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7일 평창 동계올림픽을 취재 중인 내외신 기자들을 만나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많은 기대를 하지만 마음이 급한 것 같다”며 “우리 속담으로 하면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평창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것을 평가하면서도 “지금 이뤄지고 있는 남북대화가 미국과 북한의 비핵화 대화로 이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남북정상회담을 성급하게 추진하기보다 북·미대화도 함께 진전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어조가 다소 강하지만 현 북핵 정세에 대한 냉정한 평가라고 본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순위 결정전이 열린 18일 강릉 관동하키센터에서 관중들이 남북 단일팀에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있다. 강릉 _ 연합뉴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해서는 운도 떼지 못하고 있는데 남북관계만 앞으로 나가는 것은 한반도 정세를 오히려 악화시킬 수 있다. 남북정상회담도 중요하지만 북한과 미국을 대화 자리에 앉히려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상황 인식이 타당한 이유다. 마침 미국도 잇따라 대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17일 인터뷰에서 “북한이 나에게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하기를 귀 기울이고 있다”고 말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가 한 말 중 가장 강한 대화 의지를 밝힌 것으로, 북한의 호응을 기대하게 한다.

한·미 양국 간 긴밀한 대북 공조를 위해서도 속도 조절은 의미가 있다. 이는 2000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등 과거 사례를 봐도 입증된다. 당시 남북 정상들이 대화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북·미대화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최근 남북관계 급진전에 미국 조야가 불편해한다는 말이 들린다.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 진전에 대해 미국에 충분히 설명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설득을 해서라도 불필요한 균열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미국의 눈치를 보라는 게 아니라 대북정책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해서다.

유념해야 할 것은 전략과 원칙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남북관계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은 전략의 문제이다. 하지만 평화적으로 북핵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흔들려서는 안되는 원칙이다. 어떤 경우에도 남북대화 동력이 훼손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문 대통령은 “여건을 만들어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자”고 밝힌 대로 착착 준비해야 한다.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해놓고도 스스로 손발을 묶으면 안된다. 기왕에 남북이 합의한 군사당국회담과 고위급회담을 열어 모멘텀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도 적극 협력해야 한다. 하루라도 빨리 북·미대화를 가동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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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라이크 클로이 킴(Just Like Chloe Kim).’ 평창 동계올림픽의 스타가 된 한국계 미국인 클로이 킴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는 3분26초짜리 동영상이다. 주한 미국 대사관이 진행 중인 ‘걸스 플레이 2’ 캠페인(#GirlsPlay2!)의 일환으로 제작된 이 영상에서 클로이 킴은 면온초등학교 스노보드 선수들과 함께 출연하여 여학생들의 체육활동을 독려한다. 화면 속 여학생은 말한다. “제가 나중에 컸을 때 ‘여자들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슬로건은 자연스럽지만 강력하게, 그리고 설득력 있게 등장한다. 여자라고 못할 일은 없다. 열심히 하고, 재미있게 즐겨라.

일주일 전, 아이돌 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손나은이 자신의 SNS에 아침 식사를 하는 사진을 한 장 올렸다. 사진 속 그가 손에 들고 있는 스마트폰에는 “GIRLS CAN DO ANYTHING”이라는 문구가 선명했다. 댓글난은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되었다. 손나은 너마저 페미니스트냐, 혹시 메갈이냐, 군대 가라 식의 글들이 이어졌고, 심지어는 김치녀라는 난데없는 비난도 얹혔다. 게시물은 곧 삭제되었지만, 여진은 계속되었다. 남성들의 비난 때문이 아니라 페미니스트들의 응원 댓글 때문에 게시물을 내렸다는 출처 불명의 설명도 퍼졌다. 해명은 단순했다. 문구가 새겨져 있던 스마트폰 케이스는 프랑스 브랜드인 ‘쟈딕앤볼테르’ 제품을 협찬받은 것이며, 손나은은 해당 브랜드 화보를 촬영 중이었고, SNS 사진은 일종의 스포일러 목적이었다고 한다.

손나은이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로 여기는지, 인권이나 여권 혹은 성평등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미 대사관이 제작한 동영상 속의 문구는 진취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로 받아들일 똑같은 사람들이 한 젊은 연예인의 스마트폰 케이스 속 문구에는 발끈하여 “밥줄을 끊어버리겠”다고 나섰다는 점이다.

실제로 “소녀에게 왕자님은 필요 없다(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사진을 찍었다는 이유로 성우가 퇴출된 사례도 있으니 단순한 겁박만은 아니다. 이 두 경우는 다르다며 굳이 구별짓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페미니즘 포비아라는 점에서는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슬로건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여자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는 오지도 않았거니와, 뭐라도 하려면 너무 힘들다. 젊은 남성 연예인이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선언하면 칭송받지만, 젊은 여성 연예인은 혹시나 페미니스트라 ‘의심’받을까봐 조심해야 한다. 원로 남성 문인의 술시중을 거부하면 시인의 꿈을 접어야 하고, 권력을 가진 예술감독이 호텔 방으로 불러 마사지를 시켜도 군말 없이 해야 연극 바닥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과연 ‘여자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라 말할 수 있는가?

얼마 전 발표된 삼성전자의 임원 승진자 221명 중 여성 신임 임원은 7명에 그쳤다고 한다. ‘여성인재 발탁’을 내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도 30명 임원 중 3명만 여성이었다.

안태근 검사가 공공연한 자리에서 후배 검사를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나오자 여성뿐 아니라 많은 남성들도 경악하고 분노했다. 비슷한 시기, EBS의 토크쇼 <까칠남녀>가 조기 종영되었는데, 기독교계의 반(反)동성애 운동과 더불어 소위 ‘안티-페미니즘’ 정서가 폐지에 큰 역할을 했다. 이 프로그램은 성평등 관점 확산에 기여했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7 푸른미디어상’ 성평등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런데 <까칠남녀> 폐지를 주장하던 입으로 남근검찰의 성도착적 적폐를 욕하는 것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자가당착이다. <까칠남녀> 속의 은하선과 손희정의 목소리가 사라지지 않아야, 오히려 점점 커져야 미니-안태근이 없어지고 제2의 고은과 이윤택이 슬그머니 기어나오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클로이 킴이 여성도 훌륭한 스노보더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과 서지현 검사가 성추행 경험을 용감하게 폭로하는 것을 무관한 일인 것처럼 여기는 이들이 많다면, 성평등한 사회는 요원하다. 완곡하기 그지없는 슬로건 하나를 실제 죽임을 당하는 여성들의 공포와 등치시켜 비난하는 이들이 많다면, 성평등은커녕 극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장되지 못했던 과거로 회귀될 것이다.

‘좋은 페미니즘’과 ‘나쁜 페미니즘’ 감별사를 자처하는 이들, 혹은 이론적·실제적 의미가 거의 없는 ‘이퀄리즘’을 페미니즘의 대안이라 상찬하는 이들이 많아진다면,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이다.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Boys, Be ambitious)”라는 말은 자연스러운데 “여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가 거슬린다면, 그건 당신의 젠더감각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윤태진 |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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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온라인 뉴스 매체 ‘복스닷컴’은 지난달 “2018년에는 사라져야 할 여덟 가지 잘못된 건강·과학 상식”이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게시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 산하 모든 과학과 보건 연방 기관에서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반과학적 태도에 대한 비판을 목적으로 매체 과학 데스크가 기획한 기사다. 유권자가 사실에 근거해 투표한다, 중독은 도덕적 실패다, 아편유사제가 만성허리통증 치료에 효과적이다, 플라세보는 쓸모없다, 비만 해결에 운동이 최고다, 동종요법이 효과가 있다, 기후변화는 ‘토론’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통계적 유의성’이 ‘강한 과학적 증거’를 뜻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이 여덟 가지 상식이 사라져야 할 미신으로 제시되었다.

과학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가 간단한 통계적 검정을 통과하면 ‘통계적 유의성’이 있다고 선언한다. 엄밀하게는 p값으로 정의되는 확률이 0.05 미만이면 통계적으로 유의한 결과를 얻었고 출판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과학자가 ‘영가설이 참이라고 가정할 때, 관찰된(또는 더 극단적인) 결과가 일어날 확률’이라는 p값의 정확한 정의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최근 몇 년간 0.05라는 문턱값으로 얻은 결과가 매우 강한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절감하고 있다. 총알을 난사하듯이 통계적 검정을 수행해 요행으로 얻은 하나의 유의한 결과를 보고하는 p해킹도 학계에 만연해 있다.

p값이 0.05 미만이면 실험 결과가 우연한 기회로 얻어졌을 확률이 5% 미만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거짓 양성으로 밝혀질 확률이 5% 미만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실제로는 차이가 없는데 실험에서 차이가 있다고 나오는 확률을 거짓 양성률이라고 부른다. 실험의 거짓 양성률은 5%보다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를 근거로 문턱값을 0.005 미만으로 낮추자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많은 사회과학 연구자는 결과가 재현되지 않는 ‘재현성 위기’를 고통스럽게 인지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미국통계학회는 ‘통계적 유의성과 p값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했다. 17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미국통계학회가 통계학의 기본적인 문제에 관해 처음으로 발표한 성명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p값은 과학적 증거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판단하는 데 흔히 사용하는 척도지만 가설이 참이거나, 결과가 중요한지 여부를 결정할 수 없다. p값을 오용하면 재현되지 않는 연구 결과가 증가하게 된다. 특히 p값이 0.05 미만과 같은 특정 문턱값을 통과했다고 해서 과학적 결론을 이끌어내거나 정책적 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미국통계학회의 성명서가 학계에 준 충격은 상당히 컸다. 성명서가 20년 전에 발표됐다면 생명공학 연구가 훨씬 발전했으리라는 만시지탄의 감회와, 이번 성명서를 계기로 연구자가 p값에 대한 회의를 품어 다양한 통계분석 방법을 사용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많았다. 

