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궐선거 열기가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석연 변호사의 갑작스러운 사퇴는 아마 1주일만 지나면 뉴스거리도 되지 않고, 그는 잊혀진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와중에 그가 박원순 후보에게 토론을 요청하고, 나경원이 아니라 시민후보로서 박원순과 단일화하겠다는 제안은 그냥 해프닝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이렇게 간단하게 볼 일은 아니다. 보수 쪽에서 이석연은 그냥 행정수도 이전의 위헌 소송을 제기한 율사 정도로만 알려졌겠지만, 그는 1999년부터 2001년까지 경제정의실천연합, 흔히 경실련이라고 부르는 곳의 사무총장이었다. 박원순이 한참 참여연대 사무총장을 할 때는, 그만큼 유서깊고 중요한 단체의 실무 책임자였다. 일단 나는, 마음이 애틋해졌다.

그가 박원순에게, 나는 나경원이 아니라 당신과 단일화할 수 있어, 이렇게 말했다. 여기에서 동지적 애틋함이 느껴졌던 것은 나만의 감정이었을까? 뉴라이트와 진보단체가 단일화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참여연대와 경실련이 토론을 하고, ‘연대’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10년이라는 공간을 넘어, 예전에 우리는 동지였잖아, 그 얘기를 이석연이 한 것이다.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토론 한 번은 해봄직했다. 정치가 무서운 대결구도이지만, 이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애틋함마저도 없는 건 아니다.

이석연 (경향신문DB)


연전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유행할 때, 정의가 보수의 용어인가, 진보의 용어인가, 그런 논쟁이 있었다. 조선일보 측에서는 원래 정의는 보수 쪽 용어인데, 왜 진보에서 이 책을 놓고 이 난리를 치느냐, 그렇게 투덜거렸다. 그때 나는 한국 보수가 딱 요만큼이라도 하면 좋겠다는 의미로 이 책을 보는 거다,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경제정의를 추구하는 단체, 경실련은 딱 그렇게 보면 된다.

여기서부터 더 오른쪽으로 가면, 이제 아스팔트 우파와 부모연합 같은 무서운 데가 나오지만, 여기서 약간만 왼쪽으로 가면 이제 보수들이 “그러면 북한으로 가라”고 면박 주는 그런 단체들이 나온다. 좋든 싫든, 정의는 좌파와 우파가 다 사용하는 개념이 되었고, 경실련은 그렇게 보수와 진보의 논의가 만나고, 실제로 인사들도 이곳을 중립지처럼 활용한다. 시민운동을 참여연대나 환경운동연합, 이런 큰 단체 몇 군데서 다 만든 게 아니라 지역의 작은 단체들의 기여도 많았듯이, 경실련의 기여도 무시할 수 없다.

지난 10년을 돌아보더라도 아파트 등 부동산 문제, 조세 문제 그리고 농업 문제 등에 대해서 경실련이 기여한 바가 많다. 지난 대선에 이명박 캠프의 농업특보를 했던 윤석원 교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서 농업 분야를 맨앞에서 이끌었다. 민주당, 심지어 민주노동당과 일하는 전문가들도 경실련 내에서는 한나라당 이데올로그들과도 편안하게 같은 테이블 앞에 앉아서 운영은 물론 정책에 대한 상의도 할 수 있다. 물론 중요한 선거나 TV 논쟁 같은 때에는 또 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가지만, 그렇다고 이게 경제정의에 대해서 평상시에 만나고 협력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하지는 않는다.

참여연대와 경실련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많은 연대투쟁에 올리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고 단독출격하는가, 그런 거지 선명성이나 이데올로기의 차이는 아니다. 민생경제라는 표현을 쓰면, 참여연대가 더 잘한다고만 말하기는 어렵다. 나도 농지투기 문제나 뉴타운 문제, 아파트값 폭등 문제 등과 관련해 경실련과 많은 협력을 했고, 실제로 그들의 자료를 통해 배운 것도 많다. 우리나라 전체를 통틀어 봐도, 이 정도로 좌우가 격의 없이 토론하고 협력하는 것은 경실련과 대학 동창회 정도 아닌가?

이석연이 이번에 남긴 가장 큰 성과는, 보수 시민단체가 갈 수 있는 세 가지 길을 보여준 것이라는 게 내 평가다. 첫째는, 지난 대선 때 했던 것 같은 한나라당 2중대의 길. 둘째는, 조금은 더 급진적 보수들이 생각하는 자체 세력화, 아마도 사퇴하지 말고 끝까지 가자고 했던 사람들이 이 그룹일 것이다. 셋째는, 일종의 좌우 사이의 중립 지역 혹은 완충 지역으로서의 시민사회의 역할, 즉 경실련 모델의 확대.
나경원과의 단일화를 끝까지 언급하지 않고 이석연이 사퇴한 것은, 그가 첫 번째 길은 아니라고 보고, 나머지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뉴라이트가 가야 한다는 얘기를 한 것이라고 본다. 물론 경실련과 반북 시민단체 사이에는 넘기 어려운 현실적 간극이 있다.

진보 시민단체만 놓고 보면, 아마 한쪽 끝에 경실련이 있을 것이고, 또 다른 끝에는 문화연대가 있을 것이다. 한나라당과 진보정당, 즉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양 극단에는 이런 단체들이 서 있다. 이석연에게 “힘도 없는 게 왜 나왔어”, 그렇게만 보고 말 것은 아니다. 그는 출마하면서 던져준 메시지는 약했지만, 사퇴하면서 한국의 보수가 선택할 몇 가지 선택지에 대한 밑그림을 던져놓은 셈이다. 한나라당이 경실련 정도의 정책적 논의가 가능하다면, 진짜 환골탈태가 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그게 진짜 일본 자민당 모델이기도 하다. 미국 공화당과 일본 자민당의 차이는, 딱 뉴라이트와 경실련만큼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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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는 특히 많은 일이 있었다. 박원순의 서울시장 출마가 어느 정도 기정 사실이 되었고, 민주당에서도 경선이 본격 시작되었다. 대중적인 주목을 못 받았을지 몰라도 ‘노심’이라고 한동안 불리던 노회찬과 심상정이 진보신당을 탈당하였다. 1992년 이후 진보정치추진위원회 시절부터 노동자의 정치세력화를 추진했던 그 본 그룹에는 최대의 위기가 온 것이다. 그리고 흔히 뉴라이트라고 불리는 보수적 시민단체의 추대라는 형식으로 이석연 변호사가 출마를 하였다. 이런 급변하는 상황을 놓고 호사가들 사이에서 아주 말이 많았다.

박원순이 출마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박원순이 누구야, 그렇게 말을 했다고 한다. 시민단체 내부에서의 박원순에 대한 인지도와 일반인들의 인지도에는 차이가 많다.
반면 이석연 출마 선언 때에 사람들은 “이건 뭐지?”라는 반응이 생겼다. 한때 정권의 명운마저 가를 정도로 큰 사건이었던 수도 이전 위헌 판결에 대해서 실제 서울 시민들은 별 관심 없었다. 게다가 그 소송의 주체가 이석연이었다는 것까지 소소히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은, 한나라당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는 뉴라이트를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 반응이 나왔을 것이다.

이석연 전 법제처장 /경향신문DB


일반적으로 시민단체에는 ‘민주당 2중대’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객관적으로 공정하게 한다고는 하지만, 밖에서 보면 민주당과 시민단체가 잘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실체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민주당 후보인 박영선 의원이 “무상급식 운동에서 박원순 후보가 한 게 뭐가 있느냐?”고 질문을 했는데, 그건 좀 생각해볼 거리가 된다. 급식운동이 생협운동과 농업운동 한 구석에서 제기가 되었고, 그 흐름을 받아서 주로 학부모들 중심으로 학교급식네트워크라는 게 꾸려진 게 지난 정권 때의 일이다.

그리고 무상급식으로 급진전하면서 현실로 튀어나온 것은 김상곤 경기교육감이 한 일이다. 그는 민주당 후보가 아니고, 진보 후보로 출마하였었다. 민주당이 학교급식을 받은 것은 급식 운동이 수 년 동안 전개된 이후의 일이다. 민주당의 많은 정책이나 공약들은 시민단체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고 운동으로 바꾸면, 그 후에 그걸 받는 경우가 많다. ‘반값 등록금’으로 상징되는 대학 등록금 문제와 국공립대학 네트워크를 세상에 꺼내놓은 것은 2004년 민주노동당이었다.

지금 민주당의 정책들은 어떤 건 시민단체, 어떤 건 민중단체로부터 온 것들이 많다. 요즘에야 시침 뚝 떼고 있지만, 뉴타운을 입법화시키는 데 앞장선 사람들은 열린우리당 시절의 일명 ‘탄돌이’들 아니었는가? 민주당과 시민단체는 때로 비슷해 보이기도 하지만, 별도의 이념적 실체가 있다. 때로 협력하기도 하지만, 시민운동과 민중운동이 “그놈이 그놈이다”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석연 후보의 출마와 함께, 이제 우리는 한나라당과 뉴라이트가 어떤 관계인가, 이 질문 앞에 서게 되었다. ‘작전상 해체’라고 본다면,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주민투표를 추진한 시민단체와 오세훈의 관계처럼 보는 눈일 것이다. 별개인 것 같지만, 사실은 같다고 볼 수도 있다. 두 개의 기준이 있을 수 있는데, 이념적으로 별개인가 그리고 좀 치사한 눈이지만, 자금적으로 별개인가, 그렇게 볼 수 있다.
돈 얘기부터 해보자. 시민단체 중에는 정부 보조나 정책연구 사업 같은 게 수입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곳도 있지만, 특히 참여연대는 정부 돈은 예전부터 거의 받지 않았다. 그렇다면 뉴라이트들은?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정부 아니면 대형교회에서 나오는 돈이 기본으로 알고 있는데, 정부나 교회나 이번 정권에서는 집권세력이었던 것 아닌가? 보수 단체들은 후원금 등 자금 내역을 진보 쪽 시민단체만큼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재정적으로 독자 세력인가는 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한나라당과 뉴라이트가 이념적으로 독립적인 세력인가, 그런 기준일 텐데, 이건 애매하다. 보수 내에도 ‘아스팔트 우파’라고, 정몽준이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삼으려고 하는 할아버지나 어버이 모임이 있고, 여기와는 좀 구분이 되려는 ‘건전한 보수’가 있는 걸로 알고 있다. 한겨레 칼럼에서 김규항은 안철수야말로 ‘합리적 보수’라고 지적한 적이 있다. 일리 있는 말이다. 지금의 뉴라이트가 한나라당과 구분되는 별도의 이념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냥 작전상 분화한 세력인가, 나는 별 차이 없다고 보고 있었다.

이석연의 출마는, 애매한 영역에 있던 이 질문을 꺼낸 것 아닌가? 그러니, 이건 뭐지, 이렇게 질문하게 되는 것이고. 한나라당과 보수 시민단체가 단일화할 것이냐, 아니냐, 현실에서는 그게 중요하지만, 이념에서는 과연 두 집단이 별개의 실체가 있는 두 집단인가 아닌가, 그게 더 중요할 수 있다. 반MB 보수, 그런 게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닌가, 그게 한 가지 기준선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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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지방선거 몇 년 전에 시민단체 내에서 서울시민포럼이라는 단체를 결성해서 서울의 지자체 선거를 준비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염두에 두었던 것은 박원순 대표였는데, 그가 출마하는 데까지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그해 서울시장 선거는 결국 강금실과 오세훈의 양파전으로 갔고, 여성단체는 강금실을, 그리고 환경단체는 음으로 양으로 오세훈을 도왔다. 환경단체는 1992년 리우에서 벌어진 환경 정상회담에서 생겨난 ‘의제21’을 중심으로 지자체와의 협력 구조가 생겨났는데, 고건 서울시장 때 이후로 서울시와는 일정한 협력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오세훈 서울시장의 초대 인수위원장을 최열 대표가 맡기도 하였다.

환경운동연합이 지자체와 여러 가지 양상으로 협조도 하고 갈등도 빚게 되는 반면, 참여연대는 ‘어드보카시’라고 부르는 일종의 대변인 운동으로서, 중앙정부 및 국회와 더 많은 일을 했다.

경향신문DB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참여연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한국 시민단체의 상징 중의 상징이기도 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것은 IMF 직후에 참여사회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참여할 때의 일이다. 우리는 그를 ‘박변’이라고 불렀고, 우리가 하고 싶던 얘기를 그를 통해서 중앙정치에 전달하고는 했다. 그는 지도자라기보다는 ‘우리의 입’ 같은 존재에 더 비슷했다.

활동가들은 최열 대표나 박변이 하는 얘기를 그냥 듣고 따르는 그런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들의 힘을 활용한 그런 관계에 가깝다. 그건 행정의 장관과 국장 혹은 사무관 관계 아니면 재벌의 CEO와 실무자 간의 관계와는 확실히 다르다.

