 두 사람은 공동체를 공동 운영하는 협력자 지지자가 되며, 그들만의 정서적 성적 친밀감을 나눈다. 자녀가 출생하면 양육과 교육을 책임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운영되는 데 필요한 노동력, 경제력을 합의된 방식으로 제공한다.”

낭만적 환상의 요소가 배제된 연애와 결혼의 본질을 말해주면 젊은 여성들은 실망하거나 화를 낸다. 어떤 여성은 모욕당한 것 같은 표정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환상을 깨뜨리면서 지금 화를 내는 게 나을 것이다. 나중에 자기 환상을 충족시켜주지 않는다고 연인이나 남편에게 화를 내며 관계를 깨뜨리기보다는.

15년 전쯤에 외국 소설을 읽으며 염려했던 일이 아직 우리 사회에 나타나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결혼 생활이 날로 어려워진다는 것은 모든 성인들이 체감하는 진실이다. 체면을 중시하고, 이혼을 실패로 여기는 중년 남자들은 묵묵히 어려움을 감수한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젊은 남자들은 결혼을 미룬다. 갈수록 결혼 연령이 늦추어지는 이유가 오직 경제적인 요인만은 아닐 것이다. 예전처럼 “단칸방에서 숟가락 두 개만으로 시작했던” 그 용기와 신뢰를 나눌 만한 관계 맺기를 이루어내지 못하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계약 결혼, 파트타임 결혼 등 구속력과 책임이 덜한 대안을 꿈꾼다. 정부와 미디어가 아무리 결혼을 미화하고 출산과 육아를 멋진 일로 포장해도 젊은이들은 이미 그 의도까지 파악하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연애와 결혼은 포장되고, 선전되고, 꾸준히 팔리는 상품이 될 것이다. 젊은 여자들은 낭만적 환상을 좇아서, 젊은 남자들은 사회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일을 할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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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생활을 하는 후배 여성들이 가끔 조직에서 처신하는 어려움에 대해 토로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업무보다 힘든 것이 사람 관계라고 말한다. 업무는 혼자서만 열심히 하면 되는데 인간관계는 이쪽에서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쪽에 독자적이고 유기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타인이 있기에 어렵다고 한다. 그런 이들 중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부장님이 나를 미워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이도 있다. 그런 말을 하는 여성은 대체로 온순하고 조용한 말투를 사용하며, 선량한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웃으면서 말해준다. “부장님은 자기를 미워할 여유가 없어요.” 그러면 후배 여성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중간 관리자쯤 되는 자리에 있는 이들은 회사 업무에 책임이 무거워지고, 집에서 가장으로서의 역할에도 하중이 더해진다. 목소리 커진 아내와 의견을 조율하는 문제, 사춘기로 접어든 자녀들의 반항을 받아주는 문제 등이 산적해 있다. 어쩌면 노년에 접어든 부모가 치매에 걸려 긴급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는 상황일지도 모른다. 부장의 연배에 있는 이라면 자기 문제가 너무 절박해서 부하 직원을 미워하는 데까지 사용할 시간, 열정이 없다. 부장님이 원하는 것은 부하 직원이 맡은 일을 잘해내는 것뿐이다. 그러면 후배 여성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다고 해서 한순간에 모든 의혹이 거둬진 것 같은 표정은 아니다.

의외로 많은 젊은이들이 연장자인 누군가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느끼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런 감정이 ‘박해감’이며, 사실무근의 인식 오류라고 설명하면 그런 단어를 처음 들어본다고 말하기도 한다. 박해감 역시 생애 초기 부모와의 관계에서 만들어 가지는 감정이다. 아이의 공격성을 소화시켜주지 못한 채 고스란히 분노로써 되돌려주는 부모는 아이의 내면에 박해감을 심어줄 수 있다. 아이의 실수를 감싸주지 않고 처벌부터 하는 부모, 사소한 잘못에 대해서까지 아이에게 가혹한 책임을 묻는 부모, 자기의 불안 때문에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는 부모들과 관계 맺으며 자란 아이는 당연히 부모가 자신을 공격한다고 느낀다. 성격 내부에 박해감이 자리 잡게 되며, 공격하는 부모와 관계 맺기 위해 온순하고 순종적인 태도를 만들어 가진다. 성인이 된 이후 그들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감정을 자주 경험하며, 공격을 피하기 위해 선량하고 유혹자적인 태도를 생존 전략으로 사용한다.

그들은 심지어 타인의 중립적 언어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낀다. 후배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특정 행동에 대해 “왜 그랬어요?”라고 묻는 일이 있다. 그런데 의외로 많은 여성들이 그 질문에 대해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자기 입장을 해명하는 식으로 대답한다. 왜 그랬느냐는 질문을 공격이나 비난으로 받아들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질문을 변형시켜야 한다. “그 행동의 이유와 배경을 설명해보세요”라거나 “그렇게 말한 자기 마음은 무엇인 것 같아요?”라고 다시 묻는다. 그러면 비로소 내면으로 시선을 돌려 자기 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한다. 그런 다음 나오는 대답은 대체로 이것이다. “잘 모르겠어요.”

박해감을 느끼는 이가 내면에 억압하고 있는 진짜 감정은 분노이다. 그동안 분노는 공격성이나 우울증으로 표현되었다. 사회적으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허용되던 시기에 남자들은 분노를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직접 표현했다. 상대적으로 화내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여성들은 분노를 자기에게 돌려 우울증에 걸리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남자들의 분노 표현은 점차 금지되고 여자들의 자기표현은 다소 허용되는 사회 분위기로 변화하자 많은 이들이 분노를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통로를 찾아낸 것으로 보인다. 남녀 구분 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분노 대신 박해감을 더 많이 경험하는 듯하다. 인터넷에 악플을 쓰거나, 타인을 험담하는 이들의 공통된 감정도 시기심이 포함된 박해감이다. 그런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공격한다는 감정에 사로잡혀 타인들을 공격한다. 자신과 아무런 관계없는 사람의 말이나 글에 대해서도 공격받은 듯 느끼거나 모욕감을 경험한다. 앞서 달리는 초보 운전자에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다. 초보 운전자는 단지 운전에 서툴렀을 뿐인데 박해감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가 자기 앞길을 가로막으며 알짱거렸다고 느낀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남이 나를 이유없이 미워한다’고 느끼는 감정이 ‘박해감’
이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억압된 분노·왜곡된 시기심에 의해 나타나
사람들은 타인에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현실 받아들여야


성인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던 초기부터 품었던 의문이 있다. 우선, 사람들은 왜 자기와 아무 관계없는 타인들을 미워하고 심지어 비난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누군가에 의해 혹평이나 악담을 듣는 이들을 실제로 만나보면 제삼자를 통해 받은 이미지와 아주 다르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뒷담화하며 비판했던 당사자보다 한층 성숙하고 온전한 인격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투사의 감정에 대해 알고 나서야 그 기이한 현상의 본질을 이해하게 되었다. 박해감을 가진 이들은 타인을 악한이나 공격자로 만드는 기술에 능하다. 선한 얼굴, 온순한 태도로 상대가 자기를 공격했다고 말하면서 경쟁자를 제거하는 전략을 사용하기도 한다. 혹은 약자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상대방의 공격 행동을 실제로 유도한다.

박해감을 가진 이들에게 공격하고 협박하는 부모가 있었던 것처럼, 그들 역시 부모의 행동을 내면화시켜 가지고 있다. 그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부모가 되면 똑같은 것을 자녀에게 물려주게 된다. “어떻게 부모에게 이럴 수 있느냐, 마음이 아프구나”라고 말하면서 자식이 불효자처럼 느끼게 만들고, “그렇게 멋대로 살다가 부모가 세상을 떠나봐야 그때 후회하지”라며 자녀를 감정적으로 협박한다. “우리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로 희생자 역할을 과장하면서 자식에게 죄의식과 부채감을 떠안기기도 한다.

치유와 변화는 당사자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왜곡된 인식을 알아차리는 데서 시작된다. 부장님은 부하직원을 미워할 여유가 없으며, 사람들은 이유 없이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실은 모든 사람들이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느라 타인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객관적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누군가가 자기를 공격한다고 느끼는 마음은 “땅바닥이 벌떡 일어나 이마를 때렸다”고 말하는 만취자의 언어처럼 농담이거나 망상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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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나는 성장기 내내 텔레비전에서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광경을 보며 자랐다. 그들은 맨주먹으로 뒤엉켜 싸우기도 하고, 몽둥이 같은 것을 휘두르기도 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 상대방을 겨냥하여 몸을 날리기도 했다. 목청이 터져라 소리치기도 하고, 문을 잠그거나 때려부수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볼 때마다 어린 마음에도 생각이 많아졌다. 다 큰 어른들이, 벌건 대낮에,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밑바닥까지 드러내면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싸우는 걸까…. 궁금했다. 초등학생들도 고학년만 되면 그런 식으로 싸우는 것을 부끄러워하는데. 더욱 궁금한 사실은 그 난폭한 폭력 장면에 대해 누구도 설명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분노에 차서 싸우는지, 싸우는 방법 말고 다른 해결책은 없는지, 그런 관행을 멈추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닌지.

