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은숙 인권연구소 ‘창’ 활동가


부음이 들리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내려놓고 달려가는 게 보통 사람의 마음가짐이요 태도다. 어떤 다급한 사정보다도 “조문 가봐야 한다.”는 말은 우선순위요, 양해의 이유가 된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서 이건 당연한 도리다. 가신 분에 대해서는 추모를, 남은 분에게는 위로를 안기는 것 또한 당연하다. 그런데 이상하다. 개인들 사이에선 당연한 이런 도리가 왜 사회정치적으로는 무시되는 것일까?


2012년 연말, 얼굴을 할퀴는 찬바람보다 더 센 칼바람에 가슴을 베인 분들이 많다. 한진 중공업의 고 최강서님을 비롯해 다섯 분이나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이 하나의 세계’라 했으니 다섯 개의 세계가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 뿐인 세계, 다시 못 올 세계를 추모할 우리 사회의 언어는 참 잔인하다. 그분들을 평소에 설명했던 노동자, 정리해고, 비정규직 등의 단어들이 서럽게 몸부림친다. 그분들의 죽음을 부른 노동조합 활동 탄압, 수백억 원대의 손해배상청구, 노사합의 불이행 등이 원망스럽게 질기다.


 



이런 서러움과 원망에 부응하는 것이 사회정치적 애도일 것이다. 그런데 책임을 보여야 할 기업주나 정치인들이 애도는커녕 죽음을 깍아 내리고 헐뜯는다. 울음소리가 들리면 돌아보는 게 인지상정인데 미동조차 보이지 않는다. 죽은 이들은 추모 받지 못하고 남은 이들은 위로받지 못하고 더욱 통곡한다. 이곳저곳 철탑 위에 굴뚝 위에 올라서 “우리 좀 봐라, 우리 소리 좀 들어라”는 노동자들은 더 아파한다. 사회정치적 응답대신 날아드는 동료의 부고. 그들의 속앓이에 얼음꽃 맺힌 날짜만 쌓이고 있다.


지켜볼 수만 없기에 사회정치적 애도를 촉구하기 위해 다시 시민들이 부릉부릉 시동을 걸었다. 1월 5일 ‘다시, 희망 만들기’란 이름으로 버스가 뜬다. 울산 현대자동차 송전탑 농성장을 거쳐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으로 간다. 서울에서는 오전 9시30분, 대한문 농성장에서 출발한다. 


시민들이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정치권이 나서야 한다는 말 백번 맞다. 그런데 움직이는 척을 안하니 더 밀고 다그쳐야 할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도 내 곁에서 사라져간 세계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기 위해 간다. “산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야지요.”란 흔한 위로의 말을 ‘사회정치적인 희망’으로 바꾸기 위해 간다. 싸게 쓰고 함부로 버리는 소모품 취급을 거부하기 위해 간다. 빼앗기고 쫓겨난 사람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간다. 2011년 ‘희망버스’를 통해 사측이 내놓았던 약속, “회사는 노동조합 활동을 이유로 손배, 가압류를 하지 않는다.”는 합의서 불이행을 따지러 간다. 이것 말고도 가야할 이유는 많다. 나의 세계가 또 다른 사람의 세계와 만나기 위한 이유가 어디 이것뿐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유로 함께 살기 위해 간다. 이 버스가 동행하실 분을 기다리고 있다. 문의 010-9667-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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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야가 기어코 택시를 대중교통수단으로 인정하는 ‘대중교통 육성 및 이용 촉진법 개정안’(택시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택시도 버스나 철도처럼 정부의 폭넓은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택시법안을 지지하는 여론은 택시업계를 빼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치권이 처음부터 제대로 여론을 수렴하지 않고 여야 합의로 택시법안을 발의하고 강행 처리한 탓이다. 여야는 택시법안의 필요성에 대해 이런저런 이유를 들지만, 따지고 보면 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택시업계 종사자 30만명의 표를 의식했기 때문으로 볼 수밖에 없다. 입법권이 아무리 헌법상 국회의 고유권한이라지만 택시법안 처리는 ‘입법권의 남용’이란 지적을 받아 마땅하다.


(경향신문DB)


택시법안의 입법 취지는 택시회사의 경영난과 운전기사의 열악한 처우 같은 택시업계 현안을 정부 재정 지원으로 해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결책은 방향부터 틀렸다. 택시업계가 현재와 같은 어려움에 처한 근본 원인은 택시 대수가 너무 많고 요금이 싼 데 있는 만큼, 해결책은 당연히 구조조정을 통해 대수부터 줄이고 요금을 올리는 식으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택시업계 현안을 이런 방식으로 해결하지 않고 재정 지원으로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것은 밑 없는 독에 물붓기가 될 것이 뻔하다. 정부 지원이란 든든한 ‘백’이 생긴 마당에 누가 구조조정을 하려 할 것인가.


택시법안에 따른 정부의 택시 재정 지원은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자영업자와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현재 전체 택시의 65%를 차지하는 개인택시는 자영업자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택시는 과잉공급돼 있고 이용객은 적은 탓에 돈벌이가 신통치 않다. 그렇다고 정부가 세금으로 그들을 지원하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운전기사의 열악한 처우는 어떻게든 개선할 필요가 있지만 택시법안의 방법은 분명 잘못돼 있는 것이다.


정치권이 무리하게 택시법안을 강행처리한 데는 정부 책임도 크다. 사실 택시업계의 문제가 불거진 지 오래됐지만 정부는 그동안 해결 방안을 적극 강구하지 않았다. 여야가 지난해 말 택시법안 처리 방침을 밝히자 부랴부랴 특별법 제정을 택시업계에 제안했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택시법안 입법으로 대중교통정책은 혼란이 불가피하게 됐다. 그러나 이제라도 정부는 택시정책을 제대로 세워야 한다. 정부 재정 지원을 최소화하면서 택시가 고급 교통수단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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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어제 육성으로 발표한 신년사는 올해가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전환을 이룰 시기임을 명시하고 있다. 지난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유업이었던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에 이어 인민생활의 개선을 토대로 한 경제강국 건설에 본격적으로 매진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남북관계에서는 이명박 정부 5년간의 대립과 갈등을 접고 기존 합의를 준수하는 방향으로 관계를 개선할 것을 제안했다. 북한이 노동신문·청년전위·조선인민군 공동사설이 아닌 지도자의 육성 신년사를 통해 국정기조를 밝힌 것은 1994년 이후 처음이다.


北김정은,19년만에육성신년사발표 (경향신문DB)


신년사에서는 무엇보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안도감이 엿보인다. 100% 자력으로 이룬 장거리 로켓 광명성 3호 2호기의 발사 성공을 국가적 존엄과 영예를 끌어올린 ‘특대사변’으로 규정했다. “군사기술적 우세를 통해 원자탄으로 위협공갈받던 시대가 지나갔다”고 밝힌 김 제1위원장의 지난해 4·15연설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외부의 군사적 위협에 대응할 최소한의 수단을 확보했다고 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이러한 자신감은 북한이 자위력 확보에 과도하게 편중됐던 국가자산의 일부를 경제발전에 돌릴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실제로 신년사는 올해 투쟁구호로 “우주를 정복한 그 정신, 그 기백으로 경제강국 건설의 전환적 국면을 열어나가자”고 제시해 군사기술적 성취를 경제적 성공으로 연결시키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신년사가 6·15 공동선언 및 10·4 선언의 이행을 강조한 것 역시 종래 주장을 되풀이했다고 단정하기 앞서 경제건설로 방점을 옮기려는 북한 내부의 노선 변화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북한이 최근 일본에 대해 일본인 유골반환 및 납북자 문제에 대한 협상재개를 제안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김 제1위원장이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비난을 자제한 것 역시 대남·대외적으로 대결보다 협력을 원한다는 신호로 보인다. 


물론 여전히 선군정책을 지침으로 삼고 있는 북한이 핵·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중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대결에는 대결로, 대화에는 대화로 임한다는 기조에서 앞으로도 핵실험 및 장거리 로켓 발사는 물론 대남 물리적 도발을 감행할 가능성도 상존한다. 하지만 이는 차기 정부와 미국의 버락 오바마 2기 행정부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다. 한반도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을 외면한 채 대북압박 또는 상황관리에만 몰두한다면 남북관계 및 북핵 문제는 앞으로도 간헐적인 성공과 지속적인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북핵 문제를 포함해 북한과 관련된 모든 현안은 결국 분단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나 해결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북한의 민생경제 개선 의지는 한·미의 대응에 따라서는 한반도 문제의 새로운 접근을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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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가 어제 새벽 342조원 규모의 2013년 새해 예산안을 채택했다. 법정처리 시한인 12월2일을 넘긴 것은 물론이고 해를 넘긴 지 6시간 만에 통과시키는 진통을 겪었다. 5년 만에 처음 여야 합의로 예산안을 채택했다는 상징성은 있지만 아쉬운 일이다. 


새해 예산안의 가장 큰 특징으로 복지예산이 사상 처음 100조원을 넘었고, 전체의 30%를 차지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당초 정부가 제출한 복지예산은 97조원이었지만 대선이 치러진 이후 국회 예산안 심의 과정에서 2조원이 더 늘었다. 여기에 민간에 사업을 맡기고 정부가 금리를 대주는 방식의 복지사업 5조원을 합치면 실질적인 복지예산은 100조원을 넘어선 것이다. 복지예산이 늘어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처럼 복지예산이 많이 늘어난 것은 서민들의 삶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는 정치권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 사회를 맞아 복지예산을 늘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라고 본다. 대선 과정에서 양극화 해소를 위한 경제민주화와 함께 선별적 복지가 아닌 보편적 복지에 대한 요구가 현안으로 떠올랐던 것도 이 때문이다. 


