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정부는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인 사드(THAAD)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중국과 러시아가 반대하고, 외교안보 불안을 우려하는 국내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만, 정부는 강행할 의사를 분명히 했다. 일방적으로 배치 지역으로 통고받은 성주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았다. 항의 시위가 잇따랐지만, 대통령까지 나서서 단호한 의지를 재천명했다.

24일 오전 경북 성주군 성주읍 한 아파트 옥상에 사드배치 반대를 주장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중국이나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함이라는 일각의 우려를 일축하면서 북한의 미사일로부터 남한을 지키기 위한 조처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대통령 담화가 정부가 내놓은 ‘대책’이다. 그러나 속속 드러나고 있는 사실관계는 이런 대통령의 자신감을 의구심에 빠뜨리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안보’ 논리를 내세웠지만 정작 사드는 수도권 방어용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미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장비라는 보도가 설득력을 얻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정부는 완강하게 사드 배치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최초의 이유였던 북한의 미사일에 대응한다는 ‘안보’ 논리는 궁색해졌지만, 한반도의 전쟁 억지력을 담당하는 미군의 안전을 도모한다는 명분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사실상 한국의 ‘안보’는 전후 세계질서를 통해 형성된 것이고, 최근 학계의 연구가 뒷받침하듯이, 한국전쟁은 냉전의 결과라기보다 그 냉전을 본격화한 계기였다는 사실을 참조한다면, 미군을 통해 한반도의 안정을 보장받는다는 정부의 논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주류적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에 방한한 프린스턴 대학의 존 아이켄베리 교수도 지적하듯이, 냉전을 통해 형성된 전후 세계질서라는 것은 ‘필요악’에 가까운 리바이어던일지도 모른다. 이 세계질서의 기원이 잘못되었고 완전하지 못하다고 해도, 이 리바이어던을 해체한 뒤에 찾아올 혼란은 지금 이 질서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비용을 치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이런 주장을 ‘학문적’으로 반박하기는 쉽지만, 현실적인 차원에서 이 주장을 뒤집을 만한 뚜렷한 대안을 제시하라고 한다면, 선뜻 답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지난해 발간된 <세계질서>라는 책에서 헨리 키신저는 미국을 “양가적인 강대국”이라고 칭하면서 21세기 세계질서의 재편에서 이런 예외적인 미국의 본성은 긍정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심지어 키신저는 미국을 지키는 동맹국이나 다자관계의 지지나 요청이 없더라도 이 질서를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야말로 미국 사회와 국가를 유지하는 길이라고 역설하기도 한다. 키신저가 말하는 “미국적 가치의 본성”이라는 것에 대한 입장은 분분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맹렬하게 몰아친 ‘트럼프 현상’이 이런 키신저의 생각에 반하는 다른 미국의 얼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전후 세계질서를 지탱해온 “양가적 강대국”이 과연 앞으로도 지속가능할지 의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사드 배치를 둘러싼 분란에서 한국 정부의 의지는 확고하게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질서의 재편에 편승하는 것이 ‘국익’에 합당하다고 판단한 것이고, 그래서 사드 배치를 결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야당들 역시 이 문제에서 크게 이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가장 심각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당사자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성주군민들이다. 중국과 러시아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군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지역을 찾다보니 성주가 지목된 것이겠지만, 이 상황이야말로 이른바 세계질서라는 명목으로 ‘지역’에 가해졌던 과거의 불행들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아시아에서 벌어졌던 가혹한 동족상잔과 인종청소의 명분은 바로 세계질서를 구축하기 위해 발명된 반공주의였다. 반공주의란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왜 반대하는가. 자본주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왜 자본주의를 지켜야 하는가. 공산주의는 비인간적이고 자본주의는 인간적인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멀리 갈 것도 없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지난 상황들을 보면, 자본주의 체제라고 해서 특별히 인간적이었다고 말하기 민망해진다. 한창 자본주의 개발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난무했던 폭력은 자본주의 체제 역시 공산주의 체제 못지않게 비인간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런 비인간성은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한국의 후진성 때문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질서의 경찰을 자처해온 최고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 사태들을 보면 이런 주장의 신빙성은 상당히 떨어진다.

전후 세계질서의 문제는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양자택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어떤 체제든 보편을 가장한 ‘질서’는 언제나 ‘지역’의 희생을 강요한다. 이 ‘질서’는 절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오늘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사람들’이 여기에 연루되어 있다. 이 ‘사람들’이 직접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문제는 수면으로 떠오른다.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내 마당에 사드는 안돼”라는 ‘지역 주민’의 이기주의와 ‘국익’이 서로 충돌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상황은 세계질서의 재편이라는 지극히 거시적인 정치가 일상의 정치와 조우하고 있는 장면이다. 진정 한국의 파워엘리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을까.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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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제19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해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18년은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이 되는 해이다. 이 70년의 세월 중 6·25 한국전쟁의 시기를 빼면 앞쪽 30여년은 군사독재의 국민총동원 산업화 체제였다. 이 체제는 ‘민주화’와 더불어 ‘세계화’라는 큰 파도에 휩쓸려 변화됐다. 시공간의 제약이 풀리자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만능의 욕망이 분출됐다. 이 뒤쪽 30여년을 ‘성취의 청년기’와 ‘축적의 중년기’로 보낸 세대는 지금 우리 사회의 장년과 노년이 됐다. 반면 이들 슬하에서 자란 당대의 청년과 중년은 풍요 속의 상실과 혐오를 되씹으며 나이를 먹는다. 산업화, 민주화, 세계화의 ‘위대한 유산’을 잘 정리하지 못하면, 향후 30여년은 무기력과 자괴감의 ‘위험한 청산’이 될 수 있다는 경보 단계는 이미 지났다. 차기 정부의 5년은 그 향배를 가를 ‘마지막 선택’의 기로에 선다.

ⓒ 경향신문

이 점에서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세계화의 원조국에서 부실한 민주주의가 어떻게 오작동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줬다. 세계화가 밀어붙인 사회해체의 위기 속에서 스스로를 구제할 공동체의 역량과 문화를 준비하지 못했을 때, 무능한 주류와 과격한 비주류는 책임도 못 질 한판 도박에 모두의 운명을 내던질 수 있다는 사실, 그것도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반하는 비극으로 말이다.

세계화의 대표적인 문제로 부상한 청장년의 생존 문제를 직시하는 대신 이민자 배척을 선동한 결과는 대영제국의 ‘독립기념일’을 자축하는 허탈한 희극이기도 했다. 이 희비극은 앵글로색슨족과 기타 인종, 소수 부자와 몰락한 중산층, 세금 안 내려는 기성세대와 낼 세금이 없는 청년세대, 대물림 엘리트와 미개한 대중으로 사회를 찢어놓고 폭력을 불러낸 세계화라는 이름의 기업독재와 그 극장정치의 민낯이다.

유럽경제공동체 잔류를 결정했던 1975년 영국의 국민투표가 2016년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기까지 40여년이다. 2016년 6월23일의 브렉시트는 그 세월 동안 영국이 택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사회적 출구의 좋은 원천들을 간과하고 나쁜 원천들에 휩쓸려 당도한 ‘마지막 선택’일지 모른다. 물론 ‘마지막’은 새로운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영국과 유럽은 브렉시트의 교훈을 돌아보며 암중모색을 시작했다. 우리는 우리의 좋은 탈출이 무엇이어야 할지 대비해야 한다. ‘치킨게임’의 브렉시트와 다른 상생의 ‘코렉시트(Korexit)’를 맞이하려면 대한민국 건국 70년을 전후해 ‘탈(탈) 70년’의 방향을 잡고 이후 40년을 기획하면서 지역과 생활 단위의 작은 경제와 작은 정치라는 제방을 쌓아야 한다. 이 대안이 없다면 ‘헬조선’의 중앙집권제와 국민투표는 언제든 도박으로 흐를 수 있다.

최근 박원순 서울시장은 “지방분권과 지방재정 확대를 위한 개헌 논의”를 시작하자고 주장했다. 앞서 남경필 경기도지사는 “청와대와 국회를 세종시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시민의 권리와 의무가 함께 행사되는 새로운 민주주의 운영체제”를 피력한 안희정 충남도지사도 같은 견해다. 중국 자본의 초고층 타워와 대규모 리조트 개발에 제동을 건 원희룡 제주도지사도 주민의 참여와 소득 증대를 고민했을 것이다. 이들 정치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지역 현장에 입각한 지방 분권의 구상보다 앞서는 국가적 의제는 앞으로 없다고 생각한다.

지방자치를 통한 주민자치가 작동되지 않는다면, 중앙정부가 쏟아내는 국가적 현안과 이를 받아쓰는 중앙 미디어의 빅뉴스는 ‘나의 현실(actuality)’이 아니라 ‘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해’의 겁박이나 본말을 어지럽히는 탁한 소문일 뿐이다. 단적으로 사드(THAAD)의 한국 배치를 일방 통보한 미국 및 한국 정부와 이를 국민투표에 부쳐 결정하자는 안철수 전 국민의당 대표의 영국 전총리 같은 주장은 나의 현실이 아니다.

혹자는 국민의식 부재라 탓하겠지만, 그 실종을 초래한 당사자는 나의 삶에서 유리된 유령 같은 중앙의 정치와 정부다. 지역이 국가 이슈가 되려면 영남권 신공항이나 국립한국문학관 유치를 둘러싼 지방정부 간 대결처럼 중앙의 간택을 바라며 극렬하게 떼를 쓸 때이다.

이조차 없던 일로 하겠다는 중앙정부의 통보 앞에서 주민자치 없는 지방자치의 토호 이기주의만 부각되고 남은 것은 주민의 열패와 상처다. 나의 문제를 이웃과 주민자치로 협의해 지방자치로 실현하고 그런 지역들이 모여 국가 미래를 계획하고 조정해 본 경험이 우리에게 없어서 그렇다.

그렇게 건국 70년이 쌓였다. 각종 최악의 불행지표가 오늘의 고초라면, 저출산의 인구절벽은 내일의 재앙이다. 어린이집부터 대학까지 폐교가 잇따르면 치안센터, 공중보건소, 동주민센터도 인원을 감축할 것이다. 그럼 우리 주변의 생활 터들도 폐점이 늘어난다. 생활권의 이런 문제들에 중앙의 정치와 정부로 대처할 수 있는 일은 지금보다 훨씬 더 없다. 그럼에도 권력을 독점한 중앙은 지방자치의 희미한 무늬조차 지우려 한다. 이것이 대한민국 건국 70년, 2017년 대선을 놓고 주어진 ‘마지막 선택’의 전말이다. 요컨대 ‘탈 70년’의 ‘코렉시트’는 불가피하며 관건은 ‘정권을 교체하면 된다’가 아니라 지방분권으로 가는 ‘코렉시트’를 선택하는 데 있다. 세계화를 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던 이 나라에서 세계화를 통제할 집단지성은 지방분권에서 나올 수 있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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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북부의 중세 고도(古道) 베로나는 셰익스피어의 연애 비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로 잘 알려져 있다. 여행자들은 베로나역에 내리면 도심의 아레나(원형극장)를 따라 에르베 광장 근처 줄리엣의 집으로 향한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고백했던 이 집 발코니를 소재로 몇 해 전 <레터스 투 줄리엣>이라는 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줄리엣의 발코니’라 불리는 이곳 벽에는 전 세계 여행자들의 메모들이 도배하다시피 빼곡히 붙어 있고, 매일 사랑에 빠진 이들의 편지가 날아든다. 편지의 내용은 대부분 애틋한 첫사랑의 고백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연들이다. 설레는 첫사랑이든, 쓰라린 실연이든 베로나는 사랑의 성지(聖地). 50년 전 불발된 첫사랑의 약속을 찾아 초로의 여인이 나타나기도 하고, 약혼 여행을 왔다가 헤어지고 이곳에서 미지의 편지들에 답장을 쓰며 머무는 작가 지망생이 등장하기도 한다.

