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새누리당 완승으로 끝났다. 새누리당은 전통적 야권 강세 지역인 서울 관악을과 인천 서·강화을, 경기 성남 중원 등 수도권 3곳 모두에서 승리를 거뒀다. 새정치연합의 아성인 광주 서을은 무소속 천정배 후보가 압승을 거뒀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으로 민심 이반이 가속되고 ‘정권 평가’의 성격이 강해진 상황을 감안하면 새정치연합의 참패가 도드라진다. 새정치연합은 민심의 척도라 할 수도권에서 여당에 완패를 당했고, 소선거구제로 전환된 1988년 이래 27년 동안 한 번도 놓치지 않았던 광주 서을에서도 더블 스코어 차이로 패했다. 문재인 대표의 리더십이 직격탄을 맞게 됐고, 야권 재편의 소용돌이가 커질 전망이다. 새누리당은 선거 승리로 김무성 체제가 보다 공고해지고 정국 주도권을 잡을 계기를 마련했다.

이번 선거는 야권의 분열 구도를 전제하더라도, 정권의 대형 부패 의혹으로 야당에 유리한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는 새정치연합이 정권의 실정과 부패에 들끓는 민심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는 데 실패했음을 보여준다. ‘성완종 사태’의 반사이득에만 기대어 구태의연한 선거 전략, 제1야당의 기득권 지키기에 매몰됐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지난해 7·31 재·보선에 이어 이번 재·보선에서도 참패한 것은 새정치연합에 대한 국민 신뢰가 회복되지 않고 있다는 징표다. 문재인 대표는 당 혁신을 외치면서도 구체적 실행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경제정당론’을 주창하면서도 피부에 와닿는 대안 정책을 내놓지 못했다. 여당이 ‘성완종 사면’ 문제를 내세워 사태의 쟁점을 흐리고 본질을 호도하는데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막아내지 못했다. 선거 막판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특별 사면’을 부각시켜 ‘여도 야도 똑같다’는 프레임을 만들 때도 속수무책으로 끌려갔다.

4·29 재보선 투표가 시작된 29일 오전 서울 관악구 난향동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주민이 투표를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무엇보다 광주 서을에서 ‘호남 정치 부활’을 내건 천정배 후보에게 더블 스코어로 참배한 것은 새정치연합에 뼈아픈 대목이다. 문재인 체제의 새정치연합이 호남에서 존재를 위협받고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새정치연합은 재·보선 결과를 반성과 성찰의 전기로 삼아야 한다. 야권 분열 탓으로 자기변호를 하며 혁신을 방기할 경우, 내년 총선이나 2017년 대선에서도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새누리당은 선거 의미를 오독해서는 안된다. 선거 승리는 스스로 잘해 거둔 게 아니라는 것을 새누리당도 알 것이다. 서울 관악을 승리는 야권표의 분산으로 인한 어부지리 측면이 크다. 유권자들은 미덥지 않은 야당에 등을 돌렸으나, 정부·여당의 실정을 용인한 것은 아니다. 특히 ‘성완종 리스트’가 들춰낸 정권 부패 의혹이 면죄부를 받은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선거 승리에 취해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적당히 덮고, 불통과 독선의 국정운영을 밀어붙이려 한다면 소탐대실의 결과를 자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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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재보선

정부가 ‘세월호특별법 시행령 입법예고안’의 수정안을 어제 공개했다. 주무부처인 해양수산부는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세월호특위)’의 수정 요구를 상당 부분 수용했다고 밝혔으나, 세월호특위 측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이라며 거부했다. 세월호 피해자 가족들도 “참담하다”고 했다. 세월호특위와 가족들의 요구는 특위의 독립적·객관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보장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정안을 보면 이러한 시행령으로 진실의 한 조각이라도 건져올릴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든다.

해수부는 수정안에서, 세월호특위 정원을 시행령 시행 6개월 뒤 120명으로 늘리고 파견공무원 비중은 특위 요구대로 낮추기로 했다. 그러나 특위 무력화 논란의 진원지가 된 ‘기획조정실장’ 역할은 그대로 둔 채 명칭만 ‘행정지원실장’으로 바꿨다. 특위 측은 그동안 독립성을 훼손하는 기획조정실장 자리를 없애고 각 소위원장이 소위 업무를 지휘·감독하도록 할 것을 요구해왔다. 수정안은 또 진상규명 작업의 핵심 역할을 맡을 조사1과장 자리도 파견공무원(검찰 수사서기관)이 맡도록 했다.

이석태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오른쪽 두번째)와 특조위원들이 27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정부시행령 철회를 위한 농성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세월호특별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은 지난해 11월이다. 이후 다섯 달이 넘도록 시행령이 제정되지 않고 있는 데는 정부·여당 책임이 크다. 해수부는 특위 설립준비단이 2월17일 넘긴 시행령안을 한 달 이상 외면하다 3월말에야 정부 안을 일방적으로 입법예고했다. 유가족과 특위 측이 반발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 1주기 전날 “시행령 문제의 원만한 해결”을 지시했다. 하지만 해수부가 내놓은 수정안은 대통령 발언이 1주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한 ‘립 서비스’에 불과했음을 보여준다.

정부는 시행령 수정안을 오늘 차관회의에 상정해 5월4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수정안 수준의 시행령으로는 “참사의 발생 원인·수습 과정·후속 조치 등 사실관계와 책임소재의 진상을 밝히도록”한 모법(母法) 세월호특별법의 입법취지를 지켜낼 수 없다. 세월호특위의 독립적이고 객관적인 활동을 보장해달라는 요구는 지극히 상식적이다. 정부가 이 같은 요구를 외면하고 문제의 시행령안을 끝내 고집한다면 시민들은 묻게 될 것이다. 세월호의 진실이 드러나는 일이 그토록 두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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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그룹 가운데 현대자동차와 LG, 동부그룹의 장애인 고용이 매우 저조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는 어제 장애인 고용실적이 현저히 낮은 국가·자치단체와 공공기관, 민간기업 등 802곳의 명단을 공개했다. 30대 그룹에서 가장 많은 계열사가 명단에 포함된 곳은 LG그룹이다. LG생활건강, LG씨엔에스, 하이프라자(LG전자 유통업체) 등 9곳이 들어갔다. 현대차그룹은 현대카드, HMC투자증권, 현대캐피탈 등 8곳, 동부그룹은 동부생명, 동부화재 등 7곳이 각각 포함됐다. 현대엔지니어링과 SK네트웍스 등 55곳은 2회 연속 명단에 올랐고, LG그룹의 에이치에스에드 등 3곳은 단 한 명의 장애인도 고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낯 두꺼운 기업들이다.

노동부의 명단 공표 대상 기준은 국가·자치단체의 경우 장애인 공무원 고용률이 1.8% 미만이거나 장애인 근로자(비공무원) 고용률이 1.3% 미만이며, 공공기관은 고용률 1.8% 미만, 민간기업은 1.3% 미만이다. 법정 장애인 의무고용률이 민간기업 2.7%, 국가·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은 3.0%이므로 이들 기관은 사실상 법적 의무를 절반가량도 지키지 않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들은 노동부가 사전에 공표 대상임을 통보하고 대처할 것을 주문했는데도 끝내 고용 확대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래서야 사회적 책임을 지는 기업을 자임할 수 없다.

장애인 홍보대사에 위촉된 배우 차승원씨가 20일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제35회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서 장애아동 신은성양의 휠체어를 밀어주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절대적 빈곤 상태인 한국의 장애인들에게 일자리는 생존 그 자체다. 경제적 자립과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장애인 의무 고용 기준을 법으로 정하고 위반 시 부담금을 매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대기업들이 이를 회피한다면 장애인들은 갈 곳을 잃게 된다. 일부 대기업은 부담금 제도를 악용해 장애인 고용을 늘리지 않고 돈으로 때우려는 곳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부담금을 대폭 올리는 방식은 적절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사회적 연대와 부조의 정신에 기대하는 것이 맞는 방향이라고 본다.

정부도 할 일이 많다. 기업들의 장애인 고용 기피 사유를 연구·조사해 맞춤형 대책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다. 안전사고 근절을 위한 해당 시설 지원 확충도 그중 하나다. 직무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장애인 직업 교육도 더욱 확대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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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장애인

평화롭던 공간에 느닷없는 괴성이 울려퍼진다. 곧이어 고요함을 날카롭게 가르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온다. 실체가 애매했던 소음은 이제 분명한 언어로 구성된 고함소리라는 것이 확인된다. 누군가가 공공장소에서 고성을 지르고 있는 것이다. 몇 초만 들어보면 감이 온다. 소위 말하는 ‘진상 손님’이 또 출현했다는 사실을. 어디를 가도 이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식당, 카페, 마트, 버스, 지하철, 주차장, 심지어는 비행기까지, 서비스업이 존재하는 한 어디든 ‘진상’은 활개를 친다. 그들의 무례함과 뻔뻔함 때문에 서비스업계 종사자는 물론 일반 소비자마저 감정노동에 시달릴 판이다. 마치 천하의 중죄를 저지르기라도 한 것처럼 종업원을 닦아세우는 손님 때문에 불편했던 경험이 없는 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다. 막무가내의 행동 기저에 깔린 기본 논리가 실은 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돈을 냈으면 그에 응당한 권리는 반드시 100% 챙기겠다는 심리만큼 정당한 것이 또 있을까? 재화와 용역의 금전적 교환이라는 철칙 앞에선 그 어떠한 수모와 비애도 감수해야 마땅한 세상이다. 손님은 왕, 고객 만족은 최고의 가치. 닥치고 일이나 할지어다.

