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어제 미국 대통령으로는 24년 만에 한국 국회에서 연설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연설에서 굳건한 한·미동맹을 재확인하면서 6·25 이후 남북한이 걸어온 길을 극적으로 대비했다. 남한의 정치·경제적 성장을 극찬한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지옥” “감옥국가”라며 맹비난했다. 북핵에 대해서는 “김정은 당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심각한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미국과 동맹국이 위협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면서 “미국을 시험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중국을 지목하며 더 크고 강한 대북 압박과 제재를 주문하고 힘을 통한 평화 유지를 강조하기도 했다.

트럼프 국회 연설의 대북 발언 수위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발언에 비해 높다. 한국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연설에서 다 쏟아낸 듯싶다. 연설만 놓고 보면 트럼프가 대북 강경 기조로 돌아선 것 아니냐고 의심할 법하다. 보수야당들은 북한에 강력한 경고메시지를 보낸 연설이라며 환영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이후 24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서 국회 연설을 하고 있다. 권호욱 기자

애초 트럼프 대통령의 국회 연설은 상대 없이 혼자서 진행하기 때문에 대북 강성발언이 나올 수 있다는 관측이 우세했다. 예상대로 트럼프는 억압과 경제적 궁핍으로 고통받는 북한 주민의 생활상을 일일이 열거하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데 연설의 대부분을 할애했다. 남한에 대해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을 꾸려나가고 자유와 정의, 문명과 성취라는 미래를 선택했다”고 평가한 반면 북한에 대해서는 “부패한 지도자가 압제와 파시즘, 탄압이라는 기치 아래 자국민을 감옥에 넣었다”고 지적했다. 번영하는 한국의 존재 자체가 북한 독재체제의 생존을 위협한다고도 했다. 트럼프는 또한 “북한 김정은에게 직접 전할 메시지가 있어 왔다”면서 “당신이 획득하고 있는 무기는 당신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심각한 위협에 빠뜨리고 당신이 직면할 위협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부정적인 대북 인식은 새로운 게 아니다. 과거 그는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해 이보다 훨씬 더 심한 용어를 구사하며 비판해왔다. 북한 김정은 정권의 열악한 인권과 독재, 핵·미사일 위협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관건은 이런 북한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가 “우리는 북한이 올바른 선택을 할 경우 더 나은 미래를 제공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힌 것은 주목된다. 비록 탄도미사일 개발중단과 완전하고 검증가능한 총체적 비핵화를 전제로 했지만 북·미관계 개선이나 대북 지원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북한에 대해 부정적 언급만 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메시지를 함께 보내며 나름대로 균형을 갖추려고 노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제 한·미 정상회담 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북·미 직접 대화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고 대답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트럼프의 발언 하나로 미국의 대북 기조가 바뀔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과잉 해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핵 문제에서는 조그만 단서라도 놓치지 않고 포착해 기회로 활용하는 자세가 중요하다. 이제 한국 정부는 트럼프 행정부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길로 가도록 이끌어야 하는 숙제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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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뉴스 편집 재배치로 인해 검색 등 네이버 서비스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는 사실상 거의 무너졌다. 네이버가 지금의 네이버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이해진 창업자와 직원들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기여한 수백만명의 사용자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네이버 성장의 견인차가 된 지식인 서비스 역시 누리꾼들 덕분이었다. 그럼에도 네이버는 기득권이 되면 한순간에 권력과 재벌의 편이 되어 동업자의식을 갖는 우리 사회 추악한 일면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그들을 키워준 국민과 누리꾼들을 배신한 것이다. 게다가 기사 재배치 조작이 스포츠에 한정됐다고 말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작태다. 왜 우리는 네이버의 기사 재배치에 이토록 분개하는가. 네이버는 대한민국의 생각과 인식을 움직일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영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몇년 전 나는 한 자영업자가 보낸 하소연을 잊지 못한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사이트 등록을 했지만 네이버에서 검색이 잘되지 않는다는 하소연이었다. 그는 네이버 고객센터에 수차례 연락과 문의를 했지만 몇개월이 지나도 아무런 연락이나 답변을 듣지 못해 상심해 있었다. 넉넉한 형편이 아닌 것 같아 돈만 내면 초기화면에 실어주는 네이버 파워링크를 굳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는 무시와 냉대를 받은 것이 너무 억울해서 네이버 본사 앞에서 분신하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약자에게는 이처럼 무례한 네이버가 권력과 재벌에는 어떤 태도를 보여왔는가. 지난 7월 모 신문사가 검찰·특검 수사자료를 입수해 보도한 “삼성이 이재용에게 불리한 기사의 포털 노출을 막았다”는 기사에는 삼성의 한 임원이 장충기 전 미래전략실 사장에게 보고 형태로 보낸 문자메시지가 나온다.

“(네이버와 다음) 양쪽 포털사이트에 미리 협조요청을 해놔서인지 조간 기사가 전혀 노출되고 있지 않다. 포털에 노출되지 않아 댓글이 퍼지고 있지 않은 추세. 기껏해야 댓글은 10여개.” 이 문자메시지는 많은 것을 시사한다. 물론 네이버는 사실이 아니라고 부인했고, 삼성 역시 “담당 임원이 자신이 네이버에 부탁한 게 반영된 것으로 알고 잘못 보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우선 삼성과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미리 협조를 요청해서인지”라는 대목에서 알 수 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또 포털에 노출되지 않을 경우 기사의 가치나 중요성과 상관없이 댓글이 붙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뉴스의 가치나 뉴스를 생산한 신문사나 기자, 칼럼니스트가 누구냐 하는 것과도 상관없다. 오로지 메인화면에 노출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모바일, 즉 스마트폰을 통한 뉴스 소비가 추세인 상황에서 소비자들은 네이버 초기화면에 뜨는 오로지 5개의 뉴스에서만 선택할 수 있다. 쉽게 말해서 네이버 편집자가 메인화면에 뽑은 기사는 대체적으로 이용자들이 많이 본 뉴스가 되며 동시에 댓글이 가장 많이 달리는 기사가 된다. 만일 네이버가 검색조작이나 편향적인 기사편집과 재배치에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통제하고 있었더라면 부패한 정권이나 세력들은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산처럼 드러나고 있는 적폐 양산의 또 다른 공범자가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지금의 네이버 뉴스 서비스는 어떤 면에서 언론 위에 군림하는 ‘옥상옥’이다. 네이버는 알고리즘 운운하면서 검색과 뉴스 배치에 시스템이 개입돼 있어서 공정성을 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치명적인 시스템의 오류보다 더 치명적인 인간의 손이 개입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번 스포츠 기사 재배치 조작 사건이 그저 빙산의 일각이라고 믿고 있다. 네이버가 언론사들이 만들어준 기사를 자기 입맛대로 주무르면서 권력이나 재벌들과 밀착관계를 이어온 게 아니냐는 의혹 역시 끊이지 않는다. 뉴스 서비스 외에 검색조작 문제도 네이버가 넘어야 할 산이다. 독재정권은 담론을 만들어, 즉 의미를 생성해내고 그것을 사회구성원들에게 무의식 혹은 의식적으로 강제로 주입시켜왔다. 실시간검색어의 경우 사회구성원들의 생각과 관심까지 조작할 수 있다. 검색은 인터넷과 현실 세계에서 우리의 생각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때로는 우리의 인식 범위를 결정하기도 하고, 행동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이는 책이나 영화, 병원, 학교, 디지털기술 등을 평가하고 순위를 매기기 때문이다.

