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그림 원고 뭉치를 받았다. 두툼한 파일로 몇 개. 10여년 동안 다달이 꼬박꼬박 연재되었던 그림이라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물고기, 짐승, 풀과 나무, 살림살이, 마을의 집들, 소리와 맛과 움직임을 나타내는 그림까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이 작은 그림 하나에 담겨 있었다. 단순하고 아름답고 유쾌했다. 그림 하나하나에는 우리말 이름이 붙어 있고, 그 아래에 일본어로 뜻과 우리말 소리가 적혀 있었다.

10월 초 파주출판도시에서 열린 ‘파주북소리’의 프로그램 가운데 홍영우 화가의 그림책 원화 전시회가 있었다. ‘온 겨레 어린이가 함께 보는 옛이야기’라는 주제로 10년 동안 그린, 20권의 그림책 완간을 기념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홍영우 선생이 올 수 있었다. 모두들 오기 어려울 것이라고 여겼는데, 오셨다. 일본에서 조선적으로 살고 있는 선생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이 쉽지 않다. 2010년에도 인사동에서 선생의 전시회가 있었지만, 그때는 오지 못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에는 별 어려움 없이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일본에서 조선적으로 살고 있는 재일동포 전체가 비슷한 처지다. 선생이 온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고, 지금도 다른 조선적 재일동포의 한국 방문은 어렵다고 한다. 그동안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졌던 다른 일들도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 많았지만, 이렇게 약하고 힘없는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은 잘 알려지지도 않는다.

<우리말 도감>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던 원고 뭉치는 선생이 10년 동안 20권의 옛이야기 그림책을 그리기 전, 10년 동안에 그린 것이다. 이 그림은 선생의 손주들이 다니는 학교, 그러니까 우리학교(일본의 조선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에게 보이는 그림이었다. 우리학교의 유치원이나 초등 과정에 입학하는 아이들이 처음 우리말을 배울 때 보는 그림. 쉽게 말한다면 낱말 그림책 같은 것. 이 아이들은 조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는 일본말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고 한다. 그랬던 것이 학교에서 우리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초등 2, 3학년만 되어도 우리말로 이야기를 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다.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 정도 시간에 외국어 하나를 배우는 셈이다. 바로 그동안에 아이들은 선생의 그림을 늘 옆구리에 끼고 지낸다.

여든을 바라보는 연세이신 선생은 꼬박 20년 동안, 손주뻘 되는 아이들에게 보일 그림을 그리는 일에 매달린 셈이다. 화가로서 선생의 작품인, ‘쇠장(소시장)’은 평양의 조선미술박물관에 국가보존작품으로 소장될 만큼 뛰어나다. 재일동포 화가의 대표격으로 국내에서도 따로 전시회가 열릴 만큼 우리나라 화단에도 선생의 그림은 알려져 있다. 그렇게 자기 그림을 줄곧 그려나갈 수도 있었겠지만, 할아버지가 된 선생이 그린 그림은 낱말책 그림, 옛이야기 그림 이런 것들이었다.

선생은 이 원고를 두고, 어떤 식으로든 우리학교에 입학하는 아이들 손에 쥐여질 수 있다면, 그것 말고는 바람이 없다고 하셨다. 10년간 매달 연재된 그림은 일본에서 한 권 분량만이 책으로 나왔다. 그 몇 배가 넘는 나머지 그림들은 아직 나오지 못했다. 그 일을 부탁하고 가셨다. 요즘 일본의 우리학교 형편은 좋지 않다. 우리나라 기준으로 보자면 아주 적은 돈을 써서 운영하는 학교다. 하지만 작년인가 다음 스토리 펀딩에서도 만날 수 있었던 조선학교 아이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유쾌하게 자라는 아이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선생들도, 학부모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손주를 학교에 보내놓고 그 아이들을 위해 10년 동안 그림을 그리는 할아버지가 있었겠지. 그저 겉보기로는 그림책 몇 권을 내는 일로 보이는, 그러나 나로서는 가늠하기 어려운, 마음이 담기는 일을 맡게 됐다. 이 일만큼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요량이다. 벌써 어디어디, 누구누구 하는 식으로 머릿속에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다. 때마다 꺼내 보기 좋도록 손 닿는 자리에 그림들을 꽂아 두었다.

전광진 | 상추쌈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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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든 현실이든 음모론이나 궁중비화식 서술은 해악이 있다. 극소수 엘리트 영역을 위주로, 사회적 맥락보다는 개인 심리와 윤리 차원으로 상황을 단순화함으로써 대다수 인민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의 총체성을 소거하기 때문이다. 최순실 사태는 음모론과 궁중비화식 서술에 대한 그런 일반적 판단을 무색하게 한다.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들이 사실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해악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배계급의 처지에서, 이 사태는 박근혜나 최순실 따위 지극히 비정상적인 인간들의 행태가 될수록 안전하다. 이 순간 거의 모든 사람이 입에 올리는 ‘국정농단’이라는 말은 그와 관련되어 있다. 국정을 농단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하여 그 결과가 정반대의 가치로, 친노동자·서민적 정책으로 나타났다면 어땠을까. 정체가 드러난 최순실은 ‘의적’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른다. 국정 운영의 합리성보다 중요한 건 사회에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 어떤 계급의 이해에 기여하는가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조선일보를 필두로 한 지배계급은 온 나라가 한목소리로 ‘국정농단’을 외치도록 함으로써, 자신들도 똑같은 피해자가 되어 상황을 빠져나간다.

분노의 함성이 세상을 뒤덮고, 퇴진 여부와 관련 없이 박근혜가 기존의 권력을 회복하긴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사회에 어떤 실제적인 변화를 가져올까. 박근혜의 무력화는 지배계급 전체의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고, 반대로 지배계급이 위기를 모면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변혁적 사회 변화는 사회적 분노가 다른 세상의 전망과 결합할 때 만들어진다. 분노는 내 밖의 것들에 대한 반응이지만, 전망은 내 안에서 진행하는 엄격한 지적 활동이다. 분노와 전망의 결합이야말로 공화국 시민의 요건이자 표징이다.

이번 사태로 분노는 혁명 전야 수준까지 올랐다. 그러나 진보정치의 쇠락을 비롯해 이미 미약해질 대로 미약해진 다른 세상의 전망이 그에 걸맞게 저절로 생겨난 건 아니다. 전망이 ‘박근혜 없는 세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배계급은 이 소란 속에서도 ‘선수 교체’만으로 모든 걸 지킬 수 있다고 믿는다. 지배계급의 2중대인 민주당도 당장은 욕을 먹고 있지만 적당히 시간이 지나면 ‘정권 교체’의 깃발 아래 다들 돌아올 거라 확신한다.

다른 세상의 전망에는 여러 차원과 갈래가 있다. 학자나 이론가의 역할도 있고 활동가의 실천도 있다. 그걸 기반으로 인민의 보편적 사회의식과 식견이 형성되고, 도달 가능한 사회의 수준과 상이 도출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전제는 지금 현실의 구조와 본질을 정확하게 보는 일이다. 그게 없다면 전망이나 대안은 초점을 잃고 해소되거나 기존 체제의 존속에 봉사하게 된다. 분노의 양은 부차적이다.

그런 맥락에서 ‘손석희 뉴스를 어떻게 보는가’는 의미 있는 질문일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지배계급의 핵심 중 하나인 홍석현 그룹은 왜 사실 왜곡과 극우적 선전 선동이라는 기존 우파 언론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고, 자그마치 한국에서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뉴스’를 만들었는가. 여기에 대해선 좀 더 자세하고 긴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일단 결론부터 말하면 흔히 ‘수구 꼴통’이라 통칭되는 지배계급이 그 내부로부터 매우 빠르게 혁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혁신 그룹은 조선일보로 대변되는 기존의 방식이 인민의 진전된 시민의식과 이념 성향으로 볼 때 한계에 봉착했음을 간파하고, 영리하게도 손석희라는 신망 높은 중도 우파 언론인과 손을 잡았다. 그들은 그런 선택이 종편 사업의 사업적 측면에서 최선의 선택일뿐더러, 지배계급의 습속에 어색할 뿐 지배계급의 이해를 거스르진 않는다는 걸 안다. 손석희씨 또한 독립적 권한을 가지고 소신대로 뉴스를 만들 수 있는 매우 특별한 기회를 거부할 이유가 없다. 결과는 대성공이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공공적 성격을 가진 방송과 상업주의적 목적의 방송(종편)이라는 이분법에 기초한 언론운동의 틀은 박살이 났다. 그리고 기존 언론에서 볼 수 없었던 손석희 뉴스의 중도 우파적 양식과 매력이 보다 급진적 관점의 존재 의미를 잊게 함으로써,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지배계급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을 세련되고 교양 있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요컨대 손석희 뉴스의 애정어린 시청자들은 이건희 성매매 사건을 다루는 손석희에 거듭 신뢰를 보내면서, 이재용의 등기이사 선임을 비판적으로 다루지 않은 손석희를 관용하는 것이다.

