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못회전의 방을 뒤지니 허난설헌에 관한 글이 네 편이 됩니다. 이 달 초순에는 모 잡지사의 부탁으로 허난설헌의 삶을 25매 분량 원고에 우겨넣기도 했는데요, 흩다가 우겨넣으니, 아쉽습니다. 아쉬운 길에 허난설헌이 나고 죽을 때까지를 죽 써 내려가기로 했습니다.

*“나사못회전의 방에 오른 허난설헌 관련 글.
http://theturnofthescrew.khan.kr/27
http://theturnofthescrew.khan.kr/18
http://theturnofthescrew.khan.kr/17
http://theturnofthescrew.khan.kr/11

 

이름, , , 그리고 시집을 남긴 여성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은 한국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여성 시인입니다. 그가 살다 간 시대는 여성이 제 이름을 걸고 사회 활동을 하기가 불가능한 시대였지만, 허난설헌은 시인의 이상이 깃든 이름인 호뿐만 아니라 어릴 때 쓰던 이름, 어른이 되어 쓰는 이름인 자, 자신의 호가 제목으로 박힌 시집까지 세상에 남겼습니다.
허난설헌의 성은 허씨이고 이름은 초희楚姬입니다. 자는 경번景樊이며 이 여러 이름 가운데 난설헌이라는 호가 가장 유명하지요. 그리고 <홍길동전>을 쓴 아우 허균이 엮은 헌난설헌의 시집은 그의 호를 딴 <난설헌집蘭雪軒集>입니다. <난설헌집>은 한국 문학사에서 여성 시인의 이름이 책 제목에 오른 첫 시집으로, 조선을 넘어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었습니다. 그냥 간행되고 만 것이 아니라 인기를 누리며 널리 읽혔습니다.
허난설헌은 개성이 넘치는 자신의 문학 세계 덕분에 옛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이름호는 물론 시집까지 남겼으며 외국에까지 그 이름을 떨친 것입니다.


강릉에서 태어나 서울로
허난설헌은 1563, 조선 명종 18년 강릉에서 태어나 오늘날의 강릉시 초당동에서 자랐습니다. 강릉은 예조참판을 지낸 허난설헌의 외할아버지 김광철金光轍의 고향인 데다, 아버지 허엽이 즐겨 처가로 와 독서를 하는가 하면, 1563년 삼척부사(당시에는 강릉대도호부가 삼척부와 양양부를 거느리고 있었음)로 부임한 인연까지 있었기 때문입니니다.
그런데 허난설헌의 강릉 외가는 허엽이 재취한 덕분에 생긴 인연입니다. 허엽은 첫 부인 청주 한씨가 일찍 죽는 바람에 다시 장가를 갔는데요, 청주 한씨는 장남이자 허난설헌의 큰오빠인 허성과 두 딸을 낳았습니다. 첫 부인이 죽은 뒤 허엽은 김광철의 따님인 강릉 김씨와 다시 혼인해 허난설헌을 낳았습니다. 강릉 김씨는 허난설헌의 작은오빠 허봉, 그리고 막내 허균까지 세 남매를 낳았습니다.

초당동에는 지금도 허난설헌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집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강릉의 명물 초당두부를 처음 빚은 이도 허엽이라고 하지요. 허엽은 허난설헌이 자란 초당리 집 앞 샘물로 콩을 가공하고, 가까운 바다에서 간수를 받아 두부를 빚었다고 하는데요 허엽의 호가 바로 초당草堂입니다.
이후 허난설헌은 다섯 살 또는 일곱 살 때쯤, 중앙직을 맡게 된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사합니다. 서울 집은 한성부 건천동(乾川洞, 마른내골), 그러니까 오늘날의 서울 중구 인현동 명보극장 일대에 있었고 허난설헌은 출가하기 전까지 여기서 살았던 것 같습니다. 사족이지만, 이순신 장군 또한 1545년 건천동에서 태어나,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답니다.


허난설헌의 집안
이제 허난설헌의 집안을 자세히 들여다보겠습니다.
허난설헌의 아버지는 허엽(許曄, 1517~1589)은 조선 중기의 명문가 양천 허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허엽은 조선 사람들이 명예롭게 여긴 벼슬인 대사성, 지방직으로서는 가장 높은 벼슬인 관찰사 등의 벼슬을 두루 지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가독서(賜暇讀書, 명망 있는 문신에게만 허락되는 연구 기간. 임금의 격려를 받음)를 하는가 하면, 중국에 사신을 다녀왔으며, 정치판에서는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우두머리 노릇을 한 당대의 명사입니다. 벼슬과 그 밖의 영예, 정치 지도자로서의 명망 등 모든 점에서 우뚝했던 것입니다.

허엽이 유명한 인물이라고 했지만 세 아들도 못잖은 인물들이었습니다.
먼저 허난설헌의 큰오빠 허성(許筬, 1548~1612) 또한 고위직을 두루 거쳐 이조판서에 이른 명사로 선조 임금의 임종까지 지킨 대신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에 사신을 다녀왔습니다.

작은오빠 허봉(許篈, 1551~1588)은 아버지 허엽과 함께 동인의 선봉이 되어 당시 정치를 주름잡던 인물입니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중국에 사신을 다녀왔으며 이이와 대립한 끝에, 1584년 함경도 종성에 유배 갔다 풀린 뒤로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금강산에서 죽었습니다.

여섯 살 아래 아우 허균(許筠, 1569~1618) 또한 너무나도 유명한 인물이지요. 허균 또한 중국에 사신을 다녀왔으며 중국 사신이 조선에 오면 중국 사신을 상대해 외교를 도맡았던 인물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권력의 한가운데서 실력을 뽐낼 수 있었던 허균은, 그러나 천성이 호방하고 거침이 없어서 자잘한 예교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사상 면에서는 불교, 도교, 서학에 두루 관심을 보였고, 현실 정치에서는 이상론에 바탕한 개혁주의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문학에서도 남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빼어난 작가였을 뿐 아니라, 빼어난 비평가이기도 했던 허균은 누이 허난설헌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여성 작가들도 남성 작가들과 똑같은 비평 대상으로 대했습니다. 여성 작가를 공평하게 다룬 비평 태도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드문 것이었습니다.

남의 집안 자랑을 뭐 그리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느냐 하시겠지만, 다른 무엇보다, 이 똑똑하고 잘난 집안이, 툭 터진 마음으로  여성인 허난설헌으로 하여금 문학을 공부하며 높은 교양을 쌓을 기회를 주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작은오빠 허봉은 허난설헌을 끔찍이 아꼈습니다. 허봉은 허난설헌에게 시집이나 문방구를 선물하며 시 열심히 쓰라”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아름다운 시에 담아 주고받기도 했습니다. 나아가 자신의 친구이자 그 시대를 대표하는 시인 이달에게 허균의 문학 공부를 맡길 때에 허난설헌도 함께 배우도록 했습니다. 여성이 공부를 하면 건방지다’ ‘되바라졌다는 욕을 먹기 일쑤였던 시대에 허봉은 누이의 공부를 위해 베풀 수 있는 모든 것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여섯 살 아래 아우인 허균 또한 누나와 누나의 문학을 아꼈습니다. 허균은 누나의 삶을 기록했고 누나의 삶을 안타까워했습니다. “내가 죽으면 내 글을 모두 불사르라는 누나의 유언을 어기고 <난설헌집>을 엮은 이도 허균이고, 조선에 온 중국인들에 허난설헌의 작품을 알린 사람도 허균입니다. [계속]

사진_21세기의 명품 허난설헌 작품 번역,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이경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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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의 정직
정몽구의 준법
정운찬의 동반성장
안상수의 민주주의
이명박의 공정
...
그리고 최철원의 침묵에 부칩니다.

오늘 이건희, 정몽구, 정운찬, 안상수, 이명박, 최철원 따위 고유명사를 부르게 되는군요. 제 문학을 어렵게 지키며 살다 간 시인에겐 몹시 미안하지만... 그러나 기어이 이옥(李鈺, 1760~1813)의 연작시에서 하나 뽑습니다.


儂作社堂歌 내가 부른 사당가社堂歌
施主盡居士 시주는 모두 중놈들
唱到聲轉處 노랫가락이 절정에 이르자
那無我愛美 나무아미타불!”


이 시의 출처는 이옥의 연작시 <이언俚諺>(“거리의 노래” “길거리 이야기쯤으로 새기면 됩니다) 가운데서도, 창기들의 노래를 모은 탕조宕調입니다.

시는... 보시는 대로입니다. 더하고 뺄 것 없이 딱 이렇습니다.
1인칭대명사입니다. 사당은 온갖 연희를 하는 연예인 집단이지요. 연희뿐만 아니라 성매매도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그저 돈을 벌기 위해서나, 나아가 힘 있는 프로모터를 섭외하기 위해서나, 남사당이든 여사당이든 성매매를 활용하곤 했습니다.
문맥으로 보아 여사당인 가 사당의 노래를 부르며 연희를 시작하자 모여들어 돈을 내는 자란 온통 거사居士로군요. “거사는 원래 가정에서 계를 지키는 남성 불교도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스님의 신분이 천인에 묶여 있었으며 불교 교단 조직이 와해되어 있던 조선 후기에 스님과 거사를 구분하기는 불가능합니다. 여기서는 그저 중놈이라고 새기면 앞뒤가 맞겠지요.
아무려나, 이 여사당의 노랫가락이 절정에 다다르자 시주施主”, 그러니까 돈이고 재물이고 털어내는 자들이란 죄다 중놈이군요. 그래도 중이라고 외느니 나무아미 어쩌고입니다만...
보세요, 잘 보면 보입니다만, 읊으면 나무아미인데, 글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나무아미가 아닙니다.

那無我愛美
.” 의문사 와 부정사 를 짚고 뜻을 새기니
어찌 내가 미인을 사랑하지 않으리!?”입니다.

이 풍자, 이 반전에 더 붙일 말은 없습니다. 다만 작가 소개를 생략할 수는 없군요.
이옥은 조선 후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문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화려하게 수놓았는지, 국왕 정조가 몸소 나서 견책할 정도였습니다.
곧 정조가 일으킨 유명한 사상 검증 소동인 문체반정文體反正에 걸려든 것인데, 정조는 성균관 유생 가운데서는 특히 이옥을 지목해 기어이 반성의 증거를 받으려 했습니다.
정조는 일개 성균관 유생 이옥에게 사륙병문四六騈文 50수를 쓰게 하고, 그런 지 두 달 뒤에는 율시律詩 100수를 짓게 하는 등, 말하자면 반성문을 받아내겠다고 달려들었던 것입니다.
(사륙병문에 대해서는 http://theturnofthescrew.khan.kr/31 참조)
이옥도 임금에게 나긋나긋 꺾이지만은 않았으므로 끝내 양반이자 성균관 유생으로서의 공민권에 제한을 받게 됩니다. 이옥은 과거 응시 제한, 군적 편입, 급제했다 해도 강등당하는 등의 풍파를 겪어야 했고, 결국 청운의 꿈을 접고는 낙향하고 맙니다.

