덤프트럭 기사로 살아온 20여년 동안 이렇게 높은 곳은 처음이다. 국회 의원회관이 바로 보이는 여의2교 앞 30m 광고탑 위에 건설노동자 2명이 있다. 전국노동자대회가 있었던 11월11일부터다. 아래에서 보기에는 높아 보이지 않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보니 현기증이 난다. 서 있을 수가 없어 엉금엉금 기어다니며 안전 밧줄을 걸고 로프를 몸에 감아 앉을 자리를 확보했다. 이곳에서 국회의원들이 건설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보기를 바라고 있다.

건설노동자들은 ‘건설근로자법’(건설근로자 고용개선 등에 관한 법률)을 개정해서 10년째 동결된 퇴직공제부금도 인상하고 건설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건설기계 1인 사업자에게도 적용해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해달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퇴직공제부금은 노후를 조금이나마 보장하는 사회안전망이다. 남들 다 받는 퇴직금을 건설노동자들은 일한 일수만큼 하루 4000원씩 건설사가 건설근로자공제회에 납부하면, 건설노동자가 건설업을 그만둘 때 공제회로부터 퇴직공제부금을 받는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면서 체불과 저임금, 장시간 노동, 산재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건설기계 1인 사업자에게도 사회보장 차원에서 퇴직공제부금을 적용해야 한다. 건설노동자들이 이 같은 내용을 담아 법 개정을 요구한 건 2008년부터다. 그러나 19대 국회에서도 좌절됐고, 20대 국회에서도 법 통과가 요원하다. 일부 국회의원들이 건설기계 조종사들은 개인사업주로 특수고용직이기 때문에 퇴직공제부금 적용이 어렵다며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1992년부터 덤프트럭 일을 시작했다. 2017년 현재 수중에 남은 건 마이너스통장뿐이다.

덤프트럭은 운반 횟수에 따라 돈을 받는 ‘탕뛰기’가 관행처럼 돼 있다. 그래서 새벽 2~3시부터 건설현장에 나와 김밥으로 허기를 달래며 한 탕이라도 더 하려는 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 노동을 하면서도 몇 십만원 체불당하는 건 예삿일이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는 건설기계 노동자들은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더불어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보장은 문재인 정부의 공약 사항이다.

250만 특수고용노동자들은 노조할 권리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18년을 투쟁하고 있다. ‘노조할 권리’가 이렇게 힘든 나라가 과연 정상적인 나라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노조할 권리 보장은 국제노동기구에서도 권고했고, 국가인권위에서도 권고한 내용이다. 정부는 진정성 있게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며, 국회는 노조법 2조 개정을 통해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보장하도록 조속히 입법해야 한다.

억울해서, 또 간절해서 30m 고공에 발 디딜 곳조차 마땅치 않은 곳에 올랐다. 별달리 막을 것이 없어 온몸으로 비바람을 맞으며 국회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다. 한편으로 광고탑에서 바라보는 여의도의 밤풍경이 너무도 아름답다는 감상에 빠진다. 도로와 건물만 보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이 보인다. 건설노동자들이 흘린 땀방울만큼 건물은 올라갔고, 도로는 건설됐다. 국회의원들의 눈에도 건설노동자들의 노동이 들어왔으면 좋겠다. 저 건물, 저 도로, 저 불빛에는 쓴 소주 들이켜며 고된 노동과 천대의 설움을 삭였을 건설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스며 있다.

<이영철 | 건설노조 수석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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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수능 연기…. 지금 실화야, 실화냐고? 나 어떡해, 다리에 힘이 확 풀리는 것 같아!”

지난 15일 포항 지진으로 수능 연기가 발표된 날 고3 수험생인 아이는 아연실색했다. 가방을 싸놓고 나름 마인드컨트롤까지 마치고 잠자리에 든 후 퇴근한 아빠가 소식을 전하자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몇 번이고 “정말이냐”고 되물었다. ‘2018 수능, 포항 지진으로 일주일 연기…23일 시행’이란 뉴스 속보를 몇차례나 검색해 보고서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언뜻 1주일 연기로 시간을 벌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당사자들의 당혹감은 무척 컸다. 숨도 멈출 만큼 잔뜩 긴장해 100m 출발선에 선 달리기 선수들의 상황과 비슷하지 않을까.

포항 지진으로 2018 대학수학능력평가가 일주일 연기됐다. 17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 경복고등학교에서 수험생들이 자율학습을 하고 있다. 김창길 기자

공부는 물론 몸과 마음의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리기 위해 별별 신경을 다 써가며 준비한 날이 아닌가. 전국 59만3527명의 수험생들은 이날 모두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수험생 60만명가량은 물론이고 이들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수험생에 딸린 가족이 4명이라면 240만명, 가까운 친·인척 10명만 손꼽아봐도 600만명이 그간 함께 마음 졸여왔다.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사상 24년 만에 첫 연기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은 지난 15일 포항에서 규모 5.4의 강진이 발생한 때문이다. 지진으로 건물파손과 균열 등 안전상의 문제가 발생했고 피해자가 속출했다. 천재지변으로 보금자리를 잃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을 사람들의 공포를 생각하면 합당한 조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수능 연기로 여기저기서 혼란이 빚어졌다. 수능 전날 기숙사 학원이나 독서실을 나서며 그동안 공부해온 손때 묻은 교재를 버린 수험생들은 그야말로 ‘멘붕’이 됐다. 한데 뒤섞인 교재 더미에서 자신의 것을 찾으려고 애쓰다가 결국 울음을 터트리는 학생들의 모습이 TV뉴스에 중계돼 안타까움을 샀다. 수능 출제위원으로 들어간 엄마를 기다리는 어린 자녀들의 사연, 자식의 수능이 끝난 후 수술을 하겠다고 스케줄을 미룬 암투병 학부모, 소음이 걱정돼 모든 공사를 수능 이후로 잡은 독서실 옆 가게 주인까지….

‘웃픈’ 얘기도 있다. 우리집 고3 아이의 친구네는 온가족이 수능성공 48시간 단식을 했는데 70대 할머니가 허기에 지쳐 일찍 잠이 들고 다음날에야 연기 소식을 듣고선 허탈해하셨다고 한다. 수능 전날 대부분의 고등학교에선 고3 수험생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리가 마련됐는데 그간의 고생을 떠올리며 선생님을 붙잡고 오열하며 인사했던 아이들은 “다음날 학교에서 또 어떻게 얼굴을 보냐”며 민망해했다. 예비 고3, 고2에 맞춰 수업일정을 잡은 학원, 수능에 맞춰 영화 개봉과 공연 개막일을 잡고, 온갖 마케팅을 펼쳤던 기업들까지 변경이 불가피하게 됐다.

막상 수능이 연기되고 나니 ‘수능 나비효과’는 생각 이상이다. 우리는 이렇게 촘촘하게 연결된 존재였던가. 급기야 정부는 ‘수능 연기 고충처리센터’까지 마련했다. 수능 연기에 따라 발생할 수 있는 수험생과 학부모 및 국민 고충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다.

그러나 수능 연기를 둘러싼 잡음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수능 연기 반대 청원이 쇄도했다. 이틈을 타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선 ‘사람이 먼저’라는 현 정부의 기조를 정치적 인기몰이로 치부하는 비난도 있다. 포항 지역의 수험생들 가운데는 체육관에 머물고 있는 가족과 떨어져 위험이 남아 있는 집에서 혼자 공부할 만큼 절박한 아이들도 있지만 수능 연기의 원인 제공자로 원망을 들어야 하는 기막힌 상황도 겪고 있다.

초유의 수능 연기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학교 체육관에서 피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 한 고3 수험생 엄마는 TV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모든 게 불안하고 힘들지만 우리 사회가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고 배려하는 것 같아 마음이 놓여요. ….” 대다수를 위한 논리였다면 안전불감증의 비난이 일었을망정 수능은 연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수능이 갖는 상징성은 단순한 시험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온갖 욕망이 응축된 절대불가역의, 누구도 함부로 손대지 못하는 수능 아닌가. 그런데 그 수능에 브레이크가 걸린 것이다.

절대 다수, 기득권의 편의와 힘에 좌지우지되고 몰아붙여진 사회에서 오랜 기간 살아온 우리에게 ‘수능 연기’는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힘들고 아픈 사람들을 위해, 안전을 위해, 소수를 위해, 불공정한 상황을 바꾸기 위해 우리 모두가 멈출 수 있다, 잠시 쉴 수도 있다, 가던 길을 바꿀 수도 있다는 것…. 이제는 그럴 때가 된 것이다.

<김희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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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맨질한 마당에

그림자를 널어놓는다

빛바랜 칫솔을 물고

노파는 주름진 입술을 오물거린다

거품을 문 입술은 지느러미보다 유연하다

칫솔이 움직일 때마다

헐렁한 소맷자락의 꽃들이 간들거린다

노파와 칫솔이 만드는 각도에 맞춰

마당 안의 사물들이 일제히 몸을 흔든다

마른 손등에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담 밑의 꽃봉오리가 조금씩 입을 벌린다

제 키를 훌쩍 넘는 그림자를 발끝에 달고

아이들이 달려나간다

양은대야 가득 경쾌하게

구름이 흘러간다

오래전 지붕 위로 던진 치아들이

뭉게뭉게 떠 간다

 -한세정(1978~)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마당 구석에 있던 변소가 집 안으로 들어온 걸 처음 본 게 언제였더라? 우유가 종이 안에 담겨 있는 걸 본 것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는데, 이제는 마당도 담장도 길도 산도 구름도 모두 실내에 있는 게 당연하게 느껴진다. 아파트 베란다 바깥은 절벽이니 그럴 수밖에.