박원순의 시간을 크게 3가지로 나누면, 참여연대 사무총장 시절, 아름다운가게를 넓혀 나가는 아름다운재단 시절 그리고 가장 최근의 희망제작소 시절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단체 활동가에서 재단 이사장 그리고 연구소 소장의 3단계를 밟아왔다고 할 수 있는데, 이 각각의 기관은 박원순이라는 상징성만 교류하지, 운영이나 결정에 서로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삼성이나 현대 같은 곳들이 오너의 지분을 통해 지배한다면, 위의 세 단체는 박원순이라는 상징성을 통해서 오히려 박원순을 지배하는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형식적으로만 보면 성공의 연속이지만, 이 과정이 꼭 그렇게 부드러웠던 것만은 아니다. 참여연대 시절에는 각종 연대 사업에서 성공의 열매를 전부 가져갔다는 투덜거림이 있었고, 아름다운가게는 이미 활동하던 지역의 단체들에 백화점식으로 군림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희망제작소는 워낙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렵다보니, 연구원과의 내부 갈등이 적지 않게 있었다. 그래도 “이건 박변이 하는 일이니”, 그렇게 서로 조정하고 문제점들을 풀면서 지금까지 왔다.

초창기의 참여연대가 하던 일들도 경제민주화 등 몇 개의 단체들이 분화하면서 지금은 많이 분산화된 상태이다. 한때는 참여연대 활동가를 뽑을 때 논술시험까지 보게 되는 등 청춘들의 선망의 직장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많이 약해진 상태이다.

그렇지만 참여연대가 한 가지 잘한 건, 다른 시민단체에 비해서 정부의 지원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고, 그걸 지켜나갔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이후, 많은 시민단체들이 돈줄이 말랐다고 할 정도로 혹독한 시기를 버텼지만, 상대적으로 참여연대는 덜 고통을 받았다. 받던 게 없으니, 끊길 것도 없는 상황이다.

국가를 잘 운영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대통령 후보를 배출하고 대선 과정을 실무적으로 꾸려갈 수 있는 정당이 아닌 종합 조직이 한국에는 몇 개가 있다. 몇 개의 재벌이 그렇고, 교수와 졸업생들로 구성된 대학 조직이 그렇다. 서울대 법대나 경기고 같은 데가 이런 비정당 조직이다.

노조는 규모는 크지만 노동문제 그것도 정규직 노동문제에 집중하다 보니, 그런 종합능력은 없고, 농민들의 조직인 전농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정치운동의 창구로 진보정당 운동을 만들었지만, 생각보다 내부 역량 축적의 속도가 늦다.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 그리고 여성운동의 경우는 깊이는 깊지 않을지라도 21세기에 그런 종합적 능력을 새로 갖춘 조직들이다.

박원순의 서울시장 출마는, 시민운동의 정치참여라는 새로운 시도이며 시민운동의 출마 자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박변’이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던 위상이다. 안철수 원장은, 그를 지지하는 튼튼한 계층이나 세력은 있지만 그 힘을 물리화시킬 수 있는 집단이 아직 없다. 박원순은 대중적 인기는 약하지만 국정 아니면 시정 같은 것을 수행할 집단의 뒷받침이 있다.

두 사람의 시장후보 단일화는 IT 세대와 시민운동 세력 사이의 단일화 같은 것이다. 그리고 박원순은, 극좌파는 절대 아니다. 나와 비교하면, 한참 오른 쪽에 있는 사람이고, 훨씬 ‘마일드’한 사람이다. 유럽 기준으로, 중도우 정도 된다.

경향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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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단체가 한국에서 그 힘이 절정기에 올랐던 것은 아무래도 2000년 낙선운동 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시민단체가 하는 얘기를 들어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런 현실적 실력 행사가 배경이 된다. 남 잘 되는 건 못해줘도 고춧가루는 뿌릴 수 있다, 그런 게 낙선운동이 가진 메커니즘이다. 좀 치사해보이기는 해도 시민적 가치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건 물론 현실화하기에도 가장 강력하다.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시민단체가 사실상 집권 세력이니까 힘이 세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권력이라는 게 불가근 불가원의 속성이 있어서 너무 가까우면 단체의 운동은 좋아지지는 않는 경우가 생긴다. 실제로 환경단체 등 시민운동의 위기에 대해서 지적이 있고 공개적인 토론회가 열리기 시작한 게 2005~2006년이다. 결국 정권을 만들어 냈던 2000년의 힘이 점차 빠지기 시작하고, 결국 2007년 대선에서 정권을 내어준 것, 그렇게 볼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서 대부분의 기존 단체들이 더 어려워졌다. 정부 보조금 같은 건 아예 받지 않는다는 원칙을 정했던 참여연대가 어느 정도 버티고, 기존 단체들은 정말로 어려워졌다. 환경운동연합은 근근이 틀거리만 유지하는 정도이고, 문화연대 같이 정말 메이저 중의 메이저 단체라고 할 수 있던 곳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현상 유지도 어렵다. 이렇게 보면 시민단체 전체가 위기로 보이는데 꼭 그렇다고는 말하기가 어려운 게 이 와중에 잘나가는 단체들도 있기 때문이다.

청년유니온 조합원들이 노조 창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최근에 생긴 단체 중에서 미래의 가능성만으로 보면 청년 유니온이 가장 중요한 단체라고 생각한다. 비정규직 시대에 노조와 시민운동 그 사이에서 매우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기는 하다. 그런데 20대들이 워낙 가난해서 아직 그 명성만한 폭발력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20대의 힘으로 운동을 한다, 뜻은 세울 수 있지만 세력을 세우기는 어렵다, 시작부터 지켜본 내 잠정 결론은 그렇다. 뜻과 현실적 힘이 다 같이 결합된 단체 세 개를 꼽자면, 청년 유니온을 꼽기는 어렵다.

카라,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 국민의 명령, 이 세 가지가 최근에 시작됐고, 뜻과 현실적 힘이 다 같이 결합되면서 지금 한국을 흔드는 단체가 됐다
.
카라와 사교육의 경우는 여성들이 본진을 형성하는 곳이다. 동물보호와 관련된 카라는 미혼여성과 기혼여성, 다 참여한다. 이걸 보고 중산층 여성들의 할 일 없는 문화 취향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볼 일은 아니다. 모임의 주축은 채식주의자들로부터 시작된 것이고, 지난 겨울 구제역 파동 때 그야말로 전선 맨 앞에 서 있던 강성파 운동이다.
교육 걱정 없는 세상은 진짜로 어머니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단기간에 이 단체가 이 정도로 커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좀 있는데, 다음 대선을 뒤흔들 진짜 힘은 이 두 단체에서 나올 것이다.

한나라당이 복지까지는 따라 온다고 해도 이 두 단체가 가지고 있는 전위적 성격까지 따라오기는 어렵다. 급식 다음 의제는 사교육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히 나오는 것은 일부 호사가가 실험적으로 해보는 주장이 아니다. 실제 시민적 참여의 실체가 이번 정권을 거치면서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외를 넘어서 조기유학까지 가는 걸 이상향으로 생각하는 대치동식 한나라당 고품격 당원들이 사교육과 동물 복지를 이해하기는 좀 어려울 것이다.

국민의 명령 문성근 대표/경향신문DB


배우 문성근의 국민의 명령, 이걸 시민운동으로 보아도 좋은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과 격론이 있었다. 회원도 많고 영향력도 강하다는 기준에서는 잘 나간다는 건 맞는데, 이게 시민운동이냐, 그 성격 규정이 좀 어렵다. 시민운동이 아니라고 반대하는 사람은 그냥 민주당 외곽조직 혹은 친노 공개조직에 불과하다는 이유가 하나, 또 하나는 다음 대선 끝나면 없어질 거니, 시민운동으로 볼 수 없다는 게 또 다른 이유이다.
두 가지 모두 맞는 말이기는 한데, 크게 보면 낙선운동에서 맥을 이어가는 시민운동 정치세력화의 한 유형이라는 게 내 최종 결론이다. 낙선운동 관련 단체가 연대체도 이미 해소되고 없지만 그걸 시민운동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정치운동도 운동의 하나라고 본다면 국민의 명령이 시민운동이 아니라고 할 근거는 별로 없다.

그러나 기왕 사람이 모였는데 선거 한 번 치르고 해소하는 게 옳을까, 그런 진로에 관한 문제는 좀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어떤 정권이든지 감시와 견제는 필요할 것인데, 어떻게 하면 홍위병으로 변질하지 않고 건강한 감시세력으로 남아 시민운동의 역할을 계속할 것인가? 노사모는 왜 시민운동으로 성공적으로 전환되지 못했는가, 이런 고민들이 이들에게도 유효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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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권 능력이라는 말이 한국에서 가장 유행했던 것은 1987년 대선이었다. 외형적으로는 양 김의 분열로 결국 노태우에게 정권이 갔다고 분석하기도 하지만, 진짜 보수의 기획통들은 좀 다르게 설명한다.

“당신들이 진 것은, 수권 능력이라는 단어에 잘 대처하지 못했기 때문이야….”

어쩌면 이 말이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최초의 실용 언어일지도 모른다. 과연 그 시절의 YS와 DJ에게는 수권 능력이 있었을까? YS는 한나라당으로 들어가면서 이 문제를 해결했고, DJ는? 노무현 시대까지, 조·중·동 프레임에 따라다녔던 ‘아마추어리즘’ 같은 것의 대중적 인식의 기원이 바로 이 말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한나라당 지지자들이 말하는 ‘명품정당’의 이미지에도 이런 수권 능력의 이미지가 강하다.  

지금은 당시의 민주화 세력에 붙던 이 질문이 진보신당에 붙어 있다. 당신들은 수권 능력이 있는가? 내가 가끔 보수적 인사들하고 노회찬이나 심상정에 대한 얘기를 하면, “좀 현실적인 얘기를 하자”는 반응이 바로 나온다. 오래된 프레임이지만, 한 번 프레임이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벗어나기가 어렵다.

노무현 정권을 지나면서 생겨난 가장 큰 성과는 국정의 방향은 몰라도 수권 능력에 대해서만큼은 이제는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한나라당이 집권해서, 더 잘한다는 것을 보여준 게 별로 없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시민단체에 해보자. 시민단체가 정부 부처를 운영한다고 하면 적어도 한나라당보다 잘할 수 있는 곳이 어느 정도 될까? 시민단체의 역사가 이제 10년을 넘어가고보니, 국정원장이나 경찰청장 같은 공안부서 아니라면 당장 장관을 해도 좋을 인사들을 만들어냈고, 장관실 정도는 언제든지 구성할 수 있는 실무진과 연구진도 갖추고 있다.

시민 진영이 증명한 것은, 정책 대안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론적 엄밀성을 갖춘 분석능력은 한국의 시민단체가 아직은 좀 떨어지지만, 정책 제시 능력은 한국의 어느 집단보다도 강력하다. 정부가 운용하는 국책연구소와 비교해 보면, 여전히 분야별 분석 깊이는 좀 낮지만, 종합 능력은 더 뛰어난 경우가 많다.

다음 대선은 진보와 보수의 49 대 51 싸움이 재현될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당으로 보면, 한나라당이나 민주당이나, 정치공학에 푹 빠져 있고, 길게 보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정당의 정책 연구능력으로 보면, 여의도연구소나 민주정책연구소나, 차마 자기네 보고서를 자신있게 공개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이다.

보수 쪽에는 기업연구소들이 은근한 힘이 되어주지만, 그간 시민단체나 민중단체에서도 싱크탱크 등 연구능력이 많이 확충되어서 지난 대선 때처럼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국정 수행능력에서, 진보 쪽 시민단체와 뉴라이트 쪽 시민단체에서는 차이가 나는 것 같다.

집권 후 보수단체들은 교과서 고치고 북쪽에 풍선 날리는, 지나칠 정도로 이념적인 일에만 골몰했지, 자신들이 그렇게 예전에 목 놓아 외치던 ‘정책 대안 제시’나 분석능력을 보여준 게 거의 없다. 이제는 오히려 저들이 수권 능력에 대해서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 역전되는 순간이 온 것 아닌가? 최소한 정책능력이나 국정능력으로만 보면, 진보 쪽 시민단체가 밀릴 게 없을뿐더러, 훨씬 높은 수준에 와 있는 것 아닌가?