손석희 뉴스는 오늘 자본의 권능이 어느 정도까지 왔는가를 가감없이 보여준다. 홍석현 그룹은 최선의 상업주의적인 뉴스를 기획했던 것이지만, 그 결과는 ‘가장 공정하고 정의로운 뉴스’다. 지상파 뉴스가 심각하게 반동화한 상태에서 손석희 뉴스의 미덕과 유익을 부인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그것을 지나치게 전면화함으로써, 우리 자신의 관점과 통찰을 잃는다는 점이다. 지금 우리의 분노에 전망이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배계급은 이제 맞춤식으로, 한편으로 극우적 선동으로 한편으로 정의와 공정성으로 대중을 장악하고 지도하며 다음 세상을 구현해 나가고 있다. 우리는 이 매트릭스의 어디쯤에 있으며, 어디에서 다시 출발해야 할까.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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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졸중’은 뇌혈관이 막히거나 갑자기 터져 뇌에 혈액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나타나는 여러 신경 증상을 일컫는다. 졸중(卒中)은 졸중풍(卒中風)의 줄임말이고, ‘뇌졸중’은 ‘뇌졸중풍’이 줄어든 말이다. 요즘은 그냥 ‘뇌중풍’이라고도 한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많은 사람들이 ‘뇌졸중’을 ‘뇌졸증’으로 잘못 알고 있다. 아마도 ‘합병증’ ‘통증’ ‘우울증’ 등 질병이나 증상을 나타내는 대부분의 단어에 ‘증’이 붙다 보니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졸’은 ‘갑자기’를 뜻한다.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졸도’다. ‘뇌졸중’의 ‘중’은 가운데를 뜻하는 게 아니다. ‘중’에는 ‘맞다’ ‘맞히다’란 의미도 있다. 화살 따위가 목표물에 정확하게 맞는 것이 ‘적중’이요, 쏘는 족족 들어맞는 것이 ‘백발백중’이다. 이 ‘중’이 ‘뇌졸중’의 ‘중’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뇌졸중’은 ‘뇌가 갑자기(졸) 바람을 맞았다(중)’는 의미다.

‘뇌졸중’을 ‘뇌졸증’으로 잘못 쓰는 것과는 반대로 ‘증’을 써야 할 곳에 ‘중’으로 잘못 쓰는 말도 있다. ‘대중요법’이 그렇다. ‘대중적인 치료법’쯤으로 생각하고 ‘대중요법’으로 쓰는 것 같다. 하지만 이 말은 ‘대증요법’이 바른말이다. 병의 증상에 대응해 처치를 하는 치료법을 말한다. 요즘은 어떤 정책이 근본 해결보다 미봉책에 머물 때 비유적인 표현으로 ‘대증요법’을 쓰기도 한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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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의 비선 실세 파문인 ‘최순실 게이트’의 의혹이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다.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특혜 의혹과 관련해 이화여대가 파문을 겪었고, 곧이어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과 국무회의 발언, 인사 내용까지 공식발표 이전에 먼저 받아봤다는 보도가 이어지면서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 17~23일 트위터상에서 가장 이슈가 된 핫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1~3위가 모두 최순실 게이트 관련 키워드였다. 1위는 최경희 총장이 이화여대 130년 역사상 첫 불명예 퇴진한 것과 관련된 ‘이화여대’ 키워드였다. 그동안 트위터에서는 정씨의 부정입학과 학사특혜를 규탄하는 각종 대자보를 비롯해 학생들이 교내 곳곳에 설치한 ‘말(馬)’과 관련된 상징물들이 다수 공유됐다.

박 대통령이 지난 20일 “어느 누구라도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면 엄정히 처벌받을 것”이라고 발언한 뒤 ‘K스포츠재단’도 다시 트위터에서 화제가 됐다. 박 대통령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트위터에서는 노회찬 정의당 의원이 “(대통령이) 마치 죄의식 없는 확신범 같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게 가장 큰 문제다”라고 반응하는 등 청와대와 대통령의 상황인식을 비판하는 글들이 다수 공유됐다.

최순실씨 핵심측근으로 알려진 고영태씨 발언을 인용해 ‘최씨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박 대통령의 연설문을 고치는 일’이라는 내용이 보도된 뒤 ‘대통령 연설문’ 키워드도 언급량이 급증했다. 곧이어 최씨가 박 대통령의 연설문, 국무회의 발언, 인사 내용 등을 먼저 받아봤다는 보도가 잇따르면서 고씨의 발언이 거짓이 아니라는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이밖에 고 백남기 농민이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질 당시 상황속보가 경찰 측 설명과 달리 모두 존재한 사실이 확인되면서 ‘상황속보’ 키워드가, 또 SBS <그것이 알고 싶다>가 물대포의 위력을 직접 검증하고 나서면서 ‘그것이 알고 싶다’가 순위권에 올랐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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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여러분, 호소드립니다. 가능한 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와주시기 바랍니다.’

이 글을 마감하려고 앉아 있는 시간. 긴급 공지가 SNS를 도배하고 있다. 백남기 농민 강제 부검을 정말 강행하겠다는 것일까. 25일 밤 12시까지인 영장 집행을 막기 위해 며칠 전부터 수많은 시민들이 서울대병원을 지키고 있다. 24일 경찰은 언론을 통해 강제 집행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를 흘렸다. 영장 재청구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모두가 연막이었다는 말인가.

정말 이 정부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어디까지 이 사회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것일까. 정부는, 아니 본인을 중세의 왕처럼 여기는 청와대는 물대포에 의한 공권력 살인 행위를 가리기 위해 그간 무수한 사회적 기준들을 허물어뜨려 왔다.

25일 오후 홍완선 종로경찰서장이 고 백남기 농민에 대한 부검영장 강제집행을 하지 못하고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떠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대병원은 외압에 의해 명백한 ‘외인사’를 대한의료계의 지침까지 어기며 ‘병사’로 기재해 전체 의료계를 우습게 만들었다. 경찰과 검찰은 이를 빌미로 두 번씩이나 영장을 재청구하며 고인 죽음의 원인을 가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유가족들의 고소·고발 관련해서는 1년이 다 되어가도록 조사조차 하지 않는 검경이다. 도대체 이 나라 공권력은 누구의 공권력인가. 특정 권력의 사병이란 말을 피할 수 있을까.

정작 지금 한국 사회에서 영장 발부가 시급히, 가장 필요한 곳은 어디일까. 근래 모든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는 청와대가 아닌가. 24일 JTBC 보도에 의해 대통령 연설문, 수석비서관 회의 주재 자료, 국무회의 자료 등 극비여야 할 최고 국정 정보가 아무런 자격도 없는 ‘최순실’에게 사전 유출되었다는 것이 사실로 밝혀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박근혜 대통령 재임 시절 내내 논란이던 ‘십상시’나 ‘문고리 3인방’, 주변 ‘환관’들은 최소한 공무원 신분이기라도 했다. 도대체 대통령의 위에서 이 사회 최고 권력자처럼 행동해 온 ‘최순실’은 누구인가. 그런 비선의 조종에 의해 앵무새처럼 연설문을 읽고 있던 박근혜씨는 도대체 누구인가. 국가 권력을 사유화하고,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막고, 헌법에 보장된 집회·시위의 자유 앞에 살인 물대포를 전진 배치시키고, 역사교과서를 ‘족보’책처럼 국정화시키고, 2000만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도매값으로 자본에게 넘기려 노동법 전면 개악을 밀어붙이고, 사드 배치로 한반도를 전쟁기지화하려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그는 이 국가의 주권자인 모든 국민들을 무엇으로 아는 것인가. ‘쫄’로, ‘바보’들로, 아니면 교육부 정책기획관이었던 이처럼 ‘개·돼지’들로 아는 것은 아닌가.

이제 더 이상은 안된다. 백남기 농민에 대한 영장 집행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 먼저 박근혜 정부에 대한 영장 청구가 있어야 한다. 그가 물러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법정에 그와 그의 ‘무당’ ‘환관’들이 세워져야 한다. 그러지 않을 때, 오늘은 서울대병원으로 가지만, 모든 국민들이 내일은 청와대를 향해 가게 될 것이다.

송경동 |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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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강연을 가끔 한다. 사람들은 모두 글을 잘 쓰고 싶어 한다. 그 이유와 동기는 참 다양하다. 자기소개서를 잘 써서 취직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기자가 되고 싶은 사람도 있고, 책을 내고 싶은 사람도 있고, 자기 삶을 기록해 놓고 싶다는 분도 있다. 어떤 분은 글을 못 써서 직장 상사에게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고 ‘복수’하려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한다.

수강생들은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가 궁금하다고 했다. 내가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이렇다. 나는 1985년부터 2005년까지 버스 운전을 했다. 그 당시 시내버스 기사들 근무여건은 너무 열악했다. 임금이 너무 적었고 쉴 시간이 없었다. 사업주들의 욕심 때문에 운행시간이 너무 짧아 정해진 시간에 노선을 돌아오려면 난폭운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 인상과 여유 있는 배차시간을 요구하며 1년에 한 번씩 연례행사처럼 파업을 했다.

