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살펴볼 글은 연암이 경지에게 답한 세 번째 척독이다. <영대정잉묵>에 남아 전하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은 이 글까지 해서 세 편이 전부다. 먼저 그 전문을 보자.

그대가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를 읽었다지만 그 글만을 읽었을 뿐, 그 마음은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고서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나 생각하고, <자객열전刺客列傳>을 읽고서 고점리高漸離가 축(筑, 고대 현악기의 하나)을 켜던 장면이나 생각하니 말입니다. 이런 쯤은 늙은 서생들이 늘 해 대는 케케묵은 이야기입니다. 또한 “부엌에서 숟가락 얻었다”는 소리와 무엇이 다릅니까?
어린아이들이 나비 잡는 모습을 보면 사마천司馬遷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내민 다리는 반쯤 꿇고, 뒤로 뺀 다리는 비스듬히 발꿈치를 들고서 두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만들어 다가가는데, 잡을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에 나비가 그만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고, 어이없이 웃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지요. 이것이 바로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의 마음입니다.
足下讀太史公. 讀其書. 未甞讀其心耳. 何也. 讀項羽思壁上觀戰. 讀刺客. 思漸離擊筑. 此老生陳談. 亦何異於廚下拾匙. 見小兒捕蝶. 可以得馬遷之心矣. 前股半跽. 後脚斜翹. 丫指以前手. 猶然疑蝶則去矣. 四顧無人. 哦然而笑. 將羞將怒. 此馬遷著書時也.
_<경지에게 답함 3[답경지지삼答京之之三]> 전문


첫 번째 척독에서 보았듯, 연암과 경지는 헤어지기가 아쉬워 1리나 서로 떨어지고도 딱 돌아서지 못할 정도의 우정을 나누는 사이이다. 한데 여기서는 경지가 <사기>를 읽고도 <사기> 행간에, 사마천의 마음속에 미처 육박하지 못했음을 신랄하다고 할 정도로 지적하고 있다.

<<사기>>는 연암의 글쓰기와 문학 방법론에 깊은 영향을 미친 고전이다. <<연암집>> <방경각외전> 속의, 소설을 방불케 하는 인물전의 원류를 <<사기>>의 열전이라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열하일기>> 곳곳에 드리운 ‘사마천의 그림자’는 고전은 고전으로 어떻게 이어지는가, 문학사는 문학사로 어떻게 이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일대장관이다. 연암의 창작론을 대표하는 글 <소단적치인騷壇赤幟引> 또한 <<사기>>을 밑절미로 하고 있다.
이렇듯 연암은 <<사기>>를 깊이 읽었고, 유난히 좋아했다. 하여 나비 잡는 아이처럼 <<사기>>에 노닐었다. 노닐며 사마천의 “마음”을 헤아리곤 했다. 그러니 더욱 절친한 벗 경지가 <<사기>>를, 사마천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함이 섭섭했나 보다.

원문의 “족하足下”는 2인칭 대명사로 존경하는 상대에게 부치는 말이다. 연암은 경지에게 바로 “너 아직 <<사기>>를 제대로 읽지 못했군” 해놓고는 <항우본기>와 <자객열전>의 예를 끌어온다.

“성벽 위에서 전투를 관망하던 장면”이란 <<사기>> <항우본기> 속 거록에서 벌어진 전투의 한 장면이다.
진나라 시황제가 죽고 그 아들 호해가 뒤를 잇자 진제국은 분열한다. 곳곳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사칭 및 참칭이 대부분이었지만 진제국 통일 이전의 옛 제후가 복고를 선언한다. 항우의 집안은 대대로 옛 초나라의 장군을 맡아왔다. 덕분에 항우는 다시 일어난 초나라의 군대에서 쉬이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그리고 진나라 군대와의 전투에 소극적인 초나라 고급 지휘관을 제거하고 곧 병권까지 손에 넣는다. 그 뒤 항우는 초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장하를 건너 진나라 군대가 집결한 거록으로 진격한다. 항우가 지휘관을 제거하고, 강을 건너고, 전투하기까지, <항우본기>의 문단은 박진감이 넘친다.
장하를 건너고서 배를 가라앉히고, 솥과 시루 등 취사도구를 깨뜨리고, 병사들에게 3일치 식량만을 휴대하게 하고 진격할 때의 결기며 삼엄함이란 참말이지 읽는 이를 격발케 한다. 이어진 전투에서 항우가 이끈 초나라 군대는 함께 모인 제후군과 장수로 하여금,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에 여러 장수들은 모두 자신의 진영에서 관망만 할 뿐이었다”의 상태로 몰아넣을 만큼 용맹했다.
바로 이 장면이다. 이 장면은 문자를 알고, <<사기>>를 아는 사람들에게 잊지 못할 장면이었다.

“고점리가 축을 켜던 장면”은 어떤가. 자객 형가는 진시황을 죽여 연나라 태자 단의 원수를 대신 갚고자 한다. 형가가 이제 막 연나라와 진나라의 국경인 역수를 건널 즈음 이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흰 옷에 흰 모자를 쓰고 강가로 나와 형가를 전송한다. <<사기>>는 이 장면을 이렇게 그렸다.

고점리는 축을 켜고 형가는 화답해 변치의 성조로 노래를 불렀다. 이때 듣는 이들 모두 눈물을 쏟으며 울었다. 형가가 또 앞으로 나오며 노래했다.

“바람 쓸쓸한데 역수가 차구나.
장사가 한 번 떠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우조로 강개한 노래를 부르니 사람들은 모두 눈을 부릅떴고 머리카락은 곤두서 모자를 찔렀다. 그때 형가는 수레를 타고 떠나며 끝내 돌아보지도 않았다.


기억하기 바란다. 연암이 <<열하일기>>의 첫 꼭지인 <도강록>, 그것도 그 첫날 기록에다 형가와 고점리의 일을 인용해 강 건너 청제국으로 들어가는 자신의 마음을 은유했음을.
연암은 이제 막 압록강을 건너 미답의 땅으로 들어가는 연암의 심정을 한 자루 비수를 쥐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적국으로 떠나는 자객의 심정으로 은유했다. 그만큼 이 장면은 연암에게도 강렬한 한 장면이었다. 그러나 거록의 전투든, 역수에서의 도강이든 다만 거기에 “고착”되어 있을 뿐이라면, 연암이 보기에 글에, 글쓴이의 마음에 육박한 것이 아니다.
고착되어 “거록 전투 끝내주지?” “고점리 정말 강개하지 않냐?”에서 끝난 독서란 “부엌에서 숟가락 얻었다”는 속담처럼, 별일 아닌데 떠는 호들갑, 하나마나 한 소리에 이어질 따름이라는 말이다.

이하 아이가 나비 잡는 문단에 대해서는 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저 읽으며 빙그레 웃을 뿐.

“사방을 둘러보아도 사람은 없고[四顧無人]”, 곧 “누구한테 이 쑥스러운 상황을 들킨 것도 아닌데”의 울림이 문득 삼삼하다.
“그 마음은 미처 읽지 못했습니다[未甞讀其心耳]” 또한 삼삼하다. 부정사 “미未”에는 “불不”이나 “불弗”과 달리 “시간”이 깃들어 있다. “미未”에 깃든 “아직 ~아니다”의 뜻을 새기며 위 문장을 다시 한 번 새기기 바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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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 <영대정잉묵>에는 연암이 경지에게 보낸 척독이 모두 세 편 남아 전한다. <영대정잉묵>의 편차상 경지에게 답한 첫 편지는 바로 앞 글 "<영대정잉묵> 속으로_1"에서 본 바와 같다.

다시, 바로 앞 글 말한 것처럼,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은 글로서,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연안은 <영대정잉묵>에 부친 “자서”에서 일상생활에서 우러나온 글의 진솔함 및 주고받는 형식만이 담을 수 있는 표현상의 개성 들을 들어 척독의 문학적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이런 평가는 먼저 연암 자신이 척독마저 문학적 갈래로 소화한 ““척독가尺牘家”였기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연암은 <영대정잉묵>의 “자서”에서 척독을 “봄날 숲속의 새소리, 난바다 신기루 속 보물, 연잎 위의 이슬, 초나라의 박옥[화씨지벽和氏之璧을 말함]” 들로 은유했다. 이런 데 비길 만한 수사에 품격마저 갖춘 척독을 남긴 이들에게는 “가家”를 허여해 “척독가”라는 호칭까지 마련했다. 다시 한 바퀴 도는 말이지만 먼저 연암 자신부터 “척독가”였다. 그렇다면 척독가 연암이, 척독 속에서 이룬 문장은 어땠는가. <영대정잉묵>에 수습된, 경지에게 보내는 두 번째 척독 속 한 줄을 보자.

경지에게서 어떤 편지가 왔기에 이런 답장을 썼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연암은 “문자나 글월로 표현되지 않는 문장”을 읽을 줄 모르는 엉성한 독서를 지적하는 데 뒤이어 이런 문장을 배치했다.
 

저 허공 속을 날고 우는 존재가 얼마나 생기가 발랄합니까. 그런데 싱겁게도 “새 조鳥” 한 글자로 뭉뚱그리고 말다니요. 그렇게 표현한다면 채색도 무시되는 것이고 그 모양과 소리도 빠뜨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임에 나가는 시골 늙은이의 지팡이 끝에 새긴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彼空裡飛鳴. 何等生意. 而寂寞以一鳥字抹摋. 沒郤彩色. 遺落容聲. 奚异乎赴社邨翁杖頭之物耶.
_<경지에게 답함 2[답경지지이答京之之二]>에서

“새 조鳥” 한 자는 그저 생물종 “새”의 관념을 환기할 뿐이다. 이 한 자만으로는 비상과 노래의 생기발랄을 담을 수 없다. 산란한 빛을 따라 시시각각 달리 보이는 새 몸 표면의 색채도 표현할 수 없다. 그 운동감도 드러낼 수 없다. 이는 프랑스 인상파 그림쟁이들의 눈과도 일맥상통한다.

비상도 노래도 채색도 아우트라인도 텍스처도 무시된[沒郤] 채, “새[鳥]” 딱 한 글자로만 추상화된 새라니. 이는 나라에서 노인에게 경로의 뜻으로 지급하는, 대가리에 비둘기 장식 조각한 지팡이에 고착된 비둘기상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 고착이다. 생기, 시간에 따른 변화, 운동감 들이 제거된 채의 “고착.” 연암은 자신의 글에 추상적 고착이 없기를 바란 글쟁이였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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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태인/새사연 원장  
 
나는 TV광(狂)이다. 한 때 나와 채널 경쟁을 했던 큰 아이가 “아빠가 아줌마야?” 할 정도로 드라마광이다. 지금도 6개월에 한 두 개 쯤 꽂히는 드라마에는 ‘본방사수’를 할 정도인데 요즘은 네 식구가 대충 의견 일치를 보기 때문에 채널 싸움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성균관 스캔들>, <시크릿 가든>, <최고의 사랑>이 그랬고 요즘 유력한 후보는 <무사 백동수>다). 9시 뉴스 시간에 집에 있을 땐 예외 없이 EBS의 <세계 테마 기행>을 보며, 늦은 밤 각 방송사의 다큐도 벅찬 가슴으로, 가끔 눈물까지 흘리며 본다.

                                                                                    <경향신문 DB>
 
요즘 웬만큼 바쁜 일 없으면 집이건, 식당이건 보는 프로그램은 MBC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이다. 나는 술 취하면 거의 매번 연구원들을 노래방으로 끌고 가지만 실력은 가끔 빵점이 나올 정도로 형편없다. 하지만 ‘나가수’에서 누가 일등할지, 그리고 누가 꼴등해서 탈락할지를 맞출 정도의 눈치는 있다(어쩌면 우리 청중평가단은 다 나만큼 음치일지도 모른다^^).
 
그 엉성한 감각에 비춰 볼 때 박정현, YB, 그리고 아마도 김범수는 영원히 탈락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박정현은 금주에 그랬듯, 모든 장르의 도전을 즐기는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너무 많이 나와 지겹다”는 이유로 외면당할 이유도 없을 듯 하다. 한편 옥주현은 떨어질 때가 됐다는 느낌이 강했는데 청중평가단은 역시 냉혹했고, 마치 아이돌 출신은 여기 오면 안 된다는 나름의 고집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임재범과 한 무대에 서는 건 ‘나가수’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것이며, 이제 탈락했다 하더라도 그의 노래 인생은 서너 계단을 단숨에 올라섰을 것이다.
 
이런 부질없는 생각을 하다 문득 왜 지식인들 사이에선 이런 아름다운 무대가 없는 걸까, 내가 그 무대에 오른다면 어떤 모습일까, 매년 열리는 각종 학술대회는 왜 이런 긴장감이 전혀 없이 그저 때운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아니 지상에서의 간접 경쟁에서 조차 왜 이처럼 목숨을 건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그저 지엽말단의 실수에만 치명적인 칼날을 들이미는 걸까, TV 토론에서 왜 나는 상대의 무지와 옹고집에 방송 중에도 한숨을 쉬는 걸까(아마 상대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서로 칼날 위의 경쟁을 하면서도, 심지어 아주 깊은 속으론 내 음악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방금 드러난 다른 이들의 실력에 언제나 공감하는 아름다운 모습이 왜 전문가 집단 사이에선 벌어지지 않는 걸까. ‘나가수’에선 분명히 이룬 ‘화이부동’이 왜 지식인 사회에선 불가능할까.
 
지금이야 말로 춘추전국시대처럼 제자백가가 백화제방 할 시기이다. ‘신자유주의’라는 한 시대가 저물고 그 다음 시대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때, 지식인들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넘어 다가올 시대에 대해 큰 그림을 펼쳐야 한다. 미래이기에 증명할 수 없지만, 예술가처럼 감각으로 미래를 예감하도록 할 능력은 없지만 지금이야말로 좁디 좁은 자신의 전문 영역을 넘어 전체 사회와 자연의 미래에 대해 예언할 때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근시안과 좁은 이기심 때문에 지속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면, 그런데도 오로지 몇몇 정치인의 행보에 우리의 미래가 걸려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면 나를 포함한 모든 지식인들은 직무태만이라는 역사적 중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의료인들이 히포크라테스나 화타의 삶을 잊고, 교수와 교사가 공맹이나 권정생의 진정을 잊고 모두 각자의 전문가 울타리 안에서 적당한 보수를 누리고 있다면, 이강택 전국언론노조 위원장의 말대로 “지금은 언론의 위기가 아니라 언론인의 위기”일 정도로 언론의 공공성을 잊었다면 그 어찌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대체 시청률이 거의 유일한 잣대가 되고, 심지어 방송사주와 자신의 정치적 행로가 방송의 내용을 규정한다면 그런 방송인이 과연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조선시대 깐깐한 선비의 기준에 도달한 지식인이 몇 명이나 될까? 봉건시대의 선비들은 후대에 자신이 ‘소인’이라고 역사에 기록되는 것 만큼은, 그래서 후손이 부끄러워 하는 것 만큼은 걱정했는데 과연 지금은 그 무엇이 우리들을 규율하고 있는 걸까?
 
