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이울 틈 없이 바로 여름이다. 늦봄 없이 여름이니 “이울다”는 말은 도무지 소용에 닿지 않는 시절이다. 이운 봄 없이 여름이 오고, 거리는 여름 화장으로 빛난다. 눈은 오늘의 거리에 두고, 손은 문득 조선 후기 시인 이옥(李鈺, 1760~1813)의 문집을 뒤진다.

歡莫當儂髻 그대, 내 트레머리에 닿지 말아요
衣沾冬栢油 옷에 동백기름 묻어나니까
歡莫近儂脣 그대, 내 입술에 가까이 오지 말아요
紅脂軟欲流 붉은 연지 부드러워 흘러드니까

이옥의 연작시 <이언俚諺> 가운데서도 자신의 매력을 뽐내(유보할 사항이 있으나 아무튼 “팔아”) 먹고사는 여성들을 제재로 한 노래 모음인 <탕조宕調>에 속한 노래 한 자락이다.
보는 그대로다. 화장은 복식과 함께 하게 마련. 수고를 다해 트레머리를 올리고 동백기름으로 마무리한 여인. 연지로 붉은 빛을 도드라지게 올리고는 추근대는 사내에게 짐짓 딴전이다.
게다가 사내를 부르는 2인칭 대명사가 “환歡”이다. 문맥에서의 느낌을 살리자면 “자기야!”쯤도 가능한 말이다. “환歡”은 “환희歡喜”의 쓰임처럼 원래 “기쁘다”라는 뜻이지만 고시의 대표적인 갈래인 악부에서 일쑤 연인을 부르는 대명사로 전용된다. 기쁨 가운데 으뜸이 무엇이겠는가. 누가 나를 가장 기쁘게 하겠는가. 언어는 달라도 “환歡”에는 "honey"만한 말맛이 담겼다.

트레머리에 동백기름, 그리고 붉은 연지로 한껏 멋을 낸 여인의 상대는 어떤 사내였을까. 밀어내고 싶은 진상 손님이었을까, 어쩔 수 없는 기둥서방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여인의 동백기름과 연지의 자취를 걱정해야 할 기혼자 애인이었을까.
그 사내가 기방 출입을 하는 기혼자였다면, 이 사내, 흔적을 지우지 못한 덕분에 집에 돌아가 공인된 제 짝과 이러고 싸웠을 게다. <이언>의 또 다른 꼭지인 <염조艶調>에서 다시 한 수 뽑는다.

歡言自酒家 당신은 술집에서 왔다지만
儂言自倡家 기생집에서 왔겠죠!
如何汗衫上 언제 내가, 당신 속적삼에
儂脂染作花 연지 꽃물을 들였나요?

“환歡”을 여기서는 “당신”으로 새겼다. <탕조>는 확실히 직업여성의 세계를 다룬 꼭지고, <염조>는 비직업여성의 생활을 다룬 꼭지라는 점에 착안해서다. 아무려나 제 사내를 “환歡”으로 부르는 여인이 있으니, 이 사단은 젊은 부부의 신혼집에서 난 사단으로 짐작이 된다.
아까 걱정한 대로인지 속적삼에 연지 자국이 남았다. 밖에서 돌아온 사내가 연지로 아예 꽃물을 들이고 왔단 말이다. 암만 생각해도 내 몸에서 옮겨갔을 리가 없는데, 하필 속적삼에 연지 꽃물이라니. ㅋㅋㅋ

예전 화장에도 요즘의 기초 대 색조, 기본 대 성장과 같은 구분이 있었다. 곧 수수하고 담박한 기본 화장은 “담장淡粧”, 담장에서 색채가 살짝 들어가 주면 “농장濃粧”, 농장을 지나 아예 작정을 하고 채색을 올려 섹슈얼리티를 연출하면 “염장艶粧”이라고 했다.
맨 먼저 본 시 속의 여인은 염장을 하고 있을 테고, 두 번째 시 속 여인은 평소 담장쯤을 하고 살았으리라. 그리고 거기서도 색조, 채색 질감에 대한 기호에 따라 무한대의 연출이 가능했을 터이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진술은 색채에 대한 당대의 유행을 드러낸 것일까, 시를 쓴 이옥의 취향을 드러낸 것일까? 모르겠다. 그저 갸웃거리며,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다.

桃花猶是賤 복사꽃 화장은 오히려 천박하고
梨花太如霜 배꽃 화장은 서리처럼 너무 차갑지
停勻脂與粉 연지와 분을 골고루 발라
儂作杏花粧 나는 살구꽃 화장을 하지


*사진은 친구 솔밧이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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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쥐에 비유하는 것도 그렇고, 그렇다고 모욕죄 씌우는 것도 그렇고 참 인간이란 얼마나 자기들 멋대로인지...쥐들은 자기 삶에 충실할 뿐인데 인간이 자기들의 도덕적 잣대로 쥐를 평가하고, 나쁜 사람 닮았다고 쥐를 모욕한다.”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본 한마디다. 시절이 수상한 판에 이규보의 <쥐가 벌인 소동>이며 <쥐를 저주하는 글>을 소개했는지라 이 한마디도 심상히 보이지 않아 자꾸 들여다봤다. 들여다보며 뭐라 딱히 설명할 길이 없는, 웃자고 웃는 웃음이 아닌 웃음이 슬며시 흘러 나왔다. 사람도 쥐도 참 억울하고 힘든 시대구나...
이규보의 시대는 농업 생산이 생산의 거의 전부였던 때였다. 한데 사람은 그 귀한 농업 생산의 시작인 종자 보존에서부터 쥐와 싸워야 했다. 자연스런 산화-부패는 제쳐두고, 수확한 농업 생산물을 지키기 위한 다툼에서 가장 지독한 경쟁 상대가 쥐였다.
그 시대 사람들에게 쥐는 무심히 보아 넘길 생물종일 수만은 없었던 것이다그리고 이제 몇 백 년이 지나 쥐에게 이규보 시대만 한 은유와 상징의 막이 한 겹 덧씌워질 모양이다. 아니 이규보 시대보다 더한 막인가? 또한 모를레라!
허허롭게 웃은 김에 이규보의 웃음 한 자락을 소개할까 한다. 다음과 같다.


人間可笑事頻生 살다 보면 웃을 일이 자주 생긴다만
晝日情多笑未遑 낮에는 머릿속이 복잡해 웃을 겨를이 없고
半夜衾中潛自笑 한밤중에야 이불 속에서 슬며시 웃는데
殷於手拍口兼張 이 웃음이야말로, 손뼉 치며 입 찢어져라 웃기보다 더한 웃음 

衾中所笑雖非一 이불 속에서 웃을 일이 한 가지만은 아닌데
第一呵呵孰最先 그 가운데 가장 우스운 일이 무엇인가
文拙平時遲澁者 글재주 보잘것없어 평소에는 쩔쩔매던 사람이
揮毫示捷貴人前 높은 사람 앞에서는 붓을 떨치며 날랜 체하는 것

笑中第二又誰是 우스운 일 두 번째는 무엇인가
爲吏稍貪深自秘 벼슬아치로서 탐욕을 부리되 자기 딴에는 깊이 숨기는 자일세
一物入門人盡知 뇌물 하나 집에 들여도 온 사람이 다 아는데
對人好說淸於水 남들에게는 자신이 물보다 맑다고 떠들어 댄다

笑中第三女不颺 우스운 일 세 번째는 잘나지도 못한 여자가
鏡裏自看難自識 거울 속 들여다보고도 제 꼴을 알아보지 못하고
有人報導你顔姝 누가 예쁘다고 찔러 주면
妄擬正妍多作色 주책없이 정말 예쁜 줄 알고 온갖 교태를 부리는 것

笑中第四是予身 우스운 일 네 번째는 나 자신이라
涉世無差僥倖耳 세상살이 탈 없이 지나온 게 다 요행일 뿐이었지
直方迂闊人皆知 모나고 융통성 없음은 남들이 다 아는데
自謂能圓登此位 스스로 원만한 처세를 한 덕에 이 자리까지 오른 줄 아는 것

笑中第五是浮屠 우스운 일 다섯 번째는 중놈들
邂逅佳人心已寄 미인을 만나면 마음은 벌써 쏠리는데
目送飛鴻佯不看 눈길을 날아가는 기러기에 두고 못 본 체하며
故爲灰冷無心士 짐짓 식은 재처럼 싸늘하고 무심한 스님 행세를 한다
_이규보, <이불 속에서 웃다[衾中笑]> 전문


하루를 마무리 하는 내 집 방 안
, 그러고도 내 덮은 이불 속에서 웃는 웃음이 손뼉 치며 입 찢어져라 웃기보다 더하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한낮에는 일이 많고, 그만큼 내 마음도 바빠[晝日情多] 웃으려 해도 아직 겨를이 없으니까[笑未遑]. 이제 이불 속에 파묻혀서는 응축됐던 감정이 터질 판이다. 이때에 이르러 얄궂어라!
높은 사람 앞에서 붓을 휘두르며 날랜 체하기[揮毫示捷貴人前]는 이규보 또한 남들 못잖게 해본 노릇이다. 이규보는 최충헌이 집권한 29세 이후 끝없이 권력자들에게 자신의 글을 드러낸 덕분에 본격적으로 벼슬을 할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동명왕편>에서 보인 큰 뜻을 펴기 위한 구관 활동이라고 해도, 그것은 분명 귀인전貴人前에서의 어릿광대놀음이었다. 그렇게 오른 벼슬길,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 벼슬아치 집에 무슨 뇌물이 들어가는지 사람들이 다 아는데, 남들 앞에 청렴한 척 나대는 벼슬아치들은 왜 그리 많은지.
잘나지 못한 여자의 예쁜 체역시 지나온 구관 활동과 무관치만은 않을 것이다. 이규보는 32세에 최충헌의 잔치에 불려가 이인로, 함순, 이담지 들과 함께 최충헌에게 글재주를 뽐낼 기회를 맞았다. 이후 40세에 한림원의 임시직에 들기까지 좋다” “잘 쓴다는 빈말을 들었을지언정 실속은 없었다. 권력자를 향한 구애의 글쓰기가 주책없는[妄擬] 교태부리기, 아양 떨기[多作色]와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그렇게 해서 벼슬을 하고 문인관료로서 행정 능력을 발휘하게 되기까지가 다 요행이었을 뿐[僥倖耳]이라 했으니 무척 쓸쓸한 느낌도 든다. 여기에 직방우활直方迂闊을 덧붙였다. “직방直方정직방정正直方正의 뜻으로, 여기서는 모나다라고 새기면 그만이다. “우활迂闊은 그저 어리석다가 아니라고, “현실 적응력이 떨어지다” “융통성이 없다의 뜻이다.
이 또한 얄궂다. 정직방정하고 우활한 사람이 구관 행각을 벌이는 길에 권력자에게 글재주를 뽐냈다. 이어진 원만한 처세의 갈팡질팡에 이르면 이규보 웃음의 속내가 되돌아 보인다.

끝으로
미인 앞에서의 아닌 체는 나사못회전 또한 어쩔 줄 모르는 바다. 다만 회랭무심灰冷無心”, 곧 식어 불기 빠진 재인 듯, 무심함을 굳이 가장하지 않아도 무탈한, 노골의 시대에 감사하고, 안도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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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보는 앞서 소개한 시 <쥐가 벌인 소동[서광鼠狂]>에서 대놓고 까부는 것도 완악한 노릇인데/심지어 지랄에 행패까지?/시끄럽게 다투며 내 잠을 방해하고/약삭빠르게도 사람이 먹을 것을 훔치는구나라며 쥐를 꾸짖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있는데도 쥐가 이렇게 날뛰는 까닭은 실은 고양이가 재주가 없어서라고 했다. 이 새벽, 쥐를 소재로 해 쓴 이규보의 또 다른 작품을 뒤지다 문득 한 조각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오늘 이 나라에 쥐 소동이 횡행하는 까닭이, 실은 이 나라 국민이 못나서일까?


