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교 | 한예종 영화과 학생


 
얼마 전 워쇼스키 남매의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를 흥미롭게 보았다. ‘타임’지는 지난해 최악의 영화로 이 영화를 꼽았고, 국내에서도 평론가들은 혹평을 쏟아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전형적인 갈등 구조와 아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이미지 등 단점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느 영화에서는 찾기 힘든 미덕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6개의 시간들이 끊임없이 교차되며 인류사의 위기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인간성의 몰락, 위기가 만성화된 파국적 세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지, 억압적 세계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보편적 과제는 가능한 것인지, 목숨을 건 도약과 실천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말이다.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 캡쳐. (경향신문DB)

오늘날 우리는 누구나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해 있다. 자본주의 최첨단에 선 금융계의 대부부터 서울역 광장에 선 온갖 종교적 선동가들까지 이런 위기에 대한 인식과 우려들을 우회하지 않는다. 끔찍하게 높은 자살률, 묻지마 살인, 우리 자신에 대한 갖가지 파괴행위와 타자에 대한 공포와 혐오감까지.

 

어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에 처했으니 혁명을 선동하거나 가장 급진적인 구호를 외치기만 한다면 억압받는 이들이 곧바로 따를 것이라고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잡혀 있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은 종교에 귀의해 명상에 충실하거나 정치적 양극단을 오가기도 한다. 그러나 무너진 삶의 공간, 관계맺음을 복원하고 노동권을 지키기 위한 사소하지만 보편적인 움직임들부터 만들어나가지 않는다면 변화는 공염불에 그칠 것이다.

 

박근혜씨의 대통령 당선 이후 많은 사람들이 ‘멘붕’에 빠지거나 정치적 회의를 쏟아내거나 개인으로서의 삶에만 충실하겠노라는 자기계발의 다짐을 되뇌고 있다. 정의로운 시민을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은 가난하고 무지한 시민들에 대한 혐오를 쏟아내거나 아직도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버티고 있고, 어떤 정치이론가들은 선거 패배가 좌로 기운 선거전략의 결과라고 망언을 쏟아내기도 한다.

 

그러나 DJ-노무현 신자유주의 정권 10년의 정리해고, 비정규직 양산 등 구조조정 결과 삶의 파탄을 경험한 하층계급 사람들이 몸으로 알고 있는 시대의 고통을 일부러 반복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기억력이 좋은 사람들이라면 철도 민영화나 FTA, 정리해고 등의 조치들이 아주 오래된 폭력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좌파건 우파건 역사가 언제나 진보하기 마련이라는 망상을 믿어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는 역사가 반드시 진보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걸 방증하고 있다. 가진 자들은 더 부유해지고 없는 이들은 더 곤궁에 빠지는 구조가 예전보다 더 극심해졌다. 심지어 가난한 사람들은 소위 진보세력을 더 이상 신뢰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냉정하게 현실을 인식하고 왜 이런 지경에 빠지게 되었는지 반성적으로 돌아보는 게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2013년에도 전 세계적 자본주의의 위기와 삶의 억압은 극심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희망의 원리>를 쓴 에른스트 블로흐는 절망 앞에 선 동시대 사람들에게 말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향해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며, 무엇이 우리를 맞이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오로지 혼란스러움을 느끼리라.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 지금의 우리에게 절실한 질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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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섭 | 문화평론가


가슴이 서늘하다. 단지 한파 탓만은 아니리라. 많은 이들이 지난 5년간 차고 넘칠 만큼의 고통을 받았다. 그래서 ‘어쩌면 이것으로 충분한 것은 아닐까?’라는 착각을 잠시나마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2012년에 있었던 두 번의 선거에서 이 고통은 그저 계산을 위해 필요한 많은 변수 중의 하나로 취급될 뿐이었다. 저마다 승리의 열쇠를 쥐고 있노라고 호언장담하는 가짜 선지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가운데, 고통은 점점 그늘진 곳으로 밀려났다. 게다가 결과는 그나마 신통치도 않았던 야당의 패배였다.


향후 5년간 국가를 대표하게 될 이들은 벌써부터 이 고통에 대해 선을 긋고 있다. 해고투쟁과 사측의 손배소에 고통받던 노동자들의 자살에 대해 인수위의 입장을 묻자 “그게 당선인과 무슨 상관”이냐고 되묻는다. 일부러 하는 소리라면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지만, 진심으로 궁금해서 되물은 거라면 그 천진난만한 세계관이 부러워 죽을 지경이다. 마침내 전 세계 1위의 자살률을 갖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이들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취급할지가 눈앞에 선하다. 사람들이 자꾸만 자살을 하니, 자살을 법으로 금지하자고 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출처: 경향DB)



곳곳에서 환멸이 고개를 든다. 환멸은 복잡하고 깊은 감정이다. 거짓, 부정의, 크고 작은 부당함, 철가면을 뒤집어쓴 자들의 뻔뻔함, 구태의연한 야비함, 수많은 이들의 외면과 침묵이 반복될 때, 그리고 그것이 변할 수 있다는 조금의 여지도 보이지 않을 때 환멸은 우리에게 온다. 세상이 부지런히 생산해내는 분노가 그 원인이 아니라 개인들의 무력함을 향할 때,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개인들을 좀먹으며 파멸로 몰아붙인다.


그 흔한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적을 곳이 없었던 노동자의 유서는 그들이 단지 철탑과 거리로만 내몰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갑게 증언한다. 스스로의 생을 마감하기로 결심한 바로 그 순간에조차도 짧은 감상에 젖을 틈조차 주지 않을 만큼, 그를 옥죄고 있는 질서는 기계와도 같은 정교함과 무자비함을 갖고 있었다. 이제는 놀라는 척도 하지 않는 자본의 무덤덤한 반응 속에서 그의 죽음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아니 어쩌면 이미 셈해지고 있었을 죽음이었다.


그뿐일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했다는 죄로 고발을 당하고 소송을 당해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당연한 것들을 주장하고 요구했다는 죄로 사회분열세력이나 폭력강성노조 같은 딱지를 붙여야 할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어이없는 꼬투리와 편법으로 설자리를 잃고 밀려나야할지 알 수 없다. 의기양양한 점령군의 얼굴을 한 이들이 쏟아낼 추악한 말들은 어떨까. 자유를 잃은 문화와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할 미학적 폭력들은 또 어떤가.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사온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면…”이라는 말에 “홍시라니 빨갱이구만!”이라고 응수하는 이들과의 피할 수 없는 ‘의사소통’을 우리는 어떻게 해쳐나갈 수 있을까?


하지만 이런 파상공세와 더불어 우리를 환멸에 빠지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라는 시제의 실종일 것이다. 우리의 앞날이 괴로운 현재의 반복과 반복으로 가득 차있을 것이라는 슬픈 예감을 제외하고는 그 어느 것도 미래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지 않다. 노동소득을 통해서 중산층이 되거나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듣기 좋았던 사장님 소리도 쌓여가는 적자 앞에 한없이 초라해진다. “어차피 모두가 기회가 생기면 다 해먹을(은) 자들”이라는 성찰성속에서 서로에 대한 믿음은 강바닥 아래로 파고들고, 이념과 신념의 전선은 자칭 깨어있는 시민과 자칭 애국보수의 진력나는 말싸움 사이에서 표류한다. 먼 미래도, 가까운 미래도 잡히지 않는 가운데 서명을 기다리는 포기각서들만이 길게 늘어서 있는 일상을 니체가 인간이 견딜 수 없다고 단언했던 “이유 없는 고통”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자살이 환멸에 대한 하나의 극단적 대응이라면, 다른 한쪽에는 모든 연민과 공감과 감각들을 닫아걸고 괴물이 되는 길이 존재한다. 게다가 어느 쪽이든 그 파괴적인 결과들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결국 뭣도 없는 우리들이다. 그저 사람으로 살아남는 것이 우리시대에는 이토록 어려운 과업이다. 전시도 아니건만, 나는 우두커니 서서 그저 살아만 있어달라는 말을 전한다. 모두들 부디 살아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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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자유기고가


빵 한 덩어리를 훔친 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연거푸 탈옥을 시도하고 또 붙잡힌 끝에 급기야 19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된 한 남자가 있다. 청춘을 모두 감옥에서 탕진한 그는 끝없는 분노와 사회에 대한 증오심만을 가진 채 하룻밤 몸을 누일 곳을 찾기 위해 방황하다가, 살아있는 성자로 불리던 미리엘 주교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이것은 최근 화제를 불러오고 있는 영화 <레미제라블>의 시작 부분 줄거리이면서, 동시에 그 원작이 되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 내용이기도 하다. 이어지는 내용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장발장은 은혜를 배신하고 은식기를 훔쳐서 달아나려 하지만, 미리엘 주교는 ‘나는 이 그릇뿐 아니라 은촛대도 주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장발장을 구해낸다.



영화 '레미제라블' (출처 ;경향DB)

 


문제는 그 다음이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레미제라블>을 회상할 때, ‘미리엘 주교의 용서로 감화를 받은 장발장은 몇 년 후 막대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다’라고만 기억한다. 19세기 초 프랑스를 배경으로 19년간 징역을 살고 돌아온 장발장이라는 한 사내가 단지 ‘삐뚤어진 내면’으로 인해 세상과 불화하였노라고, 그래서 그가 마음을 고쳐먹는 순간 모든 것이 다 잘 되었다는 식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빅토르 위고가 만든 이야기와 다르다. 장발장은 미리엘 주교가 자신을 용서해준 순간, 크게 놀랐지만 당장 개심하지는 않았다. 한 어린아이가 놓친 동전을 발로 밟아 빼앗은 후 자신은 은그릇을 훔친 것도 용서받았으면서 어린애의 돈이나 강탈했다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충격을 받는다.


그 이후에는 또 어떤가. 위고가 묘사하는 바, 당시 프랑스에서는 한번 징역을 살고 나면 평생토록 죄인으로 살아야 했다. 아예 다른 색깔의 신분증이 발급되며, 여행이 제한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그 신분증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범죄자가 우리 마을에 들어왔다’는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다. 장발장이 미리엘 주교를 찾아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그것이었다.


요컨대 장발장은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평생토록 현대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보호관찰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발급된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감옥 밖의 세상으로부터 또 한번 탈출한다. 우리가 아는, ‘부자가 되었지만 자베르가 쫓아와 다시 도망가는 장발장’은, 애초에 그가 보호관찰로부터의 무단이탈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상태이기 때문에 가능한 캐릭터이다. 지금의 현실에 억지로 대입해본다면, 전자발찌를 끊어버린 것이다.


영화 <레미제라블>을 본 후 대선에서 패배한 상처가 ‘힐링(치유)’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민중들을 위해 혁명을 하지만 그들로부터 외면당한 채 쓰러져나가는 마리우스의 동료들을 보며 비감에 젖어든다는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더 큰 바리케이드, 더 뜨거운 혁명의 모습과 함께 웅장한 목소리로 “Do You Hear the People Sing”이 울려퍼질 때, 많은 이들은 정서적 위무를 받는다.


