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정 | 충남도지사


 

지난 6월 대한민국 인구가 5000만명을 넘어섰다. 세계에서 7번째로 2050클럽에 진입한 것이다. 대한민국 발전의 원동력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단연코 ‘사람’이라고 답한다. 변변한 부존자원도 없이, 더구나 식민지와 전쟁의 폐허를 겪은 나라가 세계 10위권대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했다. 우리 국민들의 땀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살아갈 미래에도 결국 사람만이 희망이다. 창조적 두뇌와 창의적 감수성으로 만들어가는 지식재산이 국가경쟁력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는 이러한 지식재산 확보를 위한 치열한 경쟁에 돌입했다. 가히 지식재산 전쟁시대를 방불케 한다. 우리나라도 이러한 추세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행보를 서두르고 있다. 정부가 작년에 지식재산기본법을 제정하고 국가지식재산위원회를 출범시킨 것은 늦었지만 잘한 일이다. 또 올해를 ‘지식재산 강국 원년’으로 선포하고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식재산 강국의 실현을 위해 몇 가지 짚어야 할 과제가 있다. 먼저 양보다는 질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 국민들의 두뇌와 기술은 잠재력 면에서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다. 그러나 원천기술 등 질적인 면으로 본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기술무역수지 적자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세 번째로 많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따라서 고부가가치의 원천기술을 위한 연구개발(R&D) 투자와 소프트파워, 기술인력 확충에 국가적 차원의 좀 더 많은 투자가 이뤄져야 할 것이다.


두 번째로 중소기업의 지식재산 창출 및 보호에 힘써야 한다. 기술 개발도 어렵지만, 어렵게 기술을 만들어도 그것을 지식재산으로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강소기업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우리 경제의 체질을 강화하고 경쟁력을 높이는 길임을 감안할 때, 이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지원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끝으로, 지방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노력도 중요할 것이다. 충남도에서는 이미 2009년 말 충청남도 지식재산진흥 조례를 제정했으며, 지식재산으로 생기 넘치는 충청남도를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경향신문DB)


지식재산 전쟁은 곧 인재 전쟁이다. 대기업, 수도권 중심의 인재 창출 전략은 이제 한계에 이르렀다. 지식재산 강국의 실현을 위해서는 국가균형 발전전략과 대·중·소 동반성장 전략을 연계해 추진해야 한다. 지식재산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물론 기업과 대학, 연구기관 등이 함께 힘과 뜻을 모아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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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하 | 외교통상부 개발협력국장


공항은 설렘과 즐거움이 있는 공간이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 사업차 해외로 나가는 사람 등 공항을 찾은 이들의 얼굴에는 평소와는 다른 감정들이 가득하다. 현재 국내에서 출발하는 국제선 항공 요금에는 아프리카 질병과 빈곤퇴치를 위한 기여금 1000원이 포함돼 있다. 이는 항공권에 개발원조 목적의 기여금을 부과하는 ‘항공권 연대기금’ 제도로 우리나라뿐 아니라 프랑스, 칠레 등도 동참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이란 명칭으로 운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조성되는 기금은 한 해 약 150억원으로 국제의약품구매기구, 세계백신면역연합, 우리나라 비정부기구(NGO)의 아프리카 질병퇴치사업에 지원되고 있다. 실제로 후천성면역결핍증, 결핵 등 위험 질병 발병률이 높은 우간다 등은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을 통해 낙후된 보건시설 개선 자금을 지원받아 건강한 삶을 누릴 기회를 갖게 됐다.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은 국제사회에서 우리나라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도 한몫하고 있다. 국제사회는 지난 2000년, 빈곤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는 새천년개발목표(MDGs)를 발표했고, 전 세계 인구 7명 가운데 1명은 매일 굶주리고 있는 현실을 개선하고자 공적개발원조(ODA)를 증대시켜왔다. 우리나라도 해마다 공적개발원조 금액을 늘려왔지만 국가 경제규모에 비해 원조 규모가 작은 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해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 대비 원조 비율은 0.12%로, OECD 23개 국가 중 22위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에서 혁신적 개발재원인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제도 운영은 새천년개발목표 재원 마련에 힘을 보탬으로써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질병치료 지원을 받은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기억하고,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고 하니 이보다 더 큰 국위선양이 또 있을까. 


(경향신문DB)


오는 9월 말 일몰시한을 두었던 국제빈곤퇴치기여금 제도는 그 유용성에 입각해 5년 더 연장하는 개정법안이 19대 국회 1호 법안으로 통과됐다. 앞으로도 국제빈곤퇴치기여금을 통해 많은 아프리카인들이 질병에서 벗어나 새 희망을 꿈꾸게 될 것이다.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 아프리카가 국제사회의 지원이 얼마나 필요한지 우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프리카에 희망을 전하는 따뜻한 비행이 이어져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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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관 | 서울 배재중학교 교사


 

최근 헌법재판소는 ‘인터넷 실명제’에 대한 위헌 판결을 내렸다. 2007년 인터넷 실명제가 도입된 이유는 인터넷을 통한 악성 루머, 인신공격, 사생활 침해 등의 부작용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인터넷에 의견을 게시할 때, 이용자의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해 인터넷의 역기능을 해소하려 한 것이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인터넷에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공익의 효과가 명백하지 않고, 그 실효성도 부족하다고 보았다. 


헌법재판관들이 ‘인터넷 실명제’ 위헌 결정 등을 내리기 위해 앉아 있다. (경향신문DB)


 헌법재판소의 인터넷 실명제 위헌 판결은 인터넷 이용자를 자율의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이제 그 어떤 제도적 조치보다 선행돼야 할 것은 인터넷 이용자들의 자발적인 자정 노력이다. 네티즌 스스로가 건전한 윤리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성숙한 인터넷 문화를 정착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문화의 정착을 위해서는 초등 및 중학교 때부터 인터넷 예절에 대한 교육이 더욱 더 절실해 보인다.


현재 각급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미래엔(구 대한교과서)의 중학교 도덕교과서를 보면, 인터넷 윤리와 예절을 주요 단원으로 설정해 인터넷 예절에 대한 교육과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인터넷 공간의 특성을 이해시키고, 사생활 존중과 보호 방법을 찾아보게 하며, 인터넷 공간에서 지켜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먼저 자신이 누구인지 드러나지 않는 익명성에 대한 이해이다. 익명성은 인터넷 속에서 자유롭고 활발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긍정적 측면이 있지만, ‘악플로 인한 자살’ ‘신상 정보 밝히기’ 등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인터넷 공간에서는 누구든 자신을 숨긴 채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 그러므로 인터넷 공간에서 도덕적 책임을 강조해야 한다. 또한 인터넷 공간을 이용하고 관계를 맺는 대상은 나와 같이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쓸 때, 인터넷 게임을 할 때 다른 사람과의 교류라는 것을 인지하고 현실 공간과 마찬가지로 기본적 예절을 갖춰야 한다. 우리는 인터넷 공간의 특성을 긍정적으로 활용해 도덕적 실천의 장으로 만들어 가야 한다. 예를 들어, 안타까운 사연을 가진 사람들을 돕고자 하는 네티즌 운동, 선한 댓글 달기 운동, 사이버 기부 등을 통해 소외된 이웃을 돕고 나눔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이다. 네티즌은 단순히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인터넷 문화를 만들고, 인터넷 공동체를 꾸려 나갈 때, 진정한 의미의 네티즌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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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 사회가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 대립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을 두고 100년 넘게 갈등했다고. 그런 중에 놀라운 건(?) 노예해방가로 세계적으로 추앙받는 링컨 대통령의 동상이 미국의 남부 지역을 통틀어 처음 만들어진 것이 2003년이라는 것이다. 리치먼드에 있는 그것은 워싱턴에 있는 것과 달리 그 크기도 실물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링컨에 대한 미국 남부의 평가는 그 동상의 크기만큼이나 인색한 편이라고 한다. 


단순하게 대비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은 전쟁이 발발한 지 ‘겨우 60년’을 갓 지났으니, 앞으로 적어도 40년은 더 싸워야 할는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미국의 경험은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둘러싸고 생성된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준다. 특히나 노예해방과 같은 ‘보편적 인권’ 문제가 걸린 사건이었는데도 시비가 계속되고 있으니 말이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국민통합’이라는 이름으로 전태일 재단 방문과 동상 앞 헌화를 ‘시도’했다. 그의 행보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그의 방문 계획 소식을 접한 전태일 재단의 한 관계자는 “오늘 태풍이 서울까지 도착한다는데…, 제가 있는 재단은 볼라벤보다 더 큰 태풍을 예고하고 있습니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파격이 통합의 물꼬를 트는 데는 실패한 것 같다.


