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얼음을 뚫고 나와 ‘날 잡아 잡수’하고 엎드렸다는 겨울 잉어와 더불어 천하의 효자나 구할 수 있었던 눈밭의 딸기는 이제 겨울이 제철입니다. 부모님들도 더 이상 딸기 정도로 효자를 시험하지는 않으십니다. 그래도 유난히 추운 이번 겨울, 곱이나 더 들어가는 기름을 쳐다보며 새벽마다 하우스로 나가 온도를 점검하고 마음 졸이는 심정을, 딸기를 잡수시는 분들은 좀 알아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자연을 극복해야 얻어지는 맛이니 얼마나 욕보겠습니까.


농한기라고 한가한 농민은 별로 없습니다. 농사일이 없으면 김 양식장에 취업을 하거나 집 짓고 창고 짓는 데에 날일이라도 다닙니다. 연세 드신 분들은 동네 한 바퀴씩 걸으며 운동도 하고 회관에 모여 윷도 노십니다만, 노는 사람도 그렇게 편해 보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 주변 논두렁대학의 농업, 농촌 박사들과 함께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농한기를 맞아 충북 청원군 내수읍 노인회관에서 노인들이 '띠자리'를 만들고 있다 (출처: 경향DB)



첫 번째 주장은 ‘비닐 발명론’입니다. 비닐은 제초작업에도 혁혁한 공을 세웠으며 비로소 겨울철 특수 재배를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땅을 죽이고 에너지를 너무 투여한다는 비판 정도는 “너 이리 와서 니가 풀 한번 매봐라”하면 수그러들 것이고 그렇게 심오한 문제를 제기했다가는 겨울에 딸기를 먹는 오천만 국민이 한꺼번에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신중한 접근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농사는 철이 없어졌고 농민 역시 언제든 투입될 수 있는 농자재의 신세로 격하된 배경이 바로 비닐의 발명이라는 주장입니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 사회 진보를 보장하는가에 대해 토론하다가 누군가 잘 노는 것이 진보인지, 잘 먹는 것이 진보인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보인지를 묻자 모두 딴짓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는 ‘태생론’으로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한 거야”하는 주장입니다. 애초에 그렇게 태어났다는 것인데, 토론보다는 술과 안주를 이어가는 것에 훨씬 충실한 쪽입니다. 줄어든 농업소득과 이로 인해 겸업을 해야만 유지가 되는 현실도 ‘내가 더 열심히 하면’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논리를 떠나 점점 이 친구들이 부러워지고 있는 것이 추세라면 추세고, 문제라면 문제입니다.


세 번째 주장의 이름은 ‘김정은 책임론’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여년 전 IMF를 힘겹게 넘어 21세기로 접어든 겨울입니다. 10년만큼은 더 예뻤던 배우 김정은이 한 카드회사 광고에 등장합니다. 빨간 옷에 하얀 목도리를 두르고 누구든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넵니다. “여러부운~ 부자되세요”하며 나를 보고 웃을 때, 게임은 이미 끝났다는 것이 제 지론입니다.


때마침 “이 정도면 우리도 괜찮은 거 아냐?”하고 방심한 사람들은 아무런 의심없이 연말연시, 명절, 친구, 친척들에게 “부자되세요”를 합창합니다. 돌잔치에서 아이에게도, 팔순잔치를 하는 할아버지에게도 “부자되세요”라고 말하면 모두가 “하하”하고 웃습니다. “그럼그럼.”


이처럼 시대정신을 선도하고 분명한 의도를 관철시킨 인사말은 전무후무합니다. 혹자들은 2012년 선거가 보수대연합의 승리라고 말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대연합은 21세기 초반 이미 완성되었던 것입니다. 10대 재벌과 여야 가릴 것 없는 고위층들은 IMF 구제금융의 위기를 ‘이런 식으로 넘어도 되는구나!’라고 감탄하며 이때야말로 돌이킬 수 없도록 쐐기를 박아둘 때라는 데에 인식을 같이합니다. 새천년의 시작과 함께 ‘21세기의 시대정신과 대중화’라는 주제로 각종 회의를 열고 마침내 3박4일의 합숙을 거쳐 모종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부자되세요’가 나온 배경은 이 정도는 되어야 설명이 가능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습니다.


`부자 되세요' 라는 새해 덕담이 새겨진 문자 수박 (출처 : 경향DB)


좋은 가치가 절대 가치로 변하는 순간 더 많은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 없게 됩니다. 나아가 ‘행복하세요’라든가 ‘건강하세요’라는 우리들의 인사말을 단번에 전근대적인 것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고집스럽게도 ‘마음이 부자라야 진짜 부자다’라며 저항했던 세력들은 촌스럽다는 이유로 극좌의 취급을 받으며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큰 싸움에서 생각보다 쉽게 이긴 사람들은 그래서 더욱 대담하게 이야기합니다.


식량과 농업의 위기에 대한 진실보다는 10만 전업농 육성과 1억 농부 만들기 카드를 살랑살랑 흔들며 “부자되세요”, 한 발자국만 헛디뎌도 사달이 날 철탑 위의 노동자들에게도 “그럼, 부자되지 그러세요”, 심지어 자연에도 일관되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부자되세요. 우리는 강남 땅에는 핵시설과 해군기지를 짓지 않습니다.”


IMF를 넘어서며 국민들은 금반지를 모아 주었지만,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완성하기 위한 근거들을 차곡차곡 모아 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준비한 기간만큼, 협동하고 연대해서 만들어내는 행복한 저항과 행복한 공동체들의 사례를 차곡차곡 모아내지 않는다면 ‘부자되세요’를 이겨먹을 만한 덕담을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농업 무시하는 이명박 정부 반대한다’의 문법을 넘어서는 ‘그 한마디’를 만들어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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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나는 기억하기 위하여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 기억이 죄다 휘발되기 전에, 글씨를 쓴다. 이 모든 비속하고 정답고 지겨운 것들을, 하찮고 애절하고 시시하고 또 시시해서 끝도 없이 사랑스럽고 그리운 것들을.”


서른을 갓 넘긴 글쟁이 김현진은 <뜨겁게 안녕>이라는 책을 쓰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그는 도시에서 산다는 건 누구에게나 그렇듯, 고단하고 막막하다고 전했다. 도시에서 넓고 깨끗하게 구획되는 거리는 좁다랗고 아무렇지도 않고 후줄근하고 또 정다운 골목을 쾌속으로 말살하고, 그 골목에서 마주치던 수많은 사람들을 감쪽같이 증발시켰다고 말한다.


김현진은 그 사라져버릴 골목 갈피마다 품고 있었을 사람과 사연을 기억하고 싶어 했다. “사랑하고 증오하고 끝내 미워하면서도 또 사랑했던 도시, 성장촉진제를 맞은 것처럼 광포하게 확장되어 결국 구차한 주머니를 가진 사람은 온몸을 부르르 흔들어 곡식 낟알을 까부르듯 떨구어내고야 말 이 도시에서 나는 끝내 밀려나고야 말 것”을 예감하면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시대와 환경은 전혀 다르지만, 백석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이라는 시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백석은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고 적었다. 이때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 백석은 생각에 생각을 더듬어 이윽고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는다”고 전했다. 외로운 생각이 들면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했다.


경향신문DB

최근에 글을 쓴다는 것이 뭐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김지하 때문이다. 그를 생각하면 학창시절 문학소년이던 때, ‘김지하 문학의 밤’에 갔다가 대학생만 가득한 강당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라는 시를 들으며 무서웠던 기억이 새롭다. 대학생이 되면서 <사상계>와 <창조>를 사서 김지하의 ‘오적’과 ‘비어’를 읽고 흥분했다. 숨겨놓은 연인처럼 ‘김지하’를 탐독하는 동안 문체도 김지하를 닮아갔다.


김지하는 내게 김현진이고 백석이었다. 김수영이고 황지우였다. <남녘땅 뱃노래> <밥> <동학기행>에서 만난 김지하도 아름다운 사상이었지만, 시집 <애린>에 새겨진 시어는 더욱 눈부셨다. “단 한 번 울고 가/ 자취없는 새/ 그리도 가슴 설렐 줄이야/ 단 한 순간 빛났다 사라져가는 아침빛이며/ 눈부신 그 이슬/ 그리도 가슴 벅찰 줄이야/ 한때/ 내 너를 단 하루뿐/ 단 한 시간뿐/ 진실되이 사랑하지 않았건만/ 이리도 긴 세월/ 내 마음 길 양식으로 남을 줄이야/ 애린/ 두 눈도 두 손 다 잘리고/ 이젠 두 발 모두 잘려 없는 쓰레기/ 이 쓰레기에서 돋는 것/ 분홍빛 새 살로 무심결 돋아오는/ 애린/ 애린/ 애린아.”


그대, 아직 갈망하는가. 내가 2010년에 쓴 책의 제목이다. 김지하는 애린을 향한 그의 갈망을 어느 순간 접었다. 김지하는 지난 1월8일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 가진 인터뷰에서 “나는 한때 가톨릭”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는 한때 나의 우상이었다고 적어도 좋을까. 시의 혁명의 통일을 노래했던 김지하의 추종자였던 나는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우라’는 김지하의 조선일보 기고가 나오면서 마음이 다치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향기로운 물, ‘지하’(芝河)가 아니라 지하(地下)에서 외로움에 떨며, 누구든 자신을 인정해 줄 사람을 구걸하는 자의 모습이다. 


언젠가 판화가 이철수를 만났을 때, 그는 “고준한 담론을 설파하는 위대한 사상가라도 되짚어보면 그의 마음은 깊은 강물이 아니라 얕은 도랑물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일상의 자잘한 욕구와 외로움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면, 그는 언제든 자신의 사상을 스스로 반역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김현진은 김지하보다 이제 더 큰 울림이 된다. 그는 강압적인 학교교육에 반발해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와 <네 멋대로 해라>는 책을 썼다. 그리고 <뜨겁게 안녕>이라는 책에서 소개하듯이, 그는 “집도 절도 없이 빽도 없이 도시빈민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왔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긍지를 지니고 있다. 김현진은 이 책의 인세의 절반을 이웃과 나누고 싶다며 용산참사 유족들, 유기동물친구들, 쌍용차 해고자, 청년유니온 등을 열거하고 있다. ‘없는 가운데 나누려는’ 그 마음이 고맙고, 그의 발랄한 기상이 구체적이어서 고맙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을 쓰는 목적을 “수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신에게 닿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에서 사랑스럽다. “대단히 아름다운 문장이나 세상에 보탬이 되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하찮고 정다운 것들에만 정이 가고 늘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속 좁은 사람으로 태어나서 지금까지 버텨올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당신 덕분이었다”니, 그런 겸손함이 그를 지상에서 구원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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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별아 | 소설가


몇 해 전 ‘한·러 문학의 밤’에 참석하기 위해 러시아에 갔다가 모스크바 남쪽 멜리호보에 있는 ‘체호프 기념관’을 찾았다. ‘가장 러시아적인 작가’로 일컬어지는 안톤 체호프가 대표작 <갈매기>를 집필하며 뜨거운 한 시절을 살았던 장소임에도, 그곳은 초라하리만큼 소박한 공간이었다. 작가들의 기념관은 아무리 화려하게 치장하려 해도 딱히 채울 게 없다. 낡은 책상, 닳은 펜, 손때 묻은 책이 고작인 유품들은 영혼의 부(富)와 대비되는 일상의 빈곤과 고독을 전시한다. 체호프 기념관 역시 작가이면서 의사였던 삶을 증명하는 주사기와 진찰도구 몇 점을 제외하면 별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때 맞닥뜨렸던 쓸쓸한 풍경은 기지와 통찰이 번득이는 그의 작품들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해주었다.


체호프의 유머는 독하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면 여물지 않은 귀에다 대고 “글 쓰지 마라. 글 쓰지 마라. 작가가 되면 안돼!”라고 속삭이기부터 하라고 권한다. 그럼에도 아이가 작가적 성향을 드러낸다면 손을 번쩍 들고 외친다. “망했다!” 이유인즉슨 작가가 되려는 열망이야말로 불치병이므로. 이쯤 되면 유머가 아니라 저주인 것도 같다. 문제는 이것을 부인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은 집을 사지도 못하고, 1등 칸을 타고 다니지도 못하고, 룰렛 도박도 하지 않고, 철갑상어 수프도 먹지 못한다. 그들은 간신히 배를 채울 수 있을까 말까한 음식을 먹고, 가구가 딸린 방을 빌려서 살고, 교통수단은 자기 발로 걸어다니는 것이다”라는 체호프의 독설이 고스란한 현실이니까.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출처; 경향DB)



하지만 ‘그래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는 것이 사랑이라면, 작가라는 이름으로 사는 존재들은 지독한 연애 지상주의자이다. 문학으로 앓는 불치병은 황진이네 이웃 총각을 죽음에 이르게 한 상사병만큼이나 치명적이다. 가문의 원수와 사랑에 빠진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막을수록 더 하고 싶어 광란한다. 작가들은 굳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하지만 번연한 불행까지 기꺼워할 리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은 절규다. 울부짖음이다. 재채기다. 터져 나오는 그것을 막을 수 없고, 결코 막아서도 안된다.


