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일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사태 때문에 국립중앙의료원을 방문했다. 여기서 박 대통령은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 때와 비교해 메르스의 정부 대응이 많이 뒤처진다는 세간의 비판을 직접 반박했다. “사스의 경우엔 중국이나 동남아에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그런 질병 유입을 막아내는 것이었다. 이번 메르스는 내국인에 의해 그 어떤 질병이 유입된 후에 의료기관 내의 여러 접촉을 거쳐 감염이 계속되고 있다.” 양상이 다르니 정부 대응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렇게 말하는 박 대통령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되고도 남는다. 박 대통령이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했던 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그 노 전 대통령이 2003년 사스 대응 때 너무 잘해 세계보건기구(WHO)로부터 방역 모범국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반면 이번의 메르스 사태와 관련해 우리나라는 국제사회로부터 민폐국이라는 혹평을 받고 있다. 속이 상하고, 기분 나쁠 만하다.

사실 하나의 사례만을 놓고 대통령 리더십의 차이를 가늠하는 것은 무리다. 대중의 눈에 다 잘 못하는 대통령도 있고, 스스로 다 잘했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론 다 못하는 대통령도, 다 잘한 대통령도 없다. 이런 비교는 보수 세력이 그동안 전가의 보도처럼 위기 때마다 휘둘렀던 ‘노무현 때리기’의 자연스러운 역풍이다. 그럼에도 누가 더 잘했느냐는 식의 편가르기식 접근은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 호오(好惡)의 태도나 진영논리에 매몰돼 냉정한 사태 인식과 책임 소재를 가려 버리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타고난 승부사(natural-born fighter)다. 국회법 개정과 관련해 물러설 조짐이 전혀 없다. 여야가 정의화 국회의장의 중재안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일부 양보하려 해도 대통령은 요지부동이다. 특히 김무성 대표와 유승민 원내대표에게 무조건 항복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사태에 직접 나서는 것에 대해서도 국민 혼란 운운하면서 공박했다. 그런 탓에 박 시장은 메르스와 싸우고, 박 대통령은 박 시장과 싸운다는 말까지 나왔다. 여기에 더해 전염병 대응을 놓고 노 전 대통령과 비교되는 것에 못마땅해했다. 좋게 말해 승부사이지 나쁘게 말하면 싸움꾼이다. 그가 누구든 가장 많은 권력을 가진 현직 대통령이 생각이 다른 이들과 사사건건 싸우는 것은 민주주의에 해롭다. 인간적으로도 쪼잔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참 못난 대통령’이다.

메르스 책임 회피 정국 (출처 : 경향DB)


대통령은 책임을 지는 자리다. 미국의 33대 트루먼 대통령은 자기 책상에 놓여 있는 표찰에 이런 문구를 적어 놓았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The Buck Stops here.)” 그는 물러날 때 더 멋진 말을 남겼다. “누가 됐든 대통령이라면 결정은 그의 몫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누군가 다른 사람이 대신 결정해 줄 수도 없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의 일이다.(The President- whoever he is- has to decide. He can’t pass the buck to anybody. No one else can do the deciding for him. That’s his job.)” 대통령이란 자리는 불가피하게 결정권을 행사하고, 그로 인한 책임을 감당해야만 하는 자리다.

2010년 1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앞선 해 크리스마스에 있었던 항공기 폭탄테러 미수 사건을 두고 남을 탓하지 않았다. “저는 누군가에게 책임을 돌리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최종적인 책임은 제게 있습니다. 대통령으로서 저는 국가와 국민을 보호해야 할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시스템이 실패했다면 그것은 제 책임입니다.” 미국 보수의 우상 레이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깜짝 놀랄 발언을 했다. “작금의 위기상황에서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정부가 문제입니다.” 레이건이 이처럼 정부가 문제라는 도발적 명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임 카터 대통령의 심각한 무능으로 인해 나라의 위기가 초래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리더십은 중요하다. 대통령이 책임을 미루고, 싸움에 몰두하면 나라는 어지럽고, 국민은 힘들다. 싸움보다 일 그리고 남 탓보다 책임, 이건 대통령직의 의무다. 이 때문에 트루먼은 이런 말을 남겼다. “책임을 질 수 없으면 아예 맡지도 마세요.(If you can’t stand the heat, get out of the kitchen.)”


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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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밤공기는 아카시아, 밤나무, 쥐똥나무 꽃들이 풍기는 향기로 가득해 심호흡이라도 하면 머리가 어찔해질 정도이다. 그러면 벌써 10여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소나무에 올라 전지 작업을 하다 추락해 목뼈에 금이 가 수술을 받아야 했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를 병실에 남겨둔 채 홀로 포장마차에 앉아 술을 마시던 그해 초여름 나는 30대 초반이었고 첫 소설집 출간을 앞두고 있었다. 병실에는 수술 탓에 금식 중인 데다 목뼈를 가지런히 하기 위해 관자놀이 부근에 나사를 박고 거기에 무거운 추가 달린 줄을 매단 채 신음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그때 나를 괴롭혔던 문제는 아버지의 수술이 아니라 아버지의 수술비였다. 적게는 1000만원에서 많게는 2000만원가량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순간부터 내가 마련할 수 있는 액수를 가늠해 보았다. 나는 그때 보증금 400만원짜리 옥탑방에 살고 있었고 그게 내가 가진 돈의 거의 전부였다. 대출은 꿈도 꿀 수 없었는데 보증금 400만원도 바로 아버지가 농협에서 대출받아 내게 준 돈이기 때문이었다. 대학 시절에 대출받은 학자금도 갚아가는 중이라 생활비마저 부족한 시기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별다른 수가 생겨날 것 같지 않았다. 결국 사채를 쓰거나 장기를 팔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하여튼 뭔가 다른 방도를 찾아야 했다. 그러기로 굳게 결심을 하고 나니 지나온 생이 쓸쓸해졌다. 나는 처음으로 내 삶에서 개인사적 재난에 맞닥뜨린 기분이었고 그 재난을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헤쳐나갈 수 없다는 무능에 상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늦봄이거나 초여름이거나 그러한 계절이 아니라면 맡을 수 없는 새벽공기를 마시며 병원으로 향했다. 간신히 잠들었을 아버지 옆에 앉아 날이 새는 걸 지켜보았다. 아침은 오랜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사람의 낯처럼 파리했다.

조금 뒤 아직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50대 후반의 사내가 문병을 왔다. 아버지 못지않게 시커멓게 탄 얼굴이며 삐쩍 마른 몸이며 평상복인지 작업복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허름한 입성이며 한눈에 보아도 아버지의 동료인 것만 같았으나 알고 보니 아버지가 일하던 조경업체의 사장이었다.

그는 초조해하는 내게 두어달 전 산재보험에 가입했으니 아버지 수술비도 보험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다. 산재보험 가입 의무에서 제외되어 왔던 5인 이하 사업장도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법률이 시행된 거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밤새 사채니 장기매매니 도둑질이니 하며 혼자 비장했던 일이 열없어졌다.

까다로운 수술이었으나 수술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마취에서 깨어난 아버지 앞에서 나는 병원비로 고심했던 흔적을 지우느라 애써 웃었는데 그 웃음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지금도 아버지는 당신의 사고 탓에 노심초사했던 기특한 자식으로만 안다.

이 법률이 시행된 시기가 ‘참여정부’이기는 했으나 그것이 참여정부만의 공적일 리는 없다. 수십년 동안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했던 노동자들 덕분임을 그때나 지금이나 잘 안다. 그리고 국가, 정부와 같은 권력기구들이 누구에게 권력을 부여받았느냐에 따라 성격이 무척이나 달라진다는 사실도 잘 안다.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왼쪽)과 박인용 국민안전처 장관이 22일 서울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세월호 인양과 관련해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우리는 지금 재난의 시대를 살고 있다. 보통 사람들에게 재난 같지 않은 하루가 어디 있으랴만 재난을 재난으로 인식하는 한 재난을 극복할 가능성 역시 분명히 있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그리고 지금 메르스 사태를 지켜보면서 많은 이들이 국가와 정부의 부재 혹은 무능을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재난을 재난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것을 국가와 정부의 부재 혹은 무능이라 말하지 않는 이유는 국민이 죽어 가는데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에, 국민이 공포를 느끼는데도 진실을 감추려 하고 자신들의 이익만을 지키려 하기에 결코 부재나 무능이란 말 따위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국가와 정부는 국민에게 적대적인 국가와 정부일 뿐이다. 국민을 적대하는 자들일 뿐이다.


손홍규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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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개정안이 어제서야 정부에 이송됐다. 정부 시행령에 대한 국회 통제권을 강화한 국회법 개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시사한 박근혜 대통령의 완강한 반대에 막혀 있다가, 정의화 국회의장이 제시한 중재안을 야당이 수용함에 따라 물꼬가 트였다. 중재안은 정부 시행령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의 ‘요구’를 ‘요청’으로 자구수정을 한 것이다. 청와대가 강하게 문제 삼은 국회의 정부 시행령 수정 권한의 ‘강제성’을 완화한 상징적 조처이다.