 

서울 종로 청계천6가 전태일 동상을 방문한 박근혜 대선 후보 (출처: 경향DB)



그의 행보에 대한 반응을 볼 때 그러하다. ‘진정성이 없는 오만함’ ‘정치적 쇼’라는 비판이 가해졌다. 통합의 상대측과의 사전 소통과 공감이 선행되지 않은 일방적 행보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모욕감을 느낀다는 말도 들린다. 그 재단관계자는 앞선 글에 이어 “그 태풍이 할퀴고 가는 상처가 꽤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참 답답하네요”라고 썼다. 심지어 같은 당 소속인 이재오 의원은 “손 내밀면 통합된다는 생각은 독재적 발상”이라며 맹공을 퍼붓기까지 했다.


그런 파격 행보가 의미하는 것이 ‘통합의 시작’인지, ‘통합의 종결’인지 잘 모르겠다. 후자라면 따따부따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통합의 시작이라면 박근혜 후보가 유념할 것이 있다. 미국의 경험에서처럼 통합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특히 5·16 군사쿠데타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고수하는 한 그렇다. 노예해방이라는 ‘가치’가 아닌 반공이라는 ‘적대감’을 대의명분으로, 쿠데타를 일으키자마자 좌익분자라는 이유로 백수십명을 일거에 처형했던 ‘야만’을 옹호하면서 통합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기 때문이다.


그의 ‘정책브레인’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아버지라는 걸 떨쳐버리고 전직 대통령으로 객관적 평가를 하면 좋겠다”고 했다. 어쩌면 이것이 통합을 위한 최소한의 기준이리라. 하지만 그것에도 전제가 있다. 객관적 평가라는 미명하에 ‘경제성장이라는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장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권을 경제적 부와 맞바꿀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선언에는 ‘누군가의 희생은 어쩔 수 없다’는 관점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정의론>의 철학자 존 롤스가 밝힌 바처럼 누군가의 희생을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의가 아니다. 특히 약자의 희생, 그것도 부당한 이유로 생명마저 내놓아야 하는 희생일 경우 더욱 그렇다. 약자의 부당한 희생의 불가피성을 수용하는 공동체는 발전은커녕,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40년 더 한국전쟁의 책임을 둘러싼 공방을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개명천지’에 그런 공동체에 애정을 갖고 계속 살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권과 경제성장 사이에 딜레마가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딜레마는 정치지도자가 겪어야 할 선택의 고뇌 그 자체를 가리키는 것일 뿐, ‘국민행복’을 기치로 내건 정치지도자가 지향하는 가치관으로 표방될 수 없다. 박근혜 후보가 진정 통합을 하려면 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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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통합당의 위기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대선 후보 경선은 ‘안철수 현상’에 떠밀려 ‘2부 리그’로 전락한 지 오래고, 당 지도부는 속수무책인 양 후보들의 ‘개인기’만 쳐다보고 있다. 당 지도부의 역량이 한계를 드러내면서 마음 둘 곳이 없다보니 당권파니 비주류니 하는 편가르기가 노골화하고, 출신과 성향 등에 따른 끼리끼리 모임도 빈번해지고 있다. 이러한 모습으로 연말 대선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지금 당내 최대 관심사는 후보 경선이 아닌 것 같다. 경선에 쏠릴 국민들의 시선을 앗아갈 수 있다는 이유로 한동안 잠잠하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과의 후보 단일화론이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안 원장의 민주당 입당론에서 제3지대 통합정당론까지 단일화 아이디어가 만개하고 있다. 이번에는 지도부가 아닌 의원 중심으로 물밑에서 단일화론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게 과거와 다소 다른 점이다. 기대와 달리 싱겁게 진행되는 경선에 대한 회의감이자 위기감의 표출이다. 일부 초선 의원들이 당 혁신론을 제기할 태세지만 아직 힘이 부친다. 일각에선 이해찬 대표와 박지원 원내대표의 2선 후퇴론도 내놓는다. ‘야당의 무대’라는 회기 100일의 정기국회가 오늘부터 열리지만 야당다운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든 형편이다.


입장하는 민주당 지도부 (출처: 경향DB)


문제를 바로 봐야 해결책이 나오는 법이다. 무엇보다 먼저 연말 대선에서 민주당이 자체 후보를 내든, 안 원장과의 단일화를 하든 자강 노력은 포기할 수 없는 대전제다. 민주당이 있어야 대선도 있고, 단일화도 있다. 또 지도부를 선출하기만 했을 뿐, 지도부의 당 운영이 꼬여도 침묵이나 방관으로 일관한 데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현 위기는 ‘대선주자-대표-원내대표 담합론’에서 촉발된 지도부의 책임이 큰 건 사실이나 구성원 모두가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당을 만들고 바꿀 수 있는 건 다른 사람들이 아닌 바로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토대로 당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바는 민생의 구현이다. 4·11 총선 패배는 물론이고, 현 위기가 현 정권에 대한 책임 추궁이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에 대한 공세 부족 때문이라고 보는 건 오산이다. 그것을 뛰어넘는 자신들의 존재감을 보여주지 못한 탓이다. 


민주당은 여전히 ‘이명박근혜 타도’와 같은 구호 정치에 머물고 있다. 국가의 미래 비전 제시는 고사하고 스스로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후보 단일화가 된다 해도 연말 대선에서 자신들의 공간은 없다는 절박감조차 잘 안 보인다. 오늘의 위기는 남 탓이 아닌 ‘내 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경선이든, 국회 상임위 활동이든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자신은 물론이고 당의 존재감을 키워야 한다. 그러한 각성과 실천이 수반될 때 민생으로 가는 길도 보인다. ‘자강’과 ‘참여’ ‘민생’이야말로 위기를 극복하는 첩경이다. 더 이상 머뭇거리기에는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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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따른 ‘묻지마 범죄’와 아동 성폭력 사건 끝에 경찰이 거리 불심검문을 2년 만에 부활하겠다고 나섰다. 경찰청은 이달부터 대로변과 지하철역 등 대중운집 시설과 다세대주택가를 비롯한 범죄 다발지역에서 불심검문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라는 지침을 어제 전국 지방경찰청과 경찰서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불심검문은 경찰관 직무집행법 제3조에 근거한 것으로 범죄를 범했거나 범하려 한다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는 거동 수상자를 경찰관이 정지시켜 질문을 던지거나, 흉기 소지 여부를 확인할 수 있도록 부여한 권한이다. 그러나 영장주의와 과잉금지원칙을 위반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그 폐해가 끊임없이 지적돼왔다. 국가인권위원회가 2010년 9월 인권침해를 이유로 인천의 한 경찰서장과 지구대장에게 서면경고와 직무교육을 권고한 뒤 사실상 거리에서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경찰이 검문검색 강화에 애착을 보여온 게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2010년 5월에는 아예 시민이 정지 검문검색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삭제하고, 검색 대상을 흉기 외에 ‘그 밖의 위험한 물건’ ‘공공의 안전에 위해를 끼칠 수 있는 물건’으로 확대한 경찰관직무집행법 개정안을 밀어붙였다가 역시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경찰의 권한이 커지면서 국민 신체의 자유,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는 이유로 수정·보완 권고를 받기도 했다. 일선 경찰관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국민의 기본권이 얼마든지 침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검문하는 경찰관 (출처: 경향DB)


‘절망범죄’ ‘은둔형 외톨이 범죄’가 국민을 불안케 하고 있다. 하지만 끔찍한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민을 더욱 불안케 하는 것은 제 역할을 해내지 못하는 경찰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이번 나주 초등학생 성폭력 사건만 해도 피해 어린이의 집과 영산대교 인근에 CCTV가 1대도 없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은 해당 지역에서 평소 2인 1개조로 순찰차를 타고 24시간 순찰을 해왔다고 주장했지만, 사건예방은커녕 대로변에 방치된 피해어린이를 신고한 지 5시간이 지나도록 발견하지 못했다. 지난 4월 수원 중부서 관내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납치, 살해 사건에서는 112신고를 묵살해 국민적 지탄을 받았다. 경찰은 재발방지를 다짐했지만, 수원 중부서는 불과 두 달 뒤 112를 통한 30대 여성의 구조요청을 또다시 외면한 바 있다. 경찰이 검문검색부터 강화하겠다는 것은 제손에 쥐여준 인원·장비·권한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면서 국민의 기본권에 앞서 경찰권만 강화하겠다는, 역발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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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찬 | 문화부장


폴 스위지(1910~2004)라는 경제학자가 있다. 혹자는 그를 진보 월간지 ‘먼슬리 리뷰’의 창간인 겸 발행인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러나 ‘먼슬리 리뷰’에 앞서 그를 세상에 알린 것은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The Theory of Capitalist Development)이었다. 1942년 쓰여진 이 책은 지금도 마르크스 경제학 입문서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이 책은 1970~80년대 한국 대학가에서 은밀히 유포돼 읽혔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이 책을 독서 목록에 넣어 읽고 토론했다. 당시만 해도 번역이 안됐던 터라 학생들은 이 책을 그냥 ‘스위지’라고 불렀다. 스위지는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과 동의어였다. (책은 2009년 필맥출판사에서 번역 출간됐다.)