, 그의 호는 문무자文無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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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슈베르트의 피아노 독주곡 <방랑자 환상곡>을 듣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마우리치오 폴리니의 연주입니다. 그리고 하필 이 시디의 대문 노릇을 하는 이미지는 보시는 것처럼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의 그림 <구름바다 위의 방랑자>입니다.낭만, 낭만주의라고 할 때, 쉬이 떠올릴 만한 이미지가 바로 <구름바다 위의 방랑자>와 같은 형상이 아닐지요. 알 수 없는 그리움, 떠나기, 사람을 지핀 환상, 길 위의 객수, 고독, 고독한 나그네의 마음속... 낭만, 낭만주의 기추는, 우선은 이런 것들입니다. 낭만, 낭만주의란 불만과 우울만으로는 아무래도 온전히 서기 어렵습니다.

지난 글에 소개한 임제 또한 여행에 취해 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만, 그러나 임제의 시대는 <구름바다 위의 방랑자>와 같은 형상을 남기기는 어려운 때였습니다. 그 시대에는 자연이 화면에 담기려면, 자연은 먼저 이상적인 산수화로 변용이 되어야 했습니다. 또한 인간의 뒷모습이 화면을 꽉 채운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기념이나 의전을 위해 등장할 만한 우뚝한 인물의 초상이 아니라 신원불명인 자의 뒷모습을 포착하다니요. 이런 형상은 개인과 개인주의가 발생한 다음에나 가능하겠지요. 이런 사정을 헤아리매, 다음에서 보이는 임제의 낭만은 더욱 절절하게 다가옵니다.


 

十五越溪女 15세 아리따운 처녀
羞人無語別 남부끄러워 말 한마디 없이 이별하더니
歸來掩重門 돌아와 문 닫고는
泣向梨化月 배꽃 비춘 달을 향해 눈물짓네


그지없이 낭만적이네요. 다른 고사 가져다 붙일 것도 없습니다. 그저 읽어 내려가는 대로입니다.

열다섯 살 먹은 아리따운 처녀가 있습니다. ‘월계녀越溪女만큼은 설명이 필요하려나... 월계녀는, 굳이 고사를 찾으면 유명한 미인 서시西施입니다. 서시는 월나라 출신의 미녀로 빨래하러 갔다가 물에 얼굴을 비추자 물고기마저 그 아리따움에 취해 헤엄치기를 순간적으로 잊고는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는 고사를 남겼지요.
그러니 첫 구는 열다섯 살 먹은, 서시처럼 아리따운 아가씨”, 한창 때인, 게다가 서시처럼 아리따운 처녀로 새길 만합니다. 아니, 말 그대로 시냇물 넘어 갔다 온 아가씨라 못 할 것도 없습니다.
시내는 동네나 공동체 사이의 경계잖아요. 한밤중에, 집밖, 아니 동네 벗어났다고 하면 더 낭만적이지 않습니까, 하하. 때가 때니까 대놓고 연애질하기 어려웠겠고, 그래서 늘 한밤중 출타고, 이별하는 판에도 남의 말질이 두렵고... 그 상황, 그 심정이 남부끄러워[羞人]” 두 글자에 그대로 맺혔습니다.

엄중문掩重門세 글자도 까다로이 볼 것 없습니다. “에는 포개다” “겹치다의 뜻이 있지요. 그저 앞의 닫다[]”에 이어 엄중掩重두 자는 닫다로 새기기 충분합니다.

이화월梨花月또한 낭만적 정취를 더합니다. 예서 이조년(李兆年, 1269~1342)의 못잖게 아름다운 시조 한번 볼까요?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 제
일지춘심一枝春心 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밝기만 한 달빛에 배꽃은 더욱 흽니다. 아니 배꽃 덕분에 달빛이 더욱 도드라집니다. “이화월은 바로 그런 풍경 속의 달을 가리키지요. 말도 못하고 돌아와 문을 닫고 눈물지을 때, 하필 바라보이느니 이화월.
시속의 목소리는 십오세 아가씨의 속사정을 어쩜 이리 잘 알고 있을까요. 사실 목소리는 십오세 아가씨의 시점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밖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임제는 어디 딱 붙박인 시선, 붙박인 자의 목소리만으로 시를 쓰지 않았습니다.

다음 그네타기 노래, <추천곡鞦韆曲>, 영화용 카메라라기보다 텔레비전 카메라로 잡은 줌인, 줌아웃의 동영상입니다. 시적 자아의 시선, 목소리는 그네처럼 훨훨입니다.


1.
白苧衣裳茜裙帶 하얀 모시 치마저고리에 꼭두서니 물든 빨강 허리띠
相携女伴競鞦韆 처녀들 손에 손잡고 그네타기를 겨루는데
堤邊白馬誰家子 저 방죽의 백마 탄 이는 어는 집 도련님일까
橫駐金鞭故不前 금채찍 비껴 들고는 짐짓 나서지 않는다

2.
粉汗微生雙臉紅 분칠 위로 땀은 살짝 맺히고 발그레한 두 뺨
數聲嬌笑落煙空 아리따운 웃음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指柔易著鴛鴦索 고운 손길로 사뿐히 잡은 원앙줄(그넷줄)인데
腰細不堪楊柳風 가는 허리는 봄바람을 못 이길 듯

3.
誤落雲鬟金鳳釵 잘못해, 구름결 같은 머리에서 금비녀 떨어졌네
游郞拾取笑相誇 서성이던 도련님 금비녀 주워들고 웃으며 뽐내는데
含羞暗問郞君住 비녀 잃은 처녀 수줍어 가만히 묻는다, “도련님, 어디 사나요?”
綠柳珠簾第幾家 버드나무 늘어진 몇 번째 집입니다.”
_임제, <추천곡> 전문


우리나라 단오의 그네타기는 모여 타는 사이에 떠들썩한 모임이 되는 데다가, 누가 높이 차고 오르는지도 겨루는 일종의 스포츠, 널뛰기와 더불어 여성들에게 허용된 얼마 되지 않은 스포츠 가운데 하나였죠. 그러고 보니 춘향이도 그네를 타다가 이도령을 만났군요.

처녀들이 손에 손잡고 몰려와 그네를 뜁니다. 이 자체가 시끌벅적한 행사요, 더구나 도려님들한테라면 체면 불구하고 볼 만한 볼거리겠으나 한 도련님은 그 앞으로 대놓고 나서지는 못합니다백마에 금채찍으로 화려하게 차린 도련님은 짐짓[] 그 앞으로 바로 나서지는 않았[不前]”습니다. 그저 저 너머 방죽에서 서성일 뿐.

이제 그네타기는 한창입니다. 이때 한 처녀의 화장, 그 분칠한 위로 땀이 송글송글 돋고 두 뺨은 어느새 발그레 주홍물이 들었습니다. “분한미생粉汗微生”, 흉하게 번진 거 말고, 베이스 위로 살짝 땀이 맺힐까 말까 한 상태죠. 그래서 라고 썼습니다. 임제 이 사람, 화장 상태 관찰에도 일가견이 있군요(, 나사못회전도 베이스와 원래 피부의 톤을 제법 알아봅니다).
그 처녀 발 굴러 높이 공중 높이 올라가서는 몇 줄기나 되는 아리따운 웃음을 구경꾼 잔뜩 모인 저 아래로 떨어뜨리곤 합니다[落烟空]. 게다가 그 처녀가 그넷줄 붙든 손길은 나긋나긋 곱고, 그 두 손길 사이로 보이는 허리는 가늘어 봄바람[楊柳風]을 못 이길 것만 같습니다.

한창을 지나 절정으로 가는 그네타기. 발 굴러 오를 때, 아차, 잘못해서 금비녀가 구름결 같은 쪽진 머리에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걸 누가?, , 놀러 나와 어슬렁거리던 어느 집 도련님[游郞]이 주워들었네요. 그 도련님은 싱글거리며, 일행 또는 구경꾼들에게 내가 주웠지!”하고 뽐내기까지 합니다[笑相誇].
이제 어째요. 그래도 금비녀는 찾아야죠. ... 금비녀도 찾고, 다른 것도 찾을 테면 찾을 기회고.
분 위로 땀방울 살짝 비친, 두 뺨 발그레한 처녀는 그거 내 거예요, 주세요가 아니고요, “수줍어 가만히[含羞暗]”이기는 하지만 다른 말을 냅니다.
어디 사나요?”
그리고 도련님의 대답은 보신 바와 같습니다.

슈베르트가 알았으면 그 작품을 뮐러나 괴테 시 리트에 가져다 붙이듯 했겠고, 프리드리히가 봤다면 그네타기 풍경 바라보기에 몰두한 그 뒷모습을 탐냈을 만한 임제였습니다.
이만한 낭만노래꾼, 낭만시인 임제는 너절한 나라에서 살다 아까울 것 없는 죽음으로 생을 마쳤습니다(http://theturnofthescrew.khan.kr/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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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林悌, 1549~1587). 백호白湖라는 호 또한 유명한 문인입니다. 조선 선조 때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갔습니다. 그러나 굳이 높은 벼슬아치가 되겠다고 발버둥을 친 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다음 시조는 임제가 평안도사平安都事로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의 묘를 찾아가 쓴 작품입니다.

청초
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紅顔을 어디 두고 백골白骨만 무쳤느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알고 지내던 매력적인 한 여성의 죽음이 얼마나 원통했던지, 그는 이렇게 곡진한 애도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에, 아니나 다를까, 논란이 들끓습니다. 기생한테 이런 노래를 부치다니, 양반의 체통을 떨어뜨렸다고.
논란이 일자 임제는 거뜬히 벼슬을 그만두고 맙니다. 벼슬길에서 거뜬히 여행길로 제 갈 길을 바꾼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교양인이었던 허봉과 성혼으로부터 글재주와 머리를 인정받던 임제는 이제 여행, , , 기생의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평양 기생 한우寒雨를 유혹하며 부른 노래를 보면 그가 벼슬 밖 세계에서 얼마나 잘살았는지가 그대로 드러납니다.

북창北窓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해동가요海東歌謠>한우가寒雨歌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시조입니다. 초장의 운동감이 중장에서 한층 일렁이다 이윽고 종장에서 구비치는 반전이 거침없습니다.

북쪽으로 난 창문을 내다보니 누군가 맑다하기에 비옷도 없이 길을 나섰답니다. 한데 산에는 눈이 내리고 들로 나서고 보니 비가 내립니다. 이 비가 찬비한우寒雨.
비옷도 없이 나섰다 찬비[한우] 맞았으니 그대로 얼어 자겠다고 합니다. 얼어 자다... 찬비를 맞은 김에 언 채로 자겠다... ... 달리 생각지 못하고 그렇게만 읽은 분은 아직 어른[adult]이 아닌 게지요. 동사 얼다에는 암수 둘이 하나로 어우러지다는 뜻도 있답니다.
한우가 이 유혹의 노래 앞에서 임제에게 다시 한 번 찬비를 내렸을까요... 아니 더운 비가 이치에 닿으려나?

아무려나 한세상 잘 놀다 간 이 기남자奇男子풍류남아風流男兒께서는, 그의 일생에 견주어 보면 쓸쓸한 느낌이 감도는 말년 일화도 남기고 갔습니다.
예컨대 이익(李瀷, 1681~1763)<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그의 최후를 이렇게 그렸습니다.

[임제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아들들이 슬피 울었다. 이때 임제가 말했다. “사해의 여러 나라가 황제를 칭하지 않은 데가 없는데, 유독 우리나라만이 예부터 그러지 못했지. 이런 너절한 나라에 태어났으니, 그 죽음을 애석해 할 것 있겠니![生於若此陋邦, 其死何足惜]” 그러고는 곡하지 말도록 명했다.

이익은 이 장면 끝에 임제가 평소 하고 다니던, 한 시대의 우스개로 전해진 임제의 농담을 덧붙였습니다.