성탄절을 맞아 다일복지재단 관계자들이 노숙인들에게 방한복·도시락 등을 나눠주고 있다. (출처 : 경향DB)


그러나 아직도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 복지 수준은 갈 길이 멀다. 보건사회연구원에 따르면 2009년 우리나라의 국내총생산 대비 사회복지 지출 비중은 9.4%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19.3%)에 못미치는 것은 물론 최하위 수준이었다. 복지예산이 많이 늘어난 것은 바람직하지만, 얼마나 효율적인 집행이 이뤄질 것인지도 철저히 챙기고 따져야 한다. 예산만 늘리고 집행 과정에서 소홀함이 생긴다면 도움이 필요한 계층은 정작 혜택을 받지 못한 채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새 정부도 이른바 복지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각별히 유의해주기 바란다.


새해 예산안 확정 과정에서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를 비롯해 여야 실세 의원들이 지역구 예산을 많이 챙긴 것은 여전히 고쳐지지 않은 구태였다. 지역 인프라 구축에 쓰이는 사회간접자본(SOC) 예산이 정부가 제출한 것보다 3710억원 더 늘어난 것이다. 복지예산이 정부안보다 3000억원 더 늘어난 것보다 더 큰 규모다. 이런 행태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나라를 지키는 국방예산, 미래 먹거리를 찾는 연구개발(R&D) 예산도 깎는 판에 실세 의원들이 지역구 민원사업을 챙기는 데 급급해서는 곤란하다. 오죽했으면 예결위 전체회의에서 한 예결위원이 “국가예산을 다루는 분들이 이래도 되느냐”고 따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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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건호 |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연구실장



 

새해가 밝았다. 작년 이맘때와 비교하면 마음이 부풀기보다는 허전함이 맴돈다. 총선, 대선을 거치면 올해부터 복지국가 길이 열리리라 기대했던 탓이다. 주위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인 듯하다. 어쩌랴. 이제 몇 해 더 치열하게 준비하자 마음을 다듬고 있다. 작년에 무엇을 놓쳤고, 앞으로 무엇에 주목해야 할까?


복지운동의 눈으로 보면 총선과 대선은 부끄러운 선거였다. 시민들의 복지 열망은 넘쳤으나 정작 복지는 쟁점이 되지 못했다. 복지민심을 열매로 영글게 할 복지정치가 빈약했다. 


우선 핵심 의제가 없었다. 2010년 지방선거의 무상급식, 2011년 서울시장 보궐선거의 보편복지·선별복지처럼 복지철학과 정책 차이를 보여줄 쟁점이 드러나지 못했다.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였다는 박근혜 후보의 차별화 해소전략은 효과를 발휘한 반면 복지 원조격인 민주, 진보진영의 의제 기획은 무기력했다.


새해 예산안 합의 (경향신문DB)


복지 재정방안도 불명확했다. 야권은 강한 복지 공약을 주창하면서도 그에 따른 재정방안을 제대로 내놓지 못했다. 복지를 바라는 만큼 구체적 실행방안을 보고자 하는 시민들의 눈높이에 턱없이 부족했다. 이번 대선이야말로 반세기 동안 정의롭지 못하게 뿌리박아온 재정조세 체계를 근본적으로 혁신하는 계기가 되어야 함에도 포괄적인 재정개혁, 선언적인 부자감세 철회에 안주했다.


그 결과 시민들은 관람자로만 내몰렸다. 논점이 생겨야 이를 중심으로 찬반여론이 갈리고 지지자의 세력화가 가능하며 그래야 집권 이후 기득세력의 저항을 물리칠 대중적 힘도 만들어진다. 안타깝게도 복지공약 생산이 캠프 전문가집단의 전유물이 되고 시민들은 선거를 코앞에 두고서야 공약을 접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달라야 한다. 부족했던 것들을 채워나가야 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시민들이 집중할 핵심 의제를 논의하자. 일회성이 아닌 사회제도 개혁을 수반하는 의제로서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가 어떨까? 연 40조원으로 지출 규모가 가장 크고 5000만 국민 모두에게 해당되는 복지 과제가 바로 병원비이다. 고령화시대 시민들의 병원비 불안은 갈수록 커지지만 민간의료보험의 시장 보호를 위해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늘릴 수 없는 게 박근혜 정부이다. ‘민간의료보험 대신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운동을 시작하자.


‘모든 병원비를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 준비위원회 발족식 (경향신문DB)


복지 확충을 위한 시민 증세운동을 펴자. 시민들은 세금에 대해 두 가지 복합 감정을 지니고 있다. 세금 쓰임새에 대한 불신에 따른 조세 저항과 복지 확충을 위한 증세 불가피성이다. 지금까지 저항만이 강조돼 왔고, 증세는 다음 일로 간주돼 왔다. 당연히 재정지출, 과세형평성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겠지만 이제는 복지국가를 향한 증세도 본격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역으로 증세가 재정조세 인프라 개혁의 에너지가 될 수도 있다. 증세가 대중운동으로 전개되기 위해선 소득세,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 개별 세목을 복잡하게 다루기보다는 상징적 단일 세목으로 복지목적세가 적절하다.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세,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세에 이어 지금은 함께 사는 대한민국을 위한 복지세의 시대이다.


시민들이 복지확충 활동에 주체로 나서자. 정당, 노동조합, 시민단체 회원만이 아니라 복지를 바라는 소박한 시민들이 주인이 되는 시민 참여형 복지활동이 필요하다. 1인당 평균 월 1만원씩 더 내서라도 병원비 100만원 상한제를 실현하자는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일반 시민도 처지에 맞게 내며 상위계층과 대기업의 책임을 압박하는 ‘사회복지세 도입’ 운동을 주목하자. 두 사업 모두 복지민심이 ‘낼 테니 내라!’를 외치는 ‘소득별 보편증세’ 운동이다.


새해가 떠오르듯이 다시 복지국가 꿈을 꾼다. 정치권의 지지부진을 감안할 때, 시민사회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중앙, 지역 복지단체가 각각 사업을 벌여왔다면 이제는 공통 사업 기획이 요청된다. 복지에선 ‘국민건강보험 하나로’, 재정에선 ‘사회복지세 도입’을 내걸고, 풀뿌리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복지국가 만들기 운동에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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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욱 | 영상설치미술가




지하철역으로 내려간다. 끝없이 펼쳐진 터미널 상가, 쳐다만 봐도 상처를 잊게 하는 물건들이 목덜미를 잡는다. 이게 아편굴인가 싶다. 축지법을 쓰며 시간도 잊게 하고 공간도 바꿔주는 물건들이 휙휙 덮친다. ‘이민 가방 있어요’라는 팻말이 눈에 띈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 이민 갈 거라던 사람들이 참 많았지. 1988년 유학 떠나기 전, 남대문에서 이민 가방을 고르는 내 모습이 떠오른다. 이민 가방의 기억은 엄마의 피란길 풍경으로 거슬러간다. 손녀 운동화 한 켤레, 괘종시계, 집문서를 동여매고 산등성이를 넘다가 미군에게 발각된 할아버지의 보따리. 그 할아버지를 기다리며 어느 초가집 마당 멍석 이부자리에서 깨어난 엄마의 머리맡엔 송아지의 배가 드리워져 있었단다. 엄마는 그때, 아침 이슬이 무언지 처음 알았다고 한다. 그리곤 늘 덧붙였다. 데모하면 전쟁 난다고…. 층층이 줄일 수 있고 늘릴 수도 있는 이민 가방을 바라보며 기억을 챙기다 보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룩한 이 나라의 시공간도 덩달아 주름을 잡는다.


(경향신문DB)


그러고보니 비동시적인 것이 동시에 담겨 있는 한반도는 자체가 이민 가방을 닮은 것 같다. 푸른 별 대륙 주머니 같은 곳에서 서로서로 돌아가며 추방을 한다. 평등한 ‘햇볕’보다는 공포에서 안정과 향수를 느낀다. ‘빨리 먹어’가 사랑의 유일한 표현이고, ‘어서 먹어’가 곧 실천인 부모님 세대처럼 지붕을 부수고 복덕방을 사수하며 영원히 ‘잘살아보세’를 외친다. 이웃의 얼굴은 잠재적 범죄자이고 주소는 쓸모가 없으며 외우지도 못할 비밀번호나 만들고 있다. 그렇게 이리저리 이민 가방에 세간살이 꾸겨 넣고 살다 보면 평수별로 노는 아이들을 낳고 앵무새들은 결혼정보업체에서 사랑을 낚을 것이다. 스승은 완장 찬 제자에게 고발당할 것이고, 연민은 위선으로, 고통을 분담하는 것은 빨갱이 짓으로 매도당하고, 노조 탄압은 법조계 하이에나들을 즐겁게 할 것이다.


