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칼럼=====/배철현의 심연'에 해당되는 글 24건

  1. 2015.07.05 ‘자기 자신’이라고 불리는 괴물
  2. 2015.06.21 부정적 수용능력
  3. 2015.06.07 내면의 소리
  4. 2015.05.20 천재는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른 아침에 동네 한 바퀴를 뛰다 보면, 더 이상 숨이 차서 숨이 곧 멈출 것 같고, 심장이 너무 뛰어 터질 것 같은 한계에 부딪힌다. 달리기를 시작한 초보자는 그 순간에 쉽게 멈춰 선다.

숨을 몰아쉬면서 손을 허리춤에 대고 천천히 걷는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르면, 다시 뛰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다시 한계에 닿으면, 멈추는 행위를 반복한다.

달리기를 처음 시작한 나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그 무시무시한 ‘동물’이 하나 있다. 나에게 항상 패배를 안기는 ‘괴물(怪物)’이다.

영어 단어 ‘몬스터(monster)’는 괴물의 의미를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해준다. ‘몬스터’라는 단어의 의미는 ‘한쪽과 다른 쪽을 구분하는 경계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다.

몬스터는 나에게 익숙하고 게으른 과거로 돌아가라고 호통친다. 우리 대부분은 이 경계에서 작아진다. 그 증거가 우리의 ‘뱃살’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포클레스의 작품 <오이디푸스 왕>을 가장 위대한 비극으로 평가했다.

비극이란 우리에게 타락하는 주인공을 보여주면서, 우리 자신을 재현한 감동적인 이야기다. 오이디푸스는 테베의 왕 라이우스와 왕비 요가스타의 아들로 태어났다.






라이우스왕은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서 새로 태어난 아들의 운명에 관한 신탁을 문의한다. 그 신탁은 끔찍했다.

언제인가는 이 아들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선언한다. 라이우스는 갓난아이의 뒤꿈치를 한데 묶어 기어 다니지 못하게 만든다. 라이우스는 급기야 신하에게 이 아이를 산에 버려 죽게 만들라고 명령한다. 그 신하는 불쌍한 이 아이를 죽게 내버려둘 수가 없어, 근처 도시 고린도에서 온 목동에게 건넨다.

목동은 마침 자식이 없어 애타게 양자를 기다리던 고린도 왕 폴뤼부스와 왕비 메로페에게 아이를 바친다. 폴뤼부스는 이 아이의 발꿈치가 부어 있어, 그를 ‘발(푸스)이 부은(오이디) 아이’ 즉 ‘오이디푸스’라고 부른다.

세월이 지나 자신이 사생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존재를 알고 싶어 델피로 가서 출생의 비밀을 알려 달라고 신탁한다. 그 신탁 내용은 그가 자신의 부모를 죽일 운명이라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일 수밖에 없다는 운명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 고린도로 돌아가지 않고 델피 근처에 있는 테베로 여행하기 시작한다. 아뿔싸, 테베는 자신의 친부모가 있는 도시가 아닌가! 오이디푸스는 테베로 가던 중 세 갈래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도착한다. ‘세 갈래’ 길은 플라톤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중요한 일이 일어나는 무시무시하고 이해하기 힘든 ‘코라’이다.

그는 그곳에서 전차를 타고 가는 테베의 왕이자 자신의 친부인 라이우스와 운명적으로 마주친다. 누가 먼저 길을 가느냐는 사소한 말다툼 끝에 오이디푸스는 아버지 라이우스를 살해한다.

라이우스는 오이디푸스의 친부일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극복해야 할 과거의 관습, 관행, 습관, 편견과 같은 것을 상징한다.

인간이 스스로 온전해지기 위해선 아버지로 상징되는 과거에 대한 청산이 필수적이다. 여기서 과거란, 자신의 선택이 아닌 그에게 알게 모르게 부여된 정신적인, 사회적인, 역사적인 얼개들이다.

인간이 스스로 서기 위해서는 이 얼개들이 자신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재점검하고 재선택해야 한다.

