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삼성이랑 아무 상관없는 사람이에요.” 어제 아침 한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로부터 들은 말이다. 나는 삼성전자서비스 ○○센터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었고, 그는 하루 15시간 노동의 고된 발걸음에 나서던 중이었다. 무더운 여름 하루도 쉬지 않고 삼성전자서비스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삼성전자 제품을 가득 안고 나서는 그가 왜 그렇게 말했을까? 순간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설국열차>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아이를 뺏긴 한 남자가 팔이 잘리는 형벌을 받았을 때, 열차의 2인자 메이슨은 남자의 머리 위에 구두를 올려놓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다. 구두는 머리에 쓰는 것이 아니듯 꼬리칸의 ‘천박한 것들’은 이곳의 질서를 넘어서는 행동을 ‘감히’ 자행해선 안된다고 말이다. 우리는 이미 현실에서 이런 강요된 질서를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다.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으로, 하청노동자는 하청노동자로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겠다는 헛된 희망은 애써 짓누르면서 말이다.


영화 설국열차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꿈이 ‘헛된 희망’으로 취급받는 세상에서 꿈을 품고 행동에 나서는 것은 분명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쩌면 스스로 삼성과 무관하다고 말한 그 노동자는 애써 ‘희망’ 품기를 포기한 것인지도 모른다. ‘꼬리칸’의 천박한 사람들이 엔진으로 나아가 ‘해방’의 꿈을 품은 것과 다르지 않은 무수한 역사가 우리에게 ‘패배’로 기록돼 있기 때문이다. 특히 지난 십년간 노동운동이 깊은 좌절 속에서 분열과 후퇴를 반복해왔으니 이를 지켜봐온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접고 희망 품기를 포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혁명의 꿈을 품은 꼬리칸 사람들도 그런 ‘의심’을 지닌 옛 친구를 만난다. 그는 함께 앞으로 가서 싸우자는 동료에게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라며 거절한다. 우리 역시 그 옛 친구처럼 지배계급이 만든 질서를 벗어나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다.


삼성전자서비스 협력 노조 창립 (경향DB)


얼마 전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들이 전국금속노동조합에 집단가입하며 삼성에 맞선 단결된 행동을 개시했다.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여름휴가일랑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그들에게 노동조합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최후의, 최고의 보루다. 보름여 만에 노동조합 가입자가 2000명으로 늘었다고 하니 ‘무노조 경영’과 하루 12시간 노동이라는 초헌법적 경영원칙을 고수하던 삼성전자엔 당황스러운 사건이 됐다. ‘바지사장’들을 불러 모아 어떤 방책을 알려주었는지 교섭을 요구하는 노조에 돌아오는 답변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삼성전자서비스 엔지니어들은 제품 수리 후 “저희 제품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넨다. 그러나 삼성전자서비스 사측은 근로기준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에게 “여러분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닙니다”라며 매몰차게 답하고 있다. 사측이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며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선 보다 많은 노동자들이 뭉치고, 고용노동부 역시 관리감독의 역할을 제대로 해야 한다. 위장도급과 부당노동행위 고소에 늑장 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연 고용노동부가 탈법 자본의 편인지, 땀 흘려 일하는 이들의 편인지 의구심을 갖게 만들 수밖에 없다.


노동조합은 우리 헌법이 보장하는 노동자들의 권리이다. ‘주어진 질서’를 넘어 모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그리고 여전히 헌법과 근로기준법을 어기며 노동자를 억누르고 있는 것은 누구인가? 노동자들의 인권이 심각하게 저해받는 한국 사회에서 다시 ‘꿈’을 꿀 수 있다는 용기를 전하고 있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무한한 지지와 연대를 보낸다. 항상 소비자로서 그들을 대했던 우리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들에게 이미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삶을 바꾸는 것은 정치인들이 우리 대신 무언가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뭉쳐 싸우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들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홍명교 | 사회진보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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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20대 담론’이 지난 몇 년간 유행했지만 수많은 논의들이 냉소와 한탄으로 끝난 이유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자. 2차 세계대전 이후 서방세계 및 동아시아의 경제가 급속도로 성장하면서, 급진적 무장투쟁을 통해 체제의 붕괴를 꾀하는 방법론은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고 헌법 개정을 이루어내면서 이후 안정적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꾸거나 적어도 유의미한 영향을 주려면 결국은 정치적으로 결집해야 한다.


군 입대 전 직장을 그만두고 현재 자유기고가 겸 번역가로 살아가고 있는 필자는 국민건강보험공단에 의해 지역가입자로 분류되어 있다. 혼자 살고 있으므로 부양가족은 없으며, 현재 월세로 살고 있는 집의 세대주이기도 하다. 물론 어찌어찌 생활은 하고 있으나, 알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객관적으로 스스로를 바라본다면, 백수에 가까운 프리랜서라고 할 수 있겠다.


(경향DB)


그런데 이 유사 백수의 모습은, 이른바 ‘번듯한 직장’을 구하지 않거나 못한 상황에서, 자신의 부모와 떨어져 살며, 거주지에 제대로 주민등록을 해서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진 젊은이의 한 표본이기도 하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바로 나와 같은 이런 인원들을 지역가입자로 분류하는데, 그러면 통상적으로 같은 월수입을 얻는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건강보험료가 부과된다.


젊은이가 스스로 세대주가 되고 해당 지역의 투표권을 가지고 나면, 어깨 위에 얹히는 짐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방금 볼멘소리를 하긴 했지만 나는 그 책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편이다. 첫 주민세를 낼 때 매우 큰 뿌듯함을 느꼈다. 하지만 지자체 및 관공서에서 날아오는 몇 종의 고지서를 읽어보고 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1인 가구를 염두에 두지 않고 설계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호주제는 폐지됐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사람’이 아니라 ‘가구’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지역가입자 문제를 다시 살펴보자. 검색 사이트에서 ‘대학가 원룸 시세’를 입력하면 대체로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이 표준가로 나온다. 건강보험공단의 보험료 산출 방식에 따르면, 가령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원룸에 사는 사람이나, 구하기도 힘든 3000만원짜리 전세에 사는 사람이나, 같은 금액의 임대차계약을 맺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며 따라서 해당 항목에서 동급 판정을 받는다.


사회에 첫발을 들여놓은 젊은이의 입장에서 보지 않더라도, 전자와 후자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리고 필자처럼 미혼인 데다 아직 만 35세가 되지 않은 사람은 정부에서 보증하는 전세자금대출을 받을 수도 없다. ‘사람’이 아니라 ‘가구’가 표준 단위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이 생활하는 지역의 유권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단지 소비자에 머물게 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이 바로 ‘부재자’, 즉 있지만 없는 자들이다.


(경향DB)


서울, 그 중에서도 특정 지역은 젊은이들의 비율이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높은 편이다. 왜 그런 곳마저도 ‘88만원 세대’에서 말하는 ‘바리케이드’ 노릇을 하지 못할까. 그 젊은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나열한 것과 대동소이한 이유로 인해 자신의 실제 거주지 및 활동 반경이 아닌 어딘가의 투표권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역에 기반한 젊은 세대의 정치가 스스로 싹틀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진다.


대학가에는 젊은 주민이 아니라 ‘부재자’들이 모여 있을 뿐이다. 작은 단위의 지자체 선거는 그들에게 의미가 없다. 큰 선거에서는 그저 대의명분에 휘둘려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이다. 특정 지역을 자신의 표밭으로 삼아 가장 낮은 단위부터 한 단계씩 성장하는 정치인이 나올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부재’하는 상황이다. 이 근본적이고도 제도적인 한계를 고민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의 정치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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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청와대 청년위원회 출범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청년 창업과 관련해 “부모님이 자식 생각하듯이 한번 도와줬으니 됐다가 아니라 일어설 때까지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정부가 가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정말 주옥같은 말이다. 창업을 했거나, 하려는 청년들에게는 장마에 비 그친다는 말처럼 반가운 소식일 것이다.


나 역시 내 주변에 창업으로 울고 웃는 청년들이 넘쳐난다. 같은 사무실에 있는 친구도 최근에 창업지원 프로젝트에 선정되었다고 참 기뻐했다. 지난 설연휴에는 고향에서 만난 친구가 커피숍을 낸다고 온갖 돈을 다 끌어오고 대출까지 받았단다. 오랜만에 만난 그는 목 좋은 곳을 찾는다고 나를 끌고 온 시내를 돌아다녔다. 얼마 전에는, 커피숍을 낸 지 1년 정도 된 후배가 운영이 어려워 가게를 닫는다고 했다. 자주 들여다보지는 못했지만, 아담하고 깔끔한 인테리어며 맛 좋은 커피향이 시트콤에 나오던 청춘들의 아지트 같아 괜시리 행복했었는데 커피 한 잔 더 팔아주지 못한 게 너무나 아쉬웠다. 이렇게 내 주변에도 창업을 둘러싼 시작과 끝이 하루에도 몇 건씩 발생하고 있다.


박대통령, 청년위원회 위원들과 웃으며 회의장으로 (경향DB)

하지만 이러한 창업은 어느새 자신의 꿈을 좇는 도전의 장이 되지 못하고 있다. 자발적 창업자보다, 일자리가 없어 창업이라도 해서 살아보겠다는 소위 ‘비자발적 창업자’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영업 인구 중에 증가세를 보이고 있는 연령대가 50대, 60대 다음으로 20대라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물론 스스로 창업을 선택하는 청년들도 늘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20대 자영업자들은 주도적으로 창업을 선택했다기보다 창업으로 내몰렸다는 표현이 더 적절한 듯하다. 좋은 일자리에 취업하는 문턱은 높은 반면, 정부와 지자체가 앞다투어 지원하는 청년 창업은 문턱이 낮기 때문이다. 취업을 하더라도 고용 불안이나 저임금 일자리로 인해 안정된 미래를 준비하기 어려운 탓도 있다.


청년일자리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겠으니 창업이라도 해라. 이명박 정부가 내세운 청년실업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박근혜 정부 또한 이 기조의 연장선에서 청년창업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좋은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서야 하는 대기업들은 손을 놓고 있고, 청년실업을 해결하라는 사회적 요구는 대단히 높다. 이런 조건에서 정부는 ‘창업’이라는 궁여지책의 공간을 활용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일어설 때까지 지원하겠다’는 말이 청년들에게 또 다른 희망고문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창업을 성과 위주의 일자리 정책으로 몰아가서는 안된다. 이는 마치 일자리를 책임져야 할 기업과 정부의 책무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외환위기 이후 퇴직금을 받아 치킨집을 낸 아버지와 졸업 후 좋은 일자리가 없어 창업 지원금으로 커피숍을 내는 자녀들의 처지가 무엇이 다를까?


