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문학창작을 배운다고요? 네, 배웁니다!’ 이것은 프랑스 언론 매체 ‘뤼마니테(L’Humanite)’의 기사 제목이다. 필자는 ‘세계의 문예창작 현황’이라는 주제 아래 지난 주말 개최된 학술세미나 발표를 준비하던 중, 2012년 이후 프랑스의 대학에서 문학창작 전공을 개설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는 취업률을 잣대로 2010년대를 기점으로 축소, 통합, 폐과의 수순을 밟고 있는 한국 문예창작학과의 흐름과는 대비되는 형국이어서 고무적으로 다가왔다. 2013년 파리8대학에까지 개설되면서 문예창작 전공을 개설한 대학은 현재 4곳으로 늘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창작보다는 작품 분석과 토론에 치중해왔던 프랑스 대학 교육 전통에 지각 변동이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창작을 배운다고요? 네, 배웁니다!’는 프랑스 대학에서 처음으로 문예창작 전공 졸업생이 배출된 시점에 맞춰 게재됐다(뤼마니테, 2014·6·25). 앞서 문학예술 전문 방송인 프랑스 퀼트르에서 문예창작 전공자들의 인터뷰를 연속 진행했다. 뤼마니테는 문학창작을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겨온 회의적 관점에도 이 전공을 찾는 학생들이 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그리고 미국 소설을 즐겨 읽는 프랑스의 젊은 독자들을 통해 이유를 제시했다. 그들이 존경하는 미국 소설가들이 대학 문학창작학과에서 다각도로 글쓰기를 연마한 것과 그들이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소설가

현대문학사의 선구자들인 플로베르와 보들레르를 비롯해 20세기 문학사의 중심을 차지하는 프루스트, 사르트르, 카뮈 등은 프랑스 문학에 거점을 두고 있다. 이들은 10대 시절부터 문학 환경 속에 살면서 읽기와 쓰기, 발표를 지속해왔다. 반면 영어를 공용어로 하는 다민족 이주민 공동체인 미국의 경우, 대학에 문예창작 전공을 개설해 소설가를 배출해왔다. 레이먼드 카버, 줌파 라히리, 조너선 사프란 포어 등 미국을 넘어 세계 독자와 소통하는 소설가들이 수혜자들이다. 우리의 경우, 문예창작학과 역사가 60년(중앙대)이 넘고, 이문구, 오정희를 비롯해 편혜영, 이기호까지 많은 작가들이 문예창작 전공자들이다. 또한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조이스 캐럴 오츠, 피에르 바야르, 한강 같은 현역 소설가들이 대학에서 문예창작 강좌를 이끌고 있다.

한 편의 소설은 ‘모나리자’와 같은 예술작품이기도 하고, 스마트폰 같은 상품이기도 하다. 파급효과가 크고 빠른 대중문화가 한류라는 기관차의 선두를 이끌고 있다면, 문학은 느리지만 깊고 단단한 뿌리를 형성한다. 창작 환경의 지속적인 장려와 배려 없이 후세에게 전할 유산은 기대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세기 문학 중심국의 자부심을 내려놓고, 변화하는 21세기 환경에 발맞추어 새로운 도전을 시도하는 프랑스 대학의 문학창작 전공 개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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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에 네 명의 청춘이 가슴 벅차 하고 있었다. 3800㎞의 남아프리카를 종단하는 11일간의 자동차 여행, 주인공은 24세 박보검, 27세 고경표, 31세 동갑 안재홍과 류준열이었다. 최근 종영된 tvN <꽃보다 청춘 아프리카> 이야기다.

출연료 받고 비행기 타고 아프리카에 가서 많은 스태프가 보는 가운데 배낭여행 방송을 찍었으니 또래는 물론 아줌마·아저씨 시청자도 부럽기 짝이 없다. <응답하라 1988>로 막 스타가 되고 선물 같은 해외여행까지 마치고 귀국하면 매니저와 팬들과 빼곡한 일정이 기다리니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그들은 여행 내내 활짝 웃거나 울컥하면서 “감사하다”를 연발했다. 툭하면 “감사하다”를 격하게 합창하는 네 명의 청춘이 나오는 TV 앞에서 나는 ‘심쿵’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 것은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에 펼쳐진 모래언덕과 잠비아와 짐바브웨를 가르는 빅토리아 폭포의 경이로운 화면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디션 천 번 보자”며 별별 알바를 전전한 류준열처럼 바닥에서 인기 배우에 오른 그들 청춘의 눈빛과 고백 때문이었다. “나도 후회 없이 사는 청춘이고 싶다”고 평범한 욕망을 드러낸 박보검과 “(빅토리아 폭포) 이걸 같이 봤으니 영원히 남는 거야”라며 흥분한 안재홍에 이은 고경표의 말이 압권이었다. “(나는) 많이 흔들리는 사람인데 (이번 여행으로) 내진 설계가 됐다”며 앞으로는 숱하게 “흔들려도 무너지진 않을 것 같다”는 앳되고 떨리는 그의 목소리는 가장 심쿵했고 짠했다.

짠한 것은 그들이 각자 경비로 받은 게 하필 88만원인 것과도 무관치 않았다. 9년 전 <88만원 세대>는 대졸자 비정규직 20대의 월 평균소득을 88만원으로 정리하며 짱돌을 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월 88만원의 청년은 일본 시코쿠 섬의 행자처럼 스펙 쌓기와 멘토 찾기의 미로 속에서 88개 사찰을 순례하는 저마다의 ‘88난민’이 되어 있다. 이제는 모 금융회사의 사외이사들이 받은 작년 평균 시급 88만원과 극단의 합을 이룬 청년의 월 88만원은 그 얇은 생존의 실감마저 놓아버린다. 그런 88만원을 들고 남아프리카 11일 여정의 종착점에서 “사랑합니다! 사랑하세요!”를 외치고 번지 점프를 하는 청춘 류준열의 빛나는 하강을 지켜보자니 심쿵하고 짠하면서 확 깼다.


그렇게 가슴 벅찬 거기 그들처럼 지금 여기 청년들도 “후회 없이 사는 청춘”이 되려면 어디서 길을 찾아야 할까. “많이 흔들리는” 청년이고 “오디션 천 번”의 현실이지만 “무너지진 않을” 청춘으로 단련되는 “내진 설계”를 갖추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유명인이 안되어도 방송에 나오지 않아도 남아프리카 거기가 아니어도 서너 명의 청년들이 뭉쳐서 그런 11일을 보낼 수만 있다면 가슴 벅찬 청춘을 경험하지 못할 청년이 과연 있을까. 문제는 그럴 수 있는 돈과 시간이다.

청년의 월 88만원에 모 사외이사의 시급 88만원(남아프리카에 가는 항공료의 절반 수준)을 합친 돈과 11일의 자유 시간을 매년 청년 보장으로 운영하는 사회쯤 되면 언제 어디서든 남아프리카보다 더 벅찬 가슴을 느끼는 청춘의 나라가 되어 있을 것이다.

“저렇게 사고를 치는 그들의 방식이 부럽고 젊음이 부럽더라”는 나영석 PD의 말대로 청춘은 한사코 그렇게 만들어진다. 정답을 찾고 성취를 이뤄 청춘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문제를 외부에 일으키고 저질러봤기 때문에 문제를 발견할 줄 아는 내면의 뿌리가 생기면서 청춘은 완성된다.

그들 청춘의 구호 “감사하다”는 말은 문제를 만들어서 자신의 문제를 대면해본 청년이 선물 같은 기회를 만날 때 실패의 기억조차 복되게 돌아보면서 하게 되는 탄성이다. 주목받지 못한 삶이었어도 지금껏 존재해왔다는 사실만으로 지지받는 경험을 하게 되면 “감사하다”고 말하는 청춘이 된다. 그렇게 해서 모든 청년은 청춘이 될 수 있다.

문제는 돈과 시간이다. 해법은 기본소득(시민임금)에 있지 싶다. 스위스는 올 6월 국민투표를 하고 핀란드는 내년에 시범사업을 하며 네덜란드는 지방정부들이 방식을 검토한다.

브루킹스연구소는 미국이 기본소득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라고 했고 영국왕립예술협회는 연간 630만원의 기본소득 모델(25~65세)을 제안해 올 4월부터 시행되는 생활임금 시급 1만2000원과 함께 결과가 주목된다.

우리의 경우 녹색당의 총선 공약에만 기본소득이 있으나 다음 선거엔 더 많은 정당의 공약이 될 것이다. 기존의 노동 및 고용시장은 붕괴되는 반면 알파고의 일자리 잠식은 곧 닥칠 일이라서 보수·진보 정당을 불문하고 기본소득 정책 경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

올 7월 서울에서 기본소득지구네트워크 대회가 열린다. 세계 각지의 기본소득 정책들이 소개될 것이다. 이 자리에서 청년들이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기본소득을 다오” 하며 합창해야 한다. 하여 돈과 시간이 주어지는 새집에서 청년은 청춘이 되고 노인은 품위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기본소득과 함께라면 청춘의 나라는 곧 노인의 나라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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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새삼 제기한다. 식민지나 이민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를 부모로 두었거나 직접 체험한 작가들의 경우, 언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북대서양의 섬나라 아일랜드는 800년 가까이 잉글랜드의 식민지배를 받은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아일랜드 작가들의 경우, 민족어이자 모국어인 게일어가 아닌 식민지 제국 언어인 영어로 글을 써야 했고, 자국 문학사가 아닌 영국 문학사의 일원으로 세계 독자에게 소개되어 왔다. 예이츠, 오스카 와일드,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등이 그들이다.

조이스는 식민지 조국으로부터 스스로 유배의 길을 택해 문학을 조국으로 삼아 유럽 각국을 전전하며 소설 쓰기에 투신했다. 그 여정에 생산한 <율리시스>는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독보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그는 식민지 역사로 점철된 슬픈 아일랜드 출신 작가지만, 그들을 삼킨 ‘대영제국’이 국보로 여기는 셰익스피어가 평생 구사한 2만 단어를 능가하는 4만 단어 이상을 <율리시스>에 자유자재로 부려놓음으로써 식민지 언어 사용자로서의 한계를 통쾌하게 벗어던지는 아이로니컬한 장관을 연출했다.

고도를 기다리며_제공


조이스와 같은 아일랜드 출신 작가 사뮈엘 베케트는 프랑스에 귀화해 이중 언어 사용자로 작품 활동을 했다. 기존의 언어관을 전복시키는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비롯해 소설과 희곡들을 영어와 프랑스어로 번갈아 썼고, 그것으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또 다른 부조리극 작가 외젠 이오네스코도 베케트처럼 이중 언어 사용자였다. 그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프랑스에서, 청년기를 루마니아에서 보낸 뒤, 프랑스에 귀화해 프랑스어로 작품 활동을 하며 세계적으로 명성을 높였다. 이들은 정주(定住)를 거부하며 예술사를 빛낸 20세기의 이방인들이다. 이들의 새로운 일원으로 줌파 라히리를 놓을 수 있다.