오이디푸스는 그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한 사이, 운명적으로 부친을 살해한 후, 테베의 성문으로 향한다.

테베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막는 괴물이 웅크리고 있다. 이 괴물을 ‘스핑크스’라고 부른다.

그리스어 ‘스핑크스’는 새로운 단계로 무모하게 진입하려는 사람들의 ‘목을 조르는 존재’라는 뜻이다.

스핑크스는 괴물이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속해 있지 않은 하이브리드다. 머리는 인간, 등은 사자, 그리고 새의 날개를 가졌다. 스핑크스는 테베로 들어오려는 자에게 수수께끼를 낸다.

만일 그 문제를 풀지 못한다면 바로 목을 졸라 죽여 먹어치운다. 그러나 그가 문제를 푼다면, 성문을 통해 테베로 들어갈 것이다.

수수께끼는 이것이다. “한목소리를 가졌지만, 아침엔 네 발로 걷고, 오후엔 두 발로, 그리고 밤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대답한다. “사람입니다. 어릴 때 네 발로 기어 다니고, 어른이 돼선 두 발로 걷고, 늙은이가 되어선 지팡이까지 포함하여 세 발로 다닙니다.”

오이디푸스의 대답을 들은 스핑크스는 당황한다. 그는 경계를 지키는 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이행하지 못해, 자책감에 시달려 높은 절벽 위로 올라가 몸을 던져 자살한다.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그 길을 막고 있는 스핑크스는 사실 오이디푸스 자신이었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가 버려야 할 과거다.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 오이디푸스가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 바로 자신이라는 괴물과 대면하고 그 괴물을 죽이는 일이다.

인간이 어린아이처럼 주위 환경과 가족에게 의존하는 존재에서 스스로 두 발을 땅에 딛고 시선을 저 높은 곳에 고정하고 전진할 때 자기라는 괴물이 등장한다. 나를 과거의 나로 잡아당기는 괴물은 우리의 일상에 숨어 있다. 적어도 나에겐 매일 아침 조깅할 때 만나는 숨참과 거친 심장박동이다. 이 괴물을 극복해야 뱃살이 없어질 것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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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단 한 번의 여행을 떠나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다. 우선 자신이 가고 싶은 장소를 선정하고 그곳으로 가는 최적의 지름길을 찾아야 한다. 남들이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을 ‘영웅’이라 부른다.

그가 가는 곳은 GPS에도 없고, 지도에도 없고, 안내책자에도 없다. 찰스 다윈, 헨리 포드, 에이브러햄 링컨, 알렉산더, 마리 퀴리, 라이트 형제, 모차르트 등 우리가 아는 거의 모든 영웅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들어올린 한 발 한 발이 새로운 길이 되었다. 아브라함 종교의 창시자들인 아브라함, 모세, 예수, 무함마드도 날마다 새로운 길을 떠났던 사람들이다. 이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부정적 수용능력’이다. ‘부정적 수용능력’이란 자신을 엄습하는 불안감, 초조함, 질시, 외로움, 우울함, 애매모호함을 오히려 자신이 상상한 찬란한 미래의 굳건한 발판으로 만드는 능력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한 영웅이 있다. 전설에 의하면, 모세는 기원전 13세기경 외국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이란 의미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이집트 왕 파라오의 양자가 되었다. 자신과 같은 외국인 노동자가 이집트인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화가 치밀어 그 이집트인을 살해한다.

그는 그 이후 40년 동안 살인자이며 도망자로 산다. 그가 도망친 장소는 지구상에서 가장 화산 활동이 심한 시나이 반도다. 이곳은 거칠고 황량한 땅이지만 살인자 모세를 민족의 구원자 모세로 변화시킨 도장이었다. 양떼를 치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모세가 어느 날 더 이상 갈 수 없는 사막을 가로질러 그 이상으로 가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사람들이 갈 수 없는 사막의 끝에 도달해, 그 사막마저 건너간다. 그곳엔 신이 산다는 높은 산이 있었다. 이 산은 에베레스트와 같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산이 아니라, 모세만이 갈 수 있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자리잡은 심연의 산이다.