어린 시절엔 세수하러 나가면 개울이 밤새 맑은 물을 떠다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먹을거리 놀거리가 없어도 눈앞에 펼쳐진 시야는 한없이 넓고 발걸음이 닿을 수 있는 거리는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아이들은 모두 흙이며 돌이며 풀이며 벌레 따위를 즐거운 놀이로 만드는 천재였다. 마당에서 양치하는 할머니는 이 모든 기억들이 살아 있는 놀이터이고 보물 잡동사니가 가득한 창고다. 그 추억에 로그인하면 어린 시절은 바로 현재가 되고 할머니는 어린아이가 된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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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0월 어느 날, 충남의 어느 검진센터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여느 날처럼 검진 버스를 타고 충북지방 구석의 어느 소규모 공장을 방문했다. 자동차 도색 및 수리 공장으로 열 명 남짓한 사람이 근무하고 있었다. 악취 및 화학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진을 받는 노동자들은 소음성 난청 때문에 귀가 안 들려 말이 잘 통하지 않았고, 늦가을인데도 땀으로 범벅이 된 얇은 속옷차림에 검은 기름때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그분들은 공동 숙소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아침에 일어나 잠자리에 들기까지 거의 하루 12시간씩 일한다고 했고, 한 달에 딱 두 번 있는 휴일에 읍내로 나가 빨래도 하고 목욕도 한다고 하였다. 한 수검자가 말했다. “다들 이렇게 살지 않느냐. 내 주변은 다들 이렇다고. 이렇게 살지 않으면 입에 풀칠 못한다.”

그날의 경험은 내가 직업환경의학과를 선택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지금은 전문의가 되어 근로자 건강진단을 하면서 노동자들을 하루에 수십명씩 만나고 있다. 근로자 건강진단은 산업안전보건법에 의해 사업주가 실시하는 것으로, 단순히 고혈압, 당뇨병과 같은 건강 문제를 확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관련된 작업환경과 유해인자에 대한 노출을 확인하게 된다. 그들에게 듣게 된 이야기는 10년 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었다. 젊은이들이 선망해 지원하는 소방, 경찰 공무원들은 연속 이틀간 쉴 수 있는 부서가 거의 없다. 방송 노동자들은 휴식 없이 연속 48시간 근무를 하고 12시간 쉬는 경우도 있었다. 연구소 연구원들은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집에 가기도 힘들었다. 연구소가 일괄 소등한다고 하지만 개인 노트북으로 지속적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일반 사무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중소기업은 물론이고 대기업 막론할 것 없이 아침에 출근하여 정시 퇴근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지혈증, 당뇨 등을 진단받은 사람들에게 운동을 하고 의원에서 약을 처방받으라고 이야기할 때마다 현실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곤 했다. 병원 갈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로서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건강을 위협하는 가장 심각한 유해인자를 꼽으라면 단연코 장시간 노동이라고 말하고 싶다. 2011년 고용노동부에서 발주한 한 연구용역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임금노동자의 30% 이상이 주당 52시간 이상 일하고 있다고 한다. 장시간 노동이 뇌심혈관질환을 비롯한 여러 직업병 발생 위험을 증가시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장시간 노동은 그 자체로 고된 노동 후에 피로를 해소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도, 아파도 건강관리를 할 시간마저도 불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근로기준법은 장시간 노동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주 40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하나 노사합의에 의해 초과근로가 가능한 경우 주당 52시간까지 일할 수 있고, 여기에 노동부 행정해석에 의해 근로시간 산정에서 제외된 주말에 특근까지 하면 최대 68시간까지 일하게 된다. 게다가 근로기준법 59조에서 대부분의 서비스 업종을 근로시간 특례업종으로 지정하여 주당 68시간을 넘겨서도 일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OECD 국가 중 두 번째로 길게 일하는 나라가 된 이유이다. 국제노동기구는 1935년 제45호 협약에서 주 40시간 노동을 제시하였고, 과거 장시간 노동 국가로 명성이 높았던 이웃나라 일본도 특례업종의 법정근로시간을 주 44시간으로 정하고 있고, 특례의 내용이 노동자의 건강 및 복지를 해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장시간 노동과 과로사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근로기준법 59조에 대한 개정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국민적 공감이 이제라도 확산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다. 더 이상 노동자들이 자신의 건강을 돈으로 바꾸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방관할 수 없다. 특례업종에 대한 규정은 폐지되어야 한다. 근로기준법이 장시간 노동을 줄여줄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법으로 바뀌길 기대해 본다. 앞으로는 직업환경의학 전문의들이 진료실에서 노동자의 체념 어린 눈빛을 떠올리는 일이 줄어들기를 기대해본다.

<조현아 | 일터건강을 지키는 직업 환경의학과 의사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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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의미는 무엇일까? 최근 병원의 초기 연혁을 정리하며 이런저런 오래된 흑백사진과 자료들을 발굴하게 되었다. 매년 연보를 만들 때마다 기계적으로 영혼 없이 반복하던 첫 몇 줄의 의미가 조금씩 생명력을 갖고 살아나기 시작했다. ‘아! 우리 병원은 이렇게 시작되었구나.’ 기록을 확인해나가는 작업은 더디지만 즐거웠다. 단절되고 무관하게만 느껴지던 먼 시간이 생생히 곁으로 다가와 우리가 누구인지 친절히 알려주었다.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인 줄 알았는데 실은 백조였음을 깨닫게 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시민병원’이라는 잊혀진 이름의 재발견이었다. 나이 드신 분 중에는 을지로에 있던 시민병원을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다. 이 이름 참 정답고 반갑다. 평소 낯선 이에게 병원을 소개할 때면 사람들의 반응은 비슷하게 나온다. “동부병원… 동쪽에 있나요? 그럼 서부, 남부, 북부도 있겠네요?” “네, 뭐 비슷합니다.” 그때마다 머쓱하다. 누가 이름을 이렇게 성의 없이, 개성 없이 붙였을꼬. 하지만 ‘시민병원’이라는 이름은 다르다. ‘시민이 주인인 공공병원’이라는 우리의 존재 이유와 정체성을 너무도 선명하게 가감 없이 드러내주지 않는가.

병원의 기원은 1929년 경성부민의 진료를 위해 세워진 ‘경성부영진료소’에서 시작한다. 1934년 신축하며 ‘부민병원’이 되었다. 경성의 중심가 황금정통(지금의 을지로) 훈련원 터에 새로 지어진 신식 콘크리트 건물의 낙성식 장면이 떠오른다. 훈련원은 조선시대 무술훈련과 무과시험을 관장하던 곳으로 이순신 장군이 무과시험을 보다 말에서 떨어졌지만 다리를 동여매고 다시 올라타 급제했다는 에피소드가 전해내려오는 바로 그곳이다. 무술을 연마하던 곳에서 의술을 펼치는 곳으로 전환된 것은 맥락상 칼을 사용하여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바가 있어 오묘한 땅의 기운이 작동하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1945년 해방과 함께 경성부가 서울시로 바뀌며 병원의 이름도 자연스럽게 ‘시민병원’으로 따라 바뀌었다. 1957년 터전을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옮기는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이는 당시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의 주도로 한국 정부와 스칸디나비아 3국 사이에 맺어진 국립의료원 설립운영에 관한 3자 협정(tripartite agreement)에 따라 신설되는 국립의료원에 자리를 내어주게 된 까닭이다. 이후 시민병원은 ‘동부병원’으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격변의 근대를 살아온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고달픈 흔적이 병원 연혁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몇 해 전부터 이 유서 깊은 곳에 다시 변화가 꿈틀대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국립의료원 현대화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초구 원지동에 새로운 부지를 마련하였고 병원을 신축 이전하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을지로 땅은?

보도에 따르면 을지로 부지는 막대한 이전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매각을 결정하고서 개발자를 찾고 있고 그곳은 공공병원으로 사용되던 기존의 용도와는 다른 용도의 개발을 계획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쉽다! 이 땅은 국립의료원 이전부터 시민병원과 부민병원, 면면히 지역 서민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곳이었다. 특히 65세 이상 노인, 의료급여 대상자, 노숙인, 장애인 등 의료취약 계층 사람들에겐 없어선 안될 든든한 버팀목이자 비빌 언덕이 돼 왔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품은 땅을 팔아 이전비용을 마련하는 것이 과연 최선의 선택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그런데 과정 중에 근방의 도심 일대 의료공백을 걱정하는 지역주민들이 반발하자 당국은 이를 고심하게 되었고 다소의 절충안을 내놓았다. 매각조건에 전체 부지 8341평 중 8.6%에 해당하는 717평 귀퉁이 땅에 소규모 공공병원을 짓는 단서를 붙이게 된다. 문제는 추산된 이전비용을 맞추려고 하다보니 내놓은 공공병원 부지의 크기가 턱없이 작다는 것이다. 굳이 대형병원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지역주민의 필수의료는 물론 기간시설이 밀집되어 있고 인구밀도가 높은 도심지역 특성상 혹시나 있을 사건사고나 재난에 긴급 대처하고, 취약계층을 돌보는 공공의료를 수행할 종합병원의 역할을 담아내기 위해선 적정한 규모가 확보되어야 한다. 이대로라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면피용이거나 정체불명의 애매한 멀티클리닉 수준의 요양병원밖에 나오지 못할 것 같다.