당초 청와대가 거부권 행사의 명분으로 내세운 위헌 가능성과 ‘국정 마비’ 자체가 근거나 타당성은 빈약했다. 국민 위임을 받아 입법부가 만든 법률의 취지와 정신을 위반한 행정부의 시행령은 고치는 게 마땅하다. 국회법 개정안은 월권과 일탈을 일삼아온 행정입법을 헌법에 근거해 정상으로 바로잡자는 취지다. 정부의 시행령에 대해 국회의 무한 간섭이 가능해져 국정 마비가 초래할 것이란 주장도 호도에 가깝다. 설령 야당이 시행령 수정 권한을 발동하려 해도 여당이 동의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행정부가 시행 요청을 듣지 않더라도 제재할 방법도 없다. 그럼에도 파국을 불사하는 청와대의 막무가내 고집에 부닥쳐 ‘요구’를 ‘요청’으로 수정하는 국회의장 중재안이 마련됐다. “거부권을 앞세운 박 대통령의 겁박에 입법부가 투항했다”는 지적이 있지만, 국회법 개정안을 놓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정면충돌하는 사태를 피할 수 있는 출구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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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 국회법의 정부 이송 시한인 11일 오후 정의화 국회의장이 시계를 보며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청와대에서는 중재안에 대해서도 거부권 행사 가능성이 흘러나온다. 애초 국회의원 3분의 2의 찬성으로 통과된 국회법 개정안이었는데 여야 합의로 마련한 국회의장 중재안마저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대국회 관계의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 야당은 물론 여당과의 관계도 극한 갈등으로 치달을 수 있다. 거부권을 행사해 국회에 환부된 법안에 대해 3분의 2의 찬성으로 재의결해 거부권을 무력화시키는 경우 대통령과 여당도 정치적 결별로 내몰린다. 여당이 재의결을 회피해 국회법 개정안이 폐기되는 절차를 밟을 수 있지만, 이때는 여야 관계가 결딴난다. 이러한 파국과 충돌 상황을 감내해서라도 대통령이 사활을 걸어야 할 만큼 국회법 개정안이 본질적이고 시급한 현안인지 의심스럽다. 메르스 사태가 국가적 위기로 확대되고 있다. 대통령이 또다시 실속도 명분도 없는 국회법 싸움이나 벌일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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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박원순 서울시장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서울중앙지검은 의료혁신투쟁위원회라는 단체가 “박원순 시장이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관련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고발한 사건을 형사1부에 배당했다. 앞서 법무부와 검경은 ‘메르스 괴담’ 엄단 방침을 밝힌 바 있는데, 박 시장을 사실상의 첫 표적으로 삼은 셈이다. 메르스 잡는 데는 둔한 정권이 ‘박원순 흠집 내기’에는 왜 이토록 기민한가. 메르스 대란의 와중에 박 시장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것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고발 단체는 박 시장이 지난 4일 기자회견에서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은 의사(35번째 환자)가 재건축 행사에 참석해 1500여명이 감염 위험에 노출됐다”고 언급한 것을 문제 삼았다고 한다. 이후 해당 환자가 억울함을 토로하자 박 시장은 “당사자와 의료진에게 마음의 상처가 됐을지 모른다. 유감의 말씀을 드리며 쾌유를 기원한다”고 사과한 바 있다. 그럼에도 제3자가 이를 고발했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다. 현 정권 들어 보수단체가 진보·야권 인사를 고소·고발하면 검찰이 ‘청부수사’하는 게 관행화했는데 이번에도 같은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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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경향 표지, 박원순 서울시장 (출처 : 경향DB)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죄가 성립하려면, 허위사실 적시로 관련 인사의 사회적 평가가 급락해야 한다. 하지만 박 시장은 35번째 환자의 실명을 특정하지 않았다. 또한 박 시장 발언은 정부의 메르스 관련 정보 공개를 촉구하는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실제 박 시장 회견을 계기로 정부는 비밀주의를 포기하고 정보공개 쪽으로 돌아섰다. 설사 발언 내용이 허위였다 해도 위법성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다. 이를 모를 리 없는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면 목적은 박 시장 기소가 아닐 것이다.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 선두에 나선 박 시장에게 타격을 주고, 정부의 초동대처 실패를 물타기하려는 의도일 가능성이 짙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자체가 (메르스에) 독자적으로 대응하면 국민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며 박 시장을 견제하고 나선 것과도 무관치 않을 법하다. ‘괘씸죄’에 대한 심기경호성 수사란 얘기다.

수많은 시민이 감염되고, 격리되고, 희생되는 절박한 시기에 정권이 정치적 계산이나 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 박근혜 정부는 지금 메르스와 싸워야지, 박 시장과 싸울 때가 아니다. 검찰은 박 시장 수사를 즉각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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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박원순

중동호흡기증후 군(MERS·메르스) 사태가 벌써 28일째로 한 달을 앞두고 있다. 당초 정부가 예상치 못한 장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국내 메르스 확산세는 삼성서울병원 응급실에 머물렀던 14번째 환자에 의한 발병이 최장 잠복기 14일이 끝나는 지난 12일을 고비로 꺾일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지난 주말 삼성서울병원에서 감염된 확진자가 무더기로 나오고 어제도 1명이 추가됐다. 더욱이 4차 감염 환자가 추가로 발생하고 제3의 슈퍼전파자 후보군도 계속 나타나고 있다. ‘3차 대유행’이 현실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보건당국과 의료계, 국민 모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상황이다.

걱정스러운 것은 잠재적 슈퍼전파자로 지목된 후보군이 3차 대유행의 진원지가 되는 경우다. 보건당국도 2차 대유행을 유발한 14번째 환자 등 6명의 확진자를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14번째 환자는 응급실 밖으로 나간 사실이 뒤늦게 확인돼 추가 감염 여부가 우려된다.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이송요원인 137번째 환자와 순환기내과 의사인 138번째 환자, 대전 대청병원에서 16번째 환자와 접촉한 뒤 부산 4개 병원을 거친 143번째 환자도 유력한 슈퍼전파자 후보군이다. 이미 3명의 4차 감염자를 발생시킨 76번째 환자에 의한 감염이 추가로 나올 수도 있다. 경기도 평택 경찰관인 119번째 환자는 감염 경로가 불분명한 가운데 병원 밖 감염 가능성마저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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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단벽이 설치된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앞으로 16일 한 병원 직원이 지나가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렇게 한 달 앞두고 상황이 심각해지고 있지만 정부는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보건당국이 파악한 메르스 관련 정보는 번번이 빗나갔다. 2m 이내의 밀접 접촉이 있을 경우에만 감염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고, 잠복기가 최장 14일이라고 한 것도 의심스러운 정황이 계속 나타나고 있다. 환자 1명이 감염시킬 수 있는 환자가 0.6명에서 0.8명이라고 했는데 슈퍼전파자가 나왔으며 고령자라든가 기저질환이 있을 때나 위험하다고 했지만 젊고 건강한 환자도 상태가 불안정하거나 사망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메르스 사태 장기화 조짐과 3차 대유행 우려는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모두 안이한 상황 인식과 그에 따른 느슨한 대응에서 비롯됐다. 이미 1·2차 대유행을 겪고 4차 감염까지 발생할 때까지 말로는 총력 대응을 반복했지만 결과는 접촉자 관리에서조차 구멍투성이라는 게 확인됐을 뿐이다. 3차 대유행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지역사회 전파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그야말로 ‘과잉 대응’이라고 할 정도로 총력체제로 나서야 한다. 이대로 한 달을 넘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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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의 아픔이 아직 아물지 않고 그 진상 규명마저도 진척되지 않은 이때,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과 공포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과연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하는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엄중히 문책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는, 해경이 출동하고도 죽어가는 국민을 구하지 못하고 민간기업에 그 책임을 미룸으로써, 국가가 국민 안전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기 때문이다. 민간기업의 사적 역할 뒤로 국가가 숨어버렸기 때문에, 국민의 안전은 위험에 처했고 국가는 실종됐던 것이다.

그런데 메르스의 확산이 전 국민에게 위험이 되고 세계에 조롱거리가 되는 이유 역시 근본적으로 정부에 있다. 무능한 정부는 초기 대응에 실패했고, 개별 병원에 책임을 전가했다. ‘개인정보 보호’를 명분으로 공익과 전체 국민의 안전을 외면하는 동안 메르스는 급격히 확산되고 말았다.

왜 국가는 세월호 참사를 겪고도 메르스 확산을 방지하지 못했는가? 박근혜 정부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지속적인 면담요청을 묵살했으며, 1주기를 맞은 유가족들과 시민들에게 물대포와 캡사이신을 쏘아댔다. 국민의 안전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하지도, 배우지도 못했다. 그 대신 TV 앞에서 눈물을 보이며 ‘이미지 정치’로 국민들의 환심을 얻기에 급급했다.

박근혜 정부는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역설하지만, 경제의 본바탕은 상품교환이 이뤄지는 시장에 달려 있지 않다. 경제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줄임말로 ‘나라를 운영하면서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뜻에서 나왔다. 영어로 경제(economics)는 ‘집(oikos)을 잘 운영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동서양 모두 경제는 내 집, 내 국민을 편안케 하는 ‘살림’을 강조한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승객들을 살리지 못하고 메르스의 확산으로 국민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최우선으로 삼는 ‘살림’정신은 찾을 수 없고, ‘상품 개발과 시장 개척’만이 경제의 전부인 양 ‘겉멋에 빠진 속 빈’ 행태로 작금의 국가 실종 사태를 낳았다.