줌파 라히리는 인도 벵골 출신의 부모 슬하에서 미 동부에서 성장했고, 영어를 모국어로 교육받았다. 보스턴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에서 처음 소설을 접한 그녀는 이민자 가정의 현실을 진솔하고 담담한 문체로 쓰기 시작했고, <이름 뒤에 숨은 사랑> <그저 좋은 사람> 등이 독자들의 호응을 얻어 현재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소설 창작과 더불어 르네상스 연구를 20년 넘게 지속해온 줌파 라히리는 현재 로마에서 살고 있다.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는 그녀가 이탈리아어로 쓴 첫 책이다. 21편의 산문과 2편의 짧은 소설로 이루어진 얇고 단정한 책은 작가에게 모국어란 무엇인가, 곧 작가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준다. 그녀가 작가로서의 명성과 권위를 안겨준 주된 언어인 영어와 모든 것이 영예롭게 주어지는 미국의 삶을 내려놓고, 로마로 옮기면서 밝힌 이유는 단 하나다. ‘창작자에게 안정감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순간순간 뻗어나가는 봄의 생명력만큼이나 21세기 이방인 줌파 라히리의 작가적 모험이 신선하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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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총선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여야의 구분이 따로 없다는 점인 것 같다. 여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이 있다. 선거라는 공간이 열리자마자 평소에 숨어 있던 긴장들이 모래알처럼 분열했다. 과거 같으면 민주 대 반민주로 나뉘어서 야당과 여당이 명분 싸움을 했겠지만, 이제는 야당이든 여당이든 다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면서 심판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 심판의 근거는 바로 경제이다. 야당이 경제 문제를 정부와 여당의 정책 실패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여당은 현안을 해결하기 위한 법안을 제때에 통과시켜주지 않은 야당의 책임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설득력으로 치자면 여당의 주장은 다소 억지스럽다. 여당 관계자들도 인정하듯이, 지금 현재 불거지고 있는 양극화나 청년실업 문제, 그리고 경제성장 둔화는 현 정부 들어 발생한 것이라기보다, 보수 집권 훨씬 이전부터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경제 문제에 관한 한 여야 모두 떳떳하게 자신들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김종인 대표를 영입해서 “문제는 경제야”라는 오래된 빌 클린턴의 전략을 ‘재활용’하는 야당이 오히려 문제를 적절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적절하게 문제를 파악했다고 해서 그 문제의 답이 선거결과로 주어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경제 문제를 내세우면서 정치를 쓸모없는 과잉으로 받아들이게 만들었던 장본인들이 보수였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지금 벌어지고 있는 야당의 ‘보수화’가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일까. 어떤 이들은 더민주가 야성을 잃었고, 진보의 이념을 포기했다고 주장한다. 일견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고 더민주가 집권하기 위해 야성을 되찾고 왼쪽으로 이념적 위치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주의가 금과옥조로 내세우는 대의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집권이지 야성과 이념일 수 없다. 이른바 ‘차악 선택론’은 한국 정치가 미개하거나 후진적이어서 발생한다기보다, 대의민주주의를 가능하게 만드는 본질에 가까운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미국 선거에서 트럼프가 일으키고 있는 반향은 ‘막말’보다도 이런 대의민주주의의 약점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감히 자유주의자들이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규범 때문에 발설하지 못했던 민감한 사안에 대해 마음껏 직설화법을 구사했다. 그의 직설화법은 공화당 내에서도 반발을 초래할 정도로 파장을 일으켰다. 할리우드에서 진보적인 배우로 통했던 <델마와 루이스>의 주인공 수전 서랜던은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가 대선에서 후보로 겨룰 경우 누구를 지지할지 질문하는 기자에게 선뜻 힐러리를 지지하지 않을 것 같다는 대답을 하기도 했다.

애매모호한 서랜던의 입장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대의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트럼프가 외설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점을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나 미개한 국민성으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상식으로 통했지만, ‘정치 선진국’이라고 숭앙을 받던 그 미국 본토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이런 상식을 거스르는 사건이라고 할 만하다.

자유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엘리트정치를 지향한다. 엘리트는 이른바 ‘검증된 전문가’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렇게 전문성에 바탕을 둔 ‘상호 감시’의 기능을 담당하는 당사자가 바로 시민사회이다. 선거를 통해 선출되지 않았을 뿐, 시민사회 역시 ‘검증된 전문가’라는 점에서 정치집단과 대등한 지위에 놓인다. 정치집단과 경쟁하면서 감시기능을 수행하는 시민사회는 현대 정치를 구성하는 필수적인 구성요소였다. 문제는 이 시민사회가 더 이상 감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시민사회의 경험이 정당정치로 진입하기 위한 경력으로 포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사실상 거대정당 이외의 정치는 정치적 의제에 속하지 않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는 자유민주주의 정치 자체의 종언을 드러내는 징후인 것처럼 보인다.

엘리트정치를 당위적인 것으로 인준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명분은 전문가 집단의 상호 감시가 특정 집단의 독주를 막을 수 있다는 원칙에 근거한다. 그런데 그 시민사회의 감시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원칙이 무력해질 때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이 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천 파동이니 야권 분열이니 온갖 부정적 수사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번 선거만큼 상식을 뛰어넘는 양상을 드러낸 경우도 없었다. 예측불가능한 이변들이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속출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것만이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놓은 교착상태를 해결할 가능성을 희미하게나마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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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신을 가만히 관조하며 내가 가야 할 미래를 상상한다. 그리고 그곳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그러나 내가 그 거룩한 여정으로 떠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쌓이는 것이 있다. 내가 아무리 떨쳐버리려 해도 나에게 겹겹이 달라붙는다. 이 괴물의 이름은 오만(傲慢)이다. 오만은 자신에게 유일한 최선의 삶을 구가하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생기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기원전 16세기, 그리스 남동쪽 에게해의 섬 테라에서 역사상 가장 강력한 화산 폭발이 발생했다. 수백m 화산재가 쌓이고 해일이 발생해 미노스 섬과 미케네 섬을 중심으로 일어난 문명이 자취를 감췄다. 이때 생긴 섬이 휴양지로 유명한 산토리니다. 당시 지중해 지역에서는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생산해 정교한 해상무역망을 구축했다.

그러나 대규모 화산 폭발로 하루아침에 상권이 무너지면서 그리스에 거주하던 원주민들이 서서히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기술문명인 철기문화와 기마문화로 무장해 팔레스타인을 장악했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펠레세트’라고 불렀다.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어원이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용어는 구약성서에 ‘블레셋’으로 번역됐다. 블레셋은 기원전 13세기 터키 지역의 히타이트 문명, 시리아 지역의 우가리트 문명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오늘날 이스라엘 해변에 다섯 도시를 구축해 거주했다. 이 혼란을 틈타 등장한 국가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이 자랑하는 가장 위대한 통치자가 있다. 다윗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우울증을 악기 연주로 덜어주던 악사로 시작했다. 그는 동시에 용감한 용병이었다. 당시 블레셋엔 무시무시한 장군이 있었다. 거인 장군 골리앗이다. 다윗은 골리앗과 일대일 대결에서 승리하며 일약 스타가 되어 왕위에 오르게 된다. 다윗은 왕이 된 후, 블레셋의 위협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12지파로 나뉘었던 이스라엘인들을 하나로 묶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그는 12지파들이 모두 공감할 수 있는 미지의 땅인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해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일개 용병으로 시작해 이스라엘의 왕이 된 다윗에게 어김없이 찾아온 괴물이 있다. 바로 오만이다. 이 오만은 그를 게으르게 만들었다.

얀 마시스의 '다비드와 바세바'(1562). 다비드(다윗)는 바세바의 나면인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죽게 하고 바세바와 결혼했다. 이교활한 결합으로 제혜의 왕 솔로몬이 탄생했다.


오만은 비극적 인간의 첫 단추다. 자신이 누리는 현재의 혜택이나 특권을 스스로 성취했다고 착각하는 마음이다. 그리스어로는 ‘휴브리스(hubris)’다. 휴브리스는 자신의 초심을 잃고 난 뒤, 반드시 따라오는 극도의 자만심이자 과도한 확신이다. 사람이 휴브리스라는 병에 걸리면, 곧 장님이 된다. 두 눈을 부릅뜨고 직시해야 할 현실에 대한 감각을 상실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시작한다. 이것을 그리스어로 ‘아테’라고 부르는데, 그 의미는 ‘장님성’이다. 자신 앞에 다가온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병이다.

다윗은 이제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다. 야전사령관으로 잔뼈가 굵은 다윗이 자신이 할 일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부하 요압에게 전권을 맡긴다. 요압은 다윗을 대신해 이스라엘을 위협하고 있는 암몬과 모압과 전쟁을 치른다. 이 위임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다윗은 깨닫지 못한다. 그는 예루살렘 궁전에서 지중해의 쾌적한 날씨를 홀로 빈둥빈둥 즐기고 있었다.

혁신가는 자신이 있어야 할 시간과 장소를 헤아려 아는 사람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부하들이 모압의 수도 랍바를 포위하면서 사선에 처해 있는데도, 예루살렘 궁전 위에서 목욕하고 있는 한 아름다운 여인을 염탐하는 졸장부로 전락한다. 그녀는 자신의 부하 군인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였다. 다윗은 밧세바를 궁궐로 데려와 향락의 시간을 가진 후, 임신시킨다. 다윗은 우리야를 최전선에 배치해 전사하게 만든다. 다윗은 스스로를 비극으로 몰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한다.

다윗을 지켜본 예언자 나단은 다윗에게 비유로 말한다. “한 동네에 부자와 가난한 자가 있었습니다. 가난한 자에겐 딸처럼 키우는 어린 암양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 부자에게 손님이 찾아오자, 부자는 가난한 자의 어린 암양을 빼앗아 도축해 대접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분개하여 말했다. “그 사람은 죽어야 마땅하다.” 그러자 나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그 부자입니다. 당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께서 왕이 되었지만,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망각해 오만한 장님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다윗을 죽이려고 반란을 일으키고 밧세바 사이에서 난 아들은 죽고 만다. 오만에 빠져 장님이 되고 나면 찾아오는 불행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이 불행을 ‘네메시스(nemesis)’라고 부른다. ‘네메시스’란 흔히 복수라고 번역하는데, 그 근본적인 의미는 ‘내가 당연히 감수해야 할 그 어떤 것을 받는 것’이다. 나는 내가 누리는 이 혜택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이미 오만-장님성-불행이라는 빠져 나올 수 없는 미로에 이미 걸려든 것이다. 내가 오만에 빠지지 않도록 근신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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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문인에 대해 공부를 하다 보면, 어떤 작품을 언제 썼더라, 이때 그가 무엇을 하고 있었지 하는 의문이 든다. 꽤나 중요한 작품이어서 창작 연도를 꼭 알고 싶은데, 알 길이 없다. 이럴 때면 소상한 연보가 있었으면 한다. 물론 유명한 문인이라면 문집에 문인의 비문이나 행장 같은 것이 있어서 대충 그 사람의 생애는 알 수가 있다. 또 조금 더 유명한 인물로 벼슬을 했다면 <조선왕조실록>이라든가 <승정원일기> 같은 관찬 사료에 이름이 나온다. 이것으로 참고할 수도 있다. 그래도 좀 더 자세한 것을 원할 수도 있다. 또 일반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유명한 학자, 정치인이라면 문집 끝에 연보가 있다. 이 경우 해당 인물을 이해하는 지름길을 만난 것 같다.

연보도 갖가지인데 내가 본 정말 상세한 연보는 <주자연보>다. 모두 4권인데, 약 600페이지쯤 된다. 우리 쪽이라면 송시열의 연보가 압권이다. 송시열은 워낙 주자를 절대적인 진리의 담지자로 알고 살았던 사람이고, 그의 제자들은 송시열을 꼭 주자처럼 섬겼다. 그래서 그의 문집도 <주자대전>을 따라 <송자대전>으로 만들었고, 그 권수도 체제도 <주자대전>을 따랐다. 이건 좀 건방진 일이라 정조 역시 그게 뭐냐고 비꼬았을 정도다.