나를 오대육조와 만나게 했다면, 나 또한 돌림천자는 했으리라[若使吾値五代六朝, 亦當爲輪遞天子].”

오대五代는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교체되는 시기로 이 사이에 후량後粱, 후당後唐,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다섯 왕조가 일어났다 스러졌습니다.
육조六朝는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후예인 후한마저 멸망한 뒤, 수나라가 서기까지 강남에서 일어났다 스러진 여섯 왕조, 곧 오, 동진東晋, , , , 을 말합니다.
오대나 육조나 모두 교체기이자 혼란기였고 각각 다섯 왕조, 여섯 왕조가 얼마간 섰다가 스러졌으니 그때의 제왕들이란 그야말로 돌림천자[輪遞天子, ‘윤체輪遞돌아가며 번갈아의 뜻]라 할 만하지요.

다시 임제의 유언으로 돌아가느니 누방陋邦두 글자가 삼삼합니다. 누방... 누추한 나라, 대국大國에 견주어 궁벽한 나라, 하필 자에 지펴 새기니 너절한 나라.’ 그리고 또한 삼삼한 돌림천자.’

기생의 무덤에 부친 노래며, 유혹의 노래 모두 낭만적입니다만 문득 너절한 나라돌림천자’ 앞에 이르러서는 한 시인이 느낀 답답함이 왈칵 몰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오대와 육조의 역사를 우스개의 밑천으로 쓰는 시인에게 누방의 벼슬이 다 무엇이겠어요.
벼슬이 아무것도 아니어서, 저세상으로 간 여성, 그것도 기생의 무덤에 얼마든지 애도의 노래를 부치고, 눈앞의 기생에게는 찬비에 얼어 자는 낭만을 연출하건만 이런 몸짓마저도 어쩌면 불만과 우울의 저편에 맺힌 거울상이 아니었을까요.

연평도에서 처참한 노릇이 벌어지던 날, 저는 하필이면 임제의, 보다 낭만적인 한시를 뒤지고 있었습니다.
우연히 본 인터넷 속보가 무슨 소린지 짐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자료를 덮
은 그날 밤까지
정보의 진전은 전혀 없이 반복되는 뉴스 앞에서 맥이 다 풀렸습니다.
불질 지나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머릿속에는 누방두 글자가 자꾸 너절한 나라로 영사되는가 하면, ‘돌림천자의 헛헛한 우스개가 자꾸 불만과 우울로 몸을 나툽니다.

2010121, 대한민국 서울에서 나사못회전이었습니다.



사진: <소화시평小華詩評>의 임제 관련 기록_영인본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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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비랑 우박이랑 진눈깨비가 한반도를 오락가락합니다. , 우박, 진눈깨비 들이 어느새 눈밭에 얼음밭까지 만드는 풍경, 그게 바로 혜초(慧超, 704~787[추정])가 노래한 冷雪牽冰合입니다.
습기가 한 번 언 뒤 어김없이 찾아오는, 쩡하기도 하고 매콤하기도 한 날씨를 떠올리매 혜초가 파미르 고원 횡단을 앞두고 쓴 시가 오늘 다시 삼삼합니다(http://theturnofthescrew.khan.kr/33 참조).


혜초의 여정중국 광동
[해로 출발지]남중국해~인도차이나반도의 해로오늘날의 동인도[인도 도착지는 미상]쿠시나가라를 비롯한 불교 성지페르시아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과 러시아 접경(카불, 바미얀 포함)파미르 고원구자龜玆(쿠차, 당제국의 안서도호부 소재지)에 걸친 것으로 추정됩니다.

햇수로 4년이 걸린 여정... 구법의 길이었고, 난생처음 보는 자연·사회·인종과 만난 길이었고, 그 자연과 사회와 인종이 한순간에 여행자의 목숨을 빼앗을 수도 있는 길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혜초는 인도, 페르시아, 중앙아시아의 8세기 사정을 아우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고, 이는 5세기 법현法顯<불국기佛國記>, 6세기 현장玄奘<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의 뒤를 이으며 자칫 사라질 뻔한 한 시대를 기록해 오늘에 전하고 있습니다.


혜초는
<왕오천축국전>, 앞서 소개한 시까지 해서 모두 다섯 수의 시를 남기고 있습니다. 이 다섯 수는 모두 여행자의 감상을 드러낼 뿐 아니라 여행기 구성의 매듭이 되고 있습니다.

기록 전체는 직필직서의, 담담하다 못해 건조한 서술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담담과 건조 사이에서 고개를 든 다섯 수의 시에는 진리를 찾기 위해 어떤 어려움도 무릅쓴 사람의 진정이 살아 있습니다. 또한 자연의 위력을 실감한 사람의 정서적 울림을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게다가 그 마음속 풍경은 여로의 풍경과 순간적으로 결합해 동아시아 한문학사에서 보기 드문, 살아 있는 현장감을 뽐냅니다.


혜초의 여정과 혜초의 글 앞에서 여러 말이 다 무안합니다
. 이제 <왕오천축국전>에 난 길, 혜초 마음속에 난 길을 따라가 볼까요. 원문의 교감에 대해서는 이설이 구구하지만 가장 최근의 업적인 정수일의 교감을 따릅니다. 앞서도 그랬습니다.


[사진_최남선이 교감한 <왕오천축국전> 부분]


[사진_정수일이 역주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不慮菩提遠 보리수 멀다고 걱정하지 않았는데
焉將鹿苑遼 어찌 녹야원을 멀다 하리
只愁懸路險 그저 근심거리는 험한 벼랑길뿐
非意業風飄 업풍 몰아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八塔誠難見 여덟 탑을 보기란 참으로 어려워라
參差輕劫燒 어지러이 긴 세월 지나며 불타버렸다
何其人願滿 어찌 한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까만
目睹在今朝 오늘 아침 내 눈으로 보고 있노라.


지금 혜초는 갠지스 강 유역, 마게타(마가다)에 와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석가모니가 도를 이룬 자리인 부다가야(보드가야)의 보리수, 그 보리수를 기념해 지은 절 마하보리사 앞에 서 있습니다. 여기서 북서쪽으로 한참, 오늘날의 네팔까지 가면 또다른 불교 성지, 깨달은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그 깨달음을 설법한 녹야원(사르나트)이 있습니다.
성도成道의 기념물 앞에서 떠올리는 저 너머 첫 설법지. 대륙에서 대륙을 건너 여기까지 온 나그네의 마음...
벼랑길 험난함을 걱정할 뿐[只愁懸路險], 업풍이 몰아쳐도 아랑곳하지[非意業風飄] 않는다는 표현도 현장감을 더합니다. 업풍이란 선연과 악연의 유전을 은유하는 말이기도 하고 지옥에서 부는 폭풍을 비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구도의 서원을 세웠으매 나중에 맺힐 업연에 연연할 틈이 없습니다. 이 여정을 뚜벅뚜벅 걸어갈 나그네는 지금은 발밑 벼랑길을 삼가야지요. 다음 생, 저 너머의 세상도 지금 삼가 걷는 내 한 걸음부터라는 결기가 이 시구 덕분에 더욱 또렷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이어 나오는 여덟 탑”, 팔탑八塔은 석가모니의 탄생, 성도, 최초의 설법, 열반 등과 관련한 여덟 군데 대표 성지의 기념물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시에 나온 것처럼 세월이 지나면서 폐허가 된 곳도 있었고요.
마하보리사도 말하자면 이 팔탑 안에 듭니다만, 제 눈으로 이를 보게 될 줄을 혜초 자신으로서도 어찌 알았겠어요. 업풍 아랑곳하지 않고, 발길 삼가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은 결과 아니겠어요.

그렇게 가고 또 가 남천축에 이르러, 혜초는 다시 노래합니다.

月夜瞻鄕路 달밤에 고향길을 바라보니
浮雲颯颯歸
뜬 구름 휙휙 지나간다
緘書忝去便
편지를 삼가 그 편에 부치려 하나
風急不聽廻
바람이 급해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돌아오지 않는구나
我國天岸北
내 나라는 하늘 끝 북쪽
他邦地角西
남의 나라는 땅 끝 서쪽
日南無有雁
일남에는 기러기도 없으니
誰爲向林飛
누가 나를 위해 상림원上林園으로 날아갈까



은 시선을 멀리 두는 행위입니다. 어느 날, 인도 대륙의 한참 내륙에서, 혜초는 고향길을 바라 저 멀리로 시선을 두었겠죠.
마침 그때 달빛 아래로 뜬 구름이 휙휙 지나갑니다. “삽삽颯颯은 한국어 휙휙쯤에 상당하는 의성어로 무언가가 질주하듯 빠르게 지나가는 모양을 나타냅니다.

구름은 지나가고[“에는 돌아가다뿐 아니라 가다의 뜻도 있어요], 공손하게[] ‘가는 길에 내 편지 좀 부쳐 다오해보지만, 바람이 워낙 삽삽이 구름을 몰아가는지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도 구름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내 나라... “아국我國”... 여기서는 문명, 대륙 단위로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뒤 시구와 앞으로 볼 나머지 시 두 편이 제대로 풀립니다. 허턱 신라라고 할 수 없는 대목인데 차차 풀어보겠습니다.

일남은 옛 지지를 곧이곧대로 따라 베트남 중부, 꽝트리·꽝남·꽝나이·빈딘 일대라고 해도 좋고[그곳만큼 머나먼 남쪽이라는 뜻], 아니면 해 뜨거운 남쪽이나 위 땅 끝 서쪽[地角西]”에 물려 해 뜨는 남쪽이라고 새겨도 좋습니다. 어느 편이나 북, , 남의 대비가 나그네의 발걸음을 잘 드러냅니다.

끝으로 誰爲向林飛입니다. “내 나라[我國]”를 떠올리시며 보시겠어요?
“who” “whom”의 의미와 역할을 두루 간직한 의문사입니다.

은 여기서 상림원上林園입니다. 한나라 무제 때 흉노에 사신 갔던 소무蘇武는 붙들려 오지로 추방된 상태에서 억류되었습니다. 소무는 어느 날 기러기 다리에 자신의 처지를 알리는 편지를 기러기 발에 묶어 날렸는데 이 기러기가 마침 장안 궁실의 뜰인 상림원에서 잡혀 그 편지가 한나라에 전해지게 되었습니다. 황제는 바뀌어 소제 때였습니다. 소무의 소식을 알게 된 소제는 흉노에 사신을 보내 소무를 귀환시켰습니다. 19년 만의 귀환이었습니다.
이것이 전고典故라는 한문학의 수사법입니다. “기러기가 하필 언급되면서부터 소무의 고사가 작동합니다. 그러고는 고향에서 이격된 신세-기러기와 편지-돌아갈 곳과 상림원-향수 들이 꽉 찬 원을 그리게 됩니다.
고병익, 이석호, 정수일 등 많은 분이 을 바로 계림鷄林”, 곧 신라로 풀었지만 그럴 만한 전거도 그럴 만한 고사도 없습니다. 전거典據에 기댈 때, 고사故事에 기댈 때에 작동하는 수사법이 전고입니다. “상림원上林園으로 새길 때 생기는 자연스러운 흐름, 그리고 문명과 문명, 대륙과 대륙을 오가던 나그네의 상상력의 그릇을 아울러 살펴보면 어떨까요.


