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9일. 어떤 날을 거기까지 세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최강 한파가 덮친 지난 금요일, 세종로공원 한편에 세워진 작은 텐트를 찾았다. 기타 생산업체인 콜트콜텍 노동자들의 농성장이다. 4000일, 예정된 특별한 행사는 없다고 했다. “해탈한 것 같아요. 4000일이라고 뭔가 요란스레 할 것도 없고.” 그리고는 언제부턴가 시작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의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고 했다.

나오는 길에 책 한 권을 받았다.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 임재춘씨의 농성일기를 묶어 펴낸 것이다. 집에 돌아와 한쪽한쪽, 그러니까 이들의 하루하루를 읽어가며, 나는 억울했던 날, 희망찼던 날, 정의를 울부짖던 날을 보았다. 그러다 책 제목을 다시 보고 알았다. 3999일이라는 긴 시간에도 가질 수 없었던 날이 있었음을. 하루를 이어 붙여 4000일을 만들어도 이를 수 없는 날이 있었음을. 그건 바로 ‘내일’이다. 해고된 날 사장이 빼앗아간 ‘내일’ 말이다.

5년 전쯤 이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적이 있다. 우리 송년행사에 이들이 결성한 밴드 ‘콜밴’이 왔다. 그때 표정이 너무 밝았기에 나는 그 해에 대법원의 끔찍한 판결문이 나왔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했다. “투쟁을 안 했다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겠어요? 악덕 사장 만난 덕에 이 나이에 밴드도 하고 연극도 해보고….”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즐겁게 투쟁한다면 힘든 싸움이지만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거라고. 그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난주 콜트콜텍의 농성이 4000일이 되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4000일이라는 긴 시간은 날을 늘리지 않기 위해 이들이 필사적으로 몸부림쳐온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래하는 가수, 연극하는 배우, 고추장 만드는 농사꾼, 책 쓰는 저자가 되었던 것은 이들이 노동자로 남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5년 전쯤 내가 가수가 되고 배우가 된 노동자들에게 감탄하던 때, 이들은 그전 5년을 본사를 점거하고 철탑에 올라가고 분신을 하고 목까지 맸던 사람들이다. 악기박람회, 록페스티벌을 찾아다니며 해외 원정 투쟁도 벌였다. 그 후 다시 5년, 이들은 더 이상 잘 할 수도 없고 더 이상 잘 할 필요도 없는 묵묵한 해탈의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무슨 복잡한 사정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한 걸까. 큰 억울함은 복잡한 것에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것에서 온다. 너무나 뻔한 불의를 인정하지 않고 더 나아가 그것을 정의로 포장할 때 우리의 밑바닥 정의감이 뒤집어지는 것이다.

콜트콜텍의 사정도 단순했다. 2006년 4월 콜텍에 노동조합이 설립되었다. “자꾸 창문을 쳐다보면 생산성이 떨어진다”며 창문 하나 만들지 않은 공장. 이런 공장이 어떻게 운영되었을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각종 유기용제와 분진이 가득한 작업장, 강제된 잔업, 성차별과 추행. 거기에 대규모 구조조정까지 시작되었다. 이때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수단이었다.

그런데 노동조합 설립 1년 후 노사협의회가 예정된 날 사장은 공장의 모든 출입문을 폐쇄하고 폐업절차에 들어갔다. 그리고 모회사인 콜트에서도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했다. 더 이상 주문량이 없다는 이유였다. 그것은 당연했다. 물량을 중국이나 인도네시아 공장으로 돌렸기 때문이다. 매년 순이익을 60억원 이상씩 내고 폐업 직전에도 주문량이 늘었다며 임금인상에 합의한 회사가 물량이 없다며 폐업신고를 한 것이다. 지방노동위와 중앙노동위는 콜텍의 직장폐쇄와 콜트의 정리해고가 부당하다는 판정을 내렸다.

법정싸움이 이어졌다. 당연한 것이 뒤집힐 수는 없었다. 그런데 2012년 대법원은 고등법원 판결을 교묘하게 비틀었다. 사실상 한 회사인 콜트와 콜텍을 분리하고, 콜트악기에 대해서는 부당해고를 인정했지만, 콜텍에 대해서는 “장래의 위기에 미리 대처하기 위한 인원감축도 정당”하다며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고등법원에서는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없다며 부당해고라고 했던 것을 대법원은 ‘긴박함’을 ‘장래에 있을 수도 있는 위기’로까지 확대했다.           

모두가 ‘긴박함’이라는 말뜻에 고개를 갸웃하고 있을 때, 사장은 콜트악기 공장까지 매각해서 그나마 대법원이 부당해고를 인정한 노동자들의 복귀도 막아버렸다.

이것을 인정할 것인가. 이 단순한 질문이 지난 4000일간 농성노동자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미래의 점을 치듯 서초동 대법관이 내린 판결에 내 양심의 법관이 펄쩍 뛰는데 달리 어쩌겠는가. 그래서 이들은 내일로 못 간 채 오늘을 붙들고 수천 일을 보내고 있다. “아이들에게 오늘을 물려줄 수는 없어요.” 너무나 뻔한 부당해고와 위장폐업, 너무나 어이없는 판결문을 쥐고 오늘 아플지언정 내일로 넘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2012년 이들은 <햄릿>을 무대에 올린 바 있다. 햄릿은 그의 사명이 ‘이음매가 어긋난 시간’을 바로잡는 데 있다고 했다. 시간이 어긋나니 과거는 어제가 아닌 오늘을 살고 미래는 내일이 없는 오늘에 붙는다. 이 불의의 시절이 4001, 4002로 숫자를 이어간다면, 그래서 우리가 오늘을 늘려 내일로 삼는다면,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지금, 시간을 바로잡아야 한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희곡은 연극의 대본이다. 따라서 연극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다. 하지만 희곡은 하나의 완결된 문학 작품이기도 하다. 문학의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은 것은 고대 그리스, 아리스토텔레스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래된 일인데 어쩐 일인지 출판되는 희곡집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내로라하는 문학 출판사들도 어쩌다 고전이라 할 수 있는 희곡들을 모아 선집을 내는 경우는 있어도 현장에서 상연되는 뜨거운 목소리를 담는 경우는 드물다. 문학으로서의 희곡이 독자를 잃고 공연의 대본으로만 남았다.

2년 전쯤, 남산예술센터의 우연 극장장이 극장에서 상연되는 희곡을 출간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이 시대의 가장 뛰어난 창작 희곡을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우리나라에 몇 개 되지 않는 제작 극장의 제안이었기 때문에 기꺼이 응했다. 희곡을 읽는 문화가 없는 상황에서 판매를 기대하기는 어려웠지만 다시 사람들이 희곡을 읽을 수 있도록 출판이 버팀목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연극을 배우는 학생들이 복사지를 들고 희곡을 읽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고 문학 독자들에게 희곡의 즐거움을 돌려주고 싶었다. 입말로 이루어져 소리 내어 읽기 좋고 대화로 이루어져 그 사이를 독자의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희곡은 다른 어느 장르보다 읽는 즐거움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믿음도 있었다.

이렇게 시작한 <이음 희곡선>은 출발부터 쉽지는 않았다. 첫 권으로 준비했던 박근형의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도화선이었고 가장 큰 논쟁을 불러일으킨 작품이었다. 이 희곡을 촛불 정국 이전에 출간하면서 직접 극장에 오지 못하는 독자들에게도 작품의 진가를 알릴 수 있었으면 했다. 책의 가격은 극장에 직접 온 관객들이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있도록 5500원으로 정했다. 도서정가제를 고려하면 현장에서 5000원에 판매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연극을 보고 희곡집을 손에 들고 가서 다시 연극을 떠올리기도 하고, 연출과 다른 방식으로 마음속의 연출을 해 보기도 했으리라. 극장에 직접 온 관객들에게는 호응이 좋았지만 서점에서는 독자들이 아직 희곡을 많이 찾지는 않는다.

실제로 무대에 작품을 올리면서 희곡집도 같이 출간하기 때문에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생기기도 했다. 고연옥 작가의 희곡 <처의 감각>을 출간 준비하면서 고선웅 연출이 실제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을 함께하고 있을 때였다. 작가와 연출이 따로 있을 때, 현장의 조건과 배우, 스태프들의 상황, 그리고 연출의 의도 때문에 희곡이 원본과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처럼, 텍스트로 고정한 희곡의 출간과 작품의 상연이 함께 이루어질 때, 둘 사이의 조정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잠시 고민을 했다. 물론, 독자들에게 주어진 책은 고연옥 작가의 텍스트였고, 극장의 관객들은 실제 연극과 희곡의 차이를 비교해 보면서 둘 사이의 간격 속에서 나름의 의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남산예술극장과 시작한 협업은 두산예술센터 강석란 감독과의 협의 끝에 김은성 작가의 <선샤인의 전사들>을 출간하는 것으로 극장의 범위가 늘어났다. 최근에는 서울시극단의 김광보 예술감독과 함께 극단에서 공연할 장우재 작가의 <옥상밭 고추는 왜>를 출간하는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국립극단의 이성열 예술감독에게 극장에서 상연할 창작희곡이 있으면 함께 책도 만들어 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해볼 생각이다. 이성열 감독이 연출한 고영범 작가의 <에어컨 없는 방>이 이미 <이음 희곡선>으로 출간되어 있기 때문에 이 작업의 의미를 잘 알고 계시리라 기대하고 있다. 책의 표지에 희곡을 출판한 출판사 이름과 극장 이름을 함께 올리는 이 프로젝트가 어려운 시대의 문학과 공연에 작은 기여를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진행하고 있는 제안들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이 시대를 살고 있는 가장 예민한 촉수인 작가들의 창작물을 책으로 만드는 것은 그동안 잃어버렸던 독자와 관객을 찾는 일로 중요하다고 믿는다. 시를 한 번도 읽지 않았던 독자들이 시의 독자들로 돌아오고 있고 베스트셀러도 등장하고 있다. 이 독자들은 짧지만 강렬한 드라마를 담고 있는 희곡도 좋아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희곡은 무대를 상상하고 쓰기 때문에 극적인 긴장감이 있고 구체적인 사물이나 사건과 추상성 사이를 오가는 감정적인, 혹은 지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데 그만이다. 최근에 각광을 받고 있는 오디오 콘텐츠에 바로 적용이 가능한 가장 좋은 텍스트이다. 희곡의 즐거움을 읽고 들어보기를 권한다. 그 흥분을 안고 극장으로 향해 보는 것도 떨리는 일이다.

<주일우 | 이음출판사 대표>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검찰의 이미지 하면 흔히 떠오르는 것이 칼이다. ‘검찰의 칼날이 ○○을 향하고 있다’ ‘○○이 검찰의 칼을 피하지 못했다’ 등등 검찰 수사를 칼에 비유하는 표현들이 관행적으로 쓰여왔다. 검찰의 첫 글자 ‘검(檢)’과 칼을 뜻하는 ‘검(劍)’은 발음도 같고 한자 모양도 비슷해 더더욱 검찰과 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인다.