공자는 ‘정치는 바로 다스리는 것(政子正也)’이라고 했다. 그런데 공(公)보다 사(私)를 먼저 고려하는 국가가 ‘바른 길’에 들어설 수 있을까? 관변 언론들을 통해 현실을 왜곡하고 국민들의 비판을 탄압하고자 한다면, 그런 국가는 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봉건주의, 전제 국가일 따름이다.

14일 오후 박근혜대통령은 메르스여파로 영향을 받고 있는 상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동대문상가를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출처 : 경향DB)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 대선개입 의혹에서 시작해서 세월호 참사, 성완종 대선자금 의혹, 메르스 확산 등 의혹과 불신으로 점철된 가운데 국민들에게 끊임없이 고통과 눈물을 안겨줘 왔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은 왕의 자리가 아니라, 공적인 ‘종’(civil servant)으로서 국민을 섬기는 자리다. 국민을 섬길 줄 모르는 정부를 마냥 지지해주지 않는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국가는 특정 통치권자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사사로운 수단에 복속해서는 안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민을 섬기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돌보며, 공과 사를 구분해 제대로 ‘나라 살림’을 해야 하는 데 있다.


오세일 |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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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람들이 있다. 페미니즘이 주제로 등장하면, ‘진정한 페미니즘은 그런 게 아니지 않나요?’ 하는 사람들 말이다. 경험적으로 여자보다는 남자들이 그런 소리를 많이 하는 것 같다.

특히 남자들 중에서도 스스로를 비교적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유독 ‘진짜 페미니즘’과 ‘가짜 페미니즘’의 구분에 집착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분야의 고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김규항의 칼럼 ‘그 페미니즘’을 떠올려보자. 그의 논지는 단순했다. 계급해방보다 여성해방을 앞세우는 ‘그 페미니즘’은 가짜라는 것이었다.

최근 트위터에서 터져나온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해쉬태그 달기 운동에 대해 반감을 표하던 고종석도, 말하자면 ‘페미니스트 감별사’ 대열에 동참했다. 졸저 <논객시대>를 읽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나는 그에 대해 각별한, 아니 차라리 애틋한 경외심을 품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히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선언하는 사람들을 ‘스탈린’이나 ‘크메르루주’에 빗대는 나의 우상을 보며, 본 필자는 형언하기 어려운 비감에 젖어들었던 것이다.

‘진정한 페미니스트’에 대해 집착하는 것은 유명 논객들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이 언급되는 거의 모든 인터넷 게시물에는 ‘제대로 된 페미니즘’ 운운하는 댓글이 달린다.

아마 이 칼럼에도 그런 댓글이 붙을 것이다. ‘저 머나먼 선진국에는 진정한 페미니스트가 있지만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왜곡되어 있고, 이대 나온 꼴페미들이 여성가족부에서 양성평등이 아닌 여성우월주의를 주장한다’는 식의 뻔한 레퍼토리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대체 그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무엇인가? ‘가짜 페미니즘’을 질타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많은 경우 그들이 말하는 ‘진정한 페미니즘’이란, 장학금 타면서 공부해서 좋은 직장 들어갔다는 ‘엄마 친구 아들’과 마찬가지로, 실존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가상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페미니즘’은 오직 현실 속의 페미니즘을 ‘가짜’로 몰아가기 위해서만 거론된다.

최근 발생한 페미니즘 이슈에 대한 여성계 입장 (출처 : 경향DB)


가령 디씨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시작된 ‘메갈리아’ 운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수많은 여성 누리꾼들이 익명으로, 지금까지 여성들에게 쏟아져 왔던 수많은 여성혐오적 표현들을 그대로 ‘반사’하는 운동이다.

예컨대 ‘김치녀’라는 비하 용어는 ‘김치남’으로, ‘된장남’은 ‘강된장’으로 되돌려준다. 여성을 그저 성기에 빗대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관용구를 ‘보적보’로 줄이는 표현에 대해, ‘메갈리아의 딸’들은 군폭력 문제 등을 거론하며 ‘자적자’라고 받아친다. 그나마 신문 지면에 소개할 수 있는 용어들이 이 수준이다. 그만큼 여성혐오 표현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이 운동은 ‘진정한 페미니즘’이 아닌가? 만약 당신이 남자라면, 그 어떤 경우에도, 당신에게는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평화와 비폭력을 주장하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달리, 폭력을 투쟁의 도구로 활용하기도 하는 말콤X는 ‘진정한 흑인운동가’가 아니라고, 어떤 백인이 지껄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이다.

남자들이 100만원 벌 때 여자들은 62만원밖에 못 버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한국 남자는, 본인이 알건 모르건, 여성 착취의 주체다. 여자들에게 ‘진정한 페미니즘’을 가르칠, 아니 언급할 자격조차 없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페미니즘‘들’이 필요하다. 더 많은 여성들이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권리를 요구해야 한다. 그 다양한 의견들의 충돌과 갈등과 화해 속에서 ‘진정한 페미니즘’의 모습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리도 안 하고 애를 낳아본 적도 없는 주제에 여자들에게 페미니즘이 뭔지 가르치려 드는 남자들은 발에 차이도록 넘쳐난다. 그런 이들이 객석에서 떠들고 있는 한 ‘진정한 페미니즘’이라는 합창곡은 울려퍼질 수 없다.

그러므로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남자들이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의 뜻을 표하는 것뿐이다. 모든 페미니즘은 진짜다. ‘진정한 페미니즘’을 위해, 묵묵히 연대하자.


노정태 |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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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법 개정안은 계륵이 되어있다. 위법·부당한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에 대해 국회가 수정·변경을 요구할 수 있게 한 국회법 개정안이 대통령의 반발에 부딪혀 꼼짝 못 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부에 송부하려니 대통령의 거부권이 두렵고, 그렇다고 211명에 달하는 의원들의 찬성으로 가결된 법률안을 그냥 방치하려니 입법절차의 준엄함이 거슬린다. 이 와중에 우리의 법치는 급전직하의 운명에 처해진다.

법치주의의 원칙상 행정은 국회가 정한 법률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동안의 관행은 이를 정면에서 거역했다. 법률안 제출권을 가진 행정부가 입법의 과정을 주도하였고, 대통령이나 각부 장관들은 법률의 범위를 넘어서는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만들어 자기의 권력을 확장해 왔다. 행정을 통제하여야 할 법률이 되레 행정기관에 무한한 권력만 백지 위임하는 파행이 연발하였고 그 결과 권력분립은커녕 제왕적 대통령제가 구축되고 행정만능이라는 반법치적 현상이 굳어져 왔다.

이 개정안은 이런 폐습에 대한 반성에 터 잡은 것이다. 시행령·시행규칙에 의한 행정을 법률에 의한 행정으로 원위치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국회에 수정요구권이라는 조그마한 권한 하나를 마련한 것이다. 혹은 제왕적 대통령제를 교정해 나가는 좁은 길 하나를 열어둔 것이다. 그러기에 이 개정안에 대한 위헌론은 아주 무용한 패싸움에 지나지 않는다. 권력분립과 법치주의라는 헌법명령을 제대로 구현하여야 한다는 시대적 과제에 비하면 이 위헌시비의 세목들은 너무도 하찮거나 아예 본말이 전도된 채로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29일 여야 합의로 국회법 제98조의 제3항이 개정됐다. (출처 : 경향DB)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대통령의 반발에 한없이 위축되는 국회의 모습이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없애야 한다며 분권형 개헌론까지 서슴지 않고 제기하던 국회의원들이 바로 그 대통령의 일갈 한 마디에 좌고우면, 우왕좌왕할 뿐이다.

여기에 국회의장은 한술 더 뜬다. 작년 11월, 국회의장은 행정입법에 대한 검토 의무와 과잉 행정입법에 대한 시정요구권이 절실함을 공언하였다. 그러던 국회의장이 지금은 중재안 운운하며 수정 ‘요구’권을 ‘요청’권으로 완화시키자고 나선다. 국회와 행정부의 관계라는 점에서 이 두 단어의 차이는 엄청나다. 입법권은 국회의 고유한 권한이다. 만일 행정부가 이를 침해한다면 의당히 국회는 행정부에 시정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하며 행정부는 그 시정요구를 성실히 처리할 의무를 져야 한다. 반면 ‘요청’은 그 의무를 희석시키고 행정부에 커다란 재량의 여지를 부여한다. 결국 이 ‘중재안’은 법률의 지배를 우롱해 왔던 지금까지의 역사를 또다시 반복하자는 제안에 다름 아니게 된다.

게다가 이 개정안의 ‘개정’을 위해서는 번안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그러나 번안절차는 이미 통과된 의안에 중대한 흠이 있을 때에나 사용하는 아주 이례적인 것이다.(국회의안정보시스템에는 지금까지 본회의에서 법률안을 번안한 사례가 단 한 건뿐이다.) 대통령의 반대와 같은 정치적 이유는 번안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청’이라는 말을 넣기 위해 번안절차를 가동하는 것은 국회 스스로가 수정 ‘요구’권이 위법한 것임을 자인하며 행정이 국회 바깥에 있는 성역임을 공인하는 자가당착의 조치가 되어버리고 만다.