[사진_이석호가 교감한 <왕오천축국전> 부분]

이번에 보실 시는 북천축의 한 절에서 숨을 거둔 중국인 스님의 사연을 듣고 쓴 것입니다. 하필 고향으로 가는 길에 덜컥 병이 나 머나먼 땅에서 숨을 거둔 중국인 스님의 사연이 너무나도 슬퍼서 쓴 시입니다.

故里燈無主 고향 등불은 주인을 잃고
他方寶樹摧 타향의 보배로운 나무는 꺾였구나
神靈去何處 신성한 혼령은 어디로 갔는가
玉貌已成灰 옥 같은 모습은 이미 재가 되고 말았네
憶想哀情切 생각하니 가엾고 절통해라
悲君願不隨 그대 소원 이루지 못했음을 슬퍼하노라
孰知鄕國路 누가 고향 가는 길을 알까
空見白雲歸 덧없이 바라보느니, 흰구름 지나는구나


두말이 필요 없는 직설로 표현한, 한 문명과 한 대륙 사람에게 느끼는 동감과 동정이 이러합니다.
나 또한 가는 길 중간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나를 위해 추도사 한 마디 해 줄 같은 문명, 같은 대륙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면? ... “생각하니 가엾고 절통해라는 말은 시인이 시인에게 주는 말로도 들립니다.

이제 여정의 끄트머리로 달려가는 길에 쓴, 혜초가 남긴 다섯 수 가운데 네 번째 시이고, 현존 <왕오천축국전> 마지막 시 바로 앞에 자리한 시입니다.

君恨西蕃遠 그대는 서쪽 변방이 멀다고 한탄하고
余嗟東路長 나는 동쪽 길이 멀다고 탄식하노라
道荒宏雪嶺 길은 험하고 산마루는 어마어마한 눈을 이고 있는데
險澗賊途倡 험한 골짜기로는 도적떼가 길을 트는구나
鳥飛驚峭嶷 날던 새는 가파른 산에 놀라고
人去偏樑難 사람은 기우뚱한 다리 건너기가 어려워라
平生不捫淚 평생 눈물 훔친 적 없었다만
今日灑千行 오늘만큼은 천 줄기 눈물을 뿌리노라



여기는 오늘날의 토카리스탄과 와칸 사이.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이 바라보이는 곳입니다. 여기서 동진해 파미르 고원을 넘으면 드디어 당제국의 경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데서 만난 당제국의 사신은 서쪽 길이 멀기만 합니다. 혜초랑은 가는 길이 정반대가 됐네요.

險澗賊途倡의 표현이 절묘합니다. “인도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지나온 걸음을 셈하든 가야 할 걸음을 셈하든 멀기만 한 이곳 골짜기가 무법자들이 선두가 되어 길을 낼정도로 험한 곳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험한 길에 무법자들이 출몰하고, 하는 느낌이 참 잘 살아 있습니다.

人去偏樑難의 현장감도 생생합니다. 날던 새가 놀라도록 험하고 가파른 산지에 놓인 다리이니 기우뚱하기도 할 테고, 새가 놀랄 만한 데에 위태하게 걸린 다리를 지나는 사람의 마음은 또 어떻겠어요.
그나마 한 문명, 한 대륙 사람을 만나 눈물이라도 후련하게 뿌렸으니 그 눈물바람의 정화가 적지 않은 위로가 되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또 앞서 보신 http://theturnofthescrew.khan.kr/33 까지 해서 혜초가 <왕오천축국전>에 남긴 시 다섯 수를 모두 보셨습니다.

목숨을 건 여행길에서 이런 노래를 남긴 혜초는 그 뒤 당제국의 수도 장안에 머물며 밀교 연구와 밀교 경전 한역에 힘쓰다 오늘날 중국 4대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오대산의 건원보리사로 들어갔고, 거기서 공부하다가 생을 마칩니다. 신라로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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冷雪牽冰合 찬 눈은 얼음과 뒤섞이고
寒風擘地裂 찬바람은 땅이 찢어져라 부는구나
巨海凍墁壇 넓디넓은 바다는 얼어 단을 펼쳐 놓았고
江河凌崖齧 강물은 제멋대로 강기슭을 물어뜯는다
龍門絶瀑布 용문에는 폭포마저 끊기고
井口盤蛇結 우물 아가리는 뱀이 도사린 듯 얼어붙었다
伴火上陔歌 불을 들고 층층이 올라가 노래 부르지만
焉能度播密 어떻게 파밀(파미르 고원)을 넘어갈까?



, 얼음, 땅을 찢을 듯 부는 거센 바람, 제멋대로 강기슭을 물어뜯는 강물, 얼어 끊긴 폭포, 도사린 뱀 모양으로 얼음이 맺혀 버린 우물 아가리, 그리고 어두운 길 밝히려 불을 들고 한 층 한 층 오르고 또 올라 만나는 파미르... 어때요, 쩡한지요? 매콤한지요?

위 시는 혜초
(慧超, 704~787[추정])가 자신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안에 남긴 시입니다.
시가 시작되기 바로 앞에는 겨울, 토화라에서 눈을 만난 소회를 오언시로 쓰다[冬日在吐火羅, 逢雪述懷, 五言]”라는 건조하기 짝이 없는 한마디가 붙어 있습니다.

토화라(吐火羅, 토카리스탄)는 오늘날의 러시아와 파키스탄 접경에 자리한, 동으로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 고원을 바라보는 곳입니다.

겨울, 토화라에서...”에 이끌려 이윽고 시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에, 8세기 당제국과 인도 사이의 바닷길이 떠오르고, 중앙아시아의 초원과 고원이 떠오르고,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접경의 황무지가 떠오르고, 로켓포 포탄에 무너져 내린 바미얀 석불이 떠오르고(혜초는 카불과 바미얀도 들렀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자연 앞에 선 한 사람의 심정도 삼삼합니다. 다시 시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사진_<왕오천축국전> 현존 원문의 영인본 재촬영. 오른쪽 둘째 줄에
"冬日在吐火羅..." 구절이 보인다.]
 

冷雪牽冰合  (찬 눈은 얼음과 뒤섞이고)

지금 혜초가 머물고 있는 토화라, 곧 오늘날의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 접경에 자리한 토카리스탄은 춥디춥고, 바람 많은 산악의 황무지입니다.
겨울 어느 날, 이 토화라에 눈이 내리는데 얼마나 춥고 바람이 거센지 그 차디찬 눈이 쌓인 위로 드문드문 얼음이 듣기도 합니다.
혜초는 이를 "冷雪牽冰合"이라 포착한 것입니다. 견 "牽" 에는 "끌어당기다"의 뜻이 있는데요, 직역하면 “찬 눈이 얼음을 끌어[牽] 모으다[合]”쯤이 되겠지요. 눈이 씨가 되어, 눈 사이로 결빙하는 모습에서 추위가 느껴지고 읽는 이의 가슴까지 절로 싸늘해집니다.


寒風擘地裂 (찬 바람은 땅이 찢어져라 부는구나)

―눈뿐입니까. 찬바람은 땅이 찢어져라 불어 지나갑니다. “벽擘”은 “가르다” “쪼개다”의 뜻이며 “렬裂” 또한 “찢어지다”입니다. 지면을 패며 지나가는 무서운 바람이 차기도 합니다. 결빙에 이어, 오소소 소름 돋게 하는 한 구절입니다.

巨海凍墁壇 (넓디 넓은 바다는 얼어 단壇을 펼쳐 놓았고)


―거해? 이곳은 오늘날 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접경, 곧 내륙 중에서도 내륙입니다. 바다라니요. 예, 실제 바다가 아니라, 바다와 같이 펼쳐진 고원의 지형을 빗댄 표현이지요. 바다와 같은, 평평하니 넓디넓게 펼쳐진 지형이 저 너머로, 저저 너머로 끝없이 얼어붙은 것입니다. “만墁”에는 “흙손”이란 뜻이 있고, “(흙손질하듯)바르다”라는 뜻으로 연역됩니다. “단壇”은 주변보다 높이 쌓은 시설을 두루 일컫는 말이지요. “단상” “교단” 따위를 떠올려 보세요. 곧 바다와 같은 고원 지대가 얼어붙은 모습이, 마치 단을 깔아놓은 듯 전개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江河凌崖齧 (강물은 제멋대로 강기슭을 물어뜯는다)

-이 구절도 운동감도 생생합니다. 중아아시아의 고원은 홑으로 비죽이 서 있지는 않습니다.
이곳 고원은 협곡을 끼게 마련이고, 협곡을 흐르는 물은 평지보다 험한 강기슭을 지나게 마련입니다.
“릉凌”은 “깔보다” “범하다” “능가하다”의 뜻입니다. 문맥에 따라 “제멋대로” “함부로” “마구” 들로 새길 수 있습니다.
“애崖”는 “벼랑”이란 뜻이며 “애涯”와 통용해서는 “물가” “강기슭”의 뜻도 있습니다. “설齧”은 그야말로 “물어뜯”고 “갉아먹”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저 너머를 바라보던 시선을 문득 아래로 떨굽니다. 한겨울 날씨 사납고, 그에 장단을 맞춰 벼랑 아래를 지나가는 강물도 사납습니다. 얼마나 사나운지 강기슭을 아예 물어뜯을 듯 마구잡이로 솟구쳤다 떨어집니다. 강기슭을 제멋대로 덥석 베어 무는 강물. 이렇게 “릉凌”과 “설齧”으로 드러낸 운동감은 그것을 본 적 없는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현장감과 잇닿아 있지 않을까요.

龍門絶瀑布(용문에는 폭포마저 끊기고)


―용문. 중국의 험한 지명의 대명사입니다. “등용문登龍門”이란 말도 있잖아요. 물고기가 여길 넘으면 용이 되고 못 넘으면 죽지요. 용문처럼 험한 지대에 자리한 폭포의 흐름이, 지금은 맵고 사나운 날씨에 얼어 끊어졌습니다.

 井口盤蛇結 (우물 아가리는 뱀이 도사린 듯 얼어붙었다)  


―앞서 바다와 같은 고원 지대를 바라보던 시선을 벼랑 아래로 떨어뜨렸던 혜초는, 이번에는 험하디험한 지형 어느 곳의 끊어진 폭포를 바라보다 문득 우물에 눈이 갑니다. 그 우물 아가리라고 별 수 있습니까. 얼어붙었습니다. 도사리고 앉아 있는 뱀[盤蛇]처럼 얼어붙었습니다[結].

 伴火上陔歌 (불을 들고 층층이 올라가 노래 부르지만)


―혜초는 지금 토화라에 있습니다. 여기서 시작해 힌두쿠시 산맥을 돌파하고 파미르를 건너야, 자신의 스승과 동문이 있으며 자신에게 여행증명서를 발급해 준 당제국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4년 구법 여행의 대미가 한층 가까워진 셈입니다.

사나운 날씨, 험한 자연은 나그네의 감상을 더하고, 혜초는 어느새 가슴이 터질 지경이 되었을 테지요. 아니 가슴이 터졌습니다. 터졌기에 이렇게 노래[歌]를 부르고 있잖아요..

“반伴” “짝” “반려자”의 뜻입니다. “화火”는 어두운 길을 밝힐 조명입니다. 험한 길에 벗 삼을 이도 없습니다. 여기까지 한 층 한 층 힘겹게 올라온 길도 그랬지만, 힌두쿠시 산맥과 파미르까지 갈 길도 한 층 한 층 힘겹게 또 그저 불 하나 들고 조심조심 가야 합니다. “층계”를 뜻하는 “해陔”가 그 ‘한 층 한 층’ ‘층층이’ 오르는 힘겹고도 조심스런 길을 드러냅니다.