물론 영화나 소설의 감상에 어떤 정답이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처럼 말하자면 ‘총체성’을 지니는 작품을 감상한 후 그것을 오직 갓 끝난 대선과 연결지어 생각할 뿐이라면, 그 또한 비극적인 일이다. 그것은 우리가 <레미제라블>뿐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마저도 온전히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난한 사람들을 범죄로 내몰고 범죄자들을 결코 다시 받아주지 않던 차가운 세상. 그 속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찢어버리고 새 삶을 시작하지만 계속 쫓겨다니는 선량한 사람. 이 기본적인 서사의 골격을 우리는 그리 어렵지 않게 지금의 현실에 대입할 수 있다. 파업을 해서 전과자가 되고 손해배상으로 신용불량자가 되면 그는 사회 밖으로 간단히 추방된다. 관객들이 ‘도망친 범죄자’가 아니라 ‘실패한 혁명가’에게 감정이입할 때, 그들은 또 한번 잊혀지고 있다.


빅토르 위고에게 그의 장발장이 있었듯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장발장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이들의 얼굴과 목소리를 떠올리지 못한다면, 그들을 다시 우리 사회로 끌어안을 방법을 고민하지 않는다면, ‘힐링’은 값싼 자기 위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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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 에세이스트 jein82@naver.com



크리스마스가 지나갔다. 얼마 전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이런 말이 나왔다. “이 방송은 혹시 실수로라도 어린이들이 들을 가능성이 있어서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산타할아버지는 있습니다.” 


이 믿음을 지켜주는 건 중요하다. 난 지난달부터 3살짜리 아이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면서 산타할아버지를 가르쳤다. 덕분에 아이는 참 금욕적인 생활을 했다. 카시트에 앉고 싶지 않거나 밥을 먹기 싫을 때 산타할아버지에게 전화한다고 으름장을 놓으면 착한 아이가 되어야 했다. 산타할아버지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는가.


 나도 그런 기억이 있다. 아주 어릴 때, 집에 멀쩡히 있던 아빠가 갑자기 밖으로 뛰쳐나가더니 외쳤다. 산타할아버지가 오셨다! 그리고는 선물을 가지고 들어오셨다. 나는 언니와 후다닥 뛰어나갔지만 복도는 비어있었다. 아빠는 따라 나오더니 말했다. 벌써 가셨네. 어색한 연기였다. 그러나 나는 그저 선물을 받았음에 안도했다. 크리스마스는 일종의 심판의 날이었다. 그런데 그날 이외의 기억이 없다. 딱 일 년만 착한 어린이였나 보다.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게 선물을 안 주시는, 일종의 권선징악을 실현하는 캐릭터다. 권선징악은 좋은 거니까 어른들에게도 산타할아버지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집 앞에 선물이 놓여있는 것이다. 신비롭지 않겠는가. 그러면 지난 일 년 내가 착하게 살았다고 안도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선물이 없다면? 화가 나기도 하겠지만, 최소한 반성적 삶이 가능할 것이다. 


현실적인 어려움들은 있다. 선물 구매비용은 기금을 마련하거나 가입비를 받는 등의 방법으로 충당할 수 있겠다. 배달은 우리나라 택배 아저씨들같이만 한다면 못할 것도 없으리라 본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이거다. 누가 착한지, 안 착한지를 판단하기. 이것이이야말로 진짜 문제다.


(경향신문DB)


편의상 수감자들과 전과자부터 제해보자.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건 꽤나 객관적인 사실이다. 그럼 정봉주 전 의원 같은 이들은 선물을 못 받나?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박정근씨는? 짧지 않은 토론이 수반될 문제다.


크리스마스 하면 역시 나눔의 정신이니까, 기부금 영수증 같은 증빙자료를 접수하는 건 어떨까. 너무 단편적이다. 어려울 때 받은 6억원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하며, 그만큼 사회 환원은 할 예정인 사람은 착한 사람인가? 


기본으로 돌아가자. 어릴 적 배운 대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모범적인 생활습관을 가진 이가 착한 사람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군인 전원이 선물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동의하시는가?


역시 쉽지 않다. 최근에 선거도 있고 했으니 활용할 수 있겠다. 1번 찍으면 나쁜 사람이고 2번 찍으면 좋은 사람으로 정하는 것이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사실 산타도 ‘할아버지’이므로 1번에 손을 들어 주실 확률이 크다. 그러면 도덕적 우월함을 확신했던 사람들은 큰 충격에 빠질 것이 분명하다. 다음주쯤 크리스마스를 다시 만들자고 청원할지도 모른다. 그건 크리스마스 정신의 근간을 흔드는 문제이기에 바람직하지 않다.


세대별로 나누는 것은 어떨까? 이번에는 20대가 전에 없이 정치참여에 적극적이었으므로 20대 전원에게 선물을 준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면 자신이 왜 선물을 받는지 혹은 못 받는지에 대해 어리둥절해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선물 증정자 위주의 편의적 발상이다. 이런 건 학자 또는 언론이나 그러는 거다.


뾰족한 답이 없다. 제 아무리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산타할아버지라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오히려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누가 그렇게 좋기만 하고 나쁘기만 한 사람이겠는가. 각자 사연이 있게 마련이지. 그러니까 역시, 크리스마스 선물은 효도를 열심히 해서 엄마 아빠에게 받는 것이 최고라는 결론에 이른다. 어린이들도 이걸 알아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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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 소설가


여기,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한 가족이 투표장소로 향하고 있다. 한 가족이지만 지지하는 후보도, 선거를 대하는 태도도 다르다. 한지붕 아래 살지만 고향도 다르고 성장과정도 다르며 사회에서 처해있는 상황도 다르다. 


아버지와 딸은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 딸은, 정책에 대한 뚜렷한 비전도 없는 박근혜 후보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날개가 되어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 아직 투표가 나라를 바꿀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딸은, 20대 투표율이 관건이라는 말에 친구들에게 카카오톡으로 투표를 독려하기에 여념이 없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와 카카오톡 친구를 맺고 TV토론에서 이정희 전 후보의 발언에 속시원해한다. 아버지는 <나꼼수>가 딸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정치란 혼자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닌데 민주통합당이 하는 ‘짓거리’를 믿을 수가 없다고 한다. 노무현 참여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정치는 소수의 의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엄마는 남편과 딸의 이야기를 유심히 듣는다. 둘다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고 느끼면서도 아직 마음을 정할 수 없다. 엄마는 자신도 미워하지 않는 박정희를 왜 딸이 미워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기세대야말로 박정희 정권의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엄마는 1970년대 환기가 되지 않는 방직공장에서 일하다가 폐병에 걸려 거의 10년 동안 약을 먹어야 했다. 옆동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소식을 전해듣고서도 일을 멈출 수 없었다. 어쨌든 엄마는 경제발전을 이뤘으니 자기 시대의 희생이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부모 없이 자란 ‘희생양’ 박근혜에 대한 연민도 있다. 물론 TV토론에서 박근혜 후보가 보여줬던 빈약한 논거에서 나오는 아슬아슬함이 맘에 걸린 것은 사실이다. 문재인처럼 점잖은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겠지만, 이정희처럼 자기 눈에 다소 ‘과격해’ 보이는 사람과 한편인 것 같아 맘에 걸린다. 


아들은 냉소적인 부동층이다. 회사일에 지친 그는 오랜만에 찾아온 휴일에 잠이나 자고 싶지만, 굳이 투표를 해야 한다면 칸 밖에 도장을 찍고 오겠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투표가 국민의 의사를 표현하는 수단이라면, 자신의 의사는 ‘기권’이라는 것이다. 17대 대선 때 그는 구직 중이었다. ‘일자리 약속’에 BBK는 덮어두고 이명박에게 표를 던졌다. 험난한 구직난 속에서 취업에 성공했지만, 직장생활 5년차인 그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다. 회사에서 고단한 하루를 지내고 나면 남는 시간에는 잠을 자거나 텔레비전을 잠시 보는 것이 고작이다.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에는 코웃음이 절로 나온다. 자신이 퇴직하는 날까지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승진을 하거나 주식이 오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돈을 빨리, 그리고 많이 벌어서 직장을 그만두고 해외로 공부를 하러 떠나는 것이 현재 그의 소망이다.


투표참여 약속하는 한 가족 (출처;경향DB)


가족은 한 사회의 축소판인데, 정말이지 이 작은 사회 안에서도 다양한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복작인다. 사회 안에는 각기 다른 정당을 지지하거나,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거나, 무관심한 구성원들이 있다. 그럼에도 선거가 치러지고 새로운 권력, 새 대통령이 탄생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가 되든 그렇지 않은 후보가 되든 이제 새로 당선된 후보를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거나 끝까지 갈팡질팡하던 사람들도 새로운 변화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투표를 마친 가족이 집으로 돌아가 한 밥상에서 밥을 먹고 지지고 볶으며 함께 살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서로 다른 입장 사이에서 투닥거리고 큰 소리도 좀 내는 게 정치라고들 하지만, 새 대통령은 다양한 구성원들의 마음을 좁혀주길 바랄 뿐이다. 아니, 적어도 서로의 차이를 인정할 여유 정도는 생기기를 바란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사회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는다. 살림살이가 금방 나아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욕구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을 두루 살피고 공감하는 마음이 있다면, 5년은 변화가 일어나기에 짧지 않은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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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자유기고가


 

경제학자 두 명이 길을 걷다가 개똥을 발견했다. 경제학자 A가 B에게 제안했다. 자네가 저 개똥을 먹으면 내가 100달러를 주겠네. B는 고심 끝에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100달러를 벌었다. 좀 더 가다보니 개똥이 또 하나 나왔다. 이번에는 B가 A에게 같은 제안을 했고, A가 개똥을 먹어서 100달러를 B로부터 받았다.


정산을 해보자. 두 사람 모두 개똥을 먹었고, 100달러씩 벌었지만 또 100달러를 썼다. 그래서 결과적으로는 둘 다 개똥만 먹고 한 푼도 못 번 셈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달러씩 서로 두 번 거래를 한 셈이어서, GDP(국내총생산)는 200달러 올라간다. GDP가 현실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과 삶을 제대로 반영해주지는 못한다는 교훈을 전달하고자 할 때 경제학자들이 인용하곤 하는 경제 우화 중 하나다.