이와 같은 경제논리에 수긍하며 사는 모든 사람들은 싫든 좋든 따라오게 되어 있다. 하지만 사실상 서비스업에 속해 있지만 속성이 전혀 다른 ‘노동계층’이 있다.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업계에 ‘종사’하고 있는 이들은, 뭣도 모르고 전시, 교육, 심지어는 쇼비즈(Show-biz) 영역에까지 그 노동력이 활용되고 있다. 물론 계약서에 사인을 한 적도 없고, 4대 보험의 혜택을 누리는 것도 아니다. 잘살고 있다가 그저 재수 없게 잡혀와 주야장천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이주노동자, 바로 동물이다. 그들의 대표적인 일터는 동물원이다. 임무는 간단하다. 그냥 살아 있으면 된다. 목숨 자체가 재화이자 용역인 셈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기만 하면 해고당하지 않고 밥벌이는 할 수 있다. 자연 상태에서 이들은 다른 생물의 시선을 피하면서 사는 것이 기본이다. 특히 잠재적인 포식자인 덩치가 큰 직립 생물이 노려보는 것을 달가워할 동물은 단 한 종도 없다.

하지만 이 업계에 종사하는 이상, 야생 동물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은닉과 프라이버시는 송두리째 내동댕이쳐야 한다. 사람들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입장료가 얼마인데. 게다가 만성 적자와 인력부족 그리고 전문성 부족에 시달리는 동물원들은 보통 이들의 근무조건이나 복지 향상에 할애할 여지가 없다. 정글 출신이든 사막 출신이든, 야생성이건 주행성이건 시멘트 바닥과 쇠창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집무실이 제공된다.

사회생활이나 결혼 등에 대한 자유가 없음도 물론이다. 마음에 안 맞는 상대라도 그나마 주어지면 운이 좋은 편이다. 홀로 쓸쓸하게 짧은 ‘수생(獸生)’을 마감하는 일이 허다한 곳이니 말이다. 이들의 경우는 감정노동이라기보다는 존재노동이라 불러야 더 적확하지 않을까. 죽지 못해 산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이다.

물론 동물원이 죄다 똑같은 수준으로 열악한 것은 아니다. 걔중에는 좀 더 나은 환경과 관리방침으로 운영되는 곳도 있긴 하다. 그러나 발견되는 문제의 속성과 양상의 측면에서 보면 동물원 간의 수준 차이는 크지 않다.

민간동물원 안에 있는 원숭이 (출처 : 경향DB)


최근 동물보호단체 ‘동물을 위한 행동’에서 발간한 동물원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의 모든 민영 및 공영 동물원에서 생태적이지 못한 전시 환경, 정형행동의 만연, 부족한 행동풍부화, 비체계적인 개체수 조절, 예산 확보의 어려움 등의 문제가 일관되게 발견된다. 좁고, 낡고, 더럽고, 어둡고, 무료하고, 황량하고, 답답하고, 관람객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사육장이 아직도 너무 흔하다.

게다가 여러 동물원은 동물에게 무리한 ‘추가 근무’를 강요한다. 이른바 쇼에 차출되어 자신의 생태와 전혀 무관한 행동을 해야 하거나, 불특정 다수에게 마구잡이로 만져지도록 몸을 내맡겨야 한다. 어찌 보면 어쩔 수 없이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비견되는 신세이다. 여기서 한 가지를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동물이 가두어져 산다는 것은, 동물이 자연에서 절대로 만나지 않고, 진화적으로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그런 종류의 고통이다. 잡아먹히면서 몸이 뜯기는 고통, 산불이나 용암에 몸이 타는 고통, 질병의 고통, 물에 빠지거나 질식하는 고통, 모두 자연계에 원래부터 존재하며, 지구 역사상 모든 동물이 겪어왔다.

그러나 한 공간에 가두어진 채 먹이는 계속 주어져 죽지 못하게 만드는 고통, 이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동물을 가둬 키우는 모든 행위는 실로 미안한 일이다. 그러니 이왕 키울 거면 잘해줘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당연한 사명이요 의무라고, 야생학교는 명심한다.


김산하 | 영장류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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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가 현실로 나타났다. 교육부가 공청회를 열어 초등학교 교과서의 한자 병기에 대한 찬반 의견 수렴 절차를 거치지 않고,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위탁해 한자 병기를 위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한 사실이 4월27일자 언론보도를 통해 드러났다. 교육부는 지난해 9월24일 ‘2015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총론’을 발표하면서, “한자 교육 활성화를 위해 초·중·고 학교급별로 적정한 한자 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 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라고 밝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초등 교과서에 한자 병기가 불필요하다고 보는 한글 관련 단체들은 성명서와 건의서를 발표하였다. 초등 교과서에서 한자는 1970년 박정희 정부에서 폐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아무런 문제가 없이 초등교육이 이루어져 왔다.

제 나라말과 제 나라글로 학습 내용을 읽고 쓰고 듣고 말하도록 함이 국어정책의 핵심이다. 교육부는 이 정책을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문자생활을 한글로만 해도 아무런 지장이 없기에, 중국글자인 한자를 교과서에 병기할 필요가 없다.

교육부의 시대역행적 교육 방침에 맞서 초등교사들도 여론조사를 통해 교과서의 한자 병기에 반대했다. 시와 도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교육감들도 여기에 대해 반대하였다. 다음의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어 교육부에 지적하고자 한다. 교육부가 발표한 교과서의 한자 병기 주장이 상위법인 ‘국어기본법’을 위반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국어와 한글의 소중함을 인식한 국회의원들이 합의해 2005년에 ‘국어기본법’을 제정하였다.

지금 시행하고 있는 ‘국어기본법’은 한글 전용법을 진전시킨 법률이다. 국어기본법 제3조 제1호의 규정(‘국어’란 대한민국의 공용어로서 한국어를 말한다.)과 제2호의 규정(‘한글’이란 국어를 표기하는 우리의 고유문자를 말한다.)과 제14조 제1항의 규정(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경우에는 괄호 안에 한자 또는 다른 외국 글자를 쓸 수 있다.)을 주목해야 한다.

“공공기관 등의 공문서는 어문규범에 맞추어 한글로 작성하여야 한다”라는 규정은 현재 교과서 기술에도 적용되고 있다. 이 규정에 의거하여 대한민국의 모든 교과서는 한글로 기술하고 있다. 국회의원의 질의에 교육부 관료가 답변하기가 궁색하리라 여겨진다.


그렇다면, 교육부는 교과서의 한자 병기를 추진하기에 앞서, 이 규정을 먼저 살펴보았어야 했다. 교육부가 ‘국어기본법’을 지키지 않는 오명을 듣지 않기를 바란다. 오명을 듣지 않는 첩경은 초등 교과서의 한자 병기 검토를 철회하는 데에 있다. 교육부가 ‘국어기본법’을 지키는 모범을 계속 보여주기 바란다. 사마천은 “정치를 가장 못하는 자는 백성과 싸우는 사람이다”라고 말하였다. 국민과 맞서는 교육부가 되지 말고,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교육부가 되기를 충심으로 바란다.


박용규 |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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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이 상고법원제 도입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상고법원제란 대법원과 별도로 상고법원을 설치해 대법원으로 올라온 상고사건을 대법원과 상고법원이 나누어 재판하는 제도를 말한다. 3심제에서 대법원은 최종 재판을 담당하는데, 대법원은 법 해석의 통일을 기할 필요가 있는 사건이나 공익사건 등 중요 사건만 직접 재판하고, 그 외의 일반적인 상고사건은 별도의 상고법원이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상고법원의 판사는 대법관이 아니라 일반 판사들이다. 이런 내용의 법원조직법 개정안이 현재 국회에 계류돼 있다.