그런데 작가답게, 작가적인 본능과 욕망과 존재 자체에 충실했던 작가들이 ‘고발’당했다고 한다. 지난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정권교체를 바라는 젊은 시인·소설가 137인’의 명의로 경향신문에 게재한 광고가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명목으로 광고 게재의 실무를 맡은 소설가 손홍규가 검찰 수사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문인들을 고발한 서울시선거관리위원회가 문제 삼은 내용은 선언문에 실린 ‘독재자’라는 표현과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간절히 기다린다’, ‘그 답은 정권교대가 아닌 정권교체’라는 표현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해 작가들은 대답했다. ‘정권교체’라는 표현은 여야 후보 모두가 사용한 일종의 시대의식으로서, 여당후보는 ‘정권교체’를 넘어 ‘시대교체’를 강조하기까지 했다고. 선관위가 조치했다는 ‘고발 3건, 경고 7건’의 실체적 내용을 확인하고 형평성을 따져보지 않은 상태에서 신속하게 이루어진 작가들에 대한 고발에 대해 그들이 원하는 것은 ‘법 위의 특권’이 아니라 다만 ‘법 앞의 평등’이라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 ‘137인’에 속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밝힌 137인의 작가들을 확고부동하게 지지한다. 그것은 팔이 안으로 굽는 생물학적 이치를 떠나 작가라는 존재와 문학예술에 대한 옹호다. 작가는 애초에 스스로를 불신하고 시대와 불화하는 존재다. 아무러한 공(公)적 발언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최후의 순간까지 가장 사(私)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문학은 자유와 그에 대한 열망 없이는 발화하지 못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작가들의 발언에 대한 선관위의 고발을 단순히 위법에 대한 기소로만 볼 수가 없다. 선거가 끝나자마자 들려온 소식에 과거의 망령이 되살아나 재갈을 물리려 다가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과연 나만의 터무니없는 상상일까?


작가들을 말하게 하라. 함부로 떠들고 지껄이고 외치게 하라. 그것이야말로 그들의 천부인권이요 본연의 임무다. 쥐를 쥐라 못하고 닭을 닭이라 못하고 개를 개라 못한다면, 어찌 꽃을 꽃이라 하고 별을 별이라 하고 바람을 바람이라 할 수 있을까? 꽃과 별과 바람이 사라진 세상에서 무엇이 꽃피고 무엇이 빛나고 어떻게 숨 쉴 수 있을까? 시 한 줄, 소설 한 편 읽지 않고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믿는 천하디 천한 세상에서도, 시인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로 꽃핀다. 소설가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로 빛난다.


부디 작가들을 ‘고발’한 이들이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무언지 깨닫기 바란다. 그들은 다만 터무니없이 여리고 실로 힘없는 작가들을 윽박는 게 아니다. 각각이 눈부신 세계들을 압살하려는 것이다. 그것이 사라진, 입 없는 작가들의 나라는 오직 암흑뿐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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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기차를 처음 탄 것은 동대구역에서였다. 방학이면 무조건 거창의 큰댁으로 가서 뛰놀았던 나는 부산~거창을 오고갈 때, 천일여객의 시외버스를 주로 이용했다. 어느 해 여름 한철을 보내고 고향을 떠날 때, 버스표를 구하지 못해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갔다. 내 기억에 그때 아마 처음으로 기차를 탔던 것 같다. 초등학교 5학년 언저리의 일이다.


그러고 기차를 여러 번 탔다. 가장 길게 탔던 것은 고등학교 졸업식 마치고 대학교 본고사 시험 치러 서울 갈 때였다. 그때 나는 검정 교복을 입고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책가방을 들고 소위 상경이라는 것을 했다. 선생님 인솔하에 대학교 시험 치러 가는 친구들과 단체로 기차를 탄 것이다. 서울이 무슨 고원지대도 아닐 텐데 왜 상경(上京)한다고 했을까. 서울은 높은 곳이라서 그곳에 살려면 그만큼 아슬아슬함을 견디라는 암시였을까.


 

바다를 기고 기차가 달리는 여수의 풍경 (출처; 경향DB)



그 이후 기차를 아주 많이 탔다. 수십 년을 지나온 나의 생애가 제자리에서 그냥 흐른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뿐인가. 내 안으로는 몇 개의 터널도 뚫렸고 그 내부로는 숯검댕도 많이 쌓였다. 정거장도 몇 개 생겨났다. 나의 몸도 세월을 감당하면서 방황을 해야 했고 바람을 따라 흔들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이력이 기차처럼 제법 길어졌을 때. 나의 기억이 석탄을 실어나르는 화물기차 한 칸처럼 어두컴컴해졌을 때. 나는 궁리출판을 세웠다. 그리고 그 이름으로 두 번째로 펴낸 책이 독일의 사회학자 볼프강 쉬벨부쉬의 <철도 여행의 역사>였다. 저자에 따르면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과 공간에 대한 미증유의 감각을 체험케 한 것이 바로 기차였다. 이 완강한 쇳덩어리를 타고 인간은 근대를 횡단하면서 도시로 돌진한 것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거창에서 부산으로 갔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떠난 셈이었다.


전도유망한 시인으로 활약하다가 몇 해 전 입산 출가한 분이 있다. 그 이후 소식은 들을 수 없지만 아마 이제는 한 소식을 접하고 수행에 정진하고 계실까. 출가하기 전 발표한 ‘소화(消化)’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차내 입구가 혼잡하오니/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 여러분/ 봄 여름 가을/ 입구에서 서성대고 계시는/ 승객 여러분/ 입구가 몹시 혼잡하오니 조금씩/ 안으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갈 봄 여름 없이/ 가을이 옵니다/ 다음 손님을 위해서 조금씩/ 겨울로 들어가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정류장은 봄입니다.”


가까운 분의 황망한 부음을 받고 울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갑자기 표를 구하느라 이런 자리를 배당한 것일까. 좌석번호가 ‘12호차 1B’였다. 기차를 타고 보니 출입구의 바로 첫자리였다. 그간 기차를 많이 타보았지만 이 자리는 처음 앉아보는 곳이었다. 중간의 창가에 앉았다면 아마 바깥 풍경에 마음이 많이 쏠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눈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두리번거리느라 바빴을 것이다. 그러나 첫 칸, 그것도 통로 측에 앉고 보니 나의 귀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입구는 조금 혼잡했다. 뻥 뚫린 귀에도 문(門)이 있었던가. 귀문이 활짝 열린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많은 소리들이 그 문을 통과해 들어왔다.


전남 곡성 섬진강변을 달리는 증기기관차 안에서 매점 손수레를 운영하는 윤재길씨 (출처 :경향DB)


발자국 소리, 겉옷 벗는 소리, 출입문 여닫는 소리. 이음칸에서는 소리의 종류도 다양했다. 사람들 속삭이는 소리, 휴대폰 통화하는 소리, 화장실 문 여는 소리. 그 사소한 틈을 타고 찬 공기가 무시로 밀려들었다. 찬 공기는 나의 뒷덜미를 잡아채면서 자꾸 밖으로 불러내려고 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하면서 미리 예방주사를 맞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봐, 자네 차례가 멀지 않았네. 천천히 나갈 준비를 하게!” 


이 자리는 처음 앉아보는 곳이었다. 앉았다기보다는 대기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 자리였다. 앉은 자리에서 앞으로 나란한 좌석들을 보았다. 두더지처럼 승객들의 머리가 불룩불룩 솟아있었다. 잠깐 일어나 탁자가 구비된 동반석에 앉아가는 4인의 핵가족을 보았다. 젊은 부부는 까닥까닥 졸고 아이 둘이 새우깡과 초콜릿을 먹고 있었다. 귤 껍질도 흩어져 있었다.


나도 처음 기차를 탔을 땐 저 중앙 언저리의 자리였던 것 같았다. 이젠 차츰차츰 밀려나 오늘은 맨 가장자리가 내 자리였다. 출입문이 하나의 경계가 되고 나는 언젠가 이 실내에서 나가 이음칸에서 서성거리다가 저기 바깥 풍경에 꽂혀야 한다는 암시일까. 이 차에도 정원이 있고 나는 다음 손님을 위해서 겨울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윽고 우리 열차는 곧 울산역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속도를 조금 낮추었지만 기차는 계속 덜컹거렸다. 나는 내릴 준비를 위해 일어났다. 선반에서 배낭을 챙기는데 커브길을 도는지 몸이 잠시 휘청했다. 바깥으로 밀려나는 것은 곧 무언가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도 하다. 천천히 기차가 섰다. 소화가 끝나고 되새김질을 잠시 멈춘 것인가. 육중한 기차가 나를 바깥으로 탁, 뱉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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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 농민회 교육부장 sinpo9085@hanmail.net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더 좋아하는 것은 꼭 게을러서만은 아닙니다. 뭐라고 딱 정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빈 들판 앞에 선다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걱정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물음에 맞서는 것입니다. ‘이삭거름을 얼마 더 줄까’가 아니라 ‘올 한 해 얼마를 벌었나’에 답해야 하는 것이고, ‘삽질 해서 뭐하나’보다는 ‘농사 지어 뭐하나’에 답해야 하는 것이며, ‘농협 빚은 다 갚았나’가 아니라 ‘10년 후에 어떻게 살 거냐’는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더욱 실존적인 물음이기도 합니다.


 너른 들판을 보며 민주대연합을 이야기한 어떤 시인의 상상력도 그럴듯하지만, 와서 보면, 눈으로 보이는 겨울 들판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자극합니다. 더구나 논두렁까지 폭 파묻히게 눈이 와서 내 논, 네 논 분간이 가지 않는 날이면 우리 동네에서는 아이들까지도 국민대통합 정도는 우습게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겨울밤은 국민을 일일이 실로 엮어 봉합하고도 남을 만큼 길기도 한데, 나는 이 좋은 들판 앞에 서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직업적 자긍심에 맞는 좀 더 심오한 생각과 들판을 막힘없이 흐르는 바람과 가창오리떼처럼 스마트한 삶을 꿈꾸는 것입니다. 겨울 긴 밤 아무도 없는 동안 난 절대 딴짓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년 봄 즈음에는 주변에 내놓을 작은 선언 정도로 갈무리하기로 작정합니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황금들판 (출처 :경향DB)


역시, 밤이 길기 때문이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지만 묵은 일기장을 들춰본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제법, 어쭈, 어허 할 정도의 기특한 생각들도 있고 제기랄, 젠장, 에휴 할 만한 한심한 나도 있습니다. 운 좋게도 아직 버려지지 않은 편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때 네가 한 네 말을 기억한다’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합니다. 불안한 청춘에 대한 어머님의 당부는 한글 프로그램에 ‘눈물체’라고 등록해도 좋을, 글씨만 봐도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알게 하는 마술이 있습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연애시절 편지에는 ‘동지적 사랑’ 같은 비문과 ‘영원한 사랑’ 같은 비현실이 차고 넘쳐 소각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떼어 내어 잔소리와 투정과 투쟁의 일상에서 적절한 부적으로 재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무산의 ‘강령’이라는 시입니다. ‘성실, 노력, 정직은 네 청춘의 강령이었을까/ …/ 유치하도록 진실한 사내/ 아직도 그 강령 폐기하지 않았노라고/ 주먹을 흔들어 보이는 사내/ 운동도 조금씩 꼬여버린 세상, 그래/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싸우자/ 우리의 강령이 틀림없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필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한참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그런 유치함, 미숙함, 투박함이 아직도 ‘성실, 노력, 정직’의 강령을 폐기하지 않은 힘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하고 지난 시절의 내가 말을 건네니 곧 부끄러워집니다.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오래된 지도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볼 친구도, 눈물체의 당부를 주시는 어머님도 다들 적당한 거리에 있습니다.


식상한 반성문이 될지, 감동 없는 출사표가 될지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 겨울밤은 많이 남아 있고, 또 생각이 영 잡다해지면 겨울밤이 길기 때문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일 터입니다만, 2013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살겠다는 막연한 고민보다는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함께하고 있을지 적어 보겠습니다. ‘성실, 노력, 정직’의 강령은 이제 그만 전문에 담아내고 꼼꼼하고 구체적인 강령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맺고 끊는 결기도 가져 보겠습니다. 쭉 해왔던 일들 중에 이제는 그만해야 하는 일부터 가려내겠습니다. 이참에 크리스마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소식을 어린 딸들에게 어떤 표정으로 선물과 함께 전해야 하는지도 정리해 보겠습니다. 궁색할 때 말로만 떠들던 히말라야 등반도 시기를 정하고 허풍을 치겠습니다. 생각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그만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의 순서를 매겨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생활의 언어로 적어 보겠습니다. 내 삶과 이 시기에 좀 더 집중한다면, 그리고 죽지 않는다면, 10년 후 나에게도 ‘생각보단 괜찮은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밤에 들판에 선다는 게 춥기도 하고 남사스러운 일이니 눈을 감고 함께 상상해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 넓은 들판이 있고 함박눈이 펄펄 내립니다. 바람은 적당히 불고 가창오리 군무가 하늘을 수놓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익숙한 행진곡풍의 노래를 허밍으로 낮게 시작합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나를 잊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노래가 ‘빰빠 밤빠 밤빠밤’ 하는 대합창의 전주곡이 되는 날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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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도서출판 궁리 대표


“한때 나를 뻑가게 만든 카수의 공연. 시간된다면 표 6장 끊으마.” 친구에게서 문자를 받았다. 마침 올해의 꽃산행도 거의 파장 무렵이라 주말이 좀 한가해졌다. 공연소식을 뒤졌더니 노래는 알 법했지만 낯선 가수였다. 내가 둔한 놈이었다. 내가 미처 이름을 몰랐을 뿐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번 공연도 가수의 팬카페에서 힘을 모아 여는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노래를 들어보면 아, 그 노래가 그 가수야! 하고 알아차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11월 셋째 토요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 가수는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노래를 불렀다. 우울한 1980년대를 통과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노래들이었다. 주로 기타를 이용한 반주였지만 웅장하고 활달한 느낌이었다. 총 3부로 이루어진 공연이 끝날 무렵이었다. 


 “벌써 마지막 노래군요. 제목은 ‘강매’인데, 물건이나 표를 억지로 파는 것을 강매라고도 하지만, 실은 강가에서 보아주는 이 아무 없어도 혼자 쓸쓸히 피어난 매화입니다.” 가수의 눈가가 물기로 어룽지는 듯했다.