검찰의 심벌마크에도 칼이 들어가 있다. 대검찰청 홈페이지는 이 심벌에 대해 ‘중앙의 직선으로 칼을 형상화해 균형 있고 공평한 사고와 냉철한 판단을 표현했다’고 설명한다. 2004년 이 심벌이 만들어질 때 검찰을 출입하고 있었다. 당시 심벌 제작은 수개월이 걸렸는데, 당초 검찰이 시안으로 공개한 후보 8개 중 절반가량에 칼이 있었고, 나머지에는 칼이 없었다. 과연 검찰이 어떤 선택을 할까 기대했는데 결국 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질 못했다. 그런데 당초 시안에는 아래를 향하고 있던 칼끝이 최종 결정된 심벌에서는 아래위를 모두 향하게 그려졌다. 시안을 공개할 때 검찰은 칼끝을 위로 하면 공격적으로 보여 아래쪽으로 향하게 했다고 설명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칼끝이 심벌 밑에 쓰여 있는 ‘검찰’이라는 글자로 향하게 돼 자신들을 찌르는 모양새가 되다 보니 확정판에서는 칼끝이 위아래 모두에 달리게 됐던 것이다.

그렇게 검찰은 스스로 칼이 됐다. 실제 수사를 잘하는 특수통 검사를 ‘칼잡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의료계에서 유능한 외과의사를 그렇게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검찰의 본질적 기능은 칼을 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칼날(수사기관의 수사)에서 국민들을 보호하는 것이 검찰의 진짜 핵심 역할이다. 이런 인권보호 기능은 프랑스혁명 이후 근대 검찰 제도가 태동할 당시의 기본 취지였다. 그런데 검찰 스스로도 그렇고, 대부분의 국민들도 검찰은 수사를 하는 기관, 칼을 휘두르는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막말로 유명한 한 정치인은 얼마 전 검찰의 적폐청산 수사를 ‘망나니 칼춤’이라 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은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독점하고 있는 검찰의 막강한 권한에서 초래됐다. 그리고 이 무소불위의 권한이 비판을 받으면서 이제 검찰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2004년 검찰이 새 심벌을 만들 때 칼끝이 자신들을 향하는 것을 걱정했던 것이 현실화된 셈이다.

지난 수십년 동안 대한민국 검찰은 나름의 역사적 소명을 수행했다. 2003년 불법대선자금 수사 이후 어느 정당도, 어느 대기업도 선거 때 뭉칫돈을 받을 생각도, 줄 생각도 안 하게 됐다. 현재 진행되는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정치공작 수사가 마무리되면 앞으로 어떤 권력자도 정보기관을 선거나 정치에 이용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검찰 수사가 역사 발전에 기여한 부분을 인정할 만한 예다. 영화 &lt;1987&gt;에서 경찰의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은폐를 막은 최 검사처럼 검찰은 과거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주도한 고문과 불법이 난무했던 수사 행태를 법에 의한 형사사법시스템으로 전환하는 데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검찰의 역할도 역사적 임계점에 왔다. 수사와 기소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쥐고 있으면서, 검찰총장 1인이 지휘하는 일사불란한 단일조직이라는 검찰의 무소불위 위상은 민주화되고 탈권위화되고, 인권친화적이고 다양화된 현재의 우리 사회와는 더 이상 양립하기 어렵다. 맷돌이 인류의 생산력 발전에 큰 기여를 하며 중세 봉건시대를 발전시켰지만 결국 증기제분기에 자리를 내주며 자본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처럼 검찰개혁도 역사의 필연적 흐름이 된 것이다.

억울해하는 검사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영화나 드라마에서조차 정의를 수호하는 검사만큼 권력의 시녀가 되고 사건을 ‘엮는’ 검사들도 흔하게 볼 수 있는 게 현실이다. 이것이 지금 대중들이 검찰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얼마 전 국회가 사법개혁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청와대가 14일 권력기관 개편안을 강도높게 발표하면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설립과 검경 수사권 조정 등 검찰개혁에 대한 정치권의 본격적인 논의가 불붙게 될 것이다. 검찰개혁은 현 정부의 최대 공약이고 여당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하지만 최대 야당인 자유한국당이 공수처 설립 등을 반대하고 있어 논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아 보인다. 그래서 지난 십수년 동안 반복됐던 것처럼 또다시 검찰개혁이 흐지부지되거나 여야가 주고받기식으로 정치적 타협을 하게 될지 모른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왕 할 거라면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제대로 하는 것이 낫다. 어차피 검찰개혁은 시간이 문제일 뿐 갈 수밖에 없는 길이다.

<김준기 사회부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겨울 눈 오는 날 청계천 헌 책방엘 갔다 김종삼 특집 낡은 시 잡지 표지에 이름도 없는 내가 김수영 전봉건 김종문 신동문 김광림 시인과 함께 섞여 내다보고 있었다 움, 무우순, 무순(無順), 번외(番外)라고 금방 끼룩거렸다 성중천(性中天)이 거기 있었다 맨 꽁무니 기러기 한 마리여

그즈음 어느 겨울날 아리스 다방 골목길 과일 가게에서 김종삼 시인이 하얀 손수건 꺼내 조심스럽게 싸들던 홍옥 한 알과 김하림 시인도 이 겨울 생각났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열애 중인 그들이었다

 -정진규(1939~2017)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시인은 눈 오는 날에 찍었던 옛 사진 두 장을 기억의 서랍에서 꺼낸다. 한 컷은 헌 책방에 들렀던 때이고, 또 한 컷은 과일 가게에 들렀던 때이다.

시인은 책방에 가서 본 잡지의 표지에 자신이 여러 시인들 속에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한다. 비록 이름이 다른 시인들만큼 널리 알려져 있지 않았고, 또 밑천도 없는 때여서 자신이 기러기 행렬의 끝자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그 모임의 한데 섞임에는 배열이나 분류의 차례가 없고, 순번도 없고, 다만 하늘 아래 타고난 마음의 본바탕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었다고 회상한다. 또 하나의 필름에는 홍옥 한 알을 손수건으로 감싸서 들던 김종삼 시인이 있다. 사과를 흰 손수건으로 둘러싸 들어 올렸으니 사과의 빛깔이 더욱 더 선명하게 붉었을 것이다. 눈이 내리던 겨울 어느 날의 풍경들이었다.

재지 않고 터놓고 어울리고, 눈빛에서 마음을 읽을 수 있고, 서로를 격려하고, 멋스러운 데도 좀 있게 살았던 그 시절의 얼굴들. 열렬하게 생업과 세상을 사랑하며 살았던 때의 사진들이 따뜻하다.

<문태준 | 시인·불교방송PD>

'일반 칼럼 > 경향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홍옥 한 알  (0) 2018.01.15
멧새소리  (0) 2018.01.08
산산산  (0) 2018.01.02
  (0) 2017.12.26
겨울나무  (0) 2017.12.18
배 나온 남자  (0) 2017.12.11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자, 이제 마지막 기회다. 열심히 해보자. 안되면 되게 하라는 말 알지?” 고3 여름방학을 앞두고 담임 선생님이 종례를 이렇게 마무리하자 뒤에 앉은 친구가 말했다. “안되는 게 어떻게 돼요?” 캐나다 고속도로에서 ‘Zero Tolerance’라는 표지판을 볼 때마다 이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음주·과속 운전 금지 표지판 옆에 적혀 있는 이 문구는, 보통은 ‘무관용’이라 번역되지만 ‘안되는 건 절대 안된다’ 또는 ‘절대 안 봐준다’로 해석해야 더 실감이 난다.

평소 토론토는 서울보다 운전하기가 여러모로 편하고 수월한 도시이다. 인구 밀도가 낮고 덜 복잡하기도 하거니와 교통 법규가 비교적 ‘널널하고’ 운전자에게 자율성을 많이 보장하니 그럴 것이다. 도로 중앙선을 넘어 좌회전도, 유턴도 할 수 있다. 하지 말라는 것만 안 하면 문제될 것이 없다. 대신 금지 표지판이 붙어 있는데도 그것을 어기면 가차 없는 처벌이 뒤따른다. 새로운 환경에 익숙지 않은 초기 이민자들은 범칙금을 수업료처럼 내가며 교통 문화를 배우고 익히는 경우가 많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토론토에 살러온 직후 나도 단속 티켓을 연달아 받았다. 제한속도 20㎞의 공원 도로에서 38㎞로 달리다가 경찰을 처음 만났다. 며칠 후에는 빨간불에서 그냥 우회전했더니 경찰차가 비상등을 켜고 따라왔다. 일단 멈춤 위반. 처벌이 범칙금과 벌점으로 마무리된다면 별일 아니겠으나 문제는 그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단 보험료가 껑충 뛰고, 티켓이 여러 장 쌓이면 보험사에서 이듬해 재가입을 받아주지 않는다. 그 지경에 이른 운전자는 말썽꾸러기 전문 보험사를 찾아가야 한다. 보험료가 몇 배 비싸다.

보통의 경우가 이 정도이니 어린이 보호라든가 공공의 안전과 직결된 위반은 처벌 강도가 훨씬 더 높다. 비상등을 번쩍이며 경적을 울리는 소방차와 구급차, 멈춤 표지판을 올린 스쿨버스가 보이면 도로 위 모든 차량은 얼어붙은 듯 정지한다. 그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토론토 시민들의 질서의식이 참 높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봄이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산책이라도 나가면 겨우내 눈 속에 파묻혀 있다가 드러난 개똥이 지천이다. 동네 숲길에서는 사시사철 똥 밟기 십상이다. 물론 개를 끌고 나온 주인이 방치한 것이다.

빨간불만 보면 휴일 새벽 아무도 없는 좁은 도로에서도 본능적으로 브레이크를 밟는 사람들, 보는 사람 없으면 개똥을 그대로 두고 가는 사람들. 그들 모두 평범한 토론토 시민들이다. 법규 준수 여부는 개인의 양식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개똥의 경우를 보면 단속과 처벌의 영향을 확실히 더 많이 받는 것 같다. 경찰이든 공무원이든 눈에 불을 켜고 단속에 나선다면 개똥은 봄눈처럼 사라질 것이다.

