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의례가 있다. 골방에 들어가 가운데 자리 잡고 눈을 감고 반가좌를 틀고 앉는다. 그날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집중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상념으로 마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집중한다는 의미는 내 자신을 새로운 시점에서 가만히 들여다본다는 의미다. 내 마음속에 알게 모르게 쌓여 편견과 고집이 되어버린 내 에고를 벗겨야 한다.

이 무식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나는 어제와 똑같은 과거의 나, 죽은 나로 똑같은 삶을 반복할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내가 가보지 않은 내 마음의 심연(深淵)으로 들어가, 바로 그날 해야 할 바를 깨닫게 된다. 이 심연은 누구도 가보지 않은 나만의 심연이다. 나는 이 임무를 대담하고 간결하며 거침없이 완수할 것이다. 사실 그 일을 마치지 않아도 좋다. 내가 그 과업을 노력하는 순간에 나는 이미 완수했기 때문이다.

이 심연의 존재를 알고 운명적인 여정을 시도하는 사람을 ‘영웅’이라고 부른다. 인류는 기원전 1만년경 별들의 운행만큼 심오한 생명의 신비를 발견하였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중동이라고 부르는 지역에서 처음으로 보리와 밀이 시절을 쫓아 곡식이 되어 자신들의 양식이 된다는 것을 관찰하게 되었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인류의 조상들은 한곳에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한다. 봄에 파종하고 여름에 김을 매고 가을엔 추수한다. 그리고 겨울엔 자기가 사는 지역의 특산품들, 예를 들어 옷감이나 공예품을 만들어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중동지방에서 장거리 여행을 하며 저녁엔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하늘의 쏟아지는 별들과 달을 보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곤 했다.



인간은 자신이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다. 당시 사막에서 장거리 대상 무역을 하던 사람들은 한 음유시인이 노래한 죽음을 극복한 한 영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이름은 ‘길가메시’다. 인류 최초의 도시인 우룩(오늘날 이라크 남부도시 와르카)을 건설한 왕이다. ‘길가메시’라는 수메르어 이름의 의미는 “노인이 청년이 되었다”이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신화로 기원전 2300년부터 그에 관한 여러 노래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더니 기원전 14세기경 한 사제이자 시인에 의해 3600행 정도의 노래로 고정되어 토판문서에 기록되었다. 이 시인의 이름은 ‘신-레케-우닌니’다. 그는 바빌로니아 사람이 아니다. 기원전 15세기경 바빌로니아를 침공하여 다스린 카사이트인이다. 우리는 아직 카사이트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인종인지 알지 못한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간의 두 가지 욕망을 다룬다. 하나는 명성, 권력 그리고 부에 대한 추구와 다른 하나는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영생에 대한 추구다. 서사시의 전반부는 신들에게 도전하여 우주 질서를 혼돈에 빠뜨린다. 반신반인(半神半人)인 길가메시는 자신의 친구이자 ‘제2의 자아’인 엔키두와 함께 신에게 도전한다. 이들은 신들의 거주지를 짓는 데 사용하는 백향목을 지키는 괴물 후와와를 살해하고, 전쟁의 여신인 이슈타르를 욕보이고, 하늘의 황소인 구갈라나를 살해한다. 길가메시는 신들이 가진 명성과 권력을 가진 듯 보였다.

그러나 신들은 길가메시의 엔키두를 병들어 죽게 한다. 길가메시는 이제 자신이 신들처럼 영원히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걸 실감한다. 그는 인간으로 태어나 지하세계에서 영원히 살고 있다는 우트나피시팀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영생의 비밀을 듣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선다. 그는 우트나피시팀을 만나기 위해서 ‘돌아올 수 없는 바다’를 건너 자기 자신이 죽어야 한다. 길가메시는 영생을 찾기 위해 자신이 죽기로 결심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로 여행을 떠난다. 우여곡절 끝에 우트나피시팀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놀란다. 우트나피시팀이 자신과 너무 똑같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는 영생을 찾아 목숨을 건 이 숭고한 여행에서 영생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추구하는 삶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시인 신-레케-우닌니는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한 에피소드를 첨가한다. 우트나피시팀은 길가메시에게 불로초(不老草)가 있는 장소를 알려준다. 페르시아만의 가장 깊은 장소에서 자라는 바다 식물이다. 길가메시는 진주를 캐내는 잠수부처럼 다리에 돌을 동여매고 누구도 여행하지 못한 바다의 멧부리, 심연으로 헤엄쳐 들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불로초를 따온다. 길가메시는 이제 자신이 왕으로 치리하는 우룩으로 돌아가 적당한 시간에 이 영생의 식물을 먹을 것이다. 우룩으로 가는 길은 더웠다. 그는 옷과 불로초를 놔두고 연못으로 들어가 목욕을 한다. 그때 어디에선가 뱀이 나와 불로초를 먹고 자신의 껍질만 남겨둔 채 사라져버렸다. 이 순간은 불멸을 찾아 나선 길가메시 여정의 끝이지만, 동시에 길가메시 불멸의 시작이다. 4000년이 지난 우리가 그를 기억하고 있으니까.

시인은 고대 바빌로니아어로 기록된 <길가메시 서사시>를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샤 나그바 임무루, 이시티 마티”(제1토판 1행). 이 문장을 번역하자면 “나라의 기초인 심연(나그바)을 본 자”이다. 영웅은 영생을 찾으려는 여정을 용감하게 시작하고 신에게 도전하고 자신의 심연을 본 사람이다. 시인은 다시 노래한다. “루크탐 일라캄-마 아니흐 슈프슈시”(제1토판 9행). 번역하자면 “그는 먼 길을 떠나 거의 죽을 뻔했지만, 오히려 새 힘을 얻었다.” 내가 감행해야 할 인생의 여정은 무엇인가? 나의 심연은 어디에 있는가?



배철현 |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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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이 지면에서 일제의 조선 책 모으기에 대해 간단히 썼는데, 검토해야 할 자료가 더 있다. 일단 다음 자료를 읽어보자. ‘촌구(村句)씨의 선친 경성(京城) 수서(蒐書)항’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급히 귀가하여 여장을 차리고, 있는 돈을 모두 가지고 한걸음에 경성에 왔다.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조선인이 경영하는 ‘고본옥(古本屋)’을 내리 훑었다. 촌구씨가 착목(着目)한 것은 주로 고간(古刊) 당본(唐本)이었다. 그 가운데는 송판(宋版)의 <육신주문선(六臣註文選)>이 있었다. 이러한 것에는 조선의 ‘고본옥’은 전연 눈을 뜨지 못하였는지 61책 송판이 겨우 3원 남짓. 이 금액으로 입수했으니 꿈같은 이야기이다. 당본의 옛것은 거의 1책 6전 정도로 살 수 있었고, 조선본보다 비교적 비쌌다.”

촌구씨는 이들 송판이나 원판(元版)의 귀중본을 가지고 경성을 떠나 동경으로 돌아왔다. 동경에서는 <육신주문선>이 천 몇 백 원에 팔렸고, 세상에 볼 수 없었던 고판의 희귀서도 곧장 팔렸다. 이전보다 더 풍부한 자금을 준비해 가지고 재차 도선(渡鮮)하여 경성의 어느 한 서적상 재고품을 전부 사자고 할 정도의 배포있는 흥정을 했다. 그런데 만철(滿鐵)이 그 일을 듣고 “조선본은 만철에서 수집하고 싶으니 일절 손을 대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 그 대신 당본은 그대에게 일임하고 만철에서 일절 손을 대지 않겠다”고 타협을 해왔기에 응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촌구의 부친은 조선에 2진으로 진출한 고서상이었다. 이 사람은 고서를 팔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온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고서를 사기 위해 건너왔다. 이 자가 노린 것은 ‘고간 당본’, 곧 조선에 있는 중국본 서적이었다. 곧 그것은 당나라 때 판본이 아니라, 조선이 중국에서 수입한 중국 간행 서적을 말한다.

촌구의 아버지가 송판 <육신주문선>을 구입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송대의 서적, 곧 송판본은 장서가들이 최고의 것으로 꼽는다. 교정과 글씨, 종이 모두 최고로 꼽는 것이다. 오죽 했으면 송판본 책을 손에 넣기 위해 애첩을 넘겨준 사람까지 있을까? 고려는 송과의 무역이 활발했으니 적지 않은 송판본이 수입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조선조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송판 자체에 대해 별반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었다. 촌구의 아버지가 조선의 고서점이 전혀 그런 사실에 눈을 뜨지 못했다고 하면서 <육신주문선>을 3원에 사서 동경에서 천 몇 백 원에 팔았다고 하니, 그 당시 일본 고서상들에게 조선은 그야말로 ‘엘도라도’였고,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육신주문선> 등으로 500~600배나 되는 이문을 남긴 촌구의 아버지는 또 풍부한 자금을 가지고 와서 한 서점의 재고 전체를 사려고 흥정을 했는데, 그때 만철의 만류로 그만두었다는 것이다. 만철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다. 러일전쟁이 끝나고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 ‘만주선후협약(滿洲善后協約)’에 근거해서 러시아가 남만주에서 가진 일체의 권리를 계승하고, 1907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러시아가 경영하던 철도의 일부, 곧 장춘(長春)에서 대련(大連)에 이르는 철도를 경영했다. 만철은 워낙 규모가 크고 방대한 사업을 벌여 중국의 동북 지역에 군림한 사실상의 식민지 국가였다.