대법원이 드는 이유는 상고사건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2014년 상고사건 수는 3만8276건으로, 대법관 1인당 연 3000여건을 처리해야 하는 수치이다. 사건 수가 너무 많으니, 대법원의 재판이 지연되거나 부실해지는 사태를 피할 수 없다. 대법원의 재판이 부실해지면 그 피해는 결국 국민들에게 돌아간다. 뭔가 해결책을 강구해야 하는 시점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상고법원 도입이 올바른 해결책일까. 대법원의 구상에 따르면, 일반 법관으로 구성되는 상고법원이 대법원을 대신해 3심 재판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된다. 상고법원에서 재판할지, 대법원에서 재판할지는 사건마다 대법원이 결정한다고 한다. 국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제도는 ‘대법원의 재판을 받을 권리’를 박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재판청구권의 침해로서 위헌 소지가 다분하다. 우리 헌법상 대법원장 및 대법관은 국회의 동의를 받아 임명되므로 대법원의 재판에는 국민주권의 원리가 반영돼 있다. 실질적인 헌법이념에 비추어 보면, 국민의 재판청구권은 대법원의 대법관에 의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법원도 위헌 소지를 의식했는지, 특별상고라는 제도를 둔다고 한다. 특별상고란 상고법원의 재판에 대해 제한적으로나마 대법원에 다시 상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현행 3심제를 사실상 4심제로 운영하는 결과가 된다. 국민 정서상 재판을 시작하면 대법원까지 가서 끝장을 보려는 경우가 많다. 상고법원제는 결국 분쟁해결에 소요되는 시간과 비용을 증대시켜 국민 부담만 가중시킬 것이다.

사건 수가 너무 많아 대법원의 재판이 부실해지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사법개혁의 과제이다. 가장 간명하면서 헌법정신에 부합하는 방안은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이다. 조금 거칠게 비유하자면, 상고법원 도입방안은 어떤 기업이 인기가 치솟은 제품의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자 교묘하게 ‘짝퉁’을 만들어 파는 것과 같다. 기업 입장에서는 해당 제품의 생산을 늘리는 것이 옳은 길이다. 상고법원제도 마찬가지이다. 대법원의 업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상고법원을 별도로 설치해 사건을 뚝 떼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이 국민의 재판청구권 보장에도 훨씬 부합한다. 그런 이유로 대한변호사협회도 오래전부터 대법관 증원을 주장해 왔다.

상고법원 개념도 (출처 : 경향DB)


이렇게 간명한 해결책을 굳이 외면하면서, 대법원이 상고법원이라는 짝퉁 방안을 들고 나온 이유는 뭘까. 대법원은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전원합의체 판결’을 하기가 어려워진다고 주장한다. 대법원은 ‘부’ 단위로 재판하는 게 원칙이며, 전원합의체는 대법원장과 대법관 전원이 참여하는 재판을 말한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연간 20건 안팎에 불과하다. 대법원의 주장은 대법관 수가 늘어나면 모두가 모여서 사건을 심리해야 하는 전원합의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대법관 수가 100명쯤 되면 그럴 수도 있겠다. 현재 대법관 증원 방안은 25명 주장도 있고 40~50명 수준으로 늘리자는 주장도 있다. 이 정도라면 전원합의체 토론이 불가능하지 않다.

나는 대법원이 대법관 증원에 반대하는 진짜 이유는 소수정예로 구성되는 대법원의 관료적 권위주의를 놓지 않으려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50대-남성-서울대-법관 출신’으로 상징되는 대법관은 전형적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은 판사들의 승진 종착지이다. 상고법원제도는 대법원의 사건부담을 하위직 판사들에게 전가하면서 대법원은 소수의 엘리트 판사 출신들이 독점하는 폐쇄적이고 관료적인 사법체계의 구조를 더욱 강화하는 꼼수이다. 대법원의 이러한 폐쇄적 권위주의 자체가 혁파의 대상이 돼야 한다. 그 첫걸음은 대법관 수를 늘리고, 다양한 직역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는 사람들이 대법원에 진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정도를 외면하지 말자.


이호중 |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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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재·보궐 선거에서도 정책은 실종됐다. 초유의 정치이슈가 된 ‘성완종 게이트’에 묻혀 선거 초반에 제기됐던 새정치민주연합의 ‘두툼한 지갑론’은 선거 후반에 들어와서 시민들의 관심을 잃었다. 정책적 쟁점은 유권자의 관심과는 별개로 선거 이후 정치과정에 투입된다. 그럼, 내년 총선과 그 다음해 대선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정책 아젠다는 무엇이 될 것인가?

상위소득 점유율이 다음 선거에서 주목받는 거시경제지표가 되어 가고 있다. 상위소득이 전체 국내총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2012년 한국의 상위 10% 소득점유율은 44.8%로 OECD 국가 중에 미국 다음으로 두 번째로 소득불평등이 심각한 수치이다. 박근혜 정부의 기득권 위주의 정책을 감안하면 이미 45%를 넘었을 것이다. 이 소득불평등 지표로 볼 때 한국경제는 빨간불이 켜진 지 오래됐다.

새롭게 등장하는 거시경제지표들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1970년대까지 고도성장기 경제에서 관심을 받는 거시경제지표는 경제성장과 인플레이션이다. 2000년 이후 세계경제의 관심은 일자리와 고용이었다. ‘고용 없는 성장’에 대한 대안으로 ‘유럽2020 아젠다’는 고용률 70%를 새로운 거시경제 목표로 제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자리가 최고의 복지라는 인식의 확산과 함께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이 공약이 제시됐다.

4·29 재보선 투표가 시작된 29일 오전 서울 관악구 난향동주민센터에 마련된 투표소에서 주민이 투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출처 : 경향DB)


지금 세계경제의 관심은 고용률을 넘어서 소득불평등으로 이동하고 있다. 고용된 상태이지만 비정규직, 파트타임 등으로 근로빈곤이 더 중요한 문제가 되고 있다. 총선을 불과 1주일 남겨놓은 영국에서는 제로아워 고용이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랐다. 이는 근무시간과 횟수를 규정하지 않은 고용계약으로 우리나라 청년의 근로빈곤 형태인 열정페이만큼이나 불평등한 고용형태이다. 고용된 상태에서 소득불평등이 더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상위소득 10%의 소득점유율은 학계에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최근의 연구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 30년 동안 이 경제지표가 지속적으로 안정적이었던 반면, 1980년대 이후 한국의 경우에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급격하게 악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상위소득 10% 점유율은 U자형 커브를 보이면서 소득불평등이 계속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선거의 쟁점은 상위소득 점유율의 감소와 함께 소득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6년 11월에 실시되는 미국 대통령 선거 쟁점으로 이 경제지표에 대한 관심이 이미 제기됐다. 올 1월에 나와 주목받고 있는 ‘포용적 번영 위원회’의 경제 분석은 이 지표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최근 출마선언을 한 힐러리는 이 보고서를 근간으로 대선 캠페인을 시작했다.

작년에 세계적인 선풍을 불러일으킨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에서 제기된 문제의 정책 대안으로 올해 미국과 한국에서 앳킨슨의 <불평등>이 발간되어 주목받을 것으로 보인다. 상위소득 10%의 점유율을 완화하는 정책들이 전향적으로 검토돼야 한다는 주장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기회의 불평등’뿐만 아니라 ‘결과의 불평등’이 미래의 기회 불평등을 초래한다는 점이 동시에 고려돼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부모의 소득이 자식들의 교육기회 불평등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상당한 설득력을 얻을 것이다.

다음 총선에서 소득불평등 지표인 상위소득 10% 점유율이 현재 45%에서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수준인 35% 정도로 완화하는 정책들에 대한 경쟁이 주요 쟁점으로 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정부의 개입과 소득정책으로 임금 격차를 줄이고 국민소득에서 임금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여서 부의 집중을 낮추는 정책들이 유권자의 관심을 끌 것이다. 조세정책에서 고소득자에 대한 한계세율을 65%까지 인상하는 방안 등은 전향적으로 검토될 것이다. 다음 총선에서는 상위소득 점유율 인하를 쟁점으로 한 소득불평등 완화가 유권자의 관심을 모을 것으로 기대한다.


임채원 | 서울대 국가리더십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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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청와대 홍보수석을 통해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대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했다. 박 대통령의 ‘대독 메시지’는 책임회피와 적반하장, 치졸한 정치공세로 점철되어 있다. 박 대통령은 자기 측근들의 부패, 대선자금 의혹에 대해 어떤 사과도 유감 표명도 하지 않은 채 “금품 의혹 등이 과거부터 어떻게 만연해 오고 있는지 등을 낱낱이 밝혀 정치개혁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을 ‘원래부터 있었던 문제’라는 식으로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적반하장이다. 누가 뭐래도 이번 사건의 본질은 국무총리와 전·현직 비서실장 등 정권 실세들이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의혹이다. 이들 자금의 용처도 박 대통령이 직접 치른 선거에 닿아 있다. 자신과 자신의 측근들이 연루된 데 대해 국민에게 고개부터 숙였어야 하는데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이완구 총리의 사퇴에 따른 면피용 유감 표명만 했다. “국민이 수긍할 수 있는 진솔한 말씀”(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과는 거리가 멀다.