하지만 그 파업은 사업주와 정부가 짜고 어용노조가 들러리를 서서 했던 위장 파업이었다. 그런데 조중동을 비롯한 수구 신문들은 ‘난폭운전을 일삼는 버스 기사들이 웬 파업?’ ‘이런 가뭄에 웬 파업?’ 하면서 비꼬았다. 나는 그런 신문을 보면서 분통이 터졌다. 그때만 해도 나는 신문사 기자들이 시내버스 속내를 몰라서 그렇게 썼을 거라고 생각했다. 큰 착각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런 수구 신문들은 다른 노동현장에서 파업을 해도 그런 식으로 기사를 썼다. 나는 글을 써서 시내버스 현장을 고발하고 싶었다. 결국 글쓰기를 배웠고, ‘한겨레’와 ‘작은책’에 글을 연재해 시내버스 기사들의 근무환경이 열악하고 시내버스 파업이 위장 파업이라는 걸 고발했다. ‘사업주도 파업하네’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글이다.

<1984년>과 <동물농장>으로 유명한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은 글을 쓰게 된 동기로 네 가지를 들었다. 그 네 가지는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이다. 조지 오웰이 말하는 정치적 목적이란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조지 오웰은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의 가난한 삶을 그렸고, 스페인 내전에서 스탈린을 지지하는 공산주의자들의 탄압, 그리고 파시즘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전체주의의 위험성을 고발했다. 조지 오웰은 본래 자연주의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과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사, 2010)

요즘 한국은 미학적인 글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파시즘 시대로 돌아가 버렸다. 세월호 참사로 어린 학생들을 포함한 304명이 수장됐는데 책임지는 사람이 없고, 경찰은 물대포로 백남기 농민을 죽여 놓고 부검해야 한다고 우기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최순실은 미르재단, K스포츠재단을 만들어 재벌들에게 모두 800억~900억원을 뜯어냈다(미르는 ‘용’이라는 뜻이다. 박근혜가 용띠다).

게다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는 이화여대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학칙에 없었던 아시안게임 단체전 금메달 경력을 면접에 반영하는 특례를 제공받아 입학하고, 출석하지 않고도, 시험을 보지 않고도, 비속어와 맞춤법도 무시하고, 표절까지 한 리포트에 B학점을 받는 특혜를 누렸다.

이렇게 권력형 비리 의혹이 백일하에 드러나는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실체가 없다”고 뭉개 버린다. 게다가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까지…. 탄핵당할 사유만 나열해도 끝이 없겠는데 ‘실체가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이런 사회가 파시즘 사회다.

이런 걸 고발하는 글쓰기는 중요하다. 그런데 파시즘 국가에서는 행동도 중요하다. 백남기 농민을 강제 부검하는 폭력엔 당장 행동으로 저항해야 한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경고했다. “권력을 감시하지 않고, 권력이 부패하는 순간 저항하지 않는 대중들의 무지와 무관심 속에서 전체주의가 출현”한다.

안건모 | ‘작은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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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바쁜 가운데’처럼 형용사나 동사 뒤에 ‘ㄴ/는 가운데’를 붙여 쓰면 ‘어떤 일이나 상태가 이루어지는 범위의 안에서’라는 뜻이 된다.

한데 ‘ㄴ/는 가운데’를 써야 할 곳에 ‘바쁜 와중에’처럼 ‘ㄴ/는 와중에’를 쓰는 것을 적잖게 볼 수 있다. 단어의 정확한 뜻을 모른 채 사람들이 많이 쓰는 표현을 따라 하다 보니 ‘와중’이란 말을 잘못 쓰는 경우가 흔하다.

‘와중’의 ‘와’는 소용돌이를 말한다. 따라서 ‘와중’은 글자 그대로 ‘소용돌이의 가운데’라는 의미다. 바다나 강의 바닥이 팬 자리에서 물이 빙빙 돌면서 원을 그리며 흐르는 현상을 소용돌이라고 한다. 소용돌이가 치는 곳은 물이 세차고 급하게 휘돌아 흐른다. 쳐다보고 있으면 무엇인가에 이끌려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정신이 없고 혼란스럽게 느껴진다.

이처럼 ‘와중’은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선 것 같은 어려운 상황을 비유적으로 일컬을 때 쓰는 말이다.

그래서 ‘일이나 사건 따위가 시끄럽고 복잡하게 벌어지는 가운데’라는 의미로 쓰인다.

‘와중’은 ‘전란의 와중에’처럼 큰일이 나서 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상황이 복잡하게 꼬일 때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니까 ‘바쁜 와중에’처럼 일상생활 중 조금 바쁜 상황을 가리킬 땐 ‘와중’이란 말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바쁜 가운데’나 ‘바쁜데도 불구하고’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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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 더불어민주당 도종환 의원이 “정부가 지원하지 않기로 한 예술인들의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며 9473명의 명단을 공개한 뒤 ‘문화계 블랙리스트’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해당 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 조윤선 장관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받았다”고 일축했지만, 의혹은 가시지 않고 있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 10~16일 트위터상에서 가장 이슈가 된 핫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블랙리스트’가 가장 주목받은 키워드로 집계됐다. 트위터상에서는 박근혜 정부에서 예술검열과 탄압을 실시했다는 비판 여론이 우세했다. 또 블랙리스트 사태를 풍자하는 문화예술인과 시민들의 게시물도 다수 올라왔다. 특히 박원순 서울시장이 이례적으로 ‘대통령 탄핵’까지 언급하며 정부를 강하게 비판한 것도 논란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조윤선 장관이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부정했지만 도종환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문예창작기금 지원 대상 작품 심사위원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힘들다고 토로하는 녹음파일을 공개한 뒤 사실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지고 있다.

박근혜 정권의 비선 실세로 알려진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특혜 의혹으로 ‘이화여대’ 역시 핫키워드에 올랐다. 정씨와 함께 수업을 들은 이화여대 의류학과 학생이 정씨에게 학점 특혜를 줬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교수에게 대자보를 통해 사과를 요구하기도 했다. 트위터에는 대자보에 적힌 글 전문이 공유됐고, 이화여대 학생·동문에 이어 교수들도 최경희 총장의 사퇴를 촉구하고 나섬에 따라 논란은 더욱 증폭됐다.

스웨덴 한림원이 지난 13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미국의 포크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인 밥 딜런을 선정하면서 ‘노벨 문학상’ 키워드도 급증했다. 트위터 내 노벨상 공식 계정(@NobelPrize)에서는 밥 딜런의 일러스트 사진과 함께 수상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공식으로 남겼다. 하지만 가수의 수상은 노벨 문학상 115년 역사상 처음인 데다 시나 소설 같은 전통 문학작품이 아닌 노랫말에 상이 주어져 트위터에서도 여론은 분분했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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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뿔소를 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케냐에 있는 나크루 호수에 갔을 때이다. 그곳은 세계 홍학 서식지로 유명했다. 마사이 마라 초원에 사는 뭇 동물들을 만나고 나이로비로 향하던 길이었다.

홍학들이 고즈넉한 호숫가를 띠를 두른 듯 분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깃털들로 자욱한 호숫가를 걷고, 발길을 돌리는 순간, 눈에 들어온 것은 호수 저편, 초원 한가운데에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는 코뿔소 가족이었다.

코뿔소를 두 눈으로 직접 본 것은 이오네스코의 연극 <코뿔소> 이후 20여년 만이었다. 나크루 호숫가 초원에서 본 코뿔소는 콧등에 한 줄로 뿔이 두 개 솟아난 아프리카 코뿔소였다. 그때까지 나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인도 코뿔소인지 구별할 생각도 못했다. 코에 뿔이 나 있으면 다 같은 것이었다.

과천 서울동물원에서 열린 '먹방베스트 10' 행사에서 흰코뿔소가 과일을 먹고 있다. 연합뉴스

아프리카에서 코뿔소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마사이 청년들이 나무를 깎아 만든 코뿔소들을 구해 왔다. 서재 곳곳에 코뿔소들이 서 있다. 어떤 녀석은 뿔이 하나에다 갈색이고, 또 어떤 녀석은 뿔이 두 개에다 희고, 또 검다. 매일 녀석들과 마주하면서도 나는 이오네스코가 연극에 등장시킨 코뿔소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아시아 코뿔소인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이오네스코는 단지 현실에서는 맞닥트릴 수 없는 야수(野獸)의 순간적인 출몰에 코뿔소를 등장시킨 것뿐이다.

코뿔소 대신 카프카의 <변신>처럼 등껍질이 딱딱한 풍뎅이로 탈바꿈시키거나, 카뮈의 <페스트>처럼 오랑 사람들의 건강(삶)을 파괴시키는 병균으로 대체해도 무방하다.