대의제 체제에서 국회가 허약해지면 민주주의 자체가 허약해진다. 국회법 개정안은 이에 대한 반성의 결과이다. 바로 그 때문에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또한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국회와 대통령은 각각 국민에게 자신의 행동이 정당함을 설명하고 국민은 그에 대해 스스로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를 통해 대통령과 당당히 맞서며 그의 행정부를 제어하고 나서는 국회의 존재 또한 국민에게 각인시킬 수도 있게 될지도 모른다.

이 점에서 야당의 역할은 중차대하다. 아쉽게도 보도에 의하면 여당은 이미 말을 바꾸기로 작정한 듯이 보인다. 이제 공은 야당에 넘어간 형국이다. 섣불리 번안에 동의할 일이 아니라,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그의 제왕적 권력의지를 차단해 내는 데 야당이 앞장서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국회법 개정안은 계륵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국회가 제자리를 찾고 법치주의와 권력분립의 원칙이 헌법의 틀 안에서 제기능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교두보이자 전진기지로 삼아야 하는 귀한 디딤돌이다. 지금은 국회가 물러설 때가 아니라 당당히 자기 목소리를 낼 때이다. 시인 김수영의 말처럼,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에야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이 보이는 법이다.


한상희 |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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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증후 군(MERS·메르스)의 ‘최대 온상’인 삼성서울병원의 상황이 임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이 병원에서 촉발된 메르스 유행이 잠복기 시한인 지난 주말을 넘겨서도 잦아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응급실 이송요원 4차 감염과 의사 1명 추가 감염 등 새로운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과 접촉한 사람들만 수백명에 달해 3차 유행 가능성도 제기된다. 삼성병원은 뒤늦게 신규 환자의 외래·입원을 제한하는 부분 폐쇄 조치에 들어갔다. 나름의 고강도 처방이지만 이 병원의 메르스 대처 역량과 의지에 비춰 그 정도로 사태가 수습될지 의문이다.

삼성병원 응급실 이송요원 환자 사례는 삼성서울병원의 메르스 관리가 얼마나 부실한지 다시 한번 확인해준다. 이 환자는 발열과 근육통 등 메르스 증상이 있었지만 9일 동안 아무런 통제 없이 통상 근무를 하면서 430여명과 접촉했다. 구급차에서 감염된 이 환자는 당시 보호장구를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삼성병원 의사로는 두번째인 138번 환자는 응급실에서 ‘슈퍼전파자’란 이름이 붙은 환자로부터 옮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의사 역시 슈퍼전파자와 접촉 후 14일 동안 격리되지 않은 채 정상근무했다. 당시 삼성병원은 응급실 소독과 신속한 환자 노출자 파악과 필요한 격리를 시행했다고 밝혔으나 실제 소속 병원 의사조차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한마디로 메르스 사태의 진원지이면서 감염 추적관리 부실, 자체 조사 결과 및 명단 관리의 정확성 부족, 대응조치의 실효성 미흡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모두 평시가 아닌, 메르스로 초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다. 국내 최고라는 이름이 무색한 이 병원을 더 이상 신뢰하기가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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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서울병원은 14일 메르스 총력대응을 위해 부분적으로 병원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외래진료 및 입원을 제한하며 응급수술을 제외하고 수술 및 응급환자 진료도 한시 중단하며, 입원환자를 찾는 모든 방문객을 제한하는 조치다. 외래진료 휴무일인 14일 병원 1층은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출처 : 경향DB)


전염병 사태에서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대처만이 확산 방지를 담보한다. 과거 사스 사태 때 우리는 이런 적극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똑똑히 경험한 바 있다. 정부는 메르스 사태를 끝내기 위해서도 삼성병원에 대한 적극적인 관리가 필요하다. 정부는 그동안 서울시와 삼성병원이 참여하는 3자 협의체를 가동해왔으나 환자 발생이나 감염 경로에 대한 정보 제공이 미흡해 손발이 맞지 않는 경우가 발생했다고 한다. 이러면 대응이 적시에 이뤄지기 어렵다. 세계보건기구(WHO)도 메르스 사태를 관리하는 거버넌스 확립이 중요하다고 주문 했다.

의료계에서 삼성병원 전체를 폐쇄하고 메르스 치료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삼성병원의 방역 실패와 관련해 이미 정부의 적극 개입이 필요하다고 제안한 바 있다. 지금이라도 삼성서울병원을 정부의 직접 관리 체계에 포함시켜 효율적으로 대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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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3일자 경향신문 1면 사진에 가슴 아린 독자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에서 방역복을 입은 의료진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는 모습이었다. 그의 눈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긴장, 탈진, 고독, 그럼에도 버텨내야 한다는 사명감…. 세월호 참사 때 목숨 걸고 바다에 뛰어든 잠수사들이 있었다면, 지금은 ‘메르스와의 전쟁’ 최일선에서 사투를 벌이는 의료인들이 있다. 그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한다.

메르스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의사와 간호사 등 의료진의 피로 또한 누적되고 있다. 입고 벗는 데만 1시간이 걸리는 방호복을 입고 음압병실에 들어가면 5분만 지나도 온몸에 비 오듯 땀이 쏟아진다고 한다. 감염될지 모른다는 심리적 공포 또한 만만치 않다. 이미 적잖은 의료인이 메르스 확진 판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대다수 의료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쪽잠도 감수해가며 24시간 환자들 곁을 지키고 있다. 소명의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14일 현재 의료진과 직원 등 58명이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감염 예방을 위해 자택 격리됐다가 복귀한 대전 서구 건양대병원에서 박창일 의료원장이 출근한 의사를 끌어안으며 환영하고 있다. _ 연합뉴스


인천 인하대병원은 지난 2일 경기 평택에서 발생한 메르스 환자 1명을 인계받아 치료키로 한 사실이 알려진 뒤 내원객의 발길이 끊기다시피 했다. 의료진이 당혹스러워하자 김영모 의료원장이 내부게시판을 통해 입장을 천명했다. “국가적 의료 위기 상황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중심병원으로서의 역할을 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의료인으로서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을 것입니다.” 김 원장의 다짐은 깊은 울림을 남기고 시민들의 격려로 이어졌다. 또 다른 병원에서는 경험이 일천한 후배 의료진이 머뭇거리자 선배들이 앞장서 방호복을 입었다고 한다. 메르스 대란 속, 정부의 초동대처 실패에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이런 의료진 덕분일 터이다.

지난해 12월 미국 시사주간 타임은 ‘올해의 인물’로 ‘에볼라 전사들’을 선정했다. 에볼라가 창궐하는 서아프리카 지역에서 목숨 걸고 치료·구호활동을 벌인 의료진과 간병인, 구호단체를 지칭한 것이다. 타임은 “그들이 있었기에 전 세계는 매일 밤 편안히 잠들 수 있었다. 그들은 총 대신 영웅적인 가슴으로 에볼라와의 전쟁을 치러냈다”고 상찬했다. 이 땅의 의료인도 다르지 않다. 낯선 감염병에 맞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메르스 전사들’에게 격려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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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나도 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인가요? 모르겠는데요. 남들이 줄 끝에 서기에 나도 섰어요. 무슨 줄인가요? 잘 몰라요. 얼마나 기다리게 될까요? 글쎄요. 몇몇 여자들이 뭔가를 들고 가면서 자기들끼리 떠들었다. 90%라고 하지요? 왜 그렇게 한대요? 모르겠어요. 저는 처음인데요. 몇 시간 기다렸어요? 무작정 서 있었어요. 오가는 말들의 저 끝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나를 안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디서 본 듯한 사람이다. 지난번 만났을 때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네요.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누구인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얼마나 기다릴 거예요? 그냥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무엇인데요? 글쎄, 기다려봐야 알 것 같아요. 그의 이름이 도저히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누구에게 손을 흔들었던가 싶었다. 그때 사람들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왜요? 끝났어요? 300명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네요. 무엇이었는데요? 앞쪽에서 누군가 물었다. 코끼리 삼겹살 아니었나요?


△ 아파트 청약 접수 현장에서, 전광판이 뜨거운 증권회사에서, 끝내주게 맛있다는 맛집에서, 꽉 막힌 주말도로에서 나도 저 긴 줄에 끼어 기다린 적이 있다. 이 줄에서 빠지면 나만 손해 보는 것 같아 휩쓸려갔다가 나중엔 왜 기다리는지 잊어버리고 기다린 시간과 인내심이 아까워 기다리기도 했고, 기다림이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해서 기다리기도 했다. 이 맹목성과 저돌성과 욕망과 불안이 이렇게 재미있는 코미디인지 몰랐다. 이 우화는 아주 현실적이어서 내 불안과 두려움이 다 들키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삶, 남들과 다른 삶, 이 길이 맞는다고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 삶은 불안하다. 묻지 마 줄서기, 남들이 가는 길 무작정 따라가기, 대세에 묻어가기는 가장 편한 선택이 된다. 의심하고 묻는 일은 낭비가 된다. 그런 고민할 시간에 한 발이라도 먼저 가서 줄 서는 게 득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줄을 잘 설까. 대단한 선진 국민의 질서요, 엄청난 자발성이다.