1907년 만철 설립 당시 이사였던 동국제국대학교 교수 강송삼태랑(岡松參太郞)이 만철도조사부 도서실을 설립했는데, 여기서 중국의 고전, 일본어 도서, 서양서, 러시아어 자료를 정상적 구입(값을 치르고 구입하는 것), 특별 구입(계획적인 프로그램에 의한 구입), 기증, 권력을 이용한 강제적 ‘접수’ 등으로 광범위하게 축적하기 시작했다. 만철의 도서실은 1922년 ‘남만주철도주식회사대련도서관(南滿洲鐵道株式會社大連圖書館)’이란 명칭을 얻었다. 만철도서관의 방대한 자료는 지금도 남아 있으며 거기에는 방대한 규모의 한국 관계 자료도 남아 있다(이상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한국 관련 ‘만철(滿鐵)’ 자료목록집). 만철이 조선본을 수집하려 한다는 것은 이런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이다.

만철 같은 거대한 기관뿐만 아니라 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 같은 자는 권력을 이용해 책과 서화를 긁어모아 일본으로 반출했고,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 같은 학자, 아사미 린따로(淺見倫太郞) 같은 변호사도 조선에서 책을 긁어모았다. 이들의 책은 모두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마에마 교사쿠의 책은 일본 동양문고(東洋文庫)의 서고에 들어가 있고, 시라토리 구라키치의 책은 관동대지진 때 소실되었다. 아사미 린따로의 책은 뒷날 미쓰이(三井)물산에 넘겨졌고, 미쓰이 쪽은 다시 미국 버클리대학에 팔았다. 한국 학자들이 요즘도 가끔 방문하는 곳이다.

2006년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학 교수가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란 책을 냈다. 일본에 있는 한국본 서적을 모두 모아서 목록을 만든 것이다. 물론 작업의 결과가 모두 출판된 것은 아니다. 경(經)·사(史)·자(子)·집(集) 중 일본에 있는 모든 조선 문집의 목차를 정리한 것이다. 이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페이지의 거창한 책이다. 전체가 간행된다면 일본에 있는 한국 책의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 목록을 만드는 데 평생을 바친 학자의 집념도 알 만하다. 대한민국 학자가 이런 ‘짓’을 하면 연구성과 0%에 해당한다. 아마도 무능한 교수로 낙인이 찍혀 쫓겨날 것이다. 끝으로 한마디 더하자면, 우리나라에 있는 고서의 전체 규모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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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BBC방송은 어제 치러진 한국의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주요 뉴스로 다뤘다. ‘운명의 날’이라는 제목으로 고사장 앞에서 여학생들이 북을 치며 선배들을 응원하고 사찰에서 절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외국인들의 눈에는 우스꽝스럽고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 교육의 진면목이다.

수능은 한국 교육의 불합리성을 대표한다. 무엇보다 단 한 번의 시험이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는 것은 부당하고 반인권적이다. 한 번의 시험으로 실력을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실수나 시험 당일의 컨디션이 성적에 영향을 줄 가능성도 크다. 특히 수능이 쉽게 출제되면서 한두 문제로 등급이나 당락이 갈리는 상황에서 실수 여부는 더욱 중요해졌다. 이처럼 실력이 아니라 운이 좌우하는 시험에 승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실수한 학생을 실패자로 만드는 시험, 한 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시험은 교육 왜곡일 뿐 아니라 인간 모독이다.

수능의 상대평가 방식은 경쟁을 전제로 한다. 인생이 걸린 경쟁에서 친구는 적이 된다. 학생들은 사교육의 포로가 되어 친구를 물리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교는 민주시민의 소양을 쌓는 장소가 아니라 ‘공부 감옥’으로 전락했다. 또한 수능은 본질적으로 비교육적 속성을 띠고 있다. 변별력을 갖추기 위해 단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육에서 단 하나의 답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정답을 찾기 위한 사고력의 향상이 교육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수능이 요구하는 대로 정답의 울타리에 갇혀 기계적 사고를 해야 하고 그런 사고에 갇힌 삶을 강요당하고 있다. 수능과 대학입시가 초·중·고 공교육을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노란 리본 달고…수능 기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진 12일 한 학부모가 경기 안산시 원곡고 정문 앞에서 가방에 세월호를 상징하는 노란 리본을 단 수험생의 어깨를 끌어안고 기도하고 있다._배장현 기자


공 부라는 잣대 하나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것은 교육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처사이자 수능의 비민주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성적은 점수로 표시할 수 있으므로 전형 도구로 삼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학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절대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교육은 인간이 평등하며 그런 것으로 우열을 가려서는 안된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

물론 수능 성적으로 대학 진학 능력의 기준을 삼는 것은 엄연한 사회적 약속이다. 내신을 제외하면 대입 전형도구로 당장 수능을 대치할 만한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수능으로 상징되는 대입의 비교육성과 비인간성, 야만성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와 있다. 교육이 사회 발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목을 잡는 상황을 이제는 바로잡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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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선장 이준석씨에게 살인죄가 적용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어제 이씨의 살인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퇴선명령과 구호조치 없이 먼저 배에서 내린 데 대해 살인의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이 대형 인명사고에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인정한 것은 처음이다. 타인의 생명을 지켜야 할 이들이 의무를 저버려 수많은 인명을 희생시켰다면 엄벌에 처하는 게 당연하다고 본다.

대법원은 “적절한 시점의 퇴선명령만으로도 상당수 피해자의 생존이 가능했다”며 “이씨는 그럼에도 선내 대기명령을 내린 채 퇴선해 승객들의 탈출이 불가능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행위는 “선장의 역할을 의식적이고 전면적으로 포기한 것”이라며 적극적 살해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판단했다. 다중의 안전과 관련된 직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고도의 책임감이 요구됨을 강조한 판결이다.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로 몰려는 세력은 ‘살인자’를 징벌했으니 이제 멈추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이게 끝일 수는 없다. 온 나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304명의 목숨이 속절없이 스러졌다. 국가 위기관리 능력의 총체적 부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검찰 수사는 선장·선원 10여명과 청해진해운 임직원 몇 명, 해경 말단 지휘관의 책임을 묻는 선에서 종결됐다. 청와대와 정부의 보고·대응 과정은 수사범위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이제라도 참사의 구조적 원인을 낱낱이 파헤치고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한다.

세월호 참사는 목숨을 잃은 304명과 그 가족만의 문제가 아니다. 진실과 대면하지 않은 채 망각하고 만다면 또 다른 재앙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가장 시급한 과제는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독립적이고 효율적인 진상규명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특조위 무력화 시도를 중단하고 충분한 활동기한과 예산·인력 지원을 보장해야 한다. 미수습자 9명이 570일 넘도록 차가운 바닷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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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말 5급(행정) 국가공무원 공채 면접시험에서 면접관들이 역사교과서 국정화와 종북세력 등에 대한 견해를 수험생들에게 물었다고 한다. 수험생들끼리 하는 집단토론 때는 ‘개발도상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려면 새마을운동과 경부고속도로 건설 중에서 어느 것을 우선 지원해야 하는지’가 토론 자료로 제시됐다. 미래 공직사회를 이끌어갈 젊은 공무원을 선발하면서 보수정권의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골라 뽑기 위해 사상검증을 한 것이다.

헌법 19조는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양심은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추구하는 가치적·도덕적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다양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양심의 형성과 변경에 외부의 개입과 억압에 의한 강요가 있어서는 안된다. 일부 다른 권리에서 제약을 받는 공무원이라고 해도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대상에서는 예외가 될 수 없다. 더구나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절대다수의 역사학자와 시민이 반대하고, 정치적으로도 첨예하게 갈려 있는 사안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공무원에게 강요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공무원은 국민 전체에 봉사하는 것이지 특정 정권의 이념에 헌신하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3차 면접이 요식행위나 다름없는 다른 시험과 달리 행정고시에서는 최종 면접시험에서 응시자의 30%가 떨어진다. 당락을 좌우하는 이런 면접에서 국정화 견해를 묻는 의도를 모를 리 없는 수험생들이 어떻게 대답했을지는 불문가지다. 한 수험생은 “당락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해서 평소 생각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양심에 반대되는 행동을 합격 전부터 강요한 것이다. 이건 국가에 의한 폭력이다. 지난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도 법무부에 보낸 한국 정부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 제4차 보고서 심의결과에서 한국의 인권 상황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바 있다. 마치 이런 사태를 예고하기라도 한 것 같다.

정부는 지난해 같은 시험의 면접 때 의회입법과 정부입법의 차이 등 주로 업무 중 딜레마에 처했을 때의 대응을 질문했다. 그런데 올해 갑자기 역사관, 종북 문제 등 사상검증과 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 과시로 바뀌었으니 그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혹시 박근혜 대통령이 임기 후반 국가 차원에서 아버지 명예회복을 추진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공무원은 그런 일에 쓰이는 도구가 아니다. 시민의 위임을 받은 정권이 시민 모두를 위한 관료조직을 보수이념의 전도사, 보수정권의 하수인으로 바꾸려 한다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건 반드시 실패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사상검증 면접 사태에 대해 진상조사를 하고, 응분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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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청춘 마리안느>는 1955년에 출시된 쥘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영화다. 원제(Marianne de ma jeunesse)를 그대로 번역했더라면 이 영화는 우리에게 ‘내 청춘의 마리안느’나 ‘내 젊은 날의 마리안느’ 정도의 말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저 ‘의역’에 관해 말한다면, 당시 조사 ‘의’의 용법이 오늘날처럼 다양하지 않았던 탓도 있겠으나 ‘의’로 연결된 두 명사보다 나란히 놓인 두 명사가 더 멋있어 보였던 시대적 감각의 힘도 크겠다.