 이 지저분한 이야기는 그러나, 모종의 깔끔한 ‘상식’을 전제로 하고 있다.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 한다. 업무를 완수하면 ‘요즘 경기가 통 안 좋아서’같이 구질구질한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지불해야 한다. 게다가 B가 A의 제안을 받아들여 본인도 100달러를 벌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시피, 그들에게는 이른바 ‘갑’과 ‘을’의 관계가 유동적이고 잠정적이다. 이런 상식이 통하는 세상 속에 두 명의 경제학자와 두 개의 개똥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A와 B가 100달러를 매개로 수평적인 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에 주목해보자. A의 제안을 받았을 때 B는 100달러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구강을 청결하게 유지하는 쪽을 선택할 수 있었다. 100달러를 벌게 된 B는 또 반대로, 그 돈을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고, <영웅본색>의 주윤발처럼 담뱃불을 붙이는 용도로 활용할 수도 있었지만, A에게 같은 제안을 하는 쪽을 택했다. 그 시점에서 말하자면 ‘주도권’을 가진 사람은 B이다. 그에게는 100달러가 있지만 A에게는 없다. 100달러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A가 아니라 B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고, 돈은 곧 힘이다. A는 B에게 개똥을 먹이는 대신 그만큼 자신의 ‘힘’을 넘겨준 것이다.


여기서 우화의 형태를 조금 바꿔보자. 갑은 모종의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사장이고, 을은 갓 대학을 졸업한 청년이다. 이 조합이라면 갑이 을에게 ‘젊은 벗의 재능을 기부해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하는 일이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다. 또한 을이 ‘나중에 이력서에 한 줄이라도 써넣을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고 그 일을 수락하는 것도 낯설지 않은 일이다.


재능기부발대식(경향신문DB)


논의의 공정함을 위해 갑이 운영하는 ‘사회적기업’이 정말 좋은 곳이어서, 을의 재능기부는 사회 전체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작용했고, 그래서 을 스스로가 그 이익을 보게 되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고 해도 이 이야기는 본래의 경제학자들이 등장하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사회적기업을 운영하는 갑은, 동료에게 짓궂은 내기를 제안한 경제학자 A와 달리, 을에게 자신의 돈, 즉 ‘힘’을 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을이 월급을 받아서 전액을 다시 갑의 ‘사회적기업’에 기부할 생각이었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갑의 돈은 을의 통장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므로 누구에게 얼마나 어떻게 기부할지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을에게는 없다. 을은 재능기부를 함으로써 ‘기부’ 그 자체뿐 아니라, 다른 그 어떤 행위도 선택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좋아서 하는 일이건 마지못해 하는 일이건 일은 일이다. 좋아하던 것도 직업으로 삼으면 힘들긴 매한가지다. 개똥을 먹고 돈을 받는 경제학자들의 비유는 어쩌면 우리의 삶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신의 일을 사랑해도 매 순간 충만하고 행복할 수는 없으니 말이다. 


하물며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원치 않아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미처 다 파악하지도 못한 20대에게 일한 만큼의 돈을 지불하지 않는 것은, 제아무리 ‘좋은’ 포장지로 감싸도 노동착취일 뿐이다. 이 구조적 모순에 온몸으로 맞서는 후보에게, 이번 대선에서 나는 한 표를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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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 에세이스트


 

영화 <트로이>에서 헥토르는 이런 말을 한다. “나의 원칙은 간단하다. 신을 섬기고, 내 여자를 사랑하고, 조국을 지키는 것이다.” 원칙에 걸맞게 그는 위험에 처한 가솔들을 대피시키고 제 한 몸을 가족과 국가를 위해 바친다. 


반면 아킬레우스는 후세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만을 바랐고, 자손을 남기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당시 ‘이기적 유전자’를 읽은 지인은 분석했다. 자식을 지켜낸 헥토르는 유전자의 기계 역할을 충실히 하는 인간이고, 아킬레우스는 그걸 초월한 인간이다. 나는 그게 그럴듯했다. 그런 측면에서 보니 헥토르는 조금 찌질했고 곧 죽어도 아킬레우스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8년이 지났다. 정신을 차려보니 애가 둘이다. 어느새 큰애는 “크롱은 악어 아니야 공룡이야”라고 나를 가르친다. 작은애는 그 옆에 엎드려 사지를 파닥이며 웃고 있다. 굴러가는 둘째를 잡고서 첫째를 향해 “크롱은 공룡이었구나, 엄만 몰랐네?” 하며 장단을 맞추다가, 조금 공허해졌다. 이 유전자 전달체를 남기기 위해, 얼마나 많은 걸 버렸나.


첫째를 낳고 우리 가족은 진통이 많았다. 일찍이 친정엄마는 ‘내 나이 육십 전에 낳으면 길러준다’고 선언한 바 있다. 공약 실천을 위해 엄마는 서울에 올라왔고 아빠는 독거노인 비슷하게 되었다. 때마침 치솟은 전셋값과 언니의 분가 등 변수로 인해 가족은 흩어졌다 뭉쳤다 하며 2년 동안 이사를 여섯 번 했다. 풍비박산이었다.


그 와중에 복직을 했다. 아기를 친정에 데려다놓고 출근하면서는 퇴근할 생각뿐이었다. 엄마가 힘들어 못한다고 그러실까 무서웠다. 아이가 없을 적엔 이런 생각을 했다. 회사의 애 엄마들은 왜 집에 갈 생각만 하나. 그런데 어느새 그런 모양으로 꾸역꾸역 다니고 있었다. 회사에서 곱게 볼 리가 없다. 당연히 영화 한 편, 맥주 한 잔 같은 여가생활은 인생에서 지워졌다. 아기는 수면권과 같은 기본권마저 박탈하며 제멋대로 울다가 웃다가 했다.


그런데 아기가 또 태어났다. 또 낳다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어쨌든 아기 둘을 보는 건 하나를 보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회사생활에 빗대어 보자면 이렇다. 본부장이 지시한 자료를 만드는데 부장이 갑자기 회의 소집해서 가야 되고, 그사이 전화로 ‘갑’이 메일 안 왔다고 호통 치는데 ‘을’은 찾아와 선처를 호소하고 그 와중에 배도 고픈, 그런 상황이 계속된다고 보면 된다. 퇴근도 없다. 중노동인 것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아기를 기른다. 오늘 아기들을 옆구리에 끼고 마루로 나오니 엄마가 정신없이 졸고 있었다. 엄마도 낼모레면 환갑이다. 언제까지 아기 둘을 볼 수가 있을까. 아빤, 본 지 오래되었는데 아마도, 혼자 찬밥이나 먹고 있을 것이다. 우리 부모님에게 주변 사람들이 “왜 자식 때문에 그러고 사느냐”고 질책하는 모양이다. 자식으로서 그 말이 되게 아프다. 그런데 다른 방법이 없어 그냥 아파만 한다.


그렇다면 이 시기가 고비일 것인가. 아니다. 아기들이 자라면 또 다른 문제들이 생긴다. 일단 아이가 뒤처지지 않도록 열심히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곳은 낙오자까지 포용하는 너그러운 나라가 아니다. 어렵사리 대학생이 되면 등록금에 허리가 휠 것이다. 전셋값이 요즈음 같아서는 시집장가는 보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어찌어찌 손자까지 본다면 걔들을 길러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 나이 육십에도 오늘처럼 아기 이유식이나 만들고 있을 터인데, 이게 사는 건가.


세상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요즘 같다면, 이름을 남기기는커녕 가죽도 못 남기고 죽을지 모른다. 


그러나 마침 대통령 선거다. 모두가 새 세상이 되길 기대하는 시기다. 그리하여 국민으로서 공약을 하나 건다. 이 시대 여성의 삶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교육, 경제, 복지 모든 측면에서 아이 기를 만한 세상을 만들어주는 대통령이 나온다면 나도, 이왕 이렇게 된 거, 국가가 장려하는 바와 같이 셋째까지 낳아 저출산 문제 해소에 작은 보탬이 되도록 하겠다.


(경향신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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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소설가


 

8년 전, 내가 다니던 대학교 바로 옆에 대형 쇼핑센터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정문 바로 옆이었지만 얼핏보면 대학의 일부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당시 나는 학교 신문사 기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학교 앞 상업화에 반대하는 의미로 쇼핑몰 건립에 반대하는 침묵시위를 하기로 했다. 검은 테이프를 ‘X’ 모양으로 붙인 마스크를 하고 반나절 동안 쇼핑몰 앞에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피켓에는 “학교 앞 상업화 반대,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보장하라” 대강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위를 한 보람도 없이 쇼핑몰은 계획대로 공사에 들어갔고 곧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장사가 잘되지 않았고 머지않아 폐업 선언을 하고 말았다. 학생들은 학교의 일부인 것마냥 정문 옆에 착 붙어있는 쇼핑몰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학생들이 외면하자 쇼핑몰은 결국 영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다닌 대학교 주변은 작은 옷가게가 즐비한, 이른바 쇼핑의 메카였다. 학생보다는 관광객을 위한 곳으로, 해외 관광책자에도 소개되어있는지 해외 관광객들이 줄지어 쇼핑을 하고 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 쇼핑몰 건립만은 막아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 소상공인들이 상권을 형성하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던 것이다.


개장을 준비 중인 이화여대 ECC 내 한 프랜차이즈 매장 (경향신문DB)


그때만해도 학교 바로 옆에 대형 쇼핑몰이 있는 것이 어쩐지 ‘부끄럽다’는 느낌이 있었다. 대학이라면 모름지기 오래된 서점과 가벼운 주머니로도 밥 한 끼 먹을 수 있는 식당, 정감 있는 술집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적어도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대형 쇼핑몰이 망하는 것을 보고 입점한 상인분들께는 미안하지만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1년 뒤, 학교 안 운동장 부지에 기업의 이름을 딴 지하 캠퍼스 센터를 건립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제는 외부가 아니라 내부였다. 그것도 대담하게 캠퍼스 한가운데였다. 지하 주차공간을 만들고, 커피숍과 식당, 서점, 스포츠센터 등의 편의공간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먼저 운동장을 사용하던 체대 학생회가 반대하고 나섰고 학교 신문에서도 지하 캠퍼스 건립을 부정적으로 다루었다. 학교 안에 기업의 후원을 받아 세워진 건물은 이미 많았다. 학교 이름과 기업의 이름을 나란히 적어 건물 이름을 짓는 것에 익숙해졌다. 마치 동업자의 이름을 섞어서 가게 이름을 짓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었다.


2004년은 학생들에게 ‘공사’연도로 불렸다. 지하캠퍼스 건립이 가열차게 진행되었다. 지하캠퍼스는 내가 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완공되었다. 유명 건축가가 설계했으며 스타벅스, 교보문고, 링코 같은 친숙한 프랜차이즈로 채워진 그 공간은 여느 쇼핑몰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주 고객이 대학생들이라는 것이었다. 