반면 p값이 옳지 않으니 사용하지 말라는 주장은 자동차 사고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운전을 하지 말라는 억측과 다름없으므로, 통계를 요리책처럼 취급하지 말고 과학으로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는 신중한 반응도 있었다.

0.05라는 통계적 유의수준은 확률통계의 역사에서 오랫동안 발전시켜온 개념이다. ‘미국심리학자’ 1982년 5월 호에 실린 해설 논문에 따르면, 현대 통계학의 아버지인 로널드 피셔가 ‘농업부저널’ 1926년 33호에 발표한 논문이 현대적 기원이다. 관행적으로 적용해온 확률오차의 3배가 표준편차의 2배와 같으므로 약 4.56%로 계산되는데, 피셔가 설명하기 쉽게 반올림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설득력 있게 나와 있다. 피셔가 욕조 안에서 오른쪽 발가락을 문지르다 5가 좋아 보여 문턱값을 0.05로 결정했다는 설명도 간간이 보이지만 도시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피셔의 논문과 저서 어디에도 0.05를 기준으로 과학적 결론을 내리라는 문장이 등장하지 않는다. 0.05라는 유의수준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인 데는 후대의 학문적 관행 탓이 크다.

2026년은 피셔가 현대적 의미의 통계적 유의성 개념을 창안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연구자는 통계적으로 유의하다는 구시대적 표현으로 과학적 중요성을 강조해서는 안된다. 언론인은 통계적으로 유의하다는 연구 결과를 맹목적으로 전달해서는 안된다. 

물어야 할 질문은 통계적으로 유의한가가 아니라 효과 크기를 드러내는, 실제로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여야 한다. 현대 과학을 근본에서 흔드는 재현성 위기가 2026년에 해소되리라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이미 학계 일각에서 통계적 유의성 개념을 폐지하자는 주장을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하고 있다. 2026년을 통계적 유의성 폐지의 원년으로 선언한다면 통계학의 역사 연표에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황승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과학잡지 에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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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서윤씨보다 그분들이 더 돈 많지 않을까요?”

서촌의 ‘궁중족발’ 이야기를 지인에게 털어놓았다가 들은 말이다.

궁중족발은 대폭 인상된 보증금과 월세로 세입자가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을 위기에 처한 현장이다. 건물주가 바뀌면서 보증금 3000만원, 월세 300만원이 보증금 1억원에 월세 1200만원으로 올랐다. 나는 이것을 “권리금 챙길 생각일랑 하지 말고 조속히 이곳에서 꺼져라. 나는 당신들 권리금 몫까지 빨아들여 건물을 매매해 더 큰 부자가 되겠다”는 건물주의 메시지로 해석했다.

궁중족발의 사장 부부는 부동산 중개업자로부터 “권리금을 1억5000만원에서 1억8000만원까지 받을 수 있다”며 다음 세입자에게 가게를 넘기고 나가라는 제안을 받아도, 그저 고향인 동네에서 오래도록 장사하며 살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의 법체계는 이들의 소박한 바람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월세 인상 상한 비율을 5년 동안만 보장하고, 그나마도 환산 보증금이 매우 적은 액수여야 하는 것이 그동안의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었다.

동네의 문화를 만들고 건물의 가치를 높인 주체가 누구인가? 그 동네에서 먹고 자고 장사하는 사람들이고, 그중 다수는 세입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주는 세입자를 마치 쇼핑하듯 고르며 ‘소비’하고, 있던 곳에 머무르며 삶을 지탱하고자 하는 세입자들을 거칠게 쓸어버린다. 그나마 ‘영민한’ 세입자는 권리금이라도 얻어 나갈 수 있기에, 오래도록 한 곳에서 한 종목으로 장사하는 우직함보다 뜨는 동네를 알아보고 단기적인 장사 아이템과 포토제닉한 인테리어를 기획하는 감각을 높게 평가하는 인식은 확산된다. 

이런 시류에 편승하지 않고 ‘동네’라든지 ‘역사’라든지 ‘공생’ 같은 인문학적 가치를 좇은 결과가 무엇인지는 궁중족발이 보여준다. 궁중족발은 같은 곳에서 7년 동안 장사했다는 이유로 ‘합법적인’ 폭력의 대상이 됐다. 그것도 모자라 불법 심야 강제집행까지 거행됐고, 궁중족발 사장은 네 손가락이 절단됐다.

이것이 건강한 사회일까? 궁중족발은 한국 사회에 문제제기한다. 그리고 건물주에게 요구한다. 돈만 보고 폭력으로 내쫓지 말고,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를 하자고. 가능하면 함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보자고. 이에 대해 공감하는 헌신적인 문화예술인, 종교인, 활동가들은 돌아가며 궁중족발에 머무른다. 

나는 아주 드물게 행사에 얼굴을 비출 뿐이고, 이에 대해 일종의 부채감을 느낀다. 대신 친지들을 만날 때마다 궁중족발의 안타까운 사연을 알리는 일이라도 하려 하는데, 대다수는 궁중족발의 사연에 공감을 표하고 함께 분노하지만 아주 가끔씩 그들이 너보다 가진 게 더 많을 수도 있는데, 네가 왜 그렇게 그들 걱정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난다.

어쩌면 타인의 일에 너무 이입하여 감정소모하지 않기를 바라는, 나를 위하는 마음에서 한 말일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일상에서의 스트레스 지수가 너무 높은 한국에서, 억울하고 불행한 이야기에 일일이 마음 쓰는 것은 분명 피로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더 많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때, 더 많은 사회적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지점이 만들어진다. 

나는 한국 사회에 개선돼야 할 구조적 문제가 많다고 인지하기에 소망한다. 내 현실의 조건은 잠시 머릿속에서 지우고, 온전히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상황을 보며 함께 분노할 수 있기를. 우리는 그것을 공감능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일단 궁중족발 건에는 일반 시민들보다 건물주님의 공감능력이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건물주님께 호소한다.

건물주님은 수십 채의 건물을 사고파신 이력의 분이라 들었어요. 그동안 많이 버셨는데, 그렇게 꼭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하십니까? 그리고 건물 소유권이 다른 모든 권리 위에 있다는 것은 구시대적 사고방식이에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게 법이고, 상가임대차보호법 역시 보호기간을 10년 이상으로 장기화하고 환산보증금의 상한선을 높이거나 아예 폐지되는 방향에 대해 논의되고 있지요. 현행법을 근거로 본인의 신념이 옳다는 확신을 강화하지 마시고, 부디 함께 잘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데 동참해주시길 바라요!

최서윤 <불만의 품격>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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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좀 다녀올게. 누가 이 말을 하면 이상하게 뭉클해진다. 고향에 가는구나. 태어나 자란 곳,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신 곳. 꼭 명절이어서가 아니라 고향으로 향하는 심사가 어쩐지 가늠이 되기도 하고, 그곳에 다녀온 후의 조금 안정된 상태의 그를 기대하게도 된다.

그러면서 슬그머니 부러운 마음도 생겨난다. 그런 곳이 있다니. 명확하게 갈 수 있는 고향이 있다니.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 물어오면 우선 불편하다. 어쩐지 출신을 파악하고 편을 만드는 꼰대 같은 느낌이 든달까? 그 다음에 오는 느낌은 난감함이다. 글쎄 그곳을 어디라고 해야 할지. 갑자기 소심해지고 자존감이 떨어진다. 태어난 곳이 서울이니 서울이라 할까. 초·중·고 시절을 보냈고 여전히 부모님이 사는 곳이 인천이니 인천이라 할까. 아니면 아버지 고향 무장이나 어머니 고향 순천에 슬그머니 묻어가볼까.

가장 친한 친구가 누구냐는 질문에, 과연 그 친구도 그렇게 생각할까 가늠하며 저어하는 사람처럼.

예전에 아시아 작가들이 모여 문학적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떤 작가는 오래전 떠나온 고향이 마음속에서 항상 2㎞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주 멀어질 수도 없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곳. 그래서 자꾸 쓸 수밖에 없는 곳. 또 다른 작가는 떠돌아다니다 멈추는 바로 그 자리가 고향이라고도 했다.

이에 도서관이나 인터넷 공간을 자신의 문학적 고향인지도 모른다는 젊은 작가도 있었고, 심지어는 편의점이 자기 문학의 자양분이자 고향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서울(Seoul)이 고향인 것이 어쩐지 시시해 보인다는 말에, 한 일본 작가가 ‘소울(soul)’이 고향이니 얼마나 근사하냐고 응답했다. 나는 고향을 명확히 댈 수 있는 작가들이 부러웠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일수록 그랬다. 미나리꽝이나 갈대밭이나 과수원 같은 게 있으면 좋겠고, 적산가옥이나 소금창고나 향교나 토성 같은 게 있어도 좋겠고. 아니면 물 건너 섬마을이나 산골마을이나 천변마을 같은 곳이면 더욱 좋고.

내 고향은 어디라고 말할까? 부모님이 각자의 고향을 떠나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무악재였다. 어머니는 서울여상에 입학한 동생 때문에, 아버지는 얹혀 살 수 있는 유일한 친척이 그곳에 살아서 선택한 동네가 무악재.

같은 회사에서 근무했던 남녀가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퇴근을 하다가 정분이 나는 건 어쩌면 뻔하고도 남는 일. 그리하여 그 둘이 부부가 되어 보금자리를 튼 곳은 홍제동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그로부터 대략 십년간 홍제동, 불광동, 연신내, 진관외동, 삼송동으로 북서진을 하다가 갑자기 방향을 틀어 부평으로 가 자리를 잡는다. 나는 그곳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집을 나와 처음 독립한 곳이 이촌동이었고, 전세계약이 끝나는 2년마다 이촌동에서 이촌동으로 부암동으로 평창동으로 동네를 옮겨다니다가 현재 불광동에 정착을 했고, 10년 동안 그곳에 산다.

불광동에 처음 이사를 왔을 때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누군가는 밀려밀려 그곳 산 밑까지 갔느냐고도 했지만, 정작 나는 고향에 돌아온 기분도 들었다. 아마도 그곳이 내 기억 속 최초의 동네이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집이 불광동 어느 즈음의 문간방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동안 저녁마다 불광동 산책을 다녔다. 해가 지고 난 후 나가는 불광동 동네산책은 제법 흥미로웠다.