김기택 | 시인·경희사이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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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연구결과들은 민주국가일수록 국민들이 더 건강하다고 말한다. 2004년 영국 메디컬 저널에 실린 논문 ‘건강에 미치는 민주주의의 효과’는 그중 하나다. 이 논문은 경제·소득수준 등 다른 모든 변수를 통제한 후, 국제인권단체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하는 170개국의 ‘자유지표’와 건강지표의 상관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민주주의가 발전한 나라일수록 건강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전염병도 마찬가지다. 미 브라운대 의학교수인 케네스 메이어는 자신의 저서 <전염병의 사회생태학>에서 “전염병의 확산은 바이러스의 속성뿐만 아니라, 그 나라 정부와 정치·사회적 속성에 기인한다”고 했다. 민주주의가 전염병 확산 방지에 더 효과적이라는 말이다.

이들이 설명하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정부가 재집권을 하려면 표를 의식해야 한다. 그래서 민주 정부는 국민들의 요구와 반응을 살피고 기민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메르스 사태 수습을 위해 전면에 나선 것을 두고 대권을 노린 행보라며 깎아내렸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비난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왜 민주주의가 전염병 차단에 강점을 지닐 수밖에 없는지 보여주는 사례일 뿐이다.

그러나 정작 박근혜 정부가 이번 사태에서 보여준 행태는 민주국가의 모든 속성을 부정했다. 국민들의 공포에 기민하게 반응하긴 했으나 그래서 나온 대응은 유언비어 처벌이었다. 공무원들은 재빨랐지만, 청와대와 국회 앞에 열감지기를 설치하고 문형표 복지부 장관이 탈 엘리베이터 의전을 챙기는 데만 날렵했다. 메르스 사태에 오랜 침묵을 지켰던 박근혜 대통령이 그나마 표를 의식한 듯 보인 유일한 행동은 박원순 시장을 비판하며 견제에 나설 때뿐이었다. 혹시 이 정부가 아예 재집권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닐까란 의구심마저 들었다. 어쩌면 그들은 더 이상 표를 의식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간파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코노미스트 전 한국 특파원인 다니엘 튜더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미 한국은 일당체제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야권이 정치적 경쟁력을 잃으면서 정부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계속 집권할 수 있는 권위주의 국가로 말이다.

그런데 뭔가 여전히 석연찮다. 일부 학자들은 민주 정부보다 권위주의 정부가 때로 전염병 확산 방지에 더 효율적이라며 상반된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한다. 뉴욕주립대(뉴팔츠)의 조나단 슈와츠 교수는 2003년 사스가 확산됐을 당시 중국과 대만 정부의 대응을 비교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중국 정부는 초반에 사스 발생 사실을 은폐해 사태를 악화시켰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대만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역에 성공했다. 모든 권한이 집중된 강력한 컨트롤타워를 가동해 병원과 대중을 통제한 덕분이다. 그가 인터뷰한 중국의 의사들은 처음에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에 불만이 많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사스를 진압하는 데 핵심 열쇠였음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슈와츠 교수는 이러한 효율성이 중국의 강력한 일당체제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그런데 민주 정부의 특징을 찾아보기 힘든 이 정부는 심지어 권위주의 정부의 몇 안되는 장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국민들의 눈치를 보지 않는 강인한 결단력을 자랑하면서도, 병원과 기업을 통제할 힘은 없다. ‘제2의 메르스 기지’가 된 삼성서울병원은 애초부터 정부의 통제대상에서 제외돼 ‘치외법권’이냐는 말까지 나온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이 6월 3일 정부세종청사 영상국무회의장에서 열린 청와대와의 영상 메르스 대응 민.관 합동 긴급점검회의에서 박근헤 대통령의 모두발언을 듣고 있다. (출처 : 경향DB)


도대체 이 정부의 정체는 뭔가. 민주국가의 정부라고 보기엔 너무 비민주적이다. 권위주의 정부라고 말하기엔 아무런 힘도, 권위도 없다. 답은 뻔하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오직 정부만 인정하지 않고 있는 바로 그 사실. 이 정부는 아무것도 아닌, 그냥 무능한 정부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것을 ‘정부’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정유진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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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거울이자 렌즈다. 비춰볼 수도 있고 들여다볼 수도 있다. 생겨나자마자 급격하게 확산되는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비말(飛沫), 상기도, 슈퍼 전파자, 밀접 접촉, 능동 감시, 국민안심병원 같은 용어는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의학사전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 눈길을 사로잡은 새로운 말이 있다. ‘○○번 환자’와 ‘자가(자택) 격리’. 발음하기가 편치 않은 두 새로운 용어를 한참 들여다본다.

6년 전 신종플루 때 감염된 환자를 어떻게 불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번호를 붙이지는 않은 것 같다. 기사를 검색해보았더니 2009년 5월 국내 첫 신종플루 확진 환자는 51세 수녀였다. ‘1번’이 아니고 첫 번째였다. 2003년 사스 첫 추정 환자 역시 ‘1번’이 아니고 40대 남성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환자를 가리킬 때 주로 번호를 사용한다. 내 눈에는 ‘14번 환자’와 ‘35세 남성’은 달라 보인다.

환자에게 번호를 매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감염 시간, 감염 경로를 강조하기 위한 고려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반대로 행정 편의주의의 발로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몇 번 환자 대신 ‘15번째 환자 박모씨’라고 부를 수는 없었을까. 내게는 저 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15번 환자에게서는 인간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15번 환자는 인간이기 이전에 격리시켜야 할 감염자일 뿐이다. 후자에서 번호(서수)는 환자 박모씨를 가리키는 한정사 역할에 그친다. 박이라는 성씨는 그가 우리와 같은 엄연한 사회적 존재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번호를 붙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씨를 붙인다고 해서 환자의 신상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번호 붙이기를 통해 환자를 비인간화하는 행태에는 배제의 논리가 깔려 있을지도 모른다. 몇 번 환자라고 명명되는 순간, 그는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그 순간 사회는 환자를 마음껏 비난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한다. 몇 번 환자는 이기적이고 몰상식하며 거짓말을 일삼는 파렴치범으로 낙인찍힌다. 비감염자와 감염자 사이의 경계가 확고해지는 동시에 비감염자들 사이에서도 적대감이 형성된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적의가 활성화된다.

메르스 예방책 중 첫손으로 꼽히는 손씻기도 마찬가지다. 귀가하자마자 세면대에서 강박적으로 씻어내는 것은 무엇인가. 타인의 흔적이다. 손을 씻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리는 불특정 다수는 누구인가.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접촉하지 말아야 할 감염 경로일 따름이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타인이 거대해지고 또 구체화된다. 타인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의식할 수 없는 사이에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손씻기는 타인을 격리시키는 동시에 스스로를 격리시키는 행위이다. 역설적이게도 전염병이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상호의존성을 확인시켜준다.

환자를 번호로 부르는 (무)의식은 자가 격리에 견주면 사소해보일지 모른다. 자발적으로 외출을 금지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강제적으로 ‘감금’되었을 것이다. 저 민주화 시절, 가택 연금에 이어 조선시대의 위리안치가 생각난다. 만일 내가 당사자라면, 그것도 정부 당국이 해당 병원을 늦게 공개하는 바람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어떠했을까. 게다가 가족까지 함께 두문불출해야 한다면. 자가 격리 지침에 따르면 생활 용품을 따로 써야 하고, 실내에서도 마스크를 써야 한다. 가족 또는 동거인과 대화도 할 수 없다. 밥도 따로 먹어야 한다. 상상만 해도 울화가 치밀어 오른다.

10일 서울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1182차 정기 수요집회에서 김복동 할머니가 메르스 여파로 마스크를 쓴 채 참석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출처 : 경향DB)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인구 1000명당 병상 수 9.46개로 전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다. 일본 다음이다. 하지만 1000명당 공공병상 수는 1.19개로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국가가 운영하는 의료시설이 충분하다면, 아니 설령 공공 의료기관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국가가 보다 신속하고 합리적으로 대처했더라면 자가 격리는 아예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가 격리라니. 전쟁이 일어났는데, 국가가 각 가정을 진지로 만들어 각자 전투에 임하라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환자 이름 대신 일련번호를 매기는 ‘국가의 마음’과 자가 격리를 대책이라고 내놓는 ‘국가의 마음’이 달라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메르스 사태를 지난해 세월호 사태와 동일시한다. 이 같은 견해에 동의한다면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선박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최근 메르스 진원지 중 하나인 삼성서울병원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이 나왔다. “우리 병원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가 뚫린 것이다.” 그럴 것이다. 국민의 생명이 뚫린 것이 아니라 국가의 어딘가가 뚫렸을 것이다.


이문재 |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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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비용’이라는 용어는 흔히 사회 전체가 치러야 하는 각종 비용이라는 뜻으로 널리 쓰이는 말이다. 하지만 이를 학문적 개념으로 정초하는 데 크게 기여한 유럽의 제도주의 경제학자 칼 윌리엄 캅의 저서 제목은 ‘영리기업의 사회적 비용’이다.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개인 혹은 조직이 자신들이 응당 치러야 할 비용을 치르지 않고 이를 사회에 전가시키는 것을 중심적인 문제로 삼는 것이다.