반MB 진영에 단일세력으로 집권할 최대 분파도 없고, 독자적으로 국정운영할 수 있는 그룹도 없다. 지금 이 집단이 가진 가장 취약점은, 집권 때까지만 힘을 모으고, 그 후에도 힘을 모을 수 있다는 보장도, 그걸 주도할 원로도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힘이 잘 모이지 않는 것이다. 그걸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결국 집단지도체제를 전제로 한 연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다음 정권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게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부터 보여주어야 한다. 시민단체가 특히 잘할 수 있는 환경부 같은 부처가 몇 개가 있고, 새로운 정권에서는 시민단체가 더 적극적으로 국정운영에 참여해서 정권 자체를 성공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냥 특정 정치인에 줄 선 대로 장관이나 정부기관 나누어주고, 보은하는 방식으로 다음 정권을 운영하면 백전백패이다. 관료에게 먹힌 경험, 조·중·동의 여론 공세에 밀린 역사, 이런 걸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은 시민진영의 축적된 수권 능력을 더 활용하는 것이 우리가 가진 추가 옵션이 아닌가? 민주당 힘만으로는 집권도 어렵지만, 통치도 어렵다.
어용단체일 것이냐, 책임을 지는 집권세력일 것이냐 그 애매한 구분선에 대한 논의를 이제는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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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정부 때의 일로 기억난다. 녹색당 만든다고 한참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방법은 잘 모르지만 어쨌든 녹색당의 주축 중의 하나가 농민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농업경제학의 원로들이 차라리 농민당을 먼저 만드는 게 더 빠르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주었었다.
스위스의 남쪽 이탈리아권은 농업지역이라서 경제적으로 낙후한 편인데, 여기에서 티시네티 지역을 중심으로 농민당이 실제로 생긴 적이 있었다. 나중에 엔지니어 등이 주축이 된 도시 전문가들과 합쳐지면서 극우파 정당이 되었다. 레닌에서 모택동 시절에는 농민들이 진보 세력일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지만, 정치적으로 반드시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그래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극우파 정당이라도 농민당이 있거나 정파로서 존재하는 편이 농업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앞선 농정을 하는 곳 중의 하나인 스위스가 농업 재정을 국민투표까지 끌고 간 데에는 이런 정치적 배경이 있다. 표로 움직이지 않으면 정치인들이 어디 신경이나 쓰겠는가?

영남의 한나라당 텃밭, 호남의 민주당 텃밭 이게 어디 어제오늘 일이겠나 싶지만 그렇다고 이 지역 정치인들이 농업을 대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냥 시늉만 낸다. 그러나 가만히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난 수 년 사이에 농업이 한국 정치의 한가운데에 이미 들어와 있다. 출범 초기의 광우병 사태의 핵심에 농업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경향신문DB


학교급식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여기에는 식품안전을 둘러싼 시민운동의 흐름과 유기농업 등 농업운동의 흐름이 결합되면서 진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학교 급식, 작업장 급식, 군대 급식 그렇게 세 개의 목표를 잠정적으로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에 학교 급식 쪽의 속도가 빨라졌지만 원래는 농업운동 역시 중요한 한 축이었다.
오세훈 서울시장과 한나라당의 명운을 걸고 주민투표 한판이 벌어졌는데, 농업이 그 핵심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잠시 망각된 것 같다. 친환경+무상급식, 그 용어 자체가 사회운동의 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노무현 정권 때의 농업정책은 6㏊(헥타르) 정책으로 불리는 대농으로의 전환 그리고 농촌 개발로 상징되는 지역개발 정책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별로 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MB 정부와 함께, 그나마 그게 어디냐,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게 어디 농업뿐이겠냐? 주요 국회의원과 공기업 간부들이 가짜로 농민 등록하고 쌀 직불금 타먹은 게 정권 초기에 터진 스캔들인데, 이제는 그 직불금마저 없애려고 난리이다.

한·미 FTA 등 개방 정책으로 피해받는 부문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대책을 수립하겠다는 한나라당 농촌지역 국회의원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울리는 것 같은데, 잠시 그런 것들을 사람들이 잊은 사이, 농민들에게 가는 예산부터 줄이겠다는 게 최근 집권 여당, 한나라당님들과 경제 고위공무원님들이 하시는 일이다. 4대강 추진하느라고 한편으로는 직불금마저 예산에서 빼겠다니,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민주당이나 한나라당이나 농업 정책은 여전히 별 거 없다. 경제관료는 8% 정도 되는 농민의 수를 3~4%로 줄이는 게 선진국이 되는 농업정책이라고 믿는 것 같다. 물론 그 정도 비율이 선진국에서 나오는 건 맞는데, 지금처럼 하면 장기적으로는 2%도 지키기가 어렵다. 새로 농업에 들어가는 청년들의 숫자가 거의 없는데, 지금의 고령농민들이 농업에서 물러나면 이제 농사는 누가 지을 건가? 그때 되면, 알아서 남는 농지를 아파트로 바꾸겠다는 게 경제관료들이 생각하는 장기적 농업에 대한 위상이다.
무상급식은 어떻게 보면 지역 농민 특히 친환경 농민들에게 가는 보조금의 의미가 강하다. 수요에서 지원이 되면, 공급 쪽이 안정되는 보조금 효과가 있는 게 뻔한 거 아니냐? 직불제와 비축미 등 농업관련 예산부터 먼저 자르겠다는 한나라당은 사실 농업에서는 역적 정당과도 같다.

다음 정권에서 걸어야 할 농업 공약을 딱 한 가지만 고르자고 하면, 식량자급률 특히 쌀을 제외한 농산물에 대한 부문별 자급률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런 게 없으니 국내 농업은 만날 홀대받다가 가격이 조금이라도 오르면 바로 수입해서 농민들 피눈물 나게 하는, ‘휴대폰 팔아 쌀 사먹는다’의 연속이 되는 것 아닌가?
여기에 하나를 더하자면 청년 농민 혹은 청년 귀농인에게 생활 지원 수당이 있었으면 한다. 물론 형태는 다양할 수 있는데, 이런 소득지원은 WTO 체계에서도 허용되는 정책이다. 농사는 누가 지을 건데, 이 질문에 다음 정권이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농업은 기본적으로는 식량 정책이지만 동시에 고용 정책이기도 하다. 토건보다는 농업이 더 현실적인 경제 정책이라는 시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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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2000년대 이후 일관되게 나빠진 분야들이 몇 개 있다. 사교육이 그렇고, 농업이 그렇고, 지하경제가 그렇다. 민주화되면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기대가 제일 충족된 곳은 아마 인권 분야일 것이다. 하지만 정책을 통해서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으면 민주화되어도 별 볼일 없는 분야들이 있다. 인권은 확실히 좋아졌고, 여성들의 사회 참여도 좋아졌다.

한국의 민주화는 세계적인 신자유주의와 시기가 겹쳐서 크게 힘을 못 쓴 이유도 있고, 80~90년대 민주화 시절에 너무 큰 얘기만 하다 보니 그렇게 된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 와중에 제일 망한 걸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과학을 꼽을 것 같다. 이명박 정부 들어와서 제일 큰 타격을 받은 데가 과학 분야이고, 여러 부처로 찢겨서 아예 흔적도 없게 됐다. 현장에서 죽는 소리를 하니까 과학기술위원회가 결국 상임위원회로 새로 만들어지기는 했는데, 그 정도 가지고는 ‘턱’도 없는 것 같다.
시민단체가 유독 약한 분야가 농업과 과학이다. 그나마 농업은 민중단체 계열의 전농 등 생산자 단체가 버티고 있고, 소비자생활협동조합 등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점점 형상을 갖춰가기 때문에 길게 보면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과학은? 시민단체도 별로 없고, 그렇다고 과학기술자노조가 엄청나게 힘을 쓰는 구조도 아니다.

원래는 WTO의 최대 수혜자가 과학 분야가 될 거라고 20세기 후반에 모두가 예상을 했었다. 수출 보조금이 없어지면서 공공기술개발에 대한 보조금 형식으로 기업 보조금이 바뀔 거니까, 과학 분야는 아주 잘될 거라고 예상을 했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한때 나오던 ‘이공계 살리기’ 목소리도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물리학과나 전자공학과가 합격선이 최고이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지방까지 의예과 계열이 다 차고 나야 비로소 이공계 지망이 시작된다. 냉정하지만, 그것만큼 이 시대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지 않은가?

경향신문DB


지역경제가 어려워지니까 점점 더 지역이 스포츠 쇼비니즘으로 질주하는 것과 똑같다. 과학도 ‘보여주기’와 쇼비니즘에 기대면서, 황우석 이후로 여전히 ‘한탕’을 통한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노린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노벨상은 그렇게 단기간에 돈을 퍼붓는다고 나오는 게 아니다. 일본의 경우는 노벨상 수상자들이 좀 나왔는데, 이 사람들에게 과학정책을 맡겼다. 대중적 인기가 너무 높아서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었는데, 행정가의 몫이 별도로 있는 거라서 결국에는 엉망이 되었다는 게 일본 과학자들의 전언이다.

기초과학과 기초 엔지니어링이 약하게 되니까 벌어지는 문제가 각 산업의 자체 고도화 즉 고부가 가치 산업으로의 전환이다. 기초 소재, 정밀기계, 스위스 등 유럽의 소규모 경제 국가들이 떼돈 버는 분야에서 우리는 유독 약하다. 결국 이게 중소기업 혹은 가족기업의 영역인데, 여기가 약하니까 지역경제도 어렵고 고용 문제도 풀기가 어렵다.
문제는 알겠는데, 여기에 조금 집중하자고 강조하면, 과학계는 또 금방 수출 쇼비니즘으로 간다는 게 솔직히 딜레마다. 황우석 때, 지겹게 보았다. 왜 한국의 유명한 과학자는 전부 보수이고, 쇼비니스트들인가?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은 사람도 많지만, 언론의 틀을 거치고 나면 전부 강력한 민족주의자들로 돌변한다. 현장에서 보면, 그냥 미국 시민권 가지고 싶은 소박한 찬미주의자들이 더 많다.

야당이 집권한다고 해도, 과학기술 분야는 아무래도 나아질 전망이 보이지 않는다. 안상수가 대통령 되면 좀 나아질까? 그도 중소기업 살리자는 얘기 외에는 특별히 더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과학기술 분야를 생태계로 보고 분석을 해보면, 전형적인 상후하박 구조이다. 위로 가면 넉넉하고 지낼 만하지만, 밑으로 가면 인권 같은 건 아예 찾아볼 수도 없는 비민주적 실험실 운영과 거의 노예 같은 대학원 연구조교들의 삶… 쇼비즈니스와 특성이 너무 똑같다.
나한테 한 가지만 바꿀 수 있는 권한을 준다면, 우선적으로 지방 이공계부터 무상 등록금을 구현하겠다. 서울에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실험실도 있는 게 아니니, 그 편이 더 효율적이다. 그리고 그 돈을 따라 실험실 민주화에 대한 고민을 할 것 같다. 과학자의 꿈을 가져야 할 청년들이 편의점 알바로 근근이 살아가는 것, 이게 현실이다.
민주화의 성과가 왜 과학기술계에는 성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왜 유독 과학 분야에서만 시민적 가치에 대한 논의가 전혀 없었는가? 그런 고민을 지금부터라도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다음 정권에서 드디어 물리학과가 한국에서 사라지는 날을 볼지도 모른다. 아직도 더 망할 게 남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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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들어오면서 한국에 아주 독특한 취향을 가진 세 가지 사회적 집단으로 구분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그 맨 앞은 초딩. 통계에는 잡히지 않지만, 한국에서 MB를 가장 적극적이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집단은 아마도 초딩이 아닐까 한다. “저기 보온병 간다”는 초딩들의 웃음으로 집권여당의 대표가 낙마하게 된 것은 건국 이래 처음이 아닌가? 어떤 정권도 초딩들과 이렇게 힘겹게 싸웠던 적이 없었다. 보온병 사건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돈을 내고 밥을 먹어야 하는 ‘오세훈 학년’이라는 5~6학년이 있다.
초딩들의 반한나라당 정서는 한국의 그 어떤 사회경제적 집단보다도 강한데, 한나라당은 완전 망했다. 진보정당이 집권할지는 모르겠지만, 진짜 경천동지할 변화가 오기 전에는 한나라당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 같다. 이걸 전교조 선생님들이 만든 게 아니다. 안상수, 오세훈 여기에 MB, 초딩들의 안티 히어로 삼인방이 있다.

초딩을 제외하면 또 하나 상반된 의견 그룹이 20~30대 여성, 40~50대 남성, 여기가 또 특징적으로 구분된다. 60대 이상은 통계 처리나 경향 분석이 무의미한 게, 아직까지는 결국 자기 고향 사람들 찍는 게 대세라서 그렇다. 민주 대 반민주 구도로 보면, 40대 남성과 50대 남성이 확연이 다르다.
그러나 토건이라는 틀을 들이대면, 새만금을 중심으로 20~30대 여성과 30~50대 남성이 어느 정도는 차이가 나타나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40대 남성들에게 새만금 해법에 대해서 물어보자. 1) 귀찮다, 끝난 사건 아니냐. 2) 지금 전북 얘기 꺼내서 적진 분열하지 말자. 이 두 가지의 반응이 대부분이다. 반면 30대 여성들이 새만금에 대한 민감도가 좀 높은 것 같다. 20대 남성과 20대 여성 사이에 새만금에 대한 민감도의 차이가 있을까?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있는 것 같다.