베로나에서 인상적인 곳은 단연 줄리엣의 집이지만, 그보다 은밀하게 내 관심을 끈 곳은 줄리엣의 묘와 아레나 옆 고서점이었다. 줄리엣의 집을 방문하고, 반대편 아레나 길을 따라 기차역이 있는 남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다 보면 사이프러스나무로 에워싼 저택에 이르게 되는데, 로미오와 줄리엣이 결혼식을 치른 수도원이다. 이 뜰 한쪽 지하에 줄리엣의 묘가 있다. 묘는 석개(石蓋)가 없는 석관묘이다. 지하는 석굴처럼 서늘하고, 한가운데 관 모양으로 자리잡은 붉은 석묘에는 속이 텅 빈 채, 순결과 변함없는 사랑을 뜻하는 흰 백합 꽃다발이 놓여 있다. 입구에 줄리엣의 묘라고 명기되어 있지만, 이곳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추정지일 뿐이다.

베로나에서 두 번 찾아간 곳은 줄리엣의 발코니도 그녀의 묘도 아닌 아레나 옆 서점이었다. 기차 시간에 맞춰서 역으로 가다가, 돌연 다시 아레나 쪽으로 발길을 돌린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하는 고서점은 입구에서부터 허물어질 듯 쌓아놓은 책들로 발 디딜 틈 없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그날 내가 구한 책은 이 지역 출신 화가들의 화집과 서점 건너편 식당 벽에 모사화로 재현해놓은 미국 사실주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의 화집이었다.

베로나에서 돌아온 지 몇 해가 흘렀다. 올해는 어디로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긴 여름날 오후, 아레나 옆 헌책방에서 구해온 화집을 펼쳐본다.

내일은 보수동 서점 골목으로 순례를 떠나야겠다. 육이오 동란기 잠시 둥지를 틀었던 화가들의 옛 부산 풍경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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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유행하는 말 중에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있다. 다양한 의미역을 가지고 쓰이긴 하지만, 대체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주어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불평을 늘어놓는 이를 일컬어 프로불평러라고 부르는 것 같다.

프로페셔널과 불평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영어식 조어로 만들어낸 이른바 언어파괴형 농담이라고 할 수 있다.

EU탈퇴 지지자들이 영국 웨스트민스터 다리 위에서 팻말 시위를 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농담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이 말은 최근 유행하고 있는 2’ ‘쿨병’ ‘설명충같은 인터넷 용어들과 함께 특정 개인의 행동을 규범적으로 재단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말하자면, ‘프로불평러라는 말은 최근 인터넷에서 두드러진 현상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용어인 셈이다. 과거에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이 규범 파괴의 장이었다면, 불과 10여년이 흐른 뒤에 이 장은 역설적으로 규범을 생산하고 강제하는 욕망 기계가 되었다.

아론 슈스터는 <쾌락의 곤경>이라는 책에서 불평과 관련해서 흥미로운 유태인 농담 하나를 들려준다. 러시아행 열차 칸에 한 여행자가 목마름을 호소하는 노인과 동승한다. 그 노인은 계속 아아, 목이 마르다고 소리친다. 그 소리를 견딜 수 없어 여행객은 노인의 목을 축여주기 위해 물을 사서 건넨다. 물을 마신 노인은 한동안 잠잠하지만, 계속 여행객의 눈치를 살피다가 갑자기 아아, 나는 목이 말랐어라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한다.

이 농담이 보여주듯, ‘불평은 사적인 문제라기보다 이데올로기적 기제라는 것이 슈스터의 주장이다. 이데올로기는 사적인 차원을 넘어선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차원을 의미한다. 농담에 등장하는 노인에게 중요한 것은 목마름을 해소하는 것이었다기보다 그 목마름을 계속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목마름을 호소하는 것이야말로 노인에게 지극한 쾌락이었던 것이다. 이처럼 불평은 자기의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 설정하는 어머니가 바로 불평하는 존재라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불평하는 존재프로불평러라고 부르고 조롱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적 기제인 불평을 사적인 성격이나 경향으로 치부하려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시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냉소주의이다. 냉소주의는 이데올로기를 비웃는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냉소주의는 계몽의 피로감에 따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계몽을 통해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고 믿는 이들이 그 계몽의 결과를 회의하는 자기부정이 냉소주의를 이루는 핵심 원리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 더 정확히 말하자면, ‘변해야 할 것들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냉소주의의 논리다.

과거 학생들이 시위라도 할라치면 이른바 어른들불평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으니 열심히 공부해서 나중에 높은 지위에 올라 그때 세상을 바꾸라고 조언하곤 했다.

물론 그럴 듯하게 보이는 이러한 주장 역시 냉소주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불평을 사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면, 객관세계의 변화는 불평이라는 기제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불평은 결코 사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사안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항상 구조적인 차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불평러라는 용어는 이런 의미에서 불평에 대한 냉소주의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불평이라는 쾌락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항상 무엇인가에 대해 불평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감히 불평하지 못할 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불평자체라기보다, ‘불평할 수 있는 권리. 이 권리는 종종 권력과 동의어를 이룬다. 이른바 갑질은 이런 불평의 권리가 권력화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모두는 불평할 수 있지만, 모두 다 마음대로 불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적 평등주의는 이런 사각지대를 과소평가한다. 부자와 거지는 원칙적으로 평등하지만, 구걸을 금지했을 때 피해를 보는 것은 거지이지 부자가 아니다.

불평도 마찬가지다. 원칙적으로 우리 모두는 불평을 즐길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불평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쥔 이들만 그렇게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불평러는 불평등한 불평의 현실에 좌절한 이들이 만들어낸 풍자이다. 문제는 프로불평러라는 말이 전제하는 불평하지 말자라는 금지의 규범이라기보다, 그 규범 너머에 있는 불평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불평등한 현실일 것이다. ‘땅콩 회항이나 라면 상무처럼 감정노동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적인 불평은 이런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과연 불평의 불평등성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모두가 공평하게 누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쾌락이 사실상 불평등한 조건의 산물이라는 사실일 것이다. 이 불평등성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논리다.

그러나 이 불평등성은 개선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불평의 지속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목은 축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목마름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순 없다. 욕망의 정치가 가진 양가성을 어떻게 변화의 에너지로 만들 것인지는 여전히 우리에게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천명한 브렉시트사태는 이 문제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을 때, 진보정치세력에게 닥쳐올 재난이 무엇일지 적절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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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는 거리와 광장 못지않게 정원과 공원으로 이루어진 도시이다. 내가 처음 공원이라는 공간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시절 몽소 공원에서라는 샹송을 들으면서이다. 옆 사람에게 말하는 듯한 이브 되퇴이유의 음성과 담백한 멜로디에 가본 적 없는 공원의 호수와 벤치, 하늘과 그 위를 날아가는 새들을 한가로이 스케치해보는 것이었다.

몽소 공원이 파리의 어디쯤 위치해 있는지 모른 채, 노래 가사와 시적인 울림에 빠졌다면, 몽수리 공원은 김채원 소설을 읽으면서 꿈꾸게 되었다.

그녀의 <쪽배의 노래> <겨울의 환> <몽수리 공원에 내리는 가을> 등은 소설이 단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이야기 상품이 아니라 언어로 빚은 예술, 그 너머 경지임을 알게 해주었다.

몽소 공원은 파리 도심 샹젤리제 뒤편에 아담하게 자리 잡고 있고, 몽수리 공원은 파리 남쪽 교외 경계에 있다. 내가 처음 몽수리 공원에 간 것은 파리 첫 체류 시절인 이십대 후반의 어느 늦여름이다. 그곳으로 나를 이끈 것은 김채원의 아름다운 소설뿐만이 아니라, 불문학 전공 시인과 선배 번역자들로부터 날아온 우편엽서 속의 주소지였다. 그들은 엽서 말미에, ‘노르웨이관에서또는 멕시코관에서라고 써서 보냈다.

그곳은 몽수리 공원 건너편에 있는 파리 국제 학생기숙사 캠퍼스(Cite Internationale Universitaire), 현지 학생들 사이에서 시테라 불리는 곳이었다. 

시테를 방문하기 전까지 나는 왜 노르웨이관이고, ‘멕시코관인지, 그들은 어떤 형태이고, 어떤 규모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정문은 신전을 방불케 했고, 고목이 우거진 드넓은 정원에 저택(maison, )들이 한 채 한 채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노르웨이, 독일, 멕시코, 베트남, 일본, 심지어 인구 2만여 명에 불과한 모나코까지 25개국의 이름들이 저택 앞에서 맞이했다. 건축물들은 자국의 전통과 현대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었고, 그 나라 학생들이 입주해 있었다. 안타깝게도 거기에 한국관은 없었다. 한국 유학생들이나 단기 체류 연구자들은 동가식서가숙 처지로 이들 나라의 빈방을 빌려 쓰는 형국이었다.

처음 시테에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현격하게 달랐다. 경탄과 아쉬움, 서글픔. 시테에 꼭 한국관이 있어야 하는 이유란 무엇일까. 그렇다고 없는 채로 있어야 하는 이유란 또 무엇일까. 세월이 흐르고, 파리를 드나들면서, 가끔 몽수리 공원과 시테에 들러 한국관을 짓는다면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곤 했다.

상상이 현실이 되었다. 2017년이면, 시테에 26번째 국가관이 등장한다.

이름은 한국관(Maison de la Coree du Sud)이다. 

함정임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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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명의 청소년에게 진로강의를 했다. 나와 내 일터를 소개하고 강의를 했다. 세상을 알아가고 부모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나를 알아가는 것이 진로를 찾는 길이라는 요지였다.


질문에 답한 후 마무리 말을 했는데 질문자가 또 있었다. 담담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지역문화재단은 뭐하는 데예요?”

순간 눈앞이 노래지면서 대답이라고 한 설명은 내 귀에도 “웱케쫘앆껴귀 꼮껴서꽛흐으”같이 들렸다. 말을 마칠 땐 “지금 뭔소리?” 안 하고 열심히 들어줘서 고마울 뿐이었다. 그러나 질문은 계속 따라다니며 물었다. 그런 대답 말고 진짜 응답을 해보라고. 돌아볼수록 그 청소년에게 미안해서 이 글을 쓴다.

