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희 | 작가


올림픽의 정신과 이념을 엿볼 수 있는 ‘올림픽헌장’의 1장 6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올림픽에서의 경쟁은 개인이나 팀의 경쟁이지 국가 간의 경쟁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계대전과 냉전시대를 거치면서 올림픽은 국가의 위신, 체제의 우월성, 그리고 국민들의 대리만족을 위한 ‘전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금메달만 따면 하루아침에 ‘국민오빠’ ‘국민여동생’으로 등극을 하며 TV, CF에 등장해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병역면제라는 보너스까지 따라붙다 보니 선수들은 죽기살기로 ‘1등 쟁탈전’에 내몰린다. 반면에 몇 년 동안 묵묵히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해온 선수, 경기에 최선을 다한 선수라도 메달을 못 따면 그야말로 ‘찬밥’이 된다.

 

올림픽선수단 격전지로 출발 ㅣ 출처:경향DB

런던 올림픽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다. 한국 사회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다시 한번 애국심을 부채질하며, 경기보다는 ‘메달의 색깔’에 주목하며, 선수 개인의 영광을 ‘국가’와 ‘국민’의 영광처럼 여기며 뿌듯해할 것이다. 여기에는 역대 정권뿐만 아니라 언론의 책임도 적지 않다. 언론들은 오랜동안 국민들을 국가대표의 승패와 국가 랭킹에 울고 웃는 ‘애국자’로 만들어왔기 때문이다.

나라 전체가 오로지 스포츠에 ‘올인’을 하다 보니 올림픽이나 월드컵 직전까지 시끄러웠던 사회, 외교, 정치 문제는 불과 2~3주 사이에 국민의 뇌리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다. 이는 여야 구분 없이 약점이나 치부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유리한 ‘망각의 마법’으로 작용한다.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은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좋은 기회도 드물다. 더군다나 올해는 대통령 선거가 있다. 대선주자들 중에는 스포츠 스타들을 서로 데려가 친분을 과시하며 선거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럴 때야말로 언론은 침착하고 냉정한 보도를 통해 국가, 인종, 랭킹을 넘어선 진정한 스포츠 축제로서의 올림픽을 조명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흥분과 열기의 축제도 좋지만, 그 와중에 더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조용한 여름, 조용한 올림픽을 기대하는 이유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18대 대통령 선거를 향한 여야 주자들의 레이스가 막을 올렸다. 새누리당에선 지난 주말 5명의 경선 후보가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했고, 민주통합당도 오늘 TV토론을 시작으로 8명의 주자가 본격 경쟁을 펼친다. ‘장외 주자’인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도 대담집 <안철수의 생각>을 펴낸 데 이어 오늘 밤 SBS <힐링캠프>에 출연하는 등 사실상 대선 행보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서울 교보문고를 찾은 시민들이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출간한 책을 보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새누리당 경선은 ‘박근혜’로 시작해 ‘박근혜’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무늬만 경선’이 될 공산이 크다는 이야기다. 이는 새누리당은 물론 국민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을 돌아보라. 당시 이명박·박근혜 후보의 경쟁은 경선의 역동성을 이끌어낸 것은 물론 상호 검증을 통해 유권자들의 선택을 돕는 역할도 했다. 이번에 박근혜 의원이 상처 없이 이기는 길만 생각한다면 5년 전과 같은 경선 효과는 사라지고 ‘불통’ 이미지만 굳어질 수 있다. ‘비박 후보’ 4인도 ‘박근혜 추대대회’의 들러리를 거부하고 치열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유권자에 대한 도리다.

민주당은 새누리당보다 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경선 과정을 통해 국민의 주목도를 높이고 지지율을 제고하지 않고선 대선 전망이 어둡다. 이런 맥락에서 후보 8명은 당 전체가 승리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 후보 개인의 승리를 이끌어내는 길도 될 것이다. 민주당 경선의 또 다른 변수인 안철수 원장에 대한 시각도 마찬가지다. 안 원장을 지나치게 의식할 경우 민주당 경선은 ‘2부 리그’로 전락하고 만다. 범야권 단일화를 말하기 전에 자강(自强)이 우선이라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대선 출마에 한 발짝 더 다가선 안 원장은 이제 국민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 한다. 책 출간이나 TV 예능프로그램 출연은 좋은 홍보수단일 수 있으나 진정한 소통수단이 되기는 어렵다. 출마 결심이 섰다면 기자회견이든, 토론회든 본격적인 검증무대에서 자신의 비전과 역량을 자신의 목소리로 알려야 한다.

연말 대선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5년, 아니 그 이상 오랜 기간 한국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다. 대선 주자들은 자신이 어떠한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지, 그런 나라를 만들기 위해 어떠한 정책적 대안을 갖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미래를 말하려면 자신이 걸어온 ‘과거’도 진솔하게 털어놓고 검증받아야 한다. 비전과 정책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자질과 가치관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명박 정부 임기말의 인사 난맥상이 도를 넘고 있다. 대법관에서 정부, 심지어 산하기관 인사에 이르기까지 마찰과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도덕성 및 자질 시비를 부른 대법관 임명동의안은 국회 파행의 숨은 원인이 되어 정국을 혼란케 하고 있다. 청문회에서 부적격자임이 드러나 여야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한목소리로 반대하는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에 대해 청와대가 연임 강행 의사를 밝혀 인권위 내부까지 패닉상태에 빠뜨렸다.

검찰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지난 13일 단행된 검찰 고위간부 인사에서 민간인 불법사찰·은폐조작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으로 검찰 조사를 받은 김진모 전 청와대 민정2비서관의 검사장 승진을 ‘최악의 보은 인사’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죄 판결이 난 MBC <PD수첩> 사건을 무리하게 기소한 전현준 대검 범죄정보기획관을 서울중앙지검 3차장으로 영전시켰다. 보은 인사를 넘어 ‘오기 인사’ ‘불통 인사’의 새로운 결정판을 쉴 새 없이 보여주고 있다.

 

이명박 정부의 회전문 인사 실태 ㅣ 출처:경향DB

산하단체와 공공기관 등 정부 관련 기관들도 조용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다. 최근에는 새로 출범하는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에 동아일보 출신 이재호씨를 임명해 “비전문가 낙하산 인사”라는 출판계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예술의전당·한국케이블TV방송협의회·한국중부발전·신용보증기금 등 올 상반기에 임명 또는 연임된 기관장 인사도 예외없이 낙하산 또는 부적격 시비로 구설수에 올랐다. 한국석유공사·한국광물자원공사·부산항만공사 등의 후임 사장을 놓고도 온갖 잡음이 들린다. 사상 초유의 170일간 장기파업 사태를 치른 MBC는 김재철 사장의 ‘8월 퇴진’으로 정치적 해결을 모색하는 상황에서 그에 반하는 조직개편과 인사를 단행해 사태가 악화되고 있다.

온 나라의 인사가 총체적 난맥상에 빠진 모습이다. 국정 실패는 인사 실패에서 비롯된다는 건 모든 국민이 아는 상식이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은 ‘강부자·고소영 인사’라는 유행어가 상징하듯 제한된 인력풀로 되풀이해온 측근 인사, 낙하산 인사, 회전문 인사, 돌려막기 인사, 보은 인사의 당연한 귀결임을 알아야 한다. 7개월 정도 임기를 남겨놓은 이명박 정부는 이제 마무리 인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 정권에서도 ‘전 정권 찍어내기 인사’가 되풀이될 공산이 크다. 남은 기간이나마 국민을 감동시키는 인사는 고사하고 최소한 잡음 없는 인사를 하는 모습이라도 보고 싶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공정거래위원회가 은행과 증권사 등 금융기관들을 대상으로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 담합 여부를 조사하는 데 대해 금융감독 당국자들이 보이는 자세는 참으로 못마땅하다. 이들은 금리 담합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감독 소홀의 책임을 져야 하는 처지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금융기관이 시장지표를 조작해서 얻을 이익이 크지 않다” “담합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앞서 권혁세 금융감독원장은 “자체 파악한 결과 은행과 증권사 모두 공정위에 CD 금리 조작을 실토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금융감독 당국자들의 이 같은 발언은 공정위가 이제 막 본격적인 조사에 들어간 상황에서 미리 방어막을 치는 듯한 인상이 짙다. 조사 대상인 금융기관들에 입을 열지 못하게 압박함으로써 공정위의 조사를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금융감독 당국은 이미 저축은행 사태를 통해 신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다. 금융감독 당국자들의 발언이 국민에게 설득력 있게 와닿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더욱이 최근 감사원 감사 결과 시중은행들이 주택담보대출 등 각종 변동금리 대출상품에 가산금리를 높게 책정해 수천억원대의 부당이득을 챙긴 것도 금융감독 당국의 지도·감독이 부실했기 때문으로 지적됐다. 금융감독 당국이 일반 국민은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전문성의 울타리’ 속에서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하고 정작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의혹을 지울 수 없다.