숫자의 모양새만 유난히 우아했던 2012년이 지나갔다. 뚱한 표정의 2013년이 철퍼덕 자리를 깐다. 기시감 속에서 밝아온 새해 아침, 소망도 분열을 거듭한다. 애국심으로 증명해야 할 진정성과 반성 타령이 돌림노래를 한다. 슬프지도 않지만 기쁘지도 않다. 거듭되는 불화와 긴장만이 맴도는 이곳은 언제나 고향처럼 ‘익숙한 타향’이니까. 대한민국에 던져진 모두의 인생 여정이 그렇지 않나. 이곳의 불완전한 가능성은 삶이란 여행을 추동하는 유일한 진실이다. 단 한번도 완전한 평화를 모르고 자란 내가 이민 가방을 거꾸로 챙겨 ‘예술하기 좋은 나라’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도 이것 때문이다.


그래도 13년을 살다 온 낭만적인 파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계속 받는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대한 막연한 향수 같은 것이 있다. 그 말을 절감한 선거가 끝났다. 분노와 열정만으로는 성취될 수 없는 민주주의가 저만치 또 물러서 있다. 무지한 향수로 점철된 선동의 메시지만 미디어를 장악한다. ‘무지한 스승’이 스스로 길을 찾아가도록 적극적 부재를 행한다면 무지한 향수는 맹목을 부추기고 미래가 들어설 자리를 빼앗는다. “배고플 땐 예술도 사치”라는 민주당 시의원이나 한을 발효시켜 총체적 긍정의 말춤으로 세계를 점령하라는 큰 시인이나 권력 주변에 꼬인 자들의 목소리는 오십보백보다. 민주주의도 배부른 다음에 있는 거라는 무지 앞에서 예술은 또 언제나처럼 일순위로 예산 삭감과 대중의 독재에 바쳐질 것이다. 


하지만 두렵지 않다. 항해자들은 단독자 태양보다 무수한 별들 아래에서 길을 찾는 법. 우아하지는 않지만 유연하고 의연하게 이민 가방을 툭툭 쳐가며 ‘체리가 익어갈 무렵’이란 노래를 불러본다. 이민 가방에 담아온 내 인생의 노래다. 행운의 여신이 찾아온다 해도 아픔을 잊지 않고 기리면서 부르는 노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작가의 길을 다시 묻는다.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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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논설위원

 


10년 전 인터넷에 떠돌던 새해 황당 예언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란 적이 있다. 2002년 초 어느 누리꾼이 올려놓은 그해 일어날 15가지 가상 뉴스를 연말에 확인하고서였다. ‘오사마 빈 라덴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전격 인수’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 DNA 복제로 부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김희선에게 공개 프러포즈’ 등과 같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만 골라 놓았는데, 그 가운데 2개가 적중한 것이다. ‘한국 월드컵 4강 진출’과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당선’이었다.


민주당사에서 꽃다발을 들고 지지자들의 환호에 답하고 있는 노무현대통령 당선자내외 (경향신문DB)


새해가 되면 그럴듯한 예측에서부터 황당한 예언에 이르기까지 각종 전망이 봇물을 이룬다. 그런 예측이나 예언은 빗나가기 일쑤다. 2001년 9·11테러, 2008년 국제금융위기, 2011년 후쿠시마 사태 등 21세기를 강타한 3대 사건만 보더라도 이를 미리 예견하거나 경고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세상은 인간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은 모양이다. 그래서 세계 금융가 등에서는 일반적인 상황의 경기 전망 보고서뿐 아니라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상황을 전제로 한 이른바 ‘블랙스완(검은 백조) 보고서’도 함께 만든다고 한다. 이를테면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가 ‘그리스에서 국가 채무보다 더 큰 가치를 가진 유전이 발견된다’ ‘영국 연방이 해체된다’ 등 올해 벌어질 13가지 황당 상황을 가정한 것이라든가 온라인 투자은행인 삭소뱅크가 ‘독일 증시가 33% 하락한다’ ‘일본의 메이저 전자회사가 국유화된다’ 등 10가지 ‘2013년 충격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이 그렇다.


한국이 승부차기 끝에 4강에 진출하게 되자 황선홍선수가 기뻐하고 있다. (경향신문DB)


인간이 미래의 일을 미리 알기란 어렵다. 예지력은 “원인이 결과보다 앞선다”는 인과율에 위배되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현대 과학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에 속한다.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 일이라든가 절대로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자주 현실화되는 것, 다시 말하면 황당 예언이 적중하는 일이 생기는 것이 그 때문이다. 남북정상회담 전격 개최, 박근혜 대통령 90%대 지지율 기록, 업계 사상 최악의 구인난, 고리 1호기 및 월성 1호기 폐쇄 결정, 노동부 장관 전태일상 수상…. 새해에는 ‘국태민안·태평성대’의 국운이 펼쳐질 것이라는 역술인들의 ‘덕담’을 떠올리면서 ‘2013년 황당 예언’을 해보자. 개인사와 관련한 것까지 해도 좋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 중 몇 가지가 적중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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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일생을 다룬 어린이용 위인전이 연이어 출간되고 있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인이라고 해서 위인전의 주인공이 돼서는 안될 까닭이 없고, 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나라에서 그런 책의 출간 자체를 탓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새로운 국가 지도자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요구에 부응하려는 출판사의 상업적 행위를 문제 삼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런 책들이 비판의식이 없는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과 그들에게 편향된 내용이나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 때문이다.


대선이 끝나기 무섭게 지난 25일 발행된 것을 비롯한 몇몇 어린이용 ‘박근혜 위인전’을 보면 그런 우려가 기우만은 아니라는 게 여러 대목에서 발견된다. 가장 문제가 되는 점은 박 당선인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편향적인 평가다. 자나깨나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성품이라든가 경제성장을 이끈 업적 등 긍정적인 부분만 부각한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5·16 쿠데타라든가 유신독재 등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언급하거나 심지어 왜곡·호도하는 기술마저 보이고 있어서다. 유신체제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정치적 매도’로 규정한 것이 한 예다.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 과장되게 부풀려지고 왜곡되는 것을 박근혜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었다”는 등 박 전 대통령과 박 당선인을 억울한 피해자인 것처럼 묘사하기도 했다. 5·16을 군사정변, 유신체제를 반민주적이라고 기술한 초등학교 교과서와도 어긋나는 이런 내용은 아이들의 판단을 혼란케 할 소지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도시락을 배달한 뒤 집을 나서고 있다. (출처: 경향DB)


박 당선인을 지나치게 미화한 것도 적절치 않아 보인다. ‘박근혜 위인전’은 박 당선인이 20대 초반부터 대한민국의 퍼스트레이디로서 국정 전반을 보살피고, 박 전 대통령 서거 후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고, IMF 사태를 보고 무너지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정치에 투신했다고 그리고 있다. 우리나라가 전자공업을 육성한 것이나 의료보험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것, 미국이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철회한 것 등을 박 당선인의 공로로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찬양 일변도의 위인전은 교육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아직 취임도 하지 않은 권력을 미화하거나 영웅화·우상화하는 것은 박 당선인과 새 정부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도리어 국민통합을 저해하고 민심을 읽는 눈을 가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최근 대구시가 박 당선인의 생가에 표지석을 세우고 그 주변을 관광코스화하려는 것이나 충북 옥천군이 육영수 여사의 생가 인근에 2017년까지 국비 등 140억원을 들여 가칭 ‘퍼스트레이디 역사문화타운’을 조성하기로 한 것 등 이와 관련한 지방자치단체의 움직임도 그런 점에서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벌써부터 ‘박비어천가’라는 논란과 잡음이 일어서야 되겠는가. 지금은 박 당선인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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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지관 | 덕성여대 교수·영문학


이번 대선 결과를 두고 여러 해석들이 나오는 가운데 세대 간 갈등에 주목하는 논의가 그 어느 때보다도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결국 세대별 투표율 차이가 승패를 가름했기 때문이다. 젊은 층의 참여도 높아졌지만, 50, 60대의 경이적인 투표율 상승이 박빙의 국면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다.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젊은 세대의 꿈이 늙은 세대의 손에 깨지는 것을 보고 착잡한 심경에 빠진 사람은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노인세대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 표출에서부터 고령화에 따른 사회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정치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노년의 자기주장이 이처럼 현실에서 위력을 발휘한 사태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나이든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다. 오히려 억지로 주변으로 물러나는 것, 생명의 현장에서 소외되는 일이기 쉽다. 일찍이 아일랜드의 국민시인 예이츠는 예순을 넘긴 나이에 쓴 시 ‘비잔티움으로의 항해’에서 “서로 껴안은 젊은이들”을 보며 “저것은 노인들을 위한 나라는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시인은 이들이 ‘관능의 음악’에 취해 ‘영원한 지성의 기념비’를 무시하고 있다고 한탄한다. 


 나이 들어 육신이 아름다움을 잃고 허물어질 때, 노년의 의미는 정신의 지고한 가치를 좇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이 시의 화자로 하여금 젊은 몸을 지닌 존재들이 지배하는 이 세상을 떠나 영원히 늙지 않는 예술의 도시 비잔티움으로 향하게 한다. 


그렇지만 시인의 마음속에는 생명의 축제에서 밀려난 노년의 짙은 비애와 생동하는 청춘에의 열망이 숨어 있음을 우리는 “연어 치솟는 폭포, 고등어 우글거리는 바다”라는 활기 넘치는 표현에서 엿보게 된다.