어쨌건 <송자대전>의 송시열 연보는 <주자대전>을 본떠 양도 엄청나다. <송자대전>은 215권이고, 그 뒤에 부록이 19권, 습유가 9권, <송자대전> 속 습유 부록 2권, <송자대전> 수차가 13권이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냐고 할 것이다. 원래는 <송자대전>과 부록까지가 끝이다. 나머지는 뒤에 새로 찾아 추가한 것이다. 연보는 뒤로 갈수록 자세하다. 송시열이 죽는 해인 1689년의 경우 1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날인 6월8일까지가 한 권 분량이다. 그런데 이 연보는 희한한 것이 송시열이 죽고 난 뒤 1787년 정조가 <대로사비>의 비문을 써서 내릴 때까지 거의 100년이 이어진다. 송시열은 죽었지만 그의 당파가 계속 정치권력을 장악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송시열의 연보는 또 그가 노론의 영수였기 때문에 당연히 그의 모든 행위를 정당화한다. 예컨대 연보는 자신이 자연사하기 전에 사약을 받겠다면서 사약을 재촉하고 몸을 일으켜 단정히 앉은 채 약을 마시고 의연히 죽는 송시열을 그리고 있지만, 반대 당파의 기록은 어떻게 하든 죽음을 모면하기 위해 계략을 쓰는 송시열을 그리고 있다. 송시열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연보도 있지만 그 내용이 판이하다. 송시열과 원수지간이었던 박세당·윤증의 연보는 동일한 사건이라도 당연히 의미 부여가 다르고 어떤 경우 사건의 구성 자체까지 다르다.


연보는 인물을 이해하는 데 있어 1차 자료가 된다. 이토록 중요한 것이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연보에 대한 관심이 희박하다. 예컨대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학자는 당연히 다산 정약용이지만 현대에 만들어진 연보는 없다.

송재소 선생님이 최근 번역한 <사암선생연보>(창비, 2014)는 원래 후손 정규영이 작성한 것이다. 21세기의 관점에서 다산과 관련된 자료를 모두 섭렵하고 작품의 창작 연대까지 포괄한 그런 연보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것이다. 다산뿐만 아니다. 실학자로 이름난 사람들, 박지원이라든가 박제가, 서유구 등은 모두 연보가 없다.

중국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어지간한 사람이면 연보가 작성되어 있다. 내 연구실에 있는 것만 해도 <완원연보> <염약거연보> <이지연보> 등 여럿이다. <이지연보>는 이지, 곧 이탁오를 공부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중국은 ‘연보’가 아예 학문의 한 장르가 되어 있는 것이다. 일본 쪽도 사정은 같다. 몇 해 전 부산대 일문과 오경환 교수와 연보를 주제로 이야기를 하다가 나쓰메 소세키의 연보에 대해 듣고 연구실을 방문해 확인한 적이 있다. 아라 마사토란 비평가가 만든 <소세키 연구 연표>인데, 1867년 소세키가 태어난 해부터 1916년 사망할 때까지의 연표였다. 문제는 워낙 자세하여 하루를 오전·오후로 나누기까지 할 정도로 치밀하게 소세키의 일생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경환 교수도 아마 마사토는 소세키보다 소세키에 대해 더 많이 알았을 것이라고 하며 웃었다.

이야기가 약간 겉으로 새지만, 범인들도 연보가 필요하지 않을까? 자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말이다. 예컨대 마성린이란 사람을 보자. 마성린은 서리 신분이었다. <안화당사집>이란 필사본 문집을 남기고 있다. 이 문집은 18세기 서울 서리, 곧 경아전 사회의 동태를 아는 데 매우 요긴하다. 특히 이 문집 말미에 실린 <평생우락총록>이란 연보가 비상하게 중요하다. 마성린이 무슨 양반명문가도 아니고, 또 과거에 합격해서 화려한 벼슬을 거친 것도 아니고, 또 무슨 대단한 학자가 되어 학문적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고, 또 무슨 대단한 시인이나 산문작가가 되어 길이 남을 작품을 쓴 것도 아닌 다음에야 무슨 연보를 꾸밀 만한 것이 있으랴. 그런데 마성린은 이런 보통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다. 그는 자신의 평생 즐겁고 기쁜 일, 걱정거리를 연보로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드물지만 좋은 연보가 있다. 정석태 선생이 엮은 <퇴계선생 연표 월일 조록>이 가장 상세하고 방대한 것이다. 이런 연보가 앞으로 많이 나왔으면 한다. 이런 책이 문화 발전의 증거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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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갓 뽑은 따끈한 에티오피아산 커피는 나를 잠에서 서서히 깨운다. 그러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는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이내 식는다. 사람은 늙기 마련이고 영원할 것 같은 저 하늘의 별들도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장렬히 빛을 내뿜으며 사라질 것이다.


우주 안에 괴물 중 괴물이 하나 있다. ‘시간’이다. 이 괴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시간은 날아간 화살처럼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쏜살처럼 다가오는 미래를 추호도 모르면서 무방비상태로 매 순간 진입한다. 나에게 남겨진 것, 아니 나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는 것은 ‘과거’라는 기억뿐이다.

이 ‘과거’라는 기억은 20년 전이나 20분 전이나 현재의 시점에서 ‘순간’이란 점이 경이롭다. 워싱턴 어빙의 소설 <립 반 윙클>에서 주인공 립 반 윙클은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 ‘울프’라는 개와 뉴욕 근처에 있는 카트스킬산 속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갔다. 그때는 영국 왕 조지3세가 미국을 다스리던 시절이다. 그는 산속에서 밀주를 마시며 나무 막대기를 세워놓고 ‘론 볼즈’(볼링)를 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잠이 들고 만다. 한참 잔 후, 어느 날 아침 햇살에 잠을 깨고 보니, 울프는 없어지고 들고 왔던 장총이 녹슬고 자신의 턱에는 턱수염이 텁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마을로 내려와 평소에 가던 여관에 가니 못 보던 국기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미국 성조기와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초상화다. 그가 잠깐 자는 동안 조지 워싱턴이 혁명을 일으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그는 이제 미국 시민이 되었다. 그는 한순간에 20년을 자버렸다. 20년 동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분명한 것은 20년이 금방 지나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씨줄과 공간이라는 날줄이 만나는 지점에서 존재한다. 순간이란 봄의 약동으로 싹이 트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그 찰나(刹那)다. 봄이 약동하면 잎과 꽃망울은 모든 찰나에 과격하면서도 거칠게 변화한다. 이 찰나의 순간에 식물은 자신의 색깔과 자기 몸의 구조를 다채롭게 변화시킨다. 만일 성능이 강력한 현미경으로 나무의 속살을 들여다본다면, 그 안 섬유질이 매 순간 변화하고 팽창하고 줄어드는 것을 관찰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_경향DB

그리고 만물은 자신의 운명에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모두 시들어버린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인간을 포함한 만물은 찰나에 그 현상과 본질이 변한다. 이 인식의 순간을 영어로 ‘moment’라 한다. 이 단어도 정지가 아니라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라틴어 ‘momentum’은 ‘움직임/ 움직이는 힘/ 변화’ 혹은 ‘순간’이라는 의미다. 움직임을 구성하는 한 동작 한 동작이 거의 눈에 띄지 않지만, 한순간에 저만치 가버린다.

‘눈 깜짝할 사이’는 시간적인 경험이며 눈을 뜨고 감는 그 사이에 본다는 행위를 통해 그 순간에 사물을 인식한다. 사진작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은 그런 순간을 또 다른 눈인 카메라 렌즈로 포착한다. 그는 눈과 렌즈와 마음이 하나가 되는 신비한 합일의 점에서 자신도 모르게 셔터를 누른다. 그는 이 순간을 ‘결정적 순간’이라 부른다. 그는 이 작지만 혁명적인 카메라를 통해 흘러가는 시간과 공간에 개입해 파괴하고 정지시켜, 일상을 거룩한 정지, 영원으로 만든다.

그리스도교에서는 흘러가는 양적인 시간을 그리스어로 ‘크로노스(chronos)’라고 부르고, 신이 개입하는 결정적이며 질적인 시간, 한 번밖에 일어나지 않지만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시간, 영원한 시간을 그리스어로 ‘카이로스(kairos)’라고 부른다. 그는 오랜 기간 수련을 거쳐 셔터를 누를 ‘카이로스’를 직관으로 감지한다. 그러나 그 순간에 다가설 때마다, 자신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그의 사진은 직관, 몰입, 평온, 그리고 불안으로 가득 차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교육의 본질을 설명한다. 그는 하찮은 순간이 영원한 순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동굴의 비유’에서 극적으로 보여준다. 입구가 빛으로 열려져 있는 동굴 안 깊은 곳에 어려서부터 다리와 목이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 뒤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꼭두각시를 들고 그림자를 동굴 벽에 비추었다. 족쇄에 묶여 한 곳만 일생 보아왔던 이들은 인위적인 물건들의 그림자를 실재하는 물건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다 한 사람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 그림자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속박으로부터 벗어나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는 자신이 매달려온 안전장치인 족쇄를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순간에’ 일어나자신이 일생 동안 보았던 동굴 벽에서 눈을 뗀다. 그는 시선을 빛이 있는 쪽으로 돌려 걸어가 빛을 보기 위해 눈을 높이 든다. 이 모든 행동은 낯설고 어렵고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다. 더욱이 처음 보는 태양빛은 너무 눈부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플라톤은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하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동력을 부사(副詞)로 표현했다. 고대 그리스어로 ‘엑사이프네스(exaiphnes)’는 흔히 ‘갑자기, 한순간에’라고 번역된다. 이 순간은 카르티에 브레송의 ‘결정적인 순간’처럼 타성과 게으름을 일깨워, 고정되어 있는 나의 시선을 돌려 빛을 향해 걸어 나가게 만든다. 자기 변화의 기초는 바로 이 모멘텀, 지금 이 순간을 포착하고 자신이 원하는 삶으로 걸어가는 수련이다. 당신은 이 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렵지만 이 순간에 집중해 자신만의 빛을 찾기 시작하면 어떨까요?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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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의 장편소설 <댈러웨이 부인>은 클러리사 댈러웨이라는 런던 상류층 중년 여성이 화자인데, 울프는 클러리사의 30년 전과 후의 회고담 속에 전쟁 후유증으로 환각증을 앓고 있는 셉티머스의 이야기를 끼워서 끌고 간다. 그 결과 소설의 중심 화자는 클러리사지만 중간 중간 노출되는 셉티머스의 장면들로 인해 독자는 두 사람의 생애, 두 겹의 서사를 경험하게 된다. 클러리사는 고단한 하루를 보낸 지인들의 피로를 풀어주기 위해 파티를 여는 것을 본분으로 생각하고 사는 여자이고, 셉티머스는 매 순간 죽음의 유혹에 시달리는 청년이다. 그렇게 흘러오고 흘러가는 어느 하루, 클러리사는 파티에 집중하고, 셉티머스는 죽음을 단행한다. 울프는 이 둘을 런던이라는 한 공간 속에 대비시킴으로써 이 세상에 만연한 정상과 비정상,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들을 위해 울프는 시간과 공간의 독특한 결합 방식을 선보이는데, 시간 몽타주와 공간 몽타주가 그것이다.

몽타주란 프랑스어로 ‘조립하다’ 또는 ‘편집하다’에서 파생된 용어다. 조립과 편집의 몽타주 기술은 20세기 초 아방가르드 영화와 모더니즘 소설들에서 나타나기 시작해, 다양한 분야의 실험을 거쳐 예술사의 중요한 미학으로 자리 잡았다. 버지니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에서 시간 몽타주는 대상이 공간 속에서 고정된 상태에 머물러 있고, 의식이 시간 속을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이와 반대로 공간 몽타주는 시간이 고정되고, 공간 요소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인공 클러리사가 저녁의 파티를 준비하기 위해 꽃을 사러 집을 나서 런던의 거리와 공원을 가로질러 가는 동안 보고,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꽃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의식의 흐름 속에 30년 전의 추억과 현재의 상황이 교차하며 움직이는 것이 시간 몽타주이다. 반면 런던 북쪽 리젠트 공원에서 셉티머스가 공포스러운 환각증으로 헛것을 보며 시달리고 있을 때, 하늘에 제트기가 광고 문구를 뿌리며 날아가는 장면을 그곳과는 다른 장소인 런던 남쪽 빅맨 근처의 집 현관에서 클러리사가 바라보는 것이 공간 몽타주이다.