야산을 넘어 은평구립도서관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연신내 시장까지 골목길을 따라 내려가는 게 기본 코스다. 허름하고 작은 단층집들이 닥지닥지 붙어서 끊어졌다 이어지고 무수한 막다른 길을 만들어내는 그 골목길의 이름은 번영1길 번영2길, 행복1길 행복2길.

그 좁고 구불구불한 번영길에는 오래된 미장원이 다섯 개나 있다. 골목까지 침투한 대기업 마트의 위협에도 꿋꿋이 버티고 있는 자그마한 전방도 물론 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는 밤 가로등 아래는 손부채 하나씩 들고나온 노인들 차지. 요즘 같은 세상에 고함을 지르며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땀을 찔찔 흘리며 뛰는 아이들을 뒤쫓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전방에 들어가 하드 하나 사서 애들처럼 쩝쩝 소리를 내며 먹게 되곤 했다. 그러면 이곳이 고향이구나 하는 확신이 들었다.

예전에 내가 살았던 모습인 것만 같아서, 그 한결같은 느낌을 주는 것만으로도 고향이라 하기에 충분했다.

현재 내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내는 곳은 연남동이다. 처음 식당자리를 알아보러 다닐 때, 마침 인근에 살고 있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그 동네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며 한탄했다. 조용한 주택가였는데, 상가들이 다 망치고 있다고. 그러면서 웬만하면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 은근한 협박의 소리도 들었다. 약간의 죄책감도 들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그곳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그 한적한 주택가 분위기가 좋았으니까. 그래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건물에 덥석 계약을 하고 식당문을 열었다. 그리고 의식을 치르는 사람처럼 오픈 전에 꼭 산책을 한다. 빙그레 간판을 달고 있는 우유대리점에서 출발해 담장 밖으로까지 흘러내린 포도나무덩굴의 오래된 집을 지나 단층집 이층집 마을식당을 지나간다. 연남동은 불광동과 다르지 않아서 좋았다. 새로운 고향으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친구의 말대로 1년 사이 한산하던 주택가에 십여개의 점포가 새로 들어섰고 골목은 예전 같지가 않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산책을 하며 변해가고 있는 그 골목을 눈에 담는다. 새로운 고향의 역사를 간직하려는 사람처럼. 허물어진 건축물 앞에서 묻는다. 네 고향은 어디인가. 그리고 또 묻는다. 이곳은 누구의 고향인가.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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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과 예술단, 응원단의 방한 행적은 북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깼다. 트집잡기, 신경전, 허세가 사라지고 ‘쿨(cool)’해졌다. 북한 응원단의 응원도구를 한국언론이 ‘김일성 가면’이라고 보도해도, 만경봉호가 기항한 묵호항과 서울시내에서 반북 시위대가 인공기와 김정은 사진을 불태워도 북한은 그냥 넘어갔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진 현수막이 비에 젖은 것을 북한 응원단이 발견하고 울부짖던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때와는 천양지차다. 삼지연 관현악단은 북한 노래에서 시빗거리가 될 만한 가사는 모두 뺐고, 소녀시대 멤버와 합동공연을 해 달라는 청와대의 갑작스러운 요청도 수용했다.

김정은 북한노동당 위원장이 지난 8일 열린 '건군절' 70주년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고전적인 헤어스타일에 수수한 옷차림으로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은 예의와 성의로 세계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평창 올림픽 개회식에서 태극기가 게양되고 애국가가 흐르자 일어나 예를 갖췄다. 한국 고위인사가 북한에서 인공기 게양 때 그랬다면 보수세력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을 일이지만, ‘외교란 이런 것’임을 김여정은 쿨하게 보여줬다.

북한은 1월9일 판문점 고위급회담에서도 기싸움 없이 속도전으로 회담을 진행했다. 남북관계를 취재하던 2000년대 초반과는 전혀 딴판이다. 어떤 이들은 ‘북한이 보여준 모습 그대로 믿어선 안된다’고 한다. 일본어의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표면적인 태도)로 표현하면 북한이 보여준 건 ‘다테마에’일 뿐이라고. 하지만 본심과 겉모습을 늘 일치시키는 나라도 있던가. 외교무대야말로 ‘다테마에’의 경연장 아닐까.

북한의 대남태도가 쿨해진 데는 여러 분석이 있을 수 있다. 경제제재의 압박이 커지고 미국이 군사공격까지 검토하는 엄중한 정세를 돌파하기 위해 남북관계 복원에 나선 만큼 판을 깨지 않으려 각별히 조심했던 것 같다. 남남갈등이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대화에 응한 문재인 정부를 배려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쿨해진 북한’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북핵에만 이목이 쏠려 있던 김정은 정권 7년간 북한 내부에서 일어난 변화도 들여다봐야 한다.

이 시기 북한은 ‘유격대 국가’나 다름없던 상태에서 정상국가로 조금씩 이행해 왔다. 올림픽 개막 전날 열병식이 열린 북한군 창건기념일(건군절)이 ‘비정상화의 정상화’의 좋은 예다. 원래 창군일은 1948년 2월8일이었지만 김일성이 중국에서 항일유격대를 조직한 날(1932년 4월25일)로 1970년대에 변경됐다. 김정은이 2015년에 이를 원위치시켰고, 올해 2월8일 70주년을 기념해 열병식을 개최한 것이다. 북한의 역사와 제도를 김일성 우상화에 동원하던 선대의 극단주의에서 탈피하려는 시도다.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낸 친서에서 ‘국무위원장’이란 직함을 썼다. 여전히 낯선 직함이지만 최고지도자가 ‘국방위원장’이던 선대의 어색함에서는 벗어났다. 김정은은 김정일과 달리 매년 신년사를 직접 발표한다. 지난해 신년사에선 “언제나 늘 마음뿐이었고 능력이 따라서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자책 속에 지난 한 해를 보냈다”고 북한 주민들에게 사과했다. ‘무오류’의 주체사상과 강성대국을 부르짖던 예전 북한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세습 독재체제에 핵·미사일로 국제사회를 위협하고 있는 본질은 그대로지만 적어도 나라 전체에 만연했던 ‘허세의 거품’은 줄어들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2000년은 식량난 극복을 위한 ‘고난의 행군’이 한창일 무렵이다. 이 고비를 넘기며 북한경제는 조금씩 회복됐고, 2010년대 북한식 개혁·개방조치로 탄력이 붙었다. 김정은은 2013년 전국 각지에 경제개발구를 조성하는 경제개방을 선언했고, 각 부문에서 인센티브를 허용하는 개혁으로 생산력을 높였다. 최근 방북한 이들은 90년대 중국 못지않은 활력이 느껴진다고 전한다. 덩샤오핑(鄧小平)이 주도하던 70년대 말 개혁·개방 초기단계를 넘어섰다는 얘기다. 과거의 북한은 한국의 대북지원을 받아야 할 처지이면서 자존심을 잃지 않기 위해 허세를 부려야 했다. 대남태도가 쿨해진 건 나아진 경제형편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외신들은 김여정을 두고 “올림픽에 ‘외교댄스’ 부문이 있다면 김여정이 금메달 후보”(CNN 보도)라고 했다. 김여정은 2박3일 내내 반북 캠페인만 벌이다 돌아간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과의 대결에서 압승했다. 펜스만이 아니다. ‘올림픽 주최국’의 수도 한복판에서 참가국의 국기를 불태우던 반북 시위대와, 북한의 일거수일투족에서 시빗거리 찾기에 바빴던 보수세력도 참패했다. ‘의문의 1패’가 아니라 여지없는 1패다.

<서의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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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어려서 명절이나 잔치마다 강강술래였다. 손만 잡으면 강강술래 빙글빙글 돌고는 했다. “전라도 우수영은 우리 장군 대첩지라. 장군의 높은 공은 천수만대 빛날세라. 술래술래 강강술래. 술래소리 어디 갔나 때만 찾아 잘 돌아온다… 먼데 사람 듣기 좋고 곁에 사람 보기 좋게 강강술래. 높은 마당이 얕아나 지고 얕찬 마당은 짚어나 지게 욱신욱신 뛰어나보세… 은팔지는 팔에 걸고 약초 캐는 저 큰 아가. 니야 집이 너 어데냐. 내야 집은 전라도 땅. 검은 구름 방골 속에 열두우칸 지하 집에. 화초병풍 둘러치고 나귀에다 핑깅(풍경)달고. 응그랑쩡그랑 그 소리 듣고. 나알만 찾아 어서 오소. 강강술래.” 천국에 가면 성형수술 때문에 얼굴 원본대조를 하느라고 길게 줄을 서야 한단다. 돋보이려는 욕망들이 지어낸 그런 줄서기 말고, 둘러서서 다 같이 욱신욱신 뛰어나보는 강강술래의 여인들. 조선하늘 맑은 여인들이 빚어낸 잔치 풍경들. 가족이 또 이웃이 손을 잡고서 달과 별을 반기고 해와 구름과 동무했다. 우주가 내려앉은 태극기를 공중에 매달고서 우리는 누대를 그렇게 한 덩어리 한겨레였다.

얼음판을 지치는 쇼트트랙. 헤집고 시원하게 달리는 선수들을 구경한다. 하계 운동에 양궁이 세계 으뜸이라면 동계엔 빙상 쇼트트랙이다. 미장이가 다져놓은 듯 반듯한 얼음판을 숨차게 달려가는 선수들. 마치 윷놀이만 같아라. 윷놀이도 설날에 빠질 수 없지. 돼지와 개, 양, 소 그리고 말을 가리키는 도, 개, 걸, 윷, 모. 우리가 ‘동 났다’라고 할 때 쓰는 동. 한 동 두 동… 그렇게 네 동이 먼저 나면 이기는 놀이. 암만 빨리 달려도 뒷덜미를 붙잡히면 어김없이 꼴찌로 나앉아야 한다. 모가 나는 행운보다 말을 더 잘 써야 한다.