60여년 만에 다시 변화를 맞게 될 이 유서 깊은 보건의료 역사적 땅에 그 필요와 의미가 제대로 담긴 ‘시민병원’이 다시 들어서게 되기를 바란다. 시민병원인 만큼 그 내용을 더더욱 시민들이 함께 고민할 수 있도록 구체적 공론화 과정이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어쩔 수 없지 않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김현정 | 서울특별시동부병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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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미수습자 5명이 마침내 하늘나라로 갔다. 단원고 2학년 학생 남현철·박영인군, 단원고 교사 양승진 선생님, 권재근씨·혁규군 부자에 대한 장례절차가 20일 오전 발인을 마지막으로 끝났다. 참사 발생 1315일 만이다. 유해조차 찾지 못한 채 사랑하는 이를 가슴에 묻어야 하는 유가족의 비통한 심정을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삼가 미수습자 5인의 명복을 빈다. 미수습자 5인에 대한 장례가 끝났다고 304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가 끝난 것은 아니다. 유가족들은 앞으로 더 긴 세월을 절절한 그리움과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 참사가 남긴 과제는 여전히 미완의 상태로 남아 있다. 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야말로 살아남은 자들의 도리이자 의무다.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이 오는 18일 목포신항을 떠난다. 16일 오후 목포신항 철재부두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가족들이 "세월호 선체 수색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지금 가족들은 비통하고 힘들지만 이제 가족을 가슴에 묻기로 결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연합뉴스

세월호 참사가 남긴 가장 큰 숙제는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책 마련이다. 진실규명은 그 첫걸음이다. 지난 4월 세월호 인양과 5월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월호 침몰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이 활기를 띤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가야 할 길은 멀다.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2기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는 일이 급선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야당인 국민의당 및 정의당은 이를 위한 ‘사회적 참사의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을 오는 24일 국회 본회의에 부친다.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은 여야 추천 위원 비율 등을 문제 삼아 이 법안 처리에 반대하고 있다고 한다. 시민들은 한국당이 전 정권 때 1기 세월호 특조위의 활동을 방해한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한국당은 미수습자 추모식 논평에서 “더 이상 불행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야당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고 밝힌 대로 법 통과에 동참해야 할 것이다.

누워 있는 세월호 선체를 바로 세우는 일도 진상규명을 위해 필요하다. 그래야만 그동안 접근하기 어려웠던 구역에 대한 수색이 가능해 미수습자 유골 수습과 사고 원인 조사로 이어질 수 있다. 30분 늘어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7시간30분’도 풀어야 한다. 선체조사 후 결정하게 될 세월호 선체 처리 문제도 과제다. 원형 보존, 중요 부분만 보존, 상징물 보존 등 3가지 방안을 두고 논의 중이다.

진실규명과 함께 바로잡아야 할 것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을 바라보는 일부의 비뚤어진 시선이다. 그들은 참사의 교훈을 되새기거나 유가족의 아픔을 어루만지기보다 갈등과 분열을 조장했다. 이들은 더 이상 갈등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해 숭고한 결단을 내린 미수습자 유가족을 보고 부끄러워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유가족을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가게 할 권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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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가 발표한 새 온라인 캐릭터 시리즈 ‘니니즈(NINIZ)’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호된 비판에 직면했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던 전작인 ‘라이언’과 달리 폭력적인 언행을 하는 캐릭터로 묘사되면서다. 특히 일부는 스토킹 등 범죄 행위를 묘사하고 있어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14일 발표된 니니즈 캐릭터는 모두 7개다. 복수를 꿈꾸는 외계인 렛서팬더 ‘팬다’, 원래는 북극곰이었지만 토끼가 돼버린 ‘스카피’ 등이다. 문제는 이들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캐릭터와는 거리가 먼 것이라는 점에서 시작됐다. 탐정 콤비인 ‘콥&빠냐’의 경우 “스토커 기질이 있으며 미행하기를 좋아한다”고 소개했고, 성이 ‘한놈만’이라는 ‘팬다’는 “북금곰 씨를 다 말려버리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하는 식이다. ‘스카피’는 애완펭귄을 잡아먹는 캐릭터로 묘사됐다.

누리꾼들은 “보기만 해도 섬뜩하다” “범죄행위를 미화했다”는 반응을 보였다. ‘@do****’은 “귀여운 외형에 반전 요소를 넣으려는 시도는 알겠는데 (정도가) 과했다”며 “캐릭터 설정에 한 종의 괴멸이 목표인 것이 말이 되는가. 전 국민이 다 볼 수 있다는 걸 생각 좀 하라”고 지적했다. ‘@ba****’은 “아예 범죄자라고 하라”고 반문하면서 “인신매매를 연상시키는 캐릭터에, 비윤리적인 설정 등이 불편하다”고 말했다.

이런 캐릭터들을 어린 초등학생 등 미성년자들이 많이 사용한다는 점에서 누리꾼들의 비판은 더욱 거셌다. ‘@gi****’은 “국민 캐릭터 (업체)로 자리매김한 카카오에서 미취학 아동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데 ‘스토킹’ ‘죽인다’ ‘팬다’ 등의 단어 코드가 쉽게 소비되는 게 염려스럽다”며 “보통 영상이나 만화, 글 등 내가 찾아봐야만 볼 수 있는 선택적인 콘텐츠와 달리 누구나 쓰고 볼 수밖에 없는 이모티콘은 풀리고 나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카카오 측은 일부 문구를 수정하면서 “폭력적인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하지만 누리꾼들의 시선은 계속 싸늘한 분위기다.

<박홍두 기자 ph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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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은 일은 늘 겹쳐서 온다고 했던가. 정말 그 해는 나에게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지금은 너무 오래전 일들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마음이 지옥이었다는 느낌은 그대로 남아있다. 아이를 출산하자마자 신혼집이 경매에 넘어간다는 안내장을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 음주운전에 보험도 들어있지 않은 차였다. 부상이 심했고 수술이 잘못되어 꽤 긴 시간 병원생활을 했다. 한 돌도 안된 아이를 들쳐 업고 버스로 병원을 오가며 아이와 남편을 돌봐야 했고 무보험차라 책임보험밖에 보상이 되지 않아 병원비까지 감당해야 했다. 몸으로 일하던 사람인데 퇴원할 때 의사는 ‘노동 상실률이 높아 앞으로는 힘든 일은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활동가가 지난 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얼굴에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페인팅을 하고 ‘낙태죄 폐지 결의 범시민사회단체’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뒤편으로 낙태죄 폐지 메시지가 쓰인 여성의 몸 사진이 보인다. 권도현 기자

당장 집은 경매로 넘어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고 남편은 일을 할 수 없으며, 전세 빚에 병원비 때문에 생긴 빚까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정말 너무너무 막막했다. 한 돌이 겨우 지난 어린아이를 회복 중인 남편에게 맡기고 내가 직접 생계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임신까지. 너무나 절망적이었다. 스스로를 벼랑 끝으로 내몬 우리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미웠다. 우리 부부에겐 정말 선택지가 없었다. 그나마 셋이라도 살아남느냐, 아니면 넷이 같이 죽느냐. 당시에는 병원에서 인공임신중절수술을 어려움 없이 해주던 시기였기에 ‘그나마 셋이라도 살아남겠다’는 결정을 우리는 다행히 완수할 수 있었고 또 다른 위험을 없애고 셋의 안정적인 미래 설계를 위해 정관수술을 받았다.

만일 당시에 병원에서 불법이라고 수술을 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 우리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아니다. 넷의 미래가 너무나 뻔히 보였다. 하나의 불행이라도 줄여야 했고 셋은 살아남아야 했다. 더 많은 비용과 위험을 감수했어야 하더라도 결국 똑같은 결정을 했을 것이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0년대 기혼 여성 2명 중 1명은 임신중단을 결정했고 중단한 여성 10명 중 7명은 ‘원하지 않는 자녀’이기 때문이었다. 자녀 수가 많을수록 낙태 횟수는 증가했고 딸만 있는 경우가 아들만 있는 경우보다 3~4배 높았다.

낙태는 본질적으로 태아의 생명과 여성의 선택 간 권리 경합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를 낳을 계획이 없음에도 임신과 낙태를 반복하게 되는 맥락이 문제의 핵심이다. 왜 여성은 임신을 피할 수 없고 자신의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불가피한 선택을 강요받는가가 핵심이다. 우리 사회의 성적 이중규범은 남성에게 자유로운 섹스를 허용하고 피임의 책임은 부과하지 않는다. 임신 후의 남편이나 연인의 ‘나 몰라라’ 태도나 상대의 참혹한 낙태 경험에 대한 무감각이 그 증거다. 거기에 국가는 여성에게만 부과하는 ‘낙태죄’라는 이름으로 남성에게는 책임에 대한 면죄부를 주고 여성을 응징할 권력을 부여한다. 낙태죄의 본질은 여성에게 성적 행동이나 자기 몸과 자기 삶에 대한 통제권을 주지 않겠다는 남성 중심 국가권력에 의한 여성 시민권의 박탈이며 평등권 침해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는 헌법 제10조는 낙태죄가 존재하는 한 여성에게는 허구다.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한다.

<김민문정 | 한국여성민우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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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도 지진으로 흔들리는 나라가 되었다. 건물 외벽이 쏟아져내렸고 아파트는 한쪽으로 기울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사망자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포항의 많은 사람들이 기울어진 아파트의 각도만큼이나 아슬아슬하게 목숨을 건졌다. 조금만 더 흔들렸다면, 아, 상상하고 싶지도 않다.