느슨한 개똥 단속과는 반대로, 시민들을 늘 긴장하게 하는 단속이 있다. 물론 1순위는 시민 안전과 관련한 단속이다. 소화전 앞이나 소방도로에서 실수로라도 위반했다가는 인생이 피곤해질 만큼 가혹한 조처가 따른다. 운 좋게 단속을 피할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서, 소방서 앞 같은 곳에 주차한다는 것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2018년 새해 첫날 강릉소방서 앞에 차량들이 불법 주차했다는 보도(경향신문 1월1일자 ‘119 긴급차량 진출입 막은 해돋이 관광객의 안전불감증’)를 접하고 많이 놀랐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경포119안전센터 관계자의 말이었다. “새해 첫날임을 감안해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고, 계도·주의 조치만 했다.” 이 말은 관광객의 안전불감증을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널리 퍼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재가 새해 첫날을 알아보고 비켜가는 것도 아닌데, 소방서 앞에 불법 주차를 해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알려주었으니 말이다. 캐나다에서 대형 참사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안되는 건 하늘이 두 쪽이 나도 안되기 때문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가 놀고 있을 때 그녀에게 반한 제우스가 황소로 변장하여 나타났다. 이 황소에 관심이 끌려 에우로페가 그의 등에 오르자 제우스는 바다 건너 크레타섬으로 날아가 황소를 좋아한 그녀를 위해 하늘에 황소상을 남겨두었는데 이것이 황소별자리다. 이 공주의 이름 에우로페(Europe)는 영어의 유럽(Europe), 프랑스어의 외로프(Europe), 독일어의 오이로파(Europa), 러시아어 예브로파(Европа) 등 구라파의 다양한 명칭이 되었다. 이렇게 흩어진 자신의 이름을 빌린 국가들을 에우로페는 하나로 모으고 싶었을까. 오늘날 대부분의 에우로페 국가들은 정체성은 달라도 유럽공동체로 통합되어 거대한 국가가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단군의 단일자손이면서도 70년을 넘게 적대시하며 갈라져 있는 한반도는 날이 갈수록 초라해 보인다. 통일의 열기도 갈수록 식어져 독일이 지불한 막대한 통일비용에 대한 우려에서 남북의 통일에 부정적인 층도 있다고 한다. 이는 통일비용만 생각했지 분단비용은 염두에 두지 않은 근시안적인 사고로 분단에는 돈뿐 아니라 심리적인 피해까지 따르는데도 말이다.

이렇게 통일에 제일 부정적으로 작용하는 층으로 정치인들을 꼽을 수 있다. 일부 지도자들과 이들을 추종하는 정치꾼들은 남북의 분단이라는 민족의 수치도 모자라 영호남 등 남한까지 갈라 이중분단을 저질러 왔다.

오직 권력만이 관심거리인 이들은 힘든 현실에 대처하기보다 자신의 지역만을 챙기고 상대 지역에 반감을 일으켜 쉽게 당선되면서 한결같이 애향, 애교, 애국 등을 내세운다. 이들이 전략적인 애교를 부르짖을 때 동창회조차 없는 독일 대학은 세계적 수준으로 상승하여 다수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다. 무려 4000종류의 맥주에 전 세계 맥주공장의 3분의 1을 지닌 독일의 애향은 자기 지역의 맥주를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아름다운 지역감정이 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지역감정은 대결의 구도를 넘어 적대감으로 악화되어 미국의 인종 문제나 중동의 종교분쟁같이 국가의 재난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이념이 같은 남한을 분단시키면서 이념이 다른 민족과 남북통일하자는 외침은 훈장을 주렁주렁 차고 있는 이완용을 연상케 한다.

서양이 근대 300여년에 걸쳐 판단과 감정을 분리하는 훈련을 받을 때 당파싸움에 익숙해진 탓인지 우리는 진보나 보수, 좌우익, 영호남 등으로 갈라지고, 독재정권에 저항만 해도 좌익이나 빨갱이로 낙인찍는 반공이 득세하였다. 하지만 과거 강력한 반공국가로 우리의 최대 우방이었던 대만과 단절하고 한국전쟁의 주적이었던 공산중국과 수교할 때 극단반공주의자들은 왜 그리도 침묵했는지. 국익을 위해 공산권 중국은 받아들이면서 같은 민족인 북한에 약간의 편향만 보여도 좌익이나 빨갱이로 규탄하는 그들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하지만 남한과 북한은 같은 민족으로 동질성이 많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지역만을 챙겨 민족의 정서를 오염시킨 정치에는 공통점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정치를 벗어나 학계, 문학, 예술, 체육 등의 공동체가 양국의 변천에 내포된 공통점을 찾아 통일을 추구해야 하겠다. 유럽통합의 동기도 원래 정치가 아니었다. 1916년 당대 최고의 문학가 로맹 롤랑은 머지않아 민족의 갈등이 끝나고 유럽의 공동체가 형성된다고 예언했는데 후에 유럽은 정말로 통합되었다.

불구대천의 원수로서 철옹성과 같은 반목의 벽을 쌓던 미국과 북한을 가장 가깝게 했던 사건도 정치가 아니고 2008년 2월27일 평양에서 연주된 로린 마젤이 지휘한 뉴욕필하모니였다. 이때 북한의 청중들은 성조기를 앞세운 그들에게 기립박수를 보냈다.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맺게 된 동기도 나고야세계탁구경기(1971)였고, 우리도 시드니 올림픽(2000) 등에서 남북단일팀으로 통일의 정서에 접근하기도 했다. 북한의 스포츠팀과 여러 단체가 참가하는 평창 동계올림픽에 큰 기대를 걸어본다.

<안진태 | 강릉원주대 명예교수>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최저임금 인상을 앞둔 지난해 말 232가구가 거주하는 울산 태화동 주상복합아파트 리버스위트에는 안내문이 내걸렸다. 새해부터 최저임금이 인상돼 부득이하게 관리비를 올릴 수밖에 없어 2가지 안으로 입주민 투표를 실시한다는 내용이었다. 투표안에는 최저임금 7530원에 맞춰 경비원의 급여를 인상하는 방안과 휴게시간을 1시간30분 늘리고, 경비원 수를 감축하는 방안이 담겼다. 입주민 투표결과 경비원 급여를 인상해야 한다는 의견이 68%였다. 경비원들은 노동시간 조정이나 인원변동 없이 일자리를 지킬 수 있게 됐다. 입주민들은 최저임금 인상으로 매달 9000원가량의 관리비를 더 내야 했지만 비용을 나누며 함께 사는 쪽을 선택했다. 입주민들은 “공동체의 일원인 경비원에게 지출하는 비용은 비싸지도, 아깝지도 않다”며 상생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입주민 투표를 주도한 주민자치위 관계자는 “가구당 1만원이 되지 않는 관리비 인상액 때문에 입주민을 위해 일해온 경비원들을 해고하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울산 리버스위트 아파트 입주민들은 최저임금 인상 부담을 나눠 지며 ‘더불어 살기’를 실천한 것이다.

아파트 경비원 구조조정에 관한 주민의 호소문

하지만 대한민국 최고의 부촌이라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구현대아파트의 입주민대표회의는 지난해 말 경비원 94명을 전원 해고했다.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관리비 부담 증가와 경비 업무의 전문성 확보를 해고 사유로 들었다. 경비원 노동조합은 입주민 부담을 덜기 위해 휴게시간 연장과 퇴직금 산정방식 변경 등을 제안했지만 묵살당했다. 최저임금이 7530원으로 인상되면 구현대아파트 경비원들의 급여는 월 32만원가량 오른다. 3000여가구가 매달 3570원만 더 부담하면 된다. 울산 리버스위트 아파트 입주민들이 올해부터 추가로 내야 할 관리비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런데도 구현대아파트 입주민대표회의는 경비원 전원을 해고하고, 경비업무를 용역업체에 맡기는 쪽을 택했다. 부자동네 아파트 주민들이 경비원의 일자리를 빼앗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시세가 10억원이 넘는 아파트를 갖고 있는 주민들이 월 5000원도 안되는 추가 부담을 꺼려 경비원을 해고한 것은 적은 비용도 나눠 질 수 없다는 이기주의적 판단의 결과다.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을’인 50여만명의 경비원들은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고용불안에 내몰려 있다. 대부분 24시간 교대제 근무를 하지만 휴게시간마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주 40시간을 초과해 근무해도 연장근로수당을 받지 못한다. 지난해 9월 개정된 공동주택관리법은 경비원에게 업무 외에 부당한 지시를 내릴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1년마다 계약갱신을 통해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관리사무소와 입주민의 지시를 경비원들이 거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최저임금 인상을 통한 노동조건 개선뿐 아니라 탈원전·지구 온난화 해결·복지 확대 등 삶의 질 향상은 시민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수혜를 보고 그 비용을 각자 나눠 지겠다는 연대와 협력의 정신을 발휘할 때만 가능하다. 시민들이 더 나은 조건과 환경에서 살기를 원하면서도 그에 필요한 최소한의 인건비와 전기료, 세금 등을 더 내지 않으려 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외면하는 일이다. 물론 그런 현상은 내가 조금 더 낸 비용이 나에게 더 큰 혜택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 정글사회의 법칙을 압구정동 아파트 입주민이 잘 보여주었다. 적은 비용이라도 아끼기 위해 시장 논리를 충실히 따르는 ‘압구정동 모델’이다. 그러나 다른 접근법도 있다. 약간의 부담을 나눠 지면서 상생을 모색한 ‘울산 태화동 모델’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대처하는 서로 다른 두 가지 해법은 한국 사회의 산적한 현안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기주의가 만연한 경쟁사회에서 척박한 삶을 살 것인가, 연대와 관용이 넘치는 따뜻한 공동체에서 더불어 살기를 실천할 것인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14일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 권력기관 개혁안을 발표했다. 이날은 31년 전 22살 청년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날이다. 그는 영장 없이 불법체포돼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가 수배 중인 선배 은신처를 대라는 추궁과 함께 물고문을 받다 숨졌다. 당시 검찰과 경찰, 안기부는 관계기관대책회의 등을 통해 진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 했다. 영화 &lt;1987&gt;에 나온 내용 그대로다. 문재인 정부가 박종철군 31주기에 맞춰 그간 정권의 도구 노릇을 했던 국가 권력기관을 시민을 위한 기관으로 재탄생시키는 개혁방안을 발표한 것은 의미가 크다. 조 수석은 “민주화시대가 열린 후에도 권력기관은 조직 편의에 따라 국민의 반대편에 서 왔다”며 “촛불시민혁명에 따라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악순환을 끊고자 한다”고 말했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14일 춘추관에서 권력기관 구조개혁안을 발표한 뒤 자료를 짚으며 관련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개혁안은 권력기관이 갖고 있던 기존 권한을 분산하고 상호 견제와 균형을 통해 권력 남용을 막을 수 있도록 바꾸는 게 핵심이다. 이 방안대로라면 최대 수혜자는 경찰이 될 가능성이 높다. 경찰은 기존 조직과 권한은 그대로 둔 채 수사권에 국정원의 대공수사권까지 넘겨받게 된다. 또 하나의 새로운 공룡기관이 탄생할 것이란 우려가 나올 만하다. 청와대가 밝힌 자치경찰제 도입과 수사·행정경찰 분리, 경찰위원회 실질화 등 권한 분산과 견제장치 외에도 시민에 의한 민주적 통제 등 다양한 안전장치를 더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검찰개혁의 큰 줄기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와 검경 수사권 조정이 담긴 것은 이미 예견됐던 바다. 공수처 신설 전까지는 경찰이 검사를 수사할 수 있게 했다. 수사권 조정으로 검찰은 2차·보충적 수사권을 갖게 되며 직접 수사는 경제범죄 등으로 대폭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앞서 경찰개혁위는 검찰의 직접 수사권을 폐지하고, 경찰이 사건을 송치하면 보완수사 요청 등 사후통제만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수사권 조정안을 내놓은 바 있다. 앞으로 보다 정밀한 조정이 필요해 보인다. 국정원은 국내정치·대공수사에서 손을 떼고 오로지 대북·해외에 전념하면서 시민과 국가를 위한 최고수준의 전문정보기관으로 거듭나도록 한다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새 정부 출범 8개월 만에 비로소 권력기관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한 종합 청사진이 마련된 셈이다.