“나는 지식인이다”라고 외치며 광장에서 우리의 미래에 관해 모두와 함께 토론할 수 있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 진보와 보수 모두 지식인으로서 지금 ‘나는 가수다’의 그들처럼 대중 앞에 나서서 그야말로 실력으로 경쟁해야 할 때가 된 게 아닐까? 적어도 20-30년은 지속될 대혼란이 우리 머리 위에 엄습해 있는데 이 시대의 지식인은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이 글은 PD저널에도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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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우 | 마들주민회 운영위원
 

<경향신문 DB>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를 보노라면 대한민국의 미래가 정말 암담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대자본의 행태를 보면 이들 대자본이 한국사회를 끝없는 양극화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주범으로 등장했음을 알게 된다.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하며 고공농성을 시작한지 무려 200일이 넘었다. 경찰과 회사 측이 사병으로 고용한 용역이 침탈할까 마음 쓰느라 하루에 10분을 제대로 잠들 수 없는 ‘고독의 섬’ 같은 크레인 상공에서 100일도 아니도 200일을 넘겨 고공 농성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시시각각 죽음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순간이 위기인 시간을 보내왔다고 말해야 맞는 표현일 것이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한진중공업 조남호 회장을 비롯한 한진 재벌은 사태해결을 위해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 전기를 끊고 죽을 못 올려 보내게 하고 용역과 경찰을 끌어들여서 폭력적으로 진압하기에 급급했고 조합원의 동의와 민주적 절차를 받지 않은 ‘노사합의’라는 형식을 동원하여 김진숙 지도위원과 정리해고당한 노동자들을 고립시키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인간적 연대를 하러 달려온 희망버스 참가자들을 고소 고발하는 것 말고 한 것이 무엇인가? 

김진숙 지도위원이 목숨을 건 200일 넘는 고공농성을 하면서 ‘정리해고 철회’,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절규하는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이명박 대통령의 의중을 전하는 청와대는 기껏 한다는 말이 희망버스를 ‘훼방버스’라고 비난하고 정치권은 관여하지 말라고 경고나 하고 있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는 무책임한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고 언론 플레이나 하고 정쟁의 소재로나 쓰고 있는 모습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을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문제가 폭발직전의 상황까지 왔다는 것이다. 기성 정치권과 정부가 제도를 통해 해결할 어떤 전망도 보여주지 못했다는 현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희망버스를 비난할 것이 아니라 김진숙 지도위원께 ‘양극화, 비정규직, 정리해고라는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바라 볼 수 있게 하는 계기와 지혜를 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면서 정리해고를 철회시키고 입법과 제도개선에 나서는 게 바른 길이다. 

한국의 자본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전경련이라는 대자본을 대표하는 단체도 있고 국내 유수의 재벌 총수들도 있다. 이들에겐 한 사람이 200일 넘도록 위험하기 이를 데 없는 크레인 높은 곳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외치는 외침을 듣는 용기조차 없는가! 한국의 자본가들이 살아남으려면 조남호 회장 같은 악덕 기업주를 퇴출시키는 자정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조남호 회장은 국회가 청문회의 증인으로 채택해서 나오라고 하는데도 전혀 미동도 하지 않는다. 기성 법률과 제도, 국회의 권능이 얼마나 형편없으면 반칙을 일삼는 악덕 자본가 하나한테 이처럼 농락당하는가! 상대적 저임금에 수십 년간 한 솥밥을 먹고 한진중공업을 살찌게 한 나이든 노동자들을 하루아침에 정리해고하는 모습에서 피도 눈물도 없는 한국자본주의의 실상을 목격하게 된다. 토사구팽이 따로 없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과 G-20 의장국을 자랑하고 2014년도에는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되리라는 장밋빛 전망을 앞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 속에 살아가는 국민들은 일자리 불안, 해고, 실직, 저임금, 살인적인 등록금, 집값폭등, 전월세난, 강제철거, 용역깡패, 노후 무대책, 병원비 걱정에 시달리면서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지 않는데..... 

김진숙님이 기쁜 마음으로 걸어 내려오는 날을 간절히 바라면서..... 비정규직 없는 세상이 할루 빨리 오기를 기대하면서..... 이 땅에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당당히 복직하는 날을 기다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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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아저씨들이 보면 기겁을 하면서 저것도 운동이냐 할 그런 운동들이 시민 진영에는 종종 있다.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들이 조그만 단체를 꾸릴 때 저게 운동이냐, 그런 목소리들이 있었다.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지난 겨울 구제역 파동 때 맹활약했던 카라, 그들의 모체가 바로 채식주의였다. 별의별 운동단체와 활동가들과도 일해 본 기억이 있다. ‘꼴페미’라고 사람들이 부르는 여성 근본주의, 그중에서도 가장 강성인 영 페미니스트들과도 중요한 일들을 같이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 나도 잘 적응하기 어려운 게, 평화 근본주의자들과 생태 영성주의자들이다. 비밀스러운 종교, 밀교의 느낌을 접할 때, 가끔 내가 가지는 상식이 시험에 든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절대 평화, 내 안의 평화, 마음속의 평화, 이런 것들이 오히려 내 평화를 깨뜨린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래도 이들과 같이 일하는 게, 로자 룩셈부르크가 ‘어른들의 군사 놀이’라고 했음직한 극단적 전쟁광들을 이들이 제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는 두 종류의 전쟁 마니아들이 있는 것 같다. 한쪽에는 북한을 증오하는 게 자신의 생존 이유라고 생각할 정도로 북한 혐오로 자신의 삶을 소진하는 조갑제류의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한편에는 밀리터리 마니아 혹은 군사 오타쿠라고 불리는, 신무기 도입을 게임처럼 즐기는 또 다른 신인류, 이들이 전쟁을 지지한다.
그리고 그들의 뒤에는 국방산업을 둘러싼 복잡한 자본 메커니즘이 숨어 있다. 이라크전 때 전쟁의 외주화가 어느 정도 진전이 되었다. 전쟁은 변하지 않는 국가의 일이라고 얘기하지만, 군대 급식 같은 일상의 영역에서 첨단 무기를 둘러싼 채산성에 이르기까지, 생각보다 복잡하고 또한 변화무쌍하다.


 

여성 학군사관후보생(ROTC)/ 경향신문DB


시민단체가 국방에 대한 의견 역시 그만큼 복잡하다.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의무병역제에서 모병제로 바꾸는 공약을 내걸었다.
그러나 모병제는 보통 우파들의 정책이고, 해외 파병과 국제전을 치르는 데에는 ‘우리들의 아들’이 죽는 것보다는 직업 군인이 죽는 게 여론상 유리하다. 그래서 최근에는 징병제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효율적이며 인간적인 병역 구조를 만들 수 있는가, 시민단체의 의견이 좀 변화하고 있다. 여기에 여성단체들이 새로운 의제를 제기하는 중이다.

여성도 군대에 가겠다, 이런 얘기가 군가산점 논쟁의 여파로 여성단체 일각에서 제기되는 중이다. 다만 병역을 일종의 사회적 서비스처럼 이해해서 돌봄 노동이나 사회 서비스 부문을 늘여서 남녀 모두 사회에 대한 봉사를 한번쯤 하자, 이런 식의 얘기들이 최근에 제기되고 있다.
시민단체와 국방부의 충돌이 ‘양심적 병역 거부’라고 부르는, 종교적이든 양심의 이유든 군대에 가는 걸 거부하고 차라리 감옥에 가기를 선택한 ‘양심적 소수자’에 대한 문제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한때 군대가 일반 사회보다 선진적이고 엘리트적인 요소를 가진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박정희, 김종필, 모두 당시로서는 매우 우수한 엘리트들이었고, 젊은 장교들은 사회 일반 평균보다 분명 우수했었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다보니 군인들끼리 결정하면 된다, 그 철의 명제에 흔들림이 온다. 군대 중의 군대, 해병대의 문제는 자기끼리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국방부와 시민단체의 접점은 다원적이고 복잡한데, 나는 아직도 군인들의 순혈주의만으로는 경제사회적 문제점이 해결되지 않을 거라고 본다. 군의 신자유주의화, 이게 조금만 더 진행되면 가난한 집 자식들만 전투병으로 남고, 부자들은 관리직이나 행정직으로 빠지는 내부 모순이 더욱 심화될 것 같다는 걱정이 있다.

지난 정권에 논의하다가 덮어놓은 의제 중의 하나가 국방장관이 누가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민간인은 국방장관 하면 안되는가, 요게 핵심 질문이다. 예를 들면 요즘 ‘폭풍 간지’로 ‘사나’들의 가슴을 뜨겁게 했던 문재인 같은 사람은 국방부 장관이 되면 안되는가? 쿠바 위기 때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세기의 국방부 장관 맥나마라는 직전 직업이 포드사 부사장이었다. 민간인 국방부 장관, 이게 군의 고루한 순혈주의와 국방부의 폐쇄성을 개방하는 첫 번째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현 정권에서는 어차피 군대도 안 간 사람이 군통수권자는 물론이고, 국정원장 등 주요 국가안보 보직을 다 맡았었다. 군면제자보다는 문재인급의 인사가 군대를 맡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누가 국방개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군인들 스스로는 개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 군대는 닫혀 있는 것 아닌가? 그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폐쇄형 조직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딜레마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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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정배 민주당 국회의원
 


오늘은 10년 전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대통령후보로 공개지지한 날이다. 국회의원으로서는 최초이자 유일했다.

다들 노무현후보에 대해 냉소적이었지만 그가 고집스럽게 지켜 온 개혁의 원칙과 의지를 믿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후보를 만드는 힘이 되고 결국 국민도 선택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외로웠지만 일말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 후 노무현후보는 일반의 예상을 뒤엎고 민주당의 후보가 되어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승리는 원칙과 정의의 승리였다. 대통령은 신이 내리는 것이 아니라 보통시민이 만드는 것이라는 것을 감동과 열정으로 보여줬다. 


10년이 흘렀다. 개혁진보세력은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있다. 10년 전과 똑같은 지점에 와 있는 것이다. 어떻게 승리할 것인가? 어떻게 노무현대통령의 가치와 정신을 이어갈 것인가.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 들어서서 나는 앞이 캄캄했다. 이 정권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거꾸로 세웠다. 어떻게 바로 세울 것인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해 왔다. 10년을 다시 맞는 오늘 나는, 내년 대선에서 개혁진보세력이 더블스코어로 이길 수 있는 매우 쉽고 확실한 길을 제시하고자 한다. 민심은 이미 명백히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을 떠났다. 이런 상황에서 개혁진보세력이 이기지 못한다면, 그건 바보다. 역사에 대한, 노무현 정신에 대한 배신이다.



승리여부는 개혁진보세력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을 뿐이다. 특히 나는 민주당이 수권정당으로, 수권세력으로 변화하는 것이 그 해답이라고 본다. 민심은 아직 민주당을 믿지 못하고 있다. 민주당이 지난 3년여 동안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친 까닭이다.

이제 국민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국가비전과 정책을 가진 세력으로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국민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세력이 되어야 하고 야권 통합과 연대를 위해 기득권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민주당이 되면 야권 통합이나 연대도 쉽게 이뤄질 것이다. 민주당의 변화는 2012년 승리의 필요충분조건인 것이다. 민주당만으로는 승리할 수 없지만 민주당을 빼놓고도 승리할 수 없다. 



어떻게 민주당을 변화시킬 것인가? 매우 쉬운 길이 있다. 우선 연말 전당대회에서 주춧돌을 놓아야 한다. 민주당의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 갈 의지와 능력이 있는 세력이 당대표와 최고위원의 다수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승리의 물을 건너는 노둣돌이다. 당내에 이런 세력이 될 만한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집권시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집권기간 동안 분열해서 서로 경쟁하고 반목하며 감정의 골도 패였다. 지금껏 하나가 되지 못하고 흩어져 있다. 심하게 말해 각자도생의 길을 가고 있다. ‘각자도생’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일 뿐이다. 이 세력이 뭉치기만 하면 당장 당원과 국민들로부터 압도적 지지를 받고 당의 주도권을 쥘 수 있다. 민주당을 변화시켜 수권정당으로 만들고 야권 통합과 연대도 해낼 수 있다. 오직 이것이 내년 대선에서 더블스코어로 이기는 쉬운 길이다.


우린 민주세력의 정권탈환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2012년 승리가 노무현의 가치와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라면, 이를 위해 민주당의 변화를 이끌 사람들은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 민주, 평화, 통일, 복지를 실현하기 위한 한길로 나서야 한다. 이것이 내가 10년 전의 마음으로 돌아가 제안하는 필승의 길이다.

그날 노무현후보는 말했다. "해봅시다. 오늘은 우리 둘 뿐이지만 내일은 열, 모레는 삼천 만이 될 것입니다. 옳은 길이 가장 넓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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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집燕巖集>>의 한 꼭지인 <영대정잉묵映帶亭賸墨>은 연암과 연암 지인 사이의 척독尺牘을 모은 꼭지이다. 척독은 한마디로 짧은 편지이다. 짧게, 사실이나 정보나 감상이나 일상의 한순간 따위를 압축했기에 편지틀을 갖추느라 장황해진 격식 있는 서간문과는 또 다르다. 척독은 전화기 없던 시대의 전화 통화였고, 인터넷망 없던 시대의 인스턴트 메신저 또는 트위터 또는 페이스북이었다.

면무식한 사람들은 척독으로 안부를 묻고, 끽다나 음주나 회식을 위한 약속을 잡았다. 척독은 주고받는 이쪽저쪽 당사자가 공유하는 비망록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한편 일상의 한순간이나 마음속의 한 조각이 압축될 때에, 척독은 필경 트위터나 페이스북의 소용과 구실을 감당했다.

옛 기록에 흔히 보이는 동복童僕또는 동복僮僕이라 하는 어린 사내종은 척독을 주고받는 데 꼭 필요한 도구였다. 살림살이 복잡한 여염집 부인 곁의 계집종이며, 면무식한 사내들 상대하느라 면무식한 청루 기생 곁의 어린 계집종도 동복과 마찬가지로 하루에도 몇 번이고 척독을 품고 뛰었다. 오페라에서 흔히 보이는 쪽지 형태의 메시지message”는 일종의 서양식 척독이다. “메신저messenger”는 서양식 서번트servant”의 가장 중요한 임무 가운데 하나였다.