이제 집도 학교도 다시 지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다르게 지어야 한다. 한 번 일어난 것은 두 번 일어나고, 작게 일어난 것은 크게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건물도 건물이지만 금이 간 마음을 치유하는 데 많은 시간이 들 것이다. 이제 마음도 집을 잃어버렸다. 마음을 다시 지을 수 있을까. 건물은 지진을 반영해서 달리 설계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의 골조를 달리 세울 수 있을까.

육군2작전사령부 예하 50사단 장병들이 17일 오후 포항 청하면 지진 피해지역에서 굴삭기ㆍ덤프 등을 투입해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거대한 재앙은 사람들의 생각을 크게 바꾸어놓는다. 대표적인 예가 리스본 대지진이다. 1755년 11월에 큰 지진이 리스본을 강타했다. 대규모 화재가 일어났고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덮쳤다. 수만명의 시민들이 죽었고 85% 이상의 건물이 파괴되었다.

당대 사상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계몽주의자 볼테르는 세상일을 신의 뜻으로 설명했던 신정론을 강하게 비난했다. “모든 게 ‘신이 만든’ 최선이라 외쳤던 철학자여, 와서 이 폐허를 보라.” “신이 벌을 내렸다고 말하는 자여, 어미의 가슴에 안겨 피흘리고 있는 저 어린것에게 무슨 죄가 있는지 말해보라.” 그는 신의 섭리에 자신을 내던지느니 약한 인간들과 더불어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찾겠다고 했다.

근대 계몽주의는 이렇게 태어났다. 자연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구분하지 않는다. 자연은 맹목이며 믿을 것은 인간의 이성뿐이다. 재난을 신의 의지에서 떼어내어 인간 이성의 관리 아래 두는 것. 불확실한 자연을 인간의 과학기술로 지배해 나가는 것. 수잔 니먼의 표현을 빌리면 리스본에서의 깨달음은 “근대의 진정한 시작을 알리는 이정표”였다.

하지만 인간을 믿어도 좋은가. 과연 자연은 맹목이고 인간의 눈은 밝은가. 다시 포항 지진을 보자. 지진이 일어나자 많은 이들이 진앙지 근처의 핵발전소들을 보았다. 더 큰 재난을 의식한 것이다. 근대 이후 인간을 두렵게 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장 끔찍한 재난이 인간 한테서 올 것임을 알고 있다. 리스본 지진은 근대를 낳은 재앙이지만 지금 우리는 근대가 낳은 재앙과 대면하고 있다.

리스본 지진에서 볼테르는 인간의 죄 때문에 자연재해가 일어난다는 생각을 비난했다. 하지만 10년 전 수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쓰촨성 대지진은 천재와 인재의 구분이 쉽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댐에 담긴 물이 지반을 뚫고 들어가 단층을 끊어 지진이 일어났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를 신의 심판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자연재해에 인간의 죄가 없는지도 확실치 않다. 볼테르 이후 계몽의 역사는 재난을 막을 수호자가 재난의 유발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핵무기와 핵발전소는 이런 역설의 정점에 있다. 최고의 안보수단이 최악의 자기절멸수단이며, 최고의 발전설비가 최악의 황폐화를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수 야당과 주류 언론은 포항 지진이 탈핵 논쟁으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데 필사적이다. 한 신문은 사설을 통해 “사람들의 공포심을 자극해서 비합리적 주장을 펴는 것이 광우병 사태와 같다”고 했다. 핵발전소에 대한 사람들의 우려가 비합리적 선동과 괴담에 놀아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과 괴담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우려는 더 깊은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탈핵론자들이 아니라 “이번 지진으로 원전의 안전성이 입증되었다”고 외치는 사람들이다. 거기서 나는 안전성이 아니라 불감증을 본다. 핵무기가 최고의 방어수단이라고 하지만 핵무기를 끼고 사는 삶이 불안을 유발하듯, 핵발전소가 최고의 안전장치를 통해 관리되고 있다고 해도 핵발전소를 늘려감으로써만 영위할 수 있는 삶은 불안하다.

원자로를 다섯 겹으로 둘러쌌으니 안전하다는 말은 다섯 겹을 둘러싸야만 안전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당장에는 그 다섯 겹이 충분한 것인지, 다섯 겹을 제대로 둘러싸기는 한 것인지 때문에 불안하다(경험상 한국사회에서 이런 불안은 충분한 이유를 갖고 있다). 하지만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는 최소 다섯 겹은 둘러싸야 하는 것을 이렇게 많이 만들어놓고, 더 늘리지 못해 안달하는 모습, 그런 맹목성 때문에 불안하다.

2009년에도, 2017년에도 우리를 불안케 한 것은 괴담이 아니라 불감증이다. 이 불안은 괴담으로 생겨난 게 아니므로 과학기술로 해소되지 않는다. 핵발전소에 대한 불안의 해법을 더 안전한 핵발전소의 건설에서 찾는 한 우리의 운명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핵발전소를 양산해온 우리 사회의 길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다.

그러나 이번 일로 우리 정신의 골조가 다시 짜일 것 같지는 않다. 어떤 지진에도 견디도록 내진설계된 정신들, 다섯 겹의 콘크리트로 밀봉된 정신들, 지진이 나면 오히려 핵발전소로 뛰어들어 가라는 저 낡은 볼테르들이 어떤 새로운 계몽도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병권 |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고려대 민연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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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가 살기 좋은 선진국이라고 해서 이민을 왔다. 막상 살아보니 불편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밥벌이의 어려움이나 언어장벽 같은 것이야 미리 예상하고 왔던 터라 새삼 불편해할 바는 아니었다. 통상적인 낯섦과는 별개로 일상생활을 하는 곳곳에 불편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것이 캐나다 사람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느낌마저 들었다.

적응하기 쉽지 않았던 일 중 하나가 자동차 운전. 서울 같은 복잡한 도시에서 13년 무사고 운전을 했으니 운전에는 웬만큼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토론토에는 넓은 길, 좁은 길 가리지 않고 암초가 널려 있었다. ‘멈춤(STOP)’ 표지판이야 눈에라도 잘 띄니 적응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학교 주변에 있는 갖가지 표지판들. 신호등 위나 진입로 모서리에 작게 붙어 있는 표지판들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 ‘제한속도 40㎞’ 또는 ‘아침저녁 진입금지’ 위반 딱지를 한두 번 떼고 나니까 표지판들이 크고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학교 주변이 아닌 다른 어느 곳에서도 스쿨버스가 멈춤 표지판을 올리고 서 있으면 양쪽 차로 차량은 얼어붙은 듯이 정지해야 한다. 무심코 그냥 지나쳤다가는 신호나 속도위반의 몇 배에 해당하는 범칙금과 벌점을 물어야 한다. 재판을 걸고 잘못했다고 아무리 빌어도 이것만은 절대 깎아주지 않는다.

눈이 많이 오는 날이면 토론토에서도 대란이 벌어진다. 교통대란이 아니라 ‘학부모 대란’이다. 교육청에서 길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스쿨버스 운행을 전면 금지하기 때문이다. 부모는 아이 돌봐줄 사람을 찾거나 휴가를 내야 한다. 그 여파는 토론토 전체로 퍼져나간다.

비단 아이들과 관련한 문제만이 아니다. 안전에 관한 것이라면 내 일상생활이나 스케줄을 엉망으로 만들어도 문제를 제기하기가 어렵다. 아니, 이곳 사람들은 문제를 제기하기는커녕 당연히 감내해야 할 일로 여긴다. 토론토의 어느 지하철역에서 인명 사고가 발생하면 토론토 지하철이 모두 멈춰 선다. 안내 방송이 나온 이후 승객들은 지하철 안에서 기다리든 바깥으로 나가 버스를 타든 각자 알아서 자기 길을 선택한다. 혼잣말로 투덜댈 수는 있겠으나 어디에 항의하거나 하소연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공항도 사정은 마찬가지. 몇 년 전 뉴욕 출장을 한 달에 한 번씩 간 적이 있었다. 뉴욕행 비행기가 제 시간에 뜨는 적이 거의 없었고 심지어 다음날 오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 안내 방송은 길지도 않았다. “보안상의 이유.” 항공사 직원에게 문의는 해도 불만을 털어놓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고층빌딩을 새로 짓거나 보수를 하면 그 주변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한국에서라면 몇 개월 만에 뚝딱 끝낼 법한 일인데, 몇 년을 질질 끄는 듯이 보인다. 느려서 답답하기는 해도 안전수칙을 철저하게 지켜가며 공사를 하니까 사고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편해도 참는다. 아니, 불편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이른바 선진국 시민들이 세상을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였는데, 선진국 소리 듣는 곳에 직접 와서 살아보니 이렇게 불편을 감수해야 할 일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재미나는 것은 이런 불편함은 금세 익숙해진다는 사실. 불편함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세상 편하게 사는 방법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선진국에서 선진 시민으로 살아가자면 이런 대가 혹은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사람이 안전하게 안심하고 살 수가 있다.

포항에서 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수능시험이 연기되어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불편해도 참으시라. 이런 불편함이 생겨난다는 것은 한국이 선진국 되어 간다는 방증이다. 이런 불편함을 당연한 일로 받아들일 줄 안다면 당신은 이미 선진 시민이다.