이제 공은 국회로 넘어갔다. 청와대 개혁안은 입법으로 뒷받침해야 할 사항이 대부분이다. 이를 주도할 국회 사법개혁특위는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간다고 한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한둘이 아니다. 여야 간 견해차가 큰 탓이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공수처에 대해 ‘옥상옥’이라며 강력 반대하고 있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는 방안도 안보수사 역량 저하를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한국당의 반대가 거듭되면 논의는 겉돌 수밖에 없다. 사개특위는 6월 말이 활동 시한이다. 정치권이 조만간 6월 지방선거 정국으로 빨려 들어갈 경우 정상 가동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이제는 우물쭈물할 여유가 없다. 권력기관의 기본원칙은 견제와 균형이다. 권력기관을 정치와 단절시키고 본연의 임무에만 전념토록 하자는 것은 온 시민의 염원이다. 민주화 30년이 지나도록 이를 완수하지 못한 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이때를 놓치면 언제 다시 권력기관 개혁이 이뤄질지 기약하기 어렵다. 여당은 야당을 설득하고 이해를 구하는 협치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야당은 시민 다수가 검찰개혁을 요구하고 있는 마당에 무작정 반대는 시대착오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권은 당리당략이 아니라 시민들의 인권과 편익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권력기관 개혁은 시민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올 사안이다. 시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개혁을 이뤄낼 힘은 시민에 있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른 아침 시립병원 앞길에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 비쩍 마른 몸을 어찌나 웅크려 접었는지 얼핏 검은 배낭처럼 보였는데 어라 움직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하나 줍더니 신통치 않은지 이내 내버린다. 좀 더 장초가 없나 찾고 있다.

로비에 들어서니 일찍 나온 사람들이 접수대가 열리기를 기다리며 TV를 보고 있다. 아는 얼굴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함께 살고 있는 다른 분이 생각나 안부를 여쭈었다. “조○○씨는 잘 계시지요?” 그는 눈을 끔벅끔벅하며 뭔가 말하려 한다. 순간 무슨 일이 있구나 직감했지만 말하기를 기다렸다. 겨우 말문을 뗀다. “형님 돌아가셨어요.”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다. 그저 왈칵하며 두 손을 맞잡았다.

형님이라 불린 사람은 우리 병원에서 유명한 분이다. 오래전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다쳤는데 후유증으로 대퇴골 골수염이 생겨 이십년이 넘도록 허벅지에서 계속 고름이 나오는 만성병을 앓고 있었다. 병원에 와서 가끔 약을 타가기도 했지만 대개는 집에서 혼자 고름을 짜고 소독하고 드레싱을 해오던 차였다. 그는 자신도 형편이 넉넉지 않으면서도 더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냥 넘기질 못했다. 갈 곳이 없어 그의 집에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신세를 진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다. 자신의 다리가 불편한데도 더 불편한 사람을 보면 휠체어를 밀어주곤 하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사람들 몇이 고개를 숙인다. “회장님 명복을 빕니다.” 형님이라고도 불리고 회장님이라고도 불리던 그의 죽음에 여러 사람들이 숙연해졌다.

오후에는 호스피스 병동의 사별가족 지지모임이 있었다. 저마다 가장 찬란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기억여행’ 자리였다. 참여자들은 사별한 지 6개월에서 1년 사이의 분들로서 서로 별칭을 만들어 부르고 있다. 미소가 화사한 햇님이언니, 말끝마다 그러게 하는 그러게언니, 하늘하늘 소녀 같은 풀잎이언니, 어릴 적 고향 신의주에 가보고 싶다는 만세오빠… 어르신들이다.

풀잎이언니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떨리고 스릴이 있었어. 그이가 해군 세일러복을 입고 나를 찾아왔어. 어찌나 멋지던지… 팔남매 가난한 집 장남인데 내 짝이 되어 주겠냐고 물었지.” 꿈꾸는 눈이 되어 말을 이어간다. “매일 가마솥에 밥해 가지고 머리에 이고 밭에 날랐어… 보증 섰다가 사업이 망했는데 어찌나 술을 먹던지… 한강 가서 같이 죽자 하는데 난 안 죽겠다고 했어. 그래도 술 깨면 우리 마누라가 최고라고 했었어. 혼인 50주년 되면 같이 여행 가자고 했는데 몇 달 남기고 갔어.” “동생들 셋 태어나 늘 애 업고 다녔어요. 아버지는 폐병치료 받느라 누워있고 열살 때부터 베 짜는 공장에 다녔는데 매일 늦게까지 광목을 짰어요. 자정 넘어 집에 가는데 너무 무서워 철둑에서 엄마 부르며 뛰어가던 기억이 나요. 그러다 홍역으로 동생 셋이 다 죽었고….” 그러게언니의 옛이야기에 함께들 눈물 짓는다. “스무살로 돌아간다면요? 저는 새벽부터 밤까지 일만 했던 게 서글퍼요. 보통의 놀이를 놀아보고 싶어요.”

“도둑결혼에 식도 못 올리고 시댁으로 출발했는데 도착하니 한밤중이었어요. 시어른이 신랑한테 이 문둥아 하길래 정말 문둥병 걸렸냐고 물어봤어요… 저는 글을 몰라요. 공부 못한 게 철천지한이에요. 글만 알았어도 아이를 맥없이 뺏기진 않았을 텐데….” 햇님이언니는 그래도 웃는다.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요? 지금이 좋아요. 전 지금이 최고로 좋아요.”

“석양에 강에서 그물 치던 아버지 뒷모습이 생각나. 잉어 놓치고서 서운해하던… 애가 태어났는데 죽은 줄 알고 윗목에 놔뒀대. 근데 침 맞히고서 꼬물꼬물 살아나더라지 뭐야. 그게 나야. 할멈 얘기? 하려면 많지!” 만세오빠는 벌어진 앞니 사이로 허허 웃는다. “선생님도 팔십 되어봐. 사랑하면 버티며 가는 거야.” 잊지 않고 덕담도 해주신다.

폭설뉴스가 요란하다. 비닐하우스가 무너지고 공항에는 발 묶인 사람들이 즐비하다. 전 세계가 한파에 이상기후라고 한다. 이상하게도 원체 눈이 많이 오는 나라에는 눈 피해 소식이 없다. 핀란드 아이슬란드에서 폭설로 지붕이 폭삭했다는 뉴스 본 적 있나? 신랑은 그런 나라에선 너무 흔한 일이라서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추운 지역에선 눈이 변수가 아니라 상수라서 대비가 잘되어 있기 때문일 거라고 했다. “지붕이 뾰족하잖아. 아예 눈이 쌓이지 않거나 쌓이더라도 중력대비 단위면적당 무게가 덜 나가도록 설계된 거라고.” 문과생과 이과생의 흔한 대화가 오간다.

가난한 이들에게 겨울은 더 길다. 어서 봄이 왔으면! 나무도 꽃도 구름도 바람도 별도 아닌 바로 사람들이 답이다. 우리가 빚어내는 따뜻한 온기와 활기로 겨울을 녹여내고 봄을 피워내자.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처음부터 한국 정부가 혼자 감당할 문제가 아니었다. 어쩌면 한국 정부가 해결하겠다고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가 성노예 제도의 희생양이 된 여성은 26개국 출신 40만명 이상이다. 중국인 20만명을 포함해 독일·영국·미국 간호사 등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따라서 일대일 양자협상을 통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머니들이 우리 문제부터 해결하지 않으면 일본과 국교를 단절하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고, 국제사회에서 한·일 간에 합의가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이런 국제적인 인권문제를 졸속 합의로 땡처리한 당사자가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9일 오후 경기 광주시 나눔의집에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한·일 위안부 합의 처리 방향을 발표하는 모습을 TV로 시청하고 있다. 연합뉴스

어쩌면 그런 박근혜 전 대통령이어서 별다른 일이 없으리라고 우리는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4월부터 12차례 국장급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 시민단체들도 적극적으로 개입할 생각을 못했다. 한·일 양국에 입장차가 있다는 언론 보도만 있었기에 별다른 결과가 나올까 싶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전쟁범죄를 다루는 협상테이블에 앉은 적이 없는 만큼 미국의 요구든 뭐든 협상테이블에 나온 것 자체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내놓은 결과는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 기림비를 세우는 등 이 문제 해결에 진력해온 우리는 실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는 출범 7개월 만인 지난 9일 위안부 합의 후속조치를 발표하면서 일본에 재협상을 요구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합의 파기를 선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당장 10억엔을 일본에 돌려주고 화해·치유재단도 해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최종적·불가역적 해결’을 선언한 한·일 합의에 사망선고를 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한국이 합의를 파기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는 세계인권에 관한 것인 만큼 두 나라의 합의로 해결됐다고 볼 수 없으며, 앞으로 국제기준에 맞춰 피해자 중심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천명했기 때문이다. 또 “일본 정부가 출연한 화해·치유재단 기금 10억엔은 전액 우리 정부 예산으로 충당하고, 기금의 향후 처리 방안에 대해서는 일본 정부와 협의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한·일관계 안에 위안부 문제를 가두는 2015년 양국 합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입장이 바뀌었다는 것을 국제무대에서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 위안부 기록물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는 사업부터 재개해야 한다. 우리도 캘리포니아 교육부가 채택한 10학년 교과과정 2016년 개정판에 포함된 한·일 합의에 대한 일본 외무성 링크를 없애달라고 다시 요청할 것이다. 한·일 양국 정부가 공동으로 요청해서 포함된 이 링크를 삭제하는 것은 한국 정부가 간단히 풀 수 있는 첫 번째 과제이기도 하다.