여기에 탈핵이라는, 후쿠시마 사태 이후로 불거진 원전 문제를 들이대면, 20~30대 여성과 40~50대 남성 사이의 의견 차이가 좀 더 커진다. 노무현 시절에는 이렇게까지 세대간, 성별 의견차이가 높지는 않았던 것 같다. 가설은 몇 가지가 있는데, 가장 유력한 건, 미워하면서 닮아간다고, 남성들끼리 민주화를 놓고 대립하면서도 개발주의 시대의 기억을 지울 수 없는 것 같다.
전체적으로 보면 여성은 한 번도 그 시기에 집단적으로 주체의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잃을 게 없으니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도 큰 법, 탈토건과 탈핵에 대해서 20~30대 여성들이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인가? 50~60대 여성은? 아직까지는 남편 눈치를 보는 성향이 강한 것 같다. 그렇다면 20대 남성은 왜 집단적으로 새로운 의제에 대해서 “의견 내는 것 자체가 피곤하다”는 피로감을 보일까? 그건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노무현 직계 중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김두관, 이광재, 둘 다 대표적인 토건형 민주지사들이다. 민주적이고, 똑똑하고, 유능한 듯하지만, 20~30대 여성들의 생태적 감성에는 잘 안 맞는다.
같은 직계이지만, 안희정은 좀 다르다. 앞의 두 사람이 남성성이 특징이면, 안희정은 섬세하고? 아니 소심인가? - 여성성의 특징을 조금은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지방선거 전에는 똑같이 4대강 반대를 외쳤지만, 실제로 당선되고 나서 하는 정책들에는 좀 차이가 있다.

자, 그렇다면 한국의 토건의 총지휘자이며 실체 바로 그 자체인 국토해양부 개혁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까? 토건 한국의 총본산답게 거느리고 있는 산하단체도 많고, 국회의원들에게도 가장 인기 있는 위원회이다. 앞에서는 입 바른 소리 하더라도 지역으로 돌아가면 결국 올림픽 같은 국제행사 유치나 국책사업을 유치하겠다고, 혹은 주민 숙원사업 풀어준다고 ‘깨깽’하고 딴소리하기 일쑤다.
뉴타운에서 4대강에 이르기까지, 토건 경제의 원흉이기도 하고, 투기 국면을 이끌어 주거복지의 훼방꾼이다. 그리고 복지로 가야할 돈을 빨아먹는 흡혈귀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제는, 이들의 국민경제 비중이 선진국에 비해 2배 이상 커져서 스스로도 자신을 제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국토부 측과 몇 번 만나고 나서, “결국 고용 문제는 건설이 최고야”라고 말하지 않은 주류 정치인을 거의 보지 못했다.

다른 부처는 몰라도 국토부의 경우는 정책 내용보다도 결국 누가 수장이 되어 탈토건을 추진할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자해지, 스스로 문제를 풀도록 할까? 홍수에 다리가 무너져도 4대강 사업과는 상관없다고 발뺌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이건 어렵다. 나한테 기회가 있다면, 두 사람을 추천하고 싶다. 대선 출마할지도 모르는 사람인데 이렇게 말하는 게 결례일 수 있지만 한때 재경위 위원이었던 심상정, 또 다른 사람은 서울대 환경대학원 명예교수인 이정전, 이렇다.
다음 정권의 성공은 결국 고삐 풀린 국토부를 누가 다시 공복의 위치로 옮길 것인가, 그 주체에 달려있다. 정책은, 그 다음이다. 민주당에는, 미안하지만 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토건만 놓고 보면, 손학규 대표는 국토부보다도 더 토건적이다(분당 공약을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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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내무부라고 불리는 행정안전부(행안부) 장관은 정권 제2인자의 자리인 경우가 많다. 지금 프랑스 대통령인 사르코지가 내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대통령 준비를 했었다. 전 대통령인 시라크와는 우파 내에서 라이벌 관계였는데, 그가 가장 강력한 자리를 차지하면서 다음 정권을 노린 셈이다. 시라크가 대통령을 준비하면서 절치부심, 결국 파리 시장이라는 자리를 차지했는데, 이게 바로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을 대통령 전초전으로 노렸던 바로 그 전략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행안부 장관은 다음 대통령이 가는 자리, 이렇게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지금 행안부 장관이 누구인지 기억하는 국민이 있을까? 한때 유명했던 앵커였던 맹형규 장관이지만 국민들은 이제 그런 사람이 누군지 신경 쓰지도 않는 것 같다. 그 대신 경찰청장은 대부분 안다. 행안부 내에는 경찰청과 소방방재청, 두 개의 청이 있는데 사람들이 아는 건 경찰청장뿐이다.

따지고 들면 행안부만큼 국민들의 삶과 밀접하고 또 시민단체와도 긴밀한 협조 관계에 있게 되는 부처도 없다. 우리나라의 시민단체도 중앙형 조직에서 점차적으로 분산형 조직으로, 즉 지역의 풀뿌리 단체로 분화하는 중이다.


지난 정부에서 집권을 시작하자마자 분권이라는 키워드를 내건 적이 있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런 분권으로 이루어진 것도 별로 없을뿐더러, 그냥 지역별로 토건 사업들을 벌이면서 토건 경제를 강화시키는 부작용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리에게 자치의 역사는 짧고, 또한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정치나 행정이 경제처럼 ‘압축 성장’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기지도 않는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자치의 방향으로 가는 게 맞을 것 같고, 그래서 행안부 역시 예산도 늘리고, 그 기능도 더욱 강화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원론적인 입장이고 행안부를 강화하는 데 찬성할 시민단체는 별로 없다. 행안부 산하의 경찰청과 좋은 관계에 있는 시민단체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에게 장관 이름 대보라고 하면 몇 사람 안 나오지만, 경찰청장 이름은 어지간하면 알 것이다. 이게 우리가 ‘경찰국가’라는 현실의 한 단면이다. 경찰 없이 통치가 가능한 정권이 오기를 바라지만 대화하고 타협을 찾아갈 수 있는 방향으로 국가 운영에 근본적인 변화가 오기 전에는 당분간 한국은 정치가 아니라 경찰력으로 통치하는 경찰 국가의 모습을 계속 가질 것 같다.

지난 정부에서 하려고 했는데 별 성과가 없이 끝난 것은 경찰 권력의 지역화 즉 지방 경찰로의 분산화 과정이다. 만약 다음 정권이 시민의 정권이 된다면, 당연히 경찰 국가 체계를 일정하게 해체해야 하는 것 아닐까?

경찰의 역할에 치안과 공안이 있다면 지금은 공안을 잘 하는 경찰들이 승진하고 공을 세우게 되는 시기가 아닌가? 영화 <체포왕>에 등장한 박중훈 이선균 같은 사람들은 지금과 같은 경찰국가에서는 절대로 경찰청장이 못되는 거 아닌가?

검찰이 수사를 주도하든 경찰이 수사권을 갖든 국민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다 그게 그거고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아무리 좋은 시각으로 문제를 봐주려고 해도 ‘밥그릇 싸움’ 이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문제의 본질은 경찰의 힘으로 국가를 유지하고 검사들의 힘으로 정치를 유지하는, 그런 물리력에 근거한 국가 체계 자체가 문제이다. 경찰 개혁이라고 해야 수사권을 누구에게 줄 것인가, 이런 건 다 말장난이고 시민과 경찰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 그게 본질이다.

길게 보면 토건으로 흐르는 지방행정 대신 복지와 안전과 같은 행안부 본연의 임무를 통합적으로 강화하는 방식으로 가는 게 맞다. 지역에 토건 재정 형태로 가는 국토부의 중앙 예산을 행안부 예산으로 전환해서 자치에 대한 권한과 함께 책임을 질 수 있게 하는 것이 시민의 정부에서 행안부가 가야 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경찰청도 상당 부분 지역 자치의 영역으로 넘기고 중앙은 통합 관리 형태로 가는 게 옳다. 부산에 3차 희망버스가 간다고 서울의 전·의경 절반을 부산으로 빼는 지금의 경찰 국가, 이걸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오세훈 서울시장이 경찰력까지 갖는다고 생각하면 솔직히 오싹하기는 하다. 그래도 그 상태에서 정부 내에서의 견제, 시민들의 참여와 감시 그리고 계속되는 제도 개선들을 통해서 우리의 자치 능력을 높여나가는 게 궁극적으로는 가야 하는 길이다.

행안부 장관은 누군지도 모르고 경찰청장 이름만 기억하는 지금의 기형적인 구조를 언제까지 끌고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지독한 경찰국가, 이제는 그만하자. 경찰 없이는 유지되지 않는 정권, 그건 이미 망한 정권이고 실패한 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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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아저씨들이 보면 기겁을 하면서 저것도 운동이냐 할 그런 운동들이 시민 진영에는 종종 있다.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들이 조그만 단체를 꾸릴 때 저게 운동이냐, 그런 목소리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겨울 구제역 파동 때 맹활약했던 카라, 그들의 모체가 바로 채식주의였다. 별의별 운동단체와 활동가들과도 일해 본 기억이 있다. ‘꼴페미’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여성 근본주의, 그중에서도 가장 강성인 영 페미니스트들과도 중요한 일들을 같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도 잘 적응하기 어려운 게, 평화 근본주의자들과 생태 영성주의자들이다. 비밀스러운 종교, 밀교의 느낌을 접할 때, 가끔 내가 가지는 상식이 시험에 든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절대 평화, 내 안의 평화, 마음속의 평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내 평화를 깨뜨린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도 이들과 같이 일하는 게,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른들의 군사 놀이’라고 했음직한 극단적 전쟁광들을 이들이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두 종류의 전쟁 마니아들이 있는 것 같다. 한쪽에는 북한을 증오하는 게 자신의 생존 이유라고 생각할 정도로 북한 혐오로 자신의 삶을 소진하는 조갑제류의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밀리터리 마니아 혹은 군사 오타쿠라고 불리는, 신무기 도입을 게임처럼 즐기는 또 다른 신인류, 이들이 전쟁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국방산업을 둘러싼 복잡한 자본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이라크전 때 전쟁의 외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되었다. 전쟁은 변하지 않는 국가의 일이라고 얘기하지만, 군대 급식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 첨단 무기를 둘러싼 채산성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복잡하고 또한 변화무쌍하다.


 

여성 학군사관후보생(ROTC)/ 경향신문DB


시민단체가 국방에 대한 의견 역시 그만큼 복잡하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의무병역제에서 모병제로 바꾸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모병제는 보통 우파들의 정책이고, 해외 파병과 국제전을 치르는 데에는 ‘우리들의 아들’이 죽는 것보다는 직업 군인이 죽는 게 여론상 유리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징병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효율적이며 인간적인 병역 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 시민단체의 의견이 좀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여성단체들이 새로운 의제를 제기하는 중이다.

여성도 군대에 가겠다, 이런 얘기가 군가산점 논쟁의 여파로 여성단체 일각에서 제기되는 중이다. 다만 병역을 일종의 사회적 서비스처럼 이해해서 돌봄 노동이나 사회 서비스 부문을 늘여서 남녀 모두 사회에 대한 봉사를 한번쯤 하자, 이런 식의 얘기들이 최근에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와 국방부의 충돌이 ‘양심적 병역 거부’라고 부르는, 종교적이든 양심의 이유든 군대에 가는 걸 거부하고 차라리 감옥에 가기를 선택한 ‘양심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때 군대가 일반 사회보다 선진적이고 엘리트적인 요소를 가진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박정희, 김종필, 모두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엘리트들이었고, 젊은 장교들은 사회 일반 평균보다 분명 우수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군인들끼리 결정하면 된다, 그 철의 명제에 흔들림이 온다. 군대 중의 군대, 해병대의 문제는 자기끼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국방부와 시민단체의 접점은 다원적이고 복잡한데, 나는 아직도 군인들의 순혈주의만으로는 경제사회적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군의 신자유주의화, 이게 조금만 더 진행되면 가난한 집 자식들만 전투병으로 남고, 부자들은 관리직이나 행정직으로 빠지는 내부 모순이 더욱 심화될 것 같다는 걱정이 있다.

지난 정권에 논의하다가 덮어놓은 의제 중의 하나가 국방장관이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민간인은 국방장관 하면 안되는가, 요게 핵심 질문이다. 예를 들면 요즘 ‘폭풍 간지’로 ‘사나’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문재인 같은 사람은 국방부 장관이 되면 안되는가? 쿠바 위기 때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세기의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직전 직업이 포드사 부사장이었다. 민간인 국방부 장관, 이게 군의 고루한 순혈주의와 국방부의 폐쇄성을 개방하는 첫 번째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현 정권에서는 어차피 군대도 안 간 사람이 군통수권자는 물론이고, 국정원장 등 주요 국가안보 보직을 다 맡았었다. 군면제자보다는 문재인급의 인사가 군대를 맡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누가 국방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군인들 스스로는 개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군대는 닫혀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폐쇄형 조직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딜레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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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지수라는 수치를 내보고 싶었던 것은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지역별로 혹은 단체별로 얼마나 그 지역이 마초 성향이 강한가, 그런 걸 지표로 내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고 마초에 대한 간접 지표들을 뽑아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서 몇 년째 마음 속에만 가지고 있고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몇 개의 작업 가설을 만들어본 적은 있다.
한국에서 마초지수가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여성들과 겸상을 아직도 잘 허락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는 안동이나 의성 같은 곳이 아주 높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마초지수가 차이가 있을까? 이런 것도 오래된 질문 중의 하나인데 별로 그럴 것은 아닌 듯싶다. 밀양의 성폭행 사건이 우리에게 꽤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는데, 소설가 공지영의 <도가니>에 나온 아마도 전라도 지역이 분명할 무진 역시 <무진기행>에서 따온(?) 그런 점에서는 만만치 않은 듯싶다. 고려대학교 지도부는 어찌 이리도 <도가니>의 대학 버전으로 그렇게 소설과 판박이인지, 끌끌.