 

금융당국 수장과 금융지주 회장들이 은행회관에서 긴급 간담회를 갖고 있다. ㅣ 출처:경향DB

현재로서는 금융기관들이 CD 금리를 담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과거 CD 발행·유통과 금리 동향 등에 비춰볼 때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만일 CD 금리 담합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파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금리 담합 여부는 금융시장의 신뢰 확보 차원에서 분명히 밝혀져야 한다. 또 공정위는 속전속결로 조사를 벌여 시장의 혼란과 불안을 하루빨리 없애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를 위해서는 금융기관들이 공정위 조사에 성실하게 임해야 하고, 금융감독 당국도 적극 협조해야 한다. 지금처럼 공정위의 조사에 반발하는 듯한 자세를 보여서는 안된다.

CD 금리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기준금리 지표도 서둘러 개발해야 한다. CD 금리는 이미 시장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식물금리’로 전락한 상태다. CD 금리의 문제점과 함께 대체 기준금리 도입의 필요성이 제기된 지도 10년이 넘었다. 그러나 그동안 금융감독 당국들은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며 새 지표 개발에는 허송세월해왔다. “CD 금리를 대체할 새로운 금리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라는 해명은 너무나 무책임하게 들린다. 금융감독 당국이 제 역할을 못한다면 대수술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윤송이 | 이화여대 사회학과 4학년


지난 6주간의 경향신문 ‘토요판’을 살펴봤다. 6월16일자 경향 지면에 처음으로 토요판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올해 초 한겨레신문이 토요판이라는 이름을 달고 토요일자 신문을 새단장하면서 다른 일간지들도 토요판과 주말판 등을 강화했다. 일찍이 토요일자 신문의 ‘책과 삶’ 코너를 8면으로 늘렸던 경향신문 역시 ‘토요판’으로 제호를 붙이고 다각적으로 콘텐츠를 확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지난 6주간 토요판을 구성한 코너는 ‘집중기획’ ‘나의 삶을 말한다’ ‘이 사람’ ‘이것이 궁금하다’ ‘포토다큐’ ‘세계는 지금’ ‘책과 삶’ 등이다. 여러 코너 가운데 경향 토요판의 강점은 ‘책과 삶’ 섹션이라고 생각한다. 경향은 토요판의 책과 삶 코너에 여덟 면을 할애하고 있다. 토요일자 신문이 보통 28면으로 발행되고 있으니 약 30%를 차지하고 있는 셈이다. 21일 토요일자 신문을 찾아봤더니, 조선, 중앙, 동아, 한국은 세 면, 한겨레는 네 면을 책을 다루는 데 할애했다.

여러 일간지의 책 섹션의 콘텐츠는 신간 서평, 저자 인터뷰 중심이었다. 기본적으로 경향의 책 섹션도 이와 다르지 않지만 분명 차별점이 있다. 경향은 서평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인문학에게 던지는 12가지 질문’ ‘양세기의 달빛’ 등 한 면을 통째로 배치한 굵직한 기획물과 ‘세상을 나온 시’ ‘명저 새로 읽기’ 등의 연재물을 포함한 풍부한 작은 코너들이 바로 경향 책 섹션이 차별화하고 있는 지점이다. 이런 코너들은 독자들에게 지식의 폭을 확대할 수 있는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향신문의 책과 삶 섹션이 가진 장점에 비해 다른 토요판 콘텐츠들은 아직 아쉬운 부분이 많다. 먼저 각 주제별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인물 인터뷰인 ‘이 사람’과 ‘나의 삶을 말한다’ 코너는 그 차이점이 선뜻 들어오지 않는다.

 

경향신문 이미지 ㅣ 출처:경향DB

특히 지난 7월14일자 ‘이 사람’에서는 권노갑 민주통합당 상임고문과 김두관 전 경남지사의 누나인 김길자씨를, ‘나의 삶을 말한다’에서는 인터뷰어 지승호씨를 인터뷰했다. 당시 ‘두 코너의 차이가 뭘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넷에서 개별 기사로 접할 때는 섹션 이름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독자가 이번주 토요판 ‘이 사람’에는 어떤 사람이 나올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하려면 두 코너 간 차별 지점을 명확히 하는 게 좋겠다. 실제 인기 있는 인터뷰 담당 기자가 있는 몇몇 일간지는 그 인터뷰 코너만의 열혈독자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토요판 코너의 정기성이 확보되었으면 좋겠다. 아직 여섯 편(토요판 제호가 붙은 신문 기준)밖에 토요판이 발행되지 않았으니 계속해서 조금씩 변화를 모색하는 단계일 것이다. 방송으로 따지면 파일럿 방송을 하는 단계일 수도 있겠다. 가령 포토다큐는 7월7일자 이후 토요일자 지면에서는 볼 수 없었다. 또 ‘오늘 경향 토요판에는 왜 이 코너가 없지’라는 의문이 들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7월21일자에는 ‘요즘 세상은’과 ‘세계는 지금’ 코너를 모두 지면에서 볼 수 있었지만 7월14일자에는 ‘세계는 지금’밖에 없었다. 지면 사정과 시의성 있는 뉴스 전달 등을 고려하면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코너별 지면 게재 일정을 조그맣게라도 독자에게 알려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주위의 20대 경향신문 독자들에게 경향신문 토요판에 대한 의견을 물으니 대체로 한겨레나 중앙일보 등의 토요판에 비해 ‘읽을거리’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았다. 그간 경향신문 토요판이 다뤄온 특집기획을 살펴보면 ‘한 달 벌이 15만원’ 청량리 가판대 형정남 할머니(6월16일자), 난 40대 싱글이다(6월30일자), “귀농 제 1수칙은~”(7월21일자) 등이다. 특집기획만 보면 ‘읽을거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토요판을 선제적으로 만든 다른 일간지들이 외부필진 등을 통해 풍부한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 경향신문의 고민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이전의 ‘e세상 속 이 세상’과 같이 경향신문이 온라인에서 각종 SNS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고 있는 부분들을 토요판을 활용해 지면에서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다른 일간지들은 토요판 지면 편집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인포그래픽 등을 적극 활용하며 ‘보이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쓴다. 물론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지만 편집이 가독성에서 가지는 중요성을 감안한다면 경향의 노력이 조금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경향만의 색깔이 토요판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몇몇 신문의 토요판을 보니 토요판을 제작하는 데만 치우친 나머지 그 신문만의 차별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최근 보도를 통해 경향신문이 앞으로 공세적으로 토요판을 제작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경향이 추구하는 가치들을 반영한 다양한 형식의 ‘경향만의 기사’들을 토요판에서도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손호철 | 서강대 교수·정치학

 

얼마 전 난생처음으로 위 내시경 검사를 했다. 수면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마취에서 깨어나자 의사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암인가 보다’라며 덜컥 겁이 난 나에게 의사는 ‘암 선고’만큼이나 충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 왜 그렇게 박정희 욕을 하세요?” 마취를 하면 무의식에 있는 이야기를 한다던데, 마취가 되자 박정희 욕을 계속 뱉어낸 것이다. 물론 대학 시절 고문도 당하고 투옥도 되고 제적도 당하고 군대에도 끌려갔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 나이가 되도록 깊은 무의식 속에 사랑이 아니라 누군가에 대한 증오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 너무 충격적이고 부끄러웠다.

이처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한국현대사에서 피할 수 없는 뜨거운 감자이다. 이 뜨거운 감자는 새누리당 박근혜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5·16을 “최선의 선택, 바른 판단”이라고 밝히면서 대선의 중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박 전 위원장은 이 발언이 쟁점으로 부상하자 민생 등 할 일이 많은데 역사논쟁만 할 것이냐며 논쟁 중단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 문제는 단순히 지나간 역사에 대한 공허한 논쟁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현재의 선택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라는 점에서 논쟁 중단 선언으로 피해갈 문제가 아니다.