그곳에 들어서게 되면 발견하는 한 가지가 있다.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일상(日常)이 천상(天上)이란 사실이다. 모세는 40년 동안 지겹게 보던 가시덤불에서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열이나 연기가 나지 않는 신기한 장면을 목격한다. 이 이야기는 과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자신이 경험한 신기한 이야기다. 모세는 이 신기한 가시덤불에 다가가니, 그 안에서 한 소리가 울려 나오는 것을 듣는다. “모세야, 모세야!” 모세는 사막에 흔히 너부러져 있는 가시덤불 안에서도 신을 발견할 수 있는 영적인 인간이 된 것이다. 그 목소리는 말한다. “샌들을 벗어라! 네가 서 있는 그곳은 거룩한 땅이다!” 우리는 중동 지역에서 항의의 표시로 신발을 던지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미디어를 통해 종종 듣는다. 자신의 모든 것, 즉 신발을 내버릴 정도로 상대방을 혐오한다는 의미다. 그 신비한 내면의 소리가 모세에게 알려준 최고의 가르침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그 장소, 네가 40년 동안 지겹도록 다녔던 그 먼지 나고 더러운 그 장소가 바로 천국’이라는 깨달음이다.

이스라엘 모세의 떨기나무 (출처 : 경향DB)


유대인들은 ‘네가 서 있는 그곳’이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콤(maqom)’을 바로 ‘천국’으로 여겼다. 천국은 사후 장소가 아니라 우리가 지겹도록 삶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는 바로 ‘여기’다. 내면의 목소리는 자신의 일상이 자기혁신의 시작이라고 속삭인다. 이 내면의 소리를 듣는 자가 위대한 리더가 될 것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이 내면의 소리를 가시덤불과 같이 보잘것없다고 여겨 무시한다. 우리의 가슴속에서 불타고 있는 가시덤불은 귀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발견하는 자가 위대한 리더가 될 수 있다.

사막이나 가시덤불과 같이 어렵고 보잘것없는 장소가 창조를 위한 유일한 공간이라고 주장하는 철학자가 있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우주 창조 이야기를 기록한 <티마이우스>에 이 공간을 소개한다. 그는 이 공간을 ‘코라’라고 불렀다. 코라는 원래 도시와 사막 사이에 버려진 땅을 의미한다. 그러나 ‘코라’는 만물을 소생시키고 어머니처럼 아이에게 젖을 먹여 일으켜 세우는 장소다. 한마디로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장소이다. 인간 삶에 비추어 보자면 인생에 있어서 자신이 있어야 할 본연의 장소이다.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코라’를 거쳐야 한다.

모세의 가시덤불이나 플라톤의 코라는 우리가 부정하고 감추고 싶은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어렵고 당황스러운 모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남들이 만들어 놓은 기존의 틀 안에서 쉽게 그 해답을 찾으려 시도한다. 그러나 모세나 플라톤은 그 해답을 기존 질서 안에서 쉽게 이해하려 노력하거나 해결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이들의 능력을 ‘부정적 수용능력’이라 부른다. 이 능력은 그 어려운 상태를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의 일부로 가지고 가는 삶의 태도이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런 모순들을 편리성과 효율성을 위해 만든 이성적인 체계 안에 가두려고 시도하지 않았는가?