<<연암집>> <영대정잉묵>에는 연암이 지인들과 주고받은 50편의 척독이 남아 있다. 연암은 1772<영대정잉묵>을 엮으며 부친 자서自序에서 <논어> <시경> <춘추좌씨전>까지 끌어다 척독의 가치를 논했다. 여기서 연암은 척독이 때때로 고답적인 문학 갈래와 맞먹는 가치를 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을 폈다. 요컨대 생활에 바탕한 문답 형식의 글에 깃든 진솔함과 표현상의 개성(척독은 워낙에 주고받는 글, 대화하는 글이다)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평가자와 엮은이와 글쓴이를 겸한 연암의 속내가 부러 그런 글만 남도록 한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영대정잉묵>에 실린 척독들은 진솔함과 표현상의 개성이 어울려 고답적인 갈래와는 또 다른 글맛을 뽐내며 빛난다. 이제 볼 몇몇 문장은 그 대표적인 예다.

이별을 아쉬워하는 말을 주고받았으나, 이른바 천리까지 그대를 전송해도 끝내 한 번은 이별을 하게 마련이니 어쩌겠소. 다만 한 가닥 희미한 아쉬움이, 하늘하늘 마음에 얽힌 채 공중의 환화幻花처럼 왔다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시 아른아른 고울 뿐입니다.
別語關關. 所謂送君千里. 終當一別. 柰何柰何. 只有一端弱緖. 飄裊纏綿. 如空裡幻花. 來郤無從. 去復婀娜耳.
_연암 박지원, <경지에게 답함[답경지答京之]>에서



경지京之라는 인물을 경산京山 이한진(李漢鎭, 1732~1815)으로 보는 이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아무튼 글 말미를 보면, 연암과 경지라는 인물은(연암이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을 기준으로) 어제[昨日]” 만났다 헤어졌다.
헤어지며 얼마나 아쉬웠는지, 둘은 서로 1리를 떨어지고도 싹 돌아서 작별하지 못하고 1리 밖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연암은 벗과 헤어지는 아쉬움과 그 곡진한 정을 이토록 자연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표현했다.

천리까지 그대를 전송해도 끝내 한 번은 이별을 하게 마련[送君千里. 終當一別]”이라는 표현은 전송하는 이가 아무리 쫓아와도 결국 이별의 순간이 한 번 찾아온다는 말이다. 곧 떠나가는 이가 아쉬워 자꾸만 쫓아오는 이에게 이제 그만 돌아가라고 만류하는 말이다. 이 문장 바로 앞에 이른바라고 한 것은 이 표현이 한문 사용자 사이의 관용구였기 때문이다. 김명호 교수가 예시한 바에 따르면, <<수호전>>에서 무송武松이 송강宋江의 전송을 만류하며 이렇게 말한다:
 “
형님은 멀리 전송할 것 없소이다. 속담에 그대를 천리까지 전송해도 끝내 한 번은 이별해야 한다고 했소[尊兄不必遠送. 常言道. 送君千里. 終須一別].”

관용구나 속담뿐이라면 연암의 글이랄 것도 없다. 연암은 관용구로 상황을 압축한 뒤, 허공에다 환상의 꽃[幻花]을 영사하며 끝내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을 불러낸다. 그 아쉬움은 하늘하늘 마음에 얽[飄裊纏綿]”히고 나서도 이내 사라지지 않는다. 공중에 핀 환상의 꽃은 다시 한 번 다시 아른아른 고울 뿐[去復婀娜耳]”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물리적 거리가 벌어지는 동안과, 그런 추이 속에서도 결코 칼로 벤 듯 끊어지지 않는 사이가 이렇게 자연스럽게 어울린 예도 드물 것이다. 돌아보고 나서 또 돌아보는 그 마음을 형상화한 하늘하늘[飄裊]”아른아른[婀娜]” 또한 연암다운 수사로 빛난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


[사진_<<근묵>>에 있는 박지원의 글씨. 영인본 재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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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수/새사연 이사

 



오늘 아침에는 GP(일반의)들이 근무하는 진료소를 몇 군데 찾아가려고 한다. 진료소..... 우리는 잘 쓰지 않는 말이고,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는 진료소라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동네의원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잠깐 영국의 의료기관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지나가야 할 것 같다. 진료소의 의사들이 일하는 모습과 주민들의 모습은 나중에 최종적으로 정리하면서 글을 이어갈 것이고, 여기서는 체계에 관한 것만 실으려고 한다.

영국의 동네의원

영국에서 사람들은 건강상의 문제가 있으면 제일 먼저 자신의 주치의를 찾아가야 한다. 주치의, 즉 일차의료 담당 의사들을 말하는데, 이들이 일하는 곳이 일반의 진료소(동네의원)이다. 나는 주치의 진료소를 찾아서 구경하면서 운 좋으면 의사와 면담이라도 하려고 찾아보았다. 그러면서 동네를 기웃기웃 돌아다니며 있던 중, 지나가는 동네 사람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

 “Excuse me. Would you direct me the near medical clinic?”
“.....”
“Medical clinic! GP’s office!”
“.....”

이럴 때 쓰려고 열심히 준비한 말이었는데, 길을 가다가 낯선 동양인에게 질문을 받은 그 동네 사람은 잘 이해가 안 가는 말이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Aha, GP surgery?”
"No, No GP surgery. GP clinic! GP office!”

다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그 사람에게 나는 미안해서 더 묻지 못하고 가던 길을 가게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내 발음에 문제가 있었든지, 우리나라로 치면 ‘동네의원’을 말하는 표현에 문제가 있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의원이란 말이 클리닉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중에 현지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고 있는 이원영 교수에게 물었더니 영국에서는 일반의가 근무하는 의원을 ‘GP surgery’라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니, surgery라면 ‘외과’나 ‘수술’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가?

이원영 교수도 작은 병원, 혹은 의원을 말할 때 지금은 외과를 뜻하는 surgery라는 말을 사용하는 이유를 모른다고 했다. 내가 추측하건데 옛날에는 외과가 의사의 상징이었고, 의원이라면 당연히 외과적 치료를 하는 곳이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의원을 관습적으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GP surgery 외에도 주치의 진료소를 다른 말로는 ‘GP practice’라고도 한단다.

 

다음 날 숙소 근처에서 발견한 GP surgery(동네의원, 주치의 진료소) 광고 현수막. 이번에 새로 개원한다는 표시로 걸어 놨다. 그 건너에 보이는 집이 주치의가 있는 동네의원이다. 진료 시간을 보니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 의사가 6명 근무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사를 가거나, 지역을 옮기게 될 때에는 항상 먼저 그 동네의 일반의(GP, General practitioner)를 찾아서 ‘등록’을 하게 되는데, 등록이란 ‘앞으로 당신을 주치의로 삼아서, 내가 아프면 당신에게 맨 먼저 오겠소’라고 문서화 하는 과정이다. 현지에서 듣기로는 아직도 영국에서는 자기가 사는 지역의 일반의들 중에서 주치의를 삼아야 한다고 들었다. 즉 유능한 의사가 멀리 있다고 그 쪽으로 가서 등록을 할 수는 없다. 물론 아주 예외적인 때를 제외하면. 하지만 그 지역적 경계가 요즘은 흔들리는 것 같았고, 옆 동네에 있는 주치의를 찾아서 가는 주민들도 꽤 있었다. NHS에서 그다지 간섭하지는 않는 것 같다.

그러한 동네의원에는 보통 여러 명의 의사와 간호사, 재활치료사, 상담사뿐만 아니라 행정요원들이 근무하게 된다. 2009년 통계를 보면, 잉글랜드(영국 전체가 아님)에는 8228개소의 주치의가 일하는 동네의원(GP surgery)이 있고, 일반의들은 4만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아직도 그 수가 모자라다고 하는데, EU 전체로 볼 때도 낮은 수치이다. 5% 정도만이 혼자 일하는 의원이고, 대부분이 여럿이 함께 진료를 하는 공동개원(Group practice) 형태이다. 그리고 주치의 한 명당 보통 1500명 정도의 주민들을 등록해서 관리해주고 있다고 한다.

대체로 도시나 사람들이 많은 곳은 여러 명이 공동으로 일하고, 외곽이나 한적한 시골에는 한 명이 있는 곳이 많았다. 아무래도 대부분의 동네의원들이 민간의료기관이기 때문에 효율성과 수익을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정부와 NHS를 관장하는 위원회들은 그러한 문제점들을 고치려고 지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다. 그 예로 지난 노동당 정부(1997년~2010년) 당시 지속적인 보건의료 지출 증액으로 그나마 GP들이 많아졌고, 대기시간이나 의료 접근성들이 좋아졌다는 통계를 보면 말이다.

영국의 기초 의료서비스들

이러한 주치의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치과 의원, 안경점, 약국도 NHS와의 계약 속에서 주민들에게 기본적인 보건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영국에서 NHS란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의료 관계 조직 및 보건의료 행정조직들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그리고 기본적인 의료서비스라는 말은 의뢰 없이도 주민들이 직접 찾아갈 수 있는 서비스 장소를 말한다.

그 속에 안경점은 왜 있지? 그렇다. 광학기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은 안경점을 차리고 NHS와 계약을 해서 시력검사나, 상담, 안경을 맞추는 일까지 국가지원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분 중에 영국에 가거든 안경점을 유심히 보시기 바란다. 바깥 유리판이나 가게 어디쯤 NHS 파란 표시가 보일 것이다.

런던 시내를 걷다보면 하루에도 여러 번 시끄럽게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앰뷸런스를 보게 된다. 그 앰뷸런스도 긴급 환자 이송을 담당하는 독립된 보건의료 조직이면서 NHS라는 영향권에 있어서 차량 옆, 뒤에 보면 NHS라는 파란 글씨가 보인다. 어떤 영국 사람은 자기네 나라 앰뷸런스 소리가 전 세계에서 제일 시끄러울 것이라며 화를 내기도 하던데, 들어보면 정말 시끄러워서 500m 밖에서도 충분히 들릴 정도였다. 하여튼 어떤 것이든 이 표시가 없으면 국가보장 의료가 아니라는 뜻으로 봐도 된다. 병원이든, 약국이든, 안경점이든 어디를 가더라도 말이다.

국가의 보건의료체계와 관련된 행정조직이나 의료관련 기관들은 모두 NHS라는 표시를 하고 있다. 왼쪽은 앰뷸런스, 오른쪽은 안경점의 모습.


런던에는 몇 개의 구역으로 나눠서 분포하는 지역거점 진료소들이 있다. 여기에는 동네에 있는 GP surgery들 보다 규모가 크고, 여러 시설들이 갖춰져 있다. 역시 일차의료 진료소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보건소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는 의사들도 수 십 명이고, 전문의도 근무하면서 일을 할뿐 아니라 간단한 수술까지도 할 수 있다.

아침에 의사소통 부재로 동네 GP surgery 방문에 실패한 나는 일행들과 함께 미리 방문 허락을 받은 지역 거점 진료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여기는 외국 이민자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런던에서도 가난한 지역입니다. 이 진료소 건물은 크고 훌륭하게 지어졌는데, 정부 시책으로 민간 자본에 의해 지어진 거죠.” 

런던 외곽지역에 있는 Vicarage Lane Health Centre. 지역 거점 진료소로서 Foundation Trust라는 체계상의 위상을 가지며, 역할로 치면 우리나라의 보건소와 같다.

NHS의 영향을 받고 있는 진료소이지만, 민간자본으로 지어졌다는 진료소 매니저의 설명을 들으니 의문점이 머리를 맴돌았다. 개인의원은 민간 영역이 많다고 쳐도, 종합병원이나 대형 진료소들은 국가가 직접 경영한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러 관련자들의 얘기를 듣고,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아보니 영국도 민영화 바람이 심각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가 흔히 듣던 BTL(Build-Transfer-Lease) 방식이라든지, PFI(Private Finance Initiative) 방식이 공공의료 분야에서도 점점 늘고 있었다. 우리가 방문한 대형 진료소는 PFI 방식으로 지어져서 투자자에게 NHS에서 일정액씩 돈을 주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민간자본의 투입은 비단 지금 보수당의 캐머런 정부에서 생긴 일은 아니었다. 지난 노동당 정부인 토니 블레어 총리 시절부터 꾸준히 민간 영역이 넓혀져서 지금은 상당 부분에까지 침투했다는 자료를 보니 놀라울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에서 본격화된 민영화 작업들이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지나친 상상일까? 지금도 제주도에서 영리병원 도입 반대를 위해 서울과 제주도를 오가느라 고생하는 제주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의 박형근 교수의 힘든 얼굴을 멀리 런던에서 떠올려 본다.

NHS에 대한 투자 재원을 보여주는 이 도표에서 보면 노란 부분이 1997년경부터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민간자본의 인입이 점차 늘고 있다는 의미이다. Health System in Transition : United Kingdom 2011 자료 발췌 - LSE 대학의 숀 보일(Se-an Boyle) 박사 등 엮음

 

※ 이 글은 필자가 2011년 7월 2일부터 7월 9일까지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 최근 보수당 캐머런 정부의 NHS 개혁에 관한 것과 일차의료 현장에 대한 견학을 하고 느꼈던 것들을 쉽게 이야기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은 나중에 자료집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 원문은 http://www.saesayon.org/journal/view.do?pcd=EC01&page=1&paper=20110720102532187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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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새사연 이사장




진보는 대안이 없다. 흔히 하는 말이다. 기실 그 말이 떠도는 데는 나의 책임도 있다. 2005년 진보적 싱크탱크를 만들겠다며 뜻을 모을 때 무람없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대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진보세력의 대안이 완비되었다고 감히 선언할 생각은 전혀 없다. 아직 부족한 게 많다. 다만 지금도 진보는 대안이 없다고 꾸짖는 윤똑똑이들에게는 명토박아두고 싶다. 대안이 없다는 말, 이제 그 말은 게으름의 고백이다. 대안이 없다며 진보세력을 비판하는 ‘진보’적 교수나 ‘진보’적 언론인을 볼 때면 더욱 그렇다.

대안이 없다고 진보세력을 나무라는 사회과학자는 정말이지 겸손하게 자기 발밑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안을 만들어야 할 당사자가 대안을 만들지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는 꼴 아닌가. 언론인은 조금 다르다. 정책 대안을 직접 제시할 당사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론의 책임도 그만큼 줄어들까? 전혀 아니다. 우리 사회에 축적되어 가는 진보적 정책 대안들이 국민 사이에 소통되지 않는 결정적 이유가 바로 언론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가령 최근 민주노총이 연 토론회를 짚어보자. 이명박 정권이 언죽번죽 부르댄 ‘경제 살리기’가 민생 파탄을 불러오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노총이 대안을 전면에 내걸고 토론회를 열었다. 사무금융연맹과 금속노조가 함께 한 토론회는 보도자료에서 제시했듯이 ‘이명박 정부의 하반기 경제정책 방향에 대한 비판적 검토와 노동자 대안’을 목적으로 했다. 