이오네스코는 단편소설로 <코뿔소>를 쓴 뒤, 연극으로 각색해서 무대에 올렸다. 평온하던 일상에 난데없이 코뿔소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그 수가 점차 많아져, 그곳 사람들 수와 거의 같아진다. 인간이기를 끝까지 싸워 지킨,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여기에서 코뿔소란 사람들의 다른 모습인 것. 카프카가 잠자를 풍뎅이로 변신시킨 것처럼, 이오네스코는 단 한 사람을 남기고 모든 사람들을 코뿔소로 집단 탈바꿈시켰다.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모습으로 변해간다는 것은 두렵고 소름끼치는 일이다. <코뿔소>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유년기에 나치와 파시즘, 전쟁과 이산의 고통을 겪은 이오네스코의 부조리한 세계 인식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코뿔소>는 20세기 중반에 발표된 소설이자 부조리극이지만, 코뿔소적인 상황은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깊어가는 가을, 먼 곳에서 도착한 편지처럼 반가운 소식을 접했다. 프랑스 전문 극단이 처음으로 한국을 찾아온다는 것이다. 시월의 마지막은 연극 <코뿔소>와 함께 보낼 것이다. 이번엔 뿔이 하나인지 둘인지, 흰지 검은지, 아프리카 코뿔소인지 아시아 코뿔소인지 알게 될까. 아무렴, 가을이 깊어간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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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가족 수가 좀 많은 데다가 다들 역마살까지 있는 편이라 여기저기서 모아온 물건이 한데 모인 까닭이다. 웬만한 건 함부로 버리지 않는 습관도 여기에 한몫하였다. 그러다 보니 생기는 약간의 공간 부족이 문제이긴 하지만, 인과응보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긴다. 아무리 살아있는 생물이 아니라지만 사물도 나와 세월을 겪으며 소소한 역사와 이야기가 엮인 것인데 매몰차게 다루는 건 어쩐지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그래서 일 년 내내 꺼내보지도 않은 채 먼지만 쌓여가는 것들이 허다하지만, 이 ‘미련 덩어리’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오늘도 한 지붕 아래 같이 지내고 있는 것이다.

의미 없이 보관만 되고 있는 물건들과는 달리 특별한 기회를 만나 빛을 발하는 물건도 있다. 허름해진 이불이 훌륭한 덮개로 활용되고, 다 마신 와인의 코르크 마개는 서랍 손잡이로 둔갑하기도 한다. 안 버리고 모아놓은 온갖 크기와 모양의 상자 및 가방은 내가 필요로 하는 그 어떤 용도도 다 충족시켜줄 정도로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리본, 철사, 끈, 천, 종이 등의 자재는 물론, 수많은 종류의 통과 도구, 부속품과 공구가 모아져 있어 만물상을 방불케 한다. 이 엄청난 물건의 목록을 정리하고 파악하는 역할을 하는 어머니는 우리 집의 ‘구글’이나 다름없다. 필요한 걸 어머니께 ‘검색’하면 거의 예외 없이 필요한 결과를 찾아서 내놓기 때문이다.

제 기능을 못 한 채 처박혀 있던 무언가가 우연한 기회에 차출되어 세상이 돌아가는 데에 기여하게 될 때, 그것은 작은 기적과 같다. 혹시 몰라서 남겨 두었던 보잘것없는 작은 요소가 딱 필요할 때를 만나 톡톡히 제 역할을 할 때, 그때만 느낄 수 있는 묘미와 쏠쏠함이 있다. 가장 근본이 되는 심리는 아마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 기쁨일 것이다. 버린다는 것, 그것은 차디찬 단절을 의미한다.

쓰레기통에 들어간 순간, 문명의 총화였던 하나의 물건은 순식간에 현대기술이나 자연의 원리로 처리 불가능한 이물질로 전락한다. 누군가의 기억 또는 손길이 미치는 곳에 여전히 있는 물건은 아직 죽지 않을 가능성을 의미한다. 비록 먼지 쌓이고 있지만 어디엔가 요긴하게 쓰일 가능성이 살아있는 것과 영원히 사라진 것은 하늘과 땅 차이이다. 그리고 우연의 사슬이 찰칵 소리를 내며 물건과 들어맞았을 때, 그 작은 가능성은 실현되어 이 허망한 우주 속에서 존재에 의미를 조금 더 실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재활용의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현대적 재활용 시스템이 등장하기 전에 물건의 재활용은 말 그대로 다시 사용하는 행위였다. 오늘날처럼 물건을 재료별로 구분하여 버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물건을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종이, 플라스틱, 철, 유리 등의 소재로 인식함으로써 물건의 폐기는 체계화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금 잘 쓴다’는 재활용 본연의 의미도 어쩌면 폐기된 것인지도 모른다. 물건을 구성 물질로 환원하여 보는 시점은 결국 경제적 논리로 그 재활용의 의미를 재정의하게 되고, 그 결과 심지어는 재활용이 오히려 환경에 나쁘다는 반직관적 결론에 이르기까지 한다. 가령 알루미늄은 광물을 캐내는 비용이 높아 재활용하기에 좋지만, 플라스틱은 유가 인하로 재활용이 오히려 더 비싸다는 식의 논리이다. 재활용이 재료공학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그동안 수거해 가던 물건을 더 이상 가져가지 않는 일도 일어난다. 얼마 전, 그동안 스티로폼을 수거하던 업체가 폐스티로폼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거를 거부하거나 이런 종류의 물건을 아예 일반 쓰레기로 분류해달라고 요청한 일이 일어났다. 스티로폼 역시 유가 하락으로 인해 원래 재생원료로 가공하여 수출하던 것이 경제성이 떨어지면서 수거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어떤 플라스틱의 경우에는 이를 수거, 분류, 그리고 다시금 원료로 만드는 가공 과정에서 탄소가 더 많이 배출되기 때문에 차라리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분석도 있다. 물건의 재활용을 재료의 재활용으로만 보는 순간 당연히 그 물건은 원자재 거래시장의 원리에 따라 취급을 받게 되고 재활용 본연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다.

얼마 전, 나는 이사를 하면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정 들었던 물건들, 그러나 형편상 이제는 헤어져야 할 물건들을 어찌해야 하나 골몰하게 되었다. 그냥 버리기엔 너무 멀쩡하고 아까운 것들이라 하나하나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 그때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마침 시골에 요양하러 가시는 장인·장모님이 필요하다며 식탁 세트를, 같이 온 삼촌이 탐난다며 선반과 바비큐 틀을, 후배는 거실 의자와 카펫을 각각 가져가거나 맡아주기로 했다. 또 뒷집에서 이사 나가는 아저씨는 세탁기를, 이사 들어오는 아저씨는 옷걸이와 부엌 도구를 시원하게 처리해주었다. 이런 사람들만 있다면 새 물건을 팔아야 할 업체들이 장사가 안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새 보금자리를 찾아 제2의 삶을 시작할 정든 물건들을 생각하면, 야생학교는 뿌듯할 따름이다.

김산하 | 영장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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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다고 해서 들깨 타작을 서두르는 날이었다. 베어 놓은 지 4~5일 지났는지라 잘 말라서 ‘가빠’를 깔고 한 곳으로 모으는데 따가운 햇살이 새삼 고마웠다. 들깨를 벨 때는 이슬이 덜 깬 이른 오전이 좋지만 타작하기에는 햇살 따가운 오후가 좋다.

옮기기 좋게끔 반 아름 정도씩 끌어모으는 때도 그렇고 그걸 양팔에 안고 올 때도 그렇다. 무척 조심스럽다. 깨알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니까 충격이 가지 않도록 걸음도 사뿐히 걷는다. 내려놓을 때는 반대다. 소리 나게 턱 내려놓는다. 한 알이라도 털어지라고.

들깨를 벨 때도 조심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낫을 예리하게 갈아서 들깨 밑동에 댄 채로 비스듬히 당겨 올려야 깨알이 떨어지지 않는다. 충격이 가지 않게 하는 방법이다. 이보다 더 조심하는 단계가 있다. 들깨 베는 날과 시간을 정하는 때다.

적어도 닷새 정도는 날이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가 있어야 하고 참새 떼 눈치를 봐야 한다. 기민하고 주의 깊게 살펴서 밭에 들어가는 순간을 정해야 한다.

들깨가 익으면 참새 떼가 귀신처럼 알고는 몰려든다. 익지 않은 들깨는 쳐다보지도 않는다. 들깨 뿌릴 때도 들켰다가는 다시 뿌려야 할 정도로 참새는 들깨를 좋아한다.

애써 농사지어서 참새들에게 빼앗길 수는 없다. 속 편한 말로 들짐승이나 날짐승도 먹고 살아야 하지 않느냐고 하지만 들깨 밭의 참새는 다르다. 이놈들이 쪼아 먹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데 들깨 밭에 내려앉거나 날아가는 순간에 들깨가 우수수 떨어진다.