그러나 ‘내 청춘’이 아닌 ‘나의 청춘’에는, 그때까지도 여전히 강력했을 일본어의 영향을 제쳐 둔다면, ‘마리안느’와 ‘청춘’ 사이의 생략된 ‘의’에 대한 아쉬움도 어느 정도 개입했을 듯싶다. 아무튼 이 영화는 내용보다 먼저 제목으로 이 땅의 청춘들을 오랫동안 설레게 했다. 내가 다닌 고등학교의 국어교사이기도 했던 한 시인은 ‘청춘’이 들어간 말 가운데 저속하지 않은 것은 ‘나의 청춘 마리안느’뿐이라고 단언했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제하 선생의 대학로 카페 ‘마리안느’도 그 이름을 이 영화에서 빚졌을 것이다.

바바리아의 호숫가에 자리 잡은 귀족 기숙사 학교의 생도인 뱅상은 매혹적인 청년이다. 이국적인 노래를 기타 반주에 실어 애조 띤 목소리로 부르며, 특별한 마력을 행사하여 짐승들을 수족처럼 부릴 줄 안다. 그는 호수 건너편 비어 있는 고성을 탐색하던 중, 어느 늙은이와 강제 결혼하여 그 성에 갇혀 있는 처녀 마리안느를 만나게 된다. 뱅상은 마리안느를 탈출시키려 했으나 거인 경비원의 폭력에 쓰러지고 만다. 그는 개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학우들의 도움으로 깨어났다. 그는 마리안느를 구하기 위해 학우들과 함께 다시 성으로 들어갔으나 사람들은 사라졌으며, 마리안느였던 처녀의 낡은 초상화가 걸려 있을 뿐이었다. 뱅상은 제 젊은 날의 사랑인 마리안느를 다시 만나기 위해 기숙학교를 떠난다. 필요하다면 세계의 끝까지 갈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녀를 만나야만 살아갈 의욕을 다시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청춘을 훌쩍 넘긴 40대 중반에야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너무 늦게 본다는 것은 그 자체가 죄악일 때도 있다. 음식은 식기 전에 먹어야 한다. 영화에 대해 수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부풀어 오른 기대를 낡은 영화는 채워주지 못했다. 주인공 뱅상 역을 맡은 피에르 바넥이 학우들에 비해 너무 나이 들어 보인다는 느낌도 내내 영화에 집중하려는 노력을 방해했다. 그리고 또 다른 훼방꾼이 있었다. 알랭 푸르니에의 <대장 몬느>를 나는 이미 읽었던 것이다. 푸르니에의 소설은 영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지녔고 같은 발상법에서 출발했다고 말할 수 있지만 훨씬 더 세련되고, 조직이 더 복잡하고, 스케일이 더 클 뿐만 아니라 영화보다 무려 40여년 전에 출간되었다. (뒤늦게 출발하여 여전히 초창기에 있는 영화가 발전의 정점을 넘긴 소설을 따라잡기는 힘든 일이다.)

영화에 흥미로운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기숙학교의 뱅상이 그리스 신화에서 인류의 첫 시인이자 가수로 소개되는 오르페우스의 현대판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어 무슨 큰 발견이나 한 것처럼 기뻤던 것이 사실이다. 오르페우스의 리라는 뱅상의 기타가 되었다. 동물들은 오르페우스의 노래에 춤을 추듯 뱅상에게 복종한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유리디스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가고, 뱅상은 호수 건너편의 고성에서 영혼의 약혼자 마리안느를 만난다. 그 둘은 모두 여자의 구조에 실패한다. 물론 이런 비교는 문화적 호기심을 잠시 충족시킬 뿐 어떤 감명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내 선배들과 영화의 주인공이 공유했을 마음의 자리를 알아맞힐 수는 있었고, 선배들을 감동하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키는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


<나의 청춘 마리안느>는 2차 세계대전이 남긴 상처 속에서 적국이었던 프랑스와 독일이 합작으로 만든 영화다. 엉뚱한 이야기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여기에는 끔찍한 살육의 벌판으로 인간들을 내몰았던 나쁜 이념에 대한 저주와 반성이 있다. 주인공 뱅상이 정신의 약혼자를 만나거나 만나지 못할 ‘세상의 끝’은 국가주의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이념들과 제도들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이다. 뱅상이 이 세상 밖의 여자, 그래서 순결한 여자 마리안느를 만나러 떠날 때 그는 제 정신이 제도와 이념의 식민지가 되는 것을 거부한다. 가장 먼저 거부하는 것이 학교 교육이다. 학교는 제 나라 땅에서도 자주 식민의 집행부가 된다. 학교는 새로운 앎을 개발하기 이전에 젊은 정신을 국가와 사회의 이념에 먼저 묶으려 하기 때문이다.

식민지의 가장 큰 불행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들이 제 운명을 제 뜻대로 기획하고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은 저를 제 뜻대로 성장시킬 수 없으며, 제가 살아야 할 사회를 제가 기획하지 못하며, 제 나라를 제가 건설하지 못한다. 그가 제 자신을 사회에서 따로 떼어 말하려 한다면 그 시도 자체가 반역이다. 몽매할 뿐이기에 계몽되어야 할 인간이 제 인격을 말한다는 것은 사회에 짐을 지우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가 국가를 위해서만 존재할 때, 그 나라는 비록 독립국이라도 식민지와 다를 것이 없다.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의 미래에는 오직 하나의 목표, 국가를 위해 봉사한다는 목표밖에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0일 국무회의에서 “자기 나라 역사를 모르면 혼이 없는 인간이 되는 것이고, 바르게 역사를 배우지 못하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면서, “이것은 참으로 무서운 일”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지식의 바름과 바르지 못함을, 인간 정신의 정상과 비정상을 이제 국가가 결정하려 한다. 젊은 정신들을 국가주의의 식민지로 만들려 한다. 여기에는 ‘나의 청춘’도 ‘마리안느’도 없다. ‘나의 청춘’은 앎을 향한 순결하고 열정적인 주체이며 ‘마리안느’는 그 열정을 보장하는 자유이다.

사족을 붙인다. ‘마리안느’는 현행 외래어표기법을 따르자면 ‘마리안’으로 써야 한다. ‘내 청춘 마리안느’는 외래어표기법이 유동상태에 있을 때 만들어진 말이다. 내게 ‘마리안’을 ‘마리안느’로 쓰도록 허락해주는 ‘내 청춘 마리안느’는 국가적 언어정책의 추상같은 의지를 잠시 피할 수 있게 해주는 해방구와 같다.


황현산 | 문학평론가·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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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이 어제 출범 20주년을 맞이해 앞으로 20년을 향한 비장한 결의를 밝혔지만 노동계 전체가 당면한 상황은 녹록지 않다. 박근혜 정부 출범 후 지속되고 있는 ‘노동개악’ 시도가 외부로부터의 위기라면 비정규직 확대와 쉬운 해고라는 전면적인 노동탄압에도 총파업 결의 하나 자신 있게 못하는 무기력과 전략부재는 내부로부터의 위기라 할 수 있다. 그 사이 정부는 민주노총을 청년세대와 비정규직으로부터 고립시키는 여론몰이에 나서고 있다.

민주노총은 정규직 노조이기주의라는 비판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2000년대 이후 비정규직과 사내도급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어냈고 비정규직 노조를 조직화하는 데 앞장섰다. 학교와 공공부문에서 12만2000여명의 비정규직을 노조로 조직화해낸 것도 민주노총이다. 주 5일제를 위한 선도적 문제제기, 공공부문 민영화 반대 논의 등 노동계 이슈를 의미 있는 사회적 의제로 발전시킨 민주노총의 그간 노력도 과소평가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출범 20주년을 맞아 새로운 20년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왜 현 시점에서 자신들이 노동자 전체 이익을 대변하는 조직으로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는지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다. 민주노총은 1996년 12월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날치기에 맞서 3개월간 끈질긴 총파업으로 노동법 개악을 막아낸 역사를 갖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1998년 노사정위원회에서 정리해고와 근로자 파견법을 핵심으로 하는 노동법 개악에 동의한 원죄도 갖고 있다. 민주노총은 외환위기 이후 대기업들의 비용절감을 위한 지속적인 고용유연화에 효과적인 방패막이가 되지 못했고 일부 대공장 노조는 자신들의 고용안정을 위해 비정규직의 희생과 고용불안정을 방치한 측면도 있다.