위안부 문제는 피해자와 피해 당사국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전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세계의 인권문제다. 가장 앞장서서 가장 오랫동안 싸워온 할머니를 모시고 있는 한국 정부가 국제기준에 맞는 해결을 이루도록 능력을 발휘하기를 기대해 본다. 더 늦기 전에.

<김현정 미국 가주한미포럼 사무국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월이다. 치열하게 보낸 2017년의 조각들을 떠올려 본다.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은 떨어지고 집중력 또한 예전 같지 않다. 가장 우려스러운 부분은 바로 독서라는 행위다. 신간 서적은 매일 쏟아지고 읽어야 할 책은 500권 넘게 대기표를 달고 있다. 과학의 힘으로 수면시간이 사라지거나 자면서도 독서를 할 수 있다면 적어도 1년에 300권 이상의 책읽기가 가능할 텐데.

독서의 목적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가장 피곤한 인간형은 지식자랑에 심취하는 자다. 책에서 얻은 자투리 지식을 전가의 보도처럼 아무 때고 휘두른다. 무술영화로 치면 저잣거리에 처음 등장한 칼잡이와 다를 바 없다. 고가의 명품이 인격 형성의 필요악인 것처럼 단순히 지식 차원에서 맴도는 말을 무한반복한다. 독서와 인격이 따로국밥의 모양새를 취하는 격이다.

다음은 자기계발서 외에는 상종하지 않는 자칭 현실주의자다. 자기계발서는 독자에게 환상을 강요한다. 누구나 ‘1만 시간의 법칙’만 따른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목받는 존재로 변한다는 유혹의 언어를 뿌려댄다. 당신은 선천적으로 열등하기 짝이 없는 실패작이기에 자기계발서를 완독하라고 겁박한다. 현실주의자의 독서란 1등만을 기억하는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의 학습과정이다.

수집형 인간도 빼놓을 수 없다. 틈만 나면 서점에서 시간을 보낸다. 생활비보다 책값에 더 많은 돈을 쓴다. 읽은 책보다 산 책이 압도적으로 많다. 원하는 절판서적을 발견하면 가차 없이 지갑을 연다. 가족으로부터 모진 무시와 박해를 당해도 끄떡없다. 그는 인생의 빈 공간을 책으로 채워야 한다는 철학의 소유자다. 문제는 흡연처럼 눈을 감아야지만 수집벽이 멈춰진다는 거다.

독서를 연중행사로 여기는 인간도 있다. 이들은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바쁘다는 언어를 자기과시나 자기포장 용도로 소비한다. 번잡한 상황을 마음껏 자랑하는 동시에 독서를 멀리할 핑계로 악용한다. 당연히 대화에서 활용할 수 있는 단어의 종류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생계를 위해 장시간의 노동을 해야만 하는 ‘진짜로 바쁜’ 경우는 예외다.

베스트셀러만 읽는 독자는 어떨까. 이러한 쏠림현상은 앞으로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공통의 관심사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베스트셀러를 찾는 경우도 허다하다. 아쉬운 점은 영화시장처럼 베스트셀러에 파묻혀 독서시장에서 자취를 감춰버리는 양서가 부지기수라는 거다. 독서 초심자에게 베스트셀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지일지도 모르겠다. 독서의 폭이 넓고 깊어진다면 해결 가능한 사례다.

이러한 경우 외에도 다양한 독서행위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독서가의 정의는 무엇일까. 필자가 생각하는 독서가란 독서 자체를 사랑하는, 목적 없는 독서에 심취한 사람이다. 그들에게 책은 두 번째 세상과 만나는 지혜와 사유의 공간이다.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공기처럼 책을 품고 마신다. 당연히 자신만의 시간을 거둘 줄 아는 후회 없는 인생을 택한 인물이다.

대통령의 독서가 화제에 오르고는 한다. 책 &lt;대통령의 독서법&gt;에 의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독가였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문서를 좋아했고, 이명박 전 대통령은 피터 드러커류의 경영서를 읽었다. 독서 성향에 따라서 정치인의 색깔과 사상이 드러나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요점은 독서를 멀리하는 정치인치고 국민으로부터 오래도록 존경을 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는 거다.

올해도 어김없이 빛나는 신간들이 서점에 등장할 예정이다. 그만큼의 독서가가 탄생할 것이고, 그만큼의 지식사회가 형성될 것이다. 키케로는 ‘책이 없는 방은 영혼이 없는 육체와 같다’고 말했다. 영혼과 육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싶다면 독서가 우선이다. 잠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텔레비전 전원을 끄자. 이번 주말에는 하워드 진의 책과 함께 아래로부터의 역사와 만나는 시간을 가져 보자.

<이봉호 대중문화평론가 <음란한 인문학> 저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호돌이’ ‘호순이’ 시대에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올림픽을 떠올리면 지긋지긋하다. 86 서울 아시안게임과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러야 하는 것이 마치 내 또래가 태어난 역사적 숙명인 줄 알았다. 공책을 비롯해 모든 문구류에 언제나 오륜기 같은 올림픽 심벌이 새겨져 있었다. 요즘말로 하면 나름 ‘올림픽 굿즈’였던 셈이다. 올림픽 성공 개최를 기원하는 포스터 대회부터 합동체육 율동 음악도 김연자의 ‘모이자, 모오오이자, 아침의 나라에서’라는 후렴구가 지겹게 반복되는 ‘아침의 나라에서’였다. 그런데 30년 만에 또 올림픽이라니.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자연 훼손에 더해 최순실 게이트에 휘말리기까지 한 평창 동계올림픽이 탐탁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평창 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오랜만에 남북관계에 숨통이 트였다. 선수단과 취재진, 그리고 북한 ‘걸그룹’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모란봉악단’ 참가도 예상되니 이래저래 흥행카드 몇 장을 한국에 선물한 셈이다.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면서 ‘통일’이란 문제를 깊게 고민하며 사는 것도 아니고 북핵 실험 같은 극단적인 소식이 들려오면 걱정보단 짜증이란 익숙한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통일 포스터가 아니라 반공 포스터를 그렸던 우리는 그 시절에서 얼마나 걸어 나왔을까.

1985년 큰 수해가 있었다. 천변 지척이었던 우리 동네에도 물난리가 났다. 그해 아주 낯선 일이 벌어졌는데 대체로 늑대나 이리로 그리곤 했던 ‘김일성’이 남한 수해 복구 지원을 한다며 쌀과 옷감을 보내온 것이다. 상습 수해지역인 우리 동네에 북한 옷감이란 것이 흘러들어 왔다. 새마을지도자 역할을 열심히 하던 아버지 덕분이었던 듯하다. 다소 난감한 꽃분홍색의 나일론 천이었는데 아마도 한복용 옷감이었을 것이다. 옷을 지어 입을 수는 없어 엄마는 가장자리에 오버로크를 쳐서 밥상 보자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북한 옷감 좀 구경하자며 이웃 아주머니들이 오셔서 그 천을 조금씩 얻어 갔다. 그해 지독한 수해 끝에 남은 것은 북한산 꽃분홍 밥보자기였다. 기성복을 사서 입던 시대이니 사실 북한산 옷감에 어떤 용처가 있었겠는가. 그래도 남측은 흔쾌히 그 선물을 받았고 적대적인 남북관계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는 후일담을 들었다. 선물이란 것이 본래 그렇잖은가. 딱히 쓰임새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주고받는 그 행위와 태도 자체에 의미가 있어서 선물이다.

농민운동 조직인 ‘전국농민회총연맹’ 소속 농민들은 남북관계가 꽉 막힌 상황에서도 통일쌀 농사를 지어왔다. 정부미로 부르던 ‘통일벼’가 아닌 정말 통일을 염원하는 ‘통일쌀’이다. 농사를 지어 북한에 쌀을 보내자는 취지의 공동 농사다. 2000년부터 2007년까지 매년 평균 40만t의 쌀을 차관 형식으로 북한에 지원하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 쌀을 보내지 못했다. 그래도 농민회 소속 농민들은 매년 ‘통일 모내기’를 하며 남북대화를 촉구해왔다. 수확된 쌀이 북한 인민 전체의 식량을 책임질 정도의 양은 아니지만 ‘쌀’이라는 강력한 민족의 상징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남한 농민들이 북녘 동포들에게 쌀밥 한 그릇을 꼭 선물하고 싶은 그 마음조차 닿지 못한 지 10년째다. 그래서 이번 남북대화를 계기로 ‘통일쌀’을 선물할 수 있다면 좋겠다. 명절에 남녘은 떡가래를 뽑아 떡국을 끓이고 중부지방은 떡만둣국을, 북녘은 만둣국을 먹는다 들었다. 이 통일쌀로 떡을 뽑아 올라가겠으니 이북 만두를 빚어 내려오면 좋겠다. ‘통일 떡만둣국’ 한 그릇 먹을 수 있는 설날이 어서 오기를. 아! 그 밥상에는 꽃분홍 밥상 보자기가 제격이겠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결혼을 민영화하는 것은 어떨까? 국가가 결혼 공인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단체나 사회단체도 인증을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얘기다. 종교인이라면 교회나 성당, 사찰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종교단체로부터 인증을 받으면 되는 식이다. 커플은 자신들의 필요와 열망에 가장 부합하는 결혼 허가 조직을 선택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은 성소수자 단체에서 결혼을 인증받으면 된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이것은 201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리처드 세일러가 자신의 대표작 <넛지>에서 ‘결혼의 민영화’란 이름으로 한 장을 할애해서 한 제안이다. 그는 결혼 대신에 이성과 동성에 관계없이 두 사람의 동거 협약을 지지했다.

경향신문은 신년기획으로 ‘우리도 가족입니다’를 게재했다. 미혼 입양모, 비혼 동거, 동성혼 부부, 공동체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소개했다. 오랜 세월 동안 결혼은 가족을 이루는 첫 단추였다. 하지만 이제 결혼에 대한 생각도, 가족의 형태도 바뀌고 있다. 1인 가구는 대세다. 2025년이면 3인 가구와 4인 가구를 합쳐도 30%를 넘기 어려울 것이란 게 인구학자들의 의견이다. 2016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3세 이상 인구의 48%가 ‘남녀가 결혼하지 않더라도 함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중 20~30대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60%를 넘었다.

결혼·가족제도는 끊임없이 변해왔다. 과거에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제도도 있었다. 고구려와 부여에는 형사취수제도가 있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데리고 사는 제도다. 고구려 사람들이 형수를 넘볼 정도로 유독 음흉해서? 아니다. 성경에도 나온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에게 묻는다. 모세가 정해준 법에는 형이 자녀가 없이 아내를 두고 죽으면 그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형의 대를 이어야 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 큰형, 둘째 형, 셋째 형…. 막내까지 일곱 명이 한 여자를 아내로 삼으면 부활한 뒤 이 여인은 누구 와이프가 되나요?(마가복음) 이런 제도가 생긴 것은 여자를 재산으로 생각했고, 어떻게든 출산을 통해 인구를 늘리는 게 힘을 키우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또 결혼으로 맺어진 세력 집단 간의 합의를 깨트리지 않기 위해서였고, 여성 혼자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어렵기도 했다. 흔히 알고 있는 데릴사위, 민며느리뿐 아니라 다양한 결혼풍습(제도)이 있었다.