노인회 방문한 박근혜 후보 (출처 : 경향DB)


시간을 초월한 영원성을 내세우면서도 젊음의 생기를 은밀히 그리워한 예이츠와는 달리 더 직설적으로 죽는 순간까지 생명의 끈을 붙잡아야 한다고 노래한 시인도 있다. 웨일스의 시인 딜런 토머스는 노인들은 다가오는 죽음에 맞서 항의하고 분노해야 한다고 외쳤다. 병석의 부친에게 ‘꺼져가는 빛’에 순순히 승복하지 말고 끝까지 맞서라는 그의 호소에는, 세상에서 물러나 소멸의 운명을 앞둔 노년의 삶에 대한 연민과 안타까움이 묻어 있다. 


투표장에 길게 늘어선 나이든 주권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심지어 노환으로 입원한 환자들이 앞다투어 투표하겠다고 나서서 간호사들을 난처하게 했다는 소문도 들으면서, 딜런 토머스의 호소를 떠올린 것은 왜일까? 저물어가는 삶 속에서, 생명의 빛이 차츰 꺼져가는 가운데 자기존재를 내세우고 세상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노인들에게 허용된 것이 다만 한 장의 투표권이라면? ‘저 좋은 밤’ 속으로 순순히 들어가려 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지향이 그 정치적 행위 속에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노년들로 하여금 바다 건너 비잔티움이 아니라 투표장으로 향하게 한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늙는다. 그리고 나이가 들고 병약해지면 다음 세대에게 자신의 의자를 넘겨주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질서다. 이번 대선 결과가 세대 간의 갈등과 적대감을 부추길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 보편의 진실이 세대 사이를 통합하는 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젊은 세대는 노년들의 자기주장을 폄하하지 말아야 하고, 나이든 세대는 미래를 살아갈 젊음의 꿈을 장려해주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생명권은 소중하고 지켜져야 하지만 꺼져가는 빛 속에서 삶의 지혜를 깨달아가는 것도 노년의 힘일 것이다. 


고령화로 인한 사회의 보수화를 우려하는 데서 나아가 이제 진보에는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좌절감조차 피력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령사회가 현실로 다가오는 시대에 노년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고 노년에 대한 상투화된 의식을 극복해내는 것도 우리 사회의 과제가 아닌가 한다. 노년이 초라하고 괴롭지 않도록 사회적인 배려가 더 있어야 하고, 일을 통해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도 더 주어져야 한다. 나이 듦이 저주가 아닌 그런 사회를 이룩해나가는 가운데 노년의 자기주장이 젊은 세대의 선택을 가로막는 아이러니도 되풀이되지 않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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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주 |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


미국 오바마 행정부의 국무부 공보 담당 차관보와 대변인이었던 필립 크롤리, 리처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 등 대북 외교에 관계했던 사람들의 분석과 평가는 북한이 절대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일치하고 있다. 실제로 북한의 지도부는 만일 핵 개발이 없었으면 벌써 이라크와 리비아 이상의 초토화를 당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한·미는 물론 국제사회에서도 이러한 북한의 인식에는 수긍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대북 강경파들은 협상 무용론을 제기하며 북한의 정권교체나 한국 주도의 흡수통일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압박, 제재, 무력 사용 위협도 북 핵 문제 해결에 기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최소한 북한의 핵 능력 증진과 외부로 이전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 북한과 대화해야 한다는 포용정책을 고민해 왔다. 북한의 핵 능력을 현재 수준에서 동결시키고 핵무기 사용이 불가능한 방법을 찾을지, 아니면 봉쇄와 고립으로 북한의 항복이나 급변사태를 유도할지 미국 주도의 국제사회 대북정책은 묘안을 찾지 못하고 있다. 북한의 핵 협상과 대미관계를 총괄하고 있는 강석주 내각 부총리는 핵을 포기하려고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북한은 핵개발을 체제 생존의 가장 강력한 보장책으로 삼고 있는 만큼 핵무기는 결코 포기하지 않은 채 핵 보유국 지위를 유지하려는 전략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해제, 체제보장, 평화협정 체결 등의 현상유지적 타협책으로 6자회담에서 논의되는 포괄적 대북패키지안을 통해 추가적인 핵과 대량살상무기의 개발을 동결함으로써 미국 및 국제사회와의 대결구도를 피하려 할 것이다. 자칭 대북 전문가 사이에서 김일성 주석의 한반도 비핵화 유훈을 들어 북한의 핵 포기가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이 변했고 중동사태의 학습과 교훈이 ‘핵 보유’라는 김정일 위원장 유훈으로 변했다. 이것은 북한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세력도 어떻게 해 볼 방법이 없다. 유일한 방법은 신뢰구축의 억지력뿐이다. 


김정은 노동당 제1비서가 김정일 국방위원장 1주기 중앙추모대회에서 자리에 앉아 있다. (출처; 경향DB)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은 대북정책을 진화와 균형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진화와 균형의 지점이 어디인지 불명확하다. 외교적으로 미국과는 “포괄적인 전략동맹 관계”를 심화시키고 중국과는 “전략적 협력동반자 관계”를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중의 이해가 충돌하고 갈등할 때, 대북정책에서의 불일치가 발생할 때 이를 어떻게 균형적으로 대응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내용이 없다. 박 당선인의 각론적인 대북정책 공약은 남북관계의 급격한 변화보다는 단계적 접근으로 서울과 평양에 ‘남북교류협력사무소’를 설치하고 보건·종교·학술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문화 교류의 활성화를 통해 남북 간 신뢰가 쌓이고 북한의 비핵이 진전되면 국제사회까지 참여하는 “비전 코리아 프로젝트” 예컨대 개성공단 국제화, 지하자원 공동개발, 라진·선봉 등 북한 경제특구 진출 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이다. 이른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이다. 정책의 신축성과 점진적 관계 개선 계획으로 이명박 정부와 차별성을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핵 연계론의 남북관계에 머물러 있다. 다만 북 핵문제를 선 폐기론이 아닌 장기적 관점에서 탄력적으로 접근, 해결해야 할 상호보완적 관점으로 보고 도식적 구분에서 벗어나겠다는 점, 안보를 강조하면서도 북한과의 대화에 전제조건을 달지 않겠다는 점은 다행스럽다. 박 당선인은 약속한 대로 한·미·일 공조가 아닌 “한·미·중 3자 전략대화”를 가동하는 것이 유용한 접근법이 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가 가동되는 국외적 전환점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현 단계에서 북한의 핵개발 씨를 말리자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방법과 수단이 없다. 북·미관계가 개선되고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도 중단과 동결은 가능하지만 북한은 현존의 핵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분단 한반도 현상에서 할 수 있는 비핵화의 한계성이다. 북한 붕괴와 한반도 통일의 시나리오는 지금 당장 불가능한 일이다. 미국과 중국이 통일한반도의 미래에 대해 타협을 안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일한 방법은 평화체제 수립이라는 긴 과정을 통해 핵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정책방향은 북핵 능력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핵 능력의 추가 발전을 억제하면서, 현상동결의 단계적 해결 접근방법을 취해야 한다. 또 신뢰를 바탕으로 한 남북 화해 협력과 관계 개선 그리고 북한 개혁 개방이 제일 중요하다. 이와 연결하여 9·19 공동선언에서 명시한 경제협력,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를 실천하고, 한반도 휴전체제의 평화체제 전환과 동북아 다자안보대화 체제를 수립하는 것이다. 북한의 개방과 개혁을 유도하는 길은 한국과 국제사회의 대북 교류에 있다. 한국은 절실한 긴박감을 가져야 한다. 한반도가 안정이 되고 통일이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핵을 보유할 이유가 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한국의 시급한 국정과제의 하나가 통일정책과 통일외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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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신주 | 철학자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마라!” 1970년 11월 전태일은 자신을 횃불 삼아 박정희의 경제개발이 감추고 있던 치부를 백일하에 보여주었다. 그렇지만 1972년 10월 박정희는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전태일의 외침에 유신헌법으로 응답한다. 40년이 흐른 지금, 이번 겨울은 유독 춥게만 느껴진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독재자의 딸이 보내는 득의만면의 미소가 매서운 겨울바람과 함께 더욱 우리의 옷깃을 세우게 만든다. 이제 박정희의 묘지에 누가 당당하게 침을 뱉을 수 있을 것인가? 이제 누가 얼굴을 들고 전태일의 묘소에 참배할 수 있다는 말인가? 유권자의 과반수가 전태일이 아니라 박정희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가 아니라 2012년 올해 벌어진 사건이자 남기고 뺄 것도 없는 바로 우리 의식의 현주소다. 상생과 통합의 미사여구가 캐럴 속에서 울려 퍼지지만, 어디 이것이 가당키나 한 말인가. 상생과 통합의 주체는 자본가나 보수 여당, 혹은 대통령이니까 말이다.


 독재자의 딸을 지지했던 보수적 성향의 유권자들은 지금 자신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고나 있을까. 아마 그들은 선거 결과에 득의양양해 있을지도, 혹은 이제 경제가 회복되어서 박정희 개발독재 시대의 영화가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들의 백일몽은 박정희 시대에 비인간적인 피와 땀을 흘려야만 했던 수많은 전태일을 망각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돌아보면 그들은 박정희 개발독재 시절에서부터 1997년 IMF 구제 금융 사태 때까지 물질적 풍요를 만끽했거나, 아니면 그 시대에 물질적 기반을 얻는 데 성공했던 사람들을 부모로 두었을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의 공식 하나를 언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풍요를 구가하던 자본이 위기에 빠져 불황에 이르게 되면, 사람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의문을 달기보다는 오히려 거의 미친 듯이 돈, 그러니까 현금을 수중에 넣으려는 경향을 보인다. 과거보다 재산이 줄어드는 순간, 재산이 더 줄어들까 노심초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를 일이다. 바로 여기에 보수적 성향 유권자들의 유례없는 단결력이 발생한 원인이 있다.