영국 낭만주의 시인 존 키츠(1795~1821)는 어린 시절 지나치게 내성적인 성격으로 남들과 어울릴 수 없었고 청년 시절 우울증에 시달렸지만 영국이 자랑하는 최고 시인이 되었다. 그의 다채로운 언어와 상상력이 오늘날 우리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의 위대함의 비결은 자신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자신의 찬란한 삶을 위한 지렛대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남들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사실이나 이성을 성마르게 추종하지 않고 불확실하고 신비하고 의심스러운 상태에 의연하게 거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우리가 경험한 불완전한 삶에 대한 질문을 끝없이 발굴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서 인내를 가지고 사는 것이다. 내 마음 안에 있는 ‘꺼지지 않는 가시덤불’은 나를 애타게 부르고 있다. 그 소리에 응답하는 자가 자신만의 별을 창공에 다는 사람이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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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테 쿠아이시베리스 엑스트라(Ne te quaesiveris extra).’ 이 라틴어 문구를 번역하면 “당신과 상관없는 그 어떤 것도 추구하지 마십시오!”이다. 19세기 미국 사상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1841년에 <자립>이라는 에세이를 썼다. <자립>은 미국의 정신적인 ‘독립선언문’이다. 미국은 유럽이 독점해왔던 과학, 예술, 철학 전통을 떠나 스스로 자립하려 시도하였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무엇인가?’ 혹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중요한 철학적이며 신학적인 질문을 탐구할 때, 과거라는 전통에 도움을 청한다. 과거의 인물들이 정교하게 장식된 분묘(墳墓) 속에 남긴 이야기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한다. 이 분묘에는 과거의 위대한 사상가들의 글과 그들의 사상을 숭배하는 학파들의 이론과 창시자를 신격화한 종파의 교리가 굳건히 자리 잡고 있다. 에머슨은 그것을 ‘엑스트라’라고 말한다. ‘엑스트라’는 파기해도 되는 ‘나하고 상관이 없는 것들’이다.

위대한 철학가들이나 종교 창시자들의 위대함은 당대 보통 사람들이 숭배하는 과거나 ‘엑스트라’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사람들의 게으른 생각인 관습과 편리한 생각인 편견을 넘어선 ‘새로운 길’을 거침없이 제시한다. 우리가 철학이나 종교, 혹은 과거 문화나 문명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반짝이는 천재성을 훔쳐보고, 우리 자신도 직접 신(神)과 대면하고 우리 자신들의 별을 만들기 위해서다. 남들이 전달해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적용할 때, 항상 편견과 왜곡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당신은 혼자의 힘으로 인생에서 추구할 그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습니까? 당신이 그 무엇을 발견했다면, 다른 사람들의 견해나 소문과 같은 엑스트라에 의지하지 말고, 당신 스스로 찾았습니까? 우리가 수많은 책을 읽고 세계 여행을 했다고 우리의 식견이 넓어집니까?”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리만의 우주를 찾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응시하면, 그 안에 나일강과 유프라테스강, 에베레스트산과 옐로스톤과 같은 심산유곡이 있다. 그 우주는 어떻게 생겼나? 그 우주는 우리 주위에서 우리의 관찰을 기다리는 자연, 특히 하늘의 별, 산, 강, 나무, 시냇가, 고양이, 아이의 얼굴,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우리는 남들이 다 가는 관광지가 아니라, 우리만의 산과 강을 찾아 인내를 가지고 관찰해야 하지 않을까. 위대한 사상들에 빛을 비추었던 태양과 달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여명을 비춘다. 우리 예배의 대상은 우리가 발견한 우주와 그 작동원리가 되어야 한다.

수메르인들은 이라크 남부에서 인류 최초의 문자를 기원전 3300년경 발견하였다.

이들은 그림글자를 이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였고 ‘도시’라는 공동체를 이루어 그 행정 문서를 기록하였다. 수메르인들은 우주의 작동원리, 자연의 순환을 관찰하며 감탄하고 쐐기문자로 표시하였다. 수메르인들은 그 원칙을 ‘별’을 그려 표시했고 ‘딩길(dingir)’로 발음했다. ‘딩길’이란 단어는 ‘우주의 작동원리’ ‘신성성’ ‘신’을 의미한다. 우리는 자신의 별을 아무도 없는 사막의 칠흑과 같은 밤하늘에서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이 별은 우리 곁에 항상 있지만, 인식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

자신이 추구해야 할 자신만의 별은 인내를 가지고 관찰할 때 조심스럽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은 우리가 상상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르며, 당혹스럽고 흉측한 괴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괴물은 알고 보면 바로 자신이다.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 있는 괴물과 같은 또 다른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통해 우리와 소통하고자 한다.