‘살인적 노동시간’보다 긴 공부시간을 견뎌 대학에 가면 진로를 잃어버린 채 비정규직을 전전할 확률이 더 많은 청소년들 앞에서 진로강의를 한 나에게 “지역문화재단은 뭐하는 데예요?”라는 질문은 무엇이었을까?

지역문화재단이라는 데에서 일하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에요?” 하는 물음이었다. “나에게 (지역문화재단에서 일하는) 당신은 뭐하는 사람이에요?”라고 물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문화융성’을 천명하고 서울시장이 ‘예술 선언’을 준비하는 나라의 72개 지역문화재단 중 한 곳에서 일하는 나에게 그 청소년은 이렇게 질문한 것이다. 거기서 당신이 하는 일이 나하고 무슨 관계인가요?

그러니까 이 글은 나의 “웱케쫘앆껴귀~” 했던 상념을 정리하는 반성문이자 전국 지역문화재단 종사자들에게 “지금 뭔소리?” 하는지 돌아보자는 권고문이다.

지역문화재단의 역사는 이렇다. 1997년 경기문화재단 설립을 시작으로 2010년까지 매해 평균 3개씩 생겼다. 2011년 이후부터는 매해 평균 5개씩 생기는 추세이다. 이런 증가의 배경에는 2014년에 제정된 지역문화진흥법이 있다. 문화정책을 국가정책으로 삼은 문화예술진흥법이 나오고 32년이 지나 시행된 법이다. 민관이 함께 지역문화진흥법 제정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지 10년, 국회에서 입법 발의 폐기된 지 8년이 걸려 탄생한 법이다.

지역문화진흥법의 본격적인 구상은 2004년 6월 노무현 정부가 발표한 ‘21세기 새로운 문화의 비전-창의 한국’이 출발점이다. “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과 지역발전을 위한 핵심과제’가 지역의 문화진흥에 달려있다, 그 ‘선결과제는 지역의 문화역량 제고’이다, 이를 위해 국가-지역-주민의 바람직한 역할 정립이 필요하다”는 요지다.

그리고 10년이 지나서 지역문화진흥계획, 지역문화진흥기금, 지역문화재단 등을 명기한 지역문화진흥법이 나왔다. 너무 늦었다. 경기문화재단이 설립된 1997년 전후거나 2004년 무렵에는 나왔어야 했다. 지각생이라도 지역문화진흥을 제대로 추진하고 있다면 다행이나 현실은 안 그렇다.

법 시행 2년째지만 그 계획, 그 기금, 그 재단은 개점휴업이다. 중앙-광역-기초 지방정부의 전달체계는 아직 일방향이다. 바람직한 분담과 협력체계는 없다.

하여 날로 늘어나는 지역문화재단은 민법의 비영리 재단법인으로 설립되어 지방재정법, 지방공기업법, 지방출자출연기관법, 지역문화진흥법에 따라 프랑켄슈타인처럼 짜깁기된 정체성을 가진 채 자신이 누구며 부모가 누군지 세상을 향해 혼잣말처럼 방언을 중얼거리고 있다.

그사이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이미 문화와 예술은 창조경제, 공유경제, 사회적 경제는 물론 도시재생, 혁신교육, 마을만들기, 귀농귀촌 등 사회 모든 영역과 융합 진화했다.

이 사회적 작용 속에서 문화와 예술만 따로 추출해 진흥시켜야 할까? 가능하기는 할까? 문제는 지역문화재단 내부에도 있다. 짜깁기된 정체성 탓에 목적의식과 사명감보다는 행정 대행기관의 전문성 뒤에 숨어서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는 안정된 직장인의 문화, 그들만의 리그에 젖어 있다.

지역문화재단은 공무원, 대기업, 금융기관을 포함해 대략 400만명의 정규직 언저리에 있는 직장이다. 다수의 동년배 비정규직과 함께 동일업무에 종사하면서 신분 보장과 임금에 격차가 있는 직장이다. 잘 모르는 부모는 내 자식이 정부기관의 공무원인 줄 알고 안심하는 직장이다.

이 직장에서 지역주민의 삶의 질과 지역 발전에 헌신하는 태도와 담대한 기획이 나오려면 두 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온갖 중간지원조직을 따로 두어 각기 부실 위험을 키우기보다 지역문화재단과 합쳐서 지역재단이자 교육재단으로서 문화재단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다.

또 하나는 국가와 광역정부가 용단을 내려 지역문화재단의 정규직을 두 배로 키우고 청년과 청소년을 대거 고용하는 길이다. 예산이 부족해 사업을 못한다는 변명 대신 직접 주민을 만나 관계를 형성하고 주민자치를 앞당기는 일에 매진하면서 예술가도 주민으로 살도록 돕는 지역문화재단이 돼야 옳다.

글을 마치는 지금도 나는 “웱케쫘앆껴귀~”라고 쓰고 있는 것 같다. 반응은 “지금 뭔소리?”가 아니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지도 모름서!” 이 질문이 20대 국회와 교육문광위 의원들에게도 생생하게 들렸으면 좋겠다. “거기 뭐하는 데예요?” 나 하고 무슨 관계냐고 그 청소년이 묻고 있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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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강 시즌이다. 이번 학기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과 소설의 다양한 형상을 점검하고,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한 편의 짧은 소설로 창작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어문학과 학부 전공 수업이지만 한국어문학, 문예창작학, 국문학, 교육학, 철학생명윤리학, 사학, 경영학, 국제관광학까지 다채로운 전공 학생 50명이 참여했다.

이론과 창작실습을 통합한 새로운 형태의 수업을 개설하며, 처음엔 이 많은 인원으로 소설 창작까지 도모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딱딱하고 울퉁불퉁한 땅을 개간하는 농부의 심정으로 감행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얼굴 생김새가 있고, 눈빛이 있고, 음색이 있고, 화법이 있듯, 각자 자기만의 문장과 문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스무 살 어름의 문학도들이 처음 소설이라는 것을 쓰려고 할 때 봉착하는 것은 자기만의 특별한 경험(이야기)이 없거나, 매우 빈약하다는 깨달음이다. 이때 내가 제시하는 것이 ‘원체험’이다.

원체험이란 전쟁이나 보릿고개의 극빈, 육친의 죽음, 테러 등과 같은, 자신의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닌, 외부에서 주어진 불가항력적인 사건들이다. 대부분 비극적이고, 말도 안되는 ‘부조리 상황’으로 트라우마를 남긴다.

함정임 동아대교수

나의 경우, 1980년대 대학 시절, 민주화의 상징인 집단의 광장과 거리, 그리고 개인의 밀실인 도서관과 소극장을 오가며 겪었던 공포와 죄의식이 있고, 그보다 더 심층적인 원체험으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겪어야 했던 신산스러운 아픔이 있다.

내가 원체험을 꺼내놓자, 읽고 소비하기에만 치중했던 학생들이 백지 위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그리고 놀랍게도 종강을 앞두고 모두 각자 한 편씩 소설을 완성했다. 원체험 쓰기는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받은 마음을 들여다보고 보듬어 안아주는 행위와 같다.

소설은 자기 안에 억눌린 자아에게 귀를 기울이고, 숨을 터주는 것부터 출발한다. 차마 보여주기 부끄럽지만, 드러내놓고 나면 마음이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진다. 마음이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소설쓰기의 본질이 구원에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원의 마음으로 세상을 향할 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민의 대상이 된다. 나의 원체험 쓰기로부터 세상의 아픔에 가닿을 수 있다. 소설이란, 때로 연민과 애도, 추모의 형식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무고한 생명들이 무자비하게 희생당하고 있다. 마음이라는 것이 온전히 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다.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너 나 할 것 없이 상처 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기 위해, 이청준의 <자서전을 씁시다>라는 소설 제목처럼, 이 여름 소설 한 편씩 써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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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다 사망한 사람은 외주 정비업체에 입사한 지 8개월 된 19세 남성이었다. 경찰은 열차 통제의 책임을 가진 서울메트로 전자운영실, 현장 관리의 책임을 가진 역무실, 2인1조 수칙의 책임을 가진 외주업체를 조사해 죽음에 대한 “구조적 책임”을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통해 ‘죽음의 책임구조’가 가려진다 해도 장례를 미룬 가족과 지인에게 그의 19년에 걸친 ‘삶의 책임구조’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는다. 부친에 따르면 늘 격무에 시달린 그는 “씻지도 못하고 집에 오면 바로 곯아떨어”졌어도 비번날에 고용승계 집회에 참석할 만큼 정규직의 꿈을 갖고 있었다. 퇴근 행렬이 시작되기 직전인 오후 5시57분에 숨진 그의 가방에선 여러 공구와 함께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다.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23세 여성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주방용 식칼로 살해한 범인은 다른 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34세 남성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를 공론화한 추모운동과 정신질환자 관리 실태를 비롯해 공용화장실의 범죄 취약성까지 여러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중 범죄 원인을 두고 남성에게 만연한 여성혐오와 조현병자의 피해망상으로 쟁점이 형성됐지만 둘 다 ‘죽음의 책임구조’를 밝히는 차원이다. 친구와 주점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다 오전 1시7분에 화장실에 가서 살해당한 23세의 여성의 삶과, 0시33분부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식칼을 들고 사회적 약자를 기다린 34세 남성의 삶, 그 ‘삶의 책임구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이렇듯 19세 비정규직 남성의 오후 5시57분, 23세 여대생의 오전 1시7분, 34세 범인 남성의 0시33분은 저녁에서 새벽에 걸쳐 구의역과 강남역 사이의 20분 남짓 거리를 두고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죽음의 책임이 알지 못하는 ‘너 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주업체와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연결돼 있어도 알지 못하는 너와 나 사이에 들이닥친 불행의 표면적 인과만 밝힐 뿐 그 구조를 설계하고 만들고 관리하는 구조 운영자들은 늘 면죄됐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우리가 ‘삶의 책임구조’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관계로부터 면책되길 바라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탄생에 합의하고는 나만 괴롭히지 않으면 된다고 착각했던 업보가 아니면 뭘까 싶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삶이라 믿는 동안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에서 ‘삶의 책임구조’는 실종됐다. 이렇게 ‘삶의 책임구조’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죽음의 책임구조’와도 무관해진 국가와 기업은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취했을 뿐이다. ‘저녁을 방치하는 국가’와 ‘저녁을 주는 기업’만 작동된다면 삶과 죽음의 책임은 개인에게 외주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책임의 구조를 운영하는 정치와 경제라면 일명 ‘칼퇴근법’을 제정한들 무너진 중산층과 하루벌이 서민의 저녁에는 삶이 깃들 수 없다.

5월30일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한 일간지는 “132개의 초심”이란 머리기사를 통해 초선 의원들의 입법 포부를 깨알같이 소개했다. 하나하나가 각종 비타민처럼 소중하나 모아놓으면 종합비타민 같아서 꼭 그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으로 다가오기 쉽지 않다. ‘저런 세상이 올 수 있구나’ 하는 큰 실감을 주는 정치가 무엇인지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러자면 예컨대 30대 재벌 269개사의 753조원이 넘는 사내보유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정치여야 한다. 경제활동의 이익이 조세회피처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공동체에서 순환하게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정치여야 한다.