어리고 어리석은 마음에 그랬을 것이다.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광경을 ‘국회 액션 누아르’라 이름 짓고 마치 영화를 관람하듯 바라보곤 했다. 오래 보아온 덕에 그것에 대해 몇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는 그 정도 폭력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라는 것을. 오히려 그런 종류의 폭력은 권력자의 특권이자 권력을 행사하는 방법이라 여긴다는 것을. 무엇보다 우리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 외에 다른 문제 해결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것이 실은 내면의 분노를 외부로 투사하는 미숙한 갈등 처리 방식이라는 것을. 진짜 홍콩 액션 누아르를 관람할 때처럼 애잔하고 쓸쓸한 정서가 가슴 밑바닥에 고이는 듯도 했다.

인생은 갈등을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내면의 불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생의 성패가 달려 있고, 자기 분노를 어떻게 소화시키느냐에 인격의 성숙이 달려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내면 갈등을 처리하고 문제 해결법을 배우기 전에 먼저 ‘국회 액션 누아르’와 함께 서로에게 분노를 투사하는 법을 배웠다. 온 국민이 그것을 학습하여 가장은 가족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고, 형은 동생에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중삼중으로 물려받은 분노가 쌓여 있는 듯 보인다.

아기 때는 엄마가 아이의 분노를 안아주고 소화시켜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기가 분노를 달래는 법을 배워서 내면의 분노를 통합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의 불편한 감정을 달래주지 않을 뿐 아니라, 왜 엄마를 귀찮게 하느냐고 짜증까지 부리는 부모는 그런 방식으로 아이에게 분노를 물려주었다. 또한 우리는 사회적으로 분노를 학습해왔다. ‘홍콩 액션 누아르’는 영화를 감상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 치료의 기능이 있다. 그러나 실제 사건인 ‘국회 액션 누아르’는 불안과 공포를 퍼뜨리는 기능이 있다. 온 국민에게 미숙한 갈등 처리법과 폭력적 문제 해결법을 학습시키는 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감정적 갈등을 처리하고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
어른들이 먼저 보여준다면 아이들은 절로 따라 배울 것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면 그들이 겪는 감정적 불편 중 으뜸은 분노를 처리하는 문제이다. 건강하게 분노를 해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이들은 화가 날 때 스스로를 달랠 줄 몰라 고통스러워한다. 쉽게 자기보다 약한 자를 공격하거나, 혹은 자기를 공격하여 우울감에 휩싸인다. 우선은 분노의 정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분노는 본질적으로 받지 못한 사랑이다. 지금 받지 못한 사랑뿐 아니라 무의식 깊은 곳에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마음이 분노의 근원이다. 치유는 인식의 변화에서 온다. 실제로 사랑을 못 받은 게 아니라 유아기의 미숙한 인식으로 인해 사랑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무의식이 형성되어 있음을 깨달을 때 분노의 문제가 해결된다.

분노는 또한 울지 못한 울음이다. 화난 아이들을 달래보면 처음에는 버팅기면서 화를 내다가, 그것을 계속 받아주면 어느 순간 분노를 누그러뜨리며 훌쩍이기 시작한다. 혼자 있는 게 무서웠다거나, 동생만 예뻐해서 화가 났다고 속맘을 표현한다. 어른들의 분노 해결법도 같은 과정을 거친다. 박해받았거나 고통스러운 일을 경험한 후 충분히 슬퍼하지 못해 화가 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슬픔이 온다. 스스로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부모에 대해 가여운 마음이 깃든다. ‘국회 액션 누아르’를 연출하는 부모 세대가 자기보다 더 불행한 삶을 살아왔으며 그들로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슬픔과 함께 분노가 녹아내린다.

만약 우리가 성장기에 텔레비전에서 정치인들이 갈등을 성숙하게 해결하고 문제를 순조롭게 풀어나가는 장면을 보고 자랐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자기 주장만을 밀어붙일 게 아니라 상대 입장을 배려하면서 협상안을 찾아내고, 자기 이익만을 염두에 둔 채 상대를 굴복시킬 게 아니라 윈윈 전략을 사용하고, 서로 극단으로 치달을 게 아니라 제3의 해결책을 모색하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면. 그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로를 비난하면서 화내고 싸우는 것은 약자의 생존법이다. 자기 삶을 주도할 힘이 없다고 느끼거나, 힘 있는 타인이 자기를 통제한다고 느끼는 자들의 반응이다. 강한 사람은 고요하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갈등을 처리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기에 묵묵히 자기 삶을 살아간다.

‘국회 액션 누아르’에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엉뚱하고 이상하게 관대한 문화를 많이 가지고 있다. 술 취한 채 행한 일에 대해 관대한 문화도 이상하다. 맨정신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술자리에서 취한 채 소리지르며 해결하는 방식은 이상하다. 지나친 음주 자체가 벌써 문제를 회피적으로 처리한다는 의미이다. 인터넷 공간을 메우는 악플에 관대한 문화도 이상하다. 우리가 폭력에 무감각해서 그런지,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지, 혹은 서로 이익이 얽혀 있어서 그러는지 알 수 없다. 현직 고등학교 상담 선생님이 들려준 말에 의하면 인터넷이 생기면서 학교 화장실 벽의 낙서가 깨끗하게 사라졌다고 한다. 화장실 벽에 낙서하거나 악플을 쓰는 것 말고는 내면 갈등을 해결할 줄 모르는 청소년들을 처벌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그들에게 감정적 갈등을 처리하는 법, 타인의 입장을 배려하는 태도,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른들이 먼저 그런 모습들을 보여주면 아이들은 절로 보고 배울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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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관용구 중에 “남부끄러워 못살겠다”거나, “남보란 듯이 잘 살아주겠다”는 표현이 있다. 나라에 불행한 일이 생기면 “국가적 망신이다”라고 여기기도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저 모든 문장들에는 우리를 지켜보는 외부의 시선이 있다는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그 시선이 우리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자격이 있다고 느끼고, 그 시선에 의해 우리의 가치가 좌우된다는 믿음이 들어 있다. 심지어 그 시선이 우리보다 강하고 선하다고 느끼는 무의식까지 있다. 그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해결하고 그 경험에서 소중한 지혜를 배우는 일에 무능하다. 그들은 하루 빨리 사건을 덮어두고, 문제가 없는 듯한 겉모습을 꾸미고, 남들 눈에 그럴듯하게 보이는 치장에 집중한다. 그런 태도는 자신이 열등한 존재라는 무의식에 갇히는 결과가 되며 병적인 수치심과 죄책감 속에 머물러 있도록 만든다. 물론 불행한 사고가 끊이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최근에 일어난 불행한 사건에 대해 우리는 슬픔과 분노의 감정과 함께 죄책감과 수치심을 느껴왔다. 슬픔과 분노가 진정되면서 죄책감과 수치심이 한결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지나친 죄책감을 떠안은 이들은 거듭 “미안하다, 우리 모두가 잘못했다”고 말하고, 수치심을 경험하는 이들은 “국치(國恥)라거나, 부끄러운 일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은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믿을 수 없어. 어쩌자고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생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우리가 경험하는 불행한 사건과 우리가 인식하는 나르시시즘적 국가 이미지 사이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감정이 죄책감이다. 수치심은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고 자신의 존재 자체를 부끄럽게 여기는 일을 말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관용구 “남세스럽다”는 수치심을 전제로 하는 언어이다. 죄책감도 수치심도 실은 “우리가 괜찮지 않다”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결과이다.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이 그러하듯 죄책감과 수치심에도 건강한 단계와 병리적 단계가 있다. 건강한 죄책감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며, 실수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을 뿐 자기가 사악한 사람이라 여기지 않는 감정이다. 병리적 죄책감은 자신이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믿으며, 자신이 완벽하고 선하다고 여기며, 그래서 세상의 기본적인 규칙들을 위반하기도 하는 마음이다. 건강한 수치심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감정이다. 자신이 유한한 존재이며 잘못을 범할 수 있으며, 실수를 통해 개선될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병리적 수치심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선하지 않고 잘못되어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자신과 타인을 함부로 판단 평가하면서 모든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는 지나친 도덕주의를 낳기도 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 중에는 과도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추진력으로 하는 이들이 많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으며 겉보기에 유능하고 자신만만하며 확신에 차 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내면에서는 정반대의 감정을 경험하고 있기 십상이다. 자주 열등감, 소외감, 공허감 등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성취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 그들은 성장기에 존재 자체만으로 사랑받은 게 아니라 그들이 성취한 것으로 사랑받은 이들이다. 부모 마음에 드는 행동을 했을 때, 학업 성적이 좋았을 때, 대회에서 상을 받았을 때만 사랑받은 경험이 그들을 성취 지향적으로 만들었다. 잘못을 야단칠 때 아이에게 죄의식을 심어주는 부모, 실수를 비판하면서 수치심과 모욕감을 함께 준 교육 환경도 그들을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어떤 성공한 사람은 실은 비난, 수치심, 죄책감에 발꿈치가 물릴까봐 맹렬히 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하고 멋진 모습을 꾸며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랑이나 존중감을 얻을 수는 없다. 그 사실이 다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든다. 건강한 자기애나 자기 존중감은 외부에서 얻는 게 아니라 내면에서 만들어 가지는 자질이라는 것을 그들은 여전히 알지 못한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에게 더 큰 리더십과 공동체 의식, 역사의식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런 이들일수록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적 특성을 보이는 점에 거듭 실망하곤 한다. 사실 그들의 성공 비밀이 개인적 결핍감이나 수치심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회복해야 바로잡을 수 있어
실수·실패 통해 더 나은 존재 될 수 있다는 믿음 필요


