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이 정치를 ‘대중문화’로 만들어버린 것은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다. 그것에 제일 능했던 이는 미국의 40대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었다. 배우 출신의 레이건은 자신이 주인공인 영웅담을 대중에게 선전하는 것이 실제 무슨 일이 있었냐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연설, 협상, 그리고 정책에 있어서도 할리우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사운드 오브 뮤직>(1965)을 시청하느라 정상회담용 자료를 검토하지 못했던 일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할 테면 해봐. 오늘은 나의 날이야”라는 대사에 감동을 받아 의회의 조세 인상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심지어 ‘미국의 위대함’을 설파하기 위해 인용하곤 했던 일화는 <날개와 기도>(1944)의 한 장면이었다고 한다. 레이건은 자신이 연기했던 배역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어필했고, 이후 할리우드 백인 남성 영웅을 지도자로서의 자기 이미지이자 레이건 행정부의 이미지로 전유했다. 영화학자 수잔 제퍼드는 <하드바디>에서 이를 자세히 분석한다.

[김용민의 그림마당]2016년 11월17일 (출처: 경향신문DB)

신자유주의의 시작을 알렸던 레이건 이후 36년. 신자유주의가 이제 그 생명을 다해가고 있는 시점에 대중문화가 길러낸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등장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다. 2000년대 초반. 연이은 부도로 위기에 당면한 부동산 재벌 트럼프는 독특한 생존전략을 선택한다. 스스로를 이미지 상품으로 만들어 ‘트럼프 브랜드’의 가격을 올리기로 한 것이다. 그리하여 출연한 것이 <어프렌티스>라는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였다. ‘견습생’이라는 뜻의 이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은 트럼프 눈에 들어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어프렌티스>의 인기가 올라갈수록 그의 재산도 늘어갔다. 그리고 그의 성공 신화는 미국의 성공 신화로 다시 쓰여졌다. 이 신화에서 인간 군상은 영웅이 되기 위해 비열한 협잡꾼이 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어떤 모욕도 견뎌낸다. 그것이 ‘생존’의 의미인 것이다. <어프렌티스>를 경유해 자본의 독재와 신민의 무한경쟁은 오락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10여년 후. 그는 미국 대선이라는 새로운 리얼리티 서바이벌 쇼의 주인공으로 대중 앞에 선다. 레이건이 할리우드의 고전적인 영웅을 자기 이미지로 참고했다면, 트럼프는 미국 대중문화의 가장 저열한 면모인 리얼리티 쇼의 천박한 자본가 이미지를 자원으로 삼았다. 대선 과정에서 전시했던 그의 독설과 소수자에 대한 혐오는 <어프렌티스>의 유행어 “너, 해고야(You’re fired)”와 다르지 않다.

그저 가십일지도 모르는 이런 이야기의 끝에 ‘길라임’을 떠올리게 된다. 드라마 광팬으로 알려진 박근혜 대통령은 일국의 지도자로서 어떤 자기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큰 영애(令愛)’의 이야기는 모든 국민이 알고 있었다. 그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런 ‘국민 드라마’ 혹은 ‘우파의 신화’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특히 대통령 후보 박근혜를 믿고 따랐던 유권자들에게는 ‘장사꾼 이명박’과는 다른 ‘진성 정치인으로서의 우아함과 리더십’에 대한 판타지가 있었고, 그 판타지는 아버지 박정희가 영애에게 남겨준 위대한 유산이었다. “우리 근혜 불쌍해”와 “우리 근혜는 달라”라는 익숙한 말을 떠올려 보라. 박근혜 스토리의 셀링 포인트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래서 처음 그가 <태양의 후예>의 열렬한 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당연히 그의 자기 이미지가 ‘유시진’일 것이라 생각했다. 군국주의의 화신이자 비열한 공무원들과는 질이 다른 고귀한 ‘귀족’으로서, 유시진은 우리를 구원할 아버지의 재림이었다. 그리고 그 영웅적 재림의 실현이 박근혜의 자기 이미지이리라 상상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보기 좋게 어긋났다. 박근혜 게이트의 ‘막장 드라마’로 추론해보자면, 그는 ‘길라임’ 혹은 ‘강모연’으로 자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트럼프보다도 한심스럽다. 지도자로서 아무런 자기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길라임과 강모연은 치열한 자기계발로 얻은 재능과 커리어와 ‘미모’를 전부 다 이성애 연애의 완성을 위한 자원으로 소진하는 신자유주의형 공주다. 그리고 이런 공주 이야기의 핵심은 백마 탄 구원자에 대한 판타지다.

업무를 시작하고, 홈페이지를 개편하는 등 청와대의 적극적인 대응이 시작됐다. 성실하게 수사를 받겠다던 것과는 사뭇 달라진 태도다. 옆에서 구원자들이 머리를 굴리고 있기 때문일 터다. 그들까지 발본색원해서 그의 판타지를 철저하게 깨는 것이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다. 더 이상 그에게 해피엔딩을 허할 수 없다.

손희정 |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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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ross