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일하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정양모 신부의 <로마서 풀이>란 책을 작년에 펴낸 적이 있다. 정 신부는 “팔리지도 않을 책을 내줘 고맙다”는 말씀을 거듭하셨다. 


정 신부는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성서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예루살렘 도미니코회 성서연구소에서 연구했으며, 광주 가톨릭대와 서강대, 성공회대에서 교수를 역임한 굵직한 성서학자였지만, 급진적 견해 때문에 한국 교회 안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아마도 결정적인 단서는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그분을 너무도 사랑하고 사모한 나머지 고대인의 어법으로 최고의 존칭을 붙여드린 것”이라는 발언 때문일 것이다.


성부 하느님과 성자 예수와 성령을 모두 하느님으로 여기는 가톨릭교리와 어긋나기 때문에, 어느 성당에서는 그분의 성서강의를 주교에게 밀고한 이가 있어 그만 강의 자체가 중단된 적도 있다. 정 신부는 어쩌면, 예수는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느님의 자비를 온전히 드러낸 ‘탁월한 우리들의 형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사랑하던 하느님이 사랑하는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을 사랑하며 그분 뒤를 따르는 사람들, 그분의 운명적인 십자가 죽음마저 나눠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 간 대화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있는 정양모 신부 (경향DB)


유·불·선을 섭렵한 다석 유영모처럼 전방위로 소통하는 신앙을 지니고 싶어한 분이 정 신부다. 납득할 수 있는 신앙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었던 사제다.


그런 점에서 정 신부의 글은 모두 예수가 연정(戀情)을 품었음직한 이들에게 보내는 연서(戀書)다. 자신이 깨달은 그 사랑을 나눠 갖자는 통문(通文)이다. 최근에 나 역시 산문집 한 권을 내면서, 먼저 책 제목 때문에 고심을 거듭했다. 처음엔 ‘날아라 사슴, 눈부신 가벼움’이라 붙였다. 마종기의 시에서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잡아 죽인다는 사나운 세상의 공식을 넘어서” “날아다니는 사슴의 눈물 고인 길 따라” 가라는 말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오십대에 들어 처음 내는 이 책을 생각하면, 인생이란 결국 세상과 사람들을 통해 영원한 그 무엇, ‘그분’이라 불러도 좋고 ‘그대’라 불러도 좋고 ‘너’라고 불러도 좋을 분을 찾아나서는 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 길 끝에서 그분을 만나고자 갈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문집 제목을 ‘너에게 가고 싶다’라고 지었다. 마침 눈 밝은 출판사가 있어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첫 번째 산문집이 <연민>이었으니, ‘연민으로 너에게 가고 싶다’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책을 내고도 두루 알릴 길이 없었다.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냈지만 날마다 쏟아져 나오는 신간서적에 묻혀버린 것 같다. 페이스북 등에 올려 보았으나, 결국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그분을 사모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 책을 접할 것이다. 이미 ‘너에게 가고 싶다’고 써서 연서를 우체통에 넣었으나, 수신자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이런 편지조차 쓸 수 없어 애달파 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글이란 마음 여린 이들의 대필(代筆)인지도 모른다. 내가 삶의 갈피에서, 그 어느 구비에서 만난 사람들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대신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국 교회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 인터넷 대안언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의 기사가 교회에 영약(靈藥)이 되길 바라지만, 어느 주교는 “뭐, 그런 언론이 다 있어” 하며 언론으로 취급해 주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교회개혁의 목소리가 불편한 사람들은 ‘반교회 언론’ 운운하며 무시하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그들도 우리 기사를 몰래 탐닉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온다. 정양모 신부처럼 공적으로 취급받지 못하더라도, 비공식적으로는 그들과 소통하고 싶다. 교회와 세상과 인간에 대한 나의 사랑, 우리들의 갈증을 나누고 싶다. 이처럼 나 역시 책을 통해서도 너에게, 그대에게, 그분에게 가고 싶다. 


서거정은 ‘독좌(獨坐)’라는 한시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홀로 앉아 오는 손님도 없이/ 빈 뜰엔 빗기운만 어둑하구나/ 물고기 흔드는지 연잎이 움직이고/ 까치가 밟았는가 나뭇가지 흔들리네/ 거문고 젖었어도 줄은 울리고/ 화로는 싸늘한데 불씨는 남아 있네/ 진흙길이 출입을 가로막으니/ 하루 종일 문을 닫아걸고 있으리.” 사방이 가로막힌 듯하여 홀로 적적한 상황, 습기를 잔뜩 머금어 소리가 날 것 같지 않은 거문고도 퉁겨보니 소리가 나고, 손에 대어보니 싸늘한 화로인데도 헤집어 보니 불씨가 살아있다는 말에 안심이 된다.


대단한 사람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시인 백석은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 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라 했다. 그 마음이 가랑비처럼 젖어들어 서로 행복한 웃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이따금 만나고 싶은 것이다. 그에게 가고 싶은 것이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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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끝자락에 자리한 집에서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도심으로 볼일을 보러 나갈 때면 ‘서울 백병원·평화방송’ 정류장에서 하차한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는 횡단보도를 건너 50m쯤 걸어가야 하는데, 그 짧은 길을 지날 때마다 나는 홀연히 감개무량하여 남들이 이상하게 보든 말든 벌쭉벌쭉 웃기도 하고 몽상에 잠기기도 한다. 


사람들이 예사롭게 스쳐지나가는 ‘마른내길’ 인근이 바로 조선시대 ‘건천동(乾川洞)’이라 불린 유서 깊은 동네다. 강릉에서 올라와 불행한 결혼을 하기 전까지 난설헌 허초희가 높고 아름다운 시흥을 돋우었던 본가가 여기 있었다. 걸출한 학자였으나 입신출세에 뜻이 없어 사직을 거듭했던 퇴계 이황이 임금이 부르면 마지못해 상경해 머물던 가택도 이 주변에 있었다. 


생전에 불운한 무장이었으나 사후에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장수가 된 충무공 이순신이 나고 자란 마을도 바로 이곳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의 숲에서 그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다. 옛길들을 지우고 들어선 고층빌딩과 자동차 경적의 소음 속에서 시간이 판가름한 오욕과 영광을 생각하면 절로 무연함에 젖게 된다.


서울에 남아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인물과 길을 통해 톺아낸 재미있는 책 한 권을 읽었다. 그런데 책에서 주로 다루는 경복궁 서쪽마을 ‘서촌’의 그림이 아무래도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워낙에 공간지각력이 떨어지는 길치인 데다 상경한 지 이십여년이 넘었지만 사대문 안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촌것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서울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의 서촌 골목길 풍경 (경향DB)


그래서 저자 중 한 사람인 김창희 선생이 길잡이가 되어 ‘북 트레킹’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손을 번쩍 들었다. 초여름 이른 더위가 아스팔트를 끓이는 날이었다. 바야흐로 내 발로 ‘한양’을 밟아보기 위해 운동화 끈을 단단히 조였다.


한국 사회의 무시무시한 변화와 발전의 속도에 걸맞게 서울 사대문 안에는 조선 초기에 지어진 건물이 단 한 채도 남아있지 않다. 기껏해야 조선 중기 한옥의 주춧돌이 빌딩들 아래 눌려 있는 정도다. 


하지만 집과 사람은 사라져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길을 따라 첩첩이 쌓인 시간 속을 걸었다. 안평대군의 옛집 비해당, 누상동과 옥인동 사이 골목길의 윤동주 자취집, 친일파 윤덕영의 벽수산장, 화가 이쾌대의 형으로 한국미술사와 복식사에 독특한 족적을 남긴 이여성의 옥인동 집, 중인문화의 절정인 옥계시사의 배경인 송석원, 해방 후 미 군복을 입고 조선에 돌아온 유일한 여성이자 파란만장한 인생사의 주인공인 앨리스 현의 원적지 등. 눈 밝은 길잡이가 없었다면 무심히 지나쳐버리고 말았을 풍경이었다. 비해당은 덤불에 가려져 그 어림만 더듬을 수 있고 윤동주의 자취집은 볼품없는 다세대 주택에 불과했다.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박노수 고택’으로 정비 중인 일부 지역 외에는 재개발로 흉흉하고, 앨리스 현이 머물렀을 것으로 짐작되는 집은 치킨집이 되어있었다. 시간은 무자비하다. 전쟁과 개발의 유사성은 그 파괴적 속성에 있다. 하지만 마음의 눈을 홉뜨면 폐허 속에서도 사라질 수 없는 역사가 보인다.


재미있는 점은 길잡이인 김창희 선생과 공저자인 최종현 선생이 가장 주목한 것이 서촌의 주인이었던 사람들의 ‘앵글’이라는 사실이다. 세상 만물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다. 비운의 왕자 안평대군은 권력 세계로부터 고개를 돌리고 북쪽으로 창을 내어 집터를 닦았다. 양반문화에 대응해 자신감에 넘친 중인들은 인왕산 기슭에서 남산을 정면으로 내다보는 넓은 시야를 확보했다. 그런가 하면 이완용보다 덜 유명하지만 더 악랄하기로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친일파 윤덕영은 조선왕조의 궁궐을 내려다보며 프랑스 귀족의 성을 본뜬 괴이한 대저택을 지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인 셈이다. 


2013년을 살아가는 우리의 시선은 어떠한가하는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역사는 아직도 개발의 불도저 앞에서 촛불처럼 위태롭다. 물론 주거환경이 심각한 상태에서 마냥 재개발을 미룰 수 없을 테고 모든 문화재와 유적을 발굴해 보존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박원순 서울시장을 비롯해 도시를 설계하고 행정을 담당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부수고 무엇을 세울 것인가를 결정하기에 앞서 단 한번만이라도 이 길을 직접 걸어보시라고 권유하고 싶다. 알면, 보면, 상상하면 달라지기 때문이다. 역사를 알면 수많은 이들이 앞서 밟았던 다리에 콘크리트를 발라버리는 실수를 반복하진 않을 것이다. 조상들의 소중한 식수원이었던 우물이 괴물이 튀어나올 듯한 암굴로 방치되는 것을 보면 마음이 아플 것이다. 우리가 서 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살고 사랑했던 옛사람들을 상상하면 비정한 도시가 정겨워질 것이다. 서울은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기 이전에 오래된 삶터이기 때문이다.



김별아 | 소설가 ywba69@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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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리출판의 목록에는 웰다잉 시리즈가 있다. 목숨을 받은 이상 누구도 피해갈 수는 없는 마당에 죽음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기획한 책들이다. <죽음준비학교> <애도> <해피엔딩> 등 열 권을 훌쩍 웃돈다. 이런 사정을 헤아렸는지 영화사에서 가끔 제의가 들어온다. 죽음을 다루는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티켓과 책을 교차 부조해서 마케팅을 하자는 것이다.


<엔딩노트>는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일본 영화였다. 주인공은 가짜 죽음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었다. 스크린에서 전개되는 죽음은 육체의 진짜 스러짐이었다. 회사에서 은퇴한 주인공은 제2의 인생을 설계할 꿈에 부푼다. 그러다 덜컥 위암 말기 진단을 받는다. 그는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원치 않아 얻었기에 농담 삼아 인생의 혹처럼 여긴다는 셋째딸은 영화감독이다. 그는 죽음 준비를 꼼꼼히 하고 ‘혹’은 아빠의 투병 생활을 촬영해 나간다.


영화 <엔딩노트> (출처' 네이버 영화')


죽음이라고 반드시 그리 무서운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모든 게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했는데 아무렴 죽음도 예외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죽음에 임박해서는 아내와 아들, 딸, 사위, 며느리, 손자들과 작별인사를 나눈다.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여기가 바로 천국이 아닐까? 어느 날엔 촬영하던 ‘혹’마저 떼어내버리고 부부만의 시간을 갖는다. 시들어가는 남편의 손을 잡고 뜨거운 눈물을 쏟는 아내의 고백. “당신이 이렇게 좋은 사람인 줄을 미처 몰라 미안해요.” 영화가 시작할 때 장례식 장면이 나온다. 약력 중에 이런 글씨가 보인다. 향년(享年) 65세. 처음 보는 단어가 아니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향년이라는 말이 새삼스러워졌다.


<아무르>는 프랑스 영화다.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던 음악가 출신의 노부부. 어느 날 아내가 깜빡 자신도 모르는 증세를 보인다. 아내는 혹 치매에 걸리더라도 병원에는 보내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한다. 상황은 점점 악화된다. 하나뿐인 딸은 어머니를 가끔 찾아와 말로만 어찌할 뿐 전적으로 보살필 수는 없다. 그에게는 그의 가정이 있는 것이다. 엄마와 딸의 어찌할 수 없는 거리. 남편은 자신에게 맡겨달라고 한다. 하루가 다르게 가라앉는 아내를 지켜보다가… 죽음은 참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인가 보다.


그동안 아내의 고개를 얌전히 받쳐주기만 하던 베개. 그 베개가 돌연 얼굴을 덮치면서 아내의 목숨도 끝장이 난다. 남편은 차마 아내의 목을 직접 조를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남편은 베개를 누르고 그 베개가 아내의 숨을 짓눌렀던 것이다. 그곳까지의 간격은 참 짧은가 보다. 맨발인 채 몇 번의 바둥거림만으로 아내는 그곳으로 건너간다. 편안하게 누웠던 침대에 막대기 같은 딱딱한 노구를 남기고.


제 65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미하엘 하네케 감독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AFP연합)


내가 너무 기대를 해서 그랬나.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지만 <아무르>에 그리 후한 점수를 줄 생각이 없다. 어떤 선택을 하려면 그에 합당한 과정이 있어야 할 텐데 남편의 행동에는 그게 약간 모자란 듯했다. 아무르, Amour. 사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사랑이 하는 것이라면 인생은 누리는 것이다. <아무르>에는 향년이 없는 것 같았다.