영화 '댈러웨이 부린'_경향DB

우리의 삶은 시간과 공간의 교직으로 진행된다. 2016년 3월은 유난히 시간의 속도와 공간의 층위가 긴밀하게 부각된 시기였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 칠일’, 천 단위의 AI(컴퓨터)들이 그만큼의 화살촉이 되어 오직 하나의 점을 향해 일사천리로 작동되는 냉정한 순간을 목격했고, 수천개의 판단이 응집된 그 한 점과 맞서는 한 인간의 고심과 결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 칠일간, 내가 버지니어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서가에서 다시 꺼내본 것은 바둑돌 하나의 선택 속에 두 겹, 아니 그 이상의 몽타주들이 쏜살같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다. 마지막 1초까지 집중하며 열광한 적이 언제였던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봄날은 왔고, 또 간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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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이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안다. 누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그에 관한 정보를 자연스레 모으게 되는데, 주로 어느 학교를 다녔는지를 먼저 따진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먼저 이렇게 묻는다. ‘어느 대학 나왔는데?’ 실제 학벌이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을 정하는 카스트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그것이 모두에게 깊이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도 다 아는 사실이다. 전근대 사회로 가면 약간 다르다. 사람을 만나 정보가 없다면, 먼저 그의 집안부터 알려고 든다. 그가 어떤 성씨이며 어떤 파에 속하는지, 또 그의 직계는 어떤 관직에 있었는지 등을 묻는다.

박지원이나 정약용처럼 유명한 사람이라면 소용이 없지만, 이름을 듣고 금방 감이 오지 않는 사람이라면 족보를 찾아서 계보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족보를 보고 그 인물의 직계나 방계를 훑어보면 그 집안의 위상이 대개 짐작된다. 보통 조선시대 작가 연구의 기초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약간 허망한 경우도 있다. 족보에서 일껏 내가 찾는 이름이 나와서 순간 기뻐했는데, 맞추어보니 동명이인이다. 이럴 때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김천택(金天澤)이란 인물이 있다. <청구영언(靑丘永言)>이란 시조집을 엮은 사람이다. 원래 시조는 노래로 부르는 것이다. 곧 노래가사다.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고려 말 인물이 작가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대개 고려 말에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원래 노래인 데다 표기 수단이 없으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걸 1728년 김천택이란 사람이 모아서 <청구영언>이란 책, 곧 노래가사집을 엮었다. 이토록 중요한 가집을 엮었으니, 그 편집자 김천택에게 국문학자들의 관심이 쏠릴 것은 당연했다.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어떤 연구자가 족보를 뒤져 그 이름을 찾아냈다. 김천택이 광산김씨(光山金氏) 족보에 있었던 것이다. 김천택은 김춘택(金春澤)의 삼종제(三從弟)란다. 김춘택의 조부는 김만기(金萬基, 1633~1687)다. 김만기의 딸이 숙종의 첫 비(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다. 국구(國舅)인 것이다. 김만기의 동생이 곧 <서포만필>을 쓴 김만중이다. 김춘택의 작은할아버지인 것이다. 노론 중의 노론, 양반 중의 양반, 벌열 중의 벌열인 것이다. ‘광김(光金)’이라면 조선후기 벌열가의 대표인 것이다. 김천택이 이런 집안 사람이란다.

‘택’은 돌림자다. 김춘택이 있으면 ‘김천택’이 있음직하다. ‘천’이란 글자는 흔한 글자가 아니던가. 아무리 맞추어 보아도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엮은 김천택이라고 할 수는 없다. 김천택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김수장(金壽長)은 <해동가요>란 가집을 엮었는데, 거기에 김천택을 ‘포교’라고 써 놓았다. ‘광김’ 김천택이 ‘포교’라? 이건 조선시대 문화에 대한 상식이 있으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김천택이 ‘광김’이라는 학설은 학계에서 이제 수용되지 않는다.

족보라는 것은 대개 고려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족보는 조선조에 들어와서 성행하기 시작했다.

대개 1423년에 간행된 문화유씨(文化柳氏)의 <영락보(永樂譜)>를 조선 최초의 족보로 본다. 유교적 가부장제에 입각한 친족제가 성립하자 남성 사족의 혈통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에 족보를 만들어 자신과 타자를 구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또 양반 사회에서는 타인을 만났을 때 그가 어떤 집안 어떤 사람의 자손인가를 아는 것이 퍽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렇게 남의 집 족보에 대해 아는 것을 ‘보학(譜學)’이라 했고 이것을 행세하는 양반의 교양으로 알았던 것이다.

족보는 양반들만 만든다고 했다. 상민이나 노비는 족보가 있을 리 없다. 양반 외에 족보가 있는 축으로는 중인이 있다. 중인은 조선시대의 기술직을 맡은 신분이다. 외국어 통역을 맡은 역관, 의술을 담당하는 의관, 그 외 중앙의 관청에서 재정과 관련된 여러 회계를 다루는(그러니까 이들은 수학자이기도 하다) 계사(計士), 관상감에 소속되어 천문학을 공부해 역법(曆法)과 책력(冊曆)의 제작을 담당하는 천문학관, 도화서에서 국가와 왕실에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 등이 중인에 속한다. 물론 관상감에는 풍수지리학을 전공하는 지리학관, 인간의 운명과 길흉화복을 점치는 명과학관(命課學官)도 있지만 중요시하지 않았고 사회적으로 눈에 뜨일 정도의 세력을 형성한 것도 아니어서 중인을 말할 때 거론되는 적이 거의 없다. 이들 중 역관과 의관이 중인의 70~80%를 차지하므로 보통 의역중인(醫譯中人)이라 부른다. 또 의관과 역관, 천문학관은 비록 잡과(雜科)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어쨌건 과거를 통해 뽑는다. 계사와 화원은 취재라는 약식 시험으로 선발한다.

중인들은 의외로 추적하기 쉽다. 서울에만 있었던 신분이고 또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폐쇄적인 집단이기 때문이다. 역과 시험을 치른 뒤에는 합격자의 명단을 기록한 <역과방목(譯科榜目)>을 낸다. 의관은 <의과방목(醫科榜目)>, 음양과는 <운과방목(雲科榜目)>, 계사는 <주학입격안(籌學入格案)>을 낸다. 이것을 보면 누가 어느 해에 어떤 잡과에 합격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에 합격자의 인적 사항, 곧 이름, 사조(四祖), 관향(貫鄕) 등을 기록해 놓는 것이다. 이들은 족보를 따로 만든다. <의역주팔세보(醫譯籌八世譜)>란 책이 있는데, 이 책은 의원과 역관, 계사만 모아서 만든 족보이다. 서로 통혼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엮어서 한꺼번에 족보를 만든 것이다. 이 족보를 보면 중인들은 쉽게 추적할 수가 있다.

중인 족보로는 <성원록(姓源錄)>이라는 책이 있는데, 고맙게도 모 출판사에서 영인본을 냈다. 구입해서 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부지런히 보았다. 비전공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 나는 이 책에서 꽤나 귀중한 정보를 얻곤 했다. 예컨대 신윤복은 그때까지 그 가계가 알려지지 않았는데, <성원록>을 보고 그가 저 유명한 신숙주의 동생 신말주(申末舟)의 후손인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계통에 문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고, 아마도 서파일 가능성이 있었다. 어쨌거나 조선의 치밀한 족보 문화가 연구자에게 큰 편리를 제공하는 셈이니, 후손으로서 한편 고마운 마음이 든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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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라 경제와 정치를 비롯해 한반도 정세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경은 “어처구니없다”가 대세인 것 같다. 이 말은 작년 하반기에 특히 유명세를 탔다. 지난해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베테랑>의 대사 “어이가 없네” 때문이다. 영화에선 ‘어이’를 맷돌 손잡이로 설명하면서 ‘갑자기 손잡이가 빠져 맷돌을 못 돌리니… 황당하다’로 풀이했는데, 한편에선 ‘어처구니’라고 해야 옳다는 논란이 있었다.

하나 이는 기와지붕의 토우(土偶)다, 맷돌 위아래를 연결하는 암수 쇠붙이다 등 ‘어처구니’의 어원에 대한 민간의 여러 속설 중 하나일 뿐이다. 사전 정의로는 ‘상상 밖으로 엄청나게 큰 사람, 기계, 물건’이란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다’와 붙어서 어떤 연유로 “어이없다”는 뜻으로 사용됐는지는 모호하다.

아무튼 충격, 분노, 체념을 지나 허탈의 지경에 이르러 “어처구니없다”라고 할 때는 이성 정지와 감정 진공의 ‘멘털 붕괴’ 상태를 가리킨다.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지켜보는 세간의 심리도 ‘설마’ 하던 단계를 지나 이제는 “어처구니없다”에 이른 것 같다. 그래봐야 바둑 잘 두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일 뿐이고, 인간지능을 따라오려면 수십년이 걸린다는 ‘알파고의 아버지’ 허사비스의 위로도 있고, 인류의 초라함과 미래의 위대함을 동시에 느낀다는 정치인의 자기연민 같은 감상평도 있고, 알파고의 승리를 집단지성과 빅데이터를 만든 인간의 승리로 해석하는 희망고문 같은 논설도 있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폭풍 발전이 몰고올 일자리 소멸의 온갖 분석과 수치들은 논리정연하게도 암울하다.

근미래를 지배할 인공지능의 사회 예측은 온통 격변이다. 과학전문지, 대학연구소, 컨설팅업체, 조사기관은 말한다. 20년 안에 미국과 영국에서 각각 47%와 35%가, 14년 안에 지구촌에서 20억개가, 4년 안에 51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이다. 어떤 계산식이든 ‘인공지능 쓰나미’라 부를 만한 이 사태는 의료, 법률, 금융, 행정 같은 전문 노동에 종사해온 중산층의 대몰락과 불안정 노동사회의 보편화를 예고한다. 가뜩이나 고용절벽과 소득절벽에 처해 기진맥진한 우리 사회에서 알파고라는 이름은 이제 인간으로 태어난 운명을 “어처구니없다”로 만드는 유령의 대명사처럼 회자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공산당 선언>의 첫 문장을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알파고라는 유령이!”라고 다시 썼을 것 같다.

그러나 문제가 정말 인공지능 그 자체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빠진 집단 착각과 함정이 무엇인지를 의심해봐야 할 때가 지금이다. 알파고를 “서구의 디지털 지능”으로 보고 “지금의 젊은이들은 생전에 터미네이터를 실제로 맞닥뜨리는 중세기술사회”에 직면할 터라서 이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아날로그, 즉 디지로그”를 믿자고 말하는 이어령 선생의 혜안도, “우리가 목격한 건 혹시 ‘알파고의 영혼’이었을까?”라고 물으며 “오히려 인공지능이 제한된 수준의 사회적 상호작용만 가능하다는 것”에 착안해 인공지능을 능가할 “신경과학과 뇌과학의 발전”에 주목하는 정재승 교수의 제안도 우리 사회가 우리 당대에 집단 착각과 함정에서 빠져나왔을 때라야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경제 불평등 문제다. 경제민주화가 없다면 ‘10 대 90’에서 ‘1 대 99’로 1%의 1%의 1%에게 자본과 권력이 귀속되어 ‘0.01 대 99.99’ 너머로 무한질주하는 설국열차 맨 앞 칸의 인공지능을 소유한 그가 모두의 운명을 지배할 것이다. 700조원을 넘은 대기업 사내유보금과 600조원을 넘긴 국가채무와 1000조원 이상의 가계부채가 서로 관계없다는 듯 행동하는 우리의 집단 착각과 함정이 교정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의 혜택과 이익을 만인이 누릴 것이라는 낙관론은 사기극의 대사일 뿐이다.