11일 민주노총 창립 20주년 기념식이 열린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참석자들이 박수를 치며 창립을 축하하고 있다._김정근기자


당장 현 정부의 ‘노동개악’에 맞선 대응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노총은 기간제 사용기간 연장이나 파견확대 방지, 실업급여제 등 비정규직에 절실한 과제보다 정규직 노조 중심의 ‘임금피크제’에 지나치게 집중한 측면이 없는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노총은 투쟁일변도 중심의 낡은 운동방식을 지적하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오히려 최근 연대와 단결이 필요할 때 나서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깊이 새겨야 한다. 지금 민주노총에 필요한 것은 ‘말로만 비정규직 끌어안기’가 아니라 노동자 전체 이익을 위해 자신의 온몸을 불사른 ‘전태일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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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처럼 너무 익숙해서 딱히 자각 증세가 없을 만큼 우리 일상에 녹아든 생활 감정이 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습니다”는 선행교육 사설학원의 흔한 광고 문구다. 아무리 빨라도 빠르지 않다는 이 공황 상태는 부모에게 정상이다. ‘MADE WITH 100% PASSION’은 24시간 패스트푸드점의 점원 유니폼 등짝에 큼직하니 박힌 서비스 강령이다. 99%도 모자라 100%의 완전한 열정을 요구받는 시급 5580원의 알바에게 몰염치한 이 무례는 왕이 된 소비자에게 상식이다. 어느 대기업 그룹의 홍보 제목은 단 한 줄 “바다는 쉬는 법이 없다”는 문장이다. 쉼 자체가 부정되는 이 극한의 과로 예찬은 정규직을 갈망하는 취준생의 소망이자 생존이 목적인 월급쟁이의 기본이다.

빠른들 더 빨라야 하고 심신을 완전 연소해야 하며 휴식일랑 애초에 없는 생활이라면 식민지 노예라도 못한다. 그러나 이 불능을 가능하다고 말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이 ‘생활세계의 내부 식민지화’다. 하버마스는 근대 시민의 생활세계(life-world)에서 비롯된 국가 관료와 시장 화폐의 체계(system)가 시민의 생활을 내부로부터 식민지화(the inner colonization)한다고 보았다. 해서 공황이 정상이고 무례가 상식이며 과로가 기본인 사회가 등장한다. 이 뒤집힌 가치를 대표하는 생활 구호가 ‘무한 리필’이다. 음식 소화부터 지구 자원까지 무한할 수 없는 한도의 제약을 무시하고 끝내 소진하는 방식으로 치닫는 생활이 어찌 가능할까.

견딜 수 있는 한 가능하다. 예컨대 환상을 좇을 때는 자신을 속여서 견딜 수 있다. 취기가 오를 때는 자신을 잊어서 견딜 수 있다. 하나 ‘부자 되세요’의 허구가 드러나고 ‘대-한민국’의 약효가 떨어진 뒤엔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마냥 견디기도 한다. 독존의 아집도 탈존의 초월도 아니고 소멸되는 순간까지 잔존하는 것이다. 체념과 순응, 혐오와 연민의 쳇바퀴를 돌리는 이 잔존의 생활양식은 ‘내부 식민지화’의 궁극일 수 있다. 그럼 여기가 끝이다. 파국이 도래하는 여기에서 잉여의 전환이 시작되려면 생활세계와 체계가 각기 탈바꿈을 시도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경향신문 11월6일자 칼럼에 실린 안병진 교수의 심경과 만난다.

‘이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산뜻한 해법’이 없다는 탄식인데 누군들 떡하니 있을까. 하나 ‘어렴풋한 방향’이라며 그가 꼽은 두 가지는 잉여의 전환을 이끄는 예민한 감각이다. 하나는 ‘과거의 인식 및 태도와 급진적 단절’을 하는 것인데 국가와 시장 체계의 언어와 심리로부터 거리를 두는 일이다. 또 하나는 ‘계획적인 작은 실험을 성공’시키는 것으로 생활세계의 내 몸과 감정을 바꾸는 일이다. 이 둘은 하나다. 자신을 속이거나 잊어서 체계를 견디는 상태에서 벗어나겠다면, 그냥 견디는 잔존과 나부터 생활의 일각을 변모시키는 실천은 양자택일의 문제다. 그 어중간한 조합이 있으리라 관망하지 않고 살아 버릇하는 것은 생각의 힘일 것이다.



올 초 나온 <심미주의>(2015, 김영사)에서 문광훈 교수는 인문학 공부와 예술 경험의 목표를 ‘삶의 자기양식화(self-stylization)’라고 했다. 이를 자기제어와 변형의 자기형성술이자 삶의 기술(an art of living)로 표현한 그는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분야의 미시적 세목에 충실”하자고 주문했다. 그때가 지금이며 ‘그 미시적 세목’이 생활세계의 자발성과 공동체성의 깊이를 복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 생활세계는 국가(국민)나 도시(시민)가 아니라 우리 동네의 주민 관계를 재생하는 데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작은 실천’을 통한 ‘급진적 단절’의 열쇠가 지방분권과 마을자치 그리고 거버넌스에 있는 이유다.

그 ‘작은 실천’의 첫째는 면(面)을 늘리는 것이다. 안다, 기억한다, 친밀하다는 면식(面識)의 이웃이야말로 생활세계의 진짜 지식이다. 둘째는 정(井)을 만드는 것이다. 정도전이 인용한 맹자의 정전제(井田制)처럼 같이 파고 쓰고 지키는 공유의 우물이 많아져야 한다. 먹고 씻고 빨래하고 노래하는 ‘공유의 우물’(共井)이 살아나면 ‘사회의 형평’(公正)을 세울 법도 나올 것이다. 셋째는 생(生),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이다. 생명을 얻으려면 사귈 시간과 사랑할 공간이 필요하다. 생명을 기르자면 돌봐줄 가족과 친구가 있고 다른 세계의 소식을 알려줄 손님이 있어야 한다.

나에겐 이 ‘작은 실험’이 견디는 힘이다. 내 생활을 마을자치의 세계와 융합하는 이 길이 어르신에겐 과거사일지 모르고 나 같은 중년에겐 뒤죽박죽 처신하는 현안이지만, 오늘의 청년에겐 아직까진 미지의 생활세계다. 마을자치를 통해 청년이 면식(face)과 공정(well)과 생명(life)의 문화를 일군다면 그 생활세계는 이미 다른 체계와 직면할 것이다. 이것이 안병진 교수의 말처럼 ‘보수 대 진보’의 퇴행적 구도가 아니라 ‘누가 더 대담하게 상상하고 누가 더 치열한가’를 경합하며 ‘과거 대 미래’의 좌표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김종휘 | 성북문화재단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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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헛나오는 바람에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했다.” 사람들은 이와 같이 ‘말을 잘못하여 실수를 저지르다’는 의미로 ‘말이 헛나오다’란 표현을 많이 쓴다. 그런데 국어사전을 아무리 뒤져봐도 ‘헛나오다’란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나가다’란 뜻인 ‘헛나가다’가 ‘말이 헛나가다’라는 예문과 함께 표제어로 올라 있다. 사전에 따르면 ‘말이 헛나가다’가 보다 적확한 표현인 셈이다. 그러면 ‘헛나오다’는 틀린 말일까.

‘헛’은 일부 명사나 동사 앞에 붙어 새 단어를 만드는 접두사다. 명사 앞에 붙은 ‘헛’은 명사에 ‘이유나 보람 없는’ ‘쓸데없는’의 뜻을 더해준다. 따라서 ‘헛이름’은 실속 없는 헛된 명성을 뜻하고, ‘헛고생’은 보람 없이 하는 고생을 가리킨다. 또 ‘헛바람’은 쓸데없이 부는 바람을, ‘헛웃음’은 마음에 없이 지어서 웃는 웃음을 말한다.

‘헛듣다’ ‘헛먹다’ ‘헛보다’ ‘헛살다’ ‘헛디디다’ 등에서처럼 동사 앞에 붙은 ‘헛’은 뒷말에 ‘잘못’이란 의미를 덧붙인다. 이런 ‘헛’이 붙은 ‘헛나오다’는 사전에 올라 있지 않다. 그렇다고 ‘헛나오다’를 글말로 쓸 수 없는 건 아니다. ‘헛나오다’와 비슷한 형태인 ‘헛나가다’가 사전에 있고 어법상으로도 문제가 없기 때문에 ‘헛나오다’를 사용해도 괜찮다는 게 국립국어원의 견해다. 다만 ‘헛 나오다’처럼 쓸 순 없다.


김선경 기자 sun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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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합의금 장사’, ‘저작권 파파라치’, ‘시간차 공격’ 등 용어가 이제는 전혀 생소하지 않다. 대한민국은 K팝, 한류 등으로 문화 위력을 아시아와 중동을 넘어 미주,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확산시키고 있다. 이러한 문화 및 예술 콘텐츠를 보호하는 법률이 바로 저작권법이다.

그런데 이러한 위상에 걸맞지 않게 저작권을 남용한 합의금 장사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되고 있으며, 일부 로펌의 새로운 비즈니스로 자리 잡은 지가 벌써 10여 년이 흘렀음에도 아직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현행 저작권법은 복제·공연·공중송신 등의 방법으로 저작재산권을 침해한 자에게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조항에 따른 형벌은 친고죄로 정하고 있어서 저작권자에 의한 고소가 있어야만 기소가 가능하다. 이로 인해 민사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경미한 침해에 대해서도 형사고발의 남용과 부당한 합의금으로 인해 사회적 불합리성과 불필요한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다.