임진년 보내고 계사년 맞이하는 와중에 위에 소개한 두 편의 영화를 연달아 보았었다. 이상은 스크린 속의 이야기이다. 영화에서 참 흔한 게 죽음이듯 실제 현실에서도 죽음은 늘 우리 곁에 가까이 들러붙어 있다. 스크린 바깥에서 실제로 벌어진 영화 같은 죽음을 뉴스로 접했다.


“폐암 간병 5년. 중환자실 아내의 호흡기 뽑은 남편. 아내가 중환자실에 옮겨진 다음날 오후 심씨는 바지 주머니에 접이식 과도를 들고 중환자실로 들어갔다. 그는 두 간호사의 제지를 물리치고 영양 공급 튜브를 자른 뒤 인공호흡 튜브를 잡아 뽑았다.”(조선일보 2013년 1월22일자)


얼마 전에는 이런 기사도 있었다. “치매 아내 4년 돌보던 남편, 승용차로 저수지 빠져 동반자살. (…) 할아버지는 절대 요양원 안 보낸다며 할머니를 안심시켰다. 하지만 내년이면 90살이 되는 할아버지가 언제까지 할머니를 돌볼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남긴 유서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이 길이 아버지, 어머니가 가야 할 가장 행복한 길이다.”(한겨레신문 2013년 5월14일자)


영화와 현실이란 차이도 있었지만 일본, 프랑스, 한국에서의 죽음은 각각 조금씩은 달랐다. 언제고 돌이킬 수 있는 죽음이 없듯 어디에서고 이해 못할 죽음 또한 없었다. 현실 속에 영화는 있고 그 영화 바깥에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그런 현실의 둘레에 우리는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간다. 잠시는 살아 있지만 영화가 끝나듯 삶에도 엔딩은 있다. 나의 경우는 어떨까. 죽음은 언제 나를 정통으로 맞힐까.


그 희미한 죽음의 얼굴을 어쩌다 떠올릴 때 내심 비비고 싶은 언덕이 있다. 나중 염라대왕님 앞에서 궁리의 도서목록을 들이대면 혹 정상참작을 해주시지 않을까, 걸어보는 허무맹랑한 기대.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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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들판은 푸르게 채워지고 이른 봄에 심은 작물들은 청년이 다 되어 갑니다. 파종해서 모내기까지는 난리 굿판이었습니다. 모를 시집보낸다는 나긋한 말도 있지만 오죽하면 ‘모싸움’이라고 하겠습니까. “모싸움 끝났는가?” “욕봤네.” 보는 사람마다, 볼 때마다 들에서 나누는 인사는 우리의 동업자 정신입니다. 우리끼리만 했던 일은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친지들이나 일 좀 써먹을 만한 친구들은 기특하게도 휴가까지 내고 와서 일을 거들거나 아니면 전화를 잘 받지 않았습니다. 일을 거들었거나 전화를 잘 받지 않았거나 봄이 지나가는 동안은 모두 애썼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공부하느라 바쁜 학기 중에도 사나흘 내려와 함께 일했던 ‘청년 농활대’들의 땀도 들판에 녹아 있는 것이라 어린 모는 더욱 짙푸른 나락이 되어 갑니다. 일상의 공부와 전쟁 같은 아르바이트와 불꽃 같은 연애는 모두 무탈한지 동지의 마음으로 묻습니다.


농촌활동을 떠나기 위해 발대식을 가진 뒤 짐을 꾸리고 있다. (경향DB)


연인원 3만여명의 대학생이 수십년째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거르지 않고 전국의 농촌을 누비는 사회현상을 다른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을까요? 전태일이 외친 ‘단 한 명의 대학생 친구’에 대한 응답일 수도 있겠고, 공부라는 것의 근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졸업하기 전까지 꾸준히 오는 친구들을 보고 있자면 농촌, 농업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간이 흘러 졸업을 하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도 가끔씩 안부를 묻는 녀석들이 우리 농업, 농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또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농활은 농촌봉사활동이 아니라 나를 찾는 방식으로 나 아닌 것과 나누는 교감, 농민학생연대활동이라고 꼭 부연 설명을 하는 것이겠지요.


젊은 날, 가족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와도 어떤 자리에서도 이처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일어나 이야기할 수 있는 경험이 흔치 않습니다. 사람을 밑바닥까지 알게 하고 조직의 쓴맛과 단맛을 모두 맛보기에 적절합니다. 할 줄 모르는 일 하느라 몸도 고생이고 일 돌아가는 눈치 보느라 마음도 고생입니다. 벽에 등을 기대지 않는다는 무시무시한 구태는 여전히 남아 농활대 규율의 윗자리를 차지하고, 절대 민폐 끼치지 않는다는 상식을 항일 독립군의 전통까지 들먹이다가 가끔씩 쌀과 김치가 떨어져 전전긍긍하기도 일쑤입니다. 지켜질 리가 없는 밤 12시 취침과 반드시 지켜야 하는 오전 6시 기상 사이에서 땀과 모기와 근육의 떨림을 오로지 정신으로만 이겨내며 그래도 잃지 않는 웃음을 볼 때는 일본의 조선학교에 쓰여 있다는 ‘힘들어도 웃으며 가자’는 구호만큼 뭉클하기도 합니다. 아침부터 비오는 날이나 별 많은 밤에는 미래를 설계하며 친구들과 도란도란 삶을 나누는 낭만도 있는지요.


면서기까지 나와 농활 온 학생들 동태를 파악하던 때에서 봉사활동 점수로 인정까지 해주는 오랫동안 참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속옷 한 벌로 열흘을 버티고 한 번도 씻지 않았다는 더 이상 지저분할 수 없는 자랑과, 밭을 매면서도 잠을 잘 수 있다는 생활의 발견과, 이상한 학생들로 몰려 마을 입구에서 천막을 치고 보낸 열흘과 마침내 온 마을 사람들이 감동하여 함께 울음과 웃음으로 마을 잔치를 벌였다는 전설은 반절 이상 허풍일 테고 콧방귀를 뀌고 귓등으로 들어도 그만입니다만, 여름농활 열흘 정도면 기승전결도 있겠고 이야기가 생기게 마련인데, 사실 살다보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통장과 성적표에 찍힌 숫자보다는 이야기의 많고 적음이 아닐까 하는 것을 아직은 나도 배워가고 있는 중입니다.


“농활도 예전 같지 않네” 하는 소리야 고대 이집트 벽화에도 나왔다는 실없는 걱정. 문제가 있다면, 우리 농민들, 우리 마을의 품이 작아졌기 때문입니다. 술이 얼큰해지면 10여년 농사 선배들에게 “왜 지금 이렇게밖에 못하고 있느냐”고 따지지만 선배 농민들이 지켜온 것만큼의 가치를 우리 세대가 지켜갈 수 있을지를 아프게 되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젊었을 때의 꿈과 현실의 무게 사이에서 무릎이 꿇리기 시작하고, 세상 오만 것들을 다 안다고 참견하는 인생 평론가에 접어드는 때에 청년들의 웃음이 죽비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좀 더 맑은 정신으로 기다리겠습니다. 내일 해도 그만인 일일랑 둘째 치고, 서로 깨우고 일으켜 가며 통장 잔액만 쳐다보는 농사와 성적표만 쳐다보는 공부를 넘어서 새로운 사회 ‘아름다운 집’을 짓는 데 벽돌 한 장이라도 함께 올려놓읍시다.


한 번 주고 마는 정처럼 덧없는 것은 없답니다. 봄에 오셔서 힘들었을 테고, 여름방학 동안 해야 할 일들도 많겠지요. 왔다 가고 나면 우리도 괜히 마음이 휑하고 밀린 일도 걱정이라 한나절은 술타령일지도 모르겠고 그리 되면 각시나 동네 양반들에게 잔소리깨나 듣기 딱 좋을 테지만. 부디 공부 열심히 하시고 연애도 열심히 하시고 짬 내어 여름 들판에서 뜨겁게 또 만납시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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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나는 돛 없는 배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수부처럼 이 항구에서 저 해안으로, 애달픈 가난에서 불어오는 메마른 바람을 따라 떠돌아야 했다.” 15세기 피렌체의 공화주의자였던 단테는 교황의 군대가 이탈리아를 점령하자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을 쳤고, 추방된 단테는 객사했다. 단테는 <신곡>에서 그 분노를 담았다. 당대의 두 교황을 지옥에 던져 넣었는데, 성 베드로가 이들을 향해 “너희는 내 무덤을 피와 더러움을 담는 그릇으로 삼았다”고 선언했다. 단테는 “어떻게 악한 사람이 잘사는 상황이 계속될까?” “만일 하느님이 그런 일을 막을 수 있다면 왜 그 힘을 쓰지 않을까?” 질문하면서, 그가 만난 악한 정치가와 교황, 성직자들을 지옥에 처넣었다.


당대의 알렉산더 6세 교황은 전쟁을 부추겼으며, 부인이 다섯이나 되었는데, 그 자식들 중에는 교황 군대의 사령관이 된 체자레 보르지아도 있었다. 이들은 전쟁포로들을 바티칸 뜰에 끌어다놓고 활쏘기 과녁으로 삼아 즐겼다. 결국 체자레도 죽임을 당하고, 교황도 독살되었지만, 뒤이은 율리우스 2세 교황이나 레오 10세 교황 시절은 마르틴 루터가 촉발시킨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해 주었다. 


한편 이들은 궁전과 성 베드로 성당, 시스티나 성당 등을 지으면서 예술가들을 먹여살렸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리면서, ‘최후의 심판’에 천둥으로 내리치는 그리스도, 그리고 지옥에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는 성직자들을 그려 넣었다. 그는 교회개혁을 갈망하다가 파문당한 도미니코회 수도자 사보나롤라의 예언, 그리고 단테의 분노를 그림에 담았다. 세상과 교회의 권력을 쥐었던 자들은 심판 앞에서 ‘벌거벗은 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최후의 심판', 1537~1541, 13x12m, 프레스코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올봄에 선출된 교황 프란치스코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이런 교황권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요한 23세 교황과 바오로 6세, 요한 바오로 1세 교황의 유지를 받들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꾀했던 교회개혁을 지속하고, 특별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이들의 교회’를 희망하고 있다. 곧 ‘가난’을 다루는 그의 첫 회칙이 나올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교황좌에 오른 지 33일 만에 죽는 바람에 개혁에 실패한 요한 바오로 1세를 위해 이 시간 묵념하고 싶다.


현충일, 내가 살고 있는 빌라촌 골목에서 태극기를 단 집은 단 두 집뿐이다.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인터넷사이트 ‘일베’에 들어가보니, 5·18에는 그렇게 극성을 부리더니 정작 현충일에는 순국선열을 위해 묵념하는 인간이 없다는 ‘한탄’이 가득하다. 이들은 ‘일베충’이라고 자신들을 부르는 데 동의하며 ‘일베’에 ‘충’성을 다짐한다. 이들이 싸안고 도는 세력은 해방 이후 10여년을 빼고는 언제나 권력을 독식해왔던 자들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이명박으로 이어지는 권력놀음에서 오히려 ‘재미’를 느끼는 것 같다. 글쎄, 미켈란젤로가 다시 한국 사회의 지옥도를 그린다면, 누구 얼굴이 제일로 또렷할지 궁금해진다.


미켈란젤로와 함께 바티칸을 장식했던 라파엘로는 당대의 일베충이라 불러도 좋을까? 그는 화색이 도는 얼굴과 상냥한 성품, 황실화가의 아들답게 탁월한 재능으로 유쾌한 매력을 발산해 돈방석에 앉아 명예도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의 사나이였다. 그러나 끊이지 않는 연애와 방종으로 열병을 얻어 37살에 운명을 마친 게 야속할 따름인 사나이. 이런 여한을 남기지 않으려고 한국의 일베충은 약삭빠르게 적절한 연애와 관음증, 그리고 건강에 마음 쓰고 있다. 라파엘로가 누린 행운의 비결은 지배계급을 그렸기 때문이다. 라파엘로가 그린 성화 안에는 당대 교황과 상인과 귀부인들의 얼굴이 비친다.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목을 내밀고 배를 내밀고, 불그레한 얼굴로 한창 잘 살고 있는 모습이다. 심지어 성모 마리아는 누추한 시골집이 아니라, 궁전에서 천사에게 ‘예수아기 잉태’의 소식을 듣는다. 이른바 라파엘로는 단아한 ‘명품’을 지향한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여인들조차 머리를 단정히 여미고 울부짖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시스티나 성모



라파엘로의 그림은 ‘식스투스의 성모’에서도 그러하듯이, 인물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우아하지만 생기가 없다. 어차피 작품에는 화가의 영혼이 담기기 마련이다. 권력자와 부자들의 초상화를 그려서 떼돈을 벌고, 늘 사람이 꼬이고 여자가 많았던 쾌활한 라파엘로는 가난하고 ‘고독한’ 미켈란젤로를 조롱했지만, 미켈란젤로는 그런 경박한 라파엘로를 경멸했다. 경박한 라파엘로는 품위 있는 지배층을 그렸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에는 고통과 슬픔이 가득한 인간이 늘 주변을 서성거렸다. “인간은 자기 주위의 세상이 울 때 웃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던 미켈란젤로에게 세상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일베에 난무하는 조롱과 비아냥으로 범벅이 된 경박한 글들은 ‘영혼 없는 영혼’의 일그러진 초상일 뿐이다. 마켈란젤로는 평생 초상을 그리지 않았다. 슬픔이 없는 자여, 일베로 가라!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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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형이 결혼을 한단다. 이 글이 실린 신문의 헤드라인 뉴스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그날 다른 신문들의 제1면은 한 이성애자의 권력을 이용한 ‘음란하고 더러운’ 성추문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깔끔하게 정장을 차려입고 파트너와 다정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아름답고 성스러운’ 결혼을 발표하는 그는, 바로 동성애자 영화인 김조광수였다.