<성우제 | 재캐나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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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경주지진에 이어 1년여 만에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전국에서 지진동을 느꼈다. 집이 무너지고 길이 갈라지고 자동차가 파손되고 사람들이 다쳤다. 잘 수습되고 더 큰 피해가 없기를 바라는데, 이 일대 활성단층들이 활동기에 들어갔으니 학교 등 다중 이용시설과 주요 산업시설의 안전 점검이 시급하다.

한반도 동남부 양산단층대에는 국내 원전 18기가 운영 중이고 5기의 원전이 건설 중이다. 인근의 부산, 울산, 대구, 경주 등 주요 대도시에는 수백만명의 인구가 밀집해 지진과 함께 원전사고까지 이어진다면 나라의 운명을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양산단층대에는 육지에서만 230㎞에 이르는 양산단층을 중심으로 월성·신월성 원전 주변에 있는 울산단층, 고리·신고리 원전 주변의 일광단층, 동래단층, 밀양단층 등 발견된 것만 60여개가 넘는 활성단층들이 분포하고 있다. 지난 수천만년 동안 최소 4번의 활동 시기가 있었고 활동 시기에 들어서면 수백년 이상 지각활동이 이어졌다. 작년 경주지진에 이은 640회의 여진 그리고 15일 포항지진과 이후 하루 동안 30회가 넘는 여진은 양산단층대가 다시 활동 시기에 돌입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이미 지질학자들은 양산단층대의 재활성을 경고해왔다. 양산단층대 일대에 지진 규모 7.0이 넘는 대규모 지진이 수백년의 주기를 두고 발생했던 기록이 역사서를 통해 확인되고 있다. 마지막 대규모 지진 발생 후 500여년이 지난 지금이 대규모 지진이 다시 발생할 수 있는 시기라는 경고가 있었지만 정부 당국은 안일했다.

포항지진은 경주지진보다 규모가 작지만 피해는 더 컸다. 진원지 깊이가 더 낮고 도시 인근이라 피해가 더 컸다. 지진 위험을 단순히 지진 규모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포항지진은 포항분지의 퇴적층과 화강암의 북쪽 경계단층에서 발생했다. 연약지반인 퇴적층은 포항지진을 더 증폭시켰다. 규모 5.4인 포항지진 진앙에서 2.6㎞ 떨어진 가스공사 흥해관리소의 지진계는 0.58g(중력가속도)의 최대지반가속도를 기록했다. 중력가속도 g의 0.58배의 힘으로 좌우로 흔들린 것이다.

이 일대에 운영 중인 원전 17기의 내진설계는 0.2g에 불과하다. 신고리 3호기와 건설 중인 원전 5기의 내진설계 역시 0.3g밖에 되지 않는다. 포항지진으로 0.58g까지 흔들릴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원전 내진설계는 여기에 한참 낮은 수준이다. 지금은 진앙이 원전에서 떨어져 있어서 안전하지만 다음 지진이 원전 인근에서 일어난다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포항분지의 남쪽 경계단층은 월성원전 인근이다.

지진으로 인해 땅이 흔들릴 때 돔 형태의 콘크리트 건물이 지진에 견딘다고 원전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원전은 배관 연결 길이만 170㎞에 달하고, 케이블 연결 길이는 1700㎞이다. 지진이 일어나면 배관이 파손될 수 있고 용접부위가 갈라질 수 있고 밸브가 틀어질 수 있으며 화재가 발생해 케이블이 녹아내릴 수 있다. 17개 원전의 케이블은 내연 케이블이 아니라서 화재가 나면 원전 전체가 먹통이 될 수 있다. 파손된 배관으로 인해 원전 냉각이 실패하면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지진으로 도로가 끊겨서 외부 지원도 불가능해지고 산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 방사성물질이라도 방출되는 날에는 수백만명의 인구가 도대체 어디로 피난을 간다는 말인가.

지금은 전기 공급이 충분해서 봄가을에는 원전 40개, 여름·겨울에는 원전 20개 이상의 발전설비가 남는 상황이다. 앞으로도 전기 소비는 크게 증가하지 않는다는 예측인데 신규 발전소는 늘어나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원전 가동과 건설을 계속할 이유가 없다. 설계상 내진설계 강화가 될 수 없는 중수로 원전인 월성원전 1~4호기부터 폐쇄해야 한다.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상향된 원전안전기준으로 안전성을 재검증하기 위해 50개의 가동 중인 원전을 모두 중단했다. 내진설계를 강화하고 지진 안전성을 투명하게 확인하기 전까지 원전 가동과 건설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양이원영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국 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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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스페인 토마토 축제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람들이 태산처럼 쌓아 놓은 토마토를 짱돌 던지듯 투척하고, 발로 짓이기면서 노는 축제인데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축제 중 하나란다. 아버지 연배의 어르신들이 보면 기함할 장면이다. 먹는 거로 장난치면 천벌 받는다는 믿음으로 사신 분들이니 말이다. 나도 한때 천벌 받을 짓 많이 저질렀다. 밭가에 던져 버린 토마토를 장화 신고 짓이겨 버리곤 했는데, 그때마다 엄마는 “하지 마라, 하지 마라, 큰일 난다”며 말리시곤 했다.

‘도마도집’ 딸이었던 나는 대학생 때 정통으로 IMF를 때려 맞았다. 형편이 쪼들리면 제일 먼저 지갑을 닫아버리는 것이 과일 구매다. 한국이야 토마토를 과일로 먹다 보니 그 소비가 함께 줄어든다. 게다가 쌀값은 형편없고 수입개방은 대대적으로 벌어져 정부가 특작으로 방울토마토 권업을 많이 했었다. 결국 방울토마토와 그냥 토마토 모두 동반 추락. 최상품 토마토가 아닌 이상 트럭장수는 가져가지도 않고 가락동이나 구리, 청량리 농수산물 시장을 빙빙 돌아도 실어간 토마토를 하차조차 하지 못했다. 빨개지는 토마토는 유통이 어려워 상품성이 없다. ‘권투장갑’이라 불리던 등급외품 토마토를 밭가에 던져놓으면 그걸 주워가는 치들이 있었다. 몇개 정도야 주워서 간식으로 먹는 건 참겠지만 작정하고 주워가는 사람들이 너무 얄미워 아예 당신도 못 가져가고 우리 집도 내지 못하게 발로 짓이겨 버리곤 했다.

겨울부터 온실을 따로 만들어 토마토 모종을 직접 기르고 애면글면 돌본 토마토로 인건비 보전은 언감생심. 종당에는 박스값과 상하차비, 작목반 회비도 건지질 못할 판이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모종 기르는 수완이 있어서 모종값은 따로 나가지 않았으니 그거 하나 다행이었달까. 결국 갈아엎기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다. 작물은 자랄 때는 무섭게 자라기 때문에 농가에 부담으로 오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그다음 작물을 빨리 심어 벌충해야 하니 말이다.

올해 상반기, 가뭄으로 배추가 귀했다. 배춧값이 괜찮아 좀 많이 심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날씨가 받쳐주면서 김장 배추 폭락장이 돼버렸다. 배추 주산지에서 출하량 조절을 위해 트랙터로 배추밭을 갈아엎는 것으로 대책을 세우고 있다. 일일이 사람 손으로 배추를 뽑을 수도 없고 밭떼기로 넘기지 못한 곳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해다. 포기당 200원입네, 300원입네 하는 마당에 사람 사서 수확을 한다는 것은 장고 끝에 악수다. 그래서 트랙터로 갈아엎는 배추밭이 속출하고 있다는 뉴스에 차라리 기부를 하지 음식 귀한 줄 모른다거나, 보상금 노리고 저렇게 갈아엎는다는 식의 물색없는 말들이 줄줄이 달린다. 농업은 생명을 살리는 일만이 아니다. 살리는 만큼 죽이는 일이기도 하다. 진드기도 잡고 미국선녀벌레도 잡고, 탄저도 잡아야 한다. 농민들 몸과 마음을 모두 죽여가며 하는 일이 농사다. 돈을 벌겠다가 아니라 손해를 덜 보는 궁여지책으로 삼는 것이 갈아엎기다.

그해 부모님은 토마토를 엎어버리고 겨울 오면 엽채값이 오르려니 하면서 쌈채소를 심었다. 하지만 IMF로 사람들이 삼겹살마저 사먹지 않으니 쌈채소는 갈 길을 잃었고 연거푸 갈아엎고 말았다. 트랙터가 없었던 우리 집은 트랙터 대여비와 공임까지 보태서 말이다. 20년 전 토마토 함부로 발로 차던 시절의 이야기다. 피멍자국으로 남은 토마토.

철 지난 지 한참인데 거둘 엄두도 못 낸 푸른 배추는 함부로 걷어차인 멍자국 같아 바라보자니 차마 아프다.

<정은정 농촌사회학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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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대학 민주화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가늠하는 민감한 지표라는 생각이 대학 교수만의 자기중심적 주장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촛불항쟁으로 탄생한 새 정부가 반년을 넘긴 오늘, 대학 안에서 벌어지는 민주화 요구와 수구집단 간의 충돌은 대학 민주화가 촛불혁명을 한 단계 더 진전시키는 싸움임을 입증하고 있다.