  焉能度播密 (어떻게 파밀(파미르 고원)을 넘어갈까?)


―와락 터진 노래, 이제 여며야죠. 이제 곧 건너야 할 파밀播密, 곧 파미르. 그곳을 바라 가슴 깊은 데서 터져 나온 노래를 불러 봅니다만 한구석의 불안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언焉”, 반문(반어문)을 이끄는 부사입니다. 문맥에 따라 “what~?!”을 살짝 넣어 독해해도 좋습니다. “언焉”으로 해서, 토화라에서 부른 혜초의 노래, 그 마지막 구절의 속뜻은 “어떻게 파밀을 건널 수 있을까?” “과연 파밀을 건널 수 있을까?”에 걸치게 되었습니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이 시를 포함해 모두 다섯 수의 시가 실려 있습니다.
다섯 수 모두 여행기 서술과 구성의 매듭 역할을 하면서 나그네의 깊은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냅니다.
겨울 핑계가 있기에 이 쩡하면서도 매콤한 시부터 보셨습니다만, 앞으로 간략한 <왕오천축국전> 해제와 함께 나머지 네 수도 마저 소개할까 합니다.
구도를 향한 의지, 목숨을 건 행위였던 여행에서 얻은 감상, 난생처음 접한 자연과 문명에 대한 놀라움 들을 솔직하게 드러낸 시를 혼자 읽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11월입니다.


[사진_최남선의 <왕오천축국전> 해제(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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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에 태어나 1649년에 돌아간 조선 사람 조위한(趙緯韓, 호는 소옹素翁, 또는 현곡玄谷)은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아간 뒤 호조 참판까지 지냈으니 당시 조선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았다고 하겠지요. 그런데 1576~1649사이에는 임진왜란·정묘호란·병자호란이 자리합니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죽어 나간 권력 다툼인 계축옥사癸丑獄事도 자리합니다.

조위한은 왜란 때 종군했고, 계축옥사에 엮여 관직에서 쫓겨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인조의 쿠데타 이후에 다시 등용되고서는 이괄의 난도 겪었고, 호란 때 다시 종군합니다. 이 땅에서 정말 여러 일을 겪고 돌아간 셈입니다.
그나마 그에게는 물러나 쉴 데는 있었습니다. 외가의 인연이 있었던 전라도 남원이 그곳입니다. 쉬고 싶을 때, 정말 떠밀려서 쉬지 않을 수 없을 때 그는 남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최척은 남원에서 접한 한 가족의, 참으로 기이한 사연을 <최척전崔陟傳> 담았습니다. 조위한이 1621년에 탈고한 <최척전> 속 이야기 한 번 보실래요?

최척
, 옥영네는 1597년 남원이 왜군 손에 떨어지면서 온가족이 뿔뿔이 흩어집니다. 최척은 귀환하는 명나라 군대를 따라 중국 절강으로 들어갑니다.
옥영은 최척과 고니시 유키나가 선단의 선장 돈우의 포로가 되어 나고야까지 끌려간 뒤, 돈우의 신임을 얻어 항해사가 되어 나고야, 오키나와, 베트남을 오가다 천운으로 베트남에서 최척과 재회합니다. 부부는 중국에서 둘째 몽선을 낳지요(첫째 몽석과는 남원에서 헤어짐).

그러고도 최척은 조위한처러 계속 전쟁을 겪습니다. 최척은 명과 후금이 요양에서 충돌하자 명나라 군대에 징집되어 요양으로 나갔다 후금의 포로가 되었고, 이때 명나라의 원군으로 온 조선군으로 파병된 아들 몽석(역시 포로 신세)과 포로수용소에서 재회한 뒤 함께 조선으로 탈출합니다.

한편 최척과 옥영의 며느리이자 몽선의 아내인 홍도는 마지막으로 고향으로 가보자는 일념 하나로 거친 바다를 뚫고 조선 땅 남원에 이릅니다. 지나친 설정일 수 있으나 홍도의 아버지인 명나라 장교 출신 진위경은 군법 위반으로 명나라로 귀환하지 못한 채 조선에 머물고 있었고, 홍도가 남원으로 향할 즈음에는 이미 남원 최척네에 살고 있었지요. 아무튼 이런 곡절 끝에 1597년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은 24년 만인 1620년 모두 한 자리에서 서로를 얼싸안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24년이란 세월도 참으로 길고, 한 가족이 아우른 공간도 넓디넓기만 합니다만 덕분에 인물과 그 형상이 풍부하긴 하지요.
여성의 구애를 피하지 않았으며, 아내의 생사를 모르는 동안 수절 홀아비로 산 최척도 그때 사람과 사뭇 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옥영은 최척에게 먼저 구애했으니, 김시습 <이생규장전>의 여성 주인공 최랑 같은 인물입니다. 나아가 옥영이 눈물바람으로 가족의 재회를 바라는 인물이 아니라 앞날을 대비해 항해술을 익히고 합리적 판단으로 앞길을 여는 여성임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옥영이 조선을 향해 차분히 항해를 준비하는 장면이나 해적을 만났을 때 임기응변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아, 이제 한국문학사에 드디어 새로운 여성이 나타났구나, 실감하게 되지요.

고니시 유키나가 선단의 선장 돈우도 그저 지나칠 수가 없습니다. 돈우는 독실한 불교도로서 전쟁을 혐오하지만 억지로 전쟁터에 나왔고 포로 옥영을 인간적으로 대합니다. 베트남에서 최척과 옥영이 만나자 두말없이 옥영을 보내줍니다.

이들뿐 아닙니다. 일본인 돈우와 함께 중앙권력에서 독립한 해상 세력의 활동을 보여주는 최척의 중국인 친구 송우, 미귀환 외국군의 삶을 보여주는 진위경(최척네의 사돈, 홍도의 아버지) 들의 형상도 이채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최척과 몽석이 갇혔던 포로수용소의 소장 말입니다.

최척과 최척의 아들 몽석이 후금의 포로수용소에 처음 함께 있을 때, 그 둘은 서로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떨어져 산 지가 몇 해인데요. 기막힌 상봉부터 보실래요? 후금군이 명군을 격파하고, 조선군한테서는 항복을 받은 다음 이야기입니다.

최척은 몽석과 함께 한 곳에 감금되었다. 그러나 부자는 서로 누구인지 알 리가 없었다. 몽석은 최척의 조선어가 서툰 것을 보고 조선어가 되는 명나라 병졸이 후금군에게 학살당할까 두려워 거짓으로 조선인 행세를 하는 줄 알았다[실제로 최척은 죽은 조선 병졸의 조선옷을 갈아입은 덕분에 학살을 면함].
몽석이 출신지를 물을 때면 최척은 오랑캐가 염탐한다고 여겨 횡설수설하며 전라도 사람 어쩌고, 충청도 사람 저쩌고 했다. 몽석은 의심만 쌓이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서로에 대한 경계심은 며칠 지나서야 풀립니다. 같은 포로 처지라 경계심보다 동정심이 점점 쌓인 결과였습니다. 둘 사이의 경계심이 풀리고, 이윽고 최척이 자신이 살아온 얘기를 털어놓게 되자, 그제야 부자는 서로를 확인하고 알아보게 됩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가만이 지켜만 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포로소장입니다. 그는 원래 조선 땅 평안도 삭주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조선어를 하며 나타난 후금 포로소장 앞에서, 최척과 몽석 부자는 놀라 자빠질 지경입니다. 두 조선인에게 포로소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겁내지 마라! 나도 조선 땅 삭주 사람이야. 토병土兵이었지. 삭주 부사가 어찌나 괴롭히는지 그 고통을 견딜 수 없어 온가족을 데리고 오랑캐 땅으로 들어왔다. 벌써 십 년이 넘었지. 오랑캐들은 성격이 소박한 데다 혹독한 행정도 없다.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왜 꼭 고통뿐인 고향에 얽매여야겠느냐?”

그러고는 두 사람의 사연을 안 이상 놔주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군법 위반에 따른 처벌을 감수하기로 합니다. 나아가 자신의 아들을 시켜 탈출로까지 안내하게 합니다.



보시는 대로입니다. 옛 평안도 의주와 창성 사이에서 압록강 너머로 만주를 바라보는 땅이 삭주입니다.
위에 나온 토병이란 상시 동원되는 예비군입니다. 이들은 군복, 군량, 무기까지 자비로 조달해야 합니다.

조선에서도 평안도는 함경도와 함께 변방입니다. 평안도와 함경도 수비 병력은 늘 이민족과 싸우며 지냅니다. 소총이 도입된 뒤로는 화약 무장과 총질까지 부담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부역과 조세가 덜하냐면 그것도 아닙니다. ‘홍경래의 난을 기억하시겠지요. 평안도(함경도 사람들도 그렇고) 사람들은 2등 신민으로, 만만한 수탈 대상입니다.

상시 동원, 자비 부담의 병역, 수탈, 2등 신민의 삶... 그렇죠, 하필 고통뿐인 조선인으로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조선인의 삶을 포기하고, 후금인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어떻게든 고향 조선으로 가려는 최척네에게는 마지막 인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여기서 마지막으로 딱 한 번 조선인입니다. 앞으로 조선인으로 살 여지는 없을 것만 같습니다.

인생은 아침이슬 같은 것이다. 왜 꼭 고통뿐인 고향에 얽매여야겠느냐?"

원문은 이렇습니다:
人生如朝露, 何必局束於捶楚鄕乎?”

운율감 대단한 말도 아니고, 수사가 빛나는 표현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변방 국적 이탈자의 입에서 나올 법한 평이한 문장입니다. 그런데 이 문장이, 한미자유무역협정 앞에서, 의료보험민영화 앞에서, 이마트 피자 앞에서, 기업형수퍼마켓(SSM) 앞에서 자꾸 떠오릅니다. 여기서 그만 살고 딴 데 가서 살 자리 찾으라고, 누가 자꾸 등을 떠미는 듯한 요즈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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汝宗葬于是, 汝安歸之. 惟永寧!”
네 핏줄들이 여기 묻혀 있으니 너도 마음 놓고 돌아가렴. 길이 편안하기를!”

위 한 줄은 한유(韓愈, 768~824. 자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 는 한문공韓文公)가 사십대에 열두 살짜리 딸 한나韓挐를 저세상에 먼저 보내고, 묘구덩이에 부친 마지막 이별의 말입니다. 자신이 딸 한나를 잃게 된 사연과, 한나를 가매장했다가 가족묘지로 이장한 사연까지 기록된 글 <여나광명병서女挐壙銘幷序>의 핵심인 이 바로 이 한 문장이고, 문장 전체의 맨 마지막 문장입니다.

한유 하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떠올리시겠지요. 흔히 동아시아 한문문학사에서, 고문운동의 대표자 여덟을 꼽을 때 한유는 그 맨 앞에 자리하는 인물입니다. 한유는 당나라의 한유韓愈, 유종원柳宗元, 송나라의 구양수歐陽修, 소순蘇洵, 소식蘇軾, 소철蘇轍, 증공曾鞏, 왕안석王安石 이상 여덟 가운데 맨 앞이고, 이 순서가 일반적으로 당송팔가문唐宋八家文편차의 기본 얼개가 되게 마련입니다.