나와 남동생, 우리 남매에게는 시쳇말로 ‘어(색한 자)부심’이 있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 두 명과 같은 집, 같은 방에서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은 군에 입대하기 직전 우리 자취방에서 자고 간 ‘한국 제1호 게이 연예인’ 홍석천이고, 다른 한 사람은 여름방학 동안 우리 집에서 동생과 친구들을 ‘학습’시킨, 내년에 ‘한국 제1호 동성 결혼식’을 거행한다고 발표한 김조광수다. 동생은 그들과 같은 대학에서 연극영화를 공부한 선후배 사이다.


사실 우리 남매가 만난 그들은 ‘게이’가 아니었다. 그때 그들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긴 채 고통과 고독에 홀로 맞붙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신문 1면을 장식한 광수형의 결혼 보도를 접하는 우리의 심경은 참으로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우리가 알고도 모르는 사람, 미안하고도 안타까운 과거이자 현재이기 때문이다.


광수형은 한양대 연극영화과의 ‘전설’이었다. 1980년대 연극영화과에 자연 발생한 최초의 ‘운동권’으로, 예비역 선배들에게 ‘빨갱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지하 소극장에서 두들겨 맞았다. 그때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김동회 역을 맡았던 배우 이일재가 막아섰다가 같이 몰매를 맞기도 했다는데, 어쨌거나 이후로 한양대 연극영화과에서 공식적인 구타는 사라졌다. 하지만 광수형의 못 말리는 반골 기질은 운동권 내에서도 쉽게 받아들여지기 어려워, 빨간 점퍼에 날라리 같은 그의 모습을 의심한 운동권들로부터 프락치 혐의를 받기까지 했다는 ‘웃(기고 슬)픈’ 일화도 있다.


동생의 신입생 시절 ‘살아있는 전설’이었던 광수형은 후배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곱상한 외모와 달리 아니다 싶으면 까칠하고 매정하게 등을 돌리는 성격으로 은근히 적을 만드는 유형이었지만, 술이 매우 약해 술자리를 기피하면서도 힘들어하는 후배가 있으면 “무슨 고민 있니? 우유나 한 잔 하자”며 손을 내미는 따뜻한 선배이기도 했다. 우리 자취방에서 합숙하며 학습할 때에도 식사 준비며 뒷설거지는 인천의 작은 분식집 아들로 자란 그의 몫이었다. 엽렵하고 재발라서 농촌봉사활동을 가면 짐을 풀자마자 수십 명의 농활대가 열흘 동안 먹을 김치부터 담그고, 요리 중에 특히 계란탕을 기막히게 잘 끓이는 솜씨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그는 엄마가 해주는 밥만 얻어먹고 자란 대다수의 신랑·신부들보다 결혼 생활을 알뜰하게 꾸릴 준비가 확실하게 된 사람이다.


하지만 재미난 추억 속에도 지르르 마음을 저리게 하는 기억의 조각들이 있으니, 주로 그의 성정체성에 대한 무지 혹은 무시가 빚어냈던 상황이다. 우리가 아는 그는 다만 우리가 편리하게 단정해버린 광수형이었을 뿐, 그의 에세이집에 등장하는 것처럼 낮에는 운동권으로 살고 밤에는 P극장 근처를 배회하며 이중생활의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동성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동생은 광수형의 커밍아웃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 문득 가슴이 서늘해졌다고 했다. 당시의 사회, 그리고 운동권의 문화는 지극히 마초적이고 소수자들에게 폭압적이었다. 무지와 무신경은 때로 죄가 된다. 우리 또한 무의식적으로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을까?


광수형은 농담 삼아 자신의 가명을 ‘조(선의)진(짜)호(모)’라고 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어떻게든 성정체성을 ‘극복’하고자 여자 친구를 사귀어보려 애쓰기도 했다. 어떤 무지한들은 지금도 동성애를 이성애로 바꾸지 못하는 동성애자들의 타락한 욕망과 의지박약을 비난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자신들부터 이성애자에서 동성애자로 변모하는 시범을 보여주길 바란다. 고칠 수 있다면 정말로 고치고 싶은 것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최초로 자각할 무렵 그들의 심경이기 때문이다.


나는 광수형의 결혼에, 동성 결혼 합법화에 찬성한다. 동성애가 말세의 징후라면 그리스 로마나 삼국시대쯤 진즉에 세상은 멸망했어야 한다. 동성애자들의 성생활보다는 어떤 커플을 볼 때마다 그들이 어떤 체위로 섹스하는지 따지는 이들이 훨씬 더 변태적이다. 네 가족이라면 어쩌겠느냐고 반문하는데, 나는 항상 아들에게 말하기를 세상 모두가 네게서 등을 돌릴지라도 나는 너를 지지할 마지막 사람이라고 다짐한다. 그 절대의 사랑에 성정체성만이 예외일 리 없다. 그리고 가외로, 얻는 것만큼이나 잃는 것이 무수한 결혼 제도의 불합리를 이성애자들만 겪을 수는 없다. 동성애자들도 기꺼이 ‘고통 분담’해야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동생의 메시지를 전하며, 광수형과 그의 파트너 승환씨의 앞날을 축복한다. 


동반자와 입맞추는 김조광수 감독 (경향DB)


“형! 가시 돋친 꽃 덤불 위를 맨발로 걷기 시작하신 것을, 축하하고 위로합니다!”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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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하는 이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나 아랫사람을 상대하여 자기를 가리키는 일인칭 대명사. 2. 남이 아닌 자기 자신. 자아. 3. 대상의 세계와 구별된 인식·행위의 주체이며, 체험 내용이 변화해도 동일성을 지속하여, 작용·반응·체험·사고·의욕의 작용을 하는 의식의 통일체.”


국어사전에서 찾아본 어느 낱말의 뜻풀이다. 항용 사전에서 모든 표제어들의 기술 내용은 서로 의존적이다. 모든 설명은 죄다 이런 식이다. 기역은 니은에 기대고 니은은 디귿에… 히읗은 다시 기역에 의지한다. 그러니 사전은 결국 뱅뱅 꼬리에 꼬리를 무는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다. 그건 사전이 부실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과 현상을 설명하고자 하는 인간 언어의 한계가 그럴 수밖에 없다. 이것은 저것이 아니고 그것과 다르다, 라고만 할 수 있을 뿐 이것은 이것이다, 라고 정의할 수 있는 근거가 도대체 없는 것이다.


아침에 먹은 밥이 국과 다르고, 반찬과 다르고, 식탁과 다르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숟가락에 실려 입으로 들어와 부드럽게 씹히는 흰 물질. 그것의 전신이 쌀이고, 논에서 왔고, 식물의 열매이다, 라고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무리 읊어도 앞에 앉은 이가 글쎄, 그건 알겠는데, 그래서 그게 도대체 무엇이냐, 라고 다시 물으면 그만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급기야는 화를 벌컥 내면서 이런 한마디를 내지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씨바, 쌀밥이라니깐!”


앞에서 설명한 낱말은 짐작하다시피 ‘나’다. 참 빤하고 너무나도 잘 알고 늘 함께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저렇게밖에 영 설명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더 있다. 표제어로서 사전 속의 ‘나’는 그렇다 치고 사전 바깥에서 숨쉬고 먹고 싸고 돌아다니는 물체인 ‘나’는 어떻게 하겠느냐이다. 누가 나보고 “너는 누구냐?”라고 말로 찔러올 때 무슨 대답을 하겠느냐이다. “제기랄, 나, 나라니깐!”이라고 지껄일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처럼 ‘나’를 ‘나’로 ‘나’답게 증명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증명이라는 말과 맞물려 올해로 4주기를 맞이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는 말 때문에 지독히 곤욕을 치른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다르다. 그이만큼 마이크 앞에서 우리 국어를 정확하게 구사한 사람도 참 드물었다.


전국 평검사들과의 토론회에서 모두 발언에 참여한 검사들 (경향DB)


그가 ‘기적적으로’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삐딱한 운동장’의 심판이 되었다. 공은 차지 않아도 자꾸 특정한 방향으로만 굴러갔다. 운동장의 기울기 때문이었다. 취임 초 노 대통령이 ‘평검사와의 대화’를 열고 텔레비전에서는 이를 전국에 생중계했다. 다른 건 모두 지나갔는데 한 단어가 귀에 걸렸다. 대강 이런 요지의 말들 속에서였다. 대화가 시작되고 먼저 평검사회의 회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께서는 토론의 달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오늘 대화에서 말로서 우리를 제압하지 말아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냥 지날 법했는데 대통령이 바로 응수했다. 미리 준비한 원고가 아니라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방금 그 말씀은 저에겐 대단히 모욕적으로 들립니다. 내가 마치 공연히 말재주만 피우며 살아온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의 가치와 신념을 그동안 내 살아온 삶으로 증명해 왔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구독한 잡지가 있었다. <수학의 정석>의 저자인 홍성대씨가 발행한 수학 전문지였다. 제호는 <수학세계>. 교과서나 참고서에선 볼 수 없는 낯선 수학 문제도 있었지만 수학계의 화제와 교양을 읽는 재미가 쏠쏠했었다.


나는 본고사 세대다. 연합고사를 본 후 지원한 대학에서 본고사를 따로 치렀다. 어느 해 서울대학교 본고사에 이런 문제가 나왔다. “√2가 무리수임을 증명하시오.” 이는 수험생의 의표를 찌르면서 수학의 기본에 충실하라는 출제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문제였다.


그해 시험이 끝나고 입시에 관여했던 출제, 채점 교수들의 좌담회가 잡지에 실렸다. 그 증명 문제가 화제에 올랐다. 내가 교과서에서 배운 간단한 풀이법은 다음과 같다. √2가 유리수라고 가정한다. 이를 서로 약분이 되지 않는 분수꼴로 만들고, 양변을 제곱해서 루트를 벗기고, 이를 계속 전개한다. 그러다 보면 모순에 빠진다. 유리수라는 가정이 틀린 것이다. 따라서 √2는 무리수이다.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알고 나면 쉽지만 과연 증명은 만만한 것이 아닌 모양이다. 그때 수험생들의 답안지에는 이런 기발한 것도 있어 좌담회의 사람들을 포복절도케 하였다고 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보았는데 √2는 무리수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2는 무리수이다.” 요즘이라면 혹 이런 무작스러운 답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겠다. “내가 문제를 많이 풀어보아서 아는데, 루트2는 무리수여!”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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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에게 기초연금 월 20만원’‘쌀 직불금 100만원 인상’이라는 내용의 현수막은 지난 대선에서 농촌지역의 많은 어르신들을 설레게 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엷은 미소는 마을이 들썩들썩했던 젊은 시절의 향수를 자극했고 잘빠진 빨간색 디자인은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한데, 더군다나 꼭 꼬집어 쌀 직불금 100만원이라니! 제아무리 홍보의 신이라고 해도 현수막 하나에 이런 기막힌 조화를 담아내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쌀값 보전을 위해 농민들에게 지급되는 쌀 고정직불금을 현행 1㏊(1만㎡)당 70만원에서 100만원으로 인상해 주겠다는 공약의 예술적 표현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8년째 17만원으로 고정되어 있는 쌀 목표가격은 물가상승률과 생산비 인상 등을 반영하여 현실화하고, 고정직불금을 1㏊에 140만원으로 하자는 것이 농민들의 오래된 주장이다 보니 대선 공약으로 100만원 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그렇게 커다란 선심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냥 농민의 주장과 내일모레 대통령이 될 사람의 이야기는 그 무게가 하늘과 땅 차이라 ‘적어도 올해는 100만원으로 인상되겠구나’ 하는 것은 한글을 알 만한 모든 사람의 생각이었습니다. “쓰는 김에 좀 더 쓰지!”와 ‘100만원이 어디야. 5년 동안 한 푼 안 올린 놈도 있는데’ 하는 심정이 잠시 교차했을 뿐, 어쨌든 누가 말했든 반가운 일이었고, 빨간색 현수막 담당자, 홍보의 신은 우리들이 그렇게 생각할 줄 당연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쌀 직불금은 쌀 소득 보전 정책의 일부입니다. 바로 체감할 수 있는 액수가 제시되는 만큼 민감하고 농민들의 관심이 높습니다. 몇 해 전 고위 공직자를 비롯해 몰지각한 지주들이 농민들의 쌀 직불금을 가로챈 사실이 뉴스에 크게 보도되기도 하였습니다. 쌀 소득 보전 정책에서 사실 더 중요한 것은 3년마다 정하기로 되어 있는 쌀 목표가격의 내용입니다. 현행 제도에서 쌀 직불금은 이때 정해진 목표가격을 유지하기 위한 것입니다. 2005년도에 도입된 쌀 목표가격은 쌀값의 급격한 하락을 막고 적정한 수준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취지로 시작됐지만, 물가가 오르건 말건, 땅값이 오르건 말건, 비료값, 종자값이 오르건 말건 80㎏에 ‘나는 원래부터 17만원이다’ 하면서 오히려 산지 쌀값을 묶어두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벼농사가 농가소득의 절반이 넘는 농민들로서는 무척 서운한 일이었습니다. 한 끼 쌀값이 껌값보다 못한 지경이고 도시가구 대비 농가소득 비율이 점점 떨어지고 있는데도 쌀값은 왜 오르면 안되는 겁니까?