이렇게 희망의 정치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통해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 강남역과 구의역을 잇는 젊은이와 시민들의 추모 행렬에 담긴 ‘삶의 연대구조’를 국가와 기업에도 ‘삶의 책임구조’로 강제하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후보가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은 행복한 저녁을 더 많이 상상할 수 있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삶의 책임구조’를 함께 만들겠노라 행동할 수 있다. 다음 대선은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의 저녁에 달려 있다. 불과 1년7개월 뒤면 대선이다.



강명관|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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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초여름 대선 경선에 나온 야당의 한 후보가 ‘저녁이 있는 삶’을 주창했다. 이 때문에 설레던 이들이 꽤 많았지만 더 많은 돈을 욕망하느라 ‘삶을 삼킨 저녁’은 달라지지 않았다. 2년 전 가을 나는 이 지면에 ‘저녁은 이미 넘쳐나고 있다’는 칼럼을 썼다. 무연무업(無緣無業) 인구가 급증한 사회의 ‘넘쳐나는 저녁’엔 불안과 고독이 미세먼지처럼 가득했다. “완전히 다른 상상이 절실”하다고 글을 마쳤지만 돌아보면 상상은 태부족했다. 그러다 지난 5월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인 범죄가 벌어졌다. 5월28일엔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났다. 두 사건을 접하면서 ‘저녁이 있는 삶’에 대한 내 감정과 생각은 곤두박질쳤다.

구의역 9-4지점 승강장에서 홀로 안전문을 수리하다 사망한 사람은 외주 정비업체에 입사한 지 8개월 된 19세 남성이었다. 경찰은 열차 통제의 책임을 가진 서울메트로 전자운영실, 현장 관리의 책임을 가진 역무실, 2인1조 수칙의 책임을 가진 외주업체를 조사해 죽음에 대한 “구조적 책임”을 밝히겠다고 발표했다.

수사를 통해 ‘죽음의 책임구조’가 가려진다 해도 장례를 미룬 가족과 지인에게 그의 19년에 걸친 ‘삶의 책임구조’는 하나도 밝혀지지 않는다. 부친에 따르면 늘 격무에 시달린 그는 “씻지도 못하고 집에 오면 바로 곯아떨어”졌어도 비번날에 고용승계 집회에 참석할 만큼 정규직의 꿈을 갖고 있었다. 퇴근 행렬이 시작되기 직전인 오후 5시57분에 숨진 그의 가방에선 여러 공구와 함께 뜯지 못한 컵라면이 나왔다.


SNS를 통해 모인 20대 여성들이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여성혐오 살인'이라는 항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_경향DB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의 주점 화장실에서 살해당한 사람은 23세 여성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녀를 주방용 식칼로 살해한 범인은 다른 주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는 34세 남성이었다.

이 사건은 여성혐오를 공론화한 추모운동과 정신질환자 관리 실태를 비롯해 공용화장실의 범죄 취약성까지 여러 문제를 부각시켰다. 이중 범죄 원인을 두고 남성에게 만연한 여성혐오와 조현병자의 피해망상으로 쟁점이 형성됐지만 둘 다 ‘죽음의 책임구조’를 밝히는 차원이다. 친구와 주점에서 저녁시간을 보내다 오전 1시7분에 화장실에 가서 살해당한 23세의 여성의 삶과, 0시33분부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을 죽이기 위해 식칼을 들고 사회적 약자를 기다린 34세 남성의 삶, 그 ‘삶의 책임구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다.

이렇듯 19세 비정규직 남성의 오후 5시57분, 23세 여대생의 오전 1시7분, 34세 범인 남성의 0시33분은 저녁에서 새벽에 걸쳐 구의역과 강남역 사이의 20분 남짓 거리를 두고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이들 죽음의 책임이 알지 못하는 ‘너 때문’으로 치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외주업체와 역무실과 전자운영실로 연결돼 있어도 알지 못하는 너와 나 사이에 들이닥친 불행의 표면적 인과만 밝힐 뿐 그 구조를 설계하고 만들고 관리하는 구조 운영자들은 늘 면죄됐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우리가 ‘삶의 책임구조’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관계로부터 면책되길 바라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괴물의 탄생에 합의하고는 나만 괴롭히지 않으면 된다고 착각했던 업보가 아니면 뭘까 싶다.

더 많은 돈을 갖는 것이 삶이라 믿는 동안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에서 ‘삶의 책임구조’는 실종됐다. 이렇게 ‘삶의 책임구조’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죽음의 책임구조’와도 무관해진 국가와 기업은 더 많은 권력과 돈을 취했을 뿐이다. ‘저녁을 방치하는 국가’와 ‘저녁을 주는 기업’만 작동된다면 삶과 죽음의 책임은 개인에게 외주화될 수밖에 없다.

이런 무책임의 구조를 운영하는 정치와 경제라면 일명 ‘칼퇴근법’을 제정한들 무너진 중산층과 하루벌이 서민의 저녁에는 삶이 깃들 수 없다.

5월30일 20대 국회가 시작됐다. 한 일간지는 “132개의 초심”이란 머리기사를 통해 초선 의원들의 입법 포부를 깨알같이 소개했다. 하나하나가 각종 비타민처럼 소중하나 모아놓으면 종합비타민 같아서 꼭 그것이어야 한다는 공감으로 다가오기 쉽지 않다. ‘저런 세상이 올 수 있구나’ 하는 큰 실감을 주는 정치가 무엇인지 뜻을 모아야 한다. 그러자면 예컨대 30대 재벌 269개사의 753조원이 넘는 사내보유금을 어디에 사용해야 하는지를 밝히는 정치여야 한다. 경제활동의 이익이 조세회피처로 빠져나가지 않고 지역공동체에서 순환하게끔 법과 제도를 바꾸는 정치여야 한다.

이렇게 희망의 정치를 쌓아올리는 과정을 통해 대선을 맞이해야 한다. 강남역과 구의역을 잇는 젊은이와 시민들의 추모 행렬에 담긴 ‘삶의 연대구조’를 국가와 기업에도 ‘삶의 책임구조’로 강제하겠다고 공약하는 대선 후보가 나와야 한다. 그럴 때 국민은 행복한 저녁을 더 많이 상상할 수 있고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삶의 책임구조’를 함께 만들겠노라 행동할 수 있다. 다음 대선은 강남역과 구의역 사이의 저녁에 달려 있다. 불과 1년7개월 뒤면 대선이다.



김종휘 ㅣ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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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찌질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허삼관이라는 ‘피 파는(賣血) 사내’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 보여주는데,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허삼관이 이야기로 아이들에게 요리를 하나씩 만들어주고, 아이들이 맛있게 받아먹는 장면이다. 피를 뽑아 팔아 생계를 꾸리는 가장(家長) 허삼관과 그 가족은 늘 가난에 시달리는 상황. 이 피 파는 사내가 허기진 채 잠자리에 누운 아이들을 위해 깜깜한 허공에 대고 말로 만들어주는 음식은 ‘홍소육(紅燒肉)’이다.

“고기가 익으면 꺼내서 식힌 다음 기름에 한 번 볶아서 간장을 넣고, 오향을 뿌리고, 황주를 살짝 넣고, 다시 물을 넣은 다음 약한 불로 천천히 곤다 이거야. 두 시간 정도 고아서 물이 거의 쫄았을 때쯤…. 자 홍소육이 다 됐습니다.”

허삼관은 아이들의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를 들었다(위화, <허삼관 매혈기>, 최용만 옮김, 푸른숲).

영국의 로알드 달은 <맛>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와인 마시는 법의 정석을 보여준다. 위화가 <허삼관 매혈기>로 격동의 중국 현대사와 변두리 삶의 인생담을 울리고 웃기며 질펀하게 들려준다면, 달은 <맛>으로 태연하게 연기하며 사는 사람들의 가면을 ‘내기’라는 극적인 장치를 만들어 통쾌하게 벗겨버린다. “냄새를 맡는 과정은 거의 일 분간 지속되었다. 이윽고 프랏은 눈을 뜨거나 머리를 움직이지 않고 잔을 입으로 내리더니, 내용물의 거의 반을 입에 넣었다. (중략) 포도주를 혀 아래에서 굴리더니 씹었다. 포도주가 빵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로 씹고 있었다.”(로알드 달, <맛>, 정영목 옮김, 강)


위화와 달이 맛을 둘러싼 짠하고 유쾌한 이야기로 독자의 애간장을 녹여준다면, 한국의 한강과 독일의 귄터 그라스는 유년기 특정한 음식 체험을 통해 인간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는 트라우마를 드러내면서 치유(씻김)의 제의(祭儀)를 치러준다.

한국 작가 최초로 세계 3대 문학상인 '맨부커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이 포즈를 취하고 있다_연합뉴스

한강의 <채식주의자>의 영혜가 육식 거부의 삶을 단행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개를 매달고 동네를 돌고 돌면서 죽이는 과정에 죽어가는 개와 눈을 마주쳤던 기억과 그렇게 잔혹하게 죽여 만든 음식을 먹었던 원체험이 치명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와 거식이 변형적인 채식주의자로 그려졌다면, 그라스의 <양철북>은 주인공 오스카의 어머니가 해변에서 보았던 말머리 속에 들끓던 바닷장어와 그것을 잡아와 만든 바닷장어 요리가 뒤틀린 욕망의 매개물로 그로테스크하게 제시된다.

소설은 인간과 사회의 변화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통하는 장르이다. 20세기 중반까지 음식은 소설에서 그저 인물들을 식탁에 모이게 만드는 단발적인 역할에 그쳤다. 21세기 전후, 소설에서 눈에 띄는 변화는 인물의 욕망을 이끄는 서사의 핵심으로 음식의 비중이 커진 것이다. 유월, 초여름으로 들어서는 길목에서, 작가들이 소설 속에 차린 특별한 음식들을 다채롭게 음미하기를 권한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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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가? 나는 내 생각의 가감 없는 표현이다. 나의 얼굴, 몸가짐, 내가 처한 환경과 운명은 내 생각 그대로의 표현이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도, 내 생각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그 미래는 마치 조각가 앞에 놓여 있는 다듬어지지 않은 최초의 커다란 돌덩이다.

나는 형태가 없는 돌덩이와 같은 미래를 내가 원하는 아름다운 조각품으로 만들고 싶다. 나는 두 손에 정과 망치를 들고 마음속에 그려놓은 생각을 조각하기 위해, 쓸데없는 군더더기 돌들을 과감히 덜어내고 정교하게 쪼아내기 시작한다.

‘나의 미래’라는 조각품은 남들과 비교하거나 부러워하지 않을 때 빛이 날 것이다. 생각은 내 손에 쥐여 있는 정과 망치를 통해 어제까지 내가 알게 모르게 습득한 구태의연함을 쪼아버리는 작업이다.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여 내 생각을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만들어내는 마술이다. 그러면, 내가 만들어낼 조각품의 청사진은 무엇인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정을 부단히 움직이게 하는 그 원동력은 무엇인가?