이상은 죽어서 받은 대접이지만 한유는 살아생전에 대단한 문벌 출신도 아니면서도 제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서서는 당제국의 낭관郎官[황제를 수행하고 황제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자리], 국자좨주國子祭酒[국립대학 총장], 경조윤京兆尹[서울시장] 등 고위직을 두루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52세에 귀양과 다름없는 좌천을 당하고 아끼던 딸 한나마저 잃게 됩니다. 당나라 헌종이 부처의 손가락뼈를 궁 안으로 들여와 예배하자 당시 낭관이었던 한유는 저 유명한 <논불골표論佛骨表>를 헌종에게 올립니다. 헌종은 이 글을 읽고는 한유를 거의 죽일 뻔했습니다. 다행히 고위직에 있던 사람들이 힘써 말린 덕분에 귀양과 다름없는 조주 좌천으로 일을 막았지만요. 그때의 사연을 <여나광명병서女挐壙銘幷序>를 통해 볼까요.


한나는 내 넷째 딸이다
. 총명했으나 일찍 죽었다.
내가 소추관(小秋官_낭관의 별명)에 있을 때, 천자께 부처는 오랑캐 귀신이며 그 논리가 세상을 어지럽히니 일절 끊어 퍼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양나라 무제가 부처를 섬기다 신하인 후경에게 시해된 예를 들었던 것이다.
천자께서는 그 말이 상서롭지 못하다 여기시어 나를 조주로 내치셨다. 조주는 한나라 때로 치면 남해쯤 되는, 그러니까 게양과 같은 오지였다.
내가 길을 떠나자 담당 관리는 죄인의 가족을 서울에 머물게 할 수는 없다고 판단해 마구 몰아냈다. 열두 살짜리 한나가 병으로 누워 있을 때였다.
한나는 갑자기 아비와 이별한 마당에 수레가 요동치며 도로를 달리니 몸의 자연스러운 대사를 놓쳐 상의 남쪽 층봉역에서 죽었다. 곧 길 남쪽 산 밑에 묻었다.
5년이 지나서야 나는 경조윤으로 복직되었다. 이때 비로소 집안 자제들과 동서들을 시켜 이장하여 하남의 하양 한씨 가족묘지에 한나의 유골을 보내 장사지냈다.
하나는 원화 14(819) 22일에 죽었다. 이장해 가족묘지에 보내기는 장경 3(824)이다. 장례식은 같은 해 1111일에 치렀다.
그 명은 다음과 같다:

네 핏줄들이 여기 묻혀 있으니 너도 마음 놓고 돌아가렴. 길이 편안하기를!”
(汝宗葬于是, 汝安歸之. 惟永寧!)
-한유, <여나광명병서> 전문


중세는 혈연과 지연에 인간의 좌표와 위상을 설정합니다
. 개인은 아무도 아닙니다. 한 사람은 반드시 아무 집안의 누구입니다. 아울러 어디서 왔음곧 고향을 밝힐 수 있을 때에만 정체가 분명합니다. 핏줄과 고향을 전제조건으로 인격을 부여받는 사람, 중세인은 그런 사람입니다. 하여 길바닥 죽음은 상서롭지 못합니다. 온전한 죽음이란 반드시 고향 땅 가족묘지에 묻히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어쩔 수 없이 그랬다 해도, 길바닥에 가매장했다는 것은 딸을 버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한유가 중앙에 복귀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란 딸의 가족묘지 이장 말고 또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네 핏줄들이 여기 묻혀 있으니의 마음을 헤아리시겠지요?
드디어 가족묘지에 마련한 묘구덩이가 열리고, 저세상으로 가는 정문을 찾은 딸에게 한유는 마음을 놓으라고 합니다. 이는 한유 스스로를 위로하는 말이기도 하겠지요.

원문이 번잡해 일일이 싣지 못했으나 한나를 이렇게 이장해 묻기까지를 써 내려간 단문과 짧은 글 호흡의 행간에는 이런 사내가 보입니다.
자꾸 눈물이 나서 구구절절 쓰지는 못하겠으니, 얼른 짧은 문장 짧은 문단으로 저간의 사정을 기록하고, 남들 보는 데서는 먼저 간 딸에게 공식적인 마지막 인사를 전하고, 얼른 돌아서서 드디어 남몰래 울려는 사내.

살아생전에 제 글재주로 벼슬길을 돌파한 사내, 낭관에서 국자좨주에 경조윤까지 지낸 사내, 죽어서는 고문가의 맨 앞에서 대접받는 사내가 보여주는 자연스레 침통한 한순간이 이렇습니다. 그가 를 논하고, ‘스승의 길을 논하고, 역사의 정통을 따지고, 신비주의와 투쟁할 때보다, 바로 이순간의 그가 제게 더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군말_‘고문고문운동
동아시아 한문 문학사에서 시의 전범은 당시唐詩였습니다. 그렇다면 산문의 전범은? 단연 고문古文입니다. 이때 고문이란 그저 예스러운 글을 일컫는 말만은 아닙니다.

중국 역사에서 삼국시대 오
나라 이후 당나라 이전 시기를, 보통 오나라에서 수 나라에 이르는 여섯 개 왕조가 명멸한 시대라 해서 육조시대라고 합니다. 이 육조시대 이래 산문의 주도권은 병문과 과문이 잡고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병문騈文4자구와 6자구 사용의 까다로운 규칙이 있는 문체입니다. 과문科文은 과거 시험 답안에서 유래한 상투화된 규범을 따라가는 문체입니다. 병문이건 과문이건 수사만 현란해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수사rhetoric란 워낙은 설득력에 방점이 찍혀야 하겠지만 말과 글이 한번 자기최면의 호랑이 등을 타고 보면, 설득력은 어느새 스러지고 현란과 현학만 남는 모양입니다. 그때 식자들은 병문과 과문의 까다로운 규칙’ ‘상투적 규범지키기가 대견하다못해, 그만 설득력에는 눈을 감고 말았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동아시아 한문 문학사 속의 고문이란 소통하는 글의 대화적 상상력과 생명력을 잃은 병문과 과문에 맞서 선진先秦시대 및 진한秦漢시대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겠다고 작정한 산문입니다. 고문은 평이하고 보편적인 어법과 논리적인 글쓰기를 추구하며, 문장의 자연스런 전개와 독창적인 표현을 염두에 둡니다.

또한 고문은 유학 부흥 운동과 짝을 이루는 문체이기도 합니다. 당나라 현종은 713년부터 741년까지 28년간만은 나라를 잘 이끌었지만 한순간에 자기 관리에 실패했고(양귀비는 관리 실패를 반증하는 아이콘이겠지요), 당나라는 이민족 침략을 포함해 안녹산과 사사명의 난 등의 난리를 겪게 됩니다. 이런 가운데 지방 군벌은 전국에 할거해 농민과 농촌을 직접 지배합니다. 이렇게 되면 황제와 수도를 정점으로 하는 지배 질서가 기우뚱하게 되지요.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일단의 식자들은 지배 질서를 바루기 위해서라도 유학을 다시금 적극적으로 불러내게 되었고, 그 표현의 우군이 될 만한 고문이 유학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당대 위기에 대한 처방이 사상에서는 유학 부흥 운동(송나라의 성리학으로 귀결되는)으로, 문학에서는 고문 운동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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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베로나에서 태어나다.
노래 잘하고, 오페라 좋아하는 삼촌 덕분에 싸구려 자리일망정 음악회는 놓치지 않는 어린 시절을 보내다.

실업 학교 학생 때 아레나디베로나 극장에 견습 나갔다가, 학교 마치고는 정식으로 극장에 취직하다. 취직해 아레나디디베로나 극장의 의상실 또는 영선실 일꾼으로 살다.
극장 일꾼이므로 극장의 리허설, 드레스리허설을 얼마든지 보며 살다. 거의
매일 모차르트, 베르디, 푸치니, 벨리니, 레온카발로, 차이콥스키, 무소르그스키의 드라마를 보고 듣다. 본공연보다... 역시 '리허설이 짱!'이라 여기다.
점심은 언제나 샌드위치와 차 한 잔이 전부. 가다, 잠깐 쉬는 틈에 재봉틀질을 멈추고(또는 무대의 나무 마루 깁느라 하던 망치질을 멈추고) 낙서하듯 악보를 그리다.
그러던 어느 날 음악감독 눈에 띄다. 노감독님 보시기에 이 젊은 일꾼이 엉성하게 엮은 선율이 제법 그럴듯하다. 젊은이는 사람좋은 노감독 덕분에 자작곡 몇 곡을 무대에 올리기도 하다.
재봉틀질 또는 망치질을 하다가, 대단한 작
곡가는 아니지만, 그 동네에서 인기 있는 노래를 쓴 사람으로 기억되는 일생을 살다가 가다.
동네 결혼식에서는 아직도 그가 쓴 춤곡이 울려퍼지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진 꿈의 줄거리다. 이 꿈 꾸다 일어난 새벽 잠결에 내 귀에는 푸치니의 <라보엠> 제1막에서 로돌포와 미미가 처음 만나 주고받은 노래가 울려퍼졌다.
노래가 울려퍼질 때, 꿈속 풍경은 아레나디베로나의 탁트인 객석이 아니라 화재 뒤 수리를 마친 마린스키극장 천장이 나와서 좀 웃기긴 했지만.


이쯤되는 '낭만적인' 꿈은, 그러나 요즘은 도통 꾸지 못한다. <라트라비아타>나 <라보엠>이나 <예브게니 오네긴>의 한 자락을 귓가에 듣다 일어나는 아침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아니 꿈결에, 대놓고 '정치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쇼스타코비치 음악을 듣기도 요즘 쉽지가 않다.
대신 얻은 꿈은 다큐멘터리다. 제2차세계대전 뒤의 기괴한 전후처리를 다룬 다큐멘터리가 꿈에 흐르곤 한다.




꿈에, 제2차세계대전 뒤 소련과 미국은 지구를 양분했다. 여기까지는 오늘날의 역사책과 같다. 그러고는 바로 대체역사가 펄쳐지다.

꿈에, 1945년을 다 보내고 1949년이 다 지도록 중국은 공산당 정권과 국민당 정권 어느 쪽도 대륙 전체를 석권하지 못하다. 밀고당긴 끝에 양자강 이북에는 모택동을 주석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정권이, 양자강 이남에는 왕정위 정권의 잔당과도 연합한 장개석 총통의 중국국민당 정권이 들어서다.

꿈에, 일본 열도는 일단 미국 손에 들어가다. 단 사할린과 홋카이도는 소련 차지였다. 동경의 매카서 사령부는 오키나와에 미국 괴뢰정권을 수립하다. 명목상으로는 이때 오키나와는 일본에서 '독립'해 독립국이 되다.

꿈에, 괴뢰국 오키나와의 독립을 본 소련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오르다. 소련은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묶어 오키나와와 같은 소련 괴뢰정권을 수립하다. 오키나와, 그리고 사할린과 홋카이도가 빠진 일본은 천황제가 복귀하다.

꿈에, 한반도는 내전을 거쳐 제주에서부터 압록강과 두만강까지는 미군 지원을 받은 우익이 석권하다. 매카서 사령부는 애초부터 이왕가 복귀를 희망하다. 본국도 매카서 사령부에 그만한 권한을 주다. 이왕가가 복귀하고, 내각 총리에 이승만이 앉다. 다른 반쪽은? 내전 패배 끝에 김일성, 김책, 최용건, 무정에서부터 여운형, 김규식, 허헌, 조소앙 들은 짐 싸 압록강을 넘다. 그리고 북중국과 소련의 양해 아래, 북중국 조선족 자치주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수립하다. 이때 수립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선 조선족 자치주장 주덕해가 김일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다.
 