결혼·가족제도는 정치·경제·사회적 환경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와 어머니와 자녀로 된 3~4인 가족은 근대의 산물이다. 아버지는 직장에 나가 일하고, 어머니는 가사를 관리하는 식의 가족 형태는 근대에 발명된 것이다.

세일러에 의하면 공식적인 결혼제도가 생겨난 주요 이유는 결혼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생활 탈퇴를 단속하기 위함이었다. 이혼이 어려우면 부부생활이 안정되고, 자녀들에게 유익하다. 경제·사회적으로도 긍정적 효과가 많다.

지금은 성을 단속할 수도, 단속해서도 안 되는 시대다. 해혼, 졸혼이란 말도 나온다. 세일러는 경제학자답게 결혼의 대차대조표를 따져봤다. 그는 결혼의 혜택이 놀라울 정도로 적고, 시대착오적이라고 평가했다. 한국도 그렇다. 아이가 생기면 여성은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을 감수해야 하거나, 사회적 지원이 제대로 뒷받침되지 않아 돌봄의 책임을 가족이 짊어져야 한다.

문제는 가족의 형태는 급변하고 있는데, 정부는 실태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다못해 비혼 또는 비혼 동거 커플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파악되지 않는다. 현실을 알아야 대책을 마련할 수 있는 법인데, 지금까지 정부의 가족정책은 출산율에 맞춰져 있었다. 출산율을 중심에 놓고 결혼·가족제도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미혼, 비혼, 동성혼을 비정상가족으로 보기 십상이다. 하지만 정상가족, 비정상가족으로 나눌 수도, 나눠서도 안 된다.

결혼·가족의 공식은 ‘1(남편)+1(아내)=3 또는 3+α’가 아니다. 마치 기업과 공장에서 생산성, 생산성 외치듯이 결혼제도·가족정책에서 출산율, 출산율 해선 안 된다. 정부가 2006년 이후 10년 동안 쓴 저출산 예산이 80조원이나 된다는데, 그렇게 많은 돈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은 올라가지 않았다. 오히려 비혼 동거 커플에게도 법적·경제적 지원을 한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출산율이 올랐다.

결혼제도는 영구불변의 법칙이 아니고, 가족정책은 생산성(출산율)의 문제가 아니다. 가족을 노동인구를 찍어내는 공장 같은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 출산율이 아니라 행복하고 건강하며 조화로운 삶을 밑돌로 놓아야 한다. 결혼제도·가족정책은 그렇게 가야 한다.

<최병준 문화에디터>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에너지전환의 원년이 밝았다. 이제 우리는 안전과 생명이 중시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전환의 출발점에 섰다. 포항 지진 이후 한 여론조사기관이 탈핵·에너지전환국회의원모임 의뢰로 지난해 1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탈원전 신재생에너지 확대정책에 대해 58.2%의 응답자가 계속 추진을 지지했고 27.0%만 추진 중단을 원했다. 국민 모두가 에너지전환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적 추세인 에너지전환을 국민 다수도 이제 가야만 하는 길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에너지전환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원자력과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이용에 생계를 걸고 있는 이해관계자들의 반발이나 에너지전환 비용 때문만이 아니다.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에너지갈등이다. 심각성의 정도는 다를지라도 원자력발전소와 석탄화력발전소, 방사성폐기물처분장, 송전탑 등을 둘러싼 에너지갈등이 태양광발전 시설 설치에서도 재연되는 느낌이다. 과거 몇몇 지역에 국한되었던 갈등이 전국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

어떤 에너지 이용도 환경이나 인체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은 없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 상대적으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로 간주된다. 원전은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화석연료는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재생가능에너지는 환경이나 인체에 미치는 영향이 극히 적고 그런 영향조차 인간이 통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적이다. 그나마 풍력발전은 소음이나 전자파, 철새 이동경로 방해, 빛 반사 등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어 설치에 주의를 요하지만, 태양광발전은 숲을 대대적으로 훼손한다거나 미관이나 경관에 대한 고려 없이 설치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별다른 환경이나 건강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풍력발전에는 일정한 이격거리 규정을 두지만 태양광발전에는 두지 않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태양광발전에 이격거리를 두는 지자체가 늘고 있다. 여러 지역에서 태양광발전소 건설을 ‘결사반대’하며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총 태양광 설비용량(약 4.6GW)의 63%가량이 입지한 농촌에서 반대 민원이 늘고 있다. 주민들은 미관이나 경관 침해 문제만이 아니라 패널의 빛 반사, 주변 온도 상승, 전자파 발생 등을 문제로 제기한다. 하지만 기술 검증 결과 이런 우려는 사실이 아닌 걸로 나타났다. 태양광발전 시설에 대한 이격거리 기준을 설정·운영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산업통상자원부의 가이드라인과 다르게 지난해 말까지 85개 지자체가 도로나 주거지역으로부터 최소 100m에서 심지어 1000m까지 이격거리를 두도록 하는 개발행위허가 지침을 마련했고 그 결과 무산되는 사업들이 생겨났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걸까? 현재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들을 살펴보면 모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사업자들이 농촌을 단지 대규모 설치 대상지로 대상화할 뿐 지역주민의 보금자리에 변화를 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동의를 구하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지역주민에게 아무런 수익이나 일자리를 제공하지 않은 채 소외시키거나 배제한 탓이 크다.

주민이 함께하지 않는 태양광발전 확대는 또 다른 토목공사이자 외지인에 의한 지역수탈로 느껴진다. 지역주민이 태양광발전소 건설 과정에 참여해서 의견을 나누고 에너지 생산 주체로 탈바꿈하여 이익과 일자리를 함께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고령화가 꾸준히 진행되고 농가수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농촌 태양광발전은 협동조합 방식의 출자나 임대를 통해 농가소득원이자 농촌재생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주민참여와 이익공유 없는 에너지전환, 그것은 네모난 동그라미와 같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카카오톡, 밴드, 텔레그램. 언제부터인가 우리 주위를 침범한 녀석들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60개가 넘는 카카오톡 모임방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다. 카카오톡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단순 문자나 게임, 택시 예약 서비스는 초기 버전이다. 금융 거래와 영화 예매까지 가능하며, ‘헤이 카카오’라는 인공지능 스피커는 원하는 음악도 들려준다. 곧 정부 고지서나 통지서까지 카카오톡을 통해 등기로 배달된다. 이제 카카오톡은 일상생활을 지배하는 만능 플랫폼이 되었다.

물론 기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함을 준다. 그런 행복을 향유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혜택 받은 세대인 듯도 하다. 그러나 과연 정보통신기술의 발전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불행한 일들은 없는가. 지난 몇 년 사이 ‘카톡 감옥’에 갇힌 직장인들, ‘카톡’이 두려운 노동자들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들을 접할 수 있다. 카카오톡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의 폐해가 만만치 않다. 퇴근 후는 물론 주말까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카톡 때문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직장인이 늘고 있다. 휴일이나 업무시간 이외에도 연락을 받거나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당장 급한 일이 아닌 경우가 더 많다는 점이다. 대부분 다음날 아침이나 월요일에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소통과 공유를 강조하고, 빠른 정보를 연결하는 수단이지만 직장인들에게 단톡방은 ‘족쇄’나 다름없다. 단톡방 메시지가 업무 관련 내용만 오고 가는 것도 아니다. 개인적인 사생활도 많다. 직장에서 업무상 필요로 인해 그룹방(일명 단톡방)을 만들겠다고 하면 거부할 수 있을까. 업무보고와 지시 때문이라고 하면 거부할 사람은 없다. ‘울며 겨자 먹기’로 응해야 한다. 부서장의 썰렁한 메시지에 아무런 답을 달지 않는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아마도 승진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충격적인 수치도 확인된다. 서비스 노동자 3046명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4명(37.5%)이 퇴근 후 SNS, e메일 등으로 업무 지시를 받고 있었다. 1주일 평균 2.3회, 87분의 부가적 일을 하고 있는데 1년이면 무려 69.6시간이나 된다. 휴일에도 일일이 메시지를 확인해야 하고, 퇴근 뒤까지 이어지는 업무지시는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의 경계선을 허문 지 오래다. 일과 삶의 균형은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고 유연하게 일할 수 있는 ‘원격근무’나 ‘재택근무’라는 것이 만들어진 이후 이미 카톡에 갇힌 직장인들의 굴레는 시작된 것이다. 최근에는 공공기관조차 사무실이 아니더라도 언제 어디서나 효율적으로 일하라고 ‘스마트 워크’도 앞다퉈 도입했다.

사실 원격근무(telework)는 ‘멀리서(tele)’ ‘일한다(work)’는 의미다. 1973년 미국에서 나온 신조어인데 45년이 지난 지금은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카톡이나 e메일, 문자 등으로 업무지시를 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한다.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지만 최근 기업들 스스로 규제 움직임도 보인다. 밤 10시 이후나 주말에 SNS로 업무지시를 하지 못하도록 한 곳도 있고, 노사 간 단체협약으로 체결한 곳도 있다. 이미 유럽의 몇몇 기업은 업무시간 이외에 회사가 보낸 e메일이 도착할 경우 삭제하고 있다. 휴가기간에는 보낸 사람에게 ‘부재 중’이라는 정보와 함께 업무를 대체할 사람의 연락처를 안내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업무종료 30분 이후 업무용 스마트폰은 e메일이 중지되고 다음날 근무시작 30분 전에 서비스가 된다.

최근 20대 국회에서도 퇴근 후 SNS 등을 활용한 업무지시 금지법이 3개나 제출된 바 있다. 현실적으로 이런 법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특히 ‘긴박하고 꼭 필요한 경우’와 같은 단서 조항의 해석을 둘러싼 갈등은 분명 쟁점이 될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퇴근 후 혹은 휴일에 업무지시를 내리는 행위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는 문화를 바꾸어야 한다. 프랑스에서 ‘연결되지 않을 권리’ 법안이 통과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카톡이 침범한 경계 없는 노동시간을 벗어나기 위해 국회의 역할이 필요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장준환 감독의 영화 <1987>은 6월항쟁과 그 전후의 역사적 맥락에 비춰볼 때 큰 흐름과 세부 사실 모두 흠잡을 대목이 드문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교과서적이라는 평가가 작품의 성취를 깎아내린다며 불만을 품을 관객도 있겠지만, 내 말은 시간이 지나면 고전의 자리에 올라설 것이라는 뜻이다. 어쨌든 사람마다 제각기 할 말이 많은 영화가 <1987>이다.