들깨 잎을 따서 반찬을 만들 때도 시퍼런 잎보다는 들깨가 익어가면서 깻잎이 노르스름해질 때가 좋지만 이때는 함부로 밭에 들어갈 수가 없어서 곁을 돌면서 잎을 딴다. 하물며 사람조차 조심하는 이런 때에 참새는 거침이 없다.

참새들의 활동은 이른 아침부터 낮 동안 계속된다. 그래서 먼저 참새 떼가 밭에 날아 와 있는지를 보고 없으면 일을 시작하지만 참새 떼가 있으면 날아가기를 기다렸다가 베기 시작해야 한다. 불쑥 다가갔다가는 놀란 참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면서 들깨 손실이 크다.

올해는 맑은 날이 많아서 농사가 풍년이다. 들깨 알도 굵다. 자근자근 첫 번 털기에서 깨가 와르르 쏟아진다. 초벌 털기가 끝나면 다시 소리 나게 내리치는 두벌 털기를 한다. 들깨 더미를 옮겨 쌓으며 깨알은 자루에 담는다.

비 소식만 없다면 그냥 덮어 뒀다가 다음날 바람에 드리우겠지만 일단 자루에 담아 집으로 옮긴다. 들깨 자루는 가볍다. 물에도 뜨는 식물성 기름이 가득 차 있어서다. 쌀 20㎏짜리 마대에 가득 담아도 12~13㎏이 될까 말까다.

가을 해는 짧다. 어둑발이 내리는가 싶더니 가로등이 들어왔다. 들어와서는 안되는 가로등이다. 조금 남은 일거리는 불빛 없이도 얼마든지 마칠 수 있다. 지난여름에 가로등을 꺼 달라고 군청에 전화해서 겨우 꺼 놨는데 왜 가로등이 또 들어올까. 가로등은 해당 주민이 손댈 수 없게 되어 있다. 안전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농작물 피해로 가로등을 꺼야 할 때도 담당 관청에 연락해서 꺼 달라고 해야 한다.

인적조차 없는 시골길에 밤 내내 환한 가로등은 빛 공해다. 더구나 무와 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는데 가로등은 치명적이다. 쉬어야 하는 밤에 약한 빛이라도 있으면 식물은 광합성 작용을 하려고 시도한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쉬지 않고 일을 하면 스트레스 물질이 체내에 쌓인다.

가로등 불빛이 있는 쪽 콩이랑 들깨는 익어 갈 생각도 않고 만년 청년으로 살겠다는 듯 자라지도 않고 잎만 무성하기에 가로등에 적힌 대로 전화를 했더니 받지를 않았다.

평일 낮 시간만 통화가 된다는 걸 통화가 된 며칠 뒤에 알게 되었다. 이날도 늦었다. 어차피 다음날 전화해서 가로등을 꺼 달라고 해야 할 상황이다. 이렇게 가을날 하루가 저물었다.

전희식 | 농부· ‘소농은 혁명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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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미국의 가수 밥 딜런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온갖 추측을 일순에 잠재운 놀라운 결론이었다. 1964년 프랑스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장 폴 사르트르가 공식적으로 노벨 문학상을 거부한 것만큼이나 충격이었다. 이번 수상 결정을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오고 있지만, ‘문학상’을 ‘가수’가 수상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논란은 끊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의 음유시인을 예로 들면서 밥 딜런의 수상을 정당화했지만, 궁색한 논리일 뿐이다. 엄연히 오늘날 ‘문학’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고대의 시나 글과 다른 근대적인 글쓰기 체계이고, 수상 대상을 결정한 이들조차 이 사실을 모를 리 없다. 어차피 ‘문학’은 모두 같은 것이라는 주장은 어딘가 어색하다.

의도야 무엇이었든 스웨덴 한림원이 파격을 노렸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이 사실은 많은 것을 암시해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사실 이번에 일어난 사건의 실마리는 이미 1964년 사르트르가 수상을 거부할 때 발표했던 ‘서한’에 감춰져 있다. 사르트르는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신의 수상 거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먼저 사르트르는 작가로서 어떤 공식적인 명칭도 부여받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하게 표명한다. 작가는 오직 작가의 이름으로 불려야지 “노벨상 수상자 아무개”라는 식으로 불리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기관이나 조직을 위해 작가라는 지위를 빌려주는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주장이었다. 그다음으로 사르트르는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입장으로서 서방세계에서 주는 대표적인 문학상을 받을 경우,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문제 삼는 ‘우파들’에게 “잘못된 해석”을 유도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미국 싱어송라이터 밥 딜런이 71세 때인 2012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하고 있다. 로스앤젤레스 _ AP연합뉴스

물론 이런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 소감이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억측에 불과할 수도 있고, 다분히 당대의 급진적인 정치상황을 반영한 ‘과도한 제스처’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수상 거부는 노벨 문학상의 딜레마를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소홀히 취급할 수 없는 ‘퍼포먼스’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을 거부하는 사르트르의 ‘소감’이라기보다, 그가 제시한 노벨 문학상의 정체성이다. 사르트르는 노벨 문학상이라는 것이 ‘세계문학’을 대상으로 ‘자유’라는 가치를 진작시키기 위해 서방세계가 만들어낸 제도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노벨 문학상에 감춰진 정치적 성격을 지적한 것이다. 사르트르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정치적 성격이란 것은 특별한 진영논리를 강화하거나 특정한 이념성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성’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정치성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사르트르는 ‘세계문학’의 범주로서 노벨 문학상을 거론하고 있다. 말하자면, 기원이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노벨 문학상은 1960년대 이후에 ‘세계문학’이라는 이상을 공유하는 이들을 통해 명분을 유지해왔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문학’이 무엇인지를 두고 몇 년간 논쟁이 펼쳐졌지만, 유럽이나 북미 문학상과 달리, 노벨 문학상은 특정한 언어권 문학이 아니라 ‘세계’의 다양한 언어권 문학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분명 다른 성격을 가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이 전해지면 으레 나왔던 푸념이 ‘번역’ 문제였지만 노벨 문학상이 포괄하는 ‘세계문학’은 단순하게 번역의 문제만은 아니다. 오히려 노벨 문학상은 기존의 ‘세계문학’,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세계문학시장’에 속하지 않는 작품들을 발굴해서 새롭게 조명하는 쪽에 가깝기 때문에 딱히 특정 작가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었다고 해서 수상 대상에 오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세계문학’이다. 사르트르가 수상 거부 소감에서 밝히고 있듯이, 노벨 문학상이라는 ‘세계문학발굴제도’는 냉전의 한복판에서 동요하는 세계체제를 통합하기 위한 문화적 장치이기도 했다. 사르트르도 스웨덴 한림원이 “부르주아적 기관”이기 때문에 이 상을 거부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사르트르가 이 상을 거부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역설적으로 노벨 문학상의 ‘세계성’ 때문이었다. 여전히 제3세계 민족해방투쟁이 불타오르던 그 시절 사회주의자 사르트르에게 논란을 일으킬 상을 받느니, 거부하는 것이 더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효과적이라고 판단할 법했던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노벨 문학상은 ‘세계문학시장’에 들어오지 못한 다양한 ‘문학들’을 포섭하는 기능에 충실했다. 사르트르 같은 ‘사치’를 누릴 수 없었던 제3세계 작가들이 이 ‘발굴제도’를 통해 ‘세계문학시장’에 자신들의 문학을 선보이고 각광을 받는 일들이 길게 이어졌다. 그러나 이번 밥 딜런의 수상 소식에서 읽히는 상황은 이런 노벨 문학상의 고유성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모종의 위기감을 읽어내는 것은 너무 과한 해석일까. 이미 작년부터 균열이 예감되었지만, 더 이상 노벨 문학상이 ‘세계문학시장’에서 권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조건도 이런 변화에 한몫했을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나는 이것이야말로 이제 글로벌 자본주의의 안과 밖이 무색해진 현재를 보여주는 장면들 중 하나라고 본다. 에릭 홉스봄이 지적하듯이, 지금 우리가 즐기고 있는 문화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만들어진 세계체제의 산물이다. 때늦게 밥 딜런이 ‘세계문학의 무대’로 불려 나온 것은 그러므로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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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따뜻한 햇볕이 그리워지는 계절이 성큼 다가왔다. 우리말 속담 가운데 ‘양반은 얼어 죽어도 겻불은 안 쬔다’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궁하거나 다급해도 체면 깎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양반은 물에 빠져도 개헤엄은 안 친다’는 속담과 한뜻이다. 그까짓 체면이 뭐길래, 양반은 체면에 목숨까지 거는 걸까?

‘겻불’은 곁에서 얻어 쬐는 불을 말하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겨를 태우는 불’이다. ‘겨’는 벼, 보리, 조 따위의 곡식을 찧어 벗겨 낸 껍질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겨를 태운 불은 뭉근하게 타오르기 때문에 불기운이 약하다. 해서 ‘겻불’에 ‘불기운이 미미하다’란 의미도 있다.