지금 우리 사회는 성공한 사람이 경험하는 공허한 내면 같은 정서에 물들어 있는 듯 보인다. 그동안은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즘을 추진력으로 하여 달려왔다. 간혹 우리는 한두 명의 스포츠 스타가 이룬 성취를 마치 국가적 성공처럼 여기기도 했다. 단지 축구에서 이겼을 뿐인데 마치 우리나라가 세계를 제패한 것처럼 도취되기도 했다. 세계 일류를 꿈꾸며 가장 크고 높고 빠르고 강한 무엇인가를 이루어내면서 그 사실을 다시 추진력으로 삼았다. 우리의 내면이 나약해서 병리적일지라도 나르시시즘적 추진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뒷면을 직시해야 할 때가 되었다. 술 소비량, 자살률, 이혼율, 교통사고 사망자 수, 명품 소비량, 악플의 나라 등 객관적으로 우리가 “괜찮지 않다”는 지표들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가 불편해 하는 사회현상들이 곧 성공한 사람이 드러내는 반전 실망과 같은 차원의 것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동안 “괜찮다”는 사실에만 매달렸던 이유도 실은 병적인 수치심과 열등감을 내면 깊숙이 억압해 놓은 까닭이었다.

병리적 죄책감이나 수치심은 건강한 자기 존중감을 회복해야 바로잡을 수 있다. 자기 존중감은 이상화시키고 미화시켜둔 자기 이미지를 벗어낼 때 만들어 가질 수 있다. 자기가 부끄러운 일, 잘못된 일을 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일이다. 부족한 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소중하고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며, 실수와 실패를 통해 배워 더 나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이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슬픔과 고통을 경험하듯 건강한 수치심과 죄책감을 경험하는 일이다. 부끄럽고 미안해서 죽을 것 같은 마음을 안은 채 살아가는 일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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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충격이 지나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던 우울의 시기도 지나가고 있다. 슬픔과 함께 밥을 삼키고 묵직한 감정을 내면에 간직한 채 일상을 영위했다. 모든 기능들이 조금씩 둔화되어 있었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말수가 줄어들고 사람 만나는 일을 피하고 싶어졌다. 동년배 여성이 문자를 통해 “이런 시기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뉴스에서 눈을 뗄 수가 없는데,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몰아치기로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했다. 중년 여성의 판타지를 극대화시켜 놓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것이 그동안 사용해온 방어기제였다는 사실을 명백히 인식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있다고 대답했다. 슬픔과 우울감이 몸을 관통해 지나가도록 그냥 있는 것, 그것 말고는 할 일이 없었다.

서른 살짜리 후배 여성은 녹초가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뉴스를 통해 심신을 흠씬 두들겨 맞은 기분이라고 했다. 그녀는 우리나라가 사회적 경제적으로 웬만큼 안정된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대한민국이 꽤 괜찮은 나라라는 나르시시즘적 국가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 만했다. 그랬기에 사건의 원인이 하나씩 밝혀질 때마다 그곳에 드러나는 우리 사회의 추악한 이면에 경악했다. 우리나라가 그토록 속속들이 썩어 있다는 사실에, 기성세대가 그토록 미개하고 비겁하며 탐욕스럽다는 데 좌절했다. 그녀는 새롭게 품게 된 어른들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답답해 했다. 나는 그녀에게 우리나라가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 치중하여 해결하지 못한 많은 문제를 덮어둔 채 달려왔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불행한 일이 생기면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묻는다. 가장 손쉽게 문제 삼을 수 있는 것은 제도나 시스템일 것이다. 다음에는 조직 책임자나 시스템 작동자에게 비난의 화살을 보낼 수 있다. 문제의 책임을 타인에게 떠넘기면 그 일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과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다. 외부에 아무도 비난할 대상이 없으면 우리는 곧잘 운명이나 신까지 끌어다 화를 낸다. 우리도 오래도록 그렇게 해왔다.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터질 때마다 책임 소재를 따지고 책임자를 찾아내어 문책하는 데 치중했다.

젊은 세대들도 그런 마음인 듯하다. 우리가 겪는 불행에 대해 기성세대를 비난하고 싶어하는 듯 보인다. 분향소를 다녀온 중년 여성은 노란 리본에 적힌 글에서 젊은이들의 분노를 보고 놀랐다고 했다. 기성세대들이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는 채 회피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동안 젊은이들은 어른들을 비난하면서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했다. 기성세대들이 제도와 시스템을 문제 삼으면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젊은이들은 그 말을 영혼 없는 사과처럼 느꼈다. 기성세대들이 위로의 말을 건넬 때 젊은이들은 “빈말이라도 따뜻하게 하는 게 낫다”고 믿는 그들의 관행을 떠올리며 마음이 싸늘해졌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겉만 그럴듯하게 꾸미고 문제 덮어왔던 기성세대
“우리는 괜찮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이번 사건을 계기로 세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듯 보인다. 젊은이들은 이제 겉으로 그럴싸하게 보이는 데 치중하면서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신화의 본질을 간파해버렸다. 방금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에게 우리나라가 어떻게 보이는지 묻는 기성세대들의 마음에 깃든 약한 자존감도 알아차렸다. 기성세대가 자기들이 이루어낸 성과에 나르시시즘적으로 도취되어 있었던 진짜 이유도 실은 내면에 숨겨둔 열등감 때문이라는 사실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젊은이들이 기성세대의 본질을 알아차리고 그들을 부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일 수 있다. 사실 그동안 그들이 어른들의 신화를 비판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 더 조심스러워 보였다. 어른들의 세계에 의존하여 안락한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가려는 의지가 없는 듯 보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 젊은이들이 어른들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가 또 한번 새로운 차원의 변화를 꾀하기 위한 발판이 될지도 모른다. 돌연변이가 자연의 건강을 지켜가듯이.

다만 그 과정에서 젊은이들이 한 가지만 기억해주었으면 싶다. 기성세대들은 여러분이 상상해본 적도 없는 가난과 전쟁과 폭력의 기억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해결하지 못한 심리적 문제가 당사자의 마음속에서 현재처럼 생생하게 경험되고 있다는 것을. 자기 마음에 대해서조차 무지했던 이유는 고통스러운 내면을 차마 들여다볼 용기가 없어서 그랬다는 것을. 그들의 사과가 빈말처럼 들릴 때는 그들이 미안하다는 말조차 당당하게 하지 못할 정도로 마음이 약하다는 사실을. 황무지를 개간하듯 이 나라를 이끌어온 그들의 추진력이 비록 불안과 강박증이었다고 해도, 그들에게도 틀림없이 배울 만한 지혜가 있다는 사실을. 무엇보다 이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싶다. 그들이 젊은이들에게 주지 못한 배려, 관용, 안전한 환경 등을 그들도 받아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인간은 누구나 자기가 경험한 것만을 내면화시켜 자신의 일부로 만들 수 있으며, 내면에 있는 자질만을 타인에게 건네줄 수 있다는 것을.

슬픔과 우울감이 우리 사회를 뒤덮고 있는 현상은 불행 중 다행으로 보인다. 우리가 감정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아 안을 만큼 단단해졌다는 의미일 것이다. 부모 세대가 젊은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게 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들이 자녀에게 어떻게 나쁜 것을 물려주었는지 세밀하게 알아차리고 개선해나갈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괜찮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멋지게 꾸며 놓고 우리가 꽤 괜찮다고 믿어온 나르시시즘적인 도취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의 내면에 윤리나 양심 따위가 들어설 자리가 없을 정도로 불안과 결핍이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인재’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그 재난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의미이다. 그가 이미 심리적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이거나, 위기의 순간 정신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선은 제도를 개선하고 시스템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저마다 심리적으로 건강해지는 일이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대해 우리는 모두 심리적 공범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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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내가 유년기를 보낼 때 당시 부모들은 친구와 다툰 후 울며 귀가한 아이를 안아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지는 게 이기는 거다.” 친구끼리 놀다가 서로 다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 경험을 어떻게 처리하고 넘어가야 하는가에 중점을 두었던 듯하다. 그들은 아이를 안아 달래면서 이런 지혜를 물려주었다. “참는 사람이 장사다.”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도 아이는 분한 마음을 가라앉히며 싸움에서 지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다. 부모가 안아서 다독여주었던 경험을 내면화시켜 마음속에 스스로를 달랠 수 있는 기능을 간직할 수 있었다.