청년 CEO들과 화이팅외치는 안철수 (경향DB)


또한 실패해도 좋을 생태계를 만들어야 한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가 불가능한 환경에서 창업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은 범죄와도 같다. 창업이 활성화되고, 누구나 도전할 수 있으려면 실패를 당당히 말할 수 있고, 실패 후의 삶이 실패 전의 삶만큼이나 유지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창업지원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 실패자들을 위한 튼튼한 사회안전망이다. 이제는 창업을 부추기기보다, 지난 정부에서 창업으로 고통받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구제해 줄 정책을 펼쳐 나가는 것이 더 시급해 보인다.


불통과 권위의 리더십을 보이는 박근혜 정부에서 얼마나 창조와 혁신이 만들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왜 삼성은 닌텐도를 개발하지 못하냐’고 호통쳤다던 이명박 전 대통령과 똑같은 절망을 청년들에게 안겨주고 싶지 않다면 자신이 한 말 그대로를 실천해 주기를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부탁드린다.



김영경 | 함께사는서울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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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게 비가 내리는 여름이다. 몇 년 전, 이런 식으로 계절감을 잃어버리고 지낸 적이 있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출발해 사무실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는 출퇴근을 반복하던 때였다. 어느 순간 내가 더 이상 일기예보를 확인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씨에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사무실과 집은 물론이고 마트나 영화관 등 자주 가는 대부분의 장소에도 지하주차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차를 지하에 댄 후 엘리베이터를 타고 실내에 도착하면, 밖의 날씨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것이었다.


(경향DB)


계절과 상관없이 적당한 습도와 온도, 그리고 조명까지 유지하는 실내에 앉아 통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는 풍경은 바로 그 느낌과 비슷하다. 한 발짝만 밖으로 나가면 우산을 써도 사정없이 들이치는 비바람을 느낄 수 있는데, 그 비바람과 유리창을 때리며 흘러내리는 빗물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인데도 나와는 상관없다는 느낌, 가방을 챙겨 일어나는 순간 내게 다가올 일인데도 실감나지 않는다고나 할까. 모기에게 물어뜯길 위험이 높은 자연 속 ‘캠핑(camping)’보다 자연 속 분위기를 느끼되 필요한 도구들이 모두 갖춰진 곳에서 안락하게 즐기는 ‘글램핑(glamping)’이 대세인 것처럼, 우리는 연출된 현실과 바라보는 역할에 익숙하다. “내 남자친구는 모니터 속에 있다”고 사뭇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젊은 세대를 비롯해 컴퓨터 모니터와 스마트폰 창을 통해 보는 세계가 현실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아파트 단지 (경향DB)


아파트에 사는 느낌이 꼭 그렇다. 층층마다 똑같은 구조의 거실에 놓인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는 풍경의 반복이다. 아파트 단지는 ‘개인의 고유한 삶’이라기보다는 ‘표준화된 도시인의 삶’을 재현하는 공간에 가깝다. 아파트뿐만이 아니다. 우리 대부분의 일상은 골목과 동네 상권을 집어삼키며 날로 거대해지는 편의점과 마트-각종 프랜차이즈-산부인과-노인요양시설-상조업체와 장례식장 안에서 표준화되는 중이다. 이 과정은 박철수 교수의 신작 <아파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돼 있다. 박 교수는 “우리는 규격화된 삶의 유지를 위해 창조적 노동을 생활의 편리로 바꾸고, 이 모두를 돈으로 해결한다. 그리고 그 비용은 철저한 먹이사슬 구조에 따라 거대기업과 대형 유통업체로 유입된다”문제는 ‘아파트’가 아니라 ‘아파트 단지’라고 지적한다.


우리는 거대 유동자본이 주도하는 삶에 포박돼 표준화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는지도 모른다. 그 착각 속에서 우리는 열심히 돈을 벌고, 아파트를 사고 마트와 각종 체인점을 들락거리며 그 돈을 소비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마트, 롯데마트, 홈플러스, 코스트코 중에 어디를 이용하느냐 혹은 스타벅스, 투썸플레이스, 커피빈, 카페베네 가운데 어느 유리창 앞에 앉아 있느냐 정도의 차이뿐일지도 모르겠다. 그 사소한 차이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기억과 추억은 닮은꼴이 되고, 모두의 이야기는 점점 비슷해질 것이다.


자본주의의 피라미드…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생얼’ (경향DB)


조명 밝힌 화사하고 환한 유료 공간들을 얻는 대가로 우리는 잃어서는 안되는 소중한 것을, 돈을 내도 만들어낼 수 없는 그 무엇을 지불하는 중이다. 두부만 해도 그렇다. 내게 두부는 김이 펄펄 나는 통에서 한 사발 푸짐하게 떠 주는 뜨끈뜨끈한 순두부였고, 두부 트럭 주위에 모여 은근슬쩍 덤도 챙기던 소박하지만 즐거운 저녁시간과 동의어였다. 이런 기억들이 쌓일 때 한 사람의 일생은 다양한 빛깔로 채워질 것이다. 두부를 보고 마트의 1+1 두부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의 추억이란 얼마나 초라한가.


돈을 내도 해결되지 않는 그 무엇들을 복원하기 위해, 이제 창밖으로 나와 비바람을 마주할 때다. 미술가 임민욱의 말처럼 ‘기억을 박탈당한 멍청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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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2일부터 45일에 걸쳐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시작됐다. 국정조사라는 하나의 무대를 만드는 것에는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국정원 파동이 벌어지던 지난 몇 주를 돌이켜볼 때, 야권에서 제대로 된 ‘결정타’를 날리는 장면을 상상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여권과 국정원이 이른바 ‘NLL 포기 발언’을 폭로하면서 만들어낸 ‘안보 프레임’을 이겨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박근혜 대통령 역시 “우리의 NLL 북방한계선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로 지”킨 곳이라며 한마디 거들고 나섰지만, ‘그럼 우리나라를 지키지 말자는 거냐’는 비판 앞에서 야권은 할 말을 잃는다.


이런 식으로는 결코 현 국면을 타개할 수 없다. 기껏 해봐야 ‘절차 대 안보’라는 가짜 논쟁에 휩싸여 휘청거리다, 점점 수적으로 고립되고 있는 노무현 지지자들의 집단 분노 속에서 맴돌게 될 뿐이다. 문재인 의원을 중심으로 한 야권에 요구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다.


문재인 "원본열람해 'NLL포기' 사실이면 정치 그만두겠다" (연합뉴스)


첫째,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대북송금특검에 대한 입장을 바꿔야 한다. 외교 문제, 그 중에서도 가장 민감한 북한 관련 사항의 뚜껑을 국내의 정치적 이유로 열어젖힌 사건이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는 국정원이 아니라 노무현 정부가 먼저 열었다. 김정일을 향해 ‘외교적 수사법’을 펼치는 노무현을 옹호하면서, 김정일을 향해 ‘외교자금’을 보낸 김대중 정부를 수사하는 것을 정당하다고 강변하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외교의 영역은 어디까지나 외교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그 기준선은 참여정부 이전에까지 적용돼야 한다.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갈라진 야권 지지자들을 규합하는 일 또한 요원할 뿐이다.


둘째, 정상회담 회의록에 나온 내용 중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가령 ‘평화의 공동수역’ 같은 것. 한국 해군이 NLL까지 전부 순찰을 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어선 및 군함들이 경계를 넘어와 무력 충돌을 일으키곤 한다. 심지어 한국의 영토인 연평도에 북한은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정직하게 말해보자. 과연 우리가 북한과 중국을 그토록 논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는 힘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긴 한가? 올해 들어 북한은 개성공단에서 벌어들이는 몇 푼의 달러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평화의 공동수역’이 소말리아 앞바다처럼 되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우려를 감출 수 없다. 참여정부 인사와 그 지지자들이 아닌 한, 그렇게까지 북한을 믿어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셋째, 북한에 대해 온정적인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훨씬 적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대북 포용정책 이전에 북한이라는 ‘리스크’를 어떻게 관리할지에 대해 국민들을 안심시키겠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기회가 된다면 “연평도는 우리땅”이라고 만세라도 불러야 한다는 뜻이다. 아닌 게 아니라 만약 일본이 독도에 포격을 했다면 지금 우리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통일의 꽃’ 임수경을 보고 환호하던 일부 고학력 중년층이 아닌 다음에야, 특히 젊은이들에게, 북한은 그저 또 하나의 외국일 뿐이다. 한국인의 목숨보다 북한 정부와의 관계를 중시한다는 뉘앙스가 조금이라도 남아있는 한 야권은 ‘안보’ 프레임에서 백전백패할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7일 청와대 회담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경향DB)


결론을 내보자. 죽은 노무현은 살아있는 박근혜를 이길 수 있다. 노무현의 ‘유훈’을 곧이곧대로 지켜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가능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저들’의 비아냥을 이겨낼 수 있다. 후대의 사정에 따라 언제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뀌어야만 한다.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도 크게 달라졌고, 특히 핵실험까지 성공시킨 마당에, 이미 공개된 정상회담 회의록 속의 노무현을 지키는 것에 급급한다면, 야권에 미래는 없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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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지자체에서는 처음으로 서울시에 프랜차이즈 분야 ‘불공정피해상담센터’가 개소됐다. 서울시는 중앙정부도 미처 신경을 쓰지 않던 시기에 청년고용할당제와 표준이력서를 도입하고, 대형마트 상생품목을 발표했으며 서울형 기초보장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개별 정책에 대한 호불호와 평가를 떠나 이러한 정책은 과히 선도적이라 할 만하다. 적어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정책 집행에서만큼은 할 수 있는 근거보다, 안 되는 이유가 더 많은 한국 사회에서, 중앙정부도 아닌 지방정부가 그러하니 말이다.