 

모를레라! 애오라지 13세기 사람의 글에 눈을 둘 뿐이다. 입술에 쥐 기름을 칠하고, 뱃속에 쥐 살점을 장사지낼 고양이는 어디 있는가. <쥐를 저주하는 글>에서 이규보는 아직 고양이를 풀어내지는 않았다. 다만 저주의 수사를 풀어낼 따름이다. 아래와 같이.

우리 집에서는 평소에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다. 그래서 쥐떼가 멋대로 날뛰는데, 이를 미워해 쥐를 저주해 보았다(予家素不蓄貓, 故群鼠橫恣, 於是疾而呪之).

[여기까지가 병서다. 병서 다음부터가 <쥐를 저주하는 글>의 본문이다. 시는 아니지만 운문韻文이므로 한 구씩 떼어 원문을 제시한다.]

惟人之宅 사람의 집에서는
翁媼作尊 나이 많은 남녀가 어른이 되고
挾而輔之 옆에서 이들을 돕는 데는
各有司存 저마다 맡은 일이 있다
司烹飪者赤脚 음식 만들기를 맡은 이는 계집종이고
司廝牧者崑崙 마소 부리기를 맡은 이는 사내종이다
下至六畜 그 아래로 말///돼지//닭에 이르기까지
職各區分 직책에 각각 구분이 있으니
馬司代勞 말은 사람의 수고를 대신해
載驅載馳 달리며
牛司引重 소는 무거운 짐을 끌거나
或耕于菑 밭을 간다
鷄以鳴司晨 닭은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리고
犬以吠司門 개는 짖어서 문을 지키는 등
咸以所職 모두 맡은 바 소임으로
惟主家是裨 주인집을 돕는다
問之衆鼠 뭇쥐에게 묻는다
爾有何司 너희가 맡은 일은 무엇이며
孰以汝爲畜 너희를 기르는 건 누구며
從何產而滋 어디서 생겨나 불어나는가?
穿窬盜竊 구멍을 뚫고 침범해 도둑질하기는
獨爾攸知 오직 너희만이 아는 노릇이다
凡曰寇盜 대개 도둑이라고 하면
自外來思 집 밖에서 들어오게 마련인데
汝何處于內 너는 어찌 집 안에서 살며
反害主家爲 도리어 주인집에 해를 끼치는가
多作戶竇 여기저기 구멍을 뚫어
側入旁出 이리저리 들락날락하고,
伺暗狂蹂 어둠을 틈타 미친 듯이 짓밟고,
終夜窣窣 밤새도록 시끄럽게 굴고,
寢益橫恣 잠이 들면 더욱 제멋대로가 되고,
公行白日 대낮에는 보란 듯이 다니는구나
自房歸廚 방에서 부엌으로,
自堂徂室 마루에서 방으로 오가며
凡獻佛之具 부처님께 올린 음식과
與事神之物 신령을 섬기는 제물에
汝轍先嘗 너희가 먼저 맛본 흔적을 남기니
蔑神無佛 이는 신령을 능멸하고 부처님을 무시하는 짓이다
以能穴堅 단단한 것에 구멍 뚫을 줄 알아
善入函櫝 상자며 궤짝에 잘 들어가고
以常穿突 굴뚝을 뚫어
煙生隈曲 방의 구석에서 연기가 나게 하며
飮食之是盜 음식을 먹어치우니 이것이 바로 도둑질이다.
汝亦營口腹 너희 또한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겠지만
何故噬衣裳 도대체 왜 옷감을 쏠아
片段不成服 옷을 짓지 못하게 하며
何故齕絲頭 도대체 왜 실을 씹어
使不就羅縠 명주를 짜지 못하게 하느냐!
制爾者貓 너희를 제압할 놈이 고양이로되
我豈不畜 내가 왜 고양이를 기르지 않는 줄 아느냐?
性本于慈 내 성품이 본래 인자해
不忍加毒 차마 악독한 짓을 할 수 없어서란다
略不德我 그런데도 내 덕성을 제대로 대하지 않아
奔突抵觸 마구 날뛰다 내 뜻을 거스르게 된다면
喩爾懲且悔 너희를 벌해 후회하게 만들 테니
疾走避我屋 빨리 내 집에서 나가라
不然放獰貓 그렇지 않으면 사나운 고양이를 풀어
一日屠爾族 하루 만에 너희 족속을 도륙 내
貓吻塗爾膏 고양이 입술에 너희 기름을 칠하게 하고,
貓腹葬爾肉 고양이 뱃속에 너희 살점을 장사지내게 할 것이다
雖欲復活 그때는 다시 살고 싶어도
命不可贖 명을 이을 수 없을 것이다
速去速去 얼른 꺼져라, 얼른 꺼져!
急急如律令 율령을 대하듯 급급히 하라
_이규보, <쥐를 저주하는 글_병서 포함[呪鼠文 幷序]> 전문


모를레라! 애오라지 어려운 자구에 설명이나 보태고 물러나겠다.
적각赤脚은 계집종, 하녀를 이른다. 그와 나란히 놓인 곤륜崑崙, 여기서는 쉬이 사내종으로 새기면 된다. 이는 곤륜노崑崙奴를 줄여 쓴 것인데 원래는 남중국해 쪽에서 수입되어 중국에 들어온 흑인종 노예를 가리킨다. 이미 4세기 중국 기록에 흑인종 노예 수입 기사가 보이는데 당, 송 기록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곤륜노들은 특히 물속에서도 눈을 깜빡이지 않고 익숙히 노동을 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載驅載馳싣다가 아니라, 단순히 동사나 형용사와 만나 2음절어를 만드는 허사다. 굳이 새길 필요가 없다. 또 다른 허사로, “自外來思또한 금방 알아먹기 힘든 쓰임이다. 여기서 에는 생각하다는 뜻이 전혀 없다. 다만 성글게 연결~종결을 표시하는 허사일 뿐이다.
命不可贖도 조금 어려운데, 여기서는 대속代贖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잇다는 뜻의 과 통용해 쓴 것이다. 이뿐이다. 까다로운 부분은 이쯤이고 나머지는 글자 그대로, 문법 그대로다. 그뿐인가. 나사못회전의 번역이 모자라 그렇지, 한문 독해가 되는 분들이라면 이 글을 읽으며 한문 운문 특유의 장단에 어느 새 몸을 실었을 것이다. 그만큼 글의 장단감도 좋다.
, 글은 재밌게 읽었다. 한데 고양이, 고양이 말이다. 하루 만에 쥐떼를 도륙 낼, 쥐 기름을 입에 묻힐, 뱃속에 쥐 살점을 장사지낼 고양이는 어디 있는가. 모를레라! 13세기 고려 시인도 실제로는 사나운 고양이를 구하지 못한 끝에 애오라지 저주의 수사를 발휘한 것일까.

고양아, 고양아, 머리를 내밀어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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眼如劈豆角 눈은 콩을 쪼개 놓은 듯
伺暗狂蹂蹈 어두운 데서 엿보다 미친 듯 짓밟는다
任爾穿我墉 멋대로 우리 집 담을 뚫을 때
滔滔皆大盜 거침없는 기세가 어느 모로 보나 대도大盜의 그것

위 시는 이규보의 <뭇짐승을 읊음[군충영群蟲詠]> 가운데 <쥐[서鼠]> 부분이다. <뭇짐승을 읊음>은 모두 여덟 수 한 편으로 이뤄진 연작시로 각각 두꺼비/개구리/쥐/달팽이/개미/거미/파리/누에 들을 형상화했다.
앞서 이규보의 작품은 13세기 고려 사회사, 문화사의 거의 모든 열쇠말을 포괄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동식물에 걸친 생물종 또한 그의 작품에 두루 나타난다.
그 가운데 “쥐”는 인민의 생산, 사람의 생활을 해치는 생물로 등장하곤 한다. 물론 이규보는 쥐 또한 생존을 위해 인간 생활의 영역 안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아래 작품은 그 좋은 예다.

人盜天生物 사람은 하늘이 낸 만물을 훔치고
爾盜人所盜 너는 사람이 훔친 것을 훔친다
均爲口腹謀 사람이나 쥐나 똑같이 먹고살자고 하는 짓
何獨於汝討 어찌 너만을 성토하겠니
_이규보, <쥐를 내치며[방서放鼠]> 전문


사람은 하늘이 낸 만물을 훔치고, 쥐는 사람이 훔친 것을 훔친단다. 그리고 사람이나 쥐나 똑같이[均爲], 먹고살자고[口腹], 이렇게 한단다[謀_plan]. 덩치가 크든 작든, 사람과의 관계가 어떻든, 이나 개나 목숨 귀하긴 마찬가지라는 주장을 편 유명한 글 <슬견설蝨犬說> 속의 속내가 여기에서도 분명하다. 그렇지만 눈앞에서 인민과 나를 괴롭히는 쥐에게, 이규보는 당장의 분노마저 가릴 수는 없었다. 그는 문인이자 관료였으니까.

고양이를 기르는 건 너희를 도륙 내겠다는 게 아냐
고양이를 보거든, 너희가 알아서 숨기라도 했으면
왜 달아나지 않고
벽과 담을 뚫으며 언제나처럼 왔다 갔다 하니!
대놓고 까부는 것도 완악한 노릇인데
심지어 지랄에 행패까지?
시끄럽게 다투며 내 잠을 방해하고
약삭빠르게도 사람이 먹을 것을 훔치는구나
고양이가 있는데도 너희가 이러는 건
실은 고양이가 재주가 없어서다
하나 비록 고양이가 제구실을 못했다 해도
너희 죄 또한 잔뜩이다
고양이는 때려 내쫓을 수 있으나
너희는 사로잡아 붙들어 매기 어려우니
쥐야, 쥐야, 너희가 그 버릇 고치지 않는다면
다시 날랜 고양이를 두어 너희의 오만방자함을 벌하겠다
畜猫非苟屠爾曺
欲爾見猫深自竄
胡爲不遁藏
穴壁穿墉來往慣
出遊已云頑
矧復狂且亂
鬪喧妨我眠
竊巧奪人饌
猫在汝敢爾
實自猫才緩
猫職雖不供
汝罪亦盈貫
猫可鞭而逐
汝難擒以絆
鼠乎鼠乎若不悛
更索猛猫懲爾慢
_이규보, <쥐가 벌인 소동[서광鼠狂]> 전문


어려운 글자, 어려운 구절 하나 없이 써 내려간 직필의 이 시(오언이나 칠언이 아닌 위와 같은 형식을 “장단구長短句”라고 한다)에는 인민과 사람의 생활과 경쟁해야 하는, 경쟁하다 인민과 사람의 생활을 해칠 수도 있는 존재에 대한 강한 반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한편, <쥐를 내치며>의 쥐와 <뭇짐승을 읊음> 및 <쥐가 벌인 소동>의 쥐가 똑같은 “생물종 쥐”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전자가 “그저 쥐”라면 후자는 “인민의 생산과 국고를 축내는 존재로 은유된 쥐”로 읽히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이규보가 쥐를 소재로 남긴 또 다른 글을 읽으며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이규보가 다룬 동물은, 쥐를 빼고라도, 두꺼비/개구리/달팽이/개미/거미/파리/누에/이/배추벌레/나비/고양이/개/소 등으로 다양하다. 고답적인 세계로 시안이 벋을 것도 없이, 일상과 현실에서 건져 올린 제재만으로도 시인의 세계는 다채롭고 풍부했다. [끝]

<경향신문> 보도를 인용한 <미디어오늘>의 보도에서 퍼 옴. 
 