제목 쌀직불금 규탄 (경향DB)


며칠 전 정부는 쌀 목표가격을 17만4000원으로, 4000원 인상하는 안을 내놓았습니다. 쌀 전업농이나 농민회 등에서 80㎏ 1가마에 23만원의 목표가격을 주장하고 있고 국회의원 일부가 이미 21만원의 목표가격을 내용으로 하는 ‘쌀 소득 등의 보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해 놓은 상황을 감안해 볼 때 정부와 농민의 인식은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하겠습니다. 매년 올라가는 물가상승률과 생산비 증가라는 공통된 상황인식에서 어떻게 쌀 목표가격이 여전히 10년 전 수준이 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약 올리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언론이든 정부든 ‘8년 만에 목표가격 처음으로 인상’이라는 표현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쌀 직불금 100만원 인상’도 실제로는 80만원으로 고시했습니다. 궁색한 대로 100만원은 2017년까지 단계적인 이야기라고 합니다. 하지만 ㏊당 140만원을 주장해 온 농민들에게 100만원은 올해 이야기지 2017년 이야기가 아닙니다. 한 달 용돈 1만원을 받는 큰딸에게 2017년 용돈도 1만원일 거라고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대선 공약이 “빌 공자 공약이더냐”고 목소리를 높이고 박근혜 정부의 농업 정책은 이미 쳐다볼 것도 없다는 사람들도 더러 있지만 쌀 직불금 단돈 20만원의 차이가 행복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고 생각하는 현인들, 즉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선각자와 ‘원래 잘 잊어먹잖아’ 하는 도인과 ‘누가 한다고 달라지겠느냐’와 ‘아무 상관 없으니 될 대로 돼라’들의 실망도 만만치 않습니다.


쌀값은 농민값이라는 말은 괜히 나온 말이 아닙니다. 논 농업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논 농업은 농업의 심장과도 같은 것이고 쌀과 관련한 정책은 정부가 농업을 대하는 자세와 성의가 어떠한지를 재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쌀 소득 보전 정책의 분명한 의지 없이는 정부가 주장하는 ‘강소농’이나 ‘농업의 6차 산업화’ 같은 것들도 실은 ‘농사 지어서 돈 벌기 어려우니 일을 좀 더 많이 하시죠’ 하는 메시지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농업에 투자하고 농업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정확히 후세에 있습니다. 나와 동네 아저씨들의 빈 주머니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다음에 농사지을 누군가를 위해서 20만원은 올해 꼭 돌려받고 싶습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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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의 글씨 가운데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라는 말이 있다. “작은 창으로 빛이 많이 들어오니 나로 하여금 오래 앉아 있게 하네”라는 뜻이다. 아버지가 목수 일을 하시던 어린 시절, 일찍 학교를 파해 집에 돌아와 컴컴한 빈방에 들어가 누워 있자면, 그 방의 유일한 쪽창에서 마치 영사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기둥처럼 햇빛이 밀려 들어왔다. 햇빛의 많고 적음은 창의 크기와 무관하다는 사실을 그때 이미 알아차렸다.


요즘 가장 대표적인 주거시설인 아파트 베란다는 전면 통창이지만, 창이라 할 수 없어서 어둠을 비추는 빛을 느낄 수 없다. 어둠이 자욱해야 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니까. 어렸을 적 한겨울에 아이들과 구슬치기를 할 때, 다음 차례를 기다리며 언 손을 바지춤에 넣곤 했다. 그 따뜻함이란! 내 체온이 36.5도라는 사실을 이때만큼 절실한 고마움으로 느끼는 시간은 없다. 내 몸이 내 손을 덥히고 있다는 사실을 추운 겨울에야 느꼈다. 처음 결혼해서 반지하 셋방에 신혼살림을 풀고, 현관의 비가리개에 걸려 장롱이 집에 들어오지 못했을 때 아내가 처음 눈물을 보였지만, 지나고 나면 다 ‘추억’이 된다. 추억이 많은 사람은 삶이 다채로워 같은 시간을 살았어도 더 많이 산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부평의 영구임대주택에 살다가 서울 상계동 불암산 자락 산동네에 자리잡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집들이하는 날, 어머니는 마을버스도 다니지 않는 산동네 언덕바지를 오르면서 표정이 없었다. 내가 “엄마, 여기 공기 좋지?” 하자, 대뜸 이렇게 말씀을 던지셨다. “공기 먹고 사냐?” 어머니는 식구 가운데 가장 번듯한 대학을 나오고도 노동운동한다고 속썩이고, 결혼해서도 ‘이 따위’ 후질한 산동네 집에 방을 들인 자식이 언짢았을 게다. 대학원에서 신학 공부한다고 그마저도 접고 프리랜서로 일하면서 담뱃값이 궁하면 장롱 바닥을 자로 훑어가며 동전을 모았던 시절, 당시에도 흔치 않던 쌀가게에서 봉지쌀을 사먹던 시절이다. 그래도 ‘추억’은 아름다운데 어쩌랴.


내 살아온 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1987년 민주화운동이 있은 연후에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시고, 대학로에서 그분 영결식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그날 눈이 많이 내렸다.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하며 목청을 돋우어 열사들의 이름을 부르시던 문익환 목사, 그분은 우리 시대에 ‘축복’ 같은 분이셨다. 나라는 사람도 누군가에게 ‘축복’이 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시절을 건너온 누이들은 아파트에 신문이 오면 제일 먼저 신문 갈피에 낀 전단지를 읽었다. 할인행사와 쇼핑찬스를 광고하는 전단지에서 정성껏 쿠폰을 오리고, 엇비슷한 이웃 아주머니들에게 전화를 걸어 쇼핑일정을 잡곤 했다. 싼값에 웬만한 살림을 마련할 줄 아는 주부의 지혜가 그 집 살림을 안정케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나는 정작 기사는 읽지 않고 딴청 부리는 누이들이 못마땅했다. 그러나, 이젠 그것마저도 내 추억의 ‘2부’ 정도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도 누이들은 사회적 관심은 아니더라도 손이 닿는 한 어려운 이웃을 도울 줄 알았다.


얼마 전 한밤중에 텔레비전을 보다가 충격처럼 다가온 사람이 있다.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앤 공주로 출연했던 오드리 헵번이다. 프로그램이 <세기의 여성들>이었던가. 여기서 헵번이 영화배우의 삶을 접고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취임하면서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지난 40년은 제가 이 자리에 앉기 위한 리허설이었다.” 헵번은 <사브리나>, <마이 페어 레이디>,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을 통해 영화배우로서 명성을 쌓은 것조차 전쟁 피해아동의 구호와 저개발국 아동의 복지를 위해, 그 아이들의 슬픈 현실을 세상에 알리는 일을 하기 위한 ‘리허설’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순정하게 큰 그녀의 눈망울은 영화 관객을 위한 것이기도 했겠지만, 결국 그처럼 큰 눈에 굶주린 눈물이 그렁그렁한 세상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굶주리고 백일해를 앓아야 했던 그녀가 자기 어린 시절의 ‘아픈 추억’을 잊지 않은 탓이다. 물론 다른 선택도 가능했겠지만, 스타덤을 누리는 것으로 충분했겠지만, 헵번은 그들을 또 다른 ‘나’라고, 인생을 걸 만한 ‘나의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말한다. “어린이 한 명을 구하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린이 백만 명을 구하는 것은 신이 주신 기회입니다.” 지금 나도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일까


세월이 흘러도 아름다운 오드리 햅번 (경향DB)


내 인생이라는 소중한 선물을 어떻게 쓸지는 우리의 자유다. 괴테의 말대로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아름다운 입술을 갖고 싶으면 친절한 말을 하고, 날씬해지고 싶으면 네 음식을 배고픈 이들과 나누라고 권할 줄 알았던 헵번, 내 고통을 우리들의 고통으로 치환할 줄 알았던 그녀가 보고 싶다. 영화라도 다시 봐야겠다. 추억이 리허설이 되어 내 영혼을 귀하게 이끌어주면 좋겠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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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는 별칭이 많다. 꽃과 신록이 천지간에 난만하니 계절의 여왕이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과 스승의 날이 줄줄이 이어지는 가정의 달이요, 역사적으로 민주주의의 도전과 응전이 맞부딪힌 항쟁의 달이기도 하다. 그런데 바깥세상과 상관없이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5월은 엘리엇의 4월 못지않게 ‘잔인한 달’이다.


이십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때 내 주변의 친구들은 잔뜩 화가 나 있었고 얼마간 풀죽어 있었다. 3월과 4월의 모의고사와 중간고사 성적에, 꿈과 현실의 간극에, ‘3당 4락’이니 ‘4당 5락’이니 하는 소리로 자도 잔 것 같지 않은 불편한 수면에, 강제 학습에 다름 아닌 자율 학습에, 독서실의 탁한 공기에, 매일 아침 시험일 디데이를 새로 고치는 주번에, 고3 수험생을 둔 집안답게 눈치를 보며 발끝으로 걷는 가족들에, 우리만 빼놓고 띵까띵까 신난 듯만 보이는 세상에.


학기 초의 결심과 각오는 흐지부지해진다. 피로는 쌓이고 긴장과 초조함까지도 익숙해진다. 아무리 협박을 하고 으름장을 놓고 살살 꼬드겨도 ‘딱 1년만 죽었다’고 생각하며 살기는 어렵다. 삶은 단 한순간도 멈출 수 없을뿐더러 열아홉 스물의 유예된 시간은 새싹을 짓밟아 춘신(春信)을 수신 거부하는 억지나 매한가지기 때문이다.


(경향DB)


다시 이십여 년이 지난 후에도 한봄의 살풍경이 사라지기는커녕 도를 더하니, 한국의 아이들은 가장 재미없는 공부를 가장 오래 하는 것으로 세계 제일을 달리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몸의 나이를 따라붙지 못하는 정신의 나이 때문에 여전히 부모보다는 아이들에게 감정 이입이 되는 나로서는, 무능한 어른들이 밉고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싫고 무력한 아이들이 안쓰러울 뿐이다. 그런 데다 고교 졸업생의 30퍼센트만이 대학에 가던 이십여 년 전보다 80퍼센트가 대학을 가는 지금이 더 나쁜 점은, 대학 진학 이외에 선택할 진로가 협소해진 것과 더불어 과열된 경쟁과 부모의 교육열로부터 벗어날 방도가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은 도망쳐 숨을 데가 없다. 학교에도 집에도 그들의 작은 몸을 감춰줄 곳은 없다. 기껏해야 컴컴한 PC방이 아니라면 비정한 도시의 거리에 헐벗은 채 나서야 한다. 멀쩡한 집에 안락한 공부방에다가 원한다면 독서실도 척척 끊어주는데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항시 충족되지 못한 욕망으로 배고픈 어른들은 말씀하신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필요한 곳은 집중력이 강화되어 학습 효율이 높아지는 공간이 아니라 고단한 몸과 마음의 쉼터다. 생후 20개월이 지나 공간지각력의 발달과 함께 자기만의 공간을 갈구하는 어린아이들처럼, 방구석에 커튼을 치고 기어들어가 아무도 모르는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상상하는 그 두려움의 존재들처럼, 아이들에게는 세상의 시선과 압력을 피할 보금자리가 필요한 것이다.


아들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야산에는 졸업생들이 파놓은 ‘땅굴’이 있다. 이 어수선한 시국에 땅굴이라니, 라면 박스에 곱게 담아 벽장에 넣어둔 반공글짓기 상장의 유령이 기어 나올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이 땅굴은 지난해 고3이었던 해수와 종범이가 장장 8개월에 걸쳐 작업한 ‘졸업 작품’이다. 얼마 전 아들아이와 함께 살펴본 땅굴에는 푸른 방수포가 씌워져 있었다. 미완의 작품이라 두 번의 미장 공사를 더 해야 하니 올여름에 마무리 작업을 할 때까지 흉측함을 참아달라는 안내문도 붙어 있었다. 살짝 방수포를 들춰 보니 사람이 들어간다면 겨우 두어 명, 오모가리 김치찌개 집 김칫독이 들어가면 족할 만한 구덩이가 검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니, 이걸 여덟 달 동안 팠단 말이야? 고3 수험생들이?” 


짐짓 허탈한 내 말에 그 ‘장인’들의 후배인 아들아이가 발끈한다. 


“형들이 이 4017리터를 파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대한민국의 고3 수험생으로서 보약을 먹어가며 숨도 에너지효율성에 따라 쉬어야 마땅할 그들이 땅굴에 들인 노력은 친구들과 후배들이 잘 알고 있었다. 폭염과 폭우, 모의고사와 수능, 폭설과 맹추위를 견디며 삽질을 했다고 한다. 돌이 나오면 굴착기를 들고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2미터 아래의 지하세계에서 돌과 씨름했단다. 그러는 동안 수십 켤레의 장갑과 세 켤레의 신발과 다섯 개의 망치가 닳아 없어졌고, 고단한 수험생활도 허물어질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다시 파낸 흙더미처럼 사라져갔다.


졸업식 다음날 페이스북에는 ‘안식처’에 조명을 달고 기뻐하는 종범이와 해수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올라왔다. 어쩔 수 없는 ‘어른’의 궁금증으로 졸업 후 그들의 근황을 살피니 종범이는 스포츠과학을, 해수는 건축학을 공부한다고 한다. 생각해보니 어느 대학에서 무얼 전공하느냐는 질문 자체가 어리석다.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들은 자신만의 땅굴이거나 은신처이거나 안식처이거나 궁전일 그것을 반드시 지어내고 말 터이니.



김별아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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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럴 줄 알았다. 겨울은 호락호락 쉽게 물러가는 법이 없다. 봄날의 훈풍이 당연한 4월 중순의 주말이었건만 뜻밖의 눈이 배달됐다. 


어디 공중에서 오는 날씨만 그럴까. 우리가 매일매일 엮어나가는 날짜 속의 세상도 그렇다. 한두 번 봄이 온 듯하더니 겨울공화국을 방불케 하는 일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춘래불사춘이라는 말은 그래서 생겨난 말이기도 하겠다.


매달 지리산의 식물 공부를 하는 모임이 올 2월에는 주중에 있었다. 멤버가 부산과 대구의 교사들이라 방학을 맞이해서 그렇게 일정을 잡은 것이다. 월요일 청학동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자면 일요일 오후에 내려가 근처에서 일박을 해야 한다. 그냥 갔다가 올라오기엔 왠지 아쉬웠다. 두 동무에게 주말을 통영서 보내자고 했다. 나의 수작이 엉큼한 것은 아니었고 남녘 바다에서 봄의 기미를 만끽할 수도 있는 호기회여서 흔쾌히 따라주었다.