내가 청춘기 무렵이 되었을 때 당시 젊은 엄마들은 친구와 다툰 후 울며 귀가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왜 만날 맞고 다니느냐? 다음부터는 맞은 만큼 너도 때려줘라.” 물론 아이를 안아서 달래주지도 않았다. 부모의 말은 자녀에게 절대적 진리이다. 아이들의 싸움은 복수전처럼 변해가고, 간혹 어른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부모 역시 몰랐을 것이다. 그 행위가 실은 자신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감정을 아이들에게 집어던지는 일이라는 것을. 왜 맞고 다니느냐고 소리칠 때는 자기 안의 분노를 아이에게 떠넘겼고, 왜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잔소리할 때는 내면의 불안을 아이에게 물려주었다. 부모에게서 마음을 달래는 경험을 제공받지 못한 아이는 부모가 했던 것처럼 모든 불편한 감정을 바깥으로 쏟아내는 방법밖에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에 불안과 분노가 팽배하다고 한다. 어떤 이들은 우리 사회를 불안사회, 분노사회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회라는 유기체가 불안, 분노한다기보다는 그런 감정들을 더 자주, 많이 표현하는 개인들이 있을 뿐이 아닌가 싶다. 그런 개인들이 자기 문제를 외부로 투사하면서, 온 세상이 불안하니까 나도 그렇다는 식의 일반화 방어기제를 사용하는 듯하다. 그런 감정들은 미디어의 발달과 함께 급속히 널리 확산되는 특성이 있다.

우리에게 처음 인터넷 통신이 생겼을 때 그곳은 사람들의 내면을 고스란히 비춰주는 공간처럼 보였다. 그곳에 들어가면 동호회라는 공간이 있어 회원들끼리 내밀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곳에 실린 글들은 누군가 자기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지지해주었으면 하고 호소하는 내용들이었다. 통신 문화가 발달할수록 그 안의 공간은 점점 세분화되었고, 그곳에 올라오는 글들은 더욱 내밀한 내용, 더 짙은 감정들을 담고 있었다. 최근에는 개인마다 하나씩 공간을 확보하고는 그곳에 내면 풍경뿐 아니라 일상적 삶 전체를 생중계하는 듯 보인다.

사실 소셜미디어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그것일 것이다. 개인들이 혼자서 소화시키지 못하는 감정들을 그곳에 토로하는 자기표현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그곳에서 어떤 이들은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자기 모습만을 표현하면서 미화된 자기 이미지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또 어떤 이는 내면의 고통스러운 부분,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감정들을 표현한다. 그들은 자기가 연출하는 바로 그 모습 그대로 타인들이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부탁하는 것 같아 보인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인정과 지지, 사랑과 배려 등이 교환되기도 한다. 또한 그 공간은 연약한 개인인 ‘나’라는 존재가 익명의 군중 속에서 ‘우리’라는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보호받는 듯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다. 무엇보다 그곳은 현실에서 잘 소통하지 못하는 이들의 소통 장소가 되기도 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그저 말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타인과의 관계가 형성되는 듯 보이는 신기한 장소처럼 여겨진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옛 부모들 “지는 게 이기는 것”이라며 자녀 마음 다독였는데
불안·분노를 외부로만 표출하는 오늘 우리의 내면은 살풍경


하지만 진정한 자기만의 정체성이나 창의성을 확보하려면 그 공간을 개인의 내면으로 옮겨와야 한다. 누구에게나 개방된 열린 공간에다가 자기를 표현하는 대신 내밀한 심리적 공간 속에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심리적 공간을 카를 융은 테메노스라고 불렀다. 테메노스는 고대 희생 제의가 치러지던 공간을 말하는데, 융은 그 용어를 개인이 내면에 만들어 가지는 심리적 공간을 지칭하는 용어로 차용해왔다. 내면에 심리적 공간, 의식의 공간이 있어야 부정적인 감정을 담아두고 소화시킬 수 있다. 갈등을 폭발시키지 않고 해결책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릴 수 있고, 그곳에 고요히 머물며 피로해진 정신을 회복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창의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바로 그 공간이다.

테메노스의 핵심은 밀봉에 있다고 한다. 중세 연금술사들은 헤르메스의 그릇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납, 아연, 구리들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그 속에 넣고 잘 밀봉해두면 그것이 금으로 변한다고 믿었다. 그들은 연금술의 핵심이 그릇의 밀봉 상태에 달려 있다고 믿었다. 우리나라 발효식품 문화에서도 밀봉이 관건이다. 밥과 누룩이 변해 술이 될 때까지 열어보지 못하도록 한다. 밥을 지을 때조차 중간에 열어보면 뜸이 잘 들지 않는다. 마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경험과 감정, 체험과 정서를 얼마나 내면에 간직해둘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역량과 풍요로움이 달라진다. 내면에 간직된 경험만이 황금으로 변할 수 있다. 경험과 기억이 섞일 때 통찰이 생기고, 감각과 상상력이 결합되어 창의성이 발현된다. 몇 가지 경험에서 추출된 공통 원칙은 삶을 이끄는 지혜로 쌓인다. 이 모든 유익함은 밀봉된 내면에서만 이루어지는 화학 작용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셜미디어는 절반만 유익하다.

우리가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고, 고통을 통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면에 테메노스가 없기 때문이다. 의식의 공간에 경험을 간직하지 못한 채 바로바로 외부로 표출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아직은 즉각적인 자기표현이 필요한, 치유해야 할 마음의 문제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여전히 지는 사람은 패배자이며, 참는 사람은 바보 취급 당하는 듯 보인다. 고통을 통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 작은 고통 앞에서도 쉽게 무너진다. 개인도 사회도 무너지려는 마음을 다독여 일으켜 세울 때, 먼저 그 경험을 내면에 간직하고 인내하면서 되새길 수 있는 의식의 공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면 공간에 머물 때에만 우리는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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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남자에게 “애인에게 준 가장 비싼 선물은?” 하고 질문한 적이 있다. 그는 게임기라고 답했다. 여러 달 용돈을 아껴 선물했다고 덧붙였다. 그에게 다시 물었다. “그 선물을 준 후 얼마만에 헤어졌어요?” 당황하는 기색으로 그는 기간을 계산했다. 약 열 달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내 예상은 6개월이었는데, 예상보다 길었다. 그 연애가 곧 끝났을 거라 예상한 이유는 그들이 좌충우돌하는 열정을 지닌 젊은이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자가 원했든 아니든 자신의 능력에 벅찬 선물을 줌으로써 상대의 마음을 얻고자 하는 남자의 마음속에는 이미 불안과 비하감이 존재한다. 만약 여자 쪽에서 먼저 비싼 선물을 요구했다면 그녀는 관계를 물질로 치환하는 오류를 범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관계는 허약한 토대 위에 서 있는 셈이다.

간혹 명품 가방이나 비싼 선물을 원하는 여자친구 때문에 곤란해하는 젊은 남자를 보면 연인과 헤어지는 방법을 권한다. 남자에게 비싼 물건을 요구하는 여자는 지나치게 의존적인 사람이다. 비싼 물건이 자신의 가치를 돋보이게 한다고 느낄 정도로 자기존중감이 약하며, 마음 깊은 곳에는 자기가 명품처럼 특별하다는 나르시시즘마저 뒤섞여 있다. 비싼 옷과 구두로 치장한 다른 여자들을 보면서 시기하는 마음까지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위에 나열한 감정은 여자들에게 보편적인 것이다.

가끔 여자들의 결핍감은 그 바닥이 얼마나 깊고 어두울까 생각해본다. 믿어지지 않지만 한탄하듯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여자들은 약속한 듯 동일한 수사법을 사용한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엄마가 혹은 아빠가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고, 남자친구가 혹은 남편이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다고 하소연한다.

여자는 결핍을 널리 공표함으로써 사랑받으려 하고, 심지어 그 결핍을 소중히 간직한다고 일찍이 프로이트는 주장했다. 프로이트는 여자의 결핍감 근원에 페니스 엔비(남근 선망)가 있다고 설명한다. 여자가 핸드백이나 구두를 목숨처럼 아끼는 것은 그것이 결핍된 것을 대체해주는 사물이기 때문이다.

프로이트 이론이 아니라도 우리나라처럼 남녀 차별이 심한 문화에서 자란 여자의 내면에는 결핍감이 쌓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은 남자 형제와 차별당한 내용을 칫솔 하나, 옷 한 벌에 이르기까지 세세하게 기억한다. 성인이 된 후 상대적으로 여성의 사회 진출 기회가 적은 우리 문화는 다시 한 번 여성에게 박탈감을 안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보다 근원적이고 치명적인 결핍의 감각은 탄생하는 순간 만들어진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출생의 순간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경험한다. 딸이라는 이유 때문에 윗목에 밀쳐지거나 어른들이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 돌린 기억을 무의식 깊은 곳에 간직하고 있다. 그 경험은 당사자의 첫 번째 정서가 될 뿐 아니라 세계관의 밑그림이 된다. 환영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한 최초의 박탈감은 무의식 깊은 곳에 새겨져 영원히 당사자를 결핍과 불안에 떨게 만든다.