전태일 유족 "박근혜 후보 재단 방문은 무의미하다" (출처 ;경향DB)


아무리 과거보다 재산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줄어들 재산이나마 있다는 것은 어쩌면 행운 아닌가. 그렇지만 불행히도 행운을 행운이라고 느낄 여유는 우리들에게는 증발한 지 오래이다. 더군다나 더 심각한 것은 자신이 가진 재산에 노심초사할수록, 우리들의 시야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헤어진 임을 오매불망 그리워하는데, 어떻게 가족이나 친구가 눈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잃어버린 돈에 안타까워하는데, 어떻게 이웃의 하소연이 귀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이 바로 보수적 감수성이 탄생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이자, 동시에 보수적인 사람들이 왜 공동체의 삶을 도외시하고 자신의 기득권에만 연연하게 되는지를 설명해주는 핵심적인 논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보수적인 사람들의 눈에 1997년 IMF 구제 금융 시대 이후 대학을 다녔던 88만원 세대의 감당하기 어려운 아픔과 쓰디쓴 분노가 들어설 여지가 없는 것이다.


우리 젊은이들에게는 대학과 청춘의 낭만은 어느 사인엔가 사치가 되어버린 지 이미 오래다. 과거 사법시험처럼 정규직 직장을 구하기가 힘이 드는 시대에 그들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라는 불안한 근무 조건과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 던져져 있다. 젊은이들에게 더 가혹한 삶의 환경을 제공했던 MB 정권에서 그들의 절망은 깊어만 갔지만, 그래도 그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온 사회 성원들을 비인간적인 경쟁으로 내몰고 민영화라는 미명하에 공적 안전망을 차근차근 자본에 양도했던 MB 정권도 언젠가는 막을 내릴 수밖에 없을 테니까. 우리 젊은이들은 자본이 아니라 사람을 품어주는 정권, 그러니까 보편적 복지의 방향으로 공동체가 재편되기를 간절히 원했으며, 자신들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 젊은이들이 보편적 복지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라고 꿈에라도 생각했겠는가.



일러스트 _ 김상민 기자( 출처: 경향DB)



▲ “‘박정희’라는 형식을 그의 딸이 채우자마자,

‘전태일’이란 형식을 전도유망한 우리 젊은이가 채워버렸다”


선거가 끝난 뒤 우리 젊은이들의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박정희를 선택한 사람들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삼촌, 이모, 고모였으니까 말이다. 아들과 딸, 혹은 손자와 손녀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리라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당한 배신이었으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전태일의 편을 들어주리라 믿었는데, 우리 어른들은 박정희를 선택한 것이다. 소수의 기득권자라면 그럴 수도 있다. 어떻게 제2의 ‘전태일’이 되도록 내몰리고 있는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와 손녀의 간절한 소망을 그들의 부모와 조부모가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그만큼 보수 이데올로기가 극성을 부리며, 우리의 선량한 이웃들에게 자본이 성장하고 발전해야 아들과 딸이, 그리고 손자와 손녀가 잘살 것이라는 믿음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과반수의 우리 이웃들 대부분이 선의를 갖고 독재자의 딸을 권좌에 올렸다는 것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선의를 조롱하는 사건이 하루도 되지 않아 일어났다. 새 권력자에 서치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언론들의 외면을 받아 더욱 쓸쓸하기만 했던 한 젊은이의 죽음이다. 2012년 12월20일 오후 7시,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 지독한 절망 속에 35살의 어느 젊은이가 자살이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나는 회사를 증오한다. 자본, 아니 가진 자들의 횡포에 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심장이 터지는 것 같다. 내가 못 가진 것이 한이 된다. 민주노조 사수하라! 손해배상 철회하라! 태어나 듣지도 보지도 못한 돈 158억원. 죽어라고 밀어내는 한진악질자본.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고 5년을 또… 못하겠다. 지회로 돌아오세요. 동지들. 여태껏 어떻게 지켜낸 민주노조입니까. 꼭 돌아와서 승리해주십시오. 돈이 전부인 세상에, 없어서 더 힘들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다.


‘박정희’라는 형식은 ‘전태일’이란 형식으로 완성된다. 아니면 전태일이란 형식에 수많은 이웃들을 가두어야만 박정희란 형식이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해도 좋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적인 구조는 바로 이것이다. ‘박정희’라는 형식을 그의 딸이 채우자마자, ‘전태일’이란 형식을 전도유망한 우리 젊은이가 채워버린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프로야구 경기결과를 복기하듯이 선거가 끝나자마자 승인과 패인을 쿨하게 분석하고 넘어갈 문제는 더욱이 아니었다. 왜냐고. 우리 젊은이들에게 그것은 생사의 문제이자 희망과 절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전태일’이란 형식을 다시 만든 사람들은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이다. 이 업보를 어떻게 우리가 다 갚을 수 있을까. 이제 절망하는 젊은이들과 함께하면서 우리의 업보를 씻어나가자. 그리고 인간다운 삶을 위해 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도록 하자.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과거 어느 선비처럼 젊은이들을 진정으로 위로할 수가 있을 것이다. 자본이 목적이 아니라 인간적 삶의 수단이 되는 그날까지 “가야 할 길이 머니, 부디 자중자애하기를 바란다(政遠, 切祈珍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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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의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번에는 대통령직인수위 산하 청년특위 위원으로 임명된 하지원 에코맘코리아 대표와 윤상규 네오위즈게임즈 대표의 비리 전력이 드러났다. 극우인사 윤창중씨의 당선인 수석대변인 기용, 대선 기간 야당에 막말을 한 김경재·김중태씨의 국민대통합위 발탁에 이은 ‘사고’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논란거리가 보태지는 격이다.


하지원 위원은 서울시의원이던 2008년 돈봉투를 받은 혐의로 기소돼 벌금 80만원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박 당선인은 인수위 인선 기준으로 전문성, 국정 운영능력, 애국심, 청렴성을 제시한 바 있다. 하 위원의 경우 최소한 네 번째 기준에는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윤상규 위원은 대표로 있는 회사가 하도급 대금을 법정기일을 넘겨 지급하면서 지연이자도 주지 않았다가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을 받았다. 대기업의 중소기업에 대한 불공정 거래를 뿌리뽑겠다고 밝혀온 박 당선인의 의지에 역행하는 대목이다. 임명 전부터 논란을 빚은 김경재 국민대통합위 수석부위원장은 임명 직후 특정 방송사에 “야권 지지 방송이라는 걸 다 안다”며 ‘협박성’ 발언을 해 또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김중태 부위원장은 공직선거법상 허위사실 유포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고 한다.


봉투 뜯는 윤 수석대변인 (출처: 경향DB)


인사 잡음의 원인은 말할 것도 없이 ‘밀봉 인사’ ‘깜깜이 인사’에 있다. 당선인의 극소수 측근들이 극도의 보안 속에서 인선을 하다 보니 검증 작업은 부실해질 수밖에 없다. 새누리당은 “지금까지 발표된 인선은 자문위원 성격이 강하고 공직자를 뽑는 게 아니다”라는 식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다. 문제의 본질을 건드렸다가 당선인의 심기를 상하게 할까 걱정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청년특위나 국민대통합위 위원이 법적으로 공직자냐 아니냐는 중요치 않다. 국민들이 논란의 중심에 선 인사들을 ‘박근혜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대통령 당선인의 초기 인선은 향후 인사의 방향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나 신호등과 같다. 유감스럽게도 박 당선인의 초기 인선은 국민에게 긍정적 신호를 보내지 못하고 있다. 어제로 예상됐던 인수위원 발표를 미룬 것도 이러한 여론을 의식한 결과로 본다. 박 당선인이 향후 인사에서 검증 작업을 강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첫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줄줄이 어긋나는 법이다. 부적격자임이 드러난 윤창중·김경재·김중태·하지원·윤상규씨의 임명을 철회하거나 사퇴시키는 일이 우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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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희 |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


선전했든 고전했든 진 건 진 것이다. 졌으면 그에 합당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옳다. 물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잘해서 이긴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을 못해서 진 것도 아니다. 민주당이 잘한 것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졌으니 하나하나 왜 졌는지를 집요하고 꼼꼼하게 따져야 한다. ‘지독한 반성과 겸허한 성찰’은 민주적 자세이자 대중에 대한 예의다.


반성과 성찰이 있기 위해서는 전제가 있다. 2012년의 총선과 대선을 이끈 주체가 뒤로 물러나는 것이다. 어떤 정부가 잘못하면 정권교체가 당연하듯이, 민주당의 지도부나 주류가 선거를 패배로 이끌었다면 이들의 교체, 즉 당권교체는 마땅하고 필요하다. 새로운 사람들이 키를 잡아야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에서 패인을 따지는 전망적 리뷰(prospective review)가 가능하다. 이것 없이는 단 한 발짝의 진전도 어렵다.