학교 안에 기업의 후원을 받은 건물이 지어지면 건물도 좋아지고 편의시설도 생기니 좋은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학교 밖으로 가지 않고도 스타벅스 커피를 마실 수 있고, 최신식 체육시설도 이용할 수 있으니 학생들에게도 훨씬 좋아진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아낌없이 베푸는 기업의 호의에 감사한 마음이 솟아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대학도 기업의 후원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오히려 후원을 받을 정도의 인지도가 있다는 사실을 기쁘게 여겼다. 최근에는 캠퍼스에 ○○스퀘어 같은 본격적인 대형 쇼핑몰을 만들고, 기숙사를 세워주는 대가로 대형 할인점을 입점시키는 대학들도 생겼다. 하지만 과연 그 편의시설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나에게 대학은 도피처 같은 곳이었다. 집에서 나와 살던 내가 밥 세 끼를 해결하던 곳이었고 대학 밖에서는 가질 수 없는 동아리방과 도서관 같은 공간을 제공받았다. 냉난방이 잘 안되는 자취방에서 도망치듯 나와 강의실 앞 소파에서 널브러져도 위화감이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신이 있는 공간에 늘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대학만은 그 틀로부터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제 대학 안에서도 ‘있는 것만으로’ 돈을 지불해야 하는 공간이 늘었다.


등록금에 허덕여 밥값조차 아껴야 하는 대학생들은 학교 안 스타벅스를 지나며 무슨 생각을 할지 짐작해본다. 분명 캠퍼스 안이고 문은 활짝 열려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곳에서 발표준비 모임이라도 하게 되면, 누군가는 쾌적하고 커피향 좋은 공간이 있음에 기뻐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남몰래 커피값에 신경 쓸 것이다. 캠퍼스 안에서 깊어지고 있는 소외가 반짝거리는 건물외관과 상품들에 가려지는 것은 아닌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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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높은 놈, 배운 놈, 잘난 놈, 있는 놈! 모두 다 내 얘기를 들어봐라. 나도 말 좀 해야겠다. 이 높은 데 있을 때 큰소리 좀 쳐보자!” 1980년대 최고의 영화 <칠수와 만수>에서 빌딩 옥상에 오른 만수(안성기)가 이렇게 외친다. 구경하는 시민들, 공권력, 기자들은 이를 노동자들의 농성 투쟁으로 오인하고, 여기서 비롯된 일대 촌극에 동참한다. 그리고 칠수와 만수는 결국 자신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비극성을 확인한다. 빌딩 아래서는 누구도 칠수와 만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로 자동차 소음 가득한 도시의 하늘로 사라질 뿐이다. 만수는 뛰어내리고 칠수는 체포됨으로써 그들의 의도치 않은 고공농성은 이렇게 끝난다.


외환위기의 거센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하던 1997년 가을 중학교 때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가던 어느 날 평생 잊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경사가 가파른 언덕을 올라 집 앞에 다다랐을 때, 두 눈 앞에 펼쳐진 믿기 어려운 장면. 3층 빌라 두 동을 짓는 건설현장에 쌓여 있는 속칭 아시바 맨 꼭대기, 땅에서 15m가량 떨어진 높이의 철 구조물 위에 한 남자가 올라 있었다. 그는 몸을 지탱할 꼬챙이나 로프도 하나 없이 단지 두 손으로 아시바 끄트머리를 부여잡고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당장 약속해라, 은행에서 돈을 출금해서 당장 갖고 오란 말이야!”


 듣고 보니 그는 지난 넉 달째 임금 체불에 시달리고 있는 일용직 건설노동자였다. 3층짜리 빌라 건물 공사의 거의 막바지 상황이었다. 그런데 건축업자가 끝까지 임금을 주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외침 속에 섞인 절박함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벼랑 끝에 선 절망이었고,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무관심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었다. 이 소란에 모여든 주민들은 넋 놓고 아슬아슬하게 선 노동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 동네에서 가장 격렬했던 ‘계급투쟁’의 시간이었다.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현대차 비정규직 해고자 최병승씨와 천의봉 비정규직지회 사무국장 (경향신문DB)


그 때문일까? 높은 탑 위에 오른 사람, 크레인에서 소리치는 사람이 더 많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 사회가 해고되었거나 비정규직인 노동자에게 매우 잔인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됐다. 21세기에 이곳처럼 고공농성이 많은 나라가 또 있을까? 조선소에서, 건설현장에서, 한강 다리 위에서, 높은 빌딩 위에서 벼랑 끝에 선 노동자들은 외치고 또 절규한다. 이렇게 높은 곳에 올라 ‘죽을 각오’를 하지 않으면 세상은 귀도 기울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최병승씨와 천의봉씨도 울산공장 송전탑 위에 올랐다. 최병승씨는 이미 대법원에서 현대차의 ‘불법파견’에 따라 정규직이 인정된다는 확정 판결을 받았으니 마땅히 다른 모든 비정규직 동료들과 함께 ‘정규직’이 되어 공장으로 돌아가 일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차 자본과 정몽구 회장은 대법원 판결마저 깡그리 무시하며 ‘불법파견’을 자행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골리앗에 맞선 다윗의 싸움을 벌인 지 벌써 8년째다. 어느 새 사내하청 불법파견 문제는 전 사회적인 이슈로 등장했고 현대차 자본이 불법적으로 비정규직을 늘려왔다는 건 만인이 안다. 여러 언론에서 밝힌 바 있듯 현대차 자본의 이 ‘버티기 탄압’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자본이 제 힘을 믿고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1차 하청과 2차 하청으로 나누어 착취하고 있을 뿐이다.


정부는 정몽구 회장이 수천억원대 횡령을 했음에도 쉽게 풀어준 바 있다. 당장 구속 수사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찰과 울산지법은 도리어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구심점인 박현제 현대차 비정규직지회장과 노조 간부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하고 농성하고 있는 천의봉씨에게는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공권력마저 제 본분을 잃고 빼앗기고 착취당하는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으니 1500만 노동자들은 어떻게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찾아야 하는 걸까? 오는 17일은 울산에서 ‘3차 포위의 날’이 열린다. 영화에서 칠수와 만수가 선 높은 빌딩 아래 구경꾼들이 “우리가 바로 저 페인트공이다”라는 마음이었다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송전탑 위에 두 하청 노동자가 걸어놓은 저 작고 빛나는 희망에 내기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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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 에세이스트


 

뽀로로는 많이 알려졌지만, 실제로 그의 위력을 느껴본 이는 얼마 없으리라. 우리 아이 역시 뽀로로의 노예다. 아이는 뽀로로만 보면 직전까지 자신을 괴롭히던 부정적 감정들을 망각한다. 오죽하면 처음으로 말한 문장이 “빼빼빼 아나 벌래여(뽀로로 하나 볼래요)”였다. 그 간절함은, 나도 드라마를 보며 느껴봤기에 안 보여주기도 어렵다. 그러고보니 뽀로로는 내가 푹 빠졌던 미국드라마 <프렌즈>를 닮았다. 친구들끼리 노닥거리는 게 이야기의 전부라는 점에서 말이다.


정말이지 뽀로로와 친구들은 하루 종일 논다. 썰매를 타거나 아니면 낚시를 다니면서 제대로 논다. 그리고 하루종일 먹는다. 먹어도 초콜릿 쿠키나 딸기 케이크처럼 맛있는 것만 먹는다. 그래서 나는 이걸 계속 보여줘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런 판타지가 어디 있는가. 좀 자라면 실망하게 될 것이다. 저런 세상은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로보카 폴리’처럼 변신하는 자동차가 현실성이 있겠다. 


(경향신문DB)


 그래도 나는 여전히, 우리 아이가 좀 놀고 먹으면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백수로 자라라는 건 아니다. 그냥 ‘저녁이 있는 삶’ 정도? 하지만 그게 가능한 세상이던가. 트위터에서 ‘대나무숲’ 계정들을 보면,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고 아이가 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있다. ‘출판사옆대나무숲’을 비롯해 연구소, 영화사, IT회사 옆 대나무숲 등이 있는데, 답답한 이는 누구나 익명으로 하소연할 수 있다. 그러다보니 체계없는 삶의 현장에서 힘없는 자들이 착취당하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보상 없는 노동, 강요된 업무, 여가 없는 삶. 그리고 불행한 사람들. 


심지어 ‘고등학교 옆 대나무숲’도 있다. 그곳에는 다른 대나무숲과 다르게 ‘이 시기가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기대가 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아서, 차마 읽기가 미안하다. 도대체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몇살부터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가? 우리는 왜 이렇게 살게 되었을까? 


땅을 일궈야만 생산이 가능할 때는 근면이 미덕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도 그런 촌스러운 의견을 가진 사람은 많다. 거기에 돈을 사람보다 중하다 여기는 천민 자본주의, 오래된 악습인 권위주의가 더해진다. 이런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상사 또는 ‘갑’이 되어 부하직원 또는 ‘을’들의 삶을 강탈한다. 거기에 높은 실업률로 대변되는 팍팍한 삶, 조금이라도 뒤처지면 나락으로 떨어지게끔하는 그물없는 복지제도 등은 우리로 하여금 사표를 날려도 내일 아침까지만 날리는 비굴한 인간이 되게 한다.


나는 이게 행복지수는 물론 성장지수도 낮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모름지기 사람은 놀아야 발전하는 존재다. 요한 하위징아라는 네덜란드 학자는 인간은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라고 정의했다. 동물은 놀기에 기계 이상의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은 그저 합리적인 존재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철학과 예술, 문화를 꽃피워 낸 건 다 놀아서라는 것이다. 틈만 나면 혁신을 외치는 요즘이 아닌가. 필요한 건 야근이 아니라 놀이인 것이다. 


물론 ‘놀면서까지 뭘 창조해야 하나’라고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버트런드 러셀은 하루 4시간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온다면 일부는 유용한 일을 추구할 것이라 했지만, 꼭 그렇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너그럽게 말했다. 왜냐하면 평범한 남녀들은 행복해질 기회를 갖게 되어 보다 친절해지고 서로를 덜 괴롭히게 될 텐데 그런 도덕성이야말로 세상이 가장 필요로 하는 자질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연인지 의도된 것인지, 뽀로로에서도 그런 사례를 목격할 수 있다. 뽀로로의 친구 중엔 다소 오타쿠적인 측면이 있는 여우 에디가 있다. 그 독특함에도 친구들은 친절하게 잘 놀아준다. 덕분에 에디는 놀면서 얻은 아이디어로, 로봇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든다. 그렇다. 문명은 이렇게 발전하는 게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오늘만큼은 칼퇴근을 지시하여 혁신을 추구하는 상사가 되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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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 소설가


 

얼마 전, 대선을 반장선거에 빗댄 영상을 보다가 옛 반장선거의 추억이 떠올랐다. 초·중·고등학교의 반장선거는 서로에 대한 정보가 아직은 빈약한 학기 초에 이뤄지기 때문에 성적이나 외모만 보고 뽑는 경우가 많았다. 마지막 반전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연설 시간인데 후보들이 나와서 ‘반장으로 뽑아주신다면~’으로 시작하며 공약을 내놓는 시간이다. 그때도 나는 공약을 전부 믿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그 아이가 어떤 말을 하는지는 여전히 중요했다. 학교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하면 학급도서 정도는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반장선거가 있다. 중학교 때 후보들이 나와서 공약을 내놓았다. ‘화장실 청소를 다 하겠다.’ 이건 속셈이 너무 뻔했다. ‘솔선수범하겠다.’ 너무 평범했다. ‘운동장에 축구골대와 농구골대를 세우겠다.’ 대부분의 남자아이들이 환호했지만 나에게는 좋을 게 없었다. 그 때 마지막 후보자가 나와서 말했다. ‘저는 여러분의 아이돌이 되겠습니다.’ 뭔가 착 감겼다. HOT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때였고 아이돌이 중·고등학생들의 삶 깊이 침투해 있었다. 뭘 하겠다고 말한 것도 아닌데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그 후보자는 내친김에 HOT의 ‘캔디’를 불렀고 성적이나 외모에서 앞서는 다른 후보를 제치고 당당히 반장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여러분의 아이돌이 되겠다’가 바로 ‘슬로건’이다. 슬로건을 보면 후보의 정체성 노선에 가닥이 잡힌다. 신선한 한 줄의 슬로건이 가진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슬로건의 어원은 스코틀랜드어 ‘슬로곤(slogorn)’으로 ‘군대’와 ‘함성’이라는 뜻이 섞여 있다. 군대를 응집시키는 함성과도 같은 한마디랄까. 그래서 슬로건은 길지 않고, 메시지가 정확하면서도 스토리를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후보의 삶에 비춰볼 때 납득이 가야 한다. 