내가 ‘스위지’를 기억하는 것은 선배 황정하 때문이다. 그는 스위지의 탐독자였다. 키가 훤칠하게 컸던 그는 양복 윗옷 주머니에 스위지 제록스판을 넣고 다니며 보았다. 영어 실력이 뛰어났던 그는 사전도 없이 술술 읽어냈다. 당시 서울 성수동에서 노동야학 교사로도 활동했던 그에게 ‘스위지’는 노동 현실을 이해하는 좋은 도구였던 것이다. 대학 졸업을 3개월여 앞둔 1983년 11월 황정하는 학생 시위를 주동하다 도서관 5층에서 추락해 숨졌다. 그는 시위에 앞서 경찰의 조사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물건을 모두 정리했다. 스위지 책은 한 후배가 전해받았는데, 그의 유일한 유품이 됐다. 해마다 그의 기일이 되면 제사상에 이 책이 놓인다. 


유신과 전두환 군사정권시대에 카를 마르크스는 최대 금기어 가운데 하나였다. 마르크스의 저서는 모두 금서였고, 책을 소지하기만 해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았다. 마르크스의 <자본>(Das Kapital) 원전을 접할 수 없었던 대학생들은 폴 스위지의 <자본주의 발전의 이론>과 같은 <자본> 해설서를 집어들었다. 


 

칼 마르크스 (출처: 경향DB)



1988년 출판물 해금 조치로 <자본>은 빛을 보았다. 이듬해 김수행 서울대 교수가 <자본론> 완역본(비봉출판사)을 내자 도서출판 이론과실천은 곧바로 독일어 원본을 번역한 <자본>을 선보였다. 비슷한 시기에 북한판 <자본론>도 수입돼 번역본 경쟁이 치열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년 뒤 소련이 붕괴하면서 <자본>에 대한 관심은 금세 시들해졌다. 공산권의 몰락을 자본주의 승리로 받아들이는 속에서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고들 했다. <자본>이 설자리는 없었다.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용도폐기될 것만 같았던 마르크스주의를 불러온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였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자 사람들은 다시 <자본>을 주목했다. 신자유주의가 확산되고 비정규직, 워킹푸어들이 늘어나면서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자본>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2010년엔 독일어판 <자본>이 다시 번역돼 나왔다. 이어 <데이비드 하비의 ‘자본’ 강의>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류동민),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자>(강신준) 등 <자본> 입문서들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주에는 <자본론을 읽어야 할 시간>(아케가미 아키라), <마르크스가 예측한 미래사회>(김수행)가 출간됐다.


때맞춰 경향신문은 주말기획으로 ‘오늘 <자본>을 읽다’를 내보내고 있다. 이는 마르크스 <자본>을 독자 눈높이에 맞춰 소개하는 언론 사상 초유의 시리즈가 될 듯하다. <자본>은 어려운 책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학자들 가운데에도 완독한 이가 매우 드물다. 이 때문에 종합일간지에 <자본> 강좌를 싣는 게 옳으냐는 반문도 적지 않다. 


그러나 숨막힐 듯한 작금의 현실은 <자본>이라는 ‘무기’를 필요로 한다. 작가 공지영은 최근 펴낸 <의자놀이>에서 22명의 죽음을 가져온 쌍용자동차의 무법천지와 음모 앞에서 “이 사회가 정상이냐”며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 23, 24번째 희생자를 부르는 의자놀이를 멈추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냐고 묻는다. <자본>을 보면 쌍용차 자본주의의 음모를 읽을 수 있다. 세상에 대한 환멸과 무기력에 빠져 죽어가는 노동자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경향신문 <자본> 연재를 맡은 강신준 교수는 20여년간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자본> 전문가이다. <자본>을 완역하고 시민·대학생을 상대로 <자본>을 강의해온 강 교수는 지상강좌를 통해 독자들에게 마르크스 경제학의 핵심을 전해준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이미 두 차례 지상강좌를 접한 독자들은 강 교수의 친절한 강의에 기대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강 교수는 <자본> 연재를 시작하며 “노동자들이 집집마다 <자본>을 곁에 두고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신문 연재가 <자본>을 읽는 데 길라잡이가 됐으면 한다. 그래도 부족하면 ‘스위지’와 같은 시중의 정치경제학 입문서가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에 “지금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시대인가를 늘 생각했다”고 썼다. 독자들에게 이 같은 문제의식만 전달돼도 <자본> 지상강좌는 성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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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대 부자들에 대한 기록인 <사기> ‘화식열전’을 보면 인생 삼모작을 모두 성공적으로 이끈 인물이 나온다. 범려라는 사람이다. 춘추 말기 그는 오나라 왕을 도와 정치와 군사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데도 그는 권력의 자리를 미련없이 버리고 장사꾼과 사업가로 변신해 역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이 때문에 250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는 부와 재물의 신으로까지 추앙받고 있을 정도다.


범려가 이렇게 성공적인 삶을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신서(新序)>라는 책에 기록된 다음 일화는 그의 성공 원인을 짐작케 하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중국 '사기'의 저자 사마천 (출처: 경향DB)

위(魏)나라에 판단하기 어려운 사건이 하나 발생했다. 군신들 가운데 절반가량은 그 사람이 유죄라고 판정했고, 나머지 절반은 무죄라고 판정했다. 위왕도 결단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위왕은 “평민의 신분으로 거부가 된 도주공(범려의 별명)에게는 틀림없이 기가 막힌 지혜가 있을 것이다”라며 사람을 보내 도주공 범려를 불렀다. 위왕은 범려가 알현하자 사안의 경위를 소상하게 설명한 다음 이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냐고 자문을 구했다. 


범려: 저는 일개 평민 백성에 지나지 않아 이런 형사사건을 판결할 줄은 모릅니다. 제 집에 흰 옥이 두 개 있사온데, 색도 같고 크기도 같고 광택도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1000금이 나가고, 하나는 500금이 나갑니다.


위왕: 색도 크기도 광택도 다 같은데 어째서 값이 다르오? 


범려: 그것들을 옆에서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가 좀 더 두껍습니다. 그래서 값이 배나 더 나가지요.


위왕: 옳거니! 죄를 판정하기가 어려우면 사면하면 되고, 상을 줄 것인지 말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면 그냥 상을 주면 되지!


범려로부터 자극을 받아 후덕의 의미와 치국 방식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얻은 위왕은 “이렇게 보면 담이 얇으면 무너지고, 옷감이 얇으면 찢어지며, 그릇이 얇으면 깨지고, 술이 얕으면 이내 시어진다. 무릇 각박하면서 오래 버티는 자는 없다”는 말로 자신의 깨달음을 정리했다. 위왕은 적어도 말귀를 알아듣는 통치자였다.


범려가 옆에서 살피라고 한 것은 실제로는 늘 하던 관찰 방식, 즉 기존의 시각을 버리고 새로운 각도에서 사안을 다시 봄으로써 기존의 시각으로는 이해관계를 밝히거나 우열을 판단할 수 없음을 깨달으라는 지적이었다.


“눈동자는 다른 곳의 미세한 솜털은 볼 수 있어도 자신의 속눈썹은 보지 못하는 법이다.”(<사기> ‘월왕구천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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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웅 논설실장


언론은 빈발하는 새로운 양상의 범죄들에 적절한 작명을 하느라 분주하다. 절망, 증오, 분노, 묻지마, 자포자기 같은 수식어들이 범죄·살인 앞에 붙곤 한다. 이들 범죄는 각양각색이지만 공통 코드가 있다. 외톨이형 범죄란 것이다. 견해가 다를 수도 있겠으나 나주 아동 성폭행 사건도 그 범주다. 범인이 오랜 기간 PC방을 전전해왔고, 게임광이었다는 점에서다. 