가수의 이름을 밝히자. 윤선애. 1984년 대학 노래패 ‘메아리’에서 노래 활동 시작. 노래 모임 ‘새벽’에서 활동하며 ‘그날이 오면’ ‘저 평등의 땅에’ ‘언제나 시작은 눈물로’ 등의 노래를 불렀다. 2005년 첫 싱글 앨범 <하산> 이후로 2009년 두 번째 음반 <아름다운 이야기>를 발표했다. 이 외 디지털 싱글 음반에 ‘다시 만날 날이 있겠죠’ ‘살아가는 것이 더 큰 용기죠’가 실려 있다. (공연 팸플릿 중에서)


[김석종의 만인보]다시 무대 서는 ‘80년대의 전위’ 윤선애 (출처;경향DB)


공연도 좋았고, 가수도 좋았고, 노래도 좋았다. 특히 강매(江梅)를 소개하는 말은 오래된 추억 하나를 댕기는 불씨가 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공연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지난 시절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그러자면 결국 그때 그 시절의 ‘나’가 돌연 나타나서 일상에 찌든 나를 빤히 쳐다본다. 과연 그때 너는 뭘 했지? 캄캄한 객석에 앉아 소심함, 부끄러움, 한심함, 비겁함 등등의 복잡한 심사를 차례로 만나야 한다. 어려운 시대의 일부를 감당했던 노래의 곡조와 가사가 절실할수록 마음은 벌겋게 달아오르고. 


가수는 몸이 곧 악기일 텐데, 어쩌면 저 나이가 되도록 목소리 색깔이 이리 신선할까. 초대해준 친구는 흥건해진 감동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았다. CD를 사고 가수의 사인도 받았다. “… 너를 찾아 헤매다 나의 외로움만 쌓이고 쓰러진 꽃잎을 찾으려고 등 뒤 해지는 줄 몰랐네.” 강매의 한 소절을 흥얼거리면서 공연장을 나섰다.


복사꽃 흐벅진 때라면 ‘봄날은 간다’를 부르겠다. 맞춤하게 비라도 와 준다면 ‘봄비’를 읊겠다. 그러나 지금은 혹독한 겨울. 며칠 전 눈이 전격적으로 왔다. 사람들의 발길은 눈을 더럽히지만 나무들은 눈을 떠받들고 있다. 경복궁역에서 사무실로 오는 골목. 인왕산에서 굴러온 것인가. 한 줌의 낙엽들이 발길을 붙들었다. 꽃잎이나 낙엽은 흙으로 녹아들면 양분 덩어리다. 그러나 세상구경 나섰다가 길을 잘못 들어 방황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어서 이 거리를 벗어나야겠다는 듯 하수구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찬바람에 쫓기는 초라한 낙엽을 보자 흥얼거리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보고 싶은 얼굴’. “… 거리마다 물결이 거리마다 발길이 휩쓸고 지나간 허황한 거리를 눈을 감고 걸어도 눈을 뜨고 걸어도 보이는 것은 초라한 모습 보고 싶은 얼굴.” 


이 노래가 발표된 것은 1964년이다. 책의 제목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느 문학평론집에서 읽은 적이 있다. 간절했던 혁명이 느닷없는 군홧발에 짓밟힌 뒤 많은 이들이 술잔을 앞에 놓고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가사와 곡조를 웅얼거리면 그 시절을 통과해낸 이들의 울분과 울적한 심정이 그대로 전해오는 것 같다. 허망한 심사도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 같다. 작사가와 작곡가가 그것을 의도했는지는 몰라도 그 시대가 그 노래를 만들고 가꿔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각자 처한 자리에서 울퉁불퉁한 시절을 견디면서 우리는 살아왔다. 어느덧 한 해의 끝자락이고, 또 그 어디로 건너가고 있는 중이다. 그 길목에서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계절이다. 2012년 12월19일 오후 5시59분30초. 아마 올해도 텔레비전에서는 그 시각이 되면 카운트다운을 할 것이다. 그리고 6시 정각이 되면 한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될 것이다. 그는 우리들 각자가 내심 간절히 원했던 ‘보고 싶은 얼굴’일까. 


지금 주위는 선거 열기로 뜨겁다. 골목을 메우는 요란한 선거구호와 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운동원의 발길들. 그들의 눈에는 낙엽조차 모두 표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한편 생각하면 이것은 실제로 나무가 행사한 고귀한 표이기도 하겠다. 나무들은 이를 통해 산을, 저들의 세상을 바꾸었다. 그래서 스산한 가을을 갈아치우고 정신이 번쩍 나는 겨울을 맞이하는 것이렷다. 겨울을 끙끙 앓으며 새 세상을 준비하는 나무들처럼 부디 우리 사는 세상도 그렇게 바꿀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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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


<여수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소설집과 <그대의 차가운 손>이라는 장편소설을 지었던 한강. 40대 초반의 그녀가 지난 2007년에 자신이 지은 곡을 직접 부른 CD와 노래이야기를 책으로 펴냈다. 한강, 이름이 먼저 가슴을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갔고, CD에 담긴 그녀의 음색에 이내 젖어들어갔다. 최소한 반주 사이로 생 목소리가 귀청을 훑으며 내려와 가슴 깊은 곳에 박혔다. 이 노래의 음반작업을 지휘한 작곡가 한정림씨는 그녀에게 “절대로 노래를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있는 그대로 불러요”라고 주문했다. 한강은 “그냥 있는 그대로라니… 그 말이 더 무서웠다”고 전한다.


“눈물도 얼어붙네/ 너의 뺨에 살얼음이// 내 손으로 녹여서 따스하게 해줄게/ 내 손으로 녹여서 강물되게 해줄게// 눈물도 얼어붙는/ 12월의 사랑노래.”


그 노래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12월 이야기’다. 한강은 1980년 1월 서울로 이사오면서 첫인상으로 ‘넓고 춥다’고 했다. 유리창의 성에, 얼어붙은 길, 딱딱 소리치며 이가 부딪치는 추위, 그래서 겨울만 되면 새 스웨터를 사고 싶었다고 한다. 겨울은 그렇듯 따듯함과 차가움이 격렬하고도 애절하게 충돌하는 계절이다. 언 몸을 녹이는 아랫목, 외투 안에 품고 가는 풀빵봉지의 온기, 무심코 스친 손끝의 따스함이 간절하다.


 




한강은 연극 <12월 이야기>를 준비하면서 문득 인디언 달력을 떠올렸다. 체로키족은 12월을 ‘다른 세상의 달’이라 했고, 수우족은 ‘나뭇가지가 뚝뚝 부러지는 달’이라 했고, 샤이엔족은 ‘늑대가 달리는 달’이라 했다. 그리스도인들은 12월을 뭐라 할까? 아마도 ‘예수가 아기로 다시 태어나는 달’ 정도가 되지 않을까. 12월은 새로운 한 해를 준비하면서 ‘첫마음’을 기억해야 하겠지. 예수가 태어났을 때 들판의 목자들에게 한 천사가 나타났다고 한다. 와서 “메시아가 탄생했으니 가서 경배를 드리라”고 전했다지.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 위에 누워 있을 텐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라 했다지. 그래서 12월은 짐승의 밥으로 오신 분, 무력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그분을 기억하는 달이겠지.


겨울의 복음은 ‘따뜻함’이다. 아기를 품은 포대기처럼 따뜻한 손끝이다. 그래서 한강은 12월을 “눈물도 얼어붙는 달, 내 따뜻한 손으로 네 뺨의 살얼음을 녹여주고 싶은 달”이라고 적었다. “서늘한 눈꽃송이가 내 이마에 내려앉아 녹아내리는 달”이라고 했다. 그건 격렬한 열정이 아니다. 은근한 미소이며, 조용조용 ‘어제와 다른 내일 곧 오리라’는 희망이다. 늑대들마저 마중 나가고 싶어 하는 ‘사랑’이다.


한강은 ‘서울의 겨울 12’라는 시에서 이렇게 전한다. “어느 날 어느 날이 와서/ 그 어느 날에 네가 온다면/ 그날에 네가 사랑으로 온다면/ 내 가슴 온통 물빛이겠네, 네 사랑/ 내 가슴에 잠겨/ 차마 숨 못 쉬겠네/ 네가 네 호흡이 되어주지, 네 먹장 입술에/ 벅찬 숨결이 되어주지, 네가 온다면 사랑아.”


서울에 첫눈이 내린 다음날,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 사퇴 선언을 한 뒤 13일 만에 ‘정치쇄신과 정권교체’를 위해 문재인 후보를 전폭적으로 돕겠다고 나섰다. 새누리당에서는 황급히 안철수의 합류를 평가절하하느라 정신없다. 평생을 대통령의 딸로, 퍼스트레이디로, 보수정당의 상층부에만 머물렀던 자칭 ‘여성대통령’ 후보와 평생 정치와 인연 없이 살다가 2012년에 만난 문재인과 안철수는 사뭇 다른 동기와 배경을 지니고 있다. 이 사람들은 각각 누구에게 복음이 될까, 잠시 생각해 본다. 문재인은 서민을 위해, 안철수는 청년을 위해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할 것이다. 그런데 박근혜는 ‘알 수 없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문재인과 안철수 캠프의 면면을 보자면 도종환, 안도현, 조국, 공지영, 유홍준 등이 포함된다. 박근혜 후보의 친구는 누구일까? 이회창, 김영삼, 이인제, 한광옥, 한화갑… 이름만 들어도 ‘퇴행적’이다. 고령화 시대에 걸맞은 ‘노인군단’이란 말인가. 새누리당에 입당한 손수조는 이 틈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예수가 가난한 이들에게 전했다는 ‘하느님 나라’를 ‘복음’이라고 부르는데, 실상 예수보다 먼저 태어난 로마제국의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전한 ‘무력에 의한 로마의 평화’도 ‘복음’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황제가 전한 복음과 예수가 전한 복음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맨발의 가난한 그리스도를 선택할 것인지, 홍포를 두른 황제를 부러워하면서 따를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안철수는 “100년이 지나면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리는 잠깐이지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로 얼마나 귀한 사람들인지’ 알아야 한다는 요청이다.


이제 우리 뺨에 맺힌 살얼음을 녹여주고 강물 되게 해주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하다. 오래된 나뭇가지는 뚝뚝 부러지고, 다른 세상이 열리는 12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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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 농민회 교육부장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처럼 튀밥이 눈이 되어 내리는 느낌까지야 아니지만 읍내에서 여우고개를 넘어 오거나, 금강하구의 너른 들판을 질러 국립생태원이 들어선 길을 따라오다 보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어! 이런 곳에?”라고 할 만한 아담한 도서관이 있습니다.


차로 15분 정도 걸리는 초등학교의 전교생이 70명 남짓이니 근방의 아이들이라고 해 봐야 몇 되지 않습니다. 옆 마을 친구집이라고 해도 아이들이 걸어서 가기에는 난감합니다. 초초고령사회인 농촌에서 마을 정책은 대부분 어르신들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 절실했나 봅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이 정말 멋져서 그렇게 어른들을 설득해 나갔습니다. 엄마들의 진심과 의지에 마을 분들은 누룽지 공장을 하려고 했던 공간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태생부터 마을과 지역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빚을 짊어지게 됩니다.


 “좁은 집에다 책 쌓아놓을 일 없어 좋다”며 집에 있는 책을 몽땅 내놓았고 억척을 떨어가며 여기저기 헌 책들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참, 도서관에는 책꽂이도 있어야지?’ ‘살림은 개뿔로 하나? 쥐뿔로 하나?’ 하고 섣부른 객기를 한탄할 즈음 지역의 젊은 예술가들은 아이들과 함께 도서관 곳곳을 꾸며 주었고 뜻을 가상히 여긴 여러 분들이 십시일반 후원해 주었습니다. 좋은 상상력이 많은 사람들의 손과 발을 모은 것입니다. 그래서 태생부터 ‘나 잘났다’ ‘우리 잘한다’고 할 수가 없는 곳입니다만, 누가 만들어 준 게 아니라 우리의 상상이 만들어 낸 도서관이라는 자부심만은 가득합니다. 다 자란 마을 아이들은 처음 인사 오는 신랑, 신붓감에게 가장 먼저 마을의 도서관을 자랑할 것입니다.


며칠 전 제2회 여우네 도서관 마을 축제가 열렸습니다. ‘여우네 풍물단’의 길놀이로 시작합니다. 농사짓는 틈틈이 연습한 풍물패는 ‘100명의 마을 사람들로 구성하고 목표는 세종문화회관’이라는 허풍으로 시작했지만, 초등학생부터 여든이 다 된 분까지 함께하는 고작 30여명의 풍물패가 고샅길을 돌아 입장할 땐 가슴이 뭉클하기까지 했습니다. 한글학교 학생인 할머님들의 합창은 하나도 맞지 않아서 처음엔 ‘돌림노래를?’하고 착각했지만 살아오신 연세만으로도 무대를 압도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엄친아’(엄마랑 친한 아이)라는 이름으로 도서관에서 공동육아를 하고 있는 착한 엄마들의 율동은 ‘저 나이에 저런 동작을?’하는 경악을 자아냈지만 모자가 날아가 우는 아이와 그 아이와 똑같은 모자를 쓰고 춤추는 엄마들을 보면 누구라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야심차게 준비한 ‘해님달님’이라는 동극은 넓은 마당을 극복하기가 무리였고 마이크까지 지지직거리는 바람에 커다란 위기를 맞았지만 갑자기 등장한 객석의 아이가 오누이 숨은 곳을 호랑이에게 알려주어 당황한 호랑이가 대사를 잊은 후부터는 ‘해님달님’인지 ‘달님해님’인지 상관없이 박장대소가 이어졌습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어흥!” 


뒷짐 지고 쳐다만 볼 것 같았던 어르신들은 마당 한편에서 열린 짚공예, 새끼 꼬기 대회에서 예쁘게 꼬고 길게 꼰 것을 따지느라 야단법석이었지만 국회에서 ‘새끼 꼬기 순위를 가리는 특별법’이 통과되기 전에는 어차피 가려질 싸움이 아닙니다. 짚으로 엮은 알둥우리, 똬리 등을 보며 ‘저걸 할 줄 아는 인간도 곧 문화재가 되겠구나’ 싶어 잠깐 씁쓸했습니다.