사진_트위터리언 @schbard가 촬영한 <쥐벽서> 현장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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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이규보의 삶을 건성으로 훑고 나니, 몇천 편이나 되는 그의 글이 눈에 밟혀 못쓰겠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50
http://theturnofthescrew.khan.kr/51
http://theturnofthescrew.khan.kr/52
http://theturnofthescrew.khan.kr/53
http://theturnofthescrew.khan.kr/54

그를 시인이라, “문신관료라 일러 놓고는 <동명왕편>에 어찌어찌 할애하다 그만이었으니 못쓰겠다. 하여 5월 한 달은 깜냥 되는 만큼 이규보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은 그 첫 순서다.
사람들은 흔히 시를 고상한 갈래로 여긴다. 시에 쓰는 말은 고상해야 한다는 편견도 있다. 이 통념, 이 편견은 중세에는 더했다. 일상의 구체성, 생활의 실감, 당대의 감수성이 직접 드러나는 시는 고답적이지 못하므로 저 아래로 처지는 시로 보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규보는 중세인다운 고답적인 시를 쓰는 가운데서도, 일상과 삶과 당대 들이 바로 드러나는 시를 함께 썼다. 무엇보다 시에 농민, 농민의 생산 활동, 농민 덕분에 지상에 태어난 생산품 들을 자주 등장시켰다. 농민이 어떻게 수탈당하는지도 그대로 썼다. 현실 저 너머의 몽롱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가 보고 겪고 느낀 데서 나온 시, “생산물질에 눈뜬 시를 쓴 것이다. <햅쌀의 노래[신곡행新穀行]>는 그 좋은 예다.

 

한 톨 한 톨이 어찌 가벼우랴
생사와 부귀가 여기 달렸다
부처님 공경하듯 농부를 공경하느니
부처님이라도 굶주린 사람 살리기는 어렵지
기쁘다! 머리 흰 이내 몸
올해 다시 햅쌀을 보았으니
죽어도 한이 없으리
농사의 혜택이 내게도 미쳤다
一粒一粒安可輕
係人生死與富貧
我敬農夫如敬佛
佛猶難活已飢人
可喜白首翁
又見今年稻穀新
雖死無所歉
東作餘膏及此身
_이규보, <햅쌀의 노래[新穀行]> 전문


 

어려운 글자 하나, 어려운 표현 한 군데도 없는 깔끔한 이 고체시에 고답이 껴들기는 어려우리라. 佛猶難活已飢人쯤이 까다로운 구절일까. “오히려. 이에 부처로서도, 부처라고해도가 되는 것이다.
已飢人도 재밌는 글자다. 여기서의 문법 역할은 시 전체의 시간 흐름보다 앞선 시제를 표시하는 것이다. 지금 시간의 흐름 전에 이미[]” 굶주리고 있는 사람, 돌아보기 전에 벌써 뱃구레 텅 빈 사람은 부처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새겨보라. 문득, 표류한 해변에서 주린 배를 채우고 나서야 숨진 동료가 떠올라 눈물이 나더라는 <일리아드> 속 오디세우스 일행의 일화가 떠오른다. 부처가 오든 가든 빈 뱃구레는 빈 뱃구레일 뿐.
이 밖에 설명이 필요한 말이라면 동작東作쯤이 있을 텐데, “동작東作의 원뜻은 봄 농사이며, 여기서는 그저 농사로 새기면 되겠다. <서경書經>이 출처인 어휘다.

농민과 농민 생산의 고마움에 눈뜬 시인은 관리의 부정에도 크게 분노했다. 그 자신도 관리였지만 관리의 부정이 인민에 대한 수탈과 서로 손 꼭 붙잡고 다닌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인민은 거의 죽을 판이라
뼈와 살가죽만 앙상하구나
몸뚱이에 살점이 얼마나 남았다고
싹 다 긁어 가겠다는 게냐
歲儉民幾死
唯殘骨與皮
身中餘幾肉
屠割欲無遺

그대 보았겠지, 강물을 마시는 두더지도
제 배를 채우면 그치는 것을
네놈들한테 묻는다! 대체 입이 몇 개나 달렸기에
만백성의 살점을 죄다 처먹겠다는 게냐
君看飮河鼴
不過滿其腹
問汝將幾口
貪喫蒼生肉
_이규보, <군수 몇 놈이 뇌물을 받아 죄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聞郡守數人以贓被罪]>
2
, 전문


 

歲儉民幾死거의. “간신히 남은 얼마간을 뜻한다. “은 영어의 "will"에 가깝다. 해마다 흉년이 져[歲儉] 인민은 거의 죽을 판이다. 이제 몸뚱이에는 뼈와 살가죽이 얼마간 남아 있을 뿐인데 군수란 놈들은 뇌물을 받았단다. 중세 관리의 뇌물이란 백에 백 수탈로 이루게 마련이다. 수탈은 곧 인민의 살점 뜯어먹기 아닌가.
군간君看은 한시에서 불특정의 그대[]”를 부르며 분위기를 환기, 제고하는 말이다. 비슷한 표현으로 군불견君不見”, 그대 보지 못했나?” 하는 말도 있다. “불과不過는 용량, 한도, 빈도, 상태를 지나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시인은 그대 보았겠지하며 다시 한 번 분노의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강물을 마시는 두더지를 보라. 두더지도 제 배를 채우면 거기서 그칠 뿐, 뱃속 용량을 지나쳐 물을 마시는 법은 없다. 그러니 더욱 궁금타. 군수 이놈들은 다른 짐승, 다른 사람과 달리 입이 몇 개씩이나 더 달렸나? 내처, 시인은 직접 묻기로 한다. 군수 네놈들한테 한 번 물어보자[問汝], 도대체 입이 몇이나 되기에 세상 모든 인민[蒼生]의 살점을 죄다 처먹겠다[貪喫]는 것인지.

농부 공경하기를 부처 공경하듯 할 수 있는, 생산 앞에서 겸손할 줄 알았던 시인의 수탈에 대한 분노가 이러했다. 그의 겸손과 분노는 한국 문학사를 타고 흘러 나중에 김시습, 정약용 들에게서도 보이는 바가 되었다.

아참, 뱀의 발 몇 가지만 더! “將幾口은 영어의 "with"쯤의 뜻이다. 將幾口, 이번에는 거의가 아니라 이다. []

사진_<동국이상국집> 가운데 연보의 끝 및 제1권 시작 부분. 연보 작성자는 이규보의 아들 함이다. 이함은 지방직에 있느라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연보는 임종을 지키지 못했으니 평생을 두고 애통한 심정을 어찌 말로 다 나타낼 수 있으랴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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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우한 이십대를 난필과 난독과 침잠으로 가로지르며, 이규보는 제대로 된 벼슬에 더욱 욕심을 내게 된 듯하다. <동명왕편>에서 보인 것 같은 빛나는 재주가 있다고 한들, 다만 임용 대기자의 재주라면 과연 그 재주가 꽃필 수 있겠는가.

이규보는 22세에 과거에 합격한 뒤, 25세에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자전自傳을 썼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연보는 이 글쓰기를 일러 “스스로 자신의 행동거지를 서술했다(自敍己之行止)”고 했다. 여기서 행동거지란 “일상과 삶 속 자신의 몸가짐 전체”로 새기면 되겠다. 

이규보는 24세에 아버지 상을 당한 뒤 천마산에 우거하며 난독과 난필의 세월을 보내다 드디어 지나온 자신의 생을 응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시에 앞날의 생 또한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이윽고 26세에는 <동명왕편>을 완성해 나라와 시대를 향한 포부를 웅대하고 화려한 서사시로 제시했다. 그 뒤 이규보는 명망가들의 사교 모임에 껴들어 자신을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1196년 그의 나이 29세에 최충헌이 정권을 잡자 더욱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가려 한다. 그러나 삼십대에도, 이름은 최충헌 주변에 알렸을망정 자신의 뜻을 펼 자리를 잡지는 못했다.

기회는 1207년 그의 나이 40세가 되었을 때에야 찾아왔다. 이규보의 재주와 명망을 인정한 최충헌이 한림원翰林院의 임시 보직에 이규보를 배치한 것이다.

한림원은 왕명에 의한 문서 및 외교문서를 다루는 곳이다. 무신 정권의 무단 정치는 문신관료-학자관료의 씨를 말렸고 그 때문에 무신들이 정권을 잡은 뒤, 나라의 문서며 외교문서를 맡을 만한 사람이 늘 부족했다. 그러므로 이규보의 글재주는 더욱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40세에 한번 권력자들에게 알려지자 이규보의 벼슬길은 제대로 열렸다. 사직할 당시 그의 자리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1237년 고려 고종 24년, 이규보가 정식으로 사직할 때 그의 관계官階는 종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고 관직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에서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사判禮部事” “한림원사翰林院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는 여섯 가지를 겸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규보는 시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신 정권에 빌붙은 것일까?


시인의 출세

“벼슬, 벼슬이 없소/여기저기다 빌어 입에 풀칠하기는 내 뜻이 아니오(常無官常無官, 四方糊口非所欲)”

위 인용문은 이규보가 본격적인 벼슬길에 오르기 전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벼슬 없음을 한탄하며[無官嘆]>의 한 구절이다.

이규보는 관직 생활 내내 문신관료-학자관료 일에만 매달렸다. 그가 행정 문서를 정리하고, 중국․몽골 들과 외교문서를 주고받는 동안 고려의 국가로서의 체모는 상당한 격을 갖출 수 있었다. 그의 연대기는, 그의 벼슬살이가 “입에 풀칠하기” 너머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이규보는 그의 시에 농민과 농민의 생산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켰다. 농민이 어떻게 수탈당하는지도 그대로 썼다. 관료로서 민중봉기 토벌군에 종군해야 할 때도 민중에 대한 동정심을 잃지 않았다. 그는 현실 저 너머의 몽롱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내가 보고 겪고 느낀 데서 나온 실감을 시에 담았다. 그저 권력에 빌붙은 사람에게서 이런 시가 나올 수 있었을까.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의 평가가 참고가 될 듯하다.

“그는 현실정치 또는 관계에 뛰어들었으나 권력을 휘두르거나 빌붙으려는 뜻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왕성한 참여의식의 발로였다. 뒷날 그는 최씨의 대몽항쟁을 찬양하였으나 최씨들의 횡포를 감싸지는 않았다.”

“이규보는 최씨정권에 아첨하여 벼슬살이를 하였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권력의 중심부에 들지도 않았으며 축재를 하는 일 없이 평생을 군색하게 지냈다.”

_이이화, <이야기 한국사6: 무신의 칼 청자의 예술혼>에서

역사학자의 평가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는 어떤가.


비 맞으며 이랑에 엎드려 김을 매니 
시커멓고 추한 것이 사람 꼴이 아니네
높은 사람들아, 나를 업신여기지 마라
부귀호사가 나한테서 나오니까
帶雨鋤禾伏畝中
形容醜黑豈人容
王孫公子休輕侮
富貴豪奢出自儂

새 곡식은 푸르디푸른 채 아직 밭에 있는데

관리와 아전은 벌써 세금을 달라니

힘찬 밭갈이로 이루는 부국이 우리에게 달렸는데

왜 우리 살갗을 벗겨내나

新穀靑靑猶在畝

縣胥官吏已徵租 

力耕富國關吾輩

何苦相侵剝及膚

_<농부를 대신해서 읊다[代農夫吟] 2수>


마치며
나라에 정치외교 업무를 맡을 문신이 없는 때, 이규보의 글재주는 더욱 요긴하게 쓰였다. 이규보는 빼어난 시인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안으로는 행정의 수준을 높이고 밖으로는 나라의 체면을 지키는 데 꼭 필요한 인물로 살았다.
그의 글은 문집 <동국이상국집>에 갈무리되었는데, 13세기에 이규보보다 많은 글을 남긴 고려 사람은 없다. 그가 남긴 많은 글은 아름다운 문학 작품을 넘어 한 시대의 생활과 역사를 보여준다. 거기에는 13세기 고려의 인물, 풍속, 술, 차, 김치, 가축, 채소, 과일 이야기가 남아 있는가 하면, 주몽이 나라를 세운 이야기가 있다. 농민의 아픔이 있는가 하면, 고려대장경과 금속활자에 대한 소중한 기록이 남아 있다.
젊은 날에 문학에 눈을 떠, 한 시대를 문학과 함께 하고, 거기 제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담았던 시인. 이규보는 그런 시인이었다. 아울러 문장과 공부가 경세제민에 실제로 소용됨을 보여준 한국 역사상 거의 첫 문인관료였다. [연재 끝]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 속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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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동명왕편>에는 고구려 사람 스스로가 남긴 고구려 건국 이야기는 물론, 지금은 볼 길이 없는 <구삼국사>와 같은 고대사의 흔적까지 살아 있다. “배움이 없는 남녀 백성들”이 “제법 그럴싸하게 주고받”는 신비롭고 기이한 이야기를 접한 데다 <구삼국사> <위서> <통전>과 같은 국내외 역사서까지 섭렵한 이규보는 자연스레 신화․전설․민담․역사를 아우를 길을 찾게 되었을 것이다. 그 서문에서 보았듯 이규보는 이제 동명왕-주몽 이야기에 깃든 상상 및 상징 세계의 의의를 적극적으로 재해석하게 되었고 그 재해석의 결과, 공식 역사 기록에 기댄 연대기가 아닌 문학-서사시를 선택하게 되었다. 시인다운 선택이었다.