여의도 칼부림 사건이나 의정부역 흉기 난동은 비교적 ‘신종’이란 이유에서 미국, 일본에서 발생한 선례들과 비교 분석되기도 한다. 여의도에서 전 직장동료와 행인들에게 마구 칼을 휘두른 김모씨 사건은 일본의 도리마(通り魔) 사건과 비슷하다고 한다. 분노 대상을 공개 ‘응징’한 것 등 미국형 다중살인을 닮았다고 보기도 한다. 총이 아닌 칼을 사용했다 뿐, 영락없이 미국식 총기난사 사건이라는 것이다. 


극단 제5스튜디오가 공연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원작 연극 '죄와 벌' (출처: 경향DB)


절망형 은둔자는 주로 쪽방, 고시원, 지하방 등에서 혼자 산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등장하는 ‘나’와 비교해볼 만하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든 인간이다. … 나는 악한 인간이다. 생각건대 간에 이상이 있는 것 같다. … 내가 치료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은 증오심 때문이다. …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런 식으로 약 20년간을 살아왔다. …” 1864년 나온 이 소설은 무기력하고 자의식 넘치는 독백으로 가득 차 있다. 물론 그는 지식인이며 고립상태에서 증오에 시달리지만 무슨 범죄를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다르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죄와 벌>(1866년)에서 살인을 통해 초인사상을 실현하려다 실패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창조한다. 


시대와 사회적 배경은 달라도 ‘지하생활자’는 항상 있었다. 도스토예프스키 때 지하생활자는 물질문명과 전체주의를 냉소하지만 무기력한 지식인이었다면, 이 시대의 지하생활자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절망과 증오를 쌓아가는 신용불량자나 게임과 음란물에 중독된 외톨이들일 수 있다. 더욱이 한국 사회는 이 사회적 낙오자, 절망형 은둔자들을 ‘양산’하는 체제다. 청년실업, 가계부채, 신용불량, 비정규직, 사회안전망 등 모든 지표가 그 이유를 말해준다. 높은 자살률과 절망범죄는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거기에다 대고 그저 엄벌을 촉구하고 불심검문이나 부활하자는 건 참으로 하지하의 방책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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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대 | 서울 양천소방서 홍보교육팀장


지난해 서울시의 화재통계에 따르면 소방시설 미설치 대상인 일반주택이 전체 주택의 41%를 차지하고 최근 3년간 화재 사망자의 54%가 일반주택에서 발생하는 등 일반주택은 화재로부터 매우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화재의 경우 대부분이 심야 취침시간대에 발생하여 화재사실을 조기에 인지하지 못한 채 대피가 지연되어 유독가스 흡입에 따른 다수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있다. 아울러 아파트와 기숙사 등 공동주택에는 소화설비, 경보설비, 피난설비 등이 의무적으로 법령에 규정돼 있지만 일반주택, 연립과 다세대 등 공동주택의 경우 화재발생 및 인명피해가 높은 실정임에도 소방시설 의무설치 대상에서 제외돼 왔다.


이처럼 법의 사각지대에 놓여왔던 일반주택의 화재피해를 막고자 올해 7월30일부터 주택에 기초 소방시설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서울시 주택 소방시설 설치에 관한 조례’가 공포돼 주택에도 층별, 가구별 소화기 1대와 구획된 실마다 단독경보형감지기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화재가 발생하면 연기를 감지해 자동으로 경보음을 울려 신속히 대피할 수 있게 하는 설비로 기존 주택은 5년간 설치 유예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소방방재청 등 민관 10개 단체가 ‘저소득 화재 취약계층 단독경보형감지기 달아주기 범국민 모금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며 서울소방재난본부는 독거노인, 기초생활수급자 등 형편이 어려운 가구를 대상으로 무료로 보급하는 등 화재피해를 줄이기 위한 종합대책을 추진하고 있다.



소방관들이 서울광장 앞 지하공사장에서 진화작업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실제로 지난 2010년 11월28일 새벽 2시40분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 산160번지 산청마을에서 화재가 발생해 판잣집과 비닐하우스 주택 21채가 소실됐으나, 단독경보형감지기가 작동해 인명피해가 없었으며, 2011년 12월14일 강북구 미아동 주택 베란다 보일러에서 화재가 발생했으나, 안방에서 낮잠을 자던 주인이 단독경보형감지기 경보 소리에 깨어 초기에 자체 진화해 인명피해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단독경보형감지기는 개당 가격이 1만2000원 정도에 불과하지만, 화재에 취약한 일반주택의 화재 시 소중한 생명과 재산을 지켜주는 효과적인 안전설비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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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록 |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대선을 앞두고 다시금 ‘5·16’이 쟁점이 되고 있다. 5·16쿠데타의 주역인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즈음 5·16과 유신에 대해 국민들의 올바른 인식을 제대로 따져 봐야한다. 미래에 대한 구상과 전망은 과거에 대한 평가와 인식에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헌법의 최고 수호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총칼로 헌정질서를 무너뜨린 행위를 최선의 선택 운운하는 것이 바른 역사관인지, 경제성장과 안보를 위해서는 쿠데타도 불가피하다는 인식에 대한 검증도 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전두환이 근대화를 넘어 경제선진화를 이뤘으니 5·17은 쿠데타가 아니라 구국의 혁명이고, 전두환의 선택이 최선이라고 강변한다면 거기에 대해서도 5·16과 동등하게 인식을 할 것인가? 그런 논리라면 앞으로 경제가 어려울 때는 언제라도 군을 동원해 헌법을 파괴하고 경제만 성장시키면 그것이 곧 구국이고 최선의 선택인가?


 

'5.16이 쿠데타냐, 아니냐?' 질문받는 김황식 총리 (출처: 경향DB)



그들은 사회적 혼란에서 국가를 구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군대를 동원해 국가기관의 권한을 정지시킨 뒤 입맛에 맞는 권력기구를 만들었다. 우리는 박근혜 후보의 말처럼 소모적인 논쟁으로 과거에 연연한 것이 아니고, 국가 보위와 군 통수권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5·16과 5·17에 대한 역사관을 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을 국민이 직접 뽑지 않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간선하도록 한데다가 몇 번이고 연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영구집권의 길을 열었다. 거기에다 대통령은 국회해산권을 언제든지 발동할 수 있고, 긴급조치권, 국회의원 3분의 1의 추천권, 대법원장과 모든 판사들에 대한 임명, 파면권까지 가졌다. 이는 대통령 일인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된 제왕적 체제였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시행착오를 해왔다. 군 생리를 잘 알지 못한 사람에게 군 통수권을 맡겨도 봤고, 헌법 조항을 군홧발로 짓밟은 사람에게 민주주의 희망을 걸어보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다 도덕적 흠집은 있어도 경제부강을 기대하면서 성원을 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후회와 허탈뿐이었다.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국민을 무시하거나 잘못을 모르고 국민을 졸(卒)로 보는 후보는 철저히 가려내야 한다. 속고 나서 후회하면 때는 늦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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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돈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성을 보장하는 체제다. 돈이 상품과는 달리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10만원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10만원에 상당하는 상품 중 어떤 것이든지 구매할 수 있다. 자장면이 먹고 싶다면 자장면을, 아름다운 장미를 애인에게 주고 싶다면 장미를 살 수 있다. 그렇지만 상품을 가진 사람은 이런 무한한 교환 가능성을 가질 수가 없다. 자장면을 만든 사람이 아무리 애인에게 장미를 선물하려고 해도 돈이 없다면 불가능한 법이다. 반드시 자장면을 팔아 장미를 살 수 있는 돈을 벌어야만 한다. 급하다고 해서 자장면을 들고 꽃가게에 갈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 자장면이 있으니, 장미 한 송이만 주세요.” 아마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이 취업하려고 혈안이 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자신의 몸을 뜯어 먹고 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자신을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려고 지금도 애를 쓰고 있다. 상품 상세 설명서, 그러니까 스펙이란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은유가 아니다. “이 스마트폰은 인터넷 속도가 빨라요, 그리고 앱도 다른 기종보다 훨씬 더 다양하게 활용 가능합니다. 더군다나 시중에 좋다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더 좋은 화소를 가진 카메라도 장착되어 있구요.” “저는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양한 외국어를 구사할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입니다.” 마르크스의 시니컬한 지적처럼 정말 지금 우리는 보편적 매춘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돈이 없다면, 우리는 옷과 집과 같은 생필품조차도 구할 수 없는 사회에 살 수 있으니까. 