네이버는 그동안 한 번도 정부당국의 요청으로 실검을 삭제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물론 이 바닥 사정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을 곧이 믿는 사람은 없다. 그동안 검색결과나 조작된 실시간검색어에 대한 제보가 쏟아졌다. 네이버의 이번 기사 재배치는 화면조작을 한 일종의 피싱에 가까운 범죄라 할 수 있다. 정보 교란행위다. “악해지지 말자”는 구글은 한국에서 1조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면서도 한 푼의 법인세도 내지 않고 있다. 서버를 두지 않는다는 구차한 변명을 하면서. 초심을 잃은 구글의 철면피 행각. 구글을 떠올리면서 네이버가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희원 인터넷진흥원 수석연구위원 | '해커묵시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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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일 변정수 초대 헌법재판관(재임기간 1988~1994)이 타계하셨다. 나는 헌법재판소 연구관으로 5년간 변 재판관을 보좌했다. 변 재판관과의 만남은 법조인으로서 오늘의 내 삶의 자세를 견지하도록 하는데 깊은 영향을 준 소중한 인연이었다. 사건의 배후에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공권력 남용에 맞선 투쟁정신 등이다. 더 나아가 재판은 건전한 상식과 순리에 입각한 단순 명료하고 간단 명쾌한 것이어야 당사자와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는 것, 논리적이고 현학적 법리에 입각한 재판만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역시 그의 지론이었다.

변 재판관은 한국의 올리버 웬들 홈스다. 홈스는 ‘법은 논리가 아니라 경험’이라고 주창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위대한 소수의견자다. 많은 학자들은 그가 재임 중 낸 60여 건의 소수의견과 20여 건의 위헌결정이 오늘의 헌재 위상 정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검사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첫 위헌결정으로 검찰권에 대한 헌법적 통제를 가능하게 했으며, 대법원 규칙인 법무사법시행규칙에 대한 위헌결정으로 헌재와 대법원의 관계 정립뿐만 아니라 법률의 하위 법령에 대한 헌법심사를 가능하게 했다.

특히 위 대법원 규칙에 대한 위헌결정이 나오기까지 주심인 변 재판관이 겪었던 고초는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일로서, 그의 불굴의 소신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변호인이 구속 피의자, 피고인을 만날 때 교도관이 입회하여 대화 내용을 적고 사진 찍는 관행을 없앤 것도 그의 공로였다. 억강부약(抑强扶弱), 즉 강자보다는 약자를 위하는 자세와, 국민의 기본권이 국가 권력에 우선한다는 그의 일관된 헌법관은 후학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허약한 체질에다 잔병이 많고 하루도 편할 날이 없이 평생 병에 시달려 왔다. 마음도 몹시 약하고 눈물이 헤프다. 마음은 너그럽지 못하고 소심하다. 사교는 즐기지 않고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얼굴이 붉어지기 때문에 말도 잘하지 못한다. 머리의 회전도 느리다.’(변정수 회고록, <법조여정> 중에서)

참으로 겸허한 자기 성찰이다. 곁에서 지켜본 그는 다정다감하고 인정이 넘쳤다. 약자를 편들고 강자를 싫어했다. 고집은 세지만 옹고집은 아니었다. 합리적인 논거와 이유를 제시하면 자신의 주장을 시정하였다. 책임감이 강하고 돈보다 명예를 중히 여기고, 항상 검소한 생활태도를 잃지 않았다. 농촌 풍경, 특히 논두렁, 밭두렁을 너무 좋아한다고도 했다.

그가 낸 소수의견은 대부분 8 대 1의 외로운 길이었다. “뜻을 같이하는 재판관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연구관한테 이런 얘기는 안 해도 되는데….” 평의를 끝내고 종종 나를 불러 한 말씀들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재임기간 내내 인간적인 외로움을 감내했다. 퇴임 후에는 장관급 공직자에게 의례적으로 주어지는 청와대의 훈장 제의를 끝내 거절했다.

그가 개척했던 길은 이제 아름다운 동행이 넘치는 길로 헌법재판사(史)에 우뚝 섰다. 법조인으로서 초입에 그를 만나 엄격한 단련을 거쳤던 것은 나에게는 큰 행운이었다. 관용과 진실에 기초한 공동체 정신을 헌법적 가치로 회복해야 할 이 시기에 우리는 헌법의 거목을 잃었다.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기를….

<이석연 | 변호사·전 법제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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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 가서 일하는 아저씨가 여럿 있었다. 어른들이 ‘사우디에 갔다’는 말끝에 붙이는 형용사에는 대개 안쓰러움이 담겨있었다. 어른들의 오가는 말속에 ‘사우디’는 달걀을 도로 위에 깨트리면 지글지글 익어버리는 뜨거운 태양과 온종일 입안에서 서걱거리는 모래바람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그 나라 이름을 들을 때마다 모래바람을 뒤집어쓴 채 끝도 없이 이어지는 파이프 위에 듬성듬성 서 있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아무튼 뜨거운 사막에서 땀 흘린 이들은 집으로 돈을 부쳐서 모래바람은 집이 되고 텔레비전이 되고 냉장고가 되었다.

이제 아이들은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하면 석유와 잘 나가는 축구팀 하나쯤 사는 건 일도 아닌 거부를 떠올릴 테고, 어른들은 가물가물한 못 먹던 시절 얘기를 더는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한테는 잊힌 아니 잊으려고 하는 고달픈 ‘이주 노동’은 지구 곳곳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김포에 있는 공장에서 몇 년째 일하고 있는 청년은 방글라데시에서 왔다. 다카에서 한참 들어가야 하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산다는 그의 ‘이주 노동’은 마치 품앗이와 같다.

“큰형은 오랫동안 사우디에서 일했어요. 형이 번 돈으로 내가 학교에 다니고, 우리 식구 다 먹고살았어요. 지금은 내가 해요.”

그의 서툰 한국말에서 ‘사우디’가 내 귀에 아주 선명하게 박히면서 청년의 까맣고 큰 눈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연대감과 같은 감정이었다. 우리는 모래바람 속에서 일한 이들을 통해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청년은 형이 그랬듯이 월급을 죄다 집으로 보내고, 식비로 받는 20만원으로 생활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일하는 건 좋아요. 가족들이 보고 싶은 게 가장 힘들어요.”

그러고 보니 사우디아라비아에 몇 번씩 다녀온 우리 동네 아저씨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애들이 보고 싶어서 정말 또 나가고 싶지 않다고. 거친 모래바람보다 낯선 땅의 서먹함보다 쉼 없이 되풀이되는 노동보다 힘든 것은 여전히 그리움이었다.

<김해원 |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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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령사회를 대비해 출산율을 높여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춘 현 출산장려정책은 한마디로 문제가 있다. 2000년 고령화사회로 돌입한 후 출산율이 계속 떨어지면서 정부는 부랴부랴 출산장려책으로 돌아서 2006년부터 10년간 무려 102조원에 달하는 엄청난 재정을 투입했다. 하지만 결과는 출산율이 오르기는커녕 더욱 떨어져 합계출산율 세계 최저수준(2016년 1.17명)에 머물러 있다.

이 같은 국내 고령화 저출산 문제해결 난맥상은 바로 인구학적 정책 결여가 가져다준 단적인 사례이다. 한국인구학회는 2005년 보건복지부로부터 용역을 받아 우리나라 적정 인구에 대해 연구한 바 있다. 당시 15세 미만과 65세 이상 비생산연령에 대한 부양비 등을 기준으로 할 때 4600만~5100만명을 적정인구로 추정했다. 또한 복지적 관점으로 4900만~4950만명, 쾌적성과 풍요성 등을 고려한 환경측면에선 4750만~5300만명인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 연구는 연구로 끝났다. 국가 정책에 이 같은 인구학적 연구를 거의 참고하지 않았다. 인구학회는 당시 “적정 인구규모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남북통일과 동북아시아 중심국가 시대에 대비해 북한을 포함, 한반도 전체의 적정인구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돼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연구의 타당성에 대한 검증은 물론 후속 조치마저 없었다.