박 대통령은 “사건의 진위는 엄정한 수사를 통해 밝혀져야 한다”면서도 독립적인 수사를 위한 방안을 내놓지 않았다. 검찰이 정권 실세들의 불법 정치자금과 ‘살아 있는 권력’의 대선자금 문제를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 국민의 우려가 깊다. 우려를 해소하려면 박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을 비롯해 정권의 누구도 수사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국민 앞에 약속하는 게 필요하다. 한데 박 대통령은 ‘과거부터 내려온 부패의 척결’이라며 정치권 전반에 대한 물타기 수사로 몰아갔다.

박근혜 대통령이 27일 오전 중남미 4개국 순방을 마치고 서울공항으로 귀국했다. (출처 : 경향DB)


박 대통령이 대국민 메시지에서 방점을 둔 것은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특별사면’ 문제다. 박 대통령은 “성완종씨의 연이은 사면은 법치를 훼손하고 나라 경제를 어지럽히며 오늘같이 있어서는 안될 일이 일어날 계기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을 노무현 정부의 ‘연이은 사면’으로 규정하고 나선 것이다. 견강부회이고 치졸한 정치공세다. 박 대통령이 직접 특별사면 문제를 들고 나선 이유를 짐작 못할 바 아니다. 곁가지인 ‘성완종 사면’ 논란을 키워 사태의 본질을 호도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박 대통령은 ‘성완종 사면’을 해소해야 할 의혹이라며 수사 대상으로 지목했다.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사면권 행사를 수사 대상으로 삼겠다는 발상이 어이없다. 결국 속셈은 따로 있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의 ‘특별사면’을 이슈화해 목전에 닥친 재·보선에 영향을 미쳐보겠다는 것 아닌가. 국민이 듣고 싶어 하고 걱정하는 일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이, 대통령이 이 난국에 ‘선거 주판알’이나 튀기고 있으니 기막힐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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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는 지난 2005년부터 부산 기장군에 국내 최대의 도심형 해양복합리조트를 조성하겠다는 프로젝트를 본격 추진해왔다. 이 야심 찬 사업은 ‘부산의 미래’라 일컬어졌다. 그러나 그 초대형 프로젝트는 10년이 지난 지금 ‘부산의 미래’는커녕 ‘부산의 토착비리 백화점’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이 사업은 외자유치로 초대형 관광단지를 조성하겠다는 청사진을 내세울 때부터 실현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그 우려대로 외자유치 건은 줄줄이 실패로 돌아갔다. 막대한 금융차입에 따른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한 부산시가 2009년 사업주체를 산하기관(부산도시공사)에 넘겨주었다. 그 과정에서 ‘세계적인 테마파크’는 사라지고, 상가와 숙박시설 분양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때부터 ‘던져진 고깃덩이(특혜분양 및 임차)’를 차지하기 위한 아귀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부산시의회 의원 및 시 공무원, 부산도시공사 직원, 경찰관, 롯데몰 현장소장, 부동산개발업자 등이 복마전에 뛰어들었다. 3억원대의 현금과 룸살롱 및 요트 접대를 받은 도시공사 전문위원과, 현금 수천만원을 받은 시 의원과 군청공무원, 가족 및 친척 명의로 롯데몰에 입점한 경찰서 계장 등. 특히 이종철 전 부산도시공사 사장은 사업자(롯데몰)에 편의를 봐주고 퇴임 후 가족의 이름으로 상가를 임차한 혐의를 받고 있다. 비리의 복마전에는 이렇게 인허가 선상의 사람들이 앞다퉈 등장하고 있다.

백화점과 쇼핑몰이 몰려 있는 부산 센텀시티역의 모습 (출처 : 경향DB)


기막힌 노릇이다. 지난달 시작된 검찰 수사는 40여일 만에 사업을 총괄했던 이종철 전 부산도시공사 사장 등 10명을 구속함으로써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앞으로도 건축 인허가와 교통·환경영향 평가에서 사업주에 특혜 혹은 편의를 제공했는지 전방위 수사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일각에서는 검찰 수사의 장기화 때문에 모처럼 활기를 띠었던 국내외 투자자들의 발길이 끊겼다는 등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검찰 수사 때문에 사업차질을 빚는다니 참으로 어이없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 명실상부한 ‘제2의 도시’ 부산에서 ‘토착비리’라는 퇴행적 용어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창피한 일이다. 마침 검찰이 “독버섯 같은 비리들 때문에 사업이 10년 넘게 표류한 것”이라고 했단다. 검찰의 철저한 수사가 기대되는 대목이다. 좀 늦으면 어떤가. 드러난 비리의 민낯을 말끔히 도려내어 투명성을 확보해야 ‘부산의 미래’가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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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열심히 보는 드라마 <압구정 백야>는 <인어아가씨> 등을 집필했던 스타 작가 임성한이 ‘방송국을 소재로 한 가족이야기를 그리자’는 것이 기획의도였단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주인공 백야가 자신을 버리고 재가한 어머니에게 복수를 맹세할 때만 해도 기획의도대로 가나 싶었지만, 임성한의 작품들이 다 그렇듯 뒤로 갈수록 내용이 이상해졌다.

가장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백야의 친구인 ‘육선지’의 존재감이었다. 대부분의 드라마에서 여자주인공의 친구는 주인공이 남자한테 배신을 당했을 때 “어쩜 그럴 수 있니?”라며 같이 흥분해 주고, 가끔 되지도 않는 우스갯소리로 억지웃음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이 고작이었지만, 이 드라마는 그와는 차원을 달리한다. 즉 육선지는 회가 거듭될수록 극중 비중이 높아지는데, 지루할 만치 길게 편성된 결혼식 장면도 그랬지만, 신혼여행지에서 신랑과 닭살 돋는 장면이랄지, 육선지가 결혼 후 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중전마마를 연상케 하는 한복을 입고 가 화제가 된다든지 하는 장면들을 보면 도대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누군지 헷갈릴 정도다. 최근에는 그녀가 아들 네 쌍둥이를 출산해 화제가 되기도 했는데, 그러다보니 시청자게시판은 “이게 압구정 백야가 아니라 압구정 선지다”라는 비아냥거림으로 도배됐다. 뭐로 보나 주인공급은 아니었던 육선지의 빛나는 활약에 대한 의문은 아내의 다음 말로 풀렸다.

“육선지 역을 맡은 배우, 임성한 작가의 조카잖아!”

실제로 육선지 역할을 맡은 배우 백옥담은 데뷔작부터 시작해서 딱 하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임성한 작가의 드라마에만 출연했다. 놀라운 연기로 극에 활력을 준다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그 배우가 혈연을 제외하면 뭐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될 만하다. <압구정 백야>에 육선지가 캐스팅된 것도 임 작가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게 많은 시청자들의 추측이다. 그래서 아쉽다. 임 작가가 조카의 앞날보다 드라마가 잘되는 것에 더 신경 썼다면 <압구정 백야>가 막장으로 치닫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 비단 임 작가만 욕할 일은 아니다. 인사권을 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해 자신과 친한 사람을 요직에 앉히는 일이 제법 많으니 말이다. 그 정도가 심한 대표적인 분은 바로 대통령인데, 이분의 원칙은 다른 걸 다 떠나서 자신과 친하냐 아니냐인 듯하다.

얼마 전까지 국무위원 18명에는 대선 때 자신의 비서실장을 지냈던 최경환 경제부총리를 비롯해 친박 출신 국회의원이 3분의 1인 6명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분들이 정말 훌륭한 분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 거짓말로 일관하다 물러난 이완구 총리의 예에서 보듯 그다지 신뢰가 가진 않는다. 친박인사의 중용은 비단 국무위원에만 국한된 건 아니어서,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2014년 3월부터 9월까지 공기업, 준정부기관 등에 임명된 친박인사는 무려 94명이었단다. 나도 서민이 아닌 박민이었다면 뭐라도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시청자에게 욕만 좀 먹으면 되는 드라마와 달리 국무위원과 공기업에 자격 없는 사람이 임명되는 건 큰 후유증을 남긴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운 일이다.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1948년 탄생한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을 표방하면서 국민들은 얼떨결에 선거권을 갖게 됐다. 1971년 선포된 유신은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박탈했지만, 줄기찬 투쟁 끝에 국민들은 그로부터 16년 후 대통령 선거권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1995년에는 자기 지역을 위해 일할 사람도 스스로 뽑게 됐으니, 이쯤 되면 국민이 여러 요직의 인사권자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그 인사권을 잘 행사하고 있을까? 내가 보기엔 아닌 것 같다. 누가 진정으로 지역과 국가를 위해 일을 잘할 것인가를 기준으로 삼는 대신, 특정 후보가 자기 지역 출신이라서, 아니면 상대 후보가 종북이라는 공작에 놀아나서 표를 던지는 사례가 제법 많으니 말이다. 그 결과 한 도지사는 우리나라에 몇 없는 공공병원을 없애버렸고, 아이들 밥 주는 걸 가지고 이전투구를 하고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한 기업인으로부터 1억원을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이런 일에 대해 그를 뽑은 사람들을 비난하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압구정 백야>가 시청자에게 몰매를 맞으며 막장으로 치닫자 MBC는 “약속된 주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당혹스럽다”면서 “다시는 임성한 작가와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인사는 어찌됐건 욕을 먹고 있고, 대통령의 지지율을 떨어뜨리는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그간 숱한 잘못된 선택을 했던 국민들에게는 책임을 묻는 이가 없다. 이렇게 물어보자. 국민의 뜻은 늘 위대하며, 국민은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일말의 책임도 지지 않는 인사권이 과연 옳은 것인가? 마침 오늘은, 일부 지역에 국한되긴 했지만, 재·보선이 실시되는 날이다. 후보자의 고향과 종북논란에 구애받지 않는, 해당 지역민들의 올바른 선택을 기대해 본다.