가끔 고위직 여성진출 비율 등 여성과 관련된 지표를 보면 한국은 회교국가인 말레이시아보다 훨씬 낮고 요르단과 비슷한 수준의 수치로 나온다. 남녀 임금 격차 등 많은 경우 한국은 OECD 평균 근처에서 수치가 나오지 않고 회교 국가들 비슷한 데서 수치가 나오는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여성가족부는 한국의 정치 과정 특히 시민단체가 만들어낸 가장 큰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와 여성 정책, 이렇게 얘기를 꺼내보면 좀 참담하다. 일단 인권위원회가 해체되지 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것처럼 여성가족부도 정부 출범 초기, 진짜 죽다 살아났다. 한나라당 같은 할아버지들의 정당에서 이걸 없애지 않았던 데에는 수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눈물겨운 호소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부처가 없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해서 뭔가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닌 듯싶다. 정부 프레임이 어떻든 소수의 열성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영웅적인 활동을 보여주든, 현 정권은 반(反) 여성주의 정부이고 여성운동의 위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과연 파시즘으로 가고 있는가, 아닌가, 여기에 대한 논란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히틀러의 나치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은 시스템의 실패를 내부 구성원 중에서 찾고,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는 증오의 정치가 등장할 때 그렇다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 정권에서 찾아낸 내부 희생자는 김용철 변호사의 표현을 빌리면 ‘전라디언’이 아니었던가? 전라도 사람은 야비하고 믿을 수 없다는 다분히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경상도든 서울 사람이든 군사 정권 내내 암묵적 가해자였다.

우리의 파시즘적 경향을 보여주는 내부 희생자는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여성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은 아직은 유럽 수준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위험 요소이다.
그리고 여성은? ‘열폭족’이라는 형태로 이건 이번 정권에서 이미 하나의 흐름으로 나온 듯싶다. 군 가산점 논쟁 같은 게 있을 때 여성단체나 여자대학교의 게시판을 마비 상태로 만드는 사람들을 열폭족이라고 부른다. 이건 사회적 변화인데,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탈마초의 흐름에서 다시 우리는 남성우월주의의 마초 시대로 역행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단체만이 아니라 여성가족부 자체가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MB 시대가 종료할 때,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토건이나 국가주의 쇼비니즘만이 아니라 다시 강화된 마초주의가 아닐까 싶다.
사실 여성들을 위한 정부부처가 생겨나는 것은 나머지 모든 부처는 남성 엘리트들의 지적 우월주의이고, 딱 한 부처만 여성 정책을 고민하게 된다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정부 모든 부처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국이나 실 하나씩은 만들고, 어떻게 21세기에 탈마초 시대를 맞을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언제든지 우리는 열폭족과 함께 순식간에 파시즘의 길을 열 수도 있다.

사회적 경제, 돌봄노동과 같은 전형적인 여성 진영의 경제 문제에서부터 여성 노동자, 여성 알바, 여성 농민, 이런 세밀하면서도 특단의 대책을 찾기 어려운 질문을 포함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국 특유의 마초 시대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이명박 이후의 시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인터넷의 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극우파가 이 문제에 대한 차별적 해법을 주장하면서부터 생겨나는 것 아닌가? 위기의 여성가족부, 다음 정권에서는 이 부처가 사회의 핵심으로 떠올라야 우리의 미래가 밝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여성부 덩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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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인기가 요즘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 정부 근처에서 줄 서기 좋아하는 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대통령 인수위원회이다. 인수위 갔다가 청와대 중책 혹은 장·차관, 그게 한국 엘리트 남성들의 보장된 출세길이다.
반대로 임기말 청와대는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가 된다. 공무원들은 ‘인공위성’이라고 부르는데, 괜히 잘못 갔다가 정권 바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망하는 정부 말년 청와대에 가면, 다음 정권 내내 인생이 고달파진다.

세상 인심이라고, 정권 초에는 어떻게든 줄 대서 청와대 가고 싶어하던 공무원들이, 최근에는 죽어라고 도망가서 청와대는 안 가려고 하는 듯하다. 세상사, 다 이런 것 아니냐 싶게, 민주당에 줄 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공무원이든 민간 기업이든 ‘보험’이라고 부르는 줄 타기가 요즘 유행인 듯싶다. 하늘 아래 영원한 건 없다는 것처럼 고소영, 강부자의 시기도 끝나간다.


이번 정권에서 일반인들에게 완전히 스타일 구긴 부처가 외교부였다면, 밑바닥부터 붕괴한 곳은 인권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건 그냥 시민단체(NGO)에 맡기면 되는 거 아니냐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이 현 정권의 장·차관들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특히 못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인권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번 정부가 잘 한 게 뭐가 있나, 그렇게 물어보면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시민들의 인권 인식은 높아진 것 같은데, 이건 정권이 잘 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닌 듯싶고. 그럼 국방은 잘 했나?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것도 아니다.
자기들은 ‘선진화’를 국정 모토로 잡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눈에서 보면 한국이 한참 후퇴했다는 데에는 좌우, 진보, 보수 모두 이견이 별로 없는 듯싶다. 물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우리가 후진국이던 시절 혹은 개발독재 시절로 상당 부분이 돌아갔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후대에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칠 것, 그것은 생태 분야가 아닐까 싶다. 아닌 말로 인권이야 정권 바꿔서 다시 되돌리면 되는데 4대강, 새만금, 이런 건 다시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노무현 후반기에 ‘대못질’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면, 현 정권이야말로 ‘생태 대못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환경단체와 환경부의 관계는 외국과는 조금 다르다. 환경청을 환경부로 격상하는 데 상당히 관여를 했기 때문에 어떨 때 보면 시집 보낸 딸을 보는 친정 어머니 느낌도 든다. 환경부도 환경단체를 극진하게 생각했었다. 현 정부에서 이런 우호적 관계가 끝났다. 아예 장·차관이 나서서 4대강 사업 추진본부장처럼 움직이니 좋은 관계일 수도 없다. 아직 공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환경부를 해체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젊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국토부가 개발을, 환경부가 견제를, 이렇게 하는 10년 넘은 구도에서 사실상 환경부가 제대로 견제를 하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시늉은 좀 했다. 이렇게 짜여진 시스템에서 아예 환경부 장관이나 차관이 개발하자, 이러고 나오면 견제 시스템이 돌지 않는다. 자기들이 나서서 4대강 주무 부처처럼 굴 거면, 아예 없애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대신 환경영향평가를 아예 환경단체나 민간에서 위탁해서 관리하는 게 국가주도 개발방식에 최소한의 견제라도 될 거다.

시민의 정부가 들어오면 환경부는 어떻게 할 거냐? 그냥 장·차관만 바꾸면 될까? 손학규나 정동영이라고 친구 시키지 말라는 법 없고, 그 사람들이라고 한나라당과 달리 좀 생태적인 생각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차피 옛날 사람들이고, 토건 시절에 출세했던 사람들이다. 말은 녹색성장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내용을 열어보면 토건 + 원자력, 그게 전부다. 생태는 녹색 ‘뺑끼칠’, 온실가스 배출은 원자력으로 줄이고, 그랬던 거 아니냐.
프랑스 식으로, 국토부와 환경부를 합쳐서 환경 부총리를 만들고, 환경부는 생태부로 아예 이름을 바꾸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우파 정치인인 사르코지도 이 정도는 했는데, 이명박 시대의 환경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었다.

좀 더 세게 나가자면 아예 경제 운용 자체를 지속가능 경제로 하자는 측면에서 기획재정부를 지속가능부로 바꾸고, 아예 여기에서 국민 경제 자체를 생태적으로 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삽질의 경제적 효과는 단기적이지만 삽질의 후유증은 오래 간다. 이명박 시절에 저지른 토건질을 치우려면 어떤 건 100년쯤 갈지도 모른다.

환경 활동가들 입에서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 손으로 환경부를 해체하자, 그런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치욕스러운 시기이다. 한반도의 생태 역사에서 이 시기가 일제 시대 같은 의미에서 생태 부역분자의 시대로 기록될 것 같다. 배 바꿔 탄 환경주의자, 토건 부역분자 환경부, 그 시기가 과연 끝날까?
민주당 내부에 당장 탈토건 위원회부터 만들기를 바란다. 한나라당의 진짜 약점은 복지가 아니라 토건이다. 다음 정권의 탈토건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는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집권하고 집권이 의미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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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한국 사회를 뒤흔든 공정 사회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로 유명환 외교부 장관딸 사건이었다. 내용이야 간단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성격이다. 특정 공무원 집단이 자기들만의 왕국을 쌓아놓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특혜로 취업시킨 것인데 그야말로 “썩은 물이 고인다”는 사건의 대표격이다. 난 여전히 외교 아카데미를 반대하는데, 일단 자기들끼리 왕국을 쌓은 사람들이 더욱 공고하게 왕국 현상으로 가겠다는 것이라서 반대한다.

외교부는 한국 관료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집단 중 하나이다. 외부 견제가 쉽지 않고 내부 견제는 더더군다나 어렵다. 국방부에 민간인 장관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인들끼리 서로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긴 육·해·공군의 서로 다른 군인들끼리 자체 견제가 좀 있다. 외교부는 그런 것도 없다.


외교부가 지금과 같이 통상 기능까지 전부 가지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 배경에는 DJ가 관련되어 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DJ는 영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외교부에서 정말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결국 통상교섭본부를 통해서 통상 기능까지 갖게 된 외교부는 그 후로 견제할 곳이 없는 막강한 부서가 되었다. 어떤 공무원이든 외국에 갈 때에는 외교부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외교부와 개인적으로 척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당연히 부패가 생겨나고, 또 은밀한 거래 현상도 생겨난다.

한국 국민들 중에는 해외 영사 업무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을 듯싶다. 가끔 해외공관에서 한국인에 대한 민원처리가 너무 소홀해서 뉴스거리가 되기도 한다. 단건 단건으로 보면 그냥 해당 공관에서 생긴 문제라거나 ‘무능한 공무원’ 일반의 문제처럼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한국에서 시민단체가 전혀 없는 부처가 어디인가? 그게 바로 외교부 아닌가? 국방부만 해도 평화단체 등이 견제를 해서 시민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이제는 좀 익숙해져 있다. 실물경제와 에너지를 담당하는 지식경제부는 관련된 시민단체만 100개도 넘을 듯싶다. 이런 부처는 과별로 전담 마크맨 같은 시민단체가 있을 정도이다. 교육은 또 어떤가? 학벌 문제에서 사교육 문제까지, 주제별로 빼곡하게 시민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법무 쪽은 참여연대의 변호사들이 사실상 전담 마크맨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예 시민단체가 없는 지자체가 있었다. 간단한 골프장 뇌물 사건에 단체장에서 공무원들, 게다가 지역언론까지 줄줄줄 연루된 적이 있다. 그런 지역은 시민단체가 아예 없는 지역이었다.
이제는 풀뿌리 시민단체라는 이름으로 구청장이나 시장 맘대로 뭘 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시민단체가 있다고 해서 그 지역이 꼭 발전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단체장의 폭주나 구조적인 부패는 조금씩 견제를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견제한다고 생각하면 좀 더 교묘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도 전체적인 부패는 좀 줄어들게 된다.

외교부를 견제할 시민단체에 대한 논의는 비공식적으로 여러 번 있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외교부의 전담 마크맨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돈의 문제이다.
해외공관까지 쫓아가 마크하는 활동가를 파견할 여력도 없고, 외교부가 주관하는 여러 가지 협상을 외국으로 쫓아다니면서 감시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주요 협상에서 외교부가 한국에서는 형식적으로만 하고 실질적인 내용은 한국의 활동가들이 접근할 수 없는 외국의 밀실에서 한다는 의혹이 종종 불거져 나온다.

결국 돈의 문제이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사무실 하나, 활동가 약간명, 그렇게 유지된다. 물론 환경운동연합이나 YMCA처럼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진 단체들도 있기는 하지만 개별 사무실의 상황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 그런 상황에서 외교부를 마크한다는 건, 기술적으로는 가능해도 경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미국 국무부의 경우에는 전문 분야별로 감시 단체들이 꽤 된다. 한국과 선진국은 시민단체에 돈이 들어오는 경로가 다르고 사회적 후원의 규모 자체가 비교가 안 된다. ‘펀드 레이징’이라고 불리는 시민단체를 위한 모금 조직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이다.