물론 가지 않은 길이기에, 지방정부의 역할이 아니라는 등 볼멘소리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현재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불공정피해상담센터의 상담예약이 꽉꽉 들어차는 걸 보면, 어려운 사람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에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역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커져간다. 오히려 공정거래위원회까지 갔다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서울시 상담센터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는 경우가 절반을 넘는다. 공정거래위는 상담인력이 부서와 상관없이 순환으로 근무하다보니, 상담을 통한 해법 모색이 쉽지 않은 구조다.


화장품 가게 (경향DB)


나는 이 상담센터의 코디네이터로 참여해 애끊는 사연들을 매주 접하고 있다. 연령도, 업종도, 불공정의 형태도 너무 다양해서 유형화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그만큼 프랜차이즈의 불공정 행태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해 그야말로 ‘창조경제’를 창출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대기업일수록 불공정행위의 도가 지나치고, 중소기업이라도 대기업과 합병하거나 몸집을 부풀리면서 대기업의 그것을 적용한다. 여기에 대형마트나 백화점이 낀 ‘샵앤샵’의 경우는 문제가 더욱 복잡해진다. 본사와 대형마트 간에 어떤 계약이 체결되었는지 가맹점주들에게 제대로 알려 주지 않은 채, 그걸 무기로 말을 안 들으면 쫓겨난다는 협박이 일상이다.


남양유업 사태에서 빚어진 밀어내기와 유상할당은 이 업계의 기본이다. 이런 상담을 받고 있자니 슈퍼에서, 화장품 가게에서 연일 진행하는 ‘1+1’ 할인 행사도 달갑지가 않다. 싸다며 좋다고 사 먹던 할인상품이 결국은 가맹점주의 고혈을 짜내는 거였다니, 우리의 일상이 온통 프랜차이즈와 프랜차이즈의 불공정거래에 볼모로 잡힌 것 같다. 상담센터를 찾아왔던 나보다 나이 어린 화장품 가맹점주의 빨개진 눈과 떨리는 목소리가 자꾸만 겹쳐진다.


지난주 상담에는 공교롭게도 나와 동갑인 가맹점주가 두 명이나 있었다. 한 명은 언니와 함께 직장을 그만두고 모아둔 돈으로 가게를 냈는데 가까운 거리에 본사에서 똑같은 가게를 또 내준 것이다. 매출이 뚝 떨어진 원래 가게 주인은 가게를 접고 싶지만, 애매한 법 규정으로 폐업을 하면 막대한 손해를 보고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한 명은 남자 가맹점주였는데 이분 역시 빚을 내서 가게를 시작했다. 본사의 약속 불이행으로 적자만 늘고 있지만, 구제 방법이 없어 빚만 불리고 있는 셈이었다.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은퇴한 중년의 한 부부는 이러한 문제 때문에 남편이 대상포진에 걸리고, 가게를 내자고 조른 부인이 죄책감에 시달려 가정이 해체될 위기에까지 갔다고 한다.


대부분은 상담에서 폐업하기를 원한다고 밝혔다. 본사의 패악질에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은 장사를 이어갈 힘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담을 진행하는 내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근원적인 질문이 계속 맴돈다. 본사의 책임이 명확해서 일정의 보상을 받은 후 폐업을 한 그들은 그 이후에 어떻게 살아갈까? 자영업의 굴레가 아닌, 안정된 일자리를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상담을 끝내고 나가는 그들의 진짜 외로운 싸움은 그 문을 나설 때부터다. 그들이 마주하게 될 잔인한 일상과 거대한 프랜차이즈 벽 앞에서 그들이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는 길, 그 길을 마련하기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모두가 머리를 맞댈 일이다.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2011 프랜차이즈·창업 부산국제박람회' (경향DB)



김영경 | 청년유니온 초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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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퇴근길이었다. 신호대기 중에 횡단보도를 바라보고 있는데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보이는 아이가 김밥 한 줄을 손에 쥐고 우걱우걱 먹고 있었다. 아이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은 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능숙하게 은색 호일을 벗겨가며 김밥을 먹었다. 보는 내가 다 목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그 아이의 표정은 덤덤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도 김밥 먹는 것을 멈추지 않는 그 아이의 뒷모습에서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갑자기 떠올랐다.


꽤 오래전 영국에서 잠시 인턴 생활을 한 적이 있다. 출근 첫날,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아무도 밥을 먹으러 가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냉장고를 열고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그릇에 담고 각자 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하거나 책을 보면서 밥을 먹는 게 아닌가? 아침 티타임에 다정하던 사람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내게 누군가 너도 사온 게 있으면 먹으라며, 사온 게 없으면 나가서 먹고 오라고 알려주었다. 황망히 나가 샌드위치를 사들고 들어왔을 땐 거의 모든 사람들의 식사가 끝나 있었다.


지금은 한국에도 1인용 테이블을 갖춘 식당이 제법 생겼고, 혼자 밥 먹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많이 덜하다. 그래도 여전히 분식집이나 푸드코트가 아니면 혼자 밥을 먹는 것은 어려운 ‘미션’이고, 공부는 각자 하다가도 밥은 같이 먹는 ‘밥터디’(밥+스터디)가 생길 정도로 밥만큼은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 하지만 시간에 쫓겨 끼니를 때워가며 일해야 먹고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함께 먹는 밥’마저 사치일 뿐이다. 류동민 교수의 신간 <일하기 전엔 몰랐던 것들>에는 기사 식당의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돼지불백인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운전 중 들릴 화장실이 마땅치 않아 노상 방뇨를 많이 할 수밖에 없는 택시기사들이 화장실을 적게 가기 위해 국물 없는 메뉴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주머니 얇고 시간 없는 노량진의 수험생들에게 ‘혼자서, 빠르고, 값싸게’의 삼박자를 충족시킨 컵밥이 최고 인기 메뉴였던 것과 다르지 않은 서글픈 현실이다. 그러니까, 지금 한국에서 ‘혼자 먹는 밥’은 개인의 호불호와 기호에 따른 선택사항이라기보다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정해진 답에 가깝다는 얘기다.


‘나홀로 먹기’를 강요하는 노동 조건은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를 어렵게 만든다. 사람들의 관심이 다른 쪽으로 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빵을 치킨패티로 대체하고 그 사이에 베이컨과 치즈를 넣어 출시한 버거가 엄청난 칼로리에도 불구하고 폭발적인 인증 열풍을 불러온 바 있다. 내장파괴버거, 죽음의 돈가스 등의 ‘괴식’과 ‘역전! 야매요리’ ‘코알랄라’ ‘오무라이스 잼잼’을 비롯한 음식 웹툰의 인기는 혼자 밥을 먹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허전함을 달래는 방편이 아니었을까? ‘짜파구리’를 유행시킨 ‘먹방 스타’ 윤후의 뒤에는 인터넷 방송의 실시간 ‘먹방’(먹는 방송)을 시청하며 밥을 먹는 15만명(하루 기준)이 존재한다.

KBS방송 캡처

그래서일까, 결혼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가 “같이 밥 먹는 사람이 생긴다는 게 너무 좋아서”라는 친구도 있었다. 자기가 차려 주는 걸 맛있게 먹는 모습도 예쁘고, 연인이 차려 주는 밥이 그렇게 맛있었다고. 특별한 메뉴를 상다리가 부러지게 차린 것도 아니고, 갓 지은 밥에 김치와 반찬 몇 개에 어설픈 솜씨로 끓인 국과 동그랑땡 정도가 전부였는데도 그 밥이 그렇게 맛있어서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는 거다. 하지만 그 얘기를 들으면서 축하보다는 걱정이 앞섰다.


주당 노동시간 세계 1위’의 한국 사회에서 친구 부부는 과연 한 달에 몇 번이나 알콩달콩 저녁밥을 차려 나눠 먹을 수 있을까? 아이가 혼자 김밥 먹으며 학원에 가지 않도록 키울 수 있을까?'


누구나 함께 밥 먹을 시간을 선택할 권리가 있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혼자 먹고 싶은 사람은 혼자,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은 같이 먹을 수 있는 선택의 기회마저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노동은 대체 무엇을,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영화 <황해>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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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어릴 때 불만이 많고 이것저것 따져 묻기를 좋아해, 대부분의 전래동화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특히 황희 정승이 나오는 것들은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너도 옳다, 그래 너도 옳다, 아니 이런 네 말도 옳다 하는 그런 것 말이다. 두 사람의 갈등을 해결해줘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이 ‘양비론’이나 ‘양시론’을 택해서야 쓰겠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던 기억이 난다.


이 문제의식에는 지금껏 아무런 변화가 없다. 양비론과 양시론은 모두 제한적인 경우에만 옳다. 모든 발화 주체에게는 나름의 문제와 결격 사유가 있겠지만, 매 순간에는 주제라는 게 있는 법이고, 그것으로부터 일탈하기 위해 상대방의 자격 따위를 따져 묻기 시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간베스트’(일베)라 불리는 사이트에 대한 온갖 논의들을 보고 있자니, 양비론자로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꼭 해야 할 말이 생겼다.


일베 사용자들이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다른 성격을 지닌 웹사이트(‘오늘의 유머’ 등)에서 그들을 조롱할 때, ‘일베충’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경향신문을 포함한 몇몇 언론의 보도를 통해 알고 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시피, 이 단어는 ‘일베’와 ‘벌레 충(蟲)’자를 합성한 것으로, 그 의미는 문자 그대로 ‘일베에 사는 벌레’ 정도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칼럼을 읽는 독자분은 혹시 ‘이회충’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가. 최근까지 활발하게 사용되는 어휘는 아니고, 주로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까지, 당시 여당의 대선 후보였던 노무현을 지지하는 웹사이트에서 많이 쓰인 표현이다. 당시의 기억을 되짚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연상할 수 있다시피, 이것은 당시 노무현의 경쟁 상대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선 후보의 이름과, 대한민국이 못 살고 가난했던 시절 서민들을 괴롭혔던 기생충인 ‘회충’을 합성한 것이다. 그 의미는 따로 풀어서 설명하지 않기로 하겠다.


(경향DB)


노무현 전 대통령의 열성적 지지자, 혹은 그렇게까지 뜨거운 지지자는 아니더라도 사람이 사람을 칭하는 데 있어서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베에서 노무현을 ‘노구리’(노무현+개구리)나 ‘노운지’(노무현+운지·투신자살을 뜻하는 은어) 등으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면 대단히 착잡한 기분을 느끼거나, 분노할 것이다. 나도 그런 언어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시 한번, 양비론자가 될 위험을 무릅쓰고, 묻자. 그 ‘일베하는 애들’은 대체 그런 말버릇을 어디서 배웠을까?