최근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은 그 파급효과가 산업현장은 말할 것 없고 교육과 경제·사회에서 국방과 정치에까지 크게 확대되어 갈 것이 분명하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은 국가의 적정 인구문제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한 시대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의 잣대로 고령화에 따른 미래의 적정 생산인구 수의 산출은 큰 의미가 없다. 수가 아니라 질이 중요해진 시대가 됐기 때문이다. 출산도 중요하지만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인력을 키워내야 한다. 출산장려에 앞서 이미 확보된 인력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국가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고령화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출산장려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다문화가족 구성원과 모든 소외계층 자녀가 미래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으로 커나갈 수 있도록 돕는 일에 힘써야 한다. 아울러 고령자 문제로 파생될 일자리는 ‘노노케어’로 풀어가는 정책 등 고령자 활용의 길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인구문제는 국가 백년대계와 직결되는 사항이고 인구학은 바로 이 문제를 종합적으로 다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분야이다. 늦었지만 이제부터라도 우리의 고령화 저출산 문제에 대한 해법을 인구학적 접근을 통해 모색해야 한다. 나아가 한국의 국토면적과 기후, 산업형태에서 지정학적인 문제 등을 포함한 장기적인 안목에서 종합적이면서 현실적인 인구정책을 마련하길 바란다.

<이광영 | 한국골든에이지포럼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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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뜻이다. 본래의 좋은 성질이 바뀐 환경 때문에 나빠진 경우를 묘사하려고 자주 인용된다. “한국에 태어났다면”이라는 도입구로 시작되는 집단창작물은 귤화위지의 인터넷판이라 할 수 있다. 귤화위지는 “아인슈타인이 한국에 태어났다면 대학입시에서 낙방했을 것이다”라든가 “마리 퀴리가 한국에 태어났다면 봉제공장 미싱사가 되었을 것이다” 등으로 응용되어 무한확장된다.

“회수를 건넜더니” ‘귤화위지’되기는커녕 ‘청출어람’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서양의 포크커틀릿이 동양에 건너와 돈가스로 변신했지만, 돈가스의 맛은 포크커틀릿 그 이상이다. ‘차폰(吃飯)’이 바다를 건너면 ‘잔폰(ちゃんぽん)’이 되고, ‘잔폰’이 다시 한번 바다를 건넜더니 ‘짬뽕’으로 변하기도 한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각각의 개성을 지닌 음식이 “회수를 건넜기에” 탄생한 것이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1902년 문을 연 손탁호텔에 있던 정동구락부가 한국 최초의 커피숍이라고 한다. 그로부터 100여년이 지난 후 한국은 카페 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도시 곳곳에 카페가 있다. 카페는 처음 등장했을 때 유럽에서는 문예 비평의 중심지이자 시민혁명을 가능하게 했던 정치 비평의 근거지였다고 한다. 그 카페가 “회수를 건너”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리고 카페는 한국의 환경에 적응하며 변주되어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이라 하여 ‘카공족’이라 부르는 한국형 도시부족을 낳았다.

공부를 위한 공간이 아닌 카페에 장시간 죽치고 앉아 테이블 회전율을 떨어뜨리는 민폐족이라는 비난을 듣기도 하는 ‘카공족’을 관찰하기 위해 서울에서 가장 큰 대형서점 근처의 카페를 찾아갔다. 자리를 찾기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이 카페에 있지만 의외로 조용하다. 도서관을 연상시킬 정도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보다 공부를 하는 사람이 더 많다. ‘카공족’의 일원이 되어 카페에서 공부하며 각양각색의 ‘카공족’을 살펴봤다. 그리고 페이스북에서 자칭 ‘카공족’인 사람에게 카페에서 공부하는 까닭을 물었다.

‘카공족’이 아닌 사람에게 ‘카공족’은 동일한 속성을 지닌 집단처럼 보이지만 ‘카공족’이 된 저마다의 속사정은 다르다. ‘카공족’은 단일한 집단이라기보다 팔색조에 가까운 다채로운 도시부족이다. “~라 쓰고 ~라 읽는다”는 인터넷 이디엄을 ‘카공족’ 각자의 사정을 해독하기 위해 빌려온다.

삼복더위가 찾아왔는데도 집에 에어컨이 없거나,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요금 청구서가 두려운 사람, 겨울이어도 햇볕이 한 줌도 들지 않는 반지하에 사는 사람은 카페에서 도피처를 찾는다. 이 경우 ‘카공족’이라 쓰고, 주거문제라 읽어야 한다. 다국적 카페가 도시인 자격을 부여하는 듯한 막연한 느낌이 좋아 카페에서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카공족’이라 쓰고 힙스터 강박이라는 도시질병으로 읽어야 하는 경우다. 근처에 도서관이 없어서 가까운 카페에서 공부하기도 한다. ‘카공족’이라 쓰고 공공도서관 부족이라고 읽어야 한다.      

가사노동 압박 때문에 집에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어서 카페를 찾는 사람도 있다. ‘카공족’이라 쓰고 여전히 여성의 몫으로 남겨진 가사노동이라 읽는다. 프리랜서 재택근무자는 출근하는 느낌으로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간다. ‘카공족’이라 쓰고 숨겨진 작업장이라 읽는다. 무조건적인 정숙을 강요하는 질서정연하게 책상이 배치되어 있는 도서관이 갑갑한 사람은 테이블이 무정형으로 배치되고 높은 천장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카페에서 공부한다. ‘카공족’이라 쓰고 도시의 카라반이라 읽고 싶은 사례이다.

도서관에선 노트북용 콘센트는 희귀재이나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가 넘쳐흐르고 무료 와이파이까지 제공되는 카페는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인터넷 강의를 들어야 하는 사람, 높은 토익점수를 따려고 반복노동이 되어버린 한국형 공부를 해야 하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이 경우 ‘카공족’이라 쓰고 스펙 사회라 읽는다. 스펙을 위해 공부해야 하는 현실이 지겨운 사람은 카페에서 동일한 처지의 사람을 시각적으로 확인하며 위안을 얻는다. ‘카공족’이라 쓰고 쉼터라 읽어야 하는 경우다. ‘카공족’이 되고 싶어도 경제적 부담이 커 포기하는 사람도 있다. ‘카공족’이라 쓰고 소득불평등이라 읽는다. ‘카공족’을 관찰한다는 핑계로 카페를 찾은 나는 반복 구매자에게 증정하는 다이어리에 한층 다가섰음을 느끼며 기뻐했다. ‘카공족’이라 쓰고 시지푸스적 욕망에 포획된 소비자라고 읽었다.

이 다양한 사정의 ‘카공족’ 중 어떤 ‘카공족’이 미래를 지배할지 아직은 모른다. ‘카공족’의 미래는 ‘카공족’을 낳은 환경의 미래에 달려 있다. ‘카공족’이 ‘탱자’인지 ‘청출어람’인지도 그때 최종 판가름날 것이다.

<노명우 | 아주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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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1일은 농업인의날이다. 농업인의날이 11월11일인 이유는 숫자 11을 한자로 표시하면 ‘十一’이 되고 이를 합치면 흙 토(土)가 되고, 농사를 짓는 데 무엇보다 중요한 흙의 가치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빼빼로데이’로 대표되는 상업적 기념일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묵묵히 땀 흘려 일해온 농업인들의 소외감을 외면한 채 중공업 중심의 수출정책을 펴온 정부의 농업분야 홀대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하지만, 관련 예산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이다. 그나마 개헌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농업 관련 단체가 뜻을 모아 ‘농민 권리와 먹거리 기본권 실현을 위한 헌법개정운동본부’를 출범시켰고, 농협중앙회는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대한 중요성을 헌법에 명시하기 위한 ‘농업가치 헌법 반영 범농협 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지난 1일부터 국민 공감 1000만명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농업의 공익적 기능이란 식량을 공급하는 기능 외에도 환경보전, 농촌 경관 제공, 전통문화 유지, 수자원 확보와 홍수 방지, 식량안보에 기여하는 등 농업과 농촌의 유·무형의 가치를 말한다. 최근에는 식품 안전, 쾌적한 휴식공간 제공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가 갈수록 커져 경제적 가치가 100조원 이상으로 추정될 만큼 소중한 자산이다.