우리나라 텔레비전에는 왜 그토록 먹는 장면이 자주 방영되는지 묻는 이들이 있다. 언제 보아도 텔레비전에서는 입을 크게 벌리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이 흔하게 목격된다. 사람들은 입 안 그득한 음식을 씹으며 가난해 굶주리던 시절을 이야기한다. 물로 배를 채우거나 보리쌀 한 줌에 봄나물을 듬뿍 넣어 온 가족 끼니를 해결했던 이야기. 착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주는 식당을 찬양하기도 한다. ‘먹방’이라는 신조어는 우리의 결핍감이 또 하나의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의미처럼 들린다. 먹방을 의식한다는 것은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또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오래 박탈과 결핍의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그만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역사적 박탈감과 개인적 결핍감을 해결하는 방법은
박탈과 결핍감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포기하는것


우리의 현대사는 그 자체가 박탈과 결핍의 과정이었다. 지난 100년 동안 우리나라 국민은 누구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조국과 삶의 터전을 잃고, 가족과 재산을 잃은 경험을 지나왔다. 삶을 통째로 잃은 이도, 목숨을 잃은 이도 있다. 가난했던 시절 역시 불과 얼마 전의 일이며, 마음은 여전히 그 상실의 경험에 머물러 있는 듯 보인다. 여성들이 자신의 결핍감을 소중히 간직한 채 포기하지 않으려 하듯, 우리 사회도 못 받은 사과와 덜 먹은 끼니들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개인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우리는 결핍의 빈 곳을 소중히 간직한 채 박탈의 허공을 디디고 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리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져도 소용없는 일이다. 자본주의는 다시 개인의 결핍감을 자극하며 성장하고 있으므로.

여자들의 결핍감은 그 자체로 아무 잘못이 없다. 심지어 그녀들은 자신의 무의식 속 검은 구멍을 인식하지도 못한다. 모르는 채로 그것을 타인에게 떠넘긴다. 남자친구에게서 게임기를 선물받고 떠난 여자처럼 자기도 모르게 남자에게 박탈감을 넘겨준다. 남자는 이제 결핍 상태를 인식하게 되며, 상실된 것을 보상받기 위해 열정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게 된다. 다른 여자거나 중독 물질 같은 것을. 그러면서 가끔 중얼거릴 것이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우리는 수직으로 수평으로 널리 박탈감, 결핍감을 퍼뜨리는 듯 보인다.

역사적 박탈감도, 개인적 결핍감도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어이 받아내는 일이 아니다. 박탈과 결핍감을 보상받으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일이다. 그것을 영영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 솟구치는 분하고 억울한 마음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가 이루어낸 것들에 초점을 맞추어 볼 수 있다.

관점을 바꾸면 우리의 성취감, 승리감, 강인함 등이 보일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 정신에 자연의 신비로움과도 같은 복원력이 있으며, 우리가 경험한 상실이 우리를 더욱 강하고 창조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박탈의 역사가 아니라 승리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해자의 승리가 가해자의 잘못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해자의 죄는 영원히 그들 몫이라는 자명한 사실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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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을 해본 사람들은 체력을 키우는 방법에 대해 알고 있다.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점까지 고통이 느껴지도록 몸을 훈련해야 체력의 한계를 조금씩 넘어설 수 있다. 가슴이 뻐근해질 때까지 달린 다음에야 폐활량이 커지고, 근육이 타는 듯한 고통이 지나간 다음에야 근력이 는다. 고통스러운 지점을 돌파하지 않고 몸이 편안한 상태에서만 운동하면 현상유지는 될지 몰라도 체력의 새로운 지평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정신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론이 적용된다. 인간의 정신도 고통이나 시련을 통해 성장한다. 힘들고 아파 꼭 죽을 것 같은 지점을 넘어서야만 정서의 폐활량도 커지고 마음의 근력도 는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대체로 고통의 경험 앞에서 주춤거리는 듯 보이는 때가 있다.

대학교 학생상담실에서 근무하는 선생님들에 의하면 대학생들이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진로와 사랑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 만나는 젊은이들도 사랑에 대한 고민을 많이 토로한다. 이별 후 다시 사랑하기 두렵다거나, 남자 친구가 홀연히 떠난 후 어떤 남자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예 사랑의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고 말하는 젊은이도 있다. 사랑을 해봤더니 너무 아파 앗 뜨거라 하는 심정으로 물러섰다고 말하는 젊은이도 있다. 그 고통이 예상을 넘어서는 수치여서, 그때까지 맛본 적 없는 통증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사랑이 왜 그렇게 아프고 힘든지 묻는다.

사랑을 하면 당연히 그 뒷면 감정이 폭발하듯이 터져나온다. 그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걸까 하는 불안감, 다른 이성을 바라보기만 해도 솟구치는 질투심, 기대한 만큼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이는 분노를 경험한다. 그 감정들은 그대로 고통이 된다. 사랑한다는 것은 질투를 이겨내고 불안을 다스리면서 계속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작동시키는 일이다.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이 연속된다. 그러니 처음 사랑을 경험하는 젊은이들이 그 어려움에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잘못이 있다면 사랑이 오직 달콤하고 행복한 것이라는 환상을 증폭시킨 문화나, 사랑이 본래 고통을 감수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어른들에게 있을 것이다.

직장생활에서도 고통과 관련되어 똑같은 문제가 이어진다.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살아왔다고 여기는 기성세대의 눈에 요즈음 젊은이들은 작은 어려움에도 회사를 그만두는 듯 보인다. 상사가 잘못을 지적하거나 야단치면 그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는 젊은이들도 있다. 우리는 실수를 통해 배우고, 오류를 개선하면서 능력을 향상시킨다. 상사의 말에서 지혜를 얻는 게 아니라 박해감을 느끼다니, 그들은 얼마나 고통에 대한 내성이 없는 걸까 싶다. 그런 이들은 사회 초년생이 직장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적응이라는 사실도 잘 수용하지 못한다. 조직에 적응한다는 것은 이를테면 삼년쯤 마당을 쓸거나 군불을 때는 것처럼 단순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일에 자신을 투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장인들은 전문 기능을 전수해줄 제자에게 한 삼년 단순 무용한 노동을 시켰다. 그 하찮은 일을 성심으로 소중히 해낼 때에야 마음이 순복되어 귀한 기술을 담을 그릇이 된다고 여겼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한 삼년 군불 때는 일을 감수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나르시시즘에 상처를 입는 것처럼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 어른들은 젊은이들에게 안전한 길 알려주기보다
그들이 도전·모험 뛰어들 때 묵묵히 지원해줘야


심리치료의 핵심에도 고통을 감당하는 일이 있다. 우리가 마음이 아픈 이유는 충격적 사건이나 상실을 경험한 후 그에 따른 고통을 회피했기 때문이다.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외면해둔 그 고통을 다시 체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심리치료를 받는 사람들도 인정 지지 단계의 달콤함만 취하고 무의식을 직면하는 고통은 회피한다. 치료자가 내면의 잘못된 신념이나 부정적 감정을 직면시키려 하면 그 지점쯤에서 치료가 중단된다. 그런 이들은 치료자의 말에 모욕감을 느꼈다거나, 치료자가 자기를 판단하는 게 불쾌하다고 말하면서 예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모욕감이 해결해야 하는 나르시시즘이고, 불쾌감이 불안과 분노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기가 고통스럽기 때문에 치료자에게 투사한다.

젊은이들이 고통 앞에서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이유도 그들 내면에 있는 불안과 나르시시즘 때문으로 보인다. 그들은 고통이 정신을 해체시키고 시련이 생을 무너뜨릴까봐 두려워한다. 되도록 고통을 피해 쉽고 안전한 길로 가려 한다. 그것 역시 부모 세대가 물려준 태도일 것이다. 어려운 시대를 힘들게 통과한 부모들은 자녀에게만은 자기가 경험한 고통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자녀들의 삶을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해왔다. 안전한 선택, 위험하지 않은 길을 찾아내 자녀를 안내했다. 그 과정에서 자녀들은 자잘한 어려움을 경험하고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다. 마음의 힘을 키울 기회를 잃었다. 부모는 자녀가 고통받을까봐 두려워하면서 바로 그 불안감을 자녀에게 물려준 셈이다.