며칠 전 용산에 위치한 국립중앙박물관을 무심코 들렀다. 그곳에서 한국조각의 걸작이라고 여겨지는 ‘반가사유상’을 보았다. ‘반가사유’는 내게 익숙하지만 그 의미가 아직도 아련해, 이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빙하시대 크로마뇽인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는 구석기시대의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가운데 한국국보 78호 금동반가사유상과 일본국보 주구사 목조반가사유상이 마주 보며 10m 정도 떨어져 서로 무심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이 불상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 이 불상을 제작한 6세기 삼국시대 무명의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토록 묘한 조각 작품을 만들었을까? 거의 천오백년이 지난 오늘, 왜 이 불상 앞에서 숙연해지는 것인가?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달래며, 금동반가사유상 앞에서 모든 것들을 관찰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불상 전면으로 가 그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불상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심하게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자신의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들고 있었다. 불상 주위를 한 바퀴 돌았지만, 불상은 태초부터 이런 자세로 앉아 있었던 것처럼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신기하게 나의 부산한 움직임을 감지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않는 것 같기고 하고…. 기분이 묘했다.

국보 78호 반가사유상(왼쪽)과 83호 반가사유상._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불상은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둥근 의자 위 방석에 앉아 있었다. 불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려 얹은 자세다. 그래서 ‘반가(半跏)’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평평한 바닥에 결좌 자세로 허리를 90도로 꼿꼿이 세우고 두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지 않는가? 불상은 한쪽 다리만 다른 쪽 다리에 올리고 왼쪽 발은 족좌 위에 올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다리의 발바닥, 특히 엄지발가락 밑에 상당히 두툼하게 부풀어오른 부분이다. 붓다는 참선을 통해 해탈 속으로 들어가 그 안에서 탐닉한 것이 아니라 인간 군상들과 함께 먼지가 나고 고통이 가득한 세계 안에서 발이 붓도록 돌아다니신 것 아닐까!

불상의 왼손은 그런 발을 어루만지듯이 가볍게 올려놓은 오른발 복숭아뼈를 살포시 감싸고 있다.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에 올려놓고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를 뺨에 살짝 대며 심오한 생각에 잠겨 ‘사유’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 같다.

사유(思惟)라는 한자를 보면 심오한 의미를 훔쳐볼 수 있다. 생각 사(思)자를 해석하는 사람들은 마음 심(心) 위에 있는 글자가 ‘밭 전(田)’이 아니라 한자의 뇌(腦) 글자의 오른쪽 아래 등장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생각의 대상은 뇌 속에 있는 이데아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매일매일 만나는 일상이라고 생각한다. 농부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삶의 터전인 ‘밭’인 것처럼, 생각의 대상도 ‘밭’과 같은 일상이 아닐까! 나를 더 나은 나로 변화시키는 현장은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이며 집이고, 내가 만나는 사람이며 책이다. 그 일상이 때로는 귀찮고 피하고 싶지만, 붓다의 왼손처럼 그 지치고 퉁퉁 부은 왼발을 어루만지는 것이 아닐까?

예수는 “천국은 밭에 감추인 보화다”라고 단언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라 바로 여기, 매일매일 만나는 삶의 터전, 냄새나고 파리와 모기가 날리는 곳이다. 다만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그 안에 감춰진 보화를 발견하는 훈련이 바로 생각이 아닐까?

‘사유’란 단어의 ‘유(惟)’자도 신비하다. ‘유(惟)’의 오른편에 있는 한자는 ‘송골매’나 ‘최고’를 의미하는 추(추)자다. 생각한다는 것은 송골매의 눈으로 나를 보는 연습, 가장 높은 경지에서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관조하는 것이 아닌가. 서양 전통에서 ‘묵상’을 의미하는 단어인 ‘컨템플레이션(contemplation)’도 ‘자신의 모습을 독수리의 눈으로 찍어본다’는 의미다.

내가 응시해야 할 대상은 내가 처해 있는 현재 삶의 터전을 극락이라고, 지금 여기서 송골매의 눈으로 응시하는 것이 아닐까? 컴컴한 전시실을 나오려고 했다. 뒤에서 반가사유상이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려보니, 그 불상이 나에게 미소(微笑)를 짓는 것이 아닌가.

내가 서 있는 이 장소와 시간이 나의 사유의 대상이며, 그것을 나를 위한 천국으로 만들려고 결심할 때, 신은 우리에게 미소를 선물한다.


배철현 ㅣ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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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낭보를 들었다.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 영어본이 영국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결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한강의 수상 소식은, 가치에 비해 늦기는 했지만, 한국 소설의 존재감과 번역 작업에 대한 인식의 전환점을 안겨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3편의 중편소설로 구성된 연작소설집이다. 한국문학계에서 소설가가 1년에 문예지에 발표하는 단편소설의 최대치는 4편 정도, 대개는 2편 내외, 중편은 1편 정도이다. 소설가가 쉬지 않고 성실하게 작품을 쓰고 발표해서 한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기까지는 3년 내외의 시간과 공력이 필요하다. 2004년 중편 <채식주의자>를 시작으로 <몽고반점> <나무 불꽃>이 문예지에 발표됐고, 2007년 한 권으로 출간됐다.

소설은 자본주의에 적합한 속성을 지닌 문학 장르이다. 사상과 예술을 담는 고유한 서사 양식으로서의 가치와 함께 상품으로서의 영향력이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상품으로서의 소설, 그러니까 세계 소설 시장에서의 소설이란 대개 장편소설을 지칭한다. 한국 작가들은 그동안 장편보다는 단편소설에 치중해왔다. 신인 시절 단편 창작을 통해 문장력을 연마한 뒤, 중편과 장편으로의 확장을 도모하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 한류의 흐름 속에 세계 소설 시장을 겨냥해 장편소설이 독려되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17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시민이 한국인 최초로 맨부커상을 받은 소설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고 있다._ 경향DB

소설가마다 세상을 표현하는 서사 감각과 호흡의 길이가 다르다. 소설가의 개인차뿐만 아니라 언어와 국가적 특성차를 고려해야 한다. 단편 미학에 적합한 소설가와 중편 양식에서 기량이 발휘되는 소설가가 따로 있다. 장편에서도 서사의 호흡과 규모에 따라 경장편과 장편, 대하장편으로 달라진다. 단편 작가로 오정희와 앨리스 먼로, 레이먼드 카버를 들 수 있고, 장편 작가로 천명관과 오르한 파묵, 대하장편 작가로 박경리와 레프 톨스토이 등을 들 수 있다. 중단편과 장편을 고루 운용하는 작가로는 황석영과 성석제 등이 있다.

21세기 인터넷 매체 환경이 보편화되면서 한 인간의 삶을 묵직하게 그려낸 중편 장르는 소멸되는 듯하다가 경장편이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이행되고 있다.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비롯,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등은 중편과 경장편 양식을 겸하고 있다. 철학적인 사유 속에 시적인 문장들이 돋보이는 카뮈의 <이방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 등이 같은 계열이다.

한강은 시인으로 데뷔해 소설에 집중해왔다. 시적인 감수성과 서정이 잡식의 힘센 소설 장르와 경합을 벌이면서 독특한 긴장과 여운을 창출해왔다.

소설가의 삶이란 한 편의 소설을 완성하기 위한 지난한 작업의 연속이다. 한 편의 소설이 세상에 떨치는 가치는 현재와 미래, 무한대로 열려 있다. 한강의 맨부커상 수상을 출발점으로 그동안 축적해온 다양한 개성의 한국 소설들이 세계 독자와 유쾌하게 만나리라 기대한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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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릿광대인줄만 알았던 도널드 트럼프가 마침내 미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 트럼프를 미치광이 취급했던 이들에게 충격적인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이 본선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공화당 대선 후보가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트럼프 현상이 무시할 수 없는 상승력을 가진 실체적 열망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미국은 대체로 리버럴리즘과 보수주의가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해온 국가이다. 급진주의를 배제한 보수 양당 체제는 자유민주주의의 보편 모델로서 추앙받아 왔다. 이런 자유민주주의는 2차 세계대전 동안 미국이 반파시즘 전선에 동참하면서 가치화되었고, 냉전시기를 통과하면서 확고한 ‘자유 진영’의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트럼프 현상은 이렇게 미국 주도의 전후 세계 체제를 지탱해왔던 정치적 질서에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 이상 기류는 트럼프가 연일 내뱉는 ‘고립주의’라는 겉모습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사실상 그 뿌리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스크린에 덮여서 보이지 않았던 인종주의, 반지성주의, 백인우월주의, 기독교 근본주의 등이다. 지금까지 미국에서 지엽적인 것으로 간주되어 왔던 이런 극우주의 경향이 트럼프라는 프리즘을 통해 제 색채를 드러낸 것이다.

트럼프 현상의 본질은 민주주의에 대한 반발심이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은 미국의 민주주의가 자신들의 의견을 대의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일정하게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완전한 민주주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민주주의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른다.

미국 공화당의 대선후보 지명이 사실상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_AP연합뉴스

이런 판단은 이성적이라기보다 감정적이다. 트럼프의 캠페인이 혐오 정서를 부추기는 방식으로 호응을 얻었다는 것은 많은 문제를 시사한다. 트럼프 현상 역시 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반민주주의가 세를 얻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1980년대 이후 미국은 하나의 미국을 만들어내기 위해 여러 규범들을 만들어냈는데, 그중 하나가 ‘정치적 올바름’을 위한 문화운동이었다.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요구는 차이를 존중하고 소수성을 옹호한다는 취지였지만, 일정 부분 ‘정치적 올바름’ 자체를 규범화해서 이 규범에 들어맞지 않는 것을 모두 나쁜 것으로 규정해버리는 교조적 경향으로 귀결되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를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신들에 대한 역차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런 리버럴리즘의 한계가 트럼프 현상에 일정하게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미국의 트럼프 현상은 공화당으로 대표돼 왔던 보수주의가 약화됐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부시 정부가 노골적으로 보여줬던 것처럼 공화당은 정치적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기독교 근본주의와 손을 잡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라크 침공을 십자군 원정에 비유했던 수사학은 그냥 등장한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과 경기침체는 공화당을 지지하던 중산층의 이탈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합리적 유권자’에 해당했던 이들이 이탈하면서 만들어진 공백을 채운 것은 이민자와 소수인종에 대해 불만을 품은 백인 노동자들이었다. 불법 이민자들과 소수인종들이 자신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범 때문에 불만을 토로하기도 쉽지 않았던 이들은 ‘국경 폐쇄’를 소리 높여 외치고, 남의 나라를 위해 미국의 돈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트럼프가 자신들의 속마음을 시원하게 대변해준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릿광대라고 하기에 트럼프의 제안은 구체적이다. 트럼프는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것이다” “미국을 보호할 것이다” “우리는 유럽과 다른 길을 갈 것이다” 등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더불어 해외로 이전한 공장을 불러들여 생산직 일자리를 늘리고 불법 이민자를 추방하겠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아 불법 이민을 근본적으로 막아서 노동자의 이익을 지키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런 파격적 주장이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온 백인 노동자들에게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트럼프가 대선에서 승리해 만에 하나 미국 대통령이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벌써부터 아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가 내세우는 ‘고립주의’는 한반도에서 미군을 철수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게 만든 배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미국 우선주의는 민주당 대선 후보 힐러리 클린턴의 입장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사실상 트럼프와 힐러리는 정책적인 측면에서 거의 변별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트럼프든 힐러리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에게 모두 부담스러운 대통령들일 것이다. 이런 직접적인 영향 못지않게 트럼프 현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명확하다. 이른바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미국 역시 트럼프 현상 같은 포퓰리즘에 속수무책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현상은 진전일까 퇴행일까. 민주주의의 역설을 넘어선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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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분야에서 존경받는 일인자가 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일가를 이루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자신에게 행복한 임무를 발견하고 정진할 때, 우리를 좌절시키고 포기하게 만드는 장애물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임계점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 재능이면서, 결심이자 단호한 의지다.