민주노총 이창근 정책국장은 발제문을 통해 해마다 노동소득분배율이 떨어지고 소득 불평등이 깊어진 현실을 객관적 통계로 제시하며 이명박 정권조차 내수 활성화를 위한 30개 과제의 우선 도입을 발표할 만큼 국민 대다수가 늪에 빠져있다고 비판했다. 이어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의 틀을 바꾸지 않은 채 내놓는 내수 활성화 대책은 미봉책일 뿐만 아니라 실효성도 없다고 진단했다.

민주노총은 권력이 의지만 있다면 당장 구현할 수 있는 구체적 대안들을 제시했다. 중소기업의 납품단가 협상권을 보장하고 원자재 가격의 납품단가 연동제를 도입하는 정책은 결코 과격한 요구도 이념적 주장도 아닌 실질적 대안이다. 내수 시장 활성화를 위해서는 가처분소득이 늘어나야 하고 그러려면 비정규직을 줄이고 정리해고를 제한해야 한다는 논리도 명쾌하다. 한진중공업 경영진이 살천스레 자행한 ‘정리해고’에 맞선 싸움이 경제를 살리는 길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이 제시한 ‘경제 살리기’의 구체적 정책 대안들은 신문과 방송은 물론 인터넷신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다. 토론회에 단 한명의 기자도 없었다. 기실 사회단체들이 부족한 예산을 털어 토론회를 여는 이유는 그만큼 여론 형성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무리 대안 토론회를 열고 책을 출간해도 국민과의 소통이 막히는 데 있다. 대다수 언론이 모르쇠해서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토론회가 기사화되는 일은 극히 드물다. 그나마 인터넷신문들이 보도할 뿐이다.

과연 그래도 좋은가. 자칭 보수언론들은 민주노총을 비롯한 진보세력의 대안들을 전혀 보도하지 않는다. 정리해고 남용을 막기 위해 한진중공업을 찾아간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의 얼굴에 최루액을 발사한 경찰을 비판하긴커녕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갈등을 부추긴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뉴스기사에 담는다. 무분별한 정리해고를 막는 게 한국 경제를 살리는 가장 현실적 방법이라는 판단은 보수언론의 기자들이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논리일까?

진보를 내세운 언론도 진보세력의 대안을 보도하는 데 인색하다. 왜 그럴까? 새삼 궁금하다. 왜 그들은 진보세력의 토론회를 취재하지 않는 걸까? 왜 진보정당이 내놓은 대안들을 국민에게 알려주고 여론화해나가는 일에 게으를까?

최근 <문화일보>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좌클릭’을 계속하고 있는데 그들이 내놓고 있는 정책들은 대부분 민주노동당 정책을 베낀 것이라고 분석했다. 물론, 그 기사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여섯 석짜리 민노당의 급진적인 주장에 끌려 다니며 민노당 3중대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극우단체의 개탄을 전하고 있듯이 색깔공세가 목적이다. 하지만 두 당이 진보정당의 정책을 베끼고 있다는 진실을 담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 DB


진보세력이 애면글면 만들어 대안으로 내놓아도 모르쇠 하는 언론인들이 그것을 민주당이 나 한나라당이 받아들일 때 부각하는 보도행태를 어떻게 보아야 옳은가. 자칭 보수언론의 무지 못지않게 진보언론의 나태 또한 비판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진보를 표방하는 교수와 언론인들이 진보세력은 대안이 없다는 주장을 곰비임비 늘어놓으면서 국민 대다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한국 정치가 발전하지 못하는 근본적 원인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다. 진보는 대안이 없다고 꾸짖는 글을 쓰거나 희망이 없다고 지레 체념하기 전에 이제는 꼼꼼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다. 참으로 진보는 대안이 없는가를.

이 글은 '미디어 오늘' 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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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지수라는 수치를 내보고 싶었던 것은 벌써 5년 전의 일이다. 지역별로 혹은 단체별로 얼마나 그 지역이 마초 성향이 강한가, 그런 걸 지표로 내보고 싶었던 적이 있다. 물론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도 아니고 마초에 대한 간접 지표들을 뽑아내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서 몇 년째 마음 속에만 가지고 있고 실제로 해본 적은 없다. 그렇지만 몇 개의 작업 가설을 만들어본 적은 있다.
한국에서 마초지수가 가장 높은 지역은 어디일까? 여성들과 겸상을 아직도 잘 허락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들이 같은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는 걸 미덕으로 생각하는 안동이나 의성 같은 곳이 아주 높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

경상도와 전라도 사이에 마초지수가 차이가 있을까? 이런 것도 오래된 질문 중의 하나인데 별로 그럴 것은 아닌 듯싶다. 밀양의 성폭행 사건이 우리에게 꽤 큰 충격을 준 적이 있었는데, 소설가 공지영의 <도가니>에 나온 아마도 전라도 지역이 분명할 무진 역시 <무진기행>에서 따온(?) 그런 점에서는 만만치 않은 듯싶다. 고려대학교 지도부는 어찌 이리도 <도가니>의 대학 버전으로 그렇게 소설과 판박이인지, 끌끌.

가끔 고위직 여성진출 비율 등 여성과 관련된 지표를 보면 한국은 회교국가인 말레이시아보다 훨씬 낮고 요르단과 비슷한 수준의 수치로 나온다. 남녀 임금 격차 등 많은 경우 한국은 OECD 평균 근처에서 수치가 나오지 않고 회교 국가들 비슷한 데서 수치가 나오는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여성가족부는 한국의 정치 과정 특히 시민단체가 만들어낸 가장 큰 성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명박 정부와 여성 정책, 이렇게 얘기를 꺼내보면 좀 참담하다. 일단 인권위원회가 해체되지 않고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할 것처럼 여성가족부도 정부 출범 초기, 진짜 죽다 살아났다. 한나라당 같은 할아버지들의 정당에서 이걸 없애지 않았던 데에는 수많은 여성 활동가들의 눈물겨운 호소가 숨어 있었다.
그러나 부처가 없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해서 뭔가 사정이 나아진 것은 아닌 듯싶다. 정부 프레임이 어떻든 소수의 열성적인 페미니스트들이 어떤 영웅적인 활동을 보여주든, 현 정권은 반(反) 여성주의 정부이고 여성운동의 위기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과연 파시즘으로 가고 있는가, 아닌가, 여기에 대한 논란이 아직 끝나지는 않았다. 히틀러의 나치나 무솔리니의 파시즘의 등장 가능성은 시스템의 실패를 내부 구성원 중에서 찾고,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는 증오의 정치가 등장할 때 그렇다라고 보는 게 일반적이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 정권에서 찾아낸 내부 희생자는 김용철 변호사의 표현을 빌리면 ‘전라디언’이 아니었던가? 전라도 사람은 야비하고 믿을 수 없다는 다분히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경상도든 서울 사람이든 군사 정권 내내 암묵적 가해자였다.

우리의 파시즘적 경향을 보여주는 내부 희생자는 최근에는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여성으로 전환되는 중이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적대감은 아직은 유럽 수준은 아닌 듯싶다. 그러나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위험 요소이다.
그리고 여성은? ‘열폭족’이라는 형태로 이건 이번 정권에서 이미 하나의 흐름으로 나온 듯싶다. 군 가산점 논쟁 같은 게 있을 때 여성단체나 여자대학교의 게시판을 마비 상태로 만드는 사람들을 열폭족이라고 부른다. 이건 사회적 변화인데, 좋은 방향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탈마초의 흐름에서 다시 우리는 남성우월주의의 마초 시대로 역행하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단체만이 아니라 여성가족부 자체가 위기의 시대를 통과하고 있다. MB 시대가 종료할 때,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토건이나 국가주의 쇼비니즘만이 아니라 다시 강화된 마초주의가 아닐까 싶다.
사실 여성들을 위한 정부부처가 생겨나는 것은 나머지 모든 부처는 남성 엘리트들의 지적 우월주의이고, 딱 한 부처만 여성 정책을 고민하게 된다는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 원칙적으로는 정부 모든 부처에 여성이라는 키워드를 가진 국이나 실 하나씩은 만들고, 어떻게 21세기에 탈마초 시대를 맞을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아니면 언제든지 우리는 열폭족과 함께 순식간에 파시즘의 길을 열 수도 있다.

사회적 경제, 돌봄노동과 같은 전형적인 여성 진영의 경제 문제에서부터 여성 노동자, 여성 알바, 여성 농민, 이런 세밀하면서도 특단의 대책을 찾기 어려운 질문을 포함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국 특유의 마초 시대로부터 벗어날 것인가, 이명박 이후의 시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인터넷의 한 공간에서 발생하는 극우파가 이 문제에 대한 차별적 해법을 주장하면서부터 생겨나는 것 아닌가? 위기의 여성가족부, 다음 정권에서는 이 부처가 사회의 핵심으로 떠올라야 우리의 미래가 밝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여성부 덩치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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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수의 가슴앓이]
고병수/새사연 이사



비행기 시간이 점점 다가오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오늘 서울로 가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 인천공항에서 새벽같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아직 짐 정리도 못했다. 다름 아니라 어제 해군기지 문제로 싸우고 있는 강정마을에 진료를 갔다가 하루를 자고, 오늘 부랴부랴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강정마을 주민 진료는 뺄 수 없는 일정이었고, 서울행 비행기 시간은 오늘이어서 둘 다 옮길 수 있는 사정이 안 되었다.

강정마을을 떠나 뿌옇게 안개 낀 한라산 중턱을 넘어서 집으로 차를 몰았다. 집에 와보니 나 대신 옷가지며, 세면 도구 등을 싸고 있는 부인의 입이 뾰루퉁하게 튀어나왔다. 떠나는 마당이라 잔소리는 못 하고, 눈만 흘기며.....

인천공항 --> 나리타공항 --> 프랑크푸르트 공항 --> 런던 히드로 공항

이건 나의 여행 경로 표시가 아니라 돈을 절약한다고 경유하는 일정을 골랐더니 이렇게 갈아타게 되었다. 제주에서 김포공항까지 표시하면 영국 한번 가는데 도대체 비행기를 몇 번을 타야했던 건지.

13년만의 런던

7월 2일 아침 일찍, 인천공항에서 같이 갈 일행들과 만나서 드디어 비행기를 탔다. 한참을 자다가 깨다가, 갈아탔다가 하면서 도착하니 저녁 시간이었다.

1998년 가을이던가? 병원에 근무할 때 아일랜드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갔다가 돌아오면서 영국을 돌아본 적이 있었으니 13년만에 다시 와보는 영국이다. 그 때는 1997년 IMF를 맞은 직후라서 원화가치 하락으로 엄청 비싸게 경비를 들여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방을 구하는 게 여의치 않아서 역에서 떨며 자야했던 기억도 나고, 처음 겪는 문화적 차이에 놀라기도 했던 기억도 나고.... 차창 밖의 런던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기억을 떠올리니 살짝 미소 지어지기도 했다.

오래됐지만 예쁘게 붙어있는 집들, 좁은 벽돌길들도 여전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예전에 비해 외국에서 이민 온 유색인종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 눈에 띄는 정도.

우리 일행은 숙소가 있는 변두리 Earl's court라는 곳으로 전철을 갈아타면서 이동을 했다. 숙소가 있다는 전철역에 내려서 천천히 걸으면서 보니 멀리 높다란 호텔이 보인다. 오호라, 오는 길은 험했지만 숙소만큼은 제대로 골랐구나 흡족해하면서 가는데, 인솔자가 그 건너편에 있는 호텔이란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자그마한 호텔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여관 수준.....

적당히 짐을 풀면서 창밖을 보니 저녁 9시가 넘었는데도 날이 훤하다. 동네에 있는 PUB에 들려 맥주 한 잔 마시고 돌아와서는 잠에 빠진다.


NHS 입문

LSE 대학 입구 ※ LSE : London School of Economics and Political Science

둘째날이 되었다. 아침 식사를 구운 식빵과 커피, 바비큐로 때우고 일행들과 런던 시내에 있는 LSE 대학으로 향했다. 오늘은 간단히 최근 영국의 NHS 개혁에 대한 동향을 전해 듣는 시간을 갖기로 해서 현지에서 연구원으로 공부하고 있는 윤태호, 기명 두 분 강사를 모시게 되었다. 윤태호 선생님은 부산대 의대 교수로 있다가 LSE 대학의 연구자로 있으면서 영국의 NHS 역사에 대한 논문을 준비하고 있고, 기명 선생님은 영국의 건강불평등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는 두 분 강사를 통해서 지난 대처 정부 시절의 신자유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경쟁을 주창하며 NHS 기간이 흔들렸던 것과 토니 블레어 총리 당시 NHS 재정 증대와 복지 정책의 확산, 그리고 현재 보수당의 캐머론 총리가 다시 집권하면서 NHS를 상당 부분 민영화하려는 개혁 의도에 대해서 들을 수 있었다. 캐머론 총리는 작년 말에 자신의 NHS 개혁 구상을 발표하였으나 노동당과 여러 의료관련 단체뿐만 아니라 영국의사협회(BMA)의 반대에 부딪혀서 다소 물러선 듯한 NHS 개혁안을 다시 내밀고 있지만, 이마저도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다고 했다. 

영국에서는 1900년대 초부터 가난한 사람들이나 육체노동자들을 위해 제한적인 건강보험 형태가 있었다. 하지만 초기에는 노동자들이 아파서 결근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의미로서 일부 도시를 중심으로만 시행되었고, 그것도 여자와 어린아이는 제외였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건강보험 형태는 확대해 갔으나, 비버리지 보고서로 더 잘 알려진 ‘Social Insurance and Allied Services’란 자료집이 1942년에 나오면서 국민 건강에 대한 국가의 전적인 책임을 논의하게 되었다.             

                                                                                                                  

William Henry Beveridge(1879~1963) and The Beveridge Report, 1942

         

이 보고서에 유명한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cradle to the grave)’라는 표현이 나온다.

나는 강의를 들으면서 책으로 읽었던 당시 상황 등을 떠올려 보았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8년부터 영국에서는 국민들의 건강을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NHS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처칠의 보수당 정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전격으로 시행이 됐다는 것이다. 그 힘은 다름 아닌 획기적인 보건의료 체계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절대적인 지지 때문이었다.

비버리지 보고서는 영국의 복지와 보건 정책에 대한 300쪽 안팎의 보고서인데, 그 자료집을 구하려고 영국 국민들이 난리를 쳤다는 뒷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처칠의 보수당 정부로서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불쌍하게도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 보수당은 선거에서 졌고, 처칠은 연임을 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첫날이어서 가볍게 영국 의료제도에 대한 입문을 마치고 남은 시간은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하지만 나와 몇 명은 유학 온 연구자들과 템즈강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이야기를 나눴다. 비싼 돈을 내면서 영국에 왔는데, 관광을 하는 게 아까운 마음도 들고, 영국의 의료제도 자체보다도 영국의 일차의료의 실제 모습에 대한 내용들을 더 알고 싶어서 이야기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병원을 이용하는 이야기며, 영국인들이 느끼는 불편감, NHS 개혁을 통해 겪게 되는 문제점들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맥주 한 잔에 이야기 하나..... 템즈강가의 모임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템즈강가의 토론..... 바로 옆에는 고서적 판매 시장이 열리고 있었다. 왼쪽에서부터 가정의학과 이석훈 전공의, 홍승권 교수, 이원영 교수, 필자. 안 보이지만 사진을 찍는 분은 김용수 노팅험 대학의 연구원

 

NHS에 대한 짧은 안내 ...