인류의 지혜가 담긴 신화를 참고하자면, 신화의 주인공들은 도전과 모험, 그에 따른 시련과 고통을 통해 영웅이 된다. 각 문화의 성인식은 소년이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의식적으로 고통을 경험시킨 후 삶의 비전을 전수하는 의례이다. 사랑과 용기, 관대함을 가진 성인식 집행자들은 젊은이가 고통받는 과정을 지켜보고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어떤 문화의 통과의례에서도 청년이 혼자 고통받고 스스로 어른이 되는 경우는 없다. 길을 안내하고 비전을 전수하는 어른이 있어야만 젊은이는 마음놓고 고통 속으로 뛰어들어 어른이 되는 과정을 밟는다. 그렇게 삶의 비전을 전수받은 젊은이는 비로소 어른이 되어 다음 세대를 도울 수 있다.

똑같은 공식이 지금 이곳의 삶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오직 실수와 시행착오를 통해 배우며, 시련과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성장한다. 고통은 인간을 더 빨리 의식적으로 만든다.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성격을 확장시키고, 그 경험을 끌어안을 수 있도록 내면 공간을 키운다.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안전한 길을 가도록 조종하는 어른이 아니라, 그들이 도전과 모험 속으로 뛰어들어 고통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묵묵히 지원해주는 어른들이 아닐까 싶다. 어른이 먼저 사랑과 인내, 관대함 등을 갖추고 있어야만 젊은이들에게 그것을 물려줄 수 있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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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지방 국립대학 학생들의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일이 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다는 그 학생들은 메일, 전화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청탁했고, 강의를 수락하자 자기들의 고민과 질문을 미리 메일로 보내왔다. 메일은 다섯 통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이런 내용이었다.


“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문제가 많다.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를 기억하고 분노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아버지 역할을 강요했으며, 그래서 항상 아버지와 마찰이 있었다. 나는 아버지의 입장 따위는 고려해보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내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살아야 했으며, 그래야 내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강연 이튿날 다른 학생이 메일로 비슷한 질문을 보내왔다.


“제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저를 이끌어주시는 교수님의 말을 들을 때에도 항상 걸러서 듣는다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분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의 길을 가겠어. 교수님은 이건 틀려’라는 목소리가 내면에서 들립니다. 그래서 제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이 그토록 진지하게 정신적 성장과 내면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었다. 강의 주제는 자기 정체성 개념과 그 형성에 대한 내용이었다. 자기 정체성은 1959년에 에릭 에릭슨이 처음 제안한 용어이다. 프로이트 시대의 인간은 억압된 욕망으로 인해 고통받았지만 현대인에게 욕망은 거의 무한대로 충족된다. 대신 현대인들은 생존의 느낌 결핍으로 힘들어한다. 열심히 일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일을 끝내도 성취감이나 만족감이 없다. 항상 내면이 텅 빈 느낌이며 사랑과 분노, 조증과 울증이 급격히 반복되는 정서적 롤러코스터에 시달린다. 자기만의 정체성이 제대로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사춘기부터 형성되기 시작해 25세 무렵에 완성되는 정신 기능이다. 그 기간 동안 인간은 아동에서 성인으로, 개인에서 사회적 존재로 변화해간다. 부모에게서 심리적으로 독립하여 고유한 자기 개념과 자기만의 삶을 만들어간다. 시간이 흘러도 동일하게 유지되는 자기 개념, 다양한 정서들을 균형 있게 체험할 수 있는 능력, 활기차고 의미 있는 삶을 느끼는 능력 등이 거기에 포함된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그것을 형성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유로는 산업화로 인한 공동체 해체를 가장 먼저 꼽는다. 공동체가 제공해주던 삶의 비전, 지혜 등을 상실한 채 도시의 허허벌판에서 홀로 자기 삶의 명분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이 쉽지 않다.


정체성 형성이 어려운 또 다른 이유는 양육환경의 변화이다. 핵가족 사회에서 부모와 긴밀하게 관계 맺으며 자라는 자녀들은 부모로부터 정서적 침해를 당하기도 쉬워진다. 그런 환경에서 젊은이들은 자기만의 정체성을 형성하기를 포기한다. 권위적이고 지배하는 부모에게 삶의 주도권을 내어주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순응 유형이 있다. 반대로 매사에 부모에게 반항하면서 서둘러 자기 삶을 찾아 떠나는 반발 유형이 있다. 그들은 권위에 도전하면서 사회에 적응하기 어려워한다. 글 앞머리에 질문한 두 청년이 겪는 어려움이 이 범주에 속한다.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하는 세 번째 유형은 자기를 분산시키는 경우이다. 그들은 생에 대한 질문 없이, 열정이나 기대 없이, 어떤 역할도 맡기 싫어하면서 살아간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 정체성 형성이 어려워진 사회현실 속

젊은이들의 진지한 자기성찰에 감동


학생들이 미리 보낸 질문 메일에는 두 교수의 내면 이야기가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 앞에서 자기 내면의 불안감과 시기심에 대해 담담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학생들은 존경하는 교수님들 속에도 자기들과 똑같이 어쩔 줄 몰라하는 내면 아이가 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눈빛이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교수들의 내면 이야기를 경청한 것이 어떤 교훈보다 값지지 않았을까 생각되었다. 연전에 한 20대 여성이 부모 세대 여성들이 속내 이야기를 토로하는 자리에 끼어 앉아 있었던 경험에 대해 들려준 적이 있다.


“충격이었어요. 내가 못 받았다고 느꼈던 사랑을, 그들도 가지고 있지 않았어요. 그들도 사랑받지 못했다고 분노하면서 사랑을 줄 줄도 모르고, 심지어 자기 내면에 대해서조차 잘 모르고 있었어요. 대체 누구에게 무엇을 기대했던 건가 싶었어요.”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가 자기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자주 의심한다. 부모에게서 받은 한두 가지 상처에 의식이 집중되어 있어, 자식을 보살피면서 염려한 그 긴 세월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보지 못한다. 부모 세대 역시 물려받은 상처가 있어 어쩔 줄 모르는 채로 고통 속에 살아왔다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한다. 그들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지 못해서 자녀에게 사랑이라고 내미는 것이 이상한 모습을 띠기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요즈음 들어 심리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지면서 기성세대들은 자기들이 부모 역할에서 범한 잘못을 알아차리고 있다. 미안하고 다급한 마음에 서둘러 자녀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취하기도 한다. 아직 부모를 이해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젊은이들은 그 일방적인 태도에 당황한다.


“아빠가 갑자기 ‘우리 딸 사랑해’ 하면서 하트까지 넣어 문자를 보냈어요. 이제 와 왜 그러는 거죠? 그냥 하던 대로 하지….”


“엄마는 나한테 사과한다고 말하지만 그 말투는 여전히 위압적으로 명령하는 방식이고, 엄마 생각을 강요하는 것일 뿐이죠.”


이제 내면을 이해하고 소통하기 시작했으니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것이다. 이미 자기 내면의 잘못된 신념을 알아차리는 젊은이들도 있다. 맨 앞의 글에서 질문했던 학생은 아버지를 심판한다는 내용을 쓴 후 곧이어 자기를 성찰해냈다. “글을 적어 놓고 보니 참 문제가 많은 놈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 내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요구했으니,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두 번째 인용문의 학생도 어른을 존경해본 적이 없다고 쓰면서 자신의 모습 한 가지를 통찰해냈다. “헉, 글을 쓰면서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이 있는데, 저 역시 그 학우처럼 아버지를 심판의 눈길로 바라보며 반발하는 모습이군요.” 학생들은 이제부터 새로운 자기 정체성을 형성해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만 해나간다면 앞으로 우리 사회도 괜찮을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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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배 여성은 서른 다섯 살이 되는 새해에 회사에 사표 내고, 남자 친구와도 헤어진 후 외국 여행을 떠났다. 첫 목적지는 알래스카였다. 성장기에 꿈꾸던 알래스카 설원을 밟은 다음 아메리카 대륙을 남으로 횡단하리라 계획했다. 나는 여행 떠나는 그녀를 격려했다. 이별에 따른 애도 작업도, 중년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도 필요해 보였다. 휴식과 재충전의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면 중년기 이후의 삶을 건강하게 펼쳐나갈 거라 기대했다.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외국에서 5년을 살았다. 처음에는 알래스카 설원이나 뉴욕 뒷골목 사진에 안부를 적어 보냈다. 남아메리카 원주민 여성이 한 땀 한 땀 엮어 만든 공예품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남미의 한 나라에 멈추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삶을 이어가는 것 같았지만 얼마 전, 마흔 살이 되는 새해에 귀국하여 안부를 전할 때까지 그녀는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낯선 문화에 몸을 담근 채 4년 이상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외부 세계에서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귀국하여 만났을 때 그녀는 이국 땅에서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매일 내 손으로 상을 차리고, 나를 먹이곤 하는 일이 의미 있었다. 가족에게 돌아가면 이렇게 엄마에게 상도 차려드리고, 엄마한테 잘 해드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여행 떠나기 전 그녀는 엄마에게 화를 많이 내는 딸이었다고 덧붙였다. 그녀가 스스로 성취했다고 여기는 것 위로 재를 뿌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냉정한 진실을 건넸다. 아무리 멀리 떠나 있어도, 예전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는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거라고. 며칠 후 그녀는 근황을 전했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마음이 불편해지고, 한밤에 혼자 목놓아 우는 자신을 발견했다고.