전남 곡성군 죽곡면 주민들이 마을 시집을 읽고 있다. (출처 : 경향DB)


사회자의 역할에 대한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잔치가 시작도 하기 전에 사람들의 어깨는 들썩이는데 앞에서 얘기하는 사람은 뭔가 2% 정도 부족한 듯하고, 보다 못한 구경꾼들은 구경꾼의 지위를 망각하고 여기저기서 달려 나옵니다. “내가 해도 그만큼은 하겠다. 너 비켜라”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대동단결이지 않을까 하는 것인데, 2% 이상 부족한 사회자 덕에 함께한 누구라도 한마디씩은 하고야 말았습니다.


200명 정도가 모였고 100여명이 무대에서 뭔가를 했으며 50여명은 음식준비와 행사 진행을 하였고 50여명은 그냥 왔다 갔다 했는데, 아름다운 비율이었습니다. 딱히 손님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마을과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해 왔습니다. 군수님은 웬일로 바쁜 척 않고 오래도록 공연을 함께 본 후 축사가 아닌 축하를 해 주었고 장모님을 모시고 멀리 남원에서 구경 온 처남은 “매형, 이사 오고 싶어요!”라고 말해 잠시 뿌듯하기도 했습니다만.


“삶은 곧 축제다. 즐겁게 살지 않는 것은 죄다. 나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최대의 복수는 그들보다 즐겁게 사는 것이다. 그들의 귀에 나의 즐거운 웃음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무라카미 류 <69> 중)


사실 여우네 도서관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돈, 일, 돈, 일만 반복하게 만드는 세상에 대한 거대한 복수극이고 이제 그 서막일 뿐이라는 것을 몇몇 눈 밝은 사람들만이 가만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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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몸에 좋다는 것을 먹어야 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가까이 하다 보니 결국은 이상신호가 왔다. 종합검진을 받기로 했다. 몸에 달린 각 기관별로 작은 방을 돌라고 했다. 세 번째는 복부검사를 하는 곳이었다. 진료침대에 만세하는 자세로 누워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팽창하는 갈비뼈와 불룩해지는 배. 눈을 내리깔고 무덤처럼 부푼 배꼽 주위를 보는데 문득 떠오르는 책과 영화가 있었다.


<노름마치>란 책이 있다. 노름마치란 ‘놀다’의 놀음(노름)과 ‘마치다’의 마침(마치)이 결합된 말로 최고의 명인을 뜻하는 남사당패의 은어이다. 책에는 강호에 숨어 있던 기생, 무당, 광대, 한량을 발굴하기까지의 내력과 한껏 괄시받았던 그들의 눈물겨운 사연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머리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1974년 추석. 촌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십리 길을 걸었다. 십 원짜리 네 개를 얼마나 꽉 쥐었던지 극장 앞에 당도하니 손바닥에 다보탑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넘기는 페이지마다 감칠맛 나는 문장이 빽빽하다. 저자는 전통예술연출가인 진옥섭. 자신이 올린 무대의 관객석을 속절없이 뒤집어놓는 뛰어난 재담꾼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장가라는 직함을 하나 더 얹어주고 싶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대조와 은유의 문장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


 그런 중에서 참 인상적인 대목이 하나 있다. 경남 고성 춤의 대가인 어느 할머니에게 “몸이 뭐예요?” 물었단다. 말씀하시길, “장독대이다. 위장, 간장, 대장. ‘장’자만 죄 모아 놓았으니 장독대가 아니고 뭐여?” 몸에 관한 숱한 이야기를 접했지만 이야말로 단연 말의 노름마치가 아닐 수 없다.


전통예술 연출가 진옥섭 씨 (출처 : 경향DB)


EBS에서는 일요일 심야에 <한국영화특선>을 시리즈로 보여준다. 작년 이맘때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이 나왔다. 1999년 봄. 주인공 김영호가 ‘가리봉 봉우회’ 야유회 장소에 만취한 채 나타난다. 20년 전 첫사랑의 여인, 순임과 함께 소풍을 왔던 곳. 철교 위에서 영호는 목젖이 보이도록 절규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영화는 기적소리와 함께 과거로의 여행을 시작한다.


마흔 살의 영호는 무직. 꿈과 사랑은 잃어버린 지 오래이다. 1994년 여름. 가구점 사장 영호는 직원 미스 리와, 마누라는 운전교습 강사와 각자 바람을 피운다. 1987년 봄. 영호는 닳고 닳은 형사. 열정은 식고 권태는 풍선처럼 빵빵하다. 군산으로 출장갔다가 카페 여종업원의 품에서 첫사랑 순임을 목놓아 부른다. 1984년 가을. 영호는 신참내기 형사. 한 청년을 고문하다가 그가 배설한 똥을 손에 묻힌다. 1980년 5월. 광주에 투입된 이등병 영호는 급박한 상황에서 M16을 발사한다. 걸을 수 없어 군화를 벗자 피가 쏟아진다. 모두에게 잔인했던 시절이다.


1979년 가을. 이제 영화는 마지막으로 치닫는다. 장소는 첫 장면의 야유회가 벌어진 바로 그곳. 구로공단의 야학생 열댓 명이 소풍을 간다. 교련복을 걸치거나 기타를 든 사람도 있다. 갓 스무 살의 영호와 순임도 보인다. 제과공장에 다니며 하루에 사탕 1000개를 싸야 하는 순임. 그녀는 영호에게 박하사탕을 건넨다. 영호에게는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사탕이다. 그 박하맛의 사탕을 녹이며 어렴풋이 첫사랑을 느낀다.


소풍간 사람들이 물가에 둘러앉아 ‘샌드페블스’의 ‘나 어떡해’를 부른다. “나 어떡해 너 갑자기 가버리면…” 손뼉치며 노래하는 풋풋한 사람들. 참 이상하다. 모래밭에 궁둥이를 내려놓고 둥그렇게 모여 앉은 사람들 풍경이 장독대 같다.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항아리 같다. 석기시대 때 모래에 꽂아 사용하던 빗살무늬토기 같기도 하다.


무리에서 슬며시 빠져나오는 영호. 자갈 틈에 핀 쑥부쟁이 곁에 팔을 괴고 눕는다. 천천히 기울어지는 항아리. 항아리는 하늘을 무심히 바라본다. 항아리 뚜껑을 열면 툭툭한 된장 둘레로 맑은 간장이 괴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항아리, 영호의 눈에서 그 간장 같은 눈물이 흥건해진다. 무슨 서러움을 하늘에서 보았나. 그래서 눈물은 짠 것일까. 점점 육박해오며 고조되는 기차 소리. 한 줄기 맑은 눈물이 넘쳐 그의 야윈 볼에 이르렀을 때, 화면 스톱! 그리고 사람들의 흰 이름이 공중으로 계속 올라간다.


<동물의 왕국> 같은 자연다큐멘터리를 보면 동물들이 앞다리를 들고 꼿꼿이 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주 경계를 할 때 그런 자세를 취한다고 한다. 그 녀석 단순히 경계만 할까. 혹 배설의 쾌감을 느끼는 건 아닐까. 그런 자세를 취할 때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장독대의 항아리처럼 보이는 게 아닌가. 몸을 가진 사람들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동물의 왕국 같았던 시절이 있었다. 영화에서 고문하던 형사가 손에 똥을 묻히듯 실제로 순임 같은 여공에게 똥물을 끼얹기도 했었다. 야만의 시대였다. 누군가는 과거사는 그만 잊자고 설탕같이 달콤한 말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싶다고 마음대로 잊을 수 있는 도사가 아니다. <노름마치>의 어느 할머니 말씀마따나 누군가의 돌팔매에 쉽게 박살이 나는 장독대일 뿐. <박하사탕>의 마지막 장면처럼 물가 모래밭에 기울어진 항아리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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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안타까운 눈으로 모니터를 통해서만 바라보는 땅이 있다. 제주 강정. 천주교 제주교구장인 강우일 주교는 “이 작은 고을에서 평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평화의 왕자라는 예수조차도 빵 굽는 동네 베들레헴에서, 그것도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성경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던 나자렛이란 촌읍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강정에 가 보면 몇몇 천주교 사제들이 공사장 입구를 지키면서 매일같이 미사를 봉헌하지만, 미사에 참석하는 이들은 양손가락으로 헤아려도 충분할 만큼 적은 숫자다. 그러니 경찰들이 밀어붙이고 조롱하기 일쑤다. 심지어 문정현 신부가 들고 가던 성체마저 경찰에 밀려 땅바닥에 뒹굴었다.


‘국가안보’와 관련된 일이라니, 정부와 경찰의 태도에서 공손함을 찾아보기 힘들다. 때때로 뭍에서 강정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이들이 찾아가 시위를 해보지만, 정작 제주도민들의 반응은 냉담하다. 주교가 나서서 공사를 반대해 보지만, 제주교구 사제와 신자들의 반응마저 뜨뜻미지근하다. 4·3의 기억을 지닌 사람들은 ‘반정부’ 활동처럼 보이는 일에는 지극히 몸을 사린다. 그사이 구럼비 바위는 콘크리트에 갇히고 연안을 돌며 살아가던 목숨들은 질식사한다. 몇몇 강정 주민들의 목소리는 언론에서 사라진 채 매장되고 있다.


 수염이 성성한 문정현 신부는 오는 이들의 옷깃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제발, 여기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회 이영찬 신부는 ‘레미콘 신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공사장에 시멘트를 나르는 레미콘 위로 한사코 올라간다. 조금이라도 공사를 지연시키고 싶은 까닭이다. 결국 이영찬 신부는 경찰에 연행됐고, 최근 구속됐다. 혓바닥이 감겨들 정도로 안타까운 상황이 제주 강정에서 벌어지고 있으나, 뭍에 사는 우리에겐 여전히 ‘바다 건너 일’이다.


제주 해군기지 현장 찾은 쉔드 세계자연보전연맹 부총재 일행 (출처; 경향DB)


헨리 나웬이란 영성가가 있다. 그는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느 날 한 젊은 탈주병이 적의 눈을 피해 어느 작은 마을에 들어갔다. 그 마을 사람들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고, 은신처를 제공했다. 그러나 탈주병을 찾으러 온 병사들이 마을 사람들에게 탈주병의 행방을 묻자 사람들은 겁에 질렸다. 병사들은 동이 트기 전에 탈주병을 내놓지 않으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모조리 사살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사제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줄 것인가, 아니면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게 할 것인가. 사제는 해결책을 얻기 위해 자기 방에 들어가 동이 트기 전까지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드디어 새벽녘이 되어 사제는 성경을 넘기다가 우연히 이 구절을 발견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


사제는 성경을 덮고 병사들을 불러 탈주병의 은신처를 알려주었다. 탈주병이 끌려가 살해당한 뒤, 마을에서는 사제가 마을 사람들을 구했다고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사제는 그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 슬픔에 잠긴 채 자기 방에 남아 있었다. 그날 밤 천사가 사제에게 나타나 “당신은 무엇을 하였소?”라고 물었다. 그가 “탈주병을 적의 손에 넘겨주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천사는 다시 “당신은 메시아를 넘겨준 것을 모르는가?”라고 물었다. 그 탈주병이 메시아인 줄 어찌 알겠느냐는 사제의 변명에 천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는 대신에 단 한번이라도 그 소년을 찾아가 그의 눈을 응시했더라면 그 사실을 알았을 텐데.” 


상념에 빠지는 일보다, 묵상에 잠기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통의 현장’을 직접 제 눈으로 보는 일이다. 시몬 베유 같은 이는 중국에서 군벌들 사이의 내전으로 죽어가는 인민들의 참상을 다룬 신문기사만 보고도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이처럼 공감능력을 타고난 이가 아니라면, 우리는 직접 가서 보고 만지고 느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참한 처지에 놓인 목숨들이 소문이나 기사나 사물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생명’으로 여겨져 사랑하게 될 것이다. 가슴 아프게 된다. 끌어안아주고 싶을 것이다. 그리고 제주 강정에서 왜 사제들이 그토록 애달파하는지 납득하게 될 것이다. 내 안에 이미 고여 있는 사랑을 길어올릴 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랑하라, 그리고 뭐든지 하라”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을 모든 논쟁을 거슬러 받아들일 것이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연루자들을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구속된 천주교 원주교구 최기식 신부도 아마 김현장과 문부식과 김은숙씨를 직접 만나보지 않았다면 그처럼 엄청난 결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착한 눈매를 보지 않았다면 ‘빨갱이’로 지목된 이 젊은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저 평온한 사제의 일상을 살았을 것이다. 문제는 ‘보는 것’이다. 메시아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예수가 한 말도 똑같았다. “와서 보라”는 것이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에서 이영찬 신부의 석방을 요구하는 기도회를 오는 5일 제주 강정에서 연다고 한다. 이번엔 “가서 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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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삐약삐약” 갓 태어난 병아리 1000수를 들여온 날은 비 온 뒤 기온이 뚝 떨어진 날이었습니다. 부화장 사장님은 “보온 잘해야 해요”했지만, 과한 보온보다는 추위를 견디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가 죽는 것은 추워서가 아니라 추위를 이기기 위한 과정에서 한 곳에 몰려 압사하는 이유가 대부분입니다. 몰려서 겹치지 않도록 잠자리에 완만한 경사로를 만들어 주고 볏짚이나 왕겨 정도로만 보완하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오히려 추위를 견디는 과정에서 잔털이 발달하고 돌아오는 겨울에도 튼튼히 버틸 체질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어미 품만큼이야 하겠습니까만은 이 정도면 길러야 하는 사람과 커야 하는 병아리의 적절한 타협점입니다.