남부터미널을 출발한 버스는 순조롭게 달리기 시작했다. 며칠 전 매서운 추위가 다녀간 터라 상대적으로 훈훈한 날씨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봄 느낌이 더욱 더해지는 것 같았다.


고속버스의 좌석. 그곳을 그냥 목적지에 가기까지 잠시 궁둥이를 맡겨두는 곳이라 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참 묘한 장소이기도 하다. 자동차 바퀴처럼 팽팽 돌아가는 바쁜 도시생활에서 그곳은 문득 정지한 공간이다. 화장실 말고 이처럼 오래 혼자 되는 자유, 홀로됨의 여유를 누리는 곳도 드물다.


일인석에서 안전벨트에 묶여 있는 동안 창밖으로 흰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듯 많은 생각이 일어났다. 지나가는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흔들리는 버스를 따라 몸도 따라 흔들리는데 딸아이가 챙겨준 이어폰 생각이 났다. 


스마트폰을 소지하고 있지만 그저 전화나 카카오톡을 이용하고 페이스북이나 기웃거리는 정도였다. 그러다가 며칠 전부터 유튜브에서 음악을 골라 듣다가 제법 재미를 느낀 바가 있었다. 비슷하게 연속되는 풍경에서 조금 변화를 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이 닫힌 공간에서 할 수 있는 동작이 별달리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 이어폰과 유튜브와 클래식이 떠오른 것이다.


클래식에 관한 일천한 지식으로 제목을 댈 수 있는 건 손에 꼽을 정도이다. 통영까지는 앞으로 두세 시간. 연주가 제법 긴 곡목을 찾아야 했다. 모차르트, 베토벤, 바흐를 떠올리다가 작곡가가 아니라 퍼뜩 떨어지는 곡명이 하나 있었다. 바깥 풍경과도 딱 어울리는 노래였다.


이래저래 여러 번 들어본 바가 있기에 그 앞 대목은 흥얼거릴 수가 있다. 물론 내가 먼저 하는 게 아니라 반 박자 늦게 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독일의 유명한 가곡으로 제목만 대충 알았던 노래. 그것은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였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니 <보리수> <여인숙> <거리의 악사> 등 3곡의 가사가 번역되어 흐르고 있었다. 오늘의 내가 피끓는 청춘이었더라면, 그리하여 공교롭게도 실연의 상처를 달래느라 떠나는 시무룩한 여행길이었다면 <보리수>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날 날카롭게 꽂히는 건 <여인숙>이었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한 묘지에 이르렀네/ 바로 여기에서 묵어가리라 그렇게 생각했다네/ 푸르른 장례조화들이 간판이 되어주어/ 지친 방랑자를 서늘한 여인숙으로 안내하네/ 그런데 도대체 이 집에 빈방이 하나도 없다니?/ 나 쓰러질 정도로 지치고 심한 상처를 입었다네/ 오 무정한 주인이여 나를 내쫓는 것인가?/ 그렇다면 더 멀리, 더 멀리 가자꾸나 나의 충실한 지팡이여.”


이럴 수가. 가사를 알고 감상하는 <겨울 나그네>는 단순한 노래가 아니었다. 대강 알고 말았더라면 얼마나 억울했을까. 어떤 이는 고등학생 때 이 노래를 듣고 음악의 길에 투신했다고도 했다. 이제 인생의 오후로 접어드는 한 중늙은이에게 그런 열정을 기대할 수는 없다. 다만 앞으로 나의 여인숙까지 가는 동안 지팡이로 삼기에는 아주 흡족한 노래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지금 나는 통영으로 짧은 여행을 떠나는 겨울 나그네. 그 신세를 알아차리는 듯 차창 밖으로 여인숙이 계속 나타났다. 오래된 곳도 있었지만 신장개업한 여인숙도 더러 있었다. 묵은 가지마다 희끗한 잔설이 간판처럼 달려 있었다. 머지않아 할미꽃, 솜나물, 산자고, 양지꽃 등이 등(燈)처럼 숙소 주위를 밝힐 것이다. 살아서는 문패도 없던 이들이 저 허름한 곳에 투숙하고서야 비로소 이름을 내걸고 편안히 잠들었구나.


경남 통영의 동피랑 골목 (경향DB)


대전을 지나 대진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이윽고 버스는 무주 근처 덕유산 자락을 통과하고 있었다. 저 너머 너머에 두고 온 내 고향이 있다. 오늘 하룻밤이야 통영에 어디 빈방 하나 없을까. 하지만 평생을 떠도는 이 지친 방랑자를 받아줄 최후의 여인숙은 저 어딘가에 서늘하게 있어 언제든 어서 오라, 기다리고 있을 듯!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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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가 길어집니다. 보일러 기름값이 아까운 노인양반들은 여태 한 평 남짓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고, 배싹 마른 사람 날아갈 듯 부는 동풍에 아직도 겨울옷을 들여놓지 못합니다. 그래도 마을회관에나 가야 사람구경할 수 있었던 철은 지나고 논밭에도 제법 사람들이 기어 나와 들판은 뭔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습니다.


주말마다 아홉시 뉴스 첫 자락을 차지하는 것은 상춘객들이지만 놀기 좋은 날은 일하기도 좋은 날이라는 불편한 진실. 논 갈고 볍씨 파종하면서부터 봄 ‘싸가지’, ‘싹수’에 대한 걱정은 몇 십 년 농사를 지어 온 어른들에게도 언제나 365일 한 해 밥 빌어먹는 무게입니다. 저녁 때 갖는 소소한 술자리에서는 한숨 쉬는 소리도 심심찮게 들립니다. “에휴, 날 따땃해진 게 이제 일만 남았네.” “못자리 끝나고 꽃 다 떨어지면 꽃구경 가세!” 해마다 겪지만 과정과 결과의 고단함을 뻔히 아는 한 편의 드라마 속으로 뛰어들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엄살일 수도 있겠습니다. 일 잡기 시작하면 깜깜할 때 일어나 ‘시간이 지났는데 해가 왜 안 뜨나’ 하는 것이 걱정이고, 할 일이 날마다 잔뜩 남은 저녁에는 ‘왜 해가 벌써 지나’ 하는 것이 또 새로운 걱정입니다. 새벽 3시에 논에서 꿈틀대는 아저씨를 보고 “나이 먹은 게 잠도 안 오죠?” 하면 “너는 꼭두새벽에 뭣하러 돌아다니냐” 하는 핀잔이 술 한 잔으로 돌아오면서 곧 일과 사랑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두려움이란, 겪지 않은 일에 대한 것, 하지만 상상할 수 있는 것. 예를 들면 나이가 더 들어 삶이 비루해지면, 사랑했던 각시와 헤어지게 되면, 한없이 예쁘기만 한 아이들이 바보같이 자라면, 하는 것에 대한 상상. 친한 아저씨네 집에 바쁘다고 품앗이를 가지 않는다면, 새로 해 놓은 못자리판에 뿌리가 잘 잡지 않는다면, 집 지으려고 모아 놓은 돈으로 온 식구가 세계여행을 떠난다면, 내 삶과 대수롭지 않은 인간관계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상상. 숙면을 방해하는 것, 여름 장마와 가을 수확을 따져 보는 봄, 아직, 오지 않은 것.


포털 화면에서 ‘개성공단 잠정 중단’보다 두 칸 밑에 있는 ‘류현진의 첫승’을 손가락이 먼저 클릭하는 순간, 머리는 ‘이래도 되냐?’고 물었고, 이어 누구에겐가 모르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군산 비행장으로 낮게 나는 군용기가 다시 보이기도 했지만, 고위 관계자가 되어서 고급 정보를 가지고 고단수의 외교전, 심리전, 정보전 등을 직접 수행하지 않는 이상 바보상자에서 하는 소리나 되새김하면서 3인조 강도 때문에 패트리엇 미사일을 배치했다는 철 지난 농담이나 지껄일 뿐입니다. 


(경향DB)


배경조차 생소한, 나무 한 그루 보이지 않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이 텔레비전에 나올 때 애써 감정이입을 하기도 하지만, ‘내가?’ ‘내 아이가?’ 하는 생각은 전혀 비현실적입니다.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비현실적인 전쟁이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300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한국전쟁과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를 앞에 두고 3만명 이상이 죽었던 제주도에서 우리 동네 아저씨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조국통일대전’이나 ‘한반도에 들어선 커다란 시장’일 리는 만무합니다. 그때도 오늘 약속한 품앗이를 못 가거나 물꼬를 못 보거나 하는 것이 걱정이겠고, 여전히 농사를 개콧구멍으로 아는 조국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간직한 채 ‘아! 나는, 오늘, 소 밥도 못 주고 죽는구나!’ 하며 양민학살로 기록될 역사의 현장에 있기 십상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왜 그러는 거예요?” 하며 시작하는, 야구 해설보다 결코 재밌거나 유익하다고 할 수 없는 평론가들의 입방아는 넘쳐나는데, 정작 평화를 지키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누구도 말하지 않고, 평화를 위한 어떤 움직임에도 주목하지 않습니다. 성숙한 국민의 힘으로 안정을 유지하고 있다는 해석은 차라리 역겹습니다.


평화의 반대가 전쟁이 아니라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폭력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의 감각은 이미 다 닳아버렸기 때문입니다. 집에서 쫓기고, 병원에서 쫓기고, 일터에서 쫓기고, 사람에게 쫓기고, 돈에 쫓기고, 쫓기고 쫓겨 오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평화의 범위는 내 코 앞 석 자를 넘어 휴전선까지 닿기에는 난망한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바람이 불면, 우리 동네 아저씨들은 풀보다도 먼저 잽싸게 눕겠지만, 병자호란 끝에 돌아와 ‘불길이 끊긴 화덕 안쪽의 구멍을 막’고 ‘장독 속의 똥물’을 밭에다 뿌리며 봄농사를 시작하는, 김훈의 <남한산성>에서 오직 의미 있는 ‘서날쇠’처럼 살 것입니다. ‘조정이 비켜줘야 소인들도 살 것이온데….’


방긋 돋는 새순이 어서어서 자라 알곡이 되고 북녘 어린이들의 목구멍으로 따습게 넘어가는 쌀밥이 되기를 바랍니다.



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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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왜 이리도 더디 오는지, 아마 급작스레 추워진 날씨 탓이겠지만,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이승을 따뜻하게 데울 것이다. 일부러 꽃구경을 갈 여유는 없지만, 아내가 끓여준 백련차에서 깊은 향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수년 전 강진 백련사 선방에 앉아 백련차를 마시던 기억이 삼삼하다. 연꽃이 한창일 때 따서 급속냉동을 시키면, 그 향이 보존된다고 하더라.


식구들은 서울 은평구에 있는 살림의료협동조합에 가입했다. 살림의원에 가입차 방문했다가 만화책 한 권을 발견했다. 여기서 주호민이 그린 <신과 함께> 이승편을 읽었다. 철거 예정지역으로 지정된 한 산동네 이야기다. 낡아빠진 오락실을 운영하며 혼자 살던 장학봉 노인이 사망 일주일 만에 이웃에 의해 발견되는데, 노인이 저승차사와 나눈 이야기가 여운이 남는다.


저승차사가 나타났을 때, 장학봉 할아버지는 무릎에 담요를 덮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아마 <6시 내 고향>이 아니었을까, 순창 고추장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이것만 보고 가게 해줘요… 나의 유일한 낙이오.” “제가 무섭지 않으세요?” “죽는 건 무섭지 않지만… 다 썩어 문드러져 있을까봐… 얼마나 치우기 싫겠어… 그게 무서워요.” 생전에 자신을 돌보아주지 않았던 가족들이지만, 살아남아서 뒤치다꺼리를 해야 할 이들의 처지마저 돌보는 사람의 심정이다. 따뜻하다. 원망이 없다.


이윽고 저승차사가 “장학봉, 장학봉, 장학봉” 세 번 부르고, 육신에서 혼이 일어나 저승길을 채비한다. “아 참, 텔레비전 좀 꺼주시오. 전기세 많이 나와.” 차사는 “이제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라고 안심시킨다. 아마 보일러 난방도 못하고, 겨우내 전기장판으로 때웠을 할아버지에게는 늘 전기세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아끼고 아끼고 아끼고 살아야 살아남을 수 있는 ‘동정 없는 세상’에서, 그에게 위로를 주었던 것은 그래도 텔레비전뿐이었다.


그가 이승을 떠나도 이승은 무탈할 것이다. 그가 살던 허름한 방칸마저 용역들이 들이닥쳐 허물 것이다. 이렇게 그가 살았던 흔적들이 지워지고 나면, 그의 영혼은 삶의 무게에서 더 자유로워질 테지, 생각한다. 황지우 시인이 말했던가. 새는 나뭇가지에 앉았다 떠나가더라도 자신이 남긴 체중이 잠시 흔들릴 뿐 “자취를 남기지 않는다”고. 예전에 녹색평론 편집장을 하다가, 농사꾼이 된 장길섭은 “땅에 엎드리고 살다가 이승에 왔던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지는 게 자연에 대한 도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문득 그의 흙처럼 그을린 얼굴이 그립다.