 

그 시가 담은 것
<동명왕편>은 5언시 282구에 산문으로 된 해설이 덧붙은 한문 서사시다. 주몽의 출생-시련-투쟁-승리는 전형적인 “영웅의 일생”을 그리고 있으며 다채로운 세부는 빠른 속도 위에서 역동적으로 전개된다. 하백과 해모수가 다투는 장면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 장면은 하늘에서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내려온 해모수가 하백의 딸 유화를 유혹해 야합한 뒤에, 하백에게 청혼의 예를 갖추면서 시작된다.

君是上帝胤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神變請可試 신통한 변화를 시험해도 되겠지
漣漪碧波中 굼실대는 푸른 물결 속에서
河伯化作鯉 하백이 잉어로 몸을 바꾸니
王尋變爲獺 왕(해모수)는 수달로 변해
立捕不待跬 몇 번 물을 짓치지 않고도 잡아챈다
又復生兩翼 하백이 다시 두 날개를 돋아 내
翩然化爲雉 꿩으로 몸을 바꾸니
王又化神鷹 왕은 신통한 매로 변해
博擊何大鷙 공격하는데 어찌 그리 날쌘지
彼爲鹿而走 저쪽이 사슴이 되어 달아나면
我爲豺而趡 이쪽은 승냥이가 되어 쫓는다


<동명왕편>의 시작과 끝 내내, 시인 이규보는 위에서 본 것과 같은 속도감과 역동성을 잃지 않는다. 해모수의 강림, 유화의 시련, 주몽의 탄생과 시련, 부여 탈출, 고구려 건국, 주몽의 승천에 이르는 모든 장면에서 긴장과 밀도가 떨어지는 법이 없다. 시의 호흡을 잠깐 가다듬는 산문 해설 부분의 재미와 이채도 마찬가지다. 아래 산문 해설 부분은 그 대표적인 예다.
 

“주몽이 이별하는 자리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자 주몽의 어머니가 ‘어미 생각은 하지 마라’ 하고는 오곡의 종자를 싸서 보내주었다. 그런데 주몽이 생이별이 가슴에 사무치는지라 보리 종자는 잊어버리게 되었다.
주몽이 큰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들었다. 주몽이 ‘틀림없이 신모神母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주신 게지!’ 하고는 활을 쏘아 한 번에 비둘기 두 쌍을 잡았고, 목구멍을 벌려 보리 종자를 꺼낸 뒤 비둘기에게 물을 뿜자 비둘기가 되살아 날아갔다고 한다(朱蒙臨別. 不忍暌違. 其母曰. 汝勿以一母爲念. 乃裏五穀種以送之. 朱蒙自切生別之心. 忘其麥子. 朱蒙息大樹之下. 有雙鳩來集. 朱蒙曰. 應是神母使送麥子. 乃引弓射之. 一矢俱擧. 開喉得麥子. 以水嘳鳩. 更蘇而飛法云云).”


시인이 꿈꾼 나라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규보는 그때의 고려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던 신비롭고 기이한 일과,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역사책까지 두루 참고해 신화, 전설, 민담, 역사를 아우르는 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를 써 냈다.
해모수, 하백이 하늘과 물의 공간을 제시했다면
1)아란불·해부루·금와·대소 등 부여계 인물들은 지상의 현실적인 정세와 정치 갈등을 압축해 드러낸다. 그런가 하면
2)임신한 채 가부장 하백으로부터 쫓겨난 유화를 쇠그물로 사로잡아 금와에게 바친 강력부추,
3)주몽의 첫 협력자 오이·마리·협보,
4)주몽이 부여를 탈출한 뒤 만난 협력자인 재사·무골·묵거 들의 존재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훨씬 뛰어넘는 내용과 세부의 바탕이 되고 있다. 또한
5)주몽과 비류왕 송양의 대결 장면은 새로이 일어나는 나라가 선주민 세력과 싸워 이기기 위해 어떤 지혜(사실 간지奸智에 가까운)를 발휘했는지 또 얼마나 원색적인 야성(사실 잔인함에 가까운)을 발휘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렇게 해서 고려 문학사뿐 아니라, 이제까지의 한국 문학사를 통틀어서도 가장 빛나는 서사시가 이규보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다.
중국 기록에도, 또 <광개토왕릉비문> 같은 자료에도 동명왕-주몽의 이야기는 나오지만 <동명왕편>만큼 세부가 잘 살아 있고, 게다가 전체의 짜임새가 뛰어난 동명왕-주몽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자신도 불우하고 나라도 엉망인 때 이규보는 왜 하필 주몽 이야기를 썼을까. 이미 살펴본 <동명왕편>의 서문에 그 답이 있다.

“동명왕의 사적은 변화무쌍한 신기한 일로 뭇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건국의 신성한 자취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서술해 두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대체 무엇을 보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시로써 이것을 기록하여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52 참조

<동명왕편>은 건국의 사적을 노래한 서사시다. 여기에는 이제 막 새 나라를 연 사람들의 씩씩함과 자신감이 넘친다. 큰일에 덤벼든 등장인물들의 야성이 살아 있다. 새로이 나라를 연 사람들의 이상이 미래의 후손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씨 또한 잘 살아 있다.
<동명왕편>을 쓸 당시, 스물여섯 살 청년 이규보는 과거 3수생 출신 임용 대기자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명왕-주몽의 자료를 수집하고 그 사적을 시로 노래하는 동안, 마음만큼은 이미 몇백 년 전 상상계의 호한한 데에 가 있었을 것이다.
그 마음을 자신의 시대에 미루어 정말 멋지고 제대로 된 나라를 이뤄 보고자 한 속내가 오롯이 <동명왕편>에 맺힌 게 아닐까. 동시에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알게” 할 만한 작품을 이룸으로써 자신의 문학 수업이 경세에 가 닿을 수 있음을 나름대로 증명하려 함이 아니었을까. [계속]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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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 년 세월을 건너온 이야기

고구려 건국 시조 동명왕
-주몽이 1)부여 계통으로[出自北夫餘], 2)하늘나라[天帝]와 물나라[河伯]를 아우른 혈통이며, 3)알을 깨고 이 세상에 나와[剖卵降世], 4)4)홀본(또는 졸본)에 도읍해 나라를 세웠다[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는 이야기는, 앞서 <광개토왕릉비문>에서 본 대로 고구려인 자신이 그린 건국 시조의 영상이다. 그리고 그 영상은, 광개토왕릉비 건립 시점을 기준으로, 적어도 7, 8백 년을 건너 고려로 이어졌다.
이는 고려 때 편찬된 정사 <삼국사기>에서, <삼국사기>를 깊이 의식한 <삼국유사>에서 본 대로다. <삼국사기>는 정사 체제인 본기本紀에 위 1)~4)의 줄거리를 남겼다. <삼국사기>는 여기에 <후한서後漢書> <위서魏書> 들에 실린 고구려 건국 기록까지 아울렀다.
한편 <삼국유사>는 북부여-동부여-고구려 순서로 기록의 편차를 잡고 동명왕-주몽의 고구려 건국을 기록했다. 여기에 위 1)~4)의 줄거리가 온전히 남아 있음은 물론이다. 나아가 <삼국유사>주몽이 단군의 아들이라는 인식까지 담았다.

두세 번 반복해 읽으며 그 근원의 취지에 들어가니
서기 1193년 고려 명종 23,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이규보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역사서인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읽게 된다. 광개토왕릉비는 조금 과장해 말하면 20세기에 재발견된 자료로, 이규보 당시에는 고려와 중국을 통틀어 그 존재가 잊혀진 상태였다. 이규보는 일단 <구삼국사>를 통해 동명왕-주몽을 다시 보게 된다. 한 번 다시 보게 되자 그때까지 고려 민간에 전승되어온 동명왕-주몽 이야기가 심상히 보이지 않았다. 나아가 <삼국사기>가 생략한 세부가 아까워 견딜 수 없는 지경이 된다.
<
동명왕편>의 서문을 통해 <동명왕편> 창작의 막전막후를 살펴보자. 이하는 서문의 전문이다.

세상에서는 동명왕의 신비롭고 기이한 일에 대해 많이들 이야기한다. 배움이 없는 남녀 백성들까지도 그 일을 자못 그럴싸하게 주고받는다. 나는 일찍이 그 이야기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스승 공자께서는 사람을 현혹하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괴상한 일[怪力亂神]은 입에 담지 않으셨다. 동명왕의 일이 참으로 황당하고 기괴하니 우리처럼 공부하는 사람들이 말할 거리가 아니다.’
그 뒤에 <위서><통전>을 읽어보니 거기도 동명왕 관련 기록이 실려 있었다. 그렇지만 성글어 자세하지는 않았다. 이는 자국의 역사는 자세히 쓰고 외국의 역사는 생략해서 쓰고자한 속내가 아닐까.
지난 계축년 4<구삼국사>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읽어보니, 그 신비롭고 이상한 자취는 세상에서 오가는 말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을 수가 없어 기괴한 이야기나 요술 이야기쯤으로 여겼는데, 두세 번 반복해 읽으며 점차 그 근원의 취지에 들어가니 그것은 요술이 아니라 성스러운 일이었고 기괴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성한 일이었다. 더구나 한 나라의 역사란 있는 그대로 기록해 남기는 문서인데 어찌 망령된 것을 전하겠는가?
김부식 공이 나라의 역사를 다시 편찬할 때, 동명왕 관련 기록을 많이 생략했다. 이는 한 나라의 역사란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므로 지나치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이지 않는 편이 낫다고 판단해서 생략한 것 아닐까.
당나라의 <현종본기><양귀비전>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방사(方士,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간 일은 없다. 그런데 시인 백낙천만은 그 사적이 없어질까 걱정해 노래로 엮어 기록으로 남겼다(양귀비와 당 현종의 이야기를 읊은 백낙천의 서사시 <장한가長恨歌>를 가리킴). 저 일이야말로 정말 황당하고 기괴한 일인데도 시로 읊어 후세 사람들에게 보였는데, 하물며 동명왕의 사적은 변화무쌍한 신기한 일로 뭇사람의 눈을 현혹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건국의 신성한 자취한 것이다. 그러니 이런 일을 서술해 두지 않으면 우리 후손들은 대체 무엇을 보란 말인가.
그런 까닭에 시로써 이것을 기록하여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나라임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 雖愚夫騃婦, 亦頗能說其事, 僕嘗聞之, 笑曰. 先師仲尼, 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奇詭之事, 非吾曺所說. 及讀魏書通典, 亦載其事. 然略而未詳. 豈詳內略外之意耶. 越癸丑四月, 得舊三國史, 見東明王本紀. 其神異之迹, 踰世之所說者. 然亦初不能信之, 意以爲鬼幻. 及三復耽味, 漸涉其源, 非幻也, 乃聖也. 非鬼也, 乃神也. 况國史直筆之書, 豈妄傳之哉. 金公富軾重撰國史, 頗略其事. 意者公以爲國史矯世之書, 不可以大異之事爲示於後世而略之耶. 按唐玄宗本紀楊貴妃傳, 並無方士升天入地之事. 唯詩人白樂天恐其事淪沒, 作歌以志之. 彼實荒淫奇誕之事, 猶且詠之, 以示于後. 矧東明之事, 非以變化神異眩惑衆目, 乃實創國之神迹. 則此而不述, 後將何觀. 是用作詩以記之, 欲使夫天下知我國本聖人之都耳).”[계속]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 속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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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왕의 17세손

하늘나라[天帝]와 물나라[河伯]를 아우른 혈통으로, 알에서 이 세상에 나와[剖卵降世], 나라를 세우고, 황룡의 목덜미를 밟고 승천한 고구려 시조 추모왕, 곧 동명왕. <광개토왕릉비문>은 소략한 기록일망정 동명왕과 광개토왕을 이렇게 연결하고 있다.