 올겨울은 이 병아리들과 함께 지내게 됩니다. 아직은 올망졸망 모여 겁먹은 표정으로 주인 눈치를 보고 있지만 금방 천방지축 날듯이 뛰어다닐 겁니다. 점점 자라 벼슬이 나올 때쯤 되면 생긴 것도 하는 짓도 꼭 말 안 듣게 생긴 중학생이랑 어쩜 그렇게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변성기가 지나고 “꼬끼오” 발음이 점점 그럴듯해지면 주인이 있든 없든 신경도 안 쓰고 여기저기서 짝짓기를 하게 되는데,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훨훨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답구나”하는 유리왕의 심사를 굉장히 사실적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당장 각시에게 달려가고 싶습니다. 넉 달이 조금 더 지나면 예쁘고 신선한 초란이 나오고 이때 딸들은 날마다 농장으로 출근합니다. 짝짓기하는 닭들이 농장주인 쳐다보듯, 일하고 있는 아빠는 안중에도 없고 날계란만 물리도록 쪽쪽 빨아 먹습니다. 알려주지 않아도 아이들의 입맛은 좋고 맛있는 것을 찾아갑니다. 그러는 동안에 매서운 바람과 함께 한파도 찾아올 것이고 눈이 무릎까지 쌓여 장화를 신고 닭장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때도 있을 것입니다. 언 물을 녹이느라 고생하는 날도 더러 있겠지요. 그래도 큰 일이 없으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 내년 초봄에는 통장에 돈도 제법 들락날락 할 것입니다. 또 하나의 희망을 품는 가을입니다.


구호 외치는 양계농민들 (출처: 경향DB)


문제는, 올봄에도 그랬다는 겁니다. 봄일 도우러 온 친구 녀석은 논농사 1만평을 짓는다는 말에 “땅부자네!”하는 실언으로 “뭣도 모르는 놈!”하는 핀잔을 들었고, 못자리 때 뿌리는 볍씨 한 톨에서 대략 100개 정도의 이삭이 나온다고 하니 “백배 장사면 그것뿐이 할 것 없겠다”며 히죽대다가 급기야 뒤통수를 얻어맞기까지 했습니다만, 사실 조금은 나아질 줄 알았습니다. 긴 봄 가뭄에도 그럭저럭 들로 시집보낸 모들은 싹수가 좋았고 뙤약볕을 이기며 잘 자라주었습니다. 장마에, 태풍에 맘 졸이기도 했지만, 항상 있는 일이었습니다. 남녘에서는 태풍 피해로 한 해 농사를 다 버린 곳도 꽤 된다지만 내 나락은 조금 더 실할 거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습니다. 같은 하늘 아래서 내 농사만 좋으라는 법은 없나 봅니다. 통계청 발표만 보더라도 올해 쌀 생산량은 사상 최저치입니다. 항상 그렇듯이 현장에서 느끼는 감으로는 훨씬 더한 흉년입니다. 가을 들판에서 늘 하던 “나락 많이 나왔는가?”하는 인사가 민망해집니다.


풍년 농사였어도 별로 다르진 않았을 겁니다. 땅 임차료가 수확의 거의 반절입니다.(소작쟁의라도 해야 하나) 농자재, 농기계 값은 해마다 물가 상승률을 선도하고 있지만 나락 값은 10년 전 그대로입니다. 20년 전하고 비교해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짜장면 값은 10년 전 3000원, 20년 전 1300원. 미안하다 짜장면.) 1990년대 말 80% 정도였던 도시가구소득대비 농가소득은 2011년 59%까지 떨어졌습니다. 하위 수준일수록 그 격차는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대부분이 중소 가족농임을 감안하면 도시가구소득대비 59%라는 숫자는 정확히 나의 경제입니다.


결혼하고 12년 동안 늘 함께해 왔던 냉장고, 세탁기, TV에게는 13년을 향해 달리자고 미리 말해 두었습니다. 이제 보내줄 때가 되었다는 고물 트럭에게도 동요하지 말 것을 지시했습니다. 말은 안 해도 가을에 기백만원 정도는 통장에 넣어 줄 바람을 가지고 있을 각시에게는 직접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아 이렇게 지면으로 전합니다. “미안하다. 없다.”


농민의 위험은 곧 밥상의 위험입니다. 22%까지 떨어진 식량자급률, 80%대까지 떨어진 쌀 자급률, 한우값 폭락, 돼지값 폭락의 소식 뒤에는 비소 함량 논란이 있는 미국 쌀, 온 국민의 촛불을 넘어 온 수입 소고기, 비싼 석유 써가며 왜 여기까지 왔어야 했나 싶은 원산지 불명의 농산물들이 악마의 미소를 띠고 있습니다. 모자라면 항상 사다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계 곡물 소비량은 생산량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유통과 공급과 가격의 결정권은 농민과 착한 국민이 아니라 다국적 기업의 손에 있습니다.


59%라는 농민의 경제와 22%라는 당신의 밥상을 극복하지 않고는 박 ○○%, 문 ○○%, 안 ○○% 하는 숫자가 주는 희망도 한낱 신기루일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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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시인


해발 800m 산속에서 살고 있는 친구가 결혼을 한다고 했다. 장소는 살고 있는 집이라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나이 들어 하는 결혼이라 쓸쓸할 텐데, 산속에서 결혼을 한다고 하니 더 맘이 쓰였다. 일찍 집을 나서 서울로 가, 선배 시인 딸 결혼식에 잠깐 참석하고 원주로 향했다. 출판사를 시작한 후배 차를 타고 가며, 출판시장에 대한 이런저런 얘기와 내가 하고 있는 인삼장사 얘기를 나눴다. 얘기에 속내를 풀어놓을수록 작은 출판사나 영세 삼장사는 다 힘든 상황으로 치달았다. 길가 야산에는 벚나무 단풍이 들고 있었다. 주말인데도 차량이 많지 않아 고속도로가 뻥 뚫렸다. 시원하게 차가 빠지자 후배는 좋지 않은 경기 덕을 우리가 톡톡히 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고속도로를 내려온 차가 원주 시내를 지나 계곡의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공원관리소에서 목적지를 말하자 차를 통과시켜주었다. 구불텅구불텅한 산길로 차는 달렸다. 몇 년 전에 와 보았을 때는 없던 새 다리도 놓였고 길이 한결 좋아져 있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을 때였다. 친구들이 나를 태우고 갈 곳이 있다고 말하고 막무가내로 이곳으로 데려왔었다. 독한 음식 없는 이곳에서 한 달 정도 몸을 추스르고 나오라고 했다. 그냥 혼자 있다가는 큰일 난다고 하며. 나는 한 열흘을 머물렀었다. 친구는 산속에서는 이게 영양식이라고 하며 냉동실에 얼려놓았던 돼지 족을 과주기도 하고 말려 놓았던 산약초로 물을 끓여주기도 했다. 지게로 나무를 져 나르기도 하고 계곡 얼음물로 오장육보를 씻어내며 한 열흘 보내니 몸이 좀 나아진 것 같아 하산 길에 올랐었다.


띄엄띄엄 산길 나무에 시화가 걸려 있었고 하산하는 등산객들이 걸음을 멈추고 시를 읽고 있었다. 아마 이 고장 시인들이 시화전을 열고 있는 듯했다. 낙화하는 낙엽, 산 구릉을 잇는 새소리, 계곡을 점자로 읽어 내리는 물소리, 이처럼 깊은 것들이 다 배경이 되는 곳에서의 시화전은, 오히려 배경에 압도되기 십상이어서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자로 올라가는 일차선 길가에 차가 힘들게 자리를 잡고 멈춰 섰다.


산속 낙엽 위의 다람쥐 (출처: 경향DB)


차에서 내려 찻길을 버리고 40분을 산길을 더듬으며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사람들이 많이 왔는가 물어보고 싶었으나, 목적지인 친구의 집에서는 휴대전화가 잘 안 터진다는 후배의 말에, 그냥 돌다리를 조심조심 건넜다. 길가에 알밤들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바람에 흔들리는 밤송이를 품고도 맑기만 한 가을 하늘을 보았다.


“한식에 나무 심으러 가자/ 무슨 나무 심을래/ 십리 절반 오리나무/ 열의 갑절 스무나무/ 대낮에도 밤나무/ 방귀 뀌어 뽕나무/ 오자마자 가래나무/ 깔고 앉아 구기자나무/ 거짓없어 참나무/ 그렇다고 치자나무/ 칼로 베어 피나무/ 네편 내편 양편나무/ 입맞추어 쪽나무/ 너하구 나하구 살구나무/ 이 나무 저 나무 내 밭두렁에 내나무….” 


며칠 전, ‘광고의 나라’라는, 광고 카피로 하루를 시작해 하루를 마감하는 시풍을 빌려, 식물들의 이름과 이미지로 하루를 건강하게 살아내는 시를 써보자는 발상을 했었다. 그러면서 어떻게 나무타령을 피해 갈 수 있을까 걱정하며 잊고 있던 나무타령을 찾아보았었다. 돌다리를 다시 건너고 숲길로 걸음을 옮겼다. 산속 결혼이라고 하객 걱정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렇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자연이 다 하객들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나무타령을 자연타령으로 바꿔 산골결혼식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폐백은 다람쥐나 청설모가 맡고, 경비에는 엄나무, 경호에는 화살나무, 식수 담당은 물에 대한 아픔이 있는 고로쇠나무가 하고, 술 담당은 절대 자작나무 시키지 말고 소태나무한테 일임하고 바텐더는 잔대가 맡고, 음악은 국악으로 가서 꽹과리는 치자나무 피리는 버드나무 북은 북나무 스피커는 꽝꽝나무 노래는 오소리가 제격. 사회는 주목나무가 좋겠고 식권담당 이팝나무 축의금 접수는 은행나무 화촉은 산초나무 화장실 안내는 뽕나무 쥐똥나무 다 사양하고 싸리나무로 가라. 신부화장은 분나무 조명은 반딧불 박수는 손바닥 붉을 때까지 단풍나무가… 주례는 누가 맡으면 될까 고심해도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산속 하객들은 의외로 많았다. 집 입구에 누구누구의 두 번째 합궁을 축하한다는 현수막을 건 아랫동네 사람들도 있었고 신부 친구 화가들과 신랑 친구 시인들 도합, 30여명은 되어보였다. 들국화 부케를 든 신부는 예뻤고 백발에 청바지를 입은 신랑은 순수했다. 주례는 격식을 차리지 않았고 임시로 건 가마솥에서는 소머리가 삶아지고 있었다. 가끔 양철 지붕 위로 밤톨이 떨어져 좌중의 시선을 집중시키기도 했다. 풍광 좋은 곳을 보기 위한 정자도 있지만 풍광을 완성하기 위한 정자도 있는 법. 그날 산속의 결혼식은 결코 산속의 정취를 흩뜨려놓지 않았다.


어둠 속, 갔던 길을 되내려오며 나는 대선을 앞둔 현 정세를 자연의 이름과 연결시켜 보려 했으나 잘 되지 않아, 자연의 이름으로 자유롭게 연결되는 세상이 오기를 기원해 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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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저 산에 언제 다 오르랴 싶지만 꼭대기로 가는 길은 언제나 좋다. 산 아래에서 아무리 찧고 까불어대도 바람과 구름만으로 천만변화를 일으키는 하늘만 상대할 수 있잖은가. 허무한 마음과 맹랑한 말들을 뒤로한 채 순한 짐승처럼 헐떡이다가 그곳에 천천히 도착하면 누구나 오직 한마디의 외침만 내지르면 된다. 마음속 가득 쌓인 먼지까지 끌어올리면서, 야호! 천관산이란 이름을 들었을 때 참 생소했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 있는 산 이름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미처 그 이름을 몰랐을 뿐, 산은 이미 웅장한 산으로 장흥에서 장흥사람들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장흥을 지키고 있었다.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변산과 더불어 전라도 5대 명산 중 하나였다. 억새가 유명해서 가을이면 전국 규모의 큰 축제가 벌어진다고 했다. 


전남 장흥 천관산 억새밭 전경 (출처: 경향DB)


 천관산은 해발 730여m로 기암괴석이 장관을 이루는 산이다. 주차장에서 영월정을 지나 가파른 고개를 치고 올랐다. 양근암과 정원석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걸을 땐 게으른 황소의 불룩한 뱃가죽을 탄 기분이었다.


드디어 천관산의 정상인 연대봉에 섰다. 한려수도의 절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발아래 보이는 저 멀리 어딘가에 보성 소리를 완성한 명창 정응민의 생가, 소설가 이청준의 무덤, 영화 <천년학>의 촬영장이 숨어 있을 것이다. 또 그보다 조금 먼 바다에는 여러 섬들이 수려하게 떠 있었다. 그 섬 중 하나는 소록도. 저 호젓한 섬들이 없었다면 바다는 얼마나 적막하랴.


환희대에 이르러 잠시 쉴 때였다. 한 친구가 배낭에서 귤을 꺼내 나눠주면서 말했다. “껍질에는 농약 성분이 묻어 있으니 함부로 던지지 말게.” 우리는 쓰레기봉투를 하나 만들어 귤껍질을 모았다. 또 한 친구는 부시럭거리더니 미리 3등분한 사과를 꺼내주었다.


귤은 껍질만 챙기면 되는데 사과는 부속물이 좀 많다. 몸통이야 그냥 먹으면 되겠지만 껍질, 씨, 씨방은 어떻게 처리할까. 우적우적 베어먹고 나면 입안으로 들지 못한 그것들은 순식간에 쓰레기로 변해버린다. 음식과 음식쓰레기는 이리도 가깝군, 하다가 문득 굴비에게로 생각이 연결되었다.


웬만한 밥집에 가면 손바닥만한 굴비가 인원수대로 나온다. 생선을 무척 밝히는 나는 한 마리를 냉큼 앞접시로 데리고 온다. 그리고 젓가락으로 열심히 헤집지만 머리 떼고, 내장 파내고, 가시 빼고 나면 정작 발라먹을 게 별로 없기가 일쑤다. 그저 내 침만 잔뜩 묻힌 채 난도질당한 굴비는 그냥 쓰레기로 전락하고 마는 것이다.