저작권 침해에 대한 검찰 처분을 분석해 보면, 저작권법 위반자 중 대다수는 불기소 혹은 벌금에 의한 ‘구약식’으로 처분되고 있어 개별 사건들의 침해 정도가 대부분 경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저작권법 위반자 중 청소년 비율이 증가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불기소 사유 중 ‘공소권 없음’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은 저작권 침해에 대한 신고 혹은 고소와 고발 등이 무분별하게 행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저작권 파파라치의 부당한 형사합의금 문제가 증가하면서 검찰과 법무부는 저작권법을 위반해 처음으로 고발을 당했거나 미성년자에 한해 죄를 묻지 않는 ‘교육조건부 기소유예제’를 시행해 침해자에 대해 저작권 교육을 시행해오고 있다. 그러나 ‘교육조건부 기소유예제’의 순기능에도 불구하고 합의금 장사는 수그러들기보다 오히려 증가하고 있어 근본적인 해결책이 모색되어야 한다.

최근 국회에 회부된 저작권법 일부개정법률안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작권을 침해하더라도 영리 목적이 있거나 소매가격 기준으로 6개월간 100만원 이상 피해를 입힌 경우만 형사처벌하도록 하며, 이를 모두 고소 없이 소추가 가능하도록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비영리적이고 개인적으로 행한 영화 및 음원 업로드 등으로 인한 피해액이 100만원 미만의 경미한 침해에 대하여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하고 민사적으로 침해를 해결하도록 해 청소년을 비롯한 소액 저작물 이용자를 범법자로 양성하는 것을 방지하자는 것이 개정안의 입법취지이다.

그러나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가 통과시킨 위 개정안을 최근 법제사법위원회가 ‘금액 100만원’을 삭제하고 친고죄의 범위를 확대하는 수정안을 내놓았다. 이는 부당한 합의금 장사를 방지하려는 입법취지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으로 오히려 합의금 장사를 부추기지 않을까 매우 우려된다.

미국과 독일 등은 저작권 침해가 비상업적이고 경미한 경우에는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민사적으로 해결하도록 규정을 두고 있다. 물론 이들 국가에 비해 우리나라는 저작권 침해에 대한 손해액 입증이 어렵고 그 배상액이 적은 점은 장기적으로 개선돼야 할 과제이다. 그러나 저작권을 악용한 형사합의금 장사는 창작을 장려하고 문화예술 콘텐츠를 보호하는 저작권제도에 대한 인식을 나쁘게 하고 청소년을 범법자로 만들며, 경찰 및 행정 인력 및 사회적 비용을 낭비하게 되어 저작권 보호 노력을 반감시키게 될 것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국회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과 함께 개선 의지를 적극 실천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손승우 | 단국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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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 국무회의에서 “국민을 위해 진실한 사람들만 선택받아야 한다” “바른 역사를 못 배우면 혼이 비정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한번 지적하는 것으로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청와대는 최고 지도자의 발언으로 부적절했다는 비판이 고개를 들자 “경제와 민생을 위한 박 대통령의 충정을 제대로 이해해달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언은 이해해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고, 말이 곧 사람이다. 박 대통령은 이번에 자신의 말을 통해 매우 독단적 사고를 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드러냈다.

자신만이 절대선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권력자에게 위험한 것은 없다. 내가 절대 옳고 상대방은 절대 틀렸다고 믿는 순간 소통의 여지는 사라진다. 최근 부쩍 박 대통령이 그런 말들을 즐겨 쓰고 있다. ‘진실’이나 ‘올바른’이라는 표현은 그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더군다나 권력자가 독점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다. 민주주의 지도자의 언어로도 합당하지 않다. 이번 ‘진실한 사람들’ 발언은 지난 6월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향해 “배신자를 국민이 심판해달라”며 축출한 일을 연상케 하는 나쁜 언어다.



요즘 박 대통령의 말에는 품격이 없다. 지난달 국정 협조를 요청한다며 여야 지도자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과거 야당의 지도자가 박 대통령을 두고 했다는 ‘그년’ 발언을 꼭 끄집어낼 때는 많은 이들에게 섬뜩한 공포까지 느끼게 했다. 대통령은 한 당을 이끄는 정치인이기도 하지만 국가의 지도자이다. 분열이 아닌 통합의 언어를 구사해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말로 남을 공격하는 것은 통합할 뜻이 없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증오와 편 가르기, 남 탓의 언어로는 통치에 성공할 수 없다.

김영삼 대통령도 재임 시 단정적인 언어를 구사해서 비판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는 ‘절대로, 확실히, 철저히’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보고서를 김 대통령에게 올린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박 대통령에게는 그런 고언을 할 참모가 없다. 여당도 감히 충언하지 못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집권 초 종교인들과 만나 “막말이 우리나라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정말 외국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을 할까”라고 정치인들의 언어를 개탄한 바 있다. 지금 품격 없는 언어를 되돌아보아야 할 이가 있다면, 바로 느닷없이 분노의 언어를 터뜨리는 박 대통령 자신이다. 과거 절제된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가를 받던 그가 이렇게 ‘비정상적’ 언어에 익숙해진 모습을 본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박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그 말은 시민에 대한 폭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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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싸고 정부와 지방교육청 간의 갈등이 재연되고 있다. 내년도 예산안에 전국 17개 시·도교육청 가운데 14곳은 어린이집 누리과정 보육비를 한 푼도 편성하지 않았다. 나머지 3곳도 6~9개월치만 반영했다. 교육부는 “교육감의 누리과정 예산 편성은 법령상 의무”라며 편성을 촉구하고 있다. 미편성분에 대해서는 2017년도 교부금에서 삭감할 것이라는 경고도 곁들였다. 양쪽이 서로의 입장만 내세운 채 실력행사에 나선 형국이다.

이런 갈등은 이미 예견됐다. 정부와 지방교육청이 어린이집 보육비 부담을 놓고 올해 예산안 마련 때도 똑같은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지방채 발행과 일부 국고 지원으로 부족분을 채워 간신히 넘겼던 사안이 다시 표면화했을 뿐이다. 전국시·도교육감협의회는 이미 수차례 결의를 통해 내년도 어린이집 누리과정 예산 편성 거부 방침을 분명히 밝혔다. 그럼에도 정부는 일방적으로 지방재정법 시행령을 개정해 누리과정 보육비 예산을 지방교육청에 떠넘겼다.



누리과정 예산 갈등의 원인 제공자가 정부라는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누리과정이 박근혜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시작된 사업이라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저출산 대책과도 맞물린 국가 사무이고, 실제로 어린이집의 소관 부처도 보건복지지부다. 어린이집도 교육기관이기 때문에 시·도교육청이 관련 예산을 편성해야 한다는 정부의 논리는 군색하다. 지도·감독권은 정부가 행사하면서 돈은 지방교육청이 대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맞지 않다. 각 시·도교육청은 교육부 소관인 유치원 누리과정 예산은 100% 편성했다. 그런데 어린이집 예산까지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어렵다는 게 각 시·도교육감의 주장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내년도 어린이집 보육 혼란은 불을 보듯 뻔하다. 자녀를 어린이집 대신 유치원에 보내려는 부모가 늘어나 유치원 입학 경쟁이 치열해질 것이다. 아이들이 빠져나가는 어린이집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될 것으로 보인다. 결국 피해자는 어린이와 부모, 어린이집이 될 것이고 그에 대한 책임은 정부가 질 수밖에 없다. 해마다 이런 일을 반복할 수는 없다. 저출산 문제극복을 위해서도 보육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하는 상황이다. 정부의 접근법이 바뀌지 않고는 문제가 풀리지 않는다. 정부는 지방교육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리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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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생광과 천경자는 한국 현대 채색화의 기원을 이룬 이들이다. 해방 이후 일제잔재를 청산한다는 미명 아래 채색화를 무조건 왜색적인 그림으로 몰아붙이는 바람에 채색화 작가들은 수묵화 작업으로 전향하거나 혹은 외톨이가 되었다. 박생광과 천경자가 후자의 경우다. 이 둘은 화단으로부터 소외되었고 당시의 주류적 경향으로부터 벗어난 채 철저하게 자신의 작업세계를 심화시키면서 긴 고독의 시간을 견뎌낸 이들이다.

천경자는 “절실한 것이 호소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미술 사조와 유행이 흘러갔지만 나 자신은 그런 것을 한 번도 따른 일 없이 내 자신의 세계를 추구해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1970년대 천경자의 여인상, 1980년대 박생광의 불화, 민화 등에 기반을 둔 채색화가 나올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기회주의적 변신을 거듭하면서 살아남은 대다수 작가들은 당대에는 무척 잘 나가는 것 같았지만 사후 그들의 작품은 초라하고 시들하기만 하다. 이른바 영성적인 색채와 이미지의 주술성을 지닌 천경자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자전적인 동시에 한국인의 보편적인 문화와 정서를 대변한다. 철저하게 자신의 내면과 자의식의 산물인 천경자의 색은 자신의 감정과 심리의 등가물로 착색된다. 이것이 한국 채색화의 현대성이다. 장식이나 종교적 이미지에 국한되었던 색의 세계가 비로소 자아의 대리물로 빚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색은 시각뿐만 아니라 촉각성(햅틱)을 지닌다. 그림이란 눈(目)적인 것과 손(手)적인 것의 혼합이며 시각과 촉각의 혼합이다.