 

출처:경향DB

박 전 위원장의 주장이 ‘상황론’에 기초한 매우 위험한 논리임은 여러 사람이 이미 지적한 바 있다. 정작 문제는 박 전 위원장의 이 같은 주장을 비판하고 있는 이해찬 대표 등 민주통합당의 이중성이다.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민주통합당은 5·16과 유신에 관한 한, 근본적인 원죄를 안고 있다. 1999년 여름 나를 비롯한 민중운동과 시민운동 관계자들은 연일 기자회견을 열고 농성을 벌여야 했다. 왜냐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구를 방문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이젠 역사 속에서 존경받는 지도자가 돼야 한다”며 갑자기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약속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김 전 대통령이 역대 대통령들 기념관이 아니라 박 전 대통령의 기념관만 꼬집어 제안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대표 등이 각료로 참여하고 있었던 김대중 정부는 학계, 사회운동 진영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위한 200억원 지원을 결정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5·16 쿠데타와 유신에 관한 한, 한국사 최초의 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김대중 정부의 출범 그 자체에도 원죄가 숨어 있다. 5·16이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박 전 위원장의 평가에 대해 민주통합당이 길길이 뛰고 있지만, 5·16 쿠데타를 주도한 실질적인 주역, 그리고 유신체제하에서 총리를 지내며 2인자 역할을 한 것은 바로 김대중 정부가 1997년 대선 승리를 위해 손을 잡았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였다. 나아가 김대중 정부는 스스로 ‘제2의 건국’이라고 자임하면서도 초대 총리에 유신 총리였던 김 전 총재를 앉혔다. 5·16과 유신이 그처럼 문제라면 어떻게 5·16 쿠데타와 유신의 주역이던 김 전 총재와 손을 잡고 그를 초대 총리로 앉힐 수 있을까? 1998년 초 김 전 총재의 총리 임명 당시 개인적으로 비판했듯이, 40년 만의 소위 ‘민주정부’의 초대 총리에 유신 총리를 앉히는 것은 해방 후 세운 ‘민족정부’의 초대 총리에 이완용을 앉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물론 민주통합당은 김종필과의 연정이 역사적인 정권교체를 위해, 박정희기념관이 영남으로의 동진정책과 지역통합을 위해, 문제가 있지만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해명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선택을 상황론에 의해 정당화한다면, 5·16이 절차와 수단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지만 국민들을 기아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박근혜 전 위원장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중요한 것은 5·16 논쟁이 지나간 공허한 역사논쟁이 아니듯이 김대중 정부와 민주통합당의 원죄 역시 공허한 역사논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민주통합당이 무엇을 위해, 무엇을 희생하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현재의 문제이다. 이제는 상황론과 결과 제일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영수 중국전문가


춘추시대 남방 초나라의 장왕(莊王)은 소국 진(陳)나라의 내분에 개입하여 사태를 단숨에 수습했다. 장왕은 높다란 보좌에 앉아 무문대신으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씩 축하의 인사말을 듣고 있었다. 장왕은 도취되었다. 그런데 한순간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남방 속국의 군주와 여러 작은 부족의 수령들까지 모두 와서 축하를 올리는데 어째서 대부 신숙시(申叔時)가 안 보이는 걸까?

이때 마침 신숙시가 들어왔다. 제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이제 막 돌아온 것이었다. 신숙시는 제나라에 다녀온 일을 보고했다. 그러나 신숙시는 축하의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장왕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진나라의 하징서가 영공을 죽이는 천인공노할 죄를 저질렀다. 중원의 제후들 누구도 나서지 않길래 내가 정의의 기치를 들고 하징서를 죽였다. 우리 땅도 훨씬 넓어졌다. 대신들은 물론 이웃 나라들 우두머리들이 다 와서 축하를 올렸다. 그런데 그대는 그에 대해 입도 뻥긋하지 않으니 내가 뭐 잘못이라도 했단 말인가?”라고 다그쳤다.

신숙시는 황망히 절을 하며 “아닙니다, 아닙니다. 신이 풀지 못하는 문제가 있어 마침 그 생각을 하던 참이라서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화를 누그러뜨린 장왕은 호기심어린 표정을 지으며 “무슨 문제이길래?”라고 물었다.

 

출처:경향DB

“어떤 사람이 남의 밭에 들어간 소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소가 밭을 밟아 곡식이 제법 쓰러졌습니다. 밭주인은 화가 나서 소를 끌고 가서는 소 주인에게 돌려주려 하질 않았습니다. 이 문제를 대왕께서는 어떻게 처리하시렵니까?”

잠시 생각하던 장왕은 “당연히 소 주인에게 돌려줘야지”라고 했다. 신숙시는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소가 남의 밭으로 들어가 곡식을 밟은 일은 물론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를 빼앗아 돌려주지 않겠다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하던 장왕은 순간 무엇인가를 느꼈는지 신숙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어허, 뭔가 했더니 돌려서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던 게로군. 내가 그 소를 주인에게 돌려주겠네”라고 말했다.

장왕은 멸망한 진나라를 다시 회복시켰고, 진나라는 새로운 군주 성공이 즉위했다. 무슨 행동을 하든 행동의 당위성을 뒷받침하는 명분은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 하지만 명분을 과도하게 내세우거나 명분을 관철시키는 과정이 지나치면 명분의 정당성마저 훼손당한다. 더욱이 명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과정에서의 지나침은 일쑤 사사로운 욕심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명박 대통령이 엊그제 청와대에서 비상경제대책회의를 주재하며 “온 세계가 당면한 어려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고소득 노조의 파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금속노조와 금융노조의 파업 결의를 지칭한 것이다. 이 대통령은 “고소득 노조가 파업하는 나라는 우리밖에 없다. 정말 어려운 계층은 파업도 못한다”고도 했다. 그의 뿌리깊은 반(反)노동적 인식을 여과 없이 드러낸 발언이다.

이 대통령의 말은 우선 헌법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헌법에 규정된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 등 노동3권은 소득에 따라 누구는 행사할 수 있고 누구는 행사할 수 없는 권리가 아니다. 사실관계도 틀렸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프랑스에서는 항공관제사, 전력공사, 최대 정유회사 토탈 노동자들이 파업을 했다. 영국의 경우 국영철도노조와 BBC 노조가 파업을 결의한 일이 있고, 노르웨이에서는 연봉이 1억원 이상인 유전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선다. 미국에서는 영화·드라마 작가들이 파업에 돌입하자 세계적 스타들이 이를 지지해 골든글로브 시상식이 무산되기도 했다. 고소득 노조가 파업하는 나라가 우리밖에 없는 게 아니라, 고소득 노조가 파업한다고 눈치 봐야 하는 나라가 우리밖에 없는 것이다. 이른바 ‘고소득 노조’의 대표 격인 현대차 노조는 “조합원 가운데 연간 3000시간 이상 살인적 노동을 하는 사람이 28.7%나 된다”며 “외국에서도 고소득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만 소득이 얼마인지 묻는 대신 왜 파업을 하는지 묻는다”고 했다.

 

출처:경향DB

“정말 어려운 계층은 파업도 못한다”는 인식은 왜곡된 노동관의 절정이라 할 만하다. 이 대통령 말대로 ‘고소득 노조’도 파업을 하는데 정말 어려운 노동자들은 왜 파업조차 못하는가. 친자본·반노동 분위기 속에서 노조 설립 자체가 힘들고, 간신히 노조를 만든다 해도 복수노조하의 교섭창구단일화 제도로 인해 소수 노조는 교섭권을 갖기 힘들다. 교섭도 못하는 처지이니 파업은 언감생심 꿈꾸기 어렵다. 여기에 학습지 교사, 간병인, 택배·퀵서비스 노동자 같은 ‘특수고용직’처럼 노동자성을 인정받지 못해 노동3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도 많다.

이 대통령의 비뚤어진 노동관은 여러 차례 회자된 바 있다. 2007년 대선 때는 “인도에 가보니 대학 출신 종업원들이 ‘우리는 노동자가 아니다’라며 오버타임(초과근무)을 해도 수당을 안 받는다고 하더라. 노조도 만들지 않는다는데, 스스로 프라이드(자부심)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대학교수 노조를 만들기 위한 법안이 국회 상임위 소위를 통과했다고 해서 충격받았다. 대학교수란 사람들이 노조를 만들겠다니, 교육이 제대로 되겠느냐” 등의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뼛속까지 반노동적’인 대통령으로 인해 지난 4년반 동안 수많은 노동자들이 생채기를 입었다. 남은 7개월이라도 자중하기를 촉구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문광훈 | 충북대 교수·독문학


울릉도 나리분지에 다녀왔다. 오래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는데, 이번에 맘먹고 간 것이다. 그곳으로 정한 것은 험한 산들로 둘러싸인 오목한 평지여서 뭔가 자족적인 별세계(別世界)가 아닐까 여겨졌기 때문이다. 또 영육의 배터리를 재충전할 필요도 절실했다.