그동안 수없이 불거졌지만 흐지부지되기 일쑤였던 사학비리 척결 요구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사학비리에 관한 언론의 심층보도도 끈질기며, 교육부에 설치된 사학혁신추진단에 제보가 줄을 잇고 있다. 김문기 전 상지대 이사장은 한때 쫓겨났지만 2007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막무가내 장외투쟁 끝에 개악된 사립학교법의 독소조항인 사학분쟁조정위원회 덕분에 복귀하여 구태를 반복했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기나긴 투쟁이 촛불에 힘입어 다시 대학을 제 궤도에 올려놓고 있다. 수원대 이인수 총장은 2심 유죄 판결 외에도 추가비리가 속속 드러나자 사퇴했다. 그러나 이사회는 징계가 예상되는 총장의 사표는 수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직 처리함으로써 스스로 불법과 부정의 조역임을 폭로했다.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딱히 비리사학이 아니어도 힘센 교수와 직원이 학생, 조교, 비정규직 교직원에게 저질러온 노동 착취와 성범죄 등 ‘갑질’에 대항해 끓어오르는 반발은 더 이상 낡은 체제로 버티기 힘들게 만들고 있다. 대학이 거듭남으로써 연구와 교육의 질이 높아지려면 무엇보다도 교수부터 바뀌어야 한다. 거창한 제도 변화를 주문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사례를 두 가지만 들어보자.

미국 대학 도서관은 대개 한 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오후부터 운영시간을 줄인다. 일요일도 늦게 문을 열지만 다음날인 월요일부터 수업을 하는 교수와 학생을 위해 밤늦게까지 정상적으로 운영한다.

그러나 국내 대학은 일요일에 도서 대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거나 심지어 없다. 서울대의 도서관 개관시간은 오후 1시부터 5시이며, 그 이후에 갑자기 갈 일이 생기면 방법이 없다.

여러 해 전 서울대는 일요일 개관시간을 연장했지만 얼마 뒤 (아마도 인력 부족을 구실로) 여론수렴도 없이 다시 줄이고 말았다. 이런 작은 일에서부터 연구와 교육, 학사관리의 수준과 밀도는 격차가 벌어지는 법이다. 국내에서 박사를 딴 나는 학위논문 준비를 위해 30대 초반에 처음 바다 건너 미국 대학 도서관을 경험하며 부러워하지 않을 길이 없었다. 그런데 국내 교수 중 미국 박사가 이처럼 많은데도 왜 지금껏 도서관 주말 운영방식 하나를 개선하지 못할까.

이 대목에서 박사 배출을 미국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가운데 국내 학계의 자주성과 자생력이 드러내는 허약한 체질을 읽는 것은 결코 과민반응이 아닐 듯하다.

또 다른 사례는 지난해 가을 ‘김영란법’을 명분으로 한 교육부의 방침에 따라 학내 논의도 별로 없이 제정된 ‘조기 취업자 출석 및 성적처리 지침’이다. 아직 이수할 학점이 남은 학생이 조기 취업했을 때, 교수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면 불법 청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취업기관이 아예 공식적으로 학사과로 취업확인서류를 보내고 다시 학사과는 해당 학과를 거쳐 담당교수에게 통보하게 한 지침이다. 물론 학생의 불출석을 별도 과제 등으로 대체해줄지는 담당교수의 권한으로 남아 있지만, 이 일은 대학의 기본마저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종강을 코앞에 두고 불가피한 회사 사정으로 출근하는 등 합당한 경우라면 나도 선생으로서 형평에 맞게 배려해왔다. 그러나 공식 지침까지 만들면 학생은 조기 취업에 따른 혜택을 권리처럼 여기게 마련이다. 구직난 탓에 어느 대학이나 조기 취업이 갈수록 엄정한 학사관리를 뒤흔들고 있지만, 이 폐해의 큰 책임은 사실 민간기업보다 정부에 있다.

 행정안전부나 외교부는 과거 재학생이 시험에 합격하면 졸업 때까지 유예기간을 허용했지만 요즘은 유예 없이 곧바로 근무하도록 요구한다. 수업보다는 고시 준비에 몰두하다가 심지어 한두 학기를 편법으로 이수하고 중앙부처 공무원이 된 이들이 학사운영의 원칙을 존중할 리 없고, 조기 취업의 기형적 관행을 없애자고 사회를 설득하기 위해 나설 리는 더더욱 없다.

대학다운 대학을 지키고 가꿀 가장 큰 책임은 교수에게 있다. 정규직 교수가 기득권을 내려놓고 비정규직 교수를 포함한 다양한 대학 구성원의 손을 굳게 잡는 자기혁신의 노력이 앞서야 고등교육의 위기를 조장하는 세력을 극복하고 대학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

<김명환 서울대 교수·영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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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규모 5.4의 지진으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1주일 연기되면서 대입전형일정이 일제히 조정됐다. 교육부는 16일 “한국대학교육협의회와의 협의를 거쳐 수시·정시 모집 등 대입전형일정을 1주일씩 연기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지진 피해를 입은 포항지역 수험생들은 인근 지역에서 수능을 치를 수 있도록 했다. 교육당국의 수능 연기와 대입전형일정 조정은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조치다. 수능이 자연재해로 연기된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지만 대입전형일정의 혼선이 수험생의 안전보다 앞설 수는 없다. 강진 여파로 포항지역의 시험장 14곳 중 11곳에서 교실 벽에 균열이 생기고, 운동장 곳곳에 금이 가는 등 피해가 발생했다. 도저히 수능을 치를 수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강진 이후 40여차례의 여진에 이어 16일 오전 9시2분쯤 포항시 북구 인근 지역에서 규모 3.6의 지진이 발생했다. 수능이 연기되지 않았다면 수험생들이 1교시에 대피해야 하는 아찔한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수능의 생명은 형평성이다. 지진 피해가 큰 포항지역 수험생들은 다른 지역 수험생들보다 심리적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공평하지 못한 상태에서 수능을 치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수능과 대입전형일정이 늦춰져 59만3000명의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크게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험생들은 대학 진학의 관문인 수능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웠을 터인데 지진 발생과 시험 연기로 심적 부담이 더한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수험생과 학부모들은 차분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런 와중에 ‘지구가 준 선물, 마지막 일주일을 불사르는 직전 특강’ 등과 같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며 ‘특강 마케팅’에 나서는 일부 학원의 행태에는 눈살이 찌뿌려진다.

교육당국은 수능 연기와 대입전형일정 조정으로 수험생들이 피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무엇보다 85개 시험지구로 옮겨진 수능 시험지 보안이 중요하다. 관련 당국은 시험지 유출이나 도난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교육당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재난 발생 시 수능 시행 여부와 대입전형일정 조정을 신속하고 체계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비상계획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단 한 차례의 수능이 대입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대입체제 개편도 서둘러야 한다. 모든 시민이 교육당국을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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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지난해 9월 경주지진에 이어 1년2개월 만에 포항지진이 일어남으로써 한반도가 더는 지진의 안전지대가 아님이 재확인됐다. 두 번의 강진은 한반도 동남부를 가로지르는 활성단층대를 진앙으로 두고 있다. 이 일대에는 월성 6기, 한울 6기, 고리 6기의 원전이 가동 중이고, 5기가 건설 중이다. 원전지뢰밭이라 할 수 있다.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이번 지진에도 불구하고 가동 중인 전국의 원전 24기가 모두 정상운영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진 안전지대라던 동남부 지역에서 강진이 단기간에 두 번이나 이어졌다는 것은 이 일대 단층이 본격 활성화 단계에 돌입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지진의 진원지(9㎞)가 지난해 경주지진(11~15㎞)에 비해 얕아져서 체감위험도가 훨씬 커졌다는 사실도 심상치 않다. 그럼에도 지하의 지질구조를 분석한 ‘단층지도’는 아직 없다. 이 때문에 한반도에 엄습한 수상한 지질현상을 파악할 수 없다. 지진이 잦았던 17세기 이후 400년 동안 지하 어디엔가 축적된 응력이 경주·포항지진으로 나타난 것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축적 응력이 지하 몇 ㎞ 깊이에서, 혹은 어느 원전 밀집지역에서 지진으로 표출될지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지진이 일상의 공포로 다가온 것이다. 문제는 가동 원전 24기 중 23기의 내진설계가 규모 6.5에 해당되는 최대지반가속도 0.2g에 맞춰졌다는 것이다. 한수원은 이미 규모 7.0에도 견딜 수 있도록 21기의 내진보강을 마쳤다고 밝혔다. 하지만 기본설계는 그대로 둔 채 주변 구조물 등을 보강해봐야 한계가 있다. 특히 얇은 압력관이 380개나 설치된 중수로 원전(월성 1~4호기)의 경우 내진보강이 사실상 어렵다. 지진으로 압력관이 터지면 백혈병과 암을 유발하는 삼중수소가 대량으로 유출될 수 있다.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지키려면 당연히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정해야 한다. 공포감을 고취하려는 게 아니다. 다가올지 모를 비극에 대한 올바른 대처법이다. ‘원전사고는 1억년에 한번 나올 법하다’고 큰소리치던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사례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원전가동을 중단해서라도 원전구조의 안전성을 점검하고 기존 원전들의 내진설계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 무엇보다 2022년으로 예정된 월성 1호기 폐로를 비롯하여 내진보강이 어려운 노후원전들을 차례로 정리해야 한다.