한 국가의 보건의료를 책임지는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NHS라 불리는 국가보건의료체계(NHS, National Health System)와 사회보험체계(NHI, National Health Insurance) 두 종류이다. 참고로 미국처럼 자유주의적 시장원리 속에서 NHS와 민간보험 중심의 의료(HMO, Health Maintenance Organization)를 보이는 미국의 경우는 변형된 형태로서 특별한 경우이다.

NHS 방식은 국가가 세금을 거둬서 전반적인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하는 형태로서 영국에서 처음 시작되었으며, 이후 여러 나라로 파급되었다. 여기에는 노르딕 국가들(Nordic 5 countries :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아이슬란드, 덴마크)과 이탈리아, 스페인, 포루투갈, 뉴질랜드가 있다.

이에 비해 NHI 방식은 국가가 기업과 국민들로부터 건강보험료를 거둬서 필요한 경우에 보건의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용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독일을 시초로 프랑스, 베네룩스 3국(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일본, 대만, 한국의 경우에 해당한다.


※ 이 글은 필자가 2011년 7월 3일부터 7월 9일까지 영국 런던에 머물면서 최근 보수당 캐머런 정부의 NHS 개혁에 관한 것과 일차의료 현장에 대한 견학을 하고 느꼈던 것들을 쉽게 이야기로 정리한 것입니다. 그에 대한 자세한 내용들은 나중에 자료집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 원문은 http://www.saesayon.org/journal/view.do?pcd=EC01&page=1&paper=20110715110702912 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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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외교 사절의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청제국을 여행한 연암이 그 여행기 <<열하일기>>를 남긴 경위는 앞서 본 대로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64 참조.

이 여행에서 연암은 현대의 산책자-관찰자의 면모를 여실히 발휘했다. 연암의 눈은 열하의 계엄 상황, 몽골 및 티베트 대 청제국 사이의 긴장, 건륭제와 판첸라마의 회동과 같은 굵직굵직한 사건 또는 사태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염집, 술집, 전당포, 외양간, 거름 더미, 수레, 복식, 시장, 길바닥 인심 등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부분에 가 닿았다.


그는 현대의 도시 산책자 발터 벤야민처럼 청제국을 누볐고, 기록광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폴 스미스처럼 끝없이 비망록을 챙겼다. 이런 관찰과 기록을 근거로 해서 연암은 청제국 문물의 특징과 본질을 “
대규모大規模, 세심법細心法”으로 요약했다. 여기서 “대규모”란 청제국 문명, 문물, 재부, 제도의 현황이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대단하다는 뜻이다. “세심법”이란 청제국이 그 대단한 규모를 작동하고 유지하는 원리의 기본은 일상의 작은 일 하나에도 소홀함 없는 섬세한 마음씀씀이라는 뜻이다.

 

대규모와 세심법을 한껏 호흡한 여행꾼의 손에서 나온 덕분일까. <<열하일기>> 또한 청제국 못잖은 대규모와 세심법을 아울러 갖춘, 크고도 섬세한 문서다. 그리고 규모와 섬세함을 겸전한 매력이 워낙 강렬해서 오늘날의 많은 독자들이 “연암 곧 <<열하일기>>” “<<열하일기>> 곧 연암”이라는 상을 품기도 한다. 그런데 연암의 글은, 하나 마나 한 소리지만, <<열하일기>> 하나뿐이 아니다. 청제국 여행 전에, 연암은 이미 스스로 대규모와 세심법을 아우른 원고를 이루고 있었다.

 

글쓰기에서 이룬 대단한 규모의 세심한 마음씀씀이가 청제국 여행을 통해 다시 한 번 화려하기 그지없이 만개했다고 하면, 글쎄, 내 생각에도 참 마침맞은 설명이 될 듯하다.

그런 생각의 연장이다. 서가에 <<열하일기>>를 정리하다 문득 <<연암집>>의 꼭지, <연상각선본> <공작관문고> <영대정잡영> <영대정잉묵> <서이방익사> <종북소선> <방경각외전> <고반당비장> <엄화계수일> 들이 새삼스레 경경하다. 경경한 만큼 또 다른 연암을 한 번 되돌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난다. 그러면서 편 데가 마침 <맏누님 증 정부인 박씨 묘지명[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이다.
 


1771년, 조선 영조 47년 연암의 맏누님이 향년 43세로 세상을 떠난다. 당시 34세였던 연암은 맏누님의 죽음에 부친 묘지墓誌와 명문銘文(명문은 칠언절구로 갈음하는 파격을 시도함)에 가족의 정과 곡진한 애도의 뜻을 담았는데 다음과 같다. 짧은 글이므로 원문을 먼저 제시하고 나서 번역문을 제시한다.
 

孺人諱某. 潘南朴氏. 其弟趾源仲美誌之曰:
孺人十六. 歸德水李宅模伯揆. 有一女二男. 辛卯九月一日歿. 得年四十三. 夫之先山曰鵶谷. 將葬于庚坐之兆. 伯揆旣喪其賢室. 貧無以爲生. 挈其穉弱婢指十. 鼎鎗箱簏. 浮江入峽. 與喪俱發. 仲美曉送之斗浦舟中慟哭而返. 嗟乎. 姊氏新嫁. 曉粧如昨日. 余時方八歲. 嬌臥馬전[馬+展]效婿語. 口吃鄭重. 姊氏羞. 墮梳觸額. 余怒啼. 以墨和粉. 以唾漫鏡. 姊氏出玉鴨金蜂. 賂我止啼. 至今二十八年矣. 立馬江上. 遙見丹旐翩然. 檣影逶迤. 至岸轉樹隱. 不可復見. 而江上遙山. 黛綠如鬟. 江光如鏡. 曉月如眉. 泣念墮. 獨幼時事歷歷. 又多歡樂. 歲月長. 中間常苦離患. 憂貧困. 忽忽如夢中. 爲兄弟之日. 又何甚促也.

去者丁寧留後期
猶令送者淚沾衣
扁舟從此何時返
送者徒然岸上歸

유인(孺人, 벼슬하지 못한 선비의 아내를 사후에 일컫는 존칭)의 휘는 아무개이며 반남 박씨이다. 아우인 지원 중미(仲美, 박지원의 자)가 다음과 같이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씨 집안 이택모 백규(伯揆, 이택모의 자)에게 시집가 딸 하나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1771년) 9월 초하루에 돌아갔다. 향년은 43세이다. 남편의 선산이 아곡(경기도 양평 소재)에 있었으므로, 그곳의 남서쪽을 등진 자리의 묘역에 장사지내게 되었다.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난 뒤 가난하여 생계를 이을 수 없게 되자, 그 어린 것들과 계집종 하나와 크고 작은 솥과 상자 따위를 가지고 배편으로 협곡에 들어가기 위해 상여와 함께 출발했다. 나는 새벽에 두포(팔당댐 부근. 여기서 남한강을 거슬러 오르면 양평군을 지날 수 있다)에 정박한 배 안에서 통곡하고 돌아왔다.
아, 슬프다! 누님이 갓 시집가서 새벽에 단장하던 모습이 어제런 듯하다.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다. 까불대며 토욕하는 말처럼 뒹굴면서 신랑의 말투를 흉내 내어 더듬거리며 정중한 체했더니, 누님이 수줍어 하다가 빗을 떨어뜨리는 바람에 내 이마를 건드렸다. 나는 성질을 부리며 울고 먹물을 분가루에 섞는가 하면 거울에는 침을 뱉었다. 누님은 비녀와 머리장식을 꺼내어 주며 울음을 그치도록 나를 달랬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물여덟 해가 흘렀다!
 

강가에 말을 세우니 저 멀리로 붉은 명정의 너울거림이 바라보였다. 구불대던 돛의 그림자는 강안을 돌아 나무에 가리게 되자 다시는 보이지 않는데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른 것이 쪽 찐 머리 같고, 강물에 감도는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눈썹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누님이 빗 떨어뜨렸던 일을 생각하니, 유독 어렸을 적 일이 역력히 떠오른다. 또 즐거운 일도 많았고 세월도 더디 가는 것만 같더니만 중년에 들어서는 늘 고생스럽게 지내고 가난을 걱정하다가 꿈속처럼 훌쩍 지나고 말았다. 누이와 아우로 지냈던 나날은 또 어찌 그리 촉박했는가!

떠나는 이 정녕 뒷날 다시 오마 다짐해도
보내는 이 여전히 눈물로 옷을 적실 텐데
조각배 이제 가면 언제나 돌아올까
보내는 이 하릴없이 강기슭으로 돌아간다

_연암 박지원, <맏누님 증정부인 박씨 묘지명[백자증정부인박씨묘지명(伯姊贈貞夫人朴氏墓誌銘)]> 원문 및 번역문 전문



김명호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연암의 자형 이택모는 박씨가 죽고 나서, 나중에 종2품 벼슬인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이에 따라 연암의 맏누이자 이택모의 부인인 박씨도 나중에 정부인의 봉작을 받은 듯하다. 제호의 “증정부인贈貞夫人”이란 “사후에 추증되어 정부인의 봉작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증정부인”은 본문의 첫 어휘 “유인孺人”과 이렇게 맞아떨어진다.
 

아무려나 남매간의 정에 견주어서는 남편의 벼슬, 사후의 봉작 따위 다 시답잖다. 갓 시집간 누님한테 응석을 부리고 신랑 흉내를 내며 장난을 거는 장면, 그예 수줍어하던 새색시가 여덟 살짜리를 울리는 장면 들은 단 몇 줄에 지나지 않지만, 그 몇 줄 사이에 연암을 여덟 살짜리가 되어 28년 전으로 돌아간다.
 

특히 어린아이의 응석을 표현한 “까불대며 토욕하는 말처럼 뒹굴면서(嬌臥馬전[馬+展])”는 표현의 압권이다.
원문 “마전(馬전[馬+展], 여기의 ‘전’은 ‘말 마’와 ‘펼 전’를 합한 글자인데 인터넷용 한자 팩에서 표현되지 않으므로 이와 같이 썼다)은 말이 진흙이나 모래에서 하는 토욕土浴을 가리킨다. 말은 진흙이나 모래에 뒹굴며 몸에 붙은 기생충, 세균 따위를 떨어낸다. 말이 토욕할 때는 마구 뒹굴게 마련인데, 여덟 살짜리 사내아이의 기운 센 까불기, 응석이 참말이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이어지는 누님의 행동까지, 다 한 가지에서 난 사이에서만 공유하고 추억할 수 있는 장면이다.

 

아내 잃은 가장과 엄마 잃은 아이들이 돌아간 아내이자 엄마의 상여와 한 배를 타고 떠나가는 장면의 배경 묘사도 연암 글쓰기의 특질을 여실히 드러낸다. “쓸쓸함” “슬픔”이라는 말 한 마디가 없지만, 상처한 사내, 엄마 잃은 아이들, 잡살뱅이 살림, 그리고 상여의 병렬이라니!

떠나간 배는 “강가의 먼 산들은 검푸른 것이 쪽 찐 머리 같고, 강물에 감도는 빛은 거울 같고, 새벽달은 눈썹 같았다”라는 영상을 남기고 영영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우는 여덟 살 그때를 떠올리지만 누이는 저 배처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 이제 누님은 추억할 때에만 영사되는 “풍경” “장면”일 뿐이다.
 

묘지의 명문을 대신한 칠언절구 또한 두말이 필요 없는 절창이다. 연암의 벗 이덕무는 이 시를 읽고는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고 했다. 사실 나사못회전 또한 지금 눈가가 촉촉하다. 문장으로, 어휘로, 통사로, 화용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연암의 정이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이런 것이다. 연암은 이런 글을 쓰고 있었다. [끝]


*원문의 교열 및 구두는 신호열, 김명호 두 분의 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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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준 | 동아대 교수·문화연구

 
동계올림픽으로 인한 경제효과가 65조원에 이른다고 한다. 누구 표현대로 이는 ‘거의 사기’다. ‘구라가 예술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 자료를 나에게 주면 세 시간이면 100조원으로 만들어줄 수도 있다.
어느 경제학자가 그랬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거짓말을 잘하기 위한 것이라고. 서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경제효과가 450조원이라는 ‘창조적 연구’도 있지 않았던가. ‘경제효과’는 과학이 아니라 신념의 문제요, 상상력의 공간인 것이다.

올림픽을 이렇게 이해하면 된다. 평상시라면 절대 짓지 않을 불필요한 시설을 단 보름간의 행사를 위해 짓는다. 신나게 환경을 파괴하며 많이도 짓는다. 누가? 재벌 건설사가. 누구 돈으로? 우리 세금으로. 이게 ‘경제효과’의 실체다. 그러니까 ‘올림픽 경제효과’란 건설사엔 버는 돈이지만 우리에겐 써야 할 돈인 것이다. 그래서 한 외국 학자는 올림픽은 가난한 자의 돈을 부자들에게 옮길 뿐이라고 했다. 올림픽은 곧 양극화다.

‘흑자 올림픽’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대회 개최를 위해 쏟아 붓는 지출을 계산하면 무조건 적자다. 무시무시한 적자다. 철도에 7조원, 도로에 2조2000억원, 경기장에 1조2000억원이 들어간다고 한다. 9조원을 들여 KTX까지 놓는단다. 이제 평창올림픽은 20조원을 훌쩍 뛰어넘는 건설프로젝트가 됐다. 개최 준비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대테러 보안·안전비용에만 2조원이 필요하다. 이런 식이면 개최비용은 30조원을 가뿐하게 넘길 것이다.

최문순 강원도지사는 “LA올림픽을 비롯한 올림픽 흑자사례를 연구해 완벽하게 준비할 것”이라고 했다. 애석하게도 평창이 참고할 만한 ‘흑자사례’는 없다. 당시 LA는 선수촌을 새로 짓는 대신 대학 기숙사를 활용했을 뿐 아니라 단 하나의 경기장도 새로 짓지 않았다. 주경기장도 1923년에 지어진 LA콜로세움을 그냥 썼다. 알펜시아 같은 허황된 리조트도 없었고 고속철도도 놓지 않았다.

지금 올림픽은 구조적으로 흑자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특히 개최지에 엄청난 희생을 강요한다. IOC는 경기장 규모, 경기장 간 거리, 선수촌과의 거리 등을 중시한다. 중복투자, 과잉투자를 강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계올림픽의 ‘파괴력’은 엄청나다.
1998년 개최지 나가노는 지금도 경기침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민들은 후회하고 있고 올림픽을 찬양했던 학자들은 반성하고 있다. 2010년 개최지 밴쿠버는 대회 폐막 후 10억달러 적자라고 했었는데 최근 50억달러에서 100억달러 적자라고 실토했다.