이는 그 개인이나 조직의 도덕성을 문제로 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리사업 자체가 필연적으로 비용을 사회에 전가시키는 경향을 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리사업체는 영리활동에 필요한 것들 중 꼭 값을 치르고 사야 하는 항목들, 즉 이미 상품이 되어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비용을 지불하게 되어 있으며, 나머지의 요소들에 대해서는 일절 아무런 돈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영리활동의 투입물 중에는 그렇게 정확히 상품화되어 가격이 붙어 있지 않은 것들도 부지기수일 수밖에 없으며 영리활동의 와중에 그를 둘러싼 사회적·자연적 환경에 끼치게 되는 ‘외부성’ 또한 무수히 많을 수밖에 없다. 그 와중에 벌어지는 피해의 종류는 환경 파괴, 인간적 비용, 실업으로 인한 고통, 사회의 문화와 윤리의 파괴 등 무한히 다양하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비용을 사회에 떠넘긴 채 기업은 꼭 지불해야 할 것들에 대한 비용을 제외한 나머지를 오롯이 이윤으로 가져가게 된다는 것이다.

메르스 사태 와중에서 우리는 우리나라 의료 시스템의 난맥상을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민낯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공공의료 체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위급 상태에서도 국가 기구가 사태에 대처할 수 있는 준비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정보 파악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기능부전을 보이고 있다. 질병 전파의 허브 역할을 하면서 이른바 ‘슈퍼 전염 병원’들 몇 개가 떠올랐다. 정부는 병의 전파가 병원을 통해서만 벌어진다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려 들면서 정작 그 슈퍼 전염 병원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초기에는 아예 병원 이름 공개조차 거부하면서 사태를 결정적으로 악화시켰다. 지금까지도 그 병원들은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나라의 민간 병원들이 거두고 있는 이윤 속에 얼마나 많은 ‘사회적 비용’, 즉 그들이 마땅히 지불했어야 할 비용들이 포함되어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구조적 차원이다. 허약하다 못해 사실상 무력화되다시피 한 공공의료 시스템으로 인해 전국의 환자들을 집중시켜 대기업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는 몇 개 대형 병원들이 출현하게 되었다는 것은, 양자가 표리를 이루고 있음을 말한다. 이렇게 몇 개의 큰 병원들의 큰 이윤은 결국 공공의료 시스템의 위축이라는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고 있으며, 지금 우리는 그 비용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메르스 바이러스의 국내 유입이 확인된 이후 상당 기간 문제의 병원들, 특히 슈퍼 전염 병원의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그 병원들은 계속 이윤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정부가 비공개 입장을 고수했던 것을 설마 그 병원들에 영업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는 동일하다. 병원들은 정상적으로 영업을 계속했고 메르스 사태는 통제불능의 지경으로 치달았다. 격리당하고 병마에 시달리며 심지어 목숨을 잃은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으로 조성된 불안과 불편함, 그리고 경기의 위축으로 경제적 손해를 입은 숱한 사업체들이 다양한 형태로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크기의 비용을 치러야 했다.

삼성서울병원 송재훈 병원장이 14일 기자간담회를 열어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이송요원인 137번 환자와 관련해 국민여러분께 사과드리며, 메르스 대응을 위해 부분적으로 병원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하고 있다. (출처 : 경향DB)


이번 사태는 ‘비즈니스 코리아’가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영리기업이 어떻게 비용을 사회에 전가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그렇게 발생한 사회적 비용을 합리적으로 계산해 공평하게 부담하는 체제가 얼마나 부실한지를 보여준다. 무책임하게 뒤로 빼는 정부와 각자도생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결국 그 비용이 사회적 자원과 영향력이 없는 약자들에게 어떻게 전가되는지도 여실히 보여준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한국 사회의 공공성 부재라든가 국가 시스템의 붕괴 등을 질타하는 소리가 높다. 하지만 이러한 성찰이 현실적인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이 ‘영리기업의 사회적 비용’의 문제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영리조직들이 어떻게 각종 비용들을 발생시키며, 또 이를 눈에 보이지 않게 사회에 전가하는지, 그리고 그 비용을 결국 최종적으로 부담하게 되는 이가 누구인지 등의 메커니즘을 좀 더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또 그렇게 해서 발생한 비용이 얼마나 되는지를 계산하기 위한 ‘사회적 회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홍기빈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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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G 메르스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공포가 창궐하면서 세상이 어수선하다. 사회는 동요하고, 사람들은 공포 앞에서 하나가 된다. 아니 한 사회가 질병 앞에서 하나가 되었다. 보이지 않는 공포, 다가오지 않는 실체, 병에 걸릴 확률은 막연한데 치사율은 확실해 보이는 전염병 앞에 이 사회의 민낯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국가는 질병 재난에 대한 대처능력이 형편없다. 공포를 키우는 격이다. 국가가 위기 대처능력이 없다는 것, 그리고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데 무심하다는 점은 이미 드러났다. 세월호는 그 비극적인 정점이었다.

그런데 세월호 후에 메르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세월호는 이미 ‘벌어진’ 사건이고 죽어가는 죽음이었다. 사람들은 죽어가는 죽음을 구조하지 못하는 국가를 성토했지만, 자신들은 이미 그 불행 앞에 비켜서 있음을 안다. 해서 세월호는 보편성이라 말했지만 사실은 아주 특수한 ‘사건’이었다. 어쩌면 조문하고 애도하는 문상객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 ‘우리’가 그렇게 만든 것이리라.

하지만 메르스는 다르다. 이것은 벌어진 일이 아니라 벌어질 일이고, 어떤 불행한 이들에게 닥친 비극이 아니라, 언제 내게 닥칠지 모르는 불행이다. 부자 동네 강남 주민들도 예외없이 공포에 떨게 만들고 걸리게도 하는 전염병. 이것이야말로 전염병이 갖는 평등함이다. 보편성이다. 누구나 걸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전염병은 공공적이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메르스 발생 후 이른바 ‘영리병원들’의 의료체계는 무용지물임이 드러났다. 한국의 공공의료 시스템은 그동안 진주의료원 폐쇄 결정에서 보듯 이미 해체되고 약화되고 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주목해야 할 첫 번째다.

14일 오전 메르스 관련 국가 지정 격리 병상이 있는 서울 중구 국립중앙의료원 주차장에 음압 격리 병실이 부족할 경우를 대비해 음압 격리 텐트가 설치되어 있다. (출처 : 경향DB)


상업적이고 영리를 추구하는 사설병원들은 전염병 환자 공개 및 차단, 치료와 병상 제공, 나아가 병원 폐쇄를 당연히 꺼린다. 삼성서울병원은 확산의 두 번째 진원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병원 폐쇄나 병원 환자에 대한 전체적인 역학조사를 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의료행위는 비즈니스 이상의 ‘공공성’을 유지해야 하는 것이고,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국가가 나서야 하고, 공공의료 시스템과 공공병원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메르스는 왜 공공의료 시스템이 유지돼야 하는지를 극명히 드러냈다.

하지만 전염병이 아무리 보편적이고 공공적이라고 해도 그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질병인 한, 그 안에는 계급적 지형이 있다. 국립의료원이 메르스 퇴치 ‘거점 병원’으로 지정되면서, 그 병원의 기존 주요 환자들이었던 서민층 100명이 병상을 비워주고 쫓겨나고 있다는 사실. 흥미롭지 않은가. 평상시에는 돈 많고 시설 좋은, 이를테면 이번에 문제가 된 삼성서울병원 같은 곳을 이용하던 부자들과 중산층들이, 결국 전염병 공포 앞에는 돈 많은 자본이 아닌 공공병원을 선호하고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면서 가난하고 돈 없는 사람들을 위한 공공병원 시설은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는 것.

질병은 설사 그것이 전염병일지라도, 결국 계급적인 성격을 가진다. 스스로 대처하고, 좋은 영양상태에다 병을 이겨내는 많은 ‘자원’을 가진 이들과 없는 이들은 구분된다. 역사적으로 모든 전염병이 그랬다. 전염병은 항상 계급적으로 닥쳤다. 극단적인 예가 14세기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는 ‘흑사병’이다.

메르스 역시 그렇다. 평소 영양상태가 좋지 않은 빈곤층 노약자들, 하루 노동을 잠시 멈추거나 노동 이후 푹 쉬지 못하는 이들이야말로 사회적 ‘고위험군’이다. 예방용 마스크를 쓰고 싶어도 쓰지 못한 채 노동하고 거리에 있는 수많은 노동자들은 또 어떤가. 택시노동자들, 건설노동자들, 서비스노동자들, 이주노동자들, 쪽방동네 사람들. 질병의 계급적 측면이다. 전염병처럼 ‘고위험’ 질병의 경우, 그것은 사회적이다. 즉 계급적이다. 예방도 치료도 사망도. 전염병의 공공성을 확인하는 한편에 메르스의 계급적 지형이 놓여 있다. 진짜 공공성은 바로 그 지점까지 살피는 것일 것이다.


권영숙 | 사회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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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고리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폐쇄가 결정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어제 제12차 국가에너지위원회를 열어 고리 원전 1호기의 영구정지를 한국수력원자력에 권고하기로 했다. 관리·감독 기관의 권고는 한수원의 원전 수명연장 결정에 구속력을 발휘한다. 운영 허가가 만료되는 2017년 6월18일을 끝으로 고리 1호기는 전력 생산을 마치고 폐로 절차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고리 1호기는 1978년 상업운전을 시작하며 국내 원자력발전의 막을 연 원전이다. 2008년 한 차례 수명연장을 거쳐 올해로 37년째 가동 중이다. 그동안 크고 작은 고장과 비리 등 말썽과 잡음이 끊이지 않아 ‘노후원전’ ‘사고원전’ ‘비리원전’ 등의 오명도 얻었지만 한국 원전산업의 견인차이자 역사의 산증인으로서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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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영구정지와 폐로 또한 국내 37년 원전 사상 처음 경험하는 일로 그 역사적 의미와 향후 과제를 우리에게 부여한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뜻깊은 것은 이번 결정이 시민과 여론의 뜻이 적극 반영된 결과라는 점이다. 산업부와 한수원 측은 애초 안전성과 경제성에 별 문제가 없다며 고리 1호기의 수명 재연장을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민·환경단체가 문제를 제기하고 정치권과 부산시, 여론 등이 가세해 폐로 쪽으로 돌려놓았다. 지역·시민사회의 결집된 힘이 국내 원전 역사상 처음으로 폐로 결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정부가 정치·사회적 고려를 반영해 폐로 결정을 내린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나 나름의 평가를 받을 만하다.