 


유명을 이어받은 태자 유류왕은 도로써 나라를 잘 다스렸고 대주류왕은 정권을 이어나갔다. [추모왕]17세손에 이르러, [17세손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 18세에 왕위에 올라 칭호를 영락대왕이라고 하였다. 그 은택은 하늘에 미치고 군사적 위력은 사해에 떨쳤으며 □□을 제거하니(2자 인멸. 판독 불가) 사람들은 저마다 생업에서 편안했으며 나라와 인민은 넉넉했고 오곡은 풍성했다. 하늘이 [우리 인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아 39세에 돌아가시니 갑인년 929일 을유일에 산릉으로 운구했다. 이에 비를 세우고 공적을 기록해 후세에 보이고자 한다(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儒留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二九登祚, 號爲永樂大王. 恩澤洽于皇天, 武威振被四海, 掃除□□(2자 인멸. 판독 불가), 庶寧其業, 國富民殷, 五穀豊熟. 皇天不弔, 卅有九, 晏駕棄國, 以甲寅年九月卄九日乙酉, 遷就山陵. 於是立碑銘記勳績, 以是後世焉).”

이렇듯 능비문은 광개토왕의 위업을, 저 멀리 16대 위 시조인 동명왕의 위대한 탄강 및 눈부신 창업과 연결한다. 나아가 제2대 유류왕[유리명왕]과 제3대 대주류왕[대무신왕, 또는 대해주류왕]의 정권 계승과 연결하고 있는 것이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
이왕 말이 나왔으니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란 왕호를 지나칠 수가 없다. 한번 들여다보자.

1)국강상國岡上_능묘가 위치한 곳의 당시 지명일 것이다.
광개토왕 이전에 이미 능의 소재지로 왕호를 표시한 예가 있었다. 고구려 제16대왕인 고국원왕故國原王고국지원故國之原에 묻혔다.
2)광개토경廣開土境_“국토의 영역을 크게 개척하시다라는 말이다.
이는 재위중의 대표적인 업적을 표시한 것이다.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왕은 생전에 64, 1,400을 정복했다고 한다.
3)평안호태平安好太_이는 앞 구에 이어 후세의 평가를 깃들인 휘호徽號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서 평안은 내치가 훌륭했음을 드러내며 이미 나온 이도흥치以道興治란 표현을 떠오르게 하는 수사이기도 하다. “호태는 미칭 또는 존칭으로 보면 될 것이다.

한편 경주에서 출토되었으며 장수왕 3년쯤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호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王이라는 이칭이 보이고, 5세기 고구려 귀족의 무덤에서 나온 <모두루묘지牟豆婁墓誌>에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岡上廣開土地好太聖王이라는 이칭이 보인다. 능비문에 보이는 왕호나 두 유물에 보이는 이칭 모두 국강상에 잠든, 나라의 영역을 크게 개척한, 평안한 치세를 이룬, 대단한 군주라는 표현과 뜻을 담고 있음은 마찬가지다.



<
삼국사기><삼국유사> 속 주몽-동명왕
지금까지 <광개토왕릉비문>에 실린 동명왕 기록에 대해 장황할 정도로 살펴보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동명왕편>12세기까지 고려 사람들에게 전해진, 고구려 사람들이 남긴 고구려 건국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동명왕편>이 탈고되기 이전에 편찬된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동명왕편> 탈고된 뒤에 완성된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주몽-동명왕 이야기는 실려 있다. 그리고 두 책 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실려 있는 주몽-동명왕 내력의 줄거리만큼은 공유한다. 하나 정사正史 체제의 본기와 연표에 자리한 <삼국사기> 속 주몽-동명왕 이야기는, 이규보가 보기에는 생략된 부분이 많았다. 한편 <삼국유사>왕력편王曆篇에서 별다른 설명 없이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했으며, 그때까지 전해지던 여러 부족국가 기록까지 망라한 기이편紀異篇에다 <삼국사기>의 그것보다 축약된 주몽-동명왕 기록을 싣고 있다. 물론 두 책 다 <광개토왕릉비문>의 주몽-동명왕의 이야기의 줄거리를 공유하는 만큼, 딱 그만큼 범위에서, 세부가 부족한 이야기소를 공유한다. 예컨대

1)이야기 시작의 무대는 부여.
2)하백의 딸 유화가 천제의 아들을 자처한 해모수와 정을 통해 주몽을 임신.
3)딸의 야합에 화가 난 부모가 유화를 버림.
4)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유화를 부여의 왕 금와가 보호.
5)유화가 알을 낳자 개, 돼지에게 버렸으나 뭇 짐승들이 오히려 알을 보호.
6)알에서 주몽 탄생. 나면서부터 활쏘기에 빼어남.
7)금와가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자 나쁜 말은 잘 먹여 살지게 해 금와에게 제공하고, 좋은 말은 덜 먹여 마르게 한 뒤 주몽이 가짐.
8)금와의 일곱 아들이 주몽을 시기하자 유화의 권유로 오이 등 일행과 함께 부여 탈출.
9)기병대에 쫓기는 판에 강물에 가로막히자 자신을 천제의 아들, 하백의 손자라 하면 강물에 호소, 이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만들어 주어 도강.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만든 다리는 곧 사라져 기병대는 도강할 수 없었음.
10)도강 뒤 졸본에 도읍하고 건국.

여기까지가 <삼국사기><삼국유사>가 공유하는 이야기소다. 그러나

1)주몽이 도강한 뒤 세 사람의 동지를 더 얻음.
2)불류국왕 송양과 졸본을 놓고 입씨름과 활재주로 다툰 끝에 주몽이 송양의 항복을 받음.

등의 이야기소는 <삼국유사>에는 없다. <삼국사기>는 이 뒤에도,

1)동왕명 2년 이후 점차 고구려가 나라의 체모를 갖춰 가는 과정,
2)주변 정복 전쟁, 금와가 유화를 태후의 예로 장사지낸 사실,
3) 동명왕의 처와 아들(나중에 제2대 유리왕에 오른)이 고구려로 도망해온 사실,
4)끝으로 동명왕 19년 가을 9월에 동명왕이 세상을 떠난 데까지,

를 간략하나마 정사답게 기록했다.
[계속]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70105429875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 속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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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이 되면, 새봄에 활짝 핀 꽃을 보면 떠오르는 시인이 있다. 백운거사白雲居士라는 호로 유명한 이규보(李圭報, 11681241)가 바로 그 사람이다.이규보는 1168년 고려 의종 22년에 태어나, 스물두 살에 처음 사마시에 합격했고, 서른두 살 무렵 본격적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1236년 고려 고종 23년 조정에 사직을 애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1237년 고려 고종 24년에야 사직할 수 있었다

 

사직이 받아들여진 당시, 이규보의 관계官階는 종2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이르렀고 관직은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에서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감수국사監修國史” “판예부사判禮部事” “한림원사翰林院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는 여섯 가지를 겸하고 있었다. 여섯 벼슬 모두 외교문서를 포함한 나라의 중요한 문서를 잘 다룰 능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임금과 조정의 자문 상대가 될 만큼 뛰어난 학식과 경험을 갖춘 인물이어야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이토록 화려한 이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에서 나왔다. 무단 일변도의 통치로는 나라의 체모를 유지할 수 없음을 깨달은 최씨 정권은 내정과 외교에 걸쳐 제대로 된 문서를 꾸릴 수 있는 인력이 필요했고, 글을 가지고야 나라의 체모를 제대로 세울 수 있다는 점을 아프도록 새기고 있었던 시인은 이미 가슴속에 난만爛漫한 자신의 글을 어떻게든 천하에 피워내고 싶었다.

무신시대
1170년 정중부가 주도한 무신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규보는 겨우 두 살이었다.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간, 고려의 정권은 무신의 손아귀에 놓인다. 100년간을 무신시대라고 하는데, 이규보는 일흔넷에 죽을 때까지 꼬박 무신시대를 살다가 간 셈이다.
무신시대는 세 단계로 나뉜다. 첫 단계 26년간은 정중부, 이의방, 경대승, 이의민 들이 차례로 권력을 잡았다. 이들은 사치 풍조에 물든 임금 및 문신의 잔치나 들놀이 따위에 호위 업무로 불려 다닐 뿐,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무신의 난은 그 불만이 쌓인 끝에 터진 정변이지만 난을 일으킨 자들에게는 나라의 병폐를 일소하려는 이상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정변으로 권력을 쥔 무신 대부분은 깡패나 다름없었다. 다만 임금과 문신의 호위를 서며 익히 보고 들은 사치와 향략에는 일찌감치, 확실하게 눈을 떴다.
이들 가운데 이의민, 두경승 같은 자들은 조정의 집무실에 앉아서 누구 주먹이 더 센가를 겨루기까지 했다. 이들은 집무실 기둥을 치고 바람벽을 부수며 완력을 겨루었다. 특히 이의민 같은 자는 임금 자리에서 물러난 고려 의종의 등골뼈를 제 손으로 부러뜨린 뒤 연못에 집어던질 정도로 잔인했다.
무신시대의 두 번째 단계는 1196년 최충헌이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이때 이규보는 29). 최충헌이 일으킨 최씨 정권은 62년간 정권을 독차지했다. 마지막 세 번째 단계 12년간은 최씨 정권의 잔당이 버티던 기간이다.
무신시대는 그야말로 어지러운 세상, “난세亂世였다. 무식한 자들이 설치면서 나라의 행정 능력은 땅에 떨어졌다. 정권을 독차지한 세력이 탐욕을 부린 까닭에 백성과 노비와 천민은 이전보다 더한 세금과 부역에 시달려야 했다. 이 때문에 정권에 맞선 문신, 스님, 백성, 그리고 노비를 비롯한 천민이 봉기는 무신시대 100년간 전국에서 잇따랐다. 1231년에는 몽골까지 쳐들어왔다. 몽골의 침입은 1259년 고려가 항복할 때까지 여섯 차례나 이어지며 고려 인민들을 도탄에 몰아넣었다. 나라의 모든 것이 피폐한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사학에서 공부하다
이규보의 아버지 이윤수는 황려현(오늘날의 여주)의 향리 세력 출신으로 추정된다. 이윤수는 낮으나마 개성에서 관직에 있었고, 고려의 과거 제도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사학私學, 곧 일종의 사립학교에서 과거를 준비하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세상을 살았다. 그러니 아들에게도 일찌감치 한문과 유학을 배우게 했을 것이다. 과연 이규보는 일찍부터 공부에 재주를 나타냈으니 열한 살 에는 남의 시에 즉흥시로 화답하는 재주를 보일 정도가 되었다. 열네 살에는 고려의 유명한 학자 최충(崔沖, 984~1068)이 세운 사학에 나가 공부를 하기도 했다.
최충은 학문 진흥과 사학 발전에 큰 공을 세워 해동공자로 칭송받은 고려의 학자다. 그가 세운 유명한 사학이 9재학당九齋學堂인데, 이규보는 9재학당 가운데 성명재誠明齋에서 수학했다. 그러나 과거와는 금세 인연이 닿지 않았다. 이규보는 열여섯 살 이후 세 번이나 과거에 도전했지만 번번이 낙방하고 만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벌써 이규보는 시험공부보다는 문학의 꽃인 시에 푹 빠져 있었다. 시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술에도 빠져 있었다. 그러다 스무 살도 흘려보내고,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비로소 과거에 합격한다.