아인슈타인은 바로 이 내면의 소리를 들은 자다. 1930년대 등장한 양자역학은 원자의 행동을 설명하는 이론으로 자리를 잡아 ‘우리 시대 가장 성공적인 물리학 이론’으로 평가받았다. 이 이론은 트랜지스터, 레이저, 화학 등 여러 분야에 적용되어 현대인의 삶을 설명하고 편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을 완벽한 이론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개별 사건들을 묘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는 스피노자의 신을 믿습니다. 그 신은 존재하는 것들의 질서가 잡힌 조화 안에서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 신은 인간의 운명과 행위에 관심 있는 그런 신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아인슈타인이 말하는 신은 전통적인 종교들에서 말하는 인간의 의지가 투영된 그런 신이 아니다. 그는 우주 안에 숨겨져 있어 좀처럼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질서와 조화하는 신이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 (출처 : 경향DB)


아인슈타인의 새 이론인 상대성이론은 양자역학처럼 처음에는 기꺼이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GPS나 블랙홀 같은 현상은 그의 이론을 통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아인슈타인은 우주를 창조한 신이 아니라,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다면 그 신의 생각을 알고 싶어 했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현상을 설명할 뿐만 아니라 우주 현상의 존재이유를 설명하려 시도한다. 그는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내기 오래전에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통해 우주 질서를 설명하려는 섬광을 보았다.

이 내면의 소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천진난만하고, 서투르며 즉흥적이다. 이성적인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 소리는 우리가 이성이라는 신전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엎드려 숭배할 때, 우리의 본성을 자극하는 광기(狂氣)다. 우리는 쉽게 일상생활 속에서 이성을 기반으로 한 ‘신전’으로 가 해답을 찾으려 한다.

아인슈타인의 종교는 바로 이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다. 그는 이 마음을 ‘거룩한 선물’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얼마나 남들이 말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거룩한 선물’을 무시하고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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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는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사람이다. 19세기 말 미국 사상가 랄프 왈도 에머슨은 자기 자신의 생각을 믿고 자신에게 진실한 것이 인류 모두에게 진실하다고 믿는 자를 천재라고 정의한다. 내 자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그 생각을 가장 위대한 것으로 믿을 수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헤아리려 노력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무 쉽게 외부적인 평가와 기준에 우리를 맞추려 한다. 천재는 자기 자신 마음의 심연(深淵)에 숨어 있는 자신만의 욕망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행동으로 옮긴 자다.

자신만의 생각은 자신의 DNA처럼 각자에게 특별하다. 자신의 영적인 DNA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 이 특별한 DNA는 안 보이지만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중력과 같다. 모든 사람들의 영적인 DNA는 모두 한 곳을 지향하고 있다. ‘생각하다’라는 히브리 단어 ‘샤아르’는 원래 혼돈의 광야에서 질서의 도시로 들어가기 위한 ‘성문’이며 세속의 공간과 거룩한 공간을 표시하는 ‘신전의 대문’이다. ‘샤아르’는 경계이며 터부다. 내 자신이 정결하게 수련하고 준비하지 않으면 그 신전 문을 통과할 수 없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가 테베라는 도시에 진입하려 할 때, 그 경계에서 만난 괴물이 스핑크스다. 스핑크스는 오이디푸스에게 묻는다. “목소리는 하나이나, 처음에는 네 발로 걷고, 그 후엔 두 발도 걷고, 나중에는 세 발로 걷는 존재는 무엇이냐?” 오이디푸스는 ‘인간’이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어릴 때는 네 발로 기면서 땅만 보며 산다. 우물 안에 있는 개구리처럼 자신이 보는 세계가 전부라고 착각한다.

인간은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자신의 두 발로 걸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신전 문’이란 의미를 가진 ‘샤아르’는 “저 높은 신전 문 위에서 신전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신을 관조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유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생각하는 행위가 아니라 내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 삶의 여정에서 어디쯤 왔는지, 그 길을 왜 가야 하는지, 자신만의 여정을 위해 힘찬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딛기 위함이다. 우리는 불안하지만 거룩한 경계에서 자신이 성취해야 할 카르마를 찾는다.