꿈에, 어디로든 기어들어가기 애매해진 전쟁범죄자, 일제 부역자 잔당들은 남중국으로 모여들다. 조선, 대만, 나치스에 동조했던 북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세력까지 남중국의 수도 남경에 집결하다. 남중국 정권 초대 문화상에 조선인 박태원 취임하다. 조선에서는 왕이었던 두 총독 미나미 지로, 아베 노부유키 들도 이곳에서 군사, 외교 고문으로 살며 1960년대까지 천수를 누리다 가다. 남중국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 제국주의 잔당들은 운남에서 자치주를 선포하고, 예서 아편을 가꿔 프렌치커넥션을 이루다.


꿈에, 만추리아, 만주, 동북삼성 등 지명도 복잡한 그곳이 문제의 핵심이 되다. 남중국은 미군의 지원에, 일본과 프랑스 제국주의 잔당까지 끌어모아 화북 진공과 만주 진공을 꿈꾸다. 북중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방패로 화북 방어전을 펼치다. "북조선의 비열한 행태가 만주의 안전을 위협하고, 만주가 떨어지면 한반도가 순망치한이라", 대한민국 이승만 총리는 세계평화의 한반도의 안전을 위해 화북 진공에 참전하다.

꿈에, 이렇게 어지러울 때를 틈타 티벳은 영국 괴뢰국으로 독립하다. 몽골은 내외몽골 없이, 한 덩어리로, 소련 괴뢰국으로 독립하다. 베트남은 남북국 상태로 오늘까지 서로 으르렁거리다.

꿈에, 남중국의 화북 진공이 제3차세계대전으로 번지다. 남북한은 이들 사이의 스파이 국가로서 소련과 미국의 원조를 받아 먹고살다. 먹고는 살다. 그냥 이렇게 근근이 먹고살다.
 


꿈에, 베로나에 살 때는 극장 의상실의 예쁜 처녀와 연애 사건도 일으켰건만, 다큐멘터리 영상과 연대기만 흘러가는 꿈속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꿈에, 사람은 하나 없는 시간이 흐르고서는 몹시 찜찜한 채로, 개운치 못한 잠에서 깨야 했다.

이즈음 '낭만적인 꿈' 따위는 휘발하고 없다.
다만 기괴할 뿐이며, 그저 무서울 뿐인 꿈속을 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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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에 걸쳐 동북아시아를 피바다로 내몬 임진왜란. 쉬운 대로 통계만 뒤져도, 이 전쟁 전 170만 결에 이르던 조선의 등록된 경지 면적이 전쟁 후에는 54만 결로 줄었으니 전쟁을 겪으며 이 땅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는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지 모릅니다. 당시 실기류의 일반적인 기록이 전하는 참혹함은 이렇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태연히 잡아먹다.”
제 자식은 차마 잡아먹지 못해 남의 자식과 바꾸어 잡아먹다.”

국제정세도 크게 변합니다. 대륙에서는 왜란이 명청 왕조 교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을 장악하는 계기였습니다. 얄궂은 것은 그 참화의 무대였던 조선의 사정입니다. 무너졌어야 할 왕조와 지배체제는 큰 타격을 입고서도 제 몸을 보존했고, 연이어 호란을 겪으면서도 체제를 다져 그 뒤로도 300년 넘게 왕조를 유지합니다. 그러나 왜란이 우리 역사의 한 결절인 것은 분명합니다. 왕조와 지배체제는 유지되었지만 인민과 지식인의 동향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지고 맙니다. 결정적으로, 인민은 직접 전투를 치르고, 외국군을 상대하면서 스스로의 힘을 자각하게 되었죠. 일단의 지식인 또한 이런 흐름을 틈타 변혁을 꿈꾸기도 합니다. 어수선하고 불온한 기운이 팽배한 가운데 우리 역사와 문화 각 부문도 사뭇 변화의 물결을 타게 됩니다.

문학사만 떼놓고 볼까요. 17세기에 들어간 한국문학사는 이제 본격적인 소설의 시대로 접어든다고 해도 되겠죠. 이때도 왜란은(이어진 호란을 포함해서) 분명 분기점입니다. 이는 곧 서사하고자 하는 욕구’(1)앞뒤 사정을 조리 있게 이야기하기 2)눈에 보이는 이야기 줄거리의 이면을 자세히 설명하기 3)적극적인 대화 지향이라는 뜻에서)의 폭발이라고 할 수 있겠죠.
시도 당대의 충격에 직면해서는 서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아주 강하게 드러냅니다. 왜란과 호란을 모두 겪었던 문인 벼슬아치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시 <415[四月十五日]>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안눌은 1607년 동래로 부임합니다. 동래는 왜란 당시 참혹한 전투를 겪은 곳입니다. 동래부의 군민과 그 지휘관이었던 동래부사 송상현의 분전기는 오늘날까지도 유명하지요. 바로 그 참혹한 역사의 현장에 벼슬 살러 온 이안눌은 아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써 남깁니다.

 

四月十五日 4월이라 보름,
平明家家哭 이른 아침부터 집집에서 울리는 곡소리에
天地變蕭瑟 천지도 변해 으스스한데
凄風振林木 찬바람은 숲속 나무를 흔든다.
驚怪問老吏 놀라 웬 곡성이 저리 슬픈가?”,
哭聲何慘怛 늙은 아전에게 물으니 대답한다.
壬辰海賊至 임진년(1592)에 왜놈들이 쳐들어왔고
是日城陷沒 [16년 전] 오늘이 바로 동래성이 함락된 날입니다.
維時宋使君 그때 송 사또[당시 동래부사 송상현]께서는
堅壁守忠節 방어를 굳게 하고 충절을 지키시어
闔境驅入城 온 고을 사람들 성안으로 들어왔으나
同時化爲血 한 번에 피바다가 되고 말았습니다.
投身積屍底 쌓인 시체 밑에 숨어
千百遺一二 목숨을 건진 경우는 천 명 백 명 중에 한둘이나 될까요.
所以逢是日 이 때문에 그날이 돌아오면
設尊哭其死 제사상을 차려놓고 망자를 위해 통곡합니다.
父或哭其子 아비가 아들 때문에 통곡,
子或哭其父 아들이 아비 때문에 통곡,
祖或哭其孫 할아비가 손자 때문에 통곡,
孫或哭其祖 손자가 할아비 때문에 통곡,
亦有母哭女 어미가 딸을 때문에 통곡,
亦有女哭母 딸이 어미 때문에 통곡,
亦有婦哭夫 아내가 남편 때문에 통곡,
亦有夫哭婦 남편이 아내 때문에 통곡,
兄弟與姉妹 형제며 자매가
有生皆哭之 살아남은 자가 있다면 모두 통곡합니다.“
蹙額聽未終 얘기느 다 듣지 못했는데 얼굴은 찌푸려지고
涕泗忽交頤 눈물은 어느새 턱으로 굴러 떨어지는데
吏乃前致詞 아전이 다시 말을 꺼냈다.
有哭猶未悲 곡해 줄 사람이나 있으면 아직 슬프지도 않게요.
幾多白刃下 번뜩이는 칼날 아래 온 가족이 몰살당해
擧族無哭者 곡할 사람조차 하나 없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데요!”
-이안눌, <415> 전문



                                             [사진_이형석이 작성한 동래 전투 개황 일부. <임진전란사 상>에서]


위 작품은 전하고자 하는 사연이 사또와 늙은 아전의 대화라는 액자 안에 담겨 있습니다
. 대화라는 상황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는 한층 극적인 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어 참상은 혈연을 나타내는 낱말에 의해 구체화됩니다.
아비, 아들, 할아버지, 손자, 어미, , 아내, 남편, 형제, 자매에 이르는 혈연은 중세 인간의 근원적인 삶의 형식이라는 점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들이 지상에 없다는 것은 당대의 삶이 완전히 파멸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아예 온 가족이 저세상으로 가, 곡해 줄 사람조차 지상에 남지 못한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데요!(幾多白刃下/擧族無哭者)

이안눌은 구구한 진술은 싹 빼고, 반복되는 통사 안에 한눈에 들어오는 어휘를 최대한 빠른 호흡으로 제시하며 이 긴 시를 한 편의 이야기로 이끌고 있습니다. 아전의 마지막 진술을 이끄는 액자 보여주기가 끌어올린 시의 형식적 완성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듣는 쪽에서 듣고 울었다라고 끝낸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전하는 상대를 보여줌으로써 대화 상황이 또렷해지고 작품의 입체감이 한결 살아납니다. 통곡, 통곡, 통곡 뒤에, 통곡조차 할 수 없는 상황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진술 또한 함축과 긴장을 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제목 ‘415입니다. 이렇게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한시 제목 다른 데서 본 적 있나요.

여기서 ‘415은 역사의 시간, 그 흐름을 한 장으로 집작하고 있습니다. 시니까 흐름도 한 장에 담아야겠죠. 그러나 마음의 추이는 이미 서사에 압도되었습니다. 엄청난 사건 앞에서 시는 이렇게 변하게 마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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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서사, 드디어 출발하다.
열린 협동학제 학교를 꿈만 꿨는데 누군가는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 이만큼 애를 썼다.
부러운 추진력이고, 고마운 끈기다.
고담준론이야 쉽지, 하나 열매는 손에 흙 묻히고 등에 땀 밴 사람이 있을 때에만 거둘 수 있는 법 아닌가.
개교식도 이렇게 멋지게 준비하다니... 마음과 생각과 손과 발을 낸 모든 분께 경의부터 표한다.

출발, 백하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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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안녕하세요. 크로스 지킴이 윤민용 기자입니다. 처음 이곳을 통해 인사드립니다. 
그동안 KHross와 함께하는 필진들의 블로그 대공사를 하느라 바빴습니다. 앞으론 자주(?) 등장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크로스 http://khross.khan.co.kr/ 에 글을 쓰시는 분들은 경향신문 편집국 기자들과 사외 필진 블로거로 구성돼 있습니다. 이름이 익숙한 분들도 계시겠지만, 낯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어떤 분들은 필명을 쓰셔서 '정체'가 사뭇 궁금한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필진 여러분께 이메일로 공통된 자기 소개 질문을 보내드린 뒤 받은 답글입니다. 

소개하는 순서는, 제게 답장을 보내주신 순서대로~~

(나사못회전님은, 제일 늦은 줄 아셨겠지만, 가장 빨리 답장을 보내주셨다는. 
재밌게 자기 소개를 해달라고 필진들을 압박했더니, 부담을 느끼신 분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ㅠ.ㅠ.)




먼저 '나사못회전의 몽상으로 가득한 쪽방'을 운영하는 나사못회전 님 입니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
( 주소 일일이 치려면 힘드니까, 어서 누르시고 즐겨찾기 혹은 rss리더기로 등록해두세요~ ^^ )






-간략하게 자기 소개를 해주세요.

선술집 주인이 꿈인 사람. 십 년 넘도록 월급쟁이 생활을 했지만 선술집 낼 만큼의 돈은 모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가슴이 좀 아픕니다. 누가 투자 해준다면, 얼씨구!할 판입니다.

-블로그는 처음인지? 이전에 쓰던 개인 블로그들과는 어떻게 다르고 또 비슷한 가요?