마음은 다른 곳에
과거에 합격했다지만 벼슬길이 바로 나지는 않았다. 삼십대에 제대로 관직에 나서기 전까지, 이규보는 고민이 많은 무관無冠의 젊은이요 임용 대기자일 뿐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간 스물넷에는 개경의 천마산에 들어가 시를 쓰며, 방황하며, <장자莊子>의 세계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저 하늘의 흰 구름처럼 유유자적하길 바란 뜻이 담뿍 담긴 백운거사라는 호는 이때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시기는 방황의 시기만은 아니었다. 새로운 사상을 탐색하고 겨레의 역사에 빠져든 시기이기도 하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에 쓴 고구려 건국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가 그 증거다.
동명왕이란 고구려를 연 주몽이다. 이규보는 그때의 고려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던 신비롭고 기이한 일과, <구삼국사舊三國史> 등 지금은 전해오지 않는 역사책까지 두루 참고해 신화, 전설, 민담, 역사를 아우르는 한 편의 웅장한 서사시를 이룬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중국 역사에도, 무엇보다 <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 같은 자료에도 주몽의 이야기는 나온다. 하지만 <동명왕편>만큼 내용과 세부가 풍부하고 짜임새 있는 주몽 이야기는 없다.

그 비문에 나오는 이야기
<광개토왕릉비문>은 좋은 비교지가 될 것이다. 서기 414년 고구려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왕의 묘역과 수묘인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세운 광개토왕릉비의 비문에는 고구려의 기원과 주몽(비문에서는 추모왕鄒牟王”)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다. 건국의 위대함에 광개토왕의 위대함을 잇댄 <광개토왕릉비문>의 주몽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그리고 다음이 전부다.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옛적 시조이신 추모왕이 나라를 세웠는데

出自北夫餘
북부여에서 나왔으며

天帝之子
, 母河伯女郎
천제의 아들이었고, 그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이었다.

剖卵降世
알을 깨고 세상에 나왔는데

生而有聖
□□□□□□
태어나면서부터 성스러운 ...이 있었다(5자 인멸. 판독 불가)

命駕巡幸南下, 路由夫餘奄利大水
거둥을 준비해 남쪽으로 가다가 길이 부여 땅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

王臨津言曰
, 我是皇天之子, 母河伯女郎鄒牟王, 爲我連葭浮龜
왕이 나루에서 말했다.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하백의 따님인 추모왕이다. 나늘 위해 갈대를 잇고 거북을 띄우라!”

應聲卽爲連葭浮龜
말을 마치자마자 곧 갈대가 이어지고 거북떼가 떠올랐다.

然後造渡
,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 而建都焉
그런 다음 물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쪽에 자리한 산에 성을 쌓고 거기에 도읍을 세웠다.

不樂世位
, 因遣黃龍來下迎王
왕위에 싫증을 내자, 황룡이 내려와 왕을 맞이하였다.

王於忽本東岡
, 履龍頁昇天
왕은 홀본의 동쪽 언덕에서 황룡의 목덜미를 밟고 서서 하늘로 올라갔다.

[계속]


*사진 출처
http://vertciel.blog.me/70105429875

친구 솔밧이 자신이 촬영한 꽃 영상을 빌려주었다. <새봄에 생각나는 시인 이규보>에 딸린 글에 오르는 꽃 그림은 모두 솔밧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솔밧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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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조선과 일본 사이에 강화도수호조약이 체결되면서 두 나라 사이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뒤 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조선이 일본에서 주로 들여온 상품은 면직물, 등유, 술이었다. 조선은 그 대가로 귀하디귀한 쌀과 콩을 일본에 내주었다.

면직물. 유럽의 대형 방직공장에서 생산된 값싼 면직물이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은 그것을 많은 이익을 남기고 조선에 되팔았다. 일본은 생산 없는 중개만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등유. 말그대로 “등燈” 밝히는 데 쓰는 “기름油”이다. 그때까지 조선 사람들은 피마자기름이나 쇠기름 따위로 등불을 켜 어둠을 밝혔다. 초도 있었지만 그때까지 초란 벌통 찌꺼기인 밀납으로 만든 밀납초뿐이었다. 이는 왕실이나 문벌 높은 양반님네나 쓰는 귀한 조명 재료일 뿐 서민대중은 죽기 전까지 밀납초를 밝힐 일이 없었다. 더구나 피마자기름이든 쇠기름이든 순도가 높지 않아 조도가 별로였다. 이런 시절에 일본은 순도가 높고 품질이 균일한 미국산 등유를 소포장한 뒤, 서양식 남포(램프)와 함께 조선에 되팔았다. 마찬가지로 생산 없는 중개였다.

술. 경제사가들이 “미면교환체제米綿交換體制”, 곧 “식량 내주고 면직물 들여오는 체제”라는 이름을 달아 설명하는 이 시기, 일본이 아직 변변한 대형방직공장도 정유시설도 갖추지 못한 이때, 그나마 조선에 수출한 “일본산”으로서 가장 많이 팔아먹은 것이 술이었다.

술은 낱병짜리 사케로도 들어오고, 주정으로도 들어왔다. 그중 많이 들어왔던 사케(일본식 청주)의 한 브랜드인 “정종正宗”은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 사이에서 “정종” 곧 “사케” 그 자체로 혼동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들어와 유통되었다. 그렇다면 정말 조선은 술이 없어서 사 들였을까?

오랫동안 쌀농사를 지어왔고 오랫동안 발효식품을 먹어온 땅에 술이 없었을 리 없다. 곡물을 발효시켜 쉬이 만들어 얼른 마시는 탁주(막걸리), 탁주를 더욱 곱게 걸러 맑게 해 마시는 청주, 생산 관리를 보다 엄격해 제조한 고급 청주인 법주, 발효주를 증류한 술인 소주 들이 선사시대부터 이 땅 사람들의 삶과 함께였다. 정말이냐고? 문헌을 열면 탁주와 청주와 소주에서 분화해 독립한 어마어마한 종류의 술이 쏟아져 내린다.

황금주, 백자주, 송주, 예주, 죽엽주, 파파주, 백주, 방문주, 춘주, 천금주, 녹파주, 백하주, 삼해주, 연엽주, 소국주, 약산춘주, 경면녹파주, 벽향주, 부의주, 갑고주, 하향주, 이화주, 청감주, 감주, 하엽주, 추모주, 죽통주, 두강주, 도화주, 지주, 포도주, 백자주, 호도주, 와송주, 백화주, 구기주, 오가피주, 감국주, 석창포주, 소자주, 지약주, 감국주, 구기주, 복령주 등등을 마주하고 보면, 이름 풀이를 따라 그 제조법과 재료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곤드레만드레의 너머로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이름 말고도 문헌 한 쪽만 뒤지면 얼마든지 별별 술이 다 튀어 나온다. 지방마다, 내력 있는 집집마다 가양주의 전통도 있었으니 문헌이 놓친 술도 수두룩할 것이다. 그러나 서민의 정성, 집안의 전통만으로는 대량 유통에 값하는 “균일한 주정”과 “식품의 품질 유지”에 눈뜬 일본산 술의 공세를 당할 길이 없었다.

이러는 사이 조선의 술은 하나둘 사라져갔다. 게다가 제국주의일본은 주세법을 통해 가정에서 술 빚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36년 동안 중앙의 통제에 있던 조선의 술은 진화의 기회는 잃었으며, 얻은 것이라기보다 뒤집어쓴 것이 일본식 청주 제조법과 공업화된 소주 생산법뿐이었다. 해방 뒤에도 한국 정부는 일본식 주세법을 이어받으며 한국 술이 진화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미면교환 시대며 천황 시대며 다이쇼데모크라시며 군국주의 시대를 관통하는 동안, 일본에서는 훗날 세계 최고의 위스키 브렌드가 되는 산토리위스키가 쑥쑥 자랐다. 산토리위스키의 창업자 도리이 신지로는 1899년 위스키 블렌딩을 시작해, 조선에선 독립만세 소리가 드높던 기미년, 1919년에 시제품격의 위스키를 내놓는다. 그리고 1924년 교토 교외 야마자키에 일본 역사상 최초의 위스키 증류소인 야마자키 증류소를 준공해 본격적으로 위스키 생산에 들어갔다. 산토리위스키는 패전 뒤에도 위스키 블렌딩 전통을 이어갔고 이윽고 1980년대를 거치면서 산토리위스키의 삼총사인 야마자키, 하쿠슈, 히비키는 영국 위스키 팬들을 필두로 한 세계 위스키 팬들의 찬사를 받는 명주로 당당히 이름을 드날리고 있다.

나도 산토리위스키의 팬이다. 미면교환 시대를 곱씹으면서도, 교동법주와 안동소주와 영광소주와 진도홍주가 아까워 죽을 지경이면서도 산토리위스키의 팬이다. 엄마 손맛과 집안 내력만으로 안 될 그 무엇을 곱씹을 때, 산토리위스키에 더욱 손이 간다. [끝]


*다이쇼데모크라시_1911년 ~ 1925년 사이 일본에서 사상통제가 얼마간 풀린 때를 이르는 말. 당시의 연호가 "다이쇼大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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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탁류>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들로 유명한 작가 채만식(蔡萬植, 1902~1950).

채만식 글을 읽을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사람 웃을 줄 알았구나. 웃을 줄 아니까 이만한 글을 썼구나.”

사진은 1923년 채만식이 와세대 대학교 축구부원으로 출전해 우승한 뒤 찍은 것입니다. 가슴에 붙은 “W”, 와세다 대학교의 표지와 곁에 놓인 우승 기념배가 스물한 살 젊은이와 썩 잘 어울립니다. 다음 사진은 20대에 찍은 듯한 사진입니다. 여기서도 환히 웃고 있죠. 그 다음 세 번째 사진은 1936년 서른네 살 때 찍은 사진입니다. 역시 웃고 있어요.

채만식은 1902년에 태어나 1950610일에 돌아갔습니다. 동족상잔을 이승에서 목도하지 않았음은 다행이랄까... 살다가 간 세월이 참으로 어렵고 불행한 때에 걸쳐 있습니다.
일제치하를 내세워 허턱 어려웠다, 불행했다,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제국주의일본의 국군주의와 파시즘은 반인륜범죄, 전쟁, 일상의 전시(戰時)화에 보통 사람을 조직적으로 동원했습니다. 말과 글로 먹고사는 지식인들은 그 뻔한 속내를 알면서도 군국주의와 파시즘에 무릎을 꿇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그야말로 욱일승천旭日昇天의 기세를 떨치던 제국주의일본은 1940330일 제국주의일본의 괴뢰 정권인 남경국민정부를 세우기도 하지요. 남경국민정부의 주석은 손문의 핵심 보좌역이었으며, 투항 직전까지 국민당 안에서 항일을 부르짖으며 장개석蔣介石과 호각을 이루던 왕정위汪精衛였습니다. 그리고 그해 7월 조선 소설가 박태원은 왕정위의 비겁한 투항과 남경국민정부 수립을 찬양하는 소설 <아시아의 여명>을 발표합니다. 이 박태원이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천변풍경> <갑오농민전쟁>을 쓴 바로 그 박태원입니다.