농업인의날이 진정한 잔칫날이 되기 위해서는 획기적인 농업예산 확보가 최우선 과제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헌법에 농업의 공익적 기능과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 이를 통해 농업·농촌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국토의 균형있는 발전과 농업인의 소득 증대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김병순 | 농협경주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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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금요일, 북한산 백운대에 오른 후 내려올 때의 일이다. 잠시 쉬었다 가려고 백운대 휴게소 옆 샘물가에 갔는데 서서히 헬기 소리가 커지더니 거센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낙엽이 소용돌이치며 얼굴을 때리고 시야를 가렸다. 서 있기가 힘들 정도로 바람이 강해, 주저앉아 몸을 웅크리고 모자를 두 손으로 꼭 붙잡았다. 설상가상으로 사람 키보다도 큰 드럼통 여러 개가 무섭게 굴러다녔고, 그 과정에서 드럼통에 맞아 허벅지에 크게 피멍이 들고 부어올랐다. 말 그대로 이러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헬기가 사라진 후 휴게소 국립공원 직원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런데 직원의 반응에 나는 놀랐다. 직원은 저기에 가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등산객은 그 설명을 못 들을 수 있다’ ‘헬기가 들어올 동안은 제대로 통제했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하자, 직원은 ‘그럼 내가 뭘 해줘야 하냐’며 ‘정규직도 아닌 계약직 직원이니 차라리 북한산국립공원 사무소에 연락하라’고 했다.

직원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거니, 용암사라는 절에 공사 장비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헬기가 다니면 안되는 길로 지나가서 생긴 일로, 책임은 강북구에 있다고 했다. 이번엔 강북구청에 전화를 걸어 또 한참을 설명하니, 담당자가 자리에 없으니 연락을 드리겠다고 하고는 지금까지 연락이 없다.

북한산 내 작업 처리 방식과 직원들의 태도를 보고 있자니, 등산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공사 명목으로 다니면 안되는 경로로 헬기를 띄워 언제든 등산객을 공포에 떨게 만들 수 있으며, 그래놓고도 잘못이 없다, 책임은 다른 곳에 있다고 미루기에 급급하니 말이다. 이 정도의 안전의식을 가진 직원들을 신뢰하고 산에 갔다가 더 큰일을 당했으면 어땠을까 싶어 모골이 송연해진다. 단풍철을 맞아 북한산을 찾을 많은 등산객들에게 이를 꼭 알리고 싶다.

<황성혜 | 서울 성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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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우이(執牛耳), ‘쇠귀를 잡다’라는 말이 있다. 춘추시대 제후들은 맹약을 체결할 때 소를 잡아 그 피를 돌려가며 입술에 바르는 삽혈의식을 거행했다. 맹약을 어길 경우 그 소처럼 피를 흘리며 죽어도 좋다고 맹세하는 것이다. 소의 귀를 잘라 피를 받고 쟁반 위에 올려놓으면 맹약을 주도한 이가 가장 먼저 쇠귀가 든 쟁반을 잡는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실권을 장악한 맹주가 되는 것을 두고 쇠귀를 잡는다고 표현해 왔다.

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그런데 왜 하필 귀일까? 소의 상징은 역시 뿔이니, 쇠뿔을 도려내어 피를 흘리는 퍼포먼스가 더 강한 효과를 거둘 수 있지 않았을까? 18세기 문인 홍양호는 이런 의문을 던지고 추정을 이어간다. 단단하게 위를 향해 있어서 힘으로 들이받기를 능사로 삼는 뿔은, 언제고 더 강한 존재를 만나면 꺾이고 만다. 그러나 부드럽게 아래로 드리운 귀는 남의 말 듣기를 본분으로 삼고 힘보다 지혜에 의존하므로 오래 갈 수 있다. 춘추시대의 패자(패者)들 역시 부드러움과 지혜로 장기적인 승리를 도모했기에 뛰어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뿔이 없다면 귀는 힘을 지닐 수 없다. 춘추시대 패자들은 절치부심 실력을 다져 이미 남을 제압할 만한 뿔을 지닌 이들이었다. 강력한 무위를 갖추었기에 그들의 포용과 관대함이 빛을 발할 수 있었다. 홍양호는 자신이 사는 우이동(牛耳洞)이 삼각산(三角山) 아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였다. 험준하게 솟은 쇠뿔 같은 산이 있기에 텅 비어 만물을 품을 수 있는 쇠귀 같은 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홍양호는, 멀리까지 복속시키는 무위와 모든 것을 포용하는 온유함을 겸비한 군자, 그 삶의 지향을 떠올린다.

강한 나라를 위한 염원으로 강한 지도자가 각광받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다시, 무소불위의 힘을 믿고 여기저기 뿔을 들이미는 이를 상대해야 하는 곤혹스러운 외교 현장을 목도하고 있다. 힘의 불균형을 감내한 채 북핵과 FTA 등의 현안에서 실리와 명분을 챙기는 접점을 찾기란 실로 지난해 보인다. 시간을 두고 쇠뿔과 쇠귀를 겸비해 가는 일, 미련해 보이지만 다른 길은 없다. 여전히 경청과 설득을 통해 협력을 이끌어내는 능력이야말로 오래가는 지도자의 미덕이다. 강하기만 한 것은 결국 꺾이고 만다. 이 역시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송혁기 |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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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은 지난해 12월 시애틀에 신개념 무인점포 ‘아마존 고’를 열었다. 오프라인 편의점인 아마존 고에서는 계산대 앞에서 줄을 설 필요가 없다. 제품을 고르면 자동결제되기 때문이다. 집었다가 내려놓은 상품은 구매목록에서 자동 삭제된다. 아마존은 유통산업의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아마존 고를 열었다고 했지만 무인 편의점 확산 속도는 중국이 더 빠르다. ‘빙고박스’란 무인 편의점은 광저우에 1호점을 낸 이후 베이징·상하이 등 22개 지역에 158개의 점포를 오픈했다. 인공지능과 사물인터넷, 음성인식 기술의 발달로 무인 경제시대가 열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2월 미국 시애틀에 문을 연 무인 매장 ‘아마존 고(Amazon Go)’의 광고 영상에는 쇼핑할 때 줄서서 계산을 기다릴 필요가 없는 점을 강조한 ‘단지 걸어 나가세요’ 문구가 나온다.

편의점은 무인 경제시대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편의점은 1927년 미국 텍사스주에 있던 제빙회사 ‘사우스랜드’가 처음 선보였다. 사우스랜드는 일반 소매점과 달리 오전 7시부터 밤 11시까지 영업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상호명을 ‘세븐 일레븐’으로 정했다. 미국 전역에서 점포 수를 늘려가던 세븐 일레븐은 경영난으로 1991년 일본 기업에 매각됐다. 일본이 ‘편의점의 천국’이 된 것은 그때부터다. 일본보다 출발은 늦었지만 한국은 ‘편의점 공화국’으로 불릴 정도로 성장세가 가파르다. 전국 편의점 수는 4만개로 치킨집(3만여개)보다 많다. 인구 대비 편의점 수는 일본의 1.5배에 달한다. 퇴직자들의 희망도 ‘치킨집 주인’에서 ‘편의점 점주’로 바뀌었다고 한다. 생필품 구매는 물론 택배, 세탁, 금융서비스가 가능한 편의점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최근엔 독특한 콘셉트의 ‘음악이 흐르는 편의점’ ‘밥 짓는 편의점’ ‘책 읽는 편의점’까지 등장했다

편의점 하면 떠오르는 게 알바생이기도 하다. 하지만 편의점에서 유니폼을 입은 알바생을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하다. 한국에도 무인 편의점이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븐 일레븐이 지난 5월 잠실롯데월드타워에 무인 편의점을 연 데 이어 이마트24도 지난달 전국 4개 직영점에 무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무인 편의점은 최저임금 인상과 맞물려 급속도로 확산될 것으로 전망된다. 알바생의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던 편의점이 일자리가 사라질 가능성이 큰 업종이 되고 있는 것이다. 무인 경제시대가 드리우게 될 어두운 그림자다.