폐로는 그동안 경험한 적이 없고 준비도 안돼 있는 새로운 도전이다. 원전 설계나 건설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 수준을 갖춘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실제 해체 과정에서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폐기물 처리나 소요 비용 등에서 어떤 문제가 생길지 불투명하다. 이번 폐로 결정 과정처럼 지역·시민사회가 참여한 가운데 안전한 폐로 절차를 만들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는 고리 1호기 폐로가 원전 정책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돼야 한다. 그제 사용후핵연료공론화위원회는 사용후핵연료를 영구처분할 시설을 2051년까지 건설해서 운영해야 한다는 내용과 그 일정을 담은 권고안을 발표했다. 사용후핵연료 문제 또한 원전 역사 37년 동안 묵혀두었던 난제 중 난제가 아닐 수 없다. 고리 1호기 폐로와 사용후핵연료 처분 등의 난제 앞에서 신규 원전 확대를 고집하는 것은 현 세대의 안전과 미래 세대의 부담을 모두 외면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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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호흡기증후 군(메르스)의 지역사회 전파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메르스 환자로 드러난 경찰의 병원 내 감염 정황이 희박해지면서다. 지역사회 전파는 불특정 다수에 의한 불특정 다수의 감염 가능성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병원 내 감염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대처가 요구된다. 정부는 모든 역량을 가동해 최대한 빨리 감염 경로를 파악하기 바란다.

정부는 애초 경찰 환자가 경기 평택박애병원 응급실에 들른 ‘52번 환자’에게서 감염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병원 측은 확진환자보다 경찰관이 먼저 병원 응급실에 다녀가 둘이 마주치지 않았다며 병원 내 감염 가능성을 부인했다. 이 말이 맞다면 경찰은 병원 내 감염이 아니라 지역사회 등 병원 밖에서 감염됐을 여지가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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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정부는 앞뒤가 맞지 않는 가설을 고집하고 있다. 지역사회 감염 가능성을 배제한 채 “52번 환자로부터 감염 가능성이 있다”고 공식 표명한 것이다. 감염병을 잡으려면 모든 상황을 상정하고 대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넓은 ‘방역그물’을 쳐야 하는 것이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당초 예상을 넘어서는 정황이 나오는데도 억지를 부려서는 안된다. 정부가 폐렴환자 전수조사를 하면서 조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병실이 메르스로부터 안전하다”고 선언한 것도 문제다.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는 게 당연하다.

송재훈 삼성서울병원장이 14일 응급실·외래 업무 등을 24일까지 부분적으로 폐쇄한다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송 원장은 “국민 여러분께 큰 심려를 끼쳐드려 머리 숙여 사죄 드린다”며 “삼성서울병원 본원에서 감염된 모든 메르스 환자의 진료를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밝혔다. (출처 : 경향DB)



보건당국은 어제 메르스 확진환자 증가세가 둔화하고 격리자가 처음으로 감소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공식 방역망 밖 지역사회 전파 우려가 제기되는 점을 감안하면 절대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감염병 재난 극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한다. 경찰 환자 외에 삼성서울병원 외래진료를 받은 확진환자의 감염 경로가 아직 규명되지 않았고, 경기 성남에서는 여자 초등생 양성반응자가 나왔다. 확진되면 ‘첫 10세 미만 환자’ 사례가 된다. 경북의 교사 환자는 메르스 증상이 나타난 뒤에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의원 여러 곳을 찾아간 것으로 드러나 추가 감염자 양산 우려를 낳고 있다. 메르스 사태에 책임져야 할 인사들의 부적절한 언행이 잇따르는 것도 답답한 일이다. “이번 사태는 2009년 신종플루보다 작은 일”(국민안전처 이성호 차관), “삼성이 아니라 정부가 뚫렸다”(삼성서울병원 간부)는 국회 답변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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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의 ‘성완종 리스트’ 수사가 파장 분위기다. 이르면 다음주 초 수사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검찰은 리스트에 오른 8인 가운데 이완구 전 국무총리와 홍준표 경남지사만 불구속 기소하고 나머지 6인에게는 면죄부를 줄 모양이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인터뷰 음성파일과 메모는 물론 측근들의 진술까지 있는데도, 증거가 없다거나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수사를 종결하겠다는 것이다. 메르스 대란을 틈타 어물쩍 넘어가려는 속내가 비친다. 치졸하다.

성완종 리스트 수사의 본질은 ‘대선자금’이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선대위 핵심이던 홍문종 의원과 유정복 인천시장, 서병수 부산시장에 대한 수사에 관심이 쏠린 이유다. 검찰은 그러나 이들 3인에 대해 계좌추적도 벌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홍 의원을 불러 조사해도 별다른 성과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유·서 시장은 소환조차 않고 서면답변서 두 차례 받는 것으로 끝낼 듯하다. 두 달 전인 4월12일 특별수사팀 출범 당시 검찰은 독립적 수사, 성역없는 수사를 공언했다. 다짐은 결국 구두선에 그쳤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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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완종 리스트 8인'수사 진행 상황(홍준표,이완구,홍문종,유정복,서병수,김기춘,허태열,이병기) (출처 : 경향DB)


수사는 초기부터 이상했다. 금품 공여자인 성 전 회장의 최측근 2인은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검찰에 불려가 구속됐다. 성 전 회장 지시로 증거를 은닉·폐기했다는 혐의였다. 검찰은 이들의 신병을 확보해 비밀장부 같은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을 찾아내려 했다. 하지만 최종 결론은 비밀장부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구속된 2인이 숨기거나 없앤 증거는 중요한 자료도 아니었던 셈이다. 특별수사팀 구성 이후 구속자는 이들 2인뿐이다. 돈을 건넸다는 쪽은 구속되고 받았다는 쪽은 불구속 또는 무혐의 처리된다면, 본말 전도 아닌가. 검찰은 리스트에 오른 정권 실세 대신, 이미 사망해 ‘공소권 없음’ 대상이 된 성 전 회장 쪽만 겨냥해 수사를 벌여온 셈이다.

이번에도 검찰은 ‘살아있는 권력’ 앞에 무력하고 무능함을 여실히 드러냈다. ‘끈 떨어진’ 이 전 총리나 ‘친박 실세 아닌’ 홍 지사로 체면치레만 하고, 정권의 아킬레스건에는 눈감은 것이다. 검찰이 대선자금 의혹을 기어이 덮고 가겠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특별검사에게 사건을 넘겨 전면적으로 재수사하는 수밖에 없다. 국회는 검찰 수사결과가 발표되는 대로 특검 도입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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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이야기를 하고 보니 책 빌리는 이야기(거꾸로 책 빌려주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부 혹은 연구하는 사람이 어떤 책을 필요로 하는데, 또 그 책이 누구에게 있는지 번연히 아는데, 책을 빌려 볼 수 없다고 하자. 역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책이 어떤 공부를 하는 어느 연구자에게 필요한 것을 안다고 하자.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빌려주어야 한다. 그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도리다.

다산 정약용 이야기를 해보자. 다산은 알다시피 조선 최고의 학자다. 그의 학문은 실로 광범위해 경학, 문학, 사학, 경제학, 행정학, 음악학, 지리학, 언어학 등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그런데 그가 가장 힘을 쏟았던 분야는 경학(經學)이었다. 경학이란 경전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정하려는 학문이다. 주자학의 본령도 경학이다. 주자의 <사서집주(四書集註)>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에 대한 기존의 모든 주해를 비판하고 자신의 주해를 통해 독특한 해석을 제시했고, 그 위에 자신의 장대한 철학을 축조했다. 주자 이후 사서의 해석은 그의 <사서집주>를 따랐다.

명나라 영락제(永樂帝) 때 편찬된 <사서대전(四書大全)> <오경대전(五經大全)>은 주자와 그 학파의 주해를 선택한 국정 표준 주해서였다. 여기서 과거 문제가 출제되었기에 이 두 주해서의 중요함이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명은 물론 조선도 대전본(大全本)을 표준 주해서로 삼았다. 그런데 대전본은 워낙 졸속으로 만들어졌기에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드디어 명말(明末) 청초(淸初)의 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가 <일지록(日知錄)>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이란 논문에서 대전본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조선이 그동안 절대적으로 신임했던 텍스트의 문제가 노출된 것이다.

한편 주자의 주해도 문제가 있음이 지적되었다. 모기령(毛奇齡, 1623~1718)이 경전과 역사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주자의 경전 주해가 오류임을 주장했다. 모기령은 주자에게 심사가 꼬였던지 주자의 학설이라면 괜찮은 것도 증거를 찾아 억지로 부정하는 짓을 서슴지 않아 비난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 해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려 죽는 일은 없었다. 어쨌거나 모기령의 경학이 18세기 후반 조선 학계에 수입되자 논란이 일어났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다.