어느 날 가깝게 지내는 출판사 대표가 죽은 생선과 다투는 나의 서툰 솜씨를 보더니 한마디 했다. “우리 친정아버진 생선 드실 때 접시 위에 아무것도 안 남아요!” 젓가락 끝이 아니라 그 말끝에 생선 바르는 비결이 숨어 있는 것 같았다.


불에 익힌 생선을 먹는 데 머리, 아가미, 지느러미, 내장, 몸통, 껍질, 꼬리를 굳이 구분할 필요가 있을까. 같은 생선의 몸에서 먹을 것과 못 먹을 것을 꼬치꼬치 구별할 게 뭐 있을까.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가 있을 뿐이지 젓가락에 무슨 좌우의 구별이 있던가. 그렇게 생각하니 고개를 박고 먹을 만한 것만 골라 먹는 게 어쩐지 좀 쪼잔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그 이후 나는 웬만한 생선이라면 그냥 통째로 먹는다.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 전부 홀랑 먹어버리는 것이다.


전어한테는 참 미안한 이야기인데 가을이면 전어철이 돌아왔다고 술꾼들은 너도나도 입맛을 다신다. 나도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해 누군가가 잡아다 준 전어를 먹는다. 회로 먹기도 하지만 구워 먹을 때도 있다. 그럴 때 이 방법이 톡톡히 효과를 본다. 쩨쩨하게 찝쩍거리지 않고 전어를 들어 통째로 머리부터 간장에 찍어 빈대떡 베어먹듯 한 움큼씩 나누어 먹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꼬리를 먹을 땐 꼬리에 묻은 거친 물결의 흔적까지도 함께 씹어 먹는다. 그렇게 남김없이 먹어주는 게 전어에게는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치욕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게 차라리 전어에 대한 깨끗한 예의이리라. 그러니 이젠 나도 생선을 제대로 먹을 줄 아는 축에 끼게 된 것일까?


천관산에는 곳곳에 주상절리가 발달하여 큰 바위들이 다정한 형제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껍질째 3등분한 사과를 받아 입으로 넣기 전에 손바닥에 올려놓았다. 까만 사과씨 두 개가 우화등선(羽化登仙)한 어부처럼 한가운데 타고 있는 게 마치 한 척의 돛단배 같았다. 손가락 사이로 한려수도 한 폭이 척 걸려들었다.


사과도 위아래가 있다. 사과나무의 줄기에서 양분을 공급받은 꼭지가 달린 부분을 머리라고 하자. 그 반대편의 잘록한 부분은 사과의 엉덩이이리라. 나는 한 마리의 굴비를 먹듯 사과를 차례로 먹었다. 껍질도, 씨방도, 씨도. 물론 통통한 살까지. 다시 말해 사과의 머리부터 꼬리까지, 아니 사과의 똥구멍까지. 내 손바닥은 빈 접시처럼 깨끗해졌다. 물론 씨는 깨물지 않았다. 내 캄캄한 몸을 통과해나간 무심한 씨앗은 어느 양지바르고 축축한 곳을 만난다면 한 그루의 사과나무로 다시 자라날 수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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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가난함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배부릅니다/ 내 야윔으로/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살이 찝니다/ 내 서러운 눈물로/ 적시는 세상의 어느 길가에서/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납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이 지은 ‘세상의 길가’라는 시. “어디 갔다가 늦게 집에 가는 밤이면 불빛이, 따뜻한 불빛이 검은 산 속에 깜박깜박 살아있는 집. 그 불빛 아래 앉아 수를 놓으며 앉아 있을 그 여자의 까만 머릿결과 어깨를 생각만 해도 손길이 따뜻해져오는 집”이라고 적은 ‘그 여자네 집’만큼이나 망명정부 같은 이승을 살아가면서 힘든 고비를 넘길 때마다 가슴으로 읽던 글귀다. 이건 아마도 그리움일 것이다. 이승에서 다 채우지 못할 영원한 고향 같은 다정함에 대한 갈증일 것이다. 기울어가는 세상의 무게중심을 잡으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1999년 가을 이맘때쯤 나는 서울을 탈출해 무주 산골로 내달렸다. 귀농,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와 도종환 시인의 말대로라면 ‘화엄’을 일구고 있다. 울 탈출의 직접적인 이유는 영양실조와 스트레스로 인한 결핵성 늑막염. 간접적인 이유는 두 눈으로 직접 ‘별을 헤아리는 밤’을 소유하기 위함이었다. 학창시절 새 교과서를 받으면 제일 먼저 국어책에서 시를 골라 읽던 나는 윤동주가 보았다는 그 별을 나도 헤아리고 싶었다. 이어령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하나의 우주가 흔들린다”고 노래했던 바람을 느끼고 싶었다. 무엇보다 이른바 ‘운동판’에서 받은 상처와 질병을 직면하고 치유받고 싶었다. 


지난 총선 이후 끝없이 마음을 어지럽혔던 통합진보당 사태는 ‘물신화’된 자본 중심의 세상에서 진보세력 역시 자유롭지 못함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어 이정희 전 대표가 대선 후보로 나서면서 그 정도가 극에 달하고 있다. 한자릿수의 지지율로 캐스팅보트를 쥐고 대선 이후에 지분을 나누어가지려는 유사 진보세력의 권력 욕망을 지켜보면서, 한때 그들과 더불어 세상을 바꾸어보겠다고 나섰던 내 심경은 참담하다. 진보정당이 정치적 입지를 얻는 것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이 너무 속물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괴물과 대적하면서 스스로 괴물이 되어, ‘사심없이 투신했던’ 사람들을 함부로 상처내고 있다. 


그들은 언제부턴가 ‘가난하고 야위고 서러운 눈물을 적시는 법’을 잃어버린 모양이다. 그래야 세상의 어딘가에서 누군가 배부르고 살이 찌고 어느 길가에선 ‘새벽밥같이 하얀 풀꽃들’이 피어난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과 같은 이들의 가치는 고귀하다. 투신의 열매를 탐하지 않고, 그가 몸을 던져 얻은 것은 절룩이는 발을 거들어줄 지팡이뿐이었다.


통합진보당 당권파 중앙위원과 당원들이 몸싸움을 벌이고 있다. (출처: 경향DB)


송경동은 “어느 대학 출신인가요”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나요”라는 질문을 ‘사소한 물음’이라고 했다. 통쾌하고 명쾌한 해석이다. “어느 날 한 자칭 마르크스주의자가 새로운 조직 결성에 함께하지 않겠느냐고 찾아왔다. 얘기 끝에 그가 물었다. 그런데 송동지는 어느 대학 출신이오? 웃으며 나는 고졸이며, 소년원 출신에 노동자 출신이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순간 열정적이던 그의 두 눈동자 위로 싸늘하고 비릿한 막 하나가 쳐지는 것을 보았다.” 송경동은 ‘운동권 엘리트’ 그네들만의 혁명에 함께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답했다.


손학규 전 의원은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면서 ‘저녁이 있는 삶’을 내세웠다. 재벌은 재벌대로, 군부는 군부대로, 농민은 농민대로 저마다 꿈이 다를 텐데 무차별하게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내세운 현실성 없는 박근혜 후보의 슬로건보다 더 현실적이면서 시적이다. 광부가 기름 묻은 하이데거와 러셀의 책을 읽는 나라. 자전거에 막걸리병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으로 놀러가는 “황토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을 그린 신동엽의 ‘산문시’를 떠올리게 하는 멋진 정치구호다. 그러나 구호는 구호일 뿐. 정작 문재인 후보는 선거운동 전문가에 앞서 도종환 시인과 안도현 시인을 캠프에 초대했으며, 안철수 후보는 꼼수없이 세속적인 기득권을 포기할 의사를 밝혔다. 정치권력의 아수라에서 시인과 성직자를 연상시키는 문재인과 안철수가 오히려 급진적이다.


미국 빌보드 차트 2위를 기록하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8만명의 시민이 모인 가운데 싸이가 불렀던 ‘강남스타일’ 노래에선 말한다. “낮에는 따사로운 인간적인 여자. 커피 한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 있는 여자. 밤이 오면 심장이 뜨거워지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여자….” 그런 ‘반전 있는’ 정치를 보여주는 이들이 진보적이다. 자칭 진보든 보수든 반전 없는 정치 스타일은 ‘수구세력’에 다름 아니다. 가장 아픈 곳에 시선이 머무는 정치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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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농민회 교육부장


“어느 해든 농사가 그냥 되는 법이 있나!” 석 달 가뭄에 호미로 땅을 파서 모를 심고 돌밭을 일구어 옥답을 만들던 옛날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올 같은 바람은 살다살다 처음이네.” “무슨 놈의 비가 오기만 하면 퍼붓는가 몰라” 하며 하늘을 원망하는 일은 해마다 더해 갑니다. 이변이 일상이 되어가면서 단 한번의 집중호우 또는 단 한번의 태풍으로 한 해 또는 몇 해의 노력이 물거품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냥 되는 법’이 없는 농사 이야기는 콩을 심어 콩을 얻는, 말하자면 행동에 따른 정직한 결과가 되기보다는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기’까지의 난관과 극복에 관한 것입니다. 특히 자연재해로 ‘○○ 심은 데 ○○ 난다’가 어렵게 되거나 ‘△△ 심었는데 이럴 수가’ 하는 무수한 일들은 원치 않는 드라마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제기랄, 볼라벤과 덴빈에 이은 산바 같은 일일세!”


 연이은 태풍의 경로를 따라 내내 두렵고 우울해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2007년 벼가 한참 자라 새끼도 다 치고 조금 있으면 이삭도 품게 될 때였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아무렇게나 꾸며도 예쁜 스무 살 아가씨 정도 되겠습니다. ‘이제 낮잠 좀 자도 되겠구나’ 하는 행복한 생각을 할 무렵, 볏잎이 마르기 시작하더니 논바닥 전체로 번졌습니다. 비료도 줘 보고 농약도 뿌려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애멸구가 옮기는 줄무늬잎마름병이라는 것인데 이미 못자리 때부터 이상이 있었던 것입니다. 수십년 농사를 지어온 어른들도 처음 있는 일이라며 난리였습니다. 


피해는 서해안 지역에 광범위하게 나타났고 해당 논의 생산량은 전년의 반절이 되지 못할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상치 못한 느닷없는 충해였습니다. 재해로 인정하라는 요구와 농업재해보상법을 제정하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우리는 다급했고 농정 담당자들은 상황을 해석하기에 바빴습니다. “이런 제기랄, 억울함이라도 알려보세!” 농민으로서 잘한 결정인지는 역사가 평가할지, 땅이 평가할지, 벼가 평가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많은 고민 끝에 결국 내 논을 갈아엎었습니다. 스무 살의 아가씨를요. 누구는 고생했다고 하고, 누구는 미안하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투쟁의 성과와 전망에 대해 논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좀 아팠습니다. 그리고 다음해 봄까지 집 앞 길산천 건너 처음 장만한 내 논에 가지 못했습니다. 


수해복구 나선 육군 장병들이 쓰러진 벼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출처: 경향DB)


2010년 여름 어느 날, 한나절 만에 400㎜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가 내렸습니다. 도랑과 개천들이 순식간에 범람했습니다. 금세 그 넓은 들이 원래 바다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닭을 키우는 축사는 수중 생태계의 일원이 되어버렸고, 급하게 온 친구들과 함께 닭들만 건져 트럭에 실었습니다. 비 맞은 닭들의 누추한 모습이 ‘40여년을 살아온 내 인생의 꼬라지’와 같다는 몹시 심한 감정이입이 있었습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은 둘째입니다. 가을이 오도록 줄기차게 흘린 땀과 가끔씩 남 몰래 터지던 눈물과 내내 빛나던 지겨운 태양으로 기억되는 여름입니다.


‘내 잘못은 아니잖아!’ 하고 편하게 생각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괜찮아질 거야’ 하는 희망이 손님처럼 머물다 떠나면 나에게만 찾아온 것 같은 절망과 우울은 늘 함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다 잦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태풍이나 폭우의 소식과 함께 어르신들의 류머티스처럼 스멀스멀 기어나오곤 합니다.


올여름 끝이 고단합니다. 수확을 앞둔 벼는 고개도 못 숙이고 하얗게 서 있습니다. 바람에 되게 맞은 나락들은 모양만 있지 여물지 않을 것입니다. 낙과 피해를 본 과수농가들도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쉽니다. 물에 빠진 닭을 함께 건졌던 ‘감박사’ 이웃 형님의 감나무에서는 70% 이상의 감이 떨어졌습니다. 가지 끝에 다시 붙여라도 주고 싶지만 붙여줄 수가 없는 일입니다.


무너진 하우스나 창고를 고치고 날아간 비닐을 다시 씌우면서 “어쩌겠습니까, 이렇게 된 거. 이 술 한잔 먹고 힘 냅시다” 하거나 “정신 차려! 그깐 일로 농사 접을라고!” 하면서 더 아파하지 않도록 마음을 치유하는 일들은 마을에서 영농회에서 농민회에서 우리 농촌공동체들이 해볼랍니다. 굳이 생색을 내자면 훨씬 더 큰 사회적 비용이 들어갈 일입니다. 대신 자연재해로 인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되어버린 농작물에 대해서는 국가가 보상했으면 합니다. 세계적인 식량위기라는 말이 위기라는 느낌도 들기 전에 단골 뉴스가 되어 버린 시대이고 농업을 안보와 주권으로 인식하는 것 역시 국민의 상식이 되고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은 다 농민이 살아야 해결되는 것 아닙니까? 일단은 농민이 살아야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니 농업 생산 체계니 하는 이야기도 점잖게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식한테 받을 수 있는 효도는 열 살 이전에 다 받았다는 어머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 여물지 않더라도 봄에 심는 고생과 커 가는 것을 지켜보는 마음이 여러분들이 드시는 것의 팔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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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 | 시인


오랜만에 들판을 보려고 집을 나섰다. 하늘은 높푸르고 세상은 평화롭다. 세상의 수직한 것들이 수평을 절감해 보았던 태풍. 먼 바다 큰 바다에서 태풍은 왔다. 땅속의 뿌리들에게 지상의 몸들을 치열하게 읽어보라고, 태양조명 끄고 사선으로 내리치는 빗줄기를 흩뿌리며 태풍은 왔다. 수직한 것들의 근심을 일제히 뿜어 올려주던 태풍. 아, 그 끝도 없이 불어오던 바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TV 전파가 자연을 생중계하게 만들던 어마어마한 바람들은 홀연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가을 들판은 고요하다. 바람소리가 모든 소리들을 다 이끌고 간 듯 들판의 공기는 한가롭다. 걷던 길을 멈춘다. 길가의 들풀들은 별일 없었던 듯 건재하다. 연이은 태풍에 5000여개의 전신주가 부러져나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저 가는 강아지풀은 멀쩡하여 머리에 토실토실 영근 씨앗을 이고 있는가. 살 오른 송충이 같은 이삭을 자랑스레 숙이고 있는 강아지풀을 붙잡고 그 비결을 물어본다. 까슬까슬 강아지풀은 답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이상 없어도 기실 풀줄기들도 만신창이로 지쳤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수직을 얻기 위해 수평으로 이동할 수 없는 식물의 숙명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인내하고 있을 뿐일 것이다. 