민주당 초선 의원들, 참회의 1000배 (출처 :경향DB)


 세계 어느 정당도 지고 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태연하고 한가하게 ‘선거 후 국면’을 맞이하지 않는다. 게다가 총·대선에서 두 번씩이나 연거푸 패배한 정당이라면 더더욱 일대 혼란과 재정립이 불가피하다. 정당은 여론과 민심을 먹고사는 사회적 생물이다. 여론과 민심이 딱 부러지게 드러나는 기제가 선거다. 따라서 정당이라면 선거에서 드러난 민심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하는 게 일종의 태생적 한계다. 아무리 강하고 돈 많은 정당이라도 이 사실을 거부한다면 집권하기 어렵다.


1997년 대선에서 당시 한나라당은 아깝게 패배했다. 37만표 차이였으니 그야말로 석패다. 이인제라는 제3 후보 때문에 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그들은 패배를 받아들이기보다 불의하게 잃었다는 생각이 강했다. 그 결과 그들은 낙선 후보를 당의 중심으로 세우는 한편 일체의 의미 있는 변화도 거부했다. 이회창 총재 체제하에서 당시 한나라당은 원래의 노선과 정책을 그대로 고집했다. ‘지금 이대로’(The way it is right now)의 노선으로 한나라당이 한때 대세론을 구가하기는 했지만 결국 패배했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대패한 민주당이 선택한 행보는 안정이었다. 17대 대선에서 사상 최대의 530여만표 차이로 졌다. 넉 달 뒤에 있었던 18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299석 중 153석, 공천 문제로 탈당한 친박계가 21석, 이회창의 자유선진당이 18석을 얻는 등 보수진영의 강세로 의석수가 192석(점유율 64.2%)에 달한 반면 민주당은 27%인 81석에 그쳤다. 이런 연이은 대참패에도 민주당은 인물·정책·행태에서 과거와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기신기신 버티기 바빴다.


촛불항쟁에 기겁한 MB정부가 보수의 품안으로 뛰어들어 만성적 위기를 자초한 덕에 민주당은 2010년의 지방선거에서 뜻밖에 기사회생했다. 그 후에도 집권세력의 실정과 그에 따른 반대정치(anti stance politics)로 반사이익을 챙기는 데 주력했다. 물론 지방선거에서 그 위력이 드러난 무상급식을 계기로 복지 아젠다에 일부 천착하기는 했지만 복지 아젠다를 어떻게 사회적 중심의제로 만들고, 새누리당과 어떻게 다른지 차별화하는 데 실패했다. “대안을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권력수단이다.” 민주당은 샤츠슈나이더의 이 명제에 반하는 모습, 즉 변화와 혁신을 통한 대안 제시가 아니라 안정과 반대에 매진했다. 안철수 현상의 충격에도 혁신보다는 통합에 매달렸고, 마침내 2012년 총·대선에서 패배했다.


민주당이 갈 길은 1997년 후의 자폐적 한나라당이 아니다. 문재인이 이회창의 전철을 답습해선 안된다. 2011년 말 집권당의 주류인 친이계는 MB의 임기가 1년 넘게 남았음에도, 총선 공천권을 비롯해 비상대권을 정적인 박근혜 전 대표에게 넘겨줬다. 이러한 탈계파적 결단으로 당은 살아났다. 이기기 어렵다던 총선에서 승리했다. 민주당도 이젠 새롭고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자기 혁신에 매진해야 한다. 그 시작은 당권교체, 즉 하루빨리 역동적인 경쟁을 통해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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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 소설가·서울예대 교수

선생님, 여러 달째 외국에 나가 계시다는 말씀 전해 들었습니다. 잘 지내고 계신지요. 하지만, 춥다는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없습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추운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입니. ‘타인이 고통받는 순간에 내가 행복해도 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사춘기 이후 집요하게 저를 따라다녀왔고 지금까지도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열흘, 선생님이 7년 동안 쓰셨다는 소설 <봄날>을 고통스럽게 읽으면서 그 질문을 먹먹하게 마주보았습니다. 문학의 몫은 어쩌면 인간의 힘으로 대답할 수 없을 만큼 근본적인 질문을 끈덕지게 마주하는 작업 속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 그 와중에 들려온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대선을 앞두고 137명의 젊은 시인과 소설가들이 정권교체를 바란다는 내용의 선언을 했는데, 그 때문에 성탄 전야에 한 소설가가 선관위에 의해 검찰에 고발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비록 그 선언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깊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선언문의 핵심은 인간의 고통을 향해 몸을 기울이는 어떤 태도라고 저는 읽었습니다. 공감했음에도 제가 참여하지 않은 것은 다만 저의 조심스러움, 현실정치로부터 조금 거리를 두고 싶은 그저 조심스러운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으니, 결국 그 선언은 이런 방식으로 작가들을 고발할 수 있는 권력, 표현의 자유라는 상위의 원칙을 가볍게 저버릴 수 있는 권력에 대해 발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아프게 느낍니다. 5년 전 용산의 망루에서 고통받은 이들이 지금까지 감옥에 갇혀 있게 한 정권, 맹목적인 힘으로 강들을 파괴한 정권, 인간과 생명의 존엄을 위태롭게 다루는 정권이 연장되는 것에 반대하는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작가행동1219' 북콘서트에서 김애란 소설가가 작품을 낭독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선생님이 <봄날>을 쓰기 전 소설 <등대>에 쓰셨던 것처럼, 인간의 영혼 속에는 결코 깨어져서는 안되는 귀하고 연약한 무엇인가가 있다고 저 역시 믿고 있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그토록 귀하고 연약한 것이어서 쉽게 깨어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영원히 깨어져버리고, 때로는 고통 속에서 오롯이 다시 생명을 얻습니다.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문학이 인간의 고통에 대해 질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문학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귀하고 연약한 것을 간절히 들여다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인간에 대해 질문하는 문학이 인간의 회복 가능성과 불가능성에 대해서 질문하며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대답들을 호출하고, 지우고, 다시 쓰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 비정형의 움직임들, 그 언어들의 자유가 위협받는 세계에 대해 저는 힘을 다해 반대합니다.


선생님, 겨울은 이상한 계절입니다. 입술을 열 때마다 흰 불꽃 같은 김이 흘러나오고, 잠시 악수하는 손들은 믿을 수 없게 따스합니다. 외투 속에 군고구마 봉지를 품으면 심장 가운데 불을 지피는 것 같고, 말없이 안부를 묻는 우리 눈은 물기 없이 뜨겁습니다. 이토록 차갑고 뜨거운 것들, 딱딱하고 연약한 것들을 가로질러 우리는 걸어갑니다. 이 삶 속에서는 어떤 것도 쉽지 않고, 고통 없이 회복을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거짓이라고 느낍니다. 이 차가운 겨울의 복판에서, 선생님이 <봄날>을 썼던 7년이라는 시간에 대해 생각합니다. 모든 불가능성을 가로질러 건너갈 비좁은 통로를 더듬어 찾기 위해 끈질기게 서성거렸을 한 인간의 몸짓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러한 서성거림과 질문의 자유, 몸짓과 언어의 자유가 훼손되어서는 안된다는 명백한 사실을, 성탄 전야에 들려온 손홍규 작가의 검찰 고발 소식 앞에서 아프게 손아귀에 움켜쥐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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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 중국전문가


맹자(孟子)는 생명과 의리 중 취사선택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물고기와 곰 발바닥을 비유로 들고 있다. 먼저 맹자의 말을 들어보자.


“물고기, 내가 갖고 싶다. 곰 발바닥, 역시 갖고 싶다. 그러나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물고기를 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하리라. 생명, 내가 아끼는 것이다. 의리, 역시 내가 아끼는 것이다. 둘 다를 동시에 취할 수 없다면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물고기와 곰 발바닥은 요리를 가리키는 것 같다. 맹자는 물고기를 생명에, 곰 발바닥을 의리에 비유하면서 의리가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한 것이다. 마치 곰 발바닥 요리가 물고기 요리보다 더 귀하듯이 말이다. 요컨대 맹자는 어떤 상황에서는 자기 목숨보다 의리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런 비유를 든 것 같다.


중국의 사상가 맹자 초상화. (출처: 경향DB)


그런데 맹자의 이 논리는 시간이 흐르면서 물고기와 곰 발바닥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없으니 한 가지만 ‘선택’해야 하는 문제로 변질되었다. 


물고기 요리와 곰 발바닥 요리는 모두 귀한 요리니 다 먹을 수 없다. 그러니 하나만 고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문맥을 잘 살펴보면 맹자는 결코 두 가지를 다 가질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다.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이라는 가정을 했을 뿐이다. 맹자는 때로는 생명보다 의리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좀 더 분명하게 강조하기 위해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 물고기 요리와 곰 발바닥 요리를 비유로 들었던 것이다.


맹자는 “마음을 감독하는 것이 생각이다. 따라서 생각하면 얻을 수 있지만 생각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고 했다. 공자는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속이게 된다”고 했다. 생각 없는 논리와 행동의 위험을 경고하는 말이다. 공자나 맹자 모두 논리와 행동을 뒷받침하는 사유의 필요성과 그 힘을 성찰했던 것이다.


맹자는 특수한 상황에서는 의리가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물고기와 곰 발바닥이란 비유를 들었지만, 거기에서 우리는 얻는 것과 주는 것,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이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라 둘 다를 취할 수도 있는 ‘모순의 통일성’을 발견하게 된다. 사유의 틀에 대한 성찰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기에 앞서 우리는 큰 선택을 했다. 하지만 하나를 선택했다고 해서 하나를 버린 것은 결코 아니다. 인간에게는 곰 발바닥 요리와 물고기 요리 모두를 취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 그리고 때로는 노력보다 방법이 중요하다. 