<박구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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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예산안에 대한 국회 심의가 시작되었다. 올해 본예산 400조5000억원에서 429조원으로 7.1% 증가한 예산안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이끌기 위해 적극적 재정정책을 담았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특히 복지예산이 눈에 띈다. 내년부터 기초연금 인상, 아동수당 도입 등으로 16조7000억원이 늘어 증가율이 12.9%이다. 앞으로도 문재인케어, 부양의무제 기준 개선, 사회서비스 공공화 등이 본격화되면 복지는 더 커갈 것으로 전망된다.

예산안을 볼 때마다 문재인 정부는 참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세법개정안이 연 5조5000억원 수준의 핀셋 증세에 그치지만 초과세수 덕택에 주요 복지공약의 내년도 몫을 예산안에 담을 수 있었다. 우리나라 복지사업은 중앙정부가 복지를 확대하면 지자체의 대응예산도 늘어나는 구조이다. 이 비용마저도 내년은 초과세수에 따른 지방교부세의 자연증가로 충당될 듯하다. 집권 첫해부터 세수가 예상에 못 미쳐 재정 부족에 허덕이고 지방정부와도 갈등했던 박근혜 정부와 확연히 대비된다.

초과세수는 반갑지만 한편 우려도 생긴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려면 그에 걸맞은 재정 기반을 갖추어야 하건만 조세제도 개혁 밖의 초과세수에 안주하는 경향이 보여서다. 지난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발표한 ‘국정운영 5개년 계획’부터였다. 이 문서는 대통령직인수위원회 보고서 성격이라 대선공약의 실행프로그램을 기대했으나 재정방안이 대선공약과 너무 달랐다. 공약재정 178조원이라는 수치는 동일했으나 구성물은 전혀 딴판이었다.

대규모 초과세수가 새로운 카드로 들어왔다. 세법 개정과 탈루세금 과세를 통한 세입확충이 대선공약에선 61조원이었으나 17조1000억원으로 급감하고 대신 초과세수 60조5000억원이 추가되었다. 공약재정의 3분의 1을 경기 효과로 충당하는 셈이다. 또한 기금여유자금 등을 활용한 재원도 20조원에서 35조2000억원으로 늘렸다. 이는 사실상 전임 정부가 넘겨준 재정을 공약 이행 비용으로 사용하는 꼴이다. 물론 초과세수는 환영할 일이고 여유자금도 필요 이상으로 쌓였으면 사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방식에 크게 의존하면서 복지는 제도를 통해 확대되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뒷받침할 증세개혁은 주변으로 밀려버렸다는 점이다.

이는 앞으로 진행될 재정분권에도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달 시·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자치분권 로드맵(초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현재 8대 2인 국세와 지방세 비중을 7대 3을 거쳐 6대 4로 전환하는 강력한 재정분권이 담겨 있다. 이미 행정안전부에선 지방소비세와 지방소득세의 인상을 제안한다.

하지만 이번에 정부가 예산안과 함께 국회에 제출한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재정분권을 위한 세금 수치는 담겨 있지 않다.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주 국정감사에서 결국 ‘제로섬’이라며 재정분권에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앞으로 중앙권한의 지방 이양 정도를 봐야겠지만, 중앙정부도 임기 말 연 44조원의 재정적자를 예상하는 상황에서 국세를 쉽게 넘겨줄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그렇다면 문재인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재정분권을 위한 재원은 어디에 있는 걸까?

올해 우리나라 조세부담률은 GDP 19.3%로 전망된다. 초과세수 호조가 지속되면 실제 수치는 더 오를 수 있다. 박근혜 정부 임기 첫해인 2013년에는 17.9%였다. 담뱃세 인상으로 서민증세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소득공제의 세액공제 전환, 고소득자 소득세 강화, 대기업 세금감면의 축소 등 박근혜 정부의 증세 조치도 조세부담률 상향에 한몫을 했다. 문재인 정부는 어떤가? 국가재정운용계획에 의하면 2021년에도 조세부담률이 19.9%에 머문다. 마치 20% 선을 레드라인으로 여기는 듯하다. 근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평균 25.1%와 비교하면 약 5%포인트, 금액으로 환산하면 약 90조원이나 부족한 선이다.

내년은 초과세수로 재정을 충당하지만 항상 날씨가 맑은 건 아니다. 복지국가를 위한 조세제도 기반을 구축하고 지방재정 분권까지 달성하려면 임기 초반부터 적극적인 증세 로드맵을 준비해야 한다. 아직은 증세를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아니라고? 그나마 경기가 호전되는 시기가 좋은 때이다. 또한 복지가 빠르게 증가하는 지금이 더욱 적기이다. 실제 ‘복지가 늘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많다.

기초연금, 아동수당, 문재인케어 등 복지가 확대되는 만큼 관련 세금 공제를 줄여 소득세 실효세율을 높이고, 한발 더 나아가 ‘복지에만 쓰는 목적세’인 사회복지세 도입도 이야기하자. 대통령이 ‘복지국가 대한민국을 위해 소득에 따라 누진적으로 세금을 더 냅시다’라고 말할 순 없을까?

<오건호 |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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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이 전병헌 청와대 정무수석의 국회의원 시절 비서관 윤모씨 등 보좌진 3명을 7일 전격 체포했다. 윤씨 등은 전 수석이 회장을 맡았던 한국e스포츠협회를 통해 롯데홈쇼핑에서 3억여원대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전 수석은 19대 의원 시절 국회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소속으로 홈쇼핑 재승인과 관련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지난해 검찰의 롯데홈쇼핑 비자금 수사 당시에도 전 수석 금품 수수설이 돈 바 있다. 홈쇼핑 재승인을 위해 허위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비자금을 만들어 로비에 사용한 강현구 전 롯데홈쇼핑 사장은 1심에서 유죄가 선고됐다.

이번 수사는 검찰이 문재인 정부 들어 정권 실세를 상대로 벌이는 첫 번째 수사다. 검찰은 엄정한 수사로 전 수석 관련 의혹을 규명하기 바란다. 전 수석은 “어떠한 불법에도 관여한 바 없다”고 밝힌 만큼 검찰 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부 적폐청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이 작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가 스스로에 더욱 엄격하고, 검찰이 정권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수사할 수 있도록 보장해야 한다. 검찰도 권력에 굴종해 국정농단의 공범으로 추락했던 과오를 되풀이해서는 안된다.