(출처: 경향DB)


들판으로 간신히 이어진 야산에서 늦은 보리매미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우거진 풀을 헤치고 가, 산에 서 있는 나무들을 일일이 만나 그간 바람의 강도를 줄이느라고 수고 많았다고 악수라도 청해볼까. 


그러면 나무는 터진 잎맥과 늘어난 물관과 들뜬 껍질 때문에 몸이 시큰거리니 손을 조금만 흔들라고, 낮은 비명 섞인 침묵으로 내게 부탁을 해올지 모를 일이다. 산자락이 끝나자 4차선 너비는 족히 되는 수로가 나타나며 길을 좌우로 꺾어놓는다. 수로 건너편 논에서는 콤바인으로 벼를 추수하고 있다. 콤바인은 이발기처럼 벼 포기들을 깎으며 논을 오간다. 그렇게 논을 몇 번 오간 콤바인이 코끼리 코 같은 낟알 배출기를 뽑는다. 농로에 대기하고 있던 트럭의 짐칸에서 마스크 쓴 농부가 큰 자루를 벌리고 콤바인이 삼켰다가 토하는 벼 낟알을 받는다.청개구리가 방정맞게 깔깔깔 운다.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수로 둑에는 쑥부쟁이, 기생여귀, 고마리, 달개비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다. 작은 꽃들을 보고 있자니 은하수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남빛 달개비꽃을 허리 숙여 들여다본다. 달개비꽃의 꽃잎은 두 장이다. 마치 작은 나비가 날개를 치켜올리고 있는 듯, 꽃잎 두 장이 꽃송이의 상층부에 붙어 있다. 


어지럽게 펼쳐진 남색 나비떼로부터 눈을 떼어 둑 아래 물을 바라본다. 수면에 깔려 있는 물방개 닮은 풀 위에 빈 페트병과 스티로폼 쪼가리들이 올라앉아 있다. 물풀이 없는 곳에는 하늘이 내려와 있다. 구름은 하늘에서 볼 때보다 더 입체적으로 보여, 구름이 평면체가 아니라 거대한 덩어리임을 더 확실히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구름은 저렇게 해서라도 자신의 고향인 물로 내려와 보고 싶은가보다. 하구에서 수로의 물을 빼고 있는지, 물 마르는 소리가 자박자박 난다. 수로를 가로지르는 전깃줄에 밤낚시꾼들이 던진 바늘과 찌가 걸려 있다. 


수로 둑길에서 벗어나 좁은 논둑길로 접어든다. 메뚜기 한 마리가 폴짝 뛴다. 반가워 메뚜기에게 내 소개를 하려고 다가간다. 메뚜기는 그럴 필요 없다고 논으로 도망친다. 개구리 한 마리도 저도 마찬가지라고 이삭물 잡아놓은 논으로 첨벙 뛰어든다. 섭섭해하며 몇 걸음 걷고 있을 때 다시 메뚜기 한 마리가 뛰어오른다. 자세히 보니 한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다. 메뚜기들은 교미 중이다. 교미 중인 메뚜기에게 실례를 하고서라도 가까이 다가가 살진 허벅지를 한 번 보고 싶어진다. 메뚜기가 도망간다. 풀줄기에서 풀줄기로 건너뛰었는데, 풀줄기가 무게를 못 이기고 땅까지 휘어진다. 메뚜기 암컷이 등에 올라타고 있는 수놈의 무게를 감안하지 않고 습관대로 풀줄기를 택했던가보다. 메뚜기는 심기일전 다시 뛰어 풀줄기를 잡는다. 이번에도 풀줄기가 휘어지자 메뚜기는 재빠르게 뒷걸음치며 굵은 풀줄기 쪽으로 내려온다. 그 동작이 하도 민첩해 나는 박수를 친다. 어른들이 나란히 벼를 베어 나오는 반대편 논두렁에서 메뚜기를 잡던 옛 기억이 떠오른다. 어른들의 낫질에 쫓겨 오던 메뚜기떼를 아이들 여럿이서 기다리고 있다가 잽싸게 낚아채 술병에 집어넣으며 즐거워하던 일이.


다시 논둑길을 걷는다. 벼를 베려고 논 귀퉁이 벼를 미리 베어 놓은 곳으로 다가간다. 벼이삭에 코를 대본다. 벼이삭 익는 향이 차고 시원하다. 논에 물을 대는 고무호스가 핏줄처럼 논도랑 위에 불거져 있다. 벼 낟알 부딪치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 귀를 기울여본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낮에 우는 귀뚜라미 울음소리는 건조하기도 하고 절절함이 부족해 그 깊이가 얕다. 


들판의, 농부의, 농촌의 아픈 현실을 외면하고 산책을 한다. 애써 딴전을 피우며 들판을 걷는다. 언젠가 이러한 산책이 딴전이 아닌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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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벌초하러 가기 위해 배낭을 꾸리는데 KBS <한국의 재발견>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청정 거창, 마음으로 걷다’ 편이 흘러나왔다. 수승대, 고택, 거창사과는 물론 야치기해서 잡은 물고기로 어탕국수를 끓여먹는 것까지를 모두 보느라 출발 시간을 조금 늦추어야 했다. 고향까지 쭉 뻗은 길. 그 길을 신나게 달리면서 45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났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 인생에서 참으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부산으로 전학가기 전까지의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보냈다는 사실이다. 날이 갈수록 나는 이 체험이 사무치게 좋아진다. 나의 고향은 거창읍에서 덕유산 자락으로 사십여리(里). 내 어머니 머리에 쌀 이고 장에 갈 때 두 시간 남짓 걸리는 깡촌이었다. 그렇게 나를 길러낸 고향 마을은 지금의 웬만한 아파트 한 동(棟)에도 못 미치는 규모이지만 그때 내 눈에는 아주 으리으리한 마을이었다.


 당시 나의 하루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달그락달그락. 책보에서 몽당연필이 필통을 긁는 소리와 함께 학교에서 돌아오면 배가 고프다. 어머니가 점심을 차리는 동안 마당의 감나무에 올라가 매미를 잡기도 한다. 그리고 맨밥을 찬물에 말거나 노란 콩가루에 비벼 후다닥 해치우고 동청(광장)으로 소를 몰고 나간다. 이른바 ‘소먹이’를 하러 가는 것이다.


동청에 모인 소들은 서로 싸우기도 하고 똥을 싸기도 한다. 풀을 먹고 내놓는 똥은 냄새도 그리 지독하지 않았다. 이윽고 손바닥의 침을 튕기며 결정한다. 오늘은 자루골로 간다! 그 골짜기 입구에 소를 풀어 놓고 우리는 시냇가에서 오후 내내 멱을 감는다. 그리고 해가 엇비슥히 질 무렵 꼴망태를 메고 자루골로 간다. 우리는 멀리서도 워낭 소리나 울음으로 자기 소를 잘 찾았다. 소가 싱싱한 풀들로 배를 채우는 동안 우리는 꼴을 벤다. 


소의 배는 부르고 망태는 불룩하고 우리의 마음도 두둑하다. 소를 몰고 동네로 돌아오면 집집마다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뭉클뭉클 피어올랐다. 그리고 짤랑짤랑 워낭 소리, 수런수런 소의 콧김 소리, 자박자박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가 골목을 가득 채웠다. 때는 저녁이다. 식구들은 두루판에 둘러앉고 소는 외양간에 엎드리고 송아지는 어미소의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리고 내가 통통한 보리밥을 우물우물 씹어 먹는 동안 소는 오늘 하루를 되새김질했다.


이런 경우가 있었다. 소먹이를 하는데 소나기를 만났다. 다른 소들은 다 찾았는데 우리 송아지가 안 보인다. 날은 어두워지고 산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송아지를 걱정하는 어미소의 뒤척임이 밤새 계속되었다. 다음날 아버지와 나는 어미소와 함께 집을 나선다. 그땐 그저 묵묵히 어미소의 뒤를 따라야 한다. 이윽고 어미소의 긴 울음소리를 듣고 바들바들 떨고 있던 송아지가 칡넝쿨 덤불에서 뛰쳐나올 때, 넷은 모두 운다. 어느 땐 어미소를 잃어버리기도 했다. 어른들은 말했다. 소는 절대 달아나지 않는다. 무덤가를 찾아보라고. 그렇다. 하룻밤을 지낸 소는 어느 무덤가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찾으러 온 사람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그런 날들은 모두 지났다. 시골에 가도 소는 한 마리도 없다. 소는 단체로 사육되고 먹이도 사료뿐이다. 예전처럼 천연의 풀을 먹고 자라는 게 아니다. 구제역이니 광우병이니 하는 것들도 이런 환경의 변화와 깊은 연관이 있을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방학이면 나는 무조건 시골 큰집으로 갔다. 옛날에는 작두로 짚을 썰어 정성으로 쇠죽을 끓였다. 쇠뜨기, 바랭이 등 야생초와 뒹기(겨)를 넣기도 했다. 우리가 간장이나 고춧가루로 맛을 내듯 이것들은 쇠죽의 양념인 셈이다. 김이 설설 나는 그것을 쇠죽통에 부어주면 소는 혓바닥으로 코를 핥아가며 국물까지 맛있게 먹어주었다. 콧등치기가 달리 또 없었다. 그런 소를 보면서 내 배도 부른 듯 뿌듯해 하던 일이 어제 같다.


내 사무실 책상 귀퉁이에는 낫처럼 생긴 나무토막이 있다. 그것은 쇠죽을 끓일 때 쓰던 뒤집개이다. 몇 해 전 시골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어진 채 버려진 것을 수습해 온 것이다. 그것은 오래 사용해서 닳고 닳은 흔적이 역력하다. 가끔 이 뒤집개를 불끈 잡아본다. 그러면 그때의 일들이 영화처럼 머리를 스쳐간다.



대진고속도로의 무주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를 타자 거창으로 가는 이정표가 드디어 나타났다. 내 고향 거창은 거창한 동네이다. 나는 내일 숱한 추억을 짊어지고 자루골로 간다. 이제 그 골짜기에는 소들은 사라지고 집안의 산소가 몇 기(基) 더 늘어났다. 그리고 사촌 형님이 일군 사과밭이 있다. 골짜기가 깊어 햇살은 더 따갑고 그래서 더욱 높아진 사과의 당도(糖度)! 무주 구천동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신풍령으로 접어들었다. 벌초 마치고 그 빨간 거창사과 한 입 베어먹을 생각을 하며 고개를 넘자니 침도 절로 꼴깍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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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초등학생 딸아이가 가정통신문을 들고 왔다. 자녀들을 일찍 등교시키지 말라는 통보였다. 학교 안에서 납치유인돼 성폭행을 당한 아동이 늘어나면서였다. 그후 서울시교육청에서 학교 보안관 제도를 마련해 그나마 안심이 됐는데, 최근 연이어 아동성폭력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동네 구석구석이 우범지대로 보이고, 나이 불문하고 ‘잠재적 위험분자’로 보여 딸의 안전을 골몰하게 만든다. 요즘은 딸을 키우는 부모에게 ‘난세’인 듯하다.


 최근에 개봉된 김휘 감독의 <이웃사람>이라는 영화를 나는 보지 않는다. ‘동정 없는 세상’에서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영화 포스터는 “죽은 소녀도, 살인마도, 그를 막는 사람들도 모두 ‘이웃사람’이다. 202호 소녀의 죽음, 그리고 열흘 간격으로 발생하는 연쇄살인사건, 범인의 실마리는 잡히지 않고, 강산맨션의 이웃사람들은 공포에 떤다”고 했다. 그 공포에 감염되지 않기 위해 애써 ‘있는 현실’을 외면하려고 시도하는 것일까.


강풀 만화 ‘이웃사람’ 에 등장하는 인물들 (출처: 경향DB)


아동에 대한 성폭행의 경우 범인의 대부분이 이웃이거나 심지어 친인척들이라는데, 그렇다면 ‘안전한 이웃’은 없다. ‘이웃사촌’이란 말은 오히려 경계해야 할 낱말이 된다. 그렇게 이웃은 우리 주변에서 실종되기 시작했다. 이 이웃들을 효과적으로 감시하기 위해 경찰이 나서기로 한 모양이다. 경찰청은 ‘무차별’ 범죄와 아동성폭행 등 강력 범죄를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불심검문’을 시작했다. 최근 성폭행 사건에서 늘 실수만 연발하던 경찰이 나서는 일이라서 도무지 미덥지 않다. 