천경자는 기존의 상투적이고 관습적인 꽃 그림이나 여인상 혹은 창백한 소재주의로만 일관한 채색화와는 전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러니까 진부한 상투성과 예측 가능한 개연성을 지닌 구상화와는 달리 오로지 자신이 창조해낸 형상을 추구했다. 자신의 분신인 여인, 그리고 그를 감싸고 있는 뱀과 꽃을 그렸다.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여자는 자화상의 변주다. 얼굴과 목이 길고 쌍꺼풀 없이 찢어진 가느다란 두 눈에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 그리고 머리에 꽃이나 뱀을 이고 있는 여자들은 한결같이 고독하고 처량하며 깊은 우수에 젖어 있다. 고독하면서도 자존심 강한 한 여자의 삶을 대변하는 천경자의 얼굴은 현대 미술이 저버린 서사의 의미를 회복시켰다. 동시에 미술이 한 개인의 자전적 삶에 전적으로 기대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천경자 그림 속의 여자들은 권진규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결정적인 얼굴 하나를 우아하고 매혹적으로 안겨주었다. 또한 이집트 조각의 정면성이 암시하는 불멸의 존재성 역시 강하게 환기시킨다.

한편 천경자의 그림에 등장하는 뱀이나 마녀적 이미지는 모두 어두운 현실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지키는 수호신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부적과 같은 것이다. 그녀들은 단지 남자의 시선 아래 종속된 수동적 존재, 미인에 불과하지 않다. 또한 그림에 등장하는 꽃은 계절의 변화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표현하며, 무엇보다 생의 기쁨이나 죽음의 세계를 상징한다. 작가에게 꽃이란 ‘그 자체가 색채의 파티’이다. 그의 작품에서 색채는 내적 표현의 결정체이며 자연과 사물의 조화를 담는 영혼으로 해석된다.

바로 그 점이 돋보였다. 이처럼 천경자의 그림은 대상의 외형에 근거한 정교한 재현적 채색 방식에서 완연히 벗어나 색채에 자신의 주관적 정서를 강하게 투사했다. 특히나 대상을 드러내는 묘선이 색채에 파묻히고 부드럽고 화사한 색층이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점이 매력적이다. 색을 입히고 다시 호분을 덮고 그 위에 또 색을 시술하는 방법에 의해 색층이 두꺼워지면서 안에서부터 우러나는 색의 뉘앙스가 무척 풍요롭다는 얘기다.

그로 인해 수성으로 그리지만 마치 유화 느낌도 들고, 무수한 붓의 중첩에 의해서 밑으로부터 은은하게 차오르는 중간색의 미묘한 색감이 모호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전통 동양화의 채색 재료를 새롭게 구사하면서 자신의 섬세한 감정을 신비롭고 미묘한 색감으로 우려내는 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이에 따라 형태뿐만 아니라 색채 자체가 발하는 심리적 아우라(aura)를 강하게 표출한 그림이 되었는데, 바로 이 점이 천경자의 채색화가 만든 성과이다.


천경자 '여인'_경향DB



꽃과 여인의 초상으로 대변되는 천경자의 독창적 예술 세계가 만들어지는 시기는 1960~1970년대이다. 화단으로부터의 소외와 가난, 불우한 가족사, 복잡한 개인사가 마구 맞물려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나는 바로 그 시기에 그려진 천경자의 그림만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천경자는 자전적 요소와 상징성을 교묘하게 결합한 형상과 모티프로 그림을 만들었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지닌 개성적인 화풍을 구현했다. 대중에게 친숙한 상징 언어를 구사하는 작가는 현실을 연극으로 치환해 보이는 모종의 환상성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 일관된 주제는 이른바 ‘꿈과 정한(情恨)’의 세계였다. 자신의 꿈과 낭만을 실현하려는 의도로 꽃과 여인을 소재로 자신의 환상을 펼치고 있는 그림이다.

따라서 천경자의 환상은 자의식과 예술혼을 지키고 강화하는 일종의 방어기제 같은 것이다. 그래서 그 그림은 ‘환상의 물화 과정’이라고 불린다. 그런 의미에서 천경자의 그림은 하나의 영매로서 기능하고, 따라서 그녀는 스스로 무당이 된다. 당연히 그녀의 그림, 색채는 주술성으로 충만하다.

한국 채색화 영역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보여주었던 천경자가 얼마 전 죽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누구도 그의 죽음을 함께하지 못했다. 기이하고 의아한 죽음이다. 그의 죽음을 접한 한국 화단은 유족의 황당한 처신과 오래전의 위작 시비에만 사로잡혀 있다.

천경자 작품의 진정한 의미와 그녀의 화가로서의 삶에 대한 논의는 부재하다. 오늘날 수많은 채색화가와 여성작가들이 버글거리지만 천경자만큼이나 지독하고 ‘징한’ 그림, 자의식으로 충만하면서도 채색의 우아한 경지를 매혹적으로 안겨주는 그림을 찾기는 쉽지 않다. 화단의 주류언어에 기대지 않고 서구식의 새로운 미술만을 추구하는 데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직 자신의 삶과 감각에 기대어 그 무엇인가를 길어 올리려 애쓰던 작가의 모습은 오늘날 더 이상 이곳에서 보기 어려운 장면이 되었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고 슬픈 이유다.


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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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최상위 물 계획은 국토교통부가 5년마다 작성하는 수자원장기종합계획이다. 2001년의 이 계획에 따르면, 10년 뒤 국민 1인에게 하루 공급하는 양은 410ℓ에 달할 전망이었다. 1998년 395ℓ였던 것이 경제발전과 소비증가 때문에 늘어난다는 것이다. 이는 1996년 계획의 예측치 485ℓ를 18%나 낮춘 것인데, 여전히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계획은 그 이유를 국민들이 ‘물을 물쓰듯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2011년 국민 1인에게 공급한 양은 335ℓ에 불과해 1998년 사용량보다도 15%나 줄었다. 이 결과와 비교한다면 1996년 계획은 무려 45%를 과장했던 셈이다. 물 공급이 감소한 것은 국민의 물 절약과 물 기술의 발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관로를 고쳐 누수를 줄인 것이 원인이었다.

2001년 계획은 생활·공업·농업 등 전국의 모든 분야에서 1998년 사용한 물이 260억t인데, 2011년엔 290억t으로 늘어나고, 2016년엔 294억t에 달할 것이라고 했다. 이를 감당하기 위해 국토부는 27개의 대형 댐을, 농식품부는 2451개의 농업용 댐을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2011년 물 사용량은 257억t에 그쳤다. 무려 33억t, 팔당댐 13개 분량의 오차가 발생한 것이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정부가 주장했던 댐들은 대부분 건설됐고, 4대강사업으로 새로 추가된 것까지 감안한다면, 지금 한국은 엄청난 양의 물이 철철 넘쳐야 한다는 의미다. 정부 계획이 정확한 것이라면, 댐들의 물 공급 능력이 주장만큼이었다면, 한국은 물 부족 걱정은 하지 않는 나라가 됐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 정부와 여당은 물이 부족하다고 난리다. 환경단체들 때문에 댐을 짓지 못해 문제가 생겼다고 하면서, 4대강사업으로 저수한 물을 지류지천에 보내는 대규모 토목 공사를 벌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기하다. 대체 어떻게 물이 부족할 수 있을까? 더구나 2011년 계획은 현재 가뭄 논란인 충남 서부지역의 물 부족이 없다고 표시하고 있지 않은가? 과거에 겪었던 최대의 가뭄이 오더라도 물 부족은 없다고, 국토부의 월등한 물 관리와 4대강사업 등의 성과로 추가적인 대책이 필요 없다고 하지 않는가?

또 신기한 것은 정부는 물이 없다고만 하지, 어디에 얼마나 부족한지는 확인해 주지 않는다. 피해 규모가 얼마고, 제2의 4대강사업으로 줄일 수 있는 피해액이 얼마인지도 밝히지 않고 있다. 하긴 재해복구 사업이라며 타당성 검토를 피해가지 않는다면, 정부가 주장하는 사업들은 예산을 받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세상에 하류의 물을 상류로 끌고 가서 방류하거나, 저수지를 파서 저수량을 늘리는 따위의 계획을 세우는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대체 ‘녹조라떼’ 똥물을 상류에 흘려보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한국은 지난 수십년간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물 시설에 많은 투자를 했다. 하지만 가뭄도 홍수도 수질도 어느 하나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더 문제인 것은 문제가 터져도 마땅히 책임을 지는 이가 없다. 물 정책의 실패에 대한 반성도 수정도 없이, 엉뚱하게 환경단체를 탓하며 토목 공사의 악순환만 벌인다.

정부와 여당이 할 일은 환경단체나 전문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물 관리에 대한 스스로의 능력을 높이는 것이다. 막대한 조직과 물량으로 잠시 가뭄장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럴수록 물 정책은 꼬이고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이라면, 충남 서부지역의 62.5%에 불과한 유수율을 높이고 12년간 폐쇄한 지방 상수원의 일부라도 복원하고, 기왕 파놓은 관정을 제대로 이용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한다. 이들 시설부터 활용한 후에, 새로운 토목 공사의 타당성을 논의하자. 그렇지 않았다가는 4대강사업 때와 마찬가지로 부실과 부패 갈등으로 이어질 뿐이다.