영화 <1987>은 전두환 정권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영화의 뛰어남은 최근의 수작 <택시운전사>와 비교해도 두드러진다. 후자에 등장하는 1980년 광주의 택시 기사들이 도대체 왜 군대가 광주 시민에게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푸념하는 모습은 실감 나지 않는다. 실제로 당시 택시 기사들은 직업의 특성상 시위 진압의 잔혹한 실상을 직접 목격하기 쉬웠을뿐더러 부상자를 병원으로 옮기다 계엄군에게 걸려 죽고 다쳤다. 강경 진압의 정치적 의미를 명확히 인식한 그들은 마침내 목숨을 걸고 차량 시위의 선두에 서서 공수부대 정예 병력을 수세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실제 역사와 달리 <택시운전사>는 무고한 시민과 사악한 권력이 맞서는 감상주의적 구도에 갇히고 말았다. 반면에 <1987>은 다양한 인물상을 훨씬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그리면서도 기록영화처럼 냉정하기도 하다.

그러나 <1987>을 경계하는 목소리도 만만찮다. 그중에는 귀담아들을 얘기도 있지만, 오독에 가까운 발언도 없지 않다. 특히 이 영화가 다루는 승리의 서사가 ‘586세대’(옛 ‘386세대’)의 신화를 굳힐 위험이 있다는 (SNS에서도 자주 만나게 되는) 비판은 좀 지나치다. 586세대의 일부가 198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과 성과를 과장하고 독점하려는 경향 탓에 신화화의 위험은 물론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비판이 과하면 피상적인 세대론의 함정에 끌려 들어갈 수 있다.

영화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 6월항쟁은 586세대 혼자 한 일이 아니었다. 그들이 도화선이요, 주력이기는 했지만, 6월항쟁은 어디까지나 전 국민적 사건이었다. <1987>에 세대론의 틀을 들이대는 비판적 평가에 자신의 경험을 여전히 과잉해석하는 586세대와 그 언저리 연령대의 (다분히 남성적) 감수성이 숨어 있을 역설적 가능성을 냉철히 따져볼 일이다.

의외로 별로 언급되지 않지만, 연희(김태리 분)가 교도관인 삼촌(유해진 분)과 다투다가 아빠의 죽음을 입에 올리는 장면도 지나칠 수 없다. 노동조합을 주도한 아빠가 등을 돌린 동료들 탓에 상심해서 술을 가까이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다. 노조를 탄압하던 사람들을 미워해야지 왜 아빠 친구들을 미워하느냐는 삼촌의 말은 옳지만, 이 장면에서는 실패와 상처를 두려워하는 연희의 현실적인 자세가 관객에게 더 와닿는다. 이처럼 세심한 연출 덕분에 연희 아빠의 죽음이 지금 이 순간도 노동현장에서 숱하게 터지는 일임을 환기하는 효과도 은연중에 확보되며, 힘겨운 과정을 거쳐 항쟁의 현장에 합류하는 연희의 모습이 미화되는 느낌이 없다.

개봉 영화를 두고 찬사와 비판이 엇갈리는 일은 흔하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그저 이 영화를 보지 않는 선택에 머무르지 않고, 절대 보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가 대통령 일행이 영화를 관람하는 자리에 함께하고서도 차마 영화는 볼 수 없어 발길을 돌린 사연은 누구나 쉽게 이해한다.

그러나 고등학생 때 광주항쟁에 참여했고 나중에 간첩조작 사건에 얽혀 긴 감옥살이를 한 강용주씨의 입장을 아는 사람은 적다. 그에 따르면, 박종철 고문사의 진상 규명을 돕는 의인으로 묘사된 교도소 보안계장의 실제 인물은 ‘간첩사건’으로 갇힌 재소자들에게는 혹독한 방식으로 전향을 강요하는 인권 침해를 저질렀다. 강용주씨만이 아니라 그에게 당한 공안 사건 연루자들 여럿이 입을 모아 증언하는 사실이다.

남영동 대공분실의 불법 고문수사를 총지휘한 치안감 박처원(김윤석 분)은 ‘빨갱이’를 서슴없이 때려잡는 명분으로 월남한 자신이 북에서 겪은 비극적 가족사를 강조한다. 반공을 앞세운 박처원 일당의 광기 어린 행태는 생생하면서도 너무 낯설어 우리는 이 야만적 시대가 이제는 사라졌음을 영화가 증언한다고 잠깐 오해할 지경이다. 그러나 (지금은 MBC 사장이 된) 최승호 감독의 영화 <자백>(2016)은 간첩조작이 바로 엊그제까지도 노골적으로 벌어졌음을 폭로했다. 박처원과 고문 기술자 이근안, 공안검사 김기춘은 방심하면 언제든지 우리 곁에 돌아온다. 그러니 <1987>은 우리 현대사의 한 장을 마무리하는 작품이 아니라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문제작이다. 1987년을 비롯한 한반도의 현실을 뿌리 깊이 제약하고 있는 ‘우리 안의 휴전선’까지 무너뜨리는 다양하고 깊이 있는 작품들이 나오면서 촛불시민혁명을 진전시키길 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지난달 21일 발생한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는 119상황실과 현장 구조대 간 무선통신망이 부실했던 데다 현장 지휘관이 상황 전파를 소홀히 하는 등 소방당국의 부실대응이 인명피해를 키운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 소방합동조사단은 11일 제천 화재 조사 결과 최종 브리핑을 통해 “지휘관들은 상황 수집과 전달에 소홀했으며 인명구조 요청에도 즉각 반응하지 않는 부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소방청은 이일 충북소방본부장을 직위해제하고, 간부 4명을 중징계하기로 했다.

브리핑 내용을 보면 화재 직후 2층 여성 사우나에서 충북소방본부 119상황실로 구조요청 전화가 걸려왔지만 상황실과 현장 구조대 간 무전이 되지 않았다.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야 할 조직이 위급 시 통신망을 불통상태로 두었다니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현장 지휘관은 2층 상황을 전달받은 뒤에도 이를 무전으로 전파하지 않았다. 결국 늑장 구조로 2층 여성 사우나에서 20명의 아까운 인명이 희생됐다. 초기 지휘를 맡았던 간부가 눈앞에 보이는 위험과 구조상황에만 집중하느라 건물 뒤편에 있던 비상구의 존재나 상태도 확인하지 못했다. 운전자가 경험과 훈련 부족으로 굴절차 조작이 원활하지 못했다는 점도 확인됐다. 아직 석연치 않은 점도 있다. 조사단은 소방대가 비상계단을 통한 진입을 시도했다가 강한 열기와 연기로 후퇴했다고 밝혔지만 유족들은 계단에 화재 흔적이 없다며 조사단의 주장을 반박했다.

화재경보기와 스프링클러가 작동하지 않았고, 건물 내 배연창과 비상통로를 잠가 놓은 데다 테라스를 불법증축한 건물주의 과실도 무겁다. 소방대원의 현장 진입을 가로막은 고질적 불법주차도 화를 키웠다. 많은 이들이 참사에 책임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무선통신만 원활하게 가동됐더라도 인명피해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소방당국의 부실대응 책임은 엄중하다. 인력과 장비 부족 등 소방당국이 처한 어려움은 이해하지만 기본 중의 기본인 통신망 점검을 생략한 과실마저 덮을 수는 없다.

수많은 안전사고에서 확인돼 온 것처럼 매뉴얼이나 규정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구비돼 있다. 문제는 ‘별일 없겠지’ 하며 지키지 않는 안전불감증이다. 안전불감증은 윤리의식의 부재와 다를 게 없다. 이 고질병을 어떻게 치유해야 할지 우리 사회의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음식은 거저 오지 않는다. 그냥 태어나지 않는다. 사람은 내게 주어진 자원을 가지고 음식을 만든다. 이때 자원이란 농업을 기본으로 인간과 자연과 국제관계와 과학기술 등등이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결과다. 날것 상태의 자원이 먹을 수 있는 밥, 빵, 국수에서 장, 과자, 일품요리 등등이 되기까지 인류는 어마어마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하고 주고받고 이어왔다. 자원의 한계를 다만 감수할 뿐 아니라, 탐구하고 대응하는 가운데 교육도 문화도 인간다움도 태어났다. 음식은 사람답게 살아남기 위한 기본기술(low-tech)이자 1만년 농업사와 함께 이어진 문화의 꽃이다. 그 꽃은 갖가지 모양과 빛깔로 피어나 오늘에 이른다. 위도마다 대륙마다 민족 저마다 서로 다른 일상의 식생활이야말로 거대한 강줄기, 산맥 또는 해양 못잖은 일대장관이다.

한식 또한 그중 하나다.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사용돼 온 식재료 및 그와 유사한 식재료를 사용해 한국 고유의 조리 방법 또는 그와 유사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음식으로 한국 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갖고 생활 여건에 알맞게 창안되어 발전, 계승돼 온 음식”(농촌경제연구원 자료) 같은 말로 한식의 갈피를 잡기 어렵다면 내 점심시간부터 들여다볼 일이다.

막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한 끼 먹자고 모두의 발길이 다급해진다. 어린이, 청소년, 노인, 학생, 취업준비자, 산업예비군, 자영업자, 봉급쟁이 누구나 이 한 끼만큼은 놓칠 수 없다. 아침 거른 사람도 많다. 이 한 끼를 놓치면 하루가 엉망이 된다. 이때의 한 끼를 감당하는 골목골목, 거리거리의 밥집, 국밥집, 분식집 그리고 학교식당이며 구내식당의 한식부, 더하여 점심시간만큼은 반드시 밥과 반찬이 있는 차림 또는 구이나 찌개를 일품요리 삼아 백반 정식을 준비하는 온갖 형태의 요식업소가 바로 오늘날 한식의 제일선, 최전선이다. 한국인이 소화해 변형한 중식, 일식, 양식도 의미가 깊다. 점심시간에 한해 “매일 반찬이 바뀌는 한식뷔페”를 차리는 맥줏집이 여기서 어찌 빠지랴.

오늘날의 한식은 매일 한식을 선택하는 서민대중의 한 끼에, 스스로 나는 한식에 종사하노라 여기는 종사자들의 인식과 매일 수행하는 일 속에 적나라하고 정직하게 깃들어 있다. 산업혁명과 현대의 충격을 지나 오늘에 이른 한식의 실제는 초·중등 학생과 서민대중의 점심 한 끼가 나오는 구체적인 과정 안에 압축되어 있다. 가정식 또는 한 사람의 자취(自炊)만으로는 못다 먹일 사람을 먹이는 바로 그 사람의 일이 한식의 세목을 이룬다.