제국주의일본에 대한 부역이 겨레와 인류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짓이며, 반인륜범죄의 종범이 되는 짓이며, 제 자신의 인간성 파멸에 이르는 짓임을 몰랐겠어요! 알고도 무릎 꿇는 마음속은 무엇으로 가득했을까요. “아 이제 제국주의 세상이구나하는 체념, “군국주의와 파시즘을 이길 길이 있겠나하는 자포자기,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하는 공포 등등이 아니었을까요.

양심에는 왜 거리낌이 없었겠어요. 겨레 앞에, 인류 앞에 부끄러운 짓을 저지르는 동안,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부끄러움에 지피고 말 것입니다. 거기에 어쩔 수 없잖아하는 자기합리화를 시작하면서는 분열과 착종의 상태에 빠져들 테지요. 그런 뒤의 선택이란 완전히 군국주의와 파시즘의 괴물이 되든지, 절망 속에서 공동체-역사-시대와 절연한 투명인간이 되든지 둘 중 하나겠지요. 이것이야말로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검은 얼굴 하얀 가면” “자기 땅에서 추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신채호, 이회영, 김창숙, 박헌영의 예를 드시겠습니까. 저는... 이들의 투쟁과 절의에 진심으로 경의를 표합니다만, 표해 마지않습니다만, 만 명 가운데 한 사람이 어려운 경우가 이들이라 여깁니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채만식 또한
1940년 중반 이후 군국주의와 파시즘에 무릎을 꿇고는 제국주의일본의 욱일승천을 찬양하게 됩니다. <탁류>의 리얼리즘, <인형의 집을 나와서>의 여성주의, <감독의 안해>의 속 깊은 시선(여성과 노동을 함께 아우른), <태평천하> <치숙> <레디메이드 인생>의 묵직한 풍자, <염마> <제향날>의 개성 들이 제국주의 부역과 함께라니요. 여기까지 몰린 사람의 상태를 일러 낙백落魄이라 하지 않으면 달리 무슨 말을 가져다 붙일 수 있을까요.
1940년의 어느 시점에서 채만식의 웃음기는 싹 가셨을 테지요. 아니 1937년부터 이미 도통 웃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낙백한 사람에게서 웃음이 솟을 리 없죠.

군군주의와 파시즘이 아니라도 어차피 괴물로 살았을 자한테 가슴이 아플 까닭이 없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때라고 해도, 너무 급한 경사로 괴물의 내리막을 걸은 자한테 안타까울 게 없습니다. 이러나저러나 투명인간이었기에 조금의 아픔도 없이 괴물을 맞이한 자들한테 번잡하고 수고로운 사면 심사는 필요 없습니다.

해방 뒤, 자신의 부역 행위를 반성한 글쟁이는 채만식이 유일합니다. 그의 반성은 추상적인 말 흐리기가 아니라 <민족의 죄인>이라는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글쓰기로 행해졌습니다. 해방 뒤, <소년은 자란다>를 통해서는 해방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 깊은 데서 되새겼습니다. 그 짝이 될 만한 작품으로 염상섭의 <효풍> 하나 말고 더 무엇이 있는지...

해방이 되고, 남북에 두 개의 민족국가가 서고, 20세기가 다 지나가고, 21세기 들어와서 10년을 더 보낸 오늘 또한 괴물 되기걱정은 여전합니다. 그리고 괴물 되기를 강요받은 시대를 살다가 돌아간 작가 채만식은 저세상에서 우는 표정일지 아예 무표정일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 웃음을 찾지는 못했을 줄로 짐작합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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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 조선의 남아여!
백림마라톤에 우승한 손, 남 양군兩君에게

그대들의 첩보를 전하는 호외 뒷등에
붓을 달리는 이 손은 형용 못할 감격에 떨린다!
이역의 하늘 아래서 그대들의 심장 속에 용솟음치던 피가
이천삼백만의 한 사람인 내 혈관 속을 달리기 때문이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
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침울한 어둠 속에 짓눌렸던 고토故土의 하늘도
올림픽 거화炬火를 켜든 것처럼 화닥닥 밝으려 하는구나!

오늘 밤 그대들은 꿈 속에서 조국의 전승戰勝을 전하고자
마라톤 험한 길을 달리다가 절명한 아테네의 병사를 만나보리라
그보다도 더 용감하였던 선조들의 정령이 가호하였음에
두 용사勇士 서로 껴안고 느껴느껴 울었으리라.

오오, 나는 외치고 싶다! 마이크를 쥐고
전세계의 인류를 향해서 외치고 싶다!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
약한 족속이라고 부를터이냐!”

지난 글에서 심훈의 <박군의 얼굴> <야구> 2편의 시를 소개했습니다. 거기서 여운형은 1936년 심훈의 장례식에서 심훈 최후의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울면서 낭송하며 심훈을 보낼 정도로 심훈과 절친했다고 말씀드렸죠. <오오, 조선의 남아여!>의 전문이 위와 같습니다.

193689, 독일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경주에서 조선인 손기정과 남승룡은 각각 제1위와 제3위 테이프를 끊으며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죠.

야박하게 말해
, 그때 조선은 일본제국의 일부였습니다. 손기정과 남승룡 두 사람은 일본제국의 신민이었습니다. 이들은 국제대회인 올림픽에 일본선수단의 일원, 재패니스 손 기테이난 쇼류로 출전해야 했죠.

이들의 우승은 일본제국은 영광이기도 했고 조선의 긍지이기도 했습니다. 야박하게 말해, 조선만이 그 영광 그 긍지를 누릴 수는 없었습니다.

이들의 소식이 조선인에게 전해진 시점은
1936810일 새벽입니다. 소식을 접한 신문사들은 호외를 발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심훈 또한 호외를 통해 이 소식을 듣고는 감격에 겨워 호외 뒷면에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일필휘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는 심훈의 최후의 작품이 되었고, 심훈의 장례식장에서는 여운형의 낭송을 통해 자신이 쓴 자신의 만가가 되었습니다.


원문의 한자어는 거의 다 한자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 , 남 두 사람은 전승용사로 불립니다. 스포츠가 전투가 됐네요.

이어 다시 한 번 야박하게 말해, “규칙이 엄격한 긴 거리 달리기에서 조선 사람 둘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달린 끝에 제1위와 제3위를 차지했을 뿐인데, 심훈은 인류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싶답니다.

이겼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막은/깊은 밤 전승의 방울소리에 터질듯 찢어질듯.”
인제도 인제도 너희들은 우리를/약한 족속이라고 부를터이냐
!”


앞서의 <야구>도 그렇고 예서도 그렇고, 어찌 보면 조금은 촌스러워 보이는, 우울과 울결도 새 나오는 듯한, 열등감의 거울상이 잡힐 것만 같은, 그때 그 시 그 감탄문 앞에서 저는 오히려 야박할 수만은 없네요.

이렇게 읽고 있는 동안은, 읽기 전에 튀어나오는 "공격성" "남근숭배" "지나쳐서 결국 싱거운 말맛" "기어코 무너진 시적 구조" 들에 대해서는 따로이 군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누가 지적하지 않아도 그쯤은 저도 읽습니다. 그런데 당장은 이런 생각이 오락가락할 뿐입니다.

-새로운 정신뿐 아니라 새로운 몸에 눈뜬 선각자들에게 스포츠는 또 하나의 반제국주의투쟁의 전선이자 반봉건주의투쟁의 전선이었지...
-이 시기 조선 스포츠계의 전국구 지도자는 단연 여운형이었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손기정을 비롯해 이상백 들이 속해 있었음이 조금도 어색하지 않구나... 아니 당연하지...
-여운형은 심훈의 장례식을 지켰지... 손기정은 여운형의 영결식에서 제 어깨로 여운형의 관을 운구했지...

공연히 쓸쓸해진 채로, 머리 속이 이렇습니다. 총총.



---덧붙임---
1)손기정 선수가 제1위로 테이프를 끊는 장면은 위키백과에서 퍼왔습니다.
2)이상백(1904~1966). 서울대 교수를 지낸, 사회학자, 그 이상백입니다. 이상백은 와세다대학 농구 선수로 뛰었고, 미국에도 친선 경기를 다닐 정도로 농구광이었습니다. 1930년 일본 농구협회를 창설해 상무이사를 맡았고, 1931년에는 일본체육회 상무이사로 선임되었습니다. 1936년에는 일본체육회 전무이사 겸 일본대표단 총무로 베를린올림픽에 나갔습니다. 여운형 사거 뒤에는 정치와는 일절 연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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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코홀병에 담거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같이 부풀어오른 두 뺨
두개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에
양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

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다리는 매력이 있었더니라.

4년 동안이나 같은 책상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은 교수대 곁에서 목숨을 생으로 말리고 있고
C사에 마주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
모진 매에 창자가 꿰어서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 사람의 박은
음습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을 나섰구나.

박아 박군아 ××!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들이 네 손을 잡는다
이빨을 악물고 하늘을 저주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 나는 너의 표정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아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을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


_심훈, <박군의 얼굴> 전문


보신 것은 심훈이 1927122일 쓴 시 <박군의 얼굴>입니다.
소설 <상록수>와 시 <그날이 오면>이 중등 한국어 교과서에 실린 덕분에, 심훈은 아주 좁고 잗다란 범주의 문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소설가,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영화인이었죠.
1925년 제작된 영화 <장한몽>에는 이수일의 대역으로 출연했고, 1926년에는 동아일보에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인 <탈춤>을 연재합니다. 영화소설이란 영화배우들이 장면을 연출한 사진이 삽화를 대신해 소설 문장과 유기적인 짜임을 이루는 소설을 말합니다. 1927년 영화 공부를 하러 일본에 가서는 일본 영화 <춘희>에 단역으로 출연했고, 같은 해 조선으로 돌아와서는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원작·각색·감독을 맡으며 제작까지 해냈습니다. 연기·영화의 원작 집필·각색·감독·제작까지(물론 영화평론도 썼습니다) 두루 감당한 심훈에게 영화인은 정말 마침맞은 호칭 아닙니까.
그 앞 이력에도 남다른 구석이 있습니다. 18세 되던 1919,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심훈은 3·1운동 덕분에 6개월이나 옥고를 치른 데다 다니던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성제일고보)에서 제적당하고 맙니다. 그러고는 중국으로 건너가 항주와 상해를 오가며 생활했는데요, 이때 심훈은 민족주의자들 가운데서는 무장투쟁 노선을 걷던 이들과 사귑니다. 그리고 좌파로는 경성제일고보 1년 선배인 박헌영을 비롯해 신채호, 여운형 들과 깊이 사귀었습니다. 여운형은 1936년 심훈의 장례식에서 심훈 최후의 시 <오오, 조선의 남아여>를 울면서 낭송하며 심훈을 보낼 정도로 심훈과 절친했지요.

이렇듯 심훈은 1923년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중국에서 민족주의자들은 물론 좌파와 두루 사귀었습니다. 돌아와서는 좌우합작 단체인 신간회를 주도한 민족주의자 홍명희와 각별한 사이였습니다. 다시 왼쪽에서는 좌파 문학 조직인 염군사에 참여했고, 1925년 염군사가 또 하나의 좌파 문학 조직인 파스큘라와 합쳐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가동맹)가 창립될 때에는 그 창립 멤버였습니다.
무장투쟁 노선의 재중 민족주의자들, 한국 공산주의운동사의 효시를 쏘아올린 상해의 좌파들, 또 신간회를 주도한 민족주의자와 두루 사귀는 동시에 카프에 참여한 심훈.
당시로서도 세계적으로 가장 새로운 매체인 영화에 뛰어들 만한 감수성이 있었고, 거기서 성과를 이뤄 한국 영화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심훈.
그에게 그저 계몽”, 그저 민족주의”, 그저 문인딱지 붙이기는 암만해도 무리인 듯합니다.