외교부에서 뭐라고 말하든 한국은 외교 후진국이고 밀실외교, 비밀외교 그리고 홍보외교 이 정도 수준이다. 외교부의 전담 마크맨이 생길 때까지 외교부의 비밀주의를 견제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시민단체, 아직은 외교부를 견제할 수준에는 못 갔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말이다. 대통령 친구들이 줄줄이 대사로 나가는 형편이다. 외교부가 그야말로 MB 친구들 신사유람단으로 전락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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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어찌’를 통해서 다음 정부는 시민적 가치를 지향하는 시민의 정부가 되는 것이 지금까지의 주요한 흐름 중의 하나라는 것을 얘기하였다. 시민단체든 시민이든 ‘시민적 가치’라는 것을 전면으로 내세울 정도의 흐름을 우리가 형성한 것 같기는 하다.

촛불 시민으로부터 시작된 그 일련의 흐름이 이제는 도도한 하나의 장강이 된 지금, 그것이 새로운 가치의 출발점이 될 것 같다. 역사로 본다면 지금쯤은 민중 진영이 한 번쯤 집권하는 게 좋다고 10여년 전에 생각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불행히도 역사는 그렇게 흘러오지 않았다. 87년 이후 20년 이상 흘렀지만, 민중 진영이 당장 집권을 하고 수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비판 세력이고, 잠재적 대안 세력이지만 당장 집권할 수는 없어 보인다.
지금 집권한다면? 나라도 뜯어 말릴 것 같다. 이명박 쪽 사람들이 무능을 보이면서 역사의 뒷물결로 흘러가는 것처럼 지금 민중 진영이 당장 집권하면 무능과 부패, 그런 역사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현실이 지금 그렇다.


민중단체가 힘을 기르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국회에서 맹활약을 하거나 특정 지자체에서 자신의 능력을 보이는 방식이다. 그러나 울산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지는 못한 것 같다. 그렇다고 국회에서 맹활약하였는가? 소금의 역할은 분명히 한 것 같지만, 정치적 대폭발을 당장 기대할 정도의 맹활약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길은? 연정의 파트너로 참여하여 몇 개의 부처를 장악해서 행정 관료들을 더 많이 배출하면서 현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정책에 대한 장악능력을 높이는 길이 있다. 그런 방식을 ‘캐비닛 연정’이라고 이름을 붙여보자.

정치학자들과 이런 방식의 연정에 대해서 의견을 꽤 많이 나누어 보았는데, 대체적으로 한국의 정치학자들은 대통령제 하에서 연정의 성사 가능성에 부정적인 견해를 피력하였다. 어지간한 신뢰나 고도의 조정능력이 없으면 연정은 언제라도 위기에 봉착하게 되고, 5년 동안 안정적으로 움직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결국 서로에게 생채기만 남기고 적보다 더 미워하는 동지로 전락할 위험이 높다는 게 그들의 지적이다.
사실 동지가 돌아서면 적보다 더 깊고 오래 앙금이 남는 법이다. 지금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하나의 틀로 돌아가는데, 이성보다는 감정에 남은 앙금이 더 큰 거 아니겠는가?

유럽에서의 연정은 대체적으로 캐비닛을 나누어 일종의 집단 통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좌파는 물론이고 우파도 단독으로 집권하기는 어려워서 결국 50%의 의석수를 채우기 위해서는 연정을 구성하게 된다. 사회적으로 2~3%의 지지율밖에 없던 녹색당이 환경부 장관을 차지하고, 그렇게 정부 전체의 녹색화를 주도하는 것은 일종의 상식이 되었다. 우리도 그렇게 해볼 수 없을까?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의 강기갑 의원 같은 사람이 농업을 맡고, 진보신당의 노회찬 전 대표 같은 사람이 법무를 맡는, 그런 몇 개의 타협안을 고민해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

지난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이 국회에서 통과될 때 우리가 봤던 있으나마나한 합의문 글자 ‘쪼가리’보다는 몇 개의 부처를 책임지고 운영하는 그런 방식이 보다 더 현실적일 수 있을 듯싶다. 서로 다른 당에서 후보 경선을 하기 위해서 있지도 않은 가설정당을 만드는 것보다는 현실적으로 민주당이 대선 후보를 가지고 가고, 연정 파트너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색채와 정체성에 잘 맞는 정부 부처들을 책임지는 그런 방식이 더 생산적인 논의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한지 꽤 된다.

문제는 그런 걸 조정할 만한 유연성과 교섭력이 한국 정계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치 9단들인 DJ와 JP 정도 되는 사람들도 중간에 연정을 깨먹었다. 누가 이런 교섭을 부드럽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게 우리의 딜레마 아닌가?

후보 선출과 단일화를 위한 논의는 게임의 논리상 언제나 불안정하고, 집권하게 되면 결국 제왕적 대통령으로 복귀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

그러나 캐비닛을 나누는 방식은 선거를 조금은 더 정책 선거로 끌고 갈 것이고, 국민들도 다음 정부가 어떤 모습을 가질지, 어떻게 운영될지 훨씬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이런 논의가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면 시민들이 정부 구성 및 운영에 더욱 더 적극적으로 참여할 여지를 준다는 점이다.

개인의 장단점에 대한 논의로는 박근혜의 철옹성을 넘기 어렵다. 정부부처와 정부기관 그리고 공기업들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런 실질적 논의들이 총선과 대선으로 가는 논의들을 더 풍부하게 해줄 것 같다. 시민의 정부의 캐비닛 연정, 그런 방식으로 연정틀을 구상할 수는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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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진이라는 배우가 있다. 이 배우는 아무도 못 가본 미증유의 길을 걷고 있는데, 부산 한진중공업에서 경찰차에 타면서 그는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아마 그가 잠깐이라도 감옥에 가게 되면, 진짜 우리도 배우 출신 대통령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영웅을 중시했고 잘 배우고 잘 난 사람들이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게 좀 바뀌기 시작한다.

탈권위, 탈계몽 등 2010년을 즈음한 사회의 흐름이 미세하게 변화하기 시작한다. 경제 구조 자체가 포디즘(Fordism)의 대량생산 대량소비 체계에서 보다 복합적이며 창의적인 것으로 바뀐 이유도 있고, 워낙 말씀이 통하지 않는 대통령을 모시고 살다보니, 취향이 바뀐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영도력 있는 대통령을 두고 국민들은 읍소형으로 사는 것에 익숙했던 나라였다. 오죽하면 신문고를 놓고 “제발 얘기 좀 들어주세요”라고 했을까?

왜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오고 촛불을 들까? 전혀 사람들 얘기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귀에 공구리 친 대통령’이라서 그런 것 아닌가? 대통령과 청와대가 미리미리 알아서 국민들의 불편함을 헤아려 높은 곳에서 우러러보는 정치에서 점차적으로 낮은 정치 혹은 다중의 정치 같은 것으로 우리도 흐름이 변하는 중인 것 같다.

‘아바타’라고 표현을 하면 사람들은 정말로 그렇게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일을, 자신의 얘기를 듣고 그걸 해주는 사람을 원한다. 지금 김여진이 딱 그렇다. 홍대 청소부 파업에서 부산 한진중공업에 이르기까지, 마음은 있지만 정성을 나눌 수 없던 사람들의 아이콘이 바로 김여진이다.

청와대 분위기로는 꼴 보기 싫다고 감옥 보내면 그만이라고 하는 것 같지만 그러다가는 진짜로 그가 우리들의 대통령이 된다. 한나라당이 여러 가지로 변화를 생각하지만 진짜 잘 못 따라오는 게, ‘다중’이라는, 좀 다른 흐름이 생겨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도력을 가진 ‘좋은 상품’을 대선에 내고, 그렇게 영도력과 지도력으로 다음 세상을 맞으려고 하는 것 같다.

근데, 세상이 좀 바뀌었다. 이런 변화는 시민운동에서도 감지된다. 원로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말 빨 쎈’ 어른들이 있는데, 시민운동이 요즘은 그렇게 대표의 권위나 총장의 명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상명하복의 시대는 시민운동과 함께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는데 지금은 사회 자체가 그렇게 움직인다. 그게 탈계몽의 시대이다. 누가 뭐라고 앞에서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이 “아, 훌륭하신 분이 말씀하시니까 그렇겠구나”, 그런 일이 안 벌어진다.

대통령의 실패는 대화와 설득은 없고, 존경도 못 받는 사람이 그냥 힘으로만 밀어붙이려고 하는 것에 기인한다. 권위도 안 먹히고 계몽은 더더군다나 안 먹히는 시대이다. 원로? 존경받는 원로가 과연 한국에, 혹은 보수에게 있는가? 학자? 교수? 사람들은 이런 말 이제 안 듣는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영웅형 지사를 자꾸 찾으려고 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 수렁으로 빠지게 된다. 비장미의 시대, 그건 촛불집회와 함께 벌써 끝났다.

요즘 한나라당 쪽 사람들이 주로 하는 말이 당신네 쪽 상품이 별 볼 일 없지 않으냐는 거다. 사실 손학규든 정동영 혹은 정세균, 그런 영웅이라는 눈으로 보면 좀 하자 있는 상품들이기는 하다. 명품급에는 들지 몰라도 노무현처럼 사람을 확 휘어잡는 특1급 제품들은 아니다.

그래서 이 쪽도 많은 사람이 여전히 영웅을 기다린다.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몸을 낮추어야 한다는 정치인의 덕목을, 이들은 이미 구현했다는 것이다. 무섭지 않은 것, 이것도 중요한 덕목이다. 물론 미덥지 않다는 하자들이 있다. 대표 상품들이 좀 비리비리하다보니, 사람들이 요즘 더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의견을 내놓기 시작한다. 일종의 다중 진화인데 이게 무섭다.

이걸 한나라당은 ‘포퓰리즘’이라고 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피플리즘’에 가깝다. 한나라당은 사람들이 원하는 건 틀렸다고 생각하는데 민중이 집단적으로 원하는 것, 그게 바로 역사의 발전이다.

수년 전부터 포퓰리즘은 유럽 극우파를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요즘 대세가 우파들의 포퓰리즘인데, 한국 우파들은 알아서 인기 없는 쪽으로 가겠다고 하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알아서 소수가 판단하는 영도력과 다중의 피플리즘이 격돌하면 당연히 표 많은 쪽이 이긴다.

좀 하자 있는 상품으로도 한나라당식 명품을 이길 수 있는 건, 한국 통치와 정치의 작동방식이 바뀌는 중이라서 그렇다. 제발 포퓰리즘 앞으로도 하시지 마시기 바란다. 저희는 인기 없고 싶어요, 살다살다 이런 정치집단은 처음 봤다. 참 다행이다.

※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는 신라 향가 해석으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의 ‘몇 어찌(幾何)’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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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 정부가 출범하였을 때, 보수 신문에서는 ‘좌파 정권’이라고 엄청 몰아붙였다. 진보와 좌파라는 말 사이에 묘한 뉘앙스 차이가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참여 정부 내에 좌파라, 글쎄… 그들을 진보라고 부를 수는 있을지 몰라도, 고전적인 구좌파의 의미든, 요즘의 신좌파의 의미든, 좌파는 아닌 듯싶다.
‘수구꼴통’의 줄인 말, 수꼴과 ‘좌파 빨갱이’의 줄인 말, ‘좌빨’, 이런 고상하지 않은 용어가 우리의 인터넷을 달구던 현실 용어였다. 누구든, 사람이라면 그런 말로 불리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좌파라고 불리면, 사회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레드 콤플렉스가 강했던 한국이니까, ‘진보’라는 어정쩡한 표현을 쓴다. 뭐가 진보냐? 정의하기 아주 어렵다. 진보를 표방한 조봉암이 사형당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진보라는 얘기를 할 수 있다는 것도 진짜 세상 많이 좋아진 것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좌파’라는 용어를 공개적으로 쓰기에는 꺼림칙한 측면이 있다.
한 쪽에서는 평화 통일 혹은 남북 화해 정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종북’이라고 부르는 것도 좀 심하고, ‘반북 좌파’라는 진짜 어정쩡한 용어가 사용되는 것도 좀 어색하다. 어떤 의미로든 2010년대에 좌파라는 용어는 한국에서 편한 용어는 아니다.

상황이 이러니 운동권 내에서도 은어들이 발달하게 되었다. ‘리버럴’이라는 용어는 공식 용어는 아니지만 미국 민주당 정도, 즉 좌파는 아니라는 걸 낙인찍기 위해서 종종 사용되기도 한다. 별로 고상한 표현은 아니라서 나는 이 용어를 즐겨 사용하지는 않는다. 이런 은어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몇 개 있다.