경찰의 불심검문을 두고 인터넷상에는 “이게 불심검문으로 해결될 문제냐. 무차별 살인 및 폭행은 MB정권 5년간 중산층과 서민 모두 빈민화돼 버린 절망과 분노가 원인”이라는 말도 나오고, “성범죄와 성희롱 논란 등을 일으키며 성도덕을 망친 새누리당 정권이 원인”이라는 말도 나왔다. 결국 무차별 불심검문에 대한 인권 시비가 붙고, 경찰은 심야에 다세대주택이나 원룸 밀집지역 등 범죄 발생률이 높은 지역에서 집중적인 불심검문을 시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제 서민 주거지역에서 야심한 밤에 다니는 이들은 ‘의심받을 만한’ 이웃이 된 셈이다. 그러니 나도 심야에 빌라 현관에서 서성거리며 담배 태우는 일은 삼가야 할 판이다.


언론과 경찰이 연일 이웃을 조심하라고 다그치는 요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 <에밀리>의 전언이 더 새롭게 다가온다. 이 동화책을 수년 전 무주 시골에 살면서 다섯살배기 첫딸을 무릎에 앉혀놓고 읽었다.


길 건너편에 ‘에밀리’라는 신비로운 여인이 살고 있었다. 아직은 추운 겨울, 언젠가 피아노를 치시는 어머니에게 그 여인에게서 전갈이 왔다. 평생 문밖출입을 하지 않아 신비에 싸였던 그 여인은 납작하게 말린 초롱꽃을 넣어 보낸 편지를 통해 어머니에게 피아노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느냐고 부탁했다. “저는 마치 이 꽃과 같답니다. 당신의 음악으로 저를 소생시켜 주세요. 그 음악이 저에게 봄을 가져다 줄 거예요.”


다음날 어머니를 따라 그 집에 가면서, 소녀는 백합 알뿌리 두 개를 주머니에 넣어 갔다. 정작 그 여인은 보이지 않았지만, 어머니의 손가락이 건반 위에서 떨리고, 음악이 어두운 방에 퍼져나가자, 이윽고 박수소리가 잔물결 치며 계단 위에서 밀려 내려왔다. 다시 연주가 시작되고, 소녀는 살금살금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그 계단 위에 온통 새하얀 그 여인이 앉아 있었다. “장난꾸러기 꼬마야, 이리 오렴.”


소녀가 백합 알뿌리를 그분의 무릎에 내려놓았다. “땅에 심으면 백합꽃으로 변할 거예요.” “그럼 나도 너에게 뭔가를 줘야겠구나.” 그분은 종이 위를 가로지르며 시를 써서 소녀에게 선물로 쥐어주었다. “지상에서 천국을 찾지 못한 자는 하늘에서도 천국을 찾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 천사들이 우리 옆집을 빌리기 때문이다.”


이웃이 실종되면 어디서도 ‘천사’를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이야기는 너무 순진한가, 묻는다. ‘이웃’이 빠진 ‘사랑’은 얼마나 공허한가, 묻는다. ‘도둑고양이’를 ‘길고양이’로 고쳐 부르며 환대하는 풍속을 바꾸어, 이웃을 ‘개’보다 조심하라고 이르는 게 부모의 도리일까. ‘이웃사랑’ 대신에 ‘이웃조심’이라고 경전의 문구를 바꾸어야 할까.


예수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했듯이, 우리 이웃 안에도 있을 ‘천사’를 마다하는 세상은 외롭고 서늘할 것이다. 더구나 그 외로움이 다른 범죄의 가능성을 높이지 않을까, 걱정된다. “세상에 나를 알아줄 이 없다”고 느끼는 순간, 이웃은 이웃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지게 된다. 한번 미끄러진 삶에서 회복될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출구 없는 삶은 다른 이웃들을 모두 지옥으로 보낸다. 지옥이라도 혼자 가기는 억울할 테니까. 그러니 세상의 가장 힘든 고비를 넘어가는 이들에게 백합 알뿌리 하나쯤 손에 건네주어야 한다. 또 아는가, 그게 꽃으로 피어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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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각시도 예전의 각시가 아닙니다. 마을 도서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각시에게는 나와 두 딸 말고도 매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마을 도서관에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만큼 각시의 일이 많아졌고 그만큼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외롭다’고 보내는 신호가 무시되기 일쑤이며 ‘힘들다’는 투정도 가급적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내 유전자로부터 기대하는 각시와 거리가 멀어져 갑니다.


부모님을 보며 몸으로 배워 온 전통적인 부부관계의 틀로 사고할 때는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기도 하지만, 적금이나 연금 따위로 미래를 스케치할 상황이 아닙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생의 전략으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잘 안되긴 합니다만, 자세를 낮추고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줄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700마리의 닭을 자연농업 방식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에게 3일 동안 물과 통현미만 먹입니다. “그러면 병아리 다 죽어. 고운 사료를 먹여야지.” 자연농업연구소 조한규 소장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닭한테 물어 봤어요?”


뿌리에 거름을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거름 쪽으로 뻗어가도록 생명력을 키우는 것이 식물을 튼튼하게 한다는 이치입니다. 소화가 잘되게 고운 사료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거친 사료를 소화하기 위해 위장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키우도록 도와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갓 태어난 병아리들은 죽지 않고 통현미를 먹으며 잘 자라고 있습니다. 소화기관이 발달한 닭의 똥에서는 냄새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황금닭 피서지는 대숲이 최고(출처: 경향DB)


닭장에서 무엇인가 할 때는 그것이 닭에게 좋은 것인지, 닭과 사람이 타협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닭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자네, 이거 괜찮겠는가?” 닭장 주변을 고치고 닭 모이를 바꾸어 줄 때마다 노동의 효율성만 강조하는 것은 닭보고 사람한테 맞추라는 협박입니다. 닭이 닭답게 자라지 않으면 사람도 닭도 다 망하게 됩니다. 닭의 습성을 잘 관찰하고 닭에게 맞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닭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키워야 하는 사람, 먹어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닭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각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말하지 않는 닭과 말하지만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각시 모두 내게 항상 불통을 호소하며 경고합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살아준다.” 


40년 넘게 버스 운전을 해오신 아버지의 ‘생명 탑승론’은 차차 풀기로 하고, 매일매일 버스를 쓰다듬는다는 이야기는 아버지가 하신 어떤 말씀보다 감동입니다. 한밤중 불 꺼진 종점에서 시동을 끄고 막차에서 내리는 아버지가 운전대나 버스 앞 범퍼 어디쯤을 토닥이며 지긋한 눈빛으로 “수고했다”고 한마디 던지는 모습은 영화나 광고의 한 편으로도 꽤 괜찮은 장면입니다. 그리 많은 월급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운전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것이야 더욱이 있을 리가 없겠습니다. 버스는 가족을 지키는 희망으로, 함께 일하는 동지로서, 생명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로서 존중의 대상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장미란의 바벨 키스를 보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두 양반의 스킨십에서 느끼는 감동은 일상의 노동과 땀을 어림짐작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나도 한번쯤 연출해 보고 싶은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폼 잡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 


나 아닌 것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일은 직관이나 감성 또는 취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노동입니다. 나의 수고를 감수하며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좋은 결실을 위해 땡볕에서 김을 매며 흘려야 하는 땀과 같은 일상의 노동입니다. 그런 수고와 땀 없이 나 아닌 것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 이들에게 좋은 주장과 구호와 편과 줄을 갖추는 일은 반쪽의 무기입니다. 얼마나 다양한 주장이 공존할 수 있는지, 구호는 얼마나 마음을 움직이는지, 편과 줄은 얼마나 열려 있는지에 대해 민감한 것이 정확히 나머지 반쪽입니다.


어느 시점부턴가 농업은 귀하다는 자부심에 자족하고 멈춰 있지 않은지. 주장과 입장을 세우면서 오히려 농업의 가치와 농촌의 무궁한 가능성을 박제시키고 있지 않은지. 논과 밭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이 “정부는 뭐하는 거야” “도시놈들 도대체 농촌을 알아야지” 하는 원망과, “쌀값 더 떨어져봐야 농민들 정신차린다”는 자학의 벽을 넘어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지. 내가 나에게 던지는 맨 앞의 질문입니다.


무서운 꿈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닭 똥구멍에서 나오는 계란만 좋아하다가, 각시가 차려주는 밥상만 바라다가, 여전히 국민들은 농촌을 고향 어디쯤의 가치로 만족할 것이라고 착각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달려들어 이러는 겁니다. “야야! 너 없어도 된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몇 년은 그럭저럭 지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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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민복|시인


강화도에는 화가들이 300여명 산다. 서울이나 인천 같은 대도시로의 접근성이 용이하고 자연이나 역사적 배경 같은 작업환경이 좋아서 그런 것 같다. 섬 주민 200여명 중 한 명이 화가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화가들의 작업실을 방문할 때가 많다. 내가 아는 화가들의 작업실은 대부분 열악하다. 농부들이 가축을 기르던 건물이나 폐가를 손봐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작업실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춥다. 단열이 잘되지 않아 열손실이 많기 때문에, 전기나 기름 같은 값비싼 연료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한겨울 연탄가스가 스며나오는 작업실 문을 열 때면 나쁜 생각이 먼저 떠올라 겁이 나기도 한다.


“글 쓰는 사람들은 좋겠어요. 공간도 많이 필요 없고 들어가는 재료도 별로 없고, 뭐 종이 하고 연필이나 컴퓨터 한 대만 있으면 되잖아요.” 친하게 지내는 동년배 화가의 생활을 걱정하자 그가 농담을 던졌다. 아닌 게 아니라, 그림 그리는 것에 비해 글 쓰는 일이 수월하기도 하다. 화가들은 그림을 그리려면 물감을 비롯해 여러 재료와 도구를 사야 한다. 또 작업환경도 제한을 받는다. 외딴곳이나 방음장치가 된 작업장이 아니라면, 조각가는 아무리 창조적인 영감이 떠올라도 한밤중에 돌 쪼는 소리를 낼 수 없을 것이다. 물론 글 쓰는 데도 기본적인 비용은 필요하다. 책을 도서관에서 빌려 볼 수도 있지만 꼭 구입해야 하는 책들도 있고 취재를 해야 하는 경우 경비도 감안해야 하니까 말이다.


장마철 그림을 그리고 있는 후배 작업실에 들렀을 때 문득 한 생각이 떠올랐다. 지자체나 정부가 그림을 보관해주는 사업을 해준다면 어떨까. 그림 보관소를 만들고 최소한의 보관료만 받는다면 애써 그린 그림이 상할까 노심초사하는 걱정도 덜 수 있고 그림의 분실 위험도 덜 수 있지 않을까. 비좁은 작업실 구석구석에 쌓아놓은 그림을 맡길 수 있다면 작업장도 넓어질 것이다. 더러 명성이 있는 화가들의 그림이야 화랑에서 관리를 해주기도 하겠지만 당대에 유명세를 떨치는 화가보다는 그렇지 않은 화가가 더 많은 게 현실 아닌가.


화가들은 웬만하면 자기 그림을 곁에 두고 싶어 한다. 그래서 형편이 좀 나아지면 보관소에 맡겼던 그림을 찾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보관물이 순환되어 여러 사람에게 혜택을 줄 수 있지 않을까. 보관소가 그림은행 역할도 하고 전시관 기능까지 갖춘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올여름 중국 시안에 있는 산시성 비림(碑林)박물관을 구경할 기회가 있었다. ‘비석의 숲’ 비림은 900여년 전 북송 때 당나라 비석들을 옮겨오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비림에는 한나라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수집한 작품 2000여점이 있다고 하는데 이 중 1100여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당나라 문종 때 114개의 석판에 65만200여자로 새긴 주역, 시경, 예기, 논어, 효경 등 12개의 경전도 볼 수 있었고 왕희지, 안진경, 구양순의 글자가 판각된 비석들도 관람할 수 있었다. 당나라 시대에 기독교가 이미 중국에 전래되었다는 비문을 보고 놀라기도 했다. 박물관을 돌아보며, 미래를 위해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값어치 있는 것들을 잘 보호한 중국이 몹시 부러웠다.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昆陽面) 흥사리(興士里)에 있는 고려시대 말기의 매향비. (출처; 경향DB)


박물관을 나서며 우리나라에도 56억7000만년 후 강림할 미륵불을 맞을 준비를 하며 만들어 놓은 매향비(埋香碑)가 있다는 사실로 마음을 달래보았다. 나는 집에 돌아와 우리 조상들의 통큰 패러다임을 생각하며 허균이 쓴 <사찰 장식 그 빛나는 상징의 세계>를 다시 읽었다. ‘불자들은 도솔천으로부터 강림한 미륵불의 법회에 제일 먼저 참석하면 현세와 미래에 영원한 행복을 얻는다고 믿었다. 그래서 용화법회에 참석할 준비물로 향목(香木)을 해변에 묻어두었다가 때가 되면 미륵불에게 그 향을 공양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그 증거가 바로 매향비이며 지금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사천 매향비, 정주 매향비, 삼일포 매향비 등을 비롯한 다섯 개의 매향비가 있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도 미래를 위해 타임캡슐을 만든 적이 있다. 타임캡슐에 실용성을 접목시켜 보면 어떨까. 가령, 수백년 후 훼손된 미술작품을 복원할 때 도움이 될 수 있게 현재 사용하고 있는 붓이나 물감, 종이 같은 것을 보관해보면 어떨까. 마치 종자은행에서 종자를 보관하는 것처럼.


요즘 MB 독도 친필 표지석과 경북지사 기념비로 나라가 시끄럽다. 이 비석들은 법 문제를 차치하고라도 생각해볼 게 분명 더 있다. 비석의 글씨도 그렇다. 꼭 대통령 글씨로 써야 하는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서 한자를 따오던가, 한글로 하려면 안중근 의사나 김구 선생님의 글씨 또는 조국수호를 위해 몸 바친 선열의 글씨를 집자해서 새기면 안될까. 또 비석을 세우는 주체가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5000만 국민이나 우리 8000만 겨레의 마음다짐으로 하고 이를 대통령이 받들어 표지석을 세운다고 하면 어떨까. 어떤 것이 더 미래를 위하는 것이고 더 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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