자본가의 파괴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팔아서라도 얻으려는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회사 CEO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그가 존경스러워서라기보다는 그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언제든지 나를 해고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는 내게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신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온다는 속담이 맞긴 맞나보다. 월급날 우리의 수중에 돈이 들어오니까 말이다. 우리는 작은 자본가가 된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노동자에서 소비자로 탈바꿈한다. 이제 상품은 자본가가 가지고 있고, 그것을 구매할 수 있는 돈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도 자본주의의 냉혹한 원리, 그러니까 돈을 가진 사람이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원리는 어김없이 작동한다. 



▲자본가의 잉여가치 보호하는

신용카드 남발과 대출제도

노동자에게 봉급 이상 지출 조장

자본의 탐욕 통제 장치는 없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출처: 경향DB)


평상시 자본가들은 소비자로 변신한 노동자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어차피 우리는 자본이 만든 상품을 사느라 자신이 가진 돈을 다 소비할 테니 말이다. 바로 여기에 자본의 신비가 숨어 있다. 노동자가 자신이 번 돈으로 자신들이 만든 상품을 구매하는 메커니즘에 의해서만 자본은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극단적으로 말해볼까. 사실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봉급을 주는 이유는 그것으로 상품을 구매하라는 암묵적인 요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소비자가 된 노동자들이 상품을 사지 않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봉급으로 주었던 돈이 상품 대금으로 회수되지 않을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괴물이 가진 유일한 약점, 즉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이다. 광고를 통해 소비를 유혹하는 전략, 마케팅이 중요시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어떤 방식으로든 자본가의 입장에서 노동자에게 봉급으로 주었던 돈은 반드시 회수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잉여가치가 발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본가로서의 위엄도 회복할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마케팅이고 뭐고 더 이상 노동자가 자본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경우가 생길 수 있다. 허영을 자극하는 선정적인 광고도 더 이상 노동자의 지갑을 열지 못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쓰고 말고는 돈을 가진 사람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로서는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자본주의의 아킬레스건을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침내 묘수 한 가지가 자본가의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그것이 바로 신용카드와 대출로 상징되는 신용경제 시스템이다.


신용경제는 노동자가 아무도 모르게 미래에 쓸 수 있는 돈을 미리 댕겨서 쓰도록 만든 시스템이다. 결국 신용경제는 빚경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용경제는 또한 얼마나 치명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는가. 신용카드나 대출을 통해 이제 마음만 먹으면 어느 때든 우리는 가볍게 명품가방도 구입할 수 있다. 타인에게 자신이 얼마나 부유한지를 과시하는 허영인 셈이다. 또한 갑자기 돈이 필요할 때, 신용카드는 치명적인 마력을 발휘한다. 친구나 동료들에게 돈을 빌린다는 것은 상당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은행의 단말기는 어떤 꾸지람도 없이 버튼만 누르면 가볍게 300만원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신용경제는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만나면서 더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인터넷을 통한 상거래는 주로 신용카드로 이루어지고 있고, 웬만한 결제는 이제 스마트폰으로도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어디서나 신용경제는 우리의 허영과 자존심을 음흉한 미소로 어루만져주고 있는 셈이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이나 혹은 남에게 돈 이야기를 못할 정도로 소심하고 여린 사람, 즉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일수록 신용경제는 견디기 힘든 유혹일 수밖에 없다. 얼마나 사악한가? 마치 거미줄을 치고 먹이를 기다리는 거미처럼 신용경제는 우리가 돈이 궁해질 때를 입맛을 다시며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신용경제에 포획되어 빚을 지게 될 때 자본은 빚을 진 것은 자기 탓이 아니라 우리 탓으로 돌릴 것이다. 거미줄에 걸린 것이 자기 탓이 아니라 부주의한 당신 탓이라고 말하는 기만적인 거미처럼 말이다. 부동산이든 명품가방을 사고 싶을 때, 혹은 갑자기 급전이 필요할 때, 우리는 신용경제에 포획되어 순간적인 단맛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항구적인 채무자의 길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한 일 아닌가? 신용경제가 발달할수록 신용은커녕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악순환이 벌어지니 말이다. 그렇지만 자본은 그런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잉여가치를 획득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국민의 선거로 선출된 정권이 국민이 아니라 자본을 위해 일하고 있는 지금 자본의 탐욕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부동산을 통해 경제 불황을 타개하겠다고 정부가 내놓은 정책, 그러니까 총부채상환비율(DTI)을 완화하겠다는 정책을 보라. 다시 우리들에게 빚을 내 부동산을 구매하라는 요구가 아니면 무엇인가. 답답하기만 하다. 언제나 우리는 빚을 권하는 나쁜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벗어날 수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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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서울북부지법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를 선고받았던 임모씨 등 4명이 청구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당연한 것이고 예상됐던 바지만 37년 만에 내려진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에 대한 첫 재심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각별하다고 하겠다. 사법부는 이미 긴급조치 1호와 4호의 위헌 결정에 이어 지난 8월2일 이들의 재심 청구를 받아들임으로써 9호도 위헌이라는 판단을 내린 터였다. 재판부는 이들에 대한 무죄 선고와 함께 과거 재판부의 잘못된 판결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만한 일이다. 


긴급조치 9호가 어떤 것인가. 1975년 5월 발령된 이 조치는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했다. 이 조치를 위반한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그 표현물을 제작·배포·판매·전시하는 것은 물론 소지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미수하거나 예비·음모한 자도 똑같이 취급했다. 이 조치를 포함해 이에 따른 주무장관의 조치를 위반한 자에 대해서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금·압수·수색할 수 있고 1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헌법재판소가 유신헌법 긴급조치 조항의 위헌 여부를 가리는 공개변론을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장준하 선생 등을 탄압한 1호나 민청학련을 단죄한 4호와 달리 긴급조치 9호는 ‘긴급한 조치’를 요하는 특정한 사안도 없는 가운데 발령해 1979년 10·26사태로 원인 무효가 될 때까지 5년 가까이 ‘일상적 조치’로 지속했다. 유신체제의 결정판이자 여러 긴급조치 가운데서도 가장 고약했으며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하물며 목회자의 기도와 설교, 교원의 수업과 학원강사의 강의, 친구끼리 주고받은 대화와 편지, 재수생이 쓴 시, 택시에서 한 취중발언까지도 문제가 됐다. 당시 고교 교사였던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부터 아파트 경비원에 이르기까지 800명이 넘는 학생·시민이 이 때문에 수갑을 차고 감옥살이를 했다. 이 가운데 많은 이가 인생을 망쳤고, 상당수가 그 후유증으로 지금껏 고통스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이들의 재심 청구가 봇물을 이룰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약 200여명이 재심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과거사는 억지를 쓴다고 해서 그 행위가 없던 것이 되고 공과가 뒤바뀌는 것은 아니다. 최근 정치권에서 벌어지는 ‘유신 재평가 논란’은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고 세상이 어둡다고 우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과거를 직시하고 과가 있다면 이를 분명히 정리한 뒤에 비로소 공을 논할 수 있고 미래를 기약할 수도 있다. 사법부의 이번 판결은 그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누가 긴급조치 9호를 위반해 구속됐다는 사실을 보도하는 것조차 긴급조치 9호 위반이었던 헌정사 최고 암흑기의 속살은 아직 손바닥으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과거사 왜곡을 비판하면서 우리의 과거사 왜곡을 방관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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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잇단 태풍이 지나가는 사이 폭염에 시달리던 날들을 기억의 저편으로 몰아내고 문득 계절이 바뀌었다. 서쪽바다에 휘몰아친 대자연의 위용도 위용이지만, 대통령의 느닷없는 독도 방문으로 촉발된 한·일갈등으로 동해의 파고 또한 높아졌다. 한반도 양안의 이 강풍 탓인지 한창 진행 중인 야당후보 경선은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1야당 후보가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대선의 풍향을 가름할 변수다.


민주당의 경선과정이 흥미로운 것은 권력과 인간의 문제를 되짚어보는 일종의 인문적 성찰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문재인 후보에 대한 비판으로 본격 제기된 권력의지의 유무 논쟁이 바로 그 계기다. 권력의지를 공적인 ‘소명의식’과 연관시킨 문 후보의 주장과 이에 맞서 민중에 대한 연민과 강한 실천정신이 진정한 권력의지라는 손학규 후보의 발언은 경선에 어떤 정치철학적 의미가 실리게 한다. 이것은 지난 여름 일종의 소극으로 끝난 새누리당의 경선과는 현격히 구별될 뿐 아니라 선거에서 일찍이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현상이기도 하다. 대선에서 권력의지 유무나 그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진 것은 유례가 없지 않나 한다.