이것은 소위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구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즐기는 사람만이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이다. 그것은 바로 인내(忍耐)다.

거의 30년 전 나는 한 언어에 매료되었다.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구약성서>를 기록한 고전 히브리어다. 나는 그 당시 어두운 숲속을 헤매며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내 몸과 정신, 그리고 영혼까지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로 매력적인 그 무엇. 그것이 바로 고전 히브리어였다. 이 언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수업 첫 시간은 좌절 그 자체였다. 글자 모양, 소리, 단어와 문장, 발음. 이 모든 것이 너무 생소해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이 언어가 내 일생의 동반자가 될 것이라고는 추호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 언어를 사랑할 수 있는가? 내 전략은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우선 내 일과는 이 언어 공부가 전부였다. 이 언어의 신비한 매력에 빠져 점점 시간을 늘리고 있었다.

3년 정도 공부하니, 이제 고전 히브리어가 내게 말을 걸어왔고, 문장의 단어와 단어 사이에 공간의 의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것처럼. 남들이 들어가 볼 수 없는 경지에 들어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사랑이 가져다주는 선물이 바로 인내다. 아마도 사랑과 인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구분할 수 없는 신비한 합일(合一)이다.

인내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최고의 덕목이다. 인간에겐 특별한 취미가 있는데, 자신의 신체를 극한 상황으로 몰아가는 스포츠다. 그런 경기들 중 단연 돋보이는 극한 스포츠가 ‘마라톤’이다. 4년마다 열리는 국제 스포츠 경기인 올림픽의 꽃은 맨 마지막에 거행되는 ‘마라톤 경기’다.

윌슨 로야나에 에루페가 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결승 테이프를 끊고 있다_연합뉴스

마라톤 경기는 모호한 매력이 있다. 뛰는 사람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환희와 재미를 선사한다. 42.195㎞를 일정한 속도로 뛰어가는 한 사람의 영웅적인 모습. 그의 모습에서 인생의 가장 중요한 가치인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인내를 찬양한다. 그의 일그러진 얼굴과 주룩주룩 흘러내리는 땀은 인내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선이라고 묵묵히 그리고 감동적으로 외친다.

인간은 왜 이렇게 자학하는가? 인내가 인간 승리의 표상인가? 달리기 선수들은 특별한 엑스터시 경험을 말한다. 대부분 이 경험을 신뢰하고 자신들이 직접 경험했다고 말한다.

이들은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도달하면, 고통을 거의 느끼지 않고 쉽게 즐기며 달릴 수 있는 단계에 진입한다.

이 기분이 진짜일까? 진짜라면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장거리 전문 선수들 중 일부는 자신이 기절할 정도로 달려 완주한 후, 평온함을 느꼈으며 심지어는 행복감에 젖었다고 말한다.

이것을 영어로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최근 과학자들은 극도의 인내를 요구하는 장거리 달리기를 할 때 선수의 뇌에서 기분을 전환시키는 화학성분이 분비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화학성분을 엔도르핀이라고 부른다. 장거리 달리기와 유사한 격렬한 운동을 하는 선수들의 뇌, 특히 변연계와 전두엽 부분에서 엔도르핀이 감지되었다. 이 부분들은 사랑에 빠지거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콘체르토 3번과 같은 감동적인 음악을 들었을 때도 활성화된다. ‘러너스 하이’는 인내에 따른 혜택이다.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 아름답고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신에게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몰입되어 자연의 흐름에 따라, 천재지변이 있더라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순간에 눈부시게 자기에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꽃들이 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금기와 같은 두 가지다. 다른 꽃들을 부러워하거나 자신을 그것들과 비교하는 일이다. 아니, 태생적으로 부러움과 비교는 그들의 삶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행복한 천재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깊이 사랑하지 않고, 자신이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성찰을 통해 찾았다면, 그 일이 우주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전념하면 되지 않을까? 우리 교육은 언제부터인가 부러움과 비교에서 시작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러너스 하이’를 통한 자신만의 사명을 알고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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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가정에서 자란 10대 엄마는 남몰래 사내아이를 낳았다. 보모의 손을 전전한 아이는 2세에 양부모를 만났지만 관심을 받진 못했다. 외할머니가 8세까지 키우고 돌아가신 뒤 다시 양부모 손에 맡겨진 아이는 언제나 혼자였으나 외할머니의 독서와 양부모의 교양 덕에 영특한 소년으로 컸다. 초등학교만 나온 소년은 영화광이 됐고 15세에 영화클럽을 설립했다 망했다. 이때 진 빚을 갚으려고 양부의 타자기를 훔쳤고 양부의 신고로 수감됐다. 이후 짝사랑에 치이고 입대했으나 탈영했고 수감됐다. 불우하기 짝이 없는 이 청소년을 제자이자 양자처럼 보듬은 사람은 영화계 리더인 28세의 멘토였다. 멘토의 보증으로 풀려난 그는 돌봄과 후원으로 성장했다. 23세가 되자 그는 자신의 이름과 함께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란 비평을 발표했다.

기성 영화들과 영화계를 신랄하게 부정한 비평 때문에 칸영화제 참석이 금지됐던 그는 26세에 결혼했고 장인의 배급영화들을 비판하다가 “그렇게 영화를 잘 알면 한번 만들어보지?” 하는 힐난에 영화를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영화가 1959년 칸영화제 공식경쟁 부문에서 기립박수를 받고 최우수감독상을 수상한 <400번의 구타>다. 당시 28세였던 그의 이름은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해 초겨울 그를 키운 정신적 양부이자 멘토 앙드레 바쟁이 41세로 숨을 거뒀다. 트뤼포 감독은 자신의 성장담을 투영한 영화의 주인공으로 14세 소년 장 피에르 레오를 발굴했고 직접 키우고 가르쳤다. 자신이 겪고 성장한 대로 트뤼포 감독은 레오의 양부이자 멘토가 되었고 둘은 감독과 배우로 여러 편의 영화를 같이 만들었다.

‘400번의 매질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는 프랑스 속담에서 빌려왔다는 영화 제목대로 트뤼포 감독이 경험한 가족이란 애정이 사라진 관계고 학교란 훈육만 가득한 공간이다. 이런 세상에선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으실”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든다. 이 세계를 어른들이 본다면 온갖 어리석은 짓들뿐이겠지만 아이들은 그 어리석음을 통해 문제를 일으키고 상처 입고 성장하면서 세상과 자신의 진실을 만난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 영화 <400번의 구타>가 지난 4월13일 국내에서 처음 개봉됐다. 같은 날 정지우 감독의 신작 <4등>도 개봉됐다. 영화를 본 관객이라면 아프고 미안하면서 고맙고 대견한 마음의 동요를 평화롭게 다 받아주는 <4등>의 영화 포스터를 갖고 싶었을 것 같다.

영화 속 소년 준호는 포스터 문구대로 “난 수영이 좋은데 꼭 1등만 해야 해요?”라고 묻는다. 수영을 좋아하고 소질도 있어서 수영선수가 된 준호는 “야! 4등! 너 웃음이 나와?” 하고 화를 내는 엄마와 어른들 앞에선 만년 4등이자 40등과 같은 패자이며 400번의 구타를 통해서라도 기어코 1등에 올라야만 구제받을 수 있는 미완의 훈육 대상일 뿐이다. 그래도 수영이 좋아서 수영선수이길 원하는 준호 앞에 나타난 멘토는 1등의 폭력을 대물림하는 전 국가대표 선수다. 맞고 훈육 또 맞고 훈육 끝에 준호는 2등을 한다. 가족파티가 열린 그날 어린 동생이 말한다. “정말 맞고 하니까 잘한 거야? 예전엔 안 맞아서 맨날 4등 했던 거야, 형?”

정상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오늘의 행복을 빼앗는 부모 자식과 스승 제자라는 한국의 현재를 그린 <4등>은 탈가족과 탈학교의 위기 속에서 양부모와 멘토를 통해 자라고 또 그렇게 누군가의 가족과 스승이 되어 살았던 저 근대적 프랑스인의 고전 <400번의 구타>와 57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떼어놓을 수 없는 문제적 영화다. <4등>의 결말은 준호의 1등이지만 이 성취는 훈육 때문이 아니라 준호 스스로의 현실 직면을 통해서다. 초등학생 아이의 선택치고는 가혹하지만 준호는 수영선수로 살아남아 끝내 수영을 좋아하는 자신을 지킨다. 수영장의 푸른 물빛 가득한 포스터 하단에는 잠수한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슬며시 웃고 있는 준호의 얼굴이 투명한 기포를 한가득 올려 보내며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지상의 몰상식과 폭력을 떠나 숨을 참고 수중의 잠수를 통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맞이하는 준호의 모습에서 400번의 구타에도 4등의 행복을 즐길 줄 알았던 해맑고 성숙한 우리의 또 다른 아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곧 성년의날 5월16일이다. 모 주간지는 특집으로 ‘성년이 된 발달장애인을 우리 사회는 맞을 준비가 됐나’를 실었다. 소방관이 되고 싶고, 요리사가 되고 싶고, 수영선수가 되고 싶은 발달장애 아동에게는 앙드레 바쟁과 프랑수아 트뤼포 같은 스승이자 멘토가 절실하다. 영화 포스터에는 “반짝반짝 빛나는 4등”이라고 쓰여 있다. 아이들이 숨을 참고 잠수해야만 반짝반짝 빛날 수 있는 수중만 아니라 지상의 햇볕을 쬐며 숨 쉬고 웃어야 할 그날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어야 한다.

마침 성북 아리랑고개에 있는 아리랑씨네센터에서 <4등>과 <400번의 구타>를 같이 상영하고 있다. 이 오월이 가기 전에 꼭 보셨으면 좋겠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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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아는 교수님이 소설책을 번역해서 보냈다. 역자가 둘이다. 그분은 원래 부부 교수님인데, 한 분은 영문학자, 한 분은 역사학자다. 두 분이 번역했겠거니 했는데, 역자 중 한 사람은 아드님이란다. 참으로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행복하겠구나 싶었다.