또 다른 문제는 대회 폐막 후의 시설 관리다. 폐막 후 그 거대하고도 많은 시설의 관리는 전적으로 지역 주민의 몫이다. 강릉시는 폐막 후 다섯개의 빙상장들을 컨벤션센터, 체육관, 수영장 등으로 전환한다고 하지만 전환 공사비만 각각 수백억원이 필요한 데다 관리비로 매년 20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 인구 20만 강릉시에 과연 적절한 수준인가.

그러니까 문제는 ‘얼마나 흑자를 내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적자를 줄이는가’이다. 경기장을 크게 짓고 여기저기 공사판을 벌이며 올림픽을 폼나게 치를수록 강원도는 골병든다. 추후 발생할 재정 손실의 싹을 미리 쳐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경기장 규모를 줄이고 미디어센터, 선수촌은 물론 경기장도 기존 시설을 쓰거나 가건물로 지어 폐막과 함께 철거해야 한다.

IOC와 약속했기 때문에 안된다고? ‘강원도의 발전’이라는 도민과의 약속은 어디 갔나. 에누리 없는 장사 없다. 끈질기게 협상해라. ‘대회 반납 불사’의 자세로 협상해라. 강원도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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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의 인기가 요즘 없어도 너무 없는 것 같다. 정부 근처에서 줄 서기 좋아하는 인사들이 가장 선호하는 자리는 대통령 인수위원회이다. 인수위 갔다가 청와대 중책 혹은 장·차관, 그게 한국 엘리트 남성들의 보장된 출세길이다.
반대로 임기말 청와대는 아무도 가고 싶어하지 않는 자리가 된다. 공무원들은 ‘인공위성’이라고 부르는데, 괜히 잘못 갔다가 정권 바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민간인들도 마찬가지이다. 망하는 정부 말년 청와대에 가면, 다음 정권 내내 인생이 고달파진다.

세상 인심이라고, 정권 초에는 어떻게든 줄 대서 청와대 가고 싶어하던 공무원들이, 최근에는 죽어라고 도망가서 청와대는 안 가려고 하는 듯하다. 세상사, 다 이런 것 아니냐 싶게, 민주당에 줄 대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다. 공무원이든 민간 기업이든 ‘보험’이라고 부르는 줄 타기가 요즘 유행인 듯싶다. 하늘 아래 영원한 건 없다는 것처럼 고소영, 강부자의 시기도 끝나간다.


이번 정권에서 일반인들에게 완전히 스타일 구긴 부처가 외교부였다면, 밑바닥부터 붕괴한 곳은 인권위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건 그냥 시민단체(NGO)에 맡기면 되는 거 아니냐고 공공연히 말하는 사람들이 현 정권의 장·차관들이다.

한나라당 사람들이 특히 못하는 게 몇 가지 있는데, 인권은 정말 황당하기 짝이 없다. 이번 정부가 잘 한 게 뭐가 있나, 그렇게 물어보면 사실 할 말이 별로 없다. 시민들의 인권 인식은 높아진 것 같은데, 이건 정권이 잘 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닌 듯싶고. 그럼 국방은 잘 했나? 싸우지 않고도 이기는 법,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것도 아니다.
자기들은 ‘선진화’를 국정 모토로 잡았지만,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눈에서 보면 한국이 한참 후퇴했다는 데에는 좌우, 진보, 보수 모두 이견이 별로 없는 듯싶다. 물론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우리가 후진국이던 시절 혹은 개발독재 시절로 상당 부분이 돌아갔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후대에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칠 것, 그것은 생태 분야가 아닐까 싶다. 아닌 말로 인권이야 정권 바꿔서 다시 되돌리면 되는데 4대강, 새만금, 이런 건 다시 되돌리기가 쉽지 않다. 노무현 후반기에 ‘대못질’이라는 표현이 유행했다면, 현 정권이야말로 ‘생태 대못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서 환경단체와 환경부의 관계는 외국과는 조금 다르다. 환경청을 환경부로 격상하는 데 상당히 관여를 했기 때문에 어떨 때 보면 시집 보낸 딸을 보는 친정 어머니 느낌도 든다. 환경부도 환경단체를 극진하게 생각했었다. 현 정부에서 이런 우호적 관계가 끝났다. 아예 장·차관이 나서서 4대강 사업 추진본부장처럼 움직이니 좋은 관계일 수도 없다. 아직 공개적인 것은 아니지만, 이럴 거면 차라리 환경부를 해체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이야기가 젊은 활동가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국토부가 개발을, 환경부가 견제를, 이렇게 하는 10년 넘은 구도에서 사실상 환경부가 제대로 견제를 하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시늉은 좀 했다. 이렇게 짜여진 시스템에서 아예 환경부 장관이나 차관이 개발하자, 이러고 나오면 견제 시스템이 돌지 않는다. 자기들이 나서서 4대강 주무 부처처럼 굴 거면, 아예 없애는 게 나을 수도 있다.
그 대신 환경영향평가를 아예 환경단체나 민간에서 위탁해서 관리하는 게 국가주도 개발방식에 최소한의 견제라도 될 거다.

시민의 정부가 들어오면 환경부는 어떻게 할 거냐? 그냥 장·차관만 바꾸면 될까? 손학규나 정동영이라고 친구 시키지 말라는 법 없고, 그 사람들이라고 한나라당과 달리 좀 생태적인 생각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어차피 옛날 사람들이고, 토건 시절에 출세했던 사람들이다. 말은 녹색성장이라고 하지만 어차피 내용을 열어보면 토건 + 원자력, 그게 전부다. 생태는 녹색 ‘뺑끼칠’, 온실가스 배출은 원자력으로 줄이고, 그랬던 거 아니냐.
프랑스 식으로, 국토부와 환경부를 합쳐서 환경 부총리를 만들고, 환경부는 생태부로 아예 이름을 바꾸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우파 정치인인 사르코지도 이 정도는 했는데, 이명박 시대의 환경부, 참으로 시대착오적이었다.

좀 더 세게 나가자면 아예 경제 운용 자체를 지속가능 경제로 하자는 측면에서 기획재정부를 지속가능부로 바꾸고, 아예 여기에서 국민 경제 자체를 생태적으로 운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삽질의 경제적 효과는 단기적이지만 삽질의 후유증은 오래 간다. 이명박 시절에 저지른 토건질을 치우려면 어떤 건 100년쯤 갈지도 모른다.

환경 활동가들 입에서 이럴 거면 차라리 우리 손으로 환경부를 해체하자, 그런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오는 치욕스러운 시기이다. 한반도의 생태 역사에서 이 시기가 일제 시대 같은 의미에서 생태 부역분자의 시대로 기록될 것 같다. 배 바꿔 탄 환경주의자, 토건 부역분자 환경부, 그 시기가 과연 끝날까?
민주당 내부에 당장 탈토건 위원회부터 만들기를 바란다. 한나라당의 진짜 약점은 복지가 아니라 토건이다. 다음 정권의 탈토건 거버넌스에 대한 논의는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야 집권하고 집권이 의미 있을 수 있고 또 그래야만 오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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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정조 4), 조선 조정은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을 맞아 축하 사절단을 꾸린다. 그리고 이 사절단의 정사(正使, 사절단장)에 영조의 사위이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의 팔촌형인 박명원을 임명된다. 연암은 이때, 일생을 걸쳐 어쩌면 딱 한 번 집안 인연을 활용했는지 모른다. 연암은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 시종 병졸 자격으로 팔촌형님이 사절단장으로 있는 사절단에 껴든다. 당시 연암의 나이가 마흔넷. 생각과 글쓰기 모두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은 중년에, 세계 문명의 중심지이자 북학론北學論의 현장인 청제국에 육박할 기회를 맞은 것이다


연암은 18세 무렵을 지나면서는 썩은 세상에 대한 실망과 과거 급제만을 위한 글공부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었다. 실망과 회의는 두통과 우울로 나타났고, 오로지 창작과 여행을 통해 그 두통과 우울을 잠시 달랠 뿐이었다. 다만 양반 집안 자제였던 만큼 마지못해 과거를 보기도 했다.

연암은 서른넷에 응시해 두 차례 초시(예비 시험)에서 두 차례 모두 수석을 차지하고 만다. 게다가 이를 기특하게 여긴 영조의 명으로, 국왕 영조 앞에서 시권을 낭독하는 특전까지 누린다. 그러나 연암은 마지막 관문인 회시(최종 시험)에서 답안지를 제출하지 않았다(또는 백지 답안지를 제출한 듯). 과거가 안중에 없음, 세속적인 입신양명에 어떤 미련도 없음을 이처럼 분명히 한 예가 조선사에 다시 있을까. 청제국 여행 기회는 그러고 나서 딱 10년 뒤에 연암을 찾아왔다.

여정은 길었다. 1780624일 압록강을 건너, 81일 북경에 도착, 청 예부로부터 예정에 없던 예식 참가를 명받아 810일 열하로 이동, 820일 북경으로 되돌아와 약 한 달쯤 체류, 이윽고 917일 북경을 떠나, 1027일 서울 도착해 조정에 귀성을 신고. 그리고 그 발걸음은 <<열하일기>>라는 호한한 문서에 오롯이 집약되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였고 여정은 험했지만 행운도 있었다. 무엇보다 청제국 정치, 외교, 군사의 가장 치열한 현장 열하를 방문한 것이야말로 행운 가운데 행운이었다. 열하는 청 황제의 여름 피서지로 이전 조선 사신들은 단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한데 때마침 예정에 전혀 없던 열하 일정이 느닷없이 생겼고, 덕분에 직제에도 없는 비공식 수행원 자격으로 사절단에 껴든 연암까지 얼떨결에 열하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보겠지만, 청 황제의 열하 피서는 말 그대로의 피서가 아니다. 무슨 말인가? 황제의 거둥에는 엄청난 병력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그 피서지와 이동로 일대는 계엄 상황이 되게 마련이다. 당시 건륭제의 피서와 거둥이란, 실제로는 팀스피리트 연습과 다를 바 없는 군사연습이자 군사도발이자 무력시위였다. 누구를 겨냥한 것인가? 그 누구보다 청제국을 위협하고 있던 몽골과 티베트를 겨냥한 것이었다.

내가 열하에 이르러 묵묵히 살펴본 천하의 특이한 형세가 다섯 가지다.
황제는 해마다 열하에 가 머문다. 열하는 만리장성 밖의 황폐하고 외진 곳이다. 그런데 천자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무릅쓰고 이 국경 밖의 황폐하고 외진 곳에 머물까? 명분은 피서다. 그러나 그 실제는 천자가 몸소 변방을 수비하는 것이다. 그러니 몽골이 얼마나 강한지를 알 만하다.
황제는 서번의 승왕(西番僧王, 여기서는 티베트의 판첸라마를 가리킴)을 맞아 스승으로 삼고, 황금 전각을 세워 거처하게 한다. 천자는 무엇 때문에 괴로움을 무릅쓰고 이처럼 상식 밖의 굴욕스럽고 낭비가 심한 예절을 차리는 것일까? 명분은 스승(판첸라마)에 대한 예우다. 그러나 실제는 판첸라마를 황금 전각에 억류해 둠으로써 청제국에 하루라도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니 서번이 몽골보다도 훨씬 강성함을 알 만하다. 이 두 가지 때문에 황제는 진작에 마음속이 괴로운 것이다.”
_<<열하일기>>, <황교문답黃敎問答>에서


위에서 보듯 연암은 북경을 벗어나 열하에 이르는 동안 황제의 거둥이 국경의 계엄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임은 꿰뚫어보았다
아울러 몽골 48부의 추장 저마다가 황제 직속의 왕으로 임명되어 몽골이 부족 단위로 분열된 속사정, 티베트 불교의 황교파가 티베트는 물론 몽골까지 석권하자 청제국이 티베트의 판첸라마에게 황제와 대등한 예우를 베푸는 이면 들에 청제국의 노련한 이이제이以夷制夷” “이호제호以胡制胡의 정치외교가 도사리고 있음을 포착해냈다.

나아가 연암은 당시 청
-몽골-티벳 및 청제국 역내외 여러 민족의 움직임과 갈등을 생생하게 기록해 <<열하일기>>에 담았다. 특히 1780, 당시 티베트 불교의 제6대 판첸라마가 건륭제와 대등한 예우를 받으며 열하에서 회동하는 모습을 그린 대목은 중국 외교사, 중국-티베트 외교사의 역사적 순간을 포착한 진기한 사료로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받고 있다. <<열하일기>>열하에는 이처럼 단순한 지명 이상의 의의가 깃들어 있다.

황제가 탄 가마가 반선(班禪, 판첸라마) 앞에 이르니, 반선이 천천히 일어나 걸음을 옮겨 탑상(榻上, 의자) 동쪽에 서서 기쁜 듯 미소를 띤 얼굴을 짓는다. 황제는 네댓 간 떨어진 곳에서 가마를 내려 빠른 걸음으로 달려와서는 두 손으로 반선의 손을 잡고 서로 끌어안고 마주 보고 웃으며 이야기를 나눈다.”
_<<열하일기>>, <찰십륜포札什倫布>에서


이 문단의 앞에는 청제국 고위 관리들이, 황제보다 먼저 나온 판첸라마에게 머리를 조아려 인사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이어서는 위 묘사 그대로, 황제가 아이쿠, 제가 좀 늦었어요하며 판첸라마에게 종종걸음 쳐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바로 이 장면을 담은 <<열하일기>>의 한 권인 <찰십륜포>찰십륜포또한 제국으로서는 상식 밖의 굴욕스럽고 낭비가 심한 예절이되, 제국의 정치외교의 고심의 총체와 같은 건축이다.
건륭제는 연암의 사절단과 마찬가지로, 건륭제의 칠순 축하를 명분으로 열하를 방문한 당시의 판첸라마를 위해, 타시룸포(티베트 라싸에 자리한 승원)를 모방해 만든 모형 타시룸포, 찰십륜포를 열하에 세우는 적극적인 외교를 기획했던 것이다.

연암은 어떻게 이 모든 것을 관찰하되 그 이면까지 꿰뚫을 수 있었을까?
하나는 여행 전의 공부다. 과거만을 위한 공부를 작파하면서, 연암의 시야는 조선을 넘어 대륙으로 넓어졌다.
둘째는 그만한 시야에 공명할 수 있는 동료의 존재다. 연암보다 앞서 청제국을 여행한 홍대용, 박제가 들은 책에는 담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정보를 그에게 전했다.
 