염형철 |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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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시 세끼. 아침엔 감자와 햇차, 점심엔 고구마와 물김치. 저녁엔 뭘 먹을까. 감이 유혹하누나. 감나무에 까치들이 몰려와 실컷 먹고서 판소리 한 대목. 새들이 집을 찾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요즘은 앞마당 건너 동네 밭에 있는 감나무 때문이다. 더 빼앗기기 전에 나도 숟가락을 얹었지. 단감을 몇 개 땄는데 어떤 건 흐물흐물. 지난주만 해도 엄청나게 사각거렸는데. 이가 모두 빠진 늙은이가 되면 홍시나 먹게 될 거니까 젊어서 부지런히 단감을 깎아 먹어야지. 사각사각 입에서 나는 소리가 즐거워 눈을 감고 먹는다네.




58년 개띠 케빈 컨이라는 피아노 치는 사내. 앞을 못 보는 장애인. 그가 까뭇한 세상에서 건져낸 한적하고 느린 곡 ‘정원(Le Jardin)’을 틀어놓고, 환기할 겸 창문을 다 열고, 늦가을 정원에 나가 앉아 있으니 새들도 숨을 죽이고서 귀를 기울인다. 누가 쇼팽콩쿠르 1등을 먹었다지. 축하하지만 너무들 1등에 열광해 젊은 연주자까지 식상하게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염려돼. 기계적인 달인의 연주보다 이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귀하고 선한 친구의 곡을 듣고 싶어. 인간은 말도 모자라서 악기를 연주하며 사랑과 슬픔을 나누고 교감하지.

얼마 전 신문에서 판다의 말을 알아냈다는 소식을 접했다. 매매(사랑해), 즈즈(배고파), 구구(편안해). 어린 판다는 즈즈나 와와라는 말을 자주 한대. 배가 고프거나 엄마가 무거운 체중으로 누르고 있을 땐 빼달라면서 즈즈, 와와. 기분이 업되면 개구진 목소리로 구구. 수컷 판다는 매매매 하면서 사랑을 구하고 암컷 판다는 수줍은 듯 지지 차차 소리를 낸대. 달콤한 사랑의 인사. 대밭이 지천인 담양에 살고 있으니 대나무 잎사귀를 먹고 사는 판다에 관심이 많다. 시선생께옵서 판다 한 쌍을 우리나라에 선물했다는데 대나무 오르간이 있는 담빛예술창고 정원에다 풀어놓고 진종일 같이 놀아주고 싶어라. 죽녹원 댓잎을 먹고 매매 지지 차차, 같이 살고파. 이 세상에 가득한 수많은 말들과 소리들. 정죄와 흉보기, 갈등과 반목의 말이 아닌 사랑과 자비의 말들이 넘치기를. 매매 지지 차차.


임의진 | 목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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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사회는 거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나 아렌트가 이야기한 ‘세계 없음’의 상태가 이처럼 적확하면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없을 것이다. ‘세계 없음’은 단순한 상실감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말은 경험 이외에 그 무엇도 이 세계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무엇을 위해’라는 정치적 대의가 소멸한 세계에서 오직 남은 것은 각자도생의 생존경쟁이다. 물론 이 생존경쟁은 사회를 자연환경과 동일시하는 특정한 태도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런 경쟁주의적 태도를 낳은 이념에 대한 반발이기도 하다.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도 이와 같은 반발 중 하나일 것이다. 단도직입해 말한다면, 국정화는 핑계일 뿐, 사실상 민주화 과정에서 홀대 받아온 경제개발세대의 세계관을 추인시키겠다는 인정투쟁이 국정화 논쟁의 본질이다.

지금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스스로 시장주의자를 자처하면서도 한편으로 시장의 실패를 바로잡기 위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얼핏 들으면 모순적인 주장이지만 사실상 자유주의 정치경제학의 딜레마를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검정제도라는 시장주의의 실패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 국정제도를 제시하는 셈이지만, 검정제도라고 해서 정부의 개입이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국정화가 기존의 제도에 정면으로 배치한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는 난점이 있다.

정부의 개입에 대해 시장이라는 ‘진리’를 옹호하는 것이 적절한 대립각인데, 이런 의미에서 국정화 반대의 대안이 검정제도의 유지가 아니라 자유발행제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사태를 제대로 파악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시장주의를 위반하는 자칭 자유주의자들에게 더 강력하고 절대적인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과연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정부의 ‘역주행’에 대한 근본적 대책일 수 있을까. 과연 동서양을 통틀어 역사적으로 어떤 정부가 문자 그대로 완전한 시장의 자유를 실현한 적이 있었던가. 오히려 역사는 우리에게 시장의 실패마다 개입했던 정부에 대한 이율배반의 사례를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지 않은가.



비슷한 딜레마를 아이유 논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취향의 차이에 따른 선택이라는 시장주의 원칙은 한 출판사의 문제제기로 너무도 쉽게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누구보다도 표현의 자유를 대변하고 지지해야 할 출판사가 특정한 문학작품의 등장인물에 대한 아이유의 해석을 문제 삼았다는 사실은 교과서 검정제도에 문제제기하는 시장자유주의자의 모순을 환기시켰다.

“표현의 자유도 대중의 공감하에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출판사의 발언과 “학문도 너무 자율은 안된다”는 여당 대표의 발언은 단어만 다를 뿐 사실상 같은 말이다.아이유 논란도 겉으로는 표현의 자유를 축으로 한 갑론을박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각자가 염두에 두는 시장의 진리에 대한 ‘해석’을 주장한 것에 불과했다. 아이유의 노래에 대해 음원폐지운동이 벌어지는 것이나, 대중음악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취향에 맡겨야 한다는 것이나 결과적으로 시장을 절대적 진리로 간주하는 입장은 동일했다. 전자가 불량식품을 근절하기 위해 소비자가 시장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이라면, 후자는 불량식품을 사먹는 것도 하나의 취향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시장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두 입장 모두 자유를 허락하거나 규제하는 절대적 기준으로 ‘시장의 선택’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표현의 자유 자체를 규범화의 대상으로 본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같은 전제를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도돌이표가 지속되는 걸까. 바로 규범화의 덫 때문이다. 규범화는 특정한 입장이나 태도 또는 취향을 정상적인 삶의 방식으로 강요하는 행위이다.

규범화는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구분을 만들어내는 프레임이다. 대통령이 ‘올바른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비정상’이라는 표현을 쓴 것도 이런 까닭이다. 마찬가지로 아이유의 앨범을 두고 ‘소아성애’의 혐의를 덧씌우면서 ‘비정상’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규범화에 따른 결과이다.

규범화는 사유를 가로막기 위한 권력의 기동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권력은 이미 수립되어서 위에서 아래로 작동하는 것이라기보다, 밑에서 위로 올라가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작동하는 것이다. 각자도생하는 ‘세계 없음’이 만들어낸 진풍경들이다.


이택광 | 경희대 교수·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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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수도답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가 피렌체를 기반으로 로마 바티칸, 파리, 밀라노로 존재감이 확장된 것에 비해 보티첼리만은 피렌체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우피치미술관을 대표하는 그의 걸작 ‘비너스의 탄생’을 근거로 들 수 있다. 이들 걸작 원본과 마주할 때 보통 10분을 넘지 않는데, 작품에 이르는 과정에 우여곡절을 겪을 때가 많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라 그라치에 성당의 식당 벽에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는데, 그곳에 입장하려면 인터넷이나 전화로 미리 예약을 해야 한다.

보티첼리의 그림들은 우피치미술관이 고수하고 있는 입장 인원 제한 규칙에 따라 2시간 넘게 줄을 서 있다가도 기차 시간에 맞춰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발생한다. 몇 번이나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선 경우도 있다. 파리 동양유물박물관인 기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려 불화 ‘수월관음도’가 그것이다.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는 한국 불교회화의 꽃인 고려 불화 중에서도 신비스러운 영롱함의 극치로 꼽힌다. 뜻은 ‘화엄경의 보다락가산의 유지(幽池) 위에 비친 달처럼 맑고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는 보살’(김영주, <한국불교미술사>, 솔)에서 유래한다.



이 국보급 불교회화들은 국내보다는 국외, 대표적으로 일본, 미국, 그리고 프랑스에 소장되어 있다. 주로 일제강점기에 소장자가 진품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안타깝게도 헐값으로 일본의 개인이나 사찰에 팔거나, 유출된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 소장본은 몇 점에 그치는데, 예전 용인의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현재 한남동 리움미술관으로 옮겨와 자리 잡고 있다.

내가 ‘수월관음도’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게 된 것은 미술사학자 김영주 선생의 <한국불교미술사>를 책임편집하면서이다. 첫 만남은 그보다 한 해 먼저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모아 ‘고려불화전’(1995)이라는 특별전을 연 때였다.

이후 파리에 갈 때면, 단지 ‘수월관음도’가 소장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음이 수시로 기메박물관으로 치닫곤 했다. 그런 중에 2009년, 통도사 성보박물관 개관 10주년 기념으로 최대작 ‘수월관음도’(일본, 鏡神寺 소장)가 귀국 전시되었고, 벅찬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보았다.

근래 내가 ‘수월관음도’와 재회한 것은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이 펴낸 <수월관음의 탄생>(글항아리)을 통해서이다. 한국과 서양 회화의 공통된 미학과 여성성으로 물 위의 도상(圖上)과 연관지어 14세기 고려의 ‘수월관음도’와 15세기 르네상스의 ‘비너스의 탄생’을 해석한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깊어가는 가을,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아늑한 연못가, 수월관음의 세계로 떠나볼 것을 권한다.