적어도 필자가 이 글을 쓰는 6월4일 새벽까지는, ‘그들은 우리에게 정치의 언어를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을 단 한명도 찾지 못했다. 이회창을 ‘이회충’이라고 부르고, 이명박을 ‘쥐박이’라고 하던 그 얄팍한 ‘풍자’와 ‘해학’이 목적을 잃고 떠돌다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에 실망해버린 새로운 인터넷 사용자의 손에 넘어갔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정치를 분석하고 또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대신, ‘조중동’이나 ‘수꼴’ 같은 타자를 만들어서 몰아세움으로써 이쪽의 올바름을 증명하는 방식을, 왜 상대편이라고 쓰지 말아야 한단 말인가.



저들이 휘두르는 칼과 망치는 우리의 것을 더욱 과격하게 만든 것이라고, 솔직하게 인정하고 진심으로 후회하는 대신, 지금 신문 지면을 도배하는 것은 ‘대체 저들은 누구인가, 어쩌다가 저렇게 되었나’를 분석하는 사람들뿐이다. <거리로 나온 넷우익>의 저자 야스다 고이치는, 일본의 ‘일베’ 격인 재특회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당신의 이웃들입니다”라는 대답을 돌려준다. ‘일베’를 분석하기에 바쁜 논객들과 언론을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이 바로 그렇다. ‘일베의 정체가 뭐냐’는 질문을 들으면, “당신의 제자들입니다”라고 답해주고 싶어지는 것이다.

(경향DB)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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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운전을 하게 된 지 5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작한 운전은 신세계였다. 처음 차를 몰고 거리에 나선 날의 두려움과 설렘은 물론이고 음악을 크게 틀고 창문을 내리고 달렸던 여름밤, 뺨에 와 닿던 바람의 느낌까지 생생하다. 당연히 좌충우돌 시행착오도 많았다. 3일 만에 어처구니없는 접촉 사고를 내 뒷목 잡고 내린 앞차 운전자와 합의를 봐야 했다. 라이트를 끄고 내리는 것을 잊어버려 차를 방전시키고, 기어를 D에 놓고 시동이 안 걸린다며 패닉에 빠져 긴급 출동을 부르는 건 가벼운 축에 속했다. 한낮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돌아다녀 보다 못한 옆차 운전자가 와서 꺼주기도 했고, 라이트가 고장난 채로 밤에 고속도로에 진입했다가 기겁한 적도 있다.


실수가 줄어들고 운전이 익숙해지면서 나름의 원칙도 생겼다. 택시와 버스는 이기려 들지 말 것, 배달 오토바이와 자전거는 피해 갈 것, 수입차는 무서운 게 없으니 조심할 것 등.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원칙도 생겼는데 바로 기름값이었다. 처음에는 차계부도 쓰고, 유가 동향에도 귀를 기울이며 주유할 타이밍을 모색했다. 카드 할인이 되지 않는 주유소는 가지 않았고, 탱크를 채우고 다니면 연료 소모가 빨리 된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새겨 늘 3만원어치씩만 주유를 했다. 그러나 지금은 ℓ당 50원 이상 싸지 않으면 그냥 보이는 주유소에 들어간다. 기름값과 타협을 하고 나자 ‘과태료’란 돌발변수가 나타났다. 불법 주정차 과태료를 내고(내보신 분은 알겠지만 정말 아깝다!), 견인을 당해본 결과 과태료도 미리 내면 20% 감면 혜택이 있다는 것등의 소소한 팁을 생돈 들여 힘들게 알게 되었다. 결국 조금 귀찮더라도 주차장에 세우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싸다는 평범한 진리를 뒤늦게 터득했다. 자동차 검사는 미루면 미룬 일수만큼 과태료가 누적된다는 것도 겪어보고서야 알게 된 생활 속 지혜(?)였다.


차를 소유하게 되면서 가장 큰 변화는 ‘차’라는 변수로 인해 내가 전혀 다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의 발견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변화는 눈을 싫어하게 됐다는 것이다. ‘동심을 잃어버린 어른이 되어버린 걸까’ 싶으면서도 눈 예보 소식을 들으면 집에 갈 걱정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게다가 나는 어느새 어디를 가든 주차가 가능한 곳인지를 가장 먼저 따지는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단지 주차가 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재래시장 대신 백화점이나 대형 마트로, 오래된 영화관 대신 멀티플렉스 영화관으로 가는 일이 잦아졌다. 마음은 불편했지만, 편리함에 익숙해진 몸의 간사함을 이기기란 역부족이었다. 가까운 거리도 차를 끌고 가다보니 걷지 않게 되고, 당연한 순서로 살이 찌고 , 운동을 한답시고 돈을 들여 헬스에 등록해놓고, 안 간다고 내 돈 들여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가학의 코스까지 겪었는데도 달라진 건 없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운전자가 되어 도로로 나올 때까지 차를 소유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과 최소한의 자격 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차를 갖게 되면서 일어나는 생활의 변화폭을 감안하면 방기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자동차로 인해 야기되는 각종 문제의 책임은 고스란히 차를 소유한 개인의 몫이다. 정작 사람들은 자신에게 차가 필요한지, 산다면 언제 사야 하는지, 차가 생기면 어떤 점이 달라지는지,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전혀 교육받지 못한다. 그저 ‘차가 있으면 편하지 않을까’란 막연한 생각 정도로 차를 사고 운전을 시작할 뿐이다. 자동차 보유대수가 1900만대(2.7명당 1대)를 넘어섰는데도 차와 사람의 공존을 위한 어떤 고민도 요구하지 않는 곳이 바로 한국 사회다. 오늘도 거리에는 ‘저도 제가 무서워요’를 써 붙이고 나온 초보운전자들이 가득할 것이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운전면허시험 외에 자동차의 소유와 관련한 최소한의 교육이 필요한 때다. 아무런 준비 없이 길거리에 나왔던 5년 전의 나처럼 돈 들여가며 위험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같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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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은 ‘무주택자의 날’이다. 1992년 ‘주거권 실현을 위한 시민연합’에서 이날을 무주택자의 날로 정하면서 매해 철거민들이 중심이 되어 주거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행사를 해왔다. 하지만 주거권으로 실현되는 생존권의 문제는 더 이상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3년 전에 사귀던 남자친구가 조심스러운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전셋값이 너무 올라서 그는 자기가 가진 돈으로는 집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조그만 방에 월세로 살자니 밑 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내게 혼인신고를 해줄 수 없겠냐고 했다. 낭만적인 프러포즈와는 거리가 멀었다. 혼인신고를 하면 정부가 보증하는 전세자금 대출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보증금을 모으지 못해 창문 없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언제 이곳을 탈출하나 끙끙 앓던 나 또한 남자친구의 고민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그럼에도 전세자금 대출을 받으려고 혼인신고를 해줄 순 없었다. 헤어지면 어쨌든 공식 서류에 ‘이혼’이라는 기록을 남길 생각을 하니 선뜻 내키지가 않아 결국 거절했다.


하숙집과 월세방을 안내하는 광고전단 (경향DB)


서울시의 1인 가구는 4가구당 1가구로 지난 30년간 10배 이상 증가했고, 이 중 절반 이상이 경제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20~30대 청년층이다. 이들의 상당수는 주거비 부담을 감당하지 못해 고시원, 반지하, 쪽방 등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 도입된 최소주거기준에 따르면 1인 가구의 최소주거면적은 14㎡(4평)다. 고시원, 반지하, 쪽방촌을 전전하는 이들은 이런 최소기준조차 충족하지 못한 홈리스라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최소주거기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열악한 보금자리가 결코 저렴하지 않다는 것이다. 불안정한 주거환경에 노출된 청년들의 주거권 실현을 고민하는 ‘민달팽이유니온’의 자료에 따르면 고시원의 3.3㎡(1평)당 임대료가 타워팰리스보다 비싸다는 결과가 나왔다. 서울 시내 고시원의 3.3㎡당 임대료는 14만원에 달했다. 반면에 부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타워팰리스의 3.3㎡당 임대료는 12만원에 불과(!)했다. 창문 없는 고시원에 웅크려 잠드는 학생, 일용직 노동자, 기러기 아빠, 아주머니들이 강남의 부유층에 비해 비싼 임대료를 부담하는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부와 빈곤이 교차하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경향DB)


실제로 주변에서 월세를 구하는 청년들의 경우 적게는 30만원에서 많게는 70만원이 든다. 한 달 수입의 25~50% 수준이다 보니 50만원이 넘어서는 순간 혼자 살 수 없어서 좁은 방에서 2~3명이 모여 살기도 한다. 나이가 조금 들어 독립을 하겠다고 해도 온전한 자기 집을 가지는 게 아니다. 방 한 칸씩을 나누어 갖는 하우스메이트나 자신이 빌린 집을 다시 세놓는 셰어하우스 개념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다. 낯선 사람과의 동침으로 인한 불편함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참아내는 것에 비하면 사치일 뿐이다. 이 불편함이 싫어서 적은 돈으로라도 혼자만의 주거를 꿈꾸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대치는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이나 교통편이 불편한 달동네다. 물론 공간을 혼자서 점유하기보다 함께 나누는 셰어하우스가 대안일 수도 있지만, 연애와 결혼을 앞둔 청년들에게 독립은 모텔비를 아끼느냐 마느냐의 현실적인 문제인 것이다. 


어느 공기업의 광고가 외친다. “집은 사는(buy) 게 아니라 사는(live) 것이다”라고. 이 카피 문구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21세기 쪽방촌을 살아가는 우리의 현실 그 자체다. 앞으로 주거환경은 우리가 수돗물과 전기를 쓰고 공기를 들이마시는 것을 자연스러운 권리로 받아들이듯 사회 구성원에게 당연히 보장된 권리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더 이상 사고팔거나 돈을 굴리기 위한 부동산 문제가 아니라, 삶을 이어가기 위한 최소한의 기준으로 주거권을 고민해야 한다. 주거권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정의’가 절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주택의 공급 물량을 줄이고 가격부양 정책에 몰두하는 박근혜 정부의 행보가 우려스럽다.