전 세계에 윷놀이는 오직 한국 사람만 하는 놀이다. 외국인 친구들에게 윷을 가르쳐주면 쉽게 따라서 한다. 어렵지 않은 놀이다. 사막에서 묵을 때 하도 심심해서 윷판을 만들어 날밤을 새웠다. 국민 혈세로 한식세계화 어쩌다가 쪽박을 찬 그런 코미디와는 격이 다른 문화전도사. 내가 그런 사람인데 알아주지 않으니 이렇게 글로 남겨보는 센스.

<임의진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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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평양으로 돌아간 김여정 당 제1부부장 등 고위급대표단과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 14일 조간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사진에서 김여정은 두 손으로 김 위원장의 팔짱을 끼고, 김 위원장은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의 손을 팔목째 껴안듯 잡고 있다. 김 위원장의 표정도 온화하다. 김 위원장이 어디 나들이라도 갔다온 삼촌과 여동생을 만나는 듯한 분위기다. 이복형을 암살하고, 고모부를 처형한 잔혹한 지도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고위급 대표단으로 방남한 뒤 돌아온 김여정 당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김 위원장 오른쪽)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김 위원장 왼쪽) 등을 만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을 노동신문이 13일 보도했다. 연합뉴스

김 위원장의 ‘친근한 이미지’ 연출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현지 지도에서 남녀 주민·군인들과 스스럼없이 팔짱을 끼는가 하면 핵개발 과학자를 등에 업어주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무표정한 얼굴에 여군과 팔짱을 끼고 사진 찍는 게 고작이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는 스타일이 다르다. 공개석상에 부인 리설주를 동반하는 것도 김정은 시대의 특징이다. 인간적이고 주민을 사랑하는 지도자상을 연출하려고 하는 의지가 드러난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통일전략연구소 소장은 김 위원장이 대남유화메시지를 전할 때마다 리설주를 행사장에 대동한다고 분석했다.

김 위원장의 최근 대외 행보는 놀라움 그 자체다. 혈육인 김여정을 남한에 특사로 보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남북관계 개선의 의지를 이만큼 대담하게 표출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김여정의 2박3일 방남 행적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말수는 적었지만 도도하면서도 잔잔한 미소를 띤 표정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일각에서는 북한의 위장 평화공세에 속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한다. 미국에서도 ‘북한 미소작전 경계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13일 상원 정보위원회에서 “김여정은 북한 선전선동부 수장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면한 북핵 위기 속에 북한의 의도를 파악하고 대비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김 위원장이 화난 표정으로 미국 본토와 한반도 핵공격을 거론하며 위협하는 것보다는 ‘작전’일지라도 미소 짓는 게 나아보인다. 언젠가 북·미관계가 호전되면 김여정이 미국을 방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팔짱을 끼고 사진 찍는 날이 올지 모를 일이다.

<조호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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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누구나 한번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과거의 장소를 찾았을 때 그곳이 기억에 남은 장소와는 달라 놀랐던 적이 있을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그런 느낌을 받았던 건 성인이 되어 투표를 위해 고향을 찾았을 때였다. 투표장은 내가 다닌 초등학교였는데 기억에 남은 것과 달리 운동장이 퍽 작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광활하다 할 만큼 컸던 것만 같은데 나이를 먹고 다시 보니 작고 평범한 운동장일 뿐이었다. 세월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뒤 때때로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새삼스럽기는 했으나 놀랍지는 않았다. 기억과 실재의 차이를 자연스레 인정하게 되어서였던 듯하다.

그리고 며칠 전 사십여년 동안 기억에만 있던 장소를 찾게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부모님과 더불어 사십여년 전 당신들이 살았던 셋집을 찾은 거였다. 그 시절 당신들은 세 살짜리 아들 하나를 슬하에 둔 삼십대의 젊은 부부였고 셋집 주인은 사십대의 부부였다. 부모님은 그 시절을 가장 찬란했던 순간처럼 회상하곤 했던 터라 나는 언제든 기회가 되면 그 옛집을 더불어 찾아가고 싶었다. 물론 그 집을 단번에 찾은 건 아니었다. 우선은 당신들의 기억에 남은 마을 이름에 의지해 그런 이름을 지닌 마을을 찾아간 뒤 마을회관에 들렀다. 다행히 그곳에서 당신들보다 나이 든 노인 한 분이 셋집 주인의 이름을 기억해주었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다른 마을이라는 것도 일러주었다. 그곳을 찾아가다 들른 삼거리 슈퍼 주인은 더 자세하게 알려주었고 그 뒤로는 별로 헤매지 않고 그 집을 찾아갈 수 있었다.

당신들은 옛 마을에 들어서자 기억이 났던 모양인지 바로 여기라며 장담했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무척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어서 내 기억에는 몇 가지 인상으로만 남았던 터라 사십여년 만에 찾은 그곳이 낯설기만 했다. 내가 지닌 몇 가지 인상이라는 것도 초라하기 짝이 없어서 그 집이 무척 크고 대문이 높고 마당이 그윽했다는 등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옛집에 이르렀다.

기억에 남은 것과는 다르리라 짐작은 했지만 달라도 너무 달라서 마음속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형적인 ㅁ자 구조의 집이라는 건 기억과 같았지만 작아도 너무 작았다.  대문 양쪽으로 문간방이 달리고 집채가 작은 마당을 둘러싼 형태였는데 마당도 두어 평에 지나지 않아 햇빛이 겨우 들 만큼 조붓했다. 노인은 돌아가신 지 조금 되었고 노부인이 살아 계신 터라 부모님은 노부인과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고 돌아 나왔다. 나오기 전에 우리가 머물렀던 대문 오른쪽 문간방을 들여다보았다. 층이 진 두 칸짜리 방이었는데 손바닥만 한 창이 하나 달렸을 뿐이어서 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그러니까 사십여년 전 그 방에서 삼십대의 하사관과 그의 부인 그리고 그들의 세 살짜리 아들이 꿈을 꾸며 잠들곤 했던 거였다. 노부인은 다시 찾아오겠다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말로 찾아온 사람은 없다며 눈시울을 붉혔고 마당으로 내려앉은 한 줌 햇살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내가 웃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집을 다녀온 뒤 한동안 나는 이런 의문에 사로잡혔다. 기억에 남은 집과 실제로 찾은 집이 그처럼 달랐던 이유는 무엇일까. 다섯 살인 딸아이는 이즈음 사물의 크기를 가늠할 때 아빠인 나를 기준으로 삼는다. 커다란 차가 지나갈 때면 아빠보다 크다 하며 놀라고 무언가를 설명할 때도 아빠보다 크거나 작다, 아빠보다 힘이 세거나 약하다 식이다. 아마도 그러했으리라. 기억의 집은 집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장소나 사물을 실제보다 크고 아름답고 멋지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곳에 깃든 정서가 그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 꿈을 꾸며 살았고 부모의 보호를 받으며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던 곳이기에 기억 속에서 그곳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가난하고 고된 시간이라 할지라도 사랑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이든 장엄한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무엇을 기억하든 실제로 기억하는 건 사람과 사랑뿐임을 뒤늦게 깨닫는다.

<손홍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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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직속 자문기구인 정책기획위원회가 지난 13일 국민헌법자문특위를 출범시키고 정부 개헌안 마련에 본격 착수했다. 정해구 위원장은 “6월 지방선거와 동시에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위해 3월13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개헌안을 보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신년기자회견에서 국회가 합의에 실패하면 정부가 개헌안을 내겠다고 밝힌 바 있다. 기획위는 대통령의 개헌구상에 맞춰 정부발(發) 개헌열차를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문 대통령의 개헌구상을 “야당에 대한 선전포고” “관제개헌 독재”라며 반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가 독자 개헌안에 속도를 낸 것은 야당을 압박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지만 지나친 압박은 야당을 자극하고, 불필요한 정쟁을 야기할 수 있다. 헌법자문특위는 앞으로 한 달간 4차례 전체회의를 열고 시안을 확정하겠다고 했다. 너무 빠듯한 일정이다. 대통령이 개헌안을 발의한다해도 116석의 자유한국당이 반대하면 국회 통과는 불가능하다. 어차피 개헌은 정당합의로 할 수밖에 없다. 시간에 쫓겨 서두를 일이 아니다. 경향신문 여론조사에서도 개헌 국민투표를 ‘가급적 6월 지방선거와 함께 실시해야 한다’는 답(47.0%)이나 ‘무리해서 함께할 필요는 없다’는 답(46.5%)이 큰 차이가 없었다. 

개헌안은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가 논의를 주도하고 시민의 뜻과 정부안을 모아 만드는 것이 최선이자 순리다. 정부가 개헌을 주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통령이 발의해도 최후의 수단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이제 정부의 개헌일정이 확정된 이상 더 늦기 전에 국회는 개헌에 관한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한다. 각당이 개헌안을 테이블에 올려놓고 의견이 다른 부분은 협상과 토론을 통해 조율하면 된다. 개헌 시기만이라도 합의한다면 국민적 공감대 속에 차분히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바깥에서 진행되는 개헌 논의를 구경만 할 거라면 국회는 왜 존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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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5일 지면기사-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남북한 선수들이 단일팀을 이뤄 출전한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예선이 14일 일본전을 끝으로 예선리그를 마무리지었다. 앞으로 5~8위 결정전 2경기가 더 남아 있지만 지금까지의 경기만으로도 잘해냈다고 손뼉 쳐줄 만하다. 국가 간 실력차가 큰 아이스하키 경기에서 세계 3~4부 리그에 머물고 있는 남북한 선수들은 스위스와 스웨덴 등 세계 톱클래스팀과도 용기있게 싸웠고, 일본전에서는 역사적인 골까지 넣었다.