하여 “어처구니없다”는 말을 앞으로는 “터무니 있다”로 바꾸어서 그 ‘터무니’의 재발견과 재구축에 공을 들여야 한다. 지난 11일 서울시와 각계가 공동 선언한 ‘경제민주화 특별시’는 공정한 경제 질서와 노동권 보장을 통해 지역의 경제생태계를 살리겠다는 구상으로 요약할 수 있다. 글로벌 경쟁과 대기업 문제에는 중앙정부와 국회의 역할이 크겠지만 지방정부와 지방의회가 지역의 중소기업, 소상공인, 소비자와 연대해 “터무니” 있는 상생과 선순환의 구조로 재조직하는 과제는 누가 시작하든 시급한 일이다.

“터무니 있는” 지역의 경제생태계 구축에는 아파트 연 관리비 총액 12조원의 부패를 해결할 아파트 민주주의를 위해 동별 대표자 선발에 모바일투표를 적용하는 과제도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고교 졸업생보다 훨씬 많은 대학 정원으로 수년 뒤부터 문을 닫아야 할 대학 문제도 인위적 전공 조정이 아니라 지역에서 해법을 찾는 자유학기제 같은 발상으로 풀어야 효과가 있다. 명사 ‘터무니’는 주춧돌이나 기둥을 세웠던 자리의 흔적이다. 즉 생활의 기본이자 중심인 ‘터무니’에 인공지능이 기여하는 길이 열려야 “어처구니없다”가 아닌 “터무니 있다”의 세상이 시작될 수 있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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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세월호 참사를 또 한번 외면했다. 국회 사무처는 오는 29·30일에 열리는 2차 세월호청문회 장소로 국회 회의장을 사용하게 해달라는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의 요청을 거절했다. 사무처는 ‘국회청사 회의장 등 사용 내규’를 들어 “국회가 주관하는 국제회의 등 공식행사, 교섭단체가 국회 운영을 위해 사용하는 경우 등에만 쓸 수 있다”며 사용 불가 방침을 최근 특조위에 통보했다.

▶[기타뉴스] 세월호 유가족들이 또 삭발·단식을 한 이유

국회 결정은 특조위의 성격과 ‘민의의 전당’이란 국회의 성격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다. 특조위는 국회가 통과시킨 세월호특별법에 근거해 구성된 기구다. 이 특조위 위원 17명 중 10명은 여야가 5명씩 추천해 선출했다. 이처럼 특조위는 조직과 인적 구성의 뿌리를 국회에 두고 있다. 특조위가 이번에 시행하고자 하는 청문회 역시 세월호특별법에 근거한다. 이렇게 보면 ‘특조위’의 ‘청문회’는 국회가 입법한 바에 따라 열리는 일종의 ‘공식행사’로 볼 수 있다. 국회 사무처의 판단은 내규의 자구를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한 것이다. 국회가 이렇게까지 경직되게 판단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특조위는 지난해 12월 서울YWCA 대강당에서 1차 청문회를 열었다. 특별법에 근거한 기구인 특조위의 청문회 장소로 적합하지 않았고, 공간도 너무나 협소했다.

이석태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_경향DB


현재 국회의 각종 회의실은 4·13 총선을 앞두고 텅텅 비어 있다. 공천 경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회의실을 들락거릴 정도로 여유로운 국회의원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특조위 청문회가 열려도 국회 운영과 관리엔 문제될 소지가 없어보인다. 그럼에도 사무처는 특조위 요청을 단박에 거부했다. 이쯤되면 세월호 참사 2주기에 임박해 열리는 총선을 앞두고, 세월호 참사가 이슈로 부각되는 것을 우려한 정치적 판단이라는 의심마저 든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앞두고 있지만 세월호 희생자 유족들은 여전히 광화문 광장과 거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세월호 청문회마저 거리에서 열려야 하는가.


허남설 | 사회부 nshe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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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이 한국에서도 화제다. 정가는 물론이고 장삼이사들에게도 관심거리이다. 그만큼 이변이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국 대선이 세간의 이목을 집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버니 샌더스와 도널드 트럼프 때문이다. 힐러리도 관심을 끌 만한 정치인이긴 하지만, 샌더스와 트럼프가 일으킨 ‘바람’이 없었다면 이만큼 미국 대선이 먼 나라 호사가의 입에 오르내리진 않았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내게 흥미로운 것은 샌더스 ‘열풍’이라기보다 트럼프 ‘광풍’이다.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교육학자인 헨리 지루는 최근 한 방송과 이루어진 인터뷰에서 트럼프가 어떤 정치인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를 지지하는 이들이 민주주의에 반대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는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겼다. 트럼프의 태도나 성격을 거론하면서 대통령 후보 자격이 없다거나 히틀러와 다르지 않은 파시스트라고 자질 문제를 제기하지만, 여기에서 부정할 수 없는 것은 바로 트럼프를 지지함으로써 민주주의에 반대하는 이들이 엄연히 미국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루의 발언이 암시하는 것처럼, 이른바 전후 세계체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경찰 노릇을 자임해온 미국의 한복판에서 식을 줄 모르고 끓어오르는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참으로 자가당착적인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트럼프의 출현이 전혀 생뚱맞은 돌발 상황은 아니다. 트럼프의 지지율을 떠받치고 있는 요소 중 하나가 반지성주의라는 일부 지적이 있는데, 미국은 이 방면에서 본토라고 할 만하다. 반지성주의라는 것은 지식인에 대한 불신과 반감에 기초해서 지적인 작업 전반에 대한 경멸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사회적 경향이다.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미국의 반지성주의>라는 책에서 미국 반지성주의의 뿌리가 기독교 복음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적시하고 있다. 복음주의의 신생활운동을 주도했던 이들은 기존 성직자들을 ‘위선적인 집단’이라고 비판하면서 ‘오직 성서로 돌아가자’라는 기치를 내걸고 호전적인 반지성주의 운동을 펼쳤다.

이처럼 트럼프에 대한 지지는 지식인 자체를 좌파로 간주하고 견제하는 우파적인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기독교 복음주의를 동력 삼아 미국 사회에 복류하고 있던 반지성주의적 경향이 노골적으로 분출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혐오를 내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트럼프는 이런 정치 혐오에 기대어 자신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정치 혐오의 정도로 친다면, 한국도 미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싶다.


흥미롭게도 한국의 몇몇 정치인들은 자신을 샌더스에 빗대어 언급하곤 했다. 이른바 정치혁신을 이끄는 새로운 ‘바람’의 주역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리라. 그런데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평소 한국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 샌더스보다는 트럼프에 더 가까운 이들이 더 많은데 왜 이들은 샌더스에 자신들을 즐겨 비유하려고 했던 것일까. 한국 정치인들 중 트럼프와 자신을 비교하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 정치인들 중에 트럼프에 준하는 이는 없는 것일까.

얼마 전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은 보수기독교계가 주최한 국회기도회에 참석해 기독교 교리를 들먹이면서 동성애법과 차별금지법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들이 밝힌 입장은 지금 미국 대선 캠페인에서 트럼프가 온갖 막말을 동원해서 부르짖는 내용을 그대로 빼다 박은 것이다. 이들에게 왜 이런 발언을 했는지 물어본다면 아마도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기독교계의 지지가 필요해서 그랬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본심이야 어떻든 이런 발언을 기독교계가 지지한다면, 한국에 만연한 극우주의의 온상이 기독교계라는 사실만은 다시 한번 확인되는 셈이다.

트럼프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 평소에 미국 사회에서 쉬쉬하고 있던 온갖 사안에 대한 ‘속 시원한 대책’을 내놓는다. 대개 이런 대책은 민주주의라는 원칙 때문에 감수해야 하는 복잡하고 피곤한 절차를 무시하는 것이다. 또한 트럼프는 모든 미국인이 자기처럼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아메리칸 드림을 자기 방식대로 약속한다. 과연 이런 트럼프가 자격 미달 정치인의 광기라고 볼 수 있을까.

한국의 정치현실을 돌아보면, 이런 ‘트럼프 현상’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정치인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온갖 막말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본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국회에 입문하는 것을 ‘개인적 출세’라고 생각하는 것도 트럼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트럼프에 비기지 않고 샌더스나 힐러리에 겹쳐 보려고 한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정치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트럼프 현상은 이미 한국의 정치가 실현하고 있는 ‘오래된 미래’이다.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보이는 모습이야 어떠하든 한국의 정치인들이 자신을 트럼프와 다르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런 동기를 ‘양심’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대중의 지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자신의 소신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용기’까지 우리 정치인들이 갖추기를 희망하는 것이 과한 욕심은 아닐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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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월, 순간순간 자라나는 봄빛 속에 사진집을 펼쳐놓고 오며가며 바라본다. 더도 덜도 말고, 일기를 쓰듯 하루 한 장, 한 장면과 만난다. 사진 한 장에 누군가의 일생, 어느 골목의 역사, 어느 계절, 어느 하루의 흐름이 담겨 있다. 휴(休), 공(空), 하늘, 옛 동네, 구석, 인생, 산, 항구, 균형, 구름, 기다림, 무수함, 바다, 바위, 부처, 환희, 몸, 사라짐(滅). 이들은 사진집의 지향점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궁극의 리스트’이다.

‘궁극의 리스트’는 움베르토 에코가 고대부터 현대까지 인류의 문학예술을 한 권의 책으로 압축하면서 명명한 제목이다. <궁극의 리스트>를 위해 에코가 선택한 장면은 190컷, 고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20세기 앤디 워홀의 팝아트까지 아우른다. 에코의 방법론에 따라 다양한 궁극의 리스트가 가능하다. 소설을 매개로 나를 사로잡은 궁극의 리스트를 구성해볼 수 있다.

이 목록은 흥미롭게도 소설보다도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해 주는 역할을 한다. 소설에서 나아가 그림, 영화, 공간(여행), 친구, 사랑 등으로 궁극의 리스트를 옮길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군가의 궁극의 리스트는 그 사람의 삶(내공)과 욕망을 대변한다.

손가락에 담배를 들고 포즈를 취한 움베르토 에코._경향DB

‘휴(休)’에서 시작해서 ‘사라짐(滅)’까지, 18장의 목록으로 구성된 이 사진집 제목은 <요가, 하늘가에서>(눈빛)이다. 사진집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이상, 요가와 시(詩), 자연이 어우러진 향연이다. 서울 가회동, 전주 한옥마을, 서초동 주차장, 북촌 골목과 기와지붕, 경동시장, 전남 무안, 삼성동 코엑스, 삼척항 등. 전국 방방곡곡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틴 프로스트는 요가를 한다. 그 장면을 이스라엘 출신 포토그래퍼 다나 레이몽 카펠리앙이 흑백과 컬러로 찍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마틴 프로스트는 다시 시로 썼다.

사진의 대상이자 시를 쓴 마틴 프로스트는 프랑스인으로 한국어와 영어, 일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전 파리 7대학 한국어과)이자 요가 교수(연세대)이다. 그녀의 요가와 시는 인간과 자연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는 정신과 지혜의 산물이다. 그녀에 따르면 요가는 육체적 수련이다. 그러나 그것의 궁극적인 도달점은 ‘정신적 혼란의 정지(停止)’이다. 곧 요가는 ‘정신세계에서 일어나는 행위’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상업적으로 유행하는 체중 감량을 위해 본성을 해치며 고통스럽게 감행하는 다이어트 요가와 구별된다.

마틴 프로스트는 처음 한국을 방문했던 197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풍경과 풍물에 반해 수시로 지방으로 향했고, 특히 강진의 쪽빛 하늘과 바다를 사랑해 파리에 한국의 청자정원 건립 사업을 도모하는 등 한국의 문화를 프랑스에 알리는 일로 평생을 살아왔다. <요가, 하늘가에서>는 내국인 못지않게, 아니 더 깊이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체득한 그녀의 다정다감하면서도 경이로운 장면들을 담고 있다. 요가와 시, 그리고 사진의 삼중주에 깃든 궁극의 리스트를 새봄의 메시지로 전한다.