 권력의지라는 말은 쓰는 이에 따라 달리 이해되지만 역시 대선후보를 염두에 둔 만큼 무엇보다 ‘대통령이 되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선 출마자에게 그런 의지가 있느냐고 묻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일 듯도 하다. 그러나 대권의지의 유무 자체가 토론주제가 되면서 권력의 의미와 권력자의 자세를 검증해볼 수 있는, 단순히 정치적이지만은 않은 삶의 문제가 환기된다. 대권의지의 이면은 대권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의지와 욕심 사이의 이 긴장을 심문하는 것은 진정성과도 유관한 도덕성 검증의 높은 수준을 말해준다.


악수하는 민주당 1, 2위 후보 (출처: 경향DB)


권력이라면 대개 정치권력을 말하고 대통령 중심제의 국가에서 그 정점이 대통령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치권력만 하더라도 견제와 균형을 위해 의회와 분점되어 있거니와 언론 경제 등 시민영역의 권력 또한 정치권력에 어느 정도 맞설 만큼의 세력을 가진다. 나아가서 권력은 도처에 있다는 푸코의 관점을 따르면 권력의 미세한 촉수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존재한다. 이 권력의 편재성을 생각하면 권력의지라는 것도 달리 볼 여지가 있다. 실제로 니체에게 권력을 향한 의지는 자신을 성장시키고 퍼뜨리고 주위를 다스리고자 하는 본능과 같은 것, 한마디로 생의 충동이기도 하다. 세상 자체가 권력의 의지들이 부딪치는 공간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는 권력의지의 유무를 묻는 것이 무의미할 법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니체적 의미의 생의 충동을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권력의지를 당연한 것으로 긍정하는 데서 나아가 권력을 정치권력이라는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순간, 정치판에서 마키아벨리즘이 득세하고 인간의 요소는 퇴색한다. 니체의 생각이 오용되면 가령 히틀러가 그러했듯이 파시즘의 씨앗을 키우는 셈이다.


권력의지가 개인의 권력욕과 결합한 결과의 폐해는 히틀러까지 갈 것도 없이 박정희를 비롯한 과거 독재자들의 면모에서 여실하다. 강한 권력의지가 민주사회에서 결코 미덕만은 아니다. 권력욕을 스스로 제어할 만한 자기수양이나 인간이해가 갖추어지지 않은, 즉 인문적인 소양이 없는 통치자가 스스로를 망치고 나라도 어렵게 만든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민주당 경선이 마이너리그라거나 흥행실패라거나 하는 비아냥이 들린다. 정치공학의 관점으로만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더라도 꼭 사실과 부합하지도 않거니와, 이 경선과정에서 민주적 심성이나 자기성찰의 능력이 정치쟁점으로 떠오른 토론의 품격을 무시한 소치다. 인문의식이 배어 있는 논쟁의 이 새로운 지평이야말로 구각을 탈피하고 새 정치를 탄생시킬 희망일 수 있다. 강력한 권력의지를 찬양하고 인간적 면모를 오히려 약점으로 치부하는 관점은 역사상 진정한 지도자가 인문적인 품성을 지녔다는 점을 간과한다. 책을 읽고 생각하는 지도자, 광화문을 지키는 이순신과 세종대왕도 바로 그런 인물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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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시도 예전의 각시가 아닙니다. 마을 도서관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각시에게는 나와 두 딸 말고도 매일 만나야 할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마을 도서관에 부여하는 의미와 가치만큼 각시의 일이 많아졌고 그만큼 혼자 밥 먹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외롭다’고 보내는 신호가 무시되기 일쑤이며 ‘힘들다’는 투정도 가급적 스스로 해결해야 합니다. 내 유전자로부터 기대하는 각시와 거리가 멀어져 갑니다.


부모님을 보며 몸으로 배워 온 전통적인 부부관계의 틀로 사고할 때는 가정의 평화와 행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돈이 없기도 하지만, 적금이나 연금 따위로 미래를 스케치할 상황이 아닙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생의 전략으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잘 안되긴 합니다만, 자세를 낮추고 물어보는 것이 가장 빠른 줄은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700마리의 닭을 자연농업 방식으로 키우고 있습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에게 3일 동안 물과 통현미만 먹입니다. “그러면 병아리 다 죽어. 고운 사료를 먹여야지.” 자연농업연구소 조한규 소장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닭한테 물어 봤어요?”


뿌리에 거름을 주는 것이 아니라 뿌리가 거름 쪽으로 뻗어가도록 생명력을 키우는 것이 식물을 튼튼하게 한다는 이치입니다. 소화가 잘되게 고운 사료를 먹이는 것이 아니라 거친 사료를 소화하기 위해 위장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키우도록 도와야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몇 년 동안, 갓 태어난 병아리들은 죽지 않고 통현미를 먹으며 잘 자라고 있습니다. 소화기관이 발달한 닭의 똥에서는 냄새도 거의 나지 않습니다.


황금닭 피서지는 대숲이 최고(출처: 경향DB)


닭장에서 무엇인가 할 때는 그것이 닭에게 좋은 것인지, 닭과 사람이 타협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고민해야 합니다. 닭한테 물어봐야 합니다. “자네, 이거 괜찮겠는가?” 닭장 주변을 고치고 닭 모이를 바꾸어 줄 때마다 노동의 효율성만 강조하는 것은 닭보고 사람한테 맞추라는 협박입니다. 닭이 닭답게 자라지 않으면 사람도 닭도 다 망하게 됩니다. 닭의 습성을 잘 관찰하고 닭에게 맞는 환경을 만드는 것은 닭을 위한 것이지만 결국은 키워야 하는 사람, 먹어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닭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은 각시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말하지 않는 닭과 말하지만 뜻을 헤아릴 수 없는 각시 모두 내게 항상 불통을 호소하며 경고합니다. “어쩔 수 없으니까 살아준다.” 


40년 넘게 버스 운전을 해오신 아버지의 ‘생명 탑승론’은 차차 풀기로 하고, 매일매일 버스를 쓰다듬는다는 이야기는 아버지가 하신 어떤 말씀보다 감동입니다. 한밤중 불 꺼진 종점에서 시동을 끄고 막차에서 내리는 아버지가 운전대나 버스 앞 범퍼 어디쯤을 토닥이며 지긋한 눈빛으로 “수고했다”고 한마디 던지는 모습은 영화나 광고의 한 편으로도 꽤 괜찮은 장면입니다. 그리 많은 월급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운전에 대한 사명감 같은 것이야 더욱이 있을 리가 없겠습니다. 버스는 가족을 지키는 희망으로, 함께 일하는 동지로서, 생명을 같이하는 운명공동체로서 존중의 대상이지 않았는가 싶습니다. 장미란의 바벨 키스를 보면서 아버지가 생각났습니다. 두 양반의 스킨십에서 느끼는 감동은 일상의 노동과 땀을 어림짐작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나도 한번쯤 연출해 보고 싶은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건 폼 잡는다고 되는 것이 아니잖아!’ 


나 아닌 것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일은 직관이나 감성 또는 취향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노동입니다. 나의 수고를 감수하며 끊임없이 관찰하고 배려하는 자세입니다. 좋은 결실을 위해 땡볕에서 김을 매며 흘려야 하는 땀과 같은 일상의 노동입니다. 그런 수고와 땀 없이 나 아닌 것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더 나은 미래를 원하는 이들에게 좋은 주장과 구호와 편과 줄을 갖추는 일은 반쪽의 무기입니다. 얼마나 다양한 주장이 공존할 수 있는지, 구호는 얼마나 마음을 움직이는지, 편과 줄은 얼마나 열려 있는지에 대해 민감한 것이 정확히 나머지 반쪽입니다.


어느 시점부턴가 농업은 귀하다는 자부심에 자족하고 멈춰 있지 않은지. 주장과 입장을 세우면서 오히려 농업의 가치와 농촌의 무궁한 가능성을 박제시키고 있지 않은지. 논과 밭에서 전하는 이야기들이 “정부는 뭐하는 거야” “도시놈들 도대체 농촌을 알아야지” 하는 원망과, “쌀값 더 떨어져봐야 농민들 정신차린다”는 자학의 벽을 넘어 제대로 전달이 되고 있는지. 내가 나에게 던지는 맨 앞의 질문입니다.