후배들 중에는 삶이라는 커다란 울타리 바깥에서 서성이면서 시간을 다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낯선 땅에 2, 3년씩 머무르면서 일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는 이들을 더러 만난다. 몸은 국내에 있지만 외국을 떠도는 사람처럼 생을 흘려보내는 젊은이들을 더 자주 맞닥뜨린다. 그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생에서 확보하지 못한 기능이 비단 의존성을 끊는 문제만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그들은 세 가지 개념을 충분히 내면화시키지 못한 듯 보인다. 자립, 자율, 자유.


자립은 유아기적 심리적 의존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다. 그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자기 삶을 살아가기보다는 부모에게 잘 해드리고 싶어하고, 엄마에게 집을 사드리거나 아버지 자동차를 바꿔드리고자 한다. 그렇게 하면 예전에 못 받았다고 느끼는 사랑을 지금이라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어린 시절에 못 받은 사랑은 어디서 받아내야 하나요?”라고 질문하는 여성도 있다. 그런 이들은 환갑이 될 때까지도 자기 인생을 살기보다 부모에게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그 자녀들과 상호 의존 관계에 있는 부모 역시 내면에 결핍의 구멍을 가진, 만족할 줄 모르는 이들이다. 아무리 애써도 원하는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분노하게 될 때까지 헛된 노력을 되풀이할 뿐이다. 어떤 이유로든 부모에 대한 애착이나 분노의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면 그것은 심리적으로 자립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 자립·자율·자유 성취 못한 젊은이들

부모 간섭 벗어나려 외국서 떠돌아


자율은 스스로 삶을 만들어나갈 수 있는 역량을 말한다. 자기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실천해나가야 하는 규칙을 스스로 정한다. 삶의 세목들을 행동에 옮기면서 작은 목표들을 성취할 때마다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자존감을 키운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작은 실천과 성취들이 모여 삶에 가치를 부여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스스로 삶을 운영해나가는 역량을 자율성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떤 젊은이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누군가가 자기 삶의 실천 항목들을 제시해주기 바란다. 오래도록 학교가 수업 시간표를 만들어주고, 부모가 과외 스케줄을 짜주었기 때문에 성인이 된 후 외부 규칙이 없어지면 일상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런 이들은 친밀감을 나누는 대상과도 적극적으로 통제 관리하는 관계를 맺는다. 상대가 구속당한다고 느낄 만큼 일일이 간섭하고 통제하면서 상대방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원한다. 컨트롤하는 행위 전체를 사랑이라고 여긴다.


자유는 큰 개념이다. 한 개인의 삶의 문제에 국한하여 말한다면 자기 삶이 온전히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의미를 말한다. 삶은 선택의 문제이며, 그 결과를 마음껏 향유하고 스스로 책임지면 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대외적으로 멋져 보이는 삶을 꿈꾸거나, 세상이 정해둔 틀 속에 자기 삶을 맞추려 노력한다. 삶에 준비되어 있는 여러 요소들을 마음껏 시도하지도, 그 열매를 흠뻑 맛보지도 못한다. 자유를 두려워한다기보다는 책임을 두려워한다는 게 옳을 것이다. 스스로 삶을 책임지기 두려워하면서 내면에 빅 브러더를 초청한다. 누군가 힘 있는 대상이 자기 삶의 최종 관리자가 되어 책임과 승인을 이행해주기 바라며 자유를 반납한다.


젊은이들이 자립, 자율, 자유를 성취하지 못하는 배경에는 그들 부모 역할이 지대해 보인다. 자식이 자립하려 하면 배은망덕이라며 뒷덜미 잡는 부모, 자식이 자율성을 연습하려 하면 말 안 듣고 제멋대로 군다고 여기는 부모가 있다. 자식이 자유를 향유하려 하면 그 결과를 책임질 수 있느냐며 협박하는 부모도 있다. 외국에서 떠도는 젊은이들을 볼 때면 그들이 혹시 구속하고 간섭하는 부모로부터 멀리 떠난 게 아닐까 싶을 때도 있다.


그런 삶 역시 그들의 자유이고, 스스로 책임지면 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다. 그렇다면 세 가지 항목을 체크해 보아야 한다. 


일, 사랑, 돈의 문제에서 잘 해나가고 있는가. 일은 그가 사회 구성원으로 잘 기능한다는 방증이 된다. 노동으로 돈을 벌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가는 어른이 되었다는 중요한 척도이다. 주변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정서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면 심리적으로 잘 기능한다는 의미이다. 세 가지 측면에 문제가 없다면 어디서 어떻게 살든 당사자의 자유일 뿐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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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배 여성은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사람이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열심히 하겠습니다!” 외치는 듯 보인다. 온몸의 근육은 긴장되어 있고, 목소리는 무엇인가를 주장하듯 힘이 실려 있다. 실제로 일을 맡으면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임무를 완수한 후에는 미진함을 느끼며 안타까워한다. 자주 근육 통증에 시달리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기울이듯 살다가 한 번씩 신체 에너지가 방전되는 상황을 맞는다. 그때마다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내 인생은 왜 이렇게 힘들까? 그녀는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와 대화하는 일에도 온 힘을 기울여 남자가 부담스러워하며 뒷걸음질치게 만들었다.


삶이 힘들다고 호소하는 젊은이들을 드물지 않게 만난다. 그런 이들은 부모 마음에 들기 위해 지나치게 애써야 했던 성장기를 보낸 경우가 많다. 엄마의 집안일을 거들고, 아버지를 대신해 가정을 짊어지려 하고, 돈을 벌어 부모님을 호강시켜드리겠다고 다짐한다. 그런 이들의 내면에는 자기가 가정에 필요한 존재인지, 부모에게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는 마음이 있다. 부모가 주는 사랑이 불공정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조건에 좌우된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랑받는 자식이 되기 위해 애쓴다. 그들은 성인이 된 후에도 직장이나 친밀한 관계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다. 남들과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두세 배쯤 많은 신심의 에너지를 소모하는 셈이다.


삶이 힘들다고 느껴진다는 것은 생의 목표가 잘못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사실 우리가 성장하면서 품는 꿈의 성격은 둘 중 한 가지일 것이다. 부모의 소망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거나, 결핍되어 있다고 느꼈던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타인의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구, 콤플렉스를 만회하려는 의지가 그대로 꿈이 되기도 한다. 불행한 것은 외부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삶의 목표는 아무리 성취해도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가끔 생의 목표를 성취한 후 슬럼프에 빠지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꿈이 없어졌기 때문에 방향을 잃은 게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실망했기 때문에 힘없이 주저앉은 게 아닐까 싶다. 혼신의 힘을 기울여 목표에 도달했지만 원했던 사랑이나 인정은 쏟아져 들어오지 않는다. 무의식 깊은 곳에 있는 구멍이 채워지지 않자 오히려 그 구멍에 삼켜지고 만 것이다. 그런 이들은 지금이라도 자신의 재능이나 삶의 소명을 점검해보면 좋을 것이다.


삶이 힘들다고 느끼는 또 다른 이유는 넘어서지 못한 의존성의 문제와 관련 있다. 부모의 사랑을 받기 위해 지나치게 애쓴 이들은 당연히 부모에게 의존하고 싶은 욕구가 충분히 충족되지 못한 상태이다. 힘있고 다정한 어른이 자기를 보호해주고 자기 삶을 이끌어가주기 바라는 마음이 내면에 남아 있다. 그런 이들은 좋은 부모 환상을 충족시켜줄 연장자를 찾아다닌다. 자기를 사랑하고 지지해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면 그에게 헌신하면서 그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한다.


안타까운 것은 그런 이들이 사회적 관계에서도 친밀감이나 사랑을 기대한다는 점이다. 비즈니스 상대가 다정하게 대해주기를 원하고, 부장님이 사랑해주기를 바란다. 어떤 이들은 사회적 태도에 깃든 객관성, 거리감에서도 박해감을 느낀다. “부장님이 저를 미워하는 것 같아요.” 저 문장은 젊은 직장 여성에게서 자주 듣는 호소이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답해준다. “부장님은 자기 문제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서 여러분을 미워할 여유가 없어요.” 의존성을 넘어서지 못한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할 때 심리적 불편을 많이 겪는다. 자신이 엉뚱한 대상에게 당치도 않은 것을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실감으로 고통받는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출처: 경향DB)

▲ 입시에 치여 삶에 대해 배운 적 없는 젊은이들

주변 현실이 힘든지, 감당하기 힘든지 구분해 보길


삶이 힘들다고 느끼는 마지막 이유는 생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들은 인생이 본래 아름답고 행복해야 한다고 믿는다. 생에 대한 근거 없는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 현실의 삶이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견디기 힘들게 느껴진다. 백마 탄 왕자가 없는 것처럼 단언컨대,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이란 없다. 누구의 삶이나 그 속살을 열어보면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는 게 생의 첫 번째 조건이다. 생에 대한 환상이 많은 이들은 타인의 성취에 대해서도 시기하는 마음을 먼저 일으킨다. 타인들의 성취 뒤에는 무수히 많은 좌절과 인내,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볼 줄 모른 채 겉으로 드러나는 좋은 면만 부러워한다. 어떤 이는 다짜고짜 “그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기심에서 오는 고통은 마치 자기 것을 빼앗긴 양 절절하다.