1997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준비된 대통령’, 2002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새로운 대한민국’, 2007년 이명박 대통령은 ‘국민성공시대’였다. 미트 롬니와 대결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008년 대선 당시 정치구호는 ‘Change!’와 ‘Yes, we can!’이었다. 오바마가 사람들의 마음을 잡는 데 성공한 것은 대선 당시의 상황도 한몫했다. 사상 첫 유색인종 대통령에 대한 기대, 8년 동안 전쟁과 경제불안으로 하한가를 친 부시 대통령에 대한 실망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그렇다면 2012년 대선에서 가장 눈에 띄는 슬로건은? 문재인 후보는 경선에서 ‘사람이 먼저다’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바 있고, 박근혜 후보는 ‘내 꿈이 이뤄지는 나라’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 안철수 후보는 최근 ‘국민이 선택하는 새로운 정치가 시작됩니다’라는 슬로건을 발표했다. 


민주통합당 대선경선 손학규 후보가 서민금융 보호 정책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DB)


그러나 아직 회자될 만큼 압도적인 슬로건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패배한 손학규 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이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된 바 있다. ‘저녁이 있는 삶’은 듣는 순간 유럽풍 복지국가에서 있을 법한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야근은 축복’이라며 ‘야근이 있는 삶’을 이상적으로 보는 기성세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수많은 홍보전문가가 투입되고 슬로건 경쟁열기가 높아지며 이미지 정치만 난립한다는 비판도 있다. 하지만 슬로건은 국민들이 대통령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려주며, 대통령의 행적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Change!’를 외친 오바마 대통령에게 미국 시민들은 어떤 것들을 바꿔 놓았는지 따질 것이다. ‘국민성공시대’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에게 실망한 사람들은 말을 바꾸어 ‘국민실패시대’라는 오명을 붙이기도 한다. 잘해도, 못해도 한 번 각인된 슬로건의 그늘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그래서 슬로건은 중요하다. 


중학교 때 남다른 슬로건을 선보였던 우리반 반장 얘기로 돌아가보자. 그녀는 반장 노릇보다는 아이돌의 면모를 과시하는 데 주력했는데, 어쨌든 HOT의 망치춤을 완벽하게 재현해 전교생의 아이돌이 되기는 했다. 역시, 슬로건은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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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안철수 대선 출마 기자회견문에서 SF소설 작가 윌리엄 깁슨의 말을 언급한 이래 그의 책들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단다. “미래는 이미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있지 않을 뿐이다”라는 매력적인 인용구가 부지불식간에 일간신문의 정치면을 장식했다. 안철수는 깁슨의 이 비의적 잠언을 빌려 자신이 밀고 있는 ‘혁신 경영’의 이미지를 알리려 했던 모양이다.


과거 ‘혁신’의 이미지는 소위 사회주의자들의 차지였지만 오늘날에는 그와 반대가 되어버렸다. 2000년대부터 우후죽순격으로 출간된 무수한 혁신 경영의 사례를 담은 책들의 집대성 같은 존재인 안철수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융복합’ ‘혁신’은 오늘날 좌파 대신 ‘혁신’의 이미지를 거머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의 대표 슬로건이다. 경제적으로는 철저히 자본주의 착취구조를 안착시키기 위해 복무하지만 문화적으로는 ‘진보’나 ‘혁신’ 따위의 이미지를 거머쥔 산업시장의 전문가들이 바로 그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다.


안철수의 생각 (경향신문DB)


 안철수가 우리 사회의 상처와 아픔들을 치유할 수 있을까? <아프니까 청춘이다>식의 자기계발 교훈을 철석같이 믿고 있다면 이 훌륭한 멘토의 등장을 구세주처럼 반길 것이다. 그러나 세계적 경제위기에 임박해 자본주의 시스템 작동의 가부를 위협 받고 있는 지금, 어떤 훌륭한 오너 한 명이 할리우드 영화의 슈퍼히어로처럼 세상을 바로잡아줄 만큼 단순한 세상이었다면 이미 세상은 몇 번쯤 혁명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오늘날 우리를 끊임없이 배제에 대한 공포와 경쟁 속으로 밀어넣는 것은 다름 아닌 경제위기이다. 이 위기의 근원은 전 세계적으로 펼쳐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지, 게임의 룰을 바로잡는다고 해서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뜯어 고쳐야 할 것은 게임의 룰 그 자체다. 각자도생의 세계에서 자기계발을 반복한들 점점 더 치열한 경쟁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중요한 것은 지독한 경쟁의 룰 안에서 살고 있는, 노동조합 등 자기-통치의 무기를 쥐지 못한 ‘몫 없는 자들’이 함께 뭉치고 저항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정치를 펼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는 청소노동자들의 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법정 최저임금에 가까운 임금을 받으면서도 온갖 불합리한 대우를 받고 일해 온 청소노동자들은 저 유명한 신자유주의적 ‘혁신 경영’의 기치에 따라 내년부터는 미화원 점수제를 시행하겠다는 방침을 들었다. 일을 열심히 잘하는 사람에겐 시급을 올려주고, 그렇지 않은 노동자는 과감히 자르겠다는 것이 그 혁신 방침의 기본 취지였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지 않은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많은 일터에서 자행된 연봉제, 정리해고제, 간접고용, 경쟁적 시스템이 전면화된 것이다.


오늘날 몫 없는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혁신 경영’인가? 아니면 단결과 연대인가? 5년 전 한국 사회의 ‘표준시민’들은 무너지지 않을 중산층의 꿈을 뉴타운 신화의 정치가에게 담아 대통령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뉴타운의 붕괴와 민주주의의 파괴였다. 안철수가 신자유주의 개혁 이후 줄줄이 실패한 전직 대통령들의 역사의 산물이자 정당정치마저 붕괴된 위기의 산물이자 그 지루한 반복이 맞다면, 경제위기 속에서 삶의 전망을 찾지 못하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변화될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두 달여의 공장 밖 농성을 마치고 일터로 복귀한 SJM 노동자들이 떠오른다. 용역깡패를 동원해 노동자들을 두드려 패고 직장폐쇄로 공장에서 내쫓은 사측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포기하기를 종용했다. 세간의 흔한 선택지라면 SJM의 노동자들도 내부적으론 분열하고 저항은 포기하길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선택한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 단결하고 싸우며, 지역사회와 연대하는 것이었다. 결국 골리앗에 대한 다윗의 싸움처럼 보였던 이 싸움은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는 노동조합이 없는 불안정한 일터에서 일하는 대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게다. 아마도 우리는 함께 뭉쳐 싸우기보다는 서로 경쟁하고 다투어 1등을 정하고 낙오자는 추락하는 질서에 익숙한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런 게임의 룰이 아무리 공정한들 결국 우리에게 정치적 무기를 쥐여주지 않는 정치란 결국 가짜 정치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저 SJM 노동자들이나 노동조합을 결성한 청소노동자들처럼 일하는 과정에서 겪는 자신의 억압과 모순을 스스로의 단결과 저항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만약 윌리엄 깁슨의 저 훌륭한 경구의 진짜 주인이 “이미 도래한 미래”처럼 우리에게 와 있다면, 그 몫은 바로 안철수가 아니라 단결하고 저항하는 사람들 자신의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미래를 더 알리고 확산시키는 것은 바로 우리의 몫이다. 지금부터는 우리 주위와 우리 자신의 일상에서 기적처럼 우리 자신을 구원할 ‘사건’을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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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 서강대 철학과 대학원생


 

필자가 2010년 가을 무렵 입대를 선택한 것은 2012년 여름에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해 연말이 대선이니 이른바 ‘논객’들의 활약이 도드라질 것이고, 따라서 긴 공백을 뚫고 입지를 확보하는 일도 좀 더 쉬워질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한 장의 전역증을 주민등록증 뒤에 살포시 감춰놓고 다니게 된 지금, 그 계산은 명백히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2012년 12월19일에 대통령 선거가 치러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논객’이 활약할 만한 입지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 조건들이란 무엇인가? 


 첫째, 피아 대립 구도가 명확해야 한다. ‘우리편’과 ‘너희편’을 확실히 나눠서, 내 글이 먹혀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그 ‘우리편’에 모종의 정당성이 있어야 하고, 나 스스로가 그에 동의해야 한다. 그래야 ‘진정성’ 있게 논객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고, 독자들도 비로소 설득된다.


셋째, 그 논객들의 활약을 실어줄 수 있는 언론들 역시 스스로의 입장을 확실히 해둔 상태여야 한다. 그래야 지속적으로 특정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자신의 글을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DB)


양심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인혁당 사건에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루되어 있는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문명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는 후기 박정희 정부의 직접적인 관계자 중 한 사람으로, 유신정권의 공과 과를 모두 짊어지고 가야 할 책임이 있다. 비단 ‘판결이 두 개’인 인혁당 사건만이 아니라, 유신정권이 만들어낸 그늘의 깊이를 모두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따지자면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 후보는 어떤가? 최근 항간에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주도적으로 추진했던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문재인의 캠프 주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고 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문재인은 참여정부의 공과 ‘과’를 모두 끌어안은 셈이다. 물론 그것은 ‘대한민국 남자’다운 태도일 수 있지만, 정치인으로서 올바른 자세일지는 매우 의문이다.