지진으로 인한 원전의 공포에서 벗어나는 길은 딱 하나, 탈원전이다. 한반도를 강타한 지진이 그 사실을 일러주고 있다. 16일 ‘월성 1호기 폐로’를 논의한 한수원 이사회가 탈원전의 본격적인 첫걸음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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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나라 밖 지진 소식이 들릴 때면 우리나라에 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안도하곤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우리나라가 달라지고 있다. 아니, 사실은 오랜 역사 동안 지진이 발생했지만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이 기억하는 한 지진 때문에 큰 피해가 발생한 경우가 없었기에 우리나라를 지진 안전지대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적어도 작년 9월12일의 경주지진이나 이틀 전인 11월15일 포항지진이 발생하기 이전까진 말이다. 한반도에서 얼마나 많은 지진이 발생했는지, 그 지진이 얼마나 강력했는지에 대해선 이미 역사적인 기록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만 441건이 기록되어 있고 ‘세종실록’에도 심지어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2012년 기상청에서 발간한 <한반도 역사지진 기록>을 보면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지진이 총 2161회고, 그중 진도 8~9(규모로는 6.7로 추정)의 강진이 15회(0.7%) 정도였다고 한다.

지난해부터 지진이 발생하고 있는 경주와 포항, 울산 인근에는 원전이 입지해 있다. 무려 18기가 가동 중이고 5기가 건설 중이다. 다행히 아직까지 전국 24기 원전엔 이상이 없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다시 더 강력한 지진에 노출될지 알 수 없기에 참으로 불안하기 짝이 없다.

작년 규모 5.8의 경주지진 발생 후 진원지가 월성원전에서 28㎞ 떨어진 지점이라 원전 안전성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수 시민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너무나 쉽게 말이다. 이번처럼 또 지진이 발생하면 그제야 다시 원전 안전을 염려하지만 또다시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이래서는 안되지 않을까? 안전은 안전할 때 지켜야 한다. 원전사고는 너무나 치명적이어서 단 한 번의 사고라도 일어나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지진이 발생했을 때만 잠시 경각심이 살아나선 곤란하다.

신고리 5·6호기는 공론화 과정을 거쳐 건설을 재개하기로 했다. 원전 위험을 우려하는 필자로선 참 아쉬운 대목이지만 이미 내려진 결정이기에 안전에 만전을 기하길 기대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원자력계도 인정하듯이 신고리 5·6호기가 기존 원전보다 안전성이 한층 강화된 거라면, 기존 원전은 안전 수준이 떨어진다는 말이다. 현재 가동 중인 원전 24기는 신고리 3호기를 제외하면 모두 규모 6.5까지만 견디도록 설계되어 있다.

지질학계에 따르면, 단층구조상 우리나라에선 최대 규모 6.5~7.0의 초대형 지진이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기존 원전의 내진 성능을 7.0까지 강화한다고 하지만 이미 지어진 구조물의 내진 성능이 정말 안전하게 보강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설계와 실제 성능은 다를 수 있어서 더욱 그렇다. 망치와 환형 구멍이 발견된 한빛 4호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시공과 관리 부실은 또 다른 암초다. 충분한 안전 여력을 확보할 수 없다면 설계수명 이전 폐쇄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사고가 난 후는 이미 늦다.

이제 우리나라는 더 이상 지진 안전지대가 아니다. 다행히 신고리 5·6호기 건설 재개 결정에도 불구하고 시민참여단의 과반수(53.2%)는 원전축소정책을 지지했다. 정부의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정책은 재론의 여지 없이 유지되어야 한다. 기후변화와 미세먼지 문제를 고려할 때 탈석탄정책도 흔들림 없이 추진되어야 한다. 이런 정책이 제대로 가려면 전력 소비에 낭비가 있어서는 곤란하다. 위험하고 깨끗하지 않은 발전소를 자꾸 지어서 싸고 풍족하게 전기를 쓸 생각을 이젠 과감히 버려야 한다.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시민 한 사람 한 사람, 기업 하나하나가 더 이상 소비자로만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이제 누구나 전력 생산자가 되어야 한다. 이미 기술은 우리 곁에 있다. (미니) 태양광발전부터 시작해보자. 이게 지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자 경고에 대한 답이다.

<윤순진 서울대 교수 환경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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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식 강의실이 등장한다. 느리지만 정확한 어투로 계약법을 설명하는 노교수의 눈빛이 형형하다. 그는 종강을 선언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강의실 문을 향해 걸어간다.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원 기립박수를 날린다. 놀란 기색으로 제자들을 응시하는 교수. 영화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의 한 장면이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다섯 번 보았다.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낭만적인 분위기를 건네는 작품. 영화는 자신의 실제 대학생활을 소재로 한 작가의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다.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여주는 인물은 계약법을 가르치는 킹스필드 교수이다. 법대생들은 수업시간마다 교수의 집요한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에 시달린다.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 포스터

얼마 전에 박사과정을 공부하는 지인으로부터 답답한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원에서 실권을 가진 인문학 교수의 횡포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시간에 대놓고 스승의 날 선물을 하려면 마시면 사라지는 고급양주 말고 오래도록 가치가 남을만한 선물을 달라는 발언. 논문지도랍시고 학생을 두 시간 가까이 기다리게 해놓고 자신에게 확인전화를 했다는 이유로 폭언하는 사례. 평소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을 논문평가에서 고의적으로 탈락시키는 횡포 등을 성토했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갑질교수임에 틀림없다. 안타까운 사실은 이런 저질교수의 전횡이 대학가에서 전방위적으로 벌어진다는 거다. 게다가 실력이 처지는 교수일수록 정치적인 입지에만 골몰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대학총장과 각별한 사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해당 교수는 대학의 이미지를 추락시키는 적폐임에 틀림없다. 오로지 실력으로 학생과 소통하는 킹스필드와는 정확히 반대편에 위치한 인물이다.

일반적으로 교수가 갑의 위치를 점할 수 있는 무기는 다양하다. 학점, 논문평가, 조교 및 강사채용 등이 그것이다. 반대로 학생이 문제교수에게 자신의 권리를 피력할 수 있는 수단은 그리 많지 않다. 교수평가제가 시행되고 있다지만 무능교수를 대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제도는 갖춰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사설학원에서 지속적으로 콘텐츠를 개발해야만 살아남는 프리랜서 강사와는 경쟁력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존재이다.

소개한 영화의 무대는 미국 보스턴 일대로 유학하려는 학생들이 한 번쯤은 진학을 꿈꾸는 하버드대학이다. 게다가 졸업과 함께 부귀영화가 보장된다는 법대가 그 배경이다. 금수저와 흙수저 영재들이 고루 모인 학업모임에서는 풍부한 법학지식만이 자신의 존재감을 증명할 수 있다. 게다가 킹스필드 교수의 강의실에서는 학생의 출신이나 교수와의 사적인 관계가 예외사항으로 통하지 않는다.

쏟아지는 과제물을 감당하려고 새벽까지 책과 씨름하는 영화 속 법대생의 이미지가 신선해 보였다. 삶의 열정이 내리막길을 걸으려 하는 기색이 보이면 어김없이 <하버드대학의 공부벌레들>을 찾았다. 누구든지 현실 속에서 넘어지거나 다치는 사건을 경험한다. 하지만 어떤 자세로 다시 일어서느냐가 인생 후반부를 좌우한다. 킹스필드는 오로지 강의와 질문, 과제를 통해서 무거운 현실과 맞서는 방법을 전파한다.

지인은 논문심사를 기다리는 연구생들이 갑질교수가 안식년을 가는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가 사라져야 공정한 논문평가가 가능하다는 신세타령이 이어졌다. 과연 한국 대학가에는 몇 퍼센트의 교수가 킹스필드에 근접하는 학문적인 존경을 받는지 궁금하다. 연구는 고사하고 정치적 가치관이나 소신도 없이 오로지 권력만을 위해 부나비처럼 외부활동에 전념하는 폴리페서 역시 존경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부단한 노력으로 학문에 매진하는 교수다운 교수가 일부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이들만으로 대학의 미래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늦었지만 학생을 종으로 취급하는 갑질교수를 통제할 전방위적인 제도가 갖춰져야 한다. 이를 통해서 실력있는 교수가 대우받는 정상적인 대학으로 환골탈태해야만 한다. 동시에 취업학원으로 전락한 대학의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마지막 강의를 마친 뒤에 후배들의 기립박수는 고사하고 손가락질은 받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그대의 이름은 이상한 대학에서 서식하는 교수님이다.

<이봉호 | 대중문화평론가·<음란한 인문학>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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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군인 한 명이 지난 13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총격을 받으며 남측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남측 군당국이 미온적으로 대응했다고 야당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그제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 등은 송영무 국방장관을 상대로 북한 측에 대응사격을 하지 않은 점을 질타했다. 그래서인지 군이 판문점에도 한국군 교전수칙을 적용하는 방안을 검토한다고 한다. 판문점 내 북한의 공격에 적극 대응하도록 유엔군 대신 한국군 전투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것이다.