아무쪼록 모두가 지혜를 모아 방법을 찾아가는 새로운 한 해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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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화 논설위원


‘로드스꼴라’는 사회적기업인 여행사 트래블러스맵에서 운영하는 비인가 대안학교이다. ‘길’과 ‘학교’를 뜻하는 단어를 합친 로드스꼴라는 학업을 중단한 학생들에게 길 위에서 경험하고 느끼는 과정을 통해 삶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여행학교다. 이 학교에선 2009년 3월부터 매 기수 15명 내외의 학생들이 2년 4학기 과정을 끝내고 트래블러스맵의 인턴사원을 거쳐 여행기획자로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선택받은 학생들이 아닐 수 없다. 


엊그제 본지 토요판 기사 ‘올해도 6만명이 학교를 떠났다’에 소개된 로드스꼴라 학생들의 체험위주 교육현장은 학교수업을 포기한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주는 성공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소수다. 기사에서 밝혔듯이 1년에 약 6만명의 학생들이 학교를 나와 거리에서 방황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2011년 3월부터 올 2월까지 전국 초·중·고교에서 학업을 중단한 학생이 5만9165명이라고 집계했다. 이는 전체학생의 0.85%다. 그중 입시를 앞둔 고교생 3만3057명이 학교를 떠났고, 절반인 1만6419명이 학교부적응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비인가 대안학교인 로드스꼴라 아이들이 지난 4월 남미문학여행 중에 들른 볼리비아의 소금사막에서 하늘을 향해 껑충 뛰어오르고 있다.(출처; 경향DB)


‘탈학교’ 학생들은 특히 2008~2009년 7만명 이상으로 최고치였다. MB정부 출범 후 학교를 그만두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점수 위주의 경쟁적 교육이 강조되면서 성적 하위권 학생들은 점점 학교에 다닐 의욕을 잃었다. 학교는 위축된 학생들을 껴안기는커녕 퇴학을 권할 만큼 교육철학을 상실했다. 학부형들도 학교수준을 높이기 위해 열등생들이 퇴학하기를 원했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토록 학교에서 소외된 학생들이 부쩍 늘고 있지만, 이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나 정확한 통계, 마땅한 대책 등을 찾기 어려운 현실이다. 탈학교 아이들을 수용하는 대안학교는 정부인가 48개교, 비인가 약 130개교가 있지만 극히 일부 학생을 수용할 뿐이고, 이조차 교과부 추정일 뿐 공식적 정부 집계는 아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해 존재하는’ 학교에 흥미를 잃고 왕따와 학교폭력에 꿈을 앗긴 채 학교, 가정, 사회로부터 부유하는 아이들의 응어리를 어떻게 풀어주어야 할까. ‘네 짝꿍이 너의 경쟁자’라고 가르치는 학교를 포기하고, 눈 앞의 이익만 가르치는 학교를 거부한 아이들을 누가 보듬어야 할까. 국가와 우리 사회인 것만은 분명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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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있던 12월19일, 난 아침 일찍 투표를 하고 혼자 훌쩍 봉화 청량사로 떠났다. 마침 그날은 중환자실 퇴원 후 후유증으로 1년여 투병하다가 향년 79세로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의 8주년 기일이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는 모르나 내 몸은 마치 자석에라도 끌리듯 오래전 전 선생과 함께 여행한 절로 향했다. 물론 개표결과가 궁금했지만, 난 이미 내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그동안 송년회 같은 자리에서 난 ‘문 후보가 안타깝지만 3~4% 정도 차이로 패할 것 같다’고 여러 차례 예단한 바 있다. 어쩌면 이 혹한의 무목여행도 문재인의 패배가 실언이기를 바라는 그만큼의 내 좌절감을 달래기 위한 고행인지도 모른다.


청량사로 가는 길은 칼바람과 폭설이 그리움처럼 쌓여 있었다. 한여름, 하얀 ‘런닝구’가 땀에 푹 젖은 전 선생의 등을 밀며 가파른 청량사를 올랐던 옛 추억이 아련했다. 그의 이마에 밭고랑처럼 깊이 파인 무수한 주름살들은 상처 깊은 우리 현대사의 그늘로 보였다. 유리보전으로 오르는 까마득한 나무계단 앞에 이르자 풍경소리 속으로 전 선생과의 대화가 실려 왔다.


 “돌멩이 맞으며 이 계단 같은 골고다 언덕을 오른다고 예수가 참 힘들었겠어. 탐욕이 과하면 죄를 낳고 죄가 과하면 죽음을 불러온다는 성서의 말이 딱 맞아.” “성서도 읽으세요?” “아, 권정생 형이 자꾸 한번 보기나 하라 해서 대충 훑어봤더니 뭐 별로야, 허허. 근데 그 형이 진짜 예수처럼 사는 것 같아.” “권 선생님이 기적도 행하세요?” “아, 그럼! 요즘 세상에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기적이지, 하하.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정말 소박하고 착하게 사는데, 언행일치의 진수야.”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저자 전우익씨 별세. (출처; 경향DB)


1925년 경북 봉화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전 선생은 해방 후 ‘민청’에서 청년운동을 하다가 사회안전법으로 6년 남짓 옥고를 치렀다. 또 출옥 뒤에는 보호관찰대상자로 장기간 주거제한을 받아 고향 밖을 나가지 못하는 유배신세였다. 그의 여러 저서를 보면 알겠지만 그 곡절 많은 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며 성찰의 나무를 가꿔왔다. 특히 대선 후폭풍에 민감한 요즘엔 가시 같은 대목들이 더욱 찌른다.


“민중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편을 들어 왔다. 서울을, 나라를 이렇게 만든 근본적인 책임은 민중이 져야 한다.” “곡식이 자리 잡고 제대로 크면 잡초가 맥을 추지 못한다. 세상도 그런 게 아닌가. 버릴 줄 알아야 지킬 줄 아는데 버리지 못하니까 지키지도 못한다.”(<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해고노동자들의 투신자살이 이어지는 요즘, 대선 후유증으로 전국이 곡소리 중이다. 마치 문재인의 패배로 이 나라의 민주주의가 뿌리라도 뽑힌 분위기다. 그런데 설사 문재인이 당선됐다 하더라도 야당과 그 병따개들만 팔뚝에 완장을 찰 뿐, 결코 국민들이 완장을 차는 것은 아니다. 이번 대선은 야권이 여권의 극히 상식적인 ‘쓰리쿠션 전략’에 무너진 것이다. 일찍부터 여권은 버거운 안철수를 낙마시키기 위해 야권과 진보진영 내에 ‘안철수 MB 세작설’ ‘문재인 필승’ 등 교묘한 ‘세작전술’을 펼쳐왔다. 난 그 공의 최종 방향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그러나 권력을 따는 데 눈먼 ‘진보적 병따개’들은 온갖 수사로 합리화했다. 안전한 길을 버리고 위험한 길로 몰아가더니 절벽 아래로 추락해버렸다. 그들은 얼마 전 진실이 밝혀진 통진당 사태처럼 지금 또다시 침묵 중이며, 책임도 반성도 없다. 그들 중에는 어차피 안철수가 나가도 졌을 거라고 배설한다. ‘유신스타일’의 강변과 ‘강남스타일’의 변명이다. 파는 뿌리를 자르고 심어야 크게 자란다. 계파와 사람의 뿌리까지 잘라 다시 심어야 세상이 바뀐다. ‘잡초’들이 설치는 세상을 보면, 전우익 선생의 주름살은 무덤 속에서도 더 늘어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사족을 붙이자면, 나는 좌든 우든 잘못하면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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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일아트란 손톱, 발톱을 깨끗이 정리하고 모양이나 그림을 그려 넣어 예술적인 감각을 표현하는 창조적인 작업을 말한다. 수년 전부터 네일아트 수요가 늘면서 네일아트 기술을 배워 취업하거나 창업하려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 그러나 창업을 하려는 이에게는 큰 걸림돌이 있다. 2008년 공중위생법 시행령 개정으로 미용사 국가 자격증을 따야 네일아트숍을 열 수 있기 때문이다. 네일아트 단체에서 발급하는 민간 자격증을 따 전문성을 확보하더라도 미용 공부를 해 미용사 자격증까지 취득해야 하니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더욱이 네일아트는 머리카락이나 피부가 주대상인 미용과도 관련이 없는 분야다. 네일아트 단체들이 미용에서 네일아트를 분리해 별도의 자격증 제도를 신설해 줄 것을 요구하는 이유다. 최근 자치단체들이 법 개정에 따른 계도 기간을 거친 뒤 미용사 자격증이 없는 네일아트숍 단속에 나서자 불만이 폭발하고 있다.