속담 중의 ‘겻불’을 ‘짚불’로 쓰기도 한다. ‘짚불’은 짚을 태운 불을 말한다. ‘겨’나 ‘짚’은 태우면 연기만 많이 날 뿐 불기운은 신통치 않다. ‘겻불’과 ‘짚불’은 불기운이 시원찮기로는 도긴개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한데 ‘겻불’을 ‘곁불’로 잘못 쓰는 경우가 흔하다. ‘곁불’은 얻어 쬐는 불을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까이하여 보는 덕을 말한다. 운 나쁘게 목표물 근처에 있다가 맞는 총알을 일컫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어떤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고 가까이에 있다가 받는 재앙을 가리킨다. 따라서 신통치 않거나 시원치 않음을 뜻하는 ‘겻불’과는 의미가 사뭇 다르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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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은 이제 우리의 생활이 되고 있다. ‘안전지대 한반도’라는 통념은 이미 깨졌다. 올여름부터 집중적이고도 연쇄적으로 겪는 폭염, 지진, 태풍, 원자력, 북핵의 문제는 더 이상 평소와 달랐던 천재나 인재의 경고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이라 불렀던 생활세계의 토대가 수시로 일거에 아수라장이 될 수 있다는 현실감이다. 올해의 남은 날들과 내년은 불확실한 미래가 아니라 ‘재난의 생활화’라는 오늘보다 더 확실한 내일이다. 세월호, 메르스, 가습기 살균제와 함께 하늘과 바다와 땅의 재난은 한반도 사람들에게 블랙홀 같은 트라우마로 내면화되고 있다. 더불어 드러난 문제는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와 정치만이 아니다.

만약 한반도 전역으로 재난이 파급된다면, 그날을 대비해 무엇을 준비해왔고 어떻게 행동하며 폐허에서 어떤 관계 방식으로 살아갈지에 대해 우리가 무지, 무감하다는 사실이 진짜 문제다. 그날 며칠 전부터 지구촌 어딘가로 이동할 1%를 제외하면 여기 남는 우리는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삶을 진작 바꾸지 않는다면 공멸한다. 대재앙을 거쳐도 살아남았던 인류사의 모든 문명과 공동체의 시금석은 단 하나였다. 위기 속에서 여성과 노인, 장애인과 환자, 어린이와 젊은이부터 구하고 살아남게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위대한 영웅’이나 ‘모성애 많은 민족성’ 때문이 아니라 인간 사회의 생존과 지속을 위해 저장된 집단지성 덕분이다.

그 집단지성은 위기 때면 자동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상적으로 ‘위안의 장소’를 두고 ‘환대의 공간’을 운영하며 ‘격려의 관계’를 증진하는 생활세계의 안전망을 유지하고 있을 때 생사를 다투는 그 순간에도 발휘되는 현상이다. 이렇게 드러나는 집단지성의 사례는 근자에도 있었다. 5년 전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 때였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 앞에서 정부와 도쿄전력이 진상 은폐와 책임 회피에 긍긍하는 동안 이재민에게 심신의 위안을 준 곳은 동네 편의점이었다. 공공의 구호가 미치지 못하는 그때 편의점에선 식수와 음식은 물론 화장실과 온수를 제공했고 전국 점포망을 통해 피해지역에 상품 공급량을 늘렸다.

편의점이 곧 재난 물류센터라는 집단지성의 기원은 21년 전 고베 대지진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정부는 지진 발생 후 6시간 뒤에 대책본부를 꾸렸고 대책 발표엔 하루 넘게 걸렸으며 총리는 TV를 보고 사태를 파악했다. 반면 한 편의점 본사는 피해지역의 편의점 343개 중 272개 지점이 피해를 입었으나 사장과 직원 360명이 급파돼 별도 본부를 꾸리고 피해 점포를 3시간 만에 영업 재개시켰다. 지진으로 모든 가게가 문을 닫았을 때 이 편의점은 24시간 영업하며 이재민에게 식료품과 생필품을 제공했다. 이들은 대재난 앞에서 자신들이 이재민에게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고베 대지진 이후 내각 지지율은 곤두박질쳤고 총리는 사퇴했다. 반면 그 편의점은 도호쿠 대지진 발생 땐 재난 물류센터를 넘어 정보센터 역할까지 했다. 이렇게 일본인에게 편의점은 민간 기업이 만든 사회안전망이자 가장 신뢰받는 공공서비스 체계가 됐다. 편의점은 이제 물품을 사는 곳이자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경험하는 곳이다. 일본 지방정부들은 편의점과 재난 대비 협정을 맺었고 중앙 정부는 ‘재해 시 편의점 정보 시스템’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같은 역할을 미국 뉴욕에서는 공공도서관이 더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15년 전 9·11테러 때도, 4년 전 허리케인 샌디가 뉴욕을 강타했을 때도 뉴욕 시민들은 도서관 홈페이지부터 찾고 이재민은 도서관에 가서 숙식을 제공받았다.

9·11테러 때 도서관 홈페이지는 공포를 조장하는 대중매체와 달랐다. 대피소를 제공하고 자원봉사와 헌혈을 연결했고 소식이 끊긴 사람을 찾게 도와줬다. 또한 이슬람의 역사와 정치를 선입견 없이 이해하게 프로그램을 만들고 트라우마 치료와 상담을 제공했다. 평소에 뉴욕 공공도서관은 보건소이자 취업센터이고 창업교실이며 편의점이자 동주민센터이고 결혼식장이자 예술극장이다. 이러니 테러와 허리케인은 물론 영화 <투모로우>의 한파와 쓰나미에도 마지막 피난처는 공공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두 사람의 기금을 토대로 비영리단체가 시민 기금과 정부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우리는 어떤가. 편의점은 모르겠으나 민간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수지의 느티나무도서관이 으뜸일 게다. 자치구와 마을이 협력해 만든 공공도서관으로는 은평의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있다. 자치구가 만든 공공도서관의 혁신 사례로는 성북의 10개 구립도서관이 있다. 이들 도서관의 공통점은 ‘도서관답지 않게’ 주민의 생활과 결합하며 집단지성의 공간으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서울에는 구립 공공도서관만 123개가 있다. 작은 도서관은 905개가 있다. 이는 동주민센터와 투표소에는 못 미치나 그 다음으로 많은 수다. 우리 동네의 민주주의는 지금 이들 도서관에서 생활문화의 혁명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곳이 재난의 그날이 왔을 때 위안과 환대와 격려를 기대하며 찾는 우리 동네의 피난처였으면 좋겠다.

김종휘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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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기 대선이 1년2개월 앞으로 다가오면서 대선주자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 7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정책 싱크탱크를 발족시키면서 트위터상에서 관련 언급이 급증했다.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 3~9일 트위터상에서 이슈가 된 핫 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싱크탱크’가 1위를 차지했다. 야권의 유력 대권주자인 문 전 대표가 자신의 싱크탱크인 ‘정책공간 국민성장’ 창립 심포지엄을 개최해 트위터에서 ‘싱크탱크’ 키워드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심포지엄에는 정계 및 학계 인사 600~700명이 모여 대선 후보의 출정식을 방불케 했다. 심포지엄에서 문 전 대표가 발언한 “정권교체 넘어 경제교체를 이루겠다”, “국민이 돈 버는 성장 시대를 열겠다”는 말이 트위터에서 다수 공유됐다.

지난 8일 서울 여의도 63빌딩 앞 한강공원 일대에서 열린 ‘2016 서울세계불꽃축제’도 트위터에서 많이 언급됐다. 2000년 첫 행사 이후 올해 14회째를 맞는 불꽃축제에는 관람객 100만여명이 모여 성황을 이뤘다. 이날 트위터에 불꽃축제를 촬영한 사진과 영상이 공유돼 축제 현장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전했다.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서울시교육청 국정감사에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에게 “MS사의 ‘MS오피스’ 프로그램을 왜 수의계약으로 구매했느냐”고 질타한 이은재 새누리당 의원의 발언이 논란이 되면서 트위터에는 ‘아이폰을 왜 애플에서만 사느냐’, ‘갤럭시는 왜 삼성에서만 사느냐’ 등 이 의원의 발언을 비꼬는 얘기들이 다수 올라왔다. 이 의원은 기자회견을 통해 MS오피스의 구매입찰에 4개 업체가 참여해 47억원에 계약을 했는데 한글오피스의 경우 1개사가 참여, 유찰돼 35억8187만원에 수의계약한 것과 관련해 유착 의혹을 제기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트위터에는 ‘질의가 잘못됐다’, ‘답변에도 문제가 있다’ 등의 의견이 오갔다. 이와 함께 국감장에서 삿대질을 하고 고성을 지른 이 의원의 태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컸다.