“보이는 것 너머에 생각하지 못했던 고요가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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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오늘 걷는 이 발걸음이 내가 간절히 원하는 그 목적지를 향해 일직선상에 있는가? 이 길은 나의 숭고한 여정의 필수불가결한 단계인가? 나는 아침마다 내가 디디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 거룩한 과정이며 동시에 목적지이길 기도한다. 스승이란 인생의 길 위에서 나의 최선을 촉구하는 존재다. 스승은 인격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그 길을 이미 묵묵히 걷고 있는 도반(道伴)이자 선각자다.

서양에선 스승을 ‘멘토(mentor)’라고 부른다. ‘멘토’라는 영어 단어는 1750년경부터 문학 작품에 등장해 오늘날까지 ‘스승, 조언자’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멘토’는 인도유럽어권에서 ‘생각하다’라는 의미인 ‘만(man)’의 사역형인 ‘멘(men)’에 ‘~하는 사람’이란 뜻의 어미인 tor를 첨가한 것이다. ‘멘토’를 직역하자면,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멘토는 ‘자기 자신의 본연의 의무를 성찰하게 만드는 사람’이다. 순간을 사는 인간이 주위의 기대나 체면 때문에 부화뇌동하기 쉬운데, 멘토는 자신이 반드시 이루어야 할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도록 상기시키고 촉구하는 존재다.

멘토 이야기는 서양사상의 바이블이자 최소 소설인 <오디세이아>에 나온다. 호메로스는 기원전 750년경 기원전 12세기에 일어난 트로이전쟁에 관한 오래된 노래를 기록했다. 그리스인들이 이전에 사용하던 문자들, 즉 미노스섬의 선형문자 A나 미케네섬의 선형문자 B가 음절문자 형태이기 때문에 이 노래들을 기록하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 문자를 누가 만들었는가는 아직 논란거리지만, 아마도 호메로스는 페니키아 상인들이 사용하는 문자인 페니키아 문자를 수용하고, 페니키아 자음 중 몇 개를 모음기호로 전환시켜 고대 그리스 알파벳을 만들고, 400년 이상 구전으로 내려온 노래를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라는 책으로 남겼다.

<일리아스>는 트로이전쟁 이야기이며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전쟁 후 집으로 돌아오는 ‘귀향’에 관한 이야기다. 서양에서 <일리아스>는 시의 원형이 되었고 <오디세이아>는 소설의 시조가 되었다. 아니 이 두 권의 책은 서양문명을 낳은 어머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참전했던 영웅들은 귀향했지만 한 명은 예외였다. 오디세우스다. 그는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고 싶었다. 거기엔 그가 사랑하는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 그리고 자신의 왕국이 있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이 쉽지 않다. 그래서 ‘오디세이아’는 호메로스의 작품 명이며 동시에 ‘인간의 고단한 삶의 과정과 여정’을 뜻한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1891년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외눈박이 괴물인 폴뤼페무스 눈을 상하게 만들어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귀향하는 항해가 모질게 되었다. 오귀기아라는 섬에선 그 섬의 여신인 칼립소가 오디세우스와 사랑에 빠져 그를 7년 동안 섬을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 고향 이타카에서는 오디세우스가 20년 동안 돌아오지 않자, 이타카와 주변 섬들의 영주들은 페넬로페와 결혼해 이타카의 왕이 되려고 궁궐에서 매일 음식과 포도주를 마시며 지내고 있었다. 텔레마코스는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출정하기 전 태어난 아들로 이제 21살이 된 청년이었다. 그의 이름 ‘텔레마코스’는 그리스어로 ‘전쟁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란 의미다. 그는 20년 동안 고아와 다름없이 지냈다. 아버지가 없기 때문에 이타카의 왕이 될 수 없고, 어머니 페넬로페가 다른 영주들의 아내가 될 위험에 빠져 자신은 왕자에서 하찮은 존재가 될 상황이었다. 자립을 해 본 적이 없는 텔레마코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스스로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미지 ‘경계’로 자신을 밀어내는 용기였다.

멘토는 원래 오디세우스가 트로이로 원정을 떠날 때, 아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한 친구였다. 아직도 유약한 텔레마코스는 더 이상 자신에게 처한 딜레마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단한다. 그는 혼자서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으로 가 무시무시한 회색 파도에 손을 씻으며 의미심장하게 외친다. “아테네 여신이여, 내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당신은 어제도 우리 집에 방문하셔서 행방이 묘연한 나의 아버지의 귀향에 관한 소식을 알기 위해 나에게 배를 타고 잿빛 심연 바다 위로 항해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오디세이아> 2.262-4)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여신 아테네가 아버지 친구인 늙은 멘토로 변신해 말한다. “텔레마코스! 너에게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고귀한 용기가 스며있다면, 너는 바보도 비겁한 자도 아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말을 어긴 적도, 자신의 일을 미완성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네가 그를 찾아 나선다면, 너의 여정은 성공할 것이다.” 그 후, 텔레마코스는 아버지의 행방을 찾아 안개가 자욱하고 큰 파도가 넘실대는 아드리안 바다로 나가 영웅 네스토의 섬 퓔로스와 영웅 메넬라우스의 섬 스파르타로 항해를 떠난다.

이 이야기에서 텔레마코스의 스승은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오랜 친구 멘토나 그로 변장한 여신 아테네인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텔레마코스의 스승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멘토’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독수리의 눈으로 꿰뚫어보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바다로 가서 손을 씻는 그 순간에 서서히 자신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특별한 존재다. 이제 텔레마코스는 늙은 아버지 친구 멘토의 말을 통해서도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의 구태의연함과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에 안주하는 사람에겐 멘토가 찾아오지 않는다. 흉흉한 바다에 몸을 실어 인생의 항해를 떠나는 순간 멘토가 찾아온다. 찬란한 미래를 꿈꾸며 지금 이 시점에서 새롭게 조망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신이 바로 멘토다. 당신은 그런 멘토가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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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2월12일 토요일이었다. 인천 연수경찰서에 전화가 걸려왔다. 오전 11시4분이었다. “여섯 살 정도 돼 보이는 아이가 맨발로 혼자 돌아다니고 있다.” 인천 연수동에 위치한 동네슈퍼 주인의 제보였다. 경찰이 발견한 “아이”는 키 120㎝와 몸무게 16㎏, 짧은 머리와 반바지 차림에 맨발의 왜소한 소녀였다. 경찰 발표와 취재 보도가 잇따랐다. 2년간 집에 감금되어 굶주림과 폭행에 시달린 소녀는 뒤로 묶인 양손의 노끈을 풀고 2층 세탁실 창문을 나와 가스배관을 타고 탈출했으며 배가 고파 동네슈퍼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소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세상에 알려졌다.

맨발의 소녀가 등장하는 동네슈퍼의 CCTV 화면은 공포 영화였다. 넋 나간 소녀는 곧장 먹을 것을 찾아 가슴에 안고는 위태롭게 걸었다. 주인이 바닥에 박스를 깔아주자 그 위에 간신히 무릎 꿇고는 야윈 손으로 포장지를 뜯고 힘겹게 입에 넣기 시작했다. “집이 어디냐”는 질문에 “고아원”이라고 답했던 소녀는 병원으로 옮긴 뒤 “집에 안 보낼게”라는 말을 듣고서야 그간 당한 학대를 털어놓았다. 6세로 오인됐던 소녀는 11세였고 부천에서 2학년 1학기까지 초등학교를 다니다 인천으로 이사온 다음 집에 감금되었다.

부친, 동거녀, 동거녀 친구, 애완견 두 마리와 함께 지냈으나 완전히 고립된 소녀는 갈비뼈 골절과 온갖 타박상과 영양 결핍을 작은 몸으로 견디다 그날 오전 그렇게 탈출했다. 이 사건의 충격은 친부의 아동 학대만이 아니었다. 진짜 충격은 소녀가 2년간 사라졌는데도 학교와 동사무소 누구도 행적을 몰랐다는 행정 공백이었다. 소녀를 신고한 동네슈퍼 주인을 비롯해 누구도 소녀를 알지 못했다는 이웃 관계의 절벽이었다. 이 사건으로 정부는 장기 결석 아동을 조사했고 그 결과 친부모의 아동 학대 살인 사건만 현재 세 건이 드러났다.

조사할수록 아동 학대와 실종 사건은 늘 것이다. 장애인과 노인 등 사회적 약자로 조사를 넓히면 사건은 대폭 증가할 것이다. 요컨대 11세 소녀의 이야기는 혈연 가족의 파탄사가 아니다. 국가와 공동체의 안전망이 무너진 상태에서 가족에게 전가된 아동의 운명이 그간 어찌 방치되고 은폐되었는지를 폭로하며 국가와 공동체를 고발한 사건이다. 부친 처벌을 원한다고 밝힌 소녀에게 검경 전담반은 더 많은 처벌을 발표하겠지만 그래서 학대가 줄어들까.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면 육아를 책임진다던 국가가 약속을 저버린 상황에서 응답은 지구촌 최하위 출산율이다.

정부는 5년간 200조원을 투입해 출산율을 높인다는 종합대책을 내놓지만, 아동과 청소년의 안전을 믿는 국민이 8명 중 1명에 불과한 사회에서 문제는 출산율이 아니다. ‘아동수출국’의 오명과 고아원 아동 증가에다 중증 질환 아동의 치료비를 TV 국민성금으로 때우는 나라에서 “걱정하지 말고 낳기만” 하라니. 63만5000쌍의 불임 부부 중 정부 지원은 연평균 7.5%인 현실에서 “낳기만” 하라니, 이 무대책에 대한 하소연이 출산 포기다.

여기에 출산장려금을 늘리고 출산율이 높은 지자체에 인센티브를 준다는 정부의 발상은 아전인수다. 1월29일 당정협의 자리에 참석한 경제 4단체 대표들의 발언은 더하다. 저출산 극복을 위해 ‘노동개혁’과 ‘노동유연성’을 강화해서 기업에 부담은 줄이고 혜택은 늘리라는 딴청이다. 누리과정 보육대란, 높은 사교육비와 대학등록금, 취업난과 주거난까지 사방을 지뢰밭으로 만들어놓고 11세 소녀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학대 부모 처벌뿐이라면 너무 뻔뻔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시청자들이 소녀에게 성금을 보내는 것 말고는 없단 말인가.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밝혔듯 성인의 97.5%가 정부의 저출산 대책을 효과 없다고 느낀다면 종합대책은 전면 혁신되어야 한다. 혁신은 갖은 방법과 수단을 열거하고 거창한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원점에서 다시 정의할 때 시작된다. 이렇게 재정의하면 문제는 아동이 태어나서 자라기에 나쁜 사회 자체다. 해법은 아동이 태어나서 자라기에 좋은 사회로 도시를 바꾸는 것이다. 그런 도시라야 부모는 물론 장애인, 노인에게도 좋은 사회를 만든다. 작년 9월15일 아동친화도시 지방정부추진협의회가 출범했다. 유네스코와 함께하는 협의회에는 27개 지자체가 참여했다.

아동친화도시란 무엇인가. 미혼모라서 혼자 낳고 엄마라서 혼자 기르고 가족이라서 자녀를 도맡는 도시가 아니다. 정부와 학교와 마을이 함께 사회적 양육에 나서는 아동친화를 도시 가치의 첫째로 꼽는 사회다. 11세 소녀에게 절실한 터전은 이런 도시다. 이런 도시라면 저출산 문제의 매듭도 풀린다. 5년간 200조원의 종합대책을 이렇게 혁신한다면 앞서 열거한 많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아동 학대의 반대말은 자녀 사랑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우리 모두의 아동친화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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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감명 깊은 책은 쉽게 말할 수 없지만 가장 영향력이 있는 책은 누구에게나 다 있다. 무슨 고전 같은 것을 말하느냐고? 그건 아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한 책은 아마도 초·중·고 교과서일 것이다.