무서운 꿈 이야기 하나 들려드리겠습니다. 닭 똥구멍에서 나오는 계란만 좋아하다가, 각시가 차려주는 밥상만 바라다가, 여전히 국민들은 농촌을 고향 어디쯤의 가치로 만족할 것이라고 착각하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달려들어 이러는 겁니다. “야야! 너 없어도 된다.” 


괜찮습니다. 앞으로 몇 년은 그럭저럭 지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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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환 | 귀농본부 텃밭보급소장


남자들은 밭갈기와 파종을 잘하고 여자들은 풀매기와 수확을 잘한다. 남자들은 특히 삽질하기를 좋아한다. 삽으로 흙을 뒤집을 때의 쾌감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흙을 뒤집지 말기를 권한다. 


 



우선 흙을 뒤집거나 갈면 가뭄을 탄다. 뒤집고 가는 과정에서 흙의 습기가 마를 뿐만 아니라 깊은 땅속에서 올라오는 물길이 끊어지고 메워진다. 아무리 맑은 날이라도 맨땅에 앉으면 엉덩이가 축축해지는 것은 땅속에서 습기가 올라오기 때문인데 흙을 뒤집으면 이 습기 올라오는 길이 막히는 것이다. 또 흙을 뒤집고 갈면 병해충이 더 생긴다. 흙을 갈지 않으면 흙 속 생태구조와 먹이사슬이 그대로 살아있어 흙의 균형이 유지되는데 흙을 갈아엎어버리면 이 구조가 교란되고 그 빈틈을 해충들이 메운다. 해충은 초식이고 익충은 육식 벌레다. 생태계가 깨지면 초식성 벌레나 동물이 먼저 생기기 마련이다. 먹을 게 없는데 육식성 벌레, 동물이 먼저 찾아올 리 없다.


뒤집지도 갈지도 않으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호미로 풀만 매주는 게 좋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가는 효과가 생기는데 그 깊이가 10㎝를 넘지 않는다. 이른바 얕이갈이(淺耕)를 하면 표토에서 날아가는 습기는 잡아주고 작물 뿌리에 도달하는 습기는 건들이지 않게 된다. 그래서 가뭄을 덜 탄다.


흙을 뒤집지 않는다면 거름은 어떻게 줘야 하나? 초보농부들은 뿌리가 거름을 잘 흡수하도록 흙 속에 집어넣는다. 그러나 거름을 땅속에 집어넣으면 그걸 먹으러 해충들이 모여든다. 따라서 거름은 땅 위에서 호미로 흙과 살살 섞어주기만 한다. 거름의 양분은 빗물에 의해 충분히 스며들게 되어 있다.


흙을 갈지 않으면 폭우에도 흙과 거름 유실을 줄일 수 있다. 흙을 너무 곱게 갈면 약간의 비에도 쓸려간다. 흙이 유실되면 땅이 딱딱해지고 양분이 쓸려가버려 흙은 산성이 되어 농사도 잘 안된다. 상업 목적의 대규모 단작 농사에선 불가피하게 기계로 땅을 갈아야 하지만 자급 목적의 도시농부들은 갈지 않을수록 땅도 좋고 힘도 덜 들며 병해충을 예방하는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래도 그 힘든 삽질을 하시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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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나주에서 초등학생이 잠을 자다 납치돼 성폭행 당하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도 범인은 ‘이웃집 아저씨’였다. 경찰에 붙잡힌 피의자 고모씨는 그제 새벽 자신의 주거지에서 300m가량 떨어진 ㄱ양의 집에 침입해 거실에서 자고 있던 ㄱ양을 이불째로 납치해 성폭행했다고 한다. 경남 통영에서 성폭력 전과자가 이웃 초등학생을 성폭행하려다 살해한 사건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천인공노할 아동 대상 성범죄가 재연된 것이다. 어린 소녀들이 흉악범의 제물이 되는 동안 이 땅의 어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부끄럽고 참담할 뿐이다.


이번 사건은 2008년 사회적 공분을 일으킨 ‘조두순 사건’을 연상케 한다. 범인 조두순이 등교하는 어린이를 화장실로 끌고 가 성폭행한 사건으로 피해자는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 이번 사건 피해자도 성폭행 과정에서 대장이 파열되는 중상을 입고 응급수술을 받아야 했다. 조두순 사건 피해 아동은 “친구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메시지를 사회에 전해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러나 아이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부는 성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근절대책’을 내놓았지만 성범죄가 근절되기는커녕 발생빈도가 늘고 수법도 잔혹해졌다.


보호해주세요! 여성성폭력 예방지킴이 발대식 행사에서 호루라기와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출처: 경향DB)


정부와 새누리당은 성범죄에 대한 국민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화학적 거세(성충동 억제약물 치료)’ 적용대상을 확대하고 성범죄자 처벌을 강화하는 방안 등을 추진 중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사후대책’에 불과하다. 사전에 범죄를 예방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성폭력 범죄를 막으려면 무엇보다 성에 대한 왜곡된 사회적 인식을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성범죄가 성충동 때문이 아니라, 소외에서 야기된 분노를 타인에게 해소하거나 피해자를 뜻대로 통제하는 쾌감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일상생활에서 성희롱 등에 너그러운 문화부터 고치지 않고는 성범죄를 추방하기 힘들다는 지적이다.


나주 사건의 피해 아동은 범죄에 취약한 환경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집 구조상 문을 닫으면 바람이 통할 곳이 없어 문을 열고 지냈다는 것이다. 범죄자는 이 틈을 노려 범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아동 대상 성범죄의 주 표적이 되는 것은 소외계층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사회적 보호 체계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튼튼한 안전망을 갖춰야 한다. 아동 대상 성폭력은 최악의 파렴치 범죄이며 엄단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처벌 강화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 고민하고 행동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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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우리땅걷기 대표·문화사학자


영남 유학의 산실을 두고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부른다. 


‘좌 안동’의 기틀을 세운 퇴계 이황은 조선의 대유학자다. 그에 대한 일화들이 <퇴계집>에 많이 실려 있다. 한편 한편의 글이 다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면서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한번은 퇴계 선생을 모시고 산당(山堂)에 앉아 있는데, 앞들에 말을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있었다. 


산당을 지키는 중이 “그 사람 참 괴이하다. 진사(進士) 앞을 지나가면서 말에서 내리지 않다니” 하자, 퇴계 선생이 하는 말이 “말 탄 사람이 그림 속의 사람같이 하나의 좋은 경치를 더해주는데 허물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경향신문DB)


퇴계의 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증언하기를, 퇴계 이황은 손님에게 밥상을 차릴 때에 반드시 집에 있고 없는 것에 맞추어 차리도록 했고, 귀한 손님이라 해서 성찬을 차리지 않도록 했으며, 또 비천한 사람이나 어린이라고 해서 소홀히 하지 않게 했다고 한다. 


또한 퇴계의 제자인 이덕홍이 구술하기를, 퇴계는 산수가 아름답거나 폭포수가 쏟아지는 곳이 있으면, 간혹 몸을 빼내어 홀로 가서 즐기며 시를 읊조리다가 돌아오기도 하였다고 한다. 이덕홍은 퇴계의 임종을 두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8일에는 아침에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했다. 이날은 개었는데 유시(酉時)에 이르자 갑자기 흰구름이 지붕 위에 모이고, 눈이 내려 한 치쯤 쌓였다. 조금 있다가 선생이 몸을 바르게 앉혀달라고 명하므로 붙들어 일으키자, 앉은 채로 돌아가셨다. 그러자 구름은 흩어지고 눈은 개었다.”


한 번 살다 가는 인생을 이렇게 살다 가야 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오고 가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인생을 두고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결국 돌아갈 때는 누구의 인생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을 너무 거창한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는 게 아닌지.


그리스의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영혼의 자서전>에서 한 사람의 인생을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주 고상한 노래를 하나 부르자. 똥 싸고, 먹고, 방귀뀌고, 마시는 게 인생이라네.”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대문호 괴테는 “어지러운 인생도 그림에서는 아름다워 보이느니”라고 평했다. 


아주 하찮은 것이 인생일 수도 있고, 아주 지고지순할 수도 있는 것이 인생이다. 당신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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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 | 여성학 강사


 

성범죄 가해자에 대한 독특한 시선이 있다. 다른 범죄는 처벌하면 그만인데, 이들에 대해서는 상담·치료 등 ‘다양한’ 대책이 제시된다(절도나 폭력 사범에게 ‘심리 상담’을 운운하지는 않는다). 새누리당은 아동 성범죄와 ‘변태’ 성욕에 국한했던 성충동 약물치료, 이른바 ‘화학적 거세’를 강화하는 요지의 법 개정을 추진하기로 했다.