함정임 | 소설가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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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한 요순시대 이야기다. 황하의 범람을 다스렸다고 전하는 우(禹)가 어느 날 순(舜) 임금을 모시고 있다가 이런 말을 한다. “임금이 임금 노릇하는 것을 어려워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하는 것을 어려워해야 바른 정치가 시행되어 백성들이 선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려워함’이란 무엇일까?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고 지금 하는 일이 완벽할 수 없음을 마음 깊이 알아서 늘 살얼음판을 걷듯이 전전긍긍하며 두려운 마음으로 성찰하는 자세를 말한다.

우의 이야기를 들은 순 임금은 진심으로 동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참으로 어렵게 여길 줄 안다면, 훌륭한 건의가 묵살되는 일도, 현명한 인재가 묻혀버리는 일도 없게 된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매사에 어려워할 줄 아는 윗사람이라면 자기주장을 고집하지 않고 많은 이들에게 물어서 그 의견을 따를 것이고 하소연할 데도 없이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괴롭히거나 버려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들보다 조금이라도 윗자리에 있는 이들일수록 자신의 신념과 경험을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그 자리에 오르도록 들인 노력과 쌓인 지식을 생각하면 아랫사람들은 그저 답답해 보일 뿐이어서 걸핏하면 가르치려고만 들게 된다. 높은 자리에 있는 덕분에 주어지는 넓은 시야와 정보 장악력이 본디 자신의 능력인 양 착각하고, 본 것은 적더라도 나름의 진심을 담아서 올린 새로운 의견들을 한마디로 묵살해버리기 십상이다. 세상에는 능력 없고 노력도 안 하는 무지렁이들 천지이니 그들을 애써 구제하려 할 것도 없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갑질’이란 지극히 정당한 일이다. 본디 군자가 가져야 할 자세로 제시된 전전긍긍의 가르침은 어느새 힘없는 아랫사람의 전유물이 되어 버렸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보지도 못한 채, 자기 자리가 허락하는 선에서 그저 당장 문제 안될 선택만 하며 그야말로 ‘어렵게’ 묻혀서 살아간다. 이런 삶에 선함과 바름을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먼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순 임금은 우의 말이 훌륭하지만 자신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고 오직 앞선 요(堯) 임금만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다고 겸손하게 말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을 제쳐두고, 어려워함의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는 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까마득한 요순시대 이야기다.


송혁기 |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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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진 쌀을 주식으로 하는 아시아인들에게 젓가락은 생명의 상징이다. 1998년 충북 청주 명암동의 고려시대 석관묘에서 먹(墨)과 철제 젓가락, 중국 동전 등 3종 세트가 발굴된 것도 우연이 아니다. 저승에 가도 밥은 굶지 말고(젓가락), 공부는 계속해야 하며(먹), 부자가 되라(동전)는 염원을 담은 것이다. 중국에서 죽은 이가 사용했던 젓가락을 대문에 걸어두고, 일본에서 1877년 야마가타현(山形縣)에 젓가락무덤(御箸陵)을 세워 신성시한 이치와 다를 바 없다.

동양에서는 젓가락을 부모의 신체와 동일시했다. 상 위에 차려진 젓가락의 길이가 다르면 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죽는다고 믿었다. 그런 습관 때문에 지금도 식당에 가면 젓가락의 키를 재보는 일이 흔하다. 젓가락이 부러져도 불길한 조짐으로 여긴다. ‘젓가락 전문가’ 정연학 국립민속박물관 학예관은 “젓가락 문화에도 나라마다 미묘한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예컨대 젓가락의 길이는 중국-한국-일본 순인데 이것은 세 나라의 상차림과 관련이 있다. 큰 상에서 멀리 있는 음식을 집어야 하는 중국은 길고, 작은 독상을 차리는 일본은 짧을 수밖에 없다. 한국의 젓가락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 크기이다. 나무젓가락을 쓰는 중국·일본과 달리 한국인들이 금속젓가락을 선호하는 이유가 신라시대 때 쇠(金)를 쓰는 김씨가 정권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웃지 못할 설도 전해진다. 특별히 중국에서는 젓가락이 남편을 상징하기도 하기 때문에 일부 소수민족 처녀들은 젓가락을 떨어뜨려도 절대로 다른 것으로 바꾸지 않는다. 젓가락을 바꾸면 남편을 바꿀 운명이라는 것이다. 또 음식을 떨구면 그 모습이 마치 ‘눈물방울 같다’고 해서 불길하게 여긴다.


밥그릇에 담긴 밥을 젓가락으로 뜨고 있은 모습._경향DB


젓가락을 사용하면 30여개의 관절과 50여개의 근육이 뇌신경을 자극해서 지능촉진에 도움을 준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우리네 부모가 ‘젓가락질 못하면 시집장가 못 간다’고 그토록 닦달하며 가르쳐주었던 까닭을 알 것 같다. 한·중·일 3개국이 참여한 ‘젓가락 페스티벌’이 10일부터 17일까지 충북 청주에서 열린다. 별것 아니었던 젓가락이 동양을 관통하는 문화콘텐츠로 발돋움한 것이다. 이참에 11월11일을 ‘빼빼로데이’ 아닌 ‘젓가락데이’라 명명하면 어떨까.


이기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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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내 딸아 미안하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살아라’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 50대 가장. 이제 이런 기사는 크게 새로울 게 없다. 그만큼 50대 남성 가장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서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세대. 임금피크제를 반대하면 젊은이들에게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세대. 그러나 취직은 못하고 나이만 먹은 자식까지 부양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은 박정희와 전두환이 만든 교과서로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북한 공산당은 정말 빨갛게 생긴 사람들이라고 믿기도 했다. 군대에서 얻어터지며 국방의 의무도 다했고, 30~40대 때 열심히 일했다. 세금도 꼬박꼬박 냈고, 수많은 선거에도 열심히 투표장에 가서 한 표를 행사했다.

100세 시대라고 하는 요즘, 노후를 생각하면 한없이 불안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인가 이 사회는 미래가 안 보이는 세상이 돼버렸다. 언제부턴가 대한민국은 그냥 묵묵히 살아가야 하는 김빠진 세상이 돼버렸다. 아니 50대는 이제 무력한 세대로 전락해가고 있는 것 같다. 친구들과 술자리에서 핏대를 올리던 정치 이야기는 한물간 하소연이 돼버렸고,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자식들에게 손 안 벌리고 살 것인지,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돼버렸다.

그러나 50대는 한때 우리 역사를 만들어 낸 혈기왕성한 세대였다. 비록 ‘유신이 한국적 민주주의’라고 배웠지만, 거리에서는 독재타도를 외쳤고, 캠퍼스에서 친구들과 스크럼을 짜고 거짓과 싸웠으며, 노동조합을 결성해 우리 권리는 우리가 찾겠다고 소리 질렀다. 그리고 알았다. 민주주의는 권력자들이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는 것을. 1987년 6월, 직장에서 넥타이 맨 채 뛰어나와 영원히 권력을 누릴 것처럼 위세를 부리던 그들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그리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 평생직장이라고 여기며 밥 먹듯이 야근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옥죄어오는 강도가 너무 심하다. 해도 너무한다. 암살당한 ‘박정희의 부활’을 목격해야 하고, 조선시대 임금도 못 건드리던 역사를 위정자가 자기 잣대로 다시 쓰겠다고 한다. 진보 아니면 보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하는가 하면, 웬만하면 다 좌파다. 학자들의 ‘전국역사학 대회’에 난입한 사건을 ‘충돌’이라고 쓴 언론 기사를 봐야 한다.

경제민주화, 분배라는 용어는 선거 때만 반짝였을 뿐, 이제는 내놓고 재벌 밀어주기 정책만 편다. 내가 맞으니 국민들은 잠자코 따라오라고 한다. 복종하지 않는 국민에게는 북한의 적화통일을 운운한다. 비정상이 정상이 돼버렸으며, 몰상식이 상식을 지배하는 세상이 돼가고 있다.

어린 학생들이 거리로 나오고 있다. 저들의 역사교과서로 절대 배울 수 없다고 항변한다. 지난 주말 비가 쏟아지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피켓시위를 하던 한 소녀에게 지나가던 중년 남자가 우산을 받쳐주던 사진기사를 보았다. 어린 청소년들이 치를 사회적 비용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민주주의는 세우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들다’라는 말. 무력한 야당 탓만 하며 언제까지 굴욕을 견뎌야 하는가.

이야기해야 한다. 부당한 권력행사는 그만하라고. 바뀌도록 우리의 의견을 모아야 한다. 그리고 행동해야 한다. 또 보여주어야 한다. 역사는 우리가 만들어 왔음을. 역사를 바꾸려는 저들에게 역사를 두려워하도록 가르쳐 주어야 한다.

무력한 50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헬조선’이라 부르는 젊은이들에게 “아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희망이 있다. 누구든지 최선을 다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고, 결혼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어야 한다. 별 이야기가 다 나오고 있다. 내년 총선에서 3분의 2를 넘겨 개헌하겠다고 한다. 내각제가 좋은지 대통령 중임제가 좋은지 그때 상황을 보아서 판단하겠다고 한다. 우리가 만든 역사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고 있다. 최소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우리 자식들에게 물려줘야 하지 않겠는가.


유용화 | 동국대 대외교류연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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