하지만 울릉도 가는 길은 간단치 않았다. 대부분 ‘패키지여행’을 선호했고, 그 때문에 숙소나 구경할 곳을 확정치 않은 채 혼자 가는 경우는 거의 없어 보였다. 비바람으로 출발을 한 차례 미룬 다음 나는 결국 묵호에서 하루 묵고 다음날 배를 타기로 했다. 터미널에서 표를 예매하고 삼척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하평해안가라는, 길이 200m 정도 되는 모래사장에 들어섰다. 심상대의 소설 <묵호를 아는가>가 생각나서였다. 날씨는 후텁지근했지만 불어오는 바닷바람은 시원했다. 서너 아이들이 뛰어노는 그 작은 해안가에서 나는 어둠이 밀려올 때까지, 책장의 까만 활자가 책 밖의 어둠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르트르의 단편소설을 읽었다. 떠나온 많은 것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배를 타고 울릉도에 내려 다시 버스로 어렵게 찾아간 나리분지는 과연 별천지처럼 여겨졌다. 그곳은 해발 300m 정도에 동서로 1.5㎞ 남북으로 2㎞ 정도 되는 분지로, 성인봉의 화구가 함몰되어 생긴 작은 평원이다. 거기에는 전통가옥인 투막집이나 울릉국화 같은 천연기념물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평범하게 여겨졌다. 떠나는 날 들렀던 성인봉에서 바라본 이곳 풍경은 아름다웠다. 뭍에서 이토록 멀리 떨어진 섬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나날의 생계를 유지해간다는 것이 놀라웠다. 척박한 대지에서 삶을 이어가는 것이야말로 아름답다.

 

울릉도의 풍경 ㅣ 출처:경향DB

날씨가 갠 날에 나는 동네 입구나 야영장 주변을 어슬렁거렸고, 산마늘 씨앗을 고르는 할머니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민박집 내외분은 친절했다. 비가 오면 방에서 쉬거나 책을 뒤적이거나 바람소리를 들으며 지나가는 구름과 안개를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가장 즐겼던 것은 숙소에서 신령수(水)까지 왕복 4㎞를 산책하는 일이었다. 아침이나 오후에 그 성인봉 원시림구역을 두어 시간 걷는 것은 호젓한 일이었다. 주변의 나무들은 울울창창했고, 그래서 왜 이 섬이 ‘울창한 구릉(鬱陵)’으로 불리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간혹 산비둘기와 꿩이 발걸음 소리에 놀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기척 드문 그 숲 그늘을 나는 나무의 신기한 이름들을 웅얼거리며 걸어 다녔다. 섬말나리, 말오줌나무, 맥문동, 회솔나무….

사실상 나리분지를 지배하는 것은 바람과 안개와 침묵과 어둠 같은 것들이었다. 찾아드는 관광객들로 낮에는 시끌벅적할 때도 있었지만, 그 소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떤 소리가 들린다고 해도 그것은 끝없이 이어지는 적막 가운데 잠시 일어나는 해프닝 같은 것이었고, 주위는 이내 잠잠해졌다. 무엇보다 밤이면 바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것이 어디에서 불어오는가 싶어 창문을 열면, 밖은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암흑천지였다. 낮에는 눈에 띄지 않던 희미한 것들이 저녁이면 이렇게 가까이 다가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어둠과 침묵을 우리는 마치 없는 것처럼 여기곤 한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세계 사이에 세워진 벽도 이 어둠과 침묵의 빈자리 때문 아닌가? 사르트르도 이렇게 썼다. “우리는 영원을 위한 어음을 끊으며 시간을 보냈지만,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이렇게 살면서 어떻게 동시에 죽어가고 있는지 느끼기 위해선 주변의 사물들을, 나무나 거리나 밭이나 계곡 또는 사람의 표정을 찬찬히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이것은 시시각각 생겨나면서 사라진다. 그러니 이 순간에 우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파도에 휩쓸리듯 시간의 물결에 떠밀려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잉여의 존재로, 있어도 되고 없어도 그만인 하나의 생애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리분지의 저녁과 바람과 숲과 침묵은 내가 선 옹색한 자리와 내가 사는 허망하도록 짧은 시간을 돌아보는 데 도움이 되는 듯하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한국원자력문화재단이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4개 지역과 신규 원전 후보 지역 2군데를 순회하며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원전 홍보 뮤지컬 공연을 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와 교육청 등의 협조를 얻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을 유치해 <명탐정 손오공과 함께 떠나는 원자력 이야기>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무료로 관람케 하고 공연 장소에서 원전을 홍보하는 책자나 만화를 배포하고 있다니 기가 막힌다. 배움의 시작 단계에 있는 어린이에게 이렇게 일방적으로 원전을 홍보하는 것은 교육적으로 부적절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동심을 이용한 원자력문화재단의 원전 홍보는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에도 <도깨비 나라의 원자력 방망이>라는 뮤지컬을 공연해 4만3000명이 넘는 어린이에게 관람케 했다. 초·중·고교생이 참가하는 원자력공모전을 21회째 개최하고 있으며, 초등학생 대상 원자력탐구올림피아드와 NIE원자력교육 등도 매년 실시하고 있다. 지난 4월에는 모 일간지 NIE 섹션에 ‘6.5 강진에도 거뜬…UAE에 원자력발전소 수출, 원전 강국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낯뜨거운 원전 홍보 기사를 실어 초등학교 수업시간에 배포했다. 교과서에 표현된 원자력 관련 내용의 수정을 요구하는 활동도 꾸준히 해왔다. 원자력문화재단의 각종 어린이 공모전 수상작과 교과서의 관련 내용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원전 찬양 일색이다.

 

후쿠시마 어린이들이 19일 도쿄 메이지공원에서 열린 탈원전 집회에 참가한 뒤 ‘원전은 필요없다’는 글귀가 쓰인 펼침막을 들고 가두행진을 벌이고 있다. 도쿄 _ 서의동 특파원

굳이 후쿠시마 사태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원자력은 명과 암이 극명하고 논란이 많은 에너지원이다. 그런데 어느 한쪽 면만, 그것도 비판적 사고 능력이 없는 어린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세뇌하듯 주입하는 것은 그들의 미래를 왜곡하는 짓이다. 원자력에 대해 왜곡된 선입견을 갖게 함으로써 새롭게 떠오르는 신재생에너지를 포함한 폭넓고 균형 잡힌 에너지 교육을 가로막는 행위이기도 하다.

어린이 뮤지컬 공연을 포함한 원자력문화재단의 활동 재원은 국민이 내는 전기요금의 일부로 조성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나온 것이다. 오로지 원자력을 위해서만 매년 100억원에 이르는 국민 호주머니 돈을 쏟아붓는 것은 불합리하다는 비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이런 차에 부산교육청의 승인 없이 어린이 뮤지컬 공동 주최 포스터를 제작하는 등 무리수까지 동원해 가면서 동심을 이용한 원전 홍보를 계속하는 것은 후안무치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이에게 원자력은 결코 ‘행복에너지’가 아니다. 미래의 에너지는 미래세대가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박태균 |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1961년 5월16일 아침 11시30분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윤보선 대통령을 만났다. 박정희 소장이 윤보선을 만나고 돌아간 직후였다. 매그루더는 합헌적으로 수립된 장면 정부를 지지하며, ‘총구에서 비롯된’ 변화가 한국 사회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말했다. 아울러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부를 것이라는 우려를 표명했으며, 북한의 공산 독재와 싸우는 데 가장 큰 자산인 민주적 기관과 자유선거를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불행하게도 유엔군사령관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다. 한 번의 성공한 쿠데타는 또 다른 쿠데타를 불렀다. 5·16 쿠데타는 1962년부터 1963년 사이 수많은 ‘반혁명 사건’을 양산했다. 소위 ‘반혁명’은 쿠데타로 세운 군사정부를 쿠데타로 몰아내기 위한 시도였다. 1964년 한일협정 반대시위로 박정희 정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한미국대사는 군부 내에서 또 다른 쿠데타 움직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1972년 10월17일 또 다른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가 선거를 통해 민간정부로 옷을 갈아입었지만, 그로부터 9년이 지나 더 이상 집권 연장이 불가능하자, 다시 한번 군을 동원해 스스로 만든 헌법 질서를 무너뜨렸다. 1972년의 쿠데타는 7년이 지난 뒤 몰락을 예고하는 것이었지만, 12·12 쿠데타라는 또 다른 쿠데타를 불러왔다.