한미 국방장관이 경기도 파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대북 메시지를 발표한 지난달 27일 오후 북한 병사들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을 둘러보는 한미 국방장관을 바라보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드러난 허점은 보완할 필요가 있다. 당장 판문점 내 감시 사각지대를 해소해야 한다. 사건 당시 군은 북한군이 차량으로 넘어오는 것은 관측했지만 이후 상황은 놓쳤다. 군사분계선 남쪽 50m 지점에 쓰러진 북한 병사를 발견하는 데 15분이 걸렸다. 경비는 한국군이 맡는데 작전지휘권은 유엔사가 행사하는 지휘체계도 재고할 여지는 있다. 하지만 판문점은 남북 대화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이런 곳에서 총격을 자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전협정 때부터 판문점 내에 권총과 비자동소총만 반입 가능한 것도 이곳을 평화의 장소로 유지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판문점에 적용되는 교전수칙은 비무장지대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유엔사 교전수칙과도 다를 수밖에 없다. 총격이 벌어져도 그에 상응하는 수준에서만 대응함으로써 확전을 방지하도록 한 것도 그런 취지 때문이다. 그런 판문점에 한국군 교전수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한국군 교전수칙은 비례성의 원칙에 구애받지 않고 북한의 도발 수준에 따라 3~4배로 응징하게 돼 있다. 더구나 유사시에는 현장 지휘관이 스스로 판단해 ‘선(先) 조치, 후(後) 보고’ 하게 돼 있다. 사소한 갈등이나 우발적인 총격이 확전으로 이어질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판문점에서 군의 대응이 미온적이었다고 하는 것은 전형적인 꼬투리 잡기다. 북한군이 귀순할 당시는 판문점 방문객이 없는 날이라 경비병 자체가 배치되지 않았다. 북한군이 남측 지역으로 넘어와 사격을 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응사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판문점을 대화가 아니라 전투의 장으로 만들자는 것이나 매한가지다. 판문점에서까지 총질이 빈번해진다면 대화 장소로서의 의미는 상실하게 된다. 판문점에 한국군 교전수칙을 적용하겠다는 발상은 거두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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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15일 오후 경북 포항시 북구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했다. 지진은 포항은 물론이고 서울과 강원도는 물론 제주도 지역까지 감지됐다. 전국 곳곳에서 건물의 흔들림이 느껴지는 등 지난해 경주지진(15㎞·5.8)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진원(9㎞)이 더 얕아 체감 위력은 더 컸다. 수능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발생한 강진은 크고 작은 여진을 낳았다. 교육부는 결국 16일 시행할 예정이던 수능을 일주일 뒤인 23일로 연기했다.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으로 수능을 연기한 초유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동안 남의 일로 치부되던 지진이 어느덧 전 국민의 관심사인 수능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일부 학교의 시설이 파손돼 학생 안전이 우려되고, 시험시행의 형평성을 고려한 불가피한 결정이었다는 게 교육부의 설명이다. 정부는 수능 연기에 따른 입시혼란을 최소화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한 명의 수험생도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

15일 경북 포항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진원지 부근인 포항시 북구 흥해읍내 건물 외벽이 무너지면서 도로에 주차해 놓은 차량들을 덮쳤다. 규모 5.4의 이날 지진은 1978년 우리나라에서 지진 관측을 시작한 이래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경상일보 제공

이날 규모 5.4의 지진은 지난해 9월 지진 관측 이후 최대규모(5.8)였다는 경주지진에 이어 1년 2개월 만이다. 지진 안전지대로 치부되던 한반도에서 이토록 단기간 내에 큰 규모의 지진이 잇달았다는 것은 심상치 않다. 그사이 640여 차례의 여진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 영향으로 한반도의 지반이 약해지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갖는다. 정부는 2020년까지 조기경보시스템과 내진설계대상의 강화 등 다양한 지진대책을 세운 바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다. 민간건축물 중에서 내진설계가 이뤄진 비율은 20%를 밑돌고 학교, 철도와 교량 등 공공시설물의 내진율도 40% 선에 머물고 있다. 게다가 한국은 원자력 발전소의 세계 최다 밀집지역이다. 공사재개가 확정된 신고리 5·6호기 등을 포함해서 고리(10기), 한울(8기), 한빛·월성(이상 6기) 등의 원전이 특정지역에 몰려있다. 이 중 고리·월성 일대에는 60여 개의 활성단층이 확인됐다. 한반도에서 7.0 이상의 대지진이 일어날 가능성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제법 있다. 설마하고 수수방관할 때가 아니다. 노후원전의 조기폐로 문제도 이참에 거론되어야 한다.

지난해 9월 규모 5.8의 경주지진이 일어난 뒤 꼭 일주일만에 규모 4.5 여진이 이어졌다. 15일 오후의 지진은 더 강한 지진의 전조일 수 있다. 추호도 긴장을 늦춰서는 안된다. 정부와 지자체는 물론 시민들도 이번 지진을 계기로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지진 발생 때 잠깐 안전에 관심을 갖다가 평상시엔 잊어버리는 망각증은 곤란하다. 재난 안전 대책에 부족한 곳이 없도록 총체적으로 재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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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찬바람이 사무치는 즈음에 지나간 일은 글감으로 삼지 않는다는 칼럼의 불문율을 한 번 깨겠다. 2017년 한가위가 선물한 연휴가 꿈처럼 지나갔다. 지난 연휴는 밥벌이의 최전선으로 돌아온 생활인들에게 이미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게다가 11월도 하순이 코앞이다. 어정거리다 연말이 바로 코앞일 테다. 이때 하필 다시 펴느니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열양세시기>이다. 김매순은 신라의 “가배”에서 추석의 기원을 찾은 뒤 말한다. “이날은 아무리 구석진 시골 가난한 집이라도 으레 모두 쌀로 술을 빚고 닭을 잡아 음식을 한다. 안주며 과일도 넘치도록 한 상 가득 차린다.” 이 때문에 당시에 이미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加也勿減也勿, 但願長似嘉排日)”라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녔다고 한다. 정말 오래된 관용구 아닌가. 사대부 또한 이 분위기에 젖었던 모양이다. 설, 한식, 중추, 동지 가운데 중추, 곧 한가위의 묘제를 가장 풍성하고 크게 치르는 경향이 있다고 김매순은 설명한다. 부모형제, 고향, 고향을 지키는 친구를 떠올리는 마음에 상하귀천이 있을까.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김매순은 “하인, 종, 머슴, 거지 모두가 부모의 묘를 찾는다”는 옛글을 인용한 다음 마무리한다. “오직 이날이니까 그런 것이다”라고.

한국인은 이 문화를 이어는 받았다. 우리는 좀 더 맛나고 특별한 음식을 좇아다녔고, 일상과 다른 공간을 찾아 떠났다. 여기까지다. 휴가는 늘 짧기만 하고, 계획과 예산을 벗어난 지출은 11월까지도 돌아오는 짜증스러운 할부금으로 남았다. 음식은 어떤가. 남들이 사니까 덩달아 산, 송편을 필두로 한 떡이며 약밥이 지금 냉동고 속에서 잠자고 있지 않은가. 지금 냉동고 문을 열어볼거나. 그 송편은 필시 자다 못해 얼어 죽어버렸을 테다.

무언가 하던 대로 하는데 구체적인 행동은 다르다. 자본제 시대, 산업화 시대니까 음식은 그저 “사 먹지 뭐”로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 여행 또한 “여행 상품” 구입이라는 지름길이 있다. 그동안 세상은 너무 급히 변했고, 우린 너무 지쳤고, 음식 하는 법도 여행 하는 법도 가꿀 기회가 별로 없었다. ‘개저씨’는 돈밖에 모르고, 청년은 취향을 벼릴 겨를이라고는 없는 시대라고 하면 지나칠까. 그래서 더욱, 세시가 남긴 문화와 행동을 나를 돌보고 나를 돌아보는 계기로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매체와 기업은 동지, 성탄 전야, 연말연시를 굽이치며 탐식과 고급 숙박 상품 판매에 활활 불을 붙일 테지만, 일상과 문화 일체를 소비에 의지할 수만은 없다. 내 줏대와 내 손이 빛나는 시간을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가 귀하다. ‘주말이니까 사 먹자’가 아니라, 주말만큼은 반찬을 만들자는 골목길 여기저기의 모색과 한 길이다. 매끼는 어렵지만 하루 한 끼는 내가 장을 보아 내가 내 밥상을 차려보자는 온당한 마음가짐과 같은 궤다.

어정하다가 동지가 훅 닥칠 테다. 우리는 별로 우리 일상을 가꾸며 지내지 못했다. 그래서 생각과 준비가 필요하다. 지난 송편은 냉동고에다 장사 지냈다. 그렇다면 다가올 동지팥죽은 어떤가. 역시 나한테 돌아가야 한다. 내 입맛, 취향은 어떤가. 나는 별미 죽 가운데 실제로 팥죽에 입맛 다신 적은 있나. 덩달아 먹을 테냐, 내가 내게 다른 수를 낼 테냐.

팥죽도 김치찌개만큼이나 집집이 다 달랐다. 통팥 퍼진 팥죽, 팥물을 고듯 쑨 팥죽, 쌀알을 살린 팥죽, 쌀가루로 방점 찍은 팥죽 등등 천차만별이었다. 새알심의 탄성과 질감도 저마다의 입맛을 탔다. 찹쌀가루와 밀고 당길 갖가지 전분도 취향껏 쓰였다. 동지팥죽에는 꿀로 단맛을 더했다. 대추를 고아 풍미를 더하기도 했다. 저마다의 손이 사라지면서 다채로움도 빛을 잃었다. 소가죽 젤라틴에다 꿀, 계피, 생강, 정향, 후추, 대추고를 더해 굳힌 전약(煎藥), 그러니까 프랑스 제과로 치면 앙트르메 또는 데세르에 준하는 과자가 팥죽에 따라오기도 했다. 이런 맛의 설계는 사자고 해도 없는 노릇이다.

송편은 냉동고에서 얼어 죽었다 치고, 이제 팥죽이 냉장고 합성수지 찬통에서 보글보글 괼 차례인가. 아, 죽이 쉬다 괸다는 말 또한 오늘날에는 알아먹기 어려운 말이 되었다. 이러나저러나 한 해에 한 번이다. 한 번이니까 내가 해 보자, 같이 모여 배워서 해 보자 하는 마음이 골목골목 자랐으면 좋겠다.

<고영 음식문헌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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