서민 | 단국대 의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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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산에 들면 피어나는 건 꽃만이 아니다. 겨우내 단단하게 뭉쳐 있던 눈에서 새잎이 스르륵 얼굴을 내민다. 솜털을 뽀송뽀송하게 달고 팽그르르 돋아나는 잎.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듯 나무에게는 꽃만이 전부가 아닌 것이다.

기가 아주 세다는 전북 순창의 회문산. 동학혁명과 한말 의병활동의 근거지가 되었고, 빨치산 전북도당 사령부가 자리 잡기도 했다. 김대건 신부의 동생과 조카의 묘가 안치된 천주교의 성지였다. 그런 인연의 작용인가. 죽음을 한번도 치르지 않는 안방이 없듯 무덤 하나 가지지 않은 산도 없겠지만 회문산에는 유난히 무덤이 많았다.

정상에 오르니 아예 무덤 위에 또 무덤이 포개져 있는 형국이었다. 함께 묻힌 사연을 뒤로하고 많은 무덤을 통과하여 오늘의 꽃산행을 마무리하고 식당으로 접어드는 길이었다. 내 마음은 흐물흐물하기가 이를 데 없어 닭도리탕에 소주 한 모금이면 무덤처럼 그냥 허물어지는 것.

식당 앞 길켠에서 마지막으로 오종종하게 모여 있는 큰개불알풀을 찍고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가까이에서 나의 눈에 척 걸려드는 나무와 그 나무의 가지와 그 가지에 달린 잎사귀가 있었다. 특히 잎사귀에는 사춘기 소녀의 귓불처럼 이제 막 피기 시작하는 솜털이 자욱했다. 내 꽃동무가 알맞게 표현한 바처럼 천하를 수놓는 ‘연두에서 초록까지’의 한 단계를 담당하는 빛깔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어린 때죽나무였다.

이 따뜻한 봄날에 파릇파릇 돋아나는 잎들은 모두 줄기 위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하나같이 하늘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좁고 낭창낭창한 길을 밟으며, 하얀 솜털을 미세하게 나부끼며, 궁금한 세상을 향해 잎사귀를 벌리며, 녹색의 즙을 칙칙 뿌리며, 햇빛을 톡톡 튕기며, 그 어딘가로 나아가는 때죽나무 잎사귀들의 걸음! 내 허리춤의 낮은 곳에서 출발해서 공중에 난 계단을 밟고 구름의 난간으로 통, 통, 통 걸어가는 봄의 행진! 때죽나무과의 낙엽 교목.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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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연금 개혁이 진통을 겪고 있다. 개혁 추진과 관련해 갈등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개인 간이든 집단 간이든 국가 간이든 갈등은 이해관계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같은 이해관계라도 당장 눈앞의 작은 부분에 집착하는 경우와 큰 틀에서 멀리 보고 접근하는 경우는 해소 노력의 결과가 크게 다르게 나타난다. 공무원연금 개혁 관련 주체와 객체들에게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큰 틀에서 접근해 줄 것을 주문한다. 특히 당리당략적 접근을 경계한다.

개혁은 그 성과에 못지않게 내용과 처리 절차도 중요하다. 개혁의 주체들은 성과에 집착해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최적의 개혁안을 만들 것을 주문한다. 많은 사람들의 눈에 공무원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집단으로 비치고 있다. 이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이들을 소외시킨 가운데 일을 진행시킨 결과가 아닌지도 살펴보아야 한다. 공무원 단체들도 치열하게 고민하고 검토해 합리적인 안을 제시하는 성숙된 자세를 보여주기 바란다. 나아가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대승적 견지로 임해줄 것을 당부한다.

공적연금강화를 위한 공동투쟁본부 회원들이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공무원연금 개악저지 결의대회'를 열고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및 강화를 촉구하는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있다. _ 연합뉴스


무릇 불만은 직접적으로 손해를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에서 생기는 법이다. 퇴직자와 재직자, 앞으로 공무원이 될 예비 대상자를 포함한 객체 모두가 공평하게 부담을 지는 개혁안이라면 불만요인이 많이 해소될 것으로 생각한다. 특히 앞으로 공무원이 될 잠재적 대상자들에게 더 많은 부담을 떠안겨서는 안될 것이다.

적자로 위기에 처한 연금재정은 당연히 고치는 게 맞다. 하지만 연금 개혁을 논하는 데 온통 경제논리만 앞세우는 것은 문제가 있다. 연금 개혁이 논의되고 있는 현재 공무원들의 사기는 그 어느 때보다 떨어져 있다. 그로 인한 손실은 기금의 손실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 손실과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는 개혁이 되었으면 한다.


이병문 | 퇴직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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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소비자로서는 붉은 조명 아래 진열된 고기들이 무슨 차이가 있는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 이것저것 잔뜩 살 수는 없으니 조금을 사도 좋은 고기를 사야 할 텐데, 고기 잘 고르는 법은 없을까.

여기에 대책이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축산물이력제다. 축산물이력제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지속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마련됐다. 가축의 출생에서부터 도축·포장처리·판매에 이르기까지의 정보를 기록·관리하며 축산물 유통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있다. 2006년 6월 쇠고기이력제를 개시했고, 지난해 12월부터는 돼지고기도 이력제를 시행하고 있다.

롯데마트 잠실점을 찾은 여성고객이 14일 '생산이력제 시스템'으로 판매중인 호주산 쇠고기를 구입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축산물이력제에 따라 사람에게 13자리의 주민등록번호가 있듯 모든 쇠고기와 돼지고기는 12자리의 이력번호를 가지고 있다. 생산농가 식별번호 부여부터 시작해 도축장·포장처리업소 등을 거치며 ‘고기’가 되기까지의 이동경로를 시스템으로 관리하며 정보를 축적해 제공한다. 소비자는 스마트폰 앱(안심장보기 또는 축산물이력제)이나 인터넷(www.mtrace.go.kr)을 통해 내가 고른 고기가 어디서 어떻게 키워지고, 도축되고, 가공돼 왔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이력제를 활용하면 농장에서 질병이 발생했을 때 원인균에 감염된 가축이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어디로 이동됐는지를 빠른 시간 내에 파악해 회수·폐기 등의 조치를 신속히 할 수 있다.

각종 가축 질병 발생에 따라 축산물 안전성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급증한 상태다. 애초에 고기가 싼 물건도 아닌 데다 축산물에 대한 왜곡된 정보가 확산되고 있어 선택에 나선 소비자의 눈매가 그 어느 때보다 매섭다. 예전의 ‘질보다 양’이라는 소비 패턴은 조금 비싸더라도 안전이 보장된 국산 축산물을 사겠다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오는 6월 말쯤 돼지고기이력제가 무사히 시장에 정착되고, 시장을 움직이는 주체로서 소비자가 안전한 먹거리 추구에 대한 스스로의 권리를 놓지 않는다면, 우리 식탁은 더 건강해질 것이다.


허영 | 축산물품질평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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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집안을 둘러보니 가난한 부모였습니다. 아이는 ‘이승에서의 삶은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바로 목숨을 끊고는 저승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런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대학생들은 이런 자조를 맘껏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청춘의 민낯>(대학가 담쟁이 엮음, 세종서적)은 “새벽부터 밤늦도록 아르바이트를 하고, 학교 수업의 개인 과제나 팀 과제를 하고, 스펙을 쌓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합판 하나를 사이에 둔 고시원에 살면서, 학자금 융자로 벌써부터 천만 원 이상의 빚을 지고 있었다”는 대학생들이 쓴 낙서모음집입니다. 그 책에는 “ ‘서울대를 가야 하는구나’에서 ‘이과를 가야 하는구나’에서 ‘외국 명문대를 가야 하는구나’에서 ‘집이 잘살아야 하는구나’까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사회에서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이 가능했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념과 학력이 달라도 공존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느슨한 계급사회가 형성되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국내총생산(GDP) 1위인 미국이 바로 그랬습니다. <공부의 배신>(원제는 ‘Excellent Sheep’, 다른)은 ‘엘리트 코스’의 교육을 받고 예일대에서 영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윌리엄 데레저위츠가 ‘빅 스리’(하버드, 예일, 프린스턴)를 포함한 미국의 아이비리그가 ‘똑똑한 학생’들을 지적 호기심이라고는 없는 그저 ‘똑똑한 양떼’로 만들어내는 한심한 현실을 고발하는 책입니다.