지난해 7월 관련법 시행 즈음, 효과와 인권 침해 여부를 놓고 여러 차례 논쟁이 있었다. 2~6%에 불과한 성폭력 신고율, 신고와 기소 과정에서 피해자가 겪는 고통, 낮은 신고율만큼이나 낮은 기소율과 더 낮은 유죄 판결률을 고려할 때, 성범죄를 막기 위한 대책이 ‘주사(注射)요법’이라니, 그다지 설득적이진 않다. 


 어쨌든 성범죄의 규모와 실태가 워낙 심각하기에, 효과라도 확실하다면 극렬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성범죄의 원인이 성별 권력관계의 불균형 때문이지, 남성호르몬 과다로 인한 생리현상이 아니라는 점에 있다. ‘화학적 거세’는 진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 경우에는 질 나쁜 맥거핀이다.


‘섹스’는 뇌로 하는 것이지 성기로 하는 것이 아니다. 발기는 혈액이 조직을 채우는 것인데, 이는 뇌의 역할이고 그 기능을 가능케 하는 ‘자극’의 내용은 철저히 사회적인 것이다. 간단히 말해, ‘화학적 거세’는 과학적 근거도 실제 효과도 없다.


나는 20여년간 여성에 대한 폭력 관련자들을 상담해왔는데, 가해자들의 가장 절실한 호소는 피해의식과 분노다. “남들 다 하는데 나만 재수가 없어서 걸렸다”는 피해의식과 자신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법체계와 신고한 여성, 그리고 ‘여자들이 판치는 세상’에 대한 분노다. 이러한 사고방식과 심리상태의 근거는 ‘성범죄 불가피론’이다. 남성에게 삽입 섹스는 소변과 같은 신체의 자연스러운 배설행위이므로 성폭력이나 성구매를 불법화하는 것은 ‘오줌을 못 싸게 하는’ 고통과 같다는 것이다.


“남자는 참을 수 없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참는(?) 남성, 혹은 ‘재수 좋아 안 걸린’ 대다수 남성들의 신체는 배뇨 통증으로 폭발 직전일 것이다. 가해자들의 이야기는 나이, 학력, 계층과 관련없이 사전 회의라도 한 듯 똑같다. 이는 이들의 성 인식이 개인의 일탈이 아니라 사회적 규범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들의 합창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통념이기도 하고, 성범죄의 원인을 통제할 수 없는 성욕에서 찾는 ‘화학적 거세법’의 현실인식과 동일하다. 성욕이 배설과 같다니? 논의의 가치는 없다. 문제는 이 절대적 무지에 저항하기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사회 전체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이 ‘상식’에 동의하고 있다. 


그들은 나를 설득하려 한다. “갑자기 길 가다가 오줌이 마려우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길거리에서 그냥 해결할 수도 있고(성폭력을 의미한다), 화장실을 찾을 수도 있고(성 구매), 참으며 집까지 갈 수도 있겠죠(파트너와 성교). 근데, 화장실이 없으면 그 자리에서 싸는 사람이 많겠어요? 참고 집에 가는 사람이 많겠어요? 또 집에 간다고 해서 쌀 수 있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파트너가 없거나 동의하지 않는 경우를 말한다)” 


베를린에서 열린 ‘슬럿워크’ 시위에서 한 여성 참가자가 수영복을 입고 걸어가고 있다. (경향신문DB)


여성의 몸을, 남성을 위한 용기(用器)로 취급하는 것은 가부장제 성문화의 핵심이다. 이러한 의식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성범죄의 원인이 인체의 화학에 있다는 전제에서 이를 억제하겠다는 발상은 성범죄 예방이 아니라 부양책이다. 


다른 범죄와 마찬가지로 성범죄도 사회적 대책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며 완전한 근절은 불가능하다. 맞다. 하지만, 그러니까 우선 ‘화학적 거세’라도 하고 보자? 진실은 그 반대다. 해결 방법 중 하나라는 ‘화학적 거세’의 사고방식이 바로 문제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원인을 대책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의혹은 또 있다. 성범죄자에 대한 가부장제 사회의 지나친 도덕적 낙인(변태, 괴물 등)과 ‘참지 못하는 그들’에 대한 경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거의 모든 통계조사에서 성범죄자에 대한 강력 처벌을 주장하는 입장은 여성보다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남성 문화는 왜 이토록 성범죄가 아니라 성범죄‘자’를 혐오할까. “나는 아니다”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아닐까.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인데, 이를 수용하게 되면 모든 남성은 피곤해진다.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수화, 엽기화된다. 그럴수록 여성들은 밤거리나 여행에서 조심스럽게 행동하는 등 스스로를 통제해야 한다. 반대로 국가와 사회를 통치하는 ‘안 걸린’ 남성들은 사회적 약자를 제대로 보호하지도 못하면서 보호자, 시혜자, 감시자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화학적 거세’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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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 문학평론가 poetica7@hanmail.net


 

웬만한 불의와 불행은 잘 외면하면서 살고 있지만 그런 내게도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컨대 밤늦은 시각에 거리를 걷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허리가 기역자로 구부러진 할머니들이 상가 앞 쓰레기봉투를 뒤지는 모습. 우리가 쓰레기라고 부르는 그 물건들 중에서 어떤 것이 돈이 되는지 나는 모르고, 그것들이 얼마의 돈으로 바꿔지는지도 나는 모른다. 나는 아는 것이 없다. 그 할머니들이 따뜻한 국물이 곁들여진 밥을 먹은 지가 얼마나 되었는지, 그러다 돌아가면 맘 편히 누울 방 한 칸이라도 있는지, 노년의 아픈 몸을 지탱할 약은 드시는지. 


손홍규의 책 <톰은 톰과 잤다>(문학과지성사)에는 ‘투명인간’이라는 단편이 수록돼 있다. 아버지의 마흔 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온가족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한다. 아버지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연기를 해보자는 것. 처음에는 모두가 즐길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가족들은 어쩐 일인지 연기를 멈출 수가 없어서 점점 거기에 익숙해진다. 얼마간 힘들어하던 아버지 역시 상황을 수락해버린다. 그리고 반전이 일어난다. 이제는 아버지가 가족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한다. 그들은 서로를 잃어버린다. 마치 원래 그랬다는 듯이.


 밤거리에서 만나는 할머니들도 투명인간처럼 보인다. 행인들은 할머니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지나가고, 할머니도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투명인간 취급 받는 일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거꾸로, 타인들을 투명인간 취급하기로 결심한 사람. 평생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을 키우며 살았을 것이고 이제는 버림받아 혼자일 것이다. 이런 분들을 이 사회도 버려두고 있다. 사회의 부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토록 비정한 공동체라면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노년세대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 '투명인간' 중 한장면. (경향신문DB)


지그문트 바우만은 <쓰레기가 되는 삶들>(2004)에서 1970년대 이후 세대들이 당면한 상황은 이전 세대들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한다. 이제는 실업(unemployment)이 아니라 잉여(redundancy)가 문제라는 것. ‘실업’이라는 표현은 완전고용이 바람직할 뿐만 아니라 가능한 것이며 궁극적인 목표여야 한다고 믿는 사회에서 사용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것. ‘un’이라는 접두사가 말하고 있듯 이 개념에는 실업이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관점과 그 상태가 곧 해결될 수 있고 해결되어야만 한다는 전망이 담겨 있다는 것이다. 


반면 ‘잉여’라는 표현 안에는 그런 관점과 전망이 없다. 잉여는, 필요한 인간의 수에 비해 존재하는 인간의 수가 더 많다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의 산물이라는 것. 잉여인간이 된다는 것은 늘 이런 말을 들으며 산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바우만은 이 암담한 문장보다도 더 끔찍한 문장을 써서 실업과 잉여의 비교론을 이렇게 요약한다. “실업자의 목적지는 다시 노동현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장이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는 이들이 절망을 체념으로 바꾸기 위해 고투하고 있다면, 잉여인간 취급을 받는 이들은 절망이 분노로 바뀌지 않도록 다스리느라 고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는 데 실패한 몇몇 이들은 칼을 들고 거리로 나섰을 것이다. 이를 ‘묻지마 살인’이라 부르는 것은 무책임한 짓이다. 혹자들의 제안대로 ‘절망 살인’이라고 불러야 하리라. 악의 결과를 변호하기 위해서가 결코 아니라, 악의 구조를 성찰하는 일에 나서기 위해서 말이다. 투명인간과 잉여인간을 양산하고 방치하는 국가라면 그것이야말로 투명국가이고 잉여국가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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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