김영경 | 청년유니온 초대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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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5일 밤 10시43분. 대구 동대구역 광장에서 한 남성이 문구용 커터를 꺼내들고 자신의 생식기 중 일부를 잘랐다. 이 황당무계한 자해사건을 일으킨 김모씨는, 언론 보도에 따르면 올해로 32세다. 사건 당시 만취상태였다는 그는 역무원 및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출혈이 많을 수밖에 없는 부위를 절개했지만, 생명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김씨는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이 있었고, 그래서 자식을 낳으면 자식에게도 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해, 본인이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육체에 상처를 내면서 쾌감을 얻는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자해사건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경우가 많다. 잊을 만하면 ‘독도는 우리 땅’ 같은 자명한 메시지를 일본대사관에 보내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거나 손가락 끄트머리를 살짝 따서 ‘혈서’를 쓰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인간에게는 그 누구보다 자신이 소중하다. 그럼에도 스스로 자신의 육체를 해쳐가며 어떤 행위를 한다는 것은, 그렇게 해서라도 타인의 이목을 끌어서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는 뜻이다.


일본 규탄, 칼로 자해하는 시민 (경향DB)


하물며 그런 경우에도, 차라리 배를 가르면 갈랐지 자신의 생식기에 손을 대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 필자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의 반응을 통해 짐작하건대, 거의 모든 남성들은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함께 느꼈다. 나이·직업·재산·소득수준 등을 뛰어넘어, 모든 남성들이 공감할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영역을 파고드는 충격적 사건인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김씨가 그 어떤 메시지도 전달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그는 스스로 유전자의 대를 끊기 위해 그런 엽기적인 행동을 했을 따름이다. 여기까지 생각해보면 더 이상 이 사건은 한낱 해프닝으로 간주할 수 없다. 2013년 5월5일 어린이날에 벌어진 이 익명의 사건, 32세의 한 남성이 벌인 ‘유전적 자살’은, 사실 지금 모든 곳에서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린 시절 겪은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안 좋은 일’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다. 2013년에 태어난 아기가, 부모의 직업·소득·자산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워졌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그나마 부분적 농지개혁을 통해 부를 하향 분배했던 대한민국은, 이후 고도성장기를 통과하면서 다시금 부익부빈익빈으로 되돌아왔다. 사실상 신분사회를 재건해낸 것이다.


땅을 가진 아버지, 건물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소년과 소녀들은 계속 그렇게 풍족할 것이다. 그 땅 위에서 농사를 짓고 건물에 세들어 사는 부모 밑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계속 그렇게 허덕일 것이다. 이 나라를 계급사회라고 부르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할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다.


왜 30대 젊은이가 자신의 생식기를 잘랐는지 묻지 말고, 왜 생식기를 자르지도 않은 젊은이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지 물어보라. 그 이유는 거의 비슷하다. 내가 성장 과정에서 겪은, 혹은 지금 겪는 고통을 내 아이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 힘으로 감당이 안되는 이 세상에서 너까지 시달리게 하는 건 너무 미안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해줄 게 없는 엄마와 아빠라서,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게 해주는 것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동대구역에서 자해를 한 김씨는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사회적’ 해석은 분명 과잉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동대구역에서 사건이 벌어지기 전부터, 수많은 젊은이들은 눈물을 머금고 사랑을 포기하고 결혼을 미루며 아이를 낳지 않는다. 이 고통에 대한 무감각이야말로 ‘엽기적’이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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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책을 내놓은 소설가를 만났다. 작업실이 따로 없는 그녀는 주로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의 창가에서 글을 쓴다고 했다. 얘기를 듣고 나니 그 커피숍에 가야만 좋은 글이 써질 것 같은 조바심이 이는 게 아닌가?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커피숍으로 달려갔는데 웬걸, 생각보다 사람이 꽤 많다. 탁 트인 2층, 중앙에 배치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은 사람들은 이어폰을 꽂고 동영상을 즐기거나, 수다를 떤다. 적당한 조도의 개별 조명을 갖춰 공부하기에 그만인 테이블은 학생들 차지다. 앞자리 여자분은 노트북을 켜고 입사 지원을 하는 중이고, 옆 테이블에서는 중간고사 대비 시험공부가 한창이다. 소규모 커피숍과 달리 ‘세월아 네월아’ 앉아 있어도 눈치 줄 사장도, 추가 주문에 대한 부담도 없다. 은은한 커피향과 음악, 사람들의 대화가 섞인 적당한 소음과 풍성한 햇빛, 각자의 자리 밑에 장착된 콘센트 덕에 배터리도 든든하다. 통유리창 앞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책을 뒤적이다 보면 없는 여유도 생기는 것 같은 착각은 덤이다.


(경향DB)


다음날, 이번에는 오랜만에 도서관을 찾았다. 고등학교 때 주로 이용하던 도서관은 시간이 멈춘 듯 여전하다. 바코드를 일일이 찍지 않아도 한꺼번에 대출되는 시스템으로 업그레이드된 자료실과는 달리 매점은 십수년 전 모습 그대로다. 시멘트 바닥을 울리는 마찰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외벽, 말라붙은 라면 국물 자국과 불어터진 면발이 그대로인 테이블, 먼지와 함께 공기 중에 떠다니는 컵라면의 조미료 향까지…. 고등학교 시절 즐겨먹던 ‘매점표’ 불량 먹거리들과 왕왕대는 TV 소리만이 햇빛이 잘 들지 않는 빈 공간을 채우고 있다. 사람이 없다보니 왠지 더 썰렁한 느낌이다.


도서관은 공공장소지만 매점만큼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도서관 매점은 공개입찰을 통해 최고가를 써낸 사업자에게 낙찰되기 때문에 개인의 영업공간이다. 도서관 매점은 특별한 수완 없이 할 수 있는 창업 아이템 중 하나여서 인터넷을 잠깐만 검색해봐도 창업비용과 약정 기간 등을 지역별로 찾을 수 있다. ‘외부 음식 반입 금지’를 써붙인 도서관 매점이 많은 이유다. 요새는 컵라면도 먹지 못하게 하는 곳이 늘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매점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사실 도서관은 학교를 제외하면 가장 다양한 구성의 대중이 연령과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이용하는 공공공간이다. 공부하러 온 사람들의 허기를 달래주는 매점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도서관 매점의 음식이야말로 학교급식처럼 일정 수준 이상의 공공성을 요구받아야 하지 않을까? 1000원짜리 캔음료라도 사먹지 않고서는 무료로 이용할 공간을 찾기 어려운 요즘이라면 더욱 그렇다. 도서관은 ‘기부금을 내면, 입장권을 끊으면, ○○카드 고객이면’ 등의 조건 없이 무료 이용이 가능한 거의 유일한 공간이다.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만큼은 아니더라도 도서관 매점은 좀 더 매력적인 공간이 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아직 도서관 매점에는 사례가 없지만, 학부모와 교사들이 공동 출자해 ‘친환경 먹거리 학교 매점’을 운영 중인 영림중의 시도는 그래서 인상적이다. 


최근에는 경기도에서도 학교 매점을 협동조합 방식으로 운영하는 시범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아직 6개 학교에 불과하지만 시작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첫걸음이다. 이미 발빠르게 사회적기업이나 저소득층의 자활사업장, 공정무역 단체와 손잡고 매점을 북카페 등으로 리모델링해 운영하는 지자체가 늘어나고 있다는 반가운 뉴스도 들려온다. 우리 동네 도서관이, 그리고 도서관 매점이 아늑하고 쾌적한 공간으로 바뀐다면,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이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에 그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앉아 있을지 궁금하다.


선택은 개인의 몫이지만, 선택할 만한 공간을 제공하는 것은 사회의 몫이다. 우리 사회는 과연 그 역할을 하고 있는가? 새삼 궁금해진다.



정지은 | 문화평론가·인천문화재단 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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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개하는 벚꽃의 여흥이 오히려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바로 커피숍과 편의점, 미용실, 건물 청소 용역, 경비업체 등 수많은 곳에 흩어진 최저임금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벚꽃 향만 맡아도 최저임금의 계절이 돌아왔다고 으스스 몸을 떨 정도로 삶이 팍팍하다.


계절이 계절이다 보니, 요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최저임금 이야기가 자주 도마에 오른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최저임금이 인상되는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해에 정해진 최저임금이 잘 지켜지기만 해도 좋겠다”고 하소연한다. 쥐꼬리만 한 임금이 조금이라도 오를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약속한 것이라도 잘 지키라는 이 바람을 “왜 이리 소박하냐…”고 타박할 수도 없다. 법과 제도가 정한 최저임금도 잘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니까.


이러한 현실과 함께 우리가 동시에 마주하게 되는 아이러니는 ‘최저임금’자를 주로 고용하는 편의점주가, 동네 슈퍼마켓과 중소기업 사장이 부채와 도산 등으로 자살을 선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쥐꼬리만 한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며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절망 뒤에는 그를 고용한 점주의 절망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18일 경기 용인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던 젊은 점주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올해 들어서만 벌써 세 번째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기로에 서지 않더라도 우리 주변에는 대기업의 수탈과 심각한 부채에 신음하는 영세 상인들의 존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얼마 전에는 결국 이 상황을 참지 못한 전국 편의점 가맹점주들의 협의체가 출범했다.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으로 보자면 그들은 ‘투쟁’의 대상임에도 왜 나는 그들의 용기에 응원을 보내게 되는 걸까?


지난해 1월에 한 팟캐스트에 출연한 적이 있다. 유통기한이 지난 삼각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최저임금도 못 받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의 처지에 대해 한참 하소연을 했다. 그런데 이 방송을 들은 인천의 어느 편의점 점주의 아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모님이 인건비, 건물 임대료, 가맹수수료 내고 나면 한 달에 남는 돈이 고작 60만원이라고 했다. 요즘은 건강이 안 좋으셔서 그가 직장이 끝나고 밤에 가서 부모님 대신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당시 최저임금인 4320원보다 적은 4000원을 주고 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설 연휴에 집에 못 가는 아르바이트생의 처지가 딱해서 직접 떡국도 끓여주고 임금은 적게 주지만 잘 대해주려 노력하고 있다며, 이야기의 말미에 “정말 미안합니다”라고까지 했다.