그가 말하는 엘리트란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전문가와 사업가, 상류층과 중류층 그리고 조직의 관리자와 성공한 인물 등 명문대를 나와 자신만의 독점적인 이익을 누리며 사회를 이끄는 무리 모두”를 뜻합니다. 그들은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시작된 ‘끝없이 주어진 일과’ 덕분에 명문대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정작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한 경험의 소유자들입니다. “숙제를 해오고, 질문에 답하고, 시험을 치르는” 일만큼은 “순수혈통의 경주마들이 트랙을 도는 장면”처럼 경이롭게 해낸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 ‘학생이 되는 법’만 배웠을 뿐 ‘마음을 알아채는 법’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학점, 사교클럽, 장학금, 의과대학 입학, 로스쿨 입학, 골드만삭스 취직” 등의 ‘마법의 단어’가 자신들의 운명뿐만 아니라 정체성까지 결정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이력서에 쓸 수 없는 일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고 그저 ‘스펙 쌓기’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들은 “부와 안정 그리고 명성이라는, 제한된 개념 안에서만 움직”이다 보니 결국 “목표의식도 없고, 무엇이 나쁜지도 모르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자신의 길을 창조할 수 있는 상상력, 용기, 그리고 내적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똑똑한 양떼’가 되었습니다.


대학은 “학생을 최고가 입찰자에게 팔아치우는” 이기적인 행동을 앞장서 실행했습니다. “우등생들이 우수한 직장에 들어가 돈을 많이 벌 수 있도록 훈련”시켜서 나중에 기부를 많이 하는 ‘부유한 동문’이 되기만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그만한 투자수익을 내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배출되어 지배세력이 된 엘리트들은 “똑똑하고 재능 있고 에너지는 넘치지만, 또한 불안하고 탐욕스럽고 개성이 없고 위험을 회피”했습니다. “용기도 비전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스템 안에서 작동하도록 훈련받았을 뿐, 더 나은 것은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끔 훈련받지는 못했”습니다. 신념, 가치, 원칙을 가르치는 인문학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문가란 ‘지능지수 높은 바보’나 ‘폭넓은 사색이 부족한 사람’을 뜻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책에서 알려준 지배세력이 보여준 행태는 정말 한심했습니다. “더 안전하고 더 싼 약이 있는데도 의사들은 제약회사로부터 돈을 받고 그 회사의 약을 환자에게 과장해 권한다. 대학 총장들은 등록금 급등과 긴축 재정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봉급을 받아 챙긴다. 정치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책을 망각하고 로비스트로서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기에 여념이 없다. 단속 기관의 공무원들은 퇴직 후 자신이 감독하던 기업에 당당히 취업한다. 경영진들은 자신의 기업을 노략질한다. 투자은행들은 고객들을 상대로 음모를 꾸민다. 회계회사 및 신용평가기관 들은 회계장부를 조작한다. 간단히 말해서 미국의 지배층은 국민에게 등을 돌렸다.”

저자는 그들 모두 ‘자신’밖에 모른다고 질타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미국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요? 사람들은 대학이 몰락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진격의 대학교>(문학동네)의 저자인 오찬호는 기업의 노예가 된 한국의 대학은 죽은 게 아니라 “아주 생생하게 살아서, 활발히 진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당연히 방향이 문제겠지요. 한국의 대학은 미국의 대학을 어설프게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저자는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거짓말 자판기’처럼 행동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들을 읽고 그들이야말로 ‘똑똑한 양떼’이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기호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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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총은 노동시장 구조개선을 위해 양극화 해소를 목표로 지난해 말부터 약 3개월에 걸쳐 노동시장 구조개선 노사정 협상을 진행했다. 협상 과정에서 정부와 사용자단체는 ‘노동시장 구조개악 음모’를 드러냈고, 3개월로 못박은 초단기간 동안에 기준과 원칙이 없는 사회적 대화 운영으로 인해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협상 결렬의 원인은 세 가지이다. 첫째, 정부와 사용자단체는 노동계가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무리한 요구를 들고나왔다. 협상이 열리던 지난해 하반기부터 기획재정부 장관, 노동부 장관은 해고는 쉽게, 임금은 깎고, 비정규직을 늘리는 등 일방적으로 소위 ‘패’를 먼저 들고나왔고, 사용자단체는 그들의 숙원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다. 보수 성향의 다수 공익위원들 역시 친사용자 논리로 노동계를 압박하면서 노동계 대 정부와 사용자, 공익위원의 1 대 3 구도가 돼버렸다.

둘째, 3월 말까지로 정한 짧은 논의 일정은 광범위한 노동시장 구조개선 의제를 다루는 데 한계로 작용했다. 한국노총은 정부가 제기한 통상임금, 노동시간 단축, 정년 등 현안 중심의 의제 외에도 경제민주화, 조세개혁, 노동기본권 보장 확대, 보육·교육·주거·의료 등 사회공공성 강화 등 문제를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와 사용자단체, 공익위원들은 이중구조 해소를 위한 결정적 아젠다에 대해서 논의를 미루거나 거부했다. 결국 ‘3월 말까지’라는 데드라인에 맞춰 시간에 쫓기듯 논의를 종료한 후 합의 결론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셋째, 사회적 대화는 결론 못지않게 공론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협상에서 제기된 쟁점 의제들을 국민들이 알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적 공감대가 조성돼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대화를 주관하고 있는 노사정위원회는 협상을 비공개로 이끌어갔고, 노사정 각 주체의 배석자조차 협상장 출입을 제한했다. 심지어 밀실에서 4인 대표자회의를 진행했고, 대표자회의·간사연석회의 등 주요 회의체는 회의록조차 만들지 않으면서 사회적 대화 운영의 폐쇄성, 비민주성이 심각한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더욱이 회의 결과에 대한 노사정 주체 간 확인 절차 및 공유 과정 부재, 노사정위의 주관적이고 독단적인 회의 결과 해석과 이에 대한 일방적인 언론 플레이로 혼선을 초래했다.

이뿐만 아니라 협상 말미로 가면서 정부는 유리한 정치적 여론 지형을 활용해 노동계를 전방위적으로 압박했다. 17억원에 달하는 국민 혈세를 낭비해가며 대중매체를 통해 유통시킨 장그래 광고, 공안당국의 노동계 인사 수사 등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 결과 노사정 협상은 의제를 정하고 본격적으로 논의를 개시한 지 106일 만인 지난 8일 최종적으로 결렬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됐다.

이기권 고용노동부 장관이 9일 오후 서울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노사정 대타협 결렬 관련 기자간담회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선 추진방향에 대한 정부의 입장 브리핑을 위해 입장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한국노총은 정부 주도의 일방적 노동시장 구조개악에 맞서 협상과 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협상을 통해서 일반해고 및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요건 완화, 비정규직 확산 등 5대 불가사항을 대내외적으로 이슈화시켜 국민들이 알 수 있도록 했다. 정부는 상반기 내로 관련 가이드라인 배포와 노동법 개악을 일방 추진할 것이다. 협상 결렬로 끝난 것이 아니라 더 큰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한국노총은 현장교섭과 투쟁, 사회연대운동을 통해서 ‘청년, 비정규직의 권리 쟁취를 위한 최저임금 인상, 청년의 양질 일자리 확대, 비정규직 철폐, 노동악법 저지 투쟁’을 현장과 함께, 국민과 함께 전개해나갈 것이다.


정문주 | 한국노총 정책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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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를 탔다. 앉자마자 택시기사가 정치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만히 있었더니 본격적으로 세월호 이야기를 했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며 유가족을 비난한다. 4억원이니 8억원이니, 그게 다 국민 세금이고 내 호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며 얼마나 더 받고 싶은 것이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죽은 자식을 운운하며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극언을 이어갔다. 시위대는 다 ‘종북’이고 전문데모꾼들이다. 그만하시라고 눈치를 줬더니 한참이나 혼자서 중얼거렸다. 택시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식당에서도 인터넷에서도 온갖 잔인한 말들이 쏟아진다. 서로가 서로의 증오를 진정시키는 게 아니라 더 부추기고 극한으로까지 이끌어간다. 아무리 세상이 엉망이라지만 자식 잃은 부모 앞에서 전혀 말을 가리지 않는 이 패륜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자신의 잔인함을 가리려는 ‘위선’마저도 없어진 것 같다. 오히려 그런 태도를 비웃는다. 타인의 고통에서 희열을 느끼는 괴물이 된 것인가?