수박, 사과, 이런 과일들의 은유들은 비교적 부드러운 용어들이지만, 속내는 좀 무섭다. 수박은 겉은 녹색이지만 속은 빨갛다. 생태를 표방하는 좌파들을 이렇게 불렀다. 환경운동 내에도 한나라당 계열이 있는데, 이번 정부에서 녹색성장을 정책 기조로 삼으면서 우파 계열의 환경단체 흐름이 나타났다. 수박은, 한나라당 쪽에 줄 선 환경단체와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사과는 좀 아픈 용어이다. 강남좌파라는 말은 여기에 비하면 좀 점잖다. 겉은 빨간색이지만, 살짝 껍질을 벗기면 흰색이 나오는 사과, 이건 아주 아픈 용어이다. 한·미 FTA 논쟁이 한창일 때, FTA 찬성론 쪽에 서 있던 민주당 486의원들을 주로 이렇게 불렀었다. 수박과 사과가 손을 잡을 수 있느냐, 이런 게 새만금 논쟁이 한창일 때에도 많이들 했던 얘기였다.
자주 쓰는 표현은 아니지만 겉과 속이 다 붉은 자두, 검붉고 맛있지만 보관이 어렵고, 금방 물러터지는 딸기 같은 표현들도 있었다.

지금 촛불 시민들이 요구하는 ‘반 MB’ 전선은, 수박, 사과, 자두, 이런 게 합쳐서 일단 정권부터 찾아오라는 말이다. 참 어려운 요구이기는 한데, 그라피티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설치류급 정권 앞에서, “그렇게는 못하겠다”고 버티는 것도 꼭 좋은 일은 아닌 듯싶다. 어쨌든 전통적인 좌우 혹은 진보·보수의 틀과는 다른, 일반 시민들이 지금의 변화를 끌고 나가는 핵심 세력이니 말이다.
수박과 사과의 연정, 이 조합이 과연 가능할까?

지난 정권에서 논의되었던 연정 논의는 적녹연정과 적녹시 두 가지였다. 사민주의 정당과 녹색당이 독일에서 집권했던 것을 적녹연정이라고 부른다. 여기에 시민단체까지 같이 하나의 주체가 되는 것을 한국 버전으로 적녹시라고 불렀다. 지난 촛불 때 감옥에 갔고, 이번 반값 등록금 집회에서 사실상 실무를 끌고 가는 참여연대의 안진걸 팀장이 당시 아이디로 바로 이 적녹시를 썼다. 적녹연정이든, 적녹시 연정이든, 사실 이 논의에서 정말로 스스로 주체가 된 시민들의 존재를 우리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간접적으로만 참여하는 시민이 아니라 스스로 목소리를 내고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진짜 시민의 등장, 이것을 외면할 수 있을까? 시민과 민중이라고 하는, 고전적인 두 가지 사회운동의 주체와는 또 다른, 진짜 2010년 버전의 촛불 시민, 그 실체를 이론적으로 어떻게 부르든, 분명히 하나의 흐름이 생겨난 것은 사실인 것 같다. 그들 앞에서 좌우 논의든, 진보와 보수든, 그렇게 힘을 가지지는 못한다. ‘우리들의 대통령’을 아주 싫어하시고, 한나라당을 추풍낙엽처럼 밀고 갈 새로운 힘이 생겨난 것이 사실이다. 그건 지금까지 좌파도 못했고, 진보도 못했던 일이다.

한국의 각 정파는 촛불 시민들을 다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만 이해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게 연정형태이든, 아니면 합당형태이든, 아직까지 한국의 어느 정파도 이루지 못한 큰 변화가 지금 진행 중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정부의 이름은 ‘시민의 정부’ 혹은 ‘시민 대연정’이 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무지개 정부, 아니고, 좌파 정부, 아니고, 민중 정부, 아니고, 민주 정부, 더더군다나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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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민주당이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다. 사람들이 민주당을 주목하고 여기에 표를 몰아 주는 게 결코 이 정당이 믿음직스럽다거나 듬직해서 그런 게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통령이 너무 혐오스럽고 한나라당이 너무 싫어서, 바꿔야 한다, 그런 게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게 아닌가? 자기들끼리는 엄청 다르다고 할지 몰라도, 소위 ‘빅 스리’ 세 명 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다.

어차피 그 사람들이 좋아서 힘을 모아 주자고 하는 게 아니다. 그걸 ‘아, 사람들이 나 좋아하나 봐’, 이렇게 착각하면 진짜 한 방에 훅 간다. 착각은 자유지만, 자신에게 안겨진 인기가 한시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게 긴 레이스를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다.


사실 그것만 잊지 않는다면, 이번에는 설령 유시민이 통합 후보가 된다고 하더라도 난 그에게 표를 줄 생각이 있다. 어차피 도토리 키재기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인간됨됨이나 별로 객관적이지도 않은 인물평보다는 무슨 가치를 내걸고, 무슨 정책을 약속하는지, 그걸 더 보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민이라는 걸 한 번 했었고, 국민이라는 것도 해봤고, 참여도 해봤다. 물론 좋은 말들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지만, 주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남은 건 민중과 시민 두 가지 정도이다. 한국에서 정책을 만드는 집단은 네 개가 있다.

첫 번째가 노조를 중심으로 하는 민중단체들, 이런 데가 자신들의 현실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정책을 만들어 낸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으로 들어오는 많은 정책들은 일부는 시민단체가 제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민중단체들이다. 자신의 문제라서 생동감 있는 정책들이 적지 않다.

두 번째가 주로 민주당에 정책을 제공하는 시민단체들. 분당 이전의 통합 민주노동당 시절에는 시민단체와의 교류가 좀 있었는데, 오히려 분당하고 나서 양쪽 관계가 더 소원해졌다. 물론 특정 사안에 대해서 시민단체가 한나라당 의원하고도 같이 협력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한나라당에 법안을 주는 일은 거의 없다.

세 번째는 공무원들.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이니 하는 얘기는 다 그냥 하는 얘기들이고, 고위직 공무원들이 쪼르르 달려가서 한나라당에 정책을 아예 통으로 던져 주거나 아니면 자문해 주는 일은 벌써 수년째 계속되는 일이다. 그게 한나라당의 진짜 힘이기도 한데, 개별적으로 접촉하는 것을 법적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명박 정부’라고 불렀던 이번 정권은 현실적으로 ‘고급 공무원 정부’인 셈이다. 물론 민주당 성향의 공무원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간부급은 공무원이든 공기업이든, 기본적으로 한나라당 성향이다.

네 번째는 이익단체들. 다양한 종류의 이익단체들이 있는데, 전경련같이 덩치 큰 데도 있고, 그냥 작은 협회들이나 직능 모임들이 있다. 여기도 기본적으로는 한나라당 성향들이다. 물론 참여정부에서 삼성 보고서들을 적극 채택한 적이 있었는데, 그러다가 정권 날려 먹은 전례가 있다. 아무려면 삼성이나 현대에서 고급 정보를 민주당 쪽에 주겠는가?

크게 보면, 한국의 정책은 민중단체와 시민단체가 한편 먹고, 공무원과 이익단체가 한편 먹고, 이렇게 싸우는 형국이다. 물론 한편 먹는다고 해도, 민중진영과 시민진영 사이에는 긴장이 팽팽한 반면, 공무원과 이익단체는 아주 쫀득쫀득하게 한편이 된다.

로펌을 정거장으로, 공무원 나갔다가 다시 장관하고, 또 나갔다가 이번에는 강만수 산업은행 총재처럼 또 차관하는 거 봐라. 그게 한나라당이 중앙을 통치하는 방식이다.

이 구도에서 일반 국민들이나 시민들은 진짜 교과서에나 있는 개념이었다. 순서대로 보면 시민단체들의 힘으로 민주당 정권을 만들었으니, 이번에는 민중진영이 우리도 한번 하자, 그런 게 맞는다.
2002년 대선 때, 유시민 장관 등 당시의 노무현 지지자들이 이번 한번만 도와주면 다음에는 꼭 민주노동당 돕겠다고 했었다. 물론 그런 약속은 지켜지는 법이 없다. ‘민중 대연정’, 아직은 시기 상조인 것 같다. 그렇다면 시민단체냐? 시민단체도 한국에서는 전부 고전 중이라서 새 정권을 만들기 위해서 심판 역할은 할 수 있지, 주도적으로 에너지를 만들 형편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의 흐름을 만든 것은 바로 2008년의 촛불집회로부터 나왔다는 점이다. 진짜 시민, 그들이 정치의 맨 앞에 서 있는 것, 그게 지금의 우리 현실 아닌가?

대통령은 경찰의 힘으로 그걸 때려잡았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때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진짜 선거의 힘으로 더 증폭된 것 아닌가? 촛불시민의 에너지, 그게 지금 한국 정치를 움직이는 진짜 힘 아닌가? 솔직히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 혹은 농민들의 강철 대오, 그런 게 현 정국을 만든 건 아니지 않은가? 진짜 시민의 힘으로 새로운 정권을 만든다고 하면, 그건 ‘시민의 정부’라고 불리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렇다면 뭐가 시민의 정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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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요즘 잘 못하는 게 한 가지 있다. 온 국민을 발칵 뒤집어놓은 고엽제 사건에 대해서 입장을 내놓지 않는 등 구체적인 대화를 피한다. 이 사건의 뒤처리는 어렵지만, 입장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철저하게 조사하라, 그리고 해법을 찾아보자….”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러나 그는 이게 반미처럼 보일 것 같다고, 아무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수첩공주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박근혜 의원 따라하기인데, 사건만 놓고 보면 그는 이미 대통령이 다 된 것 같다. 두 가지를 읽을 수 있다.

이미 손학규 대표는 사람들과는 드러내놓고 얘기하지 않는, 이미 저 먼 곳에 가버린 사람 같다는 점이다. 구중궁궐이라고 부르는 청와대에 갔을 때 그가 어떻게 할지, 너무 뻔해 보이지 않는가? 그러면 안 된다. 후보 시절에 더 많이 일반인을 만나고, 더 많은 토론을 하는 게 지금 시대의 흐름이다.


두 번째는, 그다지 반미 논란에 휘말릴 것 같지도 않은 환경 범죄에 관한 일에 대해서도 이러니, 그가 어떻게 우리의 주권과 시민권을 지켜줄 것인가, 단박 그런 의심이 든다.
그는 반이명박의 기치만 높이들면 시대 정신이 저절로 생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지금처럼 꿍허니 앉아서 자기측근들과 밀실에서 속닥속닥하면, 금방 옛날 사람으로 몰린다. 이명박도 싫고, 박근혜도 미덥지 않은 사람들이 그에게 표를 준 건데, 벌써 박근혜 흉내내는 전략으로 가는 건 좀 시대 흐름을 잘못 읽은 거 아닌가 싶다.

요즘 만나는 공무원들 중에서, 정권은 바뀔 것 같은데, 과연 당신이 말하는 좋은 시대가 열린 건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손학규나, 뭐 크게 바뀌겠느냐는 것이다. 그 말에 바꿀 수 있다고 자신있게 반박하기가 어렵다.
곰곰 생각해보니, 우리는 계속 증오의 정치를 해왔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두환이 너무 미워서 87년에 나섰고, 이명박 대통령이 너무 싫어서 촛불집회에 나왔고, 노무현 대통령을 자살하게 만든 상황이 너무 싫어서, 일단 합치자고 얘기한다. 이런 증오의 힘들이 정권을 바꾸는 데까지는 갈 것 같다. 그러나 증오 위에 세울 수 있는 가치가 있는가? 

따져보면 한국의 우파들은 노무현 대통령을 너무 싫어했다. 정책만이 아니라 인간 자체를 싫어한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명박 후보를 내세워서 결국 정권을 바꿨다. 그러나 증오 위에 그들이 세운 가치가 있는가? “보수가 집권하면 나라 망한다”는 김영삼의 전설을 다시 한 번 입증한 것 아닌가? 뒤집으면 이건 이 쪽에도 마찬가지 질문이 된다. 증오 위에 우리가 세울 수 있는 가치가 있느냐?

가치 논쟁이 허망할 것 같지만, 지금 우리가 집권하고도 이기지 않을 정권을 세우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바로 가치 논쟁이다. 손학규든, 정동영이든, 아니면 정세균이든, 소위 ‘빅 스리’가 지금 해야 하는 것은 바로 가치 논쟁이다.
좌우 진보·보수의 이념 논쟁을 다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야 할 세상, 그 세상을 세우기 위한 가치는 무엇인가, 그 논쟁이 지금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더 이명박을 미워하느냐, 그런 증오의 논쟁만 남는다. 가치는 정책으로 구현되는데, 그 정책에 일관성을 만들어주는 게 바로 가치이다. 한국 정치가 증오가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고 싶은 사회에 대한 가치 혹은 사랑을 포함하는 그런 단계로 갈 때가 된 것 같다.