청년 편의점주의 죽음 (경향DB)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임금을 지급할 경우 해당 고용주는 형사 처벌의 대상이 된다. 최대 징역 3년에 해당하는 중대한 범죄인 것이다. 결국 매달 적자를 내며 직원들에게 최저임금도 지급하지 못하는 편의점, 빵집, 분식집의 사장님들은 매일매일 범죄자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왜 범죄자가 되었을까? 누가 그들을 범죄자로 만들었을까? 한국 경제의 수준에 비해 최저임금이 너무나도 높은 것인가. 한국의 최저임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꼴찌 수준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재벌 대기업들은 앵무새처럼 이야기한다. 최저임금이 인상되면 중소기업, 영세 자영업자들이 힘들어진다고 말이다. 이 앵무새들에게 한마디 해야겠다.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 정리해고를 통해 멀쩡한 근로자를 동네 자영업자로 밀어낸 사람이 누구이며, 청년실업 300만 시대에 넘쳐나는 젊은 인재들을 최저임금으로 착취하는 사람은 또 누구냐고. 가진 것 없는 부모와 자식 세대를 서로 반목하게 하고, 싸우게 하는 주범이 누구냐고 묻고 싶다. 


그래서 상상해 본다. 올해의 최저임금 캠페인에는 영세한 사장님들과 최저임금도 못 받는 아르바이트생들이 서로를 향해 질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손을 맞잡은 모습을 말이다. 우리는 각자가 살아 ‘내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 ‘가야’ 하는 사람들이니까.



김영경 | 청년유니언 초대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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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조직법 개정안이 3월22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새 정부가 야심차게 구상한 부처 개편도 이루어졌고, 4월9일 현재 아직 해양수산부 장관과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자리가 공석이긴 하지만 대략 인선도 마무리되는 분위기다. 장관 인사가 끝나면 그 아래로 줄줄이 인사 개편이 이루어질 것이고 비로소 마비 상태였던 국정 업무가 수행될 수 있을 터다.


이중국적 문제로 낙마한 김종훈 후보자는,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아무튼 독특한 논점을 제시했다. 그와 달리 다른 경우는 너무도 일상적이고 그만큼 지리멸렬한 소재들로 검증받았다. 위장전입, 부동산 투기, 병역의무 이행 여부, 논문 대필, 법인카드 유용 등이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을 넣고 필터링을 해보니,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지금까지 무려 장·차관급 7명이 통과하지 못했다. 그 과정을 통과한 사람들을 놓고 봐도, 그것은 그들이 절대적으로 깨끗해서가 아니라, 그저 상대적으로 조금 나은 수준이기에 용인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사청문회를 통과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모두가 공통적으로 내놓는 핑계에 우리는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그것은 당시의 관행이었다고. 돈이 생기면 지방에 땅을 사는 것, 그것은 관행이었다고. 실소유자인 본인이 아니라 미성년자인 자녀의 이름으로 땅을 사는 것 역시, 내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하고 있는, 관행이었다고. 그렇게 가갸거겨를 배우기도 전에 땅부자가 되어 있던 아들이 병역 면제를 받도록 슬쩍 힘을 쓰는 것 역시, 남들과 다를 바 없이 관행대로 한 것뿐이라고.


이토록 인간적인 핑계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잃고 분노하지 말고, 그 내면의 논리를 잘 살펴보자. 아마도 저 해명의 방식은 그들이 내놓을 수 있는 최선의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진실한 답변일 것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나도 한다. 다들 그렇게 해왔던 것이니만큼 내가 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인사청문회에서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겠지만 우리는 많은 경우 다양한 사례에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 그냥 하던 대로 집 앞 차도를 무단횡단하고, 카드로 계산하면 6500원인 백반집에서 현금으로 6000원만 내는 그런 사소한 탈세를 한다. 그 상황에서 국세청 직원에게 붙들리면 아마 나나 당신도 거의 똑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여기서는 다들 이러는데, 이것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전에 없이 수많은 후보자들이 거론되고, 그들이 모두 하나같이 오늘날의 도덕성에는 맞지 않음이 드러났으며, 그 이유를 과거의 관행에서 찾고 있는 이 모습에서 ‘박근혜 정부의 부도덕성’을 탓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이다. 이것은 박근혜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법과 도덕이 21세기의 현 시점에 부합할 만큼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경향DB)


여기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들이 당시 관행대로 위장전입을 하고, 탈세를 하며 부동산을 통해 부를 축적해온 것은 사실이다. 당시에는 다 그렇게 했다고 치자. 그런데 오늘날 도덕적 기준이 바뀌었다면, 그것에 대해 응분의 대가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단지 ‘낙마’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후보자들뿐 아니라 당시의 관행에 편승한 모든 사람들이 이토록 쉽게 면죄부를 받는 것은 과연 정당한가?


관행대로 했다는 개인들을 불러놓고 면박을 주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해봐야, 관행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방식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공직에 나서서 검증당하는 과정을 회피할 유인동기만을 제공할 뿐이다. 그때는 다들 그랬다는데, 어쩌겠는가. 하지만 지금 이 시절이 최소한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면, 그렇게 만들어진 재산에 대해 조금 더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런 식으로 눈에 띄는 사람들만 비난하고 지탄하는 방식으로는 관행을 이겨낼 수 없다. 단호하고 적극적인 부동산 세제 개혁이 해법일지 모른다.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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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 문화평론가




사회생활을 일찍 시작한 편이다. 졸업 1학기를 남겨두고 휴학해 들어간 첫 직장의 입사자는 스물세 살 막내인 나와 왕고참 스물여덟 살 언니를 포함해 열 명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경력의 나와 최소 5년 경력직의 월급은 별 차이가 없었다. 현실을 마주한 나는 내 운에 감사하는 한편 ‘저 언니들만큼은 되지 않겠어’를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내 연봉의 3배를 받는 동갑내기 정규직, 알바와 비슷한 대우를 받는 비정규직 언니들 사이를 오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다들 직장생활은 그런 거라고 했다.


2003년 영화 <싱글즈>가 개봉됐고, 여주인공의 나이는 왕고참 언니보다 한 살 많은 스물아홉이었다. 서른 살이 되면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데 스물아홉이라니! 나는 “서른 살이 되기 전 인생의 숙제, 둘 중의 하나는 해결할 줄 알았다. 일에 성공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지금 난, 여전히 일에 성공하지 못한 싱글이다. 그러면 어때? 어쨌든 서른 살 이제 다시 시작이다. 파이팅!”을 외치는 주인공의 독백을 비웃고 있었다. ‘설마 내가 6년 후에 저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은 애써 모른 척했다. 스물셋이 상상하는 서른의 나는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거나 사랑스러운 남편과 깨소금 냄새 나는 신혼을 즐기는 주부, 최소한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여행 중이어야 했으니까.


영화가 개봉한 지 10년이 지났다. 주인공의 상황을 남 일로 치부하던 대학생은 어느새 10년차 직장인이 됐다. 졸업을 하고 몇 개의 직장을 경험했지만, 능력을 알아본 누군가가 스카우트 제의를 해오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직장인이긴 하지만 근사한 커리어우먼이라고 부르긴 힘든 셈이다. 그럼 결혼은? 올해 연애하고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지 않으면(4월이니 이미 가능성이 희박하다) 첫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 마흔이 넘는다는 우울한 농담이나 하고 있는 중인 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근사한 커리어우먼이나 결혼은 ‘남들 다 하는’ 일이 아니라 ‘아무나 할 수 없는’의 능력의 범주에 속하는 일인 셈이다.


싱글즈 (경향DB)


막상 살아보니 서른 살이 된다고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지만, ‘남들 다 하는 만큼’ 사는 것도 어렵거나 선택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누구나 몰고 다니는 것처럼 보이던 차도 그랬다. 어렸을 적 ‘소나 타는 차’라고 농담하던 쏘나타는 준중형도 아니고 무려 중형차였다. 그 정도 배기량의 차를 몰고 다니려면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10년차 직장인은 아주 잘 알고 있다. 색다른 결혼식을 하겠다는 포부도 마찬가지. 친한 사람들만 부르는 조촐한 야외 결혼식, 부조금 안 받기 등 듣기만 해도 아름다운 결혼식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선택’은 ‘추가 비용’의 다른 말이기도 하니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선택을 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는 세상의 진리를 알아가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남들만큼’ ‘남들처럼’이란 핑계로 서로에게 하기 싫은 인생의 과정들을 떠넘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정하기 어려울 때 ‘남들도 다 이렇게 산다’는 꽤 강한 설득력을 발휘하기 마련이니까. ‘사람 사는 거 다 비슷해, 그러니까 당신만 특별한 척 하지 말고 그냥 살자’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이 빚 내서 아파트 산다니까 따라서 사고, 나이 차면 결혼을 하거나 해야 한다고 말하며 산다. 살다보면 짐작과 다른 일은 늘 생기기 마련이지만 삶의 기준을 어디에 둘지는 각자의 몫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외에 이유다운 이유가 없다면 그 결정은 당신의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것이다. 제일 바람직한 상황은 타인의 인생을 ‘남들 사는 만큼’이란 기묘한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그 기준을 ‘남들도 다 그러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는 뻔뻔한 변명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건데 내가 너무 많은 기대를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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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 에세이스트



 

‘담뱃값 인상 반대시위’라는 사진을 봤다. 피켓의 내용을 살펴보니 내용이 소심했다. 아예 반대한다는 시위가 아니었고 ‘점진적으로 인상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피켓은 슬프기도 했다. ‘정말 담배를 못 피우게 하고 싶으면, 담배 소비만이 아닌 판매·구입·소지를 전면 금지하라.’ 노력은 했으나 결국 못 끊은, 그리하여 결국 본인들의 주머니만 털리고 말 것을 예측한 애연가들의 사연이 들리는 것 같았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한 번뿐인 인생, 안 해본 건 해보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지만 앞으로도 담배는 못 피울 것 같다. 건강은 둘째고 사회로부터 배척당하고 싶지 않다. 담배에는 발암물질이 가득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것이 타인까지 해한다는 사실이 강조되는 추세다. 그리하여 금연빌딩이나 흡연구역이라는 것들이 생겨나고, 흡연자들의 땅은 점점 좁아진다.