한편 1997년 대선 후로 얼마 전까지는 전통적인 여야 구도에서 벗어나더라도 좀 더 진보적인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국민승리21부터 가시화된 진보정당 운동이 대안 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인터넷에서 ‘찌질’거리고 있었을 뿐이지만, 어쨌건 스스로의 정치적 지향에 부끄럽지 않게 현실정치에 대한 담론에 뛰어들 수 있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고래가 그랬어>의 발행인인 김규항의 말마따나, 예전에는 ‘신념대로 찍으라’고 말할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나의 신념을 비춰볼 수 있는 현실 속의 거울이 산산조각 나버렸다. 더욱 우스꽝스러운 것은 그 분열과 파산이 ‘통합’의 기치하에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잔여 세력과 국민참여당 계열의 정치인, 진보신당의 간판급 얼굴들이 모여 통합진보당을 만들었는데, 이른바 ‘주사파’의 활약에 힘입어 노회찬, 심상정, 유시민 등은 다시 한 번 탈당 보따리를 쌌다. 급격하게 힘을 잃은 진보신당은 사회당과 살림을 합쳤지만 그로 인해 어떤 상승 효과가 발생하고 있지는 않다. 지난 총선 당시 관악을 공천에서 부정선거를 한 이정희는 국민들 앞에 죄송한 마음을 담아 눈물의 ‘강남스타일’ 말춤을 춘다. 진보정치는, 적어도 제도권 속에서는, 죽었다.


당시 이정희의 부정선거를 기묘한 논리로 옹호하던 진중권은 현재 안철수를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필자가 이 칼럼을 쓰는 9월19일 새벽 1시45분 현재, 안철수는 유력한 대선 후보이지만 대선 출마 선언을 하지도 않은 대선 후보다. 말하자면 ‘슈뢰딩거의 안철수’인 셈인데, 필자는 그런 양자역학적 후보를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상상력이 풍부한 인물이 못된다. 게다가 19일 오후 3시, 그가 대선 출마와 관련하여 중대발표를 하기로 예정되어 있지만, 신문사의 마감 시한으로 인해 그 내용을 이 칼럼에 반영할 수도 없다. 


지지 세력뿐 아니라 심지어 운도 없으니, 필자에게 ‘논객’의 시대는 정말 끝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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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에세이스트


 

서재 정리를 하다가 <간디 자서전>을 발견했다. 난 간디에도 자서전에도 관심이 없는데 이게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이것은 남편이 연애 초기에 준 생일선물이었다. 여자친구의 생일선물로 인도의 위대한 정신적 지도자의 자서전이라니. 속지에는 다음과 같이 증정 의도가 적혀있다. “너는 내 눈에 대인이야. 그래서 세계의 대인에 관한 책을 준비했어. 우리 모두 간디처럼 살자.” 간디처럼 살자고? 생일날 빈손으로 만나기 무안하여 급하게 골라온 거라고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당시 이 책을 읽지 않았다. 나는 세계의 대인이 되기보다 회사원이나 되고 싶었던 사람이었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읽어보기로 했다. <힐링캠프> 같은 프로그램도 열심히 보는데 유명한 분의 자서전쯤이야 못 읽을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 중요한 점을 깨달았는데, 간디처럼 살다간 큰일이 나고야 말 것이란 사실이었다. 


(경향신문DB)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도인 권익보호 운동을, 인도에서 영국으로부터 독립운동을 지휘한 지도자다. 그 방식은 ‘샤타그라하’라고 명명한 ‘비폭력·불복종’이었다. 간디 본인도 이 원칙에 입각하여 살았기에 우리는 그를 평화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여기까지는 다 아는 얘기.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내가 보니까 간디는 수줍음을 잘 타고 고집불통이어서 친구하고 싶은 타입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나쁜 남편이었다. 정절을 지켜야 한다며 부인을 감금하다시피하다 나중엔 금욕실천을 한다고 부인과 잠도 안 잔다. 의사가 병든 부인에게 소고기즙을 먹이자, 채식주의자 간디는 현대 의학 치료를 거부하여 부인을 고생시킨다. 부인에게 갑자기 소금과 콩을 먹지 말라고도 한다. 거절하자 ‘나는 안 먹을 건데 당신은 먹던가’ 식으로 고집을 부려 결국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킨다. 그러고는 이것이 가정에서의 ‘샤타그라하’라고 즐거워했다. 그는 부인의 성격에 대해 ‘독립심과 인내심이 강했으며, 적어도 내게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라고 묘사했는데 나라도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남편의 섣부른 바람대로 간디처럼 산다면, 나는 요즘 매일 자정께 들어오는 남편을 지금처럼 가만 둬선 안 되는 것이다. 남편이 간디를 잘 알았다면 이 책을 선물했겠는가. 모르니까 그랬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잘 모르니까, 기껏해야 요약해 놓은 삶밖에 모르니까, 누가 훌륭하다고 쉽게 말한다.


칭찬이야 좀 섣불리 해도 될 것이다. 하지만 잘 모르는 상태에선 비난도 쉽다. 그건 문제다. 언론은 그런 사태를 부추긴다. 알랭 드 보통은 신문에 ‘보바리 부인’의 스토리가 실린다면 ‘쇼핑 중독에 걸린 탕녀’라는 헤드라인을 뽑을 것이라고 했다. 소설 보바리 부인을 읽으면 부인을 이해하게 되겠지만, 쇼핑 중독에 걸린 탕녀에게는 손가락질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든 건 나주 성폭행 사건 보도를 보면서다. 그날 범인이 피해자 엄마를 PC방에서 만나 인사를 나누었다고 했다. 애 엄마가 어떻게 새벽까지 오락을 하나. 많이들 그랬을 것이다. 우리 엄마도 그러시기에 “애 엄마가 낮에 PC방을 갈 수가 있나. 가려면 밤에 가야지”하고 대답하다 궁금해졌다. 두 살배기를 포함한 아이 넷을 겨우 재우고, 술에 취해 널브러진 남편을 뒤로하고 PC방에 간 여성의 하루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거기까지 오게 된 삶은 또 어떤 것이었을까. ‘새벽에 PC방에 간 애 엄마’ 정도로 요약될 만큼 간단한 것이었을까.


전남 나주 초등학생 성폭행 사건 피해자의 집 (경향신문DB)


그러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힐링캠프’처럼 긴 인터뷰를 할 기회도, 두꺼운 자서전을 쓸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삶이 그렇게 단순한가? 아니다. 우린 복잡한 내면을 가진 인간들이고 운명은 누구에게나 제멋대로 흘러가며 그 속에서 나름의 사연들이 생긴다. 그렇다면 남들의 삶에도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우린 어떤 매체도 발언권도 지니지 못했지만, 그 점만 기억해도 서로를 덜 해하면서 살 수 있으리라. 어쨌든 끔찍한 일을 겪은 아이와 가족의 상처가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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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 소설가


 

아버지가 퇴직한 뒤의 변화 중 하나는 텔레비전을 함께 시청하는 시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자연히 뉴스를 함께 볼 일도 생기고 뉴스 내용에 대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할 기회도 많아졌다. 이 시간이 내게 편하지만은 않다. 특히 대선이나 정치적인 뉴스가 나올 때면 아버지와 나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처음에 아버지는 혼잣말하듯이 우회적으로 당신의 의견을 밝힌다. “저게 뭐하는 짓이냐” “잘들 한다” 등등. 혼잣말을 빙자한 의사표현이 고조될 즈음이면 때가 가까워졌다는 징조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거의 정확히 알 수 있고, 아버지 역시 내가 아버지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쨌든 아버지와 나는 유전자를 공유한 데다 성격과 사고방식이 비슷한 부녀 사이인 것이다. 아버지의 감정이 충분히 고조되었다 싶을 즈음 여지없이 아빠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아버지와 정치적인 사안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 특히 각자 지지하는 정당과 정치인을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 나 역시 구사하는 화법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는 유머다. 유머는 모든 것을 이긴다. 대놓고 비꼬지 않으면서 상황을 반전시켜 허를 찌르는 유머 한마디면, 게임 오버다. 하지만 유일한 문제는 탁월한 유머감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유머감각이라면, 내가 아버지보다 한 수 아래다. 특히 아버지가 음주 뒤 말발지수가 상승했을 땐 백기부터 들어야 한다.


두 번째는 평화롭고 우회적인 어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두루뭉술하게, 나의 의견도 내세우면서 상대방의 의견도 어느 정도 동조해주는 것이다. ‘네 말도 옳고 쟤 말도 옳다’던 황희 정승처럼 나도 ‘이 후보는 잘생겨서 좋고, 박 후보는 요가를 해서 유연성이 좋다더라’고 말하는 것이다. 스위스만큼이나 중립적으로 말이다. 주로 피곤한 나머지 논쟁이 깊어지지 않기를 원할 때 쓰는 방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세 번째, <100분 토론> 스타일로 가고 만다. 아버지는 내 입을 열게 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서로 말할 타이밍을 잡느라 촉각을 곤두세우고 타협지점을 찾기 힘든 대화를 이어나간다. 가끔 아버지와 대화를 하고 있으면 일부 직장 상사 분들이 떠오른다. 회사에서 직장 상사가 까마득하게 어린 부하직원에게 정치문제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일이 간혹 있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박근혜 후보가 좋냐, 문재인 후보가 좋냐?” “요즘 젊은 사람들은 안철수 원장을 어떻게 생각하나?” 하고 묻기도 한다. 


사실 이 질문에 대답하기란 여자들이 남자친구에게 날리는 “김태희가 예뻐, 내가 예뻐?”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에 버금갈 만큼 어렵다. 우선 솔직하게 답하기가 어렵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대방의 의도를 간파해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티나게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어제 뉴스에 따르면 A후보의 지지율이 5% 정도 높은 것 같았습니다” 하고 객관적인 수치를 인용하거나 “안철수 원장은 정치를 해도 좋을 것 같은데 학자로서의 모습이 더 잘 어울리긴 합니다” 하고 양비론을 쓰는 것이 무난한 답변이다. 아버지와 정치 얘기를 하다 보면, 아버지도 퇴직 전 부하직원들에게 이렇게 넌지시 질문을 던졌을까 싶어진다. 그래도 끊임없이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까닭은 딸과 하는 토론이 그리 싫지만은 않아서일 것이다. 결국 이것도 ‘소통’의 한 형태인 걸까. 아버지와 100분이나 열띤 대화했다는 사실이 제법 놀랍기도 하다. 문득, 직장 상사분들 앞에서도 몸 사리지 말고 솔직한 대화를 시도해볼까 싶기도 한다.