그러나 이 ‘증오’의 말들을 들여다보면 다른 무간지옥이 보인다. 극언을 쏟아내던 택시기사는 자기가 얼마나 뼈 빠지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지를 말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가끔은 승객들의 무례함과 폭언, 폭력에 시달린다. 그렇게 일해도 한 달에 버는 돈은 100만원을 겨우 넘는다. 입에 풀칠하기에도 급급한 돈이다. 끈질긴 것이 목숨이라 ‘생존’하기 위해 아등바등한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배제되지 않고 살아남고자 굴욕을 참으며 뼈 빠지게 일한다. 사회학자 김홍중은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지는 마음의 체제를 ‘생존주의’라고 불렀다.

이렇게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사람들에게 4억원이니 8억원이니 하는 돈은 감정을 바꿔 놓기에 충분한 돈이다. 그저 ‘많은’ 돈이 아니다. 이들에게 그 돈은 이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탈출할 수 있는 돈이다. 지옥에서 벗어나 ‘예외적 삶’을 추구할 수 있는 돈인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공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오로지 자기 노력과 능력으로만 벗어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처음엔 자식 잃은 부모의 마음에 감정이입을 잠시 했다가도 태도가 싹 바뀐 것이다. 앞의 것은 사적인 감정이지만 뒤의 것은 사회의 규칙에 대한 ‘공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진위는 중요하지 않다. 감정만 자극하고 증폭시키는 소문들이 ‘공적인 것’을 지킨다고 돌아다닌다. 유가족과 세월호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을 사적인 감정으로 공적인 규칙을 흩트리며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서 저 증오의 말들을 ‘과하지만’ 공적인 것을 걱정하는 공공성의 언어인 것처럼 치켜세웠다. 그 결과 증오의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말을 증오와 혐오가 아니라 ‘공익’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은 씨알도 안 먹힌다.

여기서 유일하게 공정한 것은 ‘살벌함’뿐이다. 살벌하지 않은 것을 못 견딘다. 그건 공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살벌함이 공정함의 다른 이름이다. 더구나 이 공정함이란 각자도생할 수 있는 소수의 특권층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사람들 사이의 ‘공정함’이 아니다. 결코 각자도생할 수 없는 절대다수의 사람들끼리 살아남으려고 벌이는 아귀다툼을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 이 아귀다툼의 결과는 서로 물귀신이 되는 공도동망일 뿐이다.

세월호참사 1주기를 하루 앞둔 4월 15일 세월호가 잠겨 있는 사고해역을 방문한 유가족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경향DB)


생존주의에서는 역설적으로 삶뿐만 아니라 ‘생존’도 없다. 지상과제인 생존조차 예외가 된다. 소수만이 예외적으로 생존을 도모할 수 있다. 나머지는 공도동망한다. 세월호 이후 우리가 요구해야 하는 안전이 있다면 바로 이 공도동망이라는 생존주의로부터의 안전이다. 따라서 쌍용차에서 밀양, 강정 그리고 세월호까지 사람들의 요구는 하나로 모아진다. 삶을 예외로 만들고 살벌함만을 보편화하는 생존주의에 맞서 “함께 살자”.


엄기호 | 문화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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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말벌은 바퀴벌레를 침으로 쏘아 마비시킨 뒤 그 몸속에다 알을 낳는다. 알에서 나온 보석말벌 애벌레는 바퀴벌레의 몸을 먹으며 자란다. 먹이를 신선하게 유지하기 위해 항균물질을 분비하고 숙주가 죽지 않게 치밀한 순서에 따라 장기를 갉아먹는다. 불쌍한 바퀴벌레는 애벌레가 완전히 자라 몸 밖으로 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산 채로 몸을 파먹힌다. 잔혹하지만 곤충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찰스 다윈이 같은 방식으로 번식하는 맵시벌을 보고 “자비로운 신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창조하셨을 거라고는 도저히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동료 생물학자에게 실토한 일화는 유명하다.

얼마 전 출간된 댄 리스킨의 <자연의 배신>은 온화하고 풍요롭고 조화롭고 완벽한 곳인 양 표현되는 인간 중심의 자연관을 180도 뒤집는다. 자연은 아름다운 한 장의 풍경사진이 아니라 사기, 절도, 강간, 유혹, 불륜, 배신, 복수가 뒤엉킨 생존과 번식의 막장 드라마일 뿐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다윈도 통탄했듯이 자연의 작품이란 것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솜씨 없고 낭비적이며 실수투성이에 저열하고 징글징글하게 잔인하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미 알아챘을 것이다. ‘자연의 배신’은 바로 우리 정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최근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서 많은 사람이 느끼는 것이 바로 ‘정치의 배신’일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가 깨끗하고 양심적이고 정의롭고 민주적이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상식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은 데 대한 배신 말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경향신문과 마지막 인터뷰를 하고 자살한 것은 지난 9일이다. 이 사건의 본질이 현직 총리와 전·현직 대통령 비서실장 등 여권 실세 8명이 언급된 이른바 ‘성완종 리스트’의 진실 규명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루된 인사가 대부분 친박계인 데다 2012년 대선자금과도 연결돼 있어 박근혜 정권의 기반을 흔들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그런데 20일 남짓 지난 지금 이상한 상황으로 변했다. 초점이 엉뚱한 데로 옮겨졌다. 성 전 회장이 노무현 정권 시절인 2005년과 2007년 특별사면을 받은 것에 맞춰져 있다. 희한하게도 여권이 일방적으로 밀리다가 어느새 여야가 공방을 주고받는 구도로 바뀐 것이다.

검찰 수사 또한 무슨 조화인가. 경남기업에 대해 3차례나 압수수색을 하고 성 전 회장 측근 2명을 증거인멸 혐의로 구속하면서도 성완종 리스트에 오른 8명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수사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핵심 증인을 회유하는 등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그런데도 검찰은 이들 수사에 속도를 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분노할 필요 없다. ‘자연의 배신’에 공감한다면 ‘정치의 배신’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한다. 보석말벌이나 맵시벌을 사악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바보스러운 짓이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안전하게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고, 그렇게 진화했을 따름이다. 그들의 행동이 끔찍하고 역겨울 수는 있지만 그것을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정치판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이나 정치세력 또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당연하다. 거짓말, 억지, 변명, 말바꾸기, 물타기, 역공세, 말맞추기, 유체이탈 화법… 이런 것들이 바퀴벌레의 몸에서 깨어난 보석말벌 애벌레의 행동처럼 정치인의 생존 본능이 절박하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속 편하다. 다만 보석말벌의 그런 행동은 자연선택에 의해 유지되지만 정치인의 그것은 유권자의 지지라는 인위선택에 좌우된다는 점이 다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완종 리스트 정국에서 나온 새누리당 권성동 의원의 ‘경향신문 압수수색론’이나 김진태 의원의 ‘황희 정승 간통·뇌물 발언’과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주장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권·김 의원이 정치인이 된 것도, 그들의 향후 정치생명도 결국 유권자의 선택에서 비롯됐고, 또 그것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재보궐선거를 하루 앞둔 28일 서울 관악구 난향동주민센터에서 선거관리위원회 관계자들이 투표소를 설치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내일 치러지는 4·29 재·보궐선거가 그래서 새삼 주목된다. 국회의원을 뽑는 서울 관악을, 경기 성남 중원, 인천 서·강화을, 광주 서구을 등 4곳의 판세를 여야 모두 초접전으로 전망하고 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이 선거 결과에 어떻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지가 관건이라고 한다. 자연이 완벽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듯이 정치가 그런 것은 어쩔 수 없다. 배신의 그림자는 자연 생태계는 물론 정치 생태계에도 상존한다. 유권자의 선택은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때로는 정치가 위대해 보이거나 우아한 모습으로 다가오는 건 틀림없이 그것 때문이다.


신동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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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모든 교육감이 초등 교과서 한자 병기에 반대한다는 뜻을 한 입으로 밝혔지만, 교육부에서는 여론을 무시한 채 강행하려나 보다. 이게 왜 헛일이자 뒷걸음질인지 열 가지만 까닭을 추려보겠다.

첫째, 중·고교 교과서에는 한자를 병기할 수 있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자가 점차 사라져 이제는 찾을 수 없다. 정부가 강제한 게 아니라 교과서 집필진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일어난 일이다.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진 것과 같은 현상이며, 시대의 큰 흐름이다. 대한민국의 문자 생활은 한자가 사라진 뒤 더욱 발전하였고, 초등 교육도 마찬가지다. 둘째, 국어사전에 나오는 낱말 가운데 한자어가 57%를 차지한다지만, 사전은 원래 낱말을 보관하고 찾아볼 요량으로 만든 것이니 쓰지도 않는 한자어가 수두룩하게 올라 있다는 게 병기의 근거일 수 없다. 평소에 쓰는 한자어는 우리가 ‘커피’를 coffee라고 적지 않아도 뜻을 아는 것처럼 한글로만 적어도 뜻을 알 수 있는 우리말이 되었다.