이번 단일팀은 얼어붙어 있던 남북관계를 반영하듯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최종 결정(1월20일)과 북한 선수 12명의 합류(25일) 등 일사천리로 단일팀이 구성되자 20~30대를 중심으로 한 국내 여론은 싸늘해졌다. 북한 선수들을 다 차려낸 밥상에 숟가락 하나 들고 찾아온 불청객쯤으로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이 같은 부정적인 기류를 알고 있던 북측 선수들도 세라 머리 단일팀 감독과 남측 선수단의 눈치를 몹시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머리 감독이 ‘원팀’을 강조하면서 차별 없이 합동훈련을 하고, 따로따로 설치했던 라커룸도 함께 쓰도록 했다. 양측의 임원들은 밖으로 내보냈다. 서로 격의 없이 대화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서였다. 남북 선수들 역시 서로 생일잔치를 해주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선수들끼리 경포대 해변을 거닐고, 카페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흉금을 털어놓았다. 남북한 코치들은 3쪽짜리 아이스하키 용어집을 만들어 소통했다. 혹여 선수단 화합분위기를 저해하는 요소가 돌출되면 앞다퉈 한목소리로 지켜주었다. 머리 감독의 말마따나 선수들을 끈적끈적하게 결합하는 ‘팀본딩’을 이룬 것이다. 남북한 응원단도 힘을 보탰다. 우려 속에 출발한 단일팀이 단 20여일 만에 이룩해낸 작은 통일이다. 외신들도 스위스·스웨덴 등 강호와 맞선 단일팀에 ‘경기는 졌지만 평화가 이겼다’는 평가를 내렸다. 안젤라 루기에로 IOC 위원(미국)은 “단일팀 선수들은 노벨 평화상을 받아야 한다”고까지 했다. 한국 갤럽 조사에서 단일팀 구성에 40% 대 50%로 부정적이던 여론도 경향신문의 설특집 여론조사 결과 긍정적(56.8% 대 38.7%)으로 바뀌었다. 타의로 만들어진 단일팀이지만 서로의 마음을 한데 모은 ‘선수들의 단일팀’이 된 덕분이다.

하지만 이번 단일팀은 1991년 지바 탁구선수권대회 때의 단일팀이 46일간이나 한솥밥을 먹고도 일회성으로 끝나버린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당시 현정화 선수는 ‘이 기분 뭐지. 왜 우리가 헤어져야 하지’ 하는 허탈한 감정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남북 간 상황은 그때보다 열악하다. 더 이상 단일팀 구성이 어려울 수도 있다.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남북 교류가 지속되어야 한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경평축구 재개’를 이야기했다니 무척 고무적이다. 아이스하키의 경우도 남북한 정기합동훈련이나 교류전 등으로 모처럼 조성된 단일팀 분위기를 살릴 필요가 있다. 한 자매처럼 지냈다가 기약 없이 헤어져야 하는 감정적 단절을 더 이상 선수들에게 안겨줘서는 안된다. 스포츠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는 현실에서 돌발변수의 영향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핑퐁외교가 중국과 미국 관계를 풀어줬듯이 남북 스포츠 교류 역시 한반도 긴장을 녹일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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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1호기 수명연장 처분을 취소한다는 법원의 판결이 난 지 1년이 되었다. 원자력안전위원회는 1심 판결에 불복하여 항소하였고, 한수원도 2심 소송에 피고참가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월성 1호기 폐로를 공약으로 내건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정부가 지난해 12월 국회에 보고한 제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따르면 전체 발전용량 중 월성 1호기를 제외하고, 올해 상반기 중 경제성 등 계속 가동에 대한 타당성을 평가하여 폐쇄 시기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경제성 평가는 이미 나와 있다. 국회예산정책처가 2014년 월성 1호기 수명연장의 경제성을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상당한 적자가 발생하는 것으로 산정됐다. 문 대통령이 월성 1호기 폐로를 공약했던 것도 경제성이 없는 것은 물론 안전성이 크게 문제 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경향신문DB

월성 1호기 1심 판결은 ①수명연장에 관한 원자력안전위원회의 적법한 심의 및 의결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고, 원자로 등 수명연장을 위한 설비교체에 대한 허가가 과장 전결로 이루어졌으며, ②당시 원자력안전위원장 등 결격사유가 있어 당연퇴직하여야 하는 위원이 월성 1호기 심의, 의결에 관여하였고, ③핵발전소 수명연장을 위한 안전성 평가를 할 때 평가기준일 당시의 국내외 최신 기술기준이 모두 적용되어야 하나 월성 2·3·4호기에 적용된 R-7 등 기술기준이 월성 1호기 수명연장 안전성 평가에 적용되지 않았다는 점 등이 위법하다고 판시하였다. 따라서 정부로서는 경제성 평가가 아니라 법원이 판시한 월성 1호기 수명연장의 안전성 평가 등의 위법사항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재판 과정에서 원고들이 월성 1호기 최종안전성분석보고서 열람을 신청하여 지난 1월 말 허용되었으나, 그동안 적극적 정보공개를 공언했던 한수원은 열람기간도 겨우 3일에 목차만 메모할 수 있게 하고 복사·촬영을 불허하였다. 열람에 참여하였던 전문가들은 월성 1호기 수명연장에 적용한 안전설계기준이 30년 전 내용을 개정 없이 그대로 적용하였고, 기계부품규격도 1971년 규정을 적용하는 등 안전성 평가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안전보조계통의 상당수가 내지진검증이 되어 있지 않아 지진이 발생하면 안전설비가 작동되지 않을 수 있어서 중대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도 밝혀졌다. 중수로인 월성 1호기 원자로는 20㎏짜리 핵연료 12개가 내장된 6m 길이의 두께 수㎜ 압력관 양단에 2.5m의 종단이음관이 연결된 11m 길이의 수평 배관 380개로 구성되어 있어 지진 충격에 상당히 취약한 구조이다.  더군다나 사고 시 중앙제어실이 방사선 오염을 막을 수가 없어서 운전원들이 거주할 수 없기 때문에 사고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였다.

법원의 판결로 이미 확인된 문제점을 정부가 조사해야 하는 이유는, 원자력안전위원회와 한수원이 1심 판결에 불복하여 다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월성 1호기 폐로의 정당성을 확인하고, 월성 1호기 수명연장 과정의 문제점과 위법사항은 국내 다른 핵발전소에도 마찬가지 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월성 1호기 수명연장 과정에서 드러난 규제의 문제점은 빙산의 일각으로 나머지 국내 핵발전소 인허가 과정과 안전규제의 위법사항에 대해 전면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들 중요한 시발점이 될 것이다. 이는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고 적폐를 청산한다는 것을 넘어, 재발방지와 사고방지라는 국가 안보적 측면에서도 너무도 중요한 일인 것이다.

<김영희 | 변호사·탈핵법률가모임 해바라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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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m 굴뚝 위에 그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75m는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숫자였다. 제법 숫자에 밝은 이가 25층 아파트 높이라고 일러줘도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땅바닥에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 것인지 막연했다. 1층부터 아파트 층수를 헤아리면서 고개를 뒤로 젖혀 올려다본들 눈으로만 닿을 뿐 마음으로는 읽히지 않는 높이, 그곳에서 93일째 농성 중이라는 두 사람을 응원하러 가면서 시의 구절이 떠올랐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언제든지, 새들처럼 하늘로 올라가 둥지도 틀 줄 알아야 한다는, 송경동 시인의 ‘생태학습’.

그리하여 아주 오래전 어느 날 고무공장 노동자가 을밀대에 날아오른 뒤로 수많은 이들이 한강철교에 크레인에 송전탑에 옥상 광고판에 올랐다. 정말 시인의 말대로 그들은 새들처럼 가뿐히 그곳에 오른 것일까. 어둠 속에서 흰 연기를 거침없이 뿜어내는 까마득하게 높은 굴뚝을 올려다보며 나는 기껏 이런 생각을 했다. 새벽 찬 공기를 뚫고 한 걸음 한 걸음 허공으로 솟은 계단을 밟아 올라가 어느 순간 정말 하늘을 높이 나는 새처럼 작은 점이 되었을, 그들의 첫날을 생각하니 오금이 저렸다.

“우리의 요구는 고용과 노동조합과 단체협약을 승계하라는 겁니다!”

마이크를 쥔 이는 굴뚝 아래에 쳐놓은 천막에서 지낸다고 했다. 그는 말하는 게 서투르다면서 쑥스러워했다. 오랫동안 길 위에서 세상과 맞서 싸운 이들이라면 날 선 눈빛을 하고 있을 법한데, 찾아오는 이들과 눈을 맞추는 그의 눈빛은 온화했다. 사람들이 왔다고 굴뚝 위에서 내내 흔들리던 손전등 빛도 따스했다. 노동악법 철폐와 헬조선 악의 축 해체! 그들의 외침은 억센 구호가 아니라 망망대해 등대의 불빛과 같은 것이구나, 그들의 싸움은 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모두의 꿈이라는 것을 굴뚝 아래서 그 높은 곳을 올려다보고서야 깨닫는다.

그나저나 며칠 전 회삿돈 수십억원을 멋대로 유용해 뇌물로 쓰고도 버젓이 감옥에서 걸어 나온 이를 생각하니 굴뚝에 있는 이들이 내려올 날이 요원할 것만 같아 차갑게 언 손가락이 아렸다. 세상은 언제쯤 굴뚝 위에 있는 저 불빛에 응답할 것인가.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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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대선 직후 홀연히 떠났던 양정철 전 청와대 비서관이 잠시 귀국했다. ‘양비’라는 호칭이 더 익숙한 양 전 비서관.

문재인 대통령은 대통령비서실장, 국회의원, 당 대표를 거치며 짧은 시간 상층 단위에서 정치를 학습했다. 때마침 금권, 패권 정치가 저물 무렵이었다.