영화 <인터스텔라>에 숨겨진 아름다운 주제가 있다. 주인공에겐 사랑하는 딸이 있다. 그러나 그는 지구를 대체할 새로운 행성을 찾기 위해 우주여행을 떠난다. 사랑하는 딸을 두고 기약이 없는 여행을 떠나야 하는 주인공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 차 있다. 주인공은 두렵고 불확실하며 생명을 담보로 한 미션이지만 그 여행을 감행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누구도 가본 적이 없고 대신 갈 수 없어 두렵지만 반드시 시도해야 하는 그 무엇이 바로 자신의 길이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 주인공이 사랑하는 딸과 함께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출처 : 경향DB)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가 감행하는 이 여행은 나에게 유일하다. 그러기에 거룩하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 사람들이 간 길을 흠모하고 추종하고 있는가? 내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나만의 신념, 이것이 나의 보물이자 나의 천재성이다. 만일 내가 이 보물을 발견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의 박수를 보낼 것이다. 그들이 감동하는 이유는 그들 자신 안에 숨겨진 그들만의 보물을 찾아나설 수 있는 용기를 주기 때문이다. 가장 심오한 나의 생각이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우주적이며 영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에 숨겨져 있는 이 보물과 같은 생각을 고고학자처럼 발굴한 사람들이 붓다이며, 예수이고, 공자다.

우리는 심연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이 천재적인 섬광을 감지하고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만의 생각들을 정리한 자들이 셰익스피어, 모차르트, 그리고 아인슈타인이다. 이 천재들이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밤하늘의 별들을 찬양하고 그 내용을 암기했겠는가? 이들은 모두 자신의 심연에 숨겨진 이야기를 용기 있게 표현한 예술가들이다. 우리의 마음을 가만히 응시해 보자. 우리는 그런 숭고한 생각의 섬광을 발견하지만, 무시해버린다. 결국 우리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어 우리는 모두 타인들만이 가졌다고 여겨지는 행복이란 신기루를 바라볼 뿐이다. 천재들은 바로 자신의 심연에서 발견된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행동으로 옮긴 자들이다. 그 모습이 남들과 비교하면 보잘것없고 숨기고 싶은 것이라 할지라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그것이 오히려 내 자신의 별을 발견하게 되는 발판이 된다.

기원전 27세기 인류 최초의 도시가 있었다. 수메르 우룩이란 도시다. 오늘날 이라크의 남부에 위치한 알-와르카다. 이곳에는 이 도시를 건설한 전설적인 왕 이야기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다. ‘길가메쉬 서사시’다. 12개 토판문서로 이루어진 이 서사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심연을 본 사람, 길가메쉬.” 여기서 심연(深淵)이란 길가메쉬가 불로초가 있다고 여긴 페르시아만의 가장 깊은 곳이다. 영어로는 ‘abyss(아비스)’라고 부르는데, ‘바닥이 없는 장소’란 의미다. 길가메쉬는 이곳으로 내려가 불로초를 따온다. 심연(深淵)은 또한 길가메쉬의 가장 심오한 마음의 연못인 심연(心淵)이기도 하다. 길가메쉬는 자기 마음의 가장 깊은 곳으로 내려가 자기 자신을 발견한 자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 ‘길가메쉬 서사시’는 우리에게 자신의 심연으로 여행할 것을 권한다.

‘심연’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모두 특별하고 유일하게 주어진 자신의 심연 안에 숨겨진 보물을 발견하면 좋겠다. 그 도구가 바로 깊은 생각인 묵상(默想)이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별이 저 하늘의 별보다 더 위대하고 쓸모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면 깨닫는 사실이 하나 있다. 남을 부러워하는 것은 무식이며 더욱이 흉내 내는 것은 자살행위다. 19세기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의 시 ‘자기 자신을 위한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나는 내 자신을 축하하고 내 자신을 노래합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당신도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내가 축하해야 할 대상은 나하고 상관없는 신이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내 자신이다.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자신만의 미션을 찾는 자가 가장 행복한 자다.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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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