이제 <박군의 얼굴>, 무지막지하고 생경해서 행만 간 격정 토로로 보이는 시 같지 않은 시가, 심훈이 썼음 직한 작품으로 다가오는지요. 간단히 주석하겠습니다.

제목 박군의 얼굴의 박군, 또 시 속에서 애타게 호명되고 있는 박군은 박헌영입니다.
박헌영은 19251122일 터져 초기 조선공산당에 궤멸적인 타격을 입힌 일명 신의주사건의 여파로 같은 해 1129(또는 30) 서울에서 체포되어 신의주로 압송됩니다.
이후 1926년에 일어난 6·10만세운동의 와중에 간신히 재건된 조선공산당에 대한 검거가 시작되고, 이전 신의주사건과의 연계가 드러나자 박헌영은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됩니다.
신의주에서 터진 사건이 여섯 달에 걸쳐 서울에서 다시 불붙은 셈인데요, 1925년 신의주사건 때의 검거자(1차 조선공산당사건)19266·10만세운동 때의 검거자(2차 조선공산당사건)를 합쳐 모두 135명이 체포되고 그중 101명이 공판을 맞게 되었던 것입니다(1, 2차 사건을 통칭해 조선공산당사건이라 함).
박헌영의 첫 공판은 1927913일에야 열렸습니다. 박헌영은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숨진 박병순의 죽음을 계기로 본격적인 미치광이 행세에 들어갑니다. 헛소리, 발작 들을 연기하며 보석과 탈출의 기회를 노리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192711월에 들어서는 자살 시도에 똥을 먹는 연기를 하기에 이르죠. 그러고는 1122일 마침내 보석 허가를 받아 병보석으로 나오게 된 것입니다.

심훈은 박헌영이 병보석으로 서대문형무소를 나오던 날 친구들과 함께 옥문 밖에서 박헌영을 맞았습니다. 박헌영은 1928년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아내 주세죽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하기까지도 꾸준히 미치광이 연기를 하며 관헌의 눈을 속였다고 하지요. 그러니 석방 당일은 어땠겠어요. 마중 나온 노모와 아내도 못 알아보는 체하며, 대인기피를 연출했다고 합니다.
위 시에서 심훈은 박헌영을 일러 나이다운 검붉은 육색에/양미간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이 떠돌았고//침묵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사람을 끌어다리는 매력이 있었더니라.고 했지만, 그 잘나고 우뚝한 벗이 미치광이가 되어 노모도 아내도 알아보지 못하는 상황이라니요.

울화통이 터질 노릇은 이뿐이 아닙니다. 시를 통틀어 박헌영 외에 두 사람의 박군이 더 있지요.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1923년 천황 암살 기도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무정부주의자 박열입니다(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일제 패전 전까지 일본에서 22년간 복역). 박열은 심훈과 경성제일고보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죠. 그리고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 사람의 박은 앞서 말한, 2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 숨진 시대일보 기자 출신(시 속의 C가 시대일보)의 박병순입니다.
어머니도 아내도 못 알아보는 지경이 된 벗 앞에서, 기약 없는 옥살이를 하고 있는 벗, 고문당한 끝에 죽은(한마디로 맞다맞다 창자가 터져 죽은”) 벗을 떠올린 심훈. 그의 원통과 절통이 오냐 박군아/눈을 빼어서 갚고/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너와 같이 모든 ×을 잊을 때까지/우리들의 심장의 고동이 끊칠 때까지.라고 울부짖는 데 이르렀습니다.

생경하다할 수도 있겠고, “직정이 생생히 느껴진다고 할 수도 있을 심훈의 시... 실은 그 가운데 <야구>를 읽다 이리 번잡해졌어요. 일찍이 영화에 눈뜬 심훈의 감각이 스포츠를 지나칠 리가 있나요. 한국 정치사의 거목일 뿐 아니라 한국 체육사의 위인이며 엄연한 스포츠맨이었던 여운형과 심훈의 사이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죠.
일제시대 한국문학 가운데는 식물학자가 주인공이 되어 연구의 디테일을 펼쳐 보이는 소설도 있고(유진오, <화상보>), 무대는 방송계 및 연예계에 가수와 제작자가 주연과 조연으로 나서는 소설도 있지만(이효석, <장미 병들다>) 기념용이나 행사용이 아닌 스포츠문학은 아마도 심훈의 <야구>가 유일할 겁니다.

그때 시대가 이랬습니다. 한 사람의 속이 아래 보시는 대로였습니다.
분명 야구를 노래하고 있는데, 공이 폭탄과 탄환으로 은유되고 방망이질이 폭발로 은유되는 시. 시대의 그림자와 시인의 우울이 깃든 <야구>... 그래도 한국 스포츠사가, 한국 야구팬이 갈무리할 만한 자료가 아닌가 합니다.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오라!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유월의 태양이 끓어내리는 그라운드에
상록수와 같이 버티고 선 점··……

꿈틀거리는 그네들의 혈관 속에는
붉은 피가 쭈 뻗어 흐른다.

피처의 꽂아넣는 스트라익은 수척의 폭탄.
HOME-RUN BAT! HOME-RUN BAT
배트로 갈겨내친 히트는 수뢰의 탄환,
시푸른 하늘 바다로 번개 같이 날은다.

VICTORY! VICTORY VICTORY, VICTORY!
고함소리에 무너지는 군중의 성벽,
찔려 죽어도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는
이 나라 젊은이의 의기를 보라!
지고도 웃으며 적의 손을 잡는
이 땅에 자라난 남아의 도량을 보라!

식지 않은 피를 보려거던 야구장으로,
마음껏 소리질러보고 싶은 자여, 달려오라!

_심훈, <야구> 전문

 


--
덧붙임---
*시 속 ×는 원래 글자나 뜻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부호로 덮은 것입니다. 검열의 흔적입니다. 이런 부호, 또는 이렇게 덮는 짓을 복자伏字라고 합니다.
*1925신의주사건은 어처구니없는 소극입니다. 19251125, 신의주 지역 좌파 청년들이 만취 상태에서 지역 친일파와 일본 경찰을 구타하고 으스대다 보안사고를 낸 끝에 조선공산당 조직이 궤멸에 이른 것입니다.
*수척手擲_손으로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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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녹아가는데, 아직 다 녹지 않고 남아 있는 눈, 이를 잔설殘雪이라 한다.
연휴도 하마 이울고, 입춘 지난 골목엔 잔설이 남았을 뿐이다. 초순의 막바지니 이러다 양력 2월도 휙 지나가리라. 잔설의 감상이 연휴 막바지에 잇닿으매 떠오르는 시 한 수.

 

北風吹雪打簾波 북풍에 밀려온 눈보라에 발은 일렁이고
永夜無眠正若何 기나긴 밤 한숨도 못 잤으니 어쩌나
塚上他年人不到 무덤엔 해 지나도 찾는 이가 없으니
可憐今世一枝花 가련하다, 살았을 적의 일지화一枝花
_소홍의 절구絶句

 

소홍小紅은 평안도 성천의 기생이란 사실과 한시 몇 수가 전해올 뿐 자세한 경력은 알려진 바가 전혀 없다. 대략 19세기를 살다 가지 않았을까 막연한 추측을 할 뿐. 서울, 평양, 전주, 진주의 일급 기생이 아닌 데다, 명사며 기남자들 사이에 난 사연이 없다면 기생의 일생쯤 그 누구도 기억하고 기록할 리가 없는 것이다.

위 절구는 소홍이, 세상을 떠난 동료 기생 일지화를 생각하며 쓴 시다
. 시라지만 은유와 상징의 밀도가 떨어져 완성도까지 말하긴 뭣하다.
생각의 실마리가 풀려 나오는 대로 한자로 적다, 어찌어찌 운은 맞추다... 양반을 상대해 먹고살아야 하므로 아, <천자문千字文> <통감通鑑> 이상의 교양은 있었겠구나, 양반 손님 앞으로 급한 전갈 한 장 왔을 때 눈치를 발휘할 선의 면무식은 되었겠구나 싶다. 그러매, 그러므로 더욱 바로 느껴지는 마음속 진정. 이런 게 바로 지방 무명 기생의 시다.

북풍이 눈보라[吹雪] 몰고 오는 성천은 어떤 곳인가. 이상이 <매일신보> 1935927일자~1011일자 사이에 발표한 성천을 제재로 한 수필 속, 바로 그 성천成川이다.
성천은 동명성왕 주몽과 동명성왕에게 패해 나라를 잃은 송양의 전설을 간직한 고장이다. 높은 산지 덕분에 1945년 무렵까지도 화전민이 많았던 곳이다. 이상은 성천을 이렇게 그렸다.

건너편 발봉산에는 노루와 멧도야지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기우제 지내던 개골창까지 내려와서 가재를 잡아먹는 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동물원에서밖에 볼 수 없는 짐승, 산에 있는 짐승들을 사로잡아다가 동물원에 갖다 가둔 것이 아니라, 동물원에 있는 짐승들을 이런 산에다 내어 놓아준 것만 같은 착각을 자꾸 느낍니다.”
_이상, <산촌여정: 성천 기행중의 몇 절>에서

그러나 공기는 수정처럼 맑아서 별빛만으로라도 넉넉히 좋아하는 누가복음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참 별이 도회에서보다 갑절이나 더 많이 나옵니다. 하도 조용한 것이 처음으로 별들의 운행하는 기척이 들리는 것도 같습니다.”
_이상, <산촌여정: 성천 기행중의 몇 절>에서

짐승과 별들의 고향 성천. 그래도 평양과 가깝고 대동강변 절경을 끼고 있던 덕분에 조선 객사 건축의 명품으로 손꼽히는 성천 동명관東明館을 품은 고장이기도 했다. 성천 기생의 특별한 수요는 대개 동명관이 발생시켰으리라.

이런 고장 성천에서 북풍이 분다.
북풍에 밀려 눈보라는 드리운 발을 때려 일렁이게 한다[打簾波].이 소리에 짐짓 핑계를 대는 것일까. 시적자아는 긴나긴 밤 아예 잠 한숨 이룰 수가 없다[無眠]. 그러면서 더욱 속이 타 내뱉는다. 한숨도 못 자는 이 밤을, 내 마음을, 내 처지, 이를 어째?[若何]
약하若何어떤가” “어쩌나들의 뜻을 품은 말이며, 여기서 은 굳이 새길 필요 없는 허사다.

그 뒤는 그저 말 그대로다. 총상塚上, 곧 무덤엔 일지화가 세상을 떠나고 해가 바뀌어도 찾아오는 이 하나 없다[他年人不到].
성천 동명관, 강선루에서 바라보이는 절경은 조선 시대에 유명한 관광 상품이었다. 여행이 아닌, 그저 관광이라면 수많은 남성들이 여성까지 한 몫에 낀 패키지관광을 바랐으리라. 소홍도, 일지화도 거기 낀 상품이었을 터. 인격 아닌 상품을 추모할 사람은 없다. 같은 기생 신분 소홍에게, 일지화의 처지는 남의 일일 수 없다. 이 쓸쓸한 무덤에 비추매 그 살았을 적[今世, 여기서는 금생今生과 같은 뜻으로 새기면 되겠다]이 더욱 가련타.

마음에 파문을 내고, 마음에 느꺼움을 채우기에 정히 잘되고 잘난 작품만 소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툴다고 할 만하되 뱃속 저 깊은 데서 토해 나온 직정을 마주하고 보니 감상이 더욱 일렁인다.

사족이지만, 기생을 추모한 사내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몇 되지 않는다. 황진이를 추모한 임제, 매창을 사람 취급했던 허균 들은 천하에 드문 경우다. 이것만으로도 나는 임제와 허균에게 충분히 존경을 부칠 수 있다.

사진_성천 동명관의 배치평면도.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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