‘양비’는 현재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무게를 만들었다. 2008년 3월 ‘시민 문재인’은 경남 양산 매곡마을로 내려와 “밥벌이가 아니라면 더 깊숙한 골짜기를 찾았어야 했다”고 했다. 그랬던 ‘시민 문재인’을 정치 한복판으로 끌어낸 것은 정권교체를 도원결의한 친노 그룹의 집단적 결의였다. 그다음 기승전결은 ‘양비’가 엮었다. 한 손엔 ‘노무현의 유산’을 또 한 손엔 <문재인의 운명>을 건네며. 2012년 대선 시작부터 2017년 대선 마무리까지 ‘양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 17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며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간중간 심호흡이 필요할 때 <1219 끝이 시작이다>와 같은 고해성사를 부추기는 일도 ‘양비’의 몫이었다.

<1인자를 만든 참모들>의 저자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은 “양정철 전 비서관은 참모 정치인의 전형”이라고 평가했다. 이 의원이 분류한 참모 10계명 중 실제 ‘양비’ 사례를 대입하면 역사적 책무에 충실할 것(정권교체), 전투보다 전쟁을 생각할 것(문 대통령 20대 총선 불출마), 특출한 다른 참모를 인정할 것(임종석), 자리에 연연하지 말 것(외국행) 등이다.

‘양비’의 참모 정치는 귀국길에서 한발 더 나아갔다. 참모의 철학을 대통령 리더십에 투영하지 않고 직접 제시했다. ‘말과 글’이었다. 따지고 보면 말과 글은 ‘양비’의 DNA다. ‘양비’는 노무현 정부 청와대에서 국내언론·홍보기획 비서관을 맡아 권력의 언어를 다뤘다. 이전엔 기업에서 자본의 언어가 가진 힘을 알렸다. 학창 시절엔 격문으로, 학보사 기사로 운동의 언어를 구사했다. ‘양비’는 통화와 출판기념회에서 “이젠 말의 힘이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사회를 진보시킨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저서도 <세상을 바꾸는 언어>다. 7~8년 전부터 메모한 약 300단어를 추려 평등, 배려, 공존, 독립, 존중의 언어로 정리했다. 특히 권력의 언어에 집중했다.

그간 정치에서 말과 글이란 정치인들의 권력 분배를 위한 자원에 불과했다. 종북, 빨갱이라는 말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정치권의 거친 언어도 권력의 주인이 시민이 아니라는 확증편향에서 비롯된다.

요즘 툭하면 저급한 언어를 쏟아내는 자유한국당과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이낙연 국무총리가 대비되는 결정적 이유다. ‘양비’는 “문재인 정부는 국민주 정권이다. 우리가 만든 정부니 성공해야 한다는 주권의식이 강한 시민들이 정권을 이끌고 있다”고 규정했다. 정치를 하려면 ‘우리가 어떤 수준의 시민들과 함께하는지 고민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양비’의 화두는 뼈아픈 시행착오 속에서 더 깊게 길러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정치개혁 완수를 위해 제도개혁을 중요하게 여겼던 리더였다. 하지만 급했다. ‘우리가 옳다’는 전제 속에서 시민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다 보니 사사건건 관성과 개혁의 경계를 돌파해야 했다. 그래서 노무현 정부 당시 권력의 언어는 통역이 필요하다는 푸념이 나돌곤 했다. 언론담당 ‘양비’는 그때마다 최전선에 있었다. 국회 국정감사 때 수석도 아닌 ‘양비’가 출석했을 정도니. 노 전 대통령과 언어로 맺어진 참모 중에서도 현실 정치에 직접 개입했던 독특한 참모였다. 뾰족하고, 투쟁적이고, 거칠고, 비타협적인 ‘양비’ 이미지는 이때부터 굳어졌다.

정권교체 일등공신이면서도 외국을 떠도는 데는 정치적 이유가 클 것이다. 권력 내 이해관계, 문재인 정부의 차별화, 제왕적 대통령제 폐해 등등. 일본에서 ‘양비’가 언어와 민주주의를 주제로 책을 낸다고 해서 “이번에 귀국하면 다른 문법으로 만나고 싶다”고 미리 요청했다. 요 며칠, 다른 문법으로 접한 ‘양비’는 달라져 있었다. 말과 글로 아파 봤던 참모가 말과 글로 치유하는 과정이 쉽지 않아 보였다. 사람이란 존재가 아무리 상처이면서 칼이라고 해도. 스스로 문재인 정부에서 ‘양비’ 이외 다른 직책은 없을 거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다른 문법으로 답한다면 ‘양비’의 정치 재개는 문재인 정부의 레임덕 시점이 아닌 ‘언어 민주주의’가 필요할 때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그때까진 “나는 지나가는 봄”이라고 한 그의 계절엔 바람이 불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9개월 전 무심한 혼잣말에도 꽃은 흔들렸다. 심지어 지금은 찬 바람에 내준 한겨울 나뭇가지마다 다른 꽃들로 무성하다.

‘양비’라고 마음이 스산하지 않을까. 하지만 무엇으로든 피어난다. 어떻게 피어날 준비를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어쩌겠나. 살아온 길이 그랬고, 살고 있는 지금이 그렇고, 살아야 할 내일이 심상치 않은 운명인 것을.

<구혜영 정치부 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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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작년 말을 기준으로 65세 이상 국민이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4.2%를 넘어 고령사회에 진입하였고 합계출산율은 1.2명 정도로 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을 기록하고 있다. 그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역대 정부가 쏟아부은 예산이 물경 200조원에 이르지만 상황이 나아진 것은 거의 없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우리의 농촌이 점점 비어간다는 사실이다. 농촌 지역사회의 고령화는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전남 고흥군의 경우를 보면 6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38.5%로 초초고령사회에 이르렀고, 광역단위인 전라남도 전체 고령자인구 평균은 21.5%로 초고령지역이 되었다.

예로부터 농자(農者)는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하였는데 시대가 바뀌고 생활방식이 변하고 산업구조가 달라졌을지라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농업은 생명산업으로 모든 산업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산업별 취업유발계수를 보면 농업 부문이 32.9명으로 어느 산업보다 높게 나타나고 있다.

이는 농업에 대한 투자가 일자리 창출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업에 대한 의욕적이고 장기적인 투자를 통해 농촌지역을 살림으로써 일자리 창출뿐만 아니라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고 산업 기반을 든든히 하는 일거삼득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간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입한 200조원이라는 천문학적 예산을 농촌개발과 농업부흥에 제대로 투자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우리 농업은 네덜란드나 스위스의 농촌처럼 과학영농, 첨단기술 활용의 선진 농업으로 탈바꿈하여 청장년이 돌아오고 아기 울음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피어나는, 새롭게 도약하는 삶의 터전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요즈음 인구에 회자하는 4차 산업혁명은 인공지능, 사물인터넷, 빅데이터가 주도하고 있지만 이들 첨단기술은 다행스럽게도 매우 농업친화적이다. 정보통신 최첨단 과학기술을 농식품 분야별, 생산단계별로 다양하게 결합해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고 우리가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농업에 대한 투자는 소모적인 것이 아니고 어느 분야 투자 못지않게 효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선진농업국가 구현은 21세기 국가 성장동력의 중요한 한 축이라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거센 물결로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우리 농업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의 전환과 전략적 집약투자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를 통해 일자리 창출, 저출산 극복, 국부 증대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박종복 | 농업기술실용화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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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여성 시인이 지난해 겨울에 발표한 ‘괴물’이라는 시가, 이른바 ‘미투운동’의 일환으로 알려지면서 문단과 문화계를 넘어 문학 대중이나 일반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고 있다. 일부 문학인들이 목도한 현실로, 그리고 많은 문학인들 사이에서는 풍문으로 회자되었던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론화되면서 그동안 순수와 고고(孤高)로 포장되었던 ‘어떤’ 문학(인)들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비판이 일고 있다.

그동안 우리 사회가 덮어두었던 또 하나 적폐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우리의 대학이 한국의 문단과 많이 닮아 있음을 생각하게 된다. 작품 ‘괴물’이 에둘러 가리키는 어떤 인물처럼, 한국의 대학은 온갖 미명(美名)을 두르고 있고 수치로만 본다면 충분히 세계적인 반열에 올라 있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기이하고 추악한 일들이 적잖다.

지난 2016년 문예지에 문단 내 성폭력 실태를 폭로했던 김현 시인이 7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하고 있다. 김현 시인이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문단 성폭력을 말하고 있다. 정지윤 기자

최근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대학의 풍경들, 이를테면 수천억원의 기금을 적립해두고 있으면서도 최저임금 인상을 이유로 청소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줄이고 정리하는 모습 등은 납득할 수 없지만 감추어진 실체는 아니다. 지원금 앞에 교육부의 철저한 을로 전락한 대학 당국, 그 대학본부가 비용의 논리를 들어 촘촘하게 배치한 대학 내의 위계적인 인적 관계들, 계량화된 업적 평가와 연구재단의 연구비에 온전히 포획된 연구자들로 꾸려지는 대학, 게다가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85% 이상을 담당하고 있는 사립대학들에서 벌어지는 감추어진, 그러나 내부자들에게는 공공연한 그 괴이한 천태만상들은 문재인 정부가 수행해가고 있는 적폐청산의 과정과 그 너머 어디쯤 건설될 건강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더 이상 그릴 수 없게 한다.

‘교육 개혁 없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 문단의 패악과 달리 대학의 문제는 대다수 국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청소년들을 짓누르는 끔찍한 입시제도, 다수의 국민들에게 열패감을 안겨주는 부동산 문제, 젊은이들을 절망하게 하는 일자리 문제, 저출산 고령화의 문제, 몰락하는 지역의 문제 등등 대한민국 사회의 난마 같은 문제들이 대학과 관련되어 있다. 대학을 둘러싼 문제들을 제대로 풀지 않고는 사회적 병폐들을 치유할 수 없으며 우리의 건강한 미래도 건설될 수 없다. 대학의 문제를 좀 더 거시적이고 공적인 차원에서 함께 고민하고 다루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다행히 문재인 대통령은 대학 공공성의 중요함을 분명히 인지하고 대학체제 개편을 통한 교육정상화를 선거 과정에서 약속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의 고등교육개편안 핵심은 국공립대학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공영형 사립대학’을 집중 육성함으로써 대학 서열화를 완화하고 지역균형발전을 도모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확대함으로써 중등교육을 정상화하고 대학을 지역균형발전의 견인차로 삼겠다는 발상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에 ‘장기적으로 발전 가능성이 있고, 지역적으로 필요한 사립대’ 최소 30곳을 육성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운 바 있다. 문재인 정부의 핵심 정책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역분권의 실질적인 방안이 바로 이 고등교육개편안에 담겨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인 교육제도에 대한 발본적인 변화와 개혁 의지를 담고 있는 만큼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가시적인 성과를 단기간에 거둘 수는 없겠지만, 고통의 감내나 장기적 비전에 대한 확고한 의지 없이 한국 사회의 건강한 미래는 당도하지 못할 것이다.