책을 훑어보니,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고, 한 페이지는 인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파본이다. 서점에서 산 책이라면 당장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증받은 책을 파본이라며 돌려보내고 다시 새 책을 달라고 한다면, 뭔가 좀 이상한 것 같다. 그래서 서가에 꽂아두고 내쳐 그냥 두었다. 뒤에 그 교수님을 만나 책을 보내주어 고맙다 하고 책의 상태가 그랬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새 책을 보내주겠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아니 파본이니까 그냥 갖겠다고 우겼다. 왜냐? 이 책이 혹 아는가? 이 책이 뒷날 유명해져서 에러우표처럼 엄청난 값을 받게 될지? 하하!

파본일 수도 있다면서 책을 사면 꼭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넘겨가며 검토하는 분도 보았다. 자신이 못하면 학생을 시켜서라도 꼭 확인하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깐깐할까 하고 생각했다가 다시 생각해 보니, 과거 책들은 그럴 만도 했다. 인쇄나 제본 기술이 시원치 않았을 때 종종 인쇄되지 않은 페이지, 중복된 페이지, 없는 페이지가 드물지 않게 있었던 것이다. 그분의 깐깐한 행동도 이해가 되었다.

이런 불구의 책을 파본이라 한다. 파본을 종종 경험하는 터이다.

한 번은 학교 앞 서점에서 책을 사서 붉은 색연필로 줄을 그으며 신나게 읽고 있는데, 어라, 갑자기 내용이 튄다.

전후를 꼼꼼히 훑어보니 몇 페이지가 빠졌다. 서점에 가지고 갔더니 두말 하지 않고 바꾸어준다. 또 책날개에 보면 ‘파본은 바꾸어드립니다’라고 적어두고 있으니 요즘은 파본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정작 사람을 괴롭게 만드는 것은 이빨 빠진 고서다.

서울의 모 대학 도서관에 꼭 필요한 책이 있어 중간에 사람을 넣어 복사를 부탁했다. 며칠을 기다리는데 아주 감질이 났다. 드디어 복사본이 도착했다. 허겁지겁 자료를 훑어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내가 원했던 자료가 있는 책만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10권 5책의 고서라면 10권은 내용상의 분류고, 5책은 형태상의 분류다. 그런데 내가 보고자 했던 것은 4책의 8권에 있는데, 4책이 없는 것이다. 목록에는 5책이 다 있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4책이 사라진 것이다.

다시 같은 책을 소장하고 있는 다른 도서관과 접촉해서 복사를 했다. 그런데 이게 또 어찌된 일인가. 그쪽 사본에도 역시 내가 원하는 부분이 있는 책만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책의 중요 부분을 안 사람이 빌린 뒤 반납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이가 빠진 책을 낙질본이라고 한다. 희한하게도 내가 보고자 하는 내용이 낙질 속에 있었던 경우가 자주 있었다. 박사과정 때도 도서관에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책이 있는 것을 알고 신청을 하면, 종종 망실되었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건 나만의 경험인가?

최근에는 고서가 아닌 책에서도 동일한 경험을 했다. 부산대 도서관에 <부산대학교 10년사>란 책이 있다. 나는 2005년 부산대학교 60년사를 편찬할 때 편찬위원으로 참가해서 한 꼭지를 썼다. 그때 교사자료관(校史資料館)에서 필요한 기본 자료를 건네주었다.

아주 간단한 것을 예로 들자면, 부산대학교 50년사, 40년사, 30년사, 20년사, 10년사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946~1956년의 10년간 역사를 정리한 10년사였다. 부등사판을 긁어 갱지에 인쇄한 이 책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초라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그 내용은 너무나도 흥미롭다. 해방 직후 부산에 대학을 설립하고자 했던 부산 시민들, 그리고 그야말로 적빈(赤貧)의 상황 속에서 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선각(先覺)들, 좌우 대립, 6·25전쟁기의 전시대학(戰時大學) 등 어느 것 하나 귀중하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특히 국가에서 국비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 민간에서 자금을 모아 국가에 헌납한 뒤 그것을 국비로 다시 내려주는 형식을 통해 부산대학교를 건립했다는 이야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또 어떤 유명한 기업인이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의 설립에 기부금을 내기로 약속했다가 지키지 않고 뒷날 선거에 나와 자신의 업적을 묻는 사람에게 부산대학교에 기부금을 냈노라고 거짓말한 것까지 적어 놓고 있다. 요컨대 지금처럼 예비취업생을 길러내는 대학이 아니라,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지한 열정이 넘쳤던 대학의 모습을 <십년사>를 통해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무미건조한 계량적인 역사가 아닌 이야기체의 서술도 너무나 흥미로웠다.

<십년사>는 이미 부산사(釜山史)의 일부를 이루고 한편으로는 한국 대학사(大學史)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단 한 부밖에 없는 귀중한 책이기에 혹시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마음에 부본(副本)을 만들려고 했다.

책을 복사한 뒤 돌려주고 복사한 것을 대본으로 한글파일로 옮겼다. 깨끗이 교정을 보고 출력을 했더니, 아주 깔끔하게 되었다. 출판사에서 내줄 리 만무한 책이니 언젠가 형편이 돌아가면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주해를 달아 소량 제작하기로 하고, 몇몇 관심 있는 분들에게 출력해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십년사>에는 결정적인 흠이 있었다. 여러 페이지가 누락된 파본이었던 것이다. 아마도 제본할 때 실수로 몇 페이지가 빠진 것 같았다. 은퇴하신 노교수님들에게 여쭈어보는 등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온전한 책을 구할 수 없었다. <십년사>를 낸 것이 1956년이니 교수며 학생이 수백명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십년사>를 간행해도 얼마나 간행했을 것인가. 또 이런 책일수록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니 사라진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교사자료관에 있는 책이 유일한 것이다. 이럴 경우 다시 책을 찍는다 해도 빠진 부분을 채워 넣지 못하고 만다. 불구의 책이 되는 것이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파본은 정말 더할 수 없는 형벌인 셈이다. 책 만드시는 분들에게 부탁하노니, 제발 파본만은 말아 주시기를!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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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월이 가고, 오월이 와도 숨쉬기가 편치 않다. 최근 한국소설계에 유독 참사와 재앙, 애도의 서사가 많이 생산되는 이유를 묻는 일은 무의미하다.

김애란의 단편 ‘물속 골리앗’은 이렇게 시작한다.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비행운>, 창비) 이 소설은 철거의 폭력과 공포에 내몰린 재개발 공간과 한 달째 쏟아지는 폭우 상황에 고립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애란의 또 다른 단편 ‘하루의 축’에는 이런 장면이 등장한다. “기옥씨는 입을 크게 벌려 과자를 반쯤 베어 물었다. 처음에는 ‘아유 달어’ 하고 살짝 몸서리쳤지만, 곧 프랑스 전통 과자의 그윽하고 깊은 단맛, 부드럽고 바삭한 식감을 조심스레 음미했다. 하지만 얼마 안 돼 기옥씨의 안색은 이내 어두워졌다. 기옥씨는 왠지 울 것 같은 얼굴로 나지막하게 웅얼거렸다.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비행운>, 창비)

김애란 작가 _경향DB

너무 달콤해서 소설의 화자 기옥씨를 몸서리치게 만든 것은 프랑스 전통 과자 마카롱이다. 기옥씨는 누구인가? 공항의 일용직 잡부이다. 이런저런 사연으로 화장실 청소를 하며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신산한 삶에 처해 있다. 이런 기옥씨의 일터에 누군가 ‘스무 가지가 넘는 색깔의 신선한 마카롱’을 놓고 간 것이다. 한 입 베어 문 마카롱은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사는 기옥씨의 고달픔을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로 달콤하다. 기옥씨로서는 태어나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상상할 수 없는 맛이다. 넋을 쏙 빼가듯 기옥씨의 미각을 사로잡은 달콤함은 독자에게 전달되면서 처절함으로, 이어 처연함으로 바뀐다.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김애란이라는 젊은 작가의 문장, 문장 속에 담긴 의식, 의식 속에 새겨진 세계(작품)을 엿보면 된다. 그녀가 호출해낸 인물들의 존재 방식은 2010년대 전후 한국 사회의 민낯을 첨예하게 드러낸다.

작가란, 그저 재미를 추구하는 오락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사회의 맥락 속에 인간의 존재론적인 질문과 흘러가는 시간에 맞서는 예술의 의미를 소설을 통해 던지는 존재이다. 뭇사람들의 견딜 수 없는 슬픔과 어긋나고 응어리진 현실을 풀어주고 어루만져주는 존재가 작가이고, 소설이다.

작가에게는 영매(靈媒)의 역할이, 소설에는 치유의 기능이 내재되어 있다. 여름의 문턱에서, 안부를 묻듯, 김애란의 소설 한자락 건네본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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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것이 왔다. 구조조정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한계기업 구조조정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대량 해고가 예상됨에도 구조조정에 반대할 수 없는 건 더 이상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는 업종 전체, 나아가 산업계가 공멸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구조조정에 속도가 붙으면서 고용지원, 재원확보 등 숙제들이 여럿 생겼다. 그런데 가장 먼저 나와야 할 것이 빠졌다. 이런 상황을 초래한 대주주의 책임지는 자세다.

한진해운은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이 남편의 뒤를 이어 2007년부터 경영을 맡았으나 2009년 적자로 돌아섰고 2013~2014년 1조800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냈다. 회사가 2조원에 육박하는 적자의 늪에 빠진 2년간 최 회장이 보수와 퇴직금으로 받아간 돈만 97억원이다. 최 회장은 2014년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지주사인 한진해운홀딩스를 유수홀딩스로 바꿔 정보기술(IT)과 외식사업을 하고 있다. 자율협약 신청 발표를 앞두고는 갖고 있던 한진해운 주식을 모두 팔아치웠다. 부실경영에 책임지는 자세를 보이기는커녕 발빠르게 손실을 피해가는 ‘도덕적 해이’의 극치다. 최 회장 일가가 보유한 재산은 공식적으로 드러난 것만 1900억원이다.

26일 인천국제공항 제2여객청사 상량식에 참석한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_ 이준헌 기 ifwedont@kyunghyang.com

부실 덩어리를 넘겨받은 조 회장은 대한항공 등 계열사를 통해 1조원을 지원했다. 조 회장 입장에선 할 만큼 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한진그룹 역시 한진해운을 넘겨받기 훨씬 이전부터 경영 상태가 나빴다. 경제개혁연구소가 분석한 부실 징후 기업집단(부채비율이 200%를 넘고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못 내는 기업) 명단에 한진그룹은 2008년부터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채권단이 한진해운을 살리기로 결정하면 정부 재정이든 한국은행이 돈을 찍어내든 어떤 형태로든 돈이 들어간다. 결국 국민 부담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주주 일가가 뼈를 깎는 모습을 보이는 건 필요조건이다. 차입금 규모가 5조6000억원에 달하니 면피용 사재 출연으로 넘어갈 일도 아니다.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을 팔아서라도 최대한 자금을 마련해보겠다는 태도를 보일 때다.