모기령과 아울러 경학에 일대 충격을 던진 사람은 염약거(1636~1704)였다. 유교 정치학의 오리지널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서경(書經)>(다른 이름은 <尙書>)은 원래 진시황의 분서(焚書) 때 사라졌다가 뒤에 다시 출현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텍스트가 등장했는데, 그 과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어쨌거나 동진(東晉) 이후 <고문상서> 25편과 <금문상서> 33편을 합친 것이 지금까지 읽히고 있는 <서경>이다. 이후 사람들은 이 텍스트를 교과서 삼아 읽었다. 그런데 ‘고문’이라고 한 것이 문장이 읽기 쉽고, 금문이라 한 것이 읽기 어려운 등의 문제가 있었다. 학자들은 ‘고문’ 쪽이 수상했지만, 가짜라고 단정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염약거의 업적은 엄밀한 문헌적 증거를 들어 ‘고문’ 쪽이 가짜라고 밝힌 데 있다. 너무나 완벽한 증거 앞에 더 이상의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고문’ 쪽의 <대우모(大禹謨)> 역시 가짜였고 <대우모>에 근거해 성립한 주자학 역시 치명상을 입었다. 그런데 희한한 일이 생겼다. 사사건건 주자의 학설이라면 반대하던 모기령이 이번에는 염약거에 반대해 <고문상서원사>를 써서 <고문상서>가 진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 학계에서는 <고문상서>의 진위를 둘러싸고 논란이 그치지 않았다.

중국 대륙에서는 염약거와 모기령이 나와 <서경>의 절반이 가짜니 아니니, 주자가 옳니 그르니 하고 논란이 뜨거웠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상황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정이 전해진 것은 대체로 1760년대 말부터다. 18세기 후반 경학 쪽에 전에 없던 논의들이 풍성해진 것은 대륙의 이런 학문적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1776년 즉위한 정조가 경사강의(經史講義)를 열고 경전과 역사에 대해 토론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모기령과 고염무의 학설이 검토되었다. <고문상서>의 진위도 다루어졌다. 다산은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신유사옥 때 걸려든 다산은 강진 귀양지에서 학문에 몰두했다. 그의 거창한 경학 방면의 업적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그 중 <매씨서평(梅氏書評)>이란 책이 있었다. <서경>의 절반인 <고문상서>가 동진(東晉)의 매색이 날조한 가짜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 문제는 100년도 전에 염약거가 <상서고문소증>에서 이미 밝힌 것이 아닌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다산은 <상서고문소증>의 존재를 몰랐던 것이다. 다산만이 아니라 대체로 18세기 말까지 조선 학계는 모기령은 알아도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은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모기령의 <고문상서원사>가 <상서고문소증>을 의식해 저술되었는지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사실 18세기 조선 학계에 정보가 어떻게 유통되고 있었는지를 따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지만, 현재 학계에서는 이 문제를 다루지 않고 있다.

1818년 다산은 강진 유배지에서 풀려나와 <매씨서평>의 원고를 홍현주(洪顯周)에게 보냈다. 홍현주는 정조의 사위고, 그의 형 홍석주는 영의정까지 올랐다. 그의 집안은 명문 중의 명문이었고, 장서가로도 유명했다. <매씨서평>의 원고를 본 홍석주는 홍현주에게 염약거의 <상서고문소증>을 다산에게 보내라고 한다. <매씨서평>의 부족처를 보완하라는 의미였다. 책을 받아든 다산은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이내 <매씨서평>을 고쳐나갔다. 홍석주는 노론이고 다산은 남인이었다. 평소 서로 오가는 관계가 아니었다. 하지만 홍석주는 다산이 필요한 책을 보냈다. 다산은 책의 말미에 홍석주 형제가 책을 빌려준 데 대해 진심으로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들 형제의 호의가 아니었더라면 <매씨서평>은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모쪼록 책을 빌려줍시다!


강명관 |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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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

6월11일 오전 8시까지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감염자는 122명이고 9명이 사망했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국가의 기본 책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세월호 침몰 때처럼 이번에도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내지 못했다. 게다가 외국인들의 한국관광 취소와 소비수요 위축으로 우리 경제는 큰 손실을 입었다. 이것은 메르스 사태의 ‘현상’이다.

그런데 어떤 사안의 드러난 현상만 봐선 안된다. 본질을 봐야 한다. 그래야 거대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메르스 사태의 ‘본질’은 무엇인가. 바로 대한민국의 저열한 사회공공성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가 포함된다. 하나는 정부의 무능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불신이다.

먼저 ‘정부의 무능’부터 살펴보자. 세계화 시대에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사스)이나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의 국내 전파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결국 ‘얼마나 잘 막아내느냐’가 관건인데, 이는 정부의 두 가지 방역 능력에 달려 있다.

첫째, 정부는 신종 감염병 환자를 조기에 발견하고 진단하는 효과적 감시체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메르스는 3년 전부터 중동에서 유행했으므로 언제든지 감염자가 국내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경각심을 가지고 감시체계를 체계적으로 작동시켰어야 했다. 그러나 잠복기 상태로 입국한 최초의 메르스 환자는 발열과 기침 증상을 보였던 지난 5월11일부터 확진을 받았던 5월20일까지 무려 4곳의 의료기관을 다니며 바이러스를 전파했고, 그동안 우리 정부의 감시체계는 무능했다. 인력과 시설 등 감시체계의 공적 인프라가 구조적으로 취약하기 때문이다.

둘째, 정부는 신종 감염병의 확산을 조기에 차단할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여기서도 무능했다. 이는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제약조건 때문이다. 메르스 확산의 첫 번째 온상이었던 평택성모병원 역학조사에서 드러났듯이 우리나라는 병원시설이 감염병의 병원 내 확산에 매우 취약하다. 게다가 환자 공용병실에서 가족들이 자유롭게 오가며 간병하는 후진적인 돌봄 환경도 사태를 악화시켰다. 이렇게 감염병에 취약한 병원 환경이라는 구조적 요인을 그대로 방치한 것도 정부의 무능에 해당한다.

중요한 정부의 무능이 하나 더 있다. 평택성모병원의 경우처럼 신종 감염병이 병동으로 확산된 때는 신속하게 병원을 폐쇄하고 밀접 접촉자 전부를 시설에 격리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선제적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럴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감염병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격리시설 등의 공공의료 인프라가 극히 취약하다. 그렇다고 민간병원을 강제로 폐쇄하고 시설격리를 추진할 만한 제도적 준비도 갖춰져 있지 않다. 보건의료의 공공성이 OECD 최하 수준이다. 그래서 일을 키웠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는다”는 속담이 여기에 해당한다. 결국 우리 사회는 엄청난 비용을 치렀다.

다음으로 ‘사회적 불신’을 살펴보자. 세월호 침몰 때처럼 메르스 사태에서도 정부는 여전히 무능했다. 누구나 정부의 무능을 질타한다. 그런데 정부는 무엇인가? 정부는 곧 사회공공성이다. 정부가 무능한 것은 사회공공성이 저열하기 때문이다. 사회공공성이 낮은 국가는 신뢰수준도 낮다. ‘함께 살자’는 연대의 공동체 의식 대신에 ‘나만 살자’는 각자도생과 이기심이 판치게 된다. 시장만능주의 사회에서 메르스 사태를 맞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그런 모양새다. 사회공공성이 낮은 곳에서 사회적 불신은 높기 마련이다.

의학적으로 메르스는 의료기관 감염으로 확산되고 환자와 밀접하게 접촉한 경우에만 비말로 전파된다. 공기 감염은 일어나지 않는다. 보건복지부가 학교 휴업은 불필요하고 의학적으로도 옳지 않다고 발표했고, 대한감염학회 이사장도 신종플루 때는 학교가 전파의 온상이었기 때문에 휴업이 타당할 수 있지만 메르스는 학교와 무관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의 요구로 10일 현재 2474개 학교가 휴업했다. 정부의 발표조차 신뢰하지 못하는 사회적 불신이 집단적 불안으로 증폭된 것이다.

8일 메르스로 인한 휴교에 들어간 서울 서초구 한 초등학교 운동장이 텅 비어 있다. 서울 강남구와 서초구에 있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경기도 일부 초등학교 등이 휴교를 결정했다. (출처 : 경향DB)


정부의 무능과 사회적 불신은 낮은 사회공공성의 다른 이름이다. 지난 20년 동안 역대 정부와 정치권은 사회공공성 확충을 방기했고 민영화를 추진했다. 이것이 메르스 사태를 초래했다. 공적 영역을 키워야 한다. 사회공공성 확충을 위해 세금을 더 내고 법률에 따른 제도적 규제를 감내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안전망이 튼실해지고 생명과 안전을 지킬 수 있다. 공공성 높은 사회일수록 국가에 대한 신뢰가 높고 이웃을 믿는 열린 공동체로 발전한다. 이것이 복지국가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의 본질은 ‘저열한 사회공공성’이며, 그러므로 올바른 해법은 무능한 시장만능주의 ‘작은 정부’를 넘어 공공성 높은 역동적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상이 |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대표·제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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