대학은 과거의 지식이 전수되고 새로운 지식이 창출되는 곳이다. 대학에서 우리는 인류의 축적된 지혜를 배우고 도래할 미래를 대비할 수 있는 힘을 기른다. 개인과 국가의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것과 더불어 대학은 사회 구성원들이 함께 공유할 가치들을 고민하고 교육하는 시민교육의 장이다. 청소년기에서 성년기로 이행해가는 젊은이들이 자기 자신의 삶과 자신이 속한 현실 세계를 두루 성찰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찾고 만들어가야 할 곳이 대학이다. 대학의 공공성을 강화하고 확대하는 일은 적폐청산 이후의 한국 사회를 사유하고 상상하는 작업과 뗄 수 없다. 대학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가고 건설하는 핵심 기지로서 우리 사회의 공적인 자산이다. 그러한 점에서 대한민국 고등교육의 절대치를 담당하고 있는 사립대학의 공영화 문제는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대학의 공적 기능을 회복하는 일, 그것은 대한민국의 건강한 미래를 준비하고 실현해가기 위한 필수조건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김문주 | 영남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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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평균 70년을 산다면 그중 1년은 감기에 걸려 있다는 통계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햇수로 따지면 매년 약 닷새 좀 넘게, 일수로 따지면 매일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시간인 20분 남짓 우리가 감기에 골골하고 있는 셈이 된다. 평생 고뿔을 모르고 살았노라 곤댓짓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많은 사람들은 일 년에 한두 차례 감기를 명절 손님처럼 맞는다. 전 세계적으로 매년 10%의 인류가 경험한다는 감기는 바이러스 때문에 발병한다. 우리처럼 온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기온이 떨어지는 겨울에 감기에 취약하다. 날이 차가워진 까닭에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면역력이 떨어져서 쉽게 감기에 걸릴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계절에 따른 온도 차이가 크지 않은 적도 근처의 사람들은 감기에 잘 걸리지 않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홍콩에서는 작년에 감기 바이러스의 사촌격인 인플루엔자 감염으로 300명이 넘게 죽었다. 아열대 기후의 특징을 보이는 홍콩에서 여름 시즌인 5월에서 8월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2006년 세계보건기구가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적도 근처의 사람들도 온대 지방인 미국 사람들 못지않게 감기에 걸리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고 한다. 따라서 뉴욕에든 자바섬에든 바이러스는 늘 있는 것이고 어떤 이유에서든 면역력이 떨어진 인간을 골라서 바이러스가 습격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온대 지방과 마찬가지로 적도 지역에서도 감기에 취약한 연령층은 U자 그래프를 그린다. 아주 어리거나 나이든 사람들의 면역력이 상대적으로 쉽게 약해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 인간의 면역계는 왜 감기 바이러스에 유독 취약한 것일까? 일주일 정도의 휴식과 따뜻한 콩나물국 말고 다른 처방은 없는 것일까?

뉴스를 조금만 눈여겨보면 바이러스는 사람뿐만 아니라 새들과 식물에도 거침없이 달려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물고기, 개구리, 악어도 사는 동안 한번쯤은 바이러스에 시달린다. 지금까지 나열한 생명체는 모두 눈에 보이지만 현미경으로나 보임직한 세균도 바이러스 때문에 흔히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다양한 바이러스 중에서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와 조류가 특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들이 있다. 감기는 이미 얘기했고, 현대판 흑사병이라 불리는 에이즈, 소두(小頭)증을 유발한다는 지카, 해마다 갈마들며 조류 독감과 구제역을 일으키는 바이러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바이러스는 RNA라는 다소 불안정한 유전 물질의 돌연변이를 통해 끊임없이 변신하며 약물이나 백신에 대해 내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세균은 이런 RNA 바이러스에 상대적으로 강한 내성을 보인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세균은 쉽사리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 다른 수단도 있겠지만 침입한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감지하고 제거하는, 크리스퍼(CRISPR)라 불리는 세균의 면역 담당 저격수가 한몫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퍼는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의 줄임말이다. 세균의 유전자 가위니까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자른다고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어디를 자를 것인가? 바로 이 지점에 생물학의 묘미가 살아 숨 쉰다. 세균의 크리스퍼는 자르고자 하는 바이러스 유전자 표적에 지퍼를 채운 것처럼 착 달라붙는다. 그런 다음 크리스퍼와 팀을 이뤄 일하는 가위 단백질이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싹둑 잘라버린다. 스스로를 조립하지 못한 바이러스는 이제 더 이상 바이러스가 아니며 온전하게 살아서 세균 밖을 나갈 도리가 없다.

사실 크리스퍼의 단서를 짐작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1987년 세균의 유전자를 비교 분석하던 일본의 연구진들이 크리스퍼의 존재를 눈치챘다. 하지만 그 정체가 밝혀진 것은 21세기에 접어든 뒤였다. 요구르트나 요플레와 같은 발효 유제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균을 조사하던 덴마크의 대니스코 연구진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 체계가 바이러스 감염에 대한 내성을 갖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흥미로운 점은 크리스퍼가 과거 세균 집단에 무단 침입했던 바이러스의 유전자를 채무기록처럼 꼼꼼히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 세균은 자신을 한번 침입한 바이러스를 쉽사리 잊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면역계의 이러한 특성을 두고 적응성 면역이라고 칭한다.

이후 분자생물학자들이 크리스퍼의 파급력을 짐작하게 되면서 변방에 있던 세균의 면역 체계가 일약 유전공학의 총아로 떠올랐다. 마침내 과학자들은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인공적으로 합성하여 정확하고 빠르게 동물이나 식물의 특정 유전자 부위를 편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혈우병과 같은 유전 질환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게 될 것이다. 비계 대신 살코기가 듬뿍 든 ‘슈퍼’돼지를 만들 수도 있다. 곰팡이 감염에 강한 바나나도 곧 선보일 것이다. 크리스퍼는 이미 변화의 장도에 올랐다.

한편 과학자들은 크리스퍼가 본디 바이러스의 대항마로서 진화한 세균의 방어체계라는 점을 잊지 않고 그것을 난공불락의 감기 바이러스를 무력화시키는 데도 쓸 수 있으리라 궁리한다. 무작정 살처분에 맡기는 구제역과 조류 바이러스 감염 가축들도 곧 크리스퍼와 한번쯤 만나야 하지 않을까? 영하의 강추위가 한정 없이 길어지는 이 겨울, 나는 작고 작은 것들의 세상을 꿈꾼다.

<김홍표 | 아주대 약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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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한 500명의 대학생이 한 학기에 한 권의 고전을 함께 읽는다. 이번 학기의 고전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다. 이해를 돕기 위한 특강, 전문가 해설과 함께하는 영화 상영이 기획되고, 자발적 세미나와 원문 강독 모임에 전문 인력과 진행 경비가 지원된다. 아우슈비츠는 물론, 캄보디아와 베트남, 제주도와 서대문형무소, 그리고 ‘위안부’ 역사관 등을 찾아서, ‘악의 평범성’이 역사가 되어 버린 현장을 발과 눈으로 확인한다. 책의 내용과 현장 경험을 창의적으로 발전시킨 소감문을 시상하고 공유한다. 정규 수업으로 개설하기 힘든 산스크리트, 라틴어 등의 도구언어 학습반과 연 50여 종의 동서양 고전 강독반이 진행된다. 소수라도 원하는 학생이 있으면 전문가를 붙여주는 방식이다. 교수와 대학원생, 학부생이 함께하는 랩을 만들고 학업지원금을 지급하며 차근차근 인문학 후속세대를 키워간다. 글로벌 지역문화 이해와 다양한 융합전공의 기반으로서 인문학이 지닌 가능성을 배가하기 위해 교육과정 개편과 해외 연수, 전문가 특강, 인턴십 등이 다채롭게 진행된다. 인문학 교수들이 교도소와 병원, 지역 문화원과 기업체로 찾아가고 중·고등학생과 지역주민을 대학교로 초청해서, 품격 있는 인문학 강연을 진행한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대학인문역량강화사업(CORE)’의 일환으로 한 대학교에서 진행 중인 프로그램의 일부다. 전국 19개 대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인문학 교육 프로그램과 대중화 사업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창의적이다. 당초 약속대로 이 사업이 10년 동안 정상적으로 지속되면 인문학의 육성은 물론, 인문적 상상력을 지닌 융합인재와 글로벌 지역전문가의 배출, 나아가 국가의 미래 경쟁력 확보에 가시적인 효과가 기대된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대학재정 지원 사업 개편에 의해 이 사업은 3년차로 중단된다. 지역학 중심으로 교육과정을 개편한 학과들은 파행을 막을 길이 막막하다. 인문기반 융합전공에서 진로를 모색하던 학생들은 모처럼의 동력을 잃게 되었다. 미래의 인문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학생들이 학교와 국가를 상대로 가지게 될 허망한 배신감을 생각하면, 처참할 뿐이다. 약속의 파기는 개인 간에도 심각한 문제다. 백년대계를 두고 국가가 한 약속은 더욱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후속 사업이 절실하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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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 독일에서 공부한 탓인지 서유럽 정치에 관심이 적지 않다. 당장 3월4일 치러질 이탈리아 총선에서 우파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五星)운동’이 집권에 성공할 것인지를 눈여겨보고 있다. 최근 오성운동은 30%에 육박하는, 단일 정당으론 가장 높은 지지율을 보이고 있다. 오성운동이 다른 정당과의 연대를 거부하지만, 선거 결과에 따라선 우파 연립정부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주목할 것은 포퓰리즘이 2008년 금융위기라는 ‘대침체’ 이후 서구 정치변동을 이끌어온 핵심 동력이라는 점이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현상’, 프랑스의 ‘국민전선’과 ‘전진하는 공화국’,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 영국의 ‘독립당’,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오스트리아의 ‘자유당’, 덴마크의 ‘국민당’, 노르웨이의 ‘진보당’, 그리스의 ‘시리자’, 그리고 스페인의 ‘포데모스’에 이르기까지 포퓰리즘이 서구 정치사회는 물론 시민사회를 뒤흔들어 왔다.