 

출처:경향DB

박정희 본인은 1963년 8월 군복을 벗고 정치에 참여하면서 자신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일부 정치적인 군인들은 그를 우상화했고, 그처럼 쿠데타로 정권을 잡고자 했다. 그래서 헌법적이고 민주적 질서를 파괴하는 쿠데타가 반복됐다.

둘째로 북한과의 대결 문제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 북한은 소련과 동구유럽의 원조 덕분에 빠르게 전재를 복구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남한의 복구와 성장은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힘 때문이었다. 그런데 5·16 쿠데타는 그 중요한 재산을 날려버렸다.

1980년대 민주화 이전까지 많은 해외 동포들이 남한보다 북한에 더 친화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조총련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해외 동포들의 태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180도 변화하게 됐다. 이들은 경제성장을 동반한 한국의 민주화에 감동했고, 이제는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해외 동포들은 남한의 성장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헌법적 질서를 파괴한 쿠데타가 잘못된 것이라고 하더라도 가난으로부터 나라를 일으킨 공로를 인정해야 하고, 이는 결국 ‘구국의 혁명’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결국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생각이 녹아 있다. 지금 청소년과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결과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의 중요성이다. 한국의 많은 사회적 문제들의 원인이 결과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말하면서, 경제성장 과정이 어떻든 간에 그 결과만 보고 ‘혁명’으로 봐야 한다고 가르쳐야 하는가? 올림픽만 되면 메달을 딴 선수들만 주목할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한 선수들 모두를 봐야 한다고 하면서, 역사를 바라볼 때에는 다른 잣대를 댈 것인가?

역사의식을 우습게 봐서는 안된다. 역사의식은 당대 사회를 바라보는 눈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역사를 말하는 것은 곧 현재의 생각을 보여주는 것이고, 그래서 ‘역사는 과거와 현대의 대화’다. 집단 따돌림의 문제, 성적 지상주의의 문제가 판을 치는 학교 현장에서 민주주의와 다원화의 중요성, 그리고 결과만큼이나 과정과 수단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는데 사회적 동의가 이루어진 현재의 시대 상황에서 어떠한 역사관을 갖는가는 그만큼 중요한 문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미국의 일간지 뉴욕타임스(NYT)는 2003년 3월11일 1면에서 그동안 수십 건의 기사를 날조한 자사 기자 제이슨 블레어를 해고했음을 알리면서 큼지막한 사과 기사를 실었다. NYT는 “블레어의 기사 날조는 본사의 152년 전통에 대한 심각한 배신행위라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사과한다”면서 문제가 된 기사와 정정내용을 2개면에 걸쳐 게재했다. 또한 하월 레인스 편집인과 제럴드 보이드 편집국장 등 2명의 고위 편집 간부가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블레어 사건’으로 NYT는 한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조선일보가 19일자 1면에 게재한 ‘태풍 카눈’ 사진이 3년 전 찍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이 신문은 ‘해운대의 성난 파도…오늘 태풍 카눈 수도권 관통’이라는 제목 아래 큰 파도가 일고 있는 부산 해운대 앞바다 사진을 전체 지면의 4분의 1 크기로 실었다. 또 사진 밑에는 “18일 오후 해운대 앞바다의 파도”라는 설명을 붙였다. 그러나 이 사진은 3년 전인 2009년 8월9일 태풍 모라꼿 당시 같은 장소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확인됐다. 조선일보는 다음날인 20일 2면에 1단짜리 사과문을 싣고 문제의 사진을 찍은 김모 기자가 프리랜서였다고 발표했으나 얼마 전까지 계약직 기자였다고 한다. 프리랜서건 계약직 기자건 간에 1차 책임은 김 기자가 져야겠지만 ‘가짜 사진 게재’와 관련한 총체적 책임은 사진의 진위를 확인하지 못한 조선일보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신문은 2010년 11월 연평도 사태 당시에도 북한군의 포격으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사진을 이른바 ‘포토샵’을 통해 연기를 더욱 검게 만들어 게재함으로써 ‘조작 논란’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조선일보 19일자 신문 1면에 게재된 사진 ㅣ 출처:경향DB

마감 시간에 쫓기는 데다 다른 매체와의 치열한 취재경쟁을 겪어야 하는 일선기자들로서는 기사 조작이나 표절 등의 유혹에 쉽게 노출된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라도 진실을 왜곡하고 독자·시청자를 기만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타인을 향해 늘 ‘정의’ ‘진실’ 등의 도덕적 훈계와 당위론적 사실 등을 늘어놓으면서 정작 언론 자신이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은 스스로 신뢰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이나 노선 따위도 엄정한 직업윤리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객쩍은 공론공담(空論空談)일 뿐이다. 따지고 보면 이번 ‘가짜 사진’ 사건은 조선일보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도 이번 일을 교훈 삼아 다시 한번 언론 윤리를 되새기면서 스스로를 벼리려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김성진 변호사

 

얼마 전 공정거래위원회 공무원들이 회식비 200만원을 대형 로펌의 변호사에게 결제시켰다가 감사원에 적발됐다. 또 얼마 전 안철수 교수가 재벌과 하도급기업의 관계를 빗대어 ‘삼성동물원, LG동물원’이란 표현을 써서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전자는 사실이고, 후자는 의견이지만 재벌에 포섭된 대한민국의 현실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풍경이다.

재벌은 1960년 이래 박정희 정권부터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과 지원을 받아 성장했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이른바 ‘747’을 목표로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노골적인 친재벌정책을 통해 재벌에 대한 규제 완화와 지원을 강화했다. 그 결과 747은커녕 재벌·대기업으로의 경제력 집중만 더욱 심화됐다.

4대 재벌의 매출액은 국내총생산의 50%를 넘고, 최근 4년간 재벌 계열사는 60% 넘게 늘어났다. 늘어난 재벌 계열사는 재벌 3·4세를 위한 편법적 증여의 수단이 됐으며, 중소기업과 중소상인들의 사업 분야인 비제조업과 서비스업으로 발을 뻗었다. 그 결과 중소기업과 중소상인은 더욱 궁핍해졌다. 노동자의 삶의 질은 더욱 악화됐고, 고용 또한 늘지 않고 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양극화는 대기업에 속하지 못한 노동자나 자영업자들의 소득에 영향을 미쳐 사회적 양극화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출처:경향DB

재벌의 지배구조는 지배하는 사람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경제적인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재벌은 불과 1~2%에 불과한 지분을 가지고 계열사 순환출자 등의 방법을 통해 재벌에 속한 기업 모두의 경영을 100%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경영의 잘못으로 인해 해당 기업에 발생한 손해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고 있다. 재벌로의 경제력 집중은 하도급 단가 인하 등 중소기업의 존립을 위협하고, 양극화를 초래함으로써 국민경제의 지속가능한 선순환 구조를 깨뜨리고 있다.

재벌 일가로 집중된 과도한 경제권력은 단순히 경제 분야만의 문제에 머물지 않고, 정치·사회·문화 등 전 영역에 걸친 영향력 행사로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재벌이 투자 파업 위협, 막대한 자금과 인맥을 동원한 로비를 통해 정부 정책마저 좌우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검찰, 사법부까지 대규모 로펌이나 소속 임원들을 통한 로비, 퇴임 후 뒤봐주기 등을 통해 우호세력으로 포섭한 상태이다. 재벌들의 경우 횡령이나 배임의 액수가 천문학적임에도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고, 기다렸다는 듯이 특별사면을 통해 경영 일선에 복귀하는 사례 등이 바로 법치주의 위기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국민은 현명하다. 이명박 정부의 친재벌정책으로 중소기업과 중소상인, 노동자와 서민들이 더 살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몸으로 알고 있다. 최근엔 시민사회가 나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를 결성하고 대중운동도 전개하고 있다. 뜻있는 정치인들도 나서고 있다. 국민들의 형편이 어려워졌다면 그 정책은 잘못된 것이다. 잘못된 현실을 고치는 방향으로 관련 입법도 추진하고 있다. 하도급 거래관계를 보다 공정하게 하고, 중소기업·중소상인·노동자들을 보다 더 보호하고, 재벌의 담합으로부터 소비자들의 이익을 지키고, 재벌 3·4세의 경영권 세습 등 재벌 일가의 이익만을 위해 소액주주나 국민 다수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통제하는 방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아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재벌 일가는 경제민주화를 위한 입법의 근거가 되는 헌법을 없애자고 한다. 몇몇 집안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국민 대다수의 합의를 뒤집듯 하고 있는 것이다. 재벌이 헌법을 바꾸자고 하는 것은, 재벌이 이제 국민의 합의에 기초한 법적 통제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벌이 제기하는 이러한 개헌론에서 역설적으로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갑수 | 궁리출판 대표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극심한 가뭄이었다. 눈이 종적을 감춘 이후 계절의 순서에 의해 봄이 오고 비가 몇 번 내렸다. 여름의 기미가 도래했지만 비다운 비가 오지 않았다. 100년 만의 가뭄이라고 했다. 특히 농민들의 인내심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이 갈증이 지속된다면 사람들의 가슴에서는 마음의 세굴(洗掘) 현상이 일어나고 머리에서는 이성의 보(洑)가 붕괴될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 와중에 누군가는 4대강으로 가뭄과 홍수를 극복했다고 흰소리를 늘어놓았다. 고인 강물을 찡그린 채 바라보아야 하는 흰 구름이 들었다면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난달 마지막 주말을 이용해 강원, 경북 일대의 산림문화 생태답사에 참가했다. 원주 신림(神林)의 성황림, 예천의 회룡포를 둘러보고 금당실 전통마을에 하룻밤의 여장을 풀었다. 저녁을 먹고 주막 마당에서 전통산림 지식에 관한 세미나가 열렸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교수님이 ‘조상들의 빗물 관리 지혜’에 관해 짧은 강의를 해주셨다.