임희숙은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에서 “너를 보내는 들판엔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래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라며 “등이 휠 것 같은 삶의 무게”를 노래했다. 그래, 삶은 고단한 것이다. 물론 희번덕거리는 탐욕의 눈빛을 가진 1퍼센트 상류층도 있을 테지만, 대체로 누구나 삶은 좀 고단하다. 다만, 그 고단함을 깊은 휴식을 위한 영양제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 다행이다.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만화책의 장학봉 할아버지처럼 다정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 사람들이 세상을 구원하고 있는지 모른다. 고요히 티내지 않고 은근히 하염없이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영혼의 혈족’처럼 떠올릴 줄 아는 내가 오늘은 대견하다. 그들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 ‘천개의 바람’처럼 우리 곁에 남아 사방에서 말을 건넬 것이다. ‘괜찮다’고, ‘그만하면 충분하다’고 위로할 것이다. 임형주가 부른 감미로운 노래 가사처럼 자유롭게 날며, 가을엔 곡식들을 비추는 따사로운 빛이 되고, 겨울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되고, 아침엔 종달새 되어 잠든 나를 깨우고, 밤에는 어둠 속에 별 되어 나를 지켜주리라 믿는다. 그러나 시선을 한 발자국만 옮겨 딛으면 바로 허방이다. 이승에서 이승만을 사는 사람들 때문이다. 한문 앞에 놓인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분향소를 걷어차고 꽃밭을 만드는 구청, 억울한 죽음 앞에 조의를 표하는 것도 아니면서, 죽음에 대한 예의가 없다. 강정에선 여전히 사나운 경찰이 평화활동가들을 밀어붙이고, 새 정부는 ‘저들만의 공화국’을 만드느라 염치가 없다. 정부 요직에 군 고위지휘관들이 속속 결합하고, 한반도는 전쟁 ‘선포’ 중이다. 가련한 여인은 맞아죽고, 일자리 찾을 수 없는 젊은이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거리에 나선다.


대한문 앞 쌍용차 희생자 분향소 철거 후 들어선 화단에 국화꽃을 던지고 있는 사람들 (경향DB)


동정 없는 세상이 맘 붙일 곳 없는 사람을 만든다. 저승을 생각하면, “사실 아무것도 아닌데” 생각하지만, 누구는 또 “그것은 패자의 변명”이라고 하겠지. 하느님 믿는 이들조차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면서 필요 이상의 재산을 모을 만한 재테크에 열을 올린다. 최근 대한문 앞에서 봉헌된 미사에서 최영민 신부는 “정말 ‘평화’가 필요한 시대인데, 교회에서는 ‘평화드림’이니 ‘평화상조’니 돈 버는 데만 열성”이라고 타박했다. 안타까운 세상에 말을 건네는, 만화 속 인물이지만, 장학봉 할아버지에게 조의를 표하고 싶다.



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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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ywba69@hanmail.net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웬만한 가정에서 거실의 주인은 다름 아닌 텔레비전이다. 모두의 눈길이 닿는 가장 좋은 위치에 떡하니 자리 잡은 채 식구들과 생활을 함께한다. 어떤 이들은 텔레비전을 거의 숭배하다시피 모신다. 귀가하자마자 그를 찾고, 그의 매력에 홀려 온종일 쳐다보고, 시시때때로 더 큰 화면에 고화질의 신품으로 개비한다. 요즘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가지각색의 기기들이 생겨나 손바닥 안에 넣어가지고 다니며 언제 어디서나 그의 일거일동을 다시 보기도 한다.


이처럼 일상을 파고든 텔레비전이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력이 막강하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이 왕왕 생긴다. 어쩌다 뉴스 배경으로 깔리는 거리 스케치에 무표정한 행인으로 등장하거나 밥 먹으러 간 식당에서 별안간 들이닥친 카메라를 만나 맛집 소개 프로그램에 뒤통수라도 잡힐라치면, 기가 막히게 그걸 알아보고 연락해오는 지인들이 있다. 그처럼 깨알 같은 숨은그림찾기는 방송이 얼마나 위력적인가를 증명하는 한편, 직업적 방송인이 아닌 바에야 일반인이 텔레비전에 출연하는 것이 좀처럼 흔치 않은 일이라는 사실을 방증한다.


그런데 묘한 일이었다. 지난해 말부터 올봄까지 서너 달이 넘게 공중파, 그것도 공영방송 제1TV에 출연했음에도 주변에서 알은체하는 이가 거의 없었다. 어쩌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걸 봤다’고 말을 건네 오는 이들 역시 몇 해 전 방영했던 여행 프로그램이나 인터뷰의 재방송을 본 경우였다. 하긴 나도 내가 출연하는 프로그램의 ‘본방 사수’를 다섯 번 중에 두 번밖에 못 해봤다. 일주일 중 가장 고단한 ‘험프 데이(hump day)’ 수요일 꼭두새벽 모두가 잠든, 혹은 잠들어야 마땅할 자정 이후에 시작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기란 웬만한 정성이 아니고서야 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시간에 프로그램을 편성해놓은 건 보든지 말든지 맘대로 하라는 뜻에 다름 아닐 터, 그리하여 그같이 불친절한 방송을 기어이 본 이들은 전체의 1퍼센트에 불과했다. 그 프로그램이 바로 2011년 6월에 시작해 2013년 4월2일까지 KBS 제1TV를 통해 방송되었던, 이제는 폐지된 공중파 유일의 책 프로 <즐거운 책 읽기>이다.


제목 KBS1 '즐거운 책읽기' (경향DB)


어눌한 말재간에 카메라 울렁증까지 있는 내가 얼결에 학식과 견문이 높은 출연자들의 말석에 끼어 앉았던 건 새로운 책 읽기를 배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문학의 침체와 출판계의 고사(枯死) 위기는 말하기에 입만 아픈 이야기지만 세상엔 여전히 하고많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애초에 그 모두를 읽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에 독서에도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읽고 싶은 책만 읽기에도 바쁘다고 콧방귀를 뀌던 외고집쟁이였던 나도 그리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 <즐거운 책 읽기> 덕분에 색다른 시각에서 새로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일이면서 공부였던 그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구절구절 뽑아 써먹기만 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을 원전으로 읽었을 리 없으며, 체코의 천재적인 작가이며 오늘날 SF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카렐 차페크를 동명의 일본 홍차 브랜드로나 기억했을 것이며, 20세기 뉴욕에서 21세기 런던으로 이동한 현대 미술의 흐름을 통해 ‘창조의 제국’이 된 영국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좋은 책(fine work)’이 아닌 ‘유명한 책(famous work)’을 선호하는 ‘속물 교양’이 어떻게 탄생되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자신만의 길을 만들기 위해서는 때로 헤매는 시간도 필요하다. 하지만 낯선 길에서 섞갈려 갈피를 잡지 못할 때에는 눈 밝은 길라잡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함께 읽는 책 읽기를 통해 새삼스레 배웠다.


그런데 어디론지는 모르지만 앞을 다투어 달리는 세상은 길을 인도하는 이들 따윈 필요치 않다고 한다. 아파트 관리비 고지서에 반강제로 포함되어 징수되는 TV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조차 당장에 눈에 보이는 시청률을 좇아 공연히 걸리적거리기만 하는 길잡이를 걷어치운다. 얼마나 더 기발하고 재미있고 보는 사람 혼을 쏙 뽑을 프로그램을 새로이 편성될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찰과 자성의 브레이크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단지 쥐떼를 몰고 다니는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언제나 문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즐거운 책 읽기>는 없어졌다. 하지만 까칠한 패널들을 부드러운 지성과 넉넉한 품으로 감싸준 정용실 아나운서, 적은 제작비 때문에 무대 세트 한 번 바꾸지 못했지만 항상 열정이 넘쳤던 PD와 작가들은 방송으로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편견을 깨준 고마운 인연으로 남았다. 그리고 모두가 곤히 잠든 시간에 책과 만나기 위해 밤을 지새운 1퍼센트의 시청자들에게도, 내게 대표 자격이라는 게 있을 턱이 없지만, 모두를 대신해 인사를 전한다. 그 1퍼센트의 불면이 언젠가 비몽사몽 갈팡질팡하는 세상을 흔들어 깨워주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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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엔 오늘날처럼 이 정도로 취업이 어렵진 않았다. 전공과의 불화로 어서 학교를 떠나 출근이란 것을 하고 싶었다. 양복을 입고 사회에 편입하는 것도 너끈히 사는 한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렇게 엉거주춤하게 캠퍼스와 작별할 무렵, 내심 소박하게 생각해 본 게 있었다. 앞으로 이렇게 직장생활을 하면 어떨까?


취직을 하면 그래도 책상은 하나 생길 터이다. 그 앞으로 손님이 가끔 찾아올 것이다. 그럴 때 맨숭맨숭하게 있을 게 아니다. 둘 사이엔 뭔가 있어야 한다. 하필이면 왜 그런 유치한 품목을 선정했는지는 모르겠다. 세 번째 서랍 한구석에 땅콩을 수북하게 준비한다. 누가 찾아올 때 그 땅콩을 함께 먹으면서 고소한 이야기를 나누자. 그런 퍽 희한한 생각을 했었다.


또 하나는 편지를 쓰고 싶었다. 그때만 해도 인터넷이나 휴대폰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두 번째 서랍에는 우편엽서를 100장 묶음으로 비축한다. 가끔 울적할 때마다 엽서를 쓴다. 물론 우표도 구비한다. 공개된 엽서에 담을 수 없는 사연을 쓸 때도 있을 테니깐.


실제로 회사생활이 시작되었다. 회사는 나에게 서랍이 네 개나 달린 ‘좁장한’ 책상을 주었다. 몸집이야 커졌지만 노는 곳이 운동장에서 교실로 다시 이렇게 어깨만 한 면적으로 팍 쪼그라들었다. 그래도 나만의 품목을 구비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된 셈이라 위안을 삼았다. 그러나 나의 구상은 많이 헝클어졌다. 땅콩은 준비하지 못했다. 사무실에서 껍질을 흘리며 우물거린다는 게 영 어울리는 풍경이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커피를 마시고 일과가 끝난 후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겨 맥주와 함께 땅콩을 먹었다.


우표와 엽서? 그건 실제로 행동에 옮겼다. 기억에 남는 엽서가 있다. 기술고시에 합격하고 공무원의 길을 걷는 친구가 있었다. 인허가 문제로 정부과천청사를 가끔 드나들 때면 산업자원부 로비에서 만나 커피를 홀짝이기도 했다. 어느 날, 친구가 정색을 하고 전화를 했다. “야, 인마? 누구 죽일라꼬 글카나? 한 번만 더 고따우 엽서 보내면 쥑이뿐다!”


그 친구의 반응이 이해할 만도 했다. 동료나 상사도 볼 수 있었던 엽서는 이랬던 것이다. “야, 오리야. 근무 잘하고 있느냐? 공무원의 본분을 망각하지 말고… 운운” 물론 오리는 탐관오리에서 따온 말이었던 것!


(경향DB)


작년 말부터 편지를 자주 쓸 일이 생겼다. 훈련병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수신인의 처지가 인간적 권리가 잠시 유보된 상태에 놓였다. 인터넷 편지는 하루 두 통만 가능했다. 훈련병의 엄마와 여자친구에게 양보하고 나는 손편지를 쓰기로 했다. 그러면서 늘 지나치기만 했던 우체국에도 가게 되었다. 최근의 기본 우표값은 270원이었다. 제법 무게가 나갔는지 20원짜리 우표를 하나 더 붙이라고 했다. 우표를 사서 붙이는데 기분이 좀 묘했다. 옛날엔 우표 뒤에 마른 접착제가 있어 물을 칠하면 금방 끈적끈적해졌다. 풀을 바르면 접착력은 더욱 강력해졌다. 그러나 누가 그러겠나. 대부분 그냥 땅콩을 입 안으로 들이듯 우표를 혀에 얹었다. 그러면 침의 힘으로 접착제가 풀어졌다.


요즘 우표는 좀 달라졌다. 270원짜리는 바탕면이 있어 우표를 떼면 바로 접착력이 있었다. 문제는 20원짜리였다. 그건 옛날과 같은 그냥 우표였다. 버릇대로 입 안에 넣었더니 혀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옛 우표라면 아교처럼 좀 짜릿한 접착제의 냄새와 끈기가 전해오기 마련이다. 그것은 무슨 미약한 전기처럼 혀에 따끔한 자극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냥 맨숭맨숭했다. 알겠다. 요즘 사람들은 그런 걸 위생에 문제가 있거나 점잖지 못하다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풀로 붙이라는 뜻인 게다. 하지만 나에게는 편지 부치는 은근한 재미가 하나 사라지고 말았다. 미미한 세기로 혀에 착 감겨들었던 접착제. 그것은 분명 작은 행복의 충격이기도 했었는데!


글쎄, 난 그래도 발신인과 수신인을 이어주는 접착제의 아찔한 효과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 몸의 속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혀는 그 쓰임새가 참 많다. 밥을 먹는 데도 소용되고 말을 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숟가락이 찬밥과 더운밥을 가리지 않듯 혀도 참말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건 아니다. 이솝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것도 혀이고 가장 좋은 것도 혀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일 테다. 그리고 침으로 우표를 붙이는 데에서 알 수 있듯 편지를 부칠 때 그 마무리는 혀가 하였던 것이다. ‘키스로 봉한 편지’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하지 않았겠는가.


내가 요즘 보내는 엽서는 서해의 어느 먼 섬으로 간다. 불안을 헤치고 멀미와 싸우며 여러 날 걸려야 도착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마다 써서 보냈더니 100통의 엽서가 제법 움푹 줄었다. 북어 스무 마리를 꼬챙이 하나에 꿴 것을 쾌라고 하듯 엽서 100장의 묶음을 칭하는 단어가 없을까. 나는 임시로 그것을 책이라 하겠다. 내가 이 책을 모두 써서 두 번째 서랍이 허전할 무렵이면 아들은 내 곁으로 돌아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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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청맹과니 어린 날엔 몰랐다. 부모도 자식으로 인해, 선생도 학생 때문에 상처받을 수 있음을. 강의가 시작되자마자(혹은 시작되기도 전에) 졸다 못해 아예 잠드는 대학생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이면 일희일비하거나 흥야항야하지 않기를 매양 다짐함에도 어쩔 수 없이 받은 생채기로 쓰라리다. 처음엔 젊은이들의 밤잠이 어찌 그리 부족한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해했다. 그들의 가수면 상태는 아침 1교시든 오후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든 교양필수 특강이든 매한가지였다. 다음엔 자기반성으로 내 이야기가 그리도 시시하고 재미없나 고민하며 점검했다. 멀티미디어 세대는 눈부터 사로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개 발에 편자인 프레젠테이션 자료까지 멋들어지게 만들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내용을 바꾸고 형식을 개비해도 애초에 잠잘 의지와 자세에 충만한 그들을 깨울 방도가 없었다. 화가 나기보다 속상했다. 본디 누군가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 무능자처하였으나 소통과 공감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돌심보인 내 마음까지 아프게 했다.