반박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교과서라니?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답할 분도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을 꼽을 것이다. 불교 신자라면 불경을, 드물지만 이슬람교 신자라면 코란을 꼽을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떤 작가의 소설을 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아마도 일시적인 감명일 수는 있지만 당신을 ‘만든’ 책은 아닐 터이다. 가장 엄청난 책은 당신 자체, 혹은 나아가 인간 자체를 만드는 책이다. 그 거룩한 책의 이름은 교과서다.

교과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자발적으로 교과서를 읽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을 터이다. 하지만 교과서는 국가권력을 업고 있다. 그것은 국가권력에 의해 개인에게 강제로 주입되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과 교육이 이루어지는 학교가 선(善)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다. 교육이 곧 사회적 성공을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사회, 또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사회적 특권에 속했던 전근대 사회에 대한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한글을 깨치지 못한 할머니들이 한글을 깨친 뒤 내뱉는 감격을 전하며 배우는 것이야말로 ‘해방’과 ‘자유’임을 설파하기도 한다. 이것이 아마도 교육의 순수한 본래적 의의일 것이다. 하지만 정작 국가권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교육에서 본래적 의의는 희박한 그림자로 남아 있을 뿐이다.

냉정히 말해 교육은 개인의 대뇌를 열고 교과서를 쑤셔 박는 행위이고, 학교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늘 은폐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교과서를 말로 되풀이하는 권위적 도구가 교사이며, 교과서를 확장한 것이 참고서이며, 교과서가 개인의 대뇌에 장착되어 있는가를 점검하는 것이 시험이다. 그 시험의 과정은 초·중·고 12년 동안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당신이 어떤 책을 읽어도 그 책의 내용을 알고 있느냐고 덤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오직 교과서만이 알고 있는지 강제로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 수능시험은 결국 교과서에 근원을 둔 지식들이 머릿속에 어느 정도 들어 있는지를 총체적으로 점검하여 점수를 매기고, 그 점수로 개인의 서열을 정한다. 그 주홍색 서열이 이마에 한 번 찍히면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카스트의 기호가 된다.

사람들은 왜 지금의 형태로 교과서가 세팅되어 있는지, 동일한 주제라면 다른 나라, 다른 사회의 교과서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곰곰 따져보면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것들이 모두 쓸모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교과서는 모든 인간에게 통용되는 진리가 아니다. 일제강점기의 교과서와 지금 북한의 교과서, 대한민국의 교과서는 각각 다른 진리를 말하고 있다. 쿠바의 교과서와 미국의 교과서 역시 다를 것이다. 어느 교과서가 진리를 말하고 있는가? 나는 한국인이기에 오직 한국의 교과서를 진리로 수용할 뿐이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을 칠 때마다 영점을 받았으니 그의 대뇌에는 교과서가 장착되어 있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 국사 교과서를 배우는 12년 동안 한국사의 세세한 국면은 아마 잊을 수는 있어도 우리가 동일한 과거의 기억을 공유한 한민족이라는 명령적 진술은 이미 깊이 머릿속에 침투하였다. 쉽게 지울 수도 없고, 쉽게 비판할 수도 없다. 이것은 거의 모든 교과서가 동일한 구실을 한다. 초·중·고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교과서에 의식화되면서, 한국인으로 성장한다. 한국인과 중국인, 미국인, 북한인은 그렇게 해서 각각 만들어진다. 요컨대 그것은 인간을 보다 해방시키기 위해서, 주체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 국가에 충성하는 개체를 만들기 위해서다. 교과서를 충실히 대뇌에 복제한 사람, 곧 우수한 인재들은 뒷날 다시 그 교과서를 개량하여 보다 강력한 교과서를 만든다.

이런 의미에서 교과서는 세상에서 가장 힘이 센 책이다. 감동이니 감명이니 하는 말과는 다른 차원에서 개인에게 깊이 각인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교과서를 엄밀히 분석해 보는 일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교과서를 비판적으로 분석해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또 교과서만큼 빨리 사라지는 책도 없을 것이다. 학년을 올라가면, 학교를 졸업하면 그냥 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장착되었으니 아무 소용도 없는 책이 교과서다. 학교를 마치고 나면 거들떠보지 않게 된다.

과거 사회를 알기 위해서도 교과서만큼 중요한 책은 없다. 구한말의 교과서는 많지 않으니 학자들이 수습해서 영인본으로 제작해 놓았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의 교과서를 정리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다. 교과서가 몇 종이었는지 또 얼마나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제국주의자들이 식민지의 신민들을 만들기 위해 어떤 담론을 주입시키려 했는지 아직 충분히 연구되어 있지 않다. 해방 이후로 넘어오면 사정이 더욱 딱하다. 초·중·고 교과서는 수천 종에 이를 것인데 모두 남아 있는지 의문이다. 남아 있는 것만이라도 어디 한곳에 모으고 이미지 파일로 만들어 인터넷으로 제공했으면 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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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예술이 되는 계기가 있다. 예술가의 작품이란 어린 시절 엄마 또는 삼촌 또는 누이의 어깨너머로 접했던 세계의 비밀스러움이 내면화되어가는 과정이다. 나를 작가이자 시네필로 만들어준 것은 유년기의 영화구경이었다. 극장의 장막을 걷고 어둠 속으로 들어갈 때의 떨림, 더듬더듬 자리를 찾아 앉을 때 들려오던 아련한 경음악소리, 어둠을 가르고 스크린까지 뻗어가던 한 줄기 빛, 그리고 새로운 삶, 새로운 인생. 그날 어둠 속에 펼쳐진 세상의 황홀과 비극, 삶의 진실에 사로잡혀 누군가는 배우가 되고, 누군가는 작가 또는 감독이 된다.

소설과 영화는 매체는 다르지만 서사를 기반으로 하는 공통점이 있다. 감독의 고유한 연출법을 미장센이라고 일컫는데, 발자크의 소설들에서 초기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첫 장면과 인물 등장 방법을 차용해 발전시킨 것이 영화의 미장센인 셈이다. 소설가로 출발해 영화감독이 된 이창동의 영화들이 첨예한 주제의식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개성적인 미장센으로 주목받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대책위원회 기자회견’이 13일 오전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가운데 참석자들이 취재진의 질문을 받고 있다. _이선명 인턴기자

서사성과 더불어 소설과 영화의 공통점은 대중성과의 관계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세계관, 창작관에 따라 상품이냐 예술이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미장센이 뛰어난 작가주의 감독의 경우 상업성과는 거리가 있다. 세상의 불편한 진실을 기록하고, 전하는 다큐 기법의 영화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영화제를 통해 진면목을 드러내고, 관심을 촉구한다. 지난해 칸 영화제 대상작 <디판>과 엊그제 폐막한 올해 베를린 영화제 대상작 <파이어 앳 시(Fire at sea)>의 메시지가 그것이다. 이들은 모두 난민의 현실과 참상을 그린 영화들이다. 특히 <파이어 앳 시>는 다큐영화로 작년 노벨문학상이 주어진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다큐소설과 맥을 같이한다. 칸과 베를린의 선택은 거대 자본에 잠식당한 영화산업과의 공존과 저항이라는, 영화제의 두 가지 기능에서 후자에 힘을 실어준 셈이다.

부끄럽게도, 부산국제영화제는 지금 전쟁 중이다. 지난해 10월 영화제에서 부산시는 세월호 참사 관련 다큐영화 <다이빙벨>의 상영 철회를 요구했고, 집행부는 거부했다. 이후 부산시는 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사표를 권고하고, 협찬금 중개 수수료 부정지급 혐의로 위원장과 사무국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리고 정부는 영화제 보조금을 대폭 삭감했다(토니 레인즈, ‘대한민국은 과거로 퇴행하는가’, 씨네21, 1041호).

영화제의 프로그램 운영은 전문가 집단으로 구성된 집행부의 고유 권한이다. 그 외 어떤 것도 월권이다. 올해로 21회를 맞는 부산국제영화제가 부산에 소재하고 있지만 부산시만의 영화제가 아님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며칠 전 세상을 뜬 움베르토 에코는 새로운 흐름을 억누르는 문화를 반동적인 문화라고 경고했다. 진실은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요란하지 않으나 예리하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에코의 전언을 환기하며, 세계의 참상에 인류애의 경종을 울린 칸과 베를린 영화제의 선택을 의미심장하게 되새겨볼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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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낯설지만 신나는 삶의 여정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과거는 나를 안정과 편안으로 유혹하는 달콤한 구속복이다. 이 옷을 벗어 던지기 위해선 불편한 미지의 세계로 자신을 진입시켜야 한다.

어제 있는 그 상태로부터 자신을 강제로 이탈시키는 행위를 ‘엑스터시(ecstasy)’라고 부른다.

‘엑스터시’는 보통 무당이 경험하는 입신의 경지를 이르거나 마약의 이름으로 알고 있다. 그 원래 의미는 ‘자신의 과거나 사회가 부여한 수동적인 상태(state)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가려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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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유일한 길을 가려고 결심하지만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이 결심을 단단하게 여며주고 상기시켜주는 효과적인 도우미가 있다. 육체적 운동이다. 나는 28년 전, 한 멘토를 만났다. 그는 나에게 주문했다.

“매일 아침 조깅하십시오. 그리고 시간이 남으면 공부하십시오.”

나는 이 조언의 심오한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그를 믿고 매일 아침 뛰기 시작했다. 내가 당시 살던 동네를 한 바퀴 완주하는 데 40분 정도 걸렸다.

오늘만은 예외로 조깅하지 않으려는 마음은 수천가지다. 어제 피곤해서, 오전에 꼭 넘겨야 할 신문 글이 있어서 혹은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 정당하고 달콤한 유혹이 나를 혼미하게 만든다. 내가 운동복과 운동화를 착용하고 뛰기 시작하면서도 발길을 멈추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이런 아침에 조깅하는 사람이 제정신을 가진 사람인가? 10분 정도 뛰면 벌써 헐떡이고 내 자신을 꾸짖는다.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가? 내가 미쳤는가?” 이런 불평을 하다보면 다시 10분이 지난다. 조깅과 관련된 구절이 하나 있다.

“당신이 30초를 달릴 수 있다면, 당신은 마라톤도 완주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나는 이 상투적인 구절을 싫어한다. 30초가 아니라 10분이나 지났는데, 나는 지옥문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20분 정도 지나면 숨이 차고 다리가 뻣뻣해지면서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다. 내 머리는 외친다. “나는 달리기를 싫어한다.” 불평하면서 10분 정도 지나면, 내가 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에 진입한다. 나는 ‘내 자신으로부터 탈출한’ 이 30분경을 좋아한다. 엑스터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 후 10분은 순간처럼 지나가면서 천상의 선물이 몸에 스며든다. 온몸에 샘솟는 땀, 근육의 미세한 떨림, 가파른 심장의 두근거림, 거칠게 헐떡이는 숨소리, 그리고 땀이 흐르는 얼굴에 가만히 드러나는 미소다. 내 발은 땅을 딛고 있지만 나는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일본에서 남자 아이를 위한 고이노보리에 만드는 잉어모양 천으로 된 깃발 _경향DB


일본에 하늘로 날아간 물고기 신화가 있다. 이 물고기를 ‘고이’라고 부른다. 고이는 ‘잉어’를 의미하는 일본어이며 연못이나 어항에서 볼 수 있는 주황색 물고기다. 한 조그만 잉어가 불가능한 도전을 시도하기로 결심한다. 모든 수고들 중 가장 숭고한 행위인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한 가지를 실천해야 한다. 강물을 거슬러 헤엄쳐 ‘갈 때까지 가보는 힘겨운 노력’이다.

고이는 매 순간 집중하고 몰입해야 한다. 한눈을 팔다간 자신도 모르게 한참 떠내려가 바다 입구까지 밀려간다. 강물에 몸을 실어 내려가는 다른 물고기들은 고이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시류에 어울려 살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극복할 수 없는 강물을 대적한다는 말인가! 고이는 이런 말들을 들으면 못 들은 체하지만, 사실은 금방이라도 다른 물고기들처럼 강물에 몸을 맡기고 싶다.