최근 피의자들의 극단적인 선택이 잇따르고 있다.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방해 의혹으로 구속영장이 청구된 변창훈 검사가 투신자살하고, 국정원 소속 정모 변호사도 목숨을 끊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이 때문에 검찰 수사가 위축되면 안된다. 검찰은 환부만을 도려내는 깔끔하고 절제된 수사로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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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한·미 간 자유무역협정(FTA)에 문제가 있다”며 개정을 재차 요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7일 한·미 정상회담을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한·미 FTA가) 자유롭고, 공정하며, 호혜적 무역협정이어야 하지만 지금 현재 협정은 성공적이지 못했고, 미국에는 그렇게 좋은 협상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를 기반으로) 개정협상이 진행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무역적자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는 기존 한·미 FTA가 무역불균형을 초래했으므로 미국의 입장을 반영해 개정하겠다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내비친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초청 국빈만찬에서 건배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트럼프 대통령의 이 같은 요구는 이미 예견된 바다. 그는 직전 방문국인 일본에서도 “미·일 무역은 공정하지도, 개방되지도 않았다. 미국은 오랜 기간 일본에 의한 무역적자로 고생해왔다”며 무역적자를 줄이는 조치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한국은 일본과 같이 미국에 대해 무역흑자를 지속하고 있는 국가다. 미국은 적자폭이 한·미 FTA 발효 전인 2011년 116억달러에서 발효 후인 2016년에는 233억달러로 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미국은 이 같은 피해를 방치할 수 없으므로 FTA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미 통상압력이 실행에 들어간 부분도 있다. 미국 국제무역위원회는 삼성과 LG전자의 세탁기에 대해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을 예고한 것을 비롯해 한국을 상대로 31건의 수입규제조치를 가동하고 있다. 

한·미 FTA 개정협상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날 “경제도 한·미 간 동맹의 하나의 축”이라며 “한·미 FTA를 신속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힌 만큼 협상이 더욱 빨라질 가능성이 높다. 우려되는 점은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 기간 중에 무역적자를 재차 강조한 만큼 통상 관련 압박이 더욱 거세질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국은 협상의 주요 쟁점인 자동차, 철강, 농업 분야에서 자국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적극 나설 것이다. 정부는 미국의 요구에 맞설 다양한 옵션을 마련해야 한다. 그래야 협상이 끝난 뒤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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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어제 청와대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고한 한·미동맹과 북한 핵·미사일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을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회담 직후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두 정상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미국에 단순한 오랜 동맹국 그 이상”이라며 “우리는 전쟁에서 나란히 싸웠고 평화 속에서 함께 번영한 파트너이자 친구”라고 말했다. 두 정상은 북한에 대해 핵과 미사일을 폐기할 것을 촉구하고 이를 위해 최대한의 제재와 압박을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두 정상이 단단한 한·미동맹을 재확인한 것은 의미가 크다. 흔들림 없는 동맹관계를 천명함으로써 북핵을 둘러싼 한·미 간 이견이 있다는 국내외의 우려와 비판에 일침을 가했다. 북핵 대응에서의 긴밀한 공조를 천명한 것도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하다. 두 정상은 회견에서 “북한의 추가도발은 한·미동맹의 확고하고 압도적인 대응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모든 범주 군사능력 운용과 확장억제 제공 공약을 재확인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구체적인 북핵 해법을 도출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양국은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마련해야 할 절박한 시점에 제재와 압박이라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하는 데 그쳤다. 미국 대통령의 25년 만의 국빈방문에 걸맞은 성과라고 보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 입장에서는 북핵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다고 보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의 담판을 앞두고 한국에서 자신의 구상과 복안을 제시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트럼프 방한을 계기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의 전기를 마련한다는 한국의 구상은 실현 가능성이 낮아졌다.

두 정상이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 원칙에 의견을 모았음에도 불구하고 트럼프가 군사옵션 카드를 완전히 버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트럼프는 그제 미·일 정상회담 직후 “모든 선택지가 테이블 위에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밝힌 ‘한반도 5원칙’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을 나타내지 않았다. 특히 대화를 통한 북핵 문제 해결이 정상회담에서 주요하게 논의되지 않은 점이 아쉽다. 문 대통령이 “지금은 압박과 제재에 집중할 때”라며 대화를 미래에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때 가능한 일로 미뤄 두었다. 북핵 해법으로 미제 첨단무기 구매와 한국에 대한 미사일 탄두중량 제한 완전 해제가 논의된 것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트럼프가 보수세력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주요 공격 소재인 이른바 ‘코리아 패싱’ 논란에 대해 일축한 것은 문 대통령의 국내 입지를 넓혀줄 것 같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한국은 굉장히 중요한 국가이며 한국을 우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북한에 대한 평가에도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북한을 “전 세계에 끔찍한 위협”으로 표현했지만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발언은 아니었다. 북한을 자극하는 발언에 대한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하다. 문 대통령이 균형외교에 대해 미·중 사이 균형이 아니라 외교 지평 확대로 설명한 것은 이를 중국편향 외교로 이해하는 미국을 의식한 수위 조절로 보인다.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해결된 문제보다는 해결해야 할 과제를 더 많이 남긴 회담이었다. 하지만 북핵은 어느 한 국가나 지도자의 노력으로 해결이 불가능한 국제 문제다. 이번 회담에도 불구하고 당사국들은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노력을 흔들림 없이 전개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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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국회에서 ‘개헌 공론화를 위한 토론회’가 열렸다. 국회 개헌특위의 여당과 야당이 정부형태 등 핵심쟁점에 합의하지 못해 개헌이 사실상 교착상태에 빠져있으므로,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의 사례를 개헌에 적용하자는 것이었다. 앞으로 이처럼 공론화와 숙의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적 현안을 해결하려는 요구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공론화란 ‘공공의 사안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이 존재할 때, 논의를 통해 입장 차이를 좁힘으로써 공익에 부합하는 공론(公論)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서로 다른 입장이 좁혀지는 것은 ‘특정 사안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논의함으로써 신중한 결정을 내리는’ 숙의(熟議)로 가능하다. 신고리 공론화위원회는 대체로 성공적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활동보고서를 보면 10% 부족하다는 느낌이 든다. 온라인, 오프라인으로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학습을 했다고는 하지만 관련 주제를 깊이 들여다보는 구조화된 토론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학습도 중요하지만 구성원 간의 역동적인 토론과 상호작용을 통해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면 숙의는 더 깊고 넓어졌을 것이다. 오래전부터 초등학교를 포함한 각급 학교에서 대형 강의를 줄이고 소그룹 토론식 수업을 늘려가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밀도 있고 깊이 있는 토론을 위해서는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퍼실리테이션은 사람들 사이에 소통과 협력이 활발하게 일어나 합의에 쉽게 도달하도록 하는 행위이고, 이런 일을 하는 전문가를 퍼실리테이터라고 한다. 인간의 소통과 협력은 물론 쉽지 않다. 세상은 이견, 자기주장, 정쟁, 갈등으로 가득하다. 신고리 원전에 대한 찬반 양론, 개헌특위에서 정부형태를 둘러싼 여야 갈등, 회사 내 부서 간의 갈등, 학교친구들 간의 편 가르기, 가족 간의 오해와 상처…. 이런 일들이 보다 쉽게 해결되도록 하는 것이 퍼실리테이션이다.

소통과 협력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대화란 ‘너와 내가 각자 의미의 시냇물이라고 한다면, 너의 의미와 나의 의미가 만나 더 큰 의미의 강을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대화를 잘 설계하고 조직하면 밀실에 갇혀있던 생각이 광장으로 뛰쳐나오고,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집단 전체와 공익을 배려하는 넓은 생각으로 활짝 열리고, 부정적인 생각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뀌는 혁신이 일어날 수 있다. 바로 숙의와 공론화가 지향하는 바이다. 더구나 이런 접근을 하면 앞뒤가 꽉 막힌 양자택일의 상황에서도 한층 지혜로운 제3의 길을 찾는 것이 가능해진다.

사람들 간의 성공적인 대화를 위해서는 다섯 가지 일이 일어나야 한다.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 정보·느낌·견해의 소통, 상대의 입장이 되어보는 공감(역지사지), 공동의 의미 발견, 미래 행동방향에 대한 합의’가 그것이다. 이 다섯 단계를 체계적으로 설계하고 조직하는 것이 퍼실리테이션의 영역이다. 이런 일을 위해서 퍼실리테이션은 수많은, 검증된 기법들을 갖추고 있다. 이번 공론화위원회에서 하루 이틀 교육받고 투입되었다는 ‘모더레이터(moderator·사회자)’와는 다르다.