목정민 기자 mo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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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 전, 페루에서 국가폭력, 학살이 담긴 사진을 보았다. ‘아야쿠초’라는 마을 이름이 보였다. 리마에서 꽤 떨어졌고 더 가면 마추픽추다. 민박 주인이 왜 마추픽추에 안 가냐 했다. 이미 알아버린 이름, 아야쿠초 때문이었다.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길을 나섰다.

버스가 밤새 달려 아침 무렵 아야쿠초에 다다랐다. 한 건물 바깥벽 그림이 눈에 띄었다. ‘기억박물관’이다.

3층 전시실에는 희생자 생전 사진, 마지막에 입은 옷, 학살 현장 사진, 그림, 조형물, 한 여성이 “왜 내 아들을 죽였는가?”라고 쓴 팻말을 든 사진, 부모나 형제자매를 잃은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 진실을 밝히려 20여년 투쟁한 여성들의 사진, 지나온 과정 기록이 있었다. 담당자한테 설명을 듣다 왈칵 울었다. 여자가 나를 꼭 안아주었다. 시간과 공간이 아무리 떨어져도 사람은 이어졌다.

십년 뒤, 한국·안산·고잔동에서 ‘416기억저장소’와 ‘416기억전시관’을 본다. 부서진 304명의 꿈이 생명을 존중하는 세상으로 피어나게 ‘기록하고 기억하며 행동’ 하자 한다. 지난주 금요일, 상가건물 3층 416기억전시관 전시실에서 단원고 2학년 2반 김수정 아빠가 시를 읽었다.

“수정아, 보고 있니?/ 아빠가 네 얼굴을…” 1연 2행 한가운데서 소리가 뚝 멈춘다. 앞에 선 아빠도, 바닥에 앉아 듣던 사람들도 모두 침묵에 갇힌다. 긴 침묵을 함께 견딘다. 그 속에 얼마나 많은 말이 들었을까. “아빠가 네 얼굴을 십자수로 떴어./ 하루에 9시간씩 11개월이나…” 가까스로 이은 시가 다음 행에서 다시 끊긴다. “…십자수 바늘을 붙들고 있었어.” 남은 행과 연을 아빠는 포기하지 않고 다 읽었다.

기억시 낭송문화제 ‘금요일엔 함께하렴’은 지난 9월23일에 시작해 내년 4월14일까지 금요일마다 오후 7시에 열린다. 2주나 3주에 걸쳐 한 반씩 아이들을 시로 읽고 만난다. 교사 모임 ‘교육문예창작회’ 작가 35인이 단원고 학생과 교사의 삶을 시로 썼다.

“3년 가까이 되는데 진실이 밝혀진 게 없다. ‘이제 그만 하지’라는 말을 들으면 억장이 무너진다. 딸 하고 약속한 게 있다. ‘네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밝혀내겠다.’ …딸과 한 약속을 지켜서 이 나라가 반듯하고 안전한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두 번째 금요일에 1반 유미지 아빠가 한 말이다. 유가족 이야기, 진상규명·세월호 인양 이야기, 안산 주민 이야기, 가수의 노래 순서도 있다. 다른 이의 말과 시, 노래에 귀 기울이다 보면 어느덧 두 시간이 지난다. 8반 이재욱 엄마는 “기억시 낭송이 하나의 저항이라 생각한다”고 했다.

화가 홍성담 그림 전시회 ‘들숨ː날숨’도 함께한다. 참사 1000일인 2017년 1월9일까지 전시한다. 유가족이 안내원, 도슨트로 시민과 만난다. 단체로 관람을 올 때는 미리 연락을 주면 좋다. 1반 한고운 엄마가 ‘2014년 4월16일 오전 10시20분’이라는 그림을 말한다. 세월호가 110도 기운 시각, 그림 속 아이들은 흰 눈물을 흘리며 가라앉는 배 안에서 창밖을 바라본다. “저 아이의 눈은 무엇을 바라보고 있을까요? 저 아이의 눈은 어디를 바라보고 있을까요? 우리 아이들의 꿈과 희망, 사랑했던 엄마 아빠, 모든 것들과 이별하는 얼굴입니다. 그날, 해경들은 구조를 위해 달려왔지만 저희 아이들의 간절한 눈빛을 외면한 채 제일 먼저 선원들만 구조했을 뿐입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바다 속에 잠겨서 하나둘 죽음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7반 허재강 엄마가 목단 가득 핀 그림 ‘내 몸의 바다2’ 옆에서 화가가 한 말을 전한다. “그 마지막 물고문 학살의 고통스러운 순간에 직면하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유가족이 먼저 용기를 갖고 직면을 하게 된다면 국민들도 아이들의 고통스러운 죽음의 순간을 대면할 것입니다. 이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생명의 귀중함을 알게 되며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평등하게 대접받아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만이 제2의 세월호 학살을 막을 수 있습니다.” 엄마들이 눈물을 삼키며 그림을 설명하는 이유다.

세월호, 안산, 고잔, 단원고…, 이미 당신이 알아버린 이름. 사진과 영상은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길을 나서보자. 416기억전시관에서, 그림과 시와 말 사이에서 곰곰 오늘을 만나자. 안내하는 이의 설명을 듣다 왈칵 울어도 된다. 발걸음이 이어지면 진실규명에 힘내자, 함께하자는 응원이 되리라.

박수정 | 르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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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1900년>(1976)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 어느 날 이탈리아 농촌 마을에서 각각 소작농과 지주의 자식으로 태어난 올모(제라르 드파르디외)와 알베르토(로버트 드 니로)의 우정과 일생을 그린 영화다. 5시간이 넘는 영화지만 장면들은 거의 기억나지 않았다. 두 배우가 출연했다는 건 기억했지만 그마저도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저렇게 생겼었구나’ 싶었다. 덕분에 마치 처음 본 영화처럼 영화 속 현실을 오늘 현실에 비추어가며 볼 순 있었다.

일러스트_ 김상민 기자

영화의 끝 무렵, 1945년 이탈리아는 파시스트에게서 해방되고 지주 알베르토는 소작농들에게 체포되어 둘러싸인다.

올모는 말한다. “우리가 너를 비난하고 과거가 너를 비난하고 있어. 이제 지주는 없어. 지주는 죽은 자야.”

무력한 얼굴로 “난 아무도 해치지 않았어.” 읊조리는 알베르토에게 소작농들이 다가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제대로 알아들은 거라면 난 죽은 사람을 보는 거네.” “이 친구 살아 있어, 몸이 뜨거워. 시체는 차가워지는 법인데.”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리에겐 그가 죽었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소작농들은 마치 노래하듯 목숨의 의미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올모를 굳이 죽이지 않음으로써 실은 이미 죽은 사람임을 내내 진열하기로 한다.

우연치곤 묘한 일이었다. 영화를 보기 며칠 전 나는 페이스북에 이렇게 적었던 것이다. “목숨이란 무엇인가? 몸은 살아 있되 목숨은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몸은 죽었지만 목숨은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다. 몸은 죽은 지 수백수천 년이지만 여전히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의 생각을 깨우치며 행동하게 하는 사람들도 있다. 농민 백남기는 살았고 의사 백선하는 죽었다. 백선하는 실은 자신의 사망 진단을 했다.”

신약성서 복음서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목숨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복음(하느님나라 운동)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입니다.” 예수는 사람에게 두 가지 목숨이 있음을 말한다. 예수는 육체의 목숨을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는 사람들을 언제나 정성으로 대하며 치유하곤 했다.

그러나 예수는 말한다. 육체의 목숨과 그에 관련한 삶의 가치들이 전부인 양 집착할 때 사람은 진정한 목숨을 잃는다. 예수의 부활 사건도 같은 맥락의 일이다. 예수의 부활이 단지 예수의 죽은 육체가 되살아난 사건이라면, 뿔뿔이 도망쳐 예수와 관계마저 부인하던 제자들이 갑자기 돌아서서 죽음을 두려워 않고 예수의 복음을 전할 이유가 없다. 죽은 육체가 사흘 만에 살아났다는 건, 단지 육체가 사흘 동안 노화를 멈추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부활은 제자들이 예수가 말한 ‘목숨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는 사건이었다.

<1900년>에서 소작농들은 제 노동으로 평생 지주만 배 불리는 일이 하늘이 정한 운명이 아님을 깨닫고 싸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단지 불의한 경제 구조를 변혁하는 일이 아니다. 목숨의 의미를 확인하는 일이며, 새롭게 태어나는 일이다. 물론 그들은 충분히 단련된 투사나 지사가 아니기에 늘 용감하기만 할 순 없다.

파시스트 패거리가 그들 중 한 사람을 보란 듯 린치할 때 그들은 두려움에 움츠러든다. 보다 못한 그들 중 하나가 피해자의 이름을 외치며 다가가다 총에 맞고 쓰러진다. 한 여성이 제 가슴을 풀어헤치며 항의하다 역시 쓰러진다. “총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친 사람이 쓰러지고, 누군가가 그들의 노래를 휘파람으로 불기 시작한다. 차례로 총을 맞고 쓰러지지만 휘파람은 멈추지 않는다.