전통마을의 구조와 그 마을을 유지하는 생태계의 순환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지만 몇 가지 생각을 가다듬어 보았다. 물 문제는 결국 비의 문제이다. 지구는 새로운 물을 독자적으로 생산할 수가 없다. 식물들이 잎을 넓게 벌려 이슬을 만든다지만 그것은 한줌에 불과하고 햇빛이 들기 무섭게 금방 스러지고 만다. 결국은 하늘에서 공급돼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빗물을 여하히 오래 머물게 하면서 이를 이용할 것인가가 관건인 셈이다. 이번 가뭄을 해결한 것도 결국은 하늘이었다. 사실 물은 가급적 지상에 오래 머물려고 하는 성질이 있다. 자연의 강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고 굽이굽이 곡선으로 천천히 흐른다. 그래서 사람의 마을을 빠짐없이 들렀다 간다. 비오는 날 처마 끝에 맺히는 물방울을 보라. 그것은 최대한 늦게 떨어지려고 안간힘을 다해 몸을 웅크리지 않는가.

 

단비 머금은 논 ㅣ 출처:경향DB

토론이 끝나고 막걸리, 마른안주, 수박으로 뒤풀이 자리를 준비하는 동안 하늘을 바라보았다. 먹구름 사이로 달이 숨바꼭질하고 있었다. 내일이면 그렇게 고대하던 비가 오긴 올 모양이었다. 널찍한 평상에 벌렁 드러누웠다. 재미있는 생각 두 가지가 슬며시 떠올랐다.

나는 여름 과일 중에서 수박을 몹시 좋아한다. 왜 그럴까? 어느 날 어머니께서 쉽게 답을 주셨더랬다. ‘그해가 몹시 더웠는데, 니가 참 안 나오더니만, 느그 아부지가 수박을 큰 거 사와서, 그걸 먹고 잤는데, 새벽에 쑥 나왔다 아이가.’ 아마 그날 나는 수박의 기운을 두르고 조금은 벌겋게 상기된 채 이 세상으로 나왔던 모양이다. 이런 연유로 나와 수박은 궁합이 잘 맞는구나. 그렇게 믿기로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너무 많이 내리는 폭우는 곤란하지만 나는 비를 무척 좋아한다. 나만 비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비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 궁리 식구들과 강원도로 여행을 몇 번 떠난 적이 있다. 신통하게도 그때마다 비가 와 주었다. 우중(雨中)의 강원도에 있으면 산수화 속을 거니는 기분이었다.

나는 왜 비가 좋을까. 인체의 70%가 물이라는 것, 생명이 바다에서 왔다는 것도 한 이유는 될 것이다. 또한 나는 어머니 배 안에 있는 동안 양수(羊水)에서 헤엄치며 놀았다. 하지만 이는 비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공히 해당하는 사항이다. 나의 이름에 수(洙)자가 있는 것? 물하고 전혀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것은 항렬이다. 흔쾌히 납득하기엔 아무래도 2%가 부족했다.

오리는 태어날 때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로 알고 쫄쫄쫄 따라다닌다고 한다. 이른바 각인효과라는 것이다. 내가 비를 좋아하는 것, 이 또한 각인효과의 일종은 아닐까. 문득 내가 태어난 날의 날씨가 궁금해졌다. 기상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더니 1960년 이후부터의 기상 상황이 정리돼 있었다. 민원실로 직접 전화했다. “1959년 8월○○일 부산의 날씨가 어땠나요? 비가 왔나요?”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대답과 함께 컴퓨터 자판 두드리는 소리가 빗소리처럼 수화기 너머에서 희미하게 건너왔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도착한 그날. 오리의 새끼와 사람의 자식이 실상 뭐 그리 다르겠는가. 이제 갑각류처럼 굳어진 오늘의 나와는 달리 그날 그 녀석은 피부호흡도 했을 것이다. 정수리 뚜껑도 열려 있었을 것이다. 포대기에 싸여 있어도 창밖의 기미는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나의 첫 생일. 그날의 맑고 흐림, 그날의 비 소식이 뭐 그리 대수랴. 하지만 잠시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다. 이윽고 토닥토닥 빗소리 같던 자판기 소리가 끊기고 대답이 날아들었다. “왔습니다. 영점사미리가 왔습니다!”

아, 0.4㎜의 비! 내 작은 발바닥에 찰랑대는 깊이 영점사밀리미터의 비! 내 달콤한 몸뚱아리를 충분히 적시고도 남을 단비가 왔단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손가락 끝에서 야호 소리가 터져나올 것 같았다. 내 인생에서 무슨 큰 상(賞)이라도 받은 듯 기분이 몹시 우쭐해졌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철환 귀농본부 텃밭보급소장

 

병충해는 장마철에 많이 발생한다. 탄저병, 역병, 노균병, 배꼽썩음병 등은 고온다습한 장마 날씨 탓이 크다. 병이란 무릇 그 원인을 알고 미리미리 다스리는 예방을 해야지 그 결과를 다스리는 것은 악순환만을 조장한다.

병해충은 배수와 통풍이 잘 안되면 기승을 부린다. 밭의 고랑과 두둑을 잘 만들어 배수와 통풍을 좋게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토양 내부의 배수와 통풍이 잘되게 하는 것이다. 지렁이 똥(분변토)처럼 틈새가 많은 떼알구조의 흙이 배수와 통풍이 잘된다. 장마철에 병에 잘 걸리는 원인은 비가 이런 흙의 틈새를 메워버리기 때문이다. 토양 내 배수와 통풍을 나쁘게 하고 병균을 부르는 또 다른 사례는 닭똥, 돼지똥 등 동물성 질소 거름을 많이 주는 경우이다. 식물성으로는 깻묵이 대표적이다. 이런 질소 거름은 당장 작물의 생육을 촉진시키는 데는 좋지만 장기간 주게 되면 토양의 숨구멍을 막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출처:경향DB

반면에 토양의 숨구멍을 잘 뚫어주는 것은 식물성 탄소질(섬유질) 거름이다. 이른바 녹색비료(녹비)라 한다. 썩은 왕겨·톱밥, 부엽토가 그것들이다. 이런 거름들은 작물 생육에 당장 큰 효과를 내지는 못하지만 장기간 주면 토양의 배수와 통풍을 좋게 한다. 이뿐만 아니라 작물에 미량 요소의 공급을 원활하게 해 작물을 건강하게 키운다.

토양을 뒤집는 경우 너무 깊게 하지 말고 얕게 호미로 살짝 하는 게 좋다. 깊게 뒤집으면 토양 구조가 교란되고 숨구멍을 끊는 역효과를 내 가뭄에도 약하고 병해충만 증식시키는 부작용을 낳는다. 당장 병해충을 예방하는 방법은 목초액이나 액비, 효소액 등을 작물 잎에 직접 뿌려주는 것이다. 목초액 대신 식초, 액비 대신 오줌도 가능하다. 마요네즈를 써도 된다. 효소액으로는 쌀뜨물을 발효시킨 것도 좋고 막걸리 삭은 것도 좋다. 장마 사이사이 비가 오지 않을 때 물로 희석해 3~5회 정도 뿌려주면 예방 효과를 볼 수 있다. 다만 앞에서 제시한 근본대책을 잘 지켜야 효과가 배가된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어제 <안철수의 생각-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지도>라는 책을 펴냈다. 안 원장은 책에서 자신의 삶은 물론 대한민국에 대한 비전과 사회 현안 진단, 청소년에게 전하는 이야기 등 폭넓은 주제를 다뤘다. 그는 책 출간을 계기로 출판기념회나 지난해의 ‘청춘 콘서트’ 형식을 빌려 시민들과의 접촉을 확대해나갈 계획이라고 한다. 안 원장이 연말 대선을 향해 또 한발짝을 내딛는 모습이다.