셋째, 한자 병기는 책 읽기를 방해하는 함정일 뿐이다. 한자를 읽을 줄 알아야 뜻을 알 수 있다고 믿는 아이들은 문장 전체를 읽기보다는 한자 함정에 빠져 바깥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한자를 모르는 아이들은 병기된 한자 함정 때문에 우물쭈물하다가 읽기의 맥이 끊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위험한 게 바로 한자 함정이다. 이 한자 함정에서 벗어났기에 우리나라의 15세 청소년들이 국제학업성취도평가 문해력 부문에서 최상위에 오른 것이다. 넷째, 고유어든 한자어든 낱말의 속성과 쓰임새를 맥락 속에서 풍부하게 알려주는 교육이 중요하지 그 시간을 병기된 한자 암기로 허비할 까닭이 없다. 더구나 낱낱의 한자 뜻과 그 한자로 이루어진 낱말의 뜻이 잘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숱하다. ‘방송’ ‘회사’ ‘주식’ ‘민주주의’ ‘선생’ ‘제자’ ‘함수’와 같은 말의 한자를 찾아보면 그 뜻의 조합이 우리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말과 얼마나 다른지 쉽게 알 수 있다.

다섯째, 추상적인 개념을 구성하는 한자들은 낱자의 뜻도 추상적이거나 한자어인 경우가 많아 이를 가지고 뜻을 풀이해도 여전히 추상적이거나 동어반복에 그치기 쉽다. 재물은 재물 재(財)에 물건 물(物)인데, 두 글자의 뜻도 추상적인 한자어의 동어반복일 뿐이다. 이런 한자를 병기한다 하여 낱말의 뜻이 살아나겠는가?


여섯째, ‘부모’나 ‘학교’처럼 낯익은 한자어는 그 말뜻을 이해하는 데에 한자 병기가 전혀 필요하지 않고, 반면 ‘파충류’와 같은 전문용어들은 그 말을 이루는 한자도 자주 볼 수 없는 한자라 병기해도 도움이 안 된다. 대부분의 말은 병기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어려운 말은 한자도 어려우니 병기해도 소용이 없다. 말로 풀어줘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걸 병기하여 어려움만 키우는 꼴이다.

일곱째, 한자를 아는 아이와 모르는 아이 사이에 한자를 둘러싸고 반응이 다르게 나타나기 시작하면 수업 운영이 어려워진다. 초등학교에서는 지식을 정교하게 심어주기보다는 공부하는 힘과 창의적인 태도를 길러주고 민주시민의 인성을 만들어가는 데에 힘써야 하는바, 한자 병기는 모든 과목에서 이걸 방해한다. 여덟째, 고유어든 한자어든 동음어는 맥락 속에서 그 뜻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지만, 한자 병기는 그런 능력을 약하게 만든다. 수학의 ‘분자’와 과학의 ‘분자’는 같은 한자를 사용하지만, 결코 같은 뜻이 아니다.

아홉째, 하나의 한자에는 뜻이 한 가지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최소 두어 개에서 열 개 넘는 경우가 많다. 하늘 천(天)에는 10가지, 아비 부(父)에는 6가지의 뜻이 있으니, 이런 뜻 가운데 무엇과 무엇이 조합되었는가를 외우는 일은 암기할 거리만 늘리는 무모한 짓이다.

마지막으로, 한자가 병기된 교과서로 공부하려면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한자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할 테니, 사교육과 선행학습이 번성한다.


이건범 | 작가·한글문화연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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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어제 이완구 총리 사표를 수리했다. ‘성완종 리스트’ 파문에 연루된 이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지 일주일 만이다. 부정부패 문제로 이 총리가 취임 70일 만에 낙마함에 따라, 출범 2년여밖에 안된 정부에서 여섯 번째 총리를 찾아야 하는 기막힌 광경이 벌어지게 됐다. ‘총리 부재’로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총리직을 대행하는 비정상적인 국정 운영도 최소 한달 이상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대통령은 이 총리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가타부타 아무런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이완구 사태’로 빚어진 나라의 혼란과 국정의 난맥에 대해 임명권자로서 응당 사과부터 했어야 마땅하다.

이제 국정을 정상 궤도로 돌려놓기 위해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은 새 총리 인선이다. 박 대통령은 새 총리 인선을 국정의 혼선을 수습하고 정권의 분위기를 일신하는 전기로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의 눈높이에서, 국민 다수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야 한다. 도덕성이 새 총리 인선의 최우선 기준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박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후보자 5명 가운데 3명은 청문회에 서 보기도 전에 낙마했고, 한 명은 ‘최단명 총리’란 불명예 기록을 남겼다. 거듭된 ‘총리 인사 실패’가 낡은 수첩에 얽매여 내 사람을 고집해 도덕성 기준을 무시·간과하면서 빚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만일 이번에도 총리 후보자가 도덕성에 걸려 국회 인사청문 과정에서 진퇴 논란에 휩싸이고 낙마 지경에 몰리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면 박 대통령은 심각한 레임덕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이완구 국무총리가 27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이임식을 갖고 황교안 법무장관과 어색한 조우를 하고 있다. 이완구 총리는 고 성완종 회장 리스트에 오르며 결국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출처 : 경향DB)


그렇다고 인사청문회 통과만을 우선해 현직 각료나 친박계 정치인 등을 물색하는 것은 또 다른 실패를 예비하는 길이기 십상이다. 다분히 정치공학의 산물인 특정 지역 총리론도 마찬가지다. 둘 다 ‘이완구 총리 실패’가 보여주는 바다. 인사청문회 관문을 걱정하지 않고, 도덕성과 통합·소통 마인드 등 현 상황에서 요구되는 총리 자질을 갖춘 인물을 찾으려면 인재 폭을 넓혀야 한다. 박 대통령이 ‘수첩’ 밖으로 나와서, ‘진영’의 틀을 벗어나 폭넓게 사람을 구하는 변화를 보여야 한다. 필요하다면 야권에도 총리후보자 천거를 요청하는 등 발상의 전환도 불사해야 한다. 이번 총리 지명 결과가 박 대통령의 변화 여부를 판단하고, 남은 임기의 성패를 가름하는 잣대가 될 것이다. 더 이상 박 대통령에게 실패의 교훈을 학습할 기회는 남아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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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이완구

처음으로 3~5세 어린이집 운영비 지원 중단 사태가 현실화됐다. 강원도와 전북도가 4월분 어린이집 운영비 지원을 끊은 것이다. 어린이집 누리과정 지원금은 보육료와 운영비로 나뉘는데, 2개 도는 이 가운데 운영비를 지불 시한인 엊그제까지 지급하지 않았다. 특별한 상황 변화가 없는 한 다음달 11일이 지불 시한인 보육료는 지급이 어려울 듯싶다. 다른 광역 시·도 역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번 사태가 전국적인 보육대란으로 확산될 가능성도 있다는 얘기다. 어린이집 원장들은 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 운영을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나섰다. 이것이 아이를 낳기만 하면 국가가 키워준다는 나라의 현주소다.

2개 도의 어린이집 운영비 지원 중단 사태는 중앙 정부와 지역 교육청 간 물고 물리는 책임 공방 끝에 발생했다. 외견상 해당 지역 교육청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지원금을 도청에 보내지 않은 것이 직접적 원인이다. 이들 교육청은 올해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3개월치만 편성해 지난달까지 모두 소진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교육청이 영·유아를 볼모 삼아 몽니를 부리는 형상이다. 그러나 교육청의 어린이집 지원 중단이 중앙 정부가 약속한 국고 지원이 시행되지 않은 데 따른 조치임을 감안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박근혜 대통령이 경기창조경제혁신센터를 방문 대형화면상 분당 어린이집 원아 및 어머니들과 대화를 나눈 뒤 아이들의 기념촬영 요청에 따라 황창규 KT회장, 남경필경기도지사와 함께 머리에 위해 양손을 들어보이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정부는 지난달 누리과정 예산 부족분 1조8000억원 가운데 우선 국고 예산 5064억원을 지원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여야가 국고 지원과 지방채 발행 요건을 완화하는 내용의 지방재정법 개정을 동시에 처리키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지방재정법 개정 작업이 지지부진하자 특별한 이유 없이 국고 지원을 미루고 있다. 정치적 문제로 영·유아와 학부모들이 엉뚱하게 피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국고 5064억원이 집행된다고 해서 당장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지방재정법 개정과 지방채 발행 작업이 순조롭게 이뤄질지 의문인 데다 다행히 그 관문을 넘는다 해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은 여전히 4600억원가량 부족하기 때문이다. 결국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중앙 정부가 나서는 길밖에 없다. 어린이집 지원은 국가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다. 출산율과 여성의 사회참여 유도와도 밀접히 연계돼 있다. 국가적 차원의 사업이니 중앙 정부가 책임지는 것이 순리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부의 어린이집 보육 지원 책임론을 여러 차례 약속한 것을 상기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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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