대경대생들이 경북 상주동부초등학교에서 전공 맞춤형 네일아트 봉사를 하고 있다. (출처; 경향DB)


네일아트를 포함한 뷰티산업은 웰빙·감성소비 트렌드와 맞물려 규모가 커지고 있을 뿐 아니라 성장 잠재력이 높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또 서민이나 여성 밀착형 산업으로 일자리 창출과 내수기반 확충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지난해 7월 기획재정부가 ‘하반기 경제운용 과제’를 발표할 때 내수기반 강화 대책의 하나로 네일·메이크업 등 뷰티 서비스 자격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 같은 판단에서다. 당시 네일·메이크업 분야의 국가 자격증을 신설하거나 현재 국가가 관리하는 뷰티산업 관련 자격증을 모두 민간에 넘겨 자율운영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란 얘기도 나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에서 구체적인 후속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복지부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미용업계의 강한 반발을 우려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복지부는 “현행 법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향후 네일아트 분야의 사회 성숙도를 고려해 자격증을 분리하는 법률 개정 등을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제도적인 허점 때문에 많은 네일아트 종사자가 범법자로 몰리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는 행태가 아닐 수 없다. 네일아트가 국가경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유망 산업이라면 하루빨리 국가 자격증 제도를 신설하고 국가 차원에서 적극 지원·육성할 필요가 있다. 네일아트 시장 규모가 커질 때까지 기다릴 일이 아니다. 불합리한 제도나 규제로 가뜩이나 생활이 어려운 서민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된다. 뷰티산업의 자격증 제도를 개선할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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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택 | 경기대 교수·미술평론



최병소는 신문지의 표면을 볼펜과 연필로 까맣게 물들인다. 덮어버린다. 그것은 그리기이자 지우기다(대구시립미술관, 12·21~2013·2·17). 깊은 검음이 아름다웠다. 종이의 표면을 지독하게 새까맣게 칠해버린 것인데 그 결과물이 광물이나 재와 같다. 종이의 표면을 저렇게 깊고 단호한 어둠으로 만든 작가의 손놀림과 한없는 노동의 양, 시간을 헤아려보았다. 회화란 주어진 평면에 눈속임을 불러일으키는 장치일 텐데 그의 화면은 표현이나 환영이 아닌 그저 종이라는 물질을 이상한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연금술사처럼 종이에 화학적 변화를 일으켜 색다른 물질로 환생시켰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고 표현한 것도 아니고 그래서 작가의 조형 의지나 의미란 것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그런 기이한 화면이었지만 오히려 그 침묵의 화면이 더 큰 울림을 동반하고 있었다. 문득 내 자신이 형언하기 어려운 묘한 물질로 돌변한 종이, 신문지의 마른 살과 그 피부를 죄다 점유해버린 캄캄한 어둠 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다. 내 몸과 의식도 저런 어둠으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나를 마냥 북북 지우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지우고, 가능하다면 지금까지 살아왔던 치욕과 슬픔, 아픔과 한을 단호하게 지우고 다시 살고 싶은 것이다. 그냥 ‘콱’ 하고 죽고 싶은 것이다. 


작가는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는다. 온몸으로 신문지 내부로 육박해 들어갔다. 신문지 피부와 자기 몸을 일체화시켰다. 회화의 극한으로 들어간 결과 종이는 터져버렸다. 찢긴 종이는 홀연 입체·조각이 되었다. 괴이하다. 작가는 자신의 손, 몸이 볼펜과 연필을 통해 신문지의 표면을 집요하게 문지르는 소리를 들으며 늙어갔다. 그는 온통 새까만 색으로 물들였다. 그가 검정색 볼펜과 연필로 신문지를 덮어나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당시 유신의 음성이 신문지를 가득 뒤덮고 있었다. 그는 신문지 위를 볼펜으로 무심하게 칠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신문을 읽을 수 없게 지워나가는 동시에 검은색으로 칠하는 행위다. 신문의 활자들이 지워진다. 순간 신문은 홀연 사라졌다. 신문지의 용도를 의도적으로 폐기하고 이를 예술적 맥락에서 새롭게 탄생시킨 것이다. 한 해가 저무는 시간에 나는 저 침묵으로 절여진 새까만 종이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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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용혁 | 서천군 농민회 교육부장 sinpo9085@hanmail.net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판을 더 좋아하는 것은 꼭 게을러서만은 아닙니다. 뭐라고 딱 정해서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빈 들판 앞에 선다는 것은 지금 하고 있는 걱정보다는 좀 더 근본적인 물음에 맞서는 것입니다. ‘이삭거름을 얼마 더 줄까’가 아니라 ‘올 한 해 얼마를 벌었나’에 답해야 하는 것이고, ‘삽질 해서 뭐하나’보다는 ‘농사 지어 뭐하나’에 답해야 하는 것이며, ‘농협 빚은 다 갚았나’가 아니라 ‘10년 후에 어떻게 살 거냐’는 물음에 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근본적인 물음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더욱 실존적인 물음이기도 합니다.


 너른 들판을 보며 민주대연합을 이야기한 어떤 시인의 상상력도 그럴듯하지만, 와서 보면, 눈으로 보이는 겨울 들판은 훨씬 더 많은 것을 자극합니다. 더구나 논두렁까지 폭 파묻히게 눈이 와서 내 논, 네 논 분간이 가지 않는 날이면 우리 동네에서는 아이들까지도 국민대통합 정도는 우습게 생각해 내는 것입니다. 겨울밤은 국민을 일일이 실로 엮어 봉합하고도 남을 만큼 길기도 한데, 나는 이 좋은 들판 앞에 서서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직업적 자긍심에 맞는 좀 더 심오한 생각과 들판을 막힘없이 흐르는 바람과 가창오리떼처럼 스마트한 삶을 꿈꾸는 것입니다. 겨울 긴 밤 아무도 없는 동안 난 절대 딴짓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정리해서 보여주고 싶습니다. 내년 봄 즈음에는 주변에 내놓을 작은 선언 정도로 갈무리하기로 작정합니다.


벼가 노랗게 익어가는 황금들판 (출처 :경향DB)


역시, 밤이 길기 때문이고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지만 묵은 일기장을 들춰본 것은 잘한 일이었습니다. 제법, 어쭈, 어허 할 정도의 기특한 생각들도 있고 제기랄, 젠장, 에휴 할 만한 한심한 나도 있습니다. 운 좋게도 아직 버려지지 않은 편지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그때 네가 한 네 말을 기억한다’고 서늘한 눈빛으로 말합니다. 불안한 청춘에 대한 어머님의 당부는 한글 프로그램에 ‘눈물체’라고 등록해도 좋을, 글씨만 봐도 하지 못한 이야기까지 알게 하는 마술이 있습니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 싶은 연애시절 편지에는 ‘동지적 사랑’ 같은 비문과 ‘영원한 사랑’ 같은 비현실이 차고 넘쳐 소각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떼어 내어 잔소리와 투정과 투쟁의 일상에서 적절한 부적으로 재활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백무산의 ‘강령’이라는 시입니다. ‘성실, 노력, 정직은 네 청춘의 강령이었을까/ …/ 유치하도록 진실한 사내/ 아직도 그 강령 폐기하지 않았노라고/ 주먹을 흔들어 보이는 사내/ 운동도 조금씩 꼬여버린 세상, 그래/ 정직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싸우자/ 우리의 강령이 틀림없다.’ 볼펜으로 꾹꾹 눌러 필사하는 모습을 상상하다가 한참 몸 둘 바를 몰랐지만 그런 유치함, 미숙함, 투박함이 아직도 ‘성실, 노력, 정직’의 강령을 폐기하지 않은 힘인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나쁘진 않네’ 하고 지난 시절의 내가 말을 건네니 곧 부끄러워집니다. 비교적 정확한 지도를 따라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나 오래된 지도라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고 이제는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볼 친구도, 눈물체의 당부를 주시는 어머님도 다들 적당한 거리에 있습니다.


식상한 반성문이 될지, 감동 없는 출사표가 될지 아직 자신은 없습니다. 그래도 아직 겨울밤은 많이 남아 있고, 또 생각이 영 잡다해지면 겨울밤이 길기 때문이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일 터입니다만, 2013 선언문에는 이런 내용이 담겼으면 좋겠습니다.


어떻게 살겠다는 막연한 고민보다는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함께하고 있을지 적어 보겠습니다. ‘성실, 노력, 정직’의 강령은 이제 그만 전문에 담아내고 꼼꼼하고 구체적인 강령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맺고 끊는 결기도 가져 보겠습니다. 쭉 해왔던 일들 중에 이제는 그만해야 하는 일부터 가려내겠습니다. 이참에 크리스마스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노동자의 소식을 어린 딸들에게 어떤 표정으로 선물과 함께 전해야 하는지도 정리해 보겠습니다. 궁색할 때 말로만 떠들던 히말라야 등반도 시기를 정하고 허풍을 치겠습니다. 생각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그만 내려놓고 할 수 있는 일의 순서를 매겨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생활의 언어로 적어 보겠습니다. 내 삶과 이 시기에 좀 더 집중한다면, 그리고 죽지 않는다면, 10년 후 나에게도 ‘생각보단 괜찮은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겨울밤에 들판에 선다는 게 춥기도 하고 남사스러운 일이니 눈을 감고 함께 상상해 봐도 괜찮을 것입니다. 넓은 들판이 있고 함박눈이 펄펄 내립니다. 바람은 적당히 불고 가창오리 군무가 하늘을 수놓습니다. 두 팔을 벌리고 익숙한 행진곡풍의 노래를 허밍으로 낮게 시작합니다. 적어도 내가 기억하는 나를 잊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우리의 노래가 ‘빰빠 밤빠 밤빠밤’ 하는 대합창의 전주곡이 되는 날을 확인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확신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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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