안철수 책, 벌써 관심 (경향신문DB)


<안철수의 생각>을 주목하는 이유는 그의 정책적 비전과 정치참여 의지를 어느 때보다 분명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안 원장이 사회적 현안들에 대해 원론들을 제시한 적은 있으나 자신의 생각들을 비교적 소상하게 설명한 건 처음이다. 이런 생각들은 그가 대선 출마에 나설 경우 대선 공약으로 발전될 것이며, 지난해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지원 때처럼 측면 지원에 그치더라도 야권 대선 후보의 공약에 반영될 공산이 크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책은 안 원장의 국가운영 구상 묶음집이라 봐도 무난할 것 같다. 둘째, 안 원장이 대선 출마 쪽으로 기우는 징후가 보다 명백해졌다. 안 원장은 ‘4·11 총선 패배 후 자신에 대한 정치적 기대가 다시 커지는 것을 느꼈다’고 집필 동기를 밝혔고, ‘앞으로 내 생각을 보다 많은 분들에게 구체적으로 돌려드리고 많은 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며 향후 계획도 밝혔다. <안철수 생각>을 사실상의 대선 출사표에 견줄 수 있는 까닭이다.


안 원장의 정책 구상들은 예상대로 ‘친야’ 색깔이 짙어 보인다. 시대의 화두라 할 수 있는 복지는 일자리와 복지의 선순환을 강조했고, 경제민주화는 재벌개혁이 요체라고 정리했다. 사법 개혁을 위한 고위공직자수사처 신설이나 비정규직 차별 철폐와 같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역설했다. 안 원장 스스로 ‘경제는 진보, 안보는 보수’라고 밝혀온 점을 감안할 때 이른바 보수를 표방한 이명박 정부와 확연하게 선을 그은 대북정책이 눈에 띈다. ‘통일의 관점을 사건에서 과정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기조 아래 금강산 및 개성관광 재개 등 남북 간 경제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과 용산 참사에 대해서도 “거주민을 고려하지 않고 개발논리만 밀어붙인 것이 원인”이라고 비판적 진단을 내놨다.


서둘러 출간한 기색이 역력한 이번 저서는 대선에서 안 원장의 역할을 둘러싼 국민들의 궁금증에 대한 응답이라고 본다. 안 원장도 이를 의식한 듯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도 많지만 다양한 자리를 통해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렇다면 안 원장은 이제 자신이 밝힌 구상을 누구와 더불어,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도 충분히 설명해야 한다. 여전히 외곽을 돌며 여론을 탐색하는 듯한 모습에서 벗어나 국민들과 눈 높이를 맞추고, 직접 만나야 할 시점이 임박해오는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은행에서 돈을 빌려본 사람이면 이자 1%가 얼마나 부담스러운지 실감한다. 그런데 은행창구 이자는 절반이 양도성예금증서(CD)금리가 좌지우지한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내려도 CD금리가 움직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금융권이 담합해서 가능한 한 CD금리를 높게 묶어두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기준금리를 내려도 CD금리는 내리지 않자 공정거래위원회가 조사에 나선 것이다. 설마했지만 담합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 금융사 1곳이 CD금리를 담합한 사실이 있다고 공정위에 자진 신고를 했다는 보도다. 공정위에 잘못을 가장 먼저 신고하면 과징금을 면제받는,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제) 혜택 때문으로 보인다. 


금융위 단기지표 개선을 위한 TF회의 (경향신문DB)


공정위는 CD금리를 날마다 보고하는 10개 증권사, CD를 발행하는 시중은행과 지방은행 9곳을 뒤지면서 전방위 조사를 벌이고 있다. 공정위는 시중은행 담당자들이 매달 모이는 자금부서장 간담회를 담합 창구로 의심하고 있다. 금융권은 아직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가계대출 금리를 내리기 위한 정부의 또 다른 압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철저한 진상규명이 필요하다. 담합이 있었다면 주체가 은행인지 증권사인지, 아니면 은행과 증권사의 암묵적 담합인지 서둘러 가려야 한다. 그리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CD금리를 0.1%만 부당하게 올리면 은행은 2800억원을 챙기고, 대출자들은 그만큼 손해를 보는 셈이다. 사실로 확인되면 금융권은 천문학적인 과징금 폭탄에다 도덕성에 대한 비난은 물론 소비자들의 집단소송까지 각오해야 한다. 이만저만 심각한 일이 아니다. 


이미 시민단체들은 비난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금융소비자연맹은 조작이 사실로 밝혀진 뒤 금융사들이 모른 체한다면 집단소송에 나서겠다고 한다. 손해배상 요구는 최대 20조원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최근 4만2000여명의 대출자들이 모여 은행을 상대로 부당하게 받은 부동산 근저당 설정 비용을 되돌려달라고 10조원 규모의 집단 소송을 낸 바 있다. 


금융기관 관리감독을 맡았던 금융당국에도 그동안 뭘 했느냐고 묻고 싶다. CD금리는 발행규모나 거래량이 적어 대출금리 기준으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지난해 TF를 만들었다가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흐지부지한 전례가 있다. 공정위 조사는 가능하면 서둘러 끝내는 게 좋다. 시장의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이번 기회에 금리 결정을 비롯한 금융 시스템 전반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고 본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대검찰청 산하 저축은행 비리 합동수사단(합수단)이 어제 이석현 민주통합당 의원의 서울 거주지를 압수수색했다. 이곳은 이 의원 보좌관 오모씨의 동생 소유이지만, 경기 안양 동안갑이 지역구인 이 의원이 서울에 머물 때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검찰은 “오씨의 개인 비리 혐의와 관련된 압수수색”이라고 밝혔으나 이 의원은 자신에 대한 ‘보복수사’라고 주장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의원은 압수수색 전날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민간인 불법사찰 사건과 관련해 “장진수 전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에게 입막음용으로 전달된 ‘관봉’ 5000만원은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조성한 비자금”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 돈은 이현동 국세청장이 기업으로부터 마련해 민정수석실에 제공한 것”이라고도 했다. 권재진 법무부 장관과 국세청은 즉각 의혹을 부인했다. 하지만 불법사찰의 윗선 추적에 결정적 고리가 될 것으로 기대돼온 관봉의 출처를 검찰이 확인하지 못한 터라 이 의원 발언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의원이 보복수사라고 주장하는 배경이다.


보좌관에 대한 압수수색은 정치탄압 (경향신문DB)


검찰은 “이 의원의 대정부질문이 있기 전에 이미 법원에서 영장을 발부받았다”며 의혹을 일축했다. 또 오씨 집 전체를 압수수색할 예정이었으나 이 의원이 함께 거주하는 점을 고려해 오씨 방만 압수수색했다고 설명했다. 검찰의 말대로라면 법적 절차를 위반한 부분은 없어 보인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지난 5일 합수단 관계자는 이상득 전 새누리당 의원의 집을 압수수색하지 않은 데 대해 “저축은행 수사와 관련해 압수수색한 정치인은 한 명도 없다. 정치인들은 수사하기 굉장히 어렵다”고 말했다. 국회의원 보좌관도 광의의 정치인으로 본다면, 이 전 의원 수사와 오씨 수사는 형평성 논란을 낳을 수 있다. 상식적으로 판단해도 이 전 의원의 혐의가 오씨보다 무거울 가능성이 크지 않은가.