(경향신문DB)


아, 그러고 보니 엄마 얘기가 빠졌다. 아버지와의 100분 토론의 중재자는 엄마인데 주로 몇 마디 말로 우리를 제압하곤 한다. “시끄러우니까 그만하고, 라면 끓여주랴?” 그럼 우리는 세대간의 의견 차이는 접어두고 일단 야식을 먹자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일단 머릿속에 떠오른 이상 먹는 걸 참지 못하는 것도 아버지와 나의 치명적인 약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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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 학생


 

유난히도 요란스럽게 태풍이 지나갔다. 북상하면서 커질 것이라는 예측은 다행히도 빗나갔고, 국민들은 태풍보다 더 태풍스러운 뉴스들로 며칠을 보냈다. 그 사이 우리는 끔찍하고도 아이러니한 풍경들을 여유 없이 흘려보냈다. 태풍의 스펙터클한 위용에 대해 걱정하다보니 우리가 겪는 일상적인 폭력에 대해선 아무것도 몰랐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해외시장에서 보이고 있는 현대자동차의 ‘위대한 도약’에 대한 언론의 대대적인 선전을 접하는 사이, 국내 현장의 공장들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저항이 이어졌다. 공장 안에서 관리자와 경비로 둔갑한 용역깡패들이 사내하청 노동자에 대한 납치와 감금, 폭행을 자행하고 있는 가운데서도 사회의 연대를 구하는 고군분투는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례 없는 영업이익을 올리고 있는 현대차 자본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기세다. 사내하청에 대해 대법원의 불법파견 판결이 내려졌음에도 내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정규직 채용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현대차 사측이 3000명 신규채용에 대한 협상안을 제시했을 때 대다수 언론은 요란스럽게 그것이 “괄목할 만한” 양보안이라고 호도했다. 아마도 사측이 뿌린 보도자료를 그대로 썼거나 취재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추후에 이는 2015년 즈음까지 지금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정년퇴직하는 딱 그만큼만 사내하청에서 끌어올리는 술책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벼랑 끝에 선 심정으로 이를 전면 거부해야 한다고 외쳤고, 정규직 노조는 어정쩡한 태도만 보였다. 하청노동자들의 절규에 찬 사투가 없었다면 노동조합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참극을 벌인 것으로 평가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전체 1만여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중 3000명만을 선별적으로 채용하는 것으로,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들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사내하청지회의 교섭력을 약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퇴임한 정규직의 자리를 정규직으로 신규 채용하는 것은 이미 기존 단협에 체결되어 있던 내용이다. 하청노동자들이 관리자들로부터 두들겨맞으며 반대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끊임없이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의 질주를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SJM 안산공장에서 벌어진 용역깡패들의 참극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지 얼마 안된 시점에서 쎈싸타테크놀러지스 진천공장에 용역깡패 300명이 난입할 거라는 소식이 주말이 가까워질 즈음 퍼졌다. 이로 인해 노동조합을 만든 지 한 달도 안된 이 공장 노동자들은 지역사회에 연대를 구했다. 이에 지역의 노동조합, 시민들은 함께 밤을 지새우며 공장을 지켰고, 급기야 사흘여 만에 사측은 협상의 제스처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초국적 투기자본에 의해 운영되는 이 공장 자본이 부르려 했던 끔찍한 ‘재난’을 지역에서의 노동자 연대로 막아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전태일 열사 흉상 앞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쇼를, 울산과 아산에서 매일같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내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전쟁 같은 폭력을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 뻔뻔한 정치인을 향해 시원하게 욕을 퍼부으면 될까? 혹은 적당한 선에서의 타결을 막연하게 기대할 것인가? 오늘날 우리가 저 거대한 폭력 앞에 마주하게 되면 이 두 개의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실천은 어렵겠지만 길이 없진 않다. 전태일이 그랬던 것처럼 주위의 동료들을 모으고 함께 저항하고 연대하는 것,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동3권’을 지키고 쟁취하는 데 모든 기준을 맞추는 것이다. 민주노조운동이 벌여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이 기나긴 싸움이 지속되고 확장되어야만 그런 헐거운 옷조차 없는 우리에게 사소한 희망이라도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왼쪽 아래)이 28일 서울 종로 청계천6가 전태일 동상 앞에 주저앉아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 후보의 헌화를 막고 있다._ 국회사진기자단



그런 점에서 사내하청 노동자들, 용역깡패의 위협과 고용 불안으로부터 공장을 지키고 있는 모든 노동자들은 오늘날의 ‘전태일들’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 청계천의 전태일 열사 흉상을 찾은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가로막고 항의한 쌍용차 해고노동자 김정우씨는 박 후보의 수행원에게 멱살을 잡히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죽은 전태일에게 헌화하기 위해 살아있는 ‘전태일’을 밀어낸 셈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권력자들이 매일같이 전국 곳곳에서 오늘날의 ‘전태일들’을 짓밟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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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섭 | 성공회대 대학원 박사 과정


무더위와 올림픽 때문에 많은 이들이 불면의 밤을 보냈다. 연이은 오심 논란과 예상외의 선전, 운명 같은 한·일전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런가 하면 연예계에서는 집단따돌림(왕따) 논란이 있었다. 걸그룹 티아라의 컴백 과정에서 불거진 논란에 대해, 소속사는 피해자로 추정되는 멤버를 탈퇴시키는 것으로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여기에 회사 말단 스태프의 곤궁함을 마치 탈퇴 멤버의 탓인 것처럼 돌리는 이상한 변명이 더해지면서 사태는 더욱 커졌다. 그 결과 일부 팬과 누리꾼들이 소속사에 대해 집단대응을 벌이면서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려던 소속사의 의도는 무산됐다. 


그런 와중에 어떤 곳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사 분쟁이 진행되던 SJM이라는 중소기업에서 사측이 300여명의 용역을 투입해 노동자들에게 무차별 폭력을 가한 것이다. 이 사건의 주역인 컨택터스라는 용역회사는 경찰에 버금가는 진압장비는 물론이고 자체 살수차까지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더해 이들은 사태 해결에 나선 국회의원에 대한 조롱까지 벌여가며 그야말로 성역 없는 노동 파괴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이 세 가지 일이 비슷한 시기에 한국 사회에서 벌어졌지만 사람들의 관심은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이 사건들이 사실은 이상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면 어떨까? 그리고 우리 역시 이 연결고리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면? 


 

컨택터스 측이 자사 홈페이지에 올린 경비 장비 (출처 : 경향DB)

먼저 올림픽을 생각해보자. 한국의 체육은 이른바 엘리트 스포츠다. 선수들은 10대 때부터 극한의 훈련을 견뎌가며 운동하는 기계로 육성된다. 그런데 이 중에서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는 사람은 해당 종목과 체급의 모든 선수들 중 1위를 한 선수뿐이다. 프로리그가 없는 종목의 선수들은 대학이나 실업팀으로 가기 위해 또다시 피땀을 흘려야 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수의 탈락자들이 발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 탈락자들에게는 별다른 구제책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미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오로지 운동에만 바친 이들은 상대적으로 좁은 시야와 부족한 학습량이라는 핸디캡을 지닌 채 자력구제를 해야 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이들과 연예인 혹은 수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은 뾰족한 끝부분만 밝게 빛나고 있는 피라미드에서 극적으로 만난다. 피라미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깜깜한 부분에서는 희망고문과 탈락의 불안이 넘실거린다. 


연예인들이 TV 토크쇼에 나와 선후배 간의 폭력적인 관행을 즐거운 에피소드처럼 이야기하고, 가혹행위에 대한 사회적 비난에 대해 외부인은 참견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이는 예체능 전공자들의 모습은 이런 비슷한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길러진 이들에게는, 지금까지의 삶을 모조리 포기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출구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멀고 먼 합리성이나 정의 같은 관념들보다는 당장 눈앞의 인맥과 작은 권력들이 생살여탈권을 쥔 존재가 된다. 또 그것이 불합리하거나 가혹한 것과는 상관없이, 내부의 관행들은 법처럼 군림한다. 무엇보다도 이 악습들은 어떻게든 성과만 내면 좋다는 협회, 지도자, 관계자, 매니지먼트 같은 결정권자들에 의해 묵인되거나 심지어 권장되기까지 한다. 그 결과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눈부신 한 줌의 성공이고, 거대한 곤궁함과 잔혹한 룰은 그 빛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다.


이 구조는 우리를 다시 용역들이 늘어서 있는 농성장으로 이끈다. 순위에 들지 못한 이들의 몇 안되는 취업처이자 가난한 청년들의 짭짤한 아르바이트. 나에게서 머나먼 법과 생판 모르는 노동자들 대신에 돈과 선후배를 믿으며 돌진하는 이들. 그리고 이들의 무모하고 무지한 돌진에 속절없이 나동그라지는, 결국에는 “좀 살자”라는 단말마를 공유하는 수많은 노동자들. 우리 모두는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나가는 문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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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인 | 에세이스트


지난해 여름이었다. 10년 묵은 ‘장롱면허’를 꺼내어 운전 연수를 받았다. 자동차운전학원에 전화해서 친절한 분으로 보내달라고 했다. 10년 전 만났던 운전학원 아저씨를 나는 아직도 미워하는데, 창밖의 여자나 살피다가 내가 버벅거리면 소리치면서 브레이크나 퍽퍽 밟아댔기 때문이다. 상담원은 그럼요 물론입니다, 했다. 


약속 날 ‘도착했습니다’하는 문자메시지를 받고 나가보니 인상이 강건한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1997년쯤 출시된 작은 차를 몰고 왔다. 햇볕에 이글거리는 차를 타기가 겁이 났다. 하지만 여자 분이라니, 그것만 해도 다행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아주머니 남편도 운전 연수 지도를 하는데 남자들은 일이 없어서 지금 집에서 놀고 있다고 했다.


 암튼 그런 남편 얘기부터 시작해서 아주머니의 수다는 쉼 없이 이어졌다. 이런 식이었다. 새벽 연수가 있어서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남편이 두시까지 텔레비전을 봤다. 그래서 발로 차서 내쫓았다. 결혼은 30년 전에 했는데 겨우 20살 때였다. 첫날밤 이게 뭔가 싶어 난리를 피웠다. 시어머니가 소란스럽다고 혼냈다. 그밖에도 시어머니는 나더러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구박을 일삼았다. 한번은 콩나물을 다듬는데… 등등. 나는 어쩔 수 없이 내가 잡은 핸들이 엇나가고 차는 중앙선을 침범하여 달리는데 말하느라 정신이 없는 아주머니가 보조브레이크를 밟지 못해 나뒹구는 상상을 했다.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초면의 성인 단둘이, 마음만 먹으면 상대방의 코털까지 볼 수 있는 공간에 앉아있어야 하는 상황. 그 어색한 공기를 아주머니가 수다로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주머니의 직업은 수다를 떨어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여적] 아줌마는 나라의 기둥


연수 마지막 날, 차에 탔더니 김치 냄새가 났다. “앞 시간 연수 끝나고 도시락을 먹었어.” 나는 끼니를 대충 때우면서 하는 노동에 반대한다. 다 먹자고 하는 일인데. 게다가 가시지 않는 냄새라니. 연수 학원에 전화해 항의하고 싶었다. 아주머니는 대신 오늘은 좀 길게 연수해 주겠다며 자신의 집에 가보자고 했다. 올림픽대로를 타고 서쪽으로 한참을 가다 강을 건너 골목을 돌아 들어갔다. 모퉁이 편의점 앞에서 웬 아저씨가 발바닥을 긁고 앉아있다 차를 보더니 편의점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아주머니는 “저 인간이 우리 아저씨”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집에서 김치통을 들고 나와 뒷좌석에 실었다. “냄새 나지?” 내가 “괜찮아요. 원래 났으니까요”라고 말하는 게 적절한지 고민하고 있는데 아주머니가 다시 말했다. “우리 김치가 아주 기가 막혀. 자기네 동네 사는 연수생도 한번 먹어보더니 매일 산다고 그래. 그래서 김치 좀 갖다 주려고. 어제 오이소박이를 담갔거든. 자기도 한번 먹어볼래?” 