이주영 기자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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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끓던 4·13 총선이 끝났다. 여당 압승이 예측되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총선 전 이 지면에서 “이변을 기대한다”고 썼던 나의 예상은 맞았다. 그러나 나의 기대를 넘어선 ‘이변’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클릭한 정의당을 제외하고 노동이나 환경 문제를 의제로 설정하는 ‘진보정당’은 원내 진입에 실패했다. 왜 ‘진보정당’은 유권자를 매혹하지 못하는 것일까. ‘진보정당’에 무관심한 유권자를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진보정당’의 부재는 역설적으로 지금 현재 한국에서 ‘의회정치’라고 부르는 민주주의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번 투표는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말만 총선이지 실질적으로 차기 대권주자들의 ‘체력장’에 가까웠다. 유권자들은 권력교체를 열망하는 마음으로 사분오열되었을망정 야권에 표를 몰아주었다. 박근혜 정부와 집권여당에 대한 반감이 선거제도를 통해 표출되었다는 진단은 그래서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총선 이후 추락하고 있는 대통령 지지율이 이 사실을 증명하는 것처럼 보인다. 언론은 여야의 대립구도에 주목해서 여소야대 정국의 탄생을 집중 보도했지만, 이번 총선 결과가 보여주는 것은 누가 여당이고 누가 야당인지 알 수 없는 혼돈이다. 국민의당이야말로 바로 이 혼돈 상황의 의미를 말해주는 증거처럼 보인다.

분명 국민의당은 새누리당이든 더불어민주당이든 모두에게 필요한 존재이다. 이 상황을 두고 과거 자민련과 국민의당을 빗대는 평가도 있지만, 초록이라고 다 똑같은 색은 아니다. 자민련과 국민의당이 얹혀 있는 정치적 지형도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번 총선은 정권교체에 대한 유권자의 마음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대통령에 대한 ‘콘크리트 지지’와 장기집권 음모론을 단숨에 날려버린 선거였다.

여하튼 유권자가 바란 것은 정권교체였고, 거기에 합당한 ‘인물’에게 표를 던져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번 총선에서 중요했던 것은 정당이었다기보다 정권교체를 가능하게 만들 정치인을 선택하는 일이었다.

국민의당 천정배, 안철수 공동대표가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_연합뉴스

선거 결과는 집권여당보다도 야당에 차기 ‘대통령감’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지만, 사태는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총선에서도 중요한 지표를 제공한 ‘부동층’의 향배가 여야 정권교체를 결정할 것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 이 ‘부동층’에게 사실상 여야는 따로 없다는 점에서 차기 대통령 선거 역시도 뚜렷한 이념이나 노선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겉으로는 ‘여야’가 대립하고 있는 것 같지만, 진실은 서로 다른 정치인 개인의 역량들이 각축을 벌일 가능성이 크다. 북한이라는 변수도 있지만, 역시나 이번 총선에서 ‘북풍’은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여전히 진보적 의제는 선별적이나마 보수정치인들을 도드라지게 보이기 위한 장식으로 동원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보수주의적인 규범에 어긋나는 급진적인 의제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당해서 처음부터 배제될 것이다. 뚜렷한 의제의 방향이 없는 선거는 결국 역량 있는 대통령을 선출하는 문제로 수렴될 것이다. 이런 까닭에 총선을 거치면서 정당은 표를 가졌지만, 정작 그 표를 받은 정치인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정치인들의 관심사는 대체로 누가 차기 대통령이 될 것인지, 이 궁금증에 멈춰 있는 것 같다. 이른바 차기 대권주자들 역시 차기 대통령 자리를 놓고 벌이는 게임에 뛰어들 채비를 차리느라 분주해 보일 뿐이다.

그러나 이들은 성적표를 받아든 학생들처럼 자신들의 역량이 선거 결과를 통해 ‘증명’되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유권자들이 정당에 표를 던진 이유는 주어진 선택지 내에서 최선의 답을 찾은 결과일 뿐이다. 선거는 유권자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하는 제도라지만, 정작 유권자들에게 주어진 선택지 이외의 답을 말할 자유는 허락되지 않는다.

게다가 다수가 선택한 의제 이외에 다른 것은 비합리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되기 일쑤다. 자유민주주의의 비밀은 이것이다. ‘진보정당’이 지금 정치구도에서 언제나 찬밥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선거가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답 내에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규칙은 새로운 답을 찾으려는 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인 셈이다.

전 체코공화국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은 정치를 ‘불가능성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을 실현하는 예술이 바로 정치라는 의미이다. 이런 정치의 예술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는 예술가의 덕목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하벨의 주장이었다. 그 덕목이란 지금 자신의 처지와 전체를 연결해서 생각함으로써 현재의 한계를 넘어서는 차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보수의 재편이 가져온 새로운 국면이 그냥 ‘대통령 뽑기 게임’으로 끝나지 않기를 희망한다. 지리멸렬함에 빠져 있는 이 사회에 새로운 생각을 부여할 수 있는 정치인들이 출현할 수 있을지 관심 깊게 살펴볼 일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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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대학에 근무하는 친구가 나더러 자기들 모임에 좀 나와 줄 수 없느냐고 부탁을 한다. 무슨 모임인가 물었더니 책읽기 모임이란다. 한 달에 한 번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모임으로 마침 내가 쓴 책을 읽고 토론을 할 예정인데, 그 친구가 저자가 친구라고 했더니 모임에서 불러서 같이 얘기를 해보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친구는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그 모임 역시 같은 자연과학 전공자의 모임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과 쪽 전공자들이 자연과학 쪽 지식을 결여하고 있듯, 자연과학을 전공하는 분들은 대체로 인문학 쪽 관심이 희박하다. 같은 대학에 있지만 사실 딴 세계에서 살고 있는 듯한 느낌이 없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결핍을 채우고자 하는 의식적 노력도 있다. 친구의 모임은 주로 인문학 서적을 읽고 있었다. 나 역시 교양 과학서에 손이 자주 가는 편이다. 어쨌든 그날 모임은 아주 즐거웠다.

달포 뒤 그 친구가 전화를 걸어 다산(茶山)을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물었다. 그런 방법은 없노라고 답하자, 이것저것 다산에 대해 물었다. 신통한 답은 아니지만 아는 대로 조금 주워섬기자 이내 ‘다산평전(茶山評傳)’ 같은 책은 없느냐고 물었다. 지금 같으면 박석무 선생이 쓴 <다산 정약용 평전>을 소개했을 터인데, 그때는 이 책이 나오기 한참 전이다. 없다고 하자, 그래? 그런 책이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아쉬워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어떤 인물에 대해 공부를 하고 싶은데 접근할 방향을 찾기 어려울 때가 있다. 그가 남긴 저작이나 연구서를 읽으면 되지 않느냐고 하겠지만 그게 또 쉽지 않다. 원저작이 어렵고 또 연구서는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의 경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면 무조건 읽어야 하겠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필요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평전에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평전을 읽는 것은 여간 즐거운 일이 아니다. 최근에 읽은 평전으로는 피터 싱어의 <헨리 스피라 평전,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가 있는데,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의 생애를 통해 동물권에 대한 생생한 지식을 얻게 돼 엄청나게 고마웠다. 거슬러 올라가면 평전을 읽고 공부가 된 적이 적지 않다. 프랜시스 윈의 <마르크스 평전>, 막스 갈로의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아이작 도이처의 <트로츠키 평전> 3부작을 읽고 비로소 혁명의 시대를 희미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었다. <스탈린 평전>도 러시아 혁명과 전체주의 체제를 이해하는 데 아주 요긴하였다.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는, <바쿠닌 평전> <엠마 골드만 평전>으로, 인도 독립사는 <간디 평전>으로, 또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은 <암베드카르 평전>으로 읽었다. 문인, 예술가의 평전도 흥미롭기 짝이 없다. <파블로 네루다 평전> <자코메티 평전>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평전은 아마도 나의 뇌 속에 간직돼 있을 것이다. 읽다가 만 것도 있다. <케인즈 평전>은 읽다가 다른 책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끝을 내지 못했다. <헤겔 평전>은 너무 길고 난삽하여 3분의 1쯤 읽다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윌리엄 모리스, 미켈란젤로 평전은 아직 서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 학계나 문필계에서는 아직 평전을 쓰는 분위기가 아닌 것 같다. 근대 이후는 모르겠으되 조선조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야말로 평전의 황무지다. 조선 건국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한 정도전 같은 경우도 TV 연속극은 있지만 믿고 읽을 만한 평전이 없다. 세종대왕은 어떤가? 왕이라서 평전이 필요 없다고? 그렇지 않다. 왕이야말로 권력에 가려 평가의 왜곡이 일어나기 쉬우므로 엄정한 평전이 필요한 것이다. 이순신은 어떤가? 이순신의 전기는 대부분 거의 영웅서사시에 가깝다. 당대 사회의 맥락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철저한 자료 비판을 통해 그의 내면까지 읽어내는 그런 평전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평전의 결핍은 상상외로 심각한 수준이다. 다산이라면 모두 대단한 학자인 줄 알지만, 최근에 박석무 선생의 <다산 정약용 평전> 외에는 믿고 읽을 수 있는 평전이 없다. 이 책으로 급한 대로 해갈(解渴)은 하게 되었지만 다산 같은 학문의 거인의 경우, 그의 학문 전체를 충실히 조망할 수 있는 ‘학자 다산’의 평전이 또 나왔으면 한다. 어디 다산뿐이겠는가? 박지원도, 박제가도, 이덕무도 모두 평전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사실 인물과 그의 생애, 업적을 평가하는 글은 한문학의 전통에서는 결코 드물지 않다. 아니, 오히려 풍성하다. 사람이 죽고 나면 쓰는 행장과 비문, 전(傳) 등이 그렇다. 이 중에는 지금 평전의 양에 걸맞게 아주 긴 것도 있다. 주자의 <장위공행장(張魏公行狀)>이란 작품은 한문책으로 220페이지, 전겸익의 <손승종행장(孫承宗行狀)>은 224페이지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아마도 책 두 권은 너끈히 나올 것이다. 물론 이렇게 긴 행장은 드문 것이고 또 행장은 인물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위주로 쓰인다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에 대한 평가를 하던 중국과 조선의 오랜 전통은 까맣게 잊혀지고 말았다. 오늘날 평전이란 행장과 비문, 전의 복합물이라고도 할 수 있을 터인데, 볼만한 작품이 없다는 것은 정말 유감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시간이 흐르면 읽을 만한 평전이 적지 않게 나올 것이다. 다만 간절히 바라노니, 제발 영웅서사시는 이제 그만 썼으면 한다.

나와 같은 과 교수로 있는 정출헌 교수는 평전과 연보에 관심이 많다. 정 교수는 점필재연구소 소장이기도 한데, 이 연구소에서 ‘연보와 평전’이란 제목으로 작은 잡지를 낸다(연구소에서는 <이완용 평전> 등 몇 종의 평전을 내기도 했다). 나 역시 거기에 몇 차례 원고를 싣기도 했는데, 이 잡지 평판이 아주 괜찮다. 광고 따위도 없고 모조리 읽을 만한 글로 채워졌으니 어찌 그렇지 않을 것인가!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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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