왜? 도대체 왜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대학에 와서 강의실 의자에 걸터앉자마자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반사적으로 잠드는가? 아무런 학문적 호기심도 없다면 차라리 강의실 밖 세상 공부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은가? 나야 주제넘은 헛짓을 걷어치우면 그만이지만 도무지 까닭을 알 수 없는 젊은이들의 가수면 상태는 안타까움을 넘어 커다란 의문으로 다가왔다. 모르면 물어봐야 한다. 물어도 대답 없는 당사자들을 대신해 그들을 가까이서 일상적으로 접하는 지인들을 붙잡고 물었다. 아래의 사례는 개인적 인맥으로 만난 이들에게 청해 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들이다.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L선생은 교양필수 과목인 ‘채플’을 진행할 때 자괴감과 모멸감으로 마음을 다치지 않기 위해 애당초 ‘방송 설교’를 한다 생각하고 강의를 하노라 고백했다. 유명한 ‘파워 블로거’로 종종 대학 특강을 하는 친구 W도 연예인의 가십을 말할 때나 눈을 뜨고 있다가 조금만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금세 눈감는 학생들 때문에 강의 청탁을 가리게 된다고 하소연했다. 이른바 ‘독일 박사’로 지칭되는 학문적 내공이 깊은 유학파들도 도무지 통(通)할 수 없는 현실에 좌절하고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있는 지경이란다.


이렇게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강의실의 공기를 강사 K는 ‘소비자 이론’으로 설명했다. 요즘 학생들(아, ‘요즘’ 젊은이, ‘요즘’ 아이들이라는 표현은 정말 쓰기 싫지만!)은 철저히 소비자로서의 자세를 갖추고 구매하는 자세로 수업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필요 없는 상품은 간단히 외면한다. 그래서 강사 K는 직접 강의를 줄이고 학생들이 스스로 ‘영업사원’이 되도록 수업의 진행을 맡기는 방식을 택한다고 했다. 


(경향신문DB)


그런가 하면 사교육 1번지로 지칭되는 한강 이남의 어느 동네에서 20년 동안 인기 강사로 이름을 날렸던 후배 N은 대학의 관문에 이르기도 전에 마지막 한 방울의 에너지까지 빼앗겨버리는 아이들의 현실을 증언한다. 일주일에 적게는 대여섯 곳에서 많게는 열 군데가 넘는 학원을 다니는 아이들을 N은 ‘좀비’라는 한마디로 표현했다. 일요일에도 오전 내내 ‘과학 실험’ 과외를 받고 오후에 학원에 와서 책상 위에 널브러진 아이를 보면 도저히 일어나라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그처럼 엄청난 돈과 시간과 (노력이라기보다) 에너지를 투여한 데 비해 결과물은 기대치에 크게 밑돌지만, 어쨌거나 결과가 좋아 대학 입시에 ‘성공’했다고 해도 아이들의 영혼은 바스러진 나비의 날개처럼 쉽게 회복되지 않는다. 


‘단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 채 자라나 명문대 학생이 된 후 복수하듯 스스로의 삶을 방기하는 N의 제자 이야기는 까닭모를 선잠에 빠진 젊은이들을 볼 때와는 또 다르게 마음을 저리게 했다. 스스로 원해서 하는 맨 처음 일이 어쩌자고 자기 파괴여야 했을까. 그 복수는 무엇을 위해, 누구에게 하는 것일까.


모든 시대의 청춘은 고단하다. 나 또한 불안에 시달리며 차라리 혼곤한 잠 속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그 시절을 기억한다. 어쩌면 강의실 의자에 파묻혀 잠든 그들은 밤새 ‘알바’에 시달렸거나 불가부득한 불면의 밤을 보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령을 잡을 수 없는 춘곤증의 이유가 그동안 길들어 온 서열주의와 경쟁주의의 피로감으로 인한 무기력이라면, 젊은이들에게 들씌운 수마(睡魔)는 고스란히 어른들의 책임이다. 봄(春)은 봄(見)이라 더 많이 보고 기어이 봐야만 한다. 물론 그 와중에도 반짝이는 눈빛들에게 희망을 건다. 그런 한편으로 이토록 아름답고 찬란한 날에 맥을 놓고 까무룩 잠들어버린 푸른 봄들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그들을 깨울 방도는 없을까? 퇴마사가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한잠 푹 자고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나을까? 해답을 아는 분이 있다면 제발 좀 가르쳐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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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3년 전까지만 해도 보행이앙기를 끌고 쫀득쫀득해진 무논을 철퍽철퍽 걸어다니며 모를 심었습니다. 허벅지까지 꽉 끼는 물장화를 신고 하루 종일 1만여㎡의 논에 모를 심고 나면 온몸이 한여름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해지지만, 네 줄씩 착착 심어지면서 들판이 파랗게 채워지는 것을 가까이에서 보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할 만한 일이었습니다만, 힘들게 느껴지기 시작한 것은 몸의 상태에 따라서가 아니라 승용이앙기가 점점 눈에 많이 띄면서부터였습니다. 더구나 보행이앙기를 끌고 서너번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옆 논에서 승용이앙기로 논 한 자리를 다 심고 “어이! 이리 와서 술 한잔 먹고 하소” 하면, 이건 참, 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부르는데’ 갈 수도, 안 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일감의 정도와 아직은 끄떡없는 체력에 비추어 나에게는 꼭 맞는 기계였지만 아무도 취급하지 않아 호환성이 떨어지게 되고 ‘궁상 그만 떨라’는 압박에 시달려 3년 전 고물값 5만원을 받고 고물상에 넘기고 말았습니다.

(경향신문DB)


한두 해는 동네 형님 이앙기를 빌려 심었습니다. 하지만 “돈 받을 것 같으면 빌려주지도 않는다” “너, 기계 살 때까지는 그냥 쓰라”는 말 사이에는 간극이 있는 것이고, 그 간극에서 나는 염치를 발견했습니다. 염치인지, 자괴감인지 모를 마음으로 다음해부터는 이앙기 영업을 하는 사람에게 모 심는 것을 통째로 맡겼습니다. 돈으로 해결하니 걱정은 덜했고 몸도 편했습니다.


모를 많이 심는다 해도 승용이앙기로 1년에 열흘 이상 모를 심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승용이앙기는 아무리 썩어도 5만원에 넘길 수 있는 고물이 아닙니다. 가을 바심에 길어야 보름 정도 쓰는 콤바인도 수천만원, 봄에 논을 갈고 꾸미는 트랙터도 수천만원입니다만, 농사짓는 집마다 갖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일을 돕거나 급한 사람에게 빌려 주는 인정은 있지만 같이 장만하고 사용하는 데에는 손을 내젓습니다. 합자하면 ‘망하고’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 보편적인 생각들입니다. 내 편리대로 쓰는 만큼 수천만원짜리 농기계 때문에 부채가 악성이 되어 가는 과정도 혼자 견뎌야 하는 일입니다. 


마을 궂은일을 함께하고, 초상에 상여를 함께 메고, 절기마다 회관에 모여 밥 나눠 먹는 마음으로 농기계를 함께 쓰는 일은 왜 가능하지 않은 걸까요?


경지면적과 농기계의 작업량을 고려해 우리 마을에 필요한 농기계의 숫자를 산출하는 것은 초등학생도 할 수 있습니다. 한 마을을 협동의 단위라고 전제했을 때 당장 우리 마을의 잉여 농기계만 처분해도 수억원의 고정자산 처분 이익이 생기게 됩니다. 새로운 성장의 이름이, 사라지지도 않는 ‘4대강 사업’일 수도 있겠고 사라져버린 ‘경제민주화’일 수도 있겠으나 협동과 연대의 관계를 통해 얻는 이득이야말로 새롭고도 무한한 성장동력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의 무대를 경쟁에서 협동으로 옮기는 결단 이상으로 기술 혁신을 위한 부단한 노력 또한 중요합니다. 가까운 몇몇 유정란 생산농가들은 100% 우리 곡물 사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농업의 근간인 소규모 가족농이 연대해서 국산 곡물만으로 계란을 생산한다는 취지입니다만, 축산연구원 박사들이 피나는 노력을 거듭해 만든 배합사료의 결과를 넘어서지 못하고 낮은 산란율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착한 소비자들의 격려로 버티고 있지만 더 많은 소비자를 만나 하나의 흐름을 만드는 데까지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많은 연구와 노력을 통해 극복해 낸다면 축산업에도 일대 혁신이 오리라고 굳게 믿으며 서로 애쓰고 위로하고 있는 중입니다.


대한민국 과수농가에겐 지긋지긋한 캘리포니아산 오렌지이지만, ‘썬키스트’는 도매상들의 횡포에 맞선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농가들이 판매와 유통을 직접 조직하면서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워온 협동조합입니다. 유니폼에 상업광고를 찍지 않고 유니세프를 후원하는 ‘FC바르셀로나’ 역시 전 세계 20만 조합원이 회장 선출 권한을 갖는 ‘클럽 그 이상’의 협동조합 기업입니다. ‘썬키스트’와 ‘FC바르셀로나’를 보며 키우는 협동의 꿈도 나무랄데는 없습니다. 그래도 뭔가 마음에 확 와닿지 않던 차에 우연히 서울시 협동조합 상담센터에서 만든 포스터를 보았습니다. 다섯 마리의 기린이 초원에서 협동조합을 구상하는 내용입니다. ‘유기농 먹거리’와 ‘공동 육아’를 고민하는 기린의 말풍선 마지막에 “사자 망보기 협동조합은 어때?”라는 문구를 보고 한참을 웃었습니다.


웃다가, 다시 보다가, 기린도 생각하고, 사자도 생각하다가 ‘사자 망보기 협동조합’에서 ‘협동과 연대’에 대한 ‘기린의 사즉생 결기’를 읽었다면 심각한 오독이겠습니다만, 내 삶을 스스로 기획하고 우리의 필요와 상상력을 함께 조직하는 것을 더 이상 미룬다면 지금, 여전히 그냥 가고 있는 길의 끝이 어떨지 대충은 알고 계시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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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서울을 떠난 지 10여년 만에 다시 돌아온 서울에서 실종된 것은 ‘삶’이었다. 일상은 계속되었으나 복잡한 관계망 때문에 ‘나’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고, 매듭 없는 끈처럼 정리되지 않은 채 지루한 하루 이틀이 쌓여갔다. 가끔 반짝이는 희열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제와 같은 내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강박처럼 나를 자주 슬럼프에 빠지게 했다. 자고로 사람은 추운 겨울날 가슴에 넣은 손에서 온기를 느낄 수 있어야 ‘생존’을 확인하듯이, 몸을 움직여 제 몸에서 무럭무럭 피어오르는 땀내를 맡으면서 ‘살아있음’을 느낀다. 하다못해 좀처럼 앓아눕지도 못하는 내 건강을 탓하기도 했다. ‘이제 그만!’이라는 소리가 콘크리트 바닥에서 차오른다.


어제는 밤 늦은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텔레비전 전원을 올렸다. 귀농한 뒤로 텔레비전을 버렸고, 다시 서울로 돌아와 아이 성화 때문에 3년 만에 들여놓은 텔레비전이다. 요즘은 텔레비전도 진화해 IPTV에서는 영화도 마음대로 골라볼 수 있다. 무작정 시선을 끄는 영화가 있었다. “용기가 필요한 당신을 위한 기적 같은 여행”이라고 선전하는 라이언 머피 감독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주인공 리즈 역을 줄리아 로버츠가 맡았다. ‘노동하고 기도하라’는 베네딕토 성인의 주문보다 한층 진화된 구호다.


시몬 베유가 존경했던 생의 철학자 알랭은 ‘위(胃)의 철학’을 강조했다. 그는 서구철학이 ‘굶주림’에 대해 무심했다고 비난했다. 그래서 시몬 베유는 철학교사로서, 한사코 노동자들의 밥을 위해 싸우면서 ‘장미’를 꽂아주고 싶어 했다. 육신의 요구와 정신의 요구를 통합시킬 줄 알았던 그는 이 과정을 통해 마침내 ‘실천적 신비주의’에 닿았다. 영화에서 주인공 리즈는 안정적인 직장과 번듯한 남편, 맨해튼의 아파트까지 버리고 ‘자신이 원했던 삶이 무엇인지’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그 길에서 리즈는 이탈리아에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서 자유롭게 사랑한다.


유쾌한 밥상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이완시키는 일이 또 있을까? 예전에 화성시에 있는 야마기시 공동체에서 연찬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산안농장’이라고 부르는 이 무소유 공동체를 사람들은 ‘행복한 마을’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풍족하게 먹고 낮잠을 즐기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는 풍경이다. 잠시 잠깐의 낮잠이지만 노곤한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나면 몸이 상쾌해지고, 곧 이어 가혹한 정신훈련이라 불러야 할 연찬에 들어간다. 아마 리즈는 이탈리아에서 몸의 욕구를 충분히 사랑했을 것이다.