미디어몹에서 처음  제대로 된 블로그를 시작했어요.
민비(저한테 명성황후는 없습니다. 제 입장의 한구석이 되겠군요.), 황현, 정기룡, 이안눌 같은 역사 속 인물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썼습니다. 내가 보낸 한순간,그때의 느낌을 정리해 두고 싶다는 생각에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내용으로 블로그를 채워갈 예정인지요?

말 그대로 “한순간을 정리”해 두고 싶은데 그 순간이 대개 시, 음악, 몽상과 잇닿아 있을 듯합니다.

-블로그의 이름과 주소에는 담긴 뜻을 알려두세요.

나사못회전"은 벤자민 브리튼의 오페라 <the turn of the screw>에서 왔습니다. 이 오페라의 원작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the turn of the screw>이고요. 이밖에도 브리튼의 오페라는 거의 다 좋아하는데, 특히 이 오페라가 좋아서 별명의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블로그를 만들고 난 뒤, 지난 한 달을 돌이켜본다면?

한 달 동안 글 한 편 올리기가 만만찮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고 있죠.


 
-블로그에 임하는 자세라면?

데스크탑 모니터 들여다보는 자세 있잖아요. 그거 빼면 뭐 다른 자세가 나오나요?


-
개인적으로 크로스의 다른 블로그 중 관심이 가는 블로그, 혹은 가장 재밌게 읽었던 포스팅은?

서민의 기생충 같은 이야기( http://seomin.khan.kr ) 는  입맛에 맞아요.

선대인(http://unsoundsociety.khan.kr/), 제윤경(http://gitanzali.khan.kr/) 두 분 글도 알차고 재밌는데...말하자면 ‘가장 재밌게’랑은 좀 거리가 있죠.
 오페라로 치면 존경은 베르디한테 가도, 친구 삼고 싶은 쪽은 푸치니입니다. 설명이 되려나


-크로스 오픈 이후 둘러본 감상은? 그리고 개선할 점은?

꽤 유명한 블로거의 블로그도, 오랫동안 경향에 몸담은 분들의 블로그도 조회가 많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경향신문 지면에서 더 많은 홍보를, 또는 지면과 인터넷의 결합을 시도해보면 어떨까요? 


-블로그 관리와 관련해서 크로스지기에게 바라는 점은

...없어요... 한 일년쯤 지나면 생기려나?

 

나사못회전 님의 알흠다운 목소리가 듣고 싶으시다면, 일요일 오전 마포FM에 접속해 보세요.
일요일 오전 10-12시까지  <나사못회전의 일요일 아침에>를 진행하십니다. 
다시듣기는 여기에서: http://www.mapofm.net/bbs/nasa.php
카페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
cafe.naver.com/sundayfriend

트위터에서는  
@iltrittico 를 찾으세요~ 
전 개인적으로 유자차 형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유는 트위터를 방문해보시면 알거예요. 쿄쿄




**크로스지기가 약간 덧붙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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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자전거 끌고 밖으로 나가다.
바라본 하늘은 곱게 푸르다
. 내 눈이 그저그렇고 수중에 똑딱이뿐이었으니 망정이지 혹여 내 눈이 사진가의 눈이고 수중에 제대로 된 사진기가 있었다면 종일 하늘을 바라보고, 종일 하늘을 찍어댔을지도 모른다. 하늘이 자꾸 바라보이도록 좋은 때, 그저 봄에 이어 다시금 미친흥이 절로 나는 계절에 문득 떠올릴 만한 노래가 ‘소년행少年行’이다.

소년행은 한시의 시체詩體인 ‘악부樂府’ 가운데 하나다. 악부는 원래 한나라 무제 때 설치된 국가 기관이다. 주된 업무는 의전에 쓰는 음악을 관리하는 것이었지만 민간의 노래를 채집하고, 채집한 노래를 궁정 음악에 흡수하는 일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악부 덕분에 정리된, 민간의 가요 분위기가 짙은 시체詩體를 아예 ‘악부’라 부르게 되었다. 국가 기관의 업무가 시 갈래 하나를 나은 셈이다.

악부는 엄격한 형식미를 강조하는 정통적인 시
(특히 근체시近體詩)에 견주어 형식, 율격, 내용 들이 자유롭다. 더우기 소년행은 젊은이들이 의리를 목숨보다 귀중히 여기는 모습, 호방한 기개를 뽐내는 모습, 젊은 혈기로 좋은 시절을 거침없이 즐기는 모습 들을 노래하는 시이고 아울러 시 이전의 야성을 간직한 노래다. 무엇보다 소년행의 ‘소년’은 아동의 탄생 이전, 청소년 탄생 이전의 ‘젊은이’이다. 그것도 가장이라거나 지아비라거나 어버이의 의무 따위는 도무지 없는 미혼의 젊은이다. ‘세상아 덤벼라! 내가 간다’ 할 수 있는 젊은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五陵少年金市東 오릉 젊은이들 금시 동쪽을 지나가매
銀鞍白馬度春風 은안장 얹은 백마 타고 봄바람 헤쳐 나간다
洛花踏盡遊何處 져버린 꽃 다 밟으며 어디서 놀려는가
笑入胡姬酒肆中 웃으며, 오랑캐 계집[胡姬] 있는 술집으로 들어간다
-이백, <소년행> 전문(전체 두 수 가운데 둘째 수의 전문)


遺却珊瑚鞭 산호 채찍 잃고 나니
白馬驕不行 백마가 건방져져 나아가지 않는다
章臺折楊柳 장대에서 버드나무를 꺾는
春日路傍情 봄날 길가의 정경
-최국보, <소년행> 전문


이백 <소년행>이 내뿜는, 진 꽃잎 아무렇찮게 즈려 밟고 내닫는 거침없는 기운에 따로이 무슨 군말이 필요할까. 최국보 <소년행>이 단 방으로 포착한 젊음의 연출력에 다시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군말도 설명도 주석도 참고자료도 필요없는 노래가 소년행이다... 하고 보니 골방에서 어휘만 조합해 쓴 <소년행>도 떠오른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少年重然諾 소년은 뱉은 말을 소중히 여기고
結交遊俠人 협객과 벗이 되지.
腰間玉轆轤 허리에는 옥녹로 드리우고,
錦袍雙麒麟 쌍기린 수놓은 차림.
朝辭明光宮 아침에 명광궁을 떠나
馳馬長樂坂 장락궁 언덕길에 말을 달린다.
沽得渭城酒 위성의 술을 사 취하니
花間日꽃 사이로 해는 저물어 간다.
金鞭宿倡家 금채찍 휘둘러 기생집으로 달려가 머물면
行樂爭留連 온갖 쾌락이 다투어 (소년을) 주저앉히지.
誰憐楊子雲 누가 양자운을 가련하다 했나,
閉門草太玄 문을 닫고 태현경을 엮는다.
-허난설헌, <소년행> 전문


은안장, 백마, 져버린 꽃, 오랑캐 계집 따위 말을 딛고 겅중겅중 뛰어 건널 수 이백의 <소년행>이나 산호 채찍, 백마, 버드나무, 봄날 따위 말을 딛고 겅중겅중 뛰어 거널 수 있는 <소년행>하고는 참 다른 허난설헌의 <소년행>이다.
말하자면...
옥으로 된 활대 모양 장식품’(옥녹로)이나 ‘쌍기린 수놓은 옷’이야 ‘은 장식 올린 안장’, ‘산호 장식 올린 채찍’이랑 맞잡이라 하겠지만, ‘오랑캐 계집 있는 술집’이나 ‘길가’에 견주면 ‘명광궁’ ‘장락궁 언덕길’ 같은 말은 지나치게 커서 아무것도 붙들 수 없는 어휘로만 다가온다.

명광궁은 한나라 무제가 세운 궁으로 기록에 따르면 빛나는 옥장식
, 금계단 따위가 대단해서 ‘밤낮으로 환히 빛났다[晝夜光明]’고 한다. 송시와 당시 속에서 자주 나오는 고유명사이기도 하다. 또다른 고유명사인 ‘장락’은 장락궁을 가리키는데, 이 궁은 중국 한나라가 장안에 도읍한 초기에는 조회를 하던 곳이고 한나라 제2대 황제 혜제 이후로는 황제의 모후母后를 모시는 궁이 되었다. 미앙궁과 함께 한제국 수도의 위엄을 대표하던 공간이다.
소년들이 나라의 최고위들만 출입하는 명광궁, 장락궁을 들락거릴 리는 없을 테고, 다만 그만큼 화려한 환락가를 은유하려는 뜻이겠지만 말의 덩치가 지나치게 커서 오히려 성근 시어 탓에 소년행의 분위기는 눈 큰 그물 새로 고기 빠져나가듯 새 나가 버렸다.

위성’ 또한 소년행에서는 눈 큰 그물이 아닐까 싶다. 위성은 진나라의 수도였던 함양의 동쪽에 자리한 곳으로 장안을 마주보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 당나라 때는 당제국 서북쪽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여기서 전송하며 이별의 눈물을 뿌리고 또 이별주를 나눴다고 한다. 아예 이별 노래로 ‘위성곡渭城曲’이라는 악부가 있을 정도다.
허난설헌에게 참고가 됐을 구절은 어떤 것일까. 당나라 시인 왕유王維의 시구 “위성의 아침 비 가벼운 먼지를 적시니 객사엔 푸르디푸른 버들빛 새로워라”[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 당나라 시인 잠삼岑參의 시구 “위성 가에서 말술 마시고 목로집에서 취해 곯아떨어질 만하네”[斗酒渭城邊, 壚頭耐醉眠]는 유명한 구절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말이 너무 무거웠다. 왕유나 잠삼이 드러낸 곡진한 이별의 정은 소년들이 감당할 바가 아니다. 소년행을 빛낼 만한 지명이란 오릉, 금시, 장대(http://theturnofthescrew.khan.kr/13 참조) 따위 아니겠는가.

마무리에 쓴 양웅楊雄[자운子雲은 양웅의 자]<태현경太玄經>도 그렇다. 중국 한나라 때의 문장가인 양웅은 관학화한 유학과는 다른 분위기의 문장과 사상을 지녔던 인물이다. <태현경>은 육조시대 도가의 연원으로 평가받는 저서이다. 맥락으로 보면 젊은 날의 화려함과 문 닫고 도사리고 앉은 문장가의 결기가 대조되어 있지만, , 지나쳐라, 선진 사상이나 원시 유학까지 돌아보아야 할 시어란 소년행의 원래 발걸음에 비겨 지나치게 둔중하지 않은가.

곱게 푸른 하늘 덕분에 봄날의 미친흥을 다시 새기매 허난설헌 ‘골방의 이국취향, 골방의 낭만주의’가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http://theturnofthescrew.khan.kr/17 참조). 겪어 본 적도 없는 ‘소년 시대’를 제 방의 서가에서만 호흡하고, 그예 지펴 옛 시집에서 시어를 수집하고, 날빛 빛나는 거리에서가 아니라 규방에서, 부르지도 못하고 다만 내리 쓴 ‘소년행’이라니.

허난설헌의
<소년행><강남곡>을 뒤집어놓은 데서 ‘깊은 슬픔’을 더하는 것만 같다(http://theturnofthescrew.khan.kr/18 참조).
미친흥조차 다만 읽기만 하다 세상을 떠난 시인을 생각하면 애틋해서 견딜 수가 없다.
하늘이 푸르디푸른 철의 이유 있는 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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