검찰은 보복수사·표적수사 의혹을 분명하게 석명할 필요가 있다. 면책특권이 보장되는 국회의원의 발언을 겨냥해 수사기관이 나선다는 것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보복수사가 사실이 아니라 해도 검찰은 의혹이 제기된 데 자신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지폐의 일련번호가 찍힌 관봉의 실물사진이 존재함에도 출처 추적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무능과 수사 의지 부족이 의혹의 근원이 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는 민간인 사찰 국정조사특위를 조속히 가동해 사건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쳐야 한다. 또 검찰은 정치인 수사에서 원칙과 형평성을 지키는 문제를 유념해야 할 것이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이건범 | 작가·출판인


 

최근 공공영역에 쓸데없이 외국어를 남용한 두 가지 일이 벌어졌는데, 이를 수습하려는 태도와 철학이 정반대로 나타나 흥미롭다. 전기를 아끼기 위해 간편한 복장을 허용한 서울시의 ‘쿨비즈’ 정책과 중학교 1학년부터 수·우·미·양·가 성적표기를 A·B·C·D·E로 바꾸겠다는 교육과학기술부의 정책이 있었다.


두 정책 모두 뜻은 좋다. 서울시는 여름철 실내 온도를 26도로 맞추면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입은 직원들이 지칠 테니까 일부 민원 부서 외에는 반바지 등 더위를 피할 수 있는 복장으로 일을 해도 좋다며 적극 권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수·우·미·양·가’라는 성적 표기가 일제 잔재로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의 머리를 베어오는 성적에 따라 매기던 점수 표기라 이를 바꾸겠다고 발표하였다.


쿨비지 패션쇼 (경향신문DB)


 문제는 그 좋은 의도가 다 ‘쿨비즈’ 따위 영어로, 로마자로 국민에게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공공영역에서 외국어를 남용하면 자칫 국민의 알권리를 침해할 수 있을뿐더러 공공과 민간의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공공이 민간 위에 군림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가장 사소하게 저지를 수 있는 민주주의 파괴행위다. 당연히 항의가 거세게 일어났다. 그런데 이 항의에 대응하는 두 기관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서울시는 곧 공공언어 다듬기 위원회를 소집하여 네 가지 대체어를 고르고, 시민단체인 한글문화연대와 협력해 시민들의 의견을 조사했다. 그 결과 ‘쿨비즈’ 대신 ‘시원차림’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로 뜻을 모았다. 반면 교육과학기술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물론 두 기관 모두 처음 정책 관련 용어를 만들 때 언어와 민주주의의 관계, 공공언어의 파급력 등을 고려하지 않은 소수 공무원이 결정했겠지만, 서울시는 시민에게 배우고 함께하는 반면 교과부는 관료적 권위주의로 뒷걸음치고 있다. 


쿨비즈나 A·B·C·D·E 성적표기만 해도 국민의 실생활에 미치는 악영향은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나타난다. 하지만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정책 용어들도 많다. 선별적 복지를 취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복지 혜택을 받는 이들은 소득이 낮거나 장애가 있거나 가정이 무너진 경우에 속한다. 이런 환경 탓에 이분들의 교육수준이 비교적 낮고 또 낮은 교육수준이 어려움을 더 키운다. 그런데 보건복지부는 이들이 이용해야 할 복지상품권 제도를 ‘바우처 제도’라고 이름 붙여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했고, 이제 바우처는 어린이집 등의 보육기관으로까지 퍼졌다. 일반인도 잘 모르는 이 말이 우리나라 복지를 대표하고 있다.


의료비 포괄수가제 문제점 제기하는 의사협회 (경향신문DB)


그러나 언어와 민주주의의 문제가 단지 외국어 남용 때문에만 생기지는 않는다. 우리말 같은 데도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말이 또 우리를 괴롭힌다. 대표적인 사례가 ‘포괄수가제’다. 2012년 7월1일부터 일곱 개 질병에 전면 적용한 포괄수가제 도입 여부를 놓고 텔레비전에서 토론을 할 때 나도 중간부터 본 적이 있다. 무려 한 시간 넘게 토론을 봤지만, 난 포괄수가제가 무언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주 답답하게 그 뜻을 추측해야만 했다. 알고 보니 포괄수가제는 ‘의료비 정액제’, 또는 ‘진료비 정찰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우리말 같지만 거의 외국어나 다름없는 어려운 말이다. 


공공영역에서 정책을 만들거나 이를 알리는 사람들은 머리를 써야 한다. 상품의 이름을 짓고 책의 제목을 정하는 일은 상품의 기술을 개발하거나 책의 내용을 쓰는 일만큼 엄청난 고민을 쏟는 일이다. 차별성을 얻기 위해 손쉽게 외국어를 갖다 붙이지만, 그건 내용을 알리거나 매력을 일으키기에 그리 적합하지도 않거니와 다른 상품이나 책과 혼동을 일으키는 부작용마저 부른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짠다.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로 고민해야 한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

장훈 | 중앙대교수·정치학


 

장마와 무더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 안녕하십니까? 연일 이어지는 각종 토론회, 회견, 지역 방문 등으로 얼마나 바쁘십니까? 경제민주화부터 일자리 창출, 노인 복지까지 실로 다양한 문제들에 대한 질문에 끊임없이 답해야하니 더운 줄도 모르고 지내시겠지요? 


새누리당 대선 주자들 처음으로 한 자리에 (경향신문DB)


저는 요즘 수없이 이어지는 대선주자 분들의 인터뷰, 토론회를 지켜보면서, 무언가 중요한 고리 하나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되었습니다. 사실 대통령에 선출되면, 대통령의 귀한 시간과 에너지의 절반 이상은 대외적인 문제에 쏟게 됩니다. 안보와 국방에서부터 국제경제 동향, 에너지와 식량 확보 등등은 국가의 사활적인 이익이 걸려있는 문제들이고, 최고 결정권자로서는 잠시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슈들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요즘 쏟아져 나오는 대선주자 분들의 인터뷰, 토론회에서는 북한 문제만 가끔 다뤄질 뿐 차기 정부와 대통령이 다뤄야할 사활적 대외이슈들이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을 하는 언론인들의 한계라기보다는, 우리 정치가 오랫동안 내부 문제를 우선시하는 고질적 습관 때문이겠지요?


지금부터 차기 대통령이 고민하고 씨름해야 하는 중단기 대외적 이슈들을 꼽아보겠습니다. 백면서생의 어리석은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만, 미국, 중국, 일본 등의 지도자들은 이미 수백 번 숙고하고 있고 나름의 깊은 이해와 준비가 되어 있는 이슈들일 겁니다. 


질문 1. 한국의 차기 대통령 임기는 2013~2018년에 걸쳐 있습니다. 이 기간 동안에 미국과 중국의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중국 낙관론의 예측대로 중국이 미국을 경제적으로 거의 따라잡고, 군사적으로도 이에 도전할 정도의 세력을 키우게 될까요? 이럴 경우 거대한 자원이 묻혀있고, 경제·군사·정치적 요충지인 남지나해의 어딘가에서 미국과 중국의 물리적 충돌은 불가피할 수도 있습니다.(물론 하나의 가상적 시나리오이기는 합니다만) 이때 우리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G2의 제한적 충돌이 현실화할 때, 우리는 고래싸움에 ‘연루’되는 위험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경제적으로는 중국에 깊이 의존하는 우리의 처지에서, 동시에 군사적으로는 미국과 오랫동안 깊은 관계를 유지해온 상태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참고로 옛날 역사를 잠깐 말씀드리자면, 중국 대륙에서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조선의 조정은 두 나라 모두로부터 수십 차례의 파병 요구를 받은 바 있습니다.)


질문 2.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2013~2018년 사이에 북한이 급변할 사태를 우리가 상정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의 내부사정이 심각한 위기 상황으로 치닫게 될 때, 우리 정부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요? 한국정부에 의한 단독 위기관리가 가능할까요? 혹은 미국·중국이 참여하는 국제적 위기관리 체제가 가동될까요? 이 문제는 우리 내부의 극심한 대립과 함께 한반도 주변세력들 간의 심대한 불안정을 불러올 수 있는 가상 상황입니다.


질문 3. 이번에는 조금 부드러운 질문을 드려보겠습니다. 아시는 대로, 녹색경제는 21세기의 큰 흐름입니다. 기업, 개인, 가정 모두가 환경친화적인 생활방식과 사고를 실천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문제는 저탄소경제나 녹색기술이라는 것도 결국은 선진국(북)과 개도국(남) 사이의 대립을 불러오게 됩니다. 프랑스, 독일을 포함한 유럽의 선진국들은 이 분야에서 성큼 앞서가고 있고 개도국들은 크게 뒤처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기후변화 대책을 염두에 둔 저탄소경제의 강화와 실천은 결국 국제적으로는 남과 북의 집단적 대립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이 같은 질문들에 대해서 수많은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으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후보분들 스스로가 이런 중대한 이슈들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고민과 사색,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는지 한눈에 알아볼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Related Posts Plugin for WordPress, 

Blogger...
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