인도는 기도하기에 좋은 곳이라 불러도 될까? 사람들은 시신이 떠내려가는 바라나시 갠지스 강변에서 목욕을 하고, 곳곳에 놓여 있는 사원에서 기도에 몰두한다. 가난이 손톱 끝까지 배어들어간 땅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황금빛 꽃을 팔러 다니고, 걸인들은 적선받은 돈으로 짜이 한 잔을 사서 마신다. 이 걸인들은 아무리 가진 게 없어도 신에게 꽃을 사다 바친다. 다음 생애에서는 다시 지옥 같은 이승을 살고 싶지 않다는 갈증 같은 기도다. 리즈가 찾아갔던 아쉬람은 ‘내 안에 신이 머물고 있음’을 깨닫고, 삶의 균형을 찾으려고 찾아든 구도자로 넘쳐난다. 어찌 생각하면, 인도는 가장 참혹한 상황이기에 제 삶을 송두리째 내려놓고 드리는 간절한 기도가 가능한 땅인지도 모른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경향신문DB)


이 영화의 백미는 ‘영원한 사랑’이 가능한지 묻는 것이다. 리즈는 ‘영원한 사랑’이 없다고 믿기 때문에 짧고 길었던 사랑을 떠나보내면서, 이제 다시 누군가 사랑하기를 주저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렵게 얻은 ‘삶의 균형’을 깨뜨리고 상처를 덧입히는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가 상담을 청했던 주술사 케투가 마지막 순간에 “삶의 균형은 상처를 통해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간다”고 말하자 ‘용감하게’ 발리에서 만난 사랑에 응답한다. 리즈는 새로운 사랑 펠리페에게 이탈리아에서 배운 말을 전한다. 아트라베시아모!(Attraversiamo). “우리 함께 가자”라는 말이다.


그러나 리즈가 ‘영원한 사랑’을 믿지 않았듯이, 한 개인의 자기애로는 영원한 사랑이 불가능하다. 이웃을 ‘나’의 확장으로 여기는 깨달음이 따라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능력이 필요하다. 그 사람의 기쁨에 내가 먼저 기쁘게 반응하는 인간에게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하다. 여기서 이른바 ‘사회적 사랑’이 발생한다. 고공철탑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오르는 해고노동자를 보면서 내가 먼저 눈물이 앞을 가린다면 나는 그 순간 영원한 사랑에 직면한 것이다.


리즈가 발리에서 만난 가난하지만 다정한 와얀 모녀를 위해 움직이는 순간 그 사건이 발생했다. 민간요법으로 밥벌이를 하던 이혼녀 와얀과 그녀의 딸에게 집을 지어주기 위해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순간 리즈는 영원한 사랑에 접속됐다. 푸른 타일이 깔린 집이 발리에 지어진다. 푸른빛은 가톨릭에서 성모 마리아의 색깔이다. 세상을 품어 안는 그 자비 안에서 영원한 사랑은 이따금 우리 곁에서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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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내 고향은 동해에 잇닿은 변방의 작은 도시다. 황제의 야망보다는 제후의 평강을 택한 시조를 따라 천년 동안 삶터를 지킨 토박이 집안에서 수성(守城)의 미덕을 배우며 자랐다. 하지만 어린 나를 쏘삭인 것은 타지 출신들이 ‘텃세’라고 부르는 가득권의 안정감보다 ‘탈출’에 대한 의지였다. 한마디로 나는 답답하고 지루했다. 학기가 바뀔 때마다 같은 반에 두어 명씩은 돌림자를 쓰는 방계 친족이 있었고, 성씨가 달라도 따지고 들면 사돈에 팔촌쯤 되는 친구가 수두룩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바람에 들썽거리던 시절, 아무리 정처 없이 헤매려도 아버지 친구, 엄마 친구, 동생의 친구와 이웃 아줌마 아저씨까지 거듭 부딪치는 좁디좁은 ‘시내’를 견디기 힘들었다. 항상 감시당하는 기분이었기에 한시바삐 벗어날 궁리뿐이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익명의 숲, 너른 세상에서 내 멋대로 자유롭게 살고 싶었다.


이제는 그렇게 떠나온 고향에서 살았던 시간보다 타지를 떠돌며 산 세월이 더 길다. 낯설고 두려웠던 대도시가 어느덧 생활공간으로 익숙해졌다. 수도권 신도시 대단지 아파트에서 소시민으로 섞여 살며 갈망했던 익명성을 여한 없이 누린다. 하지만 가뿐한 개인주의자의 삶을 살면서도 고단할 때면 어김없이 배릿한 바다 냄새와 고향을 떠올린다. 초등학교 동창들은 명절 때마다 언제 집에 내려오느냐고 채근한다. 머리는 희끗희끗해졌지만 장난기 어린 표정은 여전한 그들을 만나면 맥없이 흘려보낸 시간이 일순 무색해진다. 



도루묵찌개를 안주 삼아 예전의 그 ‘경월소주’에 비하면 맹탕인 소주를 기울이며 함께 나누는 이야기는 결국 얽히고설킨 관계의 일상이다. 뉘 집 누구와 누구의 근황을 읊어대는 투박한 사투리가 정겹다. 어느 별에선가 휙 날아와 떨어진 운석인 양 빤빤하게 굴어도, 어쨌든 내 잔뼈는 그 너른 오지랖과 눈길 속에서 굵은 게다.


한국 사회는 2011년 리투아니아를 제치고 인구 10만명당 31.7명으로 자살률 세계 1위에 등극했다. 근간에는 이웃나라 일본의 신조어로 ‘무연사회(無緣社會)’의 징후인 ‘고독사(孤獨死)’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질병으로 사망한 후 한 달여가 지나서야 냄새로 알려진 죽음, 무려 6년 뒤 백골이 되어 발견된 죽음 앞에서 전체 가구 중 4분의 1이 1인 가구가 된 한국 사회는 충격을 넘어선 공포로 반응한다. 언론이 연이어 쏟아내는 고독사와 관련된 기사의 대부분은 외로운 죽음, 방치된 죽음에 대해 개탄한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자면, 외롭지 않은 죽음이 어디 있는가? 가족과 친구에게 둘러싸여 일일이 작별인사를 나누고 평화롭게 ‘잠드는’ 죽음 같은 건 꿈에 불과하기에, 나는 기꺼이 죽음의 고독을 감내할 작심을 진즉부터 해온 차였다. 하여 지금 논란이 되는 ‘고독사’는 기실 ‘고립사’라 불러 마땅하며, 살아남은 자들이 나눠야 할 고민거리는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육탈한 시신이 증명하는 것은 생전의 외로운 삶, 방치된 삶에 다름 아니다.


‘큰 재난이 닥쳐오면 각자 날아오른다’는 말처럼 남은커녕 나를 돌보기에도 버거운 시절이다. 애옥한 살림살이만큼 마음이 가난해져 누군가를 살필 겨를이 없다. 그러나 아무리 제각각 날아오르려 해도 세상의 그물에 갇힌 채로는 날갯짓조차 버겁다. 신자유주의의 비정한 롤러코스터에 올라탄 동승자들과 손잡고 껴안을 수밖에 없음은 연민과 동정을 넘어선 생존의 문제다. 고독의 대가(大家)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말했듯, 고독은 당사자와 다른 사람 사이에 놓인 공간의 거리로 측정되는 것이 아니다. 군중 속의 고독은 더욱 잔인하고 혹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과 친구의 연고가 모두 끊긴 상태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웃이 고립과 소외가 빚어내는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 예전의 고향에서처럼 누구네 집의 숟가락, 밥공기가 몇 개인가를 알지는 못해도 누구네 집의 쌀독이 비고 약봉지가 떨어졌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러하기에 관계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마을의 귀환이 절실하다.


(경향신문DB)


그 마을은 소유주들이 집값을 중심으로 하나 되는 ‘뉴타운’이 아니라 삶터를 함께하는 사람들끼리 스스로 만들어가는 문화와 환경과 교육의 ‘공동체’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얼마 전 KBS <수요기획>에서는 ‘재미난 마을에는 재미있는 사람들이 산다’ 편을 통해 ‘마을공동체 지원 사업’을 벌이는 서울시가 모범사례로 꼽는 도봉산 자락의 삼각산 마을을 소개했다. 나 또한 그런 마을에서 아이를 키웠고 지금도 그런 마을을 일구며 살고 있다. 나 같은 개인주의자까지 슬그머니 한쪽 발을 들여놓고 싶을 만큼, 마을은 추상이 아닌 실제로서의 ‘우리’의 삶에 관여한다. 우리의 아이들이어야 안전하다. 우리의 놀이여서 재미있다. 우리의 터전이기에 사랑스럽다. 인간으로서의 우리는 고립되어 살 수 없다. 그런 삶이야말로 백골이 되어 발견되는 죽음보다 더 슬픈 것이다. 마을은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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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도서출판 궁리 대표


점심시간을 끼고 인왕산에 올랐다. 새해가 오면 산 아래 동네에는 바뀌는 것도 많다. 달력이 바뀌고 사람들의 나이가 바뀐다. 방이나 벽지를 바꾸고 싶은 이도 많을 것이다. 여기서 한눈에 보이는 청와대의 얼굴도 잠시 바뀐다. 그러나 인왕산은 그저 인왕산일 뿐 그랬거나 말았거나 그제 내린 눈을 품에 안고 묵묵히 서 있었다.


오랜만에 산을 오르자니 그냥 사무실에서라면 만나지 못했을 생각들이 멀리서 찾아왔다. 고향, 인생, 죽음 그리고 책. 이에 관해 신년에 걸맞은 궁리를 이리저리 해 보았다. 그런 좀 무거운 주제가 끊길 무렵이면 산을 구성하고 있는 풀, 돌, 나무 등 더욱 묵직한 것에 대한 생각을 밟아나갔다. 그리고 벌레와 곤충의 안부를 찾아 숲으로 궁금한 눈길을 던지기도 했다.



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과 뒤로 보이는 인왕산에 밤새 내린 눈이 앉아 있다. (출처 : 경향DB)


깔딱고개에서는 작년에 자주 만났던 개미들 생각이 났다. 어느 금요일 어스름 무렵에 이런 추리를 한 적이 있었다. 어둠이 차츰차츰 몰려와 진하게 되었을 때, 등산객의 발길이 끊어졌을 때 그 적막한 인왕산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미는 이런 정황을 재빨리 간파했을 것이다. 인간의 그늘을 벗어나는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까. 영리한 개미라면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치마바위 곁을 지나 하산하는데 멀리 범바위 능선이 눈에 들어왔다. 막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때 어둑한 곳에서 한 그림자가 휙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덩치가 나만한 것 같았다. 내일의 휴일을 맞이하여 사람만하게 변장하고 변신하는 것. 분명 그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근무교대하는 군인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위틈으로 감쪽같이 숨어드는 개미인간이 아니겠는가! 내가 지금 미끌미끌한 산길에서도 끊임없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것은 혹 그 개미인간의 행방에 관한 작은 실마리를 찾을까 해서였다. 그러나 역시 개미들은 대단했다.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를 자장가 삼아 개미는 지금 느긋한 겨울잠을 즐기는 것일까. 어디에도 쉽사리 그 흔적을 노출시키지 않고 있었다.


인왕산을 오를 때 계절에 따라 특별히 생각의 품목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겪어온 것과 닥쳐올 것을 중심으로 사색의 무늬를 짜곤 했다. 그리고 위에 잠깐 적은 대로 과학소설 같은 이야기 한 자락을 슬쩍 끼워넣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은 좀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다. 나의 머릿속에는 인왕산 초입에서부터 아프리카가 계속 맴돌고 있었다.


인왕산의 허리에 해당하는 산중도로를 건너 가파른 길을 치고 올라갔다. 이내 반반한 쉼터 바위가 나왔다. 서울시내 전경이 한눈에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경복궁과 청와대가 코에 닿을 듯해 사진 찍기에도 좋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경계병이 둘 지키고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새해 덕담을 건넸는데도 경계병은 최소한의 반응만 보였다. 혼잣말인 듯, 물어보는 듯 뜬금없이 말했다. “아프리카가 어느 쪽일까? 그중에서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어디쯤일까요?” 


아프리카. 여기서 아프리카를 찾으려면 하늘만 보아서는 안될 것 같았다. 너무 먼 공중의 길이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방향이 아니겠는가. 차라리 땅에 붙어사는 개미한테 물어보는 게 더 지름길일 것도 같았다. 개미라면 인간은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방법으로 아프리카 개미와 내통하고 있을지도 모르잖는가.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찾듯 인왕산에서 아프리카를 찾는 나를 두고 경계병은 얼치기 산중처사 내지는 정신이 좀 맑지 않은 이로 치부하는 듯했다. 대놓고 거동수상자 취급은 안 해도 슬금슬금 피하려는 눈치였다. 아마 정신수상자로 여기고 업무일지에 기록할지도 모르겠다. 오늘 계사년 첫 등산을 인왕산으로 하면서 아프리카를 떠올린 것은 까닭이 있다. 작년, 그러니까 임진년 세모에 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낸 한 통의 엽서를 받았다. 희망봉 근처 케이프반도의 수려한 풍광을 담은 그림에 코뿔소를 그린 우표가 붙어 있었다. 궁리에서 펴낸 책을 읽고 “개운한 만족을 느꼈”다면서 어느 독자가 보낸 것이었다. 엽서 말미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엽서가 도착할 무렵 아마도 한국은 대통령 선거 열풍으로 후끈 달아 있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그 즈음 인왕산에서 바라본 서울풍경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2012·12·03. Sandton, Johannesburg.”


아프리카. 그곳은 어디쯤일까. 바로 며칠 전 꽃산행을 함께하는 내 동무들이 아프리카로 떠났다.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을 누르느라 엄청 혼이 났었다. 지금쯤 그이들은 탄자니아의 응고롱고로 국립공원에서 꽃이며 야생 동물들과 흠뻑 교분을 나누고 있겠지. 남아프리카공화국. 엽서가 도착하는 데 한 달이나 걸리는 그곳은 얼마나 멀까.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민주화를 완성했다는 그곳은 공기도 다르겠지. 그나저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그 독자께는 오늘의 서울풍경을 뭐라고 전해줄까. 발 아래와 눈썹 너머를 교대로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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