포퓰리즘을 특징짓는 현상은 두 가지다. 첫째,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균열을 부각시킨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엘리트란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다. 정치의 일차적 목표는 엘리트 기득권에 맞서서 국민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이들은 역설한다. 대중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 논리보다 감성에 의존하고, 민중이 정치의 주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인민주권을 내세우는 게 포퓰리즘의 핵심이다.

둘째, 이념 구도를 망라한다. 트럼프 현상이 우파 버전이라면, 포데모스는 좌파 버전이고, 전진하는 공화국은 중도 버전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의 차이다. 두 포퓰리즘은 모두 엘리트 대 국민의 적대를 정치의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우파 포퓰리즘은 이 적대에 국민 안에서의 ‘내집단 대 외집단’의 적대를 더한다. 저널니스트 존 주디스에 따르면, 외집단이란 이민자·난민·이슬람교도 등을 지칭한다.

서구에서 포퓰리즘이 급부상한 데에는 세 요인이 중요하다. 첫째, 불평등의 구조화다. 금융위기 이후 우파든 좌파든 기성 정치사회는 불평등의 해소에 대체로 무능했다. 둘째, 세계화의 증대다. 세계화 시대가 열리면서 호황의 국면에선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높았지만, 대침체 이후 이민과 난민 정책이 예민한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셋째, 정보사회의 진전이다. 적잖은 국민은 신문·방송의 기성 공론장을 패스해 페이스북·트위터 등 SNS를 통한 정치사회와의 직거래를 활성화시켰다.

요컨대, 불평등, 세계화, 정보사회가 가져온 전환기의 불확실성은 문제 해결에 무력한 기성 정치사회에 대한 실망과 거부를 낳았고, 바로 이 실망과 거부의 공간이 포퓰리즘의 서식처를 이뤘다. 정치학자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통찰했듯, 포퓰리즘 정당은 기존 계급·이념의 균열을 넘어서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새로운 적대를 창출했다. 그리고 다양한 사회 집단들을 ‘하나의 국민’이란 이름으로 호명하여 결집시킨다. 포퓰리즘 정치에는 이렇듯 소외되고 배제된 국민들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정체성의 정치’가 도사리고 있다.

트럼프 정부와 시리자 정부가 보여주듯 포퓰리즘의 득세가 정부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우파 포퓰리즘이 내세우는 이·난민 문제나 좌파 포퓰리즘이 주력하는 불평등 해소는 쉬운 과제들이 아니다. 정책의 선택은 세계화된 자본주의로부터 가해지는 구조적 강제와 정부 정책을 구속해온 경로의존성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국민들은 기득권 세력을 공격하는 포퓰리스트들에 열광하지만, 그 열광은 이내 환멸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한계가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포퓰리즘이 번성하는 이유는 뭘까. 그 까닭은 무엇보다 기성 정치사회의 역량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낮다는 데 있다. 적잖은 국민이 관료화된 기성 정치가 국민 전체의 가치와 이익을 대표하지 않는다고 믿는 한, 포퓰리즘은 제3의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 계속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정책적 측면에서 ‘대중영합주의’를 함의한다. 주목할 것은 정치적 측면에서 포퓰리즘의 의미와 효과다. 포퓰리즘은 인민주권의 회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한 식솔이다. 그러나 동시에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불편한 친구다. 서구에서 1929년 대공황 이후 복지국가가 등장했듯, 2008년 대침체 이후 포퓰리즘이 부상한 것은 서구 정치가 새로운 시대로 가는 문턱에 올라서 있음을, ‘이념 시대’에서 ‘포퓰리즘 시대’로 전환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징표일 수 있다. 서구 정치변동에 대한 또 하나의 이해를 위해 이 칼럼을 썼음을 밝힌다.

<김호기 | 연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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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_내_성폭력 1차 파동이 일던 2016년 가을, 한 여성 평론가에게 물었다. “요즘 문단 분위기 어떻습니까?” 매우 신중한 성격인 그녀는 약 5초간 침묵하다가 “문단이란 걸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답했다. 그녀의 입에서 그런 단호한 말이 나오는 걸 들은 건 처음이었다. 어린 고교생 작가 지망생까지 성폭력의 희생자였음이 드러난 때였다.

대구경북여성단체연합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 1일 대구지방검찰청 앞에서 검찰 내 성폭력 사건의 진상규명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단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없앨 수도 있고 없앨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제도로서의 문단은 등단과 문학상, 문예지와 문학가 단체 등을 아우른 체계를 뜻하고, 비물질적인 측면에서 문단이란 문인들의 네트워크, 또 비평적·예술적 규범과 권위로 이뤄진 무정형의 공동체 같은 것을 뜻한다. 한국에서는 대표적인 문예지를 운영하는 출판사와 그 주변의 작가·비평가가 문단의 중심에 서 왔다. 그리고 이 땅 문단에서는 근대문학의 이념과 제도가 발생하던 20세기 초부터 술자리가 중요했다. 이는 한국 사회 어디에나 있는 그 술자리의 문학판 버전이기도 하다. 거기서 친분과 인맥이 생겨나며, 청탁과 거래가 오가기도 한다. 언젠가부터 큰 출판사들은 의식적으로 많은 돈을 쓰며 지식인·문인들에게 공짜 술을 샀다. 고담준론이나 지적·예술적 교류가 오간 것도 사실이니, 좋게 보면 술자리는 문학계의 자율성과 연동되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자리들에서 권력의 네트워크와 권위를 악용한 성폭력도 자행돼온 것이다. 성폭력범은 소수라 해도 이런 문화 자체가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이어져왔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다.

2015~2016년의 표절·성폭력 스캔들을 겪고 문단의 제도와 네트워크는 부분 개혁되었지만, 권위와 존경은 근저에서 깨져나가고 있어 안타깝다. 필자가 다니는 대학 문학 동아리의 한 남학생은 모 원로 소설가를 일컬어 ‘고마운 개새○’라 했다. 노회한 상습범이 젊은 영혼에게 충격적 깨달음을 준 것이다. 그는 남성인 자기에게 모호하던 많은 문제가 사태로 인해 분명해지고, ‘여성의 처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고 했다.

저렇게 심각했던 1차 파동 때에 문단의 호스트이자 ‘권력’이었던 ‘어른’들은 마치 아무 일 없는 양 하거나 침묵했다. 그리고 며칠 전 어느 ‘원로’는 다시, ‘작품과 작가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된다’거나 ‘예술가들의 업적은 존중하되 그 약점이나 실수는 보호’(!)해야 한다고 했다. ‘원로’나 일부 비평가들은 이런 사태로 인해 자신들이 쌓아온 ‘공적’이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힌 모양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선, 많은 피해자들과 젊은 문학인과 독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가해자 또는 방조자됨을 진정으로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예술적’ ‘공적’의 일부라도 한국문학 교실에서 가르칠 수 있다.

사실 이미 한국문학사는 ‘불구하고’(일본어투라지만 문맥상 양해를)가 되었다. 표절에도 불구하고 작품성이 훌륭하다, 일본을 위한 전쟁에 죽으라 선동했음에도 소설은 좋다, 이승만·박정희가 한 모든 일과 전두환을 찬양하는 시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모국어의 마술사다, 상습 성추행범이었음에도 뛰어난 예술가며 민족 시인이다. 이런 한국 현대문학사란 도대체 무엇일까? ‘문학이라는 질병’(‘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엘리트들의 체제 순응과 남성 동맹’이라는 부제가 붙은 다카다 리에코의 책 제목에서 빌림)은 또 얼마나 독한 것인가?

이번에 상습범으로 지목된 시인은 1970년대에 이문구·백낙청 등과 함께 야만적 유신독재뿐 아니라, 어용화된 서정주·조연현 등의 문인협회와 싸워 한국문학의 기풍과 정신성을 바꿨었다. 그 싸움과 정신의 중요 구성부분을 ‘민족문학’이라 경칭해왔다. 민족문학은 식민 지배와 내전, 분단을 겪은 가련한 한반도 종족과 민중의 문화 이념이자 운동이었다. 그런데 민족문학은 민주화의 부분 성공과 문단 헤게모니의 교체 이후에 주류·정통의 자리에 놓였다. 바로 거기서 많은 모순과 불행이 배태됐다고 생각한다. 그가 계속 가장 유력한 노벨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것은 민족문학의 한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최영미 시인이 경험한 폭력은 1990년대 민족문학의 제도적 구현체와 직간접 관계가 있다. 폭로 이후 SNS에서 2차 가해성 글을 쓴 또 다른 시인도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활동가였다 한다. 이념과 운동으로서의 민족문학은 21세기에 들며 자연사하다시피 했는데, 이렇게 또 스스로 면류관을 벗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진다.

그럼에도 이 지구에는 한국어로 생각하고 노래하고 이야기를 짓는 사람들이 여전히 몇 천만명이니, ‘민족의’ 문학이나 한국어 문학은 또 이어질 것이다. 새로운 공동성과 규범이 절실하다. ‘문학이라는 질병’을 넘는 문학인의 네트워크나 문화가 곧 도래할 것이다. 여성들과 젊은 세대가 할 것이다.

<천정환 | 성균관대 교수·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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