그러나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이 어디서 출발했는지 알고 싶었다. 고이는 뾰쪽한 돌에 부딪혀 피가 나고 다른 포식어류들의 공격에 노출되지만 이 강물의 원천(源泉)으로의 외로운 여행을 감행한다.

고이가 강물에서 만나는 장애물들과 자신의 마음에 생기는 부정적인 생각조차 자신을 매 순간 단련시켜 강하게 만든다. 강물의 상류로 가면 갈수록 물길이 거세지고 지세는 가파르게 변한다. 고이의 체력이 강해진 만큼, 고이가 극복해야 할 장애물도 배 이상으로 어려워진다. 고이의 체력이 거의 고갈되었을 때, 고이를 완벽하게 좌절시킬 만한 장애물이 등장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90도로 세워진 폭포다. 하늘에서 쉬지 않고 퍼붓는 폭포수는 고이 몸을 거의 산산조각으로 찢을 수 있다. 고이는 망연자실한다. 도저히 거슬러 헤엄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이는 불가능한 상상력을 동원한다. “내가 비록 물고기지만, 물고기이기를 포기하겠다. 지느러미와 꼬리를 날개로 만들어 폭포 위로 날아가면 되지 않는가!” 고이의 자기믿음이 그 순간에 그를 한 마리 용으로 변모시켰다.

고이는 자신을 가차없이 떠내려 버리는 강물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용이 되어 하늘을 훨훨 나르는 자신을 발견한다. 발밑에 아련하게 사라지는 폭포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

당신은 시류에 떠내려가 피라미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만의 신화를 찾아 용이 될 것인가?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의 차이는 매 순간 자기확신과 그 확신을 지켜내는 인내다.

자신의 신화를 구축하고 그 신화를 찾아 인내하는 자가 성공하는 자다. 내가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는 그 어떤 것이 되도록, 지속적으로 유혹하고 강요하는 세상에서 당신 ‘자신’이 되는 것이 성공이 아닐까.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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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라는 작가의 삶과 문학을 대상으로 한 권의 책을 썼는데, 제목이 <프루스트가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소설 말고(How Proust Can Change Your Life: Not a Novel)>이다. 한국어 번역본으로는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이 출간되어 있는데, ‘소설 말고’라는 부제가 생략되어 있고, ‘자기계발서’로 분류되어 있다. 매혹적인 제목 짓기 감각과 철학적 사유를 유려한 문장으로 풀어낸 덕분에 이 책은 프루스트가 누구인지 모르는 독자라도 읽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실제 큰 사랑을 받았다.

프루스트는 10대 때부터 오직 소설가가 되기 위해, 삶을 소설 쓰기를 준비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는 먹고, 자고, 보고, 만나고, 느끼고, 갈등하고, 사랑하고, 상처받고, 절망한 모든 것을 소설 쓰기의 질료로 사용했다. 결과물이 125만 단어로 축조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기나긴 소설이다. 일찍부터 그토록 꿈꾸고 헌신했으나, 소설가가 된 것은 38세 때,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1편을 출간하면서이다. 이후 그는 14년 동안 같은 제목으로 7편(11권)까지 줄기차게 쓰다가 51세에 생을 마감했다.

프루스트가 당신의 삶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소설 말고>는 삶을 사랑하고 의미 있게 살아가는 방법에 대한 사유를 ‘소설 말고’, 그것을 쓴 사람의 일상(사생활)을 중심으로 펼친 것이다. 보통이 프루스트를 대상화한 이유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전무후무한 소설을 쓴 작가이기 때문이다. 곧 프루스트라는 ‘인간’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소설은 인간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가. 문학을 빌려 삶의 지혜를 제시한 보통의 방법론을 차용하여 ‘소설이 고등학생의 삶을 창의적으로 바꾸는 방법’이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부산 전역에서 모인 고교생들과 워크숍 형태로, 방학 중 1주일에 2회 4시간, 오직 소설을 읽고 쓰는 시간을 가졌다.

글쎄, 프루스트가 당신을, 아니 소설이 고등학생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을까. 영상에 밀리고, 속도에 치여 갈수록 약해지고 조롱거리가 되고 있는 문학을 본업으로 삼은 소설가로서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는 심정으로 도전 삼아 시작했던 이 프로그램은 3회 연속 고등학생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으며 강하게 커나가고 있다.

생각을 모아 전달하기 전에 속사포로 낱말들을 쏘아 날려 보내는 SNS 매체 환경의 열일곱살 전후 고등학생들이 진실한 한 문장을 쓰기 위해 자신의 안팎을 돌아보고, 나 아닌 사람들을 이런저런 입장으로 헤아려보며, 세상을 보다 따뜻한 눈길로 바라보게 된 것, 그러기 위해 시간과 마음, 지적인 능력을 집중하려고 애쓰게 된 것을 변화라고 해야 할까. 겨울 끝자락에 벌써부터 여름을 기다리는 그들의 눈망울이 봄빛처럼 새롭고 감사하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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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자 한겨레에 쓰신 ‘영남패권주의와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논지에 십분 공감하면서, 영남패권주의(영패)에 대해 제가 지닌 생각을 약간 다른 각도에서 덧붙이고자 합니다.

한국에서 영패의 고착은 세 단계를 거쳤다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는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에서의 영남 패권 확립입니다. 두 정권의 이양기에 광주학살이라는 비극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영패의 폭력성과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노태우 정권 시절의 3당합당입니다. 이것은 유권자들이 짜놓은 정치지형을 정치엘리트들이 인위적으로 뒤바꿔 호남을 고립시킨 사건입니다. 전통적으로 리버럴 세력권이었던 부산·경남(PK)이 3당합당을 통해 대구·경북(TK)과 합체해 수구화했습니다. 셋째는, 사람들이 흔히 놓치고 있는 계기인데, 노무현 정권의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 그리고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시도입니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노무현 정권은 영패의 완화에 이바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마무리한 셈입니다. 이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주관적 선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객관적 사실입니다. 민주당 분당에 이은 한나라당과의 연정 시도를 통해 노무현 정권은 한국의 영패를 디폴트값으로 만들었습니다. 보기에 따라선 앞의 두 단계에 견줘 세 번째 단계가 더 비판받을 수도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영패의 공고화를 위해 호남 유권자들의 압도적 지지를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두 번째 단계까지의 영패만을 언급하셨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영패의 정치적 구현체를 새누리당으로 제한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묘하게도 선생님의 글에 반발한 것은 전통적 새누리당 지지자들이 아니라,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문재인 의원 지지자들이었지요. 선생님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의원을 영남패권주의자라 지적하지 않았는데도 소위 친노 세력이 ‘영남패권주의’라는 말 자체에 심하게 반발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저는 2002년에 쓴 ‘신분제로서의 지역주의-극우 멘털리티의 한국적 작동양상’이라는 글에서 TK를 정점으로 한 한국의 지역주의 질서가 일종의 신분제이고, 영남의 패권적 지역주의가 극우 이데올로기임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영남패권주의가 인종주의적 성격, 더 나아가 파시즘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글은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위한 일종의 선전글을 겸하고 있었고, 그래서 선생님의 한겨레 기고문과 마찬가지로 TK-새누리 계열의 패권주의를 겨누는 데서 멈췄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글은 노무현 후보와 그 둘레세력에 대한 제 호감과 믿음이 얼마나 순진했던 것인가를 드러냈습니다. 저는 노무현 후보가 집권 이후 영패에 투항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튀니지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알베르 메미가 정의한 인종주의, 즉 “어떤 공격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또는 상상적인 차이들을, 공격자에게는 유리하고 피해자에게는 불리하도록 결정적으로 일반화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호남을 포함한 다른 지역 사람들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지역주의, 곧 영남패권주의에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다시 말해 대다수 논자들이 영호남 지역주의라고 부르는, 그러나 마땅히 영남패권주의라 불려야 할 이 이데올로기는 인종주의입니다. 사실 호남지역주의라는 말에도 어폐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월하다고 가정되는 인종이 뒤처진다고 가정되는 인종에게 갖는 태도와 감정을 인종주의(racism)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유럽계 미국인이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갖는 차별 정서를 인종주의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발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유럽계 미국인에게 갖는 정당한 분노와 저항을 인종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남성이 여성에게 갖는 우월적 지위와 태도를 성차별주의(sexism)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발로 여성이 남성에 대해 수행하는 저항운동을 성차별주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인종주의든 성차별주의든 적극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집단이 소극적 가치를 체현하고 있다고 가정되는 집단을 대하는 패권적 태도를 가리킬 뿐, 그 거꾸로는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남과 호남(을 포함한 다른 지역들)의 관계에서, 그들 사이에 어떤 적대적 감정과 태도가 있다고 할 때, 지역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영남의 지역주의뿐입니다. 인종주의가 백인우월주의이고, 성차별주의가 남성우월주의이듯, 한국의 지역주의는 영남우월주의, 곧 영남패권주의인 것입니다.

제가 영패를 극우 이데올로기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고결하고 순수한 피에 대한 집착이고, 거기서 비롯된 배제의 욕망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피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영패는 극우와 무관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지역은 곧장 피로 환원됩니다. 그것이 상상된 혈연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호남사람과 영남사람의 결혼은 다소 별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그 결혼이 결렬됐을 때, 그것은 주로 ‘전라도 핏줄’ ‘전라도 씨’에 대한 경상도 쪽 부모들의 거부감 때문에 생기는 결과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영패는 전형적 극우 이데올로기인 파시즘과 많은 특징을 나눠 지녔습니다. 우선 영패는 감정적이고 비합리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늘 편견에 노출돼 있습니다. 영남사람이 지녔다고 선전되는 긍정적 특질들과 호남사람이 지녔다고 선전되는 바로 그만큼의 부정적 특질들은, 독일 제3제국의 권력자들이 소위 아리안족에게 자의적으로 부여한 수많은 긍정적 특질들, 그리고 유대인에게 들씌운 수많은 부정적 특질들과 대칭을 이룹니다. 영패는 영남사람과 다른 지역 주민집단 사이의 평등을, 곧 인간의 평등을 인정하는 데 인색합니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지도자 원리가 도출됩니다. 이 원리에 따르면, 사람들 사이에는 그리고 집단들 사이에는 지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우열의 차이가 있으므로 지도해야 할 사람이나 집단, 지도받아야 할 사람이나 집단은 정해져 있습니다. 한국에서 지도해야 할 지역집단은 영남입니다. 그 영남을 정점으로 한 지역적-인종적 위계질서의 맨 아래에 호남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김대중 정권에 대한 영남사람들의 정서가 과도하게 적대적이었던 것은 바로 이 ‘자연적’ 위계질서를 그것이 뒤집어놓았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독일 제3제국에서 유대인이 집권한 것입니다!

영패는 영남의 정치엘리트들이 바탕을 마련한 것이지만, 그것은 이내 거의 모든 영남사람들에게 파고들었습니다. 영남은 한국의 지역-인종 카스트에서 맨 윗자리를 차지하게 됐습니다. 지금 심리적으로 고귀한 신분이 돼 있는 영남사람 대부분이 (다른 지역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19세기 말 노예의 후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얄궂은 일입니다. 그러나 전통적 신분제가 무너지고 역사의 변덕에 힘입어 영남이 정치적·경제적 최고권력자들의 분만실이 되자, 영남인들은 내적으로 융화돼 집단적으로 고귀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상상된 신분질서 속에서 자족감을 누리며 다른 지역에 물리적 패권을 행사합니다. 요컨대 영패는 인종주의이자 파시즘입니다. 그리고 이 영남파시즘을 실천하는 주체는 새누리당만이 아니라 노무현 정권 이래의 민주당 계열 정당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호남에 기생하는 영남파시스트입니다. 한국은 아직 민주주의 이전에 있습니다!


고종석 |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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