신고리 공론화위원회는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받는 첫 공론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활동은 사실 ‘토론을 통한 숙의의 질 향상’보다는 ‘학습, 그리고 의견의 통계적 변화 추적’에 더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사회적 현안의 해결을 위해 앞으로 끊임없이 제기될 공론화와 숙의민주주의를 한층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깊고 넓은 토론’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해서 숙의민주주의에 퍼실리테이션을 결합할 필요가 있다. 이와 더불어 한국적 상황에 맞는 공론화, 숙의민주주의 방식을 찾아내고 사회적으로 정착시키기 위해 국가적 차원의 연구·개발 기구를 만드는 것도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신좌섭 | 서울대 의대 교수·의학교육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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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기자분들이 지적을 하도 많이 해서 퇴직해도 아무 데나 바로 못 가요.”

지난 9월28일 열린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 취임 100일 기자간담회에 배석한 국토부 고위 관료가 한 말이다. 그는 이날 명예퇴직한 실장(1급)을 가리켜 “한동안 집에서 쉬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사실일까.

안호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토부에서 받은 ‘2013~2017년 9월 4급 이상 고위 공무원 재취업 현황’을 보면 76명이 산하기관과 이익단체에 재취업했다. 6일 정부공직자윤리위원회에 확인한 결과 지난달 국토부 퇴직 공직자 2명이 산하 공공기관과 대형 건설사 자회사에 재취업했다.

국토부 고위 공무원이 재취업한 곳은 산하기관뿐 아니라 SR, 이레일, 공항철도 같은 민자사업 기업도 있다. 이익단체는 더 많다. 교통투자평가협회, 한국골재협회, 자동차산업협회, 항공진흥협회 등 20곳도 넘는다.

공무원이 휴직하며 민간기업에서 경험을 쌓게 하는 ‘민간근무 휴직제’를 경제부처가 얼마나 이용했는지 취재하던 지난달 29일 국회를 통해 자료를 요청했다. 민간기업과 공무원의 유착 통로가 됐다는 지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국토부만 자료 제출을 거부했다. 하창훈 국토부 인사팀장은 지난 1일 “국정감사로 바빴고 상부의 결재도 받아야 하며 인사혁신처와 협의도 필요하다”고 했다. 전형필 국토부 운영지원과장은 이튿날 “국정감사 기간이 끝났는데 자료 요청에 급히 응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냐”고 했다. 박찬대 민주당 의원이 인사혁신처에서 받은 자료를 보면 국토부 고위 공직자 2명은 지난해 손해보험협회와 현대건설에서 1억원 넘게 받으며 일했다. 최근 국토부 내부에선 산하 한국도로공사 간부급 퇴직자들이 휴게소 사업을 독점한 소수 업체에 재취업했다는 올해 국감 지적을 쉬쉬하는 분위기도 있다.

세월호 참사의 원인 중 하나로 퇴직 공직자와 민간기업의 유착이 꼽히면서 재취업을 규제하는 공직자윤리법이 개정됐다. 국토부는 세월호 교훈을 잊었는지 ‘내 사람’을 챙기는 시대착오적 온정주의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퇴직해도 아무 데나 못 간다’는 국토부 고위 관료의 말은 결코 사실이 아니다.

<경제부 |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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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쌀 생산 조정정책으로 밭작물의 논 재배를 장려하고 확대하는 정책을 추진 중이다. 올해에는 3만5000㏊의 논에 벼 대신 다른 밭작물 재배를 권장했다. 내년에 이를 5만㏊까지 확대하기 위해 1368억원의 예산도 편성했다. 내년부터 논에 벼 대신 콩을 심으면 ㏊당 200만원의 보조금을 지급하기 위한 것이다. 올해 타 작물의 논 재배면적을 보면 조사료를 제외한 밭작물 중에서 콩이 5261㏊로 가장 많았다. 앞으로도 콩의 논 재배면적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콩이 논 재배 적합 작물로 각광을 받는 이유는 많다. 습해에 다소 강한 편이고, 물관리만 잘한다면 밭 콩보다 논 콩의 생산성이 높다. 콩 파종부터 수확까지 생산 전 과정의 기계화 재배기술 개발로 평탄한 논에 적용 및 보급하기 용이하다.

콩을 수확하는 농부들. 연합뉴스

지난해 콩의 자급률은 약 25%다. 대부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국산 콩 자급률을 높이고 쌀 적정생산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논 콩 재배를 정책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이유다. 또 콩을 두부, 장류, 콩나물 및 청국장으로 가공하는 업체 등의 국산콩 수요와 소비도 늘고 있다.

콩의 생산성 향상뿐만 아니라 생산 콩에 대한 품질관리도 매우 중요하다. 콩의 품질은 수확 후 처리기술과 기계화 시설에 크게 좌우된다. 우리나라는 일찍이 벼를 미곡종합처리장(RPC)을 통해 건조, 도정, 선별, 저장해 고품질 쌀을 유통하고 있다. 따라서 콩도 미곡종합처리장과 같은 콩종합처리시설(SPC)을 이용한 수확후 관리 방법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콩 가공업자들은 제품 품질을 높이기 위해 콩을 구매할 때 원료곡의 품질이 균일하고 좋은 것을 찾는다. 농가가 소득을 높이기 위해 재배 과정에서 수확량과 품질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확한 콩의 관리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배경이다.

콩 수확 후 건조, 정선, 선별, 저장을 한다. 건조는 콩의 수분 함량을 낮춰 유통과 저장 중 품질 변화를 적게 해준다. 정선은 탈곡과정 중 콩깍지와 이물질 등을 제거하여 콩알만 남게 해준다. 선별은 보통 3개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는 덜 익은 콩과 깨진 콩을 걸러내고, 두 번째는 병에 걸려 콩에 다른 색깔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세 번째는 크기를 일정하게 해줘 균일도를 높이는 것이다. 선별과정을 거친 콩은 판매를 하기 위해 저장된다. 건조부터 저장까지의 과정을 통해 품질을 높이는 것이 콩종합처리시설이다.

우리 현실은 어떨까. 농가들이 콩종합처리시설을 이용하기엔 역부족이다. 우선 개발돼야 할 종합처리시설의 단계별 표준화 기술들이 거의 없고 정밀한 모델조차 없다. 이는 설치 기업체가 가진 기계공학적 노하우에만 의존해 설치되고 작동하게 된 데 따른 것이다. 기업체가 가진 기술이 각각 달라 종합처리시설의 건조, 정선, 선별의 작업공정에 대한 기준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셈이다. 제각각인 작업공정 기준으로 인한 피해는 콩종합처리시설 운영자와 농가가 받게 될 것은 뻔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정부에서 지원한 콩종합처리시설은 괴산 불정농협, 서문경농협, 북파주농협 등 3곳에 설치돼 운영 중이다. 소규모 콩종합처리시설은 농업법인, 작목반, 개인들이 운영하기도 한다. 앞으로 콩의 논 재배가 확대되고 콩 생산량과 수확 후 처리량도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콩종합처리시설이 더 많이 설치되기를 기대한다.

콩종합처리시설의 운영 효율성을 제고하고 고품질의 콩이 유통되게 하기 위해서는 콩 생산 및 처리 규모에 맞는 표준화 시설 모델과 처리 공정단계별 표준화 기술을 확립해 현장에 적용해야 한다.

<문윤만 | 한국콩연구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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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과 함께 가을은 이사철입니다. 여기저기 사다리차로 이삿짐 옮기느라 분주하죠. 그런데 가만히 보면 이웃 중에 이사 와서 얼마 살지도 않고 다시 짐 싸서 다른 데로 옮겨가는 집도 보입니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이 떨어진다’고, 이사를 자주 다니면 그때마다 이사와 집 꾸미는 데 지출이 크고 살림살이도 쉬 망가집니다. 애초에 집을 신중하게 구했어야 옳았겠지요.