이런 분위기 덕분인 듯하다. 담뱃값을 올려 복지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정책을 당당히 발의하는 것 말이다. 올리는 폭도 대범하다. 2500원에서 4500원이라니. 배추값이 그만큼 오르면 정부가 나서서 난리다. 내가 아는 한 김치와 담배 중 하나를 고르라면 담배를 선택할 사람들은 널렸다.


물론 나는 비흡연자니까 담뱃값이 오르면 삶이 윤택해질지도 모르겠다. 간접흡연도 줄어들 테고 어쨌거나 복지재원을 마련한다지 않는가? 하지만 남들이 괴로워할 걸 알면서 좋아할 수는 없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 것이다.


사실 나는 담배 피우는 남자들이 부럽다. 특히 근무시간에 혼자 밖에서 담배를 피우는 남자들이 부럽다. 근무시간을 공공연한 묵인하에 땡땡이친다는 사실 때문은 아니다. 그 정도는 나라고 못할 것도 없다. 하지만 멍하니 밖에 혼자 서 있다고 생각해보면, 남 보기가 참 그렇다. 비흡연자들이 쉬기 위해서는 같이 노닥거릴 동료가 필요하고 아니면 책이나 음악, 그래도 없으면 커피라도 있어야 한다. 담배를 챙기는 건 훨씬 간편하다. 번거롭지 않으면서 고독하게 휴식하는 데에는 담배만 한 게 없는 거 같다.


(경향신문DB)


오래전에 담배를 피운다는 여성 칼럼니스트가 쓴 에세이집을 읽었는데, 거기서 그랬다. 남자들이 담배 피우는 여자를 싫어하는 건, 그 여자가 남자들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라고. 물론 이 직관적 분석에 동의 안 하는 남자들이 많겠지만 내 논지는 이거다.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남자든 여자든 외롭지 않아 보인다.


인간은 외로움에 약하다. 고독한 현대인들이라 그런 게 아니라 옛날부터 그랬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통해 이런 이야기를 전한다. 최초의 인간은 둘이 하나였다. 은유가 아니고 실제로, 머리가 둘이고 팔과 다리가 넷이고 가슴도 둘인 한 쌍이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힘도 세고 빨랐고, 완벽했다. 신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신이 그들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그 후 사람들은 약해졌으며 더 이상 신에게 도전하지 않았다. 그리고 평생 자신의 반쪽을 찾아 헤매며 살게 되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에리히 프롬도 말했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가장 성숙한 대처방식은 잃어버린 반쪽을 찾는 것, 사랑이다. 하지만 그게 여의치 않으니 종교나 마약 같은 외부적인 것에 의지하게 된다. 그 대상에는 담배도 있다.


사람들은 특히 노동현장에서 외로운 것 같다. 마르크스도 ‘소외’라고 표현하지 않았는가. 일의 목적도 결과도 나의 존재이유와 일치점이 없다. 두 개밖에 없는 팔다리로 육체노동을 할 때도, 하나밖에 없는 머리로 정신노동을 할 때도, 하나밖에 없는 가슴으로 감정노동을 할 때도 외롭다. 외로움이란 어떨 때는 버거움이기도, 지루함이기도, 고통이기도 하다. 그럴 때 가장 완벽한 방법은 나의 반쪽을 찾아 사랑을 하는 것일 테다. 허나 그게 어디 쉬운가. 시간, 능력, 노력, 운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는 것인데.


그럴 때 담배란, 가장 완벽하진 않더라도 적절한 상대가 될 수 있겠다. 내가 아는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하루를 버텨나가고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여겨지듯 악당들이 아니고 그저 삶이 고되고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일 가능성이 더 높다. 그런데 마치 로빈후드나 되는 것처럼 정의로운 일인 양 담배를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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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자유기고가



 

지금보다 열살가량 어렸던 시절, 한창 혈기 넘치던 나는 지워버린 블로그에 이런 내용을 적어두었다. “대한민국에서 제정신이 박힌 젊은이는 두 가지의 선택 중 하나를 강요당한다. 안보를 걱정하는 좌파로 살 것인가, 분배를 근심하는 우파로 살 것인가.”


이런 식의 ‘자기 인용’이 대단히 부끄러운 행위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보니 저 문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상징적인 사건이지만, 보수진영과 진보진영 양쪽 모두 제대로 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


주요 일간지들의 사설을 검토해보자. 이른바 보수적이라고 불리는 쪽이건 그 반대편이건, ‘유능한 재외동포가 국내에 들어와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우리가 박탈한 것은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국민국가 체계 속에 살고 있다. 국민국가 시스템의 핵심은 국가가 폭력을 독점하는 것이며, 국민은 국가의 일원으로 그 ‘공적 폭력’의 일부가 된다. 쉽게 말해 대한민국 국민 중 군복무에 지장을 주는 장애를 갖지 않은 남성은 징집 대상이 되며, 그 외 국민들은 다른 방식으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한다.

김종훈(경향신문DB)


그러므로 ‘나는 한국인이다’라는 말은,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와 전쟁을 할 경우 그 깃발 아래 적국의 국민을 죽이거나 그 일에 협력한다는 뜻이다. 미 해군에서 군복무를 한 김종훈 전 후보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미 해군의 수병들과 함께 ‘Sailor’s Creed’를 수도 없이 복창했을 것이고, 시민권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충성 맹세(Oath of Allegiance)”도 했을 것이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자신의 모국이 아니라 미국을 위해 전투 및 비전투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내용이 그 선언문 속에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참조: http://deulpul.net/3932189).


이것이 국민국가의 본질이다. 언제라도 다른 국민국가와 전쟁을 할 수 있고, 그에 대비하는 무력집단이 바로 국가다. 그리고 국적은 어떤 사람이 어느 국가에 속하는지 여부를 지시하는 가장 핵심적인 신분상의 지표다. 물론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혈맹’이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며 특히 국제정치는 더욱 그렇다. 지금도 한국의 국익은 미국의 그것과 자주 충돌한다. 외국인에게 외교, 안보, 국방과 관련한 고급정보가 수도 없이 오가는 내각의 문호를 개방하는 처사를 나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스스로 ‘편협한 국수주의자’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며 이 사안에 대해 말을 아끼는, 이른바 진보진영에 묻고 싶다. 당신들은 반대로, 가령 본명이 로버트 할리인 귀화 한국인 하일씨가, 심지어 한국 국적을 유지하면서 미국에서 장관 후보로 지명되는 모습을 진지하게 상상할 수 있는가? 이 광경이 이상하게 보인다면, 한국 국적조차 없었던 누군가를 장관으로 뽑으려다 실패하는 것은 왜 ‘안타까운 일’로 간주되는가?


미국인으로서 충성 맹세를 하고 30여년을 산 사람이, 단지 한국계 혈통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적도 없는 상태에서 장관 후보로 거론됐다. 어떤 한국인이 이른바 ‘코시안’ 혹은 ‘다문화’라는 이유로 차별을 당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미국인이 단지 한국계라는 이유로 한국에서 장관 후보가 되는 것은 인종적 편견 없이 불가능한 일이다. 한쪽에는 불이익을, 다른 쪽에는 특혜를 주고 있지만, 둘 다 인종차별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장관을 미국인 중에서 뽑는다. 상식선에서 반대하면 충분한데, 그걸 지적하는 이석기 의원은 무책임하게 ‘CIA 스파이설’을 퍼뜨렸고 진보언론이 편승했다. 하지만 그는 CIA의 스파이가 아니어도 한국의 장관 후보로 부적절했다. 한국계 미국인은 국적상으로 미국인이기 때문이다.


온 국민의 국가관이 이 모양인데, 국가정보원 직원은 유머 사이트에 댓글을 달고, 보수논객 변모씨는 그 국정원에서 팝 아티스트 낸시 랭이 ‘넓은 의미에서’ 북한 추종자라고 강연한다. 촛불시위에 꼬박꼬박 나갔던 진보논객이 나라 걱정을 안 할 수가 없다. 스무살의 고민은 서른살이 되어도 여전하다. 에라, 모르겠다. 내가 보수논객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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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자유기고가


이 신문이 하나의 건물이라고 생각해 보자. 가장 유동인구가 많은 1층이 1면이고, 맨 마지막 페이지의 광고는 건물 옥상에 얹혀져 있는 옥외광고라고 연상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사설은 꼭대기층에 놓여있는 펜트하우스 같은 것일 테고, 비슷한 방식으로 이런 저런 지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이 비유를 연장해보자. 어떤 신문이 필자에게 칼럼을 쓰게 해준다는 것은, 다른 식으로 이해해 보자면, 어떤 공간을 임대해 준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건물주는 임대료를 받는 반면 신문사는 원고료를 준다. 하지만 건물주가 자신의 건물에 들어올 업체의 성격, 종류, 매출 규모 등을 세심하게 따지듯, 언론사 역시 ‘외부 필자’들을 선별하고 관리한다.


 

'폴린 폴리시' 한국어판의 노정태 편집장 (출처 : 경향DB)



그리고 이 지면의 이름은 ‘2030콘서트’이다. 본인을 포함해 다섯 명의 젊은 필자가 돌아가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그런 공간인 것이다. 바로 그 지면의 속성과 내력을 꼼꼼히 따져보면 우리는 작년말 대선과정 및 ‘멘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통찰을 얻을 수 있다.


20대 담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된 것은 2008년 무렵이다. <88만원 세대>가 베스트셀러가 됐고, 촛불시위 과정에서 ‘촛불소녀’로 불리던 당시의 고등학생들에 대한 기대가 솟아올랐으며, 반대급부로 역시 당시의 대학생들이 ‘이명박 찍어놓고 등록금 올랐다고 울먹거리는 바보들’ 취급을 받기 시작했다.