더운 여름 따뜻한 차 안에서 먹는 따뜻한 오이소박이라니. “아니요. 괜찮아요.” “진짜 맛있어. 하나만 먹어봐.” “정말 괜찮아요.” “하나만 먹어보라니까?” “아뇨. 저 오이 싫어해요.” 


극구 사양하자 아주머니는 기운이 좀 빠진 듯 보였다. 편의점 앞을 지나며 아주머니의 주문에 따라 속도를 늦춰보았다. 아저씨는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머니는 나직하게 욕을 했던 것도 같다. 


돌아오는 길, 아주머니는 조금 조용해졌고 차 안은 조금 어색해졌다. 그래서인지 처음으로 라디오를 틀었다. 컬투의 목소리와 오이소박이 냄새가 좁은 차 안을 채웠다. 컬투가 물러갈 즈음 집에 도착했고, 나는 작별 인사를 했다. “덕분에 연수 재미있게 받았어요.” 아주머니는 재밌었으면 주변에 소개나 해 달라 대꾸하고 차를 몰고 사라졌다. 우리 동네 어딘가 산다는 연수생에게 오이소박이를 배달하러. 아니, 어쩌면 그냥 집으로.


지금와서 드는 생각인데, 그 오이소박이 한번 먹어 볼 걸 그랬다. 아마 맛있었을 것이다. 시어머니가 할 줄 아는 게 없다고 구박했었다지만, 30년 세월 동안 아주머니는 못하는 게 없는 여인이 되어있었으니까. 어디서 무엇을 하든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러므로 운전도 잘하고 수다도 잘 떨고 오이소박이도 기가 막히게 담글 줄 알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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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 소설가


 

내 주변에는 동거 또는 동거에 가까운 생활을 해온 커플이 몇 있다. 그들은 시시때때로 결혼을 결심했다가 그 결심을 철회하고는 한다. 결혼을 결심하는 것은 대부분 외부적인 압박이 있을 때다. 가족의 압박(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냐)과 시집간 친구들의 핍박(너도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될 텐데)이 쏟아질 때이다. 그들은 대부분 친지에게 동거사실을 숨긴다. 때때로 그들은 사회부적응자가 된 것 같은 불안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내 결혼하겠다는 결심은 거두어지고 만다. ‘결혼을 원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진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동거를 지속할수록 결혼을 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결혼한 것과 다름없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부장제 사회에서 결혼할 때 부록처럼 딸려오는 의무들, 즉 확대된 가족 안에서 감당해야 할 며느리로서의 역할,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지는 임신의 부담,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가장의 짐 등은 덜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결혼보다는 동거가 그들이 원하는 삶의 형태에 가까운 셈이다.


동거사실을 친척,친지들에게 숨기려는 동거족의 모습 일러스트 (경향신문DB)


 결혼적령기가 넘도록 결혼을 원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채로운 비난이 쏟아진다. 부모에게 불효하는 거라며 양심에 가책을 주기도 하고, 나이 들어서 외롭게 늙어 죽을 거라며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그중 가장 과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국가의 근간을 흔들 것이라는 경고이다. 철학을 전공한 친구의 말에 따르면, 이러한 생각은 갑자기 생겨난 것만은 아니란다. 독일 철학자 헤겔은 가족이 국가인륜성의 기초라고 믿었다.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기 마련인데 이기적인 인간들이 모여서 살다보면 사회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기심이 아닌 사랑과 인정으로 유지되는 조직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가족이다. 따라서 가족이 사라져간다는 것은 국가의 위험요소가 늘어난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 해도 의문이 남는다. 동거커플도 엄연한 가족의 한 형태이다. 동거를 하는 내 친구들을 보면 도무지 그들이 가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오순도순 밥해 먹고 때로는 다투기도 하며 잘 살아간다. 헤겔도 약육강식의 사회와는 구별되게 사랑과 인정으로 이루어진 관계를 가족으로 본다. 그렇다면 동거커플이 가족이 아니란 법은 없다. 하지만 국가가 동거커플을 가족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각종 지원정책은 혼인신고, 출생신고 등 ‘신고된’ 가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편 결혼하지 않은 커플에 대한 과도한 적개심은 생물학적인 불안 때문일 수도 있다.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아이를 적게 낳아 인구가 줄 거라는 불안 말이다. 그렇다면 국가정책은 거꾸로 가고 있다. 동거커플의 아이는 미혼모, 미혼부의 아이로 등록하지 않는 한 출생신고조차 불가능하니 말이다.


얼마 전 <두개의 선>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봤다. 안티결혼 다큐멘터리라는 부제가 있는, 결혼제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 6년차 동거커플의 치열한 고민을 기록한 것이다. 이야기는 임신테스트기에 임신을 했을 때 나타나는 두 개의 선에서 시작한다. 임신으로 인해 동거관계를 끝내고 떠밀리듯 결혼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들은 결혼하고 싶지 않다는 결론에 이른다. 엄마의 성을 따서 아이를 기르기로 결심하지만 출산 뒤에 난관에 봉착한다. 아이가 선천적인 질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 그리고 치료비는 ‘신고된’ 가족에게만 지원된다.


결국 그들은 아이의 출생신고일 마지막날에야 혼인신고와 출생신고를 결심한다. 동거커플과 동거커플의 아이에 대해 국가가 덜 적대적이었더라면, 그들이 억지로 결혼제도에 편입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해 독일에 갔을 때 독일에 이민온 한국인 2세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시청이 결혼하는 커플들에게 무료로 결혼식 장소를 제공하지만 결혼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텅텅 빈다고 했다. 프랑스에는 시민연대계약이라는 것이 있다. 동거커플이 결혼한 커플과 동일한 혜택을 받으며 살아간다. 우리나라도 동거커플에게 가족이라는 이름을 허할 때가 올까. 아직은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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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교 | 한예종 영상원생 daresay@naver.com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일련의 디스토피아 영화들처럼 오늘날 우리는 어디를 가나 비통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안산에서는 중무장을 한 수백명의 용역깡패들이 부분파업 중인 노동자들을 때려잡았지만 경찰은 수수방관이었고, 부당회계가 의심되는 가운데 정리해고가 감행된 공장에서 노동자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한 것을 공권력은 ‘우수사례’로 꼽았다. 용산 참사로 죽은 철거민들의 한은 여전히 풀리지 못한 채 남겨졌고, 참사에서 아버지를 잃은 아들은 여전히 철창 속에 갇혀 있다.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현대차는 개정된 파견법에 따라 정규직 고용의무를 지지 않기 위해 2년 미만 노동자를 모조리 계약해지하고는 기간제로 재배치했다. 이는 법망을 피하려는 꼼수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회사가 잘나가도 노동자들의 삶의 권리는 죽어도 보장해줄 수 없다는 막장 엄포이기도 하다.


SBS 토크쇼 '힐링캠프' 출연한 안철수 원장 (경향신문DB)


며칠 전 친구들과 올 대선에서 누굴 찍을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안철수가 대안은 아니라는 것에 동의하면서도 ‘그래도 안철수를 찍을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상징적 존재로서의 ‘박정희’를 ‘다시 소환’하려는 것을 막아야 하고, 더군다나 좌파에게 딱히 대안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소위 진보진영이 처한 상황을 돌아보노라면 어떤 정치적 대안도 내놓기 힘든 상황임은 명백한 사실이다. 지난 총선 이후 진보신당은 제 앞길 살피는 데에도 버거워하고 있고, 통합진보당은 일련의 선거 부정 사태들과 정파 간 갈등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문제에는 눈길 돌릴 여유도 없다.


섣부른 예단일 순 있지만 만일 이런 식의 구도가 대선까지 지속된다면 한국의 정치질서는 점점 더 양당제 구도로 흘러갈 것이고, 사람들은 새누리당식 보수주의와 민주당식 자유주의 외에는 어떠한 정치적 대안도 찾기 힘들게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미 통진당은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진 지 오래며, 대안세력은커녕 가장 대책 없는 집단으로 낙인찍혔다. 진보신당은 자력으로는 결코 선거에 대응할 수 없을 정도로 쇠락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가 제3의 세력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민주당보다 보수적이면 보수적이었지 구조적 모순에 대한 혜안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최악과 차악, 양자택일의 문제가 돼버리는 것이다.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의 현실은 매우 불안정하고 위태롭다. 그리스의 위기 국면은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폭탄을 안고 있고, 스페인과 캐나다, 파라과이 등에서는 연일 신자유주의적 조치들, 긴축재정에 맞선 대규모의 민중 투쟁들이 이어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선 원전에 맞선 대규모 시위가 연일 기록을 갱신하고 있다.


엊그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가계부채 부실에 따른 위기상황이 단기간 내 급속히 도래할 가능성이 있다”며 위기가 현실화되면 금융채무 불이행자가 양산되고 서민경제 기반이 붕괴돼 사회가 불안해질 수 있다고 예측했다. 정권 초기부터 이른바 ‘MB노믹스’의 상징이었던 산업은행 강만수 회장은 최근 “현재 위기는 대공황 때보다 더 크고 오래갈 것”이라며 “자본주의는 끝났다”고 말한 바 있다. 이렇게 경제계의 수장들이 절망적인 수사를 늘어놓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오늘날 세계 경제의 상황이 조금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은 채 다수 민중들에게 점점 더 야만적인 삶이 증폭되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필연적 귀결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안철수처럼 테크노크라트의 ‘합리적 통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어떤 관료 개인의 통치를 통해 절망적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우리가 점점 더 그런 신사적 미덕의 통치, 정치 관료들의 합리성에 막연한 기대를 보낼수록 이 체제 자체의 구조적 대안을 외치는 정치는 실종되고 말 거라는 점이다. 우리는 자기 스스로의 역량을 믿는 대신 소수의 영웅들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마치 저 괴물 같은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좀비처럼 묘사되는 시민들이 어서 빨리 영웅 배트맨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배트맨이 절대 나갈 수 없다는 감옥을 탈출할 때조차 투옥자들은 영웅적 위대함을 선망하는 무기력한 존재로 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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