또 가을은 여름휴가 챙기고 새 직장 알아보며 이직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개중에는 현재의 직장으로 옮긴 지 채 일 년이 안 된 경우도 있습니다. 급여나 업무가 자신이 생각한 것과 맞지 않아 이직을 결심하기도 하지만, 상당수는 직장 내 인간관계가 못마땅해서라고 합니다. ‘회사 보고 입사해 상사 보고 퇴사한다’는 말처럼, 겉만 봐선 모르고 겪어봐야 알 수 있으니 이런 이유 때문이라면 이직이 잦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속담에 ‘자주 옮겨 심는 나무 크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급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은 자연스레 얻을 것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서양의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와 같은 속담입니다). 나무가 자라려면 흙 속의 양분을 빨아들여야 하는데, 그 역할을 하는 것은 굵은 뿌리가 아니라 무수한 잔뿌리들입니다. 그런데 이제 막 한 자리에 뿌리내리려 하는 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겨 심자면 캐내는 과정에서 많은 잔뿌리를 잃게 됩니다. 새로 심긴 곳에서도 그곳의 토양에 맞춰 다시 애써 잔뿌리 내려 옳게 안착하는 2~3년은 나무의 성장도 멈춘다 합니다.

직장인들이라면 다들 공감하는 ‘똑똑한 놈은 나가고 엉덩이 질긴 놈만 남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진득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전전하면 이력서에 실력과 경력, 관록의 이끼가 묻기 어렵습니다. 누구 싫어 나가지 말고 그 사람 나갈 때까지 버텨봅시다.

<김승용 | <우리말 절대지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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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교육부는 올해 안에 교장 자격증이 없는 교사도 응모 가능한 ‘내부형 교장공모제’ 확대를 위해 교육공무원 임용령 개정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좋은 교사가 교장이 될 수 있는 교장공모제 확대는 대선 공약이자 국정과제이다.

현재 교장공모제를 신청한 학교 중 절반 이상은 응모자가 한 명이거나 아예 없다. 정부는 2011년부터 교육부 임용령으로 내부형 교장공모제 대상 학교의 15%까지만 교사가 응모할 수 있도록 제한을 두었다. 예를 들어, 경기도 초·중등 2800여개 학교 중 교사가 응모 가능한 학교는 초등 1~2개, 중등 1~2개에 불과하다. 학교 구성원들이 4년간 학교운영을 할 적격자를 정하자는 교장공모제 취지가 무색해졌다. 교사가 응모 가능한 교장공모제 확대는 좋은 교사가 교장이 될 가능성을 높인다. 학교 구성원들이 학교장을 뽑을 기회를 갖는다. 즉 학교자치 실현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반길 일이다.

이제 학교장에게 어떤 역할이 중요한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으면 좋겠다. 교장의 직위를 승진의 자리로 보는 나라는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초·중등교육법 제20조는 “교장은 교무를 통할하고, 소속 교직원을 지도·감독하며, 학생을 교육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교장은 학생을 교육하는 역할과 조직을 관리하는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직이다. 학교 교육목표를 함께 정하고 학생들이 수업에서 잘 배울 수 있도록 학교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 있는 리더로서의 역할이 중요하다. 일전에 학교장의 역할에 대한 토론회에 참석했다. 현재 학교장의 권한이 크니 책임과 영향력도 기대도 크다. 그런 만큼 학생, 교사, 교직원, 학부모, 지역사회 등의 입장에서 바라는 학교장의 모습은 여러 가지다. 여러 주체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학교장은 역시 어려운 역할이다.

어떤 이는 따듯한 아침맞이를 하는 학교장을 바란다. 학교장이 학생들과 눈을 맞추고 소통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학기마다 학급별로 대화시간을 가지며 학생들의 의견을 듣는 학교장도 있다. 학부모들과 정기적인 간담회를 통해 학교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학교 운영에 대한 이해를 구하기도 한다.

다른 이는 수업하는 학교장을 바란다. 수업한다는 것은 학교장의 교육자로서 역할에 중심을 둔다. 수업 장학을 하거나 학교 교육과정의 방향성을 조망하는 전문성을 발휘하는 방법 중 하나다. 독일의 경우, 학교장은 주당 일정 시간 수업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초등학교 전담교과 수업을 담당하거나 중학교 자유학기제 주제선택 수업을 담당하거나, 불가피하게 수업 결손이 생길 경우 보강을 하는 학교장도 있다. 교사들과 함께 수업철학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한다.

또 다른 이는 권한을 내려놓고 함께 의사결정을 하는 학교장을 바란다. 의사결정에 참여한다는 것은 책임도 함께 진다는 것이다. 많은 학교가 모든 학생의 교육을 위한 것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구성원들이 교육적 판단을 하고 있는가? 각 구성원들의 의견이 달라도 인간적 품위를 지키며 각각의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학교장이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

교장공모제가 확대되면 학교는 달라질까. 한 가지는 확실하다. 학생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학생이 민주시민으로 잘 성장할 수 있는 학교를 위해 ‘노력하려는’ 리더에 대해 학교 구성원들이 같이 고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손민아 | 경기 전곡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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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만 젖히는 것과 등을 땅에 대고 보는 밤하늘은 그야말로 천양지차이다. 짐승처럼 웅크린 바위에 배낭을 베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검은 밤이 가슴을 내리눌렀지만 코끝을 바짝 스치는 흐뭇한 별빛이 그 압박을 풀어주었다. 눈으로 마구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이 별빛 중에는 저 북두칠성, 저 오리온자리에서 내려온 것들도 분명 섞여 있을 터!

소청을 나설 때 깜깜하던 어둠이 어느새 환하다. 희운각에서 누룽지와 인절미로 아침을 때운 뒤 마침내 공룡능선을 더위잡았다. 살아 있는 공룡을 한 번도 본 적은 없다만 이름과 실질이 딱 어울리는 지형이 아닐 수 없다. 공룡이라는 명칭 이외에는 그 어떤 다른 말로도 대체 불가능한 공룡능선. 작년 가을에 왔을 땐, 공룡의 비늘 같은 바위틈에서 많은 꽃들을 만났지만 이제 모두 자취를 감추고 열매조차 흩어지고 흔적만이 남았다. 그중에서 저무는 가을을 가냘프게 감당하는 꽃이 있으니 산오이풀이다. 꽃은 대부분 반토막이 났지만 오늘까지 그런대로 허술한 모양을 유지하면서 내 허전한 시선을 받쳐주는 게 대견하고 고맙다. 산의 높은 곳에서 자라기에 이렇게 늦게까지 이 자세를 유지하는가.

마등령에 서면 발밑에서 내 빠져나온 그림자가 아득한 선계로 들어가는 열쇠구멍인 듯 낯설다. 언제 또 여기에 올 수 있을까. 시간과 무릎을 걱정하면서 아래를 향해 아쉬운 발길을 돌렸다. 상강 이후 정상 부근에서 몰락하더니 금강굴 부근에서 제대로 다시 부활한 단풍. 비선대 계곡 다리 옆 나무가 이런 팻말을 달고 있다. “당단풍나무. 가을에 붉은색으로 변하는 데서 유래되었고 설탕 당이냐 당나라 당이냐 유래가 확실하지 않다.” 저 훤칠한 나무를 두고 하필이면 저런 설명뿐일까. 웃음이 슬며시 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왔던 설악산 비선대. 그때의 까만 교복에 검은 모자 눌러쓴 까까머리의 나하고 지금의 나는 같은 나일까. 늙으면 이렇게 늙으라는 듯 소박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설악산 공룡능선의 산오이풀을 생각하면서 어둠 속으로 점점 희미해지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속초 외옹치항으로 향했다. 산오이풀,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

<이굴기 |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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