<<
열하일기>>에서 청제국 체제의 규모가 워낙 거대함을 제시한 대규모大規模라는 표현, 그 대규모의 작동 원리가 실은 세심함에 있음을 한마디로 제시한 세심법細心法이라는 한마디는 동료 홍대용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이다. 거름으로 쓰려고 쌓아둔 똥무더기, 가지런히 쌓은 벽돌, 곧게 뻗은 거리를 결코 심상히 지나치지 않은 감수성은 박제가 및 박제가의 청제국 견문록인 <<북학의北學議>>와 맥이 통한다.

연암은 썩은 세상에서의 출세를 포기한 자리에서 쌓은 공부에, 썩은 세상에서 더욱 돋보인 우뚝한 벗들과의 교감을 더해 그만한 눈, 그만한 필치를 갖출 수 있었다. 연암은 열하에서뿐만 아니라, 여정 내내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보고, 제대로 쓰려는 노력을 놓지 않았다. 그는 이르러 보고 겪은 모든 것-정치외교, 군사, 행정, 학술, 건축, 도로, 시장, 서민 생활, 황실 사정, 사절단 생활의 세부 등-의 안팎을 예리하게 관찰했고 꼼꼼히 기록했다. 그 모든 것이 응축된 문서가 바로 <<열하일기>>.

연암은 <<열하일기>>를 통해 여행을 연장했다. 연암은 조선에 돌아오자마자 정리 및 편집 작업에 들어가, 1783년 경 탈고한 <<열하일기>>, 보완을 거치기도 전에 필사본으로 퍼져나가며 당대 최고의 화제작이 되었다. 거침없는 묘사, <걸리버 여행기> <돈키호테>의 알레고리를 방불케 하는 독한 풍자와 해학, 여행가만이 형상화할 수 있는 이국정조 들이 그 화제의 고동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열하일기>>는 지배계급의 눈에는 볼온하기 짝이 없는 문서였다.

1792
년 정조는 문체 타락의 원흉으로 연암을 꼭 집어 견책했고, 이에 편승한 일부 문인들이 연암과 <<열하일기>> 비난에 열을 올렸다.
세상의 화제, 국왕의 견책, 문단의 비난을 거치는 동안 연암은 끝내 자신의 손으로 확정한 교열본에 의한 <<열하일기>> 출간은 이루지 못한다. 1805(순조 5) 서울 재동 자택에서 연암이 세상을 떠나고, 그 편집 수준이 어떻든 <<열하일기>>가 처음 간행된 때는 20세기 하고도 십 년이 더 지난 1911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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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껏 소리 지르기, 아픈지 안 아픈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박수 치기, 마음속 조마조마를 응축할 대로 응축했다가 하단전의 숨을 한순간에 휘발시키는 득의의 또는 아쉬움의 감탄사 내뱉기... 지독히 역동적이며 도회적이며 그동안 없었던 이 휴식 방법은 격투 이상으로 사람의 야성을 건드릴 수도 있다. 드라마 이상으로 사람을 빨아들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래 링크를 따라가면 나오는 시에서 보듯, <그날이 오면>의 시인 심훈의 가슴은 야구 앞에서 이렇게 일렁이기도 했다.

http://theturnofthescrew.khan.kr/46

한민족에게, 하기와 보기 두 측면에서 너무나도 새로운 이 행위는, “문명개화”의 시대에 바다 건너에서 새로이 들어왔다.
베이스볼baseball. 각각 아홉 명이 두 패로 나눠 아홉 회 동안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 하는 운동 경기. 이 경기의 직계 조상이 영국인들의 크리켓인지, 미국인 더블데이(A. Doubleday)가 확정한 19세기의 베이스볼인지 나는 모른다. 다만 한중일을 타고 넘은 베이스볼의 한자어 번역을 파자하면 그 내력이 이렇다.



*사진_여명기의 한국 야구사를 소재로 한 영화 <YMCA야구단>의 홍보용 컷에서
  

베이스볼을 접한 조선인들이 이 행위에 처음에 붙인 말은 타격에 착안한 “타구打球” 또는 “격구擊球”였다. 중국인들은 같은 행위를 보고도 하필 방망이에 착안해 “봉구棒球”라 불렀다. 그리고 오늘날, 대륙에서나 대만에서나 베이스볼은 “봉구”다. 여기서 중국어 초심자를 위한 팁 하나! MLB(미국 메이저리그 베이스볼)의 현대 중국어 간체자 표기는 “全美职业棒球大联盟”, 곧 “전미직업봉구대연맹全美職業棒球大聯盟”이다.
일본인은 어땠는가. 일본인들은 평평하고 탁 트인 공간을 필요로 하는 운동 경기라는 데 착안해, 이 행위를 “야구野球”라 했다. 한편 조선인 재일유학생들은 손에 전용 장갑을 낀데다, 손으로 공을 주고받는 행위에 착안해 “수구手球”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하나 조선 사람들에게도 일본어 어휘 “야구”가 완전히 침투해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지난날의 조일은 물론 오늘날의 한일도 “야구”를 공유하고 있다.
한국어 “야구”든 중국어 “빵키우棒球”든 일본어 “야큐野球”든, 아무튼 이 운동 경기는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조선을 사로잡았다. 적어도 19세기 말에는 인천항에 정박한 미국 선박의 선원을 통해 조선인들에게 소개된 것으로 추정되는 야구는, 20세기 초에는 황성기독청년회YMCA를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 사람들에게 전파되기 시작한다.

조선에서 야구의 기세는 놀라웠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가 황성기독교청년회 회원들에게 야구를 가르친 이후, 점차 관립 학교를 중심으로 야구단이 생겨남과 함께 대중에게 공개되는 야구 경기도 늘어나기 시작한다. 이후 몇 해 지나지 않아 1909년에는 동경유학생 대 재조선 선교사간 야구 경기가 성대하게 벌어져 대중적 인기를 더욱 확산했고, 1910년대 한성외국어학교• 동경유학생회•대한의원부속학교•한성고등보통학교•휘문의숙 들이 잇달아 야구단을 창설하는 데 이른다. 그리고 1920년 7월 조선체육회가 창립된 뒤, 같은 해 11월 드디어 제1회전조선야구대회가 개최되었다.

1920년대 조선 야구사의 흐름에는 눈여겨볼 구석이 많다. 1920년대 조선 야구는 빠르고 조직적으로, 몹시 “스마트”하게 움직였다.
예컨대 MLB 야구와 조선은 이미 1922년에 만났다. 야구 선수 출신이자, 제1회전조선야구대회의 심판이자, 스포츠용품을 취급한 상인이자, 조선체육회 조직의 핵심인사이자, 스포츠저널리즘에 일찍이 눈뜬 걸출한 체육인 이원용이 1922년 일본 방문 친선 경기를 치른 메이저 리그 올스타팀의 조선 방문을 성사시킨 것이다. 조선에 온 메이저 리그 올스타팀은 전조선군(全朝鮮軍, “조선의 올스타”라는 의미)과 경기를 치렀고, 이때 전조선군은 21 대 3으로 대패했다. 하나 세계 최고 수준의 경기력과 직접 대면한 의의만큼은 결코 적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야구 발전을 위한 노력은 일회성 행사로 그치지 않았다. 조선 야구계는 1925년에는 시카고대학 팀과 미국여자야구단을 초청해 경기를 여는 등 보급과 흥행 양쪽을 꾸준히 다져나갔다. 그 덕분인지 야구는 1920년대 조선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로 자리를 잡는다. 예컨대 당시 언론이 말하는 조선 야구의 현황은 “팀 수 400여 개, 8면짜리 신문에서 1개 면을 야구에 할애, 매경기 관중 수는 2000〜3000명”에 이를 정도였다.
이 기세는 새로이 열린 건축 공간에서도 불타올랐다. 1925년 10월 10월, 우리 건축사상 최초의 스포츠 전용 공간으로 태어난 경성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가 바로 야구였다. 방송에서도 야구는 “최초”를 기록한다. 1927년 갓 개국한 경성방송은 경성실업야구연맹전의 경기를 라디오로 실황으로 중계했는데 이것이 한국 스포츠사상 최초의 실황 중계방송인 것이다. 그리고 1920년대를 관통한 노력은, 1930년 9월 야구심판협회를 조직함으로써 정점에 이른다. “매경기 관중 수 2000~3000명”도 대단하지만, “심판”과 “협회”를 챙긴 조선 야구계의 마음과 지각에는 문득 존경심마저 피어오른다.

물론 중일전쟁 발발과 확전 이후에는, 조선의 모든 부문이 그랬듯 야구 또한 안타까운 침체를 면할 길 없었다. 이제 조선이 아닌 한국 야구사의 여명은 해방과 함께 왔다. 중간에 침잠의 시기가 있었을지언정, 야구는, 한 분야의 발전을 위해 또 한 분야가 내실을 다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스마트”하게 움직인 경험이 있다. 이런 경험이야말로 오늘의 한국 야구를 격려하고 격발할 만한 한국 야구사의 자산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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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전에 한국 사회를 뒤흔든 공정 사회 사건이 벌어졌는데, 바로 유명환 외교부 장관딸 사건이었다. 내용이야 간단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성격이다. 특정 공무원 집단이 자기들만의 왕국을 쌓아놓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자녀를 특혜로 취업시킨 것인데 그야말로 “썩은 물이 고인다”는 사건의 대표격이다. 난 여전히 외교 아카데미를 반대하는데, 일단 자기들끼리 왕국을 쌓은 사람들이 더욱 공고하게 왕국 현상으로 가겠다는 것이라서 반대한다.

외교부는 한국 관료 중에서도 가장 폐쇄적인 집단 중 하나이다. 외부 견제가 쉽지 않고 내부 견제는 더더군다나 어렵다. 국방부에 민간인 장관이 필요하다고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군인들끼리 서로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긴 육·해·공군의 서로 다른 군인들끼리 자체 견제가 좀 있다. 외교부는 그런 것도 없다.


외교부가 지금과 같이 통상 기능까지 전부 가지고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 배경에는 DJ가 관련되어 있다. 김영삼 대통령에게 대선에서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한 DJ는 영국에서 망명 아닌 망명 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외교부에서 정말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결국 통상교섭본부를 통해서 통상 기능까지 갖게 된 외교부는 그 후로 견제할 곳이 없는 막강한 부서가 되었다. 어떤 공무원이든 외국에 갈 때에는 외교부의 협조가 필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없으면 외교부와 개인적으로 척을 지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구조에서는 당연히 부패가 생겨나고, 또 은밀한 거래 현상도 생겨난다.

한국 국민들 중에는 해외 영사 업무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을 듯싶다. 가끔 해외공관에서 한국인에 대한 민원처리가 너무 소홀해서 뉴스거리가 되기도 한다. 단건 단건으로 보면 그냥 해당 공관에서 생긴 문제라거나 ‘무능한 공무원’ 일반의 문제처럼 다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자. 한국에서 시민단체가 전혀 없는 부처가 어디인가? 그게 바로 외교부 아닌가? 국방부만 해도 평화단체 등이 견제를 해서 시민단체와 정부의 갈등이 이제는 좀 익숙해져 있다. 실물경제와 에너지를 담당하는 지식경제부는 관련된 시민단체만 100개도 넘을 듯싶다. 이런 부처는 과별로 전담 마크맨 같은 시민단체가 있을 정도이다. 교육은 또 어떤가? 학벌 문제에서 사교육 문제까지, 주제별로 빼곡하게 시민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법무 쪽은 참여연대의 변호사들이 사실상 전담 마크맨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아예 시민단체가 없는 지자체가 있었다. 간단한 골프장 뇌물 사건에 단체장에서 공무원들, 게다가 지역언론까지 줄줄줄 연루된 적이 있다. 그런 지역은 시민단체가 아예 없는 지역이었다.
이제는 풀뿌리 시민단체라는 이름으로 구청장이나 시장 맘대로 뭘 하기가 그렇게 쉽지 않다. 물론 시민단체가 있다고 해서 그 지역이 꼭 발전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단체장의 폭주나 구조적인 부패는 조금씩 견제를 할 수 있게 된다. 아무래도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견제한다고 생각하면 좀 더 교묘해지는 부작용이 있을 수 있어도 전체적인 부패는 좀 줄어들게 된다.

외교부를 견제할 시민단체에 대한 논의는 비공식적으로 여러 번 있었다.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문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외교부의 전담 마크맨이라고 할 수 있는 단체가 생겨나지는 않았다. 돈의 문제이다.
해외공관까지 쫓아가 마크하는 활동가를 파견할 여력도 없고, 외교부가 주관하는 여러 가지 협상을 외국으로 쫓아다니면서 감시하는 건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다 보니 주요 협상에서 외교부가 한국에서는 형식적으로만 하고 실질적인 내용은 한국의 활동가들이 접근할 수 없는 외국의 밀실에서 한다는 의혹이 종종 불거져 나온다.

결국 돈의 문제이다. 한국의 시민단체들은 사무실 하나, 활동가 약간명, 그렇게 유지된다. 물론 환경운동연합이나 YMCA처럼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진 단체들도 있기는 하지만 개별 사무실의 상황은 대체적으로 유사하다. 그런 상황에서 외교부를 마크한다는 건, 기술적으로는 가능해도 경제적으로는 불가능하다.

미국 국무부의 경우에는 전문 분야별로 감시 단체들이 꽤 된다. 한국과 선진국은 시민단체에 돈이 들어오는 경로가 다르고 사회적 후원의 규모 자체가 비교가 안 된다. ‘펀드 레이징’이라고 불리는 시민단체를 위한 모금 조직이 별도로 존재할 정도이다.

외교부에서 뭐라고 말하든 한국은 외교 후진국이고 밀실외교, 비밀외교 그리고 홍보외교 이 정도 수준이다. 외교부의 전담 마크맨이 생길 때까지 외교부의 비밀주의를 견제하기는 어렵다.

한국의 시민단체, 아직은 외교부를 견제할 수준에는 못 갔다. 적어도 경제적으로는 말이다. 대통령 친구들이 줄줄이 대사로 나가는 형편이다. 외교부가 그야말로 MB 친구들 신사유람단으로 전락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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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권/새사연 부원장



오랜만에 ‘재벌개혁’ 구호가 정치권에서 공공연하게 거론되기 시작했다. 재벌개혁이 당연시되던 외환위기 직후도 아니고 재벌개혁을 사회개혁의 주요 부분으로 내걸며 집권했던 참여정부 시절 얘기가 아니다. ‘대기업 친화적 정책’을 핵심 공약으로 했던 이명박 정부 집권 4년차에 나온 것이다. 그것도 야당이 아니라 집권여당인 한나라당이 진원지라는 점에서 놀랍다.

정두언 전 한나라당 최고위원이 지난 6월26일 ‘대기업은 다시 재벌이 되어 버렸다’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재벌개혁 없는 선진화는 불가능하다”며 “재벌개혁은 한나라당이 ‘부자 정당’ 오명을 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적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에 동조하면서 7월4일 한나라당 전당대회의 주요 이슈로 부각될 움직임을 보이고 있기조차 하다. 격세지감이다.