가난하고 불쌍해서건, 피터지는 ‘스펙’ 싸움을 해야 해서건, 자기들이 정권 뺏겨놓고 20대 투표율이 낮아서 졌다고 우기는 386에게 매도를 당하고 있어서건, 20대는 어떤 식으로건 화제의 중심에 섰다. 이른바 ‘20대 논객’들이 몇명 거론되고, 그들을 한데 묶어 신문 지면을 내주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과거 어느 시점부터 활동하고 있었느냐에 따라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아무튼 일군의 젊은 필자들이 ‘20대 논객’으로 불리기 시작했으며, 그들이 나이를 먹어 30대에 접어들자 ‘20대 논객’은 ‘2030 논객’이 되었다. 그것을 성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비슷한 구성원들이, 필자가 군 입대로 인해 2년여의 공백을 갖기 전과 비교했을 때 거의 차이가 없는 방식으로, 하나의 공간을 함께 쓰고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 신문을 하나의 건물로 비유하자면, ‘20대 필자’들 혹은 ‘2030 논객’들은 여전히 고시원 혹은 자취방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2030 논객들이 신문지상의 방 한 칸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이 모습은, 바로 그들이 대변하고자 했던 세대의 현황을 거의 완벽하게 은유하고 있다. 고시원에 사는 20대가 최저 시급도 못 받고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이 결코 새삼스러운 사회적 논란거리가 되지 않듯, 2030 필자들이 신문 지면에 오르내리는 것 역시 어떤 형식의 일상이 되었다.


20대 담론의 이름으로 제기된 수많은 문제들 중 유독 반값등록금만이 사회적 의제로 자리잡은 것은, 그것이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인 20대의 문제이며, 동시에 그 등록금을 내거나 최소한 보증이라도 서줘야 할 그들의 부모가 얽힌 문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그 부모들은 몇몇 보수적 일간지의 적극적인 여론몰이에 힘입어, ‘하우스푸어’라는 불행의 완장을 차고 선거 국면을 주도했다. “우리 집값이 떨어지게 생겼는데 너희들 등록금이라도 내려야 하지 않겠니”라는 소비자 주권의식 하에 두 세대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거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죽은 것은 ‘일하는 20대’의 신음소리요, 살아남은 것은 ‘돈 내는 20대’의 함성이었다. 20대 담론은 막을 내린 것이다.


여기까지 놓고 보면 절필 선언이라도 해야할 것 같다. 물론 필자는 그럴 생각이 없다. 다만 함께 생각하면서 다음 단계를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불쌍한 20대’ 그 너머의 무언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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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 에세이스트


가끔 백일도 안된 아기를 때려 사망케 한 엄마가 구속됐다는 공포영화 같은 기사가 나온다. 그를 이해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안다. 출산 후 불균형한 호르몬, 변화된 환경에 대한 스트레스, 정신적 부담과 육체적인 고됨, 거기에 잠 안자는 아기. 안자고 우는 아기에겐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어떤 게 있다. 


그리하여 0세 자녀를 둔 엄마들의 첨예한 논쟁 주제는 ‘수면교육’이다. 아기를 길러보지 않았다면 ‘자는 것도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잠드는 것조차 혼자 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수면교육 찬성론자들은 말한다. 약간의 교육을 하면 아기는 혼자 잠들 수 있다. 졸음이 와서 울더라도 안아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아기도 푹 잘 수 있고 엄마도 편하다. 반대론자들은 말한다. 아기는 많이 안아주어야 정서에 좋다. 특히 졸음이 올 때 많이 불안해하는데 그때 안아주지 않는 건 학대다. 


미국 사진작가 트레이시 레이버가 아기들의 자는 모습을 찍은 사진 작품 (출처: 경향DB)



이것은 육아세계의 보혁논쟁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나의 성향을 고백하자면 후자 쪽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사실 이 사안이 논쟁적일 수 있다는 점도 얼마 전에 알았다. 아기 가진 집에서 웬만하면 구입하는 소아과 도서가 있다. 그 책의 저자는 웬만한 육아관련 방송엔 꼭 나오는 의사다. 노출 빈도로만 보면 우리나라 육아 분야 최고 권위자라 할 것이다. 그가 수면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기에, 아기의 미래를 위해 꼭 필요한 줄 알았다.


그래서 나도 수면교육을 시도했었다. 졸려 하는 아기를 뉘어놓았더니 아기는 울기 시작했다. 10분 정도 안아주지 않고 바라만 봤다. 아기는 악악 죽겠다고 울었다. 그 10분은 아기에게도 내게도 끔찍했다. 나는 그 의사를 원망하며 아기를 안았다. 그날부터 열심히 안아서 재웠다.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수면교육은 절대적인 육아법이 아니었다. 진작 알았다면 불안감 없이 아기를 기를 수 있었을 텐데. 수면교육뿐만 아니다. 육아에 관련된 전문서적, 인터넷 카페, 방송들은 모두 확신에 찬 목소리로 충고한다. 이것은 해야 하고 저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곳에서 엄마들은 답을 구하고자 하지만 오히려 고민이 생긴다. 이제 밤중 수유를 끊어야 하나? 우리 아기는 왜 아직도 못 걷는 건가? 얘 나이면 한글은 뗀다던데? 


패턴은 비슷하다. 전문가들은 다른 방법은 없을 것처럼 권위적으로 충고하고, 인터넷 카페에서는 ‘엄친아’들의 사례를 구전하여 물건을 팔고, 방송은 짧은 시간에 핵심을 우겨넣느라 과장하고 일반화한다. 


그런 것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죄책감이 든다. 우리 애는 저렇지 않은데, 나는 모자란 엄마인가? 그들이 정해준 규칙을 따르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규칙이 없으면 큰일 나는 건 오히려 그들이다. 전문가도, 인터넷 카페도, 방송도 우리의 불안감을 강조해야만 존재가치가 올라가게 된다.


나는 이것이 요즘 엄마들을 힘들게 하는 핵심이라 생각한다. 초보엄마들은 새 생명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불안정한 사람들이다. 가장 약해진 사람들을 파고들어 불안을 만들어내고, 그 불안을 없애주는 척하면서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돈·시간·정신을 낭비하게 하니 나쁜 일이고,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의 크기를 줄이기에 슬픈 일이다. 비단 육아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던가. 


둘째는 기르기가 수월하다. 아기는 제가 타고난 유전자에 새겨진 법칙대로 자라며, 엄마 따위가 어떻게 하기엔 너무 신비로운 존재라는 걸 알게 된 후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마케팅이 공략할 부분이 적어진다. 얇은 귀를 팔랑이며 첫째를 기른 나도 어느새 그렇게 되었다. 아기도 나도 편해졌다.


다른 일도 마찬가지다. 날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불안과 욕망일 수도 있다. 이것이 정말 고민할 만한 일인가.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방향인가. 불순한 의도 속에 둘러싸여 사는 우리로서는, 계속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해야지 별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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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 소설가


한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카운터가 소란해진다. 한 고객이 커피를 앞에 두고 항의하는 중이다. 방금 산 커피에서 비닐조각이 나온 모양이다. 


한눈에도 어리고 서툴러 보이는 아르바이트생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환불을 해줄지 다른 상품으로 교환해줄지 묻는다. 고객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팔짱만 끼고 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고객의 침묵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사과를 한다.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길어진다. 

 

경향신문DB

고객은 지점장을 찾는다. 그러나 지점장도, 사장도 없다. 교육받은 지 얼마 안된 아르바이트생이 전부다. 결국 고객은 나중에 사과전화를 하라면서 번호를 남겨놓고 간다. 아르바이트생은 땀을 닦으며 서둘러 다음 주문을 받는다. 


흔한 광경이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받은 피해에 대해서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고, 그걸 당연하게 여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내는 사람, 즉 고객은 ‘왕’이다. 감히 고객에게 함부로 하는 업체는 살아남지 못하는 시대다. 


아직 완벽한 것은 아닐지라도, 소비자고발센터와 소비자보호원이 있고, 각종 소비자 관련 언론이 소비자를 돕는다. 무엇보다도 소비자들이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각종 사이트들이 있다. 커피에서 나온 비닐조각은 사진과 함께 인터넷 공간을 돌아다닐 것이다.


사실 소비자의 권리가 강조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한때는 대규모 기업 앞에서 개인이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계란으로 바위 치기’와 같았다. 제 돈 주고 사먹는 음식에서 정체 모를 생물체가 나와도 분을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 권리가 강화되면서 제품에 대한 알 권리, 안전을 보장받을 권리, 선택할 권리 그리고 부당한 피해로부터 보상받을 권리 등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악용하는 <개그콘서트>의 ‘정마담’ 캐릭터가 희화화될 정도다.


그런데 드는 의문은 소비자로서의 권리에 민감한 데 비하면 노동자로서의 권리에는 무감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크레인에 올라 수백일째 농성 중인 노동자의 모습과 머리카락이 나온 햄버거 사진 중 어느 쪽이 빠르게 이슈화될까. 당연히 후자 쪽이다. 20만원을 주고 산 오리털 파카가 한 번 세탁하자 누더기처럼 변했다면 적어도 해당 매장에 가서 항의할 것이고, 적극적인 소비자라면 세탁심의를 신청할 것이다. 그래도 보상을 받지 못하면 인터넷에 이 분한 사실을 올리기라도 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수당 없이 초과근무를 해도, 최저임금제를 위반한 낮은 임금을 받아도, 애초의 계약사항을 회사가 이행하지 않아도 개인이 감내한다. 그저 회식 때 술 한잔 걸치며 삭이거나 정 못 참겠으면 이직을 결심한다. 권리를 침해받았을 때 소비자로서는 당당하지만, 노동자로서는 한없이 온순하다.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슬픈 현실이다. 


또 다른 흔한 이야기다. 월급 100만원 남짓 받는 중소기업 경리직원이 회계장부를 조작하고 회사 돈을 지속적으로 빼돌린다. 발각된 뒤 수색한 경리직원의 집에서는 수백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백이 다수 발견된다. 많은 사람들이 소비자인 동시에 노동자이다. 노동자로서 쌓인 스트레스는 고가의 제품이 즐비한 매장에서 대접받을 때 말끔히 풀린다.


사실 소비자 권위를 교묘하게 높이는 데는 업체들이 큰 몫을 했다. ‘고객은 왕’이라는 표어를 만들어낸 것도 기업이다. 고급 서비스로 차별화하며 자신들의 주머니를 불렸다.국 ‘왕’은 돈을 쓸 때까지 시한부로 대접받는 소비자가 아니라, 돈을 벌어들이는 기업이다. 자본주의는 노동자를 소비자로 둔갑시키면서 사실 그 위에 군림한다. 


소비자가 왕의 권위를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노동자들의 감정노동 덕분이다. 소비자의 온갖 비위를 맞추면서도 높은 톤의 친절한 목소리를 유지해야 하는 노동자들 말이다. 소비자는 왕이라는 환상을 깨면, 결국 남는 것은 우리 모두 노동자라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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