목숨을 그렇게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도 모른다. 제 신념에 대해 사람들에게 설명하거나, 정연한 성명서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고작 휘파람을 불다 죽어가는 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휘파람은 ‘나는 살아 있다’는 확인이자 ‘너희는 이미 죽었다’는 선언이다. 그들은 그렇게 목숨을 포기함으로써 목숨을 얻는다.

2016년 한국의 백남기도 그렇다. 농민운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이름을 전에 들어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의 생각이 담긴 저작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결코 유명 인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를 단지 억울하게 죽은 희생자로 여기지 않고 마음 깊이 존경심을 갖는다. 우리는 그의 휘파람 소리를 듣는다.

목숨의 의미를 잊지 않는다고 해서 다 성인(聖人)이 되는 건 아니다. 영화 속의 등장인물이 되거나 당장 육체의 죽음을 맞아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그런 사람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존경과 추모의 대상으로 삼아 내 삶으로부터 밀어내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휘파람 소리를 듣고, 그들과 함께 내 휘파람을 부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이 ‘세상이 다 그런 거지’ ‘현실이 어쩔 수 없지’ 할 때 ‘그래도 사람이 그러면 안되지’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세상을 바꿔내야지’ 마음먹는 것이다. 수많은 살아 있는 시체들 속에서, 내가 정말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김규항 |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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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게 많지 않다.” 가진 게 충분치 않다는 얘기다. ‘-지 않다’는 앞말이 의미하는 행동이나 상태를 부정하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게 ‘-지 않다’의 자연스러운 쓰임새이고 본뜻이다. 한데 요즘 ‘-지 않다’가 글말과 입말에선 달리 쓰이기도 한다.

“이건 너무 많지 않아?” 많다는 뜻이다. 의문형으로 바꾸었을 뿐인데 반대 의미가 되었다. 의문형으로 끝난 ‘-지 않다’에선 부정의 뜻을 찾기 힘들다. 단순히 ‘많다’를 강조하는 역할만 한다. ‘않다’의 본래 뜻을 잃어버린 것이다.

“너무 많잖아.” 이 또한 많다는 소리다. ‘많지 않아’가 줄어든 말이 ‘많잖아’다. ‘많다’의 어간에 ‘-지 않아’가 결합한 말이지만 부정의 뜻은 없다. 이는 ‘-지 않아’가 줄어든 표현인 ‘-잖아’로 굳어져 쓰이면서 새로운 뜻을 얻었기 때문이다. ‘귀찮잖아’ ‘예쁘잖아’ ‘힘들잖아’ ‘이야기했잖아’에서 보듯 ‘-잖아’로 굳어진 표현이 널리 쓰인다. 이 ‘-잖아’는 말하는 이가 듣는 이에게 자신의 말이 맞지 않느냐고 상기시키면서 핀잔하듯이 말함을 나타내는 관용구처럼 쓰인다. 일부에선 부정의 ‘-지 않다’의 축약형과 구분해 ‘구어 종결어미 -잖아’로 부른다.

“사람이 많지 않아 좋다.” 종결형과 달리 연결형일 때는 ‘-지 않다’의 본뜻으로 읽힌다. 이땐 ‘많잖아’로 거의 줄여 쓰지 않는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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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심에서 증거능력을 인정받았던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마지막 인터뷰가 2심에서는 “믿을 수 있는 증거로 보기 어렵다”는 판단을 받았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이완구 전 국무총리가 2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이다. 죽음을 결심하고 성 전 회장이 남긴 마지막 진술의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트위터코리아가 빅데이터 분석업체 다음소프트와 함께 지난달 26일~지난 2일 트위터상에서 가장 이슈가 된 핫키워드를 분석한 결과 ‘성완종 리스트’가 1위를 차지했다. 성 전 회장은 사망 직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 전 총리를 비롯해 자신이 돈을 건넨 정치인들과 시점, 액수 등을 밝혔다. 1심에서는 성 전 회장의 인터뷰를 신뢰할 수 있는 증거로 판단했지만, 2심에서는 “특별히 믿을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기 힘들다”고 판단했다. 트위터에도 돈을 줬다는 성 전 회장의 사망 전 인터뷰에 대한 재판부의 설명내용이 언급되며 공방이 오갔다.

시행 일주일을 맞은 ‘김영란법’(청탁금지법) 역시 화제의 대상이 됐다. 시행 초기에 ‘시범케이스’가 돼서는 안된다는 긴장감 탓에 골프장, 고급식당 등의 예약이 줄어든 것으로 집계됐다. 트위터에서는 직장 및 사회 생활에서 유의해야 할 점을 담은 정보들과 식당, 골프장 등 관련 업계의 반응이 다양하게 공유됐다.

지난달 25일 끝내 숨을 거둔 백남기씨의 사망원인을 놓고 ‘부검영장’과 ‘사망진단서’ 등도 핫키워드에 올랐다. 특히 서울대병원 특별위원회가 백씨의 사망진단서가 일반적인 사망진단서 작성 형태와 차이가 있고, 작성 지침 원칙에 어긋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트위터 내 비판이 거세졌다. 여기에 특별위원회 이윤성 위원장(서울대 의대 법의학교실 교수)의 “만약 내가 주치의였다면 ‘병사’가 아니라 ‘외인사’로 기록했을 것”이라는 발언이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트위터에서는 서울대 의대 학생이 발표한 ‘선배님들께 의사의 길을 묻습니다’ 성명서가 다수 공유되고, 적극적 치료를 거부해 병사했다는 주치의 백선하 교수의 의견에 대한 유가족들의 반박 자료도 활발하게 공유됐다.

이윤주 기자 runy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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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하는 7일 동안, 국내외 작가들과 광화문의 한 숙소에 머물며 대학로를 오갔다. 점심 식사 후에는 국내외 작가 2명이 짝을 지어 독자들 앞에서 대화를 했고, 저녁 에는 자신의 문학작품을 다른 예술 장르로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서울국제작가축제를 통해 다시 확인한 사실은 한 사람의 작가는 하나의 독립된 행성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행성을 알아보기 전까지 작동하는 것은 각자의 나라에 대한 선입견과 정체성이다. 시인 T J 제마와 처음으로 인사하면서 그녀의 나라 보츠와나를 상상하고, 소설가 퉁 웨이거와 마주하면서는 익숙한 듯 새로운 대만을 떠올리는 것이다. 콜롬비아, 아프가니스탄, 북아일랜드 등지에서 온 14명의 외국 작가들은 다채로운 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중 부지불식중에 나를 사로잡곤 했던 작가들은 파리에서 온 알렉시스 베르노와 린다 마리아 바로스, 그리고 금희이다.

한국문학번역원 주최 '2016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여한 소설가 김숨과 금희가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작가들의 수다' 행사를 함께 하고 있다. 연합뉴스

베르노와 바로스는 파리에서 온 시인들이다. 이들의 국적이 프랑스인데, 지금 나는 이들이 프랑스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파리에서 왔다고 소개하고 있다. 베르노는 파리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계속 파리에서 살고 있는 순수 파리지앵이다. 바로스는 루마니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 파리로 건너와 교육을 받았고, 현재 파리에 거주하고 있는 이민자 출신이다. 바로스는 현재 파리 시단(詩壇)의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녀는 1981년생의 젊은 시인이지만, 이미 프랑스 최고의 시문학상인 아폴리네르 상을 받았고, 6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베르노는 앙리 미쇼와 앙토냉 아르토를 추종하는 시인이자 영문 번역자로 첫 시집을 출간한 상태이다.

내가 베르노와 바로스를 눈여겨보게 된 것은 이들이 문학예술을 추동시키는 원천인 야생성을 확인할 수 있는 흥미로운 접점이기 때문이었다. 베르노는 부드러운 음색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참가 작가들에게 파리지앵의 진면목을 보여주었고, 바로스는 예민한 성정 속에 매우 성실한 태도가 묘하게 공존하는 매혹적인 모습을 선사했다. 나는 바로스를 통해, 어쩔 수 없이, 그녀와 동향인 루마니아 출신의 에밀 시오랑과 미르시아 엘리아데, 외젠 이오네스코를 떠올렸다. 이들은 불가리아의 크리스테바, 아일랜드의 베케트, 러시아의 로맹 가리처럼 태생지를 떠나 파리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이방인들이다. 이들이 없었다면, 20세기 파리의 문학예술은 초라했을 것이다.

바로스를 보며 내가 되돌아본 것은 한국 문학의 현주소다. 이번 참가자 중, 중국을 대표한 소설가 금희는 옌볜 출신으로 축제 기간 내내 주로 한국어를 구사했다. 그녀의 존재는 그동안 내가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한국 문학의 순혈성, 아니 배타성을 환기시켜 주었다. 축제가 끝난 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한국 문학에서도 이제 바로스와 금희와 같은 강력한 이방인들을 만날 수 있을까. 기대만으로도 가슴 벅찬 일이다.

함정임 | 소설가·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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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