미안하지만, 한국의 보수는 증오 위에 이 나라를 세우려고 했다. 레드 콤플렉스의 본질이 북한에 대한 미움 아닌가? 우리가 그들보다 한 발 더 갈 수 있는 건, 바로 진정한 가치 논쟁이 시작될 때의 일이다. 노무현 정신이라는 말, 좋다. 그렇다고 다음 정부를 ‘노무현 정부’라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노무현 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참여 다음의 가치는 무엇인가?
나는 ‘노빠’라는 표현도 거의 쓴 적이 없고, ‘친노’라는 표현도 쓰지 않는다. 그 정신이 무엇인지 혹은 그 가치가 무엇인지, 아직 인간의 말 형태로 접해보지 못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노무현 정부를 다시 만드는 데 난 반대하지 않을 생각이다. 만약 우리가 알아먹을 수 있는 형태로 가치가 제시된다면 말이다.

내가 지지할 수 있는 형태의 노무현 정신이라면, 상고 출신이 대통령 되는 나라, 그건 충분히 동의도 하고 지지할 수 있다. 다시 상고 출신이 대선에 나온다면, 그리고 그의 정신이 시대정신을 역행하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를 다시 지지할 것이다. 노무현 정부가 다시 만들어진다고 할 때, 그 정부의 이름이 ‘노무현 정부’가 될 게 아니라면 무슨 정부가 좋은지, 그 논의가 바로 가치 논쟁의 시작일 것 같다. 반MB 전선에서 ‘반MB 정부’를 만드는 것, 그건 아니다.
자, 야권 제1주자인 손학규 후보가 만들고 싶은 정부는 무엇인지, 대답해주시기 바란다. 이 논쟁을 우리가 피하면, 다시 한나라당 세상이 된다.

※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는 신라 향가 해석으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의 ‘몇 어찌(幾何)’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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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재·보선에서 분당에서의 손학규 당선은 천지개벽을 알리는 소리와도 같았다. 손학규를 지지하느냐, 지지하지 않느냐, 민주당을 좋아하느냐, 좋아하지 않느냐, 그건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듯하다. 방향이 어떻게 될지, 흐름이 어떻게 될지 혹은 누가 최종적으로 대선에 나서게 될지, 그런 건 아직 오리무중이다. 그렇지만 지금의 대통령은 정말 아니다, 그리고 한나라당 정권은 아니다, 그런 장강의 거센 물결 같은 것이 도도하게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게 분당 선거의 의미일 것이다.
자, 수도권에서 남은 건 강남 3구. 여기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를 정점으로 하는 강남갑 외에는 모를 일이다. 손학규 대표급은 아니더라도, 후대를 도모할 수 있는, 꿔다놓은 보릿자루급만 아니라면 강남 철옹성도 밀고 들어갈 수 있을 기세이다.

외연에 해당하는 시나리오가 몇 가지 떠도는 게 있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하면, 합당이냐, 연정이냐, 그 정도인데, 이거야 이미 얘기가 진행되는 중이고, 한나라당을 중심으로 보면, 박근혜 쪽은 3파전이 되면 필승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재오 계열도 나오고 박근혜도 나오면, 결국 양파전으로 가는 게 아니니까 30% 정도의 굳은 표를 가지고 있는 박근혜 필승, 대략 이런 생각들을 하는 것 같다.

결국 따져보면, 현재 상황으로 가면 다음 대선은 내가 뭘 잘해서라기보다는, 남이 너무 못해서, 그렇게 상대방의 실책으로 덕 보는 구도가 지금 펼쳐지는 중이다. 박근혜를 비롯한 주요 대선후보들이 중요한 정책에 대해서 입도 뻥긋 안하는 이유가, 그런 복잡다난한 구도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여기에 상대방이 실책을 하면 언제든지 치고 올라가겠다는, 역시 10% 내외의 굳은자를 가지고 있는 유시민까지 합세하면, 아, 정말 해골 복잡해진다.


자, 우리 숨을 멈추고 잠시 뒤를 돌아보자. 5공이 끝나고 6공이 되면서 각 정권마다 이름을 하나씩 갖는 게 유행 아닌 유행이 되었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를 거쳐 참여정부까지, 지금까지의 정권은 자신이 생각하는 시대정신을 자신의 이름으로 달았다. 현 정부는 공식적으로 ‘이명박 정권’이라고 이름을 달았다.
하여간 제정신은 아닌 사람들이다. 일본이 조선왕조를 자꾸 ‘이씨 왕조’ 혹은 ‘이왕직’, 그렇게 격을 낮추기 위해서 사람 이름을 붙인 적은 있지만 스스로 자기 이름을 붙여서 알아서 품격을 낮추는 인간들이 다 있다니! 그들은 아예 가치라는 것을 모르고, 품격이라는 것을 입에 올릴 자격 자체가 안되는 사람들인 것 같다. 그런 자들이 외국에서 망신살 뻗치는 줄도 모르고 이상한 외교를 하면서 맥락에도 맞지 않는 ‘국격’이라는 말을 노상 입에 달고 산다.

이명박 정부는, 정권 출범 전부터 중국과 사이가 안 좋았고, 중국은 지나친 친미 노선을 내내 불편해했다. 그러다 대통령이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하자, 냅다 선물로 따오기를 주었다. 관계 회복의 징조로 따오기를 주었다는데, 당시 중국은 물론 한국의 외교가에서도 결국 이 정권이 외교로 망할 것이라는 말이 파다했다. 따오기의 학명은 ‘니뽀니아 니뽄’이고, 일본에서는 멸종된 따오기를 일·중 수교를 개시하면서 선물로 준 적이 있다. 따오기의 숨은 의미를 안다면 절대로 선물로, 특히 국가 대 국가의 선물로 받을 수 없는 것이었는데, 그 의미도 모른 채 귀한 거 받아왔다고 자랑했다.
역시나, 첫 방미 때 광우병 사건으로 정권 날려먹을 뻔했고, 자기들이 자랑하는 원전 수출 등 정권 바뀌면 국회 청문회로 올라갈 사건들이 줄을 서 있다. 이건 타산지석이다. 자기 스스로가 시대정신이라고 자처했던, 그러면서도 정작은 “너 사실 일본 사람이라는 소문 있다는데”라는 따오기 학명의 숨은 의미도 모르는 정권의 말로를 지금부터 우리가 진득하게 구경할 수 있다. 그러나 정권은 바꿀 수 있을 것 같은데, 과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최근 늘어나기 시작한다. 최근 민주당 지도부 하는 거 보면, 그 질문이 아프다.

한국 사람들이 정치에서 절대로 허락하지 않는 단 하나의 덕목이 있다면, 그건 오만함이다. 토건도 참고, 감세도 참았지만, 오만함은 절대 참지 못하는 것 같다. 최고의 절대 권력을 쥐었던 박정희도 감히 자기 이름을 붙이지 못하고 ‘유신’이라는, 아주 고전적이며 일본에서도 한 번 썼던 표현을 썼다.
자신들은 ‘이명박 정권’이라고 불렀지만, 아마 힘 빠지면 저잣거리에서는 ‘따오기 정권’이라는 별칭으로 불릴 가능성이 아주 높다. 그래도 그게 쥐보다는 고상하지 않은가? 얼마 전 쥐 포스터에 벌금을 물린 후, 올 여름 대학가에는 쥐박이 그림 티셔츠가 유행할 것이라는 전망들이 있다. 그게 세상 인심이다. 청사초롱과 쥐, 그 한마디에 현 정권의 상징은 ‘훅 갔다’. ‘쥐21’, 대통령이 사랑하는 21마리의 쥐라는 게 대학가의 얘기다.

자, 이 시점에서 진지한 질문 한 번 던져보자. 만약 다음 정권을 반MB 진영이 잡는다면, 그 정권의 이름은 무엇이 되는 게 옳은가? 손학규 정권, 정세균 정권, 이런 이상한 이름 말고….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는 신라 향가 해석으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의 ‘몇 어찌(幾何)’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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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선거 때가 되면, 나한테 비례대표 출마하라고 여기저기서 온다. 물론 선의로 하는 얘기지만, 지금까지도 안 했고, 앞으로도 할 생각이 없다. 정치를 안해 본 건 아닌데, 내가 정치를 잘 못한다는 건 이미 수년 전에 증명이 끝난 일이다.
내가 하던 활동은 녹색당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창당에 필요한 광역별 일천명, 즉 오천명을 모을 능력이 없었다. 오천명도 못 모으느냐? 서울과 경기도에는 녹색당이 필요하다는 시민이 그 정도는 되는데, 문제는 다른 지역이다. 광주에서 민주당 아닌 당 만든다고 하면 배신자 소리 듣고, 경상도에서 한나라당 아닌 당 만들자고 하면 정신병자 취급받는다. 울산에서 민주노동당 아닌 당 만든다고 하면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라고 한다.
시민사회 일각에서 녹색당 창당 움직임이 있었고, 그때 정책실장을 맡으면서 당원을 모으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지금 생각해도 참 어렵고 피곤한 일이었다.

시민사회에서 ‘정치세력화’라는 주제로 본격적인 창당 논의가 시작된 것은 2002년 즈음의 일이다. 주로 풀뿌리단체와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지방선거에 후보를 내기 시작했고, 환경운동연합의 활동가였던 김혜련 의원이 전국 최연소로 당선되는 등, 활동가 출신 기초의원이 생겨나면서 논의에 불이 붙었다.

시민사회와 정치권 사이의 관계는, ‘끼어들기’와 ‘새판짜기’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되었다. 끼어드는 건, 개별적으로 입당하면서 출마를 하거나 당직을 맡는 걸 의미한다. 그걸 정당에서는 ‘새 인물 모시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보통은 비례대표로 나갔다가 다음 번에 출마하는 방식이 된다. 넓게 보면, 민중당 출신이었던 이재오나 김문수도, 현실적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끼어들기 전략을 쓴 건데, 너무 끼어들어서 ‘낑겨버린’ 셈이 되었다.


새판짜기는, 말 그대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새로운 정치틀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렇게 부른 사람은 없었지만, 시민당 흐름과 녹색당 흐름,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논의가 진행되었다. 간단히 말하면, 참여연대가 주축이 될 거냐, 환경운동연합이 주축이 될 거냐, 그런 거였다.
녹색연합은 이미 녹색평화당을 창당한 적이 있는데, 결과가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참여연대와 환경운동연합이 손을 잡으면 언제든지 민주당을 제치고 더 큰 정당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두 단체가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방향이 같지 않아서 그렇게 논의가 합쳐져 진행되지는 않았다.

사람으로 보자면, 정대화 교수가 이끌던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가 대체적으로 참여연대 그룹이 주축이 된 논의축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 번 대선 때 민주당에 대거 입당하면서 결국 끼어들기 전략으로 수정이 되었다. 최근 김기식 위원장이 주축이 된 ‘빅텐트’ 진영이 결국 이런 끼어들기의 연장선 위에 있는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 유학파 교수들이 많았던 이 흐름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미국식 양당체제이다.

녹색당 흐름은, 기본적으로는 유럽식 다당제 그리고 연정이라는 틀 위에 서 있다. 실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녹색당이 생겨난 것은 단순한 생태운동만이 아니고, 여성·평화 등 기존의 사민주의 가치로 잘 담기 어려운 시민사회의 흐름들이 결국 녹색당이라는 형태로 모이게 된 것이다.
나는 3년 동안 이 일을 했는데, 너무너무 힘들어서 결국 포기했다. 세상에는 뜻과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그게 딱 노무현 시절이었다. 노무현 정부가 토건으로 맹돌진하는 걸 보면서, 그건 아니다라는 얘기를 계속 했고, 왜 우리에게 협조하지 않느냐, 그런 얘기를 엄청 들었다.

끼어들기 전략은, 개인에게는 정말 편한 전략이다. 시민운동을 하다가 결국 공천 받는, 그 필승의 공식을 시민단체에서는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쪽이 정말 시민사회의 정치세력화 논의가 궁극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길인지, 우리 모두 좀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민들이 사회운동에 나서고 정치운동에 나서는 것은 이 사회를 지금보다는 낫게 만들어보자는, 그런 기본적인 동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러나 두 번이나 민주당 정권을 세우고도, 진짜 이 나라 경제가 나아졌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우리편 사람이라고 했던 침묵의 동의, 그게 노무현 정권이 결국은 붕괴한 이유 중 하나이고, 시민단체와 시민이 멀어지게 된 진짜 이유가 아닌가 싶다. 2000년대의 시민운동, 도대체 우리가 얻은 게 뭐고, 왜 노무현 정권이 붕괴하면서 정말 이상한 대통령이 이 나라를 꼴랑 집어삼키게 되었는지, 이 시점에서 좀 곰곰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다음 대선에서 박근혜에게 그냥 이 나라를 넘겨주고 싶지는 않다. 왜 졌는지 생각해보지도 않고 그냥 힘을 모으자? 힘은 그렇게 모이는 게 아닐 성싶다.


※ 우석훈의 ‘시민운동 몇 어찌’는 신라 향가 해석으로 유명한 양주동 박사의 ‘몇 어찌(幾何)’라는 수필에서 인용한 단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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