정두언 한나라당 전 최고위원 (출처: 경향신문 DB)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2009년 하반기 이래로 50% 전후라는 놀라운 이상(?) 지지율을 유지해 왔던 이명박 대통령이 2011년 접어들면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하더니 급기야 4·27 재보선 참패라는 결과로 나타났다. 6월 접어들어서는 이 대통령 지지율이 30% 밑으로 추락하고 있는 실정이다. 총선과 대선을 불과 1년 앞둔 시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른바 한나라당 식 복지정책을 내놓지 않을 수 없었고 반값 등록금이나 보육지원 확대 등을 하려면 재원마련이 필수적이었는데, 이를 위해 추가적으로 인하하려던 대기업 법인세 인하 등을 재검토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국면이었다. 또한 경제위기 와중에도 대기업은 고속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데 국민의 체감경기는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대기업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은 터였다.

이런 마당에 재벌 대기업이 조용히 있어 주는 것은 고사하고 경제단체들이 들고 일어서 공공연하게 법인세 인하 철회를 비판하는가 하면, 자신들과 직접 이해관계도 없는 반값 등록금 정책까지 문제 삼고 나서 버렸으니 한나라당으로서는 좌시할 수 없었을 터였다.

“재벌이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한다”, “북한의 세습체제를 능가하는 세습 지배구조, 문어발식 족벌 경영 등으로 서민경제를 파탄내며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낸 이유다.

우선 재벌개혁을 요구하는 한나라당 일부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명박 정부 집권기간 3년, 동시에 경제위기 3년 기간 동안 확연해진 사실은 우리사회에서 재벌 대기업의 눈부신 성장이 곧 국민경제의 성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재벌 대기업이 선도하는 경제 발전모델은 지금 시점에서 확실히 그 효력을 상실했다.

이렇게 재벌 대기업의 성장이 국민경제의 균형발전이 아니라 불균형을 확대하고, 이들이 국민경제의 부가가치를 독점적으로 편취하는 현실에서 양극화 해소나 복지확대는 매우 어렵게 된 것이며, 지금 시점에서 ‘재벌개혁’이 국민경제와 사회통합을 위해 필수적으로 나올 수 밖에 없는 과제가 됐다. 향후 우리 사회의 핵심의제로 재벌개혁이 다시 전면에 부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이는 내년 총선과 대선국면으로 접어들수록 확대될 것이다.

그렇다면 어찌할 것인가. 한나라당이 야당인 민주당보다도 앞서 재벌개혁이라는 의제를 공식적으로 꺼내든 것도 모자라 재벌들에게 가장 민감한 세습이라는 용어를 동원하면서 원색적인 비난까지 마다하지 않을 정도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대책이라는 것은 말만큼 대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주장만 놓고 보면 한나라당은 재벌 대기업들에게 법인세 추가 인하 중지나 ‘임시투자세액 공제제도’ 종료를 순순히 수용해 주기를 바라는 정도다. 최근 대기업이 동네 순대가게 영업시장까지 먹으려한다는 비난에서 보듯이 중소기업이나 영세상인들의 시장까지 과도하게 잠식하는 행태를 자제하는 정도를 원하는 것이다. 덧붙인다면 정부가 물가 문제로 고전하는 있는데 통신사나 정유사 등 재벌 대기업들이 물가안정에 협조하는 모양새를 만들어 줬으면 하는 것이다. 이게 전부이고 한나라당 식 재벌개혁이다.

이명박대통령이 경제5단체장과 오찬장으로 향하고 있다.왼쪽부터 이희범(경총회장) 김기문(중소기업중앙회회장) 손경식(대한상의회장) 대통령 허창수(전경련회장) 사공일(한국무역협회회장) [출처: 경향신문 DB]

한 가지 확실히 해 둬야 할 것이 있다. 외환위기 이후 살아남은 주요 재벌 대기업들의 경제력 집중도는 꾸준히 상승해 왔지만, 특히 이명박 정부 들어서면서 규제완화와 감세, 고환율 정책으로 인해 그 정도가 역사상 최고점까지 올 정도로 심해졌다는 사실이다. 외환위기 이후 10여년 만에 다시금 재벌개혁의 깃발을 들 정도로 집중도는 심화됐고 반면 국민경제 파급력은 약화됐던 것이다.

바로 한나라당이 저질러 놓은 일이다.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고 되돌려 놓아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재 수준에서 더는 과도하게 재벌이 나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수준의 재벌개혁이라면 이는 문제를 일으킨 자신의 책임조차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더 가관인 것은 이 정도 수준의 재벌에 대한 요구조차도 대놓고 거부하면서 정부·여당과 날을 세우고 있는 재벌 대기업 집단이다. 가히 2010년대 한국의 재벌 대기업 집단은 ‘누구의 눈치도 통제도 받지 않는 절대권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들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통제받지 않는 권력이 전횡을 일삼고 이익을 독점하는 것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나 정의의 관점에서 보나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한나라당의 어설픈 재벌개혁 깃발로 해결될 일이 아니다.

이글은 매일노동뉴스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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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춘/새사연 이사장



권영길의 눈물.
민주노동당의 ‘상징’인 그가 기자간담회에서 끝내 눈물을 흘렸다. 권영길이 회견문을 읽다가 말을 잇지 못하고 울컥한 순간은 앞으로 건설될 통합 진보정당에서 어떤 당직과 공직도 맡지 않겠다며 사실상 2012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한 대목이 아니었다. 서울 “삼선교 쪽방의 국민승리21 시절부터, 2004년 총선승리의 영광, 분당의 상처까지 모든 고난과 영광의 세월동안 민주노동당이라는 이름은 권영길의 영혼”이었다고 회고할 때였다.

왜 권영길은 그 대목에서 눈시울 적셨을까. 민주노동당과 더불어 걸어온 그 길이 가시밭이었고 외로웠기 때문이 아닐까. 기실 한국의 모든 신문과 방송은 기자 출신의 정치인 권영길은 물론, 진보정당의 정치 활동이나 정책을 보도하는 데 내내 인색했다. 흔히 진보언론으로 꼽히는 신문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노동당 권영길 원내대표가 22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향후 건설될 통합진보정당에서 어떤 당직과 공직도 맡지 않겠다. 백의종군하며 오직 통합의 길에 몸을 던지겠다"고 발언하며 울먹이고 있다. (출처: 경향신문DB)


‘복지’ 쟁점화, 진보정당 없었다면…

단적인 보기가 최근 퍼져가고 있는 ‘복지’ 의제다. 권영길은 진보통합으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에 백의종군을 밝힌 간담회에서 현재 “무상급식과 반값 등록금은 한국사회 최대 쟁점”이라고 지적한 뒤 그 쟁점들은 “진보정당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랬다. 민주노동당은 2000년 창당 이후 줄기차게 ‘무상 의료’와 ‘무상 등록금’의 단계적 실현을 주창해왔다. 생활 현장에서 무상급식 운동을 애면글면 벌여온 사람들도 대체로 진보정당의 당원들이었다. 하지만 어떤 신문도 방송도 진보정당의 정책이나 활동에 주목하지 않았다. 어쩌다가 진보정당의 복지정책 공약을 구색맞추기식으로 보도했을 때도 “비현실적”이라는 꼬리표를 살천스레 달았다.

가장 오랫동안 복지정책을 지며리 제기해온 원내 진보정당에 언제나 소홀했던 언론이 2010년 들어 ‘복지’를 의제로 설정하는 모습을 탓하자는 게 전혀 아니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고 의미 있는 편집으로 마땅히 평가할 일이다. 다만 뒤늦게 복지를 의제로 부각하면서도 시민사회 중심으로 보도하는 반면, 진보정당의 정책을 보도하는 데 여전히 인색한 풍경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

전혀 내키진 않지만 명토박아둔다. 미디어오늘에 연재하고 있는 칼럼에도 정파적 색안경을 끼고 바라볼 윤똑똑이들을 위해서다. 심지어 한겨레 논설위원으로 사설과 칼럼을 쓸 때도 당시 논설주간은 내게 민주노동당 당원 아니냐고 물었다. 사실 여부를 답하고 싶지 않아 웃어넘겨서일까. 그는 확신을 한 듯이 다른 사설을 썼을 때도 그 말을 불쑥 꺼냈다. 참으로 씁쓸했지만 그가 해직 기자로 걸어온 길에 최소한의 예의를 표하고 싶어 사실이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그러자 그는 미묘한 웃음을 보내며 “그럼 비밀당원이겠지”라고 혼잣말처럼 단정했다.

흘러간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누군가를 비판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그럴 뜻은 전혀 없다. 다만 대한민국 언론계에서 진보적 생각을 표현하는 일조차 쉽지 않고 바로 그만큼 진보정당이 커나가기는 더 어렵다는 진실을 동시대의 언론인들과 나누고 싶어서다. 

권영길의 눈물은 민주·민중의 슬픔

물론, 이제 나는 더 이상 직업적 기자가 아니다. 뜻하지 않은 순간에 기자직을 그만둔 뒤 제법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언론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언론 보도의 객관성이나 중립성은 실현 불가능한 신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짚고 싶다. 아울러 자신은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편향의 칼럼을 노상 써가는 현직 언론인들이 국민 대다수인 민중의 편에 서서 시민정치운동이나 주권운동에 참여한 지식인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현실에 조금이라도 성찰을 권할 따름이다.

권영길은 간담회를 정리하는 발언에서 취재기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간곡히 호소드린다”며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은 진보진영만의 과제가 아니라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읍소했다.

가만히 묻고 싶다. 진보대통합으로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한국 정치에 절실하다고 판단하는 언론이 대한민국에 있는가.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칭 보수든 진보든 한국 언론은 진보정당이 내부 갈등으로 쪼개질 때 비로소 돋보이게 편집했다. 권영길이 아픔을 들먹이며 울먹인 바로 그 시점이다. 진보언론의 지면조차 분당을 부추기는 칼럼들을 곰비임비 편집하지 않았던가.

두루 알다시피 40대 후반 나이에 언론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선 권영길은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에 이어 민주노동당 창당에 나섰다. 오랜 냉전으로 얼어붙은 박토에 진보정당의 씨앗을 뿌렸다. 그 자신 지역구 당선을 비롯해 진보정당 원내진출의 새싹을 틔우고 작은 나무로 키워왔다. 그의 노고에, 어느새 일흔이 넘은 그의 서러움에 경의와 위로를 보내는 까닭이다.

아울러 현직 언론인들, 특히 진보언론의 현역들에게 쓴다. 권영길의 눈물은 분당 이전 민주노동당의 눈물이다. 동시에 진보대통합의 눈물이다. 그 슬픔은 맞닿아 있다, 더 깊은 민주주의의 눈물, 지금 이 순간도 고통 받고 있는 민중의 눈물과.

이 글은 미디어 오늘에도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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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진|서울대 교수·사회학


중위투표론이란 게 있다. 두 가지 가정을 필요로 한다. 어떤 기준에 따라 유권자들을 한 줄로 세울 수 있을 것. 그렇게 한 줄로 세운 유권자들의 분포가 단봉분포를 이룰 것. 말이 좀 복잡하긴 하지만 단봉분포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이 한 군데밖에 없다는 뜻이다.

마을에 사람이 북적거리는 장터가 하나밖에 없다면, 물건을 팔려면 장터에 가서 파는 게 맞다. 중위투표론이 정치권으로 건너가면 전투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중원싸움이란 말로 변한다. 선거란 결국 가장 많은 유권자의 표를 가져오는 쪽이 이기게 되어 있으니 선거가 가까워지면 각 정당들은 유권자들의 장터인 중원으로 모인다.

많은 이들이 우려했던 것처럼 재·보선 이후 민주당은 갈팡질팡 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원싸움을 포기할 수 없다며 보수화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반값 등록금처럼 과감한 정책을 내놓기도 하고, KBS 수신료 인상안에 별 고민 없이 동조했다가 빗발치는 여론에 화들짝 놀라 몸싸움도 불사하는 식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민주당 입장에서 내년 선거에 중원싸움은 없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고정지지층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도 안에서 일정 정도 좌클릭 하면서 중원을 압박하려 들 것이고, 어느 정도 효과를 볼 것이다. 
 
민주당의 성패는 중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개혁적이고 진보적이지만 그 동안 투표하지 않던 유권자들을 얼마나 끌어내느냐에 좌우될 것이다. 그 효과는 이미 20% 이상의 사전조사 결과를 뒤집어냈던 4·27 재·보선과 작년의 6·2 지방선거에서 경험한 바 있다. 하지만 지방선거와 재·보선에서 민주당의 선전은 스스로 만들어냈다기보다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이삭줍기에 가까웠다. 
대선과 같이 큰 선거에서 이삭줍기가 계속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고, 그렇게 해서 집권한다 한들 큰 의미도 없다.

거기에다 유권자의 변화는 중위투표론의 두 가지 가정을 모두 무효화하고 있다. 이명박 정권을 경험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이명박 정권의 최대 약점인 소통으로 무장한 유권자들은 한 줄로 서기보다 집단지성으로 대화하면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그들은 한 줄로 세워지기를 거부하고 ‘우리들’의 요구를 가장 잘 대표해줄 정치집단이 누구인지를 찾아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더구나 유권자의 장터는 하나가 아니라 최소한 두 개 이상이 될 것이다. 굳이 분포라는 표현을 쓴다면 단봉분포가 아니라 쌍봉분포, 혹은 그 이상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중원싸움은 무의미해진다. 물건이 형편없어도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으면 팔린다는 눈치 보기가 아니라 좋은 제품으로 손님을 적극적으로 불러 모으는 것이 올바른 전략이다. 

민주당이 갈팡질팡 하는 동안 한나라당 대표경선에서 일부 후보들이 내놓고 있는 정책들과 민주당 정책이 어떻게 다른지 구분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손학규 대표가 반값 등록금 집회 현장에서 대학생들과 대화하고 정동영 최고위원이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을 찾아가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명박 정부가 시장이라 쓰고 대기업이라 읽으며 국민들의 삶을 방치한 몇 년 동안, ‘사회정책’이야말로 한국에서 가장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된 사람들이 많아졌다. 정책이라고 하면 으레 경제정책만 생각하던 한국에서,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지탱할지를 고민하는 사회정책에 대한 각성이 이루어진 것이다. 

민주당이 생각하는 사회정책의 큰 틀이 무엇이고, 사회정책의 틀 안에서 경제정책을 어떻게 운용할 것이며, 거기에 필요한 재정은 어떻게 마련할 것이고, 그러한 커다란 틀 안에서 등록금 문제를 어떻게 자리매김할 것이며 한국인의 삶의 터전인 노동을 어떻게 정당하게 대우할 것인지를 말해야 한다. 쉽지 않을 것이다. 중원 이야기를 다시 꺼내며 표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는 걱정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재·보선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에 이삭을 몰아주었던 시민들은 분노를 삭이며 2017년을 기약할지도 모른다. 민주당에 중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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