그런 이들이 현실의 고통을 피해 즐겨 숨는 곳은 환상이다. 환상 속에서 꿈꾸는 모든 삶을 누린다. 하지만 환상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만 허용되는 생존법이다. 성장기의 약한 자아가 현실의 냉혹한 모서리에 부딪쳐 피를 흘리지 않도록, 환상은 어린 자아를 보호하는 기능을 한다. 어딘가에 다정한 엄마, 행복한 가정이 있을 거라는 꿈을 꾸면서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간다. 성인이 되면 현실의 날카로운 모서리와 직면해야 한다. 모서리에 부딪쳐 이마가 깨어지고, 벽에 부딪쳐 찰과상을 입으면서 현실의 삶을 배워나간다. 넘어지고 부서질 때마다 냉철하게 현실을 인식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주저앉아 힘들다고 탄식할 게 아니라.


우리 젊은이들은 성장기 내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느라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배울 기회가 없었던 것 같다. 삶의 주도권을 자기 손에 쥐고 스스로 자기 인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인식도 없어 보인다. 그리하여 성인으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시점에 이르면 총체적 난국에 처하는 듯하다. 배운 적 없고 준비하지 않은 어른의 삶을 살려니 매사에 힘들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싶다.


젊음은 본래 혼돈과 미숙함의 시기여서 가만히 있어도 삶이 어렵다. 불안감이 많은 기성 세대는 젊은이들을 믿고 지지해줄 줄 모른다. 객관적으로 사회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삶이 힘들다고 느낄 때 거기에는 명백히 두 차원이 있다. 객관적인 상황이 힘든지, 마음 깊은 곳에서 자기 삶을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는지. 두 가지를 구분할 줄만 알아도 삶이 조금 수월해질 것이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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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만날 때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 이야기를 했다. 부모님께 안부 전화를 드리면 막판에는 늘 어머니의 불같은 분노로 끝맺게 된다고 했다. 명절 선물을 노골적으로 불만족스러워했고, 남편과 아기가 있는데도 쌀쌀한 날씨에 보일러를 틀지 못하게 했다고 서운함을 토로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어떻게든 착한 딸 노릇을 하려고 애썼다. 한동안 부모와 관계를 단절해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면 오히려 나를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효도 이데올로기에 함몰되어 있는가 싶었다. 다음에는 부모와 심각한 상호의존 관계에 있어 박해하는 대상이 필요한가 싶었다. 1년 이상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은 후 처음으로 질문을 던져보았다. “부모가 부자예요? 부모한테서 받을 유산이 많아요?” 꽤나 깊은 무의식을 자극하는 질문이었던 듯하다. 그녀는 온순한 말투로, 그러나 문득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면 생의 에너지를 어디서 얻어요?”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많이 놀랐다.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변함없이 순종적인 태도로 앉아 있었다.

가끔 생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가 묻는 후배들이 있다. 그 젊은이들은 내면에서 남몰래 무기력과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마음에는 소망하는 바가 있지만 몸이 움직여지지 않고, 다른 삶을 살고 싶지만 변화를 꾀할 힘이 없었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욕망이 내면에서 갈등하는 것을 경험하느라 거의 탈진한 듯 보였다. 그들의 무기력은 일견 게으름처럼 보이기도 하고 가끔은 우울증처럼 보이기도 했다. 삶의 에너지는 어디서 얻는지 물을 때조차 그들은 한숨처럼 가느다란 목소리를 냈다.

우리는 보통 삶의 목표에서 에너지가 나온다고 알고 있다.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기차가 달리고, 발원을 세우면 원력이 나온다고 말한다. 그것을 프로이트의 언어로 표현하면 결핍감에서 욕망이 나오고, 욕망에서 욕동이 나온다는 것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욕동, 즉 생의 추진력에는 상반되는 두 가지 에너지가 있다. 에로스와 타나토스, 자기보존 본능과 자기파괴 본능이다. 누구의 내면에서나 사랑과 불안감이 서로 싸우고, 소망과 시기심이 대립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래도록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삶의 추진력으로 사용해왔다. 식민지의 분노, 전쟁의 불안, 가난의 복수심 등을 에너지로 사용하여 거의 한 세기를 달려왔다. 그리고 이제 탈진한 듯 보인다.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면 밖으로 성취하는 것만큼 안으로도 내상을 입기 때문이다. 각 개인이 중년의 위기에서 맞는 무력감도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삶의 추진력으로 사용한 결과라고 한다. 우리 사회도 중년의 위기와 비슷한 처지에 다다른 듯 보인다. 거듭 불안 상황을 맞이하고 도돌이표 궤적을 그리는 것은 결핍감과 복수심을 추진력으로 사용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피로감을 호소하며 보양식에 집착하는 중년들도, 어딘가 탈진한 듯 보이는 우리 사회도 저 젊은이들처럼 생의 에너지는 어디서 오는지 묻는 듯하다.

 

▲ “젊은이의 무기력은 때론 게으름 혹은 우울증으로 보인다
타인의 사랑을 얻기 위함이 아닌 내 생을 위해 힘을 내자”

프로이트 이후 대상관계 학자들은 생애 초기 중요한 타인이 한 사람의 정서에 더 많은 영향을 준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아기는 생애 초기 엄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을 탐험하러 나가는 시기를 맞는다. 엄마를 등지고 몇 걸음 걸어나가던 아기는 문득 멈춰 서서 엄마를 뒤돌아본다. 엄마가 거기 있다는 것, 자기를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다시 몇 걸음 걸어나간다. 어느 순간 엄마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아기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다. 그러고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다. 엄마에게서 먼 곳까지 놀러나가는 유년기의 어린이도 주기적으로 엄마에게 되돌아와 그 곁에서 쉰다. 엄마와 신체적 접촉을 시도하고, 엄마의 관심을 끌어 웃음 띤 환호를 받고자 한다. 그렇게 마음에 에너지를 채워 다시 세상 속으로 뛰쳐나간다.

생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묻는 젊은이들은 무의식에서 저 유아기의 좌절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어떤 이는 유아기에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린 상태로 성장이 멈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 이들에게 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의미 있는 타인과 안정된 애착 관계를 맺고 그들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몸은 성인이 되었지만 독립된 개인으로서 자기만의 생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개념을 갖지 못한 상태에 있다. 삶의 목표가 없기 때문에 생의 에너지도 없다.

무기력한 상태에 머물면서 “빨리 늙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진심으로 미안한 마음이 인다. 그들의 부모인 우리 세대가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여 생을 이끌어나가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불안과 분노가 섞인 양분을 제공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 후 후배 여성들은 이렇게 말한다. “내 불안감의 절반은 엄마 거네요.” 앞서 말한 여성도 어떠한 이유에서 유년기에 안정된 사랑과 지지를 주는 엄마의 보살핌이 부족했다. 자신이 엄마가 된 지금도 엄마 무릎에 앉아 쉬면 생의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유아기의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다. 물론 무의식에서.

작심삼일의 시기가 다가왔다. 정초에 세운 새해 목표가 첫 번째 시험에 부딪히는 때이다. 내면에서 에로스와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들이 대립하면서 무력감이 밀려온다. 이렇게 하면서까지 담배를 끊어야 하나, 노력한다고 목표가 반드시 성취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내면에서 그런 갈등이 인다면 생의 에너지가 어디서 오는지 질문해보면 좋을 것이다.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생을 만들어나가기 위해 힘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어떨까 싶다. 무력감으로 인해 꼼짝 못하는 젊은이들에게는 의미있는 타인을 찾아내어 유익한 관계를 맺도록 제안한다. 편안하고 배울 것 많은 사람을 만나 천천히 생을 배워나가면 된다고 말한다. 동일한 목표를 지닌 이들의 자조 모임에 가입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 된다. 모임은 그 자체가 중간 공간의 역할을 하면서 구성원의 성장과 발전을 돕는다.

진정한 생의 에너지는 이타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타적인 유전자가 인류를 살아남게 한다는 진화심리학자들의 연구, 사랑이 가장 힘이 세다고 제안하는 세계 종교의 지혜가 그 명제를 뒷받침한다. 유아기 좌절에 사로잡혀 있거나 타나토스 영역의 에너지를 사용하는 이들은 자기가 결핍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이타적인 마음을 내기 참 어렵다. 그 마음이 에너지 고갈의 악순환을 초래한다. 젊은 친구들에게 억지로라도, 그냥 마음만으로라도 이타적인 생의 목표 한 가지를 마음에 새겨보라고 권한다. 그들은 빈 마음만 내는 그 일도 어려워한다. 우리 사회도 그럴까봐 두렵다.

김형경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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