그 사람은 장을 본다. 식료 선택과 반찬 구성과 간 보기에서 재량이 있다. 웬만하면 온통으로 재료를 받아 밑손질을 한다. 점심 장사 직전까지 정신이 없다. 저녁 장사 전까지 다시 밑손질을 포함한 준비에 뛰어든다. 장보기와 간 보기에 재량이 있고, 차림에서 임기응변이 가능하다면 주방장급 일꾼이고 실제 요리사다. 하지만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은 대중매체, 인터넷, 소셜미디어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방송이 고급 음식 호들갑에 ‘셰프(chief)’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면서 그 존재가 더욱 희미해졌다. 분야를 떠나 식당에서 당연히 하는 일인 재료 손질-준비를 굳이 ‘프렙(prep, preparation)’이라는, 그럴 이유가 보이지 않는 외국어로 바꾸어 부르는 데 이르러 일 또한 희미해졌다.

아줌마 또는 이모로 부르는 그 사람이다. 요식업계가 찬모라 이르는 그 사람이다. 업무 능력과 일의 실제에서 셰프이고 밤낮없이 셰프의 프렙을 수행한다. 서민대중이 하루에 한 번은 만나되, 만난 줄도 모르고 지나치는 셰프다. 그러니 걱정이다. 2018년 최저임금에 대한 어깃장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한식의 제일선은 그 어깃장이 특히 심한 곳일 수 있다. 쉬이 역사와 문화 운운하지만, 우리는 너무 쉽게 ‘아줌마’를 노동과 직업의 예외자로 대한다. 이러다 한식의 제일선이 최저시급 7530원 사각의 가장 나쁜 예가 될 수도 있다. “최저임금 줄 수 있으면 셰프 쓰지 아줌마 쓰겠느냐”는 억지가 훗날의 음식문헌으로 남지 않기를 바란다. 노동과 직업과 제도의 실제에서 당대를 돌파한 경험이 있는 문화만이 내일을 기약하는 법이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희망이 곧 절망일 수 있다는 말, 이해하십니까?”

정화는 환자의 전자차트를 묵묵히 정리하고서 보호자인 최연수의 말뜻을 뒤늦게 생각해보았다. 최연수의 어머니이자 환자인 김인경은 간호사 로봇이 진료실 밖으로 데리고 나가 보살피고 있었다.

“그다음에 또 다른 희망을 품게 마련이라서요?”

“그런 옛말이 통용되는 문제라면 저도 좋겠습니다만, 저는 개인이 아니라 남은 사람 전부를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정화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최연수로부터 눈을 돌리고 밖으로 나간 환자와 로봇을 잠시 바라보았다. 투명한 진료실 벽 너머에서 김인경은 어린아이처럼 잦은 감정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간호사 로봇은 환자의 질환과 그에 따른 심리 변화에 효과적으로 반응하도록 프로그램 되었기 때문에, 아주 자연스럽게 김인경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김인경도 적극적으로 대화에 동참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화와 연수는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김인경과 그만큼 원활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김인경은 중증 알츠하이머 환자였기 때문이다. 직업적인 이해심이나 어머니를 향한 아들의 사랑으로도 넘기 어려운 벽이 김인경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정화는 다시 눈앞에 앉아 있는 연수의 말꼬리를 더듬었다.

“남은 사람이라는 건 여기 무영구 주민을 말씀하시는 거죠?”

“사실 저는 그냥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그렇게 표현했다가는 손가락질을 받겠지만요. 안 그래도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않아서 퇴물 취급을 받는 참에 생각까지 꽉 막혔다고 비난을 받겠죠. 하지만 타고난 두뇌를 그대로 갖고 살다가 죽겠다는 생각이 잘못된 건 아니잖습니까?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 살겠다고 무영구(無影區)에 모인 것 역시 잘못은 아니잖습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불법도 아니고, 전자두뇌 이식자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심해지기 전에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께서 사리분별이 어려워지더라도 절대 전자두뇌를 이식하지 말라고. 저는 그 말씀을 고스란히 따를 겁니다. 자신의 앞날과 마지막 모습을 선택할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럼에도 자식 입장에서 괴로운 건 또 다른 얘기죠.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뻔히 아는데, 지금이라도 전자두뇌를 이식하면 남은 어머니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아는데 말이에요.”

정화는 아무 말도 해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전자두뇌를 이식했기 때문에 앞으로 김인경처럼 알츠하이머에 시달릴 위험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김인경과 같은 선택을 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무영구에서 의사로 일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고민과 고통도 이해할 수 있었다.

정화는 문득 깨달았다. 연수는 왜 희망이 곧 절망이라고 말했는가. 얼마 전 밝고 희망 찬 여러 뉴스 끝자락에, 마치 부끄러워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짧게 덧붙어 알려진 소식 때문이었다.

최연수는 모든 것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말했다.

“한심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얘깁니다. 뉴스에서 그러더군요. 알츠하이머는 완전히 정복됐다고요. 십 년 동안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에게서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뇌기능 이상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죠. 그건 당연한 얘기 아닙니까. 무한한 희망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알츠하이머가 정복됐으니 뇌기능 치료를 위한 나노머신 생산을 완전히 중단한다면서요? 이제 무영구에 사는 사람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건가요? 전자두뇌를 이식한 사람들은 우리가 수명을 다하고 사라지기를 조용히 기다리는 건가요? 그럼 우리를 치료해주는 의사 선생님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계신 거죠? 그림자도 남기지 못할 우리를 앞으로 어떻게 치료해주실 건가요?”

****************************************

2018년 1월 첫째 주가 끝날 무렵 미국 제약업체인 ‘화이자’는 알츠하이머와 파킨슨 병을 치료하는 신약 연구를 중단할 예정이라고 발표했다. 국제적인 제약 업체 사이의 정확한 순위는 알지 못하지만, 화이자는 세계 3대 제약 회사에 포함될 만큼 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이다. 희귀 뇌질환 연구를 전면적으로 중단하는 건 아니며 벤처 투자 형태의 지원을 시작하겠다는 발표가 뒤를 잇기는 했다. 하지만 해당 질병에 고통받는 환자 및 가족들은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뇌신경과학 종사자들과 연구 지원을 받던 학술 단체에 미치는 영향도 적지 않을 것이다.

첨단 약품을 개발하고 치료법을 연구하는 일은 극단적인 양면을 모두 품고 있다. 긴 시간과 거대한 비용이 투입되는 일이기 때문에 채산성을 완전히 외면할 순 없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생명과 미래 복지가 직결된 사안이기 때문에 경제논리만으로 재단해서는 안되는 일이기도 하다.

이 소식을 살짝 비틀어서 거울로 삼아보자. 우리는 지금 새 물을 만난 물고기들처럼 과학과 기술 발전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흥분하고 있다. 그 미래를 예찬하느라 첨단 기술이 우리 생활을 ‘지배’할 거라고 모순적인 어휘를 끌어오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기술이 이익 논리와 직결되는 현실에서, 기술에 지배되는 삶이 마냥 긍정적일 리는 없다. 아니, 애당초 무언가에 일방적으로 지배당하는 건 우리가 최대한 저항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경제 논리와 첨단 기술의 화려함 때문에 져버릴 수 없는 게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기에 좋은 시기일 것이다.

<김창규 SF작가>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입시경쟁에 시달리고 있는 한국 교육에 몇 년 전, ‘배움의 공동체’라는 새로운 교육철학이 등장했다. 학교 현장에서는 ‘배공’이라는 줄임말로 잘 알려진 이 교육방법론은, 주입식 교육에 몰입했던 학교 현장이 학습자 중심의 교육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더 이상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가 21세기의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SNS의 급속한 발달과 4차 산업혁명의 도래 속에서 학생들은 형해화된 교과서와 5지선다형 수능 문제에 함몰되기를 거부한다. 복잡한 이론을 이야기할 것도 없다. 학교에서 직감하는 변화들이다.

‘배공’ 이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단지 교사가 교과목 잘 가르치는 것만이 교육의 전부인 시대는 지났다. 학부모 역시 더 이상 방관자적 관찰자일 수 없다. 학생, 학부모, 교사는 이미 학교 구성원의 당당한 3주체가 아닌가. 그리고 이 3주체가 물리적 공간으로 어우러진 곳이 바로 지역사회, 더 쉽게 이야기하면 하나의 작은 ‘마을’이다.

1년 전 촛불시민들의 목소리는 “이게 나라냐”는 구호로 상징된다. 부정부패, 비리 등 적폐청산에 대한 소망, 차별과 불평등의 해소, 그리고 민주주의의 기반이 되는 시민 참여의 확대가 그 목소리에 녹아 있었다. 그러한 염원이 1700만명의 조용한 혁명을 가능케 했다.

교육계는 그 목소리를 어떻게 받아안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가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지역사회의 바람을 학교 교육에 제대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있었는가. 입시경쟁교육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며 체념하는 동안,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 졸업 후 비정규직으로, 알바 노동자로 살아가는 고충을 우리는 제대로 공감해 왔는지, 또 그들의 삶의 고향이자 터전인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과 머리를 맞대고 그 고민을 제대로 나눈 적이 있었는지 먼저 성찰해야 한다.

‘마을교육공동체’(마공)는 한 학교에 네트워킹된 지역사회의 수많은 집단지성 구현의 장이 될 수 있다. 학부모들은 삶의 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생활의 달인이요, 저명한 인사요, 지역의 어르신이다. 또 여러 마을활동가들의 노하우는 단위 학교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이러한 민간의 노력과 교육청 등 관계기관의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학생들을 가르쳐 보면, 교과 지식을 아무리 달변으로 포장해 아이들에게 주입한다 해도 그렇게 구성된 배움에는 한계가 있음을 절감한다. ‘배공’의 핵심 교육철학은 ‘잘 가르침’이 아닌 ‘잘 배움’이다. ‘마공’ 역시 단위 학교 교육과정의 하향식 전달이 아닌 상향식 협력이 필요하다. 아니 상하의 위계 의식 자체로부터 탈피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학생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 주민 등이 서로의 관계맺음 속에서 교육 공동체가 그 자체로 완성되는 진정한 삶과 배움의 공간으로 우뚝 설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학생들은 진정한 배움을 느끼며 성장할 수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학벌사회라는 교육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할지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을 마련할 수 있다. 교사들은 교실과 학교, 나아가 대한민국 교사로서의 역할을 재정립하면서 실천자의 역할을 할 것이다.

올해는 다양한 교육정책의 입안을 앞두고 있다. 특히 하반기에는 작년에 1년 유예되었던 수능 개편안 발표 등 전 사회의 관심이 집중된 사안도 있다. 촛불시민혁명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꿈꾸는 교육개혁이 무궁무진한 상상 속에서 술술 풀리는 실천과 더불어 무술년 새해를 교육혁명의 원년으로 삼을 것을 제안한다.

<도성훈 인천 동암중 교장>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